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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의 불꽃

먼 훗날의 불꽃

Robyn Donald

 

1

초가을이라는 말에 알맞은, 상쾌하게 개인 날 아침이었다. 해변에서 한가롭게 휴가를 보낸 다음날 아침, 사무실로 향하는 마린 싱클레어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그녀는 소설가의 비서라는 직업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엘리스 킴버의 인품이 마음에 들었고, 또 그의 박진감 있는 소설은 구성이 치밀하고 재미있었다.

도중에 달리아를 돌봐 주고 있는 노부인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조용한 마을인 와이커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엘리스가 이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마린은 이 고장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살게 된지가 벌써 5년이나 되어서 이제는 마을 사람들과도 친숙해졌다.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사라게 된 이 마을이 지금은 제 2의 고향처럼 생각되었다. 평생 여기서 산다 해도 아무런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여어, 마린. 놀랍도록 좋아졌는걸!" 엘리스는 언제나와 다름없이 유쾌한 낯으로 맞아 주었다. "알맞게 탔군! 바닷가는 어땠어?"

"최고였어요"

"다행이군. 그럼 다시 1년간의 중노동에 임할 준비를 시작해야겠군." 엘리스는 웃으면서 이마에 흘러내린 검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서재로 향하면서 들뜬 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마린, 놀라운 소식이 있어. 다음 소설의 무대가 북쪽 섬의 대목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래서 옛날부터 권유받고 있던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했어. 그러니까 짐꾸리는 일부터 시작해야겠어! 둘이서 몇 주일 동안 뉴질랜드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지내는 거야. 내 대학 시절의 친구목장에서 말이야." "어마, 멋지군요." 순간 언짢은 생각이 들었으나 이를 숨기고 가벼운 어투로 대답했다. "학생시절의 친구라니 어떤 분이세요?"

"아아, 굉장한 녀석이지. 마린도 어쩌면 연심을 품게 될지도 몰라.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 녀석을 보기만 해도 모두 반해 버리는 모양이니까......하지만 마린은 다를 거야. 난공불락, 바로 그것이니까."

마린은 씁쓸히 웃었다. 엘리스는 나를 수수께끼 같은 여자로 생각해서 틈만 나면 놀려 대는 거야. "무척 자부심이 강한 분인가 보죠?"

"아니, 그렇지도 않아. 아주 세련되고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사나이지. 그러다보니 자연히 그 지역 지도자가 되었어. 일이 있을 때마다 의지가 되는 남자가 바로 브레이즈거든."

"브레이즈라고요?"

순간 방안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엘리스가 놀라서 마린을 의자에 앉히고는 얼른 브랜디를 먹이고 찬 수건을 이마에 대주었다.

"이제 괜찮아요" 마린은 브랜디를 약간 입에 대었다가 술잔을 탁자에 놓았다. "브레이즈라고 말씀하셨던가요? 설마 브레이즈 스탠토프는 아니겠죠? 블랙룩스 목장의 브레이즈는....." "바로 그 사람이야....마린은 그를 알고 있나?" "" 수건을 건네주며 마린이 말했다. "괜찮아요. 기절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블랙룩스 목장에는 갈 수 없어요"

엘리스는 수건을 만지작거리다가 잠시 후에 물었다. "이유를 말해 줄 수 없겠나, 마린?" "말하겠어요" 마린은 한숨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블랙록스 목장의 책임자로 계셨어요.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자 스탠토프네가 나를 맡아 주었지요. 그때 저는 16세였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비서 겸 급사 자격으로 저택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미세스 글리에도 매우 친절히 대해 주었어요....브레이즈의 숙모가 되는 분이에요." 그녀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모두 친절했어요‘"

"하지만 마린은 그 일이 싫었나?"

"아니에요, 나는 목가적인 환경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열여섯 살 생일이 지난 직후에 어떤 혐의를 받고 목장을 떠나게 되었어요. 브레이즈는 급료를 훔친 남자에게 내가 금고 열쇠를 넘겨주었다고 생각했고, 그때 나는 혐의를 벗을 길이 없었지요. 상황이 모두 나한테 불리한데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서....아니, 그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억지로라도 브랜디를 조금 마시도록 해요, 어쨌든 얼굴의 혈색은 되찾아야 하니까....그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나?" ". 죄송합니다. 바보처럼 충격을 받아 놀라게 해드려서....어쨌든 이런 이유가 있어서 그곳에는 가지 못하겠어요. 나는 브레이즈의 보복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요" "브레이즈를 사랑했었나?" "" 그녀는 자신을 비웃듯이 미소 지었다. "선생님도 말씀하셨듯이 멋진 사나인걸요. 6년 전에 브레이즈는 24세였는데. 나는 적어도 그 6년 전부터 그를 좋아했어요. 인간이란 육체적으로 성숙하기 전에도 사랑을 하게 마련인가 봐요. 나는 열두 살 때부터 브레이즈를 사랑하기 시작하여 한번도...."

자신의 말에 깜짝 놀라 마린은 입을 다물었다. 엘리스가 대신 말했다.

"한 번도 잊은 일이 없다는 말이군......그렇다면 그 결혼반지는 어떻게 된 것이지?" 마린의 녹색 눈망울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마린은 다른 남자와....그러니까 싱클레어라는 남자와 결혼해서라도 브레이즈를 잊으려 했었군. 하지만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했지?"

", 그래요. 나는 가엾은 폴을 속인 거나 마찬가지에요. 폴은 죽었지만, 나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살아 있었을 거예요. " 마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푸른 뜰을 내려다보았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같이 갈 수가 없어요. 너무나 여러 가지 일이 얽혀서....쓰라린 기억과 분노와 증오와....나는 이제야 겨우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었어요. 그 목장으로 돌아 간다는 것은 지옥의 가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도 같아요. 나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거예요. 자존심도 마음의 평화도요. 그러니까 갈 수가 없어요. 이해해 주세요" 오랜 침묵이 흘렀다. 마린은 싸늘한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한 손으로 커튼을 잡았다. 엘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아마 나한테 이야기할 수 없는 일이 많은 모양이군. 지금까지 누구한테 고백한 일이 있나? 마린?"

"없어요."

"남편한테도?"

"... 조금밖에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모든 일이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폴은 참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사실은 결혼해선 안 되는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어째서 결혼했지, 마린?"

브랜디의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제야 마음의 무거운 짐을 벗게 되었다는 유혹에 졌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개인적으로 관계가 없는 사람이기에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마린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브레이즈의 아기를 가졌기 때문에....절망했었기 때문이었어요."

"유감이로군." 엘리스의 얼굴에는 경멸이 아니라 넘치는 동정심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마린이 목장에 가지 않겠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군. 너무 꼬치꼬치 물어서 미안해"

"아니에요.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 졌어요. 모든 것이 악몽과 같아서, 마음속 깊이 숨겨 두었었어요. 생각하면 고통스럽기만 했으니까요"

"그래서 마린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 틀어박혀 아무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었군. 나는 마린에게 늘 흥미를 느끼고 있었어. 처음에는 나도 마린이 누군가 좋은 상대를 만나 재혼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어. 마린은 눈부실 만큼 매력적이니까 말이야. 말하기는 뭣하지만 강렬한 메력을 지니고 있어. 그러나 이 마을에 온 지 5년이 지났는데도 마린은 미온족인 인간관계만 가지려 했어. 이것 봐요. 마린에게는 목장에 돌아가 보는 것도 좋은 일인지 몰라. 과거의 망령을 쫓아 버리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어쩌면 마린에게 달라붙어 있는 예전의 사랑도 화산의 재로 변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지도 몰라. 다시 한번 인생을 새 출발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거야"

"선생님의 전매특허인 심리학을 나한테까지 적용시키지는 말아 주세요. 엘리스, 나는 이제 브레이즈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더 이상 스탠토프 가문과 관계를 갖고 싶지도 않아요. 서로가 마찬가지일 거예요. 브레이즈에게 있어서는 내 생각들을 되살리는 것 이상의 즐거운 일도 없겠지요? 동급생이셨다니 잘 아실 테지만, 브레이즈는 간단히 용서하거나 잊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더구나 채찍과 같은 매서운 독설을 가진 사람이에요. 미세스 브레이즈 역시 내가 목장에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 분명해요"

"마린은 그 일족을 무서워하고 있군. 그래!"

"그 말씀이 옳아요. 무서워하고 있어요." 마린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요....급료를 훔친 사람은 텔리 글레스였어요. 내가 미세스 글리에와 텔레비젼을 보고 있을 때 내 침실에서 금고 열쇠를 훔친 것이 틀림없어요. 그날 오후 나는 은행에서 모든 사람들의 급료를 찾아다 금고에 넣어 두었어요. 브레이즈가 하루 종일 외출해 있었기에 나는 금고 열쇠를 책상 서람에 넣어 두었던 거에요.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미세스 글레에를 혼자 두고 내 방에 돌아와 보았더니 마침 텔리가 열쇠를 도로 서랍에 넣고 있었어요."

"그래서?"

"텔리가 ...키스를 하는 것이었어요. 나한테 말이에요. 전에도 몇 번이나 키스당할 뻔했지만 언제나 교묘히 도망쳤었는데, 그때는 그만....내 침실에 텔리가 있었기 때문에 깜짝 놀라 저항할 틈도 없었어요. 텔리는 틀림없이 내 뒤에 브레이즈가 따라오고 있는 것을 보았을 거예요. 텔리가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돈은 고마워, 달링그리고 다시 한번 키스했어요. 그리고 또 무어라고 했어요. 그것은 마치 우리가 전부터 연인 사이였던 것처럼 보이게 했어요. 더군다나...."

"앉아서 이야기 하지 그래?" 엘리스는 다시 브랜디를 따라 주었다.

"자아, 좀 더 마시고...."

"아무래도 취한 것만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이런 이야기까지 선생님에게 할 리가..."

"마음의 조화가 깨졌기 때문이지. 싫다면 이야기 하지 않아도 좋아."

"아니에요. 마지막까지 들어 주세요, 곧 끝날 테니까요.....브레이즈는 우리 두 사람을 죽일 것만 같은 표정이었어요. 문가에 서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무서운 일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어요. 브레이즈는 무서울 정도로 자제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나는 방금 일어난 사건을 설명하려 했어요. 그런데, 브레이즈의 질문을 받은 미세스 글리에가 그날밤 나하고 텔레비젼을 본 일이 없다는 거예요. 물론 브레이즈는 숙모 이야기를 믿었죠. 그리고 텔리의 말까지도. 결국 스탠토프 일족이니까요! 일은 바로 그런 것이었어요. 텔리는 크게 당황하고 블랙록스 목장을 나가 버렸어요. 사촌 형의 마음이 변해 살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내가 도망쳐 나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어요. 일주일 동안 나는 브레이즈에게 가혹하다고 할 만큼 노리개가 되었어요. 어쨌든 나는 버스를 타고 토코로어까지 도망쳤어요. 거기까지밖에 갈 돈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웨이트레스로 들어갔어요."

"거기서 세상을 떠난 남편과 알게 되었나?"

". 성격은 차분하지 못했지만 호인이었어요. 어느 날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폴은 그러한 나를 보고 돌봐 주겠다고 했어요. 당시 나는 머리가 정상이 아니었던가 봐요."

"원만하지 못했나?"

". 물론 폴도 노력했고 나도 노력했어요. 하지만 폴은 나의 과거를 덮어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술을 과음하게 되어...결국 나는 유산을 했고, 폴은 차에 탄 채로 강물에 뛰어들었고...선생님의 구인 광고를 본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어요. 그래서 지금 내가 여기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에요/ 짧고 비참하고, 그러면서도 죽음에 대해서만은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고나 할까요."

"비극 소설의 소재로 써도 좋을 얘기군"

엘리스는 힘없이 중얼거리듯이 말을 계속했다.

"브레이즈는 마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다행히도 몰랐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텔리의 자식으로 생각했을 것이 분명해요!"

"글쎄 어떨까...비록 브레이즈가 글리에 모자의 거짓말을 믿었다 해도, 자기 자식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생각했을 거야"

"나 자신도 토코로어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후에야 안 사실이에요. 그리고 선생님의 옛 친구는 자기의 자존심이 손상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신사로서의 자세를 잊어버리고 말았을 거예요. 마지막 일주일 동안 브레이즈는 내게 지옥의 맛을 느끼게 했어요. 내 숨을 끊으려고 했요. 그렇게 되기 전에 도망쳤지만"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마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몇 년 동안이나 참아 왔던 눈물이 쏟아지면서 마린의 연약한 육체는 마구 떨고 있었다.

겨우 안정을 되찾았을 때, 마린은 엘리스가 자기를 혼자 서재에 남겨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물이 마르자 두통을 느꼈다. 몸이 지쳐 있었다. 그녀는 얼른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조금 후, 엘리스가 차잔을 담은 왜건을 밀고 서재로 들어왔을 때는 마린도 평소의 자기를 되찾고 있었다.

"커피와 샌드위치로 브랜디의 취기를 없애도록 해. 잘 생각해 보았는데, 지금은 마린도 블랙록스목장에서 나올 때보다는 훨씬 자신이 생겼을 것 같은데?"

"물론이에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사람을 두려워하지? 화를 돋우는 주간지 기자나 마린을 설득하려고 덤벼드는 자신만만한 젊은이를 샹대했을 때도 훌륭히 이겨 낸 마린이잖아? 파티나 강연회 또는 점심 식사에 초대받고 같이 갔을 때도 마린은 훌륭히 처신하지 않았어? 그런 마린이 어째서 목장에 돌아가 그들의 잘못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지? 마린에게는 내가 있어"

 

결국 이틀에 걸친 엘리스의 권유와 설득으로 마린도 동행할 것을 승낙했다. 엘리스가 점점 더 난처해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모했던 탓도 있었다. 엘리스에겐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고 있는지 모른다. 구인 광고를 보고 그를 찾아왔을 때만 해도,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건 무감각한 상태에 있었었다.

경험도 기술도 뛰어난 유능한 많은 사람들을 마다하고 자기를 뽑아 준 것도 엘리스가 그러한 자기를 동정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언제나 즐겁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며, 정답게 격려하면서 일을 가르쳐 주었고, 적응이 늦은 것도 개의치 않았다.

엘리스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고, 사실상 그러는 동안에 마린은 지옥의 고통과 환멸에서 재기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엘리스가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는데, 비록 행선지가 블랙록스 목장이라 하더라도 동행을 거절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도중에 오클랜드에서 하루를 지낼 예정이었다. 마린은 은행에서 상당한 액수의 돈을 찾아서,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비싼 옷을 사들였다. 이왕 목장에 돌아가는 것이라면 대등한 입장에서 맞서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른바 <갑옷>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언제나 엘리스가 곁에 있으면서 지켜 주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잔인하다고 할 정도로 머리 회전이 빠른 브레이즈에게는 당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주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엘리스 앞에서는 증오를 드러내지 않았으면, 하고 원할 뿐이었다.

차가 블랙록스 목장에 가까워짐에 따라 핸들을 쥔 마린의 손끝에서 자신감이 빠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느닷없이 마린이 물었다.

"내가 간다는 것을 저쪽에선 알고 있나요?"

"아마 그럴걸. 내 비서가 동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이름이 마린 싱클레어란 것도 말했으니까. 싱클레어는 모르지만, 마린이란 이름은 그리 흔하지가 않거든"

"그렇다면 칼을 갈아 놓고 기다릴 거예요"

"그는 큰 실수를 저질렀어. 하지만 마린도 생각이 좀 지나치지 않을까? 내가 알고 있는 브레이즈 스탠토프는 분명히 오만하기는 하지만 세상을 잘 아는 사람이야. 그래서 역시 세상을 잘 아는 여자들과 게임을 즐기기는 하지만 남을 해치거나 하지는 않지! 분명히 마린에 대한 보복은 지나친 것이었어. 하지만 세월은 인간을 둥글게 만들거든. 그리고 혐의가 있을 뿐인 상대에게 복수하려는 놈은 그리 흔하지 않아"

"하기는 그래요"

이제 와서 지나간 일을 이러쿵저러쿵 말해 보았댔자 엘리스의 입장만 난처하게 되는 것이다. 브레이즈는 친구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우정에 찬물을 끼얹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말씀하신 것처럼 6년은 긴 세월이에요" 마린은 엘리스에게 웃어 보였다. "이번 방문은 내게 있어서는 과거의 망령에서 자유롭게 될 기회인지도 모르죠"

판갈레이를 지나자 길은 곧바로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린은 몇 킬로를 달리다가 오른쪽으로 차를 돌려서 산록으로 향한 길로 접어들었다.

다시 몇 킬로를 가자 길은 비탈로 변했다. 내륙과 연안 지방을 가르는 구릉 지대였다.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 드디어 정상에 이르렀다. 북부 지방은 아직 여름이어서 날씨가 무더웠다.

"여기서 부터가 블랙록스로 들어가는 길이에요. 전망대에서 잠시 쉬었으면 하는데요."

엘리스는 자기주장만을 고집하는 동행자는 아니었다. 그는 좀 쉬자는 마린의 말에 찬성하고, 차에서 내려서서 몸을 쭉 펴고 기쁜 듯이 숨을 내쉬었다.

"아름다운 곳이군."

마린도 동의 했다. 가슴이 뭉클해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몇 년 동안 꿈에서까지 보이던 풍경이었다. 목장은 블랙록스와 그 건너편의 오이오라까지 이어져 있었다.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언덕 너머에서 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뭔가 이리 오고 있는걸. 우리는 저것이 지나가거든 가기로 하지"

마린은 웃고 말았다. 엘리스는 운전에 자신이 없어서 신경질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랜드로버 같군요"

점점 가까이 오는 차를 보니 그것은 역시 랜드로버였다. 그러자 마린은 불안으로 인해 가슴이 답답해 지는 것을 느꼈다.

차는 급경사인데도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올라오더니, 엔진을 끄고 누군가가 차에서 뛰어내렸다. 브레이즈였다. 역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여어, 환영하러 나오셨나?"

엘리스조차도 깜짝 놀라 이렇게 외치며 악수했다.

그러나 브레이즈가 여기까지 마중 나온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마린은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마린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였을 것이 분명하다. 자기가 유혹하고 버린 여자에게 6년이란 세월이 가져다 준 잔인과 환멸의 변화를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여어, 정말...." 두 사람은 악수를 하고 시선을 마주쳤다.

"당신이 바로 그 조그마하던 마린 모워트요? 어서 와요. 브랙록스에 온 걸 환영하오, 마린!"

말이나 어투와는 달리 브레이즈위 눈은 마린을 저주하고 있었다. 겨우 손을 놓아주었을 때 보니 마린의 손은 너무 꼭 쥐어져 있었기 때문에 핏기가 가셨을 정도였다.

"지금 마린에게 목장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중이었네. 브레이즈, 정말 이곳을 피비린내 나는 살인의 무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말이지?"

"물론이지. 그런데 어떤 줄거리인가?"

"마약 밀수. 그 이상은 말할 수없네, 너무 많이 이야기해 버리면 소설에 박진감이 없어지기 쉬우니까"

엘리스는 크게 숨을 쉬고 말했다. "이 공기를 통조림으로 만들 수 있다면 잘 팔리겠군. 벌써부터 즐거워지기 시작하는데. 초대해 줘서 정말 고맙네."

"소설에 열중하는 것도 좋지만, 이곳에도 사교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브레이즈의 어투에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엘리스도 키가 큰 편인데도 브레이즈는 엘리스를 내려다보며 눈을 내리깔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세월은 브레이즈에게 매우 관대했던 듯, 육체는 변함없이 잘 다듬어져 있어 마치 카우보이 같았다. 그러나 얼굴에 새겨 주름살은 얼굴 모습을 엄하게 보이게 했고, 냉소적인 표정으로 보이게 했다.

"난처한데. 디너파티에서 노래를 부를 수는 없어. 내 노래 실력은 천재의 약점 그것이니까"

"그럼 마린의 노래는 어때?"

"마린은 진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엘리스는 약간 이마를 찌푸리며 몸을 폈다.

"내 말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야. 우리는 자네보다도 구면이야, 엘리스. 언제부터였더라, 마린?"

"우리가 여기 온 것은 내가 여덟 살 때였어요"아주 침착하고 냉정한 어투였다. "그리고 나간 것은 18세 생일이 자난 이틀 후였어요."

"그러니까 꼭 10년이 되는 셈이군. 그사이 2년 동안은 저택에서 같이 살았고...엘리스와는 몇 년이나 함께 있었지?"

"엘리스의 일을 도운 지가...벌써 5년이나 되었어요." 당신이 왜 묻는지 알겠어요.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하지만 엘리스까지 말려들게 하려는 것은 신사가 취할 자세가 못돼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동안의 회포를 풀어야겠는데"

말은 하지 않았지만, 브레이즈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마린은 잘 알 수 있었다...즐겨야지, 진짜로 즐겨 봐야지, 하고 말하고 싶은 거야.....

"하지만 언제까지나 여기 머물러 있을 수는 없네."

엘리스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어디 가나, 브레이즈? 설마 이 멀리까지 우리를 마중 나왔을 리는 없을 텐데?"

"미안하지만 자네 말이 맞아. 이웃 목장에 잠시 볼일이 있어서. 늦어지지는 않을 걸세. 호프 숙모가 자네들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동안 이야기 상대가 되어 줄 걸세."

브레이즈가 미소 지었다. 옛날에는 그 웃는 얼굴이 멋있게 생각되었으나, 지금은 차가운 그림자가 깃들여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어서 마린은 고개를 돌렸다. 브레이즈는 인사를 하더니 곧 차를 몰았다.

마린도 메르세데스를 출발시켰다. 엘리스는 언덕을 내려올 때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마린을 여기 데려온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군. 브레이즈는 마음을 읽기 어려운 사나이지만, 아무래도 지금까지 마린의 일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것 같아."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인걸요 뭐. 하지만 냉정히 버텨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기엔 몇 주일밖에 있지 않을 것이고, 선생님이 곁에 계시니까 내게 심한 짓은 하지 못할 거예요. 선생님도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모두 문명인이잖아요"

그러나 마침내 손가락으로 가슴에다가 성호를 그리고 말았다. 무척이나 멋있고 강렬한ㄴ 개성 이면에는 더없이 야만적인 성격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마린이었다.

"물론이지......그런데 아까는 어땠지?"

"약간 신영이 곤두섰지만, 그것뿐이었어요, 엘리스. 그런데, 내가 한말을 모두 잊어 주시는 것이 앞으로 지내는 데 수월할 것 같아요. 나를 지켜 준다는 생간을 안 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과 브레이즈 사이의 우정에 금이 갈지도 몰라요. 결국 브레이즈인들 어떻게 하겠어요? 나는 그까짓 고약한 농담 정도에 가슴 아파 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아까의 만남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하면, 6년 전 브레이즈에게서 느꼈던 것을 못 느낀다는 거였어요. 우리는 이제 전혀 남이에요"

"그렇다면 현재 브레이즈에게서 느끼는 것은 뭐지?"

"경계심뿐이에요" 마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해안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잊지 않는다면, 아마 별로 곤란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지."

길은 거목이 있는 곳에서 크게 구부러져 있었다. 마린은 오른쪽에 보이는 다섯 체의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이 목동이 사는 오두막이에요."

"오두막이라고ㅡ 나에게는 훌륭한 집으로 보이는데?"

"옛날부터 오두막이라 부르고 있어요. 하지만 고용인의 거처가 보잘것없었던 것은 벌써 옛날 이야기에요. 두 채는 내가 떠난 후에 다시 지은 것 같아요"

그중의 한 채는 마린이 부모와 살았던 집이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엘리스에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마린은 입을 다물었다.

"놀랍군!" 엘리스가 외쳤다.

눈앞에 40년의 역사를 가진 저택이 나타났다. 흰 페인트를 칠한 크고 아름다운 건물은 조용하기만 했다.

"주인과 어울리는 집이에요. 내부도 놀라워요. 고풍스런 가구에서 현대적인 가구까지 있고, 훌륭한 그림도 많이 있어요. 확실히 스탠토프 일가의 취미는 고상하고, 돈도 많이 들인 것 같아요. 블랙록스에 초대받았으면 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아요. 왕족이 머문 일도 있고, 유명한 연극배우나 영화배우, 그리고 외교관과 정치가도 수없이 많죠. 하지만 너무 인기가 좋은 사람은 사절이죠"

엘리스는 소리내어 웃었다. 기둥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현관, 색색으로 핀 수국. 건물에도 정원에도 꿈을 꾸는 듯한 우아함이 감돌고 있었다.

"마린의 유머 감각이 아직도 건재한 것이 기쁘군. 약간 신랄하기는 하지만.....저 사람은 누구지?"

문에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미세스 글리에-호프 글리에였다. 그녀의 냉담한 미소를 보자 마린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마린, 여기 있을 때하고 전혀 달라진 것이 없군"

그러나 같은 말을 그녀에게는 할수 없었다. 금발이 이제는 회색으로 변했고, 부드럽고 희던 살갗도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것은 그 오만성 뿐이었다.

마린은 소개를 끝내고 두어 걸음 물러서서 그들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우선 방을 보고 싶으시겠죠, 미스터 킴버? 당신에게는 바다가 보이는 방을 준비했어요. 그리고 마린에게는 옛날 그 방. 브레이즈가 그렇게 하라고 하기에....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곧 다른 방을 마련하지"

"아니에요, 일부러 그렇게 하실 필요는 없어요. 감사합니다."

"그 방은 다시 꾸몄지. 마린, 어딘지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집 안은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복도에서는 여전히 꽃과 낡은 가구의 냄새, 그리고 이끼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방안에서도 같은 냄새가 풍겼다.

복도 끝으로 가서 문 앞에 섰다. 원래는 하녀의 거실이었던 곳이었다. 암의 눈에 띄지 않는 아늑한 방..... 문을 연 마린은 깜짝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옛날의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편안한 침소에 지나지 않았던 방이 지금은 화려한 침실 바로 그것이었다. 널찍한 침대, 커다랗고 긴 의자와 실크 커버를 씌운 안락의자, 동양풍의 가구, 온통 은은한 빛깔의 실크와 새틴.........

마린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져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이 방에서는 퇴페적인 냄새가 나고 있어. 이국풍의 에로틱한 분위기는 마치 쾌락을 위한 방과도 같다.

노크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키가 크고 마른 중년 남자가 가방을 운반해 오고 있었다.

"욕실은 그쪽 문에 이어져 있습니다" 이 한마디만 남기고 그는 돌아가 버렸다.

욕실도 비록 작기는 했으나 관능을 자극하도록 꾸며져 있었다. 그것은 흡사 정부가 사는 방 같았다. 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목욕을 한 뒤 너무나 단순해서 오히려 답답해 보이기까지 하는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짐을 정리하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루즈를 다시 칠하고 옷장에 달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작은 체구에 아주 말라서 도저히 미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름살 하나 없는 피부와 얼굴 모습이며 짙은 갈색 눈동자, 그리고 검은 머리 덕분에 이국적인 매력을 풍기고 있다는 것은 그녀 자신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한때는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듯한 자기의 자태를 저주스럽게 여긴 일도 있으나, 지금은 남성을 자극하는 분위기가 자신에게 잇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것은 몇 안 되는 친구와 같이 있을 때뿐이었다. 씁쓸한 유머 감각도, 너무나 상처입기 쉬운 마음도 남들은 알지 못한다.

"괜찮아" 마린은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말하고 아름다운, 그러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방에서 나왔다.

 

2

두 사람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있었다.

호프 글리에는 마린에게 미소를 던졌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여기도 많이 변했지?"

"전망대에서 보는 경치는 옛날 그대로예요"

침착한 태도로 홍차를 끊이고 있는 이 노부인이 자식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젊은 처녀를 이리떼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는 이 사람도 무척 괴로웠으리라. 동정심으로 마음이 부드러워지자 말도 부드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겨우 기분이 진정되기 시작했는데, 30분도 되지 않아 브레이즈가 돌아 도는 바람에 긴장은 더욱더 고조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브레이즈는 차를 마시고는 곧 엘리스와 같이 사무실로 갔다. 대학 시절의 옛이야기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린도 안도의 숨을 쉬고 뜰로 나갔다. 오늘만 무사히 넘긴다면 이 곳 생활도 훨씬 편해질 것이다. 엘리스는 당장에라도 일을 학 싶어 하므로, 낮에ㅇ는 바빠질 것이다-누구하고도 얼굴을 대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저녁 식사 이후만이 문제다.

화단 주위를 걷다 보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이 풀렸다. 아열대 지방이어서 그런지 꽃들의 빛깔이 선명했다. 문득, 많은 돈을 들여 정원을 개조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발걸음을 정원 끝에 있는 풀 쪽으로 옮겼다.

원래 이곳은 늪이었는데, 그 늪을 메워 풀로 개조했던 것이다. 모자이크로 수놓은 로마풍의 장방형 풀은, 우아하기는 했으나 이 지방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제 풀은 확장되고 모양도 바뀌어져 제법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자이크가 제거 되고 검게 칠해져서 풀은 마치 자연적인 연못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곳도 역시 전체적으로 보아 숲속의 연못 같은 느낌이 들도록 인공이 가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건너편에는 모조된 그리스 신전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것도 지금은 숲의 오두막을 연상케 하는 목조 건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여러가지 크기의 의자가 산책하는 사람을 위해 여기저기에 놓여져 있었다.

마린은 의자에 걸터앉아 풀의 수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렇게도 우아했던 옛 신전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신전의 내부는 한여름에도 매우 서늘했었지.....

 

그것은 무더운 7월의 일이었다. 나의 일과는 아침 일찍 풀에서 한차례 수영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낮에는 손님이 찾아오곤 해서 같이 수영하기가 어쩐지 마음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브레이즈는 오빠와도 같았다. 호프는 내가 브레이즈의 눈길을 끄는 것을 싫어했고, 텔리의 상스러운 눈길도 좋게 여기지 않았다. 물론 나 역시 브레이즈의 마음을 끌었으면 하는 여자 손님을 보기 싫었다.

그러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 이슬에 젖은 풀을 밟으며 찬물에 뛰어드는 습관이 몸에 배었던 것이다. 17세인 나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에, 어쩌다가 브레이즈가 나타났을 때는 몹시 놀라 흥분하기까지 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나는 일찍부터 브레이즈를 사랑했던 것 같다. 소녀 시절부터 브레이즈를 볼 때마다 작은 가슴은 설렜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웃는 얼굴을 보였을 뿐, 스트로우크 연습을 하면서 정해져 있던 거리를 헤엄쳤다. 내가 풀에서 나오려 했을 때 브레이즈가 다가와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는 나를 이길 수 있는지 어디 한번 시합해 볼까?"

어렸을 때부터 하던 농담이었다. 브레이즈가 나를 먼저 헤엄치게 하고 10미터쯤 뒤에서 쫓아오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은 풀 사이드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쳤을 때, 거기에 브레이즈의 가슴이 있었다. 깜짝 놀라 손을 떼려 하는 순간, 브레이즈가 그 손을 붙잡았다.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나는 눈을 들어 브레이즈를 쳐다보았다. 긴장된 표정이었으며 눈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브레이즈?"

속삭이는 듯한 소리에 브레이즈는 미소로 답하며 다른 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는 끌어당겼다. 나는 얇은 비키니를 입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브레이즈의 몸놀림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깜짝 놀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도 브레이즈가 껴안고 키스를 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브레이즈의 감정이 오빠와 같은 자연적인 감정과 다르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

브레이즈는 눈에 키스를 하여 눈을 감게 하고는 입술을 겹쳐 왔다. 갑작스런 일에 긴장했으나 정답게 달래듯 하는 키스를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브레이즈가 마른 웃음을 웃었다. 그러면서 그의 몸이 굳어졌다. 나는 브레이즈가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인지 알고 몸을 빼려고 했다. 그러자 브레이즈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마린, 마음에 상처를 주지는 않겠어. 약속하지. 너무나 오랫동안 이날이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에, 드디어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어. 사랑해, 마린. 그리고 마린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브레이즈가 또 키스를 해왔다. 지금까지의 키스와는 전혀 달랐다. 탐닉하는 듯한 키스였다. 그것이, 이성을 흐리게 하는 욕망을 몸속에 눈뜨게 한다는 것을 그때까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얼굴을 든 브레이즈는 떨고 있었다. 내가 이토록 브레이즈에게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나는 야릇한 승리감을 맛보았다. 브레이즈가 두 손으로 나의 얼굴을 감쌌다.

"마린!"

나는 부끄러워 브레이즈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두 팔로 브레이즈의 목을 감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젖은 몸으로 안겨 있으려니 벌거벗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브레이즈가 어떻게 하건 나에게는 거부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브레이즈가 나를 안고 풀에서 나오는 것을 깨닫고 실망했던 일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신전에 다다르자 브레이즈는 나를 내려놓고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는 나를 쓰러뜨리며 신음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아아, 나는 사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어! 마린은 아직 어린아이인데"

그때 나는 부끄러움이나 두려움보다 훨씬 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잇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대담하게 발끝으로 서서 브레이즈의 어깨에 키스했다.

"그만둬!" 브레이즈가 내 머리를 휘어잡았다.

그러나 나는 웃고 있었다. 처음으로 여자라는 것이 부여해 준 용기를 깨닫고 자랑스러운 듯이

"설마 순진한 얼굴 뒤에 여자의 속성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이렇게 하는 것은 당신에 대해서뿐이에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브레이즈의 키스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브레이즈의 손은 이미 비키니의 후크에 닿아 있었다.

신전의 긴 의자에서 사랑을 나누며 충족된 마음을 느끼고 있을 때, 신전의 열주 사이에서 아침 했빛이 스며 들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그 아침의 광경이 생생히 떠오른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리석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15세에 어머니를 잃고, 완고한 호프와 가정부인 모일러 필드게이트밖에 없는 생활 속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 인생의 진실을 알고 있기만 했었다면, 욕망과 사랑의 차이쯤은 간파했을 것이다. 나는 브레이즈의 매력에 포로가 되어, 그를 거부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로 나는 서슴없이 브레이즈를 받아들였고 인생의 모든 것을 맡겨 버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브레이즈는 내가 그토록 간단하게 굴복해 버렸기 때문에, 나를 음란한 여자로 여긴 것이 분명하다....그렇지 않았다면 켈리의 거짓말에 절대로 말려들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씁쓸한 미소가 마린의 입가에 떠올랐다. 내가 좀 더 이성을 갖고 브레이즈와의 행복을 기다렸다면, 그는 텔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의 실패는 지나치게 사랑했다는 것, 또 너무 너그러웠다는 것에 있다.....젊은 처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교훈이 될거야!

그러나 이미 두번 다시 젊은 처녀 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 마린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며 저녁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인기척을 느끼고 그녀는 일어섰다. 물론 브레이즈였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린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깜박였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 또한 보여서는 안 되었다.

"어마, 엘리스는 어디 갔어요!"

"마린을 위해 사무실을 준비하느라 바빠....마린은 그의 애인인가?"

"당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에요!"

그녀는 따귀라도 갈겨 주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브레이즈 곁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브레이즈가 난폭하게 마린의 팔을 붙들었다.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어째서 내 일에 간섭하는 거죠? 이 손을 놓으세요. 당신의 손길이 닿는 게 싫어요!" 브레이즈는 미소를 띠고 마린이 아파할 때까지 팔에 힘을 주었다.

"브레이즈...." 갑자기 먼 옛날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부탁이에요....아아!"

브레이즈는 팔을 놓고 재빨리 그녀의 목에 긴 손가락을 댔다. 전에는 애무로 그녀의 흥분을 불러일으켰던 손이, 지금은 목을 졸라 죽이려는 것같이 느껴졌다.

"어째서 돌아왔나, 마린?"

"엘리스에게는 내가 필요해요"

"그렇다면 엘리스를 위해선 무슨 일이든지 하겠군?"

그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침을 삼키려 해도 목이 아팠다.

"착각하지 마세요. 나는 엘리스에게 고용되어 원고를 타이핑할 뿐이에요!"

"그는 우리가 연인 관계였다는 것을 알고 있나? 사실을 알고 싶어"

", 알고 있어요"

브레이즈가 손을 놓았다. 마린은 크게 숨을 내쉬고 홱 몸을 돌렸다. 그러나 브레이즈는 마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기다려, 이야기해야 할 것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 같이 한잔하지"

"나는 당신과는 말하기 싫어요......브레이즈, 어째서 당신은 과거를 잊지 못하나요? 이미 모든 것이 끝났어요. 6년 전에 일어난 일은 이미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언제까지나 묵은 원한을 품고 살아갈 필요는 없어요"

"왜 엘리스한테 우리들의 관계를 이야기 했지?"

"여기 오고 싶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마린 역시 과거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야?"

"나는......잊었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다만 잊어도 좋다고 했을 뿐이에요. 6년이란 긴 세월이거든요"

"그 점은 나도 동감이야..... 내가 예전과 좀 달라 보이나?"

브레이즈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마린은 얼굴을 붉혔다. 브레이즈의 외모는 변하지 않았으나, 물불을 가리지 않던 정열을 대신하여 강철 같은 자제심이 생긴 것 같았다.

"아뇨. 당신은 멋있는 청년이었지요. 80살이 되더라도 그 매력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마린이 네게 흥미를 가졌던 것도 단순히 그점 때문이었나?" 브레이즈는 손가락으로 마린의 턱을 만졌다. "마린은 훌륭하게 변했어. 여기서 나갈 때는 귀여운 소녀였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거든. 좋은 일이 많았던 모양이지?"

죽은 폴의 얼굴에서 흐르던 피가 , 그리고 사고 현장의 차 밖으로 비어져나와 있던 팔이 생각났다.

마린의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몸이 떨렸다.

"아주 좋은 일이 많았죠"

"물론 결혼도 했겠지? 어떻게 되었어. 이혼했나?"

"아뇨. 남편은 자동차 사고로 죽었어요"

"불행한 일이로군"

태연하게 말하는 그 어투는, 브레이즈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어떤 일도 때가 지나면 극복할 수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도 당신을 피해 가면서 지낼 생각은 없어요"

"그러면 휴전조약에 사인하겠나?"

"좋아요. 6년이나 지났으니까요"

브레이즈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한순간 머뭇거렸으나, 결국 마린도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브레이즈는 악수하는 대신 그 손끝과 손바닥에 키스했다. 마린은 얼른 손을 빼고,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랐다.

"도대체 왜 이러세요?"

"잠시 시험해 보았을 뿐이야" 그의 눈에 조롱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기로 하지. 나도 마린을 옛날 친구로 대할 테니까 마린도 그렇게 하기로 해. 나를 마치 전염병자 피하듯 하는 것도, 얼음으로 만든 아가씨 같은 태도도 버리고 말이야"

"단순한 옛 친구로서만 말이죠?"

브레이즈는 미소를 띠고 마린의 어깨에 손을 넞은 채 잔디밭 위를 걸어갔다. 걸으면서 그가 물었다. "엘리스의 일은 재미있나?" "무척, 훌륭한 분인데다 일도 마음에 들어요"

이 말을 하는 마린은 표정마저 부드러워져 있었다. 폴과 아기의 죽음이라는 2중의 비극이 있은 후 불과 2개월 만에 엘리스에게 고용되던 날의 일은 잊을 수가 없었다. 엘리스는 마린을 감싸 주면서 오늘날까지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것이다. 사실 마린이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모두 엘리스의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리스는 운이 좋은 녀석이야"

"운이 좋았던 것은 바로 나예요" 옛날과 같은 관계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고 싶었다. 브레이즈는 여성의 본능으로 미루어 마린이 자기를 경원하면서도 결코 무관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돌계단이 있는 데까지 이르자, 마린은 어깨에서 브레이즈의 손을 떼어 놓았다. 6년 전에는 이런 하찮은 일도 하늘로 오를 것 같은 심정으로 받아들였었는데.

그 무렵, 브레이즈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남의 눈이 있는 데서는 마린에게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위선적이었던가. 낮에는 오빠처럼 행동하다가도 밤만 되면....

마린은 자기 생각의 뜻밖의 진전에 놀라 새로 꾸며진 정원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집의 돌계단 밑에서 마린은 브레이즈가 한 농담에 웃고 있었다. 호프와 같이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있던 엘리스의 눈에는, 친구 사이로 지내자고 결정한 두 사람이 옛날의 연인 관계 그대로 보였다.

 

네 사람은 식전에 드는 술을 마시면서 정원의 모습이 바뀐 데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양을 바꾸자고 제안한 사람은 브레이즈인 것 같았다. 물론 로마풍의 풀이나 그리스풍의 신전은 그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으나, 그런대로 독특한 아취가 있어서 매우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숲속의 연못을 연상케 하는 지금의 풀도 블랙록스에는 잘 어울렸다. 6년이란 긴 세월이다. 브레이즈는 진보적인 지주이기 때문에, 그밖에도 변한 것이 많을 것이다. 이처럼 고급 셰리주를 마시며 테라스에서 낙조를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큰 부자의 생활은.....마린은 마음속으로 못마땅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것은 웬일일까? 브레이즈가 너무나 쉽사리 <휴전> 제의에 응했기 때문에 완전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브레이즈의 성격으로는 끝까지 복수하고야 말겠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텐데. 브레이즈는 가장 상처받기 쉬운 부분-즉 성적인 것으로 나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거야. 만일 그때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면, 욕망 이상의 것을 나에게 느끼고 있었다면, 최소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할 기회를 내게 주었을 거야. 하지만 브레이즈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도 않고 경멸에 찬 키스로 내입을 봉하고는 내 굴종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나는 나 자신이 깨끗했기 때문에 블랙록스 목장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렸던 것이 아닌가. 황혼이 언덕을 넘어 조용히 스며들었다. 마린은 약간 몸을 떨었다. 그 무렵 나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욕망에 몸을 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그에게 바쳤지만 잔인하게 거절당하자 어린아이처럼 도망쳐서 나 스스로 상처를 고치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마음은 비록 어린아이 같았을지라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브레이즈의 자식에게 집과 아버지를 주기 위해 폴과 결혼했던 것이다. 무책임한 방종이 아이를 죽게 하고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을 예상도 하지 못한 채로....언제부턴지 브레이즈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람의 아이를 6개월 동안이나 내 뱃속에 들어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감상적인 추억에 젖어 들지 말아야지. "한 잔 더 하겠나. 마린?"

이미 글래스가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브레이즈도 계속 나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일까? 마린이 거절하자 브레이즈는 엘리스와 호프에게 권했으나 두 사람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안으로 들어가지, 해가 지면 금방 쌀쌀해지니까."

 

식사 후 마린은 일할 방으로 안내받았다. 엘리스가 편지 한통을 그만 깜빡 잊고 부치지 못했다고 하면서 얼른 쓰자고 했다. 그러자 브레이즈가 방에서 나가면서 말했다.

"그러면 자기 전에 나하고 한잔하세. 이따가 내려오게, 엘리스"

편지를 타이프하고 나서야 겨우 마린은 방을 둘러보았다. 원래는 브레이즈의 사무실에 딸린 부속실로서, 마린이 이 저택에 살 때는 그녀의 사무실이었었다. 그 무렵에는 빅토리아풍의 아늑한 방이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실내 장식이 바뀌어서 넓고 세련된 방으로 변해 있었다. 옛날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엘리스는 분명히 나갔을 텐데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입구에 브레이즈가 서 있었다.

"어마, 깜짝 놀랐어요!"

"미안해" 그러나 전혀 미안하게 생각하는 티가 없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춰져 있나?" {,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검정 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브레이즈는 더욱 키가 커 보였다. 표정으로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옛날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마린의 침실도 마음에 들었나?"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마린은 그러한 자신을 꾸 짖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훌륭한 방인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어요? 옛날과는 완전히 다른 방이더군요." "모두 그런 것은 아니야. 몇몇 필요한 방만 개조했어. 이 방에 있던 서류는 마이크로 필름에 수록해서 뒷방에 보관해 두었지"

뜻하지 않게 블레이즈가 빙그레 웃었다. 마린은 하마터면 브레이즈의 매력에 끌려 들어갈 뻔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태워 없애는 도리밖에 없었어. 어떤 서류가 있었는지는 마린도 기억하고 있겠지?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블랙록스를 사들였을 때부터의 서류니까, 모든 것을 분류하는 대 무척 시간이 걸렸어. 사촌 누이동생 중에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애가 바캉스를 포기하면서까지 도와주었어. 한 번 보겠나?"

6년의 세월이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보고 싶어요. 하지만 오늘 밤은 피곤해요. "

사실 하품이 나오려 했다.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마린이 말했다. "앨리스는 차만 타면 무서워하기 때문에 나까지 긴장했었거든요" "그렇다면 어서 자야지. 그러나 컴퓨터만이라도 보아주었으면 좋겠어" "컴퓨터라구요?"

마린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브레이즈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브레이즈, 이것을 무엇에 쓰죠?" "어디 알아맞혀 보지 그래" "잠깐 기다려 주세요" 마치 고등학생 시절로 되돌아 간 것 같았다. "기억시킨 것이 모두 나올 테니까....양이나 소에 대한 정보를 수록해 둔것이 아닐까요?"

"그뿐만이 아니지. 내 가축 개량 계획에 대한 모든 자료가 수록되어 있어. 지금 열개 목장에서 행하고 있는 가축 교배에 관한 모든 자료도 수록돼 있지. 얼마 후에는 수고하지 않고 생산성 높은 양을 낳게 될지도 몰라. 소의 경우도 마찬가지지"

"또 있어요. 다른 자산의 자료도 수록되어 있겠죠?"

"물론이지. 옛날엔 얼마나 많은 서류가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지?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빨리 정보를 얻을 수 없어서 실패할 때가 적지 않았어. 그러나 이렇게 하면 자료를 기초롤 정확한 결단을 내릴 수 있지. 덕분에 시간이 얼마나 절약되는지 몰라"

마린은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거의 예전 그대로였다. 내 침실과 사무실은 철저히 바꿔 놓고서도.....무슨 생각이 떠오르다가는 금세 사라지면서 침착하지 못한 기분만이 남았다.

"조작하기 어려운가요?"

"아니야. 보통 정도의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어. 엘레나 윌리암슨을 기억하고 있나? 목동의 부인 가운데 한 사람 말이야. 그녀도 이것을 쉽게 다루고 있어" "현재는 엘레나가 사무실 일을 보고 있나요?"

평범한 질문인데도 왜 그런지 마린은 고개를 돌렸다. 대답하는 브레이즈의 어투에도 어딘지 모르게 부자유스런 데가 있었다.

"매일 아침 출근하고 있어. 아이들도 이미 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니까..."

"미세스 필드게이트도 아직 여기 있나요?"

"있지. 윌리는 죽었지만-3년 전이었던가., 현재는 샌디 데이비스라는 사람이 목장 책임자로 있어"

"내 가방을 옮겨다 준 사람이군요?"

윌리와 얼굴을 대하지 않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6년 전 필드 부부는 마린의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하고 고용주 측에 붙었던 것이다.

지금 이 방에서 브레이즈와 정답게 이야기하고 있다니, 도저히 현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전에 브레이즈는 바로 이 사무실에서, 내게 폭력을 가하는 짓은 겨우 참았지만, 갖은 욕을 하여 나에게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빼앗아가 버리지 않았던가.

두번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어! 그것은 폴의 죽은 얼굴을 앞에 두고 맹세한 말이었다. 두번 다시 피해자가 되지 말아야지. 나 혼자서 꿋꿋하게 살아가야지.....

"무척 도전적인 표정을 짓고 있군"

브레이즈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마린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마린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쌀쌀하게 말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을 뿐이에요"

"옛날 생각을 하고 있었나?"

"아니에요" 거짓말을 했다. "옛날 생각을 하면 지겨울 뿐이에요. 나는 행복한 생각만 하기로 했어요"

"그렇다면 이곳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었나?"

아무렇지도 않은 질문 같지만, 마린은 그 속에 숨어 있는 브레이즈의 의도를 간파할 수있을 것 같았다. 복수 같은 것은 어리석은 것이지만, 브레이즈는 간단히 용서하거나 잊어버릴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다시는 나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할 것이다.!

"아주 행복했던 때도, 그와 정반대인 때도 있었어요" 하품을 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정말 이제는 자야겠어요. 그러지 않으면 내일 일에 지장이 올 거예요. 안녕히 주무세요. 브레이즈"

 

10분 후 마린은 자기 침실에서, 바다를 비춰 주고 있는 커다란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 나왔다-읷이 마지막 눈물이야, 하고 마린은 자신에게 다짐 했다. 잃어버린 사랑의 꿈을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 되게 해야지.

울고 나니 가벼운 두통이 일어났다. 마린은 화장을 지우고 아스피린을 먹은 뒤, 눈에 젖은 타월을 얹은 채 침대에 누웠다.

문득 눈을 떠 보니 실내에 달빛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계절은 가을이지만 이곳은 아직 여름같이 더웠다. 손목 시계를 보니 겨우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마린은 20분 남짓 뒤치다가 침대에서 나왔다. 진즈와 셔츠를 입고 샌들을 끌며 프랑스 양식의 유리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꽃이 만발한 화단을 빠져나와 바다로 뚫린 오솔길로 들어섰다. 세상은 온통 달빛 속에 잠겨 그림처럼 조용했다. 멀리 물고기가 뛰노는 모습이 은빛으로 보였다. 조수를 타고 숭어 떼가 몰려온 모양이었다. 얼른 옷을 벗고 바다로 들어갔다. 물은 따뜻했다. 물살이 세지 않은, 헤엄칠 만한 곳이 있었다.

이 정도로 피곤하면 이제 푹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마린은 모래밭으로 올라와 젖은 머리를 닦았다. 이때 포우후터카워 노목 그늘에서 말 울음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마린은 얼른 가슴을 가렸다.

"이미 늦었어"

브레이즈가 말에서 뛰어내려 다가 왔다. 검은 복장을 했기 때문에 마치 큰 그림자와 같았다. 흡사 악몽에 나타나는 부츠를 신은 약탈자 같았다.

지금이야말로 재치가 필요할 때인데, 머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린은 얼어붙은 듯이 그자리에 못박혀 섰다.

"당신, 여기서 무얼 하세요?"

"마린과 마찬가지로 잠이 오지 않더군" 그는 눈앞에 멈춰 서서 손을 허리에 얹고 마린을 내려다보았다. 탐닉하듯 마린의 나체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나는 승마를 택했지"

불순한 눈길이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마린은 분노를 터트리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대단히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본능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어떤 반응을 나타내더라도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뿐일 것이다. 마린은 부드럽게 대꾸했다.

"깜짝 놀랐어요. 아까부터 거기 있었나요?"

". 마린은 6년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졌더군" 젖은 머리를 손가락에 감고 한손을 목 뒤에 돌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훨씬 아름다워지고 더욱 욕망을 자극한단 말이야"

"안돼요, 브레이즈" 두 손으로 상대의 가슴을 떠밀며 분명히 말했다. "당신에게 안기기는 싫어요"

"안된다고?" 그의 눈은 비웃고 있었다. "어째서 안 되지?" "

"설명할 필요도 없지 않아요? 하지만 꼭 알고 싶다면.....당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호감을 갖게 해야겠군, 그렇지?" 이렇게 말하고 브레이즈는 키스했다. 입술에다가 아니라, 먼저 눈에 키스하여 눈을 감게 하고는 천천히 목덜미까지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브레이즈의 몸은 욕망으로 뜨거워져 있었다. 마린이 몸을 부르르 떨자. 브레이즈는 귓전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어떻게 하면 마린을 뜨겁게 할수 있는지 알고 있어"

"당신 따위는 원하지 않아요" 조금만 애무해도 내가 욕망의 노예가 되는 줄 아는 모양이야. 나한테는 싸늘한 분노밖에 없는데.

"그럴까?" 브레이즈는 얼굴을 들어 마린의 굳어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마린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 아니면 완전히 잊어버렸거나...." 다시는 키스하려 하지 않았다. 가만히 마린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애무하다가 마침내 한 손을 그녀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마린은 숨을 죽이고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야, 마린은 잊어버리지 않았어. 우리가 같이 있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생각나지 않나? 마린은 아직도 그렇게 작은 소리로 신음하곤 하나? 이제부터 시험해 볼까? " 이야기하는 동안, 그의 한 손이 등골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다가 마린을 꼭 껴안았다.

"안돼요" 도전하듯 말했다. "놓으세요, 브레이즈. 부탁이에요. 나는 과거의 불씨를 다시 타게 하는 데는 흥미가 없어요. 당신이 이럴줄은 정말 몰랐어요" 문득 쓰라린 생각이 떠올라 목소리가 날카로와졌다. "당신에게는 재미 있을진 모르지만, 나는 여기서 지낸 마지막 일주일의 일을 결코 간단하게 잊을 수는 없어요. 당신은 내가 다른 애인을 가졌다고 미워했지만, 그후에도 내게는 많은 애인이 있었어요"

가슴을 애무하던 손이 갑자기 멎었다.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 마린은 아름다운 가면과 같은 브레이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멋있는 남자는 대개 멋으로 그치지만, 브레이즈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력한 의지의 소유자라는 데 있었다.

"당연할 테지" 브레이즈는 조용히 말하고 마린에게서 손으 뗐다. 그러나 마린이 고개를 돌리자 분명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을 이용할 셈이니까 조심해"

"그토록 신경이 쓰이세요?" "천만에" 그가 소리내어 웃었다. "마린은 물에 젖은 올리브처럼 아름다웠어. 남자의 마음을 빼앗을 만큼 아름다워....아니, 돌아서 있을 생각은 없어. 마린이 옷 입는 모습은 수없이 많이 본 기억이 있으니까"

"당신은 옛날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나요?"

화가 난 마린은 젖은 몸에 티셔츠를 입었다. 자기 몸을 바라보는 브레이즈의 존재를 무시하고 싶었으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뒤에 타도 좋아"마린이 옷을 다 입자 브레이즈가 말했다. 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걸어 가겠어요" "그래서 집에 있는 사람들을 깨울 생각인가?"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죠?" "개들이 있으니까" "그렇군요.....하지만 당신과 함께 돌아가도 발소리가 나서 개들이 알 거예요"

"나하고는 낯이 익었거든" 브레이즈는 귀찮다는 듯이 마린의 손목을 잡고 말이 있는데로 끌고 갔다. "어서 타"

브레이즈와 함께 같은 말을 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 손으로 벨트를 붙잡은 채 되도록 몸을 떼려고 노력했다. 브레이즈가 어깨 너머로 말했다.

"나는 전염병 환자가 아니야, 마린. 우스운 행동은 그만두고 두 팔로 나를 꼭 끌어안아"

입술을 깨물고 하라는 대로 하면서 그의 등에 얼굴을 대었다. 순간, 기쁨이 치솟고 고동이 빨라졌다. 제발 브레이즈가 이것을 깨닫지 못했으면.

나무 빗장이 있는 데서 말을 내렸다. 잰걸음으로 사라지려는 마린을 브레이즈가 붙들었다. "마린!" "?" "나는 정말 마린이 있는 동안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야. 엘리스에게 미리 말해야 할까?" "어째서 그런 일을?" 씁쓸하게 말했다. "나에 관한한, 당신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았어요?"

"싸움이 너무 빨리 시작되는 것 같은데" 비웃는 브레이즈의 매력적인 얼굴에 달빛이 비쳤다. "마린이 싫다고 하는 말은 들은 기억이 없어........잘 자"

 

3

한밤중에 수영을 했기 때문에 늦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했으나, 평소와 같이 마린은 일곱 시에 눈을 떴다. 엘리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식탁에서는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점심때쯤이 되어야 신문이 배달된다. 엘리스는 점점 맥이 빠지는지 한참 동안 멜론을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지겨운 냄새를 빼고 멜론을 만들 수는 없을까?"

"유감이군요"

"마린은 정말 아름답군" 겨우 그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어째서 나는 마린과 결혼하지 않는 것일까?"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지" 브레이즈가 프랑스 양식의 문으로 들어오면서 빈정거렸다. "만일 결혼했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아침마다 자네한테 위트가 풍부한 화제를 기대하게 될 것일세. 안정이란 놈은 생활을 무료하게 만들기 때문이지"

브레이즈는 커피 잔을 들고 얼굴을 돌리고 있는 마린을 자세히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스는 억지로 웃음을 띠어 보였다.

"아침만 되면 자네가 독선적으로 된다는 사실을 잊었었군"

그러나 이런 뒤부터는 부드럽게 대화가 진행되었다.

브레이즈가 운전하여 엘리스를 블랙록스 목장으로 안내하기로 했다. 물론 마린도 동행하게 되었다.

"엘리스, 만일 불안하다면 브레이즈의 차에 타기 전에 멀미약이라도 먹어 두는 것이 좋겠어요. 옛날과 마찬가지라면, 저 렌드로우버로 절벽이건 강바닥이건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달릴 테니까요"

마린이 조롱하듯 말하자 엘리스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사실을 잊었었군. 자네는 언제나 저돌적이었지, 브레이즈. 세월이 자네한테 분별력을 가져다주길 바라는 것은 너무 낙관적인 생각일 거야."

"곧 알게 된다, 이 말이지?" 브레이즈는 창가에서 돌아서며 마린의 얼굴을 흘끗 보고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저돌적이었던 기억은 없지만, 젊은 혈기로 저지른 과오에서 몇가지 배운 것은 있네. 첫재는 생각하는 일이지, 철저하고 깊이 말일세. 그러고 나서 행동에 옮기는 거야. 그러니 자네는 지극히 안전해, 엘리스. 골절은커녕 상처 하나 내지 않고 자네와 마린을 도로 데려올 테니까"

마린은 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그의 어투에는 약간의 자조적인 느낌이 있기는 했으나, 그런데도 이 말이 자기에게 하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영기서 몇 주일 동안 지내다 보면, 마지막에는 신경쇠약에 걸릴 것만 같았다. 험준한 숲속에서 돌멩이 하나만 들고 굶주린 호랑이의 습격을 기다리는 것과도 같다. 이런 상태를 이용할 작정이라고 한 브레이즈의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왜 아직도 나를 응징하려 하는 것일까? 마치 카드를 모두 잡힌 채 게임을 하는 것과도 같다.....

"마린?"

", 미안해요. 잠시 생각을 하느라고......"

"30분 안으로 준비할 수 있을까?

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이즈가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쓸어 올려 주었기 때문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차고에서 기다리겠어"

브레이즈는 가만히 머리를 당겨 보고는 식당에서 나갔다. 덩치가 큰 사나이치고는 조용한 걸음걸이였다, 마치 밀림의 호랑이처럼.

"놀라운 존재로군" 엘리스가 다시 홍차를 한 잔 따르면서 말했다. "만일 머릿속이 텅 비어 있다 하더라도 충분히 남의 이목을 끌었을 거야. 대학생 때부터 그랬었지. 나는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라. 애송이인 주제에 모든 것을 다 갖고 잇는 것은 불공평하다고---외모, 섹스어필, 두뇌, 그리고 강한 개성 등"

"돈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죠?"

"그건 관계없어, 만일 한푼 없이 태어났더라도 자기 힘으로 재산을 모을 녀석이니까"

"행복한 사람이군요, 무엇이든 다 가지고 있으니까요" 마린이 가볍게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엘리스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 나는 3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는데, 그때가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했던 시기였어. 카렌이 죽은 뒤에는 창작에 열중하여 자신을 잊을 수 있었지만 브레이즈는...."

마린이 갑자기 일어서며 엘리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에게 반려자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어요. 원하는 만큼 손에 넣었을 테니까요." 왜 그런지 손이 떨렸다. 마린은 접시를 치우려고 했다.

"물론 그랬을 테지. 그러나 아내는 없어....브레이즈는 사랑의 실재 같은 것을 안 믿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아무리 그가 부럽다 해도 나는 그와 자리를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어"

"브레이즈는 사랑 같은 것은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거예요...., 30분 후에 나간다고 했죠?"

"그래, 알었어. 이제 나가지. 마린도 빨리 준비를 하도록"

혼자 남게 되자, 마린은 어째서 아까 엘리스의 말에 그토록 동요했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다만 브레이즈의 일에 무관심 할 수 없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마린은 엘리스의 설득으로 여기 오게 되었으나, 엘리스가 이 상황에 소설가로서의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친절하고 걱정해 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업에서 오는 욕심이 없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좀 더 정신을 차리고 누구에게도 자기 심중을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겠어.....마음을 다져 먹자 마린은 접시를 챙겨 가지고 주방으로 갔다. 미세스 필드게이트의 긴장되고 호기심을 감춘 얼굴이 거기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남편을 잃은 사실에 대해 애도를 표했다. 집 모양이 바뀐 데로 화제가 바뀌자 가정부의 표정에 무엇인가가 스쳐갔다.

"그래요, 변화는 피할 수 없는 거예요. 브레이즈가 결혼하면 이 집은 좀 더 바뀔 거예요"

"그러면 브레이즈도 결혼을 생각하고 있나요?"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요즘에는 코럴리 알렌과 열심히 만나고 있어요. 패터슨즈 클리크 목장의 알렌가를 기억하고 계시죠?"

", ;물론이죠. 그런데 코럴리는 아직 어린애여서 기숙학교에 들어가 있지 않나요? 분명히 크고 검은 눈에 귀여운 금발의 소녀..."

"그 아가씨예요. 지금은 아주 미인이 되었어요. 귀여운 사람이죠. 그래서 우리는 모두 브레이즈의 생일에는 약혼 발표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앞으로 3주후....그런데 마린, 언제까지 여기 있을 예정이죠?"

"브레이즈의 생일까지는 있을 생각이지만, 분명히 말할 수는 없어요. 모든 것은 미스터 킴버의 마음에 달렸으니까"

이미 출발할 시간이었다. 마린은 서둘러 주방에서 나왓다. 가정부의 폭탄 선언에도 까딱하지 않는 것은, 6년 동안 다져 온 자제심 때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린은 얼른 방으로 돌아가 좋아하는 짙은 보라색 코르덴 바지와 능직 긴소매 셔츠로 갈아입었다. 잠시 망설인 끝에, 같은 빛깔의 코르덴 조끼와 크림색의 두터운 스웨터를 가져가기로 했다.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으나, 이 계절에는 언제 날씨가 변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멋진 드라이브였다. 추억의 앨범에 수록해 두고 싶은 하루였다. 푸른 대지는 풍성한 열매를 약속하는 듯 했고, 바다에는 안개가 피어올라 먼 섬이 보랏빛으로 보였다. 브레이즈는 어젯밤의 일을 잊어버린 것 같아 마린도 차차 마음이 느긋해졌다. 토지에 대한 브레이즈의 애착은 무척 깊은 것이어서, 그 이상의 안내자는 없을 성싶었다.

점심은 나지막한 언덕의 나무 그늘에서 먹었다. 피자를 먹고 홍차를 마시고 나서 엘리스는 벌렁 드러누웠다. 브레이즈가 조롱하듯 말했다.

"이것봐, 벌써 피곤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아니, 전혀. 다만 우리들 글쟁이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휴식을 필요로 하지. 쉴 새 없이 일하는 놀라운 두뇌에게 감각이 파악한 정보를 소화시킬 시간을 주기 위해서 말일세" 엘리스는 묘한 학설을 피력하고는 한손으로 눈을 가리고 낮잠을 청하려 했다.

잠시 후, 마린도 말했다

"나도 좀 자야겠어요. 눈이 감길 지경이에요"

"어젯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나?"

" 글쎄요." 하면서 마린은 깜박 잠이 들었다. 문득 몸위에 무게를 느꼈다. 눈이 떠지지 않아 손으로 더듬었더니, 머리칼과 따뜻한 피부가 손에 닿았다. 브레이즈가 얼굴을 올려놓고 있는 거서이었다. 눈을 뜨려 했으나 햇빛에 눈이 부셔 다시 감고 말았다.

이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이 브레이즈의 머리가 움직이며 배에 입술이 닿았다. 언제 벌써 셔츠를 걷어 올린 것일까? 살갗 위에서 꿈틀거리는 관능적인 입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브레이즈는 머리를 기대고 한 손을 셔츠 속으로 들이밀어 가만히 그녀의 가슴을 애무했다. 얼굴에 그림자가 지자 마린이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엘리스가...."

"엘리스는 없어. 마린, 우리뿐이야"

브레이즈는 거친 소리로 말하고 입술을 겹쳐 왔다. 마린은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브레이즈는 두 손과 두 다리로 마린을 누르고 그녀에게 체중을 실으면서 키스로 그녀의 입술을 억지로 벌리려 했다. 얼마 동안 마린은 브레이즈에게 눌려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브레이즈가 고개를 든 순간 그의 맹세를 생각해 냈다. 마린은 뱀처럼 재빨리 머리를 들고 브레이즈의 턱을 주먹으로 때렸다.

"백 배로 갚아 주겠어, 이 귀여운 암캐"

"할 수 있으면 해보세요. 조만간 그 둔한 머리로도 알게 될 거에요. 나는 당신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과 침실에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요. 당신에게 유혹당했을 때 나는 어린애였지만, 이제는 어엿한 어른이에요. 협박받는 것 정도로는 안기지 않아요. 폭력도 달콤한 말도 통하지 않아요. 강간이라면 가능할지 몰라도, 그렣게 되면 골치 아파질 거예요. 당신은 뭐가 뭔지 모르는 사이에 법정에 서게 될 테니까요. 그러니 제발 내버려 두세요. 혼자 있게 해 주세요!"

브레이즈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마린은 알 수가 없었다. 엘리스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브레이즈는 날랜 동작으로 벌떡 일어나더니 마린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엘리스가 모습을 나타냈을 때, 마린은 이미 셔츠를 진즈에 집어넣고 차에 기대어 있었다. 브레이즈는 점심을 담았던 바구니를 차에 싣고 있었다. 엘리스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을 깨달았는지 예리한 눈으로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린은 태연한 어조로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

"탐험을 했지. 메모를 해줘, 멋진 자료가 발견되었어......" 엘리스에게 어울리는 신중한 대사였다. 해변을 향해 천천히 달리는 차 안에서 마린은 아까의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문득 눈을 떴을 때 나는 현재의 상황을 잊고 잇었던 거야. 단 몇 분 동안이었지만 옛날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에 브레이즈의 애무를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였던 거야. 브레이즈가 오해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브레이즈의 애무로 달콤한 전율을 느꼈던 일을 생각하니 수치로 몸이 뜨거워졌다. 가정부 말에 따르면 브레이즈는 코럴리와 결혼할 것이라 했는데도! 엘렌가는 전통 있는 가문으로서, 친척도 많고 부자였다. 코럴리 알렌이라면 블랙록스 목장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여주인이 될 것이다. 알수 없는 무언가가 마린의 가슴의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었다.

", 머리가 아파, 마린?"

"아뇨, 나는 좀처럼 머리가 아프지 않아요"

"모든 것이 다 건강하지" 엘리스가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이 정답게 말했다. "내가 고용했던 비서 중에서 가장 건강한 사람이야"

오후는 천천히 지나갔다.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었으나, 마린은 드라이브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얼른 집에 돌아가 브레이즈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겨우 저택의 부지에 이르렀을 때, 브레이즈는 엘리스에게 랜드로버를 운전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불가피할 때는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것은 왜 묻지?"

"자네가 외출하고 싶을 때 내가 없는 경우도 있지 않겠나?"

"그럴 경우에는 마린에게 부탁하면 돼. 나는 전원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더 좋거든"

"그렇다면 마린과 바꿔 앉게, 운전의 요령을 가르쳐 줄 테니까"

"나는 내리고 싶군, 마린만 괜찮다면 잠시 조사할 일이 있어서"

결코 괜찮지 않았지만 마린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스가 사라지자 마린은 핸들을 잡고 브레이즈의 지시를 받으면서 무거운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토목공사용 불도저를 비롯하여 목장의 모든 기계를 운전하면서 자란 마린에게 있어서는 랜드로우버의 운전도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얼마 후에 브레이즈가 말했다.

"좋아, 그러면 호수 근처의 험한 길에 가서 연습하도록 하지"

물결치는 바닷가와 송림 사이에 낮은 모래언덕이 있었다. 브레이즈의 말에 의하면, 틴에이저들이 특히 험한 코스로 여겨 오토바이 훈련을 하는 곳이었다.

옆에 브레이즈가 앉아 모든 동작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주의가 산만해 지기 쉬웠다. 마린은 마음속으로 브레이즈를 무시하고 겨우 운전에 몰두했다.

"그러면 이제는 저 길이야" 몇몇 모래언덕을 지나고 나서 브레이즈가 말했다. "송림을 빠져나가 목초지로 다시 돌아오는 거야"

숲속은 서늘하고, 소나무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험한 길을 자신만만하게 올라가고 잇을 때,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뒷바퀴가 모래에서 헛돌다가 옆으로 미끄러지며 길에서 벗어낫다.

"어마!" 차가 멎었다. "미안해요"

"놀라운 솜씨야" 브레이즈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하기야 마린은 옛날부터 기계를 잘 다루었지" 마린은 기어를 바꾸어 차를 뒤로 가게 하려고 했다. 그 손을 브레이즈가 제지했다. "그대로 좋아. 그건 그렇고, 이제는 우리도 좀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야기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브레이즈. 어째서 과거를 묻어 두려 하지 않죠?"

"묻어 버린 것으로 알았었지, 마린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마린은 브레이즈의 손을 뿌리치고 핸들에 두 팔꿈치를 올려놓으면서 가만히 앞을 바라본 채 조용히 말했다.

"나는 여기서 나갈 때는 두번 다시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랜 시간이 걸려서 겨우 불행에서 벗어날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또다시 당신과 관계를 가져서 겨우 손에 넣은 마음의 평화를 잃고 싶지는 않아요. 더 이상 내게 상처를 입힐 생각은 마세요, 브레이즈. 당신의 복수는 끝났어요. 당신은 지나치게 가혹한 복수를 했어요. 사실은 당신은 나를 원하지 않고 있어요. 다만 나를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지?"

"섹스의 노예 말이에요. 당신에게 있어서 나는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거예요."

브레이즈는 마린에게 몸을 돌리고 거의 정답다고 할 정도의 어조로 말했다.

"마린은 불행에서 벗어나는 데 그다지 긴 시일이 걸리지도 않았잖아, 여기서 나간 지 6주일도 안 되어 결혼해 버렸으니까"

마린은 저도 모르게 가느다란 금반지를 손으로 가렸다. 이것을 사는 것만도 폴에게 있어서는 최대한의 정성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동작이 완고한 브레이즈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는 마린의 손을 떨쳐 버리고 오른손 약지를 붙잡았다. 마린은 아파서 얼굴을 찌푸렸다.

"브레이즈!"

"어떤 녀석이었나? 사립탐정을 고용해서 당신을 찾게 했는데도 발견하기까지는 3개월이나 걸렸어. 그때 이미 마린은 결혼한 후였더군"

"당신이.....어떻게 했다고요?"

"지금 말한 그대로야" 브레이즈는 마린의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어째서죠?"

"마린과 아직 결말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지"

"어마, 무슨 말을!"

마린은 너무나도 오만한 태도에 화가 나서 브레이즈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브레이즈의 손끝에 힘이 가해지자 결혼반지가 빠졌다. 마린은 그것을 빼앗으려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브레이즈는 송림 속으로 반지를 내던져 버렸다. 마린은 소리치며 차에서 뛰어 내리려 했다.

"내버려 둬!"

브레이즈는 마린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아픔과 충격으로 마린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것은 오직 하나뿐인 폴의 유품이에요"

"추억이 있지 않아?" 브레이즈는 마린의 저항하려 하자 무서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가만히 있어, 이 작은 악마야!" 너무나 험악한 기세에 마린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브레이즈는 계속 냉혹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 그러면 일을 분명히 하기 위해 얘기를 하자구. 마린의 결혼 이야기가 듣고 싶어"

"무엇을 알고 싶으세요?"

"어디서 녀석을 만났지?"

"나는 레스토랑에서 일했어요. 그는 그곳에 자주 왔어요"

"그래서 마린에게 반했다는 건가? 바보 같은 녀석! 그 녀석은 마린에게 결혼 신청을 할때, 마린에게 과거에 이미 두 남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내가 숫처녀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어요." 그말 속에는 냉혹한 분노가 깃들여 있었다. "이제 속이 시원하세요, 브레이즈? 당신이 여성의 성생활 고백을 듣고 좋아하는 취미까지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군요."

"마린에 대해서뿐이지, 달링." 브레이즈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와도 잤나?"

"무슨 소릴 하세요! 우리는 결혼한 사이였으니까 당연한 일이죠"

"녀석도 마린의 그 작은 몸매에 만족했을 테지?" 브레이즈는 심한 저주의 말을 퍼붓고 마린의 목덜미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마린은 입술 깨물었다. 브레이즈는 나를 불타게 하는 방법을 무엇 하나 잊지 않고 있어.

"이렇게 하는 것을 그에게 가르쳤나? 또 이렇게 하는 것도?" 브레이즈의 한 손이 셔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그녀를 희롱했다 .

마침내 욕망이 불꽃처럼 타올라 마린은 그에게 기대었다. 브레이즈는 목덜미에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기고 그대로 입술을 어깨 쪽으로 옮겨갔다. 마린은 신음하듯 말했다.

"싫어...."

"싫을 까닭이 없지" 브레이즈는 마린을 자기 쪽으로 향하게 했다. 얼굴에는 관능적인 만족감이 떠올라 있었다. "마린은 나를 원하고 있어. 마린,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어때?"

마린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욕망의 불꽃을 끄고자 하는 노력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뿐만이 아니에요." 어떻게든 자신의 말이 진실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썼다. 이런 느낌이 들게 할 수있는 사람이 브레이즈 한 사람뿐이란 것을 그가 알게 된다면 그녀는 이미 파멸인 것이다. "당신이 유일한 사람은 아니에요"

"알고 있어" 브레이즈는 잔인하게 웃었다. "마린 같은 여자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이지, 달링. 욕망에 사로잡혀 당신은 지금 자기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어"

"당신이 눈뜨게 한 욕망이에요"

" 글쎄.....내가 최초였을까? 나보다 앞서 텔리가 있지 않았을까?"

철썩 하고 따귀 때리는 소리가 났다. 마린은 브레이즈에 못지않게 창백해진 얼굴로, 브레이즈의 뺨에 남은 자기 손자국을 바라보았다. 흰 손자국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당연한 보답이에요. 당신이 지금의 나를 어떻게 여기건 상관없지만, 그 무렵의 나까지도 아무하고나 자는 여자로 생각할 권리는 없어요! 당신에게 안긴 것은 당신을 사랑했었기 때문이고, 또 그래서 전혀 저항하지 낳았던 거예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린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분노만이 남아 있었다.

"당신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지만, 그 사실만은 빼앗을 수 없어요.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 나는 17세 소녀로서 할 수 있 한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도망치자마자 결혼해 버렸나?"

"그래요. 아아, 제발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해요.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잊어버려야 할 이야기를 끝없이 들추어 내다니, 우리 모두에게 비참한 생각만 들게 할 뿐이에요. 목소리에 피곤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들어 브레이즈의 표정에 분노와 경멸이 깃들여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더군다나 당신은 곧 결혼할게 아니에요, 코럴리 알렌과. 그렇죠?"

"누구한테 들었지?"

"모일리 필드게이트에게서요" 하고는 무관심한 듯이 웃었다. "나한테 충고하듯이 말하더군요. 이처럼 당신게 대해 잘알고 있는데요, 아직도 내 장래를 당신에게 맡길 줄 아세요?"

"그렇다면 마린의 미래는 엘리스에게 맡길 셈인가?"

마린이 가만히 있자, 브레이즈는 그녀의 턱에 손을 받쳐 얼굴을 쳐들었다. "대답해 봐, 마린" "아뇨"

"그런데도 녀석은 마린에게 아침의 불쾌감을 씻어 준다며, 내 눈앞에서 왜 마린과 결혼하지 않는 것일까 하고 지껄이는 거야? 아주 친밀한 사이인 것 같은데?"

"친하죠. 하지만 나는 엘리스의 애인은 아니에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누구하고도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정말 다행이군, 엘리스는 마린과 결혼하지 못할 테니까. 녀석의 결혼생활은 무척 행복했었지. 다행히도 죄에 물들기 전에 부인이 죽었고.......그러한 헌신적인 사랑을 만나지 못하는 한, 두번째 모험에는 발을 내딛지 않을 거야"

"어마, 빈정거리는군요"

마린은 브레이즈의 냉담한 미소에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세계 제일의 스승한테서 배웠지" 하면서 그는 재빨리 그녀의 입술을 끌어당겨 입술을 겹쳤다. 거친 키스에 마린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겨우 고개를 들고 마린은 분노와 욕망으로 창백해지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당신은 정말 싫어요!"

브레이즈는 빈정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고 웃었다.

"하지만 마린은 나를 원하고 있는거야, 달링. 난 마린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아무리 몸을 굳히고 키스에 응하지 않으려 해도, 그 살갗이 축축해지고 무의식적으로 몸을 밀어붙여오지 않았느냔 말이야"

그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잔인한 표정을 지었다.

"자아, 이제 집으로 돌아가지. 마린이라면 언제든지 이 차를 사용해도 좋아. 다만 행선지만은 나에게 알려야 해"

 

4

사흘째부터는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엘리스의 소설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린도 낮에는 계속 바빴다. 밤에도 브레이즈는 완벽한 주인 노릇을 했다. 다행히도 그는 마린에게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디너파티가 열리게 되었다. 그날은 전에 없이 늦게까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마린은 아주 바쁘게 일했다.

그녀는 비서라는 자기 신분에 어울리는 옷을 골랐다. 연한 핑크빛의 헐렁한 웃옷에 핑크빛 요크 스커트. 지적으로 보였으나 남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차림이었다. 머리는 뒤로 묶고, 높은 하이힐을 신었다. 아주 점잖은 화장에 귀걸이를 하는 것으로 단장을 끝냈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폴이 준 반지 자국이 하얗게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며 찾아보았으나 끝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가슴이 찡하고 아파 왔다. 마린은 문득 어머니의 유물인 결혼반지 생각이 나서 그것을 꺼내 손가락에 끼었다. 남편을 생각나게 하는 유일한 것이 사라지자 완전히 남편이 죽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죄책감을 느꼈다. 폴은 그때 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직 살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사랑할 수 있는 아내를 맞아 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그런 폴은 자살하고 말았다. 자신의 질투와, 나의 앵정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끝내 살아 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군" 브레이즈가 귓전에서 속삭였다. 랜드로버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 처음으로 둘이만 있게 된 것이다.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요"

"언짢은 생각인가?"

"슬픈 생각이에요. 하지만 이젠 끝났어요"

"그렇게 간단히 잊을 수 있는 것이었나?"

"그렇지는 않지만,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까요. 과거에 사로잡히는 것은 일종의 자기 연민일지도 몰라요"

"마린은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군?"

"노력하고 있어요"

브레이즈는 마린의 팔을 잡더니 창 앞에 있는 코럴리 쪽으로 걸어갔다. 치 가까이 가기도 전에, 마린은 그녀의 적의에 찬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늘씬한 키에 그야말로 미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다만 토라진 표정만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마린은 코럴리가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브레이즈가 다정하게 대해 주면 고럴리 역시 어런 낯을 하지 않을 텐데, 그는 코럴리를 조롱하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열 두 명이 저녁 식사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건너편에 앉은 코럴리가 공격을 가해 오는 데는 계기가 필요치 않았다. 사랑에 들떠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와서 즐거운 모양이죠?"

"그래요"

"옛친구와 다시 만나는 일은 즐거울 거예요. 물론 때로는 실망하는 경우도 있겠지만요"

"흔히 있는 일이 아니겠어요? 세월과 함께 인간은 변하는 것이니까, 차차 마음이 떨어져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여기서도 그랬나요?"

너무나 속이 들여다보이는 질문이었다. 모두가 가만히 잇는 가운데 마린이 대답했다.

"아뇨. 왜냐하면 변한 것은 나뿐이고 블랙록스는 옛날 그대로니까요. 그러니까 실망을 했다면 내게 대해서지, 나를 실망시킨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들으셨죠?" 코럴리가 브레이즈에게 말했다. "미세스 싱클레어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고 하는 군요! 집을 고치고 정원도 모양을 바꾸고 풀은 물론 요트까지 새로운 것으로 바꾸지 않았어요?"

"그런 것은 하찮은 일이에요. 여기서는 사람도 땅도 변하지 않아요. 다소의 변화는 있어도 대지는 영원한 것이에요. 분명한 것은 오직 두 가지뿐이에요-바다는 영원히 조수의 간만을 되풀이할 것이고, 인간은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어마, 이상한 얘기네요!" 코럴리는 말끝을 흐렸다. 브레이즈가 물었다. ;어투는 조용했으나 마린의 옆얼굴을 보는 눈은 예리했다.

"마린은 운명론자인가?"

"그럴지도 몰라요."브레이즈가 설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마린은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코럴리가 던지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보아, 브레이즈와의 사이를 어느 정도 깊이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몹시 질투심이 많은 사람인가? 아니면 연인으로서의 입장이 불안정하니까 독신 여성 모두를 의심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식사 후 거실에서 커피를 마실 때 알게 되었다.

"언제까지 여기 잇을 건가요?" 코럴리는 마린 곁에 앉으며 느닷없이 물었다. 그러나 애써 미소를 띠며 세상일에 익숙하다는 티를 내보이려 하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없어요, 모든 일은 엘리스가 결정하니까요"

"아아, 그렇군요. 그런데 일은 재미있나요?"

", 무척!"

"그것은 일 자체 때문인가요, 아니면 그 사람 때문인가요?"

"양쪽 모두예요. 엘리스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자상한 사람이고, 그의 소설은 가슴을 설레게 하죠."

"어마..... 분명히 자상한 분 같더군요. 그런데 당신은 남성에게 있어서 자상하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가령 그분을 남편이라 생각했을 경우에 말이에요?"

"아주 중요하죠. 어느 책에서 기혼여성에 대해 조사 한 것을 읽었는데, 남편에게 바라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으로 자상함을 말하더군요"

"나에게는 보다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물론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 결혼을 하셨다니까. 어머니 이야기로는 이혼했다고 하지만........"

"아니에요, 폴은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우연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브레이즈가 미세스 알렌에게 무어라 말하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코럴리의 붉어진 얼굴이 민망할 정도였다. 그녀는 소파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와서 남자의 입장에서 의견을 말해 주세요, 브레이즈. 미세스 싱클레어의 말에 따르면, 결혼 상대의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상함이라고 하는군요. 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싱클레어씨는 너무나 모범적인 남편이었기 때문에 그만한 사람을 지금까지 찾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 반대인 경우여서 두번 다시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그 둘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당신의 의견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브레이즈?"

"아주 젊은 사람이었지? 젊음과 다정함이 결부되는 일은 좀처럼 없거든"

"어머나, 브레이즈!" 코럴리가 입을 비죽거렸다.

"나를 다정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코럴리는 발톱을 갈고 있는 버릇없는 암고양이지" 브레이즈는 장난하듯 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찔렀다. "코럴리에게는 약에 쓰려 해도 그런 맛이 없어"

코럴리의 기뻐하는 듯한 미소를 보니, 그것이 최고의 찬사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마린은 또다시 코럴리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전에는 나 역시 그랬어. 브레이즈 곁에만 있어도 마음과 몸이 들떴으니까.

"당신도 전혀 다정한 데가 없으면서. 내가 냉정하다면 당신은 악마예요.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미세스 싱클레어, 깜짝 놀라는 것 같군요. 브레이즈처럼 냉담한 사람과 사랑을 하다니, 나를 어리석게 생각할 테죠?"

"누구에게나 때로는 어리석음이 허용될 때가 있어요, 코럴리. 중요한 것은 같은 과오를 두번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마린처럼 말인가?"

"나는 지금까지 숱한 잘못을 저질러 왔지만 같은 과오를 범한 적은 없어요" "절대로?"

", 절대로요"

코럴리는 마린과 브레이즈를 날카롭게 건너다보았다. 브레이즈는 골이 잔뜩 난 코럴리에게 미소를 던졌다.

"행운이었는지, 분별력 때문이었는지.....코럴리는 어느 쪽이라 생각하나? 세계 어디에 마린처럼 자신있게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을 리가 없어요. 나 같은 사람은 진절머리가 나도록 같은 과오를 거듭했어요. 아마 누구든지 그렇지 않을까요? 미세스 싱클레어, 당신은 정말 모범적인 사람이에요,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마린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브레이즈 같은 남성도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토록 무비판적으로 복종하는 상대가 필요한 것일까? 마린은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환상을 갖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그것이 내 환상인지도 몰라요......그러면 잠시 실례하겠어요. 엘리스가 어째서 저토록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고 오겠어요" 브레이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한순간 서로 노려보았다. 마린은 브레이즈의 눈에 옛날의 그 증오가 떠오른 것을 보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잠시 후에 그 표정이 사라졌다. "도망치는 것인가?" "아뇨" 대답하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마린은 얼굴을 똑바로 들고 등을 꼿꼿이 한 채 엘리스에게 다가갔다.

엘리스는 긴 팔로 마린을 껴안으며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내 느낌으로는 모두들 마린을 무서워하는 것 같군. 도대체 전에 여기서 무슨 일을 저질렀지? 혹시 사제폭탄이라도 던졌나?

"고작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못하세요?"

이때 호프가 가까이 왔다. 조용한 표정 속에도 불안감이 깃들여 있었다. 그녀도 조카인 브레이즈의 결혼에 내가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밤이 깊어짐에 따라 알렌 일가 외의 손님은 모두 돌아갔다. 엘리스는 알렌 부부를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었고, 코럴리는 내키지 않아 하는 브레이즈를 졸라 도서실에 책을 찾으러ㅗ 갔다. 마린은 처음으로 긴장이 풀려 테라스로 나갔다. 문득 폴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게 되더라도 내 애정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맹세하며, 언젠가는 자신을 사랑하게 될 테니까 지금은 호의만 가져도 좋다며 그녀에게 결혼 해달라던 폴.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폴과 접촉할 때마다 그녀의 육체가 거부하며 뒷걸음질 치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후에 일어난 일은 그리스 비극처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느새 정원에 나와 있던 마린은 문득 이야기 소리가 들린 것 같아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상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녀를 어떻게 생각해요, 브레이즈? " 코럴리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가 싫어요"

브레이즈의 음성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달래고 있는 듯 그는 코럴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마린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문제를 일으키려고 온 거예요. 당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초리라니! 나는 그녀가 여기서 있었을 때 당신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아요. 그녀는 아직도 당신을 원하고 있어요, 브레이즈"

"질투할 필요까지는 없어, 코럴리"

"당신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요. 물론 그녀는 대단한 미인은 아니지만,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해요"

"대단한 상상력이로군"

"나를 어린애 취급 하지 마세요"

브레이즈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으나, 코럴리의 음성은 화가 난 듯 높아지면서 절망적인 느낌마저 깃들여 잇었다. 마린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 살금살금 객실로 돌아왔다. 잠시 후 그들도 객실로 돌아왓다. 브레이즈가 어떻게 해서 코럴리의 질투를 달랜 모양이었다. 코럴리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브레이즈의 팔에 안긴 그녀의 모습에는, 방금 키스한 처녀 특유의 친근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알렌 일가도 돌아가게 되었다. 호프와 브레이즈가 현관까지 나가 배웅했다. 엘리스와 단둘이 남아 일에 관한 아야기를 하려 했을 때 현관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운 어린애야"

"하지만 굉장한 미인이에요"

"머리에 비해 육체의 성장이 지나치게 좋은 것 같아" 마린의 놀란 표정을 보고 엘리스가 소리내어 웃었다. "위선자같이 굴면 못써. 마린 역시 잘 알고 있을 텐데, 그 멋진 육체 속에는 욕심많고 어리석은 어린애가 숨겨져 있을 뿐이란 걸 말이야. 만일 브레이즈가 그녀와 결혼한다면 그녀에게는 신의 도움이 필요할 거야.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결혼은 기정사실인 것 같아요"

"모두 그렇게 믿으려 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브레이즈에 관한 한 기정사실이란 없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을 텐데?"

"만일 브레이즈가 희롱하려는 것뿐이라면 그녀가 받는 마음의 상처는 아주 클 거예요"

"그녀에게 무슨 마음 같은 것이 있겠나, 브레이즈가 탐나는 것은 거짓이 아니겠지만, 브레이즈의 지위와 재산이 크게 작용하고 잇는 것이 확실해. 브레이즈에게는 좀 더 나은 결혼 상대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나?"

"하지만 브레이즈는 바로 그것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외동딸이니 물론 알렌가의 땅도 손에 들어올 것이 당연하고요"

"마린은 무척이나 브레이즈를 미워하는 모양이군. 그렇지 않나? " 마린은 잠자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엘리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조용한 말로 경고했다.

"조심해야 해, 마린. 증오와 사랑은 비슷한 감정이야. 그 효과는 거의 같다고 해도 광언이 아니야."

이때 호프와 브레이즈가 방으로 돌아왔다. 엘리스는 시치미를 떼고 넌지시 물었다.

"그 소란은 도대체 뭔가? 마치 자네가 풀에 빠뜨리겠다고 협박하는 것 같더군"

"코럴리는 어둠에 대한 공포증이 있어"

"꽤 심각한 모양이군"

"아니, 혼자 내버려 두면 공포를 느낄 뿐이야"

"다행이군요" 마린의 목소리는 무뚝뚝했다. "결국 대수롭지 않은 일이군요" 호프가 파티에 대해 별로 의미 없는 감상을 말하고 사람들에게 마지막 한 잔을 권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이것으로 그날 밤의 파티는 끝을 맺었다.

 

방으로 돌아오자 한꺼번에 피로가 밀려들었다. 마린은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나이트가운을 침대에 내던지고 타월을 몸에 감은 채로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그러고는 몇 번이나 하품을 하면서 방으로 돌아 왔다. 마린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 몸에 감은 타월을 꼭 잡고 침대 가까이로 가다가 기겁을 하고 멈춰 섰다. 베개에 상반신을 기대고 손을 머리뒤로 돌려 깍지 끼고 있는 브레이즈가 보였던 것이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도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예요, 브레이즈? "

"마린을 기다리고 있었지" 타월만 두른 마린의 육체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그가 말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군"

"집어치우세요, 그런 낡아빠진 설득 방법은! 제발 나가 주세요!"

"엿듣는 일은 재미있었나?"

순간, 마린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하지만 마린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뇨, 싫었어요. 그리고 끝까지 듣지도 않았어요. 금방 거기를 떠났으니까요.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브레이즈는 한쪽 눈썹을 찡긋함으로써 그런 말을 누가 믿겠느냐는 뜻을 마린에게 전했다. 그러고는 경멸에 찬 미소를 띠었다. 마린이 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 브레이즈가 재빨리 행동을 개시 했다. 얼굴을 할퀴려는 손을 붙잡고 등뒤로 돌렸다. 그 때문에 마린은 브레이즈에게 몸을 밀어붙이는 꼴이 되었다.

"마린은 언제나 강렬한 인상을 내게 주거든"

마린은 홱 얼굴을 쳐들어 브레이즈의 턱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브레이즈가 빨랐다. 절망한 나머지 무릎을 쓰려 했을 때는 이미 침대 위에 내동댕이쳐지고, 그 위에 브레이즈의 체중이 실려 있었다. 얼굴이 어깨에 눌렸기 때문에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브레이즈의 손이 타월을 치우려 했다. 마린은 브레이즈의 어깨를 물어뜯고 순각적인 틈을 이용하여 두 손의 자유를 찾고는 브레이즈를 할퀴었다, 공포와 증오로 흐느껴 울면서.

"닥쳐!" 브레이즈는 몸을 조금 비켜 마린에게 숨쉴 틈을 주었다가 이번에는 입술을 막았다. 그는 강제로 마린의 입을 벌리게 하고는 관능 그것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마린의 뺨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브레이즈는 눈에 키스하여 눈을 감게 하고 두 팔을 그녀의 어깨 밑으로 넣었다. 브레이즈의 눈과 손 앞에 마린의 상반신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브레이즈의 손이 그녀의 턱에서 목에 이르는 선을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게 애무했다, 아까는 그토록 난폭하게 다루고서도. 가벼운 브랜디 냄새와 애프터 셰이빙 크림의 미묘한 향내가 남성적인 체취를 더한층 풍기게 하고 있었다. 마린은 이처럼 브레이즈에게 안겼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연약했다.

"브레이즈, 부탁이에요. 이러지 마세요. 이미 충분할 만큼 내게 상처를 입혔지 않아요?"

"저항하려 하니까 그러는 거야"

사정없이 내뱉는 말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베개에서 머리를 돌렸다.

"난폭한 남자는 언제나 이러는 것이 아닌가요?"

"난폭하게 할 생각은 없어"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입술이 귀에서 목으로 더듬어 내려갔다. 마린은 처음으로 브레이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단호한 결의에 차 있는 눈. 공포로 가슴이 죄어드는 성 싶었다.

"그럼..........무얼 하는 거예요?"

"이제 알게 돼" 또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그러나 이번 것은 상처를 입히려는 키스가 아니라, 달콤하게 유혹하려는 듯한 키스였다. 마린이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자 브레이즈가 조용히 말했다. "가련하게도. 미안해, 달링" 그러고는 입술이 천천히 살 위로 미끄러졌다. 마치 달래듯이. 흡사 지금까지 만났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다루듯이.

깊고 강렬한 욕망이 불길처럼 온몸을 태웠다. 마린은 숨을 죽였다. 두 번 다시 마력의 포로가 되지 않아야겠다고 욕망과 싸웠다.

"싫어요........"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브레이즈는 마린의 허리를 안아 쿠션 위에 살짝 올려놓고 가슴에 키스했다. 두 손이 등 뒤로 돌려져 있엇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키스를 피할 길이 없었다. 브레이즈는 충분히 시간을 끌며 그녀를 응징하고 괴롭히면서 허리와 어깨와 목에 입술에 키스하고, 가슴을 애무했다.

마린은 입술을 떨면서 가슴 위의 갈색 머리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천천히여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나, 어느새 꼭 쥐었던 주먹이 펴져 있었다. 브레이즈는 만족스러운 듯이 낮게 소리를 내며 마린의 두 손을 붙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녀는 덜리는 손을 브레이즈의 머리에 얹고 힘껏 끌어당겼다.

"무척 오래간만이군" 브레이즈는 머리를 들고 목에 가만히 입술을 댔다. "오랜만이야, 달링. 키스해 줘."

마린도 이제는 키스에 키스로 응하고 있었다. 브레이즈의 모든 동작에 몸으로 반응했다. 오직 브레이즈만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절정에 모든 것을 잊고자 원하면서. 마린은 떨리는 손으로 브레이즈의 셔츠 단추를 끄르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욕망에 이끌려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애무했다. 브레이즈가 귓볼을 살짝 깨물고 손을 배에서 허벅지로 미끄러뜨렸다. 불태울 듯한 관능 바로 그것인 애무였다.

"마린은 무엇을 원하나?"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마린은 브레이즈의 벨트 버클을 풀었다. 브레이즈의 전신에 전율이 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이에요" "증거를 보여줘"

마린은 두 팔을 브레이즈의 등에 돌리고 자기 몸을 활처럼 휘면서 브레이즈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그대로 끌어안고 있었다. 입술과 입술, 가슴과 가슴을 겹치고......

갑자기 브레이즈가 몸을 떼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아직도 자신이 있나, 마린-같은 잘못을 두 번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5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이 있었다. 마린은 욕망으로 흐릿해진 눈으로 브레이즈를 바라보고, 승리감에 도취한 그 표정에서 얼굴을 돌렸다. 온몸은 충족되지 못한 욕망으로 차 있었으나 자존심까지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속삭였다.

"그 말이 당신의 상처를 건드렸나요, 브레이즈? 이제 만족하세요?"

"아니, 만족하지 못했어" 그는 얼른 침대에서 내려서며 말을 계속했다. "마린을 보아도, 건드려도, 체취를 맡아도 흥분하지 않게 될 때까지 마린을 갖고 싶었던 참이야. 하지만 마린 같은 여자는 못 믿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도 견딜 수 있어" 브레이즈의 옷입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벌거벗은 몸을 가려!"

"왜요?"

마린이 가만히 눈을 뜨니, 브레이즈의 굳어진 얼굴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굶주린 얼굴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굶주린 정열과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싸늘한 분노가 마린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천천히 타월을 몸을 감았다.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나요?" 마린은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이트가운을 집어들었다.

"가엾은 브레이즈, 끝까지 해낼 각오가 없다면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빈정거리듯 말하고 나이트가운을 펼쳤다. 코튼 니트로 된 짙은 파랑색의 긴 셔츠였다. 목둘레와 양쪽 소매 끝에 빨간 테두리가 있었다. 마린은 브레이즈의 존재 따위는 잊은 듯이 타월을 떨어뜨리고 나이트가운을 머리부터 뒤집어써서 입고는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목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가렸는데도 몸의 곡선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확실히 의식하면서.

"안녕히 주무세요, 브레이즈"

충족되지 않은 마음을 재빨리 숨길 수가 있어서, 어쨌든 지금은 기분이 좋았다. 자신을 자제시킬 수 있는 힘을 브레이즈에게서 빼앗아 버린 자랑스러운 기분도 들었다.

뒷짐을 지고 침대를 돌아서 다가오는 브레이즈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 꼭 다문 입술. 마린에게 조소를 당하고 자제심을 잃은 것 같았다. 마린은 전에도 이러한 브레이즈를 본 일이 있었다. 텔리가 그 무서운 거짓말을 했을 때.....브레이즈의 두 손이 마린의 목을 감았다.

"두려운가, 마린?"

"아뇨" 마린은 고개를 저었다.

목을 감은 손에 약간 힘이 가해졌다.

"아무도 마린을 죽이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마린의 ....남편은 죽이려 했겠지? 녀석에게 어떻게 했나, 마린? 남자를 괴롭히는 귀여운 암캐처럼 행동했나? 가엾은 녀석이지, 그가 강물에 차를 처박기 전에 내가 만나지 못한 것이 유감이야. 만났으면 말해 주었을 텐데, 마린은 남자가 자살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가 아니라고"

"뭐라고요? 어떻게 알았죠? "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가셨다. "브레이즈......어떻게 알았죠? 자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는 조용히 말하고, 마치 마린을 건드리면 자신이 더러워지기라도 하는 듯이 얼른 손을 뗐다. "알고 있어, 마린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어"

마린은 꿀꺽 침을 삼키고 애써 태연한 체하려 했다. 그러나 폴을 생각할 때마다 치솟는 회환에 못 이겨 비틀거리며 힘없이 침대에 앉아 고개를 떨구었다. 무척이나 조용했다.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아프도록 자신을 지켜보는 브레이즈의 시선이 느껴졌다. 브레이즈의 승리였다. 그러나 마린은 어떻게 해서든지 대등한 입장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걸리나, 마린?"

"아뇨, 내게는 숨겨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직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어, 달링. 아직도 두번 다시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말할 작정인가?"

"내가 당신에게 육체적으로 끌린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왜 그것을 이토록 강조하려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내게 잇어서 당신이 최초의 남자였는지는 몰라도 유일한 남자는 아니거든요" 마린은 조롱하듯 가벼운 어투로 말하고, 브레이즈의 경멸에 찬 눈초리에는 까딱도 않고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위선적인 자기도취에 빠져 있으면서도 나를 원하고 있군요. 당신 역시 지난 6년 동안에 무척 많은 여자를 품에 안았을 거예요. 당신을 원하는 여자를 당신은 모두 경멸하나요? 어째서 나에게 손을 댔다가 당신이 더러워지기라도 하는 듯 손을 떼는 거죠?"

"그것은 좀 더 힘껏 안아 달라는 뜻인가, 아니면 형식적인 질문인가?"

"글쎄요" 마린은 고통과 분노를 애써 미소로 바꾸고 일부러 브레이즈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며 말을 계속했다. "당신 역시 지난 6년 동안에 전보다 더 멋진 애인이 되었을 테죠. 타다 남은 불을 그러모아 아주 놀라운 정사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몰라요.....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정이 매우 복잡해지겠죠"

"마린은 거기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제는 브레이즈도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두 사람이 원수처럼 암투를 계속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감정을 가면 뒤에 숨겨 두고 말로써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려 하고 있었다.

"고맙군요"

마린은 고개를 돌려 브레이즈의 눈을 외면했다. 침묵이 계속되었다. 새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마린" 마린은 얼굴을 들어 브레이즈의 얼굴에 고통스런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흐르고 너무나 많은 일이 생겨 버린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있을 수 없었다.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잔인했던 브레이즈의 모습이 남아 있고, 또한 폴의 죽은 모습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마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예요? 지금 나는 아주 피곤해요"

"나를 봐"

싸늘한 명령조의 말에 마린은 발딱 일어섰다. 전에 그토록 마음이 끌렸던 남자의 표정에서 그 그림자 같은 것이라도 찾아보려 했으나, 브레이즈의 얼굴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무엇을 원하는 거예요?"

"마린이야" 굶주림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타나 있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를 가지려 하지 않았잖아요?"

"그래, 마린을 적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서로의 입장이 분명해졌군요. 당신은 노리던 것을 증명했어요. ---나는 육체적으로 당신이 아주 매력적이라고 느끼니까요. 아무쪼록 생각해 보시고 난 뒤 즐기세요! 그럼 이제 됐나요? 나는 피곤해서 쉬고 싶어요"

"나한테 그런 말버릇을 쓰면 못써!"

"아아......그만두세요! 이제 나가세요, 브레이즈. 당신은 즐길 만큼 즐겼으니까 이제 나 혼자 있게 해 주세요" 그는 마린의 반항적인 표정에서 패배와 피곤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만족을 느낀 것일까. 브레이즈는 관능적이 표정을 입가에 띠고 한 손을 내밀어 마린의 가슴을 희롱했다. 오직 싸늘한 독점욕에 이끌려.

마린은 창백한 얼굴에 무언의 항의로써 눈을 감았다. 그녀는 침대에 쓰러져 실컷 울고 싶은 유혹을 참고 우뚝 섰다.

"건방진 대사가 이젠 더 없나?"

"없어요, 아무것도"

"그렇다면 이제야 서로의 입장이 분명해진 셈이군"

이 말만을 남기고 브레이즈는 방에서 나갔다, 남은 일은 자는 것뿐이라는 듯이 소매의 단추를 풀면서. 놀랍게도 마린은 고도 잠이 들었다. 자기 직전에는 엘리스의 말을 생각하고 씁쓸히 웃을 수 있는 여유까지 있었다.-블랙록스 목장에 돌아가면 과거의 망령을 떨쳐 버릴 수 있으리라고 한 말을.

 

이튿날도 맑게 갠 가을 날씨였다. 아침 일찍 일어난 마린은 머릿속의 안개를 씻어 버리려고 바다까지 조깅을 했다. 누군가가 풀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브레이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침 식사 테이블에 앉았을 때, 브레이즈는 거의 식사를 끝내고 있었다. 덕택에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쨌든 한 가지 장애물은 넘었다고 마린은 생각했다. 엘리스의 소설은 이미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어서, 마린은 착실하게 그것을ㄹ 타이프하고 있었다. 엘리스의 최고 걸작이 될 성싶은 예감이 들었다. 브레이즈의 비서인 엘레나가 열한 시에 커피를 끓여 가지고 왔다. 오전과 오후의 차 시간은 그녀와 둘이서 지내는 것이 어느새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위험한 화제는 조심스럽게 피하던 엘레나도 차차 마음을 터놓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에도 두 사람은 했빛을 가득히 받으며 테라스에서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타던 코렐로라는 말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여기 마구간에는 없는 것 같던데요?"

"브레이즈가 남에게 줘 버렸어요. 벌써 몇 년 되었는걸요" 엘레나의 어투는 묘하게 굳어져 있었다. "아무도 타는 사람이 없어서요" "몇 년 전인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세요?"

"당신이 여기서 나간 지 3개월 후라고 기억되는군요" 엘레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무언가가 마린의 머리를 스쳐갔다.

"우리 부모님이 살던 집을 개축한 것도 그 무렵이죠?"

", 같은 무렵이었어요"

"그래고 내 침실과 사무실의 구조를 바꾼 것도 역시 ..."

""

그 후에 배를 팔고 풀도 개조했다---토글호 위에서, 풀옆의 신전에서, 내 침실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린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블랙록스에서 나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 만한 것은 모두 송두리째 없애 버리다니, 브레이즈으 증오는 그렇게도 깊은 것이었을까....

하지만 그날 밤 이후, 브레이즈는 마린을 되도록 무시하려 하고 있었다. 말을 하는 것도 예의상 불가피할 때만이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싸늘한 태도였다. 경멸한다는 것을 감추려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린 자신의 감정은, 솔직하게 말해서 자기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몇 년 동안이나 잠자고 있던 욕망이 브레이즈의 애무로 다시 눈뜬 것만은 사실인 것이다. 때때로, 오래 전에 브레이즈가 했던 다정한 애무를 되살리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릴 때도 있었다. 매일매일이 추억을 가득차 버리게 되면, 그것 자체가 이미 고통이었다. 오직 일하고 있는 시간만이 그녀를 구해 주었다.

어느 날 아침, 드디어 엘리스가 엄한 어조로 말했다.

"마린은 전혀 먹지를 않는군. 커피만으로는 살아가지 못해. 오늘 아침도 조깅을 했나?"

"" 마린은 모일리 필드게이트의 시선을 느끼면서 토스트를 집어 마말레이드를 발랐다. "파인애플 농장을 한 바퀴 빙 돌았어요. 산비둘기가 마냥 쫓아오더군요"

"그것은 귀여운 동물이지.....마린과 브레이즈는 잘 어울리는군-둘 다 악마라고나 할까. 차이는 오직 하나, 브레이즈는 헤엄을 치고 마린은 달린다는 것뿐아야"

"홍차를 좀 더 드시겠어요? " 모일리가 엄한 소리로 말했다.

엘리스가 깜짝 놀라 머리를 들었다.

"고마워요, 그럽시다." 가정부가 나가기를 기다려 엘리스가 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모일리가 도대체 왜 저러지?"

"그저 기분이 안 좋을 뿐일 테죠"

"아아, 마린과 브레이즈가 잘 어울린다고 말해서 그렇군. 마린이 여기서 나갈 때 제법 소란을 피운 모양이군? 그래서 되풀이되는 건 질색이란 거겠지"

"모일리는 신분 제도에 대해 낡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에요"

"그런 면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마린이 여기를 떠난 후의 브레이즈를 차마 볼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로맨틱한 생각이시군요. 그야 얼마 동안은 모든 사람에게 못살게 굴었을 테지만, 그것은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곧 그 오스트레일리아의 모델과 요란한 모델과 요란한 연애를 시작했어요. 왜 기억하고 계시죠, 그 빨강머리 여자? 틈이 있을 때마다 뉴질랜드에 날아와서 기자회견을 갖고는 곧 결혼한다고 발표할 정도였으니까요. 저 역시 그런 숱한 경우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아요"

"하지만 브레이즈는 결혼하지 않았어"

"코럴리 알렌이 있어요. 미안합니다, 엘리스. 우리에게는 로맨틱한 해피엔드 따위는 없어요."

"브레이즈하고 싸움이라도 했나?"

"그것을 싸움이라 할 수 있다면요....어쨌든 우리가 싸웠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어요" "그토록 싸늘한 브레이즈를 본 것은 처음인데"

엘리스는 새로 끓인 홍차를 들고 온 가정부에게 웃는 낯을 보였다. "고맙소, 미세스 필드게이트, 마침 마시고 싶던 참이었는데"

"음식과 음료를 즐기시는 분을 보면 기분이 좋아요....마린, 아직도 그 토스트를 먹지 않았나요?"

"배고프지 않아요" 모일리는 눈썹을 치켜 올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마린은 다시 홍차를 한 잔 따라 가지고 창가로 가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브레이즈가 말한 파티에 마린도 갈 거야?"

엘리스의 말에 깜짝 놀라 그녀는 돌아다보았다.

"무슨 파티인데요?"

"요전에 여기 왔던 커플이 여는 것이라더군. 맥글레거라 하던가....아 그렇지, 마린은 그자리에 없었군. 어젯밤 마린이 일어난 뒤 브레이즈가 얘기해 주더군. 이번 토요일에 우리도 초대하겠다는 것이었어"

"나는 가고 싶지 않은데요"

"좋아. 그러면 슬슬 시작해 볼까, 일말이야, 마린"

 

브레이즈가 스스로 정했던 침묵의 계율을 깬 것은 그날 붐의 일이었다. 마린은 풀 근처에서 수면에 비치는 저녁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린은 토요일 저녁 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다면서?" 마린은 돌아보았으나, 생각에 잠긴 표정을 곧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

"어째서?"

브레이즈는 셔츠 차림이었는데, 자못 오만해 보였다. 그런데도 마린은 그의 욕망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꿀꺽 침을 삼키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은 알고 있을 거예요"

"나하고 하루저녁 같이 보내는 정도도 참을 수 없다는 말인가?"

"그 밖에 또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그토록 나를 증오하고 있나, 마린?"

브레이즈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한 걸음 마린에게 다가왔다. 거짓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입에서 말로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마린은 천천히 대답했다.

"아뇨. 그렇지 않다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지 않아요"

"그것이 바로 우리 차이점이지. 나는 마린을 미워하고 있으니까, 달링"

실제로 그런 말이 입 밖에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마린은 한순간 고통스러운 나머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가만히 있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어째서죠? 내가 먼저 도망쳤기 때문인가요?"

"아마도" 단 한 마디의 악의에 찬 대답이었다. 가볍게 넘겨 버리려던 마린의 시도는 어긋나고 말았다. 6년 전의 그 일이 브레이즈에게도 역시 쓰라렸던 것만은 확실했다. 마린의 귀향이 브레이즈의 오래 된 상처를 다시 긁어서, 몇년 동안이나 고여 있던 독을 토해 내게 했던 모양이다. 어면 마린에게 실컷 굴욕감을 맛보게 하지 않고는 두번 다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코럴리 알렌조차도! 마린은 질투로 몸이 굳어졌다.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되기는 하지만, 일단 상처가 아물면 브레이즈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브레이즈의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브레이즈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불가피하게 상처를 입힌 결과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브레이즈는 남달리 독점욕이 강한 사람이기에 질투의 고통도 그만큼 격렬했으리라.

마린이 배반했다고 생각했을 때 브레이즈의 자존심은 산산 조각이 났고, 마린이 결혼한 사실을 알자 자존심은 더욱 박살이 났을 것이 분명하다. 마린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텔리가 나가 버린 뒤, 브래이즈는 마린을 감금하고 일주일 동안이나 전혀 생명이 없는인형처럼 그녀를 다루었던 것이다. 굴욕을 당하던 그 나날들을 그녀는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녀가 도망쳐서 폴과 결혼함으로써 브래이즈에게 그녀의 죄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마린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만일........"

"뭐지?"

마음속에서 마린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만일 당신이 그동안 진실한 사랑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다른 말이었다.

"차라리 내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바보였어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싸늘한 목소리.

마린은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브레이즈가 어깨에 손을 얹고 그녀를 돌려세웠다. 위험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표정을 알 수 없는 브레이즈의 얼굴이 있었다.

브레이즈가 마린의 손을 잡고 자기 가슴에 갖다 대었다. 손바닥에 브레이즈의 심장의 고동이 전해져 왔다. 차차 빨라지는 고동이.......

"알겠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섹스란 이상한 것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는 마린을 경멸하고 있어. 그러면서도 마린을 몇달 동안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갈수 있다면, 몇 년의 목숨이 줄어들어도 아깝지가 않겠어. 마린에게 느끼는 이 퇴폐적인 정열에 나는 마음껏 몸을 맡기고 싶어. 만족할 때까지 마린을 맛보고 싶어. 마린의 마음과 몸에서 모든 비밀을 깡그리 들추어내고, 내게 있어서는 쾌락의 도구 이외에 아무것도 될 수없을 때까지 마린을 빠져들게 하고 싶어"

잔인한 말이 뜨거운 분류처럼 온몸의 욕망을 일깨웠다. 마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브레이즈의 손이 가슴 위에 잇는 마린의 손에 힘을 가해, 얼마나 그녀에게 이끌리고 있는지를 알리고 있었다.

"마린 같은 여자는 이 세상에 없어" 한숨과 함께 그의 입이 일그러졌다. "마린 이전에도, 마린 이후에도 한 사람도 없었어. 마린을 볼 때마다 나는 어떤 시 한 구절이 생각나-먼 옛날의 정열을 위해 나는 비참하게 병들고 만다."

그 시라면 마린도 알고 있었다. 브레이즈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에게 미래는 없고, 있는 것은 오직 지나가 버린 정열의 찌꺼기뿐. 마린은 가만히 그 시의 다음 구절을 읊었다.

"나는 계속 그대에게 충실했다, 시날라! 내 나름의 방법으로"

"아아, 이런 구절도 있지-마치 불륜의 사랑에 빠지듯이 그때마다 내 입술에서는 쓴맛이 났다."

"그래요" 마린은 한숨을 쉬었다. 폴을 생각하고, 그에게 얼마나 깊이 상처를 입혔는지를 뼈아프게 생각하면서.

브레이즈는 마린의 한쪽 손을 마저 잡고 양쪽 손바닥에 키스했다. 마린은 손을 뿌리치려 하다가 오히려 끌어당겨졌다. 어느새 그의 손이 등 뒤에 돌려져 있었다.

브레이즈의 육체가 불타는 욕망을 전하고 있었다.

"싫어요"

"탐이 나서 그래. , 탐나고말고. 그리고 마린도 마찬가지일 거야!"

한손으로 마린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입술을 겹쳐왔다. 마치 자신을 부추기고 있는 정욕에서 자유롭게 되고 싶다는 듯한 격렬한 키스였다.

마린은 몸을 뒤틀고 주먹을 쥐어 브레이즈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브레이즈는 그 두 손을 붙들어 등뒤에 고정시키고는 관능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린의 저항도 이것이 고작이었다.

곧바로 벌하기 위한 키스가 유혹적인 키스로 변했다. 그녀는 어느새 두 팔을 브레이즈를 껴안고 키스에 응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브레이즈의 입술이 목덜미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마린은 두 손으로 브레이즈의 등을 애무하면서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자 브레이즈는 마린을 안고 풀 하우스의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마린은 반쯤 감은 눈으로 브레이즈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브레이즈가 그녀를 긴 의자에 뉘었다. 두 사람이 눕기에는 좁았다. 브레이즈는 마린의 몸위에 체중을 싣고, 두 손을 마린의 어깨 밑에 넣어 몸의 자유를 빼았고 말았다.

"마린은 무엇을 원하지?"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정욕에 휩쓸리고 말았다. 마린은 말라 버린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면서 속삭였다.

"나는 사랑이 필요해요"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 브레이즈가 얼굴을 들고 히죽 웃었다.

"브레이즈....."

마린의 머뭇거리던 표정은 브레이즈의 손놀림으로 지워지고 말았다. 브레이즈가 셔츠를 걷어올리고 입술을 그녀의 흰 가슴에 대자, 고뇌가 마린을 꿰뚫었다.

마린은 숨이 막힐 듯했다. 그녀는 브레이즈의 머리를 껴안고 괴로운 듯이 몸을 움직였다. 어떻게 하면 브레이즈의 정열을 불태울 수 있을지는 그녀의 육체가 알고 있었다. 이에 뒤따르는 위험한 망가과 절정까지도.

"브레이즈! 어디 있지? 코럴리에게서 전화가 왔어" 호프의 높은 목소리가 차차 가까이 왔다.

브레이즈는 고개를 들었다. 이어서 신경질적인 한숨. 그리고 마린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릴 정도의 무서운 얼굴....브레이즈는 그대로 아무말도 없이 가버리고 말았다.

 

6

마린은 긴의자에 깊숙이 앉아 고개를 떨구고 30분쯤 기다렸다. 황혼이 짙어지고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마린은 뜨거워진 눈에 두 손을 대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브레이즈를 사랑하고 있는데도, 브레이즈가 나한테 느끼는 것은 단순한 정욕뿐이다. 더구나 정열과 복수하겠다는 욕망이 한데 얽혀 있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망쳐야지.........." 마린은 어둠을 향해 중얼거렸다. 자신을 요부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브레이즈에게 있어서 그녀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브레이즈가 발산하는, 마음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나이의 관능에 사로잡혀.....만일 그때 호프가 부르지ㅣ 않았다면.......마린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쥐어, 긴 의자에 얽혀 있는 두 사람의 추억들을 떨어버리려 안간힘을 썼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6년 전, 나는 브레이즈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의 애인이 되었다. 텔 리가 거짓말을 하고 호프가 맞장구를 쳤기 때문에 브레이즈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아직 18세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으나, 나는 브레이즈의 강한 독점요과 오직 그만이 내 인생에서 유일한 남성이었으면 하는 자신의 깊은 욕구를 잘 알고 있었다.

가장 큰 배반은, 가족의 말을 내 말보다도 더 믿었다는 데 있는 거야. 마치 내가 스탠토프 일가보다 열등한 사람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러기에 나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폴의 죽음을 초래하고 말았다. 폴만이 아니라 브레이즈의 아이까지도. 그리고 나는 물론 브레이즈도 정신적으로는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마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일어섰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 된다. 그때까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안 되겠지.

 

최초의 예리한 일별을 제외한다면, 브레이즈는 불가피한 경우 외에는 마린을 계속 무시하고 있었다. 그 대신 호프가 줄곧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마린은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엘리스가 맥글레거내 파티 이야기를 꺼내고 교묘한 화술로 마린으로부터 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지루한 이야기가 계속되는 마당에 엘리스만이 그녀에게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식사가 끝난 뒤, 이번에는 브레이즈가 쥐 사냥을 나가자고 했다. 엘리스는 기꺼이 찬송했으나, 마린은 일찍 쉬고 싶다며 거절하고 사냥에 가지고 갈 커피를 끓이기로 했다.

과연 모릴리다운 청결한 주방에서 마린은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넣었다. 커피가 끓기를 기다리면서 번쩍이는 스테인레스 싱크대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몇 가지 <만일>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텔 리가 거금을 훔쳐야 할 정도로 돈에 궁하지 않았더라면.....만일 아이가 생긴 것을 알고 브레이즈에게 이야기했더라면....하지만 브레이즈가 과연 결혼하자고 했을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추측도 할 수 없었다.

브레이즈는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그러나 결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기야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 것인가? 결혼이란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도 결혼한 이상의 기쁨을 모두 맛볼 수 있었을 테니까.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정열적인 섹스 상대. 어리고 세상일에 익숙지 못했기 때문에 브레이즈의 법칙으로 밖에는 게임을 할 줄 몰랐던 나. 그런 주제에도 긍지만은 대단해서, 브레이즈와는 미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치사하게 눌러 있지 않으려고 했던 나.

모든 것은 이미 늦었어-가장 슬픈 이야기야. 아니, 자신을 가엾게 여기다니, 안되지! 마린은 우유를 플라스틱 용기에 따라 넣고,, 다른 용기에 설탕을 넣었다.

옆에 있는 작은 방에서 보온병을 가지고 돌아왔더니, 검고 두꺼운 저지 바지 차림의 브레이즈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린은 감정을 억제한 목소리로 말했다.

"커피는 곧 준비될 거예요"

브레이즈는 고개를 끄덕이고, 보온병에 커피를 옮겨 담고 있는 마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린은 그에게 신경이 쓰여 손이 떨려서 그만 커피를 쏟았고, 뜨거운 커피가 그녀의 손에 닿았다.

그 순간, 브레이즈는 얼른 마린의 손을 싱크대 쪽으로 잡아당기고 수도꼭지를 틀어 냉수를 끼얹어 주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마린은 고개를 떨구고 손목을 브레이즈에게 맡긴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아픔이 약해져갈 무렵 브레이즈가 수도를 잠갔다.

"붕대를 감는 편이 좋겠어. 화상은 입지 않았지만 며칠 동안 피부가 쑤실 거야."

"" 그러고 마린은 자신도 생각지 못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브레이즈, 텔리는 어떻게 되었나요?"

"텔리라!" 브레이즈의 눈이 긴장되고 수수께끼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녀석은 죽었어, 4년 전 타일랜드에서. 떳떳치 못한 사건에 말려들어서 말이야. 방콕에 대로상에서 사살된 시체로 발견되었지"

"마약인가요?"

"아마 그럴 거야"

"저런, 미세스 글리에가 가엾게 되었군요!"

", 불쌍하게 됐지" 일부러 표정을 감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젖어 있는 마린의 손을 잡은 채 말을 계속했다. "텔리에게는 치명적인 성격적 결함이 있었지. 마음이 약한 점이야. 그 밖에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는데-용모, 섹시 어필, 머리.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지. 약한 성격에는 별다른 처방이 없어"

"당신, 텔리를 증오하고 있었죠?"

"아아, 미워했지. 녀석의 죽음을 가엾게 생각한 것조차 호프가 불쌍했기 때문이야." 내뱉듯이 매정하게 말했다. "녀석은 내가 소중히 여기던 것을 빼앗아 가고 말았어. 내 환상을 깨고 말았어. 나는 사랑과 신뢰와 행복을 한 인간에게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는데, 텔리는 내게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일깨워 주었어"

마린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나를 경멸하고 증오하고 있는 브레이즈의 저 눈초리.

"내가 죽지 않아서 유감이군요. 나 역시 오래전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가 뒤를 이었다."그랬더라면, 당신은 우리 두 사람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었을 텐데요"

"맞았어"

마린은 고개를 돌렸다. 하마터면 입을 열 뻔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기를 유산했을 때 자칫하면 죽을 뻔했었다. 그때 의식의 혼미에 빠져들면서도 어떤 원시적 힘에 의해 이 세계에 되돌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마린은 브레이즈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커피를 보온병에 옮겨 담고 나서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어요.....멋진 사냥이 되시기를"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나?" 브레이즈의 목소리에는 묘한 반향이 있었다.

그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서둘러 얼굴을 돌리려는 마린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는 마린의 목에 키스하고 가만히 깨물었다. 마린은 온몸에 기대감이 번지는 것을 느끼면서 마음과는 다른 말을 했다.

"이러지 마세요.....부탁이에요, 브레이즈"

"어째서? 나는 마린을 좋아하고, 마린 역시 나를 좋아하고 있어. 뭐가 잘못된 거지?"

응징하듯 입술이 움직이고, 한 손이 어깨 밑으로 들어와 가슴을 애무했다. 마린은 몸을 꼬았다. 언제나 마음 내킬 때는 나를 희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너무나 굴욕적이었다.

"싫어요! 지금의 당신을 본다면 코럴리 알렌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마린이 알바 아니야"

"그럴지는 몰라도, 당산과는 상관이 있는 일이예요. 놓아주세요"

브레이즈는 도전하는 듯한 마린의 눈초리를 자세히 바라보다가 자조적인 웃음을 때고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보온병이 든 바구니를 집어들었다. 마치 마린에게 더럽힘을 당하기라도 한 듯이, 평소와 달리 점잖하지 못한 걸음걸이로 주방에서 나갔다.

 

이튿날은 비가 오고 그 다음 날은 개었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되는 동안 마린은 타이프를 두드리며 무언가 색다른 행동으로 이 우울한 기분을 풀었으면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문득 소형 보트로 바다에 나간 채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아버지는, 죽을 생각에서 모터보트를 바다에 띄웠는지도 모른다. 말이 없고 내성적이며 유머 감각도 없는 사람이었고, 아내에 대한 사랑만이 남다른 아버지였다. 낚시하러 나간 지 일주일 만에 아버지는 익사체가 되어 해안에 밀려올라왔다. 정신이 나간 마린을 오빠처럼 위로해 준 것이 브레이즈였다. 그 뒤에도 일 년 동안은 오빠처럼 대해 주다가, 그녀가 17세가 되기를 기다려 자기 것이라는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타이프에 미스를 범했다. 그러나 일하는 동안에는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 밤에는 브레이즈와 함께 지냈던 날의 기억이 되살아나서 꿈에서마저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는 것이었다,

"내 기분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군" 맥글레거의 집에서 파티가 있는 날 아침 엘리스가 말했다. 아마 그에게 가끔 일어나곤 하는 편두통인 성싶었다. 그렇게 되면 아픔이 계속되는 24시간 동안 어두운 방에서 안정을 취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다고 엘리스는 투덜거렸으나, 적어도 구토증만은 가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침실까지 엘리스를 부축해서 침대에 편안하게 뉘어 주었다. 아침 식사 테이블로 돌아와 커피를 따르면서 마린은 엘리스가 앓아 누워 있으므로 자기도 파티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럴리와 브레이즈가 희롱하는 꼴을 보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오전은 일에 쫓기며 지냈다. 점심때는 브레이즈가 외출했기 때문에 조용했다. 오후가 되자 일이 끝났으므로 마음이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마린은 두꺼운 코르덴과 저지 옷으로 갈아입고 재킷을 걸친 뒤 집을 나섰다. 바람은 찼지만 산책을 하며 답답한 마음을 달래보고 싶었다.

모래언덕을 넘어 바닷가로 나가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최근 며칠 동안은 동남풍이 강했다. 바람이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뺨에 혈색을 되살려 주었다. 수평선에 검은 띠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쩌면 밤에 태풍이 불어올지도 몰라. 갈매기가 나직하게 울며 내륙 쪽으로 날아갔다. 벼랑 밑의 바윗길을 걷는 것은 위험했다. 마린은 재킷의 깃을 세우고 되돌아와 포우후터카워의 거목이 자라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멀리서 유조선이 천천히 가로질러 갔다. 그밖에는 요트도 어선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양치기의 피리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구릉의 목초지를 향해 이동하는 양떼가 보였다. 셰퍼드 한 마리가 마린에게 달려왔다. 아직 강아지라 해도 좋을 만큼 작았다. 조심스럽게 마린의 냄새를 맡으며 마린이 내민 손을 핥았다. 그러나 모처럼 친구가 되려 할 때 휘파람이 개를 도로 불러갔다. 머리를 들어 보니 휘파람의 주인공은 브레이즈였다. 마치 안장 위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침착하기 짝이 없는 승마자세였다. 물론 마린을 보았을 테지만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무시당한 것 같아 마린은 마음이 언짢았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제일 가까운 길을 택해 집으로 향했다. 아직 반도 채 오기 전에 비를 만났다. 머리를 적실 정도의 지나가는 비였지만.

집에 들어가 홀을 가로지르려 하자 서재에서 브레이즈가 나오며 말을 걸었다.

"잠시 얘기 좀 해도 좋을까?"

마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서서 서재로 들어갔다. 상당히 어두워졌기 때문에 불을 켜 놓고 있었다. 엘리스는 어떻게 된 거냐는 그의 질문에 그녀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겠군"

", 그저 아무도 방해가 되지 않게 할 수밖에 없어요. 오늘 밤 푹 쉬고 나면 내일은 거뜬할 거예요"

"이런 일이 자주 있나?"

"일 년에 세 번 정도..........."

"그래........그렇다면 오늘 밤은 마린이 그의 대역을 해야겠는데"

"그것은 무리에요. 그리고 나는 파티에 나갈 기분이 아니에요, 브레이즈. 당신 역시 내가 없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적어도 코럴리는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질투하는 건가, 마린?"

"착각하지 마세요, 브레이즈. 왜 내가 질투를 해야 하죠? 당신은 무엇 하나 내게 주지 않는데 말이에요. 어째서 누가 내게서 무엇을 빼앗아갈까 하고 걱정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것이 질투라는 것일 테죠??"

"나는 질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일은 없어. 그러나 질투의 그 엄청난 위력은 알고 있지. 질투는 인간의 오장을 뒤틀리게 하고, 고통스러운 나머지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질투하는 상대를 죽이고 싶게 하는 것이야. 마린은 그런 질투를 느낀 적이 있나, ?"

마린은 잠자코 머리를 가로저었다. 브레이즈의 어투에 깃들여 있는 폭력의 낌새에 겁을 먹어 입을 열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없을 테지.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어" 브레이즈는 손에 들로 있던 편지를 트레이에 떨어뜨리고 빙글 웃었다. "마린에게 있어서 나는 그럴 가치조차 없었을 테니까. 정말 웃기는군! 말해 주지 않겠나? 이것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묻는 것인데, 남편이 마린을 침대에 데려가는 데는 몇 분이나 걸렸지? 내 경우는 분명 몇 분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녀석은 나보다 젊지 않았나? 혹시 마린이 싫다는 기색을 보인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지나 않았는지 몰라. 아니면 마린이 처녀가 아니란 것을 알고 역시 몇 분 안 걸린 것인가? 녀석은 마린이 처녀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고 내게 말하지 않았어?"

한마디 한마디가 칼이 되어 마린의 가슴을 찔렀다. 어떻게 하든 내게 상처를 입히고 독을 쑤셔놓으려고 하고 있어. 브레이즈는 진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거야! 마린은 입술까지 하얗게 되었는데도 자랑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없었지만.

브레이즈는 내가 배신한 줄로 알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내가 폴과 결혼함으로써 다시 한번 배반당했다고 생각하고 나를 더욱 경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그런 치욕감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굴욕감을 제거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브레이즈도 과거를 잊을 수 있게 될지도 몰라. 적어도 과거를 과거로 흘려보낼 수는 있겠지.

"왜 대답이 없지?"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린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웃음은 낯이 익었다. 마린이 나가려 하자 아니나 다를까 브레이즈가 손목을 붙잡았다. 기분 나쁠 만큼 조용히. "마린?"

"싫어요!"

"이러면 곤란한데" 감정이 없는 어조로 말하고 마린을 끌어당겼다. "이 병에서 벗어나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병에 지지 않으면 되죠" 마린은 있는 용기를 다내어 이렇게 말하고 손을 뿌리치려 했다. 다시 한번 브레이즈가 공격해 오면 도저히 그를 거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마린은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바닷가의 산책을 즐거웠나?"

브레이즈는 다른 손으로 마린의 뺨을 만졌다. 온몸에 흥분의 물결이 번져 갔다. 물론 브레이즈는 이것을 알고, 눈에 재미있어하는 듯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마린이 브레이즈의 가슴을 떠밀려 하자 브레이즈가 그 손을 눌렀다. 브레이즈의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보같이 굴면 안 돼요" 브레이즈의 따뜻한 손이 마린의 입술을 애무했다. "브레이즈, 이런 짓은 미친 짓이에요"

브레이즈가 소리내어 웃었다. 마린은 버럭 부아가 나서 브레이즈의 손을 깨물었다. 있는 힘을 다해 깨물었지만 피는 나지 않았다.

"마린은 물어뜯기를 좋아하는 모양이군"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소리였다. "블랙록스에서 나간 뒤에 익힌 솜씨인 모양이군. 그전에는 마린이 이런 짓을 한 기억이 없는데" "놓으세요, 제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린 역시 원하고 있으면서" 브레이즈는 마린의 목에 입술을 대고 그냥 말을 계속했다. "나하고 똑같이 말이야"

브레이즈는 손을 놓았다. 그러나 마린이 도망칠 틈을 전혀 주지 않고 이번에는 두 손으로 허리를 힘껏 끌어당겼다. 마린은 깜짝 놀라 브레이즈의 가슴을 두 손으로 마구 때렸다. 그러나 더욱 힘 있게 끌어안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브레이즈는 미소를 때고 마린의 얼굴에 떠오른 고뇌를 즐기고 있었다. 마침내 마린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게 되었다. 계속적인 희롱에 대해서조차 그녀의 육체는 응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바닷가의 산책이 즐거웠느냐는 물음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어"

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즐거웠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말에 태우고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마린이 거절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브레이즈는 책상에 기대어 온몸으로 마린의 감촉을 즐기면서 냉담하게 말을 계속했다. 이토록 굴욕적인 대우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마린은 자기가 타락한 듯 느껴지고, 그렇게 느끼는 것을 브레이즈가 즐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랬겠죠, 틀림없이" 마린은 냉담하고 경멸적인 어투로 말했다.

브레이즈의 손이 천천히 마린의 셔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브래지어의 후크를 만지작거렸다. 저도 모르게 노려보는 마린에게 브레이즈가 웃으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서 있는 것이 싫은가, 마린?"

", 싫어요!"

"오늘 밤 파티에 같이 가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브래지어의 후크가 벗겨지고, 브레이즈의 손은 마린의 등을 애무하면서 차차 가슴 쪽으로 가까이 갔다.

"제가 약속하면 놓아주겠어요?"

"좋아"

마린은 똑바로 브레이즈의 얼굴을 쳐다보며 따뜻한 마음의 그림자라도 찾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욕망의 불꽃뿐이었다. 오래전에 두 사람이 나누어 가졌던 것은 모두 잃어버리고 지금 그는 단지 나를 경멸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야.....

"좋아요, 약속하겠어요" 우울한 대답이었다. "당신과 같이 가겠어요"

"그럼 좋아"

 

 

7

완전한 허세였다. 마린은 자신이 위협받았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 오클랜드에서 산 흰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 거울 앞에서, 끝까지 필사적으로 그에게 대향해야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흰 드레스가 했볕에 곱게 탄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깊게 패인 스퀘어 네클라인이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강조해 주었고, 소매 달린 케이프 밑으로 몸에 꼭 붙은 드레스는 그녀의 멋진 몸매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가느다란 굽의 하이힐을 신고 진주 귀걸이를 하자 효과는 최고였다. 지나치게 정장을 한게 아닌가 싶었지만, 미세스 맥글레거의 기호에는 꼭 들어맞을 것 같았다.

쥬 루비앙 향수를 뿌리고 머리를 매만진 다음 검은 빌로도 코트를 걸쳤다. 이렇게 단단히 무장을 하면 그녀가 아직도 브레이즈에게 사랑의 불길을 태우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마린에게 파티에 참석할 것을 강요한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판갈레이 마을로 드라이브하는 동안 브레이즈는 예의바르게 행동했다. 그에게 악의가 감추어져 있는지 탐색해 볼 마음도 나지 않았다. 분명히 그는 나에게 육체적으로 끌리는 것이 옛날과 다름없다는 것에 자기혐오를 느낀 나머지, 나를 벌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기 위해 코럴리와 같이 있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리라. 결코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자기 의지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정열에 사로잡힌 인간은 흔히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마린은 생각했다.

폴 역시 그랬다. 나를 사랑하면서도 스스로 질투를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을 되돌려 받을 희망을 완전히 버렸던 것이 아닌가. 그래고 지금의 브레이즈 역시 6년 전 내가 배반했을 때 느낀 자신의 고통을 나에게도 맛보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블랙록스에서 도망쳐 나온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내가 그때 좀 더 나이가 들고 강한 성격이었다면, 목장에 남아 텔리의 거짓을 브레이즈에게 증명해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브레이즈가 말했듯이 약한 성격은 죄인지도 모른다. 그 불행한 결혼도 따지고 보면 약한 성격이 원인이었으니까. 마린은 한숨을 쉬면서 포근한 코트 안으로 몸을 움츠렸다.

"추운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으므로 두사람 사이는 떨어져 있었고, 브레이즈는 도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내 몸의 움직임을 알았을까?

"히터를 넣을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짙은 안개에 이정표가 흐려져 있었다.

"알렌 목장으로 꼬부라지는 길을 지나친 것은 아닌가요?

"코럴리는 판갈레이에 있어. 백모 집으로 마중가기로 되어 있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브레이즈가 덧붙였다. "코럴리는 블랙록스에 머무를 예정이야"

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모든 상황이 싫어지고 말았다. 브레이즈의 협박에 못 이겨 같이 오다니, 자신이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게 여겨졌다. 적어도 돌아올 때만은 코럴리와 같이 있게 될 테니까, 그런 어리석은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날씨가 어떨지 모르겠군요"

"이 계절에는 어떤 날씨가 되건 이상할 것이 없지. 저 구름을 좀 봐, 잔뜩 찌푸린 날씨군. 돌아올 때는 많은 비를 만나게 될 거야. 만일 홍수가 날 우려가 있으면 거기서 일찍 출발하게 될지도 몰라"

마린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의 도로는 튼튼하지만, 수로에 놓여 있는 다리는 작고 낡았다. 폭우가 쏟아지면 수로가 넘쳐 몇 시간씩이나 교통이 두절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차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도 하늘에는 구름이 짙게 덮여 있었으나, 아직은 보슬비만 내리고 있었다. 브레이즈는 차를, 현대식으로 지은 큰 저택의 정원 앞에 세웠다.

"곧 돌아오겠어"

마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브레이즈의 모습이 집안으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뒷좌석에 앉아 있으면 코럴리의 질투도 어느 정도 가라앉을지 몰라.

자리를 옮겨 앉기가 바쁘게 코럴리가 모습을 나타냈다. 약간 홍조를 띤 채 웃으면서 브레이즈를 올려다보던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마린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흐려졌다.

"이 사람이 온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요, 브레이즈?" 앞좌석에 앉으면서 그녀는 브레이즈에게 화를 터뜨렸다. "나는 당신이 미스터 킴버와 같이 온 줄 알았어요"

코럴리의 말에 마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엘리스는 편두통으로 누워 있어요, 운 나쁘게도"

"운이 나쁜 사람은 나예요!" 브레이즈가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돌아가고 있는 사이에 그녀는 내뱉듯이 말했다. "미리 한마디 해두겠는데, 당신이 브레이즈를 되찾겠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에요! 그는 당신을 경멸하고 있어요!"

새로운 화제는 없을까? 마린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브레이즈가 핸들 앞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마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럴리는 곧 브레이즈에게 미소 지어 보이며 들뜬 목소리로 브레이즈가 얼마나 멋지게 보이는지 모른다며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별로 순진한 것 같지 않군, 하고 마린은 생각했다. 얼른 보기에는 어린애같이 행동하지만, 그것은 타고난 탐욕과 못된 버릇을 감추려는 수단인지도 몰라. 브레이즈와 나 사이의 긴장을 곧 깨달은 것을 보면, 사실은 어린애답지 않다는 증거가 아닐까.

파티는 성공적이었다. 근대적인 매그레거 저택은 넓고 텅 빈 것 같은 인상을 주었으나, 유쾌한 대화가 그 모든 것을 메꾸어 주었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굳게 각오를 하고 찾아온 마린조차도 그 분위기를 즐기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샴페인밖에 대접하지 않는 다는 맥그레거 가문의 규율도 다소 작용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시는 양은 충분히 절제했기 때문에, 갑자기 끓어오르는 기쁨은 남성들의 주의를 모으고 있는 탓인지도 몰랐다. 지금도 세 명의 남자가 마린의 주의를 끌고자 다투고 있었다.

"글쎄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저의 보스의 일은 쾌조를 보이고 있어서 그는 움직일 기색도 보이지 않아요. 틀림없이 브레이즈에게 쫓겨날 때까지 여기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브레이즈는 그렇게 무례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존이라는 붉은 머리의 사나이가 흥분하며 말했다. "당신의 보스로부터 당신을 훔칠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마린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눈은 브레이즈에 달라붙어 있는 코럴리에게로 향한 채였다.

세 남자 가운데서 제일 연장인 사람이 마린의 시선을 쫓으며 차갑게 웃었다.

"야아, 상당히 열을 올리고 있군요. 하지만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아직 어린애인데 브레이즈는 어른이거든요. 알렌가가 필사적ㅇ로 덤벼드는 것은 알고 있지만, 글쎄요....내기를 한다면 나는 실패하는 쪽에 걸겠어요, 물론 나는 내기를 싫어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존과 또 한 사나이가 빈정거리는 미소를 띠었다. 그 사나이가 말했다.

"자네는 남의 양말 사이즈에 대해서도 내기를 하면서 무얼 그러나?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서만은 나도 동감일세. 스탠토프는 멋진 코럴리에 대해 마치 숙부처럼 행동하고 있거든. 코럴리에게는 자못 애가 타는 일이지 뭔가."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을 본 일이 있는 마린으로서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는 말이었으나, 그 말에 기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호프와 모일 리가 무엇이라 말하건, 이 지역사회에서 브레이즈와 코럴리의 결혼은 절대적인 기정사실은 아닌 모양이야. 소문이란 때로는 무서울 만큼 정확한 것이니까. 존이 이끄는 대로 음악이 흘러나오는 별실로 들어갔다. 존이 춤에 능숙하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몇 분 동안 점잖게 스텝을 밟다가 마린은 갑자기 소리 내어 웃으며 존의 동작에 맞춰 춤추기 시작했다.

"여어!" 존이 기쁜 듯이 외쳤다. "아주 놀랍군요! 우리 진짜 춤을 보여줍시다"

누군가가 리듬에 맞춰 손뼉을 쳐 주었다. 부드러운 드레스 자락이 한순간 다리에 감겼다

가 확 퍼졌다. 박수 소리가 커졌다. 사람들은 춤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을 위해 플로어를 비워 주고 빙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미소 짓고 있는 얼굴, 황홀한 듯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얼굴.......

잠자고 있던 피가 끓어올라 마린은 다시 웃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그녀의 몸이 완전히 리듬을 타며 눈은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였다. 음악이 몸속으로 일치한 듯했다. 춤추고 있는 동안은 어느 누구도, 어떤 생각도 마린의 내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드디어 음악이 끝나자 마린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깨닫고 보니 파트너와 둘이서 감탄 소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웃 방에서도 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와 있었다.

"어디서 배웠죠?"존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웃는 낯으로 흥분해서 말했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마치 내 것이란 듯이 마린의 팔을 잡았다. 그 손은 뜨겁고 땀이 배어 있었다. 마린은 그 감촉이 싫었다. 브레이즈 외의 다른 남자의 손이 닿을 때면 이상하게도 혐오감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존은 이제 겨우 자기한테 어울리는 파트너를 발견한 기쁨에 황홀해 있었다. 어쩌면 자기보다도 능숙한지 모르는 그녀의, 생기 있는 작은 얼굴에서 반짝이는 녹색 보석과도 같은 큰 눈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흰 드레스에서 뻗어 나와 있는 황금빛 팔에도 시선을 보내며.

그러면 이 곡은 어때?" 누군가가 로맨틱한 분위기의 곡을 틀었다. 춤의 변화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실례, 이곡은 내가 예약한 것이니까" 브레이즈의 어조는 조용했으나, 독특한 음향이 있었다. 존은 얼굴을 붉히고 당황해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마린의 몸이 경직되었다. 지금 브레이즈에게 안겨 춤을 춘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지금 몹시 목이 말라요" 가벼운 어조로 거절했다. 브레이즈는 미소 지으며 마린에게 샴페인 글래스를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존에게 위협적인 눈길을 보냈다.

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존이 어색하게 인사말을 하고 도망치듯이 물러가는 것이 화가 났다. 어떻게 브레이즈는 이런 일을 이렇게 쉽게 해낼 수 있는 것일까? 무서울 정도로 자신이 있기 때문이야. 마린은 브레이즈의 눈을 외면한 채 차가운 술을 마셨다. 로맨틱한 곡이 끝날 때까지 플로어 한가운데에 선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다음 곡이 시작되자 홀은 다시 춤추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한가운데서 두 사람은 조상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에게서만 모든 동작이 정지되어 있었다. 마린의 손이 약간 떨리며 술잔이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피곤해요"

그러나 브레이즈는 미소를 띠고 마린을 안더니 우아하고 관능적인 동작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깨에 돌린 손으로 마린을 리드하면서 춤추는 사람들 틈을 누비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마린의 손에서 글래스를 빼앗아 내려놓았다. 다음 순간, 마린은 완전히 브레이즈의 품속에 있었다. 브레이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저항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순간 마린은 몸을 떨었다. 브레이즈의 손에 힘이 가해지면서 그는 마린을 꼭 끌어안았다.

달콤한 음악이 두 사람을 감쌌다. 마린은 평소처럼 음악에 맞추어 우아하게 춤추기 시작했다. 브레이즈는 마린의 머리에 가만히 뺨을 대었다. 상대가 브레이즈만 아니라면, 다정하게 느껴질 수 있는 행동이었다.

"당신, 무얼 하는 거예요?"

"점수를 따고 있는 중이지" 나직한 목소리였다.

마린은 브레이즈가 발산하는 농후하고 관능적인 분위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아 얼굴을 돌렸다. 순간, 방 저쪽에 있던 코럴리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녀는 분노와 충격으로 어찌할 수 없는 당황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자, 마린은 브레이즈에 대한 분노와 모욕감이 새삼스럽게 불타올랐다.

"코럴리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면 그만두세요, 이미 전해졌으니까요"

"무척 경멸적인 어투로군"

뺨의 움직임으로 브레이즈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롱하는 듯, 재미있어하는 듯한 싸늘 한 웃음임이 분명했다.

"나는 당신이 코럴리에게 하는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아요"

"내가 코럴리에게 무슨 일을 했는데?"

그 어투는 마린에게 입을 다물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린은 얼굴을 들어 겁도 없이 브레이즈의 눈을 쳐다보았다.

"혹시 내게 인생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인가요?"

브레이즈는 한 손을 들어 마린의 뺨에 가만히 갖다댔다. 남들에게는 애정에 넘치는 행위로 보였을 테지만, 마린에게는 브레이즈의 눈 속에 빛나는 멸시의 번득임이 보이고 있었다. 그는 싸늘하게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당신은 인생을 가르치는 일에 능란하군요"

그 말은 두 사람 사이에 추억이 서린 말이었다. 브레이즈의 턱 근육이 꿈틀하고 떨리더니 이내 가면처럼 되어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점에 있어서 우리는 같아" 음악이 고조됨에 따라, 브레이즈는 죄었던 손의 힘을 뺐다. "마린이 인생을 가르치는 방법은 정말 효과적이야, 남에게 상처를 입혀 불구자로 만들어 버리거든. 마린은 내가 코럴리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갑작스런 질문에 마린은 충격을 받고 고개를 돌린 채 어물어물 대답했다.

"당신을 적으로 만들면 아주 무서운 일이 생길 테니까요"

"그녀는 그렇지 않아. 사춘기의 사랑에 고민하고 있을 뿐이지, 아직 어린애니까" 브레이즈는 나직이 웃고 손을 마린의 턱에 대어 얼굴을 쳐들었다. 그는 욕망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그녀의 입술과 가슴을 탐하듯이 바라보았다. "마린은 지금 내 따귀라도 갈기고 싶겠지만 그만두는 것이 좋을걸, 나도 똑같이 보복할 테니까"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였다. "맥그레거 부부는 자기네를 초현대적이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알면 어떻게 여길지 궁금하군" 브레이즈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손을 마린의 목에 대고 숨도 쉬지 못하게 했다가는 힘을 늦추고 허리로 손을 옮겼다. "그렇다면 마린은 내가 코럴리를 가련한 상황에서 구출해야 된다고 생각지 않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느쪽이 더 고민하게 될까-코럴리일까, 아니면 나일까?

"물론 코럴리 쪽이지요. 당신도 괴로움이란 것을 아세요? 조금도 꿈쩍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감정적으로 말이에요,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나 역시 한번은 괴로워한 적이 있지, 마린. 사실이야. 그때 나는 맹세했었지. 두 번 다시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겠다고. 자신의 실패를 통해 배우는 바도 없고 반성도 없이 자신을 신의 손에 맹목적으로 맡기는 것은 바보만이 하는 짓이니까. 마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 말에는 찬성이에요" 마린은 브레이즈의 매력에 함락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하는 데에 지쳐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자기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셈이군" 브레이즈는 만족스럽게 말하고, 표정을 잃은 마린에게 미소를 던졌다.

이때 겨우 음악이 끝났다,.

너무나도 태연하게 브레이즈가 존에게 자신을 되돌려 주는 데 대해 마린은 그를 걷어차 주고만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점잖은 존과 같이 지낸 시간은 즐거웠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존도 브레이즈와 마린의 정확한 관계를 알고 싶어 했다. 그것을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존이 오히려 측은해 보여, 마린은 먼저 블랙록스 시절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브레이즈와는 옛 친구로군요?"

", 내가 열두 살 때부터였으니까요"

"아아, 그렇다면 알겠군요......그래서 마린은 브레이즈와 그렇게 흉허물이 없었군요. 마치 떨어져 있던 반쪽이 다시 돌아온 것 같았어요." 마린의 놀라는 표정을 보자 존은 당황해 하며 말을 계속했다. ", 그것과도 좀 다르군요. 우정 이상의 것이 있는 것 같거든요"

"빗소리가 심해졌어요" 마린은 애매하게 말하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5분쯤 후에 브레이즈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다가왔다.

"미안하지만 마린, 이젠 돌아가야겠어. 집에 전화를 걸어 보았는데, 호프의 말에 따르면 몇 시간 전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는군"

"그럼 코우트를 가져 오겠어요"

침실에서는 코우트를 가지러 온 코럴 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마린을 보자 대들 듯이 말했다.

"오늘 밤은 무척 즐거웠겠군요, 그렇죠?"

" 글쎄요?" 마린은 하품을 억지로 참았다. 코럴 리가 가엾게 생각되는 동시에 브레이즈가 한없이 미웠다. 미세스 맥그레거가 마침 침실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 이상의 일은 생기지 않았다. 몇 분 후 두 사람은 자동차에 앉아 있었다. 차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블랙록스를 향해 달렸다. 거의 반쯤 왔을 때까지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이때 귓청을 찢을 듯한 우레 소리가 들렸다. 코럴 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브레이즈에게 호소했다.

"이런 날씨에 나온 것부터가 잘못이었어요! 브레이즈, 다시 돌아가요. 절대로 블랙록스까지 가지 못할 거예요"

"되돌아가도 마찬가지야. 지금쯤은 벌써 수로의 물이 범람하기 시작했겠지. 틀림없이 국지 호우일 거야. 정상에 올라갈 때쯤이면 아마 이 비도 틀림없이 고개를 넘을 거야"

"하지만 그때까지는 수로가 넘쳐 버릴 거예요." 코럴리는 이미 우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죽게 될 거예요"

"오늘 하룻밤 코럴리와 여기서 지내는 것도 괜찮겠지" 조롱하듯 하는 말에 마린은 몸이 굳어졌다. 겁을 먹고 있는 젊은 처녀를 섹스어필로 달래려 하다니! 마린의 분노를 눈치 챘는지 브레이즈가 큰 소리로 말했다. "마린은 어떤가? 좋은가?"

"괜찮아요. 당신 말대로 블랙록스에 도착할 무렵에는 틀림없이 이 비도 고개를 넘을 거예요"

"그것 봐, 코럴리. 자아. 침착해, 틀림없이 집에까지 안전하게 바래다 줄 테니까. 지금까지 내가 코럴리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던가?"

"없어요"

그러나, 코럴리는 시트에 움츠러들었다. 코럴리를 내리누르고 있는 공포를 마린은 눈으로 보듯 잘 알 수가 있었다. 가엾게 생각됐다. 동시에 그렇게 느끼는 자기 마음을 성가시게 생각했다. 코럴리를 미워할 수 있다면 차라리 속이 편하겠는데. 사실 코럴 리가 하는 말도 전혀 틀리는 것이라 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비가 쏟아지는데 차로 달리는 것은 분명히 위험한 일이었다. 더구나 길은 좁고 포장도 되어 있지 않으니까.

그러나 가만히 있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길이 수로변에 있기 때문에 물에 잠기게 될 것은 눈으로 보듯 뻔한 일이다. 블랙록스의 언덕 위라면 물벼락을 맞을 우려는 없겠지만, 그 대신 그곳은 미끄러져 내려갈 위험이 있었다.

구릉지대를 지나 홍수의 수위보다 높은 블랙록스목장에 닿아야 비로소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거기까지 차를 몰고 갈 수 있는 운전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브레이즈뿐일 것이다. 이 근처의 길과 바위와 수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운전 기술과 운동 신경이 남달리 뛰어나니까. 물론 전적으로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린은 침착하게 뒷좌석에 앉아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빗줄기와 브레이즈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와이퍼는 거의 소용이 없었다. 코럴리의 옆얼굴은 공포로 질려있었다. 단 한 번 코럴리는 무슨 말을 했으나, 브레이즈의 무뚝뚝한 대꾸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언덕 비탈을 오르는 길은 한없이 계속되는 듯 생각되었으나, 얼마 후에 브레이즈는 성공적으로 정상까지 차를 옮겨다 놓았다. 으르기보다도 내려가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마린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린은 후유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브레이즈의 말처럼 비는 분명히 고개를 넘었으나, 결코 약해졌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밤 안으로 집에 도착할 가망성은 점점 희박해진다. 평지에서는 수로의 물이 이미 둑을 넘어 길을 뒤덮어 버렸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어떻게든 애플튼 목장까지 가서, 거기서 밤을 지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블랙록스 목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따라 1킬로쯤 가면 애플튼에 도착한다. 마린은 기억을 더듬었다. 애플튼까지 가는 한 수로에 걸려 있는 다리를 건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미세스 애플튼은 유능한 주부이기 때문에, 한밤중에 갑자기 세 사람이 들이닥치더라도 놀라거나 할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물론 브레이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브레이즈는 교묘하게 핸들을 조종하면서 옛날에는 강바닥이었던 미끄러운 점토질의 길을 내려갔다. 그러나 이때 사정이 달라졌다. 세찬 빗소리를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낮고 깊은 울림과 함께 모래흙이 덮쳐왔다. 코럴리는 비명을 지르며 핸들에 달라붙었다. 그 때문에 차는 크게 커브를 그리며 멈추어 서고 말았다. 브레이즈가 외쳤다. 그러나 튀긴 돌이 차창을 깨고 들어왔을 때, 브레이즈는 약간 목을 움츠렸을 뿐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찰나, 마린의 머릿속에서 고통이 작열했다.......

마린이 정신을 차리고 처음으로 들은 소리는 울음소리였다. 세찬 빗소리에 섞인 날카롭고 히스테릭한 울음 소리. 그 울음소리는 톱으로 목을 자르는 듯한 아픔을 유발시켰다.

마린은 그저 자리에 앉아 그 울음소리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울음소리가 코럴리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브레이즈의 이름을 계속 부르고 있는 겁에 질린 목소리.....

마린은 눈을 뜨고 어둠을 뿌리치려 했다. 잠시 뒤, 축 늘어져 있는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코럴리의 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브레이즈를 건드리면 안돼요!" 어떻게 해서 말을 할 수 있었는지 마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으나, 어쨌든 코럴리의 주의를 끌 수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브레이즈가 죽었어요!"

코럴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무서운 나머지 기절할 것만 같았으나 그래도 마린은 간신히 몸을 앞으로 내밀고 코럴리의 어깨를 흔들었다.

"조용히 해요!"

조용해지자 빗소리가 위협하듯 세차게 들려왔다. 코럴리는 훌쩍훌쩍 흐느껴 울 뿐이었다. 마린은 한 손으로 흐느끼는 그녀의 머리를 껴안고, 또 한 손으로 브레이즈의 목을 더듬었다. 맥박을 느꼈을 때, 마린은 기쁨으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살아있어요" 코럴리의 손을 잡고 브레이즈의 맥을 짚어 보게 했다.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이에요"

코럴리는 홱 손을 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머리에서 피가?"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코럴리로서느 상황을 베대로 판단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불쌍하게 생각되었으나, 지금은 그런 일에까지 신경을 쓰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이 이상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코럴리에게 자신을 되찾게 해야 한다. 그것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피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 않아요! 당신이 차를 회전시켰나요?"

"아뇨"

죽을 힘을 다해서 좌석 너머로 엔진을 껐다. 실내 램프의 스위치를 넣어 보았지만 켜지지 않았다.

"회중전등!" 마린이 천천히 마라했다.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도저히 침착하게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딘가에 회중전등이 있을 거예요, 찾아보세요"

"알았어요. 하지만,,,,,나는 브레이즈를 볼 수가 없어요! 보지 않겠어요, 싫어요!"

"입 다물어요! 조용히 하지 않으면 때릴 거예요!"

마린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어떻게든 의식을 잃지 않으려 했다. "뒷좌석으로 올 수 있겠어요?"

"" 잠시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코럴리는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나는 피가 싫어요, 참을 수가 없어요"

"알았어요"

마린은 가만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머리는 부어 오른 것 같았고, 목과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 밖에는 이상이 없는 듯했다.

"내 드레스의 지퍼를 내려 주세요. 앞자리로 가려는데 드레스가 방해가 되어서 그래요"

코럴리는 손으로 더듬어 지퍼를 찾아 밑으로 내렸다. 거추장스런 드레스에서 빠져나왔을 때, 마린은 구토증을 느꼈다. 브래지어와 팬티만의 모습으로 시트에 기대어 겨우 구토증을 참았다.

"그러면 나를 밀어올려 주세요"

앞좌석으로 옮겨서도 몇 분 동안이나 구토증과 싸웠다. 마린은 축 늘어졌다. 코럴 리가 이름을 불렀다. 그 겁먹은 목소리는, 코럴 리가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난 괜찮아요"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당신들 둘이 모두 죽지 않았나 하고"

"분명히 살아 있어요" 마린은 혀끝으로 입술을 추겼다. "브레이즈는 낡은 부츠처럼 질기다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겠죠? 그리고 브레이즈는 당신을 집에 바래다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반드시 바래다 줄 거예요"

"마치 당신이 데려다 주려는 것 같군요" 코럴리는 애써 정신을 차리려 했다. "당신 역시 브레이즈와 똑같군요, 그렇죠?"

"낡은 부츠처럼.....질기다는 말인가요?"

"아니,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어쨌든 해보겠어요"

구토증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마린은 회중전등으로 브레이즈를 비추었다가 깜짝 놀랐다. 바위 모서리에 옆머리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관자놀이는 무사했으나 예리하게 살이 찢겨져 있었고, 짙은 벌꿀색 머리칼이 피와 흙탕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브레이즈는 문에 기대듯이 쓰러져 있었는데, 깨진 창문을 통해 비가 세차게 들이치고 있었다. 정신을 잃고 있는 그 얼굴에서는 브레이즈의 넘칠 듯한 정기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 분명히 구급상자가 있을 것이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러나 마린은 끝내 구급상자를 찾아내어 가위를 꺼냈다., 그러고는 코럴리를 꾸짖어 정신을 차리게 하여 회중전등으로 브레이즈의 머리를 비추게 하고는 상처 주위의 머리칼을 잘라 나갔다.

브레이즈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을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상처를 씻어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몇 번이나 구토증을 누르기 위해 손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마다 손이 떨려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상처를 깨끗이 닦아냈다.

심한 상처였으나, 마린과 마찬가지로 바위에 스치듯 부딪혔기 때문에 정면으로 충돌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두개골 파열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입술을 꼭 깨물고, 조금씩 출혈되고 있는 상처에 항생제 분말을 뿌리고 있을 때 브레이즈가 눈을 떴다.

", 가만히 계세요. 우리 모두 안전해요"

브레이즈는 회중전등의 불빛에 얼굴을 찌푸리더니 눈을 다시 감아 버리고 말았다.

"코럴리는?"

"괜찮으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혹은 났지만, 당신같은 사람이 바위 조각 따위에 상처를 입을 리는 없지 않아요?"

"마린, 당신은?"

"잡초가 나를 해칠 수 있겠어요?" 자기 상처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브레이즈는 눈을 뜨고 응급 처치에 열중하고 있는 마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벌거벗은 허리를 만졌다.

"벌거벗은 구원의 천사로군!" 빈정거리는 어조가 다시 살아났다. 마린도 겨우 안심하고 미소 지었다.

"뉴 패션의 천사예요....코럴리, 이 창을 막게 뭘 좀 주세요"

코럴리가 건네 준 것은 마린의 코트였다.

"아니, 드레스를 주세요. 이것은 내가 입어야겠어요"

희고 아름다운 드레스로 창구멍을 막았다. 놀랄 만큼 작은 구멍이었다. 운이 좋앗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좀 더 큰 바위였다면, 나는 모르지만 브레이즈는 죽었을 것이다.

"움직이면 안 돼요. 얌전히 누워 있어야 해요"

브레이즈가 갑자기 몸을 움직이려다 고통을 호소하자, 마린이 말했다.

브레이지는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회중전등을 꺼요. 도움을 청하러 가는데 필요할 테니까요"

"싫어요!" 코럴리는 다시 울음 섞인 목소리가 되었다. "난 할 수 없어요! 당신도 내게 억지로 시킬 생각은 마세요! 나는 어둠이 무서워요--당신도 알고 있지 않아요? 브레이즈, 나는 언제나 어둠을 무서워했다고 말해 주세요. 병이에요, 공포증이라는...." 목소리가 차차 높아지다가 갑자기 비명 소리로 변했다.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하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한 번의 손놀림으로 코럴리의 뺨을 때렸다. 코럴리는 숨을 죽이고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나를 두고 당신만 가게 할 수는 없어요. 모두 여기 있기로 해요. 아침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가면 안 돼요...."

"좋아요. 고집은 그만 부리고 내 말을 잘 들으세요. 나는 당신의 일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어요. 당신의 공포증도, 당신의 그 철저한 이기주의도 말이예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당신 따위는 어떻게 돼도 좋아요. 하지만 지금 브레이즈는 도움이 필요하고, 나는 도와 줄 생각이에요. 당신은 두 가지 길-애플튼까지 1킬로를 걸어가든지 아니면 여기세 브레이즈와 남아 있든지-중에서 하나를 택하세요. 자아, 어서 결정하세요"

순간 침묵이 있었다.

"정말 뻔뻔스럽군요!" 분노에 떠는 코럴리의 목소리. 고통과, 단도직입적으로 내뱉은 그녀의 말로 인해 히스테리를 일으킬 위험은 사라진 모양이었다.

"필요하다면 몇 번이라도 되풀이해 주겠어요"

"그것은 브레이즈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죠? 내가 모르는 줄 아세요? 누구나 다 알고 있어요. 당신은 여러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어요....."

"다시 한번 따귀를 맞고 싶은가요? " 얼음과 같은 그녀의 말에, 코럴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린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말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브레이즈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정신을 차리세요. 브레이즈가 정신이 들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자아, 담요를 이리 주세요"

"하지만 내가 쓰고 있는 걸요"

"당신보다 브레이즈가 더 필요로 해요"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이윽고 코럴리는 담요를 건네주었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마린은 담요로 브레이즈의 온몸을 감쌌다. 브레이즈가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마린은 손을 멈추고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이것이 마지막 키스가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무엇인가 브레이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육체의 충족 이상으로 그에게 무엇을 해준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입술에 브레이즈의 움직임이 전해졌다.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가냘픈 목소리였다.

"마린은....가면 안 돼....마린, 듣고 있어?"

", 듣고 있어요. 지금은 가만히 누워 계세요. 다시 잠들도록 노력해 보세요"

"제기랄.....이 머리만 ....." 브레이즈의 입술이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미칠 듯한 마음을 겨우 참고 마린이 말했다.

"내가 나가거든 앞자리에 와 앉아요, 코럴리. 브레이즈에게서 눈을 떼지 말고"

"괜찮겠어요? 이제 피는 나오지 않나요?"

", 출혈은 멎었어요"

"추워요!"

"브레이즈를 껴안아 주세요. 그러면 서로 춥지 않게 될 거예요"

머리의 통증이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마린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브래지어와 팬티 위에 코트를 걸쳤다. 트렁크에서 레인 코트를 찾아 입고 왼손에 우산, 오른손에는 회중전등을 들고 걷기 사작할 때까지 몇 시간이나 걸린 것 같았다. 경보판 하나를 차 뒤에 세우고, 또 하나를 옆구리에 꼈다.

몹시 추웠다. 마린은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모래흙이 무너져 내린 길을 걸었다. 굉장한 사태는 아니므로 불도저를 사용하면 충분히 한쪽 길을 틀수 있을 것이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야. 공포에 휩싸여 코럴 리가 핸들에 기댔기 때문에 사고가 난 거야. 잊어버리자. 몹시 겁먹은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데, 자제심을 요구한 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야.

물론 브레이즈도 코럴리의 히스테릭한 성격 따위는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많은 것을 주고 있으니까.

억지로 눈을 깜박이면서 흙더미가 무너진 곳에 또 하나의 경보판을 세웠다. 그러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한 손으로 머리를 만져 보았다. 머리칼에 묻은 피가 응고되어 덩어리져 있었으며, 아픔도 좀 덜해져 가기는 했다. 머릿속의 통증도 약간 가라앉는 것 같았다-신선한 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지 브레이즈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8

악몽과 같은 심야의 빗속을 강행군한 사실은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브레이즈의 이름을 중얼거렸다는 것뿐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거의 꿈속을 걷는 기분으로 애플튼가의 문 앞에 있는 흰 우편함을 지나고 있었다.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마린은 비로소 소리 내어 울었다. 2백 미터 남짓한 거리에 있는 집이 마치 지구 끝에 있는 것처럼 멀리 느껴졌다. 개가 짖었다.

우레 소리와 창고의 지붕을 두드리는 요란한 빗소리에 섞여, 개를 꾸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린이 뒷문에 닿기 전에 회중전등을 가진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 어서 램프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역시 정전이 된 모양이었다. 그 뒤에는 큰 소동이 벌어졌으나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스터 애플튼은 건장한 네 아들과 함께 밖으로 뛰어나왔다.

미세스 애플튼은 떨고 있는 마린을 더운물로 목욕을 시키며 보살펴 주고 있었다.

"충격 때문일 거예요" 그녀는 마린이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는 것을 보고 다정하게 말했다. "이제는 걱정할 것 없어요. 그레그가 불도저를 가지고 나갔고, 그밖에도 네 명이나 되는 장정이 랜드로버를 타고 나갔으니까요. 틀림없이 길을 뚫고 브레이즈와 코럴리를 데리고 올 거예요. 내일 아침이면 당신과 브레이즈가 판갈레이에서 뢴트겐 검사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머리를 다쳤으니까, 말일의 경우를 위해 절차를 밟아 놓았어요"

미세스 애플튼은 큰 체구에 서글서글한 여성으로서, 30년 전에는 간호사였다. 그러므로 마린은 마치 어린애처럼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맡기고 편하게 목욕을 했다.

"좀 크겠지만 몸을 따뜻하게 해주기는 할 거예요"

마린이 몸을 닦고 있으려니 그녀가 푸른 나이트가운을 건네주었다. "이것을 입고 주방으로 오세요, 상처를 좀 살펴봐야겠어요"

넓은 주방은 벽가에 설치한 레인지 덕분에 따뜻했다. 램프의 부드러운 조명.....근대적인 모든 설비는 정전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전기가 들어오게 되면서부터 장작을 사용하는 레인지를 쓰는 집이 거의 없어졌지만" 미세스 애플틑은 주전자를 올려놓으면서 만족스럽게 말했다. "우리는 이것을 남겨 둔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일이 없어요. 오히려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블랙록스에도 남아 있더군요"

"그럴 거예요, 모일리 필드게이트는 장작불로 빵을 구워야 제맛이 난다고 늘 말하고 있으니까요" 미세스 애플튼은 소독약 냄새가 나는 세면기를 가져오면서 말했다.

"자아, 어디 봐요.....운이 좋았어요, 단순한 찰과상이에요. 머리칼은 자르지 않고 물로 씻기만 하면 되겠어요. 꿰맬 필요도 없겠군요"

다시 눈물이 쏟아져 마린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난 브레이즈의 머리칼을 자를 수밖에 없었어요.....갈라진 상처가 있었거든요. 바위 조각에 브레이즈의 머리가 부딪혔어요. 팔로 머리를 감쌀 수도 없어서....."

코럴 리가 핸들에 매달렸기 때문에, 차가 골짜기로 곤두박질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브레이즈는 두 손을 핸들에서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옆으로 비킬 수는 있었을 텐데. 사실 브레이즈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웬일인지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추어 돌에 부딪히고 말았던 것이다. 얼마나 큰 충격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브레이즈라면 걱정할 것 없어요" 미세스 애플튼이 위로하듯이 말했다. "그는 불사신이에요.....그리고 당신도. 캄캄한 밤중에 달걀만한 혹을 달고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두통은 어때요?"

", 지겨워요!"

미세스 애플튼은 웃더니 마린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정신을 잃었었다고 했죠? 아마 매우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켰을 거예요. 구토증은 없었나요?"

"그리 심한 것은 아니지만, 두어 번 정도...."

"틀림없이 괜찮을 거예요. 우유를 데우고 있으니까 그것을 마시고 쉬세요"

"싫어요!"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미세스 애플튼의 눈에 놀란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마린은 얼굴을 붉혔다. "모두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나는 ....브레이즈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고는...."

"귀나 입에서 피가 나오던가요?"

"아니오, 내가 본 바로는"

"두개골이 팬 것 같은 느낌은?"

"없었어요"

"그러면 함몰 골절도 아닌 모양이군요. 브레이즈는 틀림없이 걸어 들어올 거예요. 그런 빗속에 나가다니, 당신 때문에 화가 났을 거예요. 그는 미끼에 달라붙은 상어 같다고나 할까!"

미세스 애플튼의 표현이 우스워 마린은 소리내어 웃었다. 불 곁에서 밀크를 마시고 있는 동안 몇 번이나 눈이 감기며 졸음의 쏟아졌지만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제는 우레 소리도 멀어지고 비도 많이 가늘어졌다.

차의 엔진 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정말 기뻤다.

"가만히 있어요!" 미세스 애플튼은 놀랄 만큼 빠른 동작으로 마중 나갔다.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코럴리였다. 창백해진 얼굴로 데이브 애플튼의 팔에 의지하고 있었다.

이어서 브레이즈의 창백하고 긴장된 얼굴이 보였다. 미세스 애플튼의 큰 가운 때문에 더욱 작게 보이는 마린의 모습이 눈에 띈 순간, 브레이즈의 눈에서는 무엇인가가 번쩍했다. 몸을 부축해 주던 톰의 팔에서 벗어나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브레이즈는 비틀거리면서 여자의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저주의 말을 토했다. 그러자 마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인용했다.

"양심이여, 사라져라. 리처드는 리처드에게 돌아왔어" 마음이 놓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내뱉고 싶었던 말이다.

브레이즈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가 마린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머리를 다쳐도 속은 멀쩡한 모양이군. 어디 내게 보여줘"

그대로 하지 않는 한 그는 절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마린은 일어서서 브레이즈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보여주었다. 브레이즈는 아주 조심스럽게 머리칼을 헤치고 파편이 지나간 자리를 찾았다.

"지독히 단단한 무쇠 머리로군" 그는 조롱하듯 말하고 귓전에 가만히 속삭였다.

"고마워"

"침대에 누워야 하지 않겠어요, 브레이지?" 코럴 리가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마치 불사신 같아요!" 마린은 브레이즈에게서 떨어지려 하다가 미세스 애플튼의 긴 가운 자락이 밟혀 브레이즈의 품에 쓰러지고 말았다.

"멋진 말을 하는군, 코럴리" 그는 안았던 마린을 놓아주고 미세스 애플튼에게 빙그레 웃음을 보냈다. "당신은 녹슨 옛 솜씨로 나를 시험도구로 삼을 생각이겠죠?"

", 꼭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그전에 마린을 침실로 안내해야겠어요.....자아, 이리와요. 당신의 다리는 이미 잠들어 있어요"

침대는 세 개의 탕파로 따뜻하게 덥혀져 있었다. 이불을 뒤집어 썼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린은 벌써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자아, 잠꾸러기 아가씨! 떠날 시간이 되었어요. 브레이즈와 아가씨를 판갈레이 마을까지 데려갈 헬리콥터가 도착했어요." 미세스 애플튼은 거의 자지 못했을 텐데도 기분이 명랑해 보였다. 침대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몸은 좀 어때요?"

마린은 가만히 베개에서 머리를 들어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은 것 같아요. 두통이라 할 것까지도 없는 약간의 통증이 있고, 목이 약간 당길 뿐인걸요. 그밖에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데, 브레이즈는 어떤지 모르겠군요?"

"아주 좋아요. 밖에 나가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에요. 블랙록스의 피해가 아주 적어서 가만히 있는 거예요. 만일 소중한 목장이 자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되면, 자기 머리 따위는 잊어버렸을 거예요. 남자들이란 정말! 자아, 홍차를 마셔요, 나중에 입을 것을 가져올 테니까. 샌디가 두고 간 옷을 찾았어요. 그러니 지금 그 나이트가운보다는 몸에 맞는 것을 입게 될 거예요"

샌디란 그녀의 딸로서, 현재는 간호사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고맙게도 셔츠와 진즈는 몸에 약간 클 뿐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코럴 리가 들어왔다. "꼭 피난민 같군요!" 그녀도 샌디의 옷을 먼저 얻어 입은 모양이었다. "미세스 애플튼, 내가 아드님 조반을 준비할까요, 일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아니, 괜찮아요. 자아 마린, 어서 떠나야지요. 파일럿은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렸을지도 몰라요-그는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있거든요. 지붕이 무너지고 다리가 떠내려 간 곳이 말할 수도 없이 많아요. 통나무에 막힌 수로도 몇 군데 되고.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에요. 여섯 시간에 2백 밀리나 비가 내렸다지 뭐예요"

브레이즈는 벌써 톰과 함께 목초지에 나가 있었다. 그는 <오라>는 손짓을 하면서 프로펠러가 돌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몸짓을 했다. 브레이즈는 몹시 피곤해 보였으며, 밝은 했빛 밑에서 보니 뺨의 상처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병원으로 가는 도중, 마린은 가슴을 죄는 듯한 고통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브레이즈, 그와의 사이에 있는 것이 육체적인 욕망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에 비로소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브레이즈만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욕망은 괴로울 정도이긴 했지만, 그녀에겐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그녀는 브레이즈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었다ㅡㅡ12세때 18세의 상대에게 느끼기 시작한 사랑이 그런 잔인한 배반을 당하고도 남아 있어 헛된 세월 동안에도 계속 커지고 있었다니. 그리고 지금은 희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다니.

씁쓸한 웃음이 마린의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틀림없이 나는 이상한 여자야. 자신을 편리한 정열의 배출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상대에게 굴욕적일 만큼의 사랑을 바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니.....인생에서 가장 예민한 시기를 브레이즈 곁에서 지냈기 때문일 거야. 14세 때 벌써 브레이즈의 살이 닿으면 흥분했을 정도니까. 사랑을 나누기 훨씬 전부터 나는 브레이즈를 사랑했던 거야..... 브레이즈가 가만히 그녀의 뺨을 만지는 바람에 그녀는 깜짝 놀라 생각에서 깨어났다. 헬리콥터가 판갈레이 상공에 이르렀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엔진 소리가 바뀌며 기체가 서서히 기울어졌다. 마린은 브레이즈의 손을 잡고 그의 손바닥에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강하가 시작되자 브레이즈가 손을 잡아 주었다. 착륙하자 곧 파일럿이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려 마린을 안아 내렸다. 브레이즈는 파일럿이 내민 손을 거절하고 지상에 내리자 마린의 어깨를 안고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고 있는 회전날개 밑을 달렸다. 몇몇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미처 그들에게 가까이 가기도 전에 플래시가 터졌다. 브레이즈가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의사뿐만 아니라 신문기자들도 와 있었던 것이다.

"헤로인이 되고 싶나, 마린? " 브레이즈가 귓전에서 소리쳤다.

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젯밤의 악몽과도 같은 경험을 이야기하게 된다면, 분명히 코럴리의 입장은 곤란해질 것이다. 브레이즈느 코럴리를 비호하려 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무슨 말을 묻건 가만히 있어"

더위와 피곤 때문일 것이다. 마린은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앞으로 가자 비틀거렸다. 덕분에 일은 간단히 끝났다. 두 사람은 곧바로 병원오로 안내되고, 신문기자들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브레이즈가 초조해 해도 병원의 절차는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겨우 뢴트겐 검사의 결과가 나와, 두 사람 모두 함몰 골절은 아니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하지만 당신은 24시간 입원을 해야 합니다" 의사가 마린에게 딱 잘라 말했다. "당신에게는 휴양이 필요합니다. 미스터 스탠토프의 말에 따르면, 블랙록스로 돌아가면 휴양이 어렵다고 하더군요" 브레이즈이 긴장된 눈을 보니, 입원이 브레이즈의 제안에서 비롯된 것임이 확실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마린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에 대해서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태도를 보이다니.

"당신은 어떻게 돌아갈 생각이세요?"

"왔을 때하고 같은 방법이지" 브레이즈는 마린을 내려다보고 눈썹을 지푸렸다. "괜찮아?"

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면 무슨 말이 나올지 자신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긴장은 곧 남의 눈에 띄는 모양인지 의사가 말했다.

"간호사에게 병실로 안내하도록 하죠, 미스.....아니 미세스 싱클레어"

결국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아무리 신문기자라도 병실까지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린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어 자세한 이야기를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결국 코럴리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약에는 진통제뿐만 아니라 수면제도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다. 마린은 그날 하루 종일 자고도 밤에도 잘 잤던 것이다. 눈을 뜨자 맑게 갠 가을 아침이었다.

"자아, 여기 있어요" 간호사가 신문을 건네주었다.

"행복한 분이군요! 브레이즈 스탠토프가 이렇게 안아 준다면 나는 발이 부러져도 원이 없겠어요!"

과연 신문에 나 있는 사진은 마치 연인 사이처럼 보였다. 브레이즈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마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마린 또한 제법 다소곳하게 찍혀 있었다.

"카메라의 눈이란 믿을 것이 못 되는군요" 마린은 중얼거리듯이 말하고, 제목과 그 밑의 작은 기사를 읽었다. 브레이즈의 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교묘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흙이 무너져 내린 곳은 애플튼 목장 바로 가까이인 듯이 되어 있었고, 마린이 폭풍 속의 밤길을 걸었다는 것은 물론 나와 있지도 않았다. 말할 나위도 없이 코럴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신문을 돌려주려 하자 젊은 간호사는 눈을 빛내면서 신문을 도로 내밀었다.

"그냥 가지고 계세요. 기념으로 보관하고 싶으시겠죠? 그는 멋있어요. 섹시한 영화배우 같아요. 그러나 알고 나면 평범한 사람이겠죠?"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어요. 겉보기 이상의 것을 갖고 있어요. 만나면 알게 되겠지만, 외모 같은 것은 잊어 버릴 정도니까요"

"신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군요" 간호사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행운아군요. 그런데 아직 결혼하지 않았어요?"

"나는 아직 그럴 만큼 그와 가까워지지 않았어요"

"유감이군요.....그런데 오늘 아침 퇴원해도 좋다고 했어요"

간호사가 나간 뒤 얼마 후 의사가 들어와 퇴원 허가를 내렸다. 마린이 옷을 갈아입고 거울을 보니, 눈 가장자리가 거무스름하여 나이가 훨씬 들어 보였다.

마린은 가방을 손에 들고 아직 나른한 발걸음으로 병실을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중나와 준 것은 브레이즈였다. 멋진 검은 웃옷을 입고 있는 그는 간호사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개암나무빛 눈동자에 무엇인가가 스치더니 미소를 띠었다. 그는 간호사에게 무엇이라 말하고 마린에게 다가와 가방을 받아들었다.

"삼켜 버리고 싶을 만큼 건강해 보이는군" 간호사가 눈앞에 있는데도 브레이즈는 마린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마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 수 있었다. 브레이즈가 얼른 허리에 팔을 돌리며 마린을 부축했다. "조심해, 그러지 않으면 하루 더 퇴원이 연기될 테니까"

"어마, 그런 염려는 하지 마세요" 간호사가 미소를 띠고 장밋빛으로 물든 마린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입원까지 할 필요가 없었지만, 사람들이 시끄럽게 굴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어요"

간호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당황과 분노로 마린은 눈을 감고 말았다. 도대체 이번에는 브레이즈가 또 어떤 음모를 생각한 것일까?

"후회막급이라는 말이 있죠" 브레이즈는 대뜸 이렇게 말하고, 마린에게 인사를 재촉하며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병원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엘리스의 차를 본 마린에게 그는 평소의 빈정거리는 태도로 돌아와 말했다...........

"자기는 필요 없다며 엘리스가 빌려 주더군"

마린은 저도 모르게 눈으로 브레이즈의 머리에서 상처 자국을 찾고 있었다.

"괜찮아"

"어째서 피하지 않으셨어요?"

"피했지. 다만 조금 늦었을 뿐이야"

마린은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속이지는 못해요, 브레이즈. 당신은 피하려다 중지했어요. 왜죠?"

브레이브는 가방을 트렁크에 넣고 필요 이상으로 힘껏 뚜껑을 닫고는 마린에게 가까이 왔다. 분노로 턱의 선이 굳어져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내뱉듯이 말했다.

"기사도적 충동이라고나 할까. 자아, 어서 타시지"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브레이즈는 본능을 거역하면서까지 마린을 지키기 위해 자기를 희생했던 것이다. 엔진이 걸리자 마린이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요....."

"감사 따위는 필요치 않아" 뒤를 돌아보고 차를 돌리면서 말했다. "잠시 가만히 있어줘, 아직 나는 이 차에 익숙지 못하니까"

그것은 물론 구실에 불과했다. 브레이즈는 어떤 차든지 최고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요령을 태어나면서부터 터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린은 잠자코 있었다. 브레이즈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일부러 갈아입을 옷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 온 것을 보면 곧바로 집에 돌아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마린은 가만히 자기가 신고 있는 하이힐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제일 좋은 구두인데....

자동차가 국도로 나와 남쪽으로 향했을 때, 마린은 비로소 무엇인가 알아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나를 오클랜드까지 데리고 가서 귀찮은 듯 버리지는 않을 테지.......트렁크에는 내 짐을 넣어 둔 가방까지 넣고 온 것일까?

얼른 브레이즈의 얼굴을 훔쳐보니, 그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싸늘한 눈초리. 어떻게 할 것인지 내가 묻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마린은 눈을 감았다. 그런 것을 설명하는 기쁨을 내가 일부러 맛보게 할 수는 없어.....10분 후, 그녀는 잠자코 있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차가 옆길로 벗어나 항구로 향했다.

차는 누군가의 집 차고에 들렀다가 나직한 언덕으로 올라갔다. 개집에서 사슬에 묶인 개가 나타났으나, 브레이즈가 소리 지르자 그대로 주저앉아 졸린 듯한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죠?"

"물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줄 알았지. 친구네 집이야. 오늘 하루 나에게 빌려 주었어"

"뭐라구요?"

브레이즈는 빙그레 웃었다. 멋진 웃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결코 못된 짓을 하려는 것은 아니야. 약속하지. 블랙록스에서는 마린과 단둘이 이야기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친구이기에 내가 마린과 중요한 일로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했더니 이 집을 빌려 주더군"

"중요한 이야기란 .....도대체 뭐죠?"

"안에 들아가서 이야기하지"

브레이즈는 손을 내밀어 마린의 안전벨트를 벗겨 주었다. 머릿속에서는 위험하든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도망칠 수는 없었다.

"자아, 앉아." 거실에 들어가자 브레이즈가 말했다.

"커피를 끓여 가지고 오겠어"

마린은 불안해서 도저히 한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잿빛 가죽으로 된 팔걸이의자에서 일어나 유리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눈앞에 푸른 언덕이 이어지고, 그 멀리 항구가 보였다. 바다는 햇빛을 받아 오팔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매 한 마리가 한가로이 목초지 위를 날고 있었다. 마린은 자기가 얼마나 깊이 이 북부의 땅과 밀착되어 있는지,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실감하고 있었다. 브레이즈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마음의 고뇌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마린!"

"여기예요, 경치를 보고 있었어요!" 마린은 애써 자기를 억제하면서 방을 돌아왔다. "아주 훌룡하군요. 당신의 친구라는 분은 무척 센스가 있는 사람인 것 같군요"

". 다음에 밤에 한번 데려오지. 밤경치도 아주 훌륭해.....어서 앉아, 소냐가 커피를 준비해 주었으니까, 인스턴트로 참을 필요는 없어"

"나는 대개 집에서는 인스턴트로 마시고 있어요"

"신경 쓸 것 없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머리는 좀 어때?"

"완전히 나았어요, 당신은?"

"다 나았어, 마린의 재치 있는 행동 덕분에. 하지만 그 멋진 드레스를 버린 것이 유감이군. 그리고 내 머리를 좀 더 모양좋게 잘랐으면 좋았을 걸"

다시 손질을 한 것이 분명했다. 풍부하고 윤기 있는 머리는 단정히 커트되어 있었고, 무참히 잘린 부분도 감쪽같이 손질되어 있었다. 마린은 브레이즈가 감행한 모험이 새삼스럽게 되새겨져 가슴이 뭉클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때는 모양 같은 걸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어요."

그녀는 커피 잔을 바라보았다. 브레이즈가 잿빛 팔걸이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브레이즈가 조용히 물었다.

"마린, 어째서 폭풍우 속인데도 밖으로 나갔지?"

"굳이 물어 볼 필요도 없지 않아요?" 몸이 긴장되었으나, 애써 어깨를 움직여 보였다. "당신에게는 도움이 필요했는데, 코럴리에게는 힘에 겨운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어요."

"코럴리의 어둠 공포증은 거짓말이 아니야."

"물론 알고 있어요. 한눈에 공포증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코럴리는 최선을 다했어요, 가엾게 생각될 정도로"

"코럴리는 자기가 가지 못한 것이 곧 나를 배반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 마린을 원망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씁쓸한 말투였다.

마린은 잔을 놓고 얼굴을 들었다. 잘 알 수 있었다. 어린아이 같은 그녀가 아닌가. 비록 브레이즈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어도 마린이 했기 때문에 반감을 갖는다는 게 조금도 이상스러울 것이 없었다.

"아무도 코럴리를 비난하지는 않는다고 그녀에게 전해 주세요. 나는 누구를 위해서건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물론 그럴 테지. 그러나 마린은 누구에게나 그런 키스를 했을까?" 마린은 깜짝 놀라 눈을 내리깔았다.

"어째서 시인하려 하지 않지, 마린? 마린이 자기 껍데기 속에 틀어박혀 있지만 않으면 만사가 훨씬 더 수월해질 텐데" 마린은 잠자코 진한 파란색의 융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브레이즈가 다가와 마린의 두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만일 내가 먼저 말하는 것이 이야기하기에 쉽다면 말하지"

씁쓸한 어투였다.

"나는 마린을 원해. 마린을 손에 넣을 생각이야.....자아, 마린도 말해 봐"

"나도 당신을 원한다고 말하란 말인가요? " 그녀는 브레이즈의 넥타이를 보며 억양없이 말했다. 마음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어째서 묻고 있죠, 알고 있으면서 말이에요? 언제나 알고 있으면서"

마린은 얼굴을 들어 반짝이는 눈으로 브레이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브레이즈는 씁쓸하게 웃었다. 마린이 자기한테서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매력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사실이야. 마린은 블랙록스에 돌아와도 아무 일이 없을 거라고 진정으로 생각했었나, ? 나는 쉽게 용서하거나 잊어버리지 않는 인간이란 것쯤은 마린도 알고 있었을 텐데?"

"나는 6년이란 세월이.....너무나 긴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피의 역류에 화를 내면서, 어깨에 놓여진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느끼고 사나이다운 매력에 노예가 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마린은 잊어버렸나?"

"아뇨" 피곤한 말투였다. 그만 저도 모르게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남자는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그만둬. 설마 그런 진부한 이야기로 얼버무릴 생각은 아니겠지? 여자는 첫 남자를 영원히 사랑하지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 여자에게서 저 여자에게로 옮겨간다는 말을 마린 역시 믿고 싶지는 않겠지?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야"

냉소적인 말이 사정없이 마린의 가슴을 때렸다., 사실 브레이즈는 그런 계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린은 얼굴을 돌렸다.

"무엇을 원하세요, 브레이즈?"

"마린이지"

"싫어요!"

"아아,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는 안 될걸, 아름다운 바람둥이"

브레이즈는 두 손을 마린의 목에서 가슴의 곡선으로 미끄러뜨렸다. 그는 미소를 띠고 말했다. "이리 와"

"싫어요!" 지금 브레이즈의 말에 따른다면 그녀의 인생은 파멸되어 버릴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정부가 될 수는 없어요, 브레이즈"

"마린이 필요해" 굶주림을 드러낸 짧은 말이었다. 마린은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브레이즈를 끌어안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브레이즈와의 거리는 한 발짝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더구나 브레이즈가 지금 자기를 다시 손에 넣으려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마지막 말을 주문처럼 되풀이했다.

"나는 당신의 정부가 될 수는 없어요, 브레이즈"

"마린 역시 나를 원하고 있지 않아? 가만히 있으려는 노력이 오히려 몸을 떨게 하고 있지 않아? 지금 내가 건드리기만 하면, 마린은 나더러 안아 달라고 간청하게 될 거야"

"하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겠죠? " 딱딱한 어투였다. 이제 새삼스럽게 내 행복을 저 사람의 손에 맡기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 미워도 하고 원하기도 하지만, 내 생각을 전혀 해주지 않는 저 사람의 손에는.

브레이즈는 마린이 겨우 손에 넣은 자유를 내던지고 자기에게 굴복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서는 마린이 설설 기면서, 자기 의사에 반하면서까지 브레이즈의 불타는 관능에 항복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되면.....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굴레가 계속될 것인가? 피할 수 없는 굴욕의 시기가 언제인가는 잘 알고 있다-브레이즈의 마음속에 일깨워진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냉혹하게 버림을 받을 것이다.

"아아, 내가 먼저 마린을 건드릴 수는 없어. 하지만 마린은 나한테 찾아올 거야, 조만간에. 마린은 견딜 수 없이 나를 원하고 있고,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6년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어. 그러니까 앞으로 며칠을 더 기다리지 못할 것도 없지"

자존심이 마린의 얼굴을 들게 했다. 그러고는 필요이상으로 딱 잘라 말했다.

"얼마든지 기다리세요! 당신의 정부가 결국은 어떤 꼴을 당할지 나는 알고 있어요. 잊어버렸나요?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는 것은 천하의 바보나 하는 짓이에요!"

"하지만 마린은 역시 되풀이할 거야"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도대체 남편과 나 말고 남자가 몇 명이나 더 있었지?"

마린은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것을 스스로도 알수 있었다. 경멸에 찬 눈으로 브레이즈를 쏘아보고 의자에 앉아 커피 잔을 들었다.

"당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 아니에요? 내가 언제 그런 질문을 당신에게 했던가요?"

"자유롭다는 말인가?"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브레이즈. 난 그런 일에 흥미없어요. 아무래도 좋아요. 그러니까 제발 귀찮게 굴지 마세요! 나는 이제 집으로 가고 싶어요"

들고 있던 받침접시 위에서 컵이 떨렸다. 마린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면서 컵과 접시를 가만히 테이블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후, 브레이즈가 말했다.

"좋아, 그럼 집에 돌아가기로 하지"

 

8

악몽과 같은 심야의 빗속을 강행군한 사실은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브레이즈의 이름을 중얼거렸다는 것뿐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거의 꿈속을 걷는 기분으로 애플튼가의 문 앞에 있는 흰 우편함을 지나고 있었다.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마린은 비로소 소리 내어 울었다. 2백 미터 남짓한 거리에 있는 집이 마치 지구 끝에 있는 것처럼 멀리 느껴졌다. 개가 짖었다.

우레 소리와 창고의 지붕을 두드리는 요란한 빗소리에 섞여, 개를 꾸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린이 뒷문에 닿기 전에 회중전등을 가진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 어서 램프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역시 정전이 된 모양이었다. 그 뒤에는 큰 소동이 벌어졌으나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스터 애플튼은 건장한 네 아들과 함께 밖으로 뛰어나왔다.

미세스 애플튼은 떨고 있는 마린을 더운물로 목욕을 시키며 보살펴 주고 있었다.

"충격 때문일 거예요" 그녀는 마린이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는 것을 보고 다정하게 말했다. "이제는 걱정할 것 없어요. 그레그가 불도저를 가지고 나갔고, 그밖에도 네 명이나 되는 장정이 랜드로버를 타고 나갔으니까요. 틀림없이 길을 뚫고 브레이즈와 코럴리를 데리고 올 거예요. 내일 아침이면 당신과 브레이즈가 판갈레이에서 뢴트겐 검사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머리를 다쳤으니까, 말일의 경우를 위해 절차를 밟아 놓았어요"

미세스 애플튼은 큰 체구에 서글서글한 여성으로서, 30년 전에는 간호사였다. 그러므로 마린은 마치 어린애처럼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맡기고 편하게 목욕을 했다.

"좀 크겠지만 몸을 따뜻하게 해주기는 할 거예요"

마린이 몸을 닦고 있으려니 그녀가 푸른 나이트가운을 건네주었다. "이것을 입고 주방으로 오세요, 상처를 좀 살펴봐야겠어요"

넓은 주방은 벽가에 설치한 레인지 덕분에 따뜻했다. 램프의 부드러운 조명.....근대적인 모든 설비는 정전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전기가 들어오게 되면서부터 장작을 사용하는 레인지를 쓰는 집이 거의 없어졌지만" 미세스 애플틑은 주전자를 올려놓으면서 만족스럽게 말했다. "우리는 이것을 남겨 둔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일이 없어요. 오히려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블랙록스에도 남아 있더군요"

"그럴 거예요, 모일리 필드게이트는 장작불로 빵을 구워야 제맛이 난다고 늘 말하고 있으니까요" 미세스 애플튼은 소독약 냄새가 나는 세면기를 가져오면서 말했다.

"자아, 어디 봐요.....운이 좋았어요, 단순한 찰과상이에요. 머리칼은 자르지 않고 물로 씻기만 하면 되겠어요. 꿰맬 필요도 없겠군요"

다시 눈물이 쏟아져 마린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난 브레이즈의 머리칼을 자를 수밖에 없었어요.....갈라진 상처가 있었거든요. 바위 조각에 브레이즈의 머리가 부딪혔어요. 팔로 머리를 감쌀 수도 없어서....."

코럴 리가 핸들에 매달렸기 때문에, 차가 골짜기로 곤두박질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브레이즈는 두 손을 핸들에서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옆으로 비킬 수는 있었을 텐데. 사실 브레이즈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웬일인지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추어 돌에 부딪히고 말았던 것이다. 얼마나 큰 충격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브레이즈라면 걱정할 것 없어요" 미세스 애플튼이 위로하듯이 말했다. "그는 불사신이에요.....그리고 당신도. 캄캄한 밤중에 달걀만한 혹을 달고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두통은 어때요?"

", 지겨워요!"

미세스 애플튼은 웃더니 마린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정신을 잃었었다고 했죠? 아마 매우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켰을 거예요. 구토증은 없었나요?"

"그리 심한 것은 아니지만, 두어 번 정도...."

"틀림없이 괜찮을 거예요. 우유를 데우고 있으니까 그것을 마시고 쉬세요"

"싫어요!"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미세스 애플튼의 눈에 놀란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마린은 얼굴을 붉혔다. "모두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나는 ....브레이즈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고는...."

"귀나 입에서 피가 나오던가요?"

"아니오, 내가 본 바로는"

"두개골이 팬 것 같은 느낌은?"

"없었어요"

"그러면 함몰 골절도 아닌 모양이군요. 브레이즈는 틀림없이 걸어 들어올 거예요. 그런 빗속에 나가다니, 당신 때문에 화가 났을 거예요. 그는 미끼에 달라붙은 상어 같다고나 할까!"

미세스 애플튼의 표현이 우스워 마린은 소리내어 웃었다. 불 곁에서 밀크를 마시고 있는 동안 몇 번이나 눈이 감기며 졸음의 쏟아졌지만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제는 우레 소리도 멀어지고 비도 많이 가늘어졌다.

차의 엔진 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정말 기뻤다.

"가만히 있어요!" 미세스 애플튼은 놀랄 만큼 빠른 동작으로 마중 나갔다.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코럴리였다. 창백해진 얼굴로 데이브 애플튼의 팔에 의지하고 있었다.

이어서 브레이즈의 창백하고 긴장된 얼굴이 보였다. 미세스 애플튼의 큰 가운 때문에 더욱 작게 보이는 마린의 모습이 눈에 띈 순간, 브레이즈의 눈에서는 무엇인가가 번쩍했다. 몸을 부축해 주던 톰의 팔에서 벗어나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브레이즈는 비틀거리면서 여자의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저주의 말을 토했다. 그러자 마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인용했다.

"양심이여, 사라져라. 리처드는 리처드에게 돌아왔어" 마음이 놓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내뱉고 싶었던 말이다.

브레이즈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가 마린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머리를 다쳐도 속은 멀쩡한 모양이군. 어디 내게 보여줘"

그대로 하지 않는 한 그는 절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마린은 일어서서 브레이즈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보여주었다. 브레이즈는 아주 조심스럽게 머리칼을 헤치고 파편이 지나간 자리를 찾았다.

"지독히 단단한 무쇠 머리로군" 그는 조롱하듯 말하고 귓전에 가만히 속삭였다.

"고마워"

"침대에 누워야 하지 않겠어요, 브레이지?" 코럴 리가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마치 불사신 같아요!" 마린은 브레이즈에게서 떨어지려 하다가 미세스 애플튼의 긴 가운 자락이 밟혀 브레이즈의 품에 쓰러지고 말았다.

"멋진 말을 하는군, 코럴리" 그는 안았던 마린을 놓아주고 미세스 애플튼에게 빙그레 웃음을 보냈다. "당신은 녹슨 옛 솜씨로 나를 시험도구로 삼을 생각이겠죠?"

", 꼭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그전에 마린을 침실로 안내해야겠어요.....자아, 이리와요. 당신의 다리는 이미 잠들어 있어요"

침대는 세 개의 탕파로 따뜻하게 덥혀져 있었다. 이불을 뒤집어 썼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린은 벌써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자아, 잠꾸러기 아가씨! 떠날 시간이 되었어요. 브레이즈와 아가씨를 판갈레이 마을까지 데려갈 헬리콥터가 도착했어요." 미세스 애플튼은 거의 자지 못했을 텐데도 기분이 명랑해 보였다. 침대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몸은 좀 어때요?"

마린은 가만히 베개에서 머리를 들어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은 것 같아요. 두통이라 할 것까지도 없는 약간의 통증이 있고, 목이 약간 당길 뿐인걸요. 그밖에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데, 브레이즈는 어떤지 모르겠군요?"

"아주 좋아요. 밖에 나가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에요. 블랙록스의 피해가 아주 적어서 가만히 있는 거예요. 만일 소중한 목장이 자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되면, 자기 머리 따위는 잊어버렸을 거예요. 남자들이란 정말! 자아, 홍차를 마셔요, 나중에 입을 것을 가져올 테니까. 샌디가 두고 간 옷을 찾았어요. 그러니 지금 그 나이트가운보다는 몸에 맞는 것을 입게 될 거예요"

샌디란 그녀의 딸로서, 현재는 간호사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고맙게도 셔츠와 진즈는 몸에 약간 클 뿐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코럴 리가 들어왔다. "꼭 피난민 같군요!" 그녀도 샌디의 옷을 먼저 얻어 입은 모양이었다. "미세스 애플튼, 내가 아드님 조반을 준비할까요, 일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아니, 괜찮아요. 자아 마린, 어서 떠나야지요. 파일럿은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렸을지도 몰라요-그는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있거든요. 지붕이 무너지고 다리가 떠내려 간 곳이 말할 수도 없이 많아요. 통나무에 막힌 수로도 몇 군데 되고.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에요. 여섯 시간에 2백 밀리나 비가 내렸다지 뭐예요"

브레이즈는 벌써 톰과 함께 목초지에 나가 있었다. 그는 <오라>는 손짓을 하면서 프로펠러가 돌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몸짓을 했다. 브레이즈는 몹시 피곤해 보였으며, 밝은 했빛 밑에서 보니 뺨의 상처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병원으로 가는 도중, 마린은 가슴을 죄는 듯한 고통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브레이즈, 그와의 사이에 있는 것이 육체적인 욕망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에 비로소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브레이즈만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욕망은 괴로울 정도이긴 했지만, 그녀에겐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그녀는 브레이즈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었다ㅡㅡ12세때 18세의 상대에게 느끼기 시작한 사랑이 그런 잔인한 배반을 당하고도 남아 있어 헛된 세월 동안에도 계속 커지고 있었다니. 그리고 지금은 희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다니.

씁쓸한 웃음이 마린의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틀림없이 나는 이상한 여자야. 자신을 편리한 정열의 배출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상대에게 굴욕적일 만큼의 사랑을 바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니.....인생에서 가장 예민한 시기를 브레이즈 곁에서 지냈기 때문일 거야. 14세 때 벌써 브레이즈의 살이 닿으면 흥분했을 정도니까. 사랑을 나누기 훨씬 전부터 나는 브레이즈를 사랑했던 거야..... 브레이즈가 가만히 그녀의 뺨을 만지는 바람에 그녀는 깜짝 놀라 생각에서 깨어났다. 헬리콥터가 판갈레이 상공에 이르렀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엔진 소리가 바뀌며 기체가 서서히 기울어졌다. 마린은 브레이즈의 손을 잡고 그의 손바닥에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강하가 시작되자 브레이즈가 손을 잡아 주었다. 착륙하자 곧 파일럿이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려 마린을 안아 내렸다. 브레이즈는 파일럿이 내민 손을 거절하고 지상에 내리자 마린의 어깨를 안고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고 있는 회전날개 밑을 달렸다. 몇몇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미처 그들에게 가까이 가기도 전에 플래시가 터졌다. 브레이즈가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의사뿐만 아니라 신문기자들도 와 있었던 것이다.

"헤로인이 되고 싶나, 마린? " 브레이즈가 귓전에서 소리쳤다.

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젯밤의 악몽과도 같은 경험을 이야기하게 된다면, 분명히 코럴리의 입장은 곤란해질 것이다. 브레이즈느 코럴리를 비호하려 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무슨 말을 묻건 가만히 있어"

더위와 피곤 때문일 것이다. 마린은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앞으로 가자 비틀거렸다. 덕분에 일은 간단히 끝났다. 두 사람은 곧바로 병원오로 안내되고, 신문기자들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브레이즈가 초조해 해도 병원의 절차는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겨우 뢴트겐 검사의 결과가 나와, 두 사람 모두 함몰 골절은 아니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하지만 당신은 24시간 입원을 해야 합니다" 의사가 마린에게 딱 잘라 말했다. "당신에게는 휴양이 필요합니다. 미스터 스탠토프의 말에 따르면, 블랙록스로 돌아가면 휴양이 어렵다고 하더군요" 브레이즈이 긴장된 눈을 보니, 입원이 브레이즈의 제안에서 비롯된 것임이 확실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마린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에 대해서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태도를 보이다니.

"당신은 어떻게 돌아갈 생각이세요?"

"왔을 때하고 같은 방법이지" 브레이즈는 마린을 내려다보고 눈썹을 지푸렸다. "괜찮아?"

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면 무슨 말이 나올지 자신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긴장은 곧 남의 눈에 띄는 모양인지 의사가 말했다.

"간호사에게 병실로 안내하도록 하죠, 미스.....아니 미세스 싱클레어"

결국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아무리 신문기자라도 병실까지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린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어 자세한 이야기를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결국 코럴리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약에는 진통제뿐만 아니라 수면제도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다. 마린은 그날 하루 종일 자고도 밤에도 잘 잤던 것이다. 눈을 뜨자 맑게 갠 가을 아침이었다.

"자아, 여기 있어요" 간호사가 신문을 건네주었다.

"행복한 분이군요! 브레이즈 스탠토프가 이렇게 안아 준다면 나는 발이 부러져도 원이 없겠어요!"

과연 신문에 나 있는 사진은 마치 연인 사이처럼 보였다. 브레이즈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마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마린 또한 제법 다소곳하게 찍혀 있었다.

"카메라의 눈이란 믿을 것이 못 되는군요" 마린은 중얼거리듯이 말하고, 제목과 그 밑의 작은 기사를 읽었다. 브레이즈의 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교묘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흙이 무너져 내린 곳은 애플튼 목장 바로 가까이인 듯이 되어 있었고, 마린이 폭풍 속의 밤길을 걸었다는 것은 물론 나와 있지도 않았다. 말할 나위도 없이 코럴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신문을 돌려주려 하자 젊은 간호사는 눈을 빛내면서 신문을 도로 내밀었다.

"그냥 가지고 계세요. 기념으로 보관하고 싶으시겠죠? 그는 멋있어요. 섹시한 영화배우 같아요. 그러나 알고 나면 평범한 사람이겠죠?"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어요. 겉보기 이상의 것을 갖고 있어요. 만나면 알게 되겠지만, 외모 같은 것은 잊어 버릴 정도니까요"

"신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군요" 간호사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행운아군요. 그런데 아직 결혼하지 않았어요?"

"나는 아직 그럴 만큼 그와 가까워지지 않았어요"

"유감이군요.....그런데 오늘 아침 퇴원해도 좋다고 했어요"

간호사가 나간 뒤 얼마 후 의사가 들어와 퇴원 허가를 내렸다. 마린이 옷을 갈아입고 거울을 보니, 눈 가장자리가 거무스름하여 나이가 훨씬 들어 보였다.

마린은 가방을 손에 들고 아직 나른한 발걸음으로 병실을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중나와 준 것은 브레이즈였다. 멋진 검은 웃옷을 입고 있는 그는 간호사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개암나무빛 눈동자에 무엇인가가 스치더니 미소를 띠었다. 그는 간호사에게 무엇이라 말하고 마린에게 다가와 가방을 받아들었다.

"삼켜 버리고 싶을 만큼 건강해 보이는군" 간호사가 눈앞에 있는데도 브레이즈는 마린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마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 수 있었다. 브레이즈가 얼른 허리에 팔을 돌리며 마린을 부축했다. "조심해, 그러지 않으면 하루 더 퇴원이 연기될 테니까"

"어마, 그런 염려는 하지 마세요" 간호사가 미소를 띠고 장밋빛으로 물든 마린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입원까지 할 필요가 없었지만, 사람들이 시끄럽게 굴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어요"

간호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당황과 분노로 마린은 눈을 감고 말았다. 도대체 이번에는 브레이즈가 또 어떤 음모를 생각한 것일까?

"후회막급이라는 말이 있죠" 브레이즈는 대뜸 이렇게 말하고, 마린에게 인사를 재촉하며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병원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엘리스의 차를 본 마린에게 그는 평소의 빈정거리는 태도로 돌아와 말했다...........

"자기는 필요 없다며 엘리스가 빌려 주더군"

마린은 저도 모르게 눈으로 브레이즈의 머리에서 상처 자국을 찾고 있었다.

"괜찮아"

"어째서 피하지 않으셨어요?"

"피했지. 다만 조금 늦었을 뿐이야"

마린은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속이지는 못해요, 브레이즈. 당신은 피하려다 중지했어요. 왜죠?"

브레이브는 가방을 트렁크에 넣고 필요 이상으로 힘껏 뚜껑을 닫고는 마린에게 가까이 왔다. 분노로 턱의 선이 굳어져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내뱉듯이 말했다.

"기사도적 충동이라고나 할까. 자아, 어서 타시지"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브레이즈는 본능을 거역하면서까지 마린을 지키기 위해 자기를 희생했던 것이다. 엔진이 걸리자 마린이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요....."

"감사 따위는 필요치 않아" 뒤를 돌아보고 차를 돌리면서 말했다. "잠시 가만히 있어줘, 아직 나는 이 차에 익숙지 못하니까"

그것은 물론 구실에 불과했다. 브레이즈는 어떤 차든지 최고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요령을 태어나면서부터 터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린은 잠자코 있었다. 브레이즈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일부러 갈아입을 옷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 온 것을 보면 곧바로 집에 돌아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마린은 가만히 자기가 신고 있는 하이힐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제일 좋은 구두인데....

자동차가 국도로 나와 남쪽으로 향했을 때, 마린은 비로소 무엇인가 알아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나를 오클랜드까지 데리고 가서 귀찮은 듯 버리지는 않을 테지.......트렁크에는 내 짐을 넣어 둔 가방까지 넣고 온 것일까?

얼른 브레이즈의 얼굴을 훔쳐보니, 그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싸늘한 눈초리. 어떻게 할 것인지 내가 묻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마린은 눈을 감았다. 그런 것을 설명하는 기쁨을 내가 일부러 맛보게 할 수는 없어.....10분 후, 그녀는 잠자코 있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차가 옆길로 벗어나 항구로 향했다.

차는 누군가의 집 차고에 들렀다가 나직한 언덕으로 올라갔다. 개집에서 사슬에 묶인 개가 나타났으나, 브레이즈가 소리 지르자 그대로 주저앉아 졸린 듯한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죠?"

"물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줄 알았지. 친구네 집이야. 오늘 하루 나에게 빌려 주었어"

"뭐라구요?"

브레이즈는 빙그레 웃었다. 멋진 웃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결코 못된 짓을 하려는 것은 아니야. 약속하지. 블랙록스에서는 마린과 단둘이 이야기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친구이기에 내가 마린과 중요한 일로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했더니 이 집을 빌려 주더군"

"중요한 이야기란 .....도대체 뭐죠?"

"안에 들아가서 이야기하지"

브레이즈는 손을 내밀어 마린의 안전벨트를 벗겨 주었다. 머릿속에서는 위험하든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도망칠 수는 없었다.

"자아, 앉아." 거실에 들어가자 브레이즈가 말했다.

"커피를 끓여 가지고 오겠어"

마린은 불안해서 도저히 한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잿빛 가죽으로 된 팔걸이의자에서 일어나 유리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눈앞에 푸른 언덕이 이어지고, 그 멀리 항구가 보였다. 바다는 햇빛을 받아 오팔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매 한 마리가 한가로이 목초지 위를 날고 있었다. 마린은 자기가 얼마나 깊이 이 북부의 땅과 밀착되어 있는지,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실감하고 있었다. 브레이즈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마음의 고뇌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마린!"

"여기예요, 경치를 보고 있었어요!" 마린은 애써 자기를 억제하면서 방을 돌아왔다. "아주 훌룡하군요. 당신의 친구라는 분은 무척 센스가 있는 사람인 것 같군요"

". 다음에 밤에 한번 데려오지. 밤경치도 아주 훌륭해.....어서 앉아, 소냐가 커피를 준비해 주었으니까, 인스턴트로 참을 필요는 없어"

"나는 대개 집에서는 인스턴트로 마시고 있어요"

"신경 쓸 것 없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머리는 좀 어때?"

"완전히 나았어요, 당신은?"

"다 나았어, 마린의 재치 있는 행동 덕분에. 하지만 그 멋진 드레스를 버린 것이 유감이군. 그리고 내 머리를 좀 더 모양좋게 잘랐으면 좋았을 걸"

다시 손질을 한 것이 분명했다. 풍부하고 윤기 있는 머리는 단정히 커트되어 있었고, 무참히 잘린 부분도 감쪽같이 손질되어 있었다. 마린은 브레이즈가 감행한 모험이 새삼스럽게 되새겨져 가슴이 뭉클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때는 모양 같은 걸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어요."

그녀는 커피 잔을 바라보았다. 브레이즈가 잿빛 팔걸이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브레이즈가 조용히 물었다.

"마린, 어째서 폭풍우 속인데도 밖으로 나갔지?"

"굳이 물어 볼 필요도 없지 않아요?" 몸이 긴장되었으나, 애써 어깨를 움직여 보였다. "당신에게는 도움이 필요했는데, 코럴리에게는 힘에 겨운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어요."

"코럴리의 어둠 공포증은 거짓말이 아니야."

"물론 알고 있어요. 한눈에 공포증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코럴리는 최선을 다했어요, 가엾게 생각될 정도로"

"코럴리는 자기가 가지 못한 것이 곧 나를 배반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 마린을 원망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씁쓸한 말투였다.

마린은 잔을 놓고 얼굴을 들었다. 잘 알 수 있었다. 어린아이 같은 그녀가 아닌가. 비록 브레이즈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어도 마린이 했기 때문에 반감을 갖는다는 게 조금도 이상스러울 것이 없었다.

"아무도 코럴리를 비난하지는 않는다고 그녀에게 전해 주세요. 나는 누구를 위해서건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물론 그럴 테지. 그러나 마린은 누구에게나 그런 키스를 했을까?" 마린은 깜짝 놀라 눈을 내리깔았다.

"어째서 시인하려 하지 않지, 마린? 마린이 자기 껍데기 속에 틀어박혀 있지만 않으면 만사가 훨씬 더 수월해질 텐데" 마린은 잠자코 진한 파란색의 융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브레이즈가 다가와 마린의 두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만일 내가 먼저 말하는 것이 이야기하기에 쉽다면 말하지"

씁쓸한 어투였다.

"나는 마린을 원해. 마린을 손에 넣을 생각이야.....자아, 마린도 말해 봐"

"나도 당신을 원한다고 말하란 말인가요? " 그녀는 브레이즈의 넥타이를 보며 억양없이 말했다. 마음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어째서 묻고 있죠, 알고 있으면서 말이에요? 언제나 알고 있으면서"

마린은 얼굴을 들어 반짝이는 눈으로 브레이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브레이즈는 씁쓸하게 웃었다. 마린이 자기한테서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매력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사실이야. 마린은 블랙록스에 돌아와도 아무 일이 없을 거라고 진정으로 생각했었나, ? 나는 쉽게 용서하거나 잊어버리지 않는 인간이란 것쯤은 마린도 알고 있었을 텐데?"

"나는 6년이란 세월이.....너무나 긴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피의 역류에 화를 내면서, 어깨에 놓여진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느끼고 사나이다운 매력에 노예가 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마린은 잊어버렸나?"

"아뇨" 피곤한 말투였다. 그만 저도 모르게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남자는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그만둬. 설마 그런 진부한 이야기로 얼버무릴 생각은 아니겠지? 여자는 첫 남자를 영원히 사랑하지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 여자에게서 저 여자에게로 옮겨간다는 말을 마린 역시 믿고 싶지는 않겠지?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야"

냉소적인 말이 사정없이 마린의 가슴을 때렸다., 사실 브레이즈는 그런 계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린은 얼굴을 돌렸다.

"무엇을 원하세요, 브레이즈?"

"마린이지"

"싫어요!"

"아아,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는 안 될걸, 아름다운 바람둥이"

브레이즈는 두 손을 마린의 목에서 가슴의 곡선으로 미끄러뜨렸다. 그는 미소를 띠고 말했다. "이리 와"

"싫어요!" 지금 브레이즈의 말에 따른다면 그녀의 인생은 파멸되어 버릴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정부가 될 수는 없어요, 브레이즈"

"마린이 필요해" 굶주림을 드러낸 짧은 말이었다. 마린은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브레이즈를 끌어안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브레이즈와의 거리는 한 발짝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더구나 브레이즈가 지금 자기를 다시 손에 넣으려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마지막 말을 주문처럼 되풀이했다.

"나는 당신의 정부가 될 수는 없어요, 브레이즈"

"마린 역시 나를 원하고 있지 않아? 가만히 있으려는 노력이 오히려 몸을 떨게 하고 있지 않아? 지금 내가 건드리기만 하면, 마린은 나더러 안아 달라고 간청하게 될 거야"

"하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겠죠? " 딱딱한 어투였다. 이제 새삼스럽게 내 행복을 저 사람의 손에 맡기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 미워도 하고 원하기도 하지만, 내 생각을 전혀 해주지 않는 저 사람의 손에는.

브레이즈는 마린이 겨우 손에 넣은 자유를 내던지고 자기에게 굴복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서는 마린이 설설 기면서, 자기 의사에 반하면서까지 브레이즈의 불타는 관능에 항복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되면.....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굴레가 계속될 것인가? 피할 수 없는 굴욕의 시기가 언제인가는 잘 알고 있다-브레이즈의 마음속에 일깨워진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냉혹하게 버림을 받을 것이다.

"아아, 내가 먼저 마린을 건드릴 수는 없어. 하지만 마린은 나한테 찾아올 거야, 조만간에. 마린은 견딜 수 없이 나를 원하고 있고,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6년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어. 그러니까 앞으로 며칠을 더 기다리지 못할 것도 없지"

자존심이 마린의 얼굴을 들게 했다. 그러고는 필요이상으로 딱 잘라 말했다.

"얼마든지 기다리세요! 당신의 정부가 결국은 어떤 꼴을 당할지 나는 알고 있어요. 잊어버렸나요?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는 것은 천하의 바보나 하는 짓이에요!"

"하지만 마린은 역시 되풀이할 거야"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도대체 남편과 나 말고 남자가 몇 명이나 더 있었지?"

마린은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것을 스스로도 알수 있었다. 경멸에 찬 눈으로 브레이즈를 쏘아보고 의자에 앉아 커피 잔을 들었다.

"당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 아니에요? 내가 언제 그런 질문을 당신에게 했던가요?"

"자유롭다는 말인가?"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브레이즈. 난 그런 일에 흥미없어요. 아무래도 좋아요. 그러니까 제발 귀찮게 굴지 마세요! 나는 이제 집으로 가고 싶어요"

들고 있던 받침접시 위에서 컵이 떨렸다. 마린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면서 컵과 접시를 가만히 테이블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후, 브레이즈가 말했다.

"좋아, 그럼 집에 돌아가기로 하지"

 

9

그날 밤, 호프의 권유에 못 이겨 일찌감치 침실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엘리스가 찾아왔다. 조심스럽게 문을 반쯤 열어 놓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해받지 않기 위해 문을 열어 놓았어. 그런데 몸은 어떤가? 진심으로 묻는 것이니까 아까 여러 사람에게 하듯 건성으로 괜찮다는 말은 하지 말아"

"그래요. 사실을 말하면 두통이 좀 있고, 서 있으면 후들후들 떨려요"

"그 정도면 다행이군. 브레이즈의 말에 따르면, 마린은 최소한 내일 하루를 더 쉬어야 한다고 하더군"

"브레이즈는 책임감 과민증에 걸려 있어요. 나는 오늘 하룻밤만 푹 자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그 폭풍우에 대한 것을 이미 소설에 삽입했나요?"

"아아, 효과 만점이야. 하기야 소설 자체는 거기까지 진행되지 않았어. 아주 바빴으니까. 울타리 수리에 도로 복구, 또 가축의 이동 등....."

"당신이?"

", 내가 다 했지. 마린은 내가 전혀 쓸모없는 줄 알고 있을 테지만, 일단 유사시에는 내 숨은 솜씨가 나타나거든" 그는 빙그레 웃고 나더니 어조를 달리 했다.

"마린도 아주 훌륭했어. 매우 자랑스러워"

"어마, 감사합니다!" 머리가 띵해졌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브레이즈가 더욱 훌륭해요. 그의 상처가 더 심했거든요. 그런데도 그는 병원에서 휴양도 하지 않았어요"

"그 녀석은 무쇠 같은 사나이야. 그리고 빗속을 한시간 이상이나 걸은 것도 아니니까. 자아, 이만 나가 볼까" 엘리스는 조용히 말하고 나서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 그렇군. 그 귀여운 코럴 리가 어제 아침 신경질을 부린 것을 알고 있나?"

"아뇨. 하지만 그녀는 아직 어리니까요"

"아니야, 어엿한 성인이지. 말괄량이인 것뿐이야. 브레이즈에게 알렌 목장까지 바래다 달라고 했지. 브레이즈는 아주 바쁜 일이 있다면서 예의바르게 거절했어. 그러자 폭발한 거지. 마린의 이름도 몇 번이나 나왔다더군"

"어머나, 저런!"

마린은 콩 튀듯 하는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갔다.

"나한테 말해 주지 않겠나? 마린이 처해 있는 상황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어. 아무것도 아니라고 잡아떼면 안 돼. 난 되도록 못 본 체하려고 했지만, 그런데도 브레이즈와 마린 사이의 긴장은 불꽃이 튀는 것 같더군. 우리의 멋쟁이 주인은 초조해 하고 있고, 가정부는 마린이 어서 떠났으면 하고 있어. 그리고 마린은 핼쓱해서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고. 모든 것이 다 내 책임이야. 내가 같이 오자고 마린에게 강요만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세요?"

마린은 엘리스의 배려에 감동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한 것 같아요"

"그런지도 모르지" 엘리스는 마린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리스의 비극처럼 피치 못할 일인지도 모르지. 브레이즈의 친구면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는데-그 친구는 예전부터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녀석이었지.. 마린은 일단 그의 신뢰를 잃었으니까....."

엘리스가 손을 잡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더 이상 자신을 탓할 수는 없었다. 마린은 웃음을 띠고 되도록 생기 있게 말했다.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자신을 저주하는 사나이한테 언제까지나 연연해 있더라도, 그것은 결코 당신의 탓이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만, 우리가 여기 오게 된 것은 내 탓이지. 더구나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이 상황에 흥미를 갖고 있었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고 싶었던 거야. 그러기에 그토록 열심히 마린을 설득했던 것이지. 말썽의 씨를 뿌리는 사나이라 여겨도 할 수 없게 됐어. 나도 내 나름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는 생각되지만, 마린 정도로 심각하진 앟아. 그리고 브레이즈 정도도 아니고. 그 녀석은 불행해......마린, 집에 돌아가고 싶나?"

", 부탁이에요"

"알겠어, 그렇다면" 마린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이 가해졌다. 그 미소는 슬퍼 보였다. "지금은 이미 늦었지만, 사과하겠어. 그리고 두 번 다시 남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겠어"

"당신은 훌륭한 분이에요" 마린은 충동적으로 말하고 엘리스의 뺨에 키스했다.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고 싶지만, 당신은 역시 훌륭한 사람이에요"

"마린은 지나치게 관대해. 그럼 잘 자요" 엘리스는 문으로 걸어가서는 손잡이를 잡고 돌아다보았다. "그 관대한 성품의 얼마만이라도 브레이즈에게 나누어 줄 수는 없을까, 마린? 그는 나보다도 훨씬 더 마린의 너그러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마린은 엘리스의 말에 깜짝 놀라, 그가 나간 뒤에도 닫혀진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너그러움을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나지 브레이즈가 아니다.

브레이즈는 나를 충동질하고 내 약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불행한 관계로 몰아붙이고 있지 않은가, 나뿐만 아니라 나를 증오하고 있는 브레이즈 자신에게 있어서도 저주스러운 관계가 될 뿐인데도.

도대체 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굶주림은 어떻게 된 일일까? 브레이즈의 말 그대로인 것일까? 차라리 다시 한번 애인으로 돌아가 그 굴욕적인 정열을 불태워 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분명히 굴욕임에는 틀림없다. 나를 경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나를 요구하는 자기 자신까지 경멸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다니, 이처럼 수치스런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마린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눈이 아팠다. 그러나 운다고 해서 이 고통스런 생각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노크했어요. 하지만....."호프의 목소리는 거의 다정하다고 해도 좋았다. "의사가 약을 보냈기에 가져왔어요. 여기 물도....."

그렇다면 곧 나가겠군. 마린은 겨우 침착성을 되찾았다. 입술에도 핏기가 없었다. 마린이 약을 다 먹고 나자 호프가 넌지시 물었다.

"조금 전에 엘리스와 이야기 했는데, 곧 떠난다면서요?"

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이즈에게도 오늘 저녁 이야기하겠죠?"

이상하게도 호프의 음성은 불안스럽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불안을 나타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마린은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럴 작정이에요"

"마린, 나는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나는 한번도 당신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진 일은 없어요. 그때 역시도......브레이즈와 마린이 그토록 친한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리고 나...."호프는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자기가 한 일을 분명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브레이즈를 사랑하고 있어요, 친아들인 텔리 이상으로. 그래서 브레이즈가 상처를 입으리라 생각했다면.......나는 자신이 크게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곧 브레이즈에게 이야기했어요. 브레이즈느 마린을 찾아냈지만, 그때는 이미 마린이 결혼한 후였어요. 나는 안도의 숨을 쉬고 마린의 행복을 기원했어요. 브레이즈가 마린의 추억을 살릴 만한 것을 모두 없앤 뒤에는, 브레이즈가 모든 것을 잊었으면 했었죠. 첫사랑의 추억을 완전히 잊어버렸으면 하고 말이에요"

"이제 그만두세요" 마린이 말했다. "모두 끝난 일인걸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내가 필요도 없는데 왜 이런 말을 꺼내겠어요. 브레이즈가 코럴리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에요. 그 이유는 마린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밖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분명한 일인가요?"

"상대가 브레이즈니까" 호프가 억지로 분노를 참고 있다는 것은 금방 알 수있었다.

"브레이즈는 감정을 밖으로 잘 나타내지 않는 사람이지만, 코럴 리가 마음에 들었던 것만은 분명해요. 그렇게 빼어난 미인은 흔치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도리가 없지 않겠어요?" 호프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겨우 냉정을 되찾으며 평소의 어조로 말했다.

"남성에게 있어서 마린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는 내가 여자라서 잘 모르지만, 어쨌든 브레이즈가 거기에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인 것만은 분명해요. 내 눈에도 안 보이는 게 아니에요. 당신들 둘을 보고 있기만 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브레이즈가 결혼하게 되면 나는 판갈레이에 집을 따로 하나 마련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하고 같이 살 염려는 없다는 거예요. 이제 나는 가겠어요. 눈이 피곤해 보이는군요. 지금 내가 마린에게 한 말로 인해 이 집안의 공기가 맑아지면 좋으련만.....잘 자요 마린"

"안녕히 주무세요"

마린은 호프가 나가 버린 뒤에도 문을 응시한 채 피곤한 머리로 지금 들은 이야기의 뜻을 파악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브레이즈는 진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내가 텔리의 애인이자 공범자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일이었다. 어째서일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잠을 자면서도 의식이 계속 그 생각에 매달려 있었는지 해답이 나와 있었다.-브레이즈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내가 폴과 결혼한 사실일 것이다. 어쩌면 임신도 배반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 결혼에 대해서는 모두 안다고 했지만, 내가 유산한 아기가 몇 개월 된 것인지는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아기였다는 사실도 물론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결혼의 불행했던 나날과 비참한 종말의 원인도 알 까닭이 없다. 브레이즈의 눈에는 내가 의혹을 풀려고도 하지 않고 집에서 나가 곧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이 부정을 증명하는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블랙록스에서 도망쳐 나가 폴의 설득으로 결혼해 버린 나는 그때 아직 어린애였다. 폴에게 얼마나 몹쓸 일을 했는지 깨달았을 때에야 비로소 어른이 되었던 것이다.

아마 인생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틴에이저들의 결혼이 그토록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을 쉬면서 마린은 상체를 일으켰다. 베개가 젖어 있었다. 꿈을 꾸면서 울었나 보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지만, 머리가 무겁고 속이 답답한 것도 꿈이 남겨 놓은 흔적이겠지.

마린은 침대에서 나와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가만히 상처 자국을 만져 보았다. 다행히도 회복이 아주 빨랐다. 침대에 앉아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리고 있으려니, 모일 리가 트레이에 아침 식사르 담아가지고 들어왔다. 브레이즈의 지시라는 것이었다.

식사를 끝내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방에서 나와 슬랙스를 입고 엷은 저지 폴로셔츠위에 재킷을 걸쳤다. 머리를 빗은 뒤 좋지 않은 안색을 감추기 위해 평소보다 좀 짙게 화장을 했다.

홀까지 나가 보았다. 집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한 시간쯤 전에 랜드로우버의 소리가 들렸으니까 브레이즈는 외출했을 것이다. 어쩌면 엘리스도 함께 나갔는지 모른다.

주방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모일리는 뜰에 나간 것일까. 마린은 싱크대에 있는 접시를 깨끗이 닦고 사무실로 나갔다.

마린은 일단 자기 책상 앞에 앉으면 정신없이 일에 몰두했다. 최소한 바쁘게 일을 하고 있을 때만은 자신의 걱정거리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처럼 곧 일에 열중해 버렸기 때문에, 브레이즈 사무실과의 사이에 있는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테이프 레코더가 멈춰지고 나서야 그녀는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브레이즈가 마린의 두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입술을 꼭 다물고 있는 것을 보니 무척 화가 나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마린을 흔들면서 거칠게 말했다.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분명히 명령했을 텐데?"

". 하지만 나는 환자가 아니에요. 브레이즈, 제발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렇게는 못 하겠어!" 그는 신음하듯 말하고 마린에게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머리가 뒤로 젖혀져 목이 아팠다. 탐욕스러운 키스가 부드러워지면서, 마침내 감미로운 요구를 해왔다. 마린은 눈을 감고 그만 브레이즈에게 기대고 말았다.

"어쩔 수가 없어. 언제 내게로 오겠나, 마린"

마린은 브레이즈이 머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내려 그의 가슴에 대었다.

"전 당신 것이 될 수 없어요. 나에게 자신을 지키도록 해주세요. 당신은 하마터면 나를 파멸시킬 뻔했어요......두 번 다시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아요."

"이렇게 된 이상 마린도 어쩔 도리가 없어"

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브레이즈는 손을 놓고 그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불타고 있던 눈빛이 사라지자 냉소적인 웃음이 입가에 떠올랐다. 놀라서 뒤로 물러서려던 마린은 발이 얽혀 오히려 브레이즈의 가슴에 쓰러지고 말았다.

"마린은 덫에 걸렸어. 자신도 알고 있을 텐데. 그물에 걸린 새처럼 버둥거리면 버둥거릴수록 점점 더 깊이 휘말리고 마는 거야. 출구는 없어, 마린"

브에이즈의 비꼬는 말에 화가 나서 마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을 옳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더욱 부아가 났다. 이때 원고 한 장이 마루에 떨어졌다. 주워 올리는 한 순간만이라도 브레이즈의 빈정거리는 시선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코럴리는 어떻게 되죠?" 마린은 자신으로서도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랐다.

"코럴 리가 어떻게 되다니?"

마린은 얼굴이 빨개지며 원고를 정리하여 서랍에 넣었다.

"당신은 코럴리를 아내로 맞을 생각이 아니었던가요? 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말인가? " 마치 재미있어하는 듯한 말투였다. "이것 봐. 코럴리는 어린애야. 결국 데이브 애플튼과 결혼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데이브는 코럴 리가 걸어간 땅까지도 떠받드는 형편이니까 말이야!"

"당신이 희롱했다는 것을 코럴리는 알고 있나요?"

브레이즈의 손길이 뻗어와 마린의 목덜미를 만졌다.

"질투하나, 마린? " 마린은 브레이즈의 눈을 쳐다보고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도망치려 했다. 순간 브레이즈의 손이 마린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대답해. 코럴리를 질투하고 있나?"

"아뇨!"

브레이즈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마린은 필사적으로 브레이즈의 욕망에 항복해 버리고 싶어 하는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녀의 귀 밑에 키스하면서 브레이즈는 속삭였다.

"나는 언제나 코럴리를 귀여운 여동생으로 대해 왔어. 만일 코럴 리가 귀여운 음모를 꾸민다 해도 그것은 코럴리의 책임이지 내가 알 바 아니야"

"당신에게는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 모양이군요"

"친절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가끔 잔인해질 필요가 있다는 속담도 모르나? 나는 그 말을 좌우명으로 삼을 생각까지 하고 있어" 그의 입술이 마린의 귓불에 닿고 혀끝이 가만히 귀의 선을 더듬었다. "이제 마린의 자존심도 만족을 느꼈겠지? 하지만 마린도 알고 있을 거야, 아무리 몸부림쳐도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야. 우리 사이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두 사람 모두 그것의 포로가 되어있어. 우리가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그것에 끌리는 대로 끝까지 가보는 거야"

"나는 당신의 단골 애인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마린은 닥 잘라 말하고 브레이즈를 밀치며 고개를 돌렸다. 브레이즈의 미소가 너무나 위험하고 마음을 흐트러 놓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돼야만 해!"

확신에 찬 브레이즈의 어투에 마린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마린의 턱을 잡아당겼다. 순간, 먼 옛날의 브레이즈가 되살아났다-낮에는 오빠, 밤에는 애인이었을 무렵의 그 브레이즈가.

"그리고 착한 아이가 되면 선물도 주겠어"

브레이즈는 홱 등을 돌리고 마치 즐거운 일이라도 있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며 방에서 나가 버렸다. 마린은 브레이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의 손이 닿았던 곳을 만지며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려 했다.

다행히도 저녁 식사 테이블에는 브레이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폭우의 뒤처리를 위해 외출했다는 것이었다. 식사 후에는 말수가 적어진 호프와 함께 한 시간쯤 텔레비전을 보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마음도 몸도 지쳐 있었다. 그러면서도 브레이즈와의 사이에 드디어 클라이맥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떠날 때까지 브레이즈를 가까이하지 않을 의지만은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브레이즈라도 난폭한 짓이야 하지 않겠지. 아니, 설사 난폭하게 나온다 해도 나를 억지로 여기 붙들어 둘수는 없을 테지.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욕제를 듬뿍 뿌렸다. 절망을 씻어 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 시간 후, 욕실에서 나왔다. 그러나 개운해진 것은 그녀의 육체뿐이었다.

천천히 몸을 닦고 실내복을 입었다. 문을 열고 침실로 돌아오자, 브레이즈가 손에 들었던 와인 글래스를 쳐들어 인사를 보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미소를 땐 채 불순한 눈길로 벨루어 실내복 차림의 마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린은 부아가 나서 한 마디 한 마디를 힘주어 말했다.

"어서 나가 주세요!"

브레이즈는 소리 내어 웃고 글래스를 비운 후 잔을 침대 곁의 테이블에 놓았다. 그러고는 태연히 말하는 것이었다.

"미안해.....하지만 몇 가지 우리 사이에 정리할 일이 있어서....."

"이미 다 정리되었어요. 당신은 이제 내게 <도망자>라는 표시만 붙이면 끝나요"

마린은 살금살금 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녀가 손잡이에 손을 대고 저주의 말을 퍼붓자 브레이즈는 히죽 웃었다.

"문은 잠겼어. 그런데 무슨 말이 그렇게 험악하지! 와인으로 입을 깨끗이 하는 것이 좋겠어"

"와인 따위는 필요치 않아요, 브레이즈.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푹 자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어서 나가 주세요"

"싫은걸" 그는 마린이 뒷걸음질 치는 것을 재미있는 듯이 보고 있었다. "떨고 있군 그래. 내가 무서운가, 달링?"

벽에 닿아 움직이지 못하게 된 그녀에게 브레이즈는 천천히 손을 뻗어 마린의 입술을 애무하다가 갑자기 그녀의 실내복을 확 잡아 내렸다.

"마린은 정말 아름다워"

그는 벗은 몸을 감추려는 마린의 손을 제지하면서 말했다.

"마린은 내 것이야. 언제나 내 것이었어. 다른 한 사나이의 손이 마린에게 닿았던 것은 잊어버리게 될 거야."

그는 마린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린을 죽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많은 남자가 있었어요!"

"거짓말이야, 마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엘리스가 어느 날 밤 만취해서 다 털어놓았으니까. 그는 마린이 화려했던 과거를 고백하기 전까지는 마린이 불감증이 아닌가 의심했다더군, 남자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기에 말이야."

"당신은 정말 싫어요!"

"그래?" 그는 마린의 가슴을 애무하며 다시 한번 반복했다.

"마린은 정말 아름다워"

"제발 혼자 있게 해 줘요!" 마린은 분노에 타는 눈으로 노려보면서 몸부림쳤다.

순간, 브레이즈의 팔에 힘이 가해졌다. 실내복이 완전히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표정에는 거친 굶주림만이 있을 뿐이었다. 마린은 그가 두려웠다.

"마린은 내 피 속에 있어" 그는 갑자기 마린을 안아 올려 침대로 가면서 말했다.

"마린은 내 머릿속에도, 마음속에도 있어. 당신은 내 일부야....."

마린은 저항하며 브레이즈를 밀어내려고 했다. 얼굴은 공포와 분노와 아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흐느낌을 참으면서 브레이즈의 어깨를 할퀴고 그를 물어뜯으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침대에 뉘어지고 체중이 실려 오자, 이제는 무릎으로 찰 수조차 없었다. 미소를 띤 브레이즈의 얼굴이 가까이 왔다.

브레이즈는 한 손으로 마린의 양손을 모아 꼭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마린을 죄었다. 마린은 브레이즈의 무게와 그 손의 힘에 눌려서 숨도 쉬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키스도 하지 않은 채, 미친 듯이 날뛰는 마린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마린이 지쳐서 축 늘어지자 그때 비로소 그는 마린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얼굴을 돌린 마린의 뺨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갔다.

마린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브레이즈의 혀끝이 그녀의 귀 뒤를 간질였다. 거칠게 다루리라 각오하고 있었는데, 브레이즈는 욕망의 감미로움을 그녀에게 일깨워 주고 있었다. 마린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애원했다.

"나는 당신을 원치 않아요. 브레이즈, 제발 놓아 주세요!"

"마린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어"

그는 마린의 가슴을 부드럽게 애무하면서 그녀의 공포와 분노를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윽고 정신을 잃을 듯한 관능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토록 익숙해져 있던, 그리고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관능이 브레이즈의 입술이 목으로 내려가 일단 멎었다가 다시 내려가며 가슴 위에서 멎었다. 키스하는 동안에도 그는 마린을 설득하고 있었다-마린은 정말 아름다워,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을 원했는지 몰라, 하면서.

마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은 분노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육체는 그것을 배반하고 있었다. 그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굶주림을 제지할 힘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브레이즈는 그녀를 자극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알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에 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때 입술이 겹쳐지고 조용히 입이 열렸다. 마린은 드디어 브레이즈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폭력이라면 자신을 지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괴롭도록 부드러운 애무 앞에서는 브레이즈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달링!" 브레이즈는 마린의 손목을 놓고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듯이 하며 속삭였다. 마린은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열정과 함께 마린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브레이즈의 셔츠를 열었다. 단추가 두어 개 떨어져 나갔다. 브레이즈는 미소를 띠며 셔츠를 벗어 던졌다.

다시 한번 입술이 겹쳐졌다. 차츰 난폭한 키스로 변해갔다. 브레이즈의 등을 애무하면서, 이번에는 그녀가 속삭였다.

"달링!" 눈을 감았다. 그녀는 키스에 응하고 애무에는 애무로 답했다.

드디어 브레이즈의 딱딱한 가면이 벗겨졌다. 그 역시 열정에 이끌려 자신을 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에는 관능만이 있었다. 마린은 브레이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신음했다. 무엇 하나 잊지 않고 있었다.

"자아, 아니라고 말해 줘" 얼마 후, 브레이즈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린의 꼭 감은 눈에 눈물이 맺히고, 뺨을 따라 흘렀다. "아아, 마린! 귀여운 사람! 울지 마. 지난 6년 동안, 그 길고 괴롭던 세월을 나는 계속 마린을 원하고 있었어. 그런 끝에 마린이 돌아왔는데도, 내가 한 일이라고는 마린을 아프게 한 것뿐이었어. 부탁이야, 울음을 그쳐. 자아......"

"나 자신도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나 브레이즈가 한 말의 뜻이 전해지자 그녀는 울음을 그쳤다. 마린은 꼼짝도 않고 브레이즈의 품안에 누워 있었다. 브레이즈가 다정하게 눈물을 씻어 주었다. 손이 지나간 자리에 입술이 따랐다. 마린은 약간 몸을 떨면서 눈을 꼭 감은 채 외치듯이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알고 있어" 그는 후유 한숨을 쉬며 마린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겹쳤다.

"나도 쭉 마린을 사랑해 왔어"

마린은 놀라서 눈을 떴다. 브레이즈가 미소를 띠고 마린에게 속삭였다.

"느끼지 못했었나, 바보! 21세 생일 때부터였어. 기억해? 마린은 학교가 파하자 서재로 달려와서 내게 섭금류에 관한 책을 선물했었지?"

"기억하고 있어요"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마린의 머리에 떠올랐다. 몇 주일이나 용돈을 절약해서 산 책이지만, 그의 마음에 들지 몰라 얼마나 불안했었는지......제일 좋은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바다처럼 파란 포장지에 빨간 리본을 묶어 그의 서재로 들어갔던 것이다.

포장을 푼 브레이즈가 미소를 띠는 것을 보았을 때, 마음이 놓이며 얼마나 가슴이 드근거렸던가. 생일 축하 키스를 해주지 않겠느냐는 말에 마린은 발끝으로 서서 키스했다. 그것이 마린에게는 첫 키스였다.....

"물론 기억하고 있고말고요" 허스키한 목소리로 반복했다.

"당신은......아주 다정했어요"

"마린이 진지한 얼굴로 키스해 주었을 때 나는 깨달았어, 마린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마린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을 보고 브레이즈는 씁쓸히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마린은 나를 그 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지, 그것이 나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전혀 모르고 말이야. 나는 마린이 20세가 되기를 기다려 결혼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마린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바다에 나간 채 소식이 없었어. 처음에는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지, 마린을 집에 있게 하면 아무도 접근해 오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사실은 마린을 기숙학교에 보냈어야 했어. 마린은 내게 너무나 매력적이고 유혹적이었거든. 그 뒤에 일어난 일은 피치 못할 일이었어. 나는 자신을 억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지만, 처음으로 마린이 내게 안겼을 때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어. 너무나 마린을 원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젊다는 것은 탐욕을 의미하니까"

가벼운 키스가 목덜미를 지나 귀로 올라왔다. 마린은 한숨을 쉬었다. 말을 할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나는 누가 알건 상관없었지만, 마린을 위해 우리의 정사가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했던 거야. 아무도 마린을 색안경으로 바라보게 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나중에 가서야 마린에게 정정 당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어......"

"정정 당당하지 못했다니?"

"그래!"

브레이즈가 다정하게 키스했다. 그러나 마린이 나직이 신음하며 껴안자, 그는 마린을 떼어놓고 벌떡 일어섰다. 벌거벗은 몸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테이블로 가서 두 개의 잔에 와인을 따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 끝까지 이야기할 수 없잖아"

장난처럼 말하고는 마린에게 글래스를 건넸다.

"마린처럼 불가사의한 눈은 본 일이 없어. 끌어안고 키스하면 언제나 눈을 감았었지. 하지만 곧 빨려들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어. 나는 그 눈동자 속에 빠져 버릴 것만 같았지" 그는 마린의 얼굴이 빨래지는 것을 보면서 와인을 마셨다. 갑자기 어투가 거칠어졌다.

"나는 마린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어.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야. 그러면서 믿고 있었지---마린도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나만큼 강렬한 감정은 품고 있지 않다고. 마린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거의 육체적인 것이었어. 그밖에는 어린애적인 영웅 숭배뿐이고"

"그렇지 않아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그때 내가 어렸다는 것은 인정해요. 하지만 당신은 내게 있어서 모든 것이었어요......그러기에 당신이 텔리의 말을 믿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던 거예요"

"아아" 그는 냉혹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만약 마린의 사랑에 좀 더 내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절대로 텔리의 말 따위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을 거야. 잘못한 것은 전적으로 나였지만,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어. 마린에게 키스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어, 아직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어린애를 유혹한 셈이니까. 그리고 마린이 마치 성숙한 여인처럼 내게 몸을 맡길 때는, 마린의 사랑이 거의 육체적인 것뿐이지 않을까 하는 내 의혹이 한층 짙어지곤 했지"

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이즈의 기분을 잘 알수 있을 것 같았다.

"호프에게 들었는데,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에게 이야기했다면서요? 그게 언제인가요, 브레이즈?"

"마린이 집에서 나간 지 열흘쯤 후일 거야. 마린이 원한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호프에게는 호프 나름으로 까닭이 있었겠지.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란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거든. 내가 미칠 듯이 날뛰는 것을 보고는 호프도 마린과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어. 그때는 이미 텔 리가 사라진 후라 찾아내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지. 하지만 결국 힘으로 진실을 토해 내게 만들었지"

"브레이즈......어쩌면 그토록 잔인한 일을!"

", 했지. 그러나 때리면서 큰 기쁨을 맛보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야"

소름끼칠 듯이 냉혹한 어투에 마린은 움츠러들며 와인을 마셨다.

"그런 무서운 말을!"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마린을 찾았지. 겨우 찾고 보니 마린은 이미 결혼한 뒤였어.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임신까지 하고 있었지"

브레이즈는 침대 곁의 테이블에 글래스를 놓고 마린에게 다가와 잔을 받아 들었다. 표정이 얼어붙어 있어서 그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알았지, 마린이 얼마나 경박한 여자인지를"

비웃음으로 입이 일그러졌다.

"탐정에게 마린을 찾아 달라고 부탁하기를 잘했어. 만일 내가 직접 찾았더라면 그때 마린을 죽여 버렸을 거야"

"브레이즈......"

브레이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린은 두려웠다. 고뇌에 찬 브레이즈는 분노로 아플 정도로 팔을 붙들었는데도 마린은 뿌리칠 기력조차 없었다. 브레이즈의 아픔은 그녀 자신의 아픔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아......그게 무슨 말이에요! 폴과 결혼한 것은 아기가 생긴 후의 일이었어요. 당신의 아이였어요. 나는 절망한 끝이었기 때문에.....폴이 도와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무서운 순간이었다. 브레이즈의 몸이 고뇌로 뒤틀렸다. 무어라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그는 침대 옆에 꿇어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어째서 나는 그걸 깨닫지 못했을까?"

"이제 그만하세요" 마린이 브레이즈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계속했다.

"달링, 이제 그만하세요. 다 지나간 일이에요"

브레이즈는 마린 옆으로 와서 그녀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그러자, 브레이즈의 떨림이 멎기를 기다려 마린은 브레이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폴은 겨우 20세였어요. 노력은 했어요. 하지만 소용없었어요. 내가 폴에게 안기면서도 당신만 생각했으니까요.....내가 폴을 죽인 거예요. 내 손으로 권총을 쏜 것과 다름없어요. 폴은 자신을 증오하고 나를 미워했어요. 원만하지 못한 것은 내 탓이었으니까요"

"이제 그만!" 고통스런 목소리였다.

"달링, 이제 그만해. 부탁이야, 제발 그만둬"

"끝까지 이야기해야겠어요. 최소한 폴을 위해서도 당신은 알아 둬야 해요. 폴은 질투심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고, 나는 폴이 가까이 올 때마다 당신을 생각한다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어요. 꼭 한 번 폴이 나를 때렸어요. 나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아기를 유산하고 말았어요. 폴은 내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 때까지 병원에서 기다리다가 곧장 차를 달려 강물에 뛰어들었던 거예요. 만일 내가 폴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그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예요. 이제 아시겠죠, 내가 그를 죽였다는 것을"

"그렇다면 마린은 그때 이후 계속 죄의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군 그래? 하지만 마린이 죽인 것은 아니야, 달링. 그는 자살했으니까.......그리고 마린이 평생 그 일로 자기 자신을 벌하기를 그가 원한다고 생각하나?"

마린은 폴의 모습을 떠올렸다.----웃는 얼굴을, 익살스런 자신감을, 어색한 상냥함을. 아니, 폴은 내가 그러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자살은 폴 자신의 의사였다, 이런 쪽지까지 남기고 갔으니까---생명은 생명으로 보상하겠다.

"아니, 그렇지는 않지만 나 자신이 나를 용서할 수 없어요. 내 사랑을 모두 당신에게 바쳤다는 것을 알면서도 폴과 결혼했기 때문이에요. 모든 잘못은 나한테 있어요."

"우리는 용서하는 것을 배워야 해" 브레이즈가 다정하게 키스했다. 그러나 강한 소유욕이 깃들여 있어, 마린은 황망히 한숨을 쉬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말을 이었다.

"아아, 얼마나 마린을 만나고 싶었는지 몰라. 마린 없이도 살 수는 있었겠지만, 마린이 없는 인생은 지루한 음악과도 같았어"

"그런 말을 누가 믿을 줄 아세요? " 마린은 그에게 안겨 농담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고 생각했다.

"당신에게는 블랙록스와, 멋진 여자가 한 다스나 있었는걸요"

"한 다스라고? 소피와 그런 어리석은 정사에 빠진 것도 사실은 나 자신에게 마린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였어. 그밖에 여자는 없어. 마린뿐이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린뿐이었어. 그때 마린은 이런 어린애에게 흥미를 느끼다니 부자연스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어렸어......"

"잘 알겠어요, 나도 그렇게 느꼈으니까요"

"마린이 16세가 되었을 때 결혼했어야 하는 것이었어. 그러면 이런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여기서 나갈 때만 해도 나는 아직 어린애였어요.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렸어요"

"그러면 지금은 어때? 절차를 밟으려면 사흘쯤 걸리겠지만......그런 뒤에는 결혼해 주겠지?"

"물론이에요"

"그러면 두 번 다시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겠지?"

"결코 도망치지 않아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걸요. 당신도 내게서 떠나지 못하게 하겠어요"

대답 대신에 격정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뒤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정다움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