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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탑 1

무영탑

현진건

 

1

신라 경덕왕 시절.

사월 초파일이 내일 모레. 서라벌 서울에는 석가 탄일 준비가 한창 바쁘다.

눌지왕 때부터 몰래몰래 이 나라에 스며들어 온 서천 서역국 부처님 도는 법흥왕 말엽 이차돈의 순교로 활짝 길이 열리고, 삼한 통일을 거쳐 성덕, 경덕에 이르자 그 찬란한 연꽃은 필 대로 피었다. 그 당시, 초파일이라면 설, 대보름, 팔월 한가위보담 더 큰 명절이었다.

파일놀이에 첫째가는 연등과 관등. 여느 집에서도 가지각색 등을 만들기에 야단법석이다. 모난 놈에 둥근 놈, 기름한 놈, 암팡진 놈, 장구 모양, 북 모양, 푸드득 나는 양의 봉황새, 엉금엉금 기는 양의 자라 남생이…….

도림의 대를 베어 곰살궂은 잔손질로 휘엉휘청 등틀을 휘어매고 선두리는 금당지에 은당지, 싸바르는 종이도 오색이 영롱하다.

여느 집도 이러하거니, 하물며 부처님을 모신 절들이랴. 대천세계를 밝게 밝게 비출 등 준비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축하식 봉행 절차와 법연 베풀 자리며 재 올릴 분별에 웬만한 절들은 벌써 여러 밤을 하얗게 밝히었다. 더구나 황룡사, 분황사, 백률사 같은 큰절들은 당일 거둥을 맞이할 차비에 더욱 공을 들이고 애를 썼다. 다른 절차는 다 그만두고라도 잠시 잠깐이나마 임금님 듭실 옥좌와 고관대작을 영접할 처소를 마련하기에 쩔쩔매었다. 비지땀들을 흘리고 쩔쩔매기는 하면서도 중들은 저절로 으쓱으쓱 어깻바람이 났다. 한 번 거둥에 쌀과 금과 은과 피륙이 산더미로 쏟아지는 까닭이다. 수가 좋으면 몇십 결 보전의 시주가 내리기도 한다. 부처님이 나셨으니 좋고 임금님이 오시니 좋고 그보다 더 좋기는 생기는 것이 많은 것이요, 음식이 질번질번하고 새옷을 갈아입게 되니 대덕 중덕의 웃두리중은 물론이요, 비구 사미 따위의 아랫두리까지 싱글벙글 한시절을 만난 셈이다.

그럴싸해서 그런지는 모르되 목탁과 경쇠 소리도 요새따라 더한층 우렁차게 활기를 띤 듯하다.

온 서라벌이 발칵 뒤집히도록 야단법석을 하는 가운데 오직 불국사만은 다 가무러진 잿불처럼 절 안이 괴괴하다.

불국사로 말하자면 신라에 크게 불법을 일으키신 제 이십삼대 법흥왕 시대의 초창으로 오늘날 장안에 즐비한 팔백팔 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찰이요, 초창 이후 여러 번 중창과 수리를 겪어 그 규모의 굉걸웅장한 품도 어느 절보담 못하지 않은 대찰이다. 더구나 서라벌의 제일 명산 토함산을 등진 그 절터는 비단 서울 근처뿐 아니라, 신라 전국을 뒤져 보아도 그런 절묘한 자리를 찾아내기는 그리 쉽지 않으리라. 뒤로는 빼어낸 봉우리를 느신하게 짊어지고, 좌우로는 울창한 송림을 슬며시 끌어당기며, 쪽으로 그린 듯한 호숫가에 넌지시 발을 내어밀었는데, 앞으론 광활한 평야가 휠쩍 열리어, 눈길 가는 곳 막힐 데 없으니 명찰에 절승까지 겸하였다 함은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이만한 절이거니 파일 차림도 응당 굉장하련마는, 도무지 그런 기척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

밤이 되었건만, 다른 절처럼 이글이글 하늘을 태울 듯한 화톳불도 놓지 않았다. 펄렁거리는 횃불도 볼 수 없었다. 마지못해 단 듯한 불전의 추녀 끝에 두어 개 촛불이 가물거릴 뿐 온 절 안이 죽은 듯이 고요한데 이윽고 '큰방'에서 두런두런 인기척이 난다.

 

'큰방'이란 절에 무슨 일이 있으면 공사하는 처소요, 또 이 절 주지 아상(阿湘)노장의 거처하는 곳이다.

 

2

불국사 중들은 저녁 불공을 마쳤으니 제각기 제 처소로 돌아가도 좋으련마는 그들의 발길은 의논이나 한 듯이 큰방으로 하나씩 둘씩 모여들었다.

풀기 하나 없는 그들은 주지 아상노장을 중심으로 한 겹 에워싸듯 둘러앉는다.

그들은 슬금슬금 노장의 기색을 살피며 무슨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듯.

그러나 아상노장은 감중련하고 그린 듯이 앉았을 뿐이요, 이가 빠져서 합죽하게 다문 입은 열릴 것 같지도 않다.

노장의 눈치를 보다가 지친 그들은 인제 저희들끼리 서로서로 눈치를 바라본다. 다 같이 제 흉중에 먹은 마음을 누가 활활 속시원하게 직설거를 해줄까 하고 서로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벌리는 사람은 없었다.

한동안 답답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누구인지 휘 하고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소리가 무슨 군호 모양으로 여기저기에서 반향이 일어나고, 어떤 이는 제법 일장 설법이나 할 듯이 칵 하고 큰기침까지 하였다.

마침내 말문은 터졌다.

", 작년 파일도 그냥 지내고……." 누구인지 혼자말같이 중얼거린다.

"작년뿐인가, 재작년 파일도 개 보름 쇠듯 안 했는가베!"

중늙은이 중 하나가 뒤받는다. 나이는 한 오십 가량밖에 되지 않았으나 겉늙어서 뺨은 살 하나 없이 홀쭉 빨았고 중풍증 탓인지 또는 신경질 탓인지 뾰쪽하게 내민 턱을 덜덜 떠는데 목청만은 쨍쨍하게 쇠되다.

"금년에는 꼭 공사를 끝내고 낙성 겸 굉장하게 파일을 지낼까 했더니 젠장맞을 그 원수엣놈의 탑이……."

구레나룻 자리가 새파란 이 절의 원주(살림 맡은 중)가 불쑥 이런 말을 하다가, 제 말씨가 너무 사나운 데 스스로 주춤하고, 말은 중동무이를 하였으나마, 그 부리부리한 눈방울을 불평스러운 듯이 구을린다.

아상노장은 조는 듯하던 눈을 번쩍 떴다. 침같이 숭숭한 하얗게 센 눈썹 밑에서 그 눈은 이상한 광채를 발한다. 입을 놀리던 중들은 움찔하였으나 노장의 눈은 스르르 다시 감기고 말았다.

"그야 그렇게 말할 건 아냐. 어느 건 공든 탑이라고 그야 공이야 들지. 그렇지만 너무 오래란 말이야, 너무 오래야. 벌써 삼 년의 세월이 걸리지 않았나. 삼 년, 삼 년이면 일 년이 삼백육십 일이라, 가만있자 날수로 치면 천 날이 넘지 않나베. 에이 참 날짜로 따져 보니 엄청나군, 엄청나."

'떠는턱'은 뼈만 남은 앙살한 손가락을 꼽아 가며 한바탕 늘어놓는다.

"삼 년, , 몇 석삼 년이 걸릴지……."

누구인지 곱씹는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예 그런 말일랑 입 밖에도 내지 말게. 삼 년, 삼 년이 셋씩 걸리면 어떡하란 말인고. 우리는 말라죽으란 말인가."

떠는턱은 손을 쩔레쩔레 흔들며 펄쩍 뛴다.

"뚱뚱보는 말라깽이 되고, 말라깽이는 말라죽고, 킥킥."

어디서인지 웃음 소리가 터진다.

떠는턱의 옴팡한 눈엔 대번에 쌍심지가 선다. 그리고 웃음 터진 곳을 노려보며,

"오 이놈, 네놈은 살푸덤이가 얼마나 붙었다고. 그래 석삼 년씩 굶어 봐라. 산돼지같이 살이 더 찔 테니."

"그러구말구. '장실' 말씀이 옳다뿐이오. 다 이를 말이오……."

장실(丈室)이란 중들끼리 서로 위해 부르는 칭호다.

아까 말실수로 무참했던 원주가 기회를 얻은 듯이 떠는턱의 역성을 드는 척하면서 쏟아 놓기 시작한다.

"그러께 작년만 그냥 넘긴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워낙 대공이라 이태쯤 걸리는 건 용혹무괴로되, 금년 파일까지도 끝을 못 내다니. 원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노라리야 노라리. 굼벵이가 쌓아도 천 날을 쌓으면 열층탑이라도 열은 쌓았을 것 아니냐 말야……."

말씨는 점점 우락부락해 간다.

"자 이건 역군일세 뭘세, 밥을 몇 솥을 쪄내도 금세금세 없어지고 들어오는 게 뭐 있느냐 말야. 대공을 끝내기 전이라 해서, 거둥 한번이 계신가, 대갓집에서 어엿한 행차가 있는가. 여느 집 재 올리는 것마저 절금이니 대관절 우리네는 뭘 먹고 살란 말이냐 말야."

하고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리친다.

 

3

화랑을 쫓아다니다가 입산한 지 얼마 안 되는 '빨갱이'가 그 별명마따나 다혈질의 시뻘건 얼굴을 더욱 붉히며 자리를 헤치고 나앉는다.

말하기 전부터 목줄대에 핏대가 선다.

"우리 신라에도 사람이 없지 않은데 도대체 그런 막중 대사를 부여놈 따위에게 맡기는 게 틀렸단 말이오. 그래 우리 신라에는 석수장이가 한 놈도 없단 말이오. 아무리 한들 그래 그까짓 부여놈 재주를 못 당한단 말이오. 꾀죄죄한 잔손질은 혹 빠질는지 모르지만 큰 솜씨야 어디 어림 반푼 어치나 있단 말이오. 정말 이 서라벌 석수들이 적이 핏기나 있는 놈들 같으면 목을 따고 죽어 마땅하지. 그놈들도 다 죽었지그려. 그런 대공을 시골뜨기 석수에게 빼앗기고 열손 재배하고 가만히들 있으니. 에이 못생긴 것들, 다 죽은 것들……."

팔을 부르걷고 분개한다.

"아니 여보, 그 말은 그 부여 석수장이를 욕하는 말이오, 또는 우리 신라 석수장이를 욕하는 말이오. 말이란 종을 잡을 수 있게 해야지."

본래부터 빨갱이의 화랑 냄새를 싫어하는 떠는턱이 한마디 따진다.

"누가 말시비를 캐자는 거요. 이를테면 그렇단 말이지. 그래, 신라에는 석수장이가 씨가 말랐단 말이오." 빨갱이는 빨근하며 뇌까린다.

", 부여는 신라 땅이 아닌가베. 원 내가 석수장이를 만든단 말인가. 씨가 마르고 안 마른 걸 내가 어찌 알꼬."

"이건 말책만 잡으면 제일이오. 아니 그래 그놈이 제 재주만 믿고 거드름을 피는 게 장실은 아니꼽지 않단 말이오. 능라주단으로 제 처소를 꾸미고 진수성찬에 엇들고 받드니 아주 제가 젠체하고 이건 누구를 보고 인사 한마디를 할 줄 아나, 혹 수작을 붙여 보아도 대꾸는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하고 마니 그래 그놈이 벙어리란 말이요, 먹쟁이란 말이오. 도대체 제 명색이 뭐란 말이오. 한금해야 돌 쪼는 석수장이 아니오. 원 아니꼽살스럽게."

"그건 또 딴말이지."

"아니 그래 장실은 끝끝내 남의 비윗장만 흔들어 놓을 작정이오. 딴말이 무슨 딴말이오. 다 한말이지. 아무튼 일을 해야 공사가 끝이 나든지 재랄을 하든지 할 것 아니오. 이건 멀거니 탑 위에 앉아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탑을 쌓는 게 아니라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잡으려는 건지. 이걸 나날이 쳐다보고 오늘이나 얼마쯤 되었나, 내일이나 끝이 나려나 하는 우리 불국사 승려야말로 불쌍하지 않소. 그놈이 아마 고량진미에 배때기가 부르고 대우가 융숭하니까 제 고장에 돌아가기가 싫어서 일부러 공사를 질질 끌기만 하는 거야."

"처음 올 적에는 밥 한 그릇씩 그냥 때려눕히더니만 인젠 아주 귀골이 됩셨는지 밥은 한 술밖에 안 뜨니……."

원주가 빈정거린다.

", 배때기에 발기름이 오르면 고량진미도 보리겨떡만 못한 법이거든."

빨갱이가 또 개탄한다.

뭇입이 찧고 까부는 사이에 졸고만 있던 아상노장은 아까부터 코까지 드르렁드르렁 골다가 이때야 또 그 영채 도는 눈을 번쩍 떠서 원주를 본다.

"요새도 그렇게 공양을 자시지 않느냐." 위엄 있고도 간곡한 목소리다.

원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굽실하며,

", 한술을 뜰까말까 하오이다."

아상노장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 그것 안되었구나. 저번에도 일렀지만 별좌(반찬 맡은 중)를 신칙해서 찬 같은 것 정결스럽게 하느냐."

"녜에, 여러 번 신칙을 했습니다. 찬이야 있는 대로는 다 올리옵지요."

"각별 신칙하여라. 먼 데 손님이 병환이나 나시면 어떡하느냐. 알아듣느냐."

부드러우나마 꾸짖는 듯한 타이르는 듯한 말조다. 그리고 인제는 내 할 말은 다 했으니 너희들이야 얼마를 떠들든지 나는 자던 잠이나 자겠다는 듯이 다시 눈을 감아 버린다. 빨갱이와 원주는 못마땅한 듯이 고개를 외우시고 입을 삐쭉한다.

 

4

빨갱이는 끊어진 수작의 실마리를 찾으며 원주를 보고,

"참 언젠가 장실이 이야기한 것이지만 요즈막은 공양은 어데로 올린다누. 제 처소로 올리는가 또는 탑 위까지 모셔 올리는가."

빨갱이는 노장을 슬슬 곁눈질하고 깍듯이 위해 올리며 빈정빈정한다.

"단층만 쌓았을 적 말이지 인제야 탑 위로는 못 올리지. 벌써 두 층이나 쌓았으니까 무슨 주제로 그 꼭대기에서야 공양을 받겠다 하겠소. 아침 점심은 제 방으로 가져가고 저녁은 역시 일터로 가져간다오. 대중공양(중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밥 먹는 것)에나 한몫 끼었으면 좋으련마는 이건 밥 먹는 자리까지 일정하질 않으니 원 성가시어."

하다가 아상노장을 꺼리어 말소리를 낮춘다.

"우리끼리 말이지만 언제든지 아침상은 그대로 나온대. 한나절까지 뒤여진 듯이 자빠져 있다가 오시가 훨씬 지난 뒤에야 겨우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개울에 나가 늘어지게 세수를 하고 목욕을 하고 제 방에 돌아와서는 점심을 뜨는 둥 만 둥 일터로 올라간대. 일터에 올라가서는 그대로 꿇어앉아서 그래도 잠이 미흡한지 꾸벅꾸벅 졸기만 하고 저녁때가 되어도 내려올 줄을 모르니 부득이 저녁상을 일터로 가져갈 수밖에 있소. 공양을 보고도 내려오지를 않고 손짓으로 탑 아래 두라는 뜻만 보인다오. 상이 났는가 하고 몇 번을 가보아도 상이 그대로 있다는구려. 열 나절이나 스무 나절이나 제 한이 차야 부시시 내려와서 몇 술을 뜨고 또 올라간대. 그러니 일껏 지은 더운 밥이 다 식고 국과 찬은 먼지투성이가 되고……."

"제 고장 있을 때 식은 밥 먹던 것이 버릇이 되어서 더운 밥을 먹으면 혓바닥이 부르터 오르는 게지." 빨갱이가 혀를 찬다.

"다 어두운 뒤에 또 올라가면 무슨 일을 할 거냐 말야, ."

원주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기 말이지. 그래 탑 위에 올라가면 역시 등신같이 앉아만 있다오. 밤이 이슥하도록 내려올 생각도 않고 어느 틈에 제 방에 내려와서 자는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밖에."

"그러면 언제 일은 한다는 말이오."

떠는턱이 묻는다.

"글쎄 그게 별판이야. 그래도 그 잔손질 많은 다보탑을 끝내고 석가탑을 시작한 것만 별판이지. 삼 년이 아니라 삼십 년이 걸려도!"

"그것 참 불가사의로군. 이녁들 말 같을 지경이면 그야말로 그 사람이 신통력을 가진 게로구려. 일하는 낌새도 없는데 세상에도 진기한 탑이 이루어지니."

떠는턱이 또 말에 티를 넣었다.

"그러면 내가 거짓말을 한단 말이오." 원주는 그 사나운 눈알을 흘긴다.

"이 좌중에 물어 보시오. 요지막에 그 작자의 일하는 걸 본 사람이 있나 없나."

"어 그렇게 진심을 내지 마시기오. 일하는 싹도 없는데 일이 되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베. 딴은 나도 일하는 걸 보지는 못했으니."

"이상은 한 노릇이야. 우리도 그 석수가 탑 위에 앉고 서고 하는 건 봤지만 손대는 것은 못 보았는걸."

누가 맞장구를 친다. 좌중도 그렇다는 듯이 고개들을 끄덕인다.

"저는 여러 번 봤어요."

먼발치에 앉아 있던 어린 사미 하나가 말참례를 한다.

", 차돌이냐. 참 너는 잘 알겠구나. 그 방에서 시중을 드는 터이니깐. 그래 그 어른이 어느 때 일을 하시던."

떠는턱은 차돌의 말에 옳다구나 하는 듯이 반색을 한다.

파일을 잘 못 쉬는 분풀이로 부여 석공에게 원정이 가게 되고, 원정 끝에 그 인격과 행동까지 티를 뜯고, 나중에는 애당초에 일은 손에도 대지를 않은 것처럼 비난의 화살이 날아,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밤 가는 줄도 몰랐다.

우 하고 토함산 기슭을 스쳐 내려오는 산바람은 큰방 장지를 흔들고 첫여름의 눅눅한 풀 향기를 들이친다.

우울과 불평과 원망에 어리인 방 안의 무거운 공기도 이 물처럼 흘러 들어오는 밤바람에 얼마쯤 완화된 듯하였다.

추녀 끝에 달린 풍경이 떵그렁떵그렁 운다.

꼬끼요, 아랫마을에서 첫 홰를 치는 닭소리가 그윽이 들려 온다.

 

5

"그래, 차돌아, 그 어른이 어느 때 일을 하시던." 떠는턱은 또 한 번 재촉을 한다.

차돌은 그 총기 있는 눈을 깜박거리며 여러 스님을 돌아본다. 이런 자리에 말을 하기가 주눅이 드는 듯, 그 여상진 흰 얼굴을 살짝 붉힌다.

"어서 얘기를 하려무나. 갑갑하구나. 본 대로 말을 못 해---"

원주는 벌써 호령조다.

차돌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고 어디서부터 허두를 내어야 옳을지 몰라 망설이는 듯하다가 가느나마 차근차근한 목소리로 말을 끄집어내었다.

온 방의 귀와 눈은 차돌의 입술로 몰리었다.

"언젠가 제가 새벽녘에 잠을 깨었지요. 그래 무심코 아랫목을 보니까, 그 어른이 누워 계시던 자리에 그 어른이 계시지를 않겠지요. 뒷간에나 가셨나 하고, 그냥 쓰러져 누우려다가 웬일인지 그날은 잠이 설들어요. 암만 기다려도 그 어른은 오시지를 않고, 휘저엇한 게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나요……." 하고 차돌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옳지, 그래 어린것이 무섭기도 하겠지. 그래, 그래서……."

떠는턱이 연방 재촉을 한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가 아마 작년 겨울인가 봐요. 눈보라가 몹시 쳐서 문풍지는 덜덜 떨고…… 잠은 점점 달아나고 무섭기는 하고, 그래 제가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옹크리고 있노라니 눈보라가 버석버석 창에 부딪히는데 어디선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와요. 쩡쩡…… 그때 '' 하시는 스님은 아직 안 나오시고 온 절 안이 괴괴한데 이 난데없는 소리를 듣고 저는 간이 콩만했다가 겁결에도, 오 옳지 이 어른이 이 눈 오시는 새벽에도 탑을 지으시나 부다 하는 생각이 문득 들겠지요!"

", 그래서."

어느결엔지 아상노장이 눈을 떠서 귀여운 듯이 차돌을 바라본다.

"제가 그대로 뛰어나와 버석버석하는 눈 위로 줄달음질을 쳐서 탑 모시는 곳으로 올라가 보았지요. 새벽이라 해도 아직 날이 덜 새어서 어둑어둑했지만 눈길은 환했습니다. 올라가 보니 아니나다를까 그 어른이 정을 들고 한참 바쁘게 일을 하시더군요. 제가 곁에 가도 사람 오는 줄도 모르시고 머리에 등에 눈을 뒤집어쓰신 채 정과 망치를 번개같이 놀리시겠지요. 거기가 워낙 바람 모지가 되어서 저는 얼마를 서 있지를 못해 귀가 떨어져 달아날 것 같고 발이 쓰리고 온몸이 덜덜 떨려서 '에이 추워' 소리가 저절로 나와 버렸습니다. 그제야 그 어른이 놀란 듯이 저를 돌아보시는데 그 얼굴에는 구슬 같은 땀이……."

"그 추운데 땀이……."

누가 감탄을 한다.

"저는 숨길도 얼어붙을 것 같은데 그 어른의 비 오듯 하는 땀을 보고 정말 놀랐어요. 그 어른은 저를 보시고 빙그레 웃으시며 '추운데 왜 나왔니. 어서 들어가거라. 감기 들라.' 그래도 제가 머뭇머뭇하고 섰노라니 ', 네가 혼자 무서워서 나온 게로구나.' 마치 제 속을 들여다보시듯이 말씀을 하시고 저를 데리고 내려오시는데, 저는 오금이 얼어붙어 댓 자국을 못 옮기겠는데 그 어른은 여상스럽게 걸어오시겠지요. 참 신통력을 가지신 어른이에요."

일좌의 얼굴에는 감동하는 빛이 흘렀다.

"그래, 그 후에도 일하는 걸 또 본 적이 있니."

원주가 종주먹을 댈 듯이 묻는다.

"보고말고요. 낮에 틈틈이 일하시는 것도 저는 가끔 봅니다마는 사람을 기하시는지 인기척만 나면 곧 일을 중지하시지요. 요새도 꼭 밤을 새우시는걸요. 아침이 되어 여러 스님이 일어나실 때쯤 해야 처소로 돌아오셔요. 제 귀에는 밤중에도 정소리가 역력히 들려 와요."

"참말 명공은 명공이야."

"천수관세음의 현신이시어."

"그런 명공을 얻은 것은 첫째 부처님의 법력이시고 둘째 우리 절의 복이야."

"아니 우리 신라의 복이지."

제가끔 떠들 때에 차돌은 갑자기 손으로 제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들 계셔요. , , 저 소리를 들어 보세요. 저 소리를." 나직하게 속살거린다.

여럿은 귀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가 그윽이 그윽이 들려 온다.

여럿은 숨소리를 죽였다. 귀가 쏠리면 쏠릴수록 그 소리는 더욱 또렷또렷해진다.

똑 똑 바로 추녀 끝에서 완연히 낙수가 떨어지고 자그륵 자그륵 연잎에 급한 소나기가 지나가는 듯하다가 문득 찡 하고 우람한 울림이 지동처럼 울려 온다.

성기고 배게, 느리고 자지러지게, 높으락낮으락 그 소리는 저절로 미묘한 곡조를 이루어 쪼는 이의 신흥을 가르쳐 준다.

여럿은 말없이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소리 오는 곳을 눈익혀 보려는 것처럼.

바깥은 옻빛같이 캄캄하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일동은 서로 돌아보았다.

그 이튿날 뜻밖에 위로 고마우신 분부가 내리었다. 대역이 끝나기 전이니 어엿한 거둥은 못 하셔도 다른 절에서 불식을 마치신 후, 미행으로 듭신다는 분부다.

 

6

불국사의 저녁 나절.

연옥색 하늘을 인 토함산 꼭대기 너머로 너붓이 내다보이는 담회색 구름장은 서쪽으로 향한 송아리가 햇솜처럼 눈부시게 피어난다. 산기슭 울창한 송림은 푸른 기름이 질질 흐르는 듯.

절 앞 넓고 넓은 못은, 바람도 없건마는 제 흥에 겨운 듯이 찰랑찰랑 몰려 들어와 새로 쌓아 올린 석축에 부딪는다. 바그를 흰 물꽃을 날리고 갈길을 몰라 쩔쩔매는 듯하다가 더러는 수멸수멸 뒷걸음을 쳐서 멀리 물러가고, 더러는 옆으로 빙그를 돌아 청운교 연화교 가를 더듬더니 마침내 돌로 튼 홍예문을 찾아내어 앞을 다투며 몰려 나가서는 어지럽다는 듯이 뱅뱅 돈다.

저 건너 언덕에는 그림배 여러 척이 매였다. 물결이 일렁대는 대로 자줏빛 남빛 누른빛, 비단 휘장이 한가롭게 펄렁펄렁한다. 그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하고 뱃머리에 여의주를 문 청룡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배는 아마 임금을 모실 배이리라.

물새 몇 마리가 너울거리는 날갯자락을 적실 듯 적실 듯하며 물얼굴을 스쳐 난다.

그 긴 부리로 넝큼넝큼 송사리 따위를 잡아 삼키다가, 별안간 놀란 듯이 그 반질반질한 작은 몸을 솟구쳐서 높이높이 공중으로 사라진다.

입실(절 어구) 부근에서 들리는 인기척이 떠들썩하게 가까워 오는 까닭이리라.

거둥이 듭신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쳐 놓고 웃두리중들은 영접차로, 아랫두리중들은 구경차로 절을 텅 비우다시피 하고 들끓어 나왔다가 인제야 제각기 제 맡은 소임을 생각하고 줄달음질로 들어오는 것이다. 어지러운 그림자, 허둥거리는 바쁜 걸음. 종용하던 공기는 흔들렸다. 찢어질 듯이 긴장한 가운데 물끓듯 워글워글한다. 미행이라 하였지만, 도리어 화려하고 가족적인 단란한 거둥이었다.

왕은 젊으신 왕비 만월부인과 후궁 비빈을 거느리셨고 배종하는 몇몇 대관들도 왕명을 받들어 그 부인과 딸들을 데리었다.

이번 거둥은 기실 젊으신 왕비께서 오래 불국사 구경을 못 하시어 한번 소창을 하시자고 낙성이 되기 전이건만 왕을 조르신 까닭이다. 안압지 서줄지의 뱃놀이도 좋지마는 절 안으로 저어드는 불국사의 그림배엔 버리지 못할 풍치가 있었다. 더구나 이번에 새로 이룩된 다보탑이 세상에도 진기하다는 소문을 들으셨음에랴.

기름 같은 물결 위에 그림배는 꼬리를 맞물고 술렁술렁 떠나간다.

배가 기우뚱기우뚱, 번쩍번쩍하는 금관이 물 속에 흔들리자, 수없는 구옥이 어지럽게 춤을 춘다. 희빈들의 어여쁜 얼굴들이 연꽃송이처럼 둥둥 떴다. 실바람에 나부끼는 구름조각과 같이 아른아른한 깁옷자락도 흐른다. 간댕간댕하는 황금 귀걸이와 구실 목걸이가 물거품 사이로 숨기잡기를 한다.

실바람을 따라 고귀한 향기가 그윽이 풍기었다.

중류를 지나자 길게 누운 으리으리한 전각의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부서졌다.

동쪽으로 청운교 백운교, 서쪽으로 연화교 칠보교가 뚜렷이 나타난다. 불국사 자랑의 하나인 돌사다리다. 번들번들하게 대패로 밀어 놓은 듯한 층댓돌과 그 층층 상하에 손잡이 돌이 우뚝우뚝 서고, 그 머리에 구멍을 뚫어 늘어뜨린 은사실을 바라보고 배 안에서는 경탄의 속살거림이 일어났다.

"얘 털아, 참 아름답기도 하고나."

꽃 같은 희빈들 중에도 뛰어나게 아름다운 웬 아가씨가 맥맥히 돌사다리를 바라보다가 제 옆에 앉은 시비에게 소곤거렸다. 그는 은실 금실로 수놓은 끝동 소매를 조금 치켜서 옥 같은 손으로 뱃전을 짚고 그 날씬한 허리를 반나마 배 밖으로 기울였다.

"어쩌면 돌층층대를 바로 물 속에 만들었어요, 구슬아가씨."

毛兒이란 시비는 그 동그란 눈을 더욱 동글게 뜨며 맞방망이를 친다.

"그보담도 저 웃사다리와 밑사다리 어름을 좀 봐라. 그 밑에 돌로 홍예를 튼 것이 보이지 않니. 물결이 그 조그마한 홍예 안으로 들락날락하는 게 가지고 놀고 싶구나."

구슬아가씨란 이의 그 거슴츠레한 눈은 황홀해진다.

 

7

그는 이손(伊朄) 유종(唯宗)의 딸 주만(珠曼)이었다. 흔히는 구슬아가씨라고 부른다.

"아이 야릇도 해라. 참 거기 물문이 있구먼요. 아가씨는 눈도 밝으셔."

털이는 그 동그란 눈을 이번에는 지그시 감은 듯이 하고 바라본다.

"그 물문 안으로 배를 타고 한번 돌아 보았으면." 주만은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그게 뭐 어려워요. 좀 돌아 보자고 사공에게 그럽지요."

"글쎄, 그럼 그래 볼까."

주만은 뛸 듯이 기뻐하며 배 안을 돌아보고,

"우리 저 물문으로 지나가 볼까요." 하고 물었다.

"그래요, 참 그래 봐요."

"그러면 작히나 좋을까."

몇몇 젊은 아가씨들도 손뼉을 칠 듯이 찬성을 한다.

다른 배들이 돌사다리 밑 돌기둥에 닻줄을 매려 할 때에, 주만을 실은 배만 슬쩍 뒤로 빠져나왔다. 청운교 백운교 사이의 홍예 밑을 돌고 다시 연화교 칠보교 물문을 접어들었다.

주만은 뱃전에 찰랑찰랑하는 물결을 손으로 움켜 보기도 하고 물굽이를 따라 배가 뱅뱅 도는 것을 어린애같이 좋아라 한다.

배가 닿을 데 닿은 뒤에도 주만은 제가 지나온 물문을 보고 또 보며 맨 나중까지 머뭇거린다.

일행은 벌써 다 배에서 내리어 행여나 뒤질세라 하고 종종걸음들을 친다.

"어서 내립쇼. 너무 뒤에 떨어지면 어떡하실라구……."

털이는 조바심을 한다.

"뭘 그 동안이 얼마나 되겠니."

주만은 태연하다. 그들이 배에서 내렸을 때엔, 왕을 모신 옥교는 동쪽 사다리 위에 오르시어 자하문 안으로 납시었다. 일행들은 걸어서 왕의 뒤를 모시었다.

주만은 배 안에서 머뭇거릴 때와는 딴판으로 질질 끌리는 치마 뒷자락을 돌아다볼 생각도 않고 나는 듯이 돌사다리를 오른다. 털이는 방구리 같은 키를 꼬불거리며 아가씨의 치마 뒷자락을 추켜 들고 쌔근쌔근 뒤를 따랐다.

자하문을 들어서자 그렇게 서둘 필요는 없었다. 왕은 옥교에서 내리시어 일행을 데리시고 다보탑 앞에 걸음을 멈추신 까닭이다. 주만과 털이는 쉽사리 그 행렬에 끼일 수 있었다.

주만은 다보탑을 한번 보고 제 눈을 의심 않을 수 없었다.

저것이 돌로 된 것일까. 저것이 단단하고 육중한 돌로 된 것일까. 돌을 어떻게 다루었으면 저다지도 어여쁘고 아름답고 빼어나고 의젓하고 공교롭게 지어 낼 수 있었을꼬.

네 귀에 웅크리고 앉은 사자 네 마리는 당장 갈기를 털고 일어날 것만 같다. 사자등 너머로 자그마한 예쁜 돌층층대가 있고 그 층층대를 눈으로 더듬어 올라가면 편편한 바닥이 되는데 그 한복판에는 위층을 떠받치는 중심기둥이 있고 네 귀에도 병풍을 접쳐 놓은 듯한 돌기둥이 또한 섰는데 그 기둥들이 둘째 층 밑바닥을 고인 어름에는 나무를 가지고도 그렇게 곱게 깎음질을 해내기 어려울 듯한 소로가 튼튼하게 아름답게 손바닥을 벌렸다. 첫 층의 지붕엔 둘째 층의 네모난 돌난간이 둘리어 쟁반 모양 같은 둘째 층 지붕을 받들었고, 셋째 층에는 난간이 팔모가 지고 기둥도 여덟 개가 되어 세상에도 진기한 꽃잎을 수놓은 역시 팔모진 지붕을 떠 이고 있다.

주만의 눈길은 그 뛰어난 솜씨의 자국자국을 샅샅이 뒤지는 듯이 치훑고 내리훑었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감흥을 자아낸다.

"절묘, 절묘." 마침내 왕께서 먼저 절찬하셨다.

"그 돌 다루는 재주는 참으로 하늘이 내신가 하옵니다."

왕의 곁에 모셨던 이손 유종이 아뢰었다. 너그러운 뺨에 자가 넘는 흰 수염이 은사실같이 늘어졌다.

"경신읍귀의 재화라 함은 이런 재주를 이름인가 합니다."

고자처럼 노리캥캥하고 수염도 없이 맹숭맹숭한 시중(侍中) 금지(金旨)가 한문 문자를 써가며 맞방망이를 올린다.

"저 탑이 분명히 돌로 지은 것일까. 바로 밀가루나 떡고물 반죽이라면 몰라도."

만월부인께서도 감탄하신다.

"마마의 비유가 그럴듯하오마는 떡가루를 가지고도 마마는 저렇게 빚어 내기 어려울 것 같소." 하고 왕은 웃으신다.

 

8

"모든 것이 부처님의 법력이시고 상감마마의 원력이신 줄로 아룁니다. 아무리 단단하고 유착한 바위라도 높으신 원력 앞에는 나무보담 더 연하옵고 물보담 더 무른 것인가 합니다."

하고 아상노장이 합장을 한다.

"연전에 감역 금대성(金大成)이 천하의 명공을 얻었다 하더니 저 탑도 그 명공이 쌓은 것인가."

왕이 물으신다.

"분부와 같습니다. 오직 그 명공의 혼잣손으로……."

"혼잣손으로?"

왕은 놀라신다.

"과연 천하명공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구나. 늙은 사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십 남짓한 젊은 사람이올시다."

"이십 남짓한 젊은 사람!"

여러 사람들도 서로 돌아보며 혀를 내어두른다.

"이십 남짓한 젊은 사람!"

주만도 속에 새기듯 곱삶았다.

"서라벌 사람이오?" 이번에는 이손 유종이 묻는다.

"아닙니다. 부여에서 왔다 합니다."

"그러면 부여 사람이오?"

"부여에 유명한 부석(扶石)이란 석수의 수제자라 합니다."

"지금도 그 석수가 이 절에 있소."

아상노장은 다보탑 서쪽으로 여남은 간 떨어진 자리에 두 층만 쌓아 놓은 석가탑을 가리킨다. 그 탑에 걸치어 사다리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아직도 집채만큼씩 한 바윗덩이가 여러 개 남아 있고 치우고 쓸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돌조각이 여기저기 떨어진 것이 아직도 공사중인 것을 가리킨다.

"이 다보탑은 작년에 끝을 내고 지금은 저 석가탑을 짓는 중입니다."

일행은 석가탑 앞으로 발길을 옮기었다.

아직 완성도 되지 않았지마는 얼른 보기에 다보탑처럼 혼란한 깎음새와 새김질이 없어 다보탑에 얻은 감흥이 너무 컸던 만큼 여럿은 적이 실망을 하였다.

"제아무리 명공이라 할지라도 다보탑에 기진역진한 게로군."

금시중이 대번에 타박을 한다. 경솔하게 입 밖에는 내지 않았을망정 금시중과 동감인 사람도 적지 않았다.

주만이만 이 말에 맘속으로,

'아니오, 아니오.' 하고 외쳤다.

층마다 술밋한 돌병풍이 둘리고 그 병풍 네 귀에 접어 넣은 듯한 돌기둥이 한데 어우러져 탑신을 이루었는데 그 거칠 것 없이 쭉쭉 뻗은 굵은 선이 어디인지 장중하고 웅장한 풍격을 갖추어 비록 다보탑과 같이 잔재미는 적을망정 그 수법이 범상치 않은 것을 일러준다.

"아니올시다. 공은 이 탑이 더 든다 합니다. 탑 한 층마다 온전히 돌 한 덩이를 가지고 지어 낸다 합니다. 그러니 공사가 거창하기로는 오히려 다보탑보담 여러 갑절이라 합니다."

아상노장이 타이르듯 금시중의 말을 반박하였다.

주만은 제가 바로 알아본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그리고 속으로,

'한 층이 돌 하나로 되었다면 다보탑보담 공이 더 들고말고.'

혼자 뇌었다.

"딴은 공사가 거창은 하겠군. 그 우람스러운 품으로는 그럴 성도 싶소. 그러면 다보탑을 능라와 주옥으로 꾸밀 대로 꾸민 성장미인에 견줄진대 이 탑은 훤훤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까, 허허."

금시중도 아까 제 말이 너무 경솔했던 것을 뉘우치고, 그 득의의 한문 문자를 휘몰아 쓰며 얼른 둘러맞춰 버리고 그 노리캥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살을 편다.

"그 석수가 지금도 있다면 잠깐 불러올 수 없을까."

하시고 왕은 아상노장을 보신다.

왕의 이 말씀에 여럿의 귀는 번쩍 뜨이었다. 저마다 그 석수를 한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듯이 뛰어난 재주를 지닌 그 석수장이는 과연 어떠한 사람일까. 여럿의 눈은 호기심에 번쩍였다.

그 중에도 주만의 눈이 더욱 빛났다.

"어려웁지 않습니다."

하고 들어가는 아상노장의 걸음이 느린 것이 원망스러웠다.

 

9

얼마 만에 아상노장을 따라 젊은 석수는 나타났다.

꾸미지 않은 옷매무새며 오래 손질을 않은 탓으로 까치집같이 헝클어졌으되 윤나는 검은 머리며 두루미처럼 멀쑥하게 여윈 몸피를 얼른 보는 순간 주만의 가슴은 웬일인지 찡 하고 울린다.

그는 이런 자리는 난생 처음이라 어찌할 줄을 모르고 먼발치에서 머뭇거릴 제 왕은 가까이 오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그는 몇 걸음 더 다가들어 와서 어색하게 허리를 굽히는데 그 고개는 땅에 닿을 듯이 숙였다.

"얼굴을 들어라." 젊은 석수는 한참 망설이다가 분부대로 머리를 들었다.

번듯한 이맛전, 쭉 일어선 콧대, 열에 뜬 것 같은 붉은 입술, 더구나 가을 호수를 생각게 하는 맑고 깊숙한 눈자위, 제아무리 천하명공이라 하더라도 한낱 시골뜨기 석수장이로 이렇게 청수한 풍채와 씩씩한 품위가 있을 줄은 몰랐다.

젊은이 축의 곁눈질하는 눈초리에는 흠모의 빛이 역력히 움직였다.

주만은 그의 얼굴과 풍골에 다보탑의 공교롭고 아름다운 점과 석가탑의 굵고 빼어난 맛이 쩍말없이 어우러진 듯하였다.

"어쩌면 재주도 그렇게 좋고, 인물도 저렇게 잘났을깝시오."

멍하니 석수를 바라보던 털이는 주만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재재거린다.

주만은 그런 소리는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이 아무 대꾸가 없다.

"아가씨, 구슬아가씨, 저 연연한 입술을 봅시요. 마치 연지를 찍은 듯……."

주만은 듣기 싫다는 듯이 그 가느나마 숱 많은 눈썹을 찡그린다. 털이는 제 아가씨의 눈치도 볼 새 없이 제 눈은 그 석수의 얼굴에서 떼지도 않으면서 노상 종알거린다.

"아이그, 가엾어라. 그 탑을 쌓느라고 얼마나 애간장을 졸였기에 저렇게 말랐을까. 저 뺨에 살점이나 붙었던들 작히나 더 의젓하고 엄전할깝시오."

주만은 털이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왕은 이윽히 석수를 바라보시다가,

"얼굴도 준수하다."

칭찬하시고,

"이름은 무에냐?"

"아사달(阿斯嫤)이라 부릅니다."

맑고도 씩씩한 목소리다.

"부여에는 부모가 있느냐."

"아비와 어미가 다 없습니다."

"그러면 형제는 있느냐."

"동기도 없삽고 스승의 집에서 자라났습니다."

"스승은 누구냐."

"부석이라 합니다."

"지금도 살았느냐."

", 살아 있습니다마는 벌써 칠십이 넘어 걸음도 잘 걷지 못합니다."

털이는 끝끝내 재잘거린다.

"보고 또 보아도 참 잘난 얼굴. 그 검은 머리는 옻빛 같고……."

주만은 잃었던 정신을 수습하려는 사람 모양으로 눈을 떴다 감았다 하다가 털이를 돌아보며,

"네 눈에도 그렇게 잘나 보이느냐."

마지못해 대꾸를 해준다.

"왜 쇤네 눈은 눈이 아닌갑시오. 저 목소리를 들어 봅시요. 어쩌면 저렇게 청청해요."

"맑고 부드럽고……." 하고 주만은 속에 가득한 것을 내뿜는 듯이 숨을 크게 내쉰다.

털이는 또 말끝을 이어,

"우리 서라벌에도 저런 인물이 쉽지 않겠습지요."

"우리 서라벌에 저런 인물이 있을 말로야."

하고 주만은 연거푸 한숨을 쉰다.

"왜 우리 서라벌에 그런 인물이 없기야 한갑시오. 첫째로 금공자가 계신데."

금공자란 말에 주만의 아름다운 얼굴은 별안간 흐려졌다.

금공자라 함은 시중 금지의 아들 금성(金城)을 가리킨 것으로 주만과 혼인말이 있는 귀공자다.

"금공자 따위야."

"왜요, 키가 조금 작으시지만 얼굴이 희시고 싹싹하시고 재주 있으시고……."

", 입 고만 놀려라. 듣기 싫다. 그 키가 작기만 한 키냐, 곱추지."

"그래도 당나라까지 가셔서 공부를 하시고 한문이라든가, 진서라든가, 그 어려운 글을 썩 잘하시고, 당나라 벼슬까지 하시고……."

"그까짓 당나라 공부가 그렇게 장하냐. 그 어수선한 글자나 잘 알면 무슨 소용이 있을꼬."

"금시중 대감이 세도가 당당하시고……."

"세도가 나한테 무슨 상관이냐."

하고 주만은 화를 버럭 낸다. 털이도 제 아가씨의 비위를 너무 거슬린 것이 죄송하다는 듯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10

어스레하게 땅거미가 들면서부터 절 안은 더욱 북적대었다. 왕을 맞이하여 저녁재를 굉장하게 올리는 것이다.

불전마다 매어달린 가지각색의 무수한 등들이 차차 불빛이 밝아 온다. 임금님이 듭신 것을 가리키는 용무늬를 올린 청사초롱에 밀초가 부지짓부지짓 타오른다. 이 불바다에 헤엄치듯 갖은 풍악이 울려 온다.

두리둥둥 법고가 운다. 엎어치는 바라가 지르렁지르렁. 쾅쾅 태증이 억세게 고함을 지르는 사이로 가냘픈 호적이 껄떡이며 넘어간다.

법당 뒤 큰방에 임시로 옥좌를 베풀고 듭셨던 왕은 일행을 데리시고 법당에 납시어 예불을 마치시고 재 올리는 구경을 하셨다.

승무가 한창 자지러지는 판에 주만은 살그머니 총중에서 빠져나왔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고 골 속이 힝힝 내어둘린다. 풍악 소리도 아무 곡조도 없는 듯 잉잉 하고 시끄럽게 귀를 찢어 내는 것 같다. 재미있는 춤가락도 눈에 어지럽기만 할 따름이다.

사람이 많은 푼수로 방 안이 좁아서 공기가 울체한 까닭인가, 그 까닭도 있었다. 어느덧 첫여름이라 여럿의 땀내와 살내와 훈훈한 사람의 훈기가 그의 비위를 뒤흔든 탓인가, 그 탓도 있었다.

가마에 흔들리고 배에 흔들리고 절 음식이 맞지를 않아 저녁을 설친 때문인가, 그 때문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원인보담도 그는 저 혼자 있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조용하고 호젓한 자리가 그리웠던 것이다. 그는 아무도 없는 자리, 아무것도 안 보이는 자리,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자리가 아쉬웠던 것이다.

그는 오직 저 홀로 무엇을 생각하고 싶었다. 제 넋과 단 혼자 은밀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법당 문 밖에 나서니 선선한 밤바람이 그의 옷깃 속으로 처근처근하게 기어든다.

그는 살 것같이 눅눅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지향없이 걸음을 옮기었다.

주인과 나그네가 모조리 재 올리는 데로 몰리인 듯, 밖에는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그는 불빛을 피하듯 어둑한 데로만 바라보고 발을 내어디디었다. 얼마를 걷지 않아 광선의 테 밖에 헤어나올 수 있었다. 어슴푸레한 가운데 낮에 보던 다보탑이 저만큼 보인다.

그 탑을 바라보는 찰나 까닭 없이 가슴이 찌르르해지며 눈물이 핑 돌 것 같아졌다. 이 묵묵한 돌탑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주만이 저도 생각지 못하였으리라. 그 탑은 부른다. 손짓하며 부른다. 두 팔을 벌리고 어서 오라 하는 듯하다. 째기발을 디디고 왜 늦었니 하는 듯하다.

주만은 허정허정 재게 걸었다. 그는 한순간이라도 빨리 그 품속에 뛰어들고 싶었다. 아까 눈으로만 더듬던 자국자국과 구석구석을 손으로 어루만져 보리라 하였다. 그렇듯이 고와 보이는 돌결이 얼마나 부드럽고 미끄러운가 뺨을 대고 비벼 보리라 하였다. 그 오뚝 솟은 손잡이들을 휘어잡고 그 자그마한 돌층층대를 껑충껑충 뛰어올라 가리라 하였다. 그 판판한 밑바닥에 펄썩 주저앉아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제 넋과 은밀한 수작을 주고받아 보리라 하였다.

처음 생각엔 거기가 고대인 줄 알았더니 걸어 보매 꽤 동안이 떴다. 더구나 서투른 길이요, 어두운 길이라 마음이 급할수록 발은 움펑진펑하여 하마터면 여러 번 고꾸라질 뻔하였다.

땅바닥을 보고 조심조심 몇 걸음을 걸어가다가 언뜻 다시 고개를 들매 초생 반달이 탑 위에 걸렸다. 그 빛물결은 마치 흰 비단오라기 모양으로 탑 몸에 휘감기어 빛과 어둠이 서로 아로롱거리며 아름다운 탑 모양은 더욱 아름답게 떠오른다.

주만은 마치 두억시니에게나 홀린 사람 모양으로 걸어간다느니보담 차라리 끌리듯이 탑으로 한 자국 두 자국 다가들었다.

문득 탑에만 어리인 그의 눈앞에 난데없는 검은 그림자가 얼른 하고 지나간다.

주만은 깜짝 놀라며 몸을 소스라쳤다.

 

11

밝은 데서 나온 까닭으로 눈이 어둠에 채 익지를 않았기도 하려니와 탑에만 정신이 쏠렸기 때문에 주만은 제 주위를 보살필 겨를이 없어, 아까부터 탑의 주위를 돌고 있는 사람을 못 보았던 것이다. 으슥한 곳에 무심한 가운데 불쑥 나타난 사람의 그림자처럼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없으리라.

"!" 나직한 외마디 소리를 치고 주만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인기척도 외마디 소리도 도무지 못 들은 양 묵묵히 탑의 둘레를 그대로 돌아간다.

주만은 아뜩한 정신을 가까스로 바로잡자 그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또 한 번 놀랐다. 그에게는 이번 놀람이 아까 놀람보다 몇 곱절 더 컸다. 가슴이 두근두근 두방망이질을 한다.

그는 제 앞으로 어른거리며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야말로 다른 사람 아닌, 낮에 본 그 석수인 것을 알아보았다.

먼 불빛과 달빛이 어우러진 여름, 희미한 광선이었건만, 그 빼어난 이마와 검고 사내다운 눈썹과 연연한 입술이 또렷또렷하게 주만의 눈 속으로, 아니 가슴속으로 박힐 듯이 들어왔다.

주만은 몸을 움직이려 하였다. 그에게로 와락 뛰어달아 들든지, 그렇지 않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리든지 두 가지 방도 가운데 한 가지 방도를 취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까 선 그 자리에 오금이 붙어 버린 듯 발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그이는 제 길만 돈다. 별을 따려는 사람 모양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어느 때는 급하게 어느 때는 느리게 돌고 또 돈다. 벌써 주만의 앞을 네 차례 다섯 차례 돌아갔건마는 단 한 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 여기 있어요."

여섯 번째 제 앞을 지나칠 때 주만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라 한들 그이가 ''가 누구인 줄 알 것인가. ''라는 사람이 그이와 무슨 알음알음이 있단 말인가.

회오리바람에 둥 뜨인 듯한 머리건만, 제 생각이 하도 어처구니없는 것을 깨닫고 어둠 속에서 호젓하게 얼굴을 붉히었다.

'그런데 저이가 왜 탑의 둘레를 자꾸만 돌고 있을까.'

주만은 차차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자 처음에는 괴이쩍은 생각이 들다가,

', 옳지, 오늘이 초파일. 그에게도 무슨 발원이 있나 보다.' 하고 스스로 깨우쳐 내었다.

석가 탄일의 밤에 소원성취를 빌며 탑의 주위를 도는 풍속을 주만은 이때까지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나도 저이와 같이 좀 돌아 볼까.'

이렇게 생각하매 저는 그이보담 발원할 것이 열 곱절 스무 곱절 더 많은 것 같았다.

그이가 한 번을 돌면 저는 백 번이나 천 번을 돌아도 이 크고 큰 발원에는 오히려 정성이 부족할 듯하였다.

첫째로 금시중 집과 혼인이 되지 말기를 빌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꿋꿋하게 끝끝내 거절해 주소서, 어머니는 언제든지 제 편을 들고 역성해 주소서, 하고 빌고 싶었다.

둘째로 지금 제가 수를 놓고 있는 수병풍이 잘 되어지이다, 그리고 당나라에 보내는 선물 가운데 첫째로 뽑혀지이다, 하고 빌고 싶었다.

셋째로 이번에 빌 것이야말로 첫째 둘째보담 더 소중하고 더 엄청나고 더 어렵고 더 간절한 발원이었다.

"그러면 그것이 무슨 발원이냐."

누가 종주먹을 대고 물어도 주만은 꼭 집어서 무엇이라고 대답은 못 하였으리라.

남에게 대답은커녕 제 속생각에나마 분명치를 않았다. 물 속에 흐르는 달빛과 같이 꼭 잡아 낼 수는 없으나마, 아무튼지 안타까웁고 애달픈 발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영롱한 무지개처럼 눈부신 발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넘치는 봄물결과 같이 마음 가득한 발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의 발길은 다시 가까워 온다. 달빛을 담뿍 안은 뒷머리가 검게 빛난다.

주만은 곧 그의 뒤를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내어디디려던 발은 다시 옴츠러지고 만다. 아아 염통은 왜 뛰기만 하는고.

"에구 아가씨, 구슬아가씨, 아가씨가 여기 계시구먼."

등뒤에서 털이의 쌔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12

주만은 이때처럼 털이가 반가운 때는 없었다. 백만의 응원병이나 얻은 듯이 든든하였다.

", 털이냐. 너 참 잘 나왔구나. 이것 봐, 오늘이 초파일 아니냐. 너와 나와 이 탑을 돌아 보자. 소원성취하게."

"원 아가씨도 급하시기는. 사람이 숨이나 좀 돌려얍지요." 하고 장히 가쁜 듯이 숨을 모두 꾸려 쉰다.

"누가 여기 와 계실 줄이야 알았나요. 한참 승무구경을 하다가 아가씨를 찾아보니 어느결엔지 계시지도 않겠지요. 온 방안을 찾아보아도 없으시고, 그래 생각다 못하여 밖으로 나왔습지요. 미친년 뽄으로 못가엘 다 가보고 산기슭도 헤매 보고 어디 계셔야지. 까막나라라 몇 번을 호방에 빠지고 참 죽을 뻔했답니다. 어쩌면 이년을 그렇게 속이셔. 후우, 아이 숨차."

찾기에 애쓰던 원정을 늘어놓는다.

"……대뜸 이 탑 생각을 했더면 좋을걸. 이 원수엣년의 대강이에 어디 그런 생각이 얼른 돌아야지……."

", 수다 작작 떨고 어서 탑이나 돌자."

주만은 벌써 한 걸음 내어디디며 털이를 재촉하였다.

털이는 막 발을 떼어놓으려다가 말고 별안간에,

"에구머니나!"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주만의 손에 매어달린다. 털이는 그제야 아사달의 검은 그림자를 알아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아가씨, 아가씨, 그 그게 누군갑시오."

털이는 더욱 달라붙으며 가슴을 발랑발랑한다.

주만은 돌아다보며 손을 저어 아무 소리도 말라는 뜻을 보이었다.

", 게 누군갑시오."

어느덧 주인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이번에는 주만의 귀가 간질간질하도록 입을 대고 소곤거렸다.

"왜 그 석수 아니시냐."

주만은 성이 가시지만 가만히 일러주는 수밖에 없었다.

"네에---" 하고 고개를 까닥까닥하다가,

"그럼 아가씨가 혼자가 아니시군요."

하며 살그머니 제 아가씨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그럼 쇤네는 괜히 온걸입쇼."

하며 해해 웃는다.

주만은 눈을 흘겨 보이었다.

"아가씨는 눈을 흘기시면 더 예쁘시어…… 해해."

털이는 농치듯이 또 한 번 웃어 보인다.

털이는 주만의 유모의 딸이다. 나이도 다 같은 열여덟에 한동갑이요,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났고 시방도 밤낮으로 몸시중을 드는 터이라, 이따금 상전과 종이라는 상하 구별을 잊어버리고 꽤 버릇없이 굴었다.

주만은 털이의 말씨가 분하고 괘씸하였으나 여기서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털이는 벌써 제 아가씨의 기색을 살피고,

"참 어서 탑을 돌아얍지요, 녜 아가씨. 자 아가씨가 앞장을 서십시오." 주만을 앞으로 떠다밀다시피 하며 서둔다.

뭉실뭉실 떠도는 구름장이 그 흐늘흐늘하는 엷은 한 자락을 펼쳐서 슬쩍 달 얼굴을 가리었다. 초승달의 약한 빛을 그나마 가리어 놓으니 사면은 어렴풋하게 조으는 듯.

네 간만큼 세 간만큼 두 간만큼! 주만과 털이의 걸음은 차차 차차 재빨라지며 가까이 가까이 아사달의 뒤를 따르며 매암을 돈다. 한 간만큼 반 간만큼! 그들의 떨어진 사이가 좁혀들었다. 앞에 가는 이의 뒤로 흔드는 손길이 뒤따르는 이의 앞으로 내미는 손길과 자칫하면 마주치게 되었다. 앞선 이의 헐레벌떡하는 숨소리가 역력히 들린다. 앞선 이의 그림자가 뒤선 이의 발끝에 밟히었다. 그 순간 그들의 거리는 다시금 멀어 간다. 한 간 두 간 세 간. 동안은 자꾸 떨어져 간다.

앞선 이도 제 뒤를 밟는 자국 소리를 분명히 들으련마는 단 한 번을 돌아다보지도 않는다. 호리호리한 여윈 뒷모양이 주만의 눈길에서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할 뿐이다.

이럴 줄 알았던들 차라리 아까 모양으로 한 자리에 서 있기나 할 것을,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앞으로 지나칠 적마다 그 모습이나마 자세자세 볼 수 있었을 것을.

주만은 무엇을 잃어버린 듯 마음이 허수해진다. 무엔지 슬프고 원망스럽고 서운하였다. 다리는 맥이 다 풀리고 걸음걸이는 허전허전해진다.

"어쩌면 뒤 한 번을 돌아보시지 않을까."

털이는 제 주인의 속을 들여다보듯이 혼자말로 종알거리고 축 늘어지는 주만의 허리를 부축한다.

"아가씨, 우리 이제는 앞으로 질러가 보아요."

털이는 마침내 묘안을 내리었다.

 

13

주만과 털이는 돌아섰다.

앞지르는 것이 과연 묘안은 묘안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수월한 노릇은 아니었다. 궁금하던 그의 앞모양과 얼마든지 마주칠 수는 있었건만 딱 맞닥뜨릴 뻔하다가 슬쩍 옆으로 비킬 적마다 주만의 가슴은 못 견딜 만큼 뛰논다.

아까는 뒤밟는 동안이 떴다가 줄다가 하더니 이번에는 그들의 매암 도는 둘레 사이가 멀어지고 좁아들고 하였다.

저 둘레와 이 둘레가 차차 차차 다가들어 두 둘레가 한 둘레로 어우러질 만하면 다시금 멀리멀리 갈리어 나간다.

너무 멀어지면 안타까웁고 너무 좁아들면 숨길이 막힐 듯하고…….

주만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히었다. 새빨간 뺨은 농익은 홍시처럼 아늘아늘 터질 듯하고 가쁘게 내쉬는 단 김에 호끈호끈 입술이 마른다.

곁에서 보기에는 허청허청 탑의 둘레를 도는 것이 어렵지 않아 보였지만 막상 돌아 보니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인제는 눈이 핑핑 내어둘리고 머리까지 어찔어찔하다. 그래도 주만은 이를 악물고 돌고 또 돌았다.

"아이 사람 죽겠네. 아이 사람 죽겠네."

털이는 쌔근쌔근하면서도 연해 잔소리를 재우치며 땀을 빡빡이 흘린다.

달을 가리었던 구름장은 어른어른 지나간다. 가닥가닥이 풀어지고 엷어져서 마지막엔 뿌유스름한 김처럼 달 얼굴에 서리었다가 이내 가뭇없이 사라졌다.

거물거물하던 그늘과 빛이 뚜렷해졌다. 탑신이 은물에 적시어 놓은 듯 불현듯 번쩍인다.

어느결엔지 또다시 같은 둘레를 돌고 있던 아사달과 주만은 거의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의 상거는 너댓 걸음밖에 남지 않았다.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아사달이 갑자기 무엇을 찾는 듯이 제 주위를 둘러본다.

달빛을 안고 흰 꽃송이처럼 피어난 주만의 얼굴에 아사달의 시선은 떨어졌다.

그 찰나! 아사달의 걸음은 주춤하고 멈춰졌다. 놀람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이 한순간 그 꿈꾸는 듯하던 눈자위에 떠올랐다. ! 하고 앞으로 고꾸라질 듯하며 한 발자국 내어디디자 아사달의 눈은 불같이 빛났다. 한참 주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 다음 순간에는 정신을 모으는 듯 눈을 감아 버린다.

주만도 별안간 변한 아사달의 거동에 깜짝 놀랐다. 뜨거운 저편의 눈길에 동여매인 듯 주만이 또한 그 자리에 딱 발길을 붙인 채 손끝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온몸의 피까지 돌기를 그치고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듯, 오고 가는 두 시선만 불꽃을 날리었다.

그때였다. 재 올리는 구경이 한 고비가 넘었는지 법당에 몰리었던 젊은이 축들이 떼를 지어 와 하고 쏟아져 나온다.

"아이 여기는 시원도 해라. 법당 속은 바로 도가니 속이야!"

"이런 줄 알았더면 진작 나올 것을."

"어디, 어디를 가볼까."

"이 마당 끝까지 가보지." 제각기 지껄이며 뜰을 내려온다.

"우리 저 솔숲으로 가볼까."

"까막나라에 뱀이나 있으면 어떡하게."

"뱀이 무슨 뱀이야."

"여길 나오니 달도 밝구먼."

"저기 다보탑이 보이네."

"저것 보아, 저 다보탑 밑에 사람 셋이 섰네."

"하나는 남자고 둘은 여자고."

"한 남자와 두 여자! 찐답잖은 일인걸."

"하하하."

"하하하." 구슬을 깨는 듯한 웃음 소리가 달 그늘로 사라진다.

"달도 희고 임도 희고……."

누가 노래 웃꼭지를 딴다.

"저것 좀 봐요. 남자가 두 여자를 버리고 저리 돌아가네."

"어느결에 안타까운 이별인가."

"초승반달이 지기도 전에."

"오호호."

"오호호."

웃음 소리를 먼저 보내며 그들의 춤추는 듯한 달뜬 발길이 탑을 향해 걸어온다.

"참 재 올리는 구경에 팔려서 탑 도는 걸 잊었네."

"옳거니 오늘이 파일이거니, 발원을 올려야지."

"발원이면 무슨 발원?"

"나라가 태평토록."

"오곡이 풍등하게."

"성수가 무강토록."

"늙으신 부모 궂기지 말게."

"효녀 충신 많으시군."

"알뜰한 내 발원은 고운 님 만나나 뵙게, 오호호."

 

14

아사달은 쫓기는 듯이 제 처소로 돌아왔다.

요새는 으레 탑 위에서 밤을 새는 버릇이로되 오늘 밤따라 떠들썩한 인기척이 수선스럽기도 하려니와 어쩐지 몸과 마음이 실실이 풀리어 지렛대와 정을 들추스릴 기력조차 날 것 같지도 않았다.

쓰러지는 듯이 제자리에 드러눕자 잠이 곧 올 것처럼 눈이 감기었다. 천근이나 되는 몸이 마치 큰 돌멩이가 물 속으로 떨어지듯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다. 온몸이 으스러지게 고단하면서도 오려던 잠은 설들고 정신이 새삼스럽게 말뚱말뚱해진다.

'그 처녀가 누굴까.' 무두무미하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까 주만이와 마주치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온다.

"옷 맨드리만 보아도 귀인이 분명한데 아사녀로 속다니."

하고 아사달은 어이없이 웃었다.

아사녀(阿斯女)란 그의 아내의 이름이었다.

제 아내와 그 처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눈앞에 그려 보매, 갸름한 판국과 입모습 언저리나 비슷하다 할까, 다른 데는 아무 데도 닮은 점이 없었다.

아사달이 주만을 보고 그렇게 놀라고 반긴 것은 한갓 제 고장에 두고 온 아내로 그릇 본 까닭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떠난 지도 어느덧 삼 년, 이 길고 긴 동안에 얼마나 아내가 아쉽고 그리웠던가. 탑 쌓는 대공에 바친 몸이요 마음이건만, 천리를 넘나드는 상사몽은 막을 길이 없었다.

오늘도 일터에 올라갔다가 절 안이 들레어 그대로 내려오고, 그 들레는 까닭으로 오늘이 파일인 줄 알게 되자 집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부여도 오늘은 야단이리라. 우리집에서도 등을 만들리라.

그 혼란한 솜씨로 내 등은 또 얼마나 훌륭하게 아름답게 만들었을까.

아사달은 아내와 같이 쇠던 지난날의 재미나던 파일을 생각하고 가슴이 뻐근해졌다.

부여에서도 파일이 되면 식구 수효대로 등을 만들고 등마다 그 등 임자의 생년월일을 써서 복을 빌었다.

자기도 파일을 진작 알았던들 비록 객지에서나마 장인과 아내를 위하여 등을 만들었을 것을. 등은 못 만들었을망정 밤에는 탑을 돌아 제 스승과 아내의 복을 빌리라 하였다.

절 안이 너무 붐비어 일은 손에 잡힐 것 같지도 않아, 낮에는 제 처소에서 누워서 보내고, 저녁이 되어 모든 사람이 재 올리는 데로 몰린 뒤에 그는 홀로 탑을 돌러 나왔던 것이다.

한 둘레 두 둘레 돌아갈 때 날개 돋친 생각은 훨훨 고장으로 난다.

갸둥질을 쳐주는 구름자락을 마다하고 달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미끄러진다.

아사녀도 저 달을 보고 있으리라. 만일 저 달이 거울이련들 예 있는 나도 저 속에 비치고 제 있는 저도 저 속에 비칠 것을.

달짝지근한 감상(感傷)이 사라지자 집 걱정이 새록새록이 가슴을 누른다.

제일 염려는 제 스승이요 장인인 부석의 건강이었다.

아사달이 떠나올 때에도 부석의 천촉증은 매우 심하였다. 한번 기침을 시작하면 그 쿨룩 소리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오장육부를 쥐어짜는 듯한 그 악착한 기침 소리, 지금도 선하게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나이 벌써 칠십이 넘었으니 아무 병 없이 정정하더라도 춘한노건을 믿을 수 없겠거든 그런 고질까지 지녔으니 오래 부지야 어찌 바랄 수 있으랴.

'만일 돌아가셨으면!'

이런 불길한 생각이 문득 일어나자 그는 몸서리를 치고 탑 도는 발을 빨리빨리 옮기었다. 한 둘레라도 더 도는 것이 마치 제 발원을 이루는 데 큰 등별이 있을 것처럼.

만일 장인이 돌아가셨다면! 아사녀에게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진 것이다.

자기도 혈혈단신 외톨이요, 처갓집도 어느 일가친척 하나 들여다볼 사람이 없는 홑진 집안이다. 홀로 남은 아사녀는 어찌 되었을까. 어리고 약한 여자의 몸으로 그런 큰일을 어떻게 겪을 것인가. 큰일을 감당하고 못 하는 것은 오히려 둘째 셋째 문제다. 남유달리 눈여린 그가 이 지극한 슬픔에 어떻게 견디어 낼 것인가.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이 울고 또 울다가 그대로 자지러지지나 않았을까.

머리는 풀어 산발을 하고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그대로 감아 버린 아사녀의 모양이 얼찐 눈앞에 나타났다.

 

15

아사달은 지긋지긋한 생각을 쫓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설마 죽기야, 설마 죽기야." 그는 제 자신이 알아듣도록 뇌고 또 뇌었다.

사람이란 슬프다고 간 대로 죽는 것은 아니다. 설령 아버지가 죽었다 하기로서니 딸마저 죽으리라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이리라.

그러나 이렇게 돌려 생각해 보아도 그의 걱정은 놓이지 않았다. 만일 장인이 죽고 아내는 살았다 해도, 더욱 그의 애를 졸이게 하는 또 다른 켯속이 있기 때문이다.

남편도 이별하고 어버이조차 여읜 괴로운 딸과 아내! 그 고단한 신세를 엿보는 이리떼 같은 부석의 제자들이 마음에 켕긴다.

그 중에도 우두머리 가는 팽개(彭介)의 모양이 언뜻 보인다. 그 후리후리한 키와 감때사나운 상판이 엎어누를 듯이 쑥 나타난다. 그 얼굴은 능글능글하게 웃는다.

그는 아사달보담 나이도 네 살이 위요, 부석의 문하에 들어오기도 아사달보다 일 년이 먼저였다. 집안이 그리 궁색하지 않은 탓으로, 제자들 가운데 차림차림도 가장 말쑥하였고 잔돈푼도 곧잘 써서 동무들의 마음을 사기도 하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가난한 스승의 살림도 가끔 도와 주는 듯하였다.

재주는 무디었지만, 나잇값과 돈냥 덕으로 여러 동무를 휘두르고 한동안은 어엿한 수제자로 내남없이 허락하였던 것이다.

드러내 놓고 말은 안 했으되, 수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어여쁜 아사녀의 신랑감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늙어 가는 스승도 든든하고 넉넉한 팽개와 같은 사위를 얻어 노경을 의탁하려 하였는지 모르리라.

그러나 한해 두해 지나갈수록 아사달의 재주와 솜씨는 너무도 뛰어났다.

예술을 생명으로 하는 부석의 사랑은 마침내 아사달에게 쏟아지게 되었다.

이 눈치를 챈 팽개는 푼푼한 나머지 울분한 생각을 꽃거리에 풀기 시작했다. 그런 소문이 들릴수록 스승의 눈 밖에, 더군다나 장래 장인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빛나는 승리는 아사달에게 돌아오고야 말았다. 뭇제자의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눈총을 맞으면서 아름다운 아사녀의 남편이 된 것이다.

아사달이 기쁨의 절정에 올랐다면 낙망의 구렁에 천길 만길 떨어지기는 묻지 않아도 팽개이리라.

그러나 팽개는 그런 사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혼인날에도 다른 제자보담 오히려 더 일찍이 와서 모든 일을 총찰하였고, 모꼬지宴會자리에서도 가장 기쁜 듯이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즐기었다.

아사녀를 앗기었으니 팽개는 이제 스승의 문하에 발을 끊으리라 하는 것이 여럿의 일치한 공론이었으나 팽개는 여상스럽게 출입을 할 뿐 아니라, 도리어 전보담도 더 성건하게 다니었다.

그의 배짱은 수수께끼였다.

하루는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키다리 장달(長達)이란 제자가 그 꾸부정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앉았다가 팽개를 보고 무두무미하게,

"원 자네는 비윗장도 좋아." 하고 놀리는 가락으로 말을 툭 내던졌다.

"이 짜디짠 친구가 이건 또 웬 수작이야. 어째 내 비윗장이 좋단 말이냐."

팽개가 되받으니까, 장달은,

"나 같으면 벌써 발그림자도 않을 텐데…… 그래도 못 알아듣겠니. 이 될뻔댁야."

하고 히히 웃어 버린다.

", 그 말이야. 그러면 계집 뺏기고 스승마저 잃어버리게, 허허."

하고 팽개는 아사달을 향하여 능글능글하게 웃어 보이었다.

그 능글맞은 웃음이 아사달에게는 도무지 잊혀지지를 않았다. 웬일인지 그 웃음이 무서웠다. 소름이 끼치었다.

지금도 탑을 돌며 멀리 아내의 신상을 생각할 제, 그 흉물스러운 웃음이 나타나고야 만 것이다.

"이놈 아사달아, 이걸 좀 봐라, 허허."

팽개는 앙탈하는 아사녀를 두리쳐 끼고 역시 그 흉한 웃음을 웃어 보인다.

"내가 왜 이런 불길한 생각만 하는고."

아사달은 진저리를 치며, 제 앞에 그린 환영을 떠다 박지르듯이 팔을 내저으며 급히 걸어 보았다. 그래도 불길한 환영들은 꼬리를 맞물고 굳이굳이 떠나온다.

 

16

아사녀를 흠모하기는 결코 팽개 하나만이 아니다.

키다리 장달, 되바라진 작지, 웅성 깊은 싹불, 여낙낙한 웃보…… 어느 제자치고 아사녀를 내맡겨도 마음을 놓을 만한 위인은 눈을 닦고 보아도 없었다.

그들의 환영도 하나씩 둘씩 번갈아 들며 제각기 다 다른 비웃음을 던진다.

아사달은 눈을 멍하게 뜬 채로 흉측스런 꿈을 꾸어 내려간다.

그 흉한들이 겹겹이 에워싼 한복판에 아사녀는 울면서 갈팡질팡한다. 이 틈을 비잡아도 무쇠 같은 팔뚝들이 막고 저리로 버르집어도 그 가냘픈 몸을 빼쳐 낼 길이 없다. 마지막엔 기진맥진하여 그대로 쓰러지매 사나운 짐승의 떼는 우 하고 달려든다!

"무슨 그럴 리야 있을까. 저희들도 사람이거니 스승의 은혜를 생각한들 외동딸에게 그런 몹쓸 짓이야……."

아사달은 지겨운 제 환상을 스스로 털었다.

집에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장인도 그저 생존해 계시고 아사녀도 몸 성히 잘 있을 것이다. 떠날 때보담 얼마를 더 자라나고 더 아름다워졌는지 모르리라. 내 올 때를 손꼽아 기다리며 바시시 사립문을 열고 서울길을 바라보는지 모르리라. 그 갸름한 종아리에 인제는 살이 올랐는가.

아사달은 견딜 수 없었다.

부여가 그립다. 스승이 그립다. 아내가 그립다.

탑이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워 버리고 지금 당장 고장으로 날아가고 싶다.

달 비추인 사자수는 금물결 은물결이 굽이굽이 넘노리라. 병상에 누웠던 스승은 얼마나 반기실까. 방싯 웃는 아사녀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치리라.

이 먼 데를 왜 왔던고. 스승도 없고 아내도 없는 이 먼 데를 왜 왔던고.

대공을 이루리란 불 같은 정열에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허둥허둥 길을 떠난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이렇게 그리웁고 마음이 졸일 줄 알았더면 아무리 스승의 명령이 엄하더라도 한사코 좇지를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 큰절을 이룩하고 그 절에 탑을 모시는데 천하의 명공을 구한다는 방이 내어걸리기는, 그들이 혼인한 지 한 일 년 안팎이었다.

저자에 갔다가 이 방을 보고 아사달의 가슴은 뛰었던 것이다. 속에 가득한 재주와 솜씨는 쏟힐 곳을 찾지 못하여 발버둥질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와서 스승에게 그 사연을 알리매 늙은 스승은 앉은 자리에서 몸을 소스라치며 애들처럼 기뻐하였다.

"인제야 네 재주와 솜씨를 보일 때가 왔구나. 이런 기회란 사람의 일생에 몇 번 있는 것이 아니다. 어서 행장을 수습해라. 어디 서라벌 석수들과 좀 겨루어 보아라."

스승은 흰 수염을 거스리며 매우 흥분된 말씨다. 그러고 이튿날로 길을 떠나라고 서둘렀다.

그는 사랑하는 제 제자의 예술적 대원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빛나는 전통의 솜씨를 자랑하기 위하여, 단 하나 사위를 내놓는 헛헛함도 잊어버린 듯하였다. 귀여운 딸의 안타까운 이별도 돌아보지 않는 듯하였다.

아사달은 신이야 넋이야 하며 행장을 재촉하였으나 아내와 나누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뻑적지근 않을 수 없었다.

새 정이 들까말까 한 아내! 그러하다, 그들은 아직 정조차 흐뭇하게 들지를 못하였다. 어린 아내는 언제든지 그를 부끄러워하였고, 그도 또한 무슨 깨어지기 쉬운 보물처럼 아내를 소중히 알아, 흥껏 마음껏 다루지를 못하였다. 부부가 되기는, 햇수로 따져 보면 벌써 이태를 잡아들건마는 그들에게는 장가들고 시집온 지가 바로 어제런 듯하였다. 행복스러운 날은 꿀보담 더 달고 번개보담 더 빠르게 지나간 것이다.

이러한 아내이거니 그와 어떻게 작별을 할 것인가. 그래도 자기는 사내대장부다. 대공을 이루기 위하여 마음을 도지게 먹을 수 있었지만, 아사녀는 얼마나 슬퍼할까. 차마 그 앞에서도 갈린다는 소리를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내일 같이 길 떠날 오늘.

그는 아사녀와 단둘이 마주치는 동안을 될 수 있는 대로 늘이려 하였다.

낮에는 이리저리 피할 수가 있었지마는 해는 어찌 그리 엉덩뚱 지나가는지 어느새 저녁이 되고 말았다.

아내와 만날 시각이 자꾸자꾸 다가들자 그의 마음은 조비비는 듯하였다.

저녁에 그를 보내는 조그마한 잔치가 벌어진 자리에서도 그는 끝까지 몸을 일으키려 들지 않았다.

자정이 지나 밤이 이슥한 뒤에야,

"인제는 잠이 들었겠지."

하고 아사달은 가만가만히 제 방으로 돌아왔다.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내는 거물거물하는 촛불 밑에 그린 듯이 앉아 있지 않은가.

 

17

아사달은 제 아내가 자려니 지레짐작을 하였다가 그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적이 놀랐으나, 이내 미안한 생각이 불일 듯하였다.

아내는 자기가 들어올 때를 고대고대하며 그 곤한 잠도 잊어버리고 저렇게 단정하게 앉았는가 하매 그는 가슴이 찌르르하도록 애연하였다. 그런 줄은 모르고 일부러 만날 동안을 질질 끈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오늘 밤 내일 아침까지만 보면 몇 해를 그릴 것이 아니냐. 그 귀중한 시간을 어쭙잖은 이허로 헛되이 넘긴 것을 생각하면 뼈가 저리었다. 한치 한푼을 다투어도 오히려 아까울 것을.

"왜 입때 자지를 않소."

아사달은 아내의 앞에 주저앉으며 번연히 아는 잠 안 자는 까닭을 물었다.

"고대 자요."

하고 아내는 방긋 흩지게 웃어 보인다. 그 웃음 속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듯하다.

"……"

"……"

부부는 마주 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곤한데 눕구려."

"눕지요."

그러나 둘이 다 누우려는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

"……"

또 한동안 말은 끊어졌다.

"나는 내일 서라벌로 떠나가오."

한참 만에야 아사달은 큰 힘을 써서 가까스로 허두를 내놓고 아내의 기색을 살피었다. 아사달은 이 말만 끄집어내면 담박에 슬픔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려니 하였었다. 울며 불며 발버둥을 치려니 하였었다.

그러나 아내는 의젓하게 도사리고 앉아 있을 뿐, 대답도 간단한 한 마디였다.

"나도 알아요."

이 홀가분한 한마디가 만근의 무게를 가졌다. 천 마디 만 마디의 슬픈 원정과 설운 사설보담도 몇 갑절 되는 뜻을 풍겼다.

그 자그마한 가슴에 커다란 고통을 부둥켜안은 채로 꿀꺽꿀꺽 참고 있는 모양이 못 견디리만큼 애처로웠다. 아사달은 제 쪽에서 엉엉 목을 놓고 울고 싶었다.

"내일은 일찌거니 길을 떠나실 텐데 정말 어서 주무세요."

하고 아사녀는 깔아 놓은 이부자리를 다시금 매만지다가 갸웃이 남편을 쳐다본다. 방 안은 덥지도 않은데 그 오목한 코 끝에는 땀방울이 송송 솟아났다. 슬픔을 누르느라고 마음속으로 무한 힘을 쓰는 까닭이리라.

아사달은 대번에 목이 꽉 잠기는 듯 대꾸도 나오지 않았다.

"어서 주무셔요."

아사녀는 또 한 번 조른다.

아사달은 그대로 쓰러질 듯이 누웠다.

"이렇게 바로 누우셔요."

아내는 베개를 고쳐 베고 이불의 접힌 자락을 펴서 따둑따둑 덮어주고 나서 물끄러미 남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남편의 쳐다보는 눈길과 딱 마주치자 그 젖은 눈동자는 달아날 곳을 몰라 잠깐 허전거리는 듯하더니 어색하게 상긋 웃고 저도 따라 눕는다.

아사녀는 눕는 길로 곧 눈을 감는다.

이윽고 아사달은 고개를 쳐들어 아내의 얼굴을 자세자세 보고 또 보았다. 제 머릿속 깊이 새기어 넣으려는 것처럼.

은행껍질 같은 눈시울이 띠룩띠룩 움직이고 남유달리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떠는 것을 보면 아내도 눈만 감았다뿐이지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곧 알 수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아내는 번쩍 눈을 떴다. 고개를 쳐들고 있는 남편을 보고,

"아이, 큰일났네. 입때 안 주무시고 내일 어찌 길을 떠나시어."

살짝 눈썹을 찡기고 제 얼굴을 치우는 듯이 돌아누우려 하였다. 마치 제 남편의 잠 안 자는 원인이, 제 얼굴이 그 눈앞에 놓여 있는 탓으로만 여기는 듯하다.

아사달은 더 참을 수 없었다. 돌아누우려는 아내를 끌어당기자 그 가냘픈 몸을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이런 때에도 수줍은 아내는 고개를 숙여 남편의 가슴팍에 제 얼굴을 파묻는다. 그 언저리가 뜨겁고 축축해지는 것은 아내도 인제야 소리 없이 우는 탓이리라.

한참 만에야 하나로 녹아드는 듯하던 두 몸은 떨어졌다.

아내는 먼길 가는 남편에게 끝끝내 요사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어느결엔지 눈을 닦고 또 닦은 모양이었으나 아무리 해도 젖은 속눈썹은 옥가루를 뿌린 듯 번쩍이고 발그스름해진 콧등이 더욱 안타까웠다.

 

18

탑을 도는 아사달의 발길은 느리게 지척거린다.

그날 밤 아내와 지내던 정경이 그림자등影燈에 어른거리는 환영처럼 뚜렷이 비추인다.

그들은 마침내 그날 밤을 꼬박이 밝히었다. 서로 어서 자라고 권하고 조르면서 저마다 모를 사이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들이었다. 서로 외면을 하고 등을 졌다가 어느결엔지 뚫어지게 마주 보고 있는 그들이었다. 분명히 떨어져 누웠는데 언뜻 깨달으면 두 뺨을 마주 비벼대는 그들이었다…….

이별을 아끼는 밤은 너무도 짧고 너무도 헤프다.

어느덧 아침이 되었다. 아내는 아침밥을 지으러, 남편은 미진한 행장을 꾸리러 이 방을 나가는 수밖에 없다.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먼저 일어선 아내가 방문 앞까지 나가다가 다시 돌쳐서서 서너 걸음 도로 들어온다. 그는 작별인사를 잊었던 것이다. 길 떠날 시각이야 아직도 얼마 남았지만 그들 단둘이 하는 작별은 이 자리가 마지막이 아닌가.

"부디 안녕히 다녀오셔요."

"부디 잘 있소."

"부디 대공을 이루셔요."

"그야!"

하고 아사달의 젊은 눈동자는 자신 있게 번쩍이다가,

"장인이 저렇게 늙고 편찮으시니……."

하고 얼굴을 흐린다.

아내는 무슨 긴히 부탁할 말이 있는 것처럼 나붓이 다시 앉는다.

"그런 걱정을랑 조금도 마셔요. 내가 어쩌든지 모시고 꾸려 갈 테에요. 몇 해가 걸리든지 부디 대공만 이루셔요."

하고 얼굴빛을 바루며 단단한 결심을 보이었다.

"부디 대공만 이루셔요."

나직하나 힘 있던 그 말소리! 지금도 아사달의 귀를 울리고 마음을 울린다. 안타까운 이별도 애달픈 그리움도, 남편의 재주를 빛내고 이름을 이루기 위하여 즐기어 견디려는 그 씩씩한 태도! 언제 생각해 보아도 든든하고 고마웁고 눈물겨웁다.

아직 철부지로 알았던 아내가 어느 틈에 그렇게 장성해졌을 줄이야. 물보다 더 무른 줄 알았던 그 마음이 그렇게 여무질 줄이야.

생각할수록 새록새록이 아내가 그리웁다.

예쁘고 의젓한 아내! 그리운 그 얼굴을 단 한 번 눈 한 번 깜짝일 짧고 짧은 동안에나마 보여 준다면 그는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았으리라.

마지막으로 아내를 보던 애틋한 정경 한 토막이 또 서언하게 나타난다…….

여러 동무들에게 옹위되어 사립문 밖까지 나왔다. 병중의 장인도 기침을 쿨룩쿨룩하면서도 지팡이에 몸을 버티고 지축지축 따라나온다.

그는 재빠르게 눈을 사방으로 돌렸다.

"이젠 아주 정말 길을 떠나는구나."

하매, 거기까지 범연히 나온 그도 다시 한번 아내의 얼굴이 더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얼굴은 거기 없었다. 별안간 큰 쇳덩이가 발목에 매어달리는 듯 걸음이 내켜지지 않았으나 마음을 도지게 먹고 일부러 쾌활하게 땅을 쾅쾅 구르는 듯 걸었다.

길모퉁이를 도는 데 왔다.

"인제 고만 들어가십시오."

아사달은 걸음을 멈추고 스승에게 더 따라나오기를 말리었다.

", 그래 그럼 잘 다녀오너라, 쿨룩쿨룩. 머 먼길에 몸조심하고, 쿨룩쿨룩. 원 몹쓸 기침이……."

튀 하고 가래침을 배앝는데 그 늙은 눈에 눈물이 걸씬걸씬한 것은 한갓 기침 탓만 아니리라.

"."

하는 아사달의 대답도 목이 메이었다.

무릎을 꿇고 마지막 작별 절을 하고 일어서면서 언뜻 제가 지금 나온 사립문을 바라보았다.

돈짝만큼씩 한 새 잎사귀가 파름파름하게 돋아나는 느티나무 밑에 아내가 외로이 서 있지 않은가. 여럿이 우 나올 때에는 부끄러워서 같이 따라 못 나오고 뒤미처 쫓아나온 것이리라.

슬쩍 한번 오고 간 두 눈길!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아사녀, 아사녀!"

아사달은 소리를 내어 가만히 불렀다. 그 이름이나마 입술에 올려보고저.

발은 제 돌던 자국을 찾아 제대로 돌아가건마는 아사달의 마음이 탑돌기를 떠난 지는 벌써 오래다.

"아사녀, 아사녀!"

그는 또 한 번 불러 보았다.

아내는 완연히 제 앞에 와 서는 듯하다.

하늘만 쳐다보던 환상에 싸인 눈을 앞으로 돌릴 제 과연 제 아내는 제 앞에 어엿이 서 있다!

일순간 꿈이 현실로 나타날 때 그는 흑 하고 놀란 것이다. 한 걸음 바싹 더 다가들며 똑똑히 제 아내의 얼굴을 살피매, 그는 물론 제 아내가 아니었다. 제 아내 낫세만한 다른 여인이었다.

설레던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탑돌기를 시작하였건만, 한번 어지러워진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무엇에 쫓기는 듯이 제 처소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

 

19

"털아 털아, 얘 털아."

주만은 아까부터 가쁜 듯이 털이를 깨우고 있었다. 털이는 앙바툼한 다리를 큰대자 모양으로 퍼더버리고 입 가장자리에 침을 깨 흘리며 곤하게 잔다.

", 털아 좀……."

주만은 털이의 팔뚝을 잡아 뒤흔들며 귀에다 대고 소리를 딱새같이 질렀다.

털이는 ", " 잠꼬대를 하고 흔들린 팔뚝으로 숭숭 맺힌 제 이마의 땀을 문지르고는 다시 돌아누워 버린다.

", 얘 좀 일어나거라. 일어나요."

깨우는 이는 바작바작 애가 마르는 듯. 자는 이는 꿈적꿈적 몸을 움직이는 듯하다가도 이내 쌕쌕 코고는 소리를 낸다.

", 어서 좀 일어나. 원 잠귀도 이렇게 어두운가. 털아, 털아!"

주만은 돌아누운 털이의 어깨를 이리로 잡아 제치며 짜증을 낸다.

"녜 녜."

털이는 코로 대답만 할 뿐이요 그저도 잠을 못 깬다.

", 좀 얼른 일어나라니까. 얼핏, 얼핏 좀 일어나."

이번에는 깨우는 이가 입술을 쪼무리고 옷이 수세미같이 말려 올라가서 벌겋게 드러난 자는 이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래도 못 일어날까, 이래도 못 일어날까, 털아, 털아."

"아야! ."

하고 털이는 별안간 나는 듯이 일어나 앉는다. 그제야 자는 이는 주인이 깨우는 줄 알고 질겁을 하며 일어난 것이나 아직도 잠은 덜 깨어서 연상 조여붙는 눈을 비빈다.

", 정신을 좀 차려, ."

주만은 힘없이 끄덕이는 털이의 머리를 사납게 휘술레를 돌리며 재우친다.

털이는 또 한참 주먹으로 눈을 비비고 닦고 나더니 발그스름하게 잠발이 선 눈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 무슨 잠이냐. 그래도 잠이 깨지를 않니."

", 안 깨긴요. 벌써 깬걸입시오."

"그렇게 불러도 일어나지를 않으니."

"아마 깜박 잠이 들었던가 봐요, 헤헤."

깬 이는 무안한 듯이 또 한 번 웃는다.

"깜박 든 게 다 뭐야. 그렇게 사람의 애를 태워."

주만은, 깨우느라고 진땀을 뺀 것이 아직도 성이 풀리지 않은 듯 털이를 노려본다.

", 원수엣년의 잠이!"

하고 털이는 제 머리를 제 주먹으로 몇 번 쥐어지른 뒤에,

"그저 죄송합니다. 무슨 심부름을 하랍시오."

절이라도 할 듯이 사죄를 하고 착착 붙인다.

"왜 또 알찐거리기는! 어서 옷이나 입어요."

주만은 내던지듯 명령을 내리었다.

"왜요. 무슨 큰일이 났어요."

털이는 그제야 확실히 잠이 깨며 저도 놀란 듯이 서둔다.

"어서 옷이나 입으라니까."

털이가 발딱 일어나 부산하게 속옷의 구김살을 펴고 치마를 떼어 입고 버선을 신는다.

"누가 그 옷 말야."

주만은 털이의 다 해진 치맛자락과 깜둥족제비가 된 버선목을 바 라보다가,

"나들이옷을 입어요. 어디 좀 갈 데가 있으니."

다시 영을 내렸다.

"어디를 갑서요. 벌써 날이 다 새었납시오."

"얘 잠꼬대 작작 해라. 무슨 날이 벌써 새니. 아직 자시도 안 되었을걸."

"! 아직 자시도 안 되었납시오. 그러기 첫잠이 깜박 들었던 거야. 첫잠이 들면 동여 가도 모른다고 하는걸입시오."

털이는 기어코 제가 잠을 얼른 못 깬 변명을 하고야 만다.

"어서 새옷을 좀 갈아입어요. 제발 좀."

주만은 울 듯이 재촉을 한다.

"아니 자시라면 한밤중 아녜요. 이 밤중에 어디를 가시랍시오."

하고 자던 이는 그 토끼 같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뜬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인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수다 고만 좀 떨어요. 나 가자는 대로 가면 고만 아니야."

주만은 전에 없이 황황해한다. 털이는 입을 아 벌린 채 수상쩍다는 듯이 제 아가씨의 기색을 살피었다. 홰를 올리고 거물거물하는 밀초 불빛에도 제 아가씨의 얼굴이 이글이글 타는 듯이 붉은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새까만 눈썹 위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떠돈다. 더구나 그 옷맨드리를 보고 놀랐다.

주만은 남빛 반비를 입고 수놓은 비단바지를 입고 갈 데 없는 귀공자로 차리지 않았는가.

 

20

주만의 어머니 사초(史肖) 부인은 외동자식이 딸 된 것이 원통하여 이따금 주만을 남복을 시켰다. 수놓은 통손바지에 남빛 반비를 떨쳐 입고 세포 복두를 제켜 쓰고 백옥 허리띠에 구슬끈을 주렁주렁 늘어뜨리고 손잡이에 금을 올린 환도를 느슨하게 차고 나서면 동뜨게 아름다운 귀공자였다. 장난꾸러기 주만이도 남복을 좋아하고 화랑의 흉내도 곧잘 내었다.

서리 같은 칼날을 뽑아 들고 공릉버선 위에 눌러 신은 목화로 터벅터벅 땅을 구르며, 그 영채 도는 눈을 제법 무섭게 부릅떠서 악 소리를 치고 달려들면 털이는 혼뗌을 하고 사초부인은 허리를 분질렀다.

그러나 이런 장난도 나이가 차가자 점점 그 도수가 줄고, 이마적 해서는 별로 한 적이 없거늘 이 밤중에 남장을 차리고 어디를 가자는 것인가. 털이도 한옆으로 겁도 나거니와 의심증이 더럭 났다.

"아이그 아가씨 왜 또 남복을 입으셨네. 또 쇤네를 혼을 내시려고 그럽시오."

하며 털이는 벌써 몸단속을 마치고 일어선 주만을 보았다.

"왜 또 네 목에 칼을 겨눌까 봐 겁이 나니."

주만은 방싯 웃고 제 손으로 허리띠를 휘 한번 더듬어 보이며,

"이것 봐. 어디 칼이 있니. 오늘 밤에는 칼은 안 찼으니 그렇게 겁낼 건 없어. 어서 따라나서기나 해라."

하고 방문을 열고 나간다. 털이도 옷을 다 입고 뒤를 쫓아나가다가 주춤 섰다.

"아이, 이렇게 어두우니 누가 뺨을 쳐도 알깝시오."

"그러면 초롱 준비를 할까."

주만은 진국으로 묻는다.

"어디를 가시기에 초롱 준비까지 하신단 말씀이에요. 방 안의 촉대를 좀 들고 나오랍시오."

"촉대를 들고 갈 수야 있나."

"그럼 어디를 멀리 가시랍시오."

"가만 있거라."

주만은 무엇을 생각하듯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벽장에서 부리나케 초 몇 자루를 내어 털이를 준다.

"너 초롱은 어디 있는 줄 아니."

"초롱이야 광에 들었습지요."

"광에…… 광문이 잠기지 않았을까."

"왜 안 잠겨요. 햇구멍이 훤할 때 벌써 닫아거든뎁시오."

"그럼…… 그럼 그 열쇠는 누가 맡았을까."

"원 아가씨도, 마님이 맡으셨지 누가 맡아요."

"……"

주만은 잠깐 말이 없다.

"초를 몇 자루씩 내어놓으시고 대관절 어디를 가시랍시오. 이 깊은 밤에."

털이는 제 주인의 행동에 갈수록 불안을 품는 눈치였다.

"어머니가 맡으셨다. 어머니가……."

주만은 제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글쎄, 가실 곳을 좀 말씀을 합시오. 그러면 제가 무슨 도리든지 차릴 테니."

"만일 열쇠를 찾으러 갔다가 어머니께서 잠을 깨시면……."

"어이구, 또 광문이 여낙낙하기나 한뎁시오? 어떻게 빽빽한뎁시오. 한번 열자면 왈그륵달그륵 온 집안 사람이 다 잠을 깰 텐데……."

털이는 벌써 주만의 뜻을 알아차리고 또 광문 열 소임은 갈 데 없이 제 차지인 것을 깨닫자 미리 방패막이를 한 것이다.

방 한복판에서 서성서성하고 있던 주만은 펄썩 주저앉는다.

"어떡하나!"

그 소리는 벌써 울멍울멍한다.

"불국사엘 가시려고 그러시지요. 이 밤중에 안 됩니다. 안 되고말곱시오. 대감께서나 마님이 아셔 봅시오. 큰일납니다, 큰일나. 애꿎이 이 털이란 년이 물고가 나겝시오. 아유 생각만 해도 소름이 쪽쪽 끼치는뎁시오. 맙시사, 맙시사."

털이는 벌써 주만의 흉중을 꿰뚫어보고, 호들갑을 떨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설령 초롱을 꺼낸다손 치더라도 그 먼 데를 어떻게 걸어가십니까. 게까지가 이십 리는 잔뜩 될걸입시오. 한낮에도 어려울 텐데 이 캄캄 칠야에 말도 안 타시고. 수레도 안 타시고 보행을 하시다니 될 뻔이나 한 말씀이에요. 자 수레나 말을 꺼낸다고 해보십시오. 아무리 쉬쉬한들 자연 왁자지껄해서 집안이 벌컥 뒤집힐 걸입시오. 천만다행으로 몰래몰래 안장을 짓는다 해도 한 입 건너 두 입 건너 내일이면 소문이 쫘아할 것 아닙시오……."

"듣기 싫어!"

털이가 안 된다는 까닭을 미주알고주알 캐내서 수다 늘어놓는데 주만은 참다 못하여 소리를 빽 질렀다.

 

21

불국사에서 돌아온 날 밤을 주만은 뜬눈으로 밝히었다.

눈만 감으면 그 안타까운 석수의 모양이 선연하게 눈시울 속으로 들어선다. 처음 왕께 알현할 제 어색하던 그 모양이 떠올랐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전허전하던 그 눈매가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땅바닥에 거의 닿을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광경도 우스웠다.

주만은 제 옆에 마치 그 석수나 있어서 놀려먹는 것처럼 생글생글 웃어 가며,

"이렇게." 하고 베개에 제 이마를 푹 파묻어서 흉을 내보이었다.

탑을 돌 제 그 꿈꾸는 듯한 느린 걸음걸이, 회오리바람같이 달음질을 치던 그 열정 가득한 행동들이 어른어른 눈앞에 지나간다. 달빛으로 더욱 희게 드러난 코, 그 열이 오른 듯한 붉은 입술이 한량없이 그리웠다. 그 청청한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나는 듯 나는 듯하다…….

첫여름 밤은 고요하다. 창 밖은 실바람도 불지 않는지 잎사귀 하나 간댕하지도 않는 듯. 찌잉 하고 귓속만 우는데 문득 사푼 하는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주만은 귀를 기울였다. 갈 데 없는 인기척 소리다. 그 발자국은 가만가만히 걷는 듯 마는 듯 제 방 가까이 와서 사라진 것 같다. 몰래몰래 들어온 사람의 입김이 완연히 문풍지에 서리듯.

"그가 왔고나, 그이가 왔고나." 머리도 없고 끝도 없이 주만의 가슴에는 이런 환상이 번개같이 일어났다.

그는 이불자락을 제치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쏜살같이 문을 열어젖히려다가 말고 제 생각이 너무 헛되고 어림없음을 깨닫자 춤추는 촛불 아래에서 호젓하게 혼자 웃었다.

초도 벌써 다 닳아 옥촉대 밑바닥에 촉농이 켜켜이 앉았다.

주만은 새 초를 한 자루 꺼내서 다시 붙이었다.

그도 이 밤에 잠자기는 단념한 것이다.

그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환상은 꼬리에 꼬리를 맞물고 한번 사로잡은 제 아름다운 포로를 놓치려 들지 않았다.

저와 그가 정면으로 마주칠 때 흑 하고 그가 제 앞으로 몇 걸음 다가들던 광경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는 왜 나를 보고 그렇게 놀랐을까. 그의 얼굴엔 반가워하는 빛이 역력히 움직이었다. 곧 나를 부둥켜안기나 할 듯이 달려들 제 그의 눈은 이상하게 번쩍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돌아서 버린 것은 무슨 곡절일까.

그도 분명히 나를 알아본 것이다. 내 마음을 알아본 것이다. 내 속을 꿰뚫어본 것이다. 그런 놀라운 재주를 가진 그이거늘 어찌 조그마한 여자의 흉중을 살피지 못할 것이랴.

그렇다면 나를 사람으로 여겼을까. 단 한 번 먼빛으로 보고 그대로 마음을 쏟아 버린 나를 상없다고 하지나 않을까.

주만은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누가 곁에서 보기나 하는 것처럼 얼굴을 붉히었다.

"아이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혼자말로 속살거리고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그러고도 미협한 듯이 이불 속에서 또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그러나 부끄러운 생각도 잠시 잠깐이다. 타오르는 정열은 걷잡으려야 걷잡을 수 없었다.

그도 나를 생각하는지 모르리라. 그도 나를 그리며 이 밤을 꼬박이 새우는지 모르리라. 그렇게 반가워하다가 그렇게 물러선 것은 그의 정과 의젓한 것을 한꺼번에 알리는 듯도 싶었다.

온몸이 끓고 얼굴이 확확 달아서 뒤덮었던 이불자락을 걷어찼다.

암만해도 그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그립고 그리워 참으려야 참을 수 없다. 주만은 마침내 또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 밤으로 아사달에게 뛰어가고 싶었다. 세상없어도 만나고야 말고 싶었다. 당장 이 시각에 그를 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벗었던 옷까지 다시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주만은 살그머니 창문을 열었다. 제 갈 길을 미리 보아나 두려는 것처럼.

선뜩한 밤공기는 그의 불같이 타는 뺨을 씻어 준다.

벽오동의 너푼너푼한 잎사귀에 다 기울어진 조각달이 뉘엿뉘엿이 걸렸다.

주만은 이윽히 지는 달을 바라보고 있다가 제가 저를 타이르듯이 소곤거렸다.

"내일 날이 밝거든!"

 

22

주만은 남복을 입은 채로 그대로 쓰러져 털이의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돌아누워 버렸다.

이윽고 그 어깨가 덜먹덜먹한다.

"아이 저를 어째. 아가씨가 우시는구먼."

털이는 딱하다는 듯이 제 혼자 종알거렸으나 무엇이라고 달래야 옳을지 몰라 매우 난처해한다.

털이는 제 아가씨의 성미를 잘 안다. 싹싹할 때에는 연한 배 같지마는 한번 역정을 내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일 어설피 달래었다가는 또 무슨 벼락을 만날는지 모른다. 아까만 해도 '듣기 싫다'는 불호령을 받지 않았느냐. 주만의 어깨는 갈수록 더욱 사납게 들먹거린다. 필경엔 훌쩍훌쩍하는 울음 소리를 내고야 만다.

이젠 무슨 벼락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 아가씨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주만의 어깨는 부들부들 떨린다. 털이는 손을 들어 그 어깨를 흔들려다가 말고 한숨을 휘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주만은,

"왜 이렇게 가까이 왔니. 저리 가려무나."

볼멘소리나마 아까처럼 날카롭지는 않다.

"아가씨 아가씨, 왜 우십시오. 진정을 하시고 무슨 말씀이든지 하십시오. 쇤네가 죽기 한사하고 아가씨의 원을 풀어 드릴 테니."

털이도 덩달아 울먹울먹하며 등뒤에 대고 간곡한 목소리를 떨었다.

"울기는 누가 울어."

주만은 역시 돌아보지도 않고 되받았으나 울음을 그치려고 애를 쓰면서도 말소리는 여전히 껄떡인다.

"안 우시면 왜 돌아누워 계십시오. 쇤네를 좀 보십시오. 이것 보십시오. 이 새옷이 죄 꾸겨집니다. 자 바로 좀 누우십시오."

"그까짓 옷이야 좀 꾸겨지면 어떠냐."

"어유 그 옷이 이만저만한 옷입니까. 한 벌 다시 장만하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뎁시오."

"그까짓 돈 드는 걸 누가 아니. 꾸겨지면 안 입으면 고만 아니냐."

"웬걸입시오. 앞으로 이 옷 쓰일 때가 많을걸입시오."

"내게 남복이 당하냐. 오늘 밤에 꼭 한 번 쓰려 하였더니만……."

"오늘 밤만 날인갑시오. 앞으로도 이런 밤이 얼마를 올걸입시오."

털이의 말이 그럴듯하다는 듯이 주만은 눈물을 거두고 일어앉아 웃옷의 구김살을 편다.

눈물방울이 아직도 그렁그렁한 주인의 눈을 바라보며 털이는 '옳지!' 하고 제 무릎을 제가 친다.

"쇤네가 좋은 꾀를 하나 생각해 드릴깝시오."

"네 따위가 무슨 좋은 꾀가 있을라구."

"왜요, 쇤네가 이래봬도 꾀주머니랍시오. 그만 일에 우시다니. 내일은 세상없어도 쇤네가 불국사엘 뫼시고 갈 테니……."

"또 내일……."

주만은 재우쳤다. 또 내일! 과연 그에게는 여러 해포나 되는 듯싶다. 어젯밤에 날이 밝기를 기다린 그가 아니냐. 그러나 낮에는 더더군다나 몰래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오늘 밤에는!"

그는 또다시 밤을 기다린 것이다.

단 하루 해를 보내기에 삼사월의 해가 길기도 길었지만, 그에게는 백날 천날이 넘는 듯하였다. 그야말로 일일이 삼추 같은 이 길고 긴 해 동안에 궁리궁리해 낸 것이 남장을 차리고 털이를 데리고 불국사를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밤이 든 뒤에는 또 집안 사람들이 잠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밤의 몇 시각은 낮보다도 더욱 길고 더욱 지리하였다.

남장을 갖추고 털이를 깨워 일으키고 막상 길을 떠나려 하니 어느 결에 달은 지고 캄캄칠야에 불 없이는 댓 자국을 내어디딜 수 없었다.

이십 리나 되는 밤길을 걸어간다는 것도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이 뜻하지 않은 난관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기다렸던 오늘 밤에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매 참고 참았던 것이 그만 울음으로 터지고 만 것이다. 금이야 옥이야 자라난 그는 난생 처음으로 제 뜻대로 안 되는 일도 있는 줄 알았다.

"내일이라도 뭐 얼마가 남았납시오. 고대 밤이 밝을 것을."

털이는 달래기 시작한다.

"내일이면 무슨 좋은 수가 있니. 어디 말을 좀 해보렴."

털이는 주만의 귀에 입을 대었다.

"저 내일 마님을 조르십시오. 불국사에 불공을 올리러 가시자구요."

"기껏 좋은 꾀라는 게 그게야."

"아닙시오. 쇤네 말대로만 하심 꼭 됩니다. 왜 아드님이 없지 않습시오. 이번 상감마마께서도 석불사에 공을 들여 동궁마마를 보시지 않으셨납시오. 자꾸 동생을 하나 낳아 달라고 조르십시오. 불국사는 새로 중수를 한 절이요, 그 부처님이 더 영검이 계시다고 조르시면 될 것 아닙시오."

주만은 그윽이 고개를 끄덕였다.

 

23

책상머리에서 졸고 있던 금성은 킹킹 콧소리를 하다가 재채기를 한번 되게 하고 졸림 오는 눈을 떴다.

"오호호."

금성의 누이동생 아옥(娥玉)은 허리가 부러지라고 웃어젖힌다.

"아이 우스워, 아이 우스워." 아옥은 때굴때굴 구른다.

그는 사랑에 놀러를 나왔다가 제 오빠가 책상에 코방아를 찧고 있는 것을 보고 심지를 꼬아 코 안으로 비비어 넣은 것이다.

"이 대낮에 낮잠이 무슨 낮잠이에요. 고리타분하게."

"이 무슨 괴란쩍은 짓이람."

오빠는 제법 점잔을 빼고 나무란다.

"어이구, 그 조으시는 모양이란 꼴도 사나웁지, 이 책 속에다가 코를 비벼대고."

아옥은 한 팔로 제 머리를 휩싸고 펴 놓인시전(詩傳)속에 제 얼굴을 뒤엎어 보인다.

오빠는 조여붙는 눈으로 삥긋이 웃는다.

"에그, 그 입 가장자리에 침이나 좀 닦아요. 어린애 모양으로 침까지 지르르 흘리고, 으흐흐."

아옥은 그 가느다란 실눈을 거의 감는 듯하며 연방 웃음을 흘린다.

"요런 오도방정은! 지금 한창 재미난 꿈을 꾸는 판인데."

오빠는 웅얼웅얼하는 갈라진 목소리로 게두덜거리며 입가에 희게 늘어붙은 침자국을 닦고 싱겁게 또 한 번 웃는다.

"꿈을 꾸었어요. 어디 재미난 꿈 얘기나 좀 해봐요."

"얘기가 무슨 얘기냐. 막 꾸려는데 네가 헤살을 놓은걸."

"그러면 채 꿈도 꾸지를 못하셨군요."

"말하자면 꿈의 서문을 초하다가 만 셈이지."

"뭐 꿈도 서문이 있고 본문이 있나 뭐."

"그럼 꿈도 서문이 있고말고. 본문을 지나면 발()까지 있는 법이야."

"발은커녕 머리가 어때요."

"무식쟁이란 할 수가 없군. 말까지 상스럽거든."

"왜 내가 무식쟁이에요. 맹자 논어를 다 읽었는데 이까짓 '요조숙녀책'만 보면 제일예요."

아옥은 책상에 놓인 시전을 못마땅한 듯이 손가락 끝으로 튀기었다.

", 성경현전을 그렇게 함부로 구는 법이 아니야."

하고 금성은 펴놓은 책을 접쳐서 한옆으로 치운다.

"입에다 대고 침을 께 흘릴 제는 언제고, 오호호."

누이는 또 땍때굴 웃었다.

금성은 누이의 이번 말은 들은 척 만 척하고 아까 말만 가지고 티를 뜯는다.

", 요조숙녀책! 그러기에 무식하단 말이지. 시전이란 말은 못 하고."

"누가 시전인 줄이야 모르나요. 오빠가 그 책만 펴들고 앉으면 밤낮 요조숙녀만 고성대독을 하니 그렇지. 남의 귀가 아프게시리."

"누가 네게 들으라고 하던."

"그건 고만두고, 그 꿈의 머린가 발인가 얘기나 좀 해요."

"맑고 맑은 물가에 비둘기 한 쌍이 내려와서……."

"오호호, 비둘기가 왜 물가에 내려올꼬."

"'관관저구 재하지주로다' 바로 시전에 있는걸."

"시전에만 있으면 고만이에요, 호호. 그러면 으레 요조숙녀가 또 뛰어나왔겠군요."

"암 그렇지, 그야." / "그래 그 요조숙녀가 누구입디까." / "꿈속에 나타난 걸 어떻게 분명히 아누."

"모르긴 왜 몰라요. 꿈에 보고도 몰라요." / "글쎄 네가 잠을 깨워서 놓쳐 버렸다는밖에."

"아이구 가엾어라. 꿈에나 실컷 보시게 할 걸 갖다가." / "그렇기에 방정을 떨지 말란 말이야, 히히."

금성은 또 웃는다.

"그래 오빠는 꿈에 본 요조숙녀를 정말 모르신단 말예요." / "몰라, 몰라."

금성은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었다. / "왜 이렇게 시침을 떼셔요. 그러면 내가 가르쳐 드릴까."

"내가 꿈을 꾼 것을 네가 어찌 안단 말이냐."

"그래도 난 오빠 속을 당경(唐鏡)보다도 더 환하게 들여다보고 있어요."

"어디 알아맞춰 봐라." / "구슬아기지 누구야." /"아니야."

"아닌 게 뭐예요."

"구슬아기가 내 꿈속에 나타날 까닭이 있나."

"어느 건 오매불망이라고 꿈엔들 안 보이리."

", ."

금성은 콧소리를 내고 제 아버지를 닮아서 맹숭맹숭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살이 벙글벙글 벌어진다.

 

24

아옥은 제 오빠가 싱글벙글하는 양을 빤히 바라보다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저도 덩달아 웃어 버렸다.

"아이 오빠, 또 꿈에 좀 봤다고 그렇게 좋으시오. 생시에 만났으면 큰일났겠네, 호호."

"아무렴."

금성은 역시 코로 웃는다. 그 실룩실룩하는 콧잔등엔 잔주름이 잡힌다.

"난 생시에 구슬아기를 보았는데 그런 줄 알았더면 오빠에게 좀 보여 드릴 것 같다가."

"언제, 언제."

금성은 그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이는지 목이 마르게 묻는다.

"언제는, 저번 파일날 불국사 놀이에서 봤지."

", 옳지. 거기는 같이들 갔겠구나. 그런 줄 알았더면 나도 참예를 할 걸 그랬군."

"어규, 오빠 마음대로 갈 수는 있구요. 명부와 딸들만 데리고 오랍시란 분부신데 오빠가 어떻게 참예를 해요."

"멀리서 구경도 못 해."

"그야 길가에는 거둥 구경꾼이 백절치듯 했습니다."

"그것 봐. 내가 보려면 어떡하면 못 보았을라구."

"그러니 더 앵하시지. 더 기가 막히시지."

"그래 정말 구슬아기가 오기는 왔던."

"그럼 거짓말로 왔을까."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네 말을 누가 믿누."

"안 믿거든 고만두어요. 누가 믿으래요."

"정말 구슬아기가 왔으면 옷은 무슨 옷을 입었던."

"남의 옷 입은 것까지 어찌 일일이 일러바쳐요. 입을 만치 입었지요."

"저것 봐. 무슨 옷을 입은 것도 모르니 봤다는 게 거짓말이지."

"그렇기에 고만둬요. 거짓말인 줄로만 알면 그뿐 아녜요."

아옥은 그 실눈이 더욱 샐쭉해지고 두 볼이 뾰루퉁하게 부어오른다. 참말을 거짓말이라고 몰아세우는데 골딱지가 난 까닭이리라.

오라비는 그래도 나이가 세 살이나 위인지라 일부러 짓궂은 척을 하고 누이동생의 골을 슬슬 올려 가며 제 듣고 싶은 대꾸를 끌어내려 한다.

"그러면 옷은 고만두고 손목에 팔찌는 끼었던."

"그럼 팔찌를 안 꼈을라구. 바로 번쩍번쩍하는 황금 팔찌던데."

"그래 그 손목이 굵던 가늘던."

"굵다면 굵고 가늘다면 가늘지."

"그리고 그 손은 어떻던. 조막손이지."

"조막손은 왜. 손가락 끝이 갸름갸름한 것이 천연 돋아나는 죽순 같던데."

", 그건 영악스럽게 보았구나. 그래 그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끼지를 안했지."

"아무것도 안 끼긴! 옥가락지를 끼었던데."

"그래 그 손을 어쩌고 있던."

"원 내 참, 땀을 뺄 노릇일세."

하고 인제야 아옥도 제 오라비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 실눈에 생글생글 웃음을 흘린다.

"손을 어쩌고 있기는! 들었다 놓았다 늘어뜨렸다 오그라뜨렸다……."

"그만하면 네가 주만을 보기는 보았구나. 그래 너를 보고 아무 말도 않던."

"말이 무슨 말예요."

"그래 인사도 않더란 말이냐."

"임금님이 계시고 어른들이 계신데 애들끼리 인사가 무슨 인사예요."

"그렇게 너희들 사이가 데면데면하냐. 언제는 퍽 친하다고 하더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해요."

"왜 팔월 한가위에 궁중에 들어가면 너희들끼리 베짜기 내기를 하고, 언제는 네가 져서 주만이 앞에 절까지 하고 회소곡을 불렀다더니."

"그야 어디 구슬아기하고 나하고 단둘이 하는 거예요. 여럿이 패를 갈라 가지고 하는 노릇이지. 그럴 말로야 거기 모이는 여러 백 명도 모두 친하다고 하겠네."

"그러니 너희들은 만나도 인사를 않는단 말이냐."

"그야 딱 마주치면 인사야 하지만, 사람 많이 모인 자리에서야 쫓아다니며 알은척할 까닭은 없지 않아요."

금성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적이 실망을 하는 눈치였으나 또 재차 물었다.

"불국사에는 너희들도 배를 타고 들어갔겠구나."

"그럼."

"주만이와 한배를 탔던."

"아녜요, 내 탄 배는 다른 배예요."

아옥은 어설피 주만의 말을 끄집어내었다가 제 오라비가 미주알 고주알 캐고 파는 데 진절머리를 내고, 금성은 주만의 눈매 하나 몸짓 하나 빼어놓지 않고 알알 샅샅이 알고 싶고 듣고 싶은데 제 누이가 말을 잡아떼려고만 하니 어디로 또 말머리를 돌려 볼까 하고 궁리궁리하였다.

 

25

오라비는 말허두를 어디로 돌릴까 하고 눈을 껌벅껌벅하더니,

"배를 타고 들어가서는 너희들끼리 한자리에 모였겠구나."

하고 '그렇지?' 하는 듯이 제 누이의 얼굴을 본다.

"그야 한데로 가기야 갔지요."

"나란히 서 있었지."

"아니 멀리 떨어져 있었는걸요."

"뭘 가까이 있고서는!"

"가까이는커녕 아주 서로 얼굴도 못 알아볼 만큼 멀리멀리 있었다오."

아옥은 인제는 제 오라비의 꾀에 좀처럼 넘어가지를 않고 도리어 뱅글뱅글 웃으며 애만 말린다.

금성은 바싹 제 누이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비대발괄을 한다.

"그러지 말고 그날 지낸 일을 하나도 빼지 말고 죽 강을 좀 해라."

"글 배운 것 강하기도 귀찮은데 그것까지 강을 하란 말예요. 난 싫어."

"싫기는. 그럼 무슨 청이든지 들어줄게."

"정말."

"정말이고말고."

"저 당서 가르치는 것 제발 고만둬 주어요. 그러고 아버지께서 잘 배우느냐 물으시거든 잘 배운다고만 해주실 테요."

"그래 그래 그 청이야 들어주지."

"그리고 또 아버지께서 강을 받으실 때 오빠가 그 대문을 나는 보이고 아버지는 안 보이는 데서 보여주실 테요. 그렇잖으면 오빠가 옆에서 뚱겨주든지."

"얘 그것 참 어렵구나. 아버지께 들키면 큰일나게."

"그러기 아버지께 안 들키게 하란 말이지, 누가 들키게 하라나베."

"그건 좀 어려운데, 암만해도."

"그럼 고만둬요. 나도 그날 본 것을 말 안 하면 고만이지."

"그래, 그래라. 네 말대로 다 들어주마. 자 그날 본 대로 들은 대로 다 얘기를 하렷다."

"싫어, 얘기만 다 듣고 나면 또 딴청을 부리실걸, . 난 얘기 안 할 테야."

아옥은 싹을 보고 더욱 비싸게 굴며 단단한 다짐을 받는다.

"한 번 약조를 한 담에야 일러주다뿐이냐, 뚱겨주다뿐이냐. 다짐장이라도 두자면 두지. 자 어서 얘기를 해라. 그래 그래 주만이가 어떡하고 있던."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배를 저어 들어가서 돌사다리를 올라가서 다보탑을 구경하고 왕께서 석수장이를 불러 보시고……."

"그래서 그래서."

"그런데 오빠아, 그 석수장이가 참 잘났어."

"그까짓 놈이야 잘났든지 말든지."

"아녜요. 그 석수장이가 어떻게 잘났는지 몰라요. 눈이 어글어글하고, 얼굴이 백옥 같고……."

하고 아옥은 그 실눈을 멍하니 뜨고 눈앞에 무엇을 그려 보는 것 같다.

"이 애가 미쳤나. 웬 석수장이 사설만 늘어놓을까. 그래, 그 다음에는 어떡했단 말이냐."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하다가 말았던가."

"원 얘가 넋이 다 빠졌구나. 석수장이 불러 본 데까지 안 했니."

"옳지, 그다음에는 불공을 올리고 저녁을 먹고 재를 올리고 돌아들 왔지요."

"그뿐이야."

"그뿐이지 무에 또 있어요."

"주만이는 어떡하고."

"주만이를 누가 어떡해요. 다들 같이 왔지 뭐."

"올 적에는 너하고 동행이더냐."

"그럼 다들 동행이지요."

"그래 동행을 하면서도 아무 말들이 없었단 말이냐."

"말이 무슨 말이에요. 아무리 초롱불이 밝아도 밤길이라 모두들 땅만 내려다보고 가까스로 못까지 내려온걸."

"작별 인사들도 안 했단 말이야."

"언제 작별 인사나 할 틈이 있어요. 못을 건너와서는 제각기 제 수레를 찾아 타고 돌아왔는데."

"얘기란 단지 그게야."

"그야말로 서문에서 본문까지 본문에서 발까지 다 얘기를 했는데 그래도 미진하시단 말이요, 호호."

"그래 그뿐이야, 기껏."

금성은 대번에 풀기가 꺾이며 매우 서운해한다.

"그러면 구슬아기가 나보고 오빠에게 무슨 전갈이나 할 줄 아셨소, 으흐흐."

아옥은 자지러지게 웃는다.

"전갈이야 않겠지만."

"그러면 뭘 뇌고 또 뇌이시오. 딱하기도 하시지."

금성은 엎어지듯 책상머리에 고개를 푹 숙인다.

"왜 또 주무실 테요. 오 참, 한 가지를 빼놓았군. 구슬아기가 탑 돌던 얘기를."

"!" 하고 금성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26

"주만이가 탑을 돌다께."

금성은 별안간 정신이 번쩍 나는 것처럼 고개를 쳐들고 제 누이동생을 거의 노려보다시피 바라본다.

"그만 일에 그렇게 놀라실 건 없잖아요, 오호호."

아옥은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또 웃음보를 터뜨린다.

"얘가 웃기는, 무두무미하게 탑을 돌았다고만 하니 궁금치 않으냐."

"참 궁금도 하실 거요. 그렇게 후비고 파는데 구슬아기 얘기란 그것뿐이니."

", 또 그뿐이냐. 탑을 돌았다면 무슨 탑을 어떻게 돌았단 말이냐."

"불국사에 새로 쌓은 다보탑을 돌았지 무슨 탑이 또 어디 있어요."

"그래 탑은 별안간 왜 또 돌았단 말이냐."

"별안간이 무어예요. 그날이 바로 사월 파일. 탑만 돌면 소원성취하는 날인 줄 오빠는 모르시오."

"옳지 참, 사월 파일이라 발원을 하는 날이것다."

"어유 오빠도. 그래 구슬아기의 발원이 무엔지도 모르시오."

"주만의 발원을 내가 어찌 알겠니."

"그래, 참 정말 모르신단 말이에요."

"그걸 어떻게 아나."

"그것도 모르시면서 남이 땀이 빠지도록 물으시긴 왜 물어요."

"모르니 묻는 것 아니냐."

"그러시지, 그렇고말고. 당초에 모르시지."

"참말 알 수 없구나. 그래 무슨 발원일까."

"발원을 올리는 것도 유만부동이지. 임금님도 계시고 여러 어른이 느른 듯한데 저 혼자 빠져나가 탑을 돌 적엔 그 발원이 여간 이만저만한 발원이겠어요."

"글쎄 그래. 그렇다면 더더구나 무슨 발원일까."

"이적도 오빠는 모르시겠단 말예요."

"그럼 내가 어찌 알꼬."

"그럼 고만둬요. 난 기가 막혀서 말도 못 하겠네."

"네가 기가 막힐 거야 무에 있니. 아는 대로 말만 하면 고만 아니냐."

금성은 곁의 사람도 알리만큼 벌렁벌렁 숨길이 사나워 간다.

"그야 뻔한 노릇 아니에요."

"뻔한 노릇이 뭐냐."

금성은 그리 크지 않은 눈을 찢어지라고 흡뜨고 아옥을 훑어본다.

"그만하면 아실걸."

"모른다는밖에."

"그럼 내가 말해 드릴까."

"그래 무슨 까닭이냐. 무슨 발원이냐."

"어서 시집을 가여지이다 하는 발원이지 뭐예요."

", 그래!"

금성은 평좌진 다리로 그대로 뛰어서 몇 간통이나 나갈 듯하다가 다시 주저앉기는 앉았다. 그는 주만의 발원이 그 근처이리라는 것은 어슴푸레하게나마 짐작은 하였지만 제 어린 누이가 게까지 직설거를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 하였던 것이다. 어차어피에 그는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어유 오빠도, 그 짐작이 안 나셔서 지금 새삼스럽게 놀라시오, 오호호."

아옥은 짜장 우스워 못 견디겠다는 시늉이다.

"시집 어서 갈 발원? 그러면 시집은 누구한테로 간다던."

"어이 오빠는 내흉스럽기도. 그야 갈 데 있나. 장님이 더듬어 보아도 알 노릇이지."

"응 장님! 어느 장님한테로 간다던." 오라비는 일부러 더욱 놀라는 척을 하여 보인다.

"장님! 왜 오빠가 장님이오."

아옥은 한옆으로 우습고 한옆으로 어마 싶었다. 그런 줄 몰랐던 제 오빠가 어쩌면 이렇게 능청맞고 엉뚱할까 하였다.

남매는 서로 넘보는 터이었다.

"그러면 주만이가 내게 시집을 오고 싶어한단 말이냐."

"옳지 인제 바로 알아채셨군. 그야 정한 노릇이지."

"흥 정한 노릇!"

"그래도 미심다우시오."

"누가 아나."

"그러기 낮잠이나 자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예요. 어서 좀 기운을 내보시란 말예요."

"무슨 기운을 어떻게 내란 말이냐."

"그렇게 미심답거든 지금이라도 뛰어가 보시란 말이야요."

"어디로 뛰어간단 말이냐."

"미심다운 사람한테로 가보시란 말이지."

"미심다운 사람이나 있으면 좋게……."

"왜 이러시오. 어서 가보시라는 데나 가보아요. 똑똑히 일러드리리까, 구슬아기에게 말이야요."

"구슬아기, 구슬아기."

"왜 입으로 외기만 하셔요. 어서 가보셔요. 자칫하면 남에게 앗길 테니. 아닌밤에 탑을 돌고 시집을 어서 가여지라 하는데. 마음이 그만큼 달떴으면 다 알아볼 것 아니야요."

금성은 남이 제 마음먹은 것을 영락없이 알아맞출 때처럼 간이 오그라붙는 듯하였다.

 

27

아옥이가 들어간 뒤에도 금성은 혼자 안절부절을 못 하였다.

그는 일어나 방 안을 거닐어 보았다. 까닭 없이 발 놓이는 것이 지척지척한다. 다시 책상 앞에 도사리고 앉아 보았다. 치웠던시전을 다시 펴들고 소리를 높여 읊조렸다.

아옥이가 흉을 본 대로 역시 '요조숙녀 군자호구'란 대문을 되씹고 곱씹고 하다가 마침내 책을 집어 던지고 머리를 흔들어 본다.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갖은 생각을 떨어 버리려는 것처럼.

그의 눈앞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주만이와 처음 만나던 광경이었다.

정월 보름날 그는 달재月城로 달맞이를 올라갔다. 온 서울 안 사녀들이 한창 구름같이 모여드는 판이었다.

자단과 심향목 수레들이 으늑한 향기를 풍기며 비단줄을 흔들고 사람의 물결을 헤치며 지나간다. 은 안장에 새파란 반딧불처럼 옥충의 등자가 번쩍이며 말탄 공자들도 펀득펀득 보인다.

사르럭사르럭 깁옷 자락이 부드럽고 미끄러운 소리를 낸다. 제글제글 노리개와 구슬줄이 운다.

금성도 성 등성에서 말을 내려 몇몇 친구들과 지껄이며 올라갈 제 그들의 앞에 심향목 수레 하나가 사람에 채이어 머뭇거린다. 수렛채를 곱게 꾸민 계집애 종이 잡고 가는 것을 보면, 대갓집 아씨나 아가씨의 행차가 분명하다.

얼마 가지를 않아 그 수레를 끌던 살찐 황소는 그 기름이 지르를 흐르는 누른 몸뚱어리를 부르르 한번 털고 걸음을 멈춘다. 인제는 더 못 올라가겠다는 뜻인지 모르리라.

짙은 남빛 바탕에 자줏빛 점이 별처럼 발린 앙장이 펄렁 하고 걷어쳐졌다.

그 속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처녀! 날씬한 키와 몸매만 보아도 벌써 뛰어난 미인임을 짐작하겠는데 황금사슬에 꿴 비취옥 귀걸이가 가볍게 흔들리는 사이로 내다보이는 분결 같은 귀밑과 뺨! 뒷모양만 보고도 금성은 이미 반나마 넋을 잃었다.

무례한 짓인 줄 저도 번연히 알건마는 마치 난봉꾼이 화랑 모양으로 슬쩍 옆을 지나치어 서너 걸음 앞을 질러 걷다가 힐끗 돌아다보았다.

먹으로 그은 듯한 진한 눈썹이 초승달 모양을 그리고 그 밑에서 번쩍이는 영채 도는 눈매, 곱고 맑으면서도 활발하게 움직인다. 품위 있는 콧대를 따라 내려오면 연꽃 꽃판 같은 입술이 바시시 웃는 듯하다.

어둑어둑 저물어 가는 황혼을 뚫고 붉은 놀은 환하게 서쪽 하늘에 뻗쳤다.

이 으늑한 빛깔 가운데 그 처녀의 모양은 더욱 뚜렷하게 더욱 선연하게 오늘 밤의 달 모양으로 떠오른 듯하였다.

한 걸음 걷다가 돌아보고 두 걸음 걷다가 돌쳐섰다. 저도 제 태도가 너무 괴란쩍은 것을 깨닫기는 깨달았으나 몇 걸음을 걷지를 않아서 고개는 누가 뒤로 잡아당기는 듯이 돌려지고 또 돌려지고 하였다. 좀이 쏠아서 견딜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참고 이번에는 제법 여러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돌쳐서서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늦었다. 그 처녀는 어느결엔지 좌정하고 달 뜨는 편을 향하여 돌아앉아 버렸기 때문에 백절치듯 하는 사람 틈바구니 사이로 그 옆모양이 어른어른 보일 뿐이었다.

이윽고 놀도 가뭇없이 스러져 버리고 온 하늘이 텅 빈 듯이 제 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더니 마침내 동녘 하늘이 밝아 오며 보름달이 그 둥근 모양을 나타내었다.

사람들은 와 하고 일어섰다.

"어째 달빛이 저렇게 허여스름할까." 어떤 입빠른 친구가 먼저 말을 끄집어낸다.

"대보름달이 희면 큰물이 진다는데!"

"쉬 달님이 들으시오. 처음 뜰 때야 으레 허여스름한 법이오."

"꼭 그런 것도 아니지요. 어떤 때는 아주 새빨갛기도 하니까."

"붉으면 가물이 심하다고 하지만 흰 것이야 그렇게 염려할 것 없소.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흰 대로 그냥 있지를 않을 테니."

"둥글기는 참 둥글군. 어느 한 모 이지러진 데 없이. 둥글면 풍년이 든다지요."

"보름달 안 둥그런 것 보았습디까."

제각기 아는 척을 하고 떠들썩하는 가운데 금성은 틈을 비집고 슬근슬근 그 처녀 가까이 몸을 빼쳐 들어갔다.

달빛을 받은 그 얼굴이 더욱 어여뻤으나 어딘지 모르게 범하지 못할 위압을 느끼고 감히 더 지싯대지는 못했다.

그 후 또 한 번 삼월 삼짇날 꽃놀이터에서 보기는 보았지마는 이때는 벌써 혼인말이 왔다갔다할 때라 금성은 체모를 돌보아 날뛰는 마음을 가까스로 참고 먼빛으로 슬쩍슬쩍 바라보기만 하였을 뿐이었다.

 

28

그 후 여러 번 매파를 보내 보았으나 저편에서는 선선히 승낙도 없고 그렇다고 딱 거절하는 것도 아니요, "아직 미거하니까"라는 말로 뒤를 둘 뿐이요 종시 결말을 짓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미룩미룩 내려온 것이다.

당당한 금시중의 아들이요 당나라의 말이나 글을 조금만 알아도 금쪽같이 쓰이어 먹는 오늘날 자기는 당나라 유학까지 하였겄다, 한림학사란 기가 막힌 벼슬 가자까지 얻었겄다, 어느 모를 어떻게 뜯어 놓고 보더라도 신라 천지를 통틀어 자기만한 신랑감은 없을 것이다.

통혼만 하면 저편에서 감지덕지 곤두박질을 하고 승낙을 할 줄 알았던 것이 이렇게 질질 끌 줄이야 정말 생각 밖이었다.

호사다마란 예로부터 있는 말이니 무슨 병통이 어디서 어떻게 생길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래 될 줄 알았으면 두 차례나 만났을 그때에 아주 당자끼리 아퀴를 지어 버렸던들 차라리 나을 뻔하였다. 거추장스럽게 매파니 통혼이니 할 것도 없이 일은 쉽사리 귀정이 났을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저번 불국사 거둥에 주만이가 끼일 것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 천추의 유한이었다.

만일 주만이가 거기 끼인 줄만 알았더면 세상없어도 쫓아가 보고야 말았을 것이다.

아무리 잡인을 금하고 남자를 금하시는 거둥이라 할지라도 멀리멀리 따라가는 것이야 누가 금할 것이냐. 그 넓은 불국사에 어디 몸을 숨기면 못 숨길 것이냐. 어느 나무 그림자 밑이나 불전 그늘에 몸을 감추었다가 주만이가 탑을 돌 때에 같이 탑을 돌아도 좋을 것이요 달도 밝으니 그 아름다운 얼굴을 실컷 마음껏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갖은 수작을 주고받을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아옥의 말마따나 저도 탑돌기를 할 적에는 마음이 달떴을는지도 모르리라.

월색이 의희한데 재자가인이 서로 만나 일창일수는 얼마나 운치 있는 놀이였을까.

'아옥의 말대로 오늘 밤에라도 그를 찾아볼까.'

금성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 쉬운 생각을 왜 여태까지 못 하였던고. 지난 일을 탓하고 뉘우칠 것은 조금도 없다. 오늘 밤에라도 그를 찾기만 하면 고만이 아니냐. 오늘 밤 달은 파일날 달보담 더 크고 더 밝을 것이 아니냐.

교교한 월색을 따라 시흥에 겨운 절대의 문장이 절세의 가인을 찾는 것은 옛날에도 흔히 있던 풍류성사가 아니냐. 나는 사마상여의 옛 본을 받아 상사곡을 읊으리라. 저 비록 탁문군이 아닐망정 그만큼 아름답고 풍정 있는 그이거니 오현금 두어 곡조야 어찌 아끼리요.

금성의 방 안을 거니는 발은 점점 활기를 띠어 온다. 그의 팔은 이따금 춤이라도 출 듯이 벌어진다.

자지러지는 제 생각에 미치광이 모양으로 홀로 싱글벙글한다.

주만이 있는 별당문을 두들기기만 하면 주만은 어느 틈에 제 목소리를 알아듣고 맨발로 뛰어나올 것 같다. 자기에게 몸을 던지고 그리움에 주렸던 눈물을 흘릴 것 같다.

홍등을 돋우고 또 돋우고 남남 사이에 밤 가는 줄 모를 것 같다.

그의 공상은 차차 현실성을 띠어 오고 나중엔 자릿자릿한 육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의 입에서는 문득 당시(唐詩) 한 구가 구르듯 흘러나왔다.

新情未洽天將曉

更把羅衫問後期

(새 정이 들자마자 어느새 밤이 밝네.

옷소매 부여잡고 언제 또 오시려오.)

이 한 구를 읊고 또 읊다가 나중에는 미친 듯이 껄껄 웃었다.

앉으락누으락, 일어서서 거닐어 보다가, 발랑 나동그라져 보다가, 바작바작 애를 졸이며 간신히 그 낮을 보내고 말았다.

그의 바라고 기다리던 밤이 되었다.

밤이 되어도 얼마를 더 서성거리다가 마침내 영창을 열어젖히고,

"고두쇠야." 하고 크게 불렀다. 고두쇠란 그의 마부의 이름이었다.

 

29

"불러곕시오."

고두쇠는 곧 문 앞에 대령하였다.

금성은 아까와는 딴판으로 아주 점잔을 빼고 거의 눈을 흡뜨다시피 하고,

"너 말 안장 좀 지어라."

호령하였다.

"밤중에 어디를 행차하시랍시오."

마부는 그 유잣덩이 같은 코에 거기 알맞게 큼직한 콧구멍을 벌름벌름하며 묻는다. 삐죽하게 멋없이 큰 키에 퉁겨나올 듯한 핏발 선 눈이 매우 사나우면서도, 더부룩한 구레나룻 밑으로 헤벌어진 입이 그리 흉물스럽지는 아니하였다.

"밤이면 어떻단 말이냐."

"녜에 헤에, 그저 좀 어두우니 어떻게 행차를 하실까 여쭙는 것입지요."

"미친놈, 달이 대낮 같은데 어둡다니."

"녜에 황송합니다. 그저 영대로 시행합지요, 헤헤."

금성은 잠깐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너 안에 가서 놀이霞兒더러 주안상을 좀 차려 내오라고 일러라."

"주안상입시오, 헤에."

고두쇠는 또 한 번 입이 벌어지며 그 뻐드렁니를 내어놓고 웃는다. 주안상이 나오면 상전도 물론 얼근해지려니와, 저도 한잔 얻어걸리게 되는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그보다도 더 좋기는 상전이 술이 취하면 마음씨가 더 좋아지는 탓도 탓이지마는.

고두쇠가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금성은 일락앉으락하면서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였다.

당건 복두에 공작 꼬리도 뻗쳐 꽂아 보고, 금 올린 허리띠에 구슬줄을 늘어뜨려 보고, 당경(거울)을 두번 세번 보고 또 보았다.

"밤중에 무슨 주안상이야요."

한참 만에야 놀이가 주안상을 들고 들어온다.

놀이란 금성의 몸종으로 말하자면 장가 안 든 도련님을 맡은 소임을 가졌다.

도련님은 도련님이지만 나이도 많을 뿐더러 더군다나 놀라운 당나라 벼슬까지 하기 때문에 도련님을 높여서 서방님이라고 부른다.

"주안상이란 으레 밤에 차리는 게지. 잔소리가 무슨 잔소리냐."

금성은 오늘 저녁은 웬일인지 들이닥치는 대로 불호령이다.

"그저 여쭈어본 겁지요."

놀이는 상긋이 웃어 보인다. 쫄작한 키에 보조개 지는 뺨이 제법 어여쁘다.

"여쭈어보기는!"

하고 눈을 부라리는 금성의 앞에 놀이는 서슴지 않고 술상부터 놓았다. 으리으리하게 윤이 흐르는 자단 소반에 은주전자와 안주 접시가 까딱하면 미끄러지려 한다.

놀이는 술상 앞에 도사리고 앉아서 옥잔에 퐁퐁 소리를 내고 호박빛 술을 붓는다.

"당주냐."

금성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연해 그 잽새눈을 부라리며 따진다.

"당주, 당주, 귀가 아프군요. 그럼 서방님 잡수시는 술이야 언제든지 소흥주지 무어예요."

"그러면 그렇지."

금성은 아주 뽐내고 한잔을 홀짝 들이켠다. 안주는 신신치 않다는 듯이 상아 젓가락 끝으로 이 접시 저 접시를 뒤적대 보다가 해송자 얹힌 전복 한 저름을 집고 나서 연방 폭배로 놀이가 미처 부을 틈도 없이 마시고 또 마신다. 한 주전자에 반나마 찼던 술이 어느 틈에 없어진다.

"왜 술을 요것만 내왔단 말이냐. 이번에는 한 주전자를 잔뜩 내어와!"

"어유 또 한 주전자를 더 잡수시면 어떡하시게. 또 쇤네를……."

하고 그 가늘게 찢어진 눈초리를 살짝 깔아메친다.

"내어오라면 내어오지 무슨 딴말이냐." 금성은 눈을 지릅뜨고 죽일 년 족치듯 한다.

놀이는 하릴없이 안으로 또 들어가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서방님의 본버릇이 또 나왔구나 하였다. 밤이 이슥하면 중뿔나게 주안상을 차려 내오라고 야단야단을 하고 술만 취하면 갖은 행티를 다 부리고 끝끝내 사람을 놓아주지를 않는다. 밤새도록 주정받이를 하고 그 이튿날에는 또 마님에게 죽일 년 살릴 년 하며 톡톡히 꾸중을 모시는 것이 놀이의 늘 당하는 고역이었다.

 

30

놀이가 내어온 두 번째 주전자를 금성은 빼앗는 듯이 받아서 들어 보더니,

"이번에는 꽤 묵직하구나."

하고 입이 헤벌어지려다가 말고 다시 새침하게 다물어 버린다. 붓고 마시고, 붓고 마시고, 두 번째 주전자도 거의 다 비어 가건마는 금성은 웬일인지 술취한 낌새도 보이지 않는다.

놀이는 속으로 이상한 일도 있구나 싶었다.

여느 때 같으면 벌써 해갈을 떨 것 아닌가. 자기를 끌어당기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가 내려놓았다가 그 술내 나는 입술을 비비대었다가…… 몸서리나는 주정으로 남을 못살게 굴 것 아닌가.

그런데 오늘 밤에는 주정은커녕 농담 한마디 걸지 않고 아주 못마땅한 눈치를 보이며 이따금 제 눈길과 마주치면 슬쩍 외면을 해버린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격으로 이왕 받을 주정이면 어서 받고 마는 것이 도리어 속이 시원할 듯하였다. 이렇게 시침을 떼고 점잔을 빼고만 있으니 나중에 무슨 벼락이 어떻게 떨어질지 몰라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송구스러웠다.

또 한 주전자를 더 내어왔다.

그 맹숭맹숭한 얼굴이 하얗게 시어서 철색이 지고 꼬부장한 어깨를 연방 추스른다.

"아이그,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잡수십시오. 큰일나겠네."

놀이는 보다가 못하여 이런 말을 하고 고만 술상을 치우려 하였다. 전 같으면,

"그럼 그럴까."

하고 그 음탕한 눈을 지끗지끗하며 곧잘 말을 듣는 서방님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댓바람에 역정부터 낸다.

"요년, 방정맞은 년."

욕지거리를 하고 놀이의 손에서 주전자를 뺏어 가지고 제가 손수 따라 먹기 시작한다.

금성은 속으로 오늘 밤에는 주만을 보러 가는데 네까짓 년이 다 무엇이냐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늘 위의 별을 따러 가는 그이거니 발부리에 핀 한 송이 풀꽃이야 돌아볼 나위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놀이를 안은 채로 주만을 꿈꾸기도 여러 번이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주만의 얼굴을 그리어 놀이의 얼굴과 바꾸어 보기도 하였었다. 이 따위 종년의 살도 이렇게 보드랍고 미끄럽거든! 하고 한숨도 한두 번 쉬지 않았었다. 벼르고 벼르던 오늘 밤에야말로 그를 찾을 것이 아니냐. 이런 때에 놀이 같은 것을 가까이하다니 그것은 주만에 대하여 모독이요 죄송스런 일이었다.

이런 줄이야 까맣게 알 수 없는 놀이는 상전의 태도가 이상하다 하면서도, 굳이굳이 술 먹는 것을 말리려 들었다.

"아이그, 제발 좀 고만 잡수십시오. 너무 취하시면 또 쇤네를……."

하고 놀이는 이번에는 잔을 치워 버리려 하였다.

"요년, 버릇없는 년, 더러운 년!"

금성은 눈을 흡뜨고 소리소리 질렀다.

"누가 네까짓 더러운 년을……."

당장 잡아나 먹을 듯이 흘겨본다. 주만을 보러 가는 데 백배 천배의 용기를 자아내게 하는 술잔을 빼앗다니. 괘씸한 년.

놀이는 대번에 눈물이 펑펑 쏟아질 듯하였다. 아무리 상전이기로 사람의 괄시를 이렇게 한단 말이냐. 사람을 짓주무르고 놀릴 적에는 할 소리, 안 할 소리, 갖은 잡보짓을 다 하고 채신머리없이 굴면서 술 그만 먹으라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버릇이 없단 말이냐.

"흥 더러운 년!"

더럽기는 누가 더럽단 말인가. 더러운 짓을 가르치기는 도대체 누가 가르쳤단 말인가.

원통하고 억울한 일은 맡아놓고 당하다시피 하는 처지이지만 이 때처럼 놀이가 분심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발딱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 버릴까 하다가 또 무슨 벌을 받을지 몰라서 주저주저하고 있자니까 창 밖에서 고두쇠 소리가 났다.

"안장을 다 지었습니다."

", 그래."

하고 금성은 겅정겅정 뛸 듯이 기뻐하며 영창을 연다.

고두쇠는 술상을 보고,

"여쭙기는 황송합니다마는 소인도 목이……."

말끝을 얼버무리고 연방 허리를 굽실굽실한다.

놀이에게는 그렇게 팩하게 성을 내던 금성은 고두쇠를 보고는 얼굴을 편다.

"그래 목이 컬컬하단 말이지. , 옜다, 이걸 먹어라." 하고 제가 먹던 주전자를 내어준다.

", 황송합니다."

"놀아, 이 상 마저 내어줘라."

'무슨 까닭이 있구나.'

놀이는 상을 내어주면서 생각하였다. 주안상을 하인에게 그대로 내어주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31

탑골에 있는 금시중 집에서 상서골 이손 유종의 집으로 가자면 안압지를 돌아내려 햇님다리를 넘어서면 남내 건너 남산 기슭에 너리편편한 기와집이 곧 그 집이다.

집 가까이 오자 금성은 말에서 내렸다. 열흘 지난 달이 낮같이 밝지마는 처음 온 집이라 어디가 어디인지 분별하기가 어려웠다. 금성의 주종은 벌써 여러 번 담장을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담은 두 길도 넘고 게다가 회칠을 번질번질하게 해놓았으니. 어디 발붙일 곳도 없는 듯하였다.

몇 바퀴를 돌아보다가 금성이와 고두쇠는 서로 마주 보았다.

"어디 발붙일 데나 있어야지."

하고 금성은 짜증을 낸다.

"암만 둘러봐야 어느 한 모 허술한 데가 있어얍지요. 참 큰일인걸입시오."

"왜 너는 몇 번 심부름을 와봤다며. 그래 어디 보아 둔 데가 없단 말이냐."

"소인이 왜 도둑놈인갑시오. 그런 허술한 데를 보아 두겝시오, 허허."

"얘 웃을 때냐. 무슨 수로 어떻게 하든지 들어는 가봐야지."

금성은 화를 버럭 낸다.

"들어는 가보셔야겠지만…… 젠장맞을 무슨 도리가 있나? 진작 소인에게 그런 분부라도 하셨더면 미리 보아나 두든지, 이 댁 하인들 하고 연통이나 해놓았습지요."

"이제 와서 그 따위 소리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고두쇠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그 사나운 눈방울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더니 고개를 번쩍 들며,

"좋은 수가 있습니다. 서방님이 소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시면 어떨깝시오. 말하자면 무동을 서시란 말씀입니다. 그러면 담 위에야 올라가실 수 있겠습지요."

"무동을 서라! 그래 무슨 짓이라도 해보자."

금성은 술이 잔뜩 취한 판이라 체모를 돌아다볼 나위도 없고 앞뒤를 헤아릴 힘도 없었다. 무슨 창피를 어떻게 당하더라도 불 같은 욕심에 들어갈 생각뿐이다.

주종은 다시 뒤꼍으로 돌아 등성이 발채에 담이 조금 낮은 데를 찾아내었다.

"자 올라타십시오."

하고 고두쇠는 어깨를 떡 버티고 주저앉는다. 금성은 허전허전하는 발을 올려놓았다.

"자 소인의 어깨를 단단히 디딥시오. 자 일어섭니다."

금성은 지척지척 떨면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어규, 어규" 하고 다시 주저앉는다.

"자 두 손으로 소인의 대강이를 꼭 붙드시고 계시다가 소인이 일어서거든 서방님이 일어서셔야 됩니다."

금성은 고두쇠가 시키는 대로 그 목덜미에 몸을 붙이고 고두쇠의 머리를 틀어안았다. 고두쇠는 일어섰다.

", 이젠 소인의 대강이를 놓으시고 일어서셔서 담머리를 더위잡아 보십시오."

금성은 일어서려 하였다. 오그렸던 무릎이 덜덜 떨리다가 한 발이 비뚝 하며 어깨 밑으로 뚝 떨어지는 바람에 고두쇠의 이마를 얼싸안고 가까스로 다시 목에 걸터앉았다. 고두쇠의 목 힘이 세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주종은 엎치락뒤치락 재주를 넘을 뻔하였다.

그래도 금성은 벌써 혼이 반이나 떠서 진땀이 쏟아지고 사시나무 떨듯 한다.

한동안 숨을 돌린 뒤에야 젖 먹던 힘을 다 들여 겨우 담머리에 손을 얹게 되었다.

"자 몸을 솟구쳐 보십시오. 그리고 배를 담에다가 척 걸쳐 보십시오."

하면서 고두쇠는 제 주인의 발을 떠받쳐 준다. 금성은 간신간신히 한 다리를 끌어올리어 담을 타고 앉아서 헐레벌떡 가쁜 숨을 모두 꾸려 쉰다.

", 어뎁시오. 아래로 내려뛰실 수 있습니까." 금성은 담 안을 굽어보더니,

", 큰일났다, 큰일. 이 발밑이 바로 연못이로구나."

", 연못? 그러면 석가산을 쌓아 놓은 데 말입시오."

"그래, 그래."

"그러면 일은 바로 되었는뎁시오. 거기가 바로 구슬아가씨 거처하시는 별당인뎁시오."

", 그래!"

금성은 씨근벌떡 숨도 옳게 쉬지 못하면서도 새 기운이 부쩍 나는 듯하였다.

"바로 내려뛰실 수가 없으시면 두 손으로 담머리를 움켜잡으시고 두 다리를 담 안으로 쳐들어 보십시오."

금성은 담 밖에 놓인 한 다리를 끌어올려 담 안으로 집어넣으려다가 말고 죽을 상을 해가지고 고두쇠를 내려다보며,

", 암만해도 안 되겠으니 네가 좀 올라와야겠다."

", 소인도 올라오란 말씀입지요. 어떻게 올라를 가나."

고두쇠는 올라갈 곳을 찾는 듯이 이리저리 담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문득 난데없는 카랑카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도적이야, 도적야!"

 

32

아사달은 파일날 밤에 집 걱정, 아내 생각으로 말미암아 온밤을 거의 다 새우고 새벽녘에야 고달픈 졸음에 잠깐 눈을 붙인 둥 만 둥 깜짝 놀란 듯이 몸이 소스라치자 쏜살같이 탑 쌓는 일터로 올라갔다.

어젯밤을 꼬박이 새우다시피 하였건만, 이상하게도 머리가 거뿐하고 몸은 날아갈 듯이 가뜬하다. 잠 못 잔 이튿날에 항용 있는 무겁고 흐리터분한 기운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어떻게 쨍쨍하게 맑은지 튀기면 터질 듯하다.

그는 제 핏줄 가운데 제 것 아닌 무서운 힘이 용솟음함을 느끼었다.

오래간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어마어마한 신흥(神興)이 저를 찾아온 줄 그의 넋은 벌써 깨달은 것이다.

이 흥이 오기를 얼마나 바랐었던고, 기다리었던고, ''이란 한없이 곱고 한없이 사납고 철석같이 미쁘다가 바람같이 변한다. 너르자면 온누리에 차고 잘자면 겨자알도 오히려 크다. 활달할 적엔 양양한 바다에 봄바람이 넘놀고 까다롭자면 시기하는 지어미도 물러앉을 지경이다. 그러고 갖은 조화를 다 가진 듯 고대 여기 있는가 하면 까마득하게 사라지고, 분명히 손아귀에 들었거니 하다가 돌아서면 간 곳을 찾을 길 없다. 어느 때는 푸드득 나는 새 날개에서 그대로 뚝 떨어져서 품속으로 기어들고 어느 때엔 발부리에 밟히는 조약돌에서도 불쑥 그 안타까운 모양을 나타낸다.

겨누와 정을 들고 얼마를 신고를 하고 생각을 하여도 날이 마치도록 그림자도 얼씬 않을 때도 있고, 생각이 나면 심술궂게도 아닌밤중에나 샐녘에야 언뜻 얼굴을 비치기도 한다.

바윗덩이에나 지질린 것 같은 답답하고 캄캄한 머리 가운데 으렷이 한 가닥 광명이 어릿거린다. 그 실낱 같은 빛줄이 차차 굵어지다가 떼구름을 쫓고 쑥 햇발이 불거지듯 갑자기 머릿속이 환해지면 어느 모를 어떻게 갈기고 어디를 어떻게 쪼아야 될 것도 따라서 환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통 때는 이 신흥이 그리 길지 않았다. 번개처럼 번쩍 하다가 그대로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길어도 한두 시간을 지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식전 꼭두부터 찾아온 것도 전보다 다를 뿐인가, 그 빛깔도 유난히 부시고 흐름도 잇달고 연달아 그칠 줄을 모른다.

그리고 그 빛물결도 여느 때 모양으로 한결같고 조용하지를 않다.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찬란하고 너무도 급하다.

영롱한 무지개가 곤두서고 달과 별들이 조각조각 부서져서 수없는 금점 은점이 소용돌이를 친다. 넘놀고 뛰놀고 곤두박질을 치고 줄달음질을 친다.

이 급류에 따라 아사달의 팔은 무섭게 빠르게 놀려졌다.

"이 줄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이 고비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 들여 번개같이 마치와 정을 놀리었건만 굽이치는 급류를 따라가기에 허덕허덕하였다.

그는 아침도 잊었다, 점심도 잊었다, 저녁도 잊었다. 밤이 되었다. 날이 새었다.

그의 줄기찬 정질과 마치질은 쉴 줄을 몰랐다.

쉬려야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번 그를 휘어잡은 ''은 좀처럼 그를 놓아 주지 않았던 것이다. 황홀의 경계에 그는 온전히 들어서고 만 것이다.

돌결은 그의 손 아래에서 나뭇결보담 더 연하게 더 하잘것없이 부서지고 다듬어지고 밀려졌다.

영락없이 꼭꼭 제 자국에 들어가 맞는 쇠와 돌의 부딪치는 소리는 그의 귀엔 이 세상의 무슨 풍류보담 무슨 곡조보담 더 아름답고 더 신이 났다.

제 손이 거칠 때마다 드러나는 일머리는 이 세상의 무슨 보배보담도 더 소중하고 더 살가웠다.

그는 목마른 줄도 몰랐다. 배고픈 줄도 몰랐다. 죽고 사는 것조차 그는 몰랐으리라.

그는 이 흥겨운 한 시각이 아까웠다. 한 찰나가 아까웠다.

이따금 그의 팔에 힘이 아니 빠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 다음 순간에는 아까보담 몇 갑절 더 되는 힘을 다시 돌이킬 수 있었다.

둘째 층의 새김질과 다듬질은 댓바람에 끝이 나고 말았다. 셋째 층을 지을 바위도 몇 번 겨누질에 어렵지 않게 매만질 수 있었다.

돌 다루는 울림은 잔 가락 굵은 가락을 섞어 가며 마치 급한 소나기 모양으로 온 절 안을 뒤덮었다.

아사달의 일은 인제 낮도 없고 밤도 없었다.

 

33

점심 대중공양을 마치고 아상노장이 들어가자 불국사 중들은 한자리에 모인 김에 '공론'이 분분하다. 벌써 며칠째 밤이고 낮이고 끊이지 않고 귀아프게 들려 오는 돌 다루는 소리에 그들은 진저리를 내었다.

"벌써 며칠째나 되었을까."

"이틀은 더 될걸."

"이틀이 뭐요. 아마 오륙 일은 되지."

"벌써 그렇게 되었을까."

"아무렴, 그렇게 되고말고."

"나무아미타불, 오륙 일을 먹도 않고 자도 않고."

"원 그렇게들 정신이 없단 말이오."

듣다가 못한 듯이 떠는턱이 중론을 가로맡아 시비를 가릴 듯이 나선다.

"가만있거라. 오늘이 사월 열하루, 파일 이튿날이니 곧 아흐렛날 식전부터 일을 시작했으니깐 꼭 오늘이 사흘째 잡아드는군."

떠는턱은 꼬챙이 같은 손가락을 또박또박 꼽아 가며 따지고 나서, 휘 한번 좌중을 훑어본다. 내 정신이 이렇게 좋은데 어느 뉘가 감히 딴소리를 할까 보냐 하는 눈치다.

"장실 말씀이 옳소. 따져 보니 과연 오늘이 꼭 사흘 되는 날인가 보오."

원주가 이번에는 고분고분히 찬성을 해버린다.

"단 사흘이라도 어려운 노릇이야."

"어렵다뿐이오. 단 하루라도 어려운 노릇인데……."

"사흘씩 굶다니 어렵고말고. 그야 우리 세존께서야 칠 년 고행도 하셨지만!"

"아니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일개 석수를 어찌 우리 세존께 댄단 말이오."

말과 말이 주거니 받거니 벌써 중구난방이다.

"원 일을 해도 주책머리가 없지그려. 안 하려 들면 이틀 사흘 손끝 까딱하지 않고 하려 들면 며칠씩 굶고 야단이니."

빨갱이도 마침내 말참견을 한다. 말씨가 우락부락한 것을 보면 아직도 아사달에 대한 미움이 그대로 남은 듯.

"그것도 소위 명공의 유세랄지."

하고 누가 빈정거린다. 파일 잘 못 쇤 분풀이는 뜻밖에 거둥으로 말미암아 풀어졌을 법도 하지마는 그래도 '떠 들어온 부여놈 따위'가 아니꼽다는 감정이 어디선지 움직이고 더구나 자기네가 신 벗고 따르려야 따를 수 없는 그 뛰어난 재주를 까닭 없이 시새었던 것이다.

"그야 그렇게 말할 것 있소. 일이야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할수록 좋은 것 아니오."

이번에는 원주가 전날과는 아주 딴판으로 아사달의 역성을 든다. 산댓속이 빠른 그는 거둥으로 생길 만큼 생겼고 또 왕이 한번 길을 터주신 후로 대갓집 불공도 푸득푸득 들어오기 시작한다. 첫째로 이손 유종 댁 아들 발원의 삼일 불공이 들지 않았느냐. 더구나 불시에 거둥을 하시게 된 것이 전하는 말과 같이 다보탑 구경하시는 데 계셨다면 그것을 쌓은 석수를 미워할 까닭은 도무지 없었다. 하루바삐 석가탑마저 이루어지면 무슨 수가 또 어떻게 생길지 누가 아느냐.

"침식을 잊으니 그것이 딱한 노릇이야." 하고 그 눈방울이 겉도는 눈에 제법 걱정하는 빛까지 보이었다.

한 절의 살림을 맡은 주장중이 이렇게 역성을 들어 놓으니 입 놀리던 중은 멀쑥해지고 난데없는 동정들이 쏟아진다.

"공양을 안 드니 정말 큰일이군."

"병이나 나면 어떡하나."

"글쎄 나도 그게 걱정이야."

"억지로라도 좀 들게 못 할까."

"기어이 좀 권해 보시지요."

"글쎄 나도 두어 번 권해 보았지만 워낙 열이 난 사람이라 말이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니, 허허."

귀찮고 성가신 일은 웃음으로 막아 버리는 것이 원주의 버릇이다.

"그런 신통력을 가진 분이니 사흘쯤 굶는 것이야 관계치 않겠지만."

"아무리 법력이 놀라워도 너무 곡기를 끊어 가지고는 염려지, 염려야."

"그러나 어쩔 수가 있소. 대공을 방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마 오늘쯤이야 일을 그치겠지."

"만 이틀에 해놓은 일머리를 보면 엄청나더군, 엄청나."

"그야 이 세상에서 다시 얻기 어려운 명공이라는밖에."

"그 탑을 모시라고 부처님이 일부러 내신 사람이지."

"어 놀라운 재주거든."

가장 동정을 하는 척도 하고 추어도 올리면서도 속살로 아사달의 신상을 염려하는 위인은 하나도 없었다. 무슨 수로 어떻게 하든지 미음 한 모금이라도 결단코 마셔 보자는 씨알머리는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다. 불전에 공양드리듯 하루 세 끼만 갖다 놓았다가 치워 버렸다가 하면 고만이었다.

 

34

아사달의 머릿속을 꿰뚫고 쏜살같이 닫는 흐름은 갈수록 혼란해지고 갈수록 급격해진다.

처음에도 물꽃 송이송이마다 별처럼 빛을 발하여 마치 별로 엉기인 은하수가 굽이치는 듯 눈부시지 않음이 아니요 영롱하지 않음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그 광채는 밝고도 부드러웠지마는, 이제 와서는 그 물결이 그대로 기름인 양 물보라를 날리는 대로 훨훨 불길을 일으키어 물꽃인지 불꽃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다.

그리고 빠르기는 물결이라느니보다 차라리 바람결 같다. 어지럽게 춤추는 꽃구름을 휙 몰아가는 회오리바람도 이러할 듯.

아사달의 손길도 바람결같이 날쌔다.

머릿속에서 쉴새 없이 터지는 줄불보담 못하지 않게 그의 눈앞에서도 쇠와 돌이 단판 씨름을 하는 불꽃이 번쩍번쩍 흩어졌다.

이 휘날리는 불꽃 사이에 모래알만 한 작은 아내의 모양이 튕기는 듯 번득이다가 스러지기도 하였다. 그리운 아내와 애달픈 ''이 두 손길을 마주잡고 그를 찾는 수가 이전에도 흔히 있었다. 그리운 생각이 쌓이고 쌓이어 손바람이 절로 나는 ''을 빚어내고 자아내기도 기실 여러 번이었었다.

아쉬운 마음이 도저하고 간절할수록 그에게 ''하는 ''도 놀랍고 엄청난 때가 많았었다.

구축축한 풋사랑과 거룩한 '솔도파()'가 한데 뒤범벅이 되는 것은 발을 구를 일인지 모르리라. 기가 막힐 노릇인지 모르리라. 그러나 사랑에서 흥이 오고 흥이 어리어 세상에도 진기한 탑이 이루어지는 것을 어이하랴. 부처님도 웃으시며 눈을 감으실지 모르리라.

이번만 해도 외로운 나그네의 몸으로 명절을 맞이하게 되고 지나친 그리움과 걱정에 몸이 달고 애를 태운 나머지에 이런 신흥이 그의 덜미를 짚은지 모르리라.

''은 인제 이글이글한 불덩어리가 되어 그대로 디굴디굴 구른다.

그는 불채찍에 휘갈기는 사람 모양으로 죽을 판 살 판 정과 마치를 휘둘렀다.

몇 날이 되었는지 몇 밤이 되었는지 그는 모른다. ''이 끊어진 때나 그에게 낮도 있고 밤도 있었지만 ''이 꼬리를 맞물고 잇달아 일어날 때에야, 기실 그 ''이 계속되는 동안이 그에게는 도무지 한순간인지 모른다.

머리에는 아직도 꽃불이 재주를 넘고 뒹구는데 몸의 힘은 마음의 힘에 차차 휘감겨 들어가는 듯하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

용을 쓰면 쓸수록 팔의 맥은 자꾸만 풀려진다.

"저기 불덩어리가 구을지 않느냐. 저 불을 쫓아가야 한다. 세상 없어도 따라가야 한다."

애가 마르도록 외치면 외칠수록 정과 마치는 제자리에 가서 놓이지 않는다.

웬일일까! 그전에도 ''의 불길이 껌벅껌벅 꺼지려 할 때에도 손길은 신이야 넋이야 쫓아가서 아주 꺼져 버린 뒤라도 그 남은 운으로 얼마쯤은 끌어갔었거든 이번에는 불줄이 이렇게 춤을 추는데도 팔을 마음대로 놀릴 수가 없으니 웬일일까!

"될 말인가, 될 말인가."

차차 차차 까무러져 가는 제 몸의 힘을 소리소리 불러일으키려 하였건만 기를 쓰면 쓸수록 팔은 허둥지둥 꿈지럭거릴 뿐이다.

"이것 큰일났구나."

아사달은 저도 제 힘에 절망을 느끼면서도 마치와 정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분명히 댈 데 대고 칠 데 쳤건만 빗맞고 허청을 쳐서 귀에 익은 제 자국에 들어가 떨어지는 쾌음이 여간해서는 일어나지를 않는다.

아사달은 수렁에 빠지는 사람 모양으로 버르적거리며, 이번이란 이번에야말로 제 자국을 때리리라 하고 마치를 번쩍 들어 보기 좋게 한번 휘갈겼다.

아뿔싸! 할 겨를도 없이 마치는 허공을 치고 그의 몸은 이상한 힘으로 휙 앞으로 잡아 낚아채는 듯하였다.

그 찰나, 그의 머릿속에서 마치 눈보라처럼 설레던 불길이 한꺼번에 확 하고 타올라서 삽시간에 불바다를 이루더니 이내 아뜩하게 꺼져 버린다……. 까무러친 아사달의 머리 위에 지나치는 달빛이 종용하게 흐른다.

 

35

"그것 보십시오. 쇤네 꾀가 어떠한가."

"그 잘난 꾀."

"모로 가도 장안만 가면 고만 아닙시오."

"그야 마님께서 내 말을 잘 들어주신 탓이지. 어디 꼭 네 꾀 때문이냐."

"아니 누가 마님을 졸라 보시라고 했는뎁시오."

"얘 말도 마라. 생으로 사내 동생을 하나 낳아 줍시사고 떼를 쓰느라고 내 땀이 얼마나 빠졌기에."

"뒹굴고 발버둥을 치시고, 하하. 아이 우스워라. 그래도 애초에 묘책을 생각해 내는 것이 여간 슬기가 아니랍니다. 이런 대강이도 쉽지는 않답니다."

털이는 제 머리가 대견하다는 듯이 주먹으로 자근자근 두들겨 보이며 연해 공치사를 한다. 주만과 털이는 다보탑 있는 데로 걸어올라가며 기쁘게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다.

"아이 장해라. 그 모과머리가."

"생기기야 모과면 어떤갑시오. 머리란 슬기만 들면 고만 아녜요."

"슬기! 놀라운 슬기도 있고는 보겠구나."

"놀랍구말굽시오. 그래 아닌밤중에 남복을 차리고 수레도 안 타시고 등불도 없이 이 먼길을 오실 법이나 합니까. 발만 부르트고 호방에나 빠지고 죽을 고생만 하셨지 뭐입시오. 아이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뎁시오."

하고 털이는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고 나서,

"자 오늘은 어떱시오. 구종을 늘인 듯이 앞세우시고 마상에 높이 앉으시어……."

"아이 장하다, 네 꾀가 장하다. 고만두어라. 무슨 난리를 치러 나가니. 마상에 높이 앉아서, 호호."

하고 주만도 조용한 웃음을 터뜨리었다.

"장하구말굽시오. 중들은 앞에서 굽실굽실하고. 그날 밤에 보행으로 초라하게 그냥 와보십시오. 절문 안을 들어서시게나 할 텐뎁시오. 맙시사, 아하하."

털이는 아주 신이 나서 재깔거리며 웃어 댄다.

", 무슨 방정맞은 웃음 소리냐. 누가 들으면 괴란쩍게."

"누가 들으면 어떤갑시오. 이손 댁에서 불공을 드리러 오시고 그 댁 아가씨께서 저녁에 달빛을 따라 절 구경을 하시는데 어느 뉘가 감히 탄한단 말씀입시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요란스럽다."

"어유 조심은 퍽도 하시네. 어느 때는 밤중에라도 그냥 지쳐 들어오실 듯이 자는 사람을 깨워 일으키시고 야단법석을 하시더니. 그래 만일 아가씨 하시자는 대로 했더라면 그야말로 큰 야료가 일어날 뻔하였지! 온 집안이 벌컥 뒤집히고 온 절 안이 벌컥 뒤집히고. 쇤네는 목이 달아나고, 아하하."

털이는 웃음이 체해서 눈물까지 글썽글썽하여졌다.

"그래도 또 웃음이야, 무에 그렇게 좋으냐."

주만도 털이를 나무라기는 하면서도 솟아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무에 좋으냐굽시오. 쇤네도 좋기야 좋습지요. 그날 밤에 그 고생을 안 했으니. 그렇지만 아무리 한들 아가씨만큼이야 좋을깝시오."

"내가 좋을 일이 무에냐."

어쩐지 주만의 목소리는 조금 기어들어가는 듯하다. 귀밑 언저리가 갑자기 불그레하게 환해지는 것은 달빛이 거기만 비치는 탓만도 아니리라. 털이는 염치없게도 주만의 얼굴을 말끄러미 들여다보며,

"아가씨도 그런 시침을 뗍시오. 좋거든 그냥 좋다구 그리십시오, 히히."

털이는 정작 제가 좋은 듯이 겅정겅정 뛴다.

"원 그 애는!"

하고 주만도 입을 다물려 해도 그 가장자리가 자꾸만 풀리었다.

그들의 발길은 어느덧 다보탑 가까이 왔다.

", 인제는 제발 좀 떠들지 말아 다오."

주만은 진정으로 털이를 타이르고, 고름을 다시 매고 옷깃을 여미었다.

그는 거룩한 자리에 들어서는 것처럼 기쁨에 헤벌어진 마음이 도사려짐을 느끼었다.

"탑돌기에 애간장을 태우던 데를 다 왔는걸입시오." 그래도 털이는 까불기를 그치지 않았다.

 

36

주만과 털이는 다보탑을 한 바퀴 휘 돌아보았다.

눈이 어리는 아름다운 그 모양이 전보다 한결 더 정다웠다. 홑으로 묵묵한 돌이 아니요, 숨길이 돌고 맥이 뛰는 생물인 양 주만을 반기어 맞는 것 같다. 그 연연한 입술을 열어 그리고 그리던 회포를 하소연하는 듯하다. 그 부드러운 가슴을 헤치고 아늑하게 안아 주는 듯하다.

이 탑의 둘레를 돌고 또 돈 지가 단 며칠이 안 되건만 주만에게는 해포가 넘는 것 같았다. 햇수조차 따질 수 없는 까마득한 옛날인 것도 같았다.

그날 밤보담 더 밝고 더 둥근 달이 역시 그날 밤 모양으로 탑의 몸에 서리었다.

주만은 서성서성하며 차마 발길을 못 돌리고 있노라니 털이는 옆에서 재재거리기를 말지 않는다.

"왜 오늘 밤에도 탑돌기를 또 하시렵시오. 왜 또 여기 이러고만 계십니까. 어유, 쇤네는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는뎁시오. 정말 쇤네는 그날 밤에 죽을 고를 치른걸입시오. 몇 바퀴를 돌았는지 어디 헤일 수도 없지. 그러니 이년의 발목쟁이가 성할 겁니까. 그때 시큰거리기 시작한 게 입때 낫지를 안했답니다."

하고 털이는 절름절름 절어 보인다. 달 비친 땅 위에 땅달보 같은 그림자를 그리고 낑낑 매며 돌아가는 것이 허리가 부러지도록 우스운 꼴이었으나 주만은 낄낄대고 웃기는 싫었다.

"여기 이러고 밤을 새우시랍시오. 어서 가보십시오."

제가 재롱을 떨어도 알은체를 안 해주는 데 적이 흥이 깨어진 털이는 절름발이 놀음을 그치고 잠깐 입을 닫았다가 또 보챈다.

시름없이 달만 쳐다보고 있던 주만은 성가신 듯이,

"가기는 또 어디를 가잔 말이냐."

"아니 고작 이 다보탑을 보시랴고 그 애를 쓰시고 여길 오셨단 말씀입시오. 저 석가탑으로 어서 가보셔야 될 것 아닙시오."

"석가탑으로?"

주만은 무심코 말을 받는다.

"그러면입시오. 거길 가셔야 만나실 분을 만나실 것 아닙시오."

"……"

주만은 다시 달만 쳐다본다.

"어서 좀 가보십시오. 나도 모시고 갈게."

"무에 그리 급하냐."

그렇게 급하던 마음이지만, 정작 예까지 오고 보니 축 늘어진다.

갈까말까.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망설여진다. 단 한 번만 보아도 원이 풀릴 것 같더니만 그대도록 중난하던 원을 이렇게 쉽사리 풀 수 있게 되었거늘 가슴은 왜 이리 답답한가. 여기서 몇 걸음을 뜨지 않아 '그이가 있구나' 하는 생각만 해도 얼굴은 왜 이렇게 화끈거리는가…….

"언제는 그렇게 서두시더니 인젠 또 급할 게 없단 말씀입시오. 아가씨도 알고 보니 여간 변덕쟁이가 아니시군."

털이는 이번 일에 제 공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을 믿고 함부로 지싯거리고 말씨도 마구잡이다.

"그 어른이 거기 꼭 계실 줄 네가 어떻게 꼭 안단 말이냐."

빈말뿐이 아니요, 참으로 주만에게 이런 생각이 지나갔다. '거기 가면 그이가 있거니' 하고 믿기는 하였지만 꼭 있다고야 어찌 장담하랴. 혹은 없을는지도 모른다. 만일 없다면!

'있거니' 할 때는 마음이 조려붙기는 하였으되 느긋하고 든든하더니 '없거니' 하매 별안간 속이 텅 빈 듯이 헛헛해지며 부랴사랴 뛰어가 보고 싶었다.

"그 탑에 꼭 계시구말구. 벌써 다 알아본걸입시오. 그 방에서 시종 드는 차돌이란 아이놈에게 넌지시 다 물어보았답니다. 어서 가시기나 하십시오."

하고 털이는 주만의 등채를 밀다시피 한다.

몇 걸음을 걷지 않아 석가탑 위에 사람이 있고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아보게 되었다.

"저기를 보십시오. 그 어른이 마치를 들고 일하시는 게 보이지 않습시오."

털이는 내 말이 어떠냐 하는 듯이 연방 손가락질을 하며 가리켜 준다.

실상 털이보담 주만이가 먼저 보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 아사달이 마치를 쥐고 돌 위에 꾸부리고 있는 것을.

", 그런데 어째 돌 다듬는 소리가 들리지를 않니."

주만은 주춤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본다.

"글녓시오." 털이도 들어 보다가,

"참 소리가 안 나는군요. 차돌의 말을 들으면 어두운 밤에도 일을 잘 하신다던데."

하고 째기눈을 뜨고 이윽히 바라보더니만 또 깔깔댄다.

"저길 좀 봅시오. 얼굴을 돌멩이에 비비대시고 아주 한잠이 드셨군요. 그 맨바닥에, 으흐흐."

 

37

주만과 털이는 석가탑 앞에 와 걸음을 멈추었다.

"아하, 아주 늘어지게 한잠이 드셨는걸입시오. 쇤네가 올라가 볼깝시오."

털이는 다짜고짜로 거기 놓인 사다리에 한 발을 얹으려 하였다.

", 주무시면 조금 있다가 다시 오는 게 좋지 않니."

"글녓시오. 온종일 일을 너무 많이 하시어 고단도 하실 테니."

털이도 이번에는 순순히 이르는 대로 들었다. 아무리 주책없는 털이라도 생면부지의 사내가 자는 것을 덮어놓고 깨워 일으키자는 염의는 없었다.

그들은 가만히 발길을 돌렸다. 마치 자기네의 자국 소리에 자는 이의 고단한 잠이 깨일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털이는 앞장을 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주만은 무엇이 마음에 켕기는지 다시 돌쳐선다. 어슴푸레한 빛을 통하여 그는 뚫어지게 탑 위를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는다.

"언제는 도로 가자시더니 왜 그리고 서 곕시오. 그래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시지를 않습시오, 히히."

앞을 서서 가다가 제 주인의 뒤따르는 기척이 나지 않으매 힐끈 돌아다보고 털이는 또 우스개를 걸었다.

주만은 털이의 버릇없는 우스개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한동안 뿌리가 박힐 듯이 서 있다가 손짓으로 털이에게 가까이 오라는 뜻을 보이었다.

", 암만해도 이상스럽구나. 주무신다 한들 어찌 저렇게 기신도 없이 주무실 리야 있겠니."

과연 돌 위에 늘어져서 등 언저리가 어쩐지 푹 꺼져 보이는 게 보통 잠자는 사람으로는 너무도 종용해 보이었다.

털이도 제 주인의 목소리가 무슨 불길한 조짐을 느낀 것처럼 약간 떨리는 것을 듣자 심상치 않다는 듯이 발을 사르르 미는 듯이 다시 돌쳐서 제 상전을 따라 탑 위를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딴은 좀 이상한뎁시오. 그냥 주무시기만 한 다음에야 저렇게 퍽 엎어져 계시지는 않을 성싶군요."

"그리고 마치를 그대로 들고 있는 것도 수상하지 않으냐. 저렇게 고단하게 잠이 든다면 쥐었던 것을 으레 놓을 텐데."

"그야 쥐고 자는 수도 있겠습지요만 아무튼 궁금하니 쇤네가 좀 올라가 볼깝시오."

주만도 이번에는 말리지 아니하였다.

털이는 휘청휘청 사다리를 부여잡고 발발 떨면서 올라갔다.

어른어른하는 달빛에서 그 방구리 같은 몸을 꼬불랑꼬불랑하며 털이는 이리 갸웃 저리 갸웃 늘어진 이의 이모저모를 자세자세 들여다보고 있다가,

"에구머니나!"

버럭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

하고 주만도 깜틀 하며 사다리 앞으로 한 걸음 바싹 다가들었다.

"이거 크, 큰일났습니다. 이 뺨에 피, 피가……."

", 피가!"

하고 부르짖을 겨를도 없이 주만은 나는 새와 같이 사다리를 날아올랐다.

"어디, 어디냐."

올라서는 길로 주만은 허둥지둥 묻는다. 아사달의 오른편 뺨과 돌이 맞닿은 어름을 들여다보고 있던 털이는,

"여길, 여길 봅시오."

하고 손가락으로 제 보던 자국을 가리킨다.

주만은 미처 치마폭도 못 거두고 올라온 탓에 발이 치맛단에 휘감기어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하였다.

달빛은 아무리 밝다 해도 흐릿한 탓에 빛깔 같은 것이 또렷또렷하게 나타나지를 않는다.

털이는 재빠르게 제 손을 그 뺨과 돌 사이에 집어넣었다가 꺼내며,

"이것 봅시오. 눅눅하게 묻는뎁시오."

하고 무슨 물기가 도는 제 손가락 끝을 비비어 보인다.

살에 묻은 피는 더구나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주만은 급한 마음에 제 치마폭을 꾸김꾸김 꾸겨 쥐고 그 뺨과 돌을 훔쳐 내어 달빛에 펴서 비춰 보고,

"피가, 피가 분명코나."

마침내 단정을 내리었다.

"이걸 어째, 이걸 어째요."

털이는 쩔쩔매었다.

", 몸을 좀 흔들어 보렴."

"여봅시오, 여봅시오."

털이는 넘어진 이의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며 등을 흔들어 본다.

"어규, 어째 살이 단단한 것이 굳은 것 같은뎁시오."

주만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아사달의 코에다가 손을 대어보았다. 그윽한 숨길이 있는 둥 만 둥한데 손을 쥐어 보니 마치 얼음장같이 싸늘하다.

"이를 어떡하나." 주만의 눈에서는 괸 때 모르는 눈물이 쏟아진다…….

 

38

아사달은 까무러친 그 이튿날 아침에야 겨우 깨어났다.

아리숭아리숭한 머리 가운데 한창 흥이 겨워서 겨누를 휘두르고 정을 들 만치는 모양이 저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떠올랐다.

그 신이 난 잔 가락 굵은 가락이 잉잉 하니 귓결에 울리며 제 몸은 반공에 둥둥 솟아 일렁일렁하는 듯하다.

돌불이 번쩍번쩍 흩어지는 대로 눈동자만큼씩 한 수없는 아사녀의 모양이 마치 콩 튀듯 튀어올라 핑핑 내어둘리는 눈끝에서 뱅글뱅글 매암을 돈다.

'내가 왜 이러고 누워 있을까?'

그는 문뜩 이런 생각을 하였다. 저 아닌 아사달은 저렇게 일을 하느라고 곱이 끼었는데 저는 번듯이 누워서 핀둥핀둥 노는 것이 송구스러웠다.

'한창 흥이 나는 판인데 나는 왜 이러고 누워 있을까. 이 드물고 소중한 시각에 나는 왜 한만히 쉬고 있을까. 몇 번 손질이면 석가탑의 삼층이 끝날 것이 아닌가. 돌결이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 터이거늘 나는 어느 틈에 드러눕고 말았을까…….'

수없는 아사녀의 모양이 하나씩 둘씩 엉겨붙더니 다 자란 아사녀가 되어 뒷걸음질을 치고 멀리멀리 달아나며, 한창 바쁘게 일을 하고 있는 저 아닌 아사달을 손짓하여 부른다.

'저것 보아, 아사녀는 저렇게 부르지 않는가. 저 사람의 겨누와 정을 든 팔은 그렇게 번개같이 놀지 않는가. 그런데 내 몸은 왜 여기 늘어져 있을까.'

암만해도 무슨 곡절인지 알 수가 없으나 아무튼지 자기가 일을 집어치우고 만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때 일을 끝내었던들 나는 벌써 훨훨 날아갔을 것이 아닌가. 지금쯤은 우리집 사립문을 삐걱삐걱 열 것이 아닌가. 그러면 아사녀는 엎드러지며 고꾸라지며 뛰어나올 것이 아닌가. 아무 거리낌 없는 내 방에서 네 활개를 퍼더버리고 실컷 마음껏 쉴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는 그 동안을 못 참아서 여기 쓰러져 버린 제 몸이 한량없이 괘씸스러웠다.

'어서 일어나야지.'

하고 그는 몸을 추스르려 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의 몸은 나른하게 풀어져서 손가락 끝 하나 오그릴 수도 없었다.

마치와 정이 제 자국에 맞지를 않아서 화증을 내던 것이 인제 와서 또렷또렷하게 생각이 난다.

'옳거니 그때 내가 화증이 나는 김에 마치를 휘갈겼거니. 그리고 그 다음에는…….'

생각의 실마리가 풀릴 듯 풀릴 듯하면서도 또다시 갈래를 잡을 수 없다. 그 후에 얼마를 일을 더 한 것도 같고 탑 위에 그냥 쓰러진 법도 하다.

'마치를 휘갈기고 나서…….' 끝이 아물아물해지려는 그 생각을 붙들고 그는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암만해도 그 뒷일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공중에 둥실 떠 있는 듯하던 몸이 차차 가라앉는 듯하며 뼈마디가 얼얼하였다.

그러자 문득 아사녀의 냄새가 난다. 숨을 들이쉬는 대로 그 감칠 듯한 향기는 모랑모랑 피어나서 콧속으로 흘러들어 피 방울방울에 스며든다.

육지에 뛰어오른 물고기가 오래간만에 물맛을 보는 것처럼 그는 가슴을 벌룸벌룸하며 숨을 크게 내쉬고 들이쉬었다.

아아 향기! 아사녀의 향기! 삼 년이나 길고 긴 세월에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그 향기. 주리고 주리던 그 향기.

과연 그는 이 향기에 주리었다. 그립고 그리운 아내의 얼굴은 비록 환영일망정 때때 그의 눈에 밟히었지만 아사녀의 현실의 몸이 아니면 발할 수 없는 이 향기가 현실로 그의 코 안으로 기어들 까닭은 없었다. 그는 대공을 마치고 어느결에 아사녀의 옆에 와 누워 있는가.

아사달은 눈을 두리번두리번하였다.

헌털방이 다된 제 벙거지가 걸려 있는 바람벽만 보아도 갈 데 없는 불국사 제 처소가 분명하거늘 이 향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흘러오는가.

아사달은 바로만 두었던 고개를 돌리어 뚤레뚤레 살피려 하였다. 그러자 귓결에서 별안간 꾀꼬리 같은 여낙낙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사내들 틈바구니에서 날을 보내었고,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간만이었다.

"아가씨, 아가씨, 구슬아가씨. 저 좀 보십시오. 그 어른이 고개를 돌리시는군요. 눈을 뜨시고 인젠 아주 깨어를 나셨군요."

 

39

홀로 외따로 누웠거니 생각을 하고 있다가 난데없는 사람 소리를, 더구나 여자의 목청을 듣고 아사달은 깜짝 놀라며 그리로 고개를 돌리었다.

제 옆에서 열 뼘도 안 떨어진 저만큼 웬 처녀 둘이 앉아 있지 않은가.

그중에 한 처녀는 어디선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저이를 어디서 보았누.'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아사달은 궁금증을 내었다. 그래도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데 두 처녀는 불시에 몸을 일으키어 제 머리맡에 와서 앉는다. 아사녀의 몸에서 나던 그 향기를 아낌없이 풍기면서.

', 옳지 그 향기가 바로 이 처녀들에게서 난 게로구나.'

아사달은 어리둥절하면서도 향기의 출처를 터득하였다.

"인제 좀 어떱시오. 괜찮습시오."

낯선 처녀는 바싹 대어들듯이 다가앉으며 묻는다.

'무에 어떠하단 말인가. 괜찮다는 것은 또 뭣을 가리키는 것인고.'

아사달은 웬 영문인지 말귀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낯익은 처녀는 가까이 오기는 왔으나 물끄러미 들여다만 볼 뿐이요, 아무 말이 없다. 그 목단화 송이 같은 번화한 얼굴 바탕에 어울리지 않게 화색이 걷히고 슬픈 빛이 가득한 것이 대자대비의 관세음상을 생각나게 하였다. 그러나 관세음상이라면 그 눈은 너무 정다웁고 너무 생기가 도는데 자기를 한없이 안타까워하고 한없이 애처로워하는 눈치다. 아사녀의 자기를 보는 눈에서나 이런 눈치를 더러 본 듯싶었다.

'어디서 꼭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보았을까?' 아사달은 또 뇌어 보았다.

'옳거니, 파일날 밤 다보탑에서 보았구나.'

마침내 황연대각을 해내었다. 그때 여불없이 제 아내의 환영으로 속았던 그 처녀가 분명하다. 그리고 보니 그 윗입술이 조금 짧은 듯한 입 모습 언저리든지 갸름한 판국이 연신 제 아내와 같은 점도 없지 않아 있어 보이었다.

'그 처녀가 어찌 또 여길 왔을까. 혹은 내가 그 처녀의 집에 누워 있는 것이나 아닌가.'

아사달의 생각은 다시금 알쏭달쏭해진다.

'이게 생시가 아니고 모두 꿈이어니.'

생각해 보매 딴은 길고 깊은 꿈속을 거쳐 나온 듯도 싶고 아직 헤어나지를 못한 것도 같았다.

그러고 또 아사달을 놀라게 한 것은 그 낯익은 처녀가 눈물을 흘린 것이다.

그 처녀는 참고 참은 모양이었으나 끝끝내 구슬 같은 눈물이 연잎에 빗방울처럼 그 뺨을 구을러 떨어지고야 만다. 뒤미처 곧 눈물을 닦고 닦았으나 그 속눈썹이 은가루를 뿌린 듯 번쩍이고 어룽진 뺨이 마치 이슬에 촉촉히 젖은 꽃잎 같은 것도 천연 이별하던 날 밤에 아사녀가 숨어 울던 것과 같았다.

'저 처녀가 왜 울까.'

아사달은 괴이쩍게 생각은 하면서도 그 눈물이 자기를 동정하는 것인 줄을 어렴풋이 깨닫고 그윽하나마 고마운 정이 움직이었다.

두 처녀는 물론 주만과 털이였다.

그들은 어젯밤 석가탑 위에서 까무러친 아사달을 발견하고 곧 절안을 혼동시켜 기절한 이를 엇메어다가 제 방에 갖다 눕히었다.

의술도 짐작하는 아상노장이 창황히 달려와서 기절한 이의 수족과 등과 배를 주물러 보고 과로한 탓으로 잠깐 기절한 것이지 큰 염려는 없다 하였다.

과연 얼마 만에 까무러친 이는 겨우 숨길을 돌리었다. 우 모이었던 중들은 뿔뿔이 헤어지고 맨 마지막으로 아상노장은 또 한 번 기절한 이의 머리와 맥을 짚어 보고 몸을 일으켜 나오다가 그때까지 서성서성하고 있는 주만과 털이를 보고,

"오늘 밤에 두 분이 많이 애를 쓰셨소. 만일 두 분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까맣게 모를 뻔하였소. 그것도 전생의 인연이오. 인제는 피어났으니 다른 염려는 없을 듯하오."

치사하는 말을 남기고 육환장을 끌며 천천히 걸어간다.

주만과 털이도 남 다 헤어지는데 자기들만 처져 있자는 수도 없어 그 방을 나오기는 나왔으나 주만은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를 않는다. 아무리 아상노장이 염려는 없다 하였지마는 아직 쾌히 깨어난 것도 아니니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랴.

아까는 여럿이 몰려 들어가는 판에 휩쓸리어 들어가기도 갔지만, 더구나 기절한 것을 맨 처음 발견한 사람으로 그 자리에 참례하는 것이 인정에도 떳떳한 일이라 조금도 어색하지를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새삼스럽게 들어간다는 것은 차돌의 보기에도 수상쩍을 것 같았다.

하릴없이 치워 놓은 자기네 처소로 돌아왔다가 얼마 안 남은 밤을 앉아서 밝히고 다시 털이를 데리고 나왔다.

털이의 염탐으로 차돌이가 아침 공양 짓는 데 시중 들러 나간 새를 타서 그들은 다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아사달이 눈을 뜬 것은 그들이 들어온 지 한참 만이었다.

 

40

주만은 턱없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외면을 하고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한 뒤에 다시 그 벗겨진 뺨 언저리를 들여다보았다. 생각한 것보담 상처는 그리 대단치 아니하였다. 앞으로 고꾸라질 때 돌에 코를 부딪혀 코피가 터지고 뺨 언저리가 돌결에 스쳐서 벗겨졌을 따름이요, 생채기가 그렇게 깊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사달의 눈엔 차차 흐릿한 기운이 걷히고 정신이 돌아나는 듯하였다. 그 어글어글한 아름다운 눈매는 웃는다. 고맙다는 뜻을 알려 줌이리라.

"상처가 쓰라리지는 않으셔요."

주만이가 맨 처음으로 아사달에게 묻는 말씨다. 이 평범한 말 한 마디가 어쩌면 그렇게 나오기를 어려워하였을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조금 잠긴 것 같았지만, 목소리는 역시 청청하다.

주만은 호 하고 또 한 번 숨을 크게 내어쉬었다. 비록 간단한 대답이나마, 말문이 닫혔으려니 하였던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든든한가. 저절로 안심의 숨길이 내쉬어진 것이리라.

"머리가 아프진 않으셔요."

하고 주만은 제 손을 들어 병인의 머리를 짚어 보려다가 슬쩍 옆을 살피었다. 매우 짧은 동안이나마 어느 결엔지 단둘의 세계를 이루어 옆에 사람이 있고 없는 것을 깜박 잊었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털이는 어느 틈에 빠져나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주만은 마음 놓고 제 손을 병인의 머리 위에 얹을 수 있었으되, 그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손바닥에 촉촉하게 땀이 배고 호끈호끈 다는 것을 보면 아직도 머리가 열에 뜨인 탓이리라.

"머리가 더운데요."

주만은 걱정스럽게 물었으나, 이번에는 아무 대답이 없다. 그 눈은 어느새 꾸벅꾸벅 졸음이 오는 것 같다. 얼마 안 가서 코까지 골고 병인은 혼혼히 잠의 나라로 떨어져 들어가고 만다.

주만은, 마치 제 누이나 다름없이 턱 맡겨 버리고, 아무 거리낌없이 잠이 드는 아사달의 태도가 어떻게 믿음직하고 흐뭇한지 몰랐다.

그러나 아사달의 잠이 깊이 들자 주만은 도리어 휘젓한 생각이 났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단 두 남녀가 있는 것도 실없이 불안한 생각을 자아내는데, 더구나 하나는 자고 하나는 잠든 이의 머리를 짚고 앉았다는 것이 누가 보면 겸연쩍을 것 같았다.

주만은 머리에서 손을 떼고 반쯤 몸을 일으켰다가 그 하붓이 열린 입술에 핏기 하나 없고, 그 눈시울 언저리가 눈에 뜨이도록 꺼져 보이는 것이 차마 혼자 남겨 두고 나올 수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몰풍스럽고 매정스러운 노릇인 듯하였다. 그는 천리타향의 외로운 나그네가 아니냐. 부모도 처자도 없는 낯선 곳에 병들어 누운 몸이 아니냐. 우리 서라벌, 아니, 우리나라에 큰 보배가 될 탑을 하나도 어려운데 둘씩이나 쌓아 올리다가 일터에서 쓰러진 그가 아니냐. 그의 몸을 돌보아 주고 병을 구원해 주는 것이 사람으로 떳떳이 할 일이거늘 부끄러울 것이 무엇이며 겸연쩍을 것이 무엇이랴.

누가 자기를 탄한다 하더라도, 아니 온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흉을 본다 하더라도 조금도 두려울 것도 없고 거리낄 건덕지도 없으리라 하였다.

주만은 다시 눌러앉았다.

아사달은 인기척에 놀랐던지 별안간 눈을 번쩍 뜬다. 제 머리를 짚어 주는 주만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이윽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 누구시오." 주만은 무망중이라 서먹서먹하고 미처 대답을 못 하고 있노라니,

"나를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병자는 잽처 또 묻는다. 주만은 짚었던 손을 떼고 얼굴을 붉히었다. 의당히 물을 말은 물을 말이건만 자기의 주책없고 지나치게 부니는 것을 책망이나 하는 것 같았다.

자기는 이손 유종의 딸 주만이라는 것과, 전번 파일 거둥에 불국사에 왔다가 왕께서 부르시어 먼빛으로나마 아사달을 보았다는 것과, 어젯밤에 탑 구경을 올라갔다가 아사달이 까무러친 것을 보았다는 것을 띄엄띄엄 일러주었다.

병인은 말 구절구절마다 고개를 끄덕일 뿐이요, 제 말은 한마디도 티를 넣지 않았다. 다만 그 눈치와 얼굴로 보아 아사달에게는 모두 처음 아는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주만이 제 자신도 이상한 것은 정작 파일날 밤에 같이 다보탑을 돌았다는 얘기를 빼놓은 것이었다.

그 말을 마저 할까말까 망설이는 판에 털이가 문을 빠끔히 열고,

"아가씨, 아가씨."

하고 가만히 불렀다. 그러면 털이는 방에서 나와 가지고 여태까지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이리라. 주만은 쫓아 일어나 나왔다.

"아가씨, 저기 차돌이가 뭐 자실 것 가지고 오는데 여럿이 따라 들옵니다."

 

41

"병인의 먹음먹이는 뭐를 가져가던."

주만은 털이를 데리고 자기네의 처소로 돌아오며 물었다.

"자세히는 안 봤지만 뭐 별것 있겠습니까."

"자세히 좀 보아 둘 걸 그랬지."

"얼른 보기에 고사리나물, 두부지짐 나부랭이 같더군요."

"그래 국물 같은 것도 없더란 말이냐."

"글녓시오. 뚜껑 덮은 것이 주발 하나일 적엔 아마 밥 한 그릇만 동그랗게 놓인 것 같더군요."

"병인이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주만은 눈썹을 찡긴다.

"바로 엊저녁에 혼절까지 한 어른이 밥 자시기가 어렵겠습지요. 더구나 그 모래알같이 보실보실한 밥을."

"그래 죽이나 미음 같은 것을 좀 쑤어 드렸으면 어떻단 말이냐."

주만은 중들의 몰인정한 것을 분개한다.

"어쩔 수 있겠습니까. 그 많은 식구에 여간 정성으로 밥 따로 죽 따로 짓겠습니까. 먹든지 말든지 밥 한 상만 올리면 저희들 도리는 다한 줄로 아는 모양이니. 차돌의 말을 들으면, 이번에 까무러치신 것만 해도 연 사흘 밤낮으로 일을 하시는데 어느 뉘 하나 물 한 모금 정성으로 권하는 이가 없는 탓이라니깝시오. 딱한 노릇입지요."

"어쩌면 그렇게 인정 사정들이 없을까."

주만은 탄식하다가,

"원 찬이나 갖추 있는지."

하고 다시금 걱정을 한다.

"찬인들 오죽해요. 사내들 손으로 하는 것이 망측합지요. 자세히 안 봐도 뻔합지요. 왜 아가씨는 못 잡수셔 보셨습니까. 댁에서 해내온 찬합이 아니면 어디 한 술이나 뜨실 법해요. 이손 댁 행차시니 저희들 있는 솜씨를 다 내어 만든 것도 그 꼴인뎁시오."

주만은 과연 네 말이 옳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도 어제 낮에는 처음 먹는 소찬이 해롭지 않아서 별식으로 먹을 수 있었지만, 두 끼니부터 벌써 생목이 꼬이던 것을 생각하였다.

"이런 데서 병이 나면 첫째 음식이 아찔이겠는뎁시오."

털이도 제 아가씨의 속을 알아차리고 걱정하는 얼굴을 들었다.

"그러면 어떡하면 좋겠니."

"글녓시오. 찬합이라도 좀 갖다 드렸으면 좋으련만 마님이 아시면 걱정을 않으실지."

"앓는 사람 갖다 주는 걸 마님인들 왜 걱정을 하시겠니."

"웬걸입시오. 석수장이쯤 앓는데 찬합을 내다 주었다 해보십시오. 벼락이 나리실걸 뭐."

털이는 실로 무심코 이 말이 불쑥 나온 것이다. 제 아가씨가 치를 떠는 석수장이를 언감생심인들 얕잡아볼 엄두도 내지 않은 것이로되 설왕설래에 말이 잠시 잠깐 미끌어진 것이다.

그러나 벼락은 마님보담 아가씨한테로부터 먼저 떨어졌다.

"석수장이, 석수장이! 석수장이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주만의 성난 목소리는 벼락과 같이 털이의 귀에 떨어졌다. 그 얼굴은 꽃불을 담아 부은 듯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대번에 목청이 꺽꺽하게 쉬어진다. 찢어질 듯이 아늘아늘해진 입술이 부들부들 떤다. 제 아가씨가 노발대발하는 것도 여러 번 겪은 털이지만 이렇게 역정이 머리끝까지 오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요 방정맞은 년아, 요 매친 년아, 이년이 왜 입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릴꼬."

털이는 제가 저를 꾸짖고 제 입을 쥐어지르고 싶었다.

"아닙시오, 아가씨. 아닙시오, 아가씨. 저 저어."

하고 털이는 발뺌을 하느라고 곱이 끼었으나 얼른 그럴듯한 말을 돌려 댈 수도 없어 말끝은 더듬더듬한다.

주만은 한번 뇌까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간다.

"아가씨 아가씨 구슬아가씨, 쇤네 좀 봅시오, 쇤네 좀 봅시오."

털이는 주만을 쫓아가느라고 열고가 났다.

"쇤네 좀 봅시오. , 좋은 수가 있는걸입시오. , 쇤네 좀 봅시오."

아무리 털이가 가쁘게 불러도 주만은 좀처럼 돌아보지를 않았다. 마침내 죽여 줍시사 하는 듯이 털이는 주만의 팔뚝을 부여잡고 늘어졌다.

주만은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돌아보며 상긋 웃는다. 그 웃음은 쓰고 차다. 그만 말에 내가 그렇게 화를 내다니 너보다 내가 그르다 하는 듯하였다. 그 붉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서 철색이 돈다.

", 아가씨 조, 좋은 수가 있습니다. 찬합도 찬합이지만 앓는 이에게는 좁쌀 미음이 첫짼뎁시오. 쇤네가 지금 당장이라도 댁에를 뛰어들어가서 쥐도 새도 몰래 그 미음을 끓여 가지고 나왔으면 어떨깝시오."

주만은 어느덧 아까의 흥분은 사라졌고, 털이의 장공속죄한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였다.

 

42

주만과 털이는 술시가 훨씬 겨워서야 사초부인의 잠든 틈을 타가지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주만의 급한 분수로는 한시가 바빴지만, 털이 혼자만 보내자니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고, 둘이 한꺼번에 몸을 빼자면 이목이 번다한 낮보담 암만해도 밤을 택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털이는 말 한번 실수한 죄로 더 상냥스럽게 더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고 모든 일을 아귀가 맞도록 꾸며 놓았다. 말과 수레 구종들을 쩍말없도록 얼러맞추어 미리 말 안장을 지어 두도록 부탁도 해놓고 초와 초롱까지 준비를 하였다.

불국사에서 상서골까지 가자면 이십 리 길도 넘었다.

주만은 어려서부터 말을 타본 솜씨라 말고삐를 손수 거사려 잡고 털걱털걱 등자를 굴리는 양이 조금도 서툴지 않았다.

으슥한 형제산 기슭을 돌 제 털이는 머리끝이 쭈볏쭈볏하고 찬 소름이 끼치었지만, 주만은 구슬 채찍을 번뜩여 말을 채치며 부랴사랴 닫는다. 초롱을 들고 앞장을 섰던 털이가 순식간에 뒤로 뚝 떨어져서, 펄펄 날리는 주만의 옷자락이 눈앞에 아물아물해진다.

털이가 기를 쓰고 말을 채질하여 따라가느라고 애를 썼으나, 말도 털이쯤은 업신여기는지 제멋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뛸 뿐이요, 도무지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다.

"아가씨, 아가씨! 제발 좀 천천히 갑시오. 쇤네가 불을 들었으니 쇤네가 앞장을 서야 될 것 아닙시오."

털이는 죽을 상을 하고 소리소리 불렀다.

주만은 털이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제 동행이 있는 것을 깨달은 듯 펄펄 뛰는 말을 멈추었다. 말은 한번 곤두섰다가 걸음을 멈추는데 화화 내뿜는 숨길이 흰 안개처럼 달빛에 서리인다.

"얘 얼핏 좀 오지를 못하니. 굼벵이보담도 더 꿈지럭거리는구나."

주만은 털이를 돌아보고 웃는다.

"애구 죽겠습니다. 애구 죽겠습니다. 빌어먹을 말이 세상 말을 들어얍지요."

털이는 숨이 턱에 닿으면서도 쫑쫑 말대답은 잊지를 않는다.

"제가 탈 줄 모른다고는 않고 그래도 말 탓만 하는구나."

주만은, 말등에서 미끄러져서 말 궁둥이 쪽에 매어달린 듯이 앉아있는 털이의 어색한 모양을 보고 우스워서 못 견디었다.

"파리나 모기 모양으로 차라리 말꼬리에 붙어 가는 것이 나을 것을, 오호호."

"수레채를 잡고 걸어갈지언정 말이란 세상 못 탈 것인뎁시오."

털이는 빡빡이 흐른 땀을 소맷자락으로 문지르며,

"초롱은 괜히 준비를 했는뎁시오. 거추장만 스럽고, 아가씨는 불 든 년을 뒤다 세우고 그냥 살같이 달아나시니."

"딴은 초롱이 아무 소용이 없겠다. 달이 이렇게 밝으니 접어 두는 것도 좋겠다."

주만의 말마따나 과연 달은 밝았다. 이내 자욱한 십팔만 호 위로 달빛은 물 위의 기름처럼 빙빙 도는 듯하였지만, 솟을추녀飛畯에 아롱새긴 금박이와 은박이가 번쩍번쩍하는 것까지 완연히 보이었다.

길가에 인적은 끊어진 지 오래였지만 어디선지 와글와글하는 소리가 잉잉 귀를 울리고 훈훈한 사람의 훈기가 들 밖 공기를 마시고 오는 신선한 코 안으로 와락 안긴다. 그들은 벌써 서울 한 모서리에 들어선 것이다.

사천왕사의 긴 담을 돌아들자 주만과 털이는 달리던 말을 천천히 몰며 가쁜 숨길을 돌리었다. 인제 햇님다리만 건너서면 집을 다 온 것이다.

주만이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었다. 그러고 털이를 보며,

"얘 우리 어디로 들어갈까. 앞대문으로 들어가면 왁자지껄하지 않겠니."

"글녓시오. 아닌밤중에 달려들면 하인들도 무슨 큰일이나 난 줄 알고 놀랄걸입시오. 더구나 대감께서 아시고 보면 꾸중을 않으실깝시오."

"그야 절에 갔다가 온다고 여쭈면 그만이겠지만, 아무튼 별당 뒷문으로 돌아 볼까."

"글녓시오. 거기도 필경 문이 잠겼을 게고 원체 안과 동안이 뜨니 부르는 소리를 잘 알아들을깝시오. 잠이 들면 다 죽은걸입시오. 원 잠귀들이 어두워서."

"그래도 뒤를 돌아 보았다가 정 안 깨거든 하는 수 없이 앞대문으로 다시 가서 불러 볼밖에."

주종은 이렇게 작정을 하고 뒤꼍으로 돌았다. 이번에는 앞장을 서서 가던 털이가 별안간,

"애구, 저것 봅시오, 저것."

죽는 소리를 하고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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