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가을 빗소리
가을에
간염(肝炎) 백신
갈대
감기
감자를 캐며
감전
강물
강물은 또 그렇게
강물은 몇천 리
강변에서
강의실
갖가지다
개나리꽃
개화
겨우살이
겨울 길
겨울 노래
겨울 들녘에 서서
겨울 바다
겨울밤
겨울밤에
겨울 아침
겨울의 끝
겨울 일기(日記)
겨울 한나절
경건
고드름
고해성사
고향
과일
구룡사 시편 전사(龜龍寺 詩篇 前詞)
구룡사 시편 전사(龜龍寺 詩篇 前詞) - 속편
구름
구절초
국화꽃
굽이굽이 계곡을 돌면
그 길을 따라
그 도요새는 어디로 갔을까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더냐
그릇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이 그리워
그리움에 지치거든
그 무엇
그 사람
금강산
급류
기다림
기러기 행군
기침
길을 잃었습니다
깨달음
꽃
꽃밭
꽃밭 풍경
꽃불
꽃잎
꽃잎 소리
꽃 타령
꽃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서 - 살구꽃
꽃 피리
꿈
꿈꾸는 나비
꿈꾸는 랩송
꿈꾸는 병(病)
꿈꾸는 악기
나는 누구?
나를 지우고
나무
나무처럼
나비
나이가 몇 살?
나파의 와인은 쓰다고 하더라
나팔꽃
낙엽(落葉)
낙타
낙하
낙화(洛花)
난 또 어디로
난을 기르며
날개
낭독(朗讀)
낮잠
내 안의 당신
너를 보았다
너를 찾는다
너무나 심심해 죽겠나 보다
너, 없음으로
너의 목소리
노여움이 가시면 슬픔이 있듯
노역
논
누가
눈
눈물
눈 발자국
눈빛
눈사람
눈 오는 소리
눈 온 날
능소화
님은 가시고
다랭이 논
단풍 숲속을 가며
달관(達觀)
담
당신의 피리
대관령에 올라
대양
더불어 살자
도시의 여자
독도
돈
돌
돌 미륵(彌勒)
동백꽃
들꽃
등불
등산
딸에게
떡갈잎 흔드는 저 바람이
뚱보의 나라
뜨락
라일락 그늘 아래서
라스베가스로
랩송의 철학
랭군을 넘어서
러브 콜(Love call)
마라톤
마리화나
막다른 곳에서
만리장성
말의 칼
매장(埋葬)
매화꽃 피어 봄이라는데
먹물 장삼
먼 그대
먼 하늘
먼 후일
멀리서
메이 아이 헬프 유?
메일 박스
모래
모순의 흙
목걸이
목성이나 토성엔
못
무궁화
무명연시(無明戀詩)
무엇을 쓸까
문밖에서
물의 사랑
미국의 대학에서 가르친 이상의 ‘날개’
미명(未明)
바닷가
바람 소리
바람의 노래
바람 잦는 날
바위
바위는 무엇하러
밤비
밤에 호올로
밤 10시 - 딸에게
백담사 시편
백두산
백두산에 올라
법에 대하여
벚꽃
베롱꽃
베샴을 지나며
별
별 밭
별처럼 꽃처럼
별 하나
병(病)
보리가 저렇게
보석(寶石)
본느 빌에서
봄
봄날
봄날에
봄비
봄은 도둑처럼
봄은 무엇 하러 오는가
봄은 바이러스처럼
봄은 전쟁처럼
봄이 온다는 것은
부끄러움
부음(訃音)
북양항로(北洋航路)
분수
불
불면(不眠)
붓은 사람일지니
브루클린 가는 길
블루스
빗속을 걸으며
사고(事故)
사람
사람 인(人)
사랑
사랑의 고통
사랑의 묘약
사랑의 방식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사막
사이버 사랑
산다는 것은
산문(山問)에 기대어
산불
산사태
산의 잠
살아있는 흙
삶
상처
상춘(賞春)
새
새벽
새해 새날은
새해 아침
샐러드를 먹으며
생이란
서산마애삼존불
서울은 불바다
석류꽃
설날
설화(雪花)
섬
성불(成佛)
성조기
세상은
소
소금
소나기
소백산
소월을 강의하며
속 구룡사 시편
쇠붙이의 덧없는 종말을
쇠붙이의 영혼
수(sue)
수부(水夫)
수좌(首座)
술
술잔
숲속에서
스스로
슬픔
승부
시뮬레이션
시인
시 한 줄
신념
신발 한 짝
신(神)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실크로드
심야
아득히
아름다운 암흑
아마나에서
아아, 훈민정음
아, 오클라호마
아이스 워터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아침
아, 타클라마칸
악기(樂器)
안개꽃
애본에서
애쉴랜드에서
앰 트랙을 타고
양귀비꽃
양귀비 빛
어떤 기도
어떤 날
어머니
어이할거나
어제 반짝이던 별들이
언어
언제인가 한번은
에너렉시아
여름밤
여름 산
여윈 손
역두에서
연
연기
연꽃
열매
영원
영혼의 거처
오아시스 모텔에서 하룻밤을
오 제이 심슨
오체투지
옹테마 아디사
와일드 마가릿따
왜 시가 망했는지 알겠다
왜 콜라를 마시는 것일까
외투
욕정
용접
우렛소리
우리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다
우화(羽化)
울음
원시(遠視)
유나봄버
유레카에서
은산철벽(銀山鐵壁)
은어 떼
은하수
음악
의상대
이 그리움
이념
이데올로기
이름도 알 수 없고
이메일
이별
이별의 날에
이별의 말
이별이 가슴 아픈 까닭
이별이란
이별 후
이슬
인간
인간의 소리
일몰(日沒)
일, 시인(詩人)의 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자궁(子宮)
자글로트
자화상
장미
장작을 패며
저울
적막
적의(敵意)
정사(情事)
정좌(正坐)
젖은 눈
제비꽃
제자리
조춘
종이컵의 사랑
주민등록번호
죽은 자와 함께 산다
죽음의 노래
지구는 아름답다
지리산
지상의 꽃
지상의 양식
직선은 곡선보다 아름답다
진달래꽃
진실
질그릇
집
집만이 집이 아니고
짓거리
찔레꽃
착한 소
찰라빠또 지나며
찰칵
찻잔
책장을 넘기며
천년의 잠
천문대
철교
철쭉
첫사랑
체크
초록별
촛불
추전역
축대
축제
출옥
카레이스키 김치 – 알마티의 재래시장에서
커피
컵라면
크레슨트 시티
타종(打鐘)
탁란(托卵)
태백산
텅 빈 나
텔레그라프
토요일 오후
투손에서
트와일라잇 존
티비
파도
파도는
파시즘
팻
팽이
페스티사이드
편지
편지의 노래
포스트 모던 포엠
폭포
표절
푸르른 슬픔
푸르른 하늘을 위하여
푸른 스커트의 지퍼
풍경
프렌드
프렌치 쿼터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피리
피항(避港)
하나의 별
하늘로 흐르는 물
하늘의 시
한니발에서
한라산
한밤중 책을 읽다가
한세상
한 알의 밀알
한 줄의 시
항구 난트켓
해바라기꽃
해킹
햄버거를 먹으며
향기
향기로운 꽃
허술
허스트 캐슬
호미
홈페이지
화약
황홀
후회
휴대폰
흐린 눈
흙의 얼음
힘
힙합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9자를 손에 들고
10월
11월
12월
80번 프리웨이
가을
오세영
2
우리 모두
10월(月)의 능금이 되게 하소서.
사과 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그 햇살로 출렁대는 아아 남국의 바람.
어머니는 입김 같은 바람이게 하옵소서.
여름내 근면했던 원정(園丁)은
빈 가슴에 낙엽을 받으면서, 짐을 꾸리고
우리의 가련한 소망이 능금처럼
익어갈 때,
겨울은 숲속에서 꿈을 헐벗고 있읍니다.
어둡고 긴 밤을 위하여
어머니는 자장가를 배우고
우리들은 영혼(靈魂)의 복도에서 등불을 켜 드는 시간,
싱그런 한 알의 능금을 깨물면
한 모금, 투명한 진리(眞理)가, 아아
목숨을 적시는 은총(恩寵)의 가을.
10월(月)에는 우리 모두
능금이 되게 하소서
능금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되게 하소서.
4
가을은 안개 낀 보도의
창 너머 있다.
잠든 이웃들을 잠들게 하고
깨어난 자의 뒷덜미를 끌고 가는
어두운 손.
미로의 창틈마다 스며드는
햇살을 거두며 가을이
녹슨 수레바퀴를 굴릴 때
가을 황혼 황야에서 문득 마주치는 나의 그림자.
가을은 먼 항해에서 돌아온 선원의,
파이프 연기 속을 빠져나온다.
안개 낀 보도의 들창을 노크하고
여윈 등불 가에 퍼덕이는 영혼의 날개.
내가 가을 황혼 황야에 서서
낯선 내 그림자를 기다릴 때
먼 기억의 녹슨 수레는 온다.
내 눈에도 아득히 불은 꺼진다.
가을비 소리
오세영
바람 불자
만산홍엽(萬山紅葉), 만장(輓章)으로 펄럭인다
까만 상복(喪服)의 까마귀 떼가 와서 울고
두더쥐, 다람쥐 땅을 파는데
후두둑
관에 못질하는 가을비 소리.
가을 빗소리
오세영
한편의 교향악인가?
불어서, 두드려서, 튕겨서 혹은 비벼서
음(音)을 내는 악기들,
가을 밤비 내리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피아노를 치는 담쟁이 잎새,
실로폰을 두드리는 방울꽃,
바이올린을 켜는 구절초,
트럼펫을 부는 나팔꽃
북을 울리는 해바라기,
빛이 없는 밤에는 꽃들도 변신해 모두
악기가 된다.
비와 바람과 천둥이 함께 어우르는,
실은 신(神)이 지휘하는 자연의
대 오케스트라 연주(演奏).
낮게 혹은 높게, 작게 혹은 크게
화음(和音)을 이루는 그 아늑한 선율이여.
일상의 소음에 지친 우리를
사르르 잠들게 하는 가을 비
그 빗소리여.
가을에
오세영
너와 나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너와 나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부벼대는 살과 살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간염(肝炎) 백신
오세영
항체(抗體)를 만들려고
백신을 맞았다.
병균(病菌)은 적당히 지녀야
좋은 것,
증오(憎惡)는 적당히 키워야
좋은 것,
배신(背信)의 쓰린 아픔을
견디기 위해,
자신의 간(肝)에 입히는
상처,
병(病)은
병(病)을 사랑하는 자만이
이긴다.
오늘도 나는 배신(背信)을 맛보며
쓸쓸히 돌아서는데,
항체(抗體)가 생겼다고
맘껏
술을 들어라 한다.
증오(憎惡)를 감춘 채 잔을 권하는
손과 손.
이별을 준비하는
만남의 손.
갈대
오세영
갈대는 갈대라서
노래를 한다.
가장 외로운 한때,
가슴을 울리는 조율(調律)
미명(未明)을 지키는 한 마리 벌레,
이슬에 젖은 꽃잎,
흙 위에 떨어지는 한 줄기 달빛,
세상 모든 것은
노래를 한다.
그렇다면 갈대여,
너희들은 왜 침묵할 순
없는가,
별이 스치는 밤엔
인간(人間)도 너희처럼 노래하고 싶다.
어두운 가슴을 울리는
우주(宇宙)의 악기(樂器), 갈대여,
생각하는 갈대여.
감기
오세영
이토록 밝은 햇빛 아래서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너뿐이다.
꽃아,
설령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늘같이 눈부신 봄날엔
차마 그를
치어다볼 수 없구나.
봄이란
꽃잎으로 질 수 있는 자만이
갖는 것,
아무래도 아무래도 무슨 일이
날 것 같아
나는
푸르디 푸른 이 봄날을
꽃그늘 어리는 방 안에 누워
감기만 앓고 있을 뿐이다.
감자를 캐며
오세영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은 것의 현신(現身)은
얼마나 찬란한 경이이더냐.
음(陰) 6월, 해가 긴 날의 어느 하루를 택해
호미로 밭두렁을 허물자
우수수 쏟아지는 감자, 감자
겉으로 드러난 줄기와 잎새는
시들어 보잘것없지만
흙 속에 가려 묻혀 있던 알맹이는
튼실하고 풍만하기만 하다.
부끄러워 스스로를 감춘 그 겸손이
사철 허공에 매달려 맵시를 뽐내는
능금의 허영과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어머니.
세상이란 보이지 않는 반쪽이 외로 지고 있을지니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의 현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경이이더냐.
감전
오세영
갑자기 환하게 밝아오는 세상,
내가 너를 처음 본 그 순간이 그랬듯이
바위가
한 송이 패랭이를 꽃 피울때에도
그리하였으리라.
비, 바람과 천둥 그치고
물오른 육신에 햇살이 문득
전류처럼 흐르던 날,
감전된 바위가 이제 더 이상
무기질이 아니듯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감동없이 되는 일이란 없다.
내가 너를 처음 본 그 순간이 그랬듯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오는 이 세상,
식은 구리줄에 흐르는 일말의
뜨거운 전류.
강물
오세영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紹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강물은 또 그렇게
오세영
강물은 흘러 흘러 어디 가는가,
바람인가, 하늘인가, 꽃구름인가,
하늘은 높아 높아 그리움 되고
바다는 깊어 깊어 슬픔 되는데
흰 구름 저 멀리 무지개를 하나 걸어 놓고
강물은 울어 울어 어디 예는가,
빛 고운 슬픔 살포시 안아
조약돌로 가라앉는 그리움이여,
들녘을 헤매던 하늬바람도
해어름 모란으로 지고 있는데
강물은 흘러 흘러 어디 가는가.
지평선 넘어서 수평선으로, 수평선 넘어서 하늘 끝으로
강물은 또 그렇게 흘러가는가,
길섶에 내리는 실비같이, 눈썹에 내리는 이슬같이
목숨은 또 그렇게 흘러가는가,
강물은 몇천 리
오세영
나룻배 한 척
빈 강변 모래밭에 매여 있다.
철없는 어린것이 잠들어 있다.
보리수 그늘 아래 꽃잎 두어 닢
물결에 실려 흔들려 가고
깊은 잠 흘러흘러
귀 먼 사공은 돌아간 지 오래인데
여어이 여어이
강 건너 피안(彼岸)에선 부르는 소리
여어이 여어이
갈대밭 피안(彼岸)에선 갈바람 소리
강변에서
오세영
동트는 아침
강가에 서 보는 것은
밤새 그리움에 지쳐 떨다가
이 지상에 투신한 별 하나,
줍기 위함이지요.
그러나 강변엔
조약돌밖에 없었어요.
푸르른 한낮
강가에 서 보는 것은
가슴 깊이 차 오르는 밀물
잡을 길 없어
먼 바다에 나아가고 싶어서지요.
그러나 강변엔
삭고 있는 목선(木船)밖에 없었어요.
해 저문 저녁
강가에 서 보는 것은
바람결에 실려 와서
내 귓가에 가득히 맴도는 음성 하나,
아련히 내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강변엔
외로운 들꽃밖에 없었어요.
강의실(講義室)
오세영
시(詩)란,
빈 가지 위를 나르는 새,
추적추적
밖에는 비가 내리고,
가을비에 나무 하나 젖고,
시(詩)란
칠판(漆板)에 부스러진 백묵(白墨),
강의실(講義室) 안에도
비가 오는데
침묵처럼 강의도 비에 젖는데
밖에는 함성(喊聲)과
투(投)
석(石).
프래카드 하나 바람에 떨고,
찢긴 노트 한 권 광장에서 울고,
시(詩)란,
칠판(漆板)에 잘못 쓰인 오자(誤字).
밖에는 투석(投石)이 오가는데,
강의실(講義室) 유리창이 깨지는데,
갖가지다
오세영
갖가지다.
구멍 낸 바지로 히프를 드러낸 소녀, 미니스커트 터서 사타구니를 과시하고 걷는 아가씨, 찰싹 달라붙은 리넨 바지에 헐렁한 브래이저만을 한 숙녀, 걸레 옷을 걸친 신사, 나체에 헝겁으로 치부만을 가린 히피.
갖가지다.
코걸이를 한 아이, 귀걸이를 한 청년, 배꼽걸이를 한 숙녀, 눈썹걸이를 한 아가씨, 입술걸이를 한 여자, 유방걸이를 한 소녀, 허벅지걸이를 한 부인.
갖가지다.
스킨 헤드*, 모-혹**, 피그테일 브레이드***, 헤어 랩****, 말총머리, 변발, 반쪽머리, 더벅머리, 진홍, 진초록, 진파랑으로 물들인 헤어 다이*****.
다양도 하구나.
소비자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독특한 디자인으로 포장해서 진열한
쇼윈도의 상품들처럼
기발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저 욕망의 시장,
'Interest'란
관심을 끄는 것이 곧 돈이 되는 일이라는 뜻인데
자본주의의 개성은
남의 관심을 끌어서 자신을 팔고자 하는
상품인가,
관심을 끌지 못할 때는
대량학살의 충격도 마다 않는
유나봄버의 폭탄.
* skin head: 머리를 면도날로 밀어버린 이발
** mo-hoak: 머리카락에 무스를 발라서 송곳처럼 만들어 여러 개 세운 헤어 패션,
*** pig tail braid: 머리 전체를 밀어버리고 뒤통수의 몇 가닥 쥐꼬랑지처럼 땋아 내린 헤어 패션.
**** hair wrap: 실가지를 넣어서 머리를 땋는 것.
***** hair dye: 머리를 초록이나 빨강색 때위로 물들이는 것.
개나리꽃
오세영
"새로 오신 선생님이다"
우르르 창가로 달려가
운동장을 향해 일제히 환호하는
초등학생들
교사(校舍)는 낡았지만
소리 치는 표정들은 환하고 밝다
새 봄 되어 개학날
교실의 창틀마다 가득히 매달려
와와 손을 흔드는 저 앳된 얼굴
얼굴들
개화
오세영
늦여름밤,
뇌우를 동반한 폭우가 갑자기 쏟아지면서
창밖에
번쩍
벼락이 친다.
곤히 잠든 울목의 난초가
화들짝 놀라
눈을 치켜뜬다.
겨우살이
오세영
하늘아래 生은 별보다 아름답다
동토(凍土)에 내리지 못한 뿌리는
남의 피를 빨아먹고
눈보라에 얼어붙은 육신은
남의 체온으로 덥히었나니
가혹하게 견디어낸 지옥의 한 철,
묻지 마,
어찌해서 부지한 목숨인가를,
믿는 것은 다만 네 앞에 서있다는
그 자체,
어두울수록 빛나는 生은
아름답다.
처연하게 아름답다
겨울 길
오세영
너 어디서 걸어왔더냐.
눈 쌓인 비탈에 선
자작 한 그루,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곁눈질 한번 주지 않고
용케 예까지 걸어왔구나.
너 어디로 가는 길이더냐.
이 벼랑 건너뛰면 또 다른 벼랑,
이 봉우리 넘어서면 또
흐르는 흰 구름,
가도 가도 길은 끝이 없는데
자작나무야,
산문에 기대선 늙은 중처럼
꽃잎을 버려
잎새를 버려
너 지금 허공에 몸 기대고
있구나.
어디로 가려느냐.
어린 까치, 집 버려야 하늘 날 듯이
자작나무야.
까치 집 하나 지고 겨울나무야.
겨울 노래
오세영
1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데없고
저녁바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데없다.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종일 내리는 폭설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을 치고
오늘은 하루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2
한철을 치악에서 보냈더니라
눈덮인 묏부리를 치어다보며
그리운 이 생각않고 보냈더니라
빈가지에 홀로 앉아
하늘 문 엿보는 산까치 같이
그리운 이 생각않고 살았더니라
한철을 구룡에서 보냈더니라
대웅전 추녀끝을 치어다보며
미운이 생각않고 살았더니라
흰구름 서너짐 머리에 이고
바람 길 엿보는 풍경 같이
미운 이 생각않고 살았더니라
그렇게 한철을 보냈더니라
이마에 찬 산그늘 품고
가슴에 찬 산자락 품고
산 두릅 속 눈트는
겨울 한철을 깨어진 기와처럼
그리운 이 생각않고 살았더니라
겨울 들녘에 서서
오세영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빈 공간의 충만,
아낌 없이 주는 자의 기쁨이
거기 있다.
가을 걷이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낟알 몇 개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지상의 만남을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거기 있다
먼 별을 우러르는
둠벙의 눈빛
그리움으로 아픈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너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킨다는 것,
홀로 있음으로 오히려 더불어 있게 된 자의 성찰이
거기 있다
빈들을 쓸쓸히 지키는 논둑의 저
허수아비.
겨울 바다
오세영
눈나리는 겨울 저녁엔
밤바다가 그립습니다.
캄캄한 어둠만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다.
고독한 늑대처럼
시방 도시度市엔 일몰(日沒)이 오고
성(聖) 누가 병원(病院)의 창마다
하나씩 등불은 켜지는데,
연인(戀人)은 (戀人)이라서,
친구는 친구라서
버리고 싶은 이 순백(純白)의 시간(時間).
눈나리는 겨울 저녁엔
바닷가 외로이 깜박이는
등대가 그립습니다.
겨울밤
오세영
창 밖엔 소록소록 하얀 눈이
내리고
방안의 나는
열에 까무러치며
망연히 내 이름을 불러봅니다.
오늘같이 포근하게 추운 날에는
꿩, 비둘기, 토끼, 노루, 다람쥐들도 어디선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틀고 있겠지요,
꿩 가족은 아마 아빠가 따온 빨간
산수유 열매를,
다람쥐 가족은 아마 엄마가 물어온 노오란
도토리 열매를
도란도란 까먹고 있을지 모릅니다.
창 밖에는 하얀 눈이 소록소록
내리는데
방안에는 촛불 하나 가물가물
이우는데
땀에 혼곤히 젖은 나는 열에서 막 깨어나
가만히 내 이름을 불러봅니다.
어쩐지 당신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꿩,비둘기,토끼, 노루, 다람쥐들도 어디선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트는
겨울밤,
창 밖에는
소록소록 하얀 눈이 내리고.....
겨울밤에
오세영
밤에
등불을 밝히는 것은
더불어 눈빛을 나누고자 함이다.
사랑은 눈으로 오는 것,
어둠 속에서 보는 얼굴이 더 뚜렷하다.
존재의 거리를 좁히는
그 빛,
밤이 오면
램프에
불 밝힐 수 있어 좋다.
겨울에 난로를 지피는 것은
더불어 체온을 나누고자 함이다.
사랑은 가슴으로 오는 것,
추위 속에서 마주잡는 손이
더 따뜻하다.
존재의 결빙을 녹이는
그 체온,
겨울이 오면 너와 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어 좋다.
겨울 아침
오세영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던가
비록 강퍅한 시대와 맞서
서릿발 사나운 동토로 내몰렸다 하나
의식은
추위와 고독의 절정에서 가장 명징하게
맑아질지니
이성이
빙벽의 저 불타는 이마에서
반짝 빛나는 이 겨울 아침에 나는 일어나
먼저 시를 쓰리라.
밤새 하얗게 내린 눈발 위에서 종종거리는
산새들의 그 정갈한
발놀림.
겨울의 끝
오세영
매운 고춧가루와
쓰린 소금과
달콤한 생강즙에 버물려
김장독에 갈무리된
순하디 순한 한국의 토종 배추
양념도 양념이지만
적당히 묵혀야 제 맛이 든다.
맵지만도 않고
짜지만도 않고
쓰고 매운 맛을,
달고 신 맛을
한가지로 어우르는 그 진 맛
이제 한 60년 되었으니
제 맛이 들었을까,
사계절이라 하지만
세상이란 본디
언제나 추운 겨울
인생은 땅에 묻힌 김칫독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인가
그 분이 독을 여는 그 때를 위해
잘 익어 있어야 할 그 김치.
겨울 일기(日記)
오세영
틀에 끼인
한 장의 사진(寫眞) 속에 평안(平安)이 있다.
아내의 싱싱한 머리카락 사이에
여름 햇빛들이 수런대고
철 없는 어린것이 물장난을 치고
액자(額子) 옆에는 시들어 버린 꽃, 또는
고개를 숙인 인형(人形),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는 해안(海岸)엔
어부(漁父)가 호올로 그물을 깁는다.
찢어진 생활(生活)의 한 컷을 넘기면서
1971년(年) 1월(月) 4일(日),
날씨, 흐리다.
온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편지를 쓰고 찢었다.
얼어붙은 시간(時間)의 저쪽에서
철없는 어린것이 물장난을 치고
생애(生涯)의 슬픔을 건너온 바닷바람이
물거품을 밀어 올린다.
틀에 끼인 한 장의 사진(寫眞),
그 속의 평화(平和),
그 속에 잠든 아내의 얼굴,
흰 파도에 부서지는
여름이 보였다.
겨울 한나절
오세영
눈 올 듯 말듯
햇빛 날듯 말듯
포장마차 집에서 막소주 한잔, 꽃가게 가서 실없는
농담, 시계방 물끄러미 들여다보기, 돌아와서 눈물 찔끔,
그리고 다시 또 소주 한잔,
행여 동백꽃 실려올까,
불현듯 달려가 본 간이역 플랫폼.
남녘에서 오는 열차는 멎지 않고
오늘도 벌써 해 저무는데,
우체부 올 시간은 지났고
아직도 누군가
올 듯 말듯.
경건
오세영
온 천지
혹독하게 얼어붙은 겨을 들판에
초가집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가냘픈 연기,
코로 따뜻한 숨을 내 뿜는
그 살아 있음의
경건함이여.
고드름
오세영
처마 끝 고드름
방울방울 낙숫물 진다.
증오가 풀리면 연민이 되는 걸까.
굳어버린 속눈썹,
싸늘하게 얼어붙은 시선에서 문득 녹아
뚝뚝
떨어지는 눈물.
봄은 화해로부터 오는 것,
강물도 너와 나 더불어야 흐른다.
고해성사
오세영
가을 되자 뜰의 벚나무
하나, 둘
잎들을 떨어뜨린다.
낙엽 지는 소리로 나는 가슴 깊이 감추어둔
그의 비밀을 듣는다.
낙엽은 나무들의 어휘,
우수수
내 쏟는 말씀과 말씀.
한 생을 살면서 나무는
무슨 일들을 저질렀을까.
사랑과 증오의
믿음과 배신의
색색이 물든 그 잎새들.
나무도 임종의 시간에는
말문을 튼다.
뜰에 혼자 몸 벗고 덩그라니 서서
조용히 고해성사를 하는
벚나무 한 그루.
고향
오세영
고향은 누군가가 기다려지는
얕으막한 산등성이 있어 고향이다.
그 산등성 너머 흰 연기를 토하고 달리던 하오 두시
완행열차의 기적이 있어 고향이다.
기적 끊긴 적막한 겨울 오후, 긴 날개의 그림자를 땅 위에 드리우며
하루 종일 하늘을 맴돌다가 사라지던 소리개가 있어 고향이다.
소리개를 쫓아 불현듯 줄을 끊고 산 너머로 달아나버린 연, 그 연을 찾으러
함부러 뛰어다니던 언덕이 있어 고향이다.
머리 희끗희끗
한번 떠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먼 항구의 불빛과 낯선 거리의 술집과 붉은 벽돌담과 교회당의 뒤뜰을 걸어서
그 언덕에 다시 섰는데
왜 이제는 이다지도 기다릴 사람이 없는가
고향은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어
고향이다.
과일
오세영
칼로 벗겨져서
과일이 과일 되듯
잉크에 적셔야만 비로소
시(詩)가 되는 나의 시(詩),
새벽녘 깨어
시(詩)를 쓴다.
칼날 앞에 옷 벗겨
떠는 과육(果肉)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알몸에 대는 칼,
진한 커피를 마시며
어두운 새벽을 벗긴다.
구룡사시편 전사(龜龍寺詩篇 前詞)
오세영
아침에는 산새가 창밖에서 우짖고
저녁에는 여우가 숲에서 운다.
한나절 퍼붓던 폭설이 지자
밤에는 달빛이 쌓이는 소리,
무심한 산옹(山翁)은 잠들었는데
머무는 나그네는 시름도 많다.
적막한 외로움 견딜 수 없어
살포시 뜰위로 내려섰더니
우지끈 이마를 때리는 소리,
눈더미에 부러지는 솔가지 소리
구룡사시편 전사(龜龍寺詩篇 前詞) - 속편
오세영
한 철을 치악에서 보냈더니라.
눈 덮인 멧부리를 치어다보며
그리운 이 생각 않고 살았더니라.
빈 가지에 홀로 앉아
하늘 문 엿보는 산 까치같이,
한 철을 구룡에서 보냈더니라.
대웅전 추녀 끝을 치어다보며
미운 이 생각 않고 살았더니라.
흰 구름 서너 짐 머리에 이고
바람길 엿보는 풍경같이,
그렇게 한 철을 보냈더니라.
이마에 찬 산 그늘 품고,
가슴에 찬 산자락 품고
산 두릅 속눈 트는 겨울 한 철을
깨어진 기와처럼 살았더니라.
구름
오세영
구름은
하늘 유리창을 닦는 걸레,
쥐어짜면 주르르
물이 흐른다.
입김으로 훅 불어
지우고 보고, 지우고
다시 들여다보는 늙은 신의
호기심어린 눈빛.
구절초
오세영
하늘의 별들은 왜
항상 외로워야 하는가
왜 서로 대화를 트지 않고
먼 지상만을
바라다 보아야 하는가
무리를 이루어도
별들은 항상 외롭다
늦가을 어스름
저녁답을 보아라
난만히 핀 한 떼의 구절초들은
푸른 초원에서만 뜨는 별
그가 응시하는 것은
왜 항상 먼
산맥이어야 하는가
국화꽃
오세영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듯
국화는
계절의 절정에서
목숨을 초월할 줄 안다.
지상의 사물이 조각으로,
굳어 있는 조각이 그림으로,
틀에 끼인 그림이 음악으로,
음악이 드디어 하늘로, 하늘로
비상하듯
국화는
하늘이 가장 높고 푸르른 날을 택하여
자신을 던진다.
서릿발 싸늘한 칼날에도 굴하지 않고
뿜어 올리는
그 향기.
굽이굽이 계곡을 돌면
오세영
허망도 하여라.
비경을 쫓아 굽이굽이 계곡에 들면
막아서는 캠프장 하나,
선경을 쫓아 줄기줄기 능선을 오르면
기다리는 비스타 포인트* 하나,
양파껍질 벗기면 빈 속 나오듯
바베큐나 해먹고 놀고 가란다.
나의 조국 코리아의 비경 끝에는
산신령께 기도 드릴 제단 있는데,
나의 조국 코리아의 선경 끝에는
시를 읊어 걸어놓을 정자 있는데
허망도 하여라.
이 나라의 풍광 좋은 산과 계곡엔
R.V.* 공원만이 들어찼구나.
산신령과 한 몸 이룰 생각은 않고
이동주택 끌고와서
즐기는구나.
* Vista Point : 경치를 조감할 수 있는 포인트
* Recreational Vehicle : 야외에서 숙식할 수 있도록 편의시설이 되어 있어 휴가 때 이용되는 자동차 이동주택.
그 길을 따라
오세영
당신은 참 무심도 하군요.
떠나가신 후
어찌 그리 한 통의 편지조차 없으십니까,
당신을 찾아 한번은 무작정
동쪽으로 나섰습니다.
어느 봄날,
당신의 눈동자 같은 샛별이
반짝반짝 새벽하늘을 비추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도가도 희미한 광망뿐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한번은 무작정
서쪽으로 나섰습니다.
어느 여름날,
당신의 분홍 손톱 같은 반달이
서으로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도가도 망망한 바다뿐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한번은 무작정
남쪽으로 나섰습니다.
어느 가을날,
당신의 하얀 소매깃으로 나래치는 철새떼가
황혼에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도가도 쓸쓸한 사막뿐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한번은 무작정
북으로 나섰습니다.
어느 겨울날,
당신의 고운 입술 같은 꽃잎들이
바람에 날려
북으로 북으로 실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도가도 삭막한 쓴드라뿐
당신은 거기에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참 무심도 하군요,
당신이 계신 곳을
별로도, 꽃으로도 가르쳐주실 수 없다면 차라리
눈물로 가르쳐주세요.
내 눈물이 여울되어 흘러간다면
한없이 한없이
그 길을 따라 걷겠습니다.
그 도요새는 어디 갔을까
오세영
파도가 나자
도요새 몇 마리가 쪼르르 달려가
쉴 새 없이 먹이를 쫀다
드러난 사구의 갯벌 위로
어지럽게 발자국이 찍힌다
파도가 들자
다시 지워져 텅 빈 모래밭
어머니 손을 잡고 들어서던
초등학교 운동장도,
선뜻 가 버리지 못하고 울먹이며 돌아서던
그녀의 뒷모습도,
강의실의 그 초롱초롱 빛나던 학생들의 눈빛도,
빈 원고지 칸을 메꾸다 지쳐 쓰러져 잠든
내 여윈 손가락 사이의 만년필도
덧없이
지워지고 없다
파도가 들고 나가는 사이,
누군가 TV 리모컨으로
찰깍,
한 세상을 닫아버리는
그사이.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오세영
어제의 바람이 오늘 또 불고,
지난해 피었던 꽃이 올해 다시 피고,
며칠 전 서쪽으로 가던 달이 또
서쪽으로 가고
오늘은 황사가 가득 날렸다.
내년 이맘때쯤 황사는 다시 올 것이다.
어제의 구름이 오늘 또 흘러가고,
작년에 북쪽으로 날던 기러기가
올해 또 북으로 가고,
오지 않을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그를 기다리며 턱수염을 말끔히 밀고
그래도
무엇인가 모를,
단지 어제보다 나을,
그러면서도 그 낫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그 어떤 것을
기다리며 다시 하루를 맞는다.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면서
희망이 있어야
산다고 하면서
그렇지 않더냐
오세영
모든 추락하는 것들이
거듭나나니
땅에 떨어져 새싹을 틔우는 씨앗이
그렇지 않더냐.
겨울의 마른 나뭇가지 위에서 뚝
떨어져 바닥에 나뒹구는 열매,
가문 허공에서 후드득 떨어져 흙을
적시는 빗방울,
아래로 아래로 미련 없이 떨어지는 것들이 마침내
새 생명을 잉태하나니
어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라
탓할 수 있으랴.
모든 금간 것들이 또
새로운 세상을 여나니
깨져 자신을 버림으로써 싹 틔우는 씨앗이
그렇지 않더냐.
금 간 바위 틈새로 빠끔히 내미는
난초꽃 대궁,
갈라진 구름 틈새로 화안히 내비치는
맑은 햇살,
한생을 다스려 집중한 그 절정의 순간에
바싹 깨져 빈 공간을 만드는 것들이 마침내
새 생명을 잉태하나니
어찌 봄밤에 스스로 금 가는 바위라
탓할 수 있으랴.
그릇
오세영
1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圓)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2
꽃은 시들고
물은 마르고
깨진 꽃병 하나,
어둠을 지키고 있다.
아, 목말라라.
금간 육신(肉身).
세시에 깨어 자리끼를
찾는
꽃병은 귀가 어둡고,
세상은 저마다의
꽃들이다.
깔깔 웃는 백일홍(百日紅)
킬킬 웃는 옥잠화(玉簪花).
세시에 깨어
귀를 모으는
금간 꽃병 하나.
3
흔히
가슴에 불덩이를 안았다고
말한다.
겨울에
언 손을 녹여 주는
화로(火爐).
잿 속에 묻힌 불씨를
찾으며
밤을 지샌다.
목숨이란
불 담긴 그릇.
욕망의 심지를 낮춰야
삭지 않고
영혼(靈魂)은
불 꽃 위에서만 꿈꾼다.
불질러 다오.
내 가슴은 식었구나.
새끼 잃은 암노루의 눈빛같이
불질러 다오.
5
혹은
술병(甁)이었을지도 몰라,
한 사내의 어지러운 꿈을
불 사르는 술,
혹은
약병(藥甁)이었을지도 몰라,
한 계집의 들뜬 열(熱)을
잠재우는 약(藥).
길가에 버려져 깨진 병
병은 이제 병이
아니다.
진흙에 묻혀서 번득이는
저 절망(絶望)의 눈.
오늘도 나는 길을 걸으며
무심히 병을 밟는다.
내 살 속에서 깊이 박히는
유리 파편,
꿈도 욕망도 아닌 저
절망(絶望)의 파편.
6
그릇에 담길 때
물은 비로소 물이 된다.
존재(存在)가 된다.
잘잘 끓는
한 주발의 물
고독(孤獨)과 분별(分別)의 울 안에서
정밀히 다지는 질서(秩序).
그것은 이름이다.
하나의 아픔이 되기 위하여
인간은 스스로를 속박하고
지어미는 지아비 앞에서
빈 잔(盞)에
차(茶)를 따른다.
엎지르지 마라,
엎질러진 물은
불이다.
이름 없는 욕망이다.
욕망을 다스리는 영혼(靈魂)의
형식(形式)이여, 그릇이여.
7
행운(幸運)을 빌며
안녕(安寧)을 빌며
부딪히는 술잔.
잔(盞)은 타인(他人)의 충족을 위해
스스로를 비운다.
비우기 위하여
채우는
모순(矛盾)의 공간(空間).
잔(盞)은 결코 외롭지
않다.
비어 있는 그것이
충족이므로.
이 밤에도
외로워서 술을 드는
인간(人間)이여,
부딪혀라 술잔(盞).
잔(盞)은 빈 것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9
신발도
하나의 그릇이다.
각기 다른
문수.
그릇은 크기가 다르다.
대접같이 투박한
아빠의 구두.
공기처럼 날렵한
딸의 힐.
종지처럼 야무진
막내 운동화.
인간은 누구나 그릇을 지닌다.
그 안에 미움과 사랑을 담고,
땀과 눈믈을 쏟아
비바람 헤쳐 온 반평생.
오늘은 구두를 벗고
털신을 신는다.
밖에는 눈보라,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며
중심을 고누는
휘청거리는 공간에서
쏠리는 체중을
신발로 받는다.
20
새벽 1시
마지막 기차가 떠난
광장엔
휴지통 하나 깨어 있다.
한때
누구의 눈물을 적셨을까,
버려진 손수건의 하얀
기다림,
한때 누구의 아픔을 달랬을까,
구겨진 편지의 타는
목마름,
별빛에 젖어 꿈꾸는
세상은 고독한 휴지통이다.
빈 벤치 곁에 버려져
사그라져 가는 담배불 하나
늘어진 전깃줄 하나.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오세영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사람을 멀리하고 길을 걷는다
살아갈수록 외로워진다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외로워
외롭고 마음 쓰라리게 걸어가는
들길에 서서
타오르는 들불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고독하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면
어둠 속에서 그의 등불이 꺼지고
가랑잎 위에는 가랑비가 내린다
그리운 이 그리워
오세영
그리운 이 그리워
마음 둘 곳 없는 봄날엔
홀로 어디론가 떠나 버리자.
사람들은
행선지가 확실한 티켓을 들고
부지런히 역구를 빠져나가고
또 들어오고,
이별과 만남의 격정으로
눈물짓는데
방금 도착한 저 열차는
먼 남쪽 푸른 바닷가에서 온
완행.
실어 온 동백 꽃잎들을
축제처럼 역두에 뿌리고 떠난다.
나도 과거로 가는 차표를 끊고
저 열차를 타면
어제의 어제를 달려서
잃어버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운 이 그리워
문듣 타 보는 완행열차
그 차창에 어리는 봄날의
우수.
그리움에 지치거든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잔의 차를 들자
들끓는 격정은 자고
지금은
평형을 지키는 불의 물
청자 다기에 고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구나
누가 사랑을 열병이라고 했던가
들뜬 꽃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마른 입술을 적시는 한 모금의 물
기다림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를 들자
그 무엇
오세영
퇴원 후 허약해진 몸을 보신하라며 아내가 내민 잣죽 한 그릇. 그 정성이 고마워 남김없이 먹긴 먹었으나 그릇엔 여전히 죽물이 묻어 있다. 박박 요리조리 훓어도 더 이상 몯아지지 않는다. 할 수 없다 싶어 설거지를 한다. 솨아 쏟아지는 물줄기에 씻겨 개수통으로 사라지는 그 말라붙은 잔여물. 잣알 몇 개의 분량일까. 그 잣알, 버려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이 얼마나 서글펐을까?
하지만 한탄하지 마라. 그래도 네가 있었기에 그 죽 그릇에 담긴 대부분의 죽은 무사히 입에 들어 병든 몸을 살려내지 않았던가. 한 알의 밀처럼 한 알의 잣처럼 스스로 가루가 되지 않고선 결코 그 무엇이 될 수 없는 무엇이 이 세상 어딘가엔 분명히 있다. 하물며 한 부서진 가루가 다른 부서진 가루에서 자신을 양보하는 그 눈물겨운 자기 희생이여! 작은 잣알 하나여!
그 사람
오세영
저녁에
팔 베고 누워
흐르는 계곡에 귀 기울이면
거기 카츄샤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꽃잎으로, 꽃잎으로 흐르다가
드디어 물이 된 그 사람.
자정에
목침을 베고 누워
솔잎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면
어린 월명이
누이와 이별하는 소리가 들린다.
갈잎으로, 갈잎으로 날리다가 어느덧
바람이 된 그 사람.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 승 아제
모지 사바하.
이 무슨 부질 없는 독경 소린가.
이 무슨 부질 없는 목탁 소린가.
새벽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댓잎의 이슬 맺는 소리에 귀기울이면
출가하는 싯달다의
뺨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 소리가 들린다.
안개로, 안개로 흐르다가
이제 하늘이 된 그 사람.
금강산
오세영
금강은
아름답기보다는 차라리
성스러운 산,
아름다움의 궁극엔 황홀이, 황홀의 궁극엔
열반이 있을지니
내 금강의 순연한 자태에서
참선하는 수좌(首座)의 얼굴을 본다.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이던가
마하연을 거스르는 물소리.
대방광불화엄경이던가.
만폭동을 울리는 바람 소리.
돌아보면 세상은 풍진이 가득한데
한 발짝 네 앞에 다가서면
내 육신이 스러지고,
두 발짝 네 앞에 마주 서면
내 마음이 사라지고
세 발짝 네 앞에 들어서면 드디어
내가 없느니
금강은
아름답기보다는 차라리
성스러운 산.
급류
오세영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
때로 웃기고 때로 울리는 감정처럼
어제런 듯 화사하게 꽃피웠다가
금세 싸늘해져 낙엽으로 내리는 대지의
물,
가능한 속내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수록 좋다.
안으로, 안으로 모두어
든든한 제방에 가두어 두어야 한다.
그 수맥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감정 깊은 골은 언제인가 반드시
무너져
홍수를 일으키니까.
기다림
오세영
화로에 불을 지핀다
빈방 섣달 하순 어두운 밤,
기다려도 그대는 오지를 않고
뒷문 밖에는 눈 오는 소리
뒷문 밖에는 갈잎소리
눈이 되어 오랴
바람 되어 오랴
얼어붙은 이승의 차가운 육신
귀 멀고 눈멀어서 밤은 길다
빈방 섣달 하순 어두운 밤
그대의 찬 손 녹여주려고
빈 가슴에 지피는 외로운
불
기러기 행군
오세영
하늘 전광판(電光板)에
문자 뉴스 몇 줄 떠오르며 스쳐 간다
겨울 전선(前線) 급속히 남하 중
지나가던 허수아비들이
일제히 멈춰 서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기침
오세영
콜록 콜록
나무들 기침을 한다.
헐벗은 몸으로 겨울의 추위를 견디어 낸 나무들의
봄 감기,
콜록콜록
오얏나무에 오얏꽃 핀다.
시인들이여, 기침을 하자*
폐부 깊이 찢어지는 아픔 없이는
아무것도 싹트지 못하는 땅.
얼어붙은 눈밭에 기침을 하자.
달콤한 말이 아니라
쓰라린 말.
침 바른말이 아니라
피 섞인 말.
* 김수영의 시구.
길을 잃었습니다
오세영
바람은 꽃향기의 길이고
꽃향기는 그리움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꽃이 저렇게 무시로 향기를 쏟는 날..
나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체취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입니다.
강물은 꽃잎의 길이고
꽃잎은 기다림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개구리가 저렇게 푸른 울음 우는 밤..
나는 들녘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말씀에 그만..
정신이 황홀해졌기 때문입니다.
숲은 숲더러 길이라 하고
들은 들더러 길이라는데
눈먼 나는 아아.. 어디로 가야 하나요.
녹음도 지치면 타오르는 불길인 것을..
숨막힐 듯 푸른 연기 헤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강물은 강물로 흐르는데..
바람은 바람으로 흐르는데. . .
깨달음
오세영
아직 채 겨울은 가지 않았는데
눈밭에서
바싹 마른 마가목 꽃대의 막
트는 눈이
눈을 뜨고 새초롬히 바라보는
유리 하늘.
동안거(冬安居) 막바지에 이른 수좌(首座)의
정결한 이마 아래서 빛나는 푸른
눈빛 같다.
아하!
깨달음은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
반짝
한 세상이 그의 눈 안에 드는 것.
꽃
오세영
찰랑거리는 기슭에 가을이
센 머리칼을 적실 때 황혼은
난간 위에 등불을 켜다.
멀고 먼 일식(日蝕)의 만(灣)을 향해
올려지는 돛, 밀물에 설레이면서
무거운 닻줄이 들리고,
하얗게 흔들리는 바람 속을 밤은
새도록 나래를 치다.
날개 위에서 거울에 비친 한 여인(女人)의
드러낸 살결 위로 흘러내리던 하늘.
햇살로 음정을 짚으면
등불 위에서 파열하는 꽃, 눈부신
한 악장, 그 물결 너머 꽃잎이
소나기로 허물어져 내릴 때,
시간은 암초 위에 부서지다.
모래톱 위에 앙상한 생명체(生命體)의
픽션,
마른 가지에 마지막 잎이 걸리고
눈물같이 빛나던 저녁을 딛고
서서 목숨은,
어둔 파도를 오르고 있다.
꽃밭
오세영
1
통사 구문에 따라
한 줄 한 줄
문장으로 이어지는 밭두렁의
고구마 순,
작물은 그 하나하나가 음소이자 단어다.
그러나 꽃들은
자신이 각각 하나의 문장,
꽃밭엔
두렁도 고랑도 없다.
툭
원고지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의외의 감탄사처럼
비약, 반전 그리고 일탈이 있을 뿐
그들의 예절은
침묵.
모든 작물은 산문,
모든 꽃들은 시(詩)다.
2
무대는 화려하였다
색소폰의 저 노을빛 저음
트럼펫의 저 하늘빛 고음
클라리넷의 저 호수빛 청음
누구를 위한 한밤의 음악회던가
우주를 향해 커튼을 활짝 걷고
장미
백합
라일락 제각각
빨강, 하양, 파랑 화음들을 고른다
악기가 바람을 모두어 음색을 내듯
향기로 발성하는 이 지상의
백화난만
그러나 오늘의 주 연주자는
튤립이다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모차르트 협주곡
C장조 제1악장
맑고 슬픈 그 선율.
꽃밭 풍경
오세영
"아름답게 살자"
고
쉽게 말하지 마라.
아름다움도 때로 죄가 된다는 것은
꽃밭에 가 보면 안다.
빛과 향이 지나쳐
영혼을 몽롱케 한 그 죄.
울안은 각자
수인의 명패를 달고
인신 구속된 꽃들로
만원이다.
"아름답다"
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어차피
삶은 원죄의 소산.
사랑이 죄가 되는 자들의
교도소가 거기 있다.
꽃불
오세영
추락보다는
차라리 파멸을 선택했다.
비상의 절정에서 터지는
꽃불.
지상은 축제로 무르익고
축등은 화려하게 걸려 있는데
그 늘어선 전깃줄 너머
무한으로 사라지는 빛 한 줄기,
소멸은 죽음과 다르다.
해후의 눈물로 글썽이는
이 지상의 축제여,
자유란 회귀를 거부하는 몸짓이다.
부딪치는 술잔 위에서 빛나는
한 줄기 저 찬란한
소멸.
꽃잎
오세영
이른 봄 깊은 산사 적막한 목탁소리.
산새 홀로 드나드는 반나마 열린 법당
눈 파란 비구니 하나 꿇어 앉아 울고 있다.
댓돌에는 새하얀 고무신이 한 켤렌데
어디선지 호르르르 꽃잎들이 날아와서
홍매화 여린 잎 하나가 나비처럼 앉는다
꽃잎 소리
오세영
어젯밤엔 소쩍새
앞강에서 울더니
오늘 밤은 뜸북새 뒷논에서 우네
누가 부르던가. 누굴 부르던가.
봄꿈은 하염없이
귀가 엷은데
베갯모에 분분히 지는 오오 저 꽃잎 소리
오오냐,오오냐,
불현듯 맨발로 밖을 내닫면
봄강물 시름없이 출렁이는데
갈대숲 속절없이 서걱이는데
누가 부르던가. 누굴 부르던가.
베갯머리 떨어지는 소쩍새 울음,
창호지에 젖어오는
뜸북새 울음.
꽃 타령
오세영
아름다움이란
높은 곳에 자리한다 해서
더하지는 않는 법
권력은 언제나 위에서 군림하지만
아름다움은
항상 낮은 곳에 있다.
꽃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서 - 살구꽃
오세영
가끔은
그늘에서 쉬고 싶은 때가 있다.
태양이 짐승처럼 달아오를 때
대지가 백금(白金)처럼 이글거릴 때
숲이 사향(麝香)처럼 씩씩거릴 때
아, 그러나 오늘은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날
너를 바라보는 것조차 죄스러운 하늘이라면
돌아와 내 모습 면경에 담자.
만개한 살구꽃은
누이의 치마폭에서 뜨는 한 떼의 구름.
꽃 피리
오세영
채워도 채워도
목마른
마흔 살 육신(肉身)의
갈대꽃 입술.
바람에 울고 있는
갈대꽃 피리.
눈 뜨면 지금은
화사한 5월(月),
수국(水菊)의 향기로 너는 웃는데
채워도 채워도 못다 한
마흔 살 육신(肉身)의 긴
목마름.
꿈
오세영
밤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있으면 문득
밤마다 명멸하는 어선들의 집어등을
생각케 한다.
심해에서 회유하는 물고기들도
수면의 그 반짝이는 등불들을
별이라 믿지 않을까.
밤에 불빛으로 선단을 이루어
고기잡이에 나선 오징어 채낙선처럼
하늘의 별들도 하마
우리들을 낚시질할지 모른다
별 하나 나 하나라 하지 않던가.
우주 밖은 또 다른 우주
꿈 밖은 또 다른 꿈.
꿈꾸는 나비
오세영
나는 숨었다
난만히 피어 있는 진달래꽃 숲.
너는 뿌리치고,
후두둑 지는 이슬.
너는 달아났다
물안개를 넘어서, 무지개를 넘어서
팔랑팔랑
태평양을 나는 한 마리의
나비
오늘도 나는 비척대며
산을 오르다 지쳐 잠이 들었다.
바다는 보이지 않고,
끝끝내 꿈속의 너는 잡히지 않고
시야는 온통 안개뿐인데,
저녁이다. 일어나거라,
내 이마 위로
툭,
떨어지는 상수리 열매
꿈꾸는 랩송
오세영
높낮이 없이
그저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기계의 소음 같다.
뒹굴면서 내는 저 음성은 발전기의 터빈 소리
흔들면서 내는 저 음성는 전동차의 비퀴 소리,
멜로디가 없음은 로맨스가 없다는 것이겠고,
화음이 없음은 나 홀로면 그만이라는 것이겠고,
리듬만 있음은 본능뿐이라는 것이겠다.
자연의 소리에는 높고 낮은 멜로디가 있는 법,
예술은 원래 자연의 모방이라는데
이 시대의 노래는 모두
기계의 모방뿐이로구나.
인생이 죽고 예술이 죽은
기계들의 나라에서 어찌
감미로운 노래를 들을 수 있겠다더냐.
꿈꾸는 병(病)
오세영
소녀는 질병을 앓았다.
기울어진 햇빛 속에서
아프리카를 생각하고 있었다.
뜨거운 열사(熱砂)의 지평(地平)을 달리는
한 마리 사자(獅子),
소녀는 사랑을 꿈꾸었다.
잠 못 드는 밤엔
세계의 끝에서 숨 쉬는
에프엠을 듣고
병든 지구에 내리는 빗물처럼
울 줄도 알았다.
러브스토리를 읽으며
인생과 예술이 술잔 속에서
페시미즘에 젖는 것을 보았다.
한 마리 사자(獅子)가 낮잠을 자는
아프리카 해안의 부서지는
푸른 파도.
소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죽음을,
다만 하나의 희망이
어떻게 이 지상에 잠드는 것인가를
보고 싶었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
사람들이 각기 등불을 켜 들 때도
소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으로, 꿈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꿈꾸는 악기
오세영
입을 버리고 말을 버리고,
춤추는 손으로 대답한다.
춤추는 가슴으로 대답한다.
우주는 주인 잃은 꿈 꾸는 악기,
네가 울면 허공에
별 하나 뜨고
지상의 목숨들은 탈춤을 춘다.
떨리는 나뭇잎은 가지 끝에서
출렁이는 물결은 바닷가에서
나는 누구?
오세영
도서관은 골 깊은 산이다.
등산하듯 층계를 올라
어두운 서가를 뒤진다.
이 골짜기는 역사서가, 저 산봉우리는 철학서가,
저 능선은 과학서가
고서는 이끼 낀 바위로 앉아 있고
사서는 칡넝쿨로 얽혀 있다.
이곳저곳 걸으며
화두 하나 참구한다.
나는 누구일까
청노루, 백사슴 다 아는 산길에서
길을 잃고 망연히 헤매는데
앞에는 문득
깎아지른 듯 가로막고 서 있는 절벽.
그 까마득한 벼랑에 핀
꽃
한 그루.
나를 지우고
오세영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나를 지운다는 것은 곧
너를 지운다는 것,
밤새
그리움을 살라 먹고 피는
초롱꽃처럼
이슬이 이슬을 지우면
안개가 되고,
안개가 안개를 지우면
푸른 하늘이 되듯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나무
오세영
나무가 쑥쑥 키를 위로 올리는 것은
밝은 해를 닮고자 함이다.
그 향일성(向日性)
나무가 날로 푸르러지는 것은
하늘을 닮고자 함이다.
잎새마다 어리는
그 눈빛.
나무가 저들끼리 어울려 사는 것은
별들을 닮고자 함이다.
바람 불어 한세상 흔들리는 날에도
서로 부둥켜안고 견디는 그
따뜻한 가슴.
나무가 촉촉이 수액을 빨아올리는 것은
은핫물을 닮고자 함이다.
하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에게 흘려 준
한 방울의 물
가신 우리 어머니가 그러하시듯
산으로 가는 길은 하늘 가는 길.
나무가 날로 푸르러지는 것은
하늘마음. 하늘 생각 가슴에 품고
먼 날을 가까이서 살기
때문이다.
나무처럼
오세영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알듯
나비
오세영
주사침을 들고
분주히 복도를 오가는
정신 병동의 간호사들.
5월,
봄엔 꽃들도 우울증을 앓고 있나?
나풀거리며
사뿐
병실들을 드나드는 그 흰 가운,
가운들.
나이가 몇 살?
오세영
일흔은
귀신도 눈에 보이는 나이라는데
실은 70년을 산 것이 아니라
70년 죽어온 것,
그러므로 생은 죽음의 이면일지니
기쁜 일 있다 해서 너무
기뻐하지 마라,
기쁨 끝엔 항상 슬픔 있나니.
슬픈 일이 있다 해서 너무
슬퍼하지도 마라,
슬픔 끝엔 항상 기쁨 있나니.
나파*의 와인은 쓰다고 하더라
오세영
태평양이 보이는 미 대륙의 끝
나파의 가을은
술 익는 계절
집집마다 오크통 속에서는
은은한 술향기가 배어 나온다.
해안에 상륙해서는 생존을 위해
맨 먼저 밀을 뿌리고
중부로 건너가선 서부로 달릴 말을 위해 콘을 심었거니
이제 마지막으로 대륙을 정복하고선
보르뉴 원산, 유럽의
포도나무를 심었구나.
나파의 와인은 쓰다고 하더라.
인디언의 피가 짙게 배인 아메리카산의 포도인데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화약 연기를 거두고
손에 적신 피를 씻고
하얀 상보의 식탁에 마주 앉아 드는
한 글라스의 와인,
밖에는 잎 진 포도밭의 나뭇가지들이 앙상한데
만족과 허망의 이 풀 수 없는 아이러니를
쓸쓸한 입맛으로 감추는
나파의
아메리카산 백포도주 한 잔.
* Napa : 샌프란시스코 동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세계적인 포도 산지이자 포도주 산지.
나팔꽃 - 6月 항쟁을 보고
오세영
땅이 아니라
아스팔트 위에서 피는 꽃도 있다.
어깨와 어깨를 메고
팔과 팔을 엮어
와와! 바리케이트를 넘는
그 향일성(向日性),
넝쿨들의 부단한 항쟁,
너에게
억압이란 있을 수 없다.
항상 푸른 하늘을 향해 자라는 너는
오히려
장벽을 꽃밭으로 일구는구나.
초연(硝煙) 가신 광장의 깃발들처럼
울타리 가득 뻗어 올라 빛을 향해서
만세!
총궐기한
빛 고운 우리나라 6월 나팔꽃.
낙엽(落葉)
오세영
꽃잎 스스로 허물어져 흙이 되는
이승의 가을은 황홀하여라,
가자,
싱싱한 한알의 능금만을 남겨두고
나의 진실, 나의 허무(虛無),
소멸(消滅)해가는 내 영혼(靈魂)의 어두운 등불.
낙타
오세영
낙타는 사막이
까마득히 먼 여행임을 아는 까닭에
오히려 천천히 타박타박 걷는다.
낙타는 사막에
쉬어 갈 주막 하나 없음을 아는 까닭에
제 몸에 식량을 예비해둘 줄을 안다.
낙타는 사막을
이정표도 없이 넘어야 함을 아는 까닭에
그 흘린 눈물의 흔적들을 기억해둔다.
타는 목마름이다.
사막을 건너는 한 생이
어찌 절박치 않을 수 있으랴.
그래도 한 가닥
자존만큼은 지켜야 하는 것, 낙타는 때로
침을 뱉을 줄 안다.
낙하
오세영
꽃잎들은 하늘 하늘 하늘로 날아가지만
열매들은
흔쾌히 지상으로 뛰어내린다.
이상은 멀리 지평선 넘어 있어도
현실은 발 아래
중력을 무시할 수 없는 법.
바람이 분다.
…… 털석 ……
생명의 중심을 향해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지는 그
용기,
우주에 잔잔히 파문이 인다.
이 세상에는 그 무엇도
결별 없이 깨어나는 삶이란 없다.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가지 끝에서
오늘도
조용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나무.
낙화(落花) - 에즈라 파운드에게
오세영
처연하게
꽃이 진다고 하지만
꽃이 진다는 것은
항상 슬픈 일만은 아니다.
돌아갈 곳이 확실하게 있는 귀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제 더 이상
기다림에 속지 않으리라.
이제 더 이상
그리움에 울지 않으리라.
비에 젖어
나른하게 흩날리는 꽃잎같이
뿔뿔이 흩어져 귀가를 서두르는
지하철역 광장
그 황혼.
난 또 어디로
오세영
물소리로 듣고 왔다
새소리로 듣고 왔다
순아, 너는 어디 있느냐.
당(堂)집 추녀 끝에 언뜻 비친
머리채,
산문(山門) 기둥 멈칫 펄럭이는 너의
옷고름,
가도 가도 보이는 건 안개뿐인데,
가도 가도 봄날은 슬픔뿐인데,
바람에 홀연히 걷히는
안개,
까르르 웃는 건 산철쭉이다.
하하하 웃는 건 산수국(山水菊)이다.
계곡물 이제 흘러 천릿길인데
순아, 난 또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난(蘭)을 기르며
오세영
난(蘭)을 기르며
한겨울 난다.
밖에는 여인(女人)의 원한(怨恨) 같은
서릿발이 치고
사는 것이 서럽다고 서럽다고
눈보라 에우는데,
병(病)든 지어미의 머리맡을
다소곳이 지키는 한 포기의
난(蘭),
난(蘭)은
겨울을 먹고 사는 꽃이다.
꽃을 꺾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은
난(蘭)을 기를 일이다.
여윈 암노루
사향(麝香) 찾아 떠나간 빈 골을
싸늘한 향기(香氣)로 피어나는
꽃.
난(蘭)을 기르며 보낸 한 철은
서러운 듯 서러운 듯
아름다워라.
날개
오세영
내가 쏘아 올린 화살은 어느 때
새를 맞춘다.
타버린 의식체(意識體)가 되어 언덕 너머
떨어지는 낙과(落果).
번득이는 비늘로 휩싸이는 의문(疑問)들.
문을 밀치면 거기 놓인 십자가에
문득 와서 꽂히는 화살, 온 밤을 피가 흐르고
경험의 뜨락에 저버린 잎새들이
앙상한 그림자로 창가를 드리울 때,
한 마리 새가
문법의 가지를 차고 오른다.
난다. 파열하는 꽃잎 속을, 시간의
폭동 속을,
아아 뜨거운 수소이온. 그 부력(浮力),
날카로운 바람을 몰고, 한 소절(小節)의 아침을 건너
햇살이 파도치는 바다에서
인력을 끊고 솟아오른 한 개의 램프.
드디어 타버린 육체의 아픔 위에
부리로 대낮을 깨면
내가 쏘아 올린 화살은 어느 때
내 가슴에 와 꽂힌다. 아아
빛을 털고 일어서는 한 마리의 새.
낭독(朗讀)
오세영
단풍 곱게 물든 계곡과
파아랗게 굽이치는 강,
막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헤치며
한적한 오전 한때
돌돌돌
헬리콥터 한 대가
청명한 가을 하늘을 홀로 무심히
날고 있다
낮잠
오세영
살풋 봄잠이 들었던가.
후두둑......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미닫이 여니
소나기 먼 산 너머 황망히 사라지고
울안은 온통
출렁대는 바다다.
점점이 떠 있는 꽃잎 배에 실려
나 어디로 가란 말이냐.
무인도에 표류한 뱃사람처럼
햇빛 밝은 산방(山房)의 마루에 걸터앉아
한나절 조을고 있는
봄.
내 안의 당신
오세영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네 자신을 사랑하라던 당신의 그 말뜻을
나는 그때 미처 몰랐습니다.
당신의 종인 나를
내가 어찌 당신보다 더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꽃피는 봄날 길을 걷다가
나는 문득
성큼성큼 앞서가는 한 사람을 부지런히
좇았습니다.
그의 뒷모습이 분명
당신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내 스승이었습니다.
비 내리는 어느 여름날 나는
뒤따르는 한 사람을 돌아보았습니다.
그의 말소리가 분명 당신의 음성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내 제자였습니다.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나는 얼른 곁에 있는 한 사람을
또 붙들었습니다.
어쩐지 그가 당신처럼 믿음직스러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당신이 아니라
내 아내였습니다.
당신은 곁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내 눈동자에 들지 않은 빛이
빛이 아니듯
나의 밖에 있는 당신이 어디 당신이겠습니까,
당신이 이미 내 안에 들어 있음을 나는
이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너를 보았다
오세영
너를 보았다.
문밖에서,
닫혀진 우주(宇宙) 밖에서,
너를 보았다.
가지 끝에서,
어두운 하늘 끝에서
너를 보았다.
보이는 것은 안개, 눈 내리는 저녁 불빛,
불빛 가득 고인 발자국,
자작나무 숲에 울던 바람은
시방 내 귀밑머리를 날리고
깨어진 피리 하나,
눈 속에 묻혀 있다.
너를 보았다.
문 밖에서
닫혀진 우주 밖에서
너를 보았다.
하나의 별, 한 마리의 새,
너를 바라보는 절망의 눈.
너를 찾는다
오세영
바람이라 이름한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들,
무엇이라 호명(呼名)해도 다시는
대답하지 않을 것들을 향해
이제 바람이라 불러본다.
바람이여,
내 귀를 멀게 했던 그 가녀린 음성,
격정의 회오리로 몰아쳐 와 내 가슴을 울게 했던
그 젖은 목소리는
지금 어디 있는가.
때로는 산들바람에, 때로는 돌개바람에,
아니 때로는 거친 폭풍에 실려
아득히 지평선을 타고 넘던 너의 적막한 뒷모습 그리고
애잔한 범종(梵鐘) 소리, 낙엽 소리,
내 귀를 난타하던 피아노 건반,
그 광상곡(狂想曲)의 긴 여운.
어느 먼 변경 척박한 들녘에 뿌리내려
민들레, 쑥부쟁이, 개망초 아니면 씀바퀴꽃으로 피어났는가.
말해다오.
강물이라 이름한다.
이미 잊혀진 것들,
그래서 무엇이라
아예 호명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이제 강물이라 불러본다.
강물이여,
한때 내 눈을 멀게 했던 네 뜨거운 시선,
열망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내 육신을 황홀하게 달구던 그 눈빛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때로는 여울에, 때로는 급류에, 아니 때로는
도도히 밀려가는 홍수에 실려
아득히 수평선을 가물가물 넘어가던
너의 쓸쓸한 이마. 그리고
어디선가 꽃잎이 지는 소리, 파도 소리,
철썩이는 잔물결의 여운.
어느 먼 외방의 썰렁한 갯벌에 떠밀려
물을 향해 언제나 귀를 쫑긋 열고 살아야만 하는가.
해파리, 민조개, 백합 아니
온종일 휘파람으로 울다 지친 소라
말해다오.
구름이라 이름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들,
무엇이라 호명해도 다시 이룰 수 없는
형상들을 향해 나는
이제 구름이라 불러본다.
구름이여,
한때 내 맑은 영혼의 하늘에 푸른 그늘을
드리우던 오색 빛 채운(彩雲),
그 빛나던 무지개는 지금 어디 있는가.
때로는 별빛에 실려, 달빛,
아니 어스름한 어느 저녁 답,
스러지는 한 조각 노을에 실려
아득히 먼 허공으로 희부옇게 사라지던
너의 그 두 빈 어깨 그리고
어디선가 내리치는 마른번개,
스산하게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잔기침 소리,
어느 먼 이역의 하늘로 불려가
흩뿌리는 싸락눈, 진눈깨비 아니
동토(凍土)에 떨어져 나뒹구는 우박이 되었는가.
말해다오.
너를 찾는다. 바람이라는 이름으로
강물이라는, 구름이라는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해 저무는 가을 저녁
찰랑대는 강가의 시든 풀밭에 홀로
망연히 앉아.
너무나 심심해 죽겠나 보다
오세영
너무나 심심해 죽겠나 보다.
별일도 아닌데 까르르 웃고,
너무나 지겨워서 못 살겠나 보다.
날 일도 아닌데 와르르 웃고,
켜논 티 브이 스크린의 드라마와 연예물들은
예외없이 코미디다.
"너 새로운 수학 선생 어때?"
"까르르---"
"히틀러같이 생겼어"
더 "까르르---"
웃을 일도 아닌데 우스워 죽는 것은
사는 데 걱정이 없어서일까.
그만큼 슬픔이 없는 탓일까.
전쟁은 항상 남의 일이고
굶주림은 항상 담 너머 있고
그렇다고 길거리 활보하기 위험하고
그렇다고 떼돈 벌어 부자될 가망 없고
그렇게 한세상 쳇바퀴로 산다면
웃을 일 찾아서 웃기나 할까.
별일도 아닌데 까르르 웃고
날 일도 아닌데 와르르 웃고----
너, 없음으로
오세영
너 없으므로
나 있음이 아니어라.
너로 하여 이 세상 밝아오듯
너로 하여 이 세상 차오르듯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이승의 강변 바람도 많고
풀꽃은 어우러져 피었더라만
흐르는 것 어이 바람과 꽃뿐이랴
흘러 흘러 남는 것은 그리움,
아, 살아 있음의 이 막막함이여.
홀로 있으므로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너의 목소리
오세영
너를 꿈꾼 밤
문득 인기척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문턱에 귀대고 엿들을 땐
거기 아무도 없었는데
베개 고쳐 누우면
지척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나뭇가지 스치는 소매 깃 소리
아아, 비가 왔구나
산 넘고 물건너
누런해 지지 않는 서역땅에서
나직이 신발을 끌고 와
다정하게 부르는
너의 목소리
오냐, 오냐,
안쓰런 마음은 만릿길인데
황망히 문을 열고 뛰쳐나가면
밖엔
하염없이 내리는 가랑비 소리
후두독
댓잎 끝에 방울지는
봄비 소리
노여움이 가시면 슬픔이 있듯 - Sanfelipe 인디언에게
오세영
알브쿼크 지나면
산타페*가 있다.
사막의 외딴섬
서러운 항구
매운 모래바람에 쫓기운 사람들이
어깨와 어깨를 보듬고 사는 곳,
격랑에 떠밀려 온 난파선처럼
산타페에서는
먼 사막을 향해 창문을 내고
저마다의 가슴에 불을 밝힌다.
뭍을 향해 깜빡이는
등대불처럼---
알브쿼크 지나면
산타페가 있다
캑터스*, 어게비꽃* 밤에만 피고
별들은 언제나 지상에 뜨는
사막의 외딴섬
서러운 항구,
노여움 가시면 슬픔이 있듯
알브쿼크 지나면
산타페 있다.
* 뉴멕시코주의 사막에 있는 도시들.
* 선인장의 일종.
* 선인장의 일종.
노역
오세영
소음이 아니다.
한밤중
모두가 깊은 잠에 빠진 사이
홀로 문득 깨어나 귀 기울여 보아라.
적막 속에서
벽시계 꼴딱골딱,
냉장고 그렁그렁,
웅얼대며 뒤척이는 에어컨,
수도꼭지 똑똑 코피 흘리는 소리,
세상은 온통 신음으로 가득 찼나니.
어쩌다 인간에게 붙들려
이리 잘리고, 저리 깎이고, 얻어맞고, 녹여져
마침내 이처럼
길들인 노예가 되었을까.
갈대밭을 흥얼대며 흐르던 계곡물도
저수지의 땜을 넘을 땐
아아악!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지 않던가.
논
오세영
모자라지 않게 짤박짤박
물을 채우고
입김으로 솔솔 봄바람을 피운다.
확
일어나는 그 여름의
파아란 불길,
태풍과 폭염으로 한동안 끓어 넘치던
물이 증발하자
마침내 솥단지는 잘 익은
벼 이삭들로 가득하다.
누가
오세영
누가 이처럼 산뜻하게
지중화(地中化)를 시켰을까?
봄 되어 얼음 풀리자
지하 수맥으로 졸졸졸 흐르는
전류.
누가
또 이처럼 하늘의 스위치를 눌러
일시에 전등을 켰을까?
어두운 겨울을 밀치고
온 천지 화안하게 불 밝히는
꽃.
눈
오세영
순결한 자만이
자신을 낮출 수 있다.
자신을 낮출 수 있다는 건
남을 받아들인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가장 낮은 곳에 설 때
사랑을 안다.
살얼음 에는 겨울,
추위에 지친 인간은 제각기 자신만의
귀가길을 서두르는데
왜 눈은 하얗게 하얗게
내려야만 하는가,
하얗게 하얗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바닥을 향해 투신하는
눈,
눈은
가장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녹을 줄을 안다.
나와 남이 한데 어울려
졸 졸 졸 흐르는 겨울 물소리.
마음이 녹는 자만이
사랑을 안다.
눈물
오세영
물도 불로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은
슬픔을 가져본 자만이
안다.
여름날
해 저무는 바닷가에서
수평선 너머 타오르는 노을을
보아라.
그는 무엇이 서러워
눈이 붉도록 울고 있는가.
뺨에 흐르는 눈물의 흔적처럼
갯벌에 엉기는 하이얀
소금기 슬픔의 숯덩이다.
사랑이 불로 타오르는
빛이라면
슬픔은 불로 타오르는 빛,
눈동자에 잔잔히 타오르는 눈물이
어둠을
밝힌다.
눈 발자국
오세영
누가 시킨 운필(運筆)인가.
나 한 개 꿈꾸는 볼펜이 되어 눈밭에
또박또박
서정시 한 행을 써 내려간다.
미루나무 가지 끝에 앉아 졸고 있다가
문득
설해목(雪害木) 부러지는 소리에 눈을 뜬
까치 한 마리,
까악까악
낭랑한 목소리로 읊고 있다.
그 시 한 구절.
눈빛
오세영
내 눈 안에 들어야
비로소 우주인 것을
홀로 있단들 어찌 그것이 참다운
있음이랴.
내 오늘 문득 나를 바라보는 네 맑은 눈동자를 또한
보거니
네 눈동자에 글썽이는 눈물이 바로
별이었구나.
무심하다 탓하지 마라.
흙에 묻힌 바위도
넌지시 난초 꽃대궁을 밀어 올려
그의 하늘 그윽히 바라보지 않던가.
진실로 있고 없음은
살고 죽음에 매어 있음이 아닌 것을.
눈사람
오세영
코는 코대로, 눈은 눈대로
이목구비(耳目口鼻)
제자리에 굳어 있지 않는 것을
어찌 얼굴이라 할까,
한세상 모진 추위 홀로 사는 길이라면
돌아와 언 몸을 굳이 녹여 무엇하랴.
풀어지면 남는 건
물과 흙 그리고 한순간의 바람,
지금의 네 고운 얼굴, 혁혁한 형자(形姿)
집착과 애욕으로 굳혀진 얼음일 뿐
누가 이 혹한의 벌판에
눈사람 하나를 이렇듯
세워 놓았나.
눈 오는 소리
오세영
그리운 이에게는
왜 이다지도 할 말이 없는가.
진한 커피 향으로도 가시지 않는
그 목마름.
심야에 일어나 편지를 쓴다.
밖에 적막하게 눈 내리는데
쓰고 지우고 지우고 쓰고
하얀 종이 위에선 밤새
사각사각
펜촉 스치는 소리.
눈 온 날
오세영
눈더미에 부러지는 소나무 가지의
와지끈-
호령 치는 소리,
새하얀 눈밭에 대고
허리춤을 까다가
기겁하여 도로 넣다.
눈 쌓여 온 천지 적막한 날엔
갈까마귀 울음에도
옷깃을 여미고 싶다.
능소화
오세영
배신의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이다지도 아름답더냐.
체념의 슬픔보다 고통의 쾌락을 선택한
꽃뱀이여,
네게 있어 관능은
사랑의 덫이다.
네 부드러운 몸둥이
다리에서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가슴으로,
칭칭 감아 올라
마침내
낼룽거리는 혀로
내 입술을 감쌀 때
아아, 숨 막히는 죽음의 희열이여,
배신이란 왜 이다지도
징그럽게 아름답더냐.
님은 가시고
오세영
님은 가시고
꿈은 깨었다.
뿌리치며 뿌리치며 사라진 흰옷,
빈손에 움켜진 옷고름 한 짝,
맺힌 인연 풀 길이 없어
보름달 보듬고 밤새 울었다.
열은 내리고
땀에 젖었다.
휘적휘적 사라진 님의 발자국,
강가에 벗언논 헌 신발 한 짝,
풀린 인연 맺을 길 없어
초승달 보듬고 밤새 울었다.
베갯머리 놓여진 약탕기 하나
이승의 봄밤은 열에 끓는데,
님은 가시고
꿈은 깨이고.
다랭이 논
오세영
깊은 바다나 옅은 강이나
자고로 물고기는 투망으로 잡았다.
저인망, 안강망, 정치망, 유자망, 채낚기, 통발을 던지고,
끌고, 쳐서 잡는 저
싱싱한 해산물의 펄떡임이여,
어찌 이뿐이겠는가.
나는 새,
기는 짐승 역시 혹은 그물을 치고 혹은
덫이나 올무를 놓아 포획하지 않던가.
무릇
살아 있는 생명은
공중이나 지상이나 물속이나
인연의 끈을 비비고, 꼬고, 묶고, 엮어 만든
매듭에 한 번 얽히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나니
아하, 저 농부,
봄 되어 날 풀리자
논두렁, 밭두렁 손질이 부산하다.
비록 땅에서 소출하는 작물이라 하나
그 역시 뭍에서 사는 생물일시 분명할지니
어찌 투망 치지 않고서 거두어 낼 수 있으랴.
봄에 던져
가을에 걷어 올릴 논둑의 저 성긴
저인망 그물이여!
단풍 숲속을 가며
오세영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옆을 보면
화들짝 붉히는 낯익은 얼굴.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뒤를 보면
또 노오랗게 흘기는 그 고운 눈빛.
가을 산 어스름 숲속을 간다.
붉게 물든 단풍 속을 호올로 간다.
산은 산으로 말을 하고
나무는 나무로 말하는데
소리가 아니면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하루 해는
설키만 하다.
찬 서리 내려
산은 불현듯 침묵을 걷고
화려하게 천자만홍(千紫萬紅) 터뜨리는데
무어라 말씀하셨나.
어느덧 하얗게 센 반백의
귀머거리,
아직도 봄 꿈꾸는 반백의
철딱서니.
달관
오세영
하루로 보면
밤과 낮이 별개 아니고,
삶으로 보면
낳고 죽음이 또한 별개가 아니라는 것은
오랜 동양의 가르침이지만
사랑과 미움 역시 그렇다는 것도
물을 보면 안다.수력 발전을 보아라.
물이 또한 불을 만들어 냄이니
흐르는 불은 물이요, 위로 오르는 물은 불.
환하게 등을 켜 든 황혼의 장미는
수직으로 솟은 물이고
서늘하게 내 발등을 스치는 꽃뱀은
수평으로 흐르는 불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면서 굳이
사랑과 미움을 애써 분별치
말기를.........
담
오세영
나무가 항상 한 곳에만 서 있다고 해서
갇혀 있다고 생각지 마라
움직이는 인간은 담을 쌓지만
서 있는 나무는 담을 허문다.
날아온 오동(梧桐) 씨 하나
자라서 제 선 돌담을 부수고
담쟁이 칡넝쿨 또한 담을 넘는다.
인간은 다투어 담을 쌓아
그 안을 삶, 밖을 죽음이라 이르건만,
그 안을 선(善), 그 밖을 또
악(惡)이라 이르건만
모두는 원래가 한가지로 흙.
인간의 분별은
담과 담 사이에 길을 내서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고 하나
나무에겐
이 세상 모든 곳이 또한 길이다.
당신의 피리
오세영
나는 당신의
피리인지 모릅니다.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이 내 육신을 애무할 때마다
이, 목, 구, 비-
다섯 개의 구멍에서
솟아나는 음률,
푸르른 봄날 당신이
강언덕에 앉아 피리를 불면
나는 아지랑이가 되어
이 세상의 꽃봉오리들을 터뜨리고,
쓸쓸한 가을날 당신이
산언덕에 앉아서 피리를 불면
나는 갈바람이 되어
이 지상의 나뭇잎들을 떨어뜨리고,
나는 꿈꾸는 허공,
텅 빈 구멍,
당신의 피리인지 모릅니다.
아니 당신의
피리랍니다.
대관령에 올라
오세영
굽이굽이 대관령 올라 푸른 동해 굽어보니
지난 한 생이 덧없고 무상하구나
솔잎 향긋하게 스치는 바람처럼
어찌 자유롭게 살지 못했던가
휘적휘적 대관령 올라 흐르는 흰 구름 바라보나니
지난 한 생이 욕되고 부끄럽구나
풀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어찌 티없이 살지를 못했던가
쉬엄쉬엄 대관령 올라 멧새들 지저귀는 소리를 듣나니
지난 한 생이 서럽고 안타깝구나
바위틈에 솟아나는 옹달샘처럼
어찌 아름답게 살지를 못했던가
대관령 올라 동해를 바라보나니 막 떠오르는해 나를 불러
지난 한 생 처럼 꿈속에서 살지 말고
흰구름으로 살아라한다
풀잎의 이슬로 살아라한다
대양(大洋)
오세영
돌다리 건너서니 길이 없구나.
사미(沙彌)야,
보이는 건 골담초, 패랭이, 달맞이,
하얗게 울어대는 갈대숲.
보이는 건 어욱새, 가시덤불, 쑥굴헝
까맣게 웅크린 널바위.
바람 불고
폭우 세차게 몰아치면
산은 해일처럼 일어서는데
사미야, 우리는
산에 든 한 조각 배였더란 말이냐?
어린 사미의 손목을 잡고
헤매는 길,
숲은 파도처럼 일렁이구나.
먼 항구의 배를 부르듯
사미야, 이제 너는
널바위에 올라서 바라나 치렴,
광풍에 날리면서 법고나 치렴,
길 밖의 길을 찾아 길 안의
길을 찾아 사미야,
너는 징이나 치렴,
바람 불면
산도 숲도 물이 되고
또 바다가 되는 것을.
더불어 살자
오세영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양 떼보다 더 간절한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봄이 오는 소리를 행여 놓칠까,
긴 겨울, 대지에 귀를 열고 견디는 양.
양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까닭에
결코 오는 봄을 의심치 않는다.
봄을 맞이하는 마음이
양떼보다 더 고운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먼 데서 오는 그가 행여 추위에 떨까,
포근한 털옷으로 감싸 안은 양.
양은 항상 이웃과 더불어 사는 까닭에
남의 고통을 안다.
봄을 간직하는 마음이
양떼보다 더 순결한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찬란한 봄빛이 행여 더렵혀질까,
정결한 흰옷으로 갈아입고 강가에 서는 양.
양은 결코 서로 다투지 않은 까닭에
한 모금의 사랑도 나누어 마실 줄 안다.
대지에 귀를 대면 아아,
지금은 멀리서 봄이 오는 소리.
들린다, 어디선가 강물 풀리는 소리.
졸졸졸 어디선가 눈 녹는 소리.
온 누리 빛 밝은 그 날이 오면
온 누리 찬란한 새 봄이 오면
강물에 풀리는 얼음장처럼
우리도 하나되어 남북으로 흐르자.
우리도 양떼 되어 이제는
더불어 살자.
도시의 여자
오세영
맞서 싸우기 위해서
간편한 바지를 입을까,
함정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현란한
스커트를 입을까,
머리를 풀어헤쳐 사자 흉내를 내본다.
머리를 틀어올려 꽃뱀 흉내를 내본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실세는 아무래도
IMF
맞붙어 싸우고 명예퇴직을 당하기보다는
또아리를 틀고 기다리는 뱀이 더
현명하겠다.
출근길,
날렵하게 스커트를 걸치고
거울 앞에 서 보는 도시의 여자,
무슨 탈을 쓸까,
붉은 루즈를 입에 물고
우는 얼굴 위에 그려 넣는 웃는 얼굴,
슬픈 얼굴 위에 그려 넣는 즐거운 얼굴,
독도(獨島)
오세영
비바람 몰아치고 태풍이 불 때마다
안부가 걱정되었다.
아등바등 사는 고향, 비좁은 산천이 싫어서
일찍이 뛰쳐나가 대처에
뿌리를 내리는 삶.
내 기특한 혈육아,
어떤 시인은 너를 일러 국토의 막내라 하였거니
황망한 바다
먼 수평선 너머 풍랑에 씻기우는
한낱 외로운 바위섬처럼 너
오늘도 세파에 시달리고 있구나.
내 아직 살기에 여력이 없고
너 또한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듯
그 누구의 도움도 바라지 않았거니
내 어찌 너를 한 시라도
잊을 수 있겠느냐.
눈보라 휘날리고 파도가 거칠어질 때마다
네 안부가 걱정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네 사는 그 곳을
어떤 이는 태양이 새 날을 빚고
어떤 이는 무지개가 새 빛을 품는다 하거니
태양과 무지개의 나라에서 어찌
눈보라 비바람이 잦아들지 않으리.
동해 푸른 바다 멀리 홀로 떠 국토를 지키는 섬,
내 사랑하는 막내아우야.
돈
오세영
손에서 손으로 건네는 순간
반짝,
햇빛에 얼굴을 드러낸 돈은
이내 지갑 속에 숨는다.
밀애를 즐기는 연인들이 그러하듯
밀실은
애정을 나누는 공간,
양복 안쪽
가슴 깊이 숨겨 놓은 지갑을 보아라.
그대를 향한 일념 또한 이 같지 않던가.
항상
심장 가까이서 잠드는 사랑처럼,
그러나 돈은
일방적이다.
그의 사랑엔 그리움이 없다.
들이대면 무엇이나 무서워
옷 벗고 몸을 허락하는
피스톨이다.
돈은
물질들이 나누는 사랑,
그 탄약이 잠재워진 지갑을 피스톨처럼
가슴에 품고
나는 오늘도
사냥길에 나선다.
돌
오세영
1
이성을 굳히면 얼음이 되듯
감정을 굳히면 돌이 될지 모른다.
한번만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유성의 희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태양?
수억 만년 전
격정에 휘말린 지구는
고혈압 환자의 터져버린 피처럼
폭발하다 응고하여 돌이 되었다.
싸늘하게 굳어버린 불,
굳힌다는 것은 가둔다는 것.
무심하게 보이지만
이 세상의 돌들은 모두 가슴에 하나씩
슬픈 불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도 정성껏
돌을 쪼고 있는 석공이여,
너는 시방 형상을 짓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하나씩
갇힌 불을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조각들을 보아라. 거기엔
슬픔과
사랑과
미움이
활활 타 오르고 있지 않던가.
4
정원 한구석에
바위 하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옆의 매화나무가 활짝 몸을 열 때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앞의 라일락이 물씬 암향(暗香)을
내쏟을 때도,
뒤의 장미꽃이 넌지시 추파를
던질 때도
없는 듯 한 가지 그림 같은 자세로
시선을 감옥에 가두는 돌,
돌은 운명처럼 제자리에
갇힌다.
그러나 보라.
어느 봄비 내리는 날 밤
뜰 건너
등불 화안히 켜진 창문을 바라다보며
뺨을 적시는 그의 눈물을.
돌은 소리 없이 울 줄도
아는 것이다.
돌 미륵(彌勒)
오세영
피이 뱃쫑 뱃쫑,
피이 뱃쫑.
산새들 요란히 우짖는 소리에
돌에서 막 깨어난 미륵불
슬며시 세상 문 밀치고 밖으로 한 발짝
발을 내딛다
추위로 싸늘하게 얼어 동면에 든다.
극락은
가릴 것, 숨길 것 없이
벗어버린 맨몸으로 사는 세상,
춥고 배고픈 중생들로 가득한
이승의 사계절은 여름도 겨울이다.
얼음 녹아 돌돌돌 계곡물은 흐르는데
산비탈 진달래꽃 활짝 웃고 있는데
동백꽃
오세영
괜찮다.
괜찮다.
부풀어오르는 밀물 탓이다
개펄을 채우고 둑을 넘쳐서
마당까지 벙벙히 넘실대는
물,
남쪽으로 불어오는 바람 탓이다.
옷고름 풀어헤치고 치마를 들치며
속살 간질이는
갯바람,
괜찮다.
괜찮다.
사릿날
초조(初潮)의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달아오르는
처녀의 볼.
들꽃
오세영
잘 자란 보리밭아,
이제 너는 농부의 그 고운 땀조차
받기를 꺼리는구나. 괭이를 움켜쥔 그
싱싱한 힘조차......
살찐 흙과 입맞춤하며 우리들의 순결한 사랑을
갈던 그 봄의 쟁기는 지금
어디 갔는가.
내 발등에 부서져 내리던 그 부신 햇살은
푸른 하늘로 솟구치던 종다리의 노래는......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쟁기질하는 대지란 없다.
트랙터가 대신하는......밭둑엔
들꽃 하나 피지 않는데
유전자가 조작된 보리들만 잘 자라 무성하구나.
이제 더 이상
백지에 펜을 긋지 않는다.
한 문장의 이랑도 컴퓨터 없이는 갈지 못하는
내 원고지의 빈 들.
등불
오세영
주렁주렁 열린 감.
가을 오자 나무들 일제히 등불을
켜 들었다
제 갈 길 환히 밝히려
어떤 것은 높은 가지 끝에서 어떤 것은 또
낮은 줄기 밑동에서
저마다 치켜든
붉고 푸른 사과 등.
밝고 노란 오렌지 등.
......
보아라 나무들도
밤의 먼 여행을 떠나는 낙엽들을 위해선 이처럼
등불을 예비하지 않던가
등산(登山)
오세영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이는 생애(生涯)의 중량(重量),
확고(確固)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때는 흔들린다.
암벽(岩壁)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무명(無明)의 벌레처럼 무명(無明)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 않는다.
벼랑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암벽(岩壁)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接近)한다.
행복(幸福)이라든가 불행(不幸)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딸에게 - 시집을 보내며
오세영
?가을바람 불어
허공의 빈 나뭇가지처럼 아빠는
울고 있다만 딸아
너는 무심히 예복을 고르고만 있구나.
이 세상 모든 것을 붙들지 못해서 우는가 보다.
강변의 갈대는 흐르는 물을, 언덕의 풀잎은
스치는 바람을 붙들지 못해
우는 것, 그러나
뿌리침이 없었다면 그들 또한
어찌 바다에 이를 수 있었겠느냐.
붙들려 매어 있는 것치고
썩지 않는 것이란 없단다.
안간힘 써 뽑히지 않는 무는
제자리에서 썩지만
스스로 뿌리치고 땅에 떨어지는 열매는
언 땅에서도 새싹을 틔우지 않더냐
막막한 지상으로 홀로 너를 보내는 날,
아빠는 문득 뒤꼍 사과나무에서
잘 익은 사과 하나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떡갈잎 흔드는 저 바람이
오세영
떡갈잎 흔드는 저 바람이
후박잎 스치는 이 바람이듯,
깊은 소 휘도는 저 냇물이
널바위 휘감는 이 냇물이듯
슬픔이 기쁨된들 어이하리요.
기쁨이 슬픔된들 또 어이하리요.
벼랑 끝 서 있는 청솔 한 그루,
어제 속눈썹 스치던 저 바람이
오늘은 머리칼 날리는 이 바람이듯,
어제 뺨에 흐르던 저 눈물이
오늘은 가슴을 적시는 이 눈물이듯
바람 불고, 천둥 울고, 어두운 날은
물에 젖어 멍청히
땅만 바래고,
바람 자고, 꽃잎 벌고, 푸르른 날은
빛을 좇아 아득히
하늘 바래고.
뚱보의 나라
오세영
미답의 땅을 한 군데 남겨놓았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자본주의를 위해서
항상 새로움을 상품화하는
그 탐욕을 위해서---
목하,
아메리카는 새로운 인종을 개량중이다.
햄버거와 코카콜라와
핫도그에 의해서 비육된
뚱보의 나라,
예전엔 미래의 인간이
몸통은 작고 머리통만 덜렁 커지리라 상상했는데
아니다. 21세기 새로운 인종은
달걀 몸통에 좁쌀 머리통의 체형,
그 무거운 체중의 유지에 따르는 식품을 팔아먹고
그 불편한 보행을 담보로 탑승 수단을 팔아먹고
그 비활동성 취미로 하여 비디오를 팔아먹고
그 무딘 지능을 대신해 컴퓨터를 팔아먹고
그 쇠잔해진 건강을 미끼 삼아 의약품을 팔아먹고
목하,
아메리카는 새로운 인종을 개량중이다.
똥보가 되는 원인이
'롱 푸드*'에서 기인한다는 견해도 있으나
아니다. 그것도 먹지 못하여 에티오피아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명씩 굶어 죽고 있지 않은가.
걸리버가
미답의 땅을 한 군데 남겨놓았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위해서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 롱 푸드(wrong food): 핫도그, 햄버거 등 불량 식품.
뜨락
오세영
쓸어 무엇하리요.
사미야,
비를 거두어라.
뜰은 원래 그들의 침실,
먼 여행에서 돌아와 피곤하게 잠든
숨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이제껏 허공에 매달려 살다가
드디어 찾은 대지의 안식,
팔랑,
도토리 잎새 하나 떨어져
상수리 마른 갈잎 다소곳이
감싸 안는다.
사랑은 인간만이 하는 것은 아닌 법,
그 위로 후두둑
가을 햇살이 내린다.
낙엽이나, 들풀에 맺힌 이슬이나, 이리 저리 구르는 돌멩이나
심지어는 깨어진 사금파리까지도
사물이 자리한 이 지상의 모든 곳은
가장 편안한 존재의 침실,
사미야,
그만 비를 거두어라.
우주의 피곤한 숨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라일락 그늘 아래서
오세영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그
한 줄.
라스베가스로
오세영
가자, 보물섬으로
콘크리트 정글이 무성하고
네온의 꽃들이 현란하게 피어 있는
그곳은
황금이 묻혀 있는 땅,
오아시스의 생수, 한 잔의 불타는
물로 목을 축이고
사막의 섬, 라스베가스로 가자.
일찍이 우리는 황금을 찾아서 여기 오지 않았던가.
황금을 찾아서 서부로 서부로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우리는
개 목의 꼬리표 같은
한 장의 플라스틱 카드를 얻었을 뿐이다.
개표를 버리고
울을 튀쳐나와
시들 수 없는 아메리카의 꿈,
가자, 보불섬으로
한 장의 지페로 지도를 삼아
네바다 사막에 뜬 한 점 섬
라스베가스로 가자.
랩송의 철학
오세영
말을 잊지 않기 위하여
말을 한다.
말을 하기 위하여 말을 한다.
홀로 있으므로 말을 한다.
로빈슨 크루소도 그랬을 것이다.
아이 엠 소리,
익스 큐즈 미,
땡큐,
이건 말의 진실한 상대가 없는 말,
그래도 각자 열심히 지껄이는 것은
살아 있음을 증거하기 위한 것일까.
들어줄 사람이 없어 흐름이 막힌 말은
체해
설사를 일으킨다.
말의 설사, 흑인들이, 아니
소외된 아메리카 민중들이 부르는 랩,
로빈슨 크르소의 노래.
오늘의 아메리카는
수많은 섬들이 떠 있는 바다다.
랭군을 넘어서*
오세영
아메리카를 좋아하는 딸아,
오늘만은 팝콘을 먹지 말아라.
버터 냄새가 물씬 나는
튀밥,
입으로 듣는 팝송,
네가 지금 보고 있는 저것은
솝 오페라**가 아니다.
마카로니 웨스턴***은 더욱 아니다.
자유란 시간을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의
미덕,
시간을 죽이기 위하여 그들은
팝콘을 먹지만
감각을 달래기 위하여 그들은
팝송을 듣지만
너는 아직 아메리칸이 되기에는
멀다.
지금 화면에서 군화발에 짓밟히는 저 여자는
아웅산 수지****가 아니다.
줄리아 로버츠*****가 아니다.
너도 예전엔 자유를 위하여 거리로
뛰쳐나간 적이 있지 않았니?
내 딸아,
오늘만은 팝콘을 먹지 말고 영화를 보아라.
너는 아메리칸이 아니다.
* 랭군을 넘어서(Beyond Rangoon) : 영화 제목 <랭군(버마의 수도)을 넘어서>. 버마 네윈의 군사 독재를 고발한 미국의 영화로 미국에서 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었음.
** 솝 오페라: 눈물을 짜는 멜로드라마. 비누를 선전하는 광고의 후원으로 만든 연속 상연되어 인기를 얻은 TV의 한 드라마에서 연유된 말.
*** 아웅산 수지 : 버마의 민주화 투쟁의 영웅. 버마의 독립투사 아웅산의 딸.
**** 줄리아 로버츠 : 미국의 여배우.
러브 콜(Love call)
오세영
한밤중에
전화가 걸려온다.
안녕하세요? 저는 나타샤 콜이예요.
지금 외롭지 않으세요? 시간이 있으면
우리 이야기해요.
행복을 드릴게요.
나는 한 마리 집을 잃은 들개다.
너는 여우냐, 아니면 외로운 사향노루냐.
밖은 적막한 어둠에 싸여 있는데,
도시는 정글처럼 숨죽이고 있는데,
문득 자지러질 듯 다가오다 사라지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언어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몸으로 접촉하면 되죠,
행복을 사시려면 전화를 주세요.
1-800-411-9111
아메리카는
밤에도 거대한 사냥터인가.
이 메일로, 인터넷으로, 전화로,
티 브이로 공략해오는 '행복'의 판매작전.
오늘밤엔 나도
들국화의 맑은 피를 마시고
싶고.
마라톤
오세영
무슨 일일까,
일순의 정적이 끝나자
-팡-
빙벽 깨지는 소리,
스타트 라인에 선 건각(健脚)들 일제히
앞으로 뛰쳐나간다.
돌돌돌
졸졸졸
보폭과 보폭을 다잡으며
먼 태양을 향해 나란히 일렬로 달리는 그들의
힘찬 역주(力走),
양안(兩岸)에 늘어선 산벗꽃, 진달래가 환호작약,
잠에서 막 깨어난 다람쥐, 꽃사슴의
갈채가 요란하다.
구만리인가, 십만리인가.
봄은
긴 마라톤 코스의 출발점인가.
마리화나
오세영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
실재하는 것은 돈,
돈이 인간을 움직이고 사회를 움직이고
돈은 자본, 자본은 물질, 물질은 감각
감각밖에 없다.
믿지 못할 가정을 버리고 사회를 버리고
저 감각의 아이스크림,
정신의 시뮬레이션,
허상답게
하얀 연기로 사라지는 현실을
애도하며
감각이 이루어낸 저 천국의 창틀에서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
마리화나를 피우자.
막다른 곳에서
오세영
그렇게 그냥 서 있었다.
한 곳에
기다림의 막다른 곳에
걸어서 걸어서
이제 서 있어도 걷는 것이 된
그것을 나무라 할까.
그것을 꽃이라 할까.
산마루가 멍청히 서 있는 측백 혹은 소철 한 그루
걷다가 걷다가 지쳐
짓누르는 어깨의 세상 짐들을 부리고
너의 이름을 부리고
너를 부리고
마침내 막다른 그곳에 와서
나무는
세상에 늘어뜰린 제 그림자를 걷으려
스스로 꽃과 잎을 벗어버린 채
홀로 하늘로 진다.
산이 된다.
만리장성
오세영
저 너머엔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멀리서
마냥 바라보기만 했던,
새날이 밝아오고 찬란히 무지개가 뜨던
언덕 너머 그 하늘,
가로막는 장성은 높고 가파르기만 한데
굳게 닫힌 문, 단단한 포루(鋪樓).
해자(垓字)는 간신히 건넜건만
내 휘하엔 병력도 무기도 변변치 않아
다만 펜 하나 들고 이 험한 장벽,
어떻게 깨부시고 넘을 것인가.
탁자 앞에서 오만하게 버티고 서
날 굽어보는 그 벽의 서가(書架),
용기를 내서
사다리를 놓고 기어올라
간신히 한 권의 장서(藏書)를 뽑아든다.
부질없이
석축(石築)에 괸 돌 하나를 허문다.
말의 칼
오세영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싸워야 한다.
걸어오면 받아쳐야 할 한마디 말을
폐부 깊숙이 감추고
집을 나서는 이 아침,
지하철역 플랫폼을 울리는 휴대폰의
신호음 소리.
한번 빼면
썩은 무라도 쳐야 하는 칼인데
승산을 저울질하며
뺄까 말까 망설인다.
예전엔 맨손과 맨손들이 싸우다가
칼로 바뀐 것이 엊그제.
자본의 시장에서는 이제
말로 싸우는구나.
허리에 칼 대신 휴대폰을 차고
오늘도 출근길을 서두르는
하루의 시작.
매장(埋葬)
오세영
동물이든 기계든
산 자는 무언가 먹어야 움직인다.
먹이 곧 에너지임으로……
빵은 밀로, 석탄은 식물로, 석유는 수상 생물로 만든
연료.
그 연료로 엔진을 돌리고
선박은 대양을,
자동차는 도로를 질주한다.
아, 기계들은 살아 있다.
생명을 먹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 없는
또 다른 한 생명.
우주를 건너는 지구의 에너지는
어디서 얻는 것일까.
거대한 그 식욕,
지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죽어
그의 에너지가 된다.
매화꽃 피어 봄이라는데
오세영
우뢰도
서릿발도 치지 않는 곳에서
허공에 몸 기댄 채 홀로
향기 머금는 난(蘭)이여.
더위 피해 추위 피해 스스로 갇힌
사기분합(沙器盆盒)엔
햇빛조차 머물지를 못하는구나.
사랑도 미움도 버려 맑은
이슬만 먹고
생애에 단 한 번 꽃 피운다 하건만
난(蘭) 한 분(盆) 안고
온철을 먼 하늘 우러르는 사람아.
밖엔 매화꽃 피어 봄이라는데
매화꽃 지고 오동꽃 피어 여름이라는데
국화꽃 피어 가을이라는데
국화꽃 지고 동백꽃 피어 겨울이라는데
먹물 장삼
오세여
슬픔도 없다.
기쁨도 없다.
양지 바른 툇마루에 홀로 앉아
꿈꾸는 듯 조으는 듯 먼 산 바래는
홑무명 먹물장삼 매마른 어깨,
앞뜰의 불두화佛頭花 낙엽 지는데
뒤뜰의 돌미륵 금이 가는데
코스모스 꽃 대궁에 단정히 앉아
하아얗게 굳어가는 잠자리 하나,
텅
비워낸 육신의
날갯짓 하나.
먼 그대
오세영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이별의 뒤안길에서
촉촉히 옷섶을 적시는 이슬
강물은
흰구름을 우러르며 산다.
만날 수 없는 갈림길에서
온 몸으로 우는 울음
바다는 하늘을 우러르며 산다.
솟구치는 목숨을 끌어안고
밤새 뒹구는 육신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움에 산다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별하나 두고
이룰 수 없는 거리에
흰구름 하나 두고
먼 하늘
오세영
바람이 분다
하늬바람이 불어온다.
백양나무 흰 물결이 쏠려가고
단풍 물이랑도 어느덧 잦느니,
가을 산은
썰물이 진 갯벌,
드러낸 암초의 앙상한 해초들 속에서
낙과落果를 줍는
나는 조개잡이였구나.
바람이 분다.
마파람이 불어온다.
마른 잔디엔 벙벙히 초록물 들고
숲은 거대한 파도소리로 우느니,
봄 산은
밀물이 든 바다,
크고 작은 능선의 푸른 파도를 타고
산을 오르는
나는 뱃사람이었구나.
산이 물이요 물이 산인데
산을 어찌 산이라 이르겠는가.
물이 산이듯 산이 물이듯
산문山門에 기대어 바라보는
먼 하늘.
먼 후일
오세영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나 이제 아무데서나
쉬어야겠다.
동백꽃 없어도 좋으리,
해당화 없어도 좋으리,
흐린 수평선 너머 아득한 봄 하늘 다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면……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나 이제 아무나와
그리움 풀어야겠다.
갈매기 없어도 좋으리.
동박새 없어도 좋으리.
은빛 가물거리는 파도 너머 지는 노을 다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면……
가까운 포구가 아니라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먼 후일 먼 하늘에 배를 대듯이.
멀리서
오세영
차라리
멀리 있음이여,
벼랑에 피는 꽃보다는
강 건너 등불이,
강 건너 등불보다는 바다 건너 무지개가,
바다 건너 무지개보다는
저 하늘의 별이 더 아름답나니
나는 벼랑 끝에서 우는 한 마리 암사슴이 되기보다는
창가에 앚아 별을 우러르는 일개
시인이 되리라.
사랑하는 이여, 그러므로
다시 만날 수 없거든 차라리
멀리 떠나갈지니
가까이 있으면서도 먼 것이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운 것보다 더
먼 까닭이니라.
그대
가까이 더불어 있는 먼
사람이여,
메이 아이 헬프 유?
오세영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는 뜻이
아니다.
메이 아이 헬프 유?
그것은
무엇하러 왔느냐는 질문,
용무가 없으면 나가라는 명령이다.
비벌리 힐스,
그 재스민 향기에 취해 언덕을 오르는데
불쑥 나타난 백인 하나,
'메이 아이 헬프 유?'
금지구역도 아닌 이 백인 동네를
나는 그저 산책하고 싶을 뿐인데
빨리 사라지라는 독촉이다.
인간이 항상
돕거나 도움을 받는 관계로 산다면,
인간이
우월하고 열등한 관계로만 산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살벌하고
슬플 것인가.
용무가 없으면 각자 관계를 끊고 살자는
아메리카의
메이 아이 헬프 유?
메일박스
오세영
아메리카 어디를 가나
한길을 향해
대문 밖 멍청히 서 있는 메일 박스
언뜻 보기엔 새장 같지만
종달새 한 마리가 포로롱 날 것 같지만
아니다, 그것은
무인 포스트,
스파이가 남의 눈을 피해서 첩보를 교환하듯
몰래 수표를 놓고 또 찾아가는
비밀 접선함.
이 세상에서
내게 안부를 물어올 사람이 누구 있다더냐.
누가 손수 펜으로 글을 써 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다더냐.
매일 주고받는 메일은 항상
각종 요금 청구서 혹은 은행 어카운트 빌 혹은 상품 광고문,
오늘도 P.G. & E* 청구서와 카드 결재 확인서가
날아들었다.
현금이 안 통하는 아메리카에서
78.21$을 체크로 끊어 포스트에 넣고 돌아서는
나의 목덜미에
희끗희끗 내리는 눈발,
스파이가 정보를 교환하듯
몰래 체크를 교환한다.
정보가 곧 돈인 아메리카의 무인 포스트
메일 박스
* P.G. & E :가스 및 전기 요금 청구서
모래
오세영
결국은 한 알의
모래가 된다.
파멸(破滅)이, 저 존재(存在)의 중심(中心)에서
깨어진 접시가
이루는 완성(完成).
결국은 한 알의
결정(結晶)이 된다.
깨어지고 깨어져서
이겨 내는 괴로움,
그는 시방
바닷가에 서 있다.
들려오는 건
허무(虛無)의 바람 소리와
애증(愛憎)의 기슭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
가장 밝은 지상(地上)에서 뒹구는
결국은 한 알의
모래가 된다.
해조음(海潮音)이 된다.
모순(矛盾)의 흙
오세영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生涯)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인간(人間)은 한 번
죽는다.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
누구나 인간(人間)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完成)되는
저 절대(絶對)의 파멸(破滅)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矛盾)의 그릇.
목걸이
오세영
비닐끈이든 리본 천이든
색실로 포장되고 묶여져야 제 구실을 하는 상품,
제품은 제작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한 생의 파란만장한 삶도 마침내
삼베로 묶인 주검이 되어야 비로소
무덤에 들지 않던가
끈이 풀린다는 것은 곧
소멸한다는 것, 아니 헤어진다는 것.
창고의 재고품처럼
더 이상 헤어져 홀로 되지 않기 위해서
내 오늘 우리들의 만남을 사랑으로 꽁공
묶어두나니
그대 하얀 목덜미에
한 줄의 끈으로 매인 에메랄드의
눈부심이어.
목성이나 토성엔
오세영
새벽 산책길에서
살모사가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
입에 삼키는 것을 보았다.
어제 저녁에도 나도
꽁치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원먹지 않았던가.
하나의 생명을 먹고 사는 다른 또 하나의 생명
죽은 자는 죽인 자의 어머니,
이 무참하게 저지른 죄를 씨기 위해 산 자는
식사후 항상
물로
자신의 내장을 헹구어낸다.
아무도 살지않는 목성이나 토성엔
물도 필요 없지 않던가
못
오세영
벽에 못을 치고
액자 하나를 걸어 본다.
곁에 서 있는 사람은 항상 아내
부모님은 뒤에 계신다. 그리고
앞에 세 남매가 서 있는
사진의 구도
우리는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혹은 사랑으로 혹은 미움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친구라 부르는
원수라 부르는
그 틀 안에 내가 있고
나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또 너를
고정시킨다.
새집 드는 날은
못을 박는 날
이곳 저곳 방마다 못을 박는다.
그러나 가끔은 부러져
흙바닥에 나뒹구는 못.
무궁화
오세영
한결같은 모습으로 늘
제 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도시로 가출한 누구는
어떤 귀부인의 거실에서
동성애를 줄기고
또 누구는 금값으로 팔려가
어는 윗전의 화려한 식장에서
빈 가슴을 위무(慰撫)한다지만
너는 타고난 성품대로
한 하늘만을 품고 있구나
너를 보면 알 수 있다.
낳고 죽음이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한 자리를 지키는 죽음이야 말로
영원하다는 것을 너, 한결 같은
마음으로 그렇게 서 있구나
꽃들의 어머니여. 무궁화여!
무명연시(無明戀詩)
오세영
1
님은 가시고
꿈은 깨었다.
뿌리치며 뿌리치며 사라진 흰 옷,
빈 손에 움켜 쥔 옷고름 한짝,
맺힌 인연 풀 길이 없어
보름달 보듬고 밤새 울었다.
열은 내리고
땀에 젖었다.
휘적 휘적 사라지는 님의 발자국,
강(江)가에 벗어 논 헌 신발 한짝,
풀린 인연 맺을 길 없어
초승달 보듬고 밤새 울었다.
베갯머리 놓여진 약탕기(藥湯器) 하나
이승의 봄밤은 열에 끓는데,
님은 가시고
꿈은 깨이고.
3
그곳은
길이 아니다. 장님이여
암흑의 허공에
피리를 불어라
명부염라(冥府閻羅)의 귀를
울려라.
깨진 피리여
가도 가도 황토흙
길은 멀고,
멀리 사라지는 상여(喪輿) 소리
요령(搖鈴) 소리,
지어미의 음성은
아스라한데
이슬에 젖은 지팡이여, 육신(肉身)이여,
그쪽은 길이 아니다.
동박새 동박새로 가는 길,
후박나무 후박나무 가는 길,
길은 어디에나 있다.
피리를 불어라
장님이여,
정(情)에 눈 먼 지아비여.
24
외로운 날에는
피릴 불었다.
텅 빈 가슴을 울리는
바람 소리.
희(喜), 노(怒), 애(哀), 락(樂)
네 개의 구멍은 깨졌구나,
여윈 손으로
등을 두드리며
마주대는 입술과 입술.
피리는
목이 갈(渴)한 자에게만
선율이 된다.
비어 있으므로 비상(飛翔)하는
날개.
외로운 날에는
강(江)가에 홀로 앉아
피릴 불었다.
깨진 육신(肉身)은 비에 젖는데
허무(虛無)의 공간(空間)을 울리는
바람 소리. 파도 소리,
또 바람 소리
36
그대 손 끝에서
구름이 일고
그대 손 끝에서
비가 내렸다.
부서진 악기(樂器), 혹은 끊긴
금슬(琴瑟),
이승의 금침(衾枕)은 차기도 한데
풀린 현(玹), 퉁기는 낙숫물 소리,
그대 손 끝에서
천둥이 울고
그대 손 끝에서
번개가 쳤다.
부서진 문틀, 혹은 병(病)든
육신(肉身).
긴 밤, 잔 기침 숨도 가쁜데
들창문 두드리는 가을 빗소리.
말로도 글로도 못 닿는 나라,
그대 문전에 빗장 풀려고
밤 새워 두드리는 법고(法鼓)소리,
빈 가슴 두드리는 대문(大門) 소리.
37
물로 빨아질거나
님의 옷에 배인 현흔(血痕),
봄 강(江) 밀물에
내의(內衣)를 빤다.
올과 낱으로 짜올린 정분(情分),
흰 모시 단속곳의 연분홍 때,
달 뜨면
사(砂丘)엔 동백꽃 피고
봄 강물 마른 하상(河床) 씻어내린다.
씻겨질거나
맨살에 남겨놓은
님의 발자국
서(西)으로 떠나버린 님의
발자국.
43
새벽 세 시
강물이 강물로 흐르고
바다는 바다로 푸르고
까투리 장끼 곁에 눕고
새벽 세 시,
달빛은 눈썹 위에 쌓이고
은하(銀河)는 귀밑머리 적시고
별빛은 이마에서 꿈꾸는 시간,
세시에 깨어
경(經)을 읽는다.
일(一)은 다(多)이며 다(多)는 일(一)이며, 가르침에 따라서 의미를 알고 의미에 의하여 가르침을 알며, 비존재는 존재이며 존재는 비존재이며, 모습을 갖지 않은 것이 모습이며 모습이 모습을 갖지 않은 것이며, 본성이 아닌 것이 본성이며 본성이 본성이 아니며……
화엄경(華嚴經) 보살십가품(菩薩十佳品) 그 말씀.
아, 가슴으로 내리는 썰물 소리
갈잎 소리.
44
육신(肉身)으로 타고 오는
바람 소리.
잘 있거라, 잘 있거라,
해거름 나루터에 달빛 지는데
강 건너 사라지는 님의
말 소리.
육신(肉身)으로 타고 오는
갈잎 소리.
잘 가거라, 잘 가거라,
세모시 옷고름엔 별빛 지는데
속눈썹 적시는 가을
빗소리.
이승은 강물과 바람뿐이다.
옷고름 스치는 바람뿐이다.
치마폭 적시는 강물뿐이다.
육신(肉身)으로 타고 오는
물결 소리
마른 하상(河床) 적시는 가을
빗소리.
46
요란한 웃음소리,
이승은 온통 분꽃밭이다.
요란한 박수 소리
이승은 흐드러진 장미밭이다.
피날레를 알리는 징이 울고,
불이 꺼지고
빈 객석엔 꽃잎 떨어져 내리고,
밤이 왔다.
막이 내렸다
탈을 벗는 광대여
어제 탈은 잡년 탈,
손타리(孫陀利), 전차녀, 제파달다(提婆達多)* 탈
막이 내렸다.
찢어진 이마를 끌어안고
달밤에 홀로 우는 광대여,
돈으로 에미를 살 수가 없어
정(情)으로 애비를 살 수가 없어
소주 한잔 마시고
비틀거리면,
요란한 웃음소리
이승은 온통 분꽃밭이다.
* 손타리(孫陀利), 전차녀, 제파달다(提婆達多): 전생(前生)에 인연으로 만나 석존(釋尊)을 번뇌에 빠뜨린 사람들.
52
진흙 털고
먼지 털고
해진 신발을 깁는다.
풀꽃을 밟았을까,
이슬 냄새가 난다.
벌레를 밟았을까
쇠똥 냄새가 난다.
돌멩이에 챈 신발 한 짝.
애증(愛憎)과 영욕(榮辱)의
하루는 저물었다.
지팡이여, 지팡이여
돌베개의 꿈은
차구나.
웃음을 털고
울음을 털고
피곤한 육신이 잠드는
길섶,
해진 신발 한 짝
꿈꾸는 길섶.
60
해진 손으로
끊긴 올을 잇는다.
살 가릴 베 한 필 짜려고,
어둔 눈으로
끊긴 올을 잇는다.
혼(魂) 가릴 베 한 필 짜려고,
갈 바람에 젖어서
우는 베틀, 베틀에 기대어 꿈꾸는
백발(白髮),
부러진 잉앗대에 달빛 삭아
내리는데,
풀린 실타래에 말씀 삭아
내리는데,
빛과 말씀으로 짜올린 수의(壽衣).
해진 손으로
맺힌 올을 푼다.
손 묶을 삼베끈 삼으려고,
어두운 눈으로
맺힌 올을 푼다.
발 묶을 모시끈 삼으려고,
64
꽃씨를 묻듯
그렇게 묻었다.
가슴에 눈동자 하나,
독경(讀經)을 하고, 주문(呪文)을 외고
마른 장작개비에
불을 붙이고
언 땅에 불씨를 묻었다.
꽃씨를 떨구듯.
그렇게 떨궜다.
흙 위에 눈물 한 방울,
돌아보면 이승은 메마른 갯벌,
목선(木船) 하나 삭고 있는데,
꽃씨를 날리듯
그렇게 날렸다.
강변에 잿가루 한 줌.
65
너를 보았다.
문밖에서,
닫혀진 우주(宇宙) 밖에서
너를 보았다.
가지 끝에서,
어두운 하늘 끝에서
너를 보았다.
보이는 것은 안개, 눈 내리는 저녁 불빛,
불빛 가득 고인 발자국.
자작나무 숲에 울던 바람은
시방 내 귀밑머리를 날리고
깨어진 피리 하나,
눈 속에 묻혀 있다.
너를 보았다.
문밖에서
닫혀진 우주(宇宙) 밖에서
너를 보았다.
하나의 별, 한 마리의 새,
너를 바라보는 절망(絶望)의 눈.
무엇을 쓸까
오세영
무엇을 쓸까
탁자에 배부된 답지는
텅 비어 있다
전 시간의 과목은 ‘진실’
절반도 채 메꾸지 못했는데
종이 울렸다
이 시간의 과목은 "사랑"
그 많은 교과서와 참고서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맨손엔 잉크가 마른 만년필
하나,
그 만년필을 붙들고
무엇을 쓸까
망설이는 기억의 저편에서
흔들리는 눈빛
벌써 시간은 절반이 흘렀는데
답지는 아직도 순백이다.
인생이란 한 장의 시험지,
무엇을 쓸까
그 많은 시간을 덧없이 보내고
치르는 시험은 항상
당일치기다
문밖에서
오세영
당신은
어디에 숨어 계십니까,
당신이 계신 곳을 찾으려고
나는
꽃의 문 앞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당신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 꽃의 문을 열자 향기가 있었습니다. 향기의 문을 열자 바람이 있었습니다. 바람의 문을 열자 하늘이 있었습니다. 하늘의 문을 열자 빛이 있었습니다. 빛의 문을 열자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무지개의 문을 열자 비가 내렸습니다. 비의 문을 열자 나무가 있었습니다. 나무의 문을 열자 다시 꽃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숨어 계십니까,
나는 항상 당신의
문밖에 서 있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문밖에
서 있습니다.
물의 사랑
오세영
인간이 불로 어두움을 밝힌다면
자연은 그것을 물로 밝힌다.
계곡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
수맥의 전류로
휘황하게 타오르는 색색의 꽃들을 보아라.
어떤 것은 길가의 가로등으로 서 있고 어떤 것은 주택의
조명등으로 켜있고 또 어떤 것은 상가의
네온사인으로 반짝이지만
모든 꽃은
물로 달구어진 필라멘트다.
등꽃 가로등 밑을 분주히 오가는 토끼 자동차,
아카시아 조명등 아래서 야근하는 일벌 노동자,
백목련 탐조등을 따라 막 이륙하는 뻐꾹 비행기,
포플러 높은 가지 위의 관제탑에선
까치의 교신이 한창이다.
물질이 불로 사는 짐승이라면
생명은 물로 사는 기계.
인간도 이와 같아라.
사랑 또한 너와 나 사이를 흐르는
수맥이 아니던가.
미국의 대학에서 가르친 이상의 <날개>
오세영
'소꿉장난'이라는 말을 압니까?
이상의 <날개>를 강독하다가 문득 던진
나의 질문에
아무도 답하는 학생이 없다.
적당한 단어가 없는 영어로 말하자면
'playing at house keeping'인데
그 뜻을 또한 모르겠단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태어나서 우유로 자라고
티 브이로 말을 배우고
컴퓨터로 생각을 입력한 아이들인데
소꿉장난인들 한 적이 있었겠느냐.
꽃밭에서
각시와 신랑이 보금자리를 차리는 놀이 대신
컴퓨터에서
I.C. 소프트웨어 DOOM 2로
총질을 배운 아이들인데
어찌 'house keeping'을 알 수 있으랴.
열 명 중 여섯 명의 부모가 이혼을 했거나 혹은 별거한
학생들을 앞에 놓고 오늘은
이상의 <날개>를 가르친다.
'소꿉장난'이라는 말을 압니까.
그러나 너희들은
졀코 비상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날 수 있는 공간은 여전히 환상뿐
이상을 위해 트럭을 먹어서는
안 될 테니까.
미명(未明)
오세영
소낙비가 난초 잎을 두드린다.
심금을 울리며
닫혀 있는 사물의 문을 연다.
소낙비가 번개를 몰고
잠든 흙을 깨우고 있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육신을
비에 직시며
가냘픈 줄기로 미명(微明)을 열고 있다.
바닷가
오세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바람 소리
오세영
육신(肉身)으로 타고 오는
바람 소리
잘 있거라, 잘 있거라,
해거름 나루터에 달빛 지는데
강 건너 사라지는 님의
말 소리.
육신(肉身)으로 타고 오는
갈잎 소리.
잘 가거라, 잘 가거라,
세모시 옷고름엔 별빛 지는데
속눈섭 적시는 가을
빗소리.
이승은 강물과 바람뿐이다.
옷고름 스치는 바람뿐이다.
치마폭 적시는 강물뿐이다.
육신(肉身)으로 타고 오는
물결 소리
마른 하상(河床) 적시는 가을
빗소리.
바람의 노래
오세영
바람 소리였던가.
돌아보면...
길섶의 동자꽃 하나,
물소리였던가.
돌아보면...
여울가 조약돌 하나,
들리는 건 분명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너는 어디에도 없고,
아무 데도 없는 네가 또 아무 데나 있는...
가을 산 해 질 녘은
울고 싶어라.
내 귀에 짚이는 건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세상은
갈바람 소리.
갈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바람 잦는 날
오세영
뜰의 감나무 하나
온종일 울고 있다.
누구를 바라고 우는 것이냐
누구를 기다려 우는 것이냐.
내 빈 가슴에도 아직은
시들지 않은 꽃나무 한 그루 있어
그늘이 질 적마다 소리 없이
울고 있다만
봄의 화사한 꽃송이
여름의 싱그러운 잎새
가을의 탐스런 과일
주신 그 아무것으로도 메꿀 수 없기에
너
오늘처럼 바람 잦은 날에는
다다를 수 없는 키, 여린 가지 끝으로
푸른 하늘을 우러러 이처럼
울고 있구나.
바위
오세영
무념무상이다.
애욕도 집착도 버려
벽을 마주하고 결부좌한
노스님
그의 화두는 중생화석(衆生化石).
절벽을 바라보고 선정(禪定)에 든
바위 하나
그의 화두는 석화중생(石化衆生).
어느 절에선가 석공은 오늘도
돌을 깨
불상(佛象) 하나 찾고 있다.
바위는 무엇 하러
오세영
바위는 무엇 하러 바위인가?
흙에서 뛰쳐나와 홀로
절벽과 마주 선 바위,
난만하게 핀 꽃들의 향기에도 취하지 않고,
거친 비바람에도 흔들림 없고,
애틋한 물소리에도 격하지 않아 그것을
바위라 하지만
그의 무심無心은 대체 무엇이 되려 하는가?
면벽천년(面壁千年), 하늘이 되려는가?
묵언만년(黙言萬年), 바람이 되려는가?
스스로 길을 막고 절벽과 마주 서서
바위는 흙이기를 거부하지만
보아라,
네 가슴에 자라는 한 포기 난(蘭)을,
감정처럼 축축히 젖는
이끼를.
밤비
오세영
밤에
홀로 듣는 빗소리
비는 깨어 있는 자에게만
비가 된다
잠든 흙 속에서
라일락이 깨어나듯
한 사내의 두 뺨이 비에 적실 때
비로소 눈뜨는 영혼
외로운 등불
밝히는 밤
소리 없이 몇천 년 흐르는 강물
눈물은
뜨거운 가슴속에서만
사랑이 된다
밤에 호올로
오세영
한밤 호올로
컴퓨터 키를 두드린다.
모니터에는
파일에서 떠올려진 시행 몇 줄,
<인간은 누구나
가슴에 하나씩 별을 안고 산다>*
커서를 <별>에 대고
지울까 말까 망설인다.
인간은 누구나
무거운 바위를 하나 가슴에 안고 사는 것은 아닐까,
아니 인간은 누구나 가슴에
칼을 하나 갈면서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늘과 별과 지상의 바위 사이를
스크린은 텅 빈 공백으로 남겨놨는데
문득 내다보는 밤 하늘엔
.......반짝.......
섬광을 내며
지상으로 떨어지는 유성 하나,
그도 하늘에서 컴퓨터를 두드리는 것일까.
밤에 호올로 시를 쓴다는 것은
무섭도록 고독한 일이다.
밤 10시 - 딸에게
오세영
아내가 약을 파는
밤 10시,
나는 시(詩)를 쓴다.
바닷가로 떠나는
밤 열차의 기적 같은 슬픔이
하이얀 원고지를 적시고
구겨진 빵세, 아빠의 시집(詩集)을 든 채
하린이는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흰 물새를 타고
너의 바다로 떠난 어린 딸아
물새가 날지 않는 어느 날,
너는 알게 되리라,
젊은 아빠의 번민을,
안개 낀 밤의 불면을,
밤 10시
안정제를 권유하는
아내의 피곤한 목소리를 들으며
시(詩)를 쓴다.
먼 파도 소리를 듣는다.
백담사 시편
오세영
1 - 봄
이른 아침
꾀꼬리 울음에 눈을 뜨자
온 도량이 부산하다.
까치는 비질하고, 촉새는 먼지 털고,
물총새는 물 나르고
뒤늦게 온 멧돼지가
씩씩거리며 길을 닦는다.
산(山) 어머니 딸들을 데리고
꽃 공양을 오시는 날,
뜰 앞 잣나무는 남몰래
가슴 두근거리는데
정작 이 절 회주는
무사태평,
아직도 침상에서 취침 중이다.
2 - 여름
여름의 백담사는
스님 대신
흐르는 계곡물이 염불을 한답니다.
그 철엔 관광객이 어찌나 많던지
법당, 선방(禪房), 요사체 할 것 없이
온 절을 점령하여 북새통을 이룸으로
그 등쌀에
스님들은 아예 절을 버리고
깊은 산중 수행처로 피신한 때문이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도량 앞을 흐르는 맑은 계곡물이
돌들을 목탁 삼아 두드리면서
마하반야 바라밀다……
온종일 독경을 한답니다.
그 중 간혹 깨달음을 얻은 자는
아상(我相)을 버려 밋밋해진 돌들이
부처의 법신(法身)임을 눈치 채고
하루 종일
자갈밭에 돌탑을 쌓기도 하구요.
지금도 그곳에
수백 개 돌탑들이 서 있는 이유인즉 모다 그렇지요.
그래도 백담사 계곡물은 여전히
돌돌돌 혹은
졸졸졸 하지 않고
마하반야 바라밀다…… 로
흐른답니다.
3 - 가을
백담사(白潭寺) 무금선원(無今禪院) 다락에 앉아
가을 산과 대좌하여 홀로
차를 마실 땐
냉수 한 사발로 족하답니다.
선방 창 앞의 베롱나무가
곱게 단풍이 들면
언제나 박새 한 마리가 날아와
몰래 차 시중을
들어주기 때문이지요.
어디선지
냉큼 찻잎을 물어오고, 약초를 물어오고,
가끔은 하늘도 한 잎 물고 와서
사알짝 찻잔에 띄워주지요.
훌륭한 선지식(禪智識)은 아예 못 본 체
나 같은 무식에게만 늘
그렇답니다.
4 - 겨울
우지끈
설해목(雪害木) 쓰러지는 소리에 놀라
잠 깨어 문뜩 귀를 기울여 본다.
달빛에 젖어
봉창에 어리는 부처의 법신(法身),
창문을 열자 아아,
뜰의 전나무 한 그루
새하얀 눈밭에 홀로 서서 화안이
이쪽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산이 조용하게 내 손목을
잡아준다.
12
일어서기 위하여
온 힘을 쏟아내기 위하여
한겨울 물을 굳어
파아랗게 강그라져 있던가.
봄 되어
위로 위로 일어서는 물을 보았다.
마른 흙을 제치고
하늘로 하늘로 솟아오르는
새 순
새벽 잠자리에서
참을 듯 참을 듯
벌떡 일어서는 사내의 새파아란
힘줄같이
위로 위로 뻗쳐, 아
터트리는 꽃 물.
아래로 흐르는 물이라고
말하지 마라.
일어서지 않고 사는 삶이란
이 세상에 없다.
16
누가 불렀을까
겨우내 침묵을 지키던 울목의 난(蘭)이
살포시 꽃 대궁을 들어올려
나를 치어다본다.
조신하기 갓 시집온 새댁 같다.
코끝에 어리는 그 맑은 향기,
나는 재채기로 대답한다.
옳거니
난은 향기로 말하는구나.
이순(耳順)은 귀가 아니라
전신으로 들을 수 있는 나이
어찌 귀만을 고집할 것인가.
이 세상에 말 없는 존재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을...............
백두산
오세영
누가 눈물 없이
백두산을 보았다 하는가.
알타이에서 뻗어 내린 산맥이 동으로 치달아
땅끝 반도의 북쪽에 우뚝 멈춰
대륙의 한축을 받들고 서 있는
백두.
한 민족이 그로 하여 태어나고
한 언어가 그로 하여 열렸나니
태평양에서 들이닥친 그
사나운 태풍과
북만(北滿)으로부터 몰아쳐 온 그 혹독한 눈보라를
어찌 이렇게도 의연히
대적할 수 있었단 말인가.
오늘도 하늘은 어두워지고
반도의 해안엔 성근 빗발이 긋고 있지만
검은 구름 새로 우뚝 솟아
찬란히 그 이마를 태양과 마주한
백두 영봉이여
그대 없인 이 땅 위에
역사도 생존도 없었거니.
그대 없인 이 민족엔
영광도 자존도 없었거니.
단군이 그곳에서 열어주신 그 보석 같은
한국어로
누가 눈물 없이 그대를 소리쳐
불러보았다 하는가.
아. 그러나 그 눈물은
새 희망과 새 출발과 새 감격의 기쁨일지니
누가 눈물 없이 또
백두산을 보았다 하는가.
백두산에 올라
오세영
전나무 자작나무 화산암 절벽 올라 솜다리 노루귀꽃 하늘대는 능선 위에 한 자락 안개 걷히니 장엄하다 백두산 입술을 움직여도 말문이 아니 트고 두 발을 떼려 해도 온몸이 굳어있다 신 앞에 섰다고 한들 이보다도 더할까 굽어보면 하늘이 발밑에 펼쳐지고 우러르면 태양이 손끝에 잡힌다 우주가 품 안에 들손 내 국토여 천지 푸른 물에 육신의 떼 씻어내고 백두 안개비에 이 마음을 닦아내어 오로지 비는 말씀은 남북한이 하나 되오
법에 대하여
오세영
법이란
냉장고의 칸막이 같은 것,
김치와 우유가
육류와 젓갈이 행여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좋아할 일과 좋아해선 안 될 일을
칸칸이
구분해서 설합에 넣어두고
언제나 분수를 지키도록 감시하는……
그러나 일상은 쉬이 부패하기 쉬우므로
항상 차가워야 하나니
누가 그랬던가.
법은 얼음 같아서
냉정한 이성이 아니면 날이 서지 않는다고……
그래도
냉장고는 알리라.
뜨거운 전류가 또한
차가운 얼음을 만든다는 것을.
벚꽃
오세영
죽음은 다시 죽을 수 없음으로
영원하다.
이 지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영원을 위해 스스로
독배(毒杯)를 드는 연인들의
마지막 입맞춤같이
벚꽃은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종말을 거부하는 죽음의 의식(儀式),
정사(情死)의
미학.
베롱꽃
오세영
아름다움이 애인의 것이라면
안식은 아내의 것,
무더운 여름날
아내의 무릎에 누워
그녀의 시원한 부채질 바람으로
낮잠을 자 본 자는 알리라.
여자는 향그러운 꽃그늘이라는 것을,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그늘의 안식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형체가 흐려
꽃보다 그늘이 더 넉넉한 꽃.
신(神)은
이 지상의 간난(艱難)을 위해서 미리
베롱꽃을 예비해 두셨다.
베샴을 지나며
오세영
싸울 듯 말 듯,
다툴 듯 말 듯
왁자지껄 웅성거리던 사내들이
나를 본 순간
일제히 말을 끊고 노려본다.
깊은 눈을 가진 사내들이다.
깡마른 얼굴에 유난히도
눈이 까만 사내들이다.
모두들
맨발에 치렁치렁한 흰 옷을
발목까지 길게 늘어뜨렸다.
어디에도 여자는 없다.
여자 같은 것도 없다.
암캐도 없다.
거리에서도, 버스 정류장에서도, 시장에서도, 노천카페에서도
온통 흰 옷을 입은 사내들만 쏟아져 나와 저들끼리
참을 듯 말 듯,
저지를 듯 말 듯
손짓 발짓 떠들어대다가
갑자기 얼어붙어 뚫어져라 나를 째려본다.
주먹을 불끈 쥔 사내들이다.
검은 수염이 광대뼈까지 무성하게 자란
사내들이다.
내가 이방인이어서가 아니다.
여자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여자 같은 것이 없어 그런 것이다.
* 베샴 : 파키스탄 중북부 카라코람 하이웨이 인더스 강가에 있는 소읍.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사는 마을이어서 여자들의 외부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시가지엔 단 한 명의 여자들을 만나기 힘들다. 밖에서는 여자들이 할 일이라 생각되는 것도 모두 남자들이 도맡아 한다.
별
오세영
님의 기침 소리는 하늘의 별들을 떨어뜨리고
지상의 나는 치마폭으로 추락한 보석들을 줍는다
치마폭에는 또 하나의 하늘
흰 구름이 흐르고 붙박이 새가 날고
은박으로 수 놓인 가을이 있고
나는 내 하늘의 가을의 왕이더니라
왕관의 그 어즈러운 보석처럼
내 이마 위에서 찬란하게 부서지는 소멸
님의 기침 소리가 님의 기침 소리가
하늘의 별들을 하나씩
떨어뜨릴 때마다 떨어뜨릴 때마다
지상의 나는 지상의 나는
추락한 그리움들을 줍고.....
별 밭
오세영
소만(小滿) 되어
견우(牽牛)의 무논에는 물이 가득
찰랑거린다.
개굴개굴
어디선가 한 놈이 울자
와글와글 저글저글
일순 온 밤하늘을 명멸하는
맹꽁이 떼
울음소리.
별처럼 꽃처럼 - 어느 여자 중학교의 개교를 축하하며
오세영
교실은 온통 별밭이다.
초롱 초롱 반짝이는 너희들의 눈
별 하나의 꿈,
별 하나의 희망,
별 하나의 이상,
교실은 흐드러진 장미밭이다.
까르르 웃는 너희들의 웃음
장미 한 송이의 사랑,
장미 한 송이의 열정,
장미 한 송이의 순결,
교실은 향긋한 사과밭이다.
수줍게 피어나는 너희들의 볼
사과 한 알의 보람,
사과 한 알의 결실,
사과 한 알의 믿음,
교실은 찬란한 보석밭이다.
너희들의 빛나는 이마
이름을 부르면 하나씩 깨어나는
사파이어,
에메랄드,
다이아몬드,
아 너희들은 영원히 빛나는
별밭이다.
꽃밭이다.
별 하나
오세영
너로 인해 알았다.
그것이 내게 주는 눈짓인 것을,
수많은 별 중에서 작은 별 하나
어둠 속에 반짝 불 밝힘은
너로 인해 알았다.
그것이 내게 주는 손짓인 것을
빈 가지에 매달린 가을 잎 하나,
허공에 파르르 떨고 있음을
너로 인해서
나는 밤이 항상 그리운 사람,
수없이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너를 바라보는 희미한 별,
너로 인해 알았다.
그것이 시방 내게 슬픔인 것을
먼 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
닿을 수 없는 별 하나,
병(病)
오세영
병이란
인간으로 태어난 특권에
지불해야 할 특별
소비세,
누구나 생애의 한 번쯤은
세금을 내야 한다
보리가 저렇게
오세영
보리가 저렇게
하루하루 푸르러 가는 것은
저녁마다 하늘과 입맞춤하기 때문이지요.
보리가 저렇게
쑥쑥 자라는 것은
새벽마다 종다리의 노래를 듣기 때문이지요.
보리가 저렇게
알알이 이삭을 패는 것은
밤마다 별들을 따먹기 때문이지요.
하느님, 하느님,
이 저녁의 만찬엔 당신이 꼭 계셔야 합니다.
이슬과 바람과 별로 차려진
우리들의 식탁,
촛불은 없어도 좋아요.
휘영청 밝은 달이 있으니까요.
보리가 저렇게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당신이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석(寶石)
오세영
1
화석(化石) 속엔 한 마리
새가 난다.
결코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 새.
내가 흘린 눈물도
쥬라기 지층(地層) 어느 하늘 아래
하나의 보석(寶石)으로 반짝거릴까,
가령 죽음이라든가,
죽음 앞에서 초롱초롱 빛나던 눈.
스스로 불에 타서 소멸(消滅)을 선택하는
지상(地上)의 별들이여,
묻혀라 화석(化石)에.
영원히 죽는 것은 이미
죽음이 아니다.
2
그것을 불러 보석이라 이름한다
햇빛에
눈부신 그 반짝거림.
강변 모래 언덕에
사금파리 하나 반쯤 묻혀 있다
보석이란 가장 소중한 마음을
이르는 것이려니
우리 처음
네게 바친 이 순수한 영혼의 징표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으랴.
장벽을 깨트리는 것.
깨진 것은 모두 보석이 된다
한때 값진 도자기였을지라도
한때 투박한 사발였을지라도
그것은 한낱
장에 갇힌 그릇일 뿐
깨지는 것은
완전한 자유에 이른 까닭에
보석이 된다
그 봄날의 풀꽃 반지도
그 강변의 모래성도
강물에 씻겨갔지만
우리들의 강 언덕엔
눈부신 영혼이
보석으로 빛나며
푸른 삶의 하늘을 지키고 있다
영원처럼.....
본느 빌*에서
오세영
북극의 빙원에는 에델바이스가 있고
사막에서도 세나꽃**이 피거늘
본느 빌, 그 끝없는 소금밭에서는
한 점 살아 있는 것이 없구나.
누가 열사의 모래밭에 모래를 내려 거기다가 다시
소금까지 뿌렸다.
하얀 얼음으로 굳어버린 햇빛의 나라,
거기에는 오직
절대의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본느 빌은 신이 비워둔 캔버스,
그는 언제 햇빛을 녹여 여기에
그림을 그릴 것인가.
흔히 빛과 소금이라고 말들 하지만
물이 없는 소금은 소금이 아니다.
어둠이 없는 빛이
빛이 아니듯.
* Bonne Ville : 유타 주 북부 네바다 주 접경에 있는 한 지명. 사막에 소금이 끝없이 덮여 있음.
** Senna 꽃 : 사막에 피는 들꽃들 중의 하나.
봄
오세영
봄은
성숙해 가는 소녀의 눈빛
속으로 온다.
흩날리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봄은
피곤에 지친 청춘이
낮잠을 든 사이에 온다.
눈 뜬 저 우수의 이마와
그 아래 부서지는 푸른 해안선
봄은
봄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의
가장 낮은 목소리로 온다.
봄날
오세영
봄날,
지표로 솟아 나온 새싹은
불꽃이다.
흙 속에서
겨우내 지열(地熱)로 달아오른 밀알들이
일시에 터지는 폭발.
신(神)들의 성냥개비다.
자유를 절규하는
목숨들을 보아라.
압제의 윤리는 배신인 것을,
흙 속에 갇혀
자유를 꿈꾸는 밀알들의 음모(蔭謨).
그것은 끝없는 방화다.
칠월의 보리밭에서 지르는 불,
새싹이여
인간은
불을 먹고 사는 짐승이다.
봄날에
오세영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봄이 오면
잎새 피어난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잎새 피면
그늘을 드리운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나, 너를 만남으로써
슬픔을 알았노라,
전신에 번지는 이 초록의 그리움을,
눈이 부시게 푸르른 그 봄날의
꽃그늘을.
봄비
오세영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뜨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
봄은 도둑처럼
오세영
현관은 잠겨 있었다.
봄은 도둑처럼 창문을 넘어 들어와서
소리 없이
낡은 코트 한 벌 훔쳐 달아났다.
뒤진 장롱과 설합에서 털려 쏟아진
사물들로
온 방이 수라장이다
그리고
소매치기처럼 달아나버린 봄.
봄은 무엇 하러 오는가
오세영
봄은 무엇 하러 오는가,
이 눈 녹으면
떡갈 마른 등걸에도 물기가 돌아
앞다투어 새잎을 피워내겠지.
바위틈에 자라던 제비 초롱도
살포시 고개 들어 하늘 보겠지.
물웅덩이 얼어 있던 송사리 떼도
부지런히 햇빛 쪼아 새끼 치겠지.
종달새 지지배배 솟아올라서
서럽도록 옛이야기 쏟아놓겠지.
진달래, 산당화 제철을 맞아
온 산은 까르르 웃음판인데
봄은 무엇 하러 오는가.
이 눈 녹으면
구만리 후미진 길 떠나갈 당신,
봄 강물 얼음 풀려 울어 예듯이
강물 따라 구만리 가야 할 당신.
봄은 바이러스처럼
오세영
바위 속보다 더 무거운
적막,
과일 속보다 더 달콤한 잠,
나[飛]는 새도 능구렝이도 윙윙거리던 벌 떼들도
다 어디를 갔나.
이 어둡고 추운 날을 살아남기 위해선,
선아 나는 이제
열병이라도 앓아야겠다.
항생제도 없이.....
바이러스로 침투하는 봄
봄은 전쟁처럼
오세영
늦바람 무섭다더니. 겨우내 적멸로 돌아가리라, 일제히 한 잎마저 벗고 동안거에 들었던 나뭇가지들 입춘 지나, 우수 지나 웅성 꿈틀거린다. 저, 저, 어느새 툭 불거진 눈방울 두릿두릿한 산수유 좀 보게. 살 오른 목련 봉오리 봉긋한 털가리개 좀 보게. 진달래 영산홍 아뜩한 입술부터 샐쭉. 적멸보궁이 눈앞이라도 못 참겠네 못 참아. 여든 살 삭정이도 무릎을 일으켜 세우다 우지끈! 큰일 났네. 산 너머 전쟁이 온다네. 울긋불긋 아롱다롱 아무도 안 죽고 무덤마저 살아나는 전쟁이 온다네
봄이 온다는 것은
오세영
봄이 어떻게 오던가
밤새 속살거리는 실비를 타고 오던가
새벽부터 짖어대는 딱새들의 울음소리로 오던가
얼음 풀려 묶인 목선 띄우는 갯가의 밀물로 오던가
먼 남쪽 푸른 바닷가에서 온
완행열차의 기적 소리로 오던가
막 도착한 그 열차는 실어 온 동백 꽃잎들을
축제처럼 역두(驛頭)에 뿌리고 떠나는데...
봄이 어떻게 오던가
먼 산 눈 녹는 소리로 오던가
깊은 계곡 얼음장 깨지는 소리로 오던가
묵은 옷들을 빨래하는
강가 아낙네의 방망이질 소리로 오던가
가슴에 하이얀 손수건을 단정히 찬
신입 초등학생들의 그 경쾌한 등교길로 오던가
거리의 좌판대에 진열된 봄나물의 향기로 오던가
봄이 어떻게 오던가,
밤새 앓던 몸살이 그친 이 아침
온몸에 피어오르는 열꽃으로 오던가
첫 고백을 들은 여인의 귓속에 어리는 속삭임으로 오던가
첫사랑에 빠진 여인의 푸른 눈동자에 어리는
별빛처럼 오던가
먼바다를 건너서 온
사내들의 푸른 힘줄에서 불끈 솟구치는
혈류로 오던가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이다
이름이 없음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이름이 없음으로 있는 것이 아닌 것에 이름을 주며
이제 그 아무것이,
그 무엇이 되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처녀라 불러 주어 처녀가 되는
처녀와 사내라 불러 주어 사내가 되는 사내
봄이 온다는 것은 그 무엇이 된다는 것이다
새록 새록 눈 녹는 소리에
여기저기 언 땅을 밀치고 솟아나는 새순들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 흔들어 깨워준다는 것이다
아침에 늦잠 든 아이를 어머니가 흔들어 깨우듯
잠든 돌멩이를 흐르는 물이 깨우고,
잠든 나무는 따뜻한 봄볕이 흔들어 깨운다
흔들어 깨워서 마음이 되는 나의 마음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 흔들어 깨워
의미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바람에 하나씩 눈뜨는 나무의 잎새들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무심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무심해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그리움은 누구에겐가 고귀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흐르는 물속의 돌멩이는 먼 하늘의 흰 구름을 그리워하고
갓 피어난 여린 새싹들은 태양을 그리워한다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아른 아른 취해 아지랑이 먼 하늘
황홀하게 우러르는 꽃들의 눈빛
봄이 온다는 것은
아득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리움만으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이젠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제 당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내가 곧 당신이 된다는 것이다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되는 나
봄이 온다는 것은 아득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가지에 물오르듯 아아, 초록으로 번지는 이 슬픔
부끄러움
오세영
3
길지 않은 시간 같은데 사회자가 슬며시 다가와 쪽지를 내민다. '선생님, 이미 5분 초과했어요.' 정신을 차리고 객석을 본다.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다. 그저 의식(儀式)의 한 순서일 뿐 누가 듣겠는가.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혼자 지껄이고 있는 꼰대의 도덕군자 같은 말, 모두 귓속말로 저들끼리 소곤소곤 잡담을 나누거나 딴청을 피운다. 황망히 말을 거두고 연단에서 내려온다. 그래도 우레 같은 박수 소리. 계단에서 발을 헛디딘다. 서슬에 상의(上衣)에 꽂힌 꽃이 바닥으로 털썩 굴러떨어져 밟힌다.
옷깃에 매달려 있다 한들 어쩌겠는가. 어차피 식이 끝나면 버려야 할 꽃. 입장할 때 원로라고 추켜세우며 그 젊은이가 쫓아와 달아준 꽃. 이미 꺾여 내 옷자락에서 시들고 있는 그 노년의 한 송이 꽃.
9
휴대전화가 생활필수품이 된 이래 모든 행적은 그 안에 기록이 된다 하더라. 일상으로 나누던 대화, 주고받은 메시지, 깊숙이 숨겨둔 속마음, 천박한 밀거래, 부정한 청탁과 로맨스를 가장한 스캔들, 어제밤 네게 보냈던 그 메시지가 하도 부끄러워 오늘은 모두 삭제를 하려는데 아뿔싸 누군가 휴대전화를 압수해 디지털 포렌식 재생을 시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지 않느냐. 그래서 범죄 피의자는 수사를 받기 전 우선 자신의 휴대전화부터 불에 태우거나 강물에 던져버린다고 들었다.
내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 심판을 받을 적에 내 육신 디지털 포렌식으로 재생시키면 그 죄상 얼마나 많이 드러날 것인가. 아들아 내 죽거든 그 육신 땅에 묻지 말고 부디 불에 태워서 그 뼛가루 강물에 뿌리거라.
10
서랍장 속의 사진들을 정리한다. 한 번도 꺼내 본 적 없어 먼지투성이가 된 사진, 아무도 보려 하지 않아 내 사랑하는 아내나 가족들조차도 외면했던 그 사진, 나 죽은 후 자식들에게 끼칠 수고가 미안해서 미리 한 장 한 장 불에 태운다. 한 줌의 재로 날린다. 한 생을 살면서 왜 그리도 많이 찍었을까. 사진 속의 나는 한결같이 뽐내며 잘난 체한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오늘 또 사진을 찍는다. 후배 시인의 출판기념회에 불려 가 앞줄 정중앙에 버티고 앉은 내 그 희멀건 얼굴, 돌이켜 보면 그 어느 때 단 한 번이라도 누굴 위해서 뒷줄의 배경이 되어보려고 한 적이 있었던가.
14
지방대 교수로 있는 딸이 내게 푸념을 했다. 아빠는 교수 사회에서 항상 잘난 체만 하고 다녀 모두가 싫어한다며? 도대체 아빠는 내게 하나도 도움이 되는 것이 없어. 아아, 그렇구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딸아.
어릴 적 애비 없이 태어난 나를 외할머니는 집안에 손이 들 때마다 당신 곁에 꿇어앉히고 항상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다. 어르신, 이 애 좀 보세요. 보통 애가 아니랍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애지요. 그러면 손님은 또 항상 이렇게 맞장구를 치셨다. 그럼요. 다른 애들과 어디 비교할 수 있나요?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애지요. 이 비범하게 생긴 이마와 부처님 같은 귀를 보세요.
그래서 나는 내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인 줄로 착각하며 살아왔단다. 사랑하는 딸아, 미안하구나.
부음(訃音)
오세영
갑자기
아내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회로에 어떤 손상을 입은 것일까.
전원(電源)은 아직 켜져 있는데
깜빡
딜레이트 되기 일쑤다.
화면이 온통 하얀 백지다.
메모리 칩인지, 깔린 앱인지
오작동(誤作動)이 일상.
어제는 지하철을 나서며 길조차
잃지 않았던가.
아, 그건 분명 치매 초기 단계.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와이파이를 붙들고
밤새 버둥거리며
한 편의 시를 쓰려다 절망한
이 아침,
지인의 부음을 받았다.
마침내
온라인과 엎 라인의 연결선을 끊고
초기화(初期化)로 돌아간
그 낡은 컴퓨터 한 대.
북양항로(北洋航路)
오세영
엄동설한,
벽난로에 불을 지피다 문득
극지를 항해하는
밤바다의 선박을 생각한다.
연료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나는
화실(火室)에서 석탄을 태우는
이 배의 일개 늙은 화부(火夫).
낡은 증기선 한 척을 끌고
막막한 시간의 파도를 거슬러
예까지 왔다.
밖은 눈보라.
아직 실내는 온기를 잃지 않았지만
출항의 설렘은 이미 가신 지 오래,
목적지 미상,
항로는 이탈,
믿을 건 오직 북극성, 십자성,
벽에 매달린 십자가 아래서
어긋난 해도(海圖) 한 장을 손에 들고
난로의 불빛에 비춰 보는 눈은 어두운데
가느다란 흰 연기를 화통(火筒)으로 내어 뿜으며
북양항로,
얼어붙은 밤바다를 표류하는,
삶은
흔들리는 오두막 한 채.
불
오세영
1
타버린 정신(精神)들은 어디 갔는가
가령, 설원(雪原)에 버려진 장미꽃 하나
혹은, 알타이에 떨어지는 햇살,
바람과 소나기, 그리고 6월(月)은
불탄다.
내 살 속에서 희미한 불빛들이
뛰어가고, 알콜이 출렁이는 바닷가에서
이십 세기는 불을 지핀다. 물질(物質)이 흘린
피. 싸늘한,
실용(實用)의 새는 날 수 있을까,
어두운 내 얼굴을 날아서, 찬 서리 내린 굴뚝과,
기계(機械)들이 죽은 무덤을 넘어서
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전선(電線)에 걸린 달, 인간의 숲속에서
전화(電話)가 울고, 아흔아홉 마리의 이리가 운다.
저것 보라면서,
불타는 서울의 술집들을 가리키면서
어디로 갈 것인가, 타버린 정신(精神)의 재
죽음, 혹은 창조의 불빛.
2
잊어버려, 잊어버려라고 그가
속삭인다
나는 누워서 눈을 감았다.
에테르로 풀리는 어둠을 붙들고
톱니, 저 관절에 긴 시간을 닦아낸다.
엔진에 타오르는 한 잔의 불,
끝끝내 벨 것인가,
떨어져 나간 팔과 다리, 내 심장에서
우는 벌레, 영혼의 살 한 점,
결국 들춰낼 것인가,
나는 내려간다
회랑의 층계를 돌아
스물아홉의 육의 밑바닥에
선박들이 침몰하고,
전주에서 본 여자가 메스를 들고
차갑게 웃고 있다.
염려 없다면서, 염려 없다면서
빼앗는 내 눈의 불
박제된 유년의 깊은 밑바닥에
알콜에 적신 내가 누워있다.
3
불빛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은
달려 나갔다.
전라도의 보리밭이 보이고, 황폐한 과거가
몇 개로 구획되었다.
먼, 황인종의 마을에서 개가 짖고
칸델라의 불빛이 경험으로 풀려나가고
지나온 십구 세기가 토막토막 잘려
자막(字幕)에 걸리고 있다.
렌즈를 열고 흰옷의 그가 나온다.
전라도 사투리로 판소리를 부르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고, 끝끝내,
심청이를 불렀다.
도무지 갈채(喝采)를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서
불이 켜지고 헛간에 켜 둔 램프가
의식(意識)을 태운다.
낡아가는 한 시대(時代)의 필름.
어리석은 사내에게 몸을 맡긴 계집은
밤새워 지나가는 트럭 소리를 듣고 졸린 눈의
수학(數學)을 보았다, 결국
벗을 것인가 이 흰옷, 정지된 자막(字幕)에
걸린 채 나는 벌거숭이 몸을 하고
손에 박힌 못들을 하나씩 뽑았다.
흔들리는 전라도의 논둑길
그 불빛 속을 뛰었다.
5
화약 냄새를 맡으며 새벽을
더듬는다. 발치엔 츈향뎐이 뒹굴고,
소리들이 뒹굴었다.
초사흘 달밤에 배가 한 척 밀려
온다, 성균관 뒤뜰을 도둑이 들고,
누구냐고 외치는 등 뒤에서
싸늘한 칼이 번득였다.
그 칼. 판단의 힘, 어떻게
쓸 것인가, 횃불들이 소란하게 문을
두드린다.
끊어진 줄. 동양(東洋)의 구슬들이
땅바닥에 쏟아진다.
쏟아진 하얀 피. 초사흘 달밤을
토해 낸 기적(汽笛)이 흩어지고
희미한 포대의 불빛이 흩어지고,
화약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셔만호의 굴뚝을 향해 총을
겨눴다.
분수
오세영
얼릴 수만 있다면
불은 아마도 꽃이 될 것이다
끓어오르는 불길을
싸늘하게 얼리는 튜립
불은 가슴으로 사랑하지만
얼음은 눈빛으로 사랑한다
어찌할거나
슬프도록 화려한 봄날에
나는 열병(熱病)에 걸렸어라
추위에 떨면서 달아오르는
내 투명한 이성(理性)
꽃은 결코 꺾어서는 안 되는 까닭에
눈빛으로 사랑해야 한다
밤새 열병(熱病)으로
맑아진 내 시선 앞에
싸늘하게 타오르는 한 떨기 튜립.
불면(不眠)
오세영
잠이 오지 않는 밤
수면제(睡眠劑) 한 알, 혹은 보르도산(産) 꼬냑에 취해
마른 육체(肉體)를 불사른 청춘(靑春)은 가서 오지 않는다.
수심(愁心)에 가득 찬 표범처럼
암흑을 건너온 사랑의 이야기는 끝내
돌이키지 못한다.
안녕(安寧)을 알리는 전화(電話)가 울고 회선(回線)에 목이 잠긴
소녀(少女)가 울었다.
마른 입술을 태우는 담배처럼
마른 육체(肉體)를 불사른 청춘(靑春)은 오지 않는다.
욕망(慾望)이 죽고, 진리(眞理)가 죽고, 전설(傳說)로 떠난 목마(木馬)는
시든 꽃과 슬퍼하는 공주(公主)를 남긴 채
한(恨)처럼 흐르는 강(江)을 건넜다.
목마(木馬)에 끌려가는 시간(時間)의 사슬 소리,
계절(季節)이 말라붙은 창(窓)을 글썽이는 별들이
들여다보고
가장 아픈 말 한마디를 차마 쓰지 못한 시인(詩人)은
끌려가는 목마(木馬)의 울음소리만 들을 뿐이다.
대답하지 않으리라.
암흑을 건너 암흑에 도달한 운석(隕石)처럼
깊이깊이 묻히리라.
잠이 오지 않는 밤,
수면제(睡眠劑) 한 알, 혹은 보르도산(産) 꼬냑에 취해
마른 육체(肉體)를 버린 청춘(靑春)은 한번 가서
오지 않는다.
붓은 사람일지니
오세영
비뚜로 가지 않도록,
허투로 서지 않도록
온 힘을 손끝에 모두어
붓을 바로 잡는다.
한 생 가는 길이 어찌
평탄키만 하겠는가.
험난한 고갯길을 넘어서면 또 다른 벼랑,
굽이치는 강물 건너면 또 다른 바다,
시련의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나니
싸우되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아니하고
패하되 굴하지 않는
아, 한 생이 걷는 아름다운 운필(運筆)이여,
비뚜로 가지 않도록
허투로 서지 않도록
온 마음 손끝에 모두어
중봉(中峰)을 꼿꼿이 지킨다.
글이 곧 사람이라 하거늘
한 생 가는 길이 어찌
한 문장이 이루는 도(道)와
다르다 하겠는가.
브루클린 가는 길
오세영
제1의 백인이 걸어가오.
제2의 백인이 걸어가오.
제3의 백인이 걸어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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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인의 백인이 걸어가오.
길은 화려한 데파트먼트 앞 네거리가 적당하오.
제1의 백인이 가슴에 총을 숨겼다 해도 좋소.
제2의 백인이 가슴에 총을 숨겼다 해도 좋소.
제3의 백인이 가슴에 총을 숨겼다 해도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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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의 백인이 가슴에 총을 숨겼다 해도 좋소.
총은 21구경 리벌버 6연발 피스톨이오.
제1의 흑인이 걸어가오.
제2의 흑인이 걸어가오.
제3의 흑인이 걸어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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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인의 흑인이 걸어가오.
길은 한적한 은행 빌딩 모퉁이가 적당하오.
제1의 흑인이 가슴에 총을 숨겼다 해도 좋소.
제2의 흑인이 가슴에 총을 숨겼다 해도 좋소.
제3의 흑인이 가슴에 총을 숨겼다 해도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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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의 흑인 가슴에 총을 숨겼다 해도 좋소.
그들은 모두 무서워하는 사람과 무서운 사람들뿐이오.
제1의 백인이 '하이' 하고 웃소.
제2의 백인이 '하이' 하고 웃소.
제3의 백인이 '하이' 하고 웃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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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의 백인이 '하이' 하고 웃소.
제1의 흑인이 '하이' 하고 웃소
제2의 흑인이 '하이' 하고 웃소.
제3의 흑인이 '하이' 하고 웃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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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의 흑인이 '하이' 하고 웃소.
그들은 그렇게 무서우니까 웃는 사람과 무서워서 웃는
사람들뿐이오
'하이' 하고 제1의 황인이 걸어가오.
* 브루클린 : 뉴욕의 한 지명
블루스
오세영
마음이 슬플 때는 가세요, 남쪽 나라,
애쉬빌 지나 내쉬빌* 지나
미시시피 강가의 작은 마을
클락스테일*로 가세요.
거기 가면 아무 데나 이발소 찾아
귀밑머리 가지런히 다듬으세요.
이발사 아가씨의 검은 눈 속을
말없이 말없이 들여다보면
그 슬픔 소리 없이 빨려가리다.
마음이 아플 때는 두 눈을 감고
이발사 아가씨의 기타 소리에
고즈넉이 낮잠을 청해보세요.
그 아픔 소리 없이 쏠려가리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뜨시면
코끝엔
아련한 오렌지 향기,
눈썹엔 파랗게 젖은 강바람,
귓볼엔 애잔한 블루스 리듬,
당신은 아시나요. 전 남쪽 나라를
유도화, 오리브꽃 향그럽게 핀
미시시피 강가의 작은 마을
애쉬빌 지나 내쉬빌 지나
블루스의 슬픔 어린
흑인의 땅.
* 애쉬빌, 내쉬빌 : 각각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주에 있는 도시.
* 클락스테일 : 미시시피 중 미시시피 강가에 있는 작은 읍. 미국 블루스 음악의 발생지. 가수 냇 킹콜의 고향. 이곳의 이발소들은 항상 악기를 준비해놓고 손님이 이발을 하는 동안 이발사 자신이 기타 등의 반주에 맞춰 블루스 음악을 선사함. 윌리엄 포크너의 고향 옥스포드도 지척에 있음.
빗속을 걸으며
오세영
담배를 핀다.
적막한 일신(一身)의 저 끝에서
타면서 꺼지면서 연소(燃燒)한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항우울제(抗憂鬱劑)를 사든 소녀가
빗속을 걸어간다.
콜라병을 든 직공(織工)이 핸들을 쥐고 있는
영화광고(映畵廣告) 위에 비가 내린다.
축축히 젖으면서 그는 담배를 핀다.
흐린 자막(字幕) 위에도 비가 내린다.
'현실(現實)'이란 글자는 지워져 있다.
그는 행복(幸福)이라는 것을 믿고, 또 모든 것을
믿었다.
시간(時間)은 함부로 태엽에서 풀려나와
고향의 봄에 피는 꽃잎을 떨어뜨리고
앓아누운 아내 이마의 땀방울을 떨어뜨리고
지켜보는 어린것의 글썽이는 눈물을
떨어뜨렸다.
비연(悲戀)의 主人公은 빗속에서 떠났다.
호올로 담배를 피며,
돌아오지 않는 미래를 향해 떠났다.
사고(事故)
오세영
비 오는 날
커브 길을 돌던 기차가
궤도를 이탈해 나뒹굴었다.
역부(驛夫)는 달려와 사고라 했지만
아니다.
그것은 기차의 오랜 음모가 실천한
회심의 탈출,
비로소 쟁취한 자유의 체험이다.
새나 짐승이나 인간은
우천(雨天)을 피하기가 매일반인데
구내(區內)에 묶여 비를 맞아야 하는 기차의 슬픔,
그러므로 물질도 살아 있는 한
의당 자유를 누려야 하는 법이니
신이여,
인간이 만든 기차가 그러하듯
이제 당신이 만든 인간의 과오를
묵인하소서.
사람
오세영
저녁에
팔 베고 누워
흐르는 계곡에 귀 기울이면
거기 카츄샤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꽃잎으로, 꽃잎으로 흐르다가
드디어 물이 된 그 사람.
자정에
목침을 베고 누워
솔잎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면
어린 월명이
누이와 이별하는 소리가 들린다.
갈잎으로, 갈잎으로 날리다가 어느덧
바람이 된 그 사람.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 승 아제
모지 사바하.
이 무슨 부질 없는 독경 소린가.
이 무슨 부질 없는 목탁 소린가.
새벽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댓잎의 이슬 맺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출가하는 싯달다의
뺨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 소리가 들린다.
안개로, 안개로 흐르다가
이제 하늘이 된 그 사람.
사람 인(人)
오세영
서로 등에 등을 기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랴.
어려울 때
슬며시 내주시는 아버지의 등.
슬플 때
넌지시 들이미시는 어머니의 등.
외로울 때
남몰래 빌려주는 친구의 등.
그의 체온과 숨결과 맥박이
고스란히 나와 하나 되어 모진 추위를 막아주는,
이 한겨울밤,
침대가 아니라, 침낭이 아니라
따뜻한 온돌바닥의 등짝이 내미는 그
어부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등에 업혀 그랬듯
적막한
우주의 숨소리를 듣는다.
사랑
오세영
잠들지 못하는 건
파도(波濤)다. 부서지며 한 가지로
키워 내는 외로움,
잠들지 못하는 건
바람이다. 꺼지면서 한 가지로
타오르는 빛,
잠들지 못하는 건
별이다. 빛나면서 한 가지로
지켜 가는 어두움,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끝끝내 목숨을
거부(拒否)하는 칼.
사랑의 고통
오세영
한밤 동안
가습기에 갇혀 펄펄 끓던 물이
아침 되어 모두 증발해 버리고 없다.
고통 속에 신음하고 나뒹굴던
육신이 이제 지상을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찾았구나.
날개도 부질없는 것,
스스로 가벼워져 기화(氣化)되지 않고선
그 누구도 천상에
도달할 수 없다.
네 이마에 맺히는 이슬
심장의 뜨거운 열
인간도 피를 데워서 끓이는
가마솥이 아닐까.
불로서 물을 끓이듯
심장을 달구는 불꽃은 사랑의 불꽃이 아니라
그 고통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묘약
오세영
비누는
스스로 풀어질 줄 안다.
자신을 허물어야 결국 남도
허물어짐을 아는 까닭에
오래될수록 굳는
옷의 때,
세탁이든 세수든
굳어버린 이념은
유액질의 부드러운 애무로써만
풀어진다.
섬세한 감정의 올을 하나씩 붙들고
전신으로 애무하는 비누,
그 사랑의 묘약.
비누는 결코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 까닭에
이념보다 큰 사랑을 안는다.
사랑의 방식
오세영
얼릴 수만 있다면
불은 아마도 꽃이 될 것이다
끓어오르는 불길을
싸늘하게 얼리는 튜립,
불은 가슴으로 사랑하지만
얼음은 눈빛으로 사랑한다
어찌할거나
슬프도록 화려한 이 봄날에
나는 열병에 걸렸어라.
추위에 떨면서 달아오르는
내 투명한 이성,
꽃을 결코 꺾어서는 안 되는 까닭에
눈빛으로 사랑해야 한다.
밤새 열병으로 맑아진
내 시선 앞에
싸늘하게 타오르는 한 떨기 튜립
사랑하는 이에게
오세영
집으로 오르는 계단을 하나둘 밟는데
문득 당신이 보고 싶어집니다
아니, 문득이 아니예요
어느 때고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순간은
없었으니까요
언제나 당신이 보고 싶으니까요
오늘은 유난히 당신이 그립습니다
이 계단을 다 올라가면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어요
얼른 뛰어 올라갔죠
빈 하늘만 있네요
당신 너무 멀리 있어요
왜 당신만 생각하면 눈앞에 물결이
일렁이는지요.
두눈에 마음의 물이 고여서
세상이 찰랑거려요
그래서 얼른 다시 빈 하늘을 올려다 보니
당신은 거기 나는 여기
이렇게 떨어져 있네요
나, 당신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요
햇살 가득한 눈부신 날에도
검은 구름 가득한 비 오는 날에도
사람들 속에 섞여서 웃고 있을 때도
당신은 늘 그 안에 있었어요
차을 타면 당신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구요
신호를 기다리면 당신은 건너편 저쪽에서
어서 오라고 나에게 손짓을 했구요
계절이 바뀌면 당신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나 알고 있어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당신을 내 맘속에서 지울 수 없으니까요
당신 알고 있나요.
당신의 사소한 습관 하나
당신이 내게 남겨준 작은 기억 하나에도
내가 얼마나 큰 의미를 두고 있는지
당신은 내 안에 집을 짓고 살아요
나는 기꺼이 내 드리고요
보고 싶은 사람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오늘도 나는 당신이
이토록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할 때
오세영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남는 건 허무(虛無)뿐이다.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남는 건 그리움뿐이다.
진실을 믿기 위하여
진실을 말하라지만
당신은 아름다운 에고이스트.
사랑은 언제나 있고
사랑은 언제나 없다.
내가 믿는 것은 하나의 아픔,
하나의 허무(虛無), 하나의 그리움,
그리고 빛 속의 어두운 그림자,
사랑한다고 말할 때
사랑은 외로워진다.
사막
오세영
1
사막은 저희끼리 산다 하더라.
바람에 쓸려간 꽃잎들이
바람에 증발한 눈물들이
바람에 바래버린 내 청춘의 별빛들이... ...
사막에서는,
이 지상에서 이미 사라진 것들이
꿈꾸듯 산다 하더라.
돌아서던 네게
마지막으로 건네던 한마디 말이,
바람 앞에선
운명의 그 슬픈 그림자가
흘러 흘러 모여든 사막은
바람들의 고향
내 죽으면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
사막으로 가리라.
기우뚱 기우뚱
낙타 등에 희미한 등불 하나 달고.
터벅터벅
낙타 목에 가냘픈 방울 하나 달고
7 - 신기루
머얼리 있어야 다가오는 것
머얼리 있어야 또렷해지는 것
머얼리 있어야 아름다운 것
가도 가도 끝없는 열사(熱砂)의 지평에서
가슴에 뜨거운 태양을 안고 궁구하는 내
사랑.
9 - 고비 사막에서
흐느낌 같다.
비웃음 같다.
무섭도록 침묵한 공간을
가냘프게 울리는 저 휘파람 소리
가도 가도 지평선은 아득키만 한데
태양이 우는 것인가.
낮달이 웃는 것인가.
사구(砂丘)에 낙타를 멈추고 문득
뒤돌아본다.
지지초 그늘 아래서 하얗게 삭아가는 백골(白骨)
속을 비운 그 정갱이 뼈 하나
바람에 실없이 울고 있다.
적막한 우주에 던져진
피리 하나.
사이버 사랑
오세영
지우개는 자국을,
화이트는 덧씌운 흔적을 남기므로
연필이나 펜으로 쓴 글씨는
완전히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블록을 설정해서 딜리트 시킨
컴퓨터의 자판 글씨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구나.
아,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를 종이에 잉크로 쓰고
지워지지 않아 애타하던
그 젊은 날의 부끄러움은 어디 갔는가.
오늘은 이메일을 네게 보낸다.
종이컵에 묽은 커피를 뽑아 마시며
사이버 공간에다 워드로 간단히 치는
너를 사랑한다는 그 말,
종이컵 버려지듯 그 얼마나 갈 것인가.
네게서 온 편지에 가슴 두근거리던
젊은 어느 봄날 아침의
막 벙글던 도화꽃잎을 생각한다
산다는 것은
오세영
산다는 것은
눈동자에 영롱한 진주 한 알을
키우는 일이다.
땀과 눈물로 일군 하늘 밭에서
별 하나를 따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가슴에 새 한 마리를 안아
기르는 일이다.
어느 가장 어두운 날 새벽
미명(未明)의 하늘을 열고 그 새
멀리 보내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손안에 꽃 한 송이를 남몰래
가꾸는 일이다.
그 꽃 시나브로 진 뒤 빈주먹으로
향기만을 가만히 쥐어 보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그래도 산다는 것이다.
산문(山問)에 기대어
오세영
산이 온종일
흰 구름 우러러 사는 것처럼
그렇게 소리 없이 살 일이다
여울이 온종일
산 그늘 드리워 사는 것처럼
그렇게 무심히 살 일이다
꽃이 피면 무엇 하리요
꽃이 지면 또 무엇 하리요
오늘도 산문(山門)에 기대어
하염없이
먼 길 바래는 사람아,
산이 온종일
흰 구름 우러르듯이
그렇게 부질없이 살 일이다
물이 온종일
산 그늘 드리우듯이
그렇게 속절없이 살 일이다
산불
오세영
꽁초,
함부로 버리지 마라.
온전히 연소해 재가 되지 않는 불은
한을 갖는 법
길바닥에 내팽개쳐 짓밟히기보다는
차라리
그대 가슴 까맣게 불태우리라.
한 때 농락의 대상으로 달아올랐던 몸.
아직 채 식지 않은 관능.
입술로 자근자근 씹고 혀로 살살 애무하다가
차창 박으로 휙 내뱉은 꽁초하나
일을 낸다.
산사태
오세영
그의 가슴에 타오르는 그리움을
철쭉이라 부르다가
그의 가슴에 타오르는 사랑을
진달래라 부르다가
끝끝내
돌아 앉아버린 산(山)
산(山)은
밤하늘의 별만을
진실이라 믿지만
초록으로 벙그는 육신(肉身)을 안고
어떻게 사나,
기다림의 절정에서 터지는 격정,
봄비는 폭우로 쏟아지는데
와르르 무너지는
산사태
산의 잠
오세영
어젯밤 하늘이 몰래 내려와
산과 잠자고 가더니
이 아침
고사리 새순 도르르 말려
그것이 한 개 우주로구나.
풀잎에 떨어뜨린 별들을 보고
내 알았지.
쫑긋 귀 기울여 천둥소리 듣고
배시시 눈 떠 흰 구름 보고......
그러므로 누구에게 물어보랴.
한 방울의 이슬 속에서 푸른 하늘을 보거니.
살아 있는 흙
오세영
차라리 깨진다.
바닥으로 밀려난 그릇.
자리를 찾지 못한
인생은 서성이는데,
손님은 아직도
밀려드는데,
잔칫상 모퉁이에서
바싹
깨지는 그릇.
자리에서 밀린 그릇은
차라리 깨진다.
깨짐으로써 본분을 지키는
살아 있는 흙,
살아 있다는 것은
스스로 깨진다는 것이다.
제 몫의 빵을 얻지못해
자리를 다투는 인간이여,
언제인가 썩을
한 개의 빵을 먹기 위해
너는 그릇을 움켜쥐지만
영원히 주어진 자리란 없다.
잔칫상의 타오르는 불꽃 아래서
스스로 깨지는 그릇 하나,
사기그릇 하나.
삶
오세영
뭍에서 바라볼 땐 언제나 반듯했던 수평선
배 위에선 한쪽으로 기울었다.
상춘(賞春)
오세영
현관은 잠겨 있었다.
봄은 소리 없이 창문을 넘어 들어와
낡은 코트 한 벌을 훔쳐 입고
달아났다.
뒤진 장롱과 문갑에서 털린
옷가지, 물품들로
온 방이
울긋불긋 수라장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몰리는 구경꾼들.
상처
오세영
쓰라리지만
소금물로 상처를 씻는 것은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눈물이 타서 굳은
숯덩이, 소금은
슬픔을 아는 까닭에
남의 상처를 아무를 줄 안다.
큰 파도가 작은 파도를 안아 올리듯
작은 슬픔은
큰 아픔이 위로하는 것,
그러므로 비록 쓰라리지만
우리
상처는 비누로 씻지 말고
소금물로 씻자.
비누는
쾌락의 때를 벗기는 데
써야 한다.
새
오세영
1
나무를 심는다.
꿈꾸는 한 마리 새를
붙들기 위하여
피곤한 하늘이 내려와
땅에 적시는 4월(四月),
새는
비 내리는 지평(地平)을
울며 난다.
사람은 누구나 생애의 한번은
새를 날린다
나의 가지 위에 날아와
문득 의미가 되는
너의 새
2
새들은
누군가가 이미 낸 길을
가지 않는다
새들은
길 아닌 길도
길임을 아는 까닭에
결코
뒷걸음을 치지 않는다
새들은 스스로
제 몸을 버려 가벼워질수록
더 무거운 짐을
끌 수 있음을 안다
줄도 매달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날아
망막한 우주로 쉼 없이
지구를 끌고 가는
새.
3
이정표도 없이 신호등도 없이
새들은 하늘을 난다
나침판도 없이 전조등도 없이 새들은
깜깜한 밤하늘을 난다
아아, 새들은 하늘에
발자국 하나도 남기지 않는딘
길만이 길이 아니고
이 세상 모든 것이 길임을 아는 자들은
누구도 어디에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봄바람처럼.
갈바람처럼.
4
발성을 하는 순간
음표는 오선지에서 비상을
결행한다.
하늘로 하늘로 날아올라 까마득히 무한으로
사라지는 그 소리.
침묵도 한 소절의 멜로디다.
마른 가지 혹은
가냘픈 전깃줄에 가지런히 앉아 먼
우주를 응시하는
한 무리의 새.
5
누가 뿌렸을까.
밤새 하늘 마당 가득히 흩어진 별들.
희끄무레
동트는 새벽, 새들은
모이를 쪼기 위해
일제히 빈 가지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6
어떤 새는 F 단조로 날고
어떤 새는 G 장조로 난다.
오르고 내리는 반복의 그 동선(動線)
음악은 청각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악장으로 끝나도 좋다.
완벽한 연주가 되어주기만 한다면
새벽녘
하늘의 커튼이 열리기를 기다려 무대에서
온몸으로 허공에 곡선을 긋는 그 한 생의
선율.
7
낮말은 새가 듣는다 하지 않던가.
온종일 나뭇가지에 앉아 쫑알 쫑알 지껄이던 새들이
해지자 간 데 없다. 어디 갔을까.
그가 아니고서는 이렇듯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인간의 자 잘못을 일일이 단죄하시는
우리 하느님,
새들을 불러 자세히 묻는다.
오늘도 이 밤, 하늘 저 건너
은하수를 넘어서
반짝반짝 마당에 모이를 뿌려놓고
짝짝 박수쳐
지상의 새들을 불러 모으는
우리 하느님.
8
전방 7m
수류탄 투척
일순
굉음과 함께 일제히
허공으로 산탄(散彈) 하는 저 무수한
파편들.
모든 새들의 비상은
슬로비디오로 바라보는 폭약(爆藥)의 폭발(爆發)이다.
꽃들이 폭발로 꽃씨를 만들 듯
뇌관에 장전한 생명, 혹은 알의 분열,
김포 해안 습지에서
무심결에 돌멩이 하나를 집어 던진다.
순간
은빛 가득 하늘로 날아오르는
철새 떼.
9
지상의 모든 새들은 불꽃이다. 아니
허공으로 튀는 불티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장작불 더미에
끊임없이 바람을 불러넣는 새들의
나래짓 소리.
뜨겁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던가.
용암의 분출이 사라지기 시작한 지구는
이미 식었다.
차라리
고스란히 타 한 줌 새가 될지언정
풀무질 그친 지구를 떠나 먼 태양을 향해서
막막히 나는
새.
11
만물을 감싸 안은
우주이거늘
이 세상 어찌 포란(抱卵)되지 않음이 있더냐.
계곡의 바위들도 실은 따뜻한 햇볕에
부화(孵化)를 기다리고 있는 것,
문득 산길을 걷다 숲속 외진
새 둥지에서
막 알을 깨고 나와 짹짹거리는
직박구리 한 쌍을 보았다.
스스로 깨짐 없이 이루어지는 생명이
이 세상 어디에 있던가.
아직 엄동이지만
엷은 햇살로도 묵묵히 체온을 덥히는
둥지의 여린 알들,
오늘은 그중 한 개가 깨어 날개를 파닥거린다.
동안거를 막 끝내고
표연히 선방을 나서 어디론가 훨훨 날아
사라지는
한 마리의 새
12
지상의 인간들은
한 조각의 빵을 놓고 다투지만
새는
별들을 쪼아 먹고 산다.
10월 한로(寒露),
맑은 밤하늘을 보아라.
마당 가득히 뿌려놓은 모이들
누가 뿌렸을까.
희끄무레
동트는 새벽, 새들은
모이를 쪼기 위해
일제히 빈 가지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20
푸드덕푸드덕,
타오르는 장작불 속에서 깃을 치는
새들의 비상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무엇이나 불꽃의 정점에 서면
새가 된다.
흩날리는 꽃잎, 솟구치는 불티,
까마득히 허공의 한 점으로
사라지는 재.
바람은 영혼의 길
육신을 소진한 한 마리 새가
그 길을 안다.
흙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그
보이지 않는 길.
새벽
오세영
마루에 떨어진 채 금화(金貨)는
빛나고 가볍게 고요가
음반(音盤) 위에 쉴 때,
우랄 알타이 모음(母音)이 잠든
베갯머리에서
담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을 그리다가
꽃이여,
찰랑거리는 시간의 델타 위에
너는 묻히고 만가(輓歌)를 부르는 새벽,
모이를 줍고 있던 밤새들의 낮고
깊은 목소리.
문을 밀치면 투명한
방으로 걸어오던 초상화.
고요의 좁은 출구를 지나서
꽃 피듯 옷을 벗는다.
실내에서 나래 치는 나비 떼
선반에 얹혀 둔 햇빛을 털고,
무겁게 누운 저 평원(平原)을
깔고 앉아, 빛을 길어 올리는
동앗줄을 붙잡고 새벽은,
잿더미 위의 앙상한 하늘을
밀어제친다.
새해 새날은
오세영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눈송이를 털고
침묵으로 일어나 햇빛 앞에 선 나무,
나무는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긴 동면의 부리를 털고
그 완전한 정지 속에서 날개를 펴는 새
새들은 비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이 오는 길목에서
아득히 들리는 함성
그것은 빛과 밫이 부딪혀 내는 소리,
고요가 만들어 내는 가장 큰 소리,
가슴에 얼음장 깨지는 소리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얼어붙은 계곡에
실낱같은 물이 흐르고
숲은 일제히 빛을 향해
나뭇잎을 곧추세운다
새해 아침
오세영
하늘은 이미
어제의 하늘이 아니다.
첫 고백을 들은 여인의
귓속에 어리는 속삭임처럼
향그럽게 감도는 바람.
우리는 오늘
닫힌 창문을 연다.
들은 이미
어제의 들이 아니다.
첫 경험 한 여인의
여린 가슴에 고이는 젖처럼
부풀어 오른 흙,
우리는 오늘
언 땅에 꽃씨를 뿌린다.
보아라
변하지 않은 자 누구인가,
영원을 말하는 자 누구인가,
내일이 오늘인 이 아침에
보아라
세계를 깨우는 황홀한 빛.
바다는 이미
어제의 바다는 아니다.
첫사랑에 빠진 여인의
푸른 눈동자에 어리는 별빛처럼
설레는 파도,
우리는 오늘
먼 항구를 향해 배를 띄운다.
샐러드를 먹으며
오세영
오토바이 폭음이나 자동차의 쿼터 플피프*나
귀청이 째지는 하드록**만은 아니다.
뛰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힙합만은 아니다.
시끄러운 것은 글자도 마찬가지,
지하철 유리창이나, 빌딩 벽이나, 변소 문짝이나, 창고 셔터나, 자동자 지붕이나, 다리 난간이나, 전화부스나, 담벼락이나, 입고 다니는 바지의 히프나, 심지어 자신의 얼굴에까지도
알록알록 휘갈겨쓴 낙서.
Kill all white men! 혹은
White pride! White man rule with pride!
Fuck equal wealth!
Power to wealth!
Sound language든 Visual language든
보디 랭귀지든 말이란 말은 온 나라에서
펄펄 죽 끓듯이 끓지만
끝내 그것은 죽이 되지 못한다.
물은 물대로 증발한 채
피는 피대로, 당근은 당근대로, 게살은 게살대로
뜨거운 양철 냄비에
고스란히 남는 날 소재,
누가 아메리카를 멜팅 폿이라고 했던가.
미국은 시디신 샐러드 디쉬.
* 쿼터 플리프(quater flip) : 자동차 지붕 위에 놓여 있는 25센트짜리 동전이 풀쩍 뛰면서 뒤집어질 정도로 음악 소리를 크게 내며 차를 질주하는 것. 미국 청소년들의 유행 중의 하나.
** 하드록(hard rock) :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록 음악.
생이란
오세영
타박타박 들길을 간다.
자갈밭 틈새 호올로 타오르는
들꽃 같은 것,
절뚝절뚝 사막을 걷는다.
모래바람 흐린 허공에
살풋 내비치는 별빛 같은 것,
헤적헤적 강을 건넌다
안개, 물안개, 갈대가 서걱인다.
대안(對岸)에 버려야 할 뗏목 같은 것,
쉬엄쉬엄 고개를 오른다.
영(嶺) 너머 어두워지는 겨울 하늘
스러지는 노을 같은 것,
불꽃이라 한다.
이슬이라고 한다.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라 한다.
서산마애삼존불
오세영
돌에서 깨어나
인간으로 지금 막 환생해서
걸어 나오는 미륵이여,
이 세상 첫걸음에
알 듯 모를 듯 입가에 흘리는
그대 미소는
진정 무엇을 말하려 함인가
한 송이 연꽃에도 우주가 있다는데
그대를 막잠에서 깨운
암벽의 진달래
너무도 아름다워 그런 것인가.
돌도 불성(佛性) 받아
인간 될 수 있음을
한낱 미소로 깨닫게 해준
서산(瑞山) 운산면(雲山面)
마애존불
서울은 불바다
오세영
적 일개 군단
남쪽 해안선에 상륙.
전령이 떨어지자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전선(戰線)
참호에서, 지하 벙커에서
녹색 군복의 병정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총구를 곧추세운다.
발사!
소총, 기관총, 곡사포, 각종 총신과 포신에
붙는 불,
지상의 나무들은 다투어 꽃들을 쏘아 올린다.
개나리, 진달래, 동백......
그 현란한 꽃들의 전쟁,
적기다!
서울 영공에 돌연 내습하는 한 무리의
벌떼!
요격하는 미사일
그 하얀 연기 속에서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벚꽃.
봄은 전쟁인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든
이 봄의 핵 투하.
석류꽃
오세영
짓밟혀도
순결만은 지킨다는 것이냐
마른 하늘의 날벼락 맞아
육신은 지금 땅에 떨어졌다만
아니다.
정신까지 더럽힐 순 없는 것,
광란의 여름은 가고
오늘 나는 보았다.
마른 가지 그 꽃잎 진 자리
석류 한 알 푸른 하늘을 향해서
하얀 이 드러내
비웃고 있음을
마음에 없는 것은 또한
하늘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설날
오세영
새해 첫날은
빈 노트의 안 표지 같은 것,
쓸 말은 많아도
아까워 소중히 접어 둔
여백이다.
가장 순결한 한 음절의 모국어(母國語)를 기다리며
홀로 견디는 그의 고독,
백지는 순수한 까닭에 그 자체로 이미
충만하다.
새해 첫날 새벽
창을 열고 밖을 보아라.
눈에 덮혀 하이얀 산과 들,
그리고 물상들의 눈부신
고요는
신(神)의 비어 있는 화폭 같지 않은가.
아직 채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눈길에
문득 모국어로 우짖는
까치 한 마리.
설화(雪花)
오세영
꽃나무만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은
겨울의 마른 나뭇가지에 핀 설화(雪花)를
보면 안다.
누구나 한 생애를 건너
뜨거운 피를 맑게 승화시키면
마침내 꽃이 되는 법,
욕심과
미움과
애련을 버려
한 발 재겨 디딜 수 없는
혹독한 겨울의 추위, 그 절정에
홀로 한 그루 메마른 나목(裸木)으로 서면
내 청춘의 비린 살은 꽃잎이 되고
굳은 뼈는 꽃술이 되고
탁한 피는 향기가 되어
새파란 하늘을 호올로 안느니
꽃나무만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은
겨울의 마른 나뭇가지에 핀 설화를
보면 안다.
섬
오세영
외롭지 않은 것은 섬이라 할 수 없다.
망망한 바다 위에 저 홀로 깨어 있어
거친 물 성난 바람에도 제자리를 늘 지킨다.
멀리 있지 않은 것은 섬이라 할 수 없다.
수평선 아득히 뭍으로만 귀를 열고
백년을 하루와 같이 해조음(海潮音)을 듣는다.
외롭지 않은 자는 시(詩)를 쓸 수 없으리
멀리 있지 않는 자는 시를 쓸 수 없으리
시인도 섬과 같아라 백지(白紙) 위에 뜬 갈매기
성조기
오세영
아무 데나 국기를 꽂는구나.
모텔 울타리에, 여염집 정원에, 술집 지붕에, 빌딩 옥상에,
지하철 매표소에, 주유소 출납창구에, 카지노 선전탑에, 농장의 축사에,
쓰레기장에, 높으면 높은 곳이라서, 낮으면 낮은 곳이라서, 바다가 아닌 육지라서,
육지가 아닌 바다라서, 산이라서, 들이라서----
아무 데나 국기를 꽂는구나.
국기로 손수건을 접고, 국기로 머리수건을 해 두르고, 국기로 티셔츠를 받쳐 입고, 국기를 찢어 팬티를 지어 입고, 국기로 브래지어를 하고, 국기로 백을 만들어 잡동사니를 넣어 다니고---
아무 데나 국기는 휘날리는구나.
맑거나, 흐리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밤이거나, 낮이거나, 바람이 불거나, 안개가 끼거나, 평일이거나, 국경일이거나, 사시사철 때를 가리지 않는구나.
새것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어떤 것은 색이 우중충하고, 어떤 것은 천이 낡아 찢어지고, 또 어떤 것은 빛이 바래진 채로 밤낮없이 바람에 휘날리는구나.
이 땅이 미국임은 분명한데,
이 나라가 미국임은 분명한데,
무슨 불안이 상기 남아 있어서 이처럼
재확인을 해두어야 하는 것이냐.
초등학교 학생들이 자신의 소지품에 이름을 새겨 넣듯
자기 땅에 이름을 새겨 넣어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아메리카 나의 땅 혹은 인디언의 땅?
아니라면
폭약을 적재한 트럭의 붉은 깃발처럼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이더냐.
세상은
오세영
누굴 사랑했던 게지.
화사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혈색
까르르 세상은 온통 꽃들의 웃음판이다.
누굴 미워했던 게지
시퍼렇게 얼어붙은 그녀의 낯색,
파르르 세상은 온통 헐벗은 나무들의 울음판이다.
아홉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지만 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미움도 사랑도 버려야만 산문에 든다 하건만
노여움도 사랑도 버려야만 하늘 문 든다 하건만
먼 산 계곡에선 오늘도 눈 녹는 소리.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더란 말인가,
흐르는 물 위엔 뚝뚝
꽃잎만이 져 내리고…
소
오세영
이 세상의
생을 영위하는 것들 가운데서
황소만큼 든든히 대지에
발을 딛고 우뚝 선 자는 없다.
든든하다는 것은 곧
믿음직스럽다는 것.
모든 믿음직한 존재는 말보다
실천을 앞세운다.
등에 햇빛을 지고
온몸으로 대지를 갈아엎어
싱그럽게 생명을 키우는
짐승,
그의 노역은 정녕
운명을 사랑하는 행위일지니
네 처연한 눈동자에 스치는 흰 구름이
문득
하늘의 무게를 말해준다.
소금
오세영
얼린다는 것은
오래오래 저장해둔다는 것,
심지어는 죽은 육신조차 미래의
부활을 위해서
냉동 보관해둔다고 하지 않던가.
슬픔도 그저 잊어서는 안 된다.
같은 병균으로 항원(抗原)을 만들듯
슬픔이 슬픔의 항생제(抗生劑)가 되기 위해서는
그 또한 적당히 절여두어야 하는 것,
그래야 슬픔도
언제인가는 기쁨이 되지 않겠는가?
부패 방지를 위해,
즐거운 만찬을 위해
나는 오늘도 요리를 하면서
음식에 적당량의 소금을 친다.
슬픔이 얼어붙은 그 하얀 결정체
짜디짠 눈물의 눈가루를.
소나기
오세영
봄이 와도
높은 벼랑의 축대는
부럽지 않았다.
받드는 누각이 있는 까닭에,
까마득한 계곡 아래서
꽃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 동안에도
축대를 받치고 있는 돌들은
힘과 힘만을 겨누고 있었다.
받드는 이념이 있는 까닭에,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그들의 정원에도 어느덧
꽃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바람에 불려 온 민들레 씨앗 하나가
수줍게 싹트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꽃이 피고 마침내
어느 여름밤,
그의 사랑이 격정의 소나기로 가슴을
울렸을 때
그는 문득 들었다.
와르르 무너지는 축대의 굉음을,
하나의 이념이
덧없이 무너지는 소리를.
소백산
오세영
조령, 죽령, 산길을 따라왔더냐
굽이굽이 남한강 물길을 좇아 왔더냐
예서 더 오를 수도 있었다만
이쯤 터를 잡아
한세상 아름답게 문을 여는 철쭉아,
더 높고 큰
가까이는 태백이 있고
멀리 또 백두가 있거니
풍기, 단양, 영월, 제천 국토의 허리에 자리해서
스스로 소백이라 일컫는 그 겸손함이여.
비록 넓은 강역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어찌 마음조차 편협할 수 있으랴.
네 가슴 띠뜻한 피가 돌아
한 세상 아름답게 봄꽃 피느니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베푸는
그 넉넉함이여.
세상 사는 이치 또한 이 같지 않더냐.
소월을 강의하며
오세영
고려연방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통일은 우선
교류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한 학생이 불쑥 일어나
나더러 반통일 세력이라고 한다.
가진 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동산투기를 근절하기 위해서 만일
국가가 모든 토지를 국유화한다면
나의 유일한 부동산인 집 한 채를
기꺼이 헌납할 생각이 있는 나인데
통일을 위해서라면 대학교수직도
기꺼이 물러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인데
25년 교직 경력, 150만 원 월수는
이제 가진 자가 되었구나.
그렇다. 나는
가진 자이다.
집에 가면 나의 사랑하는 강아지 '왈패'가 있고
브람스의 음악이 있고
그보다는 아직 티 브이의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찔찔
흘릴 눈물이 있다.
학생들이 떠난
빈 강의실,
홀로 남아 분필을 추스린다.
소월의 허무주의처럼 흑판은
텅 비어 있는데
가만히 새겨 보는 그대 이름, 아니
산산히 부서진 나의 이름.
속 구룡사 시편
오세영
한 철을 치악에서 보냈더니라.
눈 덮인 멧부리를 치어다보며
그리운 이 생각 않고 살았더니라.
빈 가지에 홀로 앉아
하늘 문 엿보는 산 까치같이,
한 철을 구룡에서 보냈더니라.
대웅전 추녀 끝을 치어다보며
미운 이 생각 않고 살았더니라.
흰 구름 서너 짐 머리에 이고
바람길 엿보는 풍경같이,
그렇게 한 철을 보냈더니라.
이마에 찬 산 그늘 품고,
가슴에 찬 산자락 품고
산 두릅 속눈 트는 겨울 한 철을
깨어진 기와처럼 살았더니라.
쇠붙이의 덧없는 종말을
오세영
버려진 땅이라지만
흙이 어찌 금보다 귀치 않으리.
제롬*에 가면 알리라.
사막에 솟아오른 불모의 바위산
밍거스, 그러나
그 벼랑에 버려진 흙더미에서는
종려나무,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마리포사, 유카**꽃도 흐드러지게
피느니
인간의 탐욕은 금을 찾아서
암반에 실없이 허공을 내지만
메꾸어진 흙은 가슴으로
생명을 받는다.
녹슬은 레일, 무너진 갱도,
제롬에 가면 알리라.
쇠붙이의 덧없는 종말을,
시간은 금이 아니고
흙이라는 것을.
* 제롬(Jerome) : 아리조나 사막지대의 암산(岩山) 밍거스 산록의 벼랑에 건설된 금광 산촌. 서부 골드러시 때 금이 발견되어 소위 앨도라도의 하나로 알려진 곳. 지금은 폐광이 되어 골드러시의 향수를 재현한 관광촌으로 변모되었다.,
** 마리포사(Mariposa), 유카(Yucca) : 사막에서만 피는 아름다운 꽃들.
쇠붙이의 영혼
오세영
쇠붙이에도 영혼이 있다는 것은
기계들을 보면 안다.
지상에 동식물이 분포해 있듯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새,
땅을 달리는 자동차는 짐승,
바다를 헤엄치는 선박은 어류,
한군데 붙박인 공장의 기계들은 식물군락(植物群落)이다.
전 생애를 바쳐 초목들이
곡물과 과일을 소출하듯
공장의 기계 역시 물품들을 생산한다.
지상에 사악한 짐승이 있고
총이나 칼같이 악령에 사로잡힌 쇠붙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라면
모든 쇠붙이는 가라고 말하진 않으리라.
삶과 죽음이란 자리를 바꾸는 일
이 세상 어디에도 소멸은 없다.
죽은 물질에 섬광처럼 깃들이는
전류, 그
쇠붙이의 영혼.
수(sue)
오세영
어제는
아래층 폴 할아버지가
수*를 당했다.
자주 놀러 와 그의 무료를 달래주던
옆집의 귀염둥이 소녀 니콜이
물뿌린 잔디밭에서 놀다 미끄러져
무릎에 조금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쯧쯧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혀를 치고 있는데
오늘은 또 내게 수가 날아들었다.
그가 일으킨 가벼운 자동차 첩촉 사고,
양해해주고 돌아서면서 인사말로 내뱉은 동양식 어법.
'아 앰 소리'가 화근,
말실수를 빌미 삼아 돈을 울궈낼 심산이다.
그러고 보니 알겠다.
며칠 전 베이커리에 들른 딸 하린이가
젖은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졌을 때
왜 웨이터가 그토록 친절하게 굴었는지.
왜 그가 공짜로 파이 한 접시를 주었는지.
새 학기 실라버스**를 짜며
성적 산정 기준을 꼼꼼히 적어넣는다.
1. 중간고사 15%, 기말고사 15%
2. 리포트 제출 네 번 20%
3. 두 번의 발표 10%
4. 출석 10%
5. 예습점검 10%
6. 토론 10%
7. 오피스 아우어 상담*** 10%
기타 기일 내 제출치 않은 리포트는 받지 않음.
답안지 및 리포트 평가에 대한 이의 신청은 반화 후
일 주일 이내만 허용됨.
no make up****
학생들에게
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정성들여 짜는 새 학기
K. 155 Korean Modern Poem*****의
실라버스.
* 수(sue):재판소송.
** 실라버스(Syllabus):대학의 강의 요목
*** 오피스 아우어(office hour): 정해진 학생 면담 시간.
**** no make up: 정해진 시간표 시간 이외에 다른 예외는 없다는 것.
***** K. 155 korea Modern Poem: 버클리 대학 동아시아문학과에 설강된 강좌명.
수부(水夫)
오세영
심야의 내 서재는 밤바다,
스탠드의 불빛이 깜빡하기 시작하면
나는 낡은 포경선을 한 척을 끌고
원양(遠洋) 어장을 찾아 헤맨다.
바다는 수많은 어휘들의 파도로 반짝이지만
금빛 비늘을 퍼덕이며
심해를 유영할 그 해도 속의
찬란한 시어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나는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에이허브 칸*
뭍에는 지탱할 힘이 없어
눈은 저 멀리 바다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찾는 것은 수직의 꼬리지느러미를
높이 치켜들고
푸른 하늘을 향해 점프하는 향유고래.
지금
북극해, 아랄해는 벌써 지나쳤는데
내 연약한 펜촉으론 작살 한번 던지지 못한 채
다만 무망(無望)의 수평선 한쪽을 회유할 뿐
오늘도 쓸쓸히
귀항의 깃발을 올려야 하나 보다.
먼 언어의 파랑을 헤치며 돌아오는
피곤한 새벽녘
낡은 포경선 한 척.
* 소설 《모비 딕》의 선장
수좌(首座)
오세영
깊은 토굴에서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근 채 면벽참선 3년,
묵언수행 3년,
장좌불와 3년,
겨울 산은
해탈을 염원하는 수좌들의 동안거가
한창이다.
귀 막고, 눈 막고, 입 막고
깜깜한 진흙 속에서 용맹정진하던
애벌레 한 마리,
오늘 우화(羽化)에 비로소
성공했나니
아, 눈부신 저 매미들의
날개
날갯짓 소리.
술
오세영
술이여
싸늘한 유리컵에 담긴
한 사내의 증오(憎惡)를 위하여
불타지 마라
마른 입술과 혀에
뿌리는 감로(甘露).
한 잔의 술을 위하여
등불은 명정(酩酊)의 뜰을 밝히고
흔들리는 그림자, 의미(意味)의 외연(外延)에서
저미는 야만(野蠻)의 고기
술이여,
술보다 더 깊은 망각(忘却)을 위해
마시는 술이여.
술잔
오세영
- 나는 특별히 행복한 삶을 누리는 재벌이나 부자들의 집안을 본 적이 없다.
술은 종류에 따라
잔의 크기가 각기 다르다.
허나
큰 잔에 채운 술이나
작은 잔에 채운 술이나
그 한 잔에 담긴
알코올 함량은 일정한 것.
큰 맥주 한 잔이라 해서 더 취하는 것도,
작은 양주 한 잔이라 해서 덜 취하는 것도,
아닌,
인생이란 하나의 빈 술잔,
흔히
많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모자라 적은 것을 한탄하지만
죽음 앞에서
한 생애가 누린 행(幸) '˙ 불행(不幸)의 총량은
크기가 다른 술잔의 동일한 알코올양처럼
똑같다.
다만 신이 따라 준
그 술의 종류가 다를 뿐
숲속에서
오세영
어떤 것은 예리한 도끼로 쳤고
어떤 것은 잔인하게 톱으로 싹둑
베어버렀다.
외진 숲속의 잘린 나무들,
아직도 나이테 선명하고 송진향 그윽한데
너는 일말의 적의(敵意)도 없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 없이 세상에 베풀기만 하였구나.
살아서는 꽃과 열매를 주고
우리로 하여
푸른 그늘 아래 쉬게 하더니
어느 악한이 장작패서 불태워버렸을까,
어느 무식이 너를 잘라 불상(佛像)을 새겼을까.
그래도 모자람이 있었던지 너는
죽어버린 끌덩에서조차
파아란 이끼를 키우고 또 다소곳이
버섯까지 안았구나
딱새, 벌, 산꽃, 다람쥐, 풀잎 심지어는
혀를 낼름거리는 꽃뱀까지도
왜 너와 더불어는 평안을 얻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이 따로 없느니
네가 바로 부처인 것을
내 오늘 산에 오르며 문득
자연으로 가는 길을 배운다.
스스로
오세영
꽃들은
자신을 피워올린다.
스스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향기 좇아
다투어 날아드는 벌처럼
바람에 휩쓸려
떨어지길 기다리는 낙엽같이
운명이란 그러나
수동으로 오는 것,
그러므로 기다림은
스스로를 죽이는 일이다.
지금은 봄,
세상은 빛과 향으로 어우러진
꽃밭인데
그늘 아래
묵묵히 웅크린 바위 하나,
그러나 바위여
너의 기다림이 설령
천 년의 바램이라 하더라도
움직일 수 없거든 차라리
깨져라.
스스로 깨지는 것이 때로
이루는 일이 되는 까닭에
슬픔
오세영
비 갠 후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먼 산은 가까이 다가서고
흐렸던 산색은 더욱 푸르다.
그렇지 않으랴,
한 줄기 시원한 소낙비가
더렵혀진 대기, 그 몽롱한 시야를
저렇게 말끔히 닦아 놨으니.
그러므로 알겠다.
하늘은 신(神)의 슬픈 눈동자,
왜 그는 이따금씩 울어서
그의 망막을
푸르게 닦아야 하는지를,
오늘도
눈이 흐린 나는
확실한 사랑을 얻기 위하여
이제
하나의 슬픔을 가져야겠다.
승부
오세영
돌을 던졌다.
(질 바엔 깨끗이
져야지)
백을 쥐고도 못 이긴
싸움
어차피 인생은 승부라는데
분을 참고
싱긋 웃어 보이는
여유, 아니 숨긴 비수,
돌아보면 세상은
빈 공간
애증의 금을 긋고
올과 낱의 매듭을 짓고
그 위에 흑과 백
돌을 던진다.
옥집을 믿어
쌍 패를 친 것이 오산,
정석대로 살지 못한
인생은 무너지고
와르르 -
귓가의 집은 무너지고
호구에 던져진
바둑알 하나.
시뮬레이션
오세영
허상과 실재의 다름이
있다더냐.
'으악' 소리를 지르는 그 순간의
공포,
실제에서 오는 것이든 허상에서 오는 것이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는 것은 다만 감각의 몽타주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촉각이 어우러내는 환영,
찰나가 주는 느낌,
우주여행의 시뮬레이션* 스타워즈*를
참관한다.
'으악'
불랙홀에 빠져들었다.
싯 벨트를 조이는 손등으로
불끈 솟는 힘줄,
'으악'
적의 미사일을 한 방 맞았다.
감싸 쥔 안면으로 흐르는
식은땀,
굳이 실체를 추구할 것이 있다더냐.
아메리카는 거대한 하나의 디즈니랜드,
감각의 믿음밖에 없는 그
실용주의.
* 시뮬레이션(simulation)
* 스타워즈(Star wars)
시인
오세영
시인은 천명(天命),
사지가 잘려 슬픈 뱀
비록 입이 있다하나 소리를 낼 수 없어
혓바닥은 항상 허공을 낼룽거린다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하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냐
한 생을 진흙탕에서 뒹굴며
안으로, 안으로 삼켜야 하는 그 붉은 눈물
저리 가거라. 징그러운 뱀
돌팔매에 쫓기는 그 원통함인들 또
어찌하겠느냐
수화(手話)로도, 구화(口話)로도 호소할 길 없어
푸른 하늘을 향해 오늘도 이처럼
온몸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시(詩)일까, 산문일까,
봄 되어 얼음 풀리고
산나리, 초롱꽃도 활짝 웃는데
꿈틀꿈틀
맨땅에 글씨를 쓰며 기어가는 풀숲의
외로운
꽃뱀 한 마리
시 한 줄
오세영
시 한 줄을 찾아
온 밤을 까칠하게 지샌 밤
새벽녘이 되어
코피가 터진다
오, 어지러워라.
빈 원고지 칸을 방울방울 메꾸는 그
선연한 핏자국.....
창밖
밤새 내린 하얀 눈밭에선
뚝뚝
붉은 동백 몇 송이가
지고....
신념
오세영
꽁꽁 얼어붙은 겨울 밭, 무우 하나
땅에 묻힌 채
강그라지고 있다.
돌아보면 텅 빈 들판, 강추위는 몰아치는데
분노에 일그러져 시퍼렇게 하늘을
노려보는 그 눈,
뽑혀 생명을 보전하다가
일개 먹이로 전락하기보다는
차라리
뿌리를 대지의 중심에 내리고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했구나.
승산 없는 전투가 끝난 전선,
지휘관을 따라 부대는 모두 투항해버렸는데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비인 들녘에서 외롭게
총살 당한
푸른 제복의 병사 하나.
신발 한 짝
오세영
진흙 털고,
먼지 털고,
해진 신발을 깁는다.
풀꽃을 밟았을까.
이슬 냄새가 난다.
벌레를 밟았을까
쇠똥 냄새가 난다.
돌멩이에 챈 신발 한 짝,
애증과 영욕의
하루는 저물었다.
지팡이여, 지팡이여,
돌베개의 꿈은
차구나.
웃음 털고
울음 털고
피곤한 육신이 잠드는
길섶.
해진 신발 한 짝
꿈꾸는 길섶.
신(神)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오세영
내가 원고지의 빈칸에
ㄱ, ㄴ, ㄷ,ㄹ......
글자를 뿌리듯
신(神)은 밤하늘에
별들을 뿌린다,
빈 공간은 왜 두려운 것일까,
절대의 허무를
빛으로 메꾸려는 저, 신(神)의
공간,
그러나 나는 그것을
말씀으로 채우려 한다.
내가 원고지의 빈칸에
ㄱ, ㄴ, ㄷ, ㄹ.....글자를 뿌릴 때
지상에 떨어지는 씨앗들은
꽃이 되고 풀이 되고 또
나무가 되지만
언제인가 그들 또한
빈 공간으로 되돌아간다.
나와 너의 먼 거리에서
유성의 불꽃으로 소멸하는
언어,
빛이 있으므로 신(神)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
실크로드
오세영
잠자는 악공*
혜초는 보았을까.
테라코트 점토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는 이 여인을,
모퉁이가 부서지고 닳아져서 지금은 볼 수 없는
그녀의 참 얼굴을,
혜초는 들었을까.
이 여인이 켜는 천상의 비파소리를,
피곤에 지쳐 살픗 잠이 든
그녀의 참 음성을,
그 어떤 상전이 기다리라 했는지
눕지 못하고 턱을 괸 채 졸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애잔하다.
다리를 꼰 채 의자에 비스듬이 기대앉아 있는 모습이
그래서 애처롭다.
잠 속에 잠이 든 여인.
테라코트 꿈속에서 잠깐
환생을 즐긴 여인,
비천일가, 보살일까, 비구니일까. 그도 아니라면
창녀일까.
보는 것이 보는 것이 아니고
듣는 것이 듣는 것이 아닌데,
혜초는 그녀의 참모습을 정말 보았을까.
보고 들은 것이 과연 그에게
보고 들은 것이었을까?
오늘이 아닌,
1300년 전
그때의 일이었으니까.
*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후 5세기까지 약 천년간 번창했던 고대도시 '탁실라(Taxila:현재 파키스탄 수도 라왈핀디 북서쪽 35km 지점에 있다) 유적 그중에서도 기원전 3세기 아쇼카 대왕이 건립한 다르마라지카 수투파에서 출토된 조각으로 간다라 미술의 전형을 보여준다. 지금 탁실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왕오천축국전>에는 1300년 전 신라 승려 혜초도 이 이곳을 방문하여 근처의 쥴리앙 사원에서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심야(深夜)
오세영
스스로 풀어져야만
섬유에 촉촉이 스며서 때를 씻는
비누처럼,
스스로 풀어져야만
신경에 올올이 배어드는
설탕처럼
풀어지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무엇을
어찌할 수 없다.
만져볼 수 있다면 사랑은 아마도
액체일지 모른다.
이성은 고체,
대낮이 스스로 풀어져
액체가 되는 심야에
설탕을 진하게 풀어
한잔의 커피를 든다. 아, 이제
노동의 시간이 가고 지금은
사랑을 해야 할 시간.
아득히
오세영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이다.
새록새록 눈 녹는 소리에
여기저기 언 땅을 밀치고 솟아나는
새순들.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 흔들어 깨워준다는
것이다.
바람에
하나씩 눈 뜨는 나무의
잎새들,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아른 아른 취해
아지랑이 먼 하늘 황홀하게 우러르는
꽃들의 눈빛,
봄이 온다는 것은
아득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가지에 물오르듯 아아,
초록으로 번지는 이
슬픔.
아름다운 암흑
오세영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이라지만
둘러보면 어디에도 물인 물,
산인 산은 없다.
이 세상은 하나의 큰 수렁,
땅인 줄 알고 밟은 곳이 정작
진창길인데
이성(理性)에서 한 발을 애써 빼내면
다른 발은 이미 감정에
빠진다.
어차피 산이 산이 아닐 바에
굳이 수렁에서
몸을 뺀들 무엇하랴,
연꽃도 진흙 속에서 사는 것을.
할 수만 있다면 연꽃이 될까.
아니라면
암흑이 아름다운
한 마리 우렁이가 되리라.
사랑에 눈멀어 헤매기보다는 차라리
눈 없이 사는 적막(寂寞)이 더 나을지니
나 오늘 강화(江華)*의 뻘밭가에 서서
쓰린 소금기로 흐려진 눈을
씻는다.
* 강화도
아마나*에서
오세영
고집쟁이 영감님 애미쉬2)
수염은 절대 깎지 않고
자동차나 비행기는 절대 타지 않고
전깃불은 절대 켜지 않고
까만 모자에
까만 코트에
까만 말이 끄는 말은 절대 타고
고집쟁이 영감님 애미쉬,
햄버거는 절대 먹지 않고
티브이나 라디오는 절대 보지도 듣지도 않고
컴퓨터는 절대 갖지 않고
하얀 집에
하얀 식탁에
하얀 우유는 절대 마시고,
그의 채소밭에서 자란 홍당무는
유난히 굵다.
그의 까만 말이 쟁기로 갈아엎는
문명.
그의 밭에는
햇빛과 바람과 샘물이 있을 뿐이다.
수염은 절대 깎지 않고
자동차, 비행기는 절대 타지 않고
전깃불은 절대 켜지 않고
까만 모자에
까만 코트에
까만 말이 끄는 마차는 절대 타고
고집쟁이 영감님 애미쉬**.
* 아마나(Amana) : 아이오와주에 있는 소읍. 애미쉬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여 특이한 생활 양식으로 살고 있음.
** 애미쉬(Aemish) : 개척 시대 독일에서 이민을 와 한 특정한 기독교 종파를 믿는 사람들로 문명을 철저히 거부하며 자연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아아, 훈민정음
오세영
언어는 원래 신령스러워
언어가 아니고선 신(神)을 부를 수 없고
언어가 아니고선 영원(永遠)을 알 수 없고,
언어가 아니고선
생명을 감동시킬 수 없나니
태초에 이 세상은
말씀으로 지으심을 입었다 하나니라.
그러나 이 땅, 그 수많은 종족의 수많은
언어들 가운데 과연
그 어떤 것이 신의 부름을 입었을 손가.
마땅히 그는 한국어일지니
동방에서
이
세상 최초로 뜨는 해와 지는 해의
그 음양(陰陽)의 도가 한 가지로 어울렸기 때문이니라.
아, 한국어,
그대가 하늘을 부르면 하늘이 되고,
그대가 땅을 부르면 땅이,
인간을 부르면 인간이 되었도다.
그래서 어여쁜 그 후손들은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이치를 터득해
'․', 'ㅡ', 'ㅣ' 세 글자로 모음 11자를 만들었고
천지조화(天地造化), 오행운수(五行運數), 그 성(性)과 정(情)을 깨우쳐
아(牙), 설(舌), 순(脣), 치(齒), 후(喉)
5종의 자음, 17자를 만들었나니
이 세상 어느 글자가 있어
이처럼 신과 내통할 수 있으리.
어질고 밝으신 대왕 세종(世宗)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정음(正音) 28자로
개 짖는 소리, 천둥소리, 심지어는 귀신이 우는
울음소리까지도
적을 수 있다고 하셨으니
참으로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
좌우상하(左右上下)를 마음대로 배열하여
천지간 막힘이 없고
자모를 결합시켜 매 음절 하나하나로
우주를 만드는
아아, 우리의 훈민정음.
속인들은 이를 가리켜
이 세계 어느 글자보다도 더 과학적이라고 하나
어찌 그것이 과학에만 머무를 손가.
그대, 하늘을 부르면 하늘이 되고,
땅을 부르면 땅이,
인간을 부르면 인간이 되는
아아, 신령스러운 우리의
한국어,
우리의 훈민정음.
아, 오클라호마
오세영
벤구리온 아동병원은
팔레스타인의 적의가 폭파하고
서울의 삼풍백화점은
천민자본주의의 탐욕이 폭파했지만
아, 오클라호마 연방 청사
그 청사 안 어린 천사의 집은
폭파의 재미가 폭파했다.
심심풀이로
지나가는 개에게 돌을 던져
다리 하나를 분질러놓듯
인간의 수족을 불구로 만들어놓은
그 광기,
우리는 왜 논리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기계처럼 틀에 박혀 살아야 하는가
한 발 혹은 세 발로 걷는 인간의 사회에서
나는 두 발로 걷고 싶다.
빵으로도, 섹스로도, 스포츠로도
달랠 수 없는
우리 시대 아메리카의 이 포스트 모던한
권태.
* 오클라호마 폭탄테러 사건: 1995년 4월 19일 미연방마약단속반, F.B.A, 비밀정보두, 재무부 그리고 어린이 데이케어센터 등이 입주해 있는 오클라호마 시티의 연방정부청사가 미지의 테러단에 의하여 무참히 폭파된 사건. 330명이 사망 실종되고, 55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특히 어린이들의 피해가 컸음. 미국 F.B.A.는 1994년 같은 날에 텍사스 주에 있는 웨이코(Waco) 사교집단을 공격하여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를 낸 바 있으므로 일설에는 웨이코 사교집단이 이에 관련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분명치 않음.
아이스 워터
오세영
생명이
따뜻한 물을 좋아하듯 물질은
차가운 물을 좋아한다.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한 컵의 냉각수로 재우는
저 기계들의 일상을 보아라.
자동차의 엔진, 철공소의 선반, 제철소의 압연기, 발전소의
터빈들이
벌컥벌컥 마셔대는 냉수,
물질은 원래 차기 때문에
찬 것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생명은 따뜻한 사랑의 존재,
그 따듯함을 지키기 위하여 따뜻한 물을 먹어왔거니
아, 여기서는 이제부터 나도 기계처럼
냉각수를 먹게 되었구나.
언제부터인가
나의 조국 코리아에서도
예전엔 따끈하게 데워 먹던 막걸리, 소주, 청주를
얼음처럼 차게 얼려 먹느니
이곳 아메리카에서는
도시 더운 식수를 찾을 수가 없구나
냉수 한 컵을 들고 테이블에 와서
무턱대고 얼음을 처넣는 웨이터에게
불현듯 외치는
'노 아이스(No ice)!'
식수로 찬물을 드는 것은
인간이 물질로 환원되어가는 시대의 한
증거일 것이다.
아이스크림
오세영
나는 외로운 들개,
오늘도 굶주림을 면하려
거리의 광장과 빌딩을 헤매고 다닌다.
표범이 몸을 숨기고 몰래
먹이를 탐색하듯
홀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려보지만
그러나 손쉬운 먹이감은 아예 없다.
뉴욕은 광막한 아열대성 정글,
가로에 우글거리는 악어 떼를 피해서
광장의 교활한 하이에나 무리를 피해서
빌딩에 웅크리고 있는 사자 가족을 피해서
한 마리 들쥐를 좇고 좇다가
오히려 먹힐 뻔했던 오늘 하루,
간신히
표범이 먹다 버린 사슴의 등뼈 하나를 주워들고 돌아와
새끼들과 식탁에 마주 앉는다.
칼로 자르고 포크로 찢어서
어금니로 씹는 한 덩이의 살,
그 피 비린 식욕을 감추기 위하여 후식으로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핥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오세영
처녀의 따뜻한 혀끝에서
녹는 아이스크림
그 완전한 소멸의 쾌락을 위하여
크림은 얼마나
자신을 굳혀야 했던가,
이념의 단단한 틀에 갇히고
서릿발 싸늘한 증오에 떨며
파아랗게 날 세운 눈빛,
그러나 침묵의 절정에선
모든 존재는 물체가 된다.
해방시켜다오,
나는 자유롭고 싶다.
한 처녀의 순결한 입맞춤으로
사르르 풀리는 육신의
속박.
아침
오세영
아침은
참새들의 휘파람 소리로 온다.
천상(天上)에서 내리는 햇빛이
새날의 커튼을 올리고
지상(地上)은 은총(恩寵)에 눈뜨는 시간(時間),
아침은
비상(飛翔)의 나래를 준비하는
저, 신(神)들의 금관악기(金管樂器),
경쾌한 참새들의 휘파람 소리로
온다.
아침이 오는 길목에서
나누는 인사(人事),
반짝이는 눈빛,
어두운 산하(山河)를 건너서
바람 부는 들녘을 날아서
너는
태초(太初)의 축복으로
내 손을 잡는다.
아아, 그것은 하나의 작은 역사(歷史),
인간(人間)은 누구나 자신의 역사(歷史)를 창조(創造)한다.
부신 햇빛으로 터지는 함성(喊聲),
아침이 오는 길목은
지상(地上)의 은총(恩寵)이 눈 뜨는 시간(時間),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하여
어머니는 조찬(朝餐)을 준비하고,
장미(薔薇)는 봉오리를 터친다.
아침이 오는 길목에서
나누는 목례(目禮),
아아, 너와 내가 엮어 가야 할
무언(無言)의 약속(約束).
아, 타클라마칸
오세영
바람에 휩쓸려 굽이치는
큰 사구(砂丘)는 큰 파도,
작은 사구는 잔물결,
먼 해안선의 불빛 같은 신기루(蜃氣樓)를 좇아
나 흔들리는 낙타 등에서
배멀미하다.
악기(樂器)
오세영
우리의 만남이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다.
얼마나 외로왔던 기다림인가,
타버린 가슴에는 동공만이 남고
세월을 메꾸는 건 바람이었다.
내 한낱 바라는 건,
먼 산 울리는 우레(雨雷)였거니
욕정에 번득이는 눈빛을 하고
시방 찾아온 너,
그러나 너의 폭력이
아직도 내게는 희열(喜悅)인 것을,
짓누르는 너의 손끝으로
굳어버린 육체에 피는 돌고
아아, 고통의 칸타타,
만장은 터지는 박수 소리다.
불은 켜지고
막은 내리고
무대엔 악기 하나 쓰러져 있는데
박수는 항상
이별을 위한 축제였던가.
안개꽃
오세영
지상에서나 하늘에서나
멀리 있는 것은 별이 된다.
멀리 있으므로 기억이 흐린,
흐려서 윤곽이 선명치 않는 너의 이, 목, 구, 비,
강 건너 반짝이는 불빛,
혹은 대숲에 비끼는 노을 같은 것,
사랑은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아름다운 안개꽃이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흐르는 은하 한 줄기
애본*에서
오세영
세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래트 포드에 있는 사내가
여기에도 있구나.
몬타나주 푸른 초원에 졸졸 흐르는 맑은 개울
애본,
집 서너 채
별 볼 것이 없지만,
개척 시대 청교도가 세운 낡은 교회 하나가 있지만
낮에는 들의 수선화가 아름답고
밤에는 은하수가 더 맑게 빛나는
애본,
그 애본 강가 애본 마을 애본 모텔에서
오늘은
시속 70마일의 속도를 멈춘다.
어디 가는 길인지요?
별들이 너무 아름답군요.
텁석부리 40대 초반의 주인은
하버드대 영문학 석사,
일찍이 문학을 버리고 현실을 버리고 인간마저 버려
꽃과 별과 새들과 함께 산다.
해는 왜 뜨는지, 별은 왜 반짝이는지,
꽃은 왜 피는지는
세상이 그의 몫으로 남겨놓은 숙제,
버너로 갓 끓인 찌개에 소주잔을 함께 나누며
애본에서 보는 별은 더 맑아 더
슬프다.
내일은 또 어디로 갈 것인가.
세익스피어의 고향 애본을 떠나서
다시 달려야 할 시속
70마일의
삶.
* 애본(Avon) : 몬타나주에 있는 작은 마을. 영국의 세익스피어가 고향에도 동명의 강이 흐르고 있음.
애쉴랜드*에서
오세영
아, 깜깜하구나,
불을 켜라,
시종에게 고함을 지르는 클로디어스.
둘러보면 세상은
밝기만 한데
낮도 기운 오후 두 시 반인데
클로디어스에겐 그것이 밤이었구나.
지붕이 없는 애쉴랜드의 세익스피어 극장에 앉아
연극 (햄릿)을 본다.
극중의 극을 본다.
시종은 객석에 촛불을 켜고
햄릿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지만
나의 무릎엔 10월의 햇살이 싸늘하다.
아, 이 세계는 진정 밤인가, 낮인가.
나는 관객인가 배우인가
클로디어스여, 이제 왕관을 벗어라.
네가 믿었던 밤이 밤이 아니듯이
왕관에 박힌 보석은
별이 아니다.
아, 깜깜하구나 불을 켜라.
외치는 그대의 무대는 밤이지만
객석엔
'팔랑'
10월의 햇빛에 떨어지는
애쉴랜드의
오크 트리 잎새.
* 애쉴랜드(Ashland) : 오리건주 남쪽 캘리포니아주와의 접경지역에 있는 소도시. 세익스피어 전용 극장이 있고 매년 9, 10월에는 전 세계적인 세익스피어 페스티벌이 열린다.
* 이 시는 <햄릿> 3막 2장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전제로 해서 쓴 것이다.
앰 트랙을 타고
오세영
거대한 구조물로
중국인들이 이 지상에서 만리장성을 쌓았다면
미국인들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튼튼하고 긴 철조망을 둘러친 사람들일 것이다.
한 대륙을 쇠줄로 감고 또 감는 그 파란만장한 용기,
앰 트랙을 타고
대륙을 횡단해 본 자는 알리라.
열차가 철조망을 쫓아가고 있느지
철조망이 열차를 따라가고 있는지,
오후 3시 5분
오하마, 덴버, 솔트레이크, 라스베가스를 밤낮 이틀에 달려
다시 오후 3시 20분, 엘 에이에 도착 예정인
내가 지금 타고 있는 이 특급 열차는
'사막의 바람'호
그 끝없는 여로를 철조망은
피곤한 기색도 보이질 않고 따르는구나
아무도 살지 않아 버려진 땅,
그 전망 좋은 언덕에 올라
푸르른 가을 하늘을 한 번 바래고도 싶다만
철조망에 걸린 팻말은
'No Trespassing'
'Private Property'
엣 중국 왕조는 자신의 강토를 지키기 위하여 장성을 쌓았다지만
오늘의 미국인들은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끝없이 철조망을 치는구나
소유가 확실한 그들의
사유(私有).
* 앰 트랙(Am Tract) : 전 미 대륙을 연결하고 있는 철조망과 기차의 이름.
** 사막의 바람(Desert Wind) 호 :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를 내왕하는 특급 열차.
양귀비꽃
오세영
다가서면 관능이고
물러서면 슬픔이다.
아름다움은 적당한 거리에만 있는 것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안 된다.
다가서면 눈멀고
물러서면 어두운 사랑처럼
활활 타오르는 꽃.
아름다움은
관능과 슬픔이 태워 올리는
빛이다.
양귀비 빛
오세영
다가서면 관능이고
물러서면 슬픔이다.
아름다움은 적당한 거리에만 있는 것.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안 된다.
다가서면 눈멀고
물러서면 어두운 사랑처럼
활활
타오르는 꽃.
아름다움은
관능과 슬픔이 태워 올리는
빛이다.
어떤 기도
오세영
기도하는 갈매기를 보았는가.
허공을 선회하던 갈매기 한 떼가
돌연
뭍으로 내리더니
해안 사구에 정연히 자리를 잡고
해를 바래 조용히 명상에 든다.
수평선 너머 한 방향을 일제히 응시하는 그
눈빛들이 경건하다.
머리에는 한결같이 흰 깃의 히잡을 썼다.
모스크 광장에 도열해서
메카를 향해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무슬림들 같다.
잠시 전
고깃배에서 활어를 약탈하고,
어시장에서 생선 찌꺼기를 훔쳐 먹고,
날쌔게 잠수해서 어린 물고기를 살육하던
그 모습이 아니다.
갈매기도
험난한 바다에선 삶이 고해임을 아는 까닭에
이처럼 신에게
고백할 줄을 아는 것이다.
어떤 날
오세영
스마트폰이 울기를
기다리는 때가 있다.
현관의 벨 소리가
기다려지는 때가 있다.
천정의 층간 소음이
기다려지는 때가 있다.
먼 하늘에서 울려오는 우레 소리
우주 또한 그렇다
어머니
오세영
나의 일곱 살 적 어머니는
하얀 목련꽃이셨다.
눈부신 봄 한낮 적막하게
빈집을 지키는,
나의 열네 살 적 어머니는
연분홍 봉선화꽃이셨다.
저무는 여름 하오 울 밑에서
눈물을 적시는,
나의 스물한 살 적 어머니는
노오란 국화꽃이셨다.
어두운 가을 저녁 홀로
등불을 켜 드는,
그녀의 육신을 묻고 돌아선
나의 스물아홉 살,
어머니는 이제 별이고 바람이셨다.
내 이마에 잔잔히 흐르는
흰 구름이셨다.
어이 할꺼나
오세영
어이 할꺼나.
찌푸린 하늘에선 싸락눈만 내리고,
어이 할꺼나.
마른 나뭇가지에선 까마귀만 울고,
어이 할꺼나.
빈 들엔 스산히 바람만 불고.
언뜻 걷힌 산자락 사이로 너를 본 날,
한나절은 산문(山門)에 기대어
싸락눈을 맞고,
한나절은 바람벽에 기대어
먼 산만을 바래고,
한나절은 활활 타오르는 화주(火酒)로
울음을 태우던
날.
어제 반짝이던 별들이
오세영
잊으려 하는 것은
잊지 않으려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더니라
작년에 지던 감꽃이 올해 또 시나브로 지듯
어제 반짝이던 별들이 오늘 밤
또 반짝이듯
세월은 아주 가지 않는 법
아침나절 내리던 썰물이
저녁에 또 내리듯
잊으려 하는 것은
잊지 않으려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더니라.
어제 반짝이던 별들이
언어
오세영
'안돼'라는 말끝에
'너를 위해서'라고 덧붙인다.
사실은 나를 위해서인데
진실을 호도하는 말의 양념,
인간은 언어에도 양념을 친다.
잘게 썬 육편을 초장에 찍어 먹듯
자른 두부와 무와 토막낸 생선에
양념을 쳐서 끓인
한 그릇의 매운탕,
양념은 원래
칼로 요리한 음식에만 치는 것인데
말에 양념을 치는 것은
인간의 언어엔 칼을 댄 까닭이다.
ㅇ, ㅏ, ㄴ, ㄷ, ㅗ, ㅐ 로 분철된
그 말, '안 돼'.
신어 언어에도 칼질이 있을까.
'멍멍' 혹은 '으르렁'
'철썩철썩' 혹은 '솨솨'
짐승의 먹이에 양념이 없듯
그의 언어엔 칼질도 없다.
언제인가 한 번은
오세영
우지 마라 냇물이여.
언제인가 한 번은 떠나는 것이란다.
우지 마라 바람이여.
언제인가 한 번은 버리는 것이란다.
계곡에 구르는 돌처럼,
마른 가지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삶이란 이렇듯 꿈꾸는 것.
어차피 한 번은 헤어지는 길인데
슬픔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청솔 푸른 그늘 아래 누워서
소리 없이 흐르는 흰 구름을 보아라.
격정(激精)에 지쳐 우는 냇물도
어차피 한 번은 떠나는 것이란다.
에너렉시아
오세영
차라리 굶는다.
굶어서 죽는 편이 더 낫다.
사람들은 그것을 다이어트라 하지만
날씬한 몸매를 가꾸기 위해서라 하지만
앙상한 몰골, 퀭한 눈초리를
어찌 아름답다 할 수 있겠느냐.
이 시대의 음식이란 먹는 것이 아니라 먹여지는 것,
뚱보를 만들어 내는 사료.
그 사육의 단맛을 끊기 위하여
감옥에 갇힌 우리의 유관순 누나처럼
대마도에 유배된 우리의 최익현 선생처럼
한사코 먹지 않는다.
다이어트란
날씬한 몸매를 가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하는 것,
울 안의 가축으로 살기보다는
울 밖에서 차라리
굶어 죽는 편이 더 낫다.
* 에너렉시아(Anerexia) : 뚱보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감에서 음식 먹기를 혐오하여 스스로 굶주리는 병. 거식증. 미국에서는 이 병으로 연간 수만 명이 사망한다는 통계가 있음
여름밤
오세영
떨어지는 폭포나
굽이도는 강이나 흐르는 물은
항상 멈추기를 바라지만
아니다.
물은 어디서도 멈출 수는 없다.
호수에서도 바다에서도,
한여름 불어난 장마비로
와르르 무너지는 뚝
나의 사랑은
홍수 지고 있는데
시방 나는 잠들고 싶다.
강과 강이, 물과 물이 모여 도달한 바다도
끝끝내
별을 안고 뒤척이는
이 여름밤.
여름 산
오세영
자지러져 검푸르기까지 한
여름 산 짙은 녹음은 차라리
짐승의 무성한 털 갈기 같다.
태풍이 치는 밤,
쩌렁쩌렁 우는 그 포효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언뜻 보인다
번갯불 사이로
온몸을 땀에 흠뻑 적신 채
대지에 웅크리고 있는 그 거대한
수컷 한 마리.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꽃을 잡아먹어, 새를, 숲을 잡아먹어 마침내
씩씩대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
맹수 한 마리.
여윈 손
오세영
내가 잠든 뒤에도
빨래는
어둠을 지킨다.
늘어진 운명(運命)의 줄을
붙잡는 여윈 손.
그는 스스로
절대(絶對)의 허무(虛無) 앞에 던져지기 위하여
체온(體溫)을 버린다.
밤의 적막(寂寞)은
바람들의 세상이지만
깨어 있는 우주(宇宙)의 창 밖에서
빨래는
어둠의 공간(空間)에
하나의 밧줄을 던진다.
스스로 육신(肉身)을 포기하는 자(者)의
저 완벽한 연기(演技).
역두에서
오세영
우리는 단지
잠깐 쉬고 있을 뿐이다.
저무는 플랫폼
길은 영원으로 열려 있고
영원에 종점이란 없다.
쉰다는 것은 이별과 만남의 교차,
달리는 순간엔 모두가
하나다.
떠난 자를 미워마라
참으로 열심히 달려왔다.
긴 터널과 외로운 가교
복사꽃 피는 마을도 있었지만
폭풍우 치는 밤이 더
많았다.
이 세상은
승차와 하차로 이루어지는
평행선.
그 끝없는 레일을 달리며
우리의 이별은
만남을
다시 꿈꾼다.
연
오세영
위로 위로 오르고자 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바람을 타야 한다
그러나 새처럼, 벌처럼, 나비처럼 지상으로 돌아오길 원치 않는다면
항상
끈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것,
양력과 인력이 주는 긴장과 화해
그 끈을 잃고
위로 위로 바람을 타고 오른 것들의 행방을
나는 모른다
다만 볼 수 있었던 것,
갈기갈기 찢겨져 마른 나뭇가지에 걸린
연, 혹은 지상에 나뒹구는 풍선의 파편들,
확실한 정체는 모르지만
이름들이 많았다
마파람, 샛바람, 하늬바람, 된바람, 회오리, 용오름……
이름이 많은 것들을 믿지 마라
바람난 남자와 바람난 여자가 바람을 타고
아슬아슬
허공에 짓던 집의 실체를 나 오늘
추락한 연에서 본다
연기
오세영
술에 취해서
실수한 경우가 더러 있을 것이다.
어른을 몰라보는 놈!
- 아른아른
떠오르지 않는 생각,
- 어질어질
분명치 않은 물상,
- 비틀비틀
허공을 짚은 두 발,
- 흔들흔들
무너져 내리는 중심,
바위나, 성벽이나, 궁전이나
이 지상을 연모하는 것들은 무엇이든
확고하지만
하늘로 가는 것은 그렇지
않다.
안개, 아지랑이 혹은 술기운이 거나한
개망나니.
술에 취해 비틀대는 사자를
본 적이 있는가,
네 발로 땅을 짚는 자들은
대지의 아들,
그들은 술을 들지 않는다. 그러나
두 발로 걷는 인간은
두 손으로 항상 하늘을 움켜
쥐고자 한다.
술잔을 들어라.
술은 하늘로 흐르는 물,
불타는 물의
연기.
하늘의 논리는 이룸이 아니라
깨짐에 있는 것이다.
연꽃
오세영
불이 물속에서도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은
연꽃을 보면 안다
물로 타오르는 붉은 차가운 불
불은 순간으로 살지만
물은 영원을 산다
사랑의 길이 어두워
누군가 육신을 태워 불 밝히려는 자 있거든
한 송이 연꽃을 보여주어라
달아오르는 육신과 육신이 저지르는
불이 아니라
싸늘한 눈빛과 눈빛이 밝히는 불
연꽃은 왜 항상 잔잔한 파문만을
수면에 그려놓는지를
열매
오세영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 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영원
오세영
식은 그렇게 끝났다.
가녀린 손에 반지를 끼워 주고,
볼에 입을 맞추고, 사진을 찍고
그리고
"영원히"라고 말했다.
나의 신부여,
너의 영원은 어디 있는가,
너의 하늘이
찰깍, 사진 속에 갇힐 때부터
꿈꾸는 배신,
보석은 갇힌 하늘에서만
뜨는 별이다.
반지여,
더 이상 영원을 일컫지 마라
불변하는 영원이란 없다.
나의 신부여.
영혼의 거처
오세영
거미가 실을 뽑아 허공에 줄을 치듯
볼펜의 잉크 실로 백지에 금긋나니
시 쓰기 집 짓는 일과 그 무엇이 다르랴.
육신의 안락만을 탐하는 고급 주택
영혼의 고단함을 정녕코 모르는가.
시는 영혼의 거처 시인은 그 파수꾼
오아시스 모텔에서 하룻밤을
오세영
라스베가스의
라스베가스 블레바드엔 사하라 호텔이 있고
사하라 호텔 곁에는 오아시스 모텔이 있다.
갈 때 하루 숙박료 52달러가
돌아올 때는 125달러,
토요일이기 때문 -
다른 곳을 몇 군데 둘러보고 다시 오니 그 사이
오른 요금이 143달러,
5분 지나 밤 9시부터는 160달러이니
빨리 결정하란다.
비싸다며 깎아 줄 수 없느냐니까
한마디로 그의 대답
'No, reasonable'
한국인이라면 '적당한'이라는 단어를 쓸 곳에
'합리적'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적당히 봐주고 적당히 넘기고 적당히 덮어두는
그 '적당'이 아니라
앞뒤를 따져 이치에 맞는 그
'합리'
시간은 금이라는 자본주의 합리를
오늘따라 왜 잊고 있었던가.
사하라 사막의 오아시스에서는 때론 황금이
물보다 귀치 않다고들 하지만.
오. 제이. 심슨
오세영
더블 머더*의 용의자
그는 아직 살아 있다.
작년 6월 12일
백인인 전 아내와 그의 정부를 죽인 혐의로
법정에 선
인기 정상의 왕년의 풋볼 선수
흑인 오. 제이. 심슨*
심리를 맡은 판사는 동양인이다.
새 남자와 결혼을 하기 위하여
자신의 두 아들을 몰래 물에 빠트려 죽인 가난한
수잔 스미스*는
이미 종신형에 처해졌는데---
그를 아직 살려두고 있는 것은 그가
목숨값을 지불하고 있기 때문이다.
440일의 수명 연장을 위하여 쓴 8백만불,
아니다, 권태로운 대중의 관심을 따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흑인과 백인과 황인이 엮는 아메리카 대륙의
흥미진진한 드라마,
아니다,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다.
거금을 챙긴 출판사, 수십만의 부수를 올린 신문과 주간지.
밤마다 티 브이 앞에 앉는 2억 6천만의 시청료, 오. 제이. 심슨 광고산업,
아니다, 잠재적 영웅의 탄생 때문이다.
소시민의 권태를 말끔히 쓸어준 저 희비극적 카타르시스,
그러나 시간을 지나치게 끌었다.
자본의 한탕 회전도 막을 내렸다.
대중은 다시 새 것을 원한다.
아메리카 대중이 빚을 진
오. 제이. 심슨,
돈도 잃고 명예도 잃고, 갈 곳도 잃은 그는 이미
죽은 존재나 다름이 없는데
돈이 있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는
아메리카의 자비.
* duble murder)
* 미식축구의 영웅이자 미국대중의 우상이었던 흑인 심슨이 94년 6월 12일 그의 이혼한 두 번째 처 백인인 니콜 부라운과 그의 정부 로날드 골드먼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검찰에 체포되어 법정에 선 사건. 일본계 미국인 이토 랜스 판사가 사건의 심리를 맡았으므로 백인 피해자, 흑인 가해자에 황인 판사가 참여한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자니 코크란이 이끈 소위 '꿈의 변호인단'으로 불리는 미국 최고 수준의 변호인단이 변호를 맡아 혐의를 반전시키고 무죄 판결을 얻어냈다. 이 과정에서 심슨은 <나는 말하고 싶다>라는 양심고백 수기를 써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사화적으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심슨이 지불한 소송비는 약 1천만불, 변호인단의 하루 수임료만 1만 5천 불이었으므로 심슨의 승소는 돈의 힘이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미국 재판사상 가장 큰 국민적 관심을 끈 사건으로 그 외에 인종차별, 담당 형사 마크 퍼먼의 위증과 증거조작 등의 문제가 제기되었고 미국의 사법제도, 특히 배심원에 대한 불신이 심화되기도 했다.
* 수잔 스미스 : 오. 제이. 심슨 사건과 같은 시기에 일어났던 살인사건의 범인.
오체투지
오세영
가장 낮은 자리에서 기는 담쟁이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벽을 넘나니
그 절망의 높이에서 푸른 하늘을 여는
꽃이여!
옹테마 아디사
오세영
- 다르 에스 살람에서 잔지바르로 가는 페리, 플라잉호스 갑판에서 나는 그녀를 처음 보았다. -
눈이 수정같이 예쁘구나.
항구 다르 에스 살람에서 만난
탄자니아 흑인 아가씨,
코가 비너스처럼 오똑하다.
허리가
막 화살을 날리려 시위를 당긴
활 같다.
청바지에 꼬옥 낀 히프가
차오르는 보름달이다.
윤기 나는 흑단(黑檀)의 그 이목구비,
그렇다.
신이 흙으로 다진 인간의 형상을
이 세상 처음
당신의 숨결로 살려냈을 때
이보다 더 곱고
이보다 더 순결하고
이보다 더 탄력 있는 피부를 어찌
구워낼 수 있었으랴.
금방 도요(陶窯)에서 꺼내든 흑자기(黑磁器) 같다. 아니
인도양 푸른 모래밭에서 막 자란
흑진주 같다.
눈이 수정처럼 맑구나.
검은 것이 흰 것보다 더 예쁠 수 있다는 것을
내게 처음 가르쳐준,
그래서 속없이
나이 70에도 사랑이라는 것을 하고 싶은
탄자니아 흑인 처녀
옹테마 아디사.
와일드 마가릿따*
오세영
해발 4,000미터가 넘는
고원 알띠쁠라노*, 아이마라*인들은
그 위에 다시 높은 피라미드를 쌓았다.
〈태양의 문(門)〉과 〈달의 문〉을 세웠다.
직접 하늘을 오르려 했던 것일까?
하늘이 가까워 보인다.
유리창보다 더 엷어 보인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낮은 평지에 피라미드를 짓고
지하의 바다를 항해해 천국을 가려 했는데
그들은 직접 하늘을 날고자 했던 것일까?
바람이 센 날,
콘돌처럼 아니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달의 문〉을 지나 〈태양의 문〉을 지나
허공을 훨훨 날려 했을까?
(아마 그랬을지 몰라,
어느 날 문득 그들이 홀연 종적 없이 사라진 것을 보면)
지상은 어디나 삶과 죽음이 지배하는 땅,
오늘은 유달리 바람이 세다.
하늘이 온통 우윳빛이다.
콘돌 한 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다.
지금은 폐허가 된 띠와나꾸*
신상(神像) 빠챠 마마*가 서 있던 유적엔
유달리 민들레꽃들이 많다.
별칭으로는 또
앉은뱅이 꽃이라 불리는.
* 와일드 마가릿따: 중남미의 민들레.
* 알띠쁠라노: 페루 남동부에서 볼리비아 서남부에 위치한 해발 3,000미터 이상의 안데스 중부 고원지대.
* 아이마라: 띠와나꾸 문명을 일군 지금의 페루 볼리비아 지역에 살던 인디오 부족.
* 띠와나꾸: 기원전 600년경부터 기원후 1200년경까지 볼리비아, 페루 일대에서 아이마라인들이 일군 고대 중남미 문명. 후대 잉카문명의 초석이 되었다. 유적은 볼리비아 수도 라빠즈 서쪽 70km 지점에 있다.
* 빠챠 마마: 띠와나꾸 유적 중 깔라사시야 신전에 서 있던 높이 7.3m, 무게 20톤의 거대한 석상. 어머니 신을 상징한다. 지금은 근처 띠와나꾸 박물관 경내에 안치되어 있다.
왜 시가 망했는지 알겠다
오세영
혼자서 가는 길이 외롭지 않다면
시적(詩的)이지만
혼자서 가는 길이 외롭다면 그건
리얼리즘이다.
혼자 사는 것이 쓸쓸해
옛 모습대로 간직한 방에서 아들의 사진첩을 들고 쓰다듬으며
세월을 보내는 산드라 할머니
혼자 사는 것이 무서워
앵무새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귀뚜라미 한 쌍을
데불고 밤낮 몸부림치는 주니퍼 아주머니
혼자 사는 것이 삭막해
주차장 한켠에 목공소를 차려놓고 틈만 나면 대체로, 톱질로
세월을 켜는 머피 아저씨,
혼자 사는 것이 불안해 허구한 날
멍하니 집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래는
콜란 할아버지,
저 앞 공원 잔디밭에선 젊은 남녀애들이 짝지어
뒹굴고 있는데
저 옆 행길가 섹스 숍에선 하나 둘 네온 등이
반짝이기 시작하는데
혼자서 가는 길이 결국 외롭다면
그건 리얼리즘,
소설보다 신문 기사보다 더 지독한
리얼리즘.
왜 콜라를 마시는 것일까?
오세영
왜 콜라를 마시는 것일까.
콜라는 코카와 펩시밖에 없다.
코카콜라를 들고(혹은 펩시콜라를 들고)
바삐 강의실에 들어서는 초미니스커트의 소녀,
발을 꼬고 앉은 채 콜라를 빨면서
페미니즘과 사랑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질문하는
저 당돌한 아메리카 소녀,
그녀는 틀림없이 점심도 한 덩이의 햄버거와
라지 사이즈의 콜라를 들었을 것이다. 아니
2억 6천만의 아메리칸들은 어김없이 오늘도
2억 6천만 잔의 코카 혹은
펩시콜라를 들었을 것이다.
유아가 항상 우윳병을 차고 다니듯
콜라병을 차고 다니는 호모 코카콜라,
왜 콜라를 마시는 것일까,
몸에는 해롭지만
허전함 달래주는 달콤한 그 맛,
외로움 마취시켜주는 씁쓸한 그 맛,
콜라는
아메리카 성인들의 모유일까,
어머니의 젓을 먹지 않고 자란 사람들의
대리 대상일까,
사랑의 결핍을 채우려 마시는
아메리카의 콜라,
콜라는 코카와 펩시밖에 없다.
외투
오세영
습관적으로
외투를 걸치며 막
외출을 서두르는 이 아침,
뜰의 개나리가 불쑥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이 겨울에
정신이 나갔나? 그 철없는
꽃.
그러나 비웃지 마라.
꽃이란 비록 제철을 잃었다 하더라도
누군가 마음에 들면 활짝.
자신의 몸을 열어젖힐 때도 있나니
외투는 겨울이어서가 아니라
추워서 입는 옷이다.
욕정
오세영
갑작스런 화재로 온 집이 전소되었다.
화인은 난로의 과열,
아빠는 죽고 엄마는 화상을 입고
단란한 가정은 깨져버렸다.
물질도 때로는 욕정으로 몸부림을 치는 것일까.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자 일순,
본능으로 전율하는 쇠붙이는
뜨겁게 달아오른다.
건드리지 마라
오늘 밤 나는 너와 더불어 온몸을
불사를 수도 있다.
전류(電流),
밤마다 정사(情事)를 꿈꾸는
물질의 애로스
용접
오세영
어디서 날아온 돌멩이인가.
어젯밤
운석 하나 하늘을 깨고 이 지상에 떨어지더니
오늘은 피지직
우르르 꽝,
요란스레 번개가 친다.
누군가 재빨리 올라가
금 간 하늘을 땜질하는
그 파아란 불꽃.
우렛소리
오세영
불이 꺼지자 홀은 일시에 암흑,
무대에서 바라보는 객석은 온통 관객들의
눈빛으로 반짝거린다.
오늘 밤에
내가 맡은 역은 의사 지바고.
텅 빈 시베리아 빙원(氷原)의 오두막은
바람에 찬데
눈밭에서 슬피 우는 창밖 늑대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밤새
시를 쓴다.
오늘의 내 연기는 충실했을까.
어둠 속에서
달빛 조명의 지구를 숨죽여 바라보는
별들의 초롱초롱한 시선들.
멀리 마른하늘에서
우주의 잔잔한 박수 소리가 들린다.
우리
오세영
항상 앞만 바라보지만 말아요.
가끔은
뒤돌아볼 줄도 아세요.
때로는 기쁜 날도 있었지만,
때로는 슬픈 날도 있었지만
거기 우리가 있지 않아요.
항상 밖을 쳐다보지만 말아요.
가끔은 안을 들여다볼 줄도 아세요.
때로는 고운 날도 있었지만
때로는 미운 날도 있었지만
거기 당신이 있지 않아요.
인생이란 그런 것,
가을날 단풍잎 곱게 지듯
언제인가 한 번은 떠나는 것
이제 우리
늘 푸른 잎새로 살아요.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다
오세영
날리는 꽃잎들은
어디로 갈까,
꽃의 무덤은 아마도 하늘에
있을 것이다.
해질 무렵
꽃잎처럼 붉게 물드는 노을.
떨어지는 별빛들은
어디로 갈까,
별의 무덤은 아마도 바다에
있을 것이다.
해 질 무렵
별빛 반짝이는 파도,
삶과 죽음이란 이렇듯
뒤바뀌는 것
지상의 꽃잎은 하늘로
하늘의 별은 지상으로......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여,
우리 이제부터는
멀리 있는 것들을 그리워하자.
우리는 시방 너무나
너무나,
가까이 있다.
우화(羽化)
오세영
봄,
서가를 청소하다가
우연히 뽑아 든, 빛바랜 시집 한 권
먼지를 털고 지면을 열자
팔랑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작년 늦가을
책갈피에 꽂아 끼워둔
코스모스 꽃잎.
인디고 블루
그 적막한 하늘
울음
오세영
1
산다는 것은 스스로
울 줄 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갓 태어나
탯줄을 목에 감고 우는 아기,
빈 나무 끝에 홀로 앉아
먼 하늘을 향해 우짖는 새,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같이 모두
울고
또 울린다.
삶의 순간은 항상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임으로.....
바람이 우는 것이냐. 전깃줄이 우는 것이냐.
오늘도 나는 빈 들녘에 홀로 서서
겨울바람에 울고 있는 전신주를 보았다.
그들은 절실한 것이다.
물건도 자신의 운명이 줄에 걸릴 때는
울 줄을 아는 것이다.
2
릴릴릴 링----
포켓 깊숙이서 잠든 휴대폰이
깨서 운다.
그 응석 받아줄까 말까
따뜻한 손으로 감싸 쥐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자기야 어디니?
그제서야 잔잔해진 투정.
태초에 인간의 언어는
울음이 아니었던가.
강보에 싸여 우는 어린 손자를
가슴에 꼭 껴안아 본다.
비가 오려나.
멀리서 울려오는 천둥소리,
하늘의 그 휴대폰 소리.
원시(遠視)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유나봄버
오세영
무엇을 널리 알리는 것은
그것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띄지 않은 것은
스스로 변별성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변별성이 없는 것은
각자 서로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상품은 하나같이 기계로 찍어내는 것,
그러므로 모든 획일적인 것들에겐
고유명사가 없다.
판매대에 진열된
캔 맥주1, 캔 맥주2, 캔맥주3---
식빵1, 식빵2, 식빵3----
을 팔기 위하여
신문에 커다랗게 내는 광고,
광고는 항상
보통 명사에게만 있을 뿐이다.
아, 그러나 나는 그 보통명사로 남아 있기가 싫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군자는
노여움을 타지 말아야 한다는데
스스로를 선전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곳
아메리카,
고유명사를 되찾기 위하여서는 드디어 피까지 보아야 하는
고유명사
유나봄버의 땅.
* 유나봄버(Unabomver) : 1978년부터 18년간 자신의 소위 <산업혁명과 기술 진보에 관한 선언문>이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지에 게재되도록 협박한 미지의 사나이에게 붙여진 명칭. 주로 우편물 폭탄테러(27회)의 방법을 사용하여 그간 불특정 3명을 살해하고 23명을 부상시킴. 지난 95년 9월 19일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 지는 더 이상의 유나봄버의 테러를 막기 위하여 3천5백만 불 상당의 광고비에 해당하는 광고란에 그의 선언문을 게재하였다. 선언문의 내용은 현대산업사회와 물질문명을 비판한 것임.
유레카*에서 - Korean American에게
오세영
제 고향 같구나.
삭막한 모래땅에서도 뿌리를 튼튼히 내린
유칼립터스**,
먼 뱃길로 대양을 건너
캘리포니아에 상륙한 이국종 나무,
유레카에는 유칼립터스가 유난히 많다.
언뜻 보면
한 맺힌 여자의 산발한 머리채 같고
언뜻 보면
등짐 진 사내의 휘청거리는 허리 같지만
기특하여라.
뿌리만은 항상 튼튼하구나.
대륙의 한 끝 태평양의 벼랑에서
삶은 또 어찌
이와 같지 않을 수 있으리.
어찌 스스 몸을
바람에 맡겨 흐느적거리지 않을 수 있으리.
유레카의 목제소에서는 오늘도
톱날 켜는 소리가 요란하지만
제 고향 같구나. 유칼립터스,
유레카에슨 유칼립터스가 유난히 많다.
* 유레카(Eurrka) : 북캘리포니아 태평양 연안에 있는 작은 도시.레드우드(Red Wood) 국립공원 등 근처의 풍부한 산림자원으로 인해 목재를 가공하는 제재 없이 발달하였음.
** 우칼립터스(Eucalyptus) : 우리나라에서 유카리 나무로 이름이 잘못 소개된 호주 원산의 큰 상록수, 미국 개척 시대에 산림자원을 남벌하면서 생긴 공지에 성장 속도가 빠른 이 나무를 호주로부터 이식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캘리포니아 전역과 멕시코에서 토종 산림 이상으로 번식을 자랑하고 있음.
은산철벽(銀山鐵壁)
오세영
까치 한 마리
미류나무 높은 가지 끝에 앉아
새파랗게 얼어붙은 겨울 하늘을
엿보고 있다
은산철벽(銀山鐵壁)
어떻게 깨트리고 오를 것인가
문 열어라, 하늘아
바위도 벼락 맞아 깨진 틈새에서만
난초 꽃 대궁을 밀어올린다
문 열어라, 하늘아
은어 떼
오세영
흘러 흘러
개울물 바다로 간다는데
거슬러 거슬러 넘는
계곡을 오르는구나.
갈대 무성한 강변이 싫어
연꽃 난만한 호수도 싫어
거친 물살
가파른 폭포를 간신히 뛰어올라
마침내 도달한 산골의 막다른 물웅덩이,
수면에 어리는 흰 구름을
은어 떼 몇 마리 쪼고 있다.
싸리나무 휘어진 가지에선
물총새 한 마리 엿보고.....
은하수
오세영
소만(小滿)되어
뒷산의 밤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
와글와글 울어대는 밤하늘의 저
수많은 별들.
갓 모내기를 끝낸 견우의 무논은
영농(營農)을 자축하는 현대판 농무(農舞).
한마당 K팝 공연장인가.
비티에스(BTS)를 따라 부르는 맹꽁이들의 그
요란스런 떼창.
음악
오세영
잎이 지면
겨울나무들은 이내
악기가 된다
하늘에 걸린 음표에 맞춰
바람의 손끝에서 우는
악기
나무만은 아니다
계곡의 물소리를 들어보아라.
얼음장 밑으로 공명하면서
바위에 부딪혀 흐르는 물도
음악이다.
윗가지에서는 고음이
아랫가지에서는 저음이 울리는 나무는
현악기,
큰 바위에서는 강음이
작은 바위에서는 약음이 울리는 계곡은
관악기,
오늘처럼
천지에 흰 눈이 하얗게 내려
그리운 이의 모습이 지워진 날은
창가에 기대어 음악을
듣자.
감동은 눈으로 오기보다
귀로 오는 것,
겨울은 청각으로 떠오르는 무지개다.
의상대(義湘臺)
오세영
?천여 년 전 신라(新羅) 고승(高僧) 의상대사(義湘臺師)는
여기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바다도 하늘을 날 수 있음을
홀연 보았겠지요.
먼 수평선 너머에서 달려와
장렬하게 부딪혀 일제히 파랑새, 나비 떼로 날아오르는
벼랑의 거친 파도.
그때 수천 리 만행(萬行) 길의 의상대사는
여기서 또 무엇을 보았을까요.
잠자는 흙에서 깨어난 바위 하나가 문득
기지개 켜는 소리를 들었겠지요.
수만 년 뜨거운 불덩이를 안고 안으로 안으로 굳혀
침묵의 절정에서 피워 올린 붉은 연꽃 한 송이.
드디어 이곳에서 명상에 든 의상대사는
마침내 무엇을 알았을까요.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도
말갛게 씻어 올리는 새벽안개가 있어야 그 빛이 밝다는 것을
홀연 알았겠지요.
아, 여기서는 하늘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하늘이 됨이니
구름이 꽃이요 꽃이 구름입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내 귀밑머리를 날리는 당신의 그 고운 목소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또 만나게 될까요
이 그리움
오세영
푸르른 봄날엔
편지를 쓰자,
이 그리움 시로 써서
멀리 보내자.
옷깃 풀어 헤친 꽃향기 태워
팔랑팔랑 나비 하나 날려 보내자.
푸르른 봄날엔 피리를 불자,
이 그리움 선율 엮어
멀리 보내자.
귀밑머리 간질이는
꽃바람 태워
하롱하롱 꽃잎들을
날려 보내자.
이념(理念)
오세영
하늘에는 천국이 있다고 하더라.
하느님, 천인(天人), 천사(天使), 또한 비천(飛天)이
산다 하지 않더냐.
비 온 뒤
파아랗게 갠 하늘에서 유혹하는
그 일곱 빛깔 무지개.
그러나 속지 마라. 그곳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앉아 스스로
천망(天網)이라 일컫는 자도
있나니.
하늘을 사모하여
평생 이슬과 꿀만을 먹고 견디던
나비 한 마리,
위로 위로 나래 치다 그만
거미줄에 걸리고 말았다.
깜깜한 지하에서
눈 없는 애벌레로 한세월을 지내다가
오늘 문득 우화(羽化)한 그
흰나비,
이데올로기
오세영
야반도주인지 강제 이주인지 아무도 몰라.
주인이 떠난 지는 십여 년이 넘었지만
대문은 아직 굳게
잠겨 있다.
이미 녹슨 지 오랜 자물쇠,
부숴야 열릴 문,
그 문틈으로 엿보는 집안은 폐허다.
가라앉은 지붕, 부서진 기둥, 나뒹구는 서까래,
개망초, 민들레,
정원의 무성한 잡초.
필시 그가 심었을
넝쿨장미 하나 밖으로 월담해 밖으로 쫑긋
귀를 내밀어
내 그 꽃에게 행방을 묻노니
주인은 어디 가셨나?
아직 이름만 남아
바람이 불 때마다 아슬아슬 허공에 흔들리는
폐가의 그 녹슨
문패.
이름도 알 수 없고
오세영
이름도 알 수 없고
얼굴도 알 수 없고
목소리조차 들은 적 없는 C는(혹은 B나 M이라도 좋다)
어디서 사는 것일까,
보채는 아이의 입에 떡 하나 덥썩 물려주고
뒷방에서 간통을 즐기는 유부녀처럼
그도 어느 밀실에 있는 것일까,
소노라 사막*의 오아시스
레몬 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사는 것일까
사우산드 아일랜드* 의 어느 한 섬을 독차지해
성을 쌓고 사는 것일까.
시끄러운 놈,
입에 드럭 물려 잠재워놓고
불평하는 놈,
티 브이 채널 몇 개 줘 밤낮으로 랩이나 부르게 하고
심심한 놈,
미사일 들려 전쟁게임 즐기게 하고
똑똑한 놈,
로즈 볼 리그에 정신 홀랑 나가게 하고
자기에게 관심만 보이지 않는다면
자기를 알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여생을 보장해주겠다는
소문만의 그,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문에 이름도 나지 않고,
인터넷 입력된 번호도 없고,
더더구나 티 브이에 나와서 누구처럼
주먹을 흔들지도 않고---
* 소노라 사막: 아리조나주에 있는 사막
* 레몬 산: 아리조나주 투손시 근교에 있는 산
* 사우산드 아일랜드: 플로리다반도에 있는 군도.
이메일
오세영
워드로 툭툭 쳐서 쓰는
편지,
편해서 좋긴 하다마는 아무래도
마음이 허전하다.
글은 곧 사람이라는데
새하얀 백지 위에 찍혀 나온
꼭 같은 모양의 인쇄체 글자가
유니폼을 입은 연인들처럼
어쩐지 위선 같구나.
편지란
쓰인 내용보다도 그 필체와 행간의
흔적들이 더 소중한 법,
쓰다가 막히면 지우고
당신을 배려해서 다시 고쳐 쓴
그 아픈 상처,
깨끗하게 프린트된
A4 용지의 인쇄체 활자보다
원고지에 삐뚤빼뚤 꾹꾹 눌러쓴
그 필기체 연필 글씨
이별
오세영
우리들의 만남은
잎새에 흐르는 바람이 되랴,
뺨에 흐르는 눈물이 되랴,
우리들의 만남은
헝클어진 머리털에 내리는 서리처럼
싸늘한 가슴으로 오는구나.
생각하지 마라,
길섶의 시든 풀잎 위에 부는 바람도
한때는 熱情(열정)으로 타던 불길인 것을.
불은 불대로, 물은 물대로
있는 것들은 있게 하여라.
이별의 날에
오세영
이제는 붙들지 않을란다.
너는 복사꽃처럼 져서
저무는 봄 강물 위에 하염없이 날려도 좋다. 아니면
어느 이별의 날에
네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의 흔적처럼
고운 아지랑이 되어 푸른 하늘을 아른거려도 좋다.
갇혀 있는 영원은 영원이 아니므로
금속 테에 갇힌 보석 또한
진정한 보석이 아닌 것
아무래도
네 손가락에 끼워 준 반지에는
영원이 있을 성싶지 않다. 그러므로
네 찬란한 금강석의 테두리에 우리 더 이상 서로를
가두지 말자 .
이제 붙들지 않을란다.
너는 복사꽃처럼 져서
저무는 봄 강물 위에 하롱 하롱 날려도 좋다. 아니면
어느 이별의 날에
네 뺨을 적시던 눈물의 흔적처럼
고운 아지랑이 되어 푸른 하늘을 어른거려도 좋다.
이별의 말
오세영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기다려달라는 말은 헤어지자는 말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별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것이다
"안녕"
손을 내미는 그의 눈에
어리는 꽃잎
한때 걱정으로 휘몰아치던 나의 사랑은
이제 꽃잎으로 지고 있다
이별은 봄에도 오는 것,
우리의 슬픈 가을은 아직도 멀다
기다려 달라고 말해다오.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이별이 가슴 아픈 까닭
오세영
이별이 슬픈 건
헤어짐의 순간이 아닌
그 뒤에 찾아올
혼자만의 시간 때문이다.
이별이 두려운 건
영영 남이 된다는 것이 아닌
그 너머에 깃든
그 사람의 여운 때문이다.
이별이 괴로운 건
한 사람을 볼 수 없음이 아닌
온통 하나뿐인
그 사람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이별이 참기 어려운 건
한 사람을 그리워해야 함이 아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그 사람을 지워야 함 때문이다.
이별이 아쉬운 건
한 사람을 곁에 둘 수 없음이 아닌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음 때문이다.
이별이 후회스러운 건
한 사람을 떠나보내서가 아닌
그 사람을 너무도 사랑했음 때문이다.
이별이 가슴 아픈 건
사랑이 깨져버림이 아닌
한 사람을 두고 두고
조금씩 잊어야 함 때문이다.
이별이란
오세영
어디에나 너는 있다.
산 여울 맑은 물에 어리는
서늘한 너의 눈매,
눈은 젖어 있구나.
솔숲 바람에 어리는
청아한 너의 음성,
너는 속삭이고 있구나.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별이란 흐르는 강물인 것을,
이별이란 흐르는 바람인 것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싸락눈 흩뿌리는 겨울 산방에
서러운 듯 피어오른 난 한 송이,
시방 너는 내 앞에서 울고 있구나.
이별 후
오세영
1
마당귀에서
사립문 너머로 보면
너는 하늘대는 댕기로 사라지고
섬돌 위에서
사립문 너머로 보면
너는 나풀대는 옷고름으로 사라지고
마루에서 사립문 너머로 보면
너는 펄렁이는 치맛자락으로 사라지고
온종일 실성한
먼 산
바래기
앞산엔 목수국 활짝 피는데
뒷산엔 찔레꽃 곱게 피는데
사립문 밖에서
밭둑 너머로 보면
너는 아지랑이로 사라지고
동구 밖에서 언덕 너머로 보면
너는 물안개로 사라지고
고갯마루에서
하늘 너머로 보면
너는 흰 구름으로 사라지고
2
엷은 눈꺼풀 살포시 치켜뜨고
어제는 온종일 하늘만 우러르더니
이 아침, 눈동자엔 눈물이 그렁그렁,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애처로워라.
별빛 스러진 풀밭의
모란 한 송이.
이슬
오세영
이슬 속으로
한 사내가 사라져 갔다.
이슬 속에
한 사내가 켜든 세계(世界)의 불빛
이슬 속으로
한 여자(女子)가 사라져 갔다.
이슬 속에
떨리는 한 방울의 눈물.
이슬 속으로
시간(時間)이 사라져 갔다.
이슬 속에
흙이 묻은 하나의 이름
풀잎에 맺힌
이 싸늘한 그리움
불러도 불러도 못한
흙이 묻은 이승의 그리움.
인간
오세영
영혼이 육신에 깃드는 것처럼 인간은
집에 깃든다.
새도 보금자리를
깃이라 하지 않던가.
유리창을 투명히 닦는 것은
항상 빛을 좇고자 함이다.
맑은 눈동자에
순결한 이념이 어리듯
오늘 우리 집은
정전이다.
퓨즈에 부하된 과전압
격노에 떨다가 터지는 핏줄
오늘 우리 집은
냉방이다.
추위에 얼어붙은 수도관
냉혹한 이성으로 굳혀버린 너
너무 더워도 안 된다.
너무 추워서도 안 된다.
항상 정상의 체온을 유지해야
건강을 지키는 육신.
아내의 남편이듯, 남편의 아내이듯
물과 불의 합환으로 사는
인간이여.
기실 너도 하나의 집이다.
집이 영롱한 빛을 안는 것처럼
순결한 영혼을 안는.....
인간의 소리
오세영
귀머거린 까닭에 큰 소리를 지른다.
천둥같이 사납게 음악을 틀고
도심을 질주하는 자동차의 경적을 들어보아라.
벼락같이 따라붙는 오토바이의 폭음을 들어보아라.
예전에 그리스 신관은
델피 신전 앞을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에서 조용히
신의 말씀을 듣고
옛 신라 사람들은 대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에서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임을 알았다는데
오늘의 아메리칸은
이제 인간의 소리까지도 듣지를 못하는구나.
하드 록이 터져 나오는 맨해튼의 디스코텍에서
얻어맞는 헤드 뱅** ,
그는 무엇이 답답해 그의 머리를
깨부수려 하는가.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화시대라 하지만
인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문명시대라 하지만
이제는 인간의 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시대로구나.
인간의 소리를 듣기 위하여 박살 내는
인간의 머리.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삼국유사> 권 제2, 48대 경문대왕 편의 이야기. 백성들 중 유일하게 임금님 귀가 당나귀처럼 생겼다는 걸 안 복두장이 이 비밀을 대숲에 가서 소문내자 이후부터 대숲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이 사실을 널리 외쳐 세상에 알렸다고 함.
** 헤드 뱅: 머리를 깨부수는 듯한 소음.
일몰(日沒)
오세영
온종일 지구를 끌다가
저물녘
지평선에 누워 비로소
안식에 든 산맥.
하루의 노역을 마치고
평화롭게
짚 바닥에 쓰러져 홀로 되새김질하는
소 잔등의
처연하게 부드러운 능선이여.
일, 시인(詩人)의 일
오세영
자유는 독재와 구별된다는
이런 따위 말이 나를 웃게 만든다
할 일 없을 땐 다방에 앉아
미스 김의 눈에 말라 붙은 웃음이나 우려내어서
따끈한 차라도 마시면 되지
우리가 하는 일이란
담배 피고 술 마시고
뚱보 김사장에게 고개나 숙이고
신문을 보면서 혀나 차는 일
웃어도 웃어도 울고 싶은
친구의 농담이나 들으면서
서울의 밤거리를 헤매다 돌아오는
그런 하루나 보내는 일이지
잃어버린 시간(時間)을 찾아서
오세영
티겟을 사 들고
고향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렸다.
출구(出口)엔 역부(驛夫)가 하나,
잃어버린 시간(時間)을 체크하고
답사(踏査)를 떠나는 늙은 고고학(考古學) 교수(敎授)와 학생(學生)들과
상인(商人)이 서성거렸다.
창 밖 고층(高層) 빌딩엔
정치가(政治家)들이 기른 비둘기가 날고
개가 한 마리
주유소(注油所) 뒤뜰에 매어 있다.
차창(車窓)에 기대어
비에 젖은 이 시대(時代)를 바라보면서
술잔에 잠긴 도시(都市)의 황혼과
쓰디쓴 감정(感情)을 들이마셨다.
비는 내려도 도시(都市)의 수목(樹木)은
시들어가고
낡은 화물열차(貨物列車)에 실려 떠난 여름은
한번 가서 와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떠나기 위하여
고립(孤立)을 두려워한다.
한때 가슴 떨리게 했던
말씀이나 눈빛도
행복(幸福)처럼 쓸쓸하게 떠날 것이다.
구겨진 지폐(紙幣)를 쥐고
고향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려도
백합(百合)의 뜰에 잠든 시간(時間)은
오지 않는다.
자궁(子宮)
오세영
짐승들이 이 세상에
코를 박고 먹이를 찾는 동안
나무는 자신을 쉬임 없이 벌릴 줄을 안다
때가 되면 스스로 잎을
떨어뜨리고, 꽃을
떨어뜨리고,
열매를 떨어뜨리고
가진 것 없음으로 가벼워져 하늘로, 하늘로
쑥쑥 자란다.
가볍다는 것은 곧 비어 있다는 것,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비어 있지 않은 강함은 없다,
다리의 텅 빈 강철 상판이
수십 톤 트럭의 하중을 견디듯
천년을 거뜬히 버티어낸 영문사(龍門寺)의 노거수(老巨樹)
은행나무,
그 속은 텅 비어 있다.
자글로트*
오세영
한바탕 가파르게 흐르던 훈자 나가르(Hunza Nagar)가
여기서는 돌연 멈춘다.
한바탕 거칠게 흐르던 길기트 격류가
여기서는 숨을 고른다.
모든 교합의 절정이 그렇지 않던가.
남과 여,
부딪혀 달아오른 심장의 맥박이
더 이상의 가쁜 고동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앗!
숨을 놓을 때
일시에 찾아드는 그 죽음의 휴지,
그리고 그 후의 나른한 황홀.
서으로, 서으로 내닫던 히말라야가,
동으로, 동으로 치다던 힌드쿠쉬가
만나서 한바탕 두 몸을 안고 어우르다
쿵 하고 쓰러지는,
여기는 아시아의 편안한 침상.
훈자와 길기트,
두 몸에서 흐르는 체액이
마침내 서로 합쳐 인더스강을 이룬다.
마침내 한세상을 연다.
* Jaglot: : 북부 파키스탄 카라코람 하이웨이가 거쳐 가는 한 작은 마을. 히말라야산맥 북쪽 계곡에서 발원한 훈자강과 힌드쿠쉬 산맥에서 발원하는 길기트강이 합류하여 드디어 인더스강이 되는 지점.
자화상
오세영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단테가 지닌 시집에서 옮겨놓은,
창문을 하나 만들어
그리로 고개 내밀면
보이는 것이 무엇이든
지금보다는 좋겠는,
호외 올림
장미
오세영
타오르는 장미를
한 접시 등불이라고도 하지만
피어오르는 장미를
한 떨기 별무리라고도 하지만
아니다! 장미는
장미다.
목에 칼을 대도 할 말을 하는
서슬 푸른 장미의
가시.
진흙밭 일궈 자갈밭 일궈
이 세상 꽃길 만드는 게 죄라면
나는 즐겁게
칼을 받겠다.
독재자의 가위에 싹둑 잘리는
그대의 머리,
그러나 장미는
대가 잘려야만 더욱 푸르다.
빛 고운 우리나라 5월 장미꽃.
장작을 패며
오세영
장작은 나무가 아니다
잘리고 토막 나서 헛간에
내동댕이친 화목(火木),
영혼이 금간불목하니.
한때 굳건히 대지에 뿌리를 박고
가지마다 무성하게 피워올린 잎새들로
길가에 푸른 그늘을 드리우기도 하지만,
탐스런 과육(果肉)으로
지나던 길손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도 했다만
잘려 뽀개진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다.
안으로, 안으로 분노를 되새기며
미구에 닥칠 그 인내의 한계점에 서면
내 무엇이 무서우랴, 확
불 지르리라
존재의 빈터에 버려져
처절히 복수를 노리는 저
차가운 이성,
잘린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금 간 것들은 이미 어떤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저울
오세영
정원의 나뭇가지 끝에
위태위태하게 매달려 있던 홍시 하나가
이 아침
툭 떨어진다.
긴장한 수평선 한쪽이 한순간 풀어지며
출렁.
푸른 물을 쏟아낼 것만 같다.
오늘부터는 그 빈 우듬지에 내 시 한 구절을
걸어놓으리.
적막
오세영
'아' 하고 외치면 '아' 하고 돌아온다.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아'와 '어', 틀림없이 다르게 돌아오는 그
산울림.
누가 불렀을까,
산벚나무엔 다시 산벚꽃 피고
산딸나무엔 다시 산딸꽃 핀다.
미움과 사랑도 이와 같아라.
눈물 부르면 눈물이,
웃음 부르면 웃음 오느니
저무는 봄 강가에 홀로 서서
어제는 너를 실어보내고 오늘은 또
나를 실어보낸다.
흐르는 물에
텅 빈 얼굴을 들여다보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봄날 오후의
그 적막.
적의(敵意)
오세영
물이 차가운 얼음이 되듯
증오가 굳으면 싸늘한
침묵이 된다.
말이 없다고 해서 호사롭다 하지 마라
화약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어둡고 밀폐된 약실에 갇혀
한순간의 격발을 노리는 그
적의(敵意).
순종은 오직 사랑에서만 오는 것
갇힌 모든 것은
반항으로 전율한다.
사랑도 굳으면
마약(痲藥)이 되지 않던가. 필로폰
하얀 분말의 그 달콤한 살의(殺意)
싸늘하던, 달콤하던 굳은 것은 모두
침묵이 된다.
화약처럼. 마약처럼 …….
정사(情事)
오세영
타악음인지도 몰라.
두드려 울려내는 신음 소리,
현악음인지도 몰라.
간질여 흘려내는 웃음소리,
관악음인지도 몰라.
몸부림쳐 토해 내는 울음소리.
누구의 악기인가.
인간의 일상은 소나타지만
신은 가끔
교향악이 듣고 싶다.
이별이던가 혹은 사랑이던가,
모든 운명적인 것이어.
오랜 기다림 끝에
맨몸과 맨몸이 하나로 어울려
웃음과 울음과 신음이 범벅된
한밤의
정사(情事)
정좌(正坐)
오세영
얼음 풀려
강물은 들녘에 일필휘지
문장을 갈겨쓰는데
온종일
흐르는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들여다보는
바위의 묵언(好喇),
글은 곧 사람일지니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운필하는 지면의 저
새하얀 한지가
바람에 불려 날아가지 않도록
그 한 귀퉁이를 눌러 조붓이
앉아 있는
문진(文鎭)이여.
젖은 눈
오세영
세숫물에 마른 갈잎 하나 파르르
떨어져 가을이다.
한 움큼 물을 뜨다 만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수면(水面),
흔들리는 파문 사이로
하얗게 머리 센 사내 하나가
하늘 끝자락을 붙들고 망연히
나를 치어다보고 있다.
어디서 보았을까, 깊고 짙은 속 눈썹,
그 젖은 눈에
하얗게 소복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 운동장을 들어서던
어린 소년이 보이고
팔랑팔랑
나비처럼 뿌리치고 사라지던
꽃밭의 소녀가 보이고
바람벽을 등지고 쓸쓸히
소줏잔을 기울이던 원고지 칸 사이의
사내가 보인다
한 움큼의 세숫물마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텅
비어버린 손바닥,
문득
이가 시리다.
제비꽃
오세영
살을 에는 추위와
눈보라
그 계절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기적 같은 너의 환생을......
이른 봄,
아직 언 땅 채 풀리지 않았는데
길섶에서, 돌 틈에서, 맨흙에서
빠꼼히 고개를 내민 꽃,
한 치의 빛만 있다면 결코
죽음은 없으리라
아름다운지고 진정
연약함 속의 강인함이여,
대대로 오백 년을 살아온 조선 여인의
쪽진 머리를 보는 것 같다
제자리
오세영
급류(急流)에
돌멩이 하나 버티고 있다.
떼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며
안간힘 쓰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꽃잎처럼
풀잎처럼
흐르는 물에 맡기면 그만일 텐데
어인 일로 굳이 생고집을 부리는지.
하늘의 흰구름 우러러보기가
가장 좋은 자리라서 그런다 한다.
이제 보니 계곡의 그 수많은 자갈들도
각각 제 놓일 자리에 놓여있구나. 그러므로
일개 돌멩이라도
함부로 옮길 일이 아니다.
뒤집을 일도 아니다
조춘
오세영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 제2번 3악장을
듣던 중, 갑자기
음원(音源)이 끊겨 버린다.
배터리도 안테나도 이상 없는데
무엇 때문일까.
요리조리 만져보아도 반응이 없는
낡은 FM 트랜지스터라디오.
물건도 매를 맞으면
아픈 것일까.
주먹으로 뺨을 한 대 갈기자
의외로 소리가 되살아난다.
계단을 오르다 발을 헛디뎌
의식을 잃고 쓰러진 그
운 나쁜 사나이,
꽃샘바람에 찰싹
뺨을 맞고
깨어나는 그 꽃봉오리
종이컵의 사랑
오세영
식기는 단지
음식을 담는 용기만은 아니다.
한 지어미의 정성이
고운 두 손에 받쳐 식탁에 오르는 접시,
그러므로 원만한 접시는 원만한 사랑 바로
그것이다.
눈보라 몰아치는 추운 겨울밤,
따뜻한 벽난로 옆 식탁에 마주 앉아
한 덩이의 보리빵을 뜯는 부부의 평화스러운 얼굴을
창 너머로 보아라.
램프의 흐린 불빛에도
백 보석 같이 반짝거리는 사기 컵의 웃음소리,
나이프와 포크가 접시에 부딪혀 어우러내는
저 밝은 실로폰 소리,
그러나 이제 식기는
단지 식기일 뿐이다.
맥도널드 타코벨, 아니 어디든
아메리카의 식탁에 놓인 식기,
한 번 쓰고 간편히 버리는 일회용
종이컵 혹은 스치로폴 접시,
세상의 남편들은 지어밀 대하기를
깨질 그릇처럼 대하라는 말씀도
그러므로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파경이란 원래
깨진 거울을 뜻하는 말이지만
부부는 결코 깨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으면 주저 없이 버려야 하는 까닭에---
지어밀 대하기를 버려질 종이컵처럼
해야 하는 아메리카 남편.
주민등록번호
오세영
달랑 이름 하나 들고
잠깐 머물다 떠나는
행성(行星).
소지품 일절 반출 불가
출국 수속이 너무 간단하다.
내 여권 번호는
420804-3301787.
죽은 자와 함께 산다
오 세 영
그가 아직
살아 있었던가,
문득 그의 생존을 일깨워주는
부고 한 통.
그는 이 부고에 의해
죽은 자로 공인되었다.
그러나 실은 이미
내게 죽어 있었던 그,
인간은 누구나
죽은 자와 함께 산다.
살아도 죽어 있음은
망각 때문이었다.
망각은 이별에서 왔다.
이별은 무의미에서 왔다.
무의미는 무관심에서 왔다.
무관심은 사랑의 부재에서 왔다.
사랑의 부재는
언어의 부재에서 왔다.
말, 말을 잊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라일락 그늘에 앉아
보낼 곳도 없이 편질 쓰는데
불쑥 날아온 부고 한 통.
인간은 누구나
죽은 자와 함께 산다.
죽음의 노래
오세영
죽은 자라 하지만
너희가 공기로 살듯
나는 흙으로 사는 사람,
아, 이제 바람 따라 헤매지 않고
비로소 안식을 얻었나니
흙은 항상 영원하기 때문이니라.
마파람, 샛바람, 돌개바람, 소소리
변하는 바람의 세상은
덧없고
그 덧없음을 숨기려
바람은 변치 않는 하나의 이름을 새기지만
이름이란 날리는 갈잎 같은 것,
갈잎에 흙에 내려 썩듯
이름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바라보는
세상은
확실하구나.
하늘은 흙 속에도 있으니
너희는 닿을 수 없는 허공의 별들을 우러르지만
나는 영롱한 보석들과 함께 산다.
지구는 아름답다
오세영
아름답구나,
호수 루이스*
에메랄드 색깔이라 하지만
어찌 보면 고려의 하늘색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이육사의 청포도색 같기도 한 너의
눈빛,
살포시 치켜뜬 자작나무 속눈썹 사이로
꿈꾸듯 흰 구름이 어리는구나
태고의 만년설로 면사포를 해 두른 너 로키는
지구의 정결한 처녀,
내 오랫동안 이를 믿어왔거니
그 청옥빛 눈매가
그 무구한 눈짓이
바로 병색임을 내 오늘 알았노라.
모든 독을 지닌 것은 아름다운 것,
모든 침묵하는 것은 신비로운 것,
산성비에 오염된 호수에서는
아무것도 살지 못한다.
결핵을 앓는 소녀가 아름다워지듯
아마존에서, 킬리만자로에서
폐를 앓는 지구는 더 아름답다.
박명한 여인처럼 아름답다.
* 호수 루이스(Lake Louise) : 캐다나 록키 국립공원 캠프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호수. 근처 산봉우리의 하얀 만년설과 호수의 특이한 물색이 어울려 절경을 자아내고 있음. 그 특이한 물 색깔은 산성비의 오염에서 비롯된 것임.
지리산
오세영
백두 아버지를 마주보고 앉은
지리 어머니,
반도의 창생들은 모두
당신의 그늘에서 자랐습니다
봄 산 바위가 지란(芝蘭)을 감싸듯
겨울 산 눈잣나무 다람쥐를 보듬듯
당신의 고운 열두 폭 치맛자락 안에선
전라, 경상, 충청이 따로 없나니
범을 쫓아 범을 쫓아 범을 만나면
함께 놀고,
곰을 쫓아 곰을 쫓아 곰을 만나면
함께 쉬고,
세석평전 철쭉 향에 아득히 취해
거러는
이 풍진 한 계절도 잊었더이다.
백두 아버지를 마주 보고 앉은
지리 어머니,
선도성모(仙挑聖母) 당신의 품 안에서 우리는
이렇게 자랐습니다.
지상의 꽃
오세영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설령 그것이 죄가 된다 해도
이제 어찌할 수 없구나.
아침마다 우짖는 산새도,
저녁마다 바자니는 다람쥐도
지금은 눈에 없어.
나는 다만 하늘을 우러르는 한 마리
슬픈 짐승,
낮에는 햇빛으로 환하게 눈멀고
밤에는 등불로 활활 타오를 뿐이다.
지상은
어느덧 가을,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어이 할꺼나,
나는 푸른 하늘을 보아버렸다.
영원한 그리움이 끝내
한 떨기 불길로 타오르다 사라지는
이 지상의
꽃.
지상의 양식(糧食)
오세영
너희들의 비상은
추락을 위해 있는 것이다.
새여,
알에서 깨어나
막 은빛 날개를 퍼덕일 때
너희들 하늘만이 자유라고 믿지만
자유가 얼마나 큰 절망인가는
비상을 해 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진흙밭에 뒹구는
낱알 몇 톨
너희가 꿈꾸는 양식은
이 지상에만 있을 뿐이다.
새여,
모순의 새여.
직선은 곡선보다 아름답다
오세영
직선은 곡선보다 더
아름다운가,
긍정의 표시로 O표 대신 X표를 요구하는
아메리카식 체크.
당신은 전에도 미합중국에 입국한 적이 있습니까,
사회보장번호 등록 신청서에
'예스' 대신 치는 X표.
돌아가면 가는 길도 오는 길인데
지구는 둥근 원인데
한사코 직선을 고집하는
그들의 길
직선으로 배열된 바둑판의 거리,
직선으로 쭉 뻗은 프리웨이,
직선으로 금을 그은 국경선,
직선으로 조합된 성조기,
인간은 때로
멀리 돌아가는 것이 더
아름다운 법인데
곡선보다 직선을 추구하는
아메리카의 길
아메리카의 삶.
진달래꽃
오세영
입술은 타고
몸은 떨리고
땀에 혼곤히 젖은 이마,
기다림도 지치면
병이 되는가,
몸살 앓는 봄밤은 길기만 하다.
기진타가 문득 정신이 들면
먼 산 계곡의 눈 녹는 소리,
스무 살 처녀는 귀가 여린데
어지러워라
눈부신 이 아침의 봄멀미.
밤새 地熱에 들뜬 山은
지천으로
열꽃을 피우고 있다.
진달래.
진실
오세영
인생은 말하는 허깨비,
그림자의 꼭두각시.
그림자의 지시대로 애욕을 탐하고
그림자의 연출로 웃고 운다.
지상은 누구도 태양의 마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법,
그러나
반항을 꿈꾸는 바람이여.
왜 세상의 모든 말은 바람을 타야
하는지 왜 세상의
모든 진실은 덧없이 허공중에 사라져야 하는지
바람으로, 바람에 의해서, 바람과 같이…
질그릇
오세영
질그릇 하나 부서지고 있다.
질그릇의 밑바닥에 잠긴 바다가
조용히 부서지고 있다.
스스로 부서져 흙이 되는
저 흔들리는 바다.
질그릇에 담긴 생선(生鮮)의 뼈,
질그릇에 담긴 폭풍(暴風),
질그릇에 담긴 공간(空間),
그 공간(空間) 하나 스스로 부서지고 있다.
집
오세영
추운 겨울에 2층 방에서
지층으로 내려가는 하수도가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집은 마비
새집을 지으면서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이
상하수도 파이프 보일러 배관이었는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생각해보면 집의 중추는 방이나 거실이 아니라
위아래를 관통하는 빈 파이프다
파 껍질을 벗기는 아내여
파는 원래 껍질밖에 없다
실은 인간도 나무도 파와 같은 것
입에서 항문으로 뻥 뚤린 공간 하나
지탱해주는 것이 아닌가
하수도의 빈 파이프처럼
허공에서 뚫려 허공으로 가는
육신의 집
집만이 집이 아니고
오세영
출가(出家)라니
정녕 어디로 간단 말이냐.
머리 깎아 바랑메고
산으로 간단 말이냐.
장삼 걸쳐 법장(法仗) 짚고
바다로 간단 말이냐.
바람 따라 향기 좇아 이른 계곡엔
도화(桃花)는 시나브로 꽃잎 지는데
하염없이 개울 물은 흘러가는데
강물 따라 소리 좇아 이른 바다엔
파도는 실없이 부서지는데
출가라니
누굴 따라 어디로 간단 말이냐.
집만이 집이 아니고
집 밖에 있는 것이 또 집인데
비로봉 만물상 곰바위 밑에
앉은뱅이 민들레나 되란 말이냐.
지리산 세석대 널바위 밑에
가지 꺾인 소나무나 되란 말이냐.
출가라니
집 밖이 또 집인데
정녕 어디로 가란 말이냐.
짓거리
오세영
총이란 원래
살생을 목적으로 만든 무기임에도
하늘에다 대고 쏘면서 일컬어
축포라고 한다.
진정한 축복은 하늘이 스스로 내릴진저,
부처님 당대에는 상서로운 날에
무시로 하늘에서 꽃비가 나렸다는데
신(神)을 위협해서
꽃비를 받자함일까.
인간의 오만은 끝 간 데를 몰라
자신이 만든 총으로 필경 자멸에 이르게 될지니
삼엄한 군대를 도열시키고
그 앞에 버티고 서서
하늘에다 펑펑 대포를 마구 쏘아대는 것은
정녕 신의 죽음을 믿거나
그 신성(神性)에 토대한 인간의 존엄을
부정한 이후부터의
짓거리일 것이다
찔레꽃
오세영
더럽히고 싶다
한 방울의 피를
순결은 육신의 감옥,
수인(囚人)으로 남기보다는 차라리
창녀로 살고 싶다
아름다움은 왜 항상 갇혀 있어야만 하는가
아름다움의 밖이 기쁨이라면
그 안은 슬픔이다
서슬 푸른 가시로도 지킬 수 없는 하늘
사랑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는 것을 일컬음이다
아아, 나는 이제 밝은 햇빛을 보아 버렸다
사내와 눈 맞아 가출을 기도하는 소녀처럼
울타리를 타고 넘어 허공으로,
허공으로 내딛는 찔레꽃
착한 소
오세영
시행의 마지막 구절을 막 끝내자
잉크가 다한 볼펜
기진맥진 원고지의 여백에
펄썩 쓰러져 버린다.
편히 쉬어라.
피어리어드는 내 눈물로 찍겠다.
돌아보면 너무도 혹사당한 일생.
경지는 다만 소만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동안 참 많은 밭을 갈았구나.
땀과 눈물과
심장에 고인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아낌없이 쏟아내고 너는 지금
후회 없이 이승을 떠나는구나
내 시가 너를 따를 수만 있다면…
잘 갈아 씨 뿌린 밭 두렁에
거품을 문 채 쓰러진
착한 소 한 마리.
찰라빠또* 지나며
오세영
잠깐 버스가 멈추자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꾀죄죄한 손으로 바구니를 펼쳐 든다.
샌드위치, 핫더그, 햄버거....
이 땅의 전래음식은 찾아 볼 수 없다.
모두들 멍하고 지친 모습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이처럼 바보 멍청이의 행색일까.
똑바로 쳐다보지를 못한다.
당당히 서지를 못한다.
엉덩이에 몽골반점이 선명한 유아(幼兒) 하나를,
어깨에 두른, 낡은 천으로 간신히 감싸 안은 아낙네가
울듯 말듯 고개를 숙이고
슬며시 바구니만 내민다.
얼마나 오랫동안 누가 어떤 짓을 했길래.
이처럼 말을 잃어버렸을까?
시선을 잃어버렸을까?
문득 일제(日帝) 36년을 묵묵히 견디어 낸 아버지, 형님들이 생각나
핫더그 하나를 집어 든다.
그 동안 이 땅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을까?
왜 초롱초롱해야 할 아이들의 눈이 이처럼
시든 헤라니오**꽃잎이 되어 버렸을까?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꽃놀이패에만 정신이 팔렸던
그래서 그 일로 충분히 보상을 받아
이제는 아름다운 휴양지 발빠리이소***의 주인이 된,
우리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눈을 감았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밝혀내야 할 일이다.
인류를 위해서
신성한 대지를 위해서
지금이라도 단죄해야 할 일이다.
콘돌이 하늘 높이 떠서 굽어본 이 땅의 진실을
이제는 누군가 캐츄아어*****로 해석해 내야한다.
이 땅에서 그동안 누가 무슨 명분을 대고
이처럼 못된 짓을 했는지를.
* Challapato: 볼리비아 수도 라빠즈에서 우유니 소금사막으로 갈 때 거치는 소읍.
** Jeranio: 클로바 비슷한, 사막에서 자라는 분홍색 풀꽃.
*** Valparaiso: 모두가 기념관이 된 네루다의 세 개 고택 중 두 번째 고택이 있는, 칠레 태평양 연안의 빼어난 휴양지. 고택은 아름다운 발빠라이소의 시가지와 바다가 시원히 바라다보이는 언덕에 그림처럼 서 있다. 나중에 그의 셋째 부인이 된 연인 마틸다와 밀회를 즐긴 곳이라 한다.
**** Pablo Neruda(1904-1973): 본명은 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 1971년 노벨상을 받은 칠레 출신의 공산당원이자 사회주의 정치인이기도 한 남미의 대표적 민중 시인, 서정시를 쓰던 그가 민중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스페인 파시스트에 의해 그의 친구이자 시인인 로르까가 살해된 뒤부터 한다.
***** Quechuas: 에콰도르에서 페루를 거쳐 볼리비아에 이르는 안데스 인디오의 고유 언어이자 잉까의 공식 언어.
찰칵
오세영
긴 것이나 짧은 것이나
영화 필름은
한 번의 작동으로 끝나버린다.
그러나 사진은
한 번 찍어 영원한 것,
영원을
긴 시간에서 찾지 마라.
내일 헤어질 운명의 남녀도
한 몸이 되어 뒹구는 오늘의 그 순간만큼은
내 사랑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더냐.
무시무종(無始無終)이
어디 있겠느냐.
반짝 빛나는 플래시의 섬광
그 한 찰나가 바로
영원인 것을.
찻잔
오세영
차를 끓인다.
욕정(欲情)의 불이 쇠할 때까지
주발의 물을
달구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
꿇어앉아
청자다기(靑磁茶器)를 편다.
육신은
영혼이 갈할 때만
켜지는 등불,
그 등불 앞에서
입술을 적시고
잔(盞)을 비운다.
진실로 사랑이란
비움으로써 가득 차는
공간,
그대 손으로
채워지는 잔,
차를 끓인다.
욕정의 불을 삭힌다.
책장을 넘기며
오세영
샛파람 불어
지면은 온통 만남의 이야기다.
연분홍 처녀들의 다소곳한 기다림과
물 건너서 달려온 초록 사내들의 다정한
눈길,
마파람 불어
지면은 온통 사랑의 이야기다.
격정에 휘몰아치던 그날 밤의 폭우와
땀에 흠뻑 젖은 숲들의 가쁜
숨결,
하늬바람 불어
지면은 온통 이별의 이야기다.
잿빛 노을 앞에서
쓸쓸히 손 흔들며 돌아서는 그의
빈 어깨,
된바람 불어
지면은 이제 온통 그리움의 이야기다.
백지 위에 나뒹구는 연필심처럼
눈밭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의 부러진
나목,
바람이 분다
운명의 책장들을 넘긴다.
다시 살아야겠다.*
* 발레리의 시구
천년의 잠
오세영
강변의 저 수 많은 돌들 중에서
당신이 집어 지금
손안에 든 돌,
어떤 돌은
화암사(禾巖寺) 중창 미타전(彌陀殿)의 셋째 기둥 주춧돌로
놓이기를 바라고,
어떤 돌은
어느 시인의 서재 한 귀퉁이에 나붓이 앉아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그의 빈 원고지 칸을 지키기를 바라고
또 어떤 돌은
어느 순결한 죽음 앞에서 만대(萬代)의 의(義)를 그의 붉은
가슴에 새기기를 바라지만
아, 나는 다만 당신이
물수제비 뜨듯 또다시 강가에 나를
팽개치지 않기만을------
아무도 깨워주지 않는 천년의 잠은
죽음보다 더 잔인할지니
흙 위에 엎드려 잠들기보다는
급류 속의 일개
징검다리가 되리라.
그러므로 님이여, 장난삼아 던질 양이면 차라리
거친 물살에 던지시라.
그리하여 먼 후일 당신이 다시 찾아오시는 날,
나는 즐겨 내 몸을 당신 앞에 바치리니
당신은 주저 말고 내 등을
밟고 건너시기를------.
천문대
오세영
하늘나라 백화점은
도시가 아니라 한적한 시골에 있다.
온 하늘 찌든 스모그를 벗어나
광란하는 네온 불빛들을 벗어나
청정한 산, 그 우람한 봉우리에 개장한 매장.
하늘나라 백화점은 연말연시가 아니라
대기 맑은 가을밤이 대목이다.
아아, 쏟아지는 은하수,
별들의 바겐세일.
부모의 손목을 잡은 채 아이들은 저마다 가슴에
하나씩 별을 품고
문을 나선다.
철교(鐵橋)
오세영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나야 하는
숙명,
그것이 설령 불륜이라 하더라도
내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대 높이 있기에
붙잡을 수 없는 슬픔을
철교는 오늘도
강 건너 사라지는 열차의 뒷모습에 기대어
호올로 울고 있다.
철쭉
오세영
소리 없는 함성은 죽어서
꽃이 되나 보다.
파아랗게 강그라지면서
외치는 입과 입,
꽃은 시각(視覺)으로 말하지만
그의 언어는 미각(味覺)이다.
발포!
시위를 진압하고 돌아와
술잔에 꽃잎을 띄우는
독재자여,
너에겐 광기(狂氣)를 달래는 술조차
폭력이구나,
그러나 너는 모른다.
확고한 신념은 항상
대지에 박고 있는 뿌리인 것을,
꺾어도 꺾어도 피어나는
빛 고운 우리나라 4월 철쭉꽃
첫사랑
오세영
여름 한낮
무더위로 하얗게 굳어가는 햇빛 속을
정적에 짓눌린 개구리 하나
첨벙,
연못으로 뛰어드는 물소리.
화들짝
나른한 오수(午睡)에서 깨어나 살포시
눈꺼풀을 치켜뜨고
먼 하는 바라보는 수련(睡蓮)의 파란
눈빛이어.
체크*
오세영
공간에 체크하란다.
당신은 전에 일 년 이상 미국에 체류한 적이 있습니까,
예, 아니오.
당신의 피부색은?
흰색, 노랑색, 검은색, 갈색, 붉은색,
당신은 과거 마약을 먹어본 적 있습니까?
예, 아니오.
현금은 사절하고 체크만 받는단다.
매달 내는 월부 집세,
P.G. & E.**와 전화 빌 그리고 안슈어린스,
이름과 주소와 사회보장번호***가 확실히 적힌
체크,
항상 체크하며 살라고 한다.
알람 체크, 도어 체크, 메일 체크, 어카운트 체크
컴퓨터 체크, 약속 체크----
그러나 오늘 나는
파킹 체크에 걸렸다.
규정된 시간에서 5분이 지나 체크 당한 나의 차,
80불의 티켓을 손에 들고 트래픽을 체크하며
요리조리 거리를 빠져나오지만
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체크무늬 아메리카의 미로
교수 임용 재계약을 원하면 서류의 공간에
체크하란다.
당신은 지난 일 년 동안
마약을 먹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 아니오
* 체크(check)
** P.G. & E: 가스 및 전기 요금 청구서
*** 사회보장번호: 우리의 주민등록번호에 해당.
초록별
오세영
해오라기, 뜸부기, 물떼새 모두 떠나고
강물조차 얼어붙은 겨울 어스름,
빈들엔
갈대 홀로 어두운 하늘을 향해
낡은 하모니카를 분다.
허수아비, 허수아비
마른 어깨너머 하나, 둘 돋아나는
초록별.
촛불
오세영
꺼져라, 가냘픈 촛불, 꺼져라
흔들리는 촛불,
아픔의 심지를 태우는 마지막의
불꽃아,
천상으로 오르는 음악과
지상으로 내리는 꽃잎이 부딪쳐
튀는 불꽃아,
영원과 찰나를 잇는
실낱 같은 그 줄이 끊길 때
너는 드디어 촛불이 된다.
추전역
오세영
세속도시를 버리고
등고선을 좇아 높이 높이 올라왔나니
활엽수림대(闊葉樹林帶)를 지나서 침엽수림대(針葉樹林帶)를 지나서
숨 가쁘게 달려온 한 생
드디어
하늘의 문턱을 넘는다.
이번의 정차 역은 하늘역
잊지 말고 내리자.
아차 놓치면 다시 돌아가는 지상은
슬픈 열대(熱帶),
내 여기 오르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던가. 추전역
허공에
무지개를 하나 끌어와 다리를 놓고
구름밭을 다져 레일을 깔았나니
한 생이 가는 길은 여로(旅路)
하늘 가는 티켓 하나 덜렁 사서
야간열차에 오른다.
아, 태백준령(太白峻嶺),
그 빛나는 태양 아래 문을 연
천제단(天祭壇) 입구의 그 추전역.
축대
오세영
누구는 그것을 벽이라 했고
누구는 그것을 길이라 했다.
날카롭게 절단된 돌과 돌이
이를 악문 바위와 바위가
빈틈없이 받들고, 고이고, 다지고, 끼워 맞춰
계곡의 비탈에 쌓아 올린 축대의
그 까마득한 높이.
위로는
트럭이 달리고,
버스가 달리고,
깃발들이 지나가고
연인들의 다정한 발걸음이 가볍지만
안간힘 써, 안간힘 써
암벽의 틈을 헤집고 뻗어 올린 그 연약한
꽃대 하나,
이 아침
활짝 꽃잎을 터트렸다.
누군가는 그것을 벽이라 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길이라 하고…….
축제
오세영
해마다 일월이면
강원도(江原道) 인제(麟蹄) 땅 소양호(昭陽湖)에선
각지에서 몰려든 수만 인파로
살생을 낙(樂)을 삼아 흥청이나니
일컬어 빙어(氷魚) 축제라 한다.
호수의 얼음을 깨고 혹은 꼬챙이로 찍어 혹은
바늘로 꿰어 잡아 올린 빙어를
한쪽에선 굽고,
한쪽에선 튀기고,
한쪽에선 끓이고
또 한쪽에서는 살아 팔딱거리는 그대로
초장에 찍어 냉큼 목에 넘기면서
참 즐거운 하루였다고 무릎을 친다.
살을 태우는 그 연기여, 냄새여.
신(神)이 인간을 잡아 이토록 회를 쳐 먹어도
즐거운 손가.
나 비록 채식주의자는 아니고
불문(佛門)에 입교한 빈도(貧道)는 더더욱 아니건만
차마 이 아비규환(阿鼻叫喚)을 축제라
부를 수는 없구나.
출옥
오세영
한 잔 한 잔 비워 마침내
바닥이 드러나야
비로소 갇힌 장에서 풀려나는, 20년산
발렌타인.
포도주든, 위스키든, 막걸리든
술병은
자신을 비움으로써만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찾나니,
혀와 입술이 엮는 관능,
그 한 세상의 감옥.
인생 또한 장기수가 아니던가.
취사를 하며
오세영
쌀만으로 혹은
물과 불만으로 밥을 지을 수는 없다.
비록 솥 안에서 물이 찰박댄다 하더라도
물과 불은
서로 한 몸을 이루어야 비로소
밥이 되는 법.
물이 많으면 진밥, 적으면 고두밥 또
불이 세면 눌은밥,
약하면 설은밥.
아예 물이 증발해 버릴까 봐
쌀을 얹힌 솥에서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하나니
사랑도 미움도 그와 같아라.
사랑으로
가슴이 새까맣게 타버린다 하지 않더냐.
미움으로 눈빛이
파아랗게 얼어붙는다 하지 않더냐.
카레이스키 김치 - 알마티의 재래시장에서 카레이스키 3세를 만났다
오세영
김치는 생명
그 지닌 강한 면역력으로
죽어가는 자도 능히 살려낸다 하지
않더냐
삶이란 또 단순히 사는 것뿐만 아니라
자유가 있어야 하나니
오랜 세월을
어둠 속 항아리에 갇혀 지내도
언젠가는 필히 밝은 햇빛을
보고야 마는 김치.
그만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남과 더불어 공존하는 것이 아니더냐.
짠 소금, 매운 고춧가루와 함께 버물려
자신을 숙성(熟成)시킬 줄 아는 김치는
또한 사랑,
나 한 달 하고도 열사흘의
지친 실크로드 배낭 여행길
알마티 질료니 바자르*에서
예기치 않게
그 김치를 먹고 건강을 되찾았나니
텐노(天皇)에게 억압당하고
스탈린에게 박해받아 백여 년 전
자유의 땅으로 망명한 카레이스키의
그 곱고도 억센 김치.
* 알마티에 있는 카자흐스탄 최대의 재래시장
커피
오세영
사랑한다고 쓸까,
미워한다고 쓸까,
채울 말이 없는 빈 원고지 앞에서
바르르 떠는 펜,
바르르 떠는 손으로
한잔의 커피를 든다.
달지도 않다,
쓰지도 않다,
단맛과 쓴맛이 한 가지로 어우러내는
그 향기,
커피는 설탕을 적당히 쳐야만
제맛이다.
블랙커피는 싫다.
커피잔에 녹아드는 설탕처럼
이성의 그릇에 녹아드는 감성,
그 원고지의 빈칸 앞에서
밤에 홀로 커피를 드는 것은
나를 바라다보는 일이다.
컵라면
오세영
사랑하는 것은 깨질 수 있지만
좋아하는 것은 다만
버려질 뿐이다.
파경(破鏡)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러나
10년 외길의 직장도
짤리면 버려진다.
성서(聖書)엔
아내 대하기를 깨진 그릇처럼 하라 했지만
오늘의 식기는 대부분 일회용 종이컵,
순간의 뜨거운 물만 있다면
오늘의 우리들은 누구나
즐기는 컵라면이다.
크레슨트 시티 - Hoopa 인디언에게 한국 시인이 들려준 설화
오세영
예도 옛적 그 옛적에 먼 옛적에
해 뜨는 동쪽 끝 바닷가에는
예쁘고 착한 백성이 살았답니다.
그 적엔 하늘에 달이 없어서
햇님만을 섬기며 살았답니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 싫어서
하루 한 번 꼭 오는 밤이 싫어서
용감하고 힘센 청년 하나가
햇님의 우물에서 두레박 훔쳐
바다 건너 동쪽으로 떠났답니다.
두레박 배를 타고 떠났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어찌할까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아 버린걸.
햇님의 침실에 든 달 보아 버린걸.
달님은 하도 부끄러워서
그길로 하늘 멀리 달아났고요,
노한 햇님은 매를 보내어
두레박을 하늘로 건져 올려서
그 청년 다시는 바다를 건너
고향에 못 가도록 하였답니다.
그 후부터 밤하늘엔 달님이 떠서
온 세상을 화안하게 비췄답니다.
지금도 한 해 한 번 7월 초사흘,
달님이 두레박 물을 긷는 날,
크레슨트 앞 바다에 조각달 뜨면
조각배 떠가듯 초승달 뜨면
하늘엔 견우직녀 상봉 있듯이
수면엔 코리아가 보인답니다.
멀고 먼 옛날 그 옛날부터
아메리카 서쪽 끝 태평양 가엔
그 청년의 후예가 살았답니다.
코리아의 한 부족이 살았답니다.
* Crescent City : '초승달'이라는 뜻을 지닌 이 아름다운 항구는 태평양 연안 캘리포니아주의 최북단에 있으며 근처엔 후파 인디언들이 오랫동안 살아왔음.
타종(打鐘)
오세영
낮고 깊은 신음소리,
날카로운 저 비명소리,
흉악범에 가해지는 형벌의 나날인가.
발가벗겨 온 생을 허공에 매달린 채
종은 무시로
채찍에 맞아 울부짖는다.
누 만년 총칼로
창과 방패로, 탱크와 군함으로, 폭탄으로
평화를 짓밟고
수억 인류를 살상한 그
씻을 수 없는 죄
그 쇠붙이를 하나 붙잡아 하늘에 고하고
단죄하나니
평화의 날을 기약하며
종신에 태형을 가하는 그
타종 소리
탁란(托卵)
오세영
양지바른 벌판
아늑한 둔덕에 쪼그리고 앉아
산은 오늘도
무덤들 몇 개를 품고 있다.
밖엔 겨울바람 매섭지만
포근하게 깃털로 감싼 가슴의 온기는
항상 따스하다.
언제 껍질을 깨고 나올까
그 알들...
산은 지상에 내려앉은
우주의 새,
품은 알 아직 부화할 기미가 없어
오늘도 날기를 포기한다.
태백산
오세영
사는 길이 막막하다고
가는 길이 외롭고 고단하다고
걱정하지 마라.
하늘 아래 태백이 있거늘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보랴.
일찍이 단군이 말문을 여셧고
해와 달도 잠시 쉬었다 가신 곳.
봄엔 틀림없이 꽃들이 피어나고
가을엔 틀림없이 또 낙엽이 지듯
꽃은 꽃으로 말하고
잎은 잎으로 말하는데
우리 모두 태백의 주목처럼
해를 받들어 살면 그뿐 아니랴
사는 길이 막막하다고
가는 길이 외롭고 고단하다고
걱정하지 마라.
예서 발원한 한강, 낙동강도
말없이 천 리를 가지 않더냐
하늘 아래 태백이 있거늘
무엇이 답답하고 또 두려우랴
텅 빈 나
오세영
나는 참 수많은 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건널 때마다 거기엔 이별이 있었고
이별을 가질 때마다 나는 하나씩
내 소중한 것들을 내주었습니다.
헤엄쳐 건너면서 옷을 벗어주었습니다.
뗏목으로 건너면서 보석들을 주었습니다.
배로 건너면서 마지막 남은 동전조차
주어버렸습니다.
나는 참 수많은 산들을 넘었습니다.
산을 넘을 때마다 거기엔 이별이 있었고
이별을 가질 때마다 나는 하나씩
내 소중한 것들을 건네주었습니다.
벼랑에 매달리면서 슬픔을 주었습니다.
비탈에 오르면서 기쁨을 주었습니다.
고개를 넘으면서 마침내
당신에 대한 그리움까지도 주어버렸습니다.
나는 참 수많은 산과 강을 넘고 건너왔기에
내겐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더불어 당신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나는 텅 비어 있으므로
지금 나는 내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나를
당신께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텅 빈 나를 더 반기실 줄 아는 까닭에...
텔레그라프
오세영
비정상이 정상으로 통하는 현실에 거역해서
실재를 지시하지 못하는 언어에 절망해서
그들은 이곳으로 모인다.
미합중국 캘리포니아주 버틀리 시 텔레그라프 애비뉴,
지상의 전화국은 없지만
하늘에다 대고 전보를 치고
하늘에다 대고 전화를 걸고
또 하늘에다 대고 편지를 쓰는
히피, 호모, 알코홀릭, 나르코틱, 홈리스----의 거리
텔레그라프,
그들은 오늘도 흐린 동공을 우러러
하늘에서 올 답신을 기다린다.
광기와
혼돈과
무위(無爲)로 이룩된 천국의
입국 비자를,
논리의 지배를 깨뜨리기 위하여
동성끼리 연애를 하고
이성(理性)의 폭력을 거부하기 위하여
마약을 상용하고
제도의 압제를 벗어나기 위하여
집을 뛰쳐나오고.
* Telegraph : '전화국'이라는 뜻의 이 거리는 버클리 시 버클리 대학 정문으로 관통하는 대학가인데 60년대 비트 제너레이션과 히피들의 생활공간이었다. 지금도 그러한 전통으로 인해 미 전역의 히피들이 모여들고 있다.
토요일 오후
오세영
모처럼의 시간을
아무나 헛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한 주일 내내
이 약속 저 약속 가늠하다가 정작
홀로 빈방을 지키는 날
사무실 뒤꼍의 코트장에서
펑펑
금속성의 정구공 튀는 소리만
듣는다.
투손*에서 - Tohono O'odams 인디언에게
오세영
너를 보려 여기 왔다.
캑더스 스과루*
알투라스*, 아마고사*, 알라모*, 아무 데도 없더니
너, 여기에 있구나.
어느 인디언의 피를 받은 종족이기에 너는
침묵의 절규를
마른 모래 위에 뿌렸다더냐.
푸른 하늘이 서러워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제 스스로 몸을 찔러 피를 흘리는
회한의 상채기,
밝은 대낮이 노여워서
밤에만 꽃을 피우는구나.
달밤이다.
우리 춤을 추자.
벌새, 휘파람새, 되새와 함께 어울려
슬픔에 취해 미움에 취해
방울뱀 쫒아서 빙글 돌면
아, 어지러운 하늘이여, 땅이여,
너를 보러 여기 왔다.
캑더스 스파루
험난한 모하브* 사막을 지나서,
네바다 사막을 넘어서.
* 투손(Tucson) : 아리조나주 남부에 있는 사막의 도시. 캑더스 스과루 국립공원이 있다. 도호노 오담 인디언들의 고향.
* 캑더스 스과루(Cactus Saguaro) : 지역적으로 미국 아리조나주 페닉스의 남쪽에서만 자라는 삼지창 같은 거대한 선인장.
* 알투라스(Alturas) : 컐리포니아의 구스(Goose)호수가에 있는 초원.
* 아마고사(Armagosa) : 네바다에 있는 사막.
* 알라모(Alamo) : 캘리포니아 디아블로 산 근처에 있는 마을.
* 모하브(Mojave) : 캘리포니아, 네바다, 아리조나주에 걸쳐 있는 사막.
트와일라잇 존
오세영
사이파이 채널*
트와일라잇 존*
독서에 미쳐 근시가 되어버린 한 사내가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채
폐허를 방황한다.
핵폭탄이 터진 대지는
무섭도록 적막하다.
그가 잠깐 상사의 눈을 피해
지하의 금고 속에서 독서를 즐기던 사이
갑자기 소멸해버린 세계,
살아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그래도 신의 마지막 긍휼이었을까,
폐허 속을 헤매던 그가 잿더미 속에서 발견한
수만 권의
전에 갖고 싶었던 희귀본 장서,
그는 폭파된 도서관의 서고 앞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아,
무심도 하여라.
책을 줍기 위하여 엎드리는 순간
'바싹' 땅에 떨어져 깨지는
그의 안경,
오늘 렌즈 알 하나 갈 줄 모르는 내가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채
C.N.N. 뉴스를 본다.
화면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상공에
작열하는 미사일의 불꽃들.
* 사이파이 채널(Sci -Fi channel) : 괴기담이나 과학 공상물만을 방영하는 미국의 TV체널
* 트와일라잇 존(Twilight Zone) : 지구의 종말을 주제로 한 사이파이 채널의 고정 드라마.
티비
오세영
한 마리의 치타가 힘껏
내달린다.
쫓기는 누의 저 필사적인 역주(力走),
그러나 일순
숨통이 물린 한 자락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금방 찢기는
멀쩡한 사지,
도망을 치다 일제히 돌아서 지켜보는
누 떼의 순하디순한 그 눈망울들.
티비를 끄고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본다.
봄비는 속절없이 내리는데 벌써
열흘째 앓고 있는 나의 독감,
아스팔트 위의 젖은 꽃잎들이 안쓰럽다.
내가 티비를 끈 것인지,
티비가 나를 끈 것인지.
파도
오세영
지우고 쓰고
쓰고 지우고,
파도가 밀려온다.
울고 웃고,
웃고 울고
한나절, 갯가에
빈 배 지키며
동,
서,
남,
북,
소금밭 헤매는 갈매기같이
지우고 쓰고,
쓰고 지우고,
만리장서(萬里長書)로 밀리는 파도.
파도는
오세영
간단없이 밀려드는 파도는
해안에 부딪혀 스러짐이 좋은 것이다.
아무 미련 없이
산산히 무너져 제자리로 돌아가는
최후가 좋은 것이다.
파도는
해안에 부딪혀 흰 포말로 돌아감이 좋은 것이다.
그를 위해 소중히 지켜온
자신의 지닌 모두 것들을 후회 없이 갖다 바치는
그 최선이 좋은 것이다.
파도는
해안에 부딪혀 고고하게 부르짖는 외침이 좋은 것이다.
오랜 세월 가슴에 품었던 한마디 말을
확실히 고백할 수 있는 그 결단의 순간이 좋은 것이다.
아, 간단없이 밀려드는 파도는
거친 대양을 넘어서, 사나운 해협을 넘어서
드디어
해안에 도달하는 그 행적이 좋은 것이다.
스러져 수평으로 돌아가는
그 한 생이 좋은 것이다.
파시즘
오세영
누가 일컬어 백색(白色)의 파시즘이라 했던가
눈 내려 온 천지
이데올로기로 꽁꽁 얼어붙었다
그 혹독한 추의, 기온의 급강하
수도관이 깨지고 보일러가 멈췄다.
출근길에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이성(理性)도 경직되면 깨지는 것일까.
냉각수의 결빙으로 동파된
라디에이터,
과열을 제어하지 못해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린 내 차의 엔진,
잊지 마라.
차가운 이성도
심장의 뜨거운 피 속에서만 항상
살아 숨 쉬는 것이다.
팻*
오세영
저는 지금 외출 중입니다
플리즈 리브 메시지*
수화기를 든 채 망설인다.
용건은 없는데 안부를 전할까,
말까,
기계에다 대고 속삭이는
'요즘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싶구나'.
분명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자동응답기로 상대방을 체크하는
그,
그의 전화를 기다리며
무심결에
탁자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한 마리
고양이를 본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그의
맑은 눈,
덥썩 뛰어 안기는
그의 따뜻한 체온,
기다려도 그의 전화는 종내 없고
고양이를 끌어안고 속삭이는
'요즘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싶구나'.
* 펫(pet) : 애완동물, 미국인들은 병적으로 애완동물에 집착한다.
* Please leave message
팽이
오세영
문밖
매섭게 겨울바람 쏠리는 소리,
휘이익
내리치는 채찍에
온 산이 운다.
누가 지구를
팽이 치는 것일까.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드디어 겨울,
회전이 느슨할 때마다 사정없이
오싹
서릿발 갈기는 그 회초리,
강추위로 부는 바람.
하늘은 항상
미끄러운 빙판 길이다.
페스티사이드* -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오세영
정원이나 공원이나 묘지나
미국의 잔디는 보기에 아름답다.
경계를 넘어
상가와 택지와 오피스 빌딩 사이에 조성한
자연 녹지 보존지역,
스프링 쿨러가 공급하는 수분을
조석으로 빨아먹고
정원사가 제공하는 비료를
밤낮으로 받아먹고
무성한 푸르름을 자랑하지만
너희는 모른다.
너희가 왜 거기 있어야 하는가를,
너희에겐 왜 침묵이 필요한가를,
메뚜기도 개미도 진드기도 더 이상
더불어 살 수 없는
간헐적인 살충제 살포,
무덤보다 더 고요한 그 정적.
경계를 나누어
이쪽을 공원 지역이라 한다.
코파 야생동물 보존지역* 곁에 있는
파파고 인디언 보호지역*
* pesticide : 정기적으로 행하는 살충제 살포.
* Kofa National Wildlife Refuge : 아리조나주에 있음
* Papago Indian Reservation : 코파 야생동물 보존지역 옆에 있음.
편지
오세영
누구의 편지일까,
발신인(發信人) 없는 편지 한 통
비에 젖어 버려 있다.
찢어진 하늘에서
투서(投書)로 내리는 비.
언어(言語)는 축축이 젖어 있다.
비는 내려도 이 도시(都市)의 녹음은 씻겨만 가고
신뢰할 그 아무것도
벌써 내겐 없는데
대담하게 쓴 한 통의 편지,
혹은 밀고(密告), 혹은 진실(眞實).
그러나 염려치 마라
하나의 진실(眞實)이 비에 씻기고
하나의 아픔이 잠자더라도
빗장을 걸고, 전깃불을 끄는 일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 있으니까.
편지의 노래
오세영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 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이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한 줄
포스트 모던 포엠*
오세영
어디 시라는 것이 있었다더냐.
아무도 읽지 않고 아무도 본 적 없는
가공의 시.
있단들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미 언어의 통제를 벗어난 의미
부서진 음소들의 파편과 쓰레기들을
포스트 모던의 상표로 포장한
아메리카 또 하나의 상품,
그는 오늘도 티 브이에 나와서
씨엠송을 부르듯 하모니카를 불며
시를 낭독하고 있지만
언어에 가해지는 그의 폭력, 광기의 몸부림을
언제까지 시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있다면
상품의 광고 문안 속에,
있다면 전화 앤서링의 안부 속에,
있다면
티브이 앵커맨의 농담 속에 있는
아메리카의 시.
* 미국의 시인들은 가끔 티브이에 출연하여 코미디언같이 시를 낭독함.
폭포
오세영
흐르는 물도 때로는
스스로 깨지기를 바란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끝에서
처연하게
자신을 던지는 그 절망,
사람들은 거기서 무지개를 보지만
내가 만드는 것은 정작
바닥 모를 수심(水深)이다.
굽이치는 소(沼)처럼
깨지지 않고서는
마음 또한 깊어질 수 없다.
봄날
진달래, 산벚꽃의 소매를 뿌리치고
끝 모를 나락(奈落)으로
의연하게 뛰어내리는 저
폭포의 투신.
표절
오세영
그믐밤 하늘엔
반짝반짝 빛나는 수천수만 별들의
대 군중집회.
은하댐 건설 반대!
같은 날 밤 지상엔
손에 손에 등불을 밝혀 든 수만 인파의
야간 촛불 대시위.
사대강 사업 반대!
푸르른 슬픔
오세영
물거품 속에 가장 맑은
하늘이 있을까
물방울 속에 가장 밝은 햇빛이
있을까
이슬 속에 가장 어두운 바다가
있을까
눈물 속에 가장 푸르른 슬픔이
있을까
가장 맑은 하늘을 찾아서, 햇빛을 찾아서
숲과 들과 풀잎과 땅 위를
우리는 물이 되어 흐르고 있다
푸르른 하늘을 위하여
오세영
피가 잘 돌아.....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도 슬픈 일도 있어야겠다 - 서정주
사랑아,
너는 항상 행복해서만은 안 된다.
마른 가지 끝에 하늬바람 불어
푸르게 열린 하늘,
그 하늘을 보기 위해선
조금은 슬픈 일도 있어야 한다.
굽이쳐 흐르는 강,
분분한 낙화,
먼 산등성에 외로 서 문득 뒤돌아보는
늙은 사슴의 맑은 눈,
달더냐,
수밀도 고운 살 속 눈먼 한마리 벌레처럼
붉은 입술을 하고서 사랑아,
아른 아른 피던 봄 안개는,
여름내 쩡쩡 울던 먹구름 속의 천둥은
이미 지평선 너머 사라졌는데
하늬 바람 불어
푸르게 열리는 그 하늘을 위해선 사랑아
조금은 슬픈 일도 있어야 한다.
푸른 스커트의 지퍼
오세영
농부는
대지의 성감대가 어디 있는지를
잘 안다.
욕망에 들뜬 열을 가누지 못해
가쁜 숨을 몰아쉬기조차 힘든 어느 봄날,
농부는 과감하게 대지를 쓰러뜨리고
쟁기로
그녀의 푸른 스커트의 지퍼를 연다.
아, 눈부시게 드러나는
분홍빛 속살,
삽과 괭이의 그 음탕한 애무, 그리고
벌린 땅속으로 흘리는 몇 알의 씨앗.
대지는 잠시 전율한다.
맨몸으로 누워있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땀을 닦는 농부의 그 황홀한 노동,
그는 이미
대지가 언제 출산의 기쁨을 가질까를 안다.
그의 튼실한 남근이 또
언제 일어설지를 안다.
풍경
오세영
분분히
하얀 설편 흩날려서
봄 미나리 파란 새순에 앉아
겨울꽃이다.
물색없이 노랑 강아지 한 마리가
천방지축
눈밭을 헤집고 다닌다.
흰 나비 떼를 좇아
팔랑팔랑 장다리 꽃밭을 뛰어다니는
해맑은 소녀의 원피스.
프렌드*
오세영
상대의 기분을 거스를 필요가 없다.
어차피 우리는 남남으로 사니까,
센트럴 파크**, 한적한
재크린 케네디 오나시스 호텔을 거닐다 불쑥
마주치는 백인 홈리스 하나,
내가 먼저 '하이' 하고 손을 흔든다.
'하이' 하고 그가 웃는다.
보기엔 참으로 정겨운 광경이지만
일순 멈췄다 뛰는 내 심장의 박동,
원자탄을 가지고 있어
싸우지 않고 살아가는 미국인과 소련인의 관계처럼
아메리카에서는 항상
상대에게 호감을 표하고 또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
총이 있으므로
매번 양보하고 매번 조심해야 하는
그 젠틀맨쉽.
아버지건 딸이건, 스승이건 제자건, 벗이건 남이건, 목사이건
도둑이건 하여간
내게 호감을 가진 자는 모두 'Friend'로 불러야 하는 그
<O. K. 목장의 결투>***식 아메리칸
* 프펜드(friend)
** Centeal park :뉴욕 맨해튼에 있는 공원
*** <O. K. 목장의 결투>: 30년대 만들어진 미국 대표적인 서부 영화.
프렌치 쿼터*
오세영
뉴올리언스의 프렌치 쿼터,
카페 엘파소에 앉아
조지 거슈인의 쿨 재즈,
<파리의 아메리카인>을 듣는다.
상제리제를 두리번거리는
시골뜨기 뉴요커를
트럼펫은 째진 목소리로 부르지만
여기는 남부 루이지애나, 목화의 집산지,
흑인이 노예로 팔려오던 곳
스탠드에 기대어
미친 듯이 두드리는 흑인 악사의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째즈는 왜 쓰다듬지 않고 두드리는가.
흑인의 슬픔이 블루스라면
그의 분노는 째즈,
좌절의 음악
랩이 언어를 파괴하는 시대에
뉴올리언스 프렌치 쿼터,
카페 엘파소에 앉아
조지 거슈인의 쿨 째즈,
<파리의 아메리카인>을 듣는다.
* French Quaeter : 뉴올리언스에 있는 한 지명. 18세기 이곳을 개척하여 도시를 건설했던 프랑스인들이 살았던 곳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카페의 째즈 음악이 유명함. 째즈의 발상지.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오세영
8월은
오르는 길을 잠시 멈추고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 번쯤 온 길을 뒤
돌아보게 만드는 달이다
발아래 까마득히 도시가,
도시엔 인간이,
인간에겐 삶과 죽음이 있을 터인데
보이는 것은 다만 파아란 대지
하늘을 향해 굽이도는 강과
꿈꾸는 들이 있을 뿐이다
정상은 아직도 먼데
참으로 험한 길을 걸어왔다
벼랑을 끼고 계곡을 넘어서
가까스로 발을 디딘 난코스 ...
8월은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 번쯤 하늘을 쳐다보게 만드는 달이다
오르기에 급급하여
오로지 땅만 보고 살아온 반평생
과장에서 차장으로 차장에서 부장으로
아, 나는 지금 어디메쯤 서 있는가,
어디서나 항상 하늘은 푸르고
흰 구름은 하염없이 흐르기만 하는데
우러르면 먼 별들의 마을에서 보내오는 손짓
그러나 지상의 인간은 오늘도
손으로 지폐를 세고 있구나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 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 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케 하는 달이다
피리
오세영
외로운 날에는
피릴 불었다.
텅 빈 가슴을 울리는
바람 소리.
희(喜), 노(怒), 애(哀), 락(樂)
네 개의 구멍은 깨졌구나.
여윈 손으로
등을 두드리며
마주 대는 입술과 입술.
피리는
목이 갈(渴)한 자에게만
선율이 된다.
비어 있으므로 비상(飛翔)하는
날개.
외로운 날에는
강(江)가에 홀로 앉아
피릴 불었다.
깨진 육신(肉身)은 비에 젖는데
허무(虛無)의 공간(空間)을 울리는
바람 소리, 파도 소리,
또 바람 소리
피항(避港)
오세영
명절날
거실에 모여 즐겁게 다과(茶菓)를 드는
온 가족의 단란한 웃음소리,
가즈런히 놓인 현관의 빈 신발들이
코를 마주 대한 채
쫑긋
귀를 열고 있다.
내항(內港)의 부두에
일렬로 정연히 밧줄에 묶여
일제히 뭍을 돌아다보고 서 있는 빈 선박들의
용골.
잠시 먼바다의 파랑을 피하는 그
잔잔한 흔들림.
하나의 별
오세영
흙이 묻은 하나의 별이
별이 있다면
진실로 물에 젖은 한 줄기
별빛이 있다면
별빛이 밟고 올 길섶의
꽃이슬과 깨진 심장(心臟) 같은 파편으로
정말 부둥켜안고 딩굴 눈물이 있다면
그늘진 이마에 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쓸어 넘기며,
우리들의 죽음을 마련할 한 평의 땅은
별이 되리
진실이 되리,
흙이 묻은 하나의 별이 된다면
진실로 물에 젖은
한 줄기 별빛이 있다면.
하늘로 흐르는 물
오세영
한 줌의 흙이 되기보다는
한 방울 물이 되기를
잠긴 눈에 뿌려지는
한 줌의 흙.
흙은 마침내 꿈에서 깬다.
흙은 마침내 옷을 벗는다.
한줌 흙으로 삭는 육신.
한 방울 물이 되기를
흙으로 흘러드는 물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늘로 흐르는
물.
하늘의 시
오세영
어스름 깔리는 마당귀에는
감꽃만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사립 밖엔 한나절
물 나는 소리.
윤사월 조금날 썰물이 길어
바다가 긴 개펄 드러내듯이
아, 나도
가진 것이라곤 시의 묘망한 하늘뿐,
너를 두고 한세상 살아왔다.
애비 없이 태어난 나는
에미도 일찍 잃어
세 살에 든 열병을 아직도 고치지 못한 채
이마는 항상 뜨겁기만 하다.
내 시의 먼 하늘, 노을에 맺힌 그 이슬이
밤바다에 반짝이는 별이 될 수 없음을
나 너로 인해 비로소 알았노니
이제 더 이상 속지 않으리라.
네가 가고 또 그로 하여 시마저 버린다면
이 세상 슬퍼할 그 무엇이 아직
남아 있으리.
한니발에서
오세영
표표히 흐르는 저것이
구름이더냐, 강물이더냐.
나 오늘 한니발에서
장강 미시시피를 바라보노니
희명한 천지 아득한 노을에 비껴
목숨의 덧없음에 울고 싶구나.
끝 간 데 모를 막막함이여,
땅과 하늘의 하나됨이여,
먼 이역의 하늘에서는 병과(兵戈) 소리 그치지 않고
가까이 땅에서는 가무 소리 흥청대느니
창생의 낳고 죽음이 또한
이같지 않으리.
고국의 병든 아내에게서는
일편 소식이 없는데
나 오늘 한니발에서
홀로 저녁노을을 비껴 날으는 한 마리
쓸쓸한 매가 되고 싶구나.
* 한니발(Hannibal) : 미주리주 미시시피 강변에 있는 작은 도시. 마크 트웨인의 고향. <톰소여의 모험>의 배경.
한라산
오세영
출가한 납자(拉子)처럼
이 풍진 세상을 등지고 홀로
의연히 순결을 지키는 삶이여.
하늘을 사모하는 마음이
그 누구와 비할 바 없어
몸은 항상 흰 구름을 데불고 있구나.
발은 비록 물에 젖어 있으나
위로 위로 오르려는 염원.
너는 일찌기
번뇌와 욕망의 불덩이들을 스스로 말끔히
밖으로 토해내지 않았던가.
그 텅 빈 마음이 천년을 두고
하루같이 하나하나 쌓아 올린 오름을
일컬어 한라라 하거니
한라는 차라리
성스런 국토를 지키는 남쪽 바다 끝
해수관음탑.
한밤중 책을 읽다가
오세영
결말은 무엇일까
시작 없는 이야기의 끝이
궁금해
온종일 한 권의 소설을 읽는다.
성급한 마음에
몇몇 행은 건너뛰고 또 몇 단락은
대충대충,
어떤 대목을 읽을 때는 스탠드의 불이 나갔다.
가슴을 저리는 부분이 간혹 없지도 않았지만
대체로 내용은 무미건조,
아, 목 말라라, 졸음을 쫓으려 마른 혀로
적셔 보는 한 모금의 커피,
그러나 몰려오는 졸음을 이길 수는 없다.
책장을 접어놓지도 못한 채 끝내
이 대목에서 잠에 떨어지고 마는
내 인생 69페이지.
한세상
오세영
길로 가는 길은 끝났다.
이제는 산에게 물어보랴.
말로 가는 길은 끝났다.
이제는 바람에게 물어보랴.
길 끝나 산이 있고 말 끝나
허공 있는데
19문 반 해어진 신발을 끌고
너를 찾아 한세상
걸어서 왔다.
어디로 가랴.
산방의 하룻밤은 풍설이 찬데
이제는 신발 없이 떠나야 할
길,
말도 길도 없이 나서야 할
맨발의 길.
한 알의 밀알
오세영
한 알의 밀알이 썩으면
석탄(石炭)이 될까,
석탄(石炭)은
겨울보다 더 깊은 망각(忘却) 속에서
병(病)을 앓는다.
겨울보다 더 춥게
가슴에 치미는 불,
한 알의 씨앗이 썩어서
이듬해, 라일락 뿌리가 되지 않거든
술이 되거라.
마른 나무에 뿌려지는 석유(石油)처럼
마른 가슴을 적시는 술,
한 개피 성냥 위에 붙는 불이 아니라
쥬라기 지층(地層)에서 타오르는 불.
한 줄의 시
오세영
시가 되지 않은 것은
구겨서
휴지통에 버린다.
그를 선택하기 위해서
너를 버리는
배신(背信)의 아름다움,
인생(人生)이란 한 줄의 시(詩),
버리는 것이 많아야
오히려 충만해지고,
완전한 슬픔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슬픔 괄호 안에 묶어야 한다.
행간(行間)을 건너뛰는
두 개의 콤마,
사랑과 이별의 줄넘기,
그러나 아직은
마침표를 찍을 때가 아니다.
오늘도 이별의 길목에서 돌아온 나는
원고지를 구겨
휴지통에 버린다.
이루어지지 않은 한 줄의 시.
항구 난트켓*
오세영
난트켓은 항구다.
추억에 산다.
예전처럼
떡 벌어진 어깨에 불거진 근육의 사내들도 없고,
그 사내들이 내지르는 휘파람 소리도 없고,
그 휘파람 소리에 들떠
머리에 석류꽃 꽂고 모여들던
처녀들도 없다.
난트켓은 항구다.
바람은 지금도 대서양 쪽에서 불어오고,
조류는 여전히 카리브 해로 흐르고
황금빛 너울은 수평선 너머 멀리
가물가물 손짓하지만
이제 아무도 바다에 나가지 않는다.
한때 고래의 심장을 겨누던
은빛 작살과
힘의 긴장으로 반동하던 밧줄의 치차는 *치차: 톱니바퀴
박물관 전시대에서 녹슬 뿐인데
난트켓은 항구다.
폐선이 되어 선창가에 묶인 배,
그 포경선의 갑판에는 이제 사내들이 음식을 나르고
처녀들은 술을 판다.
고래가 사라진 난트켓은
에이허브도, 이스마엘*도 없는
목포처럼 그저 항구다.
추억에 산다.
* 난트겟(Nantucket) : 매사추세츠주의 대서양 연안에 떠 있는 섬. 그리고 그 섬에 있는 동명의 항구. 19세기 미국의 고래잡이 기지로 유명했다. 허만 멜빌의 <모비 딕>의 배경이 됨.
* 에이허브, 이스마엘 : <모비 딕>에 등장하는 인물들.
해바라기꽃
오세영
꽃밭도 텃밭도 아니다.
울가에 피는 해바라기,
모든 꽃들이 울안의 꽃밭을 연모할 때도
해바라기는 저 홀로 울 밖을 넘겨다본다.
푸른 하늘이 아니다.
빛나는 태양이 아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산과 들
그리고 지상의 인간,
신(神)은 머리 위에 있지만
인간은 항상 그 앞에 서 있다.
모든 꽃들이 다투어 위로위로
꽃잎을 피워 올릴 때
앞을 향하여 꽃눈을 틔우는 해바라기,
흔히 꽃 같은 처녀라 하지만
해바라기는 인간이 피워 올리는 꽃이다
해킹
오세영
광에 보관해 두었던 감자가
하나둘씩 사라지고 없다.
서너 개는 쏠린 채로 나뒹군다. 몇 개의 양파도……
천장에 구멍이 나 있다.
쥐들의 해킹,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필시 저 구멍은
방과 뜰과 골목으로 거미줄처럼
엮여 있으리.
담낭선근종(膽囊腺筋腫)이라는 병명을 몰라
마우스로
인터넷을 서핑해 본다.
한 마리 쥐가 이리저리
잽싸게 뛰어다닌다.
문득
초등학교 시절의 어느 소풍날
신났던 보물찾기 놀이를 떠올려 본다.
아하, 이리저리
아무것이나 이득을 좇아 살아온
내 한 생은 기실
그때 배운, 숨은 보물찾기에 다름이
아니었구나.
한 마리 쥐였구나.
햄버거를 먹으며
오세영
사료와 음식의 차이는
무엇일까,
먹이는 것과 먹는 것 혹은
만들어져 있는 것과 자신이 만드는 것,
사람은
제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
가축은
싫든 좋든 이미 배합된 재료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김치와 두부와 멸치와 장조림과....
한 상 가득 차려놓고
이것저것 골라 자신이 만들어 먹는 음식,
그러나 나는 지금
햄과 치즈와 토막난 토마토와 빵과 방부제가 일률적으로 배합된
아메리카의 사료를 먹고 있다.
재료를 넣고 뺄 수도,
젓가락을 댈 수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이
맨손으로 한 입 덥썩 물어야 하는 저
음식의 독재,
자본의 길들이기,
자유는 아득한 기억의 입맛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향기
오세영
스탠드에
반쯤 술에 잠겨서
살포시 입술을 내미는 반라의 글라스,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랑하는 여인의 향기를 느낀다는 것이다.
한 잔의 칵테일
- 첫사랑의 키스
한잔의 와인
- 첫 경험의 키스
한잔의 스카치
- 첫 외도의 키스
아, 그러나 지금 나는 돌아와
투박한 한 조끼의 맥주로 마음을 달랜다.
잊을 뻔했던 아내의 그
아련하면서도 아늑한 체취.
향기로운 꽃
오세영
하늘 맑은
햇빛 밝은 가을입니다.
가을에 피는 꽃은
향기롭습니다.
드러냄에 서두르지 않고
때의 유혹에 삼갈 줄 알아
겨울, 봄, 여름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농염하게 익혔기 때문이지요.
하늘 높고
햇빛 푸른 가을입니다.
숨어서 피는 꽃은 더
향기롭습니다.
세속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알고
때의 부름을 기다릴 줄 알아
스스로 자신을 낮춰 오히려
더 높고 푸른 세계를
껴안는 꽃.
관악 준봉의
그 변함없는 바위틈에
홀로
난 한그루 꽃을 피웠습니다.
숨어서 더 향기로운
가을꽃이 피었습니다.
허술
오세영
피피피……
웬 소리인가 싶어 덧문을 여니
오래 방치 해두었던 옥탑의 수조(水槽)에
직박구리가 한 쌍이 새끼를 쳤다.
하나, 둘, …… 다섯.
깨진 창틈으로 드나든 모양.
그것만이 아니다.
햇빛 드는 바닥 쪽으론 도랭이피 몇 주도
뿌리를 내렸다.
쓸모없어 그저 버려두었던,
그 잊힌 공간이 생명을 기른 것은
아마도 낡아 허술해진 문짝 때문일 것,
허공을 채우고, 허공을 비우고……
모든 운신(運身)은 허공에서 비롯하나니
밀폐된 곳이라면 어찌 거기서
숨인들 제대로 쉴 수 있을 것인가.
미완(未完)은 완결의 어머니.
나 또한 이 허술한 우주의 틈을 빌어 비집고
이제껏
삶을 영위해오지 않았던가.
허스트 캐슬*
오세영
농노 위에 군림하는 중세의 영주처럼
원 없이 살았구나.
태평양이 바라보이는 주니페로 세라* 산록,
산 시메온* 해안가 산봉우리에
우뚝 솟은 백악의
궁전,
수백만 에이커의 초원에는 사슴들이
뛰놀고
베치꽃* 흐드러지게 피고
살찐 젖소 울음도 나른했거니
벼랑 아래 떨어지는 태평양의 찬란한 일몰을 바라보며
그대 무엇을 생각했느냐.
돈은 칼, 주식은 갑옷, 주주는 기사, 소비자는 농노, 경영은 전쟁,
그 전쟁으로 빼앗은 영지에 거대한 성을 쌓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그대의 기사들과 함께
나파의 포도주로 승리를
자축했구나.
중세를 꿈꾸는 자본가여,
여기 오면 알겠다.
왜 그대들은 끝없이 물질에
탐욕하는가를.
* Hearst Castle : 미국의 신문왕 허스트가 건축한, 성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저택, 캘리포니아 남부 태평양 연안의 언덕에 있으며 지금은 관광지로 개방되어 있음.
* Junipero Serra : 산 시메온 비치 동북쪽에 있는 산.
* San Simeon ; LA와 샌프란시스코 중간에 있는 태평양 연안의 아름다운 해변
* Vetch꽃 : 사막성 초원에 피는 들꽃.
호미
오세영
그만하면 작물(作物)은 되겠다
이로써
올해의 농사는 끝,
손에 쥔 호미를 고랑에
집어던지고
산뜻하게 정돈된 밭 한 필지를 휘
돌아본다
그동안
촘촘히 돋아난 싹들을 솎아내고,
죽어버린 모종은 다시 갈아 심고,
비뚜름히 자란 줄기는 바로 세우고
두렁의 그 무성한 잡초도
오늘의 풀 매기로 모두 제거,
부신 스탠드 아래서 정신을 집중해
세 번째 교정을 본다
이제는 인쇄에 돌려도 되겠다
교정지 위에 내던진 그
붉은색 볼펜 하나
홈페이지
오세영
패스워드를 바꾸어버렸구나.
두드려도 이미 열리지 않는 문,
길은 아무 데나 있다는데
길은 이제
막혀버렸다. 네 방으로 가는 길......
잠시 채팅을 즐기는 동안
어느 해커가 훔쳐 달아나버렸을까,
그 아름다웠던 날의 황혼.
간신히 피시 투우울에 들어가
지워진 파일을 되살리려 애쓰지만
떠오르는 명령어는 '에러'다.
누구의 집인가.
잠시 윈도우를 들여다본다.
까르르 피는 한 가족의 웃음꽃과
밖으로 울리는 한 소절의
피아노 화음.
너인 듯 네가 아니다.
찾아도 찾아도 얽히기만 한
인터넷 경로,
그 어느 빈방 창 밑에 앉아
잃어버린 첫사랑을 탐색한다.
귀뚜라미 우는 가을밤에 홀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린다.
화약
오세영
무색으로 녹는 물이 있다면
하얗게 굳는 불도 있다.
녹기만은 싫다.
굳고 굳어서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할 땐
차라리
부서져 가루가 되리라.
우정도 사랑도 이 세상 모두가 싫어
오직 잠들 수 있는 곳은 소외된
약실(藥室)뿐,
깨우지 마라.
이 불안한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다.
분노는
총구에 든 화약,
증오는
한순간의 격발.
황홀
오세영
아름다움은 시각을 통해서 오고,
황홀은
후각을 통해서 온다.
봄에
뜻 없이 황홀에 젖어
스르르 눈꺼풀이 감기는 것은
천자만홍(千紫萬紅)
그의 찬란한 색깔보다
향기 때문이다.
10대 소녀의 청순한
-백합,
20대 소녀의 순결한
-라일락,
30대 여인의 달콤한
-아카시아,
40대 숙녀의 요염한
-장미,
의
체취.
봄에 꽃들은
일제히 입을 벌리고
향기로 말을 쏟는다.
후각으로 오는
봄.
후회(後悔)
오세영
능금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가을은 황홀하다.
매달리지 않고
왜 미련 없이 떠나가는가,
태양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황혼은 아름답다.
식지 않고
왜 바다 속으로 잠기는가,
지상에 떨어져
꺼지지 않고 잠드는
불꽃이여,
우리도 능금처럼 태양처럼
스스로 떠날 수는 없는 것인가.
가장 찬란하게 잠드는 별빛처럼
잊을 수는 없는 것인가.
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휴대폰
오세영
2 - 수용소
창조는 자유에서 오고,
자유는 고독에서 오고,
고독은 비밀에서 오는 것
사랑하고, 글을 쓰고, 생각하는 일은
모두 숨어 하는 일인데
어디에도 비밀이 쉴 곳은 없다.
이제 거대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되었구나
각기 주어진 번호표를 가슴에 달고
부르면 즉시
알몸으로 서야 하는 삶
혹시 가스실에 실려 가지 않을까
혹시 재판에 회부되지 않을까
혹시 인터넷에 띄워지지 않을까
네가 너의 비밀을 지키고 싶은 것처럼
아, 나도 보석 같은 나의 비밀 하나를 갖고 싶다
사랑하다가도, 글을 쓰다가도
벨이 울리면
지체없이 달려가야 할 나의 수용소 번호는
공일육 구공구 삼오육이
3 - 인스턴트 시(詩)
<영원>이라는 말은 이제
사라져 버리고 없는 것일까.
가령 시라든지 신화 혹은 로망스 같은 것,
결코 지워서는 안 될......
그때 너와 나의 운명을 엮어준 그 약속을
우리는 양피지 위에다 진한 핏방울로
꾹꾹 눌러썼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 갔을까.
한 줄의 노래, 한 통의 연서, 한 권의
자서전은......
그리고 문득 나는 오늘 너에게
간단히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 사랑해 "
그러나 또 다음의 메시지를 보내기 위하여
지울 수밖에 없는 그 " 사랑해".
그래서 나는 시가 살진 시대의 시인
양피지 대신
휴대폰의 모니터에
시를 쓴다. 지운다.
흐린 눈
오세영
태양은 우주의 눈
오늘도 호수를 들여다보고 있다.
자욱한 안개를 걷고
뛰노는 백조를 날리고
물결마저 잔잔히 잠재운 수면에
그지없이 맑게 비치는 그의 얼굴.
우주도 무구한 순행(順行)을 위해서는 가끔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입김으로 후욱 불어 성애를 걷고
끼인 때를 닦아
문득 들여다보는 내 플라스틱 면경(面鏡),
아무래도
마음에서 치는 물결만은
가시지 않는다
거울은 접고 먼 하늘을 응시하는 노년
그 흐린 눈
흙의 얼음
오세영
그 어떤 이념이
이토록 생각을 굳혀놨을까.
그에게서는 사랑을 찾을 수 없다
관용도 그리고 미움도......
부드러운 흙에 도는 따뜻한 물이
한 송이 꽃을 피우듯
부드러운 살에 도는 따뜻한 피가
사랑을 싹틔울 텐데
어떤 이념이 그토록 싸늘하게
그의 육신을 얼려놨을까.
모래와 철근으로 더불어 굳어버린
시멘트,
생명을 완강히 거부하는 저
흙의 얼음.
힘
오세영
일어서기 위하여
온 힘을 쏟아내기 위하여
한겨울 물은 굳어있던가.
봄 되어
위로 위로 일어서는 물을 보았다.
마른 흙을 헤치고
하늘로 하늘로 솟아오르는
새 순
새벽 잠자리에서
참을 듯 참을 듯
벌떡 일어서는 사내의 새파아란
힘줄 같이
위로 위로 뻗쳐, 아
터트리는 꽃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라고
말하지 마라.
일어서지 않고 사는 삶이란
이 세상에 없다.
힙합
오세영
저것이 무엇?
비틀베틀 넘어지고
저게 무엇?
뱅뱅 돌다 처박고,
폴짝폴짝 뛰다가 쓰러져 뒹구는 저것이
춤이란다.
허리를 갑죽갑죽, 다리를 발발, 엉덩이를 까불까불,
두 팔을 집쩍집쩍, 온몸을 후둘후둘 떠는 저것이
춤이란다.
춤이란 원래 덩실덩실 추는 법인데
저것은 온통 지랄발광이로구나.
삐걱거릴 뿐이구나.
생각 없는 기계가 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저 모습이 가련타.
춤이란 원래 새의 나랫짓을 흉내낸 것이라는데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데
기계를 모방한 신종 예술,
하우저**를
삐걱삐걱 춘다.
히프 아래에다 헐렁하게 걸친 바지 차림에
두 손으로 허공을 쿡쿡 찌르다가
못내 기진하여 쓰러져 뒹구는
힙합,
생각하고 살기가 싫어서
판단하고 살기가 싫어서
고장 난 기계처럼 살고 싶은
기계의 춤,
아메리카의 춤.
* 힙합(Hip - Hop) : 흑인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뛰고 넘어지면서 추는 춤.
** 하우저(Houser) : 헐렁한 바지 차림으로 주로 미국의 불량 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춤.
1월
오세영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 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 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의 발성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써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2월
오세영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 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3월
오세영
흐르는 계곡물에
귀 기울이면
3월은
겨울옷을 빨래하는 여인네의
방망이질 소리로 오는 것 같다.
만발한 진달래 꽃술에
귀 기울이면
3월은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함성으로 오는 것 같다.
새순을 움 틔우는 대지에
귀 기울이면
3월은
아가의 젖 빠는 소리로
오는 것 같다.
아아, 눈부신 태양을 향해
연녹색 잎들이 손짓하는 달, 3월은
그날, 아우내 장터에서 외치던
만세 소리로 오는 것 같다.
4월
오세영
언제 우리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 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5월
오세영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부신 초록으로 두 눈 머는데
진한 향기로 숨 막히는데
마약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는
육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아아, 살아 있는 것도 죄스러운
푸르디푸른 이 봄날,
그리움에 지친 장미는 끝내
가시를 품었습니다.
먼 하늘가에 서서 당신은
자꾸만 손짓을 하고
6월
오세영
바람은 꽃향기의 길이고
꽃향기는 그리움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밤꽃이 저렇게 무시로 향기를 쏟는 날,
나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체취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입니다.
강물은 꽃잎의 길이고
꽃잎은 기다림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개구리가 저렇게
푸른 울음 우는 밤,
나는 들녘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말씀에
그만 정신이 황홀해졌기 때문입니다.
숲은 숲더러 길이라 하고
들은 들더러 길이라는데
눈먼 나는 아아,
어디로 가야 하나요.
녹음도 지치면 타오르는 불길인 것을,
숨 막힐 듯, 숨 막힐 듯 푸른 연기 헤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강물은 강물로 흐르는데
바람은 바람으로 흐르는데
7월
오세영
바다는 무녀(巫女)
휘말리는 치마폭
바다는 광녀(狂女)
산발(散髮)한 머리칼,
바다는 처녀(處女)
푸르른 이마,
바다는 희녀(戱女)
꿈꾸는 눈,
7월이 오면 바다로 가고 싶어라,
바다에 가서
미친 여인의 설레는 가슴에
안기고 싶어라.
바다는 짐승,
눈에 비친 푸른 그림자.
8월
오세영
8월은 분별을
일깨워주는 달이다.
사랑에 빠져
철없이 입맞춤하던 꽃들이
화상을 입고 돌아온 한낮,
우리는 안다.
태양이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저 눈부신 하늘이
절망이 될 수도 있음을,
누구나 홀로
태양을 안은 자는
상철 입는다.
쓰린 아픔 속에서만 눈뜨는
성숙,
노오랗게 타 버린 가슴을 안고
나무는 나무끼리
풀잎은 풀잎끼리
비로소 시력을 되찾는다.
8월은
태양이 왜,
황도(黃道)에만 머무는 것인가를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달.
9월
오세영
코스모스는
왜 들길에서만 피는 것일까,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코스모스 들길에서는 문득
죽은 누이를 만날 것만 같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9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코스모스 꽃잎에서는 항상
하늘 냄새가 난다.
문득 고개를 들면
벌써 엷어지기 시작하는 햇살,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코스모스는 왜
꽃이 지는 계절에 피는 것일까,
사랑이 기다림에 앞서듯
기다림은 성숙에 앞서는 것,
코스모스 피어나듯 9월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달이다.
9자를 손에 들고
오세영
한국인이 4자를 싫어하듯
13을 싫어하는 그들이지만,
때론 엘리베이터 표지판에서
13층을 아예 지워버리기도 하는 그들이지만
구천(九泉),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 구운몽(九雲夢) 구십춘광(九十春光), 구곡간장(九曲肝腸), 구중궁궐(九重宮闕), 구품정토(九品淨土)----
한국인들이 9자를 좋아하듯
그들 역시 9자를 좋아한다.
아이리시 커피 라지 사이즈 1불 99전, 햄버거 버불 2불 99전, 핏자 3불 99전 토핑 추가 99전, 36 숏 코닥 필름 한 통에 6불 99전, 레블로 립스틱 네 개들이 한 세트 19불 90전, 리바이스 청바지 한 벌 39불 90전, Hennesy 꼬냑 X.O. 1765년산 한 병에 399불, 소니 캠코더 CCD TR 92년형 699불, 동급 한국 삼성 캠코더 299불, 95년형 포드 토러스 6기통 배기량 3000cc 1만 5천 999불----
항상 프라이스 테그*의 끝자리를 장식하는 9는
자본주의의 행운을 상징하는 숫자인가.
채 100불이 못 된다는 생각에 고른
정가 99불의 메이드 인유. 에스. 에이. 시티 캐주얼 한 벌,
그러나 아뿔사 카운터에서는 세금 포함 108불을 지불하였다.
아름다운 여인을 얻으려고
모로코 왕이 제비로 헛짚은 포오샤의 금상자**처럼
졸지에 털린 미합중국 세계 태환권 현금 108달러,
9자는 물질을 낚는
자본주의의 숫자였던 것을---
그러므로 9자 한 자를 들고 보아라.
낚싯바늘같이 생긴 9자, 덫의 올가미같이 생긴 9자,
튕겨오를 형세의 트랩 용수철같이 생긴 그 9자.
* 프라이스 태그(Price tag) : 미국 상점의 물건값은 항상 끝자리가 9로 되어 있음.
** 포오샤의 금상자 : 세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여주인공 포오샤가 배우자를 고르는 에피소드.
10월
오세영
무언가 잃어 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 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 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11월
오세영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선택한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12월
오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80번 프리웨이
오세영
백인이라도 좋다.
흑인이라도 좋다.
황인이라도 좋다.
80번째 질주하는 자동차의 운전자를 향해 나는
총을 겨눌 것이다.
- 꽝 -
작열하는 총성에
일제히 멈추어선 자동차의 행렬
일순
깨져버린 기계들의 질서,
프리웨이 80번은 돌연
소란스런 광장이 된다.
차선은 짓밟히고
신호는 거부되고
구경꾼들은 몰려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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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를 미쳤다고 하지만
아니다.
왜 80번은 자동차만이 다녀야 하는가,
왜 80번은 차선이 구분되어야만 하는가.
왜 80번은 뉴욕으로 가야만 하는가,
아니 왜 80번은
80번으로 불려야 하는가.
* 80번 프리웨이(1-80 Free Way):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미대륙을 횡단, 뉴욕으로 연결되는 미국의 심장도로.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에 대한 무작위적인 총격 사건 소의 'Drive by shooting'이 일어나고 있음. 예컨대 지난 95년 8월 18일, 80번 도로 세크라멘토 인근에서 지나가는 트럭에 총격을 가하다가 붙잡힌 스켈리(남, 48세)는 15번이나 같은 범죄를 저질렀는데 경찰의 진술에서 그는 라디오나 사람들이나 자동차 따위에서 텔레파시로 '너는 이곳을 떠나라'라는 협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