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넬라(Monella)
Lorenzo Codelli
1
더운 공기를 타고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숨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고조되어 가고 안의 생명 없는 물건들조차도 그 소리에 발기되는 것만 같았다. 터질 듯 풍만한 가슴, 둥글고 탄탄한 엉덩이, 쭉 뻗은 다리 사이로 성글성글한 음모, 그 음모를 비집고 손가락이 피스톤 운동을 하고 있었다. 흥분될수록 손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벌어진 다리도 쾌감에 못 이겨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절정의 순간을 찾았는지 여자는 허리를 들어 올리며 희열에 찬 소리를 내뿜었다,
"아아".
로라였다. 그녀는 올해 열아홉 살이다. 총명하고 예쁜 눈동자, 오똑한 콧날, 도톰하고 윤기나는 입술, 그녀는 뛰어난 미모에 성격도 발랄하고 쾌활했다. 그녀는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향기를 맡기만 해도 누구든 넋을 잃었다. 그런 그녀를 차지하게 된 행운아는 잘생기고 건장한 청년, 타마소이다. 약혼자다. 그는 로라로 인해 하루하루가 꿈의 나날처럼 감미로웠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애를 태웠다. 솟구쳐오르는 여자의 본능을 감당하지 못하고 쩔쩔매기만 해서이다. 오늘도 타마소를 찾아갔다가 화가 난 그녀는 씩씩거리며 자기 들어왔다. 문을 잠그고 거울 앞에 섰다. 봉긋한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웃옷을 벗어 던졌다. 탐스런 가슴, 장밋빛 유두, 그녀는 유두를 천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유두를 타고 온몸으로 짜릿한 전율이 전해져왔다. 두 팔을 들어 올리고 겨드랑이에 코를 대고 킁킁했다. 콩비린내와도 같은 땀 냄새가 배어든 몸 내음, 현기증이 느껴졌다. 사타구니에서도 땀이 베어나왔다. 책상 위에 놓인 선풍기의 머리를 쳐들어 다리 사이로 바람을 쐬였다. 간지럽고 부드러운 지극에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흥분을 주체할 수 없어 그녀는 그대로 침대로 누워 하나씩 하나씩 옷을 벗어 던지고 급기야는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성숙해진 육체에 성격까지 적극적인 그녀로서는 타마소가 여간 못마땅한 게 아니었다.
타마소는 부모가 운영하는 제과점에서 일하고 있는 성실한 청년이었고 어머니 넬라와 아버지 토니도 부지런하고 원만한 사람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제과점이 많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내는 빵이 신선하고 맛있어서 자주 찾는다. 보조 한 명만으로 그들은 정성스럽게 직접 빵을 구워낸다.
그 덕택에 타마소는 넉넉한 생활을 누리며 제과점 경영을 이어받기로 했다. 사실 어머니 넬라는 로라를 별로 탐탁치 안게 여겼다. 로라도 그렇지만 로라의 어머니 자이레가 품행이 방정치 못하기 때문이다. 자이레와 함께 살고 있는 안드레 역시 소문난 바람둥이이다.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그는 여자들을 꾀어내어 온갖 외설스런 사진을 찍어 대는 인물이다. 사실, 안드레가 로라의 친부가 아니란 소문은 온 마을에 무성하다.
오늘도 타마소는 로라가 올 때가 되었는데도 오지 않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계시는 있는 가게(주방과 붙어 있다:역자 주)에 자꾸 들락거리며 로라가 오지 않았는지 물어보곤 했다. 그런 아들을 보는 넬라의 눈치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만 좀 하렴. 네가 그런다고 안 올 사람이 오니?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거냐?"
"아니에요".
타마소는 풀이 죽어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토니가 그런 아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넬라에게 한마디 했다.
"당신도 다 알면서..... 나도 옛날에는 저랬었잖아."
넬라가 토니를 쏘아보았다.
"그래도 우린 젊었을 때 교양이 있었다고요. 로라처럼 근본 없이 의심스러운 행동은 하고 다니지 않았다고요."
토니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근본? 그 애는 자이레의 딸이라고."
넬라는 코웃음쳤다.
"자이레가 유람선 탈의실에서 일했다는 걸 몰라서 그래요?"
"그게 어쨌다고?"
"처녀가 임신을 해서 돌아왔잖아요."
"그래서 안드레와 결혼한 거지."
넬라가 또다시 코웃음쳤다.
"끼리끼리 만난 거지."
토니는 그래도 여전히 그들 편을 들었다.
"그는 <노르망디>호 최고의 주방장이었어."
"최고였으면 뭐해요. 파렴치한 인간인 걸! 로라와 놀아나고 있잖아요. 호시탐탐 기회만 엿본다고요."
토니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난 부러워 죽겠어. 복이 터졌지 뮈."
넬라가 불끈해서 소리쳤다.
"응큼하기는! 내 허락 없이 절대로 내 아들과 결혼 못 해요. 그 애들은 아직 철이 없다고요."
토니가 말했다.
"사고를 쳤다면 어쩔 거야?"
넬라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내 아들은 당신하고 틀려요."
토니가 말했다.
"그래도 내 새낀데?"
그때 로라가 들어섰다.
"안녕!"
다른 때보다 오늘 더 늦은 것은 자전거를 타며 온갖 남자들을 유혹하느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마을 광장부터 시작해서 들길을 지나 제과점에 이르기까지 로라를 쳐다보느라 넋이 나가지 않은 남자가 없었다. 심지어 신부님까지도 침을 흘릴 뻔했다. 로라가 가슴이 갚게 패인 민소매에 짧은 플레어스커트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서 상체를 앞으로 깊숙이 숙여 그 탐스런 엉덩이를 온통 내놓고 다녔던 것이다. 팬티도 사실 걸친 듯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음모뿐만 그 중요한 곳도 언뜻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운 동네 남자가 넋을 잃을 만했다. 로라만큼 예쁘고 몸매다 뛰어난 여자가 드물었고 게다가 그녀는 부끄럼 없는 도발적인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니 누가 맨정신으로 그녀를 볼 수 있겠는가. 반면에 그녀를 쳐다보는 동네 여자들은 한시도 좋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동네를 망칠 여우 같은 계집이라고 소근대고 그녀의 옷 입은 행태며 하고 다니는 행실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로라를 보는 순간 넬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다고 그런 것에 연연할 로라가 아니었다. 로라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거침없이 매장을 지나 주방으로 들어섰다. 타마소를 보자마자 달려들어 키스를 해댔다. 깊고 능숙하게, 제빵사가 쳐다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타마소의 입술을 송두리째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넌 행운아야." 갑작스런 로라의 말에 타마소가 무슨 말인지 몰라 물었다. "행운아라니?"
로라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날 잡았잖아."
"그게 무슨 뜻이야?"
"날 따라오면 무슨 뜻인지 가르쳐 줄게."
타마소는 로라가 이끄는 데로 끌려갔다. 제빵사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오늘은 네가 당번이잖아."
타마소가 로라에게 끌려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월급 받았으니 네가 좀 해."
타마소는 월급날이 되어도 월급을 받지 않고 평소에 용돈만 조금씩 타다 쓰고 있었다. 로라는 타마소를 이끌고 창고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로라는 가슴을 갖다붙이며 타마소에게 말했다.
"안아 줘."
타마소가 한 발짝 물러서며 밀가루투성이인 두 손을 들어 내보였다.
"밀가루가 묻어서...."
로라가 싱긋 웃더니 타마소의 손을 잡았다.
"이리 줘 봐."
로라는 타마소의 집게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넣었다. 타마소가 놀라 손가락을 빼려고 했다.
"뭐 하는 거야?"
로라는 더 힘껏 손을 당겨 입에 넣었다.
"씻어 주는 거야."
로라의 뜨거운 혀가 타마소의 손가락을 핥더니 이내 강한 힘으로 빨아대기 시작했다. 타마소는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워낙 착실하고 보수적인 타 마소는 짐짓 머뭇거렸지만 로라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난 역시 행운아야."
타마소는 로라의 가슴을 헤치며 입술로 젖꼭지를 찾아 물었다. 로라의 탄성과도 같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슴을 그대로 드러낸 채 타마소의 목에 팔을 두루고 그의 애무에 한껏 기분 좋아진 로라는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타마소의 허리에 걸쳤다. 그러고는 타마소의 손을 끌어내려 은밀한 곳으로 갖다 댔다. 타마소는 놀라 기겁을 하면서도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촉촉해진 그곳이 늪과도 같이 그를 끌어당겼다.
"으음!"
로라가 자지러져다. 타마소는 로라의 탐스런 성기를 정신없이 애무하다가 갑자기 손놀림을 멈추었다. 로라를 떼어 내려고 어깨를 밀치며 타마소가 말했다.
"안 돼, 나 이러면 사고 쳐."
로라가 몸을 더욱더 밀착시키며 말했다.
"그럼 안 돼?"
로라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창녀와는 되고?"
며칠 전 로라는 타마소가 창녀촌에 가는 걸 목격했던 것이다. 타마소는 창녀인 윌마와 친했는데 단지 그녀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이번이 발간되었는데 그걸 사서 갖다주었다고 했다. 그 말을 사실로 곧이 들을 로라가 아니었다. 타마소가 아물 변명을 해도 들어주지 않고 닦달을 해댔다.
"넌 정숙한 여자야."
로라는 막무가내였다. 다리를 더 높이 들어 올리며 타마소를 잡아당겼다. 타마소는 어떻게든 로라를 설득하려 들었다.
"서두르지 말라고? 이런 돌 같은 남자! 순결은 빵의 속살과 같아서 첫 남자가 먹는 거야."
타마소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로라는 답답해서 소리를 질렀다.
"줘도 못 먹느냐고!"
타마소가 새삼스럽게 로라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넌 옷차림이 너무 야해."
로라가 반항하듯 치마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푹푹 찌는데 그럼 수녀처럼 입으라고?"
타마소는 로라의 부풀어 오른 젖꼭지와 거의 벗겨지다시피 한 팬티 사이로 보이는 무성한 음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다가가 어루만지며 물었다.
"나 보고 싶었어?"
로라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눈만 뜨면 네 생각뿐이야."
타마소가 다시 흥분되는 듯 로라를 끌어안았다.
"널 못 보면 죽을 것만 같아."
로라는 단단하게 머리를 치든 타마소의 성기를 움켜줘며 몸을 뒤로 제꼈다.
"나도 좀 죽여줘."
타마소는 인내의 한계에 달한 듯 로라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몸을 핥아 내려갔다. 로라는 붉은 입술을 벌려 혀를 깨물고 나른해져 가는 쾌감에 온몸을 맡겼다.
"으음."
그때였다. 창고 문이 벌컥 열리고 제빵사가 들어섰다. 제빵사는 로라의 거의 벗은 몸과 타마소의 몸이 꼭 붙어 달아오르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길이 그새 로라의 몸을 훑어보며 만족스런 웃음을 머금었다. 짓궂은 그는 그대로 서서 한참 동안 그들의 행위를 감상하고 나서 말했다.
"타마소, 빵이 제대로 부푼 것 같은데?"
타마소는 깜짝 놀라며 로라를 밀어냈다. 당황한 그는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고치며 로라에게 말했다.
"이따 3시쯤 데리러 갈까?"
로라의 눈에 그런 타마소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바보로 보였다 로라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가슴을 가릴 생가도 않은 채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싫어, 나 김샜어."
로라는 웃옷의 끈을 대충 끌어 올리며 밖으로 나갔다. 넬라가 그녀를 노려보며 혀를 찼다. 헝클어진 머리에 옷차림도 흐트러져 있는 걸 보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하여튼 근본이 좋고 볼 일이라고 넬라는 생가했다. 로라는 넬라의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불만에 가득한 표정으로 걸음을 뗐다.
2
로라는 타마소보다 세 살이 적은데 그녀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타마소는 그녀를 점찍었고 결국 그의 소원대로 약혼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3년 전 일이다. 로라의 집은 유난히 깔끔하고 예쁜 하얀 2층집이다. 그 집은 로라의 아버지 안드레가 건축에 직접 참여하여 지은 것으로 어느 곳에서나 미적 감각이 물씬 풍겨났다. 창문이 유난히 많고 2층 베란다가 넓고 지붕 또한 독특했다. 여느 지붕들과는 달리 가늘고 긴 목재들을 이어붙여 섬세하면서도 손이 많이 간 것이다. 넓은 정원에는 푸르고 고운 잔디가 깔려있고 바깥쪽으로는 큰 나무가 있고-주로 활엽수가 많다- 안쪽으로는 갖가지 꽃과 식물, 채소가 보기 좋게 심어져 있다. 큰나무는 아버지가 직접 손질하고 꽃이나 채소는 어머니가 가꾼다. 어머니는 요리를 유난히 즐기면서도 까다로워 웬만한 재료는 집에서 얻고 싶어 한다. 일층은 거실과 주방, 안방, 욕실이 있고 2층은 스튜디오, 로라의 방, 욕실, 베란다가 있다. 거실에는 작은 바가 설치되어 있고 바닥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배를 탔던 시절, 페르시아에서 구해온 카펫이 깔려 있다. 전체적으로 푸른색이 많은 이 카펫은 고급스럽고 고풍스러운 아버지가 이끼는 재산 목록에 들어간다. 중앙에는 갈색의 커다란 소파가 세트로 놓여져 있다. 창가에는 2인용 소파가 놓여 있고 커다란 창문들에는 어머니가 손수 만든 베이지색 커튼이 햇빛을 가득 품은 채 드리워져 있다. 로라는 2층 자기 방의 침대에 누워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방도 역시 커다란 창문과 베이지색 커튼이 있고 나뭇결을 살린 옷장과 거기에 맞춘 작은 화장대가 놓여 있다. 창문을 약간 비켜난 오른쪽으로 책상이 있고 그 위 책꽃이에는 책이 듬성듬성 꽂혀 있다. 사실 그녀는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오늘도 항상 같이 몰려다니는 친구들과 방과 추에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학교 갈 시간이 다 되어서야 그녀는 겨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소란스럽게 로라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욕실로 후다닥 뛰어가 샤워를 하고는 짧은 소매의 빨간 셔츠에 미니 펜츠를 입고 아래층으로 쿵쾅거리며 내려갔다. 어머니 자에레가 벌써 아침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도 신문을 보면서 로라를 기다렸다. 로라는 식탁에 앉기 전에 어머니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아버지에게는 목에 꼭 매달려 긴 키스를 했다. 무슨 일이든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조차도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아버지도 로라의 부탁이라면 귀찮아하는 일이 없었다.
식탁에 앉자 어머니가 따뜻한 수프와 버터를 바른 빵, 그리고 우유를 앞에 놓아 주었다. 로라는 수프를 둘러마시다시피 하고 우유는 한두 모금, 빵은 손에 집어 들고 현관을 나가면서 외쳤다. "다녀올게요." 운동화를 구겨 신고 가방을 둘러멘 로라가 나가자마자 집은 조용해졌다. 아침의 신선한 공기가 로라의 발그레한 빰을 스쳤다 로라는 모든 것이 즐겁고 상쾌하기만 했다. 학교까지는 40분 정도 걸리는데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전거를 많이 이용한다. 그녀는 예쁜 나뭇잎이나 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주워서 책갈피에 꽂아두거나 꺾어서 드라이 플라워를 만들어 두는 치미가 있다. 가는 길에 그라시아를 만났다. 그녀는 금발 미인이다. 학교에서도 인기가 높아 그녀 주위에는 남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봐, 그라시아!"
"응, 로라. 또 꽃을 꺾었구나."
꽃을 한 다발 들고 있는 로라를 반기며 그라시아 역시 자전거를 탄 채 친구 옆으로 바짝 붙었다. 로라는 윤기 나는 검은 단발머리이고 그라시아는 금발이지만 두 사람은 키가 거의 비슷하고 몸매도 잘 빠졌다. 아마 그라시아가 더 글래머에 가까운 듯싶다. 미모의 두 학생이 자전거를 나란히 탄 채 달려가자 그 옆을 지나는 남학생이나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던 남학생이나 모두들 휘파람을 불거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교실에 들어서니 키만 컸지 볼품 없는 델피와 검은 머리에 주근깨투성이지만 귀엽고 재치 있는 클로드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교실 문을 들어서는 로라와 그라시아를 보더니 손짓해 불렀다. 클로드가 세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들 오늘 우리 집에서 모이기로 한 것 알지?"
로라가 헝클어진 머리를 핀으로 고정시키며 말했다.
"물론이지. 눈요기거리는 많이 준비해 놨겠지?"
델피가 손아로 자기 가슴을 치며 윙크했다.
"그건 걱정마. 내가 있는데."
그라시아도 한마디 거들었다.
"넌 볼거리보다 먹을거리를 더 좋아하잖니?"
다들 손뼉을 치며 웃었다. 네 사람 중에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델피가 평소에 먹을 것을 유난히 밝히기 때문이었다. 텔피가 얼굴이 붉어져서 쏘아붙이려는데 선생님이 들어왔다. 역사 시간이었다. 선생님들 중에서는 역사 선생님이 재일 멋쟁이이다. 수업을 익살스럽고 재미있게 해서 아이들이 좋아했다. 학교 일과가 끝나고 나서 클로드는 로라, 그라시아, 델피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향했다. 클로드의 아버지는 시내 패스트푸드점과 레스토랑의 체인점을 가지고 있는 돈많은 사업가이다. 그에 걸맞게 클로드의 집은 초호화판이다. 대문에서 시작해서 자전거를 타고도 한참을 달려야 집에 다다를 정도로 넓었다. 정원도 전문 정원사의 손에 의해 거의 예술작품에 가깝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집 뒤쪽으로는 울창한 숲이 자리하고 있었고 앞마당에는 수영장이 있다.
클로드의 부모는 노환으로 고생하는 할머니를 병원에 입원시켜드리러 갔기 때문에 2~3일은 집을 비울 예정이었다. 궁전같은 집에 들어서자 하녀가 그들에게 마실 것을 내왔다. 거실에서 한참 수다를 떨고 난 그들은 2층 클로드의 방으로 갔다. 방에 들어가자 문을 잠그고 침대에 모여 앉았다. 텔피가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훨씬 큼직한 가방을 열어 보이자 그 안에 누드잡지, 연애잡지들이 가득히 들어 있었다. 오늘은 그들이 정한 섹스 데이로 성에 관한 것들을 보고 읽고, 정보 교환을 하기로 한 날이다. 한 달에 한 번씩인데 어떤 때는 남학생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다들 잡지를 읽느라 얼굴이 발그레졌다. 누드 사진을 찍은 여자들은 대개가 유명연예인들로 대담한 포즈와 도발적인 눈빛으로 뭇 사내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라시아가 뜨거워진 눈빛으로 친구들을 둘러봤다.
"너희들, 이런 거 보면 남자애들과 자고 싶지 않니?"
델피가 커다란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물론이지. 나의 이 풍만한 몸매를 사랑해 줄 남자를 만나고 싶어."
모두 깔깔거리면 웃었다. 델피는 풍만하다고 표현하기보다는 뚱뚱하다고 해야 옳았다. 그라시아가 로라에게 바짝 다가가 앉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로라는 깜짝 놀라 그라시아를 쳐다봤다.
"로라. 넌 남자애들이 참 좋아할 타입이야. 그런데 넌 보기보다 너무 고리타분하단 말야."
그들이 섹스 데이를 정한 것은 반년 전부터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농도가 진해져 가고 있었다. 그라시아가 로라의 입술에 키스하며 자기 옷을 벗어 나갔다.
"내가 오늘은 너희들에게 자위하는 법을 가르쳐 줄게. 잘만 하면 꼭 남자와 자고 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라니까."
그라시아는 옷을 다 벗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옷을 벗을 것을 요구했다. 네 명의 소녀들이 발가벗자 섹스 파티가 벌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라시아는 로라의 젖가슴을 더듬었다. 로라가 순간적으로 흠칫 놀라 몸을 뒤로 제꼈지만 그라시아가 달려들어 유두를 혀로 핥자 그만 신음소리를 내며 몸이 굳어 버린 듯 가만히 있었다. 그라시아는 로라의 어께며 배를 손으로 쓰다듬고 입술로 더듬어서 아랫배를 거쳐 사타구니까지 갔다. 그들 옆에서는 델피가 클로드를 애무하고 있었다. 그라시아의 손가락이 로라의 클리토리스에 가볍게 자극을 주자 로라는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충격과도 같은 쾌감을 느꼈다. 그라시아는 로라의 표정을 살피며 손가락 대신 입술을 갖다댔다. 그라시아의 혀가 로라의 몸을 깨웠다. 순간, 로라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벌려 부드러운 혀의 느낌을 한껏 받아들였다. 몸에서 힘을 뺄수록 눈을 감고 혀의 놀림을 생각할수록 로라는 더욱 강한 전율을 느꼈다. 아직 제대로 성숙 하지 않은 풋풋한 내음과 음탕한 열기가 어우러져 기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로라가 몸을 뒤채며 신음소리를 내는 동안 그라시아는 이번에는 누워서 자기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부풀대로 부푼 가슴, 날씬한 허리, 배 아래의 작은 둔덕, 성글성글한 음모, 다리를 벌린 사이로 그녀의 음부가 보였다. 벌어진 틈새로 붉은 속살이 쏟아질 듯 보이고 그라시아 자신의 손가락이 그것을 만지다가 서서히 리듬을 타면서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율이 음부를 통해 자궁 속으로, 가슴 깊숙한 곳까지 올라오고 드디어 오르가슴에 도달한 그라시아는 입술이 헤벌어지면서 허리를 들어 올리며 몸을 뒤틀었다.
그라시아가 어찌나 능숙하게 자위행위를 하는지 델피와 클로드가 하던 짓을 멈추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라는 눈을 감고 침대 맨 가장자리에서 멋진 역사선생님을 생각했다. 그의 입술의 감촉이 느껴지고 커다랗게 발기한 그의 남성이 그녀의 사타구니를 이리저리 헤매듯 애무하다가 성기를 찾아 그곳을 벌리고 입구에서 간지럽혔다. 감질나는 애무에 로라는 몸을 뒤틀고 한참을 그러다가 드디어 그녀의 몸을 파고 들어오는 커다랗고 부드러운 것을 느꼈다.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들어갔다, 나왔다, 원을 그리듯 돌리기도 하는..... 쾌락의 향연 속에서 땀 흘리며 흐느적거리던 네 명의 소녀는 벽에 기대거나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이제 막 성인의 모습으로 변해 가는 아직은 앳된 그들의 몸은 탐욕을 알아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클로드가 먼저 일어나 수영하러 나갈 것을 제의했다. 와르르 발가벗은 소녀들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하녀 한 명이 그들을 보고는 놀란 자신의 입을 막으며 멈추어 섰다. 그들은 수영장까지 뛰어가 첨벙하고 물속으로 잠겨들었다. 차가운 물이 열기를 식혀 주었다.
로라는 일주일 전 그라시아를 따라 그녀의 친한 친구들이 모인다는 클럽에 놀러 간 일이 있다. 그곳에는 남자와 여자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껴안고 있었는데 그들은 애무도 대담하고 거침없이 하고 있었다. 그라시아는 그중 반반한 남자를 골라 로라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의 이름은 타마소라고 했다. 로라보다 세 살이 많았다. 그곳에 온 게 두 번밖에 되지 않아 아직은 낯설다고 했다. 사실 로라는 그 남자가 눈에 익었다. 이름만 몰랐을 뿐이지 기회만 있으면 그녀 주위를 맴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그라시아에게 미리 모라를 소개시켜 줄 것을 부탁한 것 같았다. 타마소는 밤색 곱슬머리에 단정하게 생긴 남자였다. 눈썹이 처져 있는 데다 목소리까지 작아 뭐든 자신 없어 하는 성격 같았다. 그러나 로라를 쳐다보는 눈은 빛났다. 로라와 만나게 된 게 너무나도 기쁜 모양이었다. 로라는 성적 호기심은 남들 못지않게 강했지만 아직은 이런 장소에 익숙치가 않아서 안절부절못했다. 로라는 타마소가 가져온 음료수 잔을 받아들었다.
"얘. 타마소라고 했지? 너 여자 친구는 있니?"
타마소는 눈을 껌벅거리며 머리를 긁었다.
"아, 저..... 아, 아니, 없어."
"넌 취미가 뭐니?"
"아, 응? 아, 빵 만들기?"
로라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뭐라고? 호호호. 빵 만들기?"
"아. 그게, 우리집이 제과점을 하거든."
"혹시 여기서 가까운 공원 앞 네거리에 있는 빵집이니?"
"아, 응. 맞아."
"내가 놀러 가면 네가 만든 빵 줄 거니?"
타마소가 활짝 웃었다.
"무.....물론이지. 언제든지 와. 오늘 당장 와도 좋아."
로라가 말주변이 없는 타마소를 상대하고 있는 사이에 그라시아는 가죽 잠바를 입은 인상이 험상궂은 청년과 키스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그라시아가 청년의 무릎 위로 올라가 다리를 벌리고 앉자 그는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엉덩이를 만졌다. 로라의 눈길이 청년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옆에 있던 타마소가 로라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로라는 얼굴을 돌려 타마소의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너 키스 해봤니?"
타마소가 머뭇거리더니 헛기침을 했다.
"아, 흠흠. 해..... 해봤어."
"누구하고?"
"위....윌마하고."
"윌마가 누구야?"
타마소는 로라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로라는 타마소의 밤색 곱슬머리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쓰다듬어 주었다. 몸집이나 얼굴은 멀쩡하면서도 소심한 이 남자에게 왠지 호기심이 가고 친밀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고개를 든 타마소를 들여다보던 로라가 그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살포시 포갰다.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면 혀로 입술을 파고들자 그의 혀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왔다. 예상치 않은 키스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키스를 끝낸 타마소의 얼굴이 꼭 잘 익은 사과 같았다. 타마소가 말을 더듬거렸다.
"너, 넌 너무 에뻐."
"그래? 정말이야?"
"그럼, 너보다 더 예쁜 여자는 이 마을에, 아니 온 나라에 아무도 없을 거야."
로라는 타마소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돌아보니 그라시아와 청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타마소가 음료수를 더 가져오겠다고 일어선 사이, 로라는 룸 끝의 계단 옆에 있는 통로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방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끼리끼리 모여 술을 마시거나 키스나 애무를 하고 있었다. 로라는 그 광경들을 보고 통로 끝까지 갔다. 마지막 방은 문이 닫혀 있고 창문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커튼 맨 가장자리 틈새로 안의 광경이 모두 들여다보였다. 그리시아는 그곳에 있었다. 아까 그 청년이 그라시아의 뒷목덜미에 키스를 하더니 그녀를 돌려세우고 뭔가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라시아가 팬티를 벗어내리고 치마를 걷어 올리더니 의자에 앉아 다리를 벌렸다. 청년은 그 앞에 앉아 찬찬히 다리 사이를 들여다봤다. 청년이 또 뭐라고 하자 그라시아는 웃옷과 브래지어를 풀어 헤쳤다. 나이답지 않게 잘 발달된 유방이 나타났다. 청년은 유방을 만지다가 유두를 손가락으로 집어서 잡아당겼다. 그라시아는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다. 청년은 그리시아 주위를 맴돌며 온몸을 구석구석 만졌다. 그런데 청년이 뭐라고 했는지 그라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청년이 그라시아의 뺨을 사정없이 갈겨 버렸다. 그녀는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청년이 다가가서 발로 차려고 하자 그녀가 다리를 붙들고 사정했다. 잠시 후 그라시아는 네발로 기었다. 청년은 웃음을 머금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라시아의 유방은 바닥을 향한 채 출렁거렸고 엉덩이 아래 다리 사이로는 자랄 대로 자란 음모와 음부가 언뜻언뜻 보였다. 그라시아가 가끔씩 멈추면 청년은 곧장 다가가 발로 배를 걷어찼고 그녀는 맥없이 옆으로 쓰러져 배를 움켜잡았다. 바닥을 한바퀴 돌았을까. 청년은 그라시아를 일으켜 세우고는 한쪽 구석에 세워 놓고는 바지에서 뭔가를 꺼냈다. 한 손으로는 그라시아의 가슴을 난폭하게 움켜쥐고 또 한 손으로는 그녀의 다리를 올린 채로 배를 갖다 붙였다. 그의 엉덩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라시아는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청년은 상관하지 않고 자꾸만 배를 힘껏 올려붙이고 있었다. 로라마저도 이마를 찡그린 채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군가의 손이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타마소였다. 손에는 잔이 들려 있었다.
"자, 마셔봐. 칵테일이야."
로라는 엉겹결에 잔을 받아 들었다.
"그 안에 누가 있니?"
"아, 아니야. 우리 나가자."
로라는 칵테일을 마시지도 않고 타마소와 그곳을 빠져나왔다.
"너의 집에 갈까?"
타마소가 약간 의외인 듯 돌아보았다.
"늦었는데 괜찮겠어?"
"뭐 어때? 네가 바래다주면 되잖아."
타마소는 기쁜 나머지 로라의 손을 잡고 뛰다시피 집을 향했다. 가게에는 타마소의 아버지 토니가 장사를 마치고 정리 중이었다.
"아버지, 제 친구 로라예요."
"안녕하세요?"
토니가 로라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음, 예쁘게 생겼구나."
로라가 빵이 진열되어있는 진열장을 뒷짐을 진 채 둘러보았다. 토니가 그날 팔고 남은 빵을 봉투에 가득 담아 주었다.
"옛다. 집에 가서 출출하거든 먹어라."
로라가 뛸듯이 기뻐하며 토니의 볼에 키스했다. 그때 타마소의 어머니 넬라가 나타나더니 로라가 하는 양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로라. 어머니셔."
"어머, 그래? 안녕하세요?"
로라는 얼른 넬라에게도 불에 키스했다.
"빵 맛있게 잘 먹을게요."
넬라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로라의 얼굴과 그녀가 들고 있는 빵 봉지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타마소가 로라를 끌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저. 로라 좀 바래다주고 올게요."
넬라가 토니를 보며 물었다.
"저 애는 자이레의 딸 아닌가요?"
"그래? 난 모르겠는데?"
"맞아요. 틀림없어요. 하필 그 여자의 딸을 사귀다니....."
"뭐 어때서."
"어떻기는요!"
넬라는 신경질을 벌컥 냈다. 계집애 하나가 왔다 가니까 정신까지 어수선했다. 로라는 그날 일을 생각하며 헤엄은 치지 않고 물 위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세 사람은 벌써 수영을 끝냈는지 타월로 몸을 닦으며 로라를 불렀다. 그들의 몸은 서서히 여자의 본능을 들추어내고 있었다.
타마소는 로라를 데려다주고 온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동안 로라 몰래 얼마나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고 다녔는지 모른다. 그녀의 집이 어디인지, 친구들은 누구누구인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따라다녔다. 타마소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일년 전으로 그녀가 어머니 자이레와 함께 빵을 사러 왔을 때였다. 그때 타마소는 주방에서 빵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나이 어린 여자애 목소리가 들려 살짝 내다본 것이다. 그녀를 본 순간 그는 자기의 운명을 예견했다. 그녀 없는 인생을 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기필코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들리라 결심한 것이다. 그 꿈이 실현될 단계에 놓였으니 잠이 올 리가 만무하다. 타마소는 일하는 시간에도 로라를 찾아다녔고 그때마다 자기가 온 정성을 다해 만든 빵을 갖다 주었다. 로라의 집에서는 로라보다도 자이레가 그를 더 반겨 주었다. 로라를 빨리 시집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뿐 아니라 성실한 타마소가 여간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었다. 어른에게 공손하고 자기에게도 붙임성 있게 굴었다. 그래서 타마소가 올 때쯤이면 식사준비를 부산하게 한다거나 깔끔하게 청소라도 해 놓았다. 자이레와 달리 안드레는 타마소에게 차갑게 굴었다. 못마땅한 내색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리 반기지도 않는 것이었다. 타마소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손 들고 반대하고 나오지 않는 것만도 고맙고 기쁘게 생각했다. 다만 타마소는 로라를 볼 때면 항상 불안한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너무 예뻤고 사실 눈독을 들이는 사람이 자기가 알기로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타마소는 꾀를 생각해 냈다. 로라가 자기를 싫어하지 않고 잘 따르는데다 자이레가 아주 호의적이니 약혼을 미리 해두는 것이다. 타마소는 그 생각을 하자마자 그렇잖아도 요즘 아들이 일은 하지 않고 여자애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델라는 노발대발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뭐라고? 그 계집애와 약혼을 한다고? 누구 맘대로? 다른 좋은 색시감 놔두고 하필 로라야? 안된다."
"안 돼요. 엄마 꼭 시켜 주셔야 해요."
"무슨 소리야! 약혼하면 나중에 결혼하게 될 것이고 그럼 난 그애에게 시어머니가 되는 것 아니냐."
"좋잖아요. 그렇게 예쁜 며느리를 얻으니, 엄마는 아들이 행복하게 사는 걸 보고 싶지 않으세요?"
넬라는 막무가내로 약혼시켜 달라는 타마소 못지않게 무조건 반대했다.
"약혼? 절대 안 된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좋은 색시가 있을 거야. 내가 찾아보마."
"싫어요. 로라 아닌 다른 여자랑은 절대 결혼 안 해요!"
타마소는 그대로 자기 방으로 가더니 문을 잠그고 일절 나오지 않았다. 넬라가 당장 열라고 문을 두드리고 발로 차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난처했다. 그래도 타마소가 일을 해 주어야 장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얘, 그 이야기는 다음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우선 문 좀 열어 봐."
"싫어요. 지금 당장 허락해 주세요."
"당장 열어! 열라고!"
타마소는 문을 열지 않았다. 그대로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넬라는 아들의 식사를 챙겨서 문을 두드렸지만 이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번 고집을 부리면 끝장을 내고야 마는 아들 성격에 정말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로라가 타마소를 찾아왔다. 토니가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너라. 로라. 그렇잖아도 타마소가 밥도 먹지 않고 데모 중이다. 네가 가서 좀 달래 보렴."
"왜 그러죠? 요즘 저희 집에도 통 오지를 않고."
"너와 약혼하고 싶다는구나."
"네? 약혼? 호호호."
로라는 황당하기도 했지만 싫지 않은 듯 계속 웃었다. 넬라는 그런 로라가 꼴도 보기 싫은 듯 말 한마디도 걸지 않고 노려봤다.
"내가 한번 가 봐야지." 로라가 까불까불 타마소의 방으로 갔다.
"타마소, 타마소. 나 로라야."
타마소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로라의 뒤를 따라 올라온 넬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타마소는 어머니를 보자 로라만 안으로 들이고 문을 잠궈 버렸다. 넬라가 소리를 질렀다.
"네 소원대로 해 줄 테니까 당장 이 문 열어! 그렇게 약혼하고 싶으면 해!"
타마소가 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다.
"정말이죠?"
넬라는 너무 미워 냅다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자 타마소가 탈진한 상태에서 긴장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로라가 깜짝 놀라 달려가 붙들었다. 집안이 난리법석이었다. 토니가 뛰어오고 넬라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대성통곡을 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로라가 토니에게 앰블런스를 부르라고 했다. 결국 타마소는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했다. 그동안 넬라는 정장을 차려입고 그녀가 이 동네에서 가장 천박한 집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로라의 집을 찾아갔다. 자이레가 현관까지 나와 상냥하게 맞이해 주었다. 넬라는 계속해서 헛기침만 하고 있었다. 그때 안드레가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중에 아래층에 내려왔다가 넬라를 발견하고는 웃으며 인사를 했다. 넬라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다.
마을 축제가 시작된 첫날 밤. 축제에 참가한 넬라가 술을 마시느라 집에 갈 생각도 않는 남편을 팽개쳐두고 혼자 돌아가기로 했다. 가게에 거의 가까워갈 무렵 골목에서 남녀가 껴안고 키스를 하고 있었다.
"아니, 세상에...."
그런데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방 여자가 넬라를 먼저 발견하고 도망가 버렸다. 남자가 돌아서서 술에 취했는지 비척거리며 넬라에게 다가왔다.
"아니, 누가 내 애인을 쫓아 버린 거야. 엉?"
안드레는 가까이 가서 넬라임을 알고는 인사를 꾸벅했다.
"아이고, 이거 마나님께서 축제에 가셨었나 보군요."
안드레는 아무 대꾸 없이 지나쳐 가려는 넬라의 손을 붙잡더니 허리를 껴안고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어찌나 능숙하게 키스를 하는지 넬라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이제까지 남편만 바라보고 살았던 넬라에게는 다른 남자하고는 첫 경험이었다. 안드레는 넋을 잃고 있는 넬라의 가슴을 풀어헤치고 유방에 키스하고는 넬라의 몸을 돌려 치마를 들어 올리더니 팬티를 내려 엉덩이에도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나서 안드레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넬라에게 말했다.
"정말 멋진 몸매로군요. 저희 스튜디오를 찾아 주시면 그 아름다운 몸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 드립죠."
이렇게 말한 안드레는 비척비척 사라져 버렸다. 넬라는 그제서야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줘고 부르르 떨었다.
"이 불한당 같은 놈!" 그녀가 돌아봤을 때 안드레는 이미 멀리 사라진 뒤였다. 그 이후로 그녀는 그렇잖아도 소문 때문에 좋아하지 않던 그들 부부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한 점은 그때 그 일을 잊으려 해도 자꾸 생각나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자신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들 때문에 그와 어쩔 수 없이 마주치고 만 것이다.
"아 저...."
넬라는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진땀을 닦았다.
"제 아들 타마소가 글세 약혼을 하고 싶다지 않습니까."
자이레와 안드레가 동시에 물었다.
"로라와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자이레는 뛸듯이 기뻐하며 로라가 얼마나 명랑하고 착한 아이인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넬라는 분통이 터졌다. 로라처럼 행실이 좋지 않은 처녀를 보고 부모라고 저렇게 칭찬을 해대다니. 그렇다고 이 마당에 부정할 수도 없었다. 넬라는 약혼 날짜와 장소를 정하자고 했다 간단하게 양쪽 집 식구들만 모여 저녁을 먹는걸로 끝내기로 했다. 넬라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현관으로 갔다.
"넬라 부인."
넬라는 화들짝 놀랐다. 안드레가 바로 등 뒤에 와 있었다.
"양산을 잊으셨군요."
넬라는 양산을 빼앗듯이 채가지고 부산하게 나가 버렸다. 안드레가 빙긋이 웃었다. 약혼날은 타마소가 병원에서 퇴원한 다음 날이었고 시내에서 제일 큰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타마소는 너무나 기쁜 콧노래가 절로 나왔고 그날은 나비넥타이를 맨 정장을 차려입었다. 로라는 예쁜 드레스를 입었지만 가슴이 너무 파이고 속살이 다 비쳐 보여 넬라는 간간이 로라에게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타마소와 로라는 약혼 반지를 교환했다. 토니와 자이레는 흐뭇해했고 안드레는 타마소를, 넬라는 로라를 못마땅해했다. 약혼식을 끝내고 타마소와 로라는 강가로 산책을 나갔다. 타마소는 좋아서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로라는 생각보다 너무 빨리 이런 일이 일어나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싫지는 않았다. 로라가 타마소에게 매달려 키스를 했다. 타마소가 로라를 꼭 끌어안았다. 로라가 갑자기 타마소를 밀쳐냈다. 로라는 갑자기 타마소에게 등을 돌리고 치마를 허리 위까지 끌어 올리더니 상체를 구부려 팬티를 벗었다. 달빛을 받은 로라의 엉덩이가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타마소는 로라의 행동에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지만 새하얀 엉덩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 다시 눈을 떴다. 그러자 로라는 이미 알몸이 되어 있었고 타마소를 놀리듯 깔깔거리며 강물로 뛰어들어 헤엄쳐 나갔다. 타마소는 로라가 수영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3
로라의 아버지 안드레는 친구 중에서 페페를 가장 아낀다. 사냥도 그와 함께 다녔고 일도 함께 했다. 페페는 대학 시절 안드레를 만났고 지금의 아내도 그때쯤에 만났다. 페페는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안드레는 대학은 다니지 않고 요리에 소질이 있어 시내 음식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일을 배우고 있었다. 어느날 대학으로 안드레가 페페를 찾아왔고 페페는 근처 술집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 술집은 아담하고 조용한 곳으로 평소 그가 자주 찾는 집이었다. 손님이 많이 몰리는 저녁 시간이 되면 피아노 연주도 해 주는 곳이었다. 다른 날은 남자가 피아노를 쳤었는데 그날은 여자로 바뀌어 있었다. 페페는 무심코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든 그녀와 눈이 마주쳤는데 머리에 충격이 올 정도로 그의 미적 감각을 뒤흔들 만한 미모를 지녔음을 알았다. 페페는 연주 중인 그녀에게 웨이터를 시켜 위스키 한 잔을 갖다줄 것을 지시했고 술잔을 받아든 그녀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페페는 안드레에게 물었다.
"저 여자 어때?"
"꽤 괜찮은데."
젊었을 때부터 바람둥이라서 여자 보는 안목이 꽤 높은 안드레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페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페페는 피아노 연주가 끝나는 늦은 시간까지 돌아가지 않고 술을 마셨다. 손님들도 거의 다 가고 서너 테이블에 몇몇 사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문을 닫을 시간이 되자 그녀가 피아노 뚜껑을 덮고 일어났고 페페와 안드레도 일어났다. 안드레는 페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잘해 보라고."
안드레는 페페를 남겨 두고 먼저 갔다. 페페는 술집의 문 앞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5분, 10분, 시간이 왜 그리 길게 느껴지는지 페페는 제자리걸음을 하며 초조해했다. 드디어 그녀가 나왔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더 커다랗게 뜨고는 페페를 바라보았다.
"저한테 볼일이 있으신가요."
"아, 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그녀는 차갑게 거절했다.
"늦었어요. 돌아가야 해요."
페페가 그녀에게 매달려 사정했다.
"잠깐이면 됩니다. 저기 가까운 커피숍으로 가시죠."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거절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페페는 그녀를 쫓아갔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페페는 묵묵히 그녀를 따라갔다. 유흥가를 지나 공원을 끼고 한참을 걸어가자 아파트가 나왔다. 그녀는 그곳에 멈추어 섰다.
"이제 그만 가 주세요."
페페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총총히 길을 건너 집으로 향했다. 페페는 그다음 날부터 매일 출근하다시피 술집을 찾았다. 그리고 그녀가 일을 끝마치면 그녀의 집까지 따라갔다가 되돌아가는 일을 반복했다. 어느 날이었다. 열흘쯤 지났을까. 페페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그려 액자에 넣어 챙겨 두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집까지 따라갔다가 그림을 건네주고는 되돌아왔다. 그다음 날, 집 앞까지 또 따라온 그에게 그녀가 들어가서 차라도 마시고 가라고 권했다. 페페는 너무 기뻐서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녀의 방은 산뜻하고 아담했다. 장식이라고는 거의 없었고 가구 몇 점만 있을 뿐이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그가 선물한 액자가 걸려있었다. 그녀가 커피를 끓여 왔다. 페페가 커피잔을 들고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름이 뭐죠?"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아 로베르...."
"전 페페 질만입니다."
그녀는 페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림, 고마워요."
"아뇨. 뭘. 혼자 사시나 보죠?"
그녀는 그런 사실이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네. 부모님은 시골에 사세요. 농사를 지으시죠."
"아, 예." 마리아는 일어나 천축을 틀었다. 슈만의 교향곡 <봄>이 흘러나왔다. 마리아가 다시 와서 그의 앞에 앉자 그는 그녀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비단결처럼 부드러웠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볼에 키스했다. 그녀가 순간 멈칫했다. 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다가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는 감미로운 듯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블라우스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의 손이 천천히 아래쪽으로 움직여가서 치마 속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갑자기 그를 사정없이 밀쳐내며 소리쳤다.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나가요! 돌아가세요."
페페는 당황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마리아, 난 다만....."
"가까이 오지 말아요. 당장 나가라구요."
페페는 뒷걸음질 쳤다. 그녀를 한동안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돌아서서 나갔다. 페페는 아파트를 나와 그녀의 방이 있는 오층을 쳐다보았다. 커튼 사이로 그녀가 나타났다가 곧 사라졌다. 그 후 5일 동안 페페는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6일째 되는 날 밤 페페는 붉은 장미 100송이를 사 가지고 그녀가 와 있을 시각에 맞추어 초인종을 눌렀다. 그녀가 문을 열었다. 그가 올 것임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꽃다발을 받은 그녀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스쳤다. 페페는 그녀를 말없이 꼭 껴안았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들은 소파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 페페는 그녀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페페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의 옆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더니 물었다.
"말해 봐요. 내가 싫어요?"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우리가 서로 사랑해서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 동안을 그녀는 그렇게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페페는 그녀를 안아 침대에 뉘었다. 그녀는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는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겨나갔다. 그녀가 알몸이 되자 그는 부드럽게 음모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림을 감상하듯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그녀의 온몸에 키스했다. 목덜미와 가슴, 배, 사타구니, 허벅지, 발에 키스했다. 그녀의 몸이 얼어붙은 듯 경직되었다. 그는 그녀의 옆에 누워 그녀를 꼭 껴안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 보니 침대맡 서랍장 위에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고마워요. 아침 식사는 하고 가세요."
식탁을 보니 차려 놓은 지 얼마 안 된 듯 샌드위치 한 조각과 스크램블드 에그가 아직도 따뜻했고, 코코아 역시 온기가 가시지 않았다. 아침을 마친 그는 식탁 한쪽에 얌전히 놓인 열쇠를 집어 들고 방을 나갔다. 그날 저녁에 그는 화구를 챙겨 들고 그녀에게 갔다. 그는 하얀 천을 깔고 그 위에 알몸인 그녀를 눕혀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붓끝이 장밋빛 젖꼭지를 지나자 그녀의 몸이 뒤틀렸다. 그는 그녀의 온몸을 붓으로 헤집고 다녔다. 그는 날마다 다른 그림을 그렸다. 옷을 그리기도 하고 나무와 꽃, 혹은 갖가지 새들과 동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기를 일주일째, 그녀는 그에게 고백했다.
오래전, 이제 막 솜털이 보송보송한 나이에 그녀를 항상 주시하던 이웃집 어른에게 성폭행당한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녀는 그때 너무 심하게 당해 이제 아이를 낳을 수도 없다고 했다. 그는 그날은 그녀의 몸에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부드럽게, 감미롭게 열정적으로 그녀의 몸을 여는 데 열중했다. 그녀가 몸을 비틀며 신음소리를 냈다. 그의 부드러운 움직임이, 그의 따뜻한 손길이 그녀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절정에 오른 그녀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고 마침내 그녀는 눈물을 마음껏 흘렸다. 그가 등을 쓸어 주었다. 그의 품속에서 그녀는 잠이 들었다.
페페는 졸업을 하자마자 마리아와 결혼했다. 그는 그림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서 누구보다도 개인전을 많이 열었다. 레스토랑에서, 공공기관에서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개인전을 연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고 그는 방황했다. 결혼도 한 상태여서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안드레의 편지를 받았다. 같이 일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당장 짐을 챙겨 마리아와 안드레의 집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 안드레의 외동딸인 로라는 벌써 열 살이 되어있었고 페페는 자식이 없는 만큼 로라를 예뻐했다. 마리아와 함께 안드레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자주 했고 가끔씩 자기 집에 초대하기도 했다. 안드레는 짙은 누썹에 꼭 다문 입술을 한, 남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인물이었고 페페는 그런 안드레의 외모를 좋아했고 사람 좋은 얼굴만큼이나 남에 대한 배려가 깊고 익살스러운데다 눈치도 빨랐다. 그래서 그들은 일을 하면 잘 맞았고 부딪칠 일도 없었다. 처음에 페페는 안드레가 하는 일을 별로 탐탐치 않게 생각했다. 물론 마리아도 반대를 했다. 그러나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야 했고 페페의 미술적인 감각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무조건 일하게 되었다. 마약과도 같이 그 일은 페페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안드레는 집 안에 스튜디오를 마련해서 페페와 작업을 했다. 안드레는 사진 찍는 일을, 페페는 그것들을 편집하는 일을 했다. 어쨌든, 그들이 만든 사진집이나 테이프는 프랑스 파리에도 가져다가 팔 만큼 인기가 좋았다. 오늘은 영사기를 돌리며 그동안 찍었던 사진을 감상했다. 노골적인 누드사진들이었다. 뒤로 돌아 누워있는 여자, 선 채로 엉덩이를 내밀고 뇌쇄적인 눈길을 보내는 여자, 그들은 한결같이 속옷과 타이즈를 신은 채 가슴과 엉덩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앞에서 안드레와 페페는 진지한 표정으로 사진 편집을 했다. 페페가 책상에 기대어 선 채 말했다.
"머리는 빼야겠어. 몸만 보는 게 더 자극적이야. 반응도 좋고...."
안드레가 영사기를 작동시키며 말했다.
"나는 발기한다. 고로 존재한다."
페페가 영상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얼굴은 시선만 흩트릴 뿐이야."
안드레는 일어서서 영상 속 여자의 엉덩이를 어루만지더니 거기에 키스했다.
"환상과 거짓이지. 아니, 저주야. 일과 성공. 발전 다 개소리야. 저 구멍만이 진실이지."
페페가 말했다.
"그레딧의 사진을 흑백으로 처리하는 게 좋겠어."
안드레가 추억에 잠기며 말했다.
"자이레도 흑백이 어울리지. 처음 라하브에서 그녀를 봤을 때 난 <노르망디>호의 주방장이었고 그녀는 일등석 탈의실 여급이었지. 검은 유니폼에 흰 칼라. 검은 스타킹...... 피부가 백옥이었지. 미인이었어. 나 때문에 사귀는 남자를 포기했어. 나 때문이었어."
침울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옛날 생각하고 있는 안드레를 쳐다보며 페페가 말했다.
"자네도 자유로운 생활을 포기했잖나."
"세속의 욕망을 포기한 거지. 현대의 인간은 욕망의 파도 속에서 헤매고 있지만 난 세상의 고뇌를 초월하게 됐어. 이젠 나만의 울타리가 중요해. 자네와 우정을 유지하는 데서 진정한 기쁨을 느낀다네. 그리고 나에게는 자이레의 사랑, 그리고 로라의 미소가 있잖나."
페페가 의미깊은 눈길을 보냈다.
"자네, 로라에게 마음 있지?"
안드레가 페페의 눈길을 외면했다.
"자넨 몰라도 돼."
그때쯤 아래층에 있는 부엌에서는 자이레가 요리를 하느라고 분주했다. 로라는 자이레의 주위를 할 일 없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자이레는 그런 로라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로라는 이미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익을 대로 익어 단내가 흘러넘치는 과일과도 같았다. 그녀의 행동 하나 하나, 걸음걸이에서조차도 남자를 의식하는 여자의 본성이 느껴졌다. 자이레는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 걱정 속에는 불안과 질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혹시나 안드레를 로라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안드레는 로라를 유독 예뻐했다. 물론 로라가 어릴 때는 함께 발가벗고 강에서 수영을 해도 불안하지 않았다. 안드레는 로라를 딸로 생각할 뿐이었다. 게다가 로라 역시 안드레를 잘 따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로라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데 있었다. 그 무엇도 그녀의 미모를 능가할 수가 없었다. 꽃도, 보석도 지금 막 봉오리를 터트린 그녀를 당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자이레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라는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또 사랑받고픈 욕심밖에 없었다. 자이레가 로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스프에 간이 잘됐나 맛 좀 보렴."
로라가 펄펄 끓고 있는 스프를 한 국자 떠서 후후 불었다.
"좀 짜요."
자이레가 얼굴을 찡그렸다.
"괜찮은 것 같은데."
로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요."
로라는 자이레를 도와 먼저 위층에 올려다 줄 음식을 쟁반에 담았다. 접시 2개, 컵 2개, 포도주 1병, 케익 4개.....
"갖다 드려라. 위층 스튜디오에 계셔."
로라가 치마를 살랑거리며 쟁반을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자이레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스튜디오로 쓰이고 있는 방의 문 가까이 다가가자 페페와 안드레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페페의 목소리였다.
"맥심과 그 유명한 댄서가 사귀었다며?"
안드레가 말했다.
"유명하긴 했지만 사귄 건 아냐. 그녀는 열두 남자를 해치운 여자였어."
페페가 말했다.
"하지만 맥심은 성 불능이잖아."
로라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방의 벽에 설치한 스크린에는 여자의 성기가 그대로 드러나는 엉덩이가 영사기를 통해 비치고 있었고 두 남자가 피우는 담배로 인해 사방이 온통 뿌옇게 보였다. 로라는 여자 엉덩이에 시선을 둔 채 그대로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안드레가 말했다.
"이젠 다 나았어. 그래서 지금은... 페페, 누가 왔나 본데."
인기척을 느낀 안드레의 말에 페페가 돌아보았다. 안드레는 얼른 벽에 커튼을 쳤다.
"로라 왔구나. 잘 있었니? 여긴 왠일이니?"
로라는 뭔가를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안녕하세요. 페페 아저씨. 식사를 가져왔어요."
로라가 얼른 쟁반을 두 남자 사이에 있는 둥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페페가 케익을 한 개 집어 들었다.
"빵 냄새가 좋구나."
안드레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빵쟁이 타마소는 잘 있니?"
로라가 입을 삐죽거렸다.
"무슨 상관이죠? 아빠가 결혼하세요?"
로라는 요즘 들어 안드레에게 거칠게 말대꾸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타마소의 이야기를 꺼낼 때면 더 그랬다. 안드레는 유난히 타마소를 의식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탄식이 나올 만큼 예쁘고 귀한 딸을 데려가기엔 타마소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자신도 모르는 질투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안드레는 로라의 빈정거림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말했다.
"빵을 만들 듯 사랑을 해 준다면 넌 참 좋겠구나."
로라는 포도주를 컵 두 개에 따라 하나를 안드레에게 건넸다.
"드세요. 쟁반은 어떡하죠?"
안드레가 말했다.
"그냥 놔둬라. 쟁반은 신경이 안 쓰이지만 넌..."
로라가 커튼을 들어 사진을 들여다보자 안드레가 하던 말을 멈추고 손을 흔들며 로라에게 다가갔다.
"그건 안 돼. 보면 안 된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보면 안 돼."
사진 속의 여자는 뒷모습만 보여서 잘 알 수가 없었지만 그녀의 어머니 자이레였다. 순간적이었지만 로라의 눈이 멈칫, 사진에 머물렀고 다가온 아버지를 의심의 눈초리로 올려다봤다. 로라는 커튼에서 손을 떼며 방을 둘러보다가 책꽂이 위쪽에 놓아둔 줄타기 인형을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거렸다.
"저건 어디서 났죠?"
안드레가 대답했다.
"<아틀란티>호에서."
로라가 흥미로운 듯 인형을 찬찬히 쳐다보며 물었다.
"작동돼요?"
로라는 안드레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높은 책꽂이를 한 단, 두 단 기어올라가 인형을 움켜줘었다. 그녀의 짧은 치마 사이로 팬티가 보였다. 안드레는 그녀를 아래에서 올려보다가 눈을 돌리고 말았다. 로라가 한 발짝 내려 딛더니 책꽂이를 한 손으로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인형을 잡고서 안드레를 향해 소리쳤다.
"뭐하는 거예요? 도와줘요."
안드레가 마지못해 다가가 로라의 다리를 붙들고 내려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우연인지 고의인지 안드레의 얼굴이 로라의 치마 속에 묻히고 말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페페도 어색한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모라는 안드레의 품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팔에 한가득 안겨들었다. 로라는 안드레를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안드레가 로라의 팔을 거두어 내며 말했다.
"이제 가 봐, 어서. 그건 가져라."
안드레는 로라가 손에 쥐고 있는 인형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가 봐. 일해야겠다."
그새 뾰루퉁해진 로라가 홱 돌아섰다.
"아, 고매한 예술작업. 잘해 보세요."
페페는 로라가 문을 닫고 사라졌는데도 감탄의 표정을 거두질 않고 말했다.
"매력적인 여자애야. 그야말로 샤롯데 로즈야."
안드레는 턱을 손으로 괴고 눈은 초점을 잃은 채 말했다.
"그 이상이야."
안드레가 커튼을 한쪽으로 밀쳐내고 다시 영사기를 작동시켰다. 페페가 말했다.
"남자를 녹이는 재능이 있어."
안드레가 페페를 쳐다보았다.
"로라가?"
페페가 턱으로 벽을 가리켰다.
"칼라라는 저 간 큰 여자 말이야. 좀 헤프긴 하지."
"그렇지. 끝내주는 몸을 가졌지. 오늘 어디서 만나기로 했지?"
"미쉘의 의상실에서. 촬영해 주기로 했잖나. 가죽옷에 모자를 씌우고.... 프랑스판에다 실어 보려고. 우리나라에서도 주문이 쇄도할걸."
안드레와 페페는 몸매가 그럴듯한 여자는 무조건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이유로 사진을 찍게끔 유혹했다. 흔히들 처음에는 점잔을 부리며 거절을 했지만 그들의 말솜씨와 예술작품이니까 괜찮겠지 하는 황당한 이유로 결국은 사진을 찍고 말았다. 사진을 찍은 여자들은 대개 누가 그런지 알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라도 되는 듯 그 일에 대해 거론하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안드레가 자기들의 사진을 인화해서 주면 장롱 속 깊숙이. 혹은 비밀스런 곳에 잘 싸서 감추어 두었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아는 날에는 불벼락이 떨어질 걸 염려해서이다. 어떤 이들은 아예 찾아가지 않고 가끔 놀러 왔다는 핑계로 사진을 감상하고 갔다. 마을에서 알아주는 괜찮은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안드레의 스튜디오에 들렀다. 그것을 모두 모아 사진첩이나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 팔면 꽤 괜찮은 수입거리가 되었다. 안드레는 자이레까지도 그 일에 끌어들였다. 그의 눈이 자이레를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그 어떤 여자의 모습보다도 적나라하게, 또 정성스럽게 찍었다. 마치 다른 여자들은 연습하기 위한 모델에 지나지 않았다는 태도였다. 그것은 은근히 자이레의 자존심을 세워 주었다.
4
거의 다 벗은, 중요한 곳은 보이고 중요하지 않은 곳은 살짝 가린, 묘한 차림을 한 자이레가 안드레 앞에서 갖가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자이레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들어오면 어떡하죠?"
"감상하라지 뭐."
자이레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팔을 위로 치켜들었다. 가슴을 앞으로 내밀자 풍만한 가슴이 더욱 돋보였다. 자이레는 뒷모습을 보이며 눕더니 엉덩이를 높이 쳐들어서는 뒤로 뺐다. 그러자 꽃잎 같은 그녀의 은밀한 부분이 벌어지며 그 속까지 들여다보였다. 그곳은 벌써 물기가 촉촉했다. 그녀는 남자와 관계를 할 때처럼 엉덩이를 좌우로 천천히 움직였다. 안드레는 부산하게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좋아, 좋아."
안드레가 다가가서 포즈를 고쳐 주기도 했다. 자이레의 몸은 남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자이레의 가쁜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를 지켜보는 두 남자도 뜨거운 열기를 참을 수 없었다. 페페가 한쪽 구석에서 자이레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노르망디>호는 환상의 배였어."
안드레는 페페를 돌아보며 말했다.
"무슨 환상."
안드레가 그사이 쉬느라 자세를 고치고 앉은 자이레에게 요구했다.
"포즈를 취해 봐. 손도 좀 올리고, 좋아..... 아니, 아니...."
안드레가 고개를 젓더니 자이레의 손을 끌고 테이블로 갔다. 그녀를 내던지듯 테이블에 바짝 밀치더니 상체를 굽히게 했다. 그리고는 뒤로 몇 발자국 떨어졌다.
"치마 들고...."
자이레가 치마를 들자 둥그런 엉덩이가 나타났다.
"엉덩이를 더 치켜들어."
자이레는 안드레의 요구에 따랐다. 안드레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더니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선반에서 채찍을 꺼내 들고 자이레에게 다가갔다. 하얀 엉덩이가 보기에도 탐스러웠다. 안드레는 채찍을 든 팔을 올렸다.
"늘 새로운 걸 추구해야 돼."
안드레가 천천히 채찍질을 시작했다. 하얀 엉덩이에 채찍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자이레가 비명을 질렀다. 채찍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자이레의 비명은 아픈 비명소리에서 몸을 뒤틀며 교성으로 바뀌어 갔다. 엉덩이에 채찍 자국이 가득했다. 안드레는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듯 채찍을 놓고 자이레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제야 장미처럼 붉은색을 띠는군."
"으음......"
자이레가 몸을 뒤틀었다. 지금 당장 그의 성기가 뒤에서 몸을 파고들어 오기를 바라는 몸짓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은밀한 부분도, 겨드랑이도, 목덜미도 그녀의 몸은 온통 물기로 흥건해졌다. 그녀가 견디다 못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안드레가 채찍투성이인 그녀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손바닥으로 떠밀며 난폭하게 등을 눌렀다. 그리고는 다시 사진기를 들고 찍기 시작했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고. 좋았어."
안드레는 한 컷을 더 찍더니 몸을 일으켰다.
"페페, 준비시켜."
페페가 서랍을 열고 나무상자를 꺼내 들고는 자이레에게 다가갔다. 페페는 자이레의 몸을 일으키더니 한쪽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유두가 단단해졌다. 자이레의 입술이 벌어졌다.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녀는 지금 거의 환각 상태였다. 허우적거리며 그것을 더듬어 찾으려 했다.
"으음, 페페...."
페페는 자이레의 가슴을 살짝 밀어 한 발짝 뒤로 물러나게 하고는 나무상자를 열어 붓과 물감을 꺼냈다. 자이레의 한쪽 젖가슴에 페인팅이 시작되었다. 덩굴처럼 둥글게 말려진 선들이 온통 젖가슴을 뒤덮었다. 유두는 가장 진하고 어두운 붉은색으로 칠해졌다. 페페는 자기가 완성시킨 작품을 끈적거리는 눈길로 더듬더니 만족스런 미소를 떠올렸다. 손으로 다시 한번 쓰다듬어 보고는 안드레를 돌아봤다.
"자. 준비가 끝났어."
안드레도 자이레의 가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훌륭해, 페페."
안드레는 사진기를 들어 다시 자이레를 찍었다. 마지막 컷까지 찍고 나자 안드레는 자이레의 팔을 잡았다.
"돌아봐."
안드레는 자이레를 돌려 테이블 위에 엎드리게 했다. 그는 바지를 내렸다. 이미 발기할 대로 발기한 그의 성기가 그녀의 벌어진 꽃잎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녀가 기쁨에 겨운 비명을 질렀다. 피스톤 운동이 시작되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움직임에 따라 가슴이 테이블과 마찰을 일으켰고 유두는 더욱 단단해져 갔다. 페페는 자이레의 풍만하다 못해 거대한 가슴의 출렁거림과 쾌락의 느낌을 감추지 못하고 헤벌어진 입, 뒤틀리며 남자의 성기를 한껏 끌어들이고 있는 엉덩이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성기는 축축한 그녀의 몸속을 헤집고 들었다. 가장 깊은 곳까지 구석구석 한 곳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물건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들의 움직임은 창가에 그대로 그림자로 내비쳐졌고 조용히 입술을 축이며 그걸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로라였다.
그들은 그들의 육체적인 향연에 빠져 딸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안드레가 갑자기 일어나 페페에게 사진기를 건네주고 옷을 벗었다. 안드레는 자이레를 끌어다가 바닥에 눕혔다. 자이레는 안드레가 요구하기도 전에 다리를 들어서 양옆으로 벌렸다. 안드레는 잠깐 행동을 멈추고 어서 들어와 주기를 바라고 있는 자이레의 달아오른 몸뚱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이레와 관계를 할 때면 항상 바다내음이 풍겨났다. 아마도 그녀를 처음 본 게 배 위라서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안드레는 그녀의 성기를 한 손으로 감싸듯 쥐고는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그녀의 귓불을 간지럽혔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안드레를 끌어당겼다. 페페는 이쪽 저쪽으로 옮겨 다니며 그들을 찍어 댔다. 로라는 지켜보고 있는 동안 자기의 몸까지도 묘한 느낌을 전해 받았다. 로라는 손으로 자기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사타구니를 쓸어내렸다.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의 성행위를 지켜보았다.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안드레와 자이레는 지칠 줄을 몰랐다. 이번에는 자이레가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자이레는 안드레와 한참을 관계하다가도 자기에게서 버림받은 남자를 생각했다. 지금은 많이 변했을 것이고 그때의 모습마저도 지금은 가물거린다. 그러나 첫 남자였다.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나 부드럽고 상냥했다. 안드레와는 딴판이었다. 행위를 할 때도 그는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상대방의 반응을 살펴 가면서도 했다. 그래서 그와 할 때면 차분해지고 달아오르려던 몸도 평정을 되찾고 만다. 그래서 그를 버렸을까. 정신적으로도 누구보다도 의지가 되어준 사람이었는데........ 아직껏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남기고 떠난 돈과 에멜랄드 반지. 돈도 쓰지 않았고 에메랄드 반지도 한 번도 끼었던 적이 없다. 그대로 상자에 넣어둔 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안드레 몰래 가끔씩 장소를 바꾸어 숨겨두고 있다.
안드레는 그녀가 가라앉을 만하면 거세게 몰아붙여 몸의 열기가 식을 틈이 없었다. 어떤 때는 변태와도 같이 갖가지 체위와 행위, 그리고 때리기까지 하지만 그것은 더욱 강력한 자극제가 되어 그녀를 흥분시킨다. 자이레는 본능적으로 안드레를 사랑한다. 그녀가 정신적으로 그를 찾지 않고 필요로 하지 않을 때도 그를 기억하는 그녀의 몸이 그를 어김없이 불렀다. 그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도 않았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가도 안드레가 덮치면 그대로 엉켜 들고 만다. 그러다가 요리를 태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사냥을 하러 갔던 산속에서도 갑자기 정욕을 느꼈고 강가에 소풍을 나갔다가도 그랬다. 그녀의 몸은 온통 그를 위해 열려 있었다. 자이레는 안드레가 스튜디오에 불러들인 여자들을 그냥 돌려보내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어떤 때는 그녀가 들어갔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여자를 만지고 있거나 조명을 환하게 켜놓고 몸속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많았고 행위를 직접 하기까지 했다. 자이레는 남편의 그런 행위를 일하는 것으로 여기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페페는 함께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지만 온갖 여자들 몸에 페인팅을 해 준다. 한쪽 엉덩이에다가만 할 때도 있고 배나 등, 허벅지 안쪽 등 보이지 않는 곳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림이 지워지면 다시 오는 여자들도 있다. 그녀들은 페페의 능숙한 붓놀림 아래에서도 쾌감을 느꼈다. 어떤 여자들은 대담하게도 문신을 그려 달라고 한다. 그녀들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럴 때 아픔은 고통보다도 희열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안드레의 가슴에도 문신이 있다. 하트 모양을 배경으로 한 발가벗은 여자 그림이다. 페페는 또 따로 그림을 그려 두기도 했다. 그런 여자들의 은밀한 곳과 둔부, 아니면 사진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얼굴은 그리지 않고 전체적인 곡선을 강조한 몸만을 그리기도 했다. 페페는 안드레가 여자와 정사하는 장면을 보고 자기도 참여는 하지만 한 번도 다른 여자와 직접 관계를 맺은 적도 없다. 그는 잠자리는 아내 마리아와만 했다. 그것은 그만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는 아이도 좋아헸지만 주위에서 입양아를 들이라고 해도 요지부동으로 아내와 아내가 귀여워하는 강아지 한 마리와 살고 있을 뿐이다.
안드레는 자이레가 딴생각에 빠져드는 걸 알고 난폭하게 엎드리게 한 다음 책상 서랍을 열어 기구를 꺼내 들고 그것을 그녀의 몸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딱딱한 느낌 때문에 아픈지 소리를 질렀다.
"아악!"
안드레는 빠져나가려는 자이레를 붙들어 놓고 계속해서 그것을 그녀의 몸속으로 넣었다 뺐다 했다. 그녀는 곧 얌전해졌고 페페는 여전히 사진을 찍어 댔다. 잠시 후 안드레가 그녀를 잡아 일으켰다. 그녀의 눈동자는 몽롱했고 힘이 빠지는지 비틀거렸다. 자이레는 욕실로 가서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샤워를 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누군가의 손길이 그녀를 더듬었다. 안드레였다. 안드레는 그녀의 다리를 욕조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깊숙한 곳으로 들이 넣었다. 그 안의 둥근 모양과 주름들이 손가락으로 느껴졌다. 그곳은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는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가락 하나에 또다시 굴복하고 받아들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안드레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안드레의 끊임없는 정욕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안드레는 어떤 여자보다도 자이레에게 특히 집요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그는 자이레의 성감대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지고 찾아들었다.
자이레는 목욕을 마치고 복도로 나갔다가 로라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로라와 안드레가 닮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성보다 본능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로라는 아직 어려 자기 자신이 어떤 성격인지 잘 모르겠지만 자이레는 이미 파악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로라가 위험한 감정에 몸을 맡겨 버리지 않을까 항상 염려가 되었다. 자이레는 로라의 방문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나서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 저녁 식단을 위해서 채소를 좀 뜯을 생각이었다. 부엌에서 소쿠리를 챙겨 정원으로 나갔다. 평소 정성스럽게 가꾸었던 탓인지 채소는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자이레는 저녁 식사가 늦지 않도록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숲을 빽빽이 채운 나무들은 잎이 무성했고 땅을 온통 뒤덮은 풀도 자랄 대로 자라 흐드러져 있었다. 그 숲길을 로라가 타마소에게 매달려 걸어가고 있었다. 로라는 무료하고 지칠 때는 이곳에 들른다. 이곳에 오면 별세계 같아서 그동안의 고민이나 불만이 말끔히 없어져 버리곤 한다. 그라시아, 델피 그리고 클로드와 이곳엘 가끔 왔었다. 물론 지금은 그녀들과 오는 일이 없었다. 그때 그 사건이 있은 이후로 서로들 이곳에 오는걸 꺼려하기도 했지만 로라로서는 이제 타마소와 오는 것이 더 좋았다. 그녀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숲속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뛰어다니며 놀거나 강에서 수영을 하거나 햇볕 아래 누워 일광욕을 했다. 이곳은 또 연인들의 천지라 눈요기할 장면들도 많았다. 얌전한 연인들은 서로를 껴안은 채 거닐기만 하지만 격렬한 섹스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다.
그날도 로라는 친구들과 벌거벗은 채 풀밭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다는 연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강 건너편의 어떤 여자는 나무에 기대고 서서 다리를 벌린 채 자기의 몸을 남자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곳을 들여다보던 남자는 여자의 엉덩이를 껴안은 채 그곳에 얼굴을 묻고 한참 동안을 있었다. 조금 지나자 여자가 남자를 일으켜 놓고 그 앞에 꿇어앉아 그의 성기를 붙잡고 자기 입에 갖다 넣었다. 남자가 이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쾌감을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떤 연인들은 강물 속에서 껴안고서 머리가 올라왔다. 발이 올라왔다 하다가 여자 쪽이 물에 빠져 물을 너무 먹었는지 캑캑거리며 허우적거렸다. 곧 남자가 그녀를 강가로 데리고 나가 인공호흡을 한다, 배를 누른다 수선을 피웠다. 어떤 남자는 선 채로 여자와 섹스를 하고 있었는데 남자가 힘을 줄 때마다 그녀는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머리를 움켜쥔 채 소리를 질러 댔다. 가장 시끄러운 커플이었다. 로라는 챙겨온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친구들과 벌렁 누워 일광욕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어 보니 남자들 다섯 명이 그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막 도착했는지 옷도 벗고 있지 않았고 여자들과 함께 온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로라가 제일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 클로드와 델피가 깨어났다. 제일 늦게 깨어난 그라시아가 호들갑을 피웠다.
"어머나, 누구세요? 여긴 우리가 벌써 치지 한 곳이니 다른 곳을 찾아보세요."
다섯 명의 남자들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한 사람씩 여자들을 붙잡았다. 그들은 앙탈을 부리는 여자들을 재미있는 듯 오히려 힘을 더해 껴안았다. 로라는 뒤에서 와서 껴안은 남자의 팔을 잡고 몸을 비틀어 그의 얼굴을 마주 본 다음 무릎을 힘껏 올려 사타구니를 쳤다. 남자는 사타구니를 붙잡고 너무나 아파 껑충껑충 뛰었다. 그 틈을 타서 로라는 재빨리 도망쳤다. 한참을 달려가다 보니 아무도 쫓아오는 이가 없었다. 로라는 다시 아까의 그곳으로 찾아가 나무 뒤에 숨어 지켜보았다. 델피도 어디로 도망쳤는지 그라시아와 클로드만 잡혀 있었다. 다섯 명의 남자들은 여전히 키득거리며 잡혀 있는 그녀들의 가슴이며 사타구니를 만졌다. 그라시아가 대장인 듯한 남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 남자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대장인 남자가 소리쳤다.
"이봐, 너희들 꽉 잡아! 나부터 할 테니."
남자 두 명이 각각 그라시아의 팔 하나와 다리 하나씩을 잡고 그녀를 풀밭에 눕혔다. 그리고 다리를 벌릴 만큼 벌려서 바닥에 누르고 있었다. 그라시아는 반항하고 싶어도 여러 남자를 당해내지는 못했다. 대장이 바지를 내리고 막 그라시아를 공격하려는 참이었다. 텔피가 대머리 아저씨와 달려오며 소리쳤다.
"저기예요. 저기."
델피가 또다시 숲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경찰 아저씨. 이쪽으로 오세요!"
그들은 경찰이란 소리에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뭐야, 경찰?"
"야야, 튀자! 빨리!"
다섯 명의 남자들은 너무나 놀라 그라시아와 클로드를 던져두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가 버렸다. 그라시아가 클로드를 껴안고 엉엉 울어 버리고 말았다. 델피가 데려온 대머리는 아직도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들고 온 막대기로 나무들을 치며 왔다 갔다 했다. 클로드가 그런 그에게 도시락과 과일을 한 아름 안겨 주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그 별천지를 빠져나왔다.
로라는 오늘도 여기저기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타마소에게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그러고는 꼭 껴안고 겁에 질린 눈동자를 크게 떴다. 그때 큰 나무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대머리 남자가 망원경을 들고 연인들을 살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친구들을 구해 준 그 대머리였다. 타마소는 로라가 그를 처음 보는 걸로 알고는 어깨를 안아 주며 말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것보다 우리, 미래에 대한 계획을 좀 세워 보자고. 난 빵집을 공장으로 만들 생각이야."
타마소다웠다. 그는 항상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미래에 대한 계획도 철저하게 세웠다. 그러나 로라는 따분할 따름이었다. 로라는 타마소의 몸을 어루만지며 얼굴을 그의 볼에 갖다 대었다. 타마소가 빵집을 공장으로 만들 계획에 대해 한참을 늘어놓자 대머리 남자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조용! 조용히 하란 말이요. 지금 저렇게 기사들이 전투 중이잖소."
불이 붙은 연인들이 껴안고 애무하는 것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그들은 누가 엿보고 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자유분방하게 쾌락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유난히 풍만한 몸매의 여자가 알몸으로 남자를 놀리며 달아났다. 달리는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가 출렁거렸고 그 육감적인 몸을 뒤따르며 잡으려고 애쓰던, 역시 알몸의 남자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것이 약간 정신이 나간 듯한 대머리에게는 전투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타마소가 입술 끝을 올리며 비웃었다.
"저게 전투라면 육박전이로군."
로라가 타마소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 돌았나봐."
"로라는 변태야."
"변태라니?"
"연인들을 몰래 훔쳐보는 사람."
로라가 약간 겁이 나는 듯 대머리를 보며 말했다.
"우릴 쳐다보는 것 같은데?"
타마소가 로라의 손을 잡아끌었다.
"괜찮아 그냥 보는 것뿐이야. 그런데 내 이야기 제대로 들은 거야? 빵을 대량 생산하는 공장 이야기 말야. 식빵, 국수를 독일로 수출하고 닭도 키울 거야. 최신식 설비를 갖추고서..... 함께 해보자구."
타마소는 의욕에 불타올라 로라의 손을 더욱 힘껏 쥐었다. 로라가 타마소를 끌어안으며 입술을 더듬었다.
"난 너만 있으면 돼."
로라는 타마소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젖가슴을 만지게 했다. 타마소는 흠칫 놀라며 대머리의 눈치를 살폈다. 대머리는 역시나 군침을 흘리며 가까운 거리인데도 망원경을 들이대며 로라의 젖가슴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좋아서 소리를 지르며 서너 바퀴를 제자리에서 도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가자."
로라가 타마소를 붙들었다.
"방해할 사람도 없잖아."
타마소가 대머리 조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로라는 곁눈질로 조를 보더니 더욱 대담한 몸짓으로 그에게 달라붙으며 말했다.
"해롭지 않다며? 너랑 하고 싶어."
로라가 타마소의 손을 잡아서 치마 아래로 가져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조가 놀라서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히익!" 하고 소리를 냈다. 손가락을 들어 그들을 가리키며 뭐라고 하는 데 하도 더듬거려서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으아, 저저..... 저거, 좀....으아......"
로라가 머뭇거리고 있는 타마소를 흘겨보며 말했다.
"자... 만져봐."
"그래, 그래. 알았어."
타마소가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로라를 이끌고 좀 더 으슥한 곳으로 갔다. 로라는 나무에 기대어 가슴을 풀어헤쳤다.
"날 가져, 어서! 대체 뭘 망설여."
타마소는 로라가 다그치는데도 여전히 머뭇거리며 애원했다.
"난 너와 결혼하고 싶어."
로라가 화를 내며 치마를 끌어 올렸다.
"그건 어차피 해. 어떻게 좀 해 줘."
로라는 엉덩이를 뒤로 빼고 상체를 구부려 팬티를 벗어 내렸다. 벗은 팬티를 손에 쥐고서 타마소의 허리에 다리를 걸치며 그를 끌어안았다. 타마소는 억지로 몸을 빼내며 소리쳤다.
"빨리 팬티 입어."
"싫어, 날 가져. 날 피하지 마."
"피해?"
"강간하듯 한번 해보라고!"
로라가 뒤로 돌아 치마를 걷어 올리고 엉덩이를 내밀며 다리를 벌렸다. 타마소는 난처해져서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곧 결혼할 텐데 다 망치고 싶어?"
타마소는 로라를 아끼는 만큼 결혼도 하기 전에 그녀를 범하는 것은 그녀를 하찮게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결혼할 때까지 자기가 보호해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안달이 난 로라가 타마소를 밀어 풀밭에 넘어뜨리더니 그 위로 올라탔다. 그러고는 그의 불룩해진 물건 위에 사타구니를 대고는 앞으로 뒤로 문질러 댔다. 그녀는 타마소의 손을 끌어다가 자기의 엉덩이를 만지게 했다. 그래도 타마소가 울상을 지으며 거부하자 마침내 로라는 분통을 터뜨리며 타마소의 따귀를 한 대 올려붙였다. 로라는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한껏 부푼 몸을 타마소가 달래 주기를 바랐는데 그는 너무나 꽉 막힌 남자였다. 아버지 안드레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점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안드레는 이렇게 안달이 나서 달려드는 여자를 절대로 거부할 남자가 아니다. 그는 그것은 남자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이고 한심한 노릇이라고 여길 것이다. 타마소는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놀란 눈으로 로라를 쳐다봤고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삿대질을 하면 소리쳤다.
"망치긴 뭘 망쳐? 미리 속궁합을 맞춰보잔 것뿐야. 그 전에 사랑도 확인하고 말이야."
타마소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내 맘 몰라? 내 사랑은 확고해.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 사과해. 로라."
"사과?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난 널 알아. 내가 변심할까 봐 그러는 거지? 순결이 그렇게 대단해? 난 결혼하고도 변심할 수 있어."
로라는 타마소에게 다시 한번 소리쳤다.
"이 쪼다. 국수 공장과 결혼해라."
로라는 그에게서 나는 밀가루 냄새와 지칠 줄도 모르고 해대는 빵 이야기, 공장 이야기가 지겨웠다. 그녀가 원하는 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자기의 육체를 잠재워 줄 남자다. 강하고 거침없이 그녀를 가져 주기를 바라는데 타마소는 겁을 먹고 물러서기만 한다. 그녀는 타마소가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었다. 그녀가 원할 때 그녀를 가지지 않아 나중에는 가슴을 치며 후회할 일, 그런 일이 없을까. 로라는 사방을 둘러봤다. 로라는 갑자기 치마를 치켜든 채 뛰어 내려갔다. 타마소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로라를 따라 달려왔다.
"돌아와, 어디 가!"
로라는 치마를 더욱 치켜올리고 몸을 앞으로 내밀며 타마소에게 소리쳤다.
"너보다 화끈한 남자 찾으러."
로라는 타마소에게 보란 듯이 발가벗은 하체를 이리저리 내보이며 돌아다녔다.
"여기 처녀 있다."
"날 짓밟아 줄 남자 어디 없어요!"
로라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대머리 조와 눈이 맞추쳤다. 조는 로라의 눈부신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며 침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오자 마치 못 볼 사람을 보기라도 한 듯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가며 불러 세웠다.
"변태 아저씨."
조는 화들짝 놀라 공중으로 한 번 뛰어오르더니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달아난 조를 보며 로라는 어이가 없었다. 남자들이란 모두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덤벼드는 존재들 아닌가. 왜 다들 이렇게 자신을 피하는지 몰랐다. 로라는 들어 올리고 있는 치마를 놓고 망연한 모습으로 조를 지켜보았다.
"나한테 겁먹었나 보군."
타마소가 쫓아와서 로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 말 들어."
로라는 타마소의 손을 확 뿌리치며 말했다.
"멍청이..... 바보...."
타마소가 고개를 숙인 채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난 멍청해."
로라는 갑자기 신부복을 오늘쯤 입어 보러 오라고 한 미쉘의 말이 생각났다. 지금쯤이면 틀림없이 흰색의 눈부신 신부복이 로라의 몸에 꼭 맞게 완성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래도 미쉘운 마을 사람들이 알아주는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어서 분명 그녀의 마음에 꼭 들게 만들어 놨을 것이다. 로라는 얼른 타마소의 손을 끌어다가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4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로라는 타마소를 붙들고 흔들며 말했다.
"5시에 의상실에서 만날 약속이 있는데 이러다가 늦고 말겠다."
"걱정 마. 갈 수 있어."
로라가 타마소의 손을 잡고 걸음을 빨리했다. 이제까지 안달 내던 일은 기억에도 없다는 듯 타마소를 재촉하며 뛰다시피 했다.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내가 드레스를 입으면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근사해 보일 거야.'
로라는 그 서두르는 와중에도 드레스를 입은 자기의 모습을 떠올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타마소는 오토바이 있는 데까지 가자 로라를 안아서 오토바이 옆좌석에 태웠다.
"빨리 출발해. 드레스 맞추는 일인데 늦기 싫어."
"결혼 안 한다면서 웬 난리야?"
역시 로라는 아직 어렸다. 괜한 투정을 부렸다가도 딴청이니 말이다. 로라는 그 도톰한 입술을 쑥 내밀었다.
"딴 남자와 할 생각이니 상관 마."
타마소는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몇 차례에 걸쳐 시동을 걸었지만 오토바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토바이를 살펴보려고 내려서 바퀴의 체인을 만지다가 그만 손가락을 다치고 말았다. 손가락 끝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타마소가 비명을 지르더니 피가 나는 손가락을 꼭 누르고 로라에게 소리쳤다.
"빨리 와서 좀 도와줘."
로라는 시큰둥했다. 고소하다는 듯 빙그레 웃기까지 했다.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래!"
타마소는 화를 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상처를 싸매야지! 피가 계속 흐르잖아. 내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 좀 꺼내 줘."
그러자 로라가 오토바이에서 내려 타마소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손수건을 찾을 생각은 않고 얌전히 있는 그의 물건을 잡고 주물럭거렸다. 타마소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지금 뭐하는 거야!"
로라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손수건은 없고 이상한 게 손에 잡히는 데 이게 뭐지?"
손가락에서는 계속 피가 흘렀고 결국 로라가 그의 손가락을 입에 넣고 피를 빨았다. 얼마 전 일이 떠올랐다. 그날은 부활절이었다. 안드레가 큰맘 먹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부활절이라 돕는 거야."
안드레는 닭의 항문에 손을 넣고 내장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자이레는 진저리를 치며 눈살을 찌푸렸다.
"난 못 하겠더라고요."
"이게 어때서? 재밌기만 한데."
안드레는 일부러 손가락을 속으로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자이레 옆에서 로라도 말없이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안드레가 닭의 뼈에 손가락을 다치고 말았다.
"빌어먹을 닭. 손에서 피가 나는군."
안드레는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위로 쳐들었다. 말없이 안드레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로라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뛰어가 손가락을 입에 넣고 피를 빨아 주었다. 안드레의 행동 하나하나는 항상 로라의 관심 대상이었다. 그리고 안드레가 자기를 동등한 어른으로 대접해 주기를 바랐다. 어렸을 때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든 다 들어주고 필요로 하는 것은 다 사 주고 심지어는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로라가 성숙해져 갈수록 안드레는 그녀에게 말조차 잘 걸지 않았던 것이다. 로라는 안드레의 사랑을 다시 독차지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하는데 갑자기 돌변한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로라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안드레도 놀랐지만 자이레가 더 놀랐다. 딸이 아빠의 상처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로라의 행동에는 다분히 도발적인 데가 있었다. 자이레의 눈빛이 서서히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자이레는 수건을 물에 축여 오더니 로라를 밀쳐 버리고 안드레의 손을 닦아 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로라!"
로라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타마소의 손가락을 넋을 놓은 채 빨고 있었다. 타마소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아직도 나와 하고 싶은 거지?"
로라는 눈을 흘기며 들고 있던 팬티를 찢어 타마소의 손가락을 싸매 주었다.
"늦었어. 가자."
타마소는 얼굴이 빨개졌다. 타마소는 무슨 일에서든지 주저한다거나 고민하지 않은 로라의 성격 때문에 난처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물론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를 정도로 즐거웠다. 또, 자신과는 딴판으로 다른 성격 때문에 그녀를 더욱 사랑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천방지축 로라가 걱정스러웠다. 두려움이 없는 데다가 뭇남성들의 눈을 자극할 만한 옷을 자꾸 입어 타마소가 쫓아다니면서 지적을 하고 타이르지만 말괄량이 로라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타마소는 시계를 들여다봤다. 상처 때문에 소란을 떠느라 로라가 약속한 시간에 늦을지도 몰랐다. 타마소는 몇 번을 다시 시도하다가 오토바이가 겨우 시동이 걸리자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숲의 울창한 나무들 사이를 지나 들꽃이 어우러져 피어 있는 오솔길을 지나갔다. 타마소는 열 살 때쯤 아버지가 이곳으로 오고 싶어해서 이사를 한 것이지만 이 동네가 마음에 들었다. 경치가 아름답고 인정 많은 동네였다. 로라는 처음에는 속력을 즐기다가 점차 불안해졌다. 오토바이가 뒤집힐 것만 같았다. 타마소에게 이렇게 난폭한 면이 있는 줄은 그녀도 몰랐다. 참다못한 로라가 소리 질렀다.
" 천천히 가! 미쳤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로라의 얇은 옷이 비에 젖어 찰싹 달라붙었고 그녀의 몸은 옷을 벗었을 때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숱이 많은 그녀의 머리도 빗물에 젖어 헝클어져 내렸다. 시내로 들어가는 입구쯤에서 오토바이를 멈췄다. 타마소는 로라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상가가 죽 이어져 있는 그곳은 앞 통로에는 차챵이 있어서 비를 맞지 않고 걸을 수가 있었다. 그곳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미쉘이라는 여자가 운영하는 의상실이 나온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어떤 사내가 의자를 가게 밖으로 내놓고 거기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타마소는 로라의 뒤를 따라갔다. 평소 미쉘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평판이 좋지 않은 인물이었다. 로라는 걱정이 되어 따라오는 타마소를 돌아보더니 멈춰 서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신랑이 신부 옷을 보면 안 된다는 걸 몰라?"
타마소가 그래도 따라오자 로라는 뛰기 시작했다. 그는 뒤에 남겨진 채 두 손을 입에 대고 나팔 모양을 만들어 소리쳤다.
"주인 여자 조심해. 부업으로 매춘을 알선해 주는 사람이래. 나쁜 물이 들지 모른단 말이야."
로라는 코웃음을 치며 걸어갔다. 타마소의 고리타분하고 소심한 성격에 답답하고 신경질이 났다.
"저런 멍청이를 내가 사랑하다니."
타마소는 술집에서 기다리겠다고 소리쳤다.
6
로라는 의상실 문을 두드렸다. 젖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서서히 오한이 느껴져 양팔로 몸을 싸안고 있었다. 미쉘이 안에서 대답했다.
"네. 나가요."
의상실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로라는 비에 젖은 생줘처럼 문턱에 서 있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비가 와서...."
미쉘은 천박하면서도 야한 분위기를 풍긴는 중년의 여자였다. 미운 얼굴은 아닌데도 세파에 찌든 듯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절로 찡그려졌다. 단정하게 입은 투피스만은 세련되고 고급스런 분위기를 풍겼다. 화장은 진했고 눈은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두리번거렸다. 침착하지 못한 성격 때문에 일을 하면 꼭 무언가를 빠뜨리곤 했다. 그래도 로라의 신부복만은 완벽하게 완성시켜 마네킹에 입혀 놓았다. 미쉘은 장사하는 사람답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말을 건넸고 아첨도 서슴치 않았다.
"자, 이게 네 신부복이야. 메 미모가 돋보이도록 단순하게 만들었어. 어때?"
미쉘의 사람 보는 눈은 뛰어났다. 몇 번 만나지 않아도 그 사람의 특성을 파악해 냈고 그래서 상대방의 비위를 잘 맞추어 주었다. 로라 같읕 경우는 이 동네 토박이로 어려서부터 봐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경우보다 그녀에게 맞는 옷을 만들기가 훨씬 수월했다. 미쉘은 로라만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젊고 생기 있는 데다가 미모도 뛰어나서이다. 그런 이유로 자기가 고생해서 만든 작품이 더 돋보인다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로라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아, 예뻐. 대단한 작품인데요."
"한번 입어 봐."
"네."
로라는 웃옷을 벗고 치마를 벗으려다가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을 기억해내고 멈칫했다.
"어떡하죠?"
"왜."
"팬티를 안 입었어요."
"뭐라고? 사고 쳤니?"
"급한 일 때문에...."
로라가 말끝을 흐리자 미쉘이 미소 지었다. 그런 말 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능청스럽게 말하는 로라가 귀엽기까지 했다. 요즘 젊은이들의 멋대로인 사생활은 방탕하기까지 했지만 그렇다고 로라가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그녀에게는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네 나이 땐 흔히 있는 일이지. 내가 하나 줄 테니 걱정 마. 곧 가져올게."
미쉘이 팬티를 가지러 가려는데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안쪽을 향해 걸어가던 미쉘이 방향을 바꿔 출입구로 갔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엉덩이를 좌우로 절도있게 움직이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육감적이었다.
"어머. 안드레. 어서 들어와요."
미쉘은 로라가 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손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안드레는 그녀를 보더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로라는 안드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치마를 끌어 내리고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탈의실 입구를 거쳐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안드레가 순간 걸음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로라의 풍만한 몸의 곡선을 재빨리 훑어내렸다. 그녀의 벌거벗은 몸을 본 게 참 오랫만이었다. 로라가 철이 든 후로는 함께 수영을 하거나 목욕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로라는 안드레의 시선을 의식하고 몸을 옆으로 비틀며 가슴을 내보였다. 안드레는 시선을 얼른 거두고 미쉘의 뒤를 따랐다. 안드레는 미쉘의 집에 처음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익숙한 곳인 듯 거침없이 걸어갔고 미쉘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명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누가 오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귀를 쫑긋하고 기울이던 로라는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나자 다시 거울 속의 자기 몸을 이리저리 들여다봤다. 잠시 후 미쉘이 레이스가 달린 새하얀 팬티를 한 개 들고나왔다.
"자, 여기 있다. 파리제야. 레이스 팬티지."
"고마워요. 내일 돌려드리죠."
로라는 팬티를 받아들었다. 레이스가 섬세해서 꽤나 값이 나갈 것 같았다. 흰색도 그냥 흰색이 아니라 형광 빛이 도는 약간 푸른색이었다. 미쉘은 돌려주겠다는 로라의 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니, 그냥 가져. 결혼 선물이야."
미쉘은 로라의 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상이 알맞게 오른 그녀의 몸은 군살은 하나도 없이 탄력있고 매끄러워 보였다. 드레스를 입지 않은 그 몸이 오히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드레스도 예쁘지만 넌 알몸이 더 예뻐."
로라가 팬티를 끌어 올리며 가슴을 내밀었다.
"그렇지만 베일만 쓰고 결혼식을 할 순 없잖아요."
"그럴 순 없지. 넌 완벽해..... 여자한테 돈 잘 쓰는 남자들이 있는데....."
미쉘은 로라에게 드레스의 상의를 입혀 주며 그녀의 탐스런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여자라도 탐을 낼 만큼 아름다운 로라의 몸을 미쉘은 그대로 두고 싶지 않았다. 어떤 남자라도 사로잡을 만한 몸이다. 가능하다면 그녀를 이용하고 싶었다. 자기의 사업에 끌어들이면 대단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주위는 조용했다. 빗소리만 들려올 뿐 온통 정적으로 싸여 있었다. 로라는 미쉘위 손놀림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미쉘이 로라의 얼굴을 살피며 더욱 부드럽게 애무했다.
"로라는 처녀지?"
"네. 한심하죠 그런데 그런 남자들, 돈을 많이 주나요?"
"그럼, 여자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돈을 엄청 뿌리고, 그리고 아주 잘해 주지."
미쉘이 열심히 설명했다. 로라처럼 순진하고 어린 처녀를 남자들은 아주 좋아했다. 미쉘은 몇 명 되지는 않지만 벌써 마을에서 괜찮다 싶은 어린 처녀들을 자기 일에 끌어들였다. 아주 가난하거나 이미 남자와 관계를 한 적이 있어 그런 쪽에 관심이 많은 처녀들이 잘 걸려드는 편이었다. 그러나 로라는 약혼자에게 안달이 나 있어서 다른 생각은 할 것 같지 않았다. 로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은 즐겁지만 기다리는 건 정말 지겹고 힘들어요."
로라는 타마소를 떠올렸다. 도대체 그렇게 답답한 남자가 세상에 있을까 싶었다. 그에게도 정욕이란 감정이 있기는 한 걸까? 나 같은 여자를 보고도, 내가 그렇게도 원하는데 번번히 거절을 하는 걸 보면 결혼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로라는 타마소를 향한 자기의 감정까지도 헷갈렸다. 정말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그처럼 소극적인 사내는 싫었다. 그녀를 힘차게 끌어안아 줄 남자를 원했다. 타마소는 로라와 결혼하고 싶어 부모를 졸라 약혼을 했다. 로라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약혼을 좀 이른 나이에 하기는 했지만 스스로는 성인 대접을 받고 싶었다. 약혼을 하고 나서는 같은 또래보다도 훨씬 성숙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그라시아가 그녀를 제일 부러워했다. 아직은 그녀들과 위험스런 장난도 더 하고 싶지만 타마소가 어찌나 눈을 부라리는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타마소가 그라시아, 델피, 글로드가 어떤 친구들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녀들과 만나 수다 떨고 잡지를 보고 하는 정도밖에 할 수가 없다. 처음엔 약혼을 했다는 실감을 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로라는 결혼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기에 이르렀고 성적 호기심도 부쩍 늘었다. 자신의 욕구를 채워 줄 남자가 타마소임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안드레처럼 남성적이고 카리스마를 가진 남자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타마소가 싫은 건 아니였다. 그때 문소리가 들려왔다. 쏫아져 내리는 빗소리가 아직도 잦아들지 않아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온 듯싶었다.
로라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로라는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자신이 의상실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곳은 어쩐지 비밀스런 곳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미쉘이 출입구로 가서 문을 열었다.
"칼라 부인이셨군요.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미쉘이 안드레가 들어간 방향을 가리켰다.
"들어가세요."
"고마워요."
칼라 부인은 보가만 해도 엄청나게 비쌀 것 같은 옷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차림으로 턱을 치켜들고 거만하게 걸어갔다. 젊었을 적에 꽤나 미인이었을 것 같은 곱상한 얼굴에 매력적인 금발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굉장한 부자였다. 물려받은 유산이 엄청날 뿐 아니라 사업도 번창해서 그녀는 그야말로 돈방석 위에 앉혀진 왕비였다. 집에는 요리사부터 시작해서 집사, 청소부, 운전수, 하녀 등등 일하는 사람이 삼십 명을 헤아렸다. 그런데 그녀는 무료함을 참을 수가 엇었다. 남편은 여러 나라로 출장을 많이 가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갓난아이가 있었지만 유모가 다 알아서 해주니 자신은 할 게 없었다. 하는 일이라야 승마타는 정도였다. 남편이 씨가 좋은 수놈 한 마리를 집으로 들여와 그녀에게 선물했다. 집에 마굿간을 짓고 마부까지 들여 놓았다. 승마복을 차려입고 승마를 한차례 하고 와서 그녀는 우유로 목욕을 한다. 목욕하고 나면 전신 마사지를 받고 일류요리사가 해 주는 요리를 먹었다. 그녀는 남편의 출장에 따라다니며 세계 여행을 하는 게 소원이지만 그는 사업상의 일자리에 아내가 끼어드는 건 질색이었다. 그녀는 집에서만 빛나는 꽃이 되면 그만이었다. 위상도 거의 수백 벌에 달한다. 한달에 한 번씩 일류 디자이너가 요즘 유행하는 최고급 의상을 지어 그녀의 집을 찾아온다. 물론 그녀의 취향과 치수 정도는 꿰고 있다. 칼라 부인은 3년 전 아들 로렌을 낳았다. 아기가 너무나 예뻤지만 왼종일 아기를 위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녀가 아니었다. 차라리 무도회나 음악회에 한 번 더 참석하려 들었다. 사교계에서 그녀는 유명한 인사였다. 많은 유명인들과 알고 지냈고 그들이 여는 파티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녀가 유독 아는 남자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 집에서도 파티를 열었다. 온갖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고 그 중에는 미쉘도 있었다. 칼라 부인은 그녀에게 관심을 나타냈다. 그녀는 자기와 같은 유명인들의 부인들 사이에서 그들이 원하는 만남을 주선해 주는 여자로 공공연하게 말이 오가는 모양이었다. 미쉘은 어떻게 하면 칼라 부인의 눈에 들까를 생각하며 귀부인대접을 해 주며 아부를 아끼지 않았다. 칼라 부인은 미쉘의 인사를 받더니 의미 깊은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를 듣기로는 미쉘은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던데.... 뭐,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골라 만나게도 해 주고?"
"아 뭐, 사람들이 취향이 틀려서 가지각색의 사람들 중에서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 제가 그걸 눈치껏 파악하는 것입니다."
칼라 부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호, 그래?"
"뭐, 불순한 생각을 가지고서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전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부인께서는 그 미모와 탄력있는 몸매를 길이 남길 만한 일이라면 관심을 가지실 것 같은데요?"
"길이 남긴다고?"
"네. 개인 사진첩을 만드는 거죠. 그것도 최고의 예술적인 가치를 지닌 그런 사진첩 말입니다."
"그런 걸 어떻게 만들지?"
"원하신다면 그런 일을 하는 전문적인 예술사진가를 소개시켜 드리지요."
"그거 재미있겠군."
칼라 부인이 흥미를 가지자 미쉘은 재빨리 말했다.
"언제가 좋을지 모르겠군요."
"언제라도 좋아요. 당장 내일이라도."
미쉘은 들고 있던 술을 꿀꺽 한입에 들이마셨다. 요번엔 좀 큰 건수가 걸려든 것 같다. 칼라 부인이라면 평소에 안드레가 탐을 내던 여자였다. 그녀는 남자들과의 관계도 복잡했고 미모도 갖추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얼굴과 이름이 많이 알려진 사람이어서 사진첩을 만들어 팔면 상당히 많이 팔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칼라 부인은 파티 내내 젊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갖가지 찬사를 듣고 있었다. 거기에 맞게 말투는 더욱 우아해지고 행동도 조심스러워졌다. 술에 만취한 남자들은 호텔처럼 객실이 많은 그곳에서 자고 가기도 한다. 그 중에는 이미 칼라 부인과 관계를 가진 이들도 많다. 파티가 끝나고 나면 칼라 부인은 손님들과 일일이 인사를 해서 보낸 다음 침실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하녀들은 집 안을 치우느라고 분주해진다. 미쉘은 돌아가는 길에 집사를 통해 포장이 잘 되어 있는 상자를 받았다. 칼라 부인이 전하라고 한 것이라고 했다. 돌아가서 펼쳐 보니 돈과 보석이었다. 액수나 가치로 보아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다음날 서너 시쯤 안드레는 멋진 정장으로 차려입고 페페를 데리고 사진기와 조명기구까지 챙겨들고 칼라 부인의 저택을 찾았다. 칼라 부인은 첫눈에 안드레가 마음에 들었다. 잘생긴 외모에 여자에 대한 배려가 깊고 매너가 좋은 사람이어서였다. 안드레는 처음이고 최대한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서 정말 점잖은 인물 사진부터 시작했다. 초호화판 거실에서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치장한 칼라 부인을 찍고 정원에서, 침실에서 갖가지 포즈를 취하게 했다.
"부인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을 저는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사진이 끝내주게 잘 받는 얼굴이시군요."
"워낙 균형 잡힌 몸매라 나중에 현상한 사진을 보면 모델 뺨치는 작품이 나올 겁니다."
"네. 아주 우아한 포즈로군요. 좋습니다."
안드레는 침이 마르게 칼라 부인을 칭찬했다. 안드레는 다음날은 승마하는 모습을 찍어 주기도 하고 돌아갔다. 칼라 부인은 안드레의 말대로 고운 피부에 균형잡힌 몸매를 사진이 잘 받는 스타일이었다. 다음날 칼라 부이이 승마복을 입었을 때는 뛰어난 몸매가 돋보였다. 말이 얌전히 있지 않아서 고역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공적으로 끝냈다. 안드레와 페페는 집 안으로 들어가 시진기등 기구를 챙기고 있었다. 칼라 부인은 그들에게 잠깐 쉬었다가 저녁을 들고 가라고 권했다. 부인은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목욕을 마치고 마사지를 받기 위해 엎드렸다. 마사지사가 들어오는지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마사지사의 손이 목덜미에서 시작해서 어깨, 등, 둔부를 골고루 쓰다듬고 누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손놀림이 다른 때와 달랐다. 뭔가 성감대를 건드리는 듯한, 여자의 몸을 잘 아는 그런 솜씨였다. 칼라 부인은 몸이 나른해짐을 느꼈다. 발끝까지 마사지가 끝나고 나서 돌아눕자 거기에는 안드레가 서 있었다. 칼라 부인의 눈빛은 의외라는 둣 놀라면서도 은근히 반기고 있었다. 안드레의 가슴 마사지는 가히 수준급이었다. 칼라 부인은 온몸을 맡기고 잠이 들 듯 말 듯한 상태에서 기분 좋은 쾌감을 느꼈다. 가슴을 지나 아랫배에서 허벅지로, 그쯤 해서는 자지러질 듯한 강렬한 느낌이 온몸을 휩쓸었다. 안드레가 그때서야 입을 열었다.
"내일은 다른 곳에서 진짜 작품다운 작품을 찍어 보는 게 어떨까요?"
"작품다운 작품?"
"그렇습니다."
안드레는 저녁을 마치고 침실에서 잠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한 컷 더 찍기로 했다. 그들이 사진 찍을 준비를 마치자 칼라 부인이 나타났다. 항상 올렸던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었다. 더욱 여성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잠옷은 속이 보일 듯 말 듯 하늘거리는 크림빛이었다. 그녀의 고운 피부가 눈부셨다. 그녀는 침대 위로 올라가 비스듬히 누웠다. 안드레가 그녀에게 다가가 포즈를 고쳐 주었다. 그는 돌아서려다 말고 잠옷을 약간 풀어 헤쳐 한쪽 가슴이 살짝 드러나 보이게 했다. 칼라 부인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들도 집사로부터 돈을 받았다. 이제까지 그들이 받았던 것 중에서 가장 많았다. 그러고는 오늘 미쉘의 의상실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로라는 옷을 다 입고 거울에 비춰 보고 있었다. 미쉘이 감탄 어린 눈으로 로라를 쳐다봤다.
"예쁘구나. 넌 천사야."
로라가 갑자기 생각난 듯 미쉘에게 그녀의 남편에 대해 물었다. 이전부터 그녀의 남편이 사진작가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는 터였다.
"남편은 어떤 사진을 찍나요?"
미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예술 사진이지. 여긴 마땅한 모델도 없고 해서 파리로 갔단다."
로라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왜 남편을 따라가지 않고 따로 살죠?"
미쉘이 얼버무렸다.
"이유야 많지." 고개를 숙이고 드레스의 치맛단에 핀을 꽂고 있는 미쉘에게 로라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 아픈 이유가 있는 듯했다. 미쉘의 남편은 몇 년 전 사진 모델과 눈이 맞아 파리로 건너갔다. 미쉘은 남편을 영화사에서 만났다. 그녀는 영화 의상을 담당했고 그는 카메라맨이었다. 그 당시도 남편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남편은 그 많은 예쁘고 늘씬한 여자들을 두고 미쉘에게 호감을 나타냈다. 미쉘이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고 잔소리를 하지 않아 자기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방해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결혼 후 남편은 밖에서 자고 들어오기 일쑤였고 어떤 때는 모델이라고 데려온 여자와 잠을 자기도 했다. 미쉘은 영화의상 일을 그만두고 의상실을 경영하며 남편의 바람기가 잦아들 날만을 고대했다. 그러나 잦아들기는커녕 그녀의 인내심을 송두리째 뿌리 뽑으려는 듯 남편은 여자와 도망을 가 버리고 만 것이다. 미쉘은 이제 혼자 살아가야만 했다. 의상실에 손님이 많지 않아 생활이 어려웠고 그러다 보니 그녀는 생활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매춘을 알선해 주고 정사를 원하는 남녀에게 장소를 제공해 주는 일을 했다. 핀을 다 꽂은 미쉘이 몸을 일으키며 로라에게 물었다.
"어때? 완벽하지? 어, 베일이 어디 갔지. 가서 찾아오마. 핀으로 고정해 놨으니 움직이지 마라. 찔릴지도 모르니."
로라는 방 안을 왔다갔다 서성거렸다. 작은 바구니 안에 준비해놓은 껌을 하나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안드레가 들어간 방에 칼라 부인이 들어간 게 틀림없다. 로라는 두 사람이 무얼 하고 있나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로라는 안쪽으로 이어진 복도로 나가 벽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칼라와 안드레의 이야기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예술 사진이라기에 하는 거예요."
"물론이죠. 이건 예술 행위죠. 다리를 모으지 말아요. 슬립을 들어 올려요. 앞으로 기대고 조명을!"
조명을 지시하는 걸 보니 아마 페페도 와 있는 듯했다. 로라는 안드레의 목소리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방문까지 갔다. 문 틈새로 소파에서 엉덩이를 내보인 채 구부리고 앉아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칼라 부인이었다. 그 옆에는 안드레가 칼라 부인에게 뭔가를 지시하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쪽 의자에는 칼라 부인의 옷이 올려져 있었다. 칼라 부인은 안드레가 지시를 할 때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칼라 부인이 말했다.
"절 헤픈 여자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럼요,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미쉘이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베일을 보지 못했나요?"
미쉘은 그런 모습을 그동안 많이 보았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베일을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안드레가 칼라 부인의 엉덩이를 만졌다. 엉덩이를 타고 내려갔다. 손가락이 움푹 패인 그곳에 다다르자 그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여자의 몸이 흐늘거리는 것을 느끼자 물러섰다. 그녀는 엉덩이를 뒤로 더 빼서 쳐들었다.
"당신은 예술적 가치가 있어. 완벽한 몸매, 뇌쇄적인 눈빛.... 더 숙여요."
안드레는 사진을 찍고 나서 칼라 부인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점차로 다리 사이로 옮겨가고 있었다. "헉!" 칼라 부인이 비명소리를 내뿜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환희의 소리였다. 안드레의 혀가 능숙하게 그녀의 은밀한 곳을 희롱했다. 칼라 부인의 엉덩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켜 올려지고 고통을 당하는 동물처럼 꿈틀거렸다. 그럴수록 안드레의 혀는 그녀의 몸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녀의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안드레는 일어서서 다시 사진을 찍었다. 로라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신음소리는 여전히 컸다 작아졌다 하면서 들려왔다. 다시 탈의실로 돌아가 멍하니 거울 속을 들여다봤다. 그동안 안드레가 여자들의 사진을 찍는 걸 많이 목격했지만 다른 장소에서는 한 번도 없었다. 스튜디오의 문이 열려 있을 때 몰래 들어가 보기도 하고 자기방의 베란다에서 스튜디오의 베란다로 뛰어넘어가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기도 했다. 로라가 훔쳐보는 걸 안드레도 눈치는 채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여자들은 누구나 다 안드레에게 꼼짝도 뭇했다.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었고 처음에는 너무 야하다고 거부하던 여자들도 안드레의 말솜씨와 능숙한 손놀림에 한 번 당하고 나면 자진해서 보기에도 민망한 자세를 취하곤 했다. 로라는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려니 침울해졌다. 미쉘이 베일을 들고 들어왔다.
"여기 있다. 맘에 드니?"
로라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베일이네요."
"왜 그렇게 우울하니?"
로라가 미쉘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날이 어두워져서 그런가 봐요."
미쉘이 베일을 로라의 머리에 얹고 핀을 꽂아 주며 말했다.
"신부들은 보통 그러더구나. 괜찮을 거야. 일시적인 우울증세일뿐이야."
미쉘의 위로에도 로라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아버지 안드레. 그는 참 잘생겼다. 로라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항상 듬직하고 자상한 아버지 역할을 해 주어서였다. 어머니 자이레에게도 잘했다. 안드레에게 로라는 예쁘고 사랑스런 딸이었다. 로라는 언제부터인가 감정의 변화를 느꼈다. 아버지의 손길에서 어쩐지 끈적함을 느꼈고 몸 속 깊은 곳에서 전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로라의 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길도 예사롭지 않았다. 평소 여자들과 접촉이 많은 안드레에게 유난히 뛰어난 몸매로 자라나는 로라가 작품적인 측면에서 욕심이 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드레는 서로의 감정에 뭔가 변화를 느끼고 나서부터는 로라를 일부로 냉정하게 대했다. 소파에서 신문을 읽을 때면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 들어와 함께 읽으려는 로라를 밀어 냈고 작업중인 스튜디오에는 여간해서는 출입을 금지시켰다. 외출을 할 때도 더 이상 로라의 손을 잡고 나가는 일이 드물어졌다. 로라는 욕구 불만이 생겼다. 불만스러웠다. 아버지에게 사랑받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그 동안 콧방귀도 뀌지 않고 나 몰라라 하던 타마소가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골적인 애정공세를 시도 때도 없이 하게 된 것이다. 그런 로라를 더욱 실망스럽게 하는 건 타마소의 태도였다. 도무지 로라가 원하는 것을 하려고 들지 않고 그녀를 밀어내려고만 하는 것이었다.
안드레는 칼라 부인의 매끈한 다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는 소파에 올라가 등을 돌린 채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손이 점차로 올라가 엉덩이를 쓰다듬자 그녀는 몸을 그를 향해 돌렸다. 도발적인 눈빛으로 안드레를 쏘아보더니 한 쪽 다리를 들어 그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은밀한 부분이 드러났다. 페페가 안드레 대신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씩 웃더니 안드레의 목을 끌어당겨 뱀 같은 혀로 그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그의 옷이 벗겨져 나갔다. 칼라 부인은 그의 가슴에 나신의 여자 문신을 쓰다듬었다. 이번엔 여자가 능숙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다. 남자의 유두를 혀로 핥더니 가볍게 깨물면서 그의 바지를 벗겨 내렸다. 이미 발기되어 단단하게 머리를 쳐든 그것을 한 손으로 거머줘었다. 그녀의 다른 한 손이 그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그녀가 그를 소파에 눕혔다. 그의 온몸 구석구석을 그녀의 뜨거운 혀가 건드리고 다녔다. 그의 발기한 성기가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가자 그도 급기야는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녀 역시 많은 남자를 다루어 본 솜씨로 안드레를 능숙하게 요리하고 있었다. 칼라 부인은 안드레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것을 잡아 몸 안으로 집어넣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움직이던 그녀의 몸이 점차 격렬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엉덩이의 흐벅진 살덩어리와 가슴이 출렁거렸다. 그녀의 목이 뒤로 제껴졌다. 그녀는 그의 몸 위에서 뒤로 돌아 앉기도 하고 그의 몸을 껴안고 구르기도 하는 등 온갖 체위로 행위를 즐겼다. 어느새 미쉘이 들어왔는지 사진을 찍고 있는 페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었다 칼라 부인의 뜨거운 숨결이 안드레를 자극했다. 그는 땀이 흐르는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하며 말했다.
"정열의 여신이로군요."
"당신은 그 누구보다 자극적인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옆에 서 있던 미쉘이 웃으며 말했다.
"부인의 몸매가 너무나 매력적이세요."
칼라 부인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 옆에서 안드레가 아직도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애무하고 있었다. 미쉘은 얼른 가서 열기로 목마른 그들이 목을 축일 수 있게 얼음을 넣은 시원한 음료수를 가져왔다. 음료수를 건네받은 칼라 부인이 안드레에게 의미 있는 눈길을 보내며 물었다.
"언제 또 사진을 찍을 수 있죠?"
안드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부인께서 원하시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미쉘은 칼라 부인이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7
의상실을 나온 로라는 타마소가 기다리고 있는 술집으로 갔다. 평소 타마소와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곤 하던 집이었다. 그곳은 의상실과 정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에 다른 술집도 대여섯 개 정도 자리하고 있으며 로라는 주인아저씨를 특히 마음에 들어 해서 타마소에게 꼭 이곳으로 가자고 한다. 주인인 브라드는 항상 웃는 얼굴을 한 오십 대의 풍채 좋은 사람이다. 그도 로라를 예뻐해서 맥주 한잔 정도는 예사롭게 서비스를 해 주었다. 내부는 깔끔했다. 대개 술집은 울긋불긋하게 꾸미고 조명도 화려하게 색색으로 하게 마련이지만 브라드는 그런 걸 싫어했다. 입구 맞은편 정중앙에 카운터 겸 바가 있는데 브라드는 항상 그곳에 있다. 바의 왼쪽으로는 전축이 있다. 브라드가 술집을 15년째하고 있으니 그것 역시 그 정도 된, 이제는 거의 고물 취급을 받을 만큼 낡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사람들의 흉을 돋궈 줄 만한 음악을 별 무리 없이 내보낸다.
브라드는 항상 전축을 깨끗하게 닦아 놓고 어디 고장이라도 난 데가 있으며 곧바로 고쳤다. 그에게는 마치 15년 된 친구 같아서였다. 손님 테이블은 일곱 개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바의 오른쪽 맨 가장자리에는 당구대가 하나 놓여 있다. 그곳은 날마다 내기 당구를 하는 남자들로 쉴 틈이 없는 곳이었다. 사람이 많이 모일 경우에는 뒷문에 쌓아 놓은 의자를 가져와 다른 무리들과 합석을 한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브라드는 인심이 좋아서 자기뿐만 아니라 손님들 중에서도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술을 한 잔씩 돌려서 축하하고 함께 기뻐해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좋은 일. 나쁜 일을 이야기하기 좋아한다. 그도 열심히 들어준다. 그래서인지 브라드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서도 돈은 별로 없다. 그날은 손님이 별로 없었다. 남자 손님 셋이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을 뿐이었다. 타마소는 제일 구석진 곳에서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올려놓은 채 불안한 표정이 그제서야 누그러졌다. 타마소는 로라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야, 로라."
로라가 엉덩이를 필요 이상으로 흔들며 타마소 곁으로 갔다. 세 남자의 시선이 일제히 로라의 엉덩이로 쏠렸다. 타마소가 로라를 얼른 끌어다가 앉혔다. 로라는 의자에 철퍼덕 앉더니 다리를 한껏 벌렸다. 그러자 음부가 거의 보일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레이스 팬티가 드러났다. 세 남자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그대로 멈춰 섰다. 로라는 그들의 눈을 의식하자 가랑이를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넋을 잃고 훔쳐보는 그들을 눌러 주었다. 타마소가 그녀의 대담한 행동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며 로라에게 뭘 마실 건지 물었다.
"마살라 포도주."
타마소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독할 텐데. 괜찮겠어?"
로라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난 그게 좋아."
타마소가 바를 향해 소리쳤다.
"마살라 한 잔."
타마소가 짜증 나는 얼굴로 다그쳤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로라는 우물거리고 있던 껌을 더 열심히 씹어서 풍선도 만들어가며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세 남자에게만 자꾸 눈길을 보내며 재미있어 하는 것이었다. 타마소는 드디어 화가 났다.
"왜 늦었냐고 묻잖아!"
그제서야 로라가 타마소를 쳐다봤다.
"왜 늦었냐구? 드레스 입어 보고 길이 조절하고 미쉘과 이야기 좀 하고, 그런 거지. 그리고 대체 얼마나 늦었다고 그러는 거야?"
"미쉘과 무슨 얘기를 나눈 거야?"
로라는 타마소를 노려보았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꼬치꼬치 캐묻는 거야! 난 자기를 이해를 못하겠어."
"그 여잔 행실이 좋지 않다고 말했잖아."
"행실이 좋지 않은 거하고 드레스 만드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럼 드레스만 입어 본 거야? 얘기도 했다고 했잖아?"
"그거야 신부들의 일시적인 우울 증세에 대해서지."
그제서야 타마소는 안심이 된 듯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편안히 앉았다. 타마소도 자기가 로라를 의심하려고 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로라가 좀 더 정숙하게 행동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사고를 치는 건 아니지만 저 앉은 자세하며, 살랑살랑 비치는 옷차림은 타마소의 의심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로라는 또 너무 잘 웃는다. 그 붉은 입술의 꼬리가 위로 올라가며 미소 지을 때면 하얗고 고른 치아가 드러나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다. 마살라 한 잔을 들고 와서 테이블 위에 놓고 가는 주인 브라드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웃는 것이었다. 마치 살살 꼬리치며 재롱부리는 강아지마냥 왜 그리 잘 웃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타마소와 이야기를 할 때도 그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주위의 모든 것을 둘러보는 게 버릇이었다. 산만한 그녀의 태도에 타마소도 진지한 둘만의 이야기, 미래의 계획을 도무지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주위에 자기를 쳐다보는 남자들이라도 있을라치면 그날은 아예 중요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는 게 좋았다. 그들과 눈짓을 주고받느라 타마소의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려서 나중에 보면 기억하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로라는 껌을 뱉어 테이블 아래에 살짝 붙여 놓고는 술잔을 들어 한입에 꿀꺽 들이켜 버렸다. 타마소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로라는 타마소를 향해 방향을 고쳐 앉더니 치마를 접어 올렸다. 우윳빛 허벅지가 드러나고 팬티 역시 눈에 확 들어왔다.
"이것 봐. 미쉘이 준 선물이야."
타마소가 얼굴이 벌개지며 일어서더니 로라에게 명령했다.
"내려!"
"왜?"
타마소는 안절부절못했다. 음탕한 눈길로 로라를 지켜보는 세 남자를 자꾸만 돌아보며 말했다.
"남들이 보잖아."
"뭐 어때?"
세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서로를 쿡쿡 찌르며 킬킬거렸다. 타마소가 로라를 보고 작지만 힘을 주어 말했다.
"얌전히 좀 있어. 사고 나겠어."
로라는 눈을 흘겼다.
"따분한 소리만 한다니까...."
세 남자의 소근대는 소리가 로라에게 들려왔다.
"야, 침 흘리지 마. 남자가 화내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어때? 무서울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거 참 여자 때문에 미치겠군."
잠깐 멈추었던 전축을 다시 틀고 음악이 나오자 세 남자가 일어서서 로라를 흘낏흘낏 쳐다보며 춤을 추었다. 로라는 박자를 맞추느라 발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로라는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정말 일이 급해서 참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며 화장실로 들어간 로라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팬티를 벗어서 던져 버렸다. 음모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숨이 가빠왔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그녀는 자기의 몸을 구석구석 더듬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엉덩이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더욱 크게 흔들었다. 가슴 속에서 뭔가가 솟구쳐올라 와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로라는 그 느낌을 눈을 감은 채 음미하며 가슴을 틀어쥐었다. 그녀는 가끔씩 이런 증세가 오면 어떻게 해야 될 줄을 몰랐다. 대개는 자위를 하거나 춤을 추거나 강으로 뛰쳐나가 수영을 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로라는 화장실을 나와 자기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세 남자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지나가는 그녀를 잡아채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로라의 능숙한 맘보춤이 시작되었다. 그녀가 어찌나 잘 추는지 술집 안의 몇 되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스텝을 밞는 그녀의 발놀림이 경쾌했다. 살랑거리는 짧은 스커트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위로 아래로 쏠렸고 그럴 때마다 팬티를 벗어 버린 그녀의 엉덩이가 얼핏얼핏 보였다. 브라드까지도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신이 나서 테이블이 치워져 있는 중앙을 빙빙 돌아 타마소에게 스텝을 밟으며 다가가더니 키스를 했다. 그렇잖아도 화가 나 있던 그가 사정없이 그녀를 뿌리쳤다. 로라는 타마소의 불만스런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추며 다시 세 남자가 서 있는 곳으로 갔다. 그들이 그녀의 주위를 돌았다. 그중에 한 남자가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손을 잡고 춤을 추었다. 뚱뚱한 남자가 그녀를 들어 머리를 아래로, 두 다리를 위로 해서 들어 올리자 긴 다리에서 엉덩이까지 훤히 보였다. 그러기를 몇 차례, 타마소는 반복되는 그들의 춤을 지켜보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먼저 전축을 꺼 버리고 성난 얼굴로 로라 앞에 섰다.
"로라, 나가자."
로라는 자기의 손을 세게 움켜잡는 타마소의 손을 뿌리쳤다.
"난 안 가."
"그게 무슨 말이야?"
타마소는 로라를 한 대 칠 듯이 노려보았고 로라는 태연하게 비가 쏟아지고 있는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가 오고 있잖아. 너도 이리와."
그들이 티격태격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세 남자는 키들거리며 다가갔다. 그들 중에서 꺽다리 남자가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혼자 가시죠. 문을 열어 드릴까요?"
키 작은 남자도 한마디 거들었다.
"분부만 내리시죠."
타마소가 그의 어깨를 밀치며 소리쳤다.
"이제 그만해."
키 작은 남자가 그 힘에 밀려 뒤뚱거리며 뒤로 넘어지려 하자 다른 두 남자가 붙잡아 주었고 곧이어 싸울 태세를 갖추고 당장 달려들 것처럼 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로라가 화를 내며 타마소를 가로 막았다.
"왜 소란을 피우고 그래?"
로라가 눈썹 곤두세우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세 남자가 오히려 놀라 멈칫거리며 서 있었다. 타마소는 난폭하게 로리의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당장 나가자!"
꺽다리가 팔짱을 끼고 타마소를 보며 말했다.
"무례하군 그래. 숙녀에게 말이야."
타마소는 들은 체도 않고 로라를 질질 끌고 갔다. 로라는 있는 힘을 다해 타마소의 손에서 빠져나오며 소리쳤다.
"네가 뭔데 그래!"
"내 말 안 들을래!"
키 작은 남자가 빈정거렸다.
"그래서 말을 듣나?"
타마소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불끈해서 그 남자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건방진 자식. 본때를 보여주지."
지켜보고 있던 꺽다리가 친구를 때리려고 또다시 팔을 들어 올리는 타마소를 붙들었다. 뚱뚱한 남자도 합세했다.
"머리를 갈겨!"
세 남자에게 붙잡힌 타마소는 얼굴에 정통으로 뚱뚱한 남자의 주먹을 맞은 뒤 당구대 위에 내팽개쳐졌다. 바에서 술잔을 닦고 있던 브라드가 뛰쳐나오며 팔을 내저었다.
"그건 내 당구대라고. 거기는 안 돼!"
당구대 위에 쓰러진 채로 세 남자에게 연신 얻어터지는 타마소를 주인이 끌어내렸다. 타마소의 맞는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던 로라가 선언하듯 말했다.
"나, 너랑 결혼 안 해! 자유롭게 살 거야."
로라는 돌아서더니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잊지 않고 내뱉었다.
"너하고는 끝장이야."
8
아직도 비가 퍼붓고 있었다. 거리는 벌써 물이 차올라 발목까지 잠겼다. 로라는 그 빗속을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타마소는 주먹질을 멈추지 않는 세 남자 사이를 필사적으로 뚫고 나갔다. 그러고는 로라를 외쳐 부르며 뒤쫓았다. 얼굴은 멍투성이에 다리까지 절뚝거리고 있었다. 로라는 멈추지 않고 계속 뛰어갔다. 그때 빗속을 가르며 지나가던 자가용 한 대가 로라 옆으로 다가오더니 속도를 늦추었다. 차창을 내리고 운전대를 잡은 사내가 소리쳤다.
"아가씨, 타요."
로라는 그 말에 운전수를 힐끔 쳐다보았다. 얼굴에는 기름기가 흐르고 양복을 멋지게 빼입은 중년의 남자였다.
"어디든 모시죠. 어서 타요. 뭘 두려워하죠?"
그래도 로라가 머뭇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타마소는 절뚝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달렸다. 로라의 생각을 알고서 붙잡으려는 것이다.
"난 신사요. 어서 타요."
타마소가 벌써 가까이 오고 있었다.
"로라!"
운전수는 로라를 쫓아가다가 뒤를 돌아보고는 그녀가 남자를 피하려고 한다는 걸 알았다. 운전수가 애가 타는지 들어오라는 손짓까지 하며 말했다.
"어서 타요."
"로라! 안 돼!"
로라가 드디어 결심을 했는지 차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타마소가 힘이 빠지는지 휘청거리며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안 돼! 가지 마!"
차에 탄 로라는 비에 흠뻑 젖어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로라는 멍청히 바라보고 서 있는 타마소를 한 번 뒤돌아보더니 그대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아 버렸다. 운전수는 그런 로라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매력적인 얼굴에 매력적인 몸매의 나이어린 여자였다. 그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침을 꿀꺽 삼킨 운전수는 조심스럽게 로라에게 말을 걸었다.
"애인과 싸웠나요?"
"애인이라뇨? 누굴 말하시죠?"
"아까 미친 사람처럼 고함치던 남자 말입니다."
로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 이름이 로라죠?"
로라는 한참 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그래요?"
로라는 잠깐 머뭇거렸다. 그에게 자신이 로라라고 밝히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만은 자신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나를 누구라고 할까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로라가 또박또박 분명하게 말했다.
"난 자이레예요."
언뜻 차가운 미소를 떠올리는 로라를 힐끔거리며 운전수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전수가 자기 소개를 했다.
"난 렌지 레모라는 모피 상인입니다. 이 분야에선 최고죠."
로라는 대꾸는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한 번 보시겠어요?"
렌지는 고갯짓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뒤쪽에는 값비싼 모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로라는 뒤로 돌아 놀란 눈으로 모피를 바라보았다.
"음, 굉장하군요. 값이 꽤 나가겠어요."
렌지는 여전히 로라의 몸매를 훑어보고 있었다.
"몸매가 좋군요. 모델 한번 해볼래요?"
로라는 다시 똑바로 앉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렌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로라가 답답했지만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기로 했다. 분명 무슨 사정이 있어 보였다. 흘러내린 빗방울이 오똑한 코끝에 매달려 있었다. 로라는 눈을 감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렌지는 어떻게든 로라에게 말을 시켜 볼 요량이었다.
"창문을 닫을까요?"
렌지가 로라의 가슴을 가로질러 팔을 뻗어서 창문을 닫으려 했다.
"닫지 말아요. 그냥 맞겠어요."
로라는 정말 타마소와 결혼을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끓어오르는 정열을 몰라주는 그와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해해 주었으면 했다. 이 남자를 따라가서 가는 데까지 가 봐? 창문을 열어 놓은 채 그냥 두어서 빗물이 안으로 튀겼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자이레는 결혼은 중요한 것이며 특히 타마소와 같이 성실한 사람을 만나는 게 복이라고 틈만 있으면 말했다. 그녀 자신이 바람둥이 남편과 사느라 평생 동안 마음고생이 심해서였다. 그라시아도 그녀에게 타마소를 칭찬했었다.
"얘, 너 그만하면 인물 좋겠다, 가난하지도 않겠다, 그 이상 괜찮은 사람 만나는 것도 힘들어."
로라가 그 말에 기뻐서 활짝 웃자 그녀는 한마디 더 했다.
"내가 남자를 많이 사귀어 봐서 그러는데 겉멋 든 남자들 얼마나 골치 아픈 줄 아니, 타마소 같은 남자는 세상에 다시 없어."
그때 빗속에서 자가용을 쫓던 타마소의 멍든 얼굴과 절뚝거리는 다리가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렌지는 또 어떤 말을 꺼내는 게 좋을까 한참을 궁리했다. 별다른 근사한 화재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그는 평범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무서운가 보죠?"
"아뇨 전혀."
렌지는 용기를 내어 로라를 유혹했다.
"끝내주는군. 완벽한 몸매야.... 이렇게 풍만한 몸매는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로라는 생각에 잠겨 앞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렌지가 로라의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자 탐스런 가슴이 드러났다. 렌지는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손이 서서히 내려가더니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로라는 꿈을 꾸듯 눈을 감고 있었다. 렌지는 로라보다도 먼저 몸이 달아올랐다. 렌지는 자기가 어젯밤에 무슨 꿈을 꾸었던가를 생각했다.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렌지가 보기에 로라는 뭔가 정신 나간 듯 이상하긴 했으나 그런 건 별로 문제 될 게 없었다. 로라는 미쉘의 의상실에서 칼라 부인이 안드레를 돌아보며 유혹하는 눈길로 물었던 말을 되뇌었다.
"나 예뻐요?"
미쉘과 페페가 칼라 부인과 안드레의 정사 장면을 보며 음탕한 눈길로 웃는 것이 보였다. 칼라 부인이 피우는 담배연기가 피어올랐다. 로라는 눈앞에 안드레의 얼굴을 떠올렸다. 안드레가 의미 있는 눈길로 칼라 부인에게 보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 이상이야. 환상적이지....."
기뻐하는 칼라 부인의 웃는 얼굴이 확대되어 다가왔다. 가지런한 치아가 웃는 입술 사이로 보이고 그 속으로 그녀의 붉은 혀가 보였다. 미쉘과 페페도 로라를 비웃듯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로라는 다시 눈을 감았다가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손을 의식하고 몸을 일으켰다. 후다닥 일어난 로라가 거세게 렌지의 손을 뿌리쳤다. 렌지가 흠칫해서 손을 거두었다가 징그런 미소를 지었다. 로라는 사방을 둘러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걱정 말라고, 좋은 데로 데려다줄 테니."
렌지는 시내를 빠져나와 한없이 차를 몰아갔다. 로라는 그제서야 불안한지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자리에서 들썩거리며 밖을 내다봤다. 으슥한 숲길에 이르자 차를 한쪽으로 세우고는 몸을 로라 쪽으로 돌렸다. 로라가 렌지를 노려보았다.
"무얼 하자는 거죠? 여긴 어디죠?"
렌지가 로라의 발그레한 뺨을 어루만졌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 이미 얇은 상의를 제치고 고개를 쳐들고 있는 풍만한 가슴 위의 유두를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치마 역시 젖어서 몸에 착 달라붙어 팬티를 입지 않은 것쯤이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렌지의 응큼한 생각을 알아차린 로라는 그제서야 옷깃을 여미며 렌지를 노려보았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로라는 박차고 일어나 차 문을 열려 했다. 렌지가 그녀를 잡아당기며 끌어안았다.
"나가겠어요."
앙칼진 그녀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렌지의 숨소리는 가빠졌고 손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진정하라고."
사내의 뜨거운 숨결이 목에 느껴졌다. 로라는 있는 힘껏 남자를 쳐서 밀어냈다. 그 바람에 머리를 창문에 부딪친 남자는 화가 나서 로라의 뺨을 냅다 갈기고 말았다. 로라는 뺨을 손으로 누른 채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그런 로라를 렌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팬티도 안 입고 내 차에 올라타서는 날 유혹했잖아! 그런데 날 치한 취급해?"
"난 그런 적 없어요."
"그래? 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한 수 가르쳐 주지."
렌지는 그녀의 젖가슴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그러자 로라가 사내의 사타구니를 있는 힘껏 무릎으로 내질렀다.
"더러운 손 치워!"
그는 너무나 아파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움켜잡고 얼굴을 온통 찡그렸다.
"이년이 미쳤군. 그만해 꼬리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튕겨. 네 자신을 알기나 해. 넌 창녀야, 창녀. 이럴 줄 몰랐나?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이래."
그러는 사이 로라는 재빨리 차 문을 열어제쳤다.
"이게 어딜 가는 거야! 가만 두지 않겠어."
그러나 로라는 토끼처럼 날렵하게 차에서 뛰어내려 돌을 집어 들었다.
"그래? 한번 나와 봐."
렌지는 씩씩거리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빗속을 뛰쳐나가 돌을 든 여자와 맞붙고 싶지는 않았다.
"재수 더럽군."
렌지는 침을 퉤 뱉고 차문을 닫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로라는 그대로 빗속에 서서 차가 떠나는 걸 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폭우가 로라의 몸을 내리치며 몸의 세포를 온통 깨워 일으켰지만 적어도 좀전의 그 남자는 싫었다. 그녀는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타마소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내 그 얼굴은 안드레의 얼굴에 겹쳐져 희미해졌다. 다시 타마소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안드레의 얼굴이 또 그 위로 겹쳐졌다가 다시금 사라지는 것이 반복되었다. 로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늘을 향해 컴컴한 어둠 속으로 팔을 내뻗었다.
몸이 둥둥 뜨는 듯싶더니 갈기갈기 흩어져 빗물과 함께 땅으로 스며들었다. 온몸에 전해 오는 땅의 느낌은 축축했다. 로라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워 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진정한 성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타마소도 너무 로라 자신의 잣대에만 맞추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 관계에서는 지켜주어야 할 선이 있음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로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뚝 선 나무들이 꼭 사람 같아 보였다. 두려웠다. 무서움이 왈칵 그녀를 엄습했다. 그 사람 같은 나무들은 자세히 살펴보니 발가벗은 남자들이었다. 다시 자세히 보니 그들은 타마소이고 안드레였다. 타마소와 안드레가 사방에 흩어져 서 있었다. 로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로라는 깔깔거리며 웃어 댔다. 로라는 아랫배로 뭔가 모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오줌 줄기가 힘차게, 쏟아지는 빗방울보다 더 힘차게 땅으로 내리꽂혔다. 로라는 큰소리로 깔깔거리고 웃었다. 웃음소리가 빗속으로 뚫고 울려퍼졌다.
9
비에 흠뻑 젖은 타마소는 윌마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문을 힘없이 두들겼다.
"나가요, 나가."
문에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본 포주인 뚱보 여자가 윌마에게 말했다.
"이봐, 타마소 씨가 찾아왔는데."
윌마는 그날따라 우울한데다 비가 와서 그런지 손님이 한 사람도 찾지 않았고 그녀는 무료함을 견디다 못해 책을 읽고 있었다. 포주는 요즘 나이가 들어서 별로 인기가 없는 그녀를 못마땅해했다. 윌마는 소파에 누워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들여보내세요."
포주가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오세요."
방은 좁았지만 꽤나 정성을 들여 장식한 흔적이 보였다. 그녀의 침대 옆으로는 커다란 거울이 있어서 누워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그대로 나타났다. 그녀는 검은 속옷을 입고 있었는데 엉덩이 부분은 둥그렇게 드러나 보였다. 그래서 문을 들어서는 사람에게는 거울에 비친 그녀의 탐스런 엉덩이부터 눈에 들어왔다. 윌마는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유난히 크고 검은테라서 큰 눈이 작아 보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조금 둔해 보였다. 윌마는 빗물을 뚝뚝 흘리고 서 있는 타마소를 쳐다보지도 않고 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훌륭한 책이야."
그러고는 소리 내어 읽었다.
"집을 폐쇄하지 않겠다고 하자 사교계 여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 상원의원은 도움이 못 되었다."
타마소가 불끈해서 말했다.
"사람이 왔는데 딴청 피울 거야?"
윌마가 그제서야 타마소를 올려다봤다.
"비 맞은 생줘잖아. 어디서 싸웠어? 얼굴은 또 왜 그래?"
타마소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설명 따윈 지겨워."
윌마는 싱긋 웃더니 타마소의 등을 가볍게 밀어 욕실로 데려갔다.
"아니, 이 손가락은 또 어디서 다쳤어?"
윌마는 타마소의 손가락을 칭칭 감고 있는 천 조각을 풀었다. 그 천 조각은 풀어 놓고 보니 여자의 팬티였다. 윌마는 배를 움켜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호호호. 그 여자가 자길 정말 사랑하긴 하나 봐."
타마소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어쩔 줄을 몰랐다. 윌마는 타마소의 손가락에 밴드를 싸매 주고는 뜨거운 물을 욕조에 받으며 그의 얼굴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녀는 느린 손놀림으로 그의 옷을 벗겨 나갔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그의 몸을 애무했다.
"진정해.... 내가 옆에 있잖아."
윌마는 그를 욕조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것을 손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고개를 쳐들었다. 뱀 같은 그녀의 혀가 그것을 휘감으며 쓸어내렸다. 타마소는 신음소리를 내며 윌마의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넣어 움켜잡았다. 타마소가 더 이상 참지 못할 때쯤 되어서야 윌마가 몸을 일으켰다. 욕조에 뜨거운 물이 알맞게 차올랐다. 윌마는 타마소를 욕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욕조에 들어간 타마소가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그의 몸을 천천히 어루만지던 그녀는 욕조 안으로 들어가 타마소를 올라탔다. 욕조의 물이 넘치기 시작했다. 거세게 찰랑거렸다. 잠시 후 윌마는 타마소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윌마는 타월을 가져와 그의 몸과 머리를 정성스럽게 닦아 주었다. 욕실 밖으로 나온 윌마는 젖은 그의 옷을 집어 들고 바지 속에서 지갑을 꺼냈다. 타마소는 윌마가 하는 양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며 서 있었다.
"설마 돈까지 젖진 않았겠지? 내가 꺼낼게."
윌마는 지갑에서 돈을 적당히 꺼내어 타마소에게 흔들어 보여 준 뒤 침대 밑에 놓았다.
"로라와 싸웠나 보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우울할 리가 없을 텐데. 왜 싸웠어? 질투 때문에?"
타마소는 침대 위로 몸을 던져 눕더니 두 손을 깍지 끼어 머릿밑에 넣어 베개를 삼았다. 윌마가 옆에 누워 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힘들어 보여. 내가 위로해 줄게."
윌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타마소를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이곳이 폐쇄되면 남자들은 어떡하지? 하긴 옛날엔 체육관에서 손님들을 받았대."
타마소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원칙이 문제지, 나는......."
"이 짓에 무슨...... 불쌍한 타마소. 넌 아직도 너무 순진해."
윌마는 타마소의 곱슬머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그의 몸은 잘 다듬어진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그는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결단력 있고 분명한 것 같은데 묘하게도 로라 앞에서만은 소심해지고 자신 없어 하는 것이었다. 윌마가 보기에 그것은 그가 너무나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윌마는 내심 타마소를 좋아했지만 자신의 처지로서는 가당치도 않았다. 타마소는 이곳을 찾는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창녀들에게도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 그래서 윌마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를 좋아했다. 그런 그가 오늘은 무척이나 우울한지 윌마에게 무뚝뚝하게 대하고 짜증을 내기까지 했다. 그가 고민하는 것이 윌마는 그의 고미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발벗고 나설 것이다. 그러나 조금도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은 뻔하다. 위로를 해 주는 정도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그것마저도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타마소가 돌아누웠다.
"그만해"
타마소는 첫 몽정을 했을 때 친구를 따라 이곳을 들렀었다. 그때는 윌마도 나이가 꽤 어렸다. 타마소보다 겨우 서너 살 많았다. 윌마는 타마소가 찾을 때는 항상 문을 열어주었고 그의 고민도 열심히 들어 주었다. 그래서 타마소가 유난히 우울할 때는 로라때문이란 걸 알고 있었다. 윌마는 그가 고민하는 모습, 기뻐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그가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정신적으로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윌마가 있는 곳은 창녀촌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하녀가 시간제로 와서 빨래와 청소를 해주었다. 예전에는 윌마를 찾는 남자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요즘은 찾는 이들이 영 신통치 않다. 벌써 그녀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것이다. 특히 이 세계에서는 그것이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 타마소만이 잊지 않고 그녀를 찾았다. 그녀를 찾아와 관계를 했던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녀의 품에 안겨서 마음을 달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했다.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오늘 타마소는 뭔가 분출해 내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분노의 표현이기도 했다. 윌마가 일어나 서랍에서 콘돔을 꺼내 타마소의 성기에 끼워 주었다.
"이번엔 이걸 끼우고 하자구. 그래야 안심이 돼."
윌마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타마소의 유두를 간지럽혔다.
"어떻게 해 줄까?"
"자기 맘대로 해."
윌마는 혀로 그의 몸을 핥아 내려가며 말했다.
"다른 여자는 잊어버려."
타마소가 그제서야 얼굴이 좀 환해지며 씨익 웃었다.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어서 올라와."
"키스해 줘."
윌마는 타마소의 몸에 올라탄 채 뜨겁게 키스했다. 타마소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윌마를 쓰러뜨리고는 그녀의 다리를 난폭하게 벌리더니 달려들었다. 또다시 그녀의 몸을 뒤집어 엎드리게 하고 뒤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윌마가 몸을 떨며 비명을 질렀다.
"자기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아. 다른 여자도 이렇게 꼬셨어?"
"제발 그 입 좀 닥쳐!"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어. 그냥 즐기자. 하지만 이건 알아둬. 난 그녀가 아냐. 난 나일 뿐이라구."
윌마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타마소는 뒤늦게 분노를 터뜨렸다.
"로라, 나쁜 계집! 나도 맘대로 할 거야. 좋아.... 대체 로라는 왜 그러는 걸까?"
윌마는 타마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사랑은 원래 변덕스러운 거야."
타마소는 온 정력을 타 뿜어내고 나자 지쳤는지 벌렁 드러누웠다 공허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치고 힘들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떠오르는 로라의 얼굴마저도 손을 흔들어 쫒아내고는 잠을 청했다. 서서히 무거운 눈꺼풀이 내려 감기며 그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온통 어둠뿐이었다. 그곳은 컴컴한 숲속으로 발밑으로는 무성한 풀잎의 감촉이 느껴졌고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손을 휘둘러 보아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오직 웃움소리만이, 로라의 웃음소리만이 허공을 뚫고 퍼져나갔다.
10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고 진흙탕 길을 로라가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다. 숲길을 빠져나와서도 한참을 걸어서야 마을로 들어섰고 불빛 하난 없어서 자꾸만 넘어졌다. 온몸은 한기가 들어 부들부들 떨렸다.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한숨 푹 자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자신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잊은 채 그냥 터벅터벅 걷기만 했다. 드문드문 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을 밝혀 놓은 집이나 가로등이 켜져 있어서 걷기에는 좀 나아졌다. 그녀는 하얀 2층집 앞에 멈춰 섰다. 어듬 속에서도 그 집의 흰 빛깔은 눈이 부셨다. 나무들은 비를 어찌나 많이 맞았는지 가지가 모두들 휘어져 있었다. 흠뻑 젖은 로라는 현관문을 들어섰다. 도대체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휘청거리며 걸어 들어가는데 누군가가 총을 들고 로라 쪽을 겨냥한 채 서 있었다. 아버지 안드레였다. 안드레도 총을 겨눠 보고 있는데 갑자기 로라가 나타나서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냐?"
로라는 힘없이 싱긋 웃었다.
"사고는 나지 않았나 걱정했다. 빨리 좀 다니거라. 머리하고 옷 좀 봐라. 그게 무슨 꼴이냐."
"비를 좀 맞았어요. 일찍 일어나셨네요?"
안드레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냥 가려던 참이다. 페페가 늦는구나."
로라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그대로 서 있었다.
"엄마는요?"
"2층에서 잔다."
아마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안드레가 작업량이 많을 때는 그곳에서 일을 거들다가 함께 잠이 들 때가 많았다. 안드레는 말없이 로라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색하게 얽혀들었다. 그는 어색함을 피하고 싶은 듯 억지로 말을 꺼냈다.
"몸 좀 말려라. 감기 걸리겠다."
로라는 비에 젖은 자기 옷을 내려다 보더니 말했다.
"옷부터 벗구요."
안드레가 얼른 로라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었다.
"왜요? 제가 옷 벗는 게 그렇게 걸려요? 어렸을 때부터 봐왔잖아요."
안드레는 아무 말 없이 타월을 집어들었다. 로라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가슴이 드러났다. 그다음엔 매끈한 다리가 나타났고 그 다리 사이에 걸쳐진 거라곤 실오라기 하나 없었다. 로라는 안드레가 건네는 타월을 받지 않고 가슴을 내밀었다.
"다 벗었어요. 이제 닦아 줘요."
안드레는 로라가 여느 때와 다른 걸 느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타마소와 싸운 거냐?"
로라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와는 끝이에요."
"왜 그래?"
이제 비가 그치고 먼동이 트기 시작한 거실이 어슴푸레 밝아왔다. 로라의 풍만하고 싱그런 몸이 더욱 고혹적으로 빛났다. 안드레는 숨이 턱턱 막혀옴을 느꼈다. 두 사람 사이에 위험스런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안드레는 타월로 조심스럽게 로라의 몸을 닦아 주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로라가 재잘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타마소는 너무 따분해요. 유머도 없고 즐길 줄도 몰라요. 아빠도 설마 그 사람이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걸요,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사랑이란 늘 즐거울 순 없어."
로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니?"
"모르겠어요. 그를 원하다가도 딴 남자를 원해요."
로라의 눈빛이 뜨겁게 안드레를 향했다. 안드레는 갑자기 손을 멈추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강렬한 눈길에 그만 현기증이 일었다.
‘이건 너무 위험해. 정말 위험한 일이라고.’
안드레는 겨우 이성을 되찾고는 타월을 로라의 벌거벗은 어깨에 걸쳐 주었다.
"네가 닦아라."
안드레는 돌아서서 몇 발짝 걸어가더니 장식장에서 술을 꺼내 술잔에 따랐다. 그 잔을 로라에게 쥐어 주었다.
"이걸 마시면 좀 나을 거다."
로라는 잔을 받아들고 안드레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내 방에서 옷 좀 갖다줘요."
안드레가 그녀의 눈 속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부탁이냐? 네가 직접 가."
"내가 가면 영원히 안 올지도 몰라요."
협박과도 같은 말을 하는 로라의 거부할 수 없는 완강함에 안드레는 로라의 방으로 향했다.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나무로 된 계단이라 삐걱거리는 소리가 잘 났고 그 소리에 자이레가 깰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잖아도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자이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안드레는 로라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그는 옷장이 어디에 있고 소지품은 어느 곳에, 책은 어디에 꽂혀 있는지 손바닥 안을 들여다보듯 훤했다. 곧장 옷장 쪽으로 걸어갔다. 옷장을 열자 어슴푸레한 새벽의 여명 속에서도 로라가 좋아하는 꽃무늬의 원피스가 눈에 띄었다. 옷걸이에서 그 옷을 벗겨 손에 든 안드레는 돌아섰다가 문 위 구석진 곳에 매달려 있는 줄타기 인형을 쳐다봤다. 그는 로라가 없는 틈을 타 이 방에 자주 들어온다. 로라의 침대에 앉아 있으면 풋풋한 그녀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마음이 편해진다. 그녀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서먹하고 어색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지만 항상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줄타기 인형을 스튜디오에서 가져간 뒤 화장대에 그대로 얹어 둔 것을 보고는 문 위에서부터 창문까지 줄을 달아 주었다. 그리고 인형은 문 위에 고정시켜 놓았다. 로라에게 그동안 사 준 인형도 꽤나 많다. 그녀는 그것을 박스에 차곡차곡 정리해 놓고 번갈아가면서 침대 위에 꺼내 놓았다가 밤이면 껴안고 잔다. 어렸을 때는 손을 잡고 나가서 사 주었지만 요즘은 예쁜 게 눈에 띄면 사서 그녀의 책상에 놓아둔다. 그러면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로라가 그의 목에 매달려 뽀뽀를 하며 고맙다고 인사한다. 지금은 침대 위에 커다란 곰인형이 놓여 있었다. 안드레는 로라의 방을 나와 스튜디오의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처음에는 스튜디오 한 쪽에 간이침대를 놓고 야간작업을 할 때면 거기에서 자곤 했는데 불편해서 더블침대를 들여 놓은 이후로는 자이레가 찾아와서 함께 자곤 했다.어젯밤도 작업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페페와의 사냥 약속 때문에 일찍 일어났는데 그녀가 옆에 누워 있었다. 잠귀가 밝은 그녀를 깨우지 않으려고 살그머니 빠져나와 아래층에서 총을 손질하던 중에 로라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안드레는 문을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로라는 타월을 한쪽 어깨에 걸친 채로 안드레의 중절모를 머리에 삐딱하게 쓰고 안드레가 피우다가 재떨이에 걸쳐 둔 시거를 집어 입에 물었다. 시거는 생각보다 독했다. 로라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연기를 뿜어냈다. 창가로 다가갔다. 아직은 동이 채 트지 않아 보름달이 하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소파로 올라가 의상실에서 보았던 칼라 부인의 포즈를 그대로 흉내 냈다. 가슴을 창턱에 바짝 갖다 붙이고 엉덩이를 뒤로 내밀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조금씩 떠다녔고 보름달이 하얀 빛을 발하며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생은 저런 건지도 모른다. 먹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가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환한 얼굴을 내보이는, 그런 것이 인생인지 모른다. 로라는 나름대로 인생이란 정의를 내려보려 애쓰며 그렇게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지고 발소리가 들렸다. 그걸 의식한 로라는 몸을 긴장시키며 팔꿈치에 힘을 주었다. 발소리가 그치더니 그대로 선 채로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안드레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뭘 보고 있는 거니?"
"달이에요. 보름달. 정말 눈부시게 하얀 빛이예요."
"너도 그래, 게다가 넌 아름답기까지 해...."
로라가 매력적인 시선을 안드레에게 보냈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 모델이 포즈를 취한 것 같죠?"
안드레가 빙긋 웃음을 지었다.
"더 훌륭해. 이제 옷 입자."
로라는 소파에서 내려와 안드레 앞에 섰다. 타월을 던져 버리고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고는 안드레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놀리듯 말했다.
"한번 입혀 봐요."
"까불지 말고 어서 입어."
로라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안드레가 들고 있는 옷을 보았다. 자신이 아끼는 꽃무늬 원피스였다.
"이건 어떻게 찾았죠?"
안드레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그냥 찾았어."
로라가 안드레의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의미 있는 눈웃음을 지었다.
"내가 없을 때면 내 방에 들어오죠?"
안드레가 로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도 내 근처를 맴돌잖아. 타마소와 결혼할 거니?"
로라는 거침없이 내뱉었다.
"안 해요."
"튕기는 거냐?"
로라는 옷을 입히려는 안드레의 손길을 피해 맴을 돌면서 즐거워 했다.
"안 해요. 내기 할래요?"
안드레가 깔깔거리며 도망치는 로라를 쫓아다녔다. 안드레가 로라의 팔을 겨우 붙잡아 원피스를 꿰어 입혔다.
"뭘 걸고?"
로라는 이번엔 단추를 채워 주려는 안드레를 피해 춤을 추듯 몸을 흔들었다.
"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농담 마."
로라가 안드레에게 바짝 다가섰다. 안드레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로라의 가슴께의 옷깃을 양손으로 잡았다. 탐스런 가슴이 손끝에 뭉클하게 느껴졌다.
"아뇨, 진짜예요. 아빠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어요."
안드레가 화를 벌컥 냈다.
"멍청한 짓 마. 난 네 엄마의 애인이야."
거친 숨소리, 향긋하고 싱그런 로라의 몸 내음, 안드레는 잠깐 동안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말괄량이가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애인과 헤어지고 결혼을 안 한다는 걸까. 하지만 그건 순전히 그녀의 변덕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로라에게 푹 빠져있는 타마소가 그냥 포기할 리가 없었다. 이렇게 내 마음을 산만하게 만드는 이 아이는 차라리 결혼해서 내 곁을 떠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며 로라의 천진하고 맑은 눈을 들여다봤다. 로라도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진심이에요."
로라의 숨결이 안드레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안드레는 로라의 가는 허리를 움켜잡았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의식할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내가 누구인가, 이래도 되는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있으면 쾌락의 순간이 오리라는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기만 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자이레의 날카로운 부르짖음 때문이었다.
"안드레! 로라!"
속옷 차림에 가운만 걸친 자이레가 계단의 난간을 붙들고 서 있었다. 자이레의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로라를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 더러운 것!"
안드레는 로라 앞에 서더니 자이레의 거친 욕설로부터 지켜주려는 듯 손을 내밀어 막는 시늉을 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자이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이 음탕한 것!"
로라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남 말하지 말아요. 엄마의 저질 사진을 봤어요."
자이레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딸을 참담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녀는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안드레가 얼른 달려가 그녀를 부축하며 어깨를 어루만졌다. 자이레가 중얼거렸다.
"딴 여잔 몰라도 내 딸은 안 돼. 내 딸은 안 돼. 내 딸은 싸구려 장난감이 아니야."
갑자기 자이레가 안드레를 향해 냅다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그녀가 휘두르는 주먹을 막느라 진땀을 뺐다. 자이레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앞으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절망적인 생각에 싸여 눈앞이 캄캄했다. 그녀에게 변명을 하려 드는 그가 너무나 뻔뻔스럽고 증오스러웠다. 그녀는 앙다문 입으로 욕설을 내뱄었다.
"이 나쁜 자식."
안드레가 오해를 풀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건 오해야. 몸이 젖었길래 닦아 준 것뿐이야. 그게 다라고."
자이레는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발끝만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진정이 된 건지 분노를 참느라 그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안드레는 그런 자이레에게 이제껏 살아오면서, 세 식구가 단란한 가정을 꾸려오면서도 항상 궁금했던 것, 그것을 자이레에게 지금 이 순간 물어보고 싶었다. 그 사실 한 가지가 의심스러워 자꾸만 자신의 부성애가 엇나가는 틈새가 생겨나는 것만 같았다. 그 진실이 어떻게 밝혀지든 알기만이라도 한다면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안드레는 침이 바짝 마른 입술을 열어 자이레에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 줘."
"뭘요?"
"진실이 듣고 싶어. 로라는 누구 딸이지?"
자이레는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제야 안드레가 본심을 드러내는 거라 생각되었다. 그동안 불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확연히 드러나고 자기 자신은 이 잘난 남자의 꼭두각시가 되어 살았던 거라고 여겨졌다. 자신을 사랑하는 거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여자라면 무조건 다 좋은 것이다. 다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을 믿고 일생을 바치다니. 그 솥한 여자들, 그 여자들을 보고도 아픈 마음을 달려며 지금껏 살아왔는데, 그것도 그를 누구보다 사랑하면서 말이다. 아픈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자나갔다. 울컥, 가슴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뭔가. 한 남자만을 바라보며 살아 온 자기 인생을 돌아보니 텅 비어 있었다. 자이레는 울부짖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로라가 그렇게 탐나나요?"
자이레는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두 손을 덜덜 떨다가 주먹을 불끈 줘었다. 또다시 그를 향해 포효하듯 소리쳤다. 그녀의 외침은 집 안의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두 박살내어 버릴 듯 날카롭고 독기를 품고 있었다.
"그 애가 항상 걸렸어요. 당신이 건드릴까 봐. 역시 당신은 어쩔 수 없군요. 당신의 성욕은 끝이 없어요."
그녀의 울부짖음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거실 여기저기를 비척비척 걸어 다니며 외치던 그녀가 갑자기 안드레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 딸을 넘보다니 당신은 돼지예요!"
그녀의 절망적인 목소리와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안드레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자이레의 얼굴에 손을 댄 것이다. 자이레는 눈물투성이인 얼굴을 안드레를 향해 똑바로 들고 떨리는 입술로 차갑게 말했다.
"로라의 아빠는 쟝이에요. <노르망디>호 시절 당신 친구죠. 우릴 소개해 줬지만 내 애인이었죠. 다 알고 있었겠죠? 당신을 만나기 전에 로라를 임신했어요. 이제 알 건 다 알았으니 데리고 가서 놀아나세요."
안드레의 눈이 처음엔 커졌다가 놀라움이 가시자 시선이 발끝을 향했다. 그동안 그런 의구심을 때때로 가졌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대놓고 자이레를 의심한 적이 없다. 그는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자꾸만 그런 자신의 노력을 몰라주는 자이레 앞에서 그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지금의 이 사랑과 행복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는 안타까운 눈길로 자이레를 바라보며 어깨를 안으려고 다가갔다. 자이레는 고개를 숙인 채 팔만 내저었다. 눈앞에서 꺼져 버리라는 뜻이었다.
11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자이레는 새벽 네 시인데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 물건을 때려부수고 어머니를 폭행하느라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아서였다. 자이레는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두 손으로 귀를 힘껏 막고 있었다. 이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칠 줄을 모르고 어머니를 때렸다. 자이레는 일찌감치 일하러 나갈 준비를 해서 뒷문으로 몰래 집을 나갔다. 집 앞의 돌 계단에 앉아 날이 환히 밝기를 기다렸다. 앉아 있는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지런한 쟝이 우유 배달을 나갈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가 자이레를 발견했다. 쟝은 곧 자기가 일하고 있는 가게 주인인 친척의 주선으로 <노르망디>호의 선언이 될 예정이었다. 쟝은 자이레가 또 무슨 일로 나와서 앉아 있는지 짐작이 갔다. 그는 자이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집 안으로 되돌아 들어가서 빵과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들고 나왔다.
"자이레....."
자이레는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쟝을 쳐다봤다.
"이렇게 새벽부터.... 감기 들겠다. 이것 좀 먹어. 몸이 좀 따뜻해질 거야."
자이레는 쟝이 건네는 것을 받지 않고 고개를 숙여 버렸다. 쟝은 곁에 앉아 자이레의 손에 억지로 빵과 우유를 쥐어 주었다.
"억지로라도 좀 먹어. 그래야 힘을 내서 일도 하지."
쟝의 따뜻한 손이 자이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이제 일 나갈 시간이야. 가 봐야 해. 내가 봐주지 않더라도 꼭 먹어야 해, 알았지?"
자이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쟝은 눈물이 흐르는 자이레의 뺨에 키스하고는 일어서서 총총히 계단을 내려가 큰길로 들어섰다. 자이레는 쟝이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는 억지로 빵을 베어 물었다. 그녀는 조그만 의상실에서 보조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사실 의상실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남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의상실에 가 봤자 잔심부름을 하는 정도였다. 그동안 가게나 시장, 여러 곳을 전전하며 일했는데 그래도 의상실에서는 뭔가 배울 수 있겠거니 하고 열심히 다니는 중이었다. 집도 가난한데다 아버지는 그녀가 학교나 다니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자기 먹을 거라도 벌어들여야 한다며 그녀를 일터로 내몰았다. 자이레의 어머니는 아버지 눈치만 볼 뿐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그녀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지독한 가난과 난폭한 아버지, 그것이 그녀의 인생에 어둠을 드리우고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는 탈출하리라 마음먹고 푼푼이 돈을 모았다. 줘꼬리만한 월급도 아버지가 잊지 않고 타자 마자 빼앗아갔기 때문에 남는 건 없었지만 액수를 속인다거나 심부름 값으로 좀 더 받은 것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아버지에게 들켜 흠씬 두들겨 맞고 몽땅 빼앗기고 말았다. 그녀는 희망이란 단어를 알지 못했다. 온통 절망뿐이었다. 그래도 친오빠처럼 정성을 다해 자이레를 챙겨주는 쟝이 그녀에게는 한 줄기 빛이었다. 쟝은 선량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외모는 보잘것없었지만 사람 됨됨이 하나는 높이 평가해 줄 만했다. 불쌍하고 가난한 이들이라면 누구든 아끼고 동정할 줄을 알았다. 그중에서도 자이레를 향한 애틋한 사랑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쟝은 가게에서 점원 노릇을 한 지 몇 년째 되어 이제 능숙해졌고 그 가게 주인이 가까운 친척이라서 그곳을 물려받을 수도 있었다. 또한 주인은 유독 쟝을 믿고 위했으며 쟝만 좋다면 가게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그에게 딸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의상공부를 하고 있다. 그녀는 앞으로 패션디자이너가 될 생각이었다. 그녀는 대학 근처에 방을 얻어 살고 있었으며 방학 때가 되어서야 일주일 정도 머물다가 가 버렸다. 이제 그는 딸보다도 쟝에게 정이 더 갈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바다로 나가고 싶어 했다. 배를 타고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그의 소원대로 곧 바다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주인의 친구가 <노르망디>호의 선장이 된 것이다. 쟝을 가게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주인을 몇 달을 두고 조르고 설득해 겨우 그 배의 선언으로 취직이 되었다. 쟝은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보다도 배를 타게 된 기쁨이 앞섰다. 우유 배달을 마친 쟝은 곧바로 가게로 달려가 문을 열고 쓸고 닦고 열심히 청소했다. 청소가 끝나갈 무렵 주인이 가게로 들어섰다.
"녀석, 선원으로 취직시켜 주니까 더 열심히로구나. 네가 그러면 더 놓치고 싶지 않다는 걸 모르고 하는 짓이냐!"
"아저씨도 참..."
쟝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자, 이제 좀 쉬거라 물건 진열은 내가 할 테니."
쟝은 그래도 쉬지 않고 주인을 도와 가게 물건들을 정리하느라 부지런을 떨고 다녔다. 그러나 쟝의 마음속에 목의 가시처럼 걸리는 사람이 있었다. 자이레였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게 지내는지 알기 때문에 그녀를 두고 떠나기가 미안했다. 자이레는 쟝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녀에게 쟝은 그냥 마음 착한 옆집 오빠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동안 그의 보살핌 덕택에 집에서 견딜 수가 있었다. 우당탕 물건이 구르고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나면 쟝은 자다가도 일어나서 자이레의 집으로 뛰어갔다. 창문으로 안을 기웃거리다가 어떤 때는 맞고 있는 자이레를 데리고 나온 적도 있다. 술로 인사불성이 된 그녀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것을 보고 참다 못해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르는 그녀를 냅다 두들겨 팼던 것이다. 쟝은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자이레를 때리려고 팔을 들어 올리는 그를 밀어 버렸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그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쟝은 재빨리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데리고 나와 자기 집으로 갔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는 가끔 멀쩡한 정신으로 길에서 쟝을 만나면 못마땅하게 쳐다봤지만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자이레는 그렇게라도 자기를 보살펴주는 쟝이 없었으면 진작에 집을 뛰쳐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쟝은 달랐다. 남다른 미모를 가진 자이레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누더기 같은 옷을 걸쳐도 눈처럼 새하얗고 매끈한 피부에 서글서글한 눈매, 붉은 입술 때문에 누구보다 예뻐 보였다. 쟝은 배를 타고 나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돌아와서 자이레와 결혼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는 고아였다. 그의 부모는 3년 전 결혼 15주년 기념으로 여행을 갔다가 그만 사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교통사고였는데 트럭과 부딪친 대형사고라 사람의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쟝은 혼자서 저녁을 먹다가 뉴스를 보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동안은 실감이 나지 않아 그냥 멍한 상태로 있었을 뿐이다. 부모가 탄 차는 남의 것을 빌린 것이었고 차 주인이나 부모는 보험을 든 것도 아니었고 사고 결과는 상호과실로 나왔다. 남겨진 집과 부모가 저축해 둔 돈으로 생활을 해나갈 수는 있었지만 넉넉하지는 않았다. 오늘도 그는 자이레를 만나러 갈 것이다. 의상실이 문을 늦게 닫기 때문에 쟝이 일을 끝마치고 가면 자이레를 만날 시간이 충분히 되었다. 쟝은 가게 문을 닫고 문단속을 한 뒤 걸어서 20분이 걸리는 의상실을 향했다. 가게에 도착하니 주인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문밖까지 들려왔다.
"넌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하니! 손님들한테 좀 더 나긋나긋할 수 없어? 이 가게 손님들을 다 내쫓을 셈이야?"
자이레의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 다만....."
"시끄러워! 뭘 잘했다고 변명이야? 넌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구나."
가게 주인은 자이레를 미워했다. 반반한 얼굴에 가진 건 없어도 자존심만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구할 때 일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할 수 없이 자이레를 썼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녀를 절대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가게 주인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쟝은 얼른 어두컴컴한 벽으로 숨었다. 한참이 지나도 자이레는 나오지 않았다. 가게 문을 빠꼼히 열고 들여다보니 자이레는 가게 주인이 내던져 어질러진 옷가지와 천조각들을 치우고 있었다. 쟝은 안으로 들어갔다. 자이레를 도와 어질러진 바닥을 치웠다. 다 치우고 나자 힘이 빠진 그녀가 벽에 기대어 비스듬히 서 있었다. 쟝은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주인 여자는 구실만 생기면 너를 못살게 구는구나!"
쟝이 그녀의 입술에 살포시 키스했다. 그녀는 쟝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깨가 들썩거렸다. 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머리를 올려 묶어 드러난 목덜미를 쟝이 어루만지며 키스했다. 쟝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헤치고 브래지어를 걷어올렸다.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봉긋한 가슴이 드러났다. 탐스러웠다. 쟝은 보물이라도 되는 듯 젖가슴을 받쳐 들고 키스했다. 장밋빛 유두를 깨물었다. 자이레가 목을 뒤로 젖히며 신음했다.
"으음!"
쟝은 그동안 참았던 욕구가 폭발하며 사타구니가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에 키스하고 목덜미를 입술로 더듬으며 스커트를 들추고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무성한 음모를 헤집고 늪과도 같은 은밀한 곳을 만졌다. 그녀는 자지러지며 본능적으로 다리를 들어올려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쟝은 자이레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몸 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뒹굴었다. 자이레의 깊은, 오래 묵은 슬픔의 덩어리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쟝의 사랑이 자이레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 순간만은 아버지도, 가난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이레는 쟝의 허리를 꼬옥 안았다. 다시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쟝은 자이레를 일으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볼에 키스하고 일어났다. 그때였다. 인기척에 돌아보니 무슨 일인지 되돌아온 주인 여자가 상황을 파악하고 씩씩거리며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이레는 재빨리 일어나 옷매무새를 수습하고 쩔쩔매며 주인 여자에게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주인 여자는 화가 너무 나서 말이 안 나오는지 한참을 더 씩씩거리더니 마침내 소리를 질렀다.
"당장, 당장 나가! 감히 내 가게에서 이런 불순한 짓을...."
자이레가 고개를 숙였다. 쟝이 나서서 사정했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필요 없으니 나가! 내 눈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쟝은 펄쩍펄쩍 뛰는 주인 여자를 더 이상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자이레를 데리고 나갔다. 쟝은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그렇잖아도 힘든 그녀에게 수치심과 절망감만을 안겨 주다니...... 그녀는 쟝의 손을 뿌리치고 후다닥 뛰어가 버렸다. 쟝이 쫒아가며 소리쳐 불렀지만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다음날 쟝은 아저씨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자이레의 일자리를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일자리가 <노르망디>호 일등석 탈의실 여급직이었다. 쟝은 기쁘긴 했지만 자이레가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되었다. 그는 점심 시간에 짬을 내어 자이레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어두웠던 그녀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몇 번씩이나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던 그녀에겐 좋은 기회였다. 자이레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일부러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어머니에게만 떠나기 전날 밤 말할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알면 어떤 방법으로든 월급을 빼앗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주일 후. 쟝과 자이레는 <노르망디>호에 승선했다. 유니폼을 차려입은 자이레는 아름답다 못해 눈부셨다. 검은색 상하의에 검은 스타킹, 그리고 흰 칼라. 쟝은 그녀가 보일때마다 가슴이 뛰는 것을 억누르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뒤쫓아가곤 했지만 그녀는 남에게 들킬까봐 일부러 피해 갔다. 자이레의 일은 탈의실을 청소하고 세탁물을 거두어 세탁하는 일이었다. 그녀 이외에도 같은 일을 하는 사람만 두 사람이 더 있었고 이등실이나 삼등실 직원까지 합하면 열 명이었다. 자이레는 그리 사교적이지 못했다. 다른 여급들은 그녀가 거만해서 말도 않고 함께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저 잘난 체하는 얼굴 좀 봐. 못 봐주겠다니까."
"저래뵈도 남자들한테는 또 얼마나 꼬리를 잘 치는데."
"맞아. 남자들이 온통 자이레 얘기만 하더라고. 유난히 친한 선원도 한 명 있는 것 같던데."
모두들 자이레를 두고 쑥덕거렸다. 자이레는 그들이 그러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면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었다. 가끔 쟝이 몰래 들려서 초콜릿과 과자를 주고 갔다. 그녀는 처음 3일은 뱃멀미로 고생을 많이 했다. 도대체 뭘 먹을 수가 없었다. 먹자마자 모두 토해 버렸기 때문이다. 4일째 되는 날부터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쟝이 초콜릿과 과자를 챙겨주는 것도 그녀가 뱃멀미로 고생하는 것을 알아서였다. <노르망디>호가 출항한 지 5일째 되는 날 밤, 큰 파티가 열렸다. 선원들과 손님들이 어우러져 온통 축제 분위기에 들떠 마시고 떠들어 댔다.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춤이 시작되었다. 자이레는 음료수를 한잔 가지러 가느라 사람들을 헤치고 음식이 가득한 테이블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그 앞에서 흰색 옷을 갖춰 입은 남자와 이야기중인 쟝과 맞닥뜨렸다. 쟝이 반겨 맞았다.
"이봐, 자이레!"
자이레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음을 잠시 멈추고 머뭇거렸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안녕." 인사를 하고 난 그녀의 시야에 자기를 마치 삼켜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강렬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바로 쟝의 옆에 서 있던 남자였다. 복장으로 보아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인 듯싶었다. 쟝이 천진한 얼굴로 웃으며 그를 자이레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자이레, 내 친구 안드레야. 지금 이 배의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지."
자이레는 빨려 들어가 버릴 듯한 남자의 눈빛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쟝이 춤을 신청해 왔다. 얼굴이 빨개진 채 자이레는 엉겁결에 쟝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안드레가 어느새 정정으로 갈아입고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어이, 쟝. 미모의 아가씨를 혼자서만 차지하지 말고 이쯤에서 내게 넘기지 그래?"
쟝은 사람 좋은 얼굴로 자이레를 안드레에게 넘겼다. 안드레는 자이레를 낚아채듯 자기의 품에 바짝 안아 들었다. 허리를 감싸 쥔 그의 커다란 손. 그녀의 이마 위에 닿을 듯 말 듯한 그의 잘생긴 입술. 자이레는 숨이 막혔다. 스텝마저 제대로 밟을 수가 없었다. 안드레가 자이레를 더욱 당겨 안으며 말했다.
"마음을 편히 가져요, 자이레."
자이레는 점차로 그의 능숙한 춤솜씨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와 춤을 추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춤이 끝나자 안드레는 그녀에게 술을 권했다. 포도주였는데 상당히 독했다. 은근히 취기가 오른 그녀의 뺨이 불그레해지는 것을 빤히 바라보던 안드레가 그녀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그들을 때리고 지나갔다. 안드레는 그녀를 왈칵 껴안으며 키스를 했다. 그의 긴 혀가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왔다. 안드레의 본능을 깨우는 듯한 강렬한 키스에 그녀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안드레는 그녀를 데리고 주방으로 갔다. 모두들 파티에 참석해서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안드레는 문을 잠그고 나서 그녀를 난폭하게 잡아채더니 의자의 손잡이를 잡고 엎드리게 했다. 치마가 말려 올라가고 팬티가 찢겨져 나갔다. 안드레는 그녀의 탐스런 엉덩이가 나타나자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바지를 끌어 내렸다. 일어서려고 하는 그녀의 등을 한 손으로 세게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다리를 자신의 다리로 밀어내 한껏 벌리게 했다. 그녀의 몸속 깊숙이, 그는 난폭하게 파고들었다. 그녀의 몸은 바람둥이인 그를 흡족하게 해 줄 만큼 뛰어나게 아름답고 풍만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여자의 몸을 탐닉했다. 여자를 돌려 앉혀 손잡이에 다리를 걸치게 하고 다시 덮쳤다. 그는 그녀의 몸속에 사정을 하고 나자 기분 좋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반항할 겨를도 없었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의 관계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쟝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쟝은 그녀를 편안하게 해 주지만 안드레는 그녀의 감성을 건드려 깨우는 기교와 적극성이 있었다. 안드레는 그녀의 턱을 손으로 들어 올리더니 말했다.
"아주 훌륭했어. 이제 넌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내일 저녁 11시쯤이면 아무도 없을 테니 그때까지 이곳으로 와. 기다리고 있겠어. 명심하라고."
안드레는 횅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고 난 뒤 넋을 잃고 의자에 앉아 있던 자이레는 주섬주섬 옷을 단정하게 고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 자이레를 찾아다니던 쟝과 마주쳤다.
"자이레, 어디 갔었어? 한참을 찾았어. 아니, 근데 머리가 엉망이군. 무슨 일 있었어?"
당황한 자이레가 쏘아붙였다.
"무슨 일은....! 내 일에 제발 상관 좀 마."
자이레는 오던 길로 돌아서서 뛰어가 버렸다. 다음날 자이레는 약속 시간이 가까워 울수록 안절부절 못했다. 쟝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구체적으로 그와 장래를 약속한 적은 없었지만 그들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사이였다. 게다가 그때서야 자신이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음으로는 가서는 안 돼 하고 되뇌었지만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안드레를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었다. 11시가 거의 다 되어갈 무렵, 자이레는 혹시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도둑고양이처럼 주방으로 갔다. 안드레는 아직 오지 않았다. 자이레는 초조해져서 두 손을 맞잡고 왔다 갔다 했다. 5분쯤 지나자 자이레는 겁이 덜컥 나서 다시 나가려고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안드레가 씩 웃었다.
"오호,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군. 좋아, 오늘은 느긋하게 즐겨보자고. 작품도 만들어 가면서 말이야."
안드레는 자이레의 얼굴을 어루만지다가 목을 지나 가슴으로 손을 집어넣어 유두를 잡고 비틀었다.
"악!" 자이레가 낮은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안드레는 의자에 앉더니 가슴을 붙잡고 겁에 질려 서 있는 자이레에게 명령했다.
"자, 옷을 벗어. 천천히 벗으라고."
자이레는 로봇처럼 그의 말을 따랐다. 한꺼풀 한꺼풀 옷을 벗어나갔다.
"식탁으로 가서 엎드려."
자이레는 시키는 대로 했다. 안드레는 부드럽게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다리를 벌리게 했다. 그런 다음 한 걸음 물러서서 준비해 온 사진기로 그녀의 뒷모습을 찍었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 주문했다. 식탁 위에 아예 올라가 다리를 구부린 채로 엎드리라고 했다. 그녀가 그렇게 자세를 취하자 그녀의 중요한 곳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안드레는 그곳을 손으로 만지다가 혀끝으로 간지럽혔다. 그녀는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를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액체가 흘러내렸다. 안드레는 손가락으로 장난하다가 사진만 찍어 댈 뿐, 그날 저녁은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안드레는 그녀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더니 옷을 입으라고 했다. 그녀가 옷을 입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그는 터질 듯 흥분되어있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나가 버렸다. 나가기 전에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잊지 말라고. 내일도 11시에 이곳으로 와."
다음날도 그녀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그곳으로 갔다. 안드레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다. 그녀가 알몸이 되자 그는 그녀를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가 돌아서서 팔을 쳐들게 한 다음 밧줄로 묶었다. 그러고는 혁대를 풀어 그녀의 새하얀 엉덩이를 힘껏 내려치기 시작했다.
"오늘은 새로운 걸 해보자고."
그녀의 엉덩이가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갈 때쯤 그는 때리기를 멈추었다. 아픔 때문에 몸을 뒤틀던 그녀는 어느새 아픔이 쾌감으로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핥아 주었다. 엉덩이가 꿈틀거리며 그의 혀놀림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녀의 몸이 달아오를 만큼 달아오르자 그는 그녀의 손을 풀어 주었다. 풀어 주자마자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입술을 삼킬 듯 빨아들였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미친 듯 매달렸다. 그가 빙그레 미소지으며 그녀를 안아 든 채로 가슴에 키스했다. 그녀의 몸이 활처럼 휘어졌다. 주방 안이 온통 열기로 가득했다. 쾌락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재빨리 옷을 주워 입는 동안에도 노크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안드레가 문을 열자 쟝이 들어섰다. 설마했던 쟝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쟝은 안드레에게 주먹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워낙 덩치가 좋은 안드레라 그것으로는 부족할 듯싶었는지 쟝은 주방의 요리용 칼을 들고 그를 덮치며 찌르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개를 돌리고 있던 자이레가 쟝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안 돼! 쟝, 왜 이러는 거야?"
안드레가 아픈지 찡그리며 턱을 어루만졌다.
"이봐, 쟝!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비켜, 자이레. 이놈을 가만두지 않겠어. 순진한 자이레를 유혹하다니!"
자이레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안 돼, 쟝! 내가 이 사람을 유혹한 거라고."
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자이레가 쟝에게 폭탄과도 같은 말을 던졌다.
"난 안드레를 사랑하고 있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쟝은 자이레를 한 번 쳐다보고는 팔을 내려뜨리더니 얼어붙은 듯 그대로 서 있었다. 쟝은 원망을 담은 슬픈 눈으로 자이레를 쳐다보며 안드레의 몸에서 떨어져나왔다. 그는 칼을 바닥에 툭 던지더니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열린 문으로 바닷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일시에 몰아쳐 들어왔다. 자이레는 그 자리에 선 채 바깥의 어둠을 응시했다. 쟝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겨 주고 말았다. 그는 자이레에게 애정과 희망만을 심어 주었는데 말이다. 쟝의 애틋한 사랑을 자이레는 알고 있었다. 마음은 그를 향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런 복병에게 그녀의 몸이 온통 휩쓸려가 버려 그에 대한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린 것이다. 안드레가 뚜벅뚜벅 걸어와 자이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한동안 서 있더니 아무 말도 없이 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혼자 남겨지자 왈칵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쟝은 다음날부터 아프다는 핑계로 일을 하지 않고 방에 누워 있기만 했다. 자이레가 찾아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쟝은 선원일을 그만두기로 하고 <노르망디>호가 정박하는 바로 다음 항구에서 내려 버렸다. 자이레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한동안 말을 잃었지만 안드레는 마치 사람이 변한 듯 그녀를 위로하고 보살폈다. 자이레는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자이레는 그날 밤 쟝에게 들키고 난 후 그 방에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면 자이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음은 아팠지만 그녀의 몸속엔 안드레의 손길과 따뜻한 혀의 느낌이 아직껏 살아남아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뒤척이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한 자이레는 자위를 해보았다. 생전 처음이었다. 그런 데는 눈도 돌리지 않던 그녀였다. 게다가 스스로도 이성적이고 냉정한 성격이라고 판단했던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활활 타올랐다. 자이레는 벌떡 일어났다. 어깨에 숄을 걸치고 주방으로 갔다.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자 안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목소리는 안드레의 목소리임이 분명했고 여자 목소리도 들려 왔다. 순간 자이레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그녀는 그대로 선원들의 침실이 늘어선 통로로 가서 주방장인 안드레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열려 있었다. 분명 여분의 열쇠를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서랍에 열쇠꾸러미가 있기는 했지만 맞는 열쇠가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자이레는 그걸 집어들고 주방으로 다시 달려갔다. 조심스럽게, 소리나지 않게 열쇠를 하나씩 맞추어 봤다. 드디어 맞는 열쇠를 발견했다. 그녀는 슬며시 열쇠를 돌려 문을 끄르고는 살짝 열어 틈새로 안을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두 명의 벌거벗은 여자와 안드레가 있었다. 한 여자는 식탁 위로 올라가 뒷모습을 보인 채 드러누워 있었다. 또 다른 여자는 누워있는 여자의 몸을 어루만지며 선 자세에서 상체를 굽혀 엎드려 있었다. 안드레는 열심히 사진을 찍어 대고 있었다. 안드레는 사진기를 내려두고 식탁으로 가까이 갔다. 모로 누운 여자를 반듯하게 눕히고는 다른 한 여자와 그녀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허리를 뒤틀며 신음했다. 안드레는 누운 채 무릎을 들고 있는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는 그사이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녀가 스스로 다리를 더 크게 벌렸다. 안드레는 물러나고 다른 여자가 다가가 누운 여자의 음부를 핥기 사작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소리가 더욱 자극적이었다. 안드레는 또 사진을 찍으려고 돌아서서 사진기를 들여올리다가 문틈새로 들여다보고 있는 자이레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안드레는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는 들었던 사진기를 다시 놓고 문으로 다가갔다. 크게 뜬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는 자이레에게 변명을 하여고 입을 막 연 순간 자이레는 들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힘껏 내던지고 달려가 버렸다. 여자들이 깜짝 놀라 재빨리 옷을 집어 가슴을 가렸다.
"무슨 일이죠?"
"누가 온 건가요?"
안드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 일도 아냐. 옷이나 입으라고. 오늘은 이정도로 끝내는 것이 좋겠어."
안드레는 의자에 앉아 시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한참을 물고 있다가 불을 붙였다. 깊이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여자들은 안드레의 눈치를 살피며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안드레는 자이레를 생각했다. 사랑과 일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사진작가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스튜디오를 차려 본격적으로 일해 볼 생각이었다. 그는 여자의 몸에서 오묘한 신비감을 느낀다. 정말로 아름다운 여자의 몸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 그의 욕망이다. 그는 자이레를 사랑한다. 그녀는 누구보다 아름답기도 했지만 그녀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안드레는 도통 힘을 쓸 수 없다. 쟝이 자이레를 그토록 사랑한 줄을 모르고 그녀를 사랑해 버린 죄로 요즘 무력감에 빠져 자이레를 찾지 않은 것이다. 쟝이 <노르망디>호를 떠나 버리고 말자 그가 자신의 영원한 꿈을 접을 정도로 자이레를 사랑했다고 생각하니 처음 그녀를 호기심과 정복욕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대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사실 처음에는 그동안 그가 접근했던 다른 여자들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만의 매력과 순수함은 다른 여자와의 기억을 모두 지워 버리고 말았다.
안드레는 재떨이에 시거를 비벼 끄고 밖으로 나갔다. 배의 난간을 따라 거닐었다. 밤바다의 차가운 바람에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안드레는 가까이 다가갔다 자이레였다. 안드레가 어둠을 뚫고 자이레의 눈을 들여다 봤다. 아마 이곳에서 울고 있었던 듯싶다. 안드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서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30분이 지났을까. 자이레가 안드레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사랑의 힘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날부터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날이면 날마다 만났다. 그래도 사람들의 눈이란 무서운 것이여서 얼마 가지 않아 소문이 파다해졌다. 안드레는 자이레에게 청혼했다. 자이레는 아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안드레는 두 사람의 미래를 계획했다. 안드레는 직접 집도 지을 생각이었다. "집은 하얀색으로 칠을 할 거야. 물론 통나무집이어야 하고, 난 나무를 좋아하거든. 그리고 정원은 꼭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너무 삭막하고 답답해." 안드레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하자 자이레가 조용히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저 사실은 임신을 했어요."
안드레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세상에. 정말이야? 내가 아빠가 된다고?"
자이레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는 자이레를 안아서 번쩍 들더니 몇 바퀴를 돌았다. 자이레가 내려 달라고 사정했다.
"아, 안드레 내려 줘요. 어지러워요."
안드레는 그래도 내려 주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선원들에게 들켜 얼른 내려놓았다. <노르망디>호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결혼을 기뻐했다. 축복할 일이었다. 다만 안드레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여자들만이 질투에 싸여 욕하고 코웃음쳤다.
"안드레가 결혼한대. 자이레하고 말이야."
"호호, 누가 안드레 같은 바람둥이를 견디기나 하겠어? 잘해 줘도 함께 살까말까인데...."
안드레는 임신한 자이레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다. 이제 세 사람이 살 보금자리만 마련하면 된다. 두 사람은 되도록이면 빨리 꿈을 실현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안드레는 배가 서는 항구에서마다 값비싸고 희귀한 물건들을 사 가지고 왔다. 물론 자이레에게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점차 자이레도 안드레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거라고 믿게 되었다. 여자관계나 그의 미심쩍은 행동도 사랑하는 마음만 굳게 지키고 있으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항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 날. 안드레와 자이레는 먼저 자이레의 집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허락을 받고 식은 생략하기로 했다. 신고만 해도 충분했다. 자이레는 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쟝의 집과 그가 다니던 가게를 가 보았으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 길로 그녀는 안드레와 함께 고향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결혼하고 난 후 자이레의 아버지는 몇 번 그녀를 찾아왔다. 돈을 뜯어 가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막상 안드레와 부딪치면 꼼짝도 못했다. 아버지는 그때쯤에는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자이레! 자이레!"
아버지가 현관에서 부르는 소리에 자이레는 부엌에서 하던 요리를 멈추고 거실로 나갔다. 아버지가 지팡이를 짚은 채 현관에 서 있었다.
"아버지. 들어오세요."
"들어갈 건 없고.... 내가 오늘 병원을 가야 하는데 말이야."
"우선 들어오세요."
"됐다. 병원 갈 비용이나 좀 다오."
"저번에도 약값이라고 가져가신 돈, 술값으로 다 날리셨잖아요."
"누가 그래! 난 약 사다가 내내 먹었는데. 상태도 많이 좋아졌지 않느냐?"
하지만 자이레의 눈에 아버지는 전혀 좋아져 보이지 않았다. 눈은 이미 초점을 잃었고 제대로 버티고 서 있는 것도 10분을 넘기기 어려울 만큼 기력이 없었다. 자이레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그렇게 아버지 앞에 서 있었다. 자이레가 돈을 빨리 가져오지 않자 아버지가 자이레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병원 간다는데 돈을 안 줘? 길러 준 은혜를 이따위로 갚는 거냐?"
자이레가 아버지의 지팡이를 피해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아버지, 이러시면 어떡해요?"
그때 안드레가 2층에서 내려왔다.
"왜 이리 소란스러워? 무슨 일 있어?"
"아, 아녜요. 아버지 오셨어요."
"아, 오셨습니까? 들어오셔서 식사나 좀 하고 가세요."
"됐어, 밥 먹으러 온 게 아냐."
안드레는 화가 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돈을 요구하실 거면 어디에 쓰셨는지 영수증을 꼭 가져오세요. 그럼 아무 말 않고 돈을 드리겠습니다."
"무슨 놈의 영수증! 누가 영수증을 줘! 안 주니까 그렇지!"
"안 주면 달라고 하십시오. 아니면 저를 데려가 확인시켜 주시든지요."
"에잉!"
아버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자 더욱 화가 나서 지팡이를 마구 휘두르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자이레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아버지의 횡포에 마음이 심란했다. 안드레는 자이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무 걱정 마. 돈을 드려 봤자 가서 술이나 드실 것 아냐?"
자이레는 돈은 말고 식품이나 생활용품을 사서 아머니에게 종종 갖다 드렸다. 어머니도 아버지의 등쌀에 보통 늙은 게 아니었다. 자이레가 찾아가자 청소를 하고 있던 어머니가 그녀를 반겨 주었다. 그래봤자 아버지의 술값을 대느라 집도 팔아 버려 단칸짜리 허물어져 가는 판자집이라 청소할 것도 없었다. 세간도 다 부수거나 팔아 버려 냄비 몇 개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자이레는 어머니가 가여웠다. 어머니만이라도 편하게 자이레가 자기 집으로 모셔 가려 해도 어머니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고생시킨 것도 미안한데 더 이상 네게 짐을 지우기는 싫다."
"짐은 무슨, 이게 사람 사는 거예요?"
"내 운명이러니 생각하면 마음 편해."
자이레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어머니 손을 꼭 잡아 주다가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날 옆집 아이의 기별을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원인은 심장마비였다. 자이레는 슬프기보다 어머니의 고생이 끝났다는 생각으로 차라리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장례식을 조촐하게 치르고 나자 어머니는 자이레에게 혼자 살고 있는 동생에게 갈 거라고 했다. 자이레에게는 이모가 한 분 계셨는데 결혼은 여러 번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서 모두 이혼하고 혼자서 살았다. 혼자 산 지 벌써 10년쯤 되었다. 아들을 둘 두었지만 왕래가 거의 없다. 이모의 괴팍한 성미 때문이었다. 그런 이모와 살겠다니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번에도 완강했다. 기어코 짐을 싸서 떠나 버리고 말았다.
"걱정 마라. 내 너한테는 꼭꼭 안부를 전하마."
어머니는 자신을 안쓰러워 하는 딸을 위로했다. 자이레는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기차 안에서 읽어보라고 하면서 편지와 돈을 넣은 봉투를 드렸다. 그렇게 해서 자이레는 아버지의 횡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안드레는 자이레를 사랑하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구실 아래 평소 즐기는 여자의 누드 찍기와 바람기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자이레는 그를 사랑했다. 마치 마약과도 같은 그와의 사랑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이레는 그 후 19년 동안 로라가 그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로라가 성장해 갈수록 자이레가 평소 우려했던 바가 이제서야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자이레는 배신감을 넘어서 실망했다.
12
자이레는 초점 잃은 눈으로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안드레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난 당신밖에 없어."
자이레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돼지 같은 인간..."
"아니 그렇지 않아."
안드레는 그의 팔을 뿌리치는 자이레를 힘껏 끌어안았다.
"날 모르겠어? 당신을 사랑해."
"당신은 그 애를 원하고 있어요."
안드레는 자이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냐 잘 알잖아."
자이레는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허우적거렸다. 안드레는 놓치지 않을려고 손에 힘을 주며 그녀에게 다시금 속삭였다.
"아니라구, 당신만큼 날 흥분시킨 여잔 없었어."
안드레는 그녀의 성감대를 골라가며 건드리고 애무했다.
"당신은 끝내주는 여자야."
"아니에요. 난 이미 당신의 진실을 봤어요."
안드레가 자이레의 검은 머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지 않아. 난 당신뿐이야."
안드레는 그녀의 가운을 벗기고 브래지어와 팬티도 벗겨서 던져버렸다. 그리고 항상 그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방법으로 그녀를 정복해 갔다.
"당신만큼 사랑하는 여자는 없어."
자이레는 이미 몸이 나른해짐을 느끼며 말했다.
"돼지....."
안드레가 그녀의 입을 입술로 막아 버렸다. 그리고 밀어내는 그녀의 손을 잡아 누르며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점점 더 가빠졌다.
로라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단이 끝나는 곳의 구석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두 팔로 꼭 껴안고 한시간 이상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러고 있었다. 로라는 천천히 일어나 안드레의 스튜디오로 갔다. 잠겨 있기가 일쑤였던 그곳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로라는 불을 켜고 영사기 옆으로 갔다. 거기엔 커다란 서랍장이 있었고 안에는 그동안 만들었던 사진첩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로라는 의자 위에 두 다리를 올리고 앉아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자이레의 사진을 전부 따로 모았다. 자이레의 젊었을 적 모습처럼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화된 몸매와 얼굴이 담겨 있었다. 거기엔 아마도 <노르망디>호에서 찍었던 듯 한, 유니폼을 입은 어머니의 청초하면서도 동시에 도발적인 눈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듯한 모습의 사진도 잘 챙겨져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현재의 로라의 모습과도 매우 흡사했다. 로라는 영사기를 작동시켰다. 안드레가 거쳐 왔던 수많은 여인들의 쾌락에 떠는 표정들이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있었다. 어떤 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고 둥글고 커다란 엉덩이와 터질 듯 커다란 가슴, 그리고 벌려진 다리 사이로 보이는 은밀한 곳만 찍혀져 있었다. 페페가 그려 준 듯한 바디 페인팅을 한 여자들도 많았다. 어깨, 가슴, 엉덩이, 허벅지에 뱀처럼 살아 꿈틀거릴 듯한 그림, 꽃이 막 피어난 듯한 화사한 그림, 악마가 그려진 듯한 어둡고 무서운 그림 등 가지가지였다. 로라는 그중에서 자이레가 들어 있는 필름은 모조리 뽑아서 못쓰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따로 빼놓은 사진을 가지고 성냥을 챙겨서 살금살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이레의 옷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로라는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나왔다. 집 안에서는 보이지 않을 만한 정원 한구석에 앉았다. 하늘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화창할 것 같았다. 로라는 그대로 잔디 위에 쭈그리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일들을 그녀가 멋대로 휘저어 놓아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 얽히고 설킨 일들을 그녀의 힘으로 어떻게 풀어나갈까. 그녀는 다시 일어났다. 지난밤의 비로 잔디가 여전히 촉촉했다. 사진을 쏟아 놓고 불을 붙였다. 사진이 불타올랐다. 어머니의 얼굴들이 찌그러지고 검어지더니 이내 재로 변했다. 어머니의 과거도 재로 변했다. 이제 현재만 남았으니 열심히 미래를 만들어 가면 되리라. 로라는 불이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재를 말끔히 치운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벌써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미치 몇 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듯이 느껴졌다. 로라는 금새 잠이 들었다. 모든 일은 자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안드레가 미친 듯이 소리질렀다. 로라는 자기 방의 한 쪽 구석에 앉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자이레, 자이레! 이걸 보라구!"
"도대체 누가 이런 거야!"
사냥을 끝내고 페페의 집에서 저녁까지 들고 온 안드레는 스튜디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안드레는 자이레를 진정시키느라 약속했던 페페와의 사냥에 많이 늦었다. 페페도 아픈 아내를 간호하고 오느라 좀 늦었다. 두 사람은 늦게 출발하였고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다. 안드레가 페페에게 새벽에 벌어진 일을 이야기하느라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안드레는 짐승들을 보아도 쏘아 죽일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풀밭을 돌아다니다가 큰나무 아래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거나 했다. 사냥꾼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페페는 점심 시간이 되어 안드레를 찾아와 옆에 앉았다.
"이봐, 점심은 어디서 할까?"
"음, 저 산비탈 중턱에 별장이 하나 있잖나, 그리로 가세."
"나도 오늘은 별로 신통치가 않군."
페페는 자기가 잡은 산토끼 한 마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안드레와 페페는 사냥꾼들을 위해 지어져 있는 간이 별장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산장 내부에는 간단하게 식탁과 의자 네 개, 간이용 침대, 페치카 정도밖에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왔다 간 지 오래되었는지 퀴퀴한 냄새가 나고 먼지가 쌓여 있었다. 창문을 열고 식탁과 의자만 먼지를 털고 난 후 거기에 앉았다. 준비해 간 빵에 버터와 잼을 발라 먹고 커피도 끓여 마셨다. 페페가 커피를 마시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실은 애를 한 명 입양하려고 해."
안드레가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싫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런데 아내가 요즘 시름시름 아파서 말일세. 뭔가 정붙일 데가 있으면 그래도 괜찮지 않겠나 싶어서."
"그럼, 그럼, 잘했어." "어제 입양기관에 갔다 왔어."
"음. 그랬었군."
"수속은 마치고 왔으니 3일 후에 아기를 데려오면 돼. 아들인데 태어난 지 일주일도 채 안 되었어. 아, 정말 천사처럼 예쁘더라구. 마리아도 굉장히 기뻐했어. 돌아가는 길에 아기용품을 좀 골랐지. 중요한 것은 벌써 한 달 전에 사 놓았었어. 아기를 입양시킬 생각을 하고 나서는 바로 사들었지."
안드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페페가 어두운 얼굴로 안드레에게 물었다.
"그런데 자넨 자이레와 괜찮겠나?"
안드레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겠지. 사실 로라와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구 말야."
"내가 보기에도 좀 위험스럽긴 했지."
안드레가 허허허 하고 웃었다.
"이 사람,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무서워서 같이 일하며 살 수 있겠어?"
"자네 속이 투명한 건 아니라서 다 보이지는 않으니 걱정 마!"
안드레가 또 너털웃음을 웃었다. 점심이 끝나자 안드레가 또다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기만 했고 페페만 몇 번 총을 쏠 기회를 맞았다. 돌아오는 길에 안드레는 페페의 집에 들렀다. 마리아가 그를 반겨 주었다.
"그렇잖아도 기다리던 참이에요. 사냥이 끝나면 분명 우리 집에 들르실 줄 알았어요."
"아, 이거 날 기다려 주는 분이 다 있었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마리아가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던지 실내에는 온통 구수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거실에는 페페의 그림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페페는 지금도 그림 그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만간에 또 개인전을 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세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저녁을 들기 시작했다. 안드레가 마리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수프 맛이 기가 막히군요."
"입에 맞다니 다행이에요."
"이제 이 자리에 곧 한 사람이 더 앉아 이야기를 나눌 날도 멀지 않았군요."
마리아가 활짝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아기를 데리고 올 날이 기다려져요."
안드레가 마리아의 손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잘하셨어요. 혼자서 항상 적적했잖아요."
마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식사 후엔 거실에 앉아 안드레와 페페가 채스를 두었고 마리아도 페페 옆에 앉아 거들었다.
"아, 이거 두 사람이 공격해 오면 나보고 어쩌란 말이지?"
마리아가 웃으며 일어나 과일을 깎아서 내왔다. 안드레는 술도 한잔 걸치느라 한밤중이 되어서야 그 집을 나왔다. 안드레는 집에 도착해서 총만 대충 손질해서 두고 곧장 스튜디오로 갔다. 그러나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안드레는 스튜디오 안을 휘 둘러봤다. 별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고 풀썩 의자에 앉았다. 등을 뒤로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안드레는 일어나 사진첩과 필름이 없어졌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안드레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여기저기 뒤지고 다녔다. 그녀의 사진들만 일부러 따로 챙겨 두었던 적은 없었다. 따로따로 사진첩을 만들어 한 자리에 놓았을 뿐이었다. 안드레는 그 자리에서 미친 듯이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문을 박차고 나와 자이레를 부른 것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구!"
자이레는 파랗게 질려 한마디도 못 하고 있었다. 안드레는 그제서야 누가 한 일인지 짐작이 갔다. 로라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구석에 앉아 있던 로라가 고개를 쳐들었다. 방에 불을 켜 놓지 않아 어두웠다. 안드레가 불을 켰다. 안드레와 로라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안드레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더니 가서 로라의 멱살을 움켜쥐고 일으켜 세웠다. 자이레는 겁을 먹은 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로라는 태연한 얼굴로 안드레를 쳐다봤다.
"도대체, 도대체 왜 그런 거지?"
"그런 건 없애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네가 그걸 왜!"
"저밖에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잖아요?"
안드레는 로라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로라는 그대로 방바닥에 쓰러졌다. 자이레는 비명을 지르며 로라에게 달려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했다. 안드레는 자이레를 잡아 옆으로 밀어 버린 다음 다시 로라를 붙잡아 일으켰다. 로라의 입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안드레는 로라를 붙잡은 채 화가 나서 더 이상 말은 못 하고 주먹을 쥐어서 한 대 더 치려다가 그대로 방바닥에 그녀를 내팽개쳐 버렸다. 안드레는 절망적이었다.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데.... 안드레는 차분한 목소리로 쓰러져 있는 로라에게 말했다. 너무 차분한 목소리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네가 그것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알았으면 적어도 이러진 않았을 텐데."
로라는 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드레는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자이레도 로라를 묵묵히 쳐다보더니 뭔가 말을 할 듯하다가 그대로 나가 버렸다. 로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 많은 눈물이 어디에 고여 있었는지 한없이 흘러내렸다.
로라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벌써 오늘이 3일째이다. 자이레가 먹을 걸 갖다 주었는데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자이레는 걱정이 되어 어쩔 줄을 몰랐지만 안드레는 입만 굳게 다물고 있을 뿐 상관도 하지 않았다. 자이레는 안절부절못하고 거실에서 서성거리더니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녀는 페페와 마리아, 그리고 아기와 함께 집으로 들어섰다. 마리아는 평온하고 행복한 얼굴이었다. 아기를 꼭 안고 있었다. 자이레에게서 이야기를 다 들었던 듯 아기를 자이레에게 맡기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로라의 방 문을 열었다. 로라는 구석에 앉아 무릎을 올리고 그 위에 머리를 얹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 옆에 가 앉았다.
"로라, 우리 오늘 아기를 입양했단다. 아기가 천사처럼 예뻐."
로라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로라, 무슨 일인지 이야기 들었어. 아빠, 엄마도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데 네 기준에 맞추어 다시 고쳐 살 수는 없는 거 아니겠니?"
로라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로라, 너 그거 아니. 너희 엄만 자라면서 한 번도 아버지를 제대로 사랑할 수 없었단다. 아버지가 지독한 술주정뱅이에 폭행까지 일삼아서 언제쯤이면 아버지를 보지 않을 수 있을까만 생각했대. 그에 비하면 넌 얼마나 행복하니. 다른 건 생각 말고 네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해."
마리아는 로라의 손을 꼬옥 쥐었다가 놓아 주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서는 페페와 안드레가 신기한 듯 아기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자이레는 불안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2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리아가 내려오자 자이레가 가서 물었다.
"뭐라고 좀 해요?"
마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뭔가 심정에 변화가 온 것 같긴 했어요."
모두들 아기의 머리맡에 둘러앉았다. 마리아가 명랑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 아기 너무 잘생겼죠?"
그러자 안드레가 말했다.
"그거야 아버지를 닮아 그렇죠."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고 조용해지자 로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아빠를 닮아 예뻐요."
로라가 언제 왔는지 계단 옆에 서 있었다. 안드레가 로라를 돌아보도니 손을 뻗었다. 로라는 그 손을 잡았다. 안드레가 그녀를 잡아당겨 꼭 껴안아 주었다. 로라는 곧 활기를 되찾았다. 예전의 그 당돌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13
타마소는 기분이 무척이나 저조했다. 온통 로라 생각뿐이었다. 윌마를 찾아갔던 것도 후회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로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타마소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수학 문제를 앞에 놓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재빵사 베르도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타마소의 귀를 거슬리게 했다. 베르도는 여느때처럼 위에는 긴 소매를, 허리에는 앞치마, 아래는 반바지를 입고 발로 장단을 맞춰 가며 콧노래를 해댔다. 그가 원래 눈치가 무딘 사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잘해 주던 타마소가 갈수록 자기를 무시하고 함부로 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물론 로라와의 연애가 쉽게 풀리지 않아 그러는 줄 알고는 있었지만 심술이 났다. 가능하다면 자기도 로라처럼 예쁜 여자를 사귀고 싶었다. 그래서 잘난 척하는 타마소 녀석의 기를 팍 꺾어 주고 싶었다. 타마소 쪽을 슬금슬금 쳐다보면서 좀 더 큰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타마소는 베르도를 노려보았다.
"조용히 해, 멍청아."
베르도는 정말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왜 그래? 노래 싫어?" 타마소가 고개를 돌렸다.
"너도 싫어. 뭘 봐!"
베르도는 아무래도 타마소가 자신에게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딴 때 같으면 벌써 빵이 다 되어 나올 시간인데 타마소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로라 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베르도는 타마소에게 물었다.
"빵 아직 안 됐어?"
"보면 몰라?"
"이상하네. 시간이 됐는데...."
타마소가 베르도를 구박하듯 다그쳤다.
"네가 뭘 안다고 설교야?"
베르도가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로라와 잘 안 된다고 나한테 화풀이야?"
"로라 얘길 꺼내면 가만두지 않겠어."
"알았어. 조용히 할게."
베르도는 얌전히 있겠다는 대답을 하고 나서 갑자기 돌아서더니 밀가루를 두 손으로 퍼올려 타마소의 얼굴에 들이부었다. 울컥 화가 치밀어오른 타마소가 달아나는 베르도를 잡기 위해 뛰어갔다. 타마소가 막 베르도의 멱살을 나꿔챈 순간 베르도가 오븐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것 봐. 빵이 타고 있어."
"뭐?"
타마소와 베르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잽싸게 오븐을 향해 달려갔다. 빵은 이미 새까맣게 타 있었다. 온전한 빵은 한 개도 없었다. 타마소가 심란한 마음에 짜증을 내고 있을 즈음, 로라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강에서 수영을 하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의 광장을 지났다. 여전히 짧은 치마를 입은 로라는 속력을 내어 달려갔고 치마가 바람에 날려 위로 들어 올려지고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났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남자들은 경탄의 눈길로, 여자들은 비난과 질투의 눈길로 그녀를 보며 한마디씩 했다.
"저 탱탱한 젊음을 좀 보라구."
"죽여주는구먼."
"저 몸매에, 미모에, 여러 사내 울릴 거야."
"저 애 좀 보세요. 행실이 저래 가지고서야...."
"얌전하게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자이레와 안드레 밑에서 컸으니 오죽 하겠수."
로라는 마을 사람들이 뭐라 하든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달렸다. 정신이 맑아지며 무겁고 어두웠던 기억들이 떨쳐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로라는 약간 경사진 길 아래로 신부 두 명이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길가에 들꽃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로라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자전거를 탄 채로 신부들의 사이를 헤집고 바람같이 달렸다. 신부들을 지나자마자 두 팔과 두 다리를 양옆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신부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로라는 장난기어린 눈으로 신부들을 돌아다 봤다. 신부들은 로라의 통통 튈 듯한 매력에 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신부들은 잠깐 자신들의 위치를 망각하고 로라의 뒷모습을 열심히 눈으로 좇았다. 그녀가 강 쪽으로 사라져 버리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그들은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풀이 무성한 강가에 도착하자 로라는 거침없이 옷을 벗어던졌다. 푸르고 잔잔한 물결이 로라를 끌어들였다. 차가운 강물이 온몸을 간지럽혔다. 로라의 아름다운 몸매가 강 속을 가로지르며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한참을 잠수하고 있는 로라의 눈앞에 타마소가 나타났다. 그는 로라가 입을 바로 그 신부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한없이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로라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로라도 함박웃음을 머금고 그에게 헤엄쳐 갔다. 그리운 얼굴이었다. 너무나 가까이 있어 소중한 줄을 몰랐던, 너무나 잘해 주어 투정만 부렸던 그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의 사랑을 흔들어 보고자, 그의 사랑 밖으로 뛰쳐나오고자 했었는데 이렇게 되돌아가고 있더니.....
로라가 그가 내미는 손을 붙잡자 그의 모습은 물거품과 함께 부서져 사라지고 말았다. 로라는 숨이 가빠 위로 솟구쳐올랐다. 어쩜 그리도 선명하게 그의 얼굴이 보였을까. 로라는 한숨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타마소.....!"
벌써 며칠째 되었다. 그를 보지 못한지가 그는 지금쯤 거의 감당 못 할 정도로 화가 나서 그녀가 보고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자기를 그런 식으로 버리듯 떠나가 버린 그녀를 찾아가기는 자존심 상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못내 안타까웠다. 로라는 강가로 걸어 나와 옷을 입었다.
제과점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룰빵을 태우는 사건이 벌어져 롤빵을 찾는 손님들에게 계속 사과의 말을 해야만 했다. 토니가 손님들에게 굽신거리며 변명을 했다.
"롤빵은 손이 많이 가서 좀 늦어요."
손님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토니를 보며 물었다.
"왜죠?"
"아, 그게 오븐 때문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넬라가 못마땅한 얼굴로 토니의 말을 잘랐다.
"일꾼들이 게을러서요."
그건 순전히 타마소가 로라에게 정신을 빼앗겨 예전에 하지 않던 일만 해서 그렇다. 그렇게 사이가 좋던 베르도와 걸핏하면 싸우지를 않나, 빵 만드는 일에서는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던 그가 빵을 태우기까지 했으니 타마소가 정신을 빼앗겨도 보통 빼앗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토니는 아들을 감싸고 돌았다.
"그렇지 않아, 노력하고 있다고."
넬라는 뾰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로라의 그 못 말리는 바람기 때문에 정신이 나간 거죠. 뭐."
"타마소도 이젠 면역이 되었겠지."
"안드레의 바람둥이 기질을 그대로 이어받아선 안 되는데."
"그래도 사돈이 될 사람을 그렇게 말하면 되겠소?"
넬라가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들과? 안드레에게 물든 로라 같은 애와 내 아들을 결혼시킬 수 없어요. 절대로!"
손님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도 마을 일에는 훤하게 꿰고 있는 사람이었다.
"맞아요.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
그때 로라가 가게로 들어섰다. 환한 그녀의 얼굴에서 햇살이 느껴졌고 몸에서는 강바람 내음이 물씬했다.
"안녕하세요?"
넬라는 로라가 들어서자마자 얼굴을 찡그렸다가 로라가 천진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인사하자 무안해서 얼굴을 돌려 버렸다. 토니는 로라를 반기며 물었다.
"안녕, 빵 사려고?"
로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타마소 만나려고요."
토니가 그 말에 깜짝 놀라 넬라의 눈치를 보며 로라에게 눈짓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넬라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타마소를 만날 생각은 마라! 그냥 돌아가거라!"
토니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넬라를 쳐다보는 로라에게 달래듯 말했다.
"지금은 굉장히 바쁘니까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구나."
로라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코를 킁킁거리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하, 빵을 태웠군요?"
로라는 거침없이 주방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넬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로라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저렇다니까."
로라가 주방 문을 열며 인사했다.
"안녕, 빵을 태웠어?"
타마소는 내심 반기면서도 무뚝뚝하게 말했다.
"큰소리치면서 가 버리더니 여긴 웬일이야?"
베르도가 로라를 응큼한 눈길로 자꾸만 흘낏거렸다. 아마도 지난번에 타마소와 로라가 창고에서 껴안고 있던 일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로라는 타마소를 기 죽이기 위해 일부러 소리를 높였다.
"정말 앞뒤가 꽉 막혔다니까! 그 술집 손님들을 괜히 의심하고, 또 그 차에 네가 타라고 했잖아!"
타마소가 어이가 없는 듯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내가? 내가 그 차에 타라고 했다고?"
로라는 흥분한 타마소를 본 척도 않고 자기 할 말을 했다.
"넌 병적으로 질투하고 있어. 그 차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타마소가 갑자기 긴장이 되는 듯 말을 더듬었다.
"그래. 말해 봐!"
로라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가엾은 타마소...."
타마소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잔소리 말고 어서 말해 봐!"
로라가 고개를 숙였다.
"당했어."
타마소가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한 듯 되물었다.
"당해?"
잠깐 동안 멍하니 있던 타마소가 정신이 들자 로라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한 마디만 더하면 가만있지 않겠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타마소는 베르도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는 움켜쥔 그녀의 팔을 억지로 잡아끌며 창고로 갔다. 로라의 손을 잡은 채 창고 문을 벌컥 열어제쳤다. 안으로 들어가 밀가루 포대 위로 로라를 내팽개쳐 버렸다. 로라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뼈도 못 추릴 줄 알아!"
타마소가 짐승처럼 날뛰며 화를 낼수록 로라는 신이 나서 거짓말을 꾸며 냈다.
"네가 날 버렸잖아."
"무슨 말이야?"
"네가 나를 놔두고 가 버린 후에 그 남자가 날 으슥한 뒷골목으로 데려갔어. 난 차에 마치 거위처럼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는데 그가 나를 더듬더니 내 위로 올라와 덮쳤다고. 그 남자 힘이 얼마나 센지 내가 도대체 움직일 수조차 없었어. 할 수 없이 난 고함만 질러 댔어. 계속 널 불렀지만 넌 대답이 없었지. 하기야 날 버린 사람이 대답이나 하겠어? 난 버림받은 거라고!"
타마소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
로라가 침울한 얼굴로 타마소를 흘낏 쳐다보며 띄엄띄엄 말했다. 그동안 타마소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지며 분노를 참지 못해 당장이라도 로라를 한 방 갈길 것만 같았다.
"난 순결을 지키려 저항했지만, 그랬지만, 그는, 그는 욕망을 억제 못하고..."
로라는 타마소의 표정을 슬금슬금 살폈다. 타마소는 답답해서 소리 질렀다.
"그래서, 놈이 어쨌냐고!"
"날, 날 겁탈했어. 난 순결을 잃었어. 다 네 잘못이야."
"거짓말, 거짓말이지? 난 널 알아."
로라가 치마를 올리고 다리도 쫙 벌리고 앉았다. 타마소가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녀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타마소를 올려다봤다.
"정말이야. 못 믿겠으면 봐."
타마소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그대로 우뚝 서서 주먹을 줘었다 폈다 반복하고 있었다.
"뭐? 뭘 보라고? 뭘 보라는 거야! 이 창녀 같으니!"
드디어 타마소는 분노를 폭발시키며 로라를 덮쳤다. 난폭하게 그녀의 팬티를 찢어 던져 버리고 그녀를 잡아당겼다. 그녀도 적극적으로 그에게 몸을 밀착시켜 왔다. 타마소가 온 힘을 타해 그녀를 공격했다. 손을 뻗어 블라우스 속의 가슴을 난폭하게 움켜잡았다. 그녀의 몸속은 부드럽고, 끈적하고 그리고 따뜻했다. 그는 마음껏 그녀를 느꼈다. 이제껏 참았던 정욕이 폭발했다. 로라는 타마소가 어찌나 세게 밀어붙이는지 자꾸만 위로 밀려 올라갔다. 로라는 처음 경험하는 황홀한 느낌에 온몸의 감각이 열리는 것 같았다. 로라는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올리고 흥분을 참지 못해 낮은 비명소리를 냈다. 그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의 성난 모습에 그녀는 더 자극을 받아 미친 듯이 그에게 매달렸다. 그녀는 그에게 더 깊이. 더욱 강하게 들어오기를 요구했다. 갑자기 의식이 희미해졌다. 강한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자 그녀는 팔을 늘어뜨리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절정의 순간이 그녀를 꼼짝 못 하게 한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환희로 물들어 갔다. 그는 입을 다물지 않고 계속해서 로라를 비난했다.
"이 창녀...."
"이 헤픈 계집!"
로라가 제정신을 못 차리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말했다.
"그래, 날 마음대로 가지라고..."
한참 동안 로라의 몸을 공격하던 타마소가 흠칫했다. 뭔가가 이상해서 몸을 일으키고서 로라의 사타구니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선홍빛 피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고 아직도 그곳에 흥건했다. 타마소가 당황하여 로라를 쳐다봤다.
"너, 거짓말했구나. 왜 그랬어?"
로라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만족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 용기를 주려고 그런 거야. 타월 좀 줘. 피를 닦아야겠어."
타마소는 로라에게는 못 당해 내겠다는 듯 웃어 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녀의 고집대로 그는 그녀를 가지고 말았다. 타마소가 흰색 천을 벽 선반에서 꺼내 주었다.
"자, 닦아. 반죽 싸는 천이라 깨끗해."
로라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사타구니와 바닥을 닦아냈다.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아."
타마소도 은근히 자랑스러운 듯 로라의 볼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
"자 서둘러서 드레스를 찾아다 놔야지 않겠어?"
14
로라는 기분이 좋아 휘파람을 불며 미쉘을 찾아갔다.
"흐흠, 그래 괜찮았어. 그러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괜찮았어."
로라는 타마소에게 대단히 만족했다. 평소 생각했던 것처럼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것만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체격으로 알 수 있듯이 그는 힘이 좋았다.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하나가 된다는 느낌. 그런 게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근사한 힘으로 작용하는구나, 로라는 구름을 탄 듯한 기분으로 걸어갔다. 로라는 의상실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시끄러운 소리만 계속해서 들릴 뿐 미쉘은 나오지 않았다. 로라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에서 미쉘의 것인 듯한 비명소리가 연신 타져 나오고 있었다. 로라는 얼른 뛰어가 보았다. 방은 엉망으로 깨지고 찢어지고 흐트러져서 난장판 그 자체였다. 그 속에, 한쪽 구석에 미쉘이 발가벗은 채로 팔을 들어 한 남자의 구타를 애써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 이보세요. 사람을 그렇게 때리다니! 당장 사람들을 불러오겠어요!"
그러자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그는 바로 그 남자, 모피 상인 렌지였다. 로라는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눈만 커다랗게 떴다.
"뭐야! 이거, 그때 그 계집애잖아."
로라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오호, 잘 만났군. 손 좀 봐주지."
로라는 하이힐을 벗어 손에 쥐었다. 렌지가 그녀를 잡으려고 한 발을 떼자마자 그녀는 홱 돌아서서 쏜살같이 의상실 문을 나섰다. 렌지가 그녀를 쫓아나왔다. 로라는 무조건 소리부터 질렀다.
"살려줘요, 살려주세요. 이 사람이 날 겁탈하려고 해요."
그러자 음식점에서 뚱보 아저씨가, 술집에서 군인들이, 그늘에 앉아 할 일 없이 낮잠 자던 건달이 당장 달려왔다. 로라는 렌지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두들겨 맞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의상실로 되돌아갔다. 미쉘은 좀 전의 그 자세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로라가 다가가서 어깨를 잡아 주자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 나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바로 여자와 눈이 맞아 달아난 남편이야. 여자와 헤어지고 모피 장사를 시작했는데 모피 몇 벌만 남기고 모조리 날렸나 봐."
미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알몸 그대로 일어나 테이블에 있는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 들고 와서 한 대 피워 물었다.
"그가 어젯밤에 날 찾아왔어. 마음을 새로 먹었으니 나랑 다시 시작하자는 거야. 그래서 내가 거절했지. 버릇은 남 못 준다고, 다짜고짜 옷을 찟고..... 난 이제까지 관계다운 관계를 해보지도 못했어. 관계만 하려고 하면 변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옷을 찢고 때리고. 첫 아이를 가졌을 때도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유산되고 말았지. 내겐 원수 같은 남자야. 이젠 벗어날 때도 되었지."
로라는 옷걸이에서 숄을 가져다가 그녀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미쉘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연거푸 피워 물었다.
"또다시 날 찾아올 줄은 몰랐어. 그 남자와는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로라가 그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로라는 침묵을 지키며 미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여자랑 도망갈 때도 내가 모아 둔 돈을 전부 털어서 가져갔지. 그렇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는데 말야."
로라는 미쉘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올려 주며 말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나 하세요. 기분이 좀 나아질 거예요."
미쉘은 로라가 몇 번이나 재촉을 하고서야 비척비척 일어나 욕실로 갔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자 로라는 방안을 대강 치우기 시작했다. 깨어진 그릇, 찢어진 옷, 베개며 책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미쉘이 샤워를 끝내고 나올 때쯤 그래도 대강 봐줄 만하게 치울 수가 있었다. 로라는 커피 끓일 물을 준비했다. 로라는 미쉘에게 옷장에서 찾아온 잠옷을 꺼내 주었다. 미쉘이 잠옷을 받아들고서 로라를 가만히 쳐다 보았다.
"너한테 이런 신세를 지다니 면목이 없구나."
로라가 밝게 웃었다.
"신세는요. 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숨 푹 주무세요."
"그래 고맙구나."
로라는 미쉘을 침대로 데려가 눕게 해 주고는 이불을 덮어 주었다.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라는 뜨거운 커피 한잔을 타서 미쉘의 손에 쥐어 주었다. 미쉘이 로라에게 말했다.
"그런데 오늘 무슨 일로 온 거지? 아! 드레스를 찾으러 왔구나. 찾으러 온다는 날짜가 훨씬 지났는데도 오지 않아 무슨 일이 생겼나 했지."
로라가 빙긋 웃었다.
"아, 타마소랑 조금 심하게 다투었어요."
"그래? 타마소가 그래도 이해심이 많은 청년인데. 아무래도 로라 네가 잘못한 게로구나."
로라가 멋쩍어했다.
"로라, 넌 타마소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거야. 너무 네 욕심만 주장하지 말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해."
로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드레스는 매장 테이블 옆 가방에 담겨 있을 거야. 약간 구겨졌을 테니까 집에 가자마자 옷걸이에 걸어 놔. 그럼 네 결혼식 때까지는 구김이 가실 거야."
로라는 미쉘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하고 돌아서서 방을 나왔다. 벌써 땅거미가 지는 시각이다. 매장에는 불을 켜놓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로라는 불을 켜고 들어가 드레스를 챙겨 들었다. 다시 불을 끄고 문을 닫은 뒤 밖으로 나갔다. 로라는 미쉘과 더 있어 주고 싶었지만 미쉘은 혼자 있고 싶어 했다. 로라는 집에 도착하자 곧장 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은 다음 드레스를 입어 봤다. 드레스가 어찌나 화사한지 방 안이 온통 환해졌다. 로라는 드레스를 입은 채로 침대 위로 올라가 벌렁 드러누웠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손을 가슴에 얹자 타마소가 그녀를 안아 주기라도 하는 듯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이제 비로소 한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음이 실감났다. 어쨌거나 그녀는 인생의 전환점에 도달한 것이다. 그와 사랑으로 살아가리라. 그러나 욕망의 활화산 같은 그녀를 그가 얼마나 잘 감당해 낼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그녀는 한시도 욕망을 잠재우거나 본능을 이성으로 다스릴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나도 젊음이 충만한 때라서 더 그러는지도 모른다. 깜빡 잠이 들었던 로라가 눈을 뜬 것은 한밤중이었다. 여자의 비명소리 때문에 잠을 깬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밤 열두 시가 지나고 있었다. 비명소리는 여전히 들리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알몸을 한 여자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가 일어났다 하면서 언덕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다. 로라는 아무런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저쪽으로 가면 강이 나오는데...."
로라는 퍼뜩 미쉘 생각이 떠올랐다. 로라는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옷을 간단하게 걸치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여자가 가던 길을 쫓아 한참을 달려갔다. 그러나 어디에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로라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집으로 돌아갔다. 로라는 침대로 파고들었다. 아침이 되자 타마소가 그녀를 찾아왔다. 결혼식 피로연에 대해 함께 상의할 게 있다고 했다. 그녀의 방으로 함께 올라갔다. 결혼식은 야외에서 하기로 하고 마을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고 돼지와 닭을 잡는 일 등등, 악단도 부르기로 했다. 그래도 마을 내에서는 가장 성대한 결혼식이 될 것 같았다. 타마소의 목을 껴안으며 그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고는 그를 붙들고 침대 위에서 뒹굴기 시작했다. 당황한 타마소가 침대를 내려가려 했지만 로라가 놓아 주지 않았다. 로라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온 집 안을 뒤흔들었다.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이던 안드레는 눈살을 찌푸렸고 부엌에서 일하고 있던 자이레는 빙긋 웃음지었다.
15
로라와 타마소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결혼식이라고 해봐야 집 앞의 넓은 타에서 거행되었고 마을사람들이 온통 모여 마시고 먹고 하다가 춤을 추며 즐기는 일종의 축제와도 같은 의식이었다. 테이블이 죽 늘어서 있었고 그 위에는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테이블 중앙에 로라와 타마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로라는 장미꽃처럼 예쁘고 달콤했고 타마소는 의젓하고 잘생긴 청년으로 근사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오리, 닭, 강아지, 고양이들도 그들의 결혼식을 축하하느라 몰려나와 테이블 위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그것들을 향해 대머리 조가 팔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저리 비키지 못해! 훠이! 훠이!"
칼라가 한마디 거들었다.
"죽기 싫은가 봐요."
그녀는 화장을 짙게 한 얼굴에 목걸이, 귀걸이로 온통 치장을 하고 가슴이 깊게 패인 옷을 입고 있었다. 얌전을 떨며 치마를 살짝 올렸다가 의자에 앉는데 속살이 그대로 비치는 망사 팬티가 보이는 것이었다. 페페가 술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우렁차게 말했다.
"오늘 많은 숙녀분이 왔지만 그중 최고는 .... 로라입니다!"
사람들이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로라는 활짝 웃으며 부끄러운 듯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페페가 로라를 보며 말했다.
"남편한테 싫증 나거든 나한테 연락해라."
그 말에 로라가 허리를 꺾으며 웃어 댔다. 옆에 있던 사람들도 큰소리로 웃었다. 윌마는 흑단 같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리고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옆에 앉은 짓궂은 남자는 윌마가 드레스 속으로 가슴이 커 보이게 만들려고 넣어 놓은 솜뭉치를 잡아빼 버렸다. 당황한 윌마가 그것을 뺏으려고 달아나는 그를 쫒아갔다. 양복을 차려입은 토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아들 타마소를 향해 소리쳤다.
"신부에게 키스해라."
그러자 로라를 축복해 주기 위해 와 있던 그라시아, 델피, 클로드가 동시에 소리쳤다.
"신부에게 키스를!"
이번에는 참석한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신부에게 키스를!"
토니는 옆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넬라의 허리를 껴안아 자기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기분 좀 내."
토니는 넬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댔다.
"키스해 줘."
누구나 할 것 없이 기쁨에 들떠 떠드느라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도 듣기가 어려웠다. 함께 웃고 떠들던 로라가 타마소의 귀에 속삭였다.
"그런데 미쉘이 보이지 않네. 결혼식 전에 꼭 올 거라고 했었는데. 드레스 입는 걸 도와주겠다고...."
타마소가 무슨 말인지 할까 말까 망설였다.
"저, 사실은...."
그냥 넘길 로라가 아니었다. 빨리 말하라고 다그쳤다.
"무슨 일 있었어? 내게도 알려 줘. 어서 말해 봐."
"아, 그게, 미쉘이 어제 강에 빠져 자살하려다가 뒤쫓아간 남편이란 사람이 건져 내서 다행히 목숨엔 지장이 없는데...."
로라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 생긴 거로구나? 어떻게 된 거야?"
"저, 정신이 좀 이상해져서 정신병원에 실려 갔어."
"세상에, 그건 다 그 남편이란 사람 때문인데. 그놈을 경찰에 넘겨 죗값을 받게 해야 한다고."
로라가 주먹을 불끈 줘고 말하자 타마소가 팔을 잡았다.
"진정해, 그렇잖아도 조사 중인가 봐."
로라는 기분이 다시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한참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일어서며 타마소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볼 일이 있어. 금방 올게."
타마소가 돌아서서 가려는 로라의 팔을 잡아당겼다.
"화장실 가는 거야?"
"그리고 또..."
"왜 그래? 또 시작이야?"
로라가 눈을 흘기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묻지 말고 좀 기다려."
로라는 가다가 말고 안드레를 눈으로 찾았다. 곧바로 안드레와 눈이 마주쳤다. 로라는 그를 자꾸만 힐끔거리더니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자이레는 안드레가 자꾸만 로라가 가는 쪽을 힐끔거리는 것을 보고는 일부러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정말 성대한 결혼식이에요. 아마 당신의 친딸이라도 이 정도로는 못 해 줬을 거예요."
안드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결혼식이야."
그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케익 좀 살펴보고 올게. 잠깐이면 될 거야."
자이레가 못내 불안한 시선으로 안드레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때 페페가 말했다.
"자이레, 뭐하고 있어? 사위한테 키스해 줘."
자이레는 옆에 앉은 타마소의 볼에 마지못해 키스했다. 뚱보 아줌마가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세상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세 가지는 하늘의 갈매기, 바닥의 넙치...... 그리고 ...."
윌마가 소리쳤다.
"남자의 그것!"
남자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진리야."
누더기를 걸친 늙은 수사가 두 손을 모았다.
"세상에 여자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늙은 수사는 갑자기 옆 여자의 가슴을 만졌다.
"여길 만지면 내 것도 아직 발딱 선다우!"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다만 또 다른 수사만이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모든 것을 회개하겠지...."
토니는 여전히 넬라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인상 좀 펴라고. 식사하고 저녁 때 화끈하게 한번 해줄 테니."
넬라가 빨개진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사람들이 들어요."
집 안으로 들어간 로라는 한참 동안 창문을 통해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베일을 뜯어내고 팬티를 벗어서 던져놓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안드레가 들어왔다. 로라가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거울만 보고 있자 안드레는 방안을 가로질러 묶어놓은 줄 위로줄타기 인형을 작동시켰다 그제서야 로라가 돌아보았다. 인형이 드르륵 소리내며 줄을 타고 지나갔다. 안드레가 빙그레 웃었다.
"선물이 있다."
"저도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해. 비밀로 하자."
안드레는 팔찌를 하나 꺼내어 로라의 팔목에 끼워 주었다. 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클럽의 회원으로 널 받아 주마."
로라가 빙그레 웃었다.
"안드레, 멋진 일이로군요."
"좋아, 넌 선물이 뭐니."
"타마소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내기를 했는데 졌으니 선물을 드려야죠."
로라는 안드레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에 진한 키스를 했다. 안드레는 억지로 로라를 떼어 냈다.
"그만해, 너 같은 애는 처음이야."
"당신 같은 분도요."
두 사람의 눈길이 얽히고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 침묵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신부는 나와라......"
"신부는 앞으로 나와라!"
"신부는 나와라!"
타마소가 로라의 손을 잡아끌며 축하 케익 앞으로 다가섰다. 케익에는 벌써 촛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타마소가 로라에게 물었다.
"준비됐어?"
두 사람은 동시에 춧불을 입으로 불어 끄자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대머리가 한쪽 팔을 높이 올리며 소리쳤다.
"키스해, 타마소...."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신부한테 키스해."
두 사람의 키스가 시작되자 음악이 울렸다. 사람들이 쌍쌍이 춤을 추러 나갔다. 그 소란한 와중에 페페가 안드레의 셔츠 깃을 보고 한마디 했다.
"웬 립스틱 자국이지?"
모두들 신나게 춤을 추었다. 타마소도 로라를 끌어안고 춤을 추었다. 타마소의 손이 로라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드레스를 끌어올리자 로라의 새하얀 알궁둥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사람들은 빙글빙글 돌아가며 기쁨에 겨워 소리 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밤새도록 그들은 지칠 줄도 몰랐다. 그라시아는 부러운 눈으로 로라를 지켜봤다. 케익을 자르고, 빙글빙글 춤을 추고, 타마소와 키스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 한 켠이 아려옴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이가 있었다. 그건 부모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클럽에서 사귄 알베르토의 아이였다. 알베르토는 성격이 난폭하여 그라시아를 소개받은 바로 그 날 그녀를 폭행하듯 차지하고 말았다. 그라시아는 성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그가 첫 남자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알베르토는 아직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그녀가 마치 자기 것이 된 양, 날마다 불러내거나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라시아의 부모도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부모는 그녀가 학생일 때 사귀는 남자친구가 많았기 때문에 그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여기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딸이 바로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부모의 가슴은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후회로 부서져 내리는 듯했다. 알베르토는 로라의 결혼식장까지 쫓아와서 그라시아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를 본 순간 그라시아의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친구들에게도 그를 소개시킨 적은 없었다. 그라시아는 그를 피해 로라의 집으로 들어갔다가 다른 사람들의 무리에 끼어들거나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려니까 알베르토가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라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친구들과 잡담을 즐겼다. 학교 다닐 때는 거의 매일 만나다가 졸업한 이후로는 만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델피나 클로드와는 많이 만나는 편이었지만 로라는 타마소와 사귀고부터 만나기가 힘들었다.
그라시아는 아이를 낳은 직후 곧바로 다른 지방의 입양기관으로 보냈다. 때 낼 생각으로 산부인과에 찾아갔었으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녀는 결국 수술을 받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임신 기간 동안은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고, 되도록 외출을 하지 않았다. 만삭이 되어갈 무렵에는 다른 지방으로 가서 방을 하나 얻어 그곳에서 생활했다. 어머니가 가끔 들러 불편함이 없도록 보살펴주었다. 진통이 시작될 때 마침 어머니가 그녀 옆에 있어서 함께 병원에 갔다. 그녀는 아이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여자아이라는 말만 들었다. 그녀가 몸조리를 한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온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온갖 소문이 무성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부모는 그녀에게 일절 그런 소리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남의 인생에 너무나 간섭하고 싶어 한다. 다른 이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입으로는 걱정하는 말을 해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걱정하는 말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해서 나중에는 그 사람이 걱정을 하는 건지 그 이야기를 즐기는 건지 알 수가 없게 된다. 또 남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그것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사람은 드물다. 그라시아는 아이를 낳은 이후로 세상과 사람에 대해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라시아는 한 중소기업 사장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매출 실적이 좋아 벌써 대기업에 합류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큰 곳이다. 다니는 회사가 바쁜 만큼 그라시아도 보통 바쁜 게 아니었다. 델피는 지금 사귀는 남자 친구 자랑을 열심히 해댔다. 클로드가 말했다.
"그렇게 친하다면서 오늘 같은 날 왜 안 데리고 왔어?"
"오늘 회사에 바쁜 일이 있대."
"휴일인데 바쁜 일이 있다고?"
"낸들 알아? 그렇다는데?"
"너 또 저번처럼 채이는 거 아냐? 제발 그 남자가 널 좋아한다고 착각 좀 하지 마."
"뭐라고!"
그라시아가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해 가자 얼른 중재에 나섰다.
"너희들 왜 이래!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이야기밖에 할 게 없니? 자, 맥주 한 잔씩 하자. 어때, 오늘은 우리 집으로 진출해 볼까?"
그라시아는 학생 시절 돌아가면서 서로의 집으로 놀러 가서 잡지를 보고 이야기하고 어쩌다 가끔 공부도 했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클로드가 씨익 웃었다.
"그래, 이렇게 모이기도 쉽지 않으니, 그런데 로라는 갈 수가 없겠구나."
델피가 말했다.
"로라에게 지금 우리가 보이기나 하겠어? 오직 타마소뿐이지"
그들은 소리높여 웃었다. 그때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도 뛰어나가 춤을 추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결혼이든 마을 행사든 한번 모이기만 하면 밤이 깊도록 헤어질 줄 몰랐다. 아마 오늘도 축제 이상으로 사람들이 흥청거릴 것이 뻔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그라시아는 식탁 한 켠에 앉아 케익을 먹고 있었다. 오랜만에 즐거운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델피와 클로드는 아마 밤새도록 춤을 출 것 같았다. 그라시아는 그들 몰래 슬그머니 일어나 핸드백을 챙겨 들고 나왔다. 그녀 먼저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알베르토였다. 그라시아는 그를 보는 순간 몸이 얼어붙어 꼼짝도 못 할 것 같았다. 그는 멍청하게 서 있는 그라시아의 팔을 붙들고 질질 끌고 가더니 차에 태웠다. 그라시아가 문을 열고 뛰어내리려 하자 알베르토는 주먹으로 냅다 그녀의 얼굴을 쳐버렸다. 그녀는 곧바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라시아가 눈을 떴을 때는 차가 숲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호수도 보였다. 낯선 곳이었다. 알베르토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운전을 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곧 알게 돼. 가서 보면 좋아할 만한 곳이야."
"너와 함께라면 좋은 곳은 아무 데도 없어!"
"오호, 그래? 좋은지 안 좋은지는 가서 보자고."
알베르토가 차를 세운 곳은 울창한 숲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호수를 끼고 있는 아담하고 예쁜 별장이었다. 누군가가 항상 손질을 해 주는 모양이었다. 정갈하고 멋스럽게 꾸며진 마당에 집안도 깨끗했다. 알베르토는 페치카에 장작을 넣고 불을 붙였다. 불이 활활 타올라 온기가 느껴질 때까지 알베르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라시아가 욕실에 가서 찬물로 적신 수건을 가져와 쇼파에 앉았다. 그리고 맞아서 멍이 든 볼에 수건을 갖다 댔다.
"도대체 왜 날 피하는 거지?"
"네가 싫으니까."
"왜 싫다는 거야. 내가 인물이 못났어, 돈이 없어? 이유가 뭐야?"
"난 인물, 돈 필요 없어. 인간이면 인간다워야지."
알베르토의 얼굴이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난 널 좋아한다고!"
"난 널 좋아하지 않아."
알베르토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그라시아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알베르토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좋아, 날 좋아하게 만들어 주지."
알베르토는 그녀의 옷을 갈기갈기 찢기 시작했다. 마지막 팬티까지 찢어서 던져 버린 후 그녀를 안아들고 침실로 갔다. 침실에 들어서자 그녀를 팽개치듯 침대 위에 내던졌다. 그녀는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 창가로 도망갔다. 창문을 열려고 했지만 잘 열리지 않았다.
"오호라, 2층에서 뛰어내리겠다 이거야?"
알베르토는 그라시아를 들어 창틀 위에 앉혔다. 손으로 가슴을 쓰다듬었다. 유두에 살살 자극을 주었다. 그라시아는 입을 꼭 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라시아는 여지없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알베르토가 휘청하는 바람에 그라시아는 창틀 아래로 굴렀다. 쓰러져 있는 그라시아를 알베르토가 걷어찼다.
"아악!"
그라시아가 배를 움켜잡고 굴렀다. 알베르토가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들고 소리쳤다.
"난 널 위해 착하게 살려고 했다고! 그런데 네가 나를 이렇게 대접해?"
"대접? 넌 대접받을 수 없는 인간이야."
알베르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손으로 그녀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더니 난폭하게 그녀를 덮쳤다. "헉!" 그라시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알베르토가 잔인한 웃음을 흘리며 그라시아의 몸을 뒤집어 엎드리게 했다. 그는 자기의 무릎 위로 그녀의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그라시아는 엎드린 채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있었다.
"이러지 마. 이럴수록 난 네가 싫어."
그라시아의 차가운 말에 알베르토가 또 다시 웃었다 그는 그라시아의 다리를 벌려서 붙잡고는 자기의 그것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라시아가 빠져 나가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래봤자 알베르토의 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알베르토는 지칠 줄 모르고 그라시아의 몸을 유린했다. 그라시아는 저항하기도 포기한 채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우윳빛 피부와 긴 다리, 알베르토는 그녀를 안아다가 다시 침대에 뉘었다. 그녀의 탐스런 가슴이 출렁거렸다. 그 가슴 위로 알베르토가 자기의 머리를 얹었다. 알베르토는 자기가 한 번 관계한 여자를 버리지 않고 또다시 찾는다는 건 그녀에게 영광스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선택받기 위해 여자들이 줄을 서 있는데 그가 태어나 처음으로 그렇듯 그리워한 여자가 그를 벌레 취급을 하다니. 그녀가 몇 달 동안 마을을 떠나 있었을 때 알베르토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그녀의 집에 찾아가 행패를 부리기까지 했는데도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알베르토는 그녀의 가슴에 정성스럽게 키스했다. 그라시아는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라시아는 잠든 알베르토의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고 앉아 있다가 일어나 그가 벗어놓은 옷을 대충 걸쳤다. 그녀의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차 열쇠를 찾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아직 새벽 3시라 사방이 어두웠다. 그녀는 도로로 나가 호수를 한 바퀴 돌아 높게 경사가 져 차가 굴러 떨어지기 좋은 곳을 찾았다. 한 곳을 정해 놓고 다시 한 바퀴를 돈 다음 전속력으로 차를 달렸다. 부모의 얼굴, 친구의 얼굴, 알베르토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그리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아기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 그라시아는 차를 급정거 시켰다. 그러고는 브레이크를 걸지 않고 차 밖으로 나와 차를 밀어 호수에 처넣어 버렸다. 그리고 도로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라시아는 집에 가서 간단하게 짐을 챙겼다. 집을 나오기 전에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열어 곤히 잠든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을 다시 닫았다. 간단한 쪽지를 써서 그녀의 방에 놓아두기는 했다. 아침이 되면 어머니가 또 얼마나 눈물을 흘릴 것인가. 그라시아는 새벽 공기를 들이쉬며 자신이 아이를 낳았던 그곳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알베르토는 그라시아가 없어진 걸 알고는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가 보았다. 그녀의 찢겨진 옷은 고스란히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차 열쇠가 없어진 걸 알았다. 전날 밤 분명히 거실의 테이블에 놔두었었다. 알베르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알베르토는 자기 차가 호수에 빠졌다가 인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이 들어 있었던 흔적은 없다고 했다. 알베르토는 눈을 감은 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토니는 넬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술을 먹이려 했다. 그러나 술 마시는 사람을, 특히 술에 취한 사람을 경멸하는 넬라가 술을 마실 리가 없었다. 토니는 꾀를 생각해냈다. 음료수에 술을 타서 먹이는 것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콜라에 위스키를 적당히 섞어 넣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넬라는 콜라가 유난히 맛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신이 난 토니는 부지런히, 되도록 이면 큰 잔에 술을 섞은 콜라를 부어서 넬라에게 가져다 주었다. 한두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실실 웃음을 흘리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나서 좌중을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여러분, 제 아들의 결혼식에 와 주신 걸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많이, 많이들 드세요."
사람들이 어쩐지 평소와 달라 보이는 넬라를 억지로 끌어다 앉혔다.
"아, 왜 이래요. 나도 말 좀 합시다!"
토니는 안 되겠다 싶어 넬라를 데리고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넬라를 붙들고 되도록 크게, 크게 움직였다. 빙글 돌리고 잡아다 끌어서 뒤로 제치고, 넬라는 정신없이 춤을 추면서도 기분이 좋아 싱글벙글이었다. 그리고 신부복을 입은 로라가 춤을 추면서 팬티를 입지 않은 알궁둥이를 일부러 살짝살짝 공개하는데도 벙싯거리는 입으로 토니에게 저걸 조라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맨정신이었으면 넬라는 로라의 욕을 한참 해댔을 것이다. 벌써 자리를 박차고 집에 가서 아마 차라리 낮잠을 자겠다고 했을 것이다. 타마소는 로라의 엉덩이가 보이지 않게 하려고 때때로 춤을 추며 드레스를 들어 올리는 로라의 손을 후려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로라의 입술이 한껏 튀어나왔다. 토니는 춤을 한참 추었는데도 넬라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자 냉수를 한잔 떠다 준 후 의자에 앉혀 주었다. 넬라는 어지러운지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식탁에 엎드려 버렸다. 토니는 자이레와 안드레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먼저 가겠다고 했다. 토니는 넬라에게 술을 마시게 한 걸 후회했다. 즐겁게 보내려고 먹인 건데 아들의 결혼식이 채 끝나지도 않아서 집에 가야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타마소와 로라에게도 먼저 가야겠다고 말했다. 여행을 잘 다녀오란 말도 잊지 않았다. 타마소가 웃으며 말했다.
"저희 걱정은 마시고 어서 가 보세요."
로라가 토니의 목에 매달려 볼에 키스했다. 토니도 로라의 어깨를 안아 주고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토니는 엎드려 있는 넬라를 깨워서 부축했다. 넬라가 몸무게가 훨씬 더 많이 나가기 때문에 토니는 넬라가 비틀거리는 대로 자신도 함께 비틀거리며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해서 침실에 들어가자마자 넬라는 자기를 부축하고 있는 토니를 밀어 버리고는 노래를 부르며 옷을 벗었다. 그녀는 알몸이 된 채로 놀라서 바라보고 있는 토니에게 다가갔다. 넬라는 토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키스를 하더니 다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더니 몸을 옆으로 비틀며 토니를 바라봤다.
"여보, 어때요. 나도 봐줄 만하죠?"
토니는 입을 쩍 벌렸다. 술 좀 마셨다고 사람이 달라져도 저렇게 달라질 수가 있을까 싶었다. 넬라는 멍청하게 서 있는 토니의 손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토니는 당황하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넬라가 평소에도 이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넬라는 보통 적극적인 게 아니였다. 토니를 눕혀 놓고 뜨거운 숨을 내뿜으면서 귓볼을 간지럽히기 시작하더니 목덜미에서 가슴으로 부드럽게 애무했다. 그리고 토니는 누운 채로 입을 쩍 벌렸다. 넬라가 보통 때는 그리도 거부하던 일을 오늘은 솔선해서 해 주었기 때문이다. 토니의 바지를 벗긴 후 그의 물건을 들어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곧 입에 넣고 혀로 자극하는 것이었다. 넬라의 혀가 그의 성기를 간지럽혔다 빨아들였다 하자 토니는 자기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토니도 질세라 넬라를 껴안고 애무하기 시작했다. 넬라는 유난히 크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날, 두 사람의 밤은 그렇게 뜨거웠다, 아침이 되어 토니는 눈을 뜨자마자 옆자리를 살폈다. 넬라는 침대에 없었다. 토니는 샤워를 한 뒤 옷을 입고 부엌으로 가 보았다. 넬라가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토니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항상 빵 몇 조각과 잼만 식탁 위에 던져놓고 가게에 나가 일을 보던 넬라가 오늘은 웬일로 따뜻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녕, 마담?"
넬라가 콧노래를 멈추고 빨개진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잘 잤수?"
"아, 덕분에. 내 생애에서 최고로 황홀한 밤이었어."
넬라는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워 어찌할 줄을 몰랐다. 토니는 넬라 뒤로 가서 허리를 껴안아 주었다.
"당신은 정말 훌륭한 여자야.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자지."
넬라는 그 말에 으쓱거리는지 웃으며 토니에게 눈을 흘겼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당신이 언제 그걸 알게 해 줬어야지."
넬라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가게로 나갔다. 항상 굳은 표정으로 손님이 오는지 나가는지 쳐다보지도 않던 넬라가 들어오는 손님에게마다 그렇게 친절하게 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토니는 모른 척 베르도를 불러 오늘 필요한 빵 중에서 아직 진열이 안 된 빵을 주문했다.
"베르도, 아직 빵이 안 된 거냐?"
베르도가 얼굴을 빠끔히 내밀며 말했다.
"타마소가 없어서 빨리 되지가 없는데요."
넬라가 베르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타마소가 없을 걸 생각해서 일찍 시작했어야지! 생각이 그렇게 모자라서야...."
"여보!"
토니가 점잖게 부르는 소리를 듣자 넬라는 얼른 말꼬리를 내렸다.
"하기야 시간이 좀 많이 걸리겠구나. 어서 들어가서 일하렴."
토니는 돌아서서 넬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키득거렸다. 넬라는 로라의 전화를 받고서도 얼마나 상냥한 줄 몰랐다. 토니는 넬라의 신경질이 고개를 쳐들 때쯤 다시 위스키를 탄 콜라를 먹이기로 결심했다. 안드레는 결혼식 내내 칼라 부인이 자기에게 눈짓을 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자이레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칼라 부인에게 조금만 눈길을 주어도 자이레가 하이힐의 뒷굽으로 그의 발등을 사정없이 내리찍었기 때문이다. 안드레는 울며 겨자먹기로 자이레 곁에 내내 붙어 있어야 했다. 안드레가 로라를 따라 집에 들어갔다 온 후로 자이레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로라가 타마소를 껴안고 춤추고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마음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안드레는 자이레의 어깨를 안고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자이레를 일으켜 세워 끌고 나갔다. 안드레는 춤솜씨도 뛰어났다. 안드레가 자이레를 데리고 춤을 추러 나가자 사람들이, 특히 여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안드레는 능숙한 솜씨로 자이레를 리드했다. 자이레는 그의 춤솜씨에 놀아났던 <노르망디>호에서의 추억을 생각하며 그에게 쓰러질 듯 몸을 맡겼다. 안드레는 자이레와 춤을 추면서도 그녀의 몸을 애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이레의 눈이 게슴츠레해지자 안드레는 서서히 눈을 다른 데로 돌리기 시작했다. 칼라 부인의 눈이 그를 계속 따르고 있었다. 안드레는 지칠 줄 모르고 한시간이 넘게 자이레를 붙들고 춤을 추었다. 결국은 자이레가 먼저 녹초가 되고 말았다.
"아, 안드레. 전 가서 좀 쉬겠어요."
안드레가 기뻐서 입이 벌어졌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요."
안드레는 자이레가 의자에 가서 앉는 걸 보고 파트너를 바꾸었다. 자이레가 눈여겨보고 있을 것을 알고 있으므로 바로 칼라 부인에게는 가지 않고 우선 다른 사람과 춤을 추었다. 파트너를 서너 번 바꾸고 나서야 칼라 부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칼라 부인은 뜨거운 눈길로 안드레의 눈을 들여다봤다. 춤을 추면서 그녀는 그에게 자꾸만 몸을 부딪쳐왔다. 그러다 보니 안드레의 몸은 자연히 흥분해서 그게 발딱 서고 말았다. 칼라 부인은 의미 있는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쪽지를 그의 양복주머니에 넣어 주고는 파트너를 바꾸어 가 버렸다. 이번엔 로라였다. 로라가 유혹하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안드레의 손을 잡았다. 로라의 춤솜씨도 뛰어났다. 그들이 함께 춤을 추자 한 쌍, 두 쌍, 춤을 추던 커플들이 물러나 그들의 춤을 구경했다.
"야, 잘 추는데...."
"어쩜 저렇게도 호흡이 잘 맞죠?"
"댄스 경연 대회에 나가도 손색이 없겠는데."
자이레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타마소도 내심 질투의 감정이 솟구쳤다. 로라는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안드레의 볼에 키스했다. 로라는 춤을 끝내고 돌아서면서 일부러 치마 뒤쪽을 걷어올렸다. 안드레의 눈에 드레스만큼이나 눈부신 로라의 엉덩이가 확 들어왔다. 안드레는 아직 파티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자이레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취기가 오른 자이레도 군말없이 그를 따라갔다. 안드레는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자이레의 치마를 걷어올리고 팬티를 벗겨내렸다. 자이레는 기쁨에 겨운 탄성을 질렀다.
"어머나!"
안드레는 자이레의 엉덩이에 입을 맞춘 후 그녀를 세워 놓은 채로 옷을 하나씩 벗겨갔다. 안드레는 그녀의 목덜미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녀의 유두를 손으로 허무만지다가 입술을 가져갔다. 단단해진 유두를 살짝살짝 깨물어 주자 그녀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천천히 손을 아래로 움직여 그녀의 음모를 쓰다듬었다. 음모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그곳이 벌어지며 물기를 머금었다. 자이레는 안드레의 부드러운 손놀림에 그대로 서 있지를 못하고 몸을 꼬며 그에게 안겨들었다. 흥분된 그녀의 몸이 그를 향해 아우성을 쳤다. 그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의 음부를 헤집던 그의 손가락이 자꾸만 클리토리스를 자극하자 그녀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안드레는 그녀를 창가의 2인용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서 그녀의 다리를 벌려 놓았다. 그의 눈에 낯익은 그녀의 몸의 일부가 보였다. 저 안 깊숙이까지도 어떻게 생겼는지 그는 알고 있다.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몸 안을 확인했다. 그녀의 몸 안은 끝없는 터널 같았다. 들어가도 들어가도 닿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녀는 헉헉거리며 곧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는 바지를 벗지 않고도 자이레를 절정에 이르게 했다.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힘을 아껴야 하는 그는 일어나 그녀의 옷을 입혀 주려고 옆에 던져 놓은 속옷을 들었다. 그러나 자이레는 그를 그냥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퍼붓고는 그의 손을 자신의 엉덩이로 가져가더니 소파에 엎드려 엉덩이를 내밀었다. 안드레는 할 수 없이 바지를 내리고 발기된 성기를 꺼냈다. 그녀의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그것을 그녀의 몸 속 깊숙히 넣었다. 리듬감 있는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또다시 자지러졌다. 안드레는 자이레와 함께 샤워를 한 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로 들어갔다.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던 그는 자이레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는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갔다.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칼라 부인의 저택으로 갔다. 집 안으로 들어서니 입구 쪽에서 안드레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하녀가 그에게 공손히 절을 하며 부인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갔다. 칼라 부인은 중세에나 입었을 듯한 거창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허리를 조여 가슴을 강조하고 치마는 겹겹으로 된 것이었다. 안드레는 그녀 앞에 고개 숙이며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칼라 부인은 그의 손을 잡아당겨 얼굴을 그의 얼굴에 가까이 갖다 대더니 말했다.
"오늘 오지 않았으면 나와는 끝장났을 텐데 용케 오셨군요."
"누가 부르신 건데 제가 감히...."
칼라 부인은 자기 스스로 한 쪽 젖가슴을 드레스에서 끄집어내 놓더니 그의 얼굴을 잡아당겨 젖가슴에 묻게 했다. 그는 능숙하게 젖가슴을 애무했다. 그녀의 가슴이 팽팽해지고 젖꼭지도 단단해졌다. 칼라 부인은 안드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입술에 키스하고 이번엔 그녀가 그의 몸을 애무했다. 부인은 안드레를 잡고 침대 옆에 놓인 팔걸이도 등받이도 없는 긴 의자가 놓인 곳으로 갔다. 부인은 거기에 다리를 벌리고 앉더니 몸을 굽혀 엎드리고는 치마를 한꺼풀 한꺼풀 들어 올렸다. 그녀의 발가벗은 엉덩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안드레는 칼라 부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즉각 알아차렸다. 그는 손바닥으로 칼라 부인의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엉덩이가 꿈틀거렸다. 새하얀 엉덩이가 온통 장밋빛으로 변했다. 안드레는 거기에 키스하고는 엉덩이를 들어 올려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신음소리를 냈다. 안드레는 서서히 힘이 빠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무리를 하는 것 같았다. 안드레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그녀가 엉덩이를 더 적극적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돌아서서 그에게 안기더니 그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칼라 부인은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안드레가 지쳤는데도 그녀는 지칠 줄 모르고 그에게 계속하기를 요구했다. 안드레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있는 힘을 다해 칼라 부인의 욕망을 잠재울 때까지 움직였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안나?"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시 노크소리가 났다. 칼라 부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안드레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안드레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물건을 모조리 챙겨 들었다.
"자, 어서 도망가요! 저쪽 욕실로 들어가서 창문을 넘어 달아나요! 어서요!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그인 당신을 죽이고 말 거예요."
안드레는 부들부들 떨며 옷가지와 신발을 챙겨들고 욕실의 창을 기어올랐다. 별로 높지는 않았지만 너무 서두른 나머지 바로 아래에 있는 욕조 속으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그가 아파서 찡그리고 있는데 성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드레는 문을 잠그지 않은 사실이 떠올라 재빨리 문을 잠갔다. 잠그는 순간 누군가가 손잡이를 돌렸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안드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창문으로 기어올랐다. 오르기는 했으나 신발 한 짝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걸 주으려고 다시 내려 갈 수는 없었다. 안드레는 허겁지겁 뛰어내려 급한 대로 팬티와 윗도리만 걸치고는 정신없이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큰 저택의 방이란 방마다 불이 일제히 켜져서 대낮처럼 밝아졌다. 안드레는 후회막심이었다. 안전한 곳에서 만났어야 했는데.... 안드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려갔다. 정문에 다다랐을 때쯤 해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사냥개를 풀어놓은 모양이다. 안드레는 문을 잡아당겼으나 잠겨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어떻게 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안드레는 이번에는 대문을 기어올랐다. 끝이 뾰족한 철제문이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겨우 끝을 넘어서는데 뛰어내리면서 팬티 끝이 걸렸다. 팬티가 찢어지며 엉덩이도 긁히고 말았다. 안드레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다시 정신없이 달렸다. 이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 달렸다. 안드레는 지기 집보다 더 가까운 페페의 집으로 갔다. 문을 두드렸다. 모두 곤히 잠이 들었을 새벽녘인데 그리 쉽사리 일어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미친 듯이 두드렸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그제서야 바지를 다리에 꿰었다. 양말을 오다가 흘린 것 같았다. 신발도 한 짝뿐이라서 신을 수가 없었다. 양복 윗도리는 손에 들고 도망칠 때 입었던 셔츠의 단추를 끼웠다. 다행히도 페페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니, 자네 무슨 일이야! 이 새벽에!"
안드레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아무 말 말아 달라는 듯 손을 들었다. 페페는 한참 동안 안드레의 꼴을 훑어보더니 짐작하겠다는 듯 앞장서 들어갔다. 페페는 무슨 일인지 몰라 현관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마리아에게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마리아는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페페는 안드레를 데리고 2층 방으로 올라갔다. 페페는 안드레가 씻고 나올 때까지 방에 앉아 기다렸다. 안드레가 머리의 물기를 말리며 방으로 들어섰다. 페페의 목욕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응급처지 좀 해 줄 수 있겠나?"
"왜. 어딜 다쳤나 보지?"
페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구급약 상자를 가지고 올라왔다. 안드레는 페페에게 대문의 창살에 긁힌 엉덩이 상처를 보여 주었다. 페페가 놀라서 소리쳤다.
"상처가 꽤 깊은 것 같은데? 곪지 않을까?"
"그러니까 소독 좀 잘 해 달라고."
페페는 소독을 꼼꼼하게 한 후 연고를 발라 주었다. 안드레는 아파서 낮게 비명을 질렀다. 안드레는 상처에 반창고까지 붙인 후 페페에게는 나중에 이야기 하겠다고 하고는 곧바로 침대에 쓰러지듯 들어가 버렸다. 안드레는 이불을 뒤집어 썼다. 그렇게라도 해야 그 끔찍한 장면들이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았다. 페페는 할 수 없이 불을 끄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음날 아침 페페가 아침을 들고 올라가 보니 안드레는 그때까지도 이불을 뒤집어 쓴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이보게, 이보게, 안드레!"
그러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페페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불을 들추고 보았다. 그는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페페는 혼자서 안드레의 집에 가서 자이레에게 안드레가 자기 집에 서 자고 있다고 했다 아마 술이 너무 많이 취해 못 오고 중간에 자기 집에 들른 것 같다고 했다. 자이레는 그제서야 얼굴이 좀 펴졌다. 그렇잖아도 이 인간이 어떤 여자와 자고 있을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안드레는 그날 오후 늦게쯤에야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지난밤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 주었다. 페페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그거 큰일 날 뻔했군 그래."
안드레는 엉덩이 상처가 아파 자리에 앉지 못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약 좀 먹어야 하지 않을까, 상처가 꽤 크던데."
"그렇잖아도 약을 사 왔어. 걱정말라고."
다음날 페페는 안드레에게 들렀다. 안드레는 자이레에게 두통이 있다고 하고 여전히 자리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스튜디오까지 날라다 주었다.
"아무래도 당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안드레가 멋쩍어서 그녀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술을 끊든지 해야지. 이거야 원."
페페는 자이레가 나가고 나자 안드레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이봐, 칼라 부인도 난리 한번 치렀나 보던데?"
"그래?"
"음, 앞으로 그 집에서 파티를 열릴 일은 없을 거라던데. 그리고 그녀가 나오지 못하도록 방문을 못 박아 완전히 갇혀 있다더군."
안드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여자의 끝내주는 몸을 보기는 이제 글렀군 그래."
"이봐,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그게 문제인가, 지금!"
안드레는 페페가 나무라는데도 불구하고 내리 한숨을 쉬었다.
"엉덩이보다 마음이 더 아파."
페페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윌마는 파티가 시작할 때부터 계속 추근대는 남자와 결국은 춤을 추었다. 윌마는 나중에 나타날 결과가 뻔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든 마음 주기를 꺼려했다. 그 남자는 타마소처럼 예의 바르고 성실해 보였다. 그 남자의 이름은 프랑코였다. 프랑코 네로. 프랑코는 파트너가 바뀌어도 계속 그녀와 춤을 추기 위해 상대방과 자리를 바꾸었다. 윌마는 그의 적극적인 태도에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남자가 추근댄 게 참 오랜만이었다. 그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 마을 사람이었다면 윌마가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터이며 접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윌마는 점차 그의 긴 매부리코가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윌마가 앉으면 옆자리에 앉았고 윌마가 먹고 있는 음식이나 술이 떨어지면 재빨리 채워 주었다. 윌마는 그에게 마음을 터놓기 시작했다. 그는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쯤 윌마의 손을 잡았다. 주저주저하다가 그녀의 손을 잡은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홍당무였다. 윌마는 '쿡'하고 웃음이 터져나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두 사람은 이야기하고 술 마시면서 쉬었다가 다시 춤을 추었다. 완전히 지쳐 더 이상 아무것도 못 하게 되었을 때쯤 해서 그는 윌마에게 속삭였다.
"혹시 애인이 있으신 건 아니겠죠?"
윌마가 대답은 않고 씨익 웃기만 하자 그는 얼굴이 또 홍당무가 되었다. 이번엔 윌마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그와 함께 파티장을 빠져나가 공원을 거닐었다. 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집은 어디죠?"
윌마가 약간 당황한 듯하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여기서 좀 멀어요. 오늘 저녁은 친척 집에서 자고 가려던 중이었어요."
"아, 그랬습니까?"
그들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걸었다. 시내로 들어서자 술집이 늘어선 유흥가가 나타났다. 프랑코는 술이나 한잔하자고 권했다. 윌마는 기왕이면 자기가 아는 사람이 경영하는 술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가 좋다고 했다. 그녀가 그를 데리고 들어간 술집은 브라드가 하는 곳이었다. 그녀는 브라드에게 눈인사를 했다. 브라드가 손을 번쩍 들어 반겼다.
"여어, 윌마 오랜만인데."
윌마가 활짝 웃었다.
"이곳에 자주 오시나 보죠?"
프랑코가 물었다.
"아, 네. 혼자서도 오고 친구들과도 오고 처음 만난 사람과도 와요."
프랑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 어려서 고아가 되었기 때문에 항상 사람이 그립습니다."
윌마는 귀가 솔깃해졌다. 세상에 혼자라는 것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브라드가 윌마가 즐겨 마시는 술과 안주를 내왔다. 프랑코가 그녀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그동안 온갖 일은 다 해보았고, 여기저기 안 가 본 데가 없을 정도로 떠돌아다녔습니다."
윌마가 동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때는 동전 하나 없이 거리를 전전할 때도 있었죠. 지금은 그때가 추억에 지나지 않지만 그때는 정말 사느냐 죽느냐가 나의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시기라고 생각해요. 그런 건 아무나 가르쳐 줄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고생을 했던 만큼 그때의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동정이 갑니다."
그가 울먹거리자 윌마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볼에 키스했다. 그는 또 얼굴을 붉혔다. 윌마는 그가 너무나도 순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집이 문 닫을 시간까지 앉아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 그들에게 브라드가 다가왔다.
"윌마, 이제 문 닫을 시간인데. 윌마가 어쩐 일이야. 남자하고 이렇게 술집에 오래 있다니. 이 남자가 무척 마음에 드나 보지?"
이번엔 윌마가 얼굴을 붉혔다. 프랑코가 말했다.
"아, 이거 영광입니다."
두 사람은 술집을 나와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근처 여관으로 들어갔다. 프랑코는 여관에 들어가서도 윌마에게 어렸을 적 이야기, 일찍 돌아가신 부모 이야기, 지금은 돈을 잘 벌고 있다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했다. 윌마가 하품을 억지로 참자 그가 말했다.
"그럼 이제 그만 잘까요?"
윌마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그녕 자자는 이야기 같은데 그럼 여길 왜 데려왔나 싶은 것이었다. 프랑코는 윌마가 샤워를 끝마치고 나오자 자기도 들어가 샤워를 했다. 샤워를 끝낸 그가 불을 끄고 윌마의 옆에 반듯하게 누었다. 윌마는 어둠 속에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밤에 여자를 옆에 두고 잠만 자는 남자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윌마가 포기하고 잠이 들려고 할 때쯤 프랑코의 손이 그녀의 가슴으로 쑥 들어왔다. 그는 윌마의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도 정력적인 남자였다. 윌마의 옷을 벗겨 놓고 마치 운동을 시작하는 것처럼 숨을 고르더니 공격을 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해도 끝낼 줄을 몰랐다. 그의 몸은 살이라고는 없었다. 윌마는 어렸을 적에 고생해서 그런 것일 거라고 짐작했다. 윌마는 그가 행위를 끝마쳤을 때쯤 해서는 지쳐서 그대로 곤히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 햇살이 눈부셔서 윌마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처음에는 그곳이 어디인지를 몰라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옆을 보니 프랑코는 없었다. 다만 옆에서 잤던 흔적은 있었다. 화장실에라도 갔나 궁금해하면서 윌마는 어제의 그 착하고 순진한 프랑코를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윌마는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살폈다. 그녀의 핸드백, 옷 거기에다가 신발까지 모조리 없어졌다. 그래도 생각해서 남겨둔 것이 속옷이었다. 심지어는 손가락과 목에 걸고 있던 모조반지와 목걸이까지 없어졌다. 그는 좀도둑에 불과한 남자였던 것이다. 윌마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좀도둑이라고 해도 이렇게 철저하게 거두어 가는 도둑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윌마는 숙박비도 내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주인에게 포주에게 사람을 보내 돈과 옷, 신발을 보내 줄 것을 부탁하도록 간청했다. 주인도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돈을 받으려면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윌마는 며칠 후 더 기가 막힌 사실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창녀 생활을 하면서도 한 번도 걸리지 않았던 성병에 걸린 것이다.
로라는 타마소와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쉘이 입원했다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마을에서 가까운 곳이기는 했지만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정신병원을 꺼려해서 그렇게 깊숙이 들어간 것 같았다. 경치는 아주 아름다웠다. 병원으로 들어간 타마소와 로라는 면회 수속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미쉘이 나오지 않자 로라는 다시 한번 면회 신청을 받았던 간호사에게 가 보았다. 그 간호사가 옆 사람과 뭐라고 주고받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아, 네. 그제 저녁에 들어왔던 여자 환자 말입니다."
"아, 네? 네. 그렇게 하죠."
간호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로라를 쳐다봤다.
"지금 그 환자는 상태가 좋지 않아서 면회가 불가능합니다."
"뭐라고요? 사람을 한참 기다리게 해 놓고 겨우 그런 대답이나 하고 있어요?"
로라가 냅다 소리 지르자 간호사가 깜짝 놀라 더듬거렸다.
"너무 바쁘다 보니 그만 확인하는 걸 잊었어요."
"나도 바쁜 사람이에요. 이제 막 결혼한 신부가 얼마나 바쁜 줄 알아요? 아느냐고요!"
간호사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여튼 환자를 못 보면 가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세요!"
간호사는 다시 전화를 걸어 뭔가를 열심히 부탁했다. 그러더니 로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1동 간호실로 가 보세요. 간호사 한 명이 안내해 드릴 거예요."
로라는 진작 그럴 것이지 하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타마소를 불렀다. 제1동 간호실로 가니 신경질적으로 생긴 간호사가 일어나 따라오라고 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긴 복도를 따라 죽 걸어갔다. 간호사는 맨 끝방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이 방입니다. 들어가실 수는 없고 창문을 통해 보는 것만 가능합니다. 환자가 한 시간 전에도 발작을 일으켰거든요. 5분 안으로 끝내고 돌아가세요."
로라가 조그마한 창문을 들여다봤더니 미쉘은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어서 뒷모습만 보였다. 로라는 안타까운 나머지 문을 두드리며 미쉘을 불렀다. 간호사가 로라를 붙들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환자에게 자극을 주면 안 돼요!"
타마소도 로라의 어깨를 잡았다.
"로라, 진정해."
그때였다. 미쉘이 소리치며 문으로 다가와 창문을 부술 듯이 막무가내로 두들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깔깔깔 웃으며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로라와 타마소는 간호사에게 쫓겨났다. 그녀는 화가 잔뜩 난 것 같았다. 겨우 진정시켜 놓은 환자를 다시 건드렸다는 것이다. 로라는 할 수 없이 미쉘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로라와 타마소는 지중해 연안으로 여행을 갔다. 따사로운 햇볕, 드넓은 바다, 깔끔하고 으리으리한 호텔. 로라는 호텔에서 짐을 풀면서부터 미쉘의 일은 다 잊고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지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호텔 예약과 여행 비용은 모두 토니가 알아서 해 주었다. 방은 특실이어서 로라가 그렇게 팔짝팔짝 뛰어다녀도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로라는 짐꾼이 팁을 받으려고 문가에 서 있는데도 타마소에게 달려들어 껴안고 키스를 퍼부어 댔다.
"타마소, 나 이곳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타마소는 로라를 억지로 떼어 놓았다.
"로라, 제발. 저 사람이 보고 있잖아!"
로라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봤다. 타마소는 지폐 한 장을 그에게 주었다. 짐꾼은 절을 꾸벅 하고는 방을 나갔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문이 닫히자마자 로라가 기뻐서 소리를 지르며 타마소에게 다시 안겨들었다. 그러고는 그를 침대에 눕히고 셔츠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타마소가 애원조로 말했다.
"로라, 제발 피곤하니까 샤워부터 하자."
로라는 막무가내로 타마소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샤워는 언제든 할 수 있는 거라고. 이따가 몇 번을 하든 상관 않을 테니까 그때 해."
"로라, 읍!"
로라는 축 처져 있는 그의 남성을 세게 잡아당겼다. 타마소가 얼마나 아픈지 침대 위에서 떼굴떼굴 굴렀다. 그런데도 로라는 그냥 두지 않고 그의 사타구니로 얼굴을 억지로 들이밀었다. 결국 타마소는 두 팔, 두 다리 다 들고 말았다. 타마소는 누가 쫓아 들어올 것 같았다. 로라가 엄청나게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 댔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타마소는 일어나지를 못했다. 저녁 내내 로라가 2차, 3차, 4차....... 얼마나 계속 요구를 하는지 완전히 녹초가 되어 뻗은 것이다. 그러나 로라는 들뜬 나머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를 끝내고 몸치장 중이다. 로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타마소를 불렀다.
"타마소! 타마소! 빨리 바다에 나가자."
타마소는 대답조차도 하지 않았다. 코까지 골면서 잠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 로라가 침대로 가서 이불을 걷어 냈다. 타마소는 끙끙대며 돌아누워 버렸다. 로라는 침대 위로 올라가 타마소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타마소는 몸을 일으켜 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눈은 감은 채였다.
"타마소! 타마소! 내 수영복 어때? 오늘 해변에 나가면 내가 제일 돋보일 거야. 그렇지 않아?
타마소, 뭐하는 거야!"
로라가 수영복을 입은 채로 갖가지 포즈를 취했지만 타마소는 끄응, 소리내며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로라는 허리에 손을 얹고는 타마소를 노려보았다.
"좋아! 그렇다고 이 로라가 방에서 썩고 있을 사람인 줄 알아?"
로라는 비치웨어를 허리에 걸치고 선글라스를 가슴에 꽂고 작은 손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문이 '쾅'하고 닫히자 타마소가 거짓말처럼 벌떡 일어났다. 서랍에 넣어 둔 수영복과 선글라스를 집어 들고 바람처럼 달려갔다. 타마소가 헐레벌떡 쫓아갔을 때는 로라는 벌써 로비를 지나고 있었다. 그가 염려했던 바대로 로라는 만나는 남자들한테마다, 그것도 너무 자주 웃었다.
"타마소! 언제 일어난 거야? 좀 전까지만 해도 자고 있었는데."
타마소는 마치 토끼처럼 붉게 충혈된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잘 리가 있어? 로라와 즐거운 신혼 여행 중인데."
타마소는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살이 너무 빠져 야위어 보일 정도였고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들이 제과점에 들르자 넬라가 단번에 타마소가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알아채고는 눈을 치켜떴다.
"아니, 타마소. 너 얼굴이 그게 뭐냐?"
로라가 타마소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얼굴이 어때서요?"
넬라는 로라의 태연한 질문에 화가 나서 막 소리를 지르려는데 토니가 허리를 찔렀다.
"여보!"
"아, 아, 그렇죠. 너희들은 피곤할 텐데 어서 가서 쉬거라."
타마소는 어머니가 소리칠 줄 알고 몸을 긴장시켰는데 의외의 말에 깜짝 놀랐다. 토니가 어서 가라고 눈짓을 했다. 타마소는 선물만 얼른 내놓고 로라의 집으로 갔다. 자이레는 그들이 올 거라는 전화를 받고 음식 장만하느라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자이레는 로라를 보자마자 껴안으며 반겼다. 안드레도 2층에서 내려와 로라를 안아 주었다. 페페도 와 있었다. 타마소는 너무도 피곤했지만 그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술까지 마셨다. 로라는 쉴새 없이 떠들어 댔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그들은 앞으로 생활할 신혼집으로 갈 수 있었다. 타마소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로라에게 사정부터 했다.
"로라, 오늘은 제발 그냥 자자."
"날마다 잤으면서 뭘 그래?"
타마소는 로라가 오늘도 요구해 온다면 거절할 것만 같았다. 그는 로라가 샤워하러 들어간 사이 온몸에 이불을 칭칭 감고 잠들어 버렸다. 로라는 다음 날은 쇼핑을 하러 나갔다. 마음에 드는 것은 모조리 다 샀다. 그릇, 인형, 커튼, 슬리퍼, 수건 등등 얼마나 많이 샀는지 두 번이나 배달을 시켰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타마소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아니, 이게 다 뭐야? 누가 이사 오기라도 해?"
"아냐, 내가 오늘 쇼핑한 물건들이야."
타마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 봤자 로라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로라는 타마소가 씻고 나자 저녁 식사를 차려 주었다. 빵은 다 타고 스테이크는 간이 맞지 않았다. 그래도 스프는 좀 먹을 만했다.
"이 스프는 맛있는데?"
"응, 인스턴트야."
로라는 혼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안드레의 스튜디오에 놀러 갔다. 스튜디오에는 안드레 혼자 있었다. 자이레는 샤워중이었다. 로라는 안드레에게 말했다.
"저도 클럽 회원으로 받아 주신 것 기억하세요?"
안드레가 흠칫 놀랐다.
"으음, 알고 있지."
"그럼 저도 사진첩 하나 만들어 주세요."
"넌 아직 너무 어려!"
"그럼, 언제 만들어 주겠다는 거죠?"
"나중에 연락하마."
"지금 약속해 주세요. 그렇잖으면 엄마한테 말해 버리겠어요."
"그건 안 돼! 무슨 일을 낼려고 그러는 거냐!"
"그러니까 약속해 주세요."
안드레는 난처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린 채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일주일 뒤에 오렴. 네 엄마가 외할머니한테 며칠 동안 다녀오기로 했으니 그때 오면 찍어 주마,"
로라가 뛸 듯이 기뻐하며 안드레의 목에 메달려 볼에 키스했다. 안드레는 억지로 로라를 밀어냈다.
일주일 후 로라는 스튜디오로 갔다. 장말 자이레는 여행을 갔는지 아래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로라가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기에는 페페 혼자 있었다.
"페페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빠는 어디 갔죠? 오늘 나랑 약속한 게 있는데."
"그래? 안드레는 오늘 늦을 텐데?"
"그래요? 약속을 잊었나? 그럼 내일 온다고 전해 주세요."
로라는 그렇게 돌아갔다가 다음날 스튜디오에 들렀으나 안드레는 또 없었다. 페페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로라, 그냥 돌아가. 아마 사진 찍기는 어려울 게다. 안드레가 마음 내켜 하질 않아."
로라는 실망한 짓더니 그대로 의자에 앉아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로라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로라는 옷을 벗어 버리고 페페 앞에 섰다. 페페가 놀란 눈으로 로라를 쳐다봤다.
"로라, 뭐하는 짓이냐! 어서 옷 입어라."
"싫어요. 아저씨가 찍어 주세요. 난 사진첩을 꼭 만들고 싶어요. 어서요. 찍어 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페페는 난처했다. 어찌할 줄을 몰라 방 안을 서성거렸다. 잠시 후, 페페는 결심한 듯 붓과 물감을 서랍에서 꺼냈다. 그러자 로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저씨. 아빠와 똑같은 문신으로 엉덩이에 해 주세요."
페페는 로라의 왼쪽 엉덩이에 문신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하트 모양 위에 발가벗은 여자 그림. 문신이 완성되자 로라는 뇌쇄적인 포즈를 취했다. 페페는 탄성을 질렀다. 이제껏 누드 사진을 찍은 수많은 여자들 중에서 그녀만큼 뛰어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듯싶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과 풍만한 가슴, 탐스런 엉덩이는 너무나 육감적이어서 보고 있기만 해도 흥분이 될 정도였다. 페페는 사진기의 셔터를 정신없이 눌러 댔다.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 생생하게 빛나 페페의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 은밀한 부분은 장미꽃의 속입과 같았다. 페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안드레였다. 그는 뛰쳐나가 로라의 여자의 본능과 욕망을 가득 담은 그 몸뚱어리를 힘껏 껴안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 시작되면 끝을 모를 욕정의 불길을 알기 때문에 안간힘을 다해 참고 있었다. 로라는 안드레의 중절모를 쓰고 팔을 들어 올린 채 몸을 틀어 옆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름다운 옆얼굴, 팔을 들어올려 함께 위로 쏠려 올라간 가슴과 젖꼭지, 날씬한 배, 쭉 뻗은 다리..... 그 선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마치 남자의 손이 닿기라도 한 듯, 전율을 느끼는 듯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스튜디오 안은 한 여자로 인해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었다.
로라는 사진 찍기를 끝마치고 옷을 입다가 문소리가 나는 것 같아 돌아보았으나 페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로라는 스튜디오를 나왔다. 그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안드레가 그녀의 사진찍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로라는 그 길로 자전거를 타고 강으로 갔다. 저녁놀이 붉게 비추고 있었다. 로라는 두 팔을 높이 치켜들고 신선한 공기를, 저녁 냄새를, 저녁 놀을 가득 담은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그녀는 모든 남자를 사랑한다. 아니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녀는 아름다운,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이다. 로라는 옷을 벗고 강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이 강물 속에서 눈부셨다. 물고기까지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듯, 그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