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귀
가시오가피
가을
감자밭
강설(降雪)
개좆불
개똥참외
거울
겨울강
겨울 경포에서
겨울비
겨울 연가(戀歌)
겨울잠
경춘가도(京春街道)
고란사에서
고비
고욤나무
과추풍령유감(過秋風嶺有感)
굴뚝
굴뚝 소제부(消除夫)
굴비
굿 모닝
그냥
그냥 커피
그대의 별자리
그런 여자
그렇지, 뭐
그 옛날의 사랑
기러기의 삐삐
기차(汽車)
기침
김수영론
꼴두기와 모과
꽃모종을 하면서
꾀
꿈으로 흘러온 사랑
끈끈이 주걱
나는 공부가 싫어요
나의 아기
낙향(落鄕)을 위하여
남근(男根)
내 줌렌즈에 잡히는 피사체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너의 별에서
누룽지
눈 내리는 마을
눈물 한 방울
눈부처
단조(短調)
돌
동백
동해
동해설송
두레반
두절(杜絶)
라라에 관하여
마늘
마실
마흔아홉의 까마귀
만장(輓章) - 이문구(李文求) 형주(兄主)
메롱메롱
명사산(鳴沙山)
발바리
밤
밥냄새
방아타령
배추흰나비
백두산 천지
버슨 분홍
벙어리장갑
별다방
봄
봄소식
봄편지
불두화(佛頭花)
불알
붕어
블랙홀
비백(飛白)
빙빙과거
빙어에게
사랑 사랑 내 사랑
사랑의 깊이
사랑의 잠
사랑하고 싶은 날
산밭에서
삼대(三代)
새
선운사에서
설날
설날 아침
설미(雪眉)
손
솔잎
송우인곡(送友人曲)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술나무
술래잡기
술적심
숨은 딸
슬픔의 잠
시
시인
시인과 소설가
실비
쌍분(雙墳)
아기별
아내는 안해다
아빠
아이들의 화실
아침 안부(安否)
아침의 예언(豫言)
아침행진(行進)
안행(雁行)
알요강
약속
애기똥풀
액(厄)막이연(鳶)
어머니
어휘에 관한 명상
엄마
엘레지
여기쯤에서
여류시인의 일기장에서
연애
연애 미학 서설
연잎 앞에서
영희누나
오목눈이
오죽헌지(烏竹軒池)에서
오줌길
요즘의 연구과제
우리말
우리 시대의 시인론
우표 한 장의 행복
우화(羽化)의 꿈
운수 좋은 날
위리안치
은행나무
응가
이별
이수익
이제는 다 쪽빛 사랑
인사동 사람들
임금님 낚시
잉어를 위한 헌사
쟈스민차
작별
작은 어머니
잠지
장독대
장마
장모님
저녁나절의 꿈
저녁연기
저녁연기 같은 것
적막
절세미인(絶世美人)
정말 거짓말 - 서동(薯童)의 노래
제비꽃
제수(弟嫂)
종종이
죽음에 관하여
쥐에 관한 명상
쪽빛 사랑
천둥산 박달재
천등산
철새
첩란(妾蘭)
초겨울 아침
춘몽(春夢)
춘일(春日)
카마수트라의 힌두 사내
큰스님
타지마할
탑
텁석부리
토요일 오후
파 웨스트 러브 호텔
편지
포유도(哺乳圖)
폭설(暴雪)
풍장
하관(下棺)
하루해
하버지
하일서정(夏日抒情)
해피 버스데이
할미꽃
할아버지
함박눈
혼잣말
홍수
황소를 위하여
1미터의 사랑
가는귀
오탁번
나이 육십
가는귀 먹어
오는 말
알아듣지 못하네
내 핸드폰 벨소리는 듣지 못하고
옆 사람 핸드폰 벨이 울리면
내 핸드폰 꺼내다가
나 홀로 싱그워지네
이해나 분석은 엄두도 못 내고
이냥저냥 지레짐작
시늉하며 웃네
가는귀 먹어
오는 말 들리지 않는
아아
이순(耳順)의 아침
가시오가피
오탁번
아침에는 양파밭에서 놀고
낮곁에는 마늘 밭에서 뒹굴다가
저녁 어스름에는
지리산 대나무 숲에 들어가
짠 소금 먹다가 돌아온다
양파즙 한 봉지
흑마늘환 한 옹큼
죽염 한 찻숟갈
아침저녁으로 먹지만
혈압은 귀먹었는지
꿈쩍도 않는다
봄이 오는 소리
아직도 먼 雨水날 아침
평균수명을 향하여
앞으로 갓!
혼자 외치면서
가시오가피즙 하나 따서 마신다
가시오가피 가시오가피
꼭 무슨 별자리 이름인양
주문(呪文)처럼 외우면서
나도 한 그루
가시오가피 나무가 되어
날카로운 가시 세우고
아득한 은하수(銀河水) 물결을
건너갈까 한다
가을?
오탁번
?
감나무에서 감잎 뚝뚝 떨어지는 소리
아버지의 두루마기 소매자락에 이는
기러기 날아오는 가을 하늘 더 푸르다
?
텅 빈 들녘 송장메뚜기 한 마리
간고등어 한 손 든 아버지의 흰고무신코
살진 집짐승 여물 먹는 소리가 정겹다
?
버들치 헤엄치는 여울목에 빠진 가을달
반짇고리에 놓여있는 은반지의 흰 입술
쥐오줌 자국 난 벽에서 잠자는 씨옥수수
?
어머니의 가을 옷섶 따스한 저녁연기
호랑나비인 양 가벼운 굴뚝새 한 마리
감잎 뚝뚝 떨어지는 가을이 마냥 깊다
감자밭
오탁번
흙냄새 향기로운 감자밭 이랑에
하양 비닐을 씌우는
농부 내외의 주름진 이마에는
따사로운 봄볕이 오종종하다
서방은 비닐을 앞에서 끌고
아낙은 뒤에서 그걸 잡고 있는데
비닐 끝을 흙으로 덮기도 전에
자꾸 앞으로 나가니까
소를 몰 때 하듯이 아낙이 말한다
-워워!
그 말을 듣고
서방이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워, 라니?
흙을 다 덮은 아낙이 말한다
-이랴! 이랴!
신방에 들어가는 새댁처럼
가지런한 감자밭 이랑은
물이랑 되어 찰랑이는 비닐을
비단 홑이불처럼 덮고
제 몸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린다
농부 내외는
바소쿠리에 가득한 씨감자눈을
비닐을 뚫고 하나하나 꾹꾹 심는다
멧돼지와 고라니들이 내려와
감자를 반나마 나눠먹을 테지만
주먹만한 감자알을 떠올리며
새흙을 덮어 다독여준다
감자밭 이랑은
아기를 잉태한 새댁처럼
다소곳이 엎드린 채
감자알이 여무는
하짓날 긴긴 해를 꿈꾸고 있다
강설(降雪)
오탁번
외출의 발 끝에 내리는 겨울 흰빛 휴지부(休止符),
공상(空想)을 한컵 마시고 나온 나를
세종로 한복판에 토해 놓고
버스는 시간의 노선 위로 달아나 버렸다
서류와 기름끼 등 이런 것들을 차려입고
강한 자들은 기관의 정문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들을 신고하는 시민에게
검거해낸다고 단언하지 못하는 수사관에게
내 포케트에 든 공상(空想)의 음료를 주고
약한 자여
너희들은 지금 휴지부(休止符)를 집어들지만
너희들 본능의 체온 때문에라도
흰빛 겨울은 수포(水泡)가 되고
다시 난해한 곳으로 승차하기 직전
세종로는
가벼운 신(神)의 완구(玩具)가 덤핑으로 판매되는
흰 시장이 되었다
내 의식의 점포 안에도
겨울의 본능은 하강(下降)하고
약자들의 흰 빛 거래가 활발해진다
개좆불
오탁번
감기를 왜 `개좆불'이라고 하는지 알겠다
올 감기는 되게 질긴 놈이다
숏 타임이란 게 없다
보름 째 기침 가래에 숨이 차고
밤에도 가래 뱉느라고 몇 번 씩 깬다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단숨에 마시면
바이러스도 깜작 놀라 `어휴, 순 쌍놈이다!'하며
줄행랑을 치게 하던 시절도 있었다
갈비뼈가 아프도록 기침을 한다
술 담배 못하니
그냥 우울증 환자가 된다
서울시민이 떼로 모여서
나를 욕하고 있는 광경 빤히 보인다
`그 개새끼, 논문과 작품이 다 표절이야'
감기 바이러스여 그만 떠나다오!
이 질긴 롱 타임 개좆불아!
개똥참외
오탁번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자유가
싱싱한 평화가 시장바닥에 쌓여 있는 주말
배낭에 한 주일의 불만을 담아
버너에 일곱밤의 성욕을 채우고
떠났다 시외로 가는 버스에 실려
이제하의 푸르디 푸른 냉소는
내 방 오른편 벽을 사시사철 간지럼 태우는데
그대는 아는가, 개똥참외를
참외를 씨채 먹은 사람이
오 하나님 당신의 양이 그 참외를 먹고
된똥을 누면 참외씨는 무슨 보석인 양
빛나며 대지에 떨어져서
수캐든 암캐든 운수좋은 날의 개가 그 똥을 먹고
들판을 달리며 달리며
교미도 붙고 별 지랄 다 하고 나서 컹컹 짖으며
개똥을 눌 때까지
사람과 개의 밥통과 창자의 깊고 질긴 어둠을 헤치고
다시 나오는 씨앗
그 빛나는 자유가 흙에 묻혀서
또 그 가을과 겨울의 어둠을 지내고
이듬해 봄에 싹이 트는 진실을
들판에 돌서덕에 밭두럭에 자라는 개똥참외의
그 개같은 똥같은 참외같은 보이지 않게 기어다니는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요즘 자유의 드넓은 높이를
아는가 모르는가
모를 것이야 오늘밤 그대의 냄새나는 화실에서
푸른 고름이 낭자한 냉소를 아이스크림처럼 빨며
저 청조나 영은이의 아름다운 바람을
잡초들의 보이지 않는 뿌리를
씹어볼까나 마셔볼까나 조져볼까나
화가도 시인도 작가도 아닌 그 무엇도 아닌
이 시대의 무이한 예술가
이형 제하여,
마흔을 넘기고도 죽지 않는 흔한 시인들이여
개똥참외를 쪼갤 과도를 준비하라
더러운 보이지 않는 자유를 위하여
사람과 개의 밥통과 창자의 어둠 속에서 벌어질
흔적도 없는 빛나는 자살을 위하여
거울
오탁번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
이렇게 말한 시인이 있었지
띄어쓰기도 할 줄 모르면서
우리 현대시사의 문법을 다 띄어놓고 죽은
버릇없는 시인이 있었지
꽃샘추위가 밀려오는 오늘 아침
면도를 하면서 거울을 보니까
앗!
낯모르는 왼손잡이 늙은이가 나를 바라본다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을 못하는
흰수염 깎여나간 낯선 늙은이!
당신은 내가 아니다
나는 당신이 아니다
올봄 시골형님 회갑잔치에 가서
술이 취해서 어머니 부르며 울던 나는
거울 속에 있는 당신이 아니다
쉰한 살 먹은 늙은이가 아니다
어린 여자와 소주 마실 때
초저녁에는 삼십년 차이의 세월이지만
한 시간마다 십년씩 세월은 좁혀져서
나는 그제나 이제나
밤 아홉시쯤 되면 팔팔한 청년이 된단다
말도 안되는 사랑
말도 안되는 말로 고백하다가
넘어져서 코가 깨지는 무모한 젊은이란다
선생님 취하셨네요
좋은 글 많이 쓰셔야지요
아니다 아니다
나는 안 취했다
나는 안 늙었다
이렇게 소리치는 나는
거울 속의 당신이 아니다
겨울강
오탁번
겨울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양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연기 마주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마냥 자욱져 있는
얼음짱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대잎 흔드는 바람 사이로 봄기운 일고
오대산 산그리메 산매미 날개빛으로 흘러와
겨우내 얼음 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이 버들개아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리 풀려 반짝이는 여울 이루고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닻 올리며 추운 몸뚱아리 꿈틀대는
겨울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드네
겨울 경포에서
오탁번
겨울 경포의 모습을
연필화 그리듯 꼭 그대로 글로 그려낼 수 있으면 좋겠다
시인이 된 지 스무해가 지났는데
나는 왜 아직도
경포의 모습을 그릴 수 없는 것일까
흰 파도 부서지는 겨울 바다
배고픈 갈매기 날아오르고
수평선 너머 하늘
너무나 아득하다
그리운 사람은 서울에서 꼼짝않고
강릉에 사는 옛 친구는
허리가 아프다
겨울
바다
남자
여자
하느님은 덕대에 걸린 동태처럼
내장 다 빼앗기고 죽어서
겨울 바다에
나 홀로 서면
세상이 너무
무섭다
겨울비
오탁번
눈이 펑펑 쏟아져야 할 텐데 비가 온다 소한 대한 추위에 불알까지 꽁꽁 얼어야 할 텐데 비가 온다 겨드랑이에서 게을러 터진 땀냄새 나고 지난해 저질렀던 온갖 부끄러움도 다 젖는다 흰 눈 내려서 이 세상 어둠 모두 뒤덮어서 쑥덤불 같은 내 마음도 흰 도화지처럼 되어야지 순백의 마음 엮어서 사랑하는 이에게 보낼 수 있다 한겨울 깊은 저녁인데 비가 내린다 슬픈 사람 슬픈 사람끼리 눈을 맞으며 저 멀리 원시림이 매몰되는 소리를 듣고 싶다 눈을 밟으며 귀가 맑게 틔였던 지나가버린 아침을 겨울비 맞으면서 찾을 수가 없는 슬픔 어디에 숨었는지 짐작도 안 가는 그때 그 이름 저녁해 빛날 때마다 그토록 숱하던 그리움도 이제는 철 지난 겨울비로 흉칙하게 흩어진다 눈 맞으며 달려가고 싶은 그 옛날의 사랑이여 비가 온다 비가 온다 겨울비가 온다 겨울비에 젖어서 그 옛날의 사랑은 간 곳이 없다
겨울연가(戀歌)
오탁번
연안(沿岸)의 겨울 아침을 헤치며
당신의 선박은 모호(模糊)를 싣고 왔지
동량(同量)의 모호를 싣고
출항하는 나의 선박
아침마다 눈을 뜨는 우리는
연안의 긴 모래톱을 달려
대안(對岸)으로 배를 띄웠지
내륙에서 부는 바람은
갑판 위의 겨울철 양식과
영양이 담기는 식기들을 흔들고
얼지 않는 우리의 항해는
바람보다 더 큰 자연이었지
이루어지지 않는 파혼의 약속과
약한 시력을 재료 삼아
조선(造船)의 힘든 노동을 끝내고
나의 아침을 헤치며
당신의 선박은 질서를 싣고 왔지
동량(同量)의 해후를 싣고
항해하는 나의 선박
겨울을 향해 우리는 출항했지
겨울잠
오탁번
요즘 나는 나비와
겨울잠을 잔다
꿈결에 원색도감 『한국의 나비』를 펼치면
별별 나비가 함박눈처럼 흩날린다
네발나비과에 속하는
봄처녀나비, 도시처녀나비, 시골처녀나비와
살뜰히 데이트를 즐긴다
앞다리가 퇴화한 네발나비는
오직 흘레밖엔 몰라
동지섣달 다늙은이 힘을 쏙 빼 간다
팔랑나비과에 속하는
수풀떠들썩팔랑나비,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는
크기는 작은데 머리만 커서
날아오를 때 팔랑팔랑 법석을 떨며
한겨울 심술꾼 눈보라 되어
다독다독 덮은 마늘밭 솔잎을
몽땅 다 날려 버린다
경춘가도(京春街道)
오탁번
京春街道에는
계절따라 별별 露店이 다 생긴다
밭에서 막 따 온
수박과 참외도 팔고
'멜론'이라고 쓴 깃발을 내걸고
서양참외도 판다
아이들이 혓바닥 쏙 내어밀고
'메롱'하며 놀리는 듯 하지만
멜론은 맛이 참 좋다
'산수박' '산오징어'라고 쓴
露店의 간판도 보인다
산수박? 산오징어?
살아 있는 수박?
산에서 잡은 오징어?
한순간 헷갈리기도 한다
가을이면
사과와 배가 탐스럽고
뺨붉힌 약호박과
노랗게 익은 모과가
가을 햇귀 아래 곱다
귀여운 모과가
가으내 은은한 향기 풍기다가
쭈글쭈글 검정이로 변하면
京春街道에 눈이 내리고
露店에서는
빙어회를 판다
팔딱거리는 얼음빛 빙어를
초고추장에 찍어먹고
핸들을 잡으면
京春街道 빙판길도
겁날 것 없다
고란사에서
오탁번
고란사 뒤안 절벽 바위 틈에서
한사코 몸을 숨기는
눈썹만한 그대여
낙화암 푸른 절설 다 안다는 듯
천년 묵은 소나무는
굵은 뿌리를 바윗가에 드러내고
강물결 춤출 때마다
금빛 솔잎 따갑게 흔들리는데
눈씻고 보아야
겨우 눈에 띄었다가는
햇빛 비치면 다시 몸을 숨기는
고란초여
이제는 다 흘러가버린
천년 전의 사랑
아직도 못 잊겠다는 듯
그늘에 숨어서도
제 모습 부끄럽다 하네
비에 젖은 눈썹 훔치며
목숨과 바꾼 사랑
남 몰래 속삭이고 있네
고비
오탁번
솜털모자를 쓰고
시계 태엽처럼 돌돌 말려서 나온
고비 새싹이
아슬아슬 꽃샘바람에
고개를 갸우갸웃 한다
감기 들어 콜록거리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찬다
- 고비가 너보다 낫다!
감기들까봐
솜털 모자 쓰고 나온 걸 봐라
할아버지는
나보다
고비가 더 예쁜가 보다
꽃샘바람 매운지
어떻게 알고
고비는 솜털 모자를 썼을까
고욤나무
오탁번
갑사 들어가는 아름드리 숲길에서 문득 만난
키만 싱겁게 큰 비쩍 마른 고욤나무 한 그루
잎사귀도 고욤도 없이 빈 손 하늘까지 펴고
계룡산 깊은 울음소리 염주알처럼 헤아린다
봄 여름 다 보내고 단풍잎 어지러운 하늘에
꿈속에서도 그리운 뺨 눈물 머금은 저녁노을
고욤나무의 적막한 꿈이 가지 끝에 이울고
부처님의 금빛 손가락 목탁소리에 무심하다
과추풍령유감(過秋風嶺有感)
오탁번
가까운 山 더 가까이 보이고
먼 山 더 멀리 보인다
참새 똥 뒤집어 쓴 허수아비 하나
수수밭 두렁에서 웃고 있다
아득하기만 한 이 가을날
오직 나 하나 눈물방울 사이로
가까운 山 더 멀리 보이고
먼 山 더 가까이 보인다
힘들어도 웃고 살아요
굴뚝
오탁번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비유(比喩)가 있다
그으름 빛 굴뚝새나
뱀눈나빗과의 굴뚝나비처럼
흔해빠진 죽은 비유였지만
초가집 굴뚝 다 없어지고
심야전기 보일러로 난방을 하고
전기밥솥 가스렌지로 저녁을 해서
어머니의 근심처럼 피어오르던
저녁연기 다 사라진 요즘
굴뚝새와 굴뚝나비가
살아서 팔딱이는 비유가 되었다
- 굴뚝새……
- 굴뚝나비……
눈깔사탕 입안에서 굴리듯
가만히 불러보면
아득한 과거로 되감기하는
흑백 필름이 차르르 돌아간다
죽었던 비유가
눈을 반짝 뜨면서
굴뚝새 굴뚝나비 떼로 날아오른다
누나가 인두로 잘 다린
설빔의 서늘한 옷고름과
옷고름에 흙 묻혀 돌아오면
눈 흘기던 누나의 얼굴도 떠오른다
따듯한 굴뚝의 온기를 훔치는
가벼운 굴뚝새도
거미줄 용케 피해 날아가며
알 까놓고 죽었던 굴뚝나비도
죽었던 비유의 눈을 뜨고
간지럼 태우며 날아오른다
굴뚝 소제부(消除夫)
오탁번
수은주의 키가 만년필 촉만큼 작아진 오전 여덟 시
씽그의 드라마를 읽으려고 가다가 그를 만났다.
나는 목례(目禮)를 했다.
그는 녹슨 북을 두드리며 지나갔다.
나는 걸어가는 게 아니라 자꾸 내 앞을 가로막는
서울의 제기동(祭基洞)의 겨울 안개를 헤집으며 나아갔다.
개천의 시멘트 다리를 건너며
북을 치는 그를 생각해 보았다.
그냥 무심히
내 말을 잘 안들어 화가 나는 그녀를 생각하듯
그냥 무심히
은이후니.
비극을 알리는 해풍(海風)이 문을 흔들고
버트레이가 죽고 그의 노모(老母)가 울고
막이 내린다. 씽그는 만년필을 놓는다.
강의실 창 밖에 겨울 안개가 내리고
아침에 만난 그를 잠깐 생각하다가
코오피 집에 가는 오후 약속을 상기했다.
말을 타고 바다로 내달리는
슬픈 사람들,
우리는 에리제에서 코오피를 마셨다.
코오피잔을 저으며 슬프고 가난한 시간속으로 내달려 갔다.
아침의 그를 문득 생각해 보았다.
은이후니.
집으로 돌아오다가 석탄처럼 검은 빛
그를 다시 만났다.
길고 깊은 암흑을 파내어
아침부터 밤까지 골목을 내달리는
그에게 나는 목례(目禮)를 했다.
내 전신에 쌓인 암흑의 기류를 파낼
그녀를 생각하며
나는 대문을 두드렸다.
은이후니
겨울저녁의 안개를 모호한 우리의 어둠을 두드렸다.
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매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굿 모닝
오탁번
아침 일찍 일어나면
화장실로 먼저 간다
강추위에 안녕한지
살피러 간다
물을 내리니, 쏴!
굿 모닝? 하니
굿 모닝! 하네
늙은 아내 잠자는
안방을 살짝 열어본다
문 여는 소리에
홱 돌아눕는다
꿈나라 잠보!
굿 모닝? 해도
굿 모닝! 안 하네
그냥
오탁번
- 내가 왜 좋아?
- 그냥!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 내가 왜 좋아?
- 그냥!
나도 이 말 한번 해 봤으면!
그냥 커피
오탁번
옛날다방에서
그냥커피를 마시는 토요일 오후
산자락 옹긋옹긋한 무덤들이
이승보다 더 포근하다
채반에서 첫잠 든 누에가
두잠 석잠 다 자고
섶에 올라 젖빛 고치를 짓듯
옛날다방에서 그냥커피 마시며
저승의 잠이나 푹 자고 싶다
그대의 별자리
오탁번
비상등 켜고 전조등 밝혀도
그대가 가는 길 보이지 않는다
네거리에 가까스로 왔지만
직진해야 하는지 우회전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황도 십이궁도 광막한 어둠에 싸여
전갈자리인지 사자자리인지
북극성 곧바로 보이는
오리온자리인지
분별할 수가 없다
길은 뚫린 곳에서 스스로 막힌다
내 생애의 길은
저 혼자 시간의 강물로 빠지며
내 마음의 길을 지워버린다
그런 여자
오탁번
부엌 바람벽에 걸린
국자나 채반이나
부뚜막에 놓은
종지나 보시가 같은
재 냄새도 좀 나는
그런 여자가 좋다
부싯돌을 치면
제 몸을 태우는
부싯깃 같은 여자
그런 여자가
좋다.
그렇지, 뭐
오탁번
'어떻게 지내나?' 물으면 '그렇지, 뭐' 할 뿐 더 이상 말이 없다 이 말만 듣고는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 없다 허나 우리 동네에서는 이 말만 듣고도 엊저녁 밤농사가 신통했는지 안 했는지 고추농사 재미봤는지 비료 값 농약 값 빼고 나면 말짱 헛농사 지었는지 훤하게 안다
눈빛과 말품을 보고 안다 진짜 뜻은 애당초 말이나 글로는 다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장에 가서 농산물을 팔고 오는 이에게 오늘 어땠느냐고 물어도 '그렇지 뭐' 이 한 마디뿐 더 이상 대꾸가 없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서는 다 안다 헐값에 팔았는지 유기농이라고 허풍 떨어서 바가지 씌웠는지 갈쌍갈쌍한 눈빛을 보면 다 안다
몇 년 전 외아들이 선산까지 다 팔아먹고 도망간 정미소 집 늙은 홀아비는 동네사람들이 위로하면 기러기 날아가는 하늘 한 번 쳐다보며 '그렇지, 뭐' 늘 이 한 마디뿐이다 옥양목 두루마기의 헐렁하게도 서늘한 소매처럼! 빨랫줄에 앉았던 잠자리가 쇠파리 잡으러 날아올랐다가 이내 고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그 옛날의 사랑
오탁번
지붕 위에 널린 빨간 고추의 매운 뺨에
가을 햇살 실고추처럼 간지럽고
애벌레로 길고 긴 세월을 땅속에 살다가
우화되어 하늘을 나는 쓰르라미의
짧은 생애를 끝내는 울음이
두레박 넘치는 우물물만큼 맑을 때
그 옛날의 사랑이여
우리들이 소곤댔던 정다운 이야기는
추석 송편이 솔잎 내음 속에 익는 해거름
장지문에 창호지 새로 바르면서
따다가 붙인 코스모스 꽃잎처럼
그때의 빛깔과 향기로 남아 있는가
물동이 이고 눈썹 훔치면서 걸어오던
누나의 발자국도
배추흰나비 날아오르던
잘 자람 배추밭의 곧바른 밭이랑도
그 자리에 그냥 있는가
방물장수가 풀어놓던
빨간 털실과 오디빛 참빗도
어머니가 퍼 주던 보리쌀 한 되만큼 소복하게
다들 그 자리에 잘 있는가
몽당연필에 침 발라 가며 쓴
단기 4287년 가을 어느 날의 일기도
마분지 공책에 깨알처럼 그냥 그대로 있는가
그 옛날의 사랑이여
기러기의 삐삐
오탁번
- 이 봐! 줄 좀 맞춰서 날아가봐!
어지럽게 날아가는 백로를 보고
반듯하게 ∧그리며 날아가는
오동빛 기러기가 수근거린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백로는
푸른 하늘에 흰 깃털 하나 떨어뜨리듯
물똥 지리면서 훠이훠이 날아간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저수지에
잉어 낚시 던져놓고 기다려봐도
찌는 까닥도 않고 오줌만 마렵다
둘아서서 오줌을 눌 때면
입질 한번 안 하던 잉어가
잽싸게 지렁이만 따먹고 달아난다
오줌 누는 내 모습을 보고
줄맞춰서 날아가는 하늘의 기러기가
잉어에게 삐삐를 친 것일까?
잉어는 제 수염을 안테나로 삼아서
광속으로 메시지를 수신한 것일까?
무지개까지 닿을 듯 힘차던
젊은 날의 오줌발이
이젠 발등만 적시는데
- 지금 오줌 누고 있다! 이 때다!
∧그리며 날아가는 기러기가
잉어한테 삐삐 삐삐 신호를 보낸다
기차(汽車)
오탁번
할머니가 부산하게 비설거지하고
외양간 하릅송아지도 젖을 보챌 때면
저녁연기가 아이들 복숭아뼈 적시며
섬돌 아래 고샅길로 낮게 퍼졌다
숙제 끝내고 토끼풀도 다 뜯어다주고
심심해서 사물사물해졌을 때
산 너머 기차 소리가 들려오면
몽당연필에 마분지 공책 들고
아이들은 앞산 등성이로 달려갔다
까치발 암만해도 기차는 보이지 않고
두엄더미 지렁이울음처럼
기차소리만 치치포포 하릿하게 들렸다
기차를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귀를 모으고 기차소리 들으며
재바르게 기차 그림을 그렸다
여물통 같은 기차, 달구지 같은 기차!
개다리소반 같은 기차, 바소쿠리 같은 기차!
아이들은 기차소리를 그리며
멀고먼 나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손에 쥔 기차표 하뭇해하며
아득한 미리내 여울 건너듯
저녁연기 밟으며 돌아올 때면
깜깜해진 비구름이 빗방을 흩뿌리며
쏭당쏭당 개찰하듯 기차표를 적셨다
기침
오탁번
기관지를 앓는 딸아이를 데리고
아침 아홉 시 동부시립병원으로 가면서
나는 평화롭다 애비 손을 잡고 가는 딸은
기침이 나와도 그저 즐겁기만 하므로
나는 평화롭다 X레이에 나타난 딸아이의
궁형의 갈비뼈와 안개 같은 허파와 암흑
그 사이에서도 나는 평화롭다 평화롭다
동대문구에서 제일 예쁜 딸아이는
그림일기를 거짓말로 그렸다고 울지만
일기는 거짓말로 써도 된다고 달래는 대학교수
나는 평화롭다 평화주의자이므로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다지도 살고 싶은가>
미당이 이렇게 노래한 것은 기막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살고 싶은가>를
<죽고 싶은가>로 교정하는데
이 교정에 이의 있는 자 있으면
안암동 5가 1번지 문패도 없는
이름도 없는 캠프스,
그 앞으로 올 것
선생님은 참 행복하시네요
행복 속에서 어떻게 글이 나오지요?
오냐오냐 나는 행복해서 미칠 지경이다
시가 욕설이 되는 슬픔을
문학이 땅에 떨어지는 과일아니라
피어나는 잎이라는 것을
겨울을 참는 아픔이라는 것을
사이비 정치학도여 너희들은 아는가
딸아이의 기관지병은 보름이면 낫는다는데
내 기침은 15년이 지나도 가망이 없는 날에
평화에 들떠서 이 글을 적는다
김수영론
오탁번
김수영이는 시는 잘 쓰지 못해도
그 정신이 제법이야 시를 아무렇게나 써갈기는
그런 정신이 좋아 다른 놈들이 비유 찾고 주제 찾을 때
되는 대로 휘갈겨 쓸 수 있는 김수영이는 죽었다
눈치코치 없는 평론가들은 김수영을 훌륭한 시인이래
김수영이는 훌륭한 시인이 아니고 훌륭한 시민이야
엊저녁에는 술을 개판이 되도록 마셨어
시인이 갑자기 똥개가 됐지 뭐야 술이 함뿍 취하면
분노와 희열은 종이 한 장 차이야 풍자냐구?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마음속 숨은 야만의 똥개가
보신탕이 되는 것을 전신으로 거부한 거야
알맞게 살이 찐 놈들의 아가리에 들어갈 영양식품보다
되는 대로 짖어대다가 김수영이처럼 죽는 자유
자유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 개똥 같은 자유여
내 책상머리의 안개꽃과 장미는 이젠 숨넘어갔어
꽃송이마다 열렸던 그리움도 다 증발해 버리고
창을 열면 미칠 것만 같은 가을아침 햇볕이다
추석 성묘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 있던 코스모스는
저승에서 나를 손짓하는 어머니의 사랑 같았다
슬픔도 빛이 바래서 한나절의 추억이 되는 몹쓸 세상에
나는 오늘도 시와 소설을 논한다? 연애를 논한다?
상징 찾고 운율 찾을 때 되는 대로 써갈긴 김수영이는
요컨대 무엇을 논한 적이 없다 오직 정복뿐이었지?
현대시를 신체시처럼 쓰는 자유뿐이었지?
여자를 유혹해서 싸구려 여관으로 잠입하는
진정한 용기는 없이 오늘도 또 무엇을 유창하게
논하고 분석한다? 정말 나는 보신탕이 될 수는 없어
꼴뚜기와 모과
오탁번
1.
술을 좋아하는 아빠가 포장마차에 갈 때
그림일기 그리다 말고 나도 따라 나선다
아빠는 똥집 안주로 소주 한 병 비우고
살짝 데친 꼴뚜기 한 접시는 내 차지다
(꼴뚜기처럼 생긴 애가 꼴뚜기를 참 좋아해)
포장마차 할머닌 아빠를 본체도 안하고
꼴뚜기를 먹는 나만 바라 본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시킨다더니
우리 집 망신은 요놈이 다시키누나
아빠는 하하하하 웃으며 술잔을 비운다
나는 꼴뚜기 한 접시가 아쉬워 입맛 다신다
2.
엄마 따라 춘천에 가는 국도가에는
호박이랑 모과랑 파는 길가 가게가 많다
엄마는 춘천의 대학 국어선생님
나는 서울 종암초등학교 일학년 학생
엄마는 모과 다섯 개를 고르고 나서
과일가게 망신은 모과가 다시킨다는데
(오천원은 비싸요 천원 깎아 주세요
오천원은 비싸요 천원만 )
모과 파는 아줌마는 안된다고 말을 하다가
요즘 모과는 망신이 아니고 자랑이예요
이 애가 모과처럼 예뻐서 주는 거예요
내 머리를 쓰다듬는 아줌마를 보면서
우리집 망신은 요놈이 다 시키누나
엄마는 깔깔깔깔 웃으며 모과 봉지를 들고
나는 모과에 얼굴 대보며 활짝 웃는다
큰 소리치면서 작은 것 다 잡아먹는
상어나 문어나 고래가 나는 다 싫다
잘 생기고 커다란 과일도 싫다
꼴뚜기와 모과가 나는 제일이다
꽃모종을 하면서
오탁번
따뜻한 봄날 꽃밭에서 봉숭아 꽃모종을 하고 있을 때
유치원 다니는 개구쟁이 아들이 구슬치기 놀이를 하고
놀다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모종샆을 든채 나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아빠 아빠 쉬도 마렵지 않은데
왜 예쁜 여자애를 보면 꼬추가 커지나?
아들은 바지를 까내리고 꼬추를 보여주었다.
정말 꼬추가 아주 골이 나서 커져 있었다.
꼬추가 커졌구나 얼른 쉬하고 오너라
생전에 할머니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자에게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나 나는 목이 메었다.
손자의 부자지를 쓰다듬으시던 할머니는
무너미골 하늘자락에 한 송이 신나리꽃으로 피어나서
지금도 손자의 골이난 꼬추를 보고 계실까?
꾀
오탁번
우리는 너무 빨리 사랑을 하고
너무 빨리 이별을 하네
논꼬 보러가는 늙은 농부처럼
미꾸리 잡아먹던 두루미가
문득 심심해져서
뉘엿뉘엿 날아가는 것처럼
사랑하고 이별할 수 있다면!
솔개가 병아리 채가는 것처럼
쏜살같이 빠르게는 말고
능구렁이가 호박넌출 속으로 숨듯
허수아비 어깨에 그림자 지듯
느려터지게는 말고 그냥 느리게
한평생이라야
구두끈 매는 것보다 더 금방인데
우리는 너무 빨리 이별을 하고
너무 빨리 사랑을 하네
이메일메시지야
한 손가락으로 단숨에 지울 수 있지만
수많은 새벽과 노을녘은
눈썹처럼 점점 또렷해지는데
메뚜기떼 호드득호드득 뛰는
고래실 고마운 논배미를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
꾀 중에서는 제일인데 말이지
꿈으로 흘러온 사랑
오탁번
그대와 함께 까페에 앉아
가을비 내리는 창 밖을 보면
빗방울 방울끼리 저마다 눈을 뜨고
내 마음속 숨어 있는 사랑을 훔쳐 보네
그대 눈동자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모두다 비에 젖은 비애뿐이지만
우리의 사랑이 눈뜨기까지
가을마다 비가 오고 잎이 지는 모습을
이제야 가만히 바라볼 수 있네
그대와 함께 까페에 앉아
비에 젖은 창 밖의 나무를 보면
나뭇가지 가지끼리 저마다 손을 펴고
내 눈빛에 숨어 있는 눈물을 가르키네
그대 가슴 적시며 내리는 비는
우산으로도 가릴 수 없는 우수뿐이지만
아무도 모르게 지금 여기까지
오랜 세월 꿈으로 흘러온 사랑을
이제야 숨죽이며 손짓하고 있네
끈끈이주걱
오탁번
뒷개울 건너 공동묘지 가는 길은
작은 벌레 잡아먹는
끈끈이주걱 흰 꽃이
고수레 밥풀처럼 하얗게 피었다
낙향한 선비의 콧수염 같은
제비붓꽃이
촉루가 된 주검들의 보랏빛 사연을
하늘 멀리 띄울 때
하루살이 애벌레 잡아먹는
끈끈이주걱 홍자색 털이
내 어린 종아리에 자꾸 달라붙었다
하늘이 오리알 빛으로 물들 때면
끈끈이주걱에게 잡아먹힌
이름 모를 벌레들의 영혼이
송장메뚜기 뛰어오르는 풀섶에서
동글동글한 열매로 익어
껍질을 터뜨리고 길섶에 흩어졌다
서리병아리 울음 따라 가을이 깊고
긴 겨울 지나 봄이 돌아오면
보리누름은 아직도 먼데
쌀뒤주는
바닥이 났다
뒷개울 건너
공동묘지 가는 길은
끈끈이주걱이 어지럽게 피었다
나도 한 마리 벌레가 되어
밥주걱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살고 싶었다
흰 쌀밥
여름 내내 냠냠 먹다가
통통하게 살찐 벌레의 영혼이 되어
이승의 하늘 아래
깜장 열매로 흩어지고 싶었다
나는 공부가 싫어요
오탁번
나는 공부가 싫어요 엄마 아빠 공부해라
공부해라 공부해라 정말 싫어요
꺼떡하면 숙제 아차하면 자습 놀 시간이 없어요
그래도 참 좋은 건 공부방이지요
간식 먹고 뛰어 놀고 공부도 하지요
나는 공부가 싫어요
공부해라 공부해라 정말 싫어요
야단치는 울 엄마 꾸짖는 선생님
놀 시간 좀 주세요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나는 공부가 싫어요 엄마 아빠 공부해라
공부해라 공부해라 정말 싫어요
머리 아픈 산수 알쏭달쏭 자연 놀 시간이 없어요
그래도 참 좋은 건 친구들이지요
딱지치기 술래잡기 신나게 놀지요
나는 공부가 싫어요
공부해라 공부해라 정말 싫어요
야단치는 울 엄마 꾸짖는 선생님
놀 시간 좀 주세요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나의 아기
오탁번
지나가 버린 어둠에서 나와서 햇살 속에 서봐
꽃피고 바람 불 때 어떤 녀석과 불장난했지?
여인숙에 몇 번 가고 낙태수술했지만
보이지 않는 아기를 죽이는 일이 어떤 뜻인지
너는 잘 모르지? 그때는 몰랐지만
생애의 옹이처럼 못 박힌 것을 차츰 알게 될 거야
아무도 모르게 훔친 가을 햇빛은 찬란하였다
네가 춤추는 잔디밭의 가상자리 조그만 공간
내가 훔친 너의 바람 너의 입술 너의 머리칼
이 세상 풀과 나무가 모두다 눈가림인데
너는 어찌하여 내 앞에서 맑은 눈빛으로
깊이 감춘 나의 비밀을 똑바로 쳐다보는지?
네가 버린 얼굴도 모르는 아기의 숨결을
나는 알 것만 같다 그 놈이 보고 싶다
조그만 너의 자궁에 소나기 퍼부울 때
나는 번개처럼 벼락처럼 하늘 빗기어
얼굴도 모르는 아기의 슬픈 아버지가 될 거야
낙향(落鄕)을 위하여
오탁번
까마득하게 흐려져버린
내 사랑의
호적등본만한 빈터가
실은 내 생애의 전부였음을
이제야 알겠다
술지게미 먹고
깨금발로 뛰어놀던
내 사랑의 빈터에
말 안해도 마음 다 알아줄
아주 예쁜 사람이
살고 있음을
이제야 알겠다
지에밥에 누룩 풀어 담근
술항아리에서
상강날 해거름쯤
술이 익으면
첫서리 내린 들창문
반쯤 열어놓고
마주 앉아 잔 비우고 싶은
내 마음의 노른자위가 될
아주 예쁜 사람을
전생의 꿈을 꾸듯
찾아가야겠다
남근(男根)
오탁번
박달재 마루
도토리묵을 파는 식당 앞에는
사내의 목조각이 등신대(等身大)로 서 있다
신장(身長)에 비해 더 크게 과장(誇張)된
길쭉하고 뭉툭한 남근(男根)이
석양 아래 반짝반짝 빛난다
관광버스에서 내린
나잇살 잡수신 할머니들이
에구 흉칙해, 하면서도
한 손 가득 잡히는 그걸
하도나 만지고 쓰다듬고
호호호호 웃으면서
잘 빠진 구두(龜頭) 뺨을 어찌나 때렸는지
이젠 오딧빛으로 빛나는
저 위대한 남근(男根)을 보라
힘차게 밭을 가는
저 빛나는 뿌리를 보라
흙내 나는 구들방에서나
초저녁 원두막에서나
오직 그것 하나 앞세우고
지어미의 허기진 뱃속에
아들딸 암팡지게 씨 뿌렸던
무뚝뚝한 할아버지가
이젠 더 그립다는 듯
관광버스가 빵빵 크락션을 울려도
귀 어두운 할머니들은
오딧빛 남근(男根)만 어루만지고 있다
내 줌렌즈에 잡히는 피사체
오탁번
첫 새끼 낳은
알몸이 고운 암고래가
동해의 푸른 파도를 가르며
뽀얀 젖을 뿌리면
태생의 피 그냥 젖은 사랑이
아늘아늘 물보라 속에 피어난다
1억 년 전 퇴적암 위에
발자국 화석으로만 남은
난생의 사랑이
영원을 가르며 날아갈 때
짝을 찾는 개개비 한 마리가
개개개 울음 운다
어미가 뿌려 놓은 젖을 먹으며
아기 고래는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포란의 꿈이
가뭇한 젖꼭지마냥
곱다랗다
영하가 긴 잠에서 깨어나
지구의 결빙을 음모할 때도
눈도 못 뜬 새끼들에게
어미새가 토해주는 사랑이
불잉걸보다 뜨겁다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오탁번
보잘것없어도 생선가시마냥
뭔가 목구멍에 걸리는 주제가 있을까
깜부기처럼 새까맣게 목숨 태워서
거름더미에도 못 얹히는 신세가 되어
미친 돼지도 안 먹는 주검이 되어
그 많은 가운데 하나도 못 되는
캄캄한 어둠이고 싶다
너의 별에서
오탁번
너는 어느 별에서 태어났기에
이토록 무서운 광속으로 다가와서
나도 모르는 나의 생애를 불밝혀 놓고
눈물빛 핏빛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가
겨울 철새 모두 떠난 한강 물결
봄이 오는 소리 선연한 노을 아래
물 속 깊이 숨은 누치 보이지 않고
하늘 멀리 떠난 나의 아기는
깃 하나 남기지 않고 나를 울린다
흰 수염 가득한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기고 또 잠기지만
아아 또는 오오
이러한 모음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내 운명이 벼랑 끝에 홀로 서는 소리
무좀으로 썩어가는 새끼발톱까지도
너의 별에서 날아온 사랑의 빛 앞에
까뒤집어져서 탄로가 났다
나는 전생에서부터 은닉했던 증거 앞에
모두 모두 자백하였다
너의 별이 내뿜는 사랑의 빛은
1초에 우주를 일흔 바퀴씩 돌면서
나의 전생에서부터 오늘 한강 물결까지
완전하게 발가벗기고 있다
오오 자백의 황홀과 나체의 쾌락으로
너의 별이 검은 구멍으로 빨려들어가서
그곳에서 살고 싶다
죽고 싶다!
누룽지
오탁번
마누라한테 아침밥 얻어먹는 몸 요즘도 있냐?
없지?
남편한테 꼬박꼬박 아침밥 차려주는 마누라
요즘도 있냐?
없지?
윗어금니 몽땅 들어내니까
말할 때면 말보다 헛바람이 먼저 나온다
유창하던 말씨 오간 데 없고
말더듬이 눌언訥言뿐이다
잇몸에 끼었던
어젯밤 술자리에서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쉰내 나는 비아냥들이
식은 감자 껍질 같은 입 밖으로
말보다 먼저 헛나온다
폐사廢寺처럼 적막한 집에서 홀로 깨어
`가마솥에 누렁지'를 냄비에 끓인다
남의 여자 만나 슬쩍 짬짜미 하면서도
반듯한 말 잘하던 나는
이제 영영 사라져버렸다
마누라한테서
아침밥 고박꼬박 얻어먹는 놈 아직도 있냐?
없지?
모두 나처럼 누룽지 한 사발 먹고
이빨 쑤시는 거지?
그지?
으상아, 이 자슥아
눌은 누룽지 먹고 눌언訥言하는
이 자슥아, 으으상아
눈 내리는 마을
오탁번
건너 마을 다듬이 소리가
눈발 사이로 다듬다듬 들려오면
보리밭의 보리는
봄을 꿈꾸고
시렁 위의 씨옥수수도
새앙쥐 같은 아이들도
잠이 든다
꿈나라의 마을에도
눈이 내리고
밤마실 나온 호랑이가
달디단 곶감이 겁이나서
어흥어흥 헛기침을 하면
눈사람의 한쪽 수염이
툭 떨어져서 숯이 된다
밤새 내린 눈에
고샅길이 막히면
은하수 물빛 어린 까치들이
아침 소식을 전해 주고
다음 빙하기가 만년이나 남은
눈 내리는 마을의 하양 지붕이
먼 은하수까지 비친다
눈물 한 방울
오탁번
바다 건너에 간 미영이
밤중의 너의 목소리가
오늘 아침 여기 날아와
교수 5호봉 문학박사
시인 소설가의 귀밑머리
울리는데 자꾸 날리는데
진달래 피던 봄날 찍었던
5 X 7 짜리 칼라 사진 한 장
깨끗한 너의 기호는
희나비처럼 날아와 나를
간지럼 태우지만 허전한 눈물
한 방울 보고 싶은 마음
바다 건너 짝을 찾아 떠난
사랑하는 교육학과 1 학년생
너에게 한 잎사귀에 싸서
보내고 싶다 이만 총총
눈부처
오탁번
정월 대보름날 윷놀이 하다가
눈깜짝이 한 씨가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그만 쓰러졌다
사람들이 놀라 일으키자
- 뭐여? 왜들 이려?
한 마디 하고는 다시 쓰러졌다
동 트자마자 일어나
개 혓바닥같이 생긴 괭이 들고
논꼬 보러 가던
동네에서 제일 바지런한
조쌀한 한 씨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한 씨 삼우제 날
동네사람들이 모여
경로당에서 소주를 마셨다
가뭇가뭇한 한 씨 얼굴이
술잔 속에
눈부처인양 언뜻 비쳤다
이승 저승이
입술에 닿는 술잔만큼
너무 가까워서
동네사람들은 함빡 취했다
- 잔 안 비우고 뭐 해유?
한 씨에게 자꾸만 술을 권했다
단조(短調)
오탁번
진눈깨비가 내릴 만도 하이
실내에는 오일 스토브와
보리차가 끓어 오르는 흰 주전자
빈 의자가 몇 개
밖엔 희고 작은 짐승들이 짖을 만도 하이
철 지난 언덕을 올라가는 그대
해협을 통과하는 겨울 화물선에
우스꽝스런 깃발이 하나
골목에서 용변 중인 개가 하나
콜라를 마시는 해변의 김혜정이 하나
카렌다에서 지난 해가
무심결에 펄럭일 만도 하이
그대와 그대의 옆 사람이 아직
알에서 깨어나기 전
이 언덕에는
세속의 바람이 안 불고
모여라 모여라 하는 바람소리
바람소리를 잊으면 안 되이
실내에는 지난 일들이
대노(大怒)하여 끓어오르고
밖엔 태연하게 눈이 내릴 만도 하이
언덕의 정세는 날로 긴장되어
팽팽히 잡아당길 만도 하이
그대의 나이는 꼭 스무살
그대와 그대의 옆 사람을 만나면
여러가지가 실감날 만도 하이
돌
오탁번
연못가에 돌 하나를 갖다 놓았다
다 썩은 짚가래 같이 어둡기도 하고
퇴적되어 오묘한 결과 틈이
꼭 하느님이 지시다 만 시루떡 같은
충주댁 수몰지역에서 나왔다는 돌,
어느 농가 두엄더미에 무심히 서 있다가
몇 십 년 만에 수석쟁이의 눈에 띄어
수석가게 뜰에서 설한풍 견디던 돌,
이끼와 바위솔이 재재재재 자라고
나무뿌리도 켜켜이 엉켜있다
화산과 지진이 지구를 뒤덮고 난 후
태고의 적막을 가르며 달려온 돌,
비 오면 비에 젖고 눈 오면 눈에 맞는
지 아무렇지도 않은 껌껌한 돌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일은 쏠쏠하기만 한 데
물을 주고 금세 파랗게 살아나는 이끼!
검버섯 많은 내 몸에도
무심결에 파란 이끼나 돋아나면 좋겠다
동백(冬柏)
오탁번
1
지난 늦가을 어느 날
송수권 시인이 원서헌에 왔다
전화 한 통 없이
동백나무 한 그루 안고
대문으로 쑥 들어왔다
두 자 가웃 되는 키에
밑동이 어린애 손목만한 동백나무를
교실 앞뜰에 심었다
동백나무를 사이에 두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날이 더 추워지자
딱 송수권처럼 생긴 동백나무를
멋있게도 멋없는 동백나무를
마대로 칭칭 몇 겹 감아 주었다
제천이 얼마나 추운데
남도의 동백나무가
목숨 부지할 수 있을까
동백나무는
꽃피울 생각 있는지 없는지
죽은 듯 산 듯
겨울잠을 자고 있다
2
앙당거리고 서 있는
동백나무는
1․4후퇴 피란길에
찰가난한 어머니가
무명 포대기에 싸서 업고 가던
눈깔이 화등잔만 한
연약한 내 어린 몸 같았다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천등산 박달재의 강추위 속에서
소설(小雪), 대설(大雪), 소한(小寒), 대한(大寒)
사나운 눈보라에 마주서서
호젓이 겨울을 견디는
안쓰러운 동백나무는
피란 갔던 상주(尙州)땅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겨우겨우 숨을 이어가던
손님이 든 어린 나 같았다
소소리바람 아직 차가운
입춘(立春)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동백나무 보러 나갔다가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눈에 띌락말락 좁쌀만 하던
동백나무 꽃망울이
어느새 강낭콩만큼 자라서
길둥근 동백잎 사이로
거먕빛 볼을 반짝 쳐들고 있다
목숨 부지한 동백나무여
호되고 하전한 생애(生涯)를 견디는 것이
이토록 찬란하다
동해
오탁번
서울에서 죄짓고 동해에 오면
죄도 벌도 몽땅 잊고 오직
오직 하나 낚시대다
빈 낚시대 들고 돌아오는 길에는
까만 대숲에서 나비 벌이
춤추다 빛바랜 족자로 들어가고
송장 메뚜기 한 마리
오죽헌 섬돌에서 날아오른다
오랜만이다 평화여 떡밥이여
갯지렁이여 딸랑딸랑 방울이여
허전한 가슴을 뼈를 더운 피를
끝도 없이 던진다 당긴다 던진다
하루 이틀 뜻 없는 되풀이하다가
허리 잘린 지렁이가 되어
피도 똥도 아닌 눈물 흘린다
아침 바다는 미친 듯 춤추고
머리맡의 라디오를 켜면
북한방송이 너무나 잘 들려
목이 메었다 물도 공기도
진작 통일이 되었거늘
파랑불 빨강불 신호에 맞춰
인간들만 두 토막을 치고 있다
호박엿 엿치기하며 침 흘리고 있다
동해 설송
오탁번
소나무 가지에 내린 눈이
먼 파도 소리에 잠을 깨는
입춘날 아침,
대관령이
흰 수염 쓰다듬으며
굽은 허리를 펴고
동해 바다는
푸른 치마폭 펼쳐서
소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담고 있다
두레반
오탁번
잣눈이 내린 겨울 아침, 쌀을 안치려고 부엌에 들어간 어머니는 불을 지피기 전에 꼭 부지깽이로 아궁이 이맛돌을 톡톡 때린다 그러면 다스운 아궁이 속에서 단잠을 잔 생쥐들이 쪼르르 달려 나와 살강 위로 달아난다 배고픈 까치들이 감나무 가지에 앉아 까치밥을 쪼아 먹는다 이빠진 종지들이 달그락대는 살강에서는 생쥐들이 주걱에 붙은 밥풀을 냠냠 먹는다 햅좁쌀 같은 햇살이 오종종히 비치는 조붓한 우리 집 아침 두레반
두절(杜絶)
오탁번
곡우(穀雨) 지난지도 한참 됐는데
새잎 하나 피우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벽오동이여 대추나무여
학(鶴)이 날아오는
하늘 지새우고
천둥번개 요란한
벼락 맞을 날 기다리며
묵묵부답
춘신(春信) 두절(杜絶)이다
봄이 왔다고
출랑대며 꽃 피우다가 이내 지는
나무들아
두절(杜絶)이 진짜 통신(通信)인 것을!
똥볼
오탁번
축구시합하러 운동장으로 나갈 때
내가 코딱지를 파 먹으면서
개미 똥구녁 맛 같다고 하니까
주근깨가 다닥다닥한
여자 부반장 복실이가
멥쌀눈을 흘겼다
나는 동해물팀 공격수
등번호 9를 달고 냅다 달렸다
찬스를 잡아 슛을 했는데
아뿔사! 똥볼이 됐다
복실이가 메롱메롱 놀렸다
날아가던 황새가
똥볼에 놀라 물똥을 찍 쌌다
동해물! 장백산!
배고픈 아이들이
악머구리떼처럼 소리쳤다
오늘 축구시합은
복실이 때문에
재수 옴 붙었다
동해물팀이
3대빵으로 깨졌다
라라에 관하여
오탁번
원주고교(原州高校) 이학년 겨울, 라라를 처음 만났다. 눈 덮인 치악산(雉岳)山을 한참 바라다 보았다.
7년이 지난 2월달 아침, 나의 天井에서 겨울바람이 달려가고 대한 극장 나列 14에서 라라를 다시 만났다.
다음날, 서울역에 나가 나의 內部를 달려가는 겨울바람을 전송하고 돌아와 고려가요(高麗歌謠) 어역연구(語釋硏究)를 읽었다.
형언할 수 없는 꿈을 꾸게 만드는 바람소리에서 깨어난 아침, 차녀(次女)를 낳았다는 누님의 해산(解産) 소식을 들었다.
라라, 그 보잘것 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풍차(風車) 소리에 나의 아침은 무너져 내렸다.
라라여, 본능(本能)의 바탕이여. 아름다움이여.
마늘
오탁번
마늘밭 씨마늘처럼 왕겨 덮고
춥고 혹독한 겨울을 지나온 나는
소쩍새 울음처럼 마늘쫑도 싱그러운
잘 생긴 육쪽 마늘이 된 줄 알았다
참숯마냥 빛나던 머리칼
어느새 다 없어진 오늘,
아뿔싸!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퍼마켓에서 파는
표백제 바른 깐 마늘이 되었음을
나는 이제 알겠다
눈물 날 만치 매운 마늘 맛 다 잃고
염치없이 이 나이를 살았고나
곡필(曲筆)과 아세(阿世) 남의 일 아니고
성희롱 강 건너 불 아니었다
자살을 꿈꾸며 살았던
젊은 시절의 자화상에
스스로 개칠하면서 살아온
부끄러운 나의 생애,
기계충 앓은 밤송이머리 큰 눈망울로
창호지문 금간 쪽유리에
☆☆☆☆ 모양으로 종이 오려 붙여
빠끔히 내다보던
천등산 아래 옛마을로
이제 돌아가야겠다
잘못 살아온 생새 이쯤 반납하고
돼지똥 거름 냄새 이냥 풍기는
겨울 마늘밭의 추운 씨마늘로
이제 돌아가야겠다
마실
오탁번
새벽 전화벨이 울리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당뇨가 심하던 진외육촌형이
일흔도 못 넘기고 훌쩍 떠날 때도
지난 동짓달
풍을 맞은 큰형님이
평균수명 간신히 채우고는
그믐달 지듯 눈 감을 때도
꼭두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핸드폰 메세지가 뜨면
열에 다섯은 동창생 부음이다
몹쓸 병에 지지리 고생하던
동창생 하나 둘 떠나가면서
무슨무슨 병원 영안실 몇 호로
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식에
그만 주눅이 든다
술 담배 아직 그 타령인 나는
저승의 호출이 잘못됐을 것 같아
멀쩡한 배도 쓸어보면서
헛기침한다
동백꽃처럼 동백꽃처럼
질 때도 꽃 모양 고냥 지닌 채
숨 거둘 수 없을까
너부데데한 모습 보이지 않고
마실 갔다 돌아오는 것처럼
한 세상 끝낼 수 없을까
이웃에 마실 가서 친 화투판에서
돈 몇 푼 날리기는 했지만
동치미에 국수 말아 밤참을 먹고
막걸리도 몇 잔 했으니
다 본전은 한 것 아니냐고
혼자 생각하면서
사뿐사뿐 돌아올 때처럼
마흔아홉의 까마귀
오탁번
자기공명영상 필름에 나타난 나의 목뼈는
다섯 번째 여섯번째 물렁뼈가 어긋나서
오른쪽 어깨 신경을 누르고 있다
아주 완고하게 또 너무 아름답게
쓸개 떼어낸 법학교수는 6512호에 누워 있고
목뼈 빠진 문학교수는 7211호에 자빠져 있다
아침 여섯 시면 체온계를 들고 들어오는
손이 따뜻한 어린 간호원이
청량리쪽 아침 해무리 가리킨다
너무너무 곱지요? 아침노을이 멋있죠?
오른팔이 저리고 손가락이 쑤시고
무슨 죄 많이 졌기에 손발이 저린 문학교수
생각하면 눈물뿐인 마흔아홉의 저녁 나절에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소월의 시 문득 생각하면서
울고 있다
목뼈 달아매어 제자리로 앉힐 때까지는
침대에 꼼짝않고 누워서
하루종일 라디오만 듣는다
병무상담 세무상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들
육아상담 프로는 나하고 무슨 상관 있을까
이십 개월 된 아기가 엄마한테 제 꼬추를
자꾸만 만져달라고 조른단다
너무너무 무서워요 젊은 엄마의 하소연에
귀가 나쁜 상담의사가 점잖게 말한다
너무 우스워할 것 없습니다 유아기에 흔히 있는
아녜요 우스운 게 아니라 무섭다니까요
이 세상은 무서운 것일까 우스운 것일까
목빠지게 기다려온 나의 서산에서 우는
까마귀여 까마귀여
자기공명영상 필름 한 장으로 흰 벽에 내걸린
나의 운명아
만장(輓章) - 이문구(李文求) 형주(兄主)
오탁번
삼동(三冬)을 지난 마늘밭 마늘아
거름 냄새 풍기는 밭이랑 위에
삐친 눈썹 닮은 마늘 싹이
매운 꿈으로 자라는데
밭두럭 건너 저승에도
막걸리 술판이 한창이라는 듯
문뜩 떠나가는 미운 사람아
메롱메롱
오탁번
팟종에서 파씨가 까맣게 떨어지자
깨알 쏟아지는 줄 알고
종종종 달려가는 노랑 병아리가
참말 우습지?
쇠파리 쫓는 어미소 꼬리에 놀라
냅다 뛰는 젖 뗄 때 된 송아지처럼
내 유년의 꿈이 내달리던 들녘은
옥수수수염처럼 볼을 간질이며
메롱메롱 자꾸만 속삭인다
장수잠자리 한 마리 잡아서
호박꽃 꽃가루 묻혀 날리면
제 짝인 줄 알고 날아와 잡히는
수컷 장수잠자리도
용용 쌤통이지?
내 유년의 꿈을 실은 장수잠자리가
투명한 헬리콥터 타고
커다란 겹눈 반짝이며
꿈결 속 하늘로 날아온다
호적등본에나 남아있는 줄 알았던
추억의 비행장에서는
까망 파씨와 종종종 병아리와
금빛 송아지와 별별 장수잠자리가
날마다 꿈마다 뜨고 내린다
밤송이머리에 중학생 모자 쓰고
떠나온 고향 길섶에
심심하게 피어있는 민들레도
홀씨 하얗게 하늘로 날리며
메롱메롱 나를 부른다
명사산(鳴沙山)
오탁번
명사산 아득한 모래바람 속에서
긴 잠을 주무시는
혜초 스님을 月牙泉으로 모셔다가
서울에서 가져온
마늘종 고추장 깻잎 안주 삼아서
곡차 몇 잔 마신다
스님의 잠동무 아주 잘해 온
사막의 계집들도 불러내어
꼭두서니빛 꽃을 피우는
낙타초 가에 앉혀두고
스님한테 옛 社稷의 흥망을 아뢴다
즈믄 해 동안 잠동무하면서
스님한테 살가운 간지럼 많이나 태운
양젖 냄새 나는 위구르 계집과
말젖 냄새 나는 흉노 계집이
정말 갸륵해
월아천 옥빛 물로 옥가락지 만들어
모래울음 보채는 손가락 손가락에
하나씩 끼워준다
발바리
오탁번
봉양읍 블루힐 전원카페에서
하릅 강아지 발바리를 데려왔다
호랑나비 보고도
발발발 달려가는
그냥 그런 암놈 검둥개다
흰털이 소복한 가슴과 앞발목이
꼭 고양이처럼 생긴
딱 고양이만한 발바리는
정구공을 던지면
쏜살같이 달려가서 물어오고
내가 외출했다 돌아오면
내 허리까지 뛰어오르면서
까무러칠 듯 나를 반긴다
발바리는
앞발로 모가지를 긁다가는
꼭 개씹단추처럼 생긴
제 소문(小門)을 혀로 싹싹 핧는다
개는 한 살이면 성견(成犬)이 되어
새봄이면 암내 내고 새끼를 밸테니
어미 될 준비를 하는 것일까
내 어린 자식 키울 때
우리말 가르치듯
발바리를 요리조리 어른다
- 이리 와! 저리 가! 안 돼! 옳지!
새봄이면 젖꼭지 수만큼 태어날
예닐곱 앙증맞은 강아지들이
눈앞에 삼삼히 떠오른다
밤
오탁번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밥 냄새
오탁번
하루걸러 어머니는 나를 업고
이웃 진외가집으로 갔다
지나가다 그냥 들른 것처럼
어머니는 그냥 나오려고 했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밥 냄새를 맡고
내가 어머니 등에서 울며 보채면
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
- 언 놈 밥이나 먹이고 가요
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밥소라에 퍼 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 밥 때 되면 만날 온나
아, 나는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 본적이 잆다
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
진외가집에서 풍겨오는 밥 냄새를 맡으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 하동지동 :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갈팡질팡하며 조금 다급하게 서두르는 모양
방아타령
오탁번
-여보, 카섹스가 뭐래유?
요즘의 성풍속이 TV에 방송되자
계집이 사내에게 물었다
-병신, 자동차 안에서 방아 찧는 것도 몰러?
마당의 모깃불이 시나브로 사위어갔다
이튿날 사내는 계집을 경운기에 태우고
감자밭으로 감자 캐러 나갔다
산비둘기가 싱겁게 울고
암놈 등에 업힌 메뚜기는
뙤약볕이 따가워 뺨 부볐다
-여보, 우리도 카섹스 한 번 해 봐유
-뭐여?
-경운기는 차 아니래유?
사내는 경운기를 냅다 몰았다
계집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소쿠리 가득 감자를 캐면서
계집이 사내를 핼긋핼긋 할겨보았다
-저, 병신
사내는 욕을 하며
구들장보다 뜨거워진 경운기에
계집을 태웠다
배추흰나비
오탁번
호수보다 더 잔잔한 기다림으로
저녁 노을 지는 그리운 하늘 아래
배추흰나비처럼 날아다녔다
저녁 새 깃드는 먼 숲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나무 아래 이끼를 기르듯
그렇게 수많은 아픔으로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얼굴
보고 싶은 눈썹 날리는 머리칼
양 한 마리가 초원으로 멀리 숨듯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흐려지는 눈앞에 밟히는
눈 코 입 귀 머리칼
나무숲보다 더 그윽한 그리움으로
이슬 방울조차 무서운 배추흰나비처럼
지금 나는 날아오르고 싶다
백두산 천지
오탁번
솟구쳐 오른 백두산 멧부리들이 온뉘 동안 감싸안은
드넓은 천치가 눈앞에 나타나는 눈깜박할 사이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숨이 막힌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메꿏은 우레소리 지나간 여름 한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
내 어린 볼기에 푸른 손자국 남겨 첫 울음 울게 한
어머니의 어머니 쑥냄새 마늘냄새 삼베적삼
서늘한 손길로 손님이 든 내 뜨거운 이마 짚어두던
할머니의 할머니가 백두산 천지 앞에 무릎 꿇은 나를
하늘눈 뜨고 바라본다 백두산 멧부리가 누리의
첫 새벽 할아버지의 흰 나룻처럼 어렵고 두렵다.
버슨 분홍
오탁번
?
'버슨분홍'이
연분홍의 옛말이란다
옛 어른들이 노끈 고듯
은근슬쩍 만들어 낸 말
아른아른
눈썹이 간지럽네
?멱 감는 아이년 훔쳐보는 동자승 망울 처럼 연하기도 하여라
늙은 선비 흘리는
은근짜 눈매처럼 야하기도 하여라
?버슨분홍 꽃잎 휘날리는데
봄날은
봄날은
그냥 가네
벙어리장갑
오탁번
여름내 어깨순 집어준 목화에서
마디마디 목화꽃이 피어나면
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서리 내리는 가을이 성큼 오면
다래가 터지며 목화송이가 열리고
목화송이 따다가 씨아에 넣어 앗으면
하얀 목화솜이 소복소복 쌓인다
솜 활끈 튕기면 피어나는 솜으로
고치를 빚어 물레로 실을 잣는다
뱅그르르 도는 물렛살을 만지려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손 다쳐서 아야 해도 좋으니?
까치설날 아침에 잣눈이 내리면
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
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한다
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
내 손은 눈곱만큼도 안 시리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에서
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
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
실 잣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별다방
오탁번
장터 골목
간판도 다 떨어진
호젓한 별다방을 보면
그냥 쑥 들어가고 싶다
대덕산 임야도를 보여주며
한 오천 평쯤
희떱게 뚝 떼어주면
낙낙한 마담은
싹싹하게 내 품에 안겨올까
살별처럼 흘러간
옛사랑 다시 만난 듯
'그냥커피' 홀짝 마시면서
눈흘레나 하고 싶다
봄
오탁번
소쩍새는
밤 이슥토록 울고
조롱조롱 금낭화
붉은 꽃잎이 짙다
너비바위 틈에 피어난
개미딸기
오종종오종종
노란 꽃잎이 여리다
하늘 높이 뜬
솔개 눈씨에
참새도 오목눈이도
찔레넝쿨 사이로 숨는다
하느님이
수염에 묻은 황사를 턴다
붕어들이 알 낳느라
몸을 떨며 피 흘린다
봄소식
오탁번
첫돌 아기가
- 엄마엄마 아빠아빠
말 배우듯
봄이 되면 꽃들도
- 가갸거겨 오요우유
한글을 하나하나 배우면서
예쁜 눈망울을 뜨는 것일까?
내가 사는 삼호 아파트 개나리는
봄이 온 지도 모르고
겨울잠에 그냥 빠져있는데
개나리 아파트 담장에는
샛노란 개나리가 활짝 피었다
개나리 지고 진달래 필 무렵
개나리 아파트의 진달래는
꽃피울 생각 영 않지만
진달래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의
진달래는
활짝 볼우물 짓고 있다
첫돌 아기가
- 맘마맘마 지지지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배우듯
봄이 되면 꽃들도
- 개나리개나리 진달래진달래
아파트 이름 하나하나 읽으면서
봄소식 전해주는 것일까?
봄편지
오탁번
무당새가 우편함에 또 알을 깠다
올해는
큰 우편함 작은 우편함
양쪽에 다 둥지를 틀었다
주근깨 나란한 하늘빛 알이
다섯 개씩
앙증맞은 둥지 안에
반가운 편지처럼 다소곳하다
무당새가 우편함에 둥지를 틀면
우체부 아저씨는 골치 아프지만
할아버지는 싱글벙글한다
우편함 대신으로
대문 옆에 갖다 놓은 항아리 안에
편지를 넣던 우체부가
우리 할아버지 흉을 본다
- 어르신은 꼭 애들 같아요
예쁜 무당새가
아기자기 봄소식 전해주는
애련리 198번지
우리 할아버지 집
불두화(佛頭花)
오탁번
바람결에 자늑자늑 흔들리는
곱슬머리 백발을 한 부처님들이
단체사진 찍고 계신다
부처님들이 떼를 지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애련리 원서헌으로
삭풍(朔風)을 오셨나?
하나 둘 셋, 김치!
가지가 척척 휘도록
부처님들의 곱슬곱슬한 머리통은
참 예쁘게도 크기는 크다
점심공양 알리는 운판(雲版)이 울면
모란꽃 산목련 이팝꽃
자밤자밤 골고루 넣은
점심공양 맛있게 잡수신다
황사(黃砂) 날리는 날
눈썹도 예쁜 나비보살들이
불두화(佛頭花) 송이송이
수련이 벙그는 원서헌 연못물로
머리를 감겨드리면
부처님 큰 머리통에
연못물이 하냥 넘쳐서
실크로드 건너
천축(天竺)의 설산도 다 적시겠다
불알
오탁번
자두나무를 베어냈다
울타리 가에 심은 자두나무는
봄마다 물보라빛 꽃이 만발했지만
벌레 등쌀에
자두는 그만 쭈그렁이가 되어
해마다 다 떨어졌다
전지도 해보고
뒤늦게 살충제도 뿌렸지만
만사휴의!
눈 딱 감고
볼썽사나운 자두나무를 아예 베어냈다
엔진톱으로 잘라
울타리 가에 쌓아놓았다
누워있는 자두나무를 볼 때마다
야크똥이 메주처럼 쌓여 익어가는
티베트 시골집 처마가 생각났다
가으내 노을빛 자두나무는
장작이 되었다
숨은 끊어졌지만
나이테는 더 야젓해졌다
눈 내리는 한겨울 아침
난로에서 자두나무가 소신공양하고 있다
아직도 남은 숨이 있는지
오지끈! 뚝! 딱!
거먕빛 자두알이 막 떨어진다
불땀도 그만이다
만발한 꽃처럼 타오르는
불!
불의 알!
붕어
오탁번
수련이 피는 원서헌 연못에는
붕어 가족이 정답게 살고 있다
5년 전 뼘 붕어 여남은 마리 넣었더니
봄마다 산란을 한다
외바늘에 떡밥 꿰어 낚시를 하면
뼘 가웃 자란 어미 붕어도 낚이고
올봄에 부화한 눈썹만한 새끼 붕어와
작년에 태어난 전차표 붕어도
납죽납죽 잘만 잡힌다
원서헌 연못에는
다정한 붕어 가족이 살고 있다
허지만 우리집엔 가족이 없다
아들 딸 결혼해서 집 나가고
직장에 다니는 아내는 춘천에 있다
텅 빈 삼호 아파트 견디지 못하고
왕십리 오피스텔로 나앉은 나는
서울에서는 일단
무주택 독거노인이 되었다
시집 보낸 딸 보고 싶어 울다가도
백일 지난 외손자 생각하면
금세 하하 웃음이 난다
붕어는 IQ가 5밖에 안 된다더니
내가 그 짝이 났나보다
블랙홀
오탁번
같은 동네에 사는 이종택과 함께
白雲池 아래 放鶴里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김종명이네 집에 놀러갔다
멍석에 널린 고추가 뙤약볕 같이 따갑고
함석지붕에는 하양 박이 탐스러웠다
누렁이 한 마리가 마당에서
제 똥냄새 맡다가 꼬리를 쳤다
찰칵! 한 장 찍고 싶은
우리 농촌의 옛 풍경 속으로
재작년 추석 무렵에 무심코 쑥 들어갔다
안방에서 머리가 하얀 안노인네가 나왔다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어른들께 답작답작 큰절을 잘 했다
그러면 친구 어머니가 씨감자도 쩌주고
보리쌀 안쳐 더운밥도 해주곤 했다
-종명이 어머니가 여태 살아계시는구나!
나는 얼른 큰절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몇 만 분의 1초의 시간이 딱 멈추었다
종명이가 제 어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우주에서 날아오는 초음파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임자! 술상 좀 봐!
초등학교 동창 마누라에게 큰절할 뻔한 나는
블랙홀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다
머리가 하얀 초등학생 셋은
무중력 우주선을 타고
저녁놀 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放鶴里에 왔으니 鶴 한 마리 잡아다가
안주로 구워먹자, 씨벌!
종택이와 종명이는 내 말에 장단을 맞췄다
-그럼 그렇고 말고지, 네미랄!
光速보다 빠르게 블랙홀을 가로지르는
鶴을 쫓아가다가
그만 나는 정신을 잃고
종택이 경운기에 실려 돌아왔다
비백(飛白)
오탁번
?
콩을 심으며 논길 가는
노인의 머리 위로
백로 두어 마리
하늘 자락 시치며 날아간다
?
깐깐 오월
모내는 날
일손 놓은 노인의 발걸음이
호젓하다
빙빙과거
오탁번
빙빙과거(氷氷過去)라는 말이 있다
진실하지 못한 채
어름어름 살아온 과거를 뜻하는 말이다
어름어름, 얼음얼음
옛사람의 말장난이 제법이다
- 빙빙과거, 빙빙과거!
나직나직 읊조리다 보면
아득히 흘러간 젊은 날이
고드름마냥 툭툭 떨어진다
가난했던 사랑의 고백도
해토머리 얼음처럼 흔적 없다
좌파도 우파도
순수도 실천도 아닌 채
어름어름 어물쩍 흘러간
내 과거가 볼꼴 좋다
빙어에게
오탁번
간이주점 때묻은 식탁
큰 유리대접 안에서 헤엄치는
빙어
오늘 아침까지도 의림지 깊은 물 속에서
산란의 꿈을 꾸던
빙어
한 마리에 3백원씩 주고
열 마리를 산 채로 먹다
젓가락으로 대가리를 꼭 집어서
고추장에 찍어 입 안에 넣다
빙어
미안해 잘가 안녕
의림지 깊은 추억 속에서
너는 신라 때부터의 내력으로
얼음처럼 차고 맑은 몸으로
몇 백년의 세월을 이어왔지만
지금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흐리다
꽃샘바람
더 춥게 불다
1년살이 꿈이
헤엄칠 때마다
빙어
너를 죽이는 게 아니라
땅거미 진 고개를 올라서며
내가 나를 죽인다
염치도 없는
대가리를
매운 고추장에 처박는다
빙어 사랑해
안녕
사랑 사랑 내 사랑
오탁번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삼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사랑의 깊이
오탁번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둠의 깊이만큼 비애가 끝간 데 없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어쩔 수 없이 젖어드는 그리움의 얼굴
바람이 불고 눈이 오고 또 꽃이 피고
천둥 번개 요란한 새벽마다 눈을 뜨고
너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알몸에 알몸을
가까이하고 여름 여치가 날개를 비벼대며 울 듯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사랑의 깊이만큼 우수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빛나는
너의 흰 손 흰 이마 가슴 적시는 눈물 방울
사랑의 잠
오탁번
하늘은
지금도 하늘빛 하늘인데
오작교(烏鵲橋)까치 비추던
나의 사랑은
광(光)케이블 다 끊어졌고나
나 이제 그냥
운주사 와불(臥佛) 옆에 나란히 누워
깜깜한 잠에 빠질까 하니
세상의 연인들아
발소리 죽이고 지나가게나
나 이제 그만
한 점 구름 배처럼 타고
저승의 하늘을 저어 갈까 하니
은하계의 뭇 별들아
별빛 아예 비추지 말게나
사랑하고 싶은 날
오탁번
앵두나무 꽃그늘에서
벌떼들이 닝닝 날면
앵두가 다람다람 열리고
앞산의 다래나무가
호랑나비 날개짓에 꽃술을 털면
아기 다래가 앙글앙글 웃는다
태초 후
45억 년쯤 지난 어느 날
다랑논에서 올벼가 익어갈 때
청개구리의 젖은 눈알과
알밴 메뚜기의 볼때기에
저녁노을 간지럽다
된장독에 쉬 슬어놓고
앞다리 싹싹 비벼대는 파리도
거미줄 쳐놓고
한나절 그냥 기다리는
굴뚝빛 왕거미도
다 사랑하고 싶은 날
산밭에서
오탁번
가파른 산밭을 매면서 아낙네들은 말했다
매일 이 지경으로 일을 하면
밑구녁도 아예 비뚤어지겠다
건너 산에선 뻐꾸기가 울다 졸다 하였다
밭두럭에선 암소가 제 새끼의 사타구니를
뜨거운 혀로 자꾸자꾸 빨았다
가파른 산밭을 매면서 아낙네들은 말했다
서방이 제 구멍을 못 찾으면 낭패다
밤눈 밝기는 그중 밝으니 괜한 말이다
옥수수 자루가 수염을 날리며 웃었다
돌멩이와 불탄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치는
호미 소리에 뻐꾸기도 암소도 웃었다
삼대(三代)
오탁번
마당에서 들깨를 털던 며느리가 삼베적삼을 풀어헤치고 손자에게 젖을 물린다 에미의 오딧빛 젖꼭지를 물고 있던 손자가 할아버지 곰방대에서 피어나는 담배연기를 보고 방싯방싯 웃는다 젖이 불어 탱탱한 며느리의 젖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할아버지 눈에는 저승에 먼저 간 아내의 단호박 같은 얼굴이 다따가 떠오른다 한창 나이일 때 아내의 젖을 잠자리에서 한껏 어루만져주면 이튿날 아침 애비 젖먹일 때면 펌프 물 나오듯 젖이 철철 나왔다 애비가 백중날 황소 한 마리 타온 것도 다 젖심 때문이다
젖니가 난 손자가 젖꼭지를 자근자근대다 꼭 깨물자 에미는 찰싹 궁둥이를 때린다 손자가 응애응애 울면서 삼베 고의 입은 할아버지의 무릎으로 기어온다 쪼글쪼글한 불알이 축 늘어진 사타구니가 성긴 삼베올 사이로 훤히 보인다 손자는 앙증맞은 손으로 할아버지 불알을 조몰락조몰락 만지작댄다 지저귀를 갈아주던 며느리가 민망해서 아기 손을 톡 치자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도르르 말린다 밭일하자 돌아온 아들이 호박밭에 내갈기는 오줌이 누리 떨어지듯 하는 어느 여름날
새
오탁번
1억 년 전 퇴적암 위에
발자국 화석으로만 남은
난생(卵生)의 사랑이
영원을 가르며 날아갈 때
짝을 찾는 개개비 한 마리가
개개개 울음 운다
빙하(氷河)가 긴 잠에서 깨어나
지구의 결빙을 음모할 때도
서걱이는 갈대밭 물녘
눈도 못 뜬 새끼들에게
어미새가 토해 주는 사랑이
불잉걸보다 뜨겁다
선운사에서
오탁번
1
선운사 입구
민박집 마당에서 모이를 쪼아먹는
토실토실한 암탉도
나팔꽃 우산 쓰고 선운사 찾아가는
어린 여학생들의 맨종아리도
다 선운사 기운을 빼다 박았다
암탉이 갓 낳은 피묻은 달걀이나
송곳니로 톡톡 구멍 내어
쭉 빨아 먹어봤으면
솜털 보송보송한 뺨이나
그냥 한 번 만져봤으면
2
동백꽃은 다 떨어져
서녘 바다로 흘러가고
빽빽한 동백숲이
엿 먹어라 엿 먹어라
헛손뼉을 친다
금동불상 앞에 합장은 하지 않고
해우소에 들러
근심걱정 모두 버린다
똥오줌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비 오는 선운사에서
내 몸도 모두 버린다
나는 이제 몸이 없다
간절한 생각뿐이다
설날
오탁번
설날 차례 지내고
음복 한 잔 하면
보고 싶은 어머니 얼굴
내 볼 물들이며 떠오른다
설날 아침
막내 손 시릴까 봐
아득한 저승의 숨결로
벙어리장갑을 뜨고 계신
나의 어머니.
설날 아침
오탁번
마흔아홉 살에 꼭 죽을 줄만 알았다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도
서른 살까지 못살 줄 알았다
아들 낳고 딸 낳고 집장만하고
아내 모르게 슬금슬금 딴 여자도 보며 살던
서른 살의 꼭두새벽에 잠이 깨면
마흔 살까지는 정말 못 넘긴다는
조바심 때문에 목이 말랐다
마흔 살이 되어 한 예닐곱 해쯤
저승길 익히며 덤으로 사는 줄 알았다
흐흐흐 그런데
마흔아홉도 넘기고
오늘이 쉰 살 되는 설날 아침이다
나보다 키가 큰 아들 딸한테 세배받고
떡국 한 그릇 가볍게 비웠다
이 무수한 나날 앞에 놓고 보니
세뱃돈 많이 받은 아린아이처럼
까불고 싶다
고드름 하나 따서 창처럼 들고
골목골목 내달리면서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노래하고 싶다
쉰 살이 된 설날 아침
나는 정말
두렵다
설미(雪眉)
오탁번
하느님이
새참 먹다가
사레라도 들렸는가
감투밥으로 핀
이팝꽃이
막 흩날린다
하느님의
흰 눈썹 같은
해오라기 한 마리
산허리를
가웃가웃 재며
날아간다
손
오탁번
손은 여자가 여자임을 나타내는
참으로 至純한 기호라고 생각된다.
당신의 손이
환부에 닿을 때
체온계의 눈금에 닿아
그 깊은 시간이 전달되는 소리를
우리는 아직 걱정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뼈마디 마디에 受信의 공간을 마련하고
어깨에 앉은 자디잔 동작.
손은 당신이 당신임을 나타내는
너무나 투명한 기호라고 생각된다.
시간이 전달되는 소리와
그 시간 속에 피어나는 호흡.
아프 고뇌로 접혔다가 다시 이어가는
당신의 깨끗하고 슬픈 의상(衣裳).
사람들은
너무 많은 환부를 지녔다.
당신의 작은 손이
길고 오랜 시간을 지니듯.
솔잎
오탁번
추석 송편 솥에 넣을 솔잎을 따려고
땅거미가 질 때 발소리 죽이고
뒷산에 올라가는 할머니의 얼굴은
손자놈 콧물보다 더 진한 생애의 때
잿빛의 머리칼은 한줌도 안 되지만
소나무의 아픔은 옛 짐작만으로도 다 안다
해 넘어가고 첫잠 든 소나무가
은하수 멀리까지 단꿈을 꿀 때
살며시 솔잎을 따야 아프지 않고
솥에 들어가도 뜨거운지 모른다
말없이 솔잎이 숨 거둘 때마다
젊은 날의 사랑처럼 송편이 익는다
소나무의 슬픔과 솔잎의 아픔을
헤아리며 발소리 죽이는 할머니는
그 옛날 단군 할아버지의 예쁜 애인
노루피 조금 마시고도 시샘만 하여
큰 꿈 이루는 단군 할아버지 애태우다가
이제는 활활 타는 마음도 식은 재 되어
수숫대처럼 가벼운 사랑만 남아서
당신의 옛날 애인 제사상에 올릴
손가락 자국 선명한 그리움을 빚는다
가만가만 발소리 죽이며 솔잎이나 따는
다 저문 가을 들녘 홀로 바람에 흔들리는
수숫대 같은 서러움의 눈빛에는
푸르고 싱싱한 까칠까칠한 솔잎이
할아버지 한창 나이 때의 수염과도 같고
골이 나서 일어서던 비밀의 가장자리
서로 맞부비며 엉키던 그것과도 같아
송우인곡(送友人曲)
오탁번
지난겨울에는
마종하가 갔다
여름엔 이기윤이 갔다
엊그제는 신현정이 갔다
잘 가라
새끼들!
미당문학상(未堂文學賞)이
미당문학상(末堂文學賞)이 되고
알음알음으로
돌려가며 상(賞) 타먹는
이 풍진 세상 버리고
1등으로
저승 테이프 끊었다고
누가 상패(賞牌) 주냐?
분향(焚香),
재배(再拜),
대취(大醉),
슬픔의 테이프도 몽땅 끊기고
늬들 때문에
이제 내 간(肝)은
간도 안 맞는다
새끼들!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純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原始林)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石炭)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原始林) 아아 원시림(原始林)
그 아득한 세계(世界)의 운반(運搬)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石炭)의 발언(發言).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無邊)한 세계(世界)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純白)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純金)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짓.
지난 밤에 들리던 석탄(石炭)의 변성(變成)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純粹)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純粹)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世界)가 운반(運搬)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술나무
오탁번
요즘 나는 산사춘만 마신다
이별하면 안 될 사람과
이별하고 돌아오면서
포장마차에서 눈물 감추고 마시던
소주와 맥주는 아예 손 끊었다
싸고 쓴 소주는
너무 간단하게 몸 주고 돌아서는 여자처럼
뛰끝이 없어서 좋지만
여운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맥주잔 부딪치며 나눈 추억은
담날 아침 설사로 말짱 도루묵이 된다
찰랑이는 산사춘 술잔에서는
회장저고리에 다홍치마 입고
사붓사붓 걸어오는 여자의
연보(蓮步)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산사열매 따서 술 담가 마시려고
올봄 산사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밑동이 내 장딴지만한 산사나무를
10만원 주고 사다가 심었다
정성껏 물을 주고 거름을 했더니
산사꽃이 활짝 피어나고
꿀벌들 날갯소리가 따갑다
고추잠자리 날개빛으로
산사열매가 다닥다닥 익어가는
낭창낭창한 산사나무는
산사춘 담그는 나의 양조장(釀造場)!
박달재 싱그러운 바람도
천등산 간질간질한 안개도
빨갛게 익은 산사열매 속으로
살며시 들어와 깊은 잠을 자는
오오 사랑스런 나의 술나무!
술래잡기
오탁번
- 하날때, 두알때, 사마중, 날때
육낭거지, 팔때, 장군, 고드래뽕!
술래를 정하느라고 떠드는 소리가
토란잎 때리는 빗방울처럼 영롱한데
가위, 바위, 보 잘못 내는 바람에
에이 참, 그만 내가 술래가 된다
-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가쁘게 외치고 나서
동동걸음으로 숨은 동무들을 찾는데
빨래줄에 앉은 고추잠자리만
제풀에 날아올랐다 이내 앉는다
일렁이는 감나무 그림자도
굴뚝새 날아오는 검은 굴뚝도
이냥 아슴프레해지는 해거름,
저녁놀 반짝이는 장독대 사이로
나붓나붓 순이 머리카락이 보인다
까치걸음으로 몰래 다가서서
바둑머리를 톡 때리자
혀를 날름대며 나를 놀린다
- 일부러 잡혀준 거야! 메롱!
숨을 데를 찾으며 생각해 본다
- 쟤처럼 나도 그냥 잡혀줄까?
뒤안으로 뛰어가 토란잎 뒤에
궁둥이가 다 보이게 숨었는데도
순이는 나를 단박에 잡지 않는다
나 혼자 괜히 좀이 쑤시는 사이
나비 한 마리 내 뺨에 살포시 앉는다
술적심
오탁번
혼자 아침을 먹는데
국어교사를 하는 옛 제자한테서
오랜만에 전화가 온다
술적심도 없이
쥐코밥상으로 아침 때운다며
엄살을 떠니까
어마나, 아침부터 술 생각나느냐며
호호 웃는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마른입을 쩝쩝 다신다
술적심은 술이 아니라
숟가락을 적실 국이나 찌개 같은
국물 있는 음식이야!
또박또박 가르쳐 줬는데도
또, 어마나, 호호 웃는다
이놈 넌 F다!
숨은 딸
오탁번
나도 숨겨 논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
'아빠' 부르면서 카네이션 꽂아주며
내 볼에 뽀뽀해줄 보조개도 예쁜 내 딸!
'어험, 어험' 하며 처음에는 멋쩍겠지만
내심으로야 뛸 듯이 좋을 거야
아내는 뾰로통해서 눈 흘기겠지만
덤으로 생긴 딸 설마 구박은 안 하겠지
보름달 따올 만큼 힘세던 내 젊은 날
숨겨논 딸 하나 못 만들고 무얼 했을까
숨겨 논 딸이 없어 민망하긴 하지만
제 발로 숨어버린 딸은 많을지도 몰라
아득한 젊음의 새벽길에서
눈물 훔치며 떠났던 여자들이
나한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딸 하나 몰래 낳아 키웠을지도 몰라
숨어버린 딸이 운명의 해후를 위해
광속으로 달려와 내 앞에 선다면
DNA 검사 없이 바로 내 딸을 삼을 거야
호적에도 바로 올리고 재산도 나눠주고
큰 눈동자 빛나던
내 젊은 날의 흑백사진 보여줄 거야
아아,우주의 어느 행성 바닷가에서
사랑의 불장난으로 태어난 어여쁜 내 딸아
지구가 혜성에 부딪혀 파멸하는 날이 오면
나는 숨어있던 내 딸을 데리고
빙하기를 견디며 살아남아 있을 거야
몇 천 년 몇 만 년이 흐르고
빙하에 짓눌렸던 한반도가 다시 떠오르면
나는 내 딸을 데리고 화석에서 뛰어나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집 한 채 지을 거야
슬픔의 잠
오탁번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나를 거부한다
처음에는 어깨가 그냥 결리더니
팔꿈치가 저려오다가 어느 날 아침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말을 안듣는다
나를 배신한다 복종해 온 지 오십년쯤 되니
이제는 주인 말을 안듣고 제멋대로
쌀뒤주 열쇠도 챙기고 마나님 엉덩이도
모두모두 마음대로 만져도 된다는 뜻일까
오른손 높이 들어 콧구멍도 쑤시고
젊은 여자의 순결도 잘 익은 꽈리를 깨물듯
장난삼아 망가뜨리며 돌아다닐 때
나팔꽃보다 작은 우산 속으로 숨어도
가슴마다 피는 숯불 손톱 위의 반달모양
하얗게 죽으면서도 숨을 쉬었다
늦은 겨울 아침처럼 식어가는 손가락이
하늘 멀리 한점 그리움을 가리킬 때
손가락마다 민들레 씨앗 같은
금침 은침 맞으며 울고 있다
아직은 다 작별하지 못한 사랑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이제는 저승의 이슬밭에서
뽀얀 젖 뚝뚝 흐르는 젖가슴 헤치고
탁번아 탁번아
막내를 부르고 계실
아아 나의 어머니
시
오탁번
나의 시는
된장 항아리 속
꼬물거리는 쉬
쉰 보리밥 쉬파리
고추멍석 위에 쏟아지는
가을 뙤약볕
초등학교 습자시간
족제비털 붓끝에
서투른 궁서체로 피어나던
어머니 어머니
시인
오탁번
엄마가 어린 딸을 데리고 시장 가는 길
감나무에 조랑조랑 열린 풋감을 보고
'푸른 감이 가을이 되면 빨갛게 익는단다'
엄마 말에 고개를 갸웃갸웃 하던 딸은
감나무 가지가 휘어지도록 우는 매미울음 따라
엄마 손 잡고 까불까불 걸어갔네
가을 어느 날 해거름에 시장 가는 길
빨갛게 익은 감이 탐스러운 감나무 가지에
하얀 낮달이 꼬빡연처럼 걸려 있었네
다 저녁이 되어 엄마 손 잡고 돌아올 때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 딸이 말했네
'엄마, 달님이 그새 빨갛게 익었어'
개미가 기어다니는 보도블록을 걸어오는 길
엄마가 까치걸음 하는 딸을 보고 눈을 흘기자
'아기 개미을 밟으면 엄마 개미를 못 만나잖아?'
앙증스러운 어린 딸의 말을 듣고 엄마는
처녀적 시인의 꿈이 다시 생각나 미소 지었네
시인은 못 됐지만 이제 시인 엄마가 되었네
감나무가 빨간 등불 알알이 켜고 환히 비추는
아기 시인과 엄마가 시장 갔다 돌아오는 길
시인과 소설가
오탁번
어느 날 거나하게 취한 김동리가
서정주를 찾아가서
시를 한 편 썼다고 했다
시인은 뱁새눈을 뜨고 쳐다봤다
- 어디 한번 보세나
김동리는 적어오진 않았다면서
한번 읊어보겠다고 했다
시인은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
다 읽기도 전에
시인은 무릎을 탁 쳤다
- 기가 막히다! 절창이네 그랴!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운단 말이제?
소설가가 헛기침을 했다
-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이라네!
시인은 마늘쫑처럼 꼬부장하니 웃었다
- 꼬집히면 벙어리도 운다고?
예끼! 이사람! 소설이나 쓰소
대추알처럼 취한 소설가가
상고머리를 갸우뚱했다
- 와? 시가 안 됐노?
그 순간
시간이 딱 멈췄다
1930년대 현대문학사 한쪽이
막 형성되는 순간인 줄은 땅뜀도 못하고
시인과 소설가는
밤샘을 하며 코가 비뚤어졌다
찰람찰람 술잔이 넘쳤다
실비
오탁번
비 내릴 생각 영 않는
게으른 하느님이
소나무 위에서 낮잠을 주무시는 동안
쥐눈이콩만한 어린 어린 수박이
세로줄 선명하게 앙글앙글 보채고
뙤약볕 감자도 옥수수도
얄랑얄랑 잎사귀를 흔든다
내 마음의 금반지 하나
금빛 솔잎에 이냥 걸어두고
고추씨만한 그대의 사랑 너무 매워서
낮곁 내내 손톱여물이나 써는 동안
하느님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재채기라도 하셨나
실비 뿌리다가 이내 그친다
쌍분(雙墳)
오탁번
가을 햇살 눈부신 솔버덩 아래
상석도 비석도 없는
쌍분 하나
잔디빛 브래지어이지 싶다
백년해로 다 하고 죽은
지아비와 지어미는
그래도 못 다한 사랑이 있는지
지어미는 브래지어 벗어놓고
갈대밭 물녘으로 뒷물하러 갔지 싶고
지아비는 단풍숲에 들어가
시원하게 소피보지 싶다
물침대보다 살가운
잔디침대 위에서
삶의 벼랑보다 더 가파른
광속(光速)의 숨을 쉬지 싶다
?아기별?
오탁번
?
흰 이마 들어 바라보는 먼 하늘
갓 태어난 아기별의 눈물 그립다
슬픈 이별만 남아 있는
내 생애의 마지막 어둠 헤치며
현자(賢者)의 지팡이 되어 길눈 밝히는
오오
나의 사람아
한 자루의 백묵(白墨)이 지니는
말 못할 숨결도 숨결이지만
저녁 노을 아래 눈시울 적시는
달맞이꽃의 황금(黃金)빛도 또 그립다
굳은 언약 깨치며
눈뜨는 새벽마다 보고 싶은 마음
다 안다 안다 알다마다
북한산 이내 물이랑 이루며
하늘가 나비 잠든 아기별을 깨운다
아침마다 아기의 눈빛을 한
오오
눈에 밟히는
나의 사람아
아내는 안해다
오탁번
토박이말사전에서 어원을 찾아보면
'아내'는 집안에 있는 해라서
'안해'란다
과연 그럴까?
화장실에서 큰거하고 나서
화장지 다 떨어졌을 때
화장지 달라면서
소리쳐 부를 수 있는 사람,
틀니 빼놓은 물컵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생일 선물 사줘도
눈꼽만큼도 좋아하지 않는
그냥 그런 사람.
있어도 되고
없으면 더 좋을 그런 사람인데
집안에 있는 해라고?
천만의 말씀!
어쩌다 젊은 시절 떠올라
이불 속에서 슬쩍 건드리면
-안 해!
하품 섞어 내뱉는 내 아내!
아빠
오탁번
아빠는 술 마시고 들어오면
나한테 늘 하는 말이 있다
--에헴, 아빠는 어릴 때
잉크가 어는 방에서 공부를 했다!
아빠는 이글루에서 살았나?
아이들의 화실
오탁번
아이들의 손에서 태어나는
썰매 타는 여름과 꽃 피는 겨울
십자가 위에 앉은 까마귀가
몽당 크레용을 뒤집어 쓰고
비둘기 흉내를 내며 웃는다
꽃병 위에 뜬 아침해는
앞니 빠진 아이들의 입으로 들어가고
구름 사이로 솟은 미끄럼틀이
날개를 파닥거린다
아침에 자른 생일과자의 촛불은
어른들의 근심으로 곱게 타오르고
오후의 그림교실에서는
마차를 타고 가는 왕자님이
벽시계에 부딪혀 곤두박질한다
시계바늘이 깜짝 놀라
묵찌빠 묵찌빠
가위바위보를 하고
하늘은 온통 화재가 났다
소방수 아저씨의 날개에도
빨주노초파남보 불이 붙었다
어른들의 근심은
물방울 같은 별이 되어
참 잘 했어요 별도장을 찍는다
아침 안부(安否)
오탁번
그대는 빛나는 날개로 날아와
아침의 출입문에 앉는
한 마리 상징(象徵),
비교(秘敎)의 뜰을 거닐기만 하는
이 집의 요즘 게으름을 엿본다.
조간(朝刊)이 던져지는 햇빛의 문(門).
어줍잖은 가장(家長)의 출근버스까지
날아와 금(金)단추마다 퍼덕이는
예닐곱 옛 마을의 노래여.
귀가를 위하여 빗장을 따는
이 집의 평범한 하루 하루
그 구석구석에서
한꺼번에 한 마리 또는 여러 마리
내 이름을 부르며 날아오르는
옛 마을의 안부,
제천(堤川)에서 충주(忠州)로 빠지는 길목
작은 마을 평장골의 산새 떼.
잡아도 잡히지 않는
예닐곱 옛 마을의 노래여.
아침의 예언(豫言)
오탁번
추운 겨울 산(山)과 들 사이로
따듯한 강(江)이 숨어 흐르듯
추울수록 강(江)은 따듯해지고
모든 가까이 있는
사물(事物)이 눈물겹고 고맙듯
서러운 몸에서
뜨거운 사랑이 태어나고
온 오물(汚物)속에서 이름모를
풀씨는 싹튼다.
말구유에서 나신 그대는
별이 내리고
뜻있는 자(者)가 경배할 때
아침과 저녁, 암흑과 광명을
분별할 시간도 장소도
없는 전지(全知)의 하늘.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힘든 대낮에
그대여, 우리도 2천년전 아침처럼
그 빛깔의 하늘 아래 있게 하라.
서러운 몸과 마음을
분별할 시간도 장소도
없는 하늘과 땅에서,
이름모를 풀씨는 싹튼다.
어두워도 한 닷새 어두우면 좋지
열두달 어둡지는 말아야 되는 법,
언덕에 부는 제천(堤川)의 바람이여
숲은 잎을 떨구었지만
그 안에 바람의 속도를 잠재운다.
열매의 양분을 아낀다.
바람은 중앙선에서 고속도로에서
시속을 자랑하며 살아가지만
글 아는 사람들은
스토브 위에 무위를 끓인다.
한 두컵 마시며
목이 떨어지는 전봉준(全琫準)의 사랑을
노래하며 춤추며 부끄럽다.
일주일 전에 땅에 오신 그대는
산(山)과 들 사이로
따듯한 강(江)을 주시고
강물을 뿌리며 죄를 씻으셨지만
별을 따라 주인을 찾아 가는
현자(賢者)의 야행(夜行)처럼
부활의 시대는 어둡고 길다
어둡고 길다.
손바닥에 박히는 형벌의 아픔이
진실로 구원의 기쁨이기를
땅의 평화이기를.
제천(堤川)의 바람이여
서러운 몸과 마음이여
추운 들 사이로 흐르는
따듯한 예언(豫言)을
이 새 아침에 이해하리라.
아침행진(行進)
오탁번
아침마다 날아오르는 빛나는 새떼,
그대들의 발자욱 소리에
큰 마을의 잠이 깨고
반듯한 견장 위에 드리우는
곧바른 시간의 팽팽함이여.
아침의 순수는 날아올라
하늘과 땅의 모음을 노래할 때
가장 아름다운 불이
그대들의 대면에서 남 몰래 점화된다.
나라의 울타리에 한 그루
사철나무를 심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줄 아는
모든 것을 정말 얻을 줄 아는
오, 나라의 아침,
그대들의 하나같은 발자욱 소리.
안행(雁行)
오탁번
해 설핏 기운 북녘 하늘로
나울나울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고래실 논바닥에서 벼이삭 쪼아 먹고
미꾸리도 짬짬이 잡아먹어
날갯죽지에는 보동보동 살이 올랐겠다
휴전선 넘어갈 때는
형제끼리 총 겨누는 사람들이 미워서
물똥도 찍찍 내갈기겠다
날아가다가 좀 쉬고 싶으면
황해도 연안 갯벌에 내려앉아
북녘 사람들에게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와
천수만 갈대밭 흔드는
겨울바람 소리도 전해주겠다
압록강 건너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씨 뿌리던
광막한 만주벌 날아갈 때는
기럭기럭 기럭기럭 슬피 울면서
천오백 년 전 고구려 때
흙 속에 깊이 묻혀
여태껏 눈도 못 튼 볍씨의
긴긴 잠을 흔들어 깨우겠다
나볏이 줄지어 날아가는
이웃 형제처럼 수더분한 기러기 떼여
고구려 사람들의 조우관(鳥羽冠) 깃털같이
못자리에서 쑥쑥 자라는 모를
마을 사람들이 두렛일로
한 모숨 한 모숨 모내기하듯
몇 천만리 아득한 북녘 하늘을
나울나울 정답게 날아가겠다
알요강
오탁번
풍물시장 좌판에 놓인
작은 놋요강 하나가
흐린 눈을 사로잡는다
명아주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는
그놈을 냉큼 산다
기저귀만 때면
손주를 도맡아 키워준다고
흰소리 하도 했으니
미리 알요강 하나 마련한다
내년 이맘때나 손자가
기저귀를 떼겠지만
문갑 위에 모셔놓은
배꼽뚜껑도 예쁜
알요강에서는
벌써 향긋한 지린내가 난다
손지 오줌 누는 소리도
아주 잘 들리는
동지 섣달
긴긴밤
약속
오탁번
망년회 날짜 잡으려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건다
-다음 주 금요일 저녁 어때?
다들 좋다고 한다
그런데 젠체하는 한 친구는 꼭 이런다
-선약이 있나 없나 확인해 보고
백수가
무슨?
나는야
365일
아무 약속 없으니까
망년회 약속
핸드폰에 불났으면 좋겠다
애기똥풀
오탁번
1
개구리밥 자라는 둠벙가에서
눈 깜박이며 살레살레 고개젓는
애기똥풀의 가녀린 꽃잎 위로
문득 떠오르는
진외육촌 누나의 얼굴이여
아직 눈도 못 뜬 내 사타구니에
새끼자라의 연한 살결 간지럼 태우며
애기똥풀 柑黃빛 꽃물 발라주던
누나의 눈웃음이
봉숭아물 곱게 든 손톱만큼 예뻤다
둠벙도 먼 강물도 꿈꾸지 못하는 나에게
누룽지처럼 맛있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마련해 주고 떠난
누나여
2
새끼자라가 눈을 뜨고 둠벙에서 나와
흐린 강물 헤엄치며 불러보아도
이젠 영영 보이지 않는
땀방울 송송 맺히던
진외육촌 누나의 얼굴이여
간장종지만한 젖가슴도
쥐이빨 옥수수 같은 앞니도
세상의 바람 속으로 다 사라져 버렸다
추억의 빈 공책 빛바랜 페이지에서
옹알옹알 속삭이며
그때 그 어린 눈망울로
내 사타구니의 다 큰 자라가 미운 듯
말똥말똥 눈흘기는 애끼똥풀이여
누나여
액(厄)막이연(鳶)
오탁번
내내 썰매 타고 눈싸움만 하느라
색동 설빔은 그만 얼룩이 다 졌지만
정월 대보름 아침이 밝아오면
부럼을 깨물고 더위도 팔고
고드름 따먹으며 고샅길을 내달린다
저녁이 되어 보름달이 둥실 떠올라
온 동네는 白夜처럼 환해지고
돌담가 달집에 불을 놓으면
달집에 쌓인 생솔가지가 불타며
냄비 속 쥐이빨 옥수수 튀는 소리를 낸다
달빛이 눈처럼 희디희어
올 여름 장마 걱정하면서
방패연에 이름과 생일 또박또박 적는다
허릿대 대오리도 팽팽한 방패연에
하늘길 노자할 동전 한 닢과
누에고치를 매달아 불을 붙이고
얼레의 연줄 죄다 풀어서
厄막이 厄막이 외치며 연을 날린다
액막이연은
제 목숨 다 하는 줄도 모르고
창과 방패 쥐고 출전하는 무사처럼
달빛 넘치는 하늘로 높이 날아오른다
불에 타는 고치가 마지막 잉걸처럼
공중에서 아스라이 깜박일 때
연줄이 툭 끊어지며
방패연은 되똥되똥 내 厄運을 싣고
까마득한 하늘길로 떠나버린다
액막이연 하늘 높이 날아갔으니
구구단 받아쓰기 죄다 백점 맞고
키도 쑥쑥 자라서
올해는 보리고개 잘 넘어가면 좋겠다
불장난 많이 한 대보름 밤
잠이 들면
잣눈이 내린 고샅길을 지나
키 쓰고 소금 얻으러 가는 꿈을 꾼다
어머니
오탁번
1
어머니,
요즘 술을 많이 마시고 있읍니다
담배도 많이 피웁니다
잘못했읍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읍니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잊지 않겠읍니다
밥도 많이 먹고 잠도 푹 자겠읍니다
어머니!
3
봄햇살 아기손처럼 고물고물
물레, 낮달맞이, 술패랭이, 현호색 간질이며
연노랑 분홍빛 보라빛 웃음을 터뜨리는 곳
차를 몰고 온 석탄빛 손들이 놀라
길 옆 오이넝쿨 아래로 숨는 곳
나는 방금 돌 지난 앉은뱅이꽃이에요
나는 그저께 이산 온 우산꽃이에요
에헴, 나는 60년 전 애련분교 때부터
이 학교를 지켜 온 부처꽃이지
우리 모두 할미꽃에게 큰절을 드리기로 할까요
까르르 웃음소리에 연못 속 청개구리 수련 위로 뛰어오른다
교실 차양 아래 서 계시던 어머니
흰 수건 벗으시며 들판을 향해 손을 흔드신다
탁번아 이제 그만 놀고 들어와 저녁밥 먹으야제
초가집 위 저녁연기 피어오르고
풀물 든 손을 힘껏 쳐들고
봄아지랭이 가물거리는 논둑을 뛰어온다
쑥빛 검은 손 잡으며 반기시는
청동빛 주름진 얼굴
병석에 누워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만히 손을 내민다
어머니, 자리 후훌 털고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어휘에 관한 명상
오탁번
아무리 외워도 늘 소용없다
가로 세로 언제나 헷갈려서
라디오를 켤 때 안테나가
가로로 올라가는지 세로로 올라가는지
밀물 때 조개를 캐는지 썰물 때 캐는지
제부도 바닷길이
물보라 속으로 잠길 때가
밀물 때인지 썰물 때인지
정말 모르겠다
pull에서 밀고 push에서 당기고
르네쌍스 호텔 커피숍에 약속이 있는 날
무거운 문 밀고 들어가다가
그만 또 헷갈린다
pull이라고 써 있는데도
문을 힘주어 밀다가 서양인한테 들키면
국위손상이 되고 벌금도 내는 것 아닐까?
내가 바보일까?
중학교 때 가끔씩 1등도 했었는데?
첫사랑 여자의 왼쪽 눈썹 위에
주근깨가 다섯 개 있던 것도 기억하지만
가로 세로 밀물 썰물 pull push
도무지 뜻을 알 수가 없다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을 나눌 때는
위에서 아래로 놓인 상태라야 되는지
옆으로 된 방향이라야 되는지
당겨야 할지 밀어야 할지
밀물처럼 하는지 썰물처럼 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가로? 세로? 밀물? 썰물? Pull? Push?
이 간단한 어휘들이 내 앞에 와서는
왜 해체되어 무의미가 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엄마
오탁번
엄마는 아빠하고 안방에서 자고
나는 동생과 내 방에 잔다.
동생이 자다 깨어 칭얼거려서
엄마를 불러도 대답이 없다.
엄마 아빠는 무얼 하고 있을까?
우는 동생 내가 달래 재운다.
아침이면 아빠가 싱글벙글 웃는다.
-엄마가 동생공장공장장인 걸 몰라?
엘레지
오탁번
말복날 개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 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그날 밤 꿈에서 나는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여기쯤에서
오탁번
여기쯤에서 그만 작별을 하자
눈뜨고 사는 이에게는
생애의 벼랑은 언제나 있는 법
거기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
하나 따서 가슴에 달고
뜻 없는 목숨 하나 따서
만났던 그 자리 그 어둠 앞에
우리의 죄로 젖어 있는 추억을 심고
그만 여기쯤에서 작별을 하자
똑같은 항아리가 어느 한쪽에
깨어져서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도 아니다
우리의 입술은 아침저녁 비가 오고
내 몸에 묻어 있는 눈썹 하나
머리칼 한 올이 나의 새벽까지
따라와서 죄를 짓자고 속삭인다 해도
너의 찬 손이 뜨거워지고
나의 안경이 흐려진다해도
말 하지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작별을 하자 그만 여기쯤에서 생애의
벼랑에서 뛰어내려 젖은 입술을
입술에 부비며 말하지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여류신인의 일기장에서
오탁번
1
그 순간 제철소의 용광로가 보였다
대장간이 보였어 풀무 속에서 이글거리는 시우쇠처럼 뜨겁고
부드러운 것이 내 몸으로 파고들어왔어 앗 뜨거워 앗 뜨거워
소리치면서 나는 그 순간 죽고 싶었어 아니 아니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정말 고마웠어 시뻘건 쇠막대기 이글거리며
내 영혼으로 파고들어올 때 나는 내 몸뚱이가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어
2
갈대밭이 바람에 마구 쓰러지고 있었어 멀리 멀리 바다소리
내 귓가에서 출렁거렸어 솨솨솨 갈대잎 흔들리는 소리가
내 몸에서 터져나왔어 소금기 비릿한 파도소리에 나는 죽고 싶었어
아니 아니 그 순간 오래 오래 살고 싶었어 내가 자살하면
내 몸뚱이가 소멸된다는 게 너무 슬펐어 하지만 자살 말고
순간을 영원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연애 미학 서설
오탁번
자가운전하는 예쁜 여자가
내가 달리는 차선으로
얌체같이 끼어들기하고는
차창 밖으로 흔드는 하얀 손을 보면
무 베어먹듯 그냥 한 입 물고 싶다
눈 마주치면 눈흘레나 하고 싶다
뒤에서 들이박을 생각 아예 말고
살가운 접촉사고나 내고 싶다
- 지금쯤 고향의 억새밭 물녘에서는
무지개도 뛰어넘을만한 힘센 황소가
녈비에 황금빛 털이 간지럽겠다
밤길에 잽싸게 끼어들기하고는
점멸등 깜박이며 달아나는 차를 보면
반딧불이가 반딧반딧 짝을 찾는 것 같다
나도 한 마리 반딧불이가 되어
하늬바람에 공중제비하고 싶다
홰친홰친하는 낚시대 펴고
동동거리는 형광찌 불빛따라
얄미운 붕어 한 마리 잡고 싶다
- 지금쯤 고향 집 지붕에는
하양 박꽃이 환하게 피어
은하수까지 다 물들이겠다
연잎 앞에서?
오탁번
?
연잎에 내리는 여름 한낮 빗방울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그리움 따라
연잎마다 크낙한 손바닥 하나씩 펴고
호수 위에 떠다니는 내 마음 손짓하네
?
물결 따라 일렁이는 푸른 연잎을 보면
내 눈빛 잠자리 겹눈처럼 밝아지지만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때 그 입술은
예쁜 연꽃 봉오리로 아직도 숨어 있네
?
이른 아침 연잎에 내리는 이슬방울인 듯
마주보며 피워올린 첫사랑의 꽃봉오리!
아무도 모르는 물밑 아득한 깊이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랑으로 피어나는 연꽃!
?
연잎에 내리는 저녁나절 빗방울인 듯
아직도 눈에 밟히는 그리운 얼굴아
잔잔한 호수 물결 지는 듯 다시 일 때
서늘한 연잎 위에서 푸른 눈썹 떠오르네
영희 누나
오탁번
내가 백운국민학교 3학년이었을 때
충주사범을 갓 졸업한 권영희 선생님이
나의 담임교사로 부임해 왔다
내 생애의 한복판에 민들레꽃으로 피어서
배고픈 열한살의 나를 숨막히게 했다
멀리 솟은 천등산 아래 잠든 마을에
풍금을 잘 치는 예쁜 여교사가 왔다
어느 날 하교길에 개울의 돌다리를 건너며
들국화 한 송이 가리키듯 나를 손짓했다
탁번아 너 내 동생되지 않을래?
전쟁 때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오빠도 군대에 가서 나는 너무 외롭단다
선생님이 누나가 되는 정말 이상한 날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났다
송화가루 날리는 봄언덕에서
나는 산새처럼 지저귀며 날아올랐다
누나다 누나다 선생님이 이젠 누나다
영희누나다 영희누나다
가을물 반짝이는 평장골 뒷개울에서도
고드름 떨어지는 겨울 한나절에도
누나와 동생으로 꾸는 꿈은
솔개그늘처럼 아늑했다
영희누나가 있으면 배고프지 않았다
울지도 않고 숙제도 잘했다
영희누나한테 착한 어린이가 되지 못한 날은
꿈속에서 벌서며 오줌을 쌌다
오목눈이
오탁번
강우식을 보면 오목눈이가 생각난다
젊은 날 다모토리에서 소주 마실 때도
꼭 오목눈이 눈처럼
오목한 눈을 뜨고
빤히 바라보곤 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상투적인 수사도 때로는 심금을 울린다!)
쭈그렁이 백발로
인사동 술집에서 다시 만났다
그의 빤달빤달한 이마에서
꽁지가 긴 오목눈이 한 마리가
찔레 열매 따먹다가 잽싸게 날아갈 때면
북극 빙하의 얼음빛
무지개도 언뜻 섰다가 진다
가짜가 많은 세상에서
강우식 저혼자
꼭 오목눈이의 눈으로
세상만사 오목오목 노려보고 있다
오죽헌지(烏竹軒池)에서
오탁번
오죽헌(烏竹軒)에 자라는 대나무를 보려고
지난 겨울 폭설을 헤치며
아내와 아들 딸 데리고 왔었다
사임당의 첫 순결은 깨어져서
달이 되고 별이 되다가
지상의 흙냄새가 그리워
깜장 대나무로 피어났다
율곡이 자란 자궁도 터져서
마디마디 의미 있는 생애가 되어
역사가 되고 관광이 되었다
이 여름 다시 오죽헌을 찾아서
홀로 뜻 없는 묵념 올린다
소나무 그림자 무더기로 나자빠져 있는
오죽헌지(烏竹軒池)에 세 칸 반 낚시대 드리우고
떡밥 뭉쳐 바늘에 꿰고
똥 지렁이 토막쳐서 성찬 차린다
얼굴도 모르는 잉어를 기다린다
입질도 못 받는 나의 생애는
역사도 관광도 똥도 못 된 채
오죽(烏竹)잎에 듣는 빗방울처럼
울고 있다 울고 있다
텃세가 센 저수지에서
특수 떡밥처럼 특수하게 풀리고
바늘에 꿰여 죽어가는 지렁이
더럽게 나는 죽어가고 있다
오줌길
오탁번
올레길 자드락길 두레길
힐링을 위한 길이 많고 많지만
내 맘에 쏙 드는 길은
따로 있다
고샅길? 오솔길? 벼랑길?
천만에!
쑥부쟁이 핀 밭두럭이나
억새 이랑 물결치는 산비알에서
느럭느럭 지퍼 내리고
볼일을 보면
쏴 소리도 시원하게
내 오줌 잦아드는 길
지린내도 물씬 나는
바로 그 길
오줌길!
요즘의 연구과제
오탁번
요즘 나의 연구과제는 오탁번이다
오탁번의 역사인식과정에 대한 고찰
오탁번은 지금 이 글을 쓰는 사람의
고유명사가 아니다 물론 지금 다른 글을 쓰는
낯모르는 사람도 아니다 사람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풀도 아니다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작은 곤충으로 아주 희귀하게 발견된다
천둥산 박달재 오리나무 가지 끝이나
치악산 산매미 울음소리 사이에서
실잠자리 겹눈에나 잠깐 뜨인다
너무 희귀해서 곤충도감에 수록된 적이 없다
채집할 가치가 없으므로 곤충학자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눈깔과 뿔과 주둥이의 모양이
잠자리 같고 하늘소 같고 쇠똥구리 같다
다리가 땅을 파고 뛰기를 하는 데 알맞은 건
딱정벌레와 비슷하지만
갑옷과 고운 날개가 없는 걸 보면
동물 중에서 가장 종류가 많은 딱정벌레는 아니다
성충이 되어서도 유충시절의 기억이 또렷하고
어둠이 풀섶에 내리면
화학적인 에너지를 완전히 빛으로 바꾸어
같은 종의 짝을 찾는 신호를 보내는
개똥벌레의 슬픔도 슬픔이지만
불빛이 너무나 작아서
어느 여자도 어떤 학자도 눈치채지 못한다
쇠똥을 떼어내어 둥글게 다진 다음
식량으로 갈무리하면서
그 속에 알을 낳고 싶어한다
아 오탁번은
아직 채집되지 않은
너무나 작고 눈에 안띄는 벌레다
쇠똥 속에 집을 짓고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역사인식의 눈빛
개똥 같고 쇠똥 같은 불빛을 발산한다
내가 오탁번의 성충으로 직접 변태하기 전에는
그놈의 역사인식과정을
명쾌히 밝힐 실험도구가
나에겐
아직 없다
우리말
오탁번
겨울숲에서 잠을 자던
깨끗한 말과 글이 비로소 눈을 뜨고
아지랑이 비낀 언덕으로 올라서면
지붕과 지붕이 마주보는 마을
금사슬 은사슬 찬란한 햇빛
땅위에 우렁찬 노동의 삽질소리에
모음과 자음이 만나 뜻을 이룰 때
이른 새벽 늦은 밤의 발자국 소리에
새싹들이 터뜨리는 무수한 꽃망울
땀흘린 만큼 풍요로운 창고의 내실
창과 창이 서로 가슴을 여는 마을
서로 아끼고 나누어주는 노동의 결실이
꽃망울 터지듯 아름답게 전파되면
한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삽질소리에
가득가득 피어나는 모국어의 넉넉함
우리 시대의 시인론
오탁번
1
개가죽 방구가 무슨 뜻입니까?
거 있잖아 풍물 놀 때 땅바닥에 놓고 치는 커다란 북 모르는가, 개 가죽으로 만든 북일세
그러니까 개가죽 방구에서는 개같은 소리가 나겠구만요
개년들이 오줌을 싸고 퉁소 부는 놈들이 개같은 불알 하나씩
차고, 식식식, 이런 바람소리도 나겠구만요
암, 고렇고럼 되는 것이지, 뭘
2
지훈은 죽어서도 꿈에 한번 안 보이고
김수영같은 눈깔을 한 시내버스는 뛰다가 멎다가 하는데
김춘수가 꺾어보낸 한 송이 꽃은 이미 꽃이 아니다
이중섭의 꽃대궁은 아직도 독한 향기 풍기고 뻔데기 자지도 발딱발딱 숨을 쉬는데
박성룡과 박재삼은 그 빛나는 괴물과 울음은 어디에 두고
이젠 붓도 말도 더듬거리는지
이 시대의 시인론은 서론에서부터 갈팡질팡 쏙빠진 논문되기는 다 틀렸다
3
조태일이는 오늘도 작두날만 가는구나
그 옆에서 통속작가는 공장처녀들의 월급을 착취하여 포니에 에어콘을 달고
취한 듯 만 듯 앉아 있는 박재천과 강우식의 이마가 제법 좋았다
이만익의 콧수염이 나는 좋았다.
내 친구 현대시 동인의 주지주의는
3차쯤 가야만 비로소 술이 되고 시가 되는데
학교에서는 노스롭 후라이로 점심을 먹고
신동엽의 금강 속에 그의 애호가들을 수장해버렸다
4
소월이여 목월이여 그대들은 우리 시문학사의 초승달인가 그믐달인가
마종기의 꽃으로 서서 흔들리는 슬픔을
김영태 황동규의 웃음도 눈물도 아닌 웃음과 눈물을
이성부의 톱밥을 오규원의 단추 한개를
정진규의 열쇠 하나를 최승자의 오 개새끼를
동해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고은이의 자유를!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나는 언제나 술래다
우리 시대의 시인론은 여기서 일단 끝
우표 한 장의 행복
오탁번
오늘 나는 170원을 공짜로 벌었다
회신용 우표를 동봉하여 배달되는
그렇고 그런 우편물이 가끔 있는데
회신 안해도 되는 것들이 많다
인물백과사전을 내는 출판사나
데이터뱅크를 차려놓고
시인 작가와 대학교수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신문사나
여론조사를 하는 단체에서
회신용 봉투에 우표를 붙여서 보내지만
나는 우표만 뜯어내어
요긴할 때 써먹는다
더듬이가 예쁜 물방개 우표는 100원
늦털매미 우표는 150원
하늘거리는 수선화는 130원
오늘은
조선백자 그림이 예쁜
170원자리 우표를 공짜로 얻었다
이 세상 끝에서 끝까지
내 마음 모두 전해줄 우표를
침 발라가며 잘 뜯어내어
지갑 속에 넣었다
나는 아주 기분이 좋다
퇴근길에
생맥주 500cc 마셔야겠다
우화(羽化)의 꿈
오탁번
대나무를 기르는 사람이
영 대쪽같지 않고
난을 기르는 사람이
난커녕 잡초 되어 살아가는
한 많은 한세상
나의 삶이 끝나면
블랙홀 근처
조선 소나무 가지 위에
나는 매미나 한 마리 되어
맴맴맴
우주가 떠나가도록
울어는 보고 싶다
운수 좋은 날
오탁번
노약자석엔 빈 자리가 없어
그냥자리에 앉았다
깨다 졸다하며
을지로 3가까지 갔다
눈을 뜨고 보니
내 앞에 배꼽티를 입은
배젊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하트에 화살 꽂힌 피어싱을 한
꼭 옛 이응 ㅇ 같은
도토리 빛 배꼽이
내 코앞에서
메롱메롱 늙은 나를 놀리듯
멍게 새끼마냥 옴쭉거린다
전동차 흔들림에 맞춰
가쁜 숨을 쉬는
아가씨의 배꼽을 보면서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 옛날 길을 가다가
아가씨를 먼 빛으로 보기만 해도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
들끓는 야수를 눌러야 했던
내 청춘이 도렷이 떠올랐다
공짜로 지하철을 타고
맨입으로 회춘回春을 한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
위리안치
오탁번
입과 코를 숨긴
젊은이들 눈망울이
꽃샘에 피어나는
수선화 보듯
봄은 급하게 온다
오늘은
백신 맞으러 간다
다 산 다늙은이지만
추사가 수선화를 보듯
좀만 더 살아보자
그동안 너무 싸돌아다녔다
이젠 위리안치!
새싹 올라오는 마늘밭에서
어정버정하다 보면
다 궁금코 어여쁘다
은행나무
오탁번
할아버지 산소로 가는 강언덕에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번성한 자손 바라는
할아버지의 마음인 듯
다닥다닥 해마다 은행이 열린다
근처에 은행나무 수놈이 없지만
강물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늠름한 제 짝으로 생각하고
정받이를 하는 은행나무
만년 전 빙하기 때
마주 보고 서 있던 수은행나무는
얼음에 갇혀 숨을 거두고
불 같은 사랑 혼자 꿈꾸며
뛰어난 상상력으로 빙하기를 견딘
그 옛날의 암은행나무 한 그루가
할아버지 산소로 가는 강언덕에
홀로 다산성을 뽐내면서 살고 있다고
자손들은 믿는다.
지구를 뒤덮는 빙하 때문에
꽃을 피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수놈과 생이별한 한을 푸느라고
아름다운 암은행나무는
사랑의 열매를 알알이 낳고 있는데
빙하기가 다시 오면
나의 사랑은
무슨 나무로 살아남아서
절멸의 시간을 넘어서고 있을까
응가
오탁번
어린 아기 똥누듯
냄새 풍기면서도 예쁜 것이 詩다
젖몸살 앓는 엄마의 아픔처럼
눈물과 미소가 얽힌 것이 詩다
홍등가에서 사랑을 파는 여자들의
곪았지만 자꾸 파들어 가고 싶은 어둠이
그 냄새 나는 절망이 예술이다
이별
오탁번
이제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그전 같지 않아
삼겹살 곱창 갈매기살 제비추리
두꺼비 오비 크라운
아리랑 개나리 장미 라일락
비우고 피우며 노래했는데
봄 여름 지나 가을 저물도록
얼굴 한 번 못 보다가
아들 딸 결혼식장에서나
문상간 영안실에서나
오랫만에 만나 인사를 나누지
오늘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까
영영 오지 않을 봄을 기다리듯
다 헛말인 줄 알면서도
자주 자주 만나자
약속하고 헤어지지
그래 그래 마음으로야
좋은 친구 자주 만나
겨울강 강물소리 듣고 싶지만
예쁜 아이 착한 녀석
새 식구로 맞이하는
아들 딸 결혼식장에서나
그냥 그렇게 또 만나겠지
이제 언젠가
푸르른 하늘 노을빛으로 물들고
저녁별이 눈시울에 흐려지면
영안실 사진틀 속에
홀로 남아서
자주 자주 만나자고
헛 약속한 친구들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겠지
다시는 못 만날 그리운 친구야
죽음이 꼭 이별만이랴
이별이 꼭 죽음만이랴
이수익
오탁번
?
1962년 서울대 영어교육과 2학년 이수익은
신춘문예에 시를 응모해 놓고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부산행 완행열차는 가다 쉬다 했다
1963년 1월 1일 아침
가판대에서 서울신문을 사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의 시 「고별」이 당선된 게 아닌가
당선소감도 떡하니 나와 있었다
부산 사투리로 이수익은 소리쳤다
-우째 이런 일이?
부산 앞 바다에서 높은 파도가 쳤다
우리 시대의 시인 이수익은 이렇게 탄생했다
당선소감은 문화부 기자 박성룡 시인이
시 쓰듯 대신 썼다
응모할 때 주소를 서울 삼촌집으로 해놓고는
방학이 되자 고향으로 그냥 내려간
이수익!
아기집 태아가
제 태어날 날짜 모르듯
시인은
저도 모르게 태어나야 시인이다
이제는 다 쪽빛 사랑
오탁번
우주가 처음 열리던 날 새벽
알에서 갓 나온 새가
아주 작은 눈 첫번째로 뜨듯
우리들 가슴마다에 지피는
소중한 불씨 하나
지금은 어둠에 묻혀 이름도 없는
아직은 모습 이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저 먼 바닷가로 내닫는 그리움
저 높은 산봉우리로 치닫는 사랑
혼돈의 어둠이 아무리 모질더라도
심지를 돋구어 밝혀나가는
그리움의 사랑이여
사랑의 그리움이여
우리의 겨레가 내달려온
북방의 찬 하늘가에 피는 얼음꽃
추운 계절에도 마주보며
언 볼 부비며 밝혀가는 겨레의 불빛
그 아래 우리들은 하나 되어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쪽빛 사랑으로
우주의 새벽 앞에 우뚝 서 있다
인사동 사람들
오탁번
인사동에 가면
이 사람 저 사람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다
중앙일보 손기상 선배도 가끔 만났다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품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는
투고할 때의 제목은 「겨울 아침행」이었는데
문화부 젊은 기자였던
그가 바꾼 것이었다
아아, 반세기가 다 돼가는구나
시인, 교수하면서 내가 나를 탕진했듯
문화부장, 논설위원하면서
그도 그를 다 소진했는가
요즘은 만나는 일이 없다
낭만파 문화인들은
금주금연하며 깡그리 잠적하였는가
천상병, 김종삼한테 부끄럽지도 않은가
망년회와 출판기념회가 열리던
인사동 사람들, 지리산, 장자의 나비
만나면 미워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이젠 잘 보이지 않는다
귀가 웃는 임영조가 가고
단호박 같은 신현정도
갓김치처럼 매운 송명진도 가고
풍문 만들던 박남철도 갔다
다 갔다
사람이 없는 인사동 길을
나 혼자 노량으로 거닐다가
뒷골목에 숨어서
흘끔흘끔 도둑담배 피운다?
임금님 낚시
오탁번
민박집 주인이 우포늪에서
쪽배를 타고 그물로 잡아온 붕어들이
마당 가 조그만 둠벙에서
붕어찜으로 팔려갈 운명도 모르고
금빛 비늘 번쩍이며 헤엄치고 있었네
우포늪에서 하루 묵던 날
바로 그 둠벙에서
나는 정말 임금님 낚시를 했다네
두 칸 반 외바늘 낚시에 걸려올라온
참붕어 아홉 마리가
우포늪 미끌미끌한 냄새 풍기며
파닥파닥 파닥파닥 꼬리쳤다네
주인이 그물 걷으러 나갈 때
우포늪 붕어가 진짜 보고 싶어서
나도 따라나서려고 하자
쪽배가 위험하다면서 말했네
-저 둠벙에서 붕어 낚시를 하쇼
나는 임금님이나 된 듯
찰락찰락 물결 이는 둠벙에서
홀로 낚시를 했다네
숫처녀의 볼에 입맞춤하듯
새 색시와 첫날밤 살을 부비듯
외바늘에 콩알떡밥 꿰어
예쁜 참붕어를 유혹했다네
우포늪의 물빛 그냥 아롱진
아홉 마리의 참붕어야
까마득한 내 전생에는
아홉명의 애인이 있었던 게 참말이니?
알몸으로 나란히 뉘여놓으면
입술과 허리와 종아리가
정말 예쁜 아홉명의 애인이
우포늪이 생긴 1억 4천만년 전부터
내 전생에 살았던 게 참말이니?
-참말참말 참말참말
내 애인 같은 참붕어 아홉 마리가
지느러미 파닥파닥 대답했다네
잉어를 위한 헌사
오탁번
새벽 안개 자욱한 물결 위로 물총새 날아갈 때
잉어 한 마리 낚으려고 깻묵 뭉쳐 던졌다
첫 달거리하는 계집애인 듯 비릿한 몸냄새
잉어 한 마리 좇아 흰 턱수염 까맣게 잊고
낚시바늘 날카롭게 세워서 유혹의 손짓을 했다
잉어는 낮잠을 자고 난데없는 피라미들이
사정없이 달려들면서 새벽 난봉꾼을 놀렸다
어떤 놈은 불그스레한 혼인색을 띠고
피라미같은 놈아 나하고 그 짓이나 하자는 듯
힘있게 세운 낚시 찌 마구 흔들어댔다
새벽 안개 겉히자 왜가리 한 마리가
피라미 잡아 먹고 물똥 내갈기며 날아갔다
러브호텔의 살냄새도 물침대도 아닌
초평지 흐린 물 위에 뜬 낡은 조대 위에서
피라미 같은 놈이 잉어와 수작하는 꼴 우습다고
왜왜왜 발가락질하면서 왜가리가 날아갔다
작별
오탁번
오늘 아침 그대들과 작별하고 싶다
꿈꾸며 바라본 설핏한 저녁 노을
진토닉에 몸을 푸는 빨간 체리
서해바다 노을 한강까지 밀어올리며
얼음 밑에서 겨울을 나는 누치 한 마리
그대들과 선선히 작별하고 싶다
미끈미끈한 비늘도 모두 흩어지고
목마른 입술 닿은 종이컵도
재활용 봉투 속에서 잠들고 있다
첨탑에서 종소리 아득해질 때마다
내 눈썹 시리게 한
생애의 벼랑도
뜨거운 알코올 목구멍에 쏟아
나의 욕망 연소시킬 불씨도
이젠 그만 사그라지면 좋겠다
아무리 불러봐야 메아리도 없는 아침
떠나간 빈 자리 메워줄 슬픔 하나로
텅 빈 자리에 호젓이 남고 싶다
면도한 두 볼에 스킨로션 바르고
구겨진 넥타이로 목을 감고
죽어가는 관절 일으켜 세워
그대들과 절뚝거리며 작별하고 싶다
작은 어머니
오 탁 번
푸세한 무명 뙤약볕에 말려서
푸푸푸 물 뿜는
작은 어머니의 이마 위로
고운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보리저녁이 되면
어미젖 보채는 하릅 송아지처럼
나는 늘 배가 고팠다
아질이 나서 눈곱이 심할 때
작은 어머니가
솨솨솨 요강소리 그냥 묻은
당신의 오줌을 발라주면
내 눈은 이내 또록또록 해졌다
초등학교 마칠 때까지
작은 어머니의 젖을 만지며 잤다
회임 한번 못 한 채 젊어 홀로 된
작은어머니의 예쁜 젖가슴은
가위눌림에 정말 잘 듣는
싹싹한 약이 되었다
잠지
오탁번
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
밤나무 아래서 아빠와 쉬를 했다
아빠가 누는 오줌은 멀리 나가는데
내 오줌은 멀리 안 나간다
내 잠지가 아빠 잠지보다 더 커져서
내 오줌이 멀리멀리 나갔으면 좋겠다
옆집에 불 나면 삐용삐용 불도 꺼주고
황사 뒤덮인 아빠 차 세차도 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호호호 웃는다
- 네 색시한테 매일 따스한 밥 얻어먹겠네
장독대
오탁번
할머니의 들숨으로
어머니의 날숨으로
알맞게 익어가는
우리 집 간장과 된장
배불러 친정에 온 고모 같은
막 달거리 시작한 누나 같은
장독대의 크고 작은 독들이
햇살미역 감고 있다
장마
오탁번
푸렇게 일어서는 천둥산의 아침
예배당의 지붕 위에서
귀 달린 구렁이가 꿈틀거린다
돌담의 냄새 옆에는
푸득거리는 한 그루 느티나무
여름벌레들이 떨어져 흘러간다
산수숙제는 정말 어려웠다
순이의 몽당연필도
곤두서서 산으로 뛰어가고
모두 다 입을 다물고
벌레가 개울을 이룬다
얼마 곱하기 얼마는 얼마
얼마 곱하기 얼마는 얼마
아침은 발목까지 빠져서
다 젖는다 다 젖는다.
귀를 앓은 구렁이가 기어다닌다
장모님
오탁번
거실에서 자정까지 티브이를 보고 나서 잠을 자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침대 위에 스탠드 전등을 켜고 잡지를 읽는 안경 낀 장모님이 계셨다 아니 장모님 어쩐 일이십니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황급히 삼키고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장모님이라니 장모님은 벌써 몇해 전에 돌아가셔서 지금은 천안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데 장모님이라니 아뿔싸
잡지를 읽고 있던 아내는 나의 착각이 대수롭잖다는 듯 웃고 말았지만 그날부터 우리집에는 참으로 이상한 평화가 도래했다 아내와 다툴 일도 없고 깨 쏟아질 일도 없게 되었다 장모님 모시고 사는 사위의 예절만 있으니까 남편과 아내로서의 비장의 무기도 탄약이 다 떨어졌다
아내가 스물한 살 처녀일 때 부산까지 가서 당신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말했을 때 아주 난감해 하시던 스물다섯 해 전 장모님의 모습이 어쩌면 지금 아내의 모습과 이토록 흡사하단 말인가 우리들의 가난한 사랑을 근심하는 어른들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해운대 해변을 손잡고 거닐던 그 시절의 바닷물결이 어느 날 자정 무렵에 나의 집 안방 침대 위에까지 밀려와서 나를 벌주는 것인가
낯모르는 사람끼리 저녁 이슬 내리듯 새벽 안개 걷히듯 이상한 인연으로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낳아 기르고 울고 웃고 비장의 무기 꺼내어 첩조전 국지전 전면전 치르면서 휴전 종전 항복 탈주를 밥먹듯 하면서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의 사회는 중성자 망원경으로도 포착되지 않는 전자파들의 폭풍우일까 모든 시간과 공간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블랙홀의 무서운 운명일까
아내여 장모님이 된 나의 아내여 이제는 흰 뼈로 흔적만 남아 민들레 씨앗처럼 가벼워진 그 옛날의 장모님이여 오늘밤 나를 울리는 미운 아내여
쟈스민 차
오탁번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백과사전을
꿈에서도 읽고 또 읽었던 보르헤스가
술집에서 포도주를 마시다가
감기 기운을 느끼고는
집에 가서 아내와 쟈스민 차나 마시려고
밖으로 나와 니코바르2가 쪽으로
느적느적 걸어갔다
보르헤스를 본 버스 운전사가
낡은 버스를 세웠다
그 때 보르헤스는 갑자기
쟈스민 꽃이 하얗게 핀
중세의 수도원으로 사라졌다
늙은 운전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헛것을 보았나, 하품을 했다
보르헤스는 중세의 수도원에서
게으른 수도사가 되었다
핼끔힐끔하는 수녀와 몸을 섞다가
심심해지면 쟈스민 밭에 오줌을 누웠다
쟈스민 흰 꽃 위에서
교미하다가 암컷에게 먹히는
수컷 버마재비를 보았다
몸을 섞다가 죽을 수 없다면
참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자
보르헤스는 순식간에 숫컷 버마재비가 되었다
그 후 쟈스민 향이 더 그윽해진 것은
교미하다가 죽은
보르헤스의 오줌과 정액이
쟈스민 흰 꽃술마다
깊고 부드럽게 스몄기 때문이라고
<세계차백과사전(世界茶百科辭典)>(Oxford Univ. Press, 1958)
69쪽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저녁나절의 꿈
오탁번
베란다의 화초들을 모두 거두어들인다
여름 내내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고
진딧물 똥오줌 받아내며 잎이 시든
슬픔의 기억들을 하나씩 불러들인다
가을은 척추뼈 통증처럼 엄습하고
물러설 수 없는 막바지에서 울고 있다
들국화 피듯 피지 못할 운명이라면
난초칠 붓 한 자루 애당초 소용없이
하늘 멀리 날아오는 기러기의 눈빛으로
서리 덮인 귀밑머리 차갑지도 않으련만
이제 방탕의 기억들도 다소곳이 시들고
스쳐가는 구름 비껴나는 햇살도
허허로운 저녁나절의 꿈으로
조그맣게 접어서 베개 맡에 놓아둔다
금간 척추에서 거문고 소리 들릴까
기러기똥 입으로 받아 삼키면
만성 맹장염으로 젊음을 보낸 창자에서
무서운 가을 하늘 손가락질하는
이제는 잊어버린 슬픔 다시 눈뜰까
저녁연기
오탁번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나의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마을의 높지 않은 굴뚝에서 피어 올라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나 살구나무 높이까지만 퍼져 오르다가는, 저녁 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바로 그 저녁연기였다
저녁연기 같은 것
오탁번
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이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바로 시다.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내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 높이까지만 피어오르다가,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저녁연기, 이게 바로 시다.
저녁밥을 먹으려고 두레반 앞에 앉으면,
솔가지 타는 내가 배어 있는 어머니의 흰 소매에서는
아련한 저녁연기가 이냥 피어 오른다
적막
오탁번
뒷집 할머니가
외꽃이 핀 얼굴로
보행기를 밀며
느티나무 아래 지나간다
담배 한 개비를 건네자
합죽하니 웃는 얼굴
볼우물이 깊다
서녘 하늘
노을빛 왜가리가 느리다
절세미인(絶世美人)
오탁번
-2006년 3월 21일 오후3시
조선시대 다식판 하나 사려고
양성동 골동품 가게에 들렀는데
늙은 주인은 어디 가고
갓 스물 된 아가씨가 손님을 맞는다
볼우물이 고운 복숭아빛 뺨과
몽실몽실한 가슴을 보며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희고 미끈한 종아리는
왜무처럼 한 입 베어먹고 싶었다
다식판은 보는 둥 마는 둥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2006년 3월 21일 오후 4시 반
천등산 손두부집에 들렀는데
삼원색 요란한 월남치마에
발목 다 보이는 나일론 양말 신은
젊은 아낙이 배시시 웃으며 인사한다
브래지어 한쪽 컵이 망가졌는지
짝짝이 가슴이 봉긋봉곳한
주근깨도 예쁜 아낙의 얼굴을 보며
식사 주문도 잊은 채
정신이 휑하니 아득해졌다
-2006년 3월 21일 오후 6시 반
늙은 느티나무가 새잎을 피우고
저녁놀이 서녘 하늘 물들일 때
내내 방망이질한 가슴 진정시키려고
솔잎술 한잔 마시며
옛 사진첩을 그냥 뒤적거렸다
내가 서른여섯살 되던 가을
서른한살 아내와 함께
설악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 술잔을 엎질렀다
골동품 가게 아가씨보다도
손두부집 젊은 아낙보다도
몇곱절 예쁜 젊은날의 아내가
방긋 웃으며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날부터 지갑 속에
아내의 사진을 넣고 다니며
아침저녁 새새틈틈 보고 또 본다
어느날 다따가
絶世美人이 된 줄도 모르는
아내는
달팽이관이 고장나서
메슥메슥 입덧하듯 토하고 있다
아아 아득히 흘러간 젊은 시절
아내가 아기 배고 입덧할 때
귤 하나 사다줄 생각 못했던 나를
호되게 벌주고 있다
-2007년 1월 12일 오전 9시
새해 들어 입덧 더 심해진
絶世美人의 손을 꼭 잡고
영하 12도 눈보라 치는 날
춘천 성심병원 이비인후과로 간다
정말 거짓말 - 서동(薯童)의 노래
오탁번
시낭송회가 끝난 늦가을 깊은 밤에
인사동 길에 흩날리는 은행잎을 주워서
내 호주머니에 가득 넣어주는 그대여
동복 오씨 호적에 아예 오르고 싶어
볼우물 지으며 날 간지럼 태우는 그대여
모범 택시 타고 한강을 건너갈 때
성수대교 아주 사줄까나 흰소리 치자
정말 거짓말을 참말로 알아듣고
갓 낳은 달걀보다 따듯한 손 건네며
오작교를 건너가듯 숨이 찬 그대여
그대가 아비에게 버림받는 날이 오면
황금과 백지수표 수레 가득 싣고 가서
은하수도 오작교도 몽땅 사줄까나
선화공주의 뜨거운 피 이냥 흐르는
정말 거짓말을 참말로 믿는 그대여
제비꽃
오탁번
오종종한
제비꽃을 보면
그냥저냥
제비턱을 한
날랜
제비족이나 되어
낫낫한
홀어미 하나
홀려내고 싶다
제수(弟嫂)
오탁번
지난 겨울 시인들과 정동진까지
눈꽃기차를 타고 여행갔을 때
정동진역 앞 해장국집에 들려
술 몇 잔에 거나해졌는데
목포에서 온 허형만 시인이
그의 아내를 나에게 인사시켰다
평소 형 아우 하는 사이어서
앙똥한 내가 술김에 말했것다?
- 내가 시아주비니까
제수(弟嫂)씨 큰절 받아야겠소
뽕잎빛 동해바다가 하하하 웃었다
허형만 시인의 아내는
입가에 자란자란 미소를 흘렸다
사람들이 똥그라미를 하고 보는 가운데
나는 큰절을 받았다
지갑에서 돈을 몽땅 꺼내
시아주비는 절값을 냈다
절값으로 준 돈이
한 십이삼만 원은 될라나?
그냥 치레로 사오만 원 줘도 됐을 텐데!
제수(弟嫂)씨한테 절값으로 준 돈에
살살 배가 아파오는 나를 약 올리며
뽕잎빛 동해바다가
또 하하하 웃었다
종종이
오탁번
원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1963년 겨울
청량리역에 내렸다
안암동까지
추운 길을 걸어갔다
그 길이
내 생애의 비알이고 벼랑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른 채
내가 걸어온 길은
기승전결 엉망인 쓰다가 만 소설
낙서 같은 시
눈물이 앞을 가려
(상투적 수사가 이럴 땐 딱!)
더는 얘기 못 하겠다
……
종종이나 찍어야지
죽음에 관하여
오탁번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뜻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
바지 속에서 문득 일어서는 뿌리!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했다
.바다 하나 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바다 하나요
바지바지 말해도 바다바다가 되었다
쥐에 관한 명상
오탁번
민박집 천장에서 쥐 달리는 소리 들리면
참말 오랜만에 동갑내기 만난 것 같다
쥐불놀이 하다가 눈썹 태우고
시래기죽 먹고 잠든 겨울밤
쥐불연기에 수염을 그슬린 쥐들이
눈썹 태운 나와 더 놀고 싶다는 듯
쥐오줌자국 난 천장을 밤새 달렸다
씨옥수수 갉아먹던 새앙쥐들도
이불 속까지 기어 들어와
내 어린 발가락을 자꾸 깨물었다
고드름이 제 무게에 툭툭 떨어지는
아침이 밝아 오면
내 꿈길까지 따라오며 보채던 쥐들은
일곱 문 반 내 고무신에
봉숭아씨처럼 예쁜
쥐똥만 남겨 놓고 숨어 버렸다
쥐 달리는 민박집 천장 아래 누우면
옛 동갑내기의 발자국소리 들린다
쪽빛 사랑
오탁번
우주가 처음 열리던 날 새벽
알에서 갓 나온 새가
아주 작은 눈 첫번째로 뜨듯
우리들 가슴마다에 지피는
소중한 불씨 하나
지금은 어둠에 묻혀 이름도 없는
아직은 모습 이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저 먼 바닷가로 내닫는 그리움
저 높은 산봉우리로 치닫는 사랑
혼돈의 어둠이 아무리 모질더라도
심지를 돋구어 밝혀나가는
그리움의 사랑이여
사랑의 그리움이여
우리의 겨레가 내달려온
북방의 찬 하늘가에 피는 얼음꽃
추운 계절에도 마주보며
언 볼 부비며 밝혀가는 겨레의 불빛
그 아래 우리들은 하나 되어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쪽빛 사랑으로
우주의 새벽 앞에 우뚝 서 있다
천둥산 박달재
오탁번
천둥산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모두 보냈다 산은 편안하게 강 건너 멀리 앉아 있었다 흐린 날이면 이마를 구름으로 가리고 비가 오면 비 뒤에 숨었다 산불이 났을 때 아무도 산에 올라가 볼 엄두도 못내고 동네가 두런두런 두려움으로 납작해졌다
밤이 되면 박달재를 넘어 흑인병정들이 여자사냥을 나왔다 헬로! 쪼꼬레뜨 기부미 기부미! 후레쉬를 번쩍이며 여자를 찾는 병정들을 따라다니며 나는 손을 내밀었다 재수가 좋은 날은 하나 얻어먹었다 어른들은 밤늦도록 잎담배만 말아 피웠다
천둥산 산불이 아침이면 저절로 꺼져서 햇빛 속에 빛나는 것도, 내 뱃속에 들어간 쪼꼬레뜨가 동네여자들의 몸값이라는 것도 나는 몰랐다 누룽지를 달라고 보채다가 부지깽이로 얻어맞고 눈물 흘리며 바라보면, 높고 평화로운 산이 미웠다 돌멩이를 걷어찼다 발톱이 아파서 깨끔발로 뛰기만 했다
어두운 술집 모퉁이에서 천둥산 박달재를 흥얼거리는 지금도 나는 잘 모른다 천둥산의 산불도, 동네에 자욱했던 잎담배의 연기도, 숯처럼 까만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던 창덕이엄마의 한숨도, 나는 하나도 모른다 천둥산이 나의 이마 높이로 와 닿아 있고 박달재의 긴 구렁 짧은 구렁이 내 가슴까지 와 있다는 것을 그저 눈곱만큼 눈치채고 있을 뿐, 정말이다 하나도 모른다 몰라!
천등산
오탁번
천등산은 밤이 되면 等高線이 부풀어올랐다
그해 여름 병정들의 삼륜 오토바이가
밤마다 키가 크는 천등산 고개를 넘어갔다
병정들은 천등산 속으로 들어가 山이 되었다
자작나무처럼 얼굴이 흰 진외육촌형도
천등산 속으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가으내 천등산에는 산불이 났다
하늘로 퍼져오르는 자작나무 타는 연기가
진외육촌형이 흔드는 흰 손수건 같았다
철새
오탁번
우리 혼인생활 30년에
밑줄 그을 만한 뜨거운 사랑 없었지만
하늘 높이 날아오를 만한
기쁨 없었지만
아내여 미운 아내여
다음 생에서 또 만나
하늘을 날아가다가
좀 쉬고 싶으면 날개를 접고
가을 논에 흩어져 있는 햅쌀을
냠냠냠 쪼아먹는
기러기 눈빛을 한
철새나 될까 몰라
아내여 미운 아내여
첩란
오탁번
잎사귀 뻗쳐나간 모습이 꼭 난초처럼 생긴
우리나라 야산에 흔하게 자생하는 다년생 풀이
난초가 아니면서도 난초인 듯 대접도 받고
잎줄기가 뻗어나가다가 흙에 닿으면
그 자리에 또 뿌리내려 새로운 잎을 피운다
밤중에 오줌 마려워서 몇 번씩 잠을 깨는
예쁜 첩이 서방님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것같이
난초 흉내 그럴 듯하게 내는 요염한 첩란
진짜 난초는 박하담배 연기에도 고개 돌리고
꽃망울 터뜨리다가도 도로 입술 다물며
세상일 세상 사람 모두 얕잡아보는지
은은한 꽃향기 나에게는 전해주지 않지만
가느다란 허리가 너무 요염한 첩란은
종종걸음으로 나를 따라오며 꽃을 피운다
예쁘고 어린 계집얻어 딴 살림 몰래 차린 듯
삼동을 지나고도 입술 열지 않는 난초는 잊은 채
어느 야산 자락 봄햇볕 아래 첩란과 잠들고 싶다
초겨울 아침
오탁번
첫눈이 내린 초겨울 아침
지난 봄에 시집간 제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저 아기 가졌어요
눈을 뒤집어쓴 나뭇가지들이
아기 예수의
하얀 배내옷 입고
옹알옹알 옹알이 한다
크리스마스트리의 꼬마전등알처럼
나뭇가지마다
눈송이들이 반짝인다
―저 아기 가졌어요
첫눈이 내린 초겨울 아침
지난 봄에 시집간 제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춘몽(春夢)
오탁번
아내와 함께 스포티지 몰고
홍쌍리 매화마을로 매화구경을 갔다
한창 피어나던 매화는 꽃샘추위에
엇, 추워! 하면서 올스톱,
피다만 매화만 싱겁게 구경하고
내친김에 핸들을 꺾었다
장흥에서 제주 성산포행 카페리를 탔다
사람은 3만8천원, 자동차는 6만8천원
넘실대는 푸른 봄바다는 공짜!
이중섭의 아내같이 생긴 수선화도
추사의 족제비붓 같은 솔잎도
재재재재 춥다
한라산 산록을 재는 측량기사인듯
몇 번이고 돌고 돌았다
흑석영(黑石英)처럼 빛나는 까마귀떼와
눈 쌓인 한라산이
부운(浮雲)처럼 다 하릴없다
이틀을 묵고 떠나는 날 아침
조천 바닷가에 있는
조붓한 '시인의 집'에 차 마시러 갔다
손세실리아 시인이
꼭 어는 낭만 시인의 아내인듯 사는 곳
방명록에 한 줄 쓰라는 말에
나는 붓펜으로 일필휘지했다
-시인의 집에서
손세실리아와 사랑을 나누다
2012년 立春
그걸 받은 시인이
내 아내에게 보여주면서 웃었다
볼이 발그레해지면서
얼른 한쪽으로 치워놓을 줄 알았는데
나, 원, 참!
내 아내에게 냉큼 보여주다니!
차를 마시고 일어설 때
아침 요기하라면서
치즈 토스트까지 챙겨주었다
배 타고 바다 건너오면서
토스트 냠냠 잘 먹었다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이내 답장이 왔다
-다녀가신 순간이 춘몽 같기도.....
그렇기도
아무렴, 일장춘몽(一場春夢)이긴 해도
이쯤 춘몽이면 썩 괜찮은 것 아냐?
그렇고말고! 그렇고말고!
히힛히힛, 봄바다가 자꾸 웃었다
춘일(春日)
오탁번
풀귀얄로
풀물 바른 듯
안개 낀 봄산
오요요 부르면
깡종깡종 뛰는
쌀강아지
산마루 안개를
홑이불 시치듯 호는
왕겨빛 햇귀
카마수트라의 힌두 사내
오탁번
벌거벗은 녀석 제 물건 곧추 세우고
침상 위에 점잖게 누워 있다
머리맡에는 알몸의 하녀가
녀석의 머리를 젖가슴으로 받치고 있다
또 다른 하녀가 발치에 서서
시렁 위로 연결된 줄을 당기면
잘 생긴 나체의 부인이 망태를 타고
도르래처럼 시렁 위로 올라간다
메주덩이 매달린 시렁 밑에서
막내아들 만들던 아버지 생각난다
하녀가 도르래 줄을 풀면
서방을 하늘처럼 섬기는 부인이
호박보다 더 큰 젖가슴을 하고
터번 쓴 사내의 물건 위로 정확히 낙하한다
막내를 낳고는 젖이 말라 붙은 채
디딜방아에 겉보리 찧던 어머니 생각난다
메기수염을 한 힌두의 사내는
인도대륙의 잘 생긴 여인을
망태에 죄다 담고나 싶은 지
메기웃음 지으며 물건을 뽐낸다
큰스님
오탁번
이승을 떠나는 그대의 누더기 옷자락 사이로
해인사 가을바람 한 줄기 낙엽처럼 빠져나가고
참나무 연기 뼈와 살을 태우며 계곡을 맴돈다
어느 고요한 날 저녁 무렵 둠벙에서 연꽃 피어나듯
오동나무 높은 가지에서 오동잎 하나 뚝 떨어지듯
무심히 돌아왔다가 훌쩍 떠나버리는 그대여
대웅전 앞 석등에 불이 켜질 때마다
목탁 도끼로 패어 불바다 만들려고 안했나
내가 죽어 참나무 장작 위에 자빠졌다고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건 아니지?
석가는 큰 도적이고 달마는 작은 도적이니
나는 도적놈들 밑씻개나 만드는 땡추여
29는 18이요 씨팔은 두 아가리가 맞붙어야지?
두견새 우는 골에 흩어지는 붉은 꽃이여
저승문 앞에 선 그대의 검정고무신 사이로
해인사 가을낙엽 한 줄기 바람처럼 빠져나가고
녹두알 좁쌀만한 똥고집만 누리처럼 하늘을 덮는다
천하 잡놈 잡년들 불두덩에 굵은 서캐로 남아서
백련암 뒷산 소나무 가지에 송충이로 태어나서
훌쩍 떠났다가 무심히 돌아오는 미운 그대여
큰형
오탁번
고래실 논 한 마지기 다 날리고
새벽에 들어온 큰형은
어머니의 분노도 식구들의 근심도
노름판 행운을 빼앗긴 원인이라는 듯
불같이 화를 냈다
그해 겨울
우리집은 전소하였다
일흔 살 하얗게 늙은 큰형은
부모님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
향나무도 심고 단풍나무도 심었다
이제야 단풍잎 고운 장땡을 잡고
-장땡 앞에 안 죽을 놈 있어?
예순도 못넘기고 저승으로 간
그 옛날 노르꾼에게
당당하게 한마디하고 있다
타지마할
오탁번
이맘때쯤 다시 만나기로 하자
이제 여기서 헤어지고 나면
가을 깊어가고 겨울이 오고
또 몇 백년 강물이 흐른 뒤
야무나강이든 갠지스강이든
저 멀리 남한강이든
그 강물 흘러가는
어디쯤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자
손톱 밑으로 빠져나가는
시간의 햇살따라
벵골만 건너 캘커타 지나
아그라 붉은 태양 아래
흰 대리석으로 빛나는 타지마할
죽은 다음에도 되살아나는
왕과 왕비의 살냄새 거웃냄새
또 몇 백년 강물이 흐른 뒤
타지마할의 눈부신 대리석 위에
보름달이 솟을 때
여기쯤에서 만나기로 하자
사랑에는 꼭 이별이 있는 법
저승의 푸른 하늘 아래
대리석이나 오동나무 관이 아니면
관솔구멍이 숭숭 뚫린
소나무 관 속에
금은보화 비단옷이 아니면
무명옷이나 삼베옷 두르고
그도저도 아니면
청바지 차림으로라도
또 몇 백년
강물이 흐른 뒤
우리들 사랑이 타지마할에서
이맘때쯤 다시 꼭 만나기로 하자
탑
오탁번
원서헌 연못가에
삼층석탑을 모셔다 세웠다
시집간 딸이 와서 보더니
탑이 너무 예쁘다고 물었다
-아빠, 이 탑 어디서 났어?
석탑에 비낀 노을을 보며 내가 말했다
-며칠 전 천둥번개가 치고
무지개가 솟더니
하늘에서 뚝 떨어졌단다
-엥?
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실 왔던 이장이 한 마디 했다
-그럼, 우리 동네에서는 그런 일이 흔해
누가 시인이고 누가 농부인지!
나, 원 참, 정말 모르겠네
텁석부리
오탁번
콧수염과 턱수염을 보름째 안 깎았다
화장실에서 오줌 누며 거울을 보면
잿빛 듬성듬성한 콧수염 아래
턱수염이 純銀으로 눈부시게 빛난다
알토란처럼 통통한 여자들이
짧고 더부룩한 수염을 한
텁석부리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이구동성(異口同聲), 고색창연한 수사법으로
아흔 아홉 명 모두 다 합창하듯
어마! 멋져! 야단들이다
아무렴, 아예 상투까지 틀어 올리고
구레나룻까지 더하면
다산(茶山)과도 어깨동무하고
추사(秋史)와는 너나들이해도 되겠다
나야 별 벼슬 못했으니까
목민(牧民)의 그윽한 뜻은 엄두 못 내지만
올겨울 잣눈이 하루 걸러 쏟아지고
북풍설한(北風雪寒)에 대나무 몽땅 얼어 죽은
세한(歲寒)을 났는데
송백(松柏)의 푸른 기상을 어이 모르랴
옛 선비 흉내 내면서
갈지자 걸음으로 희떱게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만난 아내 앞에서
텁석나룻을 점잖게 쓰다듬으며
- 어때?
- 에구! 에구!
송곳눈을 한다
여자들이 멋지다고 아우성친다니까
- 그런 말을 다 믿어?
천 원권 오천 원권에 나온 퇴계나 율곡보다
엄청 더 할아버지네!
이런 밴댕이 소갈머리 같으니라구!
이젠 반대해도 다 물 건너 갔다
텁석부리로 사는 내 생애(生涯)의 법(法)이
99:1로 이미 통과됐다
암,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최고다
다음다음날 아침
세면대 거울 앞에 서서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질레트 세 날 면도기로
콧수염과 턱수염을 싹 깎았다
텁석부리 내 생애가 이냥 요절났다
토요일 오후
오탁번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 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 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구 예쁜 것!
파 웨스트 러브호텔
오탁번
툭 건드리면 이냥 야수가 될
저 빛나는 음경
네 소싯적 발기처럼
꽃봉오리 터지는
봄날의 외설 한마당!
4백 살 난 느티나무가
나비넥타이 매고 벨보이 하는
벌나비 쌍쌍 교미 교미하는
☆☆☆☆☆ 파 웨스트 러브호텔!
편지
오탁번
안개꽃 사이로 들려오는 너의 목소리에
초겨울 바다 바람소리 잠들고 있다
세상 살아가는 모진 모퉁이에서 넘어져
참 우습게도 몸져누운 금요일 저녁나절
서울은 이상난동이지만 나의 목뼈는 춥다
너의 목에 걸어준 손톱만한 사랑의 추억도
영혼 깊이 상채기 내준 뜻없는 욕정도
이제 모두 보이지 않는 바람으로 날아가버리고
전할 수 없는 그리움
잠재울 수 없는 뼈저림에 울고 있다
겨울 안개 자욱한 대학병원의 아침 여섯시
빈 주차장의 장명등 홀로 빛나고
겨드랑이 속의 체온계가
아직도 뜨거운
내 피의
내 정액의 슬픔을 재고 있다
물리치료실 의자에 앉아 턱을 조여매고
아무리 잡아당겨도 뽑아지지 않는 완강한 거부
뽑으려고 뽑으려고 애쓰고 있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살아가고 싶은
내 마지막 사랑의 혹독한 건널목에서
보고싶은 너에게
고려대학교병원 7211호실에서
오늘 편지는
이만 끝
안녕
포유도(哺乳圖)
오탁번
밭 가는 어미소 따라
강동강동 뛰는 송아지를
ㅡ네미! 네미!
할머니가 부르며
등에 업은 아기를 추스른다
밭에서 일하던 며느리는
송아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에미! 에미!
저 부르는 말인 줄 알고
밭두둑으로 냉큼 올라온다
-음마! 음마!
아기가 방싯방싯 웃는다
-저라! 저라!
-어뎌! 어뎌!
소 모는 힘찬 소리에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내딛는
어미소 따라가며
-음매!음매!
송아지가 젖 보채며 운다
배냇머리같이 보드라운
금빛 털이 함함하게 빛난다
-음마! 음마!
에미 젖 먹는 아기를 보며
할머니가
어미소 모는 애비에게 말한다
-송아지도 젖 보채누나
할머니의 말을 알아들은 듯
-음매!음매!
어미소가 송아지를
송아지가 어미소를
서로서로 부른다
젖 먹던 아기가 옹알이하며
쇠젖 먹는 송아지를
도렷도렷 쳐다본다
폭설(暴雪)
오탁번
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宇宙의 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풍장(風葬)
오탁번
시가 잘 안 써지는
진눈깨비 몰아치는 추운 겨울밤
깊은 잠에 빠져
무서운 꿈속에서 밤새 가위눌린다
고속도로 달리다가
핸들이 뚝 부러져 공중제비 한다
까무잡잡한 티베트 여인의
샛서방 되어
사랑을 나누고 도망치다가
야크똥에 코를 박기도 한다
지구의 한 귀퉁이 한반도
제천시 백운면 애련로 855
다 낡은 분교 사택
두 평 반 좁은 방에서
새벽녘에 홀로 잠이 깬다
반나마 까먹은 꿈을 모아
한 편의 시를 겨우 쓰지만
상투적인 수사가
늙정이의 검버섯 얼굴 같다
독한 술과 담배로
내 영혼을 쥐어짜며
고치고 또 고쳐서
한 편의 시를 간신히 마무리한다
제목은 굵은 글자로
본문은 가는 글자로
정성스럽게 프린트해서
연못가 정자로 나간다
정자 들보에
시가 프린트된 A4를
줄을 매어 나란히 건다
며칠 후
정자에서 나부끼는 시를 떼어낸다
덕장의 황태처럼 잘 익은 시를
찬찬히 읽으려고
안경을 고쳐 쓴다
어럽쇼?
글자가 하나도 없다
북풍한설에 몽땅 날아갔다!
나는 죽었다
하관(下棺)
오탁번
이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모를 풀꽃들의 뿌리로 돌아가고
향불 사르는 연기도 멀리 멀리
못 떠나고
관을 덮은 명정의 흰 글자 사이로
숨는다
무심한 산새들도 수직으로 날아올라
무너미재는 물소리가 요란한데
어머니 어머니
하관의 밧줄이 흙에 닿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모음을 부르는 나는
놋요강이다 밤중에 어머니가 대어주던
지린내나는 요강이다 툇마루 끝에 묻힌
오줌통이다 오줌통에 비치던
잿빛 처마 끝이다
이엉에서 떨어지던 눈도 못 뜬
벌레다
밭두럭에서 물똥을 누면
어머니가 뒤 닦아주던 콩잎이다 눈물이다
저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모를 뿌리들의 풀꽃으로 돌아오고
하루해
오탁번
간밤에 비 오고 바람 불어
새벽에 지팡이 짚고
밤 주우러 나간다
알밤은 다
한발 빠른 다람쥐 차지
나는 송이밤 몇 개
해가 뜨면
풀밭이 된 마당에서
메뚜기 여치 방아깨비 버마재비
제 세상 만난다
고추잠자리 떼
혼자 어지럽다
낮곁 내내
보행기 미는 노인 한둘
텅 빈 동네
벼 익는 논배미마다
지는 해
더디다
하버지
오탁번
일부변경선 건너가서
이제 두 돌 지난 손녀랑
며칠 잘 놀다 왔다
- 누구 닮아서 이렇게 예쁘지?
- 하버지!
평생 국어교사 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나보다
유음(流音) ㄹ과 한 음절을 축약하여
'할아버지'를 '하버지'로
절묘하게 변환시키는
내 손녀가
진짜 국어교사인가 보다
씨엔 타워에 올라가
온타리오 호수를 보고 온 날
곰 인형 하나 사다주니까
'하버지' 부르며 달려오는
손녀를 보면서
나는야
문법(文法)이나 족보(族譜) 냄새나는
딱딱한 '할아버지'가 아니라
두루마리 한지마냥 가볍고 서늘해서
맺음도 받침도 없이
이냥저냥 다 좋은
'하버지'가 된다
하일서정(夏日抒情)
오탁번
혼자 있을 때
내의와 양말을 빨면
환한 바깥에다 내다 걸기 뭣해서
화장실 벽에 숨겨놓듯 걸어놓는다
비알밭 쥐옥수수도
메뚜기처럼 살이 오르는
한여름 어느 날
감곡에서 놀러온 여류시인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빨래를 걷어서 들고 나온다
-빨래가 햇볕을 못 보면
곰팡이가 슬고 냄새가 나요
잠자리 떼 앉았다가 제풀에 날아오르는
심심한 빨랫줄에다 훨훨 넌다
-햇볕이 너무 좋아서
빨래들이 깔깔깔 웃겠네요
햇볕 한 번 받지 못하고
칭얼칭얼 보채던 빨래가
자늑자늑 흔들리는 빨랫줄 위에서
빨주노초파남보 눈부신 햇살을 마시며
깔깔깔 웃는 소리가
그날 낮곁 내내 들려왔다
할미꽃
오탁번
파평 윤씨 부인 묘역에서
꽃봉오리 갓 올라온
할미꽃 몇 뿌리 캐어
모종삽에 받쳐 들고 오는데
산비알 밭에서
밭갈이 하는 어미소 따라
엇송아지 한 마리가
강중강중 뛴다
저승의 무덤 떠나 이승의 꽃밭으로
이사 가는 줄도 모르는
무심한 할미꽃이
젖 보채는 엇송아지를 보다가
꽃샘 바람에 고뿔 드셨나
고개를 갸옷갸옷 흔든다
할아버지
오탁번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말복더위를 시키고 있는데
달려오던 빨간색 자동차가 끽 멈춰 섰다
운전석 차창이 쏙 열리더니
마흔 살 될까 말까 한 아줌마가
고개도 까딱하지 않고
ㅡ 할아버지! 진고천 가는 길이 어디죠?
꼭 꼬나보듯 묻는다
부채를 탁 접으면서 나는 말했다
ㅡ 쭉 내려가면 되요. 할머니!
내 말을 듣고는
아. 뜨거! 놀란 듯
자동차가 달아났다
우리나라에는
단군할아버지 말고는
"할아버지" 라고 부를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유관순 누나 생각하면
나는 어린이 집에도 아직 못 간
엡솔루트 분유 먹는
절대적인 갓난애야!
'할아버지' 라니?
고얀 년 같으니라구!
함박눈
오탁번
오늘 또 손을 데었다
장작 난로에 고구마를 굽다가
껍질이 까맣게 탄 걸 보고
맨손으로 집으려다가
앗! 뜨거! 소리쳤다
손가락이 욱신거리며
바로 물집이 부풀어 올랐다
어제는
라면 끓이던 냄비를
맨손으로 잡다가
앗! 뜨거! 내동댕이쳤다
끓는 물에 손가락과 발등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나는 왜 이렇지?
뜨거운 것을 만질 때는
수건이나 장갑을 써야 한다는 것을
맨날 까먹는 나는
정말 왜 이렇지?
욱신거리는 아픔에 잠 못 이루는 밤
자정이 넘자 함박눈이 펄펄 내려
삽시간에 눈천지가 된다
혼자 지르는 비명(悲鳴)이
은하수 이랑까지 퍼져나갔는가
베 짜던 참한 계집이
불에 덴 손가락 호호 불어주려고
일회용 반창고마냥 가벼운
펄펄 함박눈 되어
백치가 된 나를 찾아오는 것일까
해피 버스데이
오탁번
시골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 뭔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할머니와 아저씨를 태운
행복한 버스가
힘차게 떠났다
혼잣말
오탁번
수수밭 가에서 팔 휘저으며
새떼 쫓는 할아버지나
보행기 밀고 가다가
느티나무 그늘에 쉬는 할머니는
중얼중얼 혼잣말 잘도 하신다
그 말을 가만히 귀동냥해서 들으면
그게 바로 시다
그러나 문장으로 옮겨 적으려는 순간
는개처럼 흩어져 버린다
마른기침 사이로 쉬는 한숨에는
전 생애의 함성이 있고
캄캄한 우주를 무섭게 가로지르는
살별의 침묵도 있다
중얼중얼 혼잣말이여
아, 알짜 시여
홍수
오탁번
금버덩 좀 지나 만지마을로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우륵이 가야금 타며 산수를 즐겼다는 장금터가 나온다 수령 5백년 된 소나무에서는 한밤중이면 띠딩 띠딩 하는 가야금 소리가 여직도 들려온다고 동네사람들은 믿는다 강폭이 좁아진 원서천 물길이 조선낫 모양으로 꺾여져서 홍수가 나면 소나무 그늘이 넉넉한 길 위로 강물이 넘쳐 발목까지 잠긴다 중부지방에 집중호우가 내리는 어느 여름날 만난다 늙은 초등학교 동창생
노란 비옷을 입고 길에서 철벅대는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인가 해서 차에서 내렸다 나는 그때 참 희한한 활동사진 한 장면을 보았다 초등학교 동창생은 맨손으로 길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삼태기 속에는 눈치 버들치 메기 모래무지 쏘가리가 들어있었다 물살이 워낙 세차기 때문에 급류에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물가로 나온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는 애련리의 어느 여름날
황소를 위하여
오탁번
ㅈㅜㅇㅅㅓㅂ이라는 子母 위에
황소 한 마리
코뚜레와 흰 뿔과
쫙 벌린 두 다리 사이
붉은 빛 부자지가 힘차 보인다
이념도 명예도 다 쇠파리인 듯
꼬리를 치켜 휘두르며
강렬한 하늘빛 그리움을 날리는
황소야 황소야
이중섭아
짧게 살면서
길고 긴 사랑을 남긴 그대여
나는 내가 기를
송아지 한 마리 없고
외양간 여물통도 텅텅 비었다
전립선 시원치 않아
남성의 길도 막히고
선사시대 때 퇴화한 꼬리는
척추 끝에
미골(尾骨)로만 남았다
1미터의 사랑 /오탁번
석 자 가웃 되는 1미터의 정확한 길이는
빛이 진공 속에서 2억 9천 79만 2천 4백
58분의 1초 동안 진행된 거리라고 하는데,
그대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그리움의 거리는
베틀 위의 팽팽한 눈썹줄이 잉아에 닿을 때
북에서 풀리는 비단실의 떨림이라도 되는지,
우리들 사랑의 이 영겁과도 같이 멀기만 한
닿을 수 없는 허기진 목숨의 허공속에는
칠월 초이렛날 미리내를 날으는 까막까치의
하마하마 기다리던 날갯질 소리 가득하지만,
내 약지를 그대의 약지에 마주 비벼서
10조분의 1미터의 목마름 죄다 지우고
운석 떨어지고 화광 박히는 우주 속에서
미리내를 건너는 그리움이 금빛으로 물들 때,
아스라한 길녘 어느 1미터의 물이랑 위에
지필묵과 궁시(弓矢)와 실타래 가지런히 놓아서
애비에미 이별은 나비잠 속에서도 꿈꾸지 않을
외씨 같은 젖니 난 우리 아기의 첫 돌을 잡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