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드루는 서독의 오베르안메르가우의 와인바에서 멍청히 고블릿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아버지는 핵융합 회의의 캐나다 대표단을 마중하러 나가 있었다.
그녀는 추잉검을 씹으면서, 한 달 전의 어느 날 피버디 목사일행들과 함께 해방되던 날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대단한 소동이었다――카메라 세례와 인터뷰, 그리고 사진을 겉들인 톱기사. 다행히도 롤프와 같이 있었다는 것은 표면화 되지 않았다. 다른 승객들이 자기 이야기에만 열중했던 탓인지, 또는 미국 정부의 배려에서였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다행스런 일이었다.
결혼한 사실도 공표되지 않았다. 이것이 밝혀지면 롤프의 망명이 위태롭게 된다. 다만, 결혼 신고서를 서베를린의 미국 대사관에 제출한 뒤, 그녀는 피버디 일가와 함께 워싱턴으로 돌아와 국가 보안 최고 위원회에서 증언을 했다.
위원회가 끝난 후 장관인 존 스탠디시와의 대화가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매우 걱정하면서, 정부의 대표로서 특히 배려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특별한 언질을 준 것은 아니었다.
드루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장관이 한 말을 생각해 보았다.
"미세스 에아하르트," 장관은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말을 계속했다. "당신의 증언과 결혼 신고서, 이것으로 에아하르트 박사를 망명시킬 조건은 다 갖춘 셈입니다." 드루는 약간 마음을 놓았다. 장관이 말을 이었다. "박사는 결혼함으로써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일반 시민에 비해 상당히 위험성이 높습니다."
드루가 당황해서 물었다.
장관은 펜을 놓고 검은 레더 의자의 망명을 자발적으로 시인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에 따라 심한 방해 공작이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드루는 고개를 저으며 상대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어……잘 모르겠군요. 제가 떠나기 전날 밤 그가 한 이야기에 따르면, 당국이 망명 의사를 안다고 해도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어요, 감시의 눈은 심해지겠지만." 드루는 고개를 들어 장관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장관의 혈색 좋은 얼굴에 슬픈 표정이 떠올랐다.
"부인, 그것은 남편께서 부인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한 말입니다."
드루의 고동이 빨라졌다. 베를린의 장벽 근처에서 본 꽃다발이 눈에 떠올랐다――망명 실패!
실패!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드루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비로소 롤프의 안전이 현실 문제로서 걱정되기 시작했다.
장관은 드루의 안색을 깨닫고 얼른 입을 열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국가 기밀이기 때문에 자세한 말은 할 수 없지만, 한마디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동독에도 아주 우수한 우리 활동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는 신임이 두터운 분이므로 그 신임을 교묘히 이용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장관은 드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계속했다. "약속하겠습니다, 당국에서는 극히 신중히 행동할 것입니다."
드루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그만 냉정을 잃었었군요……자신의 일만 생각하다가……."
장관이 드루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미세스 에아하르트……드루씨, 의사의 말같이 될는지 모릅니다마는, 최악의 사태가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고는 용기를 북돋우려는 듯 말을 이었다. "실제로는……망명에 성공한 확률이 더 높습니다."
드루는 머리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 있으면……곧 연락해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빠른 시일 안에 연락이 가리라곤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는 드루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큰 책상으로 돌아갔다. "이런 일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고 두 분의 결혼은 국무성의 비밀 사항이 될 것입니다." 장관이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부친께는 말씀드렸겠지만, 그것만은 예외입니다." 그 표정은 동정적이었다.
"아니, 말하지 않았어요." 드루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문득, 생각에 잠긴 갈색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롤프가……무사하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롤프의 이름을 입 밖에 낸 것은, 열차에서 그와 사랑을 나눈 아침 이래 처음이었다. 그때의 일이 생각나서 드루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것은 당신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장관은 드루의 손을 잡고 문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당국에서는 가능한 한 신중하게 행동하겠습니다."
드루는 피로한 미소를 띠고 거듭 감사의 말을 하면서 장관실을 나왔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드루는 위원회 석상에서 <흥정>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꺼림칙했다. 그러나 사실을 이야기해야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다. 정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결혼한 사실> 뿐이다. 어떻게 맺어졌는가 하는 상황은 아니다.
아버지한테 이야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것은 서류를 제출하기 전에 결심한 일로서, 롤프가 무사히 탈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즉시 국무성을 통해 이혼 절차를 밟아 되도록 빨리 이 결혼에 종지부를 직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한 달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4월 17일, 드루는 아버지를 따라 서독에 왔다. 오베르안메르가우에서의 회의는 오늘 저녁 만찬회 때 정식으로 개회가 선언된다. 망명할 경우에는 이 회의를 이용하겠다고 그는 말했었다. 이 회의! 만일 두 사람이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드루는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깊이 한숨을 쉬었다. 롤프의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 국무성에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다.
찌르는 듯한 감각이 목덜미에 느껴졌다. 긴장감과 기대감이 뒤섞인 기묘한 느낌으로 드루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렸다. 그녀는 갑자기 갈증을 느끼고 침을 삼켰다. 설마…….
"여어, 미세스 에아하르트." 속삭이는 듯한 그 저음, 깃털처럼 부드러운 그 말이, 작열하는 사막에 울리는 우레와 같이 드루의 가슴에 퍼져 나갔다. 남편이다! 빛나는 눈동자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
"롤프!" 드루의 목구멍 속 깊은 곳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다. 그가 여기에 있다니! 그토록 걱정했는데, 그가 지금 자유의 몸으로 여기에 있다. 약간 여위었고 눈 밑에는 희미한 그늘이 져 있었다. 깜짝 놀랄 만한 그의 모습――짙은 회색 레더 재킷과 터틀넥의 스웨터가 넓은 어깨를 감싸고, 연한 갈색 바지가 군살이 없는 허리와 긴 다리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롤프는 그녀 옆에 걸터앉으면서 농담처럼 말했다.
"괜찮을까요, 방해해도?"
그가 옆에 오자 드루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동독에서의 일주일, 결혼, 그리고 롤프의 격렬한 애무――지난 한 달 동안 드루는 이 모든 것을 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모습을 눈앞에 대하고 애타게 그리던 바리톤 목소리를 듣자, 모든 기억이 달콤한 추억과 함께 단번에 되살아났다.
"네, 네……좋아요, 롤프." 상기된 목소리였다. 롤프는 자기 이름이 불려지자 표정을 부드럽게 하고 빙긋 웃었다. 드루가 당황하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신 것은 몰랐어요."
롤프의 갈색 눈과 잿빛 눈동자가 시선을 교환했다.
"음, 장관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
"어째서죠?"
그는 긴 손가락을 턱에 대고 대답했다.
"드루가 여기 오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직접 알리고 싶어서였지."
드루의 뺨이 붉어졌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무척 걱정했어요."
"정말?" 롤프가 입을 다물고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드루는 천천히 숨을 쉬고 얼굴을 들었다.
"얼마나 됐나요, 자유를 얻은 지가?"
롤프가 우울하게 어깨를 떨구었다.
"약 24시간."
드루는 그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었다.
"고생이 많았죠?"
롤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기로 하지." 그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결론을 내렸다.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어. 이제 모든 것은 끝났어."
그 말에는 결정적인 힘이 있었다. 자유를 위해 어떤 시련을 겪었는지 그의 입을 통해서는 들을 수 없다. 말하지 않는 이유가 개인적인 것인지 공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더 이상 알려고 해도 소용없는 것은 분명했다.
롤프가 침묵을 깨뜨렸다.
"드루?"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직 미세스 에아하르트인 채로 있나?"
드루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녀는 롤프에게서 시선을 떼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저어……도저히 이혼할 수 없었어요……당신의 무사함을 확인하기 전엔."
롤프가 끄덕였다. 그러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감사해."
드루는 그 진지한 목소리에 놀라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무언가가 번쩍 빛났다. 드루는 숨이 막힐 듯했다. 뜨거운 것이 가슴으로 솟구쳤다. 그러나 이것을 입 밖에 낼 수는 없다……여기에는 이목이 있다. 언젠가 진실한 마음을 고백해야지. 중요한 것은 시간과 장소다. 그에게 고백해야지, 이혼은 하기 싫다고? 롤프만 좋다면 언제까지나 미세스 에아하르트로 있고 싶다.
지금 다시 만나고 보니 더 이상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롤프를 사랑하고 있다!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안전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무사한 지금, 그의 안전에 대한 안도감 이상의 것이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포근함――두 사람의 결합은 진실한 것이었다. 일 개월쯤 떨어져 있는 동안에 더욱 굳게 결합된 것이다. 그동안 늘 생각나는 것은, 두 사람이 같이 지낸 시간, 그리고 롤프의 자상한 보살핌뿐이었다. 사랑의 교환 또한 자기도 바라던 것이었다. 협박으로 결혼했다는 생각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다. 롤프는 남편이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금 소중한 것은 그것뿐이다.
이 생각을 롤프에게 전하고 싶었다. 자기가 여자라는 것에 눈뜨게 하고 소중한 것을 가르쳐 준 그에게 감사의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런 용기가 생길 것인가?
강하고 따뜻한 손이 드루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깜짝 놀라 자신으로 돌아왔다.
"흥정은 이제 끝났어. 이제부터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거야." 드루의 가슴이 기대로 부풀었다. 그도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 고백을 하려는 것일까? 그러나 롤프의 표정으로는 알아낼 수 없었다. 그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드루를 내게 묶어 둘 수 없어. 두 사람이 부부여야 할 필요도 없어졌다. 과거의 쓰라렸던 일은 잊고, 앞으로는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 드루는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쓰라렸던 일이라고? 롤프의 얼굴이 흐려져 보였다. 드루는 눈물에 젖은 시선을 떨구고 곱게 다듬은 자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롤프는 아직도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난 드루의 부친과 가까이에서 근무하게 될 거야."
따뜻한 롤프의 손이 천국에서 지옥의 불길로 변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롤프가 그런 말을 하다니……그의 마음에는 결코 사랑이 깃들어 있지 않다! 드루는 눈을 감고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친구! 기대에 어긋난 무감각한 말이었다. 이제 롤프는 단순히 사업적인 관계자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것은 드루에게 있어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드루는 용기를 내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은소리로 말했다.
"친구요?"
롤프가 의아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이 이상한가, 친구라는 말이?"
드루는 얼른 머리를 흔들며 눈물에 젖은 시선을 떨구었다.
"아니에요." 가슴이 죄어들었다. "당신의 영어는 완벽해요, 그런 뜻으로 말했어요." 드루가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 밖에 낸 말은 의외일 정도로 냉정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일하시게 된다면 나도 가능한 한……협력하겠어요." 총기 없는 눈으로 그녀는 다시 한번 롤프의 얼굴을 보았다. 마음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드루는 자기 속에 있는 사랑에 작별을 고했다. 이것이 그의 희망인 것이다……. 자존심 때문에 진실한 마음을 입 밖에 내어 말할 수는 없었다. 사실은 작별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죽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었다. 강제로 결혼당한 것보다 이별이 더욱 가슴 아팠다. 드루의 쉰 목소리가 떨렸다. "박사님, 친구가 되자는 말은 하지 마세요."
말이 끊기고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계속 되었다. 마침내 롤프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도 메말라 있었다.
"음, 그렇군." 꼭 쥔 주먹이 차차 핏기를 잃어 갔다. "약속대로 이혼 절차는 드루에게 맡기겠어." 드루는 흐느낌을 참으며 그의 주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친구가 되자는 말만은 그녀가 거절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분노하는 것일까?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런 생각만으로는 그의 행동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얼른 롤프를 바라보았다.
"나는 도르프시트라세 48번지에 묵고 있어."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어떨까……친구로서……저녁전에 한 잔 하는 것이." 드루는 그이 싸늘한 말투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대답은 짐작할 수 있어. 그러니 이제 됐어." 롤프는 주머니에서 몇 장의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 대신 여기 있는 와인은 내가 사겠어."
드루는 아니에요, 하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가 성큼성큼 나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드루는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었다. 화려한 바가 생기 없는 장소로 변했다. 피곤에 지쳐 허무감만이 남았다. '음, 그렇군. 약속대로 이혼 절차는 드루에게 맡기겠어.' 드루는 그의 말을 생각하면서 멍하니 와인 글라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바보같이 생각되었다.
그에게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아름다운 사랑의 말? 히스테릭한 웃음이 치솟았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난 것은 엷은 웃음일 뿐이었다.
사랑! 아니다……결코 사랑이 아니다! 롤프 에아하르트의 속셈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자유의 몸이 된 지금, 그는 과거의 여자들에게서처럼 드루에게서도 바라는 것은 전혀 없다! 그녀는 긴 빨강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수치스런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드루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아아, 어째서 그가 이토록? 사나이란 모두 자기중심적이고 매정한 것인데, 어째서 난 그럴 모르는 것일까? 어서 여기서 나가 산산이 부서진 꿈의 파편을 혼자 부여안고 싶다. 드루가 이렇게 생각하고 마지막 와인의 한모금을 마셨을 때, 그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평생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또 보고 싶지도 않았던――사나이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금발에 키가 크고 미남형인 얼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은 바로 제임즈 폴라드였다! 롤프보다는 약간 키가 작고 살이 쪘으며 살갗은 훨씬 더 희다. 녹색 무늬 상의에 녹색 바지를 스포티하게 입고, 평소에 자랑하던 보조개를 지으며 웃고 있었다.
"여어, 오랜만이군!" 옛날 그대로의 허물없는 말투. 드루가 빈 글라스를 테이블에 놓자, 그는 조금 전까지 롤프가 있던 의자에 앉았다. "혼자야?" 짐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혼자 마시는 것은 위험한 징조야. 옛날에 드루가 내게 한 말이지."
드루는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고 짐의 푸른 눈을 쏘아보았다.
"여기에 올 줄은 몰랐어요." 그 목소리는 침착하고도 냉정했다.
짐이 빈정대듯 눈썹을 꿈틀했다.
"잊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근무하는 곳은 <과학 공학 매거진>이야. 우리가 만난 것도 시카고에서 열린 핵융합 회의를 취재할 때였어."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드루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미리 연락을 하려 했지만, 반갑게 맞아 주지 않을 것이 뻔하기에."
드루는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드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천천히 열을 세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정말 생각지도 않았어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그러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겠지, 드루는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사람이니까, 팬 레터도 써야 할 테고. 나와 헤어진 후 크게 출세했더군!"
드루는 크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당신과 헤어졌으니 그때보다 더 나빠졌을 리는 없지 않겠어요――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이미 그 소동은 끝났어요. 끝난 일은 잊는 것이 제일이에요."
"그렇군." 짐이 윙크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나 같으면 가능한 한 이 기회를 이용하겠어." 드루는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여전하군, 30이나 되었는데 마치 어린아이 같아. "유감이지만 이제 가야겠어, 오후의 파티를 취재해야 하니까." 그는 흘끗 드루를 쳐다보았다. "드루는?"
회의를 위해 빈 아로이스랭그 호텔에서의 대표단 환영 파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드루는 어떻게든 도망칠 방법을 생각하려 했다. 처음에는 참석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짐과 롤프가 모두 참석할 것 같으니 꽁무니를 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나는 안 가요."
짐이 금발을 가로저었다.
"유감이군. 하지만 앞으로 2주일 동안 같이 있을 시간은 충분히 있어." 짐은 어깨 너머로 내뱉듯이 말하고 사라졌다.
드루는 입술을 깨물었다. 회의 기간 동안 짐을 피해야 한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더구나 롤프도 같이 있다. 롤프는 회의 기간 동안 계속 여기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는 이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니까.
드루는 이마에 손을 얹고 입을 꼭 다물었다. 잠시 동안 그녀는 마음이 산란했으나,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납덩이같이 무거운 발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마을의 아름다운 오솔길을 몇 시간이나 헤매고 있었다. 남의 눈에는 단순한 산책 정도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롤프의 엄숙한 얼굴이 떠오르고, 그것이 흰 살결의 심술궂은 짐의 얼굴로 변했다……그랬다가 다시 롤프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 누구를 생각해도 드루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도망친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짐은 여전히, 두 사람 사이가 끝났다고 생각하려 하진 않을 것이다. 더구나 드루가 여기에 온 것은, 아버지를 보조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취재 때문이기도 하다.
드루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여섯시가 가까웠다. 만찬회 준비가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꼭 참석해야 한다. 소녀처럼 언제까지나 문제를 회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싸늘한 롤프, 지긋지긋한 짐. 성인으로서 현실에 직면해야 한다. 짐에 대해서는 잘 설득해야지. 그런 다음에는 열심히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 그보다, 당장 해야 할 일은 핵융합 회의의 개막 만찬회에 참석하는 것이다.
드루는 한숨을 쉬면서, 아버지와 같이 투숙하고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갔다. 물방울 무늬의 다운 재킷을 벗고 중앙의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고는 열쇠걸이에서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그녀는 멈칫했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짐!" 드루가 깜짝놀라 외쳤다. "어떻게 여기?" 잘 닦여진 바닥에 다운재킷이 떨어졌다.
짐이, 하이볼이 가득찬 글라스를 손에 들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무의식중에 드루는 뒷걸음질 쳐서 문에 등을 기대고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자신 있는 듯한 짐의 웃음.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잖아." 그가 글라스를 쳐들었다. "한잔해야지, 귀여운 당신을 위해서." 그는 경대 위에 있는 반쯤 빈 병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늦었지만."
드루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주정뱅이의 헛소리에 대항하여 거칠게 말했다.
"짐! 어떻게 내 방을 알아냈죠?"
짐이 씽긋 웃었다.
"제임즈 폴라드씨가 그 아내의 열쇠를 입수하는 건 손쉬운 일이지. 일 때문에 나만 늦게 도착했다고 설명했지."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계속했다. "내 아내라고 숙박계에 기재한 것은 오랜만의 굿 뉴스야."
드루는, 이대로 문에 등을 대고 있다가는 움직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얼른 방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세요!" 하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짐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 어리석어? 패스포트를 일년씩이나 그대로 두고서 말이야. 입으로는 두 사람 사이가 끝났다고 하면서." 그는 징그럽게 윙크했다. "드루의 행동, 아니 행동하지 않은 것 자체가 이야기하고 있어, 내게 돌아오고 싶어 한다는 것을."
드루는 어이가 없어 눈을 감았다. 그의 자기 도취는 구제할 길이 없다.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에 패스포트에 대한 것은 깡그리 잊고 있었다. 그래서 옛날 이름으로 여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 이름 덕택으로 아무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꼭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가 해방된 뒤에도 패스포트는 갱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짐을 위해서가 아니다! 미세스 롤프 에아하르트가 된 마당에, 정식으로 드루 매켄너로 돌아가는 것이 왠지 망설여졌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잘 알 수 있었다. 사실은 패스포트도 <미세스 롤프 에아하르트>라고 변경하고 싶었던 것이다. 롤프와의 결혼을 진실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에서 롤프와 재회했을 때부터 그것은 한 조각 환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결코 미세스 롤프 에아하르트는 될 수 없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짐은 아직도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앞으로 2주일 동안에 서로를 좀 더 잘 알게 될 거야. 어떤가, 제2의 허니문이?" 그는 마지막 말을 강조하면서 드루의 뺨에 손을 내밀었다.
그는 취했다. 드루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다. 목소리가 커지고, 또 어김없이 비정상적인 자기 도취에 빠진다! 그녀는 몸을 긴장시키고 짐의 손에서 도망쳤다.
"짐……." 그녀는 신중히 말을 선택했다. "이걸 알아야해요. 우리는……아무 관계도 없어요. 끝났어요. 부부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잘못 알고 있군." 그의 싸늘한 말투에 드루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무척 참았지, 아내가 도망쳤는데도." 이렇게 말하고 짐은 꿀꺽 술을 한 모금 삼켰다. "이혼계까지 내다니!" 울부짖듯 말하고 그는 깨끗한 융단에 술을 뿌렸다. "하지만 그런 종이쪽지 하나로 내게서 도망쳤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 그는 술을 비우고 나서 글라스를 경대에 내던졌다. 얼음이 큰 소리를 내며 경대 위에 굴렀다. 드루는 더욱 간담이 서늘해졌다. "당신은 내 것이야, 드루."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 "앞으로도 계속 내 것이야." 이렇게 중얼거리며 드루의 팔을 붙들었다. 조금 전까지 글라스를 들고 있던 그의 손이 싸늘했다.
"안 돼요!" 드루는 겁먹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고는 두 손을 펴 짐의 넓은 가슴에 대고 탄원했다. "놓으세요! 이러면 안 돼요!"
짐의 입술이 일그러지면서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제기랄!" 그가 거칠게 말했다. "깨닫게 해주겠어, 내 것이란 것을 ……잊어버리지 못하게 하겠어!"
"짐……안 돼요!" 짐의 손이 사정없이 드루의 팔에 파고들었다. "나는 당신의 것이 아니에요. 지금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드루는 갑자기 비틀거렸다. 따귀를 맞은 것이다.
"닥쳐, 이것아!" 흉포한 짐의 눈동자. 드루는 다시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또 구타를 당했다. 그녀는 말도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입술을 핥으니 찝찔한 것이 느껴졌다. 순간 머리가 명료해졌다. 그녀는 황망히 문 쪽을 보았다.――도망칠 길은 저곳뿐! 짐은 미쳐 날뛰고 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생각했다.――도망쳐야지, 어서! 소름이 끼칠 만큼 조용한 방. 불안이 온몸을 꿰뚫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목이 탔다. 가장 불리한 것은 발이 움직이지 않는 일이었다. 도망치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엄청난 공포로 손발이 마비되었다. 머리가 몽롱하여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머리채를 힘껏 휘어잡는 바람에 그의 싱글벙글하는 얼굴이 보였다. 짐이 내뱉듯이 말했다. "내 말을 잘 들어." 술 냄새가 풍겼다. "당신은 내것이야! 나를 공경하고 내게 복종하겠다고 맹세했을 때 내것이 됐어." 악마와 같은 형상, 그날 밤과 같은 얼굴, 멍투성이가 되어 목숨을 걸고 도망쳤던 그날 밤과 같은. 지금도 역시 그의 손안에 있다. 짐은 또다시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신의 피고 공포로 얼어붙었다. 짐은 광란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혼계, 그런 종이쪽이 뭐야? 그것은 당신한테나 필요하겠지……내게는 그 따위 것은 소용없어!" 한손으로 그녀의 팔을 비틀고 자기 얼굴 쪽으로 그녀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비웃는 듯한 짐의 표정. "그렇게 싸늘하게 굴지 말아." 몸이 비틀리고, 희게 드러난 그녀의 가슴을 짐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뜨겁게 해주지."
가슴이 후끈거리고 비틀어진 목이 아팠다.
"짐……" 드루는 외치면서 눈을 감았다. "당신은 병들었어요. 이런 짓은……비정상이에요."
그말도 짐의 고함소리로 지워져 버렸다.
"닥쳐!" 그러면서 두꺼운 입술을 밀어붙였다. 시큼하고 거친 입맞춤. 드루는 토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짐은 머리채를 감아쥔 채 미친 듯이 입술을 탐했다. 드루는 절망에 빠져 그만 짐의 따귀를 갈겼다. 갑자기 그가 입술을 놓아주었다. 무서운 눈동자. "거칠게 다루기를 원하나?" 그는 입을 일그러뜨리고 드루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화려한 퀼팅 베드 커버, 그 위에 드루는 내던져졌다. 곧 짐의 육체가 무겁게 짓눌렀다. 숨이 막혔다.
"안 돼요……짐……이러면 안 돼요!" 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드루는 혐오감으로 몸을 떨었다. 입술을 깨물면서 목을 세차게 가로저었다. 머리는 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 순간 침대 곁의 테이블에 있는 묵직한 크리스탈 재떨이가 눈에 띄었다. 드루는 얼른 그것을 집어 들었다. 짐은 신음소리를 질렀다. 처음 것은 욕망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것은 공포와 놀람 때문이었다. 크리스탈 둔기가 그의 머리를 내리쳤던 것이다.
짐은 드루의 몸 위에서 축 늘어졌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충격으로 몸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재떨이가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드루는 엎어진 짐을 필사적으로 밀어내고 겨우 땀내 나는 몸 밑에서 기어 나왔다. 그리고 힘없이 침대 옆에 섰다. 겁에 질려, 짐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보았다. 기절한 것뿐이었다.
짐이 신음소리를 냈다. 드루는 깜짝 놀라 손을 놓았다. 그가 의식을 회복했을 때 곁에 있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옷매무시를 고치고 방에서 뛰어나왔다. 그러고는 단숨에 계단을 내려가 로비로 나와 인기척 없는 거실을 빠져나갔다. 거기에는 고풍스런 돌난로가 벌겋게 피어오르고 있고, 몇몇 학자 그룹이 난로 주위에 모여 앉아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뛰어든 드루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싸늘한 초봄의 밤에 코트도 입지 않고 달려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호기심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9
도르프시트라세 48번지.
드루는 몸을 움츠리고, 싸늘한 손으로 드러난 팔을 문질렀다. 살을 에는 듯한 냉기……. 갑자기 그녀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정신없이 짐에게서 도망쳐 나왔다. 짐에게 상처입은 육체가 본능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짐에게 상처입은 육체가 본능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기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 새삼스럽게 깨닫고는 아연해졌다. 도르프시트라세 48번지――롤프가 있는 곳이었다.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인가. 언뜻 들었을 뿐인 주소에 생명을 걸고 찾아왔던 것이다!
아름다운 바이에른풍의 시골집. 그 앞의 길에 드루는 몸을 떨면서 서 있었다. 작은 종루가 있는 판자 지붕 위에는 같은 간격으로 돌이 올려 놓여 있었다.
이층에는 발코니가 있는데, 두 군데의 출입문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집 정면에는, 1,2층 모두 여섯 개씩의 창문이 있는데, 셔터가 열려 있어 안이 잘 들여다 보였다. 아래층은 불이 켜져 있고, 이층에도 세 개의 창문에서 불빛이 내비치고 있었다. 롤프는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드루는 스스로 화가 났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는 분명히 말했었다, 이제 아무 관계도 없다고……친구로서의 관계를 제외한다면. 왜 그것을 모르는 것일까? 드루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것인가? 입술을 떨면서, 왜 아버지한테 가지 않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럴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몇 번이나 그것을 실감했다.
학자로서의 매켄너 박사는 더할 나위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대인관계에서는 영점이다. 드루는 씁쓸히 웃었다. 아버지를 탓할 수는 없다, 그는 학자로서 훌륭한 사람이니까. 아버지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정상급인 물리학자로서의 아버지가 그것을 보충해 주고 있다. 드루로서도 아버지의 업적은 자랑스러웠다.
안 된다. 이런 일로 아버지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다. 그러나 드루에게는 누군가가 필요했다……짐의 병적인 소유욕에 대한 그녀의 공포를 이해하고 도와 줄 사람……때로는 지켜 줄 사람이.
이곳 경찰에게는 부탁할 수 없다. 이런 스캔들이 드러나면 회의 그 자체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미국 대표단도 곤경에 빠진다. 문득 다음과 같은 신문의 표제가 머리에 떠올랐다.
<폭행 미수, 피해자는 유부녀. 인질이 되었던 여성, 회의 개최 중에!>
짐의 고용주에게 알리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2주일만 넘기고 로스아라모스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짐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본래 난폭자는 아니다……나한테만 예외지.
그러나 지금 당장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가? 드루는 걸음을 멈추고, 호텔로 되돌아가는 것을 주저했다. 짐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어디로? 언제까지나 여기에 서 있을 수만은 없다. 드루는 깊이 한숨을 쉬고 롤프의 집에서 등을 돌렸다.
"드루?"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드루는 몸이 굳어지고 숨이 막혔다.
마치 꿈을 꾸는 듯 멍하니 돌아서서 집 쪽을 보았다. 열어 젖힌 문에 롤프가 서 있었다. 의아해 하는 듯한 표정, 넓은 어깨와 균형을 이루기라도 하려는 듯 두 다리를 크게 벌리고 있었다. 턱시도우 바지가 잘쏙한 허리와 잘 발달한 미끈한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흰 셔츠의 가슴에는 가느다란 플리츠가 들어있고 가슴팍이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짙은 털로 인해 그는 더욱 늠름해 보였다.
"드루?" 롤프는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부르더니 포치를 가로질러 성큼성큼 다가왔다. 드루의 어깨에 그의 손이 닿았다. "마음이 내켰나, 한잔하겠다고?"
드루는 당황했다.
"한잔? 아아……아니에요, 다른 일로. 하지만 내가……착각했어요." 드루는 상대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에서 눈을 돌렸다. "실례하겠어요."
롤프는 손을 놓지 않았다.
"몸이 차군. 코트는?"
적당한 거짓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드루는 고개를 돌린 채 힘없이 어깨를 떨구었다.
"들어가지."
깨닫고 보니, 드루는 롤프에게 끌리듯 걷고 있었다.
"싫어요, 롤프. 돌아가겠어요."
소박한 거실로 들어가자 롤프는 그녀를 흑갈색 가죽 소파로 데려갔다. 눈앞에서 난롯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롤프가 조용히 말했다.
"앉아."
드루는 멍청히 입을 벌린 채 걸터앉았다. 롤프가 소파 위에 있던 디너 재킷을 집어 그녀의 가냘픈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러고는 난로 곁의 캐비닛으로 가더니, 안에서 얼음이 든 아이스박스와 술병을 꺼내 왔다.
"마침 무엇을 좀 마실까 하던 참이었지."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롤프가 말했다. "드루도 좀 마시도록 해."
드루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짐에 대한 공포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술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네, 아무것이라도."
롤프가 빙긋 웃었다.
"정말인가? 나는 토마토 주스야, 드루는 다른 것이 마시고 싶을 텐데?"
"토마토 주스도 좋아요. 정말이에요."
이윽고 그가 흰 냅킨으로 싼 긴 글라스를 가져왔다. 놀랍게도 글라스에는 셀러리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멋과 분위기를 살린 자상한 마음이 엿보였다.
드루가 고맙게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롤프는 긴 다리를 꺾듯이 하고 옆에 앉아 드루의 등에 팔을 돌렸다. 난롯불과는 또다른 온기가 몸에 전해왔다.
그는 잠자코 드루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까 그대로 돌아가려 했지?"
드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지 않으려고 얼른 글라스를 입에 가져갔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찢어진 아랫입술에 주스가 묻어 쓰라렸다. 그가 상처를 알아 차리지 않았을까? 그녀는 롤프를 쳐다보았다. 그는 드루의 손을 보고 있었다.
드루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롤프는 내 마음을 읽으려고 저렇게 잠자코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롤프가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오후에 무슨 일이 있었나?"
드루는 글라스를 쥐고 떨고 있는 손끝에 눈을 떨구었다.
"롤프 돌아가겠어요. 그리고 오늘의 일은 서로 잊기로 해요."
갑자기 그가 드루의 손에서 글라스를 빼앗았다. 그것을 자기 글라스와 함께 대리석 테이블에 놓았다. 롤프의 몸이 가까이 왔을 때 드루는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 그이 목을 안고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아니, 그것이 아니다, 사랑해 주었으면 싶다, 영원히. 그의 아내로서!
롤프가 고쳐 앉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 드루는 깊은 상실감을 맛보았다.
"자아, 말해 줘." 단호한 그의 어조였다. 롤프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왜 여기 왔지?"
롤프는 분명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드루는 난롯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디까지 이야기하면 만족할 것인가, 부끄러운 이야기를 어디까지. 안 돼! 드루는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나는……오고 싶었어요……부탁이 있어서." 그러고는 고개를 떨군 채 얼른 말했다. "돌아가려 한것은……마음이 변했기 때문이에요. 상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마지막 말은 꺼질듯했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와, 그리고 가끔 가다 장작이 타는 소리뿐이었다.
롤프가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가시가 돋친 듯 싶은 말이었다.
"그래, 그 부탁이란?"
"이제 됐어요." 드루는 어떻게든 속이려 했다.
"드루," 그는 약간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틀림없이 겁에 질린 채 밤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을 거야. 그대로 돌아가선 안 돼.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바로 곁에 있었다. 그 억센 넓적다리가 그녀의 허리에 닿았다. 드루는 갑자기 숨이 가빠져서 제대로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서로의 간격을 좀 더 넓혔다. 그러고는 재킷을 벗어, 지금까지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에 놓았다. 드루는 한숨을 쉬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짐이 왔어요."
롤프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짐?"
드루는 가슴이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짐이 누구인지조차 그는 기억하고 있지 않다! 롤프에게는 개가 그토록 하찮은 존재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고백하면 그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경찰에 부탁하는 방법도 있다. 그렇다면 사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정신없이 이리로 달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시선을 캐비닛 쪽으로 향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말했다.
"그는 내 전남편이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물리학자인가?"
드루는 고개를 저었다.
"잡지사 기자예요. 그가 취재하러 올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드루는 캐비닛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술병, 아이스박스, 글라스.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바에서 헤어진 뒤 다른 여성을 초대한 것이 아닐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당연하지! 하지만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처음부터 그럴 약속이었는데. 내가 이러쿵저러쿵할 처지가 아니다. 드루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나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것이다.
"아아, 이런!" 드루는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모깃소리만 하게 말했다. "잊어 주세요. 내가 여기 오는 것이 아니었어요!" 드루는 문을 향해 달려갔다.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는다. 아무리 짐이 무섭더라도 이 사람에게 매달릴 수는 없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지 싫어하는 롤프에게 부탁하다니, 그것은 굴욕이야!
드루의 손이 손잡이를 잡았다. 가볍게 돌리니 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 바로 눈앞은 어두운 밤거리였다.
롤프는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고 만류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갈 것인가? 무언가가 그녀의 걸음을 제지했다.
결국 드루는 나가지 못했다. 싸움은 승자 없이 끝나고 말았다. 문이 찰칵 소리를 내고 닫혔다. 그녀는 이마를 문에 댔다.
"실은 이런 부탁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처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해요."
"무슨 일이지?" 귓전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롤프가 소리도 없이 곁에 와 있었다.
드루는 떨면서 한숨을 쉬었다.
"짐이 나를 도로 데려가려 하고 있어요."
부드러운 그녀의 손을 만지면서 롤프가 말했다.
"알겠어. 동독에서의 일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말이지?" 그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런 말을 퍼뜨릴 정도로 입이 가벼운 사람인 줄 알았나?"
드루는 놀랐다. 입막음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으로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꿈에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롤프를 향하여 눈을 부릅떴다.
"아니에요!" 그러고는 롤프에게서 떨러져 문에 기대었다. "아니에요……그 반대란 말이에요!"
롤프가 똑바로 섰다. 그의 어두운 얼굴에 놀라는 표정이 떠오르고 입이 약간 일그러졌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 주겠나?"
드루는 숨을 죽이고 그의 턱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동자를 보면 매료되고 만다……셔츠 사이로 드러난 우람한 가슴은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냉정을 잃게 한다. 드루는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는……짐은 믿지 않아요……끝났다는 것을. 싫다고 해도 막무가내예요……무섭고 두려워요."
롤프가 두 손으로 드루의 얼굴을 감싸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가 이를 악물자 턱의 근육이 꿈틀 움직였다. 롤프는 부어오른 입술에 가만히 손을 대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
"이것은 그놈이 한 짓인가?"
드루는 머리를 들고 눈을 빛내며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롤프가 입술의 상처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못된 놈!"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 "나쁜 자식!"
드루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롤프의 격렬한 반응에 그녀는 당황했다. "그래, 아버지는? 이런 당신을 보고 무어라 하셨어?"
"……말하지 않았어요. 이야기할 수 없어요." 롤프의 무서운 얼굴을 보고 드루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음." 롤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내가 아버지였다면 그놈을 죽여 버렸을 거야!……경찰에는 알리지 않을 생각이겠지?"
"네……. 체포되는 걸 바라지는 않아요. 그가 폭력만 휘두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드디어 진심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그에게 약한 면을 보인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괴로워하는 드루의 모습을 본 롤프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내게 무엇을?"
드루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단순한 내 희망이지만……당신이 연극을 해준다면……" 말이 막혔다. '나를 사랑하는 체하면'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말을 바꾸었다. "결혼했다는 연극이 계속된다면." 그러고는 말을 덧붙였다. "외의 기간 중에만이라도 짐이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면, 그도 단념할 것 같아요." 여기서 드루는 입을 다물었다. 롤프가 싫다고 할지도 모른다. 롤프가 싫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때를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해 두려고 생각했다.
"연극?" 의아해하는 목소리였다. "결코 연극이 아니야, 사실이니까, 적어도 현재로서는. 드루도 방금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드루가 고개를 돌리고 대답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일 내가 결혼했다는 것을 짐이 안다면……."
"하지만 실제가 그런걸." 침착한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드루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어때서 더 이상 말하게 만들려는 것일까.
"너무 조롱하지 마세요, 알고 있으면서도." 부아가 난 덕분에 말이 잘 나왔다. "2주일 동안만……행복한 듯이 보이면 돼요……그것뿐이에요. 그것을 부탁하러 왔어요! 2주일 동안만 행복한 부부, 그것을 들어줄 수 없을까요?"
롤프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
"갑자기 입장이 바뀐 셈이군, 이번에는 드루가 이 결혼을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전남편으로부터 도망쳐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그렇지?"
드루도 그 아이러니를 비로소 깨닫고 망연히 롤프를 쳐다보았다.
"네……그래요. 그 힘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롤프가 시니컬하게 웃었다.
"그렇군."
드루는 새파랗게 질렸다.
"그럼, 안 되나요?"
롤프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표정이 진지해졌다. "부탁하지 않아도 힘이 되어 주겠어, 기꺼이 결혼을 공표하겠어. 그 정도의 빚은 졌으니까……기차에서의 사건도 있고……."
드루는 숨을 죽이고 롤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롤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게는 관계가 있어. 그러기에 도움을 주려고 하는 거야."
갑자기 드루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지금까지 그것을 얼마나 바랐던 것인가. 이유는 어떻든, 롤프가 도와 주겠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창백해진 드루의 얼굴을 보고 롤프가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녀를 소파에 뉘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짐을 가지로 보내야지."
드루는 깜짝 놀랐다.
"지금 곧?"
롤프는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곁에 있는 수화기를 들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드루를 보았다.
"지금밖에 기회는 없어. 오늘 밤에 결혼을 공표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비밀에 붙이느냐 양자 택일을 해야해. 회의는 오늘 밤에 정식으로 개회돼. 그때 망명에 대한 것도 발표하겠어." 재촉하듯이 그는 말을 이었다. "오늘 밤부터 나는 매스컴의 좋은 밥이 될 거야. 그러니 내일이나 다음 주에 갑자기 드루가 내 아내로 등장할 수는 없지." 수화기를 든 채 롤프가 말했다.
"자아, 마음을 정해요. 도움이 필요한지 어떤지."
드루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보고 롤프는 곧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게스트하우스에 연락해서 드루의 짐을 가져오게 하고, 다음에는 이층에 있는 욕실을 쓰라고 드루에게 명했다.
한 시간 후, 드루는 경대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 검은 속눈썹과 커다란 잿빛 눈, 풍부하게 어깨에 늘어진 빨강머리와 투명한 듯한 살갗. 그 살갗이 진주빛 블라우스와 타프타 롱스커트에 비쳐 보이고 있다.
상처 입은 입술에 산호빛 연지를 칠했다. 상처 자국이 감춰져 보이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이어링과 한 세트로 된 진주 목걸이를 걸려고 했다. 이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그녀는 깜짝 놀라 목걸이를 떨어뜨렸다. 허리를 굽혀 주으려 했을 때 롤프가 들어왔다.
롤프는 얼른 목걸이를 주워 드루의 목에 걸어 주고 가볍게 어깨를 짚었다.
"모두 와 있어. 준비를 되었나?"
드루가 쳐다보았다. 롤프의 강렬한 인사, 압도될 듯한 넓은 어깨, 검은 벨벳의 턱시도우 차림. 흰 셔츠에 검정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가까이서 그를 보기가 괴로웠다――드루는 이토록 그에게 이끌리는데, 롤프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떨구었다.
어깨에 닿은 롤프의 손이 엷은 옷을 통해 불덩이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드루는 그때의 애무가 상기되어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여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네, 준비되었어요." 그러고는 롤프의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어떤 사람을 만나죠?" 진심으로 그런 것이 궁금한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롤프의 말도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소개하겠어." 주저하는 드루를 보고 롤프가 조롱하듯 말했다. "괜찮아. 지난번에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처럼 연기를 멋지게 해내지 않았어?" 드루는 깜짝 놀라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는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윙크했다. "당신은 틀림없이……내 아내처럼 보일 거야."
아래층에서 방향을 바꾸어 거실 쪽으로 향했다. 순간 드루는 걸음을 멈췄다. 세 사람의 눈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중키의 은발 신사가 검은 예복을 입고 서 있었다. 그 옆에는 검정색 울 드레스를 입은 자그마한 여성. 그들은 틀림없이 부부인 듯싶었다. 드루의 시선은 또 하나의 여성에게 빨려 들어갔다. 서로의 시선이 불꽃을 튀겼다. 그 격렬함에 드루는 한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몸속의 피가 질투로 얼어붙었다――라이벌에 대한 본능적인 직감. 키가 크고 매력적인 여성은 오늘 밤 롤프의 손님이었던 것이다.
드루는 마음이 무거웠다. 눈앞에 있는 금발 미인. 긴 머리를 프랑스식으로 묶고 푸른 눈은 투명한 듯했으며 콧날도 오똑했다. 빨간 입술을 곱게 열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나, 그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다.
매혹적인 육체를 자랑하듯, 금빛 술이 있는 대담한 이브닝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난로 앞에서 빛을 발하듯 서 있었다.
드루는 불안스럽게 입술을 적시고 롤프를 흘끗 쳐다보았다. 아내와 연인이 같은 방에 있는데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냉정해 보였다.
소개가 시작되었다.
"소개하죠……." 롤프가 막 입을 열었을 때 벨이 울렸다.
그 순간 드루는, 늦게 온 이 손님이 금발 여성의 상대자였으면 하고 원했다. 그러나 입구에 나타난 사람은 그녀의 남편도 에스코트 역할의 남성도 아니었다.
"아버지!"
그 목소리에 아버지도 깜짝 놀라는 모양이었다. 매켄너 박사의 얼굴에서는 당황의 빛이 사라지고 만면에 웃음이 떠올랐다.
"어떻게 네가……." 드루의 싸늘한 손을 박사가 두손으로 감쌌다. "그랬었군, 이리 오라고 이상한 메모를 보낸 것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껄껄 웃었다. "방에 없는 것을 보고 곧 깨달았어야 하는 것인데.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드루가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에 롤프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그것은 제가 한 일입니다."
박사는 이마를 찌푸리고, 내민 손을 잡았다.
"어?" 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만난 일이……."
"처음 뵙습니다. 롤프 에아하르트입니다."
아버지가 눈을 빛내고 자세를 바로하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뭣이? 에아하르트 박사? 하지만……그런……그 사람은……."
롤프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틀림없는 에아하르트입니다." 그러고는 일동을 둘러보았다. "박사님, 여러분을 소개하겠습니다." 매켄너 박사가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시슬베르트 할트무트 박사와 그 부인이신 크리스텔 여사." 두 사람이 웃자 롤프는 말을 이었다. "할트무트 박사께선 이번 회의의 의장을 맡으신, 뮌헨 대학의 핵물리학부 부장이십니다."
"그러세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매켄너 박사가 빙긋 웃고 대답하자 할트무트 박사도 그 말에 사의를 표했다.
나머지 한 사람에게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롤프가 난로 앞에 있는 여성을 소개했다.
"이분은 이르카 마르카스 씨, 할트무트 박사님의 조수입니다."
드루는 실망했다.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모임에 일부러 조수가 얼굴을 내밀 까닭이 없는 것이다.
드루는 얼이 빠져, 그 미인 조수에게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다. 다만, 롤프가 허리에 팔을 감았을 때에야 비로소 이르카 마르카스의 얼굴에서 그에게로 시선을 향했을 뿐이었다.
"여러분," 롤프가 드루의 잿빛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소개하겠습니다. 드루 매켄너……에아하르트, 제 아내입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척 긴 시간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길어도,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해도 좋았다. 롤프가 포근히 끌어않아 주었다. 따스한 그 눈동자, 그 눈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뭐, 아내!"
매켄너 박사의 놀라는 소리에 제정신이 든 일동은 각각 축복의 말을 했다. 다만 이르카 마르카스만이 긴장해서 손에 들었던 담배를 난로 속에 집어던졌다.
매켄너 박사가 딸의 어깨를 잡았다. 그 얼굴에 가려 이르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 딸이 롤프 에아하르트 박사의 아내라고?" 놀라면서도, 마치 오랜 꿈이 이루어졌다는 듯이 아버지는 기뻐하고 있었다.
드루는 흥분한 아버지를 보고 부끄러운 듯이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드루를 가만히 껴안았다.
"하지만 너는 언제, 어떻게?" 대답을 듣기 전에 딸에게서 몸을 떼고 롤프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에아하르트 박사, 그러니까……." 그는 롤프의 손을 잡고 열심히 아래위로 흔들었다.
롤프가 빙그레 웃었다. 기뻐하는 아버지 얼굴을 보니 그 역시 유쾌한 모양이었다.
드루는 문득, 자기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는 일시적인 결혼이란 말을 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한다, 짐에 대한 것을 포함해서.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사실을 이야기하면 아버지는 틀림없이 기절할 것이다. 중요한 강연을 앞두고 있는 지금인데, 외딸인 내가 몸을 지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다른 사나이와 산다는,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이대로가 나을 것이다. 다만 이 회의 기간 동안만이라도.
연장자인 할트무트 박사가 약간 미안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에아하르트 박사, 그리고 마르카스양, 두 분에게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인에게도. 비록 몰랐다고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드루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 호스트 상대역을 하는 것이 내 역할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기침을 하면서, 좀 떨어져 있는 이르카 마르카스에게 하얀 머리를 돌렸다.
이르카는 고개를 떨구면서 가볍게 웃었다. 그러고는 할트무트 박사 쪽으로 향하기 전에 흘끗 드루를 바라보았다. 얼음같이 싸늘한 그 푸른 눈.
이르카는 방향을 돌려 롤프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롤프의 망명을 사전에 안 것만으로도 영광이에요."
"망명!" 매켄너 박사의 안색이 변했다. "그랬었군. 결혼 이야기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그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르카가 말을 가로챘다.
"롤프, 당신의 계획을 알고 싶군요. 할트무트 박사님의 대학에서 근무할 건가요?" 의미 있는 웃음을 띠었다. "나도 거기서 돕고 싶어요."
드루는 두 손을 모았다. 너무도 노골적인 유혹이다. 돕는다고! 그녀는 허둥지둥 롤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그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롤프 역시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할트무트 박사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나로서도 더 바랄 것이 없지만……"
롤프가 그 말을 막았다.
"감사합니다마는, 제 전공은 교육이 아니라 연구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는 드루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만일 매켄너 박사께서만 허락하신다면 로스아라모스의 연구진에 끼고 싶습니다만."
매켄너 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요?" 그러면서 손뼉을 쳤다. "설마 박사가……만일 그렇다면 영광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할트무트 박사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결코 무리한 이야기는 아니죠."
이르카의 웃음은 패배자의 그것이 아니라 시니컬한 조소였다.
"그래요, 무리가 아니에요……결혼과 망명, 그리고 신부의 고명하신 부친과의 공동 연구. 실로 흥미진진한 인연이에요." 그 얼굴은 곱게 손질한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드루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롤프가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어요. 그런 일로 방해는 하지 않겠어요.
할트무트 박사가 기침을 하면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것을 신호로 롤프가 입을 열었다.
"자아, 가시지요. 제 목적은 여러분을 지각시키려는데 있지 않습니다. 매켄너 박사님에게 미리 결혼 사실을 알리려고 한 것뿐입니다."
"정말 고맙군," 매켄너 박사가 딸을 흘끗 바라보고 말했다. "아버지로서의 알 권리를 인정해 주어서." 박사는 말을 이었다. "에아하르트 박사, 그런데 어떻게 이런……?"
롤프가 웃으면서 친근감있게 장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곧 모든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저를 롤프라 불러 주십시오."
일동은 출구로 향했다. 매켄너 박사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들뜬 마음으로 이르카 마르카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할트무트 박사의 차로 아로이스랭그 호텔로 향했다. 드루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분이 좋은 듯했다. 남이 보기에는 행복스러워 보였지만, 머릿속은 롤프와 금발 미인이 나눈 그 의미 있는 듯한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10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넓은 홀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몹시 불쾌해 보이는 제임즈 폴라드의 얼굴이었다. 두드러져 보이는 이마의 거즈. 만찬회가 계속되는 동안 그가 계속 뒤에 서서 지켜보고 있어서, 드루는 모처럼의 성찬에도 전혀 식욕이 없었다.
"녀석이 있군 그래?" 롤프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의 말에, 드루는 저도 모르게 롤프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네?" 가느다란 목소리. 짐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롤프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보기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저놈인 것 같아." 농담처럼 그가 말했다. "미스터 폴라드를 도와 주는 것이 순서인 것 같군."
드루는 시선을 돌렸다.
"농담 마세요."
롤프가 그녀의 턱에 손을 대고 그 시선을 붙잡았다.
"미안해. 드루의 말이 옳아." 다정한 그의 눈동자,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위험한 유혹. 롤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눈이 빛나고 있었다. "문득 내가 드루에게 맞았던 일이 생각나는군." 낮고 굵은 목소리로 그가 웃었다.
드루는 어쩔 줄 몰라했다. 아스피린 병으로 롤프를 때렸던 동독에서의 일을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졌다.
이때 할트무트 박사가 연단에 서서 정숙을 요구했다.
환영사에 이어 물리학자들을 소개했다. 박수가 그치자 할트무트 박사는 더욱 열기 띤 음성으로, 바로 곁에 있는 커플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드루, 그리고 롤프.
드디어 시작되었다. 전세계를 향해, 롤프의 망명과 그와 매켄너 박사 영애와의 결혼이 발표되었던 것이다.
폭탄이 떨어진 듯한 소동이 일었다. 기자들이 덤벼들어 취재를 시작했다. 이 회의는 당초 매스컴 관계자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내용이 되었다.
드루와 롤프는 세찬 질문 공세를 받았다. 만남에서부터 결혼까지 경위는? 어떻게 망명했는가? 롤프의 장차 계획은?
거의 롤프가 혼자 대답했다. 루프트한자기의 강제 착륙, 심문 과정에서의 만남, 피버디씨 일가에게 협력 요청, 이러한 사실들을 그는 냉정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도중에서 약간 각색해서, 드루가 스스로 결혼에 응했다는 것, 식은 롤프의 자택에서 비밀리에 행했다는 것 등을 이야기했다.
마침내 두려워하던 질문이 나왔다――더구나 그 짐의 입에서.
"박사! 지금 말했듯이 결혼이 망명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면, 이젠 이혼해야 할 게 아닙니까?" 짐의 날카로운 시선이 드루를 꿰뚫어 보았다.
순간 장내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드루는 가슴이 마구 뛰어 제대로 숨도 쉴 수 없었다.
롤프는 질문자의 인물됨을 평가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죠." 그러고는 드루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일기 관계로 출발이 늦어지는 바람에 잠시 같이 살게 되었죠. 그 동안 나는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롤프는 짐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반대로 질문하는 형식을 취했다. "만일 당신 자신이 이토록 훌륭한 여성을 아내로 맞을 찬스가 생겼다면, 과연 그녀를 놓아주겠습니까?"
뜻하지 않은 반격에 짐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새로운 질문이 계속 터져 나왔다. 드루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롤프의 마지막 말이 계속 메아리치고 있었다.
드루는 롤프의 예리한 옆얼굴에 눈을 돌렸다. 능숙한 영어에 임기응변적인 말솜씨! 롤프는 짐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두 번 다시 드루에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결정타를 먹이고 있다.
드루는 저도 모르게 방긋 웃고 떨리는 손을 그의 손에 겹쳤다.
"고마와요."
그러나 롤프는 드루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약간 끄덕였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만찬회가 끝난 뒤에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드루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데 대한 감격이 아니라, 집요하게 달라붙는 짐의 타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축하의 말을 하는 인파를 헤치고 접근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롤프는 드루의 손을 잡고 교묘히 다른 그룹으로 이동하곤 했다.
참석자 2백명 전원으로부터 각각 축복의 건배를 받은 것 같았다――그 중에는 한 사람이 두 번 이상 축배를 들자고 한 사람도 여러 명 있었다. 이윽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드루는 지나치게 마신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샴페인만 마셨기 때문에 기분이 언짢고 몸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더욱 불쾌한 것은, 이르카 마르카스가 항상 롤프 가까이에 있는 일이었다. 드루는 할트무트 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눈은 롤프에게 접근하는 이르카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이르카가 롤프의 귓전에 입을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는 몸을 굽혀 독일어로 나직이 말했다. 이르카가 소리내어 웃었다. 즐거운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로.
드루는 질투를 느끼고 애써 할트무트 부인의 말에만 신경을 집중시키려 했다.
이때 갑자기 이르카가 드루 곁으로 왔다. 그녀는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드루, 나한테도 축하의 말을 하게 해주세요." 이르카는 드루의 왼손에 시선을 보냈다. "반지를 보고 싶군요. 미국에서는 왼손에 낀다죠?" 그러면서 이번에는 오른손에 눈길을 보냈다. 겹쳐지는 두 여자의 눈과 눈. 이르카는 깜짝 놀란 듯이 일부러 눈썹을 꿈틀했다. "어마, 반지가 없군요!"
드루는 숨을 죽였다. 왜 이다지도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일까? 롤프와 아까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이 결혼은 연극이라고 그가 말했을까? 머뭇거리며 드루가 대답했다.
"우리는……그러니까 롤프가 시간이 없어서……."
이르카가 말을 가로막았다.
"좋아요,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니까요." 다시 눈길이 마주쳤다. 얼음같이 차가운 눈에 짓궂은 눈빛. "아마 롤프도 곧 생각할 거예요. 그는 중요한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이르카는 홱 등을 돌리고, 마치 드루를 따돌리듯 할트무트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드루는 목덜미로 손을 가져가, 롤프가 반지 대신 준 목걸이를 만졌다. 곧 이르카의 뒤를 쫓아가 그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서……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드루는 천천히 손을 떼었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 이르카의 말이 옳다. 이 목걸이도 롤프가 사랑의 징표로 준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형식적인 것일 뿐. 이르카와 다투어 보아야 결국은 자기만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드루는 떨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온몸의 힘이 빠지고 머리가 무거웠다. 그녀는 롤프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 동양인과 이야기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동양인이 드루를 깨닫고 정중히 인사했다.
롤프가 의아하다는 듯이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피곤해 보이는군."
"롤프?" 입술에 전혀 감각이 없었다. 드루는 입에 힘을 주며 말했다. "좀 앉으면 안 될까요? 약간……이상해요."
롤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드루를 바라보았다.
"돌아가고 싶은가?"
드루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어지러운 머리를 끄덕였다.
"네, 괜찮을까요? 저어……피곤해서요."
"그럴테지." 롤프가 가만히 웃었다.
드루는 그 묘한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싶었다.
롤프의 인사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드루는 롤프의 부축을 받으며 문밖으로 나왔다. 주위에는 온통 기분 좋고 즐거운 사람들과 따뜻한 축하의 말뿐이었다. 현기증이 심했다. 드루는 애써 명랑하게 웃으며 때때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겨우 밖으로 나와 단둘이 되었다.
롤프가 택시를 잡고, 떨고 있는 드루의 몸을 끌어당겼다. 팔의 온기가 따스했다. 그는 운전사에게 행선지를 말하고 드루 쪽으로 돌아앉았다.
"연극에 만족하나?"
드루는 주저했다. 이르카 마르카스가 무슨 말을 했을까? 그러나 머리가 어지러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렇다, 짐까지도 우리말을 믿는 것 같았다. 감사해야지……드루는 고개를 들고 한숨을 쉬었다.
"네……훌륭했어요."
예기치 않은 따뜻한 말에 그는 놀란 표정으로 빙긋웃었다.
"샴페인과 같은 정도로?"
드루도 마침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방긋 웃고 그의 팔에 몸을 맡겼다.
"네……하지만 달라요."
"응?" 롤프가 물었다. "어떻게 다르지?"
"저어……." 그녀는 혀끝으로 입술을 축이고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를 움직이려 했다. 어째서 오늘 밤은 이토록 머리 회전이 둔한 것일까. "저어……롤프 에아하르트……박사는 천재예요……말솜씨도 능란해요……그 덕택에……내가 안전한 것 같아요……." 외등 밑을 차가 빠져나왔을 때, 롤프가 입은 코트의 놋쇠 단추가 눈에 띄었다. 드루는 그 단추를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샴페인은……." 그 짜릿한 맛을 생각하면서 드루는 혼자 웃었다. 평소 알콜을 마시는 일은 없었다. 예외는 짐과 결혼식을 올리던 때뿐이었다. 그러나 그 후론 더욱 마실 생각이 없었다. 짐이 매일 같이 술을 마시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은 다르다. "아니, 행복해요……샴페인 덕분에."
순간 침묵이 흘렀다.
"좋은 결혼을 하면 더 행복해지지." 롤프가 말했다.
드루는 갑자기 속이 탔다.
"싫어요!" 외치고 나서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연애에 대한 설교 따위는 이제 싫어요!"
롤프의 몸이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도 드루는 태연했다. 남의 일처럼 말하다니 너무했어. 아무리 도와 주었다 해도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어.
드루는 취한 머리를 풀 가동하면서 대담하게 웃음을 띠었다. 그가 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해줄 테야! 나는 여자야, 그리고 그 역시 결국은 남자이고! 이렇게 생각하자 소리내어 웃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편했다. 여자로서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롤프지만…….
그렇다, 그에게서 배운 것을 이용해서 그를 좀 골탕을 먹여야지. 집에 돌아가면 싸늘하게 내쫓고 말 테다. 맛을 좀 보여 줘야지!
조심해야 해――어딘가 먼 곳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곧 그 소리도 사라졌다. 복수해야지! 드루는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버림받는 고통을 롤프도 약간은 당해 보아야 한다!
드루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어……우리는 부부예요." 그러면서 롤프의 귀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갔다. "행복하게 해주세요."
"드루?" 롤프가 작은 소리로 불렀다.
"쉿!" 그녀가 꾸짖듯 제지했다. "나는 지금 바빠요!" 드루는 대담하게도 롤프의 우람한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롤프가 갑자기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떨고 있다……정말? 이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드루는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 도착한 것일까?
"이제 다 왔어." 묘하게도 쉰 목소리였다.
드루는 고개를 흔들며 싫다는 듯이 신음했다.
"싫어요……아직 내리고 싶지 않아요……." 롤프의 체온을 잃지 않으려고 드루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좀 더 앉아 있기로 해요……아주 편안해요."
그의 조용한 음성.
"편안하기는 하지만 남이 보고 있어."
드루는 몽롱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으응……." 롤프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곁에 있다. 그의 목을 꼭 붙들고 있다. 뺨에 와닿는 그의 따스한 입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가 무슨 말을 했던가?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드루는 그의 캐시미어 코트에 몸을 기대고 만족한 듯 크게 숨을 쉬었다.
멍하고 어두웠다. 천천히 의식이 되살아났다. 품에는 아무것도 없다. 왜? 손에 닿는 것은 청결한 린네르 시트뿐이었다. 침대속이다. 어째서 이런 곳에?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롤프가 없다는 것이다.
낮게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가버렸어……그는 언제나 가버리곤 하는 거야!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그는 약간 힘이 되어주었을 뿐이다. 빚이 있다고 그는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드루는 힘없이 자신을 타일렀다. 한번 손에 넣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드루는 몸을 움직여 배를 깔고 엎드렸다. 눈물이 시트에 떨어졌다. 하다 못 해 그가 관심만이라도 보여 주었으면……. 드루는 눈을 감았다. 다시 한번 잠들고 싶었다, 잠들어 있는 동안만은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부드럽고 뜨거운 손끝이 등에 느껴졌다, 드루는 그 꿈속의 환상에 나른한 쾌감을 느끼면서 몸을 뒤쳤다. 마침내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쌌다. 드루는 그 큰손을 자기 손으로 감싸고, 등뒤에 있는 사나이에게 몸을 기대었다. 그가 있다……관자놀이에 와 닿는 입김의 명주와 같은 느낌.
아직도 그는 나를 사랑해 주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헛되이 지나치지 말아야지……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지난 한 달 동안 드루는, 롤프가 침실로 돌아와 격렬히 애무해 주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었다. 그러나 그런 꿈은 번번이 언제나 중도에서 깨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꿈에서 깨고 나면 언제나 안타깝고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지금까지는 꿈과 싸워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현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 밤만은 이 꿈과 끝까지 싸우겠다. 그리고 이번에만은 현실을 떠나 그의 냉담함을 잊고 말겠어. 그렇다! 오늘 밤엔 롤프와 함께 꿈속에서 어디까지나 날아가야지.
드루는 눈을 꼭 감고 환상의 연인을 어둠 속에 용해시켰다.
육체를 꿰뚫는 듯한,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감각, 꿈이라기에는 너무도 격렬하고 너무도 현실적인 것이었다. 샴페인에 취하여 머리가 돈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노곤한 정적. 드루는 환상의 연인의 품안에서 이상할 정도로 만족을 느끼고……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드루는 침대의 온기 속에서 눈을 떴다. 밝은 햇빛이 발코니의 창을 통해 가득히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가벼운 두통에 드루는 얼굴을 찌푸렸다.
위를 보고 누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열시였다. 조찬회가 끝날 시간이었다. 왜 출석하지 않았는지 아버지가 걱정할지도 모른다.
얼른 일어나서 침대끝으로 발을 내민 순가, 드루는 깜짝 놀랐다. 자신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것이다. 어지러운 머리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넓고 긴 침대는, 헤드보드에 멋진 나무 조각의 장식이 되어 있었다. 정면 벽에는 큰 독일제 장롱이 두 짝 놓여 있는데, 그리고, 두 장롱 사이에는, 고풍스럽게 장식된 거울이 달린 경대가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드루는 거울 속의 자기를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떠져 있고 창백한 석고상처럼 몸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러나 몸에 비친 아침 햇빛이 빨강머리를 금빛으로 빛나게 해서, 마치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주연 배우처럼 그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이때 계단을 올라오는 부츠 소리가 들렸다. 드루는 깜짝 놀라, 문이 열렸을 때 저도 모르게 시트로 가슴을 가렸다.
"잘 잤나, 내 아내?" 그는 침대 옆에 서서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드루를 혼자 둘 생각은 아니었어. 하지만 급한 일이 생겨서."
드루는 입속이 깔깔했다.
"혼자 둬요……나를?" 침을 삼켰다. 더 이상 듣기가 무서웠다. 이렇게 무기력함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롤프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무언가 놀라운 것을. 그러기에 이처럼 낯뜨겁게……남의 방에……벌거벗고 있는 곳에 들어온 것이다.
롤프가 빙글거리며 침대 가에 와서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바지 주머니에서 신문을 꺼냈다. 그것을 펼쳐 드루의 무릎에 놓고 사진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만찬회 때의 사진이었다. 어느 기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롤프를 드루가 쳐다보고 있었다.
"이것 봐, 드루, 우리들의 비밀은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어."
드루는 롤프의 얼굴을 보았다. 저 허물없는 태도,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 당황했다.
아니야, 이곳은 내 방이 아니야. 기억을 더듬자, 드루의 등골에 다시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드루는 롤프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신문에 눈길을 떨구었다. 그러나 신문도 곧 희미하게 보였다. 지금은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대답을 들어야 할 의문이……그것이 아무리 쓰라린 일이라도 대답할 사람은 롤프밖에 없다.
드루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으나 그 목소리는 꺼져드는 듯했다.
"롤프, 저어……우리……특별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어젯밤에?"
롤프가 머리를 들었다.
"특별한?" 드루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롤프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억하지 못하고 있나?"
드루는 무릎 위의 신문을 보려고 하면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네……별로요." 전혀라고 해야 차라리 옳았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차를 탄 것 정도――그것도 꿈이었는지 모른다.
롤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정말 뜻밖인데. 하지만 드루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노우>야. 특별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드루는 시트를 거머쥐고 약간 안심한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롤프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의 일을 주워 모아도……생각나는 것은 멋진 꿈을 꾸었다는 것뿐이었다.
드루는 약간 자신을 회복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그렇다면 당신은 뻔뻔스럽기 짝이 없군요……여기엘 다 들어오고!" 그녀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여기는 아로이스랭그죠? 어째서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던 롤프의 표정이 갑자기 웃는 얼굴로 변했다. 그는 드루의 무릎에 손을 얹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곳은 내 방이야. 기억을 잘 더듬어 봐."
그의 말과 손의 감촉에 드루는 감전이라도 된 듯 입을 멍청히 벌렸다.
"설마!" 드루는 그의 손에서 다리를 떼고 무릎을 굽히며 고쳐 앉았다. "그러면……그가 바로……당신이었나요?" 그러고는 롤프에게서 더욱 몸을 멀리 하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이었다니, 정말 믿을 수 없어요!"
롤프의 눈에서 놀라는 빛이 떠올랐다.
"어째서? 사람을 착각했었나?"
드루는 벌컥 화를 내며 시트로 몸을 감고 침대의 반대쪽에 내려섰다.
"그런 것은 대답할 수 없어요. 나를 어떤 여자로 취급하는 거예요?"
롤프의 눈이 다시 빛나며 흰 이가 드러났다.
"아주 매력적인 여자로."
드루가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것이 착각이에요! 나는……전부……꿈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새삼스럽게 말해 보아야 아무 소용도 없다.
롤프는 생각에 잠긴 듯 손으로 턱을 만졌다.
"여러 가지로 말을 들었지만 꿈이란 이야기는 처음인걸. 하지만 그래도 좋아."
그는 반성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드루의 화를 북돋웠다.
"나를 이용하거나 하지는 않겠다고 했을 텐데요!"
롤프는 얄미울 만큼 침착했다.
"물론 그렇게 말했지."
"그렇게 말했다고요!" 분노로 몸이 굳어졌다. "당신은 어제……내가 샴페인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줄 알면서도……"
너는 내 소유물이라는 표정이었다.
"아니야, 어제 드루는 아주 진지했어."
머리가 갑자기 명료해졌다. 그러나 반격하려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완전히 모욕당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 묘하게도 그의 말이 고맙게 여겨지기도 했다.
갑자기 롤프가 옆으로 왔다. 드루는 다시 불안감을 느끼고 화려한 방안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내 옷은? 옷을 돌려주세요!"
"옷은 드루의 방 옷장 속에 있어."
"어째서 여기 있지 않죠?" 겨우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잠든 사이에 이리 옮겨 왔군요!" 드루는 약간 자신이 생겼다. "당당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도둑 고양이처럼 굴었군요!"
롤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드루의 예상을 무시하듯이 말했다.
"옷은 오늘 아침 내가 거기에 가져다 두었어." 담담한 어투였다. "어젯밤의 드루는 그런 것은 상관치 않고 몹시 성급하게 굴더군."
"넷?" 그녀의 음성이 한 옥타브 올라갔다. "그게 무슨 뜻이죠?"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시선이, 벌거벗은 것과 다름없는 드루의 몸에 쏟아졌다.
"유혹한 것은 드루가 아니었나?" 그는 손을 뻗어 드루의 뺨을 가만히 만졌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도 깜짝 놀랐어." 그는 빙그레 웃고 긴 손으로 드루의 얼굴을 끌어당겨 뜨거운 입맞춤을 퍼부으면서 말을 이었다. "놀랐지만, 무척 기쁘더군."
롤프의 입술이 와 닿자 드루의 손발에서 차차 힘이 빠져나갔다. 등에 돌린 롤프의 팔이 차차 힘을 가해왔다. 드루는 저항할 힘을 급속히 잃어 가고 있었다. 롤프의 품에 안겨 있으니 어젯밤의 기억이 불꽃처럼 되살아났다.
그의 포옹이 차차 다정해지기 시작했다. 입맞춤도 격렬한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깨닫고 보니, 능숙한 그의 손이 긴장을 풀어 주듯 드루의 등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몸이 떨렸다. 일어나 있는 것이 괴로웠다. 자칫하면 그에게 모든 것을 허락해 버릴 것 같았다……어젯밤처럼.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잠들지도 않았고, 술에 취해 있지도 않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토록…….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유혹에 질 것 같았다, 더구나 자기 의사로. 그러나……그렇다고 그가 내것이 된다는 말인가? 나는 그에게 어떤 존재인가? 그 대담은 너무나 명백했다. 롤프는 나를 탐냈다……과거의 여자들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자는 그에게 있어서 편리한 도구에 불과하다. 2주일 동안의 위안, 그 뒤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안 돼요!" 드루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마법에 걸린 몸을 어떻게든 그에게서 떼어 놓아야지. 그녀는 롤프를 밀어젖혔다. 이번에 지면 두 번 다시 그에게서 자유로와질 수가 없다. 지금 지게 되면 상처 입은 가슴에 더욱 무거운 상처를 입게 될 뿐이다. "우습게 보지 마세요! 안……안 돼요." 그녀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나가세요! 이제 충분하지 않아요?" 드루는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뜻밖의 반응에 롤프가 손을 놓았다.
"드루, 왜 그러지?"
울음 섞인 소리로 드루가 말했다.
"왜냐고요? 우리는 안 되겠어요. 당신은 못된 사람이에요! 모든 것이! 어젯밤의 일도 당신의 말은 믿을 수 없어요. 자기 멋대로 해석한 거예요. 나는 술에 강하지 못해요. 그것뿐이에요."
"내 말을 들어, 드루……."
"싫어요." 롤프의 손을 피하면서 드루가 말했다. "짐의 일로 당신한테 부탁한 것이 잘못이었어요. 당신도 짐과 한통속이군요!"
롤프가 분명한 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드루한테는 매맞는 것과 안기는 것이 마찬가지로 생각되나?"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반격을 해야지. 그 때문에 미움을 받아도 좋다.
"네, 그래요! 내 의사를 무시당하고, 물건으로 취급당하는 점에서는 똑같아요."
"물건으로 취급당한다고?" 롤프가 작은 소리로 그 말을 되풀이했다. 거무칙칙한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좋아. 약속하겠어, 드루."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두 번 다시 손을 대지 않겠어. 하지만 어제의 일에 대해서만은 나도 설명할 자신이 있어. 그리고 후회하지도 않아."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여자로서의 드루도 잘 기억하고 있어……이 침대에서 있었던 일말이야. 소녀 같은 지금의 드루보다 훨씬 더 좋았어."
그 말에 분노가 치밀어서 드루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당신 말은 더 듣고 싶지 않아요." 드루는 문으로 돌진하여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두 손을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한 손을 시트를 붙들고 있다. 드루는 어깨 너머로 롤프를 노려 보았다. 그는 우뚝 선 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도와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미 내 편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드루의 가슴은 더욱 아팠다.
그녀는 낮게 한숨을 쉬고 시트를 땅에 떨어뜨렸다. 이번에는 그 시트에 부아가 났다. 문과 마찬가지로 롤프와 공모하여 나를 바보로 취급하고 있다.
드디어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드루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맨발로 달려가는 그녀의 발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러나 롤프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것을 알자 드루의 가슴은 다시 아팠다.
11
오베르안메르가우의 혼잡한 거리에 대낮의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드루는 트위드 재킷에 갈색 플란넬 팬츠를 입고 가게의 윈도우를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녀는 눈앞의 벽화가 그려진 건물을 쳐다보았다.
목조 장식품 상점이었다. 그 이층에는, 16세기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할트무트 박사의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1632년에 이 마을 사람들이 세운 맹세의 그림이라고 한다. 그해에 온 나라에 유행하던 질병이 이 마을 입구에서 기적적으로 중단되었다. 그후 이곳 사람들은 10년에 한번씩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연하기로 맹세했는데, 그 첫번째가 1634년에 공연되었다는 것이다.
이 맹세는 3백년 이상이나 지켜지고 있다. 전쟁으로 잠시 중단된 일은 있었지만, 현재처럼 10년마다 최초의 해에 행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따라서 다음 예정은 1990년 인 것이다.
그녀는 바로 건너편에 있는 건물에서 눈을 돌려, 우뚝 솟은 코펠산을 바라보았다. 맑게 갠 창공을 배경으로 산정에 십자가가 빛나고 있었다. 드루는 그 아름다움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띠고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에아하르트씨!"
그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드루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거기 있는 것은 땅딸막한 잡지 기자와 젊은 여성 카메라맨, 그리고 짐이었다.
잡지 기자가 말했다.
"여기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기에 좀 색다른 기사를 쓰고 싶어서요."
그는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어깨에 매었던 테이프레코더의 스위치를 누르고 마이크를 들이댔다.
"부인에 대해 좀 궁금한 점이 있기에..." 어딘지 모르게 의심하는 투였다.
"두 분이 결혼 생활을 지속할지 어떨지 말입니다."
드루는 긴장하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결혼 이유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망명을 돕기 위해서라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부인은 인질이었는데, 만난 지 일주일 만에 결혼까지 하게 되다니, 좀 믿기가 어렵군요. 대체 그 동기는 무엇입니까?"
드루는 시선을 돌리고,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카메라맨 쪽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짐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녹색 눈을 가늘게 뜨고 잠자코 드루를 관찰하고 있었다. 이마의 상처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나아 있었다. 그러나 눈동자에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증오심을 담고 있었다.
드루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저어....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군요."
"무슨 말이냐고?" 신경질적으로 짐이 말했다.
"어째서 아직도 같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야. 에아하르트 박사는 망명에 성공했잖아. 더 이상 무슨 일이 남아 있느냐 말이야?"
짐에게만은 절대로 말할 수 없다. 드루는 어깨에 힘을 주고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에요..."
"아아, 여기 있었군."
그 말에 이어 롤프의 팔이 뻗어왔다.
"겨우 찾아냈군. 점심이라도 먹으러 갈까?
그의 웃는 얼굴을 보는 건 4일 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별장에서 아무 말도 않고 있기란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그의 다정한 말에 드루는 봄의 햇살 이상의 포근함을 느꼈다.
기자도 지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박사님? 한눈에 반했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롤프가 드루 곁에 와서 그녀의 허리에 팔을 돌리면서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막스 달튼씨였던가요? 막스씨, 당신에게도 좋은 사람이 있겠죠?"
상대가 돌아섰다.
"나 말입니까? 네, 물론이죠. 하지만 왜 묻습니까? 나는 지금 박사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중입니다."
"나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한눈에 좋아질 수도 있다는 말을 하려던 참입니다."
"네, 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의 문제죠.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힘없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내 경우에는 호감은 가졌죠. 그러나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롤프가 껄껄 웃었다.
"테이프를 끄는 것이 좋겠군요, 그녀가 듣고 오해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드루는 긴장을 좀 풀고 안심한 듯 롤프에게 가까이 갔다.
"막스"
롤프가 부르는 바람에 막스는 황망히 고개를 들었다. 롤프가 카메라맨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스지로군."
상대가 카메라를 조정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짐 폴라드씨."
뒤에 무뚝뚝하게 서 있는 사나이에게도 롤프는 말을 걸었다.
"좋아요. 그럼 진실을 말하기로 하죠.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서는 이번 이야기가 마지막이오.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겠소. 알겠습니까?"
모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드루의 몸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다른 세 사람과 같이 롤프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드루의 눈에, 막스가 마이크를 롤프에게 들이대는 것이 비쳤다.
"사실은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곧이듣지 않을 것입니다. 로맨티스트들은 사랑 때문에 결혼한 것이라 생각할 것이고…시니컬한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망명을 위해서라고 생각할 테니까 말입니다."
롤프는 드루의 턱에 손을 받치고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조용하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그는 드루의 떨리는 손을 잡고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아내의 마을 일 것입니다."
순간의 침묵 끝에 젊은 카메라맨이 외쳤다.
"바로 그것이에요!"
롤프가 빙그레 웃었다.
"적어도 한 사람은 로맨티스트가 있군요."
드루는 얼굴을 붉히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에 대답하듯 롤프가 빙긋 웃었다. 그 너무도 눈부신 모습에 드루는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시간이 멎고, 지금 있는 것은 롤프와 자기 둘뿐인 듯싶었다.
롤프가 하는 말이 연극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자아, 점심을 먹으러 가야지?"
롤프가 팔짱을 끼자 드루도 여기에 쾌히 응했다.
막스가 말했다.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롤프는 돌아다보며 ts을 흔들고 나서 밝은 햇살 아래를 드루와 같이 걷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들은 이 거리에서 가장 이름난 목각품 가게인 랭그스 앞을 지나갔다. 윈도우에는 갖가지 종류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상>이 진열되어 있었다. 독일어로 격언이 조각된 방패도 있었다.
그 한 쪽 구석에 있는 조각품에 드루의 시선이 잠시 멎었다.
"롤프, 저것 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와 비슷하지 않아요?"
안경을 쓴 남자가 몸을 굽히고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목각이었다. 깍지를 낀 다리사이에는 책이 두 권 끼여 있었다.
"저런 모습을 한 아버지를 본 일이 있어요. 이곳이 목각으로 유명한 곳이란 말은 듣고 있었지만, 아버지를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걸 사줄까, 이곳의 방문 기념으로?"
드루의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그러는 건 싫어요.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은 정도인걸!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당신에게 그런 것을 받을 수는 없어요."
그러고는 얼른 덧붙였다.
"나중에 아버지한테도 보여 드리고, 마음에 들어하신다면 생일 선물로 내가 사드리도록 하겠어요."
롤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하찮은 선물조차 거절하나? 내가 자유를 얻게 된 것은 드루 덕택인데."
드루가 무슨 말을 하려 하자 그는 손으로 제지했다.
"그렇게 싫다면 강요하지는 않겠어." 그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짐 일행이 보이지 않는군."
그녀에게로 돌아서며 롤프는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점심을 먹었어. 포터 박사와 만날 약속이 있어서 그러는데, 여기서 실례해도 좋을까?"
풍선이 터져 버린 듯, 지금까지 즐거웠던 드루의 기분이 갑자기 오므라들고 말았다. 그녀는 싸늘한 시선을 견디면서 고개를 들었다.
"네, 좋아요… 나는 별로 상관없어요."
"회의에는?"
롤프가 뒤로 돌아서면서 물었다.
"자리를 잡아 놓을 생각인데."
"아니, 괜찮아요. 뒷좌석이 좋아요. 홀가분하게 메모도 할 수 있고요."
그러면서 드루는 일부러 즐거운 체 해 보였다.
드루는 카세트에 제목을 붙이고 케이스에 넣었다. 오늘 일은 이것으로 끝났다. 그녀는 일어서면서 손을 허리에 대고 몸을 폈다.
관례에 따라 롤프는 질문 공세를 받고 있었다.
드루는 먼저 택시로 집에 돌아와 샌드위치를 먹고 목욕한 뒤, 잡지에 연재할 강연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발코니로 통하는 문으로 걸어 나가면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싸늘한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로브의 앞깃을 꼭 여몄다. 조용했다. 자기 방과 롤프의 방의 불빛 이외에는 어둠을 비추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롤프의 방? 불이 켜져 있다니? 그녀는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나!"
"좋은 밤이군."
롤프가 있었다! 방문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테이프를 정리하고 있을 때 돌아온 모양이었다. 갈색 플란넬 바지에 터틀넥 스웨터, 그 위에 노퍽 재킷, 오후와 같은 차림이었다. 과학자인데도 멋을 아는 사람이다. 두르는 감탄했다.
"롤프, 몰랐어요."
"방금 돌아왔어."
등을 펴면서 그가 말했다.
"춥지 않아?"
"네, 약간… 하지만 아름다운 밤이에요."
그녀는 손을 비볐다.
롤프는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색한 나머지 그 자리를 뜨기로 했다.
"이제 가서 자겠어요."
"아직 여덟시 반인데?"
그 말에 드루는 순간적으로 멈춰 서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휴전하지 않겠나? 아직 시간이 이르고 할 말도 있으니까."
"아니… 나는…."
"이야기하는 것뿐이야."
롤프가 조용히 말했다.
드루가 돌아보았다. 롤프의 진지한 표정.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좋아요. 이야기만이라면."
롤프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의자에 앉지 그래."
드루는 망설이면서 그의 방으로 들어가 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롤프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마주 보고 있었다.
침묵을 참지 못하고 드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집은 누구 소유예요?"
롤프가 빙긋 웃었다.
"할트무트 박사의 친구 집이지. 그는 지금 여행중이야. 운이 좋았지."
"좋은 집이에요."
롤프는 이 말에 그저 머리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롤프, 나는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 저쪽에서 처음 만났을 때, 왜 내게 사정을 잘 설명하고 협력을 구하지 않았어요?"
롤프는 낯빛을 흐리고 머리를 긁었다.
"그때는 내 잘못이었어. 사과하겠어."
그는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시간도 별로 없을 것 같았고, 드루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으니 강요할 수밖에 없었지. 절망적인 상황이었어. 이해할 수 있겠나?"
"네." 슬픈 듯 고개를 떨구며 드루가 대답했다.
롤프가 화제를 바꾸었다.
"짐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 내 입장에서도 물을 자격은 있다고 생각하는데."
드루의 잿빛 눈이 번쩍 빛났다.
"그런 것을 물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어요!"
롤프는 표정도 변치 않고 조용히 말했다.
"서로가 좀 더 도와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야기만 나누어도 편해질 때가 있고."
드루는 가만히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렇다, 그의 말이 옳다. 그에게 이야기하면 마음의 아픔이 좀 부드러워질지도 모른다.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단번에 이야기해 버렸다.
"그는 핸섬하고 재능 있는 사람이었어요. 처음에는 순식간에 좋아지고 말았어요…그런데."
"그런데?" 그가 재촉했다.
거북스러워서 고개도 들 수 없었다.
"그런데 학대가 시작되었어요… 처음에는 말로… 그리고…."
"말로라니?" 속삭이는 듯한 그의 음성.
드루는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었다.
"날더라 싸늘하고… 불감증이고…." 그 이상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리고?"
드루는 꿀꺽 침을 삼켰다.
"다음은 정신적인 학대였어요. ‘불감증에 걸린 여왕님에게는 만족할 수 없다’면서.
그는 ‘내 것이니 앞으로 꼭 알게 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그때까지는 바람을 피우겠다고요…."
드루는 입을 손으로 막고 울음을 참았다.
"이제 그만 이야기해도 되겠죠?"
"그런데 어째서 계속 같이 살았지?"
드루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를 일이에요. 다만 결혼은 영원한 것이라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노력하려고 했어요."
드루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떨리는 목소리로 웃었다.
"신혼여행 뒤에는 어떤 부부든지 권태를 느끼는 것이라 생각하고…."
롤프는 머리를 흔들고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드루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해."
그는 드루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어리석은 것은 짐이였지 드루가 아니었어."
그러면서 드루를 가만히 끌어안고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드루는 매우 정열적인 여자가 될 수 있어."
그의 손이 닿자 드루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버둥거렸으나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아아, 롤프, 부탁이에요…."
"아니, 내 말을 들어야 해. 최초의 내 태도에, 당신은 짐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군 그래. 미안해, 사과하겠어."
"짐과 같아요?"
"남자가 모두 그 녀석과 같은 것은 아니야."
"네… 네."
그이 품에서 고개를 흔들자 부드러운 캐시미어가 뺨을 간질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두 사람 무도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롤프나 짐이나 모두 힘으로 제압하려고 들고, 한 사람의 상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드루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저주하고, 큰소리로 외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왜 이럴까? 왜 그가 좋아지게 되었을까?
"그래요. 당신은 나를 때리거나 하지는 않으니까요."
롤프의 팔에서 갑자기 힘이 빠져나갔다. 그가 천천히 몸을 놓아주었다.
"때리지 않는다고? 차이가 겨우 그것뿐인가?"
"부탁이에요… 이제 돌아가게 해주세요."
그녀는 재빨리 문에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롤프를 쳐다보았다.
"좋아."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별로 가시 돋친 말은 아니었으나, 냉정하게 버려지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싸늘한 갈색 눈에 매료되어 몸이 마비되고 말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눈에 말못할 슬픔 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다. 그 표정에 압도되어 드루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본 것은 자유와 희망을 잃어서, 사는 것조차 체념한 우리 안의 삵괭이와도 비슷한 롤프였다. 막 자유를 획득한 롤프… 그를 우리 안의 삵괭이에 비유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동자, 그 눈을 보고 문득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를 씻어 버리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구둣소리를 듣고서야 드루는 롤프가 돌아섰다는 것을 알았다. 굳어져 있는 그의 뒷모습, 그는 의지력을 다해 나한테서 떨어지려 하고 있다. 드루는 그 모습을 눈으로 계속 쫓으면서 저도 모르게 흐느끼려 하고 있었다.
무거운 문소리가 방안에 메아리쳤다. 드루는 손등을 깨물고 있었다. 거기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어깨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고 눈물어린 눈으로 침대를 바라보았다. 일주일 전 그날 밤의 사건, 그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죄어드는 듯했다. 그렇다… 다정한 연인이었다, 그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안타까운 뜨거운 심정.
그녀는 참을 수가 없어 몸을 홱 돌려 발코니로 달려가, 안전지대인 자기 방을 향해 뛰어갔다.
텅 빈 머리로, 아래쪽 어둠 속에서 난 인기척을 깨달았다.
누가 있다!
평소 같았으면 신경이 쓰였을 테지만, 지금은 어지러워 그럴 여유도 없었다.
누가 이 집을 염탐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어째서? 그러나 이런 의심도 곧 사라지고 말았다.
드루는 자기 방문을, 마치악마라도 내쫓듯 쾅 하고 닫았다. 그러고는 침대에 쓰러졌다.
몇 시간 뒤 그녀는 피로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12
메모의 내용은 그 필체와 마찬가지로 간결하고 딱딱한 것이었다.
<드루에게. 어젯밤에 미처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사실은 할트무트 박사로부터 뮌헨 대학에서 강의를 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소. 물론 드루도 동반하라는 이야기였소. 그러나 드루의 마음을 생각하고 거절했소. 부친을 도와야 한다는 이유를 대고. 회의가 끝날 때까지는 돌아오겠소.>
‘회의가 끝날 때까지’라면 일주일씩이나 뮌헨에? 이르카 마르카스의 얼굴이 드루의 뇌리에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밤낮을 뭰헨에서 이르카와 같이 보낸다는 말인가? 생각만 해도 오늘은 우울한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메모를 주방의 쓰레기통에 버리려다 그만두었다. 롤프의 글이 아닌가. 드루는 생각을 고치고 백에 넣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롤프의 흔적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바보로군!"
자신을 꾸짖고 눈물을 참으면서 회의장으로 갔다.
지루한 하루였다. 아버지는 몇 번이나 뮌헨에 가라고 권하셨다. 녹음은 자기도 할 수 있으며, 아내는 남편을 따라가야 마땅하다고 되풀이해서 말씀하셨다.
그럴 때마다 드루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버지의 딸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유능한 과학 기자라고 대답했다.
다행히도 그 열성에 감동한 듯 아버지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짐을 포함한 대부분의 취재 기자가 롤프와 동행하여 뮌헨에 간 것 같았다. 회의가 끝나 가는 이곳보다는 망명 직후의 독일 과학자 쪽이 더 좋은 기사가 되리라. 여긴 모양이었다. 가장 무서운 상대와 가장 사랑하는 상대, 그 두 사람을 잠시 동안 보지 않게 될 듯싶었다.
다만 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있었다. 어째서 짐은 나 혼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뮌헨에 간 것일까, 지금이 찬스일 텐데?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두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짐에게도 생활이 있고, 잡지 원고도 써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된다.
한숨이 나왔다. 긴 오후를 혼자 집에 있을 수밖에 없다. 드루는 카디건을 걸치고 강가에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드루는 산책용 구두에 푸른 차이나 팬츠, 푸른 무늬가 있는 셔츠 차림으로 산간의 급류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한 시간쯤 걸었을 때 강변에 튀어나온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거기에 올라서니 마을을 내려다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조용한 전망과는 달리 드루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다. 길게 한숨을 쉬고 작은 돌을 주워 물에 던졌다. 수면에 번지는 파문… 그것은 드루의 마음에서 일고 있는 파문과도 같았다.
갑자기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가, 혼자서 보내는 허니문이?"
빈정대는 어투였다.
드루가 돌아보았다.
‘짐!"
"물론이지." 짐이 빙그레 웃었다.
드루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밑은 급류여서 헤엄쳐 도망갈 수도 없었다.
"뮌헨에 간 줄 알았어요."
"암, 갔었지. 하지만 그 머리 좋은 에아하르트 박사에게 싫증이 나서 돌아왔지."
짐은 어깨를 으쓱했다. 짐이 가까이 왔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리고 전에 말했잖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싸늘한 눈동자에 초조한 빛이 감돌았다.
"내일은 짐을 꾸려야 하니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지."
짐이 더욱 다가왔다. 드루는 가슴이 뛰었다.
"무엇 때문이죠?"
"무엇 때문이냐고?" 짐이 바로 곁에서 말했다.
"그것은… 드루가 탐나기 때문이야."
드루는 숨이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서 대답해 봐!" 날카로운 짐의 목소리.
드루는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가슴을 쑥 내밀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는 곁으로 와서 난폭하게 드루의 팔을 붙잡았다.
"어째서 처음부터 롤프 얘기를 하지 않았지?"
드루는 손을 뿌리치려고 몸을 버둥거렸다.
"이것 놓으세요!"
"어서 대답해!" 신음 소리에 가까웠다.
드루는 싸늘한 눈으로 짐을 노려보았다. 미친 듯한 푸른 눈동자. 그것을 보자 드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째서 처음에는 호텔에 혼자 들었느냐 말이야. 응?… 더구나 미세스 폴라드라는 이름으로."
"짐, 우리는…." 이렇게 입을 열다가 말을 바꾸었다.
"나는 몰랐어요… 언제 롤프가 망명할 것인지. 그래서 조금이라도 특별한 일은 할 수 없었어요."
짐이 증오에 찬 눈으로 드루를 노려보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나는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나를 멀리하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드루가…."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 녀석은 망명하기 위해서 잠시 드루를 이용했을 뿐이야. 그건 알고 있을 테지?"
짐의 숨결이 드루의 얼굴에 와 닿았다.
"실제로 뮌헨에서 내가 본 바에 따르면, 그 녀석과 이르카 마르카스라는 여자와는…."
가슴을 에는 듯한 그 말. 드루는 고개를 세게 가로저었다.
"그만둬요!"
드루의 팔을 쥔 짐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언제나 그 여자가 놈의 품에 안겨 있으니."
불길한 웃음소리.
"틀림없이 제대로 밤잠도 자지 못할걸."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멸로 문제 되지 않았다. 다만 짐의 입에서 롤프와 이르카에 대한 말이 나오는 것이 참을 수 없다.
‘이제 그만!"
드루는 소리지르며 짐의 가슴을 떼밀었다.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짐은 그녀가 버둥대면 버둥댈수록 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좋아, 바로 그거야 좀 더 날뛰도록 해!"
드루는 절규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버둥거릴수록 속이 편해질꺼야."
짐은 더욱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 독재자와 같은 그 목소리.
"미국에 가서 놈에게 버림받거든 언제든지 나한테 와."
드루는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싫어요! 두 번 다시 당신한테 가지 않겠어요! 짐, 당신은 환자예요. 치료를 받아야 해요!"
짐은 가슴을 두들겨 맞으면서도 태연하게 그 두꺼운 입술로 드루의 입을 막으려 했다.
그에게 키스 당한다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드루는 용기를 내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러고는 발로 그의 발끝을 힘껏 밟았다.
"이게 그냥!" 허를 찔린 짐의 욕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드루는 몸이 공중에 뜨는 것을 느꼈다. 짐을 짓밟아 준 발도 공중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를 걷어차다니, 그냥 둘 수 없어!"
짐이 흔들 때마다 눈앞이 빙빙 돌았다. 갑자기 내동댕이친 듯 땅에 내려졌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어."
짐은 드루의 팔을 비틀어 잡고 거칠게 끌고 갔다.
"그 집에서의 너희 두 사람의 행동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어."
드루는 팔이 빠질 것 같아 비명을 질렀다. 다리가 비틀거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했다. 짐이 계속 힐문했다.
"그때마다 미쳐 버릴 것 같았어. 이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드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정상적인 짐으로서는, 거기서 드루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는 것이 최고로 감미로운 복수극으로 생각될 것이다.
"안돼요, 짐. 절대로 안돼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크게 뜬 드루의 눈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짐의 얼굴이 비쳤다.
"안 돼? 뭐가 안 돼!"
일그러진 그의 입술 미쳐 날뛰는 짐승과 같은 그 얼굴에 드루는 생명의 위협마저 느꼈다.
마침 이때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디가 먼 곳에서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드루가 짐을 훔쳐보았다. 그는 아직 그 소리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드루를 거칠게 끌고 가면서. 눈은 별장 쪽에 못 박혀 있었다. 드루는 울퉁불퉁한 고갯길에서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몸을 틀어 소리나는 쪽을 보았다. 7,8명의 젊은이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룩작을 멘 모습으로 보아 하이킹에서 돌아가는 듯싶었다. 희망이 솟았다.
도망칠 수 있을까?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만일 거기까지 갈 수 있다면, 짐도 많은 사람 앞에서는 덤벼들지 않을 것이다. 독일어로 구원을 요청하지 않아도 그들은 짐작할 것이다.
드루가 얼른 짐의 다리를 걸었다. 두 사람은 뒤엉키듯 땅에 쓰러졌다.
"앗…."
짐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함께 땅에서 굴렀다. 그러나 미리 예상하고 있던 드루는 손으로 충격을 가능한 한 적게 할 수 있었다.
짐이 그녀의 손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드루는 재빨리 짐의 몸에서 자기 몸을 빼고 굴러가듯 등산객들에게로 다가갔다. 짐은 강가에 쓰러진 채로 있었다.
숨이 답답했다. 그녀는 어깨 너머로 짐 쪽을 보았다. 그는 머리를 약간 들고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신음소리도 들려왔다.
드루는 입에 들어간 흙을 뱉어내고, 더러워진 뺨을 주먹으로 닦았다. 손이 몹시 떨리고 있었다.
아직은 위험하다. 드루는 깊이 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아파서 내려다보니 차이나 팬츠에 피가 배어 있었다.
"아, 잠깐!"
입술을 깨물고 그녀는 말을 끊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 부탁한다는 뜻의 독일어는 알고 있다.
"비테(부탁이에요)! 비테!"
드루는 미친 듯이 손을 흔들었다.
한 젊은이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동료의 어깨를 붙들었다. 순간 노랫소리가 그치고, 여덟 명의 눈이 드루에게 집중됐다.
"야아(네)?" 선두에 있는 젊은이가 말했다.
뒤에서 짐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드루는 아픈 몸을 끌 듯이 하며 젊은이 쪽으로 다가갔다.
짐이 쓰러져 있는 한 그들에게는 짐이 보이지 않는다. 드루는 설명할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영어로 이렇게 외쳤다.
"저어… 걷다가… 쓰러졌어요. 집에까지 가야 하는데 힘을 빌 수 없을까요?"
숨을 헐떡이며 상처 난 무릎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 멀지 않아요."
젊은이들은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그러자 20세쯤 된 청년이 앞으로 나서며 영어로 대답했다.
"물론 도와 드리겠습니다, 자아, 이쪽으로."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드루의 팔을 붙들고 동료들에게 무어라 독일어로 설명했다.
일단 말이 통하자 드루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그들은 16세에서 21세 전후의 청년들이었는데, 마치 상처 입은 공주를 보호하듯 두 사람씩 교대로 드루를 부축해 줬다. 별장에 도착하자, 영어를 아는 아까의 그 청년이, 의사를 부를 것인가를 물었다. 드루는 괜찮다고 정중히 사양하고, 별로 대접할 것이 없었으므로 아이스티를 내놓았다.
젊은이들은 기쁘게 그것을 마시고 나서, 정말 괜찬은지 걱정스럽게 묻고는 노래를 부르며 돌아갔다.
드루는 문과 창이 잘 잠겼는지 확인한 뒤 침대에 걸터앉았다.
짐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상대다. 하지만 오늘의 일이 조금은 약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드루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나이트가운을 들쳐 올리고 무릎의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통증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대수로운 상처는 아니었다.
하마터면 큰 일이 날 뻔했던 데 비한다면 다행히 상처가 작았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머리맡의 불을 켜고 다시 한번 방안을 둘러보았다.
열려진 슈트케이스가 두 개, 그 속의 의류는 잘 개켜져 있었다. 뮌헨으로의 출발이 내일 오후 두 시. 뮌헨까지는 차로 한 시간. 이를 위해서 짐을 꾸렸다. 집안에서는 별로 할 일도 없었다.
아버지 일행과 같이 바이에른풍의 맥주 축제에 참가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축제는 세계의 과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 고장 사람들이 특별히 개최하는 것이었으나, 드루는 롤프로부터 전화가 올지 모른다는 구실로 집에 남아 있기로 했다.
아버지는 이 구실을, 순진한 어린애처럼 그대로 믿고 기꺼이 드루를 남겨놓고 가 버렸다. 사실은 짐에게 붙들릴 만한 곳에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여기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제일 좋다.
드루는 불을 끄고 싸늘한 시트 속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아직 몸이 굳어 있었다. 눈이 감기지 않았다. 드루는 옆으로 드러누워 달빛에 비친 발코니의 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축제의 경쾌한 밴드 소리가 들려왔다. 드루는 머릿속으로, 축제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려 했다. 갖가지 빛깔의 바이에른 민속 의상, 여성들은 크게 주름잡은 블라우스에 페티코우트가 달린 스커트와 주름진 앞치마, 남성들은 전통적인 가죽 반바지에 장화, 그리고 깃털 장식이 있는 모자. 그러다가 드루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눈을 뜬 순간, 드루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누가 손으로 입을 막았기 때문에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상대의 굵은 손목을 두 손으로 쥐고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려 했지만, 상대의 다리가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너무나 엄청난 일에 머리가 아찔했다. 짐이다! 그가 몰래 숨어들어, 예고한 바를 실행하려 하는 것이다!
그 순간, 날카롭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롤프야."
롤프? 드루는 몸을 긴장시킨 채 저항을 그쳤다. 어둠 속에서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롤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긴장 속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그 모습을 뒤에서 보았다면 잠들어 있는 듯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드루를 바라보는 빈틈없는 시선, 그리고 입을 막은 그의 손만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발코니에 누가 있어, 조용히 해!"
드루는 얼굴을 움직이지 않고 그의 어깨 너머로 발코니 쪽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숨을 죽였다.
유리 저편에 검은 그림자기 움직이고 있었다. 손잡이가 찰칵 소리를 냈다.
드루는 침을 삼켰다. 목이 타 들어갔다. 손잡이가 다시 움직였다. 누가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갑자기 롤프가 벌떡 일어나며 독일어로 외쳤다.
"어떤 녀석이냐?"
그는 다시 한번 큰소리로 외쳤다.
"어서 나가 버려!"
드루가 몸을 일으켜 시트를 거머쥐고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롤프, 조심하세요!"
검은 그림자는, 롤프의 목소리를 듣고 얼른 달아났다.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도 났다. 침입자로서는 결코 수월한 탈출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당면한 위기는 모면했다. 드루는 롤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 밤 제대로 그를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문에 서 있었다. 달빛을 받은 억센 육체가 은빛 실루엣을 만들며 떠올라 있었다. 잘쏙한 허리, 그리고 지방질이 없는 엉덩이와 허벅지.
드루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소리를 듣고 롤프가 돌아보았다.
"괜찮아?"
드루는 황망히 눈을 돌려 어둠을 바라보았다.
"네, 하지만‥‥ 롤프."
그녀는 얼굴을 돌린 채, 시트를 움켜쥔 손을 롤프에게 내밀며 말했다.
"무엇이든 입으세요‥‥."
"침대속으로 들어가란 말인가?"
이 뜻하지 않은 사태의 진전에 드루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아니에요‥‥" 그녀는 입술을 축이고 침착해지려고 했다.
"착각하지 마세요‥‥ 나는‥‥."
"알겠어. 그러면 실례."
"안 돼요!"
드루는 다시금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수치도 잊고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그의 넓은 가슴에 손을 대었다.
"부탁이에요, 롤프.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마세요."
드루는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것도 순간적인 일이었다. 롤프가 드루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떨고 있군 그래." 그가 속삭였다.
"가지 마세요."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몸 속에서 무언가 소용돌이치는 것이 있었다.
"부탁이에요, 여기 계세요."
"괜찮아, 그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 목소리와 함께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도 부드러웠다.
"그놈이 짐이었나?" 롤프가 물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어서 그녀는 얼버무렸다.
"뮌헨에 같이 있지 않았나요?"
그의 입술이 귓전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같이 갔었지. 하지만 오늘 저녁 그가 없어졌어. 그것을 알고 서둘러 돌아왔어."
드루는 얼굴을 쳐들고 놀란 듯이 물었다.
"어째서요?"
롤프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라니?" 고개를 갸웃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약속을 잊었나? 내 역할은 드루를 보호하는 일이야."
이번에는 드루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를 두고 뮌헨에‥‥." 이렇게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롤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내가 손을 뗀 줄 알았나?"
드루는 고개를 끄떡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침대 가장자리를 보며 롤프가 말했다.
"앉아도 좋을까?"
"네? 네‥‥."
분명히 대답한 것도 아닌데 그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시트를 끌어올렸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드루는 그가 지금 벌거벗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부끄러움에 뜨거워져 얼굴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두웠기 때문에 그녀의 표정은 그의 눈에 띄지 않았다.
롤프는 작은 침대 이에서 다리를 구부리고 드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앉아 있는 그 모습은 등신대의 그리스 조각과도 같았다. 드루는 그 황홀함에 가슴이 뛰었다.
"사실은,"
그의 말에 드루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롤프는 지금까지 드루의 눈이 어디를 보고 있었는지 알았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수치스런 침묵의 순간이 흘렀다. 마침내 롤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내가 짐을 뮌헨으로 유인했어, 결혼과 망명에 대해 독점 인터뷰를 하겠다는 구실로. 그가 응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드루가 얼른 말을 받았다.
"그렇게 하면 내가 짐과 떨어져 있게 된다는 생각이었군요."
"그것밖에는 좋은 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
미안한 듯이 그가 말했다.
"내가 인터뷰를 자꾸 연기하자 그 녀석도 눈치를 챈 모양이었어. 그래서 이리로 돌아온 줄 알았지."
롤프가 드루의 어깨 위에 흘러내린 머리를 쓰다듬었다.
"돌아오지 않았다니 이상하군."
드루는 시트 위에 있는 그의 거무틔틔하고 큰손에 눈길을 보냈다. 짐에게 습격당했다는 이야기를 안 한 것이 꺼림칙했다. 롤프의 예감이 맞았다는 것쯤은 말해도 좋을 텐데. 그러나 드루는 잠자코 있었다.
"드루?" 롤프가 침묵을 깨뜨렸다.
"네?"
"아까 그놈이 만약 짐이었다면, 그는 병자야."
드루도 동감이었다.
"네, 그래요." 드루는 갑자기 롤프의 몸에 접하고 싶은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어쨌든 고마와요."
두 사람의 손이 가볍게 겹쳐졌다.
"천만에, 그런데 아직도 무서운가?"
희미한 달빛을 받고 실루엣으로 떠오른 롤프의 얼굴. 그 남자다움에 드루는 압도되고 말았다.
드루는 쉰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뇨‥‥ 아마‥‥ 괜찮을 거예요."
롤프가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듯한 목소리였다.
"그럼 가야. 잘 자." 그는 등을 돌려 나가려 했다.
"잠깐!" 드루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롤프가 돌아보았다. 쓸쓸한 표정을 지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왜 그러지?" 그의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
"저어‥‥ 가지 마세요."
"나도 여기서 자라는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드루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 되나요?"
손목을 쥔 드루의 손을 롤프의 손이 감쌌다.
"그야 물론, 하지만‥‥."
우람한 어깨가 떨리는 것 같이 보였다.
"아무 일도 없이 얌전히 자야 하니, 그런 성인과 같은 일은‥‥."
드루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스스로 원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 결혼했을 때는 피할 생각만 했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롤프?"
자세히 바라보는 롤프의 매혹적인 눈동자. 드루는 용기를 내어 쭈뼛거리며 롤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자기 손이 몹시 떨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롤프는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드루가 손을 떼었다. 나는 이토록 바라고 있는데 그는 주저하고 있다니!
그러나 드루는 더 참을 수 없었다. 가슴에 있는 말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성인이 안되어도 좋아요, 롤프."
속삭이듯 말을 끝냈을 때, 드루는 이미 롤프의 품안에 있었다. 그는 다정히 드루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갖다 댔다. 드루는 입을 열어 롤프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촉촉한, 자연스럽고 두 사람에게만 허용된 입맞춤이었다.
롤프의 사랑으로 드루의 메마른 가슴에는 새로운 생명이 불어넣어졌다. 드루는 그의 애무를 받으면서 환희에 떨고 있었다.
롤프도 변했다. 단순히 격렬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다정하고 포근했다. 롤프의 입술은 드루가 주는 것을 모두 받고 그 이상의 것을 베풀어주었다.
롤프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다정히 속삭였다.
"이제야 돌아와 주었군‥‥ 나의 사랑스런 아내."
롤프의 손이 드루의 허리로 내려오자 그녀의 몸이 뜨거워졌다.
"사랑스러워." 그는 숨을 죽이고 속삭였다.
"결코 후회하게 하지는 않겠어."
그의 뜨겁고 거친 입김이 귓가에 와 닿았다.
롤프는 끈질기게 참고 있다, 내가 견디지 못할 때까지. 내가 불타오를 때까지.
불붙은 드루의 정열이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롤프의 얼굴이 바로 위에 있었다. 윤기 있는 눈동자가 미소짓고 있었다.
"정열적인 눈동자, 불꽃과도 같은 빨강머리, 그런 여성이 남자의 품에서 불타오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남자의 잘못이야."
이 말에 자신을 얻은 드루의 마음은 하늘높이 날아 올라가는 듯했다. 그녀는 롤프의 등을 꼭 껴안고 그를 맞이했다.
13
드루는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키스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능숙한 키스.
눈을 뜨고 쉰 목소리로 웃었다. 롤프가 어깨를 살짝 건드렸던 것이다.
"롤프, 간지러워요!"
롤프가 웃으며서 고개를 들었다.
"잘 잤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조반 대신 달콤한 것이라도 먹으러 갈까 해서."
드루가 팔꿈치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가세요?"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롤프가 대답했다.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렇지만 않다면 드루를 두고 이렇게 빨리 외출하지는 않을 거야."
드루는 부끄러운 듯이 가만히 웃었다.
"일찍 돌아오세요."
롤프가 몸을 굽혀 그녀의 콧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일어나지 않아도 좋아."
그 매력적인 미소에 온몸이 뜨거워졌다. 드루는 롤프의 뺨에 가만히 손을 가져갔다.
"지금 곧 가야 하나요?"
롤프가 살짝 그 손을 감쌌다.
"그렇게 날 유혹하면 못써." 이렇게 말하고는 손에 키스하고 몸을 일으켰다.
"돌아와서 천천히 이야기하기로 하지."
그의 다정한 눈길. 드루는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그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았다.
롤프가 나가 버렸다. 그 음성, 그 달콤한 입맞춤. 드루는 저도 모르게 가만히 웃었다 ‥‥이윽고 만족스런 기분으로 다시 잠이 들었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전화 벨 소리에 드루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수화기에 손을 내밀며 테이블 위의 시계를 보았다. 열 시!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다.
"여보세요?" 하품을 참고 전화를 받았다.
"드루냐? 아버지다."
"어머나,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녀는 벌렁 드러누워 한 손으로 베개를 끌어당겼다.
‘아빠, 그런데 웬일이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빠, 듣고 계세요?"
"응."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롤프의 부탁으로 전화했다." 드루는 깜짝 놀랐다.
"그러세요." 이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음." 아버지는 기침을 하고나서 말을 이었다.
"즉, 스탠디시 장관이‥‥ 너도 만난 일이 있지?"
말이 끊어졌다. 드루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네? 네. 하지만 장관이 왜요?"
"오늘 아침 특별 보좌관들과 찾아왔어. 회의가 끝날 때까지 개입을 삼갔던 모양이야."
큰 한숨 소리가 들렸다.
"데려갔어‥‥롤프를. 지금 미국으로 떠났어. 모든 조사가 끝나기 전에는 그와 같이 일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드루는 머리 위에 벼락이 떨어진 듯 싶었다.
"드루, 왜 그러니?"
드루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네‥‥ 듣고 있어요. 그가 떠났다는 말이죠?"
"응." 아버지 목소리가 약간 밝아졌다.
"미안하다는 마을 너한테 전해 달라더구나."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미안하다구요?"
"그래‥‥이별의 키스를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어."
침묵이 흘렀다. 드루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것뿐이었나요?"
"응? 참, 또 있어. 그러니까‥‥아침을 같이 먹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기침소리가 났다.
"시간이 없어서."
"네, 알겠어요."
"걱정할 것 없어. 장관의 말에 따르면, 잠시 소식은 두절되겠지만 염려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드루는 북받치는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는 <잘 있으라>는 말뿐,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드루는 전화를 끊으려 했다.
"짐을 꾸릴까요?"
그녀는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흐느낌을 참았다.
"응. 한 시간쯤 있다가 차를 보내마. 알겠니?"
"네."
전화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드루는 수화기를 쥔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쓰러질 듯한 자세로 서서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잘 가세요." 숨이 막혔다.
"나는‥‥."
수화기를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내려놓았다.
짐을 꾸려야지. 미국으로 돌아가, 되도록 바쁘게 지내며 그를 잊어야지. 그리고 앞으로는 나 혼자 살아가는 거야.
눈을 감자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드루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거야. 그녀는 일어나서 로우브를 걸쳤다. 머리가 텅 비어 아무 감각도 없었다.
그는 이미 없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약속은 실행되었다.
한 시간 후 드루는 샤워를 끝내고 와인 색깔의 브레이저와 스커트, 그리고 잔잔한 프린트 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슈트케이스를 닫았을 때 현관의 벨이 울렸다. 차가 도착한 것이다.
덩치 큰 독일인 운전사가 짐을 옮기고 있는 동안에, 드루는 이 집을 빌려 준 사람에게 인사장을 썼다.
인사장과 함께, 마을 선물 가게에서 산 은촛대를 남겨 두었다‥‥ 추억에 남을 이 집을 빌려 준 낯모르는 사람에 대한 선물‥‥ 이 집에서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드루는 피버디 목사의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벌써 세 번이나 읽은 편지였다. 목사는 편지의 문투도 역시 쾌활했다. 그는 유능한 과학자의 망명을 돕고,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 준 것이 자못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목사는 편지와 함께 신문 스크랩도 몇 장을 보내 주었다. 그 스크랩 가운데는 드루와 롤프의 사진도 있었다.
드루는 편지와 스크랩을 서랍에 넣은 뒤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었다. 원망스럽지는 않다‥‥다만 허무할 뿐. 일이 끝나고 나면 추억과 허무감으로 언제나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롤프와 헤어진 지 이미 2주일. 로스아라모스에 돌아온 후로는 되도록 일에만 열중함으로써 그를 잊으려 했다. 그러나 밥이 오면‥‥롤프와의 일이 떠올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돌난로 위에 목조 조각이 서 있었다. 롤프와 같이 보았던 인형은 돌아올 때 사서 아버지에게 선물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위해 산 것이다.
키가 크고 건장한 독일의 젊은이, 민속의상으로 차려 입고 부츠의 뒤꿈치를 들어올리며 도끼자루를 쥐고 있었다. 드루는 손끝으로 그 윤곽이 뚜렷한 인형의 뺨을 살짝 만져 보았다.
"롤프‥‥."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 엄숙한 표정과 힘있는 눈동자가 롤프와 너무도 닮은 이 인형을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꼭 사고 싶었던 것이다. 손을 떼고 드루가 말했다‥‥ 인형에게, 아니 자기 자신에게.
"내일 서류에 사인하겠어요. 이제 곧 끝나요. 당신은 완전한 자유의 몸이에요."
이혼 서류 정리를 하루 더 연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롤프와 만나기 전에 끝내 버려야지. 더 이상 미세스 롤프 에아하르트로 있어 보았자 아무 소용없다‥‥ 내일 중으로 끝내버려야지
그녀는 멍청히 벽시계에 눈길을 돌렸다. 소나무로 만든 수제품으로서, 문자반의 네 군데에 사각 못이 박혀 있을 뿐이었다. 열 시가 가까웠다.
열 시도 결코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시, 두 시가 되어도 드루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대 속에서 몸을 뒤치고 있었다. 그녀는 안뜰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5월의 밤바람을 받아 비취빛 실크 가운이 나부꼈다.
바닥에 돌이 깔린 안뜰로 나가자 골짜기의 나무들이 바라보였다. 그녀는 문득 동독에 있는 롤프의 오두막이 떠올랐다.
가운의 옷자락이 미풍에 날렸다. 드루는 갑자기 몸을 떨었다. 바람 때문일까, 아니면 그때의 추억 때문일까?
그녀는 드러난 팔을 문지르면서 엷은 가운에 시선을 떨구었다. 사무실의 젊은 비서들이 결혼 선물로 준 것으로 <그가 돌아왔을 때를 위해>라는 카드가 곁들여 있었던 것이다.
다시 바람이 불어 가운이 공처럼 부풀었다. 드루는 또다시 몸을 떨고, 부드러운 옷감을 손으로 눌러 속에든 공기를 뺐다.
드루가 안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어둠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불빛을 등뒤로 받고 있는 모습이 황홀하군."
몸이 얼어붙었다. 설마! 드루가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서재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짐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야, 사라져 없어진 줄 알고 있었나?"
그는 손을 내밀어 드루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드루는 얼른 몸을 빼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였다. 문을 미처 걸기 전에 짐이 몸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번에는 마음대로 안 될걸!"
드루는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의자에 부딪쳐 멈춰 섰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짐의 입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드루를 빤히 바라보면서 넥타이를 풀었다.
"굉장하군, 엷은 그린색 가운에‥‥불타는 듯한 빨강머리."
그는 넥타이를 바닥에 내던졌다.
드루가 의자에 쓰러졌다. 짐이 옆으로 다가갔다.
"짐‥‥."
"그 천재 녀석 따위는 상관 않겠어. 다만 그녀석이 정부 기관에 가 있는 동안 이쪽에서는 이쪽대로 결판을 내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져서."
짐은 입을 헤 벌리고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안 돼요!"
드루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떨리는 걸음으로 의자 뒤로 돌아갔다.
짐은 셔츠를 반쯤 벗다 말고 의자 등에 팔을 얹으면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드루는 이때 비로소 그의 눈이 이상하게 빛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익히 보아 온 그 눈.
드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짐은 취해 있다!
"이것 봐, 드루. 나는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어.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 집게손가락을 자기 관자놀이에 가져갔다.
"약간 시간이 걸렸지만‥‥ 그리고 술도 조금."
드루는 다리가 휘청거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목이 타서 몇 번이나 침을 삼키려 했다. 드디어 그가 알아차린 것이다!
"녀석은 정말 지독한 놈이지?"
드루는 그 말의 뜻을 잘 알 수 없었다.
"네? 무슨 뜻이죠?"
"나는 말이지."
그는 크게 손을 내저으며 말을 계속했다
"드루가 내게서 도망치기 위해 그를 이용하는 줄 알았어.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정말 웃기는 일이었어. 사실은 녀석이 드루를 이용했던 거야. 단 2주일 동안이지만, 결혼한 체하고‥‥. 사실 처음에는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거든."
짐은 머리를 흔들며 크게 웃었다.
"공산당 친구들도 귀찮아서 녀석을 보내 버렸던 거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짐, 당신은 롤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마르카스라는 여자에게 의외로 냉정한 것을 보고 짐작했어야 하는 건데."
"뭐라고요? 하지만 당신 이야기로는‥‥."
짐이 의자를 돌아 그녀에게 가까이 왔다.
"암, 놈이 그녀에게 사족을 못 쓴다고 했지."
이마를 짚고 있던 드루의 손을 짐이 붙들었다.
"그녀는 마치 고양이처럼 녀석에게 매달리는 것이었어. 하지만 놈은 그 유혹에 말려들지 않았어. 바보 같은 사나이지."
짐은 한 손으로 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착한 드루, 녀석의 비밀을 지켜 주기 위해 옷을 벗었었지?"
짐이 비웃듯이 말했다.
"대단한 경험이었겠군‥‥ 불감증인 여자와 동성연애에 빠진 녀석의!"
번쩍번쩍 빛나는 짐의 눈.
"무심코 지나쳤었지‥‥ 침실에도 따로 불이 켜져 있을 정도니까."
드루는 화가 나서 손목을 힘껏 비틀어 뺐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더 이상 말할 생각도 없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드루는 히스테릭해지는 목소리를 애써 눌러 참았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드루는 겨우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의 어디가 잘났다고 생각하세요? 롤프에 비하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의아해하는 짐의 눈.
"그럼, 녀석이 동성연애자가 아니란 말인가?"
드루는 잠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빈정대는 웃음을 띠었다.
"그것과는 정반대예요."
짐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그녀의 팔을 힘껏 비틀었다.
"사랑한다는 말이야?"
갑자기 드루는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이 아픔은 짐이 무서웠기 때문은 아니었다. 드루는 눈물을 참았다. 드루는 얼굴을 들어 타는 듯한 짐의 얼굴을 보았다.
"어서 말해! 제기랄, 사랑하고 있나?"
그는 드루의 어깨를 붙들고 마구 흔들었다.
"제기랄! 사랑하는군 그래!"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진심이 드루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네, 그래요! 사랑하고 있어요!"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
짐의 울부짖는 듯한 소리.
"바보 같으니라고! 이용당한 것도 부족해서 희롱까지 당하다니!"
짐은 드루의 턱에 손을 대고 머리를 쳐들게 했다. 눈물로 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녀석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이제 무엇이 남았다는 거야?"
짐이 그녀의 턱을 더 쳐들었다. 드루는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어서 말해! 무엇이 남았어?‥‥ 나밖에 없을 텐데!"
드루는 공포와 아픔으로 입도 열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따귀를 갈겼다.
"이 불감증에 걸린 계집이!"
귓전에 짐의 욕지거리가 들렸다. 드루는 마루에 쓰러지고 말았다. 머리를 들자 짐이 주먹을휘두르고 있었다.
"녀석이 너를 차지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내 몫을 찾겠어!"
짐이 달려들어 벨트에 손을 대려 했다. 드루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지키려 했다.
그때 갑자기 짐의 몸이 공중으로 뜨더니, 드루의 눈앞에 있는 문에 내동댕이쳐졌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머리를 들어 보니, 태양에 빛나는 바이에른의 산처럼 롤프가 버티고 서 있었다.
긴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올려 주면서 롤프가 다정하게 물었다.
"괜찮아?" 아직 믿을 수 없었다. 드루는 머리를 끄떡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좋아." 그는 안심한 듯 빙그레 웃었다.
"경찰에 연락해." 그는 드루 곁을 떠나, 정신을 잃고 있는 짐을 벽에 밀어붙였다.
드루가 말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정말이세요? 그러니까‥‥ 경찰에 전화를 하라는 말인가요?"
"응, 당장에." 그는 분노를 참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면서 짐을 노려보았다.
"짐!" 날카로운 롤프의 음성이 들렸다.
"당신은 이제 끝장이야. 강간 미수로 경찰에 끌고 가겠어. 알았어?"
멱살을 잡힌 짐의 얼굴은 백짓장같이 창백했다. 입만 우물거릴 뿐 말도 하지 못했다. 크게 뜬 그의 눈. 그러나 겨우 뺨의 근육을 꿈틀 움직였다.
"좋아, 그럼 밖에서 경찰을 기다리기로 할까." 롤프가 말했다.
롤프에게 끌려 나가며 계단을 굴러 떨어지는 짐의 비통한 절규가 들려왔다.
드루는 혼자 망연히 앉아 있었다. 무척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처음 들린 것은 사이렌 소리, 이어서 사람들의 말소리, 그러고는 정적. 문득 눈을 들었다. 입구에 롤프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왔다.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 그는 드루의 눈을 자세히 바라보며 마를 이었다.
"내일 경찰에 갈 수 있겠어?" 드루는 아직 공포에서 깨어나지 못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어깨를 들먹이고 고개를 돌렸다.
"경찰에 부탁하는 것이 결국은 최선의 길이지."
롤프는 손끝으로 그녀의 뺨에 생긴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얼음찔질을 하는 것이 좋겠군." 그는 주방에서 얼음과 타월을 가져왔다.
"자아." 하면서 그는 타월에 싼 얼음을 내밀었다. 드루는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무릎에 눈을 떨구었다. "미안해, 드루."
롤프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드루는 타월을 얼굴로 가져갔다.
"당신 탓이 아니에요." 롤프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드루의 턱에 손을 대고 얼굴을 쳐들었다.
"오베르안메르가우에서 갑자기 드루를 두고 떠나야 했던 일을 사과하는 거야. 더구나 설명할 시간도 없었으니." 다정하게 드루를 바라보는 벨벳과도 같은 갈색 눈동자.
"좀 더 일찍 도와주었어야 하는 건데, 들어오기 전에 문을 부수어야 했기 때문에."
드루는 문을 바라보았다. 손잡이 부분이 부서져 있었다.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마침 드루가 쓰러져 있을 때라서."
그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정말 미안하게 됐어." 드루는 그의 주먹에 손을 얹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덕택에 목숨을 구했어요. 평생 잊지 않겠어요. 그 사람, 오래 전부터 머리가 좀 이상했어요. 이제 그 일은 잊으세요." 그러고는 좀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당신이?" 굳었던 그의 표정이 차차 부드러워졌다.
"장관의 배려로 직원을 시켜 이리 데려다 주라고 하더군, 부인한테 돌아가라고 하면서."
"아아‥‥ 그랬었군요." 드루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스스로 여기 왔다면 얼마나 기쁠 것인가.
"당신은 지금도 내 아내지?" 드루는 대답할 바를 몰랐다. 왜 좀 더 일찍 이혼 수속을 밟지 못했을까? 어째서 ‘아니에요, 이미 당신의 아내가 아니에요.’ 하면서 그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롤프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타월의 얼음이 마루에 떨어졌다. 드루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재빨리 계단으로 다가가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아까 짐과 나눈 이야기를 다 들었나요?" 드루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모두 들었지." 그러고 보니 롤프는 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드루의 허리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드루는 나를 사랑하고 있어." 몸을 쪼개는 듯한 아픔. 드루는 끝까지 부정했다.
"아니에요! 거짓말이었어요, 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롤프는 그 타는 듯한 눈으로 드루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상처 입은 드루의 뺨에 깃털 같은 감촉의 입술이 와 닿았다.
롤프의 가슴에 댄 드루의 주먹이 서서히 펴졌다. 그녀는 흐느껴 울면서 냉정해지려고 했다. 그러나 몸이 롤프를 원하고 있었다.
입술을 가까이하면서 롤프가 속삭였다.
"지금 한 말은 거짓말이라고 말해 줘." 드루가 그의 가슴을 떠밀며 외쳤다.
"짐의 말이 옳아요! 나를 이용한 것이죠?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빼앗아 내게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내 자존심까지 요구하는 것인가요?" 드루는 필사적으로 롤프를 떼밀고 있었다.
"부탁이에요. 잠자코 나가 주세요." 롤프가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겨우 자유롭게 되었다. 드루는 어깨로 숨을 쉬며 그에게서 홱 등을 돌렸다. 그의 처절한 음성이 들렸다.
"나가겠어, 드루. 하지만 그 전에, 드루에게 주기 위해 2주일 동안이나 갖고 다니던 물건을 건네겠어." 정적만이 감돌았다. 침묵을 견디는 일에는 롤프가 더 능숙했다. 드루는 각오를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네?" 롤프는 드루의 눈동자를 바라본 채 코우트 안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는 이것을 손바닥에 얹어 드루에게 내밀었다.
"그 날 아침 혼자 나간 것도 이것 때문이었어. 내가 드루에게 주는, 드루만의 것이야."
드루의 마음이 흔들렸다. 작은 상자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롤프가 상자를 열고 가까이 와서 안에 든 것을 꺼내 보여 주었다. 드루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아‥‥ 반지!" 그의 음성이 드루의 귓전에서 약간 떨렸다.
"오베르안메르가우에서 특별히 주문한 것이지, 회의가 끝나던 날에 완성되었어."
롤프는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더니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그러고는 드루의 머리에 입술을 댔다.
"다시 한번 묻겠어, 지금도 내 아내인가?" "아아, 내일‥‥ 이혼 수속을‥‥."
드루는 몸을 떨면서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안 돼!" 그는 드루의 떨리는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드루," 그 음성은 진지했다. "드루가 없는 자유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 드루의 턱에 닿는 롤프의 손끝이, 영원한 사랑의 심벌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고개를 들게 했다.
"사랑해‥‥ 줄곧 사랑해 왔어." 쉰 목소리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드루의 손을 입술에 대고 그가 속삭였다.
"영원히." 롤프는 그녀의 손에 정열적으로 키스를 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날 아침 기차에서 깨달았어." "그렇다면 어째서‥‥?"
"왜 말하지 않았느냐는 말이군." 롤프가 숨을 내쉬었다. 갈색 눈이 빛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면 믿었겠나?" 드루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그렇군요. 믿지 않았을 거예요." 롤프가 빙그레 웃었다.
"믿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오해도 풀어야 했지."
그는 머리를 숙여 그녀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키스했다.
"믿을 수 있겠나, 지금의 나를?" 롤프의 아내‥‥ 그녀의 머리에는 지금 그 생각밖에 없었다. 드루는 롤프의 목을 끌어안았다.
"네, 믿어요." 굶주린 듯한 롤프의 입술, 드루도 필사적으로 이에 응했다. 롤프의 뜨거운 입술이 드디어 드루의 가슴으로 옮겨갔다. 드루는 한숨을 쉬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정말 기뻐요." 자기 말에 그녀는 명랑하게 웃었다.
"피버디씨를 실망시키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그분, 참 좋은 분이에요‥‥ 로맨티스트이고." 롤프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두 팔로 감쌌다.
"이럴 때 목사님 생각을 하고있나?" 드루가 미소를 되돌렸다.
"그리고 사무실 여자들도 여간 아니에요. 이 가운은 그녀들이 선물한 거예요."
드루가 장난스럽게 롤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요, 잠자코 있는 것을 보니."
롤프는 무슨 중요한 말을 들은 것처럼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연한 그린색 천에 감싸인 드루의 날씬한 몸매에 눈길을 보냈다. 그는 진지한 체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입이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드루에게는 선물이겠지만 내게는 단순한 포장지에 지나지 않아." 롤프는 드루를 안고 한바퀴 빙글 돌았다. 두 사람은 함께 소리내어 웃었다. 롤프가 이층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위는?" 드루는 방긋 웃으며 롤프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내 침실이에요." "달리 잘 만한 곳은?" 드루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군요‥‥ 더구나 침대고 하나뿐이에요." 롤프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자기는 정말 사랑하고 있다, 그것을 드루에게 알리고 싶다 이런 표정이었다.
"침대도 하나라고?" 약간 잠긴 목소리였다. "그것, 정말 유감이로군."
드루는 머리를 쳐들고, 이층으로 올라가려는 롤프의 턱에 재빨리 키스했다.
14
"굿모닝!" 바람처럼 들어온 것은 비벌리 애트킨스였다. 겨드랑이에 큰 파일을 끼고 있었다. "이야기 할 것은 단 두 가지." 그녀는 큰 눈을 빛내며 말했다.
드루는 타이프라이터의 스위치를 끄고 비벌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첫째는 일러스트가 끝났다는 것일 테지만, 둘째는 뭐지?"
비벌리는 파일을 책상에 내려놓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니야. 이것은 둘째 번이야." 짧게 컬한 머리를 파일 쪽으로 기울였다.
"첫째는 놀라운 소식이야." 비벌리는 그러면서 책상에 걸터앉았다.
드루는 의자에 고쳐 앉고 격자무늬 베스트에 팔짱을 꼈다.
"뭘까?" "우선" 비벌리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것을 보여 주고 싶어 결혼반지야." "어마." 드루가 친구의 왼손을 보았다. 그러나 반지 같은 것은 어느 손가락에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비벌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도 잠자코 있었다. 마침내 비벌 리가 깔깔 웃었다.
"지금은 이 손가락에 있는 셈 치고 있어." 마치 실제로 반지를 보이듯 손가락을 펴보였다. "톰에게 프로포즈를 받았어. 반지는 알바카키에 특별히 주문해 놓았다."
드루가 애교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겠어." "응, 다이아몬드가 스무 개나 되는데, 10자 모양으로 박았어. 모두 3캐럿 정도는 될 거야." "놀랍구나." 그러나 드루는 그녀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비벌리는 시치미를 떼고 고쳐 앉았다.
"10의 뜻은 알고 있지? 완전이라는 의미야." 이렇게 말하고 방긋 웃었다.
드루는 고개를 흔들며 입술을 오므렸다.
"응, 그래.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모를 것이 있어."
비벌 리가 일어서며 스모크 포킷에 손을 넣었다. 청 높은 웃음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역시 말려들지 않는군." 그녀는 다이아몬드가 하나 동그마니 박힌 반지를 꺼냈다.
"깜짝 놀랄 줄 알았었는데." 드루가 명랑하게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정말 어이없는 아가씨로구나." 이렇게 말하고 반지를 손에 들었다.
"축하해! 정말 아름다워." "조그마한 거야. 하지만 내력이 있어. 톰이 아주 좋아하는 할머니가 준 것이래." 비벌리는 드루한테서 반지를 받아 왼손 약손가락에 끼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좀 더 큰 것으로 바꾸겠어." 그녀는 왼손을 책상 위에 있는 라이트에 비쳤다. "불쌍한 반지. 허니문이 끝나고 일주일밖에 생명이 없으니."
드루는 옷걸이 옆으로 가서 흰 카디건을 내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비벌리, 전혀 그럴 마음은 없겠지? 안 돼, 톰한테 받은 그 반지를 결코 없애 버리면 안 돼." 그러고는 카디건에 팔을 꿰며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그러고 있더니, 크고 검은 눈을 빛내며 드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알았어. 그러면 이 반지에 6개월, 아니 1년 동안의 유예를 주겠어."
그러면서 가만히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은 즐겁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비벌리가 드루의 곁에 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음주 토요일에 톰의 집에서 간소하게 식을 올리기로 했어. 들러리를 부탁해도 좋을까?" 드루는 상대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물론이야." 약간 떨리는 목소리였다.
"자아, 이제 난 아버지 손에서 롤프를 구출하러 가야겠어. 아니면 두 사람이 철야라도 할거야." 비벌리가 깔깔 웃었다. 다시 명랑한 처녀로 돌아간 것이다.
"롤프는 요즘 어떻지?" 방을 나가면서 드루가 말했다.
"잘 되어 가고 있어. 특별 연구원이니까 자유스러운 모양이야."
비벌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일 이외에 다른 것을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어."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갔다. 드루는 싸늘한 가을바람에 카디건의 단추를 잠그면서 명랑하게 말했다.
"하지만 철야하기보다는 나하고 집에 돌아가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비벌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게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도 머리만 쓴다면… 말도 안 돼! 집에 있는 시간이 좀 더 길면…." 여기서 그녀는 말을 끊었다. 아기가 생겨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말을 하려던 것 같았다.
"저어, 한가지 묻겠는데…." 드루는 웃으면서 그녀를 디자인과의 방으로 밀어 넣었다.
거대한 토카마크 연구소는 대낮같이 밝았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드루가 겨우 가드맨인 헌크를 발견했다.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남편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드루는 소리 나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롤프, 더더구나 냉각 수소 문제도 있고 해서…."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도 키가 큰 편이었으나, 롤프에 비하면 초라해 보였다. 롤프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초음속 가스 제트 속에서 가속된 수소 얼음 입자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매켄너 박사가 머리를 긁었다.
"음… 실험해 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군." 드루는 조용히 다가갔으나, 타일 위에 하이힐 소리가 울려 두 사람은 이야기를 그치고 고개를 들었다.
롤프가 웃으며 알은 체했다. "수고 많으시군요." 드루도 마주 웃었다.
박사가 머리 위로 안경을 치켜올렸다.
"아, 너로구나." "아빠." 드루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롤프의 손을 잡았다.
"여섯 시예요.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하지 않아요?" 박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배가 고파 못 견디겠습니다." 롤프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 우리와 같이 식사나 하시지요." "아니…."
"약속하겠습니다. 같이 가시면 제 이론을 납득하실 때까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그것은 뇌물에 속해." 화난 듯한 목소리였으나 박사의 눈은 웃고 있었다. 드루가 운전하는 차안에서도 그들은 실험 방법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드루는 차를 세우고, 먼저 내린 두 사람을 따라갔다. 아버지는 아직도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유해한 부작용 등은?" 롤프가 문을 열고 드루를 대신하여 포치의 불을 켰다. 그러고 아버지를 안으로 맞아들였다. 드루는 계단을 올라가려다가 우편함에 꽂힌 편지를 발견했다. 그녀는 숨을 죽였다. 짐의 편지였다. 그의 필적임에 틀림없다.
롤프가 그녀의 이런 기색을 느끼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왜 그러지?" "먼저 들어가세요."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롤프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뜻을 굳히고 말했다.
"일분 이상 지체하면 안 돼."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드루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짐에게서 연락이 있은 지 3개월만의 일이었다. 폭행죄로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그대로 캘리포니아에서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시 연락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드루는 문에 기대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드루에게.
괴로운 일이지만 한마디하지 않을 수가 없소. 드루에게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나는 지금 치료를 받고 있는데, 겨우 내 문제를 알게 된 듯 싶어. 롤프에게도 전해 줘, 그를 원망하지는 않는다고, 언젠가 그가 용서해 준다면 고맙게 여기겠어.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가 경찰에 알린 것은 잘한 일 같아. 쓰라린 경험이었지만, 새 출발의 계기가 되었으니까. 앞으론 절대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도 좋아. 이젠 두 번 다시 편지하는 일도 없을 거야. 드루, 나한테서 얻지 못했던 행복한 생활을 롤프와 함께 쌓아올리기를 충심으로 빌겠어.>
서명은 단지 <짐>이라고만 되어 있었다.
편지를 읽는 도안 드루는 울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눈물을 닦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 체증이 뚫린 듯한 느낌에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와 롤프는 희고 작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드루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으나, 남편의 큰 몸집이 금세라도 굴러 떨어질 듯한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띠었다. 실내의 배색을 고려해서 정성껏 선택한 쿠션도 커피 테이블 옆의 융단 위에 떨어져 있었다. 문을 닫고 들어가도 그들은 여전히 실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구조 합금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라즈마의 순도를 높이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그치고 롤프는 입구 쪽을 걱정스러운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드루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기쁜 소식이에요. 나중에 이야기하겠어요." 주방으로 향하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곧 식사 준비를 하겠어요." 롤프가 끄덕였으나 드루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매켄너 박사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운 생각이군! 내일부터 곧 그 선에서 시작해 보기로 하세!"
드루는 혼자 웃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들어간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어.
"스프가 다 끓었어요." 드루가 말했다. "저런." 롤프가 몸을 일으켰다.
"평소와 다른 냄새로군." 드루는 웃고 말았다. 그날 아침, 동독에서 그가 이 수프를 끓여 주었을 때 자기도 같은 말을 했었다. 드루도 짐짓 그때 롤프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맛은 내가 보증하겠어요." R런 사연이 있는 줄을 모르는 아버지도 따라 일어섰다.
"드루, 도대체 이게 뭐냐?" 드루가 세 사람의 접시에 진한 수프를 따랐다.
"소시지가 든 양배추 수프예요. 몸에 좋아요. 제 생명을 구해 준 것이기도 해요."
"나도 네 어머니의 치킨 수프로 몇 번이나 생명을 건졌었지."
아버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롤프가 드루의 의자를 당겨 주면서 말했다.
"그런 수프라면 종류가 많을수록 좋겠군요." 매켄너 박사는 수프를 한 숟가락 떠 마시고는 곧 실험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아까 그 합금 이야기말인데…."
드루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마음속으로 씁쓸히 웃고 있었다. 물리학 공부를 한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그 덕택에 지금 눈앞에서 두 사람이 하고 있는 이야기도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한없이 이런 이야기가 계속될 것이다.
"오늘 밤은 정말…." 아버지의 말에 드루는 문득 현실로 돌아왔다. 드루는 눈을 깜빡이고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테이블 중앙에 있는 난을 보고 있었다. "너도 네 어머니를 닮아 가고 있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가 계속 말했다.
"네 어머니는 대단한 사람이었지." "어머니도?" 드루는 가슴이 벅차 아무말도 못하고 오직 행복감에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9월의 마지막 토요일, 드루는 톰의 집에서 행해진 조촐한 결혼식에서 비벌리의 들러리를 섰다. 그날 저녁에 롤프와 드루는 t로 매입한 땅을 보러 가기로 되어 있었다.
드루는 약 30분 동안, 주위를 산책하며 소나무와 흙내음을 가슴 가득히 들이마시고 밋밋한 경사지를 천천히 올라갔다. 마른 나뭇잎을 밝을 땜다 바스락거리는 상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가까이 오는 롤프를 쳐다보고 있었다. 롤프의 미소 띤 얼굴은 언제 보아도 숨을 죽일만큼 매력적이었다. 드루는 일어서서 심호흡을 하며 가슴의 동요를 진정시켰다. 로스아라모스에 불어오는 가을 특유의 상쾌한 북풍. 가까이에서 살랑거리는 나뭇가지 소리와 함께 롤프의 부츠 소리가 들려왔다.
드루는 소나무에 기대어 그를 기다렸다. 롤프의 손이 뻗쳐 와, 그녀는 어느새 소나무를 떠나 그의 억센 팔에 안겼다. 코튼 터틀넥이 뺨에 부드러웠다.
"좋은 곳이야." 롤프가 말했다. 드루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웃옷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의 고동을 들었다. 다시 북풍이 머리 위를 쓸쓸히 스쳐 갔다. 살을 찌르는 냉기. 금년에는 겨울이 일찍 올 듯싶었다. 드루가 떨자 롤프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이제 돌아갈까?" 드루는 고개를 들고 꿈꾸듯이 미소 지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그녀는 롤프의 턱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갔다.
"지금 주방에서 당신에게 안겨 있어요." 롤프의 입술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두 사람의 몸 속에 갑자기 뜨거운 정열이 솟아올랐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입술을 격렬히 요구했다.
북풍이 다시 한번 불자 더욱 추웠다. 롤프가 주저하며 입술을 떼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여기가 우리 집이라 생각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집이 서려면 내년 봄까지 기다려야 해. 그때까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지."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눈이 내릴 것 같군." 드루는 그의 우람한 가슴에 포근히 안긴 채 한숨을 쉬었다.
"눈…." 그녀는 롤프를 꼭 안고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나는 눈이 좋아요… 특히 며칠씩이나 내리는 눈보라가." 드루는 롤프가 가만히 웃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싸늘한 드루의 손을 포근히 감쌌다.
"자아." 두 사람은 로스아라모스로 통하는 좁고 완만한 언덕길을 손을 잡고 내려갔다.
세워 둔 은빛 자동차가 있는 데까지 오자, 드루는 운전석에서 집의 설계도를 꺼냈다.
"드루, 날씨가 싸늘하니까…." 그녀는 롤프의 걱정스러워하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을 에는 듯한 바람 속에서 설계도를 펼쳐 들고 들여다보았다.
"멋져요, 롤프!" 두 사람의 꿈은, 주위의 자연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집을 짓는 것이었다-돌과 삼나무를 사용한 전통적인 이층집, 소박한 민가의 취향이 감도는 외관. 도면상으로는 그 주위가 모두 숲으로 되어 있었다. 일층은 거실과 식당과 응접실. 들보가 드러나 있는 천장에는 채광을 위해 천창을 내게 되어 있었다.
소나무 판자를 댄 벽에는,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가볍게 도장한다. 큰 난로는 롤프가 직접 설계한 것으로서, 자연석으로 만들기로 했다.
이층에는 넓은 침실이 네 개. 두 사람의 방에는 창틀을 빨갛게 칠한 창문이 있어, 멀리 생글레 데 크리스트 산맥과, 빨갛게 타는 일몰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제일 드루의 마음에 드는 곳은 좀 더 작은 곳이었다. 양쪽 끝에 있는 선룸-두 사람이 <난의 방>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드루는 방긋 웃었다. 이 방에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핑크와 흰 가구를 모두 들여놓는다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드루는 도면을 둘둘 말아 둥근 통에 넣었다.
"집 문제가 잘 해결되어 다행이지요, 롤프?" "정말 다행이야." 그는 드루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차 뒤로 돌아갔다. "자, 더 싸늘해지기 전에 어서 타."
그는 문을 열고 드루가 차에 타도록 도와주었다.
드루는 롤프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의미있는 미소를 띠었다.
"롤프, 잊었나요? 당신과 결혼하면 누구든지 싸늘해질 수 없어요."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제 내 희망은 하나밖에 없어." 드루가 농담으로 물었다.
"내 가구를 <난의 방>에 몰아넣고 그 대신 좀 더 큰 소파를 사고 싶은 거죠?"
롤프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렇지 않아. 빈 침실은 귀여운 미국 시민으로 가득 채우고 싶어. 내가 이 나라에 더욱 튼튼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그의 다정하고도 진지한 표정에 드루는 가슴이 z뜨거워졌다. 그는 지금까지 한번도 어린아이 얘기를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드루는 당황하면서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어린아이? 당신과 나의?" 롤프가 머리를 숙여 얼굴만 차안으로 들이밀었다.
"응, 당신과 나의." 그러면서 드루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왜, 놀랐나!" 드루는 롤프의 목을 안고 매끄러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면서 조용히 말했다.
"아뇨, 기뻐요." 드루의 몸이 좌우로 흔들릴 때마다 가만히 닿곤 하는 두 사람의 입술. 한없이 다정하고 달콤한 그 입맞춤. 이윽고 롤프의 뜨거운 입술이 드루의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롤프가 잠긴 목소리로 드루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부드러운 목덜미에 뜨거운 입술을 밀어붙였다. 떨리는 드루의 입술. 드루는 롤프의 애무를 받으면서 멍해져 가는 머리로 생각했다. 지금 그만두지 않으면 아주 참지 못하게 된다. 막 내리기 시작한 눈 속에서, 이 눈을 녹여 없앨 정도로 뜨겁게 타고 말 것이다.
드루는 겨우 롤프의 가슴에 손을 대고 몸을 떼었다. 크게 숨을 쉬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눈을 뜨자, 롤프의 당황해 하는 얼굴이 있었다.
"왜 그러지?" 쉰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드루가 머리를 들었다. 의아해 하는 롤프의 눈. 그에 대해 자기는 말할 수 없이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발견은 드루에게는 무엇보다도 큰 놀람이었다. 무쇠와 같은 의지를 가진, 또 그토록 냉정한 롤프 에아하르트인데도 그렇다.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연출하는 역할에 따라 감정까지도 훌륭히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지금의 롤프는 전혀 연기를 하고 있지 않다. 그 갈색 눈동자 속에는 인간다운 연약함이 드러나 있다. 드루와 마찬가지로 롤프도 미칠 듯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드루가 롤프를 필요로 하고 있듯이, 그도 격렬하게 원하고 있다. 이것을 깨달은 드루의 마음은 한없는 감동을 느꼈다. 이 사람밖에 없다-롤프야말로 내 자식의 아버지가 될 사람이다.
드루는 장난스럽게 눈으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간단한 실험을 해보았어요." 그녀는 롤프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의 촉촉하고 따스한 눈동자를 대담하게 들여다보았다.
"무슨 실험?" 어두운 표정이 눈처럼 스러지고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핵융합 연구를 하고 있는 박사는 몇 분 이상이 되어야 타오르는가 하는 실험이에요."
그가 즐거운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무엇을 발견했나?" 대답하는 드루의 목소리도 역시 쉬어 있었다.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관찰이." 롤프의 뜨거운 시선이 드루의 얼굴에 쏟아졌다.
"우연이로군, 연구는 내 전문인데." 밝은 웃음소리가 드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롤프의 얼굴을 바라보고 다시 그 위를 쳐다보자 밤의 장막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깃털과 같이 흰 눈이 숲속의 대지에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드루는 롤프의 널찍한 등에 팔을 돌리고 그의 귓전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이번 겨울의 첫눈은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롤프의 귓불을 가만히 깨물며 속삭였다.
"네, 그것을 알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