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발레
C. Harrison
1
말 타는 문득 눈을 뜨자 고개를 돌려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 미풍에 커튼이 살랑거리고, 천장에는 이른 아침 햇살이 가득히 비치고 있다.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옴을 느끼자, 말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결코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했건만,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견디기 힘든 고독감으로 마음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을 때에도, 브레인의 죽음과 함께 자신도 죽었더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자신의 방이 감옥처럼 느껴질 때에도 결코 이러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건만……
옆에 잠들어 있는 남자가 돌아누웠다. 말타에게는 옆얼굴밖에 보이지 않는다. 턱에는 수염이 나 있고, 검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를 덮고 있다. 말타의 괴로움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동정해 준 자상한 남자였다.
부인과 이혼한 데다가 어린애마저 빼앗긴 불행한 남자.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말타의 심적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위안 받고자 하였다.
바에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공통된 아픔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말타는 자기 집으로 데려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남자의 아파트로 갔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였지만,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그렇지만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을 수도, 브레인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잊을 수가 없었다.
잠깐 동안의 위안은 어느새 사라졌고, 단지 잠시 서로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느껴진다. 사랑의 흉내 뒤에 남는 것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는 마음의 고통과 자기 혐오뿐이다.
하룻밤의 정사가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바에서 마음이 통하는 상대를 찾는 일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고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도 알지만, 말타는 방안에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바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도 비슷한 처지의-무척 괴로워하고,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고독한 지옥의 캄캄한 미로를 방황하는-그런 사람처럼 보였다.
말타는 슬며시 침대를 빠져 나와 침대 옆에 벗어 놓았던 옷을 입었다. 회색 스커트에 장밋빛 스웨터, 그 위에 베이지색 레인코트를 걸쳤다.
스타킹은 신었으나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구두는 손에 든 채로 방을 나가려고 했다. 남자와 다시 얼굴을 맞대며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고, 무엇보다도 빨리 집에 돌아가서 뜨거운 탕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 후에는 발레 스튜디오에 나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연습에 몰두하자……
"당신, 벌써 가오?"
말타는 문 앞에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일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곧 아침 식사를 준비하겠소. 베이컨과 달걀, 롤빵뿐이지만."
남자는 한쪽 팔꿈치를 침대 바닥에 대고 누운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색하게 웃는 얼굴이다. 말타처럼 이런 아침을 맞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이리라. 이 사람도 역시 공허한 생각과 자기 혐오를 느끼고 있는 것일까? 말타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시간이 없어요. 정말이에요."
"전화 번호를 가르쳐 주면 우리들은 또……"
"아니에요, 됐어요…… 용서하세요." 브레인이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한,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것을 말타는 잘 알고 있다. "정말로…… 미안해요."
말타는 문을 열고 구두를 손에 든 채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비로소 멈추어 서서 심호흡을 했다. 지나가는 사람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눈치 채고 출입구까지 뒷걸음쳐 나와 떨리는 손으로 구두를 신었다.
다시 한번 더 심호흡을 하고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꼭 쥐었다. 이제 아무도 보지 않는다. 말타는 걸음을 재촉하여 보도 위를 부산히 걸어가는 사람들 틈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눈에는 눈물마저 괴어 있다.
연습이 시작되기 전의 스튜디오는 이야기 소리나 피아노 소리로 언제나 시끌시끌하다. 커다란 방은 사방이 거울로 장식되어 있고 바가 설치되어 있다. 바 앞에는 가지각색의 타이츠를 입은 댄서들이 몸을 유연하게 움직이거나 긴장감을 풀면서 준비 운동을 하고 있다. 말타는 가만히 방으로 들어가 늘 연습하는 장소의 바 앞에 섰다.
"내 무릎이 울리는 소리 들었어?" 무릎을 깊숙이 구부리고 옆에서 몸을 풀고 있던 산드라가 한숨을 쉬었다.
말타는 바를 잡은 채 미소를 띤 얼굴로 대꾸했다.
"아무 소리도 안 났어."
산드라는 함께 발레는 공연하는 동료들 중의 한 사람이다. 키가 같기 때문에, 예컨대 <백조의 호수>에서의 백조의 긴 무리나 <호두까기인형>에서의 스페인 댄서 무리에서도 옆에 나란히 서서 춤추곤 했다.
체격은 비슷하지만, 얼굴 생김새는 전혀 다르다. 말타는 작은 타원형의 얼굴로 턱이 약간 뾰족하고, 눈동자는 푸른색이다. 반면에 산드라는 둥근 얼굴로 코가 높고 눈동자는 갈색이며, 대체로 평범한 인상의 용모이다.
"소문 들었어? 캘리 무어가 임신했다는 거."
"어마, 그래?"
말타는 앞으로 숙였던 윗몸을 일으켰다. 맨해튼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가 임신했다는 소문은 전에도 몇 번이나 나돌았다. 캘리 무어는 발레단의 남성 무용수 중 일인자인 캐시미르 루덴코의 파트너로, 중요한 역은 모두 그녀가 연기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맨해튼 발레단의 간판 스타이다.
캐시미르는 블론드 머리의 체격 좋은 남성으로, 야성적이고 드라마틱한 춤을 잘 추며, 도약력과 연기력을 겸비한 무용수이다. 반대로 캘리는 몸집이 작고, 긴 머리카락은 브라운이며, 섬세한 연기와 미소를 갖추어, 무대 위를 날아다니는 요정과 같다고 말하는 비평가도 있을 정도이다.
그 캘리가 임신했다면 캐시미르의 상대역이 없어지게 되고, 발레단으로서도 프리마 발레리나를 잃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일반 발레리나들에게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가 될 절호의 찬스가 되는 것이다.
젊은 발레리나는 인정받게 되기를 원하고, 연장자 발레리나도 찬스는 별로 없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들 중에서 솔로 무용수가 되기를 꿈꾼다. 산드라의 표정을 보면 그녀도 역시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타 자신에게는 환상이 없었다. 이 발레단에서는 새로운 얼굴이지만, 이제 젊지는 않다. 실라큐즈시의 발레단에서 프리마 발레리나로서 몇 년 지내고, 그리고 호평을 얻어 파리, 뉴욕, 런던의 발레단으로부터 솔로 무용수로서 초대받았던 날도 되돌아보지 않았다.
물론 사고가 모든 꿈을 앗아간 것이다. 최근 2년간은 정상적인 삶을 되찾기 위해 소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다리와 마찬가지로 마음도 완전히 치유된 상태는 아니다.
브레인의 일은 늘 생각이 나고, 춤을 출 때는 등골과 넓적다리에 예리한 통증을 느낄 때도 있다. 전에는 말타의 개성이었던 동작의 서정성이 없어진 것도 알고 있다.
말타로서는 아직도 춤추는 것만으로도, 게다가 프로 발레단에서 춤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과분하다. 스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이미 두 번씩이나 춤을 추지 않을 각오를 한 시기마저 있었으니까.
"캐시미르는 누구를 선택할지 모르겠군, 새로운 파트너로…"
"세리느 아닐까?"
말타는 방 반대쪽에 있는 젊은 발레리나를 바라보았다. 발레 마스터인 그레고리 댄의 마음에 들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산드라는 흥 하고 콧소리를 냈다.
"캐시미르와 파트너가 되기엔 너무 덩치가 커. 나는 신시아가 될 것으로 생각하는데…"
"너무 어리잖아?"
신시아 댄리비는 발레단에 가입한 지 아직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몸집이 작은 발레리나로, 작은 요정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커다란 눈동자는 언제나 놀란 듯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다른 소문도 있고…. 저, 소문내면 안 돼."
말타는 흘끗 산드라를 쳐다보고는 출입구를 돌아다보았다. 캐시미르가 들어오고 있었다. 문 위에 머리가 닿을 만큼 장신인데, 고전적인 미남은 아니지만 다시 한번 쳐다볼 정도로 남성답다. 강인한 근육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
"서해안으로 가야 된다고 하셨나요?" 저음의 목소리에는 러시아 사투리가 많이 남아 있다.
"1개월 정도 <호두까기인형>의 리허설을 해야 돼요."
발레 마스터 그레고리는 수긍했다. 작은 몸집이지만 통통하고, 머리는 번들번들하게 벗겨져서 에너지가 넘쳐 보이는 느낌의 남성이다.
"샌프란시스코 발레단과의 계약은 불평이 없겠지요? 당신은 몇 번이나 기회를 놓쳤으니까요."
"잘 알지 못하는 발레단과의 공연은 싫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만, 이번은 절호의 찬스 아닐까요? 샌프란시스코의 관중도 당신을 대환영할 텐데요."
캐시미르가 반론하려는 참에 캘리가 끼어 들어서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성용 티셔츠와 운동복 팬츠 차림이지만, 호리호리하여 섬세한 느낌이다.
"임신한 것 같지 않은데…" 말타는 작은 소리로 말한다. "분장실의 소문은 잘못된 거 아닐까?"
"아니야, 말타. 분장실의 소문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
"나는 이 발레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절대로 확실해. 벽에 귀가 있고, 문에 눈이 있어서 비밀 이야기는 다 새게 마련이야. 분장실에서 캘리가 임신했다고 소문이 났으면, 정말로 임신한 거야."
발레단의 레슨은 언제나 엄하다. 몸은 하룻밤 사이에 굳어버려, 다음날 아침에는 풀지 않으면 안 된다. 말타가 다른 발레리나와 다른 점은 고통을 수반하지 않으면 몸이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사는 사고 뒤에 계속 춤을 추려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과 같다고 선고하였다. 말타는 너무 절망하여 앞으로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 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침내 브레인과 발레를 생각나게 하는 모든 것에서 얼굴을 돌리고 실라큐즈를 떠나, 어머니가 사는 뉴욕의 아파트로 옮겼다.
인생의 의미도 목적도 상실한 말타는 밤새 독서에 몰두하며, 낮에 잠을 자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때때로 외출하여 영화를 보아도 스크린의 정열적인 이야기마저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하였다.
어머니인 시몬느 콜은 원래 자상한 성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말타는 위안이나 도움을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또 어머니도 플로리다나 캘리포니아 등으로 늘 여행을 하기 때문에 좀처럼 아파트에 있는 날이 드물다.
콜 집안은 충분한 재산이 있어서 시몬느는 여행이나 파티, 골프 등으로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마저도 시몬느를 오랫동안 집에 붙들어 두지는 못했다.
어머니의 생활 속에서 말타가 차지하는 위치는 극히 적다. 사고가 났을 때에도 최소한의 동정을 표시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말타가 뉴욕으로 온 지 1개월이 지났을 무렵에는 다시 팜 스프링스로 여행을 떠나 버릴 정도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말타를 다시 발레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도움 때문이었다.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보내고 날로 몸이 불어나는 딸의 옆에 지켜 서서 자꾸 채찍질을 했던 것이다.
말타는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 보았다. 거기에는 26세라는 자신의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피곤한 모습이 보였다. 턱은 두 겹이 되고 입과 코 주변까지 살이 붙기 시작했다. 실라큐즈 발레단의 포스터를 장식했던 아름다운 말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갑자기 체중이 걱정이 되고, 무기력하고 둔한 자신에게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말타는 몇 개월만에 드디어 결심하고 반쯤 남아 있는 초콜릿 상자를 쓰레기 통 속에 처넣었다. 그리고 침대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장롱을 열고 발레 연습복과 토슈즈를 꺼내 들었다. 다시 춤출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시도해 보는 방법밖엔 도리가 없다.
아니,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말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본다. 체중을 줄이고 다리의 근육을 풀어 주어 다시 발레리나로 되돌아가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의사의 진단은 정확했다. 말타는 예전처럼 날렵하게 춤출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5세 때부터 동경해 오던 발레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않겠다. 사랑하던 브레인보다도 더욱 소중했던 발레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레슨이 시작되었는데, 말타는 문득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파란 눈을 의식하자 당황하여 눈을 돌렸다. 캐시미르는 잠시 동안 꼼짝 않고 바라보더니, 이제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았다. 레슨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지 넓은 어깨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왜 나를 바라보았을까? 캐시미르는 캘리 이외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분장실의 소문이 정확하다면 캘리는 아주 행복한 결혼을 하여, 이제 자식까지 있는 남의 아내인 것이다.
캐시미르는 홀아비라고 했다. 결혼 생활은 아주 짧았고, 아내가 센트럴 파크 부근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비극이지만, 내가 브레인을 잃은 것과 같은 허전한 기분을 맛보고 있는지 어떤지……
분장실에서 나온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결혼 전의 캐시미르는 발레단의 대부분의 여성 발레리나와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어느 한 여성 발레리나와 관계를 맺고 나서 또 다른 발레리나를 유혹했던 모양이다.
캐시미르가 여성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남성으로 보인다는 것은 말타도 잘 알고 있었다. 핸섬하고 남성다우며, 게다가 영광으로 점철된 러시아 태생의 무용수이기 때문에 상대 여성은 마치 황금의 망토를 걸친 듯한 감미로움에 빠졌음이 틀림없다.
"무슨 생각해?"
산드라의 소리에 말타는 깜짝 놀라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거울에 등을 돌리고 서자, 캐시미르의 남성다운 등이 보인다. 말타는 얼른 눈을 돌려 레슨에 신경을 집중한다. 캐시미르는 말타에게 있어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상대이다. 저쪽은 스타이고, 이쪽은 많은 발레리나들 중의 한 여성일 뿐이니까.
오후의 강의실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레고리가 잠시 후에 새로운 배역을 발표하게 되어 있어,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캘리는 임신 2개월로, 그 전에 쌍둥이를 낳았을 때처럼 출산 때까지 휴가를 내었다든지, 캐시미르는 캐리가 알렉스 테라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 반발로 발레단의 홍보를 담당하고 있던 휴즈와 결혼했다든지, 사실은 캐시미르와 보니의 결혼은 정말 로맨스였다든지 하는 소문 따위이다.
오래 전부터 발레단에 있던 발레리나 중의 한 사람이 쓸쓸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캐시미르의 스쳐 지나간 애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심술궂은 질문에 웃으면서 가볍게 응수했다.
"그의 여러 애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면서? 기분이 어땠어?"
"우리들은 특별한 그룹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람, 밖에 애인이 생긴 거 아냐? 발레리나에게 흥미를 잃어서……"
"그렇지는 않아. 그저 옛날과 조금 달라졌을 뿐이야."
"부인이 죽고 나서 조금 난폭해졌다고 하던데……"
"술을 좀 많이 마시나 봐."
"레슨에 나오게 하기 위해 그레고리가 보드카를 빼앗은 적도 있었다는 군."
"실은……우리 발레단이 자랑하는 남성 무용수 캐시미르는 신시아 댄리비와 교제중인가 봐."
"농담은 그만둬."
"두 사람은 영화도 함께 보러 가고, 저녁 식사도 함께 하곤 한대. 그 여자는 눈을 반짝이며 스타가 되는 날을 꿈꾸고 있다더군."
"그럼 두 사람은……"
"정말일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기회는 사라진 거잖아?"
"신시아는 춤을 잘 춰?"
"캐시미르의 파트너가 될 정도로 잘 추는 것은 아니야. 경험도 부족하고."
"캐시미르가 가르쳐 주겠지…… 나는 캐시미르의 파트너가 되기만 한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거야."
"나도 그래……"
말타는 여자들이 지껄여대는 소문은 귀담아 듣지 않고 타이츠를 벗어 백에 넣었다. 캐시미르의 생활도, 소문도 전혀 흥미가 없다. 자신도 프라이버시를 굳게 지켜, 자신의 비극을 발레단의 화제의 하나로 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미 발레 관계의 잡지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단원의 대부분이 사고와 브레인이 죽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입단 당시의 단원들의 호기심도 말타의 냉정한 태도에 시들해졌다. 가장 친절하게 대해 주는 사람은 산드라이지만, 그녀도 친구라고 하기 보다는 아는 사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말타의 냉정한 태도는 내성적인 성격과 불행한 사고, 그리고 원래부터 말수가 적은 데서 자연히 비롯된 것이다. 고독은 그녀의 천성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군중 속의 고독이라 할 수 잇는데, 그녀의 어머니조차 말타의 외로움을 달래 줄 수는 없었다.
전에는 누구에게나 사랑 받던 말타의 상냥한 성격은 이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자신의 웃음소리를, 장난기를, 경솔함을 브레인은 모두 다 사랑했는데… 그런 말타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강의실을 나오자 복도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발레리나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수근수근대며 때로는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를 내면서 그레고리가 새로운 배역표를 게시판에 붙이기를 기다리고 있다.
말타는 별로 흥미가 없어 그대로 복도를 지나오려는데, 그때 마침 사무실 문이 열리고 발레리나들은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레고리는 언제나처럼 궐련을 입에 문 채 두루마리 종이 몇 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요. 자, 잠깐 비켜 주지 않겠소?"
모두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말타는 벽 옆에 바싹 붙어 서 있었다. 그레고리는 커다란 몸을 흔들며 게시판 위에 그 종이를 핀으로 꽂았다. 누군지가 들여다보려고 하자 야단을 쳤고, 몸을 돌려 리스트를 몸으로 가렸다.
"가을 순회공연은 이 배역으로 해요. 약간 변경할 필요가 생겼는데, 이유는 캘리 무어가 또다시 귀찮은 일에 말려들었기 때문이오." 웃음소리가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그레고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출산은 크리스마스 전후로 예정되기 때문에, 봄 시즌에는 캘리도 복귀할 수 있으니까 <호두까기인형> 이후는 지금까지의 배역으로 되돌아가는 거요. 그때까지 여러분중의 몇몇은 재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찬스가 생기는 거요. 금년 순회공연은 하트훠드, 보스턴, 실라큐즈, 프로비덴스, 그밖에 여러분이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몇몇 작은 도시로 예정되어 있소.,"
여기저기서 못마땅하다는 듯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순회공연은 여행 기분을 맛보게 하지만, 동시에 몹시 피곤한 일이다. 작은 도시의 관객은 발레단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흥분하여 열렬한 박수로 맞아 준다. 그렇지만 동시에, 작은 도시의 호텔이라고 하는 것은 난방장치도 시원치 않고, 모텔은 더욱더 허술하다. 레스토랑은 약속이나 한 듯이 아무래도 살찔 염려가 있는 메뉴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회공연은 필요하다. 시골에 문화를 보급하여 발레에 흥미를 갖게 하기 위해서도, 또 발레단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서도 말이다.
말타 자신도 잠시 맨해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많이 해 왔다. 환경을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무엇보다도 너무 고독하여 또 엉뚱한 일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도 매우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싶었다.
"자, 길 좀 비켜 주시오." 그레고리가 불이 붙은 궐련에서 연기를 내뿜자, 발레리나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불만인 사람은 투서함에 투서를 써넣도록 하시오."
또다시 웃음소리가 났다. 투서함 같은 것은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일단 배역이 발표되면 변경하는 일은 전혀 없다. 솔로 무용수는 감독과 발레 마스터가 결정하기 때문에 누구도 거역할 수가 없다. 발레단은 민주주의에 편승하지 않는 것 같다.
모두 게시판 앞으로 달려들자, 겨우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된 말타는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복도의 모퉁이를 막 돌려고 할 때에 누군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믿을 수 없어!"
"어마, 그 사람이잖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몇 마디의 흥분된 소리가 들려온다. 말타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산드라가 달려온다. 너무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축하해." 산드라의 입언저리가 묘하게 일그러졌음은 아마도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축하라니, 무슨 일이야?"
"전혀 몰랐어? 아니면, 모르는 체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게시판으로 가 봐."
산드라는 말타의 팔을 잡아끌고 게시판 쪽으로 갔다. 발레리나들은 두 사람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놀라움과 선망을, 동시에 노골적인 불쾌감을 얼굴 가득 띠고서.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흘리는 신시아 댄리비의 얼굴이 보인다. 캐시미르와 함께 잤다고 하는 소문이 마음속에 되살아난다. 자신이 캐시미르의 파트너로 선택될 것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자!" 산드라가 말타를 배역표 앞에 세웠다. "잘 봐!"
배역표에는 우선 발레단의 공연 목록이 씌어 있고, 그 밑에 솔로 무용수의 이름이 있었다. 야심적인 니진스키의 발레 <장미의 순수>, 작은 도시에서는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이국적인 멋의 파 드 되(pas de deux)가 있는 <해적>이 이번의 공연 목록이었다.
말타는 눈을 깜박이면서 다시 한번 배역표를 바라보았다. 어느 발레에서도 자신의 이름이 캐시미르와 파트너가 되어 나란히 씌어 있다. 한마디 예고도 없이, 여러 발레리나 중의 한 사람에게 일약 스타의 자리에 앉혀진 것이다. 나의 대역은? 신시아 댄리비로 되어 있다.
2
순회공연의 배역 발표가 있는 다음날부터 말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여느 때의 레슨 외에 의상 맞춤과 선전 포스터의 사진 찍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물론, 그레고리의 엄한 감시 아래 캘리의 지도로 혼자서, 때로는 캐시미르와 함께 리허설이 있었다.
실라큐즈 발레단에서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역은 공연해 본 적이 있지만, 다른 두 가지는 초연이다.
스타 트레이닝은 다른 많은 발레리나들의 리허설과는 완전히 다르다. 군무(群舞)라면 작은 실수쯤은 관객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춤추는 솔로 발레리나의 실수는 누구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캐시미르는 의외로 바위 같은 자신감과 힘으로 말타를 지탱해 주었다. 예를 들면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최초 리허설에서, 말타는 순간 멈칫하다가 점프하는 시간이 늦어졌다. 그때 캐시미르가 재빨리 말타의 허리를 받쳐 주어 난처함에서 구해 주었다.
"미안해요. 신경이 너무 곤두섰나 봐요"
두 사람은 잠시 땀을 식혔다. 캐시미르는 검은 타이츠와 슈즈만 신은 채 윗몸은 알몸 그대로이다. 말타는 플로어에서 내려서서 캐시미르의 당당한 몸을 힐끗 쳐다보았다.
"전에 파트너로부터 떨어뜨려진 적이 있었소?"
"그렇지는 않았지만, 이번처럼 위기에서 도움을 받은 적은 없었어요."
실라큐즈 발레단의 남성 무용수는 재능은 있지만 기술을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스타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남성 무용수가 적은 때문이었다.
"염려하지 말아요. 당신을 다치게 하진 않을 테니까요."
말타는 캐시미르의 눈을 바라보다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캐시미르에게 빠지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애무하는 듯한 눈, 뜨겁게 감싸주는 목소리. 여자들이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요소들을 캐시미르는 골고루 갖추고 있는 것이다.
"두 번 다시 겁내거나 하지는 않겠어요."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오. 실수를 하면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거지요."
말타는 캐시미르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점프 때마다 반드시 캐시미르의 팔이 받쳐 주고 있었다. 거칠게 다루는 적이 없었다.
캐시미르와 춤추는 것은 즐겁고, 자신이 릴랙스함에 따라 기교 있게 춤출 수 있다는 것도 분명히 알았다. 옛날에 자신의 특성이었던 우아한 서정성마저 어느 정도 되살아난 느낌이 들었다.
캐시미르는 짜증을 낸다거나 하지 않았지만, 그레고리의 발레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에는 한 치도 양보하진 않았다.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를 섞어 가며 계속해서 반론을 제기하면 그레고리는 궐련만 뻐끔뻐끔 피워댄다.
논쟁이 끝나고 결국 그레고리가 양보하면, 캐시미르는 발레 마스터를 끌어안고 빙빙 돌면서 양 볼에 키스를 한다. 캐시미르는 오랫동안 화를 내고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캐시미르를 좋아하지 않으려는 일이 더 어려웠지만, 말타는 조심성이 있었다. 분장실의 소문은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귀에 들어온다. 캐시미르와 신시아의 사이는 신시아의 질투로 인해 심각한 정도까지 되었다고 한다.
스타급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말타는 독방을 쓰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늘 산드라가 얼굴을 내민다. 산드라는 처음에는 말타를 질투하였으나 지금은 포기하고 아주 마음씨 좋은 아가씨로 되돌아왔다. 말타로서도 산드라가 와 주면 즐거웠으나, 자칫하면 긴장이 풀릴 염려도 있었다.
산드라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고, 이해력도 빠르다. 말타는 엉겁결에 웃어 버리곤 하는데, 소리를 내어 웃어 보는 일은 실로 오래간만이다.
그 날 오후에도 다리를 풀고 있는 말타 옆에 앉아서 산드라가 말했다.
"뉴욕 발레단 중의 하나가 남부를 순회공연하고 있을 때인데, 어느 도시에서 그들을 환영한답시고 대단한 일을 벌려 놨데."
"뭘 했는데?"
"무대 바닥을 반짝반짝하게 윤을 냈다지 뭐야."
"한심하군!"
무용수는 반들반들 닦여진 마루에서 춤을 추다가는 넘어져서 다치기 십상이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발레단에서는 순회공연이 있을 때는 마루 덮개를 가지고 다닐 정도이다.
"발레단에서는 너무 당황하여 마루 바닥에 클린저를 뿌렸대."
"클린저!"
"무용수는 위기에서 모면했지만, 스탭들이 고생이 심했대. 클린저 거품이 여기저기 날아다녀 오케스트라박스에도 라이트도 거품투성이가 되어 버리고, 마침내는 지휘자 입 속에까지 들어갔다지 뭐야."
말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정말?"
"농담이 아니야"
"에이, 거짓말 같다."
산드라는 새끼손가락을 들어 맹세했다. "나는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야."
"언제부터?"
"음, 오늘 점심때부터."
말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발의 마사지를 계속했다.
산드라가 묻는다
"<장미의 순수> 리허설을 잘돼 가고 있는 거니?"
"캐시미르는 워낙 노련하니까. 그는 장미의 순수함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멋진 체격을 가지고 있어."
"신시아를 차버렸다는 소문이 돌던데."
"글세......"
"다음은 너일지도 몰라."
"뭐?"
"캐시미르의 다음 포획물."
"그럴 리는 없을 거야. 그와 나는 단지 일을 위한 파트너일 뿐이니까."
"그럴까? 네가 캐시미르의 마음을 흔들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의 레오타드 모습은 멋있다고 느끼지 않아?"
"멋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난 별로 흥미가 없어."
"어머, 혹시 애브노멀 아냐, 말타? 나라면 금방 반해 버렸을 텐데."
"나는 달라. 내가 너무 둔감한 것일까?"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산드라가 방을 나가고 나서 말타는 마음속으로 부르짖는다. 캐시미르의 늠름한 몸을 피부로 직접 느끼고 있기 때문에.
손끝을 세워 캐시미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 캐시미르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다. 그럴 때 그가 키스를 하면 어쩌나 하고 생각하는 자신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는 일마저 있었다.
리허설 중간에 간혹 정신을 차려야만 그레고리의 말에 신경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캐시미르는 나를 지탱해 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일깨우면서.
아무튼 누가 보아도 캐시미르는 멋진 남성이다. 말타는 엉겁결에 자신의 몸이 캐시미르에게 반응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다른 파트너에게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혹시 브레인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파트너와 사랑에 빠지는 발레리나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지만 말타에게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고, 함께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데이트를 시작하여, 그대로 결혼에 골인한 브레인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다른 남자는 한 사람도 알지 못했고, 발레 일로 바빠서 로맨스를 즐길 여유도 없었다. 만일 브레인이 없었다면, 발레계 밖의 남자와 진실한 사랑을 나누었을지 어땠을지 조차 미지수이다.
말타가 발레를 배울 때 브레인은 학위를 취득하여 지방 은행의 중역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말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발레라는 것을 인정하여 주어 스스로 말타를 지탱해 주었다. 밤에 리허설이 끝나고 나서 돌아와 보면, 브레인은 쇼핑도 해 놓고 저녁 식사까지 준비해 두었다. 브레인의 에이프런을 두른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브레인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말타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 브레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리곤 했다. 모든 것이 멋있고 엑사이트하다고 사실 이상으로 과장하여 말하였던 것은, 그 무렵의 말타가 늘 하는 이야기였다.
브레인은 최고의 남편이었고, 말타는 최고의 발레리나였으며, 실라큐즈 발레단 역시 세계적인 발레단이었다. 프로다운 매력이 넘쳐 의상도, 무용수도, 테크닉도 최고였다.
그렇지만 그 당시는 아직도 어리고 순진하여 세상 물정을 잘 몰랐다. 말타는 실패도 패배도 몰랐고, 사랑이 없는 성(性)관계는 더욱 몰랐었기 때문에......
인생의 경험을 쌓아감에 따라 시니시즘이 몸에 배게 되었다.
말타는 잘 모르는 남자와 지낸 하룻밤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배운 것은, 자신은 섹스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랑이 없는 관계는 마음의 공허를 메워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말타와 브레인은 어느 쪽도 성적인 경험은 없었지만 둘이 함께 지내는 밥은 즐겁고 만족스러웠다. 지금에서야 생각하면, 브레인의 존재는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고, 그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브레인의 죽음이 가져 온 슬픔은 사라졌어도 죄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만일 그렇게 바쁘게 발레 스튜디오로 가버리지 않았다면, 만일 자신의 기분을 분석해 보기라도 했다면, 만일 그 일을 브레인에게 말하기라도 했다면.......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사람의 죽음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그것을 절대로 만회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를 규명할 찬스마저 없다면,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상대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다.
말타는 문득 자신으로 돌아왔다. 또 과거의 일을 생각하여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했다. 미래의 일을 생각해야지. 그것도 아주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캐시미르는 확실히 매력적이어서 육체적으로 강하게 이끌리지만, 주의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나의 마음은 상처받기 쉬워서, 그에게 버림받기라도 하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캘리 무어는 일주일 중 사흘을 오후 내내 말타의 지도에 소비했다. 성품이 상냥해서 실수를 해도 화내거나 하지 않았지만, 말타는 완벽하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절대로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거나 하지 않았다.
연습할 때는 작은 스튜디오를 사용하기 때문에 유난히 더운 어느 날, 말타는 드디어 소리를 질렀다. 캘리는 땀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말타에게 동조하여 옆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캘리는 개방적이고 친절하며 동정심이 있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신뢰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더구나 분장실에서 소문을 내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므로, 이 방에서 이야기한 것이 밖으로 새어 나갈 염려는 없을 것이다.
말타는 굳게 결심하고, 늘 마음속에서 궁금하게 여기던 것을 물었다.
"왜 캐시미르는 저를 파트너로 택했지요?"
"당신은 아직도 몰랐어요?"
"네. 저는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도 아닌데요."
"전원 일치로 결정했어요. 저와 그레고리와 캐시미르지요. 캐시미르가 특히 열심이었지요."
"정말 믿을 수 없군요."
"당신은 몸의 선이 아름답고, 게다가 우아해요."
"그렇지만 당신과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요."
"캐시미르는 저와 비슷한 사람을 찾으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저는 좀 특별한 의미에서 저와 다른 이미지의 파트너를 필요로 했고요. 사실 우리들은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비평가들도 비교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과 캐시미르는 잘 어울려요. 당신은 검은머리이고 캐시미르는 금발 머리이며, 둘 다 장신이니까요. 당신 키는 180센티미터 정도 되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 사고로 저는........"
"우리들 전원은 대단한 진보라고 인정했어요. 말타.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요. 당신은 스타의 가치가 있어요."
"아무래도 전 염려스러워요."
캘리는 부드럽게 말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계속 말한다.
"걱정하지 말아요. 말타. 당신은 훌륭하게 해낼 수 있어요. 저는 기대하고 있어요. 그리고 혹시 저를 대신할지도 몰라요."
"정말이에요? 그런 일 꿈에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생각은........"
"전 걱정돼서 그러는 것은 아니에요."
캘리는 소리를 내어 웃고는, 남편 알렉스가 부재중이니까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 캐시미르도 함께. 평상복 차림 그대로가 좋으니까 꼭 와 달라는 캘리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캘리의 아파트는 센트럴 파크가 바라다 보이는 호화스런 고층 빌딩 속에 있었다. 현대적 감각의 회색 가구로 통일한 훌륭한 인테리어지만, 다크 그레이의 카펫 위에서 어린아이들이 장난감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었다.
마크와 마슈는 두 살 반 된 쌍둥이로 호기심이 왕성해서 이것저것 소란을 피우지만, 한창 귀여운 때이다. 말타가 도착했을 때, 캘리의 집에 있는 가정부는 쌍둥이를 목욕시키려고 그 둘을 잡으러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밤의 전쟁이 아직도 안 끝났어요." 캘리는 말타를 맞이하자 겸연쩍은지, 잠시 부엌에 있어 달라고 한다.
"이 애들은 알렉스가 없으면 언제나 이렇게 소란을 피워요. 한 가지 충고할까요? 아기를 갖게 되면 적어도 세 살 터울은 되게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키우기가 너무 힘들어요."
부엌에 들어가자, 캐시미르가 샐러리를 잘라 커다란 접지에 보기 좋게 담고 있었다. 진즈 차림인데, 확실히 여유 있어 보인다.
"래디시? 아니면 그린 페파?"
"그린 페파가 좋겠어요."
캐시미르는 칼을 드라마틱하게 머리 위로 번쩍 쳐들며 선언한다.
"이 담에 태어날 때, 나는 세프가 되겠어요."
"당신은 전생을 믿나요."
"물론이지요."
드디어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대화는 부드럽고 유쾌했다. 캘리와 캐시미르는 교대로 발레단의 명성을 높였던 공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때때로 일어났던 에피소드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캘리의 스커트 자락의 실이 풀려서 캐시미르의 다리에 감겼던 일, 애틀랜타의 경사진 무대에서 점프하다가 엉덩방아를 찧은 일, 나갈 신호를 잘못 알고 캘리가 무대로 나가 버려 당황했던 일 등등.
"그때 어떻게 하셨어요?"
"혼자서 추었지요. 인스턴트 안무를 스스로 만들어 가지고."
괴로웠던 화제가 개인적인 화제에 대해서는 둘 다 언급하지 않았다. 말타는 모처럼 만에 정말로 즐거운 저녁 식사를 했다. 돌아갈 채비를 하면서 말타는 캘리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데, 말타. 당신은 너무 비밀이 많아요. 이젠 서서히 드러내도 좋지 않을까요? 캐시미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정말로 말타는 상당히 신비로워요. 돌아가는 길에 넌지시 캐볼 생각이오."
"아무것도 일부러 감춘 것은 없어요. 그리고 바래다주지 않아도 돼요. 제 집은 여기서 가까우니까요."
"뉴욕은 위험하오."
"정말 괜찮아요.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바래다주겠소."
뜻밖에 입 언저리가 굳어지는 것을 보고, 말타는 캐시미르의 아내가 강도에게 살해된 것을 생각해 냈다. 말타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캘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캐시미르는 곧바로 말타의 팔을 잡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작은 도시에서 자란 말타에게 있어서 맨해튼의 밤은 신선한 놀라움을 주고 있었다. 이곳에는 밤도 생활이 있었다. 젊은 연인들, 택시의 경적, 도로 밑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지하철 소리...... 밤늦게까지 바쁜 생활의 소리가 있다.
"당신은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었소." 캐시미르의 말에 말타는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별로 할 말도 없지만, 들어도 재미없을 거예요."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당신 춤에는 오만함이 있어요."
"제게요?"
"당신 자신은 모르는 것 같군요."
말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이 당신을 여러 삶들 속에서 끌어내게 한 것이오. 재능이 엿보인 거지요."
"저는 다만 사고가 있는 후 춤만 추었을 뿐이에요."
"어떤 사고였소?"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나 보군요."
"당신은 부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나요?"
캐시미르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말타의 팔을 작은 손에 힘을 준다.
"당신에게는 가시가 있군요, 말타. 그런 줄은 몰랐는데........"
말타는 곧 후회했다. 캐시미르의 상처를 건드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엉겁결에 내뱉은 말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과거에 집착해 있었기 때문에, 남에게 일일이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미안해요. 하지만 사고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남편을 사랑했소?"
"네."
"무용수는 아닌 것 같던데요."
"네, 그래요. 은행원이었어요."
"발레리나가 발레계 밖의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드문 일인데......"
"당신 부인도 발레리나는 아니었잖아요?"
"그래요. 그렇지만 그녀는 발레 세계와 관련이 있던 사람이었소.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발레에 대해서 그녀는 잘 알고 있었고, 내게 있어 발레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도 이해해 주었소."
"브레인도 그건 마찬가지였어요. 때문에 그야말로 특별한 사람이었지요."
"그럼 그 브레인이라는 사람 만한 남자는 없었겠군요. 그가 당신의 마음을 온통 독차지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지금은 이미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브레인이 자신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는지 어땠는지 조차, 말타에게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렇기는 하지만 브레인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말타는 그것을 캐시미르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인생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그를 잊고 지낼 방편으로 발레에 더욱 매달리기로 했던 거예요."
"그래서 당신은 추고 또 계속 추었군요."
캐시미르가 본능적으로 이해해 주는 것에 감사하는 뜻으로 말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까지 자신은 외적인 캐시미르, 뭔가 하나 뒤집어쓴 캐시미르를 보았을 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완전히 그를 모르지만, 뜻밖에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임을 안 것이다.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 느낌은 나도 알지요. 보니가 죽은 후에 알았소. 내게 남겨진 것은 발레뿐이라고, 무대에 서서 관객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것을 보고 있을 때, 나는 음악과 춤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소. 발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지도 모르겠소. 나는 잘 모르겠지만."
짧은 침묵이 있었다. 발걸음을 나란히 하여 걸으면서, 말타는 가만히 묻는다.
"당신의 결혼 생활을 길었나요?"
"6개월.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매우 행복한 시간이었소. 나의 말뜻을 알 수 있겠소?"
"글쎄요. 브레인과 저의 관계는 그런 상태가 아니어서요. 우리들은 오랫동안 교제했어요. 결혼도 그때까지의 생활의 연장이라는 느낌이었고..... 특별히 짜릿한 느낌이랄까 뭐 그런 것은 없었어요."
"그럼 당신은 사랑이라는 것의 본질을 정말로는 모르겠군요."
"그렇지는 않아요. 저는 브레인을 사랑했어요."
"그럴까요?"
두 사람은 모퉁이를 돌아 말타의 아파트 입구에 서 있었다. 말타는 대화의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혼 이야기나 상대를 잃어버린 이야기를 할 때는, 두 사람 모두 같은 고통을 나누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지만, 브레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분석되는 것에는 위험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캐시미르가 경험한 사랑은 자신의 사랑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인 것 같다. 갑자기 캐시미르의 수많은 정사에 대한 소문이 되살아난다. 사랑의 이야기는 구설수의 시작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경계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에스코트해 주어서 고마워요." 말타는 쌀쌀한 어투로 말했다.
"좋은 밤이었어요."
앞으로 걸어가려는 말타 앞에 캐시미르는 재빠르게 가로막고 서서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당신에게는 이전에 많은 인생이 있었던 것 같소. 당신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저는 전생 같은 거 믿지 않아요."
"전생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현세를 말하는 거요. 당신에게는 우수가 감돌고 있어요. 그렇지만 전에는 그렇지 않았겠지요? 내가 알고 있는 지금의 말타는 이전의 말타가 아니오. 그렇지 않소?"
"누구라도 그래요. 변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오. 예를 들면, 오늘밤에도 나는 당신이 웃는 것을 처음 보았소. 남편을 잃고 당신도 사고를 당한 후, 당신의 일부가 사라져 버린 거요."
"캐시미르, 이제 그만해요......."
"그렇지만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워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코나 입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내가 말하는 것은 침묵과 슬픔에 대해서요. 당신을 보고 있으면 강(江)이 생각나오. 아름다운 강은 언제나 조용하지만, 뭔가를 기다리고 있지요......"
캐시미르의 말에 넘치는 시적인 울림에, 러시아 사투리에, 손의 감촉이 말타는 최면술에 걸린 것만 같았다. 캐시미르는 말타의 턱을 잡아 똑바로 자기를 쳐다보게 했다.
"재생의 날을 기다리고 있소?"
"아니에요."
"틀림없소."
뜨겁고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말타는 캐시미르의 키스에 응하여 살며시 입술을 벌리는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엄지손가락이 말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원을 그리고, 다른 한 손은 등을 어루만지고는 허리에 가서 멈추었다.
캐시미르 자신도 떨고 주저함이 엿보이는 키스였다. 혀끝이 입술에 닿자, 말타는 천천히 욕망이 불타오름을 느낀다.
이런 감정은 오랫동안 맛보지 못했던 것이다. 다리에서 힘이 빠진 듯한 느낌도, 볼이 달아오른 느낌도. 캐시미르의 육체에 이끌리고 있었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벼운 키스만으로 그에게 허물어질 줄은 몰랐다.
침대에서 캐시미르에게 안겨 있는 자신을 상상하자 숨이 막혀 왔다. 캐시미르는 얼굴을 들고 미소를 띠며 말타를 내려다본다.
"마술이오.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말타는 한쪽 손을 캐시미르의 가슴에 대어 다신 안을 수 없도록 막으면서,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저, 그런 일......원하지 않아요. 아직 그런......기분이 아니에요."
"알고 있소, 말타. 잘 알고 있어요."
캐시미르는 손끝을 살짝 열린 말타의 입술에 아주 부드럽게 대었다가, 그 손끝을 자신의 입술에 대었다.
"잘 자요. 좋은 꿈꾸고......."
3
순회공연에 나가기 전의 2주일 동안, 발레단은 정신없이 바빴다. 말타는 하루에도 몇 시간이나 의상 담당자와 거울 앞에서 지냈다. 캘리보다 키가 훨씬 커서 의상을 고치는 것을 큰일이었다.
또한 말타 자신에게 있어서는 슈즈 준비가 큰일이었다. 새 토슈즈는 발레를 시작하고서 20분만에도 망가지는 경우가 있다. 광택이 나는 새틴은 쭈글쭈글해지고 바닥은 찢어져서 발끝이 벗겨지고 만다.
리본과 구두바닥의 고무를 붙이기 전에, 말타는 알코올을 발라서 오그라들게 하고 발꿈치의 가죽을 조금 깎아 두는 습관이 있다. 이렇게 해도 일주일 동안 열 켤레의 토슈즈를 신어 없앤다.
발레리나는 토슈즈에 애증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토슈즈 없이는 발레를 할 수 없고, 토슈즈를 신으면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말타는 리허설 할 때를 제외하고는 캐시미르와 거의 만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바빠서 이야기할 틈이 없었다. 캐시미르의 티 없는 모습은 키스하기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 키스는 맨해튼의 현란함에 마음이 이끌려 한 것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일에 있어 파트너이고 친구이며, 인생의 동일한 슬픔을 맛보고 있었다. 키스는 단지 이러한 애정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지도 않은 애무의 기쁨을 맛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내 자신이 고독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조그만 일에 금방 마음이 움직인다. 아름다움과 유머와 애정이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 자신이 왜 이런 상태에 있는지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 품에서 지낸 하루 저녁에는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었는데, 길에서 나눈 가벼운 키스가 이러한 욕망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캐시미르의 늠름한 섹스 어필에 말려들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자꾸만 든다. 하지만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말타는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을 움직이게 된 것은 캐시미르의 인간성과 이해심에서였다. 나는 우정에 굶주리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순회공연을 떠나기 전날 밤, 말타는 짐을 꾸리는데 고민하고 있었다. 슈트케이스 하나에도 도저히 다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순회공연을 떠나는 것은 처음이라서 동료들에게 물었더니, 어떤 사람은 파티가 있으니까 드레스를 가지고 가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평상복 차림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게다가 아무래도 빼놓을 수 없는 물품도 많았다. 발레복, 바느질그릇, 구급약, 발을 손질하기 위한 약, 화장품과 적은 칼로리의 스낵......
슈트케이스에 접어 넣어도 구김이 잘 가지 않을 세 벌의 드레스를 침대에 펼쳐 놓고 그 중의 한 벌을 개키고 있는데, 어머니인 시몬느가 들어왔다.
"마치 일 개월이 아니라 1년이나 순회공연을 떠나는 것 같구나."
"챙겨야 될 것들이 너무 많아요."
"어제 깁슨씨 댁에서 브로크 박사를 만났어." 시몬느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파란 빌로도의 로브 차림인데, 언제 나와 마찬가지로 패션 잡지에서 모방한 듯한 느낌을 준다. "프리마 발레리나로서 순회공연에 나가는 것은 너에게 너무 무리라고 걱정하더구나."
"브로크 박사는 제가 두 번 다시 춤추지 못할 것이라고 했어요. 그렇지만 그의 생각은 빗나갔잖아요? 이번에도 저는 해 낼 수 있어요."
"왜 신경질을 내니, 말타? 아무도 네가 하는 일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야. 우리들은 너를 염려하고 있을 뿐이야."
말타는 의아한 듯이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염려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는지를 몰랐다. 분명히 지금 어머니의 태도에 잘못은 없지만, 그 사고가 있었을 때에도 실라큐즈로 와서 간호는 해주었어도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었다.
일단 말타가 뉴욕의 어머니 아파트로 옮겨오자 시중은 요리사 콜에게 맡겨버렸고, 딸 걱정을 하는 어머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사실은 다리의 일이 걱정되어서 매일 밤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말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통증이 그리 대단치 않고, 가끔 가랑이가 쑤시고 다른 쪽 다리의 무릎 뒤가 쑤시는 정도이다. 그렇지만 증상이 악화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브로크 박사는 애초부터 춤추는 것 자체를 완강히 반대한 정도였으니까.
"만일 견딜 수 없게 되면 발레를 그만 두겠어요."
"그래. 빤히 알면서도 자신을 불구자로 만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인생에는 발레 외에도 할 일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와는 인생에 대한 사고 방식이 틀리다. 시몬느는 한 가지 일에서 다른 일로 나비처럼 가볍게 옮겨가는 성질이고. 말타는 한 가지 일에 황소처럼 돌진하는 성질이다.
말타는 어렸을 때부터 발레리나가 되겠다고 결심하여 그 목표를 바꾼 적이 한번도 없다. 시몬느는 사치스런 생활과 쾌락을 좋아해서 말타를 조롱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즐거움을 희생하는 딸을 이해하지 못했다. 땀과 노고 같은 것은 시몬느에게는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말타는 처음부터 가정부와 발레 교사와 이웃 사람들에 의해 키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는 일로 인해 출장을 자주 갔고 다정하지도 않았으며,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행하든지 아니면 혼자서 여행을 자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어머니와 딸이 얼굴을 맞대고 있어도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제게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뭐, 별로. 그런데 발레단이 실라큐즈에 가게 되면 브레인의 부모님께 연락할 생각이냐?"
"아직 그런 생각하지 않았어요."
"페기에게 들으니까 너 그동안 편지 한 장 쓰지 않은 것 같더구나. 많이 걱정하고 있더라."
"생각은 있었지만 너무 바빠서......"
"내가 보기엔 그쪽에서 오는 편지도 읽지 않고 전화 한번 걸지 않더라. 페기는 너를 딸처럼 생각하고 있어. 브레인 죽었다고 해서 네가 일방적으로 발을 끊는 것은 올바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어머니는 시어머니와 종종 연락하시는 모양이죠?"
"편지로 서로 연락하고 있어. 너도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몰랐어요."
"실라큐즈에 가면서 모리슨 집안에 연락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야. 네가 그곳에 간다는 것은 신문을 통해서 알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하도록 해라."
시몬느가 방에서 나가고 나자, 말타는 두 눈에서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어머니가 진실로 자기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모리슨 부부인 디브와 페기에게 2년간이나 소식을 끊은 채 있었느냐고 추궁 당한다면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진실한 대답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감춰 두고 싶으니까.
페기는, 어떤 의미로는 어머니를 대신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집에 하녀밖에 없을 때, 말타는 이웃에 사는 페기를 찾았던 것이다. 발레리나로서 첫발을 내디뎠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여 준 것도 페기였다.
말타만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근처 애들은 모두 모리슨 집안에 모였다. 모리슨 집안에는 두 살 터울의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모두 키가 크고 코주부에 주근깨마저 있었다. 서로 다른 것은 머리와 눈동자의 색깔뿐이었다. 브레인은 다섯 형제 중 가운데로, 엷은 갈색 머리에 눈동자는 초록색이며, 주근깨는 제일 적었다.
외톨이로 고독하였기 때문에, 말타는 모리슨 집안을 늘 동경하고 있었다. 항상 활기에 차 있었고, 아이들에겐 친구가 많았다. 한쪽 방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다른 방에서는 스테레오 소리가 들려오는 정도였다.
맛있는 냄새가 부엌에서 나면, 누구든지 마음대로 식탁으로 가곤 했다. 그러한 집을 페기는 묵묵히 미소를 띤 채 혼자서 꾸려 갔던 것이다.
페기는 체격이 커서 언제나 헐렁한 티셔츠나 디브의 와이셔츠 차림으로 있었다. 눈이 돌 정도로 바쁜 가사의 틈을 타서 스튜디오에서 희귀한 것을 만들어내는 조각가이기도 했다.
페기의 남편 디브는 투자 상담역과 주식으로 한밑천 벌어서, 말타가 아직 어렸을 때부터 거의 은퇴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목수 일을 좋아하여, 일요일에는 아이들에게 레이스카를 만들어 줄 정도로 솜씨 있던 사람이었다.
모리슨 일가가 자신에게 쏟아 준 애정과 관심은 생각만 해도 마을이 아리다. 브레인과 데이트를 시작하고 둘의 사랑이 익어 가는 것을, 그 집에서는 기쁘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말타의 성공도 모리슨 집안에서는 마치 자기네들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실라큐즈 발레단의 공연이 있을 때, 그들이 무대를 올려다보고 있던 표정은 일생 동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감독이 "말타의 팬클럽이로군!" 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한층 더 죄책감이 깊다. 2년 동안이나 소식을 끊고 있었던 것에 대해, 필시 냉정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브레인이 죽은 후 실라큐즈마저 도망쳐 왔으니까 말이다.
꿈이 산산조각 나서 실라큐즈를 떠났다기보다는, 모리슨 일가와 만나는 것이 괴로워서였다고 하는 편이 진실에 가깝다. 만일 자기가 함께 타고 있지 않았다면 차는 충돌하지 않았을 것이고, 브레인도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눈언저리에 주름을 잡혀가며 웃고, 소년처럼 이마에 앞머리를 늘어뜨린 채......
순회공연 중 발레단이 걱정을 하게 된 일련의 사고 가운데의 제 1탄은, 처음에 탔던 비행기 안에서 일어났다. 슈트케이스가 남자 무용수의 어깨에 떨어져, 그는 하트훠드에 도착하자마자 뉴욕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엑스레이 검사 결과 그의 어깨뼈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발레리나들도 미신을 잘 믿는다. 비행기 안의 공기는 곧바로 암울해졌다.
말타 옆에서 산드라가 안전벨트를 매면서 말한다.
"나쁜 징조가 아닌지 모르겠네? 다리를 다친다든지, 뼈가 부러진다거나, 비행기 사고라든지......"
"큰 도구가 망가진다든지, 의상이 없어진다든지, 관객이 싫증을 낸다든지,,,,,," 말타가 뒤를 잇는다.
그때 스튜어디스가 긴급 사태의 재해에 대해 주의 사항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끝나자, 산드라가 또 묻는다.
"캐시미르 옆에 누가 앉아 있는지 알아?"
"신시아겠지."
"맞아, 신사아야. 그런데 저 두 사람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어. 화해했다고 하던데, 소문이니까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나는 소문 같은 거 듣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너야말로 제일 흥미 깊은 주인공인지도 몰라."
"내가?"
"남자도 없고, 나쁜 평판도 없고, 발레리나로서 전도가 양양하고, 이것만으로도 그래."
"설마 모두들 내가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캐시미르의 파트너가 됐다고 수군거리는 것은 아니겠지?"
"화내지 마, 말타. 아무도 구체적으로 말한 사람은 없으니까."
"내가 잘났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모두들 남의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이 아니라, 좀더 자기 자신의 일에 열중했으면 해."
"그렇게 되면 인생이라는 건 굉장히 따분할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말타는 성녀이든지, 아니면 자기 생활에 만족해서 다른 사람의 일은 생각할 특이 없든지 둘 중의 하나겠군."
"어마 그렇지는 않아. 내 생활은......"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중간에서 말을 뚝 끊었다.
그러나 산드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타, 네 남편은 네가 발레리나라는 것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나 보지?"
"음, 별로." 너무도 직선적인 질문이어서, 말타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대로 대답했다.
"다행이군."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였지만, 뭔가 마음속이 편치 않은 듯한 말투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말타는, 산드라가 남의 말은 잘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산드라는 잡지를 집어 들고 건성으로 넘기고 있다. 말타는 산드라가 발레단 밖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의 사생활을 내보이고 싶지 않고,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산드라의 모습을 보자, 어쩐지 동정심이 갔다.
"산드라, 말하고 싶지 않으면 잠자코 있어도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인지 얘기해 줄 수 있겠어?"
"내 얼굴에 괴로움이 나타나 있나 보지? 아, 정말 싫어. 꼭 괴로울 때마다 노이로제가 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인단 말야."
소리를 내어 웃으려고 하는데, 산드라가 갑자기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산드라!"
"미안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용서해 줘."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봐."
"너 때문이 아니야. 애인이 2개월 전에 나가서 여태 나타나지 않고 있어."
"동거하고 있는지 몰랐어."
"누구에게 얘기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한마디 말도 없이 나가 버린 것은 허세인 것 같아." 산드라는 어깨를 으쓱 치켜올린다. "얼마 있다가 돌아올 줄 알았어.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
"누구야? 발레계 사람이야?"
"아니야, 최초의 애인은 발레계 사람이었어, 그런데 조금 지나니까 진절머리가 나더군. 그래서 이번에는 발레계 밖의 사람과 교제를 시작했지. 그것이 문제였어. 나는 저녁에도 없는 날이 많았고, 있어도 피곤해서 외출할 기운이 없었거든. 너무 고된 나날이니까. 그래서 그가 다른 데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거야."
"전화를 자주 한다든지, 아니면 충분한 대화를 가지든지 하지 그랬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어.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고, 그한테 멸시 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때부터 이미 그에게는 다른 여자가 생겼던 것 같아. 그는 여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이제 그와는 만나고 싶지 않아. 그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주치고 싶지 않으니까.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도 있잖아?"
산드라의 마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캐시미르와 신시아의 정사가 이렇게 분명해지지 않았더라면, 좀더 행복한 기분으로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캐시미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튜디오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일이, 순회공연을 오니까 자주 눈에 띄었다. 캐시미르의 팔에 매달리기도 하고, 미소를 짓기도 하고, 열심히 말을 걸고 있는 신시아의 모습이 보고 싶지 않은데도 자꾸 눈에 띄었다.
리허설 동안에는 신시아와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마주쳐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고, 보이지 않으면 잊곤 했다.
순회공연이 시작되고 나서 언제나 캐시미르의 애인처럼 구는 신시아를 보아야만 하는 말타는 일종의 쇼크마저 맛보았다. 될 수 있으면 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순회공연의 사흘째 되던 밤에 캐시미르의 방 앞을 지나는데, 방안에서 신시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날 밤, 밤새도록 신시아의 웃음소리가 귀에서 사라지지 않아, 말타는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거울 속의 부석부석한 얼굴을 보면서, 캐시미르에게 육체적으로 끌리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불과 몇 미터 건너편에서 캐시미르가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성적인 자극이 온몸에 전율을 일으킨다.
신시아가 되어서 캐시미르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신이 비열한 인간인 것만 같다.
하트훠드에서의 공연 닷새째 되는 날 밤,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피날레에서 갑자기 왼쪽 다리에 짜릿한 통증이 있었다. 말타는 스텝을 멈추고 캐시미르의 팔에 쓰러졌는데, 캐시미르가 재치 있게 말타의 몸을 조금 들어 올리고, 자기의 몸을 낮게 도사려서 커버해 주었다.
마지막 스텝은 별탈 없이 잘해 냈다. 관객들은 발레단에게 기립 박수를 쳐주었고, 앙코르를 요청했다. 말타는 한아름의 향기 좋은 장미꽃을 받았다.
겨우 막이 내려지자 발레리나들은 무대에서의 멋진 포즈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두들 피곤한 기색뿐이다. 몇몇 사람은 절름거리면서 갱의실로 들어간다. 단원들의 갱의실에서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온다.
갱의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말타는 그 안에서 어떤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을 감고서도 알 수 있었다. 발레리나들은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머리를 풀거나 속눈썹을 뗄 것이다. 또 토슈즈를 벗고서 아픈 발을 문지르고 있는 발레리나들도 있을 것이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후의 정경과 같다. 방바닥에는 타이츠와 레오터드, 토슈즈와 빈 소다통, 그리고 털실뭉치가 뒹굴고, 화장대 위에는 화장품과 휴지 조각이 널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발레리나들은 웃었다 신음했다 하면서 그 날 저녁 공연의 스텝 하나하나를 마음속으로 되새기고 있을 것이다. 무대 위에 있는 짧은 시간을 위해 누구든지 피나는 노력을 해 왔으니까.
발레리나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과는 다른 우아한 존재라고 믿는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지상에 얽매여 있는데도,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자기 육체까지 파괴하는 일이 종종 있다.
말타 또한 조금 전의 아픔을 발레리나라면 누구나 맛보게 되는 고통으로 생각해 버리려고 했다. 자기 갱의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머리 장식 핀을 빼려고 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캐시미르가 화장대 앞의 의자에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서둘러서 화장을 지워버렸는지, 앞머리가 젖어서 이마에 내려져 있었다. 타이츠만 입었고, 상반신은 알몸인 채였다. 말타는 양손을 꼭 쥐고, 캐시미르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면서 살며시 미소를 띠었다.
"스텝을 실수해서 미안해요. 어찌된 일인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당신답지 않은 실수였어요."
"네, 용서하세요."
"당신은 많이 지쳤소?"
"순회공연은 처음인데다가, 잠자리도 바뀌어서 그래요. 하지만 이러다가 익숙해지겠지요."
"오늘 저녁 당신의 춤은 여느 때와 다르던데......"
"그랬나요?"
"당신은 몰랐소?"
더 이상 당황한 자신의 얼굴을 캐시미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타는 의자에 앉아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토슈즈를 벗으려고 한다.
"그래요."
"그래서 관객 모두가 일어서서 박수를 쳐 준 거요."
"다른 때보다 잘되는 때도 있을 따름이겠지요."
"아니오, 말타. 그런 이유만이 아니오."
말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캐시미르에게 육체적으로 끌리고 있다는 것이 춤에 나타난 것일까? 자기 자신도 이 점은 분명히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저녁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캐시미르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순간마다 캐시미르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캐시미르의 육체를, 허리에 닿는 캐시미르의 손을, 자기를 받쳐 주는 캐시미르의 넓적다리의 근육을.
"내 손 밑에서 당신의 가슴이 뛰는 것도 느꼈소. 내가 접촉할 때마다 언제든지......"
"당신 때문이에요.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캐시미르는 곧바로 일어서서 말타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화가 난 캐시미르를 본 것은 처음이다. 코가 벌름거리고 입술이 새파래져 있다.
"나에게 그런 시답잖은 연애 유희 따윈 하지 말아요, 말타. 당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짓이요."
캐시미르의 노여움은 컸다.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이, 말타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것 같다. 말타는 자신도 모르게 한 손을 자기 목에 갖다 대었다.
"저 역시 진정으로는 당신에게 연애 유희 따윈 하고 싶지도 않아요."
"마음만 먹으면, 나는 어느 여자와도 놀아날 수가 있소."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여느 여자와 같은 존재가 아니오. 나의 진정한 파트너요."
말타는 캐시미르에게 자기의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춤을 추었는지는 정말로 저도 잘 몰라요. 오늘 저녁의 당신은...... 조금 특별하게 생각되었어요."
"좋아요, 말타. 당신 말을 믿지요." 캐시미르는 손끝으로 말타의 볼을 쓰다듬었다. "당신도 특별했소. 나는 그것을 말해 두고 싶었던 거요. 나 역시 당신을 위해 춤춘 순간이 몇 번 있었소." 그 말을 하고는, 캐시미르는 갱의실을 나가 버렸다.
말타는 멍청히 그대로 앉아, 캐시미르가 문지른 볼에 손을 갖다 대었다. 상대가 무서울 정도의 힘을 자기에게 갖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그저 볼을 스쳤을 뿐인데 이 정도의 전율을 줄 수 있는 남자가 또 있을까? 캐시미르는 그런 힘을 지니고 있었다.
4
프로비덴스시(市)에서는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이 발레단에서 일어났다. 최초에 있었던 사건은 <장미의 순수>에 입고 나갈 캐시미르의 의상이 없어진 일이었다. 여기저기 찾아본 결과, 하트휘드의 공연장에 두고 온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 날 밤의 공연 시간에 맞춰 가져 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중의 무대 의상점에 전화해서 겨우 핑크 레오터드와 타이츠를 찾아내었다. 개막까지는 두 시간 밖에 없어서 바느질을 할 줄 아는 단원은 총출동하여, 여러 가지 색깔의 핑크 펠트를 100장이나 조달하여 코스튬을 만드는 데 힘썼다. 캐시미르는 벌써 레오터드와 타이츠를 입고 방 한 가운데에 서 있다. 펠트를 꽃잎 모양으로 잘라내는 사람, 레오터드에 직접 꿰매어 붙이는 사람 모두가 바삐 움직였다. 원래의 의상은 멋있는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피기 시작한 장미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캐시미르는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의상을 보고 반쯤 날개가 잘린 닭 같다고 혹평한다.
"꽃을 연상해 주세요." 신시아가 핑크 꽃잎을 꿰매면서 말한다.
누군가가 덧붙인다.
"꽃잎에도 가시가 붙어 있어." 플로어에 앉아서 꽃잎을 본뜨고 있던 산드라가 말참견을 한다. "우리들은 나이가 먹어서 춤출 수 없게 되어도 바느질은 할 수가 있을 거야."
"나는 나이 먹고 싶지 않아." 신시아가 되받아 말한다. "영원히 춤을 추겠어."
"젊을수록 망상이 깊다더니 정말 그렇군. 어떻게 영원히 춤출 수 있겠소? 그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오."
신시아는 꿈쩍도 하지 않고 캐시미르에게 물었다.
"당신은 언제 발레를 그만둘 거예요?"
"몸이 말을 안 들을 때까지. 아니, 그보다도 관객에게 쫓겨날 때까지가 정확하겠군요."
"춤추지 않는 당신은 상상도 못하겠어요."
"어마, 나 같음 생각할 텐데. 극히 보통 생활을 하고 있는 그를……." 산드라가 비꼬듯이 말한다.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저녁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가고, 보통의 사회 생활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말이야."
"그렇지만, 산드라." 다른 발레리나가 말참견을 한다. "도대체 무엇을 할 작정이지?"
"일하지."
"어디서?"
"어디든지 좋아. 사무실, 학교, 슈퍼마켓 등 어디든지 말야. 내가 바라는 것은 확실한 생활이야. 아홉 시부터 다섯 시까지 일하고, 저녁 식사는 여섯 시에 하고, 주말에는 쉴 수 있는 그런 생활……."
"리허설도 없고?"
"토슈즈를 신지 않아도 좋아."
그렇지만 발레가 없는 생활을 경험한 말타로서는 생각이 달랐다. 한가한 시간이 지겹도록 느리게 갈 뿐이니까.
어떤 의미에서 발레는 마약 같다고 말타는 생각한다. 그 무엇보다도 고상하고 스릴에 넘치는 감각을 맛보게 해 주니까. 무대에 서 있을 때, 몇 천의 눈이 자기 하나만을 볼 때처럼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는 없다.
"앗, 아파!"
말타는 눈썹을 찡그린 캐시미르의 파란 눈을 올려다보았다.
"찔렸어요? 미안해요."
"아무래도 내 몸이 온전치 못하겠는걸."
"많이 아프세요?" 신시아가 캐시미르의 어깨 너머로 말타를 바라보면서 안쓰럽다는 듯이 묻는다. "하루 저녁만 참으세요. 일요일에는 우리들 원기를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우리들이라고 말하는 신시아의 능청스러움. 말타는 기분이 언짢았다. 캐시미르는 신시아의 손에 입술을 맞춘다.
"아, 원기를 회복한다……그것은 순회공연에 있어서 최고로 좋은 일이지요."
자못 성적인 느낌의 대화에 당황하여, 말타는 뒷걸음질 쳐서 바쁘게 꽃잎을 본뜨고 있는 산드라 옆에 앉았다. 그 날의 사건으로 맨해튼 발레단의 일지에는 〈캐시미르가 꽃잎을 분실한 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의 열광적인 박수에 응답하여 캐시미르와 함께 인사를 하고 있던 말타에게는, 관객들이 무대 위에 흐트러진 꽃잎도 연출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날 밤, 프로비덴스 배우 협회 주최로 발레단을 위한 파티가 있었다. 모두들 축제 기분이었다.
심야가 되어서야 일행은 호텔로 돌아왔다. 말타가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에 옆방에서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남자와 여자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나는데, 그 내용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누군지가 물건을 집어 던졌는지, 벽에 무엇인가 힘껏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다음에는 유리창이 깨어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말타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친 채 문을 열고 복도를 기웃거렸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고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때 옆방의 문 사이로 신시아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당신처럼 인정머리가 없는 남자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어요. 남의 일은 안중에도 없나 본데……."
캐시미르가 낮은 소리로 무엇인가 말했다.
"교만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또 무엇인가 깨어지는 소리. "제가 다시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에요. 저는 한번 재미보고 던져 버리는 그런 장난감이 아니에요. 저 역시 감정이 있어요."
또 다시 낮은 캐시미르의 목소리.
"미안하다고요? 그렇게 말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으로 생각하나요?" 신시아의 목소리는 점점 더 거세어진다.
복도 저쪽 끝 방의 문이 열리고 어느 발레리나의 머리가 보인다. 말타에게 어찌된 일인지 물어 보는 듯한 눈초리이다. 말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리자,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섭섭한 것은 저예요." 신시아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당신 때문에 쓸데없이 보낸 시간이 아깝고, 당신을 훌륭하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은 분해요. 확실히 말해 두는데, 전 당신 같은 사람 아주 싫어요!"
방문이 홱 열리고, 신시아가 파란 나이트가운의 모습으로 나와서 말타 앞을 지나갔다. 화가 나서 볼이 벌겋고 눈은 에메랄드처럼 불타오르고 있다. 말타는 신시아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말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복도에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캐시미르의 방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컴컴하여 방안의 모습이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캐시미르!"
"거절당한 여자의 노여움 앞에서는 지옥의 불길도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어떤 대사를 인용하는지, 시를 읊듯이 중얼거리는 캐시미르의 목소리가 들린다.
희미한 스탠드 불빛 사이로 방안의 정경이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테이블 위에 보드카병이 놓여 있고, 캐시미르는 파자마를 입은 채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서 있었다. 머리는 흐트러지고 얼굴 표정에는 피로감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보드카가 담긴 글라스를 들고 있었다.
"아, 천사가 나타났군요……. 건배!"
말타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침대 옆 의자로 걸어갔다. 캐시미르가 자신이 여기에 있는 것을 좋아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보드카 한 병을 통째로 마신다는 소문을 들은 이상, 지금 이대로 나갈 수가 없었다.
캐시미르가 만취해 있는 것을 보면 그레고리는 분명히 노발대발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캐시미르가 술을 덜 마시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가 술을 덜 마실지도 모르는 채, 말타는 의자에 앉아 맞장구쳤다.
"건배!"
"좋은 보드카 한번 마셔 보겠소?"
"물론……좋겠지요."
"보드카 마셔 본 적 있소?"
"아뇨, 한 번도 없어요."
"내가 오늘 밤 마시는 법을 가르쳐 주지요. 이것도 코스가 있어요." 캐시미르는 침대에서 내려와 또 하나의 글라스를 가지고 왔다.
"제일 좋은 방법은 보드카를 약으로 생각하고 마시는 거요."
말타는 보드카를 단숨에 마시는 캐시미르를 지켜보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캐시미르는 까다롭지 않은 남자야.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드러낸다. 이것도 캐시미르의 매력 중 하나인 거야…….
캐시미르와 관계를 갖는 여성들은 모두, 만일 캐시미르가 자기를 원할 때는 캐시미르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겠지. 캐시미르라면 상대를 지켜주고, 소중하게 다루고, 욕망을 불사르고, 숭배하여 줄 것이 틀림없다라고.
캐시미르는 여자들을 좋아한다. 발레리나들의 말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봐도 알 수 있다. 여성에게 흥미를 갖고 있다고 해서 캐시미르의 남성다움을 손상시키는 일은 없다. 이만큼 남성다운 남자도 없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정도니까.
"중요한 것은 단숨에 들이키는 거요. 보드카에 맛은 없어요."
말타는 캐시미르처럼 단숨에 마셨다. 속이 확확 타는 것 같았다.
"자, 한 잔 더 들어요."
"그만 마시겠어요. 저는 도저히……."
"한 잔만 더 마셔요."
말타는 점잖게 보드카를 마셨다. 눈이 핑핑 돌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누군지가 나의 이 희생을 보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한 잔 더 마심으로써 캐시미르가 마실 분량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니까.
"기분이 어떻소?"
말타는 숨이 막히는 듯했으나, 겨우 입을 열어 대답한다.
"대단히 지독하군요."
"보드카 중에서도 최고급품이오." 그는 만족스러운 듯이 말하고 베개에 기댄다. "최고의 러시아 보드카요. 가슴에 털이 나게 해 주니까요."
"어마, 고마운 일이로군요."
"그런데…… 우리들이 당신을 깨우고 말았군요."
"아직 잠들지 않았어요."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오. 마지막은 항상 이렇다니까……."
"당신들 사이가 끝났다는 말인가요?"
"끝났지요. 벌써 2주일 전에……."
"당신들은 아주 다정해 보였는데요."
"그녀는 너무 젊어요. 나보다 열 살이나 아래니까. 나와 당연히 결혼할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오. 나는 단지……. 나의 기분이 거기까지 깊지 않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오, 신시아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해요."
"나는 영원치 않은 관계를 원했을 뿐이었는데……." 또 단숨에 보드카를 들이마셨다. "보니가 죽고 나서부터 난 고독해졌소. 여자가 필요해요. 이 기분 당신은 이해하겠소?"
"네." 입이 바싹 마른다. "잘 알아요."
캐시미르가 윗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남편이 죽고 나서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졌었소?"
말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자신의 글라스에 시선을 떨구었다.
"지금 그 사람과 함께 살고 있소?"
"아녜요. 저……일시적인 정사였어요. 만난 것도 우연이었고요."
"그래서 행복했나요?"
"아녜요. 반대로 더 고독해졌어요. 너무도 일시적인 감정이었으니까요."
"저,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여자를 사탕처럼 생각하고 있었소. 사탕이 있으면 그 달콤함을 맛보고, 다 먹으면 또 다른 사탕에 손을 가져가게 되지요. 맛은 있지만 식사로 할 정도는 아니오……. 아무리 해도 영구히 사귈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보니를 알게 되었소. 보니 또한 나 같았소. 보이프렌드가 많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해 주고 있었지요. 하지만, 보니의 마음에 드는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어요. 정사와 사랑을 무관하게 생각하고 있었소. 내가 달려드니까 보니는 필사적으로 도망쳤어요. 나는 점점 더 사랑에 빠져 가고 있었소. 서로 오해하고 있었소. 나는 너무 질투하여 보니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었고, 내 소유가 아닌 저 여자야말로 제일 탐나는 여자다, 나는 저 여자를 반드시 내 소유로 하겠다……이렇게 수없이 가슴에 새기면서, 마침내는 보니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소."
"당신들은 정말 굉장했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나는 보니를 사랑 이상으로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소. 다른 여자들은 꿈결처럼 내 마음을 스쳐갔을 뿐인데 보니는 달랐소. 그래서 결국 우리들은 결혼을 했소. 보니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도 모른 채 나는 그녀와 함께 사는 것에 만족했어요. 그렇지만 보니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했소."
말타는 캐시미르의 슬픈 표정을 가만히 응시한다. 자기와 브레인과의 생활과는 다르지만, 캐시미르의 불꽃과도 같은 정열적인 결혼 생활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밋밋한 자기에 비교하여 부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브레인과의 생활에서 캐시미르와 같은 정열적인 사랑을 맛본 일은 없다. 구태여 말한다면 15세 때, 모리슨 집안의 여러 형제들 중에서 브레인이 제일 마음에 들어 필사적으로 원했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데이트를 시작하게 되었어도 두 사람의 사이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예의적이었다. 브레인에게 마음이 들뜬 일도 없었고, 지금 돌이켜보면 자기도 브레인의 마음을 들뜨게 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브레인이 나에게 열중해 있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브레인도 나는 발레 때문에 바빠서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가질 여가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두 사람은 공동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공동으로 아는 사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웃끼리 지내다가 결혼해서 같은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눈이 멀 정도로 사랑에 빠진 적은 없었지만, 은근한 사랑이 지속되고 있었다.
"혹시 당신은 신시아에게 또 한 사람의 보니가 되어주길 바라지 않았나요?"
"어째 사람 마음을 떠보는 것 같군요." 캐시미르의 얼굴은 자책으로 일그러졌다. "그래요. 이제 나는 그 전처럼 여자를 잘 다루지 못하게 되어 버렸소. 예전처럼 거리가 보장되지를 않아요.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신시아가 생각하는 것도 책임은 내게 있어요."
"사랑이 없는, 아무것도 아닌 섹스…… 경험해 보아서 알지만, 나중에는 허무만 남을 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니, 어떻게?"
"단지 하룻밤의……관계를 말하는 거예요."
"말타, 당신이 그런 짓을 하다니……." 깜짝 놀랐다는 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말한다. "믿을 수가 없군요."
"저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때는 너무 절망에 빠져 있었어요."
"당신이 원했던 것은 단지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군요."
"네, 섹스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저……."
정확한 말을 찾는 말타를 대신해서 캐시미르가 말하였다.
"당신의 고독을 풀려고요?"
"네. 슬픈 일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죽음이 우리들의 인생에 파고 들어와서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가는 것은 정말 슬프오. 살아 남아서 다른 육체와 보드카로 위로하는 것도 슬픈 일이고요."
"신시아가 처음은 아니었지요?"
"어느 파티에서 만난 여자와 짧은 정사를 가졌었소. 그렇지만 그녀는 내가 하고 있는 발레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때 결심했지요. 발레리나 이외의 여자와는 관계를 갖지 않겠다고. 어려운 문제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다음에 만난 것이 신시아요. 그런데 각오하고 있었던 것 이상의 트러블을 짊어지게 되었소."
"그렇지만 신시아는 가버렸잖아요?"
캐시미르는 괴로운 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돌아올 거요. 나는 그것을 알고 있소." 글라스를 단숨에 비우고는 또다시 보드카를 따른다. "이제 알았어요, 말타. 나의 플레이보이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가벼운 마음으로 섹스를 즐길 수는 없소."
"저도 결심했어요. 이 다음에 남자와 관계를 가질 때는 상대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요."
"나도 같은 기분이오. 사랑이 찾아올 때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 같소. 그때까지는……."
그는 허전한 듯이 보드카 병을 두드린다.
"대신 위로해 줄 것은 언제든지 있으니까요."
"술은 발레에 좋지 않아요."
"강한 러시아 사람은 보드카 한 병을 다 마셔도 끄덕없소."
"캐시미르, 당신은 이제 반쯤 고주망태가 됐어요."
"고주망태라고요? 나의 어학 실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데요."
캐시미르가 또다시 보드카를 한 잔 가득히 따르는 것을 말타는 섬뜩한 기분으로 응시했다.
"그레고리가 불같이 화낼 거예요."
"그 사람도 역시 본성은 다정한 사람일 거요."
"저는 어떻게 하죠? 파트너가 춤을 추지 못하게 되면 곤란해요."
"약속하지요, 말타.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을 거요."
"캐시미르……." 말타는 말을 계속했다. 이야기하고 있는 한, 술을 마시지는 못할 테니까. "신시아를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어떻게 하다뇨?"
"우리들은 지금 순회공연중이에요. 신시아가 단원들에게 이상한 얘기라도 하고 다니면 곤란하잖아요?"
"그도 그렇군요." 힘없는 소리였다. "따가운 시선과 책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에워싸이겠지요. 벌써 후회가 되는군요. 아직은 신시아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 걸 그랬나 보오."
또다시 캐시미르는 글라스를 든다. 말타는 벌떡 일어나서 캐시미르의 손에서 글라스를 빼앗았다. 그리고 보드카 병을 집어 들고 욕실로 가서 보드카를 전부 쏟아버렸다.
"말타! 무슨 짓을 하는 거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침실로 되돌아오면서 대답한다. 이젠 술로부터 마음을 다른 데로 돌렸으면 좋을 텐데……. 당신도 찬성할 거예요."
"최상품인 러시아 보드카가 얼마나 할 것으로 생각하오?"
말타는 침대 끝에 앉아서 캐시미르를 바라보았다.
"우리들은 친구지요?"
"글쎄, 친구라면 내 보드카를 쏟아 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캐시미르……." 말타는 캐시미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부터는 제 말을 들어 보세요."
"보드카를 마시는 것이 나을 텐데……."
"당신은 신시아에게 괴롭힘을 당할까봐 신경이 쓰이지요?"
"그래서요?"
"저를 연막으로 이용하세요."
"뭐라고요?"
"우리들의 사이가 가까워진 것처럼 하면 아무리 신시아라고 해도 당신에게 가까이하지는 않을 거예요." 캐시미르는 멍하니 말타를 응시하고 있다. "마침 신시아가 나갈 때 복도에 있는 저를 보았어요. 만일 오늘 저녁 제가 계속 이곳에 있으면, 소문이 퍼져 신시아는 당신이 반발로 저에게 손을 댔을 것으로 생각할 거예요."
"그런 것, 바보 같은 일이오."
"아니에요. 분명히 잘될 거예요. 신시아는 당신을 따라다니지 않을 거예요. 캐시미르, 저는 당신이 비참해지는 것을 볼 수 없어요. 발레에도 영향이 있으니까요. 당신도 잘 알 거예요."
"당신의 평판은 어떻게 하고요?"
"그것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상관없어요.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되든지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아요."
"이건 코미디로군요." 캐시미르는 베개에 기대어 천장을 올려다본다.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도대체 보드카를 몇 병이나 순회공연에 가지고 온 것일까? 보니가 죽은 후의 캐시미르의 음주량은 굉장하다는 소문이다. 알콜은 무용수를 못쓰게 만든다. 건강을 해치고 반사 정신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말타는 캐시미르의 훌륭한 능력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 캐시미르는 세계 최고의 무용수의 한 사람이니까. 분명히 내 멋대로의 생각이지만, 파트너인 캐시미르를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나 역시 마음껏 춤출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순회공연 중 계속 밤을 같이 하면, 캐시미르가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은 나 자신 때문이기도 하다.
말타는 달래듯이 말했다.
"우리들 둘 다 고독해서 말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겠지요? 그리고 순회공연 때만이에요. 뉴욕으로 돌아가면 그럴 필요가 없어지니까요."
"신시아는 당신을 몹시 싫어하던데……."
"알고 있어요. 당연하죠. 신시아는 당신의 파트너가 되고 싶어 했으니까요."
"신시아는 내가 그녀를 선정할 줄로 생각하고 있었소. 그렇지만 나는 사생활과 발레를 혼동하고 싶진 않아요. 신시아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요."
"신시아는 제가 어떻게든지 해 보겠어요."
"당신은 머리가 돌았군요."
"아니에요. 저는 제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에요. 당신이 빈틈없이 해 주지 않으면 안 돼요. 다른 사람을 파트너로 하면서까지 춤추고 싶지는 않아요."
캐시미르는 윗몸을 일으켜서 말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금 있다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큰 손으로 말타의 긴 머리채를 로프처럼 감아쥐었다.
"당신 나와 자겠소? 이 침대에서?"
"네."
"내가 당신에게 손을 대지 않으리란 것을 믿소."
캐시미르는 말타의 머리를 잡아당긴다. 말타는 미소로 응답했다.
"당신을 믿어요."
"거짓말장이. 말타, 당신은 나와 육체 관계를 맺고 싶은 것 아니오?"
"먼저도 이야기했지요? 사랑 없는 섹스 행위는 하지 않겠다고요. 당신도 찬성했을 텐데요."
"아, 말타." 파란 눈이 웃고 있다. "당신을 놀려먹기는 쉽군요. 볼이 얼마나 붉어졌는지 봐요. 소방차도 무색할 정도요."
"당신은 분명 매력적인 남성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과 섹스 행위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당신은 정말 매력적인 여자요."
캐시미르는 말타를 자기 쪽으로 향하게 하고 물끄러미 응시한다. 미소는 사라지고 입은 꼭 다물고 있다. 말타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은 가까이 붙은 채,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다. 스탠드의 불빛이 두 사람을 은은히 감싸고 있다.
"해 봅시다. 신시아에게 괴로움을 당하지 않아서 좋고, 솔직히 나도 밤이 되면 너무 고독해서 옆에 누군지가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소. 진정한 우정이란 어떤 것인지 시험해 봅시다."
캐시미르와 한 침대를 쓰는 것에 저항감은 없었다. 조금 김빠진 느낌과 이상한 감정은 동반되었지만. 예를 들어, 침대의 어느 쪽에서 자야 하는지 정할 때라든지…….
캐시미르는 오른쪽, 말타는 왼쪽으로 잠자리의 위치가 정해지자, 이번에는 캐시미르가 쑥스러우면 자신은 시트 위에서 자도 좋다고 한다. 말타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몸이 닿아도 상관없다고 했다.
캐시미르는 그편이 훨씬 기분이 좋다고 하면서, 결혼 생활의 멋진 점은 섹스와 관계없이도 매일 저녁 한 침대를 쓰는 상대가 있다는 점이라고 한마디 더한다.
말타도 브레인이 옆에 있는 것은 정말 근사했고, 많은 이야기도 나누었다고 했다. 캐시미르도 보니와 몇 시간이고 침대 속에서 이야기하곤 했다고 하며, 그때를 그리워했다.
다소 불안한 생각이 들게 된 것은, 침대에 들어가서 말타가 가운을 벗었을 때, 캐시미르가 자신은 알몸으로 자는 것이 습관이라고 말했을 때였다.
"그렇지만 당신 때문에 참겠소."
"신경을 써 주어서 고마워요."
각자의 자리로 들어가고 캐시미르가 불을 껐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옆으로 누워 있었다. 캐시미르가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말타는 아주 좋다고 대답했다.
침묵이 계속되고, 말타는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다. 이대로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면 숨이 막혀서,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순회공연중 계속 이런 상태로서야…….
"아무래도 바보 같은 짓이오."
"무슨 말이에요?"
"나와 당신 말이오."
"조금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예요. 처음이라서 조금 불편할 뿐이에요."
"아, 정말 어쩔 수 없군."
캐시미르가 갑자기 움직이더니 뒤쪽에서 말타를 끌어안았다. 등에 캐시미르의 가슴이 찰싹 달라붙어 있고, 자신의 다리 뒤쪽에 캐시미르의 따뜻한 다리가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소. 어떻소?"
말타는 헛기침을 했다. 캐시미르는 만족스러운 듯이 말을 한다.
"그럼 나는 이대로 자겠소."
"저도요."
그런 상태로 말타는 정말 푹 잤다. 잠들기 전에, 캐시미르의 연인 역을 연출한다는 마음 이면에는 캐시미르의 음주를 그만두게 하려는 것 이상의 강한 동기가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캐시미르의 곁에 있고 싶다고.
캐시미르의 따뜻한 가슴에 안겨 자는 것은 보호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캐시미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괴로운 인생살이가 조금은 쉽게 느껴진다.
캐시미르라는 존재에 의해서 심한 고독감도, 브레인의 생각도, 죄악감도, 슬픔도 어느 정도 잊혀졌다. 대신에 멋지고 매력적인 남성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흥분을 느끼게 할 뿐이다.
물론, 캐시미르를 사랑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생각만 해도 입이 바싹바싹 마른다. 그렇지만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남자에게 이용만 당한 채 내버려지고 싶지는 않다.
신시아는 다정하게 대해 준 것을 애정으로 오해하고, 욕망을 열정으로 잘못 알았으며, 캐시미르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결국 좋지 않은 결과가 되고 말았다.
자기만은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말타는 생각했다. 자신은 사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정을 찾고 있기 때문에…….
5
말타는 캐시미르의 연인 역을 연출하겠다는 경솔한 결심이 결국은 최고의 결단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혼자 있는 밤은 늘 무섭고 고독했다. 그런데 캐시미르가 곁에서 이야기해 주거나 위로해 주거나 하여, 무섭지도 고독하지도 않았다. 밤의 악마로부터 보호를 받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두 사람 모두 섹스가 내포되어 있는 화제는 피했지만, 이야기를 끝내면 늘 껴안은 채 잤다.
캐시미르도 말타도 플라토닉 러브 자체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남들이 알면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런 관계를 잘 지속시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연히 말타는 캐시미르의 반생에 대한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소규모 공장의 공장장이었고, 발레를 하겠다는 아들을 무척 반대하였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마음이 겨우 풀어진 것은, 캐시미르가 키로프 발레단의 스타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였다고 한다.
망명할 때의 이야기를 하는 캐시미르를 보니, 그가 얼마나 그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던지를 알 수 있었다. 자기가 태어나고 성장한 문화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도 괴로웠지만, 망명 후 가족과 일체 연락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가 제일 괴로웠다고 한다.
캐시미르는, 여자는 자신의 상심을 위로하고 기분 전환에 필요한 존재에 불과했다고 고백했다. 갑자기 스타 자리에 앉게 되자 처음에는 조금 흥분했었다고도 했다.
"일주일 동안 매일 여자가 바뀐 적도 있었소. 나는 상대의 이름조차 모를 정도였지요."
물론 캐시미르는 얼마 안 있어 침착함을 되찾아 정사의 상대를 자꾸 줄여 나갔지만, 여자에 대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여자는 즐기기 위한 상대에 불과하고, 서로의 쾌락을 위해 필요할 뿐이라는 의식이 뿌리박혀 있었다. 이러한 캐시미르의 사고 방식을 고친 것은 보니였다.
두 사람은 어릴 때의 일,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을 때의 일, 결혼 생활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춤출 수 없게 되는 미래의 일까지도 캐시미르에게는 완전히 가정적인 이야기였지만, 말타에게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프로비덴스 공연에서는 두 번이나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었다. 두 번 다 곧 회복되었고, 작은 실수여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한번은 군무를 출 때였고, 또 한번은 퇴장할 무렵이어서 아무 일 없었지만, 언젠가는 무대 한가운데서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벌써 가슴이 떨려옴을 느낀다.
말타는 이 일만큼은 캐시미르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발레는 그만두는 편이 낫겠다는 말을 듣는 것이 겁이 났고, 그녀가 말을 안 들으면 그레고리에게 얘기해서 발레단을 그만두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춤출 수 있는 날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말타는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춤출 수 있을 때까지 추겠다는 절실한 생각만이 머리를 어지럽힐 뿐이었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두 사람이 한 방을 쓰고 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단원들 사이에 퍼져, 보스턴 신문의 가십란에까지 올랐다.
사실 신시아에 대해서는 결과가 썩 좋아서, 두 번 다시 캐시미르에게는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캐시미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그들의 반응을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해 보았다. 첫째는 살그머니 눈짓을 교환하는 사람들, 둘째는 가까이 가면 느닷없이 대화를 중지해 버리는 사람들, 셋째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 사람들이다.
말타에게 최초로 충고한 사람은 산드라였다. 캐시미르와 함께 밤을 지내기 시작한 그 다음날에 말타의 속을 넌지시 떠본 후에 말했다.
"말타, 참으로 냉정하군. 신시아는 사람이라도 죽일 것처럼 서슬이 시퍼래져 있고, 단원들은 너희들을 신경을 곤두세운 채 지켜보고 있어. 어쩜 뉴욕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참지 못하지? 어차피 순회공연 중에는 함께 있을 텐데."
"우리들을 몰아세운 충동이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어떨까?"
"글세 믿고는 싶지만, 아무래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군."
"어째서?"
"캐시미르는 충동적인 타입이니까... 그렇지만 너는 다르거든. 뛰기 전에 주위를 잘 살펴보는 타입이지."
"그럴까?"
"나는 아무래도 이상해."
산드라에게 적당히 얼버무릴 수만은 없다는 것을 말타는 알았다. 비행기 안에서 이야기를 나눈 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브레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야기했을 정도니까.
산드라와 친해지면서 안 일이지만, 산드라가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자기와 상관없는 상대나 호의를 갖고 있지 않은 상대에 한해서였다. 진실을 속속들이 밝히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진실이 내포된 이야기는 할 수 있으리라.
"나는 그동안 참 외로웠어. 미망인이 된 지도 벌써 만 2년이나 되었는걸."
"말타, 나도 그건 알고 있어." 산드라의 말 속에는 깊은 동정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캐시미르가 어떤 사람인지는 너도 알 거야. 품행이 좋지도 않고, 얼마 전까지 신시아를 졸졸 따라다닌 것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너희 관계가 좋은 쪽으로 결말 지어질 희망은 없어. 너는 상처를 입고, 크게 낙심할 거야."
"캐시미르와 사랑에 빠질 생각은 없어."
"처음부터 사랑에 빠질 생각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없어. 자기도 모르게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리는 거야. 나도 그랬거든. 그이와 사랑에 빠질 생각은 없었어. 즐거움을 나누는 이야기 상대로서 그를 만난 거야. 그러다가 결국은 이렇게...... 요즘처럼 비참한 기분을 맛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일 거야. 한 남자가 이 정도로 나에게 영향력을 미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야."
"나는 캐시미르를 그 정도로 깊이 사랑하지는 않을 거야."
"얼마 안 있어 그렇게 될 거야. 그를 기쁘게 해 주고 싶고, 영원히 자기 곁에 두고 싶을 거고, 그 다음에는 자연히 질투심이 생기게 되겠지."
"반대로 될지도 모르는 일이야. 캐시미르가 나에게 질투를 느낄지 어떻게 알아."
"그렇게 되면 꼴불견이겠지." 산드라는 웃었지만, 재미있어 하는 모습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캐시미르는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타입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보니가 죽으니까...... 어마, 그냥 그렇다는 거야."
말타는 순간 산드라를 응시하고, 금방 얼굴을 돌려 버린다. 캐시미르에 대해서 아직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없으나, 혹시 산드라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말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도박이군."
산드라는 말타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레고리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말타도 캘리의 뒤를 좇아서 임신이나 하지 않을까 하여 늘 노심초사하였다.
"저는 결혼 경력도 있어요."
"그거야 나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일단 주의시키는 것뿐이요." 그레고리는 헛기침을 했다.
"캘리도 자신의 생각만큼 그렇게 빨리 복귀할 수 있을지 어떨지...... 하지만 당신과 캐시미르는 잘 해 내고 있어요. 레귤러 시즌에는 서로 함께 춤추었으면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 물론이지요."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어쨌든 일반 단원의 한 사람과 프리마 발레리나는 다르니까, 각별히 주의해 주길 바라오."
"제 일은 걱정 마세요." 말타는 살집이 좋은 그레고리의 손을 가볍게 두드려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저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어요."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진 것은 보스턴에서의 일이었다. 순회공연은 무제한의 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에, 관광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도시에서도 바깥 세계와는 접촉하지 못한 채 지나간다.
뉴욕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전 중은 레슨이 있고, 오후에는 불완전한 연기를 바로잡는 리허설이 있다. 조금 쉬었다가 저녁 식사를 마치면 극장으로 간다. 공연 두 시간 전에는 도착해서 몸을 풀고 의상을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타는 호텔 로비에서 신문을 한 장 들고 돈을 치르는 순간에, 자기의 등을 두드리는 손을 느꼈다. 돌아다보니 신시아였다. 얼굴은 핼쑥해서 핏기가 하나도 없었고, 말타처럼 진즈에 청색 오버 차림이었다.
"괜찮다면 잠깐 할 이야기가 있는데......"
"좋아요." 말타는 선뜻 대답했다. "어디서 하죠?"
신시아는 로비 한쪽 구석에 있는 긴 의자를 가리킨다.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큰 화분으로 가리워져 있어 누구의 눈에도 잘 띄지 않을 것 같았다. 말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시아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팔걸이에 기대듯이 하여 반쯤 마주보고 앉았다. 신시아가 며칠 저녁이나 잠을 못 이루었다는 것을 역력히 알 수 있었다. 눈에는 핏발이 서 있고 얼굴은 부석부석하였다.
"솔직히 말씀드리기 어려운 일인데요......"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노여움이나 질투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전에는 물론 이런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요."
"믿겠어요, 신시아. 그런데 무슨 얘기죠?"
"제가 나간 뒤에 당신이 캐시미르와 밤을 지냈다는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은 아니었어요. 캐시미르는 전부터 당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저는 그에게 대단한 흥미는 없었어요."
"신시아....."
"아무래도 좋아요.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여자와 바꿔치기 당했다는 사실에 기분 좋아할 여자는 없을 거에요. 게다가...... 저는 아침이 되면 그에게로 돌아가서 화해할 작정이었어요. 단순한 질투로 일어난 싸움이라고 생각해서요. 실제로 관계가 끝났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역시 신시아는 캐시미르가 말한 대로 되돌아올 마음으로 있었군. 말타는 마음속으로 그날 밤 캐시미르가 한 말을 떠올려 본다.
"그는 당신이 헤어지는 걸 원하는 것으로 생각하던데요."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되돌아서서 금방 후회했지요."
말타는 조금 충격적인 것을 맛보고 있다. 신시아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대강은 알 수 있지만, 그 이상 자세한 것은 알고 싶지 않았다. 자기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 성립되었다고는 생각하기 싫었다.
"저.....미안하군요."
"당신에게 사과 받으려고 이런 말 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캐시미르와 함게 지내는 동안 알게 된 것이 있어서, 그것을 당신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신시아는 한 손을 들어 입을 열려는 말타를 제지했다. "어마, 침대 속의 일 따윈 이야기할 생각이 없어요. 저는 그저 그의 부인에 대해서 당신에게 알려 주려는 것뿐이에요."
뜻밖의 말에 말타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보니에 대해서?"
"그래요. 그녀는 당신을 따라다니고 있어요. 캐시미르는 절대로 부인을 잊지 않고 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요. 언젠가 저와 잠자리를 같이하면서도 부인의 이름을 부를 정도였으니까요."
다만 한 여자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 산드라도 그렇게 말했어.
말타는 애써 태연한 체하며 말했다.
"그가 부인을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신시아는 머리를 세차게 옆으로 흔들었다.
"어떤 여자도 그녀를 대신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녀는 살아 있을 때보다도 죽은 후에 더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도 그녀에게 이길 수는 없을 거예요. 캐시미르의 기억 속에 있는 부인의 환상보다 더 아름답고, 더 섹시하고, 더 매력 있는 여성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거에요."
"저......거기까지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랬겠지요. 그렇지만 캐시미르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당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제게는 이제 그가 없는 편이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망령에 빠지지 않은 남자를 찾을 생각이에요."
신시아는 일어서서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말타를 내려다본다.
"당신의 행운을 빌겠어요. 진심으로요."
산드라와 그레고리의 이야기는 캐시미르에게 말했지만, 신시아의 이야기는 내용은 고사하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조차도 말할 수 없었다. 신시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그녀의 말이 정말인지 어떤지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캐시미르가 부인을 자꾸 생각해 내는 것은 신시아와 거리를 두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남자와 하룻밤을 지낼 때 브레인의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던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캐시미르가 보니의 망령에 빠져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내의 이름을 일부러 부르고, 그것을 신시아에게 무기로 사용한 것이리라.
말타는 문득 브레인을 거의 잊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뿐인가. 결혼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내었다.
발레단 전원의 레슨이라든지 리허설, 그리고 공연이 있을 때면, 캐시미르와 말타는 잠시도 떨어져 있지 못하는 연인을 연출하게 된다.
캐시미르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말타에게 대하고 있기 때문에, 말타는 언제든지 사랑하는 남자의 눈길이라든지 말이라든지 행위라든지의 대상이 되었다. 몸을 스칠 수 있는 찬스는 한 번도 놓치지 않는다. 호텔 식당에 들어갈 때도 말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무대에 나가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손을 잡는다. 한번은 막이 내려지는 찰나에 발레단 전원이 보는 앞에서 열렬한 키스를 해 보인 정도였다.
설마 이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말타도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다. 캐시미르 본인이 가짜 연인의 역할을 즐기고, 남성다움을 나타내는 것을 즐기고 있으니까.
<해적>의 막이 내려진 직후의 열렬한 키스 때 말타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캐시미르를 쳐다보았다. 캐시미르는 그런 말타를 내려다보면서 히죽 웃으며 속삭인다.
"우리들은 다정한 연인 사이요. 잊었소?"
말타는 머리를 가볍게 옆으로 흔들 뿐이었다. 너무도 길고 격렬한 키스여서 욕망에 불이 당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자 온 몸이 떨렸다.
다시 막이 오르고, 일어서서 박수를 보내 주는 관중들 앞에서 함께 깊이 머리를 숙인다. 박수 소리는 무대 뒤에서도 들렸는데 그 박수는 관객들의 것이 아니었고, 정열적인 키스에 보내는 동료들의 것이었다.
다행히도 캐시미르는 두 번 다시 열렬한 키스는 안했지만, 다정한 연인의 연출에는 변함이 없었다. 말타도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은 자신이었고, 그의 강렬한 매력에 끌리고 있는 여자들의 이유도 알 수 있었으므로.
캐시미르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이 이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맛보게끔 하는 테크닉을 지니고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거나 햇볕에 젖어 있는 것과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처음이어서, 말타는 무의식중에 캐시미르의 넘쳐흐르는 정열적인 연기 덕분으로 밝게 피어나고 있었다.
살갗은 싱싱하고 아름답게 빛나며, 머리에도 새틴과 같은 윤기가 더하고, 우울한 눈빛도 사라졌다. 항상 미소를 띠고, 주위 사람들하고도 곧잘 어울린다. 명랑하고 걱정 없던 옛날의 말타로 완전히 되돌아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히 되살아났다. 행복은 일상의 언행뿐만 아니라 발레에도 나타나, 이전에는 없던 멋진 테크닉을 살려서 서정성까지 표현했다. 그레고리와 캐시미르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비평가들도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짧은 일주일 동안, 말타의 나날은 목가적인 평화와 매력에 넘쳐 있었다. 다리의 통증은 사라지고, 보스턴의 관객은 열광했으며, 에너지의 원천은 마르지 않고, 말타는 영원히 춤을 계속할 것만 같았다.
멋진 나날과 더불어 멋진 밤이 있었다. 캐시미르와 이야기를 나누고, 트럼프를 하고, 어린아이들처럼 함게 자는 밤이. 임신을 걱정하고 있는 그레고리를 캐시미르는 오히려 더 우습게 생각하며, 밤에 불을 끌 때마다 말타를 놀렸다.
어느 날 밤, 말타는 캐시미르에게 보니와 결혼해 아이를 갖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캐시미르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보니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소."
"아이를 싫어했나요?"
"아니오. 어린애는 좋아했소. 그렇지만 보니는 좋은 어머니가 될 자신이 없다고 했소. 뒤죽박죽인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어떻게 자식을 기르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말타는 어머니 시몬느를 생각하고, 보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페기 모리슨에게서조차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어머니라는 존재가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어땠나요?"
"나는 아이를 원했소. 가족을 고국에 두고 왔기 때문에 더욱 혈육의 정이 그리웠소. 우리들은 이 일 때문에 몇 번이나 심한 언쟁을 했었지요"
"언젠가는 잘 될 것으로 생각했나요?"
"보니를 차분히 설득할 작정이었소. 물이 바위를 뚫듯이 말이오. 자식 하나 없이 나이를 먹고 싶진 않았소."
말타도 캐시미르의 깊은 뜻을 잘 알 수 있었다. 망명해 온 처지니까 휴가 때도 집에 갈 수 없고, 자기의 공연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여드릴 수도 없다. 발레만으로는 캐시미르의 외로움을 덜어 줄 수가 없는 노릇이다.
"당신은 어땠소? 브레인은 아이를 원치 않았소?"
"저......우리들은 어느 쪽으로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때는 먼 장래의 일이라고만......"
"그래, 당신은 자식을 생각하기엔 너무 젊어요."
캐시미르는 말타가 거짓말한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아이에 대한 것은 결혼 초부터 브레인과의 사이에 있었던 문제였다. 브레인은 말타를 들볶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자식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말타 쪽에서는 좀더 애매했다. 임신과 출산은 커리어에 방해가 된다. 야심에 불타고 있던 말타는, 물론 언젠가는 자식을 가질 생각으로 있었고 아이도 좋아하긴 했지만, 그 언젠가라는 것은 먼 30대 후반의 일이었다.
결혼해서 2년 정도 지나고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이 찾아오자, 아이에 대한 문제가 재차 거론되었다. 브레인은 아파트 생활을 집어치우고 단독 주택을 사서 아이를 낳아 기르자고 우겼다.
행복한 대가족 속에서 자란 브레인이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기분은 알았지만, 말타로서는 현실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를 갖게 되면 여름 바캉스를 포함해서 적어도 1년은 발레를 쉬어야 한다.
그래서 말타는 아이를 갖는 것을 피했다. 아직 신혼 기분으로 있고 싶다든지, 경제적인 기반을 더 닦아야 한다든지 등의 구실을 붙여서.
그 다음 2년간, 브레인은 여전히 아이를 갖고 싶어했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말타가 실라큐즈 발레단의 솔로 무용수가 되고, 계속해서 프리마 발레리나가 된 때문이다. 한마디 불평도 없이 브레인은 집안 일의 대부분을 맡아 주었다. 청소도 세탁도 식사 준비도 하고, 공연이 있을 때는 차를 태워다 주며 운전사 노릇까지 했다.
말타의 성공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말타를 사랑하고 모든 지원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발레리나들은 이런 말타를 몹시 부러워했고, 말타도 브레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혼 4년째에 접어들었을 때, 브레인이 또다시 자식을 갖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말타는 발레단의 스타 자리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발레단에서도 공연 의뢰가 들어오고 있어서 비평가들도 주목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타는 주저하지 않고 단호히 대답했다. 아이를 갖는 것은 지금으로선 비현실적이고, 싫다라고.
브레인이 노여움을 드러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며칠 동안 두 사람은 말도 하지 않았다. 브레인은 말타를 데리러 오지도 않았고, 말타가 눈을 뜨기도 전에 출근해 버렸다.
남편의 변화에 완전히 당황한 말타는 금이 간 부부생활을 원래대로 회복시키는 데에 전력을 쏟았다. 쉬는 날에는 대청소를 하고, 과자를 구워서 저녁에 브레인의 사무실에 찾아가고, 밖에서 저녁 식사를 하자고 유인도 하였다.
호화로운 레스토랑에 가서 두 사람뿐인 식사를 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다른 때와는 달리 세차게 서로 사랑하고...... 브레인은 완전히 말타의 포로가 되어, 아이를 갖자는 이야기는 잊어버렸다.
아이의 문제가 다시 대두된 것은, 그로부터 몇 개월 후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차 안에서 언쟁을 시작했고, 브레인은 화가 난 나머지 얼어붙은 길인데도 운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당신은 제멋대로이고, 자기 본위여서......"
말이 격하여지는 중에 갑자기 트럭이 나타나서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가른다. 브레인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었다.
차는 정신없이 얼음판 위를 미끄러졌다. 트럭의 짐판이 두 사람 위로 떨어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차체가 종잇조각처럼 찌부러들고, 말타는 자기 자신의 무서운 비명을 들었다.
캐시미르가 불을 끄자, 생각하기도 싫은 과거에 사로잡혀 있던 말타는 캐시미르의 가슴에 안기면서 그에게서 위안을 구하고자 했다. 그의 튼튼한 가슴은 확실히 안도감을 준다.
"말타, 왜 그러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나와 사랑하고 싶소?"
"아니에요. 그런 것 소용없어요.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하니까요."
"우리들은 친구요." 캐시미르는 말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무런 해도 없을거요."
"아니에요.... 지금은."
"아, 또 과거에 얽매인 모양이로군요."
"그저 꼭 껴안아 주세요......부탁해요."
캐시미르는 말타를 힘껏 껴안고, 어깨에 말타의 머리를 실어 준다. 말타는 캐시미르의 허리에 양팔을 감고, 더욱더 매달린다.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대에 매달리듯이.
"밤중에 때때로 당신은 소리를 질러요."
"머릿속에 꽉 박혀 있기 때문이에요.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어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만일 그 날 밤 제가 나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면......, 만일 언쟁을 하지 않았다면, 만일 길이 얼어붙지만 않았다면... 만일..." 말은 분명치 않아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캐시미르는 다만 말타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러시아 자장가를 부르면서 어린애를 달래듯 말타를 가만히 흔든다.
말타는 마음껏 울었다. 캐시미르는 무엇 하나 물으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말타가 원하는 위안만을 주었다. 캐시미르에게 안긴 채, 말타는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
6
발레단이 실라큐즈에 도착한 것은 월요일 아침이었고, 다음날 저녁까지는 자유 시간이었다. 캐시미르는 하루 종일 그레고리와 마주앉아서 발레단의 경영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말타는 생각다 못해 예고도 하지 않고 모리슨 집안을 방문하기로 작정했다. 전화를 걸지 않았다든지,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든지 한 것은 사과함으로써 용서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일가가 살고 있는 도시에 와 있으면서도 한번 찾아보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일가에 대해 용서받을 수 없는 모멸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마음 속 깊이에서는 부레인의 양친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어릴 때의 일 중 제일 생각나는 것은, 모리슨 집안에서 지낼 때의 일뿐이다.
브레인의 형제들도 만나고 싶었다. 큰형 마크는 브레인이 결혼하기 조금 전에 결혼했고, 둘째형 스티브는 독신주의자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아직 중학생이었던 제레미와 더글러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모두 그리운 얼굴뿐이었다. 재회를 두려워하는 마음도 강했지만, 일찍이 맛보았던 모리슨 집안의 즐거운 가정 분위기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은 더 강했다.
"근사한 곳이군." 대학 근처를 달리는 차 속에서 산드라가 말했다.
마음의 기둥이 되어 주었으면 해서 말타가 동행을 부탁한 것이다. 말타는 벽돌로 된 일층 건물의 교사를 가리킨다.
"나는 저 학교에 다녔어."
"모리슨 집안에서는 내가 함께 가는 것을 알고 있어?"
"아니, 깜짝 놀래주고 싶어. 내가 이 도시에 오는 것은 이미 선전이 되어 알고 있겠지만, 초대받을 때가지 기다리긴 싫어......."
산드라는 최소한 필요한 것밖에 이야기하지 않았다. 모리슨 부부의 기다림 속에 가는 것보다, 갑자기 기습하는 편이 재회에 있어 훨씬 즐겁겠지. 산드라가 곁에 있으니까 서먹서먹한 침묵도, 비난의 말도 피할 수 있으리라.
"깜짝 놀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좋을 텐데......"
"시어머니는 손님을 환대하는 사람이야. 나머지 가족들도 물론이고."
"그런데 왜 미리 전화하지 않았지?"
"왜냐고?" 말타는 하소연하듯이 산드라의 눈을 응시했다.
"2년 동안이나 소식 한번 전하지 않았으니까."
"2년 동안이나? 남편이 죽고 나서 싸움이라도 했니?"
"아니, 좀더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야. 그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두려워서......아무래도...."
"음, 브레인이 생각나기 때문이겠지. 말타, 그 기분은 잘 알아. 나 역시 그이와 잘 가던 레스토랑에는 가고 싶지 않아. 함께 듣던 레코드도 듣지 않는 정도니까. 그이를 생각나게 하는 모든 것과 부딪치고 싶지 않아."
말타로서는 브레인의 양친을 만나지 않는 것이 그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았지만, 산드라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동정을 해 주어서 기쁘다.
"너를 데려온 것은 내가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되면 도와주었으면 해서..... 내가 나빴는지 몰라."
"별소릴 다하네." 산드라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타의 손을 가볍게 두드린다. "친구라는 것은 이런 때 필요한 것 아니겠어?"
모리슨 집안에 도착하니까 주차장에 차가 석 대나 있고, 자전거도 두 대나 있는 것이 보였다. 두려워하는 말타를 산드라가 격려한다. 데님 스커트와 하늘색 블라우스 차림으로 그리운 도어를 노크하는 말타의 손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현관에 나온 것은 부레인의 아버지인 디브였다. 의아스러워하던 얼굴이 갑자기 밝아진다. 누가 왔나 알아맞혀 봐요라고 집 안을 향해 소리 지르는 디브의 목소리는 흥분하기까지 했다.
재회는 말타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쉽게 이루어졌다. 2년간의 공백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보였다. 말타를 포옹하고는, 가볍게 잘 있었느냐는 인사까지 한다.
페기는 언제나처럼 조각할 때 입는 헐렁한 샤쓰 차림이었다. 머리에는 흰 머리타락이 조금 생겼고, 웃으면 눈가에 주름이 잡히게 된 정도의 변화뿐이었다.
디브는 머리가 하얗게 되고 머리숱도 적어져서 꽤 나이가 들어 보였다. 얼굴이 부레인과 비슷해서 디브에게 포옹될 때는 목젖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둘째형 스티브는 대학원생인데, 월요일에 강의가 없어서 집에 있었다. 동생들은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집에 와 있는 참이었다. 몰라볼 정도로 성장해서, 제레미는 턱수염까지 나고, 더글러스는 머리를 눈썹까지 기르고 있었다.
동생들도 포옹했다. 말타는 가슴이 꽉 메었다. 내가 그들을 만나고 싶어했던 것처럼, 그들도 또한 나를 만나고 싶어 했어.
처음으로 말타는 모리슨 일가와의 작별이 정말 필요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브레인의 죽음으로 말타를 책망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누구든지 그저 말타와의 재회를 기뻐하고 있다. 말타도 모리슨 집안에 다시 돌아와서 더없이 행복했다.
산드라를 소개했다. 두 사람은 곧 식당으로 안내되었고, 페기의 맛있는 냄비 요리와 집에서 만든 야채 수프가 식탁에 올려졌다. 갑자기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식탁은 푸짐했다.
"집 정원에서 얻은 거야." 디브가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정원에 야채를 가꾸고 계시는 줄은 몰랐어요."
"이 사람은 무엇이든지 하지 않고는 못 견뎌. 아이들이 커져서 나무로 뭐든 만들어 줄 수 없으니까." 페기가 따끈한 수프를 나누어주면서 말한다.
말타는 가만히 식당을 둘러보았다. 2년 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가구의 진열도, 한편 귀퉁이에는 책이 쌓여 있고 또 한쪽 구석에 잡지가 쌓여 있는 모습도, 고양이인 배트맨이 거실 소파에서 잠자고 있는 모습까지도.
"옛날 그대로지?" 페기가 말타의 시선을 쫓으며 말했다.
"하나도 안 변했군요."
"어머니는 무엇 하나 바꾸지 않는 성미이시니까요." 스티브가 말참견을 한다. "내 침대 밑의 종이 뭉치, 벌써 몇 년 전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스티브......" 페기는 큰소리를 냈지만,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스티브는 자식들 중에서 제일 핸섬하다. 블론드 머리에 다갈색의 눈빛이 무척 부드럽다. 지금은 블론드 수염을 기르고 있다.
스티브는 틴에이저 때부터 여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이어서, 매일 누가 찾아오든지 전화로 불러내든지 하였다. 그렇지만 스티브는 그런 것에 도무지 마음을 두지 않았다.
페기의 말에 의하면, 스티브는 여자보다 컴퓨터에 더 열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드라가 열정적인 눈으로 스티브를 바라보고 있다.
"박사 과정에 있나요?‘ 산드라가 물었다. 스티브가 금방 그렇다고 대답했다.
"컴퓨터 과학자로군요."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집에서 내보낼 수 있는지, 도대체 대책이 서지 않아요." 페기가 말한다.
"마크형처럼 가족은 갖게 하면 될 텐데요." 더글러스가 참견을 한다. "그렇게 되면 부양의 책임을 져야 하니까 지금과는 달라지겠지요."
"조그만 게 까불고 있어." 스티브가 말하면서, 동생의 어깨에 가벼운 펀치를 먹였다. "마크형이 아내와 어린애에게 얽매여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나까지 좋아하라는 법은 없잖아?" 스티브는 냄비에서 요리를 흠뻑 떠낸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게다가 나는 어머니의 요리가 좋고, 아직 어머니보다 요리를 잘하는 여자를 본 적이 없거든."
"허허, 그거 참." 디브는 껄껄 웃고, 페기는 디브를 향해 눈을 흘긴다.
더글러스가 말타에게 물었다.
"당신은 스타지요?"
"글세...."
"우리 발레단에 있어서는 스타지요." 산드라가 말참견을 한다. "보스턴에서는 신문의 톱 기사에 실릴 정도였으니까요."
"산드라....."
스티브가 산드라를 향해 묻는다.
"당신도 발레를 하십니까?"
"저는 여러 발레리나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에요."
"아주 잘해요." 말타가 한마디 거든다. "뉴욕 발레단의 발레리나는 지방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와 맞먹어요."
"실라큐즈 발레단의 누군가에게 연락할 생각이니, 말타?" 페기가 가만히 묻는다. "감독님은 너를 만나면 많이 기뻐하실 텐데......"
"벌써 티켓도 많이 사 주셨고, 초대까지 받았는걸요. 참, 티켓을 가지고 왔어요." 말타는 핸드백에서 봉투를 꺼낸다. "아직도 발레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네가 추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보러 가지." 디브가 대답한다. "당신도 그렇지, 페기?"
"우리 모두 보러 갈 거야."
"러시아 태생의 무용서가 있다고요? 망명했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제레미가 말참견을 했다.
페기가 묻는다.
"그는 잘 하니?"
"캐시미르는 훌륭한 무용수예요." 말타의 표정이 갑자기 더 밝아졌다.
더글러스가 순진하게 묻는다.
"그 사람은 당신의 연인인가요?"
순간 식탁은 조용해졌다. 처음으로 브레인의 생각이 가족들의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페기는 디브와 마주보더니 곧 눈을 감았다. 말타는 당황하여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고맙게도 산드라가 도와주었다.
"캐시미르의 연인이라면, 제 양손가락과 양발가락을 다 사용해도 모자랄 정도로 많아요. 대부분의 발레리나들이 한번쯤은 그에게 매달리도록 만들고 있어요. 위대한 러시아인의 힘이겠지요."
"당신도 경험이 있나요?" 스티브가 흘끗 산드라를 쳐다보고는 묻는다.
산드라는 유혹하는 듯한 시선으로 스티브를 보았다.
"그에게 매력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저는 별로 흥미가 없지만요."
그 이후의 대화는 가벼운 화제뿐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가족들은 제각기 흩어졌다. 동생들은 학교로 가고, 스티브는 컴퓨터의 초보를 설명하기 위하여 산드라를 데리고 나가고, 디브는 정원의 채소밭으로 가버렸다.
말타와 페기만 식탁에 남겨졌다. 체기는 접시를 씻으면서, 날씨라든지 이웃 사람의 소문 같은 것을 이야기했다. 마음에 맺힌 화제를 꺼낸 것은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였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말타."
"뭐라고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저 자신도 저를 용서하지 못하겠어요."
"네 어머니의 말로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캔디만 먹고 있었다면서? 전혀 너답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했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브레인이 죽은 후 두 번 다시 발레는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다리가......"
"참 잘 왔다, 정말로."
"편지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쓸 수 없었어요. 책상에 앉을 때마다 눈앞에 브레인의 얼굴이 떠올라서......"
"브레인은 이제 이곳에 없어, 말타. 나 역시 처음에는 그 애가 죽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고, 사실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지만, 잘 참아내고 있어. 디브는 나보다 더 심해서 지금도 브레인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단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자식이 넷이나 남이 있다는 것에 감사드리기로 했어."
"어떻게 사과해야 좋을지......"
"네가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기뻐. 지금까지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지만......"
"말타, 나는 자식을 하나 잃은 것에 너까지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네가 이 집에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디브와 나는 너를 항상 친딸로 생각해 왔어. 그러니까 너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이 집의 문은 언제든지 너를 위해 열려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네, 정말 고마워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페기가 다정하게 말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 자......"
말타는 페기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어렸을 때도 항상 이렇게 위로해 주었다. 비밀을 자기 마음속에만 담아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말타는 훌쩍거리며 말한다.
"그 날 밤 저희들은 싸웠어요. 그래서 브레인은 커브 길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 사고로 자신을 나무랐었니?" 믿지 못하겠다는 어조였다. "그래서 이렇게 오랫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니?"
"그렇지만, 제가 잘못했기 때문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어. 트럭이 미끄러져서 충돌한 것이니까."
"그래도 저희들이 그렇게 싸우지만 않았다면, 브레인은 아마 트럭을 발견하고 옆으로 비켜났을 거예요."
"그것은 상상일 뿐이야. 더군다나 과거의 일로 자신을 나무란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브레인은 가버렸지만 우리들은 살아야 해."
"아아, 브레인이 돌아와 주길 몇 변이나 빌었지만......"
"우리들도 마찬가지였어." 페기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그 애는 병도 고통도 비참함도 무엇 하나 모른 채 죽었다고 생각해. 너와 결혼해서 참으로 행복해 했으니까."
브레인의 결혼 생활을 옛날 이야기처럼 생각하며 그것을 위안으로 여기고 있는 페기에게 감춰 두지 않으면 안 될 비밀도 있다는 것을 말타는 알아차렸다.
자식의 죽음에서 멀어지고 있는 페기에게, 브레인은 죽음 직전에 불같이 노해서 이혼한다고까지 위협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자기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 좋을 권리는 없었다.
"불이 없는 곳에 연기는 나지 않는다는 말, 누가 했는지 참 잘 말한 거야." 페기는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타는 코를 풀고서 되묻는다.
"무슨 연기죠?"
"러시아인 무용수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 말이야. 게다가 우리 집에도 연기가 날 것 같구나."
"누가요?"
"스티브 말이다. 내기를 걸어도 좋지만, 그 애는 네 친구에게 컴퓨터 강의를 하면서 윙크를 보내고 있어."
"도대체 언제부터 스티브가 여성의 매력에 끌리게 되었나요?"
"오늘 점심 식사 때부터지."
"설마......"
"두고보면 알 거야."
산드라와 같은 뉴욕의 세련된 여자가 스티브와 같은 시골 청년에게 반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산드라는 확실히 스티브의 칭찬이 자자했다. 핸섬하고, 매력적인 데다가 지적이고, 섹시하다며......
말타는 떨떠름하게 동의했지만, 그가 얼마나 많은 여자를 실연시켰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경고를 잊지 않았다. 스티브는 지금까지 컴퓨터와 연애중이야. 형제 중에서 제일 무사태평하고, 남편으로서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나는 남편을 원하는 게 아니야. 연인을 원할 뿐이지."
"연인으로도 적합하지 않아. 어릴 때부터 여자보다는 컴퓨터 쪽이 훨씬 더 섹시하다고 생각해 온 사람이니까."
"점점 투지가 용솟음치는걸."
"아직 스티브가 데이트를 신청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아무래도 좀......"
"벌써 데이트를 신청했는걸."
"정말?"
"사실은 내가 실라큐즈를 관광하고 싶다고는 했지만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어."
호텔로 돌아와 보니, 그레고리가 로비를 왔다갔다하며 말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라큐즈의 여러 신문사에서 발레단을, 특히 말타를 취재하기 위해 와 있다고 한다.
실라큐즈 출신이니까 화제가 된 것이라고 여겨, 그레고리는 기자 회견뿐 아니라 라디오 인터뷰와 텔레비전 프로에도 출연시키고 싶어했다.
기자들은 말타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호의적이어서 마음 편히 대할 수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실라큐즈 발레단에서 받은 훈련 덕택으로, 현재의 스타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니까.
캐시미르는 전부터 경험이 많고, 엉터리 영어로 인해 기자들의 웃음을 자아내곤 했다. 보지도 않은 도시를 칭찬하고, 먹지도 않은 레스토랑의 음식을 칭찬하고, 만나지도 않은 실라큐즈 여성들을 치켜올린다.
매스컴이 떠들어댄 덕택으로 공연 전에 입장권이 매진되어, 발레단은 매일 저녁 만원의 관객 앞에서 춤췄다. 파티도 몇 번인가 열렸는데, 특히 실라큐즈 발레단이 열어 준 파티가 즐거웠다. 그리운 얼굴, 그리운 이야기........
몇몇 친구는 발레를 그만두었거나 다른 발레단으로 옮겨갔지만, 여자 감독은 여전히 건재했다. 누구든지 필립 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존경을 담아서 마담이라고 덧붙인다.
"말타, 드디어 금의환향했군요. 무척 진보한 거예요."
"감독님 덕분이에요. 매일 바 앞에서 연습한 나날은 감사하고 있어요."
"아니에요. 나는 지금 말타가 알고 있는 것까지는 가르치지 못했어요. 그때 말타는 제멋대로의 발레리나였지만."
"제가요?"
"그 사고 후에 굳은 결심을 하고, 진정한 발레를 배웠나 보군요." 말타의 놀라는 표정을 보고 빙그레 웃는다. "말타는 명랑했고, 아무런 고통 없이 프리마 발레리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요. 그렇지만 진정한 발레를 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무엇이나 인생이 너무 안락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비평도 받고, 다른 발레단에서 유혹도 받았는데요."
"말타에게 재능이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마음가짐이 분명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남편과 이곳 발레단이라는 자그마하고 안전한 세계에서 정말 아무런 걱정 없이 춤만 추었어요. 그러다가 그 사고로 인해 거친 세상으로 내팽개쳐 저셔, 말타는 거기서 살아 남았어요. 그 덕택으로 더 훌륭한 발레리나가 된 거예요. 오늘 저녁 말타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지요."
확실히 마담의 말대로, 아무런 노력도 없이 실라큐즈 발레단의 스타 자리에 앉았는지도 모른다. 발레의 재능은 7세 때부터 나타났고, 16세 때는 실라큐즈 발레단의 최연소 멤버가 되었으며, 19세 때에는 솔로 무용수가 되었다.
작은 연못에서는 너무 큰 고기라고 생각했고, 미래에는 더 큰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젊음의 사치였고, 자만에 눈 멀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담은 절대로 제자를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다. 잘 생각해 보면, 칭찬한 것은 테크닉이나 서정성 같은 것이 아니고, 말타가 겨우 어른이 되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귀중하게 여겨지고 자기 고장의 발레리나에게 박수를 보내는 고장의 관객에게 응석 받는 말타가 아니라, 맨해튼 발레단에서 아무런 칭찬도 없이 괴로움도 참으며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여 스타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인정해 준 것이리라.
"고맙습니다, 마담.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말타의 파트너인 러시아 무용수는 아주 뛰어난가보지요?"
"캐시미르의 스텝은 무엇이든지 빛나고 있어요."
"그에게는 매력이 있더군요. 하지만 그런 것에 넘어가면 안돼요."
"네."
"말타에게는 보다 더 훌륭한 발레리나가 될 찬스가 있어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발레리나가 될지도 몰라요. 중요한 것은 잡념 없이 연습을 계속하는 것, 알겠지요?"
"네, 마담."
말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담의 세계, 즉 발레의 세계에서는 뒤돌아볼 틈이 없다. 하루 저녁의 실패라도, 스텝 하나의 미스라도, 사소한 힘의 감퇴라도 그 찰나에 비평가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된다. 관대함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다. 재능만이 모든 것이고,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7
실라큐즈에서의 마지막 밤은 <잠자는 숲 속의 미녀>공연이 있었다. 모리슨 일가는 이미 몇 번이나 와 주었는데, 말타는 마지막 공연에는 일가를 로열박스에 초대했다.
다시 한번 모리스 집안을 방문했을 때는 전보다도 더 웃음이 떠 있었다. 때로는 눈물도 있었지만. 말타는 뉴욕에 돌아가면 편지 쓸 것을 굳게 맹세했다. 페기가 웃으면서, 우리 집에는 발레리나를 좋아하는 피가 흐르는 것 같다고 말해 준 것도 이때였다.
스티브와 산드라가 공연 후에 몇 번인가 데이트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산드라를 볼 수 있는 것은 레슨 때뿐이어서, 잠시 체재 중에 심각한 사이로까지 되었는지는 몰랐었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막이 오르자, 왕자 역인 캐시미르의 키스로 공주 역의 말타는 잠이 깬다. 리허설때도, 첫 번 공연 때에도 캐시미르의 키스는 형식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장난스러운 키스로 바뀌었다. 말타로서는 웃음을 참으며 무대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말타는 그 장면에서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요즘은 한쪽 눈을 뜨고, 캐시미르가 어떤 장난을 하나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게되었다. 무엇보다도 코끝을 핥는다든지, 귀를 깨문다든지 하기 때문에.
그날 밤, 가까이 오는 캐시미르의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말타의 마음은 불안해졌다.
캐시미르는 무릎을 꿇고 빙긋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이 키스는 죽음에서 살려내는 키스요."
"캐시미르." 위협하듯이 말하고, 표정을 굳혀 실눈으로 노려본다.
관객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용수는 무대 위에서 잔소리를 한다.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말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저녁은 러시아식으로 합시다."
"그만하세요."
객석에서 보는 한, 그것은 로맨틱한 무대였다. 왕자가 잠자는 처녀의 손에서 장미를 가져다가 입술에 댄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당신은 러시아식이 싫소?"
"샐러드드레싱을 먹는 것 같은 말투는 하지 말아요."
캐시미르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면서 장미를 플로어에 놓고, 말타에게 얼굴을 갖다 댄다. 객석에서 숨을 죽이며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말타는 몸을 굳히고 방어할 뿐, 머뭇거리는 키스에서 농담을 지껄이는 것까지 도대체 어떻게 할지 알 수 없으니까.
캐시미르는 살짝 말타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대고, 혀끝으로 말타의 입술을 핥는다. 말타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벌리고, 혀끝과 혀끝이 마주 닿았다. 오로라 처녀라는 것을 잊을 것만 같다. 캐시미르의 목에 양팔을 둘러 꽉 끌어안고 싶다.
캐시미르는 겨우 얼굴을 들고 빙긋 웃는다. 심벌즈가 울리고 드럼이 울려 퍼진다.
말타는 일어나서 우아한 손을 캐시미르에게 맡기고 온몸으로 아름다운 원을 그리면서, 캐시미르에게 기대어 강렬하게 말한다.
"오늘 저녁, 이 손으로 당신을 목 졸라 죽이겠어요."
"그런 말을 하다니, 참으로 고약한 사람이군요."
캐시미르는 미소를 지으며 말타를 포옹한다. 왼쪽 다리를 플로어에 내려놓으면서 되돌아선다. 그런데 왼쪽 다리에 체중이 실리는 순간, 마치 맹수의 발톱으로 할퀴어지는 듯한 통증이 넓적다리에서 무릎으로 뻗친다.
말타는 숨도 쉴 수 없게 되고, 몸이 굳어짐을 느꼈다. 통증이 길어지면 어떻게 하나? 지금 다리의 힘을 빼면 그대로 무대에 주저앉게 될지도 모른다.
"말타, 왜 그러지요?"
스포트라이트가 어두워진다. 어두워지는 사이에 두 사람은 퇴장해야만 한다.
"도와주세요.......부탁이에요. 혼자 두고 가지 말아요."
허리에 감은 캐시미르의 팔에 지탱하면서, 말타는 절룩거리면서 퇴장했다. 무대 위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무대 장치가들에 의해 세트가 고쳐지고 있었다. 거미줄투성이인 처녀의 방이 조명이 점차 밝아짐에 따라 궁정의 큰 홀로 바뀌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처녀가 방의 추 때문에 손가락에 상처 입기 직전의 세계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다친 거요? 손끝을 너무 아프게 했소?" 캐시미르가 다급하게 묻는다.
"아니에요." 통증 때문에 제대로 숨도 못 쉰다. "손끝이 아니에요"
"그럼 어디요? 아킬레스건? 무릎의 인대?"
발레리나가 다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인체의 통상의 움직임에 역행하는 춤의 부담은 크다. 아무 데도 다친 일이 없는 발레리나들은 거의 없다.
"네, 그쪽인지도 모르겠어요."
겨우 통증이 가라앉자, 말타는 캐시미르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며 심호흡을 했다. 그레고리가 걱정한 나머지 얼굴이 퍼래져서 달려온다.
"말타, 괜찮아요?"
그레고리의 표정을 보니까, 얼마나 아슬아슬한 장면을 모면했는지 알 수 있었다. 드라마틱한 피날레인데, 여기서 배역을 바꾼다면.................
헤로인은 검은 머리에 장신이었지만, 사정으로 인해 붉은 머리에 몸집이 작은 발레리나로 변경합니다라고 말하게 된다면, 발레의 인상은 곧바로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레고리는 통증이 가라앉은 말타를 보고, 여느 때와 같은 쾌활함을 되찾았다.
"당신들은 정말 대단해요! 관객들은 무대를 집어삼킬 듯이 응시하고 있어요." 그레고리는 그 말만 하고는 다시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캐시미르는 그렇게 간단하게 끝내지는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고는 푸른 눈으로 의아스럽게 응시한다.
"지금은 괜찮은 거요?"
"많이 좋아졌어요."
"통증이 사라졌다는 말이오?"
"네."
"통증이 그렇게 갑자기 와서 갑자기 사라진다는 건 믿을 수 없어요. 아까는 일어서지도 못했는데, 다시 춤출 수 있다니..........."
말타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 무대 위를 바라본다. 프롤라인 처녀의 푸른 수염의 파 드 되(pas de deux)가 시작되었다.
"혹시 단순한 신경통이었는지도 몰라요."
"다쳤으면 춤추지 않는 것이 좋소."
"염려 마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정말이오?"
"캐시미르, 약속하겠어요."
그러나 약속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레고리와 의상 담당자가 당황해서 달려왔기 때문이다. 캐시미르를 노려보더니 말타의 팔을 잡아끌고 간다.
"머리가 어떻게 됐어요? 피날레의 의상을 갈아입지도 않고, 자!"
통증이 다시 올지 어떨지, 걱정할 틈도 없었다. 금은을 아로새긴 새하얀 색의 의상으로 갈아입고, 황금의 꽃관을 핀으로 고정시켰다. 동시에 메이크업도 어시스턴트도 밝게 고쳐졌다.
캐시미르도 신랑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듯 했다.
무대로 나가기를 기다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괜찮겠소?"
"물론이에요."
말타는 자못 자신 있다는 투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캐시미르의 턱의 근육이 씰룩거렸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러나 트럼펫이 울리고, 결혼하는 두 사람의 최후의 파 드 되를 고한다. 모든 몸짓에 사랑을 담아서, 두 사람은 춤추기 시작했다.
캐시미르는 말타를 높게 들어 올리고 빙 돌려서, 새색시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자랑스럽게 관중에게 보였다. 말타는 캐시미르의 팔 안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되돌아와서 춤이 저절로 추어진다.
이미 말타는 사라지고, 사랑스런 여왕이 있을 뿐이다. 음악이 흐르고, 말타는 선회의 속도를 한층 빠르게 한다. 그리고 도약. 캐시미르가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관객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린다. 말타의 몸은 캐시미르의 구부린 다리와 말타가 캐시미르의 등에 걸친 발로써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은 관객을 향하여 미소를 짓는다. 터질 듯한 박수 소리가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를 덮어 주었다.
"이젠 알았죠?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한 줄, 또 한 줄, 마치 물결과도 같이 관객이 일어서서 박수를 보낸다. 캐시미르는 한층더 부드럽게 웃었다.
"아무래도 난 믿을 수 없소. 절대로.............."
공연이 끝나고 나서 캐시미르는 그대로 말타의 분장실까지 따라와서 거칠게 다루었다. 옆방까지는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그 통증은 예사로운 곳이 아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생긴다고 캐시미르는 말했다. 말타는 다만 한번뿐인 단순한 통증이었다고 슬쩍 얼버무렸다.
캐시미르는 하트위드 공연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서 말타가 스텝을 미스한 것을 추궁했다. 그 밖의 순회공연 중에 아주 조그만 스텝의 미스까지 일일이 추궁했다.
그렇게 주의 깊게 캐시미르가 나를 지켜보다니! 두려워서 입이 바싹 마르는 것을 알았다.
그레고리가 캐시미르를 발레단의 경영에 참여시킬 작정인 것은 잘 알고 있다. 만약 캐시미르가 나와 춤출 수 없다고 한다면, 그레고리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일생동안 불구자가 되고 싶소?"
"바보 같은 이야긴 하지 말아요. 한번 통증이 있었다고 해서 불구자가 된다는 얘기가 어디 있어요?"
"상처를 무시했다가 영원히 춤을 못 추게 된 사람들은 많이 보았소."
"저는 그런 사람들과 달라요."
몸이 땀 투성이어서 기분이 나쁘다. 한편으로는 손끝이 찰과상을 입은 것 같기도 하고, 토슈즈도 빨리 벗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마주서서 서로 노려보고 싶지는 않다. 자기의 춤출 권리를 위해 캐시미르를 속이고 싶지도 않다.
지금가지 몇 번이나 캐시미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었다. 비밀을 털어놓으면 춤출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는데, 캐시미르의 심각한 표정을 보자 역시 자신이 현명했다는 생각이 든다. 말타는 더욱더 마음을 굳혔다.
"당신이 정말 위험했었다는 거 알고 있소?"
"위험 같은 건 없어요."
"왜 그렇게 고집이 세지요?"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적어도 의사에게만은 보입시다."
"알았어요. 병원에 갈께요."
캐시미르가 빨리 분장실에서 나가 주었으면 헤서 적당히 약속했다.
"언제 가겠소?"
"글쎄요." 말타는 얼버무렸다. "당신은 제 어머니보다도 더 나빠요."
"당신 어머니도 알고 있소?" 캐시미르의 반응은 민첩했다.
말타는 홱 등을 돌려 화장대 쪽으로 걸어갔다. 스툴에 앉아서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본다. 메이크업 위로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묻고 있소, 당신 어머니도 알고 있느냐고."
캐시미르는 말타에게 다가서더니, 한 손으로 말타의 드러난 어깨를 잡고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캐시미르의 눈에는 노여움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머니에게 진절머리가 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에게도 진절머리가 났다는 얘기로군요."
"전 아무에게도 이것저것 간섭받고 싶지 않아요. 제 일쯤은 저 자신이 잘 돌보고 있으니까요."
"친구에게는 쉽게 진절머리를 내는 것이 아니오."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에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필요할 때는 당신에게 위안을 줄 때뿐이란 말이지요? 어깨에 기대어 울든지, 안겨 있든지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단 말이로군요."
말타는 화장대 위의 파우더 병을 응시한다. 어깨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다. 이렇게 지쳐 있고, 겁내고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노크 소리가 나자 캐시미르는 손을 놓았다. 의상 담당 여자가 들어와서 흘끗 캐시미르를 바라본다. 발레단의 소문으로는, 그녀는 의상에만 관심이 있고, 인간관계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뉴욕에 돌아갈 짐을 꾸려야지요. 도와 드릴까요?"
"네." 캐시미르의 시선을 피한 채 대답한다. "부탁해요."
"이따가 봅시다."
캐시미르는 분장실을 나가며 쾅 하고 도어를 닫았다. 어째서 캐시미르와 싸움을 시작했을까? 나는 팩팩하는 성질도 아니고, 더군다나 친구에게 그런 적은 없었는데.
"집에 돌아가게 돼서 기쁘군요. 당신도 그래요?"
"네.........저........그래요."
의상 담당 여자가 없었다면 절망한 나머지 주먹으로 화장대를 두들기고 있을 판이었다. 지금부터는 조그만 미스도 의심하게 되겠지.
캐시미르는 친구이자 동료이고 신뢰할 수 있는 상대였는데, 아까의 태도로 보아선 어머니나 닥터 브로크와 마찬가지로 그도 춤을 못 추게 할 것이다.
앞으로도 캐시미르가 어떠한 수단을 취할 것인지 도무지 짐작이 안 간다. 스타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발레단에서 아주 쫓아낼지도 모른다. 계약을 계속하지 않으면 그만이겠지. 설마, 지금 곧 그만두게 하지는 않을거야.
고독한 절망만이 있었다. 아무리 버텨도 춤출 수 없는 날이 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끝까지 싸우려는 것일까? 닥터 브로크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알 수 있다. 브로크는 내가 자기 연민에 빠져, 먹고 자기만 하여 추악하게 살찐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까.
어떻게 또 그 적막함을 보낼까? 어머니의 아파트에서 물끄러미 벽을 응시하고 있었던 때가 마음에 떠오른다. 그때는 브레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라고 생각했지만, 제일 괴로웠던 것은 역시 발레를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 증거로 발레에 의해 다시 일어서지 않았던가.
의상 담당 여성은 비로소 말타의 침묵을 눈치챘다. 조금 분위기가 어색하다고 느꼈는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내일 또........."
"네." 간신히 대답하고 다시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응시했다. 마치 쫓기는 여자 같다. 살갗은 거칠며, 눈에는 검은 기미가 생기고........ 실제로 나를 쫓는 자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노여움으로 가득 차서 금방이라도 말타에게 덤벼들 태세로.
호텔 로비에서 말타는 산드라를 만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호텔 앞에서 정열적으로 키스하고 있는 산드라와 스티브를 보았다. 그냥 지나쳤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산드라에게 붙잡혔다.
"스티브와 계속 데이트중이야."
"그런 것 같구나."
"난 그에게 빠졌어."
"내가 경고하지 않았다고 나중에 뭐라고는 하지 마. 많은 여자들이 그를 사랑했어."
"그도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
"그는 이곳 사람이고, 너는 뉴욕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물론." 꿈꾸는 듯한 말투는 여전했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들의 정사에 강렬한 자극을 주는걸."
"정사라고?"
말타는 날카롭게 산드라를 보았으나, 산드라는 부끄러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불과 2주일 만에..........."
"한눈에 반한다는 얘기 들어 보지 못했어, 말타?"
"설마, 난 아무래도 믿지 못하겠어."
"사실은 나도 뭐가 뭔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
"멀리 떨어진 로맨스가 가능할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나 스티브에게 일종의 가설을 세웠어. 대부분의 여자가 그에게 너무 쉽게 넘어간 건 사실이야. 그럼 나로서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실라큐즈를 떠나고 나서 스티브가 나를 그리워할지 어떨지를 시험해보고 싶어."
"스티브라면 컴퓨터에서 위안을 구할 뿐인걸."
"나에게는 그의 컴퓨터도 당해낼 수 없는 매력이 있어."
"산드라, 네가 상처입는 것 보고 싶지 않아. 너를 스티브에게 소개한 것은 나이고, 모리슨 집에 데리고 가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죄책감으로 견딜 수 없구나."
"괜찮아, 말타." 산드라는 말타를 껴안으며 말했다. "너는 분명히 경고했었고, 나는 신중하게 게임을 진행하고 있어. 그는 무서운 사람이야. 침대에서는 최고............ 저런, 말타. 얼굴이 빨개졌어! 우리들 정말 잘돼 가고 있어. 분명히 2주간으로는 부족하지만, 우리들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할 거야. 스티브는 주말을 이용해서 뉴욕까지 오겠다고 했어."
엘리베이터는 말타의 방이 있는 층에서 멈추었다.
"행운을 빌어."
"그는 발레리나에게 약해." 산드라는 손을 흔들고 윙크하면서 문이 닫히기 전에 덧붙였다. "꼭 모리슨 집안의 가족이 되겠어."
한눈에 반했다고! 말타는 캘리도 그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해냈다. 어떤 기분인지 상상하려고 해도 경험이 없어서 도저히 모르겠다.
나는 언제나 조심성이 있어서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었어. 마치 비싼 보석을 망가뜨린다든지, 도둑을 맞지 않기 위해 자기의 일부분을 손 밑에 남겨 둔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브레인에게도 확실히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기의 참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모자라는 부분은 짐짓 명랑하게 하여 보충하였을 뿐.
브레인을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그렇게 자신을 속여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브레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사고 후 춤출 수 없게 된 비참함 때문에, 자기가 정말로 브레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강한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정한 사랑이었는지 어땠는지........
이번의 모리슨 집을 산드라와 함께 방문하고, 다시 한번 혼자 방문하고 나서야 브레인과의 결혼이 나에게 있어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한 사람의 남자와 결혼 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몽땅 결혼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과거의 얽힌 생각을 푸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20세 때 생각하고 결심한 일이, 26세인 지금에 와서는 진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랑 때문에 결혼했다고 생각은 했지만, 결혼은 그의 양친과 형제들을 손에 넣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어머니가 자기에게 애정이 없다고 해서 어머니 곁을 떠나 버렸지만, 그것도 실제로 확인한 후의 일은 아니었다. 혹시 이것도 20세 때의 일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자기 가족은 서로 제각기가 아니었던가. 아버지는 언제나 먼 사람이었고, 죽었을 때에도 마음에 희미한 인상밖에는 남기지 않은 정도였으니까.
어머니와의 관계도 다른 각도에서 본 적이 없다. 가족들은 서로 붙들어 주는 힘이 있는 법인데, 콜 집안에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같은 집에 살면서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뿐, 애정이라든지 희생이라든지는 없었다.
어렸을 때의 말타는 애정을 다른 곳에서 구했다. 사춘기가 되었을 때는 그 사랑의 굶주림을 브레인에게서 메우게 되었다. 어른이 되고서는 주저하지 않고 자기 길을 찾았다.
왜 콜 집안은 이럴까 하고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를 찾는 것조차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든다. 양친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자기의 마음속이 한층 분명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자신은 쉽게 남을 믿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자기에게 울타리를 쳐 놓고 감정을 숨겨버리는 경향이 있다. 춤추고 있을 때만 그 울타리가 없어진다. 무대에서 많은 관객들의 눈이 지켜볼 때만 말타는 마음의 문을 열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노여움을, 절망을, 고뇌를 표현 할 수 있는 능력은 춤밖에 없었으므로, 말타는 스타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 것이고, 마담이 칭찬해 준 것도 이 감정을 표현하는 서정성이었다.
대부분의 발레리나들은 낯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보고 있는 무대 위에서 혼을 드러내고까지는 춤추지 않는다.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친구들이나 부모나 연인 앞에서 뿐이다.
그렇지만 자기는 다르다. 왜 그럴까? 무용수니까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산드라도 켈리도 현실로 정열적인 연애를 하는 사람이고, 캐시미르도 누구에게 대해서도 감정을 감출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
캐시미르는 말려드는 일을 피하지도 않고, 타인의 노여움쯤은 견딜 수 있는 강함을 지니고 있다. 그 캐시미르가 지금 호텔 방에서 기다리고 있다.
문을 여는 것이 두렵다.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그보다 간단한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되면 맨해튼 발레단에서는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발레계는 좁다. 소문은 발레단에서 발레단으로 퍼져 어떤 감독도 자신을 채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고독한 세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이것만은 견딜 수 없다.
무의식중에 심호흡을 한 말타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캐시미르는 있었는데, 여느 때처럼 파자마 바람으로 침대에 누워 있지는 않았다. 진즈에 샤쓰, 갈색 가죽 쟈케트 차림으로 창 앞에 서서, 4층 밑의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타가 들어와도 돌아보지 않는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른다. 캐시미르는 자못 남성답고 멋있었다.
"다른 방을 얻었소."
"왜지요?"
"나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졌소."
"달리 좋은 일이 있나 보지요?"
그때서야 비로소 캐시미르는 돌아섰다. 노여움이 얼굴 가득 번지고 있었다.
"좋은 일 따윈 없소. 그러나 당신에게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소."
"전 그런 말할 생각은 없었어요. 당신은 제 어머니와 달라요..... 그리고 꼭 병원에 가겠어요."
"그 사고 때문일 거요."
말타는 당황해서 머리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계속 통증을 숨겨왔소. 쓰러질 때까지 발레를 계속할 생각이었겠지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나는 알고 있어요."
삼키고 있던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병원에 가겠다고 했잖아요?"
"그야 물론 그래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두 번 다시 춤출 수 없을 테니까요. 내가 그렇게 만들겠소."
캐시미르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노여움과 반감과 공포로 말타는 말을 잊었다. 지금 피스톨을 갖고 있다면 캐시미르를 쏠 것이다. 단검을 갖고 있다면 캐시미르의 심장을 찔러 버릴 것이다.
전에는 그렇게 부드럽고 관대하던 그의 얼굴이, 지금은 말타에게 굳게 닫혀져 있다. 파란 눈은 엄하고 입은 일직선으로 다물어져 있다.
캐시미르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로 변해 있었다. 말타에게는 캐시미르를 달래 볼 방법이 없었다.
캐시미르의 한마디로 나는 발레를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캐시미르는 무엇 하나 잃는 것이 없다. 비평가와 신문 기자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받고, 발레단의 슈퍼스타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내가 무대를 떠난다고 해서 어느 누군들 애석하게 생각할 것인가. 재빠르게 나의 자리는 채워지고, 흥분은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발레 잡지에 두 줄의 은퇴기사가 실리고, 그 후에는 나 대신 캐시미르의 파트너가 될 발레리나에게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노한 나머지 무서움을 잊고, 말타는 캐시미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곧 확신으로 변했다. 말타는 미친 듯이 말하였다.
"신시아로군요, 그렇지요? 처음부터 전부 연극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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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소리요?"
"신시아에게 질투를 느끼게 하려고 저와 가까이 지낸 거지요?"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오?"
"신시아와 다시 만나는 것을 부정할 생각인가요?"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소. 나 자신도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요"
"그것 보세요." 말타는 의기양양하게 말하고, 손을 빙 돌려서 방안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저 수단에 불과 했군요. 신시아와 다른 여자한테 갈 때까지의 구실...."
캐시미르에게 이용당하고 조롱당하였다고 생각하니, 노여움으로 눈앞이 캄캄해진다. 부드럽게 대해주고 껴안아 주면서도, 캐시미르에게 있어서 나는 아무 존재도 아니었더란 말인가! 그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된 찰나에 나가는 것이다. 나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당신에게는 아무 변함도 없다고 생각해요." 냉정한 목소리였다. "우리들은 연인사이가 아니었으니까요"
말타는 눈을 깜빡이면서 캐시미르를 응시한다. 그런 결정적인 사실을 깜빡 잊고 있다니. 순회공연 중에 정말 가까워졌고, 함께 자고,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지냈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고 있는 커플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조금 전에 신시아에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순간, 질투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무의식중에 캐시미르와 자기는 굳게 결합되어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 같다. 이럭저럭 자기가 계획한 거짓의 거미줄에 자기 자신이 말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요" 천천히 대답했다. "연인이 아니에요"
"이런 형태가 당신의 생각이었으니까요."
"네"
"그렇다면 설령 신시아에게 돌아간다 해도 당신이 마음 쓸 하등의 이유는 없지 않소‘?"
"없어요" 입술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혹시 당신이 다른 형태를 원하고 있었다면 몰라도...."
떨리는 것은 팔에서 다리로 전해지고, 마음의 구석구석 까지 전달되고 있다.
"저....."
캐시미르는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불빛에 등을 돌리고 있어서 표정은 전혀 읽을 수가 없다.
"당신은 내가 필요한 거요? 아니면 질투하고 있는 거요?"
"그만 가주세요"
"우리들 두 사람 다 솔직하지 못했소. 그렇게 생각하오, 말타."
캐시미르가 가까이 다가오려 하자, 말타는 뒷걸음질 쳤으나 문에 부딪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아니에요, 저...."
"나는 당신과 사랑하고 싶었소.... 아니, 좀더 솔직히 말하지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소. 말타, 당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소?"
말타는 옆으로 머리를 흔든다. 입이 바짝 마른다.
"며칠밤 당신을 껴안으면서 나는 당신을 요구하고 있었어요. 손을 내밀지 않은 것은, 당신은 너무 여리고 너무 겁내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렇지만 오늘 저녁, 당신은 내가 알지 못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였소. 이 새로운 말타는 나로선 너무 생소했소.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상처낼지도 아는 사람이었소. 그래서 나는 그 여린 모습의 말타는 가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거요."
말타는 두 손으로 문을 밀고 있었다. 캐시미르는 더욱 가까이 온다 . 가슴이 도저히 진정할 수 없을 만큼 떨렸다.
"분장실에서 말한 것은 본심이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나와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한 것도 본심은 아니었겠군요?"
"그건 본심이에요"
"믿을 수 없군요"
캐시미르는 한 손을 말타의 머리 밑에 살짝 밀어 넣고는 목덜미를 돌려서 천천히 잡아당긴다. 다른 한 손은 턱에 대더니 얼굴을 위로 향하게 하고 말타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개었다. 부드러움도 조롱도 아닌 키스였다.
억지로 말타의 입술을 열게 했다. 뜨거운 캐시미르의 키스에 말타는 힘이 빠져 저항도 하지 못한다.
아파트 앞에서 처음으로 키스하고 나서 늘 이것을 원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밤마다 자기의 욕망을 눌러오던 끝에 이제는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키스는 좀더 강렬해졌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캐시미르는 천천히 말타를 끌어안고 관자놀이에, 볼에, 감은 눈꺼풀 위에 애무의 손가락을 미끄러뜨린다.
마치 말타보다 먼저 욕망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한쪽 팔을 허리에 감고 조금 안아 올려 몸과 몸을 꼭 밀착시킨다. 옷이 두터웠지만, 캐시미르의 뜨거운 욕망이 전해져 온다.
함께 자고 있을 동안에는 캐시미르가 자기를 요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성적인 의미로는 어떤 형태로도 나와 접촉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무서운 자제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음순간 캐시미르는 말타를 번쩍 안아 올려 침대로 가더니 그곳에 내려놓았다.
"말타, 나를 봐요" 말타는 눈을 떠서 자기 옆에 누워 있는 캐시미르를 보았다.
"당신은 늘 나를 요구해 왔었소, 그렇지 않소?"
"그래요"
"언제부터요?"
"캘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서, 당신이 저를 데려다 주면서 키스한 그 날 밤부터...."
"아아..."
말타도 용기를 내어 묻는다.
"당신은요?"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가슴에 살짝 애무를 받은 말타는 떨고 있었다. "당신이 발레단에 들어왔을 때, 당신에게는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했소. 눈에는 깊은 슬픔이, 그리고 야생동물과 같은 순수함이 있었소. 그것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소. 당신의 남편이 죽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당신은 너무 여려 보였소. 나 자신은 슬픔에 빠져있었으니까, 위로해 줄 여자가 필요했소. 당신은 확실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요, 저 자신도 위안을 구하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요구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당신을 위한 것이오"
캐시미르는 불을 끈다. 캐시미르의 팔 안에서 말타는 지금껏 체험하지 못했던 관능을 체험했다. 브레인도 말타를 만족시켜주겠다는 생각으로 해 주었지만, 캐시미르와 같은 자신감과 확실성은 없었다.
캐시미르는 본능적으로 말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키스는 부드럽고 손끝은 다정하지만, 말타는 천천히 욕망을 높여가고 있었다. 온몸에 전율을 느끼면서 결국은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받아들일 준비는 벌써부터 되어 있었는데, 캐시미르는 더욱더 천천히 애무를 계속한다. 말타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아, 캐시미르....."
순간 조금 있다가 근사하고 충만된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정상에 도달한 것이다. 말타는 신음하면서 몸부림친다. 만족한 행복에 말타는 눈물을 흘린다. 황홀, 정열, 욕망.... 이 말들에는 말타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정도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결혼생활의 경험은 이것에 비하면 퇴색한 그림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캐시미르는 내가 한번도 몰랐던 것을 가르쳐 주고, 지금까지 몰랐던 관능을 끌어내 주었다.
눈물이 천천히 관자놀이를 거쳐서 머리에까지 흘러내린다. 달콤하고 끊을수 없는 해방감이 있었다. 과거의 슬픈 이별이, 현재의 기쁨, 미래의 희망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캐시미르는 머리를 들어 손가락으로 가만히 말타의 젖은 눈을 만져 본다.
"당신 울고 있군요"
말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가득 차고 감정이 고조되어 목구멍이 메고, 눈물이 앞을 가려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천 마디라도 더 말을 하고 싶은데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훌쩍거림뿐이었다.
느닷없이 황망해져 몸을 빼니, 캐시미르는 러시아어로 저주의 말을 토한다. 불의의 허전함을 느끼며 말타는 재빨리 손을 뻗는다. 그러나 캐시미르는 이미 침대에는 없었다.
"미안하오" 내뱉듯이 말했다. "당신에게 무리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소"
"캐시미르....."
"당신은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이런 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했는데.... 분명히 그렇게 말했는데......"
답답하던 목구멍이 겨우 뚫렸다.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저......"
"당신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소. 말 안해도 다 알아요.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를...."
말타는 간신히 윗몸을 일으킨다. 캐시미르는 어느 사이에 문 가까이까지 가 있다. 더 설명하고 싶은데, 더 말하고 싶은데.....문이 열리고, 불빛이 방안으로 들어온다.
"미안하게 됐소. 두 번 다시 당신을 울리지 않으리다." 그 말만 남긴 채 캐시미르는 훌쩍 나가 버리고 방문이 닫혔다. 방안은 다시 어둠 속에 잠겼다.
말타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무릎 사이에다 얼굴을 묻고는 양팔로 무릎을 깍지껴 안았다. 몸이 불타듯이 뜨겁고, 동시에 얼음처럼 차다는 생각도 들었다.
등줄기가 아주 민감해져서 머리끝이 곤두설 정도인데, 기운은 없고 마음도 텅 비어 있다.
가슴에 넘쳐흐르는 생각도 메말라서 지금은 어두운 허전함만 남아 있다.
갈가리 흐트러진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데도 캐시미르는 나갔다. 두 사람은 인간에게 허용될 수 있는 제일 친밀한 형태로 접촉했지만, 캐시미르는 떠난 것이다.
케시미르는 나를 관능의 정점까지 인도하면서.....
그렇다, 확실히 내가 요구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해 주었는데, 내 몸은 아직도 사랑의 흔적이 뜨거운 채 있는데 벌써 가버린 것이다.
캐시미르가 가 버린 것은 나의 눈물이 후회와 치욕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불행을 자기의 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말타는 한층 더 힘을 주어서 무릎을 끌어안는다. 절망의 큰 물결이 말타를 삼킨다. 옷을 입고 캐시미르의 방 번호를 물으러 가야 한다. 그래서 자기가 눈물을 흘린 것은 캐시미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였다고 설명해야 한다.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성의 기쁨을 일깨워 주어 고맙다고 인사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마 캐시미르와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것뿐인가! 큰 관능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결과까지 낳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진실을 캐시미르에게 고할 수는 없다. 산드라가 말하기를, 사랑이란 가만히 참고,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사로잡는 것이라 했다. 오늘저녁에야 비로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이란 자연과 같이 기본적으로, 이상과 같이 이 세상 것이 아닌 성질을 갖추고 있다. 형태는 없지만 마음속에 길러지면 감수성은 예민해지고, 생각하는 것도, 행동도, 감정도 변해 버리고 만다.
물이 흐르듯 자연히 나는 캐시미르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토록 마음을 닫고 있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에 빠지고 있다니, 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더 큰 압도적인 감정에의 제일보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캐시미르는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나에게 끌려서 욕망을 느끼고는 있지만, 진실한 사랑은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면 오늘 밤에도 얼마든지 기회는 있었다. 만일 그가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면 자신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했을 것이다. 아주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고.
그렇지만 캐시미르는 정직한 사람이고,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언제든지 마음속에 있는 것은 주저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그의 매력의 일부이기도 하니까. 캐시미르에게 있어서 자기가 어떤 존재라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이고, 동료이기도 하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신시아도 산드라도, 캐시미르는 오직 한 사람밖에 사랑할 수 없는 남자라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감정도 기억도, 죽은 아내에게 너무도 강하게 집착하고 있어서, 다른 여자에게 강한 애착을 느낄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결혼생활과는 다르다. 나는 그렇게 진하지도 열정적이지도 않았다. 브레인은 오빠와 같은 남편이었고, 여러 가지 이유에서 결혼하고 있었으면서도, 그 이유 속에 진정한 사랑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캐시미르와 보니의 경우는 다르다. 캐시미르가 사랑을 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 두 사람의 관계야말로 정말 사랑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알맞은 커플이었던 것이다.
나의 발레 일 때문에 언쟁을 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플라토닉한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캐시미르는 내가 분명히 춤을 추어도 괜찮은지 계속해서 확인하려고 할 것이다. 당연한 배려이긴 하지만 그래도 간섭받는 것은 싫다.
발레를 그만 둘지 어떨지는 나 자신이 결정할 문제이다. 그리고 발레를 대신할 수 잇는 것을 발견하지 않는 한, 발레를 그만둘 생각은 없다. 발레와 나 사이에 누구도 끼어들게 해서는 안된다. 특히 캐시미르는.
말타는 무릎에서 얼굴을 들어 올리고는 가만히 어둠속을 응시한다. 이젠 한기마저 느껴진다. 내일이면 발레단은 뉴욕으로 돌아가고, 생활은 여느 때의 형태로 되돌아간다. 그곳 발레단과 1개월의 공연이 있다.
캐시미르의 부재는 생각할 시간을, 마음의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는 시간을, 마음의 벽을 도로 쌓아 올리는 시간을 줄 것이다. 캐시미르가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조용히 살고 싶다. 그와의 그동안의 시간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내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캐시미르가 알 필요는 없다. 사랑은 마음속에 깊이 묻어 두고 빛과 사랑에서 멀어 버린 채, 시들어져 마르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아파트는 생각대로 비어 있었다. 어머니는 카리브해의 쿨즈에 갔다가 일주일 후에는 돌아온다는 메시지를 남겨 놓고 있다. 요리사에게도 휴가를 준 모양이다.
발소리가 빈 방을 메아리 친다. 아름다운 가구와 호화로운 카펫이 깔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 분위기는 썰렁하다. 색상의 조화도, 디자인의 짜임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인테리어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
말타는 처음으로 자신의 아파트를 따로 갖기로 생각한다. 브레인과 둘이서 살던 아파트가 생각난다. 지금까지는 결심이 서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자기 혼자만의 방이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 듯하다.
쌓여 있는 편지 뭉치에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캘리 무어로부터 온 것도 있었다. 뉴욕에 돌아오는 대로 점심식사를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호두까지 인형>>의 리허설이 시작될 때까지 발레단원들과는 멀리할 생각이었으나, 캘리만큼은 예외였다.
일요일이어서 특별한 스케줄은 없다. 짐을 풀고, 슈퍼에서 야채를 조금 사다 놓는 일 외엔, 말타는 전화 있는 대로 가서 캘리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말타에요, 지금 돌아왔어요"
"알고 있어요. 그레고리가 전화해 주어서"
"벌써요?"
"그동안의 일을 저에게 알려 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에요"
"무슨 얘기를요?"
"뭐, 여러 가지요. 당신이야기도요"
"그레고리는 대강밖에 몰라요"
"당신은 점심에 와 주겠지요?"
"저 ......짐을 풀까 하는데......"
"전 호기심 때문에 죽겠어요. 당신은 설마 제 죽음의 책임까지 지고 싶지는 않겠지요?"
"그런...."
"그럼 한시에 우리 집에서 만나요. 냉장고에 포도주를 넣어 두겠어요"
"당신에겐 당할 재간이 없군요"
"그럼, 제 말대로 하세요. 우리 그이도 당신을 만나보고 싶어해요. 제가 당신 칭찬을 많이 해서요. 그는 당신 때문에 제가 발레단에 쉽사리 다시 돌아갈 것 같지 않다고 까지 했어요."
발레단 동료의 말에 따르면, 캘리의 남편 알렉스는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이라고 한다. 아주 핸섬하고, 적당히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 강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 등....
말타도 알렉스와 이야기를 나눈 지 몇 분도 되지 않아서 그와 전부터 알고 있었던 착각에 빠져 버렸다.
그는 발레리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말타의 일도, 관심도, 기분까지도 정확하게 이해해 주었다.
식사를 하면서 캘리처럼 행복한 여자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훌륭한 커리어에 남편과 자식까지 있고, 더구나 각자의 일을 꼭 요술쟁이처럼 술술 풀어나가고 있으니까.
캘리와 알렉스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옆에서 보기만 해도 알수 있었다. 두 사람만의 미소를 나누고, 한 사람이 말하다 만 것을 다른 한 사람이 받아서 끝을 맺는다.
아이들이 떠들어대도 두 사람의 행복에 가득한 기분은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말타는 그런 그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실라큐즈에서는 대성공이었다면서요?"
"말타의 출신지니까요. 신문에서도 크게 떠들어대고 굉장했다면서요? 그레고리 말로는 당신이 VIP 대우였다고 하던데"
"그곳에서 춤추고 있었으니까요"
"겸손은 그만두세요. 게다가 캐시미르와 당신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면서요? 아이고, 애들아 장난은 그만둬!" 캘리는 남편에게 호소하듯 바라본다.
"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알렉스가 소리 높여 웃는다.
"내가 아이들을 동물원에 데리고 가 주면 좋겠다는 것이겠지. 그러면 말타와 순회공연의 일을 좀더 이야기 할 수 있을 테니까."
"동물원이요, 아빠?" 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알렉스는 절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맙소사! 그저 무심코 한 얘긴데, 할 수 없지. 장난꾸러기들을 데리고 동물원에 가서 동물들을 괴롭히는 수밖에"
두 아이는 잽싸게 디저트를 마저 먹고, 코트를 입은 후 모자를 쓰고는 부츠까지 신었다. 알렉스는 한 아이는 어깨에 태우고, 또 한 아이는 겨드랑이에 껴안고 문을 열었다.
"한 시간 뿐이오. 그러니까 빨리 모든 이야기를 끝내요"
"당신 정말 멋져요. 사랑해요"
"겉치레 인사로는 부족하오. 나중에 사례를 해야 해요"
"전 임신 6개월이에요. 부끄러운 줄 아세요"
"여태까지 한번도 그것에 신경 쓰지 않더니...자, 연대 출발!"
캘리는 말타에게 방긋 웃어 보이고, 닫힌 문에 기댄다. 알렉스와 아이들의 콧노래가 복도에서 차츰 멀어져 간다.
"자, 모처럼의 찬스를 놓치면 안돼요. 커피를 거실로 옮기죠. 발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마음껏 얘기해요, 우리."
순회공연 이야기, 여행 이야기, 호텔 이야기, 켈리는 몇 년 전의 순회공연까지 기억하고 있어서 화제는 그치지 않았다. <<장미의순수>>에서 캐시미르의 급히 만든 의상에서 펠트의 꽃잎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캘리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깔깔거리고 웃었다.
"아, 저도 그 장면 때 그곳에 있었으면 좋을걸 그랬군요!"
"정말 잊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 외에도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무슨 일?"
"신시아가 나가 버리고, 당신이 캐시미르의 방에 들어갔다던지...."
"어마!"
"그레고리의 눈은 피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남들이 아는 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우리들은 육체관계를 맞은 것이 아니라......"
"뭐라고요?"
"그와 함께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기 때문이었어요. 게다가 제가 캐시미르 곁에 있으면 신시아가 캐시미르를 멀리할 테니까요"
"과연"
"누구든지 우리들이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들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다만...."
이런 얘기는 말타의 귀에도 우습게 들려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함께 잤지만, 육체는 멀쩡하다고요?"
"뭐 그런 셈이지요"
"전 당신이 말하는 것 못 믿겠어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겠지요"
"당신은 캐시미르를 사랑하나요?"
"제가요? 아니에요."
"설마"
"우리는 친구일 뿐이에요." 급하게 말을 덧붙인다.
"정말로 친구였어요"
캘리가 믿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캘리의 눈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동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감정이 모두 자신의 얼굴 위에 씌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캘리는 현명하게도 두 사람의 애정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피하며 캐시미르의 일을 이야기 했다.
"보니가 죽고 나서 많이 변했어요"
"저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더군요"
"우리는 룸메이트였어요. 당신도 알고 있었나요?"
"당신과 보니 말인가요?"
"보니는 이혼하고 나서 혼자 살고 있었으니까, 저더러 함께 살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저는 뉴욕에 달리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지요. 아주 좋았지요."
"어떤 분이었나요?"
"독립심이 강하고 재치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렇지만 이것은 표면상의 그녀이고, 인생이나 남자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내면적으로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남자를 잡아두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처음의 캐시미르는 무시하고 있었어요. 저와 데이트하여 보니에게 질투심을 느끼게 하고, 다른 연인들의 일반적인 이야기를 해서 보니를 미치게 만들었어요."
"그랬군요"
"캐시미르도 차츰 보니에게 끌리고 있었어요. 보니는 캐시미르가 질투를 느끼게 하려고 알렉스와 데이트를 해서 저에게도 비참한 생각을 맛보게 했어요."
"마치 세익스피어의 희곡 같군요."
"그래요, 그때는 조금도 우습지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랬어요."
"그러면 당연한 연애 결혼이었군요"
"뭐라고 얘기할 수 없어요. 서로 열중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성격이 너무 비슷해서 사이가 계속 유지될 지 어떨지 의문이었어요. 항상 큰 싸움을 하고는, 보니는 결혼이 잘못되었다고 떠들어댔지요. 캐시미르도 우울하게 되어 과거를 그리워하고요."
"그렇지만, 보니가 죽었을 때, 캐시미르는 심한 충격을 받았잖아요."
"물론 쇼크였죠. 누구라도 그건 마찬가지일 거예요. 제 생각으로는, 캐시미르는 보니의 죽음에서 자신을 책망하는 것 같아요."
"자신을 책망하다니, 왜지요?"
"그 날 우리들은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어요. 요리는 대부분 캐시미르가 하고 있었지만, 보니가 잊고 사지 않은 것이 있었어요. 거기서 누가 길모퉁이의 가게로 사러 가느냐고 한바탕하고, 결국 보니가 갔다 오기로 했는데....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
"저런......"
"캐시미르는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 후 완전히 변했어요. 폭음하고, 무대에 세우려면 그레고리가 무척 애를 먹곤 했지요. 여자에 대해 흥미도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신시아 전에도 누군지가 있었던 것 같더군요. 신시아와도 오래 갈 것 같지 않았어요. 그녀는 너무 젊어서...."
"캐시미르가 결혼해 줄 걸로 생각했나봐요."
"가엾은 신시아..... 저 말이에요, 한가지 저하고 약속해 주세요."
"무슨 약속?"
"캐시미르를 아껴주세요. 그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델리키트한 사람이에요."
"캐시미르가.....델리키트하다고요?"
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전 걱정하고 있어요. 캐시미르는 심한 상처를 입었으니까요. 그는 한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주는 사람이에요. 그의 늠름한 근육과 러시아인다운 충동적인 매력밑에는 아주 여린 마음이 숨어 있어요. 아주 델리키트하고 아주 감동을 잘 느끼는 마음 말예요."
9
눈이 퍼뜩 떠진다. 맥박은 빠르며, 숨은 괴롭고, 온 몸은 흠뻑 땀에 젖어 있다. 한 동안 눈을 깜박여도 캐시미르의 환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요즘은 매일 밤 꿈에 시달린다. 언제나 애닯고도 괴로운 꿈이다.
자기의 감정을 애써 부정하지만, 무방비 상태인 꿈속에서 복수당하고 있는 것에 틀림없다. 캐시미르를 만나고 싶다. 그의 품에 안겨 사랑을 받고 싶다.
그렇지만 캐시미르는 샌프란시스코에 있고, 다른 발레리나와 춤추고 있다. 젊고 보드라운 육체의 발레리나는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의 선전 포스터에서 보아 잘 알고 있다.
아주 매력적인 여자인데, 캘리의 말에 의하면 지독하게 여린 캐시미르의 마음을 흔든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고 한다. 뒤얽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자꾸 눈에 떠오른다. 말타는 가슴에 비수를 꽂는 듯한 아픔을 맛본다.
비참한 기분은 발레리나로서의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과 겹쳐, 한층 더 깊어만 갔다. 등골 하부의 묵직한 통증은 여전하고, 넓적다리의 통증도 때때로 나타나게 되었다.
말타는 자기가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앞두고 계속 몸부림치며 싸워 왔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침실에 설치한 바를 잡고, 땀을 흘린다. 몸을 구부리고, 펴고, 빙 돌아 선회하면서 통증이 사라져 줄 것을 빌었다.
그렇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타는 패배를 인정하고, 닥터 브로크에게 전화를 걸어서 예약해 두었다. 발레를 단념해야 된다는 진단에는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그의 거친 말투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등골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지만, 요점은 명백했다. 닥터 브로크는, 말타가 자신의 몸을 망그러뜨리려 하고 있고, 발레를 계속하면 침대에만 누워 있어야 할 날도 멀지 않다고 말했다.
"자식을 가질 생각은 안했습니까?"
"언젠가 자식을 필요로 할 날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곤 있었어요."
"그렇지만 이대로 계속되면, 단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닥터는 솔직하게 말했다. "출산을 견딜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지 못할 테니까요." 동정은 했지만, 닥터의 말은 단호했다.
병원을 나온 말타는 쇼크로 비틀거리면서 거리를 방황했다. 찬바람이 볼을 때리고 비참한 나머지 눈물마저 흐른다.
자기 몸을 계속 신뢰하고 있었던 말타에게 있어서, 육체가 자기를 배반한다는 생각은 정말 비참했다. 최악의 경우에 침대 신세만 져야 하다니, 그런 생활은 도저히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닥터 브로크는, 만일 발레를 그만두지 않으면, 이것이 말타의 최후라고 완강하게 말한다. 그레고리에게 사표를 낼 것을 생각한 것만으로, 말타는 애달픈 나머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나가는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뒤돌아볼 정도였다.
그렇지만 발레가 없는 생활은 이보다 더 참혹할지도 모른다. 발레를 그만두어도 뭔가 떳떳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사무실에 근무하고 있는 자기도, 학생으로 되돌아간 자기의 모습도 떠올릴 수가 없다. 아버지가 물려 준 유산이 있으므로 애써 일 할 필요는 없다.
살갗을 찌르는 찬바람에 얼굴을 숙인 채 말타가 보고 있는 것은 발 밑의 젖은 길이 아니라, 허무하고 끝없이 계속되는 시간이었다.
아이를 갖는다? 브레인과 결혼하고 있을 때는 어린애를 원하지도 않았고, 브레인이 죽은 후로는 더욱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다.
그렇지만 요사이는 조그마한 동경이 싹트고 있다. 가족에게 둘러싸여서 행복해 보이는 캘리 탓인지도 모르고, 사랑을 알게 된 탓인지도 모른다.
캐시미르와 결혼해서 블론드의 푸른 눈을 한 어린애를 안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캐시미르와 결혼할 수는 없다고 해도, 어린애의 이미지를 지워 버릴 수는 없었다.
자식도 없이 늙고 싶지는 않다! 키가 큰아들과 머리를 땋은 딸의 귀여운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자식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은 말도, 자식들을 데리고 가고 싶은 장소도 떠오른다.
말타에게는 시몬느보다는 훨씬 좋은 어머니가 될 자신이 있었다. 캐시미르가 아니더라도 남자는 또 있다. 사랑을 느끼고, 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줄 남자.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으므로 말타는 아파트 앞에 서 있는 산드라를 보지 못했다. 그냥 지나치다가 자신의 팔을 잡는 사람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 얼굴을 들어 쳐다본다.
"놀랐어?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전화라고 하고 오지 그랬어." 말타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산드라는 기분 좋게 말했다.
"수위 아저씨는 네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
"안에 들어가서 커피라도 마시기로 해."
"응, 그래. 너에게 해 줄 말이 있어. 언제 해 줄까 애태우고 있었거든."
산드라의 코트를 받아 걸고 있는 사이, 산드라는 이 방 저 방 기웃거리고 다녔다. 스티브와 재회할 날을 기다리는 사람치고는 그래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주홍색 드레스네 가늘고 검은 벨트를 맨 차림이, 볕에 탄 피부를 돋보이게 한다. 눈은 크게 보이지만, 높은 코는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다. 긴 머리는 어깨까지 닿게 커트 하여 부드럽게 퍼머넌트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말타는 지금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다. 의사에게 가는 것이라 진즈에 낡은 블라우스를 입고 머리를 아무렇게나 뒤로 잡아 맨 모습. 최근 2주일 동안 화장도 하지 않고 있어서 얼굴은 굳어지고, 지금이라도 금이 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굉장한 곳이로구나." 산드라가 음악실에서 나오더니 말했다. "박물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야."
"나도 때때로 그렇게 생각하곤 해."
"말타 어머니는 굉장한 부자인가 봐."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산드라는 어깨를 옴츠리며 빙긋 웃었다.
두 사람은 식당에서 커피를 마셨다. 너무 크지도 않고 그다지 화려하지도 않은, 수가 적은 방중의 하나이다. 말타가 지내기에 편한 유일한 방이었다. 그린 벽지에 같은 색 커튼까지 쳐져 있어서 아늑한 느낌을 준다.
"요즘 캐시미르와는 어때?"
"그저 그렇지, 뭐."
"그래……. 소문으로는 두 사람이 헤어졌다고 하던데."
"어머나, 상당하군."
"그럼, 사실이야? 내가 말한 대로지? 뭐라고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옳았다면, 네 생각이 옳았어라든지 하여 나를 비행기 태워 주지 않을래?"
"네 생각이 옳았어." 말타는 장난기가 섞여 있는 말투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산드라는 계속 말타의 표정을 살피고 있다.
"사적인 것 질문해도 돼?"
"아니."
"아아, 네가 그런 남자에게 상처 입는 것보고 싶지 않았는데, 캐시미르는 여자에 대해서 이 모양이야. 단, 보니를 제외하고. 보니는 도대체 캐시미르를 어떻게 옭아맸는지 몰라."
"산드라, 캐시미르가 감수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둔감하고, 동정심이 없고, 잔혹하고, 여자들의 적이야. 그렇지만 너는 처음부터 주의를 받았으니까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자기를 지켰어야 했어. 잘 됐어. 네가 신시아처럼 끝까지 매달리지 않아서……. 말타, 설마?"
말타는 눈물이 흐르는 것은 억제할 수가 없었다. 뉴욕에 돌아와서 캐시미르 때문에 운 일은 한 번도 없어서, 자기 성격이 강인함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닥터의 진단과 산드라의 방문이 여태껏 참아 왔던 울음보를 터뜨린 모양이다. 말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테이블 위에 엎드려 울었다.
"말타!" 산드라가 옆으로 와서 말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캐시미르 때문이군, 맙소사!"
"그래 …….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그렇게 되는 사람은 없어. 어쩌다가 그렇게 되어 버리는 거야. 아아, 그런 남자……." 산드라는 욕설을 퍼부어댄다. 그것이 너무도 우스워서, 말타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들었다.
"산드라, 어디서 그렇게 무서운 말들을 배웠지?"
"여기저기서." 산드라는 핸드백에서 티슈를 꺼낸다. "자, 코를 풀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아무 연락도 없어?"
"응"
"그래, 따로 누구를 만난다는 소문은 아직 없었어. 그것이 별로 위안될 일은 아니지만."
말타는 다시 티슈 한 장을 산드라에게 받아 눈물을 닦았다.
"그것보다도 네 이야기를 해 봐, 산드라. 아무래도 내 이야기보다는 낫겠지."
"내 쪽은 마음먹고 물에 뛰어들었다고나 할 수 있을까?"
"좋은 이야기, 나쁜 이야기?"
"글쎄……. 난 발레단을 그만둘 거야."
"응, 그리고 실라큐즈에 가서……."
"산드라, 농담이겠지?"
"농담이 아니야. 네가 있었던 발레단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그곳에서 솔로 무용수가 되기로 했어. 뉴욕에서보다야 낫겠지. 게다가 스티브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네게 더 유리하다고 했잖아?"
"스티브는 매일 저녁 전화를 걸어 와. 내가 가까이에 없어서 쓸쓸한 모양이야."
"네가 지방 발레단에 가는 걸 반대하지는 않겠어." 말타는 천천히 생각해 가며 말했다. "일생 동안 작은 도시에서 지낼 수 있겠어?"
"나는 일생동안 발레리나로 있고 싶지는 않아." 너무도 씁쓸한 말투여서, 말타는 섬뜩하여 상대를 응시한다. "그건 무슨 이야기지?"
"발레 외에 살 보람은 없다고 세뇌 받으면서 사는 생활에 싫증이 났어. 나는 보통 생활을 하고 싶어.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가정을 꾸려가는 생활. 케이크를 굽고 싶어, 사이클링을 하고 싶어, 밤에는 난로 앞에서 뜨개질을 하고 싶어……. 난 그렇게 살고."
산드라의 말은 너무도 뜻밖이어서, 말타는 반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들에게는 발레만의 살길이야. 관객 앞 무대에 서서, 노력의 결과를 공연의 형태로 발표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야."
"우리들은 발레 학교 작품이야. 요컨대 자기 자신의 일을 생각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어. 5,6세 때부터 발레를 중심으로 하여 다른 것은 모두 내팽개쳐 버리고 살아 왔어. 보통의 틴에이저처럼 지내지도 못했어, 보이프렌드를 가질 수도 없었어. 댄스 파티에도 가지 못하고, 진정하게 사람을 사귀는 것도 배우지 못했지. 발레 교사는 우리들을 단세포로 길러내어, 발레 외에 다른 무슨 재능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해 버린 거야."
"그렇지만 나는 발레가 좋아."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지만 영원히 춤출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 누구나 다 그래. 그러니까 다른 일에 흥미를 가져야만 돼.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고 발레 저 쪽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이야. 스티브는 컴퓨터 가게를 내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도 컴퓨터 강의를 들을 작정이야. 스티브가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하고 싶어. 그러다가 만일 내가 바라는 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면,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해 두고 싶어. 결혼 생활을 좀더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말이야."
"어리석은 짓이야. 캘리 무어를 봐."
"캘리는 벌써 마음의 결정을 내렸어. 안무가가 될 작정이야. 그래서 자기 대신 너를 훌륭한 발레리나로 키우려고 하고 있어." 산드라는 손을 들어서 입을 열려고 하는 말타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어린애를 낳고 기르면서 발레리나로서의 능력을 갖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해. 언젠가는 끝장이 올 커리어 때문에 상처 입을 마음 따위는 하나도 없어. 그러므로 더욱 시야를 넓혀 다른 일에 손을 대고 싶은 거야. 창조력이 있어서 안무가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야. 하지만 내게는 그런 힘이 없어. 그래서 나는 전혀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돼. 좀 두렵긴 하지만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지."
"춤추지 않는 너를 상상할 수 있겠어?"
"물론 어렵겠지." 산드라는 애가 타서 한 손으로 테이블을 두들겼다. "발레 연습이 말타를 어떤 인간으로 만들었을까? 발레 이외의 세계는 없다고 세뇌되었겠지?"
"그렇지만 발레는 나의 모든 희망이었어."
"그렇지, 누가 강제로 시킨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안해 봤어? 자신의 이러한 삶의 방법은 발레단과 비평가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줄뿐이지, 자신에게는 쓸모 없다고, 그렇지만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게 되면 발레리나들에게는 갈 곳이 없어져. 누구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은 없으니까. 발레계에 있어서 나이를 먹든지, 심하게 다쳤다든지 하여 춤 출 수 없게 된 발레리나처럼 쓸데없이 되는 존재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산드라가 돌아간 뒤에도 산드라의 말은 말타의 머릿속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아니라고 생각해도 메아리는 사라져 주지 않는다. 그리고 산드라의 이론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레슨은 음악에 맞추어 특별한 동작을 몸에 익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는데, 그것이 사고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산드라는 <세뇌>라는 말을 썼는데,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발레 학교를 졸업한 후 발레단에 발을 들여놓아 바깥 세계와는 단절된 작은 세계 속에는 일도, 우정도, 교육도, 인생의 목적도 모두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지금에 와서야 춤출 수 없는 발레리나는 쓸모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자, 발레계에 모든 것이 있다고 믿은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관객도 비평가도 나를 잊어버리겠지. 그레고리는 신시아를 대역으로 세우고, 나는 그 세계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발레리나 이외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준비를 무엇 하나 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더 비참한 생각이 든다.
처음으로 말타는 발레가 없는 미래는, 노한 신(神)에 의해서 내려진 벌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인생에는 용기만 있다면, 발레 이외에도 시도해 볼 일들은 너무나 많다. 필요한 돈은 있으니까 대학에 갈 수도 있고, 발레용 부티크를 열 수도 있으며, 누구랑 결혼해서 자식을 낳을 수도 있다.
발레의 마력에서 자유롭게 되면, 바깥 세계와도 잘 적응하여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전에도 발레를 마약과 같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지만, 마약 환자처럼 마약 없이도 살아 갈 방법을 배워야 한다. 어떻게 하면 발레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말타에게는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시련에 도전하는 힘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뿐이다
구원의 손길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뻗쳐 왔다. 《호두까기 인형》의 리허설이 시작되기 며칠 전에, 어머니가 카리브해에서 돌아왔다. 더 젊어지고 더 활력에 넘쳐서.
"아주 멋진 여행이었어. 해마다 그곳에 가려고 생각할 정도야."
"누군가 멋진 사람이라도 만나셨나요?"
"지금까지는 한번도 묻지 않은 것을 묻는구나."
"그저 호기심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다시 말하겠다. 넌 지금까지 한번도 호기심을 나타내지 않았어."
어머니의 말은 옳았다. 여태껏 어머니에게 개인적인 일까지 물어본 기억은 없다. 어머니 시몬느는 미망인이 된지 13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데도 불구하고, 말타가 알고 있는 한 데이트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머니인 시몬느가 연인을 만들던지, 재혼을 하든지 하여도 누구 한 사람 비난할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어째서 데이트를 하지 않으시나요, 어머니?"
"이번에는 심문이냐?"
"아니요……. 다만 이상하다고 생각되어서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시몬느는 의자에 앉아서 계속 자신의 양손만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더니 갑자기 숨은 들이쉬고 얼굴을 들었다.
"연인은 있어."
"데이빗 글레이브즈."
설마 그럴 리가! 데이빗은 핸섬하고 장신인데다가 좋은 연고가 있는 유복한 변호사이지만, 그는 분명 어머니의 오랜 친구 케이의 남편이 아닌가!
"놀리지 마세요."
"아니다. 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야. 네가 발레 학교의 기숙사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내가 뉴욕으로 이사한 것도 데이빗 때문이었어."
"그렇지만 데이빗과 케이는 다정한 커플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들의 결혼 생활은 아주 불행해. 둘 다에게 있어서."
"그렇다면 왜 함께 살죠?"
"복잡하게 얽힌 사정이 있어. 애들 문제, 가족 문제, 돈 문제로." "그래도 데이빗이 어머니를 사랑한다면……."
"말타, 너는 아주 조금이라도 내 생활이나 친구에게 흥미를 나타낸 적이 없었어. 그런데 이 돌연한 관심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데이빗과 여행했나요? 이번의 카리브해에서는 함께 왔나요?"
"그 대답은 때로는 이라는 것과 예스야."
"어머니……. 어쩐지 알 수 없는 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무서워요."
"조금도 무서울 건 없어……. 많은 여자들이 이런 생활을 하고 있어."
"케이는 알고 있나요?"
"눈치 채고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케이에게는 케이의 생활이 있고, 내가 알고 있는 한 연인도 한 사람 있어. 우리들의 관계는 많이 진전되어 있어."
"믿을 수 없어요."
"50세가 넘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살아 있지 않은 것은 아니야. 네 심문이 끝났으면……"
시몬느는 일어섰다. 그러나 말타는 모처럼의 친밀한 분위기를 그대로 놓쳐 버릴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했을 때 행복하셨나요?"
식당으로 가려던 시몬드는 갑자기 멈추어 섰다. 몸은 굳어 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되돌아서더니 딸을 향해 물었다.
"그 질문 이면에 다른 뜻이 내포되어 있니? 왜 너는 이렇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지?"
"저는 우리 가족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도 정말로는 몰랐고요……. 이상하잖아요? 외동딸이 자기 아버지를 잘 모른다는 것은요."
"하긴 그렇구나."
"게다가……제가 왜 애초에 발레리나가 되려고 생각했는지가 이상하게 여겨져서요." 어머니를 말똥말똥 쳐다보면서 한마디 더 덧붙인다. "전……발레를 그만둘지도 몰라요……."
"다리 때문이냐?"
"이대로 계속하면 병신이 될지도 모른대요."
시몬느는 책망도 하지 않고, 잘 주의했어야 되었을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곧바로 딸 곁에 와서 앉는다.
"안됐구나. 네가 어떤 기분인지 잘 알고 있어."
"정말이세요?"
"말타, 나는 네가 발레리나가 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어. 너도 이미 알고 있듯이. 프리마 발레리나까지 올라가면 영광스럽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는 네가 싫었어. 날마다의 레슨에다가 지방 공연, 밖에서 자야 하고……."
"저는 그것이 좋았어요."
"너는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춤추는 것은 좋아했어. 음악에 맞추어서 손뼉을 치고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으니까. 그때는 사랑스럽고 귀여웠는데, 그것이 너의 집념이 될 줄은 몰랐어. 그 점은 너의 아버지를 닳았어. 그 사람도 집념에 매달린 사람이니까."
"집념이라뇨……어떤 의미죠?"
"네 아버지가 자기가 하는 일이 모두 최고가 아니면 마음에 들어하지 않은 사람이었어. 예를 들어, 여행 한 가지만 해도 최고의 여행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사람이지. 집에 잠자코 있지를 못하는 성미였어. 처음에는 그런 네 아버지를 따라다니지 않고 너하고만 있었어. 그러다가 네가 발레에 빠지게 되니까 나는 발레리나의 어머니가 되느냐, 아내로서 남편을 따를 것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 결국 나는 결혼 생활을 계속하는 편을 택한 거야. 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머니는 제가 발레하는 것을 너무도 싫어하시는 줄은 알았어요."
"싫어했지, 분명히. 발레는 너를 나로부터 빼앗아갔으니까. 너는 내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너는 내가 해 주고 싶은 것은 모두 외면했어. 승마 레슨, 예쁜 옷, 보이프렌드, 대학도 가지 않고, 너는 이제 모든 것을 발레에 바쳤어……."
말타는 항상 어머니를 자기가 요구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가 선택한 것이 어머니에게 선택을 강요한 것이라고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어머니에 사랑 받지 못한다고만 생각하여, 어머니를 상심시키고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시몬느 자신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쾌락의 늪에 저 정도로 마음을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면, 말타가 그 정도로 고집불통인 애만 아니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의 말타에게는 어머니와 딸을 떼어놓은 아버지 마틴 콜의 그림자가 보인다. 아버지가 관심을 나타내 주지 않은 것이 말타의 발레에 불은 붙인 것이고, 아버지가 하는 일에의 헌신이 시몬느에게 남편과 지낼 것인가, 딸과 지낼 것인가의 선택을 강요한 것이니까.
"그래서 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주 그만두기로 결정한 거냐?"
"아직 거기까지는 도저히……."
"그러면, 결심이 서게 되면 나에게 돌아오려무나."
시몬느는 일어서서 딸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들은 꽤 오랜 세월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네, 그래요."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것을 없애는 첫걸음이고, 화해의 의사 표시이며, 어머니로서는 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맨해튼 발레단을 그만둘 생각을 굳히려고 할 때, 어머니의 말은 대단히 영향력 있게 말타의 뇌리 속에 박혔다.
어머니와 지내는 시간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 즐거운 기대에 지금까지의 구제하기 어려운 미래의 생각도 엷어져 갔다. 데이빗과의 일을 털어놓아 준 것도 나에 대한 신뢰의 등불이었다.
발레단의 레슨이 시작되고, 이것도 이제 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말타는 충실하게 출석했다. 마음속에 절망과 불행을 간직한 채, 《호두까기 인형》의 배역표에 캐시미르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실려 있다.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제 춤 출 수 없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산드라는 실라큐즈로 가 버리고, 캘리도 알렉스와 함께 겨울 휴가를 떠나 버려, 상담해 줄 사람이 없다. 다만 무슨 신호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있을 뿐이다. 이제는 발레리나로서 생명이 끝났다고 하는 것을 알려 주는 신호 같은 것을.
캐시미르가 뉴욕으로 돌아온 것은 발레단의 게시판에서 알았다. 오후에는 말타와 파 드 되의 리허설이 예정되어 있다. 캐시미르와 댄스 플로어에서 만나게 되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걱정이 되어 가슴이 답답하다. 캐시미르는 뭐라고 할까? 설마, 과거의 연인이었던 여자들에게 대하는 것 같은 행동은 하지 않겠지. 입에 발린 소리로 적당히 넘어가려고 하는 행동…….
정말로는 견디기 어려웠지만, 상처받고 있다는 것은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 말타는 리허설을 위해 열심히 몸단장을 했다. 거울 속에 비쳐지는 여자의 모습은, 정말로 프로 발레리나의 그것이었다. 레어터드부터 토슈즈까지 모두 드라마틱하고 멋진 것으로만 갖추었으니까.
스튜디오에 도착해 보니 캐시미르는 아직 와 있지 않았다. 그레고리는 궐련을 피우면서 왔다갔다하고 있고, 피아니스트는 악보를 훌훌 넘기고 있다.
말타는 백을 플로어에 놓고 발에서 두세 번 몸을 움직여 본다. 그 움직임은 순조로왔지만, 무표정한 얼굴에는 고통이 숨겨져 있다. 날카로운 통증은 없어도 느슨한 통증이 등에서 양다리로 번져 간다. 닥터 브로크가 예언한 대로의 통증이었다.
계속 서 있든지, 걷든지 할 때는 통증이 없다. 발레가 요구하는 움직임대로만 하면 통증이 생긴다. 이대로 계속되면 발레를 하지 않을 때에도 통증이 남아서, 점점 더 심해지는 경우에는 걷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서 있지도 못할 것이다.
말타는 몸을 구부리고 발을 제4의 포지션으로 취하며, 우아한 원을 그리면서 두 팔을 플로어로 향하여 뻗친다.
그때 캐시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그레고리, 또다시《호두까기 인형》을 시키는 겁니까?"
말타는 천천히 윗몸을 일으키며 순조롭게 제2의 포지션을 취하여 캐시미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10
캐시미르가 주는 남성으로서의 충격적인 힘은 강렬했다. 연습용 검은 타이즈만 입고 있고, 근육이 솟아오른 윗몸은 알몸 그대로였다. 블론드 머리는 한층 윤기를 더했고, 푸른 눈동자는 러시아인다운 기백이 넘쳐흐른다. 하얀 치아를 보이며, 말타가 아닌 그레고리에게 웃어 보인다.
"이 춤이라면 잠자면서도 출 수 있어요."
"연습을 겸해서 말타와 두 세 번만 더 추면, 두 사람 모두 완벽하게 될 거요."
자기의 이름이 들먹거리자. 비로소 캐시미르는 말타를 보았다. 말타는 무표정한 채로 캐시미르의 예리한 시선을 받아 넘겼다. 시선이 빗나간다. 다만 상대역을 확인했다는 정도로. 그레고리는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어깨를 으쓱 치켜 올릴 뿐이다.
"오케이." 피아니스트를 향하여 말한다.
"파 드 되의 서주에서 시작하여 천천히 쳐 주세요. 첫번째가 끝나면 템포를 조금 빠르게 하고."
긴 훈련의 세월을 이보다 고맙게 생각한 적은 없다.
말타는 마음속의 비참함도 보이지 않고, 발레의 요구대로 경쾌하게 춘다. 캐시미르는 연인이 아니라, 다만 상대역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일깨우면서.
발레는 잘되어가고, 그레고리는 감탄의 소리를 낸다. 음악적 템포가 빨라진다. 캐시미르도 훌륭했다. 호두까기 왕자를 연출하면 그의 마력은 3층석의 맨 뒷줄에까지도 미쳐, 젊은 아가씨들이 캐시미르와 연애하려고 덤비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캐시미르의 열정도, 매력도 전혀 자기 자신에게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속이 상한다.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희롱의 말을 듣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 말타를 단지 상대역으로 취급하고, 미소는 짓되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며, 부드러운 손에는 무엇 하나 감정이 들어 있지 않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발레라는 생각이 든다. 여태 기다리고 있던 신호가 바로 이것이라고., 의문의 여지도 없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나의 발레리나로서의 인생은 끝났다.
될 수 있으면 역시 ‘호두까기 인형’의 무대에 서고 싶어서 여태까지 결정을 미루어 왔던 것이라는 것은 지금에 와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발레는 여러 관중 앞에서 추고 싶었다. 자기의 기술과 재능을 찬양받고, 전원이 일어서서 보내 주는 박수를 받으며 이별을 고하고 싶었다.
물론 그것은 어린애들이나 소녀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적인 어른들의 세계는 다르다. 말타의 마지막 발레는 땀 냄새가 스며있는 스튜디오에서 추게 되었다. 조율이 필요한 피아노의 반주를 타고, 궐련을 빽빽 피워대는 발레 마스터 앞에서, 말타야 떠나버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무용수를 상대로.
씁쓸함도 슬픔도 함께 있었다. 지금까지의 노력은 잠깐 사이에 스러져 버리고, 발레 비평가의 컬럼란에 단 한 줄 실리는 것뿐. 미래를 구원하기 위해 과거를 희생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생각하여 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레고리와 켈리는 슬퍼해 줄 것이다. 그러나 신시아는 대단히 기뻐할 것이고, 캐시미르도 태연히 받아 주겠지. 캐시미르의 천재성은 특정 발레리나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눈물이 치솟아 오르지만, 말타는 사람들 앞에서는 단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순간은 혼자만인 장소에서 혼자만일 때 맛보기로 한다. 그 때까지는 이 안타까움을 가슴속에 묻어 두자. 리허설이 끝나니까 다들 연습장을 떠난다. 피아니스트는 악보를 겨드랑이에 끼고, 그레고리는 캐시미르와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이 말타였다. 출입구에 서서 오랫동안 연습장을 둘러본다. 높이 달린 창문에서 흘러드는 빛에 먼지가 춤추고 있다. 조용하지만 가라앉지 않은 스튜디오는 말타의 마음속과 같았다. 허무하고 몹시 거칠어진 느낌이었다.
그곳에서 겨우 등을 돌리고 분장실로 와서는 그레고리에게 짧은 편지를 쓴다. 의사의 진단에 의하여 발레를 그만 두는 일, 발레단에서 물러나는 것은 섭섭하지만 적어도 공연에 지장이 없도록 빌고 있다는 일, 발레단의 번영을 빌고 있다는 일.
확실한 필체로 사인을 한 후 티슈로 잉크를 누르고는, 그레고리의 방 앞의 편지함에 놓는다. 백을 어깨에 걸치고 발레단의 건물을 나와서, 맨해튼으로 향하였다.
시몬느의 헌 모피 코트의 깃을 세운 후 빨간 베레모를 쓰고 긴 머리를 날리면서.
말타는 몇 시간이고 걸었다. 5번가에서 6번가로, 쇼윈도우를 바라보면서, 보행자를 관찰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살고 있을까? 어째서 저렇게 행복하게 보일까? 발레계는 아주 좁았고, 그 바깥세계에는 직업도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나는 그 중 무엇을 하며 지낼까?
자기가 뒤에 두고 온 세계의 일은 생각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너무 무리였다. 캐시미르에게는 나의 비참함을 견디기 어려울 때까지 깊이 숨기고 있어야 한다.
손을 잡고 걷는 커플, 버스 정거장 옆에서 키스하고 있는 커플, 유난히 다정스럽게 보이는 커플들만 눈에 띈다.
캐시미르의 초연한 태도는, 나 따위는 꼭 발레하는 인형과 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나를 다시 본 캐시미르의 표정이 활짝 밝아지는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어리석은 꿈, 소녀의 로맨틱한 환상이었어. 캐시미르는 분명히 다른 상대와 춤추고 싶어하고 있었고, 서로 사랑하고 있었던 기억은 싫어하고 있었는걸. 그것은 캐시미르의 눈에서 확실히 읽을 수 있었고, 캐시미르의 손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발레도, 사랑하는 남자도, 어느 쪽을 잃었다는 것도 마음이 아프다. 가슴을 에는 느낌이 싹튼다. 발레는 나의 인생이었고, 캐시미르는 나의 파트너였는데......
모두 슬프다. 이제 춤출 수 없는 것도, 이제 캐시미르와 함께 지낼 수 없게 된 것도. 가령 다시 춤출 수 있게 된다 할지라고, 캐시미르 없이 추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참고 있던 눈물이 넘쳐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흐르는 눈물이 볼 위에서 얼어붙는다. 겨우 집 앞에 도착했다. 얼굴엔 감각이 없어지고, 너무 걸어서 다리가 아프다.
그렇지만 닥터 브로크라면 이 오후에 내가 했던 일을 칭찬 할 것이다. 산보가 최고의 운동이라고 말했으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현관 앞까지 가서 코를 풀었다. 백을 뒤져서 열쇠를 찾는데 문이 열렸다.
"우리들은 네가 어디에 있는지 걱정하고 있었어."
시몬느는 저녁 외출을 위해 단정히 차리고 있었다.
"우리들이라니요?"
"손님이 오셨어."
"손님이라뇨?"
손님이라니, 누굴까? 말타는 백을 놓고 다시 한번 코를 풀고는 코트를 벗었다.
"도대체 어디서 무얼 했니? 마음 아파하고 있는 것 아니냐?"
"산보했어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생각해야 될 일이 좀 있어서요....전 오늘 사표 냈어요."
"알고 있어, 말타." 시몬느의 말소리는 다정했다.
"저 분에게 들었어."
"누군데요?"
"캐시미르야. 계속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캐시미르는 시몬느의 엘리간트한 거실의 로코코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검은 진즈에 부츠 차림의 모습은 장소에 몹시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고, 의자도 그에게는 너무 작아 보인다.. 그렇지만 아주 핸섬하게는 보인다.
"커피는 어때, 말타? 나가기 전에 커피를 끓일 정도의 시간은 있는데."
"아니에요, 어머니. 됐어요."
"캐시미르, 커피 대신 뭐 다른 것으로?"
"아니오, 고맙습니다."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지만 여섯 시에 저녁 약속도 있고 또 둘이서만 할 얘기도 있겠고..."
말타와 캐시미르를 번갈아 보던 시몬느는 말을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만 본 채, 시몬느의 존재 따위는 마음에 두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시몬느는 어깨를 움츠리고는 거실을 나간다.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요?"
"당신은 왜 그만두었소?"
"이제 춤출 수 없게 되었어요."
"그 부상 때문인가요?"
"부상이라기보다는 증상이지요, 그 사고이래 계속해서 증상은 여전히 있었고, 발레를 계속 하면 악화된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실라큐즈에서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공연하고 나서, 당신이 그렇게 화를 낸 것은 그 때문이었군요. 나에게 들키면 발레를 그만두게 될까봐."
"그만둘지 어떨지는 제가 결정해요."
"역시, 그랬었군요."
"당신은 몰랐나요?"
자기의 의견이 들어맞았어도 캐시미르는 조금도 기쁜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타를 노려본다.
"그만둔다고 왜 리허설 때 말하지 않았소?"
리허설 때 춤추는 고통 따위는 사랑이 없는 춤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겠는가.
"저는 한탄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지 않아서 편지로 사표를 낸 것뿐이에요."
"이제 두 번 다시 춤추지 않을 생각이로군요."
케시미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필시 마음이 산란했을 거요."
그렇게 꼭 사실을 밝혀야만 마음이 시원한가요? 그렇게 자신의 건강한 몸을 과시하고 싶나요? 말타는 노여움으로 얼굴이 붉어지고 양손을 불끈 쥐면서 일어선다.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잖아요?"
캐시미르도 일어섰다. 장신이어서 앞을 가로막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상대역을 잃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리라고 생각하오?"
"당신과 춤출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발레리나들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렇지만 나는 별 관심이 없소."
"꼭 누군가 발견할거에요."
"당신은 관계없다는 말이로군요. 이제 와서는 뒤를 돌아다보지도 않고...."
발레리나로서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은 것을 아무 미련도 없이 해 버린 것처럼 말하는 저런 남자! 만일 나에게 힘이 있다면 맨손으로 목을 졸라 죽이고 말겠어. 자기야말로 알몸으로 떨고 있는 나를 침대에 둔 채로 나가버린 주제에. 마치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래요. 당신처럼요."
"나처럼?" 의아한 듯이 말타를 응시한다.
"어떤 의미지?"
"여자를 버리고 나갈 수 있는 남자..그것도..."
"사랑도 없는 관계를 맺었다고 여자가 울고 있는데....그 여자의 남편도 아닌데 말이오?"
"만일 당신이 나가버리지 않았다면..."
캐시미르는 말타의 양어깨를 잡고 심하게 흔든다.
"당신이 그때 어떤 기분으로 있었는지 알고 있소. 당신과 사랑을 나누면서, 당신마음이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니에요."
"아니라고?"
"그래요. 아니에요. 전 절대로 브레인도, 그 어떤 남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가슴이 찌그러질 정도로 울었소?"
말타는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캐시미르의 얼굴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왜 그렇소?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동안, 나는 그 일만을 생각하고 있었소. 그런데 끝나고 나니까 당신은 울고 있었소."
느닷없이 행복감에 젖어서 말타는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캐시미르의 목소리에도,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도, 푸른 눈에도 고통이 어려 있었다. 나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도 나와 같이 괴로워하고 있었어.
"분명히 말해 주시오. 나는 알고 싶으니까."
말타는 떨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것은...너무나 멋지고, 그 정도로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에요."
말타는 말을 끊었다. 그러나 캐시미르는 잠자코 있었다. 말타는 침을 꼴깍 삼키고 계속했다.
"그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정말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던 탓이에요. 꿈에도 알지 못했어요...당신 품 안에서..."
말타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캐시미르에게 꽉 안겨졌기 때문이다.
"말타...오, 말타..."
캐시미르는 말타를 양팔로 안고 조용히 좌우로 흔들면서 마치 비밀의 주문을 외듯 말타의 이름을 되풀이해 불렀다.
캐시미르의 강렬한 포옹보다 멋진 것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거의 숨도 못 쉰 채 뼈가 으스러진 것 같은 느낌이지만, 마음만은 행복감으로 벅차오른다.
"캐시미르..." 가만히 속삭이더니, 멍하게 캐시미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캐시미르는 얼굴을 들고, 말타의 눈을 계속 들여다 보았다.
"말타, 어째서 그 말을 하지 않았지? 왜 당신이 나와 사랑을 나눈 것에 후회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소?"
"당신이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까요, 말할 틈도 없이 나가 버리고...."
"1개월 동안 나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소. 샌프란시스코 거리를 헤매고 다녔소. 내가 당신을 왜 울렸는지를 생각해 내려고 말이오. 제기랄, 당신 또 울고 있군."
"전 1개월 동안 울고만 있었어요. 이제 곧 눈물도 말라 버릴 거에요."
캐시미르는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말타의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약속하겠소. 당신이 이제 울지 않고 지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당신과 침대에서 몇 시간이고 지냅시다. 당신과 서로 사랑하고, 당신은 웃는 거요, 말타."
"아아, 캐시미르......멋진 일이에요."
오랫동안 달콤한 키스가 계속됐다. 이 순간의 호화스러움과 미래의 호화스러움을 약속하는 키스였다.
"당신을 침대에 묶어 버리겠소."
"전 발레를 그만두면 무엇을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조롱하는 듯한 투로 말하고, 말타는 비로소 발레를 그만둔다는 말에서 가시가 사라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캐시미르는 말타의 말을 바로 알아듣고 대답했다.
"아아, 말타. 내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아요. 다른 누구와도 춤추고 싶지 않소."
"신시아도요?"
"신시아도 발레리나지만 당신과는 다르오."
"캘리가 되돌아 올 거에요."
"캘리는 훌륭해요. 하지만 이제 전처럼 정열은 없어졌소."
"반드시 누군가가 나타날 거에요."
"그래도 나는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잖소?"
캐시미르는 말타를 끌어안고 살짝 키스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깨달은 것이 있소. 오래 전부터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오. 그런데 돌아와서 리허설에서 만난 당신은 너무 차가왔소. 그런 당신을 복 나는 마음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소."
"그렇지만 당신 역시 냉정했어요. 무서울 정도로."
"무서워한 것은 나 쪽이오. 당신에게 한 짓으로 해서 나를 미워하지나 않을까 하고."
"전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걸요. 미워하다니 말도 안돼요."
"그렇다면 나와 결혼해 주겠소?"
말타는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멍한 상태이어서 결혼까지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
"당신은 원하지 않소?"
"저, 전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
"연인은 필요 없소. 내가 필요한 것은 아내요." 격한 말투에 말타는 깜짝 놀라 캐시미르를 응시했다. "말타, 애인이라면 나에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많소. 간단하게 발견하고 쉽게 잊어버리지. 그렇지만 그런 것은 이제 나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오. 나는 내 아내와 가정을 이루어 줄 자식이 필요하오. 보니는 내 자식을 낳기 싫어했지만, 당신은 다르리라 생각하오. 나는 빌고 있었소. 당신이 나와 결혼해서 내 자식을 낳아주었으면 하오."
캐시미르의 아이가 눈에 보이는 듯하자,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네, 물론이에요." 다음 순간 말타는 이미 캐시미르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캐시미르, 왜 그래요?"
"곧 시작할거요, 말타."
"시작하다니, 무엇을요?"
"우리 자식을 갖는 것 말이오." 거실을 나가서 복도에 섰다. "당신 침실은 어디지?"
침실에 들어가자 방안은 어둠으로 깔려 있고, 테이블 위에 작은 스탠드만이 빛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캐시미르는 말타를 살짝 침대에 누인 후 구두를 벗겨 주고는 모퉁이에 앉는다.
"1개월 동안 당신을 침대로 데리고 가는 것만 생각했소. 그렇지만 당신이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했소. 그런데 지금은 꼭 기적이 일어난 것만 같소. 여기서 내가 당신과 이렇게 하고 있을 줄이야..."
캐시미르는 말타의 손을 잡더니 말타의 손바닥에 입술을 대었다. 그것만으로도 캐시미르의 정열은 전해지고, 말타의 혈관을 통하여 심장에 전달되어 욕망을 눈뜨게 한다. 말타는 호흡이 빨라지고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나하고 함께 있을 때 브레인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오?"
"네, 브레인은 저에게 오빠와 같은 존재였어요. 그의 가족이 탐나서 결혼한 주제에,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와의 사이에 어린애를 두지 않았소?"
"전 어린애를 원치 않았고, 제멋대로이고 발레리나로서의 커리어라는 것만 생각해서 가족을 위하여 시간을 쪼개고 싶지 않아서...하지만 아닌지도 몰라요. 정말로는 브레인을 사랑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무의식중에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애로 생각하고 있던 탓인지도 몰라요..어린애를 갖느냐 마느냐로 우리는 많이 싸웠어요. 브레인이 죽은 날 저녁에도 우리는 그 일로 싸움을 하고...그래서 사고가 난 거에요. 브레인이 트럭을 발견하는 것이 늦어서 차가 빙판길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자신을 책망하지 마시오."
"그렇지만 언쟁을 하지 않았더라면 사고는 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말타, 그 사람 역시 언쟁을 하고 있지 않았소."
"그렇지만 제 탓이에요. 만일 브레인에게 찬성했더라면.."
"당신은 찬성하지 않았잖소?"
"네, 그래요. 그래도 만일.." 말타는 떨면서 한숨을 쉬었다.
"인생에는 만일이란 것이 너무나도 많아요."
"당신은 이제 충분히 벌을 받았소. 발레를 잃어버렸니까."
캐시미르의 눈에는 이해가 있었다. 죄와 치욕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서 벗기 시작했다. 브레인에게 제멋대로라고 책망을 듣고 나서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적어도 일부분은 진정한 사랑을 품고 있지 않은 탓이라는 것을 알았다. 말타는 근사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고마와요."
"무슨 말이오?"
"먼저 그런 식으로 말해 주어서요."
캐시미르는 옆으로 눕더니 부츠를 차버리는 듯이 벗었다. 그는 말타는 끌어안으며 어깨에 말타의 머리를 실어준다.
"그런 기분은 나도 잘 알고 있소. 나는 몇 년이나 보니와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 왔으니까요 내가 부탁한 것을 사러 갔기 때문에 보니는 죽음을 당했소."
"캘리에게서 들었어요."
"나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말했소. 내가 대신 갔어야 하는 건데 하고 말이오. 나였다면 강도를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 그렇지만 사건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것 때문에 자신을 책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상처가 다 나은 것은 아니오,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항상 죄의식이 있소.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오."
"보니를 너무 사랑하셨군요."
"질투하오?"
"조금은요."
캐시미르는 말타의 머리에 애무의 손길을 댄다.
"당신은 보니와는 달라요. 보니는 성질이 불 같았지만 당신은 부드럽고, 보니에게는 없는 달콤함까지 있소. 보니와는 늘 다투어서 에너지 소비를 많이 했소. 우리들은 연인으로 있을 걸. 결혼이 잘못되지나 않았나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소. 그렇지만 당신과는 좀더 나은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오. 그러니까 절대로 내 기분을 의심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많이 사랑하고 있으니까 말이오."
말타는 양팔로 캐시미르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전 발레 소설을 쓰고 싶어요."
"좋은 생각이오."
"당신을 등장시키겠어요. 그 사람은 핸섬하고 매력적이어서 모든 발레리나들을 열광시키고 말 거에요."
캐시미르는 한 팔로 말타의 목을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턱을 잡아 자기 쪽을 행하게 했다.
"당신이 탐나오. 알겠소? 사랑을 가득 담아서 당신을 안아 준다는 것을.."
"네..."
"그러면 이제 울지 않겠지?"
"약속할 수 있어요."
"당신이 울면 나도 따라 울겠소, 말타. 우리들은 언제나 한마음이니까."
캐시미르는 손을 뻗어 스탠드를 껐다. 다정한 키스는 곧바로 정열적인 키스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