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밤(No Gentle Persuasion)
Kay Thorpe
1
커다란 창으로, 문득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눈부신 햇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로렌을 아까부터 계속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의 비서 캐롤이 이상하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젠 별로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블렌트씨도 점심식사를 해야 할 테니까요."
로렌도 웃어 보이면서, 아직 시간은 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레스토랑의 예약은 한 시로 되어 있었다. 벌써 열 두 시 반이 지났으나, 그 레스토랑의 헤드웨이터와는 구면이기 때문이기 자리는 잡아 둘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식전주를 즐길 시간은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남의 예정을 방해하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평사원이 아니라 중역쯤 되리라고 생각되었다. 캐롤은 그 손님이 찾아온 이유를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20분쯤 기다리는 동안 로렌은,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때 로렌의 머릿속에는 별안간, 아버지와 캐롤은 이제 결혼을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10년이라는 세월은, 남자가 혼자 살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다. 캐롤 고든이 마흔 살이고 보면, 아버지에게는 안성맞춤이다. 캐롤도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두 사람은 적어도 지난 1년동안 서로 사랑해 왔지 않은가. 로렌은 가끔, 자기 자신이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직접 물어 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로렌은 캐롤과는 원만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접 물어보지 않은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와 캐롤 두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할 때, 내가 2년 동안 브뤼셀에서 일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사실 로렌 자신도 자기가 왜 망설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뭐니뭐니해도 스물 세살이면 세상을 조금씩 알기 시작할 때가 아닌가. 틀림없이 나는 한달 뒤에는 브뤼셀에 가 있을 것이다.
로렌은 갑자기 심한 시장기를 느꼈다. 그녀는 시내로 나오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기차를 탔기 때문에 아침식사를 걸렀던 것이다. 게다가 오전 중에는 물건을 사느라 커피 한 잔밖에 마시지 못했다. 음식을 생각만 해도 침이 나올 지경이었다.
"배고파 죽겠어요." 로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캐롤의 책상 쪽으로 갔다. "캐롤, 저 두 사람에게 시간이 되었다는 걸 알릴 수 있는 무슨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블렌트씨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방해하지 말라고 했어요. 별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5분전에도 똑같은 말을 했어요." 그때 로렌은 갑자기 초록빛 눈을 가늘게 뜨고 캐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 아닌가요? 당신도 좀 불안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죠?"
"글쎄요, 저는 아무 것도…." 이때 갑자기 아버지의 방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캐롤은 하던 말을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가시겠습니까, 블렌트씨?"
"틀림없이 데블린씨는," 목소리는 낮았으나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였다. "짙은 블랙커피를 마시고 싶을 거야."
로렌은 갑자기 나타난 인물을 보려고 돌아섰다. 그러나 얼음처럼 싸늘한 잿빛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긴장되었다. 그 남자는 상상했던 것보다 젊어, 3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키는 180센티쯤 되어 보였고, 늘씬한 근육질의 체격에 잘 어울리는 회색 신사복을 입고 있었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 생김새와 잘 다듬어진 검은머리는 로렌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저는 로렌 데블린입니다만… 아버지꼐서는 기분이 좋지 않으신가요?"
"썩 좋은 편은 아닌 것 같군요. 하지만 몸이 불편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된 거죠?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버님에게 직접 물어보시죠."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난 바쁘거든요."
로렌의 옆을 지나 문으로 걸어 나가는 남자에게서 애프터셰이브 로션의 냄새가 풍겼다. 로렌은 남자의 소매를 잡고 좀 더 자세히 묻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 동안에 캐롤은, 아직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로렌도 그 뒤를 따랐다.
휴 데블린은 의자를 돌려, 눈 아래 시가의 지붕들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을 향해 앉아 있었다. 백발이 희끗희끗 섞인 머리가 전에 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도 꼼짝도 않고 공허한 눈으로 두 사람을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어리석었어. 잘되리라고 생각했는데…"
"클레이필드의 청구서 때문이 아닌가요?" 캐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벼락감사가 있었군요."
"알고 있었나?" 아버지는 캐롤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잖아도 걱정하고 있었어요. 충분한 보증도 없는 그 주식을 사들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지난 수개월동안, 청구서 얘기만 나오면 짜증을 내셨잖아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로렌은 망설이면서 물었다.
얼굴을 돌린 아버지의 갈색 눈에는 피로한 빛이 완연했다.
"네게 숨길 생각은 없어. 실은 어떤 거래에서 한몫 잡으려고 많은 돈을 무단 차용했지. 회계감사 전에 청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결코 변명이 아니다.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 하지만 너무나 좋은 찬스여서 놓치고 싶지 않았어. 스스로 구덩이를 판 셈이지. 그 뿐이야. 도박에 진 거지."
캐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려고 하죠?"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야 뻔하지. 나는 주말쯤에 신변을 정리하고 경찰의 신세를 지게 될 거야."
"그럴 수가!" 로렌의 입에서 이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빨간 입술이 흰 얼굴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아버지는 힘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상대에게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 약속을 어긴 것은 나야."
"아버지는 이 일을 20년 이상이나 해 오셨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잖아요. 관대한 처분을 받을 수 없을까요?"
"물론 처음이지. 그러니 다소 참작은 되겠지"
로렌은 아버지 곁에 무릎을 꿇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단 한 번의 실수예요. 틀림없이 용서받을 거예요."
"규모가 좀 커서 문제야. 제일 분한 것은, 3주일만 있었으면 성공하는 일이었다는 것이지."
"그렇게 빨리 갚을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인가요, 전액을?"
"보상이 필요하다면 가능하지"
"그렇게 하는 편이 모두를 위해서 좋지 않을까요?"
"닉 블렌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지금까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블렌트씨 뿐인가요?" 캐롤이 끼어 들었다.
"감사를 한 것이 그 사람이거든. 그 사람은 밤에 연습삼아 컴퓨터를 만지는 것이 취미인 모양이야. 그래서 우연히 클레이필드가 걸린 거지. 사실 나는 예고 없이 소송당하지 않은 것만이라도 감사해야 할 입장이야. 그 사람은 월요일 아침 회의에 이 문제를 꺼낼 거야."
"경찰에 신고 되는 것은 그 전인가요 후인가요?"
"어느 편이든 마찬가지야. 그 사람에게는 충분한 힘이 있거든. 어떤 조처든 취할 수 있을 거야."
"아무튼 월요일 아침까지는 신고 되지 않겠죠?" 이렇게 말하는 로렌의 마음속에는 어떤 막연한 계획이 꾸며지고 있었다.
"글쎄, 그런 것 같더라만…."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며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혼자 있게 해줄 수 없겠니?"
캐롤이 망설이고 있는 로렌의 팔을 잡으면서, 고개로 문 쪽을 가리켰다. 하기는 여기 있어봤자 뾰족한 수가 생길 리 없다. 로렌은 캐롤과 함께 방을 나왔다. 아버지를 혼자 남겨두고 문을 닫았을 때, 로렌은 어떤 결심을 한 듯 단호한 눈으로 캐롤을 쳐다보았다.
"그분의 주소를 아세요?"
캐롤은 로렌이 누구를 두고 말하는지 곧 알아차렸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 사람은 한번 결정하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말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거든요."
"하지만 어디 살고 있는지는 알고 있겠죠?"
"런던에 있을 때 묵는 곳은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은 잠시도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거든요."
"2,3주만 다른 곳에 있다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로렌은 캐롤이 쳐다보자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저도 아버지가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순간적인 유혹에 넘어간 사람이 비단 아버지뿐만이 아닐 테고, 그리고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야 아무에게도 이로울 게 없잖아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 죽어버리겠어요. 당신도 이해하겠죠? 감옥에 들어가면 아버지는 견디지 못하세요."
"그렇게 되진 않을 거예요. 초범의 경우는…."
"본때를 보일 거예요. 블렌트란 사람은 충분히 그렇게 조처하고 말 거예요."
"그렇다면 부탁해도 소용없잖겠어요?"
"그래도 해봐야죠." 로렌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태세였다. "그 사람의 주소를 가르쳐 주세요."
"그 사람은 집에 없을 텐데요.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하는 것 같았어요."
"그렇다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어요."
"아버님께는 뭐라고 말씀하실 건가요?"
"사실대로 말하겠어요. 물론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으시겠지만. 하지만 찬스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잡아야죠." 로렌은 점점 열을 올리면서 힘주어 말했다.
"부탁이에요!"
캐롤은 한숨을 쉬고 파일링 캐비닛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제가 가는 것보다 당신이 가는 것이 좋겠죠. 하지만 누구한테 물어봐도, 그 사람은 까다롭다는 얘기밖에 없어요."
로렌은 캐롤에게서 명함 한 장을 받아들었다. "고마와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를 부탁해요."
반시간 전까지만 해도 눈부시게 느껴지던 햇빛이, 지금 로렌의 마음속에는 한 줄기도 비치지 않았다. 로렌은 나이츠브리지로 달리는 택시의 시트에 몸을 묻은 채, 어떻게 말을 꺼낼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같은 사태를 잘 수습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로렌이 도착한 곳은, 시내의 고급 주택가에 솟아 있는 호화롭고 현대적인 아파트였다. 로렌이 정면 현관으로 통하는 넓은 돌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택시운전사는 떠날 생각도 않고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에 익숙한 로렌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중창의 검은 유리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매끄러운 몸의 곡선이, 꽉 끼는 녹색의 엷은 드레스 속으로 드러나 보였고, 약간 컬한, 붉은 빛이 도는 금발이 아름다운 얼굴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누구나 로렌의 외모에 대해서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로렌은 자신의 겉모습 속에 숨은 진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다. 보통 남자들은 그녀의 날씬한 다리와 풍만한 가슴을 보면 한가지 생각밖에 하지 않으니….
바닥을 대리석으로 깐 로비의 카운터 앞에는 제복차림의 수위가 서 있었다.
"블렌트씨는 안 계십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어요." 수위는 카운터에 놓여 있는 리스트를 조사해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래도 기다리겠어요."
로렌이 이렇게 말하자 그는,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씽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로렌은 이런 식으로 닉 블렌트를 찾아온 여자가 자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여자들과는 사정이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내 입장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니, 그저 쌩긋 웃어 줄 수밖에 없잖은가.
로렌은, 로비의 의자에 앉아 잡지라도 읽으면서 기다리라는 수위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월요일 아침이 되기 전에 어떻게든 그 사람을 붙잡아 놓아야 한다. 그를 붙잡아 놓기 위해서라면, 이 로비에 천막을 치고 기다릴 용의도 있다.
로렌은, 자칫하면 정말로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닉 블렌트가 모습을 나타낸 것은 새벽 네시 경이 되어서였다. 스윙도어를 밀고 들어오는 키 큰 그의 풍모는 로렌의 마음을 심히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곧 마음을 진정시키고 지켜보고 있으려니, 수위가 그를 붙들고 무어라고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러자 닉 블렌트는 로렌 쪽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로렌은 주저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잿빛 눈에 떠오른 표정이 로렌을 망설이게 했다. 그러나 로렌은 어차피 쉬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걸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태를 좀 더 원만하게 처리해달라고 설득하는 일이다.
"아버지가 당신을 보냈소?" 닉 블렌트의 첫말은 몹시 무뚝뚝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아버지는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죠!"
로렌은 한동안 할말을 잃었으나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쯤은 알고 계실지도 모르죠, 비서가 말했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나요? 이곳에 찾아온 것은 제 독단이에요."
"목적은 내 마음을 돌리려는 것이요?" 그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것은 안 되는 일인데요."
"제게는 아직 말할 기회를 주시지 않았어요. 쫓아버리기 전에 제 이야기를 들어줄 수는 없어요?" 로렌은 필사적으로 버티었다.
닉은 한동안 말없이, 볼이 상기되어 있는 로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로렌은 그 시선이 다음에는 가슴으로 내려오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흥분한 로렌은 숨을 쉴 때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닉이 다시 시선을 옮겼을 때, 로렌의 뺨은 더욱 빨개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싸늘한 눈에 기가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위로 올라가서 하고 싶은 말을 해봐요. 하지만 아무 것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한번 결정한 일을 철회하는 남자가 아니니까."
일부러 저런 말을 할 정도라면 다소 가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로렌은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수위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닉의 뒤를 따랐다. 수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너무나도 뻔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나는 한 발짝 내디딘 것이다. 나머지는 내게 달려있다.
블렌트의 방은 맨 위층인 6층이었고, 아름다운 공원의 경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유리로 된 미닫이 건너편에는 이곳 응접실과 같은 크기의 발코니가 있었다. 흰 가구와 따뜻한 인상을 주는 나무 세간이 눈에 띄었으나. 로렌은 그런 것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다른 문제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앉아요." 닉 블렌트가 의자를 권했다.
"술을 마실 줄 알겠죠?"
로렌은 평소에는 알콜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다르다. "진토닉을 부탁할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난로 옆의 커다란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럼 나도 같은 걸로 하죠."
바는 커다란 방의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었다. 닉이 마실 것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로렌은 방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당장 이 자리를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처해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블렌트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보통 설득력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로렌에게는, 상대가 받아들일지도 모를 어떤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조금 전 아래층에서 본 그의 눈초리, 그것은 로렌이 항상 겪는 일이었다. 문제는,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이 견딜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처지를 생각하면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아버지를 구제해 주겠다고 미리 약속만 한다면 무슨 짓이든 하자. 어떤 일을 당해도, 사랑하는 아버지가 감옥에 가는 것보다는 낫다.
진토닉은 평소에 마시던 것보다 강했다. 로렌은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괴로움을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마셨다. 지금부터 하려는 일을 생각한다면 취해서는 안 되겠지만, 다소 감각이 마비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닉은 로렌의 맞은쪽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그녀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로렌은 용기를 내어 가까스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를 구제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이든 당신을 따르겠어요. 솔직히 말하는 것이 시간의 절약이 되지 않겠어요? 제 단 한가지 소원은. 아버지에게 기회를 다시 한번 주겠다는 약속을 받는 것이에요."
"당신, 좀 성급하지 않아요?" 닉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이렇게 말했으나, 잿빛 눈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당신이 무척 매력 있는 여자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런 종류의 남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려는 건가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소. 한데 몇 살이지?"
"성인의 나이는 넘었죠." 로렌은 빈틈없이 대답했다.
"게다가 비아냥거리기를 좋아하는 모양이군." 닉은 한동안 눈을 가늘게 뜨고 로렌을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 나서 옆에 있는 테이블에 글라스를 놓았다.
"좋아요, 그렇다면 시작해 볼까요,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그것은 로렌이 예기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자진해서 부탁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닥치고 보니 충격을 느꼈다. 로렌은 손가락의 관절이 하얗게 될 정도로 글라스를 세게 쥐고 싸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여기서요?"
닉은 로렌의 손에서 글라스를 빼앗아 테이블 위에 놓고, 그녀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와의 거리가 바싹 좁혀지면서 닉의 입술이 바로 눈앞에 보여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냉혹한 표정에 로렌은 몸이 오싹해졌다.
"도대체 어떻게 해 달라는 거지? 당신이 제의했고 내가 받아들였는데, 왜 시간을 낭비하지?"
"중요한 것을 잊으셨군요." 로렌은 피부에 와 닿는 그의 손가락의 감촉에 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가까스로 태세를 갖추었다. "먼저 아버지에 대해서 약속해 주세요."
닉은 조소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현금 거래, 이것이 내 상법이지-물론 상품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에 한해서.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줘요. 그러고 나서 담판을 합시다."
"싫어요!" 로렌은 그의 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가 가볍게 고개를 돌려, 로렌의 손은 허공을 치고 말았다. 균형을 잃은 로렌은 앞으로 기우뚱하면서 그의 가슴을 짚을 뻔하다가 겨우 제자리에 섰다.
앞쪽에 문이 보였다. 그 문을 지나서 침실이 있었다. 맞은쪽 벽 가에 침대가 놓여 있었다. 로렌은 어느 사이엔가 침대로 운반되어 푸른 침대 커버 위에 내던져졌다. 로렌은 얼른 상체를 일으켜 팔꿈치를 짚고, 장승처럼 서 있는 닉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사기꾼이에요. 내가 당신을 잘못 보았어요."
"아니오, 당신이 찾아온 것은 이러기 위해서지. 뜻대로 되었잖아?"
닉이 상의를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로렌은 몸도 마음도 마비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강간!>이라고 비명을 올린다면? 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아래층에 있는 수위는 '이 여자 스스로가 찾아왔다'고 증언할 것이 뻔하다.
로렌은 브론즈 상처럼 근육이 울퉁불퉁한 그의 가슴에서 험악한 빛을 띠고 있는 눈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말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저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싸우겠어요!"
"좋도록 해보시지." 그의 손이 벨트로 가고, 천천히 버클을 풀었다. "자, 시작해 볼까?"
이때 갑자기 닉의 행동을 방해하듯, 침대 옆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닉은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마침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전화가 당신을 도와주었군. 10분 뒤에 걸려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저 방에서 받을 테니, 잠깐 실례."
닉이 방을 나가자, 로렌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을 때 벗어진 구두가 바닥에 그대로 굴러 있었다. 로렌은 신을 신자 다소 마음이 진정되었으나,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이 계획은 처음부터 잘못 되어 있었다. 그는 아무리 자극적인 것을 제공받는다 하더라도, 아버지를 도울 생각은 없는 것이다. 이처럼 때를 맞추어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나를 이용하고 나서 곧 차버렸을 것이다.
그가 오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자.
문을 열어 보니, 넓은 방의 건너 쪽에서 닉이 등을 보이고 전화를 받고 있었다. 로렌은 의자에서 핸드백을 집어들고, 당장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면서 발소리를 죽이고 문 쪽으로 향했다. 닉은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어, 돌아다볼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로렌은 간신히 현관까지 나와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나 곧 그녀는, 현관문이 잠겨 있고, 열쇠가 없으면 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녀는 손잡이를 잡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뒤에서, 수화기를 놓은 소리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쉽게 나갈 수는 없어요. 열쇠는 내가 갖고 있으니, 필요하면 가지러 와."
로렌은 문에 기댄 채 그를 노려보았다. 드러난 가슴은 탄탄해 보였고, 탄력 있는 웨이스트에는 바지의 웨이스트 벨트를 꽉 매고 있었다. 그리고 벨트의 버클이 풀린 채 벨트 끝이 늘어져 있었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로렌은 남은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말했다.
닉은 검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아버지에게는 당신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이오?"
"당신은 어떤 약속을 한다 해도 지켜 줄 것 같지 않아서 그러는 거예요. 제가 이곳에 찾아온 것이 어리석었어요."
"나와 함께 침대에 잠깐 누우면 내 생각이 변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내가 그렇게 여자에 걸신들린 사람으로 생각되오?"
로렌은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걸신들렸다고 생각진 않아요. 하지만 제게는, 당신에게 드릴 만한 매력적인 것이 달리 없었거든요. 그 뿐이에요."
"처음에 솔직하게 부탁했으면 좋았을 텐데…."
"효과가 있었을까요?"
"글쎄, 없었겠지. 하지만 절대로 없다고 생각했었소?"
"짐작하고 있었죠. 캐롤이 당신은 꽤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미리 경고를 해주었거든요."
"캐롤이라니?"
"아버지의 비서예요."
"아, 그 헌신적인 미스 고든 말이군. 하지만 그 사람도 이번 문제와 관련되어 있겠지?"
"캐롤은 관계없어요. 아버지에게 물어보셔도 그렇게 말씀하실 걸요."
"범인이 그렇게 말하던가?"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세요!" 로렌의 목소리는 노여움과 적의로 높아졌다. "당신에게 그런 권리는 없어요!"
"권리가 있지. 아버지는 돈을 훔쳤거든."
"아버지에게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한푼도 남기지 않고 갚았을 거예요. 물론 이자까지 쳐서요."
닉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부정하게 번 돈으로? 거참 희한한 일이군!"
로렌은 긴장이 풀리면서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얘기를 해보았자 소용없잖아요. 문이나 열어주세요. 당신의 귀중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닉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로렌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는 로렌의 늘씬한 다리로부터 엷은 드레스 속에 드러난 히프의 곡선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불룩한 가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본 그의 표정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가 얘기했던 것은 시간에 관해서였지. 아까 아버지말로는 2,3주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3주일이에요." 로렌은 닉이 은근히 암시하는 뜻을 알아챘으나, 그의 말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약으로 약속해주세요."
닉의 잿빛 눈이 다시 험악해졌다.
"언약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잖은가. 로렌은, 자신의 신경이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과 싸우면서 심호흡을 했다.
"당신의 말을 믿기로 하겠어요." 이렇게 하여 가까스로 문에서 한발 떼면서 말했다. "그럼 한번 시험해 보시죠."
"당신은 내 말을 잘못 들은 모양이군." 그는 로렌을 경멸하듯 말했다. "나와 함께 침대에 잠깐 눕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말했을 텐데. 난 화요일 아침에 로마로 떠나야 해. 그동안 짐을 꾸릴 수는 있겠지?"
"잘 모르겠어요. 무엇을…."
"당신은 바보는 아닐 거요. 하지만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닉은 여전히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1년 내내 여행을 하지, 거의 혼자서. 하지만 이번에는 동반자가 필요해. 물론 비용은 전부 내가 부담하지"
"그런 조건으로 저를 데리고 가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무리예요. 여자가 부족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여자는 얼마든지 있지. 하지만 이번에는 특정한 여자를 데리고 가고 싶거든"
"당신의 기분을 맞춰줄 여자 말이군요." 로렌은 자꾸 떨리려고 하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저는 다음달 초에는 새 직장에 출근해야 해요."
"오늘이 2일이니까, 늦어도 28일까지는 돌아올 수 있어."
"매사를 미리 결정해 놓고 말씀하시는군요."
"거절해도 상관없어요."
로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공갈이군요!"
"공갈과 뇌물과는 어떤 차이가 있지?"
로렌이 다시 반론을 펴려고 입을 열자, 닉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예스인지 노인지, 취소하기 전에 빨리 결정해"
"알았어요." 이런 상황에서는 별 수 없다고 로렌은 생각했다.
"좋아" 닉은 이렇게 말하면서 흘긋 손목시계를 보았다. "떠날 시간이오. 아래에 연락해서 택시를 부르도록 하겠어."
"제가 택시를 잡겠어요." 로렌은 모든 감각을 잃은 듯했다. "아버지에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그야 당신 마음대로지. 아버지가 승낙할거라고 생각한다면, 사실대로 말하는 게 어때요?"
"시험해 보시는군요. 아버지가, 자신이 구제받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사람인지를요.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아버지의 대답은 뻔해요."
"그렇다면 그만두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결정한 것은 당신이야.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러니저러니 말하면 곤란하지. 나로서는 월요일 밤까지만 와 주면 돼. 그럴 수 없다면 없었던 얘기로 하고. 자, 택시를 부르겠소"
로렌은 전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지금까지 당신에게, 어느모로 보나 싫은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나요?"
"오늘까지는, 남들이 나를 정직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지. 하지만 당신의 아버지를 고발하지 않으면 공범자가 되는 셈이지"
"당신의 양심정도라면 그만한 것쯤 참을 수 있을 거예요."
닉의 시선이 로렌의 얼굴과 머리를 거쳐 다시 입술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남자에게는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일이 있거든. 그럼 월요일 밤에 기다리겠소. 일곱 시 지나서"
로렌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가 아직 키스조차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몇 주일 동안, 만약 내가 끝까지 참을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신의 그런 실수를 보상하고야 말 것이다. 만약 참을 수 있다면?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달리 선택의 여지는 없으니까.
2
로렌이 아버지의 사무실에 당도했을 때는 벌써 여섯시가 가까웠으나, 아버지와 캐롤은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심로(心勞)로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은, 불과 몇 시간동안에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너를 쫓아가려고 했는데, 캐롤이 말렸어."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눈은 로렌에게 별일 없었느냐고 묻고 있는 듯 했다. "애써줘서 고맙다. 즐거운 일도 아니었는데"
로렌은 웃음을 띤 지신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수확은 있었어요. 한 달 동안 연기해 주기로 했거든요."
"그 사람이!" 아버지의 밝은 갈색 눈에 생기가 되살아났고,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오, 하느님, 뭐라고 말해야 할까!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로렌에게는 이 순간이야말로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것을 보상받는 듯 했다. 일부러 별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 사람의 친절심에 호소했을 뿐이에요. 식사하러 가시죠. 아무도 식사를 안하셨겠죠?"
"그래, 갑자기 시장기가 드는구나. 책상을 정리할 테니 잠깐만 기다려라. 오늘 두 사람을 특별한 식사로 대접하마"
"머리를 빗어야겠어요." 아버지가 별실로 사라지자 캐롤이 말했다. "당신도 빗는 것이 좋을 거예요. 함께 가지 않겠어요?"
캐롤은 이런 말로 속을 여자가 아니다. 로렌은 내키지 않았지만 화장실로 따라갔다. 그리고 화장실 문이 닫혔을 때는, 캐롤이 던질 질문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친절심이라는 말로 속이려고 하지 말아요. 나는 블렌트씨가 그런 친절심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캐롤은 잠시 말을 끊고 로렌의 활기찬 얼굴을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대가를 지불했죠? 그렇죠?"
로렌은 아버지를 설득할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캐롤은 워낙 영리한 여자기 때문에 사실 외에는 믿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2,3주일 동안의 휴가를 제의 받았어요."
"어떤 휴가?"
"그것이, 정말 재미있는 내용이에요. 밤에는 함께 지내지만 낮에는 혼자 있게 될지도 모르거든요, 내 추측이지만. 그 사람은 <여행의 동반자>라고 말하더군요."
"그럴 수가! 아버지가, 자신이 구제 받기 위해 당신을 보낼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러니까 이 일을 아버지에게 알리면 안돼요." 로렌은 초록빛 눈으로 캐롤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캐롤"
"그럴 수 없어요. 아버님은 알 권리가 있어요."
"권리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다만 아버지를 감옥으로 보내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고, 아버지가 감옥으로 가시면 어떻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잖아요? 저는 그대로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달리 방법이 없는 걸요. 더 나쁜 사태도 생각할 수 있어요. 닉 블렌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찬스라면, 많은 여자들이 덤벼들 거예요. 말하자면 그 사람은 그만큼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거죠."
캐롤은 한참 동안 로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말아요, 로렌. 여자라면 그 사람 같은 남자를 좋아할 리가 없어요."
좋고 싫고는 지금의 로렌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운이 좋으면 2,3일 만에 싫증을 느끼고 보내 줄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아버지의 문제는 도로 아미타불이 되잖아요?"
로렌은 닉의 쇠붙이처럼 싸늘한 눈을 생각하면서 세면대의 기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을 바라보았다.
"제 생각으로는, 그 사람은 약속을 지킬 것 같아요. 좀 이상한 말 같지만… 그 사람은 평범한 것은 요구하지 않았어요."
"그럼, 아버님께는 뭐라 말씀드릴 건가요?"
"아주 간단히… 브뤼셀에서 일자리를 찾았다고 할 거예요."
"아버지가 믿으실 것 같아요?"
"믿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요, 당신이 비밀만 지켜준다면" 로렌은 머리에 마지막으로 빗질을 하고 나서 캐롤을 돌아보았다. 이젠 캐롤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에게는 꼭 연락할게요."
이처럼 지루하고 더디게 지나는 주말을 경험한 일은 없었다. 로렌은 토요일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브뤼셀에 가는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어제 들었어요. 깜박 잊고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갑자기 말하니까 좀 섭섭하군. 결국 휴가는 거의 없었겠구나!" 아버지는 한동안 로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무엇인가 미심쩍은 듯한 기색이 감돌았다. "로렌, 블렌트를 쫓아간 어제의 일이다만… 그 사람이 설마…. 네가 워낙 늦게 돌아왔기에"
"그 사람, 무척 신사적이던데요. 낮에 외출중이어서 로비에서 기다렸어요. 그뿐이에요."
"아, 그렇군. 내게 좋은 생각이 있었더라면 너를 보내지 않았을 텐데. 솔직히 말해서, 네가 해준 일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한다. 그 사람은 자신을 위해 딸을 보내는 사람을 존경할 남자가 아니지. 네 장래를 생각해서 내게 시간을 주었을 게다. 네 어머니도 그랬지만, 너도 역시 쌩긋 웃기만 해도 남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거든"
어머니 시절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닌 걸요, 닉 블렌트는 쇠붙이처럼 싸늘하고 만만치 않은 사람이에요. 로렌은 그와 만났을 때의 일을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아버지, 캐롤과 결혼하세요." 로렌은 원래 이런 화제를 꺼낼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갑자기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 놀랐다. "그러는 게 좋지 않겠어요?"
"실은 언젠가 그려려고 했었지. 너는 괜찮겠니?"
로렌은, 왜 자기가 반대할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주었는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럼요. 하지만 너무 빨리 하진 마세요. 저는 한 달쯤 집을 비우게 될 테니까요."
아버지는 비로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웃음을 띠었다.
"걱정할 것 없다. 나는 우선 이번 문제를 정리해야겠어. 프러포즈를 하기 전에 내 자존심부터 회복해야겠거든"
로렌은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면서 쌩긋 웃어보였다.
로렌의 처지로서는 월요일은 우울한 날이었다. 열한시경 윔블던에 있는 집의 주방에서 커피를 즐기고 있던 로렌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낮은 목소리는 물어볼 것도 없이 닉 블렌트였다.
"짐을 꾸리기 시작했소?"
"가지고 갈 것도 없는 걸요. 시간은 걸리지 않을 거예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가는 거니까요."
닉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반반이라고 생각되는데. 아무튼 걱정할 것 없어요. 필요하면 사면 될 테니까요. 흥정의 일부라 생각하면 되지"
"당신에게는 한 푼도 받고 싶지 않아요. 저를 샀다고 생각진 마세요, 블렌트씨"
"공갈이란 말은 당신이 먼저 쓴 말이라고 생각되는데. 아무튼 좋도록 생각해요. 그런데 예정이 좀 바뀌었어. 내일 아침 열시 5분에,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당신 집에 들르겠어." 왠지 즐거운 듯한 목소리였다.
로렌은 비록 몇 시간일망정 형 집행이 연기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무거웠던 기분이 다소 가벼워졌다. 로렌은 출발이 늦어진 것에 대해, 아버지가 납득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준비하고 있겠어요." 다시 한번 그에게 사정해 볼까? 아니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 사람에게는 너그러운 구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잖은가. "그리고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뿐이에요."
"당신 아버지의 안전은 보장하지. 앞으로는 당신과 나뿐이야. 그럼 내일 아침에"
로렌은 닉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수화기를 놓았다. 당신과 나뿐-그말에는 협박이 담겨 있었다. 수동적인 저항이라는 작전은 정말 좋은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나가자. 하지만 그의 요구에 억지로 응해야 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도망칠 길이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캐롤과 아버지가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집에 왔다. 로렌이 아직도 집에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날짜를 잘못 알고 있었어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에요. 두 분만이 저녁식사를 하려고 했다면 미안해요."
"두 사람만 있을 시간은 얼마든지 있지" 아버지는 옆에 있는 캐롤에게 웃어 보이면서 말했다. "이번 문제가 완전히 정리되는 대로 결혼해 달라고 캐롤에게 말했지. 캐롤도 승낙했어."
"사실 나는" 캐롤이 말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승락하지 않았죠."
"블렌트씨가 정말 약속을 지킬지 어떨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나는 당신을 죄수의 아내로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
"그 사람은 약속을 지킬 거예요." 로렌은 사실은 이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식은 이 달 말경에 올리세요. 저도 꼭 참석할 테니까요."
"그렇게 하지" 아버지는 웃으면서 글라스를 들어 올렸다.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나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어. 두 사람의 행복을 두고서 맹세하지"
다음날 아침 고정 운전사가 운전하는 다임러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로렌도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거실의 커튼 뒤에 숨어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스마트한 차림의 닉이 뒷좌석에서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닉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잘 어울리는 다크 슈트에 회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있는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탐스럽고 검은 고수머리가 미풍에 가볍게 날렸다. 로렌은 문득, 그가 이탈리안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혼혈일거야-그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로렌은 벨이 세 번 울릴 때까지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닉이 현관에 들어섰을 때도, 한마디의 인사말도 없이 그대로 복도에 서 있었다.
"제 슈트케이스는 아직 위층에 있는데요. 운전사를 시켜 운반해 주시겠어요."
"그야 어렵지 않지. 어디야, 방이?"
"오른쪽 첫째 문이에요."
"함께 올라가지" 그이 목소리는 여전히 즐거운 듯 했으나, 잿빛 눈이 번쩍 빛났다. 닉은 로렌의 어깨를 잡아 돌려 세웠다. 실제로 등을 미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절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로렌은 침실로 들어가자,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슈트케이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예요."
닉은 슈트케이스를 들어 올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침대 옆을 그대로 지나서 옷장의 문을 연 다음, 안에 있는 옷을 뒤적였다. 그리고 일부러 짐 속에 꾸려 넣지 않은 청회색 자켓과, 같은 빛깔의 스커트를 골라냈다. 그리고 거기에 매치되는 실크 블라우스를 꺼내어 로렌에게 내밀었다.
"갈아입자면 이 정도는 필요할거야."
"당신의 프라이드 때문인가요?"
로렌은 경멸하듯 이렇게 말했으나, 그의 굳게 다문 입에 힘이 주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글쎄,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닉은 침대 위에 옷을 놓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로렌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를 커다란 경대 쪽으로 억지로 돌려 세웠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라구.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봐"
확실히 지독한 몰골이었다. 로렌이 입고 있는 옷은 바겐세일에서 산 것인데, 입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옷장 속에 쑤셔 넣어 두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빗어 넘긴 머리하며, 입술연지도 칠하지 않은 얼굴. 마치 초췌한 중년 여인 같은 모습에 자신도 이맛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우린 계약을 한 셈인데, 이런 몰골로는 안 되겠는걸" 닉이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양손으로 로렌의 옷 뒤를 잡아 솔기를 찢어 어깨로부터 벗겼다. 로렌이 당황하여 말렸을 때는 이미 팔의 절반까지 벗겨져 있었다.
"여행 중에 다른 옷을 대신 사주겠소. 자, 빨리 서둘러요."
또한 닉이 머리핀을 빼자 머리가 얼굴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로렌은 감히 반항할 수가 없었다. 거울 속에서 닉의 시선과 부딪쳤다. 로렌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보자 최면술에 걸린 것만 같았다. 아직도 목덜미에 놓여있는 그의 손이 따뜻하고 힘차게 느껴졌다. 닉은 손으로 부드럽게 로렌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녀가 본능적으로 온몸을 긴장시키는 것을 알아채고,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시간만 있다면 지금 당장 계약을 실천하고 싶은데… 아무튼 옷을 갈아 입으라구.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로렌은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가 옷을 벗었다. 닉의 손이 닿았던 부분이 근질거리는 듯했다. 아니야, 그저 뻔뻔스런 남자일 뿐이야. 단지, 그 사람이 민감한 부분을 만졌을 뿐이야. 그렇다고 해서 내 혐오감이 덜해질 리가 없다. 혐오감은 내 마음속에서 불타고 있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아주 못생긴 여자로 보이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마음을 돌리려고 한 것은 무리였다. 닉 블렌트는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신사처럼 보이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완전히 야만인이거든. 로렌은 그렇게 생각하자 전율을 느꼈다. 내가 이번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있는 용기를 전부 쥐어짜내야 한다.
실크 블라우스와 청회색 투피스를 입자, 화장기 없는 얼굴이 우습게 보여서 가볍게 화장을 했다. 현관으로 가자, 닉은 이미 슈트케이스를 운반해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훨씬 나아졌군. 자, 떠나자구" 차가 움직이자 닉이 말했다. "여행 중 내내 침묵작전을 쓸 생각은 아니겠지? 난 토라진 여자만은 참을 수 없거든"
"저는 토라진 게 아니에요." 로렌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저는 얘기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나 화제가 아니면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그런 사람 축에 들지 않거든요, 블렌트씨!"
"닉이라고 부르지" 그는 로렌의 모욕적인 언사에 대해서는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의 계약 내용으로 보아 격식적인 호칭은 어울리지 않거든"
"계약 내용은 모두 당신이 정한 거예요." 로렌은 차창 밖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저는 블렌트씨라고 부르겠어요, 괜찮으시다면"
닉은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은 원래 말수가 적은 여자인지, 아니며 성질이 비뚤어진 여자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번 일을 시작한 것은 당신이야. 기억하고 있겠지? '당신이 바라는 대로' 라고 말한 것은 당신이 아니야?"
이 말을 들은 로렌은 비로소 고개를 돌려 닉을 쳐다보았다.
"그래요. 하지만…"
"하지만 뭐야? 나는 당신 아버지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말했어. 그러니까 그 보상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마. 당신이 말한 <한 번만>으로는 보상되지 않아. 한데 아버지께는 뭐라 말했지?"
"당신이 친절하게도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고 말씀드렸어요. 돈만 갚으면 아버지는 안전하다고 말했잖아요. 아버지는 이번 거래에서는 잘 되리라고 저는 생각해요. 하지만 만일 실패한다면… 아버지는 갚을 만한 돈이 없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이미 그만한 보상을 받은 셈이에요."
닉은 험악한 눈으로 로렌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번 당신과의 계약으로 청구서는 말소된다고 내가 보증하란 말인가?"
로렌은 더 이상 기가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자꾸만 주눅이 드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
"아버지는 거액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아마, 남자가 여자에게 지불한 액수로는 최고에 속하겠지!" 그의 시선이 로렌의 얼굴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넗은 이마, 오똑한 콧날, 도톰하고 탐스런 입술, 가는 목, 그리고 그 아래의 볼록한 가슴으로 그의 시선은 서서히 내려갔다. "지금 당장 당신을 내팽개치고 싶군.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좋아, 약속하지"
두 사람은 비행기 이륙 5분전에야 공항에 도착하여 맨 마지막에 탑승했다. 로렌은 지금까지 일등실에 타본 일이 없었는데, 낮고 푹신한 시트에 몸을 깊이 묻고, 안전벨트를 매어주는 스튜어디스를 바라보면서, 돈이란 정말 편리한 것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비행기의 일등실에서는 마시는 음료수와 알코올도 다 무료다. 붉은 머리의 스튜어디스가 눈썹하나 까딱 않고, 로렌이 주문한 코크를 놓고 갔다.
"무언가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요?" 스튜어디스가 가버린 뒤, 닉이 우습다는 듯이 물었다. "사실은 코크 같은 것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당신이 마시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좋아하는 걸요." 로렌은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위스키 잔을 힐끔 쳐다보고 물었다. "꼭 격식을 차려 행동해야 하나요?"
"당신은 나를 찾아온 날부터 한 번도 격식대로 행동한 적이 없어. 좀 우스운 얘기지만, 당신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는 얌전한 아가씨구나 하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런 겉모습이 얼마동안이나 남을 속일 수 있느냐가 문제지"
"겉모습이 반드시 남을 속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저는 처음부터 당신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거든요."
무릎 위에 놓은 로렌의 손을 잡는 닉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언동을 좀 조심해야겠어. 난 너그러운 편이 못되거든."
로렌은 손을 빼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대로 참고 있었다.
"마치, 너그럽지 않다는 것을 자랑하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사실을 말했을 뿐이요. 앞으로 실제로 보여주게 되겠지만"
로렌은 한참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닉이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원래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로렌은 몸을 긴장하고, 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듯 손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 하기로 되어 있는 새로운 일은 무엇이지?"
닉이 갑자기 말했다. "사무실을 정리하는 일이에요."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군. 좋아, 당신의 인생은 당신의 것이니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2,3주일 동안은 내게 전념해 달라는 거야."
로렌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부탁하는 게 아니라 요구하는 것이겠죠."
"좋도록 생각해" 닉은 로렌의 손을 놓고 머리를 뒤로 기대며, 이젠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았다.
로렌은 눈 아래 전개되는 흰 융단같은 구름을 내다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이런 일이 결코 없었던 지금까지의 평범한 생활과, 지난 몇 주일 동안 세웠던 계획같은 것을.
닉 쪽을 돌아보니, 그는 아직도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로렌은 윤곽이 뚜렷한 그의 옆얼굴을, 햇볕에 그을은 광대뼈에서 완만한 턱의 선을 거쳐 입술에 이르기까지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한쪽 팔은 두 사람 사이의 팔걸이에 얹혀 있었다. 길고 잘생긴 그의 손.
로렌은 그 손이 자신의 몸을 더듬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갑자기 온몸에 전율 같은 것이 흘렀다. 그는 로렌의 몸 어디서 어떻게 반응을 불러일으켜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반응은 이번에도 또 그의 기대에 어긋날 것이다. 비록 그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는 문자 그대로 통나무처럼 누워 있을 테니까. 나처럼 상대를 싫어하는 여자는 그런 일쯤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야." 닉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날 나를 만나러 오기 전에 당신은 이미 결정했을 거야. 그렇다면 이것이 처음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그런데 왜, 피할 수 없는 일에 순순히 몸을 맡기지 못하지?"
"혹시 버진이라고 한다면?"
로렌이 다소 긴장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자, 닉의 입술과 눈에 조소의 빛이 번졌다. "말이란 중요한 거야."
순간 로렌은 그와 시선이 마주쳤으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눈을 돌렸다. 어린애가 되고 싶었다. 어린애처럼 그의 가슴을 두 주먹으로 두들기면서, 무례한 그의 이름을 힘껏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로렌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닉의 반응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로렌은 남성이라는 것을 경멸하고 있었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를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려고 하니까. 세련된 아름다움을 갖춘 그녀의 얼굴과 몸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은 로렌의 마음이 찾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로마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항의 출입구에서 닉은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직원에게 대답하면서, 무슨 말끝에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로렌은 무슨 말을 했는지 물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짐을 가지고 먼저 호텔로 가 있어요." 공항 밖으로 나와, 줄지어 서 있는 택시 정류장에 이르자 닉이 말했다. "30분 후에 약속이 있거든. 프런트에서 내 이름을 대면 될 거요. 스위트룸을 예약해 놓았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룸서비스에게 부탁하고. 나는 다섯 시경에는 돌아갈 수 있을 거요."
로렌은 대답도 없이 차에 올라타자 시트에 깊이 몸을 묻었다. 닉은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의 문을 닫았다. 차가 출발하고, 닉의 늠름한 모습이 멀어졌다. 비록 잠시동안이지만,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가 돌아오기까지 자신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만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3
이상하게도, 공항을 빠져나오자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로렌은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꼭, 행진하는 고대 로마 병사들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시가에는 카메라를 손에 들고 두리번거리고 있는 관광객들이 넘치고, 소음과 열기, 그리고 온갖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로렌은 잠시, 자신이 왜 이 영원의 도시에 오게 되었는지 잊고 있었다.
넓은 광장을 마주보고 서 있는 호텔은 오래 된 건물로, 로비안은 금과 크리스털로 장식되어 있고, 벽에는 호화로운 비단 천이 쳐져있었다. 프런트의 남자는 로렌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로렌은 젊은 남자의 노골적인 호기심을 의식했으나, 그로 인해 기가 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와 닉과의 관계가 남의 눈에 어떻게 비치든 상관없다. 결혼하지 않은 커플이 우리만은 아닐 테니까.
그래도, 슈트케이스를 든 포터의 뒤를 따라 로비를 가로지르는 자신을 프런트의 젊은이가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등 뒤로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렌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을 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체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몹시 거북스러웠던 것이다. 닉은 나 혼자서 체크 인하게 하는 무신경한 사람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만약 그가 나타났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귀중한 두 시간 동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심사숙고해야한다. 순간순간이 아까운 것이다.
스위트룸은 호화로웠으며, 크고 아늑한 거실과 침실, 그리고 욕실이 딸려 있었다. 로렌은 무거운 마음으로, 새틴으로 덮인 커다란 침대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닥쳐올 밤을 생각하니 공포에 가까운 감정에 사로잡혀, 로렌은 밤에 있을 일을 끝까지 상상할 수 없었다. 이런 태도로는 안 된다! 하지만 만약 내가 여기서 없어진다면 닉은 정말 소송할까? 그 사람이라면 안 할 리가 없다. 다른 중역들도 그와 같은 견해를 취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로렌은 자신이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 닉은 약은 사람이고,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없다.
짐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2,3분 만에 전부 풀었다. 닉의 가죽으로 된 슈트케이스는 그대로 팽개쳐져 있었다. 설령 열쇠를 받았다하더라도, 로렌은 그의 짐까지 정리해주는 서비스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청회색 투피스를 벗고 푸른 면으로 된 심플한 원피스로 갈아입었을 때, 닉이 오기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 이상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닉은 로렌이 줄곧 이방에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로렌은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밖에 나가 산책이라도 하면 머리가 개운해지지 않을까?
밖으로 나오자, 비온 뒤라 그런지 몹시 눅눅하고 후텁지근했다. 광장은 사람과 자동차로 붐볐다. 로렌은 왼쪽의 클라우디아 거리로 접어들었다. 앞쪽에 어렴풋이, 그러나 멀지않은 곳에 콜롯세움의 거대한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 로렌은 몹시 기뻤다.
이곳에 있는 동안 혼자서 로마를 즐겨야지. 그러나 로마의 거리에서 동반자도 없이 혼자 걷고 있는 여자는, 당연히 남자들의 주목대상이 되게 마련인 것이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더라도, 상대의 주의를 끌려는 목소리나 휘파람, 또는 저속한 유혹 따위는 통할 수 있다.
스쿠터를 탄 젊은이가 로렌의 뒤를 따라와, 뒤에 타지 않겠느냐고 꾀었다.
"미국인인가요? 재미있는 구경을 시켜줄게요." 그는 결국 콜로세움의 입구까지 따라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이, 물러가지 않고 스쿠터로 주위를 빙빙 돌았다.
사람들이 붐비고는 있었지만, 거대한 타원형의, 반쯤 페허가 된 콜로세움은 시대를 초월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로렌은 맨 위에 있는 테라스를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도중에 있는 총안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고대 로마의 광장과 자동차로 넘치는 넓은 거리가, 멀리 장난감처럼 내려다보였다. 거리의 소음이 이곳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로렌은 돌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먼 옛날을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 외에는 모두 잊은 채.
"훌륭하군요." 영어로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도 처음인가요?"
귀찮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려보니, 진즈에 티셔츠를 입은 청년이 옆의 총안 앞에 선 채 다정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청년은 함께 오기로 한 여자 친구가 올 수 없게 되어 혼자 여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렌은 얼마동안 그와 함께 스스럼없는 대화를 즐겼다.
"이젠 가봐야겠어요. 다섯 시에 약속이 있거든요."
"벌써 지났는걸요."
로렌이 몸을 일으키자, 청년은 서운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상대해주어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로렌은 가볍게 웃어 보이고 걷기 시작했다. "즐거운 여행이 되도록 빌겠어요."
청년은 혼자지만, 나보다 훨씬 즐거울 것이다. 닉은 다섯시 경에 호텔에 도착할 거라고 말했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다면, 그는 어떻게 할까? 짐이 있으니까 내가 도망쳤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5시 20분이었다. 로비는 출입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층마다 서기 때문에 로렌은 잠시 기다려야 했다. 스위트룸은 5층의 짧은 복도 끝에 있었다. 로렌은 외출할 때 일부러 맡기지 않았던 열쇠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한 발짝 안으로 들여놓자, 닉이 건너편 거실의 입구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런트에서 당신이 외출했다는 전화연락이 있었지. 도대체 어딜 다녀오는 거지?"
"밖에요." 로렌은 최후의 퇴로를 끊는다는 생각으로 뒤의 문을 닫았다. "잠깐 산책을 하고 왔어요."
"지금까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몇 분 지나지 않아 나갔다고 하던데…."
"호텔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 것은 계약 조건에 들어있지 않을 텐데요."
"하지만 이것은 들어있지"
닉은 험악한 표정으로 다가와 로렌을 꽉 끌어안았다. 그는 로렌의 반항을 무시하고 그녀의 입술을 뺐었다. 그가 세차게 입술을 밀어붙이자, 로렌은 일부러 꼼짝도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그의 손이 엷은 드레스를 통해 허리를 쓰다듬었을 때도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온몸을 긴장한 채 그의 손길에 대해 증오만을 느꼈다.
마침내 닉이 손을 놓았다. 로렌은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고, 경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끝났나요?"
"끝나지 않았어." 닉의 얼굴에서는 노여움이 사라져 있었다. "우리에게는 아직 많은 길이 남아있지. 난 기다릴 수 있어."
닉이 거실로 사라진 뒤에도, 로렌은 잠시 멍청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샌드위치와 커피를 들지" 닉이 거실에서 말했다. "몇 시간 동안 삭사는 못할 테니까"
로렌은 착잡한 마음으로 천천히 거실로 들어갔다. 닉은 자기 몫을 손에 들고 호화로운 소파에 앉아있었다. 로렌의 커피가 왜건 위에 놓여 있었다. 샌드위치는 풀을 빳빳하게 먹인 커다란 냅킨으로 덮여 있었다. 그것을 보자 로렌은 갑자기 시장기를 느꼈다.
로렌이 컵과 접시를 들고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돌아서 의자에 앉는 것을, 닉은 입가에 싸늘한 웃음을 띠고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사업상 아는 사람의 집을 방문해야겠어. 특별한 파티니까 성장하는 것이 좋겠는데, 입을만한 것이 있나?"
로렌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글쎄요, 있을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러리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내가 필요한 것을 사왔어. 침실에 있어."
"저는 옷이나 갈아입는 인형이 아니에요. 제가 입지 않겠다고 하면요?"
"입을 거야." 대답은 한마디였다.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혹시 여자의 사이즈 전문가가 아닌가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동요하는 빛이 전혀 없었다. "발 사이즈는 알 수 없어서 샌들을 몇 켤레 준비했지. 맞지 않는 것은 돌려주기로 했어."
"용의주도하시군요." 로렌은 일부러 이죽거렸다.
그는 경멸하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입혀주지" 닉은 잠시 로렌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손에 든 커피 컵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거든"
조만간 있어야 할 일이라면 왜 지금은 안 되지? 로렌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 사람이 상상하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빨리 깨달았으면 좋으련만. 한번만 겪으면 틀림없이 사양할 텐데.
이번에는 등을 떼밀 필요도 없었다. 로렌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무감동하게, 그야말로 로봇처럼 앞장서서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옆으로 가서 샌들을 벗어 던지고, 비단으로 된 침대커버를 들치고 몸을 뉘었다. 호화로운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준비는 되어있어요."
"무슨 준비가 되었다는 거지?" 닉이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벗겨주어도 좋겠지만, 그렇게 누워 있으면 어렵겠는걸, 옷을 찢어도 괜찮다면 모르지만" 닉은 침대 끝에 앉아, 로렌의 턱을 손으로 잡고 자기 쪽으로 돌렸다. "난폭하게 다루어 주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도 있지만 당신도 그런 것을 좋아하나?"
"천만의 말씀, 계약상으로는 저는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도움이 되어 주기만 하면 돼요. 지금 제가 하고 있듯이 말이에요."
"그랬던가. 무저항의 저항이란 말이지? 나는 원래 도전받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 닉은 로렌의 드레스의 긴 파스너를 내렸다. 로렌은 닉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둔채 해면처럼 누워 있었다. "아름답군. 매끄러운 피부, 날씬한 다리, 가는 허리-다른 여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겠는걸. 그 얼굴과 이런 몸이라면,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 나는 갖고 싶은 것을 위해서는 재산을 아끼지 않지. 물론 당신의 효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야. 그것은 대단히 칭찬받을 만한 일이지"
"어서, 제발!" 로렌은 될 대로 되라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는 웃었다. "지금은 당신이 즐겁지 않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지. 천천히 시작해서 분위기를 충분히 무르익히자구. 이런 식으로"
입을 맞추려고 다가오는 닉의 얼굴을, 로렌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겹쳐졌다. 가벼운 촉감이 그녀의 전신을 긴장케 했다. 그리고 그의 손이 그녀의 몸에 닿았다.
서투르지 않은 그의 부드러운 손놀림이 그녀의 의지를 빼앗았다. 로렌은 그의 손길에 자신의 몸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일찌기 경험한 일이 없는 그 무엇이 그녀의 본의 아닌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로렌은 마음과 함께 몸을 긴장시켰다.
"쉽게 허락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군." 닉은 로렌의 입술에서 떨어지면서 중얼거렸다. "그런 점도 내 맘에 꼭 들어. 당신과는 재미있을 것 같군. 로렌. 틀림없이 당신은 머지않아 사랑해 달라고 말하게 될걸"
"절대로 그렇잖아요." 로렌이 이렇게 말하자 닉은 말없이 웃었다.
"절대로란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게 아니야. 당신은 쉽게 끝내고 빠져나가려고 생각하는데, 내가 많은 것을 요구하니까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이기지 못할 거야. 그러기에는 당신은 너무 민감하거든. 당신과 나는 궁합이 아주 잘 맞겠어. 좀 더 기다릴 가치가 있어." 닉은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하면서 말했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오겠어."
목욕물에 빠져죽기라도 하라지! 로렌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로렌은 한참만에야 침대에서 내려왔다. 의자 위에는 커다란 상자가 여러 개 놓여있었다. 그 안에 든 드레스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까하는 생각이 한순간 머리에 스쳤다. 그러나 로렌은 그 보복이 두려웠다.
닉이 가지고온 샌들들은 섬세한 금빛 장식이 달려 있었으며, 그중 둘째 번에 신어본 것이 꼭 맞았다. 마치 아무 것도 신고 있지 않은 것처럼 가벼웠다. 다른 상자에는, 위에 가터가 달린 최고급 스타킹 몇 켤레와 앙증맞은 비단 속옷이 들어있었다.
로렌은 예상했던 대로 닉이 호색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이것을 입는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로렌이, 자신의 속옷이 왜 이렇게 작아야 하는가를 알게 된 것은, 드레스를 꺼내어, 커다란 거울 앞에서 자기 몸에 대보았을 때였다. 그녀는 한동안 싸늘한 눈으로 드레스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접어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로렌은 의자에 앉아 닉이 욕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닉은 허리에 타월만 감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전부 당신 거야."
"중요한 파티에 콜걸을 데려가고 싶으면 진짜를 부르는 게 어때요?"
"콜걸은 이런 특별한 서비스를 하지 않아. 당신만큼 어울리는 여자는 없을 거야."
"저는 입지 않겠어요. 억지로 입히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닉은 벽 가에 있는 워드로브 앞에서 셔츠를 입으면서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나는 입힐 수 있어. 그리고 당신은 입게 될 거야.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시험해볼까"
"왜요? 왜 저런 드레스를 입죠?"
"당신을 주목의 대상으로 만들고 싶어서…."
"왜요?"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준비할거야? 아니면 청구서 문제로 전화할까?"
로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손에 쥔 무기를 정말로 사용할 셈인가요?"
"그야 상황에 달렸지. 지금 같아서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사용하겠어."
"완력이라도?"
"아니야 완력은 사용하지 않아. 귀중한 드레스가 찢어지면 안 되니까"
"그러기를 바라요." 그러나 로렌은 자기가 어떻게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굴복할 리는 만무하다. 닉은 협박쯤 간단히 할 수 있을 정도로 냉혹한 사나이다. 결국 마지막에는 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렌은 서둘러서 샤워를 마치고 메이크업을 했다. 속옷과, 거미줄처럼 섬세한 스타킹은 로렌의 몸에 꼭 맞았다. 금실을 짜넣은 드레스는 어깨에서 발끝까지 제2의 피부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무릎 위까지 들어있는 슬릿이 벌어지곤 했다. 그리고 가슴 부분은 V자 모양으로 깊이 패어 있었다. 로렌은 마치 벌거벗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욕실에서 나가 닉의 엄격한 검열을 받을 생각을 하니, 전신의 신경이 긴장되었다.
닉은 이미 흰 턱시도와 검은 바지로 갈아입었다. 로렌을 본 순간, 그의 입에서는 가벼운 휘파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예상이상이야. 당신처럼 옷맵시를 낼 줄 아는 여자는 드물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거예요. 마치 누드로 있는 것 같아요."
"누드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 않아"
"이만하면 되었단 말인가요?"
"충분하지" 닉은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상자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꺼내어, 로렌에게 다가왔다. "저쪽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어."
로렌은 가슴 한가운데로 내려오는 한 알의 진주의 무게를 느끼면서, 닉이 가는 네크리스를 채우고 있는 동안 꼼짝도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팔찌. 이젠 다 됐어." 닉은 그의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로렌의 가까이에 서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는 로렌에게서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로렌은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지 않았다. "나중엔 당신도 좀 더 다른 것을 느끼게 될 거야."
자신의 몸이 닉의 능숙한 손길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자, 로렌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닉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내 감각을 일깨운다. 이런 때일수록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로렌은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다.
4
로렌은, 로마의 밤을 혼자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우랴 싶었다. 차가 시가를 빠져나가고 있는 동안, 닉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도 지금의 상황을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로렌은 곧, 그의 인생에 후회 같은 것이 끼어 들여지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구시가지를 벗어난 강변의, 야간 조명구역에 서있는, 근대적 디자인의 대저택 앞이었다. 계속 도착하는 차들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계단 밑에 줄지어 섰다. 현관의 넓은 문이 열려 있어,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밝은 불빛이 현관 바깥까지 비치고 있었다.
로렌과 닉은 무엇인가 계속 지껄이고 있는 한 커플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지껄이는 말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로렌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흥분하기 쉬운 민족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음을 생각해냈다. 그들은 보통 대화도 마치 기관총을 쏘듯이 격렬하게 한다.
입구에서 금실을 수놓은 망토를 보이에게 맡기자, 주위에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모두 로렌에게 집중되었다. 로렌은 허리를 펴고 닉에게 바싹 붙어 섰다. 그리고 호스트와 호스테스가 기다리는 방을 향해, 길고 호화로운 복도를 걸어갔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라가니 밝은 빛이 휘황하게 빛나는 커다란 방이 보였다. 이미 많은 손님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의 남자는 흰 턱시도차림이었으나, 개중에는 전통적인 검정 턱시도를 입은 사람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사람들의 눈을 끄는 것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들이었다. 대담한 옷을 입은 것은 로렌만이 아니었다. 로렌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로렌처럼 네크라인이 깊게 팬 옷을 입은 여자는 없었지만.
로렌과 닉이 인사할 차례였다. 닉이 소개한 호스트 내외는 사십대 중반이나 후반쯤으로 보였다. 호스트의, 단정하게 손질한 검은머리 올리브색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를 보자 그가 전형적인 라틴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로렌의 손등에 키스할 때, 그의 눈은 눈부시게 드러난 그녀의 가슴에 못박혔다.
방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모두들 돌아다보았는데, 그들의 웅성거림이 로렌의 귀에까지 들렸다. 이 거북살스럽고, 자연스럽지 못한 웃음소리가 넘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로렌은 싫었다. 그러나 그녀는 의지의 힘으로 간신히 버티었다.
로렌과 닉이 앞으로 걸어나가자, 마법처럼 천천히 길이 열렸다. 마치 한 방향에서 두 사람을 인도하듯이.
닉은 보이가 나르는 쟁반에서 샴페인 글라스를 집어, 장난스럽게 눈썹을 추켜세우고 로렌에게 건네주었다. "지금처럼 하면 돼, 아주 훌륭해!"
로렌은 그의 잘생긴 얼굴에 샴페인을 끼얹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기만 손해다. 오늘 하룻밤을 이런 식으로 지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로렌과 닉의 바로 앞에 한 커플이 서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있었다. 여자는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등을 이쪽으로 돌린 채 서 있었다. 그녀의 길고 아름다운 등은 매끄럽고 깨끗한 올리브색이었다. 에메랄드그린의 드레스는 히프 근처까지 갈라져 있었다. 칠흑처럼 검고 윤기나는 머리를 한데 묶어 에메랄드를 박은 핀을 꽂고 있었다.
남자가 먼저 로렌과 닉을 발견하고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가 무어라고 한마디 하자, 여자의 드러난 등줄기에 가벼운 긴장이 흘렀다. 곧 그 여자가 돌아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여자였다! 로렌은, 자기가 지금까지 보아온 여자들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무엇인가 기대하는 듯한 커다란 검은 눈과 도톰하고 빨간, 유혹하는 듯한 입술. 에메랄드 그린의 드레스가 몸에 꼭 끼어, 흐르는 듯한 몸의 곡선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었다.
"니콜라스라구요?" 여자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로렌의 얼굴을 보자 그녀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검은 눈이 번쩍 빛났다.
"이쪽은 로렌 데블린. 프란체스카와 루이지 바르디니 부처야." 닉의 말투에는 약간 불만이 섞여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닉은, 로렌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계속 영어로 말했다. "축하합니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매우 유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두 분이 행복하기를 빌겠습니다"라고 의미심장하게 말을 맺었다.
루이지 바르디니는 몸집이 작고 피부가 검으며, 여자보다 스무 살쯤 위로 보였다. 프란체스카의 드러난 팔을 잡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이 여자는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약간 뒤로 젖히고 있는 그의 자세에서는 어떤 도전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하고 함께 살면, 프란체스카는 아무런 불편도 없지요."
아니다, 이 여자는 무엇엔가 굶주리고 있다. 닉을 쳐다보았을 때 그녀의 검은 눈에 스친 표정을 보고, 로렌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 표정에는 깊은 고뇌가 담겨 있었다.
갑자기 프란체스카의 표정이 적의로 변했다. 그녀는 메마른 웃음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그래요, 루이지는 내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죠!"
주위의 사람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럼…." 닉은 웃으면서 로렌의 팔을 잡았다.
로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화려하게 차려입게 한 것은 이런 일 때문이었나요?"
"세상에는 매력적인 여자가 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지. 저 여자는 내게 보이려고 루이지와 결혼했어. 그래서 보복을 해준 것뿐이야."
"당신과 가까운 사이였나요?" 로렌은 무심코 말했으나, 닉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자 당황했다.
"매사를 그렇게 분석하기를 좋아한다면 끝까지 해보지 그래"
"그렇게 하죠." 로렌은 아직도 힐끗힐끗 자기를 쳐다보는 주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애써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했죠. 그런데 당신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당신 아닌 딴 사람을 결혼상대로 택하자 당신은 자존심이 상했죠. 그렇잖아요? 당신은 단물만 빨아먹고 버렸겠죠?"
"물론이지. 프란체스카와 같은 여자와 결혼할 남자는 없지"
"루이지는 결혼했어요."
"그 사람은 바보거든, 타고난 성질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틀림없이 그 사람은 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사랑의 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죠? 당신은 지금까지 누군가를 사랑해 본 일이 있나요?"
핸섬한 얼굴이 얼어붙어 마치 가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의 말이 여자에 관한 것이라면, 당신의 말대로야. 이 세상에서 믿을 만한 여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
"여자를 정상적인 곳에서 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런 여자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는걸. 마지막까지 자신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여자를 본 일이 없어. 그런 여자가 있다면 내일이라도 결혼할 용의가 있지"
"그런 훌륭한 여자가 결혼할 때는, 무엇보다도 상대가 상냥한 남자이기를 바라죠. 하지만 당신에겐 상냥한 구석은 전혀 없거든요."
"당신은?" 닉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애써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당신도 프란체스카와 마찬가지야."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아버지를 위한 것이라는 것 말고는…."
"그렇게 단정할 수 있나?" 그는 한껏 경멸하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당신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가면 당신의 미래에 그늘이 지고, 브뤼셀의 일자리도 잃을 가능성이 있는 거지?"
로렌은 한동안 눈이 휘둥그래진 채 닉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한참만에야 물었다. "제 일자리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죠?"
"조사해보았지. 어렵지 않은 일이거든"
"그럼 왜, 오늘 아침 비행기 안에서 물어보았죠?"
닉은 넓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솔직한 대답을 좀 기대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당신은 당신 이외의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일처럼 보이고 싶어 했지. 그렇잖아?"
로렌의 자존심이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 없게 했다. "좋도록 생각하시죠."
두 사람 사이에 트러블이 있다고 느꼈는지, 주위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닉은 로렌의 글라스를 빼앗아, 자기 것과 함께 가까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저쪽 방에 춤이 시작되고 있어. 돌아가기 전에 30분쯤 추자구."
아직 아홉시밖에 되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가 당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로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이 프란체스카 때문에 저를 데리고 왔다고 사람들이 상상해도, 마음에 걸리지 않아요?"
"상상할 것도 없어. 다들 잘 알고 있는걸. 뿐만 아니라, 우리가 빨리 돌아가면 그 이유도 알거야-적어도 남자들은. 오늘밤 내 처지를 부러워할 남자가 많을 걸"
"루이지씨 빼놓고는 그렇겠죠."
로렌의 팔을 잡고 있는 닉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그렇게 가시 돋친 말은 그만해둬. 내게 있어 프란체스카는, 다 읽어버린 책이나 마찬가지니까"
댄스 플로어는 좁아, 로렌은 할 수 없이 닉의 몸에 바싹 붙었다. 등에 댄 그의 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로렌은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와 가까이 있기만 해도 이런 정도라면, 막상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느 정도까지 자신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닉을 미워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만난 남자 가운데 가장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신상에 관한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요?"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깨려고 로렌이 물었다.
"어떤 질문이냐에 달렸지만, 아무튼 말해봐"
"당신에겐 이탈리아 사람의 피가 흐르는 것 같아요. 이탈리아 말도 잘하고, 모습도 이탈리아 사람 같은 데가 있거든요."
"어머니는 이탈리아인이지. 나는 두 나라 말을 배우면서 자랐어. 아버지는 싫어했지만"
"아버지가 반대하셨다니요."
"아버지는 어머니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와 결혼했지-어머니 집안에서는 처음에 두 분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을 정도였어. 아버지가 이탈리아를 싫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어머니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닌가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셨을 텐데요."
"어머니는 내가 여덟 살 때 아버지를 두고 이탈리아로 돌아가 버렸어. 그 정도의 애정이었지"
로렌은 한동안, 닉이 누구인가도 잊은 채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당신도 버리고?"
"아니야, 나는 데리고 갔어."
"그래서 당신은 이 나라에서 자랐나요?"
"아버지가 친권을 획득할 때까지는 나는 영국인이야." 그의 잿빛 눈은 거의 아무런 표정도 띠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있으면 어머니가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어머니는 돌아오시지 않았군요?"
"그렇지. 그래서 나는 두 분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었지"
"모든 것이 어머니의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을 텐데. 어머니만을 비난하고 있는 것 같군요."
"어머니만의…." 닉은 갑자기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머니는 7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는?"
"역시 3년 전에 돌아가셨지" 닉은 다시 빈정거리듯 웃으면서 말했다. "이젠 당신도 알겠지, 내가 자신이외의 다른 누구에 대해서도 생각지 않는 이유를?"
"다른 사람을 이용한다는 것도 알고 있죠."
"맞아" 닉의 시선이 로렌의 얼굴과 머리를 방황했다. "이젠 돌아갈까?"
"아직 아무 것도 먹지 않았잖아요." 로렌은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벌고 싶었다. "샌드위치를 반밖에 먹지 못했는걸요."
"배고파 쓰러지겠단 말인가?" 닉은 한심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하긴 배고픈 여자를 침대로 데리고 갈 수는 없지" 닉은 로렌을, 화려한 금실로 수놓인 소파에 앉혔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가지고 올 테니까"
그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걸면서 사람들 속을 누비고 지나갔다. 이탈리아인과의 혼혈이라고 하지만, 라틴 기질은 어쩌다가 보일 뿐이다. 저 사람은 자신을 잘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냉혹할 정도로.
"아름다운 영국의 장미를 버려두고 가셨나?"
강한 사투리의 남자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보니, 검은 눈이 스스럼없이 로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은 로렌의 얼굴에서 드러난 가슴부분으로 서서히 내려갔다.
"나는 거짓말을 못하는 성질이거든요. 혹시 당신이 지금의 파트너와 헤어지고 싶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으나,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뻔한 것이었다. 그런 사람에 대해 정색하고 대답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내가 닉의 새 애인인지 아닌지에 관한 것일 테지.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놓은 것은 닉 자신이다.
닉이 음식을 담은 접시를 높이 쳐들고 사람들을 헤치며 돌아왔다 낯선 남자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달라는 듯한 시늉을 하면서 엉거주춤 물러갔다.
그 남자의 그런 태도는 자신의 드레스 때문이라는 것을 로렌은 잘 알고 있었다. 점잖은 여자 같으면 이런 디자인을 고르지 않는 법이다. 남자라면 프란체스카와 같은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닉이 말했지만, 그 말속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닉과 같은 남자와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 하느님, 제발 그 사람과 결혼하는 여자를 구제해 주옵소서!
"저자가 당신에게 뭐라고 말했지?" 닉이 접시를 건네주면서 물었다.
"말할만한 가치도 없는 걸요."
"아무튼 말해봐,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한마디도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는 걸요. 하지만 그 사람이 매력적인 신청을 했던 것 같아요." 로렌은 도전적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에 비하면 그래도 솔직하게 자기 마음을 밝혔어요."
"내가 내 마음을 밝히지 않았단 말인가?"
"전혀 밝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저를 외국에서 산 물건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데 대해선 한마디도 듣지 못했어요. 저와 계약을 할 때 오늘밤의 일은 예상하고 있었겠죠? 그날밤 아파트로 걸려온 전화가 바로 로마에서 걸려온 것 아니었던가요?"
"이탈리아어로 말했기 때문이군. 정확하게 알아맞혔어. 처음부터 당신을 한가지 목적으로 데리고 온 것은 아니지. 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미리 알았다고 해서, 우리의 계약이 달라질건 없잖아?"
"달라졌을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당신의 최대 관심사는 아버지에 관한 것이 아니었나?"
"아니오. 아버지 때문이에요. 당신은 제게 말을 못하게 하는군요."
"당신은 말보다 음식이 급한 것 같은데.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은 음식을 생각만 해도 메스꺼워졌다. "생각이 변했어요. 제게도 그 정도의 권리는 있겠지요?"
호스트와 호스테스에게 작별의 인사를 한 것은 열시가 좀 지나서였다. 그들은 좀 더 놀다 가라고 말렸으나, 로렌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기뻤다. 닉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호텔의 엘리베이터에서는 단둘이 있게 되었다. 지금은 로마 전체가 저녁식사시간일 것이다. 호텔로 돌아오는 동안 닉은 줄곧 조용했다.
그러나 스위트룸의 문이 닫히자, 그는 로렌을 난폭하게 끌어안았다.
너무나 격렬한 입맞춤에 로렌은 갑자기 감각이 마비되는 듯했으며, 그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키스는 아까 그 남자를 위한 것이야. 그리고 지금부터는 나를 위한 것이지." 닉은 눈을 번쩍 빛내며 로렌의 망토를 벗겼다. "이제는 배가 고프다는 따위의 말은 하지 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아무 말도 않겠어요. 말을 한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맞아! 아무 도움도 되지 않지." 두 사람은 아직 스위트룸의 작은 로비에 서 있었다. 닉은 양말로 로렌의 몸을 감싸며, 등의 긴 퍼스너를 내렸다. 그리고 그는 로렌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름답군. 버들가지처럼 나긋나긋한걸."
로렌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서 있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로렌은 지신의 몸이 이처럼 떨리는 것은 에어컨 때문이라고 자신에게 열심히 변명했다. 어떻게든 그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결과적으로 그를 더 자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가 하는 대로 버려 두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이 최선책이다.
닉의 품에 안겨 침실에 옮겨졌을 때도, 로렌은 아직 주저하는 마음을 떨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로렌은 눈을 똑바로 뜬 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섰다. 영국에서는 아직 아홉 시일 게다. 아버지와 캐롤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마도 식후의 술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난로 앞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두 분은 텔레비전의 뉴스를 보고 있을 것이 아닐까? 아버지는 집에 계실 때 항상 아홉 시 뉴스를 보셨지. 물론 집에 계실 때에만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콘서트에 가셨을지도 모른다. 화요일 밤이면 두 분은 흔히 함께 가셨으니까. 화요일? 정말 오늘 오후에 로마에 도착한 것일까? 백 년도 넘는 옛날처럼 생각된다.
닉의 열기가 로렌의 공상을 산산이 부수고 말았다.
닉의 손이 로렌의 턱과 목 그리고 허리에 닿았다. 로렌은 눈을 감고 다른 일을 생각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자신의 몸이 민감한 만큼 마음은 더욱 굳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은 빼앗길망정 마음은 줄 수 없다고 다짐했다.
로렌이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을 안 닉은 더욱 난폭해지고 집요해졌다. 로렌은 숨이 막힐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말리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당신이 바라는 방식이라면…." 닉은 내뱉듯이 말했다.
로렌은 고통의 신음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의 난폭한 폭력에 대해 비명을 지르며 대항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럴 만한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신은 왜 경험이 있는 체했지?" 잠시 후 닉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깼다. "당신은 이번이 처음이지?"
로렌은 목이 아팠다. 그러나 경멸하듯 말했다.
"오늘 아침 비행기 안에서 말했을 때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태도였잖아요?"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없었거든."
"알았다면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인가요?"
"반드시 그랬을 거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좀 더 조심스럽게 했겠지. 아무튼 이미 지난 일이야."
닉이 로렌 쪽으로 돌아눕자 볼에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왜 경험이 있는 체했지?"
"경험이 있는 체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에요."
로렌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닉의 손이 난폭하게 그녀를 잡았다.
"건드리지 마세요!"
그러나 닉은 그녀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하긴 사전에 내가 물어 보았어야 옳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은 자신을 제공하기 전에, 그런 질문을 기대하는 기색이 전혀 없더군, 내가 어떻게 했어야 옳았다고 생각하지?"
"변명하려고 하는군요. 하지만 아무리 변명해도 <강간>임에는 틀림없어요!"
"당신이 부탁한 일이야. 그러니까 변명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아."
"저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저를 붙잡고 있어 봐야 별수 없잖아요? 저는 당신이 기대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거든요."
잠시 후 닉이 대답했다. 어둠 속이라 그의 표정은 알아보기 어려웠다.
"당신을 돌려보내고 싶지 않아. 우리는 계약을 했고, 아직 그 계약은 끝나지 않았어."
한 가닥의 희미한 희망마저 잃은 로렌은,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힌 채 닉을 쳐다보았다.
"저를 굴복시키려고 들지 마세요. 똑같은 일이 되풀이될 뿐이에요!"
"글세." 그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당신은 불감증이 아니야, 로렌. 당신의 마음은 아무리 거역하려고 해도 몸은 반응을 보이고 있거든. 당신이 왜 지금까지 피해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알고 싶지도 않아…."
"제가 피한 것은, 당신이 마음에 맞는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죠."
닉의 입술이 로렌의 이마에 와 닿았다. 이번에는 훨씬 부드러워, 그녀의 결심에도 불구하고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 지신과 나를 적으로 돌리고서는 싸울 수 없을 거야. 나는 꼭 당신의 마음을 바꾸어 놓겠어."
닉은 다시 한번 로렌을 요구했다. "지금은 시작이야. 당신은 싸울 수는 있겠지만 이길 수는 없을 거야."
닉이 등을 돌렸을 때, 로렌은 정신이 마비된 듯 멍청하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대한 감정을 생각한다면 거절하는 것은 간단했을 텐데…. 하지만 이성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닉에게 항복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5
로렌이 눈을 떴을 때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베개만이 움푹 들어가 있어, 닉의 오만한 머리가 쉬었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로렌은 어쩌면 자기를 해방시켜 준 것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침대 곁의 램프에 끼워둔 메모를 읽어보고 부질없는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점심때 돌아오겠어. 이곳에 있어줘>
아홉 시반 -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보다도 훨씬 늦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던 모양이다. 지금도 온몸이 나른했다. 로렌은 위안이 될만한 것이 없나 생각해보았다. 메모에는 기다리고 있어 달라고 했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간밤에 닉이 화를 낸 것은 내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때문이 아닐까? 밝은 대낮에는 좀 더 솔직해질지도 모른다.
만약 나를 데리고 온 주된 목적이 프란체스카에 대한 복수에 있었다면, 이젠 내할 일은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지나치게 낙천적이다. 로렌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닉은 나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 남자의 자존심이 회복될 때까지는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로렌은 화장대의 거울에 비친. 생기없는 초록빛 눈을 보고, 만약 닉을 만족시켜 주었다면 자기자신도 이처럼 참담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닉은 경험이 풍부한 남자다. 정말로 매력을 느끼는 여자를 만났더라면, 틀림없이 그 여자에게 잊혀지지 않을 추억을 남겼을 것이다.
만약 육체의 만족만을 위해서라면, 로렌도 앞으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고 있고, 지금까지 줄곧 원하고 있었던 것은, 육체의 만족에 따르는 <사랑>이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이런 결과가 되다니! 이런 식으로 백날 생각해 보았자 별수 없잖은가.
로렌은 갑자기 결심했다. 닉이 돌아올 때까지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부질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직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샤워를 끝내고 크림색의 무명옷으로 갈아입자, 마음이야 어떻든 몸은 한결 생기를 회복하는 듯했다.
스위트룸에서의 전망은 엄청난 스케일이었다. 콜로세움과 그 건너 쪽에 있는 고대 로마의 광장의 감동적인 폐허가 내려다 보였다. 모두가 밝은 햇살을 받고 있었다. 2천년 전에도 같은 태양이 로마제국의 번영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닉은 로렌이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돌아왔다. 그는 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로렌의 뒤로 다가왔다. 로렌이 돌아보았을 때,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표정이 스쳤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줄 알았어요. 열한 시경에나 돌아올 줄 알고…."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어.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어. 간밤엔 내가 심한 짓을 한 것 같아서…."
그의 말에 로렌은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사과할 정도로 괴로워했다는 것이 로렌의 상처받은 마음을 다소 위로해 주었다.
"당신은 오해했던 거예요. 당신뿐만 아니라 저도 마찬가지죠. 전 당신을 좀 더 선의로 생각했어야 옳았어요."
"당신은 반밖에 모르고 있어. 나는 당신이 찾아오기 전에, 아버지 문제는 덮어두기로 결심하고 있었어. 아버지는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해 왔거든. 그렇지 않다면 이미 고발되었을 거야."
로렌의 눈에 그늘이 지고 몸이 굳어졌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군요?"
"아니야, 당신이 한일은…. 당신은 나를 흔히 있는 보통 남자로 가볍게 보았지. 그래서 당신에게 생색을 내려고 했던 거야. 하지만 그때도, 당신이 프란체스카에 대한 얘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좀 더 자연스럽게 나를 대했을지도 모르지"
“그 전화 말인가요?"
"그래. 나는 프란체스카에게서 걸려온 것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프란체스카와 내가 함께 알고 있는 친구였는데, 로마로 떠나기 전이라며, 곧 로마로 오면 잘처리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기별이었어. 그래서 프란체스카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게 된 셈이지"
"하지만 당신은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문제는 내 자존심이야. 프란체스카는 2년 동안 온갖 호사를 다 했어. 그 여자는 여자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거든"
"그 여자 자신의 자존심만 빼놓고 말이죠."
"그 여자는 자존심 따윈 옛날에 버린 사람이지. 그 여자에게 루이지가 마지막 남자가 되진 않을 거야. 물론 나도 첫 남자는 아니었겠지만"
"하지만 루이지는 정식으로 결혼했어요. 당신과는 사정이 다르잖아요?"
"얼마동안은 유지할 수 있겠지. 그 여자가 절망감을 느낄 때까지 말이야. 프란체스카는 결코 한 남자에게 얽매일 여자가 아니거든"
"당신도 포함해서?"
"나는 대개의 경우 내가 필요로 할 때 그 여자가 있어주기만 하면 눈감아 주었지. 하지만 루이지는 그럴 수 없는 남자거든. 그 사람의 무기는 돈이야. 그 사람은 프란체스카가 사귀는 남자를 모두 돈으로 처리하게 될 거야."
잠시 후 로렌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저는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의 잿빛 눈은 로렌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띠고 있었다.
"꼭 그래야 한다면…. 하지만 내게도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어. 나에 대한 인상을 바꾸고 싶어서 말이야."
로렌은 왠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왜요?"
"내게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야."
닉은 로렌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미소가 로렌의 심금을 울렸다. 이것은 지금까지 보아온 닉이 아니다. 이젠 이 사람의 매력에 눈을 감을 수 없다. 아니야. 이러면 안 된다. 사실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로렌은 자기 자신에게 단단히 타일렀다.
"왜지요?"
로렌은 자신의 목소리가 감정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목소리의 억양을 억제하며 같은 질문을 했다. "왜 중요한 일이지요?"
"당신이 중요하기 때문이야, 지금까지의 어떤 여자보다도" 닉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정하게 로렌의 볼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간밤에는, 내가 당신에게 한 일에 대해서 후회가 되어, 아니 그밖에도 여러 가지가 후회가 되어 한잠도 잘 수 없었어.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기엔 이미 늦었을까?"
"모르겠어요." 로렌은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닉…."
"틀림없이 잘 될 거야."
닉은 몸을 구부려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로렌은 황홀한 마음으로 몸을 맡기고,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결국 이렇게 되리라고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당신을 원하고 있어." 닉은 로렌이 머리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은 참겠어. 우선 서로를 알 수 있는 여유를 갖자구. 어떻게 생각해?"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변하는 바람에 로렌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불장난이라면, 저는 그런 일을 잘해나갈 것 같지 않은데요."
"그렇지 않아" 닉이 로렌의 귀를 간질였다 "로렌, 나는 지금 서른네 살이니까 곧 서른다섯이 돼. 젊은 시절에 하는 실수도 경험할 만큼 경험한 셈이야. 하지만 결혼상대는 특별한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항상 생각해 왔지. 겉모습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존경할 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느냐가 문제지. 당신은 자신을 판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아버지를 위한 효심일 따름이야. 더구나 그런일은 처녀로서는 몇 곱절이나 더 어려운 일이었을 거야."
"우리는 서로가 상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요. 당신은 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충분히 알고 있어. 나머지는 시간이 메워줄 거야. 당신은 내 자제심을 위태롭게 하는군. 이러다간 내가 책임질 수 없게 될지도 모르겠어."
이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그러나 다정하게 속삭이는 사랑의 말이었다. 로렌은 갑자기 전신의 감각이 고조되는 것을 느끼면서,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요."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어." 닉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보상할거야."
침실은 에어컨 덕분에 시원했고, 빛은 엷은 진주 빛으로 흐려져 있었다. 닉은 로렌의 긴장을 서서히 풀어주었다. 곧 로렌은 본능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간밤의 고통이 이제는 먼 옛날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오늘이 처음이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 닉은 로렌의 입술에 키스하면서 속삭였다.
미풍에도 잎이 흔들리는 미류나무처럼 로렌의 전신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충족되고 싶다는 갈망이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을 때, 그것은 마치 세상의 종말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로렌은 충족된 기분에 젖은 채, 이제는 아무 것도 생각하기 싫었고,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닉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닉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때?"
"멋있어요." 로렌은 긴 팔다리를 뻗으면서 기지개를 켰다.
"간밤의 고통이 보상되었을까?"
"충분히" 로렌의 쌩긋 웃는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당신 같은 남자가 남에게 사과하다니….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어요. 특히 여자에게 사과한다는 것이 말이에요."
"나를 그렇게 남존여비적 사고방식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나?"
로렌이 밝게 웃었다. "네.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은 어느 모로 보나 그렇게 보이는 걸요. "
잠시 말이 끊겼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로렌의 어조는 변해있었다.
"닉, 아까 발코니에서 당신이 말하려고 한 것은…."
"그것은," 닉은 로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결혼해 달라고 말하려고 했던 거야. 로렌. 그것도 당장"
로렌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이성과 감정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저는…. 당신은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리고 당신에게 어울리는 여자들은 저말고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닉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듯, 한동안 묵묵히 로렌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간밤에 당신은, 내가 사랑의 힘을 모른다고 말했었는데, 당신 말이 옳았어."
로렌은 가슴이 죄어드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 닉을 바라보았다.
"지금은요?"
그의 미소가 로렌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지금은 새로 태어난 기분이야. 좋은 여자의 영향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군."
"저를 놀리시는군요."
"그렇지 않아" 닉은 로렌의 볼을 양손으로 감싸고 키스를 한 다음,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언저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오늘 오후에라도 결혼할 수 있어, 허가증은 이미 갖고 있으니까. 남은 것은 당신의 동의뿐이야."
"오늘이라구요! 하지만…."
"하지만 뭐?"
닉이 다시 키스를 하자 로렌은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고 있는데 왜 주저하지?"
이유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로렌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뚜렷하게 단 한가지의 이유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사랑이란 과연 이렇게 시작되는 것일까?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다는 것 말고는, 닉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닉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이 결혼에 있어 로렌은 너무나도 맹목적으로 닉의 요구에 응해버렸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가 최면술 같은 것이라도 쓰지 않았나 의심했을 정도였다. 로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시청의 호적담당 앞에 서 있었다. 지금은 남편이 된 닉과 함께, 오후의 강한 햇살이 내리비치는 거리로 나와서야 로렌은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나 자신도 잘 알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브뤼셀의 일자리에 대해서는?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정말 나는 미쳐버린 것이나 아닐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닉은 택시를 잡아 로렌을 태우고 호텔의 이름을 댄 다음, 자신도 로렌의 옆자리에 앉았다.
"떨고 있군. 하지만 생각을 바꾸기엔 이미 늦었어."
"알고 있어요. 미안해요. 아직도 당황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내 아내야. 별로 기쁘지 않은 것 같군."
로렌은 곧 대답을 못하고 차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처럼 수속을 빨리 끝낼 수 있었죠? 이탈리아에서는 결혼수속을 밟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했는데요."
"뇌물 덕분이지. 하지만 별로 법률위반은 하지 않았어."
한가닥 희망마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로렌은 무엇을 물어보려고 했는지조차 분명히 생각할 수 없었다.
"저는 취직을 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아버지에게는 무어라 말씀드리죠?"
"아버지에게 귀신에 홀렸다고 말씀드리는 게 어때? 브뤼셀의 문제는 내가 처리하겠어. 속기 타이피스트가 모자랄 리는 없을 테니까"
"2개 국어를 할 수 있는 속기 타이피스트가요? 상당히 값싸게 보신 것 같군요."
"값싸게 보진 않았어." 닉은 이렇게 말하고 로렌의 손을 감쌌다. "우린 이제 되돌아갈 수 없어, 두 사람 모두"
"후회하고 있어요?"
"그런 뜻이 아니야. 모든 것을 이렇게 만든 것은 바로 나야. 내가 그처럼 무책임한 남자로 보이나?"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말해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사람은 충동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허가증을 떼어 오지 않았으면, 당신을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거야. 그래도 충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
이 사람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면…. 로렌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의 잿빛 눈을 뻔히 쳐다보았다.
"제가 예스라고 말할 것을 그렇게 분명히 알 수 있었나요?"
"거절은 못하게 할 작정이었어. 아무튼 안심하라구. 모든 게 잘 되어갈 테니, 내일은 베니스로 떠날 거야."
"베니스?"
"내 고향이야."
로렌은 시트에 몸을 깊이 묻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저는 정말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게 없군요. 이탈리아의 친척과는 별로 원만하게 지낸다고 생각지 않았어요. 간밤에 당신은 자기밖에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닉의 목소리는 메말라 갔다. "할아버지는 내 신부를 만나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
"우리가 어떻게 만났다는 것을 아신다면, 할아버지는 찬성하지 않을 거예요."
"누가 할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하지? 남들에게는, 우리는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면 그만이야. 사랑 이야기만으로 충분하지"
"빈정거리는 말투군요."
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튼 이젠 걱정할 것 없어. 당신은 로렌 블렌트, 어엿한 미세스야."
"하지만 호텔에선 아무도 모르잖아요?"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겠지" 닉은 재미있어하면서도 약간 짜증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잖아? 앞으로 하룻밤밖에 묵지 않을 텐데"
닉은 로렌의 얼굴을 흘끔 보고 다시 상냥해졌다. "오늘밤은 두 사람만이 축배를 들자구. 좋은 곳을 알고 있지"
"그 드레스를 입으라고 하시지는 않겠죠?"
"다시는 그런 말하지 않겠어. 베니스로 가면, 마음에 드는 물건을 실컷 사라구"
"베니스에서는 얼마나 머물게 되죠? 유럽에 있는 지점을 돌아야 하잖아요."
"서두를 필요는 없지,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당신은 어머니 문제로 할아버지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던데…."
"과거의 일은 흘려버려야 하는 거야."
로렌도 그의 생각에 찬성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왜 어딘지 꺼림칙한 구석을 보이는 것일까? 로렌은 자신이 신경과민 상태에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걱정거리라면 그런 것말고도 있다. 로렌에게는 언제 어떻게 자신의 변화를 아버지에게 알려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있다. 어떤 방법으로 알리든, 그것은 아버지에게 쇼크를 줄 것이 틀림없다.
우선 캐롤에게 전화로 알리는 것이 어떨까? 캐롤은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택시가 호텔에 도착했다. 아직 네시 20분이었다. 아버지와 캐롤은 점심식사를 끝내고 각자의 책상 앞에 앉아있을 것이다. 닉과 처음 만났던 그날로 시간을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래를 예측할수만 있다며, 절대로 이처럼 큰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을텐데….
스위트룸은 꽤 넓은 방이었지만, 문이 닫힌 순간 로렌에게는 출구없는 작은 방처럼 느껴졌다. 로렌은 마음속으로, 도망할 길은 영영 없어졌다고 생각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닉의 품에 안기자,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샤워를 하고 오겠어."
"저는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야겠어요."
"아버지에게는, 아무 걱정하시지 말라고 전해줘. 돈이 마련되었을 때 원금만 돌려주면 된다고 말이야."
"이윤은요? 아버지는 이윤을 차지하려고 하시지 않아요. 그것은 일시적인 과오였어요. 아버지는 투자하던 날 곧 후회하셨거든요. 다만, 그때는 손을 떼기엔 이미 늦었던 것뿐이에요."
"그것은 아버지가 결정할 일이야."
로렌은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망설이면서 그대로 앉아있었다. 전화를 하면 먼저 캐롤이 받을 테니까, 갑자기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염려는 없다. 문제는 내가 아버지에게 직접 말할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캐롤을 통해 말한다는 것은 아버지에 대해서나 캐롤에 대해서나 떳떳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마침내 로렌은 용기를 내어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들었다. 상대가 나오기까지의 몇 초 동안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수화기를 통해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랜트리 블렌드 딜러 사, 데블린의 사무실입니다"
로렌은 심호흡을 했다. "캐롤? 저예요."
"로렌인가요?" 사무적이던 목소리가 갑자기 걱정스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변했다.
아버지는 식사하러 나가고 자리에 계시지 않는다고 했다. 로렌은 한동안, 지금 이야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전화를 걸 것인가 망설였다. 그러나 로렌은 캐롤에게도 알릴 의무가 있다고 자신에게 변명하면서, 지금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요. 저는…. 좀 충격적인 일을 겪었어요. 그 충격에서 아직도 완전히 깨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 사람이 당신에게 나쁜 짓이라도 했나요?"
"아니에요. 그 반대에요. 저는 그 사람과 결혼했어요. 한시간밖에 안 되었죠. 믿을 수가 있겠어요?"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전화가 끊어졌나 생각했을 때, 캐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죠? 정말이에요?"
결국 아버지에게는 캐롤이 말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틀 후에 로렌이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 아마 베니스에서 전화를 하게 되겠지. 캐롤의 말로는, 이틀 후면 아버지도 감정을 정리하게 되리라고 했다.
로렌은 수화기를 놓으면서, 갑자기 홈식(hormsick)에 사로잡혔다. 아, 하느님, 저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침실에서 찾게 되었다.
닉은 허리에 타월을 느슨하게 감고 욕실에서 나왔다. 젖은 머리가 곱슬거리고 있었다.
"잘되었어?"
잠시 후 로렌은 마음속의 응어리가 서서히 녹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닉의 품안에 있는 동안은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6
베니스 항에서 출발한 페리의 갑판에서 영국인 여행객의 파티가 열렸다. 로렌은 여행객들의 떠들썩한 소리를 들으면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은 홈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시선은 해안의 아름다운 풍경에 빼앗기고 있었다.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져 있는 두칼레 궁전 앞을 지나자, 멀리 빨간 벽돌의 종루가 보였다. 산 마르코 광장에는 인파가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운하에 면한 이 유명한 광장의 첫인상은 결코 흐려지지 않는다. 곤돌라가 햇빛에 반짝이는 파도 위에 떠 있어, 왼쪽으로 꺾이는 대운하를 드나들고 있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은, 로렌에게 있어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아래만 보고 있지 마" 닉이 약간 짜증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무도 당신을 잡아먹진 않을 테니까"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할아버지께서도 아버지처럼, 우리의 갑작스런 결혼으로 충격을 받으실 거예요."
"아니야, 그렇잖아, 오늘아침 당신이 샤워를 하고 있을 때, 전화로 연락해 두었어. 모두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반응은 어땠어요?"
"할아버지와 직접 통화하지 못했어. 시간이 좀 일렀거든. 지금쯤은 알고계실 거야."
"그럼 그렇다고 말씀해 주실 일이지…."
"한꺼번에 생각할 일이 많았거든" 그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다시 해안 쪽으로 시선을 돌린 닉은, 선착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갑자기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비코야!"
"비코라뇨?"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이야. 비코의 아버지는 우리 집의 회계담당인데, 이 일가도 성에 살고 있지"
성이라고? 로렌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의 가계가 귀족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요."
"그런 얘기를 할 시간이 없었거든. 하지만 성급한 상상은 하지 마. 오래전 17세기 때 작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잃었으니까. 물론 몇 사람은 지금도 스테이터스 심별을 사용하고 있지만"
"할아버지는 그중 한 분이 아니에요?"
"고맙게도 그렇지. 그리고 나는 다음 계승자라고 해서 세베리노 후작으로 통하고 있지. 하지만 그렇게 보이진 않지?"
닉은 로렌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다. "하선이 시작되고 있어. 자, 내려가"
선착장에 도착하자 비코가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했다. 닉보다 대여섯 살 아래로, 키는 좀 작으나 얼굴의 윤곽은 뚜렷하고, 잘 맞는 엷은 크림색 신사복에 감색 와이셔츠를 입었으며, 와이셔츠보다도 연한 푸른 빛깔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평복인 바지과 셔츠를 입은 닉과는 대조적이었다. 로렌의 얼굴을 쳐다보는 비코의 표정은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로렌은 닉의 소개를 받자 손을 내밀어 다정하게 악수했다.
"닉은 운이 좋은 분이시군요. 당신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능숙한 영어로 말했다.
로렌은 칭찬을 받아 즐거웠으나, 비코의 검은 눈을 보았을 때, 그 속에 어떤 내면적인 갈등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로렌이 이곳에 온 것을 전적으로 환영하고 있지만은 않는 듯했다.
"갈바니가 기슭에 배를 대고 있어요." 비코가 두개의 슈트케이스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이번 소식을 별로 기뻐하시지 않고 있어요."
"결국 양보하실 거야." 닉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계승권을 내게서 빼앗을 수 없어, 내가 아무리 할아버지의 소망과 동떨어진 짓을 했더라도. 그러니까 결국 양보하시지 않을 수 없지"
"좀 더 빨리 돌아오실 걸 그랬어요. 지난 몇 해 동안은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당신의 의무였거든요."
"내가 시기를 기다린 이유를 자네는 알고 있잖은가. 피올레라는 이제 누구와 결혼하든 자유야. 자네는 오히려 고맙게 여길 줄 알았는데"
비코가 힐끔 닉을 쳐다보았다. "비안키 가는 콧대가 높거든요."
"집안이 전부는 아니야."
로렌은 이들의 대화를 묵묵히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그게 어떤 내용인지 추측해 보았다. 주위 사람들은 닉이 그 피올레라 비안키라는 여자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을 게다. 그러나 닉은 자신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를 만날 때까진 이탈리아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있기로 했을 것이다.
로렌은 안심해도 괜찮으련만, 왠지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닉이 자기와 결혼한 건 일종의 독립선언을 하기 위한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렌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어 비코가 앞서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어떤 상황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지, 왜 미리 말씀해주시지 않았어요? 당신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로 되어있었다면…."
"나는 그 여자와 전혀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할아버지는 만만치 않은 분이거든" 닉은 소리내어 웃었다. "당신은 내 마지막 카드인 셈이지"
"목적이 달성되면, 저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겠군요?"
그의 웃음소리가 그치고, 잿빛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당신의 심사숙고한 끝에 한 말이라면, 내가 부정해도 믿어주지 않겠군."
"미안해요, 불안했던 것뿐이에요."
"걱정할 것 없어. 당신은 법이 정한 아내니까" 이렇게 말하는 그의 미소 속에는 아직도 싸늘함이 남아있었다. "그 점을 잊어선 안 돼"
닉과 로렌은 비코의 뒤를 따라 검은 곤돌라가 매어져 있는 곳까지 나무로 된 잔교 위를 걸어갔다.
세베리노 가의 곤돌라는 다른 곤돌라와는 달리, 쇠로 된 시트위에 방이 있고, 프린지로 장식된 천개가 달려 있었다. 선미에 서서 긴 노로 배를 세우고 있는 사공 갈바니는, 검정과 금빛으로 된 제복을 입고 있었으며, 태도도 다른 사공과는 달랐다. 로렌은 비코의 도움을 받으면서, 완만하게 흔들리고 있는 곤돌라에 올라탔다.
세베리노 후작 집안-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로렌은 작위가 폐지된데 대해 감사했다. 평민인 미세스 블렌트란 이름에 대해서조차 나는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가.
선착장의 부두에서 넓은 운하로 나오자, 뜻밖에도 물결이 세었다. 로렌은 팔걸이를 꽉 쥐고, 배가 전복되는 장면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위험하지 않아요." 곤돌라의 옆구리를 파도가 때렸을 때, 비코가 웃으면서 말했다. "베니스는 처음이신가요?"
"네" 로렌도 웃으면서 말했다 "언젠가 한번 와보아야겠다고 생각했었죠."
"이젠 당신의 나라죠. 이곳에서 행복하길 빕니다"
나의 나라라고? 하니만 닉은 이곳에서 계속 산다는 말을 하지 않았잖은가. 비코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영국으로 돌아갈 거다. 틀림없이 돌아가고 말고…. 닉의 사업체가 영국에 있잖은가.
대운하는 폭이 넓었고, 양쪽해안에는 빌딩이 늘어서 있어 그 이름에 손색이 없었다.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어지기는 했으나, 건물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산마르코 광장으로 가는 여객을 가득 실은 연락선이 지나가고, 능숙한 기타소리가 들려왔다. 투명한 파란 하늘 아래의 햇빛과 색채의 하모니에, 로렌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로렌이 기대했던 베니스. 부분적으로는 초라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에 영원히 호소하여 마지않는 매력있는 도시인 것이다.
로렌은 자신이 지금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오직 그 감동에 젖어 있었다. 곤돌라는 아카데미 교를 통과하여 왼쪽으로 좁은 수로로 들어가, 높이 솟은 고딕식 건축물아래에 있는 아치를 지난 다음, 천장이 높은 지하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건물의 이중문으로 이어지는 계단끝에 돌로 된 잔교가 튀어나와 있었다.
곤돌라가 멈추자 문이 열리고, 역시 검정과 금빛의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나오, 갈바니가 내민 슈트케이스를 받아들었다.
닉이 먼저 내려 로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건너 쪽 벽에 작은 증기선이 정박해 있었는데, 세 사람이 곤돌라에서 내리자, 갈바니가 그 증기선 옆에 곤돌라를 매러갔다. 축축한 돌계단은 오랜 세월 밟히고 밟히어 한가운데가 닳아있었다. 이중문을 들어선 로렌은 그저 놀랄 뿐이었다.
높은 돔 모양의 천장에는 훌륭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림 하나하나는 뚜렷한 돋을새김을 한 금빛틀에 끼어 있었다. 사방 벽에는, 어제 그렸다고 해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을 만큼 선명한 프레스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 밑의 횡판은 황금빛이었다. 바닥은 아이보리빛의 최고급 대리석으로, 한 발짝 걸을 때마다 하이힐의 소리가 온 방안을 울렸다.
"멋있어요. 닉! 정말 아름답군요."
닉은 로렌의 감격하는 모양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응. 아름답지. 하지만 나는 비코처럼 이런 것들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진 않았어."
"그렇지 않아요. 나는 다만 오랜 기간 동안 보고만 있었으니까요. 짐은 방에 갖다 놓았어요. 먼저 방에 가서 여행의 피로를 푸는 게 좋겠죠?"
"그래야겠어. 어느 방으로 정했지?"
"푸른 방으로 정했어요. 할아버진 네 시까진 낮잠을 주무실 거예요. 요즘은 자주 피로하다고 하시거든요."
"방해하지 않겠어." 닉의 말투가 갑자기 퉁명스러워졌다. "푸른 방이 어디 있다는 것쯤 알고 있으니까, 이젠 우리끼리 있게 해주면 좋겠어. 나중에 다시 만나"
"그럼 저녁식사 때 만나요."
비코는 무슨 말을 더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생각을 바꾼 듯 홀을 가로질러 그대로 물러갔다. 로렌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망설이듯 물었다. "닉, 비코는 당신이 계속 여기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던데…. 그 사람이 잘 모르고 하는 생각이겠죠?"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는 없지. 그것은 할아버지가 기정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렸어. 당신은 딱딱한 면회분위기를 각오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할아버지는 꽤 따지고 들테니까"
"무엇을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요?" 로렌은 놀라움과 노여움으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왜, 이곳으로 오기 전에 모든 것을 얘기해주지 않았죠?"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 위험이 너무나 많거든. 하지만 나는 당신이 필요해, 로렌. 나와 함께 이 베니스에서 사는 것이 싫은가?"
"모르겠어요. 싫다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그렇지 않아야 하지만…."
"하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말인가?" 닉의 태도는 다시 딱딱해지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와 결혼한 것은 당신의 자유의사로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강요하진 않았어."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로렌은 지금의 닉이, 그의 품에 있을 때의 닉과는 딴사람처럼 생각되었다. "닉, 나는…."
"대답은 나중에 해도 돼. 하루만 지나면 두 사람 다 만족할 수 있는 대답을 발견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로렌은 계단을 올라가는 닉의 뒤를 따르면서,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지금은 자기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조차 분명치 않았다. 로렌은 다만, 자신은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우리 안에 갇혔다는 생각만이 더할 뿐이었다.
푸른 방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아주 작았으나, 매우 아늑한 방이었다. 벽에는 수놓은 비단이 쳐져 있었으며, 가구는 옻칠을 한 사치스런 것이었다. 네 귀퉁이에 기둥이 달린 클래식한 침대에는 커튼과 같은 푸른 브로케이드로 만든 우아한 주름 장식이 달려 있었다. 옆에 붙은 커다란 클로짓이 욕실로 개장되어 있어, 이방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 설비로 되어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자마자, 마치타임터널로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로렌이 침실로 돌아왔을 때, 닉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는 밝은 빛의 슈트를 입고 있었다. 로렌은 엷은 크림색 스커트와 여기에 맞는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으나. 이 장소에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차림으로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이것밖에 없거든요."
"귀여워" 닉도 로렌과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 어딘지 서먹서먹하게 말했다. "내일 도나타와 함께 쇼핑이라도 하고 오지. 도나타는 비코의 누이동생이야."
"할아버지의 다음 계승자가 당신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죠? 할아버지에겐 아드님이 없으신가요?"
"하나 있었는데, 자동차 사고로 죽었어. 어머니의 오빠였으니까, 말하자면 남매뿐이었지. 그 조토 외삼촌은 자식 하나 없이 죽은 거야. 그래서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다시 불러왔지. 세베리노 가에서는 남자에게만 상속권이 있거든"
"당신이 포기하기로 결심한다면 어떻게 되죠?"
"어머니의 핏줄로는 비코가 다음 상속권을 갖고 있지. 남자가 적으면 한 집안의 불행한 시대라고 할 수 있지" 닉은 로렌의 표정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비코가 불쌍하다고 생각되나?"
"아니에요.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하겠어요. 이름이 하나 없어진다는 것이 좀 애석하다고 생각했을 뿐인 걸요."
"그렇게 되진 않아. 계승을 하게 되면 나도 세베리노의 작위를 사용하게 되거든."
"블렌트라는 이름대신에?"
"아니야. 양쪽을 다 쓰지. 물론 이 나라에서는 시뇨르 디 세베리노라고 불리게 되겠지만. 당신은 양쪽 세계의 가장 좋은 부분을 갖게 되는 셈이지"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은 양쪽 세계에서 산다는 얘긴가요?"
"아니야, 이곳을 방문했을 때만이지. 당신은 잘못된 인상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할아버지인 비틀레는 아직 일흔 살이야. 당분간은 죽고 싶지 않으실 걸"
"그렇다면 왜 당분간 이곳에 있어야 하죠?"
"이젠 이 나라 습관도 익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내가 이곳을 떠난 것은 피올레라가 원인이었어. 그 여자도 나와 마찬가지로, 나와의 결혼을 바라지 않았지. 다만 주위 사람들이, 어떤 일이 있어도 두 사람을 결혼시키려고 했던 것뿐이야."
"그런데 이젠 당신에게 아내가 있으니 안심이라는 거군요?"
"그런 셈이지" 로렌을 바라보는 닉의 얼굴에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이쪽으로와"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당신을 안고 싶으니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해?"
로렌은, 두 사람의 결혼이 보통의 결혼이라면 이런 일은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하자,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의 곁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닉은 로렌의 얼굴을 더욱 똑바로 보려는 듯, 그녀의 턱을 손으로 떠받치고 뒤로 젖혔다. "당신은 덫에 걸려 이곳으로 끌려왔다고 생각하나?"
"약간" 로렌은 닉의 속셈을 살피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제게 결혼하자고 한 것은 단순히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요?"
닉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가 로렌의 목덜미를 쓰다듬자, 그녀의 몸은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로렌의 어깨를 잡아 거울 쪽으로 돌려 세웠다. "거울을 보라고.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 그곳에 있으니까"
로렌은 자신의 낯익은 계란형의 얼굴과 구름처럼 부풀어 오늘 금발을 밉살스럽다는 듯이 보면서 중얼거렸다. "겉모습만이 전부가 아니에요."
"내게는 중요해. 아무리 자극적이라도, 매력이 없는 여자와는 결혼할 수 없거든"
"하지만 당신은 저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하지만 기회가 주어지면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싹트게 될 거야."
그렇다, 그것은 나도 알고 있다. 닉의 말대로, 내가 닉을 사랑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내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도로는, 나는 이런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지 마. 우리에겐 아직 이것이 있거든." 닉은 로렌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로렌은 눈을 감고, 파도처럼 서서히 밀려오는 감각에 몸을 맡겼다. 두 사람 사이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애써 잊으려고 하면서. 아무튼 로렌은 이제 브뤼셀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졌다.
닉과 로렌은 네 시에 할아버지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방은 여러 가지 책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낡은 가죽과 양피지의 퀴퀴한 냄새가 감돌았다. 로렌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림이 그려진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와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져 있거나 상아 세공의 나무가구 등에 정신을 빼앗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로렌의 전신경은, 높은 아치형의 창가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인물에 쏠려 있었다. 중키에 마른 체격이었으나, 새하얀 백발이 풍격을 나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돌아보는 그의 눈에 증오심이 어려 있는 것을 본 로렌은 마음이 죄어들었다.
"할아버지, 제 아내를 소개하겠습니다. 로렌은 이탈리아어를 모르기 때문에, 영어로 말씀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만."
"비록 외국어로 말한다 하더라도," 노인은 냉담하게 말했다. "왜 하필이면 영어로 말하지!"
"저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데요, 시뇨르." 로렌은 닉이 변호해 주기 전에 얼른 말했다. "그러니까 이탈리아어는 쉽게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네가 이탈리아어를 배울 때까지는 이곳에 있을 수 있다면 그렇겠지. 너는 언어에 있어서만 외국인이 아니라, 생활의 모든 면에서 외국인이야."
"로렌은 이곳에 있을 겁니다, 저도 그렇구요. 할아버지가 허락해 주신다면 말입니다."
"니콜라스." 시뇨르 디 세베리노는 닉을 이렇게 불렀다. "나는 네가 네 처지를 깨달은 것이 기쁘다. 그래, 나는 너를 쫓아 보낼 수도 있었지. 하지만 후계자가 자신의 의무를 돌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임종 마당에 위안이 되지 않거든. 네가 배워야 할 것은 산더미처럼 많아. 이 베니스에 있는 베네트의 땅에 대해서도 알아야지."
닉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노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쉽게 단념해 주시겠어요? 저는 믿어지지가 않는데요."
노인이 서글픈 미소를 띠자 로렌은 가슴이 아팠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부탁하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다." 노인의 어조는 갑자기 딱딱해졌다. "아니, 부탁하는 게 아니야. 꼭 하지 않으면 안 돼. 결혼이란 것은 교회에서 하느님에게 맹세해야 성립되는 거지, 그것도 될 수 있는 대로 빠른 시일 안에 말이다." 그리고 대답 같은 것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냉담한 눈으로 로렌을 돌아보았다.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그야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방은 불편하지 않았나?"
"아니요, 아주 편했어요. 감사합니다." 로렌은 자연스럽게 웃어 보이려고 했다. "아름다운 방이군요."
"그야 그렇지. 세베리노 가(家)는 예로부터 미(美)를 존중하지. 니콜라스도 예외는 아니야. 농도가 다소 희미해졌지만. 우린 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아마…."
"할아버지께서 아시고 싶은 정도는 제가 알고 있어요." 닉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제가 직접 말씀 드리겠어요." 로렌은 위엄 있는 귀족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다정하게 말했다. "말씀드리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저의 아버지는 런던의 그랜트리 블렌트 딜러 사의 주임 회계사로 있어요. 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구요. 저는 스물 세 살이고, 비서 공부를 하고 있었죠. 프랑스어는 영어처럼 할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이탈리아어는 몰라요. 하지만 꼭 배우고 싶어요. 이 밖에는 별로 말씀드릴 만한 것이 없고… 저의 집 가계로 말씀드리자면, 적어도 제가 아는 한에서는 별로 유서깊은 것은 아닌 걸로 알고 있어요."
로렌의 말이 끝나자 잠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노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재산이나 이름 때문에 손자와 결혼한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로렌은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닉이 이탈리아인의 혼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밖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저는 작위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바랄 리가 없죠."
"정말인가 그런데 너는 니콜라스가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할아버지, 저는 그 여자와의 결혼을 승낙한 기억이 없는데요." 닉은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말했다. "게다가, 남이 결정해 주는 결혼이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결혼이죠."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진 않지. 아무튼 그 문제를 두고 아무리 의논해 봤자 얻을 건 아무것도 없어. 그만 나가 다오, 편지를 써야 하니까."
로렌은 문밖으로 나와서야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닉의 얼굴을 훔쳐보니, 그는 몹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더 도전적일 거라고 예상했었죠?"
"저 늙은 악마의 장점은 자기가 언제 졌다는 것을 안다는 점이지."
"할아버지는 결코 지지 않으셨는걸요. 크게 이용하려 하고 있어요. 할아버지는 적어도 제가 생각했던 그런 분은 아니었어요."
닉의 잿빛 눈이 싸늘해졌다.
"당신은 할아버지를 모르고 있어."
"당신은 알고 있단 말인가요?"
닉이 불만스러운 듯 입을 내밀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야?"
"누구의 편도 아니에요. 이런 일에 말리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거든요. 만약 당신이 장차 정말 세베리노가의 후계자가 될 생각이었다면, 무엇인가를 희생할 각오를 했어야 했어요. 피올레라 비안키와의 결혼은 모든 집안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었을 거예요."
"나말고는 그렇겠지." 닉의 눈과 목소리는 조소적이었다. "그 여자에게는 내 마음을 끌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거든. 하지만 당신은…." 닉은 로렌을 힘껏 껴안아 벽으로 밀어붙이고 입술을 요구했다. "내게서 떠나지 마. 절대로 보내지 않겠어!"
"당신에게서 떠나려고는 생각지 않아요." 로렌은 진실의 반밖에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이 각각 다른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닉의 얼굴을 올려다본 로렌은, 자기가 결혼한 이 남자를 정말로 알 수 있는 날이 올 것인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닉…."
"더 말하지 않아도 돼." 닉의 말씨가 부드러워졌다. "방으로 가자구."
7
눈을 떠보니 주위는 어두웠다. 로렌은 아직도 의식이 몽롱하여, 마음속에 떠오른 것이 생시인지 또는 꿈속의 한 장면인지 한동안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옆에 있는 남자의 움직임으로, 자신의 고향 집의 침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닉을 깨운 것이 아닐까? 잠에서 완전히 깨기 전에는 이 사람을 깨우지 않으려고 했는데.
로렌은 닉의 품에 안겨 있을 때는 순간적인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더구나 침실에 있을 때의 두 사람은 서로가 미친 듯이 상대를 추구했다. 로렌은 얼마 전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내가 그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가 과거에 겪었던 여자와 대체 어디가 다를까? 그는 많은 여자를 알고 있다. 그리고 많은 여자에 싫증을 느껴 왔다. 그가 나에 대해서도 언젠가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과거의 여자들처럼 물러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몇 시지?" 닉이 갑자기 물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눈을 뜨고 있었을까? "시계는 그쪽에 있어."
로렌은 몸을 움직여 어둠 속에서 시계의 문자반을 읽었다.
"어머나, 여덟 시 15분 전이에요!"
닉은 일어나려고 하는 로렌의 어깨를 잡아 끌어안으면서 한참 동안 키스를 했다.
"무엇하러 그렇게 서둘러? 아홉 시나 돼야 저녁식사를 할 텐데. 그들의 저녁식사는 항상 늦거든."
"또 <그들>이라고 하시는군요. 당신은 언제부터나 <우리들>이라고 말하실 건가요?"
닉은 로렌을 안은 채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의 그의 말투는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줄곧 그런 말은 쓰지 못할 거야. 한데 그게 다를 게 뭐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평생 이곳에서 살려고 한다면 말이에요. 당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아니면 할아버지 댁에 잠시 들른 거라고 생각하나요?"
닉은 갑자기 침대에서 내려서며 로렌에게 말했다.
"정신분석은 그만 해 둬. 여덟 시 반에 살롱에서 식전주를 하는 습관이 있어. 하루 동안 가족 전체가 모이는 것은 이때뿐이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욕실로 사라졌다.
침대에 혼자 남은 로렌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밤에도 입어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가지고 있는 것은 푸른 드레스밖에 없다. 돈은 가지고 있지만, 닉이 그 돈을 쓰는 것을 허락해 줄까? 물론 그의 아내니까 그의 돈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로렌은 쓰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결혼했다는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식을 올리라고 했지만,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할아버지는 무척 진지하게 말씀하셨지만, 닉은 과연 그 명령을 받아들일 생각일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계승권이 박탈되는 일은 없겠지만, 그가 스스로 포기한다면 상속의 계통이 바뀌는 것이 아닐까? 닉은 내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상해 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것 즉, 영국 기질이 훨씬 농후하다는 것이다.
넓은 살롱은 2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대운하에 면한 창문에는 우아하고 중후한 커튼이 쳐져 있었다.
살롱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으나, 마음이 안정된 뒤 다시 둘러보니 5명의 남녀가 있을 뿐이었다. 그중 두 사람은 로렌이 이미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라우렌티스 부부는 50대 전반으로, 보기에도 대가집 부부답게 중후하게 느껴졌다. 이 부부의 딸인 도나타는 로렌과 같은 또래의 미인이었으나, 닉과 로렌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로 대했다. 도나타도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다소 점잔을 빼는 듯했으나, 흠잡을 데 없는 영어를 구사했다.
"저도 영어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하겠어요.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죠?"
"그럼요." 로렌은 도나타의 환영이 진심으로 기뻤다. "당신도 제가 이탈리아 말을 배우는 걸 도와주시겠죠?"
"물론이죠. 매일 주위에서 말하는 것을 듣게 될 테니까 어렵지 않을 거예요. 비틀레 할아버지의 말씀으로는, 당신은 프랑스어를 잘하신다던 데요."
"내가 내일 로렌을 데리고 쇼핑을 가주었으면 좋겠다만…" 닉이 끼어 들었다. "베네치안 패션을 구경시켜 주지 않겠니? 아직 아무 데도 돌아다니지 않았거든."
"네가 놓아주지 않으니까 그랬겠지." 할아버지가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맞아요. 저는 로렌을 빨리 세베리노 가풍에 익숙해지게 해서 놀래 주고 싶거든요." 닉은 로렌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악의 없는 웃음을 띠었다. "그렇잖아?"
로렌은 한순간, 사실대로 말하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했으나, 그럴 용기는 없었다.
"저는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는걸요." 로렌은 다소 빈정거리듯 이렇게 말했다.
가족들의 식사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로렌은 닉의 옆에 앉아 조심스럽게 식사를 하면서, 주위에서 나누는 대화를 약간 지겨운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로렌에 대한 배려 때문인지 영어로 말했으나, 어느 사이엔가 이탈리아어로 변했다. 하지만 이것은 할 수 없다. 화제의 대부분이 내가 모르는 장소와 인물에 관한 것이니까.
닉은 가족들 틈에 있는 것이 만족스러워 보였으나, 누가 직접 말을 걸 때 외에는 별로 대화에 끼어 들지 않았다. 로렌은 그도 자기처럼 이 자리엔 이방인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도, 그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때 로렌은, 닉의 할아버지가 이상한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얼굴에 나타났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얼른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닉의 하는 일에 대해 찬성하고 안하고는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닌가-적어도 남들 앞에서는. 닉에 대해서 그 정도의 충성은 해야지.
살롱으로 자리를 옮길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열 한 시가 넘어서였다. 로렌은 여행의 피로를 핑계 삼아 간신히 그 자리에서 도망칠 기회를 가졌다. 그래서 닉이, "나는 나중에 갈께."하고 말했을 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터라 이제는 혼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일은 하루 종일 함께 지내기로 해요." 헤어질 때 도나타가 다정하게 말했다.
로렌은 혼자가 되자 닉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할 작정일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면서, 왜 지금까지의 생활을 단념하려고 하는 것일까? 할아버지는 앞으로도 20년은 더 사실 것 같다. 그렇다면 닉이 그의 후계자가 되었을 때는 예순 살이 가까울 텐데 말이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는? 닉은 내가 줄곧 그를 도울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은 로렌에게 의외로 깊은 상처를 주었다.
닉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로렌은 이미 잠자리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잠들어 있지는 않았다.
"피로하지?"
"그래요. 바보 취급당하는 것 같아 더 피로했어요. 저는 이곳에 있기 싫어요. 이런 입장이 싫어요."
램프의 불빛을 받고 있는 닉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어떤 입장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당신도 알고 있을 것 아니에요? 당신이 할아버지에게 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해요. 이런 일은 피하려고 생각한다면 피할 수 있잖아요?"
"어떻게?" 닉이 되물었다.
그것은 로렌이 아까부터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말로 하기는 어려웠다.
"비코에게 당신의 권리를 넘겨주면 되잖아요.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에게 좋을 텐데요."
"비코에게는 세베리노의 이름이 너무 무거워."
"하지만 그 사람은 순수한 이탈리아인이에요. 할아버지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점 아닌가요?"
"당신은 할아버지를 잘 알고 있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로렌은 닉이 점점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자신이 기가 죽으면 끝장이라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북돋웠다. "할아버지가 바라고 계신 것은 무리가 아니에요. 증오심 때문에 눈이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면, 당신이 할아버지에게 반가운 존재라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죠?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어서…."
"할아버지란 분은 30년 동안 어머니에게 한마디도 말을 건네지 않으려고 했던 잔인한 늙은이야. 그래도 무리하지 않다고 생각해?"
로렌은 충격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으며, 석상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심한 짓을 했을 리가 없어요!" 로렌은 닉의 얼굴을 보고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큰 소리로 말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 뿐이에요. 그렇게 심하게 대할 바엔 왜 어머니를 데리고 왔죠?"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할아버지는 상속의 계통을 지키려고 했던 거야.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고서라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신랄했다. "나는 아버지가 친권을 획득할 때까지의 8개월 동안, 이곳에서 아주 참담한 나날을 보냈어. 할아버지의 침묵을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나는 알고 있거든.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용서한 줄로 믿고 돌아왔었지. 하지만 저 늙은이는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거든."
"당신도 할아버지에 대한 복수가, 당신의 전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닉은 귀에 거슬릴 정도로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아직 내 상속 문제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군."
"상속받았을 때는 쪼글쪼글한 늙은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죠."
"그래, 그 점이 바로 내 인생의 도박이라는 거야." 닉은 넥타이를 풀면서 돌아섰다.
닉은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복수의 집념을 불태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로렌도 그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저는 어떻게 하죠? 저는 이렇게는 살아갈 수가 없는걸요."
"점차 알게 될 거야. 아니, 알아야 해."
"이런 생활을 억지로 시킬 수는 없을 거예요!"
로렌의 아름다운 얼굴과 머리를 바라보고 있던 닉의 눈 속에 무엇인가가 흔들렸다.
"한 가지 제안이 있어. 내일 아침까지도 그런 생각이라면, 내가 공항까지 데려가 런던행의 첫 비행기에 태워 주겠어."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지금 당장 가겠어요."
닉은 손에 들고 있던 셔츠를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로렌의 허리를 잡아 침대에 쓰러뜨렸다. 닉은 로렌의 손목을 잡아 머리 위에 고정시키고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로렌은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다. 그러나 닉의 키스가 집요해지자 로렌의 노여움이 눈처럼 녹으면서, 어느 사이엔가 그녀도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밤은 보내지 않겠어. 내일도 안 돼.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용품치고는 대단하군."
이것이 무엇이든 나를 사로잡은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아직 졌다는 것은 아니다. 닉에게서 이 망상을 쫓아낼 수 있다면 이 결혼도 행복해질 수 있으련만. 어떻게 해서라도 그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도나타의 계획으로는 이튿날 아침식사가 끝나는 대로 곧 함께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아래에서 기다리고 잇던 갈바니의 곤돌라에 탔을 때, 전에 보았던 소형 증기선도 발동을 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비코가 니콜라스를 무라노로 데리고 가기로 되어 있어요." 도나타가 로렌의 시선을 느끼고 말했다. "비교적 짧은 기간이지만, 세베리노 가는 무라노의 유리공업에 관계했었죠. 지금은 그 이름이 남아 있지 않지만, 중요한 수입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세베리노 가는 이 베니스가 이탈리아의 내륙부에 꽤 많은 땅을 갖고 있고, 베네트에도 포도원이 있어요. 그러니까 니콜라스는 배워야 할 일이 많죠."
"하지만 비코는 어렸을 때부터 이 집에서 살아왔잖아요?" 로렌은 이렇게 말하면서 도나타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저는 그런 말을 들으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로렌은 도나타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머릿속에 있던 생각이 그만 입 밖으로 나온 거예요."
곤돌라는 돌로 된 아치 밑을 지나 밝은 햇살 속으로 나왔다. 조용한 수면에 비치는 건물의 그림자가 곤돌라가 일으키는 파문에 떨리고 있었다. 마치 환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로렌은 찬탄의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평화롭군요!"
"대운하로 나갈 때까지는 감격을 참으세요." 도나타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잠시 후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당신은 베니스에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죠, 로렌?"
"솔직하게 말하면 그래요." 그 점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하지만…."
"하지만 이곳은 당신의 나라가 아니란 말이죠? 저도 당신 같은 입장이라면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러나 남의 아내가 되고 보면, 가끔 그런 희생이 강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니콜라스에겐 그만한 값어치가 없을까요?"
"제가 그에 관해 여러 가지를 알게된 것은 결혼한 직후예요."
"만약 미리 알았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인가요? 하지만 니콜라스를 사랑하고 있다면… 사랑하고 있겠죠?"
내가 니콜라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남편의 모든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내의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에요. 당신은 오빠가 이 집안을 계승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도나타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면서 말했다.
"비코는 이 집안의 직계가 아니거든요."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실 수 없겠어요?"
도나타는 한숨을 쉬었다.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군요. 비코는 니콜라스가 언젠가 계승권을 주장하러 돌아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죠."
"피올레라에 대해서는?" 로렌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뿐만 아니라, 비코는 어리석게도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죠?"
도나타는 기절할 듯이 놀라면서 로렌을 응시했다.
"알고 있었어요?"
"이것저것으로 미루어 짐작했죠. 하지만 피올레라는 이제 누구와도 결혼할 수 있는 자유의 몸이 아니에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요. 세베리노 이름과 우리 가족의 관계를 생각해서, 비코를 적합한 상대라고 생각해 주지 않거든요."
"닉은 순수한 이탈리아인이 아니잖아요."
"네, 그 문제라면 니콜라스는 예외죠. 그분의 어머니가 영국인과 결혼한 것은 그분의 실수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거든요."
"할아버지의 생각은 다르잖아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도나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비틀레 아저씨는 무척 딱딱한 분이거든요."
곤돌라는 어느새 대운하로 나와 있었다. 해는 중천에 떠올라 뜨거운 열기를 퍼붓고 있었으나, 곤돌라에 달린 지붕 덕에 일사병에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로렌은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기슭에 보이는 여러 가지 건축물들을 바라보았다. 창문의 디자인도 모두 달랐고 지붕의 높이도 각각이었다. 멀리 뒤쪽에, 탑과 돔이 맑게 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마치 여러 폭의 그림처럼 차례로 지나갔다. 배의 왕래가 빈번한 합류점을 향해 길을 잡았을 때, 리알토 교(橋)의 아치가 보였다. 갈바니는 오른쪽 기슭의 잔교를 향해 소형 증기선들 사이를 누비면서 실로 능숙하게 긴 노를 저었다. 곤돌라에서 내릴 때 로렌이 비틀거리자, 이를 본 도나타가 생글거리면서 말했다.
"곧 익숙해질 거예요. 자, 여기서부터는 걸어요. 잘바니는 피아체타(소광장)에서 기다리라고 하겠어요."
리알토 다리에서 이어지는 거리에는 가게가 많아 사람들이 넘치고 있었다. 도나타는 온갖 종류의 상품에 눈을 빼앗기고 잇는 로렌의 팔을 잡아, 그녀가 길을 잃지 않게 해주었다.
"니콜라스가 부탁한 것을 사고 나서, 부티크로 가지요."
로렌은 기꺼이 도나타의 말을 따랐다. 오늘은 어차피 도나타의 날인 것이다. 로렌은 한참 동안 골목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어디가 어딘지 통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들른 곳은 약방과 보석 가게 사이에 끼여 있는 작은 양품점이었다.
두 시간 후, 로렌은 옷가지를 한아름 안고 있었다. 도나타와 가게 주인이, 모두 필요하다면서 억지로 안겨 주었던 것이었다.
"일 시뇨르의 아내로서, 로렌 패션이라도 만들어지기를 바라겠죠." 가게 주인이 짐을 꾸리고 발송을 지시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을 때 도나타가 말했다. "당신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도, 니콜라스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고 있거든요."
"일 시뇨르란 <영주>라는 뜻인 것 같은데요?"
"또는 <소유자>란 뜻도 있죠. 결국 마찬가지 뜻이지만."
"아직 좀 이르잖아요? 할아버지는 당분간 건강하실 텐데요."
이번에는 도나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니콜라스가 말하지 않던가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얘기를요?"
"비틀레 아저씨가 앞으로 얼마 사시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에요. 이상한 혈액병인 모양인데, 현대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나 봐요."
로렌은 이 새로운 국면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할아버지가 앞으로 20년은 사실 거라는 말을 들은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 아닌가. 닉은 왜 지금 계승권을 주장하게 되었을까?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그러고 보면 나와의 결혼도 틀림없이 음모의 일부일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는 그렇잖아도 마음의 위안이 없다는데….
"못 들었어요." 로렌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그렇다면 제가… 뭐라더라… 새끼 고양이를 종이봉지에서 꺼낸 셈이로군요!"
"새끼 고양이가 아니에요, 그냥 고양이예요." 로렌은 도나타의 잘못을 정정하고 나서, 아차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미안해요,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니콜라스에게는 틀림없이 까닭이 있었을 거예요."
네, 있었겠죠. 아주 훌륭한 까닭이 있었겠죠! 그 사람은 내 반응을 알고 있었는걸요. 로렌은 자신이 고른 심플한 벌꿀빛 슈트를 벗어 던지고 싶어졌다. 그 사람은 얼마나 많은 것을 내게 숨겼는가!
"마음 쓰지 마세요." 로렌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은 두고두고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려고 했을 거예요. 우리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네." 도나타는 로렌의 태도에 안심한 듯 손목시계를 보았다. "어마, 점심 전에 당신이 사고 싶어 하는 물건을 모두 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겠군요."
로렌은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러나 도나타의 예정을 깨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볼 일이다.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혀 줄지도 모른다.
레스토랑에는 운하의 조용한 지류를 내다볼 수 있는 넓은 안뜰이 있었고, 나뭇가지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앉아 있어도, 로렌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닉은 나를 여러 가지로 이용하고 있다. 그의 곁을 떠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구실은 얼마든지 있다.
저녁이 되어 소광장의 한 귀퉁이에서 갈바니와 합류했을 때는 서쪽 하늘은 석양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사람들의 왕래도 눈에 띄게 줄어, 강변도로에는 산책하는 두세 사람밖에 눈에 띄지 않았다. 로렌은 이제 곤돌라의 움직임에 익숙해져 좌우로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이 더욱 짙어져 수면도 검은 빛으로 변했고, 무수한 창문에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대낮의 소음은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모든 변화가 로렌에게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
도나타와 로렌이 저택에 도착하여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 라우렌티스 부인이 내려왔다.
"하루를 즐겁게 보냈나요?"
로렌은 기품있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서 여러 벌의 드레스를 장만했어요."
"웨딩드레스만 빼놓았겠죠? 결혼식은 일주일 후에 리바고의 교회에서 올리기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무도회 다음날에는 리바고를 향해 떠나지 않으면 안 되죠. 여러 가지로 준비할 것이 많거든요. 물론 아버님께서도 참석하셔야죠. 연락하셨나요?"
"아니요, 연락해야죠." 로렌은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으나, 내심으로는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불안하기만 했다.
"그럼 지금 하세요, 방에 전화가 있으니까요."
"네. 저어, 모두들 찬성하시나요?"
"비틀레의 소망이신걸요." 하긴 할아버지의 말이라면 절대적이다. "종교적 의식을 거치지 않은 결혼 신고는 비틀레에게 아무 의미도 없거든요."
로렌은 이곳에서 일 시뇨르의 말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씁쓸한 심정이 되었다.
앞서 가는 도나타의 뒤를 쫓으면서, 로렌은 닉이 돌아오면 무어라 말할 것인가, 말하고 나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설령 닉이 영국으로 보내 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법률적으로는 아직 남편과 아내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로렌은 그의 장래 계획에 그대로 따라간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까지 그의 계혹에 순종할 수 있을지조차 분명치 않았다. 그는 지금 당장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육체적 욕망은 사랑이 수반되지 않으면,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끝장나게 마련이다.
방으로 통하는 복도에서 간신히 도나타를 따라잡았을 때, 그녀는 걱정스런 얼굴을 하면서 도나타를 쳐다보았다.
"당신의 어머님에게 무도회에 관한 얘기를 들었는데요…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는 모임인가요?"
"제 약혼을 발표하는 피로연이에요. 이중으로 축하하는 모임이 되는 셈이군요."
"네, 그래요? 그렇다면 불공평한데요. 당신들만의 밤이 되어야 할 텐데요."
도나타는 선의의 웃음을 띠었다.
"함께 축하하는 데 아무런 불만도 없어요. 필리포는 기꺼이 두 분 곁에 설 거예요. 이 결혼은 카몬 가(家)에 크게 도움이 될 테니까요. 무도회에는 오늘 산 물빛 야회복이 좋을 거예요. 아마 지금쯤 그 마담은 몹시 당황하겠죠. 당신의 웨딩드레스를 준비할 시간이 모자라서 말이에요."
로렌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저는 특별한 것을 원하지 않아요. 우린 이미 결혼했는걸요."
"비틀레 아저씨에게는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화사하게 차려입은 도나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각오하세요.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오실 수 있나요?"
"그러기를 바라지만," 두려워하고 있는 순간을 이제는 더 이상 연기시킬 구실이 없다. "지금 곧 전화할 거예요."
침실에서 수화기를 드는 데까지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신호가 가고 있을 때, 끊지 않고 기다린다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전화를 받은 캐롤이 로렌에게 온 전화임을 확인하자,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사무적인 어조가 사라졌다.
"전화를 해주었군요. 정말 잘했어요. 아버지는 당신 때문에 미칠 지경이에요."
"당신에게는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아버지는 계신가요?"
"네, 계세요. 곧 대드리죠."
잠시 후 아버지의 음성이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로렌, 걱정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런 남자와 결혼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로렌은 아버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아니야, 첫째는 내게 책임이 있지. 만약 내가…." 아버지는 서글프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이제 새삼스럽게 자책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로렌, 잠자리를 같이했다고 해서 꼭 결혼하라는 법은 없어."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 결혼한 게 아니에요."
"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단 말이냐?"
로렌은 바로 이 순간까지, 그런 질문을 받으면 '그래요.'라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질문을 받고 보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설명하기 어려워요. 뭐가 뭔지 모르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죠."
"지금쯤은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잖겠니? 지금도 마찬가지냐?"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전화로는 설명할 수 없어요. 복잡한 심정이에요. 그리고 닉의 가족은 교회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리라고 하는데, 아버지, 베니스에 오시겠어요? 캐롤도 함께요."
"가도록 하마. 그런데 어제 클레이필드의 청구서를 다시 살펴보았는데…."
"닉이 잘 처리해 줄 거예요. 아버지는 돈이 마련되는 대로 갚으면 돼요." 로렌은 마음이 죄는 듯하여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언제 오시겠어요?"
"화요일에 가마. 그곳에서 행복하지 않으면, 우리와 함께 돌아오자. 남편이 함께 돌아오든 말든 관계없이 말이다. 그럴 수 있겠지, 로렌?"
"네." 로렌은 달리 대답할 길이 없었다. "비행기가 결정되면 알려 주세요. 세관 밖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할 테니까요."
로렌이 수화기를 놓았을 때 닉이 들어왔다. 그는 문을 닫자 언제나 그렇듯이 넥타이를 풀었다.
"누구였지?"
"아버지예요." 로렌은 자신의 목소리에 감정이 섞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했다. "결혼식에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거든요. 결혼식은 내주 주말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빨리?" 닉은 방을 가로질러 거울 앞으로 가, 등을 돌리고 호주머니에 든 것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 늙어빠진 악마는 절대로 시간을 함부로 하지 않거든."
"할아버지를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로렌은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할아버지가 오래 못 사신다는 것을 왜 저한테 말씀하시지 않았죠?"
8
닉은 잃어버린 것이 없는지 확인하듯 경대에 놓인 것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당신에게 말했지?"
"도나타예요. 저와 결혼한 것은 할아버지에게 일부러 보이기 위해서였죠? 할아버지는 안심하실 수도 없겠군요!"
로렌은 돌아보는 닉의 눈은 험악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달리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로렌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녀가 받은 상처는 깊었기 때문에 도저히 이대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억지로 정당화하려고 하지 마세요. 할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가 아버지 곁을 떠나도록 도왔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어머니가 이곳에 줄곧 계신 것은 어머니 자신의 뜻이 아니었겠어요."
"할아버지가 오래 못 사신다는 말을 당신이 들을 줄은 몰랐는데."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요? 도나타는 이 사실이 비밀이라는 투로 말하지 않았어요."
"내게는 비코가 말했다고 생각하겠지?"
"그렇잖아요?"
"듣지 못했어. 아무한테도 듣지 못했어. 믿지 못하겠으면 비코에게 물어 봐."
"하지만 왜 말하지 않았죠? 당신에게 알리면 당신이 곧 돌아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요."
"그것이 이유였는지도 모르지. 내가 없으면 없을수록 비코의 가능성이 많아지거든. 하지만 알려 주지 않은 것이 고맙군. 알려 주었더라면 피올레라와 결혼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거든."
"미워하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요?"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을 미워할 사람이 있나? 나는 할아버지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었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야."
로렌은 오랫동안 닉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저는 당신을 오해했어요. 미안해요."
닉은 로렌을 힘껏 껴안고 입술을 덮쳤다. 로렌은 현기증이 일 것 같은 남자의 냄새를 느끼면서, 닉의 요구에 응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두꺼운 카펫 위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격렬한 심장의 고동이 가라앉고 평화로운 정적이 두 사람을 감쌀 때까지, 로렌과 닉은 서로 얼싸안고 있었다.
로렌은 충족된 기분으로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있었다. 이것이 사랑은 아니라 하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그 어떤 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께 언제 말씀드리겠어요?" 로렌은 손가락으로 닉의 입술을 덧그리며 물었다.
"무엇을?"
"당신이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을." 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렌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을 때, 그의 시선은 험악해져 있었다. "생각을 바꾸지 않았어요?"
"모든 것을 비코에게 양도하진 않겠어.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여러 가지 일을 해야겠는걸."
"하지만 이젠 할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죽어 가는 사람을 계속 미워할 수 없다고 말했어. 그렇다고 해서 할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할 수는 없어."
전과는 전혀 다른 전율을 느꼈다. 로렌은 갑자기, 닉이 너무 뻔뻔스럽다고 생각되어, 몸을 바르작거려 닉의 품에서 벗어났다.
"첫인상이 옳았어요. 당신은 정말 미욱한 사람이군요, 닉!"
"내가 당신의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겠지. 당신은 확실히 어떤 여자보다도 내 욕망을 자극할 수 있어. 하지만 내 인생까지 지배할 수는 없지."
"<욕망>이란 말이 당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말이군요!"
"그럼 뭐라고 표현할까?"
2,3분 전이라면 솔직하게, '글쎄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딴사람과 함께 있는 느낌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전 모르겠어요. 알고 있는 것은 부끄럽다는 것뿐이에요."
닉은 귀에 거슬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내가 당신의 반응을 모르고 있다면, 당신의 그 말도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당신은 부끄러워하지 않았어. 자, 또 이상한 생각이 들기 전에 빨리 옷이나 입으라구. 더 이상 당신과 입씨름을 하기는 싫으니까."
로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여전히 동떨어져 있다. 한마음이 될 가망은 업는가보다.
필리포 카몬은 일요일 밤에 와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26,7세로 매력적인 청년이었으나, 로렌의 눈에는 너무나 고지식한 사람으로 비쳤다. 닉과 농담을 하고 있는 듯했으나, 큰소리로 웃는 일은 없었다. 로렌은 저녁식사 후에 찬찬히 도나타와 필리포를 관찰했다. 그러나 그중 어느 한 사람에게서도 열정 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것도 닉의 할아버지가 꾸민 정략결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도나타로서는 일단 행복한 모양이고, 또한 내 문제는 아니니까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내게는 내 문제가 산적해 있지 않은가.
닉은 남들 앞에서 예의바른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 후 꼬박 이틀 동안 로렌에게 손도 대려 하지 않았다. 로렌을 볼 때마다 입가에 빈정거리는 웃음을 띠었고, 말을 걸 때에는 딱딱한 표정을 짓곤 하였다. 로렌은 그에게, 앞으로 하는 일에 참견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나타나 라우레티스 부인처럼,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살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바깥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데, 이 집안에는 오직 전통만이 살아 있다. 가장이 죽으면 비로소 낡은 가치가 무너지기 시작할지 모르나, 그래도 갑자기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시뇨르 디 세베리노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혈색이 좋지 않은 얼굴과 광채가 없는 눈, 나른해 보이는 모습, 이런 모든 것이 그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로렌은 이곳에 도착한 날 오후에 도서실에서 만났을 때 말고는, 그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저녁식사 때밖에 없었다. 건강 상태가 악화됨에 따라, 앞으로는 더욱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게 될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분이기 때문에, 점점 쇠약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할 것이다.
노인은 주위 사람들의 대화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로렌이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알아챈 듯 그녀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와서 내 곁에 앉아. 네가 이곳에 온 후로 우리는 함께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로렌은 닉의 날카로운 시선을 등에 느끼면서, 할아버지의 명령에 따랐다. 로렌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에는 빈틈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너와 니콜라스가 어떻게 만났는지 말해 봐. 별로 오래된 얘기는 아니겠지?"
"저의 아버지 사무실에서 만났어요. 제가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때, 닉이 방 안에서 나왔죠." 닉이 이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속의 악마가, '말해, 말해'하고 속삭였다. "우리 둘은 첫눈에 반했죠."
시뇨르 디 세베리노를 완전히 속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로마에서, 그렇게 서둘러 결혼했지? 아버지가 찬성하지 않았나?"
"아버지는 모르고 계셨어요." 로렌은 닉의 도움을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인정했다. "그것은… 갑작스런 일이었거든요."
"알고 있어. 손자는 너를 만나기 전에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거든."
닉은 시니컬한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할아버지는 제가 바람둥이나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로렌은 좀 별난 여자예요. 로렌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제가 억지를 써서 결혼할 것뿐이에요."
하얀 눈썹이 의아스럽다는 듯이 치켜 올라갔다.
"너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니?"
로렌은 다시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닉에게 보냈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약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단 말이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로렌은 허리를 펴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감정을 신뢰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그리고 빈정거리듯 말했다. "네 진실한 사랑이, 너희들이 어려운 고비를 넘을 때까지, 많은 도움을 줄 거다."
노인과 닉이 바라보는 가운데, 로렌은 태연한 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닉은 나의 패배를 남몰래 웃고 있을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날 밤 잠자리에서 닉이 다시 등을 돌렸을 때, 로렌의 자존심은 더욱 가혹한 시련을 받게 되었다. 로렌은 자진해서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깨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를 억지로 모시고 와 봐야 별수 없어요. 결혼식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아요." 로렌은 어둠을 향해 지껄였다.
"전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닉."
숨소리로 보아 닉이 잠들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닉이 대답할 때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당신을 말릴 수 없어. 당신의 결심에 달려 있는 문제니까."
내가 듣고 싶어 했던 말은 그런 말이 아니다. 사실은 만류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로렌은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이젠, 곁으로 오라고 말해 주지도 않는군요?"
닉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지만 이젠, 당신으로부터 비난받는 일에 지쳤어. 처음에 내 가족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고 결혼한 것이 잘못이었어."
말해 주었다면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안으로 들어와 보아야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엄청나게 다른 세계예요. 마치 고대에 사는 것 같은걸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를 도와줘."
"이 세계를 바꾸려고 하세요?"
"조금씩 바꾸려고 하지. 우리 자식들의 세대에는 남이 결정해 주는 결혼 같은 것은 없어질 거야."
우리 자식들-로렌의 마음은 몹시 흔들렸다. 만약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튼다면, 자식은 그것을 보다 깊게 해주련만… 로렌은 다시 한번 망설이면서 물었다.
"당신은 생각을 바꾸려고는 하지 않겠죠?"
"그럴 수 없어." 단호한 대답이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옳든 그르든,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희생하셨어. 내가 그것을 등진다면, 어머니가 한 일은 모두 무의미해지는 거야."
이번에는 로렌이 한숨을 쉬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다시 망설이면서 말했다. "좋아요, 닉. 여기 있겠어요."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하겠어." 닉은 로렌을 힘껏 끌어당겼다.
그가 입술을 겹치자, 로렌은 이제까지 응어리져 있던 감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시간은 여러 가지를 변하게 할 것이다. 두 사람의 감정의 깊이도 포함해서. 이처럼 완전한 기쁨을 주는 사람을 누가 사랑하지 않고 뱃길 것인가.
화요일 오후, 로렌의 아버지는 혼자서 도착했다.
"캐롤이 안부를 전하더구나. 누군가 남아서 사무실을 지켜야 하거든. 나는 아직도,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너는 행복하냐?"
로렌은 마음 한구석의 불안감을 떨어버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를 여기까지 오시라고 했을 리가 없죠. 앞으로 무척 바쁠 것 같아요. 목요일 밤에는 대무도회가 있고, 토요일의 결혼식을 위해 금요일 오후에는 베네트의 리바고로 가야 하거든요.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셔야 하죠?"
"일요일에는 가야지. 일주일 전에는 네가 집에 있었는데… 익숙해지자면 시간이 걸리겠지."
"아빠를 속여서 죄송해요."
"로렌, 네가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었어. 차라리 내가 감옥에 가는 것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잘되었는걸요."
갈바니가 슈트케이스를 들고 앞서 갔기 때문에, 로렌은 아버지의 팔을 잡고 강변을 따라 뒤따라 갔다.
"아빠, 닉을 만나면, 아까 한 것 같은 말씀은 하지 마세요. 아버지와 닉의 사이가 원만하기를 바라요."
아버지는 메마른 웃음을 웃었다.
"딸을 빼앗아 간 녀석과 말이냐? 그건 무리한 주문인걸."
"전적으로 그 사람의 책임은 아니에요. 처음에 나쁜 인상을 준 것은 저거든요."
"그런 것은 변명이 되지 않아. 아무튼 내색은 않도록 하마. 결국 나는 그 사람에게 돌을 던질 입장은 아니니까. 그 사람에게는 많은 빚을 진 몸이거든."
갈바니는 언제나 그렇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순간 당황하는 듯했으나, 아무말도 없이 로렌의 뒤를 따라, 흔들리는 곤돌라에 올라탔다.
"너는 태어나면서 줄곧 이렇게 살아온 것 같구나. 닉 블렌트가 이탈리아인과의 혼혈이라는 것은 라고 있었지. 하지만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을 거야."
할 이야기는 많았다. 그러나, 로렌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이탈리아인들처럼, 갈바니도 영어를 알아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얘기해요. 닉은 여섯 시 전까지는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이 집안의 회계를 맡고 있는 분의 아들과 함께 나갔거든요. 라우렌티스라고 하는 그 집안은 세베리노 집안과는 먼 친척간인데, 저택에 함께 살고 있어요. 저녁식사 때 집안사람들 전원을 만나게 될 거예요."
"기대되는구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며 눈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오른쪽에, 3층으로 보이는, 발코니가 달린 건물이 보이자, 아버지는 중얼거렸다.
"저것이 파라초 코르넬 델라 카 그란데야. 대부분의 이름이 생각나는군. 그때만 해도, 이런 일로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었는데."
"아빠는 베니스에도 계셨었나요? 전혀 몰랐어요."
"네가 태어나기 전이니까 알 리가 없지. 실은 허니문을 여기서 지냈단다." 아버지는 옛날을 그리워하듯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이탈리아는 내가 좋아하는 나라의 하나였지. 10대와 20대 초에는 이곳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만…."
"그럼 이탈리아어도 하실 줄 아세요?"
"옛날에는 했지만, 지난 20년 동안 쓰지 않았거든. 한 번 해볼까? 엘라노 세코리 케 논티 베데보. 번역하면, 나는 너를 몇 백 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다, 라는 뜻이지. 정말 그런 기분이 드는구나. 물론 너를 잃은 쓸쓸함에 빨리 익숙해져야겠지만."
"저도 아버지를 잃은 것만 같아요."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캐롤이 있어 정말 다행이에요. 캐롤도 함께 왔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다음 기회에는 올 수 있겠지."
성을 본 아버지는 말을 잃었다. 로렌은 미리 준비된 방으로 아버지를 곧장 안내하고 문을 닫자,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리둥절한 채 가끔 고개만 저을 뿐, 말없이 듣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군."
로렌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꿈이 아니에요, 현실인걸요."
"네가 이 저택의 여주인이란 말이냐?"
"15분 쯤 있으면 아래층의 작은 살롱에 차가 나와요. 영국의 습관에 맞추어 주고 있거든요. 내려가셔도 되고, 가지고 올라오게 해도 돼요. 가족들은 만찬 때 만날 수 있으니까요."
"내려가지. 만찬이라니, 거창하구나."
로렌은 서둘러 자기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네이비블루의 바탕에 흰 파이핑을 두른 심플하고 귀여운 모양의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이 옷에 잘 맞는 굽 높은 샌들을 신었다. 티 타임에 옷을 갈아입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라우렌타스 부인이 복장을 중요시하기 때문이었다. 바깥은 더웠으나, 저택 안은 쾌적했다. 겨울에는 틀림없이 커다란 난로가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로렌은 그런 앞일까지 생각하기 싫었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는 하루였기 때문이다.
로렌이 아버지와 함께 살롱에 들어섰을 때, 라우렌티스 부인은 차를 따르고 있었다. 로렌은 아버지를 소개했고, 아버지는 로렌이 듣기에는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인사를 했다. 로렌은 일주일 뒤에는, 아버지가 말하는 이탈리아어쯤은 알아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편, 미사여구가 많은 인사말에 대한 캐롤의 반응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라 웃음을 참았다.
잠시 후 라우렌티스 부인이 로렌에게 말했다.
"이탈리아어로 얘기를 해서 미안해요."
"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세요. 저도 이탈리아어 공부를 시작했는걸요."
"비틀레가 감격하겠군요! 오늘 밤의 만찬석상에서는 이탈리아어로 말하세요. 틀리게 말한다고 해서 아무도 개의치 않을 거예요. 그리고 아버님께서 고쳐 주시겠죠."
"제 이탈리아어 실력은 녹슬었죠. 부인께서 이 두 사람의 말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도와드리겠어요." 도나타가 즐거운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즐거운 일인데요."
"즐거운 모양이군." 어느새, 닉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입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인사를 하려고 일어선 로렌의 아버지에게 스스럼없는 시선을 보냈다.
"결혼식에 참석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오셨으면 로렌이 실망했을 거예요."
"결혼식에는 꼭 참석하고 싶었거든요." 그처럼 어려운 사태 속에서 만났던 상대를 자연스럽게 대한다는 것은 로렌의 아버지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로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캐롤을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이 애석하군요. 누군가 남아서 사무실을 지켜야 하거든요."
닉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줄 알았더라면 미리 손을 썼을 텐데."
그렇다, 닉은 일에 관계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로렌은 속으로 그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으나, 그 문제에 대해서 닉에게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직 불안정한 밸런스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로렌은, 풍파를 일으키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닉, 일찍 돌아오셨군요." 로렌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렌은 금실을 수놓은 소파 위에 아버지와 나란히 앉았다. 닉은 평소 그가 앉는 의자에 앉아 브로케이드의 쿠션에 몸을 기댔다. 무척 편안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로렌의 마음속에 두서없는 공상이 떠올랐다-캐주얼한 즈봉과 롤 칼라의 스웨터를 입은 닉이, 책을 들고 지금처럼 의자에 앉아 있다. 그리고 장소는 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옛 시골집. 난로에서는 장작불이 빨갛게 타고,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맛있는 냄새가 감돌자, 책을 읽던 닉이 코를 킁킁거린다. 내가 있는 천장이 낮은 주방으로 들어와 어깨 너머로 무슨 요리를 하는지 보려고, 내 허리에 팔을 감는다. 내 뺨에 그의 숨결이 따뜻하게 느껴지고, 형언할 수 없는 쾌감과 더불어 그의 몸이 내 몸에 밀착된다. 그는 요리를 젓고 있는 나의 손에서 스푼을 빼앗고 다정하게 키스한다. 두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갑자기 이를 방해하는 듯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마지못해….
"로렌?" 라우렌티스 부인의 목소리에 로렌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두 번이나 물었는데요, 차를 더 들겠느냐고요."
"미안해요. 딴생각을 했던가 봐요. 네, 부탁해요. 더 들겠어요."
아버지와 닉도 로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재미있다는 듯이, 닉은 착잡한 표정으로. 닉도 내 공상의 세계까지 지배할 수는 없다. 실현될 가망이 없다 하더라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나만의 것이 있는 것이다.
그날 밤의 만찬은 로렌에게 있어 적잖이 괴로운 것이었다. 가족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의 모습과,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남모르는 노력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니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닉과 로렌을 바라볼 때마다 표정이 흐려졌다. 로렌 자신은 할아버지가 마음의 평화를 찾기를 바랐으나, 닉은 그렇지 않았다. 닉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마음속으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부러 무시하고 그대로 밀고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로렌은 지난 2,3일 동안 자주 그 문제를 생각했다. 로렌은 이혼에 관한 이탈리아의 법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 수속을 밟을 때 돈으로 빨리 해결되었다는 닉의 말이 사실이라면, 취소하는 데도 같은 방법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피올레라가 그의 아내로 부적합하다고 한다면, 그의 마음에 맞는 이탈리아 여성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내가 결심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일지도 모른다.
로렌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면서도, 계속 그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거울 앞에서 머리에 브러싱을 하고 있는 로렌의 뒤에서 닉이 옷을 벗고 있었다. 로렌은 닉의 체격이 멋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넓은 어깨와 탄력있는 허리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상반신. 근육질의 긴 다리. 햇볕에 그을은 피부는 매끄럽고 탄력이 있다.
닉이 검은 파자마의 바지를 집으려고 돌아보았다.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로렌은 얼른 눈을 돌리고 힘주어 빗질을 했다. 그러나 뒤에 서 있는 그를 완전히 무시하기 어려웠다. 잠시 후 닉이 로렌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전신에는 전율 같은 것이 흘렀다.
닉은 말없이 로렌의 브러시를 빼앗아 가까운 의자에 가볍게 던지고 키스의 세례를 퍼부었다.
"나는 당신의 아버지가 좋아." 로렌의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을 때, 닉이 말했다. "나는 사업상의 아버지밖에 몰랐었지. 고소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어. 그런 유혹에 넘어간 것은 당신 아버지만이 아니거든."
닉의 목소리에는 로렌이 헤아리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담겨 있는 듯했다. 로렌은 이 순간을 헛되이하고 싶지 않아 다정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틀림없이 자신은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계실 거예요."
"당신은?" 닉의 어조가 갑자기 신랄해졌다. "당신도 운이 좋다고 생각하나?"
"지금은 그래요." 로렌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한숨을 내쉬면서 닉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충족된 기분이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겠지."
"사람은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는 없겠죠?"
"그렇겠지. 그러니까 이 정도로 행복하다고 생각해야지. 그런데 당신은 피임약을 사용하나?"
전혀 예기치 않은 이 당돌한 질문에 로렌은 당황했다.
"저는… 저어… 그래요. 하지만 처음에는 위험을 예방해야 될 것 같아서…."
"하지만 이젠 필요 없어."
로렌은 가슴속에서 둔한 통증 같은 것을 느꼈다.
"지금 당장 아기가 필요한가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로렌은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타향에서 아기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아기를 갖고 싶다는 닉의 소망을 로렌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약속해 주겠어." 닉이 유난히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당신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어?"
"좋아요." 이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두 사람이 결혼한 후 그럭저럭 시들지 않고 자란 싹을, 한꺼번에 짓이기는 결과가 될 것이다. "약속하겠어요."
"당신의 말을 믿겠어."
로렌은 부드럽게 쓰다듬는 닉의 손을 머리에 느끼면서, 믿음만이 두 사람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제는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도 괜찮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9
무도회의 밤이 왔다. 여덟 시 반부터, 어떤 사람은 수로로, 또 어떤 사람은 육로로, 초대 손님들이 속속 도착했다. 로렌은 아름답고 우아한 물빛 드레스를 입고, 닉과 함께 손님들에게 인사를 했다. 지난번 파티에서 내 모습을 본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건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가. 틀림없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이틀 후에는 아버지의 팔을 잡고, 교회의 버진 로드를 걷게 될 것이다.
검은 머리를 우아하게 땋아 올린 도나타는 빨간 드레스를 입고, 필리포와 함께 손님들을 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렌이 보기에는 도나타의 눈에 정말로 광채가 도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음달 말로 예정된 도나타의 결혼식은 베니스 사교계의 일대 축전이 될 것이다. 로렌은 할아버지가 그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오늘 밤은 시뇨르 디 베세리노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몹시 수척해 보였다. 토요일은 그에게 있어 슬픈 날이 될 것이다. 로렌은 할아버지가 자기들 두 사람을 용서해 주기를 바랐다.
갑자기 주위가 웅성거렸다. 입구를 바라보니, 방금 마지막 그룹이 도착하고 있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큰소리로 웃던 닉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태도가 굳어졌다. 그중 세 사람-중년의 부부와 젊은 남자-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바로 프란체스카였다. 로렌은 놀란 표정으로 프란체스카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프란체스카는 여기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더구나 그녀를 에스코트할 남편도 없으면서. 오늘 밤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는 청년은, 또 한 사람의 나이 많은 신사와 얼굴이 닮은 점으로 미루어, 그와 부자간인 듯했다. 저들은 자기들이 폭탄을 안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참석자 일동에게 인사를 했을 때의 라우렌티스씨는, 마치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사람 같았다. 한편 닉의 할아버지도 프란체스카를 알고 있는지 여부는 헤아릴 길이 없었다. 그는 좀처럼 웃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닉을 훔쳐보는 사람들의 표정으로 보아, 몇 사람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사람들은, 닉이 옛날의 여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흥미진진한 얼굴로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로렌이 이미 그 여자와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렌은 그 점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계산착오였다.
"오늘 밤은 당신을 시뇨라(부인)라고 불러야겠군요." 프란체스카가 로렌의 앞에 와서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적의에 찬 시선을 닉에게 옮겼다. "축하해요. 지난번 우리가 만난 후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 것 같군요!"
프란체스카와 함께 온 사람들은 당황하고 있는 듯했다. 안됐군. 그러나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사태를 설명해 줄 것이다. 그의 부모를 곤란하게 할 의도는 아무에게도 없겠지만. 그 청년은 프란체스카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닉은 잘생긴 얼굴의 표정을 바꾸지 않고, 자신을 잘 억제하고 있었다. 로렌은 닉이 프란체스카에게, 루이지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묻지 않았다. 프란체스카의 결혼이 궁지에 빠져 있다는 것을 닉은 알고 있는 것일까? 알고 있다 하더라도, 오늘 밤 프란체스카가 이곳에 나타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조금 전에 본 그의 놀란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진짜가 아니었던가.
만찬 도중에 도나타와 필리포의 결혼 날짜가 발표되었다. 로렌은 도나타의 표정에서, 금욕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순종을 느꼈다. 비코와 도나타 남매는, 사랑 따위는 하잘 것 없는 것으로 보는 이런 환경 속에서, 어렸을 때부터 명령받은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았을 것이다. 닉도 아버지가 친권을 회복하지 않았더라면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덕분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점에 감사해야 하는가, 아니면….
로렌은 프란체스카에 대해서는, 닉이 먼저 말을 꺼내기까지는 모른 체하려고 했다. 그러나 춤을 추기 위해 서로 손을 잡았을 때, 로렌의 입에서는 본의 아니게 말이 튀어나왔다.
"프란체스카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아니."
"프란체스카는 루이지 곁을 떠난 모양이군요. 그 사실은 알고 있었겠죠? 프란체스카가 하는 일이라면, 당신이 언제나 예상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나도 이틀 전에야 알았어. 오늘 밤 초대되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어. 하지만 저 여자는 도처에 친구가 있거든."
"당신에게는 지금도 저 여자가 매력이 있어 보이나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 나는 전부터 저 여자에게 끌렸지. 앞으로도 그럴 거야, 외모가 아름다울 동안만은."
로렌은 한동안 숨을 죽이고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잠시 후 오만하게 말했다.
"다른 여자에게 갔다가 오는 것은 거절이에요, 닉."
그의 잿빛 눈이 번쩍 빛났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알 수 있어요." 로렌은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약속해 주세요, 저 여자와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고.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의 결혼을 취소한다고 말이에요."
"정말 그렇게 할 수 있겠어?"
로렌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
로렌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당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나요?"
"아니야. 다만 나는 최후통첩에 신경을 쓰지 않을 뿐이야. 우리는 서로 행복한 시간을 나누었어. 앞으로도 역시 그럴 거야. 하지만 그것은 당신에게 달렸어. 싫다는 것을 억지로 말리고 싶진 않아."
"결국 약속해 주지 않는군요?"
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만한 템포의 꿈꾸는 듯한 음악이 흐르고, 불빛은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로렌은, 어떻게 마음을 결정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사이에, 닉의 남자다운 육체를 느끼고 있었다. 단둘이 지낸 시간의 여러 가지 일을 생각했다. 서로 사랑을 나누었던 일들….
그러나 로렌은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는 닉과 만날 수도 없고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깊은 감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 잘못이었다. 그러나 로렌의 가슴은 이제 바야흐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가망성이 있을 때 등을 돌리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
"당신은 정말 양보라는 것을 모르는 분이군요."
"결혼했을 때부터 알았잖아?" 그의 어조는 다소 부드러워졌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야.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지. 프란체스카에 대해서는 잊도록 해. 저 여자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리 사이를 어떻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프란체스카는 과거의 여자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용서할 수 있으련만, 하고 로렌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비코가 춤을 추자고 신청해 왔다. 그는 예의바르게 로렌을 대했으나 그녀는, 좋지 않은 짓인 줄 알면서도 아무에게나 화풀이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의 상황을 생각해 비안키 집안사람을 초대하지 않았군요. 그러나 피올레라는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
피올레라의 이름이 나오자 비코의 몸이 굳어졌다.
"초대장을 보내지 않은 것은 비안키씨 개인의 프라이드에 대해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피올레라와 니콜라스의 약혼은 두 집안만의 사적인 것이었죠. 결혼식 날짜가 정해지면 비로소 공적인 것이 되는 겁니다."
"도나타와 필리포의 경우처럼?"
"그래요. 당신은 아직 이런 문제를 잘 모르고 계시군요."
"그래요. 도나타가 장래의 남편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세요?"
비코는 잠시 화난 것을 참고 있는 듯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필리포는 좋은 사람이죠."
"그렇다면 잘 어울리겠군요."
"그렇습니다. 이탈리아에는 아직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집안이 많거든요. 니콜라스는, 그의 시대가 되면 여러 가지를 개혁하겠지요."
"당신은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고 계신가요?"
"모르겠어요. 모든 것이 지금의 상태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하지만 도나타는 멀지 않아 지금의 상태를 불만스럽게 생각할 텐데요."
"누이동생은 현재의 상태를 인정하고 있어요."
로렌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것은, 도나타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에요. 당신들의 집안은 세베리노가 아니라 라우젠티스예요.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당신네들 집안을 지배할 권리가 없어요."
"저와 저의 아버지는 그분에게 고용되어 있는 몸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에겐 참견할 권리가 있지요. 도나타의 문제는 그대로 내버려두세요. 도나타는 만족하고 있을 테니까요."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면… 아니야, 틀림없이 나보다 행복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로렌의 입에서는 한숨이 나왔다.
"부질없는 말을 했군요.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할 건 없어요. 당신이 빠른 시일 안에 우리의 습관을 이해하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으니까요."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이곳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나는 언제나 국외자의 입장에서 매사를 보지 않을까?
춤을 추고 나서 플로어에서 나오니, 닉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로렌은 프란체스카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로렌은 자신의 그런 생각을 떨어버리고 싶어, 사람들로 붐비는 방을 빠져 나왔다. 저택의 네모난 안뜰을 에워싸듯 세워져 있었고, 안뜰로 면한 3면에는 회랑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에 있는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로렌은 열려 있는 작은 음악실의 문을 통해 회랑으로 빠져나왔다. 따뜻한 밤이었다. 남녀가 포옹하고 있는 장면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은근히 예상했으나, 뜻밖에도 도나타가 혼자서 오도카니 서 있었다.
"너무 더워서요." 생각에 잠겨 있던 도나타가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요. 같은 문으로 나오다니… 정말 재미있는 우연이군요." 로렌은 문을 닫아 안쪽의 소음을 차단하고, 기둥에 몸을 기댔다. 싸늘한 돌의 감촉이 상쾌했다. "필리포가 찾고 있지 않을까요?"
"제가 멀리 가지 못한다는 것을 그 사람은 알고 있거든요."
"당신의 <몸은> 그렇겠죠."
도나타의 미소가 불쾌한 표정으로 변했다.
"무슨 뜻이죠?"
"마음은 어디든 맘대로 갈 수 있잖아요?"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 쳐다보았다. 도나타가 먼저 침묵을 깼다.
"묻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군요."
"필리포를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이란 말이 마치 한 가지 뜻밖에 없는 것처럼 말하시는군요. 저는 피앙세를 무척 존경하고 있어요. 저는 그런 분의 자식을 낳을 거예요, 그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거든요."
"그 사람과의 잠자리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나요?"
"저는 경험이 없어요. 우리의 습관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주셔야 해요. 필리포는 절대로 약혼자를 빼앗지는 않아요. 그것은 첫날밤에만 있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그때 가서 마음이 변한다 해도 어쩔 수 없겠군요?"
도나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훌륭한 결혼에는 잠자리 이상의 것이 있어요. 저의 상대로 필리포가 택해진 것은 오래 전 일이에요. 제가 불만을 느낄 이유가 없죠."
"필리포도 같은 심정일까요?"
"결혼에 대해서 말인가요? 물론이죠."
"당신 자신에 대해서도?"
"남자는 한 여자로 만족하지 못하는 거예요."
어둠 속에서 로렌의 탄력 있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럴 수는 없어요. 당신의 말은, 남자가 무엇인가를 희생해 준다는 것을 여자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 것 같군요."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도나타의 어조는 부드러워, 마치 어린이를 타이르는 것 같았다. "제가 말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거예요. 당신과 니콜라스가 나누고 있는 감정은 지극히 한정된 사람에게만 주어진 거예요. 그걸 감사해야죠."
이때 갑자기 안뜰에서 여자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나타도 그 웃음소리를 들은 듯했다. 로렌은 한동안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거운 발걸음으로 난간 쪽을 향했다.
안뜰 건너편에 한 쌍의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늘에 가리어 있었으나, 흰 약식 예복 차림의 넓은 어깨를 로렌이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의 목에는 하얗게 드러난 팔이 감겨 있었다. 남자는 풀려고 하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닌 듯했다. 로렌은 노여움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돌아섰다. 속이 메스꺼웠다. 역시 닉은 프란체스카의 매력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 거예요." 도나타가 옆에서 위로했다.
"니콜라스는…."
"다른 남자와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겠죠? 하지만 저 여자가 누군지 아세요?"
"로베르토 에마누엘레와 함께 온 여자일 거예요."
"그래요. 닉과 2년 동안 가깝게 지낸 사이죠."
로렌은 그후 파티가 끝날 때까지 닉을 피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도나타가 말한 남자에 대한 철학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나와 입장이 바뀌었을 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시뇨르 디 세베리노는 어느새 파티에서 모습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로렌은 혼자있고 싶어 살롱으로 들어갔다가, 그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죄송해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같은 부류인걸. 들어와. 사양할 것 없어. 손님들이 돌아가자면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할걸."
명령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로렌은 어둠을 향해 열려 있는 창가로 다가가 운하를 내다보았다. 기슭을 때리는 물결소리가 들렸다. 멀리 모터소리가 들리고, 유리창을 통해, 난로 곁에 앉아서 무릎 위에 책을 펼치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서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너만이 아니야." 노인이 불쑥 말했다. "그런데 나로서는, 너희들 두 사람이 전에 만난 일이 있었다는 것이 더욱 재미있군. 어디서 만났지?"
할아버지는 우리가 주고받은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때 프란체스카는 할아버지가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말했던 것이다. 로렌은 천천히 돌아보았다.
"로마에서의 파티에서 만났어요. 그분은 남편과 함께 왔었죠."
"루이지 바르디니말이군." 로렌의 표정을 본 노인의 얼굴에 보일락 말락 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손자의 소식을 알려고 노력 해왔지. 모든 면에서 그 녀석을 알려고 말이야. 그 여자 이전에도 영국에 여자가 있었지. 너는 그녀석의 여성 편력을 그만두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도나타는 저더러,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라더군요."
"하지만 너는 도나타가 아니잖아?"
"그래요. 그것은 제가 건너야 할 다리거든요."
"너는 할 수 있을 거야. 그건 확실해." 노인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나는 그녀석의 신부 선택 문제로 말다툼하고 싶지 않아. 내게는 결혼에 대한 사고방식이 문제거든."
"피올레라와의 결혼을 바라셨던 것은, 할아버지에게 지금보다 무엇인가 나아지는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인가요?"
"그렇게 믿고 있지. 나는 세베리노 가의 혈통이 희미해지는 것을 용서할 수 없거든. 이탈리아인 신부였다면 다소 밸런스를 이루었겠지. 하지만 네가 낳은 자식에게서는 혈통이 좀 더 희미해질 거야."
"우린 어린애를 갖지 못할지도 몰라요."
"원하지 않니?"
로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종류의 거짓말은 정말 가슴 아픈 것이다.
"아니에요. 닉은 바라고 있어요. 그렇지만, 꼭 아기가 생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거든요."
"너희들처럼 건강한 남녀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지. 나는 이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겠니?"
"할아버지의 심정을 알 만해요. 그래서 저도 가슴 아파요. 하지만 저로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군요."
"그래, 너는 내 도움이 될 수 없지." 노인은 무릎위에 펼쳐 놓았던 책을 치우고 천천히 일어섰다. "손님들에게 인사할 시간이야."
로렌은 납덩이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방안에 혼자 남았다. 노인의 평가는 너무나 분명했다. 할아버지는 프란체스카조차 로렌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데 이런 고통이 따른다면, 사랑한다는 데 어떤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 대답은 그날 밤 닉에 의해 얻어졌다. 로렌이 준비해 두었던 항의의 말은, 닉이 살짝 건드렸을 분인데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마치 서로 다른 두 여자를 대하는 기분이야." 로렌이 만족감에 젖어 있을 때, 닉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낮에는 침착하고 냉정한 전형적인 영국 여자인데, 밤에는 불 같은 야성녀! 당신처럼 예민한 여자가 어떻게 그동안 참아 왔지!"
"당신 같은 사람을 못 만났기 때문이죠."
닉은 로렌에게 가볍게 키스하고 팔을 풀었다.
"잘 자, 아망."
아망-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불렀다. 아직도 진짜 사랑과는 거리가 있겠지만, 그래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말임에 틀림없다. 로렌은 안뜰에서 목격한 문제로 추궁하려고 했었으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제는 너무 늦었다. 로렌이 해야 할 일은 프란체스카보다 매력적인 여자가 되는 일이다.
리바고로 가는 일행은 석 대의 차에 나누어 탔다. 로렌은 닉이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도나타와 함께 앉아, 영국의 시골과는 정취가 다른 이곳 시골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만하게 전개된 비탈에는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고, 여기저기에 솟아 있는 교회의 높은 종루가 그곳에 마을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당당한 별장이 주위의 풍경과 두드러지게 대비를 이루고 서 있었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태양 아래, 다갈색의 부드러운 대지.
"저것은 베리코의 언덕이에요. 발다노까지는 앞으로 2,3킬로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티 타임까지는 별장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도나타가 말했다.
로렌은 내일이 결혼식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눈앞에는 닉의 검은 고수머리가 보였다. 그녀는 그의 목을 껴안고 입술을 맞추고 싶었다. 로렌은 이미 닉의 아내기 때문에, 이제부터 식을 올린다고 해서, 그녀에게 새삼스럽게 <아내>라는 의식을 일깨우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로렌은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즐거웠다.
길은 점점 오르막길이 되고, 양쪽의 비탈은 숲과 포도밭으로 뒤덮여 있었다. 멀리 눈 덮인 산맥이 보였다. 로렌은 학생 시절에 배웠던 지리 지식으로, 그것이 도로미테 산맥임을 알 수 있었다. 옛날을 그립게 하는 작은 기차가 도로와 나란히 달리며 삐익 하고 기적을 울렸다. 선로는 주택의 뜰과 뜰 사이에 멋대로 깔려 있었다. 로렌은 그것이 진기했다.
리바고는 마을이라기보다는 작은 도시처럼 생겼는데, 구불구불 구부러진 긴 메인스트리트를 따라, 상점과 끽다점이 늘어서 있었다. 낡아 빠진 18세기의 교회 건물 앞을 지나, 1,2 킬로쯤 달려 철문을 통과했다. 차는 포도밭 사이를 달려 마침내 별장에 도착했다. 별장 앞에 선 로렌은 숨을 죽였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 안드레아 파라디오 양식으로 지은 건물로, 당당하고 넓은 현관은 2층 높이의, 굵은 네 개의 기둥으로 떠받쳐져 있었다. 지붕 위에는 여러 개의 등신대 석상이 놓여 있고, 그것과 짝을 이루는 석상이, 주차장의 중앙에 있는 분수대 주위에 놓여 있었다. 옥돌을 깐 주차장의 양쪽에는 잘 가꾸어진 잔디밭이 있고, 그 끝에는 여러 가지 빛깔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화단이 있었다.
"쾌적하고 아름다운 곳이지?" 닉이 현관의 넓은 돌계단 앞에 차를 세우고 빈정거리듯 말했다.
닉이 빈정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별장은 건물로서는 훌륭하지만, 집이라는 느낌은 전혀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차가 도착했다. 맞으러 나간 로렌은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아직 아무것도 보시지 않았잖아요."
"얼핏 보기만 해도, 이곳에서 지내기가 쉽지 않겠다는 것쯤은 알 수 있어. 너와 이곳은 너무나 맞지 않아. 시골의 오두막집, 두 아이, 그리고 믿음직한 남편… 그것이 네 스타일이거든."
로렌은 아버지가 자기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아버지는, 제가 앞으로도 닉을 믿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세요?"
"그 사람이 품행 단정하게 있을 수 있을까?"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탈리아 남자는 다혈질로 유명하지."
"닉은 반반이에요."
"그래도 바람기가 많아. 간밤의 여자는-프란체스카라고 했던가- 그 사람이 모르는 여자는 아니겠지?"
"저와도 모르는 여자가 아닌걸요. 그 여자는 두렵지 않아요."
"그렇다면 두려워해야 해. 그런 종류의 여자는 금방 알 수 있거든. 그 여자는 쉽게 단념하지 않을걸."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는 초록빛 눈동자 속에는 굳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저도 단념하지 않아요."
10
그날 밤 커피는 별장의 뒤뜰에 있는 테라스에서 즐기기로 되어 있어, 각자 좋을 대로 등의자나 소파에 앉았다. 약간 낮은 곳에 풀장이 있는데, 수면이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다음날의 결혼식은 오전 열 한 시부터 별장의 작은 예배당에서 올려지게 되어 있고, 일요일에 베니스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곧바로 공항으로 가실 거고.
아버지와 캐롤의 결혼식은 이달 말로 예정되어 있다. 닉도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로렌에게 약속해 주었다.
테라스에 앉은 로렌은, 저녁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 입으러 침실로 돌아갔을 때의 일을 생각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는, 아버지는 틀림없이 수표를 돌려줄 수 있을 거예요. 아버지는 이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지시해 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런 것은 아버지에게 맡겨 두겠어, 어떻게 하시든. 아버지의 일은 걱정 안 해."
"고마와요." 로렌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언제 회의에서 사직한다고 말할 거예요?"
"사직하지 않아,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갑자기 싹튼 작은 희망을 가슴속에 숨겨둘 수 없어, 로렌은 닉을 쳐다보며 물었다.
"짐이 무겁지 않으세요?"
"처음이니까. 이곳의 일을 잘 알 때까지는 그렇겠지. 하지만 실제의 일은 비코와 그의 아버지 스테파노가 하는 거야.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만 있으면 돼."
희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꼭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하긴 당신이 이름만의 주인으로 있을 수는 없겠죠."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튼 두고보라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로렌은 절망한 나머지 비명을 올리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집이란 마음이 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의 집은 남편이 있는 바로 이곳이다. 닉이 합리적인 보통의 사회로 바꾸려 하고 있다고 믿자. 내가 그와 함께 걸어가도 이를 말릴 사람이 없을 테니까. 로렌은 자기 자신에게 다시 한번 다짐했다….
"걷고 싶지 않아?"
닉의 목소리에 로렌은 정신이 들었다. 닉은 벌써 일어나 손을 내밀고 있었다.
로렌은 기꺼이 따랐다. 아버지는 스테파노 라우렌티스와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그걸 보자 로렌의 마음은 누그러졌다. 저 두 분은 서로 마음이 맞는 모양이라고 생각되었다.
"일요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쓸쓸할 거예요." 테라스에서는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진 곳까지 왔을 때, 로렌이 말했다.
"2주일만 있으면 또 만날 수 있잖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런던에서는 얼마나 있을 수 있을까요?"
"꼭 필요한 기간만. 빨리 돌아와서 늦어진 것을 회복해야지."
"하지만 당신 자신의 일에도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지금은 이것이 내 일이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알고 있으면서…."
"잘 알고 있지." 닉은 바지의 호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어슬렁거렸다. "런던으로 가면 내가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렇게 되지는 않을 테니까. 돌아오면 당신도 도나타의 결혼식 때문에 바쁠거야."
"남이 결정하는 결혼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생각한다면, 그 결혼을 돕고 싶어 하는 당신이 놀랍군요."
"나는 내 스스로 고르고 싶었어. 그렇다고 해서 이곳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야. 이곳에서의 여러 가지 다른 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는 생각지 않지?"
"대부분의 결혼이 사랑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말인가요? 그건 것을 강조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는 그런 점에서 왈가왈부할 수 없잖아요?"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당신에게 그런 감정이 부족하리라고는 절대로 생각되지 않는걸."
부족하다고?
"저는 불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나와 입장을 바꿀 수 있다면, 기꺼이 바꿀 여자들은 많다고 생각되는데요."
"내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면, 많은 남자들이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걸. 특히 밤에는!"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군요." 로렌은 노여움이 폭발하려고 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닉을 바라보는 눈에 불길이 타고 있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은, 남이 흉내낼 수 없는 당신의 테크닉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죠?"
"다른 것을 생각할 수는 없는걸. 당신은 이곳을 싫어하고 있잖아?"
"그뿐만이 아니에요. 그것뿐이라면 대수로울 것 없어요. 다시는 프란체스카에 대해서 입 밖에 내지 않은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당신의 입으로 말해 보지 그래."
"제가 실제로 얻고 있는 것에 비하면, 당신의 사랑을 그 여자와 나누어 갖는다는 것쯤 대수로울 것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로렌은 닉의 태도로 보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닉은 전신을 긴장하며, 호주머니에서 천천히 위협적으로 손을 뺐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잘 다듬어진 정원수들이 들어차 있는 정원 안이었다. 커다란 나무 그림자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그 그늘 때문에 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로렌은 길 모퉁이를 보지 못해서, 바로 앞의 풀섶에 발이 걸려 비틀거렸다.
그러자 닉의 억센 팔이 로렌의 허리를 낚아채면서, 두 사람은 잔디 위에 함께 굴렀다. 볼링의 핀처럼 닉에게 밀려 쓰러진 로렌은, 불안과 노여움으로 입술을 꼭 깨문 채, 틀림없이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 전신을 긴장시켰다. 얇은 코튼 보일의 드레스는 마치 종이 같아서 여러 곳이 찢어졌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닉의 얼굴은 냉혹하리만큼 딱딱히 굳어 있었다. 복수를 당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당하다니!
갑자기 닉의 얼굴에서 노여움이 사라지고, 자기혐오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닉은 로렌에게서 떨어져, 숨을 헐떡이면서 고개를 떨군 채 잔디 위에 무릎을 꿇었다. 노여움은 폭발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로렌은 자신의 몸에 닉의 손이 닿았을 때,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미안해. 이런 짓은 좋지 않지."
로렌은 그의 눈에 떠오른 후회의 빛을 보고 긴장을 풀었다.
"제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요. 두 사람 모두 잘못했어요."
"잊자구. 그럴 수 있겠지?"
찢어진 드레스를 남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두 사람은 일부러 길을 돌아 침실로 돌아왔다. 다행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당신의 드레스를 어떻게 하지?"
"버릴 수 있을 때까지 숨겨 두겠어요. 당신이 제 드레스를 찢은 것은 처음이 아닌걸요."
"그렇군. 하지만 마지막이 아닐지도 몰라. 만약 또 프란체스카의 문제를 꺼낸다면… 우리 두 사람은 자신을 억제하는 버릇을 배워야겠어, 여러 가지 의미에서." 닉은 이렇게 말하면서 트윈베드를 보았다. "오늘 밤부터 시작하자구."
로렌은 닉이 자기 없이 하룻밤을 지낼 수 있다면 한번 지내보라고 속으로 뇌까리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해요."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로렌은 닉이 아직도 프란체스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나 의심하고 있었다. 오늘 밤 나와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으려는 원인이 바로 그 여자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 여자는 만 2년 동안이나 그를 독점하고 있었다. 만약 그 여자가 닉이 바라는 입장을 받아들였다면, 지금도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순전히 육체적인 관계만으로는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다. 로렌은 자기와 닉과의 관계도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혼자 베드에 몸을 뉘자 어딘지 기묘하고 허전했다. 로렌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닉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열심히 자신에게 타일렀다. 항상 격렬하게 지낼 수는 없잖아? 닉은 정말 피로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조금 전처럼 화를 낸 뒤에는. 노여움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감정이니까.
로렌은 닉이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갑자기 담요를 젖혔을 대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그러나 그가 등 뒤로 다가왔을 때는, 그의 감정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내 의지력으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당신의 관심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 이쪽을 보라구, 로렌. 창피하게 하지 말아 줘."
로렌은 닉의 목을 안고 상대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토록 진지하다면 좋아요. 이런 일로 당신을 괴롭히기는 싫어요."
"당신은 나보다도 훨씬 쉽게 잊는군. 나는 무엇이든 내 맘대로 해왔어. 그래서 내 의사와 다른 명령은 받아들이기 힘들지." 닉은 이렇게 말하고 로렌의 입술에 입맞추었다. "나와 함께 참아주겠지? 언젠가는 틀림없이 한마음이 될 거야."
작은 예배당은 많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로렌은 닉의 옆에서 사제의 말을 들으면서, 일찍이 겪지 못했던 행복감으로 가슴이 벅찼다. 간밤의 일이 마치 꿈처럼 생각되었다. 프란체스카의 모습도 이제는 마치 꿈처럼 생각되었다. 앞으로는 닉에게 그 여자는 필요 없으리라. 그 밖의 어느 여자도 필요 없을 것이다.
밝은 햇빛 속으로 나왔을 때, 도나타와 시선이 마주쳤다. 로렌은 그녀의 침착한 눈의 표정이 부러웠다. 저렇게 자기가 가는 길을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사랑의 말을 듣고 싶다거나, 듣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고통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것이다.
그날은 무사히 지나갔다. 그러나 닉의 할아버지는 한껏 노력하고 있는 듯이 축하의 말을 건넸는데, 여전히 눈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한편 로렌은, 닉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런 기대를 가진다는 것도 옳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가 비록 무엇을 택하든, 나는 닉에게 충실하자.
"행복하니?" 성대한 오찬이 끝나자, 아버지가 로렌을 구석으로 데리고 가 다정하게 물었다.
"무척 행복해요." 로렌의 얼굴에 번지는 밝은 웃음이 그녀의 말이 진심임을 증명했다. 아버지도 웃었다.
"안심이구나. 처음에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캐롤이 경위를 얘기해 주었을 때는 더욱 그랬지. 말 못할 사정이 없지는 않을 거라 생각돼서 말이다. 나는 닉을 잘못 보았어. 사과해야겠다."
"틀림없이, 어깨만 으쓱할 거예요. 아버지의 결혼식에 꼭 참석할 거예요. 결혼식을 끝내고 어디로 가실 거죠?"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아무튼 너희들은 집에서 묵겠지? 사용하지 않는 침실이 세 개나 있으니까 호텔에 들 필요 없다. 그리고 로렌, 결혼식이 끝나면 집을 내놓을까 한다. 캐롤과 내게는 집이 너무 크거든."
로렌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곧, 그 집에서 자랐기 때문일 거라고 로렌은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집은 영국에 갈 때의 편안한 본거지로서,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심감을 주는 곳인데….
"아버지와 딸의 얘기는 다 끝나 가고 있소?" 닉이 다가와 로렌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태도는 마치 로렌에게, 그녀가 이제 충성을 다해야 할 상대가 누구인가를 일깨워 주려는 것인 듯했다.
"할아버지께서, 먼저 실례하게 된 것을 장인 어른께 사과드리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할아버지는 습관적으로 낮잠을 주무셔야 하거든요."
"할아버지께선 괜찮으실까요?" 로렌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약간 피곤할 뿐이라고 말씀하셨어. 장인 어른, 로렌이 할아버지의 병환에 대해서 말하던가요?"
"응, 그런데," 아버지의 태도는 아직도 서먹서먹한 듯했다.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나?"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건 그렇고 장인어른, 라우렌티스 아주머니께서 정원을 보여드리고 싶어 하는데요. 장인어른은 아주머님과 뜻이 맞을 겁니다."
로렌은 아버지가 정원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말했다.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캐롤이 질투할 것 같아?"
"아니에요. 돈으로 할 수 없다는 말말이에요."
"아, 그 말. 하지만 아버지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당신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어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어.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남의 감정을 은근히 들쑤시는 일이야." 이때 로렌이 반박하려고 하자, 닉이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갖다 댔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말다툼하는 일은 그만두자구."
로렌은 어깨에서 힘을 빼고 쌩긋 웃었다.
"그래요. 그만둬요."
"착한 아이군." 닉이 손가락으로 로렌의 뺨을 어루만지며,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의 관능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일찍 낮잠을 잔다고 해서 잔소리할 사람은 없겠지. 오늘 밤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러 올 거야. 그동안 편히 쉬어 두는 게 좋지 않겠어?"
상할 뻔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뀌어, 로렌의 입에서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쉰다는 것은 진심에서 나온 말인가요?"
"결국은 그런 셈이지."
로렌은 나중에, 이날 오후에 비로소 사랑의 싹이 텄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마치 처음 경험하듯 열렬히 사랑을 나누었다.
깊은 잠에서 깨났을 때도, 로렌의 마음은 꿈과 생시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만이 메아리처럼 아련히 들렸다. 언제, 누가 그런 말을 했던가. 꿈에 대한 예고다. 언젠가 틀림없이 그날이 올 것이다.
그날 밤 로렌이 입은 드레스는 짙은 블루의, 한족 어깨와 팔이 드러난, 그리스풍의 디자인이었다. 머리를 한족으로 모와 틀어 올린 것을 보고 닉이 말했다.
"아테네의 미인 같군."
그날 밤 파티에서는 닉의 할아버지가 주인 역을 맡았으나, 불과 일주일도 안 되는 동안에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로렌은 그와 좀 더 가까워지기를 바랐으나, 노력의 보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에게 있어 나는 한 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것일 게다. 할아버지는 개인적인 감정 면에서는 나를 싫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한 가닥 희망을 산산이 부수어 버린 존재로서의 나를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당신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닉이 로렌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조금은 칭찬을 해주나요?"
"그래. 모두들 내 취향이 훌륭하다고 말하고 있지. 물론 이탈리아인의 기질 탓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항상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어. 그래야만 내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거든."
"당신의 자존심에는 누군가의 응원이 필요한 것 같군요."
"당신의 외모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하지만, 항상 모든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같다고는 할 수 없지."
마지막 손님이 돌아간 것은 새벽 두 시가 지난 뒤였다. 그날 아침에 닉이 아버지를 공항까지 차로 전송하기로 되어 있었다.
"열 시경에 나가죠. 출발 시간에 빠듯하게 대가면서 걱정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거든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렌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럼 아침에 보자."
로렌은 충동적으로 아버지에게 안겨, 그의 뺨에 키스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닉이 계단을 올라가면서 말했다.
"아버지가 딸을 잃는다는 것이 저렇게 괴로운 것인 줄 몰랐어. 언젠가는 나도 같은 처지에 놓일지도 모르겠군."
세 사람은 탑승 한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라고 말했으나, 닉은 떠나는 것을 보겠다고 우겼다.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자, 닉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린 결혼식 전날에 가겠습니다. 그 뒤에는 도나타의 결혼식이 있죠. 마치 유행 같군요."
시내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로렌은 입을 다물고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지금쯤은 구름 위에서 그리운 곳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불과 2주일 후면 다시 만날 수 있지만, 마치 1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차는 산 마르코 광장을 향해 마지막 다리를 지났다.
"모두들 저녁때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광장에 들러서 무얼 좀 마시고 갈까?"
"그래요." 로렌의 기분은 다소 밝아졌다. "하지만 이 시간에는 사람들이 붐비지 않을까요?"
"낮에는 항상 붐비지. 여행객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자면 겨울이 될걸."
차는 두칼레 궁전과 소광장(피아체타) 앞에 섰다.
끽다점을 찾아 테이블을 잡자, 닉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려 커피를 주문했다. 덥고 소음이 심했으나, 분위기는 만점이었다. 로렌이 앉아 있는 곳의 정면으로 거대하고 화려한 제단처럼 생긴, 황금빛 철탑이 있는 사원이 보였으며, 비둘기들이 광장에 날아와 내려앉곤 했다.
"아직도 서먹서먹해?"
"당신은?"
"나는 어렸을 때 여름 방학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지냈어. 아참, 겨울에도 한번 왔었지. 그래서 친근감을 느끼고 있어. 자기가 살았던 곳은 다 그런 거지만."
"성은 어때요? 내 집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솔직이 말하면 그렇지 않아. 하지만 멀잖아 그런 느낌이 들 거야."
커피가 나왔다. 로렌은 돈을 치르는 닉을 보면서, 건강하게 빛나는 그의 탐스런 검은 머리와 매끄러우면서 따뜻해 보이는 피부의 빛깔에 대해 마음속으로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여기, 자석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남자가 있다. 로렌은 <이 남자가 내 남편>이라고, 그를 힐금 바라보는 여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로렌은 어제 낀 다이아 반지를 만져 보았다. 전부터 결혼반지는 끼고 있었다. 두 개의 반지를 끼고 있으면서, 나는 또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도대체 이 이상의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로렌의 바로 뒤에서 누군가가 걸음을 멈추었다.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닉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벌써 로마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정리할 일이 있어서요. 잠깐 함께 앉아도 괜찮을까요?"
프란체스카가 앞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으려 했을 때, 로렌은 마음속으로 <침착하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요."
프란체스카에게는 이 말이 전혀 예기치 않은 것이었을 것이다. 비어 있는 의자에 앉으려던 프란체스카는,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는, 아주 심플하며 몸에 꽉 끼는 니트의 코튼 슈트를 입고, 터키 블루의 비단 스카프를 터반처럼 머리에 감고 있었다. 로렌은 그녀가 다른 때보다도 유난히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닉은 입술을 약간 일그러뜨리며 두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로렌은 당신을 만나서 반가워하고 있는 것 같군, 프란체스카."
프란체스카가 무어라고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면서 발길을 돌렸다 로렌은 얼굴이 상기되고 손이 떨렸다.
"이런 말이 있지." 닉이 오랜 침묵을 깨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산 마르코 광장에 앉아 있으면 온 세상을 다 볼 수 있다고." 초록빛 눈과 잿빛 눈이 부딪혀 불꽃이 튀겼다.
"순전히 우연이란 말이군요?"
"약속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로렌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늘 오후에 이곳에 올 예정은 없었으니까요."
"당신의 관심은 역시 그쪽이군."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닉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아직 중도에 있는지도 모르겠군."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러나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프란체스카가 이곳 베니스에 있는 한 로렌의 마음은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11
그 후의 나날은 이런저런 일로 바빠,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없는 채 며칠을 지나갔다. 그러나 시뇨르 디 세베리노며 상속에 관해, 닉과 로렌의 의견 차이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어느 날 같은 문제로 또 충돌했을 때 로렌은 문득, 프란체스카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란체스카는 아직 베니스에 있을까? 그러나 로렌은 자신이 그 사실을 정말로 알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밤의 만찬에 시뇨르 디 세베리노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방에서 나올 기회가 별로 없을 거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고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로렌은 자기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몇 번인가 마주쳤으나, 그 눈 속에 담겨 있는 것을 알아맞히기는 어려웠다. 그는 로렌과 닉을 저울에 달기라도 하듯, 가끔 닉 쪽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로렌은 마음속으로, 제발 그가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빌어마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가 마지막 몇 주일이나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오후 자기 방으로 와 달라는 시뇨르 디 세베리노의 전갈을 받고 로렌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자세로 창가에 서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돌아보는 그이 시선에 적의가 없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앉아. 다시 한번 얘기할 때라 생각되었던 거야."
로렌은 그의 말에 따르며, 시뇨르 디 세베리노가 맞은쪽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세베리노 가의 이름에 손상을 입힐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어요. 할아버지께서도 그 점은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해요."
"물론 잘 알고 있지. 너는 강한 의지와 대단한 주장을 갖고 있는 여자거든. 그래서 네 성실성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아." 시뇨르 디 세베리노는 이렇게 말하고 로렌은 빤히 지켜보았다.
노인의 수척한 얼굴은 창문으로 흘러드는 햇살을 받아 더욱 여위어 보였다.
"내가 너를 오라고 한 것은 한 가지 부탁이 있기 때문이야. 너는 틀림없이 거절하겠지. 그러나 꼭 부탁하겠어."
로렌은 그 부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퍼뜩 떠올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로렌은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베리노 가의 전통에는 화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저더러 돌아가 달라는 말씀이죠? 제가 없으면 문제가 반감하니까요."
"맞아. 머리가 좋군. 네가 선택하는 일이라면, 니콜라스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거야."
"그럴 수가! 그것이 할아버지의 선택인가요?"
"가계(家系)를 지키기 위해서야. 손자에게 훌륭한 이탈리아 여자와 짝지어 주려는 거야. 아직도 시간은 있으니까."
"하느님께 맹세한 결혼을 휴지화하시려는 거예요? 식을 올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할아버지 자신인 걸요!"
"나도 실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나는 충분히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지. 그래서 상황이 더욱 어려워진 거야. 하지만 수정 못할 것은 없어."
"제가 동의한다면 가능하겠죠." 로렌은 손가락의 관절이 하얗게 될 정도로 의자의 팔걸이를 힘껏 쥐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왜, 닉이 저를 그토록 쉽게 보내리라고 확신하고 계시죠?"
"그녀석은 네가 떠난 뒤에 알게 되기 때문이야. 니콜라스와 비코는 오늘 늦게야 돌아올 거야. 그리고 네 좌석은 예약되어 있어. 두 시간 뒤에 떠나는 비행기야. 아래에 갈바니가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어."
로렌은 그 용의주도한 계획에 압도되어 한동안 말을 잃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저를 비행기에 태우시겠다는 말씀인가요? 아무에게도 인사말 한마디 없이 떠나기를 정말 바라시는 거예요? 미안하지만 그런 일은 할 수가 없어요."
어느 정도 예상한 대답이라는 듯이 노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후 그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바로 어제 니콜라스가 바르디니 가의 여자와 함께 있었다고 말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나?"
무거운 침묵이 방안을 지배했다. 로렌은 간밤에 닉이 보였던 열광적인 시선을 떠올리면서도, 생각은 다른 쪽으로 향했다. 하긴 간밤의 닉은 여느 때처럼 상냥하지 않았다. 로렌은 그것은 낮에 있었던 언짢은 말다툼 탓으로 돌렸으나, 방금 들은 이야기로 미루어 생각하니, 전혀 다르게 생각되었다. 그는 프란체스카와 함께 있다가 돌아왔을 것이다. 그는 그 여자에 대한 욕망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를 이용한 것이다. 용서해도 좋은 일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안 된다. 그것만은 결코 안 된다!
로렌의 눈은 눈물로 흐려졌고, 그녀의 가슴속에는 일찍이 겪은 일이 없는 씁쓸한 슬픔이 번졌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하겠어요. 짐을 꾸릴 시간이 없으니까. 남은 짐은 나중에 보내 주실 수 있겠죠?"
"물론이지." 노인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부끄러운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런 기색은 곧 사라졌다. "우리는 좀 더 좋은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좋을 뻔했어, 로렌. 하지만 인생은 이런 거야."
노인이 면전에서 직접 로렌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로렌은 자신의 입에서 심한 말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갈바니에게, 10분 안에 내려간다고 전해 주세요."
로렌은 누구와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방으로 돌아와, 간단한 물건들만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간단한 메모를 남겨 놓고 방을 나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갈바니가 차 안에 기다리고 있었다.
대운하에는 언제나 변함없는 태양이 내리쬐어 로렌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마음을 따뜻하게 하지는 못하였다. 로렌에게 정상적인 감정이 돌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버지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로렌이 모습을 나타내자, 아버지는 말없이 그녀를 힘껏 품에 안았다.
"네 전화를 받고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입을 연 것은 차에 오른 뒤였다. "너와 닉이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렇게 빨리 파탄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 지금 이런 얘기를 해도 괜찮겠니?"
"아직은 하지 말아 주세요. 집에 돌아가면 틀림없이 마음이 가라앉을 거예요. 집을 나온 지 몇 해가 지난 것 같은 느낌이에요."
대화는 여기서 끊어졌다. 로렌은 눈에 익은 풍경이 어둠에 싸여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무엇보다도 뜻있는 일이라고 자신에게 열심히 타일렀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굴처럼 텅 빈 가슴속을 채울 길이 없었다.
캐롤은 로렌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 모든 질문을 단념했다. 캐롤이 준비한 뜨거운 수프와 방금 구워 낸 빵은 맛있었으나, 그 밖의 것은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괜찮으시다면 저는 이만 침실로 가고 싶어요. 아버지와 캐롤은 내일은 여섯 시 반이 지나야 돌아오시겠죠? 제가 저녁식사 준비를 해놓겠어요."
로렌의 침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커튼도 닫혀 있었고, 침대 커버도 펴져 있었다. 로렌은 전등의 스위치를 끄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창문 옆에 서 있는 자작나무가 실바람에 조용히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베니스에서는 밤마다 잔물결 출렁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었지. 그런데 여기서는 바람소리와 멀리 지나가는 차소리가 들릴 뿐….
이런 환경에 다시 익숙해지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이곳은 내 집인 것이다. 베니스는 결국 내가 살 곳이 못 되고 말았다. 하지만 지나간 나날은 이제 과거로 돌려야지. 지금 이 순간부터 새로 출발하는 것이다. 내게는 아직도 남은 인생이 있지 않은가.
이튿날은 날씨가 아주 좋았다. 로렌은 오전 내내 비키니만 입고 뜰에서 지냈다. 최근의 베스트셀러를 읽으려고 했으나, 지난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햇볕 속에서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났을 때는, 지난 일이 다시 그녀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닉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로렌은 빤히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화상이라도 입으면 어쩌려고 이러고 있지? 아무리 영국이라고 해도 햇볕 속에서 잠든다는 것은 현명한 짓이 아닌걸."
꿈이 아니다. 진짜 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가 홀연히 사라질 것만 같아, 로렌은 손도 내밀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죠?"
"천사처럼 하늘을 날아왔지. 환영의 인사가 겨우 그뿐인가?"
닉이 기대하고 있는 환영 방식은 뻔했다. 그러나 로렌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의지의 힘을 쥐어짜내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할 수 있는 인사는 그뿐이에요. 어떻게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셨죠? 제가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는 할아버지한테서 들으셨을 텐데요."
"모든 것을 다 들었어."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가 질투 때문인가?"
앉으면 아무래도 불리할 듯했으나 로렌은 다리가 떨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듣지 않으려는 이유를 아는 데 의미가 있는 건가요. 아니면 아내 이외의 여자와 접촉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한창 나이의 남자에 대한 지나친 편협한 태도라고 설교할 셈인가요?"
"나는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아." 불과 얼마 남지 않은 희망이나마 닉의 말이 빼앗아 갔다. "그저께 프란체스카와 함께 있었던 것은 사실이야. 그것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 아니야. 그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을 뿐이야."
"무엇 때문에요?" 로렌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닉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건드리지 마세요."
"알았어.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다고 해서 항상 친밀한 것은 아니야. 당신에겐 그런 경험이 없어?"
"상대에 따라서는 그렇겠죠.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그렇지 않아요. 틀림없이 당신도 그럴 테지요! 알고 있어요!"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다만 그렇게 믿고 싶어할 뿐이야."
"저는 가르쳐 준 것만을 믿을 뿐이에요. 이젠 돌아가 주세요, 닉. 제겐 당신이 필요치 않으니까요."
"당신은 내 아내야." 닉은 등을 돌리려고 하는 로렌을 낚아채어 힘껏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닉의 유연한 손이 로렌의 숨겨진 반응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자기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욕망에 대해 절망감을 느꼈다.
"이것이 모든 것의 원인이에요. 그렇잖아요?" 닉이 팔을 풀었을 때 로렌은 말했다. "여기가 이탈리아가 아니고 런던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에요. 강간을 하는게 어때요? 어떻게 되는지 좀 보시지 그래요."
닉은 심장을 찔린 듯 로렌을 밀어내고 옆을 향한 채 숨을 씨근덕거렸다. 땀에 젖은 셔츠를 통해 울퉁불퉁한 근육의 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로렌은 문득, 테라스에 놓아 둔 커다란 가죽 백이 생각났다. 이때 닉이 조용히 로렌 쪽으로 돌아섰다. 안 된다! 다시는 안 된다. 방금 증명되었잖아!
"옷을 입고 오겠어요. 제발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 돌아가시기 전에 무엇이라도 마시겠다면 거절하진 않겠어요."
닉은 따라오려고 하지 않았다. 로렌은 2층으로 올라가 서둘러 샤워를 하고, 줄무늬가 있는 촌스런 목면 원피스를 입었다. 그리고 맨발에 낡은 샌들을 걸쳤다. 닉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보여줄 테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조용했다. 닉은 로렌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돌아간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바란 일이 아닌가.
그러나 로렌의 마음은 다시 뒤숭숭해졌다. 갑자기 닉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띠고 거실의 입구에 나타났다.
"마실 것을 주겠다고 했지?"
로렌은 서둘러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도 감탄할 정도로 냉정하게 말했다.
"무엇을 드시겠어요?"
"커피가 좋겠어."
"좋아요. 가지고 오겠어요." 로렌은 곧 주방으로 향했다.
로렌은 뒤따라오는 닉의 발소리를 듣고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넓고 햇볕이 잘 드는 주방은 작별 인사를 하기에 알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렌이 퍼콜레이터를 조작하고 있는 동안, 닉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인스턴트라도 괜찮아."
"저는 정식으로 끓이는 것을 좋아해요."
"시간이 걸리잖아, 시간을 절약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15분 정도면 되니까요."
"나를 쫓아내기까지의 시간인가?"
"당신이 나가 주기를 바라는 시간이에요. 여기 있어봤자 별 수 없거든요."
"그것은 견해의 차이지."
"닉, 우리들 사이에는 문제가 너무 많아요. 다른 문제는 그만두고, 첫째 저는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원인이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한두 가지가 아니죠!" 로렌은 양손으로 귀를 막고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린애 같은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런 것을 개의할 심정이 아니었다. "변명 같은 것은 듣기 싫어요. 당신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싫고요. 모든 의미에서 말이에요. 어디 딴 데로 가보세요."
또 건드렸구나. 로렌은 닉의 눈을 보고 알아챘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기 전에 문을 향해 달려가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닉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그렇게까지 그를 자극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로렌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로렌은 닉이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를 듣고 침실의 문을 잠갔다. 로렌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문에 기대어 후유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지 않아도 문의 손잡이가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을 때려 부수지는 않을 거야." 문 밖에서 닉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계속 방안에 있을 수는 없을걸.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어.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에게 들려줄 거야. 그때까지 돌아가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라구!"
로렌은 혀가 굳은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닉이 물러나는 발소리를 듣고, 로렌도 겨우 긴장을 풀었다. 계속 이곳에 있을 수는 없지만, 여섯 시 반에는 아버지와 캐롤이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리자. 닉에게 붙잡히는 것보다는 낫다.
오후의 시간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방안에 책은 많이 있었으나, 그런 것은 관심 밖이었다. 아래층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로렌은 닉이 나갔는지 어떤지 의심스러웠다. 의지가 강한 면에서는 그는 각별한 사람이다. 나 혼자서 대결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틀림없이 아버지가 도와주실 거다. 필요하다면 아버지는 경찰이라도 부를 것이다. 경찰! 멀잖아 형세는 역전될 것이다. 로렌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것은 약간 지나친 것이 아닐까? 로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닉은 아직 난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만약 로렌에게 진심으로 그를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애당초 이런 처지에 놓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닉의 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문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로렌의 방에서는 뒤뜰을 내다볼 수 있었다. 창을 열고 보니, 닉이 셔츠를 벗고 반듯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때라면 정문을 통해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어디로 가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자기 집에서 도망쳐야 한단 말인가.
"위에서 버티어 봐야 별 수 없을걸." 닉이 눈도 뜨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문을 열어야 할 거야."
"어떻게 할 작정이죠? 항복할 때까지 때릴 셈인가요?"
"그런 난폭한 짓은 하지 않아.' 이번에는 눈을 뜨고 곧바로 로렌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문을 열어 보지 그래."
"싫어요." 로렌은 발끈하면서 창틀을 주먹으로 쳤다. 그러나 저 사람은 지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지 않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는지 모르지만.
차가 들어온 것은 여섯시 20분이 되어서였다. 로렌은 현관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미루어, 아버지와 캐롤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거실 쪽으로 사라졌다. 로렌은 지금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결국 올라온 사람은 아버지였다.
"문을 열어라, 로렌. 얘기 좀 하자."
로렌은 문을 열고 아버지를 들어오게 했다.
"여기서 말씀해 주시겠어요? 전 닉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다시는!"
"그렇게 잘라 말할 수 있니? 적어도 찬스는 주어야 할 것 아니냐."
"그 사람에겐 찬스를 여러 번 주었는걸요." 가슴이 벅차서 숨이 막힐 듯했다. "닉은 아빠에게, 모든 것이 오해이고, 프란체스카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고 말했겠죠?"
"솔직히 말해서, 그 사람은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다만, 너를 이곳에 두고는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을 뿐이었어. 로렌, 그 사람이 너를 이렇게 쫓아온 것을 보아도, 진심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 저는 그 사람이 할아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에요. 저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어요. 저는 그 사람 속에 있는 라틴의 피를 자극하죠. 대개의 여자가 그런 것처럼 말이에요."
아버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로렌, 남자란 자기가 특별히 아끼는 여자가 있어도, 매력적인 여자를 보고 눈을 감을 수는 없는 법이야. 여자도 마찬가지지. 중요한 것은 그런 경우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야."
"그야 그렇죠. 아빠, 저는 닉을 따르려고 열심히 노력했어요.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찬성할 수 없었어요. 무엇보다도 결혼한 이유가 틀렸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리바고에서 본 네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너는 또 한 사람의 여자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더구나."
"그 여자가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죠. 하지만 닉과 옛날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는 줄은 몰랐어요. 닉과 그 여자는 2년 동안이나 깊은 사이였거든요."
"그래, 그게 문제겠지." 아버지는 로렌의 괴로움을 짐작하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로렌, 하지만 말이다. 너그럽게 보아주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용서받을 수 잇는 실수도 있단 말이다. 그 사람과 얘기나 나누어 보렴."
"아빠는 전에, 괴로우면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벌써 철회하신 거예요?"
"물론 그렇진 않아. 하지만… 닉이 딴사람처럼 보여서."
"그럴 리가 없어요. 아무튼 저를 믿어 주셔서 마음 든든해요. 그 사람을 쫓아 보내는 것이 제 의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제게는 아빠의 응원이 필요해요."
아버지는 서글픈 듯 말했다.
"벌써 그 사람에게, 오늘 밤은 여기서 묵으라고 말했어. 어차피 아침까지는 베니스로 가는 비행기는 없잖니. 나는 너희들 두 사람이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게 하고 싶었다."
"소용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아빠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았어요. 저녁식사 문제는 미안해요, 제가 준비해 놓으려고 했었는데."
"캐롤이 준비하고 있어. 내려오겠지?"
"네, 2,3분 후에요."
기분좋은 밤과는 거리가 먼 밤이었다. 닉은 네 사람 중에서는 가장 편안한 듯했다. 그리고 식사하는 동안 내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시기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로렌은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억지로 먹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식사가 끝난 뒤에도 이렇다 할 기색은 보이지 않고, 아버지와의 잡담으로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열 시쯤 되었을 때, 로렌은 더 이상 긴장을 견딜 수 없었다.
"저는 먼저 실례하겠어요. 잘 자요, 닉. 내일 아침 내가 아래층에 내려오기 전에 돌아가 주세요." 로렌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닉은 패배를 인정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이 당신의 소원이라면."
그래요, 그것이 바로 내 소원이에요!
로렌은 침실로 들어갈 때까지는 그 생각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문을 닫고 혼자가 되었을 때,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감정에 마침내 지고 말았다. 로렌은 자기가 결혼한 상대를 미워하고 있었으나, 미움이 그녀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항상 그와 함께 있었다.
열 한 시 반쯤 되어 세 사람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닉이 있을 2,3미터 저쪽이, 로렌에게는 마치 몇 킬로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한번도 한마음이 된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편이, 보다 깊은 고통 속에 빠지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시간은 가차없이 흘러갔다. 현관에 걸려 있는 커다란 벽시계가 그것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한밤중이 지나고, 새벽이 되고, 그리고 여섯 시가 되었다. 로렌은 침대에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혼자 누워, 난생 처음 잠이 오지 않는 밤을 겪었다.
시간은 닉이 뒤에서 몰래 다가왔을 때에야 멈추었다. 닉은 당황하여 일어나려고 하는 로렌의 손목을 잡았다. 로렌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중압감에 짓눌리고 말았다.
"내 말을 들어 봐." 낮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듣고 싶든 듣기 싫든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들어보라구."
닉의 열기에 넘치는 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에는 나이트 드레스가 너무나 얇았다. 로렌은 그동안의 경위를 넘어서, 자신의 몸이 벌써 반응을 보이려고 하는 것을 느꼈다.
"비키세요. 이젠 끝난 거예요. 이런 식으로 이용당하는 것은 이젠 지긋지긋해요."
이때 닉이 입술을 덮치는 바람에 더 이상 항변할 수 없었다. 그는 로렌의 온몸이 떨릴 정도로 격렬한 키스를 했다.
"내 말을 들으라고 했잖아!" 로렌이 반항을 단념하자, 닉은 내뱉듯이 말했다. 그리고 잡고 있던 손목을 베개에 대고 힘껏 눌렀다. "프란체스카가 당신과 비교가 된다고 생각하나? 당신은 그 정도로 바보야? 그 여자는 돈만 많이 주면 어떤 남자라도 차지할 수 있는 여자야."
"순전히 육체적인 얘기군요. 그래서 옛날의 관계를 되풀이하려고 했나요? 당신이 왜 그 여자와 함께 있었는지는 아무래도 좋아요. 저는 당신이 그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그 여자와 함께 있었던 것은, 내 주위에서 서성거려 봐야 부질없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였을 뿐이야. 프란체스카도 이젠 잘 알았을 거야, 틀림없어."
"어떻게 납득시켰죠?"
닉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지."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대사군요. 그래서 모든 것이 변했단 말이군요!" 로렌은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얼굴을 돌렸다.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다른 여자가 접근하지 못할 이유는 못 되겠죠?"
"로렌, 당신이 나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어. 당신에게 나는 별로 매력적인 남자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변하게 할 수 있어. 내게는 당신이 필요해."
로렌의 고집도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다. 로렌의 떨리는 손가락은 굳게 다문 닉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닉, 이 문제로 저를 속이지 마세요. 할아버지한테서 프란체스카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죽고 싶었어요."
닉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결국 옳았던 셈이군." 그의 목소리에는 안도감과 함께 다정함이 넘치고 있었다. 그 늙은 악마는 우리 두 사람을 꿰뚫어 보고 있었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우리를 시험한 거야. 만약 당신이 가버린다면, 나는 싫어도 선택을 강요당하지. 할아버지는 그 선택을 두고 도박을 한 거야." 닉은 몸을 돌려 로렌을 꼭 끌어안았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지. 하지만 나는 믿을 수 없었어. 지금도 자신이 없어. 이런 짓을 한 남자를 당신이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어?"
"모르겠어요. 다만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로렌은 이렇게 말하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힘찬 고동이 전해 왔다. "말해 줘요,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꿈이 아니야."
로렌은 다시 한번 얼굴을 들고 닉을 쳐다보았다. 그의 미소에는 아직도 애매함이 남아 있었다.
"아까 말한 선택은…."
"당신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어. 당신은 내게 절대적인 존재인걸." 울고 싶을 정도로 다정하게 닉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할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을 어머니에 대한 의무로 받아들였지. 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할아버지는 적자 계승의 맹세를 깨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의 인생을 망가뜨렸다는 것을 깨달았지. 내가 생각해 왔던 방식으로 할아버지에게 보상을 시켜 봐야, 지나간 일은 변하지 않아. 게다가 나 자신의 인생까지 망가뜨릴 뻔했지."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물론 말했지. 모든 것을 말했어." 그때의 일을 생각해서인지, 닉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모두들 안부를 전하더군- 특히 도나타가 간곡하게 부탁했어. 결혼식 때는 둘이 함께 돌아와 달라고 말이야. 그리고 비코는, 비록 완만하지만 변화는 틀림없이 진행된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더군. 그런 얘기를 할 때는 다행히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 안 계셨지. 만약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나쁜 것으로부터 다시 나쁜 것으로 변할 뿐이라고 말했겠지만."
로렌의 마음속에는 그칠 줄 모르고 번져가는 행복감이 흘러넘쳤다. 로렌은 닉에게 입을 맞추고 나서 속삭였다.
"사랑해요." 로렌은 폭풍이 지나고 난 뒤의 평화를 맛보면서 말했다. "이젠 일어나야지요. 평소 같으면 일어날 시간이에요. 다음에 있을 일을 가르쳐 주세요. 그래야 무엇부터 시작할 지 알 수 있잖아요."
닉은 명랑하게 웃으면서 로렌의 코 끝에 가볍게 키스했다.
"다음은 우리가 살 곳을 찾는 거야."
"어디에 살고 싶으세요?"
"항상 마음속에 그려 왔던 곳은 시골이지. 시골 어디선가 두 마리의 개를 기르고 싶었어. 아마…." 닉은 여기까지 말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로렌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왜 그렇게 놀라고 있지?"
"생각하는 것이 너무 닮았어요. 아버지가 베니스에 도착하시던 날, 라우렌티스 아주머니께서 저더러 차를 더 들겠느냐고 두 번이나 물었을 때의 일, 지금 생각나세요?"
"응, 생각나는군. 당신은 마음이 딴데 있는 얼굴로 앉아 있었지. 나는 따돌림 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어."
"저는 그때, 당신 생각처럼 생각했는걸요. 두 마리의 개가 있는 시골집에서 당신과…." 로렌은 닉의 시선 속에서 달콤한 젤리보다 더 달콤한 눈빛을 보았다. "닉, 아직도 아기를 갖고 싶어요?"
"무엇이든 좋지. 당신이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구."
"그리고 당신은… 만족하세요?"
"내게 다른 여자가 필요하냐고 묻는 거야?"
"그렇게 쉽게 단념할 수는 없겠죠?"
"자칫 마음을 빼앗기는 여자도 있긴 있지. 지난번 무도회가 있던 날 밤, 프란체스카와 함께 있는 걸 보았겠지? 별장에서의 당신 태도를 보고 짐작했어. 나는 당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죄의식을 느꼈지. 변명하는 게 아니야. 그날 밤은 달이 없어, 그 여자가 더 유혹적으로 보였던 모양이야."
"게다가 당신에게는 라틴의 피가 흐르고 있잖아요. 당신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었겠죠? 저는 저 자신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질투심 많은 여자가 될 것 같거든요."
"걱정할 것 없어, 난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지도 몰라. 때로는 마음을 빼앗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뿐이야.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로렌 당신만을. 당신이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은 바로 그거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도 있을 거라는 것을 로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믿음은 키워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 그의 품안에 안겨 있지 않을 것이다.
"명심하겠어요." 로렌은 더욱 세게 그의 품에 안겼다. 결국 내가 이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