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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의 선택

몰리의 선택

Lynne Graham

 

버림받은 신부

이탈리아의 대부호 솔토와 결혼했지만 하루만에 헤어진 몰리. 무슨 일이 있어도 솔토와는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4년 만에 다시 만난 솔토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고.

"아무리 압력을 가하고 돈으로 매수해도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겠다고 했지"

솔토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당신의 허세에 도전하겠소. 내 집으로 들어와 나와 같이 살면 당신 오빠의 빚을 청산해주겠소."

온몸이 마비된 듯 몰리는 놀란 녹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농담 말아요."

"난 당신을 원하고당신은 오빠를 곤경에서 구하고 싶고, 공평한 교환일까, 권력의 남용일까?" 솔토가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소."

 

1

아까부터 와이퍼가 부지런히 좌우로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점점 세차게 불어대는 눈보라와 그로 인해서 차 앞 유리창에 쌓이는 눈 때문에 도저히 앞을 분간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좁고 구불구불하던 길이 오르막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미끄러운 비탈길에서 바퀴가 이탈하는 일이 없기만을 바라며 몰리는 기어를 저속으로 바꿨다.

주유소를 떠나올 때, 이런 눈보라 속에서 호수 길을 달리는 건 정신 나간 짓이란 경고를 듣긴 했지만, 그녀가 기어코 프레디의 외딴 집을 찾아가려는 건 가슴속 깊이 내재해 있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약혼자인 도널드가 같이 가주겠다고 했지만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작은 차의 바퀴가 헛돌면서 언덕길에서 자꾸 미끄러져 내렸다. 몰리는 이를 악물고 다시 시도했다. 프레디의 집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호수 가까지 이어진 안개 자욱한 황야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경직되고 어두운 얼굴로 운전대를 꽉 움켜잡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으로 전화를 받고 나가는 솔토를 따라나서던 자신의 비굴한 모습도 떠올랐다. 프레디가 그런 그녀를 붙잡고 지혜로운 노안으로 불안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딱한 듯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너무 매달리지 말거라. 저 애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셈이 될 테니까. 야생의 새를 길들여 새장 안에 가둬둘 순 없지. 솔토는 길들여진 짐승이 아니야. 네가 이렇게 하는 것이 저 애게는 너무 생소할 거야. 천천히 몰아붙여야지"

하지만 그 말을 듣지 않았어, 그녀는 괴롭게 인정했다. 솔토와 같이 있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때는 결코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거란 생각 때문에 그가 달아날수록 더욱 열심히 쫓아다녔던 것이다. 지금은 다른 남자가 준 반지를 끼고 있지만 그때를 기억하자 속이 울렁거려 왔다. 지친 다리가 떨려 액셀레이터를 밟고 있던 발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순간 차가 중심을 잃고 미친 듯이 옆으로 돌더니 미끄러지면서 길 밖으로 이탈해버리고 말았다. 몰리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가까스로 세운 소형 해치백의 전조등 불빛을 받으며 몇 미터 앞에 위협적으로 펼쳐진 검은 호수가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그 광경을 보자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마구 뛰었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후 차를 후진시켜보려 했지만 원래 저습한 데다가 눈이 내려 미끄러운 땅 위에서 바퀴는 계속 헛돌기만 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애쓴 끝에 마침내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밖으로 나섰다. 걸어서 가기로 했다. 세상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차가 멈추지 않고 호수로 미끄러져 들어갔을지도 모르는데. 그녀가 알기로 호수는 꽤 깊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눈과 황갈색 긴 생머리가 얼굴을 때렸다. 몰리는 발작적으로 전신을 부르르 떨며 숄더백을 집어든 뒤 재킷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쓴 다음 차 문을 잠갔다. 오후 8시가 훨씬 지나 있었다. 오늘밤 안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했다. 프레디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

바보, 멍청이. 몰리는 미끄러운 언덕길을 힘들게 오르며 자신을 나무랐다. 장례식에는 참석하지도 않은 주제에 이제 와서 프레디가 남긴 오래된 꽃병을 챙기고, 묘지에 꽃 몇 송이를 놓고 가겠다고 이 먼 곳까지 오다니? 오빠 나이젤은 그녀가 프레디의 장례식에 다녀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라 말했다.

"좋은 기회였는데, 왜 가지 않은 거야?" 나이첼이 어이없다는 듯이 나무랐다. "분명히 솔토도 왔을 텐데, 그랬다면 그에게 말해볼 수도 있었잖아"

"그만해요, 여보" 그의 아내 레나가 눈물이 글썽한 채로 애원했다. "이건 몰리 아가씨 일이 아니라 우리 문제잖아요"

"당신과 애들이 당장 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레나?" 야위고 소년 같은 얼굴에 몇 달간의 긴장이 깊이 배인 모습으로 나이젤이 따졌다. "가서 파이 한 조각 먹고 오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나라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난 그 친구 근처에는 가까이 갈 수도 없다고"

눈발이 굵어지면서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그 바람에 눈밭에 빠진 발이 젖어서 시려왔다. 차갑게 얼은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몰리는 언덕길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오빠의 절박한 재정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내리막길로 이어진 곳에 이르자 별 장식 없는 어두운 집의 형체가 어렴풋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니 안도감에 맥이 탁 풀릴 지경이었다.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날씨가 이 모양이니 나이든 가정부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부실하게 입은 옷 속을 사정없이 뚫고 들어오자 몰리는 심한 오한을 느끼며 고풍스럽게 장식된 초인종을 다급하게 눌렀다. 단 몇 분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누르고는 혹시나 불이 켜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캄캄한 창문을 올려다보며 재빨리 서너 번을 더 눌러 보았다.

가정부가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더 머물러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이곳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떠올랐다. 프레디의 가정부가 아직도 여기에 있을 거라고 경솔하게 짐작한 자신을 걷어차고 싶었다. 만약 집에 아무도 없다면, 아주 곤란한 지경에 처할 것이다. 차안에서 밤을 지내다가 동사할 수도 있었다. 몸을 감쌀만한 여행용 무릎덮개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점심을 먹고 출발할 때만 해도 날씨는 맑고 화창했었다. 그래서 일기예보는 들어볼 생각도 안 했던 것이다.

덜컥 겁이 난 몰리는 무거운 걸음으로 집 뒤로 돌아가서 눈 덮인 뜰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자기 주먹보다 큰 돌을 찾아냈다. 추위로 인해 곱은 손으로 재킷을 벗어 팔에 둘둘 만 뒤에 그 돌을 꽉 움켜잡고는 뒷문 옆의 작은 유리창 앞에 버티고 서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런 다음 팔을 힘껏 젖혀 유리창을 내리치고는 뒤로 물러서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안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빗장을 풀자 창틀이 덜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언 손으로 석조 창턱을 짚고 끙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몸을 끌어올린 뒤 열린 창문을 통해 엉금엉금 안으로 기어 들어가 부엌 조리대 위를 더듬어 나갔다. 그러다 유리조각이 무릎에 박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인정하며 꼼짝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어둠 속에서 뭔가 커다란 물체가 재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이어 억센 두 팔에 의해 들린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대던 그녀는 석조 바닥에 얼굴이 박힌 채 충격으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등을 내리찍는 숨 막히는 무게에 놀라 버둥거리고 있었다. 억센 손이 정신 없이 허우적대는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는가 싶더니 이내 힘을 빼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태리어로 지껄여대는 욕설이 들려옴과 동시에 등을 누르고 있던 무릎이 떨어져 나가면서 머리 위로 형광등이 깜박거리며 들어왔다. 몰리는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리는 몸을 얼른 일으켜 세운 뒤, 몸을 도사린 채로 뒷걸음질 쳤다. 그녀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남자에게 흐릿한 초점이 맞춰졌을 때, 믿을 수 없어서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바라보기만 했다.

"맙소사, 당신을 으스러뜨릴 뻔 했잖소" 솔토였다. 그가 격하게 질책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충격으로 말도 못하고 서 있는 그녀 앞에 19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의 남자가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마치 유령을 보듯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동안 몰리의 광대뼈는 긴장으로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게다가 안색은 창백했고, 입술은 핏기를 잃을 정도로 꽉 다물려져 있었다.

억눌린 소리로 거친 말을 내뱉으며 솔토가 운동선수처럼 사뿐히 웅크리고 앉더니 가름한 갈색 손으로 축 늘어진 그녀의 사지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려 갔다. 찢어진 검정 스타킹 사이로 피가 스며 나오는 걸 본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친 곳이 더는 없는지 마저 확인해본 다음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몰리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별 뜻 없이 스치고 지나간 감촉이 불같은 키스처럼 아직도 그녀의 몸에 남아 있어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4년 만에 처음으로 그를 본 것이다. 그가 사촌 판도라에게로 가버린 그 운명의 밤 이후, 처음이었다. 숨 막힐 듯한 두려움과 그의 출현으로 인해 받은 충격이 결합된 감정의 물결이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그러자 마비가 풀리면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오?" 솔토가 허리를 숙여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오?"

몰리는 혀를 꽉 물었다가 마른 입 안에서 역겹게 톡 쏘는 듯한 피 맛과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마음이 몸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을 수 있음을 가르쳐주었던 독 묻은 칼과 같은 통증에 비하면. 그가 딱딱한 의자에 자신을 내려놓자 몰리는 멍한 정신에도 편하고 아늑한 걸 싫어했던 프레디의 괴팍함이 생각났다. 중앙 난방 시설도 없고, 겨울인데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필요치 않은 세간은 한 점도 없었다. 과거 솔토의 약혼녀 자격으로 연로한 그의 외종조부인 프레디를 만나러 이 집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로 다시 돌아온 듯했다.

다친 무릎을 보기 위해 솔토가 스타킹의 구멍 난 부위를 찢어서 넓혔다. 몰리는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움찔했으나 딱딱한 의자 등받이에 등을 부딪치고는 정신을 차린 다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뒤통수를 어리둥절하게 내려다보았다. 위에서 쏟아져 내린 불빛에 그의 숱 많은 검은머리가 부드러운 무지개 빛을 띠었다.

"유리를 빼낼 때 좀 아플 거요" 그가 퉁명스럽게 불쑥 내뱉으며 사뿐히 일어나 부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몰리는 허공을 응시한 채 정신을 가다듬어 보려했다. 중요한 것부터 먼저 생각하자면, 우선 이곳에 솔토가 있었다. 그는 영국인 어머니로부터 극도의 자제심과 타고난 실용성과 무섭고도 냉혹한 자기 수양을 물려받은 남자였다. 하지만 나머지 반쪽은 장대하고 거뭇하게 수려한 용모가 말해주듯 다혈질의 순수 이태리 혈통이었다. 그의 얼음 같은 차가움 밑으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몰리는 한 번도 그 불길을 당기거나 그 불꽃이 내는 열기를 체험해본 적이 없었다. 몰리 자신은 그랬지만 그의 마음과 아름다운 육체는 그녀를 향해 타올랐던 적이 없었다. 거부와 배신과 말할 수 없는 굴욕감,저 남자로 인해 그 모든 걸 맛보아야 했다. 솔토가 소독약 그릇을 들고 거실로 들어서자 톡 쏘는 냄새에 과도하게 민감한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타고난 기품이 배인 자태로 방안을 꽉 메우며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녀의 갑작스런 방문에 놀란 만도 했을 텐데, 전혀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았다. 프레디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기를 써놓고, 결국은 이렇게 훨씬 더 당황스럽고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다니. 아이러니였다.

그가 눈 깜짝할 사이에 무릎에 박힌 유리를 빼내고서 피를 닦아내고 상처에 반창고를 붙였다. 세계 각지를 죽음을 불사하며 돌아다니는 남자에게 무릎 베인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혹은 예기치 않은 전 아내의 방문쯤은. 몰리는 아직도 백짓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떨리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하지만 그의 아내였던 적은, 그의 진짜 아내였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는 결혼한 지 하루만에 세상 언론에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놓았다.

솔토가 일어서면서 감정이 깃들지 않은 황갈색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오. 하지만 난 도둑인 줄 알았소. 금방이라도 달려들 코브라를 보듯 꼭 그렇게 쳐다봐야겠소?"

몰리는 얼굴을 붉힌 채 속눈썹을 내리뜨며 의자 팔걸이를 꽉 움켜잡았다. 어디선가 유리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바닥이 평평한 큰 술잔 하나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술잔을 잡았다. 브랜디가 얼얼한 목을 지나 싸늘한 몸 안 깊숙이 불길을 당기며 퍼져나갔다.

"아직 한마디도 안 했다는 거 알고 있소?" 솔토가 조바심을 억누르고 느릿하게 말했다.

그녀는 혀끝으로 마른 아랫입술을 축였다. "당신이 숨을 앗아가서요" 경솔한 말이 입 밖으로 나가자마자 마룻바닥 밑으로 숨고 싶을 정도로 창피해 얼굴을 붉혔다. 청혼한 뒤에도 그가 하지 못했던 고백을 그녀 쪽에서 서둘러 했을 때 썼던 바로 그 말이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피하는 데 있어서는 가히 천부적이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어떻게 왔소? 자고 있었지만 차 소리가 났으면 분명 깼을 텐데"

몰리는 바짝 곤두서 있는 신경을 진정시키려고 태연한 척 브랜디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언덕 밑에서 차가 길을 이탈했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걸어서 왔죠. 프레디의 가정부가 아직은 여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맙소사, 지금 농담하오? 매크로드 부인은 지난 30년 동안 늘 자전거로 출퇴근을 해왔었소. 외종조부는 사생활을 아주 소중히 여기는 분이시라 그 이상은 견딜 수 없어하셨지. 매크로드 부인은 부엌에서 식사하고, 그분은 여기서 드셨지. 두 사람은 필요할 때만 얘기를 나눌 정도였단 말이오"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이 담긴 말이었다. 긴장했을 때만 두드러지는 이태리 억양이 섞인 솔토의 깊게 울리는 음성에서 희미한 고통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깊은 속내에 대해 그녀가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지표이기도 했다. 판도라 스티븐슨 외에 솔토와 유일하게 가까웠던 인물은 프레디였다는 걸 알기에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초인종을 눌렀는데"

"사용하지 않은 지 몇 년은 됐을 거요"

"불빛도 보이지 않았고"

"하나도 켜놓지 않았으니까. 유품을 가지러 여기까지 직접 찾아왔나 보군"

"지난번에 변호사에게 들르겠다고 했었는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오지 못했어요"

솔토와 이렇게 직접 만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몰리는 찢어진 스타킹 사이로 반창고가 붙어 있는 무릎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주 격한 언쟁을 벌이고 헤어진 후, 두 번 다시 마주친 적이 없던 두 사람이 우스꽝스럽게도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헛걸음을 한 것 같군" 솔토의 조용한 말에 몰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꽃병은 여기에 없소. 택배로 이미 당신에게 부쳤으니까"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몰리의 얼굴이 빨개졌다가 다시 하얘졌다. 가겠다고 했을 때는 안 가고, 가지 못한다는 전화 한 통화 없이 있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서 감정적인 충동에

휩쓸려 무작정 집을 나선 것이었다.

"죽다 살아난 얼굴이로군. 뜨거운 물에 목욕이라도 하는 게 좋겠소." 솔토가 중얼거렸다.

몰리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적당한 기회를 얼른 낚아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요, 옷이 다 젖어서 몹시 춥네요. 욕실은 2층에 있죠?"

몸이 약간 휘청거렸지만 부축해주려고 뻗은 그의 두 손이 닿기도 전에 사냥꾼을 피해 달아나는 새끼사슴처럼 가까스로 그의 곁을 지나쳤다.

"혼자 갈 수 있겠소?" 복도에 불을 켜 닳아 홈이 파인 좁은 계단을 비춰주며 그가 뒤에서 물었다.

", 고마워요" 몰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얼른 자리를 피했다.

계단 꼭대기에서 왼쪽으로 첫 번째 문이었다. 이런저런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 추위와 반동으로 인해 이젠 이까지 덜덜거렸다. 결혼 전, 몰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프레디의 서재 밖에서 노인이 한숨 섞인 소리로 걱정스럽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래브라도 강아지처럼 사랑스럽고 순진한 아가씨로구나. 아직도 두 볼이 발그레하게 빛나는 시골 아가씨야.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더구나. 하지만 본인이 어떤 인물을 상대하고 있는지 그 아가씨도 알고 있고, 너도 끝까지 갈 자신이 있는 거나?"

"그 아가씨가 하인들처럼 문 뒤에서 엿듣길 일삼는다면 자신이 없죠." 그가 가르랑거리는 소리로 중얼거리며 문을 벌컥 여는 바람에 몰리는 화끈거리는 얼굴과 죄지은 눈빛을 한 채로 꼼짝없이 들키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나직이 웃으며 그녀를 끌어당겼다."대답해 보시오, 카라. 날 상대할 용기가 있소?"

솔토 크리스탈디. 그는 아주 대단한 이태리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그녀는 입김이 나오는 찬 공기 속에서 철제 발이 달린 욕조에 물을 받으며 아래층에 있는 그를 그려보았다. 꼭 끼는 블랙 진이 긴 다리를 감싸주었고, 두꺼운 크림색 스웨터는 올리브 빛 피부와 숱 많은 검은머리와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힘을 지닌 짙은 눈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에겐 교통사고처럼 불시에 가해지는 생생한 물리적 충격 같은 것이 있었다.

그나저나 프레디의 썰렁한 작은 집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몸서리를 치며 젖은 옷을 벗고 따뜻한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면 목욕이 끝날 즈음엔 솔토가 마술 같이 사라져버리고 없을지도 몰라. 정말 비겁하군, 몰리는 소름 끼치도록 자기 감정을 잘 감추는 남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들킬까봐 두려웠다. 예의를 갖추고 냉담해야 했지만 정말은 왜 그랬어요? 왜 나와 결혼하고서 그 여자에게로 가 버린 거죠?라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한때 그녀의 순진한 사고를 마비시켰던 은밀한 속삭임과 암시를 떠올리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상처와 손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에는 너무 늦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너무 순진하고, 사람을 맹목적으로 믿고, 사랑에 빠진 보잘것없는 시골 아가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노크 소리에 이어 욕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마른 옷이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왔소." 솔토가 우아한 손길로 개켜진 옷을 문 옆 의자에 던져놓았다.

"나가요" 몰리는 기겁하여 소리를 지르다가 문득 군살하나 없이 버들가지처럼 날씬한 판도라의 몸매를 눈앞에 떠올렸다. 그러자 창피할 정도로 풍만한 젖가슴을 두 팔로 가리고는 얼른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는 허둥지둥 욕조에서 빠져나왔다. 젖은 몸을 닦으며 세면대 위에 달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가을 낙엽 빛깔의 헝클어진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와 초록빛 눈이 자리한 가름한 얼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결혼식 날, 그녀의 엷은 금발 머리는 어린 소년처럼 몹시 짧았었다.

솔토가 내준 청바지와 스웨터는 그녀의 몸을 푹 파묻어 버렸다. 몰리는 치마 허리띠로 청바지를 고정시킨 뒤 몇 번인가 바지 단을 접어 올렸다. 녹색 스웨터는 무릎까지 내려왔다. 신발은 너무 젖어서 도저히 신을 수가 없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그는 거실에 없었다. 몰리는 젖은 옷을 의자 뒤에 걸어두고 신발은 잘 마르도록 난로가 앞에 놓아두었다. 그때 서재에서 희미하게 서랍 여닫는 소리가 나는 걸 듣고서 그녀는 부엌으로 갔다. 거친 판자 하나가 깨진 유리창에 덧대어져 찬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주전자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 예의상 커피를 만들 생각이었다. 증오와 고통과 괴로움은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처럼 고상하고 냉담하게 나갈 참이었다.

하지만 오빠와 그 끔찍한 빚은 어쩌지? 몰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4년 전 결혼식 직후, 솔토는 오빠 나이젤에게 엄청나게 많은 돈을 빌려주었다. 나이젤은 그 돈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작은 농원을 현대식 종묘점으로 개조했다. 그러나 작년 말 빚을 지는 바람에 대출금 상환이 늦어지고 말았다. 솔토의 은행가들은 나이젤이 상환금을 갚을 수 있도록 시간을 연장해 주지 않았고, 이제 오빠의 집과 사업체를 회수하겠다고 협박을 가하고 있었다.

몰리는 지금까지 오빠를 위해 솔토를 직접 만나는 일을 피해 왔었다. 나이젤은 동생이 자신의 가족을 위해 어떻게든지 기적 같은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순진하게 믿으며, 아무리 하찮은 기회라도 놓치지 않았다. 몰리는 거짓 희망을 부추기거나 솔직히 그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게 뻔한 일에 헛되이 자존심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이렇게 그와 한 지붕 밑에 있게 되고 보니 적어도 그를 설득해보지 않고는 오빠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서재 문을 열었다. 커튼을 내리지 않은 유리창 앞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선 굵은 구릿빛 얼굴이 몹시 어두워 보였다. 들어오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잘못했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가 양철 쟁반에 담긴 두 개의 잔을 돌아보았다. 크고 육감적인 입술이 팽팽해지더니 황갈색 눈이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냉소적으로 쏘아보았다.

"내 대답은 안 된다요." 그가 작지만 냉담하면서도 또렷이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말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계단 전체는 아니더라도 한 계단 정도는 자신보다 앞서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을 할 때 당신은 상대방과 눈을 맞추지 못하지. 그걸 아주 귀엽다고 생각했었소." 그 고백을 마무리 짓는 냉소적인 웃음이 그녀를 괴롭혔다.

어지러운 빅토리아풍의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을 때, 손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얼른 잔을 집어 들어 발길을 돌렸다.

"앉아요" 그가 의도적으로 회전의자를 돌려놓았다.

그녀는 망설였다. "저기, "

"앉아요" 그가 한 음절 한 음절 권위가 묻어나는 투로 반복해 말했다.

몰리는 어색하게 어깨 짓을 했다. "좋아요, 그러죠"

솔토가 책상 모서리에 날렵한 엉덩이를 기댄 채 불편할 정도로 가까이에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소?"

몰리는 어리둥절해서 눈을 깜박거렸다. "당신이 여기 있는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꽃병 하나를 챙기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왔다, 변호사가 부쳐줄 거라고 말했을 텐데. 왜 직접 찾아온 거요?"

그가 몹시 냉담하게 물었다.

몰리는 고개를 떨구고 낡은 융단에 난 구멍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묘지를 찾아보고 꽃이라도 놓고 가려고요" 그녀는 거북하게 털어놓았다.

침묵이 흘렀다.

"믿을 수가 없소, 몰리. 나이젤은 계속해서 날 만나려고 시도해왔소. 그런데 밤11시에, 그것도 당신 오빠에 대한 소유권 회수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 이렇게 내 집 문 앞에 나타나"

"프레디의 집이에요" 그가 뭘 의심하고 있는지 깨닫자 분하기도 하고 화가 치밀어 그녀는 쏘아붙였다. "정 알아야겠다면 말씀드리죠. 오빠의 부탁으로 당신에게 접근하는 것은 내가 당신에게 조롱거리만 될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지요"

"집에 돌아가면 나이젤에게 사기죄로 고소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 줄 알라고 전해요" 솔토가 나긋이 강조했다. "믿거나 말거나 당신과의 옛 관계 때문에 그가 덕을 본 거요"

그녀가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손에 꼭 쥐고 있던 잔에서 커피가 쏟아졌다. "사기요?" 몰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무슨 이유로 오빠에게 그런 죄를 묻겠다는 거예요?"

확신에 찬 긴 손이 그녀에게서 잔을 빼앗아 안전하게 옆으로 치워놓았다. 놀라고 성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숱 많은 속눈썹을 내리떠 어둡고 단호한 시선을 가렸다.

"솔토?" 그녀는 신중한 눈길로 가름하고 거뭇한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반듯하게 뻗은 귀족적인 콧날을 경계로 양분된 멋진 광대뼈가 지극히 열정적이고 고집 센 입술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하더니 점점 그 속도가 빨라졌다. 동물적인 그의 매력에 저도 모르게 반응을 보이는 자신이 역겹도록 수치스러워 그녀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이례적이게 관대한 조건으로 대출해주었을 때는 대출인이 그 대출금의 상당 부분을 자기 집을 확장 보수하고 최고급 메르세데스를 구입하는데 사용하라고 준 건 아니라는 뜻이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몸이 오그라드는 듯해 몰리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 집은 종묘점의 일부이고, 메르세데스는 두 달 전에 이미 팔았어요" 그녀는 팽팽한 소리로 쭈뼛거리며 중얼거렸다. "돈의 일부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게 사기가 되나요?"

"그렇소" 한결같고 비정한 음색이었다. "사업가로서 나이젤은 이익이 되는 인물이 아니오. 때문에 난 그 사업으로 더 이상의 돈을 잃고 싶지 않소. 내가 고소하지 않기로 한 건 당신보다는 나 자신을 위해서였소. 당신 오빠를 고소해봐야 넌더리나는 언론의 관심만 끌뿐이니까"

그의 몰인정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몰리는 입술 안쪽을 깨물며 행운을 가져다주는 부적이라도 되듯이 도널드가 준 반지를 멍한 채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오빠가 대출금의 상당액을 그런 식으로 유용한 줄은 몰랐었다. 아무도 그런 부끄러운 사실을 그녀에겐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오빠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그 돈을 그렇게 다 써버리다니" 그녀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좀 더 힘을 줘 말을 이었다.

"솔토?"

"날 난처하게 만들지 마시오, 몰리. 날 벗겨먹으려는 인물은 상대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이젤은 대출금을 자신의 개인금고처럼 유용하고도 사방에 빚을 눈덩이처럼 불려놓았소. 다른 원인으로 이렇게 되었다면 아마 대출금 상환을 연기해줄 수도 있었겠지. 바보가 아닌 이상 거듭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소. 난 바보가 아니오"

딱 자른 결론의 위협적인 어조에 몰리는 그가 자신을 바닥에 눕혀놓고 그 오만한 발로 밟고 지나갔다 해도 놀라지 않았을 것 같았다. 마치 이제 금방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느껴지자 몹시 수치스러웠다. 초연한 그의 태도가 웬일인지 너무 굴욕적이었다. 둘이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전혀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기억에서 싹 지워버린 듯했다.

결혼 허가증에 사인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는 두 사람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식으로든 복수하고 싶어서 간통죄를 이유로 그와 이혼하려 했는데, 오히려 첫날밤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혼인 무효 선언을 당해야했다. 뜻밖의 자극적인 소식에 제 세상을 만난 건 타블로이드 신문이었다.

솔토, 불감증 신부를 버리다라는 잊지 못할 머리기사가 실렸던 것이다. 그의 변호사들이 호되게 비난을 가하며 그녀의 자존심이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짓밟아놓았다.

"언제 약혼했소?" 그가 느닷없이 불쑥 물었다.

꿈속을 헤매는 여자처럼 몰리는 여전히 생소하고 새로워 보이는 작은 외알박이 보석 반지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도널드의 어머니가 끼시던 반지였다.

"어떤지 한 번 껴 봐요." 도널드는 낭만이나 열정도 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기억 속으로 솔토가 줬던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호화로운 약혼반지가 떠올랐다. 처음 그걸 껴봤을 때의 느낌이, 몹시 흥분되고 물밀듯한 사랑의 감정이 생각났다. 그런 기억에 속이 요동치자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전 어디서 자야 하죠?" 그녀가 노골적으로 물었다.

밖에 쌓인 눈만큼이나 깊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계단을 올라가서 정면으로 보이는 방이오" 솔토가 세련되고 매끄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녀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누구요, 약혼자가?" 그가 결연히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당신도 만나본 적이 있지만 기억하지는 못할 거예요. 도널드 시튼이라고"

"당신 계부의 목사보 말이오?" 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되물었다.

"우린 서로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고, 그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녀는 분개해 뻣뻣하게 응수했다. "잘 자요. 차 문제는 내일 아침 일찍 해결할게요. 고장 난 건 아니지만 견인을 해 와야 할 것 같아요."

"맙소사, 도널드 덕이라고 놀리던 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거요?"

몰리는 소리가 나게 얼른 문을 닫았다. 오늘 아침 일찍이 도널드에게 전화했었지만 그는 집에 없었다.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에게 알려줘야 했다. 복도를 둘러보았지만 전화기는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거실도 둘러보고 나서 그녀는 다시 서재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노크를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다시 그 문을 열었다.

희미하게 빛나는 눈을 번뜩이며 돌아보는 솔토의 표정이 따귀를 날린 것과 같은 효과를 냈다. "또 뭐요?"

몰리는 갑자기 무례해진 그의 태도와 분노에 깜짝 놀랐다.

"전화를 찾고 있어요"

"프레디가 병원으로 들어가실 때 끊어놓았소"

"당신 휴대폰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누구에게 전화하려는 거요?"

"도널드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 쪽으로 손을 가져가다 말고 그가 멈칫하더니 이내 이상하게 싸늘한 웃음을 터뜨리며 전화기를 집어 그녀에게 아무렇게나 던졌다. "실컷 쓰도록 해요" 무표정한 채로 그 한 마디를 던지고 성큼성큼 방을 나갔다.

신호음이 열 번은 넘게 올린 뒤에야 도널드가 전화를 받았다. 몰리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도널드가 그녀를 달랬다.

"솔토가 여기 있단 말이에요" 불필요하게 힘이 실려 그런 고백이 튀어나갔다.

"이런 날씨에 당신 혼자 그런 곳에 있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오" 도널드가 잠시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에베레스트도 등정한 사람인데 그 정도 눈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 친구가 당신의 차 문제도 해결해줄 거요"

몰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어떻게 내 차를 끌어다 준다고 그래요, 도널드. 당신 너무 무감각하단 생각이 들지 않아요?"

긴장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런 질문은 않는 건데 그랬소, 몰리. 그렇게 흥분할 것도 아니고 말이오. 솔토와 어떻게 화해할지나 생각해봐요"

"화해를 해요?" 몰리는 날카롭게 반문했다.

"원한을 품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더 현명하니까" 도널드가 그 특유의 솔직한 태도로 말했다. "과거는 접어둬요, 몰리. 그렇게 하면 기분도 한결 좋아질 거요. 솔토를 용서하도록 각별히 노력을 기울인다면"

몰리는 무슨 말이 나갈지 몰라 재갈처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키지 않겠지만 용서가 지금의 당신 기분을 한결 풀어줄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소." 도널드가 결연히 말을 이었다.

"그 특별한 조치를 취해 봐요, 몰리. 결국엔 당신이 필요로 마음의 평화를 안겨다 줄 테니까"

처음으로 도널드가 그녀를 실망시켰다.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을 모르는 거야, 그래 알 리가 없지. 솔토와 다시 대면하게 되면, 얄밉고 비정한 그의 무관심에 또 다시 당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는 산산조각 나고 말 것이다. 분노와 모멸감과 적개심을 견디는 게 훨씬 더 수월할 것이다. 몰리 자신이 그의 인생에서 불편한 딸꾹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그녀의 마음을 빼앗았다가 짓밟은 뒤 그 후로도 흔적을 남겨 놓고 재빨리 잊어버렸던 그 모든 게 일탈이었다는 사실을 은근히 암시하는 그의 무반응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아직도 싸워야 하는 열망과 욕구라는 낙인을 찍어놓은 남자에게 불쌍하고 어리석고 딱하게도 그녀는 아직도 대책 없이 붙잡혀 있었다.

서재를 나오다가 하마터면 그에게 걸려 넘어질 뻔했다. "여기 있어요" 그녀는 다짜고짜 휴대폰을 그에게 디밀고는 울분과 자기혐오의 눈물을 들키기 전에 한 번에 두 계단씩 쿵쿵 거리며 올라갔다.

 

 

 

2

몰리는 격정에 휩싸인 채 빅토리아풍의 대형 더블베드 옆에 놓인 전등불을 켰다. 침대는 마치 작은 병 안에 쑤셔 넣은 배처럼 보였다. 조각된 마호가니 머리판이 천장에서 불과 30센티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침대 자체도 아주 높은 것이 매트리스를 한 개 이상은 깐 듯했다.

맞은편 벽에는 주철로 된 벽난로가 있었고, 그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작은 불꽃이 방안을 아늑하게 해주고 있었다. 몰리는 그제야 창문 밑에 놓인 가방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찡그렸

. 자기가 쓰려던 방을 내주다니 고맙기도 하지. 갑자기 아주 사려 깊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예의 발라졌네. 몰리는 그의 가방을 층계참에 내놓았다. 그를 용서하라고? 청바지를 묶고 있던 끈을 풀고 스웨터를 비틀어 벗은 뒤, 옷을 얼굴로 가져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련한 체취가 위험한 중독성 약물처럼 전신을 삼킬 듯했다. 그러자 자신과 이렇게 오래도록 여운을 남길 수 있는 그가 싫었고, 자제력이 부족한 자신이 부끄러워 스웨터를 옆으로 집어던졌다.

그녀가 솔토와 단 둘이 있게 되었음에도 도널드가 걱정하지 않을 만했다. 그는 여자와 관련해 아주 위험한 평판이 나 있었지만 그가 기꺼이 정욕의 손길을 뻗치지 않는 유일한 여자가 있다면 그게 바로 그녀라는 걸 도널드를 비롯해서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었다. 약혼 시절에도 솔토는 단 한 번도 심각하게 유혹해 온 적이 없었다.

그런 사실에 심한 굴욕감이 밀려들자 몰리는 알몸으로 침대에 올라가 겹겹이 깃털 같은 느낌이 나는 곳으로 파고들었다. 순진하게도 그런 걸 그의 존경할 만한 인내심으로 보고서 고맙게 여겼다니. 그는 단지 그녀를 그다지 원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는데. 여전한 의심에 넌더리가 나긴 해도, 그건 내내 성적인 욕구를 배출할 수 있는 좀 더 만족스런 출구가 그에게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계단을 오르는 가벼운 발소리에 이어 조용히 욕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머리를 베개 속에 박고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도널드가 옳았다. 이미 오래 전에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가 있는 남자에게 매료되어 있는 상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그 여자는 그의 아내, 심지어 애인도 아니면서 여전히 강철로 된 그 어떤 창살보다도 단단히 솔토를 붙잡아두고 있었다.

별안간 덮고 있던 이불이 옆으로 젖혀지며 재배치되자 몰리는 소리를 지르고 몸을 곧추세웠다. "이게 무슨?"

보드라운 그녀의 입술이 딱 벌어졌다. 솔토가 옆에 쌓여있는 베개 더미에 게으른 호랑이처럼 기대어 있었다. 은은한 전등 불빛에 넓은 구릿빛 어깨와 곱실거리는 검은 털이 무성한 건장한 가슴 근육이 희미한 빛을 발했다. 느닷없이 솟구치는 승강기 속에 내던져진 것처럼 어안이 벙벙해 꼼짝할 수 없었다.

"이 집에서 침대는 이것뿐이오"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럴 리가" 몰리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외종조부는 누군가 이곳에서 하룻밤이라도 묵어가는 걸 원치 않으셨소. 다른 방에는 가구 하나 없는 상태요" 그가 긴 사지를 나른하게 죽 뻗으며 설명했다. "아래층에는 딱딱한 나무 의자 몇 개뿐이고 오늘 같이 추운 밤에 그 의자에 앉아서 밤을 지새울 생각은 전혀 없소"

그제야 자신이 벗은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몰리는 시트를 끌어올렸다. "나와 한 침대를 쓸 순 없어요"

그의 새까만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어째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장면을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거지?"

유도 심문에 무기력해진 몰리는 사태가 파악되면서 서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 이제야 알겠군. 우리가 지내지 못했던 결혼 첫날밤이었군" 솔토가 감정이라곤 조금도 없는 생각에 잠긴 말투로 스스로 답했다. "몇 주일 동안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어떻게 됐지? 아무것도 없었소. 정말 대단한 결말이었소, 카라"

문득 그날 밤이, 그녀가 히스테릭하게 울고불고 짜증을 내며 신랑을 방에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을 때 그가 보였던 무섭도록 조용하면서도 싸늘한 분노가 생각났다. 그녀는 급히 방어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때의 기억을 다시 한 번 가슴속에 깊숙이 묻어버렸다.

"등을 돌리고 있으면 일어나서 옷을 입을게요. 난 의자에서 밤을 새워도 괜찮으니까" 몰리는 그가 부끄럽게 여겨 알아서 나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뻣뻣하게 말했다.

"등을 돌리라고?"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몰리, 당신 지금 열다섯이오, 스물 네 살이오?"

새삼 창피해 얼굴이 빨개진 그녀는 자신의 뽀얀 살결을 저주하며 이를 악물었다. "아무것도 안 입고 있단 말이에요"

"나도 마찬가지지만 내 알몸의 일부를 노출시킨다고 당신을 한없는 욕정 속으로 몰아넣을 거라 생각할 만큼 자만심에 빠지진 않았소"

"날 놀리지 말아요" 그녀는 팽팽한 소리로 딱딱거렸다.

", 카라" 솔토가 일광욕을 즐기는 게으른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내가 여자의 알몸을 좀 봤다고 자제력을 잃을까봐 이러는 거요?"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면 뭐가 걱정이오?"

몰리는 시트를 꽉 움켜잡았다. "당신과 한 침대에서 잘 순 없어요. 옳지 않은 일이에요"

"누가 안다고?" 그가 아주 냉담하게 물었다.

"내가 알죠.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문제는"

"문제는 당신이 놀랍도록 답답하고 까다로운 여자란 것과 그런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는 점이지. 내가 어쩔 거라 고 생각하는 거요. 불을 끄자마자 당신을 덮칠 거라고?"

심한 굴욕감에 몰리는 금빛으로 어른거리는 눈에서 괴로운 시선을 돌렸다.

"아니면 당신 자신을 믿을 수 없어서인지도 모르겠군. 위험에 처한 사람이 나인 거요?" 그가 더욱 냉담하게 물었다.

"허튼 소리 말아요" 몰리는 저도 모르게 시트 밑으로 기어 들어가 다시 머리를 베개에 기댔다. 그때 갑자기 반대편 이불이 홱 젖혀졌다. 그쪽을 흘끗 보니 침대를 빠져나가는 금빛등이 언뜻 보였다. 결국 나가는구나 싶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다가 느닷없이 실망감이 밀려들자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를 향한 감정적인 반응이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깨닫고서 눈을 꼭 감았다.

부드러운 옷감이 얼굴 옆으로 떨어졌다. "이게 뭐예요?"

"티셔츠요, 카라. 나도 뭘 걸쳤으면 좋겠소?" 솔토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뜻밖의 타협안이었고, 그녀로서는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타협안이었다. 하지만 냉장고 같은 아래층에서 추위에 떨며 밤을 지샐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 밑으로 옷을 끄집어내려 머리 위로 티셔츠를 뒤집어 쓴 뒤 조심스럽게 엉덩이 밑으로 끌어내렸다. 솔토가 다시 내려앉자 침대가 출렁했다. 몰리의 이성은 어서 이곳을 벗어나라고 재촉했지만 이젠 몸을 가릴 옷까지 입고도 발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어 대리석 기둥처럼 뻣뻣이 누워 있었다.

까다로운 여자,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가슴 아픈 비난이었지만 솔직히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친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친아버지는 그녀가 갓난아기였을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2년 뒤 조지 길핀 목사와 재혼하셨다. 계부는 냉혹하고 금욕적인 견해를 지닌 엄격한 규율주의자였다. 그녀는 몸을 노출시키는 건 품위 없는 짓으로 여겨지고, 남녀 간의 육체 행위에 관한 말은 아기를 만들거나 결혼 상태에 해서만 허용되는 숨 막히도록 억제된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솔토에게는 그런 제약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런 일을 역겹게 여기는 어머니의 인생관을 주입 받지 않았을 테니까. 싫은 걸 참아야 하는 게 여자의 의무라는 말도 듣지 않았을 테고. 언젠가 그에게 안긴 기분이 꿈만 같았다고 털어놓았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는 혐오스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궁극적인 육체관계에서는 꿈같은 기분이 조금도 들지 않을 거라는 암시를 은근히 비치셨다.

생각이 자꾸만 성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게 거북해서 몰리는 가까이에 누워있는 남자의 몸에서 발산되는 확연한 열기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시험에 든 기분이었다. 결혼 무효 선언 이후, 그녀가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알아보는 시험 말이다. 솔토가 소녀 시절부터 꿈꿔오던 모든 기도에 대한 해답 같아서 몰리는 스타에게 매혹된 10대처럼 굴다가 상처받고 굴욕을 당하고 난 뒤에야 모진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를 잊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추억이 늘 뒤따라 다녔다. 누그러들 줄 모르는 상실감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뭘 잃은 거지? 둘의 관계는 끔찍한 제스처 게임이었다. 그럼에도 어떻게 아직도 그에게 끌릴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외모가 한 몫 하는 거야, 절망감이 더해가자 그녀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기막히게 잘생긴 남자에게 무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솔토가 몸을 뒤척이자 몰리는 매트리스 중앙의 위험한 계곡이 손짓하고 있는 걸 느끼고는 자신이 누워 있는 안전한 지대에 꼭 붙어 있으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당신과 나와 눈보라밖에 없군" 그가 거의 음미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는 궂은 날씨가 제공하는 작은 도전마저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이보다 더 심한 눈보라 속에 내던져지더라도 그 도전을 즐겼을 것이다. 프레디는 솔토를 가리켜 험난한 자연환경 속에서 자신을 입증해 보이려는 엄청난 욕구를 지닌 인물이라고 했다. 진짜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들과 동등해질 수 있는 유일한 분야라서 그렇다며. 그는 상어가 출몰하는 바다에서 심해 다이빙을 하고 산을 정복하고, 과학 탐험대로 인도네시아의 깊은 밀림지대를 돌아다니며 어릴 때부터 주체할 수 없는 활력을 탐험과 발견으로 해소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국제 금융계에서도 수위를 달리는 크리스탈디 투자사의 운영이라는 그보다 어려운 도전에서 풀려나 재미 삼아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생각할수록 솔토가 이 황량한 호수 지방의 후미진 곳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솔토, 여긴 웬 일이에요?" 그녀는 눈을 뜨고서 벽과 천장에 그림자를 어른거려 뜻밖에도 밝고 생기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불꽃을 바라보며 불쑥 물었다.

"외종조부가 반세기 동안 내려온 집안 서신을 내게 남기신 데다가 여길 팔기 전에 한 번 더 와보고 싶었소"

몰리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그런 대화를 재개하지 않고 그냥 잠들어버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

"이제 보니 당신을 위해서라도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솔토가 나긋이 강조해 덧붙였다.

"날 위해서요?" 몰리는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되물었다.

"당신은 지금 도널드와 관련해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소"

처음엔 무슨 말인가 해서 어리둥절해하던 그녀는 이내 한결같은 냉담한 확신에 발끈해 똑바로 누워 긴장을 감추지 않고 천장을 노려보았다."당신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더구나 당신이 상관할 일도"

"당신 어머니와 계부가 시작한 일을 그 친구가 마무리짓겠지. 당신은 남은 평생 작은 롤빵이나 구우면서 절규하고 싶은 데도 겉으로는 미소 지으며 살게 될 거요.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옳지 못한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스트레스에도 미치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말이지만"

아주 깊게 숨을 들이쉬느라 폐 속에 바람 든 풍선이 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당신이 어떻게 알아서요?" 발끈한 질문을 삼키고 보다 차분한 응수를 생각해 보기도 전에 내뱉고 말았다.

"누가 나보다 더 잘 알겠소?" 그가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게 반문했다."당신은 한때 내게 빠졌던 사람이오. 끓어오르는 열정과 질투와 소유욕에 얌전해 보이는 얼굴 뒤편으로는 다이너마이트처럼 격정적으로 타올랐지. 폭발 직전처럼 위험하지만 엄청난 흥분을 안겨주겠구나 싶더군"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 그녀는 한쪽 팔꿈치를 괴고 일어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질책했다.

"조심하시오" 솔토가 발끈한 그녀의 얼굴에서 호리한 한쪽 어깨에서 밀려 내려간 티셔츠 쪽으로 가늘게 뜬 시선을 보내며 나긋하게 경고했다. "속살이 보이니까"

몰리는 얼른 일어나 다루기 힘든 목선을 거머쥐고 다시 끌어올렸다. "난 도널드를 무척 좋아한단 말이에요"

"결혼을 유지하자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 그래도 당신 계부는 만족하겠군. 생색을 내고 마음대로 휘어잡을 수 있는 사위에게 실력 발휘를 할 수 있게 됐으니"

"우리 계부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도널드는 나이도 많고,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전혀 모르고 있는 친구요"

"당신은 마치 내가 무슨 괴물처럼 말하는데" 몰리는 주먹을 불끈 말아 쥐고 소리쳤다. "난 도널드를 믿어요. 그를 알고요. 절대로 날 실망시키거나 속이지 않을 사람이라고요"

"나는 그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요?"

몰리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낭패한 얼굴로 약점이 잡힌 초록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두운 터널 속에 갇혀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은 우레와 같은 열차 소리를 듣고 있는 듯했다. 도전적으로 이글거리는 금빛 눈과 경솔하게 눈을 마주치자 목이 잠기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속눈썹을 내리 뜨고서 그의 모습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어쩌다가 아주 위험한 곳으로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자신의 혼란한 감정을 드러낸 사실에 아연해하며 그녀는 있는 대로 신경을 곤두세우고는 조심스럽게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만 자야겠어요. 피곤해서"

"내가 좋은 꿈꾸라는 말이라도 할 줄 아오?"그가 매끄럽게 결연한 동작으로 둘 사이의 공간을 단숨에 넘어왔다. "자신이 하는 말을 좀 들어보시오, 요란한 파자마 파티에 참석한 가정교육을 잘 받은 소녀처럼 얘기하고 있으니까"

"솔토, 어리석은 언쟁은 이것으로 충분한 것 같네요"

불안한 그녀의 표정을 내려다보던 잘생긴 얼굴에 이글거리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집게손가락으로 베개 위에 흐트러져 있는 윤기 나는 황갈색 머리를 천천히 감았다. "무슨 소리, 난 아직 시작도 안 했소, 카라"

몰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극히 드물긴 했지만 한때는 아주 멋져 보였던, 가슴을 설레게 하던 매력적인 미소와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그 장난기 어린 손을. 점점 숨이 가빠오면서 이성적인 사고가 흐려졌다.

"뭘 시작해요?"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 둘 사이가 어땠는지 잊어버렸다면 생각나게 해줘야겠군" 그가 오만하게 검은머리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몰리는 불안한 눈길을 그에게서 떼지 못한 채 눈살을 찌푸렸다. 숱 많은 검은 속눈썹에 둘러싸여 격정으로 타오르고 있는 금빛 눈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럴 이유가 없어, 그가 키스하려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했다. 육감적인 입술이 꿈속에서처럼 천천히 다가와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리고는 무방비 상태인 그녀의 입술로 그의 혀끝이 에로틱하게 헤집고 들어왔다.

깜짝 놀란 몰리는 그를 밀치려 했다. 손을 들어 공단처럼 매끈한 넓은 근육질의 어깨에 갖다댔지만 오히려 감각적이고 유혹적일 뿐이었다. 잠시 이성과 감정이 대립했다. 지금은 안 된다고 그를 허락해선 안 된다고 외치며 따뜻한 구릿빛 어깨에 닿은 손에 힘을 주어 거부의 몸짓으로 꽉 죄었지만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 그러다가 이내 선택과 자각의 순간은 사라지고, 시간이 멈춰 보류 상태에 들어갔다.

솔토가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당기더니 힘차게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가 입으로 사랑을 나누는 동안 떨리는 헐떡거림이 그녀의 입에서 빠져나갔다.

"비할 바가 없지, 안 그렇소, 카라?" 싸늘하기 조차한 쉰 웃음소리에 등골이 오싹했지만 그의 품에 안긴 기분이 천국 같았다. 그녀는 그의 목덜미 쪽에 길게 자라기 시작한 숱 많은 검은머리 속으로 수줍은 손을 집어넣었다.

"솔토?" 그녀는 자제하려고 애쓰며 고르지 못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가슴을 움켜잡자 몰리는 숨을 쉴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중에 또다시 맹렬하게 입술을 포개더니 긴 손가락을 교묘히 티셔츠의 넓은 목선에 걸어 진로에 방해가 되지 않게 끌어내렸다.

솔토가 봉긋 솟은 유두를 건드리자 그 엄청난 감각에 몰리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애무로 인해 전선을 압도하는 관능적인 충격에 온몸을 비틀었다.

", 정말 기막히게 섹시한 몸이야" 그가 또다시 입술을 약탈하며 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완전히 통제력을 잃은 몰리는 열정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게 몸을 뒤틀며 아찔한 쾌감에 숨을 헐떡였다. 잠시 그가 주저하는 걸 느끼고 눈을 뜬 순간 붉게 상기된 얼굴에 매우 만족한 듯한 표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솔토가 그녀 안으로 들어왔다. 통증과 쾌감을 몰고 온 힘찬 침입에 놀라 몰리가 비명을 지르자 그가 격정적으로 입술을 덮었다.

격렬했다.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찌를 듯한 통증이 있은 뒤에도 압도적인 갈망과 욕구가 그녀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몰리는 뜨겁고도 맹렬하게 요구해오는 절박한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원하고, 갈구했다. 그가 점차 빠르게 밀어붙여 점점 높은 곳으로 몰아가자 강렬한 열기와 그보다 더 강렬한 통증이 몸 안 잎은 곳에서 부딪치면서 흐느낌과 몸부림을 폭발시켜 놓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이 빙빙 돌고 있었다. 어찔하니 생소하고 나른한 충족감이 사지를 꼼짝 못하게 붙들고 있었다. 솔토는 아직도 그녀를 꽉 붙든 채 땀에 젖은 크고 힘찬 몸으로 그녀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가 헝클어진 머리를 들더니 가름하고 거뭇한 얼굴에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고 꿰뚫을 듯한 번뜩이는 눈으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고맙소" 그가 아무 표정도 비치지 않은 채 느릿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바라던 그대로였소"

 

 

 

3

솔토가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곧바로 침대를 빠져나갔다. 그는 땀에 젖은 금빛 살결과 수축된 근육질의 등위로 불길이 어른거리는 몸을 아무 거리낌 없이 쭉 펼쳤다. 터질 듯한 침묵 속에서 팬티를 찾아 입더니 아주 침착하게 청바지를 집어 들었다.

몰리는 벌떡 일어나 앉아서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불안하게 마른 헛기침을 했다. "솔토?"

"난 아래층 의자에서 자겠소" 그가 청바지의 지퍼를 올리며 말했다.

"뭐라고요?"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갑자기 변한 그의 태도에 혼란스러워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솔토는 실크 셔츠 속에 팔을 집어넣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단추를 채우더니 스웨터를 껴입었다. 그리고는 침대 끝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가름하고 힘찬 손으로 침대의 발막음판을 잡고 섰다. 헝클어진 침대 한가운데 뻣뻣하게 앉아 있는 그녀를 훑어보던 시선이 마구 흐트러진 머리와 멍한 눈과 부풀어 오른 핑크빛 입술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다. "이런 모습을 보게 될 날을 기다렸었소" 그가 조용히 고백헀다.

이번엔 싸늘한 위협을 감지할 수 있었다. 차가운 눈의 결정체에서 휘황하게 발산되는 광채처럼 오그라든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서서히 핏기를 잃어 가는 그녀를 지켜보며 솔토가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한 채 말했다. "4년 전에 누렸어야 할 기쁨을 마침내 오늘밤에 치른 거요. 그 결혼식을 기억하고 있소, 몰리? 그때 당신이 했던 약속을? 그리고는 바로 그날 밤 짐을 싸서 달아나 당신 부모님 뒤에 숨었던 것도?"

몰리는 그보다 더한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을 둘 사이에서 벌어지게 놔뒀다는 충격에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러니까"그녀는 불쑥 입을 열었다. "일부러 나와 사랑을 나눴다는 거예요?"

"사랑을 나눴다는 표현은 결혼 첫날밤에나 어울리는 말이지" 솔토가 냉소적으로 내뱉듯이 말했다. "오늘밤 우린 섹스를 나눈 거요"

둘의 친밀한 행위를 묘사하는 품위를 떨어뜨리는 표현에 흥분한 몰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도 나처럼 흥분한 줄 알았는데요"

뜻밖에도 희미한 홍조가 솔토의 단단한 뺨을 잠시 부각시켰지만 곧이어 냉소적인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몰리는 얼굴을 붉혔다. 어떻게 한 순간이라도 그가 자신의 있지도 않은 성적 매력에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그처럼 경험 많은 남자가 유혹에 쉽게 굴복해 충동적이고, 경솔한 10대처럼 자제력을 잃을 리가 만무한데. 그가 그녀의 처녀성을 갖기 위해 냉혹하게 계산적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에 속이 메슥거리고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이 들었다.

"전 이해가 안 돼요" 몰리는 무릎을 감싸 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지만, 도대체 무슨 근거로 자신이 이런 벌을 받아야 한다고 솔토가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착하지 못한 소리로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해가 안 된다니 놀랍군" 이태리 억양이 섞여 모음 발음이 거칠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달아난 아내에게 접근하려 했다고 경찰의 위협을 받았을 때부터 복수심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군"

"경찰이요?"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홱 쳐들고 되물었다.

"당신 계부가 경찰을 불렀더군. 소란을 일으켰다고 주의를 받았지. 파파라치가 당신 부모님 집 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것이나 내가 도착했을 때 그들이 열광했던 것이 내 탓은 아니라고 생각됐지만. 어찌된 일인지 내가 그 죄를 다 뒤집어썼지"

싸늘한 비난과 안면 골격이 험악해지는 걸 보고서 그런 일로 그가 얼마나 격분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그가 찾아왔던 일은 알고 있었지만 경찰이 개입된 줄은 정말 몰랐었다. 그가 당황했을 생각을 하니 괴로웠다. 아니지, 그가 부당한 일을 당하긴 했어도 당시엔 떠다 밀어도 그를 만나지 않았을 거야. 어쨌거나 그녀는 그때 부모님 집에 없었다. 결혼이 공개적으로 완전히 틀어져버렸을 때 계부나 어 머니가 동정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복수심은 내가 운 좋게 모면한 거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자연적으로 사라졌다고 할 수 있지"솔토가 잔인하도록 솔직하게 말을 이었다."하지만 당신이 내 사촌 판도라에게 한 짓만은 평생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을 거요"

"판도라요?" 몰리는 그 이름을 언급하기가 너무 힘이 들어 괴로운 저음으로 나직이 되뇌었다.

"그녀는 언론에 의해 난자당했소.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도 모른 체했고, 친구들도 떠나버렸지.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침까지 뱉어대고" 솔토가 이를 악물고 열거했다. "<판도라, 남자에 굶주려 아무 남자나 가리지 않는 헤픈 여자. 가엾게 희생당한 신부에게서 신랑을 빼앗은 여자> 그런 식으로 묘사되었으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냐고? 그건 당신이 기자들에게 추잡한 거짓말을 한아름 안겨줬기 때문이지"

"내가 안 그랬어요" 폴리는 흐느끼는 소리로 반박했지만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직접 말한 건 아니었지만 누가 그랬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경솔하게 털어놓은 두 사람의 속내를 듣고 제나가 격분해서 기지들에게 흘렸던 것이다. 제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진 않았지만, 당시 판도라가 두 사람의 결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언론의 지탄을 받는 걸 보며 고소해 했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당신이 일으킨 법석이잖소" 솔토가 반항적으로 홱 돌아서며 비난했다.

"아뇨, 당신이 한 일이죠" 몰리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무릎 위로 숙이고 나직이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결혼식 다음 날 새벽에 판도라의 아파트를 나오다가 사진이 찍혔을 때 당신이 그렇게 한 거예요"

"당신은 내 아내였소. 당신에게 그 정도의 신뢰와 애착을 기대할 자격은 있었단 말이오" 솔토가 벽난로 가에서 싸늘하게 내뱉듯이 말했다.

몰리는 유혹 뒤에 깔린 잔인한 저의 때문에 망연자실해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소문대로 이토록 무자비한 사람일 수 있다고는 결코 믿지 않았다. 이제야 결혼 무효 선언이 있은 뒤로부터 지금까지 솔토가 불러일으킨 지독한 고통에 대해 자신이 어느 정도 그를 용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판도라와의 관계를 끊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과 결혼했는지는 모르지만, 판도라가 순순히 응하지 않자 결국에는 그런 기만행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거라고 마음 한편으로는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마땅히 받아야 할 걸 받은 거예요"그녀는 괴롭게 중얼거렸다."당신도 어쩔 수 없어 그랬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당신을 믿다니,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냉혹하고 감정 없는 인간이 되느니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게 나을 것"

"이런, 결코 감정이 없었던 적은 없었소" 그가 말을 가로 챘다. "복수는 차게 해서 먹어야 제 맛이 나는 법이고 당신이 도널드와 결혼해 살찐 안짱다리 아이들을 낳을 거라는 생각을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소. 마땅히 받아야 할 내 결혼 첫날밤을 위해 그 얼간이가 한 게 뭐란 말이오? 그 친구가 당신을 취하겠다면 먼저 당신이 내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고나 하게 하시오"

솔토는 이글거리는 금빛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면서 이제 막 원초적인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 사실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또한 몰리로서는 뜻밖의 사실이었다. 4년 전에, 그녀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파렴치한 야만인과 결혼했던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가 더할 나위 없이 침착하고 자제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믿기까지 했었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 몰리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불꽃의 중심부를 응시했다. 거짓 열정처럼 저 불꽃도 사그라들어 이제 곧 재만 남게 될 것이다. 솔토는 성적 카리스마로 그녀를 월등히 능가한 속임수의 대가였다. 복수라는 이름 아래 그런 짓을 했던 것인데. 문득 그녀 자신이 도널드를 사랑하지 않고, 그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반지를 돌려주면 도널드가 실망하겠지만 그래도 상처는 받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말에 청혼하면서 아주 신중하게 생각해보고 나서 답을 달라고 했었다. 어젯밤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이번 여행을 마치고서 그녀의 결심을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젠 그것이 아득한 옛일로 여겨졌다. 도널드와의 미래를 솔토가 산산이 부숴 놓았다. 그녀는 육체적으로 나약한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한 남자의 성적 매력에 이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여자는 다른 남자와의 진지한 관계를 고려해볼 자격조차 없었다.

하룻밤 정사의 상대였던 거야, 내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거야. 판도라가 겪었던 일을 두고 날 비난하기까지 하다니. 하기야 고의는 아니었다 해도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공격해 상처를 입힌 셈이었다. 정말이지 오늘밤 솔토는 그녀에게 진짜 증오심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뒤에 숨었던 건 나약하게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그가 결혼이 깨진 걸 그녀 탓으로 돌리고, 그녀의 애착과 신뢰를 문제 삼을 수 있다는 게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결혼 첫날밤에 히스테리를 부렸건 말건 그녀 자신의 감정을 분명히 보여줬었는데.

"그녀에게 가겠다면 당신이 돌아왔을 때 난 여기 없을 거예요" 그가 실제로 방을 걸어 나갈 때까지 안 그래도 심란해 울고 있는 신부를 놔두고 결혼 첫날밤에 다른 여자에게로 가는 남자가 설마 있을까 싶어 그녀는 자존심을 걸고 최후통첩을 날렸던 것이다.

하지만 솔토는 주저 없이 판도라를 선택했다. 나중에 그녀를 찾아왔었다 할지라도, 그건 이미 늦은 뒤였다. 새벽에 판도라의 아파트에서 나오는 그를 찍은 사진을 봤을 때, 밤새 사촌과 같이 있었다는 걸 공개적으로 입증하는 굴욕적인 증거와 대면했을 때,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배신의 고통이 너무도 컸었다.

지금 이 순간 먼 과거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만은 없었으면 싶었기에 그녀는 기억을 되살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보다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고 싶은 충동을 거스를 수 없었다.

솔토를 처음 만난 건 어느 무더운 여름날 오후였다. 마을 가게에서 산 달걀을 담은 바구니를 싣고서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검정색 스포츠 카 한 대가 잎이 우거진 앞길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정신없이 차를 피하다가 그만 머리를 울타리에 처박고 말았다. 잠시 후,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려 가시가 있는 관목에서 그녀를 일으켜 세워 주며 맨 팔에 난 긁힌 상처를 보고 놀란 소리로 사과했는데, 그가 솔토였다. 그때 스포츠카에서 나른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핸더슨 씨 댁이 어딘 지나 물어봐요"

그 말을 들은 솔토가 성큼성큼 차로 돌아가더니 운전석 문을 열었다. 간단한 대화가 오고간 뒤, 큰 키의 금발 미녀가 입을 삐쭉이 내민 채 마지못해 차에서 내렸다. "자전거에서 떨어진 건 유감이에요, 하지만 당신도 잘 보고 다녀야"

"네가 정신없이 차를 몰았잖아" 싸늘하게 나무라는 눈길로 금발 아가씨를 쏘아보며 그가 말을 잘랐다.

그와 판도라가 나란히 서게 되자 처음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된 몰리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쪽은 아주 거뭇하고, 한쪽은 아주 희었지만 둘 다 사람들의 고개를 돌리게 만들고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신체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에 머리는 바람에 날려 엉망이고, 유행 지난 색 바랜 여름 드레스가 그때처럼 지독히 의식되어 본 적이 없었다.

"핸더슨 씨 댁 말이에요"판도라가 조바심을 내며 반복해서 물었다.

"내 사촌, 판도라를 용서하시오. 낯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편이라서"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리더니 가름한 손을 내밀었다. "솔토 크리스탈디요. 좀 전엔 어디로 가던 길이었소?"

"집으로요" 그녀는 불안한 눈길로 희미하게 빛나는 짙은 금빛 눈을 바라보며 그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는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손을 계속 잡고 귀족적인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강렬하게 훑어보는 바람에 얼굴이 빨개진 몰리는 어색하게 손을 잡아 뺐다.

"솔토, 늦었단 말예요" 판도라가 재촉했다.

"이름이 뭐요?" 사촌이 말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가 물었다.

"몰리, 몰리 배니스터예요"

"몰리"그가 나직이 되뇌며 느릿하게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그녀의 무릎에 힘을 빼놓았다. 그가 쭈그리고 앉아 고장 난 자전거와 엉망이 된 달걀 부스러기를 살피고 있는 동안 그녀는 다리가 겨드랑이까지 올라오고, 가슴은 좀 더 작고, 엉덩이도 지금보다 날씬하고 무엇보다 수천 대의 배를 정박시킬 만한 미모였다면 좋겠다는 어린애 같은 생각을 열심히 하며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간단히 말해 솔토 같은 남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외모를 가질 수 있다면 기꺼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없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느릿하고 예절 바른 말투에 아주 세련되고 고상한 캐주얼 차림의 그는 영화배우 같은 매력을 지닌 다른 세계의 남자 같았던 것이다.

"우선 달걀부터 새로 사드려야 할 것 같군요" 그가 유연하게 몸을 일으키며 진지하게 말했다.

"달걀 값을 그냥 물어주면 되잖아요" 판도라가 어이없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새로 사주시지 않아도 돼요" 몰리는 서둘러 만류했다. "돈을 주실 필요도 없"

"그렇다면 자전거를 싣고 집까지 모셔다 드리죠" 점점 심해지는 사촌의 성난 참견을 차단시키는 만큼이나 몰리의 반대를 깨끗이 무시하고 솔토가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핸더슨 씨 댁이 어디죠?"

"언덕을 올라가서 마을을 지나 약100미터쯤 더 가시면 왼쪽에 커다란 대문이 달린"

"내 사촌부터 데려다 주기로 합시다. 바쁜 일이 있어서요"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차 뒷좌석에 타자면 좀 불편할 거요"

"안 태워주셔도 돼요. 전 그냥 집까지 걸어가면 돼요" 그녀를 태워준다는 말만으로도 무섭게 노려보는 판도라의 시선이 몹시도 의식돼 몰리는 허둥지둥 사양했다.

하지만 그가 이겼다. 자신이 직접 운전해 사촌을 핸더슨 씨 저택에 내려주고서 몰리를 조수석에 앉게 했다.

"사고가 났었다고 말하고, 내가 사과드리더라고 전해 줘"

싸늘하게 화가 나 있는 판도라에게 그가 지시했다.

그는 몰리를 태우고 마을 가게로 내려가서 달걀을 산 뒤 고장난 자전거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차를 거기에 놔두고서 자전거를 끌고 그녀와 함께 목사관까지 걸었다. 그와 판도라는 핸더슨 씨 댁에서 여는 접대 파티에 초대받아 오는 길이라고 했다. 몰리는 콩코드를 타고 뉴욕에서 바로 날아와 화려한 스포츠카를 타고 시골로 주말을 보내러 오는 사람들과 예사로 만나는 것처럼 행동해보려 했다.

목사관 앞에서 헤어진 뒤, 그와 다시 만나리라고는 정말 예상치 못했었다. 핸더슨 씨 부인이 그날 저녁 전화를 걸어와 다음날 자기 집에 와서 테니스를 치지 않겠느냐고 제의해왔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랐다. 핸더슨 씨 내외가 자기네 집 정원에서 매년 교회 축제 행사를 치룰 수 있게 해주긴 하지만 격의 없는 교제를 위해 보잘것없는 이웃을 초대하는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솔토 덕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그녀를 데리러 왔을 때 그는 그런 사실을 무심히 확인시켜 주었다. 거만한 핸더슨 씨 내외는 왕족의 방문이라도 받은 듯이 솔토의 비위를 맞췄지만 그는 그들의 과도한 환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런 호의에 익숙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나무랄 데가 없어 몰리는 그날 솔토의 엄청난 부와 그런 부가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기분 좋게 무시할 수 있었다.

테니스를 치기엔 너무 더운 날씨였지만 그런 더위에도 아랑곳 않는 그에게 감히 아무도 불평하지 못했다. 혼합 복식으로 활기 넘치는 게임을 맘껏 즐기며 코트를 뛰어다니던 몰리는 나중에 창문 앞을 지날 때 땀에 젖은 머리와 반짝이는 코와 달아오른 뺨을 보고는 움찔했다. 그녀 뒤로 다가와 선 솔토는 그때도 이미 그녀의 마음을 책을 보듯 환하게 읽었다. "멋진 모습이요, 카라. 외모만 생각하는 여자들은 영 재미없는 말 상대거든"

그의 사촌 판도라는 오후 내내 사이드라인 그늘에 앉아 두 명의 남자와 노닥거렸다. 몰리 쪽은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판도라가 여자들은 상대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파악한 터였다. 바로 전날, 솔토가 그녀를 버릇없고 고집 센 아이 취급하는 걸 직접 봤으니까. 그때만 해도 그녀가 몰리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단지 솔토가 보이는 관심에만 넋이 나가 있었다.

 

몰리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전날 밤에 그런 일들이 있었음에도 잠이 들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침대에서 기어나가 커튼을 걷었다. 자다가 창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은 듯했지만 지금은 비도 그치고 눈도 다 녹아 있었다. 아래층에 두었던 치마와 스웨터가 의자 위에 놓여 있었고 그 위에 검정색 새 스타킹도 함께 놓여 있었다. 솔토가 저걸 어디서 구했지? 어젯밤 기름을 넣기 위해 들렀던 주유소의 가게가 생각났다. 자고 있는 동안 그가 들어왔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직되었지만 그의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층계참 맞은편 욕실로 들어간 몰리는 간단히 목욕을 했다. 몸에서 아직도 솔토의 체취가 나는 것 같은 건 순전히 상상 탓이라고 자신을 일깨웠다. 상상과 죄책감 탓이야. 어쩔 수 없이 그의 소유를 상기시키는 은밀한 욱신거림을 씻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열심히 비누질을 했다.

갑자기 그녀는 깜짝 놀라 제자리에 우뚝 섰다. 그가 콘돔을 사용했던가? 하지만 이내 순진하게 겁먹었던 자신을 비웃었다. 계산된 유혹이 임신이라는 결과를 낳지 않도록 그가 어련히 조치를 취했을까. 절대 그런 위험은 무릅쓰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증거가 기억나고 안 나고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런 것들을 떠올리고 관찰할 경황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10분쯤 뒤, 몰라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게 숨을 내쉬며 어깨를 폈다. 계단을 내려가는 데 솔토가 거실에서 나왔다. 몰리는 그가 있는 곳에서 좀 더 왼쪽 지점에다가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침 좀 들겠소?"그가 물었다.

곧바로 그를 쳐다보게 만들만큼 놀라운 제안이었지만 그녀가 두려워하던 가슴을 찢어놓는 고통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젯밤 일에 대한 자기 응징과 심한 후회 때문에 일시적으로 맥이 탁 풀려 무감각하고 공허했다.

"얘기 좀 합시다, 몰리"

"내가 하지 않을 일이 있다면 그건 당신과 얘기하는 거예요" 몰리는 딱딱하게 응수한 뒤 그를 지나쳤다.

어제 차 마시는 시간 이후로 아무것도 먹은 게 없었다. 몰리는 하고 많은 것 중에 심한 허기가 든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부엌으로 가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았다. 초콜릿이 든 크로외상 봉지가 조리대 위에 놓여 있었다. 솔토는 초콜릿을 무척 좋아했다. 그와 관련해 그녀가 좋아하는 점 중의 하나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리는데 불투명한 뒷문 유리 너머로 낯익은 빨강색이 어른거렸다.

문을 열자 그녀의 낡은 해치백이 눈에 들어왔다. "내 차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어요?"

"뒷바퀴가 진흙 속에 빠졌더군" 솔토가 설명했다."내가 견인해왔소"

"뭘로요?"

"내 사륜구동으로 차고에 넣어뒀었기 때문에 못 봤을 거요. 당신 차 열쇠는 재킷 속에 있더군" 솔토가 그녀를 상기시켰다.

어젯밤 그런 일이 있었던 터라 도저히 고맙다고 인사할 마음은 나지 않았다. 둘의 육체관계는 우연이 아니었다. 갑자기 욕정에 휩싸였다거나 감상에 빠졌다거나, 통제력을 잃어서는 더 더욱 아니었다. 잔인하게 고의적으로 작정한 복수였다. 그녀는 말없이 크로와상 봉지를 뜯어 하나를 오븐 속에 넣고 데웠다. 차가 문 앞에 대령해 있다 해도 자존심 때문에 도망치듯 비겁하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녀가 가주길 바란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어수선한 상념에 잠겨 타일 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그녀 옆을 지나쳐 불 위에서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살짝 탄 크로와상도 능숙한 손길로 오븐에서 얼른 꺼내놓았다. "마음이 어지러운가 보군. 앉아요, 내가 커피를 만들 테니까"

"난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몸이 와들와들 떨려와 두 팔로 꼭 감싸 안았다. 그가 단숨에 스웨터를 벗더니 그녀의 일그러진 옆얼굴을 어두운 눈으로 강렬하게 바라보며 옷을 내밀었다. 몰리는 혐오스럽게 그 옷을 훑어보고는 거실로 물러나 탁자 앞에 앉았다.

크로와상이 입안에서 모래로 변한 듯해 억지로 삼켜야 했다. 거짓말처럼 식욕이 사라졌다. 그녀는 곤혹스런 눈길로 솔토를 몰래 훔쳐보았다. 그가 자신의 옷을 갖다놓고, 새 스타킹을 구해놓고, 차를 견인해 주었다. 하기야 그런 배려들은 모두 그녀의 출발을 서두르게 만드는 것으로, 여자를 잘 아는 남자의 노력할 필요 없는 훌륭한 태도와 타고난 세련됨이 다시 활동을 재개하고 있었다. 어젯밤 일은 없었던 듯했다. 하지만 어젯밤 그는 결혼문제에 관해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지금은 멋진 골격이 팽팽하게 날이 서 있는 것이 계속되는 긴장을 보여주었다. 터질 듯한 침묵에 이젠 그녀도 솔토만큼 편하지 않았다. 그녀는 접시를 밀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침대에 들었을 때 당신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소" 솔토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몰리는 재킷을 집으려던 손을 툭 떨구었다. "터무니없는 충동 때문이었겠죠. 장난으로 그런 거예요?" 전선을 뒤흔드는 괴로움에 내뱉듯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 결혼처럼 끔찍한 장난이었어요?"

그녀의 빈정거림에 당황한 솔토가 잠시 말없이 앉아 있다가 이윽고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몰리는 성난 경고의 몸짓으로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그래서 기분이 나아지겠으면 날 때려요" 그녀를 응시하는 금빛 눈이 무서우리 만치 침착하고 강렬했다.

몰리는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후려쳐 그나마 남아 있는 마지막 자제력을 잃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팔을 거두어들여 제대로 줄을 맞추지 못해 혼이 나고 있는 양철 병정처럼 양옆으로 꼭 갖다 붙였다.

"당신에게 키스했을 때, 그건 게임이었소. 그 이상으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소" 그가 깊게 울리는 음성으로 단호하게 고백했지만 몰리는 이미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를 등지고 돌아서 있었다.

게임이라고? 지금이야말로 절실히 필요한데 좀 전의 기막힌 무감각이 사라지고 없었다. 괴롭혔다가 물러나는 꼴이었다. 하지만 솔토는 물러나지 않았고, 한때 자신에게 저항하던 신부에게서 얻어낸 반응이 그녀가 그를 사랑하던 시절에 얻어낼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크다는 걸 알아냈다. 그것이 감질나고 재미있어서 잔인하고 가학적인 놀이를 계속하는 것일까?

"젠장" 섹시하게 가르랑거리는 소리로 그가 이를 갈았다.

"당신을 정말로 원했단 말이오"

"그런 사실을 알게 돼 기분이 한결 낫네요" 그가 정말 원했단다. 그게 무슨 뜻이며, 그런 고백을 할 때 놀란 기색을 감출 순 없었나?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내가 마치 바보란 듯이 저런 식으로 말해야 하나? 성적 욕망은 지적인 것이 아니다. 그녀의 거리낌 없는 반응이 그를 자극했던 것이고, 그 후로는 전적으로 남자의 욕정 문제였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솔토는 본인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몸부림치는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온 순간에 그가 짓던 몹시 만족한 표정을 잊자면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당신도 날 원했소" 그가 확신에 차서 주장했다.

몰리는 전신을 가르는 충격에 얼어붙었다.

"과도하게 설득해야 했던 기억은 안 나니까" 그가 은근히 자극적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당신이 열렬히 나와 호흡을 맞추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요"

재빨리 돌아서느라 잠시 휘청했지만 몰리는 손을 활짝 펴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단단한 그의 광대뼈를 힘껏 후려쳤다. 그런 뒤 심중을 드러내고 통제력을 허물어놓은 폭력성에 망연자실해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난 당신을 원하지도 않고, 당신과 함께 하는 건 더 이상 바라지 않아요. 전혀요" 몰리는 얼음처럼 싸늘하게 번뜩이는 금빛 눈을 노려보며 강조했다. 잠시 저항할 수 없게 꼭 붙들고 있는 시선에서 풀려날 수가 없었는데, 그런 사실이 그녀를 더욱 당황하게 했다. 그러다가 물건을 챙겨 들고서 급히 뒷문을 향해 걸어갔다.

운전석에 앉았을 때, 가랑잎처럼 몸이 마구 떨려왔다. 조심스럽게 차를 출발시킨 뒤 전날 밤 불행한 사건을 불러왔던 언덕을 임시 면허 운전자처럼 천천히 차를 몰고 넘어갔다. 그러다 프레디의 묘지에 놓고 올 생각으로 가져왔던 꽃이 조수석에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묘지는 길 아래로 3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임무를 완수했다.

"그 아인 너무 자존심이 강하고 화가 나서 널 뒤쫓아 가지 못하는 거야" 둘의 결혼에 관한 터무니없는 기사가 나간 뒤 보내온 편지에서 프레디는 그렇게 적고 있었다. "솔토를 돌아오게 하고 싶으면 처음엔 네가 움직여야 할 거야"

하지만 그녀는 체면을 세우는 거짓말로 범벅이 된 답장을 보냈다. 프레디에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몇 주일 후 그녀는 차분히 다시 편지를 썼다. 사랑이 언제나 전부는 아니며 서열 2위의 여자로는 절대로 살 수 없다고 그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우아하게 생겼군" 도널드가 기품 있고 목이 좁은 꽃병을 선반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잘 만드는 아름다운 청색 자기가 아니라서 아쉽군. 감정을 받아볼 생각이오?"

"아뇨, 맘에는 들지만 그렇게 값나가는 물건은 아닐 거예요. 처음 이걸 봤을 때 이게 집안에서 유일한 장식품이기 때문에 가정부가 치우지 못하게 한다고 프레디가 투덜거리기까지 한 걸요"지난 일을 회상하며 쓸쓸하게 떠올린 미소가 어느덧 다시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와 도널드에게 바로 반지를 돌려준 뒤 2주일이 지나 있었다. 그는 다른 질문 없이 그녀의 결정을 받아들였지만 그녀가 감추려고 애쓰고 있는 슬픔을 감지하고 염려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회색 머리와 따뜻한 갈색 눈에 약간 뚱뚱한 도널드가 그녀의 방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라지도 않는데 주제넘게 나서고 싶진 않지만"

"그럼 하지 말아요" 몰리는 얼굴이 빨개져 불안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미안해요. 기분이 썩 좋지 않아서요. 오빠 내외가 곤경에 처해 있는데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다니"

"하지만 지금 이런 기분인 이유가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은데" 도널드가 타고난 눈치로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당신과 솔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그 만남이 당신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준 것 같소"

몰리는 점점 곤혹스러워지는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널드는 아주 유순하고 겸손해서 사람들은 남을 배려하는 천성만큼이나 그의 큰 일부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솔직한 성격과 기탄 없는 말에 예외 없이 놀라곤 했다. 그는 교구 신자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았다. 실제로 그녀의 계부가 은퇴하고 도널드가 목사직을 승계한 뒤로 신도들이 많이 늘고 있었다.

"도널드"

"우리가 맞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릴 만큼 당신이 분별력이 있었던 걸 심사숙고한 끝에 다행으로 여기게 됐다고 하더라도 기분 나빠하지 않을 거라고 믿소. 밤이면 절실한 아내는 지금도 필요하오. 외로워서 목사관을 덜거덕거리고 돌아다니니까"

그가 아무런 감상 없이 고백했다."하지만 당신은 그런 결혼에 만족하기엔 너무 젊소. 내 욕심에서 나온 바람이었지만 그 청혼 때문에 내게 부담을 느끼지 말았으면 좋겠소"

그녀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의 지속적인 우정과 이해에 침을 꿀꺽 삼키고서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친구로서 말해줄 수 있기를 바라오"도널드가 얼굴을 찡그리며 계속했다."몰리, 자신을 위해 현재에 살도록 하고, 그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잊어버려요.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누구보다 내가 경험자로서 잘 알고 있잖소"

기억을 되살리는 퉁명스런 충고에 몰리는 아프도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옛날에 도널드가 사랑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의 감정은 받아들였지만 목사의 아내가 된다는 현실에 여자는 뒷걸음질을 쳤다. 몇 달간 비참한 관계가 지속되다가 결국은 도널드가 손을 떼고 끝내고 말았다.

"난 이제 그를 사랑하지 않아요, 도널드" 몰리는 거만하게 턱을 쳐들며 말했다. "그를 증오하고 경멸해요"

"그러면서 지금도 그와 함께 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있는 걸 어쩌겠소" 도널드가 한숨을 쉬었다. "그 친구는 당신을 태엽을 감아 움직이는 장난감처럼 감아 조여서는 길 잃은 영혼처럼 도리깨질하며 돌게 내버려두고 있단 말이오"

몰리는 차가운 손이 등을 쓸어 내린 것처럼 몸서리를 쳤다.

"썩 위로가 되는 비유는 아니네요"

"하지만 사실이오. 내가 첫 라운드의 후유증을 지켜본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 전에도 당신이 이러는 걸 봤소. 그 친구를 사랑했다가 다음 순간 같은 정도로 맹렬히 그를 증오하는 것 같았지"

몰리는 창백한 채로 의자 팔걸이를 움켜잡았다. 더욱 침울한 날이 기다리고 있던 4년 전 그 암울했던 시절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고통스런 배신감과 굴욕감에 만신창이가 되었던 그 시절은.

"안타깝게도 당신이 새 출발할 수 있도록 편견 없는 충고를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 도널드가 애석하다는 듯이 말했다. "의지가 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할 사람들이 자기들이 필요해 당신을 부추겨서는 적대적인 악감정을 품게 만들었으니까. 당신 계부는 솔토를 싫어하던 터에 비판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자 몹시 기뻐하셨지. 당신 어머니는 그 분을 지원했고. 그리고 소위 친구라는 제나는" 도널드가 의미심장하게 입술을 오므리고 말을 이었다. "제나는 당신이 그를 만난 날부터 당신을 몹시 시기해 편견 없는 방관자라고 할 순 없었소"

몰리는 자기 방어적으로 경직되었다. "난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도널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엔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요"

"좋아요, 오늘은 이쯤 하지. 난 또 들를 데가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소" 도널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 솔토에게 자기 입장을 밝힐 기회를 줬더라면 그 불행했던 사태가 한결 덜 지독했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소?"

몰리는 당시 도널드의 달갑잖은 충고를 떠올렸다. 솔토와 그런 만남을 갖도록 그가 권했었지만 상처받은 쪽은 그녀라는 사실을 무시한 듯한 충고에 무척 기분이 상했었다. 도널드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고 나서야 그가 진실하고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차까지 도널드를 배웅했다. 그는 6주간의 휴가를 받아서 그 기간 동안 뉴질랜드에 사는 친척을 방문한다는 얘기를 신나게 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을 위해 오랫동안 돈을 모아왔는데 아주 기대가 크다고 했다. 몰리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다가 말고 그녀의 오빠가 처한 곤경에 대해서는 도널드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긴 해도 깊이 동정하는 기색은 역력했다. 프레디의 집에서 솔토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어쩌면 이제 도널드는 어리석은 나이젤이 솔토의 돈으로 러시안 룰렛 게임을 하다 당연한 벌을 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빠네 가족 생각만 하면 몰리는 여전히 가슴이 아팠다.

나이젤은 부정직한 인물은 아니라서 솔토가 사기죄 얘기를 꺼내더라는 말을 전할 때는 거의 움츠러들다시피 했다.

"맞아. 그의 은행가들도 비슷한 말을 하더구나"

나이젤은 누구에게 사기를 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그 돈이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없는 돈인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대출 약정서도 제대로 검토해보지 않았다는 말에 법률 비서인 몰리는 화가 나 이를 부드득 갈았다.

다음날 아침, 몰리는 변호사 사무실의 계단을 무거운 마음으로 올라갔다. 실수를 용납치 않는 상사 우즈 씨가 관련 의뢰인의 이름을 잘못 친 긴 소송 사건 적요서를 다시 치라고 건네며 그녀를 맞았다.

오후 1시가 다 되어 갈 즈음에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에 그녀는 의뢰인이 아니기만을 바라며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에 손님이 있을 때는 비서가 점심 먹으러 나가는 걸 우즈 씨가 지독히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늦게 나가더라도 2시까지는 돌아와 있어야 했다.

불투명한 유리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놀랍게도 그곳에 솔토가 서 있었다. 깜짝 놀란 몰리는 왠지 모르게 겁이 덜컥 나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넓은 어깨와 좁은 엉덩이와 길고 힘찬 다리의 윤곽을 매끈하게 드러내주는 비둘기 색 최고급 양복 차림의 그는 숨이 막히도록 근사했다. 숱 많은 검은머리는 증권 중개인 스타일로 뒤로 빗어 넘겼고, 하얀 광택이 나는 실크 셔츠는 이국적인 금빛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다시는 느끼지 않을 것이고, 느낄 수 없고,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일깨웠던 다짐들이 한꺼번에 조수처럼 그녀를 덮쳐왔다.

 

 

 

4

그녀를 향한 매혹적인 금빛 눈이 책상 모서리를 붙잡고 있는 반지가 없는 손으로 급히 옮겨갔다. 잔인한 미소가 거뭇하고 힘찬 얼굴에서 냉담한 표정을 몰아냈다.

"같이 점심식사 할 시간이 있겠소?"

"점심식사요?" 몰리는 무섭게 솟구치는 흥분을 억누르며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 의심스럽게 더듬거렸다.

"정말 우중충하고 열악한 작업 환경이로군" 그가 작고 허름한 접수 구역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거기에는 한쪽 모서리가 찌그러진 서류 캐비닛이 늘어서 있었고, 옆 건물의 지붕이 내다보이는 좁은 창이 있었다. "내 직원들에게 이런 환경에서 일하라고 하면 아마 폭동을 일으킬 거요. 일은 지나치게 많으면서도 보수는 적을 테지. 이런 게 당신 성격에 맞는다고 생각하나 보군"

몰리는 두근거리는 가슴과 바싹 타는 입으로 그를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어떻게 알았어요?"

"외종조부가 알려주더군" 그가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반짝이는 눈길을 던졌다. "그분은 묻지 않는데도 이따금씩 재미없는 정보를 흘리시는 경향이 있소. 게다가 난 기억력이 아주 좋거든"

당돌한 그녀의 편지가 끊기기 전까지 프레디가 그 <재미있는 정보>를 얼마나 많이 흘렸을까 싶어 몰리는 거북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로?"

"그 얘기는 벌써 한 것 같은데" 솔토가 조용히 그녀를 상기시켰다.

그가 뭐 때문에 점심식사를 같이 하고 싶어 한단 말인가? 사력을 다해 혼란하고 절망적인 자의식과 싸우며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한테 뭐 할 말이라도?"

"도널드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진 않았소?"

약혼반지가 없다는 걸 그가 알아챘음을 깨닫고서 몰리는 발끈해 고개를 쳐들었다.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우리 둘이서 함께 그걸 내가 상관할 일로 만들었잖소." 그가 부드럽게 받아넘겼다. "다른 남자와 미래를 기약한 여자를 유혹하는 버릇이 있는 건 아닌데"

그녀의 뺨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도널드는 이성적으로 얘기를 나눈 뒤, 서로가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뿐이에요" 그녀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허둥지둥 설명했다.

잔인하게 재미있다는 표정이 힘차고 거뭇한 얼굴의 강한 선을 누그러뜨렸다. "당신이 얼마나 정신없이 나와 함께 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은 것 같군"

몰리는 그가 면전에서 그런 점을 지적했다는 사실에 격분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

"난 지금 그런 걸 즐기고 있는 게 아니오, 카라. 솔직한 걸 높아 살 뿐이지" 그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한때는 당신도 그랬잖소. 그런데도 내 얼굴을 후려치며 그렇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날 원하지 않는다고 했지"

몰리는 솔직한 그의 확신에 당황해서 꼼짝하지 못했다. 느닷없이 떠오른 기억이 하얀 리넨 시트에 둘러싸인 멋진 구릿빛 몸과 그녀를 아득하게 흥분시켰던 격렬한 사랑의 장면을 재연시켰다. 생생한 성적 장면에 깜짝 놀라 추운 날 타오르는 불꽃처럼 저항하기 어려운 어른거리는 금빛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들썩거렸다. 그러다가 관계가 끝난 뒤 그가 비정하고 잔인한 음성으로 게임이었다는 결론을 내린 장면이 이어지자 갑자기 본능적인 두려움이 밀려와 몸 안을 흐르던 열기를 싸늘히 식혀 주었다. 몰리는 심한 자기 혐오감에 빠져 그를 바라보고 싶은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을 떨치고 고개를 돌렸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그녀는 뻣뻣하게 말했다.

", 거짓말을 할 때는 할 수 있는 말이 많지가 않지"

몰리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도널드에게는 솔토를 혐오하고 경멸한다고 말했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와 관련해서는 마약 중독자처럼 쉽게 마음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 자신의 나약성을 그가 파괴적일 정도로 직시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몰리는 지금 그때의 경험을 갑옷처럼 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만에 하나 솔토가 오빠 문제로 찾아온 것일지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갸름한 얼굴이 창백하고 굳어진 채로 그녀는 불안한 눈길로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나하고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나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대리인들이 오빠의 집과 사업체를 회수하려 하고 있는데 말이죠" 몰리는 굳이 일깨워주지 않아도 될 말을 불쾌하게 내뱉었다. "오빠 문제 때문에 찾아온 거라면"

그의 새까만 눈썹이 빈정거리듯 찡긋 올라가면서 멋진 골격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아니오. 난 협박에 잘 대응하지도 못하고"

"협박이라고요?" 분하고 실망스러운 데도 그런 비난에 떨리는 웃음이 작게 터져 나왔다."내가 뭘로 당신을 협박한단 말이에요? 잘 들어요, 솔토. 우리 오빠가 깊고 어두운 구덩이에만 빠지지만 않았어도 당신과 이렇게 얘기를 나누는 일 없이 벌써 나기는 문을 가르쳐줬을 거라고요"

숱 많은 검은 속눈썹이 내려가 멋진 눈을 가렸다. "그게 사실이오?"

", 사실이에요" 침착한 그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몰리는 떨리는 저음으로 확인해 주었다. "당신에겐 오빠 문제를 처리할 법적 권한이 있지만 그 일로 내게서 잘했다는 칭찬이나 존경한다는 말을 들을 기대는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을 피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차도로라도 뛰어들 것 같으니까요. 세상에, 당신은 예의도 없어요? 여기까지 찾아온 건 모욕이고 권력 남용이란 말예요"

"권력을 남용했다고 비난받아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지금 당신 오빠 문제와 관련해 내가 혹시 마음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나와 잤다고 말하는 거요?" 그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굳어지면서 금빛 눈이 속눈썹 사이에서 번뜩거렸다. 주위의 공기가 끓고 있는 가마솥처럼 폭발 직전이었다.

그녀가 협상을 위해 자신의 몸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몰리는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쉰 목을 가다듬었다. "아뇨, 솔토. 그건 한때의 정신 나간 짓이었어요. 굳이 말하자면 그래요" 그녀는 썩 고르지 않은 소리로 나직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압력을 가하고 돈으로 매수하더라도 절대 당신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무리 오빠를 위하는 일이라 해도 창녀처럼 굴진 않을 거라고요"

"한때의 정신 나간 짓이었다?!" 그가 써늘하게 번뜩이는 눈으로 화가 나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훑으며 음절 하나 하나를 위협적으로 굴려가며 조용히 반복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정말 확신하오?"

몰리는 방어적으로 비웃듯이 그를 쏘아보았다. "그건 사고였고, 실수였어요. 그럼 뭐라고 생각했죠?"

그가 차갑게 강렬한 눈길로 그녀를 주시했다. "당신이 아직 알아채지 못한 건지도 모르지, 카라"

몰리는 몸을 지탱하고 있는 다리가 솜으로 된 막대처럼 후들거리자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가기 전에 우리 오빠에 대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가도록 해요. 당신은 자기 이름으로 통과한 시험 하나 없이 열여섯에 학교를 중퇴한 스물세 살짜리 소년에게 엄청난 돈을 빌려준 거예요. 사업 경험도 없고, 현장 교육도 받은 적 없고, 길잡이나 감독자도 없는"

"제발"

"오빠는 예금 내역서도 결산할 줄 몰라요, 솔토" 그런 점을 지적하자니 양심의 가책이 들어서 그녀는 눈물이 고이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급히 고개를 돌리며 계속했다. "하지만 원예 사업에 관해 알아야 할 건 다 알고 있고, 고의로 사기 칠 인물은 못 돼요. 오빠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당신 탓이라고요. 오빠에게 그만한 돈을 줘서 이렇게 혼자 허덕이게 만든 건 정말이지 정신 나간 짓이었다고요"

"배니스터 양?" 깜짝 놀라 돌아보니 우즈 씨가 자기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오?" 그가 얼굴을 찡그린 채 의심스럽게 물었다.

턱에 뻣뻣이 힘이 들어가 있던 솔토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찔하도록 강렬하게 몰리를 쏘아본 뒤 그녀의 상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희가 폐를 끼쳤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발길을 돌려서 말없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다리에 힘이 빠진 몰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놀라기도 하고, 마침내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해 몸이 마구 떨렸다. 주위를 서성이던 우즈 씨는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자마자 재킷을 걸어둔 쪽으로 향했다. 곧이어 바삐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자신의 비서가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떨까 봐서 서둘러 사무실을 나가버린 것이리라.

오빠 나이젤이 고통당하고 있는 이 마당에 여길 찾아와서 어떻게 점심을 같이 하자는 제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감정도 없단 말인가? 역시 복수하려고 찾아온 것일까? 약혼이 깨진 걸 확인하는 만족을 느끼고 싶었던 걸까? 그녀가 바로 그날 반지를 끼고 청혼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는 걸 도널드는 알지도 못한다는 걸 알게 되면 재밌어 죽으려고 하겠군. 하지만 솔토는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눴던 것이 한때의 정신 나간 짓이었냐고 되물었다. 그 이유가 뭘까? 그녀가 뭐라고 할 줄 알았단 말인가?

퇴근 후, 몰리는 오빠 집으로 갔다. 텍사스 풍 저택에 어울리는 기둥들이 건물 전면을 장식하고 있었고, 큰 증축 건물이 뒤 쪽에 딸려 있었다. 습기 차고 곰팡이 핀 파손된 옛 농가 건물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큰 조카 샐리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서 온실 계단에 풀이 죽어 앉아 있었다.

몰리는 걱정스런 얼굴로 8살짜리 조카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왜 그래?"

"엄마가 그러는데 이제 새 학교에 가야 한데. 거긴 친구가 하나도 없잖아" 샐리가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난 새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 지금 학교가 좋단 말야"

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올케의 자랑이고 기쁨이었던 어수선한 부엌으로 들어섰다. 요즘 레나는 자기 자신처럼 집안을 방치해 두고 있었다. 부스스한 금발의 작고 날씬한 여인이 퉁퉁 부은 우울한 눈길로 그녀를 멍하니 돌아보았다.

"샐리가 새 학교 얘기를 하고 있네요"

"이 동네에서는 형편에 맞는 셋집을 구할 수가 없어서요"

레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어쩔 수 없이 학교를 옮겨야 해요. 계부에게 잠시 동안만 우릴 받아줄 수 없느냐고 부탁드렸지만, 오빠를 비난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큰 언쟁이 나서 그것도 물 건너 가버렸어요"

계부에게까지 도움 청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 절박했나봐, 몰리는 침울하게 생각했다. 조지 길핀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년 뒤에 다시 재혼해 마을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안락한 교외 주택에서 은퇴 후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몰리 남매를 그곳으로 초대한 적은 없었다.

"오빠는 어디 있어요?" 몰리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오늘 아침 일찍 종묘점에 나가보니 어떤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열쇠를 달라고 하더래요. 그리고는 이제부터는 자기가 그곳 책임자라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지 뭐예요" 갑자기 눈물이 솟구쳐 울먹이는 소리로 레나가 설명했다.

"마침내 시작된 거예요. 채권자들이 가게가 팔릴 때까지 그곳을 운영할 관리인을 보낸 거고, 다음 달엔 이 집이 그렇게 될 거예요. 오빠는 암담해 하면서 내 차를 몰고 나갔는데,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때 샐리의 동생인 피오나가 인형이 담긴 쇼핑백을 끌고서 부엌으로 들어왔다. "짐 싸고 있는 거야" 네 살짜리답게 잘했다는 칭찬을 기대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며 외쳤다.

어린 딸의 순진한 얼굴을 돌아보던 레나는 식탁 위에 팔을 얹고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피오나가 겁먹은 울음을 터뜨리자 이번엔 문 밖 유아용 놀이터에 있던 어린 녀석이 귀청이 찢어져라 덩달아 울어댔다.

몰리는 놀이터에 있던 로빈을 안아 올리고, 피오나는 장난감이 있는 방으로 데려다주었다. 평생 이렇게 쓸모없는 기분이 든 적이 없었다. 그녀 자신도 방 하나짜리 작은 셋방에 살고 있다 보니 오빠네 식구들을 받아줄 형편이 못되었다.

오빠와 올케는 둘 다 10대 때 결혼을 했다. 몰리의 할아버지가 두 사람을 받아 줬고, 돌아가실 때까지 오빠를 농원에서 일하게 하시고는 최소한의 생활비를 대주셨다.

솔토는 오빠 내외가 그 당시 어떻게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처음 그를 소개시키려 했을 때, 레나는 습기 차고 낡고 황폐한 자기 집에서는 도저히 그를 접대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모두 런던 행 열차를 타고 솔토의 웅장한 시내 저택으로 가서 그를 만났다.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넓은 거실에 주눅 들어 앉아 있다가 그가 경솔하게 오빠의 꿈을 실현시켜줄 돈을 지원해주겠다는 제의를 했을 때 깜짝 놀라던 오빠 내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결혼 생활 내내 늘 부족하게 살아왔던 두 사람은 한 쌍의 무모한 아이들처럼 돈을 써대며 분별없이 굴다가 지금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었다. 나이젤은 8시가 조금 지나서 돌아왔다. 그때까지 몰리는 올케를 설득해 잠을 좀 청하게 하고,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이고 잠자리에 들게 했다. 충혈 된 눈에 얼빠진 얼굴로 들어서던 나이젤이 그녀를 발견했다. 몹시 지쳐보였다.

"네 올케가 종묘점에 관리인이 들어왔다는 얘기를 하지?"

그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계부 말대로 한 번 실패자는 영원한 실패자인 게 맞아. 공부에서 실패한 인생이 이제는 사업에서도 실패한 거지"

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부의 비정함에 치를 떨었다. 안 그래도 쓰러져 있는 오빠를 걷어차는 것 만한 것이 없었을 테지.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힘없이 문을 닫고 걸어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솔토요"

전화선을 타고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당신에게 일 관계로 제의할 게 있는데그렇소, 당신 오빠와 관련된 일이오" 그가 조용히 요점을 말했다. "내일 오후에 내 사무실에서 만나 얘기했으면 하오"

몰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머리가 멍해져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을 해야아뇨, 알았어요. 갈게요" 그녀는 그가 제의를 철회할까봐 서둘러 말했다.

"차를 보내 줄까?" 그가 유쾌하게 물었다. "번잡한 도시에서 운전하는 걸 싫어했잖소."

"아뇨, 됐어요. 기차로 갈게요"

그녀는 숨 막히고 기절할 것 같은 기분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가 오빠에게 전화할 생각으로 다시 집어 들 뻔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아니야, 솔토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않는 게 좋아. 오늘 오후에 내가 한 말에 안 됐다는 생각이 든 건가? 그녀는 아직도 충격으로 머리가 어지러워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비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소리친 일로 지독히 화가 났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탈디 투자사는 구 런던 시에서도 눈에 역는 현대적인 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간부 사무실 층에 마련된 고상한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자니 우뚝 솟은 스테인리스 스틸 기풍과 압도적인 색유리가 몹시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전에 언젠가 승강기에서 내려 전날 밤 그가 청혼한 사실에 으쓱해 솔토를 놀래주려고 접수요원의 만류를 기분 좋게 무시하고 그의 방으로 들어섰던 일이 생각났다. 그런데 약이 오를 만큼 편안한 자세로 판도라가 디자이너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축하한다고 해야겠네요" 여자가 간결하게 말했다. "솔토는 회의 중이에요. 당신이 오는 줄 알고 있나요?"

"그게아뇨. 하지만 같이 점심식사를 할까 해서요"

"우린 두 시간 뒤에 파리로 떠날 거예요. 날을 잘못 잡은 것 같네요" 판도라가 거짓으로 동정했다.

그때가 그의 사촌과 가장 긴 얘기를 나눈 때였다. 판도라의 파란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두 사람이 약혼을 해서야 판도라는 몰리의 존재를 아는 체했는데, 편하다고는 할 수 없는 관심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듯한 그 여자가 시간이 갈수록 마음에 들지 않고 불쾌했다.

솔토와 판도라는 같은 친구들과 같은 생활 방식과 같은 부와 같은 취향을 갖고 있었다. 판도라는 그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그가 손님을 초대할 때면 자연스럽게 안주인 노릇을 했다. 또한 그의 셔츠와 스웨터를 빌려 입었고 몰리는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데, 그를 웃게 만드는 재치 있는 농담을 늘어놓았다. 몰리는 외모와 재치와 세련됨에서 뒤쳐진 채 왕좌를 노리는 인물 마냥 주위를 배회했지만 솔토는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왜 그가 청혼했는지 점점 더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사랑이라는 말은 언급하지 않은 채, 그녀를 끌어당겨 아주 침착하고 무심하게 한마디 했다. "결혼합시다"

예고 없이 간절히 꿈꾸던 일이 실현돼 멍할 뿐이었다. 만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고, 그와 데이트를 할 때마다 돈 많고 부도덕한 플레이보이에게 현혹당하고 있다는 계부의 억측과 맞서 싸워야 했었다. 여자와 관련된 그의 평판이 이미 알려져 있던 터에 솔토가 길핀 목사의 애매한 신학상의 견해를 바로 잡는 큰 실수를 저지른 날 저녁, 계부의 완고한 반대는 철저한 혐오로 악화되었다.

두 사람의 약혼은 모든 이들을 충격 속으로 빠뜨렸다. 그의 친구들은 그런 사실을 감추려들지 않았고, 몰리는 자신을 좀 더 사교계에 적합한 인물로 변신시키는 것으로 그에 대응했다.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고 머리는 짧게 잘라 처음엔 밤색으로, 다음엔 빨간색으로 마지막엔 금발로 물들이기까지 했다. 아주 값비싸고 좀 더 대담한 옷을 사는 데도 과도한 지출을 했다. 솔토와 판도라의 관계가 보이는 것 이상이라는 걸 끝까지 알아채지 못했고 그러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판도라를 질투했다. 두 사람은 소름 끼칠 만큼, 잔인할 정도로 영리했다. 어쨌거나 결혼식 날까지 그의 사촌은 언제나 자기에게 푹 빠져 있는 남자를 대동하고 다니며 열심히 남자를 갈아 치웠으니까.

"배니스터 양?"

얼른 과거에서 빠져나온 몰리는 불안한 시선을 들어 그녀의 주의를 끌려고 애쓰고 있는 접수요원을 쳐다보았다.

"사장님께서 지금 만나보시겠답니다. 복도 끝에 있는 방입니다."

몰리는 처음 찾아온 방문객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접수요원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해 다행이었다. 하루 동안의 화젯거리였다가 운 없는 다른 사람들 얘기가 크게 보도되자마자 잊혀진 그녀를 누가 기억하겠는가? 그녀는 녹색 모직 정장의 주름치마를 바로잡았다. 교회에 갈 때 입는 평범한 옷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 외모를 보자고 부를 건 아니잖아?

그녀는 조각 장식이 된 인상적인 두 짝짜리 문의 한 쪽을 열었다. 그리고는 걷잡을 수 없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푹신한 양탄자 위로 발을 들여놓았다.

"시간 하나는 잘 지키는군" 그가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 탁자에 느긋이 기대 있다가 몸을 일으켜 우아하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좀 앉겠소?"

그녀는 마른입으로 겨우 고맙다고 우물거린 뒤, 아주 독특한 모양의 가축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색유리 밖으로 시내 전경을 내다볼 수도 있었지만, 그가 온통 주의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미소를 짓는 모습이 고무적이었지만 어째 다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미소였다.

첫눈에 무척 보수적으로 보이는 짙은 감색 세로줄 무늬 정장 차림을 한 그가 사뿐히 책상에 기댔다. 자세히 보니 세련된 이태리 디자이너 스타일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눈빛을 잘 반영해주는 이국적인 금색 넥타이에 의해 더욱 부각돼 보인다는 생각이 멍하게 들었다. 그녀는 심한 자책감에 얼굴을 붉히며 양탄자를 내려다보았다.

"어젯밤에 전화 줘서 고마워요" 비굴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팽팽히 긴장된 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선 내 말부터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소"

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들어 광택 나는 수제 구두와 길고 힘찬 다리를 완벽하게 감싸고 있는 바지와 모양 좋은 더블 재킷과 강력해 보이는 푸르스름한 턱과 재미있다는 듯 눈부신 미소를 머금고 있는 완벽한 곡선을 이룬 입술을 올려다보았다.

"어제 만난 이후로 오랜만이오" 그가 느긋하게 말했다.

먹잇감을 잡아놓고 가르랑거리는 큰 고양이 같았다. 몰리의 머릿속으로 자동차 경적처럼 경보음이 울렸다. 프레디의 푹신한 침대에서 저렇게 섹시하고 나긋하게 안심시키다가 어떻게 했는지 잊지 마.

그녀는 경솔하게 고개를 쳐들다가 자신에게 고정된 어둡고,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눈과 마주쳤다. 양탄자 위에 핀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침묵 속에서 그가 말을 꺼내길 기다리는 동 그녀의 안색은 수시로 변했다.

"사실 나이젤에 관한 일은 전혀 양심에 걸리지 않소" 마침내 그가 말을 시작했다. "우선 그 점부터 분명히 해둬야 할 것 같소. 내가 황금 같은 기회를 줬음에도 그는 그걸 날려버린 거요. 당신 오빠가 사업가가 될 인물은 못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 은행가들이 훌륭한 회계사를 추천해줬소. 당신 오빠는 종묘점을 세우자마자 그 회계사가 듣기 싫은 소리를 했는지 그의 도움 받던 걸 중단해버렸소"

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오빠 사업의 내부 사정을 그녀로서는 알 수 없으니까.

"나이젤이 곤경 처하기 시작했을 때 내 은행가들은 그에게 서신을 보냈소. 그때까지만 해도 재정적인 밑바닥에서 빠져 나올 순 있었소. 하지만 그는 그 서신들을 무시했지. 그들이 종묘점을 방문했을 때 종업원에게 없다고 전하라고 했다더군. 집으로 찾아갔을 때는 당신 올케가 문도 열어주지 않았고"

몰리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당신 은행가들이 좀 위협적이었어야죠"

"나 참, 그런 식으로 발뺌을 하는데 그럼 어쩌겠소?" 솔토가 역정을 내며 쏘아붙였다.

대화가 위험한 방향으로 선회하지 않길 바랬고, 부인할 수 없는 오빠의 결점을 그가 너무 길게 언급하지 말았으면 싶어 몰리는 거북하게 인정했다. "오빠가 분별없이 행동했어요."

"나이젤은 천하에 없는 바보요" 그가 표정 많은 구릿빛 손을 활짝 펼쳤다. "정말이지 당신 오빠에게 자신을 입증해 보일 기회를 한 번 더 주자는 생각만 해도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이번 일로 오빠도 깨달은 게 많아요. 정말이에요" 몰리는 애원조로 강조했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할 거예요"

"당신은 어떻소?"

몰리는 눈을 깜박였다. "난 종묘점과 아무 관계가 없어요"

반짝이는 금빛 눈이 그녀의 얼굴을 오래도록 훑었다. "일 얘기를 하는 게 아니오. 당신은 아무리 압력을 가하고 돈으로 매수하더라도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겠다고 했소. 당신의 그 허세에 도전하겠소" 그가 말했다. "당신이 내 집으로 들어와 나와 같이 살면 오빠의 빚을 청산해주고, 그의 집도 회수하지 않고 다시는 그런 곤란을 겪지 않게 해주겠소"

온몸이 마비된 듯한 10초 동안 몰리는 놀란 녹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농담 말아요" 입천장에 붙은 혀를 겨우 떼어낼 수 있게 되자, 그녀가 겨우 말했다.

"난 당신을 원하고, 당신은 오빠를 곤경에서 구하고 싶어 하오. 공평한 교환일까, 권력의 남용일까" 그가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게 생각에 잠겨 말했다.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소"

몰리는 미간을 찡그리고 불안하게 의자에서 꼼지락거리며 침을 삼켜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지금 농담하는 거죠?"

"내가 농담하는 것 같아 보이오?"

그녀는 솔토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얼굴인 걸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왜 나와 살고 싶어 하는 걸까요?"몰리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통의 남자들과 같은 이유에서이지" 그가 약간은 변명조로 차분히 말했다. "나이젤이 근신하도록 당신을 인질처럼 손님방에 숨겨둘 생각은 없소. 나와 한 침대에서 자고, 내가 사주는 옷을 입고, 사교 모임에 나와 함께 참석하고, 내가 요구할 때마다 같이 여행을 다녀줄 수 있었으면 하오"

고막 속으로 심장박동이 이상하리 만치 느릿하게 들리면서, 그의 말들이 머릿속에서 웅웅 거리며 울려 퍼졌다. 그는 자기의 조건을 분명히 말했다. 하지만 날개 없이 비상하는 자신이 상상이 안 되듯이 그런 생활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솔토는 <당신을 원하오>라는 말을 메뉴에서 음식을 고를 때처럼 무심히 말했다.

잠자리로 이끌기 위해 뇌물로 매수할 만큼 그녀를 원할 리 없었다. 그의 유일한 동기가 어떤 형태로든 여자의 거부를 견딜 수 없어하는 마초의 기질이 있는 남자의 몰상식한 옹고집이지 않는 한, 그녀를 원할 리가 없었다. 여하튼 그의 뺨을 때리고 프레디의 집을 나와 버린 뒤로 그가 사무실로 찾아올 때까지 그녀 쪽에서 어떤 사적인 대화도 거부해 왔으니까. 솔토는 그런 일에 익숙지 않았다.

"나더러 당신의 정부가 돼 달라는 거예요?" 그녀는 불신을 감추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건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감정적인 표현인 것 같소, 몰리" 그가 나무라는 투로 받아넘겼다." 요즘은 동거라는 말을 쓰지"

"그건 자유의사로 같이 사는 커플들 얘기죠"

"당신에게도 선택권은 있소"

"그리고 그런 커플들은 서로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고요" 몰리는 쌀쌀하게 지적했다.

"반면에 난 전적으로 육체적인 관계를 제안하고 있지. 우리가 결혼했을 때 당신의 그 끈질긴 감정에 난 조금도 감동 받지 못했거든" 그가 빈정거리며 말을 이었다. "2주 전 침대에서 보여 주었던 열정적인 반응이 훨씬 더 감동적이었소"

시간이 갈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라 몰리는 몸서리를 쳤다.

"순전히 날 모욕하기 위해서 여기로 오라고 한 거로군요. 도대체 어떻게 내가 가족을 위해 물물교환 하듯 내 몸을 팔 거라는 헛된 망상을 품을 수 있었죠?"

"당신이 어제 아이디어를 줬잖소"

"내가 줬다고요?" 그녀는 숨 막힌 소리로 되물었다.

"몇 달간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한 뒤 천박하게 타락한 인생으로 전락하는 위험한 모험에 대해 심사숙고해보기 전에 커피라도 한 잔 들겠소?"

몰리의 두 볼이 일순간에 빨개졌다. 그녀는 느릿한 빈정거림을 상대하지 않고 나갈 생각에 성난 몸짓으로 벌떡 자리에 일어섰다. 순간 현기증과 함께 방안이 빙 돌면서 머리가 쿵쾅거리고 앞이 캄캄해지면서 몸이 휘청거렸다. 억센 두 팔이 즉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의자에 앉혔다.

"괜찮소?"

그녀는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찡그리고 어두운 눈으로 자신을 살펴보고 있는 솔토에게 간신히 초점을 맞추었다.

"기절하는 줄 알았소"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어요"

놀랍도록 창백하고 긴장된 얼굴로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을 갖다 주지."

"너무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그럴 거예요. 점심도 거른 데다가" 게다가 아침으로 커피만 마시고, 그녀는 속으로 말을 맺었다. 스트레스와 긴장이 빈속에 안 좋게 작용해 현기증이 난 게 틀림없었다.

물방울이 맺힌 유리컵이 곧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번개같이 움직였나 보다. 도도하게 퇴장하려던 계획이 틀어지면서 그녀는 바보 같은 기분으로 그가 가져다 준 물을 마셨다.

"이제 좀 어떻소?"

"말짱해요" 몰리는 뻣뻣하게 대답했다. "내가 떠나려고 했다는 것을 알고 있죠?"

"그건 당신이 결정할 문제지"유리창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가 선 그의 오만한 머리 위로 햇살이 비쳐 멋진 광대뼈와 비정한 입매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눈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하지만 이런 제의는 다시는 없을 거요"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내가 그런 제의를 고려해 볼 거라 생각이라도 할 수 있었다니 정말 뻔뻔스럽네요" 몰리는 발끈해 쏘아붙였다.

"난 뻔뻔한 것 때문에 괴로워하진 않소, 몰리. 난 원하는 게 있을 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손에 넣는 사람이오. 이번 일에 상업적인 효과를 부여한 건 바로 당신"

"내가요?"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당신은 순전히 오빠 때문에 여기에 온 거잖소"

몰리는 어깨와 등에 힘을 주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점을 알아주니 다행이네요"

"당신의 기백을 높이 사는 바이오. 오빠 내외가 다가올 시련을 이겨내는데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보군" 그녀가 발길을 돌리는데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역경에 직면한 나약한 갈대 같더군. 내 은행가들의 위협은 나이젤의 다른 채권자들이 쓰게 될 공격적인 전법과 비교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요"

문 쪽으로 향하던 그녀의 발이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내 은행가들이 그 종묘점을 팔려고 내놓자마자 나이젤의 다른 채권자들이 깜짝 놀라 메뚜기 떼처럼 달려들 거라는 얘기요. 그런 다음에는 법원과 집행관이 개입되는 거지"

몰리는 건장하고 공격적인 남자가 조카 피오나의 인형을 빼앗아 가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집행관이라니. 채무 불이행에 대한 위협적인 마지막 대응. 집행관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천천히 돌아서는데 솔토의 얼굴에 느릿한 미소가 떠오르는 걸 보고서 심한 분노가 치밀었다. 줄에 매달려 끌려가는 꼭두각시 같은 기분이었다.

"당신을 증오하는 여자는 원하지 않을 텐데요"

"외종조부 댁에서 했던 대로만 날 증오한다면 잘 될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가 지극히 침착하게 단언했다.

 

 

 

5

"내가 왜 아직까지도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군" 몰리는 이를 갈았다.

문제는 그녀 자신이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자각이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솔토는 오빠 내외가 겪고 있는 악몽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기적을 행사해 오빠 가족을 다시 행복하고 안전한 정상의 생활로 돌아가게 만들 수 있는 힘을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덫에 걸렸다는 기분이 들면서도 그녀를 불쾌하게 고급스런 그의 사무실에 다시 주저앉게 만드는 힘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인이 단연 위협적이었다.

전화를 걸고 있는 그의 선 굵은 구릿빛 옆얼굴이 초연해 보였다. 몰리는 강박적일 만큼 강렬하게 그를 지켜보았다. 백 살까지 산다 해도 결코 그를 다 이해할 수는 없으리라. 약혼 시절에는 그녀가 마치 몸에 방어막이라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대하더니, 4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도 않고 있는데다가 강한 욕망에 휘둘린 듯 양심의 가책 없이 그녀를 산산이 부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건 섹스일 뿐이었다. 몰리는 솔토와 관련해 그가 섹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남자라는 냉소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가 수중에 넣지 못하는 여자는 거의 없었고, 그를 거부하는 여자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사춘기 시절부터 자신을 쫓아다니며 유혹하는 여자들에게 빈번히 시달려왔었다. 몰리는 그가 냉담한 무관심으로 반갑지 않은 접근을 물리치는 걸 여러 번 봐 왔다. 기꺼이 자진해서 몸을 던지는 수많은 미모의 여자들을. 그런데 대체 나의 뭘 보고 이러는 걸까?

"복수로군요" 몰리는 느닷없이 불쑥 내뱉었다. "그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그가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신념에 역행하는 일을 시키는 데서 흥분을 느끼나 보죠?" 그녀는 모질게 물었다.

"내가 미숙하고 무책임하고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당신 오빠를 복귀시켜주면 당신은 그런 흥분을 느끼겠소? 그런 일은 내 신념에 역행하는 일이거든. 강요당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당장 떠나도록 해요" 그가 충고했다. "당신 자신이 이번 일을 철저히 사업적인 것으로 만든 거요, 몰리. 감정적인 호소는 어울리지 않지"

몰리는 고개를 들고 녹색 눈을 반짝거렸다. "이 계약에서 판도라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나요?"

솔토가 입을 다물었지만 금빛 눈은 한결 같았다. "그 애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오. 다른 질문 있소?"

몰리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를 외면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상처에 칼을 비틀어 넣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정신을 가다듬고, 숨 돌릴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솔토가 그녀 옆에 놓인 낮은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는 걸 보면서 몰리는 깜짝 놀랐다. 이런 상황에 차와 버터를 바른 토스트라니, 아주 우습게도 부적절해 보였던 것이다.

"뭘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준비시켰소"

"차보다는 술이 더 마시고 싶네요" 그녀는 다소 거칠게 털어놓았다.

"사무실에 술 같은 건 없소" 그가 단언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몰리는 동양풍으로 조각된 술 장식장을 흘끗 돌아보았다. 사실은 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찻잔에 차를 따랐다. 솔토가 토스트 접시를 내밀었다.

"생각 없어요"

"분별 있게 굴어요" 그가 냉담하게 말했다.

몰리는 그가 왜 이렇게 먹이려고 드는지 의아했지만 너무 긴장해 있는 터라 그걸 문제 삼을 정신도 없었다. 그래서 토스트 한 조각을 집어 들고는 차와 함께 조용히 먹기로 했다.

"오늘밤 집으로 돌아가지 마시오"

몰리는 씹고 있던 토스트 조각이 목에 걸릴 뻔해 기침을 몇 번하고서 간신히 삼켰다. "제정신이에요?"

날렵한 한쪽 눈썹이 휙 올라갔다. "내가 임시로 비서를 사서 한 달 동안 당신을 대신하도록 조처하겠소. 그 정도면 당신 상사가 새 비서를"

"우즈 씨에게 그럴 순 없어요. 최소한 한 달은 말미를 주고 일을 마무리 해줘야 한다고요" 몰리는 기겁을 하며 반박했다.

"웬만큼 경험 있는 법률 비서라면 당신이 하던 일을 대신할 수 있을 거요"

"솔토"

"오늘 내 집으로 들어오면 내일 아침에 당신 오빠를 만나러 가겠소. 당신이 내 집으로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질수록 오빠가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 시간도 그만큼 늦어질 거요" 그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잔인한 현실을 지적했다. "당신이 실제로 내 집으로 옮겨올 때까지 거래는 없는 거요"

어젯밤 오빠의 절망적인 모습과 하루 종일 연락도 없는 오빠 때문에 걱정하는 올케 언니의 모습을 보고서 마음이 무척 착잡했던 기억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하지만"

"전문 이사업자를 시켜 늦어도 월요일까지는 당신 아파트를 정리하도록 하겠소"

그가 자신의 전 인생을 차압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자 몰리는 화가 치밀었다. "아뇨, 그럴 것까진 없어요"

"필요한 일을 내가 알아서 하게 해주시오" 토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빈둥거리는 듯한 손길로 굳게 다물린 그녀의 입술을 나무라듯 쓸었다.

몰리는 출발선에 선 경주마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잔뜩 긴장해 뒤로 고개를 홱 젖혔다. 그가 가는 팔목을 잡고 가차 없이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거 놔요" 몰리는 뻣뻣하게 저항했다.

반짝이는 짙은 눈이 그녀의 반항적인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저항하는 제물은 매력이 없는데, 카라"

"뭘 기대했는데요?"

"모르겠소" 넓고 육감적인 입가에 뜻밖에도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걸 고백해야겠군."

둘 사이가 불과 몇 센티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물리적인 힘을 가해야만 날렵하고 힘찬 그의 몸에서 자신을 떼어놓을 수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깔끔하고 남자다운 체취가 그녀를 꼼짝 못하게 마비시켜 놓았다. 심장이 갈빗대를 뚫고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동안 솔토가 그녀를 끌어안고는 입술을 포갠 후에 지극히 성적인 키스를 해왔다. 사랑을 나눌 때처럼 숨 막힐 듯 에로틱한 키스였다. 그의 혀가 교묘히 입술을 파고들자 고통에 가까운 신음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녀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지만 등을 감싸고 있던 억센 손은 떼지 않은 채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날렵한 구릿빛 얼굴 속으로 그의 눈이 금빛 화살처럼 이글거렸다.

"당신이 이 방에 들어섰을 때 화형대에 막 올라서는 잔다르크처럼 씩씩해"

"솔토"

그가 갑자기 몹시 재미있다는 듯이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목에서부터 종아리 중간까지 볼품없는 녹색 트위드 천으로 휘감은 지극히 매력적인 모습이었지. 이런, 난 기억력이 나쁜 편이 아닌데 어떡하나, 카라. 내 티셔츠에서 빠져나오던 당신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요"

그가 몸을 떼자마자 몰리는 손을 올려 그를 밀쳐냈다. 감정이 혼란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가 장난감처럼 낚아채 숨 막히는 키스를 퍼붓는 동안 그를 저지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키스가 끝나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 그가 아주 손쉽게 그녀의 통제력을 무너뜨려 놓은 것이다.

"이번 일은 복수와는 상관없소" 그가 지극히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에게 모욕을 주려고 이렇게 부른 것도 아니오. 과거는 이번 일과 아무 관계가 없소. 그건 끝나고 지나버렸지만 우린 그렇지가 않거든. 그 눈 내리던 밤 외종조부 댁에서 만난 후로 당신을 원해왔소"

"당신이 원하는 건 가져야 하죠" 몰리는 잠긴 소리로 덧붙였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당신을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대가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소. 하지만 당신이 전제조건 없이 자발적으로 온다면 훨씬 더 존경스러울 거요"

몰리는 자신이 떨고 있는 것을 들킬까봐 팔짱을 꼈다. 만난 지 한 시간 만에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놓고도 그는 예사로이 나오고 있었다. 하기야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어보지 않았을 테니까. 그는 격변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따라다니는 99퍼센트의 불편과 위기로부터 그의 부가 보호해주고 있으니. 전화 한 통화로 적정한 대가를 치르면 거의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제야 몰리는 그가 전화기를 집어 들고 자신에게 바로 그 수법을 썼다는 걸 깨닫고는 속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솔토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오후 내내 일정이 꽉 차 있소. 저녁에는 중역회의가 있어서 틈을 낼 수 없는 형편이오. 내 운전기사가 당신을 집에 데려다줄 거요. 가는 길에 해러즈 백화점에 들러서 오늘밤에 필요한 걸 사도록 해요"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비웃듯이 쳐다보며 그가 지갑을 빼내들고 충고했다. "부디 내 돈 쓰는 걸 꺼리지 말길 바라겠소. 어차피 당신 오빠 때문에 적잖은 돈이 나가게 생겼으니까. 재난은 좀처럼 비용 효과가 크지 못한 법인데 푼돈을 두고 쓸데없이 언쟁을 벌일 필요가 있겠소?"

몰리는 격분해 팔짱을 풀고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아주 잠시 화를 억누를 수 있을지조차 자신이 없었다. "내게 이런 짓을 한 걸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단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솔토는 지폐 뭉치를 핸드백에 집어넣어 주고는 능숙하게 그걸 다시 어깨에 매주었다. 그리고는 호리한 등에 침착하게 한 손을 얹고 그녀를 문 쪽으로 조심스럽게 밀었다. "한 가지 사실만 잊지 마시오, 몰리. 잔다르크는 타죽었다는 것을. 생존을 위한 역할 모델로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인물이오"

제복 차림의 운전기사가 접수대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승강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리무진의 문을 열어주면서 기사가 물었다. "집으로 곧장 갈까요, 배니스터 양?"

"아뇨, 가는 길에 해러즈 백화점에 들르라네요" 몰리는 화가 나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나직이 대답했다.

그가 이럴 순 없어, 나한테 이럴 순 없다고. 잔다르크에 대한 비유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를 악 물었다. 그녀 스스로 이런 일을 허용한 것이다. 오빠 가족이 당장 거리로 나 앉는 것을 보고만 있을 만큼 모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몰락을 묵인한 것이다.

해러즈 백화점에 들른 몰리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쇼핑을 마쳤다. 갈아입을 속옷과 세면도구 몇 점을 구입했고, 잠옷을 선택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솔토의 집사 오그든이 그녀가 리무진에서 내리기도 전에 시내 저택의 현관문을 열어둔 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배니스터 양. 이렇게 다시 뵙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몰리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고는 차를 들겠냐는 집사의 제의를 과장되게 거절한 뒤 당당하게 계단을 오르는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이 나이든 사내를 마지막으로 본 건 4년 전 결혼 첫날밤이었다. 경악한 그녀가 바로 이 계단으로 가방 두 개를 질질 끌고 내려오던 그때, 오그든은 대경실색하며 그녀를 말렸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부인" 예상치 못한 반전에 평소 무표정하게 격식을 차리던 태도를 버리고 놀라고 당황한 그가 외쳤었다.

"그가 떠나는 걸 막아 보려고는 했어요?" 몰리는 흐느끼는 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게다가 일개 고용인이 솔토가 하는 일을 감히 막을 수 없었기에 오그든은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방안으로 들어설 때면 건장한 남자들까지도 움찔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솔토는 런던 저택에서 집안 고용인들로부터 무조건적인 충성과 헌신을 받았는데 오랜 세월 동안 봉사해온 탓에 나이든 이들은 집안의 가신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주 외롭게 고립된 아이였어" 두 사람이 약혼한 후, 언젠가 한 번 프레디가 그런 말을 했었다. "솔토의 아버지는 일밖에 몰라 늘 출장을 다녔고, 내 조카딸인 그 애 엄마 올리비아는 한 마디로 쌀쌀한 성격이라 아이의 응석을 받아줄 줄 모르는 사람이었지. 그 애를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애정을 보이지 않았는데 내가 볼 땐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같아. 저도 같은 식으로 자랐으니까"

당시에는 그런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솔토가 종종 위협적으로 무심하게 굴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감정을 보여주기 싫은 거야, 그렇게 생각했었다. 당연히 그녀를 사랑하는데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단지 거북하게 여기는 것뿐이라고. 매사에 삼가고 냉정하게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뿐이라고. 눈이 멀어 그를 기꺼이 용서해줬던 거지, 그녀는 비참하게 회상했다.

오그든이 헛기침을 했다. 괴로운 생각에서 빠져나와 보니 집사가 큰방 문을 열고는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여기서 밤을 보내게 될 거라고 솔토가 이미 말해둔 게 틀림없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문지방을 넘어선 몰리는 그제야 우아한 거실에 새로운 실내 장식과 가구가 바뀐 걸 보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식사 전에 주무시고 싶어 하실 거라고 주인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오그든이 말했다.

몰리는 갑자기 집 밖으로 나가서 지칠 때까지 동네를 달리고 싶어졌다. 그녀가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오그든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가 무슨 장난을 치고 있는 거지? 답답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도널드의 말대로 솔토가 태엽을 감아 방향을 잡아주지 않으면 꼼짝도 할 수 없는 바로 그 장난감이 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가 내게 왜 이러는 거지, ? 그처럼 철저히 자기 수양을 쌓은 남자가 꼭 가져야 하는 간절한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그녀에게 전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안 적이 있었던가? 그러자 다시 한번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둘의 관계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부터 이미 긴장돼 있었지만 몰리는 그걸 한결같이 자기 탓으로 돌렸다. 결혼식 때까지 넉 달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어야 했지만 점점 불안하게 흔들렸었다. 특히 판도라를 주위에 두고는 솔토의 세계에 적응하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이 들었다.

더군다나 몰리는 집에서도 힘든 투쟁을 하고 있었다. 솔토는 그녀의 계부가 결혼식을 주재하는 걸 거부했다. 자기를 싫어하는 남자가 주례를 서는 결혼을 원치 않는다며 다른 목사를 세우겠다고 고집했다. 이에 그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그녀의 계부는 격분한 나머지 솔토에게 자기 혼자 맘대로 결혼식 준비를 하지 그러냐고 비아냥거렸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 런던에 있는 교회를 식장으로 잡고, 피로연은 솔토의 시내 저택에서 열기로 했다. 그때부터 계부와 그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 기간 동안 몰리는 여러 번 감정적인 소동을 일으켰다. 화목을 위해 화해하기를 거부하는 그의 오만함에 충격을 받고 심하게 몰아붙일 때마다 싸늘한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데는 솔직히 소름이 끼쳤다. 그러다 솔토가 꼬박 3주일간 인도네시아의 정글로 떠날 일이 생겼었다. 떠나기 전날 그는 몰리의 철없는 요구와 짜증 때문에 몹시 화가 난다고 말해 그녀를 망연자실케 했다.

"내가 돌아오기 전에 문제를 정리하지 않으면 신경 써야 할 결혼식 같은 건 없을 거요" 그가 단호히 말을 맺었다. 하루가 지난 뒤, 그가 지구 반대편에서 전화를 걸어와 그렇게 말했던 것은 진심이 아니었다고 사과하긴 했지만 몰리는 솔토의 싸늘한 분노와 매서운 독설로 인한 충격에서 쉽사리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 그녀는 솔토가 돌연 결혼을 취소하면 어쩌나 하는 굴욕적인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그래서 무사히 결혼식을 끝마쳤을 때는 안도감에 멍한 상태에 빠지기까지 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에 들떠 있다가 피로연 끝에 가서야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몰리는 그를 찾아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가 1층 복도 끝에 있는 서재에서 새어나오는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를 놀래켜 줄 마음으로 조용히 다가간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조금 열려 있는 문을 밀치려고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식의 판도라의 목소리를 들은 몰리는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주춤했다. 그 문을 열지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도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충격에 엿듣고 있다는 걸 들키기 전에 달아나는 것 외에는 솔직히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몰리는 아린 눈을 꼭 감고 레몬 색 비단 소파에 무겁게 주저앉아 그 괴로운 폭로의 순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후 몇 달간 그녀는 매일같이 나쁜 꿈에 시달려야 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난 후에야 행복한 상상을 잔인하게 앗아가 버린 바로 그 문 뒤에서 자신이 마비된 채 꼼짝 못하고 서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곤 했었다.

"그 여자는 오빠에게 아기를 낳아줄 수 있는데 난 그럴 수 없어서일 뿐이잖아. 그렇지 않고는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을 테니까" 판도라가 흐느껴 울었다. ", 정말 견딜 수가 없어. 그 여자와 오빠를 나눠 가질 수 없단 말야"

"우리 사이는 변하지 않을 거야" 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좀 더 감정이 실린 낮게 울리는 소리로 그가 맹세했다. "넌 언제나 내 마음속에 남아 있을 거고, 네가 필요로 할 때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거야. 약속할게"

몸서리 쳐지는 기억에 몰리는 숨 막힌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새털 쿠션에 경련이 이는 얼굴을 파묻었다. 판도라가 실연당한 것처럼 우는 가운데 두 사람은 운명적인 현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하는 연인들처럼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울고 있는 판도라를 다정하게 달래주는 솔토가 몰리에겐 아주 낯선 사람처럼 여겨졌다.

둘의 관계가 사람들 앞에서 신중하게 유지해온 대로 관념적인 선에서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정말로 지독한 배신이었다. 부끄러운 일이라는 듯 왜 그런 사실을 숨기려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녀가 알게 된 것은 자신은 아이를 낳아줄 수 있는데, 판도라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솔토가 그녀와 결혼했다는 것과 자신이 아내일지는 몰라도 그가 진정 사랑하는 여자는 판도라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의 결혼으로 둘의 은밀한 관계를 중단시킬 생각은 없다는 것은 잔인하도록 자명해 보였다.

 

 

 

6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흔들고 있었다. 몰리는 왜 옷을 다 입고 누워 있을까 의아해하며 구겨진 치마 속에 갇힌 몸을 불편하게 뒤척였다. 그리고는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천천히 졸린 눈을 뜨자 움푹 들어간 멋진 눈이 그녀 눈앞에 있었다. 예고도 없이 트럭에 치인 기분이었다. 놀라 숨을 헉 몰아쉬는데 전신이 꿈틀하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날 기다리고 있었소?" 솔토가 재미있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사뿐히 몸을 일으켰다. "정말 감동 받았소, 카라.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상상해봤지만 이런 건 없었는데"

몰리는 소파 위에서 몸을 일으키고 허둥지둥 치마를 끌어내려 드러난 허벅지를 가렸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남자 하인이 그녀의 저녁식사 쟁반을 들고 나가는 장면이었다. "당신을 기다린 게 아니에요" 그녀는 쓸데없이 힘을 줘 부인했다.

"깜박 잠이 들었나 봐요"

"더욱 잘 됐군" 그가 넓은 어깨에서 모양 좋은 양복 상의를 가뿐히 벗겨내 가까운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피곤하다는 핑계는 확실히 안 듣게 될 테니까"

몰리는 얼굴이 빨개져 대리석 벽난로 선반 위에 놓인 골동품 시계를 들여다보았다."아직 I0시 반밖에 안 됐잖아요."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는 손으로 초조하게 치맛단을 움켜잡고서 얇은 옷감을 구기며 쌀쌀맞게 지적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금색 넥타이를 구릿빛 손으로 느릿하게 잡아 빼며 그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오후부터 저녁 내내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어 미칠 것 같더군"

그의 솔직한 표현에 경직된 몰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턱을 쳐들었다. "당신과 함께 자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녀는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래야 한다면 어쩔 수 없죠"

"!" 기대했던 대로 마침내 완전히 충족된 것이 만족스럽다는 듯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만들고 싶은가 본데, 미안하지만 그 계획은 성공하지 못할 것 같소. 난 지금까지 스스로 원하지 않는 여자와는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 해본 적이 없소. 이제 와서 당신과 그걸 시작해볼 생각 또한 없고. 만약 그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면 옆에 있는 손님방으로 가서 자고, 내일 아침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요"

몰리의 얼굴은 후끈 달아올라 핑크빛을 띠는가 싶더니 이내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직까지 한 번도 그가 발휘하는 이런 가치 없는 협상 전법을 접해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녀가 취한 태도에 그가 바로 태클을 걸자 어안이 벙벙했다. "대단한 연설이네요"

"쓸데없는 연설이기도 했소. 오늘 오후에 어린 아이도 알아들을 만한 말로 이미 거래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으니까"

몰리는 얼굴을 붉혔다."제발 이걸 무슨 사업 거래인 양 말하지 좀 말아요" 불안한 긴장감에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반항적으로 벌떡 일어서며 질책했다.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소" 그가 반짝이는 눈으로 타격 받은 그녀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피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을 이 집에 들여놓기 위한 즐거움을 맛보려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면 이런 거래를 달리 뭐라고 부르겠소? 몇 가지 재미없는 표현을 끌어다 붙일 수는 있지만"

몰리는 기가 막혀 비난 어린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당신이 제안한 거래잖아요"

"하지만 내가 언제 이 제의를 받아들여줘서 당신을 존경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소?" 그가 치명적일 만큼 효과적으로 받아치며 옆에 붙은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수락해 놓고는 너그럽게 봐준다는 식의 위선을 부릴 때 당신은 자신의 매력에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매겨 시장에서 스스로를 배척시킨 꼴이 되고 말았소"

"당신이야말로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군요.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몰리는 그를 따라 걸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가 희미하게 빛나는 자극적인 미소를 머금고 돌아보았다.

"고맙게. 사실, 이 정도로 내가 관대하게 나오는 걸 아주 고맙게 여길 거라고"

"관대하다고요"?" 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퍽도 관대하시네요"

솔토가 말없이 셔츠를 벗었다. 넓은 근육질의 구릿빛 가슴과 평평한 배를 향해 역삼각형 모양으로 고랑을 이루며 굽이쳐 내려간 검은 털을 보고 있자니 다리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가 바지의 허리띠를 끄를 때서야 자신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몰리는 서둘러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방어적으로 반쯤 몸을 튼 뒤 그가 거리낌 없이 옷을 벗었지만 조금도 당황스럽지 않은 척 하며 가만히 있었다.

"사무실에서 옷을 벗었어야 했는데"

"뭐라고요?" 몰리는 검정 팬티 안에 든 날렵한 구릿빛 엉덩이에서 허둥지둥 시선을 거두며 얼굴이 빨개져 우물거렸다.

"남는 걸로 알겠소" 그가 마지막 남은 옷가지를 벗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땀에 젖어 축축한 손을 앞으로 꼭 맞잡은 몰리는 한순간 이글거리는 금빛 눈과 언뜻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목 안 어디선가 심장이 두 방망이질 하는 걸 느끼며 그가 나아가는 방향과 반대로 돌았다.

"씻어야겠어요." 몰리는 분명치 않은 소리로 중얼거린 뒤 달아오른 뺨을 식힐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두 손을 얼굴에 갖다 댄 채 서둘러 거실로 돌아가 아까 백화점에서 산 잠옷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솔로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나란히 붙은 두 개 의 욕실 중 하나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게 빛나는 젖은 몸의 금빛 신처럼 물을 맞고 선 솔토가 저도 모르게 그려지자 배가 단단히 조여 왔다. 그녀는 다른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근 뒤 옷을 벗었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생전 처음으로 구강 청정제로 입안을 가신 뒤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샤워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떻게 이곳을 나가 그가 있는 침대로 올라간다지? 아무런 감정도, 앞날에 대한 희망도 없이 그냥 몸을 던져? 그가 내건 조건에 굴복하는 건 스스로를 그가 뇌물을 주고 산 몸뚱이 수준으로 낮추는 짓이다. 솔토는 그녀가 위안 삼아 몸을 숨기려고 하는 허위를 일부러 벗겨버렸다. 마치 그가 원하는 건 전적으로 성적인 관계뿐이라는 걸 계속 강조해 가혹한 만족감을 얻고 있는 듯했다.

본인은 결코 모를 테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아주 가망 없는 야망을 품고 있는 거야. 싫든 좋든 거기엔 감정이 있게 될 테니까. 솔토는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을지 몰라도, 몰리는 그에 대한 사랑을 결코 멈춰 본 적이 없었다. 증오와 괴로움이 다 타버렸을 때 매혹과 갈망이 남았지만, 프레디의 새털 침대에서 나올 때까지 그런 감정을 결코 사랑이라고 불러본 적은 없었다. 그녀는 그날 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상상을 실현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품에 안겨 녹아 내렸고, 지금도 그런 자각에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몰리는 고양이를 피해 눈치를 살피는 생쥐처럼 욕실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홧김에 산 두꺼운 흰색 면 잠옷이 아주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긴 팔과 긴 목에 볼품없이 몸을 에워싼 모습이 마치 돛을 잔뜩 단 배처럼 보였다. 약간 어두운 불빛 아래로 커다란 긴 소파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솔토는 그 위에서 이리저리 쌓인 베개 더미에 기대 길고 힘찬 한쪽 허벅지 위로 시트를 위험할 정도로 낮게 걸친 채 경제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만 서성거리지" 그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몰리는 땀이 나는 손바닥을 허벅지에 대고 쓸었다. "그럼 뭘 해요?" 다소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비꼬듯이 물었다.

그가 조각 같은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짙은 눈이 금빛 불꽃을 발했다. "메리 포핀스처럼 천장이나 창문 밖으로 떠다닐 참이오?" 그가 냉담하게 물었다. "아니면 그 수많은 단추 밑에 나긋나긋하게 섹시한 뭔가가 기다리고 있는 거요?"

"미안하지만 그런 건 없어요"

"그렇다면 당장 벗어요" 솔토가 간결하게 내뱉듯이 말했다.

"오히려 우스꽝스러울 뿐이니까"

그녀는 숨을 죽이고 흔들리는 눈길로 부끄러움도 없이 기대에 찬 금빛 눈을 바라보았다.

"비용을 댄 사람에게 결정권이 있는 법이니까" 그가 나긋하게 덧붙였다. "인생의 보다 근본적인 교훈 중 하나지"

"비열해요" 그녀는 불안정한 목소리로 그를 비난하고 넓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홱 돌아서다 주름 장식이 달린 옷자락에 그만 발가락이 걸리고 말았다. 솔토가 아슬아슬하게 때 맞춰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균형을 잃고 쓰러졌을 뻔했다. 그가 고르지 않은 숨을 소리 나게 내쉬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당신 말이 맞소. 하지만 우리의 결혼 첫날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던 중이었단 말이오. 당신이 저 빌어먹을 욕실에 들어가 나오지 않으려 하던 그때의 기억을" 그가 이를 갈았다. "그런데 오늘밤도 그때와 똑같이 한 시간 뒤에야 수의나 다름없는 옷차림으로 나타났으니"

몰리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남자다운 열기와 힘이 느껴지는 근육 몸에 잠시 기대고 있다가 이윽고 몸을 뗐다.

"안 될 거예요" 몰리는 탁한 소리로 말했다.

그가 상체를 숙이더니 미처 의도를 짐작하기도 전에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런 뒤 침대에 내려놓고는 발가락 위로 잠옷 자락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생각에 잠겨 그녀를 훑어보던 짙은 금빛 눈이 갑자기 재미있다는 듯 번뜩이더니 사진 수업을 위해 피사체를 배치하는 것처럼 옷의 겹친 부분을 조심스럽게 발목 주위로 걷어 올렸다. "이렇게 하니까 중세 묘비에 새겨진 조상 같은 모습이군. 아름답고 난공불락인"

"내가 한 말 못 들었어요?" 변덕스런 그의 태도에 당황해 다시 몸을 일으키자 반짝이는 황갈색 머리가 부드럽게 어깨를 휘감으며 흘러내렸다.

그는 마치 어린 아이를 잠자리에 들이는 것처럼 그녀 위로 시트를 덮어주었다. "첫날밤의 긴장, 지금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요"

"난 이런 일은 할 수 없단 말예요" 필사적으로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 몰리는 숨 막힌 소리로 외쳤다. "이건 정말이지 못된 일이라고요"

솔토가 한 손으로 침대 위의 스위치를 건드리자 불빛이 좀 더 부드럽고 은밀하게 약해졌다.

몰리는 이렇게 되도록 방치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알기에 그와 눈을 맞추지 않고 마지막 말을 절박하게 강조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이 내건 조건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니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봐요. 하기야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았지만. 오빠 내외와 조카들을 생각했고 그 순간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느꼈던 건데. 당신을 보고는 내 스스로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으니 당신을 탓할 수도 없"

가름한 구리 빛 손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동안 나머지 한 손은 가는 허리 아래로 돌아가 그녀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얘기는 아침에 합시다." 그가 달래듯이 기약했다.

"하지만 난 아침엔 여기 없을 테니까 지금 얘기해야 해요"

몰리가 열을 내며 주장했다.

"듣고 있소" 깊게 울리는 음성이 처음엔 탁하게 들리다가 그가 머리를 숙여 미친 듯이 팔딱이는 움푹 파인 쇄골에 뜨겁게 입술을 누르느라 웅얼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갑작스런 공격과 그 감각에 놀라 꿈틀하며 등이 홱 젖혀졌다. "하지 말아요. 그러니까 생각을 할 수 없잖아요" 그녀는 더듬거리는 소리로 투덜거렸다. "내가 설명할"

따뜻한 손이 그녀의 뺨을 부여잡더니 긴 손가락이 관자놀이 뒤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숨을 몰아쉬며 금빛으로 어른거리는 깊은 웅덩이를 들여다보고 있자나 갑자기 정신이 멍해져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아 몰리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을 갖고 싶어 미칠 것 같소, 카라"

솔토가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혀끝으로 꾹 다문 입술을 기분 좋게 핥자 그녀는 몸을 떨며 본능적으로 입술을 벌렸다.

"당신도 똑같이 날 원했으면 하오"

그가 입술로 에로틱한 장난을 치다가 무방비 상태인 그녀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자 전신에 또 한 차례 전율이 일었다. 가슴이 마구 뛰고 흐르는 듯한 열기가 솟구치면서 애타는 갈망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몰리는 와락 몸을 쓰러뜨려 그와 격렬히 입술을 포개고 맹렬한 키스를 교환했다. 진심으로, 미친 듯이, 강렬하게, 언제까지나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이성적인 생각이었다. 옆으로 돌아누워 잠옷 단추를 풀기 시작한 솔토가 평소와는 달리 허둥거리다가 답답했던지 갑자기 이태리어로 거친 말을 내뱉었다. 그가 부끄러움도 없이 욕정의 신음소리를 내며 그녀의 가슴을 두 손으로 덮고는 엄지로 장난을 쳤다. 몰리가 몸을 뒤틀며 그를 움켜잡자 솔토가 그녀의 손을 치우고서 다시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엄청난 흥분의 물결이 밀려들자 그녀의 입에서도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에게서 입술을 땐 솔토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몸을 굴려 옆으로 내려갔다. 고통에 가까운 갈망을 느낀 몰리가 이를 악물고 애원하듯 그에게 매달렸다.

"몰리" 헝클어진 그녀의 머릿속에 한 손을 집어넣고 솔토가 그녀의 주의를 요구했다.

만족을 향한 폭발할 듯한 갈구로 인해 정신이 아뜩해 있던 그녀는 대답지 않았다. 격정에 휩싸인 신음소리를 내며 그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만두고 싶으면 지금 말해요" 그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내뱉듯이 말했다. "당신이 주기 싫은 건 취하지 않을 테니까"

걷잡을 수 없는 열망에 사로잡혀 그를 올려다보며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 역시 멋진 뺨이 벌겋게 상기된 채 이글거리는 금빛 눈으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금빛 눈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경이로움이 온몸을 채우는가 싶더니 이내 거대한 손이 심장을 움켜잡는 것처럼 소유욕 강한 애정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새로운 해방감이 생생한 육체적 갈망과 맞물려 몰리는 힘이 들어간 손으로 그를 다시 끌어당겼다.

"좋다는 뜻이오?" 그가 이를 악물고 쉰 소리로 물었다.

"그래요, 그래요" 몰리는 너무도 유혹적인 그의 입술을 숭배하듯 덮고 웅얼거렸다.

마치 뜨거운 부지깽이에 찔린 것처럼 그가 몸을 홱 젖혔다.

"콘돔!"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가 다시 돌아와 허벅지 사이에 힘차게 자리 잡았다. 그녀는 단단한 남성이 다가오는 걸 느끼고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곧이어 그가 격렬하게 움직이며 원초적인 리듬을 타고서 그녀를 완전히 흥분시켰다. 아주 맹렬하고 강력한 절정에서 갑자기 폭발했을 때, 몰리는 그런 상태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솔토가 부드럽게 애무하듯 숨을 헐떡이며 짧게 입술을 포갰다가 그녀를 안고 옆으로 돌아 눕는 순간 깜짝 놀라 긴장할 정도의 의식은 있었다. 이렇게 밀착해 안겨 있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겨우 입술을 떼고 그의 이름을 불렀는데 아무 대답이 없자 그제야 솔토가 어린아이처럼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남자들은 종종 이런다는 걸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기진하고 만족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약하고 인간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기까지 했다. 그녀는 멍한 정신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솔토는 그녀의 저항을 무너뜨려 놓았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 미묘하고 사악하게 밀어붙였지만 잊지 못할 몇 초간 그가 짓던 미칠 것 같이 욕구불만에 찬 표정을 생각해볼 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놀랍기만 했다.

성적으로 그녀의 수중에 있던 솔토, 그녀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힘이었다. 그러니까 사무실에서 그가 무심코 <당신을 갖고 싶소>라고 한 말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겪어 보고서야 그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오직 그녀만을 위한 그 모든 성적 열광과 타오르는 격정이라니. 그가 왜 그렇게 갈망하는지는 아직 수수께끼지만, 함께 살자는 요구가 복수와는 관련이 없다는 말이 분명 거짓은 아니었다.

그녀가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지만 후회는 남아 있었다. 그녀 자신을 위해 옳은 선택을 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성이 아니라 욕구와 사랑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솔토가 그녀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망가뜨릴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비참하게 들었다.

 

베개 위로 몸이 끌어당겨 올려지자 몰리는 짜증 섞인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갑자기 놀라 눈을 번쩍 뜨는데 옷가지 하나가 머리 위로 떨어져 잠시 시야를 가렸다. "이게 대체?"

뼈대 없는 봉제 인형처럼 잠옷 속으로 팔이 끼워지는 동안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대 가에 앉은 솔토를 빤히 쳐다보았다. 흠잡을 데 없이 잘 빠진 짙은 회색 양복 차림으로 싱긋이 웃고 있는 모습이 숨을 앗아갈 정도였다.

노크 소리가 나자 그가 벌떡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움직이는 순수한 시였다. 몰리는 절망으로 눈을 감았다. 뻔뻔스럽게도 몹시 흡족한 미소를 다시 봤는데 밤새 그에게 매달리게 만들었던 비참하도록 나약한 감정이 떠오르자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아침이오" 정성 들여 차려진 쟁반을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튀긴 음식 냄새를 맡자 속이 울렁거렸다. 얼굴을 찡그린 채 쟁반에 담긴 파삭한 음식을 내려다보는데 욕지기가 올라왔다.

"저리 치워요" 몰리는 쟁반이 엎어지지 않도록 부자연스럽게 무릎을 세우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질겁해 외쳤다.

놀란 솔토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쟁반을 치웠다. 그것을 보고 있던 몰리가 서둘러 침대를 빠져나가 욕실로 달려갔다. 다소 불쾌한 몇 분이 흘렀다. 어렴풋이 그의 존재가 느껴지자 정말이지 그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말을 할 새도 없이 그가 나서서 노련하게 일을 처리했다. 욕지기는 이내 가라앉았지만, 그 일로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솔토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데려가 눕힌 뒤 물수건을 이마에 얹어주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됐나 봐요" 그녀는 한탄했다. "이런 기분은 싫은데"

"맙소사"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몰리는 그를 보기 위해 이마에 얹혀진 수건을 치우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고급 모직 상의 밑으로 넓은 어깨가 팽팽히 긴장돼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지켜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조바심 난 몸짓으로 몇 번씩이나 깔끔하게 손질된 검은머리를 불안정한 손길로 쓸어 넘겼다.

"어제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어요. 식사 한끼 걸렀다고 현기증을 느끼진 않거든요. 당신도 감염됐을 거예요" 그녀는 한숨 섞인 소리로 경고하면서도, 속으로는 고소해했다.

"아닐 거요" 깊게 울리는 그의 음성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난 그런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을 거요"

그가 성큼성큼 침대 발치로 걸어와 짙은 눈 위로 촘촘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오늘 하루 침대에 누워 있으시오"

"싫어요" 몰리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할 일이 있어요"

"당신은 이제 내 부인이오"

"첩이죠"

그의 뺨이 엷게 검붉어지더니 금빛 눈이 돌연 경고의 불꽃을 튀기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우린 함께 살고 있는 것뿐이오. 계속해서 우리가 어떻게 지금 상태까지 왔는지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고 보오"

몰리는 당황했다. 둘의 계약이 사업적인 것일 뿐이라고 강조할 만큼 그렇게 냉소적이었던 사람이 바로 이 남자가 맞단 말인가?

"상태가 어떤지 두 시간쯤 뒤에 전화해보겠소" 그가 표정 많은 입술을 꾹 다물고 말을 이었다. "이번 주말은 탬플브루크에서 보낼 거요. 오늘 저녁에 거기서 만찬을 열기로 했는데 괜찮아지면 당신도 와줬으면 고맙겠소"

아파서 내게 할당된 역할을 해내지 못할까봐 짜증이 난 거야, 그녀는 가슴 아프게 깨달았다. 그게 잘못된 것이었다. 그래서 저렇게 화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역정을 내는 게 이기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매너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었다. 몰라는 커다란 응어리가 울컥하고 목에 걸려 고개를 떨구었다.

잠자리를 같이 하고 그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 외에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분명했다. 물론 병이 났다면 그 역할도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지. 더구나 그녀의 오빠를 찾아가 재정적 곤경에서 구해줄 무제한의 돈을 써야 하는 날 아침에 이렇게 탈이 난 건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나 다름없을 테지.

"오늘 저녁까지는 나을 거예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들이쉰 뒤 그녀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오빠에게 잘해줘요"

검은 눈썹이 냉소적으로 휙 올라갔다. "내가 당신 오빠에게 어쩔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오빠는 당신을 무서워해요"

"건전한 존경심을 좀 가진다고 어떻게 되진 않을 거요. 나이젤에게 조금이라도 기개가 있다면 그걸 찾아낼 생각이오"

솔토는 그녀가 그 말을 듣고 안심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당신 오빠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몰리는 몸이 떨리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두 남자는 확연하게 달랐다. 서른 한 살인 솔토는 나이젤보다 세 살밖에 많지 않았지만 그는 선천적으로 모질고 자신감이 넘치는 반면, 그녀의 오빠는 자라면서 계부로부터 받은 끝없는 괴롭힘과 비판과 멸시로 인해 자신감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가 문을 향해 손을 뻗는 걸 바라보면서 몰리는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오빠에게 우리 얘기는 어떻게 할 거예요?" 그녀는 뻣뻣하게 물었다.

"우리가 다시 합쳤다고 하지 뭐라고 하겠소?" 그는 너무나 뻔하고 하찮은 질문이라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이 김빠질 정도로 바로 대답했다.

"합쳤다?" 대단한 표현이군. 정말 단순한 남자 특유의 현실도피야. 솔토가 방문을 열고 나간 뒤, 몰리는 침대를 빠져나와 거울 앞에 섰다. 섹스가 친교의 유일한 수단이고, 돈이 그 존재의 유일한 이유인 관계에 동등하고 확고하게 돌봐주는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솔토가 다시 들어왔다. "이 말을 한다는 걸 잊었소. 난 지금 그대로의 당신 모습이 좋소"

몰리는 느닷없는 그의 출현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요?"

놀랄 만큼 아름다운 짙은 눈이 경고하듯 그녀를 응시했다.

"그 머리색을 바꾸거나 짧게 자르거나 인형 옷 크기만 한 옷에 몸을 맞추기 위해 다시 굶기 시작한다면 난 완전히 미쳐버릴 거요. 당신이 그런 식으로 변신하는 게 싫소. 지난번엔 정말이지 흥미가 싹 가셨소"

몰리는 그의 불쾌한 단언에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속삭이는 소리로 입을 뗐다. "정말이에요?"

"감정이 상할까봐 그때는 아무 말도 안했던 거요"

지금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차를 타려다가 당신이 또다시 자신을 개조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소" 그가 그런 생각에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고 덧붙였다.

그가 다시 떠난 뒤, 몰리는 그가 서 있던 자리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정말이지 흥미가 싹 가셨소> 아름다운 외모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줄기차게 노력했는지를 생각해 볼 때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이 좋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긴 생머리에 화장도 거의 안한 얼굴에 가슴과 엉덩이는 크고, 최신 유행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데 말이다. 그처럼 세련된 남자가 이런 식의 그녀를 더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이 몰리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녀가 만나본 솔토 주위의 상류층 여자들은 구석구석 인공적으로 돋보이게 만들고, 모두가 비쩍 마른 것이 옷차림과 외모 모두가 모델 같았다. 몇몇 여자들이 그녀에게 다이어트도 좀 하고 운동을 해보라고 지적해 줄 때마다 움츠러들지 않으러 애쓰면서도 미운 오리 새끼처럼 주눅이 들었다. 판도라는 가슴 축소 수술을 받는 게 어떻겠느냐고 은근히 암시를 주기도 했었다. 더욱 아이러니한 건 지금 그녀의 모습은 4년 반 전 솔토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모르고 약혼하자마자 애초에 그의 마음을 끌었던 걸 모조리 바꿔버렸으니.

 

서리에 있는 템플브루크 저택은 3백 년 가까이 브루크 가문 소유였다. 두 딸 중 맏이인 솔토의 어머니 올리비아가 이 웅장한 18세기 팔라디오식 저택을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완만한 기복의 넓은 부지에 자리한 이곳은 올리비아가 돈을 보고 결혼함으로써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의 여동생 메리엘도 언니와 같은 식으로 결혼해 솔토가 두 살이 되었을 때, 딸을 하나 낳았다. 그 아이가 바로 판도라였다.

오전에 전화로 솔토가 내린 일방적인 지시를 깡그리 무시했다는 사실이 의식되자 몰리는 오늘 하루 어떻게 하라고 지시를 받았을 때처럼 불쾌한 기분으로 자신의 소형 해치백에서 내려 트렁크에 넣어 두었던 가방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그든이 크게 안도하는 기색으로 현관 계단을 쫓아 내려왔다. "부인, 놔두세요" 그가 조용히 나무랐다. "일꾼들이 옮겨놓을 겁니다"

예전에 이곳 템플브루크를 딱 한 번 방문했을 때, 판도라의 존재가 그녀의 기분을 완전히 망쳐 놓았었다. 판도라는 시골 목사관에서 롤빵이나 굽고 목공예품이나 갖고 놀면서 자란 그녀와는 상대가 안 되게 당당한 태도로 귀족출신의 상류층 안주인 노릇을 하며 제집처럼 편안하게 굴었다. 그 모습은 오래도록 그녀의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

솔토가 성난 금빛 눈을 번뜩이며 웅장한 복도를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하루종일 어디 갔었던 거요? 오그든보다 훨씬 앞서 집을 나섰는데 그 친구는 몇 시간 전에 도착했잖소"

"열차로 짐을 싸러 집에 다녀왔어요" 몰리는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우리의 손님들이 40분 후면 도착할 거요"

우리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그가 어떤 사람들을 초대했는지 알지도 못할 뿐더러, 불쑥 그의 인생에 다시 나타난 그녀를 보고서 믿을 수 없어 할 표정들을 보게 될 일이 두려웠기에 그건 확실히 잘못된 표현이었다.

"옷 갈아입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특히 당신이 야단스럽게 치장하지 않은 모습을 더 좋아한다고 하니" 몰리는 가늘게 비아냥거렸다.

"런던에서 당신 옷을 배달시켜놨소" 솔토가 그녀의 빈정거림을 모른 척 하고는 냉담하게 알려주었다. "집에 다녀올 필요가 없었는데 그랬군. 당신 아파트를 정리하도록 오그든이 전문 이사업체에 연락을 해놨기 때문에 아무것도 신경 쓸 일이 없었는데"

몰리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눈에 띄게 발끈했다. 집주인에게 한 달간의 말미를 주고, 옷을 싼 다음 나머지 소지품을 어떻게든지 챙겨보려 했었다. 스스로 그런 일을 하자니 다시금 자기 삶의 통제권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솔토가 방금 그런 기분을 그릇된 생각이었다고 비웃은 것이다. 통제권은 그녀에게 있는 게 아니라 그에게 있다고.

"당신과 함께 사는 동안 내 인생을 일시 중단시켜 놓았는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억지로 남겨두고 떠나와야 하는 생활을 정리하지도 말라는 거예요?" 그녀는 날카롭게 따졌다.

그를 지나쳐 계단을 향하는데 솔토가 그녀의 팔목을 잡고 붙잡아 세웠다. "기분은 좀 어떻소?"

자신의 성난 반응에 그가 자극 받지 않은 사실이 놀라워 그녀는 입을 꼭 다물었다. "좋아요"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오늘밤 참석하지 않아도 되오"

"말짱해요"

그가 아름다운 입술을 팽팽히 조이고 어두운 눈을 가늘게 떴다. "나 참, 당신의 행방을 몰라 걱정했잖소"

내가 아예 떠나버렸을까 봐 걱정되었나 보군. 둘의 사업상 거래를 어기고 달아났을까 봐? 짧은 하룻밤으로 눈가림을 하고서? 몰리가 아는 한 그는 침대 밖에서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그가 정한 규칙이었지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제한다는 언급은 없었다.

"그렇게 먼 길을 오가면서 기운을 빼는 게 아니었단 말이오" 그가 단호하게 계속했다. "많이 지쳐 보이는군"

"이게 다 통제권 문제인 거죠?" 몰리가 비난조로 말했다.

"내가 말없이 저택을 떠났다고요. 당신이 내주는 차를 타지 않고 대신 열차를 이용했다고"

"아니오. 그런 게 아니오, 몰리" 그가 조용히 부인했다. "매너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아주 고집 센 아이처럼 굴고 있는 당신에 관한 문제요"

그의 반격에 마음이 상한 몰리는 성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본 뒤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다가 서서히 발길을 늦추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계단참에 걸린 대형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교계에 처음 나선 올리비아와 그녀의 동생 메리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둘 다 늘씬한 금발에 고전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솔토의 인상적인 거뭇한 살결에서 닮은 점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지만, 귀족적인 콧날하며 아름다운 입매와 높은 광대뼈는 부정할 수 없게 외탁을 했음을 보여 주었다.

층계 반대편에는 솔토의 아버지인 리카르도 크리스탈디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거뭇하고 정력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그는 유명한 바람둥이 남편이었다. 화가가 그 건장한 외모에 깃든 생생하고 세속적인 성적 매력을 잘 포착해놓았다. 몰리는 이 세 사람의 모습을 판도라와 솔토 옆에 나란히 놓고 약혼식 날 들었던 겉보기엔 전혀 악의 없어 보이는 평가와 몇 가지 정보를 부단히 재연하면서 지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사촌치고는 끔찍이도 가깝지 않아요?"

"판도라가 무척 친밀하게 굴고 있긴 하지만 솔토도 싫어하진 않는 것 같아요"

"난 두 사람이 결혼할 줄 알았다니까"

"무슨 소리, 두 사람은 남매 사인데"

"불가사의한 일이죠?"침묵과 심술궂은 웃음이 오갔다.

"처음 만났을 때 메리엘이 리카르도에게 필사적으로 접근했지만 올리비아가 템플브루크를 물려받고 난 후에는 그가 두 자매 중 누구와 결혼할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죠"

"리카르도가 워낙 매력적이었으니까"

"메리엘은 홧김에 그 따분한 은행가 파커 스티븐슨과 결혼했고요. 어떻게 끝난 줄 알죠? 그녀가 죽고 난 뒤, 몇 년 뒤에 파커가 지살을 했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죠. 아주 헌신적인 아버지였는데, 판도라가 열여섯 살 때의 일이었죠. 그 애가 충격이 컸어요. 그 후로 몇 달간 이태리 솔토의 집에서 지냈잖아요"

"어쩌면 더 이상 살 의욕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들 사이의 연관성을 보고 처음엔 도저히 믿기지 않아 주춤했던 오싹한 발견을 한 뒤로 그런 단편적인 대화가 늘 몰리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런 의심을 사실과 맞추어 볼수록 깔끔하게 들어맞는 듯 했다. 전에는 말도 안 됐던 일들이 갑자기 놀랍도록 또렷이 이치에 닿았다.

 

 

 

7

전신 거울 앞에 선 몰리는 어색하게 몸을 비틀며 지퍼를 올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멋진 가구로 장식된 방 저쪽 끝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있다. 거울 속으로 모습을 드러낸 솔토가 다루기 어려운 지퍼에서 그녀의 손을 치웠다.

"근사하군" 그가 지퍼를 올려주며 보드라운 흰 어깨에다가 입술을 눌렀다.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전율을 막을 순 없었지만 지금은 둘 의 은밀한 행위를 떠올릴 기분이 아니었다. 불과 하루만에 그녀의 인생을 그가 모두 날려버렸다. 그녀는 이제 실업자였고, 오갈 데 없는 떠돌이 신세였다. 이게 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에 익숙한 악당 같은 남자의 음탕한 변덕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녀와의 잠자리가 지겨워질 때가 돼서야 이런 봉사를 면하게 해주리라.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광택 나는 구릿빛 짧은 드레스에 싸여 있었다. 그녀의 능력으로는 평생이 걸려도 살 수 없는 옷이었다. 스타일과 색상이 몸매를 실제보다 더할 나위 없이 보이게 해주고 몸에 꼭 맞는다는 사실이 더욱 속상했다. 오늘밤 그녀는 번쩍거리는 소유물처럼 사람들 앞에서 과시될 것이고, 여자들은 한 눈에 그가 사준 옷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솔토를 의식하면서 길게 늘어뜨린 윤기 나는 머리를 기운차게 빗어 내렸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당신은 내 품에 안겨 편안히 잠들어 있었소. 그런데 그 후로 뭐가 달라진 거요?" 그가 덤덤하게 물었다.

그가 먼저 깨어나 그런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화가 치밀었다.

"몰리" 그가 채근했다.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소"

그녀는 돌아서서 방어하듯 성난 녹색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설명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은데요. 당신은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니까"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말이오?"

"갑자기 내가 다시 불쑥 나타나 이렇게 당신과 같이 살고 있는 걸 보면 다들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녀는 그 정도로 당황한 사실을 드러낸 것에 화가 나 홱 돌아섰다. 두 사람이 재결합한 것을 이상하면서도 몹시 재미있는 일로 여기게 될, 웃음이 깃든 억측의 눈길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그 대단한 체면 생각만 하는군" 그가 비웃으며 말했다. "난 그런 건 상관하지 않소. 특히 4년 전,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우리 결혼이 아직도 유효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소"

그의 비난에 몰리는 숨을 죽였다. "오해 같은 건 없었어요"

"신문에 난 사진을 근거로 날 비난했잖소. ? 그게 당신을 바보로 만드는 것 같고, 판도라를 말도 못하게 질투해 그 편협한 마음으로는 모든 남녀 관계에서 섹스가 주도적인 요인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어서?"

가름하고 힘찬 얼굴에 경멸이 역력했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몰리는 그가 감히 그녀의 이름을 다시 언급했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나고 괴로워 얼굴이 벌개졌다. 황소 앞에서 빨간 헝겊 조각을 흔든 꼴이었다. 확실히 그 이름을 언급하기 전에 그가 한 말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못된 여자를 말도 못하게 질투한 적은 없어요"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몸서리를 치며 쏘아붙였다. "난 불평 한 마디 없이 몇 달 동안이나 그 여자를 견뎌냈어요. 내가 바보였죠. 우리의 약혼 기간 내내 가는 곳마다 뒷자리로 밀려나고 주연 자리를 빼앗기면서도 난 참고 견디기만 했으니까요. 당신을 위해서요. 내가 얼마나 뚱뚱한지, 옷은 얼마나 못 입으며, 당신 아내감으로 얼마나 부적당한지 나긋나긋하게 쏟아내는 가시 돋친 말들을 다 참아내야 했다고요. 그래요, 처음엔 질투했을지 몰라도 그날 끝에 가서는 그 여자를 지독히 증오하게 됐어요"

솔토의 구릿빛 얼굴이 하얘졌다. 그녀가 감히 이렇게 대놓고 공격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마치 그는 충격을 받고 자신의 소중한 판도라를 대신해 심한 분노를 느끼는 듯 보였다. 이렇게 폭발시키다니, 그녀 스스로도 놀라 몸이 와들와들 떨렸지만 다시 주워 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과거처럼 순진하고 맹목적인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가 깨달을 때인지도 몰랐다.

번뜩이는 짙은 눈이 몹시 단호했다. "판도라는"

그의 말을 막으려는 경고의 몸짓으로 몰리가 두 손을 펼쳤다.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그 이름을 말하면 여길 나갈 거예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떠나버릴 테니까 오빠 일로 날 협박할 생각은 말아요" 그녀는 확신에 차서 주장했다. "더 이상 그 여자 얼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내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게 좋을 거예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그가 김빠질 만큼 차분히 받아쳤다. "지금 그 애는 뉴욕에서 살고 있으니까"

몰리는 속이 메슥거려 그를 등지고 돌아섰다. 한 달에 한번쯤은 뉴욕으로 날아가겠군. 그래도 이제는 조금은 조심해야 할 거야. 제나가 언론에 흘린 얘기로 인해서 그와 판도라가 단지 관념적인 친구 사이만은 아니란 사실이 만방에 폭로되었으니까. 하지만 둘은 곧 곤경에서 벗어났지, 몰리는 괴롭게 회상했다. 약혼녀 몰래 부정을 저질렀다고 고소를 당하는 것으로 그쳤을 뿐이었다. 판도라가 안됐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평생을 따라다닐 천박한 추문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싶을 만큼 그에겐 마음이 쓰였었다.

"정말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군" 싸늘한 금빛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그가 터질 듯한 침묵으로 이어지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을 이 집에서 기꺼이 내쫓고 싶을 정도요"

몰리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입술이 실룩거리다 아직도 출구를 찾아 아우성치는 격한 감정과 싸우느라 다시 팽팽해졌다. 그녀는 분노와 원한과 좌절과 지독한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 "말만해요, 당장에라도 나가줄 테니"

그녀는 솔토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감정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까만 한쪽 눈썹이 찡긋 올라갔다. "그런 식으로 날 조종할 순 없지"

그의 경고에 몰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솔토는 이따금씩 그녀의 마음을 아주 쉽게 읽는데, 그가 또 어떤 것을 알고 있을지 두려웠다. "공개 기록상 가장 짧았던 결혼 얘기를 접기 전에 이 말 한 마디만 더 하겠소"

몰리는 턱을 쳐들었다. "맘대로 해봐요"

문을 향하던 솔토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해명할 수 있었음에도 당신은 내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소.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게 바로 그 해명인 것 같소"

그리고 문이 닫혔다. 그는 영원히 사실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방법이 없을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 있다. 어떻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만큼 그녀는 그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판도라는 솔토가 가질 수 없는 여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의 완벽한 짝이었다. 둘은 10대가 된 후에 만났지만 금방 가끼워졌다. 서로에게 즉각적으로 끌렸을까, 아니면 뭔가 예고도 없이 그들에게 다가온 걸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그때 이미 알고 있었을까?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지 못하도록 신중을 기했던 걸까? 그래서 늘 각자 다른 관계를 가졌던 걸까?

자신을 고문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몰리는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쉬며 일부러 생각을 접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나서 다시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드레스의 몸통 부분에 살짝 구겨진 부분을 펴다가 젖가슴이 아린 걸 느끼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가 다 돼서 그런 거겠지?

몰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수첩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다. 생리가 늦어지고 있었다.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요 몇 주간 스트레스가 무척이나 심했으니까.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불안감에 등을 타고 내리는 오싹한 전율이 가늘게 일었다. 속이 울렁거렸던 건 아마도 우연의 일치였을 거야, 그 뿐이야. 그가 그런 모험을 무릅썼을 리가 없어. 그처럼 타고난 침착하고, 자제력 많고, 논리적인 사람이 피임도 않고 섹스를 감행할 리가 없었다.

그 확실한 신념에 마음이 놓여 문을 열다가 문득 어떤 피임법도 안전한 것은 없고, 그런 사고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게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난 아니어야 해. 그녀는 다시 오싹해져 벌벌 떨며 속으로 기도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바보 같이 들리지 않게 격의 없고 꾸밈없이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을 속으로 연습해보았다.

"설마 멍청하게 그런 걸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건?" 아니야, 그건 안 되겠어.

"그건 그렇고 혹시?" 아냐, 그렇게 하면 그날 밤 내가 전혀 이성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해 너무 많은 걸 폭로하는 꼴이 되고 말 거야.

솔토는 응접실에서 어떤 남녀 한 쌍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선 몰리가 문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그가 입가에 사교적인 미소를 머금고는 위협적이고도 싸늘한 눈길을 한 채로 양탄자 위를 걸어왔다. 큰 어려움 없이 그 어색한 질문을 다음으로 미루고 시선을 돌리는데 마침 그녀 쪽으로 돌아서던 금발 여인의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운 미소와 마주쳤다.

그들 부부를 알아본 몰리가 가까이 다가가 반갑게 두 사람을 맞았다. "나탈리, 제럴드, 잘 있었어요?"

"자기를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뜻밖이다" 나탈리가 흥미로운 얼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털어놓는 동안 남자들은 자리를 떴다. "솔토가 오늘 아침에 초대를 했지 뭐야. 오늘밤 여기서 지루한 사업 만찬을 가질 예정이지만, 우리를 초대한 데는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서 말야. 우린 언제나 잘 통했잖아,"

"나야말로 낯익은 얼굴을 보게 돼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어" 몰리는 솔토가 자신을 위해 나탈리를 초대했다는 사실에 조금은 감동을 받고서 미소를 지었다. 4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여인과는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 얼굴 안 보게 돼서 정말 기쁘겠다" 금발 여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결혼식에 참석할 거냐고 물어봐도 돼?"

분명 판도라를 두고 한 말이라는 걸 깨닫고 얼굴이 굳어졌지만 눈으로는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했다. "결혼식이라니?"

"판도라의 결혼식 말야, 몰랐어? 올 여름에 결혼하잖아"

깜짝 놀란 몰리는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희미한 미소는 잊지 않았다. 나탈리는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알아주는 수다쟁이이기도 했다. "그 운 좋은 남자가 누구래?"

"아주 잘생긴 브라질의 억만장자라지 아마. 그 남자한테 홀딱 반했나봐. 상상이 안 간다니까. 늘 정반대였잖아. 하기야 그 여자를 못 본지도 몇 년 됐으니까. 자기가 떠난 지 얼마 안 돼서 그 여자도 모습을 감췄잖아"

몰리는 침착하지 못한 손길로 오그든이 내민 술잔을 집어 들었다. 판도라가 사랑에 빠져 곧 결혼을 한다고? 너무 좋아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이내 솔토가 그녀에게 다시 관심을 보이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품위를 떨어뜨리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4년 전,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때 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유일한 매력은 몰리 자신이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전혀 연상시킬 수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었다. 뛰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그가 몰리 자신의 평범함에서 마음을 진정시키는 대조적인 면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고 씁쓸히 생각했었다.

솔토가 그녀의 등에 가볍게 팔을 두르고 방금 도착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게 했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솔토가 검은머리를 돌리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물만 마셨으면 하오. 알코올이 졸음을 몰고 올 것 같으니까"

몰리는 자신이 뭔가를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상기시키는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둘의 결혼 첫날밤에 그녀더러 술에 취했다고 비난한 솔토를 결코 용서할 수 없으리라. "내가 수프 그릇에 코를 박고 쓰러져 당신을 창피하게 만들까봐 그러나요?"

"창피할 건 없는데 무심한 내 태도가 당신으로선 즐겁지 않을 테니 심호흡을 하고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좋을 거요. 솔직히 내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으니까, 카라"

한때는 그의 냉담한 태도 변하에 감정이 상하고 몹시 불쾌해 했었다. 그러나 나이를 네 살이나 더 먹은 지금은 심하게 상반되는 감정의 격랑 속을 헤매고 있었다. 좀 전에 판도라를 모욕했다고 분개하던 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둘의 결혼 첫날밤을, 그를 대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끌어 모았던 용기를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결국엔 완전히 블랙 코미디가 돼 버리고 말았지, 그녀는 비참하게 인정했다. 마침내 그를 침실에 들였지만 너무도 어색해서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고, 그로부터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솔토는 성큼 성큼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나가봐야 할 것 같소" 그가 단호한 얼굴로 흘끗 돌아보며 말했다. "하기야 히스테릭해져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술 취한 신부와 함께 있는 것도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닐 테니까. 오그든에게 커피를 올려 보내라고 이르겠소"

아래층으로 그를 따라 내려가며 울고, 고함치고, 비명을 질러봤지만 어떤 행동이나 말도 서둘러 집을 떠날 결심을 한 그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좀 더 성숙해진 뒤 당시 일을 떠올리면서 정말이지 그렇게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그를 집 밖으로 내몰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녀는 이제 웅장한 식당 방에서 상석에 앉아 있는 솔토와 열여섯 자리나 떨어져 있는 식탁 말석에 앉아 있었다. 그에게서 추방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예상했던 대로 행동하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 그와 교전 중이라는 사실에 의지해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로 했다.

"보아하나 이 집의 여왕마마이신 것 같군요" 옆자리에 앉은 상냥한 젊은 은행 간부가 자신의 썰렁한 유머에 혼자 킥킥 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몰리는 얼굴을 붉히며 꽉 막힌 하수구처럼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낄낄 웃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표현은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네요"

그녀가 농담하고 있다는 결 깨닫지 못한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앉더니 식사시간 내내 사냥과 사격과 낚시를 하며 겪었던 멋진 순간에 대해 늘어놓았다. 솔토가 지켜보고 있음을 깨달은 몰리는 남자의 이야기에 바싹 귀를 기울였다. 갑자기 도널드의 말이 떠올랐다. <그 친구는 당신을 태엽 장난감처럼 감아 조여서는 도리깨질하며 돌도록 내버려두고 있단 말이오>

몰리는 자신이 유치하게 솔로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는 점을 인정하고는 곧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 젊은 은행가가 명함을 손에 쥐어주면서 한가할 때 연락하란 말을 했을 때 그녀는 움찔하다시피 했다.

"오늘밤 솔토의 기분이 아주 묘한 것 같아" 몰 리가 더 이상 그를 의식하지 않기로 결심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나탈리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가 저렇게 화내는 걸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오늘밤은 분명 그런 것 같아, 몰리"

 

몰리는 손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몹시 피곤했다. 그녀는 오그든이 마지막 손님을 배웅하고 채 문을 닫기도 전에 벌써 계단을 향해 걷고 있었다. 솔토가 그녀를 잡더니 억센 한 팔을 무릎 밑에 넣고 다른 팔은 등에 댄 채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식사시간 내내 무시당한 기분이었소?"

몰리는 내려놓으라고 하려다가 엄청나게 긴 계단을 보고는 가만히 있기로 했다. "뭐라고요?"

"내내 여학생처럼 낄낄거리고 속눈썹을 열심히 깜박거려대기에 하는 말이오. 그리 멋진 솜씨는 아니더군"

"그런 솜씨가 필요한 사람 같지 않아서요" 몰리는 다시 크게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정신없이 낄낄거리는 매춘부 타입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나와 같이 잔다고 해서 매춘부일 건 없지" 그가 팔에 힘을 가하며 내뱉듯이 말했다.

"돈을 위해 남자와 자는 여자를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솔토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나무라듯 물었다.

몰리는 졸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맙소사, 이렇게 화를 내는데도 속이 요동칠 만큼 멋져 보이다니.

"오늘 아침 내가 출근한 뒤로 정신 나간 여자처럼 굴고 있잖소"

"내 마음에 드는 일을 하자면 그렇게 되니까요. 당신도 늘 그러잖아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그러는 건 참지 못하겠어요?"

"당신 마음에 드는 일을 하자고 당신을 내 인생에 불러들인 게 아니오" 그가 미안한 기색도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겠죠" 몰리는 그가 내려놓은 편안한 침대에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당신의 제물을 잘못 본 것 같네요"

"무슨 뜻이오?"

"당신만큼이나 나도 고집이 세거든요. 늘 그랬듯이"

그가 놀랍도록 조심스럽게 그녀를 돌려 눕힌 다음 드레스의 지퍼를 내려주었다. "당신의 반쪽은 여기 있고 싶어 하고, 나머지 반쪽은 그러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군"

몰리는 아찔하도록 예리한 지적에 잠이 싹 달아남을 느꼈다.

"나와 거리를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할 참인가 본데 오늘밤은 효과가 있었소" 그가 냉담하게 말했다. "부오나놋떼 (잘 자요), 카라"

몰리는 깜짝 놀라 그가 유유히 방을 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문제를 회피하고 허를 찌르는 능력이 가히 천재적이었다. 그녀에게 뜻밖인 것이 그에겐 보통이었다. 그가 다른 방에 가서 잔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기는커녕 거부당한 기분이 들었다. 잠을 이룰 필요가 있는데도 그러지 못하고 침대에서 이리저리 뒤척이게 됐을 때, 그런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오빠 일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솔토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정직한 거래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오빠 내외와 조카들은 이제 안전할 테지만 그들은 더 이상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원인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문제가 훨씬 더 염려스러웠다. 끔찍한 운명의 장난으로 임신이라도 했으면 어쩌지?

다음 날 아침 8시 정도가 되어서 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토할 정도는 아니었다. 전날 밤에 하인들이 짐 가방을 모두 정리해서 옷을 걸어 두었지만 거기에 남자 옷은 없었다. 솔토의 방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청바지와 셔츠를 찾아 입고 욕실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늘진 눈과 해쓱한 뺨. 임신 자가 진단 기구를 사서 결과를 확인한 뒤에는 기분이 한결 나아지겠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계획에 없는 임신으로 벌을 받게 될 거라고 무모하게 믿는 전형적인 여자의 경우인지도 몰랐다. 임신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잖아.

한 시간 뒤에 몰리는 서둘러 나가서 사온 임신 자가 진단 기구를 마치 정신을 집중하면 결과가 기적적으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듯이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 급히 숨을 훅 내쉬었다. 오그든이 방문을 두드리고는 솔토가 식사를 같이 하려고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왔다. 기운을 내기까지 15분이 걸렸다.

솔토는 모닝 룸에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곧바로 일어서는 그를 보고 몰리는 저 멋진 매너로 자신이 들려줄 말을 그가 평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몹시 궁금해 했다.

그는 몸에 달라붙는 크림색 승마용 바지와 검정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오싹하게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심장이 마구 뛰고 있었다.

"마구간에 있는데 당신이 9시도 안 돼서 차를 몰고 나가더군. 그렇게 일찍 일어나 움직이는 걸 보고서 좀 놀랐소" 오그든이 격조 높은 조지 왕조 풍의 찬장에서 구색을 갖출 식기를 꺼내 두 사람 앞에 차리는 동안 솔토가 말했다.

"볼일이 있었어요" 몰리는 팽팽하게 긴장된 소리로 대답했다.

오그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녀가 커피와 토스트 몇 조각을 받아드는 동안, 솔토는 조리한 아침식사를 푸짐히 들었다. 잠시 후에 오그든이 위엄 었는 걸음으로 문을 닫고 나갔다. 몰리는 커피에 설탕을 넣고 계속해서 저었다. 그에게 말할 일이 교수대의 올가미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정말 굴욕적일 터였다. 쉽게 충격 받을 사람은 아니지만 이건 전혀 별개의 일이었다. 그가 뭐라 한들 어찌 그를 탓하겠는가? 한 번, 단 한 번의 관계였고, 그녀로서는 첫 경험에 그렇게 됐으니.

"설탕을 그릇째 커피에 쏟아 부울 작정이오?" 솔토가 온화하다싶게 느긋이 물었다.

몰리는 받침 접시 위에 소리가 나게 찻숟가락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들었다. "나 임신했어요" 그녀는 뻣뻣하게 말했다.

반짝이는 짙은 눈이 그녀의 팽팽한 얼굴과 저도 모르게 겁에 질린 눈으로 향했다.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몰리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솔토, 내 말 들었어요?"

"또 덧붙일 말은 없는지 기다리고 있었소" 그가 그렇게 말한 뒤 지극히 침착한 손길로 자기 잔에 커피를 따랐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소. 당신은 내가 식탁을 넘어가 임신했다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할 줄 알았겠지만"

예상치 못한 대화의 방향에 완전히 어리둥절해진 몰리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솔토가 몸을 말고 의자에 느긋이 기대더니 숱 많은 속눈썹을 내리떠 어두운 눈을 반쯤 가렸다. "멜로드라마를 펼칠 건 없소, 몰리. 당신이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을 때 충격을 받았다는 건 솔직히 인정하겠소"

몰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죠?"

"그날 밤 외종조부 댁에서 난 계획적으로 모험을 감행했었소" 놀라 휘둥그레진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순간 당신은 그 사실을 일아 채지 못했지.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말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게 잘 안 됐소. 당신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얼굴에 핏기가 다시 돌기 시작하면서 몰리는 몹시 분개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일부러 피임을 안 했단 말이에요?" 그녀는 바싹 타는 입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당신도 거기 있었잖소, 몰리" 그가 받아넘겼다.

"몰랐어요. 난 그때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알아채지 못했단 말예요" 몰리는 식탁 모서리를 잡고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날카롭게 외쳤다. 어찔한 느낌이 더욱 화를 부채질할 뿐이었다. "그렇게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며 용서할 수 없는 짓을 하다니"

"앉아서 토스트나 마저 먹어요"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몰리는 그가 시켜서가 아니라 어지러움을 느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고백으로 좀 전의 불안과 당혹감은 모두 사라졌지만 대신 지독한 충격이 찾아들었다.

"난 하룻밤 정사 같은 건 하지 않을 뿐더러 그땐 아무 것도 준비된 게 없었소. 비록 모험을 감행했지만 당신도 동조해"

"정말 역겹네요" 몰리는 그의 태도에 격분해 비난했다. "그때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당신도 잘 알고 있었잖아요"

", 맙소사" 짜증난 얼굴로 그가 답답하다는 듯이 허공에 양손을 내저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든 그게 무슨 상관이오? 당신은 지금 내 아이를 갖고 있소. 그 문제에만 신경 쓰도록 합시다. 다른 얘기로 언쟁을 벌여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니까"

"그러고도 입 다물고 있었다니"

어제 자기는 그런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을 거라고 차분히 확신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몰리는 속이 뒤틀렸다. 그녀가 사무실에서 쓰러졌을 때 창백해지던 안색과 몸이 안 좋았을 때 긴장하던 모습도 생각났다. 모르는 상태로 그의 진짜 반응을 봤던 것인데, 그때는 오늘처럼 이렇게 침착하고 태연한 모습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돼서"

"쓸데없이라구요?" 그녀는 숨 막힌 소리로 되물었다.

"조만간에 둘 다 알게 될 테니까. 얘기를 한다고 그런 가능성이 사라지는 게 아니잖소.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소용없는 짓이고.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라 건설적인 방향으로 생각해야 할 때인 것 같소"

그러나 몰리는 그러기엔 너무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는 처음부터 임신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괘씸하고 오만한 인간 같으니라고. 그런 위험성을 계산해보고서 모험을 감행한 뒤 자신의 전설적인 행운을 믿었던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운은 따르지 않았다. 솔토 크리스탈디 같은 남자에겐 적잖은 충격이었으리라. 어제 눈에 띄게 당황해 하던 모습을 돌이켜볼 때 지금 이렇게 차분한 반응에 속지 말아야 했다.

"나더러 건설적이 되라고요?"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건 둘 다의 책임이오."

하지만 돌이킬 수 없게 변하는 건 그녀의 몸이고, 그녀의 인생이고, 그녀의 미래이지 그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몸 안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폭발 직전의 침묵 속에서 그가 벨을 눌러 오그든을 부르더니 커피를 새로 가져오게 했다.

"서로 상의할 일이 많은 것 같소" 그가 이번에도 역시 얄밉도록 차분한 어조로 느릿하게 말했다.

몰리는 식탁 밑으로 두 손을 꽉 맞잡고 팽팽히 긴장돼 일그러진 얼굴을 들었다. "낙태는 하지 않을 거예요. 미안하지만 그건 논의할 여지가 없어요"

놀랄 만큼 아름다운 짙은 눈이 가늘어졌다. "누가 그런 얘기를 하자고 했소?"

"그게 가장 편리한 해결책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을 테니까요" 몰리는 침착하지 못한 손길로 황갈색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사랑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아이는 아니니까요. 하룻밤 정사가 나은 뜻밖의 결과이지만"

"처음부터 낙태 얘기는 꺼낼 생각도 없었소" 그가 분명히 못을 박았다."외종조부 댁에서의 그 확실한 카타르시스적인 결합을 하룻밤 정사로 표현하지도 않을 거고"

바로 그 결합이 떠오르자 도저히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 눈물이 쏟아지려 하고 목이 잠겼다. "솔직히" 그녀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야기는 고사하고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의 뺨이 붉어졌다. "몰리"

"제발 그만해요" 그녀는 다듬어지지 않은 소리로 말을 잘랐다.

느닷없이 그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서 긴장이 역력한 모습으로 창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늘 아이를 원해왔다는 건 당신도 잘 알잖소"

"알죠" 그가 있는 대로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을 말이었다. 마음이나 생각이나 감정은 다른 여자에게 가 있는데 그 결혼하려 했던 일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주지 않아도 되었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어서 빨리 아이를 갖고 싶다고 그가 조심스럽게 언급했던 일이 또렷이 기억났다.

"난 당연히 이 아이를 원하오" 그가 거의 공격적으로 말을 맺었다.

몰리는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불현듯 앞으로 닥칠 일을 알 것 같으면서 어떻게 처음부터 그걸 예견하지 못했나 놀라울 뿐이었다. 그녀는 눈앞이 흐릿해질 때까지 식탁을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으니까 제발 그만둬요"

"언제부터 내 마음을 읽게 됐소?" 그러나 그는 평정을 잃었다.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음절마다 올리는 억양이 몹시 섹시해 바보 같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거부당하고 있다는 괴로운 심정을 감추고 억지로 고개를 들어 비난 어린 눈길을 던졌다. "아이 때문에 나와 결혼할 생각인 거죠. 내 대답은 <>예요"

힘찬 얼굴이 굳어지더니 그가 멋진 눈 위로 까만 속눈썹을 내리떴다. "<>라고?"

 

 

 

8

히스테릭한 웃음이 몰리의 마른 목안에서 위험한 철사 덫처럼 꿈틀거렸다. 솔토는 놀라움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 그를 탓할 수 없잖아? 지난번에 그가 청혼했을 때 그녀는 마냥 황홀해하고 인습적이지 못한 타협 같은 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 집에 살면서 그와 한 침대를 쓰고, 아이까지 가졌으니 솔토는 그녀의 부정적인 반응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제부터 정말 이상하게 구는군. 남녀 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호르몬 때문이 아닌가 싶소" 그가 기가 꺾일 정도로 지극히 오만하게 말했다.

몰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가자 그 뒤로 울음이 터질까봐 한 손으로 떨리는 입을 틀어막았다.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나도 좀 끼워주지 그러오." 그가 다듬어지지 않은 소리로 내뱉듯이 말했다.

몰리는 말을 꺼냈다간 어떻게 될지 몰라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그가 곧바로 낙태를 요구해올 거라고 생각했을까? 어떻게 이렇게 모를 수 있었을까? 그 존재가 의심되자마자 솔토는 애정을 갖고 신중히 자기 자식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침대에 누워 있어라, 기운 빼지 말아라, 알코올 같은 것은 입도 못 대게 하면서. 솔토는 자기가 본 한 가지 긍정적인 면에만 역점을 두고 이 상황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늘 아이를 갖고 싶었다는.

이제 머잖아 유리한 걸 손에 넣게 됐다는 관점에서 보니 귀찮은 임신이 갑자기 마음에 들게 된 거겠지. 어쨌거나 잃을 게 뭐가 있겠는가? 사랑하는 여자는 멀리 떨어져 있고, 곧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텐데. 몰리는 만약 자신이 솔토와 결혼한다 하더라도 판도라 다음 가는 여자밖에는 되지 못하고, 결국엔 그녀가 낳은 아이보다도 못한 존재가 돼 버릴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안 돼, 내 자신을 씨암말 수준으로 전락시킬 순 없어. 그가 오직 그 이유 때문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살게 된다면 너무도 비참할 것이다.

"당신은 절대 미혼모로 살아갈 사람이 아니오" 그가 단정 지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지만 냉혹한 그의 조건대로 아이 때문에 하는 결혼은 더더욱 내키지 않았다. "결혼반지로 내 아이를 살 순 없어요" 몰리는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몹시 만족해했다.

"당신은 지금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지 않소"

"그 점에 관해선 불평할 자격이 없을 텐데요. 이성적인 여자라면 애초에 당신과 자지도 않았을 테니까" 몰리는 심한 자기 혐오감에 싸여 그렇게 받아쳤다.

그 뒤로 이어진 침묵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그래" 솔토가 마침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체 당신 계획은 뭐요?"

몰리는 그 간단한 질문에 그만 할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까지 당면한 현재 외에는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지만 빠른 시일 내에 따로 나가서"

"맙소사 내 아이를 가진 몸으로 날 떠날 순 없소" 그가 난폭한 저음으로 으르렁거렸다.

몰리는 공격적인 태도에 놀라 움찔했다. "난 당신 소유가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 오빠는 사실상 내 소유지" 그가 냉혹하게 상기시켰다.

"지금까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나요?" 몰리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거칠게 비난했다. "내 인생을 그만큼 망쳤으면 된 것 아니에요?"

꾹 다문 입가에 작은 근육이 팽팽히 당겨 구릿빛 피부 밑으로 창백한 안색을 더욱 부각시켰다. "우린 당신 남매가 그냥 떠나버릴 수 없는 계약과 관계를 맺었소, 몰리"

한 마디만, 한 번만 쳐다봐 줬어도 떠날 생각은 안 했을 테지만 그는 한 번도 감정에 호소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아니라 자기 자식에게 온통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것을 목이 아플 정도로 간신히 참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딜 가는 거요?"

"오빠 집에요"

"내가 데려다 주겠소" 그가 조용히 제안했다.

"됐어요" 그녀는 목 멘 소리로 거절했다.

"그럼 리무진을 타고 가시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그녀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냥 복도로 나갔다.

"지금 당장 가야겠소?" 짜증난 숨을 내쉬며 오그든에게 리무진을 대기시키라고 이른 뒤, 솔토가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저녁 10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데리러 가겠소"

"왜요?" 몰리는 증오에 찬 소리로 물었다. "아기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나 보죠?"

솔토가 이태리어로 거친 말을 내뱉더니 예고도 없이 그녀를 와락 끌어당겼다. 그가 손가락으로 고개를 들어 자기를 쳐다보게 만들자 몰리는 격정에 휩쓸릴 것 같아 고개를 돌리며 저항해보려 애썼지만, 곧 뜨겁고 맹렬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 우레와 같은 충돌에 발끝까지 짜릿한 충격이 전해졌다. 그는 비틀거리는 그녀를 꼭 붙잡고 맹렬히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몰리는 격정적인 키스에 휩쓸려 솔토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그러다 잠시 후 풀려났을 때는 전신의 감각이 깨어나는 듯해 몽롱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할 사람은 당신인 것 같군" 그가 냉담하게 말했다.

예리한 금빛 눈에 깃든 비웃음이 견딜 수 없어 몰리는 벌건 얼굴로 굶주린 사자에게 쫓기듯 급히 리무진을 향해 달려갔다. 오빠 집에 들어섰을 때 처음으로 눈에 띈 것은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로 깔끔히 정돈된 부엌이었다. 정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싱크대 앞에 있던 레나가 반갑게 그녀를 맞으며 즉시 소리쳤다. "여보, 아가씨가 오셨어요"

그리고는 모든 걸 말해주듯 몰리를 꼭 끌어안았다.

"오빠가 솔토 씨 회사에서 현장 교육을 받게 됐어요" 레나가 설명했다. "그래서 앞으로 아홉 달 동안은 런던으로 통근하게 될 거예요"

곧이어 나이젤이 문간에 나타났다. "솔토가 날 다시 학교에 보내주겠대" 그가 씁쓸히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내가 제대로 해낼 수 있다는 걸 입증하기 전까지는 종묘점 운영을 맡길 수 없다는 거야"

"오빠는 할 수 있어" 몰리가 말했다.

"이 집은 저당 잡히기로 했어" 나이젤이 야윈 어깨를 활짝 폈다. "레나와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 그래야 다른 빚도 갚게 될 테니까. 어쩔 수 없이 솔토의 돈이 나가게 될 거야"

"정말 친절했어요." 레나가 수줍게 거들었다. "그렇게 좋은 분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

나이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느슨하게 풀어진 모습으로 그 친구가 먼저 아이들에게 말을 걸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해왔지. 문 앞에서 그를 보자마자 난 거의 사색이 돼 꼼짝할 수도 없었거든"

레나가 수줍고 감복한 얼굴로 몰리를 바라보았다. "그분과 눈 속에 갇혔을 때 로맨틱한 시간을 가졌다면서요"

저도 모르게 몰리의 입에서 쓴웃음이 빠져나갔다. "로맨스가 아니라 아이를 가졌어요"

나이젤과 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몰리는 얼굴이 빨개져 돌아섰다. "그런 얘기를 털어놓다니"

레나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럼 이제 두 분은 결혼하시겠네요." 그녀가 어림짐작으로 말했다.

"당연히 해야지" 나이젤이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게 실은아니야, 안 할 거야" 몰리는 단호하게 부인했다.

세 사람 사이에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하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솔토 씨가 결혼하는 모습을 상상하기가 힘들긴 하네요." 레나가 침울하게 인정했다.

"그래, 그렇긴 해" 나이젤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임신했기 때문에 하는 결혼이 멋진 일은 아니라고, 안 그래? 하지만 옳은 일도 아닌 것 궅구나. 이런 사실을 어제는 몰랐던 게 다행이지. 알았다면 그 친구에게 한 마디 해야 한다는 기분이 들었을 텐데.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거든"

차츰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그가 결혼 얘기는 꺼내지도 않은 걸로 믿게 놔두는 게 수월할 것 같았다. 그녀의 기분이 어떤지 이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솔토는 그녀를 사랑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임신하지 않았으면 청혼도 안 했을 것이었다. 그가 원하는 건 아이뿐이었다. 하지만 그 걸로는 충분치 않았다.

9시가 넘어 템플브루크로 돌아왔을 때, 솔토는 집에 없었다.

그는 오후 늦게 이태리로 갔다고 오그든이 전했다.

"이태리요?" 몰리는 몹시 낙담해 맥없이 물었다.

"선친 회사 중 한 곳에서 큰불이 났답니다, 부인" 오그든이 도움이 되는 설명을 해주었다. "방화로 추정된다는 군요, 관리인 한 명과 경비원 한 명이 다쳤답니다. 아무래도 며칠 걸리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해도 직접 쓴 쪽지나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면서 전화 한 통 남기지 않았다. 몰리는 비참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솔토는 화가 난 것인데 그가 곁에 있을 때는 그런 사실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없을 때는 아니었다. 그나마 뉴욕에 불난 게 아니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무고한 사람들이 다쳤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자신이 옹졸하고 인색하고 이기적이다 싶었다.

다음날 저녁, 솔토가 밀라노에서 침착하고 예의바른 어조로 전화를 걸어왔다. "언제 돌아가게 될지 모르겠소. 경찰이 협조를 필요로 해서"

"다쳤다는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경비는 중환자실에 들어가 있지만 젊고 강한 사람이니까 살아날 것 같소. 하지만 나이든 관리인은 이미 죽었소" 뚜렷이 잠긴 음성이었다."비탄에 빠진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불을 낸 인간을 기필코 잡아낼 생각이오"

다음날 아침 시내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몰리는 솔토와의 전화 통화를 떠올리고는 묘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스무 살 때 그녀는 솔토의 외모와 부와 세련됨과 완벽한 표면상의 인상 때문에 그를 경외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알기 위해 제대로 노력해본 적이 있던가?

그가 오빠 내외를 친절하고 요령 있게 대해줬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모든 걸 설명해 주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질문 같은 것은 절대로 못 참아하던 그가 성질을 억누르고 그들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오빠 집을 칭찬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오빠 집은 멋대가리 없이 규모만 큰 건물인 걸 잘 아는데. 게다가 솔토와 같은 지위에 있는 인물치고 일개 고용인이 사고를 당한 것 때문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병원을 찾아 사망자를 애도하는 말은 남기겠지만 정말로 마음을 쓰거나 직접 개입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솔토는 그런 관례에 따르지 않았고, 그런 핑계를 이용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모든 행위가 말보다 더 많은 걸 말해주었다. 냉담한 표면 뒤에 그녀가 주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을 만한 남자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틀 뒤 , 그가 전화를 걸어 방금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며칠 자리를 비운 사이 일이 많이 밀려서 바로 회사로 가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방화범이 잡혔다는 소식을 함께 전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의 그것처럼 거리가 느껴졌지만, 만 하루 만에 걸려온 전화였다. 몰리는 놀란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오후 늦게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오그든이 문을 두드리고는 몹시 흡족한 투로 알렸다. "시튼 목사님께서 오셨습니다, 부인"

몰리는 죄지은 사람 마냥 안락의자에서 화들짝 일어섰다. 도널드가 그 솔직한 눈에 심란한 표정을 짓고 들어섰다.

"안 그래도 전화할 생각이었어요. 정말이에요" 몰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 채로 우물 쭈물거렸다.

"내가 뉴질랜드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 거요"

도덜드가 자리에 앉으며 얄밉도록 정확히 넘겨짚고 나왔다. "하지만 레나가 다 말해줬을 때"

"올케가 뭘 어쨌다고요?" 몰리는 말을 자르고 반문했다.

"레나도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당신이 걱정이 돼서, 그만아이를 가졌다는 얘기를 저도 모르게 하게 된 것 갔소"

도널드가 얼굴을 찡그리며 설명했다. "그래서 솔토를 찾아가 얘기를 나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몰리는 움찔했다. "그러지 않는 건데 그랬어요, 도널드"

"그런데 그와 얘기를 나눈 지 5분도 안 돼 당신이 오빠 내외에게 사실대로 다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소. 그는 당신에게 청혼을 했고, 당신은 그의 청혼을 거절했으면서도 여전히 여기에서 살고 있군. 그가 그런 제의를 다시 할 것 같진 않소, 몰리"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아요.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해서 그와 결혼할 순 없어요" 몰리는 도널드가 평생 이렇게 거북해 본 적이 없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반박했다.

"그건 그릇된 자존심이오. 그런 태도를 고집한다면 그를 영영 잃고 말 거요"

몰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도널드가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볼 때 솔토라는 친구는 자기가 예상했던 결과를 얻지 못하면 아예 그런 걸 원한 적도 없었다고 자신을 타이를 사람 같아 보였소. 당신보다 훨씬 더 위험한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오, 몰리.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속에 품고 있더군"

"그가 뭐래요?" 몰리는 불안하게 물었다.

"씁쓸해하면서도 끝까지 자기 생각은 밝히지 않더군. 아이의 요구에 부합되는 결혼이 바람직하지만 당신이 싫다면 자기는 괜찮다면서 냉혹하고 경멸적인 어조로 그런 말을 하더군"

도널드의 갈색 눈이 흔들렸다. "몹시 분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소, 몰리. 지금 승낙할 만한 이유를 그가 다 쏟아놓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거절하고 있는 거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을 바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소"

도널드의 통찰력을 늘 높이 사오던 터라 몰리는 오싹했다. 그가 떠나고 한참 뒤에도 그녀는 방안을 서성거렸다. 내가 지금 그러고 있었나? 설득하고 안심시켜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그날 아침에 그런 식으로 말해놓고서 그런 바람을 가질 자격이 있을까? 고약한 쾌감을 느끼며 그의 청혼을 대놓고 거절했는데, 실은 청혼의 말을 꺼낼 기회도 주지 않았는데.

부정적이었고 비난을 서슴지 않고 희생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자신의 자존심과 감정만 생각하고 그의 자존심이나 감정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도널드는 그녀의 본심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릇된 자존심을 접고 마찬가지로 힘든 현실을 대면하고 있었다. 궁극적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솔토를 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저녁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솔토가 돌아왔다. 넋을 잃을 만큼 멋있어 보이는 그가 갑자기 아주 소중하게 여겨졌다. 입가에 긴장의 주름이 패이고, 눈엔 어두운 그늘이 졌는데도 말이다.

그녀를 발견하고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옷 갈아입고 올 시간이 있겠소?"

"그럼요" 몰리는 다소 긴장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이젤이 현장 교육에 관한 얘기를 털어놓고 말았나 보지?" 그가 몹시 냉소적으로 물었다.

몰리는 긴장했다. ""

"내게 미소를 짓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봐야지. , 나야 당신 인생을 망쳐놨다고 비난받는 인간이니까" 그가 지극히 냉담하게 상기시켰다.

몰리는 당황해 목이 빨개졌다.

정확하게 15분 뒤에, 그가 낡은 청바지와 스웨터 차림으로 식탁 앞에 나타났다. 지나치게 민감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중대 선언이라도 할 것처럼 느껴졌다.

몰리는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당신 청혼을 생각해봤는데"

"난 그런 기억이 없는데" 그가 치명적일 만큼 효과적으로 끼어들었다.

신랄한 면박에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마음에 없는 말을 좀 했던 것 같아요"

"그렇소?" 그가 식탁에서 떨어져 가름한 손에 포도주 잔을 우아하게 들고서 어슬렁거리며 기운을 빼놓는 말을 했다.

"일을 쉽게 만들어주지 않을 생각이군요?" 그녀의 눈에 비난이 역력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하나만 대 보시오" 어른거리는 금빛 눈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들 듯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우린 함께 아이를 가진 거요, 몰리. 나도 보통 남자와 마찬가지로 유혹에 약한 사람이란 말이오. 다음날 아침 오해를 풀어보려고 했을 때나 이젠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어 2주일 뒤에 일부러 찾아갔을 때도 당신은 포용력 있게 나오지 못했소. 오빠 일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나도 그러지 않는 한은 발언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으니까"

솔직한 비난이 그녀를 흔들어놓았다. "그날 당신이 프레디의 집에서 내게 심한 말을 했잖아요"몰리는 궁색하게 변명했다.

"기분이 상하긴 했어도 마음에 없는 말을 하기는 정말 드문 일이오"

그녀는 입맛을 잃은 채, 앞에 놓인 요리를 내려다보았다. "난 당신과 결혼할 마음이 있어요"

"하고 싶다는 표현을 써야 할 거요" 그가 조용히 지적했다. "할 마음이 있었던 일을 두고 기념일을 삼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우유부단한 말인데 난 그런 사람이 아니오, 카라"

"좋아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이제 당신의 지독한 요구가 충족된 것 같아요?" 닷새 전 거절에 대한 벌로 이런 고생을 시키고 있었기에 몰리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거였소?" 그가 술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당신도 나만큼이나 그걸 즐기면서 섹스는 죄악이라는 듯이 울고불고 하는 터무니없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하오. 그리고 앞으로 한 번만 더 날 약 올리려고 다른 남자에게 도발적인 태도를 취하면 평생 그런 일은 다시 할 엄두도 못 내게 창피를 줄 거요. 우리의 문제를 공개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오"

날카로운 훈계가 이어지는 동안 몰리는 창피해 빨개진 것으로 시작해 분개해 벌개졌다가 다시 창피해지기를 반복하며 몇 번이고 낯빛이 바뀌었다. "그날 밤 날 식탁 제일 끝자리에 처박아 뒀잖아요"

"그거야 당연히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나탈리 옆에 앉게 해줄밖에. 사업상 만찬이었잖소. 믿거나 말거나 당신이 편하고 즐거우라고 그렇게 끝자리에 배치했던 거였소"

몰리는 얼굴이 빨개졌다.

"템플부르크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릴 거요. 아직도 이따금씩 사용하니까. 사진을 한 장도 못 찍게 되면 기자들이 머리를 쥐어뜯으려고 하겠지. 나이젤과 레나가 중인을 서게 될 거요. 특별 허가증을 신청해 놓겠소. 프레디의 동생인 네드 외종조부가 지금 주교로 계신데 허가증을 인정해 주시고 결혼식도 거행해 주실 거요"

몰리는 숨을 죽였다. "모두 계획해 뒀던 것 같네요"

"화사한 걸로 입도록 해요. 조금이라도 웨딩드레스를 연상시키는 옷은 유감스런 기억을 불러일으키니까"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간단히 화제를 바꿨다. 밀라노에서 방화범으로 잡힌 남자에 관한 얘기를 했다. 정신 질환 전력으로 해고돼 반감을 품고 있던 직원이었는데 자기가 지른 불로 인해 인명 피해가 났다는 걸 알고 몹시 괴로워하더라고 했다.

"사람을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더군" 날카로운 눈으로 묘하게 집중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겉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거든. 하지만 우리를 진심으로 열심히 도와야 한다고 느낀 도널드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소"

몰리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알고 있어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솔토가 느릿하고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그 친구를 좀 자극해서 당신에게 보냈는데 대단한 계략이었다고 생각지 않소, 카라?"

유쾌하게 자신에 넘친 말의 결과가 이해되는 동안 몰리는 분개해 가슴이 들썩거렸다. "어떻게 도널드를 그런 식으로 이용할 수 있어요?"

"물론 당신의 도도한 태도는 땅에 떨어졌겠지만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결혼한다는 뻔한 사실을 드러내기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결혼식을 올리는 게 바람직할 것 같아서 그랬소" 그가 차분히 말했다. "임신한 표가 나는 신부는 신랑이 마지못해 결혼한다는 인상을 남길 위험이 있는 것 같아서"

 

몰리의 드레스를 본 레나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홍색에 어깨가 드러나고, 소용돌이치는 치마 길이는 무릎 위로 10센티미터 가량 올라가 있었다. 펄럭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에게서 신부다운 면이라고는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정말 근사하네요" 마침내 올케가 인정했다. "솔토 씨는 좀 더 전통적인 드레스를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는 내가 뭘 입든 더 이상 날 좋아하지 않아요, 몰리는 낙담한 심정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이태리에서 돌아온 뒤로 솔토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 이제는 임신한 몸이라 성적으로 매력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화가 나서 그런가? 지난 닷새 동안 그는 오직 일에만 매달려 있었고, 몰리는 자신의 판단 착오를 반성하는 시간만 가져야 했다. 그때 프레디의 집에 남아서 그와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오빠가 처한 곤경을 무기 삼아 휘둘러 그와 거리를 두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사무실로 찾아왔을 때 그렇게 쌀쌀하게 대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솔토는 그걸 협박으로 여기고 그녀의 허세에 도전하겠다는 말로 대처했던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이 정말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오빠를 도와주지 않는 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게 협박이 아니고 뭐겠어?

몰리는 이제야 씁쓸히 인정했다. 그녀가 오빠를 사랑하는 만큼 솔토에게도 나이젤의 일이 양심에 찔리지 않는다고 말할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가씨가 뭘 모르고 계시네요" 레나가 천천히 방안을 돌아다니며 조심스런 손길로 광택 나는 나무를 만져보거나 걸음을 멈추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걸 놔두고 떠날 생각을 하셨대요? 게다가 솔토 씨를요? 그렇게 잘생기고 매력적인데. 지난번에 일을 좀 그르쳤으면 어때요?"

"일을 좀 그르쳤다고요?" 몰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며 되물었다.

"내가 볼 땐 그 사촌이라는 여자가 꼬리를 쳤던 건데 아가씨가 결혼 첫날밤에 그 여자에 대해 너무 극단적으로 나갔던 것 같아요. 남자들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버릇없는 아이처럼 날뛰는 경향이 있거든요"

"솔토의 자존심은 난공불락이에요. 버릇없는 아이처럼 구는 그가 상상이 안 되네요" 몰리는 방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을 오가며 딱딱거렸다.

레나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저 그날 밤 일을 아직도 그분의 탓으로 돌리면 안 될 것 같다고요, 아가씨.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에요"

"아직도 그러진 않아요" 수줍음 많고 조용한 올케가 남자에 대해 놀랍도록 냉소적이고 권위적으로 말하는 사실이 몰리로서는 놀라울 뿐이었다.

"이번 결혼식이 정말 두 사람의 새 출발이길 바라잖아요"

"그인 날 사랑하지 않아요. 그 여자를 사랑하지" 몰리는 뻣뻣하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무슨 새 출발이 되겠어요?"

"만약 진짜로 그 여자를 사랑했다면 아가씨와 헤어진 뒤 그녀와 결혼했겠죠. 아가씬 지금 사서 고생하는 거예요" 레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젠 다 지난 일이에요"

몰리는 심장이 쿵쾅거려 창밖을 초점 없이 응시했다. 정말로 이제 다 끝난 일일까? 그 헛되고 불가능한 사랑이 정말 사라진 걸까? 레나는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몰리 자신이 의심했던 걸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 솔토와 판도라가 결코 두 사람이 바라는 관계로 결합될 수 없는 비밀을.

만약에 리카르도 크리스탈디가 처제와 바람을 피워 메리엘이 아이를 낳았다면 판도라는 솔토의 이복동생이 되는 거였다. 출생증명서엔 그렇게 돼 있지 않다 해도 그 사실을 증명하거나 의심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하더라도 몰리는 솔토가 그런 사실을 이용해 근친상간이라는 바르지 못한 삶을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부정한 관계를 지속하지는 신호를 주고받기보다는 결혼을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돌봐줄 거라는 약속으로 판도라를 달래면서 그녀를 진정시켰던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판도라는 순순히 그를 놔주려 하지 않았고, 몰리는 새로 알게 된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아 판도라에게 좋은 일만 시켰던 것이다.

결국 그런 짓을 한 것이 아니던가? 고함을 지르고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해대면서 그의 얘기를 듣지도 않고 결혼 첫날밤에 집을 뛰쳐나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먼저 떠난 건 그였다. 그리고서 그는 밤새 판도라와 함께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 당시에 두 사람이 열광적인 재회를 하지 않았다면 뭘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전적으로 솔토의 잘못이라고 믿고 있던 마음에 처음으로 의심의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그날 밤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고, 알 필요가 있었다. 진실이 아무리 충격적이라 할지라도.

저택 부지 내에 자리한 오래된 석조 예배당 안은 몹시 쌀쌀했다. 소름이 돋은 맨 팔을 내놓고 좁은 통로를 걸어가는데 제단 앞에 서 있던 솔토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반짝이는 짙은 눈이 커지더니 금빛을 발하며 재빨리 그녀를 죽 훑어보았다. 모양 좋은 입가에 즐겁게 음미하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예식은 간단히 끝이 났다. 몰리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심장이 아주 세차게 뛰고 있었다는 것밖에는. 이 결혼을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마, 그녀는 끈질지게 자신을 일깨웠다. 그는 아이 때문에 너와 결혼하는 거야, 정말이지 아무것도 변한 건 없어.

예배당을 나서자 솔토가 상의를 벗어 그녀의 맨 어깨에 둘러주었다. 실크 안감에 남아 있는 체온이 말할 수 없이 따뜻했다. 흘끗 옆에 있는 그를 돌아봤다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짙은 금빛 눈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쇼핑할 때 기온은 고려하지 못했네요"

"아주" 그가 섹시하게 나직이 올리는 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보기 좋소"

오그든이 응접실에서 삼페인을 대접했다. 몰리는 솔토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고,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의 작은 외종조부인 네드가 템플브루크에 소장돼 있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도자기에 관해 끝없이 얘기를 늘어놓는 동안 나이젤과 레나가 작별인사를 하고 먼저 떠났다. 브루크 가문의 전통에 따라 솔토도 수집가의 일을 하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전문가들이 특별 예악을 하고 찾아와 저택 서편에 특별히 마련된 네 개의 방에 전시돼 있는 소장품들을 보고 가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떠나기 전에 다시 재회한 한 쌍을 보고 가야겠구나" 네드가 결연히 말했다.

"그러셔야죠" 솔토가 검은머리를 약간 기울이자 오그든이 그 말없는 부름에 답해 방안을 걸어왔다. 몰리는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그런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얼마 동안 떨어져 있었지?" 네드가 상냥하게 물었다.

"제가 태어난 날 밤부터죠" 가름하고 힘찬 솔토의 얼굴이 이상하게도 긴장되어 보였다.

"몰리는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를 거야" 네드가 그녀를 향해 미안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솔토의 아버지와 우리 형님이 바로 그날 저녁 포커 게임을 하셨거든. 리카르도가 템플브루크에 소장하려고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구입한 알 모양의 카키에몬 화병에 대해 끝도 없이 자랑을 늘어 놓자"

"프레디는 돈이 많다는 걸 자랑하려고 그런 걸 사들였다며 아버지를 경멸하셨소" 토가 끼어들었다. "내 아버지는 그림만큼이나 화병에 대해 잘 모르셨거든"

"프레디 형은 그 한 쌍의 화병 중 하나에 자기의 전 재산을 거셨어" 네드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만 내 형님이 이기고 만 거야. 리카르도는 깜짝 놀라 엄청난 액수를 제시했지"

"하지만 외종조부님은 그 화병을 집으로 가져가 감상하겠다고 하셨소" 솔토가 비꼬는 듯한 저음으로 말을 맺었다.

몰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이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녀의 방 서랍장 위에 올려둔 그 화병 얘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 테고. 가름한 손이 등에 얹히더니 몰리를 부드럽게 복도로 밀었다.

"솔토" 몰리는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물론 다들 프레디 형님이 그걸 솔토에게 물려주실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 네드가 킥킥 웃었다.

"그런데 안 그러셨어요" 그가 지친 기색이 깃든 어조로 중얼거렸다. "몰리에게 남기셨죠"

", 저런!" 노인이 재미있다는 듯이 짧게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랬다고? 하여튼 형님이라니까. 정말 대단해. 끝까지 반대로 나가시다니. 그래도 이제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셈이군, 안 그래?" 그가 더욱 힘차게 웃으며 몰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엄청난 혼수를 해왔군, 우리 손부가. 그 화병에 대해 솔토가 값을 매기려고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솔토의 선 굵은 얼굴이 차츰 굳어지더니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가 침울한 눈길로 장황하게 말 많은 노인네를 흘끗 돌아보았다. 가장 큰 전시실에 도착했을 때 중앙 유리 탑이 이미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몰리는 프레디의 화병과 똑같은 화병을 보았다. 그 모습이 그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오그든이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힌 걱정스런 얼굴로 그와 짝이 되는 화병을 경건하게 품고 들어와 아주 조심스럽게 그 옆에 놓았다.

"기억에 남을 만한 순간이로군" 네드가 솔트의 등을 철썩 치며 즐겁게 노래를 불러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긴장감 도는 분위기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걸 드러냈다. "오늘 결혼식의 하이라이트군 그래. 아주 오랜 세월을 기다려온 화해이기도 하고"

감상조의 말들이 그후로도 계속 이어졌지만, 몰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 동양 여인과 사내와 새와 벚꽃을 색깔이 있는 법랑으로 세 면의 예쁜 화판에 장식한 자신의 화병을, 자신의 귀중한 화병을 멍하게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백짓장 같은 얼굴을 한 채로 서 있는데 솔토가 원기 왕성한 외종조부를 구식 롤스로이스까지 모셔다 드리고 돌아왔다.

몰리는 충격과 비난이 가득한 눈길을 담은 채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런 얘기를 안 해줄 수 있었어요?"

마음이 어지럽도록 차분한 짙은 눈이 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빠를 구해주려고 저 화병을 경매로 팔았다면 그분의 마지막 바람을 아주 철저히 배신한 꼴이 됐을 거요"

 

 

 

9

몰리는 미안한 기색도 없는 그의 반응에 움찔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그 화병이 얼마나 나가는 거예요?"

"독특한 한 쌍 중 하나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도 나한테는 무한한 가치를 지니지" 솔토가 놀랍도록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래서 외종조부님이 저걸 당신에게 남기셨던 거요. 내가 저걸 사기 위해 당신에게 접근하리란 걸 알고서"

"당신에겐 절대로 팔지 않았을 거예요" 몰리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그의 말을 잘랐다. "당신에게 파느니 깨버렸을 거라고요"

"프레디 외종조부님은 당신을 무척 아끼셨소. 우리가 헤어졌을 때 그분은 큰 충격을 받으셨지. 어떤 이유에선지 우리를 한사코 다시 결합시키려고 하셨소" 급격히 자제력을 잃어가는 그녀와는 정반대로 점점 차분해져 가는 솔토가 아주 조용히 중얼거렸다.

"얼마나 나가는지 아직 대답해주지 않았어요"

거뭇하게 잘생긴 그의 얼굴이 불쾌한 듯이 굳어졌다. "세간에 내놓으면 최소한 50만 파운드는 받을 거요. 그렇지만 같은 기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다른 짝이 있어서 그보다 훨씬 더 나갈 거고 팔리지도 않을 거요"

"50만 파운드보다 더 나간다고요?" 몰리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속삭였다. "당신은 내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요"

그녀는 어지러운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를 등지고 돌아섰다. 솔토나 그의 돈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오빠를 구할 수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사실을 알려줄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무지를 이용해 사악한 협상을 맺도록 그녀를 이끌었던 것이다. 몰리는 뜻밖의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내내 알고 있었으면서" 그녀는 괴롭게 중얼거렸다.

"나이젤은 그렇게 큰 희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친구였소, 몰리. 외종조부님은 적어도 그분의 유산이 당신에게 재정적인 안정을 주길 바라셨던 거요. 그걸로 우리 두 사람이 재결합할 수 있기를 바라셨던 거란 말이오" 솔토가 무뚝뚝한 저음으로 말했다.

"오빠에게 어떤 자격이 있는지는 내가 판단할 일이에요"

솔토는 성난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나이젤은 철이 들고, 제 발로 서고, 책임을 질줄 알 필요가 있소. 당신이 오빠의 빚을 대신 갚아주면 고작해야 2년 뒤에는 똑같은 곤경에 처하게 될 텐데, 그땐 어쩔 생각이오?"

"내 무지를 이용한 걸 정당화하고 있군요" 몰리는 괴로운 듯 쏘아붙였다.

"몰리, 저 화병은 겹겹이 방호 포장 돼서 특별 택배로 당신에게 배달되었소. 그게 아주 귀중한 물건이라는 걸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누구라도 금방 알아차렸을 거요"

"그 당시 난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그리고 생전에 그분이 그렇게 사시는 걸 본 내가 저게 그렇게 귀한 물건인 줄을 어떻게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그분의 집도 당신 집안 소유인데"

"돈은 충분했지만 취향이 소박한 분이셨소. 그 화병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아낸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재산 자랑을 늘어놓는 남자에게서 몰상식하고 괴팍한 노인네 취급을 받는데 진력이 나셨기 때문이었소" 솔토가 화가 나 벌겋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과 팽팽한 입술을 바라보았다. "화병은 당신 거요, 몰리.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그걸 사겠"

"차라리 깨버릴 거예요" 그녀는 단언했다.

경멸적인 몸짓으로 그가 가까운 진열장 위에 열쇠를 툭 내던졌다. "맘대로 해요. 하지만 10분 뒤에는 아래층으로 내려오도록 하시오.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니까"

"공항이라뇨?" 몰리는 멍하게 되물었다.

"카리브 해로 신혼여행을 떠날 거요"

몰리는 어이 없어하는 눈길을 던졌다. "이러고도 말이에요? 농담 말아요"

무자비한 어두운 눈에서 도전적인 불꽃이 튀었다. "농담이 아니오. 그래도 기어코 지금부터 10분 동안 연좌 농성을 벌여야겠다면 당신을 무릎에 엎어놓고 엉덩이를 때려줄 참이오. 그렇게 되면 거의 일주일 동안은 그 매혹적인 엉덩이로 어딘가에 앉기는 다 글렀을 거요"

격분한 몰리는 이를 악물고 정확히 930초 뒤에 복도에 도착했다. 갈아입을 시간이 없어 여전히 현란한 진홍색 드레스 차림을 하고서 터질 듯한 침묵 속에서 차에 올라탔다. 솔토가 별장 북쪽에 특별히 마련된 헬기 이착륙장에 헬리콥터를 착륙시키는 동안, 몰리는 녹음이 울창한 작은 섬 카르발호가 보석 같은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검은 윤곽을 드리우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혀 감동 받을 기분이 아닌 그녀는 시무룩하고 구겨진 기분으로 향기 나는 훈훈한 초저녁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길고 낮은 구조의 별장은 주변의 숲과 동화되게 설계되어 주위 환경이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미관을 간직하고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부득이한 경우에만 얘기를 나눴을 뿐 몇 시간 동안 계속 침묵을 지켜왔지만 더 이상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런 곳이 있다는 얘기는 없었잖아요"

"4년 전,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으니까. 결혼식 다음날 아침 이곳으로 올 생각이었소" 솔토가 걸음을 멈추고 흰 꽃이 꽂힌 도기 항아리들로 장식된, 타일이 깔린 넓은 복도로 그녀를 먼저 들어가게 했다. "아버지가 이 섬을 사서 별장을 지으셨지만 어머니는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모르셨소. 여긴 아버지의 은신처인 셈이었지"

"여자들을 이곳으로 데려오셨다는 뜻이겠죠"

"어휘 선택이 특이하군. 꽤나 혐오스럽게 들리는데"

"당신 아버님은 유부남이었잖아요" 몰리는 불쾌하게 응수했다.

"어머니는 날 낳으신 뒤로 아버지와 각방을 쓰셨소.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신 거지" 그의 어조가 냉담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템플브루크를 복구하고 유지할 능력이 되셨기 때문에 그분과 결혼하신 거였소. 어머니는 아주 차갑고 냉정한 분이셨고, 아버지는 피가 끓던 분이셨소. 다른 곳에서 위안을 찾은 아버지를 탓할 수만은 없지. 적어도 조심하려고는 애를 쓰셨소"

솔토의 도덕성을 일깨워 주는 단면일까? 조심하기만 하면 부정을 저질러도 괜찮다는? 그래서 판도라가 뉴욕에 가 있는 건가? 몰리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들을 성급하게 억누르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어찔하도록 강렬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했다.

숨이 가빠오자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힘껏 들이마셨다. "옷을 갈아입어야겠어요."

"배고프오?"

"아뇨"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건지 솔토가 2층으로 데려가 조각된 문을 밀어 호화로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몰리는 미닫이문 밖으로 펼쳐진 전망을 좀 더 잘 보기 위해 방을 가로질러 갔다. 밑으로 보이는 폭포와 넓은 천연 풀장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가 왜 이런 곳에 별장을 지었는지 알만 했다. 몰리는 그의 자리에서 드레스 지퍼를 내리고 후련한 한숨을 내쉬며 옷 속에서 빠져나왔다.

", 그 밑에 뭘 입고 있을까 궁금했는데"솔토가 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돌아서 봐요"

그의 말에 복종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깜짝 놀라서 돌아선 것이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나길래 그가 나가고, 방에 그녀 혼자뿐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문에 느긋이 기대어 서서 육감적인 젖가슴을 감싸주고 아직까지는 가는 허리를 조여 주는 진홍색 공단과 레이스로 된 코르셋 겸 브래지어가 만들어내는 효과를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런" 모양 좋은 다리를 감싸고 있는 상단에 레이스가 달린 매끈한 스타킹과 거미줄 모양의 작은 회색 실크 팬티를 훑어보며 그가 신음했다. "그 안에 뭘 감추고 있는지 알았더라면 아까 비행기 안에서 당신을 취하는 건데"

얼굴이 빨개진 몰리는 화려한 란제리를 사 그를 놀래주고 싶었던 일시적인 욕구를 후회하며 다시 드레스를 끌어올리고 싶은 충동과 싸웠다. "난 아직 그 화병 문제로 화가 안 풀렸단 말이에요" 그녀는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듯 재빨리 경고했다.

"그래서 당신과 같이 안 잘 거예요, 알아들었어요?"

"알아 듣긴 했지만 그 말에 따르진 않을 거요" 솔토가 뒤로 손을 뻗어 문을 잠갔다. "눈앞에 에로틱한 환상이 펼쳐져 있거든. 날 이 방에서 끌어내자면 아마 무력을 써야 할 거요. 어쨌거나 순수한 욕망과 거의 2주간에 걸친 냉수 샤워의 효과로 달아올라 있지 않더라도 당신이 한 가지 작은 사실을 잊은 게 있소"

"한 가지 작은 사실이라뇨?" 몰리는 이글거리는 금빛 눈이 발하는 억누를 길 없는 성적 격정에 휘말려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떨리는 소리로 되물었다.

"이번엔 신방을 차릴 때까지 내가 마음을 놓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오. 불운했던 지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가 나른하게 빈정거렸다. "결혼 무효 선언은 혈기 왕성한 보통 신랑이 신문에서 보고 싶은 내용이 아니거든"

"<솔로 불감증의 신부를 버리다>는 어때요?" 몰리는 쏘아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난 그걸 보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족제비 같이 생긴 파파라치가 왜 신부를 취하지 못했냐고 비웃으며 물어보는 건 어떨 것 같소?" 불쾌한 기억에 경직되어 어두운 얼굴로 그가 받아쳤다. "그런 말을 품위 있게 쓸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요, 카라"

몰리는 움찔하면서도 화가 치밀었다. 저런 굴욕적인 사실을 어떻게 면전에 대고 쏟아낼 수 있다지? 어떻게 그 불쾌하고 구역질나는 인간들이 나를 그런 식으로 매도했다는 사실을 말해줄 수 있는 거야?

"약혼 기간 내내 당신이 독신을 맹세한 수도승만큼이나 날 취하는 데 관심이 없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런 질문에 크게 기분이 상했다니 나로선 그저 놀라울 뿐이네요" 몰리는 돌연 복수심에 사무쳐 쏘아붙였다.

그녀는 솔토가 아연해하는 모습을 보자 만족스러웠다.

"독신을 맹세한 수도승?" 너무도 어이없다는 듯한 짙은 금빛 눈이 목표물에 꽂히는 레이저빔처럼 그녀를 향했다.

"평소의 당신 평판으로 볼 때,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나와 자고 싶어 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곧 내 실수를 깨닫게 됐죠, 안 그래요? 거세한 남자와 데이트하는 게 나았을 거예요. 당신은 한 번도 날 간절히 안고 싶어 한 적이 없었어요"

결국 둘이 헤어진 뒤에 여자로서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기분이었는지 그때의 기억에 새삼 괴로움이 밀려들자 그녀는 내뱉다시피 말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에 대한 마음이 바뀌었네요"

"거세한 남자?" 그가 힘겹게 나직이 뇌까렸다. "내가 잘못 알고 있다면 바로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당신이란 사람은 내가 가슴에 손만 대도 질겁하던 처녀 아니었소?"

몰리는 얼굴이 빨개지며 우물쭈물했다. "그건 질겁한 게 아니라 부끄러웠던 거예요"

"내 자신을 억제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르는데, 지금 와서 이런 말을 듣고 있다니 내가 어느 별에 살고 있는가 싶군" 그가 다듬어지지 않은 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당신은 고슴도치보다도 더 제약이 많은 사람이었소. 거기다 더 큰 단점까지 있었소"

그때 그녀를 곁에 두고 참는 게 아주 힘들었다고?

"단점이요?" 몰리는 고르지 않은 소리로 되물었다.

"당신 계부는 우리가 데이트할 때마다 늦게까지 안 자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이 내 차에 재킷을 두고 내려서 몇 분 뒤에 그걸 돌려주러 다시 돌아갔었소"

솔토가 무뚝뚝하게 털어놓았다. "현관 밖에 서서 그 잔학한 심술쟁이 영감이 당신에게 섹스에 대해 설교를 해대며 당신이 나와 자고 있는 게 발각되는 날엔 집에서 내쫓아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걸 들었단 말이오"

그런 고백이 이어지는 동안 몰리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갑자기 창피해 몸 둘 바를 모르겠고 죽고만 싶었다. 당시 계부의 경고성 비난과 협박은 악몽과도 같은 굴욕감을 안겨줬었다. 그의 냉혹한 의심의 눈길과 솔토와 함께 뭘 했는지 시시콜콜 다 털어놓으라는 요구에 집에 돌아가기가 정말 싫었다.

솔토는 거칠게 쓴웃음을 터뜨렸다. "그 자는 당신이 마치 방탕한 여자 색광이라도 되듯이 말하더군. 더 이상 당신이 왜 그런 태도를 취하는지 의아해 하지 않았지. 그 비열한 인간이 당신을 괴롭히고 모욕하는 걸 보고 나서 알아야 할 모든 걸 알게 됐으니까. 그런 걸 보고도 어떻게 그 잘난 체하고 독선적인 면상을 갈겨주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모를 일이오"

몰리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떨구었다. "몰랐어요" 기어들어가는 소리였다. "계부가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걸 당신이 들은 줄 알았다면 난 아마 수천 번은 더 죽었을 거예요"

"내가 그때 당신과 사랑을 나눴다면 당신은 타락한 여자처럼 몰래 집으로 들어갔을 테고, 그렇게 되면 당신 계부는 당신이 뭘 하다가 돌아왔는지 금방 알아챘을 거요" 그가 씁쓸히 예견했다. "당신에게 그런 일을 겪게 할 순 없었소. 난 당신이 계부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다 털어놨을 테고, 그럼 그 지는 당신을 매춘부 취급을 했을 거요"

마침내 그 당시 솔토가 놀랍도록 자제했던 이유를 알게 된 몰리는 그와 다시 눈이 마주치기 전에 마룻바닥이 입을 벌려 그 안으로 빨려들어 갔으면 싶었다. "그랬을지도 모르죠"

"당신은 갈망과 호기심이 아주 자극적으로 결합된 눈길로 날 바라보곤 했지" 그가 깊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평생 처음으로 난 기꺼이 참아볼 생각이었소. 하지만 큰 실수였던 게 그 새로운 개념에 적용하고 나자 오히려 기대감이 아주 에로틱한 흥분을 안겨다 줬지"

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참은 뒤에 결국 그가 받아야 했던 비참한 결말이었다. "몰랐어요 그런 말을 해서 미안해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도승에 거세한 남자라" 그가 정말 재미있다는 듯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되뇌었다. "열일곱 살 이후로 그때가 가장 오랫동안 금욕해본 시기였소"

솔토는 그녀를 위해 고결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몰리는 양탄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정도로 많은 걸 감추고 있는데 어떻게 짐작할 수 있었겠어?

"당신 외종조부님이 내게 남기신 유품이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는 걸 왜 알려주지 않았는지 다시 설명할 수 있겠어요? 그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가 사뿐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숱 많은 까만 속눈썹 밑에서 가늘고 길게 반짝이는 금빛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한 가지 뻔한 사실에 더해 내가 인용했던 모든 이유 때문이거나 원하는 게 있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손에 넣고 만다고 했던 말 기억나오?" 위로 손을 뻗어 스타킹 벨트를 풀며 그가 놀리듯이 중얼거렸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몰리가 놀라서 물었다.

"뭘 하고 있는 것 같소?" 나머지 벨트도 푼 뒤 천천히 애무하듯 스타킹을 벗겨 내리며 그가 목쉰 소리로 물었다. "가게로 들어가 이런 란제리를 사는 데 당신으로선 큰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날 위해 이걸 샀군"

그가 만족해서 기분 좋게 가르랑거리는 소리에 몰리는 코르셋 색깔만큼이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드레스엔 아무거나 입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갑자기 진홍색에 스타킹 벨트까지 생각해냈다? 당신이 순수하게 처음으로 내게 던진 유혹을 즐기고 있는데 흥을 깨지 말아요" 이제는 바르르 떨리고 있는 호리한 허벅지를 따라 그가 나머지 스타킹도 벗겨 내렸다. "정말 아름다운 살결이군"

"그래요?" 숨 가쁜 고음이 나오자 그녀 자신도 깜짝 놀랐다. 버둥거리는 폐와 함께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주 기막힌 모래시계형 몸매에"

"나더러 살을 좀 빼라고 하던데" 몰리는 투덜거렸다.

"무슨 소리"그가 숭배하는 손길로 풍만한 엉덩이를 쓸어 올리며 확신에 차 반박하자 그녀는 강풍에 휘날리는 나뭇잎처럼 전신을 떨었다.

"아니면 가슴 축소 수술을 받던가" 거의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속삭였다.

"누가 그런 소리를 했다는 거요?" 그가 격분해 따졌다.

"생각은 안 나요" 그녀는 숨죽인 소리로 대답했다.

"멋진 가슴이란 말이오" 그가 배에 입술을 묻고 잠시 손을 붙잡아 둔 뒤 전율이 이는 그녀의 팽팽한 전선을 느꼈다. "그리고 이 안에 내 아이를 갖고 있고" 그가 몹시 만족스럽게 덧붙였다.

유연하게 몸을 일으킨 솔토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한 차례 뜨겁게 입을 맞춘 뒤 넓은 소파 침대 위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몰리는 사랑과 갈망이 가득한 눈길로 타고난 우아한 동작으로 옷을 벗는 그를 지켜보았다. 순간 그가 내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제 그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그런 생각이 더했다.

"3주 뒤에는" 솔토가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3주요?" 그녀는 놀라서 되물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쯤이 되어서는 당신이 알몸으로 이 섬을 돌아다니게 만들 거요" 그가 의욕적으로 예견했다.

"그렇진 않을 거예요" 그녀는 경고했다. "사롱 같은 거라도 걸친다면 또 모를까"

솔토가 아주 재미있다는 듯 금빛 눈을 반짝이며 껄껄 웃었다. 긴장을 푼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그가 침대로 어슬렁거리며 걸어와서는 뒤로 다가와 앉더니 그녀의 등에 털이 북슬북슬한 따뜻한 가슴을 밀착시켰다. "오랜 시간 이런 코르셋을 입고 있느라 힘들었겠소" 그가 양심에 찔린 어조로 중얼거렸지만 극히 미미한 정도였다.

지퍼를 내리고 코르셋을 옆으로 벌리더니 구릿빛 손이 풍만한 가슴을 움켜잡고는 천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몰리는 눈을 반쯤 감고 전신을 떨며 강렬한 쾌감에 신음 소리를 뱉었다. 솔토가 자기 앞으로 몰리를 돌려 앉혔다. 그러자 그녀가 두 손으로 그를 꽉 움켜잡고 숨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입을 맞추었다. 지금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렬히 원하고, 갈구하고, 더 필요로 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놀란 솔토가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는 천천히 헝클어진 머릿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외종조부 댁에서의 일은 하룻밤 정사가 아니었소" 짙은 금빛 눈으로 갑자기 불안해진 그녀의 얼굴을 훑으며 그가 조용히 말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해 자제력을 잃고 관계가 끝난 뒤 비열하게 굴긴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하지 않은 건 아니었소"

아이를 갖게 된 밤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기억을 누그러뜨리려고 이런 말을 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어 몰리는 목이 잠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매끈하게 움푹 들어간 넓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마치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듯 후끈하게 각성된 그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그가 몰리의 얼굴을 부여잡고 들어 올려 입을 맞추다가 돌연 굶주린 남자처럼 으르렁거리며 그녀 위로 올라왔다. 그녀가 다리로 그의 몸을 감아 아주 오래 되고 본능적인 유혹을 시작하자 그가 신음 소리를 내뱉더니 갑자기 숨을 앗아갈 정도로 힘차게 밀고 들어왔다.

"날 어떻게 미치게 만드는지 아주 재빠르게 깨우쳐가고 있군" 둘의 세 번째 관계가 끝난 뒤 일광욕을 즐기는 커다란 고양이처럼 몹시 만족한 솔토가 그녀를 끌어안고 나른하게 한숨 섞인 소리로 말했다. "이제 초야를 치렀으니 결혼을 무효화시킬 기회는 없고, 간통죄로 날 잡아넣을 일도 없을 거요. 그럴 기운이 없을 테니까"

몰리는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움찔해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입을 열어 말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지난번에는 그랬잖아요"

솔토가 난폭하게 그녀를 밀어내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몰리는 눈을 질끈 감고 집중력 부족과 충동적인 혀와 지금까지 꿈이 실현된 것 같았던 결혼 첫날밤을 망쳐버린 자신을 저주했다.

"정말 때를 잘도 맞추는군" 그가 싸늘히 격분해 이를 갈 듯이 말하고는 침대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목에서 뭔가 울컥 솟아올랐다. "솔토"

"그날 밤, 판도라가 각성제를 과다 복용했었소" 그가 마지 못해 내뱉듯이 말했다. "전화로 내게 그럴 작정이라고 말하길래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희망에 의지할 수만은 없었소. 다른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할 수도 없었고, 달리 방법이 없었소. 내가 가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소. 그날 밤 일로 결코 사과하지 않을 생각이오"

몰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겁에 질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아파트 뒷문으로 그 애를 몰래 데리고 나가 개인병원에 입원시켰소. 언론이 개입되는 게 싫었으니까. 괜찮을 거라는 걸 확인할 때까지 병원에 있다가 판도라의 아파트로 돌아갔소.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놨거든. 하녀가 오기 전에 미리 정리를 해놓고 며칠 간 친구 집에 가 있었을 거라는 쪽지를 남겨뒀소"

"세상에, 왜 내게 그런 얘기를 안 해줬어요?" 몰리는 괴롭게 중얼거렸다.

"나 참, 그날 밤 당신이 어땠었는지 생각해보면 그런 질문은 나오지 않을 거요. 그리고 그런 당신에게 알아듣게 설명하고 떠날 시간도 없었단 말이오"

몰리는 지독한 죄책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그런 행동을 하다니 몹시 힘든 상태였던가 보네요"

"그 애는 개인적인 일 때문에 몹시 혼란한 상태에 처해 있었소" 깊게 울리던 공격적인 어조에서 이제는 팽팽히 억제된 어조로 그가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그가 더 이상은 말하지 않으리란 걸 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 혼자서도 나머지 부분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완성된 그림을 보는 건 산 채로 심장이 뜯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가 크나큰 죄책감에 시달렸을 게 분명했다.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순 없는데 판도라가 위험에 처해 있었으니. 그날 밤, 처음엔 방문을 잠그고 피했다가 그가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왔을 때 그녀는 욕실로 달아나 버렸고, 밖이 조용해져 나와보니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 분 뒤 판도라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적어도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말해줬어야죠" 몰리는 미친 듯이 날뛰던 기억이 나 침착하지 못한 소리로 정당화했다. "내게 말해주지 않은 건 공정치 못한 짓이었어요"

"그렇소? 당신이 날 얼마나 싫어하는지 잔인할 정도로 분명히 밝혔는데도 말이오?" 그가 붙박이 옷장으로 걸어가 서랍에서 청바지를 꺼냈다."그날 밤 당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테고,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을 거요. 당신은 느닷없이 내가 그녀와 부정을 저질렀고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했을 뿐이라고 비난해댔지. 도대체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됐던 거요?"

솔토는 약혼식이 있던 날 밤, 그의 서재에서 둘이 나누던 얘기를 그녀가 듣고 있었다는 걸 모른다. 지금 와서 그걸 얘기해야 하나? 그가 아직도 시설을 모두 말해주지 않는데 새삼스럽게 그런 얘기를 꺼내야 할까? 어쩌면 그는 절대로 말해주지 않을 테고 그게 더 안전한 건지도 몰랐다.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감당하기가 더 수월할지도 모를 테니까.

"판도라와는 한 번도 성적인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소. 이번 한 번만 말해두겠소" 그가 아주 강경하게 단언했다. "그러니 그 문제로 다시는 내게 그 어떤 해명도 요구할 생각은 마시오"

난폭할 정도로 솔직한 말에 동요된 몰리는 단호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어두운 눈을 바라보았다. "알았어요"

"그리고 판도라가 심술궂은 말을 했다면, 그건 난 몰랐던 일이오. 당신이 불평을 하지도 않았고"

"어린애가 칭얼거리는 것처럼 들릴까봐 안 했어요"

그가 한쪽 미닫이문을 밀었다. "바람 좀 쐐야겠소"

몰리는 불안하게 헛기침을 했다. "계부가 당신을 잡아가라고 경찰을 불렀던 날 난 목사관에 없었어요. 실은 몇 주 동안 집에 없었고, 제나와 함께 있었어요. 자기 집에 와 있어도 좋다고 해서" 그런 뒤 급히 숨을 들이쉬고 제나의 충동적인 행동이 판도라에 관한 기사로 연결된 경위를 설명했다.

뜻밖에도 솔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젠 상관없소. 다 지나간 일이니까. 하지만 이런 말이 위안이 될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당신을 놓아줬던 거요. 안 그래도 쓰러져 있는 판도라를 발길질까지 당하게 놔둘 순 없어서"

"그때 난 어땠을지 생각해본 적 있어요?" 몰리는 괴롭게 물었다.

"날 조금이라도 믿었다면, 말로 했던 것처럼 날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새벽에 돌아온 나를 기다렸을 거요" 타는 듯한 어두운 눈이 그녀의 동요된 얼굴을 도전적으로 쏘아보았다.

"당신이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만이라도 해줬다면 믿음을 갖고 기다렸을 거예요" 선 굵은 뺨을 붉히면서 솔토가 갑자기 시선을 내리뜨는 걸 보자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당신은 지금 자신이 줄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고 있어요"

"아무도 내게 그런 사랑을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좋을 때도 있었지만 숨 막힐 때도 있었는데. 당신은 내게 미처 반응할 틈도 주지 않았소" 그가 침울하게 받아넘기고는 성큼성큼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

몰리는 흐트러진 베개 더미에 힘없이 털썩 기댔다. 오해를 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형편없지? 오랜 세월 미워해 온 여자에 대해 왜 이렇게 다 늦게 지독한 죄책감과 연민이 들어야 하는 거지? 그리고 솔토는 어떻게 판도라를 헐뜯는 기사를 보고서 둘의 결혼을 포기할 결심을 했다는 잔인한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더러운 물에 발가락만 하나 담가도 더러워지게 마련인 거요" 도널드의 말이 옳았다. 제나에게 너무 많은 걸 알려줬던 건 판도라를 뒤에서 찌른 그녀의 부정한 수법이었다.

숨이 막혔다고? 그녀는 움찔했다. 불안감이 그녀를 매달리게 만들었고, 너무 독점적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가 줄 수 없어 보이는 확신을 끊임없이 갈구하면서 솔토가 양심의 가책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식의 소란을 피우게 만들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몰리가 절박하게 나갈수록 점점 빠르게 뒤로 물러났었다. 지금처럼.

몰리는 휑하니 침대를 빠져나가 성난 걸음으로 미닫이 문 쪽으로 걸어가서는 별이 총총한 하늘을 향해 양쪽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파도가 해변을 덮치듯 그녀에게 붙잡혔다는 기분으로 해변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3주일을 예정했으니 이제 어쩔 수 없었다.

"상어에게 잡아먹혔으면 좋겠어요"몰리는 화도 치밀고 확신에 가까운 자신감이 생겨 들리든 말든 소리를 질렀다. 혼란한 감정을 발산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상어가 당신을 못 잡아가면 나라도 그럴 거예요. 결혼 첫날밤에 또다시 날 두고 떠날 권리가 당신에게 없으니까"

그가 풀장 너머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방에서 새어나간 부드러운 불빛 속에 과묵한 약탈자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풀어 헤쳐진 셔츠 사이로 털이 무성한 구릿빛 가슴이 드러나 있었고, 몸에 꼭 끼는 색 바랜 청바지 속에 싸인 길고 곧은 다리는 약간 벌어져 있었다.

그녀가 맥 풀린 표정을 짓는 걸 보고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고 다가왔다. "사실상 많은 걸 알려주는 행동이었소, 몰리. 그리고 아주 기운을 나게 해주기도 하고. 당신이 토라져 날 외면하고 등을 돌리는 건 싫거든. 당신답지 않으니까. 힘차게 공격을 가하고 주먹을 날리는 게 당신답지. 당신은 내가 아는 여자 중에 유일하게 무례하다고 내게 주의를 주고, 듣고 싶지 않은데 내게 소리를 치는 여자거든" 가 조용히 털어놓았다. 묘하게도 매력적인 특성이지"

"그래요?" 어찔한 미소에 아직도 가슴이 뛰어 그녀는 속삭이는 소리로 되물었다. "난 또 당신을 인도네시아 정글로 쫓아내는 특성인 줄 알았죠"

날렵한 까만 눈썹이 한쪽으로 찡긋 올라갔다. 강렬한 눈이 많은 내용을 담고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녀의 나신을 음미하듯 훑어 내려갔다. "원하는 모든 게 바로 여기 있는데. 위협적인 사롱도 걸치지 않고"

그제야 태어났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 있다는 걸 깨달은 몰리는 평생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욕을 나직이 내뱉고는 급히 침대로 달려갔다. 솔토가 허스키한 웃음을 터뜨리며 자기 영역을 배회하는 맹수처럼 침대로 유유히 다가왔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짙은 눈에서부터 정열적인 윤곽의 고집 센 입술까지 사람을 사로잡는 강렬한 관능미를 발산했다.

"혼자 남겨진 지 10분도 채 안 돼 외로움을 느끼다니 다행이군. 당신과 다시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아주 멋진 구실을 만들어주는걸" 우아하게 옆으로 다가와 누운 그가 놀랄 만큼 섹시한 동작으로 단숨에 셔츠를 벗어 던지며 중얼거렸다.

 

 

 

10

"딸이면 크리스터벨이고, 아들이면 재스퍼인 거요. 우리 집안은 이름을 특이하게 짓는 전통이 있거든" 그가 설명했다.

"그런 당신이 몰리라고 불리는 메리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평범한 여자와 결혼하게 되다니 놀랄 일이네요" 몰리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풀장 속에 잠긴 암반 위에 앉아서 부드럽게 일렁이는 물살이 살갗을 어루만지는, 그늘에 가려진 햇살이 벗은 등을 간질이는 걸 즐기고 있었다.

솔토가 날쌔게 물속으로 헤엄쳐 다가와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세례명은 메리 에르멘트루드잖소" 그녀가 반갑잖은 일깨움에 움찔하는 걸 보고서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아주 믿음직한 이름이지만 흔하진 않지"

몰리가 다리를 물속으로 내리는 순간, 솔토가 손을 뻗어서 그녀를 안아 올리고는 그녀의 멋진 다리로 자신의 허리를 감게 했다. 육감적으로 이글거리는 짙은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이래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그가 곧 알아챘다.

"그래서 불만이에요?"

"전적으로 찬성이지" 그가 풀장을 빠져나가며 가르랑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몰리는 고개를 떨구고 물에 젖어 매끈한 그의 어깨를 입술로 물면서 압박해갔다.

"크리스탈디 부인, 당신은 지금 날 무척 흥분시키고 있는 거요"

"난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

그가 판도라와 잔 적이 없고 그래서 그런 면으로는 그녀와 비교될 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얼마나 지신감이 생기고 거리낌이 없어졌는지 그녀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그의 가슴속에 아직도 판도라가 소중히 간직돼 있으니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잖아? 마음이 어수선해지자 그녀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낙원에서 3주를 보내고 둘 다 심심해 미칠 지경이 돼 있어야 하는데, 난 끝내고 싶지 않은 걸" 그가 거칠다싶게 털어 놓았다.

둘은 오늘 3주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그녀 또한 그런 사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강렬한 애정이 솟구쳐 그를 꼭 끌어안은 몰리는 눈부시게 수면을 비추는 햇빛도 카르발호 섬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는 동안 그녀를 사로잡았던 아찔하고 놀라운 행복에 비하면 흐릿할 뿐이란 것을 알았다.

"당신은 멋진 엄마가 될 거요, 카라. 아이가 무릎을 다치면 안아주고, 기특한 일을 하면 환하게 미소를 지어주고, 실망했을 땐 같이 안타까워해 주고" 솔토가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으며 하나하나 열거했다. "당신은 사물을 보는 그대로 믿는 순진한 사람이니까. 절대 그 순박함을 잃지 않을 거요"

"폭포와 풀장이 천연 지형인 줄 알고 있었던 점을 말하는 거라면"

"그리고 얄은 쪽과 깊은 쪽, 최첨단의 침윤 시설은 물론이고, 식물이나 물고기는 없으면서 눈에 띄게 편안한 암붕 무리와 계단이 있는 웅덩이는 없다고 지적할 때까지 당신은 아니라고 우겼지" 그가 다정하게 말을 가로챘다.

그녀가 감쪽같이 몰랐던 걸 깨닫고 그는 배꼽을 잡고 웃었었다.

"난 아직도 누구나 다 그렇게 받아들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타는 듯한 강렬한 금빛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갔다.

그가 입을 맞추자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를 꼭 끌어안고 애정 어린 손길로 손이 닿는 신체 부위를 빠짐없이 애무해나갔다. 그러자 그가 굶주린 듯이 신음 소리를 내며 애타게 갈구해 벌어진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한 시간 뒤, 몰리는 몸을 닦으며 욕실을 나왔다. 정말 낙원에서의 3주였어, 그녀는 환하게 미소를 머금고 회상했다. 다른 경치를 보고 싶을 때면 둘은 헬기를 타고 섬을 일주했다. 도미니카가 불과 3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둘은 낚시와 수영과 일광욕을 하고 오랜 시간 느긋하게 식사를 즐긴 뒤 역시 오랜 시간 사랑을 나누었다. 식사를 거른 채,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뒤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솔토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 그는 단지 울었다는 이유만으로 벌을 받았다고 했다. 철저한 자기 수양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런 모든 충동은 철저히 억누르고 감추며 살아야 했다고 했다. 늘 집에 없고 애정 행각을 일삼는 아버지와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고 짜증을 내는 어머니를 뒀던 것이다.

몰리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전과는 다른 식으로 솔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극히 육체적인 남자로 육체적 경로를 통해 감정을 표현했다. 처음엔 섹스로 의사소통을 해왔다. 놀랍도록 다정하고 마음을 쓸 줄도 알았지만 육체관계를 갖고 나서야 마음을 열고 속에 있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프레디의 집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솔직한 말로 공격해왔을 때, 그녀가 크게 충격을 받고 망연자실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주 중요한 유대를 형성하고 나서야 그는 자제하던 태도를 버리고 처음으로 그녀에게 자신의 진짜 감정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과정이 카르발호 섬에서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녀와 있을 때 긴장이 풀린 그에게서 성적 자극 없이도 놀리거나 온화한 태도가 절로 나왔다. 냉담한 무관심이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자기 방어 장치였을 뿐이었는데. 어째서, 어째서 그걸 몰랐던 걸까?

4년 전, 그들의 관계를 가로막았던 장애물의 실체를 이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육체 관계없이 그와 가까워질 가망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보여준 사랑이 확실히 그를 끌어당겼지만 솔토는 그런 걸 갈구하는 자신을 무척이나 어색해했다. 그때는 그가 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감정을 숨기고, 물러설 생각 없이 떠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쉽게 그러지 못할 것이다.

솔토가 컴퓨터가 있는 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몰리는 서늘한 라운지에 앉아 며칠 지난 영국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어제 도미니카에 갔을 때 산 건데 아직 읽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에야 다시 신문을 읽을 생각을 하다니. 솔토와 판도라가 화면에 나타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4년 동안 신문은 피하고 대신 TV만 봐왔었다.

신문 가십난에 난 판도라의 사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그녀 옆에 거뭇한 피부의 잘생긴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판도라의 예비 신랑인 아르만도는 솔토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아래에 붙은 짤막한 기사를 읽어나갔다. 순간 싸늘한 한기가 그녀의 전신을 가르고 지나갔다. 거기에는 뉴욕에 있는 한 클럽에서 아르만도와 말다툼을 벌인 후 판도라가 파혼을 선언했다고 쓰여 있었다.

판도라의 결혼이 깨지고, 그녀가 다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단다. 몰리는 두려움에 속이 울렁거렸다. 이 소식에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제서야 겨우 판도라 얘기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녀가 그런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가 불편해하고 마지못해 하며 재빨리 화제를 바꾸게 생겼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란 말인가. 판도라에 관한 모든 것은 아주 은밀한 비밀인 것 같아, 몰리는 괴롭게 회상했다.

지난 3주 동안 솔토와 판도라의 관계는 이제 끝났다고 자신을 일깨워왔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강렬히 끌리고, 그녀와 함께 있는 걸 즐기고, 태어나지도 않은 둘의 아이를 감동적일 만큼 사랑할 준비가 돼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요?" 전용 헬기가 런던에 착륙하기 한 시간 전에 솔토가 물었다.

"좀 피곤해서 그래요" 아직 그가 모르고 있는 듯한 얘기를 알려주지 않은 것이 배신처럼 느껴져 몰리는 그와 눈을 맞추지 못한 채, 잡지책만 열심히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하기야 그가 신문을 볼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 터무니없는 두려움에 몰리는 그가 기사가 난 신문을 자신의 가방 안에 숨겨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말도 없고, 먹지도 않고, 침울하게 앉아만 있는 거요?"

비겁해, 분명 그도 알게 될 텐데. 그냥 무심히 얘기를 꺼내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런 다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직접 보는 거야. 하지만 그걸 지켜볼 준비가 돼 있나?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몰리" 그가 못 참겠다는 듯이 재촉했다.

마침내 그녀는 잡지책을 옆으로 치우고 고개를 들었다. "판도라가 파혼했대요. 어제 신문에서 읽었어요"

솔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얼굴이 하얘지고 광대뼈가 팽팽해지고 입술이 꾹 다물리고 숱 많은 검은 속눈썹이 급히 내려가 탁한 눈을 가렸다.

그들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자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이라도, 아무 말이라도 해서 그걸 깨줬으면 싶었다.

"다음 주에 뉴욕에 다녀와야겠소. 가서 그 애를 만나봐야겠소" 솔토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갑자기 좀 전의 침묵이 영원히 이어졌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 입은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어서 턱을 쳐들고는 단호히 그를 노려보았다. "강박 관념은 키울 필요가 없을 텐데요. 굶겨 사라지게 해야지"

"그게 무슨 뜻이오?"

마른 목안에서 숨이 간질거렸다. "그녀에 대한 감정을 알고 있어요. 그녀와 거리를 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내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물러서기엔 이제 너무 많이 나가버렸다. 그녀는 무릎 위로 손을 꼭 맞잡고 심호흡을 한 뒤, 4년 전 그날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들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는지 그가 경직되었다.

"그래서 그날 밤에 정신 나간 여자처럼 굴었던 거로군. 그 때문에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비난을 쏟아놓았고"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서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 문제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 마음의 짐을 덜기로 했다. "당신이 그녀에게 빠져 있었다는 건 다 아는 사실"

"정말 그렇소?" 솔토가 한결같이 단호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며 아주 냉담하게 말을 잘랐다.

몰리는 시선을 돌렸다. 당연히 그는 이런 대화를 재해석해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적어도 좀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쪽으로 몰아가려고 할 것이다.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는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야 알게 됐어요. 서로에 대한 감정이 그런데 둘이 왜 그냥 합치지 못하는지 이해가 안 됐으니까요" 그녀는 주전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렇겠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납득이 안 갔을 테지" 그가 냉소적으로 조용히 맞장구쳤다. "판도리를 원하면서 왜 당신과 결혼하려고 할까 싶었겠지?"

몰리는 맞잡은 손을 비틀었다. "당신이 그녀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마음에서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이유를 알아냈을 때에야 비로소 이해가 갔어요" 비난보다는 이해로 아주 민감한 문제의 핵심을 향해 다가가는 동안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난 전혀 이해를 못하겠는데" 솔토가 냉담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두 사람의 관계가 더 밀접하다면" 몰리는 속삭이다시피 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그녀에게 분명히 말하라고 재촉하는데 있어서 그의 어조는 아주 설득력이 있었다.

"당신 아버지와 그녀의 어머니가 불륜 관계를 가졌다면 판도라가 당신 이복동생이 되는 거잖아요"

침묵이 흘렀다. 몰리는 거의 숨도 쉬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솔토가 정지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몰리는 즉시 자신이 틀렸다는 걸, 그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둘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의심이 크게 빗나갔다는 걸 알았다.

"우리 아버지와 이모가? 세상에" 그가 갑자기 폭발하듯 분노를 터뜨리는 바람에 몰리는 속으로 움찔했다.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좌석 사이의 통로를 성큼성큼 걸어갔다가 도저히 자제가 안 되는 듯 다시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분노의 가면 그 자체였다. "어떻게 그렇게 추잡한 생각을 할 수가 있소?" 그가 격분해 경멸조로 질책했다. "그렇게 앉아서 감히 우리 아버지가 이모와 관계를 가져 딸을 낳았다고 비난하질 않나, 내가 이복동생이 될 수도 있는 여자에게 변태적인 애정을 품고 있다고 나무라질 않나"

그의 오싹한 반응에 잔뜩 움츠러든 몰리는 말하지 않는 건데 잘못했다는 걸 절감하며 괴로운 눈길로 솔토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믿음을 평하는 태도가 기괴하게 억지로 갖다 붙인 식이라는 소리처럼 들리자 지독한 굴욕감이 밀려왔다. 정말이지 처음에 어떻게 그런 식의 생각을 하게 됐으며, 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 모욕적인 시나리오를 어떻게 믿을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우물거렸다.

"세상에, 당신의 그 이가 멍청한 머릿속에 박혀 덜거덕거릴 때까지 흔들어놔도 시원치 않을 것 같소" 도저히 분을 삭이지 못한 소리로 솔토가 이를 갈았다. "평생 이렇게 불쾌해본 적은 없었소. 판도라는 친여동생이나 다름없는 아이요. 그 애를 좋아하긴 하오. 하지만 아버지가 이모와 바람을 피우신 적도 없거니와 아버지가 그랬다고 말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단 말이오. 아버지는 집안사람과 관계를 가질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으셨을 거요. 게다가 이모부 되는 사람을 끔찍이도 싫어해 이모가 결혼한 뒤로 두 분이 만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단 말이오"

몰리는 경멸 섞인 그의 시선에 얼굴을 붉히면서 해명할 방법을 찾아보려 애썼다. "판도라의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녀는 허둥지둥 둘러댔다. "그녀와 당신이 정말로 남매지간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분이"

그 말에 솔토의 성난 얼굴이 단단히 굳어지면서 싸늘해졌다. "절대 그 때문에 자살한 건 아니오"

몰리는 혼란한 생각들을 정리해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알았어요. 내가 좀 무분별한 억측을 한 것 같은데 그 점에 대해선 사과할게요.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면 왜 그날 판도라가 그렇게 당황했으며, 왜 그런 식으로 말했는지 제발 설명을 좀 해줘요"

솔토의 눈에 짜증이 역력하더니 이내 눈을 내리뜨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허락 없이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오. 당신은 그날 엿들은 얘기를 크게 오해했던 것이고, 우리 둘 사이엔 당신이 위협을 느낄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정도면 충분할 거요"

깊은 침묵이 이어졌다.

솔토는 좀 전에 앉았던 그녀의 맞은편 자리를 피해서 통로 건너편 좌석에 주저앉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각에 잠긴 신랄한 눈길이 몰리를 크게 흔들어놓았다. "솔토" 스스로 과거를 들춰내 갑자기 둘 사이에 거대한 틈을 벌려놓은 것이 두려워 그녀는 겁에 질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어쩌면 다른 얘기를 해줄 때인지도 모르겠군" 그가 입술을 비틀고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4년 반 전에 난 시골길에서 아주 매력적인 소녀를 만났소. 그녀는 내가 그때까지 만났던 여자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지. 아주 솔직하고 상냥하고 마음씨도 따뜻하고, 절대로 아닌데 그런 척 하지 않는 소녀였지. 난 그 소녀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소"

몰리는 얼굴에 핏기를 잃고 꿈틀했다.

"여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녀라고 부르는 거요.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 많이 미숙했으니까. 행복한 가정에서 살고 있진 않았지만 계부의 당치 않은 요구에 결코 이의를 제기하는 법이 없었지. 다시 말해 성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거였소.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내 생활 방식을 접하게 된 그녀는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소"

몰리는 그가 그려내는 고통스럽도록 정확한 그림에 입술을 깨물었다.

"둘만의 시간을 좀 더 갖기 위해서 결혼을 미룰 생각이었지만 그게 거부를 뜻하는 게 아니라고 당신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소. 언론에서 그걸 두고 야단법석을 떨면 당신은 모욕당했다고 여길 테고, 우리 관계는 그런 부담을 이겨낼 수 없었을 거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밀고 나갔던 거였는데, 첫 번째 도전에서 우린 그만 갈라서고 말았지. 그건 그렇고 몰리, 인정하고 싶든 말든 당신은 그날 샴페인을 너무 많이 마셔서 잔뜩 취했었소"

그녀의 긴장된 뺨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몰리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입술을 꼭 다물었다.

"동시에 내가 면밀히 생각해보지 못했던 문제가 멋진 날이어야 할 날에 갑자기 중대 위기를 불러오고 말았지. 모든 게 아주 빠르게 틀어져버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소" 그가 조용히 침울하게 말했다. "바로잡아 보려고 당신을 찾아갔지만 돌아온 건 간통죄로 이혼 소송을 당할 뿐이었지. 그것과 판도라에 관한 기사가 마지막이었소"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해줬잖아요" 몰리는 그렇게 하면 눈물을 막을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목멘 소리로 속삭였다.

"말로는 한 적이 없지만 그걸 보여줬다고 생각했었소. 당신이 여장을 한 피터팬처럼 결혼식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아마 가장 강력하게 그걸 나타냈을 거요" 그가 쓸쓸하게 말을 맺었다.

"난 당신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야 했어요. 좀 더 안심이 되게 그런 말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고요" 몰리는 침착하지 못한 소리로 고백했다.

하지만 솔토는 더 이상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당신은 템플브루크에 며칠 내려가 있는 게 좋겠소.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갖도록 말이오. 지금으로선 당신을 안심시켜줄 기분이 아니니까"

몰리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솔토, "

"당신은 우리가 아직도 그걸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과거를 들춰냈소. 4년 전에는 우리의 결혼을 상의하고 구제할 수 있도록 단5분도 시간을 내주지 않더니, 이제 와선 그걸 다시 들춰내고 있잖소" 그가 싸늘히 내뱉듯이 말했다."난 우리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은 너무 화가 나 당신과 함께 있다간 무슨 짓을 저지를지 자신이 없소"

"솔토" 몰리는 고통스럽게 그를 불렀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가 적의에 찬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렇지 않소"

그가 놀랄 정도로 일축하듯이 반박했다. "당신은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오. 정말 날 사랑한다면 이따금 결점이나 비밀과 맞닥뜨리더라도 상대를 비판하는 일은 없을 거요. 날 믿었을 거란 말이오"

"당신을 믿어요" 몰리는 열광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솔토는 듣고 있지 않았다. 돌처럼 굳은 얼굴로 그녀를 뻔히 쳐다보며 험악하게 물었다. "우리가 다시 결합하기 위해 계속해서 불리한 입장에 처했던 사람이 누구였소? 분명 당신은 아니었지. 나이젤을 이용해 당신과 다시 합칠 수 있었고, 임신한 사실로 인해 당신을 내 곁에 잡아둘 수 있었소. 그런데 아직도 더 안심시켜줘야 할 게 남아 있다는 거요? 내가 볼 땐 당신은 받아야 할 정당한 몫을 받고도 남은 것 같소"

그의 빗발치는 비난과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지친 몰리는 자리에서 가까스로 일어나 세면실로 향했다. 10분 뒤에 다시 나와 보니 헬기가 착륙하는 즉시 따로 출발할 수 있도록 그가 두 사람이 타고 갈 각각의 차편을 전화로 준비시키고 있었다.

"혼자서는 템플브루크에 가고 싶지 않아요" 솔토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녀는 뻣뻣하게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작게 깨진 틈새가 이렇게 큰 구멍으로 벌어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 자신과 둘의 관계에 결코 만족하고 있지 못했다.

"진정할 시간이 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사과할 생각은 없소" 솔토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11

몰리는 공항 터미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올라탔다. 도널드 말이 솔토가 몹시 분개하고 있더라고 했지만 몰리는 너무 늦게야 그런 분개를 봤던 것이다. 그녀와 달리 솔토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두 번째 결혼을 계기로 새 출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걸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기분이 어떤지 모르기 때문에 그로서는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판도라에 대한 지독한 불안감이 진짜 행복과 만족을 느끼고 있는 중에도 따라다니는 기분을 그가 어떻게 알까?

아주 그릇되고 불쾌한 주장으로 그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했다. 솔토를 격분시키자 전체 상황이 훨씬 파괴적이고, 그녀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갑자기 불거져 버렸다.

그가 판도라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 분명하고, 둘의 첫 결혼에서 상처를 입은 쪽은 솔토 자신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판도라가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불화의 씨로 부상되는 걸 견디자면 무진장의 인내심이 필요했을 터였다. 솔토에게 많은 장점이 있지만 인내심은 그 중 하나가 아니라는 걸 몰리는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랑한다는 그녀의 고백 비웃듯이 일축했다. 정말 큰 상처였다. 하지만 그 말 이전에 4년 전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다고 한 말이 그녀를 더 괴롭히고 있었다. 솔토처럼 빈틈없고 지극히 논리적이고 실리적인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가 받아야 할 것보다 이번에 훨씬 더 큰 걸 이미 받았다는 얘기는 뭐지? 템플브루크에 도착해 초저녁이 될 때까지도 몰리는 얄밉도록 엄선된 몇 마디 말로 둘의 관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완전히 뒤집어놓은 솔토의 괘씸한 태도에 마음이 혼란해 거실을 오락가락했다. 둘의 재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는지 그 정도로 경멸에 찬 묘사를 하다니.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확신에 자신을 방어하고자 그녀는 모든 면에서 그와 맞섰었다. 그녀를 돌아오게 하고 붙잡아두기 위해 처음엔 나이젤을, 다음엔 태어날 아이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분개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지? 그는 내가 기꺼이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바랐던 거야, 그거야, 몰리.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다가 방금 구명대를 받은 사람처럼 몰리는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 시내 저택의 번호를 눌렀다. 오그든이 받았다.

"죄송하지만 주인님께선 집에 안 계십니다. 부인"

"그럼 아직 회사에 계시겠네요?" 몰리는 추측했다.

"아닙니다. 스티븐슨 양과 식사하러 나가셨"

"뭐라고요?" 몰리는 충격으로 굳어졌다.

"판도라 양 말입니다, 부인" 그녀가 성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오그든이 덧붙여 설명했다. "식당 전화번호를 가르쳐 드릴까요, 아니면 전갈을 남기시겠습니까?"

"고맙지만 둘 다 놔두세요" 몰리는 다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판도라가 런던에 와 있다는 얘기였다. 길들여진 비둘기처럼 곧장 그에게 달려간 게 분명했다. 곤경에 처했을 때면 늘 그렇듯이. 판도라의 패턴이지, 몰리는 생각에 잠긴 채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데 왜 그게 그 금발 미녀의 패턴인 거지? 판도라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내가 면밀히 생각해 보지 못했던 문제가 갑자기 중대 위기를 불러왔던 거요" 솔토는 둘의 첫 결혼식 날에 관해 그런 말을 했었다. 판도라가 그를 사랑했다거나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다른 여자에게 너무 큰 배신이 될 거라고 느끼는 걸까? 그래서 사실을 말해주지 않은 걸까?

높은 유리창 너머에서 자갈길을 구르는 차 소리가 나자 그녀는 누가 왔나 하는 생각에 멍하니 창가로 다가갔다. 솔토의 검정 페라리였다. 그가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곧 반짝이는 금발과 한 쌍의 길고 멋진 다리가 조수석에서 나오는 걸 보고는 질겁해 발끝으로 쿵 내려앉았다. 판도라였다.

두 사람에게 들킬까봐 창가에서 물러서는 데 정확히 1초가 걸렸다. 지금쯤 둘은 어딘가에서 저녁식사를 들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왜 판도라를 이리로 데려온 거지? 놀라고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 성급하게 눌러대는 초인종 소리에 서둘러 복도를 걸어가는 가정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5시에 통근 고용인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쳐진 빗장과 사슬의 장벽에 부딪친 것이다.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거실 문이 벌컥 열리고 판도라가 문간에 나타났다.

판도라는 거북하고 긴장된 얼굴로 몰리를 바라보다가 어깨 너머로 솔토를 돌아보았다. "우리끼리 좀 있게 해줘요" 그녀는 애원하다시피 했다. "오빠의 아내를 곤란하게 만드는 말은 한마디도 않겠다고 맹세하고 약속할 테니까"

판도라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와 안락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녀가 고백했다. "실수를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데는 영 서툴러서"

"왜 내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몰리는 불쾌하게 물었다.

판도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두 사람의 약혼 기간 내내 내가 정말 못되게 굴었고, 그날 문 밖에서 당신이 듣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에게 주의를 주거나 나중에라도 말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어요" 그녀가 씁쓸하게 인정했다. "당신이 아이를 낳아줄 수 있기 때문에 그가 당신과 결혼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죠. 당신이 미워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훼방을 놓고 싶었어요"

"성공했잖아요" 몰리는 인정했다.

판도라가 움찔했지만 심란한 눈길은 한결 같았다. "전 이제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 됐어요. 그때는 뒤죽박죽 엉망이고 몹시 불행했는데 더 이상 그렇지 않아요" 그녀가 단호하게 주장했다. "당시 솔토는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그에게 크게 의존했었는데 당신과 약혼하자 겁이 나고 위협을 느꼈죠"

"그를 사랑했으니까요" 몰리는 비꼬듯이 동정했다.

"아니에요. 당신이 의미하는 그런 식은 아니었어요" 판도라가 일어서서 안절부절못하고 창가로 걸어갔다. "솔토가 다 말해줬더라면 당신도 이해했을 거예요. 당시 내 문제는 다소 소름끼치는 어린 시절에서 발단된 거였어요" 괴롭지만 차분한 눈길로 그녀가 몰리를 돌아보았다. "내 아버지는 난폭한 사람이었어요. 엄마를 구타했는데 심장마비로 엄마가 죽자 그 주먹을 대신 내게로 돌렸어요"

"그럴 수가!" 몰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중얼거렸다.

"맞은 표시가 심하게 날 때는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죠. 난 종종 거짓말을 둘러대고 사고를 당한 척 해야 했어요. 가정부는 아버지의 소행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일자리를 잃을까봐 모른 척 했죠. 어쨌거나 나도 그런 사실이 부끄러웠어요" 판도라가 냉정히 인정했다. "다들 날 아쉬울 게 없는 행복한 아이로만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사실을 아는 게 싫었어요. 어떤 의미에선 아버지가 계속 그런 짓을 하도록 내가 방조한 셈이죠"

"악몽이었겠어요" 몰리는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솔토가 어느 날 불쑥 우리 집을 찾아왔어요. 몇 년 만에 처음 보는 거였죠. 아버지는 회사에 나가 계실 때였죠. 난 갈비뼈 두 대가 부러져 집에서 요양 중이었고요" 판도라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내 팔에 난 멍자국을 보고는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았어요. 내게서 모든 얘기를 듣고 나서는 곧장 런던으로 돌아가 자기 아버지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어요"

"정말 다행이었네요" 몰리가 속삭였다.

판도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바로 그 날, 이모부가 아버지를 찾아갔어요. 아버지에게 사회시설에 그 사실을 알리고 나에 대한 보호권을 신청하겠다고 하셨죠. 아버지는 그런 불명예를 감당할 수 없어서" 그녀의 목소리가 현저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자살하셨던 거군요" 몰리는 오싹한 사실을 깨닫고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대신 말했다.

"그 후로 난 로마에 있는 크리스탈디 가에서 살았는데, 석 달 뒤 솔토의 부모님도 비행기 추락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상담 같은 걸 받아야 했지만 난 싫다고 했어요" 판도라는 씁쓸하게 밝혔다. "그냥 다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오랫동안 그랬다고 믿었고요. 하지만 남자들과의 관계마다 틀어졌고, 유일하게 변함없었던 인물이 솔토였죠.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가 사귀는 여자들을 질투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가 갑자기 예전처럼 날 상대해줄 수 없게 되자 난 점점 더 미친 듯이 날뛰게 돼"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돼요" 몰리는 말을 가로막았다.

"솔토에게 다 말하겠다고 했어요" 그녀의 예쁜 얼굴이 굳어졌다. "난 그를 남자로서 사랑했던 게 아니에요. 내가 정말 관심을 갖고, 믿고 있는 유일한 사람을 잃는다는 게 너무 두려웠던 거예요. 어리석게도 그런 감정이 그 이상의 것을 위한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믿었죠. 두 사람의 약혼식 날 갑자기 못 견디게 돼 버린 거예요. 그를 붙잡고 울면서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는 망연자실했죠. 내게 희망을 줄 수 없었기에 늘 친구로서 남아 있을 거라고 안심시켜줄 뿐이었죠. 결혼식 날 일은 당신도 알 거예요"

"그래요" 몰리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내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이기적인 일이었죠. 내 감정에 답해주지 않은 그를 괴롭히고 싶었어요" 판도라가 거북하게 고백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신문 기사 건은 정말 미안해요" 몰리는 나직이 침울하게 사과했다.

"잊어버려요" 판도라가 쓸쓸하게 일축했다. "당신은 나 때문에 결혼을 망쳤지만, 난 친구 몇 명을 잃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 일로 긍정적인 결과가 있었어요. 어쨌거나 내게는요. 솔토가 마침내 날 설득해서 상담을 받게 했고, 그때부터 뒤를 돌아보지 않게 됐거든요. 그를 무척 좋아했지만 이젠 내게도 내 생활과 아르만도가 있어요" 따뜻한 미소가, 한때 냉혹한 미모의 얼굴에서는 절대로 보게 될 줄 몰랐던 따뜻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다.

"그래요?" 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난 또"

"바보같이 가벼운 말다툼을 벌인 데다 막상 결혼한다고 생각하니까 겁이 났던 거예요" 판도라가 왼손에 낀 호화로운 약혼반지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런던에서 웨딩드레스를 맞췄어요. 그래서 여기로 올 거예요. 제 결혼식에 참석해줄 거죠?"

몰리는 남아 있던 긴장이 마저 사라지자 미소를 지었다. ", 그럼요.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우리 둘에게 유일한 공통부분은 솔토예요" 금발 미녀가 아주 솔직히 말했다. "하지만 그를 위해 우리가 친구가 됐으면 해요. 그는 유일하게 남은 내 친척이거든요"

"이젠 그 점에 있어서 문제가 없을 거예요" 몰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잘됐네요. 사태를 정리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었어요" 판도라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되면 다시 솔토의 페라리를 타고 시내로 돌아가야겠네. 그가 그 점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아요"

잠시 후에 솔토가 방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부르릉거리는 페라리의 힘찬 엔진 소리가 들려왔지만 두 사람 다 서로에게 외에는 다른 곳으로 시선이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무척 불안하고 강렬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판도라가 직접 당신을 만나야겠다고 우겨서 어쩔 수 없었소"

"그런 사실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정말 끔찍한 시간이었겠어요"

"정말이지 판도라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소" 그가 긴장된 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그런 식으로 행동하다니 내가 어떻게 됐던 것 같소"

"2 더하기 2로 아주 황당한 5를 만들어 내 내가 큰 충격을 안겨준 거죠"

"날 사랑한다는 말은 진심이었소?" 그가 긴장한 채 물었다.

", 그럼요. 진심이고 말고요" 몰리는 이번엔 상처받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그를 안심시켰다.

들끓던 긴장이 사라지자 그가 열정에 넘친 손길로 그녀를 와락 끌어당겨 숨도 못 쉴 정도로 꼭 끌어안았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직접 듣고서야 알 수 있었죠" 몰리가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고르지 않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가 검은머리를 들었다. "외종조부 댁에서 당신을 다시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가 이어 당신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는 격분했지. 내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몰랐고. 당신과의 잠자리에서 자제력을 잃었던 게 싫었지만 당신이 떠난 후 당신이 외종조부에게 부친 편지를 읽게 됐소"

몰리의 표정이 굳어졌다."뭘 했다고요?"

"<몰리 편지>라고 표시해서 내게 남겨 놓으셨거든. 당신을 보기 전까지는 용케도 그 유혹을 이길 수 있었는데 당신이 떠난지 10분도 안 돼 그걸 읽기 시작했지" 그가 부끄러운 얼굴로 털어놓았다. "우리 결혼이 깨진 후로 당신도 나처럼 몹시 불행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치유가 시작되었소. 그래서 당신에 대한 반감을 풀고 다시 시도해보기로 했소. 그리고는 어떻게 해야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궁리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난 듣지 않으려 했군요" 몰리가 신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날 원한다는 걸 알고 그 이상의 것이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갖게 되었소, 카라" 부끄러워 발그레해진 그녀의 얼굴에서 눈치 있게 시선을 떼며 솔토가 말했다.

"있었죠. 난 당신을 극복할 수 없었으니까"

"다행이군" 그가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좀체로 날 원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고 곧이어 나이젤 문제가 개입되어 사태가 흐려지자 정말 화가 많이 났었소"

"미안해요. 오빠가 일을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거였는데. 그건 당신 책임도 아닌 걸요"

"몰리" 그가 달래는 손길로 그녀의 두 뺨을 보듬고 양심에 찔리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오빠 집을 찾아갔을 때 순진하게 남을 잘 믿는 사람에게 도끼를 들이댄 기분이었소" 그가 냉소적으로 입술을 비틀며 고백했다. "당신 얘기를 들었던 건 잘한 일이었소. 우리가 계속 결혼생활을 유지했더라면 당신 오빠에게서 손을 떼지 않았을 거요. 내가 곁에서 지켜봤다면 그런 곤경에는 빠지지 않았을 텐데"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고마워요"

", 이런, 카라" 솔토가 그녀를 번쩍 들어 안고 거실을 나갔다. "울지 말아요. 사실은 아니지만 내가 당신 오빠를 미워했다 해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결국엔 그를 도와줬을 거라는 걸 모르겠소?"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몰리는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눈을 깜박여 눈물을 참았다. "날 사랑한다면 처음 임신 사실이 의심됐을 때 왜 그렇게 깜짝 놀랐어요?"

날렵한 한쪽 눈썹이 찡긋 올라갔다. "그런 걸 물을 생각을 하다니 놀랍군. 당신은 이미 있는 대로 분개해 있었잖소. 혼외 관계로 내 아이를 가진 사실이 전혀 당신을 붙잡아둘 명분이 될 것 같지 않았거든. 사실 시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봐야겠지. 우리가 함께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지 당신에게 보여줄 기회조차 없었으니까"

"아이에 대해 아직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몰리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방으로 들어가 아주 귀중한 보물이라도 되듯이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내게 고함을 지르고, 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인간이라고 부르고, 당신의 인생을 망쳐놨다고 비난했을 때 난 당신이 임신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었소. 당신을 붙잡기 위해 내게 남은 거라곤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래도 당신은 할 말이 없어요" 몰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애정 어린 손길로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건설적으로 생각하라고 충고하고 아이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날 원한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해줬으니까요"

"사랑하는 여자가 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자포자기한 표정을 짓는데 그렇게 용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 그가 침울하게 말했다. "그리고 외종조부 댁에서의 그날 밤 일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을 때, 당신의 감정을 상하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 정도로 싫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정말 굴욕적이었단 말이오"

"당신이 침대를 나가기 전까지는 정말 좋았어요" 몰리는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고백했다. "그러다 당신이 그걸 다 망쳐버렸잖아요"

"우리 사이에 일어난 일로 당신만 당황했던 게 아니거든"

온화한 그녀의 눈빛에 그가 자석처럼 이끌리듯 그녀 곁으로 내려왔다. "당신을 무척 사랑하지만 4년 전 당신이 떠났을 때 난 엉망이었지. 판도라가 오늘 오후에 사무실로 찾아와 그 당시 자신이 어떻게 굴었는지 솔직히 고백했을 때 나 역시 아주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소. 당신에게 충분한 지지가 돼주지 못했고, 그 애의 행동을 알아채지도 못했으니"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모두 지난 일이고, 이젠 정말 다 잊었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중단시키며 넥타이를 잡아 그를 끌어당긴 뒤 애타는 입술을 그의 입술에 맞추는 동안 그녀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목적밖에 없었다.

격정이 솟구쳐 그 후로 오랫동안 대화가 중단되었다. 기분 좋게 만족해 몽롱한 상태로 서로의 품에 꼭 안겼을 때에야 몰리는 아까부터 자신을 괴롭혀 오던 의문을 기억해냈다. "판도라가 아기를 가질 수 없어요?"

"아버지에게 당한 폭행으로 내부 손상이 있었거든" 그 말을 하는 동안 솔토가 진저리를 치며 얼굴을 찌푸렸다. "수술을 받았지만 의사들이 아이를 가질 수 있을 지 확신을 못하더군"

몰리는 그의 어깨에 안쓰럽게 볼을 비볐다. "다시는 그녀를 질투하지 않을게요, 솔로. 그녀가 잘 됐으면 좋겠어요"

 

1년 뒤, 몰리는 사촌 시누이로 받아들인 여인으로부터 따뜻한 포옹을 받았다. 판도라와 아르만도가 어린 재스퍼 크리스탈디의 세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템플브루크로 날아왔다. 판도라의 파란 눈에 흥분과 만족의 광채가 반짝였다.

"알아 맞혀봐요" 두 사람이 세례반 앞에 섰을 때 판도라가 말했다.

도널드 시튼 목사가 몰리의 품에 안긴 아기에게 세례를 베풀며,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나무라는 눈길을 던졌다. 재스퍼가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나게 할 만큼 소리를 지르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몰리는 판도라의 눈을 들여다본 뒤 무슨 뜻인지 깨닫고는 즉시 미소로 답했다.

판도라는 임신 4개월째로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었지만 새로이 크리스탈디 가문 사람이 된 가장 어린 일원이 그런 감정을 함께 나누도록 허락하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걸렸다.

축하 점심을 든 뒤 몰리와 솔토는 도널드와 그가 뉴질랜드에 갔을 때 만나 사랑에 빠진 상냥하고 매력적인 그의 아내를 배웅했다. 아르만도와 판도라가 그 다음으로 떠났는데 둘은 비밀을 간직한 10대들처럼 손을 꼭 붙잡고 다녀 많은 웃음을 자아냈고, 어서 빨리 둘만 있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이젤과 레나도 아이들과 함께 와서 그들을 축하해 주었다.

"매제가 허락할까?" 나이젤이 현관 계단에서 다급히 속삭였다. "그와 상의해 볼 거지?"

"오빠가 직접 해야지" 몰리는 나이젤이 아직도 남편을 겁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재스퍼를 위로 삼아 꼭 끌어안고 신음 섞인 소리로 나무랐다.

"무슨 얘기였소?" 솔토가 다소 긴장된 아내의 어깨를 둘러 안고 집안으로 들어서며 깊게 울리는 소리로 물었다. "내가 뭘 허락한다고?"

"오빠가 자기는 사업 체질이 아닌 것 같대요. 지금 당신 회사에서 꼬박 1년 동안 일하고 있는데"

"종묘점을 다시 맡고 싶다는 거군, ?" 그가 그런 생각에 강한 반감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현장 교육에서 잘 해내지 못했잖아요?"

걱정스런 몰리의 얼굴을 그가 불안하게 평가하는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시도는 하고 있지, 아주 열심히"

"종묘점을 직접 운영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몰리는 염려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투입한 그 관리자와도 잘 통하고 종묘점을 다시 확장했으니, 그러니까자신은 원예 부분만 맡고 나머지는 관리인에게 맡기는 형태로 일하면 어떻겠냐고?"

솔토가 긴장을 풀고 웃음을 터뜨렸다. "몰리, 내가 왜 그곳을 확장했을 거라고 생각하오? 나이젤이 사업이 어떤 건지 알게 된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가진 상당한 지식을 가장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에 투입한다면 나로선 더할 나위 없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둘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솔토가 재스퍼를 아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 자신을 꼭 닮은 졸음이 담긴 짙은 눈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완벽한 녀석이지?"

"당신 아들인데 어련할까요" 몰리는 그를 놀렸지만 솔토가 아들에 대해 숨기려 들지 않는 부끄럼 없는 사랑과 애정에 늘 그렇듯 감동을 받았다.

"완벽한 아내를 얻었으니" 그가 아주 만족한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둘러 안았다.

몰리는 길고 단단한 그의 품에 등을 기댔다가 그에 반응하는 남자의 몸을 느끼고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몸을 비틀 듯이 전율하며 그의 품에서 돌아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는 가슴으로 애정 가득한 웃음을 머금은 짙은 금빛 눈을 올려다보았다.

"일찍 잘까?"

"이제 겨우 5시밖에 안 됐는데요"

몰리는 그를 자극하는 동안 그의 눈 속에 깃든 기쁨과 짓궂은 불만의 표정을 알아보았다. "지금 당장 당신을 안고 싶은데"

솔토가 입술을 포개고 짜릿한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를 뒷걸음질 치게 해 층계참 맞은편의 두 사람 방으로 향했다.

"당신을 향한 갈망은 절대 멈추지 않을 거요, 카라"

그 말에 몰리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해하며 그의 품으로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