57
"자, 무슨 이야긴지 어디 해보게. 담배 피우겠나? 잠깐만 기다리게. 재투성이가 되면 안 되니까."하고 그는 재떨이를 가져왔다. "자, 무슨 이야기지?"
"자네한테 두 가지 청이 있네."
"아, 그래!"
마슬레니코프의 얼굴은 어둡고 침울해 보였다. 주인이 귓등을 긁어 줄 때의 흥분했던 강아지의 그런 모습은 말끔히 사라졌다. 객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말소리였다.
"절대로, 절대로 믿지 않아요."하는 여자의 프랑스 말 목소리와 그 반대편에서 '보론초바 백작 부인과 빅토르 아프락신'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무엇인지 지껄여 대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한쪽에서는 웃음소리가 범벅이 되어 들려왔다.
마슬레니코프는 객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며 네흘류도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또 그 여자 때문에 왔는데."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응, 죄 없이 판결을 받았다는 여자 말이지? 알고 있어. 잘 알고 있어."
"그 여자를 교도소 병원 근무로 옮겨 주었으면 해서 말이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군."
마슬레니코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생각에 잠겼다.
"글쎄, 어떨지?"하고 그는 말했다. "어쨌든 이야기해 보고, 결과는 내일 전보로 알려 주겠네."
"병원에 환자가 많아서 보조간호사들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그래 그래. 어쨌든 결과를 알려 주겠네."
"부탁하네."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객실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기분 좋게 터뜨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또 빅토르가 나섰군." 빙그레 웃으면서 마슬레니코프가 말했다. "저 친구는 흥이 나면 참 재미있는 말을 하거든."
"그리고 또 한 가지,"하고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지금 감옥에는 여행권의 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1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는데, 벌써 한 달이나 됐다더군."
그리고 그는 그들이 수감된 이유를 설명했다.
"자네는 어떻게 그 일을 알았나?"하고 마슬레니코프가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갑자기 불안과 불만의 기색이 떠올랐다.
"어느 죄수한테 갔을 때, 그들이 복도에서 나를 둘러싸고 호소하더군."
"어느 죄수한테 갔었는데?"
"죄 없이 수감된 농부였네. 나는 그에게 변호사를 대 주었지.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닐세. 대체 그들은 아무 죄도 없는데 말이야, 단지 여권의 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도 수감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건 검사가 한 일이야." 화가 난 듯이 그는 네흘류도프의 말을 가로챘다. "이것이 바로 자네가 말하는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이라는 걸세. 검사란 가끔 감옥을 방문하고 죄수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아닌가를 살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카드놀이만 하고 앉았다네."
"그럼 자네로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네흘류도프는 지사가 반드시 검사의 탓으로 돌릴 것이라던 변호사의 말을 상기하면서 우울한 낯으로 물었다.
"아니, 어떻게 해보지. 곧 조사해 보도록 하겠네."
"저분에게는 오히려 더 좋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그분은 수난자가 되니까요." 객실로부터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슬레니코프의 대답은 말뿐이지 속으로는 자기가 한 말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 그런 말투였다.
"그렇다면 더욱 좋습니다. 그럼 난 이걸 갖겠습니다." 이번에는 남자의 농담 소리가 방 다른 구석에서 들려오고 곧이어 분명히 무엇인가 안 주겠고 버티는 여자의 농담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요. 안 된대두요. 절대로 안 돼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럼 모든 일은 내가 해보겠네." 마슬레니코프는 터키석의 반지를 낀 하얀 손으로 담뱃불을 끄면서 이렇게 되뇌었다. "자, 부인들 쪽으로 가세."
"참, 그리고 또 하나." 네흘류도프는 객실로 들어가는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어제 감옥에서 태형을 가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인가?"
마슬레니코프는 얼굴을 붉혔다.
"아니, 자네 그런 말까지 하긴가! 여보게, 이러면 절대로 감옥에 들여보낼 수 없겠네. 모든 문제에 마구 개입하려 드니 말일세. 자, 가세. 안나가 부르고 있으니." 그는 네흘류도프의 팔을 잡고 귀빈들의 방문을 받았을 때의 흥분을 되살리면서 말을 했지만 그 흥분은 이 시각부턴 기쁨에 넘치는 흥분이 아니라 다만 불안이 깃들인 것이 되고 말았다.
네흘류도프는 그에게서 팔을 빼고는 아무에게도 인사 한 마디 하지 않고, 말없이 어두운 낯으로 객실과 무도실을 지나 마침 달려 나오는 하인과 부딪치면서 현관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그분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하고 부인이 남편에게 물었다.
"그게 프랑스식이라는 거죠." 누군가 말했다.
"그게 프랑스식이라고요? 그건 줄루(아프리카의 야만족)식이에요."
"그렇지만 그분은 항상 그러시는 걸요. 뭐."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도 있어서 지껄여 대는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일동은 네흘류도프의 에피소드들 이 날 파티의 최고의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마슬레니코프를 방문한 이튿날 네흘류도프는 마슬레니코프로부터 문장이 들어 있는 번들번들한 두꺼운 종이에다 멋진 필체로 마슬로바를 감방 병원 근무로 옮기도록 의사에게 써 보냈으니까, 자네의 희망은 실현될 것이라는 뜻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 말미에, '친애하는 옛 벗 마슬레니코프'하는 글이 쓰여 있고, 그 밑에는 놀라울 만큼 커다랗고 뚜렷한 사인이 있었다.
"미친 놈!" 네흘류도프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벗'이라는 말 속에서 마슬레니코프가 관대한 자비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이려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즉, 도덕적으로 가장 더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자기를 훌륭한 인물로 자부하면서 스스로 네흘류도프의 벗이라고 칭하는 뻔뻔스러움을, 그다지 자랑으로 삼지 않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하는 의도를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58
이 세상에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미신의 하나는 인간은 저마다 일정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선한 자, 악한 자, 영리한 자, 어리석은 자, 근면한 자, 태만한 자 등등의 사람이 있다는 것...그러나 사실 인간이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다만 우리는 어떤 한 사람에 관해서, 나쁜 점보다 좋은 점이 많다든가, 어리석을 때보다 영리할 때가 더 많다든가, 태만할 때보다 근면할 때가 더 많다든가, 또는 그 반대로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언제나, 저 사람은 선한 자 영리한 자이며, 이 사람은 악한 자 어리석은 자이다, 라는 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것은 그릇된 짓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강과도 같은 것이어서, 물은 어느 강에서든 어디로 흘러가든 역시 같은 물이요, 또 강에서 좁은 곳도 있거니와 빠른 곳도 있고, 넓은 곳도 있거니와 고요한 곳도 있고, 맑은 곳도 있거니와 흐린 곳도 있고, 찬 곳도 있거니와 따뜻한 곳도 있는 법이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 속에 인간으로서 온갖 성질의 싹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성질이 나타나고 다른 경우에는 또 나른 성질이 나타난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지만, 가끔 전혀 다른 성질이 나타나곤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경우가 몹시 심한 사람이 있다. 그의 내부에 있어서의 이러한 변화는 육체적인 원인과 정신적인 원인에서 온 것이었다. 지금도 내부에서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재판이 끝나고 카추샤와 처음으로 만난 뒤에 느꼈던 갱생의 승리와 환희의 감정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최근에 만난 뒤부터는 그녀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만 일었다. 그는 결코 그녀를 버리지 않겠다, 그녀만 원한다면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자기의 각오를 절대로 변경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고 괴로운 일이었다.
마슬레니코프를 방문한 이튿날, 네흘류도프는 카추샤를 만나기 위하여 감옥을 향해 마차를 달렸다.
소장은 면회를 허가했지만, 면회 장소는 사무실도 아니요 변호사 대기실도 아닌 여죄수 면회실이었다. 소장은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전보다는 네흘류도프에 대해서 더욱 경계하는 태도를보였다. 분명히 마슬레니코프와의 대화가, 감옥에서 네흘류도프에 대하여 엄중히 경계하라는 명령으로 나타난 모양이었다.
"면회는 하셔도 좋습니다만,"하고 그는 말했다. "다만 돈만은 전에 제가 부탁드린 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그리고 그녀를 병원으로 옮기는 것은 부지사 각하 말씀대로 할 수 있으며, 의사의 동의도 얻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마다하면서 '옴쟁이들을 간호하기는 싫다.'고 합니다. 아무튼 전부 그 모양들입니다, 공작님." 이렇게 그는 덧붙였다.
네흘류도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만나게 해 달라는 부탁만 했다. 소장은 간수를 보냈다. 네흘류도프는 그를 따라서 텅 빈 여죄수 면회실로 들어갔다. 마슬로바는 벌써 거기에 와 있다가, 겁먹은 듯이 수줍어하며 철망 저쪽에서 조용히 나타났다. 그녀는 네흘류도프에게 다가오더니 시선을 피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용서해 주세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그저께는 너무 실례되는 말씀을 했어요."
"나더러 용서하라니..."하고 네흘류도프는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어쨌든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이렇게 그녀는 덧붙였다. 그 때 그를 무섭게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사팔눈에는 긴장된, 원한에 찬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어째서 내버려 두라는 거요?"
"어째서고 뭐고 그저..."
"어째서?"
그녀는 또다시 적의에 찬(그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튼," 그녀는 말했다. "저를 내버려 두세요. 진정이에요. 어떻게도 할 수 없어요. 이런 일도 다 그만둬 주세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 그래요. 나 같은 인간은 목이라도 매어 죽어버리는 게 나을 거예요."
네흘류도프는 그녀가 그렇게 거절하는 것을 자기를 미워하고 용서할 수 없는 원한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짐짓 거절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이 네흘류도프의 마음에 뭉쳐 있던 일체의 의혹을 쫓아버리고, 다시금 이전의 진지한 환희의 감동적인 상태로 되돌려 준 것이었다.
"카추샤, 내가 전에 말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하고 결혼해 줘요. 만일 싫다고 한다면, 당신의 마음이 돌아설 때까지 전처럼 따라다니고,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겠소."
"마음대로 하세요.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다시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네흘류도프는 말할 기력도 없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는 일단 시골로 갔다가 페테르부르크로 가겠소."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는 말했다.
"당신의, 아니 우리들의 사건에 대해서 힘써 볼 생각이오. 반드시 판결은 취소될 거요."
"취소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이번 일이 아니라도 다른 죄를 짓고 있으니까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 때 그는, 솟구치는 눈물을 참기 위해서 그녀가 몹시 애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 메니쇼프를 만나셨어요?" 그녀는 동요된 마음을 감추려는 듯이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그 사람들이 무죄라는 게 사실이죠?"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말 좋은 할머니예요."
그는 메니쇼프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다 하고, 무슨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들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병원의 일이지만," 그녀는 갑자기 사팔눈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가겠어요. 그리고 술도 다신 안 마시겠어요."
네흘류도프는 잠자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야." 그는 간신히 이 말만 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래, 그렇다. 그녀는 딴사람이 되었다.' 여태까지의 모든 의혹 끝에 오는, 전혀 새롭고 일찍이 맛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 사랑보다 강한 것은 없다는 절대성을 느끼면서 네흘류도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면회를 마치고 악취가 물씬 풍기는 감방으로 돌아오자, 마슬로바는 겉옷을 벗고 양손을 무릎 속 위에 얹은 채 나무 침대 틀에 앉아 있었다. 감방에는 젖먹이 어린애를 거느린 폐병쟁이 블라디미르 현의 여자와 메니쇼프 노파, 그리고 두 아이가 딸린 건널목지기 여자밖에 없었다. 교회 부집사의 딸은 어제 정신병자라는 진단을 받고 병원으로 끌려갔다. 다른 여자들은 모두 빨래하러 가고 없었다. 그리고 노파는 자기 잠자리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아이들은 복도에서 놀고 있었고, 그 쪽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두 팔에 어린아이를 안은 블라디미르 현의 여자와, 쉴 새 없이 손가락을 눌리면서 양말을 뜨고 있던 건널목지기 여자가 카추샤 곁에 가까이 왔다.
"그래, 만나고 왔수?" 그들은 물었다.
마슬로바는 높은 침대에 걸터앉아 마루까지 닿지 않는 다리를 흔들흔들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우는 거야?" 건널목지기가 말했다. "절대로 낙심해선 안 돼요. 자, 카추샤! 자!"하고 그녀는 잽싸게 손가락을 놀리면서 말했다.
마슬로바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들 빨래하러 갔어. 오늘은 자선 차입이 한 아름이래. 잔뜩 가져왔나봐." 블라디미르 현의 여자가 말했다.
"피나시카!"하고 건널목지기가 문 쪽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이 장난꾸러기가 어딜 갔을까!"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뜨개바늘을 하나 빼서 실 뭉치와 양말에 꽂고 복도로 나갔다.
이 때 복도에서 시끄러운 발소리와 여자들의 말소리가 들리더니 맨발에 죄수화를 신은 다른 감방의 여죄수들이 들어왔다. 모두 흰 롤빵을 한 개씩 들고 있었으나, 개중에는 두 개를 들고 있는 여자도 있었다. 페도샤가 곧 마슬로바 곁으로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어?" 페도샤는 맑고 푸른 눈으로 정답게 마슬로바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건 차 마실 때 받은 거야."하고 그녀는 흰 빵을 선반 위에 올려놓으면서 덧붙였다.
"그분이 결혼을 망설이기라도 하든?" 코라블료바가 물었다.
"아냐, 그렇지는 않지만, 내가 싫은걸."하고 마슬로바가 말했다. "그래서 싫다고 했어."
"바보 같으니!" 코라블료바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같이 살 수 없을 텐데 무엇 때문에 결혼을 해?" 페도샤가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너의 남편도 따라다니고 있잖아?" 건널목지기가 말했다.
"그야, 우린 정식 부부니깐 그렇지 뭐."하고 페도샤가 말했다. "하지만 같이 살 수 없는데 무엇 때문에 굳이 정식 결혼을 하겠어?"
"이 바보야! 무엇 때문이냐고? 그 사람하고 결혼만 하면, 등 따습고 배부르지 않아!"
"그이는 내가 어디를 가든 따라오겠다고 말했어."하고 마슬로바는 말했다. "그런데 오고 싶으면 와도 좋고, 또 그러고 싶지 않으면 안 와도 좋지 뭐. 나는 부탁하지는 않았어. 그분은 지금부터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석방 운동을 하겠다는 거야. 그 곳의 장관들이 모두 친척이라나."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 사람 필요 없어."
"그야 뻔하잖아!" 코라블료바는 자루를 챙기고 있었으므로 아마 딴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갑자기 맞장구를 쳤다.
"어때, 술이나 한잔 마실까?"
"난, 안 마시겠어."하고 마슬로바는 대답했다. "당신들끼리나 실컷 마셔요."
Lev Nikolaevich Tolstoi
1
2주일 후에 대심원의 심리가 시작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네흘류도프는 그때까지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만일 대심원에서 잘 안 될 경우에는 상소장을 작성해준 변호사의 권고대로 황제한테 청원해 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변호사가 말한 바와 같이 상소의 이유가 매우 허술해서 기각되는 경우 그만한 각오도 미리 해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6월 초순 마슬로바를 포함한 징역수의 이송단이 출발하게 될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네흘류도프는 이미 굳게 결심한 대로 마슬로바의 뒤를 쫓아 시베리아까지 따라갈 채비를 서두르기 위해서는, 먼저 영지의 여러 마을을 두루 살펴 정리를 해두어야 했다.
제일 먼저 네흘류도프는 쿠즈민스코예 마을로 출발했다. 그 곳은 제일 가까운 데 있었을 뿐더러, 흑토질의 광대한 영지로서 그의 집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미 성인이 된 후에도 두 번이나 이 곳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한 번은 그의 어머니의 부탁으로 독일 사람인 관리인을 데리고 가서 전체 재정 상태를 조사한 일이 있었으므로 벌써부터 이 영지의 사정과, 농민과 관리 사무소와의 관계, 즉 지주와의 관계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농민과 지주와의 관계는 좋게 말해서 농민은 관리 사무소에 완전히 사활 문제를 맡기고 있었으며, 솔직히 말하면 농민들은 관리 사무소에 노예처럼 예속되어 있었다. 그것도 1861년에 폐지된 농노제와 같은 사실상의 예속, 즉 일정한 주인에 대한 예속이 아니라, 토지를 갖지 않은 농부나 토지가 적은 농부들 전체의 일반적인 최초의 대지주에 대한 예속이었다. 때로는 그들 농민이 생활하고 있는 부근의 대지주들에게만 단독으로 예속되는 일도 있었다.
네흘류도프는 그것을 알고 있었는데, 사실 모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수입은 그 노예제도 위에 존재하고 있고, 그 자신도 그러한 제도에 협력하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정하지 못하고 잔혹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은, 대학시절에 헨리 조지의 학설을 신봉하고 선전했으며, 그 학설을 근거로 하여 토지 사유가 50년 전의 농노 소유와도 같은 현대의 큰 죄악이라고 생각하여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해 준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그가 군인 생활을 하면서 1년에 2만 루블이나 되는 큰돈을 낭비하는 습관이 생기면서부터 이러한 인식은 그의 생활을 위해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돈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물어 보지도 않았고, 또 그런 일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과 유산 상속, 그에 따르는 자기의 재산, 즉 토지를 관리할 필요성에 부딪치게 되자 다시금 토지 사유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결정해야 된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네흘류도프에게는 현존하는 질서를 변혁할 만한 힘도 없었고, 영지를 관리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하면서, 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며, 거기서 돈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 평안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베리아로 떠날 일이 눈앞에 박두하고 감옥 세계를 상대로 하는 복잡하고 곤란한 관계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돈과 사회적인 지위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지 문제를 그전대로 그냥 방치해 둘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손해를 각오하고 그것을 개혁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토지를 스스로 경작하지는 않고, 싼값으로 농민들에게 빌려 주어서 농민들이 지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들에게 주기로 결심했다. 네흘류도프는 여러 번 지주와 농노 소유자와의 입장을 비교해서 소작인에게 경작시키는 대신 토지를 농민들에게 빌려 주는 것은, 농노 소유자가 각자의 농노를 부역에서 연공제로 바꾸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해결을 위한 일보 진전임에는 틀림없었다. 그것은 폭력이라는 거친 형식에서 비교적 온건한 형식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기도였다. 그래서 그도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네흘류도프는 정오가 다 되어서 쿠즈민스코예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자기 생활의 모든 면을 간소화하려는 생각에서 전보도 치지 않고 역에 내려 마차를 불렀다. 마부는 허리의 아래쪽 주름이 잡힌 곳에 낮게 띠를 맨 몸집이 작은 젊은 사내로서 소매가 없는 남경 무명 겉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마부석에 비스듬히 걸터앉아서 신사 손님과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기진맥진하게 혹사당한 절름발이 헌 수레 말과, 수척하고 숨을 헐떡이는 곁다리 말은 그들이 즐길 수 있는 보조로 느릿느릿 달릴 수 있었다. 마부는 자기 마차에 탄 손님이 이 고장의 '지주'인 줄도 모르고 쿠즈민스코예의 관리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네흘류도프는 짐짓 모르는 체했다.
"그 독일인은 꽤나 멋을 부리지요." 하고 도시에서도 살아 보았고, 소설깨나 읽었다는 마부는 말했다. 그는 손님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반쯤 돌리고 마부석에 앉아서는, 기다란 채찍을 위아래로 연방 바꾸어 쥐면서 "자기가 밤색 말을 사서, 마누라와 함께 마구 쏘다니고 있습죠. 대단합니다!"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크리스마스 같은 때에는 으리으리한 집에 크리스마스트리까지 장식하고, 나는 그럴 때 자주 손님을 태워다 드렸습니다만, 전깃불도 환하게 밝혀져 있어요. 어디 이런 시골구석에서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얼마나 돈을 해먹었는지....... 물론 댁에선 믿지 않으실 테지만, 어쨌든 만사가 자기 멋대로라니까요. 또 이번엔 좋은 땅을 샀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네흘류도프는 독일인 관리인이 자기 영지를 어떻게 관리하든지, 또 어떻게 그것을 이용하든지 자기는 전혀 그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허리가 긴 마부의 이야기는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름다운 날씨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이 가끔 태양을 가리는 모양이며, 여기저기서 농부들이 귀리 밭을 갈며 보습을 따라 다니는 들 풍경이며, 종달새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있는 파릇파릇한 채소밭이며, 철늦은 참나무를 빼 놓고는 벌써 신록에 덮인 숲이며, 소와 말이 점점이 얼룩져 보이는 목장이며, 밭갈이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어른거리는 경작지를 즐거운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따금 불쾌한 느낌이 스쳐가곤 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 자기를 불쾌하게 하는가를 자문해 보았다. 그 때마다 그 독일인 관리인이 자기의 쿠즈민스코예의 토지를 자기 토지나 되는 것처럼 마음대로 관리 취급하고 있다는 마부의 말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나 한번 쿠즈민스코예에 도착하여 일에 착수하게 되자, 네흘류도프는 곧 그러한 불쾌한 감정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사무소의 장부를 점검하고, 농부들의 얼마 되지 않는 땅이 지주의 땅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매우 유리하다고 숨김없이 떠들어 대는 관리인의 설명을 듣자, 네흘류도프는 마침내 자기가 직접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전부 농부들에게 빌려 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사무소의 장부를 검사하고 관리인의 말을 듣고 난 그는 기름진 땅의 3분의 2는 종전과 같이 완비된 농구를 사용해서 일꾼들의 손으로 경작되고, 나머지 3분의 1은 한 정보당 5루블씩의 임금을 주고 농민들에게 경작시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5루블의 임금 때문에 농민들은 한 정보의 토지를 세 번씩 갈고 다듬고 하여 씨를 뿌리고 거둬들여서 다발을 지어 창고로 운반해야 했다. 요약해서, 자유 계약의 머슴일지라도 적어도 한 정보당 10루블에 해당될 만한 노동을 해야만 했다. 농부들은 또 사무소에서 지급되는 모든 필수품에 대해서도 엄청나게 비싼 값을 노동으로 갚아야만 했다. 그들은 목초나 숲속의 장작, 감자 등의 일을 얻는 데도 노동을 해서 그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사무소에 빚을 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예를 들어서 농민들에게 일정한 임대료로 대여하는 경지 이외의 토지를, 보통 한 정보당 5푼 이자 정도의 이익으로 계산한다면, 약 4배의 수입을 짜내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전부터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이번에 새삼스럽게 다시 듣고 보니, 자기를 비롯해서 자기와 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러한 불합리한 사실에 대해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그저 놀랄 뿐이었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양도해 주면 농기구는 소용없게 될 것이고, 그걸 팔려 해도 원가의 4분의 1도 받지 못할 것이며, 또한 살 사람도 없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농민들은 땅을 못 쓰게 만들 것이니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라는 관리인의 말은, 다만 농민들에게 토지를 빌려 줌으로써 자기 수입의 대부분을 잃을망정 자기 행위가 올바른 것이라는 네흘류도프의 신념을 더욱 굳게 해줄 따름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이번 여행 중에 완전히 처리해 버리리라 마음먹었다. 이미 파종을 끝낸 곡식의 수확과 매각될 농기구며 불필요한 건물의 매각은 모두 그가 떠난 후에 관리인에게 그 처리를 맡기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이튿날 자기의 계획을 농민들에게 발표하고, 임대 토지에 대한 대부 조건을 비롯한 그 밖의 것을 조정하기 위해서 쿠즈민스코예의 영지를 둘러싸고 있는 세 마을의 농부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해달라고 관리인에게 부탁했다.
관리인의 주장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농민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확고부동한 각오가 되어 있다는 의식에 만족감을 느끼며 네흘류도프는 사무소를 나섰다. 그리고 당면 문제를 심사숙고하면서 집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손질도 하지 못하고 내버려 둔 꽃밭(올해는 꽃밭이 관리인의 집 앞에만 가꾸어져 있었다.), 민들레가 무성하게 자란 테니스 코트, 보리수가 서 있는 가로수길, 이 길은 그가 항상 시가를 피우며 거닐던 곳이었으며, 3년 전에는 한동안 어머니 집에 손님으로 와 있던 아름다운 키리모바가 그에게 매혹적인 눈길을 던지던 곳이기도 했다.
네흘류도프는 내일 농민들 앞에서 연설한 이야기의 요점을 대충 생각하고 나서 관리인이 있는 데로 갔다. 차를 마시면서 네흘류도프는 다시금 자기의 토지 경작을 완전히 폐지해버릴 방법을 상의한 후, 안정된 마음으로 이제부터 자기가 농민들에게 베풀려는 행동에 만족하면서 자기를 위해 마련된 안채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객실은 항상 손님을 맞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큰 저택에 있는 방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이 방에는 베니스의 풍경화와, 두 창문 사이에 거울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깨끗한 침대와 유리병, 성냥, 소등기 등이 놓여 있는 조그만 테이블이 있었다. 거울 앞의 큰 테이블 위에는 그의 트렁크가 열린 채 놓여 있었고, 트렁크 속에는 여행용 화장 케이스와 책들이 삐죽삐죽 나와 있었다. 그 책들은 러시아어로 된 <형법 연구 시론>과, 같은 제목의 독일어와 영어로 된 책들이었다. 그는 이 책들을 이번 여행 중에 틈틈이 읽으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도무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내일은 되도록 일찍부터 농부들과 상담하기 위해서 잠잘 채비를 했다.
방 한구석에는 자개가 박힌 낡은 마호가니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전에 어머니 침실에 놓여 있던 그 안락의자를 보자, 그의 마음속에는 예기치 못했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는 머지않아 헐리게 될 이 집과 황폐해질 정원, 벌목되고 말 삼림, 그리고 자기 스스로가 마련한 것은 아니지만, 굉장한 공을 들여서 유지해 온 가축우리와 마구간과 농기구를 넣어 두던 헛간, 그리고 기계와 소와 말 등 모든 것들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이런 것들을 내동댕이쳐 버리는 것은 손쉬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지금은 그런 것들만 아니라 토지며 앞으로 필요하게 될 수입의 반감이 아까워졌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를 뒷받침이나 해주는 듯이 토지를 농민들에게 대여하여 자기의 재산을 없애 버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좀 경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나는 토지를 소유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토지를 가지지 않고서는 이만한 집과 농장을 꾸려 나갈 수가 없다. 나는 곧 시베리아 가야 하니까, 집도 토지도 필요 없다.'하고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우선, 너는 시베리아에서 한평생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결혼을 하면 아이도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자신이 영지를 물려받은 것처럼 네 아이들에게도 물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토지에 대한 의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남에게 양도하든지 때려 부수든지 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지만,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너는 자신의 생활을 충분히 생각해 보고, 자기 자신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는 마음속에 이것을 굳게 결심하고 있는가? 그리고 또한 네가 하고 있는 행위는 정말로 자기 양심의 소리에 따른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 남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닌가?' 네흘류도프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자기 결심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의문이 생겨서 해결하기가 더욱 난처해졌다. 그는 이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 보려고 깨끗한 잠자리에 드러누워 지금 혼란에 빠져 있는 모든 문제가 내일 아침에는 산뜻한 머리로 해결될 것을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자리에 든 그는 오랫동안 뒤척거렸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부터 신선한 공기와 달빛과 함께 개구리 울음소리가 정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리고, 창문 바로 밑의 활짝 핀 라일락꽃 가지 속에서는 드높이 울러 대는 밤 꾀꼬리의 울음소리도 뒤섞여 들려왔다.
개구리와 꾀꼬리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네흘류도프는 문득 소장 딸의 피아노 소리를 생각했다. 소장을 생각하자 마슬로바를 생각하게 되고, '이제 그런 것 그만두세요.' 하고 그녀가 말했을 때, 마치 개구리의 울음소리와도 같이 입술이 바르르 떨리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자 독일인 관리인이 개구리가 우는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를 불러 세우려 했으나 그는 이미 아래로 내려가 버렸을 뿐만 아니라, 어느 새 그는 마슬로바로 변해서 '나는 징역수고 당신은 공작님이신 걸요.' 하고 네흘류도프를 힐책하기 시작했다.
'아냐, 이런 일에 굽히지 않는다.' 하고 생각하며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자문해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한 일이냐, 아니면 그릇된 일이냐?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어서 잠을 자야지!' 그러는 사이에 그도 곧 관리인과 마슬로바가 내려간 곳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그는 어느새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2
이튿날 아침 네흘류도프는 9시에 잠을 깼다. 주인의 시중을 들고 있는 젊은 사무원은 그가 일어난 기척을 알아채고, 이제껏 그렇게 해본 적이 없을 만큼 번쩍번쩍하게 닦아 놓은 구두와 차고 깨끗한 샘물을 떠가지고 들어와서 농부들이 벌써 모이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네흘류도프는 정신을 차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지를 농부들에게 분배하여 자기 재산을 없애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던 어제의 마음은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그는 간밤에 후회하던 일을 되새겨 보니 퍽 놀라웠다. 지금 눈앞에 닥쳐오고 있는 일에 기쁨을 느끼고, 무심결에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창밖으로는 민들레가 무성한 테니스 코트가 보였는데, 그 곳에는 관리인의 지시대로 농부들이 모여 있었다.
어젯밤 개구리가 요란하게 울어 대더니 날씨는 잔뜩 흐려 있었다. 아침부터 바람 한 점 없고 가랑비가 소리 없이 내려 나뭇가지와 잎사귀와 풀잎에 빗방울이 대롱대롱 맺혀 있었다. 창으로부터 신록의 향기와 더불어 비를 재촉하는 듯한 향긋한 흙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네흘류도프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테니스 코트에 모여드는 농부들을 여러 번 창밖으로 내다보았다. 농부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어서는 둥글게 서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면서 서로 모자를 벗어 인사를 주고받았다. 큰 단추가 달리고 짧고 푸른 깃을 세운 신사복을 입은 육중하고 체격이 좋은 관리인이 네흘류도프에게 와서, 농부들이 모두 모이기는 했으나 조금 더 기다리게 해도 상관없으니 미리 마련해 놓은 커리를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아니, 그리로 먼저 가서 곧 그들을 만납시다."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그러나 막상 농부들 앞에 나가서 이야기할 생각을 하니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그는 농부들이 꿈에도 그려보지 못한 그들의 희망을 실현시켜 주려고 했다. 싼값으로 그들에게 땅을 빌려 주려고 하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왠지 자꾸 부끄러웠다. 네흘류도프는 농부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갔을 때, 모자를 벗은 연한 황갈색의 머리, 곱슬머리, 대머리, 백발의 머리들을 보고, 어리둥절해져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랑비가 계속해서 내려 빗방울이 농부들의 머리카락이며, 턱수염이며, 긴 외투의 보풀 위에 방울방울 맺혔다. 농부들은 주인을 바라보고 그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네흘류도프는 몹시 당황했기 때문에 얼른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 같은 불안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침착하고 자신만만한 독일인 관리인이었다. 그는 러시아 농민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를 정확하고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기름기가 흐르고 단단한 체력을 하고 있는 관리인과 네흘류도프의 모습은 농부들의 파리하고 주름투성이의 얼굴과, 그들의 외투 밖으로 삐죽 나온 말라빠진 어깨뼈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번에 공작님께서는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토지를 나누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신네들은 그럴 만한 가치조차 없지만."하고 관리인이 말했다.
"왜 우리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거요. 바실리 카롤로비치? 우리가 당신을 위해서 일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우린 돌아가신 마님한테 큰 은혜를 입었습죠. 마님의 명복을 빌고 있습니다! 젊은 공작님께서도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니 고맙습니다." 수다스러운 붉은 머리의 농부가 말했다.
"그래서 오늘 당신들을 모이게 한 것입니다. 당신들이 원한다면, 토지를 전부 당신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흘류도프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농부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동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어떻게 토지를 나누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하고 소매 없는 긴 조끼를 걸친 중년의 농부가 네흘류도프에게 물었다.
"싼값으로 토지를 쓸 수 있도록 빌려 주려는 겁니다."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하고 노인 한 사람이 말했다.
"빌려 주신다는 데 뭘 그래."
"당연한 일이지. 우린 땅 없이는 살 수가 없으니까!"
"지주님에게는 그 편이 안심일 겁니다."
여러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단지 땅값만 거둬들이면 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귀찮은 일이 많습지요."
"귀찮은 일은 언제나 당신들 때문에 일어나."하고 독일인이 말했다. "당신들이 일을 잘해주고 질서 있게 규칙을 지켜 주기만 한다면야......"
"말이야 쉽지요. 바실리 카롤로비치." 하고 날카로운 코에 말라빠진 작은 노인이 말했다.
"왜 밀밭에다 말을 들여 놓았느냐고 야단이지만, 누가 그런 짓을 일부러 하겠습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1년을 하루같이 낫자루나 무슨 연장을 휘두르며 일하고 나면 밤에 말을 감시할 땐 그만 곯아떨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말이 당신네 밀밭에 들어갔다고 해서 마구 들볶으니 말이에요."
"그러니까 규칙을 지키란 말이요."
"규칙! 규칙! 말로는 쉽지만, 우리 힘엔 겨운 일입니다." 하고 털북숭이의, 머리카락이 검고 별로 나이가 많지 않은 키가 큰 농부가 반박했다.
"그러니까 울타리를 하라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재목을 주십시오." 하고 몸집이 조그마한 초라한 모습의 사내가 끼어들었다.
"나는 여름에 울타리를 하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당신은 3개월 동안이나 나를 감옥에 가두어서 이의 밥으로 만들지 않았어요? 울타리를 만들려면 이런 꼴이 된다니까, 글쎄!"
"저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네흘류도프가 관리인에게 물었다.
"저자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도둑놈입니다." 하고 관리인이 독일어로 대답했다. "매년 숲속에서 잡혀오는 녀석입니다. 너는 남의 재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부터 배워야 해." 관리인이 말했다.
"그래, 우리가 당신을 소홀히 대했다는 말이오?" 하고 한 노인이 말했다. "우리는 당신 손에 꽉 쥐여 있으니 당신을 소중히 모시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라면 우리들을 엮어서 밧줄이라도 만들 수 있는 신분이 아니냐고요."
"무슨 소리야! 당신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당신들을 괴롭힌단 말이야. 제발 당신들이나 나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뭐라고요? 괴롭히지 않았다고요? 작년 여름, 나를 때리지 않았소? 그래도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어요. 돈을 가진 사람하고는 겨룰 자격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규칙대로 하란 말이야."
이렇게 말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다투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다투고 있는지, 또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뚜렷이 말할 수 있는 것은, 한편에는 공포에 억눌린 원한이 있고, 또 한편에는 우월감과 권력이라는 의식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네흘류도프는 그 같은 입씨름을 듣고 있는 것이 괴로워서, 본론으로 말머리를 돌려 보려고 했다. 그래서 땅값과 지불 기한을 결정하려고 했다.
"대체 토지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들은 내가 말한 대로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토지를 전부 빌려 드린다면 땅값은 얼마로 하면 좋겠습니까?"
"지주님의 땅이니 가격도 정하시지요."
네흘류도프는 가격을 말했다. 그러자 네흘류도프가 부른 가격은 이 고장에서 부르는 가격보다 훨씬 싼값이었지만, 농부들은 늘 하는 식으로 비싸다고 값을 깎기 시작했다. 네흘류도프는 자기의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했었지만, 농부들에게서는 조금도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네흘류도프는 다음의 이유에서 그의 제안이 그들에게 유리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누가 토지를 빌리느냐, 다시 말하면 전체의 농부의 이름으로 빌리느냐, 그렇잖으면 조합을 만들어서 빌리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지불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제외하자는 농부들과 제외당하는 농부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관리인의 중재로 땅값과 지불 기간이 결정되었다. 농부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언덕길을 내려가 마을로 돌아갔다. 네흘류도프는 관리인과 같이 계약서의 문안을 만들기 위해 사무소로 갔다.
모든 것이 네흘류도프가 원하고 기대했던 대로 되었다. 농부들은 그 지방 일대의 땅값보다 3할이나 싼 값으로 토지를 빌려 쓰게 되었다. 영지로부터 나올 수입은 반감되었으나, 그래도 네흘류도프에게는 충분했다. 특히 산림을 판 대금과 농기구를 팔아 들어올 금액을 가산하면 오히려 남아돌아갈 정도였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잘되어 가는데도 왠지 네흘류도프는 그 무언가가 양심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농부들 중에는 고맙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으며, 뭔가 좀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결국 그는 많은 재산상의 손해를 보면서도 농부들이 기대했던 것을 채워 주지 못한 셈이 되었다.
이튿날, 가계약서에 서명한 네흘류도프는 마을의 대표로 뽑혀 온 노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무엇인가 불쾌한 마음으로, 전날 정거장에서 타고 올 때 마부한테서 들은 관리인의 잔뜩 뽐낸 삼두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뭔가 미완성으로 떠나는 불유쾌한 감정으로 정거장으로 마차를 몰았다.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선 채 불만족스러워 머리를 흔드는 농부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출발했다. 네흘류도프 자신도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어떤 점이 만족스럽지 못한지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으나, 그는 시종 뭔가 서글프고 수치스러운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3
네흘류도프는 쿠즈민스코예를 떠나 고모한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영지로 향했다. 그 곳은 카추샤를 처음으로 만났던 곳이었다. 그는 이 영지에서도 쿠즈민스코예에서 한 것처럼 토지 문제를 처리하려고 생각했다. 그밖에 카추샤의 일과, 카추샤와 자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갓난애의 일, 그 갓난애가 죽었다는 것은 사실인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죽었는지, 가능한 한 확실히 알고 싶었다.
그는 아침 일찍이 파노보 마을에 도착했는데, 집안에 마차를 들여놓았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모든 건물, 특히 안채의 황폐하고 퇴락한 모습이었다. 전에는 파랗게 빛이 나던 지붕이 오랫동안 칠을 하지 않아서인지 뻘겋게 녹이 슬고, 아마 폭풍 때문인지 여러 장이 뒤집혀져 있었다. 안채를 둘러싼 얄팍한 판자는 군데군데 누군가의 손으로 뜯겨져 있었고, 녹슨 못이 구부러져 있었다. 입구의 계단은 두 곳 다 -앞문과, 그리고 그에게 특별한 추억을 남겨 준 뒷문도- 모두 허물어져 나무 뼈대만 남아 있었다. 몇 개의 창문은 유리 대신 얄팍한 판자로 가려져 있었고, 관리인이 살고 있던 별채와 부엌과 마구간도 모두 낡아빠져서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다만 정원의 풀만은 무성하게 자라 때마침 꽃이 만발하였고, 울타리 저쪽 활짝 핀 벚꽃과 사과, 살구 등이 마치 흰 구름처럼 보였다. 라일락 산울타리에는 12년 전 네흘류도프가 열여섯 살이 된 카추샤와 그 그늘 밑에서 술래잡기를 하다가 구덩이에 빠져 라일락 나무숲 뒤의 쐐기풀에 찔렸을 때와 똑같이 라일락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소피야이바노브나 고모가 안채 옆에 심은 낙엽송은 그 당시 말뚝만 하던 것이 지금은 대들보만 하게 자라 있었으며, 황록색의 부드러운 솜털 같은 잎으로 덮여있었다. 냇가에는 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고, 물방앗간이 있는 둑에 이르러서는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개울 저쪽 풀밭에서는 마을의 농부들이 키우는 여러 가지 털빛을 한 가축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신학교를 중퇴한 관리인이 미소 띤 얼굴로 뜰에서 네흘류도프를 맞아들였다. 그는 연방 미소를 지으면서 네흘류도프를 사무실로 안내했고, 무슨 특별한 일을 약속이라도 하듯이 싱글벙글하면서 칸막이 뒤로 사라졌다. 칸막이 벽 뒤에서 무엇인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조용해졌다. 네흘류도프를 역에서 태워다 준 마부가 찻삯을 받아 가지고 딸랑딸랑 방울 소리를 내면서 밖으로 몰고 사라져버리자 사방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수놓은 속옷을 입고, 술을 너덜너덜하게 늘어뜨린 귀고리를 단 맨발의 계집애가 창가로 뛰어가자, 뒤이어 농부 한 사람이 두툼한 장화의 징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며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갔다.
네흘류도프는 창가에 앉아서 정원을 내다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조그만 쌍여닫이 창문으로 신선한 봄의 향기와 일구어 놓은 땅의 흙냄새가 들어왔고, 산들바람이 땀 맺힌 그의 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과 칼 자국투성이의 창턱 위에 놓여 있는 종이를 하늘하늘 날려 주었다. 냇가에서는 아낙네들의 빨래 방망이 소리가 들려왔다가는 햇빛에 반짝이는 맑은 강물 위로 퍼져나갔다.
방앗간에서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박자를 맞추며 들려왔다. 파리 한 마리가 놀란 듯 귓전을 윙하고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자 불현 듯 자기가 젊고 순수했던 시절인 그 옛날 생각이 밀려왔다. 그 때도 역시 아낙네들의 방망이 소리가 들려왔었다. 봄바람이 땀에 젖은 그의 이마에 산들산들 불어왔고, 칼자국이 나 있는 창턱 위에 놓여 있는 종이가 팔락이고 있었다. 역시 파리가 귓전을 스쳐갔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그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18세의 소년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지만 그 때의 그 젊고 순수하고 한없이 위대한 미래의 가능성에 넘쳐 있었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그와 동시에 자기가 지금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으며, 그 옛날의 일들은 모두 실재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자, 무섭도록 서글퍼졌다.
"언제 식사를 하기겠습니까?"하고 관리인이 미소 지으면서 물었다.
"언제든지 좋소. 그러나 별로 시장하지 않으니, 마을이나 한 바퀴 돌아보겠소."
"그럼 먼저 안채로 들어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깨끗이 정리해 놓았습니다. 밖은 좀 뭣합니다만...... 쭉 한번 둘러보시는 게 어떨지......."
"아니, 그것은 나중에 보기로 하지. 그보다 한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 마을에 마트료나 하리나(카추샤의 이모)라는 여자가 있소?"
"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밀주를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저는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꼬리를 잡아서 잔소리를 해주곤 합니다만, 고소를 하기에는 불쌍합니다. 늙은 몸에 손자들을 키우고 있으니까요."하고 관리인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그것은 주인의 호감을 사려는 것과, 네흘류도프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모든 문제를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을 나타내는 미소였다.
"그 노파는 어디서 살고 있는지, 가서 잠깐 만나 보았으면 좋겠는데."
"마을 제일 끝에서 세 번째 집입니다. 왼편에 벽돌집이 있고, 그 뒤쪽에 노파가 사는 오두막집이 있습니다. 그보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하고 관리인은 기쁜 듯이 벙글거리며 말했다.
"아니, 고맙소. 나 혼자도 갈 수 있고. 그보다 당신은 농부들을 한 곳에 모이도록 연락해 주시오. 난 토지 문제로 그들에게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으니까."하고 네흘류도프가 일렀다. 그는 이곳에서도 쿠즈민스코예 마을에서처럼 가능하다면 오늘 밤 안으로 농부들과의 이야기를 끝맺을 작정이었다.
4
대문을 나서자 네흘류도프는 탄탄히 다져진 오솔길에서 알록달록한 무늬의 앞치마를 두르고 귀에는 장식 귀고리를 달고, 질경이와 백산다가 우거진 목장 뜰을 가로질러 맨발로 재빠르게 걸어오는, 다리가 굵은 시골 처녀와 마주쳤다. 집으로 돌아오고 있던 그녀는 오른손에 빨간 볏이 흔들리는 수탉이 가만히 품에 안겨 있는 듯했으나, 이따금 눈을 두리번거리며 시커먼 한쪽 발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처녀의 앞치마를 발톱으로 박박 긁고 있었다. 시골 처녀는 주인 앞으로 다가오자, 빠른 걸음을 보통 걸음으로 늦추어 가다가 주인과 마주치자 우뚝 멈추어 서서 고개를 뒤로 번쩍 쳐들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는, 네흘류도프가 옆으로 지나가자, 수탉을 안은 채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우물 쪽으로 내려가는 도중, 이번에는 더럽고 다 떨어진 옷을 걸치고 구부정한 등에다 물이 철철 넘치는 물통을 메고 오는 노파와 부딪쳤다. 노파는 네흘류도프를 보자 물통을 가만히 내려놓고 아까 처녀와 똑같이 고개를 바로 쳐들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우물을 지나자 바로 마을이 나타났다. 맑게 갠 무더운 날씨였다. 아침 10시인데도 날씨는 후끈후끈 찌기 시작했고,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서는 이따금씩 태양을 가리곤 했다. 코를 찌르는 듯한 거름 냄새가 마을에서 풍겨왔다. 그 냄새는 반짝반짝 빛나는 산길을 줄지어 올라가고 있는 짐마차에서 풍겨오는 것 같았으나, 그보다는 주로 네흘류도프가 지나가는 집집의 안마당에 파헤쳐 놓은 거름 더미에서 열어 놓은 문을 통해 풍겨오는 냄새가 더 지독하고 역했다.
거름이 묻은 바지와 셔츠를 입은 맨발의 농부들은 짐마차 뒤를 따라 산길을 걸어 올라가면서, 키가 크고 뚱뚱한 신사가 햇빛에 번쩍이는 비단 리본이 달린 회색 모자를 쓰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반짝이는 은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로 가볍게 땅을 짚으면서 마을길 쪽으로 걸어 올라가는 모습을 자꾸 뒤돌아보았다.
들에서 돌아오는 농부들은 빈 마차를 달리며 흔들거리는 마부석에서 모자를 벗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자기들이 다니는 길에 나타난 이 낯선 사람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여자들은 현관에 서거나 문 밖까지 뛰어나와서, 서로 눈짓 손짓해 가며 그를 전송했다.
네흘류도프는 네 번째 집을 지나가려고 할 때 요란스럽게 달려오는 짐마차 때문에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그 짐마차 위에는 거름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사람들이 앉게 편평하게 멍석이 깔려 있었다.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맨발로 마차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짚신을 신은 젊은 농부가 성큼성큼 발을 내디디며 말을 문 밖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다리가 길고 털이 푸르스름한 망아지가 문 밖으로 쫓겨나오다가 네흘류도프를 보고는 질겁해서 마차 옆으로 비켜서다가 다리가 바퀴에 부딪치자, 깜짝 놀라서는 때마침 문에서 무거운 짐을 끙끙거리며 끌고 나오는 어미 말 앞으로 달려갔다. 어미 말은 근심스러운 듯이 히힝 소리를 냈다. 그 뒤를 따라서 줄무늬 바지에 더러운 셔츠를 걸친, 역시 어깨뼈가 불거져 나오고 깡말라 원기가 왕성해 보이는 노인이 맨발로 말을 몰고 나왔다.
말들이 잿빛을 띤 말똥이 흩어져 있는 길로 나가자, 노인은 문이 있는 데까지 되돌아와서 네흘류도프에게 인사를 했다.
"나리께선 우리 여지주님 조카님이신가요?"
"네, 조카올시다."
"잘 오셨습니다. 그러시다면 저희들을 만나러 오셨습니까?"하고 노인은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고. 그런데 어떻게들 지내고 있지요?" 네흘류도프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이렇게 되물었다.
"어떻게들 지내다뇨! 우리들의 생활이란 말씀이 아니죠." 수다스러운 노인은 노래라도 부르듯 흥겹게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어째서 그렇게 형편없단 말입니까?" 네흘류도프는 문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이것도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말씀이 아닙니다." 네흘류도프의 뒤를 따라서 거름이 깨끗이 치워져 땅바닥이 드러나 있는 처마 밑으로 발길을 옮기며 노인이 대답했다.
네흘류도프는 노인을 따라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바로 저기 보시다시피 제 식구는 모두 12명이나 됩니다." 노인은 두 여자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여자들은 수건을 늘어뜨리고, 땀에 젖은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며, 장딴지를 절반이나 거름에 묻힌 채, 쇠스랑을 손에 들고 거름더미 속에 서 있었다.
"매달 적어도 스물대여섯 관의 보리를 사야 되는데 어디서 그 돈을 구해 오겠습니까?"
"당신네 밭에서 나오는 것으로 모자란단 말이오?"
"우리 밭이라고요?"하고 비웃기나 하듯이 되물었다. "우리 밭에서는 세 사람 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작년에는 여덟 단밖에 추수를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때까지도 먹지 못했지요."
"그럼, 어떻게 살아가시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식 한 놈을 머슴으로 보내고, 나리 사무실에서 빚을 냈습지요. 그러나 그것도 대제일 전에 다 써버렸기 때문에 지대도 물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대는 얼마나 되오?"
"저희는 넉 달마다 17루블씩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 내 살림이지만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봐도 좋겠소?"
네흘류도프는 이렇게 묻고 앞마당을 지나 말끔히 쓸어 넣은 자리에서,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채로 쇠스랑으로 흐트려 놓은,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 싯누런 거름더미 쪽으로 걸어갔다.
"이르다 뿐인 가요! 어서 들어가십시오."하고 노인은 대답하면서, 맨발의 발가락 사이로 거름이 비죽비죽 새어나오는 발을 재빨리 옮겼다. 그는 네흘류도프의 앞장을 서더니 그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여자들은 머리에 쓰고 있는 수건을 매만지고 옷의 깃을 바로잡으면서 자기네 집으로 들어오는, 소매에 황금빛 커프스를 단 말쑥한 신사를 호기심 어린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집 안에서 속옷만 걸친 두 계집아이가 뛰어나왔다. 네흘류도프는 모자를 벗어들고 허리를 굽혀 좁고 더러운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시큼한 음식 냄새가 풍겼으며, 베틀 두 대가 방 안 가득 놓여 있었다. 난롯가에는 소매를 걷어 올린 비쩍 마르고 햇볕에 까맣게 탄 팔을 드러낸 노파가 서 있었다.
"나리께서 오셨소. 귀하신 손님이오."하고 노인이 말했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노파는 걷어 올렸던 소매를 내리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어떻게들 살고 계신지 보고 싶어서 왔소."하고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살고 있지요. 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해서 언제 누가 깔려 죽을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저 늙은이는 걱정할 것 없다고 하지요. 임금님처럼 태평하게 살고 있답니다."하고 성질이 있어 보이는 노파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마침 지금 점심을 차리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먹이려고요."
"평소 무엇을 먹습니까?"
"무엇을 먹느냐고요? 먹는 거야 고급이지요. 먼저 빵에다 크바스(라이보리와 엿기름으로 만든 음료수)를, 또 다르게는 크바스에다 빵을 먹습니다." 노파는 반쯤 썩은 이빨을 드러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농담이 아닙니다. 당신네들이 먹는 것을 좀 보여 주구려."
"먹는 것을요?" 웃으면서 노인이 말했다. "우리가 먹는 것이란 뻔한 걸요. 보여드려요, 할멈."
노파는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 농부들이 먹는 것을 보시고 싶다니, 나리도 참 자상하시군요. 꼭 눈으로 보셔야 되겠다니…… 방금 말씀드린 대로 빵과 크바스, 거기에 수프입니다. 간밤에 한 여편네가 엿기름 찌꺼기를 가져왔기에, 그것으로 수프를 만들었지요. 그리고 감자도 있고요."
"그게 전부란 말이오?"
"더 없느냐고요? 그저 우유를 넣어서 희멀겋게 만드는 정도랍니다." 노파는 웃으면서 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사내아이들, 계집아이들, 그리고 어린애를 안은 여자들이 서로 떼밀며, 농부의 음식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파는 자신 있게 나리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나리, 우리들의 생활이란 말이 아닙죠." 노인은 말했다. "어딜 들어오려고 하는 게야!"하고 문가에 모여 선 사람들에게 노인이 소리를 꽥 질렀다.
"그럼 잘들 있어요." 네흘류도프는 알지 못할 수치심과 어색한 기분을 느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 같은 사람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노인은 말했다.
입구 쪽에 서 있던 사람들이 네흘류도프에게 길을 비켜 주기 위해 서로 밀치고 당기고 했다. 네흘류도프는 한길로 나와서 언덕길로 올라갔다. 그의 뒤를 따라 맨발의 두 아이가 뛰어왔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아이는 애초에는 하얀 것이었으나 지금은 새까맣게 때가 묻은 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다른 한 아이는 색이 바랜 분홍빛 셔츠를 입고 있었다. 네흘류도프는 그들을 돌아다보았다.
"이번엔 어디로 가세요?" 흰 셔츠를 입은 애가 물었다.
"마트료나 하리나한테 가겠다. 너희들 그 사람을 아니?"
진홍빛 셔츠를 입은 조그만 사내애가 무엇이 우스운지 킬킬거렸으며, 나이를 먹은 소년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어느 마트료나 말이에요? 할머니 말이에요?"
"응 그래, 할머니다."
"아!" 사내아이는 목소리를 길게 뺐다. "그럼, 세묘니하 할머니군요. 그 할머닌 마을 끝에 살아요. 우리들이 모셔다 드릴 게요. 얘, 페드카, 우리 같이 모셔다 드리자."
"말은 어떡하고?"
"염려 마, 괜찮대도."
페드카가 동의했으므로 그들은 같이 윗마을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5
네흘류도프는 어른들을 상대하기보다 어린이들을 상대하는 쪽이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 같이 걸어가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홍빛 셔츠를 입은 조그만 놈도 웃음을 멈추고, 큰 놈과 같이 영리하고 또렷또렷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이 누구냐?" 네흘류도프는 애들에게 물었다.
"누가 제일 가난하냐고요? 마하일네가 가난하고, 시몬 마카로프도 가난하지요. 그렇지만 마르파는 그보다 더 가난해요."
"아니야, 아니샤가 더 가난해. 아니샤는 소도 없는데다 빌어먹고 다니잖아."하고 조그만 페드카가 말했다.
"소는 없지만, 아니샤는 단 세 식구 아냐? 그렇지만 마르파는 다섯 식구나 된단 말야."하고 큰 놈이 반박했다.
"그렇지만 아니샤는 과부야."하고 진홍빛 셔츠는 아니샤 편을 고집했다.
"넌 아니샤가 과부라고 하지만, 마르파도 과부나 다름없단 말이야."하고 큰 놈이 말을 이었다. "아저씨가 집에 없으니 마찬가지지 뭐야."
"아저씨는 어디로 갔지?"하고 네흘류도프가 물었다.
"감옥에서 이를 기르고 있대요."하고 큰 놈이 어른들이 말하듯이 대답했다.
"작년 여름에 지주네 숲에서 작은 자작나무 두 그루를 베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어요." 진홍빛 셔츠의 조그만 놈이 재빨리 설명했다. "벌써 6개월이나 됐어요. 그래서 마르파는 동냥을 다녀요. 집에는 어린애가 셋이나 있고 더구나 몸을 못 쓰는 할머니까지 있어요." 소년은 자세하게 덧붙여 말했다.
"그 여자는 어디 살지?"하고 네흘류도프가 물었다.
"바로 저 집이에요."하고 소년은 집 한 채를 가리켰다. 그 오두막집 바로 앞에 있는, 네흘류도프가 걸어가고 있는 샛길에 머리가 누르스름한 조그만 어린애가 게처럼 굽어진 다리를 하고 비틀비틀 간신히 서 있었다.
"바시카, 어디로 도망가는 거냐, 이 개구쟁이야?" 그 때 마치 재라도 뒤집어쓴 듯한 칙칙한 잿빛 속옷을 입은 여자가 집에서 뛰어나와 네흘류도프 앞으로 달려와서, 어린애를 들쳐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네흘류도프가 어린애에게 무슨 못할 짓이라도 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듯한 그런 태도였다.
이 여자가 바로 네흘류도프의 산에서 자작나무를 도벌한 죄로 감옥에 갇혔다는 사나이의 아내였다.
"그런데, 마트료나도 역시 가난하냐?" 그들 셋이 마트료나 집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네흘류도프가 이렇게 물었다.
"가난한 게 뭐예요, 술을 팔고 있는데." 진홍빛 셔츠를 입은 여윈 소년이 거침없이 말했다.
마트료나의 오두막집에 닿자, 네흘류도프는 두 어린애를 돌려보내고, 출입구를 거쳐 방안으로 들어갔다. 마트료나 할머니가 살고 있는 오두막집은 두 칸 반도 채 못 되는 넓이였으므로, 난로 뒤에 놓여 있는 침대에서는 어른이 제대로 발을 뻗고 잘 수도 없을 정도였다.
'바로 이 침대 위에서'하고 그는 생각했다. '카추샤가 애를 낳고 병이 났겠구나.' 방 안은 베틀이 거의 방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네흘류도프가 나직한 문살에 머리를 부딪치며 들어갔을 때, 노파는 큰손녀와 함께 날실을 가지런히 하고 있던 참이었다. 다른 두 손자들은 네흘류도프의 뒤를 따라 들어와서 문기둥을 붙잡고 서 있었다.
"누굴 찾으시죠?"하고 노파가 화난 얼굴로 물었다. 베틀이 시원치 않아 짜증이 나 있었으며, 더욱이 밀주를 팔고 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주입니다만, 잠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노파는 찬찬히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잠시 말이 없더니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아이고 주인 나리셨군요! 바보같이 알아 뵙지도 못하고, 그저 지나는 사람인 줄만 알았습죠." 노파는 짐짓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아무도 없는 데서 조용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하고 네흘류도프는 열린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곳에는 많은 어린애들이 모여 있었으며, 그 뒤로 말라빠진 여인네가 넝마조각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병으로 인해 얼굴빛이 좋지 못한, 연방 빙글거리고만 있는 갓난애를 안고 서 있었다.
"뭘 보는 게야! 혼 좀 나봐야 알겠니? 그 몽둥이 좀 이리 가져와!" 하고 노파는 문에 서 있는 애들에게 고함을 쳤다. "문을 닫지 못해! "
어린애들은 겁을 먹고 달아나 버렸다. 갓난애를 안고 있던 아낙네가 문을 닫았다.
"난 또 누구시라고. 주인 나리이신걸. 정말 귀하신 손님이군요!"하고 노파는 말했다. "아유, 이렇게 누추한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자, 여기 걸터앉으십시오, 이 의자에."하고 그녀는 앞치마로 나무 의자를 훔치면서 말했다.
"난 또 어느 놈팡이가 왔나 했었지요. 우리 생활의 은인이신 나리가 오셨을 줄이야. 제발 용서하십시오. 늙어서 벌써 눈이 멀었나 봐요."
네흘류도프는 앉았다. 노파는 그의 앞에 서서 오른손으로 뺨을 받치고 왼손으로 오른손의 뾰족한 팔꿈치를 쥐면서 노래를 부르듯이 말했다.
"그런데 나리도 나이가 드셨군요. 물오른 나무처럼 싱싱하시더니, 지금은 그렇지 못하시니 말이에요. 무슨 걱정이 있으신가 보지요?"
"실은 할머니한테 물어 볼 게 있어서 왔는데. 카추샤 마슬로바를 기억하시겠소?"
"예카테리나 말씀입니까? 모를 리 있겠습니까, 내 조카딸인 걸……. 그야 잊을 수 없지요. 그 애 때문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다 알고 있습니다. 하기야 하나님 앞에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임금님 앞에 송구스럽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젊은 탓이지요. 누구나 차와 커피를 좋아합니다. 다 젊은 기분으로 저지른 짓이지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리는 그 애를 버리셨지만, 백 루블을 주셨으니까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하신 셈입니다. 그러나 그 애의 꼬락서니라니. 미친 짓을 했죠. 내 말만 들었던들 버젓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 애는 내 조카딸입니다만, 사실은 미친년이었어요. 그 뒤 내가 좋은 자리에 들여보내 주었는데, 글쎄 주인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고 대들지 않았겠어요? 우리 같은 주제에 감히 주인에게 욕을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쫓겨나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또 산림 감독의 댁에 들어갔는데, 거기서도 싫다고 나와 버렸어요."
"어린아이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여기서 낳았다면서요? 그 애는 어디 있소? "
"어린 것 말씀입니까? 나리, 그 때 나는 여간 많이 생각하지 않았습죠. 그 애 어미는 산후가 좋지 않아서 일어나지도 못했지요. 그래서 어린애는 영세를 받게 한 다음 육아원으로 보냈습니다. 어미가 죽게 되었다고 해도 어디 천사 같은 어린 것을 괴롭힐 수가 있어야지요. 세상에는 어린애에게 젖을 주지 않아서 굶겨 죽이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야지요. 힘은 들었지만 육아원으로 보내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그 때 마침 돈도 있고 해서 데려다 주었지요."
"그럼 등록 번호가 있었을 텐데요?"
"번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애는 곧 죽어 버렸어요. 그 여자의 말은 도착하자마자 죽었다더군요."
"그 여자라니?"
"바로 스코르드뇨예에 살고 있던 여자지요. 그 여자는 그게 직업이었어요. 이름은 말라냐라고 했는데 지금은 죽고 없습니다. 똑똑한 여자였어요. 잘해 나갔지요. 누가 갓난애를 데려다 주면 그 애를 받아 가지고는 잘 길렀답니다. 갓난애가 육아원으로 보낼 만한 숫자가 찰 때까지 자기 집에서 길렀지요. 그러는 동안에 세 아이나 네 아이가 모이게 되면 곧 육아원으로 데리고 갔답니다. 그녀는 둘이서 잘 수 있는 큰 요람을 여기저기에 만들었는데, 그 곳에 손잡이도 달아놓았습니다. 그 속에다 네 아이를 머리가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즉 네 아이의 발이 한 군데 모이게 뉘었답니다. 이렇게 해서 한꺼번에 네 아이를 돌봐 주었어요. 젓꼭지만 물려주면 모두 울지 않고 얌전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됐소?"
"그래서 예카테리나의 애도 그렇게 해서 길렀습죠. 그렇게 이럭저럭 2주일 동안 길렀다는데, 벌써 그 때부터 그 애가 쇠약해져갔다는군요."
"좋은 애였었나요?"하고 네흘류도프는 물었다.
"그야 훌륭한 애기였어요. 어디를 가서 찾아봐도 그런 애는 없을 겁니다. 꼭 나리를 닮았었지요."
노파는 늙은이답게 한쪽 눈을 깜빡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먹는 것이야 뻔하지요. 한 가지만을 먹였으니까요. 하긴 제 배를 앓아서 난 애가 아니니까 당연하지요. 그 여자는 어쨌든 육아원에 도착할 때까지만 살아 있으면 된다고 말하더군요. 가까스로 모스크바에 데리고 가자마자 숨졌다니…… 그녀는 빈틈없이 증명서까지 받아왔더군요. 참 영리한 여자였어요."
네흘류도프가 자기 자식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이것뿐이었다.
6
네흘류도프는 방문과 현관에 다시 머리를 부딪치며 밖으로 나왔다. 때 묻은 흰 셔츠와 진홍빛 셔츠를 입은 두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밖에 새 얼굴이 댓 명 끼여 있었다. 젖먹이를 안은 아낙네도 몇 명 있었는데, 그 중에는 낡아빠진 헝겊으로 모자를 만들어 씌운 핏기 없는 갓난애를 안은, 앞서 본 그 여자도 끼여 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시들어 보이는 얼굴에 줄곧 기묘한 미소를 띠면서 구부러진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네흘류도프는 그 어린애가 고통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낙네가 누구냐고 물어 보았다.
"저 여자가 내가 아까 말한 아니샤예요."하고 나이 먹은 사내아이가 대답했다.
네흘류도프는 아니샤에게 몸을 돌려 말을 걸었다.
"어떻게 살고 있소?" 그는 물었다. "무엇으로 연명하는가 말이오?"
"무엇을 먹고 사느냔 말이죠? 빌어먹지요." 아니샤는 이렇게 말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어린애는 애처로워 보이는 가느다란 다리를 움츠리면서 온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네흘류도프는 지갑을 꺼내 10루블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가 그 곳에서 두 걸음도 옮기기 전에 갓난애를 안은 또 다른 여자가 쫓아왔다. 뒤이어 노파, 그리고 또 다른 여자가 따라왔다. 모두가 자기들의 가난한 처지를 호소하고 도와 달라고 했다. 네흘류도프는 지갑에 있던 잔돈 60루블을 몽땅 털어 주고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집으로, 즉 관리인이 살고 있는 별관으로 돌아왔다. 관리인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네흘류도프를 맞아들이면서 오늘 밤 농부들이 모인다고 보고했다. 네흘류도프는 고맙다고 말하고 방에 들어가지 않고 뜰로 나와, 무성한 풀 위에 하얀 사과꽃이 만발한 오솔길을 거닐면서 자기가 방금 목격한 모든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별관 근처는 처음에는 조용했으나, 곧 관리인의 방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 여자가 서로 상대방의 말을 가로채며 외치는 사이사이에, 미소를 짓고 있는 성싶은 관리인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흘류도프는 귀를 기울였다.
"내 힘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데, 왜 남의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까지 빼앗고 야단이에요."하고 독살스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목장에 뛰어들었을 뿐이잖아요."하고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려 달라니까요. 어째서 소는 굶기고 애들 우유도 못 먹이게 괴롭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으로 갚든지 일을 해서 갚든지 하란 말이야."하고 관리인의 차분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네흘류도프는 정원에서 나와 입구의 층계 쪽으로 다가갔다. 그 곳에는 머리칼이 흐트러진 두 여자가 서 있었는데, 한 사람은 해산이 임박한 만삭의 배를 안고 있었다. 입구의 우층계에는 관리인이 범포로 만든 외투 포켓에 두 손을 찌른 채 서 있었다. 주인을 보자 여자들은 입을 다물고 흘러내린 머릿수건을 매만지고 있었으며, 관리인은 포켓에서 손을 빼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농부들이 일부러 자기들의 송아지뿐만 아니라 어미 소까지 지주네 목장으로 들여보낸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이 여자들의 암소 두 마리가 목장에 들어와 있기에 붙잡아서 외양간에 가둬 버렸다는 것이었다. 관리인은 소 한 마리에 30코페이카씩의 벌금을 내든지, 아니면 이틀 동안의 노동으로 배상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첫째 자기네 소들은 조금 들어갔을 뿐이고, 둘째 그만한 돈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셋째 일을 하기로 약속할 테니까,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뙤약볕에 처량하게 울고 있는 소만은 빨리 돌려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몇 번씩이나 당신들에게 똑똑히 일러두지 않았냔 말이야." 벙글거리는 관리인은 마치 네흘류도프에게 증인이나 되어 달라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점심때에 소를 끌어 낼 때는 자기 가축을 잘 보라고."
"잠깐 애를 보러 간 사이에 소들이 나가 버린 거예요."
"소를 보는 사람이 그 곁을 떠나는 법이 어디 있어?"
"그럼, 어린 것은 누가 젖을 먹이고요? 당신의 젖꼭지라도 물려주신다면 몰라도요."
"그것도 목장을 아주 망쳐 놨다면 몰라도 그저 잠깐 들어갔을 뿐이잖아요."하고 다른 여자가 말했다.
"목장을 망쳐 놓았단 말입니다." 관리인은 네흘류도프에게 말했다. "단단히 혼내지 않으면 건초는 만져 보지도 못합니다."
"그런 죄받을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 집 소는 한 번도 붙들린 일이 없지 않았어요?" 배가 부른 여자가 외쳤다.
"그래서 이번에 붙들리지 않았어? 그러니 벌금을 내든지, 일을 하라잖아?"
"좋아요. 일을 하겠어요. 그러니 소를 돌려주세요. 소를 굶길 수는 없잖아요." 여자는 독살스럽게 외쳤다. "그렇잖아도 낮이나 밤이나 쉴 새라곤 없는데 말이야. 시어머니는 앓아 드러누워 있지, 남편은 집에 붙어 있지 않지, 만사를 혼자 해가야 하니 정말 지쳐버렸어. 게다가 관리인은 일을 해서 갚으라고 들볶아 대니!"
네흘류도프는 소를 돌려주라고 관리인에게 말하고 혼자서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뜰로 나갔으나 새삼스레 생각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에 이렇게 일목요연한 것을 어째서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으며, 자기 자신도 그토록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은 굶주리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난에 익숙해져서 거기에 알맞은 생활 태도에 젖어 버렸다. 어린것들의 죽음과, 여자들의 과중한 노동, 모든 사람, 특히 노인들의 굶주림 등. 이렇게 농민들은 죽음에 빠져 들어가는데, 그들 자신은 그러한 무서운 상태를 알지도 못하고, 그것을 호소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들도 이 같은 상태를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대낮처럼 명백했다. 농민들 자신이 이미 깨닫고 있고 그들의 입으로 말하고 있듯이 그들이 가난한 중요한 원인은, 그들의 호구지책이 되는 유일한 토지를 지주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에 있었다. 더욱이 대부분의 어린이와 노인이 죽어 가는 것은 우유가 부족하기 때문이며, 우유가 부족한 것은 가축을 기르고 곡식이나 건초를 만들어 낼만한 땅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농민이 불행하게 된 모든 원인은, 아니 적어도 그들 불행의 중요하고도 직접적인 원인은 그들을 먹여 살리는 땅이 그들의 수중에 있지 않고, 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이용해서 이들 농민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중에 있다는 데에 있었다. 이것 역시 지극히 명백한 사실이었다. 농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그들이 목숨을 부지해 갈 수도 없는 그 토지는, 궁핍으로 쪼들리는 이들 농민들의 손으로 경작되고 있으나, 그들이 거두어들인 곡물은 지주에 의해 외국으로 팔려가서 지주의 모자나 지팡이나 마차나 청동 제품 같은 것으로 바꾸어진다. 이 모든 것이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것은 마치 울안에 갇힌 말이 발밑의 풀을 다 먹었을 때는, 다른 먹이가 있는 땅으로 자유로이 갈 수 있게 해주지 않으면, 말은 점점 말라서 굶어 죽는 수밖에 없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또한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이런 일이 없어지도록, 적어도 자기 자신은 이러한 일에 참여하지 않도록 적당한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반드시 그것을 찾아내겠다고 그는 가까운 곳에 있는 자작나무 길을 거닐면서 생각했다. '우리들은 학회나 정부 기관이나 신문 지상에서 농민들의 빈곤의 원인이나 생활의 진흥책을 논의해 왔지만, 그들의 생활을 올바르게 진흥시키는 유일한 방법, 즉 그들에게 꼭 있어야 하는 토지를 그들에게서 빼앗는 일을 중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그는 헨리 조지의 근본이념을 생생하게 상기하고 어째서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는지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토지는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물이나 공기나 햇빛과 마찬가지로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토지에 대해서, 또 토지가 인간에게 주는 온갖 이익에 대해서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
그 때 그는 비로소 쿠즈민스코예에서 개혁을 생각했을 때, 왜 자신이 수치심에 사로잡혔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에 대해서는 그 권리를 인정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러한 권리가 없다고 느끼면서도 일부분을 농민들에게 분배해 주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러한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쿠즈민스코예에서 한 일을 변경하려고 마음먹고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농민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정해서 토지를 빌려 주지만, 땅값을 그들의 재산으로 인정하여 그 돈을 세금의 지불이나 마을의 공공사업에 쓰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일세 제도는 아니지만, 현재의 상황으로서는 그 제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토지의 사유권을 포기했다는 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관리인이 무척 신이 나서 그에게 식사를 권했다. 자기 아내가 고깔 귀고리를 단 계집애의 시중을 받아서 만든 요리가 너무 끓여졌거나 지나치게 구워지지 않았을까 걱정이라도 되는 듯한 얼굴이었다. 식탁은 값싼 식탁보로 덮여 있었으며 냅킨 대신 수놓은 수건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식탁 위에는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낡은 색슨 식의 사기 접시에 감자 수프가 담겨 있었다. 수프 속에는 조금 전까지도 검은 두 다리를 버둥거리던 수탉이 토막토막 잘리고, 또한 잘게 썰려서 군데군데 털이 붙은 채 들어 있었다. 그 다음에는 역시 닭고기를 털 째로 구운 것과, 버터와 설탕이 듬뿍 든 우유과자가 나왔다. 어느 것이나 맛은 없었지만 네흘류도프는 정신없이 후딱 먹어치웠다. 그는 마을에서 돌아올 때의 그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 버린 자기 사상에 완전히 정신이 빠져 있었다.
관리인의 아내는 귀고리를 단 계집애가 접시를 나르고 있는 동안 문에서 목을 쑥 빼고 들여다보았다. 남편인 관리인은 아내의 솜씨를 은근히 자랑하는 듯 흐뭇한 얼굴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네흘류도프는 반강제로 관리인을 앉힌 다음, 자기 생각을 확인하고 싶고 동시에 자기가 몰두하고 있는 일을 누구에겐가 말하고 싶은 심정에서 자기가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줄 계획임을 말하고 그의 의견을 물어 보았다. 관리인은 자기도 벌써부터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오늘 그런 말을 들으니 유쾌하다면서 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네흘류도프의 설명이 애매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계획대로 한다면 네흘류도프가 남의 이익을 위해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는 셈이 되겠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관리인의 의식 속에는 모든 사람들이 남의 이익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네흘류도프가 토지에서 걷히는 전 수입을 농민의 공동 기금으로 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왠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알았습니다."하고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자금에서 이자를 받으시겠다는 말씀이지요?"
"아니, 그런 게 아니오. 토지라는 것은 개개인의 사유 재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이해 못하겠소?"
"그러니까, 토지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여러 사람의 소유가 되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나리에겐 수입이라는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까?"하고 관리인은 웃음을 멈추고 이렇게 물었다.
"그렇소. 나는 그것을 포기할 셈이오."
관리인은 한숨을 크게 쉬더니 다시 미소 지었다. 그는 네흘류도프가 이성을 잃은 사람으로 생각되었으며, 이제는 주인의 토지를 포기하려는 계획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 내려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 분배될 토지를 자기도 이용할 수 있게 되도록 그 계획을 해석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되자 낙심하여 그 계획에 대하여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는 주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미소 짓고 있었다. 네흘류도프는 관리인이 자기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자 그를 물러가게 했다. 그러고는 칼 자국투성이고 잉크 자국이 나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자기의 계획을 종이에다 쓰기 시작했다.
이제 막 싹터 오르는 보리수나무 뒤로 해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으며, 모기가 몰려와 네흘류도프를 쏘기 시작했다. 그가 초안 작성을 끝냈을 때, 마을 쪽으로부터 가축 떼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문을 여닫는 소리, 그리고 오늘밤 모임에 모여드는 농부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네흘류도프는 관리인을 불러서 농부들을 사무실까지 불러올 필요가 없으며, 자기가 마을로 나가, 그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관리인이 권하는 차를 급히 들이마시고 네흘류도프는 곧 마을로 향했다.
7
촌장 집 안뜰에 모인 농부들은 와글와글 떠들고 있었으나, 네흘류도프가 가까이 가자 곧 조용해졌으며, 농부들은 쿠즈민스코예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차례로 모자를 벗기 시작했다. 이 고장의 농부들은 쿠즈민스코예의 농부들보다도 훨씬 더 비참했다. 계집애들과 아낙네들은 귀고리를 달고 있었고, 남자들은 거의 짚신을 신고 있었으며, 집에서 짠 셔츠와 카프탄(소매가 길고 띠가 달린 농민 의복)을 입고 있었다. 개중에는 일터에서 그대로 온 듯한, 셔츠 바람에 맨발인 사람도 있었다.
네흘류도프는 용기를 내어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농부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줄 계획을 발표했다. 농부들은 말이 없었다. 그들의 얼굴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왜냐하면," 네흘류도프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이었다. "토지라는 것은 거기서 일하는 않는 사람이 소유해서는 안 되며, 누구나 그 토지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사실 그래야 합니다."하고 몇몇 농부들이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이어서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은 여러 사람들이 평등하게 나누어 갖게 될 것이며, 따라서 자기 토지를 받아서, 협정되는 지대를 지불하고, 그 지대는 공동 기금으로 납입하여 그들 자신이 이용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를 칭찬하며 좋아라고 하는 소리가 연방 들려왔다. 그러나 농부들의 정색한 얼굴은 더욱더 엄숙해져 주인을 보고 있던 눈들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마치 너의 교활한 속셈은 다 알고 있었으므로 너 같은 사람에게 속아 넘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렇더라도 우리는 너를 망신 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네흘류도프는 아주 명확하게 얘기했으므로 농부들도 알아들었을 텐데, 그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또한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 이유는 관리인이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누구나 인간이란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천성을 지니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주와의 관계는 그들이 몇 대에 걸친 지주에 대한 경험에 의하여 잘 알고 있었다. 지주라고 하는 것은 항상 농부의 희생으로 하여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주가 그들을 불러 모아서 무슨 새로운 제안을 하게 되면 이전보다 더 교활한 방법으로 자기들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다.
"자, 어떻소. 지대는 얼마로 하면 좋겠소?"하고 네흘류도프가 물었다.
"어떻게 우리들이 정합니까? 우리는 그런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토지는 주인님 것이니까 주인님 마음대로입죠."하고 군중 속에서 대답이 들렸다.
"아니, 그렇지 않소. 그 돈은 공동 기금으로 당신들 자신이 쓸 것이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공동의 것은 공동의 것이고, 이것은 이것대로 별개의 것입니다."
"자, 잘 들어 봐요." 네흘류도프를 따라온 관리인이 사정을 설명할 셈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공작님께서는 땅값을 결정해서 당신들에게 토지를 빌려 주시지만, 그 땅값은 또 당신들의 공동 기금으로 조합에 넣어 주시겠다는 것이오."
"그것은 알고 있어요."하고 이가 빠진 노인이 눈을 내리깐 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말하자면 은행 같은 것이로군요. 기한 내에 지불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건 질색입니다. 그렇잖아도 죽을 지경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알몸뚱이만 남게 되지요."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우린 예전 그대로가 좋습니다."하는 불안에 가득 찬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네흘류도프가 계약서를 만들어서 쌍방이 서명해야 한다고 하자 그들은 더욱더 기를 쓰며 반대하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서명을 합니까? 우리는 이제껏 일을 해온 대로 앞으로도 일하겠습니다. 도대체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무식한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그런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해주세요. 다만 씨앗만은 별도로 해주시면 좋겠어요."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씨앗을 별도로 해달라는 것은 현재의 제도로는 소작인의 씨앗이 농민의 부담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지주가 부담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럼 당신네들은 싫단 말이오? 토지가 필요 없다는 말이오?" 네흘류도프는 쾌활한 얼굴에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옷을 입은, 맨발의 중년 농부를 향해 물었다. 그 사나이는 마치 상관의 명령으로 모자를 벗듯이 왼손을 구부리고 자기의 찢어진 모자를 똑바로 들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군대 생활의 최면술에서 덜 깬 듯한 그 농부가 대답했다.
"그럼 당신들은 갖고 싶은 토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말이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군인 출신의 이 농부는 다 떨어진 모자를 쓰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가져가라는 듯이 모자를 앞으로 불쑥 내밀고는 짐짓 쾌활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 것을 잘 생각해 봐요." 네흘류도프는 기가 찬 듯한 어조로 말하고 다시 한 번 자기가 제안했던 문제를 되풀이해서 말했다.
"우리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습니다. 먼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하고 침울하고 이가 빠진 노인이 화난 듯 투덜거렸다.
"내일 하루 종일 이곳에 있을 테니까 생각이 달라지면 내게로 오시오."
농부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네흘류도프는 아무 성과도 없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공작님, 제가 참고로 말씀드립니다만,"하고 둘이 같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관리인이 말을 꺼냈다. "그들과는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고집이 어지간해야죠. 그들은 집회에 나오기만 하면, 고집만 부리고 까딱도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들, 아까 반대하던 백발노인이나 검은 얼굴의 사나이는 영리한 축들입니다. 사무실에 왔을 때 차라도 대접하면......" 빙그레 웃으면서 관리인은 말을 계속했다. "말도 잘할 뿐더러 얼마나 영리한지, 솔로몬 왕쯤은 뺨칠 정도입니다. 모든 것에 확고한 의견을 갖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일단 집회에 나오기만 하면, 전혀 사람이 달라져 가지고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하지요."
"그러면 이해력이 있는 농부를 서너 명 이리로 불러 줄 수 없겠소?"하고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그들에게 내 계획을 상세히 밝히겠소."
"그거야 할 수 있지요." 관리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부탁이니, 내일 불러 주시오."
"어렵지 않습니다." 관리인은 이렇게 말하곤 더 즐겁게 다시 웃으며, "내일 불러오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놈 참, 굉장한 놈인데!" 생전 빗질 한번 하지 않은 듯 헝클어진 턱수염에다 검은 얼굴을 한 농부가 배부른 암말을 타고 건들건들하면서 족쇄 소리도 요란스레 자기와 나란히 타고 가는, 다 떨어진 카프탄을 입은 삐쩍 마른 늙은 농부에게 말했다.
두 농부는 밤이 되어 한길가의 풀을 말에게 뜯기러 가는 길이었는데, 때로는 지주의 영지에 딸린 숲으로 말을 몰래 데리고 들어가기도 했다.
"땅을 거저 줄 테니 서명을 하라고? 이제껏 우리들을 속여먹고 아직도 모자라서...... 안 될 말이지. 이젠 우리도 모든 것을 판단할 줄 알게 되었단 말이야."하고 덧붙이고 뒤떨어져 따라 오는 한 살 된 망아지를 불렀다. "코냐쉬! 코냐쉬!"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망아지는 뒤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옆길로 빠져서 목장 쪽으로 가버린 것 같았다.
"망할 놈의 망아지 같으니! 또 지주네 목장으로 가버렸군." 턱수염이 덥수룩한 검은 머리의 농부는 뒤떨어진 망아지가 축축이 이슬에 젖은 숲의 향기가 풍기는 풀밭 속에서 승아(여귀과에 속하는 다년생 풀)를 부러뜨리면서 뛰어나오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이봐, 목장의 풀이 꽤 자랐는데. 노는 날 여자들을 데려다가 풀을 뽑아 주어야겠어."하고 다 낡은 카프탄을 입은 삐쩍 마른 농부가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낫을 버리겠는걸."
"서명을 하라고 하지만,"하고 털북숭이 농부는 지주가 말한 것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계속 말했다.
"서명이라도 하는 날엔 산 채로 잡아먹힐 테니까!"
"맞았어!"하고 늙은이 쪽이 대답했다.
그들은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딱딱한 길을 걷는 말발굽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8
집으로 돌아온 네흘류도프는 자기 침실로 마련된 사무실에 이부자리가 두툼하게 깔려 있는 것을 보았다. 털요 위에 베개 둘이 포개져 있었고, 정성들여 꽃무늬 수가 놓여졌고 풀이 빳빳한 두꺼운 2인용 새빨간 비단 이불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관리인의 아내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보였다. 관리인은 점심 때 먹다 남은 음식을 가져다가 네흘류도프에게 권했으나, 그가 사양하자 변변치 않은 음식과 부족한 설비를 사과하면서 네흘류도프를 홀로 남겨 두고 나가 버렸다.
농부들의 거절은 조금도 네흘류도프의 마음을 언짢게 하지 않았다. 반대로, 쿠즈민스코예에서는 그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을지라도 이곳에서는 불신과 적의까지 표시되었는데도 어쩐지 그는 마음이 침착하고 흐뭇하기만 했다. 사무실은 무덥고 더러웠다. 네흘류도프는 밖으로 나가서 정원으로 갈까 하다가 그 날 밤의 일, 하녀방의 그 창문과 뒷문의 계단에 생각이 미치자, 죄스런 추억으로 더럽혀진 그 장소를 거닐기가 싫어졌다. 그는 다시 현관 계단에 걸터앉아서 새파란 자작나무의 어린 잎사귀의 짙은 향기와 따스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오랫동안 어두워 가는 정원을 바라보기도 하며, 물방아 소리와 휘파람새의 울음소리, 그리고 계단 바로 앞 숲속에서 단조롭게 울어 대는 이름 모를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관리인 방의 창문에는 불이 꺼졌다. 헛간 뒤의 동쪽에서 달빛이 환하게 비쳐왔다. 멀리서 번갯불이 밝아지더니 정원에 만발한 꽃들과 다 쓰러져 가는 집을 환히 비춰 주었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곧 하늘의 3분의 1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다. 휘파람새와 다른 새들도 울기를 멈추었다. 요란스러운 물방아 소리와 꽥꽥거리는 거위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관리인의 뜰과 마을에서 첫닭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닭이란 놈은 무덥고 천둥이 치는 날에는 다른 날보다 일찍 울어 대는 법이지만, 닭이 일찍 우는 밤이면 즐거운 일이 생긴다는 속담이 있다.
네흘류도프에게는 즐겁다기보다 그 이상 가는 밤이었다. 즐겁고 행복한 밤이었다. 그의 상상은 그에게 있어서 순진한 청년이었을 때 이곳에서 지낸 행복했던 여름의 추억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지금도 그 때와 똑같이 행복하다고 느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생애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것을 상기했을 분만 아니라, 그가 열네 살의 어린 소년이었을 때 진리를 계시해 달라고 하나님께 빌던 일과, 그보다 더 어렸을 때 어머니의 곁을 떠나게 되면 자기는 좋은 사람이 되어서, 결코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어머니 무릎 위에 엎드려 울던 시절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그리고 또한 니콜레니카 이르체테프와 함께 서로 도와서 언제나 선량한 생활을 하고,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자고 맹세했던 시절의 자기로 되돌아간 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는 쿠즈민스코예에서 유혹에 사로잡혀 집과 삼림과 농장, 그리고 토지 등이 모두 아깝게 생각되었던 것을 상기하고, 지금도 그렇게 아까우냐고 자문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 어째서 그런 아까운 생각이 들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는 오늘 목격한 것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남편이 지주인 네흘류도프의 삼림에서 나무를 도벌했다는 죄로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남편도 없이 여러 아이들을 거느리고 고생하는 여자며, 자기네와 같은 신분의 비천한 여자들은 주인 나리에게 몸을 파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아니 그런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내뱉고 있는 무서운 마트료나를 생각했다.
또 그는 아이들에 대한 그 여자의 태도며, 어린애들을 육아원으로 보내는 방법이며,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죽어 가고 있으면서도 차양이 없는 누더기 모자를 쓰고 연방 생글거리고만 있던 늙어 보이는 불쌍한 그 갓난애의 일 등을 상기하고, 또 힘겨운 노동에 지친 나머지 굶주린 자기네 소를 잘 보지 못한 벌로 네흘류도프를 위해 강제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허약한 만삭의 여자를 떠올렸다. 그러자 느닷없이 감옥이며, 머리를 빡빡 깎은 머리며, 감방이며, 구역질나는 아구치며 쇠사슬 등이 생각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위시해서 도시에서 사는 귀족 계급들 전체의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생활이 생각났다. 이 모든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거의 보름달에 가까운 밝은 달이 헛간 뒤에서 떠올랐다. 검은 그림자가 뜰을 가리고, 무너져 가는 집의 함석지붕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자, 이 달빛을 그대로 놓쳐 버리기가 아쉬운 듯이 멎었던 휘파람새가 뜰 구석에서 다시 지저귀기 시작했다.
네흘류도프는 쿠즈민스코예에서의 자기 행동을 신중히 생각해 보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해결하려 했을 때 무척 망설여졌고, 또 해결하지 못한 일과,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고려되어야 할 문제가 많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 문제를 자문자답해 본 결과 모든 문제가 너무도 간단히 해결되는 데에는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간단해졌느냐 하면, 지금은 자기 한 몸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일에는 흥미가 없었으며,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 하는 문제만을 생각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무엇이 자기에게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아무리 해결하려 해도 되지 않았지만, 남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은 명확한 답이 나왔다. 이제 그는 토지를 이대로 계속해서 갖는다는 것은 좋지 않으므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추샤를 버리지 않음은 물론 그녀를 돕고 그녀에 대한 자기의 죄를 보상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서슴지 않겠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는 의견이 좀 다르다고 생각되는 재판과 형벌에 관한 모든 문제를 연구하고, 분석하고, 천명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밖의 모든 것을 반드시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만은 틀림없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굳은 신념은 그를 기쁨에 넘치게 했다.
먹구름은 어느새 하늘을 뒤덮었고, 번개도 먼 곳에서가 아니라 바로 머리 위에서 번쩍이며 넓은 뜰과 현관과 함께 낡아빠져 곧 허물어지게 된 집을 환히 비추었다. 천둥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새들이 우는 소리는 멎었으나, 그 대신 나뭇잎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바람은 네흘류도프가 앉아 있는 현관 계단까지 몰려와 그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지는가 싶더니 승아와 함석지붕을 후두둑 때리기 시작했으며, 온 하늘이 번쩍 타오르자 만물은 숨을 죽였다. 네흘류도프가 셋까지 세기도 전에 머리 바로 위에서 무엇인지 찢어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쿠르릉 하고 하늘을 굴리며 내달았다.
네흘류도프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다, 그렇다.'하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 그 문제의 의의를 나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왜 고모들은 살고 있었을까? 왜 니코레니카 이르체네프는 죽고 나는 살아 있는 것일까? 왜 카추샤라는 여자가 태어났을까? 나는 왜 몹쓸 짓을 했을까? 왜 전쟁이 일어났을까? 그 후의 나의 방종한 생활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 즉 조물주의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조물주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내 힘으로 가능하다. 나는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것을 하고 있을 때에는 나는 확실히 편안한 마음임을 의심할 수 없다.
비는 어느새 좍좍 퍼부어서, 지붕에서 홈통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뜰과 저택을 비추는 번갯불이 뜸해졌다. 네흘류도프는 방으로 돌아와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으나, 더러운 벽지가 너덜거리고 있는 것을 보자 빈대가 있지 않을까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 나는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하고 생각한 그는 자기 생각에 기쁨을 느꼈다. 그의 걱정은 들어맞았다. 촛불을 끄기가 무섭게 빈대가 물어뜯기 시작했다.
'토지를 내주고 시베리아로 간다면, 벼룩이랑 빈대랑 불결한 것이...... 그러나 견뎌야 한다면 그런 것쯤 견뎌 보는 것이지.'
그러나 제아무리 각오를 했다 해도 빈대만은 견뎌낼 수가 없어서, 활짝 열린 창가에 걸터앉아 흘러가는 비구름 속에서 또다시 얼굴을 내민 달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9
네흘류도프는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기 때문에 이튿날 늦게 눈을 떴다.
정오 때 관리인이 불러 온 7명의 농부가 사과밭으로 왔다. 관리인은 땅에 박은 말뚝 위에 테이블과 몇 개의 의자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농부들에게 모자를 쓰게 하고 걸상에 앉히기까지 설득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군인 출신인 농부는 오늘 유달리 깨끗한 각반에 인피 짚신을 신고 있었는데, 장례식 때의 군대예식대로 다 찢어진 자기 모자를 꼿꼿이 가슴 앞에 받쳐 들고 서 있었다. 그 중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모세같이 생긴, 백발의 곱슬곱슬한 수염에 까맣게 그을린 이마 언저리에 백발이 성성한 위엄이 있고 어깨가 떡 벌어진 노인이 큼직한 모자를 쓰고 집에서 갓 지어 입은 소매가 낀 카프탄 자락을 여미면서 걸상에 앉자, 다른 농부들도 그의 뒤를 따라 의자에 앉았다.
다들 자리에 앉자 네흘류도프는 그 맞은편에 앉아서 계획안의 요점이 적혀 있는 종이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팔꿈치를 괴고 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수가 적은 탓인지, 아니면 네흘류도프 자신이 자기를 잊고 설명에만 열중한 탓인지, 이번에는 조금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무심결에 곱슬곱슬한 흰 수염에 어깨가 떡 벌어진 노인에게 남달리 주의를 주면서 그 노인의 찬부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노인에게 걸었던 네흘류도프는 기대는 들어맞지 않았다. 풍채가 좋은 이 노인은 마치 찬성이라도 하는 듯이 이 존경할 만한 장로 풍의 아름다운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고 또 다른 농부들이 반대하는 것을 듣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머리를 흔들기도 했지만, 실은 네흘류도프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만 다른 농부들이 네흘류도프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만 다른 농부들이 네흘류도프의 말을 자기들의 말로 쉽게 말했을 때 비로소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보다도 이 장로연하는 노인과 나란히 앉아 있는 애꾸눈에 전혀 턱수염이 없는 작은 노인 편이 훨씬 네흘류도프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누덕누덕 기운 남경무명 외투를 입고 있었으며, 헐어서 쭈그러진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는 수염이 없고 눈이 빛나는 노인이었는데, 네흘류도프가 뒤에 안 일이지만 그는 난로 제조공이었다. 이 노인은 눈썹을 찡긋찡긋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열심히 주의를 집중해서 듣고 있다가 네흘류도프가 한 말을 곧 자기들의 말로 옮겨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해가 빨랐던 또 한 사람은 흰 턱수염을 기르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키가 크지 않고 통통한 노인이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네흘류도프의 말을 냉소적인 농담조로 비꼬면서 자신의 영리함을 자랑했다. 그 군인 출신의 농부도 보아하니, 군대 생활로 인하여 우둔해지지만 않았더라면, 또 무의미한 군대 용어를 남용해서 혼란만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진작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느껴졌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진지한 태도로 듣고 있던 사람은 집에서 짠 베옷을 입고 새 짚신을 신은, 턱수염이 짧고, 코가 길고, 아주 낮고 굵직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이야기하는 키다리 사나이였다. 이 사나이는 모든 것을 잘 이해했으나 필요할 때만 입을 열었다. 나머지 두 노인은 한 사람은 어제의 집회에서 네흘류도프의 제안을 한사코 반대하던 이가 없는 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살갗이 희고, 가느다란 다리에 각반을 치고 구두를 신은 호인 타입의 절름발이 노인이었는데 시종 주의 깊게 듣고만 있을 뿐 전혀 말이 없었다.
네흘류도프는 먼저 토지 사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설명했다.
"내 생각엔 토지란, 토지란 팔든지 사든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오. 왜냐하면 가령 토지를 팔아도 괜찮다고 한다면 돈 있는 사람이 죄다 사 버릴 것이며,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한테서 토지 사용권에 대하여 마음대로 돈을 받아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땅 위에 서 있기만 해도 돈을 받으려고 들 것입니다." 그는 스펜서의 이론을 이용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할 수 없지. 몸에다 날개를 달고 날아다닐 수밖에 !" 흰 턱수염의 농부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사실이야."하고 코가 긴 노인이 굵직한 소리로 말했다.
"옳습니다." 군인 출신이 말했다.
"아낙네가 송아지에게 주려고 풀을 좀 뜯었다고 잡아가는 형편이니까." 사람이 좋아 보이는 절름발이 노인이 말했다.
"우릴 제멋대로 취급하거든요. 농노 시대보다 더 나쁘다니까요."
"나도 당신들과 같은 생각이오."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그래서 토지를 당신네들에게 내놓으려는 것이오."
"참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모세처럼 곱슬곱슬한 턱수염을 기른 장로풍의 노인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 네흘류도프가 높은 이자율로 토지를 빌려주려는 생각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 때문에 내가 여기 온 것이오, 나는 이 이상 토지를 갖고 싶지 않소. 대체 어떻게 토지를 처리해야 할는지 그 점을 지금 우리가 의논해야 하겠소."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면 그뿐 아니겠습니까!"하고 이가 빠진 성급한 노인이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그 말들 속에서 자기의 진지한 계획을 의심하고 있는 것을 느끼자 처음에는 다소 당황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다듬어 자기가 말하려고 생각했던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물론 기꺼이 주겠소."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누구에게 어떻게 줘야한단 말이오? 어떤 농민에게? 그 마을에 있는 당신들에게만 주고 제민스코예마을(빈약한 토지를 가진 이웃 마을)에 있는 농민들에게는 주지 말란 말이오?"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런데 군인 출신만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자, 그럼 ,"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한 가지 묻겠는데, 만일 황제가 지주한테서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준다고 한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소?"
"그런 경우가 있을까요?" 노인이 물었다.
"그야, 황제가 그런 말을 할 리는 없겠으나 가정해서 말하는 것이오. 지주한테서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준다면, 당신네들은 어떻게 하겠소?"
"어떻게 하겠느냐고? 인원수대로 농부든 주인이든 똑같이 나누어 갖지요." 눈썹을 분주히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난로 제조공이 말했다.
"별수 없지요. 머릿수대로 나누는 수밖에는."하고 하얀 각반을 두른 선량해 보이는 절름발이 노인이 맞장구를 쳤다.
모두 그렇게 하면 불평이 없으리라고 이 의견에 찬성했다.
"인원수 대로라니, 어떻게 한다는 것이오?"하고 네흘류도프가 물었다. "하인한테도 나누어 주겠다는 것인가요?"
"그것은 안 됩니다."하고 군인 출신인 사나이가 쾌활하고 용기 있는 체해 보이려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분별 있는 키 큰 농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누어준다면, 다 똑같이 주어야지요." 잠깐 생각하더니, 그는 낮고 굵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하고 미리 반박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만약 다 똑같이 나누어준다면, 자기가 경작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지주라든가 하인이라든가 관리, 서기, 그 밖의 도시의 모든 인간은 자기 몫으로 받은 것을 곧 부자들에게 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토지는 다시 지주에게 모이게 됩니다. 한편 자기에게 할당된 땅에서만 일하는 사람은 가족이 자꾸 늘어도, 토지가 모두 매점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금 부자가 토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손아귀에 넣어버리게 된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하고 군인 출신 사내가 얼른 동의했다.
"토지는 팔지 못하게 하고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만 나누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난로 제조공이 화난 듯이 군인 출신 사내의 말을 가로챘다.
이에 대하여 네흘류도프는 자기를 위해서 농사짓는 사람과 남을 위해서 농사짓는 사람을 분간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 때, 키가 크고 분별 있게 생긴 노인이 조합을 만들어서 경작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즉,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나누어주고, 짓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 게 어떠냐고 굵은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이 공산주의적인 제안에 대해서도 네흘류도프는 논증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두가 다 같이 가래와 말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 각자가 딴 사람에게 뒤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말과 가래와 탈곡기와 모든 농기구를 공유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합심해야한다고 말했다.
"우리네 농민들은 죽을 때까지 절대로 합심하지 못합니다."하고 빙충맞은 노인이 말했다.
"노상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으니까요."하고 흰 턱수염을 기른 노인이 눈웃음치며 말했다.
"아낙네들은 서로 눈알을 뽑으려고 덤벼들 거예요."
"그리고 토질이 좋으니 나쁘니 다툴 테니, 땅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는지..." 네흘류도프가 다시 말했다. "무엇을 기준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옥토를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진흙땅과 모래땅을 줄 것이냔 말이오?"
"다 골고루 나누어주면 되지 않습니까?"하고 난로 제조공이 말했다.
이에 대하여 네흘류도프는 토지 분배 문제는 한 마을의 한 조합에 한한 것이 아니라, 여러 현에 걸친 전체적인 것이라는 것과 만약 토지를 무상으로 나누어준다면, 어느 사람은 좋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어느 사람은 나쁜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인데 농부들은 누구나 좋은 땅을 원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옳은 말씀입니다."하고 군인 출신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잠자코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하고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소. 헨리 조지라는 미국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이런 걸 생각해 냈소. 나는 그의 의견에 찬성하고 있소."
"나리가 주인이시니까, 나리께서 알맞게 나눠주면 되는 거죠. 누가 뭐래도 나리 생각대로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빙충맞은 노인이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이 가로채는 말에 어리둥절했으나, 이 말에 대해 불만스러워하는 사람이 자기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자 위로가 되었다.
"잠깐만, 셰묀 아저씨. 나리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려." 분별 있는 농부가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이 말에 용기를 얻어 헨리 조지의 단일세 안을 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토지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그 말씀이 옳아요." 몇 사람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토지는 공동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토지에 대해 평등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토지와 나쁜 토지가 있으므로 누구나 좋은 땅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것은 좋은 토지를 사용하는 사람이 토지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게 각자의 토지에 해당되는 땅값만큼 지불하는 것입니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누가 누구에게 지불할 것인가 하는 것을 정하는 것이 제일 곤란한 일입니다. 그러나 돈을 모을 필요가 있으므로 토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제각기 토지에 해당하는 땅값을 공동비용으로 지불하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토지를 갖고 싶으면 좋은 토지에 대해서는 나보다 많이 지불하고, 나쁜 토지에 대해서는 그 만큼 적게 지불하면 되는 셈입니다. 가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 푼도 내지 않아도 됩니다. 공동기금에 대해서는 토지를 사용하는 사람이 대신 지불할 것이니까요."
"옳은 말씀입니다." 난로 제조공이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이 더 내면 되거든."
"그 조지라는 사람은 정말 머리가 좋은데." 풍채가 좋은 곱슬곱슬한 턱수염을 한 노인이 말했다.
"다만 돈을 지불할 수 있다면 말이야."하고 키 큰 사나이가 일의 결말이 드러났다는 듯이 낮고 굵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 금액은 비싸지도 싸지도 않도록 정해야 되겠지요. 너무 비싸면 갚을 길이 없어서 도리어 손해가 날 테고, 싸면 서로 사겠다고 할 테니까요. 그래서 내가 당신들에게 이 점을 해결해 드리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그건 정당한 말씀입니다.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고 농부들은 말했다.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이군." 어깨가 떡 벌어진 곱슬머리 노인이 되풀이했다. "조지란 사람 말일세.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저도 토지를 갖고 싶은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관리인이 벙글거리면서 말했다.
"빈 터가 있으면, 그걸 얻어 농사를 지을 수가 있지."하고 네흘류도프가 대답했다.
"왜 당신이 땅이 필요하단 말이지? 그렇잖아도 배가 부를 텐데."하고 눈웃음을 치는 노인이 말했다.
이것으로 집회는 끝났다.
네흘류도프는 자기의 제안을 다시 한 번 설명한 뒤 이번에도 직접적인 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마을 전체의 사람들과 상의해서 확답을 보내달라고 말했다.
농부들은 마을의 여러 사람들과 상의해서 대답해 드리겠다고 말한 다음 인사를 하고 흥분해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는 한 길가에서는 한참 동안 이야기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 후에도 밤늦게까지 그들의 마을로부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냇가를 건너 들려왔다.
이튿날 농부들은 일을 쉬고 주인이 제안한 문제를 협의했다. 마을은 두 파로 갈라졌다. 한 파는 주인의 제안이 유리하고 의심할 바 없다고 인정했으며, 다른 한 파는 그 속에 무슨 간계가 숨겨져 있다고 하여 그것이 어떠한 간계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 두렵다고 했다.
그러나 사흘째 되던 날, 주인이 제안한 조건을 모두 승인하는 데 합의를 보고, 농민 전체의 결의를 보고하기 위하여 네흘류도프를 찾아왔다. 이렇게 합의를 보게 된 이면에는 어떤 노파의 설명이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 노파의 설명은 주인의 제안에는 조금도 의심할 만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영혼을 생각하게 되고, 이 영혼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런 행동을 하는 거라고 설명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의구심을 일소해 주었다. 그리고 이 설명은 그가 파노보에 머물러 있을 때, 많은 돈을 적선했다는 사실로써 입증되었다.
네흘류도프가 그 곳에 적선하게 된 것은 그가 여기서 농부들이 가난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 있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하자 그 빈곤함에 놀랐고, 처참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돈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그의 수중에는 작년에 쿠민즈스코예에서 판 산림의 대금과 농기구를 판 계약금까지 받았기 때문에 많은 돈이 들어와 있었다.
지주가 그에게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 특히 아낙네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도와 달라고 청했다. 그는 이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무엇을 기준으로 누구에게 얼마를 주어야 할 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도움을 청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갖고 있는 많은 돈을 주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무턱대고 준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이곳을 떠나는 길밖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이 방법을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파노보에서 묵던 마지막 날, 네흘류도프는 안채로 들어가서 거기 남아 있는 물건들을 점검했다. 거기에서 그는 고모가 쓰던, 사자의 머리에 청동 고리가 달린 낡은 마호가니 장롱 아래서랍 속에서 많은 편지를 발견했다. 그 중에서 여럿이 찍은 사진 한 장이 나왔다. 그것은 소피야 이바노브나, 마리야 이바노브나, 대학생 때의 그 자신, 그리고 순진하고 쾌활하고 아름답고 또 삶의 기쁨이 넘쳐흐르는 카츄샤가 찍힌 사진이었다.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 중에서, 네흘류도프는 이 편지와 사진만을 가졌다. 그 나머지 물건들은 늘 벙글거리는 관리인의 주선으로 파노보에 있는 그의 집과 가구 일체를 10분의 1이란 싼값으로 물방앗간 주인에게 팔았다.
네흘류도프는 지금 쿠즈민스코예에서 재산을 잃어버리는 데 대해 애석하게 여겼던 것을 생각하고 어째서 그런 마음을 품게 되었을까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는 끝없는 해방된 듯한 기쁨과 신기할 만큼 쾌활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땅을 발견한 여행자가 느끼는 그러한 종류의 감정이었다.
10
시골에서 돌아온 네흘류도프는 도시의 거리가 유달리 새롭고 이상스럽게 느껴지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저녁때 거리의 등불이 켜질 무렵, 정거장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방마다 아직도 나프탈렌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와 코르네이는 모두 녹초가 되고 시무룩해져서 밖에 내걸거나 말려서 챙겨 둘 수밖에 없어 보이는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놓고 말다툼까지 했다. 네흘류도프의 방은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직 정리도 되어 있지 않고 트렁크가 흩어져 있어 방안을 드나들기조차 거북했다.
네흘류도프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어딘지 모르게 묘한 힘이 이 집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에 방해가 된 것이 분명했다. 농촌의 빈곤한 현실을 보고 온 네흘류도프에게 있어서는, 자기도 한때는 이 속에서 살아오긴 했으나, 이 모든 낭비가 지극히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에게 나중에 누이가 와서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최종적으로 처분해 줄 때까지 가구나 의류의 정리를 부탁하고는 이튿날 하숙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네흘류도프는 아침부터 집을 나와서 감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처음 눈에 띈 지저분한 가구가 붙어 있는 두 칸짜리 검소한 아파트를 빌린 다음, 자가가 골라 놓은 짐들을 집에서 운반하도록 일러 놓고 변호사한테로 갔다.
밖은 제법 쌀쌀했다. 비가 온 뒤의 봄날씨에 흔히 있는 추위가 닥쳐온 것이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어와 얇은 외투를 입은 네흘류도프의 몸을 얼게 했기 때문에 그는 걸음을 빨리함으로써 몸을 녹이려 했다.
그의 기억 속에 시골 사람들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아낙네들, 어린아이들, 노인들, 또 그가 이번에 처음으로 본 빈곤과 고통, 특히 생글거리면서 말라빠진 다리를 흔들어 대던, 애늙은이와 같이 보이던 갓난애의 모습이 뚜렷이 되살아났다. 그는 무의식중에 그러한 사람들과 도시 사람들을 비교해보았다. 푸줏간과 어물전과 기성복 점을 지나가면서, 시골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말쑥한 옷차림에 기름기가 번질번질 흐르는 뚱뚱한 상인들의 모습을 보고 새삼 놀랐다. 분명 이들은 자기들의 상품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절대로 잘못이 아니며, 지극히 유익한 일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뒷 잔등에 단추를 단 옷을 입은 큼직한 엉덩이의 마부, 모자에 금몰을 수놓은 문지기, 에이프런을 두르고 머리를 지진 하녀들, 특히 사륜마차에 앉아서 사람들 업신여기는 듯한 눈초리로 통행인들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는, 목덜미를 파랗게 밀어올린 마부도 뚱뚱해 보였다.
네흘류도프는 이런 모든 사람들 속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토지를 빼앗기고 도회지의 생활 조건을 교묘히 이용하여 주인 행세를 하며 자기의 처지를 기뻐하는 자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은 도회지에 나왔으나 시골에 있을 때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 빠져 버리기도 했다. 어느 지하실 창가에 구두장이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구두장이가 네흘류도프에게는 바로 그러한 비참한 인간으로 여겨졌다. 비누 냄새가 풍기는 김이 무럭무럭 나오는 열린 창문 앞에 서서, 말라빠진 두 팔을 드러내고 다리미질을 하고 있는, 파리한 얼굴에 머리가 헝클어진 세탁부들도 그러한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네흘류도프가 도중에 만난, 맨발에다 헤어진 구두를 신고 머리에서 발끝가지 페인트 투성이가 된 앞치마를 두른 두 사람의 페인트공들도 역시 그러했다. 이 두 사람은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볕에 그을고 비쩍 마른 파리한 손으로 페인트 통을 나르면서 쉴 새 없이 서로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모두 지치고 화난 표정들이었다. 먼지투성이가 되어 짐마차 위에서 흔들리며 지나가는 새까만 얼굴의 마부 역시 그런 표정이었다. 길모퉁이에 서서 동냥을 하는, 남루한 옷을 입고 얼굴이 부석부석한 사내와 아이를 거느린 여자들도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얼굴은, 네흘류도프가 옆을 지나가던 목로집이 열려져 있는 창 안에서도 볼 수 있었다. 술병과 찻잔을 늘어놓은 지저분하고도 조그마한 탁자 사이를 비틀거리면서 흰옷을 입은 급사가 일을 하고 있었다. 땀이 배고 얼굴이 빨개진 손님들은 흐릿한 눈을 하고 앉아서, 떠들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했다. 창가에 앉아 있던 한 사나이가 눈썹을 치켜 올리고 입술을 내밀더니 마치 무엇을 생각이나 하는 듯이 앞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저자들은 왜 이런 곳에 모여 있는 것일까?'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흙먼지와 더불어 사방에 퍼진 방금 칠한 페인트의 시큼한 냄새며 고약한 기름 냄새를 무심결에 들이마시면서 네흘류도프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어느 거리에서 무슨 쇠붙이를 운반하는 짐마차의 한 떼와 나란히 걷게 되자, 울퉁불퉁한 포장길에서 쇠붙이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대는 바람에 그는 귀가 멍멍해지고 머리가 아팠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콧수염 끝을 뾰족하게 세운, 혈색이 좋은 한 군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고급마차를 타고 있었으며, 손을 흔들면서 유난히 이를 드러내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네흘류도프가 아닌가?"
네흘류도프는 한순간 반가웠다.
"여, 센보크!" 네흘류도프는 반가운 소리로 그를 맞았으나, 곧 반가워할 일이라곤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오래 전 고모네 집에 들렀던 센보크였다. 네흘류도프는 그 후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으나 그가 빚을 많이 짊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를 나와서도 기병으로 행세하고, 여전히 이럭저럭해서 부자들과 교제하고 있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다. 쾌활하고 만족스러운 듯한 그의 표정이 그 소문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자넬 만나서 정말 잘 됐네! 이 고장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마차에서 내려 어깨를 펴면서 그는 말했다. "한데 자네도 꽤 늙었군 그래! 걸음걸이를 보고서 곧 자넨 줄 알았어. 어때,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겠나? 이곳에선 어딜 가면 좋은 걸 먹을 수 있나?"
"글쎄, 난 그럴 시간이 없겠는데..." 네흘류도프는 친구의 감정이 상하지 않으면서 이 자리를 벗어날 궁리를 하며 대답했다. "자네가 어떻게 이곳까지 다 왔나?"하고 그는 물었다.
"좀 볼일이 생겨서. 후견인의 일일세. 나는 후견인이라네. 사마노프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어. 자네도 알고 있지, 그 부자 말이야. 그 작자는 바보지만, 5만 4천 정보나 가지고 있거든." 그는 마치 자기가 그만한 토지를 장만해 놓기라도 한 듯 무척이나 으스대며 말했다.
"그런데 그의 재산이 엉망이라 말이야. 토지는 모두 농부들에게 빌려줬는데, 놈들이 지대를 한 푼도 물지 않아서 8만 루블 이상이나 체납되어 있었다네. 그래서 내가 1년 동안 전부 개혁을 해서 70퍼센트의 수입을 올려 주었다네. 어떤가?" 그는 뽐내며 물었다.
센보크는 자기 재산을 전부 탕진해 버리고 도저히 갚을 수 없게 되자, 공교롭게도 어떤 사람의 특별한 주선으로, 재산을 낭비하고 있는 부자 노인의 후견인을 맡게 되어, 아마 지금도 그 후견인으로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이자를 떼어 버릴 수 있을까?' 포마드를 바른 윗수염에 혈색 좋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좋은 음식을 어디서 먹을 수 있느냐는 말과, 후견 일을 맡아보고 있다는 자랑을 친구에게 서슴없이 지껄여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네흘류도프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 어디서 식사를 할까?"
"아냐, 난 그럴 틈이 없네."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에 경마가 있는데... 자네 거기 가지 않겠나?"
"글쎄, 난 못 가겠네."
" 오게나! 내 말은 없지만, 그리신의 말을 몇 마리 맡고 있어. 알지? 그 자의 훌륭한 말 말이야. 꼭 오게나. 그리고 함께 저녁 식사라도 하세."
"저녁 식사도 어렵겠어." 하고 네흘류도프는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니 왜 그러나? 지금 어딜 가는 거야? 뭣하면 태워다 주겠네."
"변호사한테 가는 길일세. 바로 저 모퉁이야."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아 참, 자네, 감옥에서 무얼 한다면서? 죄수들의 후원자라도 된 건가? 코르차긴가의 사람들에게서 들었네만."하고 센보크는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들도 벌써 떠나 버렸네. 대관절 어떻게 된 거야? 이야기 좀 해주지 않겠나?"
"응, 그래, 그건 다 사실이야."하고 네흘류도프는 대답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할 순 없잖나."
"그도 그렇군, 자넨 원래 이상한 성격이었으니까. 그럼 경마에는 오겠지?"
"아니, 안 돼. 갈 틈도 없거니와 가고 싶지도 않네. 오해하진 말게."
"왜 오해를 하겠나. 그런데 자넨 어디서 유숙을 하고 있지?" 하고 묻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며 눈을 한곳에 못 박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마 무엇인가 생각을 찾아 더듬는 모양이었다. 네흘류도프는 그 얼굴에서 조금 전 목로집 창가에서 보고 깜짝 놀란, 눈썹을 치켜 뜨고 입술을 불쑥 내밀고 있던 사나이와 똑같은 무딘 표정을 발견했다.
"몹시 추운 날씨로군! 그렇잖나?"
"정말 그렇군."
"산 물건은 가지고 있지?" 센보크가 마부에게 물었다.
"자, 그럼 잘 가게. 자네를 만나서 정말 기쁘네." 센보크는 이렇게 말하면서 네흘류도프의 손을 꼭 쥔 다음, 마차에 뛰어올랐다. 새로 산 하얀 양피 장갑을 낀 큼직한 손을 번들거리는 얼굴 앞으로 흔들면서, 유난히 흰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싱긋 웃었다.
'나도 전엔 저랬을까?' 변호사 집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네흘류도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
그렇다. 꼭 저렇지는 않았더라도 저렇게 되려고 했었지. 그리고 저렇게 한 평생을 보내려고 했겠지.'
11
변호사는 차례를 무시하고 네흘류도프를 만나 주었다. 그는 곧 자기가 조사한 메니쇼프 모자 사건에 대해서 말을 꺼냈고, 근거 없는 기소에 분개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건입니다." 변호사가 말했다. "이 방화는 보험금이 탐나서 집주인이 자기 손으로 한 짓이 틀림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자의 범죄도 전혀 증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증거가 전혀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예심판사의 지나친 특별 배려와, 검사보의 무성의에서 온 것입니다. 이 사건이 만일 지방 재판소가 아니고 여기서 심리된다면, 나는 승소를 보증하겠으며, 보수 따윈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건, 황제에게 낼 페도샤 비류코바의 청원서는 이미 작성해 놓았습니다. 페테르부르크에 가게 되면, 가지고 가서 직접 제출하고 탄원하십시오. 안 그러면 청원위원회에 조회하게 되고 또 청원위원회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손 뗄 수 있도록 제멋대로 해답을 할 것이 뻔합니다. 즉 각하되어 한시라도 여태까지의 고생이 허사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력한 분에게 부탁을 드려보도록 하세요."
"그렇다면 황제께 청원하란 말씀인가요?" 네흘류도프가 물었다.
변호사는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제일 마지막, 즉 황제가 심의하는 최종심에서입니다. 지금은 그보다 낮은, 말하자면 청원위원회 서기나 주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의뢰하신 건 다 됐지요?"
"그리고 또 하나, 분리파 신도들이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네흘류도프는 분리파 신도들의 편지를 호주머니에서 꺼내면서 말했다. "이 사람들이 써온 것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사건입니다."
"아무래도 당신은 감옥의 모든 불평이 흘러내리는 깔때기나 병 모가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신 모양입니다."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많은데요. 그러시다간 감당해 내기 힘들 겁니다."
"아니, 이것은 놀란 만한 사건입니다."하고 네흘류도프는 사건의 진상을 대충 설명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느 마을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한 농부가 복음서기를 읽기 위해 동료 농부들과 모였다. 그러자 경찰이 와서 이를 해산시켜 버렸다. 농부들은 다음 일요일에 다시 모였다. 그러자 마을의 경찰이 불러가더니 고소장이 작성되어, 농부들은 전원 재판에 걸리게 되었다. 예심 판사가 심문을 하고, 검사보가 기소장을 작성하고, 재판관이 이 기소 사실을 인정하여 재판에 붙여졌다. 검사보는 유죄를 구형했다. 테이블 위에는 증거물로서 복음서가 놓여 있었고, 결국 그들은 유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사건의 어느 점이 이상하다는 것입니까?"
"사건 전부지요. 하기야 상부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경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기소장을 작성하는 검사보는 교양이 있는 인간 아닙니까?"
"그러나 바로 거기에 오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검사나 재판관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무슨 새로운 자유주의적인 인물인 양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들도 한때는 그런 인물이었긴 했습니다만, 지금은 전연 다릅니다. 그들은 다만 월급을 받고 있는 이상, 더 많은 월급을 받았으면 하고 원하고 있으며, 그들의 주의 주장도 이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닥치는 대로 기소하고, 재판하고, 유죄로 판결해 버리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단지 복음서를 읽었다 해서 사람들을 유형에 처하는 법률이 있을 수 있습니까?"
"네, 복음서를 읽어 줄 때, 규정되어 있는 이외의 해석을 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교회의 해석을 비난했다는 것만 입증되면 유형정도가 아니라 시베리아 징역도 받게 됩니다. 대중 앞에서 정교의 교리를 비판한 자는 제 196조에 의거해서 거주 유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아니, 그렇습니다. 나는 항상 재판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감사하다는 마음 없이는 당신네들을 대할 수가 없다고요. 왜냐하면 나나 당신이나, 우리들 모두 감옥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의 자비에 의한 것이니까요. 사실 우리들 중의 누구라도 공민권을 박탈해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형을 보내는 것쯤은 그들로서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하고 변호사는 말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식으로 법을 적용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음이 검사나 판사의 재량에 달렸다면 무엇 때문에 재판 같은 것을 합니까?"
변호사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거 무슨 그런 질문을 다 하십니까! 공작님, 바로 그것이 철학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를 크게 논의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럼 토요일에 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학자, 작가, 예술가 들이 모이게 되어 있으니 그 때 '일반적인 문제"를 논의하시지요." 변호사는 '일반적인 문제'라고 하는 말에 힘주어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집사람하고는 인사하셨겠지요? 꼭 와 주십시오."
"네, 되도록..." 내플류도프는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되도록 토요일 밤에 변호사 집에 모이는 학자와 작가, 예술가들의 모임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재판관들이 자기들의 뜻대로 법률을 적용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면 재판 따윈 무의미할 것이라고 네흘류도프가 말했을 때, 변호사 및 그 동료들이 만사에 있어 네흘류도프 자신과 얼마나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센보크와 같은 옛 친구들과도 멀리 떨어진 존재가 되었지만, 그보다도 변호사와 그의 주변 사람들과의 거리는 한층 더 먼 것이라고 느꼈다.
12
감옥까지는 멀기도 했거니와 시간도 이미 늦었기 때문에, 네흘류도프는 마차를 집어타고 감옥으로 향했다. 어느 거리에 이르자, 영리하고 선량해 보이는 중년의 마부가 네흘류도프를 돌아보고 건축 중인 커다란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십시오, 굉장한 공사가 아닙니까?" 마치 자기가 어느 정도 건축 공사에 책임이 있다는 듯이, 또 그것을 뽐내기라도 하듯이 물었다.
사실 그 건물은 규모도 크고 양식도 무엇인가 기발하고 복잡했다. 꺽쇠로 단단히 잡아맨 굵다란 통나무 비계가 높이 솟은 건축 중인 건물 주위를 빙 둘러쌌고, 얇은 판자 울타리가 건물과 한길 사이에 가로막혀 있었다. 비계 위에는 석회가루를 뒤집어쓴 인부들이 개미떼처럼 오고갔다. 돌을 쌓는 사람도 있었고, 돌의 각을 뜨는 사람도 있었다. 또 무거운 나무통과 양동이를 위로 나르는 인부가 있는가 하면, 빈 나무통과 양동이를 가지고 내려오는 인부도 있었다.
건축기사인 듯싶은 살이 찌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사는, 비계 한 옆에 선 채, 위를 가리키면서 공손하게 듣고 있는 블라디미르 태생의 청부업자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건축 기사와 청부업자 옆의 문으로 빈 마차와 짐을 잔뜩 실은 손수레가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일을 시키고 있는 사람이나, 모두 한결같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러나 바로 이 시각에 그들의 집에서는 애를 밴 아낙네들이 힘에 겨운 일에 시달리고 있는가 하면, 차양도 없는 모자를 뒤집어쓴 어린것들 이 아사를 눈앞에 두고 가는 다리를 내밀며 늙은이같이 히죽거리고 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어느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자기들에겐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이 궁전과도 같은 집을 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하고 네흘류도프는 그 건물을 바라보면서 탄식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건물이군!" 하고 그는 자기의 생각을 소리 내어 뇌까렸다.
"왜 어처구니없는 건물이라고 하십니까?" 마부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고마운 일이지요. 덕택에 모두들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이라는 것이 소용없단 말이오."
"소용없는 일이 아닙니다, 짓고 있는 것이니 필요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아 가는걸요."하고 마부는 반박했다.
네흘류도프는 입을 다물었다. 차바퀴 소리가 요란스러워서 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감옥 가까이에 왔을 때, 마차가 자갈길에서 포석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얘기하기가 좋아지자 마부는 다시 네흘류도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드는지 모르겠어요. 무서울 지경입니다." 마부는 마부석에서 몸을 돌려, 앞에서 걸어오는 톱과 도끼를 들고, 반코트를 입고 배낭을 짊어진, 시골에서 오는 품팔이 농민들의 떼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전보다는 많은가요?"하고 네흘류도프가 물었다.
"많고말고요! 요즘은 어디를 가나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 야단입니다. 고용주는 사람을 무슨 나무토막처럼 내동댕이치는 판입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 천집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사람들이 늘었으니까 그렇지요. 달리 갈 곳도 없고요."
"늘었다고 무슨 상관이 있소? 왜 시골에 꽉 붙어살지 않느냔 말이오."
"시골에 있다고 해서 할 일이 있겠어요? 땅이 있어야지요."
네흘류도프는 상처를 건드렸을 때와 같은 강한 느낌을 받았다. 아픈 곳이란 일부러 거기를 건드리기만 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실상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은 아픈 곳을 다쳤을 때만 아픔을 느끼기 때문인 것이다.
'도대체 어디나 다 똑같단 말인가?'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마부를 보고, 당신의 마을에 토지가 얼마나 있으며, 당신 자신은 얼마만한 땅을 가지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당신은 도시에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 마을선 한 사람 앞에 1정보의 토지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3인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부는 신이 나서 말했다. "저의 집에는 아버지와 동생이 있죠. 또 다른 동생 하나는 군대에 나가 잇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동생이 농사를 짓고 있는데, 농사라고 별로 할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동생도 모스크바로 나오고 싶어 합니다."
"토지를 빌릴 수는 없나요?"
"요새 토지를 어디서 빌립니까? 그전의 지주들은 토지를 다 없애 버리고, 지금은 상인들 손으로 그것들이 모두 넘어가 버렸죠. 상인들은 절대로 토지를 빌려 주지 않고, 자기들이 직접 농사를 짓습니다요. 우리 마을 땅은 프랑스 사람이 소유하고 있지요. 전 지주한테서 샀습니다만, 절대로 빌려주질 않습니다. 상대도 안 해요."
"그 프랑스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오?"
"뒤파르라는 사람입니다만, 어쩌면 나리께서도 아실는지 모르겠군요. 그는 큰 극장의 배우들 가발을 만들어 팔았는데, 장사가 잘되어서 톡톡히 한 몫을 벌었지요. 그래서 전 여지주의 토지를 몽땅 사버렸단 말입니다. 지금은 그 사람이 우리들의 주인으로 우리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고 있습니다만, 다행히 그 사람은 마음이 좋은데, 그 여편네가 러시아 출신으로 성미가 못돼 먹어서 야단입니다. 농민들을 어찌나 못살게 구는지 큰 두통거리입니다. 자, 이제 감옥에 다 왔습니다. 어디에 댈까요? 현관 쪽에 댈까요? 들여보내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13
오늘은 마슬로바가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 하는 생각과, 그녀의 마음속에서나 옥중에 있는 다른 죄수들 전체 속에 존재하는 것같이 느껴지는 그 어떤 비밀을 생각하고,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마음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네흘류도프는 정문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자 곧 나온 간수에게 마슬로바에 관해서 물었다. 간수는 잠깐 조사해 봤더니 마슬로바는 지금 병원에 있다고 대답했다. 네흘류도프는 병원으로 갔다. 병원의 수위는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노인으로서 곧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누구를 만나고 싶으냐고 물은 다음 소아과 병실 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온몸에 소독약 냄새가 밴 젊은 의사가 복도에 있는 네흘류도프에게 오면서 무슨 일로 왔느냐고 딱딱하게 물었다. 이 의사는 죄수들에게 관대하게 대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간수들이나 심지어 병원장하고도 자주 불쾌한 충돌을 일으키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네흘류도프가 무슨 규정에 어긋난 부탁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또 누구를 위해서도 예외적인 일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짐짓 화난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여긴 여자라곤 없습니다. 소아과 병실이니까요." 의사가 말했다.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감옥에서 넘어와 간호사 겸 잡역부로 일하는 여자가 있을 텐데요."
"네, 그런 여자가 둘 있는데, 누굴 찾으시는데요?"
"나는 그 중의 마슬로바라는 여자와 가까운 사이입니다." 하고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잠깐 만나고 싶습니다만, 나는 그 여자의 사건에 대해서 상소하기 위해 지금 페테르부르크로 갈 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좀 전해 주고 싶은데요. 사진입니다." 하고 네흘류도프는 호주머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면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런 것쯤은." 의사는 부드러운 태도로 이렇게 말하고, 하얀 에이프런을 두른 노파에게 간호사로 있는 여죄수 마슬로바를 불러오라고 했다.
"여기 앉으시든지, 그렇잖으면 응접실에 가서 기다리시지요."
"감사합니다." 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그러고 나서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 의사의 태도를 보고, 병원에서 마슬로바의 평판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전의 그 여자의 환경을 생각하면 지금은 일을 잘하고 있는 편입니다." 하고 의사는 말했다.
"저기 오는군요."
한쪽 방문으로 늙은 간호사가 들어오고, 뒤따라 줄무늬 옷 위에 하얀 에이프런을 두른 마슬로바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리에는 스카프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네흘류도프를 보자 얼굴을 붉히면서 망설이듯 발을 멈칫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내리깔고는 양탄자가 깔린 복도를 재빠르게 걸어 네흘류도프에게 왔다. 그녀는 그의 옆에 와서도 처음에는 선뜻 손을 내밀지 않다가 잠시 후 손을 내밀더니 한층 더 얼굴을 붉혔다. 네흘류도프는 그녀가 감정을 폭발했던 것을 사과한 이후 통 만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지금도 그때와 같은 심정의 마슬로바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그녀는 아주 딴판이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뭔가 새로운 것이 서려 있었다. 수줍으면서도 무언가 억제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그러면서도 그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듯한 데가 있었다. 그는 마슬로바에게 의사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하고, 페테르부르크로 가겠노라고 말한 다음, 파노보에서 가져온 사진이 들어 있는 봉투를 내주었다.
"이것은 파노브에서 찾은 옛날 사진인데, 기뻐할 것 같아서... 받아두도록 해요."
그녀는 깜짝 놀란 듯이 까만 눈썹을 약간 치켜 올리고는 그 흘기는 듯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왜 이런 것을 주느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봉투를 받아 에이프런 속에 집어넣었다.
"거기서 당신의 이모님을 만났었소."하고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그러셨어요?" 그녀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여긴 괜찮소?"
"괜찮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고생스럽지 않소?"
"네, 별로. 아직 익숙하지는 못하지만요."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소. 아무래도 거기보다는 나을 테니까."
"거기라니, 어디 말씀이세요?"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말했다.
"저기 감옥 말이오." 네흘류도프는 당황해서 얼른 대답했다.
"어떤 점이 좋단 말씀이세요?" 그녀는 물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거기 있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 같아서 말이오. 거기 있는 사람들 같은 사람들이 있을라고."
"거기에도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메니쇼프 모자의 사건도 힘써 보았는데, 아마 석방될 것 같소."하고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참 보기 드문 좋은 할머니예요."
그녀는 항상 그 노파의 말을 할 때마다 하는 칭찬을 되풀이하면서 살며시 미소를 띠었다.
"나는 오늘부터 페테르부르크로 출발하오. 당신 문제는 곧 재심이 있겠지만, 제발 판결이 취소되었으면 좋겠소."
"취소되든 말든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말했다.
"이제는 마찬가지라니 어째서?"
"그건..." 그녀는 무엇인가 물어 보려는 듯 그를 힐끔 바라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네흘류도프는 그 말과 그 눈초리를 이렇게 해석했다. 그녀는 네흘류도프가 아직도 자기의 결심대로 실행을 할 것이지, 아니면 그녀의 거절을 받아들여 그의 결심을 변경시켰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왜 당신이 마찬가지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말했다. "그러나 당신이 무죄가 되건 유죄가 되건 나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요. 그 어느 쪽이 되든 내가 말한 대로 할 각오요."
그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들었다. 까만 사팔눈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옆으로 올리기도 했지만, 그녀의 얼굴 가득히 기쁨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눈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반대의 말을 했다.
"그런 말씀은 하셔도 소용이 없어요." 그녀는 말했다.
"당신에게 알려 주고 싶어서 그렇소."
"그 이야기는 이제 끝난 것이니까 새삼스럽게 하실 필요 없어요." 그녀는 간신히 미소를 숨기면서 말했다.
병실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이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부르고 있나 봐요." 그녀는 불안스러운 듯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자, 그럼." 그는 말했다.
그녀는 네흘류도프가 내민 손을 짐짓 못 본 체하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표정을 감추려 애쓰면서 빠른 걸음으로 양탄자가 깔린 복도 위를 사뿐사뿐 걸어갔다.
'도대체 그녀의 마음속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을까?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나를 떠보려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인가?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없거나, 아니면 하기 싫은 것일까? 기분은 좀 풀어진 것일까? 그렇잖으면 더욱 원망하고 있단 말인가?' 네흘류도프는 자문해 보았으나, 그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그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변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영혼 속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변화로 인해서 그는 그녀와 결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변화를 일으켜주신 하나님과도 연결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결합은 그를 기쁜 환희와 겸손한 감정으로 이끌어 주었다.
마슬로바는 여덟 개의 소아용 침대가 놓여있는 병실로 돌아오자,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침대를 정리하기 시작했으나, 시트를 들고 너무 몸을 뒤로 젖혔기 때문에 하마터면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목에 붕대를 감은 회복기에 있는 사내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마슬로바도 참을 수 없어서 침대에 걸터앉으며 큰 소리로 웃어 댔기 때문에 여러 아이들도 그녀를 따라 '와아'하고 웃어 댔다. 간호사는 화를 내며 그녀를 나무랐다.
"어쩌자고 그렇게 깔깔거리는 거야? 여태까지 있던 곳에 되돌아갈 테냐? 어서 저녁 식사나 가지고 와요."
마슬로바는 웃음을 거두고 식기를 가지고 가라는 장소로 나가려다 목에 붕대를 감은 사내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킥'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슬로바는 혼자 있게 되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 정신없이 들여다보곤 했다. 마슬로바는 일을 다 끝내고 밤이 되어 다른 잡역부와 함께 기거하는 방에 혼자 있게 되면 사진을 꺼내서 여러 사람의 얼굴과 옷, 발코니와 계단, 그리고 자기와 네흘류도프, 두 고모의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 되는 숲의 작은 부분까지 세세히 눈으로 핥듯이 들여다보았다. 누렇게 퇴색된 그 사진은 오랫동안 꼼짝 않고 들여다보아도 도무지 싫증이 나지 않았다. 특히 이마 언저리에 머리칼이 내려와 있는, 싱그럽고 아름다운 자기 얼굴을 바라볼 때, 그녀는 황홀감을 느꼈다. 그녀는 너무 사진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료 잡역부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게 뭐니? 그분이 준 거야?"하고 뚱뚱하고 착해 보이는 잡역부가 사진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게 너야?"
"나 아니면 누구겠어?" 마슬로바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동료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 사람은 누구? 그분? 이것이 그의 어머니겠네?"
"고모야. 정말 날 못 알아보겠니?" 마슬로바가 물었다.
"어떻게 아니? 정말 모르겠어. 얘, 전연 딴 얼굴인데. 이건 한 10년 전쯤의 사진이잖아!"
"10년이 다 뭐야, 한평생도 더 지났는걸."하고 마슬로바는 말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밝던 표정이 사라지고 얼굴에 침울한 빛이 감돌면서 양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렇지만, 생활은 편했을 테지?"
"편했고말고!" 마슬로바는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러나 감옥보다는 못했어."
"어째서 그래?"
"어째서라니" 밤 8시부터 아침 4시까지, 그것도 매일 밤일걸."
"그럼 왜 그만두지 않고?"
"그만두려고 생각은 해도 그렇게 안 돼. 다 쓸데없는 짓이야!"하고 마슬로바는 외치더니 벌떡 일어나 사진을 테이블 서랍 속에 집어넣고는, 분한 듯 눈물을 삼키면서 문을 쾅 닫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사진을 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거기 찍혀 있던 시절의 자기로 돌아간 것 같아서 그 당시의 행복했던 일들, 그리고 앞으로도 그와 결혼하면 행복해지겠거니 하고 공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친구가 한 한 마디는 현재의 자기 모습과 옛날 그곳에 있었을 때의 자기 모습을 상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당시 막연히 느끼고는 있었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으리라고 하던 그 생활이 온갖 공포를 상기시켜 주었다. 이제 새삼스럽게 그 당시의 무서웠던 밤들이 생각났다.
그 중에서 사육제 날 밤 자기를 빼내 주겠다고 약속한 대학생들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일이 생각났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술에 얼룩이 지고 가슴이 넓게 노출된 진홍빛 비단옷을 입고, 흐트러진 머리에 빨간 리본을 달고, 그녀는 새벽 2시경에야 손님을 다 보내고 술에 취해 지쳐서 춤을 추다 잠깐 쉬는 사이에, 바이올린의 반주를 하는 비쩍 마른 부스럼투성이 여자 피아니스트를 붙잡고 신세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자기도 괴로워서 견디지 못하겠으므로 생활을 바꾸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때마침 클라라가 와서 세 사람은 이런 생활을 집어 치우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오늘밤으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제각기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뜻하지 않게 현관에서 취한 손님들의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이올린이 '전주곡'을 켜기 시작하고, 피아노 반주자가 카드릴의 제 1절의 경쾌한 러시아 민요를 피아노로 반주하기 시작했다. 연미복에 흰 넥타이를 맨 한 남자가 만취되어 술 냄새를 풍기며, 딸꾹질까지 하면서 마슬로바를 잡아끌었다. 역시 연미복을 입고 턱수염을 기른 뚱뚱한 또 한 사람이 클라라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빙글빙글 돌며, 떠들며 뛰며 마셨다. 이렇게 해서 1년이 지나고, 2년, 3년이 지났다. 그 동안 왜 그런 생활을 바꾸지 않았을까! 이것은 모두 그 사람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마음속에서 다시금 그에 대한 원망스럽던 옛 생각이 홀연히 고개를 쳐들고 일어났다.
그녀는 그를 욕하고 책망해 주고 싶었다. 오늘 그를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의 뱃속을 환히 알고 있으니까, 당신 마음대로 되진 않을 거예요, 옛날에는 육체적으로 나를 마음대로 했겠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예요, 자기의 관대함을 표시하는 도구로 삼으려는 건 어림없는 일이에요'하고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게 분했다. 이같이 자신을 가련하게 생각하고 네흘류도프를 부질없이 원망하는 마음을 씻어 버리기 위해 그녀는 술을 마시고 싶었다. 여기가 만약 감옥이었다면, 그녀는 자기의 맹세를 어기고 술을 마셨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여기서 술을 구하려면 조수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으나, 그녀는 이 조수를 두려워했다. 그것은 그가 줄곧 그녀에게 지분거렸기 때문이었다. 남자들과의 관계라면 이제 진저리가 났다. 오랫동안 복도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친구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자기의 망쳐진 생애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14
네흘류도프는 페테르부르크에 세 가지 용무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마슬로바에 관한 대심원 상소였으며, 다음은 청원위원회에 제출해야 할 페도샤 비류코바의 사건이었고, 마지막의 하나 베라 보고두호프스카야에게서 의뢰받은, 슈스토바의 석방을 헌병대 본부 또는 제 3부에 신청하는 일과, 그리고 역시 베라 보고두호프스카야에게 서면으로 의뢰받은 요새 감옥에 있는 청년에 대한 그 어머니의 면회를 신청하는 일이었다. 이 마지막 두 건을 그는 제 3의 용건으로 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용건은 복음서를 읽고 해설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과 헤어져 카프카스 지방으로 유형된 분리파 신도들의 일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을 위해서보다도 자가 자신을 위해서 가능한 한 전력을 다해 명백히 밝히겠다고 결심했다.
최근 마슬레니코프를 방문한 이후, 특히 시골을 다녀온 후부터 네흘류도프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을 해서가 아니라 이제까지 자기가 생활해 온 상류 사회를 마음속으로 혐오하게 되었다. 그것은 소수의 편의와 만족에 대한 보장 뒤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 같은 고통이 갖은 수단으로 숨겨져 있는 사회여서, 이 사회의 사람들은 이 같은 고통을 보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볼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자기네의 생활이 얼마나 잔인하고 죄악에 처해 있는가를 책망하는 마음이 없이는, 이 사회의 사람들 속에 끼어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날의 생활 습관과 친척 관계, 그리고 친구관계에 끌려 이 사회와 손을 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를 그런 사회로 이끌어 들이는 가장 큰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현재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유일한 관심사, 그러니까 마슬로바를 비롯하여 그가 도와주고 싶은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존경은 커녕 때로는 혐오와 경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싫더라도 그런 사회의 사람들에게 원조와 호의를 청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 때문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그는 큰 이모이자 전 국무장관 부인인 챠르스카야백작 부인의 집에 여장을 풀고, 그렇게도 자기와는 인연이 멀다고 생각되던 귀족 사회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그에겐 그것이 불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모 집에 머물지 않고 호텔에라도 가면 이모를 모욕하는 것이 되었다. 더욱이 이모는 발이 넓기 때문에 이제부터 운동하려고 하는 사건에 대해서도 다시없는 힘이 되어 줄 사람이었다.
"네 소문은 많이 듣고 있다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정말 이상한 소문이더구나."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그가 도착하자 커피를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주 하원드가 됐다더구나. 죄인을 도와서 감옥을 돌아다니며 개혁을 하고 다니다니..."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떠냐, 좋은 일인데. 그런데 거기에 소설 같은 사연이 있다면서? 말해보려무나."
네흘류도프는 자기와 마슬로바와의 관계를 모두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래, 생각난다. 네가 고모 집에 가 있었을 때, 불쌍한 엘렌(네흘류도프의 어머니)이 그 비슷한 얘기를 했었어. 네 고모들은 널 그 양녀하고 결혼시키려고 했었지(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네흘류도프의 고모인 두 자매를 항상 경멸하고 있었다). 그래, 그 처녀였구나. 지금도 그렇게 예쁘냐?"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이모는 60세의 노부인이긴 했지만 아직도 건강하고 쾌활하고 정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키가 크고 뚱뚱했고 윗입술 언저리에는 거무스름한 잔털이 나 있었다. 네흘류도프는 이 이모를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이모의 정열적인 활동과 쾌활한 성격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아닙니다, 이모님. 그것은 모두 옛날이야기입니다. 저는 다만 그 여자를 도와주고 싶을 따름입니다. 첫째로 그녀는 아무 죄도 없이 유죄 판결을 받았어요. 그 점에 있어서는 저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녀의 운명 전체에 있어서도 역시 저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서라면 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해줄 의무가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들은 이야기로는 네가 그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라면서?"
"네, 그러고 싶습니다만, 그 여자는 원하질 않습니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얼굴을 앞으로 내밀고 눈을 내리깔고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없이 조카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표정이 변하더니 만족스러운 기색이 되었다.
"그래, 그 여자는 너보다 영리하구나. 정말 넌 어쩌면 그렇게 바보냐? 넌 진심으로 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거냐?"
"물론입니다."
"그런데 있던 여자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게 다 제 죄니까요."
"아니, 너 정말 철부지로구나!"하고 이모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넌 정말 철부지야. 하기야 그런 철부지이기 때문에 넌 널 좋아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이 철부지라는 말이 자신이 생각해도 조카의 정신적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해 준 말로 여겨졌던 모양인지 그 말을 되풀이했다.
"아, 그렇지. 참 좋은 수가 있다."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알린이라는 사람이 창녀 갱생원을 경영하고 있는데, 나도 한번 가 보았다. 그러나 알린은 그 일에다 심신을 다 바치고 있거든. 그러니 너의 그 여자를 알린한테 맡기면 어떻겠니? 그런 여자들을 올바르게 만들어 줄 사람은 알린밖에 없을 거야."
"그렇지만 그 여자는 징역을 선고받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 선고의 취소 운동 때문에 여기 온 것입니다. 이것이 이모님께 부탁하고 싶은 첫째 용건입니다."
"그랬구나! 그 여자의 사건은 어디서 맡고 있지?"
"대심원입니다."
"대심원? 그래 대심원에 내 사촌 레부시카가 있긴 한데. 하지만 그 사람은 상훈국에 있어서 말이야. 글쎄 그쪽에는 아는 사람이 없군 그래. 그쪽은 독일 사람들뿐이라서, '게'라든가, '페'라든가, '데'라든가 하는 첫 글자가 붙은 사람이 아니면, 이바노프, 세묘노프, 니키티치라든가, 또는 이바넨코, 시모넨코, 니키첸코라든가 하는 이상한 이름의 사람들뿐이야. 모두 딴 사회의 사람들이지. 하여튼 이모부한테 얘기해 보마. 너의 이모부는 여러 방면의 사람들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자세한 건 네가 설명하도록 해라. 내 얘기라면 언제나 잘 알아듣지 못하니까 말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모부는 모르다고만 하니 말이야. 항상 판에 박힌 대답이란다. 남은 다 알아듣는데, 그분만은 모른다는 거야 글쎄."
이 때 긴 양말을 신은 하인이 은쟁반 위에 편지를 얹어 가지고 들어왔다.
"마침 알린한테서 왔구나! 너도 키제베테르의 얘기를 들을 수 있겠다."
"누굽니까, 키제라베티르란 사람은?"
"키제베테르 말이냐? 오늘 밤 보려무나.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거다. 그 사람의 설교만 듣고 있으면 아무리 흉악한 범인이라도 무릎을 꿇고 울면서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단다."
백작 부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이상하게도 그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기독교의 본질은 속죄에 있다고 생각하는 교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녀는 그 당시 유행하고 있던 교의를 전도하는 모임에 빠짐없이 나가기도 하고, 또한 자기 집으로 신자들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 교의에 의할 것 같으면, 모든 의식과 성상은 물론 일체의 성례까지 부정해야 했는데 그러면서도 백작 부인의 집에는 어느 방이나, 심지어 침대의 위에까지 성상을 걸어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아무 모순도 느끼지 않고 교회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충실히 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너의 막달레나(회개한 매춘부)도 그분의 설교를 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틀림없이 개심할 거야."하고 백작 부인은 말했다.
"오늘 밤에는 꼭 집에 있도록 해라. 그분의 얘기 좀 들어 보라고. 참 훌륭한 분이란다."
"별로 흥미가 없는데요. 이모님."
"틀림없이 재미있을 거야. 그러니까 꼭 참석하도록 해라. 그리고 또 무슨 부탁이 있니? 아주 털어놓고 말해보렴."
"또 하나는 요새 감옥의 일입니다만."
"요새 감옥? 아, 거기라면 크리스무트 남작에게 소개장을 써 주지. 부탁할 만한 분이야. 너도 알 거다. 네 아버지와는 절친한 친구였으니까. 강신술에 빠져 있었지만, 뭐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착한 사람이지. 그래 거긴 무슨 용건이지?"
"거기 수감되어 있는 청년에게, 그의 어머니를 면회시켜 주도록 부탁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엔 그건 크리그스무트 남작의 관할이 아니라, 제르뱐스키의 관할이라고 하더군요."
"체르뱐스키라는 사람은 싫지만, 그는 마리에트의 남편이니까 그녀에게 부탁해도 되겠지. 날 위해서라면 그만한 일쯤 해줄 거야. 그녀는 참 친절한 여자거든."
"그리고 또 한 여자의 일도 부탁드려야겠습니다. 벌써 여러 달 수감되어 있는데 그 이유를 모르고 있어요."
"아니, 그럴 수가 있나? 이유는 그 여자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난 그런 여자들을 잘 알고 있어. 그런 단발녀(허무주의를 지향하는 여자들을 뜻함)들에겐 당연한 일이지."
"당연한 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요, 여하튼 고생하고 있으니까요. 이모님은 기독교인이시고 복음서를 믿고 계시면서 그런 잔혹한..."
"괜찮아. 복음서는 복음서고, 싫은 건 싫은 거니까. 난 그런 허무주의자, 특히 단발머리를 한 여자들은 아주 질색이거든.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체하는 것은 더 나쁘지 않겠니?"
"어째서 그런 사람들이 질색이라는 말씀이시죠?"
"그 3월 1일(알렉산더 2세가 암살된 날)의 사건이 있었는데도 그걸 묻니? 오히려 그런 걸 묻는 네가 이상하구나."
"그렇지만, 그런 여자들이 모두 3월 1일 사건의 참가자는 아니잖습니까?"
"마찬가지야. 자기가 할 일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참견을 하는 거야? 그런 일은 여자가 할 일이 아니야."
"그럼, 저 마리에트도 쓸데없는 일에 참견할지도 모르잖습니까?"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마리에트? 마리에트는 마리에트지. 그녀가 어떤 여자라는 건 하나님도 아실 거다. 그런데 할츄프키나라는 여자가 사람을 가르치려 드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도와주어야 할 사람과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쯤은 잘 알고 있단다."
"그러나 농민들의 생활은 말이 아닙니다. 나는 얼마 전에 시골에 다녀왔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농민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데, 우리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네흘류도프는 마음이 좋은 이모에게 끌려서 무의식중에 품고 있던 것을 전부 털어놓고 말았다.
"그럼, 나도 일을 부지런히 하고 아무것도 먹지 말기를 마라는 거냐?"
"아닙니다. 이모님더러 잡수시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네흘류도프는 웃으며 말했다. "다만 같이 일하고 다 같이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이모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 깔더니, 호기심에 찬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넌 제대로 죽지도 못하겠구나." 그녀가 말했다.
"왜요?"
그 때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장군이 방으로 들어왔다. 이 사람이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남편이며 전 국무장관인 차르스키 백작이었다.
"여어, 드미트리, 잘 있었나?" 그는 말쑥하게 면도한 뺨을 내밀면서 말했다. "언제 왔니?"
그러고는 그는 가만히 아내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얘는 엉뚱한 이야기만 하고 있어요." 백작부인이 남편에게 말했다. "이 애가 나더러 냇가에 가서 빨래를 하고, 감자나 먹으라지 안 하요? 정말 철부지지 뭐예요." 그녀는 말을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당신도 들으셨지요? 카멘스카야 부인이 몹시 낙심하고 있다고요. 생명이 위태롭다던데요."하고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한번 가 보시는 게 어때요?"
"그거 참 안됐군." 남편이 말했다.
"그럼 이 애하고 가서 얘기나 하세요. 난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네흘류도프가 응접실 앞방으로 나가자마자, 부인은 그의 뒤에서 소리쳤다.
"그럼 마리에트에게 편지를 쓸까?"
"네, 이모님."
"단발머리 여자에 관해서는 네가 써 넣도록 여백을 남겨 두겠다. 마리에트는 남편에게 말해 줄 것이고, 그럼 남편도 잘해 주겠지. 나를 언짢게 생각하지 말아라. 네가 걱정하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무슨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마음에 안 드는 것뿐이니까. 그런 사람들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거야.! 그럼 다녀오렴. 저녁에는 꼭 와야 한다. 키제베테르 씨의 설교가 있으니까, 함께 기도하자꾸나. 네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네게도 반드시 보람이 있을 거다. 엘렌이나 너나 모두 이런 면에는 상당히 뒤떨어져 있으니까. 그럼 다녀오너라."
15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은 전 국무장관이었으며, 매우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의 젊은 시절부터의 신념은 다름이 아니라 마치 새가 벌레를 먹고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천성인 것처럼 그 자신도 고급요리사가 만든 고급 요리로 배를 채우고, 몸에 잘 맞는 값진 옷을 입고, 기분 좋고 빠른 준마를 타고 다니는 것이 천성에 어울리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은 국고에서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으면 받을수록 좋았고, 훈장도 다이아몬드가 박힌 것을 포함해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으며, 남녀 누구나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기회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었다. 이 같은 기본적인 신념에 비해 그 밖의 일체의 것은 이반 미하일로비치의 눈으로 볼 때 보잘 것 없고 흥미 없는 것이었다. 이 신념에 따라서 이반 미하일로비치는 40년 동안 페테르부르크에서 생활하고 활약한 덕에 국무장관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이 이 지위를 얻게 된 중요한 자질은, 첫째 공문서나 법률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서툴렀지만 그럭저럭 서류를 초안할 수 있었으며, 철자법도 틀리지 않게 문장을 쓸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둘째로는 풍채가 좋고, 때에 따라서는 의젓한 정도가 아니라 남이 근접할 수도 없을 만큼 위엄 있는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야비할 만큼 비굴하게 아첨도 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셋째로, 그는 도덕적인 면이건 국가적인 면이건 일반적인 주의 원칙이라는 것이 전연 없었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누구에게나 찬성할 수 있었고, 또한 필요에 따라서는 누구에게나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같이 행동하면서 그는 줄곧 그의 체면을 유지해갔고, 오직 뚜렷한 자가 당착을 보이지 않겠다는 데만 신경을 써왔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행동이 도덕적이거나, 부도덕적이거나, 또 자기 행동으로 해서 러시아 제국이나 전 세계에 최대의 해악이 생기건 그런 것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국무장관이 되었을 때는 그의 세력권 내에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실제로 많은 사람들과 측근자들이 있었는데, 일반 사람들과 바로 그 자신까지도 자기 자신이 지극히 총명한 국가적 인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한 세월이 지나가도 그는 이렇다 할만한 일을 하지 못했고, 아무 수완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생존 경쟁의 법칙에 따라 그와 같이 서류나 작성하고 해석하는 것을 배운, 정견도 없는 무주의 무절제한 관리들에게 떠밀려 퇴직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가 똑똑한 인간이 아닐 뿐더러 자존심만 강할 뿐, 실상은 천박한 교양도 없는 다른 관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것을 깨닫고 있었으나, 이 사실이 해마다 막대한 국고금을 축내며 자기 예복에 다는 새 장식품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확신을 조금도 흔들리게 하지는 않았다. 이 확신은 너무 강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를 반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일부는 은급이라는 형태로, 일부는 정부 최고 기관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그 밖의 갖가지 위원회의 회장이라는 자격으로 매년 수만 루블의 돈을 받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새로운 권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어깨와 바지에 새로운 몰을 달고 연미복 밑에 새로운 술과 에나멜의 성장을 다는 자격을 획득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은 여러 방면에 연줄이 닿게 되었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은 네흘류도프의 이야기를 옛날 부하들의 보고를 듣는 듯한 태도로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는 두 통의 편지를 써 주겠다고 말했다. 하나는 대심원 상소국의 볼리프 앞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 사나이는 여러 가지 소문이 있지만, 어쨌든 훌륭한 사람이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다가 내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라면 해줄 거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이 준 또 한 통의 편지는 청원 위원회의 유력자 앞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백작은 네흘류도프가 말한 페도샤 비류코바 사건에 대해서 커다란 흥미를 가졌다. 네흘류도프가 황후 폐하에게 청원서를 올릴 생각이라고 말했을 때, 사실 이 사건은 감동적인 사건이므로 기회를 봐서 자기가 이야기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도 약속을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절차를 밟아서 청원서를 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기회가 있어서 목요일의 소위원회가 소집된다든지 하면 그 자리에서 얘기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작이 써 준 두 통의 편지를 갖고 네흘류도프는 마리에트에게로 발길을 향했다. 그는 그녀를 처녀 시절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귀족 가문에서 자라났으나, 처세술에 능한 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 남자에 대해서는 네흘류도프도 좋지 못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수백 수천의 정치범에게 냉혹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 그의 특별한 직무가 되어 있을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금 네흘류도프는 학대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학대하는 사람 측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워졌다. 학대하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그들 자신도 필시 모르고 있을 평소의 잔악한 처사를 몇 사람의 특정한 인물에 대해서 만이라도 다소 완화해주기 바란다는 식의 부탁을 함으로써 마치 그들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케 되는 것이 못 견딜 지경이었다. 이런 경우 그는 항상 내적 불만과 혼란 때문에 부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은 부탁하기로 결심하곤 했다. 그 자신은 마리에트와 남편에게서 쑥스럽고 치욕스러운 불쾌감을 맛본다 하더라도, 그 대신 독방에서 고생하는 불편한 여성이 석방되어, 그녀와 그의 친척들이 고민하지 않아도 좋게 될 것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이럴 때 그는, 이쪽에서는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를 친구로서 취급하는 사람들 틈에 의뢰자가 되는 것이 어딘지 거짓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아서 못 견딜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이 사회 속에서 이전의 습관의 괘도에 뛰어 들어가 이 서클을 지배하고 있는 경박하고 퇴폐적인 분위기 속에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어 가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는 벌써 이것을 이모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집에서 체험했다. 오늘 아침에도 이모와 가장 진지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농담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었다.
오랜만에 와서 보는 페테르부르크는 항상 그렇듯이 육체적으로는 자극을 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둔화시켜 버리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곳은 모든 것이 깨끗하고 편리하고 설비가 잘 되어 있었으며, 특히 사람들이 도덕적인 면에 무관심한 탓으로 생활이 유달리 안이하게 보였다.
단정하고 말쑥하며 겸손한 마부가 그를 태우고 역시 단정하고 말쑥하고 겸손한 순경 옆을 지나 단정하고 깨끗하게 물을 뿌린 포장길과 집들을 지나 마리에트가 살고 있는 운하 쪽에 자리 잡은 집으로 그를 데려다 주었다.
현관의 주차장에는 눈을 가린 영국풍의 말 두필이 끄는 마차가 있었으며, 수염으로 뺨을 절반쯤이나 가린, 영국인 같은 제복을 입은 마부가 거만하게 채찍을 들고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말쑥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문지기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곳에는 금몰이 달린 더 말쑥한 제복을 입은, 보기 좋게 턱수염을 기른 하인 한 사람과, 깨끗하게 새 정복을 입고 총검을 든 당직 사병이 서 있었다.
"장군님의 면회는 사절입니다. 사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외출하십니다."
네흘류도프는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편지를 건네고, 명함을 꺼내어 방문객의 명부가 놓여 있는 테이블로 가서, 만나 뵙지 못해 대단히 유감이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때 하인이 층계 쪽으로 급히 달려가고 문지기는 현관으로 달려가더니 "준비!"하고 외쳤다. 당직 사병은 양손을 바지 솔기에 대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당직 사병은 이러한 근엄한 태도에 어울리지 않게 가벼운 총총걸음으로 층계를 내려오는 홀쭉하고 자그마한 귀부인을 눈으로 배웅하고 있었다.
털이 달린 큼직한 모자를 쓰고, 검은 옷에 소매 없는 검은 외투를 걸치고 까만 장갑을 낀 마리에트는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네흘류도프를 보자, 베일을 치켜 올리고 빛나는 눈동자의 귀여운 얼굴을 내밀면서,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나,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공작님 아니세요?"하고 그녀는 쾌활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제 이름까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잘 알고 있어요. 전 동생과 둘이서 당신을 사모한 적도 있었는데요."하고 그녀는 프랑스 말로 말했다. "많이 변하셨군요. 마침 나가려던 참이어서 섭섭해요. 그렇지만 잠깐이라도 올라가실까요?" 그녀는 망설이면서 발을 멈추며 말했다.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역시 안 되겠어요. 카멘스카야 댁의 영결식이 있어서. 그분은 몹시 상심하고 계세요."
"카멘그카야란 누구시죠?"
"어머, 모르세요? 그분의 자제분이 결투를 해서 죽었어요. 포겐하고 결투를 해서 죽었어요. 외아들이었는데, 무서운 일이지요. 어머니께서 어찌나 상심하시는지..."
"네,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럼 갔다 오겠어요. 내일이나 오늘 밤에 와 주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현관문을 향해서 재빠르게 사뿐사뿐 걸어갔다.
"오늘 밤에는 못 오겠습니다." 그는 그녀와 같이 현관으로 가면서 말했다. "실은 당신에게 좀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현관에 대기하고 있는 밤색 말 한 쌍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데요?"
"이겁니다. 이모님이 쓰신 편지인데 이 속에 다 쓰여 있습니다."하고 큼직하게 이름을 박아 놓은 긴 봉투를 내밀면서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이것들을 읽어 보시면 다 아실 수 있습니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제가 남편의 일에 간섭하고 있는 줄 아실 거예요. 그건 오해입니다. 전 그의 일에 참견할 수도 없거니와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나 백작 부인이나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런 규칙을 깨뜨리겠어요, 대체 무슨 일인데요?" 까만 장갑을 낀 손으로 포켓을 뒤적이며 그녀가 말했다.
"실은 요새 감옥에 어느 여자가 하나 수감되어 있는데, 그 여자는 병자인데다가 사건에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무엇인데요?"
"슈스토바, 라지야 슈스토바입니다. 편지에 쓰여 있습니다."
"잘 알았어요. 힘껏 노력해 보지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흙받이의 옻칠이 햇살을 받아 번쩍거리는, 푹신거리는, 푹신푹신한 깔개가 깔려 있는 사륜마차에 사뿐히 올라타고는 파라솔을 펼쳤다. 하인은 마부석에 올라앉아 마부에게 떠나라고 신호했다. 그 때 그녀가 파라솔로 마부의 등을 치자, 윤기 있는 털에 미끈하게 생긴 말은 고삐가 당겨진 목을 움츠리고 날씬한 다리로 제자리걸음을 시작했다.
"꼭 오세요. 용건 없이 말씀이에요." 그녀는 스스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고 의식하면서, 빙긋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고는 마치 연극이 끝난 뒤 막을 내리듯이 베일을 내렸다. "자, 가요." 그녀는 다시 파라솔로 마부를 툭쳤다.
네흘류도프는 모자를 들었다. 순종의 밤색 말은 코를 벌름거리며 포장길을 발굽소리도 높이 달려갔다. 마차는 가끔 울퉁불퉁한 길에 고무바퀴를 가볍게 퉁기며 신나게 달려갔다.
16
마리에트의 환한 미소를 생각하면서 네흘류도프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주위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또다시 그 생활에 휩쓸려 들어갈 뻔했군.' 그는 자기가 존경하지 않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어야할 때마다 항상 일어나는 자기 분열과 의혹을 느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헛걸음치지 않으려고 어디를 먼저 가고 어디를 나중에 가야 하나를 생각한 끝에 네흘류도프는 먼저 대심원으로 가기로 했다. 대심원에서 사무실로 안내된 그는, 장엄한 실내에서 단정하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많은 관리들을 볼 수 있었다.
마슬로바의 상소장은 수리가 되었으며, 이모부가 편지를 써 준 대심원 의원 볼리프에게 심리, 보고되도록 회부되었다고 관리들이 네흘류도프에게 설명해 주었다.
"대심원 회의는 이번 주에 있을 예정인데, 마슬로바의 사건은 이번 회의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청원하시면 이번 주 수요일 회의에 상정될 수는 있습니다."하고 한 사람이 말했다.
대심원 사무실에서 조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네흘류도프는 또 다시 결투에 관한 이야기와 카멘스키가 피살된 경위를 자세히 들었다.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페테르부르크 전체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그 사건은 이러했다. 수명의 장교들이 어느 술집에서 굴을 곁들여 술을 잔뜩 마시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카멘스키가 근무하고 있는 연대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카멘스키는 그를 향해 거짓말쟁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그는 카멘스키를 때렸다. 그 이튿날 결투가 벌어져 카멘스키는 복부에 총을 맞고 두 시간 후 숨을 거두었다. 살해한 남자와 입회자들은 체포되어 영창에 들어갔으나 2주일 후면 석방되리라고 했다.
대심원의 사무실에서 나온 네흘류도프는 청원 위원회에 세력이 있는 보로비요프 남작을 찾아갔다. 그는 웅장한 관사에서 살고 있었다. 문지기와 하인은 면회일 외에는 남작을 만날 수 없으며, 더구나 오늘은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셨고, 또 내일도 보고하러 가실 거라고 엄숙한 어조로 네흘류도프에게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편지를 내주고 대심원 의원인 볼리프한테로 갔다.
볼리프는 마침 아침식사를 끝내고, 여느 때와 같이 소화를 잘 시키기 위해 궐련을 피워 물고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네흘류도프를 맞아 주었다. 그는 자기의 이 특징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이 특징으로 인해 자기가 원했던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결혼을 함으로써 1년에 1만 8천 루블의 수입이 있는 재산을 손에 넣었으며, 자기 노력으로써 대심원 의원의 자리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빈틈없고 치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청렴한 기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청렴이라는 말은 그의 해석에 따르면, 사람들로부터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요구하는 일체의 일을 노예같이 실행하면서, 그 대신 여비라든가 보수라든가 대여금이라든가 하는 모든 종류의 돈을 국고에서 받아내는 것은 별로 파렴치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전에 폴란드의 어느 현의 지사로 있을 때 단행한 일이지만, 그 지방의 주민들이 자기 나라의 국민을 너무 많이 사랑하고 종교에 너무 충실하다고 해서 수백 명이나 되는 무고한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재산을 몰수하고 유형에 처하거나 감금했는데, 그는 이것을 별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결하고 남자답고 애국적인 위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욱이 자기에게 반한 아내와 처제의 재산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고도 파렴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의 가정은,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내와, 재산은 형부에게 빼앗기고 토지는 매각되고 돈은 형부 명의로 예금되어 있는 처제와, 그리고 얌전하고 어리벙벙하고 못생긴 딸로 구성되어 있었다. 딸은 괴롭고 외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며, 요즈음에는 복음서의 탐독과, 알링의 집이나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부인의 집에서 열리는 모임에 나가 겨우 마음의 위안을 받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의 아들은 사람이 좋기는 했으나, 열다섯 살 때부터 턱수염을 기로고 술을 마시며 방탕해지기 시작하여 스무 살이 되도록 학교 하나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고, 못된 친구들하고 어울려 빚을 져서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마침내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한번은 그의 아버지가 230루블의 빚을 갚아 주었고, 두 번째는 600루블의 빚을 갚아 주었다. 그 때 아들에게 이것이 마지막이니 개심하지 않으면 집에서 쫓아내어 부자간의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아들은 개심하기는 커녕 또 천 루블의 빚을 짊어진데다가 오히려 아버지에게 집에서 이렇게 사는 것은 고문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대들었다. 그 때,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는 아들에게 어디든지 가버리는 것이 좋겠다, 이제는 아비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 때부터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는 자기에게는 아들이 없는 것처럼 말해 왔으며, 가족들도 누구 하나 그의 앞에서는 아들 이야기를 감히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는 가장 현명하게 가정을 정리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볼리프는 상냥하면서도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면서 이것이 그의 평소의 버릇이었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하다는 무의식적인 표현이었다. 실내를 거닐던 걸음을 멈추고 네흘류도프와 인사를 한 다음, 편지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이리 앉으십시오. 죄송하지만 거닐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상의의 포켓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아담하고 정돈된 넓은 서재를 대각선으로 가볍게 걸으면서 말을 시작했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의 부탁은 될 수 있는 대로 힘을 써 보겠습니다."
그는 재가 떨어지지 않도록 살며시 입에서 궐련을 떼고, 향기로운 파란 연기를 뿜으면서 말했다.
"네, 네 , 잘 알았습니다. 니즈니에서 첫 번 기선으로 가겠다는 말씀이시죠?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남의 말을 듣기도 전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는 거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피고의 이름은 무엇이지요?"
"마슬로바..."
볼리프는 테이블로 다가가서, 다른 서류와 함께 철해둔 서류를 뽑아 들여다보았다.
"아, 그렇군, 마슬로바. 좋습니다. 동료들에게 부탁해 놓겠습니다. 수요일에 이 사건을 심리하겠습니다."
"그러면 변호사한테 전보를 쳐도 되겠습니까?"
"변호사에게 의뢰하셨나요?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그야 원하신다면 상관없습니다만."
"상소의 이유가 허술한 것 같아서 말씀입니다."하고 네흘류도프가 말했다."그러나 이 사건에 관한 선고는 오해에서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글쎄올시다. 그러나 대심원에서 꼭 사건의 본질을 심리한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하고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는 담뱃재를 바라보면서 엄숙한 투로 말했다. "대심원은 다만 법의 적용과 그 해석이 올바른가를 조사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예외라고 생각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무슨 사건이든 모두 예외적인 것이니까요. 우리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은 꼭 합니다. 그것뿐입니다." 담뱃재는 아직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곧 떨어질 상태에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에는 자주 오지 않으십니까?" 볼리프는 재가 떨어지지 않도록 궐련을 들면서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도 담뱃재는 풀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볼리프는 가만히 재떨이로 가서 털었다. "카멘스키의 사건은 참 끔찍한 일입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는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게다가 외아들이었죠. 그의 어머니의 심정이란 말할 것도 없었을 겁니다." 그는 그 당시 페테르부르크에서 떠돌아다니던 카멘스키의 이야기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일과 부인이 열중하고 있는 새로운 종교적 경향에 대해서 말한 다음,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자신은 그것에 대해 비난도 찬성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태도로 볼 때 그 종교는 그에겐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는 벨을 눌렀다.
네흘류도프는 일어서서 작별인사를 했다.
"시간이 있으시면 저녁 식사나 드시러 오십시오." 볼리프는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수요일이면 좋겠군요. 그 때는 확실한 대답을 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이미 시간이 늦었으므로 네흘류도프는 곧장 마차를 타고 이모네 집을 향해 달려갔다.
17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집에서는 7시 반에 저녁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식사는 네흘류도프가 일찍이 보지 못한 색다른 방식으로 행해졌다. 요리를 식탁 위에 차려 놓으면 하인들은 곧 물러가 버리므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가 요리를 날라다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자들은 부인들에게 쓸데없는 수고를 끼치지 않으려고, 또 여자들보다 힘이 센 남성으로서의 남성다운 모든 수고를 도맡아 하면서, 부인들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기도 하고 자기네들도 먹고 마시는 것이었다.
백작 부인은 접시 하나가 비게 되면 벨을 눌렀다. 그러면 하인들은 소리도 없이 들어와 재빨리 치우고 다른 접시와 바꾸어 놓고 나서 요리를 날라왔다. 요리도 퍽 맛이 좋았지만, 술도 손색이 없었다. 밝고 넓은 부엌에서는 프랑스인 요리장이 휜 옷을 입은 조수 두 명을 거느리고 일하고 있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은 모두 6명이었다. 백작 부처, 팔꿈치를 식탁에 괴고 있는 무뚝뚝한 근위장교인 아들, 네흘류도프, 가정 교사인 프랑스 여인, 그리고 시골에서 올라온 백작가의 총지배인이었다.
여기서도 결투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황제가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지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황제가 피살된 청년의 어머니에 대해서 깊은 동정을 베푸셨음을 알자 그들은 모두 그 어머니를 동정했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해서 동정은 했다고 하더라도 황제가 군복의 명예를 지킨 가해자에 대해서 엄격하게 다스릴 의사가 없는 것도 알려진 사실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군복의 명예를 지킨 가해자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다만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만이 본래의 경솔한 성미대로 가해자를 비난했을 뿐이다.
"그러면 앞으로도 술을 마시고 훌륭한 젊은이를 마구 쏘아 죽일 테죠. 나로서는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하고 그녀는 선언했다.
"그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얘기로군."하고 백작이 말했다.
"네, 그러시겠죠. 당신은 언제든지 내 말을 못 알아들으시니까요." 백작 부인은 네흘류도프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남들은 다 알아 주는데, 남편만은 몰라준단다. 나는 그 어머니가 불쌍해. 사람을 죽이고도 태연하다는 건 싫어."
이 때 여지껏 잠자코 있던 아들이 가해자의 편을 들면서, 장교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으며 또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연대에서 쫓겨났을 것이라고 하면서 어머니에게 제법 거칠게 대들었다.
네흘류도프는 대화 속에 끼어들지 않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남을 죽인 장교와 감옥에서 만난 적이 있는, 역시 결투를 해서 살인한 탓으로 유형을 선고받은 젊고 잘 생긴 죄수를 자기도 모르게 비교해 보았다. 어느 쪽이나 다 술 취한 김에 저지른 살인이었다. 그런데 한쪽의 농부는 격분한 순간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아내와 가족, 그리고 친척과 헤어져서 쇠고랑을 차고 머리를 박박 깎이고 유형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쪽의 장교는 영창 안의 깨끗한 방에서 좋은 요리에 맛있는 술을 마시고 책을 읽으면 내일쯤은 석방되어 전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더욱이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다.
네흘류도프는 자기가 느끼고 있는 바를 밖에 내고 말았다. 처음에는 백작 부인도 조카의 의견에 찬성을 하는 듯했으나 나중에는 곧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래서 네흘류도프도 자기가 무슨 불쾌한 말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날 밤 식사가 끝나고 얼마 안 되어, 넓은 홀에는 멋지게 조각이 된 높다란 등받이 의자들이 마치 설교를 들을 때처럼 여러 줄로 놓여지고, 큰 테이블 앞에는 설교를 들으려고 모두 모여들었다.
현관에는 번듯한 값진 마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호화롭게 장식된 홀에는 비단과 비로드와 레이스로 성장하고 머리는 덧머리를 얹고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여 맨 귀부인들이 앉아 있었다. 부인들 틈에 군인과 문관이 자리 잡고, 평민도 다섯 사람, 2명의 문지기와 장사꾼, 그리고 하인과 마부가 섞여 있었다.
키제베테르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체격이 우람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영어로 말하자, 코안경을 쓴 젊고 빼빼마른 여자가 재치 있고 재빠르게 통역을 했다.
우리들의 죄는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죄악에 대한 벌도 크며, 더욱이 그것은 피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그 벌을 예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활에 생각을 돌려 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 또 자비로운 하나님께 어떻게 죄를 범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고, 이를 피할 길도 없으며,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우리는 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하고 그는 울음 섞인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형제들이여, 어떻게 하면 이 무서운 재난으로부터 피할 수 있을까요? 이미 불길이 집을 둘러쌌으니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미 8년 동안 설교를 해 오면서 무척 마음에 드는 이 대목에 이르면, 그때마다 틀림없이 목이 떨리고 코가 메고, 눈물이 나며 더욱더 그를 감동시켰다. 방 안에는 흐느껴 우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백작 부인은 모자이크 된 테이블 곁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괸 채 살찐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마부도 놀란 얼굴로 독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그의 마차 채에 부딪치게 되어도 비켜서려고 하지 않을 때 짓는 그런 표정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작 부인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닮은 볼리프의 딸은 최신 유행의 의상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설교자는 갑자기 얼굴에서 두 손을 떼고, 배우들이 기쁜 표정을 지을 때처럼 미소를 지으면서 달콤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있습니다. 그것은 쉽고도 기꺼운 길입니다. 그 구원이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우리들의 구원의 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하고 그는 또다시 눈물 어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는..."
네흘류도프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쾌해져서 슬그머니 일어섰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수치스러운 생각을 간신히 억제하면서 발끝으로 걸어 나와 자기 방으로 갔다.
18
이튿날 네흘류도프가 옷을 갈아입고 아래로 내려가려고 할 때, 하인이 모스크바에서 온 변호사의 명함을 가져왔다. 변호사는 자기 용무도 겸해서 만일 마슬로바의 사건이 곧 가까운 시일 안에 심리가 된다면, 대심원의 심리에도 출석하겠다며 온 것이었다.
네흘류도프가 친 전보는 그와 엇갈렸던 것이다. 네흘류도프에게 마슬로바의 사건이 심리되는 날짜와, 심의관이 누구라는 것을 듣자, 변호사는 빙긋이 웃었다.
"그렇다면, 세 가지 타입의 심의원이 전부 모인 셈이군요."하고 그는 말했다. "볼리프는 페테르부르크 형의 관리고, 스보코로드니코프는 학자형의 법률학자이며 베는 실제형의 법률가입니다. "어쨌든 이 사람이 그 중에서 제일 수완가죠." 변호사는 말했다. "어쨌든 이 사람이 제일 믿음직합니다. 그런데 청원 위원회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사실은 이제부터 보로비요프 남작을 방문할 참입니다. 어젠 만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보로비요프가 어떻게 남작이 됐는지 아십니까?" 네흘류도프가 이 러시아적인 이름에도 외국어의 칭호를 한데 붙여 우스꽝스럽게 부른 데 대해 대답하면서 변호사는 말했다.
"그것은 파벨 황제께서 무슨 포상으로 그의 조부에게 내려 준 것이지요. 그의 조부는 궁중에서 하인들의 책임자로 있었는데 황제께서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를 남작으로 임명하겠으니 불평들은 하지 말라고 했지요. 이렇게 해서 보로비요프 남작이 탄생한 겁니다. 그는 이걸 여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지 않아요. 아주 교활한 늙은 여웁니다."
"어디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 가 볼까요?" 하고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마침 잘됐습니다. 함께 가십시다. 제가 마차로 모셔다 드리지요."
두 사람이 출발하려고 나왔을 때, 하인이 옆방에서 마리에트로부터 온 편지를 들고 네흘류도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저의 주의 주장을 버리고, 당신이 보호하고 계시는 사람을 위해서 남편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 여자 분은 곧 석방될 것입니다. 남편이 요새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냈으니까요. 볼일이 없으셔도 놀러와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
"자, 어떻습니까?" 네흘류도프는 변호사에게 말했다.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7개월 동안이나 독방에 갇혀 있던 여자가 아무 죄도 없다니, 그것도 석방하는 데 단 한 마디면 되다니."
"언제나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러나 어찌 됐든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된 셈이군요."
"네, 하지만 이 성공은 도리어 통탄할 일입니다. 도대체 거기서는 무엇들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요. 무엇 때문에 그 여자를 가두어 두었을까요?"
"그런 일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럼 제가 태워다 드리면 어떨지?"
그들이 현관 앞으로 나왔을 때 변호사가 말했다. 변호사가 타고 온 훌륭한 마차가 현관으로 다가왔다.
"보로비요프 남작을 뵈러 가시는 거죠?"
변호사는 마부에게 행선지를 알려 주었다. 그 멋진 말들은 곧장 네흘류도프를 남작 집으로 데려갔다. 남작은 집에 있었다. 첫째 방에는 제복을 입은 젊은 관리 한 사람과 두 귀부인이 있었다. 그 관리는 무척 기다란 목에 후골이 튀어나온 경쾌한 걸음걸이의 남자였다.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후골이 튀어나온 젊은 관리가 부인들로부터 경쾌한 걸음으로 네흘류도프에게 걸어와서 정중하게 물었다. 네흘류도프는 자기 명함을 주었다.
"남작께서도 공작님 말씀을 하시더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젊은 관리는 문을 열고 한 방으로 들어가더니, 상복을 입고 울고 있던 부인을 데리고 나왔다. 부인은 눈물을 감추기 위하여 앙상한 손으로 헝클어진 베일을 내렸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젊은 관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재 문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고 네흘류도프를 향해서 말했다.
서재에 들어간 네흘류도프는 프록코트를 입고 머리를 짤막하게 깎은 중키의 몸집이 탄탄한 남자와 마주쳤다. 그는 큼직한 사무용 테이블 옆 안락의자에 앉아서 즐거운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콧수염과 턱수염 속에서 유달리 불그레하게 보이는 얼굴이 네흘류도프를 보자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당신의 어머님하고는 예로부터 잘 아는 친구였지요. 당신도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지요. 장교였을 때도 본 일이 있고요. 자 앉으십시오. 무슨 일인지 말씀하세요."
그는 네흘류도프로부터 페도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짧게 깎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어서 이야기를 계속하세요. 잘 알았습니다. 그렇고말고요. 정말 동정할 만한 여자군요. 그래, 청원서는 제출했나요?"
"네, 청원서는 준비해왔습니다만." 네흘류도프는 호주머니에게 청원서를 꺼내면서 말했다.
"특히 각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 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려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내가 직접 청원하겠습니다." 하고 남작은 유쾌한 얼굴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동정의 빛을 띠면서 말했다.
"정말 동정이 가는군요. 그녀는 아직 어렸으므로 남편이 너무 노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싫어져서 반항을 한 게 분명합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좋습니다. 내가 직접 청원해 드리지요."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도 황후께 청원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네흘류도프의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작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어쨌든 청원서를 사무소에 먼저 내도록 하십시오. 나도 힘닿는 데까지 해볼 테니까요." 그는 네흘류도프에게 말했다.
이 때 젊은 관리가 방안으로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그는 자기의 걸음걸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 부인이 한 말씀만 더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들여보내요. 참 그 여잔 눈물도 많지. 그 눈물을 닦아 줄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어쨌든 되는 데까지 해볼 수밖에."
부인이 들어왔다. "아까 부탁드린다는 것을 잊었습니다만, 그이가 그 애를 다른 데로 보내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이가 무슨 짓을 할는지..."
"그래서 해드리겠다고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남작님, 부탁입니다. 제발 이 어미를 살펴주시는 셈치시고..." 그녀는 남작의 손에 키스를 했다.
"모든 일을 다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 부인이 밖으로 나가자, 네흘류도프도 작별 인사를 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법무성에도 연락해 두겠습니다. 그 곳에서 회답이 오면, 그 때는 가능한 한 도와 드리겠습니다."
네흘류도프는 서재를 나와 사무실 쪽으로 나왔다. 대심원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이곳에서도 장엄한 건물 안에, 복장에서부터 말씨에 이르기까지 단정하고 겸손하고 엄격하고 또렷또렷한 관리들을 많이 보았다.
'많기도 하군. 모두 기름기가 흐르고, 깨끗한 셔츠와 손, 반짝이는 구두, 도대체 누가 이토록 사치스러운 짓을 시키고 있을까? 이 사람들은 죄수들과 비교하면 말할 것도 없고, 농민들에 비해서도 얼마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네흘류도프는 무의식중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19
페테르부르크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는 인물은, 수많은 훈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보통 때는 단춧구멍에다 백십자 훈장 외에는 아무것도 달지 않는 독일계 남작 출신의 노장군이었다. 숱한 세월에 걸쳐 많은 공적을 세웠으나 지금은 사람들로부터 망령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카프카스에 근무하고 있을 때, 그 곳에서 특별히 그를 예찬해주는 이 십자훈장을 탔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그가 머리를 짧게 깎고 군복을 입고 총검으로 무장된 러시아 농민을 지휘해서 자기네들의 자유와 집과 가족을 지키려던 천 명이 넘는 삶들을 학살한 공로로 받은 훈장과 제복에 달 장식을 받았던 것이다. 그 후 몇 군데에서 더 근무했지만, 지금은 늙고 쇠약했기 때문에 훌륭한 저택과 수당과 현재의 명예로운 지위에 매달리게만 되었다. 그는 상부의 명령을 엄격히 이행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상부로의 명령에 그는 일종의 특별한 의의를 부여했기 때문에,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변경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 명령만은 절대로 변경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직무란 정치범들을 요새 감옥의 독방에 감금해 두는 일이었는데, 10년 동안에 그들의 과반수가 일부는 발광하고 일부는 폐병이거나 자살로 죽어가도록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굶어 죽거나, 유리조각으로 동맥을 끊거나, 목을 매거나, 분신자살을 하거나 했다.
노장군은 그러한 일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 이런 사건들은, 마치 벼락이라든가 홍수같이 자연히 일어난 불행이 그의 양심을 동요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전혀 그의 양심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러한 사건은 상부의 명령에 의해서, 즉 황제 폐하의 이름에 의해서 생기는 일들이었다. 이러한 명령은 필연적으로 실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 만큼, 그 명령의 결과를 생각해 본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노장군은 그런 문제 따윈 애당초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노장군은 자기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직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 명령의 수행을 조금이라도 소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것을 섣불리 생각하지 않는 편이 애국자로서, 또한 군인으로서의 의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1주일에 한 번씩 노장군은 직무 규정에 따라서 모든 감방을 순찰하고 죄수들에게 무슨 소망이 없느냐고 물었다. 죄수들은 가지가지의 청을 다 했다. 그는 그들의 말을 냉정하게 잠자코 들어 주기는 했지만, 이제껏 단 한 번도 실행에 옮겨본 일이 없었다. 그들의 요청은 하나같이 모두 규칙에 어긋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네흘류도프는 노장군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마침 종밭의 시계가 가냘픈 종소리로 신을 찬미하는 국가인 '하나님의 영광이 있을 때'를 울리고, 이어 2시를 쳤다. 이 종소리의 음악을 들으며, 네흘류도프는 불현 듯 전에 데카브리스트들의 수기에서 읽은 것을 상기했다. 매시간 되풀이되는 이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종신 징역수들의 마음에 어떻게 만향되었을까에 대해서 쓴 것이었다.
네흘류도프가 그 저택의 마차 대는 곳에서 내렸을 때, 노장군은 어두컴컴한 객실에서 자개를 박은 조그만 테이블 앞에 앉아, 자기 부하의 동생인 젊은 화가와 함께 접시를 가지고 점을 치고 있었다. 화가의 가늘고 작은 손가락이 노장군의 뻣뻣하고 주름투성이의, 뼈가 드러난 손가락과 서로 깍지를 끼고 있었다. 이 깍지 낀 두 손이 알파벳을 써 놓은 종이 위에서 엎어 놓은 접시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접시는, '사자의 영혼이 죽은 뒤에 서로 상대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하는, 장군이 낸 문제에 대답하고 있었다.
하인의 일을 맡아 보고 있는 사병이 네흘류도프의 명함을 가지고 들어왔을 때는, 접시를 통해서 바야흐로 잔 다르크의 영혼이 말하고 있을 때였다. 잔 다르크의 영혼은 알파벳의 문자를 한 자 한 자 이어서 '서로 상대를 식별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 대답이 종이에 쓰여졌다. 사병이 들어 왔을 때, 접시는 한번 P자 위에 멎었다가 O자 위로 갔다가, 다시 S자 위로 가서 멎더니 좌우로 뒤뚱거렸다. 접시가 흔들렸다. 왜냐하면, 장군의 생각에 의하면 다음 문제는 당연히 L자여야 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잔 다르크가 영혼은 모든 지상의 것으로부터 자기를 정화시킨 후에 비로소 서로 식별하게 되었다든가, 혹은 그와 비슷한 대답을 해야 했으므로 다음 문자는 반드시 L자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화가는 다음 글자는 반드시 V자여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화가는 영혼이란 에테르체에서 나오는 빛에 의해서 서로 식별하게 되는 것이라고 대답하리라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군은 굵고 흰 눈썹을 한참 손을 보고 접시가 저절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면서 L자 쪽으로 접시를 끌어당겼다. 한편 화가는 핏기 없는 푸른 창백한 눈으로 객실의 어두운 한구석을 바라보고 있다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떨면서 V자 쪽으로 접시를 끌어당겼다. 장군은 자기의 놀이를 방해한 데 대해서 미간을 찡그리더니 얼마 후에 명함을 집어 들고 코안경을 썼다. 넓적한 허리가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며, 저린 손가락을 펴면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섰다.
"서재로 안내해."
"각하, 나머지는 저 혼자 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화가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전 영혼이 거기 있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좋아, 혼자 해보게."
장군은 엄하고 결단적인 말투로 말한 다음, 다리를 쭉 뻗고 적당히 보조를 맞추면서 성큼성큼 서재 쪽으로 걸어갔다.
"잘 오셨소." 장군은 네흘류도프에게 사무용 테이블 옆의 안락의자를 권하면서 괄괄한 음성으로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페테르부르크에 온 지 오래 되셨소?" 네흘류도프는 온 지 얼마 안 된다고 대답했다.
"공작부인인 당신 어머니께서도 건강하시오?"
"어머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것 참 안되었군. 내 아들 녀석이 당신을 만났다고 하던데."
장군의 아들은 부친과 같은 출세 길을 밟아 육군 대학을 나온 뒤 첩보국에 근무하고 있으며, 거기서 맡은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가 맡고 있는 일은 첩보원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난 당신 아버지하고 같이 일하고 있었는데,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 그래 지금은 어디 나가고 있소?"
"아무데도 나가고 있지 않습니다." 장군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머리를 갸우뚱했다.
"사실은 각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좋소, 무슨 일이죠?"
"만일 저의 부탁이 부당한 것이라면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지만 저로서는 청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 무엇이오?"
"각하, 이곳 요새 감옥에 구르게비치라는 청년이 수감되어 있는데, 사실은 그의 어머니가 면회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안 되면, 책이라도 차입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장군은 네흘류도프의 청에 대해서, 만족한 빛도 보이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뭇 생각에 잠긴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실제는 네흘류도프의 청원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심조차 없었다. 규칙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다만 머리를 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당신도 알다시피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오." 잠깐 틈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면회에 관해서는 황제께서 정하신 규칙이 있으므로 그 규칙이 허용하는 범위라면 허가해 줄 수 있지. 그리고 책에 대해서는 영내에도 도서관이 있어서 허가된 책만을 볼 수 있고."
"그렇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학술 서적입니다. 공부하고 싶다고 하니까요."
"그런 소릴 곧이들어선 안 되오." 장군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공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귀찮게 굴어 보겠다는 것뿐이니까."
"그러나 괴로운 처지에 있으니까 시간을 보낼 무엇인가가 그에게 필요한 것입니다."하고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그들은 항상 불평만 늘어놓고 있소." 하고 장군은 반대했다.
"그들의 일이라면 우린 샅샅이 알고 있단 말이오." 장군은 그들이 마치 무슨 불한당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감옥에서 볼 수 없는 편의를 받고 있소."하고 장군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는 변명이라도 하듯이, 수감자들이 받고 있는 편의를 하나하나 상세하게 늘어놓았다. 마치 죄수들을 살기 좋고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데 이 감옥의 중요한 목적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사실 전에는 꽤 가혹하게 대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호강들을 하고 있지. 하루에 세 끼를 먹는데, 그 중 한 끼는 비프스테이크나 비프커틀릿 따위의 고기 요리를 먹거든. 일요일에는 그 밖에 더 좋은 일품요리가 제공되고 말이오. 그래서 모든 러시아 국민이 이와 같은 식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길 정도요."
장군은 딴 노인들과 똑같이, 일단 자기가 잘 알고 있는 화제가 나오게 되면 만족스러울 때까지 되풀이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죄수들이 버릇이 없고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수없이 한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종교서적과 낡은 잡지도 주고 있소. 우리 도서관에는 서적들이 비치되어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좀처럼 읽지 않아. 처음에는 흥미를 느끼는 듯하지만, 곧 내던지지. 새 책은 반밖에 읽지 않고 나머지는 페이지가 붙은 채로 그냥 남아 있지. 우리는 가끔 시험을 해보는데 헌책은 아예 집어 본 흔적도 없단 말이오." 장군은 미소도 아닌 야릇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일부러 종이를 끼워 놓아 보기도 하지만 그대로 있거든.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글 쓰는 것까지 금하고 있지는 않소." 하고 장군은 말을 이었다.
"석판도 석필도 주고 있으니까. 무엇이든지 써서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지우고 또 쓸 수가 있거든. 그런데도 역시 그들은 쓰지 않아. 그렇지만 그들은 곧 얌전해지지. 처음 얼마 동안은 떠들어 대지만, 좀 있으면 살도 찌고 몹시 조용해진다고." 장군은 자기가 하고 있는 말 속에 그 얼마나 무서운 의미가 내포되어 잇는지 조금도 의식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그 늙은이의 쉬어빠진 목소리를 들으면서, 뼈가 앙상한 손과 발과 흰 눈썹 밑의 퀭한 눈과 군복 깃에 걸치다시피 하여 축 늘어진 면도질한 볼이며 잔인한 살육의 대가로 받은, 유난히도 자랑거리로 알고 있는 그 십자 훈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반박하거나, 그의 말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도, 도무지 무익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일에 대해서 용기를 내어 물었다. 오늘 아침 석방 명령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슈스토바라는 여죄수의 일이었다.
"슈스토바? 슈스토바라... 그들의 이름을 낱낱이 외고 있을 수도 없지. 하도 많으니까." 그는 죄수가 너무 많은 것도 그들의 탓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리고 벨을 눌러 서기를 불러오라고 일렀다.
서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정직하고 결백한 사람은 특히 황제를 위해서, 또 '조국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하고, 은연중에 자기도 그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그러면서 네흘류도프도 봉직하라고 권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긴 했으나, '조국'이라는 말은 곁다리로 붙인 말에 지나지 않음이 명백했다.
"나는 이렇게 늙기는 했지만 힘껏 일하고 있소."
마침내 불려온 서기는 영리해 보이면서도 불안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는데, 말라서 바삭바삭 소리가 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나이로서 그는 슈스토바가 어딘가 이상한 요새에 갇혀 있으며 명령서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명령서가 오기만 하면 그 날로 석방될 거요. 우리는 그들을 붙잡아 두지 않소. 남아 있다고 해서 고마울 게 조금도 없으니까."하고 장군은 말하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했으나, 늙은 얼굴을 찡그리게 할 따름이었다.
네흘류도프는 이 무서운 노인에 대해서 느낀 혐오와 연민이 뒤섞인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노인대로 틀림없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이 경박한 청년, 자기의 옛 친구의 아들에 대해서 너무 엄격하게 다루어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마디의 훈계도 없이 그대로 보내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 잘 가요. 그러나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오. 나는 당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얘기하는 것이니까. 여기 감금되어 있는 무리들과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오. 죄가 없는 자라곤 없으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다시 없는 부도덕한 자들뿐이오. 우리들은 그들을 잘 알고 있지."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는 듯이 그는 말했다. 사실 그는 이 점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 그대로라는 것이 아니라, 만일 그것이 사실과 어긋난다면 자기 자신 마음껏 훌륭한 생활을 누려온, 존경을 받을 만한 영웅이 아니라 젊을 때부터 자기 양심을 팔아 왔고, 늙어서까지 계속 팔고 있는 악덕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가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봉직을 해야지."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황제께서는 성실한 인간을 필요로 하시니까. 또 조국을 위해서도."하고 그는 덧붙였다.
"가령 나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신처럼 봉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소? 도대체 누가 남겠느냔 말야? 그냥 제도를 비판만 하고 정부를 도우려고 하지 않는다면..."
네흘류도프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면서, 너그럽게 내민, 뼈만 앙상한 큼직한 손과 악수하곤 방을 나왔다.
장군은 불만스러운 듯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곤 허리를 문지르면서 다시 객실로 갔다. 객실에는 아까 그 화가가 잔 다르크의 영혼에서 얻은 회답을 써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은 코안경을 쓰고 읽었다.
'영혼이 서로 상대를 식별하는 것은 그 에테르체에서 발산하는 빛에 의한다.'
"허!" 장군은 눈을 감고 감탄해 마지않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어느 영혼의 빛도 똑같다면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그는 이렇게 묻고, 또 화가의 손가락을 맞끼고 테이블에 앉았다.
네흘류도프의 마차는 문을 나섰다.
"거긴 무척 따분한 곳이죠, 나리." 마부는 네흘류도프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기다리다 못해 가버릴까 했습죠."
"사실이야. 참 지리한 곳이야." 네흘류도프는 심호흡을 하면서 연기와도 같이 흘러가는 하늘의 구름과 보트와 기선이 지나간 뒤에 남은 네바 강의 반짝반짝 빛나는 물결을 바라보며 마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20
이튿날 마슬로바의 사건 심리가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네흘류도프는 대심원으로 갔다. 그는 벌써 몇 대의 마차가 멈춰 있는 대심원 건물의 장엄한 문 앞에서 변호사와 만났다. 장엄한 본관 계단을 통해서 2층으로 올라가자, 구석구석까지 죄다 알고 있는 변호사는 재판법 제정 연대가 새겨져 있는 왼쪽 문으로 갔다. 기다란 첫 번째 방에서 외투를 벗고, 심의원 전원이 모였다는 것과 맨 마지막 의원이 방금 들어갔다는 것을 수위로부터 듣자 파나린은 하얀 와이셔츠의 가슴팍이 보이는 연미복에 넥타이를 맨 채 유쾌하고 자신 있는 태도로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방 오른쪽에는 큼직한 옷장과 테이블이 있고 왼쪽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었는데, 마침 이 때 가방을 겨드랑이에 낀, 제복을 입은 의젓한 관리가 내려왔다. 이 방에서 먼저 눈에 띈 것은, 흰 수염을 길게 기르고 신사복에 회색 바지를 입은, 장로같이 생긴 노인이었다. 그 옆에는 두 명의 관리가 공손히 서 있었다.
백발의 노인은 옷장 곁으로 가더니 훌쩍 어디론지 사라졌다. 이 때 파나린은 자기와 똑 같은 연미복에 흰 넥타이를 맨 한 동료 변호사를 보고 곧 그와 쾌활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네흘류도프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방청인들은 모두 합쳐서 15명이 있었는데 그 중 두 명은 여자였다. 한 사람은 코안경을 쓴 젊은 여자였고, 또 한 사람은 백발의 노파였다. 신문의 명예훼손 사건의 공판이 있는 탓인지,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 대부분은 신문사 관계의 사람들이었다.
근엄한 제복을 입고 볼이 불그스름하고 잘생긴 정리가 서류를 한 손에 들고 파나린에게로 다가오더니 그가 관계하는 사건이 무엇인가를 묻고, 마슬로바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자 무엇인지를 기입하고 물러갔다. 이 때 옷장 문이 열리면서 그 속에서 장로같이 생긴 노인이 나타났다. 그러나 양복을 입지 않고 반짝이는 금속 기장을 가슴에 달고 금몰이 달린 옷을 입고 있어서, 그 법복 차림은 흡사 새를 연상케 했다.
이 우스꽝스러운 복장에는 그 노인 자신도 당황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여느 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입구와는 반대쪽의 문을 열고 허둥지둥 들어갔다.
"저 사람이 베 씨입니다. 모두들 존경하고 있지요." 파나린이 네흘류도프에게 말했다. 이어 그는 네흘류도프를 그의 친구에게 소개한 다음 그의 가장 흥미 있는 사건, 즉 오늘의 소송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심의는 곧 시작되었다. 네흘류도프는 방청인들과 함께 왼쪽 법정으로 들어갔다. 파나린도 다 같이 방청석으로 정해져 있는 칸막이 저쪽으로 갔다. 페테르부르크의 변호사만 칸막이 앞의 테이블 곁으로 갔다.
대심원의 법정은 지방재판소보다 좁았고 구조도 간단했다. 심의원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는 녹색 나사가 아니라, 금몰을 박아 넣은 빨간 비로드가 덮여 있는 점만이 지방재판소와 달랐다. 그리고 다른 재판소에서도 다 비치해 놓은 거울과 성상과 황제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여기서도 역시 정리가 "개정!"하고 장엄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일제히 기립하고 법복을 입은 심의원들이 입장하여 등받이가 높은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의젓한 태도를 보이려고 애쓰면서 테이블 위에다 팔꿈치를 괴었다. 모두가 지방재판소와 똑같았다.
심의원은 4명이었다. 의장 니키틴은 말쑥하게 면도를 하고 길쭉한 얼굴에 쇠처럼 차가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볼리프는 입을 굳게 다물고 하얀 손으로 사건 기록을 넘기고 있었다. 다음 스코보로드니코프는 곰보에 뚱뚱하고 육중한, 학자 출신의 법률가였다. 네 번째인 베는 제일 마지막에 들어온 장로같이 생긴 노인이었다. 다음에 심의원들과 함께 서기관장 겸 검사국차장이 들어왔다. 그는 말쑥하게 수염을 깎은, 무뚝뚝하고 얼굴빛이 까맣고, 검은 눈에 슬픈 빛이 감돌고 있는 중키의 청년이었다.
네흘류도프는 이 남자가 이상한 복장을 하고 5, 6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대학 시절의 가장 친했던 친구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저 사람은 검사국 차장 셀레닌이 아닙니까?" 그는 변호사에게 물었다.
"네, 왜 그러십니까?"
"그 사람이라면 잘 압니다. 훌륭한 사람이죠."
"검사국 차장으로 있는데 수완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 부탁할 걸 그랬군요."하고 파나린이 말했다.
"그러나 이제 와선 그럴 시간이 없군요." 파나린은 시작된 심의에 귀를 기울이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지방 재판소의 판결에 아무런 수정도 없이 채용된 공소원의 판결에 대한 상소심이 막 시작되었다. 네흘류도프는 귀를 기울여, 지금 눈앞에서 행해지고 있는 심의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역시 여기서도 지방재판소 때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점에 변론이 이르지 않고, 완전히 지엽적인 일만 문제 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의되고 있는 사건은 모 주식회사 대표자의 사기 행위를 들춰 낸 신문의 사설 기사에 관한 것이었다.
네흘류도프는 그 대표자의 배임 행위가 사실인지 아닌지, 사실이라면 그러한 배임 행위를 막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을 써야 하는지의 여부가 마땅히 심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이에 관해서는 하등의 논의가 없었다. 다만 그런 기사를 게재할 권리가 법률상 신문 발행자에게 있는지 없는지, 또 그것을 게재했다는 사실이 어떤 범죄에 속하게 되는지, 즉 명예 훼손이냐 중상이냐, 그렇잖으면 명예 훼손죄에 중상죄를 포함하게 되는지, 혹은 중상죄에 명예 훼손죄를 포함하게 되는지 하는 문제라든가, 그 밖에 여러 가지 법률 조문이나 판례라든가 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이해되기 힘든 문제에 관해서만 논의되고 있었다.
네흘류도프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사건을 보고한 볼리프가 어제 자기에게 대심원은 사건의 본질을 심의할 수 없다고 그토록 엄숙히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관해서는 분명히 공소원 판결의 기각에 유리한 듯한 보고를 하고 있다는 것과, 이에 대해 평소 소극적인 성격의 셀레닌이 격렬한 어조로 반대 의견을 진술했다는 것이다. 셀레닌이 네흘류도프를 놀라게 할 만큼 열변을 토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가, 주식회사의 대표자가 돈에 대해서는 매우 치사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과 더군다나 볼리프는 이 사건의 전날 밤에 그 대표자한테서 굉장한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볼리프가 매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분명히 편파적인 보고를 하는 것을 보자, 셀레닌은 버럭 화가 나서 대수롭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서 신경질적인 의견을 말하게 된 것이다. 그 반론은 틀림없이 볼리프의 마음을 상하게 한 듯싶었다. 볼리프는 얼굴을 붉히고 몸을 떨었으나, 입 밖에는 내지 않고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근엄하면서도 화가 난 표정으로 다른 심의원들과 함께 회의실로 나가버렸다.
"당신이 어떤 사건에 관계하고 있다고 하셨지요?" 심의원들이 나가자 정리가 다시 파나린에게 물었다.
"마슬로바 사건이라고 먼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하고 파나린이 말했다.
"아, 그러셨지요. 그 사건은 오늘 심의가 됩니다만, 그러나..."
"그러나 어떻단 말씀입니까?"하고 변호사가 물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사건이 저쯤 되었으니 심의원들이 판결 후 다시 출정하실지 어떨지 알 수 없군요. 그렇더라도 말은 해보겠습니다만..."
"그게 무슨 말씀이죠?"
"아무튼 말은 해보겠습니다." 정리는 부전지에다 무엇인가 써넣었다.
사실인즉, 심위원들은 명예 훼손 사건의 판결을 선고한 마슬로바의 사건을 포함하여 나머지 사건은 회의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며 처리해 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1
볼리프는 심의원들이 회의실 테이블 앞에 앉자마자, 무척 유창한 말투로 원판결이 폐기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의장은 평소에도 워낙 심술궂은 위인이었지만, 오늘은 가뜩이나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법정에서 사건을 들으면서 재빨리 자기 의견을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지금 볼리프가 하는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자기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기가 오래 전부터 바라고 있던 자리에 자기를 앞질러서 빌랴노프가 임명된 데 대해서 어제 자기 비망록에 써놓은 글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장 니키틴은 재직 중에 자기가 접촉해온 칙임관급 이상의 여러 고관에 대한 비평을 기록해 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어제 적어둔 한 문장에는 칙임관급의 몇몇 관리들을 혹독하게 비판해 둔 대목이 있었다. 그것은 그 고관들이 현재의 위정자들이 끌고 가려는 파멸로부터 러시아를 구하려고 하는 자기를 방해했다는 글이었으나, 실은 그들이 현재보다도 더 많은 봉급을 받으려는 그의 시도를 방해한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비망록 속에 적어 놓은 글이 자손들에게 얼마나 새로운 광명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물론입니다." 그는 볼리프가 자기에게 한 말이 무엇인지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베는 앞에 놓인 종이에 화환을 그리며, 침통한 얼굴로 볼리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베는 지극히 순수한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60년대의 전통을 신성하게 견지하고 있어서, 가령 엄정 중립에서 한 발짝 양보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자유주의를 옹호한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사건에서도 베는, 명예 훼손으로 고소를 제기한 주식회사의 대표자가 더러운 인간이라는 사실 이외에 신문기자를 명예 훼손죄로 처벌한다는 것은 출판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도 이 상고를 기각해야 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볼리프의 논증이 끝나자 아직 화환을 다 기리지 못했으나 서글픈 얼굴로, 이를테면 그렇게 명백한 이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서글프다는 듯이 부드럽고 경쾌한 목소리로, 이 상소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간단히, 그러나 설득력 있는 논법으로 증명한 다음 백발의 머리를 숙이고 계속해서 화환을 그리기 시작했다.
볼리프와 마주앉은 스코보로드니코프는 시종 굵은 손가락으로 턱수염과 콧수염을 쓸어 모아 입에다 넣고 있었으나, 베의 말이 끝나자마자 턱수염을 씹던 동작을 멈추고 큰 소리로 주식회사의 대표자가 사기꾼이라고 할지라도, 만일 법률적인 근거만 있다면 자기는 원심 판결의 폐기를 주장했을 것이나, 그러한 근거만 있다면 자기는 세묘노비치 베의 의견에 찬동하는 바라고 말했다. 그는 이로써 볼리프에게 따끔히 침을 준 것이라고 내심 기뻐했다. 의장이 스코노로드니코프의 의견에 찬성해서 이 사건은 부결되었다.
볼리프는 마치 자기가 부정한 편을 들다가 제지당한 꼴이 된 것이 매우 불만스러웠으나, 짐짓 냉정한 척하며 다음 사건, 마슬로바의 사건 기록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그 동안에 심의원들은 벨을 눌러서 차를 가져오게 했으며, 카멘스키의 결투와 더불어 그 당시 페테르부르크 시민의 화젯거리가 되었던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것은 형법 제955조에 해당되는 혐의로 체포된 모 국장에 관한 사건이었다.
"정말 추잡한 일이야!"하고 베는 내뱉듯이 말했다.
"무엇이 추잡하다는 말이오? 어느 독일 문학가의 의견을 쓴 러시아의 책을 보여드릴까요? 그는 이런 것은 범죄라고 생각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성들끼리의 결혼도 가능하다고 했거든요."하고 스코보로드니코프가 손가락 사이의 손바닥 안쪽 깊숙이 구겨진 담배를 뻑뻑 빨면서 큰소리로 껄걸 웃어댔다.
"저런 엉터리 같은!"하고 베는 말했다.
"그럼 다음에 보여 드리죠." 스코보로드니코프는 책 이름과 발행일자, 그리고 발행소까지 들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시베리아의 어느 마을의 지사로 임명되어 간다는 소문이 있던데."하고 니키틴이 말했다.
"잘되었군. 주교가 십자가를 들고 그를 환영할 거야. 그런 주교도 때론 필요한 거야. 무엇하다면 그런 사람을 내가 하나 소개해도 되지."하고 스코보로드니코프는 말하면서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내던지고는 콧수염과 턱수염을 잡히는 대로 입에다 갖다 넣고 질근질근 씹기 시작했다.
이 때 들어온 정리가 마슬로바의 사건 심리에 네흘류도프와 변호사가 입회를 원한다는 보고를 했다.
"아 그래,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말이오."하고 볼리프는 말했다. "대단히 로맨틱한 이야기가 있지요."하고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의 관계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그들은 이 사건에 관해서 한바탕 이야기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신 다음, 법정으로 나가 앞의 사건의 판결을 선고하고 마슬로바의 사건을 심의하기 시작했다.
볼리프는 그 가느다란 목소리로 마슬로바의 상소 이유를 상세히 보고했으나, 이번에도 절대로 공정하다고 할 수 없는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싶은 듯 심의하기 시작했다.
"첨가할 말은 없습니까?"하고 의장은 파나린을 향해서 물었다.
파나린은 일어서서, 넓고 흰 와이셔츠를 입은 가슴을 내밀고 설득력 있는 표현으로 원심 판결이 법률에 위배되어 있다고 여섯 가지 점을 들어 설명해 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간단하나마 이 사건의 본질에 있어 원심 판결의 너무나도 명확한 불합리성을 지적했다. 파나린의 짧고 힘찬 변론의 어조는 변론을 하는지 주장을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즉, 심의원들이 그 예리한 통찰력과 법률상의 지식으로써 자기보다 훨씬 잘 관찰하고, 또 이해하고 계신 것을 감히 자기와 같은 사람이 구차스럽게 말씀드리는 것은 직책상 하는 수 없는 일이라는 듯한 어조였다. 파나린의 변론을 듣고 난 뒤에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대심원이 판결을 파기할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론을 끝내자 파나린은 승리자와도 같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줄곧 변호사를 보고 있던 네흘류도프는 변호사의 그 미소를 알아차리고 사건의 승소를 확인했다.
그러나 심의원들을 흘끔 보았을 때 그는 파나린 한 사람만이 미소를 띠고 개가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심의원들과 검사국 차장은 미소를 짓지도 않았고 승리의 기색도 없었으며, 오히려 지루하기만 하고, '기네들의 이야기는 이제 싫증이 났어. 그런 이야기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들이야.'하는 듯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변호사의 변론이 끝나자 공연한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처럼 만족하는 듯한 빛을 보였다. 변호사의 이야기가 끝나자 의장은 곧 검사국 차장의 발언을 청했다. 셀레닌은 간단하기는 했으나, 명료하고 정확하게 상소 이유가 불충분하므로 원심 판결을 취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심의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상의하기 위하여 회의실로 갔다. 회의실에서는 의견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볼리프는 원심 판결의 기각을 주장했고, 베는 진상을 알고 있었으므로 전번 법정에서의 광경과 배심원들의 오류를 자기가 똑똑히 보기라도 한 듯이, 동료들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열심히 원심 판결의 기각을 주장했다. 한편 니키틴은 여느 때와 같이 엄정성과 형식주의를 존중하여 반대를 했다. 그래서 사건 처리는 스코보로드니코프의 한 표로 결정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네흘류도프가 도덕적인 요구 때문에 그 여자와 결혼하려 한 결심이 그에게는 다시 없이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상소 기각을 주장하는 편에 섰다.
스코보로드니코프는 유물론자였으며 다윈주의자였다. 모든 추상적인 도덕상의 현상은 물론, 심지어 종교상의 현상까지도 경멸할 만한 어리석은 짓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모욕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 매춘부 때문에 이렇게 소란을 피우고, 그 여자를 변호하기 위해 유명한 변호사와 네흘류도프 자신이 대심원으로 나왔다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는 턱수염을 입에 물고 얼굴을 찌푸리면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상소 이유가 허술하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도를 극히 자연스럽게 취하면서, 자기는 상소를 기각한다는 의장의 의견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상소는 기각되고 말았다.
22
"무서운 일이야!" 네흘류도프는 서류 가방을 다 챙긴 변호사 파나린과 같이 대기실로 들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극히 명백한 사실을 형식에 얽매여서 기각하다니, 무서운 일이야!"
"이 사건은 이미 원심에서 실패한 것입니다."하고 변호사가 말했다.
"게다가 셀레닌까지 기각에 찬성하다니, 정말 무섭고 무서운 일이야!"하고 네흘류도프는 몇 번이고 이 말을 되풀이했다. "대체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황제한테 청원해 봅시다. 여기 계시는 동안에 직접 제출하십시오. 제가 써 드릴 테니까요."
그때 법의에 여러 개의 훈장을 단 왜소한 체구의 볼리프가 대기실로 들어와서 네흘류도프 곁으로 왔다.
"이런 데서 자넬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 그는 네흘류도프가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들어왔다.
그는 네흘류도프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입가에는 미소를 띠었으나 눈에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자네가 페테르부르크에 와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무슨 일로 여기엔?"
"여기에? 공평한 재판을 바라고, 아무 죄도 없이 유죄 판결을 받은 여자를 구해 보려고 왔어."
"어떤 여자인데?"
"방금 판결된 사건이야."
"아, 마슬로바의 사건이군!" 셀레닌은 아까 일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근거가 아주 허술한 상소던데."
"문제는 상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에 있네. 아무 죄도 없는데 벌을 받고 있으니까 말일세."
셀레닌은 한숨을 쉬었다.
"흔히 있는 일 아냐. 그러니..."
"있을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틀림없네."
"어떻게 아나?"
"내가 배심원이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우리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자 알고 있다네."
"그럼 그 때 이의를 말하지 그랬나."하고 그는 말했다.
"이의야 말했지."
"공판 기록에 기재가 됐어야 하는데. 상소장에도 기재되어 있었더라면 좋았을 걸..."
셀레닌은 항상 분주해서 별로 사교계 출입이 없었기 때문에, 네흘류도프의 로맨스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흘류도프는 그것을 눈치 챘으나, 마슬로바와의 관계를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판결이 엉터리라는 것은 분명하지 않나?"하고 그는 말했다.
"대심원에서는 그런 것을 말할 권리가 없는 걸세. 만일 대심원에서 원심 판결이 정당하냐 정당치 못하냐 하면서 멋대로 재판소의 판결을 파기한다면, 대심원은 맏을 만한 근거를 상실하게 되고, 정의를 옹호하느니보다 오히려 그것을 침해할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네. 그건 차치하고라도 그렇게 되면 배심원의 결의는 그 의의를 상실하게 될 테니까."하고 셀레닌은 방금 심의된 사건을 생각하면서 말했다.
"나는 그 여자가 완전히 결백하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네. 그리고 이 부당한 선고에서 그 여자를 구해 줄 수 있는 최후의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최고 법정에서 완전히 불법을 확정한 셈이지."
"확정된 것은 아니야. 대심원은 사건 자체를 심의하는 것도 아니고, 또 심의할 수도 없는 걸세." 셀레닌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이모님 댁에 유숙한다고 그랬지?" 그는 화제를 돌리려고 이렇게 물었다. "어제 자네 이모님한테서, 자네가 와 있다는 말을 들었네. 외국에서 온 선교사의 모임에 자네하고 같이 참석해 달라고 백작 부인으로부터 초대장이 왔었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셀레닌이 말했다.
"참석은 했었는데, 싫증이 나서 중간에 나와 버렸어." 네흘류도프는 화제를 돌리는 셀레닌한테 화가 나서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왜 싫증이 났나? 하긴, 한쪽으로 치우친 편파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역시 종교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겠나?"하고 셀레닌이 말했다.
"그건 쓸데없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아."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아냐, 그렇지 않아. 오히려 우리가 우리들 교회의 교리도 모른다는 것이 이상한 거야. 게다가 우리는 러시아 정교의 근본 원리를 무슨 새로운 계시나 되는 양 착각하고 있거든."
셀레닌은 분명히 자기가 품고 있는 새로운 종교관을 옛 친구에게 알려 주려고 성급히 언명했다.
네흘류도프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서 "놀라운 일이군."하고 그는 말했다.
"아무튼, 나중에 또 얘기하기로 하세."하고 셀레닌은 말했다. "우리 꼭 만나세."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자네 날 찾아 주지 않겠나? 나는 7시 저녁 식사 때에는 언제나 집에 있다네. 집은 나제첸스카야 거리에 있네." 그는 다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갈 수 있게 되면 가지."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으나, 옛날에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셀레닌이 이런 짧은 대화에서, 현실적으론 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갑자기 아무런 인연이 없는 타인처럼 느껴졌다.
23
네흘류도프는 알고 있는 대학생 시절의 셀레닌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아들이었고 충실한 벗이었으며, 언제 보아도 점잖고 용모가 단정하며, 지극히 성실하고 정직한 인간이었다. 그는 별로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성적이 뛰어나고, 진급 논문을 쓸 때마다 금메달을 탔으나 조금도 우쭐거리지 않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는 말만 내세우지 않고 실제로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을 젊은 날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가에 봉사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 자기의 모든 정력을 기울여 일할 수 있는 분야를 조직적으로 검토하고, 결국 법률을 제정하는 고등 법원의 제 2부라면 자신도 가장 유익한 일을 하게 되리라 생각하고 그곳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기에게 요구되는 모든 일을 성심껏 정확하게 처리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일에서 남을 위하여 유익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자기 본래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도 없거니와, 자기 역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질 수도 없었다. 이 불만은 지극히 옹졸하고 허영심이 강한 직속 상관과 충돌할 때마다 더 커져 갔으므로, 결국 그는 고등 법원의 제 2부를 그만두고 대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심원은 훨씬 나았으나, 그런 불만은 여전히 뒤따라 다녔다.
그는 항상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일과 현실이 전혀 상반된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대심원에서 근무하고 있던 중, 친척들의 주선으로 시종관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는 금몰이 달린 예복에 흰 리넨의 가슴받이를 걸치고, 이런 요직에 앉게 해분 분들에게 인사를 보아도 이 직무의 합리적인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현재의 그로서는 관청 근무를 하고 있을 때마다 더욱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그를 만족스런 자리에 앉게 해주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고 이 임명을 거절하지 못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자기의 비열한 근성을 기분 좋게 어루만져 주기도 했었다. 금몰로 수놓은 예복 차림의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본다든가, 이번 임명으로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존경심을 이용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에게 퍽 만족감을 주었다.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결혼을 했을 때에도 일어났다. 세속적인 관점으로 봐서 매우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그가 결혼한 중요한 이유는 역시, 만약 그가 결혼을 거절하기라도 한다면 이 결혼을 원하고 있던 신부와 이 결혼을 성립시키려 중매한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 되고, 틀림없이 그들에게 불쾌감을 주리라는 생각과, 동시에 명문가의 젊고 사랑스러운 규수와의 결혼이 그의 자부심을 한층 북돋워서 그에게 큰 만족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결혼을 관청 근무나 시종관의 일보다 더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첫아이를 낳자 아내는 더 이상 아이 낳기를 마다하고 호화로운 사교 생활로 들어갔으므로 그도 아내와 더불어 그런 사회로 말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별로 아름답지도 않았고 남편에게 충실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런 생활 태도로써 남편의 생활을 망쳐 놓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녀 자신도 또한 노력의 소모와 피로감 이외에 이 생활에서 얻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온갖 방법을 다해서 이런 생활을 바꿔 보려고 했지만, 친척과 친지들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아내의 바위처럼 확고한 신념 앞에는 마치 돌담에라도 부딪친 양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언제나 다리를 드러내고 있는 어린 딸은 그에게는 남의 집 아이처럼 생각되었다. 특히 그가 희망하고 있는 것과는 전연 다른 방법으로 양육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생각은 더했다. 부부간에는 세상의 흔한 몰이해가 깔려 있었으며, 심지어 서로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예절에 억제된 무언의 냉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가정생활은 다시 없이 괴로운 것이 되었다. 그래서 가정생활이 관청의 근무나 궁중의 지위보다 더 '잘못된 것'임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잘못된 것'은 종교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그는 동료들이나 같은 연배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교육받아 왔던 종교적 미신의 속박을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자신의 지적 성장과 더불어 타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 그런 속박에서 해방되었는지는 자기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진지하고 성실한 남자였으므로, 청년 시절, 대학 시절, 그리고 네흘류도프와 친했던 시절에는 공인 종교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고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특히 당시 사회에 밀려온 보수적 반동사상의 대두와 더불어 이 종교적 자유는 방해가 되기 시작했다. 집안의 여러 관계, 특히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와 그 추도회 때 어머니가 성사를 받으라고 요구했고, 또 공론이 이를 요구했던 것은 문제 삼을 것이 못 된다 할지라도, 직무상 예배식이나 성찬식이나 감사기도 같은 의식에 항상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실 표면적인 종교상의 갖가지 형식에 관계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의식을 피할 수도 없었다. 이런 의식에 참석하는 이상, 안 믿으면서도 믿는 시늉을 한다거나, 혹은 이런 모든 표면적인 형식을 허위로 인정하고, 허위로 인정되는 자리에 참석할 필요가 없도록 자기의 생활을 뜯어고치든가, 그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일이라도, 막상 실행에 옮기려고 하면 여러 가지 장애가 뒤따랐다. 가까운 사람들과 항상 싸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처지를 변경하고 직무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리고 자기가 이제껏 그 관직에 있음으로써 인류를 위하여 공헌하고 있다고 믿고, 앞으로는 더한층 공헌할 수 있으리라는 모든 포부를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끝까지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소나마 역사를 배우고 대체로 종교의 발생과 기독교의 발생, 분별을 아는 현대의 교양인이라면 누구든지 자기의 상식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듯이, 그 역시 자기를 정당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교회의 교의의 진실성을 믿지 않고 자기의 정당성을 믿었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갖가지 조건의 압력 때문에 그와 같이 정직한 인간도 조그만 허위를 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합리한 것을 불합리하다고 단정 지으려면 우선 그 불합리한 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조그마한 허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가 그 속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커다란 허위 속으로 그를 끌어들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라온 정교의 세계, 주위 사람들로부터 요구받고 있고, 또 이를 인정치 않고는 인류를 위해서 유익할 자신의 활동을 계속할 수 없는 정교의 세계라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자문해 보았으나 이미 그의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는 불테르, 쇼펜하우어, 스펜서, 콩트의 저서를 읽지 않고, 헤겔의 철학서와 뷔네의 호마코프의 종교 서적을 읽었으며, 그 속에서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즉 종교적 교외의 평안과 변호 같은 것을 찾아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이를 이성으로써 부정하고 있기는 했지만 어려서부터 이교의 속에서 자라왔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의 생활은 불쾌한 것으로 충만될 것이며, 일단 이것을 인정해 버리면 일체의 불쾌한 일이 순식간에 소멸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판에 박은 일체의 궤변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 개개의 이성은 진리를 인식할 수가 없다. 진리는 오직 사람들의 결합체에만 계시된다, 진리 인식의 유일한 방법은 계시이다, 계시는 교회에 의해서 보존된다는 등등의 궤변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 그 때부터 허위를 행한다는 의식도 없이, 아주 평안한 마음으로 의젓하게 기도식이나 추도식에 참석하게 되었고, 성사를 받거나 성상을 향해 성호를 그을 수도 있었으며, 계속 직무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덕택으로 인류에 이익을 베푼다는 의식과 즐겁지 않은 가정생활에서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이 신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반면에 신앙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잘못된 것'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눈은 늘 수심에 차 있었다. 또 그 때문에 그는 그의 마음속에 그러한 허위가 미처 뿌리도 박히기 전에, 가까운 친구 네흘류도프를 만나자 순진했던 옛날의 자기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더욱이 종교관에 있어서는 네흘류도프에게 말한 뒤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것이 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네흘류도프 역시 옛 친구를 만난 기쁜 첫인상이 사라진 다음에 이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으나 어느 쪽도 만날 기회를 마련하려고 하지 않아, 네흘류도프가 페테르부르크에 체재하는 동안 두 사람은 끝내 다시 만나지 않았다.
24
대심원을 나온 네흘류도프와 변호사는 나란히 보도를 걸어갔다. 변호사는 자기 마차를 뒤따라오도록 이르고, 네흘류도프에게 심의원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모 국장의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국장의 죄상이 폭로되던 경위와 법률상으로는 마땅히 징역을 받아야 했지만, 그 대신 시베리아의 어느 현의 지사로 임명되었다고 했다. 변호사는 이 사건의 경위와 추악상을 모두 말해 버리고 나서, 오늘 아침에 그들이 그 옆을 지나쳐 온 아직도 공사가 반쯤 된 채 버려져 있던 기념비의 건립을 위해 모은 기부금을 여러 고관들이 착복했다는 이야기, 모 인사의 정부가 거래소에서 수백 만 루블이나 벌었다는 것, 누구하고 누가 아내를 매매했다는 이야기 등을 신이 나서 말한 다음, 정부 고관들이 온갖 사기와 범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감옥은커녕 각종 관청의 요직에 도사리고 앉아 있다는 이야기를 지껄여댔다.
변호사에게는 이러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해 보였고, 그러한 이야기가 변호사 자신에게도 무척 만족을 주는 듯했다. 그것은 변호사로서 돈을 버는 방법은 돈을 벌기 위해 페테르부르크의 다른 고관들이 사용하는 수단에 비해 훨씬 정당하고 죄가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입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변호사는 네흘류도프가 고관들의 범죄에 관한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작별을 고한 뒤 마차를 잡아타고 강가에 있는 집 쪽으로 돌아가 버리자, 무척 놀랐던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우울했다. 대심원이 상소를 기각했기 때문에 죄 없는 마슬로바가 억울한 고통을 받게 될 것과, 그 기각이 그녀와 운명을 같이하려는 자신의 변함없는 굳은 결의를 더욱 괴롭혀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변호사가 그토록 신이 나서 말한 활개를 치고 있는 그 가공할 이야기와, 원래 얌전하고 무엇이나 솔직하게 이야기하던 그 고귀했던 셀레닌의, 가시 돋친 냉정하고 불쾌한 눈초리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서 그의 슬픔은 한층 더 심해졌다.
네흘류도프가 집에 들어오자, 문지기는 다소 업신여기는 듯한 표정으로 어떤 여인이 문지기 방에 써놓고 간 편지를 주었다. 그 편지는 슈스토바의 어머니가 쓴 것이었다. 그녀는 딸의 은인이며 구원자인 네흘류도프에게 감사의 말을 드리려고 왔었으며, 바실리예프스키 5가의 자기네 집으로 와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과, 그것은 베라 예프레모브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는 사연이었다. 번거로운 감사의 말을 드려서 괴로움을 끼치지 않겠으니 안심하시고, 오직 한번 뵙기만 해도 기쁘겠으며, 만일 틈이 나신다면 내일 아침에 와 주실 수 없겠느냐는 내용의 것이었다.
또 한 통의 편지는 네흘류도프의 옛 친구인 시종 무관 보가트이레프로부터 온 것으로 네흘류도프 자신이 준비해 온 분리파 교도를 위한, 그들 명의의 청원서를 직접 황제에게 올려 달라고 이 친구에게 부탁했던 일에 대한 답장이었다. 보가트이레프의 편지는 굵직하고 무게 있는 필적으로 쓰여 있었다. 그는 약속한 대로 직접 황제에게 내겠으나, 얼핏 생각이 난 것이지만, 네흘류도프가 직접 이 사건의 담당자에게 미리 부탁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쓰여 있었다.
네흘류도프는 이번 페테르부르크에 체재하는 동안, 최근 며칠 동안에 받은 인상으로는 무엇 하나 뜻대로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아주 절망적인 심정에 빠져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세웠던 계획은, 사회생활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청년 시절의 공상과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페테르부르크에 온 이상, 계획했던 모든 일을 실행하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일은 우선 보가트이레프를 방문한 후, 그의 충고대로 분리파 교도의 사건 담당자들을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그가 서류가방에서 분리파 교도 사건의 청원서를 꺼내 읽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백작 부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하인이 들어와, 2층으로 차를 마시러 올라오라는 말씀이 있었다고 전했다.
네흘류도프는 곧 가겠노라고 대답하고 서류를 가방 속에 도로 넣고는 이모가 있는 방으로 갔다. 2층으로 가는 도중 그는 창 밖에 있는 마리에트의 두 필의 밤색 말이 끄는 마차를 발견했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지고 빙그레 미소까지 떠올랐다.
마리에트는 모자를 쓴 채, 평상시의 까만 빛깔이 아니라, 여러 가지 빛깔이 섞인 밝은 옷을 입고, 찻잔을 손에 든 채 백작 부인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와 반짝이는 눈을 하고 무엇인가 열심히 지껄이고 있었다. 네흘류도프가 방 안으로 들어섰을 떄, 마침 마리에트가 무슨 우스꽝스럽고 점잖지 못한 이야기를 했는지 코 밑에 잔털이 있는, 사람 좋은 백작 부인은 뚱뚱한 몸을 흔들어 대면서 배를 안고 웃었다. 마리에트는 장난기 있는 표정에 웃음을 담은 입을 찡그리며 정력적이고 쾌활한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말없이 상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흘류도프는 단 몇 마디의 이야기로써, 두 사람의 화제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제 2의 뉴스로 되어 있는 신임 시베리아 지사의 에피소드라는 것을 알았다. 마리에트가 이에 관하여 무슨 우스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백작 부인이 오랫동안 웃음을 그칠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사람 죽이는군요." 기침을 하면서 백작 부인이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인사를 하고 두 사람 옆에 앉았다. 그가 마리에트의 경박함을 탓하려고 하자, 그녀는 그의 얼굴에 감도는 적이 불만스럽고 진지한 표정을 알아차리고, 곧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얼굴 표정뿐만 아니라 기분까지도 일변해 버렸다. 그녀는 갑자기 자기 생활에 불만을 품고, 무엇인가를 구하고 있는 것 같은 진지한 태도를 취했는데,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기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녀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으나, 이때는 네흘류도프가 빠져 있는 것과 같은 기분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네흘류도프에게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심원에서의 실패와 셀레닌과 만난 이야기를 했다.
"아! 정말 결벽한 분이에요! 그분이야말로 '흠 잡을 데 없는 기사'에요. 참으로 결벽한 분이라고요."하고 두 부인은 사교계에 알려져 있는 셀레닌의 별명을 붙여서 말했다.
"부인은 어떤 분이죠?"하고 네흘류도프가 물었다.
"부인요? 글쎄 남의 흉을 보고 싶지는 않지만, 남편을 이해해 주는 편은 아니지요. 그건 그렇고 그분도 기각에 찬성하셨다고요? 정말이에요?"하고 그녀는 진심으로 동정하며 물었다.
"무서운 일이군요. 그 여자가 가여워요!"하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화제를 바꾸려고 그녀의 주선으로 요새 감옥에서 석방된 슈스토바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그녀가 자기 남편에게 부탁하여 노력해 준 데 대하여 사의를 표명한 다음, 그 여죄수와 그녀의 온 가족이 아무도 힘을 써 주는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고생을 해야 했나를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라고 말하려고 하자, 그녀는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자기의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발 말하지 말아 주세요."하고 그녀는 그의 말을 막았다.
"남편이 그 여자를 석방해도 좋다고 말했을 때, 저도 똑같은 생각에 흠칫했어요. 죄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가둬 두었던 것일까요?" 그녀는 네흘류도프가 말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을 대신 말했다.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어요!"하고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이렇듯 덧붙였다.
백작 부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마리에트가 조카에게 아양을 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기분이 좋았다.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을 때, 백작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 밤 알린한테 가 봐라. 키제베테르 선생이 나오신다니까. 당신도요."하고 마리에트를 보면서 말했다.
"그분은 너를 알아보고 계셨어. 네게 관심을 갖고 계셔."하고 조카에게 말했다.
"네가 말한 걸 죄다 그분한테 말씀드렸더니만 그건 모두 좋은 징조니까 너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품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시더라. 그러니 꼭 가거라. 마리에트, 당신도 권해 줘요. 당신도 가고."
"백작 부인, 첫째로 제겐 공작님께 권고할 자격이 없어요."하고 마리에트는 네흘류도프를 힐끗 보고 말했다. 그 눈길에는 그와 자기는 백작 부인의 말에 대해서나 복음서에 대해서 그 무엇인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그리고 둘째로 저도 그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잘 아시겠지만..."
"그래요, 당신은 언제나 남들과는 반대죠. 자기 마음대로 하시니까."
"마음대로라니, 그런 일 없어요. 저도 보통 여자들과 똑같은 신앙을 가졌을 뿐인걸요."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셋째로 내일 프랑스 연극을 보러갈 생각이에요."
"마리에트, 당신은 그것을 보셨나요... 저... 뭐라고 하는 여배우더라?"하고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말했다.
마리에트는 유명한 프랑스 여배우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꼭 가 보아라. 정말 멋있단다."
"그럼, 이모님, 여배우하고 선교사하고 어느 쪽을 먼저 보는 게 좋지요?" 네흘류도프는 미소를 띠며 물었다.
"제발, 내 말꼬리만 잡지 말아라."
"내 생각으로는 선교사를 먼저 보고 난 다음에 여배우를 봐야 한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렇잖으면 설교에 대한 흥미를 잃기 쉽지요."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아니에요. 프랑스 극장에 먼저 간 다음, 그 뒤에 참회하시는 쪽이 더 좋아요."하고 마리에트가 말했다.
"둘이서 그렇게 날 놀리는 게 아니에요. 설교는 설교, 연극은 연극이에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목을 길게 하고 울고만 있을 필요는 조금도 없으니까. 우선 믿는 거죠. 그러면 즐거우니까요."
"이모님은 어느 설교사보다 설교가 훌륭하십니다."
"그럼요." 마리에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내일 우리들 좌석에 오세요."
"아마 가기 어려울 겁니다..."
손님이 왔다는 것을 전하러 온 하인 때문에 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손님이란 백작 부인이 회장으로 있는 자선 단체의 비서였다.
"따분한 손님이 오셨군. 저쪽에 가서 만나고 곧 오겠으니, 마리에트, 이 애에게 차나 권해 주세요." 백작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총총걸음으로 나갔다.
마리에트는 장갑을 벗었다. 야무지고 넓적한 손의 무명지에서 반지가 번쩍번쩍 빛났다.
"드시겠어요?" 그녀는 새끼손가락을 묘하게 뻗치면서 알코올램프 위에 얹혀 있는 은주전자를 들고 말했다. 그녀는 진지하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훌륭한 의견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나라는 인간과 내가 놓여 있는 처지를 혼동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어요."
그녀는 마지막 몇 마디를 할 때에는 금세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설사 그녀의 말을 분석해 본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며, 또 있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애매한 것이었다. 그러나 네흘류도프에게는 그 말이 유달리 심각하고 진실하고 선량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젊고 아름답고 훌륭한 옷차림을 한 여인이 이런 말과 함께 보내는 빛나는 눈길을 그토록 그의 마음을 끌었던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당신은 당신의 기분과 당신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제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나 당신이 하신 일은 누구나 다 알고 있어요.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에요. 나는 당신께 감탄했어요."
"뭐 그렇게 감탄하실 일은 못 됩니다.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으니까요."
"그런 건 문제가 안 돼요. 전 당신의 마음도 그 여자의 마음도 이해하고 있어요. 정말 훌륭해요. 훌륭하고말고요. 이 이야기는 더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그녀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불쾌한 기색을 보고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당신은 감옥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공포와 고통을 보신 나머지," 마리에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마음을 끌어보려는 생각에서 그가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일을 여자의 직감으로 추측하면서 말했다.
"괴로움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해 주려고 생각하시죠? 그렇게도 무자비하고 몰인정한 사람들 때문에 그런 무서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이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알아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제각기 자기의 운명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것을 잠재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양심의 소리를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네흘류도프는 그녀의 기만에 완전히 말려들어가서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그 후 그녀와 얘기한 것을 여러 번 상기하고서 부끄럽게 느꼈다. 거짓말을 했다기보다는 자기의 흉내를 낸 데 불과했던 그녀의 말과, 자기가 감옥 속의 무서운 일과 시골에서 받은 인상을 이야기할 때 사뭇 감동하여 주의 깊게 듣고 있었던 그녀의 얼굴을 상기했다.
백작 부인이 들어왔을 때, 그들은 옛 친구이면서 자기네들을 이해 못하는 군중 속에서 두 사람만이 서로 이해하는 둘도 없는 친구인 양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은 당국의 불법과, 불행한 사람들의 고통과, 농민들의 궁핍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떠들어 대는 열띤 대화 소리에 따라 서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매에는 끊임없이 '저를 사랑해 주시겠어요?'하고 묻고 '사랑합니다.'하고 대답하곤 했다. 그리고 성적 감정이 자기도 모르게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형태를 이루며 서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마리에트는 떠나면서, 힘이 되어 드릴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그에게 말하고, 또 중대한 이야기가 있으니 내일 밤에는 잠깐만이라도 극장에 와달라고 했다.
"언제 또 뵙게 될지 모르잖아요?"하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그리고 보석 반지로 뒤덮인 손에 조심스럽게 장갑을 끼었다.
"내일 꼭 와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네흘류도프는 약속했다.
그 날 밤 네흘류도프는 자기 방에 누워, 촛불을 끄고 나서도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슬로바의 일, 대심원의 판결, 어느 곳이든 그녀를 따라가겠노라고 결심한 일, 토지 소유권을 포기해 버린 일들을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별안간 그러한 문제에 대답이나 하듯이 '언제 또 뵙게 될지?'하고 말했을 때의 마리에트의 얼굴과 한숨, 그 눈길, 그리고 피어오르는 듯한 미소가 생생하게 떠올랐고, 그도 그녀를 만나기나 한 것처럼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시베리아로 가는 건 옳은 일일까?'하고 그는 자문해 보았다.
드리워진 커튼을 통해서 보이는 페테르부르크의 백야는 밝았으나,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은 막연하기만 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것이 혼란에 싸여 있었다. 그는 예전의 기분을 마음속에 불러일으켜 보기도 하고, 예전의 사상의 경로를 더듬어도 보았으나, 그 사상은 이미 예전과 같은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
'나도 모든 것을 서둘러서 생각해 냈지만, 그것을 실행할 힘이 없다. 좋은 일을 하고 뒤에 돌아서서는 후회를 하는 처지고 보니...' 그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답할 기력조차 없어,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비애와 절망에 잠겼다.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던 그는, 트럼프 노름에 참패한 뒤 흔히 경험했던 것 같은 괴로운 잠에 빠져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