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뭘 보고 그렇게 놀라니."
주만은 털이의 놀라는 소리를 듣고 말을 채쳐 가까이 오며 물었다.
"저, 저걸 봅시오. 저기 저 별당 담 위를. 아이 무서, 아이 무서."
하고 털이는 말고삐 잡은 손을 덜덜 떨며 말등에 착 달라붙은 듯이 엎드리고 머리 위로 손가락을 내어 허공을 가리킨다.
"얘, 뭐냐. 똑바로 가리켜라. 뭘 그렇게 겁을 낸단 말이냐."
"아이 쇤네는 무서, 무서."
하고 말등을 파고들어갈 듯이 더욱 머리를 수그린다.
주만은 담 위를 여기저기 훑어보았다. 환한 달빛 아래, 바로 자기 방에서 거의 맞은편이 될 만한 담 위에 웬 사내가 걸터앉아서 담에다가 배를 깔고 엎드렸고 그 밑에는 웬 헙수룩한 자가 왔다갔다하는 꼴이 보이었다.
처음엔 주만이도 머리끝이 쭈뼛하였지만, 담 위에 걸타고 있는 자의 해가지고 있는 꼴이 어떻게 어색한지 도무지 무서운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아가씨 아가씨 보셔곕시오. 그게 무엡시오."
털이는 이내 고개를 못 쳐들고 떨면서 묻는다.
"아마 도적놈들인가 보다."
하고 주만은 말을 채서 껑청 뛰어 한 걸음 달려들며,
"도적이야, 도적야."
소리를 벽력같이 질렀다.
이 호통을 듣자 담을 걸탄 위인은 어쩔 줄을 모르고 허리를 폈다가 굽혔다가 담머리를 얼싸안았다가 놓았다가 쩔쩔맨다. 담 밖에 처진 한 발을 담 안으로 끌어들이더니 다시 두 다리를 다 담 밖으로 끄집어내었다가 얼핏 뛰어내려오지도 못하고 디룽디룽 발버둥을 친다.
찢어지게 밝은 달빛에 그 허둥거리는 광경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주만의 눈 안에 들어왔다.
주만은 처음 도적이야 외칠 때엔 그래도 가슴이 약간 떨리었지만, 그 광경을 보니 한편으로 우습고 한편으로 장난해 볼 짓궂은 생각이 슬며시 일어났다. 말을 또 한 번 채쳐 몰고,
"도적이야, 도적야."
부르짖었다.
디룽디룽 매어달린 다리는 더욱 버둥거린다.
온 동리는 첫잠이 들었는지 죽은 듯이 고요하고, 집 안에서도 아무 인기척이 나지를 않았다.
담 밑에서 왔다갔다하던 자가 마침내 담 위에 있는 자의 버둥거리는 발목을 잡아 주어도 담 위에 올랐던 위인은 좀처럼 내려뛰지를 못하고 담머리를 할퀴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기만 한다.
"세상에 별 우스꽝스러운 도적놈도 다 있구나. 저렇게 제가 겁부터 집어먹고 어째 남의 집을 넘어 들어갈 생각을 하였을꼬."
주만은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와 견딜 수 없었다. 더구나 더 우습기는 그 도적놈의 차림차림이었다. 달빛에도 웃옷이 윤이 질질 흐르는 것을 보면 한다하는 당나라 비단이요, 게다가 복두를 제켜 쓰고 제 딴에는 한창 거드럭거리느라고 공작꼬리까지 뻗쳐 꽂은 것이 정말 가관이었다. 그 버둥버둥하는 가죽목화도 가소로웠다.
'제가 훔친 것은 다 주워 입고 나온 게로구나.'
주만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더욱 허리를 분질렀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도적놈일수록 번드르르하게 꾸며야 할는지 모른다. 그래야 남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아니냐. 그렇지만 담을 안고 저렇게 짓뭉개고 비벼 놓았으니 인제 어디를 달아난들 더욱 유표하지 않을까.
예라, 또 한 번 혼뗌을 해주어야지 하고 주만은 더욱 목소리를 가다듬어,
"도적이야!"
또 외쳤다. 이 세 번째 호통이 떨어지자 그 버둥거리던 뚱딴지 다리도 쿵 하고 땅바닥에 떨어진다.
"털아, 털아, 저걸 구경 좀 해라. 저까짓 도적놈이 무에 무섭니."
그제야 털이도 빠끔히 눈을 내놓고, 위에서 떨어진 놈과 밑에서 받는 놈이 서로 얼싸안고 재주를 넘는 것을 보았다.
주만은 한층 소리를 높여 털이에게 일렀다.
"너 냉큼 앞대문으로 돌아가서 하인들을 깨워라. 저놈들을 모두 잡아가게."
이 호령을 듣자, 담 밑에 있던 도적놈이 쏜살같이 이리로 달려온다. 그것을 보더니, 털이는 다시 얼굴을 말등에 비비대며,
"에구머니이, 에구머니이, 도적이야, 도적이야."
하고 악을 악을 쓴다. 그 도적놈은 주만의 말머리 앞 한두 간통 떨어진 데 와서 그대로 넙죽이 엎드린다.
주만도 그 도적놈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 몸을 흠칫하였으나 급기야 제 말머리 앞에 엎드리는 것을 보고,
'세상에 이렇게 지순차순한 도적놈도 있을까.'
하고 안심을 하였다. 도적놈은 머리를 조아리며,
"그저 살려만 줍시오. 죽을 죄를 지었사오나 제발 종용히 처분을 해줍시오. 구슬아가씨."
도적놈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주만이지만 도적놈이 제 이름을 부르는 데는 아니 놀랄 수 없었다.
44
도적놈이 제 이름을 부르는 데 주만은 일변 놀랍고 일변 호기심이 움직였다.
"너는 웬 놈이관데 내 이름을 안단 말이냐."
"녜, 그저 황송하오나 이손 유종 댁 외동따님 구슬아가씨를 아무리 소인 같은 무된 눈인들 몰라 뵈올 리야 있사오리까. 소인은 결단코 도적놈이 아니옵고……."
"도적놈이 아니라께. 아닌밤중에 남의 담장을 넘는 놈들이 도적놈이 아니라니 될 뻔이나 한 수작이냐."
"녜, 그저 지당하신 분부시오나, 대매에 물고가 나는 한이 있사와도 소인은 결단코 도적놈은 아니옵고……."
하고 제 본색을 까바칠까말까 망설이면서 먼발치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제 동행을 힐끗힐끗 돌아다본다.
주만은 궁금증이 더럭 났다. 그 말씨와 거동으로 보아 딴은 행내기 도적놈은 아닌 듯도 하였다.
"대관절 네가 누구란 말이냐."
"녜, 소인 같은 놈의 성명을 여쭈어도 고귀하신 아가씨께서 알아들으실 리 만무하옵고 그저 살려 주시는 셈치시고 제발 덕분에 털이를 보내시어 댁 하인을랑 깨우지 마시옵소서."
털이 이름까지 아는 것은 더욱 신기하였다. 도적놈이 땅바닥에 엎디어 비대발괄할 때부터 털이는 겨우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제 아가씨 곁으로 바싹 다가들어 진기한 도적놈의 하소연을 듣고 있다가 도적놈이 제 이름을 부르는 데 귀가 번쩍 띄었다. 인제는 아까 콩만하던 간이 주먹만큼 커져서 말을 몰아 주만의 앞을 막아서며,
"이 녀석, 너는 웬 녀석이기에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하고 제법 호령조로 묻는다.
땅바닥에 이마를 비비대고 있던 도적놈은 털이가 앞을 나서니 고개를 번쩍 들어 그 눈딱지를 사납게 굴리면서 그래도 말씨만은 그렇게 거칠지 아니하였다.
"아무리 이 지경이 되었기로 너까지 이 녀석 저 녀석 한단 말이냐. 욕지거리를 못 하면 말을 못 하느냐."
"도적놈에게 누구는 욕을 못 할꼬, 매친 녀석."
"어 그렇게 입을 마구 놀리는 법이 아니래도."
"법! 네까짓 녀석이 법을 다 찾는단 말이냐. 아이 우스워라. 도적놈이 법을 찾으니 참 귓구멍이 막힐 노릇이다. 그래 법을 아는 녀석이 밤중에 남의 담을 뛰어넘어."
"어, 도적놈이 아니래도 또 그러네. 제발 좀 아가리를 닫치고 아가씨나 모시고 들어가게."
"이 녀석이 그래도 말버릇을 못 고치고 하게는 또 누구더러 하게야. 내 그럼 앞대문으로 돌아가서 소리를 지를 테다."
털이는 아주 기고만장이다.
"얘 아서라, 아서. 그건 제발 좀 말아 다오."
"이 녀석이 그래도 반말지거리야. 도적놈이 아니거든 어서 네 명색이나 대라."
도적놈은 털이와 실랑이를 해야 별 소득이 없을 줄 깨달았는지 다시 주만에게 향하여,
"아가씨 구슬아가씨, 소인은 물러갑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고 몸을 일으켜 꽁무니를 빼려 하였다.
"가기는 어디를 간단 말이냐. 어디 가게 되는가 두고 보자."
털이는 가로막고 정말 말을 돌려 앞대문으로 돌아갈 기세를 보이었다. 도적놈은 뛰어와서 털이의 말고삐에 매어달렸다.
"아가씨 털이아가씨, 제발 좀 살려 주. 허허, 내가 이 무슨 죽을 수란 말인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웃는다.
"네깐 녀석에게 누가 아가씨 소리를 듣고 싶다더냐. 네 명색이나 일러라."
하고 나서 주만을 돌아다보고,
"암만해도 하인들을 깨울 수밖에 없습지요. 이런 녀석들은 버릇을 가르쳐 놓아얍지요."
동의를 구하였다. 주만이도 하는 양을 보려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자 도적놈은 털이를 흘겨보고 뇌까리었다.
"쉬쉬 말이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주둥아리를 조심해라."
하고 제 동행을 눈으로 가리키며 눈껌쩍이를 해보이었다.
"쉬쉬? 이 녀석, 어디 뱀이 지나가느냐. 말이란 도적놈 보고 도적놈이라고 하는 게란다."
털이도 지지 않는다. 도적놈은 곱다랗게 놓여 가기는 이왕 틀린 줄 알고 제 본색을 알리는 것이 도리어 나을 줄 깨달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태도를 고쳐 털이를 꾸짖었다.
"이년, 요망스러운 년. 쉬쉬, 이 행차가 어느 행차시라고. 금지 금시중 댁 서방님 행차시다. 어느 존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한번 뽐내 보이었다.
"금시중 댁 서방님?"
털이는 잠깐 놀라는 눈치였으나,
"오 그렇더냐. 그러면 진작 그런 말을 할 게지, 미련한 녀석."
하고 도리어 나무란다.
주만은 놀라지도 않았다. 아까부터 기연가미연가 생각하던 것이 바로 맞은 줄 알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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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쉬, 금시중 댁 서방님 행차시다."
고두쇠는 털이의 힐난에 견디다 못하여 필경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저도 하도 창피한 일인 줄 알기 때문에 웬만하면 비대발괄로 어름어름해 넘겨서 이번 일은 쥐도 새도 모르게 감춰 버리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만의 주종의 태도로 보아 호락호락 넘어갈 것도 같지 않고 끝끝내 숨기는 것이 도리어 불리할 줄 알자 그냥 실토를 해버린 것이었다.
"금시중 댁 서방님 행차가 안녕도 하시군요."
털이는 또 주만을 돌아보며 깔깔댄다. 이 틈에 고두쇠는 부리나케 금성에게로 뛰어가서 제 상전의 옷에 묻은 흙을 털고 구김살을 펴고 말이 못된 옷매무새를 바로잡느라고 한동안 부산하더니 제 주인을 옹위하고 떡 버티고 서서 마치 적진이나 노리는 것처럼 이쪽을 향해 마주본다.
주만은 항복한 적장을 보러 가듯 말을 놓아 이 꼴사나운 손들 앞으로 천천히 몰아갔다.
고두쇠의 부축으로 일어서기는 섰으나 다친 데가 많은 듯 끙끙 안간힘을 주고 있던 금성은 천만 뜻밖에 주만이가 저를 향해 오는 것을 보자 몸둘 곳을 모르는 듯 엉덩이를 엉거주춤한 채 눈을 두리번두리번 입을 실룩거렸으나, 그래도 '행여나' 하는 생각에 까닭 없이 마음은 헤벌어졌다.
주만의 말머리가 거의 금성의 코앞에 닿을 만큼이나 되어 딱 걸음을 멈추었다. 털이가 그 뒤를 따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어른이 금시중 댁 공자시냐."
주만은 차마 맞대 놓고 묻지는 않고, 금성을 눈으로 가리키며 털이에게 묻는다.
털이가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고두쇠가 가로채었다.
"녜 그렇습니다. 이 어른이 바로 금시중 댁 공자 한림학사 어른이신 줄로 여쭙니다."
주만은 마치 적장에게 경의를 표하듯 마상에서 보일 둥 말 둥 허리를 굽히고,
"한림학사님, 이 밤중에 어찌한 출입이시던가요."
금성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묻는다.
금성은 주만의 시선이 마치 햇발처럼 눈이 부시었던지 눈을 몇 번 껌벅껌벅하고는 무슨 말인지 입 안에서 웅얼웅얼 대꾸를 한다.
"그 어른이 뭐라고 하시느냐. 네가 대신 일러라."
주만은 고두쇠를 보고 묻는다. 그런 병신성스러운 위인하고는 말도 주고받기 싫다는 듯이.
고두쇠도 제 벙거지 위를 긁적긁적하며,
"소인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사와요."
하고 무참해한다.
"응, 너도 잘 못 알아듣겠느냐. 그러면 고만두어라마는 이후엘랑 서방님을 모시고 다니거든 대문이 어디고 담장이 어디라는 것을 똑똑히 가르쳐 드려라."
주만은 침이라도 튀 배앝는 듯 한마디 말을 남기고 곧 말머리를 돌리었다. 말이 몇 자국 굽을 떼어놓을 때 등뒤에서,
"구슬아기, 구슬아기님."
하고 턱 갈라진 목소리가 들린다.
"한림학사님, 무슨 말씀이시오."
주만은 마상에서 고개만 잠깐 돌이켜 물었다. 금성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이마에 기름땀이 맺힌 것으로 보아 그는 이 한번 부름이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려웠던 것을 가리킨다.
"왜 남을 불러 놓고 말이 없으시오. 딱한지고."
주만은 금성이가 어물어물하고만 있는 것을 보고 또 한마디 채쳐 물었다.
"구슬아기, 구슬아기님, 마, 말께서 잠깐만 내리어 주었으면."
금성은 더듬더듬하면서도 이번에는 가까스로 알아들을 만큼 말을 얼버무린다.
"말께서 내려라! 그럴듯도 하신 말씀이오마는 금공자는 내 집 담의 손님인지는 모르나 내 손님은 아니니 하실 말씀이 계시면 마상에서 듣지요."
"나, 나, 구슬아기가 보, 보고 싶어서……."
하고 금성은 쫓겨온 사람 모양으로 숨을 헐레벌떡거린다.
"오호호, 내가 보고 싶으시어. 오, 옳지 그래서 내 집 담 위에 올라앉으셨군, 오호호."
하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주만은 허리를 분질렀다. 그 웃음 소리는 달 빗긴 으슥한 길 위에 구슬같이 구을며 흩어졌다.
"남의 집 규중처녀를 보시고 싶다는 것부터 모를 말씀. 더구나 아닌밤중에 찾는 법도 없을 것이고, 설령 찾더라도 어엿한 대문이 있고 객실이 있거든 하인소시에 담장을 넘으니 그게 무슨 꼴이란 말씀이오."
주인은 손님을 꾸짖는 듯 타일렀다.
"빨리 댁으로 돌아가시고 이후엘랑 찾아오실 생각은 꿈에도 내지 마시기오."
이만만 하면 발을 돌릴 줄 알았던 금성은 뜻밖에 추근추근하게 덤벼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 객실로 갑시다."
금성은 볼멘소리까지 하고 말낱도 차차 분명해 온다.
46
"인제 새삼스럽게 객실로 가자, 오호호."
주만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느라고 손등으로 입을 가리었다.
"처음에는 담을 넘고 나중에는 객실로 가는 것이 어느 오랑캐 예법인가요. 그것도 상주국 당나라에 가시어 배워 가지고 나오신 예법인가요, 오호호."
주만은 내 말이 너무 지나치는구나 하면서 슬쩍 금성의 기색을 살피었다. 아무리 얼굴 두께가 쇠가죽보담 두껍다 하더라도 이만만 해두면 코를 싸쥐고 물러나리라 하였었다. 저와 혼인말이 왔다갔다하는 처녀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였으니 사내다운 사내라면 발연변색하고 제 목을 찔러도 시원하지 않으리라 하였었다. 하다못해 혼담이야 끊어지고 말리라 하였었다. 다른 것이야 어디로 갔든지 혼담만 다시 이렁성거리지 못하게 되어도 만번 다행이라 하였었다.
그러나 금성은 일순간 눈에 뜨일락말락 입 가장자리를 몇 번 실룩실룩하였을 뿐이고 물러날 사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까보다도 오히려 말문이 터지는 것 같다.
"객실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야 처음부터 객실로 가다뿐이오. 왜 괴롭고 귀찮은 담을 넘으려 들겠소. 이러한 창피를 보는 것도 지극한 사랑의 탓. 구슬아기, 구슬아기, 살짝 마음을 좀 돌리시구려."
던적맞은 수작까지 뻔뻔스럽게 붙이고 제법 대담하게 주만을 똑바로 본다.
주만은 어마 싶었다. 그 꼴에 어디서 배워 온 억설인고. 더러운 말뿐인고. 아까는 북받치는 웃음을 참을 수 없더니 인제는 오장육부가 뒤틀려 올라왔다. 하등 벌레와 같이 한두 동강쯤 내었다고 꿈지럭거리지 않을 그가 아니다. 아무리 뼈가 저린 말이라도 말만으로는 부끄럼을 알 그가 아니다. 염의를 차릴 그가 아니다. 먼빛으로 한두 번 보아도 그 외양부터 신신치 않더니 그 속은 더더군다나 어이가 없었다. 이런 위인하고 빈말로라도 혼담이 있었던 것만 생각해도 찬 소름이 끼치었다.
"사랑이고 객실이고 인제는 때가 늦었소. 나도 볼일이 급하니 한림학사님도 어서 돌아를 가시구려."
"사랑에 밤낮을 가리리요. 일편명월을 등촉삼아 여기서 새고 간들 어떠리요."
말씨에 멋까지 부리고 그 콧소리로 신이 나서 읊조린다.
주만은 지겨운 뱀이나 본 것처럼 불현듯 말머리를 돌려서 털이를 보고,
"얘, 어서 앞대문으로 가자. 여기는 밤이슬을 맞으며 새고 가는 손님이 계시단다."
"녜, 쇤네가 그럼 얼핏 가서 하인청을 혼동을 시킵지요."
하고 털이가 총총 말을 놓아 가려 할 제 고두쇠는 껑청 뛰어와 말머리에 막아선다.
"이 녀석이 왜 또 이래, 이 녀석이 왜 또 이래."
털이는 악을 버럭버럭 쓰며 말을 뺑뺑 돌리고 있을 제, 금성은 주만의 말고삐를 잡고 늘어진다.
"구슬아기, 구슬아기, 사람의 괄시를 그리 마오. 정다운 부부로 한평생을 지낼 우리가 아니오."
금성은 곤드레만드레하며 말갈기에 이마를 대었다 떼었다 한다.
그는 담을 걸타고 앉을 때 워낙 겁을 집어먹어서 술이 얼마쯤 깨었고, 도둑야 호통에 혼뗌을 하자 주기가 간 곳 없이 사라진 듯하더니,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취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부부란 말에 주만은 몸서리가 쳤다.
"부부? 오호호. 누가 우리가 부부가 된답디까. 주만이 백 번 죽어도 밤이슬 맞는 한림학사의 아내는 안 될 터이니 염려 놓으시오."
하고 주만은 홱 고삐를 잡아치며 힘있게 채찍을 갈기매 말은 깜짝 놀라 곤두서더니 흐르렁흐르렁 콧소리를 치며 뛰어닫는다.
말고삐를 쥐고 있던 금성은 한 두어 간통 땅바닥에 질질 끌리며 따라가다가 고삐를 탁 놓자 그대로 곤두라져서 디굴디굴 굴렀다. 땅바닥을 짚고 가까스로 일어앉아 개개 풀린 눈으로 주만의 주종이 앞 대문으로 닫는 양을 멀거니 바라보며,
"얘, 매정하구나."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나서 무너지는 듯이 그 자리에 다시 쓰러져버렸다.
털이를 잡다가 놓친 고두쇠는 창황히 뛰어와서 금성을 일으키고,
"이게 무슨 꼴입니까. 어서 가십시다, 어서. 만일 이손 댁 하인들이 우 몰려나오면 이런 창피가 어디 있겠습니까."
성화같이 재촉을 하였다.
"그래 가자, 가. 내 아내 노릇은 죽어도 않겠다? 어디 두고 보자."
금성은 주만의 간 곳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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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의 주종이 주만과 털이에게 못 당할 망신을 당하고 돌아간 후 사흘 만에 시중 금지는 밤늦게 이손 유종을 찾았다.
"금시중 이 밤에 웬일이시오."
유종은 이 뜻밖의 손님을 맞아들이며 의아해한다.
"우리 둘 사이에 밤늦게 찾으면 어떠하단 말씀이오."
손님은 매우 다정한 듯, 다정한 탓에 매우 노여운 듯 주인의 인사에 티를 뜯는다.
"밤늦게 못 찾을 우리 사이야 아니지만 시중이 이런 어려운 출입을 하실 줄이야 정말 생각 밖이구려, 허허."
유종은 바른 대로 쏘고 껄껄 웃었다.
둘이 한 나이나 젊었을 적에는 다 같이 화랑으로 돌아다니면서 같은 풍월당에서 노래도 읊조리고 활쏘기도 겨루며 술을 나누기도 하였고 그 후 한 조정에 서서 피차에 귀밑 털이 희어졌으니 바이 안 친한 터수도 아니지만 속으로는 맞지 않는 두 사이였다.
금지는 철저한 당학파요, 유종은 어디까지 국선도를 숭상하는 터이니 주의부터 서로 달랐다.
금시중은 얼굴빛이 노리캥캥한데다가 수염도 없어 얼른 보면 고자로 속게 되었는데 이손 유종은 긴 수염이 은사실처럼 늘어지고 너그러운 두 뺨에 혈색도 좋으니 풍신조차 정반대였다. 더구나 하나는 깐깐하고 앙큼스럽고, 하나는 괄괄하고 호방하여 두 성격이 아주 틀렸다.
이마적 해서는 공석 이외엔 서로 만나는 일이 없었거늘 벌써 술시가 지난 밤중에 우정 찾아온 것은 유종으로 괴이쩍게 아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손께 별다른 향념이 늘 있지마는 이손께서야 나 같은 위인을 어디 친구로 아셔야지."
"그게 무슨 말씀이오. 소홀은 내 천성이라 예의범절을 모르는 것을 과히 책망 마시오."
"그렇게 말씀하면 내 말이 지나친 듯 도리어 미안하오. 그것은 다 희담이고 오늘 저녁 밥을 먹고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여간 밝지를 않더구려. 그래 문득 이손 생각이 간절하단 말이지. 소시적에 같이 활쏘기 말달리기 칼겨루기 하던 생각이 불현듯 나는구려. 주사청루에서 술잔을 주고받고 한 계집을 다투던 생각까지 난단 말이오, 허허."
하고 감구지회를 이기지 못하는 눈치로 주인을 바라본다.
"시중의 말씀을 듣고 보니 어릴 적 지낸 일이 꿈결같이 눈앞에 떠오르는구려. 엊그제 소년이러니 어느덧 귀밑에 흰 털이 웬일인지. 몇 번 창상에 옛 친구도 많이 없어지고, 인제 그때 친구로는 과연 시중과 나만 남았나 보오."
손님의 말에 주인은 진정으로 감동된 듯 옛 회포를 자아내는 것 같다.
"그래 주고(酒庫)를 뒤져 보니 마침 당나라에서 내온 소흥주 한 병이 남았기에 그대로 꿰어차고 옛 친구를 찾아온 것이오."
하고 금지는,
"여봐라, 고두쇠야."
하고 부른다.
고두쇠는 제 얼굴 보이기를 매우 꺼리는 듯 거의 땅에 닿도록 고개를 빠뜨리고 두 손으로 술병만 추켜들어 받들어 올린다. 그것은 위가 빨고 아랫배가 볼록한 담회색 바탕에 꽃무늬를 올린 사기화병이었다.
"어, 병부터 진기하군. 밤중에 찾아 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이런 진주(珍酒)까지 선사를 하시니."
휘황한 촛불 아래 그 둥둥 뜨는 듯한 꽃무늬를 바라보며 유종은 감탄한다.
"당나라에서는 술도 술이려니와 그 술을 담는 병도 가지각색, 여간 공을 들이지 않은 모양이니 토광인중에 딴은 대국이 다릅니다. 이까짓 것쯤이야 출 만한 것도 못 되지만."
금지는 만족한 웃음을 띄우며 당나라 예찬의 한마디를 비친다.
"어, 병까지 이렇게 치장을 할 적에야 술맛인들 여간 취택을 하겠소."
"그렇구말구. 술 종류만도 천 가지도 넘는답디다. 단놈 쓴놈 준한 놈에 순한 놈에, 어, 술 이름만 외우자도 몇 달 공부를 해야 된답디다. 정말 진품이야 우리들 손에 들어오지도 않고 이 소흥주란 것도 여러 백 종인데 이것은 그 중에 중길에나 갈는지."
당나라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싫어하는 유종이지만 워낙 술을 좋아하는 그이라, 당주만은 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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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상은 벌어졌다.
유종은 소흥주를 따라 먼저 금지에게 권하였다.
"내가 가져온 술을 내가 먼저 들다니 말이 되오. 이손께서 먼저 드시구려."
"주인이 되고 먼저 들 수가 있소."
"어, 우리 사이에 주객을 따질 것도 없지 않소. 이손께서 먼저 맛을 보셔야지."
하고 손님은 한사코 주인에게 먼저 권하였다. 유종은 하릴없이 잔을 받아 들고,
"그 투명한 빛이란 정말 금파와도 같군."
살가운 듯이 이윽히 들여다보다가 훌쩍 마시고 술 묻은 웃수염을 빨며,
"과연 진품이로군. 기름같이 부드러우면서 준하고 향기롭고……."
"정말 술은 이손이 자셔 보셔야 해. 성인이라야 능지성인이라고. 정말 주성이시거든, 헛허."
시중은 그 조그마한 눈을 만족한 듯이 깜박깜박한다.
"미상불 내가 술을 좋아야 하지마는 어디 이런 진품이야 많이 먹어를 보았어야지. 시중 덕에 정말 선주 맛을 보았소."
"무얼 여기서 귀하다뿐이지. 상국엘 가면야 명색도 없는 술이지요. 내야 별로 술을 좋아하지는 않지마는, 들어간 김이라 몇 병 가지고 나왔을 뿐이지."
하고 제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던 것을 자랑삼아 내어비친다.
주객은 주거니 받거니 거나하게 술이 돌았다. 금지는 술을 즐기지 않는다 하면서 그 깜찍하게 먹는 품으로는 오히려 유종을 뺨칠 만한 주량을 가졌다.
"시중께서는 그렇게 절주를 잘 하시지만 나는 술이 과한 편이지."
이손의 불그레한 얼굴에 땀방울이 숭숭 맺히었다.
"대성지성 문선왕 공자님께서도 술을 잡수셨는데 다만 유주무량하시되 불급어란(有酒無量不及於亂)이라 하셨을 적엔 과연 대음은 대음이었던 모양이오."
금지는 제 득의의 당학을 차차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 핏기 없는 얼굴에나마 광대뼈 언저리가 돈짝어란만큼 발그스름해 온다.
"당대 문장 이태백 같은 이는 여북해야 술이 대취해서 채석강에 달을 잡으러 들어갔다가 그대로 빠져서 고래를 타고 그냥 하늘로 올라갔다 하지 않소."
"고래를 타고 하늘에 올라갔다니, 그게 참말일까."
"참말이구말구. 이백이 기경비상천하니 강남풍월이 한다년이라(李白 騎鯨飛上天江南風月閑多年). 바로 백낙천의 시에 다 있는데……."
금지는 그 시 한 수를 다시 한번 늘어지게 읊조린다.
"대취한 김에 강에 떨어져 죽은 것 아니오, 허허."
"그야 그런지도 모르지요. 허나 그런 유명한 문장이 그렇게 물에 빠진다고 죽을 리야 있겠소. 고래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니 강남의 바람과 달이 한가롭게 되었단 뜻이 아니오. 이백이 같은 문장이 이런 진세에 있으면 애꿎은 강남의 달과 바람이 못 견디게 이렁성거린단 말이오. 이것은 달이 뜨니 어떻고 지니 어떻고, 바람이 부니 좋고 안 불어도 좋고, 하루에도 여러 백 수 여러 천 수 시를 지어 놓으니 바람과 달인들 괴롭지를 않겠소. 그러니 옥황상제께서 불러가신 거라오."
시중은 입에 침이 없이 신이야 넋이야 말끝을 이어나간다.
"우리 신라에야 어디 그런 풍류객인들 있소. 풍월당이니 뭐니 하고 모이기만 하면 그 음탕한 노래들이나 부르고 걸핏하면 칼부림이나 하고, 살풍경이지 살풍경이야. 저네들은 술을 마셔도 조가 있어 불급어란이지만 이것은 술타령 계집타령에 헤어날 줄을 모르니."
금지는 괴탄괴탄을 한다.
"왜 우리나라에도 좋은 풍류와 씩씩한 노래가 많았지만 너무 태평건곤에 겨뤄 놓으니 옛 풍조가 스러지고, 인심이 점점 나약해 가고 풍속이 사치를 일삼으니 그게 한탄할 노릇이란 말이오."
"글쎄 누가 아니라오. 이손의 안목으론 신라 것이면 뭐든지 다 좋아 보이시겠지만 한번 당나라에를 들어가 봐요. 참 기가 막힌단 말이오. 그야말로 옥야천리에 며칠을 가고 또 가도 산 하나 구경할 수 없는 데가 없나. 산이 높으면 어느 것은 태산이라고, 바로 하늘을 찌르는구려.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황하수는 길이도 수천 리, 뭐 바다보담 더 넓은 강이 없나. 경으로 말해도 소상강에 실비가 내리는 거라든지 은하수를 그대로 기울여 놓은 듯한 여산폭포라든지. 이걸 보고 나서 신라 산천을 보면 소위 들판이란 손바닥만하고 산이라고 올망졸망, 큰강이라야 뭐 실개천 폭밖에 아니 되니……."
제가 그 좋은 데를 다 보았다는 듯이 풍을 떨기는 떨었으나 기실 실제로 본 것보담 글에서 본 것까지 떼어 와서 능청스럽게 꾸며 대었다. 그러다가 저도 겸연쩍은 듯이 말을 뚝 끊고 가장 긴한 듯이 유종의 소매를 덥석 잡으며,
"이런 것은 다 취담이고. 우리 터수가 남유달리 친한 터이지만, 이 친한 것을 아주 대대로 비끄러매어 봄이 어떠하오."
하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끄집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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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안간 금지가 유종의 소매를 탁 잡는 바람에 유종의 들었던 술잔이 반나마 엎질러졌다.
"친한 것을 비끄러매다니?"
유종은 얼근한 김에도 이 군이 인제야 제 본색을 나타내는구나 하고, 경계하면서 채쳐 물었다.
"그만하면 알아들으실 법한데. 우리 진진지호를 맺어 봅시다."
"진진지호?"
이손은 얼른 알아듣지 못하였다.
"정말 못 알아들으셨소. 왜 열국 적의 진(秦)나라와 진(晋)나라가 있지 않소. 아시는 바와 같이 때는 춘추전국시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싸움이 끊일 날이 없고 생령은 도탄에 들었으되 오직 이 진과 진과는 서로 혼인을 한 까닭에 의좋게 화평을 누렸다 하오. 그래서 서로 사돈 되는 것을 진진지호를 맺는다 하지 않소."
유종은 금지의 이번 방문을 처음부터 수상쩍게 여기고, 혹은 청혼을 하러 오지나 않았는가 하는 의심이 없지 않았으나, 비장한 술을 가져오고 당학을 늘어놓고 하는 바람에 별다른 목적도 없이 정말 옛 친구를 그리워 심방한 것이거니 하고 믿었다가 이 별안간의 청혼에 놀랐다.
그야 전부터라도 두 집 사이에 혼인말이 있기는 있었다. 금지 집안에서 몇 번 와서 선까지 본 일도 있었고 안으로 청혼을 하자고 설왕설래는 하였지만 색시집에서는 신붓감이 아직 미거하다는 핑계로 이날 이때까지 왈가왈부를 보류해 둔 것이다.
유종은 내심으로 금지를 탐탁하게 알지를 않았고, 더구나 신랑 될 당자가 마음에 싸지를 않았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귀하기도 귀하려니와 그 재질과 기상이 아비의 눈에는 더욱 뛰어나 보이었다. 세상에 으뜸가는 사위를 구하기에 아무 빠질 것이 없을 듯하였다. 천하영웅의 아내가 되어도 아주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신라를 두 어깨에 짊어질 만한 인물,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고리타분한 당학을 한 손으로 막아 내고, 지나치게 흥왕하는 불교를 한 손으로 꺾으며, 기울어져 가는 화랑도를 바로잡을 인물, 이것이 유종의 꿈꾸는 사윗감이었다.
그러니 금성 따위는 그의 반눈에도 차지 않을 건 물론이다. 당나라 유학을 하고, 한림학사란 당나라 벼슬참을 한 것을 가지고 금지의 집안에서는 굉장한 영광으로 아는 모양이었으나, 유종에게는 오히려 눈꼴이 시었다. 더구나 가까이 자세 본 것은 아니로되 키가 달라붙은데다가 얼굴에 병색조차 돌고 장부의 기상이라고는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것이 자기의 그리는 사윗감과는 대상부동이었다.
그러면 이 혼담을 대번에 거절해 버렸으면 그만이겠으되, 그렇지도 또 못할 사정이 있었다.
금지는 당당한 참뼈로 왕족으로 임금과도 그리 멀지 않은 종친이었다. 이런 자리를 함부로 거절하였다가 나중에 무슨 화를 입을지 누가 알랴. 아무리 호활한 그이건만 벼슬살이 육십 평생에 피비린내나는 참경도 여러 번 목견한 터라, 늙은 제 한 몸보담도 귀한 딸의 장래를 생각할수록 그의 결단성은 무디어진 것이다.
"진진지호! 어 좋은 말씀이오마는 내 딸이 아직 어리고 미거해서……."
유종은 말끝을 흐리마리한다.
"아니 영애가 방년이 몇이기에 어리고 미거하단 말이오."
금지의 눈엔 날이 서며 새무룩해진다.
"아직도 열여덟 살……."
"열여덟 살이면 꼭 알맞은 나이가 아니오. 외려 과년했다고 볼 수 있지 않소. 어느 것은 이팔청춘이라고 이팔보담 두 살이나 더한데."
"뭐 키만 엄부렁하지. 철이 나야."
이손의 말은 동문서답이다.
"우리 사이에 겸사가 왜 있겠소. 그야 부모의 눈으로 보면 자식이란 골백살을 먹어도 어려 보이는 것이오. 천하 못생긴 것이 제 자식을 자랑하는 버릇이지만 지독지애(소가 귀타고 새끼를 핥는 것)인지 모르나 내 자식놈으로 말해도 제법 재주도 있고 당서는 들어 대면 사서삼경이나 제자백가에 막힐 것이 없고, 이손도 아시다시피 그 나이에 그래도 한림학사란 벼슬까지 했고 신랑감이 그만하면……."
"그야 신랑감이야 두말이 왜 있겠소. 그저 내 자식이 아직 입에 젖내도 가시지를 않아서……."
"여보 이손, 나이 열여덟에 아직 입에 젖내가 나다니. 외동따님이 아무리 귀하기로 합부인께서 설마 입때 젖을 빨리실까, 헛허허."
시중은 장히 우습다는 듯이 한바탕 웃고 나서 다시 얼굴빛을 바루고,
"뭐 기닿게 얘기할 것 없이 우리 오늘 밤으로 아주 정혼을 해버립시다. 이손 어떠하오."
50
금지는 더욱 긴한 듯이 바싹 다가앉으며 결말을 내고야 말 기세를 보이었다.
"오늘 밤으로? 무에 그리 급하시오. 나는 그런 줄 몰랐더니 시중의 성미도 꽤 겁겁하시군. 속담 상말로 우물에 가시어 숭늉을 달라시겠네, 어허허."
날카로운 칼날을 슬쩍 피하듯 이손은 농쳐 버린다.
"이손께서 속담을 말씀하시니 말이지 어느 것은 쇠뿔도 단결에 빼라고 하지 않았소. 어허허."
금지도 네 수에 넘어갈 내냐 하는 듯이 격에 맞지 않는 너털웃음을 내놓는다.
"그것은 농담이지만, 아직 몇 해를 더 지나 보고 서서히 작정을 하십시다. 나이는 과년이 되었다 하겠으나 응석받이로 자라나서 뭣 하나 옳게 배운 것도 없고, 작인이 다 되자면 아비의 눈에는 아직 까마득하니까……."
"귀한 따님이니 응석도 더러 하겠지만 여자란 시집만 가고 보면 별판으로 딴사람이 되는 법이오. 그러고 또 나도 며느리는 단 하나뿐이니 그 응석쯤이야 내가 이손 대신 받은들 어떠하겠소. 외문으로는 영애가 응석은커녕 숙성하고 얌전하고 재주가 도저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지마는……."
"그야 헛소문이 난 게지. 자식 속이야 제 아비만큼 알 수가 없는 법이오."
"그야 지자는 막여부(知子莫如父)란 말이 없잖아 있지마는 지기일이요(하나만 알고) 미지기이라(둘은 모른다), 등하불명이란 문자도 있으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으로 어버이 아는 것이 외문만 못한 수도 더 많으니까."
"글쎄 외문이야 수박 겉핥기지, 속속들이 알기야 아비가 더 낫겠지……."
"그까짓 말을 가지고 승강할 거야 있겠소. 인물도 그만하고 재화도 그만하고 나이도 그만하면 그야말로 삼합이 맞은 듯하니 자, 겸사 말씀을 우리 다 그만두기로 하고 정혼을 합시다."
"글쎄 그렇게 급하실 게 없대도 그러시는구려."
그들의 수작은 개미가 쳇바퀴를 돌듯 그 자리에서만 뱅뱅 돌고 다시 더 나아가지를 않는다. 금지는 화증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고 매게단을 지었다.
"여보 이손, 자 우리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오늘 밤에 정혼만 해놓고 성례만은 서서히 하면 어떠하오. 이손 댁에서도 준비랄지 여러 가지 사정이 계실 터이니 성례만은 일 년이고 이태고 기다리라는 대로 기다리지요."
하고 금지는 유종을 똑바로 본다. 이 말에야 설마 피해 낼 핑계가 없으리라 하는 듯하였다.
과연 유종은 무어라고 피해야 옳을지 몰라 말이 꽉 막히고 말았다. 거절은 물론 작정한 노릇이로되, 어찌하면 금지의 귀에 거슬리지 않도록 듣기 좋게 보기 좋게 거절을 해버릴까. 그러나 유종은 언변 좋게 이리저리 발라맞출 줄을 몰랐다.
한동안 답답한 침묵이 소흥주 향기가 떠도는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눌렀다. 얼마 만에 금지는 참기 어렵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손, 왜 말이 없으시오."
"……"
유종은 난처한 듯이 눈을 떴다 감았다 한다.
"이손이 말이 없으신 걸 보면 나 같은 사람과는 연사간이 되기를 꺼리시는 것 아니오." 금지는 단도직입으로 한마디를 푹 찌른다.
"무슨 그럴 리야……."
"안 그러시다면 왜 꽉 작정을 못 하신단 말씀이오, 워낙 내 자식이 병신스러우니까, 에이."
금지는 안간힘을 쓰며 불쾌한 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신랑이야……."
"그러면 어디 다른 데로 정혼을 해두셨는지."
"다른 데 정혼은커녕 아직 혼인말을 해본 데도 없소. 정혼한 데가 있다면야……."
"그렇다면 우리끼리 만난 김에 아퀴를 지어 두는 것이 좋지를 않소."
유종은 마침내 단단한 결심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무슨 화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미룩미룩해 두는 것보담 차라리 단연코 거절을 하는 편이 나으리라 하였다. 그리고 엄연한 태도로,
"시중께서 그 미거한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이 밤중에 이렇게 찾아 주시고 정혼을 바라시나 나도 심중에 생각하는 바가 있어 허락을 못 해드리니 과도히 허물을랑 마시오. 오늘 밤에 허혼은 물론 할 수 없고 앞으로도 이 혼담은 중단을 하는 것이 피차에 좋을 듯하오."
금지의 얼굴은 일순간 파랗게 질리었다. 무릎 위에 얹힌 손이 달달 떨었다.
"이손께서 나를 그렇게 아실 줄은 정말 뜻밖이오. 어 술도 취하고 밤도 늦었으니 나는 고만 가겠소."
하고 금지는 벌에게 쏘인 것처럼 불시에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51
금지를 보내고 하인을 불러 주안상을 치우고, 유종은 서안에 쓰러지는 듯이 기대었다.
독사를 건드려 놓았으니 어느 때 무슨 화단이 뒷덜미를 짚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장중보옥 같은 외동딸을 탐탁한 자리에 출가를 시키는 것도 섭섭하려든, 하물며 마음에 신신치도 않은 금성 따위에게 내맡긴다는 것은 아름다운 구슬을 돼지우리에 던져 넣는 것보담 더 아깝고 원통하였다. 아무리 제 장래의 부귀와 영화를 위함이라 하더라도 차마 못 할 노릇이었다. 백발이 흩날리는 이 머리가 서리 같은 칼날 아래 사라질지언정 차마 못 할 노릇이었다.
설령 금성이가 출중한 재주와 인물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유종은 이 혼인을 거절할밖에 없었으리라. 첫째로 금지는 당학파의 우두머리가 아니냐. 나라를 좀먹게 하는 그들의 소위만 생각해도 뼈가 저리거든 그런 가문에 내 딸을 들여보내다니 될 뻔이나 한 수작인가.
도대체 당학이 무에 그리 좋은고. 그 나라의 바로 전 임금인 당명황(唐明皇)만 하더라도 양귀비란 계집에게 미쳐서 정사를 다스리지 않은 탓에 필경 안록산(安錄山)의 난을 빚어 내어 오랑캐의 말굽 아래 그네들의 자랑하는 장안이 쑥밭을 이루고 천자란 빈 이름뿐, 촉나라란 두메 속에 오륙 년을 갇히어 있지 않았는가.
금지가 당대 제일 문장이라고 추어올리는 이백이만 하더라도 제 임금이 성색에 빠져 헤어날 줄을 모르는 것을 죽음으로 간하지는 못할지언정 몇 잔 술에 감지덕지해서 그 요마한 계집을 칭찬하는 글을 지어 도리어 임금을 부추겼다 하니 우리네로는 꿈에라도 생각 밖이 아니냐. 그네들의 한문이란 난신적자를 만들어 내기에 꼭 알맞은 것이거늘 이것을 좋아라고 배우려 들고 퍼뜨리려 드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니냐.
이 당학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우리나라에도 오래지 않아 큰 난이 일어날 것이요, 난이 일어난다면 누가 감당해 낼 자이랴.
"한 나이나 젊었더면!"
유종은 이따금 시들어 가는 제 팔뚝의 살을 어루만지면서 한탄한다.
몇 해 전만 해도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이가 조정에 더러는 있었지만 어느결엔지 하나씩 둘씩 없어지고 인제는 무 밑둥과 같이 동그랗게 자기 혼자만 남았다.
속으로는 그의 주의에 찬동하는 이가 없지도 않으련만 당학파의 세력에 밀리어 감히 발설을 못 하는지 모르리라.
지금이라도 젊은이 축 속으로 뛰어들어가면 동지를 얼마든지 찾아낼는지 모르리라. 아직도 이 나라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은 다음에야 방방곡곡을 뒤져 찾으면 몇천 명 몇만 명의 화랑도를 닦는 이를 모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아들이 없는 그는 젊은이와 접촉할 기회조차 없었다. 이런 점에도 그는 아들 없는 것이 원이 되고 한이 되었다.
이 늙은 향도(香徒)에게 남은 오직 하나의 희망은 자기의 주의주장에 공명하는 사윗감을 구하는 것이었다.
벌써 수년을 두고 그럴 만한 인물을 내심으로 구해 보았지만 그리 쉽사리 눈에 뜨이지는 않았다. 고르면 고를수록 사람 구하기란 하늘에 별따기보담 더 어려웠다.
유종은 기대고 있던 서안에서 쭉 미끄러지는 듯이 털요 바닥 위에 누웠다.
금지의 청혼을 그렇게 거절한 다음에는 하루바삐 사윗감을 구해야 된다. 금지로 하여금 다시 개구를 못 하도록 다른 데 정혼을 해놓아야 한다.
그러면 신라를 두 손으로 떠받들고 나아갈 인물이 누가 될 것인가. 삼한 통일 당년의 늠름하고 씩씩한 기풍이 당학에 지질리고 문약에 흐르는 이 나라를 바로잡을 인물이 누가 될 것인가.
유종은 눈을 감고 제 아는 젊은이를 우선 손꼽아 보았다.
첫째로 머리에 떠오르기는 상대등(上大等) 신충(信忠)의 아들이었다. 호남아로 생긴 허위대와 얼굴이 금성이 따위는 발 벗고도 따르지 못할 인물이로되 너무 귀공자답게 윤이 흐르고 허해 보이는 것이 흠절이었다. 그 다음에는 이손 염상(廉相)의 아들을 생각해 보았으나, 기상은 아비를 닮아 돌올하지마는 너무 거칠고 눈자위에 붉은빛이 돌아 어쩐지 화길한 인물이 아닐 듯싶었다.
그다음으로 누구 누구 꼽아 보았으나 별로 신통한 인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유종은 이손 금량상(金良相)의 아우 경신(敬信)을 생각하자,
"오, 옳지. 내가 어째 이 사람을 잊었던가."
하고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제 알 만한 이들의 아들들만 숭겨 보고, 미처 그 아우들을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52
금량상의 아우 경신!
"그런 인물을 내가 어찌 까맣게 잊었던가."
유종은 스스로 제 기억이 흐려진 것을 책망도 하고 괴탄도 하였다.
"만일 그가 내 사위만 된다면야 그 따위 금지쯤이야."
풀기 하나 없던 그에게 새로운 기운이 넘치는 듯하였다.
그대도록 경신이야말로 유종이 꿈꾸는 사윗감으로 쩍말없이 모든 자격을 갖추었다.
우선 지체로만 보아도 내물왕(奈勿王)의 직계후손이니 금지의 문벌보다 높았으면 높았지 떨어지지 않았다. 경덕왕께서 만득왕자라도 두셨기에 망정이지 만일 무후하시었던들 대통을 이을 이는 금량상 형제밖에 없다는 것이 떳떳한 공론이었다.
더구나 그 형제들은 어디까지나 당학파를 미워하고 국선도를 숭상하는 점으로 자기에게 둘도 없는 동지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다만 그들에게 현재는 그리 큰 권력이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흠절이라면 흠절이리라.
그야 금량상이 그대로 조정에서 있기만 하였으면 골품으로나 덕망으로나 벌써 상대등이 되었으련만, 임금께와 당나라에 아첨하기로만 일을 삼는 무리들하고 한 조정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치욕이라 하여 이손의 벼슬을 버리고 향제에 드러눕고 말았다. 몇 번 왕명으로 부르셨지만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만일 웬만한 사람이 이런 짓을 하였더면 그 간악한 당학파들이 그 능란한 붓끝을 휘둘러 무슨 누명이든지 뒤집어씌워 참화를 면하기 어려웠겠지만 왕의 믿으심도 두터우려니와 지체가 높은 탓으로 감히 개구들을 못 한 것이었다.
향제에 돌아가 누운 뒤에는 아무 거리낌없이 자제들의 훈육을 일삼고 국선도를 밝히기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소문은 풍편으로 들어 알았다.
조정의 일이 날로 그르고 국운이 차차 기울어짐을 혼자 한탄하다가도,
"오 옳지 아직도 양상이 남았구나. 그가 있는 다음에야 우리나라는 태산 반석과 같다."
하고 백만의 응원병을 얻은 것처럼 든든히 여긴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아우 경신, 그는 제 형보담 못하지 않은 영웅이다. 옳다, 인제는 되었다."
유종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무릎을 치고 일어서서 방 안을 거닐었다.
그의 눈앞에는 경신의 모양이 완연히 나타났다.
후리후리한 키에 떡벌어진 어깨판, 탁 트인 이맛전과 너그러운 뺨은 언제든지 싱글싱글 웃는 듯하였으나 어딘지 늠름한 위풍을 갖추어 대하는 이의 머리를 저절로 수그리게 한다.
유종이가 그를 눈익혀 보기는 작년 봄 신궁 앞 넓은 마당이었었다.
신궁에서 큰 제향을 마치고 그 앞마당에서 활쏘기와 칼겨룸의 모임이 열리었다. 계림 팔도에서 한다하는 낭도(郎徒)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그 수효는 만으로 헤아렸다.
여러 곳 활터와 칼터에서 첫 겨룸, 둘째 겨룸이 차례로 끝이 나고 맨 나중에 뽑히고 또 뽑힌 낭도는 스무나뭇에 불과하였다.
그중에서 칼겨룸과 활쏘기 두 가지에 맨 나중까지 뽑힌 사람은 경신 하나뿐이었다.
그때부터 경신은 만장의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겨룸은 오히려 싱거웠다. 한 번도 아슬아슬한 고비도 없이 경신이가 두 가지에 너무 쉽사리 장원을 하고 말았다. 그의 궁술과 검술이 지나치게 뛰어난 것이다.
"어, 그 화살이 세기도 하더군."
활줌통이 척 휘어서 거의 부러질 듯하자 잉 소리를 치고 화살은 흐르는 별보담 더 빠르게 날아가서 영락없이 과녁을 들어맞히고 남은 힘이 넘치어 살 위에 꽂힌 새깃이 부르르 떨던 것이 지금도 유종의 눈에 선하였다.
"어 무서운 화살이야, 무서운……."
유종은 혼자 방 안을 왔다갔다하며 정말 무서운 듯이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고 중얼거릴 제 문득 등뒤에서 말소리가 났다.
"아이 아버지께서는 뭘 혼잣말씀만 하고 계셔요."
유종이가 뒤를 돌아보니 어느결에 들어왔는지 사초부인과 주만이가 서 있었다. 그는 골똘히 경신의 생각을 하고 있느라고 제 아내와 딸이 영창을 열고 들어오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53
유종은 주만을 보고,
"오 구슬아기냐. 밤이 늦었는데 왜 자지를 않고 나왔느냐."
"그 애가 금시중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입때 조바심을 하고 있었답니다."
사초부인은 딸을 대신하여 대답하였다.
"금시중이 찾아왔기로 네가 조바심을 할 게 뭐냐."
주만은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푹 수그린다.
"금시중이 어째 아닌밤중에 찾아를 오셨소."
"어, 당주를 가지고 옛 친구를 찾아왔다 하오."
"그런데 무슨 말이 그렇게 길어요. 사내어른이 어쩌면 그렇게 수다스러울까."
"그 골치 아픈 당학을 또 늘어놓은 것이오."
"이 애가 하도 사람을 졸라서 몇 번을 나와 엿들어도 말낱은 자세 안 들리나 그 말이 그 말이고…… 나중에는 들어가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이 애가 인제 금시중이 돌아가셨다고 깨워서 무슨 말인가 여쭈어 보려고 나온 것이라오."
"네 혼인말이 나온 줄 알고 좀이 쑤신 게로구나."
유종은 고개를 빠뜨리고 앉아 있는 주만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얘 혼인말이 나왔습니까."
"그야 물론이지. 말하자면 청혼을 하러 온 것이야."
"청혼? 그래 허혼을 하셨소."
주만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 맥맥히 제 아버지의 입을 바라본다.
유종의 말도 흥분의 가락을 띠어 온다.
"그야 말이 되오. 그 진저리나는 당학파하고 혼인을 하다니 될 뻔이나 한 수작이오."
"그러면 거절을 하셨단 말씀이오. 후환이 무섭지 않을까."
"아무리 후환이 무섭기로, 이 주름살 잡힌 목에 칼이 들어온다기로 못 할 것은 못 한다고 거절을 할 수밖에 있소."
주만은 자기 아버지가 어떻게 든든하고 고마운지 몰랐다.
"아버지!"
한마디 부르짖고 그 자리에 푹 엎어져서 울고 싶었다.
"참 잘하셨소. 미룩미룩 끌어가는 것보담 아주 단정을 내버리는 것이 피차에 시원한 노릇이니까."
"그는 그러하고라도 딴은 저 애 혼인이 급하단 말이지. 벌써 열여덟이니 시집갈 나이도 되었거든."
"그래요. 허나 어디 마땅한 사람이 있어야지. 넘고 처지고."
"합당한 자리에 꽉 정혼을 해버려야 금지 따위가 다시는 이렁성저렁성하지도 못할 텐데……."
"글쎄요, 어디 합당한 자리가 있나요."
"있구말구."
유종은 자신 있게 대답을 한다.
"뉘 집안입니까."
"왜 전에 이손을 지낸 금량상이라고 있지 않소."
"오 옳지, 참 두 분이 절친하셨지. 그분이 아들이 있던가."
"아들이 아니라 그이의 동생이 있단 말이오."
"녜, 동생이 있어요!"
사초부인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금경신이라고 바로 작년 봄에 궁술 검술에 장원을 한 사람 말이오."
"오 옳지, 그런 출중한 인물은 처음 보셨다고 입에 침이 없이 칭찬을 하셨지."
"그러니 신랑감은 다시 더 볼 나위 없고 문벌도 금지옥엽이라 금지쯤은 누를 수 있겠는데 저편에서 허혼을 해줄는지. 또는 그 동안에 다른 데 정혼이나 안 했는지."
"글쎄 그게 걱정이구려. 그러면 내일이라도 사람을 보내어 염탐을 해보지요."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보담 절친하던 친구를 만나 본 지도 오래니 내가 몸소 가볼까 하오."
"그러면 그렇게 하시지. 그 혼인이 될 말로야 작히나 좋을까."
부부는 매우 기뻐하며 하루바삐 이 혼인을 서둘려 하였다.
주만은 금시중 집안과 혼인이 터진 것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새로운 벼락이 뒷덜미를 내리짚었다.
금성이와의 혼인은 설령 아버지가 허혼을 하셨다 해도 끝내 반대할 이유와 거리가 있었지만 경신과의 혼담은 저쪽에서 거절을 하기 전에는 모면할 핑계조차 없었다.
산은 오를수록 높고 물은 건널수록 깊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할까. 아무리 저를 애지중지하시는 부모님께라도 이 가슴속에 서리는 번민을 털어바칠 수는 없는 일이다.
주만은 그 자리에 고꾸라지며 엉엉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다.
"이 애가 왜 울까."
부부는 울음 소리에 놀랐다.
"왜, 너무 좋아서 우느냐."
유종은 들먹거리는 딸의 어깨를 바라보며 물었다.
"얘 불길하다. 무슨 방정맞은 울음이냐."
어머니는 질색을 하며 딸을 달래었다.
"저는 싫어요, 전 싫어요. 시집은 안 갈 터예요." 하고 주만은 껄떡거리며 하소연을 하였다.
54
아사달은 오래간만에 일터로 올라갔다.
몸에 무슨 두드러진 병이 생긴 것이 아니요, 너무 흥분하고 너무 지친 나머지 일시 기절한 것이라 그 회복은 뜻밖에도 빨랐다.
며칠 누워 있는 동안에 몸살을 한번 앓고 나매 워낙 젊은 기운이요, 마음이 긴장한 탓인지 하루 이틀 다르게 원기가 소생이 되었다.
이렇게 회복이 속한 원인엔 주만의 힘이 없지 않아 많기도 했다. 그가 은근히 쑤어 보내는 잣죽과 속미음이 모래알 같은 절밥을 먹던 입에 달고 미끄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야말로 한 모금 두 모금에 눈이 번하게 띄어 오는 듯하였다.
차차 밥을 먹게 되자 갖추갖추 반찬을 담은 찬합은 어떻게 맛난지 몰랐다. 서홉 밥 한 바리때가 오히려 나빴다. 어린애 모양으로 세 끼니가 까맣게 기다리었다.
그 사이 틈틈으로 곰과 찜 같은 것도 몰리알리 털이의 손을 거쳐 들어왔다.
한밥에 오르고 한밥에 내린다는 젊은 살은 여윈 자국을 메우듯 차올랐다.
이런 선물을 받을 때마다 아사달은 주만을 아니 생각할 수 없다.
"세상에 그런 아름다운 처녀도 있던가. 그런 마음씨 고운 처녀도 있던가."
외로운 경우일수록 불행한 처지일수록 정에 움직이기가 쉬운 것이 사람이거든 천리타향에 병들어 누운 몸을 이렇게 위로해 줄 이 누구냐. 돌보아 줄 이 누구냐.
아사달은 눈물겨웁도록 고마웠다.
아사달도 처음에는 까닭 없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고마웁게 구는 주만의 행동이 이상스럽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야 그런 대갓집의 귀동딸로 저 같은 시골뜨기 석수장이에게 구할 아무것도 없으리니, 이것은 온전히 아름다운 동정심의 나타남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현신 관세음보살님인지 모른다.
"이것도 필경 전생의 무슨 인연이리라."
아사달은 필경 불가의 이른바 인연으로 돌리고 말았다.
인연이라면 기인한 인연이다. 파일날 밤 다보탑을 도는 데서 만나는 것도 인연이요, 석가탑 위에서 까무러친 자기를 발견한 것도 인연이 아니냐. 하고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 그 집에서 불공을 오게 되고, 하고많은 시각 가운데 그가 석가탑을 올라왔을 제 하필 내가 혼절하였을까.
인연의 실마리가 너무도 얼기설기한 데 아사달은 오히려 겁을 내었다.
그는 그러하거니와 아사달은 주만을 대할 적마다 아내 아사녀의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주만이 아무리 정다워도 아사녀가 아니요 그 처녀의 손이 아무리 부드러워도 아내의 손이 아니다.
인생역로에 지나치는 길손에 지나지 않는 그이로도 대공을 이루려다가 넘어진 것을 보고 한 조각 동정심이 이다지도 곰살궂고 살뜰하거든 만일 내 아내가 이런 줄 알았으면 얼마나 가슴을 태우고 속을 끓일 것인가.
어서 하루바삐 하던 일을 끝을 내고 남의 신세를 과도히 받을 것 없이 빨리 돌아가야 한다.
그는 몸을 추스르게 되자 일에 대한 정열이 다시금 불같이 일어났다.
그는 몇 번 돌 다루는 기구를 들고 일터로 가려 하였건만 아상노장이 절대로 말리어서 오늘날까지 참고 참아 내려온 것이다.
오늘도 더 좀 몸이 완실하기를 기다리라 하였지만, 자기 몸이 이만하면 인제 넉넉히 일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만일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고 그대로 누워 있으면 도리어 병이 덧치겠다고 졸라서 간신히 아상노장의 허락을 맡은 것이다.
저녁을 일찌거니 먹고 나서 탑 위를 올라서매 돌들도 그리던 자기를 반기듯 벙글벙글 웃는 듯하였다.
정과 돌까퀴로 잔손질을 하려다가 자기의 힘도 시험할 겸 큰 군더더기를 우선 후려갈기기로 하였다.
버드나무 가지를 찢어 타레를 만들고 그 속에다가 정을 꼭 끼이도록 박아 놓은 다음에 물동 둥이를 번쩍 들어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한번 내리치매 불꽃이 번쩍 일어나자 바위는 쩡 하고 비명을 치며 그대로 쩍 갈라져 털썩 하고 떨어진다.
아사달은 첫 힘부림이 성사를 하자 겨누를 들어 돌부리를 떨고 나서 다시 정질을 시작하였다.
어슬렁어슬렁 어둠이 짙어 오건마는 아사달은 또 옛 버릇이 나와서 밤 가는 줄도 모르고 마치와 정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한참 일을 하다가 잠깐 팔을 쉬고 언뜻 눈을 돌리매 초롱 하나가 이리로 향하고 올라오는 것이 보이었다.
55
그 초롱의 임자는 묻지 않아도 주만과 털이었다.
털이는 째기발을 디디고 초롱을 높이 쳐들어 탑 위를 비추어 보더니,
"여기 계시군요."
하고 반가운 소리를 친다.
"아이 벌써 일을 또 시작하셨구나."
주만은 거의 짜증을 내다시피 말을 하였다.
"아직 채 소복도 안 되셨는데 또 덧치시면 어떡해요."
털이도 제 아가씨의 뜻을 받아 걱정을 한다.
"엊그제 기절까지 한 이를 일하는 걸 말리지도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다니."
주만은 누구에겐지 모르게 불평만만하다.
아사달은 얼마쯤 무관해진 주만의 주종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탑 가장자리까지 걸어나왔다.
"이 어두운 밤에 어떻게들 오셨습니까."
하고 미안해한다. 주만은 탑 가까이 바싹 들어서며,
"어떡하시자고 어느새 또 일을 시작하셨단 말씀예요."
초롱의 빛과 그늘이 어룽이 져서 자세히 보이지 않으나마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리며 매우 아끼고 애달파한다.
아사달은 어둠 속에서 팔뚝에 힘을 주어 보이며,
"인제 이렇게 든든해졌는데요. 성한 사람이 일을 않고 있으니 되려 병이 덧칠 것 같아요, 허허."
오래간만에 웃는 소리를 들으매, 과연 완쾌가 된 듯 한결 마음이 놓이는 듯도 하였다.
"그래도 얼마쯤 더 쉬시는 게 좋을 것 갖다가……."
"더 쉬면 더 기운을 차릴 수가 없게 될는지 모르지요."
아사달은 오늘 밤따라 수작도 잘 하고 매우 쾌활해진 듯하였다.
"워낙 성미가 겁겁도 하시군요."
주만도 난생 처음으로 농담 비슷하게 한마디를 던져 보았다.
"급하기야 오늘 밤으로라도 끝을 내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면 우리도 곧 가야겠군요. 밤새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될 듯하니까요."
"고새야 무슨 큰 방해가 되겠습니까. 나도 지금 막 일손을 쉬는 참입니다."
"그러시다면 잠깐만 놀다가 갈까……."
하고 주만은 망설이었다. 그는 혹시나 아사달이 내려올까 하였으나 저편에서 그런 기색은 보이지를 않았다.
"그러면 아가씨가 탑 위로 좀 올라가 보십시오. 오늘 밤에는 까무러치시지는 않으실 테입지요, 오호호."
털이가 난처해하는 주만을 부축하였다.
"그러면 내가 좀 올라가 볼까, 이 캄캄한 가운데 어떻게 일을 하시나 구경을 좀 하게."
제 일자리를 남에게 보이기를 몹시 꺼리는 아사달이지만 주만의 이 청은 물리칠 수 없었다. 제 재생의 은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말을 어떻게 거스를 수 있으랴.
그러나 아사달이 허락을 하고 거절을 할 나위도 없었다. 주만은 어느결에 사다리를 부여잡고 발을 올려놓는다. 아사달은 삐둑삐둑하는 사다리 웃머리를 잡았다.
주만은 조금도 서투르지 않게 사다리를 거의 다 올라왔으나 사다리가 너무 곤두서고 위층이 두 간이나 탑 위로 솟아 있기 때문에 긴 치마에 걸리어 얼른 걸타넘기에 조금 벅찼다.
아사달의 손은 저절로 주만의 손길을 잡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맨 처음으로 마주잡는 두 손길!
주만의 비단결 같은 손길이 아사달의 손아귀에 몰씬하게 녹아들었다. 아사달의 훈훈하고 억센 아귓힘이 주만의 손등과 바닥에 얼얼하게 남았다.
주만의 눈앞이 아뜩해진 것은 사다리를 걸타넘고 발 놓인 자리가 캄캄한 탓만이 아니리라.
털이가 초롱을 들고 뒤따라 올라오다가,
"여기 있습니다. 이 초롱을 받으십시오. 쇤네는 차돌에게 가서 놀고 있겠으닙시오."
하고 초롱을 치켜든다.
"조금 있다가 같이 가면 어떠냐."
"쇤네는 차돌에게 부탁할 말도 있굽시오. 아무튼 잠깐 다녀와야겠는뎁시오."
주만도 아까 아사달의 처소로 갔다가 마침 차돌이가 없어서 전복찜을 해가지고 온 것을 어디 두었다고 이르지 못한 것을 생각하였다.
"그럼 다녀오렴. 어두울 텐데 초롱을 네가 들고 가려무나."
"쇤네가 초롱을 가져가면 아가씨가 너무 어두우실 걸입시오."
"내야 가만히 있으니 괜찮지만 길 걷는 네가 어둡지 않겠니."
"그러면 쇤네가 가져갈깝시오. 두 분이 계시면 무섭지는 않으실 테닙시오. 오호호."
털이는 제가 초롱을 들고 종종걸음을 치며 내려간다.
아사달과 주만은 이윽고 초롱이 일렁일렁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둘은 의논이나 하듯이 서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옻빛 같은 어둠에 싸이어 피차에 얼굴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56
어둠! 무수한 머리올처럼 올올이 가물거리며 단 두 남녀를 겹겹이 에워싼 어둠.
수줍음도 부끄러움도 뒤덮어 주는 어둠. 망설임과 거리낌도 휩싸 버리는 어둠.
그 공능자작 밑에서 무엔지 활개를 친다. 그 수룡이 속에서 무엔지 버르적거린다.
어둠은 속살거린다. 어둠은 꾀인다.
주만은 이 어둠이 지겹고 무서웠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 한들 이렇게도 어두울까요."
그는 보이지도 않는 아사달을 눈어림으로 더듬으며 침묵을 깨뜨렸다.
"얼마쯤 기다리시면 차차 밝아집니다."
아사달은 아무 구애도 없는 듯 태연하였다.
"아무렇기로 어두운 밤이 어떻게 밝아를 져요."
"밝음에 익는 것이나 어둠에 익는 것이나 눈에 익기만 하면 마찬가지지요."
"그러면 아사달님은 내 얼굴이 보입니까."
"똑똑히는 안 보입니다마는 으렷이는 보이지요."
"내 눈엔 아사달님이 보이지를 않는데."
"그러면 눈을 한참 감았다가 다시 떠보십시오."
주만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아 보았다.
어둠 속에 제 눈까지 감아 버린 아름다운 처녀!
한참 만에 주만은 눈을 다시 떴다. 이만큼 저만큼 마주앉은 두 사이가 조금도 좁아들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않은 것이 도리어 이상스러웠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어디 보여요."
"인제 차차 보여를 집니다."
아사달의 대답은 너무 의젓하다.
수작의 실마리는 다시금 끊어지고 말았다.
그가 알고 내가 알 뿐인 단둘의 암흑세계! 은밀한 수작을 실컷 마음껏 주고받는다 한들 어둠에서 어둠으로 사라질 뿐이 아니냐. 깊이깊이 접어 넣은 비밀을 활활 털어 낸다 한들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옮겨질 뿐이 아니냐.
그러하거늘, 그러하거늘 왜 이렇게 데면데면하게 차리고만 있는가, 점잔만 빼고 있는가.
주만은 아사달을 만나기만 하면 할 말이 천겹 만겹 쌓이고 쌓이지 않았던가. 혼자 속을 태우다가 마침내 마음을 결단하고 이 밤에 그를 찾은 것이 아니었던가.
정작 그를 대하고 보매 말 한마디도 시원하게 나오지 않을 줄이야! 가슴만 가득하게 부풀어오르고 서리서리 얽히었던 하소연 한 가닥도 제대로 풀려 나오지 않을 줄이야! 알뜰한 그이를 앞에 두고도 벙어리 냉가슴을 그대로 앓을 줄이야! 이렇게 좋은 자리,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만났거든 피를 끓이는 진정을 쏟아 버리지 못할 줄이야!
설렁 하고 밤바람이 인다. 휘젓한 절 마당을 두루마리를 하다가 와하고 탑 위를 지쳐들어 그린 듯이 앉은 두 남녀를 휘몰아 낼 것같이 불어 제친다.
"웬 바람이 갑자기 이렇게 불어요."
주만은 얼굴을 외우시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는 속으로,
'내가 기껏 한다는 것이 겨우 이 말인가. 바람이 나에게 항상 큰 일인가? 온 서라벌이 다 날려간들 나에게 무슨 계관이 있단 말인고.'
"저 소리를 들어 보셔요. 저 풍경이 우는 소리를."
아사달은 주만의 말을 받으며 풍경 소리에 귀를 기울인 모양이다.
"천연 우리 부여 고란사 풍경 소리 같군요."
"고란사에도 풍경이 있어요?"
주만은 허정대고 대답을 하였다.
"있구말구요. 내 집이 고란사에서 멀지 않은 탓에 이따금 그 풍경 소리를 듣지요."
"……"
풍경 소리에까지 고향을 그리는 나그네의 심정을 몰라줄 주만이가 아니었지만, 제 속은 이렇게 조이는데 고장 회포만 자아내는 아사달의 말에 대꾸할 정황조차 없었다.
아사달은 하늘을 치어다보고,
"저편 솔밭 있는 편을 좀 보셔요. 뿌옇게 하늘에 뻗힌 것이 무엔 줄 아십니까? 그게 바람꽃이랍니다."
"바람꽃?"
주만은 시름없이 간단히 말을 받았다.
"바람꽃이 일면 정말 꽃이 떨어진다지요?"
"……"
"벌써 첫여름이 되었으니 떨어질 꽃도 얼마 남지는 않았겠지요마는……."
하고 아사달은 한숨을 날쉬었다.
그는 멀리 아사녀를 생각하고 타향에서 세 번째 봄이 속절없이 지나간 것을 한탄한 것이었다.
57
"떨어질 꽃도 얼마 남지를 않았겠지요."
아사달의 한탄은 구슬픈 가락을 띠었다.
"떨어질 꽃!"
주만도 풀기 없이 속살거려 보았다. 제 걱정이 하도 복받치어 아사달의 자아내는 향수에 맞장구를 쳐줄 근력조차 없었다가 이 말 한마디가 야릇하게도 그의 귀를 울리었다.
"떨어질 꽃!"
또 한 번 뇌자 조비비듯 하던 그의 가슴이 대번에 찌르르해지며 비감스러운 회포를 걷잡을 수 없었다. 이 난데없는 바람에 무참하게 지는 꽃. 이 어두운 밤에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이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이 스러지는 꽃 한 떨기야말로 닥쳐오는 제 운명을 그대로 일러주는 듯하였다.
"꽃 신세도 설다 하겠지만 그래도 필 때 피고 질 때 지지만……."
주만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핀다 한들 피어 있을 때가 며칠입니까. 어느덧 봄이 다 갔으니…… 덧없는 세월…… 벌써 세 번째 봄이……."
아사달의 목소리도 눈물에 젖은 것 같다. 아내의 생각이 골똘할수록 그에게는 날 가는 것이 아까웠다. 하루바삐 대공을 이루어야만 아내의 자기 기다리는 날짜가 줄어들 것을.
"필 만큼 피고 지는 것이야 누가 한을 해요……."
주만의 목은 갑자기 메어졌다. 핀 뒤에 지는 것도 덧없다 가엾다 하거든 한번 활짝 피어 보지도 못하고 봉오리째로 사라질 것이 더욱 슬펐다. 알뜰한 사람을 부둥켜안은 채로 올곧게 뜻도 이루기 전에 휘날려 떨어질 것이 더욱 서러웠다.
운명의 악착한 손은 벌써 그의 뒷덜미를 짚었다…….
금지가 다녀간 그 이튿날로 유종은 금량상을 찾아갔다.
혼인말을 꺼내자 저편에서는 두말도 않고 선선히 승낙을 하고 말았다.
"금지 따위가 주제넘게 이손께 청혼이라니 말이 되오."
금량상은 아버지보다 더욱 분개하며 그 범수염을 거스리고 노발대발하였다던가.
평소에 그렇게 대범하던 아버지가 이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뇌고 뇌시며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였다.
아버지 떠나던 날 주만은,
"제발 경신님께 다른 어진 배필이 있어지이다. 달리 정혼한 데가 있어지이다."
하고 검님께와 부처님께 축원을 올리고 또 올렸건만, 이렇게 쉽사리 정혼이 되고 말 줄이야.
"이 애 아가, 구슬아가, 인제 너는 천하영웅의 짝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 아니 기쁘냐."
하고 아버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듯이 기뻐하는 부모의 뜻을 받들지 못할 것을 생각하매 주만은 뜨거운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저는 싫어요, 저는 싫어요. 저는 시집가기 싫어요."
속절없는 노릇인 줄 번연히 알지마는 앙탈을 하고 몸부림을 쳤다.
"이런 철부지를 어떻게 남의 가문에 보내오."
아버지는 웃고,
"이 애 울음이 무슨 울음이냐. 이런 경사에 불길하게."
어머니는 꾸중을 하였다.
"다 큰 애가 엉엉 울다니 하인들 볼썽사납다. 어서 그쳐라, 그쳐."
그래도 주만은 한번 터진 울음을 좀처럼 그칠 수 없었다. 멈추려 하면 멈추려 할수록 울음 소리는 더욱 커지었다.
어버이들은 그 울음을 온전히 다른 뜻으로 푼 모양이었다.
"아무리 네가 우리 슬하를 떠나기 싫어한들 쓸데가 있느냐. 딸자식으로 태어난 다음에야 아무리 앙탈을 한들 남의 가문에 안 가고 배길 수 있느냐. 남편을 잘 섬기고 잘 돕는 것이 여자의 타고난 천직이거든."
타이르던 아버지도 회심한 생각이 드는 듯 음성이 가라앉았다.
"자식이라야 저것 하나뿐. 저것마저 치워 보내면……."
어머니는 끝끝내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버이의 말씀을 들을수록 주만은 더욱 슬픔과 설움이 복받쳐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치 매맞은 어린애처럼 홰울음을 내어놓고 말았다.
"이 애 고만 울어라, 고만. 너무 울면 지친다. 고만, 고만."
어머니는 딸의 등을 흔들고 어루만지다가 그대로 등 위에 엎드러지며,
"엊그제 젖먹이가 어느새 시집갈 나이가 되다니. 너마저 가버리면 이 어미는, 이 어미는 어떡하나……."
하고 훌쩍훌쩍 소리를 내어 운다.
아버지는 연경을 꺼내어 쓰고 사랑으로 나가 버리었다.
58
아버지가 사랑으로 나가 버리자 어머니의 흑흑 느끼는 소리는 더욱 높아 갔다.
"얘, 인제 고만, 응."
달래다가 울고,
"그대로 뚝 그치지를 못하고."
꾸짖다가 울었다.
주만은 어머니의 상심하시는 것이 민망스럽고 죄송스러워서 가까스로 꿀꺽꿀꺽 울음을 삼키고 제 처소로 돌아왔다.
제 방에서 제 홀로 실컷 마음껏 울어 보려 하였더니 웬일인지 그렇게 퍼붓는 듯하던 눈물이 그새 말라붙었는지 다시 나올 것 같지도 아니하였다. 눈은 갈수록 보송보송해졌다.
눈물이 끊어지자 속은 바작바작 타기 시작하였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할까."
머리를 두 손으로 부둥켜쥐고 짜보았건만 암만해도 어찌할 도리가 나서지를 아니하였다.
누워 봐도 시원치 않고 앉아 봐도 시원치 않고 일어서 보아도 시원치 않았다. 애꿎은 몸만 자반뒤적이를 하면 할수록 한 그믐밤 빛 같은 아득한 절망이 그의 가슴을 물어뜯을 뿐이다.
눈물이 흐를 때는 오히려 낫다. 천만 개 바늘로 쑤시고 저미듯 쓰리고 따가운 속을 얼마쯤 눅여 주었던 것이다. 빼빼 마른 슬픔을 찬 이슬처럼 축여 주었던 것이다. 눈물마저 끊어진 지금은 더욱 견딜 수 없었다.
백 갈래 천 갈래로 곰곰이 생각해도 끝머리는 언제든지 허두로 돌아가고 만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할까."
주만이 혼자로는 너무도 벅차고 어려운 문제였다. 그렇다고 이 사정을 호소할 데가 어디냐.
오늘날까지 애지중지 길러 주신 부모님께도 하소연할 수 없는 이 사정. 무슨 응석이라도 받아 주시고 무슨 청이라도 들어주시는 부모님이시지만 이런 동이 닿지 않은 말씀이야 어찌 여쭈랴. 설령 용기를 가다듬어 발설을 한다 한들 그 결과는 뻔한 노릇이 아니냐. 천부당만부당한 이 사정이거니 동해바닷물이 마를지언정 들어주실 리 만무하다. 도리어 역정만 내시고 슬퍼만 하실 것 아닌가.
이 사정을 호소할 데는 오직 아사달뿐이다. 그러하다, 이 안타까운 사정을 알아줄 이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오직 그이 하나뿐이다.
그래서 밤 들기가 무섭게 털이를 데리고 이곳을 찾아온 것이었다.
다시 없을 기회, 다시 없을 자리에 그를 만났건마는 올 때 먹은 마음과 딴판으로 입이 떨어지지 않으니 웬일일까.
바람은 더욱 기운차게 더욱 사나웁게 불어 제친다.
와르르르 어디 산이라도 무너지는 듯. 들부수듯이 산기슭으로 휘몰려 들어가매 숲은 휘술레를 돌리듯 몸을 우쭐거리며 아귀성을 친다.
바람이 걸어가는 대로 술렁술렁 물결을 치는 듯한 솔숲이 밤눈에도 으렷이 보이었다.
주만의 가슴도 바람결같이 설레었다.
통사정할 오직 한 사람인 줄로 여기었던 아사달도 어찌 생각하면 헛되고 거짓인 듯하였다. 제 고장만 생각하고 세월의 덧없음만 설워하는 그에게 이 사정을 알린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가 정혼을 한 게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내가 시집을 가고 안 가는 것이 그에게 하상 대사일까.
한 번 탑돌기를 같이 하고 한 번 까무러친 것을 발견하고 몇 번 문병을 하였을 뿐. 그와 나와 무슨 깊은 곡절이 있단 말인가. 그는 부여 땅의 젊은이, 나는 서라벌 처녀, 생각하면 아주 남남끼리가 아니냐.
부모님도 몰라주시는 사정을 그에게 알아달라니 너무도 터무니없는 노릇이 아니냐.
바람에 둥둥 뜨는 듯한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매 주만은 넓은 벌판에 단 홀로 남은 듯한 적막과 슬픔을 느끼었다.
"어유, 바람도 몹시 부는군. 저 별빛이 흐릿한 것이 어쩐지 물을 먹은 듯합니다. 비가 또 오시려나."
혼자 생각에 잦아졌던 주만에게는 아사달의 말소리가 마치 딴세상에서 울려 오는 듯하였다.
59
물 먹은 별들은 졸립다는 듯이 깜박깜박하다가 하나씩 둘씩 지워졌다.
동쪽 하늘에 둥둥 떠오른 검은 구름장이 서으로 서으로 빨리빨리 달아났다. 대번에 하늘은 빈틈없이 흐려지고 구름 두께는 갈수록 짙어지는 듯하였다.
사나운 바람은 여전히 그칠 줄을 모른다.
주만의 가슴을 지지른 검은 구름장도 더욱 무거워졌다.
그와 맞대해 앉아 있어도 이렇게 괴롭고 외로울진대 차라리 돌아가는 것이 나을 성싶었다. 그러나 한번 간 털이는 차돌이와 무엇을 노닥거리고 있는지 다시 올 줄을 모르고 아무리 대담한 주만으로도 이 캄캄칠야에 털이도 데리지 않고 촛불도 없이 제 혼자 타닥타닥 돌아가기는 거리끼었다. 그나 그뿐인가, 정작 몸을 일으키려 하매 더욱 서러웠다.
'그와 이렇게 대할 적도 몇 번이나 될 것인가.'
생각하매 그와 떠나는 슬픔이 그와 같이 있는 괴로움보다 백 갑절 천 갑절 더할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었다.
'어둡지나 않았더면 그의 얼굴이나 실컷 보아 둘걸.'
아무리 눈을 닦아 보아도 어둠 속에 덩치만 으렷이 보일 뿐, 그 어글어글한 눈매와 연연한 입술의 나타나지 않는 것이 못 견디리만큼 안타까웠다. 털이에게 초롱까지 돌려보낸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에라 암만해도 보깨이는 내 속을 알릴 데는 그이 하나뿐이다. 기막힌 내 사정을 하소연할 데는 그 아니고 또 누구 있을까.
"나는 자칫하면 인제 자주 와서 못 뵙게 될지 몰라요."
마침내 주만은 입을 열었다.
"녜?"
아사달은 제 귀를 의심하는 모양이었으나 뒤미처,
"길이 그렇게 멀다니 어떻게 자주 오실 수야……."
"길이야 백 리면 어떠하고 천 리면 어떠해요……."
하고 주만은 불 같은 입김을 내쉬었다.
"그러면 무슨 딴 일이 생겼습니까."
아사달의 묻는 말씨도 급하였다.
이 아름다운 동정자, 이 곰살궂은 은인까지 자주 못 보게 된다면 너무도 쓸쓸해질 제 생활이 아니냐. 나그네의 사막에 핀 한 송이 꽃! 그것마저 없어진다면 너무도 보송보송하고 메마른 그날 그날이 아니냐.
"나, 나는 저, 정혼을 했답니다."
주만은 더듬거리면서도 분명히 제 할 말을 하고야 말았다.
"네, 정혼?"
아사달의 대답도 허둥지둥하였다.
"쉬이 시집을 가게 되겠단 말씀예요."
주만은 아사달이 잘 못 알아들은 줄 알고 또 한 번 재우치고 어둠 속에서도 얼굴을 떨어뜨리었다.
"그, 그러시다면……."
하고 아사달은 말문이 꽉 막히는 듯하였다.
"그러시다면 인제는 참 또 오시기……."
말끝을 맺지 못하였다. 자기만 찾아 줄 그가 아니요, 자기만 돌보아 줄 그가 아닌 것을 아사달도 번연히 알건마는 어쩐지 마음 한 모서리가 허수하게 비어 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처녀가 왜 이 말을 하는고. 자기가 시집을 가고 안 가는 것을 왜 나에게 알리는고. 거기 깊은 뜻이 있는 듯도 싶었지만, 다시 생각하면 무두무미하게 발길을 뚝 끊어 버리면 궁금해할까 보아 미리 가르쳐 주는 아름다운 마음씨에 지나지 않는 듯도 싶었다.
"또 오기야 또 오지만 몇 번을 더 오게 될지……."
주만의 목소리는 눈물이 거렁거렁 고이었다.
"앞으로 단 한 번이라도 더 오실 수가 있다면야!"
아사달은 반색을 하다가,
"나도 인제는 이만큼 회복이 되었으니 염려를 놓으셔도 괜찮기야 합니다마는!"
서운한 가락을 띠었다.
"나도 몇 달만 애를 더 쓰면 이 탑을 끝을 낼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도 곧 부여로 돌아가게 되겠습니다."
주만의 방문조차 끊어진다면 그는 한시바삐 일을 서둘러야 한다. 사랑하는 아내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
"곧 부여로 돌아를 가셔요."
주만의 가슴엔 무엇이 뜨끔하게 맞치는 듯하였다.
"그렇게 쉽사리 일이 끝이 날까요."
"이젠 삼층도 대모한 것은 거진 끝이 났으니 잔손질만 하면 고만입니다. 일만 착실히 하고 보면 오래지 않아 손을 떼게 될 것 같습니다."
'그도 간다. 그도 갈 날이 얼마 남지를 않았구나. 그런데 나는, 나는…….'
주만은 속으로 외우쳤다.
60
"공사만 끝나면 곧 서라벌을 떠나실 작정이군요."
주만은 아까 아사달의 말이 마음에 키이는 듯 또다시 물었다.
"여러분의 후의와 신세진 것을 생각하면 얼마를 더 있어도 정이 남습니다마는 공사가 끝난 다음에야 한시바삐 그리던 고장으로 돌아가야지요."
아사달은 솔직하게 제 진정을 털어 내었다. 대공을 이룬 다음에야 하루인들 서라벌에 머뭇거릴 필요가 어디 있느냐.
그러나 주만에게는 그 솔직한 대답이 너무도 몰풍스럽고 매정스러웠다. 그는 내가 있는 이 서라벌이 그렇게 지긋지긋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선히 발길을 돌릴 수 있는가.
아아! 그에게는 내란 사람이 아무 상관도 없구나!
"부여가 서라벌보담 그렇게 좋아요."
주만의 이 말 한마디에는 만 가지 한과 원이 품겼으리라.
그러나 그런 줄이야 아사달은 꿈에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렇게 좋을 거야 무엇 있겠습니까. 그야 서라벌에 대면 시골두메지요마는 사람이란 제가 나고 자란 고향이 그리운 것이랍니다."
"거기는 사자수가 흐른다지요. 맑고 깊은 강이."
"강만은 서라벌보담 나은지 모르지요."
"그 강을 에두르고 부여란 큰 서울이 있었더라지요."
"옛날의 번화한 자취가 이제는 쑥밭이 되었지만 그때나 이때나 한결같이 흐르는 사자수는 언제든지 아름답고 구슬픈 꿈을 자아내는 듯하지요."
"그래 우리 서라벌의 남내와 모기내보담 큽니까."
"크기로도 남내와 모기내의 여러 갑절입니다마는 첫째 깊고 맑고."
"나도 그 사자수를 좀 구경을 하였으면, 나도 그 아름다운 물가에 살아 보았으면!"
하고 주만은 한숨을 휘 내어쉬다가 갑자기 소용돌이치는 정열을 걷잡지 못하는 듯이,
"가실 때 나를 데려가 주셔요. 나도 가요, 나도 가요. 아사달님을 쫓아서 나도 갈 터예요. 네 아사달님. 제발 나를 데려가 주셔요. 아사달님의 고향으로 나를 데려가 주셔요."
잠깐 뜸하였던 바람은 다시 세차게 불기 시작한다. 하늘은 먹을 갈아 부은 듯이 캄캄해졌다.
주만은 펄렁거리는 옷자락을 여미지도 않고 이제란 이제야말로 이속에 쌓이고 쌓인 충정을 쏟아 놓기 시작하였다.
"네, 아사달님, 나를 꼭 데리고 가셔야 됩니다. 나를 버리고 가신다 해도 나는 아사달님을 찾아갈 터입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찾아가고야 말 것입니다."
아사달은 이 정열의 회오리바람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구슬아기님, 구슬아기님, 구슬아기님이 부여로 가시다니 말이 됩니까. 이 좋은 서울을 버리시고……."
"난 서울도 싫어요. 아사달님이 안 계시는 서울은 무덤 속같이 쓸쓸해요."
"부모님도 버리시고……."
"부모님 곁을 떠나는 것이야 슬프지만 다른 데 시집을 가는 것보담 낫지 않아요."
아사달은 휘술레를 돌리이는 것처럼 머리가 핑핑 내어둘리었다.
"아무리 멀리 구슬아기님이 부여로 가신다 해도 이손 댁에서 그냥 두실 리 만무한 일……."
"그냥 안 두시고 설마 나를 어떡하실까."
"이런 서울에 사시다가 그런 두메에 어떻게 숨어 사십니까. 그런 생각을랑 아예 마십시오. 그런 말씀을랑 아예 마십시오."
"서울이면 어떠하고 두메면 어떠해요. 아사달님이 가시는 데라면 어디라도 좋아요. 물 속에라도 불 속에라도."
"구슬아기님,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아사달님이 안 된다 하셔도 이제는 틀렸습니다. 아무리 나를 떼치시려 하셔도 인제는 때가 늦었습니다. 이 몸은 아사달님의 그림자. 아사달님이 서나 앉으나 따를 그림자. 아사달님이 오나 가나 붙어다닐 그림자. 이 몸이 죽기 전에는 이 몸이 재가 되기 전에는 아사달님을 놓치지 않을 터예요. 아이지 않을 터예요."
그렇게 몹시 불던 바람도 별안간 무엇에 주눅이 든 듯 뚝 그치며 우르르 우레가 호통을 친다. 문득 먹장 같은 구름을 찢고 번개가 번쩍 하며 줄불을 터뜨리자 그 어마어마한 불칼로 하늘을 동강이를 내는 듯 무서운 음향이 일어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벼락이 떨어진 것 같다.
번쩍 하고 눈 속을 스쳐가는 광채 가운데서 두 남녀는 일찰나 마주보았다.
주만의 얼굴도 핏빛이었다. 아사달의 얼굴도 핏빛이었다. 후닥뚝닥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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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은 굵은 빗발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기예 비가 오시는군요. 이렇게 뇌성벽력을 하니 비가 오셔도 많이 오시겠는데."
"비가 오시면 어때요. 비쯤 맞으면 어때요. 비걱정을랑 마시고 나를 데려가시겠다고 언약을 해주셔요, 맹서를 해주셔요. 부여든지 어디든지 아사달님 가시는 데 같이 간다고 속시원하게 일러 주셔요."
"……"
우루룩우루룩 천둥은 갈수록 잦아 간다.
쉴새 없이 번개는 친다. 그 사나운 불채찍은 어둠을 후려갈기고 빗발을 누비질하며 번쩍거린다.
와지끈자끈 벼락은 닥치는 대로 바수어 내는 듯 온 누리가 이 호통의 으름장에 겁을 집어먹고 부들부들 떠는 듯하였다.
주만의 불을 뿜는 듯한 하소연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불국사에서 처음 뵙던 그 순간 나의 운명은 벌써 작정이 된 것이야요. 다보탑 밑에서 신기하게도, 참으로 신기하게도 두 번째 만나 뵐 제 나의 일생은 귀정이 나고 만 것이야요. 그때부터 이 몸은 아사달님 없이는 이 세상에 못 살 줄 알았습니다. 아사달님 아니고는 나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줄 이가 또다시 없는 줄 깨달았습니다. 세 번째 석가탑 위, 지금 앉은 이 자리에서 혼절하신 모양까지 뵙게 된 것은 우리의 이상한 인연이 아주 굳어지고 만 것입니다."
비는 어느결에 폭우로 변하여 좍좍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옷이 다 젖으십니다. 이 바위부리 밑으로라도 잠깐 의지를 하십시오."
아사달은 딱한 듯이 또 한 번 재우쳤다.
"왜 자꾸 딴말씀만 하세요. 이 옷이야 다 젖은들 어떠해요. 아사달님이 허락만 하신다면 이 비를 맞고 그대로 짓물러나도 좋아요. 그대로 잦아져도 좋아요. 녜, 아사달님, 같이 가실 테지요. 함께 간단 말씀을 해요."
"……"
아사달도 노박으로 맞는 비를 피하려고도 아니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이윽히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다가 마침내 차마 하지 못할 말을 하고야 말았다.
"구슬아기님,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나에게는 어엿한 아내가 있답니다. 나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아내가 있답니다."
이 말을 하기에 아사달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하였다. 자기의 둘도 없는 아름다운 동정자에게 이 말을 들리기는 너무도 면난쩍었다. 너무도 무참하였다. 그 어여쁘고 고운 염통을 칼로 저미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아까부터 몇 번을 이 말을 할까말까 망설이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스러지고 혀끝에 뱅뱅 돌면서도 입 밖에 내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것은 한때의 고통. 이런 줄을 모르고 처녀의 마음을 끝끝내 바치게 하는 것은 크고 더 무서운 죄악인 양하였다.
그는 마침내 마음을 결단하였다. 이를 악물고 이 말을 하고 만 것이었다.
과연 열에 뜨인 주만에게도 이 말만은 여무지게 울린 듯하였다. 화살을 맞은 비둘기 모양으로 그의 몸은 흠칫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움츠러들 주만이가 아니었다. 날카롭게 찔린 상처의 아픔을 지그시 견디는 듯하더니 아까보담 더욱 흥분된 목소리로 그 말을 받는다.
"나도 알아요, 부인이 계신 줄을 나도 알아요. 장인이요 스승이신 어른의 따님이 부인이신 줄 나도 알아요. 의젓하고 아름다운 부인께서 댁에서 아사달님 돌아오시기를 나날이 기다리시는 줄 나도 알아요. 나도 그 때문에 얼마나 고민을 하였을까, 애간장을 끓였을까……남의 남편, 남의 서방님을 흠모하는 이 몸이 얼마나 미웠을까……."
하고 주만은 지나친 흥분에 잠깐 말을 끊었다.
"그러나 그것도 인제는 지난날의 몹쓸 꿈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는 것보담 더 높은 정이 없을까, 더 깨끗한 사랑이 없을까요. 아무리 부인이 계시다 한들 사랑이야 어떡하실까. 나는 그 어른의 형님이 되어도 좋고 동생이 되어도 좋아요. 나는 다만 아사달님 곁에만 있으면 고만예요. 하루 한 번, 열흘에 한 번이라도 아사달님을 뵈올 수만 있다면 고만이에요."
비는 점점 소리를 치며 내리퍼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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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덩이 같은 주만의 머리와 뺨에 빗발이 젖자 무렁무렁 김이 서리었다.
"나는 아사달님과 부부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아요. 그야 어엿한 부부가 될 수가 있을 말로야……."
하다가 주만은 코 안으로 흘러드는 빗물을 풀어 내었다.
"그야 애당초에 안 되기로 정해 놓은 노릇. 저는 차라리 아사달님의 제자가 될 터예요. 겨누와 정을 매만져 드리는 제자가 될 터예요. 십 년을 배우고 이십 년을 배우면 설마 그 놀라우신 재주의 만분지 일이야 못 배울까……."
"이손 댁의 귀동따님이 석수장이의 제자가 되다니 안 될 말씀, 안 될 말씀."
하고 아사달은 고개를 흔든다.
"왜 안 돼요. 안 될 까닭이 무엡니까! 삼단 같은 머리를 끊어 버리고 불제자도 되려든. 나무로 깎고 구리로 새겨 만든 부처님의 제자도 되려든. 살아 있는 이를 왜 스승으로 못 섬길까. 눈앞에 보여주는 재주를 왜 못 배울까……."
"제발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이 아사달이 빕니다."
아사달은 머리를 푹 수그렸다.
"아무리 아사달님이 빌어도 내 마음은 돌리지 못합니다. 동해에서 뜨는 해가 서악(西岳)에서도 떠도 한번 먹은 내 뜻은 꺾지를 못합니다."
"괴롭습니다. 이 아사달이 괴롭습니다. 제발, 제발……."
"괴롭다면 내가 괴롭지 아사달님이야 왜 괴로워요. 여제자 하나 데리는 게 그렇게 괴로워요."
"제발 그러지 말아 주십시오. 부모님께서 정혼하신 자리로 떳떳이 시집을 가주십시오. 그러고 그 좋은 부귀와 영화를 누려 주십시오."
"부귀와 영화가 아무리 좋다 한들 내가 싫은 바에야 헌신짝만도 못한 것……."
"가난뱅이 석수살이. 그 지긋지긋한 고생을 왜 사서 하시려고……."
"아무런 고생살이라도 제가 즐겨 하는 거야 누구를 탓을 해요."
"말씀은 쉬워도 고생살이란 진저리나는 것. 풀자리에 베이불을 어떻게 견디실까. 안 될 말씀, 안 될 말씀!"
"돌 위에 그냥 자도 내 좋으면 그만이지요.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도 내 기쁘면 고만이지요. 아사달님을 그리고는 끊어질 이 목숨. 목숨도 태웠거든 세상에 못 견딜 일이 무에 또 있을까."
바로 머리 위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듯 천지가 뒤집는 울림이 일어났다. 정열의 용솟음에 허덕이는 그들도 아뜩하며 귀를 막았다. 눈에 불이 주렁주렁 흩어지며 세상에도 빠르고 세상에도 세찬 무엇이 홱 지나치는 듯하였다. 팽팽 내어둘리는 눈길에도 저 건너 산허리에 수없는 불바위가 디굴디굴 맞부닥뜨리며 구을다가 이내 스러져 버리는 광경이 환하게 보였다.
일순간 번하게 밝아 오는 듯하다가 다시 자욱해지더니 비는 꼬지락이로 따르었다. 대번에 탑 위에 물이 펑하게 고이며 양 가로 철철 흘러 떨어지는 소리가 난데없는 폭포를 이룬 듯하였다.
"이리로 오십시오. 이 돌부리 밑에나마 좀 들어앉으십시오."
아사달은 캄캄한 가운데서 더듬거리며 주만을 불렀다. 아무리 주만으로도 폭포수같이 내리지르는 이 빗줄기를 그냥 맞기는 어려웠으리라. 그는 몸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벌써 흠빡 젖은 옷자락이 다리에 휘감기어 댓 자국을 떼놓을 수 없었다.
아사달의 손은 가까스로 질척질척하는 주만의 소매를 잡을 수 있었다.
물펑덩이가 다된 주만의 몸을 옆으로 반나마 안다시피 하여 어훙하게 떨어 낸 바위부리 밑에 들여앉힐 수 있었다.
그 바위 밑은 둘이 맞비비대고 몸을 웅크려야만 간신히 노박이 빗발을 가리울 만큼 좁았다.
"아사달님 어디로 나가셔요. 어디로 이렇게 비가 딸쿠는데."
주만은 자기를 안아다가 놓고 몸을 일으키는 아사달을 보고 부르짖었다.
"여기도 괜찮아요. 여기도 의짓간이 있습니다."
아사달은 분명히 거짓말을 하는 모양이었다.
"거기 무슨 의짓간이 있어요. 노박이로 비를 맞으실걸 뭐."
"괜찮아요. 아무 말씀도 마시고 조금만 그러고 계십시오. 인제 곧 비가 뜸해질 것이니까요."
아사달의 말을 반박이나 하는 것처럼 비는 더욱 줄기차게 쏟아진다.
"고새라도 이 줄기찬 비를 그대로 맞으시면 병환이 덧치실걸. 어떡하나, 어떡하나."
주만은 보이지도 않는 아사달을 찾으며 조바심을 하였다.
"여기도 괜찮습니다. 여기도 비를 맞지 않습니다."
아사달의 목소리는 아까보담 얼마를 떨어져 나간 듯하였으나 그 숨길은 몹시 거칠게 들려 왔다.
63
부석의 병은 아사달이 떠나던 그해에는 별판으로 점점 나아갔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자 그 몹쓸 해소도 도수가 드물어지고 손수 정을 들어 여러 제자들에게 돌 쪼는 비결조차 가르쳐 줄 만큼 되었다.
그가 이렇게 속하게 건강을 회복하게 된 것은 첫째 온화한 기후 관계가 크기도 하였지마는 외동사위를 멀리 떠나 보내고 심신이 긴장한 탓도 탓이리라.
그는 세상없어도 아사달이 대공을 이루고 돌아올 때까지는 살아야 한다. 그 능란한 솜씨로 서라벌 석수들을 어떻게 찔끔하게 하고 천하에 으뜸가는 탑을 어떻게 지어 내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눈을 감으려야 감을 수 없었다.
만일 그 동안에 제 명이 이어가지 못한다면 홀로 남은 아사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하였다.
그는 아사달이 있을 때보담 제 몸을 돌보고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죽이나마 억지로라도 몇 술을 더 떠넣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때를 할 수만 있으면 줄이고 웬만만 하면 기동을 해보았다.
그러나 여름이 다 지나고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무서운 기침은 또다시 그를 찾았다.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고 오장육부까지 뒤틀어 오르게 하는 그 무서운 해소는 맹렬하게 그의 덜미를 짚었다.
기침 한번 한번에 늙고 쇠한 기운은 빠져 달아났다. 몸에 억지를 부린 탓으로 그 반동은 더욱 무서웠다.
한겨울이 되자 몸져눕고 말았다.
아사녀는 병상 곁에서 꼬박이 여러 밤을 밝히었다.
호된 기침을 하고 난 뒤에는 거물거물 그 자리에서 숨이 지는 듯도 하였다.
"아버지, 아버지, 눈을 떠보십시오, 눈을 떠."
아사녀는 울며 부르짖었다. 푹 꺼진 눈자위는 눈알맹이가 있을 성싶지도 않고 가르렁가르렁하던 담끓는 소리도 가라앉고 숨소리가 들릴 둥 말 둥하자 아사녀는 질색을 하며 아버지를 깨워 보는 것이었다.
"음, 음, 왜."
하고 그 진땀이 배어서 번질번질해진 눈시울을 뜨면 아사녀는 돌아간 아버지가 다시 살아난 것같이 기뻐하였다.
"아버지."
"왜."
"아버지가 이렇게 편찮으시다가…… 만일……."
"만일에 죽으면 어떡하느냐 말이지. 안 죽는다, 안 죽어, 쿨룩쿨룩."
말끝은 기침으로 마쳐졌으나 부석은 자신 있게 딸을 위로하였다.
"아사달이 돌아오는 걸 못 보고 내가 죽다니 말이 되느냐. 아사달을 다시 못 보고 눈을 감으려니 감을 수 있느냐."
"아버지께서는 그 탑이 얼마쯤이나 되었을 듯해요."
"가만있자, 그 애 간 지가 한 일 년 되었느냐."
"올봄에 갔으니 아직 일 년은 채 못 되었지요."
"옳아, 그 애가 올봄에 갔것다. 공을 들이자면 그래도 일 년은 걸릴걸."
"뭐 일 년 템이나."
"참 짓는 탑이 둘이라지. 훌륭한 석수를 만나 하나씩 맡아 짓는다면 일 년에 끝을 내겠지만 두 탑을 혼잣손으로 다 맡는다면 이태는 더 걸릴걸."
"어유 이태!"
아사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태가 그렇게 먼 듯하냐. 까다로운 공사나 만나고 생각이 잘 안 돌면 사오 년도 걸리는 수가 있느니라."
"그렇다면 큰일나게요, 큰일나게."
아사녀의 눈은 호동그래졌다.
일 년이 채 못 되어도 이렇게 그립고 기다려지거든, 이태 삼 년이 걸린다면 아버지보담도 제가 먼저 말라죽을 것 같았다.
"여기서 서라벌이 얼마나 되어요."
"글쎄 몇 리나 될까. 한 오백 리는 더 될걸."
"오백 리, 그렇게 멀어요. 걸어간다면 여러 날 걸리겠는데요."
"암 여러 날 걸리지. 발이 부르트고, 쿨룩쿨룩."
"노독이나 나지 않았을까."
아사녀는 혼자말같이 중얼거렸다.
위태한 고비를 몇 번 넘기기는 하였지만 그해 겨울은 아무튼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그 이듬해 봄이 되고 여름이 되자 기침은 또다시 뜸해졌지만 너무 지쳐서 기운을 차릴 수가 없게 되었다.
64
그 이듬해는 여름이 되어도 몹시 지친 부석의 몸은 좀처럼 소복을 못 하고 호정출입까지 어렵게 되었다.
위험시절 가을은 또 닥쳐왔다. 혹독한 기침은 썩은 나뭇가지를 분질러 내듯 쇠약한 부석의 몸의 모든 부분을 샅샅이 바수어 내었다.
인제 쿨룩쿨룩하는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를 않았다. 소리를 낼 만한 근력 한푼 어치도 그에게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름살 많이 잡힌 얼굴이 마치 으등그린 송충이처럼 흉업게 찡그려 붙고 입을 딱딱 벌리는 걸로 보아 그가 지금 기침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어복이 말라붙은 종아리는 촛대뼈와 종지뼈가 앙상하게 드러나서 하릴없이 장작개비와 같이 뻣뻣하였다.
그가 살아 있다는 오직 한 개의 증거는 가르렁가르렁 씩씩 갖은 소리를 내는 담끓는 것뿐이었다.
금일 금일 하면서도 그의 생명은 기적적으로 끊어지지는 아니하였다.
"아사달을 다시 한번 못 보고 내가 죽다니 말이 되느냐. 안 될 말, 안 될 말."
그는 조금만 정신기가 나면 언제든지 다 부서진 제 몸에 용을 쓰며 중얼거리곤 하였다.
아사녀는 하도 여러 번 그 소리를 들어서 귀가 따가웠다.
이렇게 용을 한번 쓰고 나면 그 흐릿한 눈동자에는 언제든지 눈물이 친친하게 괴어 올랐다.
제 평생을 두고 닦고 배운 재주를 모조리 전장한 아사달, 그의 쓸쓸한 인생에 오직 한 개의 보옥인 딸까지 맡은 아사달.
그가 대공을 마치고 영광에 쌓이어 돌아오는 날까지는 세상없어도 이 쇠잔한 목숨을 지탱을 해야 한다.
그의 잿불처럼 꺼져 가는 생명을 부지하는 기적이 실상은 이 원력인지 모르리라.
아사녀는 이 용쓰는 것과 눈물이 보기 싫었다. 처음에는 그럴 적마다 울기도 여러 번 울었으나 인제 와서는 그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 퉁퉁하게 부은 눈을 외우시고 만다. 이렇게도 원을 원을 하시는 것이 암만해도 원을 이루지 못하고 마실 것이 더욱 가슴을 찢어갈기는 듯하였던 것이다.
어찌어찌 그 무서운 겨울을 넘기기는 넘기었다.
추녀 끝에서 눈 녹아 내리는 소리가 또닥또닥 난다. 사자수가 풀리느라고 얼음장이 찡찡 우는 것이 제법 멀리 들려 왔다.
물동이를 이고 강가에 나간 아사녀는 어제 오늘 다르게 얼음이 한뼘 한뼘 녹아 없어지고 그 대신 찰랑찰랑하는 파란 물둘레가 넓어 가는 것이 신통하였다.
바가지로 물 한 동이를 퍼내 놓은 뒤에는 어린애 모양으로 두 손으로 그 수정 같은 물을 움켜 떠보고 손가락 새로 흘려 버리곤 하며 때 가는 줄도 잊었다.
봄이 온다.
아사녀의 염통은 뛴다. 겨우내 그 조그마한 가슴을 엎누르고 지지르던 그 두꺼운 얼음장도 녹아내려 버린 듯하였다.
봄이 오면 첫째로 아버지의 병환이 돌리시리라. 그 무서운 기침이 차차 도수가 줄어지시리라.
지팡이를 끄으시고 뜰에 내려오시어 양지쪽 봉당에 앉으시게만 되면 그 몹쓸 병은 물러나는 날이다. 재작년도 그러하였고 작년도 그러하였으니 금년이라고 아니 나으실 리가 있으랴. 전보담 너무 지치신 듯한 것이 적이 염려가 되기는 되었지만.
그러고 더 좋기는 아사달님 돌아오실 날이 가까워 온 것이다. 떠나신 후 벌써 세 번째 봄이 돌아오질 않느냐. 아버지 말씀대로 탑 둘을 혼잣손에 다 맡아 짓는다 해도 이태면 된다 하셨으니 이번 봄이 오면 햇수로는 벌써 삼 년 날수로 따져도 고스란히 이태가 되지 않느냐. 설마 세 번째 봄이야 넘기실 리 있으랴. 이번 봄에는 기어이 돌아오시고야 마시리라.
참 세월이 쉽기는 쉽구나. 단 한 달도 단 일 년도 그릴 것을 생각하매 까마득하더니 어느결에 이태 삼 년!
아사녀는 정신을 놓고 물을 움키고 또 움키다가 이른 봄의 강물은 아직도 차서 손이 쓰린 것을 깨닫고 치마꼬리에 손을 씻었다.
"내가 미쳤나. 손이 이렇게 쓰린 것도 모르고……."
아사녀는 해죽이 웃고 치마꼬리에서 빼어 낸 새빨갛게 된 손을 호호 불었다.
다가드는 봄 자취와 함께 그의 집에는 기쁜 일과 좋은 일이 꼬리를 맞물고 한꺼번에 닥쳐오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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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동이를 부엌에 내려놓고 아사녀는 쏜살같이 아버지께로 뛰어들어갔다. 오래간만에 저를 찾아준 기쁜 생각을 한시바삐 병든 아버지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막 기침을 하고 나셨는지 헉헉 하는 숨길이 턱에 닿고 번열이 난 탓으로 이불자락을 반나마 걷어쳤는데 그 칼등같이 드러난 갈비뼈를 보매, 아사녀는 지금 당장 꾸고 온 아름다운 꿈이 무참히도 부서지는 것을 느끼었다.
아무리 봄이 온다기로 이렇게 육탈한 아버지가 과연 회춘을 하실 것인가. 그렇게 기다리시던 아사달을 만나 보실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아사녀는 그렇게 좋은 공상을 단념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웠다.
"아버지, 아버지 인제 봄이 와요."
아사녀는 무두무미하게 아버지의 귀에다 대고 부르짖었다. 작년 겨울부터 귀까지 절벽이 되어서 작은 말낱은 알아듣지 못하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무슨 보에 싸인 듯이 흐릿해 보이는 그의 안광이 이때따라 생기가 도는 듯하였다.
"응 누가 와, 아사달이가 와!"
하고 올강볼강하는 팔꿈치로 한옆을 짚고 힘을 부진부진 준다. 그는 분명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아녜요, 아녜요. 아사달님이 온다는 게 아녜요. 봄, 봄이 온다는 말씀예요. 강물이 다 풀리고……."
"뭐, 뭐, 봄, 봄이 와."
부석은 싱겁다는 듯이 떠들썩하게 쳐들었던 몸을 메다붙이듯 가라앉히고 만다.
"얼음장이 풀리고 물이 제법 졸졸 소리를 내고 흘러요."
"……"
부석은 자기에게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스르르 눈을 다시 감아 버린다.
"봄이 오면 그 몹쓸 병환도 나으실 게고……."
"봄이 온다고 내 병이 나을 듯싶으냐."
"그러면요. 일기만 따뜻해지면."
부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고개를 흔들었다느니보담 차라리 흔드는 시늉을 해보이었다. 그리고 역정이 몹시 날 때 하던 버릇으로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 영채 없는 눈으로 잔뜩 천장을 노리었다.
봄이 온다는 말이 이렇게도 아버지의 귀에 거슬릴 줄이야.
아사녀는 한참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문득 아침밥이 늦어 가는 것을 생각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침을 짓는대야 아버지는 미음을 끓여 드리고 밥 먹을 이는 저 하나뿐. 그리고 누룽지를 치워 줄 삽사리 한 마리. 신신치 않은 일이나마 문병 오는 제자들이 달려들기 전에 아침밥을 먹어 치워야 한다.
아사녀는 막 방문을 열고 나가려 할 제 부석은 매우 못마땅한 눈치로 거의 흘겨보다시피 돌아본다. 말은 안 하여도,
"나 혼자 남겨 놓고 또 어디를 나가느냐."
하고 꾸짖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요새 와서 걸핏하면 화를 내시고, 더구나 아사녀가 곁을 떠나는 것은 질색이었다.
어질고 자상스럽던 성미도 병에 부대끼어 변해진 듯하였다.
아사녀는 다시 아버지 곁으로 왔다.
"아버지 잠깐만 혼자 계십시오. 아침밥을 짓고 들어오께."
아사녀가 다시 들어오자 아버지는 돌아누워 버리고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
"녜 아버지, 아침을 지으러 나가야 되지 않아요."
"그래라" 하고 대꾸는커녕 고개까지 끄덕여 주지 않았다.
"녜 아버지, 저는 나가 봐야……."
또 한 번 재우쳐 보았건만 아버지는 눈까지 감고 제 딸이 거기 서 있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아사녀는 망단하여 서성거리며 아버지의 축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 푹 꺼진 눈자위에 눈물이 펑하니 괴어 오른다.
"아버지, 아버지!"
아사녀는 억색하여 부르짖었다.
"그래 봄, 봄이 오면 아사달이 온다더냐."
다시 눈을 뜨는 아버지는 눈귀와 눈초리가 깊은 탓인지 눈물은 흔적도 없이 잦아져서 방금 우신 것 같지도 않으나 그 말소리는 몹시 떨리었다.
그러면 아버지도 자기와 꼭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가.
"오고말곱시오. 떠난 지 벌써 세 번째 봄이 오는데."
"음, 세 번째 봄이. 음, 봄이 완구히 오기 전에 아사달이가 와야 될 텐데. 요 며칠 안에 아사달이가 와야 될 텐데……."
"……"
아사녀는 무슨 뜻인지 잘 알아차릴 수 없었다.
"음, 요 며칠 안에…… 암만해도 너 혼자 남겠구나……."
아버지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다시 눈을 감아 버린다.
66
부석은 자기가 염려하던 바와 같이 그 봄이 채 다 못 와서 썩은 나무가 물오르기 전에 부러지듯이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며칠은 제법 정신기가 돌아났다. 시늉만 보이던 그 악착한 기침도 도수가 줄어진 것 같고 담끓는 소리도 한결 나은 듯하였다.
하루 아침은 물을 길러 나가려는 아사녀를 눈으로 불렀다. 곁에 와 앉은 딸을 퀭한 눈으로 치어다보며 자꾸 안간힘을 쓴다.
"아버지, 아버지 왜 이러셔요."
팔뚝 전체로 방바닥을 짚고 모로 다리를 꼬는 병인을 보고 아사녀는 또 무슨 변이 생기는가 하고 질겁을 하며 부르짖었다.
"왜 이러셔요, 아버지. 글쎄 아버지 가만히 좀 누워 계셔요."
그래도 병자는 부진부진 혼자 애를 쓰다가,
"이, 일으켜. 나를 좀 일으켜."
하고 버르적거린다.
"어유 큰일나게. 안 됩니다, 안 돼요. 몸을 움직이시면 또 그 몹쓸 기침이 나게요."
아사녀는 질색을 하였다.
"아 딸아, 아사녀야. 나, 나를 좀 일으켜 다오, 후, 후."
한참 기를 쓴 탓에 지쳤던지 숨을 모두 꾸려 쉬며 마치 애원이나 하는 것 같다.
"숨길이 이렇게 가쁘신데 일어나셨다가 덧치시면 어떡하게, 어떡하게."
"누웠으니 답답해, 어유 답답해. 이, 일으켜라, 일으켜, 좀."
"글쎄 안 됩니다, 안 돼요. 병환이……."
"병은 인제 다 나았다. 나를 일으켜라, 응. 아가, 아가."
비대발괄이나 하는 것 같다. 이 안타까운 청을 아니 들으려야 안 들을 수 없었다.
아사녀는 두 손을 병자의 등 밑으로 넣었다. 손에 만져지는 아버지의 살은 마치 물기 도는 바위와 같이 엄청나게 무섭고 미끈거렸다.
아사녀는 제 팔이 천근들이 쇳덩이나 얹힌 것처럼 휘어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아버지는 뜻밖에도 거뿐하게 일어앉는다.
아사녀는 병자가 쓰러지지 않도록 이불을 둘레둘레 모아 앞과 양옆을 두리꺼리고 뒤에는 안석삼아 두둑하게 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일어앉기가 무섭게 한바탕 된통 기침을 하였으나 그 몹쓸 고통도 잊은 듯 그 눈물이 펑한 눈으로 웃어 보이었다.
오래간만에도 그 엉덩그려 붙인 얼굴을 펴는 웃음살!
한번 일어나 보시는 것을 이렇듯 신기해하시고 기뻐하실 줄이야! 그런 줄 알았더면 진작 일으켜 드릴 것을!
아사녀도 눈물겨웁도록 그 웃음이 반가웠다. 하마터면 깨어질 듯하던 제 환상이 그대로 들어맞은 것이 어떻게나 기쁜지 몰랐다.
봄이 온다! 강물도 풀리고 아버지의 얼굴에도 봄이 온다.
그날 아침에는 물을 길으면서 저도 모르게 콧노래까지 옹알거리었다.
강물은 엊저녁보담 몰라보리만큼 더 풀리었다. 도끼로 찍어도 깨어지지 않을 성싶던 그 두껍고 튼튼하던 얼음장이 둥둥 떠서 헤실헤실 녹으며 흘러간다. 아직 덜 풀린 얼음장 위에도 덧물이 져서 콸콸 소리를 치며 오는 봄을 그리는 것 같다.
그날 저녁에 아버지는 밥을 달라고 떼를 썼다. 미음도 잘 못 넘기던 어른이 죽도 마다하고 밥을 먹겠다는 데는 아사녀도 기가 막히었다. 부녀간에 얼마를 승강이를 하다가 끝끝내 밥을 반 주발이나 말아서 자시었다. 매우 염려를 하였지만, 그날 밤에 배탈도 나지 않았다.
그 이튿날 아침에는 아사녀가 채 눈도 뜨기 전에 병자는 제 혼자힘으로 일어앉고 말았다.
"어떻게 혼자 일어나셨습니까."
아사녀는 하도 신통해서 웃으며 물었다.
"왜 내 혼자는 못 일어난다더냐."
하고 아버지는 웬일인지 웃지를 않았다. 또 무엇에 역정이 난 것 같았다.
"쌀이 얼마나 남았느냐."
아버지는 불쑥 이런 말을 물었다.
"입쌀은 한 댓 되밖에 안 남았어요."
"그러고 좁쌀은?"
"저번에 팽개님이 팔아 온 것 서 말은 남았을까."
"팽개, 팽개가 좁쌀을 팔아 와."
매우 불쾌한 눈치를 보이다가 땔나무는 누가 해오느냐, 내 옷은 몇 벌이나 되느냐, 너는 봄이 되어도 입을 옷이 있느냐, 내가 잘 장식해 두라던 돌 다루는 기구는 다 어찌 하였느냐, 갖은 것을 미주알고주알 파고 캐며 챙기었다.
그날 해가 어슬어슬해지자 아버지는 오한이 든다고 이불을 덮어도 또 덮으라 하였다.
며칠 뻔한 탓에 마음을 놓았던 아사녀는 더욱 허둥지둥하였다.
밤중이 되자 아사녀의 눈에도 아버지의 얼굴빛이 아주 달라지는 듯하였다.
"아버지, 아버지, 여러 제자들을 불러, 불러오리까."
아사녀는 울며 부르짖었다. 병자는 손을 내어젓고 무슨 말인지 입만 달싹달싹한다.
"네, 아버지, 네, 아버지."
딸은 아버지의 입에 귀를 대었다. 병자는 차오르는 숨길 가운데 낱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 아, 사달."
이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67
초종은 여러 제자들의 운력으로 어렵지 않게 치를 수 있었다. 그 중에도 가려운 데 손이 닿도록 오밀조밀한 팽개의 힘이 더욱 크고도 곰살궂었다.
얼른 보기에 덜렁하고도 투미할 듯하던 그가 큰일을 당하매 이대도록 차근차근하고 자상스러울 줄은 정말 생각 밖이었다.
그는 아사녀가 입을 상복의 치수까지 아는 듯하였다. 어느 때 어떤 절차로 절을 하고 곡을 하는 것까지 또박또박이 알리었다. 제수에 드는 것은 하나도 빼어놓지 않을 뿐인가, 고기가 얼마 생선이 얼마, 심지어 여러 가지 과실 갯수까지 남고 모자라는 것이 없도록 분별해서 사들이었다.
그러고 상청에 들어서면 어느 제자보담 가장 섧게 울었다. 울음이 끝난 뒤에 여러 제자들은 아사녀를 위로하는 척하고 둘러앉아서 지싯지싯 실없는 수작도 더러는 꺼내었지만, 그는 제 할 일만 끝나면 선선히 일어서서 사랑으로 나가 버렸다.
그의 아사녀에 대한 태도는 너무 점잖아서 오히려 데면데면한 편이었다.
장달과 싹불 같은 다른 제자들은 아사녀와 말 한번 주고받을 기회만 있으면 할 말을 다 하고 난 뒤에도 딴청을 부리고 수작을 질질 끌려 하였다. 그러나 절차를 어떻게 할 것과 흥정을 어떻게 할 것 등으로 아사녀와 접촉할 기회가 가장 많은 팽개는 단 한두 마디로 일을 처리할 뿐, 아사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버지마저 여의고 홀로 남은 아사녀, 의지할 곳 없는 아사녀, 홀아비의 손엘망정 귀히 고이 자라나고 풍파란 겪어 보지 못한 아사녀, 아직도 나이 스물셋! 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는 팽개의 이 행동이 어떻게 고마운지 몰랐다. 어떻게 든든한지 몰랐다.
슬픔과 설움이 겹겹이 쌓인 중에도 날과 달은 흘렀다.
엉덩둥 장사도 지났다. 닥쳐오는 하루하루, 휘젓하고 무서운 하루하루가 한달 두달이 되었다.
장달, 작지, 싹불, 웃보는 번차례로 혼자 오고 둘이 오고 대들고 대나며 아사녀를 찾아 주었다. 외로운 그이거니 그들의 오는 것이 반갑지 않음이 아니지만 그 눈치와 말투들이 괴란쩍을 때가 많았다. 걸핏하면 싸움판도 벌어지기도 하였다.
하루는 꼭두식전에 장달이가 그 기다란 키를 휘영휘영 흔들며 들어오다가 먼저 와 앉아 있는 웃보를 보고,
"요 녀석이 어느 틈에 벌써 왔어. 새침데기 골로 빠진다고."
"왜 못 올 데 왔단 말이냐."
"요 녀석이 왜 새벽 대령을 하고. 무슨 자갑스러운 짓을 또 저지르려고."
장달은 그 멍청이 같은 눈알을 디굴디굴 굴린다.
"이 싱거운 키다리가 못 할 말이 없네. 그건 어따 하는 수작이야. 이 기급절사를 할 놈아."
"그러면 왜 왔어, 왔어."
"너는 왜 왔니. 그 짤막한 키를 질질 끌고, 맙시사."
하고 웃보는 아사녀를 향해 웃어 보이었다.
"요 녀석이 살살 눈웃음을 치고 간지럽게. 아사녀님이 아무리 한들 너 따위에 넘어갈 줄 아느냐."
"왜 아사녀님이 무동이라 재주를 넘느냐. 넘어가시게, 하하."
웃보는 제 재담에 만족한 듯이 또 한 번 웃어 보이었다.
"요 녀석이 칠월 열중이 모양으로 입만 까가지고."
"너는 입을 안 까고 그 황새 같은 다리부터 먼저 깠니, 킥킥."
"요 녀석이 또 웃어. 요 녀석아, 네가 그 웃음으로 건너마을 술청 갈보는 호려 내었지만도……."
"이 얼간망둥이 같은 녀석을 그대로 내버려두니까……."
웃보는 눈살을 꼿꼿이 세우더니만 대번에 장달의 따귀를 갈기었다.
장달이 화다닥 일어서자 웃보도 발딱 몸을 일으켰다. 장달은 그 휘청휘청하는 긴 팔을 늘이어 웃보의 멱살을 잡았다. 웃보는 그 턱밑에서 뺑뺑 돌며 그 작달막한 다리로 후당퉁탕 장달의 허벅지를 차느라고 애를 썼다. 장달은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웃보를 휘술레를 돌리었다. 웃보는 깡충 몸을 솟구치듯 하더니 그 여무진 대가리로 장달의 턱을 냅다 받았다.
"아야야!"
장달은 비명을 치고 멱살을 놓자 이번에는 웃보의 허둥거리는 다리가 정통으로 허벅지를 내리지르고 작으나마 세찬 주먹이 장달의 앙가슴을 쥐어질렀다.
"헉!"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장달은 그 꾸부정한 등을 훨신 펴는 듯하더니 그대로 털썩 하고 나동그라졌다.
"이를 어째, 이를 어째."
아사녀는 쩔쩔매며 자빠진 장달에게로 또 달려들려는 웃보의 팔뚝에 매어달렸다.
"놓아 주세요, 놓아 주세요."
"이런 놈은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 놓아야."
웃보는 무엇이 그리 분한지 어깻숨을 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68
장달과 웃보가 싸웠다는 소문은 대번에 쫘 하고 퍼졌다. 한입 두입 건너는 동안에 터무니없는 귀가 달리고 발이 붙어서 소문은 별별 괴란쩍고 망측스러운 형상을 갖추게 되었다.
"웃보가 턱거리를 하는 바람에 장달의 턱이 떨어지고 말았대."
"웃보란 놈이 키는 작아도 다부지기는 무섭지. 그 키다리가 나가떨어지는 걸 좀 봤더면 정말 장관이었을 텐데……."
"아무리 하면 근력이야 장달을 당할 수가 있나. 그 검센 주먹으로 내리쳐서 웃보의 갈빗대가 부러졌대."
"아마 두 개가 부러졌다지."
"아니야, 세 개래."
부러진 갈빗대 수효까지 따지며 살가죽을 헤치고 보고나 온 듯이 말하는 위인도 있었다.
"대체 싸움은 왜 했다는 거야."
"여태까지 그것도 모르시오. 그야말로 종일 통곡에 부지하 마누라 상사격이구려. 장달이가 막 들어서니까 웃보가 아사녀를 끼고 앉았더래."
"저런 망할 녀석 봤나."
"아니야, 그 싱거운 키다리가 새벽같이 달려들어 채 잠도 안 깬 아사녀에게 덤벼들었대."
"그 코끼리 같은 놈이."
"그래 그걸 보고 웃보가 후려갈겼다나 봐."
"웃보란 놈은 새벽에 뭣 하러 아사녀한테 갔던가."
"그야 모르지."
"아니래. 웃보가 먼저 가 있었대."
"장달이가 먼저 갔대도 그러네."
"그야 어느 놈이 먼저든지 똑같은 놈들이지."
"그는 그래."
"아무튼 아사녀가 큰일났군. 아사달이란 놈은 한번 가더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고 아비마저 죽고 없으니 그 젊은것이 탈이 아니 날까."
"그 승냥이떼 같은 제잣놈들이 그냥 둘 리 없지."
"이쁘기나 여간 이뻐야지."
"이놈, 너도 생각이 다르구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침이 그대로 꿀떡꿀떡 넘어가는걸 뭐."
손바닥만 동리의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뭇 입길에 아사녀의 이름이 오르내리었다.
제자들은 아사녀에게 달려와서 제각기 분개한다.
"그놈들이 어디 싸움할 데가 없어서 여기를 와서 치고 받고 하다니 고약한 놈들 같으니."
"그놈이 사람이란 말이오. 스승의 상청이 바로 여기 있는데."
"돌아가신 스승의 눈에 채 흙도 들어가기 전에 그 외동따님을 놀려대다니 똥으로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같으니."
하고 작지는 입에 게거품까지 흘리었다.
"그런 놈들은 인제 이 문전엔 발그림자도 얼씬 못 하게 해놓아야."
싹불이가 이를 득 갈아 붙이었다.
"그래 웃보란 놈이 아주머니 젖가슴에 손을 댔다지요."
작지는 흉장이 막힌다는 듯이 숨을 헐레벌떡거리며 물었다.
"아녜요. 그런 일은 없어요."
아사녀는 고개를 빠뜨리며 얼굴을 붉히었다.
"아니 그놈이 아주머니를 두리쳐 끼고 입을……."
아사녀는 귀를 막고 싶었다.
새빨갛던 그의 얼굴은 대번에 파랗게 질리었다.
"이 사람이 무슨 말을 이렇게 함부로 하나. 설마 그럴 리야 있겠나."
"그럴 리가 다 무엔가. 나는 장달에게 바로 들었는데."
"아니라네. 나는 웃보에게 들은 말이지만 장달이란 놈이 아주머니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아사녀는 그 자리에 고꾸라질 듯하는 몸을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이럴 때에 팽개라도 왔으면 싶었다. 그가 왔으면 이 무도한 자들을 물리쳐 줄 것 같았다. 저희들끼리는 서로 뜯고 으르렁거려도 팽개의 앞에는 고개를 못 드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팽개의 발길은 너무도 드물었다.
그는 특별한 일 없이 결코 아사녀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올 적마다 빈손으로는 오지 않았다.
쌀이 떨어질 만하면 영락없이 쌀을 팔아 가지고 오고, 나무가 거의 다 없어져서 오늘 저녁을 어떡하나 할 때에는 기별이나 한 듯이 나무를 꾸려 가지고 왔다. 하다못해 고기 매와 생선 마리라도 들고야 왔다.
온다 해도 방에는 말할 것 없고 마루에도 잘 올라앉지 않았다. 아무리 아사녀가 권하여도 마루 끝에 그냥 걸터앉았다가 그대로 일어서 버리었다.
말을 한대야 집안 두량에 관한 말뿐 별로 다른 수작이 없었다.
다른 제자들은 오기만 하면 눌러붙고 상없고 무참한 소리를 거침없이 지절거리는 데 진절머리가 난 아사녀에게는 그가 마치 거룩한 부처님같이 보이었다. 너무 설면설면한 것이 도리어 야속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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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던 팽개는 그날 다 저녁때나 되어서 매우 침통한 얼굴찌로 나타났다.
아사녀는 반색을 하며 일어나 마루 끝까지 나와 맞았다.
"어서 오세요, 올라오세요."
그러나 팽개는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를 않고 석고대죄나 할 사람 모양으로 두 손길을 마주잡고 허리를 구부리고 선 채 이윽히 말이 없다.
지금까지 시끌덤벙하던 뭇 아가리들도 자갈 먹은 말처럼 쭉 닫혀지고 말았다. 나이 탓도 탓이려니와 워낙 얻어먹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팽개라면 꿈쩍도 못 하였다. 더구나 오늘같이 된 소리 안 된 소리 떠들고 있다가 팽개의 엄숙한 거동을 보매 더욱 찔끔을 한 것이었다.
한참 만에야 팽개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아주머님 세상에 그런 변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죽이나 놀라셨을까. 모든 것이 내 불찰입니다. 그런 놈들을 단속을 못 한 내 잘못입니다. 무슨 낯으로 아주머님을 뵈올까."
"왜 팽개님 탓이에요, 왜 팽개님 탓이에요."
하고 아사녀는 억색하여 한 말을 되풀이하며 무에라고 뒤끝을 맺을지 몰랐다. 장달과 웃보의 싸움도 싸움이려니와 그 싸움으로 말미암아 해괴한 소문이 나서 차마 입에도 못 담을 소리를 들은 것이 더욱 분하고 원통하였다. 그렇다고 싸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이러한 것은 생판 헛소문이라고 변명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더러운 말을 어찌 입결엔들 올릴 수 있으랴. 그는 오라비 겸 아버지 같은 팽개에게 매어달려 실컷 마음껏 울고 싶었다.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들. 스승의 따님이면 저희에게도 누님이 되려든. 그러니 그런 해참한 일들이 어디 있단 말씀입니까."
"오라버님!"
아사녀는 한번 힘있게 불렀다.
"그러면 오라버님도 그 터무니없는 소문을 믿으십니까."
아사녀는 그 자리에 엎어져 울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팽개는 제 말이 조금 지나친 것을 깨닫고 당장에 돌려 대었다.
"내가 왜 그 종작없는 소문이야 믿겠습니까. 그놈들도 설마 사람인데 그런 일이야 있겠습니까. 내 말은 그놈들이 아주머님께 어쩌고저쩌고 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아주머님 앞에서 말다툼인들 왜 하느냐 말입니다. 더구나 치고 받고 하다니 그런 해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팽개는 십년공부가 나무아미타불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는 사람으로 뿌옇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우리 아주머님 앞에 언감생심인들 그놈들이 그럴 리야 만무하고 말고, 만무하고말고. 내가 미쳤다고 그런 소문을 꿈엔들 믿겠습니까."
얼락녹을락하는 제 변명에 아사녀가 솔깃해지는 눈치를 차리자 팽개는 슬쩍 싹불을 보고 눈짓을 하고 나서,
"다들 사랑으로 나가!"
불호령을 내리며 눈으로 휘몰아 내듯이 좌중을 부라리었다.
싹불이가 무엇에 튕기는 듯이 발딱 일어나 서며,
"자,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떠들고 있을 게 아니라 일어서 나가세."
하고 제가 먼저 마루에서 내려선다. 여러 제자들도 쭉 따라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팽개의 일령지하에 찍소리도 못 하고 움직이는 광경이 아사녀의 눈에 팽개를 여러 곱 돋보이게 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장사를 치르고 난 뒤에 묵혀 둔 사랑에는 먼지가 켜켜이 앉았다.
싹불은 앞장을 서서 비를 들고 나가서 부산하게 쓰레질을 하였다.
팽개의 명령으로 장달과 웃보도 불리어 왔다. 당사자 둘을 대면을 시키고 그 괴변을 듣자는 것이었다.
여러 제자들은 그 두 사람을 치훑고 내리훑어 보았으나 장달의 턱도 그대로 붙어 있고 웃보의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것도 새빨간 거짓말인 듯하였다.
팽개의 문초에 그들은 서로 손찌검을 저편에서 먼저 하였다고 빡빡 세우며 끝장이 나지 않았다.
"너희놈들끼리 손을 먼저 대고 나중 댄 것은 여벌문제다. 아사녀에게 손을 먼저 댄 놈이 어느 놈이냐."
팽개는 원님보담 더 무섭게 호령하였다.
"어느 놈이냐, 어느 놈이야."
몇몇 제자들도 목에 핏대를 올리며 부르짖었다. 기실 두 놈이 싸운 것보담 이 문제가 그들에게 가장 크고 가장 흥미가 있었던 것이다.
"누가 아사녀에게 손을 대어?"
장달은 무슨 영문인 줄도 모른다는 듯이 도로 묻는다.
"이놈, 웃보, 너는."
"이 키다리가 아사녀 듣는 데서 내가 술청 갈보를 호려 내었다고 해서……."
"이놈아 누가 술청 갈보 말이냐, 아사녀 말이지."
"그놈 멀쩡한 놈, 왜 갈보 얘기를 끄집어낼까."
"그래 이놈아, 네 눈은 아사녀가 갈보로 보이더냐."
"그놈 혓바닥을 끊어 놓아라."
여럿이 욱대기는 바람에 웃보는 얼굴이 노래지고 변명 한마디 못 하였다.
아무튼 두 놈이 다 같은 놈이니 이후로는 스승의 문전에는 발그림자도 못 하도록 결말을 지었다.
70
제절제절 제비가 지저귀는 소리에 아사녀는 잠이 깨었다.
가뜩이나 수수산란한 심사가 장달과 웃보의 사단으로 말미암아 더욱 어지러워져서 한 경만 자고 나면 도무지 잠이 오지를 않았다.
아사달이 집에 있고 아버지 생전에는 누가 동여 가도 모르던 잠이었다. 그러던 것이 남편이 떠나면서 잠마저 가져간 듯, 난생 겪어 보지 못한 잠 안 오는 밤이 이따금 그를 찾게 되었다.
첫 이별의 쓰라린 맛도 견디기 어려운데 소태 같은 불면증까지 그를 괴롭게 할 줄이야. 그러나 그것도 한해 두해가 지나가자 고달프고 고소한 잠이 다시 애젊은 그를 찾아왔더니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시매 슬픔과 설움도 둘째 셋째요, 첫째 휘젓하고 무서운 증이 나서 또다시 잠을 이루려야 이룰 수 없었다. 금방 들다가 금방 깨고 코 한번 옳게 못 골아 보고 훤하니 밝는 수도 항다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아찔은 삽사리가 허덕대고 짖는 것이었다. 그 컹컹 소리만 들으면 아사녀는 질겁을 하고 일어앉았다. 간이 콩만해지고 가슴은 까닭 없이 뚝딱거린다.
'누가 오나!'
이런 생각을 하면 괜히 머리끝이 쭈뼛해지고 마음이 오마조마하였다. 햇구멍 막히기가 무섭게 닫아걸었지만 문새들이나 잘 걸려졌는지 방 안을 두리번두리번 살피기도 하였다.
'혹시 아사달님이 오시나.'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 아무리 무서워도 기어코 방문을 바시시 열어 보아야 직성이 풀리었다.
텅 빈 뜰에 달그림자만 어른거릴 때도 있고, 또는 바람이 일렁일렁 불어 일기도 하였다. 어느 때는 캄캄한 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개는 이리 오르르 저리 오르르 뛰어다니며 세차게 짖었다. 하도 여러 번 속아서 인제 개 짖는 소리도 시들해지고 혼자 자는 데 단련이 되어 어찌하면 잠도 곧잘 오게 된 판에 그 지긋지긋한 사단이 벌어졌다.
이럴까 저럴까, 천 가지 만 가지 사려에 어젯밤도 고스란히 밝혔다가 새벽녘에야 잠깐 눈을 붙인 것이 해가 돋도록 지나쳐 자고야 만 것이다.
방문을 열고 나와 보매, 제비 두 마리가 빨랫줄 위에 납신 올라앉아서 추녀 끝을 쳐다보며 고 어여쁜 대가리를 갑신거리며 연상 재잘거린다. 햇빛을 담속 안고 그 흰 뱃바닥과 남빛 날개는 윤이 자르르 흐른다.
아사녀는 가벼운 하품을 한번 하고, 고 혀를 돌돌 말아 붙이고 꽈리를 불어 터뜨리는 듯한 소리를 어느 때까지 듣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움트기 시작한 '봄'은 벌써 활짝 피었다.
'제비도 옛 집을 찾아오는데.'
아사녀는 날짝지근한 몸에 기지개를 한바탕 늘어지게 켜면서 혼자 생각하였다.
아사달은 웬일일까. 늦잡아도 이태면 이룩될 탑이거늘 어째 입때 오지를 않는가. 올 때 지난 지가 벌써 오래이거든 어째 온다는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가.
오늘따라 아사녀는 아사달의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아침 저녁 밤과 낮으로 문득문득 생각 안 나는 것이 아니지만 인제 기다리기에도 지치어서 처음 모양으로 뼈끝이 저리도록 기다려지지는 아니하였다. 더구나 요새 와서는 제자들이 들고 나고 엄벙덤벙하는 바람에 마음놓고 아사달 생각조차 못 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제비가 온 것을 보자 심청이 나도록 아사달이가 그리웠다.
'제비도 왔으니 그도 오려나.'
불현듯 이런 예감이 그의 뒤숭숭한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도 오늘은 꼭 올 거야, 꼭 올 거야.'
마침내 스스로 단정을 해버리었다. 세상없어도 오늘이란 오늘은 아사달이가 터덜거리고 들이닥치고야 말 것 같았다.
금시로 들어설 듯 들어설 듯하여 사립문을 내다보고 또 내다보았다.
"어서 밥을 지어 놓아야."
그는 부리나케 물을 긷고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밥솥에 불을 지피면서도 몇 번을 내다보곤 하였다.
밥을 다 지어 놓고 아사달의 몫으로 밥 한 그릇을 떴다.
삽사리도 주인의 뜻을 아는지 그 몽탕한 꼬리를 흔들며 앞발을 들어 치맛단 위에 깡충깡충 뛰어올랐다.
"너도 서방님이 오늘 오실 줄 아니."
하고 아사녀는 그 숱 많은 대강이를 어루만져 주었다.
오래간만에 차려 놓은 겸상! 밥 한 그릇 더 올려놓은 것만 보아도 휑뎅그레한 집 안이 그득히 차는 듯하였다.
밥상을 차려다 놓고 행길에 나와서 서울길을 눈이 빠지도록 바라보았다.
"내가 미쳤나."
다시 들어와 숟가락을 들었으나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를 않았다.
"설마 오늘 해 안으로야."
그래도 아사녀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71
그날 해도 떨어졌건만 아사녀의 바라고 기다리던 보람도 없이 아사달은 영영 그림자를 나타내지 않았다.
저녁이 되었다. 온 하루를 속았건만 또다시 남편의 저녁밥을 떴다.
암만해도 마음이 키인다.
이대도록 마음이 키이기는 갈린 지 삼 년 만에 처음인 양 싶었다. 세상없어도 오늘 밤에는 들이닥치고야 말 것 같다. 하필 오늘 제비가 날아오고 아침밥 뜨는 것을 보고 삽사리가 꼬리를 흔들며 좋아라고 뛰던 것이 심상할 까닭이 없다.
온다, 온다. 아사달은 분명히 온다.
어둑한 밤길을 재촉하며 허위허위 걷는 아사달의 모양이 자꾸만 눈에 밟히었다.
어디만큼 오시는가. 방장 숫재를 넘어서시는가.
"입때 숫재를 넘어서야 될 말인가. 그야말로 오밤중에나 들어오시게."
아사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숫재는 오늘 낮에 넘어섰으리라. 도적놈이 덕시글덕시글한다는 그 험한 재를 이 밤에 넘으실 리 만무하다. 하마 고란사 앞을 지나시는지 모르리라. 벌써 버드나뭇골 여울을 건너 우리 마을 골목으로 휘어잡아 드신지 모르리라…….
장사 지내고 남은 초로 불까지 환하게 켜놓고 아사녀는 턱없는 공상에 잦아졌다.
오늘 밤따라 삽사리도 철이 났는지 수선도 피지 않고 허청으로 짖지도 않는다. 비록 미물일망정 제 주인의 발자취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지 모른다.
아사녀는 웃목에 묻어 놓은 밥그릇을 몇 번을 다독거리고 몇 번을 만져 보며 귀에 정신을 모으고만 있었다.
어젯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또는 외곬으로 정신을 모은 탓인지 이내 꾸벅꾸벅 졸며 쓰러졌다. 손으로 밥그릇을 부둥켜쥔 채로.
얼마 만에 아사녀는 번쩍 눈을 뜨고 질겁을 하며 일어났다.
'분명히 아사달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잠이 들었는가.'
속으로 속살거리고 아무도 없는 방 안을 휘 둘러보며 무안한 듯이 해죽이 웃었다.
잠을 깨려 하면 할수록 게으름이 길길이 나고 두 눈은 졸아붙는다.
'사립문을 단단히 걸어 두었는데 만일 내가 깜박 잠이 들어 정작 아사달님이 돌아오시어 문을 뚜다려도 모르면 어떡하나.'
졸린 중에도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문간으로 나갔다. 잠 오는 품이 암만해도 한번 잠이 들면 좀처럼 깨어날 것 같지 않다. 차라리 자물쇠를 열고 문고리를 벗겨 두는 것이 나을 성싶었다.
자물쇠를 열어 가지고 들어와 보니 또 허수해서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문을 열어 놓다시피 하고 홀로 자다가 무슨 변이 정말 생기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자물쇠를 쥐고 한참 망단해하다가 마침내 다시 나가서 채우고 들어왔다.
'잔뜩 정신만 차리고 잔다면야 설마 그렇게 잠귀가 어두울까.'
사면이 솔가지로 되는 대로 막아 놓은 엉성한 울타리지만 사립문이라도 잠가 놓으니 아까 열어 놓은 때보담 한결 든든하였다.
그 대신 밤마다 닫아걸던 방문 단속을 그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꼬끼요, 어디선지 첫닭이 운다.
"닭이 울어도 안 오시네."
그는 소리를 내어 종알거렸으나 반은 잠꼬대였다.
잠을 설자리라 하고 여러 번 마음에 새기었지만 변으로 고단한 잠은 요도 안 깔고 쓰러진 그의 몸에 나른하게 퍼지었다.
앞뒤 정전을 돌며 캥캥 하고 사나웁게 짖는 삽사리 소리를 듣고 잠결에도,
'인제야 아사달님이 오시는가 보다.'
생각을 하고,
"요개, 요개."
하며 손까지 내저었으나 꼬박꼬박 오는 잠은 쉽사리 물러서지를 않았다.
뒤꼍에서 버석버석 울타리 뜯는 소리가 나고, '쉬쉬' 하며 개를 으르는 인기척까지 어렴풋이 들렸으나 잠은 막무가내로 퍼붓는다.
'아사달님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번쩍 들며 아사녀가 질겁을 하고 일어날 때는 사푼사푼 하는 발자국 소리가 이미 앞으로 돌았다.
천방지축으로 방문을 열고 나선 얼떨떨한 아사녀의 눈에 웬 검은 그림자가 성큼 하고 마루에 올라서는 것이 보이었다.
72
"아사달님!"
아사녀는 허둥지둥 마주 달려나가며 그 검은 그림자를 향하여 부르짖었다.
"응, 응."
그 검은 그림자는 고개를 수그리고 옷에 먼지를 툭툭 털며 웅얼웅얼 대답을 한다.
"아사달님!"
아사녀는 또 한 번 부르짖고 회오리바람처럼 그리고 그리던 남편의 가슴패기에 몸을 던지려 하였다. 그 순간 검은 그림자는 슬쩍 몸뚱이를 모로 돌리고 왼팔을 꾸부정하게 들어 옆으로 어색하게 아사녀를 껴안으며 오른손으로 눌러쓴 벙거지 차양을 밑으로 잡아늘이었다.
"객지에 고생이 오죽하셨을까."
하고 아사녀는 두 팔로 남편의 등과 배를 얼싸안으며 그 겨드랑이에 얼굴을 비비대고 복받쳐 나오는 울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남편은 너무 억색하여 말을 이루지 못하는 듯,
"응, 응."
역시 코대답만 하고 아내를 안은 팔뚝에도 정겨운 힘다리 하나 없었다. 매우 난처나 한 것같이 엉거주춤하고 서 있을 뿐. 아내는 한참 만에야 샘솟듯 하는 눈물을 가까스로 거두고,
"그래 대공은 다 마치셨어요."
가장 먼저 알고 싶은 말부터 묻고 갸웃이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래."
남편의 대답은 또한 자세치 않았다.
촛불빛이 약하여 워낙 마루까지는 흘러나오지 않았고, 더구나 모로 선 까닭에 귀밑 언저리만 으렷이 보일 따름이었다.
'삼 년 동안에 변하기도 무척 변하였구나.'
아사녀는 마음 그윽이 놀랐다.
밤눈에나마 목덜미와 귀의 모양까지 변한 듯하였다. 그렇다면 제 팔 안에 든 등과 배도 떠날 때와는 딴판으로 두툼하게 살이 오른 것을 느끼었다.
더구나 그 음성조차 못 알아듣도록 달라졌다. 그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청은 어디로 가고, 몇 마디 들어 보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꺽꺽하게 쉬어진 것 같다. 서라벌 사투리가 우락부락하다더니 그새에 사투리가 목소리에까지 젖고 말았는가.
"내가 왜 이러고만 있을까. 오죽이나 다리가 아프실라구. 어서 방으로 들어가세요."
하고 아사녀는 남편의 겨드랑이에 댄 이마를 떼었다.
그럴 겨를도 없이 그 검은 그림자는 얼른 제가 앞장을 서며 팔을 뒤로 돌려 아사녀를 옆에 끼고 어구적어구적 걸었다. 한번 잡은 아내를 놓칠까 보아 두리는 듯.
아내는 뒤에서 남편이 방문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에구머니나, 키도 작아졌네.'
혼잣속으로 속살거렸다.
'몸이 난 까닭에 키까지 달라붙어 보이는가.'
방 안에 들어선 남편은 아랫목으로 아니 가고 웃목 촉대 앞으로 먼저 갔다.
내젓는 손이 얼진 하고 불 위를 스치는 듯하였다. 그 마디가 굵은 뭉툭한 손가락이 환하게 아사녀의 눈에 뜨이자마자 갑자기 촛불은 탁 꺼지고 말았다.
"왜 불을 꺼요."
아사녀는 기겁을 하였다.
"손길에……."
그 검은 그림자는 황급히 변명을 하였다.
"그러면 석유황 개피를 찾아야."
하고 아사녀는 끼인 몸을 재빠르게 빼어 석유황 개피를 얹어 둔 문틀 위를 더듬더듬 찾는데 별안간 그의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하고 손이 사시나무 떨듯 하였다.
아니나다를까, 그 검은 그림자는 등뒤에서 다짜고짜로 아사녀를 부둥켜안으려 하였다.
아사녀는 선뜩 몸을 빼쳤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 억센 오른손 아귀에 아사녀의 왼 손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아사녀는 손을 뿌리치려고 바둥거리며,
"누구요, 누구요."
소리를 질렀다.
"내다, 내다."
그 검은 그림자도 허청거렸다.
"내가 누구란 말이오. 내란 누구야."
"나를 몰라, 나를 몰라."
"몰라요, 몰라."
돌변한 아사녀의 태도에 검은 그리자도 화증을 더럭 내었다.
"아사달을 몰라."
내던지듯 한마디하고 잡힌 손을 으스러지도록 쥐어 낚아챘다.
"아야야, 아니야, 아사달이 아니야."
아사녀는 휘둘리어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버티며 외쳤다.
"아니면 어떻고 기면 어떠냐."
마침내 검은 그림자가 거짓탈을 벗어 버리고 제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어 다시 한번 휘술레를 돌리는 바람에 아사녀의 갸날픈 몸은 허깨비같이 자빠졌다.
어두운 가운데도 아사녀는 그 검은 그림자가 뒤덮는 듯이 제 몸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사람 살리우, 사람 살리우."
아사녀는 바윗덩이에 지질린 것 같은 제 몸을 버르적거리며 악을 악을 썼다.
73
"사람 살리우, 흥, 누가 죽이느냐."
검은 그림자는 씨근씨근 짐승 같은 숨길을 자빠진 아사녀에게 내뿜으며 덤벼들었다.
"애구 죽겠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천근이나 되는 듯한 사내의 몸뚱어리가 무겁게 엎누르는 것을 떠다박지르며 아사녀는 바락바락 악쓰기를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악지가 무슨 악지냐."
검은 그림자는 버둥거리는 아사녀의 두 손목을 한 손에 겸쳐 잡으려고 곱이 끼었다가 소리치는 입부터 틀어막으려 들었다.
밑에 깔린 이가 고개를 사납게 뒤흔들기도 하였거니와, 어둠 속이라 누르고 있는 놈의 손은 허청만 짚고 얼른 입을 찾을 수 없었다.
"사, 사람 살려."
쇠된 소리는 연거푸 밤공기를 찢었다.
검은 그림자는 할 수 없이 깔아 붙였던 몸뚱이를 웅크리며 두 손으로 아사녀의 입을 움키려 하였다.
그 서슬에 아사녀는 잽싸게 몸을 빼쳐 화다닥 일어나며 젖 먹던 힘을 다 들여 대드는 검은 그림자를 뿌리쳤다.
"도적이야, 도적이야."
소리소리 지르며 아사녀는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려 하였건만 문은 손쉽게 열리지 않았다.
마침내 쇠깍지 같은 팔뚝은 아사녀의 가는 허리를 휘청하도록 부둥키고 말았다. 장작개비처럼 뻣뻣한 팔꿈치로 잡힌 이의 겨드랑이를 치슬러 버통개를 지르며 억센 손은 더듬어 올라와 아사녀의 코와 입을 얼싸 틀어막는다.
"끙, 끙."
아사녀는 인제 소리는커녕 숨도 옳게 못 쉬고 안간힘만 쓰며 몸부림을 쳤으나 마치 독수리의 발에 채인 참새가 팔딱거리는 데 지나지 못하였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그 흉측한 팔뚝과 손아귀에는 더욱 무서운 힘이 오르며 잡힌 몸이 바스러지는 것 같다.
"내가 매친 년이야, 매친 년이야."
경황없는 가운데에도 아사녀는 제가 저를 꾸짖었다.
천 리 밖에 있는 남편이 어떻게 오리라고 그 걸신을 하였던고. 하마하마 들이닥칠 줄을 어찌 어림없이 믿었던고. 다른 날 다른 밤을 다 내놓고 하필 이 끔찍한 오늘 밤에 그가 돌아온다 생각하였던고.
아무리 잠결인들 이 흉한 놈이 울타리 뜯는 것을 번연히 듣고도 그냥 내버려 두다니. 그 흉물스런 발자취를 아사달님의 기척으로 반기다니.
어림없이 마음이 달뜬 탓에 이런 욕을 볼 줄이야.
이 짐승 같은 놈을 남편으로 그릇 알아본 이 눈을 빼고 싶다. 이 흉측한 놈을 아사달님이라고 부른 입술을 뜯고 싶다. 그 더러운 몸뚱어리를 얼싸안은 이 팔뚝을 잘라 버리고 싶다…….
아사녀는 이젠 팔딱거리는 기력조차 풀려지는 것을 느끼었다.
제 입술을 깨물며 마지막 용을 쓰는 순간, 그 흉한도 대항거리로 우쩍 기운을 내어 아사녀를 팔랑개비같이 쓰러뜨렸다.
아까 한번 놓친 데 혼이 났던지 흉한은 쓰러진 이의 가슴을 무릎으로 잔뜩 깔아 용신을 못 하게 하고 한 손으론 여전히 입을 틀어막고 있다가 무엇을 생각하였던지 제 벙거지를 벗었다.
벙거지를 뚤뚤 말아 아사녀의 복장과 제 무릎 밑에 끼우고 나서 다시 제 허리끈을 끌렀다.
그리고 다시 제 벙거지를 빼내어 도레질하는 아사녀의 입을 아갈잡이를 하고 허리끈으로 친친 동여맨다.
"이래도 소리를 지를까, 씩."
흉한은 코웃음을 치고 발버둥치는 아사녀의 두 다리를 제 두 무릎 사이에 끼워 누르며 이번에야말로 맥이 풀린 아사녀의 두 손목을 한 손에 휘잡게 되었다.
"인제도, 인제도, 흥, 흥."
아사녀는 무엇보담도 그 흉한의 웃는 소리에 소름이 끼치었다.
놈의 말마따나 인제 아무리 앙탈을 해도 헤어날 길이 없다.
"죽여라, 죽여!"
아사녀는 울대에 피를 끓여 올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개도 제 주인으로 속았는지 짖지도 않는다.
그때였다. 뒤꼍에서 두런두런하는 인기척이 아드막해진 아사녀의 귀에도 들려 왔다.
"그놈이 여기를 뜯고 들어갔네그려."
"원 죽일 놈 같으니."
죽은 듯이 아무 소리가 없던 삽사리가 이제야 어디서 내닫는지 캥캥 하며 오르르 뛰어나온다.
별안간 방문이 환해지며 횃불을 들고 오는 듯한 발자취가 벌써 우둥우둥 마루에서 났다.
74
인기척이 나자 흉한의 손짓은 더욱 황급해졌다. 헤치던 옷자락을 인제 마구 찢어 제친다.
그러나 뜻밖의 사람 소리에 새 기운을 얻은 아사녀가 모질음을 쓰는 바람에 한 손에 겸쳐 쥐었던 두 손목을 놓치고 말았다.
추근추근하고 미련한 흉한도 그제야 만사가 틀린 줄 깨달은 모양이었다.
"엑, 에잇!"
혀를 한번 차고 꼬았던 다리를 풀고 달아날 문을 찾았으나 그 손길이 채 문에 닿기 전에 바깥에서 먼저 문을 열어 젖뜨렸다.
흉한의 코빼기를 지질 듯이 횃불을 들이대고 들어오는 사람은 팽개와 싹불이었다.
"이놈 작지야."
팽개는 흉한을 보고 호통을 쳤다. 흉한은 허리끈을 끄른 탓에 고이춤이 훨렁 벗겨져 내려가는 것을 두 손으로 잔뜩 쥔 채 핏발 선 눈을 희번덕거리며 이 생각지 않은 방해자들을 노려본다.
이런 경우에도 찬찬한 팽개는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들어와 횃불로 먼저 초에 불을 다리고 아사녀 곁으로 와서 우선 아갈잡이한 것부터 끌러 놓았다.
풀어 헤쳐진 젖가슴에는 사나운 손자국이 지나간 자취가 불긋불긋 여기저기 꽃잎을 그리고 짚수세미 다된 아래옷이 그나마 갈기갈기 찢어져 눈덩이 같은 허벅지가 반나마 드러났다. 깨문 입술에는 피가 방울방울 맺혀 떨어진다.
"아주머니!"
팽개는 어색한 듯이 한마디 부르짖었다.
아사녀는 긴장했던 마음이 일시에 풀리자 정신조차 잃어버린 듯 눈까지 감고 그 자리에 그대로 늘어졌는데 쌔근쌔근하는 가쁜 숨길만 지나간 모진 싸움의 벅차고 괴롭던 것을 알리는 듯하다.
"아주머니!"
팽개가 또 한 번 부르짖자 그 은행껍질 같은 눈시울이 살짝 열리다가 제 꼴이 너무 사나운 것을 알아차렸던지 옳게 깔아 놓지도 못한 이불자락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돌아누워 버린다. 팽개는 분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작지에게로 고개를 돌리었다.
작지는 팽개가 아사녀의 곁으로 간 틈을 타서 몸을 빼치려 하였으나 싹불이가 문을 막아서서 있기 때문에 달아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숨만 헐레벌떡거린다.
"이놈, 이 짐승만도 못한 놈, 이게 무슨 짓이냐."
팽개는 어느 틈에 작지 옆에 와서 섰다.
작지는 맹렬한 기세로 돌아서며,
"네놈은 그게 무슨 짓인지 입때 모르느냐. 네놈은 왜 아닌밤중에 남의 홀아씨 자는 방엘 들어왔느냐."
하고 시뻘건 눈을 부라리며 도리어 소리를 버럭버럭 지른다.
"이놈이 별안간에 환장을 했나. 이놈아, 내가 네놈 모양으로 혼자 왔느냐."
팽개는 적반하장격으로 대어드는 작지의 기세에 적이 서먹서먹해졌다.
"이놈아, 둘이만 다니면 고만이냐. 싹불이는 네놈의 병정. 싹불이 같은 놈 열 놈을 데리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네놈이 눈 한 번만 껌적하면 언제든지 꽁무니를 뺄 놈인데……."
"이놈을, 이놈을."
하고 싹불은 펄쩍 뛰며 작지의 뺨을 냅다 갈기었다.
"오냐, 너희놈은 두 놈이고 나는 혼자다. 실컷 때려라, 때려. 이놈 싹불아, 너도 사람의 외양을 갖춘 놈이 그래 쌀됫박이나 얻어먹는다고 친구 여편네 호려 내는 데 병정이나 서고 다닌단 말이냐."
"이놈이, 이놈이."
싹불은 치를 떨며 작지의 멱살을 잡아 끈다.
"이놈 이리 나오너라, 마루로 나오너라."
"나가마, 염려 마라. 너희놈들이 헤살을 논 다음에야 내가 아사녀 방에 만년을 있으면 뭘 하느냐."
후당퉁당 두 놈은 마루에서 엎치락뒤치락하였다.
팽개도 평일의 점잔빼던 것은 어디로 갔는지 덤벼들어 늘신하게 작지를 후려갈겼다.
"이런 놈은 죽여 버려야."
싹불은 작지의 목을 지그시 밟았다.
"어규, 어규, 사람 죽네. 이놈들이 사람 죽이네. 이놈들아, 웃보와 장달도 발을 끊었고, 나도 내일부터는 이 문전에 얼씬을 않을 테니 너희 두 놈이 아사녀를 볶아먹든지 삶아먹든지 마음대로 뜻대로 하려무나. 왜 이놈들아, 너무 좋게 되어서 사람을 죽이려 드느냐."
"이놈이 그래도 아가리를 함부로 놀려."
"그놈을 아갈잽이를 해라. 저 방에 끌러 놓은 제 벙거지와 제 허리끈으로 우리 아주머니 원수를 갚자."
"흥, 우리 아주머니! 이놈 팽개야, 이 음흉한 놈아, 낫살이나 먹은 놈이 어디 계집이 없어서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면서 행투를 내려 드느냐. 아서라, 아서."
작지는 죽도록 얻어맞으면서도 노상 입정을 놀리었다.
75
그 이튿날부터 팽개와 싹불은 아사녀 집의 사랑방을 치우고 들게 되었다.
장달과 웃보 사단쯤은 오히려 깨소금이요, 무참한 작지의 흉행이 또다시 생기는 날이면 한 번은 천우신조로 요행히 모면을 하였지만, 두 번째까지야 외롭고 연약한 아사녀로 다시 막아 내기 어려운 노릇이니 돌아가신 스승의 은혜를 생각한들 멀리 간 친구의 우정을 생각한들 제백사하고라도 외동따님과 젊은 아내를 극진히 두호하고 방비를 해야 한다.
이것은 물론 팽개의 발설로 아사녀에게 그런 사연을 떡먹듯이 일러 듣기었고, 당일도 또 조무래기 제자들을 모아 놓고 어엿이 공포를 하였다. 우두머리 제자들이라야 장달 웃보 작지를 빼어놓고는 팽개와 싹불뿐이요, 그 중에도 우두머리 가는 팽개의 처단하는 일이니 어느 뉘 하나 감히 반대들을 못 하였다.
딴은 그런 고약하고 흉측한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바에야 밤낮으로 파수 보는 사람 하나 둘은 있기도 있어야만 할 일이었다.
"스승의 뼈가 아직 썩지를 않고 아사달이 서라벌에 눈이 등잔같이 살아 있거늘 이런 변괴가 어디 또 있단 말이오. 아무리 말세가 되었기로 그런 인륜도 모르고 스승의 은혜도 모르는 죽여도 죄가 남을 놈들이 어디 있단 말이오."
팽개가 눈물과 소리를 한꺼번에 떨어뜨리며 한바탕 늘어놓을 제 어린 제자들 중에는 덩달아 눈물을 흘리고 작지의 소행에 이를 갈아붙이는 이도 있었다.
아사녀도 팽개와 싹불이가 이젠 노박이로 와 있다는 말에 마음이 얼마나 든든한지 몰랐다.
그날 밤에 작지가 팽개와 싹불에게 얻어맞으면서 끝까지 발악을 하던 말을 아사녀가 아니 들은 것도 아니었다. 어찌하면 '그놈이 그놈이다' 하는 의심이 그의 놀란 가슴을 다시 두근거리게 하지마는 뒤미처,
'아니다, 아니다. 그이는 그럴 이가 아니다. 만 사람을 다 못 믿어도 그이만은 믿어도 좋다.'
이날 이때까지 팽개의 행동을 되삶고 곱삶아 보아도 그런 사색조차 채인 일이 없다.
다른 제자들은 입정도 마구잡이요, 음담패설을 함부로 늘어놓는다. 적이 염양이 있는 위인도 입으로는 딴청을 부려도 자기를 보는 그 눈에는 음탕한 빛을 감추지 못한다. 그 중에 점잖다는 장달이 그러하였고 살살 웃음으로 발라맞추는 웃보가 그러하였다. 더구나 없는 정도 있는 듯이 척척 부닐고 추근추근하게 수작을 붙여 보려고 곱들이 끼이었다.
그러나 팽개는 언제든지 제 할 말만 하면 고만이요, 한번 자기를 바로 보는 눈길조차 보지 못하였다. 지그시 아래로 내려감든지 그렇지 않으면 딴 데를 보았지 다른 제자들처럼 낯이 간지럽도록 맞대해 바라보는 법도 없었다.
그런 이가 그런 나쁜 심정을 가졌다고 생각만이라도 하는 것이 도리어 미안한 일이다, 은혜를 모르는 일이다, 하늘이 무서운 일이다.
작지가 악풀이로 휘동대동 함부로 팽개를 먹어 댄 데 지나지 않는다.
'그이가 그럴 리야, 그 어른이 그럴 리야.'
속으로 뇌고 또 뇌며 아사녀는 여러 번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작지에게 워낙 혼이 몹시 난 터이라, 아무리 팽개를 믿지마는 밤이 되면 방문을 꼭꼭 닫아거는 것을 아사녀는 잊지 않았다.
인제 그는 아사달이가 돌아오기를 그리 몹시 기다리지도 않는다. 오지도 않는 남편을 까닭 없이 오려니 달뜬 생각을 하였다가 그런 몹쓸 변을 당하지 않았는가. 애닯은 그리운 정이 드는 것도 인제 이에 쓴물이 난다. 정말 아사달이가 왔다 해도 밤에는 만나지 않으리라고 속으로 맹서하였다.
그런 끔찍한 일이 골똘한 제 생각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줄이야, 아사달이 꿈에도 모를 노릇이로되 어쩐지 요새 와서는 남편이 야속하고 무심한 것만 같다.
아무리 부여와 서라벌이 멀다 한들 어찌 편지 한 장이 없을까. 삼 년이나 길고 긴 동안에 설마 인편 한 번을 못 얻을까.
'서라벌에는 아름다운 여편네도 많다는데!'
언뜻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 아사녀는 안절부절을 못 하였다. 믿고 믿는 남편이지만 '혹시나' 하는 터무니없는 공상이 독사와 같이 그 부드러운 창자를 물어뜯었다.
팽개와 싹불이가 사랑에 와서 지킨 지도 어느덧 달포가 넘었다.
아사녀의 어림짐작이 그대로 들어맞아 싹불은 더러 안에 드나들었지만 팽개는 이렇다할 볼일이 없고는 결코 안에를 들어오지 않았다.
아사녀가 정 심심하면 도리어 사랑으로 놀러를 나갈 지경이었다.
하루는 싹불이가 안에 들어와 마루에 걸터앉으며,
"아주머니, 난 오늘 서라벌 소식을 들었어요."
무두무미하게 불쑥 이런 말을 하였다.
76
"네? 서라벌 소식을 듣다니요."
아사녀는 제 귀를 의심하는 듯이 채쳐 물었다.
"오늘 아침결에 서라벌에서 온 사람을 만났지요."
"그래 아사달님이 잘 있대요."
하고 아사녀는 무릎을 세워 손으로 턱을 괴고 맥맥히 싹불의 입을 바라본다.
"잘 있기는 있답니다마는……."
싹불은 아사녀의 눈길이 부신 듯이 얼굴을 외우시며 어물어물한다.
"있기는 잘 있는데…… 혹은 무슨 일이?"
아사녀는 눈이 둥그래진다.
"아주머니 들으시기엔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라서……."
하고 싹불은 또 말끝을 흐리마리해 버린다.
"좋으나 나쁘나 적실한 소식만 들어도 얼마큼 속이 시원할 것 아녜요."
"바로 며칠 전에 서라벌을 떠나 온 사람이요, 제 귀로 듣고 제 눈으로 보고 왔다니까 소식이야 적실하지요만, 별로 신통치를 않아서……."
싹불은 채 말도 다 하기 전부터 장히 언짢은 듯이 눈살을 잔뜩 찌푸려 보인다.
"대관절 아사달님께 무슨 변고나 생겼대요. 어서 말씀을 좀 하셔요."
하고 아사녀는 날아 나갈 듯이 주저앉는다.
"허, 바른 대로 말씀을 하면 아주머님께서 상심만 하실 게고…… 어떡하나. 애당초에 말을 끄집어내지 말걸. 방정맞게 입이 가벼워서."
싹불은 매우 난처한 듯이 스스로 개탄하고, 스스로 꾸짖는다.
아사녀는 갈수록 초조해졌다. 무슨 소식이기에 저렇게도 말하기가 거북할까. 뜻밖의 불행과 변괴가 겹겹이 닥치는 내 팔자이거니 남편의 신상인들 좋은 일이 있을 리 있으랴. 무소식이 호소식으로, 불길한 소식이라면 차라리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것이 나을지 모르되 한번 허두를 듣고서야 뒤끝이 궁금하여 또 견딜 수 없었다.
"아무리 언짢은 소식이라도 들려 주세요. 이 위에 더 큰 불행과 슬픔이 있다 해도 나는 조금도 겁을 내지 않을 테니까요."
아사녀의 목소리는 벌써 울멍울멍해졌다.
"차마 아주머니께는 알리기 어려운 소식인데!"
하고 싹불은 제 머리를 짚는다.
"대관절 탑은 어떻게 되었답디까."
"탑이고 뭐이고…… 탑보담 더 큰 일이 생겼답디다. 그래서 탑공사도 벌써 끝이 났을 텐데 입때 미룩미룩하고 있답디다."
"탑보담도 더 큰 일이 무슨 일일까요. 그러면 그렇게 원을 하던 대공도 아직 못 이루고!"
"대공을 이루기는커녕 까딱하면 귀어허지가 될 모양이랍디다."
"녜?"
아사녀는 거의 외마디 소리를 쳤다. 그 차마 하지 못할 이별을 한 것도, 자기가 이 악착한 고생을 하는 것도 오직 대공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 탑 쌓는 일조차 허사라면!
아사녀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정말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단하고 착실하고 얌전한 사람이 그렇게 변할 줄이야."
싹불은 딱하다는 듯이 고개를 빠뜨리고도 슬쩍슬쩍 아사녀의 기색을 곁눈질하며 괴탄괴탄을 한다.
"아사달님이 사람이 변하다니요."
갈수록 심상치 않은 저편의 말에 아사녀의 가슴엔 무엇이 와지끈와지끈 부서지는 듯하다.
"그렇게도 아주머니와 금실이 좋던 그 사람이 변심이 될 줄이야, 변심이 아니라 무여 환장이라니까요."
싹불의 한마디 한마디는 비수와 같이 아사녀의 가슴을 에어 내었다.
"우리도 처음에는 서라벌에서 온 사람 말을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 여무진 사람이 그럴 리가 있느냐고 곧이듣지를 않았지요. 그런데 그 사람인즉 바로 불국사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인데 제 말이 거짓말이라면 눈이라도 빼어 놓겠다고 다짐까지 두었습니다. 그 사람이 올 때에 아사달을 보고 내가 지금 부여로 가는 길이니 가신이라도 있거든 전해 주마고 부탁까지 하였는데 편지 한 장을 부치지 않더라니 그것만 보아도 아사달이가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냐고요. 젊은 아내가 빈방을 지키며 남편 돌아오기만 고대고대를 하는데 저는 그래 한다하는 신라 귀인의 집에 장가를 들어 거드럭거리다니 그런 고약한 인사가 어디 있느냐고 노발대발을 하잖겠습니까."
"설마 장가야 들었을까."
그래도 남편을 어디까지 믿는 아사녀이었다.
싹불은 비웃는 듯이,
"설마 장가가 다 뭐예요. 벌써 자식까지 낳았다는데."
"벌써 자식까지!"
아사녀는 부르짖고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77
팽개는 사랑방에 번듯이 누워서 눈을 껌벅껌벅하며 무엇을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다가, 싹불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앉는다.
"어떻게 되었나."
싹불이가 채 자리도 잡기 전에 황황히 물었다.
"어떻게 되긴, 그야 여불없지."
하고 싹불은 싱글싱글 웃는다.
"그래 아무 의심도 않고 자네 말을 꼭 믿는 듯하던가."
"믿는 듯하기만 해, 내님의 말솜씨가 어떠마한데 제가 안 넘어가고 배기나."
"어유 장하다."
"장하다뿐이냐. 세상에 날고 기는 놈도 내님의 능청에 안 속을 장사가 없거든 고까짓 계집애의 여린 속쯤 뒤흔들어 놓기야 여반장이지."
하고 싹불은 의기양양하게 뽐낸다.
"그래, 자네 말만 들을 만하고 있고 아사녀는 아무 말도 않던가."
"말이 무슨 말인가, 그 자리에 그냥 고꾸라진걸."
"그 자리에 고꾸라지다께?"
"아사달이가 자식을 낳았다니까 대번에 폭 고꾸라지고 말데."
"자식까지 낳았다는 건 너무 과한데."
"장가만 들었다니까 어디 믿던가. 그래 얼른 자식까지 낳은 걸 보고 온 사람이 있다고 꾸며 대었지."
"원수엣놈, 능청맞게 자식 낳았다는 건 어떻게 생각이 났더람."
하고 팽개는 무릎을 탁 친다.
"딴은 말을 들여대자면 게까지 가기는 가야 될 거야."
"자네 시키는 대로 계집만 얻었다면 기연가미연가하지만 자식을 낳았다고 해야 아주 콱 믿는 것이거든."
"아사달이 그놈도 객지에서 삼 년이나 뒹굴었으니 그 흔한 서라벌 계집애 어느 눈먼 년 한 년 안 걸릴 리 없지만두 자식까지 낳았다는 건 생판 거짓말 같지 않을까."
"원 이런 사람 보게. 아니 그러면 귀인 댁에 장가들었다는 건 곧이들리겠나. 시골뜨기 석수장이 따위에게 어느 귀인 댁 따님이 미쳤다고 거들떠나 볼 것인가."
"그렇게 따지고 보면 그렇기도 하지. 아무러나 아사녀가 감쪽같이 속아넘어가기만 하면 고만이니깐."
"그 말을 듣자 그 자리에 기급절사를 하였다는밖에."
"그래 고꾸라진 걸 어떡하고 나왔나. 또 음충맞게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껴안아 일으키고 수선을 피웠겠구나."
팽개는 능글능글 웃으며 농담 비슷하게 말은 하나마 그 눈에는 쌍심지가 선 듯하였다.
"그야말로 삼십리강짤세. 누가 눈독을 들이는 게라고 내가 손가락인들 대겠나."
"그러면 뒷수습은 어떻게 했단 말인가."
"뒷수습인지 앞수습인지 아주 학질을 뗐네. 누가 뒤에서 세찬 발길로 냅다 지르기나 한 듯이 코방아를 찧고 폭 엎어지며 숨도 쉬지 않네 그려. 그대로 기색이나 될 줄 알고 아주 쩔쩔매었네. 급한 마음으로는 잡아일으키고도 싶었지만 자네 강짜가 무서우니 손도 댈 수 없고."
"그 좋은 계제에 자네 같은 개잘량이가 손을 안 대고 배겨."
하고 팽개는 눈을 흡뜨다시피 하고 싹불을 노려본다.
"맙시사, 왜 또 작지놈의 신세가 되게, 헤헤."
한번 웃고 싹불은 개가 제 주인을 쳐다보듯 팽개의 눈치를 살피고 나서,
"그래 할 수 있던가. 손은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뒤제침을 잔뜩 하고…… 헤헤…… 입만 아사녀 귀에다 대고 초혼 부르듯 불렀지."
싹불은 두 손을 비끄러맨 듯이 엉덩이에 붙이고 입이 거의 방바닥에 닿도록 고개를 숙여 그때 시늉을 해보이었다.
팽개도 의심을 풀고 껄껄 웃었다. 싹불은 팽개가 웃는 바람에 더욱 신이 나서,
"아주머니 아주머니, 왜 이럽시오. 제발 정신을 좀 차립시오, 녜,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고 한동안 비대발괄을 하다시피 하니까 그제야 엎어진 채로,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아요' 하는 그 꾀꼬리 같은 고운 목소리가 들려 오겠지. 그러더니 바시시 몸을 일으키는데 그 상기된 얼굴은 발그스름하게 도화빛이 돌고 어떻게 어여쁜지 송두리째 아삭아삭 깨물어 먹고 싶으데."
"에끼, 흉측하게. 남은 죽네 사네 하는 판인데."
"누가 죽네 사네 하게 만들었기에. 이번 일엔 상금이 후해야 되네."
"성사가 된다면야 주다뿐이냐."
"속기는 아주 쩍말없이 속았느니. 몸을 일으키는 길로 뒤도 아니 돌아보고 제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탁 닫아 버리데. 아사달을 바라고 기다리는 게 헛일인 줄 안 다음에야 자네 품속으로 기어들 것은 뻔한 노릇 아닌가."
78
그 이튿날 한낮이 겨워도 아사녀가 일어나는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아침밥을 지으려 물동이를 이고 나갈 때면 으레 사랑방을 갸웃이 들여다보고 방긋 웃으며,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림자도 나타내지 않을 뿐인가, 팽개와 싹불이가 번차례로 안을 기웃기웃 엿보았으나 아사녀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어째 일어나지를 않을까."
팽개가 싹불을 보고 걱정을 한다.
"아사달놈이 자식을 낳았다는 바람에 무척 속이 상한 게로군. 그것 보게, 내님의 구변이야말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재주를 가졌단 말이어."
하고 싹불은 맹숭맹숭한 턱을 쓰다듬으며 거드럭거린다.
"또 제 자랑인가. 너무 구변이 좋아서 아주 죽을 작정을 하고 일어나지 않는 것도 큰일인데."
"그쯤 되어야 아사달놈을 잡아먹고 싶을 것 아닌가."
"웬만하고 마음이 돌아서야지, 너무 애절을 하는 것도 도리어 일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원 그 사람 다심도 하네. 계집이란 한번 토라지면 고만이지 방해가 무슨 방해란 말인가."
"계집의 독한 마음에 자결이나 해버리면 그야말로 십년공부 아미타불 아닌가."
"죽기를 그렇게 간대로 죽어. 몇 번 쪽쪽 울고 제 손으로 제 가슴이나 뚜다리다가 말겠지. 그 기틀을 자네가 잃지 말고 슬슬 녹여 내어야 되는 법이거든."
하고 싹불은 팽개를 보며 눈을 끔쩍끔쩍해 보인다.
"괜히 섣불리 서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게. 한동안 뜸을 들여야."
하고 팽개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다가,
"아무튼 계집의 질투란 무서운 거야. 아사녀같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계집도 제 사내가 외도를 했단 말에 그렇게 치를 떠니……."
"이제야 알았나."
"우리 단둘이 얘기지만 실상 이번 꾀도 내 여편네가 가르쳐 준 것이나 진배없네."
"그러면 아주머니께서도 그 켯속을 아신단 말인가."
"원 그 사람, 그 왈패가 알아보게, 큰일나게. 스승의 따님이 홀로 있는데 뭇 제자놈들이 덤비니 스승의 은혜를 생각한들 극진히 보호를 해야 된다고 그럴싸하게 꾸며 대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그 왈패가 어디 곧이를 듣는가. 아따 성인군자 또 나셨네. 그래 당신이 아무 다른 마음 없이 아사녀를 보호만 하겠소. 그야 말짝으로 괭이에게 반찬가게를 보라는 격이지. 그래서 부부간에 대판 싸움까지 하였다네."
"그 아주머니 눈이 무섭지 무서워. 벌써 자네 속을 화경 들여다보듯 환하게 아시네그려."
"아사녀 그년도 매친 년이지. 제 서방이 벌써 삼 년째 안 올 때는 벌써 알아볼 조지, 빈방만 지키고 있으면 뭘 한단 말인고. 열녀비나 하나 얻어 걸릴 줄 알고. 냉큼 적당한 자리에 개가나 갈 게지, 하지 않겠나. 그 말을 듣고 보니 딴은 아사달놈이 삼 년 템이나 계집 없이 얼무적거릴 리도 없겠고 아사녀도 제 사내가 딴 계집을 얻었단 말만 들으면 피장파장으로 놀아날 것도 같단 말이거든."
"어규 용해라. 나는 그 꾀만은 그래도 자네가 지어 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주머니 꾀란 말이지."
"슬쩍 지나가는 말이라도 얼른 듣고 터득을 해내는 것이 더욱 용하지 않은가."
"성사가 되어도 걱정은 걱정인데, 아주머니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아사녀 마음이 나한테로만 쏠린다면야 그까짓 계집 열 명을 버린들 아까울 거야 있겠나. 그것도 아사녀에게서 미끄러진 바람에 화풀이로 얻은 것이니."
하고 팽개는 한숨을 휘 내어쉬었다.
실상 아사달과 경쟁을 하다가 무참히 패한 팽개는 꽃거리로 달뜬 마음을 달리었었다. 지금 같이 사는 계집은 그때에 얻은 것으로 어엿한 장가처도 아니지만, 아사녀에게로 골똘히 쏟아진 마음 때문에 다른 좋은 자리가 바이 없지도 않았으되 입때까지 그럭저럭 지내 온 것이었다.
"그 아주머니가 어떠신데 자네가 함부로 내버렸다가는 큰코다치리. 요새도 자네는 하루가 멀다고 번을 들지 않는가."
"어떡하나. 이 일이 되기 전에야 제 비위도 맞춰 줘야지. 잠깐잠깐 다녀오는 것이지만 이틀 밤만 걸려도 마구 강짜를 부리니."
"누구 계집은 안 그런 줄 아나. 그러기에 계집 둘 가진 놈의 창자는 호랑이도 먹지를 않는다는밖에."
"정작 둘이나 되고 그러면 좋기나 하게."
"그야 떼어놓은 당상이지, 헤헤."
"사람 놀리지 말고 아사녀에게 좀 들어가 보게."
79
팽개의 안에 들어가 보란 말에 싹불은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었다.
"나는 싫으이. 인제는 자네가 어쩌든지 하게. 나는 그 우는 꼴을 다시 보기 싫으이."
"누구는 그 우는 꼴이 보기 좋다던가. 자네가 꾸며 논 일이니 자네가 들어가 보게나."
"자네는 장래 실속이나 바라지만 내야 무슨 까닭인가. 그 말끄러미 바라보는 눈길과 딱 마주치면 아주 아찔이야. 까닭 없이 가슴이 뻑적지근해지고……."
싹불은 연상 고개를 흔든다.
"어제 쌀 닷 말 보낸 것이 적어서 그러나. 지금 와서 그런 약한 소리를 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그 고개를 배틀고 앉은 꼴은 차마 볼 수가 있어야지."
하고 싹불은 그 밀룽밀룽한 눈두덩을 잔뜩 찌푸린다.
두 짝패는 한동안 승강이를 하다가 필경엔 둘이 다 같이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팽개와 싹불은 아사녀의 방문 앞까지 왔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싹불이가 먼저 불러 보았다. 방 안에서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아무 대꾸가 없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왜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하고 싹불은 넌지시 방문을 잡아당겨 보았으나 문고리가 안으로 걸린 듯하였다.
싹불은 팽개를 돌아보고 눈을 두리번두리번하며 가만히 속살거렸다.
"문까지 꼭꼭 닫아걸었는데."
"또 좀 불러 보게. 잠이 든지도 모르니."
팽개는 싹불을 재촉하였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문고리를 좀 벗겨 주세요."
싹불은 또다시 외쳤다.
방 안에서 뒤쳐 눕는 기척이 나며,
"나가 주세요. 제가 몸이 아파서……."
모기만 한 소리가 들려왔다.
"편찮으시다고 온종일 아무것도 자시지 않으면 큰일납니다. 편찮으실수록 곡기를 하셔야 기운을 차리시지요."
이번에는 팽개가 자상스럽게 타일렀다.
"오라버니세요."
방 안에서도 팽개의 목청을 알아듣고 반색을 하는 모양이었다.
"됐네, 됐네. 자네 목소리를 듣고 저렇게 반길 때는……."
싹불은 눈을 깔아 메치며 팽개를 보고 수군거렸다.
팽개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싹불을 쿡쿡 쥐어지르고 나서,
"네, 팽개도 왔습니다. 문을 잠깐 열어 주십시오."
방 안에서는 이윽히 문을 열까말까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럼 조금 이따 들어오십시오. 방을 좀 치워야……."
"방이야 치우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잠깐 뵈옵기만 하면 고만이니까요. 그대로 누워서도 좋습니다. 별일 없으신 신관만 뵈오면 고만입니다."
팽개의 말씨에는 정이 뚝뚝 떨어졌다.
"어떡하나."
방 안에서는 난처한 듯이 혼자말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그러시다면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겠습니다마는!"
"아녜요, 아녜요. 그냥 들어오십시오."
하고 문고리를 벗기는 소리가 났다.
팽개가 앞서고 싹불이가 뒤따라 들어오는데 아사녀는 기신 없는 몸을 끌다시피 하며 벽에 쓰러진 듯이 기대이고 이불자락으로 미처 버선도 못 신은 발을 가리었다.
어찌하면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여위었을까. 척색진 두 볼은 우벼 파간 듯이 말라붙었고 그 어여쁜 눈시울은 통통히 부어올랐다. 볼록하던 가슴 언저리가 눈에 뜨일 만큼 가라앉았는데 숨 한번 들이쉬고 내어쉬는 것도 무척 힘이 드는 듯 어깨가 들먹들먹한다. 팽개와 싹불이도 차마 바로 보지를 못하였다.
"어디가 그렇게 편찮으신지 우선 약을 지어 와야겠는데."
팽개는 눈을 떨어뜨려 방바닥만 내려다보며 딱한 듯이 물었다.
"약 안 먹어도 차차 낫겠지요."
"아닙니다. 하룻밤 사이에 저렇듯 얼굴이 틀리신 걸 보면 여간 중병이 아니신데 약을 안 잡수셔야 될 말입니까."
"약을 먹는다고 나을 병이 아녜요."
하고 아사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이 싹불에게 들어 알았습니다마는 아사달이가 괘씸이야 하시겠지만 그래도 너무 상심을 하시면 몸이 부지를 하실 수 있습니까."
위로한다는 팽개의 말이 도리어 아사녀의 속을 점점이 에어 내는 것 같았다.
"죽어도 아까웁지 않을 목숨인데 몸이 좀 축가는 거야……."
아사녀는 호 한숨을 내쉬었다.
80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몸져눕고 기동조차 못 하게 되었다. 머리는 쪼개는 듯 몸은 불덩이같이 달고 뼈 마디마디가 쑤시고 저리었다. 그의 마음의 병은 마침내 몸의 병을 이루고 만 것이다.
잠이나 들었으면 그 몹쓸 고통을 잊으련만 잠을 청하려 눈을 감으면 오라는 잠은 아니 오고 갖가지 무서운 환영이 그를 사로잡고 괴롭게 굴었다. 기껏 잠을 이룬대야 이내 가위가 눌리고 정체 모를 어마어마한 괴물이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그를 찍어눌렀다.
"윽, 윽."
하고 비명을 치는 소리가 분명히 제 귀에도 들리건만 얼른 잠이 깨이지 않아서 무한 애를 켠다. 그 괴물은 어느 때는 징글징글한 작지의 모양도 되어 보이고, 어느 때는 웃보, 장달, 싹불의 낯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어찌 보면 이 네 사람 얼굴 외에 난생 처음 보는 기괴한 탈을 뒤집어쓴 무리들이 떼를 지어 달려들기도 하였다.
간신히 그 지긋지긋한 잠을 깨고 나면 처음에는 천장도 보이고 벽도 보이고 방바닥도 보이고 이것이 우리집이거니, 이것이 내 방이거니 생각하매 겨우 안심의 숨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이었다. 뒤미처 그의 핑핑 내어둘리는 시선에는 더 진저리나고 악착한 헛것이 보이었다.
귀밑머리를 충충 땋은 아름다운 서라벌 계집을 끼고서 아사달이 현연히 내닫는다. 그 아름다운 눈매는 그 계집을 살가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들여다본다. 그 연연한 입술엔 행복에 가득 찬 웃음을 웃고 있다. 그의 팔은 다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그 계집의 허리에 감긴다…….
"무슨 그럴 리야, 무슨 그럴 리야."
아사녀는 뇌고 또 뇌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지만 제 눈시울 속속들이 들어박힌 듯한 그 헛것은 더욱 또렷또렷하게 생생하게 살아온다.
아사달이가 아이놈을 갸둥질쳐 주는 광경까지 보인다.
아이놈의 상판은 쥐새끼같이 작고 가무잡잡한 것이 볼품이 없었으나, 그 숱 많은 머리가 다팔다팔하며 좋아라고 깔깔거리는데 그걸 보고 그 계집과 아사달이가 입이 벌어져서 찢어지도록 웃어 댄다…….
"나는 이 고생을 하는데……."
아사녀는 고만 새삼스럽게 설움이 복받치고 눈엣불이 번쩍번쩍 나는 듯하였다.
처음 싹불에게 아사달이가 딴 계집을 얻어 자식까지 낳았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아사녀는 앞뒤를 생각할 나위도 없이 벼락이 내리치는 것처럼 정신이 아뜩하고 말았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해 가지고 방으로 들어와 되는 대로 쓰러져서 곰곰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쳐 나갈 것만 같았다.
이 세상에 육친이라고 오직 한 분밖에 없는 아버지를 여의는 큰 슬픔을 지그시 견딘 것도, 모래알을 씹는 듯한 길고 긴 삼 년의 날짜를 보낸 것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그 해참한 변을 겪은 것도 누구를 위함이었던가. 무엇을 바람이었던가.
지금 방장 당하는 처지가 쓸쓸하면 쓸쓸할수록 답답하면 답답할수록 지긋지긋하면 지긋지긋할수록 아사달을 만나는 날의 기쁨이 크고 더 알뜰하고 더 깨가 쏟아질 것이 아니었던가.
지금은 캄캄한 어둠이 저를 겹겹이 에둘렀지만 내일!이면 찬란한 햇발이 저를 맞으리라.
방장 걷는 이 길은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는 것 같지만 모레!면 꽃밭 속으로 포근포근한 잔디를 밟게 되리라…….
아무리 슬픈 가운데도, 아무리 억색한 가운데도, 아사녀의 앞에는 언제든지 희망의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뻗쳐 있던 것이다.
작지의 변을 죽을 애를 쓰고 모면을 하고 나매, 그 달뜨는 정은 얼마쯤 움츠러들었지만, 기다리지 않는 척하고도 기다리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였다.
"웬걸 올라고."
하며 마음을 단속을 하면서도 실상인즉 무망중에 쑥 들이닥치면 더욱 반가울 것을 미리 장만을 해두려는 것이다.
"아직 공사 끝날 날이 멀고말고."
스스로 조비비는 듯한 마음을 타이르고 꾸짖었지만,
"이 보름 안으로야, 이달 그믐 안으로야."
하고 전보담 날짜만 멀리 잡아 보았었다.
가깝게 잡은 날짜가 맞지 않는 것은 오히려 심상하였지만, 멀리 잡은 날짜도 맞지 않는 데는 화증이 절로 났다.
'혹시나' 하는, 검은 구름장이 그 빛나는 희망의 무지개를 가끔 흐리게 시작하기는 이때부터였다.
81
여불없이 아사달을 데려다가 줄 듯하던 세 번째 봄도 어느덧 지나가 버렸다.
탑 둘을 혼자 맡아 짓는 데도 이태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 말을 처음 들을 때 아사녀는 어마 싶었었다.
아무리 대공이기로 그렇게 날짜야 걸리랴. 아버지께서 내 마음을 눅여 주시느라고 일부러 멀리 잡아 말씀을 하시는 것이거니 하고 제 깐으로 날수로 잔뜩 일 년, 햇수로 이태만을 잡아들면 아사달은 돌아오리라 믿었었다.
그러던 것이 벌써 햇수로 삼 년에 들어 반 년이 지났으니 날수로 따지어도 이태 반이나 되어 가는 폭이다.
그렇게 까마득하게 멀리 잡으신 아버지의 말씀대로 한다 해도 아사달은 벌써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로 말하면 석수 일에는 천하에 으뜸가는 어른이었으니, 그 어른의 짐작 밖에 벗어날 공사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러면 병환이 나셨는가.'
그러나 아사녀는 저의 방정맞은 생각을 곧 물리쳤다.
몸은 비록 약해 보일망정 그렇게 무병한 이가, 그렇게 강단이 무서운 이가 그런 큰일을 맡았거늘 병날 리가 없을 것 같다.
암만해도 탑은 다 이룩된 것 같다. 아버지의 둘도 없는 수제자인 그이거든 그 능란한 솜씨에 입때 일이 끝나지 않을 리는 만무할 것 같다.
'그러면 아사달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이 생각은 마치 잘 드는 칼과 같이 그의 염통을 에어 내었다.
사치한 맨드리가 기름독에서 빠져나온 듯하다는 서라벌 서울 여자, 그 비싼 녹둣가루를 비누로 풀어 때를 벗겨 내고 그보담 더 비싼 은가루와 옥가루를 처덕처덕 얼굴에 바른다는 서울 여자, 먹으로 눈썹에 황을 그리고 심지어 입술에까지 주사를 올린다는 서울 여자, 울금향과 사향을 옷고름과 허리띠에 찬다는 서울 여자, 그러니 아무리 박색이라도 달과 같이 꽃과 같이 환하게 어여쁘게 보인다는 서울 여자, 십 리 밖에서도 그 그윽하고도 야릇한 향기가 사내의 마음을 호려 낸다는 서울 여자!
논다니, 활량이가 파리떼 모양으로 우글우글하다는 서라벌, 어수룩한 시골뜨기만 보면 마구잡이로 붙들어 간다는 서라벌.
그 몹쓸 계집들이 그렇게도 잘나신 아사달님을 그냥 둘까. 독사의 무리와 같이 아사달님에게 달려들지 않을까. 온몸을 친친 휘감아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지 않을까.
엿가락 늘어진 뭇 계집의 팔과 다리의 등쌀에서 빼쳐나지를 못하고 버르적거리는 안타까운 아사달의 모양이 눈앞에 얼진거린다.
그렇게 얌전한 그가, 그렇게 단단한 그가, 그렇게 나를 사랑하고 소중히 아는 그가, 백명 천명 계집이 덤빈들 빠질 리가!
스스로 아사달을 위해 변명을 해보았지만 암만해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었다.
이런 판에 싹불의 그 말을 듣고 보니 흑! 하고 아니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나날이 닥쳐오는 것이란 좋은 일, 기쁜 일은 도무지 없고, 불행한 일 악착한 꼴만 겪고 나니 인제 아사녀는 제 전정의 행운에 대한 믿음성조차 흔들리게 되었다. 이렇게 굽이굽이 알뜰살뜰히 궂은 노릇만 당하게 되니 앞으로도 좋은 운이 행여나 찾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앞날의 찬란한 무지개의 한 모서리가 흐릿하게 비쳐 올 때 싹불의 한마디는 그를 천길 만길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뜨리기에 넉넉하였다.
더구나 귀인 댁 따님에게 장가를 드셨다니 왜 그 좋은 호강을 마다시고 이 부여 두메로 돌아오시랴. 딸 낳고 아들 낳고 무궁한 영화를 누리려든 자식조차 없는 이 가난뱅이 석수장이 딸을 찾아올 것인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금기둥 옥기둥 속에서 으리으리하게 푸근푸근하게 지내실 것을 이 오막살이 샛풀집엘 기어들 것이랴.
"안 오신다, 안 오신다. 오실 리 만무하다."
아사녀는 열이 뜬 머릿속으로 잠꼬대같이 속살거렸다.
"안 오신다, 안 오셔."
그는 곁에서 누가 굳이굳이 아사달이가 온다는 사람이나 있는 것처럼 화를 더럭더럭 내며 중얼거리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의 한 길뿐이었다.
이만큼 목숨을 이어온 것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왜 안 죽고 살았던고. 아버지 돌아가실 때 왜 따라 죽지 않고 살았던고!"
그는 긴 수건도 생각해 보았다.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사자수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자결을 결행하기에도 그는 너무 기신이 없었다.
"이렇게 몹시 아프니 앓아 죽을 날도 며칠이 남았을까."
아사녀는 몸을 바수어 내는 듯한 아픔을 억지로 참으며 고대고대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리었다.
82
제 목숨이 한시바삐 끊어지기를 바라는 아사녀이거니 팽개의 지어 온 약을 받기는 받을지언정 달여 먹을 리는 없었다.
먹지 않을 약이매 애당초부터 거절을 해버렸으면 그만이겠으되 남은 정성스럽게도 지어다 주는 것을 몰풍스럽게 물리칠 도리도 없거니와 더구나 팽개에게는 그렇지 못할 사정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느덧 반 년이 겨웠는데 이나마도 살아온 것은 온전히 그이의 덕이 아니냐. 단 한 입이니 그리 많다고는 못 할지라도 나무랑 쌀이랑 반찬거리를 그이 아니면 어느 뉘가 돌보아 줄 것인가.
더구나 만일 그이가 아니었던들 그 감때사나운 제자들을 누가 제어를 할 것인가.
우선 작지의 흉행만 하더라도 그이가 때맞추어 뛰어오지 않았더면 어느 지경에 갔을는지 모른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더라도 이 일 한 가지만도 그는 아사녀에게는 둘도 없는 은인이 아닐 수 없다. 그나 그뿐인가. 요새 와서는 자기의 집안 일을 다 버리고 오직 스승의 따님이란 까닭으로 수직까지 와서 해주는 그 갸륵한 정성! 아무리 세상이 넓다 한들 이렇듯 고마운 이는 또다시 없으리라.
그가 무슨 일이 있어 잠시 잠깐 다녀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아사녀는 마음속으로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고 몇 번이나 부르짖은지 모른다.
뼈와 피가 섞인 친동기간이면 이보담 더 자상스럽고 곰살궂으랴.
다른 사람 아닌 그이가 지어다 주는 약인데 안 먹을 때 안 먹더라도 어떻게 거절하랴. 만약 약까지 안 먹는다면 그이는 얼마나 더 슬퍼하고 애를 켤 것인가.
"뭐 화가 뜨시고 몸살 같으니 이 약만 쓰시면 곧 낫는답니다."
팽개는 다섯 첩을 한데 묶은 약꾸러미를 내어놓았다.
"약은 왜 또 지어 오셨어요. 곧 나을 것을……."
아사녀는 펄펄 끓는 몸을 반쯤 일으키려고 애를 쓰며 미안해하였다.
"얼른 곧 달여 잡수셔야 할 텐데……."
하고 팽개는 입맛을 쩍쩍 다시었다. 약 달일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고대 달여 먹어요."
"저렇게 기동도 옳게 못 하시는 이가 어떻게 약을 달이실 수도 없고!"
팽개는 연상 걱정을 하였다.
"아녜요. 이제 한숨만 자고 나면 몸이 풀릴 것 같애요."
아사녀는 제 병이 대단치 않다는 것을 알리려 하였다.
"실없이 중환이신데 주무시고 나신다 한들……."
팽개는 미심따운 듯이 생전 처음으로 아사녀의 얼굴을 바로 보며 머뭇머뭇하였다.
"한 경만 자고 나서 곧 달여 먹을 테에요. 제가 오라버니 말씀을 거슬릴 리야……."
하고 아사녀는 팽개의 근심하는 것이 민망하여서 가까스로 웃어 보이었다.
슬쩍 아사녀의 웃는 얼굴을 쏘아보고 팽개는 다시 얼굴을 외우시며 아주 진국으로,
"그럭저럭 다 저녁때가 되었는데 주무시고 나시면 밤중이 될걸."
"그러면 내일 아침에 달여 먹어도 괜찮지 않아요."
하고 아사녀는 어리광피듯 또 한 번 상그레 웃어 보이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그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약이란 으레 주무시기 전에 잡수셔야 된답니다. 더구나 오늘은 왼종일 잡수신 것도 없고. 첫째 무에든지 잡수셔야 될 텐데."
"왼종일 안 먹기는요, 아침도 먹었는데."
아사녀는 난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한마디하고 말았다. 거짓말을 할지언정 제 은인으로 하여금 다시 저로 말미암아 걱정은 시키기 싫었던 것이다.
"아침 지으시는 기척도 없으시던데."
팽개의 말씨는 어디까지 점잖고 어디까지 공손하였으나 그 말도 어디인지 차차 무관한 가락을 띠어 온다.
아사녀는 조금 헤벌룸해진 옷깃을 여미었다. 여자의 본능으로 경계는 하면서도 말투는 저도 모를 사이에 팽개를 닮아 갔다.
"밥 짓기가 귀찮아서 식은 밥을 데워 먹고 말았지요."
하고 제 거짓말이 차차 늘어가는 것이 무안해서 열오른 얼굴을 더욱 붉히었다.
그 순간 팽개의 눈길은 병아리를 움키려는 독수리의 눈깔처럼 이상하게 번쩍이었으나, 아사녀가 제 무안에 겨워 마주치는 눈을 돌렸기 때문에 그 무서운 눈치를 놓치고 말았다.
만일 아사녀가 그 눈치를 보았던들 지금까지 그에게 올리던 감사가 대번에 스러졌으리라. 붙던 정도 뚝 떨어지고 진저리를 쳤으리라.
"자시기는 무얼 자시어, 허허."
팽개는 한번 엄벙하게 웃고 나서 다시 얼굴빛을 바루고,
"그 큰일인데."
하고 무엇을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간다.
83
팽개가 사랑에 나와 보니 싹불은 책상다리를 하고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고 있다.
팽개는 다짜고짜로 자는 이의 책상다리를 걷어차 버렸다.
"음, 음."
자는 이는 소태나 씹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입맛을 다시면서도 책상다리째 모로 쓰러질 뿐 그대로 잠을 깨지 못한다.
팽개는 베고 있는 목침을 또다시 걷어질렀다. 목침이 튕겨 나가고 머리가 쿵 하며 방바닥에 떨어지자 그제야 자던 이는,
"애쿠 아야야, 이게 웬일이야."
하고 벌떡 일어앉으며 졸아붙는 두 눈을 크게 떠서 두리번거린다.
"이 사람아, 그새 잠이 무슨 잠이람."
하고 도리어 팽개가 뇌까리자 싹불은 더럭 골딱지를 내며,
"이건 사람을 제긴 줄 아나. 왜 툭툭 발길질을 하고……."
하고 그 멀룽멀룽한 눈시울을 걷어올리며 눈알을 부라리다가 팽개의 눈초리가 사나워지는 것을 알아보고는,
"나는 누구라구, 헤헤."
농쳐 웃어 버린다.
"차판이 하판인데 자빠져서 코만 곤단 말인가."
팽개는 치밀어오른 분이 아직 덜 가라앉았는지 매우 우락부락한 어조다.
싹불은 제 상판을 두 손으로 치문지르고 내리문지르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어디 밤잠을 자야지. 그러니 어째 곤하지를 않겠나."
그는 격에 맞지 않는 괭이 같은 간드러진 목청을 내며 거슬러진 팽개의 비위를 얼러맞추려 하였다.
"누가 자네더러 밤잠을 자지 말라던가."
"누가 자지 말란 건 아니지만 자연 그렇게 되지를 않았나."
"무슨 일이 자연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팽개는 시치미를 뚝 떼었다.
"아사녀를 지키자니 온밤을 집에 가 잘 수 없고, 틈틈이 가는 거라야 마누라가 바가지만 긁고, 낮잠은 자다가 또 자네에게 불호령이나 듣고, 어디 사람 살겠나."
싹불의 이 측은한 하소연에 성이 잔뜩 풍기어 부어올랐던 팽개의 볼은 슬며시 풀어졌다.
싹불은 저 먹여 살려 주는 주인의 낯빛이 풀리는 꼴을 보고 웃으며 너스레를 쳤다.
"그래 내 자는 새에 일은 다되었나. 아사녀가 약을 먹던가."
"약은 먹지 않아도 일은 되어 가는 낌새가 보이데."
팽개는 뻥긋뻥긋 벌어지려는 입 가장자리를 억지로 여민다.
"응 그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아무리 철석 같은 아사녀도 별수가 없네그려. 그래 그 낌새란 건 어떻게 보이더란 말인가?"
"이 사람 자네가 왜 그렇게 열고가 나서 야단인가."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거든. 자네 좋은 일에 낸들 안 좋겠나."
"인제 생글생글 웃어까지 보이데……."
싹불은 팽개의 말을 가로채었다.
"뭐 아사녀가 웃어 보여? 그 빼물기만 하던 간나이가 웃어까지 보인다면야 일은 다된 일이게."
"웃기만 한 줄 아나. 옷깃을 싹 여미고 살짝 얼굴까지 붉혀 보였다네."
"응, 얼굴까지 붉히어! 흥, 바로 새색시가 새신랑을 보고 수접을 떠는 격일세그려."
"여보게 말 말게. 나도 오입 십 년에 쓴맛 단맛을 다 본 놈이지만 아사녀가 수줍어하는 근경은 처음 겪어 보았네. 그 아기자기한 재미란 하늘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텔세."
"흥, 자네는 인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네."
"아사달이란 놈이 일 년 템이나 그 재미를 마음놓고 본 것을 생각하니 치가 떨리데, 치가 떨리어."
하고 팽개는 아사달이가 바로 앞에나 있는 듯이 허공을 노려보며 이를 득 갈아붙이었다.
"앗게, 아서. 그 계집만 빼앗으면 고만이지 지난 일까지 이를 갈 거야 무엇 있나."
팽개는 그 건성으로 도는 눈방울을 더욱 굴리며 펄펄 뛴다.
"그놈이, 그놈이, 그 아사달이란 놈이 내게서 아사녀를 빼앗아갔지. 내가 왜 남의 계집을 빼앗는단 말인가. 그 고생을 하고 그 공을 들이고 헌 계집 다된 것을 도로 찾아온들 그렇게 신통할 거야 무에 있단 말인가."
하고 노발대발하며 날뛰는 팽개의 꼴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던 싹불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길은 갈 탓이고, 말은 할 탓이라고 자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성도 싶네마는, 아사녀 같은 아름다운 계집을 한평생 데리고 살려는 놈은 너무 욕심이 과한 놈이지. 아사녀가 열 번 시집을 가고 열한 번째 나에게 온대도 나는 하늘에 오른 것보담 더 좋아하겠네."
하며 싹불은 어느 때 흐른지 모르는 제 입 가장자리의 침을 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