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임의 오후(A Secret Intimacy)
Chalotte Lamb
1장
셀머는 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빨간 벨벳 드레스는 이런 무더운 밤에는 너무나 답답했다. 그러나 그 의상을 디자인한 것은 한겨울이었고, 공연이 이렇게 롱런하게 될 줄은 어느 누구도 예상을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로 막을 내리게 된 것도, 예약이 되어 있는 다음 공연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극장측의 사정 때문이었다. 커튼콜의 흥분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모습의 배우들이 큰소리로 이야기를 하면서 대기실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셀머는 약간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웨스트엔드의 극장에 서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런 기회가 또 있으리라는 보장도 현재는 없었다. 공연하는 동안 사귀게 된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섭섭했고, 또다시 여러 곳을 돌며 오디션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오늘은 유별나게 덥군." 데이지가 중얼거렸다. 데이지하고는 공연 중에 대기실을 같이 써온 사이였다.
"정말 찜통 속 같았어. 손님들도 모두 프로그램을 부채삼아 부쳐대지 뭐야" 셀머는 브래지어와 팬티 바람으로 대답했다. 이렇게 벗은 채로 잠시 몸을 식히고 싶었다.
데이지는 짜증난 듯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심스럽군. 내 얼굴이 꼭 썩은 개살구같이 되었어. 메이크업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이야. 다시는 예전의 피부로 되돌아갈 수 없겠지?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건 참 못할 노릇이야"
셀머는 웃으면서 땀으로 범벅이 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멋있는 얼굴을 가지고 뭐 그리 한탄이야"
데이지는 거울에 비친 셀머의 얼굴을 보고 가냘픈 어깨를 으쓱했다.
"넌 정말 너무 말랐구나. 설마 거식증은 아니겠지?"
"차라리 그렇다면 좋겠어." 셀머는 데이지의 어깨너머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셀머는 자기의 스타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딘가 균형이 잡히지 않은 것 같았다. 히프가 빈약한 데 비해 바스트는 크고, 다리는 길기만 했다. "앞으로 몇 주 동안은 배고프지 말았으면 좋겠어. 언제 다시 역을 맡을 수 있을지 알 수 있어야 말이지. 어제 어느 사무실을 찾아갔더니, 매니저는 벽장 속에라도 숨었는지 보이지 않고, 접수계가 안됐다는 듯이 나중에 연락을 드리겠다고만 하지 뭐야. 이번 공연 중에 저축은 좀 되었지만, 그것도 대부분 집세로 빼앗길 것 같아"
"무슨 역이든 안 걸리겠니? 넌 평판이 무척 좋았단 말이야" 데이지는 낙천적인 말투로 위로했다.
"딱 두 번뿐이었지. <데일리 메일>은 내 다리가 멋있다고 써주었고, <타임즈>의 논평에서는 캐스트 속에 내 이름도 넣어 주었을 뿐이었어."
"적어도 무시당하지는 않았잖아" 데이지는 희망적인 쪽으로 해석했다. 그녀는 다음 일거리 따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집에는 일정한 직업을 가진 남편이 있고, 극장에는 캐스팅 때마다 그녀를 기꺼이 추천해 주는 친구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오빠네 가게에서 점원 노릇이나 해야겠어." 셀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번 거울을 쳐다보았다. 대기실은 아주 좁아, 거울 앞에는 한 사람밖에 앉을 수가 없었다. 셀머는 아직 무대 화장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점 푸른 눈 가장자리에는 아이라인이 또렷하게 그려져 있고, 눈두덩에는 푸른색의 번쩍이는 아이새도가 발라져 있었다. 얼굴 모습은 화사하고도 섬세했다. 콧날은 곧고 오똑했으며 끝이 약간 들려 있어서, 웃으면 거만한 느낌을 주었다. 짙은 화장에 가려진 피부는 매끄럽고 티하나 없었다. 입은 크고 정열적으로 생겼다. 셀머의 얼굴은 좀 특이한 편으로, 아름답다고는 할수 없으나 표정을 가다듬으면 우아한 인상을 준다. 그녀가 얼굴에 생기를 띠면,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화장을 지우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의 셀머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었다.
"나 곧 끝날 거야" 데이지는 서둘러 볼연지를 지우면서 말했다. 데이지는 평상시엔 소탈하고 쾌활하지만, 한번 화가 나면 무서울 정도다. 셀머는 두 달 동안 데이지와 사귀면서, 어떻게 하면 그녀를 화나지 않게 할수 있는가를 알았다. 데이지는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베테랑 여배우로, 결코 스타는 아니었지만 배역을 얻지 못해 쩔쩔 매는 일은 없었다. 처음으로 데이지와 같은 대기실을 쓰게 된 셀머는 처신에 무척 조심했다. 애송이 여배우로서 데이지 같은 대선배하고 같은방을 쓰는 것은 매우 신경이 쓰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데이지는 너그럽고 친절했다. 그리고 이 두 달 동안 셀머는 데이지로부터, 연극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종연 축하 파티에 무엇을 입고 갈 생각이야?" 데이지가 일어서면서 물었다.
"새로 산 푸른 드레스" 셀머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데이지를 나가게 하려고 비켜 섰을 때, 노크 소리가 나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데이지는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가냘픈 몸매의 여자가 미소를 띠고 서 있는 것을 보자,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반색을 했다.
"캐리! 어디서 왔니? 연극을 보고 있었니? 정말 뜻밖이구나. 막간에 찾아오든지, 손이라도 흔들어 보이지 그랬어. 어디쯤 앉아 있었니?"
"세째줄" 그 여자가 대답했다.
매우 매력적인 여자였다. 굵게 웨이브진 레드골드의 머리는 아름다웠으며, 메이크업도 완벽했다. 셀머보다는 데이지에 가까운 나이로 보였다. 그녀도 배우일까? 무엇을 하고 있든 성공한 것이 틀림없다. 백화점의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것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우아한, 몸에 잘 맞는 까만 벨벳의 슈트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어마어마한 값을 치렀을 것이 틀림없다.
"참 잘했어, 데이지. 우린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어. 오늘로 끝이라니 유감이군. 아직도 사람이 많이 밀려들 텐데"
"그런 소리는 매니저한테나 하렴" 데이지는 새침하게 말했으나, 곧 정다운 어조로 돌아갔다. "방금 우리라고 했는데, 제임즈도 같이 왔니?"
"아니" 그 여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들의 대화에서 묘한 뉘앙스를 느낀 셀머는, 두 여자의 얼굴을 흥미 있게 견주어 보았다. 그때, 빨간 머리의 여자 뒤에서 누군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셀머는 문간에 남자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실내복이 걸려 있는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브래지어와 팬티 바람으로 손님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셀머는 데이지의 어깨 너머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생기 넘치는 푸른 눈과 마주쳤다. 그순간 그의 검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일로, 그 눈은 곧 시계에서 사라졌다. 셀머는 서둘러 실내복에 팔을 꿰었다.
셀머는 허리끈을 졸라매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 눈은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어디서 보았을까?
그제야 겨우 데이지는 남자의 존재를 깨달은 듯, 갑자기 얼굴이 빛났다.
"제이크 아니야! 미국에 있는 줄만 알았지. 언제 돌아왔지? 촬영은 벌써 끝났어요? 얼굴이 아주 보기좋게 탔군!"
"오랜만이군, 데이지, 달링!" 기쁨과 애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제이크는 겨우 어제야 돌아왔어. 영화는 지독한 것이었대" 빨간 머리의 여자가 설명했다. "제이크는 아주 건강해 보이지? 멕시코 로케 동안 일광욕만 했다나......"
"밤에는 그곳 세뇨리타들에게 세레나데께나 불러 주었겠군."
데이지가 이렇게 말하자, 두 여자는 동시에 소리 내어 웃었다. 셀머는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으면서, 그 남자를 어디서 보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영화에서 보았겠지. 데이지가 아는 사람 중 제이크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요 두달 동안 제이크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데이지는 영화계의 톱스타 제이크 레드웨이와 친구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셀머가, 그가 나오는 영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하자, 그녀는 쇼크를 받은 것 같았다. 셀머는 두통 때문에, 어둠 속에서 스크린을 보고 있으면 눈이 흐릿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관에는 좀처럼 가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 4년 동안은 너무나 바빠서 텔레비전도 별로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낯설지 않은 것은, 역시 어디선가 한번은 그가 나오는 영화를 보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마드레느는 잘 있니?" 데이지가 묻자, 캐리라는 여자는 반가운 듯이 웃었다.
"응,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 다음 달이면 벌써 두 살이 돼. 믿어지니?"
"놀라운 일이군, 정말!" 제이크 레드웨이가 말했다. "그러니 우리도 나이를 안 먹겠어?"
캐리는 뒤돌아보며 제이크에게 미소 지었다. 셀머는, 두 사람이 무척 친한 사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드레느는 요즘 잘 걷는단다. 그래서 자꾸 돌아다니려고 들지 뭐니. 그아이가 잠들 무렵이면 난 완전히 지쳐 버린단다."
"오늘은 누가 마드레느를 돌보고 있니? 제임즈?" 데이지의 목소리에는 다시 쌀쌀한 느낌이 감돌았다. 그녀가 제임즈라는 이름을 입에 올릴 때는 언제나 대답이 노일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캐리는 데이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얼마나 마드레느를 애지중지한다구. 그 아이가 걸어 다닌 땅에도 키스를 할 정도야"
"소유욕이 남달리 강한 남자라서 그럴 거야"
제이크 레드웨이의 우울한 목소리에 캐리의 초록빛 눈이 흐려졌다.
"두 사람 다 종연 파티에는 와주겠지?" 데이지가 두 사람의 팔에 손을 얹고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오늘 저녁은 이곳에서 묵을 거니, 캐리?"
"응, 호텔을 잡아놓았어. 그리고 내일은 런던의 병원에서 검사를 받을 예정이야"
"검사? 어디가 안 좋으니?" 데이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으응, 별일은 아니야. 빈혈인데, 주치의가 어디 다른 데도 안 좋은 곳이 있는지, 미리 검사를 받아 보라고 했기 때문이야. 두 번쯤 졸도한 일이 있는데, 아마 다이어트가 좀 지나쳤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뭣 때문에 당신이 다이어트 같은 것을 하는 거요? 원래 말라깽인데?" 제이크가 분개한 듯이 말했다.
데이지는 그와 얼굴을 마주보았다. 두 사람 다 캐리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셀머는, 제이크 레드웨이와 캐리가 어서 나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래서야 언제 메이크업을 지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완전히 소외당하고 있었다. 세 사람 다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셀머는 완전히 아웃사이더가 되어 참을성 있게 두 사람이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다시 셀머는 제이크 레드웨이와 눈이 마주쳤다.
셀머는 또 다시, 어디선가 그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어디에서 보았을까? 물론 그는 유명인이고, 그의 얼굴은 언제나 대중을 향하고 있었다. 아마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보았던 것이겠지.
데이지가 그녀를 뒤돌아보며 미안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아, 셀머, 미안해. 제이크와 캐리를 소개하겠어. 이쪽은 셀머 레이스, 그녀는 오늘 무대에서......"
"나도 보았지. 알고 있었어요." 제이크 레드웨이가 여유 있는 어조로 끼어들었다. "정말 잘했습니다."
캐리도 미소를 띠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고, 이마에는 작은 유리구슬 같은 땀이 가득 배어나와 있었다.
셀머는 잡은 손을 흔들면서 걱정스러운 듯이, "어디 불편하세요?" 하고 물었다.
캐리는 매우 연약해 보였다. 윤기가 도는 레드골드의 머리칼과 쾌활한 말투와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매우 델리키트하고 몸도 가냘팠다. 데이지와 제이크가 왜 캐리를 유리그릇처럼 조심스럽게 다루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캐리는 무리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는 무척 덥군요. 모두 애를 쓰고 있어요."
"쓰러지는 것은 아니겠지!" 제이크가 소리를 지르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화장대 위에 물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데이지가 얼른 컵을 집어 건네주자, 제이크가 물을 따랐다. 캐리는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미안해요." 캐리가 말했다.
셀머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차가운 손을 문질러 주었다. 제이크가 컵을 캐리의 입에 댔다. 셀머는 묘한 각도에서 제이크의 얼굴을 올려다보게 됐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그의 얼굴도 창백했다. 그가 캐리의 입에 컵을 기울여 주였을 때, 피부의 표면이 확대되어 보였다. 물을 통해서 그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전에 어디서 그를 보았는지 생각난 것은....... 셀머는 몸도 마음도 얼어붙은 것처럼 되었다. 마음속 한구석에 파묻혀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 그녀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캐리는 눈을 감고 물을 마셨다. 데이지는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받쳐 자기의 무릎을 베게 했다.
"의사를 부르는 게 어떨까?" 데이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튼 내가 호텔까지 바래다주겠어." 제이크가 대답했다.
캐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괜찮아졌어. 더위 때문에 약간 현기증이 났을 뿐이야. 오늘 파티에는 꼭 참석하고 싶어. 종연 파티에 나가지 않은 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는 걸"
"안 돼요." 제이크 레드웨이가 말했다. "호텔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 얼굴이 백지장 같단 말이오."
"당신도 제임즈처럼 강압적이군요!"캐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날 그와 비교하지 말아요, 부탁이니......" 제이크가 투덜거렸다.
캐리는 그말을 무시했다.
"데이지, 파티에 나가지 못해서 미안해"
"그게 뭐가 미안하니? 그런데, 왜 이렇게 될 때까지...... 넌 너무 무리를 한단 말이야. 사람을 쓰면 되지 않니. 제임즈는 그런 일에는 머리도 돌아가지 않니?"
"그도 그렇게 하라고 했어. 그 때문에 몇 주 동안이나 말다툼이 계속되었었지. 하지만 난 내손으로 마드레느를 돌보고 싶은 거야. 2, 3세 때가 아주 중요한 시기야. 그 아이를 돌보는 것이 즐거워. 다른 일은 매일 오는 아주머니가 해주고 있어."
"너는 장기 휴양을 할 필요가 있어. 마드레느를 누구한테 맡기고 여행이라도 떠나면 어떻겠니?"
"세상에! 어떻게 마드레느를 팽개치고 갈수가 있겠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고는 싶지만, 그런 사람을 어디 그렇게 쉽게 찾을 수가 있어야지. 나하고 마드레느의 사이에 파고드는 유모 같은 것은 필요없어. 내가 신용할 수 있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
"너도 보통 고집쟁이가 아니구나. 달을 따 달라는 아이 같아"
"이제 그만둬" 제이크가 얼굴을 찌푸렸다.
"캐리를 바래다주고 파티에 나올 수 있지요. 제이크?"
"물론이지. 갈 수 있지요, 제이크? 나 대신 보고 모두 이야기 해 줘요."
"나도 수면을 좀 취해야지." 제이크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셀머는 우두커니 선 채, 세 사람이 주고받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제이크를 어디서 보았는지 금방 생각해 내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생각해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의 일은 모두 기억 속에 파묻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쌀쌀맞게 굴지 말고 데이지를 위해서 참석해 줘요." 캐리가 제이크를 쳐다보며 애원하듯이 미소를 띠었다.
"아니, 오고 싶지 않으면 올 것 없어요."데이지가 부은 얼굴로 말했다.
제이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토라지지 말라구. 파티에는 가 드리지. 그러니 그런 얼굴은 하지 말아요."
"무리해서 올 필요는 없어요." 데이지는 여전히 뾰로통해 있었다.
"콘노트 호텔이지? 캐리를 호텔에 바래다주고 바로 그리 가겠소."
캐리가 셀머에게 손을 내밀고 말했다.
"소란을 피워서 미안해요. 당신하고는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당신은 참 잘하더군요. 앞으로 더 좋은 역을 맡게 될 거예요."
"고마와요."
"셀머는 지금까지는 별로 찬스가 없었지만, 차차 인정을 받게 될 거야. 셀머만한 사람이 주의를 끌지 못할리는 없을 거야" 데이지가 말했다.
"다음 역을 맡게 될 때까지 가게 일이나 거들 생각이에요. 다행이도, 오빠가 골동품 가게를 하고 있어서 언제든지 파트 타임의 일을 주니까요. 하지만 그 기간이 짧았으면 좋겠어요." 셀머가 반은 자조하듯이 설명했다.
"이제 얘기는 이 정도로 끝내고 슬슬 갑시다. 캐리" 제이크가 말했다.
"잘 있어, 데이지. 또봐......"
두 사람이 떠난 뒤에 셀머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 거울을 보았다. 짙은 화장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칼을 뒤로 묶고 화장을 지우기 시작했다.
"제이크가 정말 올지 의심스럽군." 데이지가 검은 라메 드레스로 갈아입으며 중얼거렸다.
셀머가 화장을 완전히 지우고 나자, 윤기 흐르는 살갗이 드러났다. 그녀는, 제이크 레드웨이가 파티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 버린 이상, 그를 보면 어김없이 그 일이 생각날 것이다. 제이크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은데, 그것은 당연했다. 그 일은 그에게는 단지 불쾌한 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변하는 법이야. 제이크는 이제는 대스타니까, 그가 노상 참석하는 파티에 비하면 우리의 종연파티는 초라하기 그지없겠지. 하지만 그는 잊어버리고 있어, 무대에서 손님을 앞에 놓고 하는 연기야말로 진짜 연기라는 사실을....... 제이크의 최신작을 보았지. 형편없는 것이었어. 돈을 위해서 한 것이었겠지만, 그것은 연기라고도 할 수 없어. 제이크도 이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진짜 연기를 위해 땀을 흘리는 것이 좋을 텐데. 그는 배우지 섹스 심벌이 아니거든" 데이지는 브러시로 머리를 빗고 거울 앞에 서서 드레스의 주름을 매만졌다. "나 어때?"
"참 멋있어요." 셀머는 말했다.
데이지가 짐을 정리하는 동안, 셀머는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입술에 핑크빛 루즈를 칠하면서 그녀는 가만히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생기 있는 푸른 눈에 동요의 빛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 뒤로 무척 많이 변한 것이 틀림없어. 어떤 의미에서는, 나는 그날 죽어서 전혀 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나는 오랫동안 그 일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써 왔다. 고통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조차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오늘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다니, 운명이란 참 짓궂은 것이다. 그는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 나는 그때 불타는 증오심을 가지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었다. 그를 향해 고함을 지르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다. 그는 나를 때렸고,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캐리도 배우예요?" 셀머는 앞을 바로 본 채 물었다.
"그녀도 제이크나 나와 같이 양성소를 나왔어. 그런데, 곧 결혼하여 이 세계를 떠났지."
"남편은 배우가 아니에요?"
"그의 남편은 변호사야, 유명한. 제임즈 폭스라고 하는데, 들어 본 일 있어?"
셀머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부드러운 실크 드레스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네크라인은 별로 깊이 패지 않았으나, 스커트의 양쪽 사이드에 슬릿이 있어서, 걸을 때마다 늘씬한 다리가 살짝 엿보인다.
"캐리의 남편은 차가운 사람이야. 나는 좀처럼 캐리를 만날 수가 없어. 그가 그녀를 도무지 런던으로 데리고 나오지 않거든. 그녀가 무슨 나쁜 병에라도 걸린 게 아니었으면 좋겠어. 캐리는 보통 사람하고는 다르거든. 혹시 캐리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제이크가 얼마나 슬퍼할까" 데이지는 거기서 깜짝 놀란 듯이 입을 다물고는 셀머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덧붙였다. "우리 세 사람은 너무너무 친하거든"
친하다-어떻게 친하단 말인가? 데이지가 문득 내뱉은 말에 다른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녀는 멋대로 드라마를 지어내고 있는 것일까? 데이지는 무슨 일에나 드라마틱한 의미를 부여하는 버릇이 있으니까.......
데이지와 셀머는 다른 캐스트 세명과 택시를 합승하고 파티장인 호텔로 향했다. 셀머는, 옆에 앉은 배우 한사람이 묘하게 몸을 밀어붙여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드레안이라는 이름의 40대 중반의 남자로, 그 자신은 자기의 나이를 서른 안팎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옷도 최신 유행의 것만을 입고, 기회만 있으면 셀머에게 치근대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자꾸 거듭되었기 때문에, 셀머는 웃어야 할지 짜증을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아내도 여러번 만난 일이 있었다. 셀머는 그녀가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제이크가 파티에 올지 어떨지 의심스러웠는데, 틀림없이 돌아가 버린 것 같군." 아드레안이 빈정거렸다. "그는 이제 우리와 같은 패가 아니야. 우리하고 어울려 봤자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제이크는 캐롤라인을 호텔까지 바래다주러 간 거예요. 그리고 파티에 나올 거예요." 데이지가 야멸치게 말했다.
"그 여자 같으면 나도 본일이 있지. 캐롤라인 폭스, 제이크와 같이 나폴레옹 시리즈에 나왔던 배우지?"
"그래요."
"그녀하고 제이크는 그렇고 그런 사인인 모양이군." 아드레안은 데이지의 어조를 흉내내어 말했다.
"천만에요!" 데이지가 되쏘아붙였다. 그러고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흥분하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못됐군요, 아드레안!"
그러나 아드레안은 칭찬이라도 들은 것처럼 히죽이죽 웃었다.
택시가 호텔 앞에 섰다. 셀머는 택시에서 내리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도 바깥 더위는 조금도 수그러질 줄을 몰랐다.
콜드 뷔페와 음료수가 즐비하게 갖추어진 연회장은 많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캐스트와 스탭, 그밖에 공연에 관계된 사람들은 모두 나왔고, 그중의 많은 사람들이 남편이나 아내를 동반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연극 관계의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사람들은 이 그룹에서 저 그룹으로 옮겨 다녔고, 그 수도 자꾸만 불어났다. 셀머는 답답해졌다. 누군가가 창문을 열어놓았는지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셀머는 글라스를 손에 든 채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두 그룹 사이를 빠져나가려고 했을 때, 셀머는 '핼로' 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발을 멈추었다. 흠칫 놀라서 뒤돌아본 그녀의 어깨 위에서 까만 고수머리가 흔들렸다. 셀머는,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문 채 미소도 띶 않고 가만히 그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이크 레드웨이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놀리는 것 같은 웃음이 얼굴에 떠올랐다.
"아까 만났지요? 기억하고 계시지요? 데이지의 대기실에서요."
"네" 셀머는 바싹 마른 입 안에서 대답을 쥐어짜냈다. 그는 무척이나 키가 컸다. 셀머보다 훨씬 컸고, 기억에 의하면 힘도 매우 셌다. 떡 벌어진 어깨에 근육질의 날렵한 몸매를 하고 있었다. 엷은 그레이의 슈트 차림이 우아하게 보였다.
"셀머라니, 흔한 이름이 아니군요." 제이크는 그녀의 팔을 잡고 열어젖혀진 창으로 데리고 가면서 말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나 보군요?"
"네" 셀머는, 어떻게 도망갈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대꾸했다.
"본명이오, 아니면 예명?" 제이크는 셀머의 팔을 놓고, 자연스럽고 허물없는 몸짓으로 벽을 짚고 말했다.
"본명이에요."
"무대에 선 지는 오래 됩니까? 상당히 잘하시던데요. 등장 시간은 짧았지만, 무대 위에 계신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던데......" 제이크의 말은 거기서 끊어졌다. 셀머의 얼굴이 금방 창백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왜 그러지요?"
"아니, 조금 무더워서요." 셀머는 얼른 핑계를 댔다. 그렇다면 제이크 역시 조금은 눈치를 챈 것이다. 물론 그는 아직 언제, 어디서 나를 만났는지 분명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기억해 낼 것이다. 그는 그때 어떤 얼굴로 나를 볼까? 나는 애써 과거를 잊어버리려고 했다. 그 옛 상처가 다시 욱신거린다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제이크 레드웨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셀머를 보았다. 입가에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시원하고 조용한 곳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제이크가 말했다.
셀머는 그의 어조에 벌컥 화가 났다. 그는 캐롤라인에게는 결코 그런 어조로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어조가 치근대거나 자신만만해 하는 투도 아니었다. 셀머는 이런 말투를 몇 년 동안 실컷 들어왔다. 제이크 레드웨이는 여자를 함부로 다룰 것이다. 그는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으로 여자에게 큰 은혜라도 베푸는 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지한 관계 같은 것은 처음부터 그의 머리에는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정사가 끝나면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는 타입임에 틀림없다.
셀머는 얼어붙은 것 같은 미소를 그에게 되돌렸다.
"아니, 여기에 있겠어요. 이 파티를 몹시 기다렸으니까요."
"당신하고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싶단 말이오." 제이크는 셀머의 차가운 말투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한테 한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당신도 별로 나쁘지 않은 제의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셀머는 가볍게 웃었다.
"잠깐, 말하지 마세요, 알아맞혀 볼 테니까-당신의 다음 영화에 출연시켜 주겠다는 말이지요?" 그녀의 말투는 채찍처럼 신랄하고, 얼굴에는 멸시의 빛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런 낡은 수법의 낚시를 던지지 마세요, 난 어린아이가 아니니까요."
제이크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당신은 날 오해하고 있어요."
"그럴까요? 그렇지 않을 텐데요. 당신 같은 유형은 하는 짓이 뻔한 걸요."
"내가요? 정말이오?" 그는 천천히 말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셀머를 훑어보았다. 그녀의 상기된 얼굴에서부터 푸른 드레스에 감싸인, 가냘프기는 하지만 매우 여자다운 몸매로 시선이 달렸다. "당신한테 똑같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겠군. 당신을, 늘 방구석에나 처박혀 있는 얌전한 생쥐라고 생각했지요. 데이지의 대기실에서는 그랬으니까요. 한데 지금 보니, 별로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군. 당신은 입이 꽤나 험하군요. 입뿐 아니라 마음도 비뚤어져 있겠지요."
말투는 침착했지만, 그의 강렬한 노여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셀머는 좀 불안해졌다. 나는 그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생각한 것일까?
"캐리를 호텔에 바래다주면서, 우리는 당신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다음 역을 맡게 될 때까지 파트타임으로 일할 거라고 당신이 말했잖아요? 그래서 캐리는 당신한테 2, 3주 동안만이라도 아기 보는 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아......그랬군요......."
"제안이라는 것은 바로 이거였소. 여기는 시끄러워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안해요. 난 오해하고 있었어요." 셀머는 눈을 떨구고 중얼거렸다.
"그런 것 같군요." 제이크는 놀리듯이 말했다.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당신한테 미소를 던지는 남자들 모두가 다 당신에게 딴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요."
순간, 미안한 마음은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셀머는 새침해서 턱을 치켜들고 노여움에 불타는 눈으로 제이크를 노려보았다.
"내가 오해를 한 것은 당신 탓이었어요."
"아하, 그것은 도대체......"
"당신은 어떤 때나 섹시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군요.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누구한테 시간을 물을 때도 당신은 삼류 카사노바 같은 투로 물을 거예요."
할말을 다 하고 입을 다물었을 때야 비로소 셀머는, 주위 사람들이 귀를 세우고 자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분명히 재미있어하고 있는 모습이었으며, 마주보고 웃으며 속삭이고 있었다. 제이크 레드웨이에게로 시선을 돌리니, 당연한 일로, 그의 얼굴에는 미소 같은 건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셀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강한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셀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가 자기를 때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처럼.......
사람들은 다시 소리를 높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이크 레드웨이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메가폰이라도 가져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못 들은 사람도 있을 테니까......"
셀머는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제이크가 강철 같은 손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 상태로는 안 돼요. 이렇게 떠나 버리면 사람들이 정말 수군거릴지도 모르지."
"나는 내용이 없는, 사교적인 대화 같은 것에는 서툴러요." 셀머는 고개를 들고 중얼거렸다. 제이크에게서 산뜻한 아프터세이브 로션의 냄새가 풍겼다.
"당신은 배우가 아니오. 연기를 해보라구"
광대뼈가 튀어나온 그의 얼굴은 노여움으로 험상궂게 되고 말았다. 그는 핸섬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멋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개성적이고 거칠었다. 그러나 그 사내답고 섹시한 매력에는 누구라도 끌려들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되었다. 셀머는 그를 곁눈질해 보았다. 그는 편안한 모습으로 머리에 손을 대고 있었다. 마치 두 사람이 허물없이 얘기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분명 제이크는 배우였다. 그는 훌륭하게 연기하고 있었다. 그는 셀머를 내려다보며 느긋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그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캐리의 건은 천천히 생각한 뒤에 전화해 줘요." 제이크가 말했다.
셀머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럼, 그 이야기는 아직 무효가 된 게 아닌가요?" 셀머는, 그런 일이 있었으므로, 제이크가 당연히 그 제안을 다시 꺼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이크는 그녀를 마주 쳐다보았다.
"당신을 참아내야 하는 사람은 캐리지, 내가 아니니까요." 두 번 다시는 만나기조차 싫다는 투였다.
셀머도 같은 생각을 하며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강해진 것을 보니, 그 메시지는 틀림없이 그에게 전달된 것 같았다.
"캐리의 전화번호는 데이지한테 물어봐요. 가능한 한 빨리 연락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캐리는 사정이 급하니까......"
제이크는 그렇게 말하고 저쪽으로 걸어갔다. 셀머도 굳은 표정으로 그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2장
"어제가 마지막 날이었는데도 가 봐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오빠 빌리가 안경 너머로 셀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어제는 카렌이 회원으로 있는 오찬 클럽의 파티가 있는 날이라서 말이야. 그녀가 일을 보고 있기 때문에 빠질 수가 있어야지."
"안 오면 어때요. 난 조금도 상관치 않아요." 셀머는 청바지에 싸인 다리를 의자 위에 세우고, 거기에 턱을 얹어놓고 있었다.
"커튼콜은 몇 번이나 있었니?"
"여섯 번이었어요. 하지만 여섯 번째로 나갔을 때는 손님들은 그저 형식적으로 손바닥을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어요. 자리를 뜬 사람도 많았구요."
가게에는, 젊은 미국인 청년이 작달막한 블론드 아가씨와 은촛대를 들여다보며 뭔가 속삭이고 있었다. 가게는 언제나처럼 텅 비어 있었다. 셀머는, 이래서야 가게 유지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이 되어 언젠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오빠는 웃으면서 누이동생의 귀에다 입을 대고, 하루에 물건 한 개만 팔아도 채소가게의 하루벌이는 된다고 속삭여 주었다. 빌리는 잡동사니는 다루지 않고, 고급 골동품-특히 은그릇-을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18세기의 은세공사와 그 작품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빌리는 셀머보다 여섯 살이나 위였다. 예전에는 이만저만 핸섬한 청년이 아니었었다. 검은 머리에 잿빛 눈과 갸름한 얼굴은 시인을 연상케 하는 풍모였으며, 셀머의 친구들은 모두 그에게 열중해 있었다. 대학시절의 빌리는 언제나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바이런풍의 로맨틱한 비애감을 풍기고 있었다. 그가 지나가면 셀머의 친구들은 환성을 지르며 셀머를 꼬집는 것이었다. 그가 염세적이고 시니컬한 눈초리로 흘끗 쳐다보기라도 하면 소녀들은 미칠 듯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셀머는 그들의 열광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빌 리가 그런 시선을 던지는 것은 단지 근시였기 때문이며, 허영심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안경을 쓰지 않았다. 말수가 적은 것은 과묵해서가 아니라 소심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셀머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빌리의 누이동생이라는 이유 때문에 받는 특혜도 적지 않았으므로, 셀머는 그 사실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빠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카렌과 결혼하자, 셀머의 클라스는 초상이라도 난 집같이 되었다. 그리고 셀머는 올케가 된 사람에 대해서 질문 공세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녀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위로는, 그 신부가 깜짝 놀랄 정도의 미인이고 가까이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품이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셀머는 계획적으로 너무 많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카렌을 보았을 때, 급우들은 하나같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키가 작고 약간 살찐 편이며 따뜻한 갈색 눈과 곧은 갈색 머리를 가진 카렌은 아무리 보아도 트로이의 헬레네로 보이지는 않았다. '대체 너의 오빠는 그 여자의 어디가 좋다는 거니?'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셀머는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오빠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라고.
8년이 지난 지금도 그 대답은 맞는 답이었다. 카렌과 빌리는 조용한 행복에 감싸여 있었다. 오빠는 온종일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고 있다가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라고 카렌이 말했기 때문이다. 은그릇의 지워져 가는 품질증명인을 눈을 들이대고 찾기 때문에 근시는 더욱 진행될 뿐이었다.
"다음 일거리는 들어올 전망이 있니?"
오빠의 물음에 셀머는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빠가 빙긋 웃자, 안경이 코 위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가게 일을 거들겠다면 언제든지 환영한다. 지금 파트 타임으로 오는 아가씨는 온종일 껌을 씹지 뭐니. 혹시 조지 3세의 슈거 볼에 씹던 껌을 붙이지나 않을까 싶어 늘 조바심이 나지 뭐니"
"고마와요, 오빠" 셀머도 미소를 지었다. 배우 양성소에 다니던 3년 동안 오빠는 언제나 셀머를 도와주었다. 이따금 가게를 거든 덕분에 셀머도 은그릇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가 있었다.
제이크 레드웨이의 제의에 대해서 오빠에게 말하려고 했을 때, 아까 그 미국 청년이 촛대롤 손에 들고 다가왔다. 빌리는 안경을 밀어올리면서 일어섰다.
"훌륭한 물건이지요?" 그의 말투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오빠는 가게에 있는 골동품들을 모두 사랑하고 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사랑스런 듯이 촛대를 만지면서 제작자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셀머는 가게 안쪽의 재고실로 들어갔다. 짐을 풀고 있던 올케 카렌이 밝은 미소를 띠고 돌아보았다.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빌리한데 들었어요?"
"어젯저녁 일? 마음 쓰지 말아요, 상관없으니까. 내가 주역이라도 맡았다면 언니네가 맨 앞줄에 앉아서 보아 주기를 바랐겠지만......."
"그때는 제일 먼저 달려가겠어요." 카렌은 상자에서 아름다운 무늬가 부각된 은 티포트를 꺼냈다. "보세요, 이거 무척 바싸게 입수한 거예요." 그녀는 입김을 불고 보드라운 천으로 문지르며 물었다. "얼마 동안 우리 집에 있어 주겠지요?"
"글쎄요, 달리 일자리가 생겼거든요. 그 제안을 받아들일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어요."
셀머가 제이크 레드웨이와 캐롤라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카렌의 둥근 얼굴에 황홀한 표정이 떠올랐다.
"제이크 레드웨이-영화 스타......?"
"그래요."
"어마, 멋지군요. 그는 평상시엔 어떤 사람이에요? 굉장히 섹시한가요?"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우쭐해 있다는 말인가요?" 카렌은 웃었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미국에서도 굉장한 호평을 얻고 있는걸요. 난 그의 영화가 참 좋아요. 그에게는 유머 센스가 있어요. 그의 눈은 언제나 웃고 있어요. 안그래요?"
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셀머는 생각했다.
"그 아기는 몇 살이지요?"
"모르겠어요. 아직 캐리 폭스하고 이야기를 해보지 않았어요. 오늘 오후에 전화하겠다고 말해 두었어요. 캐리는 어제는 런던에서 묶고, 오늘 점심때나 집에 돌아가 있을 테니까요."
카렌은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 고개를 갸웃하고 셀머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지렁이가 땅속을 기어가고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오동통한 울새의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결정은 물론 아가씨가 해야 해요. 하지만, 얼마 동안 어린아이를 돌봐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안그래요? 아가씨는 언제나 우리 개구쟁이들을 잘 보살펴 주잖아요."
조카들은 5세와 7세로, 지금도 가게 2층의 거실에서 놀고 있었다. 그 소리로 보아, 두 아이는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사준 텔레비전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폭스 부인이란 분은 몸이 약한 것 같아요."
그말을 듣고 카렌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좀 문제군요. 그런 타입의 사람은 나도 알고 있어요. 손을 들어올리는 것조차 힘들어하지요. 결국 아가씨가 모든 일을 다 해야만 할 거예요."
"캐리는 그런 타입의 여자는 아닌 것 같아요. 데이지는 그녀를 무척 좋아해요."
"그리고 아가씨는 데이지를 좋아하시고......" 카렌은 웃었다.
"캐리 폭스가 호감이 안 가는 사람이라면, 데이지가 그렇게 좋아할 리가 없어요. 그리고 나도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캐리는 이야기할 때 상대방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군요. 그러지 않는 사람도 많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은, 눈은 상대방을 향해도, 사실은 상대방의 얼굴 같은 것은 보지 않는 거예요. 아마 자기 자신을 보겠지요. 상대방은 자기의 모습을 비춰 주는 거울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카렌은 주전자를 불 위에 얹으며 웃으면서 셀머에게 눈을 흘겼다.
"나는 이따금 아가씨를 알 수 없을 때가 있어요. 어떤 사실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난 그게 걱정이에요."
카렌은 기복이 있는 인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남편 빌리에 대한 그녀의 사랑도, 어린아이에 대한 사랑과 매우 닮은 것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세 사람을 감싸고, 필요할 때는 기꺼이 셀머의 어머니 역할도 해주었다. 4년 전에 셀머는 이 조용한 올케의 위안을 얼마나 고맙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카렌은 셀머를 절망의 늪에서 건져내어 안전한 장소로 데려다 주었던 것이다. 그 따뜻하고 애정 어린 차분한 인품으로.......
카렌은 셀머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이 문득 말했다.
"아가씨는 이제 그 일은 잊어버렸지요? 지금도 그일을 생각할 때가 있어요?"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런 질문을 했다면, 셀머는 참을 수 없는 간섭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글쎄, 이따금 달이 무척 밝은 밤에는요......" 셀머는 농담조로 말했으나, 그 말에는 씁쓸하고 애절한 감정이 깃들여 있었다.
빌 리가 손바닥을 비비며 들어왔다.
"팔렸어. 네브래스카에 있는 어머니에게 선물하겠다더군. 식탁에 놓아두면 빛이 날 거야. 좀 아까운 생각도 들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간 아무것도 못 팔아요." 카렌은 부드럽게 남편을 나무랐고, 빌리는 빙그레 웃으며 아내의 머리칼을 헝클어놓았다.
"셀머는 여기서 일하기로 했소?"
"달리 일자리가 있대요. 난 그쪽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셀머의 장래를 위해서도......"
셀머는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그 폭스 부인이라는 분은 제이크 레드웨이의 친구지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이상의 사이인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고 나자 셀머는 아차 싶었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란 말이에요?" 카렌의 눈이 동그래졌다.
"잘 모르겠지만, 데이지가 그런 말을 비쳤어요. 하지만 뜬소문일지도 몰라요."
"제이크 레드웨이라면, 그 눈썹이 있는 녀석이지?" 빌리는 아내가 따라 준 홍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셀머는 웃음을 터뜨렸다.
"눈썹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오빠의 말은 알겠어요. 그의 눈썹은 특징이 있는걸요."
"마치 수염이 눈썹 자리에 난 것 같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카렌이 남편의 팔을 꼬집었다. "마왕 같은 야릇한 매력이 있다고 <더 글로브>의 영화평에도 씌여 있었어요."
"그것은 여자 비평가가 썼겠지. 남자 같으면 그런 바보 같은 말은 하지 않아" 빌 리가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 다시는 홍차를 따라 드리지 않겠어요. 난 레드웨이의 팬이에요. 그의 영화라면 빼놓지 않고 보아 왔어요. 그는 굉장한 사람이에요. 새끼손가락조차도 섹스 어필하더군요."
"내가 발벗고 나서도 못 당할 만큼?'
"당신도 아주 멋있어요." 카렌은 방긋 웃었다. "하여튼 일단 폭스씨를 만나보면 어때요, 아가씨? 그 집에서 일하고 있으면, 유명한 영화감독에게 발탁될 기회를 잡을지도 모르잖아요."
"참 로맨틱하군, 당신은" 빌리는 애정이 담긴 눈으로 아내를 보았다. "그보다, 레드웨이가 그렇게 섹시한 녀석이라면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안전하겠는데......"
셀머는 화를 내며 항의했다.
"농담하지 말아요. 난 그런 타입의 사람과는 잠자리를 같이할 마음이 나지 않으니까요."
"아니, 아가씨! 별말을 다 하시네. 빌리, 귀를 막아요. 당신은 아직 이런 이야기를 듣기에는 일러요."
빌리는 웃으며 아내의 말에 따랐다.
"자, 나는 은이나 닦으러 돌아갈까. 여기에 있다간 내 순진무구한 마음에 때가 묻겠어."
그가 나가는 것과 동시에 위층에서 요란스런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로비군. 잠깐 보고 오겠어요." 카렌은 층계 밑에서 잠시 멈추었다. "폭스씨를 만나시겠어요?"
"그렇게 하겠어요." 사실을 말하자면, 셀머는 이미 어젯저녁에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빠와 올케에게 말함으로써 언제나처럼 자기의 마음을 분명하게 정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날 오후 폭스 부인의 집에 전화를 하자,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누구십니까?" 셀머가 폭스 부인이 계시냐고 묻자, 그 목소리가 반문해 왔다.
셀머는 그 말투 때문에 자기가 뭐 나쁜 일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셀머 레이스라고 해요. 레드웨이씨의 소개로......"
"레드웨이?"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전 일자리를 찾고 있어요. 그래서.......부인께서 아기를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셔서요......"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 제임스 폭스인 듯한 사람은 "잠시 기다려요." 하고 불쑥 말했다.
이윽고 캐롤라인 폭스의 것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따뜻했다.
"레이스양이세요? 전화를 줘서 고마워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셀머는 마음이 놓였다.
"자세한 말씀을 듣고 싶어서요."
"좋아요! 우리 집에 와서 마드레느를 만나 주겠어요? 먼저 당신이 돌볼 아이를 만나보는 것도 좋을 거예요." 캐롤라인 폭스는 기쁜 듯이 말했다. 누구라도 자기의 어린 딸을 보면 한눈에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셀머는 그녀의 말에 끌려 미소 지었다.
"기꺼이 들르겠어요. 언제쯤......?"
"내일이면 어떨까요? 그래도 되겠어요?"
"좋아요."
셀머는 폭스 가족이 살고 있는 마을 이름과 가까운 역 이름을 메모했다. 폭스 부인은 점심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는 기차도 몇 개 가르쳐 주었다.
셀머는 들뜬 걸음으로 가게로 나갔다.
"내일 찾아가기로 했어요. 남편은 까다로운 분 같지만, 부인은 따뜻한 사람이에요."
오빠는 누이동생의 얘기를 듣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런던에서 어떻게 그 먼 곳까지 날마다 다닐 작정이니, 65킬로나 되는데?"
"그 집에 입주하게 될 것 같은데요." 카렌이 말했다. "시골에서 몇주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시골 풍경을 즐길 겨를이나 있겠니, 온종일 아기보기에 쫓길 텐데" 빌리가 비관적인 어조로 말했다.
"빌리의 말에 신경 쓸 것 없어요. 오크션에서 사들인 물건 하나가 가짜라는 것이 방금 밝혀졌어요. 그래서 모든 일에 의심이 깊어진 거예요."
"오빠가 그런 상태라면 난 이만 물러가겠어요." 셀머는 문으로 향했다. 결정되면 알려 달라는 빌리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흔들었다. "물론 그렇게 하겠어요."
셀머는 이즈링턴의 땅값이 싼 곳에 있는 지저분한 하숙집에 가구가 딸린 방 두간을 빌어서 살고 있었다. 창에서 바라보이는 것이라고는 빽빽하게 들어찬 집들과 거무충충한 벽, 그리고 수없이 서 있는 텔레비전 안테나뿐이었다. 셀머의 거처는 한쪽 벽에 간이 주방이 붙어 있는 네모난 거실과 조그만 침실로 이루어졌으며, 침실 구석의 경사진 천장 밑에 욕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욕조에 들어갈 때는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허리를 굽혀야 했다. 그리고 욕실에 드나들 때도 역시 허리를 굽혀야 했다. 문이 낮기 때문이었다. 비오는 날에는 천장을 때리는 빗소리를 참고 듣고 있어야 하고, 이따금 빗물이 새어 들어와 벽에 묘한 모양으로 얼룩을 만들어 놓곤 했다. 그리고 비가 그친 뒤에는 퀴퀴한 냄새가 몇 시간이나 방안에 감돌았다.
집주인은 66세의 미망인으로, 아래층에서 두 마리의 고양이와 살고 있었다. 고양이들은 가끔 셀머의 방의 창틀에 앉아 겁을 주듯이 그녀를 노려보기도 했다.
그 가느다란 초록빛 눈이 자기를 향해 번뜩일 때마다 셀머는 마치 협박이라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름날 저녁 창문이 열려 있을 때면 고양이들은 방안으로 기어들어와, 문이 잘 닫히지 않는 찬장을 덮치기도 했다. 저녁식사를 위해 남겨 둔 정어리튀김을 빼앗겼을 때는, 셀머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처럼 쾅 하고 문을 닫았다. 미망인은, 고양이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튀긴 닭이나 정어리 같은 맛있는 것만 먹이고 있다고 말하지만 셀머가 보기에는 고양이들은 항상 굶주려 있었다.
셀머의 방 위층에는 매우 예의바르고 슬픈 눈매를 한 인도인 의과 대학생이 살고 있었다. 밤샘을 하며 공부를 하는 모양인지, 항상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그를 의사로 만들기 위해서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시험에 패스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라디오를 켤 줄도 모르고, 파티를 여는 일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웃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셀머는 그가 자기보다 먼저 이사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에 돌아와 보니, 방안은 무더위로 찜통속 같았다.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열어놓았으나 커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음료수를 만들어 의자에 걸터앉자, 생각은 저절로 제이크 레드웨이에게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오빠 내외에게, 제이크가 나에게 있어서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여튼 무척 괴롭다. 그때 그 상처는 겉보기에는 아문 것 같지만, 피부 자체가 매우 예민해져 있는 상태가 되어서, 살짝 손가락만 대어도 아파서 펄쩍뛸 것 같았다.
글라스를 비우고 나자 셀머는 비키니로 갈아입었다. 손바닥만 한 뜰로 내려가 일광욕을 할 작정이었다.
타월과 책과 선글라스와 선탠오일을 들고 문을 연 순간, 계단을 올라오는 제이크 레드웨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셀머는 너무나 뜻밖이라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금세 목까지 빨개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러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어디로 갈 참이었나요?" 제이크의 가벼운 말투도 셀머의 긴장을 풀어 주지는 못했다. 그렇기는커녕, 그의 눈이 하얀 비키니만을 입은 자기의 몸을 응시하자 긴장감은 더욱더 고조되었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바닷가에서라면 이보다 더한 초비키니를 입고 있어도 괜찮았겠지만, 이렇게 조용하게 가라앉은 집의 층계 위에서 제이크 레드웨이와 마주치게 되니,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가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셀머는 불안한 듯이 물었다. 제이크는 수수한 차림었다. 통이 좁은 청바지에 몸에 꼭 달라붙는 면 셔츠 차림이었다. 셔츠의 깃 사이로 볕에 그을은 갈색 피부와 가슴털이 보였다.
"데이지가 당신의 주소를 가르쳐 주더군요."
제이크가 한 발짝 내딛자, 셀머는 엉겁결에 뒤로 물러나 방안으로 들어갔다.
"무엇 때문에 나 같은 사람한테......"
방안으로 따라 들어온 제이크는 문을 닫고 거실을 둘러보았다.
"당신은 여기서 혼자 살고 있나요?"
"물론이에요."
그 거친 말투에 제이크가 돌아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화낼 건 없잖아요, 진지하게 묻고 있는 거니까요. 당신은 좀 과민해요, 레이스양. 별 뜻 없이 한 말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려고 들어요."
그의 푸른 눈은 셀머를 비웃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저 눈길이 마음에 안 들어-아니, 제이크 레드웨이, 그사람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몸을 가리듯이 물건을 틀어쥐고 있는 자신이 바보스럽게 생각되어 셀머는 물건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동안 계속 제이크의 파고드는 것 같은 눈길이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묘하게도, 그가 옆에 있으면 그녀는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다보니, 제이크는 아직도 셀머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전에 당신을 어디서 한번 본 일이 있는 것 같은데......어디서였을까?"
셀머는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무슨 일로 오셨지요?" 그녀는 이야기를 돌리려고 얼른 더듬거리며 말했다.
"비키니 차림의 당신......비키니......" 제이크가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군요, 레드웨이씨. 그보다, 폭스 부인한테서 무슨 전갈이라도 있나요?"
제이크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차차 생각나겠지. 그래요, 캐리한테서 당신이 내일 자기의 집에 오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차로 바래다주겠다고 말하러 온 거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기차를 타겠어요."
"바래다주겠다는데 왜 그러지요?"
"난 기차를 좋아해요." 셀머는 밀려드는 불안감과 싸우고 있었다. 차로 바래다준다는데 경계심을 갖다니, 내가 어떻게 된 거야. 하지만 도저히, 몇시간 동안 비좁은 차안에 제이크 레드웨이와 나란히 앉아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바보 같은 말 하지 말아요." 그가 말했다.
"부탁이에요, 레드웨이씨. 정말......"
"아니!" 말투가 갑자기 달라졌다. 푸른 눈이 커졌다. "당신이 누구인지 이제 생각났어." 제이크가 천천히 말했다. "이상하군, 왜 금방 알아보지 못했는지."
제이크는 셀머의 창백해진 얼굴에서 날씬한 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그눈은, 아까처럼 그녀를 어쩔줄 모르게 만드는 섹시한 빛은 띠고 있지 않았다. 그는 쇼크를 받은 것 같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셀머가 혐오감을 느낀 것은, 제이크 레드웨이의 얼굴에 떠오른 깊은 동정심 때문이었다. 셀머는 연민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단호히 물리치려고 했다.
"폭스씨 댁까지 바래다주시겠다는 말씀은 대단히 고마워요. 하지만 난 혼자 가고 싶어요." 셀머는 문을 열고 비켜서서 그가 나가기를 기다렸다.
제이크는 몸을 움직였으나, 그것은 나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셀머가 문의 손잡이를 있는 힘을 다해 틀어 쥐고 있는데도, 그는 그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당신은 금방 알아보았지요?"
셀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네, 바로요."
"그런 내색도 하지 않던데?"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지난 일은 가능한 한 잊어버리고 싶어요."
"그 이튿날 병원으로 문병을 갔는데, 면회를 시켜주지 않더군요. 나는 그날 저녁 미국으로 떠나야 했으니까요. 꽃다발을 놓고 왔는데, 받았어요?"
셀머는 그 꽃다발을 간호사에게 되돌려 주었다. 의아해 하는 간호사에게 셀머는, 그것을 꽃이 없는 다른 입원 환자에게 갖다 주라고 부탁했다. 간호사는 셀머가 보통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 조용히 미소를 띠고 나갔다. 그리고 셀머는 꽃다발에 딸려온 카드를 간호원이 모르게 찢어버렸다. 물론 카드를 읽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기를 구해 주고, 그리고 자기의 인생을 파괴한 남자의 이름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당신 남편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일로 나는 후회를 많이 했어요. 그러나 그때는 전혀 상황을 몰랐기 때문에......이해해 주시겠죠? 물에 빠져 있는 당신을 빨리 건져내야겠다는 생각뿐, 당신한테 동행이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셀머는 눈을 내리깐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는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내가 그 일을 잊고 싶어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그날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고통으로 잡아 찢기는 것 같았다. 끝없는 초록빛 바다.......일렁이는 파도가 머리에 덮쳐든다. 그리고 손가락을 쫙 편 채 내민 갈색의 팔......그것이 필립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울지 말아요." 제이크 레드웨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비로소 셀머는 자기의 눈에 눈물이 괴어 있는 것을 알았다. "당신을 동요시킬 생각은 없었어요."
제이크는 셀머의 어깨에 손을 얹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셀머는 화를 내며 바르작거렸으나, 제이크는 그녀를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마치 우는 아이를 다독거리듯이, 한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자기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 다른 손으로는 다정하게 등을 쓰다듬었다. 그 동작에는 성적인 의미는 전혀 없었으나, 셀머는 몸의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품안에 있는 것이 싫었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그때의 광경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제이크가 셀머를 보트로 끌어올리려고 했을 때, 셀머는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울었다.
"안 돼요! 나보다 필립을 먼저 꺼내 줘요!"
그러나 바람이 셀머의 목소리를 쓸어가 버렸다. 그가 단호한 얼굴로 뭐라고 외치는 것은 알 수가 있었으나, 그 목소리 역시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에 지워져 버렸다.
그러고는 그가 셀머의 얼굴을 쳤다. 그 뒤 며칠 동안이나 그녀의 턱에는 까만 멍이 남아 있었다. 셀머는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보트위에 엎드려져 있었다. 제이크가 옆에 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억센 손이 등에 와 닿는 것을 느끼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그가 말렸다.
"잠깐 가만히 누워 있어요. 당신은 몹시 지쳐 있으니까요. 자켓을 가져오겠소."
셀머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흐느끼면서 일어났다.
"나의 남편 필립이 바닷속에 있어요!"
순간, 제이크 레드웨이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뱃전으로 뛰어갔고, 셀머도 비틀거리며 뒤따랐다. 그녀의 눈은 바다 위를 절망적으로 더듬었다.
"이 근처를 돌아봐 줘요. 그가 어디에 있을 거예요."
보트는 몇 번이나 맴을 돌았으나, 필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여름날의 오후를 즐기기 위해서 두 사람이 타고 있던 보트만이 뒤집힌 채 밑바닥을 보이며 떠 있었다.
제이크 레드웨이가, 더 이상 찾아보아야 헛일이며,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조용히 말했을 때, 셀머는 삵괭이처럼 제이크에게 덤벼들었던 것이다. 나는 보트의 뱃전을 붙잡고 있었으므로 몇 시간이라도 떠 있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를 서둘러 건져낼 필요가 없었다. 보트가 뒤집히는 순간 필립은 멀리 내던져졌다. 그는 헤엄을 잘 못 쳤다. 그는 몇 번이나 보트에 다가오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물결에 밀려나곤 했다-제이크는 심각하게 셀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를 먼저 건지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해주었더라면 필립은......" 셀머는 목이 메고 울음이 복받쳤다.
제이크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쇼크로 머리가 이상해진 줄 알았어요. 미안해요."
그가 어깨에 손을 대려고 하자 셀머는 펄쩍 뛰며 소리쳤다.
"내게 가까이 오지 말아요! 만지지 말아요!"
제이크는 말없이 기슭을 향해 모터보트를 달렸고, 셀머는 모포와 자켓으로 몸을 감고 웅크리고 있었다.
셀머는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 날 필립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다. 셀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그녀의 인생은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필립의 죽음과 같은 불행에 대해서 그녀는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셀머는 아직 어린아이였는지도 모른다. 셀머는 행복한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세상이 장밋빛으로 보였다. 그랬는데,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비로소 셀머는 불행에 대해서도 눈을 떴던 것이다.
셀머는 괴로운 과거로부터 되돌아와 제이크를 밀어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셀머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당신은 아직도 남편이 숨진 게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셀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제이크 탓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고였고, 제이크는 생명의 은인인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다. 그를 보면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참을 수 없는 슬픔과 절망감을 맛보게 된다.
셀머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돌아가 주세요."
순간, 셀머는 제이크가 무슨 말을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셀머는 얼굴을 돌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그가 나가지 않는다면, 나는 이 자리에 쓰러져 울어버릴 것이다. 그의 눈앞에서 자제심을 잃기는 싫다. 그는 거기에 서서 나를 내려다볼 것이다. 소리치고 우는 나를 보트 위에서 내려다보던 그때처럼....... 그 한순간은 생생한 체험으로 마음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나중에 가서야 제이크의 연민이 빛이 서린 눈초리를 생각해 내고 기분이 나빠졌던 것이다. 동정을 받기는 싫다. 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가를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아니, 제이크뿐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
예상과는 달리, 제이크는 아무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셀머는 문을 닫고, 문에 몸을 기댔다. 그러나 몸이 떨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3장
캐롤라인 폭스가 가르쳐 준 기차 시간을 검토한 셀머는, 발차 시각은 늦으나 보통 열차보다 빨리 도착하는 급행을 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은, 안개가 자욱이 끼고, 태양은 진주색 베일에 감싸여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셀머는 좋은 인상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몸치장에 시간을 많이 들였다. 캐롤라인에게는 이미 브래지어와 팬티만 걸친 모습을 들켜 버리고 말았으니 어쩔 수가 없지만, 중요한 사람은 그 차가운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셀머는 이것저것 고르던 끝에 스커트 부분에 주름이 잡혀 있는 하얀 목면 원피스를 택했다. 한쪽 어깨로부터 갈색과 빨간색의 가는 줄무늬가 비스듬하게 내려가고, 빨간 단추가 달려 있었다. 이정도면 디자인이 점잖아 정장다와 보일 것이다.
그녀는 검은 고수머리를 업으로 빗어올리고, 옷 빛깔에 어울리는 입술연지를 칠했다. 이것은 일종의, 제임즈 폭스의 마음에 들기 위한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겉모습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곤 했다. 특히, 그 사람의 내면을 신중하게 판단할 만한 시간이 없는 바쁜 도시인들은.......
셀머는 기차 시간에 늦지 않도록 충분히 여유를 두고 아파트를 나왔다. 문을 닫고 길가로 내려선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못박혀 버렸다. 길 저편에 세워져 있는 차의 운전석에 제이크 레드웨이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는 팔을 뻗어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셀머는 미간을 찌푸리고 걸어갔다.
셀머는 차에는 타려고 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운전석을 들여다보았다.
"레드웨이씨! 말했잖아요, 나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타요." 제이크의 손가락이 핸들을 두드렸다.
셀머는 잠시,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이대로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도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는 차로 뒤따라올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오히려 난처해질 뿐이다. 어제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이렇게 찾아온 것을 보면, 제이크 레드웨이는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셀머는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설득을 해도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밀고 나갈 것이 틀림없다.
셀머는 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이크가 기분 좋은 듯이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레드웨이씨, 난......"
"제이크라고 불러요." 그는 셀머의 말을 가로막았다.
셀머는 그것을 무시했다.
"레드웨이씨, 언젠가는 당신도 자기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그 쇼크가 너무 크지 않기를 빌겠어요."
"매우 친절하군요. 고마워요. 그렇게까지 나는 걱정해 주다니, 정말 감격하겠군."
"자기 멋대로군요!" 셀머는 뾰로통해서 고개를 돌렸다.
"각오하라구, 난 신이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하니까....... 당신, 설마 광신자는 아니겠지요, 레이스양?"
셀머는 그 질문을 무시하고 물었다.
"어떻게 내가 나오는 시간을 알았지요? 아니면, 몇 시간 동안 거기에 차를 세우고 있었던 건가요?"
"그런 일은 간단하지. 나는 기차 시간표를 조사해 봤거든요.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급행을 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거요. 당신의 아파트에서 워털루 역까지 지하철로 30분쯤 걸릴 테니까, 당신이 집을 나서는 시간 정도는 간단히 알 수 있죠."
"매우 영리하시군요!" 셀머는 빈정거렸다. 그러고 제이크의 옆얼굴을 바라본 순간, 셀머는 어떻다고 표현할 수 없는 쇼크를 받았다. 그의 얼굴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으므로 핸섬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때로는 남자다움이 너무나 매력적인 얼굴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햇볕에 그을은 거무스름한 피부와 속눈썹에 반쯤 덮인 푸른 눈, 나른한 냉소를 띤 입술, 의지가 강해 보이는 경직된 턱의 선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자기가 제이크 레드웨이와 단둘이 차를 타고 있다는 일에 생각이 미치자, 셀머는 몸을 떨었다. 모든 여자들이 셀머를 부러워하고, 가능하다면 입장을 바꾸고 싶어할 것이다. 셀머는 지금까지 불행한 추억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유명한 사람이고 성공을 했고 돈도 많고 여자들에게 절대적인 인기가 있는 남자라는 사실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었다.
셀머가 지금까지 제이크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은 매우 단편적인 것이었다. 제이크는 지금까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추억에 연관된 사람이었다. 셀머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무턱대고 그를 싫어하고 있었다. 싫어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때 제이크가 자기를 구해 주지 않았던 편이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과 같이 빠져죽게 내버려 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필립이 없는 인생이란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셀머는 제이크 레드웨이가 돌려준 인생을 주체 못하고 제이크와 함께 저쪽으로 밀어내 버렸었다. 그녀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그에게 엉뚱한 적대감을 돌렸다. 마치 책상에 다리를 다친 아이가 화가 난 김에 책상을 걷어차는 것처럼.......
제이크를 처음 만났을 때 셀머가 느낀 것은 그것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는 유명한 영화 스타인 제이크 레드웨이가 아니라, 셀머를 무자비하게 바다에서 끌어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필립과 이어진 줄을 끊어 버린, 얼굴도 이름도 없는 남자일 뿐이었다.
셀머는 오늘 아침, 그 이미지가 사라져 가고, 대신 제이크의 실상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재능과 자신감에 넘치고, 유머와 강한 의지를 소유한, 절대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섹시한 남자였다.
"아직도 화가 나 있어요?" 생각에 잠겨 있는 셀머의 귀에 장난기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차는 긴 대열에 끼어 천천히 런던 브리지를 건너고 있었다. 다리 아래에는 제이크 레드웨이의 눈처럼 파란 템즈강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셀머는 변명했다. "왜 나를 이렇게 밀턴까지 태워다 주실까 하고요."
제이크는 힐끗 셀머를 보더니, 다시 앞을 보았다. 그 얼굴은 냉담하게 느껴질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오늘은 쉬는 날이고, 시골로 드라이브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셀머는, 제이크와 폭스 부인의 관계가 소문거리가 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물어 보았다.
"오늘은 폭스 부인의 남편이 집에 없나요?"
제이크가 약간 긴장하는 것 같았다.
"글세, 모르겠군요."
셀머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만일 나돌고 있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제이크 레드웨이는 폭스씨가 없는 사이에 폭스 부인을 만나기 위해서 어떤 핑계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난 이용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뭐라구요?"
그 목소리가 너무나 신경질적이었기 때문에 셀머도 벌컥 성이 났다.
"당신이 지금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날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자신을 뭘로 생각하지?" 제이크는 물어뜯을 것처럼 말했다. 핸들을 틀어쥔 손에 힘이 가해지고, 갈색 팔에 힘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나를 멋대로 판단하지 말아요, 레이스양. 왜냐하면,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기 때문이오. 내가 왜 캐리의 집에 가는가 하는 것은 당신이 알바가 아니오.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불쾌한 추측을 하지 말아요. 당신은 무엇이나 흑과 백으로 나누고 싶겠지만, 세상은 중간색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당신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을 뿐이야"
"내가 미숙하다는 뜻인가요?"
"당신 자신의 일에나 머리를 쓰라는 말이오."
"그건 나도 바라는 바예요. 난 당신의 정사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으니까, 그런 일에 나를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셀머는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제이크는 아무 말도 없었으나, 그가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외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셀머는 런던 교외의 잿빛 풍경을 바라보다가, 시계를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좁은 켄트 로드를 벗어나 조지아 풍의 우아한 하얀 집으로 이어지는 자갈길로 차가 들어선 것은, 런던을 벗어난 지 40분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차가 포치 앞에 멈춤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캐롤라인 폭스가 미소를 띠고 나왔다. 레드골드의 머리칼이 하얀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초록빛 눈이 섬세하게 생긴 얼굴에 활기를 주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뛰어오르더니 제이크에게 꼭 안겨 목에 팔을 감고 양볼에 키스했다.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때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으나, 나중에 생각해 보니 예사일이 아니었다. 제이크의 팔이 캐롤라인의 허리를 감싼 일이며, 키스를 받을 때 그가 눈까풀을 반쯤 감았던 것, 또 입가가 긴장되며 괴로움이 깃들인 복잡한 표정이 떠오른 것 등........ 그러고 나서 캐롤라인 폭스는 이쪽을 돌아보며 셀머에게 미소 지었다.
"잘 와 줬어요. 드라이브는 재미있었어요? 목이 마르지요? 제이크는 무서움을 모르는 드라이버니까요."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중상이군."
"달링, 당신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좋아해요. 그것은 당신의 핏속에 설탕인가 뭔가를 증가시키는 일을 하지요?"
제이크는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어깨너머로 셀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마 아드레날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모양이야. 캐리는 이따금 알쏭달쏭한 말을 잘하니까, 적당히 해석해 두는 것이 좋아요."
캐롤라인은 셀머의 몸에 팔을 감으며 미소 지었다.
"그는 여기에 오는 동안에도 내내 저렇게 심술쟁이였지요? 자, 마음 편하게 지내요. 제이크는 유명한 스타일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나의 오랜 친구 도날드 덕에 지나지 않는걸요."
"도날드 덕?"
"그가 도날드 덕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을 듣지 못했어요? 그는 그것으로 유명해요. 제이크, 당신이 얼마나 흉내를 잘 내는지, 지금 셀머에게 들려줘요."
제이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보 같은 소리는 이제 그만해. 아까 목이 마르냐고 묻더니 어찌 되었지? 마실 것을 주기로 했잖아"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곧 드릴 테니까요."
캐롤라인과 셀머는 제이크를 따라, 천장이 높고 조용한 홀로 들어갔다. 벽은 떡갈나무로 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빨간 타일이 깔려 있었으며, 보석을 아로새긴 것 같은 다채로운 카핏이 여기저기 깔려 있었다.
"터키 융단이에요. 작년에 이스탄불에서 사왔어요. 예쁘지요?" 셀머의 시선을 쫓고 있던 캐롤라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이크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방문 저쪽에서 캐비닛을 여는 소리와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자기 집처럼 편하게 있어요." 캐롤라인이 말했다. 셀머는 처음에는 자기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제이크에게 농담으로 던진 말인 것 같았다.
거실은 밝은 초록과 흰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털이 긴 융단은 하얀 색이었고, 커튼은 초록색이었으며, 소파는 그 두 가지 색을 복합한 것이었다. 우아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벽에는, 가족이나 친구들의 사진이 들어 있는, 은으로 테두리를 한 액자들이 걸려 있고, 초록색과 분홍색 갓이 달려 있는, 도기로 된 테이블 램프가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무엇을 마시겠어요, 셀머?"
"드라이 셰리를 부탁해요."
"마드레느는 지금 주방에서 식사중이에요." 캐롤라인이 글라스를 건네면서 말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인데" 제이크가 놀렸다.
"하지만 많이 진보했어요. 얼굴에 비벼 대는 것보다 입안에 집어넣는 양이 훨씬 많아진걸요. 앉으세요, 셀머. 그렇게 서 있으면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해요."
셀머는 셰리가 담긴 글라스를 손에 쥔 채 살며시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제이크는 동물원의 곰처럼 방안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셀머의 앞을 지날 때는, 그녀에게 힐끗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차 안에서의 말다툼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는 모양이었다.
"일에 관한 이야기는 식사 전에 할까요, 아니면 식사 후에 할까요?" 캐롤라인이 셀머의 옆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글쎄요, 난......"
"빨리 결정짓고 싶은가보군요. 나도 찬성이에요. 나는 낮 동안 마드레느를 돌보는 일을 거들어 줄 사람이 필요해요. 문제는......나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는데, 날마다 당신을 런던에서 다니게 할 거냐고 제임즈가 묻더군요. 그제야 비로소 그 문제에 생각이 미쳤어요. 가차 편은 얼마든지 있지만, 시간과 차비며 노력이 많이 들겠지요. 그러니 당신만 괜찮다면, 빈 방이 있으니까 우리 집에 있어도 좋을 것 같군요. 물론 주말과 밤에는 자유롭게 행동하셔도 좋아요."
"출퇴근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정말 폐가 안된다면 평일엔 여기에 묶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요? 반갑군요. 제임즈는 너무너무 일이 바빠서, 평일에는 거의 얼굴을 볼수 없을 정도예요. 당신이 말상대가 되어 주겠군요. 아기를 다루어 본 경험은 있으세요?"
셀머는 망설였다.
"조카가 두 명이나 있거든요. 그 아이들을 돌본 경험이 있어요."
"이따금 마드레느를 맡기고 외출해도 괜찮겠어요? 솔직하게 대답해 주면 좋겠어요. 가끔 시내에 나가 남편이나 데이지, 또 다른 친구들과 점심이라도 같이하고 싶거든요."
"마드레느가 나를 따르게 되면, 혼자서도 가능할 거예요." 그 친구란 제이크 레드웨이를 말하는 것일까? 아이로부터 벗어나 그와 몰래 데이트라도 즐길 속셈인가? 셀머는 캐롤라인의 눈을 보았다. 그 눈은 어린아이의 눈처럼 맑고 밝았다. 제이크를 쳐다보니, 그는 글라스에 시선을 떨구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면, 이제 보수에 대해서 상의를 해야겠군요."
캐롤라인이 제시한 금액에 셀머는 놀랐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셀머가 그만하면 만족한다고 말하자, 캐롤라인은 안심한 듯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다행이군요. 달리 물어 보고 싶은 일이라도?"
샐머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나지 않아요." 셀머는 캐롤라인과 제이크의 관계가 궁금했지만, 그런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자연히 진상을 알게 되겠지, 연인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비밀스런 사인을 보내지 않고는 못 배기니까.
"그럼, 우리 마드레느를 만나 줘요." 캐롤라인이 일어섰다.
셀머는 주방으로 향하면서, 점심은 어색한 분위기에서 들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묘하게도, 이 두 사람과 같이 있으면 침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볼 때마다, 괜히 셀머까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편과 연인이라는 두남자의 틈에 끼어 있는 캐롤라인이 불쌍했다. 그녀가 남편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행복한 상태는 아닐 것이다. 하루하루가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겠지? 그 탓일까, 캐롤라인이 이따금 그렇게 애처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주방은 현대적인 시설이 갖추어진 밝은 방으로, 두 방향으로 열려진 창문으로부터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흰머리의 여자가 개수대에서 무엇인가를 씻고 있었으며, 베이비 체어에 여자아이가 앉아서 엎어놓은 플라스틱 머그를 스푼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셀머가 쳐다보자, 아이는 조그맣고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기 때문에 셀머는 금방 아이가 좋아졌다. 마드레느 폭스는 겨우 두 살이었지만, 이미 나름대로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를 빼쏜 델리키트한 하트형의 얼굴, 커다란 갈색 눈. 헝클어진 까만 고수머리에는 라이스 푸딩 조각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레이스가 달린 에이프런에는 더 많은 푸딩이 으깨어져 붙어 있었다. 마드레느는 식사를 즐긴 것 같았다. 어머니가 가까이 가자 아이는 기쁜 듯 스푼을 꼭 잡고 머그를 세게 내리쳤다. 그바람에, 머그가 쟁반에서 굴러 떨어졌다.
"셀머에게 '안녕'이라고 해요, 마드레느!" 캐롤라인이 딸을 안아올리고 말했다.
셀머가 미소를 띠자, 마드레느는 쥐고 있던 스푼을 내밀었다.
"고마와요." 셀머는 보물이라도 받은 듯이 사례를 했다.
캐롤라인이 딸을 셀머에게 더 가까이 내밀려고 하자, 마드레느는 캐롤라인의 목에 감은 팔에 힘을 주어 꼭 달라붙었다.
"이 아이는 수줍음을 잘 타서요." 캐롤라인이 말했다.
"두 살쯤 된 아이들은 모두 그래요." 셀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캐롤라인은 가정부인 미세스 카터에게 셀머를 소개했다.
"마드레느는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자요. 한 시간쯤 조용한 시간이 찾아오는 셈이지요. 언제나 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침대에서 얌전하게 있어 주기는 해요." 캐롤라인은 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이제 식사를 차려도 좋아요?" 미세스 카터가 물었다.
"네, 부탁해요, 카터부인. 나는 마드레느를 재우고 오겠어요."
마드레느의 방은 커튼을 닫아 어둑어둑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캐롤라인은 조그만 구두를 벗긴 후 핑크빛 침대에 누이고, 커다란 봉제 인형을 안겨 주었다. 마드레느는 그것을 꼭 껴안았다. 캐롤라인은 딸의 볼에 키스를 하고, 두 여자는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방을 나왔다.
"여기가 당신이 쓸 방이에요." 캐롤라인은 복도의 막다른 방문을 열었다. 흰색과 라일락색으로 배합된 차밍한 방으로, 셀머의 하숙집 침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우아했다.
"마음에 들는지 모르겠군요."
"훌륭한 방이군요. 초라한 내 방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너무 좁아서 친구도 따로따로 부르고 있어요."
캐롤라인은 웃었다.
"상상할 수 있어요. 배우 지망생들이 살고 있는 하숙은 지금도 기억이 나요. 좁고 지저분하고, 언제나 캐비지와 소독약 냄새가 나고 있었어요."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캐롤라인의 눈에는 대기실을 찾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따뜻함이 넘치고 있었다.
"일을 그만둔 것을 후회하는 적은 없으세요?"
"언제나 후회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일과 가정을 양립시킬 자신이 없어요. 양쪽 다 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도저히 몸이 지탱을 못할 것 같아요. 첫째로 제임즈가......" 캐롤라인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초록빛 눈에 그늘이 졌다. "가요, 식사준비가 되어 있을 거예요."
층계를 내려가면서 캐롤라인이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방금 생각이 났는데, 우리 집에 묵는 것 때문에 당신의 사적인 생활이 침해를 당하는 건 싫어요. 혹시 당신의 보이프렌드가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언제든지 환영하겠어요."
"고마와요." 셀머는 일단 그렇게 대답해 두기로 했다. 실제로는 특별한 보이프렌드 같은 것은 한명도 없었다. 최근 2년 동안 이따금 데이트를 하는 일은 있었으나, 상대방에게 특별한 인상을 받은 일은 없었다. 셀머는 연애에 대해서 매우 진지하고, 완전함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 없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기 보다는 혼자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식사는 테라스에 내놓았습니다." 주방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세스 카터가 말했다.
"고마와요, 카터부인. 제이크, 식사하세요."
캐롤라인이 거실을 향해 부르다, 제이크가 나왔다.
"당신 참 멋지군요." 얇은 천으로 된 잿빛 슈트에, 같은 빛깔의 좀 더 얇은 실크 셔츠를 받쳐 입은 제이크를 보고 캐롤라인이 말했다. "이제부터 어디에 갈 예정이에요?"
"교외에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차리고 나온 거야" 제이크는 놀리듯이 말하며 친근감이 담긴 눈으로 캐롤라인을 쳐다보았다. "당신도 상당히 아름답군."
"난 엉망이에요. 머리도 헝클어져 있고, 드레스는 벌써 몇 번이나 세탁소를 드나든 거예요."
그러나 드레스는 그녀의 날씬한 몸에 아주 잘 어울렸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앞서서 걸어가고, 셀머는 그 뒤를 따라 터덜터덜 걸어갔다. 어쩐지 따돌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은 미소를 띤 채, 자기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약어를 쓰면서 얘기하고 있었다. 상대방에 대해 서로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한 친근감이 왠지 모르게 셀머를 짜증나게 했다.
이렇게 다정스런 두 사람을 보면 캐롤라인의 남편은 어떤 생각이 들까? 두 사람을 거의 모르는 나까지도 질투와 같은 감정에 몰리는데.......
세 사람은 바닥이 돌로 된 테라스로 나갔다. 돌난간이 반원형으로 테라스를 에워싸고, 그 저쪽에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빨강과 초록 줄무늬의 파라솔 밑에 테이블이 놓여 있고, 테이블 위의 나무 그릇에는 샐러드가 수북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이프와 포크, 오렌지와 체리로 장식된 배 모양의 멜론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캐롤라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셀머, 당신이 가운데 앉아요. 그렇게 하면 두 사람 다 당신하고 이야기 할 수가 있으니까"
제이크가 흰색의 철제 의자를 꺼내 주자, 셀머는 그의 눈을 피하면서 파라솔과 같은 천으로 만든 보드라운 쿠션 위에 앉았다. 두 사람은 그녀의 양옆에 앉았고, 제이크는 얼음을 채운 은으로 된 아이스 페일에서 백포도주를 꺼냈다. 그는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맛이 좋군. 이건 뭐지?"
"샤토브리앙이에요. 이거면 돼요, 셀머?"
"난 와인에 대해서 잘 몰라요."
그 말투가 조금 무뚝뚝하다고 느껴졌는지, 제이크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져왔다. 그러고는 포도주를 세 개의 글라스에 따랐다.
"당신의 이번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해 줘요." 캐롤라인이 재촉했으나, 제이크는 쌀쌀하게 받아넘겼다.
"장사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하지."
멜론은 시원하고 향기가 좋았다. 두 사람은 데이지를 화제에 올렸다.
"데이지도 아기를 낳으면 좋을 텐데. 결혼한 지 2년이나 됐는데, 언제까지 미룰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게 아니야. 데이지는 어른이야. 그런 일은 그녀가 알아서 할 거야"
셀머는 제이크를 힐끗 보았다. 그도 미소를 띤 눈으로 셀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차 안에서 셀머에게 한것과 거의 똑같은 설교를 캐롤라인에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은 분명히 옳았다. 남의 삶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잘못이다.
미세스 카터가 멜론 접시를 걷으러 왔다.
"잘 먹었어요." 캐롤라인이 이렇게 말하자, 다른 두 사람도 같은 뜻을 표했다.
다음에는 모두 샐러드와 햄을 접시에 담았다. 드레싱은 캐롤라인의 솜씨라고 했다.
"마늘은 넣지 않았어요. 당신의 <사랑의 생활>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요."
"사랑의 생활이라니, 무슨 뜻이오?" 제이크는 짙은 속눈썹을 깜박거렸다. 눈이 웃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나와서 바로 배우 양성소에 들어갔어요, 셀머?" 커피를 마시며 캐롤라인이 물었다.
"아니요, 한동안 오빠의 가게 일을 거들었어요. 오빠는 골동품 가게를 하고 있거든요."
셀머는 짧았던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이크 레드웨이가 자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가 그 이야기를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돈을 모으기 위해서였나요, 아니면 다른 사정 때문에 금방 양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나요?"
"시간을 벌고 있었어요." 셀머는 말을 돌렸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는 결혼을 기다리고 있었다. 셀머의 부모는 딸이 20세가 될 때까지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셀머와 필립이 처음 만났을 때 필립은 25세였고, 7세의 차는 너무나 크다고 부모는 생각했던 것이다. 필립이 죽고 보니, 그 2년간의 손실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셀머는 부모를 몹시 원망했었다.
필립이 죽고 나서 처음 몇 달 동안은, 언젠가는 다시 웃게 된다, 살아 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는 친구들의 말이 셀머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투명한 물속에 까만 잉크가 가라앉듯이, 슬픔이 셀머의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위로나 뒷받침을, 부모가 아닌 오빠 내외에게 바랐다. 오빠 역시, 결혼이 너무 이르다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누이동생에게 동정적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캐롤라인이 일어섰다.
"뜰을 구경하겠어요, 셀머? 지금이 제일 보기가 좋은 때예요."
그러나, 두 사람이 막 일어섰을 때, 캐롤라인은 놀란 듯이 발을 멈추고 테라스를 향해 열려 있는 프랑스 창을 바라보았다.
"제임즈! 일찍 돌아왔군요. 재판이 일찍 끝났어요? 결과는 어땠어요?"
커튼 사이로 키가 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셀머는 흥미 있게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저 사람이 제임즈 폭스인가? 가는 줄무늬 슈트에 푸른 줄무늬가 있는 단정한 셔츠, 검푸른 넥타이....... 빈틈없는 차림이었다. 머리는 검고, 눈은 햇빛 때문에 무슨 빛깔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눈은 눈꺼풀 밑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셀머는, 캐롤라인의 남편은 나이가 들고, 별로 매력이 없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침울한 얼굴을 한, 등이 굽은 변호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제임즈 폭스는 매우 핸섬한 남자였다. 조각같이 다듬어진 얼굴에는 위엄이 깃들여 있었다. 그러나 그 위엄은 칼날 같은 차가움이 풍기는 것이었다.
"재판은 이겼어." 제임즈는 조용하게 말하고, 허물없는 모습으로 의자에 기대고 있는 제이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이크는 그를 향해 미소 지었는데, 그 미소에는 멸시의 빛이 희미하게 서려 있었다. 그때 셀머는, 제임즈 폭스는 늘 이기고만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법정 안에서든 밖에서든 언제나 패배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물인 듯 싶었다. 그것은 그의 인격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런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롤라인은 야단맞은 어린아이처럼,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하고 있었다. 셀머는, 어쩌다가 이런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되었나 하고 후회가 되었다. 이집은 마치 깊은 강물위에 걸려 있는 다리와 같다. 조심해서 발을 내딛지 않으면 물속으로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만일 다리가 부러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세 사람 사이에 감돌고 있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감에, 셀머는 참을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지금은 나는 제삼자로서 이들을 바라보고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여기에 입주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나도 이 삼각관계 속에 끌려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 생각에 셀머는 몸을 떨었다.
4장
"어째서 말해 주지 않았어요?" 카렌은 빌리의 와이셔츠를 힘주어 다리면서 비난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셀머는 이따금, 올케가 어떻게 이 모든 일을 해나갈 수 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가게 위층에 있는 살림집을 이끌어 가고, 아이들을 쫓아다니고, 그리고 가게 일을 거든다. 감탄하면서 바라보는 동안, 카렌은 모든 일을 혼자서 척척 해나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듯이....... 바쁜 생활이 그녀의 성미에 맞는 것일까?
"글쎄요,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셀머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자기를 바다에서 건져 준 사람과 재회했다는 사실을 왜 올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제이크 레드웨이라니...! 그의 사진은 본 일이 있을 거 아니에요? 벌써 옛날에 알아차렸을 법한데"
"나는 한번도 그의 사진을 본 일이 없어요. 설령 보았다 해도 몰랐을 거예요. 실물을 보고도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는걸요."
"어쨌든, 뒤로 나자빠질 일이에요." 카렌은 다림질을 끝마친 옷가지 위에 방금 다린 와이셔츠를 놓았다. 그녀는 일련의 작업을 발레라도 추듯이 거침없이 유연하게 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삼각관계라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일이 못되는 것 같군요. 폭스씨라는 분은 꽤나 억센 사람일 것 같은데요?"
"좀 무서운 사람이에요. 하지만 난 캐롤라인을 좋아하고, 그 집 아기도 참 귀여워요. 일단 맡은 이상,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할 수는 없어요."
"한데, 그게 사실이에요?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것이....... 그저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닐까요?"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요. 난 사실은, 그들의 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어요. 그렇다고 본인들한테 직접 물어 볼 수도 없고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란, 제임즈가 제이크를 볼 때, 마치 샐러드에서 지렁이가 나온 것 같은 얼굴을 한 일뿐이에요. 제이크는 제이크대로, 때릴 테면 때려 보라도 하는 얼굴이었어요. 그 미소는 싸움을 거는 거나 같았어요. 진실은 알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폭스씨는 아가씨에 대해서 어땠어요?" 카렌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예의바르게 대해 주더군요." 셀머는, 제임즈 폭스의 평가하는 듯한 눈초리와 굳은 악수와 조심스런 태도를 떠올렸다. "그가 날 좋아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만일 마음에 안 들었다면 더 차가운 태도로 나왔을 거예요. 그러니 난 일단 합격은 한 셈이에요."
"별로 일하기 편한 직장은 아닌 것 같군요."
"그렇지도 않아요. 폭스씨는 바빠서 평일에는 거의 집에 없대요. 그러니 그를 만나지 않고도 지낼 수 있어요."
"언제부터 일을 시작하지요?"
"내일부터예요."
문득, 사이드보드 위에 놓여 있는 사진에 눈길이 멈추자 셀머는 말을 멈췄다. 그중의 하나는, 셀머와 필립의 결혼사진이었다. 신부의 베일이 바람에 나부껴 얼굴을 가리려고 하는 것을, 필립이 웃으면서 손으로 걷어 올려 주고 있는 장면이었다. 셀머는 온몸이 싸늘해져 가는 것을 느끼면서 사진을 집어, 필립의 반쯤 가려진 얼굴을 보았다. 켈트족의 갸름한 얼굴, 맑고 푸른 눈, 단정한 입매. 필립은 매우 조용한 사람이었다. 고집이 센 면도 있었지만, 언제나 이해심이 많았다. 그는 2년을 기다리라는 부모의 말을 타당하다고 여겨,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셀머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에 대해서 느끼고 있었던 누를 길 없는 충동을, 필립 역시 나에게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 처음으로 셀머의 마음속에서 그런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셀머는 정열적으로 그를 사랑했으나, 필립은 언제나 차분하고 어른스러웠다.
셀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사진을 제자리에 놓고 창문 앞으로 가서, 가게 뒤란의 돌이 깔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서는 조카들이 놀고 있었다. 조카들을 보는 순간 마드레느가 생각났다. 셀머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조그만 계집아이를 돌보는 일은 무척 즐거울 것 같다. 그 집안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캐롤라인의 남편 제임즈 폭스가 집에 돌아오자 셀머는, 자기도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고집했던 것이다. 동행한 제이크의 얼굴에 떠오른, 지워지지 않는 놀림과 모멸의 표정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제임즈가 차라리 제이크의 얼굴을 한 대 갈겨 주었더라면, 제이크에게는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캐롤라인이 너무 불쌍하다. 셀머는, 제이크와 함께 빨리 그 집을 나오는 것이 현명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어요?" 카렌이 곁으로 왔다.
"그저 놀고 있어요. 하지만 참 행복해 보여요. 아이들이 부럽군요. 다시 한번 다섯 살 난 아이로 돌아가 뛰어놀고 싶어요."
"로맨틱한 생각이군요! 하지만 그 또래처럼 파괴적인 시기도 없어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내부에서는 나쁜 꾀며 질투며 노여움이 소용돌이치고 있어요. 아이들은 늘 싸우지 뭐예요. 누가 더 큰 사과를 먹나, 더 좋은 로보트을 가지나, 더 재미있는 만화책을 집나 하는 일 따위로요. 아가씨도 자기 아이를 가지게 되면 알게 될 거예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여러 가지를 발견하게 될 거예요. 아가씨는 무척이나 환멸을 느낄 거예요!"
이튿날 아침, 셀머가 기차를 타고 밀턴에 도착하니, 캐롤라인이 차로 마중 나와 있었다.
"고마와요. 택시를 탈 생각이었어요."
"살 물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나온 거예요. 자, 어서 타세요."
집들이 띄엄띄엄 서 있는 나지막한 언덕을 내려가자 마을이 보였다. 그것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땅속에서 솟아났다고 하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런 마을이었다. 크기와 모양과 연대가 제각기 다른 집들이 서로 지붕을 맞대고 있거나, 약간 사이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생나무 울타리에 에워싸인 널찍한 뜰을 가진 집도 있었고, 하얗게 칠해진 목책으로 에워싸인 손바닥만 한 뜰이 있는 집도 있었다. 가게가 몇 채 늘어서 있는 곳을 지나자, 높은 뾰족탑이 있는 교회와 초등학교가 보였다.
캐롤라인은 앞을 달리는 우유 운반차의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차를 몰고 있었다. 연변의 풍경을 설명해 주기도 하고, 지나가는 차의 여자 드라이버에게 손을 흔들기도 했다.
"이고장 사람들은 참 친절해요." 그녀는 셀머에게 설명했다. "남자들은 대부분 시내로 일하러 나가지요. 아홉시부터 다섯 시까지는 여자들 세상이랍니다. 65세 이하의 남자는 좀처럼 구경하기 어려워요, 가게를 보는 사람 말고는요."
마을을 지나 우유 운반차와 헤어지자, 캐롤라인은 스피드를 내기 시작했다. 차는 곧 폭스가의 문을 들어섰다.
"마을까지 가까운 편이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셀머도 슈트케이스를 들고 뒤따랐다.
거실에 들어가니 미세스 카터가 벽난로 앞에 놓인 스툴에 앉아 벽난로를 열심히 닦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핑크빛 색감의 옷을 입은 마드레느가 바닥에 주저앉아 놀고 있었다. 마드레느는 캐롤라인의 모습을 보자 벌떡 일어나서 구르듯이 뛰어왔다.
"셀머한테 '안녕' 하고 말해 봐, 달링"
"우......" 마드레느는 입을 오물거렸다.
캐롤라인은 딸의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 조그만 인형의 머리를 꺼냈다. 플라스틱으로 된 머리는 으깨어져 있었다.
"지켜보지 않으면 마드레느는 무엇이나 입에 넣어 버려요." 캐롤라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커피를 끓일까요?" 미세스 카터가 스툴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부탁해요. 셀머, 먼저 방에 올라가 슈트케이스를 놓고 오지 않겠어요?"
캐롤라인을 따라 층계를 올라가 방으로 들어가 보니, 테이블 위에 꽃이 풍성하게 꽂혀 있었다.
"어머나, 정말 예쁜 꽃이군요."
"카터부인이 아침 일찍 꺾어다 꽂아 놓았어요. 혹시 침실에 꽃이 있는 것이 싫지 않아요? 향기가 좋지 않으면, 밤에는 욕실에 옮겨 놓아도 돼요."
셀머는 커다란 도기 꽃병에 꽂힌 꽃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반쯤 핀 핑크빛과 진홍색 장미, 패랭이꽃, 하얀 카네이션, 군청색의 비연초.......
"꽃을 무척 좋아해요. 햇빛을 받고 자란 꽃은 온실에서 재배한 것과는 전혀 다른 향기가 나는군요."
캐롤라인은 방긋 웃었다.
"당신이 와줘서 반가와요. 연극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에요. 가끔 그 세계가 무척 그리울 때가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상대가 있어야지요. 이곳에도 친구는 있지만, 그녀들은 극장에 갈 때 단지 쇼를 보러가는 기분으로 가지요. 서커스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요. 배우들은 피에로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재주를 부리는 돌고래라든지......" 셀머는, 제이크 레드웨이가 생각나 웃으며 덧붙였다. "아니면, 우리에 들어 있는 사자일까요?"
그날 점심식사가 끝나자 캐롤라인은 좀 쉬어야겠다며 마드레느를 안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셀머는 접시 닦는 일을 거들고 난 뒤 약 10분 가량 뜰을 산책했다. 손질이 잘된, 전형적인 영국식 정원이었다. 짙은 장미 향기가 주위에 가득 차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 오후라서 그런지 새들의 울음소리조차도 나른하게 들렸다.
집안으로 들어와 이층에 올라가 보니, 캐롤라인은 볼그레해진 볼 밑에 손을 대고 몸을 구부린 채 잠들어 있었다. 셀머는 마드레느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부인은 주무시고 계세요." 셀머는 미세스 카터에게 말했다.
"그거 다행이군요. 한 시간이라도 누워 계시라고 권해도 좀처럼 말을 들으셔야죠. 그래 봬도 무척 강단이 있어요."
"마드레느를 잠시 데리고 나가겠어요. 멀리 가지는 않겠어요."
"그럼 모자를 씌우세요. 햇살이 따가울 것 같군요."
셀머는 마드레느를 유모차에 태워 천천히 밀고가고 있었다. 마드레느는 다리를 움직이며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표정으로 보아 마드레느가 산책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비가 푸른 하늘을 가르며 나는 것을 보자 셀머도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이 근처의 풍경은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30분가량 지나 셀머는 돌아가기 시작했다. 집이 보이는 데까지 오자, 한 대의 차가 조용히 다가와서 멈췄다. 마드레느가 먼저 운전석의 남자를 알아보았다.
"아빠, 아빠! 자동차, 자동차, 아빠!"
"정말 아빠시구나, 달링" 셀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차에서 내려 다가오는 자기 아버지를 보고 마드레느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으나, 셀머는 동감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산책하고 있었니?" 제임즈 폭스가 딸을 안아 올리며 말했다.
셀머는 그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마치 딴사람 같았다. 그 냉철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아주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딸의 보드라운 볼에 살짝 키스했다.
"차를 타겠니?"
"자동차, 자동차!" 마드레느는 대찬성인 것 같았다.
제임즈 폭스는 셀머를 돌아보았다.
"레이스양, 유모차를 접을 수 있으면 집까지 같이 타고 갈까요?"
셀머는 서둘러 유모차를 접고, 마드레느를 무릎에 안고 뒷좌석에 앉았다. 제임즈 폭스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차는 문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의 엄격한 얼굴에 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집사람은 외출했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니에요. 우리가 집을 나올 때 주무시고 계셨어요." 셀머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제임즈가 자기 아내의 행동에 의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그것은 그저 단순한, 대화를 위한 질문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제임즈는 긴 속눈썹 사이로 힐끗 셀머에게 시선을 던지며 미소를 지었다. 뜻밖에 매력적인 미소였다.
"그거 반가운 얘기군요. 아내는 빈혈이 약간 있어서요, 철분을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나 대신 당신이 좀 마음을 써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어요." 셀머는 불안해졌다. 철분을 먹는지 어떤지 하는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으나, 다른 의미의 스파이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레드웨이씨와는 오랫동안 교제를 하셨나 보죠?"
"제이크말인가요?" 셀머는 얼굴이 금세 붉어지는 것을 느끼고,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났다. 더구나 제임즈가 그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더 화가 났다. 셀머는 어쩔 줄 몰라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그는 오래 전에 내 목숨을 건져 주어서......" 하고 말하다가, 얼굴이 더욱 붉어져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다 털어놓고 있는 것일까?
차가 집앞에 멎자, 제임즈 폭스는 핸들에 팔을 얹고 셀머를 돌아보았다. 그 눈초리는 매우 날카로와,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 사람하고는 자주 만납니까?"
"아니요, 그 뒤로는 한번도......" 하고 말하다가, 셀머는 자기가 또 필요 이상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그에 대해서 거의 몰라요." 제임즈는 나를 제이크의 여자 중의 한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셀머는 그런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그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남잡니다." 제임즈 폭스는 이렇게 말하고, 그 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셀머를 남겨 두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셀머도 폭스가에서의 생활에 차츰 익숙해져 갔다. 캐롤라인은 날씨가 좋으면 마드레느에게 바깥바람을 쐬어 주고 싶어 하기 때문에, 세 사람은 한낮의 대부분을 뜰이나 시골길을 산책하며 지냈다. 햇빛을 받으며 많이 움직인 탓인지, 캐롤라인과 마드레느는 낮잠을 잘 자게 되었다. 그들이 낮잠을 자는 동안 셀머는 비키니 차림으로 잔디에 뒹굴며, 지금까지 겨를이 없어서 못 읽었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다.
다행히도 제임즈 폭스하고는 거의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셀머가 자기 방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나 귀가했으며, 아침이 되어 셀머가 아래층에 내려가 보면 그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캐롤라인은 자기의 사생활에 대해서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타입으로, 남편이나 제이크에 대한 얘기를 입에 올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셀머는 더욱더 캐롤라인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마음이 따뜻하고 정적이었으며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으므로, 누구나 금방 그녀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임즈 폭스는 아내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사람이었다. 캐롤라인이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나, 하여튼 그녀는 매사에 남편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편이 기분이 언짢은 듯 이마에 주름을 잡으면 그녀는 금방 몸을 움츠리는 것이었다.
셀머가 이 집에 온 지 2주가 되는 어느날 오후였다. 제임즈 폭스는 드물게 일찍 돌아왔다. 홀에서 제임즈가 마드레느를 안아 올려 어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셀머가 수화기를 집어 들자, 뜻밖에도 제이크 레드웨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셀머는 새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캐롤라인을 바꿔 드릴까요?"
제이크의 메마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당신한테 볼일이 있어서 건 거요. 제럴드의 최신작 <첫날>을 보러 가지 않겠소?"
셀머는 상반된 두 마음 사이에서 망설였다. 처음 떠오른 것은, '아니, 난 가고 싶지 않아요' 하고 말하며 수화기를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연극을 보고 싶은 마음도 그에 못지않게 강했다. 알렉스 제럴드는 셀머가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였다. 그리고, 잘 아는 배우가 그 연극에 나오는 것도 흥미가 끌리는 이유중의 하나였다. 그는 셀머가 양성소에 들어갈 때 오디션의 심사위원이었으며, 그 뒤 몇 번인가 데이트를 한일도 있었다.
셀머가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자 제이크 레드웨이는 짜증난 듯이 말했다.
"여보세요, 듣고 있어요?"
"네, 미안해요.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요. 초대해 주셔서 고맙군요."
"그러면 가겠다는 거요, 안 가겠다는 거요?"
무엇 때문에 제이크는 나를 초대하려 하는 것일까? 나에게 개인적인 흥미 같은 것은 보인 일도 없는데. 아마 이것도 캐롤라인 폭스에 관계된 카무플라즈의 하나겠지. 거절해 버릴까? 그러나 제럴드의 연극을, 그것도 <첫날>을 놓치기는 싫었다.
"고마와요......"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하자, 제이크가 빠른 소리로 가로막았다.
"좋아요, 그럼 내일 네 시 반에 마중 가겠소. 극장에 가기 전에 가벼운 식사라도 합시다. 그럼 내일 봐요."
"레드웨이씨......" 셀머는 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셀머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가 나를 초대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을 핑계로 캐롤라인을 만나러 오는 것이다. 셀머는 그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었다.
홀로 돌아오니, 폭스 부부는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뭐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요?" 캐롤라인이 물었다.
"제이크의 전화였어요. 알렉스 제럴드의 연극을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순간, 캐롤라인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조용한 수면에 인 잔물결과 같은 것으로, 금방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 표정의 의미를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제임즈 폭스는 눈을 가늘게 떴으나, 셀머가 그를 본 순간 그는 얼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는 포커페이스를 꾸미는 데 능숙한 남자였다.
그러나,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은 제임즈뿐이 아니었다. 캐롤라인도 갑자기 열심히 제럴드의 연극에 대해서 지껄이기 시작했다.
"당신은 운이 좋군요. 그것은 제럴드의 작품 중에서 가장 걸작이라고 평판이 난 작품이에요. 아마 눈부신 저녁이 될 거예요."
그런데, 캐롤라인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그 순간 캐롤라인의 얼굴을 스친 것은 무엇이었을까-질투, 놀라움, 노여움? 아니면, 덫에 걸린 자에 대한 동정심이었을까?
대단한 사람들이군-셀머는 생각했다. 사람을 이용하고, 뒤에서 히죽거리고....... 정말 잘들 하고 있어! 셀머의 가슴은 노여움으로 들끓었다. 내가 그런 얼빠진 역할을 기꺼이 할 거라고 생각하나 보군. 어쩌면 그렇게 뻔뻔스런 신경을 가지고 있을까?
"내일은 런던에서 묵는 것이 좋을 겁니다. 연극이 끝나고 여기까지 오려면 너무 늦으니까......" 제임즈가 그렇게 말하고 딸을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캐롤라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어요. 내일은 런던에 묵는 편이 나을 거예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셀머는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강한 충동에 몰렸다. 나도 연기자다. 셀머는 자기의 감정을 누르고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제이크도 그러기를 원할 거예요!"
캐롤라인은 숨을 삼키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그말을 셀머가 의도한 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캐롤라인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셀머는 자리를 떴다. 제이크는 캐롤라인과의 정사를 카무플라즈하기 위해 언제까지 나를 이용할 작정인가? 단지 데이트만 청할 뿐일까, 아니면 거짓말에 약간의 진실성을 보태기 위해서 나를 침대로 유인할까?
셀머의 얼굴은 혐오감으로 굳어졌다. 나는 절대로 제이크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거야. 그는 내게 있어서는 낡은 양말 정도의 매력밖에는 없는 존재니까. 나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댄다면, 한 달쯤 입이 부어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줄 테다. 제이크 레드웨이는 누구한테 한번 혹독하게 당할 필요가 있어.
이튿날 오후 제이크가 올 때까지, 셀머는 계속 속을 끓이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로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쾌활하고 거침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캐롤라인이, 모든 일이 잘 되어 가고 있다는 듯이 미소 짓고 지껄일 수 있다면, 나라고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셀머는 자기가 줄곧 캐롤라인을 관찰하고, 그녀의 가벼운 미소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아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약이 오르는 일이지만, 우리는 경쟁하고 있다-그것은 셀머에겐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캐롤라인을 상대로 연기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더구나 제이크 레드웨이를 빼앗으려는 마음도 없었다.
제이크의 차가 문을 들어선 것은 네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그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셀머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캐롤라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이크는 자신을 영리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셀머는 그 정도의 일은 미리 꿰뚫어 보고 있었다.
셀머는 일부러 사람의 눈길을 끄는 불꽃같은 빛깔의 태피터 드레스를 택했다. 깊이 팬 네크라인, 레이스가 달린 소매, 화려한 레이어드 스커트....... 목에 건 묵직한 브론즈 네크리스가 뿜는 둔한 빛이 요사이에 밀빛으로 탄 매끄러운 살결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눈두덩에 푸른 아이새도를 엷게 칠하고, 긴 속눈썹에 공들여 마스카라를 하고, 입술에는 드레스와 같은 빛깔의 루즈를 칠했다. 방금 감은 머리가 부드럽게 물결치며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며 셀머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사람들은 내가 제이크 레드웨이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치장한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다. 난 나 자신을 위해서 꾸민 것이다. 어떤 여자라도 사랑을 카무플라즈하는 데 이용당하면 약이 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저녁에 기회가 오기만 하면 제이크에게 쏘아붙여 줘야지. 하지만 그때 나는 초연한 자세를 보이고 싶다. 캐롤라인을 질투하고 있다는 따위의 생각을 갖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완전무장을 한 뒤에 제이크의 뒷덜미를 잡고 그를 규탄하고 싶다.
셀머는 향수 냄새를 풍기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오빠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값비싼 향수를 있는대로 쏟아서 뿌렸다.
층계 아래까지 내려왔을 때, 거실 쪽에서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캐롤라인이 갈라진 소리로 웃으며 뭐라고 조그맣게 말하고 있었다.
"바보군, 캐리....." 제이크의 목소리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셀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그대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저렇게 속삭일 수 있을까. 문을 열자, 셀머는 자기가 방에 들어선 코끼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두 사람의 속삭임을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창문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손이 닿아있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서로 원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창문을 배경으로 검은 아우트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캐롤라인과 제이크가 아니라, 맺어질 수 없는 연인처럼 생각되었다.
"너무너무 환상적인 드레스군요! 당신 참 멋져요. 안 그래요, 제이크?"
캐롤라인의 목소리에 셀머는 현실로 돌아왔다.
"장미를 한송이 입에 물면 더욱 어울리겠는데......" 제이크가 웃었다. "나하고 플라멩코를 출 생각이라면, 기대에 따르지 못할 것 같은데......"
"그렇겠지요." 셀머는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제이크의 푸른 눈이 크게 떠지며 검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식사를 하려면 서두르는 게 좋을 거예요." 캐롤라인은 날카로운 감정의 오고감을 모른 체하고 말했다.
차를 탈 때 제이크가 손을 잡아 주려고 했다. 셀머가 얼른 그 손을 뿌리치자, 제이크는 또다시 그녀를 살피듯이 쳐다보았다.
"즐겁게 지내고 와요. 그리고 내일 얘기해 줘요." 캐롤라인이 열려진 창으로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셀머는 무리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차가 큰길로 나와 시속 95킬로미터로 달리기 시작했을 때, 제이크는 앞을 향한 채 말했다.
"뭐 언짢은 일이라도 있어요?"
그에게 하고 싶은 말로 셀머의 머릿속은 꽉 차 있었다. 그런데, 마치 열차가 전복이라도 된 것처럼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5장
셀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제이크가 돌아보고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물었다.
"기분이 매우 안좋은 것 같군." 마치 두 사람이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 같은 허물없는 다정한 말투였다. "그런 기분은 얼른 떨어버리라구. 감정에 사로잡히는 게 허용되는 것은 일급의 배우뿐이야. 그런 경우 그들은 자신을 감정에 내맡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긴장을 풀게 되는 거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든 감정을 폭발시키게 되고 말기 때문이야. 당신은 아직 그런 일류 배우의 범주에는 들지 못하고 있어." 제이크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현재로는......" 하고 빈정거리며 덧붙였다.
"당신은 그 범주에 들겠지요, 물론" 셀머는 되쏘아 붙였으나, 이것은 부당한 반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감정적이라는 소문은 들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자기 자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성미고, 대중 앞에 설 때마다 각광받기를 기대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제이크는 셀머의 빈정거림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입이 고약하군."
그의 그런 태도에 셀머는, 제이크가 인간적인 따뜻함을 가진, 호감이 가는 남자로 느껴졌다. 셀머는 미소 지었다. 제이크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카 스테레오의 스위치를 켰다. 낮고 허스키한 보이스가 흐르기 시작했다.
"엘키 브룩스를 좋아해요?" 제이크가 물었다.
"네" 셀머는 노랫소리에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의 기분에 짜증이 났다. 제이크에게 호감을 가지다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단지, 제이크에게 분명히 해두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초대에 응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교묘하게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있다.
"캐리의 말에 의하면, 마드레느는 당신을 무척 따르는 모양이더군." 제이크가 말했다.
"그것은 서로 마찬가지예요. 나도 마드레느와 노는 게 무척 즐거워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이를 볼 때마다 어른들의 복잡한 관계가 생각나 가슴이 아픈 것도 사실이었다. 어째서 캐롤라인은 어린 딸의 행복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일까? 누가 보아도 마드레느가 자기 아빠를 따르고, 그 역시 딸을 그지없이 사랑하는 것이 분명했다. 만일 캐롤라인이 제이크 레드웨이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감정이란 자기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캐롤라인이 지금같이 행동한다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어른이야 어떻게든 그 충격에서 헤어날 수 있겠지만 마드레느는....... 그녀는 마드레느에게 미치는 영향은 생각지 않는단 말인가?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오후, 셀머는 런던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입을 다물고 갖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이크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뜻밖의 질문을 던져왔다.
"결혼했을 때 당신은 몇 살이었지요?"
셀머는 쇼크로 한동안 얼어붙은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은 매우 단순한 질문이었으며, 그녀가 결혼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심코 던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질문이었다. 상대방이 제이크 레드웨이라고 해도 이렇게 쇼크를 받을 이유는 전혀 없는데.......
"스무 살이었어요." 셀머는 약간 사이를 두고 말했다. 그녀는 제이크가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무심코 던진 질문이 아닌 것이다. 그는 암을 찾으려는 외과 의사처럼 날카롭게 셀머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제이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어야 하는가? 사랑하는 사람들, 이를 테면 오빠나 카렌과 같이 있을 때도 가능한 한 그런 화제를 피해 왔는데....... 셀머가 남편이나 결혼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괴로운 추억이기 때문이다. 오빠나 카렌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제이크 레드웨이라는 남자는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마음을 마구 들이쑤시려 한다. 셀머는 그의 호기심을 증오했다.
"무척 젊은 나이였군." 제이크가 말했다.
셀머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와는 얼마 동안이나 교제했지요?"
셀머는 고개를 들었다.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것 같군. 그런데, 왜 그렇지요? 지금은 사고 직후도 아니고, 벌써 여러 해가 지났는데......"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사적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런 일을 화제로 삼는 것은 그만두세요."
"아니, 당신은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돌아가신 남편에 대해서도요. 억제하는 것은 정신위생상 좋지가 않아요." 그는 조용히 말했다.
"심리학자 흉내 따위는 내지 말아요. 당신은 다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섹스를 하면 인생이 밝아 보일 거라고 충고할 생각이지요?"
"당신은 그 일밖에는 생각하는 게 없어요?"
제이크의 말에 셀머는 얼굴이 빨개졌다.
"내가 그 화제를 꺼낸 게 아니잖아요!"
"내가 아닌 것도 분명한데. 기억에 의하면, 난 당신의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섹스에 대해서 들먹인 것은 당신이오. 언제나 그랬지만, 내가 당신에 대해서 무슨 말을 시작하면 당신은 금방,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하지 말라고 비난하거든"
셀머는 반격을 가하려 했으나,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그에게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캐롤라인과의 정사를 덮기 위해서 나를 이용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지 않은가. 그는 틀림없이, 당신은 무엇이나 섹스와 연결시킨다고 말하며 나를 놀리겠지. 어쩌면 제이크의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 내가 지나치게 상상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제이크와 캐롤라인은 단지 친한 친구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제이크는 나를 연극에 초대한 것일까? 나에게 흥미를 느꼈단 말인가? 설마! 셀머는 얼른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왜 반격을 안 하죠?" 제이크가 놀렸다.
셀머는 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음악이 이미 끝나 있었기 때문에, 셀머는 테이프를 뒤집어 다시 넣었다. 그러고는 두 사람 다 말없이 음악을 듣고 있었다. 셀머는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제이크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차가 런던 시내로 들어설 때까지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주차할 곳을 쉽게 찾지 못하자 그는 투덜거리며 불평을 했다.
"교통사정은 날이 갈수록 나빠질 뿐이군. 정말 런던은 미친 도시야. 교외에 주차해 놓고 택시를 잡을 걸 그랬군."
가까스로 주차 스페이스를 잡고 시계를 보니, 상연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저녁식사를 할 시간이 없었다. 두 사람은 극장 가까운 퍼브에서 차나 대신 마시기로 했다. 테라스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셀머는 용케 빈 테이블을 찾아서 앉았고, 제이크는 음료수를 가지러 퍼브 안으로 들어갔다.
5분 뒤에 그는 쟁반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쟁반 위에는 맥주와 마티니, 포테이토 칩과 피넛의 봉지가 얹혀 있었다. 제이크가 자리에 앉아 셀머에게 글라스를 건넸을 때,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금발의 아가씨가 한손에 노트를 들고 다가왔다.
"레드웨이씨가 아니세요?" 아가씨는 망설이면서 물었다.
"네?" 제이크가 시치미를 떼고 쳐다보았다.
"제이크 레드웨이 씨가 아니세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인데요." 제이크는 웃으면서 글라스를 기울여 단숨에 맥주를 반쯤 마셨다. "유감스럽지만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군요, 아가씨"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실례했어요, 너무나 닮으셔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으세요? 하긴 그럴 리가 없지요. 제이크 레드웨이가 이런 데 와서 우리처럼 맥주를 마시거나 하겠어요?"
"정말이에요." 셀머도 중얼거렸다.
그녀는 동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제이크는 한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런던에 있으면, 의외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있어요. 모르고 지나가거나, 알아보았다 해도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그러나 미국에서는 마음대로 시내에 나갈 수가 없어요. 런던으로 돌아오면 안심이 되지요."
"그게 유명세라는 거예요. 정상에 서 있는 사람의 고생담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아요. 눈물을 닦아 줄 티슈 페이퍼를 가져오지 않았어요."
"당신은 심술궂군요." 제이크는 눈을 빛냈다.
셀머는 웃으면서, 표현이 좀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행동에 구속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이겠지.
"당신은 내가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지?" 제이크가 도전하듯이 물었다. 셀머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우리가 만났을 때의 사정으로 보아, 당신은 분명 나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을 거야. 여자에게 이성적이 되라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당신은 좀 지나친 게 아닐까?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요? 멋대로 목숨을 건져 주어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하라는 거요? 다음에 또 여자가 물에 빠진 것을 보게 되면, 건져 주어도 좋으냐고 묻고 나서 구하겠소. 또 보따리를 찾아 달라고 하면 곤란하니까"
그 말에 셀머는 마음이 찔려 고개를 떨구었다.
"설명을 잘할 수가 없군요. 그렇게 말하니, 마치 내가 머리에 이상이라도 있는 사람인 것처럼 들리는군요."
"내게는 그렇게 생각된단 말이오." 제이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때, 우리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어요. 2년을 기다리라고 해서...... 2년이나 헛되이 보냈던 거지요. 그 때문에 더욱 안타깝게 생각되는 것 같아요." 셀머는 말을 멈추었다. 입안이 찝찔해졌다. 그녀는 살며시 한숨을 쉬었다. 이런데서 울면 안 돼, 사람들 앞에서....... 더구나 제이크가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어. 그날 이후 줄곧 고통을 맛보며 살아왔으니, 이런 상태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 침대에 든 후에나 감정을 꺼내어 긴긴 밤을 같이 지내는 거야. 그러다가 아침에 필립의 품에 안겨 있는 꿈에서 깨나게 되면, 고통만이 남게 된다.
제이크가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왔다. 그의 손이 닿자, 셀머는 불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반사적으로 손을 움츠렸다. 제이크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셀머는 곧 자기의 그런 행동을 후회했다.
"미안해요. 난 별로, 저어......"
"알고 있어요. 당신은 좀 문제가 있군, 레이스양. 그러나 난 심리학자가 아니니까, 당신을 위해서 그 문제를 해명해 줄 수는 없어요.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비난받는 것은 이제 지겹다는 거요. 3년이나 지났으니, 이제 슬슬 불행을 넘어설 때도 되지 않았소? 물론 그를 잊으라는 것은 아니오. 그런 것은 불가능하겠지. 다만, 그는 숨지고 당신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거요. 당신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과거의 추억속에 자기를 가두어 놓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요. 그것은 건전한 일이 못 돼요."
제이크는 맥주를 다 마셨으나, 셀머는 거의 입도 대지 않고 있었다.
제이크의 말이 옳다. 나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필립 역시 저세상에서, 내가 과거를 잊어버리고 미래를 내다보며 살아가기를 기원하겠지. 그는 양식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긴 약혼기간을 불평없이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겠지. 필립은 물론 나를 사랑해 주었다. 그러나 나의 사랑이 무질서하고 정열적이고 겁이 없는 데 비해, 그의 사랑은 조용하고 온화한 것이었다. 그는 내가 안심하고 기댈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커다란 바위와도 같은 존재였다.
"갈까요?"
두 사람은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최상의 좌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출연한 친구는 셀머가 와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몇 번이나 그녀에게 시선을 던져왔다.
제1부의 막이 내렸을 때 제이크가 물었다.
"밖으로 나가겠소, 아니면 여기 있겠소?"
"당신 좋은 대로 하세요."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목이 마르군." 제이크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그 날렵한 동작이 셀머의 눈을 끌었다. 몸에 잘 맞는 다크 슈트가 실팍한 가슴과 꽉 짜인 히프며 쭉 뻗은 다리를 돋보여 주었다. 그가 섹시한 남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 울림이 좋은 목소리에서 남자다운 강한 느낌이 풍겼다. 선이 굵은 얼굴과 사람을 빨아들일 것 같은 푸른 눈 속에는, 무언가 폭력적인 것이 숨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당신도 가겠소?"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셀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으로 미루어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셀머는 얼굴이 붉어졌다.
셀머는 일어났으나, 다리가 흔들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제이크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부축해 주었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옷을 통해 전해왔다. 셀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차례로 덮쳐왔다. 그에 대한 자연스런 욕구, 거센 동경에 몸을 내맡겨 버릴 것 같은 자기의 연약함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이런 감정에 젖어 버린 자신에 대한 노여움......
셀머는 제이크 레드웨이조차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의식하고 있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의 욕망뿐 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셀머는 씁쓸한 기분으로 그것을 밀어냈다.
그녀는 제이크의 손을 밀어내고, 몸을 꼿꼿이 세우고 걸어갔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인파는 바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웃으며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러나 셀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제이크는 알아챘을까? 만일 알아챘다면, 그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감정과는 상관없이 그런 욕구에 떼밀려 그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성적인 갈증을 채워 준다는 이유만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또 마티니로 하겠소?"
등 뒤에서 제이크가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셀머는 펄쩍 뛸 듯이 놀랐다.
"아, 네. 고마워요." 그녀는 더듬거렸다.
제이크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다른 사람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게 해줄 거요, 언젠가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바쪽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제이크를 알아보았으나, 그는 모른 체하고 있었다. 제이크는 여느 때와는 달랐다. 그는 주위의 누구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제이크는 그들이 자기를 무시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음료수를 손에 들고 방금 본 연극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은 단지 무해무득한 화제였다. 그러나, 보는 각도가 다른 점도 있어서, 이야기는 차츰 열기를 띠어갔다. 제 2막이 시작되는 벨이 울렸을 때, 두 사람 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데 대해 깜짝 놀랐다.
제2막은 1막보다 더 좋았다. 객석은 바늘을 떨어뜨려도 들릴 만큼 조용했고, 관객들은 대사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다. 막이 내리자 한순간 정적이 주위를 지배하더니, 이윽고 극장이 떠나갈 것 같은 박수 소리가 일었다.
셀머는 흥분으로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셀머는, 감동하면 언제나 눈물이 나왔고, 지금도 예외는 아니어서 눈물을 참느라고 눈을 깜박거렸다.
막이 다시 오르고 배우들이 모두 나와 인사를 했다. 셀머의 친구가 절을 할때 그녀를 보고, '이따가 와요' 하는 입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그가 얼굴을 들었을 때, 셀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지막으로 막이 내리고 사람들이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셀머는 제이크에게 말했다.
"친구가 오라고 했어요."
"알고 있소. 나도 보았어."
"먼저 돌아가셔도 돼요, 난 택시를 타면 되니까요." 셀머는 성급히 말했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탓으로, 어서 대기실로 달려가 배우들하고 수다를 떨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이크가 그 자리에 없으면 더 편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이크가 곁에 있으면 자꾸 자신을 의식하게 되어 이상하게 어색해져 버린다.
"난 별로 바쁘지 않아요. 당신은 오늘 밤 런던에 있을 거지요? 당신의 친구에게 같이 가서 축하해 주고, 저녁식사를 하러 갑시다. 아니면, 더 이상 날 상대하기가 싫은 거요?" 그가 도전하듯이 물었다. 그렇게 단도직입으로 물어오니, 싫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네, 고마워요." 셀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사람들에게 밀려 두 사람의 어깨가 닿았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피터 템플하고는 언제부터 아는 사이요?" 제이크가 물었다.
"여러 해 전부터에요." 셀머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제이크는 힐끗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철저히 자신을 은폐시키고 있군. 언제나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느낌이오. 당신은 지금 있는 장소에서 몇 킬로나 떨어진 곳에 있어요, 죽은 남편하고 같이 말이오. 남편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소? 이렇게 오랫동안 잊지를 못하고 있으니, 당신에게는 무척 특별한 사람이었겠지. 그에 대해서 이야기 해줘요. 어떤 사람이었나요?"
"내가 그런 얘기를 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 왜 자꾸만 되풀이하는 거지요?" 셀머는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그 노여움의 일부는 자기가 필립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그 무렵 그녀는 너무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하지 못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파악할 수가 있었겠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필립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더욱 신비로운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2년 동안이나 결혼을 기다린 것도 그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더욱 부채질해 주었던 것이다.
"만일 사람들하고 그에 대해서 이야기해 왔다면, 당신은 지금처럼 폐쇄적인 사람은 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셀머도 제이크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핸섬한 남자였나요?" 제이크는 계속 물었다.
셀머는 고개를 저었다. 필립은 매력적이고, 따뜻한 미소가 언제나 얼굴에 감돌고 있었으나, 셀머가 끌린 것은 그의 외모가 아니라 조용하고 이지적인 성품이었다.
"결혼은 얼마 동안이나 계속되었지요?"
생생한 고뇌가 덮쳐와 셀머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자제심을 잃어버릴 것 같아 대꾸하기가 무서웠다. 그녀는 자기의 감정을 숨겼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이 고뇌와 절충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무대 뒤의 입구에까지 와 있었다. 입구 앞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제이크는 노란 불빛에 비추인 셀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같은 질문을 되풀이 했다.
"결혼은 얼마나 계속되었지요?"
그에 대한 미움이 갑자기 용솟음쳐 셀머는 도전하듯이 사실을 말했다.
"우린 신혼여행 중이었어요."
2년 동안이나 애타게 기다린 끝에 결혼했으나, 며칠 만에 헤어져야 했다. 그것도 영원히....... 그녀가 받은 쇼크는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빈껍데기처럼 되어, 그 사실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만이 필립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제이크의 눈이 흐려졌다. 노여움과도 같은 빛이 그 눈에 떠올랐다. 이사람이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일까? 제이크는 셀머의 등을 밀면서 인파를 헤치고 나갔다. 수위가, "안녕하십니까, 레드웨이씨!" 하고 미소를 지었다. 흥분한 팬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그순간 셀머는 무대 뒤의 출입구에서 안으로 떼밀리고 있었다. 제이크가 등을 밀었던 것이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셀머의 팔을 움켜잡고 복도로 끌고 갔다. 손가락이 파고 들어 아팠으나, 그의 험악한 표정을 보자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피터의 대기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피터는 곧 셀머를 알아보고 기쁜 듯이 손을 흔들고 말을 걸었다.
"거기 샴페인 글라스를 집어가지고 들어와요."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피터도 제이크가 온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연극은 예상 밖의 대성공이었다. 관중은 열광하고 있었다. 각본, 캐스팅, 연출, 모든 것이 잘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알렉스 제럴드의 최고의 히트가 될 것이다.
피터는 셀머를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언제부터 레드웨이하고 다정하게 된 거지, 셀머?"
"다정하다니요, 천만에요!" 셀머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항의했다.
"속이려고 하지마, 내 눈은 속일 수 없으니까. 연극이 끝나는 날 그가 당신의 대기실을 찾아갔다지? 아드레안한테서 들었어."
"그는 데이지를 찾아왔었어요."
"흠-그럼 오늘은 데이지는 어디 있지?" 피터는 웃으며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그런 말을 해온 것은 피터뿐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셀머를 쳐다보았다. 그런 소란 속에서 그녀는 그만 제이크를 놓쳐 버렸다. 친구들의 질문 공세에 진땀을 빼고 있을 때, 그녀는 누군가와 부딪쳤다.
"미안해요." 하고 쳐다보니, 제이크가 미소 띤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다정하게 윙크했다. 셀머에게 퍼부어지는 질문의 일부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셀머는 얼른 놀라움을 감추었다. 친구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제이크의 행동에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결론을 끌어내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소문은 산불처럼 빨리 번지는 법이다. 내일이 되면, 셀머가 레드웨이의 새로운 애인이라는 소문이 런던 시내에 쫙 퍼져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명예로운 일은 못된다. 누가, 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되기를 원할 것인가.
그건 그렇고, 셀머는 자기가 갑자기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데 놀랐다. 많은 사람이 셀머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웃음 띤 얼굴들에 에워싸였다. 그 이유는 뻔하다. 제이크의 애인 역시 제이크만한 영향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입장에 있는 여자라면, 자기 친구에게 좋은 역을 마련해 주라고 제이크에게 부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셀머는 기분이 나빠졌다. 분노가 폭발하기 전에 돌아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난 이제 돌아가 봐야겠어요, 피터. 저녁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으니까요. 파티에 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셀머가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제이크에게 눈짓을 하자, 제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피터는 셀머의 어깨에 팔을 감고 긴 입맞춤을 했다. 셀머는 깜짝 놀랐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셀머는 피터의 과장된 행동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란히 출입구로 향하는 제이크와 셀머의 뒷모습을 사람들이 호기심 서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방을 나간 순간, 속삭임 소리는 거침없는 말소리로 바뀌었다.
"왜 그렇게 얌전해요?" 제이크가 셀머를 쳐다보았다. "카페 로열까지 택시로 갑시다. 식사를 하고 다시 택시로 차 있는 데까지 가는 거요. 이런 시간에 피커딜리 근처에서 주차장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니까"
셀머는,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야 겨우, 집까지 바래다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녀는 제이크를 돌아보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카페 로열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제이크하고 같이 가게 되면, 피커딜리 광장의 네온사인만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아직까지 저녁을 먹지 못해서 배가 몹시 고플텐데. 지금 뭘 먹어두지 않으면, 술기운이 돌아 내일은 머리가 띵할 거요."
"난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셀머는 운전사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운전사가 제이크를 알아보고 백미러로 그를 바라보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꽤 늦었는데도 여전히 차가 밀리고 있었다. 샤프츠버리 스트리트는 피커딜리 쪽으로 거북이걸음을 하는 차들로 꽉 차 있었다. 택시가 이따금 생각난 듯이 별안간 앞으로 나아가곤 했기 때문에, 셀머는 바닥으로 내던져지지 않도록 두손으로 좌석을 꼭 붙잡고 있었다.
"연극이 끝나면 저녁식사를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왜 생각이 바뀌었지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어요."
"그게 무슨 뜻이오? 의미를 알 수 있게 분명하게 말해 줘요." 제이크가 짙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설마,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마음을 쓸 것 없어요." 제이크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고십의 표적이 되는 것에 아주 익숙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난 마음이 쓰여요!" 셀머는 화를 내며 말했다. "난 당신의 새 베드 프렌드로 생각되는 것이 싫어요."
"어느 쪽이 먼저요?"
"무슨 말이지요?"
"즉......내 베드 프렌드로 생각되는 것이 싫은 거요, 아니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싫은 거요? 어느쪽이오?"
셀머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재미있는 농담을 하시는군요,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이에요!"
"승산도 없으면서 싸움을 거는 게 아니라구" 제이크가 천천히 말했다.
"승산이 왜 없어요. 여차하면 손톱으로 할퀴고 물어뜯을 수도 있는데......"
"당신 같으면 하고도 남겠지." 제이크는 또 웃었다. "그런데, 방금 그 이야기로 돌아가서......설령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을 가졌다 해도 마음 쓸 것 없어요. 소문 같은 것은 금방 없어지게 마련이니까요. 내가 몇 명의 여자와 침대를 같이한 것으로 되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의 사랑행각은 그렇게 화려하지가 못해요. 나는 현역 배우지 종마는 아니오. 스튜디오나 로케일이 끝나면 대본을 들고 침대에 들어가, 잠을 자기 전에 내일의 대사를 머리에 집어넣느라고 정신이 없어요. 섹스 같은 것은 떠오르지도 않아요. 그런데 매스컴이 그런 생활은 너무 멋이 없다고 하며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거요. 그것에 일일이 마음을 쓰고 있다간 몸이 지탱을 못해요."
"하지만 난 마음이 쓰여요."
제이크는 한숨을 쉬었다.
"누가 물으면 꼭 부정하겠소. 약속해요."
"그런 말을 사람들이 믿을 줄 알아요? 오늘도 피터나 그 친구들한테,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거듭거듭 말했는데도, 모두 들은 체도 안했어요."
택시가 카페 로열 앞에서 멎었다. 제이크가 창밖을 내다보고 말했다.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몹시 배가 고파요. 기껏 레스토랑 앞에서까지 와서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바보스럽다고 생각해요. 이대로 돌아가건 여기에서 식사를 하건,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데요."
셀머는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그녀도 배가 고팠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출입구를 향해서 걸어갔다.
생각해 보니,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해도 그것이 꼭 제이크의 탓이라고는 할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수 있는 기회 같은 것이 언제 또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모처럼의 찬스를 즐기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더구나 앞으로 당분간은 토스트에 익힌 햄을 얹어 먹을 수밖에 없으며, 그것조차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형편이니까.
"전에 와 본 일이 있어요?" 제이크가 물었다.
셀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신기한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는 얼굴도 눈에 띄었다. 이곳은 예전부터 작가며 예술가, 연극 관계자들이 즐겨 찾아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식사를 하면서 두 사람은 방금 본 연극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러는 사이에 화제는 서로 자기가 보았던 유명한 무대로 옮겨갔다. 최근에 공연된 것 중에는 두 사람 다 본 연극도 적지 않았다. 제이크가 길구드 연출의 <헛소동>의 무대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자, 셀머는 웃으면서 말했다.
"난 겨우 걸음마를 하고 있었을 때예요."
그러자 제이크는 정색을 하며 받았다.
"나도 겨우 반바지를 입고 있었지. 이래봬도 별로 나이가 많지 않다고"
"30대?"
"천만에. 스물여덟이오, 정확하게 말하면. 출생증명서를 보여줄까?"
셀머는 제이크의 강압적인 기색에 눌려, 그가 따라준 두잔 째의 포도주를 저도 모르게 들이켜 버렸다. 제이크를 신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취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제이크는 곧 기분이 좋아져, 최근에 자기가 출연한 영화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 같은 것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문득 시계를 본 셀머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머나, 벌써 한시가 지났어요!"
제이크는 브랜디 글라스를 손에 들고 궐련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웨이터에게 신호했다.
"당신을 택시로 집에까지 바래다 드리지. 내차는 그후에 가지러 오기로 하고......"
출입구를 향해 걸어가는데,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왔다. 셀머는 그들을 알지 못했으나, 제이크는 그중의 한사람과 두세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셀머는, 택시에 오를 때, 그 남자가 프리트 스트리트지의 민완기자라는 것이 생각나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저쪽은 친구와 같이 있었으며, 셀머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을 뿐이었다. 그가 조급한 결말을 끌어내지 않기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인지 그렇게 붐비던 길이 비어 있었다. 택시는 금방 셀머의 집 앞에 도착했다. 제이크는 건물을 쳐다보고 말했다.
"당신의 방까지 바래다주는 것이 좋겠군."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즐거웠어요. 정말 고마워요."
제이크는 셀머의 말을 무시하고 차에서 내렸다.
"잘가요, 고마워요." 라고 말하고 셀머는 정신없이 입구로 향했다. 어물어물하고 있다가 키스라도 당하면 큰일이라 싶었다.
현관문에 열쇠를 끼워 넣는 순간 택시 떠나는 소리가 났다. 셀머는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동안 뿐이었다. 제이크가 바로 뒤에 와 서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셀머 대신 열쇠를 돌려 문을 활짝 열었다.
"차를 운반하기 전에 블랙커피라도 마시고 싶군." 그는 서슴없이 말했다.
"그건 안 돼요. 마안해요, 하지만 저....."
제이크는 이미 층계를 올라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셀머는 현관문을 살며시 닫았다. 집주인인 미망인이 불면증 때문에 열시 이후에 층계가 삐걱거리면 귀에 거슬린다고 투덜거리는 소리를 몇 번 들었기 때문이다. 셀머는 숨을 죽이고 층계를 올라가며 조그만 소리로 속삭였다.
"부탁이에요, 레드웨이씨. 커피는 안 돼요."
제이크는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이 방문에 열쇠를 끼워넣었다. 그러고 얼마 동안 무언의 밀치기가 계속되었다. 제이크는 분명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두손을 셀머의 허리에 대고 그녀를 인형처럼 들어 올려 방으로 들어가, 입구 가까이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혔다.
그는 문을 닫고 불을 켰다. 셀머는 화를 내며 덤벼들었다.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오다니! 경찰을 부르기 전에 어서 돌아가세요!"
제이크는 재킷을 벗었다.
"내가 커피를 끓이겠소." 라고 말하고 간이 주방으로 걸어갔다.
셀머는 이성을 잃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피곤하단 말이에요. 왜 돌아가지 않지요? 당신이 있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잠자리를 같이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림도 없어요. 난 피곤하다니까요!"
제이크는 셀머를 향해 걸어왔다. 셀머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에 겁이 나,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섰다.
"나도 상당히 지쳐 있소. 그 지겨운 침대 타령에 이젠 싫증이 났소. 난 아직 당신을 유혹하거나 한 적이 없어요. 당신을 그 강박관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는, 나의 그 의도하는 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군."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셀머는 더듬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바로 뒤는 벽이었다. 제이크는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푸른 눈이 셀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것이 당신이 찾고 있는 거요?"
제이크의 머리가 천천히 내려왔다. 셀머는 얼어붙은 것처럼 되어, 제이크의 입술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제이크의 손이 셀머의 팔에서 드러난 어깨로, 그리고 목으로 천천히 옮겨갔다. 그의 손이 닿자 셀머는 몸을 떨었다. 그의 따스한 입술이 닿았을 때, 셀머의 입술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슴이 격심하게 두방망이질치고, 몸속 깊은 곳에서 성적인 갈망이 눈을 떴다. 그녀는 두팔을 내린 채, 정열의 물결에 삼켜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셀머는 어느새 그의 목에 팔을 감고 키스를 되돌리고 있었다.
셀머는 눈을 감은 채, 인정하기 싫은 감정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제이크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등을 애무했다. 셀머의 몸은 누를 길 없는 기쁨으로 떨렸다. 셀머는, 이 강렬한 욕망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단지 알고 있는 것은, 그에게 더 꼭 안기고 싶다는 누를 길 없는 욕망뿐이었다.
이윽고 제이크는 몸을 떼고 셀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안개가 낀 것 같은 눈을 뜨고 몸을 떨었다.
"그가 세상을 뜬 뒤에 누구하고 침대를 같이 한 일이 있소?" 제이크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셀머는 말없이 고개를 저어싸.
"결혼 전에 그와는?"
"없어요. 부모님과 약속을 했거든요. 우리는......기다렸어요."
갑자기 셀머의 몸이 세차게 떨리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제이크가 그런 셀머를 끌어당겨 따뜻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셀머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과 필립을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갑자기 끝나 버린 행복했던 나날을 위해서 추도의 눈물을 흘렸다.
셀머는, 이미 옛날에 눈물이 말라 버린 줄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는 너무나 큰 쇼크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돌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눈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저 의미 없는 그림자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뒤 서서히 셀머는 그런 허탈 상태에서 빠져나왔는데, 그때는 이미 울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슬픔은 마음 밑바닥에 침전하여 결코 녹일 수 없는 얼음덩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셀머 자신의 욕망과 제이크 레드웨이의 애무에 의해서 녹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깊은 비탄의 외침이 되어 그녀의 목을 아프게 하며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셀머는 겨우 울음을 그쳤다. 그러고는 얼마 동안 그녀는 제이크의 품안에서 떨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제이크가 말했다.
"영원히 울음을 멈추지 않을 줄 알았어요." 억양 없는, 방관자의 목소리였다.
"미안해요." 셀머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미안할 건 없어요." 제이크는 팔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이제 자는 것이 좋겠어요. 피곤할 테니까......."
셀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크에게 빨갛게 부은 눈과 눈물에 젖은 얼굴을 보이기가 싫어서 고개를 숙인 채로 있었다.
"고마와요. 당신은 정말......"
"침대로 들어가요." 그가 너무나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기 때문에 셀머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이만 실례해야 되겠소. 나도 피곤하거든. 오늘은 우리 두 사람에게는 매우 힘든 하루였으니까요." 그는 조금 망설였다. "만일 당신이 내 의도를 오해하지 않는다면 오늘 밤 이 소파에서 잤으면 좋겠는데......"
"길을 건너가면 택시를 잡을 수 있어요." 셀머는 더듬거렸다.
"당신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요?"
"걱정 없어요." 셀머는 대답했다. 빨리 그가 돌아가 주었으면 싶었다.
그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럼 잘 자요."
셀머는 우물거리며 입안에서 대답했다. 제이크는 뒤돌아보았으나, 보이는 것은 푹 숙인 그녀의 검은 머리뿐이었다. 그는 방을 나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셀머는 우두커니 서서 제이크의 조용한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닫혔다. 발소리가 거리 저쪽으로 멀어져 갔다. 셀머는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어 있었다. 가까스로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불을 껐다. 그녀는 금방 곯아떨어졌다. 무슨 꿈을 꾸었다 해도 이튿날 아침엔 그 꿈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깊은 잠속으로.
6장
셀머는 이튿날 아침 일찍 밀턴행 기차를 탔다. 창밖에는 햇빛에 반짝이는 초록빛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과수원 저쪽에는 여기저기 호프 건조소가 우뚝 서 있고, 그 굴뚝과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들 위에는 파랗게 갠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셀머는 필립이 언젠가, 시골에 작은 집을 갖고 싶다고 한말이 생각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한숨에는 이제 한스러운 아픔은 담겨 있지 않았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어떠했을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런 것을 생각해 봐야 별수가 없어. 난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까....... 만일 필립을 잃지 않았다면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갔을지 궁금하다. 성격이 거세고 감정적이고 자제심이 없었던 20세의 나는, 필립의 침착성과 안정성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그를 잃음으로써 나는 어른이 되었다. 자기 자신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셀머는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셀머를 보고 캐롤라인은 놀라는 것 같았다.
"제이크가 바래다 줄 줄 알았는데!"
캐롤라인은 실망한 것일까? 제이크를 만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셀머는 갑자기 짜증이 나서 얼굴을 돌리고, 테이블에 앉아서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마드레느에게 키스하러 다가갔다.
"막 피크닉을 가려던 참이었어요." 캐롤라인은 어느새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리하게 실망을 떨쳐 버린 것일까, 아니면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피크......닉!" 마드레느는 기쁜 듯이 몇 번이나 되풀이 했다. "피크......닉, 피크......닉!"
"커피를 마시겠어요? 제럴드의 연극에 대해서 이야기해 줘요. 그동안 카터 부인이 바스켓을 챙겨 줄 테니까. 달걀을 삶고 롤빵을 준비했어요. 롤빵에 콜드 치킨과 과일과 치즈를 곁들이면 아주 맛있을 거예요. 그러면 됐지요? 제이크도 올 줄 알고 음식을 좀 많이 준비했어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캐롤라인은 미소 지었으나, 셀머는 그 초록빛 눈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생각했다.
캐롤라인은 커피를 따라 찻잔을 손에 들었다.
"첫날 무대에 대해서 꼭 듣고 싶어요. 신문을 보니 평이 무척 좋더군요."
"네, 정말 훌륭했어요. 큰 히트였어요."
두 사람은 각기 자기의 커피잔을 들고 거실로 갔다. 캐롤라인은, 어제의 무대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즐겁게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셀머는,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일 때문에 캐롤라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쩐지 켕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캐롤라인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는가. 제이크 레드웨이는 그녀의 것이 아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셀머는, 어제 창문 앞에 나란히 서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셀머는 그때, 두 사람이 자를 수 없는 질긴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일이 지금, 그때 이상으로 셀머의 가슴을 술렁거리게 했다.
"준비가 끝났어요. 아가씨가 빨리 가고 싶다고 보채고 있어요." 미세스 카터가 문간에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금 가요." 캐롤라인은 얼른 일어섰다. "당신을 혼자 보내다니, 제이크는 나쁜 사람이군. 다음에 만나면 야단을 쳐 줘야지."
"아니, 괜찮아요." 셀머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어조가 너무 강했던 탓인지 캐롤라인이 돌아보았다.
셀머는 얼굴을 붉히며 설명했다.
"난 기차로 오는 게 더 좋아요."
캐롤라인과 제이크가 나를 화제에 올리는 것은 참을 수 없어-그것은 너무나 굴욕적인 일로 생각되었다. 제이크는 그녀와의 첫 만남에 대해서 아직 캐롤라인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젯밤의 키스에 대해서야 물론 이야기하지 않겠지.
그런데, 왜 그랬을까? 왜 제이크가 나한테 키스를 했을까? 왜 무리하게 내방에 들어 왔었을까? 왜? 셀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나에게 단순한 성적인 흥미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극장 안에서 그가 부축해 주었을 때 내가 느꼈던 여러 가지 감정이 그에게도 전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자신을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이크 레드웨이가 머릿속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헤아리기는 어려웠다. 그는 캐롤라인 폭스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겉으로 드러난 인기배우라는 모습뒤에 가려진 그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 어제 같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우리는 많은 공통점을 찾아냈다. 좋아하는 작가, 연극, 사람들, 그리고 생각이나 행동에 대해서.......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제이크라는 인간의 참모습까지는 들여다볼 수 없었던 것 같다.
도시락을 펼치는 데 알맞은 장소를 찾느라고, 두 사람은 유모차를 밀고 30분가량 걸어 다녔다. 초원의 오솔길을 누비는 세 사람의 머리 위에 아치 모양의 보리수와 참피나무의 가지들이 그림자를 던졌다.
"제이크하고는 재미있게 지냈어요?"
"그저 그렇게 지냈어요." 셀머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분은 이따금 무척 고약한 심술쟁이가 되곤 하지요."
"그런 것 같더군요."
양쪽에 보리가 자라 있는 언덕길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황록색의 줄기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묵직한 보리 이삭들이 일제히 절을 했다. 보리밭 구석에서 조그만 갈색의 새가 맴돌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드레느가 토실토실한 핑크빛 손가락으로 그 새를 가리켰다.
"브리드" 라고 아이는 말했다.
"버드에요." 캐롤라인이 정정해 주었다.
"브리드" 마드레느는 꺾이지 않고 말하며 얼굴을 돌려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핑크빛 스모크에 같은 빛깔의 보네트를 쓰고 분연한 표정을 띤 마드레느는, 마치 빅토리아조 시대의 공주님과도 같았다.
"마드레느는 아빠를 닮았군요."
놀란 듯이 말하는 셀머의 말에, 캐롤라인은 소리 내어 웃었다.
"불쌍한 마드레느! 당신의 말이 맞아요. 저 아이는 누구하고 말다툼을 할 때의 제임즈와 꼭 닮았어요. 영락없지 뭐예요."
"남편께서는 마드레느를 무척 사랑하고 계시더군요." 셀머가 말했다.
초여름의 산들바람에 레드골드의 머리칼을 나부끼면서 앞서서 걸어가고 있던 캐롤라인이, 묘한 얼굴을 하고 돌아보았다. 셀머는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캐롤라인을 좋아했지만, 오늘 아침엔 왠지 모르게 자꾸 적대감이 느껴졌다. 캐롤라인은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을 택할 것인지 아직도 결정을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두 사람을 동시에 손아귀에 넣고 즐기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흥미를 잃은 것을 단지 소유욕 때문에 놓치지 않으려는 어린아이 같은 그런 여자일까?
두 사람은 각기 유모차의 위와 아래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마드레느는 좋아서 킥킥거리고 웃으면서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러고 나서 일행은 갈대가 우거진 강가의 초록빛 풀밭을 걸어갔다.
"이 근처로 할까요?"
캐롤라인이 멈추어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 강물이 태양빛에 반짝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근처에는 느릅나무와 떡갈나무가 띄엄띄엄 서 있었으며, 캐롤라인은 그중의 한 그루를 택하여 그 그늘에 유모차를 세웠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풀밭을 앉았다. 캐롤라인은 가냘픈 몸매를 하고 있었지만, 약동하는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기쁨으로 눈을 빛내며, 목 주위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손으로 떼어냈다. 셀머는, 그녀에 비하니 자기는 마치 색채가 없는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다.
"무척 덥군요!" 캐롤라인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셀머를 쳐다보았다. "앉아요, 셀머. 피곤하지요?"
셀머는 마드레느를 유모차에서 내려 주었다. 아이는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버마재비를 잡기 시작했다. 피크닉 바스켓을 열고 있는 셀머 옆에서 말없이 딸을 지켜보고 있던 캐롤라인이 이윽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잘 안 된 일이라도 있어요?"
셀머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일부러 말을 잘못 알아들은 체했다.
"아니에요, 다 갖추어져 있는데요." 하고 셀머는 대답했다. "내가 마드레느를 보고 있을 케니까, 잠시라도 쉬는 게 어떨까요? 그러고 나서 점심을 먹죠."
캐롤라인은 하늘을 보고 누워 바람에 흔들리는 떡갈나무 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록빛 잎이 그녀의 얼굴과 몸에 재미있는 그림자를 떨구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기꺼이 들어주겠어요.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까요." 캐롤라인이 말했다.
"별로 할 이야기가 없어요." 셀머는 가벼운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 가뿐히 일어섰다. 캐롤라인 폭스에게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다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녀는 나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는 이유에 깊이 관여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삼각관계가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각관계는 더욱 고약하다. 나는 그 네 번째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데, 그런 상황 속에 빠져드는 것 따위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
위험하기 짝이 없는 둑을 향해 걸어가는 마드레느를 따라잡은 셀머는, 뿌리치려고 하는 작은 손을 잡고 조심조심 둑 위로 올라, 느릿느릿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피스!" 마드레느가 기쁜 듯이 말했다.
자세히 보니, 수초가 우거진 곳에 조그만 갈색의 생물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피시군."
"피스!" 마드레느는 만족스런 듯이 되풀이했다.
아이는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확인하는 것이 기쁜 것이다. 마드레느는 자기의 지능을 신뢰하고, 어른들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아이는 어리긴 하지만 인간사회에서 살아가는 법도 알고 있다. 누가 티타임에 계란빵을 주고 아침식사를 콘플레이크를 주는가를 잘 알고 있다.
셀머는 마드레느의 손을 꼭 잡고 강가를 거닐었다. 뒤돌아보니, 캐롤라인은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졸음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물놀이를 할까?"
셀머의 물음에 마드레느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드레느의 하얀 양말과 구두를 벗기고, 셀머 자신도 샌들을 벗자, 두 사람은 살며시 물속으로 들어섰다.
마드레느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킥킥거리고 웃으며 발로 물장구를 쳤다.
"물을 너무 튀기면 못 써요." 셀머는 마드레느의 손을 꼭 잡고 살금살금 걸어 나갔다. 날벌레가 붕붕거리며 나무 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더위와 풀내음, 꽃향기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다른 때 같으면 셀머는 이 눈부신 하루를 실컷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매우 초조했다.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여름의 하루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인 것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은 둑 쪽으로 되돌아갔다. 발목에 와 닿는 물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마드레느의 발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면서 셀머는, 수면에 비친 키 큰 풀이 물결에 따라 흔들거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서서 잔물결이 이는 수면에 자기의 얼굴을 비춰 보았을 때, 셀머는 자기가 초조한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이 아름다운 하루를 같이 즐길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필립이 그랬듯이 그녀에게만 속하는 사람, 비밀이나 기쁨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람, 뉴스가 있으면 뛰어가 보고할 수 있는 사람, 고단하면 그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쉴 수 있는 사람,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마드레느는 잠들어 있는 캐롤라인한테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큰소리로 웃었다.
"피스!" 마드레느가 강 쪽을 가리키며 엄마에게 보고했다.
캐롤라인은 딸에게 키스했다. 셀머는 그러한 캐롤라인이 부러웠다. 캐롤라인에게는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편과 귀여운 딸이 있다. 다른 남자와의 비밀스런 관계로 이 행복을 위태롭게 하다니,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그날 저녁 막 식사를 하려고 할 때, 제임즈 폭스가 돌아왔다. 그는 서류가방과 석간을 의자 위에 내던지고 아내에게 키스했다. 캐롤라인은 햇볕에 그을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좋은 하루를 보내셨어요, 여보?"
"피곤해요. 하지만 만족한 하루였소. 마드레느는 잠들었소?"
"벌써요. 다섯시에 하품을 했어요. 우리는 강가로 피크닉을 갔었거든요. 마드레느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더군요."
"강가라면 조심을 해야지."
"물론이에요. 거기에 대해서는 걱정 마세요!"
"그 아이는 무서운 것을 모르거든. 강에라도 떨어지면 큰일이야"
"셀머가 딱 붙어서 따라다녔어요. 그랬지요, 셀머? 셀머는 마드레느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어요."
제임즈 폭스는 돌아서서 가만히 셀머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셀머는 침착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눈초리는 너무나 날카로왔다. 이런 시선을 받으면 누구도, 켕기는 일이 전혀 없다 해도 태연할 수는 없으리라.
"석간을 보았어요, 셀머?"
제임즈의 갑작스런 질문은 셀머를 놀라게 했다.
"아니요."
"고십난에 당신에 대한 얘기가 나와 있더군." 그는 가지고 온 신문을 집어 들었다.
"아니, 뭐라고요! 정말이에요? 어디봐요." 캐롤라인은 웃으면서 말하고, 남편이 들고 있는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뭐라고 씌여 있지요?" 셀머는 걱정이 되어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신문을 읽고 난 캐롤라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얼굴을 들고 말없이 셀머에게 신문을 건넸다. 셀머는 서둘러 그 기사를 읽었다.
<최근 제이크 레드웨이와 같이 다니는 행운의 젊은 여배우는?> 이라는 표제가 붙은 그 기사는 셀머에 대해서, <야심 있는 섹시한 브루네트> 라고 설명하고, <레드웨이는 그녀의 야심을 돕게 될 것이다> 라고 끝맺고 있었다.
"이런 엉터리 기사를 잘도 써댔군요." 셀머는 분개했다. "마치 나는 절개도 없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 같지 뭐예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이크와 데이트하고 있다는 듯이 썼어요!"
"걱정할 것 없어요. 당신을 아는 사람 같으면 그런 엉터리 기사는 믿지 않을 거예요." 제임즈가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신문에 씌어 있는 것을 믿게 마련이에요. 누구보다도 제이크가 그렇게 믿을 거예요. 내가 자기를 이용하려 들고 있다고요. 그렇지 않다고 외치고 다닐 수도 없고, 정말 약오르는 일이군요! 이 기사를 쓴 사람의 얼굴을 구경하고 싶어요!"
"남의 속을 훤히 들여다봤다고 생각하는 약삭빠른 녀석이겠지. 그런 녀석들의 말에 의하면, 세상에는 욕심꾸러기 여자가 많다는 거요. 제이크 레드웨이는 돈과 명예가 있는 남자니까. 그 주위에는 많은 여자들이 모여든다는 거요. 하지만, 당신의 친구들은 그런 기사를 믿지 않을 테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잊어버려요, 사람들도 곧 잊어버릴 테니까요."
"제이크도 잊어버릴까요?"
"제이크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에요. 그는 고십 기사 따위에 일일이 신경을 쓰지 않아요. 당신을, 이 기사가 암시하는 것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심가라고는 생각지 않을 거예요. 당신도 그 사람처럼 이런 이야기는 무시하는 게 좋을 겁니다."
셀머의 눈에 캐롤라인의 무표정한 얼굴이 비쳤다. 캐롤라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치던 셀머는, 자기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이크와 데이트하고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그말을 캐롤라인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때는 몰랐으나, 그건 그와의 사이에 애정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그때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말로 옮겼을 뿐, 깊은 의미 같은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다음날 아침, 캐롤라인은 일어나지 않았다. 셀머가 아침식사를 하려고 내려가자, 미세스 카터가 캐롤라인은 감기에 걸렸다고 말했다.
"자꾸 기침을 하고, 목소리도 쉬셨지 뭐예요. 누워 계시라고 말씀드렸어요. 이따금 내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우시지만, 오늘은 순순히 누우시더군요. 감기에는 가만히 쉬는게 제일 좋은 약이니까요."
열시 반에 뜨거운 우유를 들고 가니, 캐롤라인은 가까스로 머리를 들어 올리며 힘없이 미소 지었다.
"당신한테만 마드레느를 맡겨서 미안해요."
"원 별말씀을......난 그러기 위해 여기에 있는걸요. 걱정마시고 편안히 쉬세요." 셀머는, 매롤라인의 상기된 얼굴과, 눈가에 생긴 검은 테를 보자 마음이 켕겼다. 셀머도 지난밤에 편히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그녀는, 제이크 레드웨이와 제임즈와 마드레느를 생각하고, 캐롤라인을 계속 비난하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제이크를 잡아두려고 하는 것일까? 만일 그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면, 단호하게 매듭을 지어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남편과 아이를 잃을 마음이 없다면.......
셀머는 마드레느를 데리고 마을로 가서 미세스 카터가 부탁한 식료품을 사왔다. 나무 그늘을 택해서 천천히 걸어오면서 셀머는 덤불 속에 열려 있는 산딸기를 발견하고, 몇 개를 따서 마드레느와 나누어 먹었다.
가벼운 점심을 마친 뒤에 마드레느가 언제나처럼 낮잠을 잤기 때문에, 셀머는 비키니를 입고 뜰로 나왔다. 비키니의 푸른색은, 요사이 햇볕에 그을은 살갗에 아주 잘 어울렸고, 검푸른 눈에 그윽함과 반짝임을 더해 주고, 웨이브진 검은 머리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녀는 엎드린 채, 그을은 자국이 나지 않도록 비키니의 호크를 끌렀다. 반쯤 감은 눈으로, 나뭇잎을 나르는 개미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발소리가 들리고 개미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눈을 들어보니, 제이크 레드웨이가 미소를 띠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아, 당신이었어요!" 셀머는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등의 호크가 벗겨져 있는 것을 알고 당황하여 그것을 채우려고 했다.
"내가 해주지." 제이크가 놀리듯이 말하고 무릎을 꿇었다.
저항할 수도 없었다. 제이크의 길고 차가운 손가락이 닿자 등에 전율이 스쳤다.
"이것을 입고 있으니 참 섹시하게 보이는군." 그는 천천히 말했다. "여기에 얼마나 있었지?"
"30분쯤 됐어요. 캐롤라인은 감기로 누워 있고, 마드레느도 낮잠을 자고 있어요."
"그런 것 같더군. 카터 부인한테 들었어. 살이 벌겋게 되었군." 제이크는 손가락으로 셀머의 팔을 쓰다듬었다. 떨림과 같은 감촉이 팔을 스쳐갔다. 셀머는 고개를 떨구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셀머는 마치 자기가 벌거벗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이크의 푸른 눈이 셀머를 응시하자, 그녀는 그가 남자라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했다. 제이크는 허리를 굽혀 선탠 로션이 들어 있는 병을 집어 뚜껑을 열었다. "이것을 좀 바르는 게 좋겠군."
"아니, 일광욕을 하기 전에 충분히 발랐어요." 셀머가 얼른 말했다.
"몸이 화끈거리는 것 같은데" 제이크는 서슴없이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셀머는, 화끈거리는 것은 당신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가만히 있어." 하고 제이크가 명령했다. 셀머는 서늘한 로션의 감촉을 느꼈다. 제이크는 비키니의 가는 어깨끈을 벗기고, 셀머의 목과 어깨에 로션을 발라 주었다. 셀머는 꼼짝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속눈썹 사이로 제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가슴의 두근거림을 그가 알아채지 못했으면 좋으련만.......
제이크는 얇은 천의 하얀 셔츠에 흰 줄무늬가 있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몸에 꼭 맞는 옷이 근육질의 몸매를 강조해 주고 있었다. 셀머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제이크는 로션을 발라 주는데 정신이 팔려, 셀머의 시선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셀머는 시선을 마주칠 염려가 없었으므로, 천천히 그를 관찰할 수가 있었다. 까맣고 긴 속눈썹은 눈을 반쯤 가리고 있고, 입술은 살짝 열려 있었다. 입술의 라인이 무척 섹시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셀머는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셀머는 그러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 몸이 더욱 화끈거렸으나, 그래도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안기고 싶다. 셀머는, 육체적인 욕망과 마음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호감을 갖고 있는지 어떤지 조차 잘 알 수가 없다. 더구나 그가 캐롤라인을 뒤쫓아 다니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나는 그를 멸시한다-그래도 그녀는, 제이크의 입술이 그날 밤처럼 자기의 입술 위에서 약을 올리듯이 움직여 주기를 애타게 원하고 있었다.
제이크가 다시 로션 병을 집어 들려고 하자, 셀머는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이제 됐어요, 곧 집 안으로 들어갈 거니까요." 다정하고 자극적인 마시지를 더 이상 계속하게 했다가는 심장 발작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싶었다.
"정말?" 제이크는 빈정거리며 물었다.
셀머는 문득, 그가 자기의 시선을 눈치 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에는 위험한 빛이 서려 있었다.
"어제 석간을 봤소?"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서 제이크가 물었다.
"네. 정말 놀랐어요." 셀머는 동요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지어낸 이야기에 신경 쓸 것 없어. 혹시 기자가 찾아오거나 하지는 않았소?"
"네, 다행히도....."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지. 나는 온종일 전화 공세를 받았어. 오늘 당신을 만나러 온 것도 그 때문이오. 아직까지 그들은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것을 모르고 있지. 여기에 온 것을 혹시 친구한테 이야기했소?"
"아니오......물론 데이지는 알고 있지만, 그 사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아직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좋겠는데. 매스컴이 당신을 뒤쫓아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면 데이지는 입을 열지 않겠지만, 당신이 캐리를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누구한테 이야기했을지도 몰라"
홀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제이크는 이야기를 멈추고 층계를 올려다보았다. 층계 위에서 캐롤라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생기가 돌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셀머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목소리가 들렸어요." 캐롤라인이 난간에 몸을 기댔다. "감기를 옮길까 싶어 내려가지는 않겠어요."
캐롤라인은 하얀 비단으로 된 나이트 드레스 위에 레이스로 짠 실내복을 걸치고 있었다. 피부는 창백하고 눈은 열 때문에 물기를 머금고 레드골드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매우 사랑스러워 보였다. 셀머는 비참한 느낌과 노여움으로 얼굴을 돌렸다.
"몸은 좀 어때요?" 제이크는 따뜻하게 물었다.
셀머는 제이크도 미워졌다. 남의 아내에게 이렇게 다정한 말을 해도 좋은 것일까?
"머리에 솜이라도 채워 넣은 것 같아요." 캐롤라인이 웃었다.
"침대로 돌아가 있어요, 달링. 몸이 불편할 때는 나다니는 게 아니오. 당신은 너무나 몸을 아끼지 않더군."
캐롤라인은 손가락을 입에 댔다가 키스를 던졌다.
"알았어요, 의사선생님!" 그러고는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셀머를 보고 말했다. "마드레느가 깼어요. 봐주겠어요?"
"네, 그럼요." 셀머는 예의바르게 말했다.
"그럼 나중에 봐요, 제이크, 달링!"
캐롤라인은 방으로 들어갔고, 셀머는 마드레느를 보러갔다. 잠에서 막 깨난 마드레느는 몸이 따뜻했으며, 얼굴도 상기되고, 눈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셀머가 키스를 해주자, 마드레느는 셀머의 목에 팔을 감고 꼭 껴안았다.
셀머는 마드레느의 얼굴과 손을 씻어 주고, 캐롤라인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마드레느가 버둥거리며 셀머에게서 내리려고 하자 캐롤라인이 말렸다.
"안 돼, 달링. 키스는 해줄 수 없어. 엄마의 감기가 옮으면 큰일이야. 아래층에 내려가서 맛있는 레몬수라도 마시렴! 방금 카터부인이 엄마한테도 갖다 주었단다." 캐롤라인의 목소리는 아직도 낮게 갈라져 있었다. 그녀는 셀머에게 미소 지었다. "온종일 애써서 안됐어요. 내일은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신경쓰지 말아요. 마드레느를 보는 일은 조금도 힘들지 않으니까요." 셀머는, 캐롤라인을 이토록 좋아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제임즈가 아까 전화로 일찍 돌아오겠다고 했어요. 그가 오면 당신은 제이크와 같이 나가도 좋아요."
셀머는 얼굴을 붉히고 아무 대답도 못하고 마드레느를 데리고 방을 나왔다. 캐롤라인은 나에게, 제이크와 제임즈 폭스가 가까이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은근히 부탁이라도 하는 것일까? 두남자가 같이 있으면 이상하게 공기가 팽팽해지는 것을 요전에 보아서 알고 있었다. 제임즈 폭스는 얼음처럼 차갑고 쌀쌀한 태도를 취하고, 제이크는 겉으로는 온화한 체하지만 조소를 담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직까지 두 사람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지만, 언젠가는 무슨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캐롤라인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자기 때문에 두남자가 불꽃을 튀기는 것을 재미있어 하고 있는 것일까? 두 사람중 한 사람도 놓치기 싫어서, 그들의 질투심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정말 한사람만을 택할 마음이 없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러나 하나도 답을 알 수가 없었다.
마드레느는 제이크의 모습을 보자 그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그는 마드레느를 무릎위에 앉히고, 셀머는 아이에게 주려고 레몬수와 비스킷을 가지러 갔다.
거실로 돌아오니, 제이크와 마드레느가 블록으로 집을 짓고 있었다. 마드레느는 제이크의 무릎에 앉은 채 레몬수를 마시고 비스켓을 먹으며 즐거운 듯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옆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 셀머는 차츰 화가 났다. 제이크는 마드레느에게 어떻게 저렇게 웃어 보일 수가 있을까? 마드레느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으면서.......
뭔가 마드레느가 한 말이 우스웠던지, 제이크는 웃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셀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았다. 순간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미소가 사라진 냉정한 눈으로 셀머를 보았다. 그러나 곧 마드레느가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의 관심은 그쪽으로 쏠렸다.
30분 뒤에 블록은 조그만 성처럼 쌓여졌다. 제이크는 성냥갑으로 침대와 장을 만들었다. 마드레느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조그만 방에 집어넣기 위해서 자질구레한 장난감을 가져왔다.
"꽤 바쁜 것 같군." 냉정한 목소리가 문간에서 들려왔다. 마드레느가 일어서서 자기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임즈는 딸을 안아 올리면서 차가운 시선을 제이크에게로 향했다.
"여어, 레드웨이씨, 또 왔소?" 조용한 말투였지만,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오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군요."
"그런 모양이군." 제임즈는 딸에게 키스하고 셀머를 보고 물었다. "캐롤라인은 좀 어때요?"
"얼굴색이 안 좋더군요." 제이크가 대신 대답했다.
제임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집사람은 일어나 있소?"
"아니요." 제이크가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
셀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겉으로는 온화하게 오가는 대화 속에 어쩌면 저렇게 많은 가시가 돋쳐 있는 것일까.
셀머가 얼른 설명했다.
"캐롤라인은 층계위에서 인사하셨어요. 감기가 옮으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잠깐 보고 와야겠군." 제임즈가 말했다. "괜찮다면 외출해도 좋아요, 셀머. 마드레느는 내가 보겠으니까"
그는 딸을 안고 방을 나갔다. 제이크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셀머를 보았다.
"잠시 드라이브를 하고, 컨트리 퍼브에서 식사나 할까? 음식을 잘하는 곳을 알고 있지."
"아니, 괜찬아요." 셀머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이제 런던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때요? 캐롤라인은 자고 있고, 여기에 당신이 있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니까요."
침묵이 흘렀다. 셀머를 노려보는 제이크의 얼굴이 서서히 상기되어 갔다.
7장
"아까 뜰에서는 그런 느낌은 주지 않던데"
제이크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셀머는 뒷걸음질 쳤다. 굴욕감으로 몸이 뜨거워졌다. 역시 제이크는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셀머는 시치미를 뗐다.
"모르긴 왜 몰라. 내 직감은 틀림이 없어.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싫은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나에게 무관심하다는 건 거짓말이야"
"난 당신한테 무관심하지 않아요. 당신을 경멸하고 있는걸요!"
제이크의 얼굴이 흐려졌다.
"경멸하고 있다고? 제발 부탁이야, 셀머! 내 잘못이 아닌 일을 가지고 나를 탓하는 것은 이제 그만둬! 공정하지 못하고, 우선 정신 건강상 좋지 않아. 난 이제 부당하게 당하는 것에는 진절머리가 나!"
머릿속이 혼란해져서 셀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요즘 필립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줄곧 이 집안의 삼각관계에 대해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돼" 제이크의 말투는 조금 누그러졌다. "그야 신혼여행 중에 남편이 죽었으니, 그보다 고통스러운 일은 없겠지. 나에게 노여움을 불태우는 마음도 이해할 만해. 그러나, 그로부터 벌써 3년이나 지났어. 3년이란 말이오! 도대체 당신은 그 일에 언제까지나 매여 있을 작정이오?"
"난 별로......"
"아니, 매여 있소. 내가 당신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줄 알고 있소? 고개를 드니, 당신은 적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소. 이젠 정말 몸서리가 나는군!" 제이크는 셀머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를 흔들었다. "내말이 들려요? 내 잘못이 아닌 일을 가지고 비난받는 것은 질색이란 말이오."
"난 그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건 알고 있소." 제이크의 시선이 셀머의 입술 위에 머물렀다. 그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당신은 자기의 감정과 정면으로 마주하려고 하지 않는거요. 무섭기 때문이겠지."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계속했다. "그가 죽은 후, 당신은 자기의 둘레에 담을 높이 쌓고 그 속에 틀어박혀 있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충격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어 버린 거요. 당신은 당신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어, 셀머. 그것이 모두 나의 잘못 때문이라고 비난하다니, 너무 억울해"
"그러나, 적어도 나는 문제를 만들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건 우연히 나에게 떨어진 불행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일부러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 같더군요, 레드웨이씨. 정신과 의사한테 가야 할 사람은 어느 쪽인지 모르겠군요."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제이크는 의아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미세스 폭스 말이에요."
"캐리? 캐리가 어쨌다는 거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고 있을 텐데요?" 셀머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얼굴에 혐오감을 떠올렸다.
제이크는 두손으로 셀머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하고자하는 말을 알아내려는 듯이. 셀머는 경멸 어린 눈초리로 그의 눈을 되쳐다보았으나, 몸이 떨리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그에게 얼마나 크게 영향 받고 있는지를 눈치 채이고 싶지 않았다. 제이크 레드웨이가 나의 사적인 문제를 이것저것 들출 권리는 없는 것이다. 하여튼, 제이크가 다가올 때마다 그의 섹시한 매력에 끌려들 것 같은 자신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는 것만은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제이크가 냉담하게 말했다.
"그럴까요? 이집에 산 지 벌써 2주나 되었어요. 폭스씨가 당신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이나, 당신이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 여기에 오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줄 아세요? 아, 이러지 마세요, 아파요!" 제이크의 손가락이 어깨에 파고 들었기 때문에 셀머는 비명을 질렀다.
"아프다고? 그거 다행이군. 당연한 보복이지. 당신은 나하고 캐리가 애인 관계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셀머는 망설였다. 그렇다고 분명히 말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여름인데도 등에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비참한 느낌이 몸을 뚫고 지나는 것을 느꼈다. 제이크는 그런 셀머를 조용히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답해. 이제 새삼스럽게 말 못할 게 뭐야!"
제이크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목의 힘줄이 꿈틀꿈틀 움직이고, 하얀 셔츠에 싸인 가슴이 거세게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히 얘기해. 당신은 나하고 캐리가 애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지, 나도 그것을 알고 싶군."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제이크는 셀머를 떼밀고 뒤돌아보았다. 셀머는 금방이라도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제임즈 폭스가 문에 기대 서 있었다. 얼핏 보기엔 평온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억눌린 감정으로 굳어져 있었다.
셀머는 귀뿌리까지 새빨갛게 되었다. 제임즈 폭스는 그녀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어때요 셀머, 당신은 아직도 대답을 하지 않는군. 당신은 왜 내 아내가 이사람의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아니, 난 그렇게는......미안해요. 혹시......아니, 그런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만일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면, 나는 그를 죽였을 거요."
제임즈의 담담한 말투에 셀머는 그의 말뜻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제임즈 폭스하면 능히 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다.
제임즈의 차가운 눈이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셀머도 제이크를 보았다. 그의 입술은 조소로 일그러져 있었다.
"당신은 내가 무척 싫은 모양이군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임즈 폭스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는 걱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제이크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으로서도 다행한 일이지요." 제임즈 역시 드라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너무 자주 찾아오지 않았으면 더 고맙겠는데요."
"아니, 뜻밖의 말인데요."
"난 솔직하게 말하는 거요."
"알고 있어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셀머는 기묘한 안도감이 가슴에 번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캐롤라인이 남편을 떠나 제이크한테 달려가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크도 제임즈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상대방에 대한 두 사람의 적대감은 경감되지 않는 듯했다. 두 사람은 똑같이, 마치 결투에 임하는 투사와도 같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제이크는 결코 캐롤라인을 제임즈한테서 빼앗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캐롤라인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제임즈 폭스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제이크에 대한 그의 적대감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캐리는 좀 자야 해요. 더 이상 고함을 쳐서 그녀를 방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소. 두분이 싸우고 싶으면 어디 다른 곳에 가서 싸우도록 하시오."
제임즈는 홱 등을 돌리고 걸어가 버렸다. 제이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셀머를 쳐다보았다. 셀머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제 만족스럽소?" 제이크가 냉랭하게 물었다.
"난 폭스씨한테 우리가 하는 말을 듣게 하고픈 생각은 없었어요. 먼저 큰소리를 낸 것은 당신이에요."
"그게 언제나의 당신의 방식이군. 일어난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제이크는 셀머의 팔을 잡고 문으로 향했다. "따라와,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갑시다. 이번에야말로 방해꾼이 끼어들지 않을 곳에서 이야기하는 거요."
"이야기라면 이미 충분히 들었어요!" 셀머는 그의 팔을 뿌리치려고 바르작거렸다.
"셀머, 나는 지금까지 무척 참아왔어. 더 이상 날 자극하지 말아줘요. 그렇지 않으면 결과에 대해서 책임질 수가 없어."
제임즈 폭스에게 들리는 곳에서 말다툼을 할 수도 없어서 셀머는 제이크를 따라 차에 올랐다. 차는 윙윙 소리를 내며 눈 깜짝할 사이에 문을 나섰다. 제이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없이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정면을 응시한 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헝클어 놓았다. 제이크는 짜증스러운 듯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셀머를 돌아보았다.
"당신의 말 중에 한 가지는 사실이오. 캐리는 나에게 커다란 존재요. 사뭇 그래 왔소. 그녀에 대해서 늘 마음을 쓰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제 새삼스레 그만둘 수가 없소. 일이나 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난 캐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소. 그런 마음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것은 사랑이면서도 사랑이 아니오. 적어도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의미의 사랑은 아니오. 나는 데이지에 대해서도 마음을 쓰고 있지만, 캐리에게처럼은 정이 가지 않아. 사랑한다는 것은 구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그것은 산다는 것의 일부요. 무언가를 얻기를 기대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져 버린다면 이세상이 어떻게 되는지 알겠소?"
제이크는 말을 멈추었고, 셀머는 자기 연민과 동정이 뒤섞인 기분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이크는 실현 불가능한 꿈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행복에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다. 필립을 잃었을 때의 그녀가 그랬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 또다시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필립을 사랑할 권리가 있었다. 제이크는, 자기가 상처를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괴롭히고 있다. 그 사실에 셀머는 노여움을 느끼는 것이다.
"당신은 어째서 그녀를 잊으려고 하지 않지요? 그렇게 하고 있으면 더욱 괴로워질 뿐일 텐데......"
제이크는 고개를 들고 찌푸린 얼굴로 셀머를 보았다.
"당신은 아직도 내말을 못 알아듣는군! 사랑한다는 것은 탐욕스러운 것이오. 그것은 보답을, 대답을 요구하지. 사랑은 거센 감정이오. 마치 식욕처럼 말이오. 사람은 굶주리게 되면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살육도 불사하지요. 그러나 일단 그 욕구가 채워지면 즐거움을 위해서 먹게 돼요. 그리고 그럴 경우에는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살인을 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제이크는 거기서 한숨을 쉬었다. "나는 캐리를 얻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아.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 일은 있소-그러나 그것은 나의 잘못된 생각이었소. 나는 그녀를 물론 좋아해요. 거의 나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요. 만일 그녀를 만날 수 없게 된다면, 내팔이나 다리를 잃은 것과 같은 느낌이 들거요. 그러나 그것으로 나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붕괴되어 버리는 일은 없소."
"난 그렇게 되었었어요. 필립이 죽었을 때......" 셀머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가 과거형을 쓴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셀머는 그때 자신의 인생이 붕괴되어 버리지 않았음을 지금에야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정지였을 뿐이다. 그녀는 그때 느끼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제이크를 만날 때까지 계속 거부해 왔다. 제이크는 그녀에게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괴로움과 마주서기를 강요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녀가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상처 밑에서 새로운 살이, 새로운 생명이 몰래 움트고 있다는-사실을 깨우쳐 준 것이다.
"폭스의 경우는 나와는 달라. 만일 캐리를 잃는다면 그라는 존재는 붕괴되어 버리겠지." 한참 후에 제이크가 말했다. "그 녀석은 캐리에게 푹 빠져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야-캐리가 그 녀석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 캐리는 그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거야. 그런 점에 있어서 여자의 직감력은 매우 예민하거든"
"그럴까요? 그렇다면 나는 예외인가 봐요.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캐롤라인은 나를 안좋게 생각하겠지요? 그녀에게 폐를 끼치게 될까봐 걱정이에요."
"마음쓸 것 없소. 당신이 한말은 폭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나까"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나빴어. 그 녀석을 보면 자꾸 놀려 주고 싶어지거든. 그는 무척이나 소유욕이 강한 남자기 때문에. 처음부터 데이지와 나에게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 캐리가 우리와 친구 관계를 계속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그도 차츰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나는 당신과 캐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는 줄 알았지 뭐예요. 당신과 폭스씨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공기가 험악해졌으니까요."
"알았소. 캐리를 위해서라도 폭스를 자극하는 것은 삼가야겠군." 제이크는 차를 길옆에 세웠다. "나는 당신한테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소. 이번에는 당신이 솔직해질 차례야"
셀머는 얼굴이 굳어졌다. 열려진 차창으로 풀내음과 들꽃 향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여름날의 시골만이 갖는 독특한 소리-새의 울음소리와 자운영 꽃 위를 날아다니는 벌의 날개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옆에 앉은 제이크의 숨소리도 들렸다. 셀머는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제이크는 필립이 죽은 후 나의 성벽을 부수고 들어온 첫 남자다. 나는 아직 새로운 감정에 대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드러내놓는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지 않은가.
"당신도 이젠 몇 가지 사실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제이크의 얼굴이 바싹 다가와 있었다.
"사실이라니, 그게 뭐지요?"
"당신은 육체를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이야. 추억에만 매달려서 살수는 없다는 얘기지." 제이크는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손이 뻗어오더니, 셀머의 목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안그래?" 그의 손가락이 맥을 짚듯이 셀머의 목 밑, 팬 곳에서 멈췄다.
"내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셀머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틀었다. 생각대로 그의 손은 아래로 떨어졌으나, 그는 손을 핸들에 올려놓지 않고 셀머의 가슴으로 뻗어왔다. 순간 셀머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검푸른 눈이 동요로 크게 떠지고, 몸은 경직된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제이크는 입가에 놀리는 것 같은 미소를 띠고 다시 몸을 가까이 가져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제이크의 입술이 셀머의 입술에 겹쳐졌다. 셀머는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제이크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얼굴을, 어깨를...... 천천히 애무했다. 셀머는 온몸에서 일시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제이크가 얼굴을 들었다. 긴 속눈썹 밑의 푸른 눈이 열기를 띠고 있었다.
"알겠지? 우리는 늦었건 이르건 사실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돼.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에 언제까지나 매달려 있지 말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단 말이오."
"차선으로 만족하라는 거군요."
"좋을 대로 생각해. 당신도 차차 알게 되겠지. 언제까지나 죽은 남자에 대해 연연해하다가는 마침내는 미쳐 버리고 말거야. 얻을 수 없는 사랑을 언제까지나 구하고 있는 것은 괴롭고 쓸쓸한 일이오.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와야 해, 셀머. 당신은 그 일을 꼭 해내야 해" 제이크는 셀머의 목에 입맞춤을 하면서 말했다. "나도 그래. 나는 당신을 원하고 있소."
셀머 역시 강하게 제이크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그녀를 말리고 있었다. 문득, 제이크가 캐롤라인 폭스에 관해서 한 말이 생각났다-나는 캐롤라인을 얻기 위해서 살인을 하거나 하지는 않아. 그에게는 몸과 마음을 불태워 누구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열정이 없는 것이다. 그는 어깨를 한번 추스르고는 다른 여자에게서 위안을 찾으려 한다. 아마 그런 점 때문이겠지. 캐롤라인이 제이크가 아니라 지금의 남편 제임즈 폭스를 택한 것은....... 그녀는 제이크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진지하게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렸음이 틀림없다.
"당신도 나를 원하고 있을 거야. 안 그래, 셀머?" 제이크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셀머는 제이크를 밀어냈다.
"나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해요! 당신하고 침대를 같이하면 즐겁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알겠어요?" 그녀는 조용히,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감정을 누를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신한테는 그것이 필요하단 말이야. 지금의 당신은 완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야. 당신은 수녀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만, 사실은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여자......"
"하지만 난 동물이 아니에요!"
제이크는 깜짝 놀란 듯, 아무 말이 없었다. 만일 그가 이렇게 화를 내고 있지 않다면, 셀머는 그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아아, 제이크를 미워할 수 있다면......! 나는 그동안 다소 폐쇄적이기는 했지만, 늘 안정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는 나를 무리하게 밖으로 끌어냈다. 과거라는 유리 상자 속에 틀어박혀 있던 나를, 그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끌어낸 것이다. 나는 눈을 뜨고 되살아나고, 그리고 상처받기 쉬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온 것이다. 셀머는 제이크 레드웨이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두려웠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그의 육체적인 매력에 빠져 버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덫에서 빠져나오는 데 전보다 더 심한 괴로움을 맛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제이크는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생각이오? 나는 속지 않아. 나는 다른 재주는 없어도, 사랑에 관해서만은 전문가니까"
"사랑이라고요?" 셀머는 소리치듯이 말했다. "당신은 혹시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자기 자신을 캐리에게 다 쏟아 붓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당신은 모르고 있어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사랑이 쾌락인 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사랑에는 기쁨보다 괴로움이 훨씬 더 많을 수가 있어요. 한데 당신의 본능은 참 편리하게 작용하는 것 같군요. 당신은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사랑에 빠져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셀머는, 지금의 나의 상태가 바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도 그런 위험을 무릅쓰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제이크가 나를 안전지대에서 무리하게 끌어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예감에 떨고 있다.
셀머는 침을 삼키고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훌륭한 배우라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일에만 쏟고 있어요. 일에 있어서는 만족할 만한 보답이 있겠지요. 하지만 여자로부터는 어떨까요?"
"말 다 했어?" 셀머가 말을 멈추자 제이크가 비웃듯이 말했다.
"아직 더 있어요. 당신은 내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고 했지요?"
"음, 그랬지. 당신은 완전히 욕구불만이야"
"당신하고 관계를 갖게 되면 나는 더욱더 욕구불만이 될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지? 시험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야. 지금까지 불만이라는 평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어."
셀머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테크닉에 있어서는 훌륭하겠지요. 내가 말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예요. 당신처럼 경험을 쌓은 배우라면, 마음이 담기지 않은 테크닉만의 연기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잘 아실 텐데요. 그렇다면 로봇하고 침대를 같이하는 편이 나을 거예요."
"이런!" 자존심을 상한 제이크가 신음하듯 내뱉었다.
갑자기 그가 몸을 돌렸기 때문에 셀머는 구석으로 피했다. 때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 무서울 정도의 노여움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제이크는 단지 차에 시동을 걸었을 뿐이었다. 엔진이 소리를 내자, 셀머는 하마터면 내던져질 뻔했다. 속도계는 시속 100킬로미터 이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차는 눈 깜짝할 사이에 폭스가의 현관 앞에 다았다. 셀머가 차에서 내리는데도 제이크는 돌아보지 않았다. 차는 다시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셀머가 현관으로 들어서자, 카터부인이 흥분한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이 왔어요. 가자인 것 같아요."
셀머는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 그녀는 기자와 이야기를 할 상태가 아니었다. 화제는 제이크 레드웨이에 관해서일 것이 틀림없다. 그에 대해서는 지금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기자는 약삭빨라 보이는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셀머는 제이크 레드웨이와 자기에 대해 나돌고 있는 소문을 열심히 부정하며, 화제를 자기의 경력 쪽으로 끌고 가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기자는 자꾸만 화제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으려고 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셀머는 마음을 놓았으나, 이내 자기가 그토록 부정한 것이 모두 무시되고 있는 것을 알고 실망하여 고개를 떨구었다.
"방금 다녀온 나들이는 레드웨이하고였지요?" 그는 문을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카터부인이 그랬는지, 아니면 그가 넘겨짚고 하는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기자를 배웅하고 돌아오니, 카터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인께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군요."
"알았어요." 셀머는 입술을 깨물었다. 캐롤라인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쉽게 짐작이 갔다. 나는 목이 잘리는 거야. 그러나 그것 때문에 캐롤라인을 탓할 수는 없다. 자업자득인 것이다.
캐롤라인은 초록빛 비단 리본이 달린 앙골라 베드자켓을 어깨에 가볍게 걸치고 머리를 브러싱하고 있었다. 머리칼은 잘 닦인 황금처럼 빛을 뿜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셀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셀머는 주먹을 틀어쥐고 서서, 짐을 챙겨가지고 나가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캐롤라인은 갑자기 미소를 띠었다. 초록빛 눈에 놀리는 것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바보군! 여기 와서 모두 이야기해 줘요. 당신하고 제이크가 어떻게 된 건지....."
안도와 감사의 마음이 가슴에 가득 찼다. 셀머는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 미소 지으려 했으나 입술이 떨렸다. 캐롤라인이 손을 내밀어, 셀머는 그 손을 잡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순간 셀머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8장
캐롤라인은 셀머가 실컷 울도록 가만히 있었다. 흐느낌이 가라앉자 셀머는 너무나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캐롤라인은 티슈페이퍼를 쥐여 주었다.
"고마와요." 셀머는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셀머는 캐롤라인의 얼굴을 볼수가 없어서, 핑크빛 시트의 꽃무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어째서 울음이 터졌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방금 제이크와 한바탕 말다툼을 하고 왔거든요. 당신도 화가 나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 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여서......"
"또 제이크하고 싸웠어요?" 캐롤라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사람은 좀처럼 싸움 같은 것은 하지 않는데. 게으름쟁이거든요." 캐롤라인의 목소리에는 따뜻한 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나하고는 잘 싸워요. 만날 때마다 말다툼이 벌어지는 걸요. 하지만 이젠 만나는 일이 없을지도 몰라요. 내가 그를 너무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그는 불처럼 화가 나서 안녕이라는 말도 없이 돌아가 버렸어요."
캐롤라인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셀머는 기분이 안좋아서 얼굴을 들었다. 셀머 자신은 방금 그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셀머의 그런 모습을 보자 캐롤라인은 얼른 웃음을 거두었다.
캐롤라인은 아까 거실에서 세 사람이 소리 높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나의 설명이나 사과를 기다리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셀머는 더듬거리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나는 당신하고 제이크에 관해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내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한테 폐를 끼쳐서...... 남편께서 화를 내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뭐라고 사과해야 좋을지......"
캐롤라인은 셀머의 손을 다정하게 토닥거리며 그 말을 막았다.
"그렇게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나빴어요."
"아니, 별말씀을......"
"아니, 사실이 그랬어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약간 샘을 내고 있었던 거예요."
셀머는 깜짝 놀라서 캐롤라인을 바라보았다. 캐롤라인은 무엇을 고백하려는 것일까? 셀머는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캐롤라인이 자기와 제이크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이 좀 어이없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캐롤라인은 말했다. "나와 제이크와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기는 약간 어려워요. 나는 제이크가 무척 좋고, 그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생각해 주고 있어요. 그 사람은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에 누구에게 얽매이는 것이 싫은 거예요. 나는 그런 예를 많이 보아왔어요. 그는 한 여자와 한동안 데이트를 계속해요. 그여자는 제이크를 사랑하게 되고,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답니다. 그러면 그는 도망을 치는 거예요."
"제이크는 여자와 가볍게 어울리기를 원해요. 알고 있어요. 오늘 내가 그에게 말한 것도 그 일이었어요. 그는 철저히 자기 본위로만 행동하는 천박한 사람이에요."
캐롤라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가만히 셀머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요. 제이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그 반대예요. 오히려 빠져 들어가는 편으로,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을 피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요? 만일 그가 깊은 감정을 모른다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을 거예요."
"그 깊은 감정은 당신에게만 향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요?" 셀머는 눈을 내리깔았다. 날카로운 아픔이 가슴을 찔렀다.
캐롤라인은 한숨을 쉬었다.
"제이크는 한동안 자기가 날 사랑하고 있는 줄 알았던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과는 질이 다른 감정이에요. 그는 무척 원초적인 사람이고......"
"난 제이크의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은 듣고 싶지 않아요." 셀머는 일어섰다.
"나도 그것에 대해서는 가십난에 실려 있는 정도밖에는 몰라요." 캐롤라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 생각을 얘기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제이크는 여러 해 동안 사랑과 섹스를 혼동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너무나 일찍 명성을 얻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기도 전에 눈부신 각광을 받아 버렸기 때문이겠지요. 하룻밤 사이에 유명한 스타가 되어 여자들에게 에워싸이게 된 남자가 겸허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에요. 제이크도 예외는 아니어서, 겸허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요.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일이 좀처럼 없었어요. 그 무렵에는......"
"지금도 그래요. 그는 자의식이 너무나 강하고, 남의 일 같은 것엔 털끝만큼도 마음을 쓰지 않아요."
"내가 말하려는 것도 그거예요. 사람은 저마다의 경험에 의해서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배워가는 법이에요. 제이크는 일찍 성공하여 여자들에게 에워싸였어요.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에 별로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마음이에요. 반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은 매우 귀중하게 보이게 마련이에요. 한동안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 줄로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내가 특별한 인간인 것처럼 그의 눈에 비친 게 아닌가 싶어요. 내가 양보하여 그와 함께 침대로 갔다면 그는 금방, 나에대한 자기의 마음이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거예요."
셀머는 다시 앉았다. 목이 바싹 말랐다. 밖에서는 여전히 나른한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저녁때가 됐는지 나무의 그림자가 길어져 있었다.
"나는 제이크를 사랑하지 않고, 과거에도 사랑한 적이 없어요." 캐롤라인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었어요. 우린 일찍부터 무척 친했기 때문이에요. 철 들기 전에 사귄 친구는 쉽게 잊을 수 없는 게 아니겠어요. 어른이 되니까 남의 일에 별로 깊은 관심을 가질 수가 없게 되더군요."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질투를 느꼈다고......"
"그것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친구를 독점하고 싶다는 기분에서였어요. 제이크는 대스타고, 나는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그에게 특별한 친구라는 것이 기뻐요. 당신이 그런 우리의 오랜 우정에 위협적인 존재로 느껴졌어요. 당신은 지금까지 제이크가 어울려 온 아가씨들하고는 달라요. 그 여자들은 모두......"
"나는 <그의 여자들> 중의 한사람이 아니에요!" 셀머는 벌컥 화를 내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자존심이 상한 느낌이 들었다. 캐롤라인에게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왜냐하면 셀머는 그녀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바보 같은 일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다. 셀머는 제이크가 다정하게 캐롤라인에게 미소 짓는 것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다정함이 처음부터 가시처럼 그녀를 아프게 했다.
"화났어요?" 캐롤라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은 그가 지금까지 어울려 온 여자들하고 다르다는 것뿐이에요. 그는 진심으로 당신한테 끌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셀머는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어떤 가능성 때문일까? 그녀 자신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제이크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이야기했어요?"
셀머는 캐롤라인이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녀에게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캐롤라인은 도중에, '그럴 수가!' 하고 딱 한마디 했을 뿐, 셀머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정말 안됐군요!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지만 이제는 별로 아픔을 느끼지 않아요." 셀머는 자기를 납득시키듯이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도 서글픈 일이에요. 차츰 나는 필립에 대해서 잊어가고 있어요. 그러한 나를 생각하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싶어져요. 한때는 나의 모든 것이었던 사람을 잊어버린대서야,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캐롤라인은 동정 어린 눈으로 셀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그건 위험한 일이에요. 고층 빌딩의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차츰 현기증을 일으켜요. 물론 당신의 말은 잘 알겠어요. 마드레느가 태어나기 전에 나는 첫아이를 잃었어요. 그때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결국은 슬픔을 넘어설 수가 있었어요. 우리 인간은 그래도 살아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거예요."
"네. 하지만 난 이제는 그토록 누구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사랑은 다시는 못할 거예요."
"그런 일에 있어서 인간은 선택권을 갖지 못한 것 같아요. 당신은 이미 제이크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 같으니까요." 캐롤라인이 미소 지었다.
셀머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에요. 그런! 다행히 나는 그렇게 바보는 아니에요."
"셀머, 당신한테 전화가 왔어요." 제임즈 폭스가 방으로 들어왔다.
"누굴까요?" 셀머는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하지만 묻지 않았소." 제임즈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이크일지도 몰라요."
"아니, 그는 아니었어." 제임즈는 미소를 띠고 아내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셀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셀머 레이스예요."
"셀머, 잘 있었어요?" 그녀의 이름이 등록돼 있는 중개 사무소의 매니저였다. "연락을 취하려고 무척 찾았지. 왜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지요?"
"정확히 알려 놓았는데요." 셀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비서는 내가 찾아갔던 것을 잊어버린 것일까? 내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일 오디션을 받을 수 있소? 당신을 지명한 역이 하나 들어왔어요. 내일 열한 시에 와 달라는데, 갈수 있겠소?"
"내가 안 갈 것 같아요?"
"그렇지! 그래야만 여배우지! 메모 준비는 되었소?" 매니저는 자세한 설명을 하고 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과 제이크 레드웨이는 어떻게 된 거요? 뜬소문인지, 아니면......."
"전화 고마워요." 셀머는 그렇게만 말하고 전화를 딱 끊어 버렸다.
노크를 하고 방문을 여니, 제임즈가 상기된 얼굴로 일어섰다. 그는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좋은 소식이지요?"
셀머는 목소리가 들뜨는 것을 누르면서 얘기해 주었다. 캐롤라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잘됐어요! 축하해요. 물론 당신이 여기에 없는 것은 쓸쓸하지만...... 마드레느한테도 잘해 주었고, 나도 당신하고 같이 있는 것이 즐거웠어요. 하지만 난 당신이 역을 맡는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만일 그렇게 된다 해도, 리허설에 들어가려면 한참 있어야 돼요."
"자, 나는 일이나 하러 갈까" 제임즈 폭스가 일어섰다. "내일은 금요일이니까 주말은 런던에서 보내도 좋아요, 셀머. 오랜만에 한가롭게 지내 봐요."
남편이 나간 뒤에 캐롤라인도 말했다.
"제임즈의 말대로 해요. 허물없는 보이프렌드하고 데이트라도 하고 와요. 그러면 제이크로 인한 고민도 조금은 덜어질 거예요."
"난 고민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캐롤라인은 셀머의 말을 무시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이크로서는 좋은 교훈이 되겠지."
"그럴 거예요." 셀머는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제이크 레드웨이는 여자에 대해서 몇 가지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여자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그러나, 그는 섹스에는 노련할지 모르지만 여자의 섬세함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오디션은 트래팔거 스퀘어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극장에서 갖게 되어 있었다. 그날 아침 셀머는 제임즈 폭스와 역에서 헤어져, 목적지까지 한가롭게 걸어갔다. 하늘은,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의 여름 아침 특유의 조용한 빛을 띠고 있었다. 셀머는 비둘기가 우글거리는 광장을 천천히 가로지르면서 제이크 레드웨이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다. 극장에 도착할 무렵에는, 자기가 제이크를 싫어하고 있으며, 일에 대한 정열을 빼고는 그의 모든 점을 경멸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제이크 레드웨이에게 끌리는 여자는 누구나 상처를 받고 말거야. 제임즈 폭스를 택한 캐롤라인은 분명 현명했다.
셀머는 무대 뒤의 입구에서 이름을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다. 복도는 좁고 약간 어두웠다. 여기에 올 때까지는 오디션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극장 안에 들어서자 손발이 차가와지고 위가 아프기 시작했다. 오디션이란 몇 번을 거듭해도 좋아질 수가 없는 것이다. 셀머는 긴장을 풀려고 애를 썼으며, 저쪽에서 걸어오는 빨간 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남자에게 가까스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어, 당신은......"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에 시선을 떨구었다.
"셀머 레이스예요."
"그랬었지. 난 돈 브라운이오. 이곳 무대감독이지. 이쪽으로 와서 해리를 만나줘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고는 돈은 몸을 돌려 앨리스의 이야기에 나오는 흰 토끼처럼, "바쁘다, 바쁘다." 하고 말하면서 종종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셀머는 숨을 헐떡이면서 그를 뒤따라갔다.
"해리라니요? 해리 에이킨즈말인가요? 이번 연극은 그가 연출하는 건가요?"
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한 의아스런 눈으로 힐끗 셀머를 바라보았다. 해리 에이킨즈는 배우들이 녹초가 될 때까지 연습을 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연출가인데, 그의 무대는 언제나 대호평을 받으며, 배우들은 다투어 그의 연극에 나가려고 한다. 그렇게 유명한 연출가가, 아무리 작은 역이라고 해도 그 역을 나에게 주려고 한다니, 셀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매니저는 왜 해리가 연출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을까? 비참한 결과로 끝날 것 같은 오디션에 아무 예고도 없이 나를 던져 넣다니 너무해!
돈은 셀머를 데리고 넓은 무대로 나갔다. 막이 올려져 있었다. 푸르스름한 라이트 하나가 무대 복판에 꽂혀 있고, 그 속에 두 남자가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의 한사람이 대머리인 해리 에이킨즈였다. 회색 러닝 웨어를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은 코끼리를 연상시켰다. 그와 마주 서 있는, 검은 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스마트한 남자가 발소리를 듣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순간 셀머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쇼크와 노여움으로 머리가 멍해져 왔다. 제이크는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제이크는 셀머의 그런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장난기 있는 미소를 띠었다.
"늦었군. 이리와요, 해리한테 소개하겠어."
셀머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려고 해도 그 자리에 못 박힌 것 같이 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노여움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모두 제이크가 벌여 놓은 일이군. 도대체 어쩌자는 심산으로......!
제이크는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어와 해리의 모습을 가로막듯이 하고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셀머를 내려다보았다.
"기회를 놓치면 안 돼. 해리는 참을성이 있는 남자가 아니야. 이것은 당신으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야. 작은 역이지만 해리의 눈에 들면 당신은 틀림없이 빛을 내게 될 거야"
"내가 오디션을 받을 수 있도록 에이킨즈씨한테 부탁한 것은 당신이지요?" 셀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는 지금 나한테 출연 교섭을 해오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나도 지금으로서는 그에게 큰소리를 칠수 있는 입장이오. 그러나 그것도 내가 출연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까지의 이야기지. 아직 손에 넣지 못한 배우는 손에 넣은 배우보다 열배나 가치가 있으니까" 제이크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셀머는 조금도 웃고 싶지 않았다.
"난 이렇게까지 하면서 역을 받고 쉽지는 않아요." 셀머는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제이크는 해리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데로 그녀를 끌고 갔다.
"여기까지 일을 추진하는 데는 상당히 힘이 들었단 말이야!"
"내가 부탁한 것은 아니에요! 나는 내 힘으로 역을 찾겠어요. 당신의 신세는 지지 않겠어요. 우선 에이킨즈씨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는 당신을 나의 최근의 연인이라고 생각하겠지."
셀머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에이킨즈씨한테 말해 줘요. 나는 결코 당신의 연인 같은 것이 아니고, 게다가......"
"그런 일에 누가 일일이 마음을 쓸 줄 알아?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오? 왜 이러지, 셀머? 이번 역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도망을 치려는 건가?"
셀머는 제이크의 말에 벌컥 화가 치밀었다.
"그런 역쯤은 나도 해낼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과 이것과는 이야기가 달라요. 이것이 정당한 공모거나, 에이킨즈씨가 내 연기를 보고 오디션을 하고 싶다는 경우라면, 나는 기꺼이 덤벼들 거예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싫어요!"
제이크는 셀머의 팔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흔들었다.
"내말 잘 들어. 만일 해리가 이역이 당신한테 무리라고 생각하면, 그는 절대로 당신을 쓰지 않을 거야. 나는 해리에게 연기 테스트를 받을 찬스를 만들어 준 것뿐이야. 나머지는 당신의 역량에 달렸어."
셀머는 불안한 얼굴로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제이크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말했다.
"어떡하겠어? 오디션을 받겠소?"
셀머는 그의 시선을 피하여 눈을 내리깔고 생각했다. 해리 에이킨즈의 무대에 설 찬스는 분명 놓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오디션을 받게 된 경과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남이야 뭐라든, 그런 것은 무시하면 되는 거야. 해리의 연출가로서의 명성이 가십 같은 것은 날려 보낼 것이다. 제이크의 말이 옳다.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회다. 접시에 담아서 내민 기회를 붙잡지 않는다면 나는 이만저만한 바보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하겠어?" 제이크가 대답을 재촉했다.
"하겠어요." 셀머는 낮은소리로 대답했다.
"무척 고마워 하는군." 제이크가 비아냥거렸다.
"고마와요." 셀머는 불쑥 말했다.
제이크는 한 대 때려 줄까 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지 나도 모르겠어." 제이크는 불쑥 그렇게 말하고는 해리 에이킨즈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시 망설인 뒤에 셀머도 그를 따라갔다. 해리는 악수를 하면서 흥미 있게 셀머를 관찰하며, 지금까지의 무대 경험이나 연극관에 대해서 두세 마디 질문을 해왔다.
"대본은 보았소?" 해리가 묻자, 셀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대강의 줄거리와 당신이 맡을 예정의 역에 대해서 설명하겠소. 작은 역이지만, 극 전체의 없어서는 안 될 포인트가 되는 역이오."
해리가 대충 설명을 한 뒤 대본을 셀머에게 건네고, 앉아서 지정해 준 2, 3 페이지를 잘 읽어 보라고 말했다. 해리가 떠나자 제이크가 다가와서 의자등에 손을 댔다.
"도와줄까? 먼저 통독을 하겠어?"
"리허설은 없어요." 해리가 객석 맨 앞줄에서 소리쳤다. "당신이 뭘 가르쳐 줄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녀의 마음의 움직임이지, 당신의 스타일이 아니야. 당신의 스타일은 대강 알고 있으니까......"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렇겠지요!"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셀머는 침을 삼키고 일어섰다. 목이 칼칼하고, 몸이 차가와져 왔다.
"됐소?" 해리가 물었다. 셀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됐다> 고 할수 있는 상태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것을 셀머는 알고 있었다. 대사를 끝까지 읽을 수야 있겠지만, 거기에 감정을 넣을 수는 도저히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셀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란, 그를 밑바닥까지 뒤흔드는 공포심뿐이었다. 머리는 텅 비어 가고, 눈앞의 글자들이 춤을 추었다. 이글자의 나열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애당초 나는 왜 무대에 서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난 머리가 이상한 거야. 연극 같은 것은 정상적인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매저키스트들이 하는 짓이야.
"오케이! 거기까지면 됐어요." 하는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셀머는 입을 벌린 채 어두운 객석을 내려다보았다. 해리 에이킨즈가 미소를 띠고 조용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셀머는 자기가 방금 대본을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끝난 것이다.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저 대사를 줄줄 읽어 나갔을 게 틀림없다.
"제이크, 잠깐 할 얘기가 있어." 해리가 말했다.
두 사람은 텅 빈 무대에 셀머를 남겨 놓은채 어디론가 가버렸다. 셀머는 의자 위에 대본을 놓고 느릿느릿 무대 옆을 향해 걸어갔다. 어떻게 출입구를 통해 밝은 여름날의 태양 아래로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오디션에 실패한 것이 분명하다. 해리가 공손하게 딱지를 놓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
셀머는 차링크로스 로드로 해서 레스터 스퀘어로 나와, 길가에 있는 조그만 다방으로 들어갔다. 진한 블랙커피가 마시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셀머는 창가의 자리에 앉아서, 셰익스피어의 동상이 서 있는 광장 복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레이스 같은 그림자를 떨구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크 레드웨이는 무엇 때문에 해리한테 나를 테스트해 봐 주도록 부탁했을까? 대답은 분명했다. 그는 나에게 빚을 지우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보답으로 그가 무엇을 기대하는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이 세계에는-아니, 어느 세계에도-흔히 있는 일이다.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대개의 여자들은 그것을 찬사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데, 제이크는 지금까지 여자를 손에 넣는 데 그토록 수고를 한 적이 없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여자들은 기꺼이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을 테니까....... 셀머는 식은 커피를 스푼으로 휘저으며, 차 안에서 제이크에게 키스를 받았을 때의 황홀한 느낌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치 몸 전체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셀머는 그러한 자신이 두려웠다. 나는 제이크를 깊이 알고 싶지 않다. 그는 나에게 상처를 줄 것이 틀림없다. 도저히 그를 사랑한다는 괴로움에 직면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셀머는 곧장 오빠의 가게로 향했다. 오빠는 가게 안쪽에서 은그릇을 닦고 있었다.
"여어, 셀머가 아니니! 런던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니? 제이크 레드웨이하고 데이트라도 하고 있었니?" 오빠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뭐가 우스워요, 난 조금도 우습지 않은데"
"그래? 그럼 커피나 좀 끓여 다오. 카렌하고 개구쟁이들은 동물원에 갔어. 무서운 여름방학이 시작되어서, 카렌은 아이들 때문에 고생이 많단다."
셀머는 오빠에게 커피를 끓여 주고는 오빠와 같이 은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제이크 레드웨이하고는 어떻게 되었니? 카렌은 스크랩을 시작했단다. 현재로는 기사를 세 개밖에 모으지 못했으나, 그녀는 매우 흥분하고 있어."
"그럴 필요가 없는데. 고십이란 글자 그대로 뜬소문에 지나지 않아요." 셀머는 화풀이라도 하듯 힘껏 은그릇을 닦았다.
"제이크가 너를 구해 준 사람이라니, 이상한 운명이구나"
"정말 묘한 운명이에요." 셀머의 손에 더욱 힘이 주어졌다.
"무엇이나 그렇게 자기 가슴속에만 가두어 두는 것은 좋지 않아. 너는 매사에 비밀주의야. 우리는 너의 가족이란 말이야. 언제나 너에 대해서 마음을 쓰고 있어."
오빠는 안경 너머로 셀머를 보고 씩 웃었다. 그것은 일종의 강요였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 대해서 마음을 쓰고 있다고 한다면 나도 그에 대해서 마음을 써야 한다는 요구인 것이다. 일방적인 사랑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사람은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얻고 있는 것이다.
셀머는 오빠를 쳐다보고 어깨를 추슬렀다.
"난 제이크 레드웨이를 몇 번 만났어요. 단지 그것뿐이에요. 우선 경쟁자가 너무나 많아서 이야기가 되지 않아요. 제이크는 여자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한두 번 데이트했다고 떠드는 것도 바보스러워요. 하여튼 얘기할 만한 일이 없어요."
"어쩐지 변명처럼 들리는구나"
"사실이 그래요. 나는 그와 침대를 같이하지 않았어요."
"누가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니?" 오빠는 미간을 찌푸렸다.
"앞으로는 아마 그를 만나는 일도 없을 거예요."
"아이고, 그래?"
오빠의 말투에 셀머는 귀뿌리까지 빨개졌다.
"정말로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 주위에서 멋대로 단정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제이크 레드웨이 따위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는 나에 대해서 조금도 마음을 써주지 않아.
"꽤 지쳐 있는 것 같구나" 빌리는 오빠다운 동정심에서 말했다. "오늘 저녁 셋이서 외식을 하는게 어떻겠니? 카렌이 돌아오면 베이비 시터를 부르겠다. 카렌과 밖에서 식사를 한 지도 오래 되거든. 아마 즐거운 만찬이 될 거야"
셀머는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빠가 너무나 기쁜 얼굴을 했기 때문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멋있겠군요. 고마워요."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되어 주지 않았다. 카렌은 다섯시에 돌아왔는데, 온종일 아이들에게 끌려다녔기 때문에 완전히 지쳐 있었다. 아이들도 하품을 하면서 셀머에게 키스를 하고, 우유와 삶은 계란과 토스트로 저녁을 마치자 바로 침대로 파고들었다. 어느 쪽이 봉제 곰을 안고 자는가에 대한 싸움은 오늘 저녁엔 없었다.
"미안해요. 다시 나갈 기력이 없어요." 카렌이 말했다. "남매끼리 나가면 어때요? 난 텔레비전이나 조금보다가 일찍 자고 싶어요."
"아니, 괜찮아요, 난" 셀머는 이렇게 말했으나, 오빠가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아니야, 가자! 너는 기분전환이 필요하고, 나도 그래. 어차피 테이블을 예약해 버렸으니까......"
"하지만 이런 차림으로 어떻게 레스토랑에 갈수가 있겠어요?"
"그렇다면 네집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옷을 갈아입으렴."
"빌 리가 하자는 대로 해줘요. 그는 무척 기뻐할 거예요." 카렌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자 빌리는 금방 뿌루퉁해졌다.
"나를 어린아이로 취급하는군!"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떻게 해요. 당신은 커다란 아기예요." 카렌은 입에 손을 대고 하품을 했다. "아아, 피곤해! 다시는 동물원에 가지 않을 거야"
빌리는 누이동생을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주고,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옷은 대부분 폭스씨 집에 갖다 놓았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은 지난번 종연 파티에 입고 나갔던 실크 드레스뿐이었다. 화장을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든 빌 리가 잠시 후에 침실 문을 노크했다.
"누구한테선지 아니?"
셀머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어서 나오라구. 상당히 조바심을 내고 있단다. 그 목소리는......"
셀머는 마지못해 수화기를 집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방금 그게 누구야?" 제이크는 그녀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물어뜯을 듯이 물었다.
"뭐라고요?"
"전화에 나온 녀석 말이야. 누구냐고? 어째서 그 녀석이 내 이름을 듣더니 웃지?"
"난 지금부터 식사를 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하고 있을 겨를이 없어요." 셀머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 녀석하고? 누구지, 그게? 당신은 오디션의 결과를 듣고 싶지도 않아?"
"듣지 않아도 알고 있어요, 절망적이라는 것을요. 그럼 시간이 없으니 끊겠어요."
"잠깐, 셀머. 당신은 그 역을 맡게 되었단 말이야. 바보 같으니! 해리는 당신이 마음에 들었나 봐. 참 좋다고 했어."
순간 셀머는 멍해졌다. 제이크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손이 떨려 수화기를 잡고 있을 수가 없어서 셀머는 한마디도 없이 그대로 전화를 끓어 버렸다.
"왜 그러니, 셀머? 무슨 일이 있었니?" 빌리가 놀라움과 호기심을 드러내며 누이동생을 보았다.
"그가 거짓말을 한 걸 거예요. 그럴 리가 없는 걸" 셀머가 말했다. 설령 제이크의 말이 사실이고 해리가 나한테 역을 준다 해도, 그것은 내가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다. 오디션이 완전히 실패였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해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제이크에게 설득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이크가 그 대가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너무나 뻔했다.
"천만의 말씀이야! 누가 그런 수법에 넘어갈 줄 알고!" 셀머는 코트를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빌리는 투덜거리면서, 급히 방을 나가는 누이동생의 뒤를 쫓았다.
빌리의 차는 바로 발진을 하지 못했다.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 날씨에는 컨디션이 좋지 못해. 새 차를 사긴 사야겠는데......"
그때 한 대의 차가 모퉁이를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누구의 차인지를 알아본 셀머는 몸이 굳어졌다. 이윽고 빌리의 차는 시동이 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제 해결!" 오빠는 이렇게 말하고 셀머를 돌아보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니!" 그는 누이동생의 어깨에 팔을 감아 꼭 끌어안았다.
저쪽에서 오는 차가 크게 클랙슨을 울렸다. 셀머는 그 차의 운전석에 앉은 남자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아래를 보고 있었다.
"어디 저런 녀석이 있어? 도로를 혼자 샀나?" 오빠는 창밖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차가 큰길로 나왔을 때 뒤돌아보니, 제이크의 차가 뒤쫓아 오고 있었다. 오빠는 다시 좁은 길로 들어서서, 스피드를 내며 이리저리 누볐다. 이윽고 제이크의 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셀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가 제이크를 몰라본 것이 다행이었다. 그의 차를 따돌려 달라고 오빠한테 부탁하기도 쑥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15분쯤 후에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셀머는 식욕이 없었으나 오빠가 즐거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분을 맞추느라고 식사를 즐기는 체했다.
"이런 외식은 앞으로 더 자주 해야 해. 카렌도 그렇지. 다음에는 셋이서 오자" 오빠가 말했다.
"카렌과 두 분이 하세요. 그게 나아요. 내일 어때요? 내가 가게를 지키고 아이들을 돌보아 주겠어요. 카렌도 가끔 기분전환을 해야 해요."
오빠는 기꺼이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셀머는 오빠 부부가 다음날 아침 일찍 외출할 수 있도록 밤에 오빠의 집에서 잤다. 빌리는 과연 그답게, 일석이조를 노릴 작정이라고 했다. 케임브리지의 옥션에 가서 은기를 몇 개 사고, 그리고 부부가 하루의 휴가를 즐기자는 계획이었다.
이튿날 셀머는 가게를 지키면서 아이들을 돌보았는데, 그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드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병에서 굴러 나온 유리알처럼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셀머는 카렌이 잘도 견딘다는 생각에 계속 감탄을 금치 못했다. 셀머는 아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점심식사로 비프버거에 포테이토 칩, 그리고 초콜렛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가능한 한 식사 시간을 오래 끌려고 했다. 식탁에 앉아 있는 동안만은 아이들도 얌전했기 때문이다.
오빠와 카렌은 일곱 시에 돌아왔다. 샐러드와 슬라이스 햄, 그리고 치킨으로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한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에 셀머는 일어서서 작별을 고했다.
"오늘은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머릿속을 세탁할 수 있었어요. 녹초가 되었겠지요?" 카렌이 말했다.
"아니, 즐거웠어요. 아이들도 즐거웠는지 모르지만......"
오빠의 배웅을 받으며 집에 돌아온 것은 열시 반이 지나서였다. 현관에서 고양이를 밖으로 내놓고 있던 미망인이 셀머를 보더니 말했다.
"당신 방에서 온종일 전화가 울어대고 있었어요. 열쇠가 있었다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긴급전화가 틀림없어요."
"글쎄요, 어떨는지......" 셀머는 그렇게 대답하고 층계를 올라갔다. 열쇠를 꺼냈을 때 방안에서 또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셀머가 수화기를 잡기도 전에 벨소리는 그쳐 버렸다. 셀머는 안심이 되면서도 묘한 실망감을 느꼈다.
셀머는 대강 샤워를 마치고 침대로 파고들었다. 길고 괴로운 싸움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병사와도 같은 기분이었다. 아이들이란 정말 기운이 펄펄 넘치는 모양이다. 불을 끄자마자 셀머는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셀머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갑자기 화재를 알리는 비상 벨이 울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정신없이 갑판으로 나왔을 때, 잠이 깼다. 또 전화 벨이 울리고 있었다.
셀머는 손으로 더듬어 사발시계를 찾았다. 시계가 떨어져 바닥 위를 떼굴떼굴 굴렀다. 사발시계의 벨이 울리기 시작하고, 그 소리와 전화 벨 소리는 서로 기를 쓰며 겨루는 듯했다. 셀머는 비틀거리며 시계를 쫓아가 소리를 멈추게 하고 나서 수화기에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하루종일 어디에 가 있었지?' 초조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바람에 일시에 잠이 달아나 버렸다. 셀머는 손에 들고 있는 시계를 보았다.
"지금은 한밤중이에요."
"당신은 캐리네 집에도 없었어." 제이크가 물어뜯을 듯이 말했다. "도대체 어디에 가 있었어? 그리고, 어젯저녁에 당신하고 같이 있었던 녀석은 누구지? 당신은 필립이 세상을 뜬 뒤에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어. 그럼, 그 녀석은 누구야? 허깨빈가?"
"당신 지금 제정신이에요? 지금은 한밤중이란 말이에요. 날 가만히 자게 해줘요. 당신도 이제 자는 게 좋을 거예요."
"빨리 대답해!"
"말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셀머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침대로 파고들자, 또 전화벨이 울렸다. 셀머는 코드를 빼 버렸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또다시 잠이 들었다.
9장
다음날 아침, 셀머가 아직 깨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문을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겨우 눈을 뜨고, 저소리를 무시해 버릴까, 아니면 도어체인을 걸고 문을 조금 열어 볼까 하고 망설였다. 결국 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되어, 짧은 잠옷 위에 얇은 목면의 실내복을 걸치고 살며시 문을 열었다. 좁은 틈새로 제이크의 얼굴이 보였다.
"문을 열어!"
"안 돼요. 돌아가 줘요."
제이크는 까만 보디 셔츠에 까만 바지라는, 평범한 듯하면서도 어쩐지 위험스럽게 느껴지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셀머는 그와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를 믿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이크의 모습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당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당신은 그 역이 탐탁지 않은 거야?" 제이크는 틈새로 발을 들여놓으며 말했다.
"난 침대에서 오디션을 하고 싶진 않아요."
셀머의 말에 제이크의 눈이 험상궂은 빛을 띠었다. 셀머는, 그가 화를 내면 평상시보다는 훨씬 더 멋있어 보인다고,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 내가 그런 것을 하자고 부탁했지? 당신은 늘 그런 생각만 하고 있나?"
"네, 그래요. 발을 치워 주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일생 동안 다리를 절며 살아야 할 거예요."
"이 문을 열지 못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안으로 들어가야겠어."
제이크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놀라 셀머는 몸을 흠칫했다. 제이크는 문틈에 낀 발을 빼더니 두세 발짝 뒤로 물러섰다. 돌아가려는 것일까? 순간 셀머는, 그가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셀머는 자신의 바보스러움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제이크는 등을 굽혀 몸으로 문을 들이받았다. 체인이 끊어지고 문이 열렸다. 제이크는 안으로 들어와 손을 등 뒤로 돌려 문을 닫고, 문에 기대어 만족스러운 듯이 빙그레 웃었다.
셀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그녀의 노여움이 폭발했다.
"잘도 남의 집 문을 부수는군요! 경찰을 부르겠어요!"
"닥쳐!" 제이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왼쪽 어깨에 손을 댔다. "어깨를 다친 것 같군."
"당신에게 좋은 약이 될 거예요. 뼈가 두세 개쯤 부러지지 않은 것이 유감이군요. 그 역 때문에 찾아왔다면, 난 사양하겠어요. 그렇게 하고 싶은 역도 아니니까요."
"한대 맞아야 정신이 날 모양이군." 제이크는 험악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일부러 나를 모욕하는 거야? 아니면, 당신은 남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나? 내가 여자를 손에 넣기 위해서 그런 잔재주까지 부려야 할 필요가 있는 줄 알아?'
"물론, 당신이 휘파람만 불어도 여자들이 몰려들겠지요. 당신은 나도 그렇게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한테 빚을 지우려고 한 거예요."
"당신은 몰라, 셀머. 난 그런 짓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어. 내가 불이 붙으면 어떻게 되는지 당신도 곧 알게 될 거야" 제이크는 손을 뻗어 셀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해리가 당신에게 그 역을 주기로 한 것은, 내가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 아니야. 그런 일을 했다간 역효과가 날 뿐이야. 그는 고집불통이거든. 당신은 오디션에서 잘해 주었어. 난 해리에게 당신의 연기가 상당히 좋다고 말했는데, 그걸 당신이 증명해 준거야"
셀머는 미간을 좁히고 살피듯이 제이크의 얼굴을 보았다.
"난 내가 대사를 제대로 읽기나 했는지조차도 모르겠어요. 그저 바보 같은 짓이나 하지 않았으면 싶었을 뿐이에요."
제이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셀머는 그 푸른 눈에 넘치는 다정함에 놀라서 눈을 깜박거렸다.
"걱정하지 마, 잘했으니까. 리허설의 시작은 6주 뒤야. 런던에서 막을 열고, 웨스트엔드에서 아마 3개월쯤 공연하게 될 거야, 운이 좋으면. 그런데, 당신이 나와 함께 그토록 오랫동안 무대에 같이 서는 것을 참아낼 수 있다면 좋겠는데......" 제이크가 놀렸다.
그는 셔츠의 앞을 풀어 놓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끼고 셀머는 자기도, 얇은 잠옷 위에 걸친 실내복의 앞이 풀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셀머는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제이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당신은 아름다워" 제이크는 이렇게 속삭이며 셀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당신을 가지고 싶어 하는 나를 탓할 수는 없어. 당신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야. 셀머!"
장난기를 띤 것 같은 그의 어조와 푸른 눈에 서린 놀리는 것 같은 표정이 그녀는 싫었다. 그녀는 제이크의 손을 치웠다.
"당신에게 있어서 여자는 모두 그런 대상밖에는 못되는 존재군요! 당신은 모든 일을 너무나 가볍게 다루고 있어요!"
"내가 가볍게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내가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 제이크의 목소리는 낮고 불안정했다. "금요일 밤에는 어디에 가 있었지? 난 당신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차 속에서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수없이 시계를 보며, 어찌 된 일일까 하고 애를 태웠어. 지금까지의 나의 생애에서 최악의 밤이었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해서 캐리한테도 전화했고, 심지어는 데이지한테까지도 전화했어. 데이지는 자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그리고 경찰에도 전화하고......."
"경찰?"
"사고라도 당하지 않았나 싶어서 말이야" 제이크는 어색한 듯이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차에 치여 병원으로 실려 갔는지-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경찰도 내머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그들은 매우 공손하게, 만일 무슨 사고가 일어났다면 근친자에게 연락이 갈 거라고 설명해 주었어. 그런데, 당신의 근친자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니......"
"당신 어떻게 된 것 아니에요?" 셀머는 천천히 말했다.
제이크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나는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어. 즉, 당신이 어떤 놈팡이하고 같이 밤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야" 제이크는 침을 삼켰다. "그러나 그것도 별로 유쾌한 상상은 못 되더군."
셀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픔과 기쁨이 교차되는 감각이 가슴을 꽉 죄어댔다. 제이크는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때문에 질투하는 법은 없으니까.
제이크는 갑자기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셀머의 눈에 떠올라 있는 표정을 읽어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흥,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군. 약을 올리기 위해서 그랬었나? 캐리가 난 좀 애를 먹을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나한테 뭔가를 깨우쳐 주려고 그랬었나, 셀머? 정말 여자란 알 수가 없군!"
"엉뚱한 오해는 하지 말아요. 난 당신한테 무엇을 깨우쳐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요. 난 그저 자신의 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고,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에요. 당신이 밤새도록 내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그런 짓을 하겠어요?"
"글쎄?" 제이크는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월요일 아침에는 난 모든 일을 제쳐놓고 먼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할 것 같군."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제이크는 힐끗 셀머를 바라보았다. 볼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셀머!" 제이크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댔다. "셀머, 난 금요일 밤에 차 안에 앉아서 이것저것 생각해 봤어. 그저 멍하니 그렇게 앉아 있으려니까 전혀 뜻밖의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더군. 당신이 사고로 죽었거나 다른 남자한테로 가버렸다면 어떻게 하나, 하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지. 난 정말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어. 당신을 잃는다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잃다니, 난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물론 그런 생각도 했지. 당신은 내 것이 아니라고 자신에겐 타일렀어.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데 어떻게 해"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도록 노력하세요. 난 당신의 것이 아니에요-누구의 것도 아니고, 난 나 자신이에요."
"난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해" 그가 말했다. 맑고 푸른 눈이 셀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셀머는 천천히 말했다. "확실하지는 않다는 말이군요?"
제이크는 화가 난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확실하지 않다고? 그렇지, 확실하지는 않지. 왜냐하면, 이런 기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야. 사랑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지 어떤지 조차도 분명하지 않은데. 지금까지의 사랑에 대한 내 관념이 완전히 뒤엎어져 버렸으니까" 제이크의 눈길이 셀머의 입술 위에 와 멎더니, 얼굴이 가까이 왔다. 그 눈에 나타난 노골적인 정열에 셀머는 기가 질렸다. "난 당신을 갖고 싶어-지금까지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어. 난 당신하고 같이 있고 싶어. 언제나 당신을 보고 있고 싶어.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은 일이 많아.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처음이야. 당신은 수수께끼야. 당신은 다른 여자하고는 다른 것 같아. 당신은 마치 소라껍데기 같아. 그속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 보지만, 결국 아무것도 알 수가 없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야" 제이크는 낮게 웃었다. "난 당신한테 사로잡혀 버린 거야-파티에서 당신이 나를 삼류 카사노바라고 말한 그날 밤부터라고 생각해. 난 화가 나서 당신을 두들겨 패주고 싶었지. 그러나 이튿날 아침잠에서 깬 나는, 당신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거야. 그 이후 줄곧 나는 당신만을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나 만일 내가 당신하고 침대를 같이 한다면, 나는 이미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닌, 평범한 여자가 되어 버리겠지요?"
"그게 아니야" 제이크는 성급히 부정했다.
셀머는 조소를 띠었다.
"당신이 나를 분석하기 시작하기 전에, 나는 이미 당신의 성격을 분석하고 있었던 거예요. 레드웨이씨!"
제이크는 셀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짜증과 욕구불만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 고물차에 같이 타고 있던 남자는 도대체 누구야?" 그가 갑자기 물었다. "당신의 보이프렌드?"
"우리 오빠예요!"
순간 제이크는 입을 벌렸다. 그 표정이 너무나 우스워서 셀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라니? 그런데 왜 당신은 웃고 있지?"
"당신의 표정이 너무 우습지 뭐예요!"
"오빠라면 오빠라고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지?"
"뭣 때문에 말해야 하지요? 당신은 무척 즐기고 있는 것 같던데......"
"즐긴 것은 당신이란 말이야"
제이크의 눈은 노여움으로 불타고 있었다. 셀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실내복의 앞을 여미고 허리띠를 졸라맸다.
"난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어요. 커피를 끓이겠으니, 당신도 좀 들겠어요?"
셀머는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 제이크는 거실의 책을 집어 들고 책장을 넘기다가 불쑥 물었다.
"가족은 몇 명이지?"
"오빠와 부모가 있어요. 당신은요?"
"난 외아들이야. 부모는 일찍 돌아가셨지. 난 외돌토리야" 제이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당신 연기를 하고 있지요?"
"그것을 알아보니 반갑군."
얼마동안 셀머는 찻잔을 꺼내고 물을 끓이느라고 매우 바쁘게 움직였다. 셀머는 문득 제이크가 매우 조용해진 것을 느꼈다. 혹시 말도 없이 돌아가 버린 건 아닐까? 그녀는 서둘러 가보려고 하다가, 바로 뒤에 와 서있던 제이크와 몸이 부딪쳤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잡으며 부축했다. 어둡게 그늘진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셀머!" 제이크는 그녀를 꼭 안았다.
셀머는 발뒤꿈치를 들고 자진하여 그의 입술에 입술을 댔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이제는 숨길 수 없게 된 정열에 몸을 불태웠다. 방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셀머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오랫동안 눌러 온 강렬한 욕구만이 거기에 있었다.
"사랑해!" 제이크가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몸이 하나로 녹아들었다. 셀머는 기쁨에 몸을 떨었다. 그 순간, 포개 놓았던 빈 남비가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얼른 비켜섰다.
"아, 깜짝이야!" 제이크가 웃었다. "심장이 마구 뛰고 있었기 때문에 혈관이라도 파열한 줄 알았지."
셀머는 뜨거운 볼에 두손을 대고 떨고 있었다. 제이크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사랑해"
셀머는 그 말을 믿어야 할지 어떨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있는 것은, 자기가 괴로울 만큼 그를 원하고 있고,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사실뿐이었다. 설령 그가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어느 날 말없이 떠나 버린다 해도....... 그리고 설령 그가 한 말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예전의 그 굳은 결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제심도 박살이 나 버렸다. 그의 입술이 닿은 순간, 셀머의 굳은 마음은 눈 녹듯 녹아 버린 것이다.
"표정을 숨기지 마" 제이크는 셀머의 얼굴에서 그녀의 손을 끌어내렸다. "내 말 들어, 셀머. 난 진심이야. 증명서가 필요하다는 얼굴은 하지 말아. 그날 밤차 안에서 당신을 기다리면서 나는 자신에게, '넌 바보다'라고 계속 말했지. 지금까지 이런 바보스런 짓을 한 기억이 없어. 그래도 당신의 행방을 모르는 채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어. 난 자신에게 물었지-'그녀는 어디 갔을까? 누구하고 같이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의 머릿속은 의문으로 꽉 찼어. 그리고 나는 내가 질투에 불타고 있는 것을 알았어. 누군가를 두들겨패 주고 싶을 정도로 질투에 불타 있었어. 그런 자신을 나도 믿을 수가 없었어. 지금까지 누구에 대해서도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일이 없었으니까"
"캐롤라인에 대해서는요?" 셀머는 조용히 물었다.
제이크는 불안한 듯이 그녀를 보았다.
"캐리가 폭스하고 결혼했을 때, 난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지. 그러나 그때의 기분은, 내가 지금 당신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이 기분과는 달라. 나는 어젯저녁에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어.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지. 당신을 찾아내서 무슨 이야기든지 하고 싶었어. 그러나 특별히 할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나는 언제나 당신하고 이야기가 하고 싶었어. 당신을 만나면 이런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야지, 하고 생각하곤 했어. 하지만 막상 당신 앞에 서게 되면, 생각했던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지 뭐야!"
"그게 어떤 일인데요?" 그가 얘기하고 싶었던 일은, 내가 얘기하고 싶었던 일과 같은 것일까? 아침식사에는 무엇을 먹는가, 좋아하는 책은 무엇인가, 혼자 있는 때는 어떤 음악을 듣는가....... 아무것이나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글쎄 모르겠군. 지금은 하나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서. 당신이 없으면 쓸쓸해.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공허한 느낌이 들어.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은 난생 처음이야.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조차도 잘 모르겠어. 처음 당신을 봤을 때는 단지, 귀엽고 마음이 조금 끌리는 아가씨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당신을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하고 기다리게 되었지. 뜻밖의 일이었어. 이런 타격을 받을 줄은 예상도 못했었지."
"그러면, 당신이 내게 싫증이 났을 때는요? 그때는 어떻게 되지요, 제이크?"
제이크는 얼굴을 들었다. 그의 푸른 눈에 당황하는 한편 화가 난 기색이 떠올랐다.
"당신은 내게,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어떻게 느낄 것인가를 묻고 있는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을 알 수 있지? 내가 80세가 되었을 때, 그때까지도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지 어떨지, 지금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얼마 전만 해도 내가 당신을 좋아하게 될 것을 알지 못했어. 지금 내가 아는 것이란,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뿐이야-그밖에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제이크는 손가락으로 셀머의 입술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제이크의 눈은 뜨거운 빛을 뿜었다. "당신은 전에 사람을 사랑한 일이 있어. 당신은 아직도 타계한 남편에 대해서 잊지 못하고 있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하겠지." 그는 괴로운 듯이 말했다.
그는 필립의 추억에 대해서까지 질투를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난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난 그때 겨우 20세 였고, 아직 아이였다고 생각해요. 18세에 결혼하는 것에 반대했던 나의 부모가 옳았던 거예요. 난 정상적인 어른이 되지 못했던 거예요. 필립이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기다릴 수 있었는지, 그 당시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도 아마 내가 아직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겠지요. 거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요. 그는 언제나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다 말해 주지 않았어요."
제이크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셀머는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모든 일이 이미 오래 전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처럼 생각되는군요. 지금은 그때의 일이 잘 보여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필립이 죽었기 때문에 난 성장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 무렵 난 내가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지만, 그것은 단지 정열이었을 뿐, 그 두가지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었어요. 난 필립을 정확히 알지 못한채 그를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는 나하고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어요. 난 변덕스럽고 감정적이었지만, 필립은 조용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난 그를 더욱 필요로 하고, 그를 사랑했어요. 하지만 지금 난 딴사람이 되었어요. 어느 정도는 나 자신을 콘트롤할 줄도 알게 되었어요. 연기 공부도 도움이 되었겠지요. 배우 양성소에서는, 자신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완전히 버리고 자신이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하여 자기 자신을 재창조하는 방법을 배우잖아요! 필립의 죽음이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 거예요. 그것은 괴로운 과정이었어요. 그러나 당신이 나를 무리하게 과거로부터 끌어낼 때까지, 나는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몰랐던 거예요."
"필립의 목숨을 구해 주지 못한 것 때문에 아직도 날 원망하나?" 제이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원망 같은 건 하지 않아요. 사실 당신을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나 자신을 탓하기보다 당신을 탓하는 편이 쉽다는 것뿐이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필립의 성격이 그 사고를 불러일으킨 거예요. 그는 고집이 세었거든요. 날씨를 생각하지 않고 보트 놀이를 하자고 주장했던 거예요."
"당신의 외침을 알아들었다 하더라도 그를 도와주기는 어려웠을 거야"
"알고 있어요. 난 이치에 안 닿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거예요. 당신은 안성맞춤의 스케이프고트(남의 잘못을 대신 책임지는 자)였어요. 내 생명을 구해 주었는데도 나는 은혜를 모르고......"
"그때는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을 거야, 당신은"
"그 나이가 되도록 난 어느 것 한 가지도 제대로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던 거예요. 위험한 삶이었어요."
"감정을 갖지 않고 산다는 것은 더 위험하지. 당신은 그것을 나에게 줄곧 말해 주었잖아"
셀머가 웃자, 제이크는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셀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당신은 과거를 넘어서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해. 언제까지나 혼자 살 수는 없으니까"
"나도 그럴 생각이에요."
"그럼, 누구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어?"
"없어요."
제이크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당신은 아무래도 사람의 약을 올리는 게 취미인 모양이군."
"나는 매사에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체득했으니까요. 만일 당신이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믿어 주겠어?" 제이크는 거칠게 말했다. "난 당신에 대해서 항상 정직하게 행동하고 있어. 당신은 내가 연기를 하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있다고 했어. 그렇다면 내가 정직하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 아니겠소? 당신은 죽은 남편의 추억에서 헤어나는 데 여러 해가 걸리는 바람에......"
"난 이미 헤어났어요." 셀머는 희미하게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당신의 말이 맞아요. 사랑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어요. 난 필립을 사랑했지만, 그의 기억은 이제 희미해져 가고, 사진을 보지 않으면 얼굴조차도 기억이 안 날 때가 있어요. 그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 전에 오빠의 집에서 그의 사진을 보았을 때였어요. 쇼크가 아닐 수 없었어요. 필립이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결혼식 사진이었는데, 나 역시 딴사람같이 보이더군요. 그때였어요, 내가 얼마나 변하고, 필립을 잃고 나서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가를 깨달은 것은......"
제이크는 셀머를 끌어안고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애무했다.
키스가 계속되고, 셀머의 팔이 그의 목에 감겼다. 셀머도 제이크와 마찬가지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제이크가 얼굴을 들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반쯤 감은 눈으로 셀머를 바라보았다. 셀머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촉촉한 입술로, 햇볕에 그을은 그의 몸에 입맞춤을 했다.
"제이크, 제이크!"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날 사랑해 줘, 셀머!"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울림이 있었다. 제이크는 자기 자신을 내던지고 있었다.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의 자존심을 버린 것이다. "난 당신이 필요해! 날 사랑해 줘, 사랑해 줘! 부탁이야, 셀머!"
셀머는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심장의 고동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셀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어려운 말을 입에 올려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제이크가 길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셀머!" 그는 이렇게 부르고는 말없이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난 당신 거예요." 그의 눈길에 응하듯이 셀머는 말했다. 제이크는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꼭 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셀머는 얼굴을 들고 눈을 반쯤 감았다. "우리 침대로 가요." 셀머는 속삭였다.
그는 눈을 떴다.
"날 옮겨 줘" 제이크가 웃으면서 말했다. "다리가 떨려서 걸을 수가 없어."
"당신 다리로 올 수 없으면 오지 않아도 좋아요."
셀머는 미소를 짓고 침실로 들어갔다. 제이크는 바로 뒤따라 들어왔다. 셀머가 침대에 걸터앉은 것과 제이크가 방문을 닫은 것은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