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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아침 2

14

꼼짝 않고 누운 엘젤의 마음속으로 호크의 비난들이 단단한 독수리의 발톱보다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좌절, 당황, 고통, 그리고 결국에는 화가 났다. 겁이 날 정도로 심한 분노가 일었다.

전에도 이런 분노를 느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엔젤은 인간성을 몽땅 잃어버릴 뻔했다.

엔젤은 자제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행복할 거라는 기대를 잠시 주었다가 도로 빼앗아 가 버린 삶을 저주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자신을 산산조각 내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도록 내버려 둔 빌어먹을 삶!

"왜죠?"

엔젤은 자신의 괴로움을 외면한 채, 자제력을 잃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생각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그게 내 한계요!"

호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목소리가 눈빛만큼이나 잔인했다. 그러다 갑자기 엔젤의 어깨를 움켜쥐더니 억지로 엔젤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돌려놓았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소?"

"하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당신이 이미 알 거라고 생각했죠."

엔젤은 단순한 반사 작용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말했다.

"세상에,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소?"

호크의 손이 엔젤의 어깨를 더욱 꽉 움켜쥐었다.

"당신이 데리나 칼슨과 잤다고 생각했소. 당신은 전혀 처녀처럼 행동하지 않았소. 내가 같이 잤던 어떤 여자보다 정열적이었소."

"데리와 잠을 자요? 칼슨과 잠을 잤다고요?"

엔젤은 무슨 말인지 깨닫지도 못하며 그 말을 되풀이했다.

"당신에게 말했잖아요. 데리는 내 친동생이나 마찬가지고 칼슨은 친구라고요."

"여자들은 항상 거짓말만 하지."

침묵이 찾아왔다.

독수리 한 마리가 영혼을 뒤흔들며 엔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다. 엔젤은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나를 거짓말쟁이에다 더러운 여자라고 생각했군요?"

엔젤은 낮게 중얼거렸다. 온몸이 떨리면서 허물어졌다. 교통사고에서 경험했던 그 막막함…….

순간 그 교통사고에서 익힌, 이젠 아예 습관이 돼 버린 자제력이 혼동스런 감정을 모두 마음속에 가둬 버렸다. 나중에 용기가 생기면 이 상처 받은 감정을 치료할 것이다. 지금은 발작을 일으키지 않도록 애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교통사고는 힘에 부친 일이었지만, 이 일은 감당할 수 있었다.

'난 살아 있어, 아주 건강하게. 하지만 지금 난 실수를 했어. 끔찍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말이야. 잔인한 호크의 내면에 있는 고통과 외로움, 인간적 욕구에 영향을 줄 만큼 난 강하지 못해. 물론 그에게 그런 욕구가 있다고 한다면 말이야.'

"당신 말이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닌 것 같군요, 그렇죠?"

엔젤은 호크를 마주 보는 눈빛만큼 공허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엔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호크는 마음이 상당히 불편해졌다. 여자들이 부리는 온갖 술수-병적인 흥분, 지독한 욕설,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 달콤한 거짓말과 애원-를 기대했었다. 섬뜩한 도자기같이 잔잔한 표정과 차가운 눈빛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호크는 엔젤의 어깨를 움켜쥐었던 손을 내리며 힘없이 물었다.

엔젤은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옷을 주워 들었다.

"그 말은 내가 매춘부가 된 것 같다는 뜻이에요."

엔젤이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처녀성을 팔았다는 얘기였음을 깨달은 호크는 불끈 화가 치밀었다.

"남자와 잠을 잘 때 보통 어떤 대가를 원하지?"

엔젤은 호크의 말을 무시하고 선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호크가 엔젤의 손목을 낚아챘다.

"연극은 그만두시지, 귀여운 엔젤. 당신은 당신 소유의 땅을 팔고 싶어 하고, 그러기 위해 가장 유치한 방법을 끌어들였소. 그건 당신 자유요. 하지만 내게 물어 본다면 소용없는 짓이라고 말해 주겠소. 내가 사려는 건 이글 헤드라는 땅이지 다른 건 아니니까 말이오."

"난 이글 헤드가 팔리는 걸 원치 않아요. 그건 데리가 원하는 일이에요"

엔젤은 감정과 깊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또박또박 대꾸했다.

엔젤의 시선이 호크와 마주쳤다. 눈에는 푸르다고 하긴 너무 어두운 색만이 남아 있었다.

"전 당신 같은 남자가 이해할 수 없는 빚을 데리에게 졌어요. 이글 헤드가 팔리면 돈은 모두 데리에게 갈 거예요. 하지만 믿지 못하겠죠, 그렇지 않아요? 믿건 믿지 않건, 그건 당신 자유예요."

엔젤은 자기 손목을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잔잔하고 공허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날 놔주세요."

호크는 엔젤을 놓아주기 전에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엔젤은 조종실 문을 닫고 나갔다. 호크는 엔젤을 쫓아 나가 눈과 목소리에 담긴 공허함을 없애 주고 싶었다. 순간적으로 엔젤을 믿고 싶었다. 자신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곁에 있으면서 사랑을 갈망하는 데에는 다른 숨은 뜻이 없다는 걸 믿고 싶었다.

그러자 이제껏 들었던 어떤 욕설보다 훨씬 심한 욕설이 자신에게 쏟아졌다.

'열여덟 살이 되던 날, 난 여자에 대해 모든 걸 배웠어. 그 이후에도 그 교훈은 계속 증명됐지. 나이 서른다섯에 재교육을 받아야 할 만큼 난 바보가 아니야. 엔젤이 처녀성에 대해 속이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면들도 진실하다고 볼 수는 없어.'

호크는 옷가지로 손을 뻗다가 자기 몸에 묻은 엔젤의 피를 보고 순간적으로 뭉클했으나 약한 모습을 드러낸 자신을 못마땅해 하며 곧 냉정을 되찾았다.

'처녀성이 별건가. 모든 여자들이 그렇게 시작해. 엔젤은 대부분의 여자들보다 자신의 값을 매기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렸을 뿐이야. 그런데 엔젤의 값은 얼마쯤일까?'

이 질문이 호크의 마음에 갈고리처럼 박혀 매순간 가슴에 파고들었고, 잊어버리려고 할수록 마음을 긁어 댔다.

'돈이 아니면 뭐지? 데리와는 무슨 관계일까? 빚을 졌다고 했는데…….'

갑자기 엔젤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 같은 남자는 이해 못할 빚을 데리에게 졌어요.'

'처녀성을 말하는 걸까? 그런 하찮은 것을 토지 매각과 바꾸려고?'

호크는 내심 화가 나 혼자 지껄였다. 그리고 입가에 냉소적인 웃음을 머금고 빈정거렸다. 자신이 이해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엔젤이 자신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셈이었다. 엔젤도 다른 여자들과 똑같았다. 결국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이 일로 기분이 언짢아 화를 낸다면 자신만 멍청이가 되는 것이다. 그 정도의 사리 분별을 할 만한 나이는 됐다. 또한 애절하고 푸른 눈의 여배우에게 속을 만한 애송이도 아니었다.

잠시 흔들렸던 확신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호크는 마음이 좀 느긋해졌다.

호크는 힘차게 돌아가는 엔진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서둘러 옷을 주워 입고 조종실 문을 열고 기세 좋게 걸어 나오다 엔젤과 마주쳤다.

"낚시하긴 좀 늦은 시간이잖소?"

호크는 선명히 반짝이는 별들을 가리키며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렇군요."

엔젤은 야간 항해등이 켜져 있는지 확인한 후, 만에 정박된 크고 작은 배들을 천천히 헤쳐 나갔다. 일단 만을 벗어나자 속도를 좀 높였으나 낮보다는 낮은 속도를 유지했다. 마음은 급했지만 말이다.

재빨리 도망쳐 버리는 것.

하지만 이런 바람은 마음뿐이었다. 현실은 험난했다. 캠벨 강까지 항해를 해야 했고, 집으로 간 다음에도 자기 방에 들어가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엔젤은 기가 막혔다. 자신을 망치려는 감정들과 소리 없이 싸워야 했다.

'한 번에 하나만 생각해. 지금은 이 순간만 있는 거야.'

"그렇잖아도 짧은 여행을 더 줄이자는 거요?"

"."

"그럼 데리의 땅 매각 건은 어떻게 되는 거요?"

"당신이 이글 헤드를 사든가 말든가 해야겠죠."

"가이드 없인 거래도 성립되지 않소. 기억하겠죠?"

"저말고 다른 사람도 많아요."

불현듯 엔젤의 표정이 변했다. 호크를 모방한 듯 입가가 왼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이를테면 칼슨도 있죠."

호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엔젤이 칼슨에게 고자질한다면 그 몸집 우람한 인디언 사내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여행을 호크에게 선사할 것이다.

여전히 자신을 짓누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이제껏 지켜왔던 확신이 한 여자에 의해 무참히 부서지려 하고 있지 않은가!

"데리에겐 뭐라고 할 거요?"

호크가 따져 물었다.

"우리는 서로 성격이 안 맞다고 하죠."

"내 애무를 좋아했던 걸로 아는데?"

잔인하게 비아냥거리는 호크를 엔젤은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수치심과 분노가 불타올랐다. 자신이 애무를 즐겼던 걸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살아야 할 남은 인생이 있지 않은가. 그 인생을 거짓말쟁이와 더러운 여자로 낙인 찍혀 살고 싶진 않았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적어도 한 번은 지독한 실수를 하죠. 내 실수는 바로 당신이에요."

엔젤이 조용히 말하자 호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더 이상 엔젤을 비꼬지 않았다. 엔젤의 진심이 다른 여자들의 거짓말보다 더욱 자기를 괴롭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남은 여행을 서둘러 마치고 램지 저택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도 데리는 자고 있었다.

엔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저택 북쪽에 있는 자기 방으로 향했다. 호크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고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엔젤의 마음속에 호크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스테인드글라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온 세상이 캄캄해진 후에도 산 정상엔 빛이 남아 있는 것처럼 스테인드글라스만이 엔젤의 맘에 남아 있었다.

엔젤은 옷을 벗고 뜨거운 물줄기 아래 오랫동안 서서 피부가 따끔거릴 때까지 씻고 또 씻었다.

아무것도 느끼거나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무감각 상태도 잠깐뿐임을 엔젤은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을 정리하고, 희망을 찾아내고, 고통을 이겨 낼 시간이 곧 올 것이다. 배워가는 시간 말이다.

'하지만 아직 일러. 지금은 이 순간을 감당해 내는 것만도 내겐 벅찬 일인데…….'

엔젤은 뜨거운 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기분 나쁠 정도로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엔젤은 수건으로 물기를 급히 닦아 내고 손가락이 아프도록 머리를 문질러 댔다.

그때서야 엔젤은 자신이 숨죽여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침실 문을 닫은 후에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소리 없고 투명한 감정의 용솟음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엔젤은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그러고는 옆으로 수건을 던지고 작업복 청바지와 푸른색 셔츠를 입었다. 둘 다 색이 너무 바래 희끄무레했다. 샌들을 신고 젖은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기며 작업실로 향했다.

북쪽 창문은 호크의 눈동자처럼 까맸다. 엔젤은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서, 과연 자신이 계속 나아갈 용기가 있는지 자문해 보았다.

'단 한 번에 모든 순간을 사는 건 아니야.'

엔젤은 조용히 자신을 타일렀다.

'네가 있는 이 순간에 넌 살고 있는 거야. 한순간은 어떻게든 꾸려나갈 수 있어. 그걸 위해 강해지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 단지 한순간이니까. 한 번에 한순간만 넘기면 돼.'

여러 번 되풀이해 익숙해진 이 말들을 장황하게 되뇌이자, 날카로운 독수리의 발톱이 자기를 움켜쥐고 있다는 강박감에서 약간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스위치를 올렸다. 짤까닥 소리와 함께 어두운 방 안에 창백한 불빛이 가득 찼다.

엔젤은 사방에 흩어져 있는 온갖 색의 유리를 보는 순간 황홀해졌다. 무슨 일이 생기든 자신에겐 유리가 있었다. 아름다운 색들이 엔젤을 둘러싸고는 상처 입은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한순간에 단 한 가지.'

엔젤은 깊고 긴 숨을 들이쉬며 형광등 불빛 아래에 즐비하게 늘어선 작업대 쪽으로 다가갔다.

두꺼운 작업대 두 개에는 털이 짧은 깔개가 덮여 있었고, 세 번째 작업대는 윗면이 반투명했다.

작업대 위에 올려놓은 유리 조각의 무늬가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엔젤은 형광등이 환하게 비치는 작업대로 갔다. 현재 작업 중인 무늬는 무척 간단했다. 젤리가 담긴 세 개의 항아리가 녹슨 창틀 위에 놓여 있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검은 딸기와 덩굴들이, 보석이 달린 술 장식처럼 창문 윗면에 길게 매달려 있었다. 창문은 늦은 오후 햇살 같은 엷은 금빛 머프 유리로 만든 것이었다.

일반적인 창 유리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엔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직 색이 없는 유리는 써 본 적이 없었다. 새하얀 빛 아래서 반짝이는 무색 유리를 보면 끔찍했던 교통사고와 죽음에 대한 많은 기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유리 조각 대부분은 이미 그 형태가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 하려는 작품은 창문 위에 매달린 딸기 송이만 만들면 됐다. 딸기 송이들은 구슬 그 자체였다.

나뭇잎은 푸른색 머프로 모양을 만들었다. 그것은 빛을 받으면 빛깔과 명암이 미세하게 변하면서 교묘하게 진짜 숲을 연상케 해주었다. 잎맥에는 페인트로 색을 칠했다. 그러고 나서 가마에 넣고 구우면 됐다. 그건 페인트와 유리를 영구적으로 결합시키는 과정이었다. 번쩍이는 유리에 나뭇잎 윤곽을 새겨 비슷한 효과를 줄 수도 있지만 엔젤은 그 대신 머프 유리의 다양한 재질과 색의 농담을 사용하기로 했다.

엔젤은 길이 잘 든 가죽 장갑을 끼고 다시 밝은 작업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단순한 모양의 유리 절단기를 집어 들었다. 견고한 강철 톱니바퀴와 연필처럼 생긴 손잡이가 오른손 굳은살에 꼭 끼워졌다.

밝은 작업대 위에 고정해 놓은 종이 도안 위에 딸기 색깔의 유리 조각을 올려놓고 서로 맞추었다. 빛이 종이에 반사되면서 잘라야 할 선이 유리 표면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엔젤이 유리에 톱니바퀴를 대자 바퀴는 윙윙거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미세한 유리 가루를 뒤에 남겼다.

주요 윤곽에 자국을 남겨 놓고 엔젤은 바로 절단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고도 힘 있게 유리에 힘을 가하자 톱니바퀴로 표시해 놓은 미세한 선을 따라 유리가 갈라졌다.

이름과는 달리, 유리 절단기는 유리를 잘라 내는 것이 아니라 유리가 가진 독특한 분자 구조에 흠을 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유리는 고체라기보다 유동체에 가깝기 때문에 절단된 부분이 저절로 뭉뚝해진다. 그래서 빠른 시간 안에 유리를 떼 놓지 않으면 유리 분자들이 다시 흘러들어와 분리된 부분이 깨끗하고 정밀하게 처리되지 않고 울퉁불퉁해진다.

엔젤은 유리를 두 개로 나눈 다음,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모서리를 무디게 만들었다.

딸기의 곡선은 너무 섬세해 한꺼번에 자를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얇은 곡선을 만든 후 특수 펜치로 원하는 곡선이 만들어질 때까지 유리 위를 꼭 집었다. 주의와 집중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엔젤은 모든 신경을 자기 주변으로 끌어 모았다. 시간이 눈 깜박할 새에 흘러가 버렸다.

집중하고 있는 엔젤의 마음 저 깊은 곳에선 끊임없이 무엇인가가 들끓고 있었다.

언젠가는 한 번에 하나 이상을 하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야 말 것이다.

유리를 조각하는 작업은 엔젤에게 안정과 숨쉴 공간을 가져다주었다. 이 일은, 어린 시절 온갖 시시콜콜한 실망감을 극복할 때나 불길에 싸인 차 속에서 부모님과 그랜트, 그랜트의 부모님이 당한 망연자실한 죽음을 받아들일 때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 호크와의 불화를 해결하는 데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작업 덕분에 엔젤은 다가오는 매순간을 버텨 나갈 수 있었다. 반짝이는 유리가 손가락 아래서 형상을 갖춰 나가는, 바로 이 순간에는 유리와 자신 외에 존재하는 게 없었다.

엔젤은 침묵 속에서 정신없이 일했다. 캐리 부인의 선물이 될 딸기 송이가 완성되었다.

이젠 나뭇잎 차례다. 엔젤은 뜨거워진 가마에 나뭇잎을 넣었다. 나뭇잎들이 구워지는 동안 이번에는 어슴푸레한 머프 조각을 다듬어 나갔다. 울퉁불퉁한 커다란 조각이 왠지 모를 기묘한 우아함을 풍겼다. 엔젤은 몇 년간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격조 있는 솜씨와 확신에 찬 손놀림으로 자신 있게 유리를 잘랐다.

얼마 후에 엔젤은 작업대에 끼워 둔 투명한 화판 위에 합판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구슬을 박는 기계로 걸어갔다. 구슬은 각각 조각하여 조립한 것을 붙여 고정시키는 공구였다.

엔젤은 작품이 완전한 구조를 갖추도록 가장 얇은 구슬을 사용했다. 구슬을 통나무 틀에 밀어 넣은 후, 틀 오른쪽 귀퉁이부터 유리를 조립해 나갔다. 1차 조립이 끝나자, U자 못으로 다음에 깔릴 구슬을 준비하기 전까지 유리를 고정시켰다.

엔젤은 일단 유리를 선택하면 유리 그 자체가 가지는 아름다움만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광을 냈다. 한조각 한조각 제 색이 나올 때까지. 조그맣게 들리던 유리 부딪치는 소리는 못을 치는 소리에 가려 사라졌다.

예고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려고 멈출 때를 제외하곤, 엔젤은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 눈물은 갓 생긴 깊은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쉽게 치료되기 힘들었다.

엔젤은 흐르는 눈물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시야가 희미해져 반짝이는 조각들을 똑똑히 볼 수 없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울고 있음을 알았다. 과거의 파편들이 엔젤의 맘속에서 새롭게 모습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깨지고 부서진 곳에 아름다움이 쌓이면서 온전한 정신이 되돌아왔다.

칠흑 같은 밤이 자취를 감추고 어슴푸레한 백랍 같은 새벽이 왔다. 여명이 작업실을 붉게 물들였다. 엔젤은 자신이 방금 막 완성한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에만 정신이 팔려, 어깨 근육이 후끈거리는 것도, 눈물을 닦아 내느라 셔츠 소매가 더러워진 것도 알아채지 못했고, 새벽 햇살이 방 안을 비추기 시작한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엔젤은 마지막으로 시멘트를 섞었다. 그건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작품이 풀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엔젤은 완성된 스테인드글라스에 뻣뻣한 솔로 걸쭉한 시멘트를 발라 유리, 구슬, 틀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시멘트를 다 바른 후에는 톱밥을 쏟아 부어 남은 시멘트를 흡수하게 했다. 그러고는 시멘트가 마르기 전에 뾰족한 나무 연장을 쥐고 구슬과 유리가 연결된 부분을 꼼꼼히 살피면서 구슬들을 파냈다.

이로써 엔젤의 창조물은 깔끔하고 우아한 윤곽을 가진 예술품이 되었다.

이제 태양은 완전히 자신의 빛을 세상에 흩뿌렸다. 하지만 엔젤은 여전히 그 아름다운 빛을 보지 못했다. 데리가 눈을 비비며 들어올 때까지 그 방엔 유리 위로 나무가 끽끽거리는 소리만이 전부였다.

"엔지 누나, 이게 무슨 일이죠? 왜 낚시하러 안 갔어요?"

 

15

엔젤은 어둠이 사라지고 온통 밝은 빛으로 가득한 방을 둘러보며 깜짝 놀랐다.

아침이었다.

긴장이 좀 누그러졌다. 본래 첫째 날이 가장 견디기 힘든 법이었다.

엔젤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몇 시간 만에 처음으로 작품 이외의 사물에 눈길을 돌렸다.

데리가 목발을 짚고 다가왔다.

"누나, 얼마나 일을 한 거예요?"

"잠시."

엔젤은 얼버무리고는 다시 스테인드글라스로 고개를 돌렸다.

"거의 다 끝냈어."

사실 한 시간 전에 이미 완성했다. 엔젤은 자신이 만든 작품의 윤곽을 다시 한번 더듬어 보고 싶을 뿐이었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자신의 꿈과 만나, 색채나 형태에서 흠 하나 없는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변한 것이 흐뭇했다.

데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밤새 일한 게 틀림없죠?"

엔젤은 제대로 말을 못하고 웅얼거렸다.

"엔지 누나?"

엔젤은 한숨을 내쉬었다. 호크를 안내하러 나간 사람이 집에 있는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그래, 밤새 일했어."

"한동안 밤새 일하지 않았잖아요."

"그랬지."

"누나, 무슨 일이죠? 어젯밤이 사고가 났던 그 밤이기 때문이에요? 3년 전……."

데리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엔젤은 잠시 망설였다. 그 사고를 애도하고 있다고 데리를 믿게 하는 편이 수월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그래. 하지만 주요한 이유는 너의 호크 씨와 내가 눈곱만치도 잘 지낼 수 없기 때문이야."

엔젤은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데리의 눈을 마주 보았다. 데리의 푸른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일이 생긴 거죠?"

갑자기 데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호크 씨가 누나에게 집적댄 건 아니겠죠?"

데리가 갑자기 진지하고 어른스러워졌다. 엔젤은 호크라는 남자의 표정을 그대로 모방한, 빈정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집적댔다고? 그 정도의 사적인 일은 아니야. 호크라는 사람에게 사적인 구석이라곤 전혀 없어."

엔젤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아 자신 있게 말했다. 집적댔다는 것은 원치 않는 관심이란 뜻을 내포했다. 호크의 접촉이 원치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에 사적인 어떤 것이 개입되지도 않았다. 그 단어의 깊은 의미로 보면 말이다. 사적인 사건이 될 만큼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서로에 대해 품고 있었던 깊은 오해의 골이 그 증거였다.

데리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우린 사고방식이 너무 달라."

엔젤은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데리는 영문을 몰라 엔젤을 쳐다보았지만 엔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죠?"

궁금해진 데리가 끈질기게 물었다.

"여성 혐오주의자란 말을 들으면 생각나는 게 없니?"

엔젤은 빛나는 유리 조각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글쎄요."

"호크는 여성 혐오주의자야. 그 남자는 여자들을 불신하고 증오해. 난 여자야. 따라서 날 불신하고 증오하지. 난 호크 씨의 주위를 어른거리기가 불편했어. 그 사람 역시 내가 주위에서 맴도는 걸 싫어하고……."

데리는 자기 앞에 선, 온갖 슬픈 기억에 젖은 가냘프고 지친 여인을 증오하고 불신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아연 실색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어쩔 수 없는 사실이야. 무전으로 칼슨을 불러. 브라운스 만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호크에게 같이 낚시하자고 제안했거든."

엔젤은 힘없이 말했다.

"그랬어요? 두 사람이 벌써 친해졌나 봐요."

"안 그럴 이유도 없잖니? 칼슨은 남자 중의 남자인데……."

엔젤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는 잠시 침묵한 채 감정을 조절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멨다.

"칼슨이 안 되면 다른 사람이라도 불러야지."

엔젤은 단호한 어조로 말하면서 데리에게서 고개를 돌리다 갑자기 멈췄다.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베일처럼 엔젤의 얼굴을 덮었다. 호크가 작업실 문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엔젤은 호크가 들어오는 소릴 듣지 못했다. 호크는 독수리가 투명한 바람의 흐름을 타고 치솟을 때 내는 소리 이상은 내지 않았으니까.

미간을 잔뜩 찌푸린 호크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고, 표정은 뜨거운 햇살로도 녹지 않을 만큼 차가웠다.

호크가 엔젤과 자신의 대화를 엿들은 사실을 깨달은 데리가 '제기랄' 하고 중얼거렸을 때도 호크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엔젤, 난 당신 옆에 있는 걸 싫어하지 않소. 그러고 보니 당신은 내가 미움 받는 걸 즐기는 이상으로 미워하는 걸 즐기나 보군."

호크는 사무적인 어조로 낮게 엔젤을 나무랐다.

데리는 움찔 놀라 숨을 죽였다.

"실례해요. 난 잠을 좀 자야겠어요."

엔젤은 호크를 쳐다보지 않은 채 그 앞을 홱 지나갔다. 그러고는 호크의 등 뒤에서 조용히 침실 문을 닫아 버렸다. 문을 닫는 소리가 집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엔젤은 비틀거리며 벽에 기댔다. 눈물이 줄줄 흘렀으나 개의치 않았다. 신경 쓸 만한 여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신발을 벗어 차 버리고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엔젤은 한순간에 잠에 빠져 들었다.

깨어나 보니 오후였다. 밝은 황금빛이 방 안을 그득 채우면서 제멋대로 흩날리는 먼지를 조그만 금빛 섬광으로 바꿔 놓았다.

몸을 쭉 뻗다가 어깻죽지에 고통을 느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낚싯바늘로 생긴 작은 상처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모든 일들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막 잘라 낸 유리 조각처럼 그때 일들이 마음을 갈가리 찢었다. 엔젤은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는 이런 아픔에 저항하려 하지 않으려 잠시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한밤중이든 대낮이든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자신이 가장 약해진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비몽사몽 상태에서는 쉽게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문제는 더욱 악화되게 마련이고…….

아픔은 여전했으나, 고맙게도 그 순간은 금방 지나가 이성적으로 다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엔젤은 덮고 있던 가벼운 누비이불을 들춰냈다. 자신이 잠에 곯아떨어질 때는 이불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갑자기 멈칫했다. 이불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손님방에 있던 것이었다.

엔젤은 데리가 자신에게 덮어 줄 누비이불을 가지러 가려고 목발에 매달려 힘겹게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리며 살며시 웃음 지었다. 데리는 그 사고 이후 너무도 세심하고 자상하게 신경을 써 주었다.

데리의 사려 깊음에 엔젤은 마음이 편안해지고 어떤 일이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솟았다. 샤워를 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더욱 시원해졌다.

엔젤은 소매 가장자리에 주름을 넣은 촉감 좋은 장밋빛 긴 원피스를 입었다. 어깨끈에는 은빛 방울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과 조화를 이루어 오른쪽 발목과 왼쪽 손목에 찬 반짝거리는 한 쌍의 은방울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작은 소리를 냈다. 같이 짝을 이루는 귀고리 역시 머리카락 사이로 살며시 속삭이듯 달랑거렸다.

2년 전 적막한 시애틀의 집에서 질식할 것 같아 그 옷과 장신구를 샀었다. 머리를 빗을 때 기분 좋게 울리는 방울 소리는 햇살에 반사된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소리와 어울려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엔젤은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며 잠시 주저했다. 화장을 해서 창백한 피부와 눈 밑의 푸르죽죽한 그림자, 마른 입술을 숨길까 하다 곧 포기하고 거울에서 얼굴을 들었다.

'무슨 상관이람.'

화장으로 속이기엔 데리가 엔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호크는……, 알다시피 여자를 증오하는 그런 남자였다. 그리고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바보 같은 여자이고.

'한 번에 한순간만. 딱 한순간만 생각해야 해.'

엔젤은 맨발로 응접실로 내려갔다. 자신에게만 들리는 경쾌한 방울 소리가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언제나처럼 손님방 쪽에서 호크의 저음이 들려왔다. 또 전화를 붙잡고 있을 것이다.

엔젤은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흘깃 보았다.

'3, 서두르지 않으면 물때를 놓칠 거야! , 대수로울 게 뭐 있어. 이제껏 무수히 물때를 놓쳤어. 모든 것을.'

데리는 안뜰에서 단어보다는 공식이 더 많은, 제 다리에 한 깁스보다 더 두터운 책을 읽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가 산들바람에 헝클어진 모습이 마치 열일곱 살 학생 같아 보였다. 데리는 골몰하여 얼굴을 찌푸린 채 노란색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있었다.

엔젤은 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살그머니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믈렛과 토스트를 준비하고, 공부하는 동안 늘 데리의 동반자였던 블랙커피를 한 잔 따랐다. 그러곤 조리대 앞에 선 채 배를 채웠다. 식욕이 당겨서라기 보단 습관적으로, 그리고 음식이 주는 힘이 필요해서 먹었다.

호크가 소리 없이 들어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챘다. 문에서 등을 돌린 채 서 있었지만 그 남자의 존재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엔젤은 마지막 오믈렛 조각을 얼른 먹어 치우고 쟁반을 헹궜다.

호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몸을 돌려 정면으로 그를 보았다. 피하면 피할수록 두려움만 더 커진다는 사실을 과거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두려움에 용감히 맞설 때만이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는 것이다.

"칼슨과 언제 만나죠?"

목소리가 무척 담담했다.

"안 만날 거요."

호크는 차갑고 성난 눈길로 엔젤의 표정을 살폈다. 엔젤이 이토록 차분하고 낯선 시선을 보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데리가 블랙 문에 수신을 보내 보니, 칼슨은 알래스카로 가는 중이었소. 분명 연어가 집결해 있을 거요."

엔젤이 긴 속눈썹을 내리깔자 눈 밑의 거무스름한 기운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정말 안됐군요. 칼슨과 동행하면 즐거울 텐데. 그래서 데리가 누굴 소개해 주던가요?"

"아무도 안 해줬소."

그 말에 깜짝 놀라 엔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멋있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뒤로 귀고리가 짤랑거렸다. 호크는 예상치 못한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져 엔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엔젤이 얼른 뒷걸음질 치자, 또 한 번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크는 엔젤이 숨을 쉴 때마다 살며시 흔들리는 은빛 방울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나무 바닥 위에서 쿵쿵거리는 데리의 목발 소리는 거의 충격적이었다. 엔젤은 호크의 강렬한 눈초리에서 벗어나는 게 내심 반가워 그 형편없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훨씬 좋아 보이는데요. 기분이 어때요?"

데리가 엔젤을 보고는 활짝 웃었다.

"좋아."

걱정해 주는 데리에게 보인 반응 치고는 너무 퉁명스럽고 냉정하다고 느꼈는지 엔젤은 바로 덧붙였다.

"이불을 가져다 줘서 고마워."

"이불요?"

데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엔젤이 시선을 호크에게 돌렸지만 호크는 먹이를 찾는 허기진 독수리처럼 강렬한 시선으로 엔젤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엔젤은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가까스로 찾은 평화가 갑자기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호크도 좀 미안했나 보지? 아마 죄의식이겠지. 당연한 거야.'

"공부는 어떻게 돼 가니?"

엔젤은 혼란스런 생각을 접어 둔 채 화제를 바꿨다. 데리가 픽 웃었다.

"별 진전이 없어요. 근데 누나!"

데리는 망설이며 애정과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엔젤의 시선을 좇았다. 그러고는 어물쩡거렸다. 엔젤은 데리에게서 들을 말을 예상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

"칼슨이 호크를 안내할 수 없게 됐어."

"알고 있어."

"다른 사람들도 일주일 정도는 짬이 나지 않는대. 설령 시간이 있대도……."

엔젤은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리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도 엔젤을 부담스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엔젤은 4주간 호크에게 받을 멸시를 뿌리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데리의 꿈을 성취할 발판을 닦는 데 자신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평생을 안타까워하며 살게 될 것이다.

'4주간 호크의 경멸을 받는 것과 평생 자책을 느끼는 것,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까?'

"됐어, 내가 해줄게."

엔젤이 침착하게 말했다. 데리는 목발에 몸을 축 늘어뜨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창백해진 엔젤의 얼굴을 보고는 걱정스러운 맘을 감추지 못했다. 무거운 몸을 목발에 의지한 채 방을 가로질러 엔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엔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누나? 얼굴이 창백해요. 요즘 독감이 돌아다닌다는데……."

이번에도 데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을 엔젤에게 부탁할 수 없었다.

엔젤은 눈을 꼭 감고 데리의 커다란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에 힘을 얻었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정말 괜찮아."

호크는 엔젤과 데리 사이에 흐르는 관심과 애정을 보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저 귀여운 데리가 엔젤에게 무슨 영향력이 있길래 엔젤이 자기가 증오하는 남자와 4주간이나 한배 안에 갇혀 있을 결심을 했는지 궁금했다.

호크는 불현듯 엔젤에게서 그 대답을 얻어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열여덟 살 이후로 여자를 크게 잘못 판단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고 싶었고, 알아내야만 했다. 엔젤의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에 이젠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데리가 숨은 엔젤을 드러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라면 데리를 이용해야겠지.'

"내가 동의할지 물어 봐야 하지 않니?"

깜짝 놀란 데리는 몸을 돌려 호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엔젤과 이야길 좀 해야겠어. 얘기가 끝나면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마음을 바꿔야 할 거야."

호크는 눈썹을 치켜뜨고는 사냥을 하는 새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엔젤에게 고정시켰다.

"그렇지 않소, 사랑스런 아가씨?"

데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채찍으로 휘갈기듯 매서운 말투였다. 데리는 걱정스럽게 엔젤을 바라보았다.

엔젤은 데리의 팔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런 말투가 처음이 아님을 눈빛으로 알려 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결심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데리의 꿈을 파괴시키기엔 자신이 너무 데리를 사랑했으니까.

"틀렸어요, 호크 씨. 당신 자신이 야기시킨 다른 모든 일처럼요."

엔젤은 호크에게 또박또박 자신의 뜻을 전하고 급히 그곳을 피했다. 조그맣게 딸랑거리는 은 귀고리와 자신의 발소리, 그리고 단 한마디만을 뒤로 하고.

"해변에서 얘기하죠."

엔젤의 매서운 말투는 호크의 말투였다.

 

16

엔젤은 뒷문 옆에 항상 보관해 둔 헐렁한 해변 산책용 운동화를 질질 끌면서, 한 손에 치맛자락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갔다. 길이 무너져 내려 갈라지고 험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솔길은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사실 그 길은 비가 왔을 때나 바람이 불 때를 제외하곤 그리 위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이나 길에 서툰 사람에겐 쉬운 길이 아니었다.

설령 오솔길이 상당히 위험했다 하더라도 엔젤은 이 길을 택했으리라. 어떡하든 데리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로 호크를 데려가야 했으니까.

칼슨처럼 데리도 엔젤을 보호하려고만 했다. 생명을 구해 준 것과 마찬가지로, 엔젤이 겪을 어떤 고통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인생에 따르는 쓰디쓴 순간마다 엔젤을 따라다니며 보호할 수는 없겠지만, 데리는 그렇게 하고 싶은 충동이 늘상 마음에서 불타고 있었다.

엔젤은 그런 데리의 죄의식을 자기 탓이라 생각했다. 3년 전,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워 자기를 살게 만든 이기주의자라고 엔젤은 데리를 비난했었다. 잔인한 비난이었지만 그땐 그럴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이제 엔젤은 자신의 독설을 후회했다. 이젠 자신이 데리를 보호해야 할 때였다.

엔젤은 숲과 바위를 벗어나 해변으로 빠져 나가는 구부러진 길을 달려 내려갔다. 그날은 밴쿠버 섬의 날씨 치고는 지나치게 더웠다. 오솔길을 벗어날 때쯤엔 옷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해변에 도착하자 엔젤은 잡고 있던 치맛자락을 놓았다. 옷자락이 바람에 날려 다리에 감기면서, 부드러운 천 밑으로 날씬한 다리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옷주름이 뒤로 가볍게 부풀어 올라 모래 위에 우아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엔젤이 숨을 채 돌리기도 전에 호크가 곁에 와 섰다. 엔젤은 호크가 자신과 같은 속도로 오솔길을 내려왔다는 사실이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호크는 독수리처럼 날렵한 사람이니까.

몸을 틀어 호크를 마주 보았다. 주름 장식이 바람에 펄럭이며 호크의 몸에 닿았고, 작은 방울들의 짤랑거리는 소리가 호크의 귀를 자극했다.

호크의 몸속에 욕망이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무엇, 자신에게 남아 있는 모든 확신을 위협하는 어떤 것까지도. 그래서 공격했다. 궁지에 몰렸을 때마다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데리에게 덜미 잡힌 게 뭐요? 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면서, 데리가 부탁한다고 한 달간 나와 보트 안에 갇혀 있을 생각을 하다니……. 제기랄, 데리는 당신에게 부탁할 필요조차 없지 않았소?"

"맞아요. 하지만 난 내가 해줄 수 있는 걸 데리가 먼저 부탁하는 일이 없길 바래요. 그리고 데리에게 덜미 잡힌 거 없어요."

단호한 어조였다.

"그럼 데리가 당신을 구속하고 있는 게 뭐요? 돈이오?"

엔젤은 입가에 경멸스런 웃음을 머금었다.

"아녜요."

"그럼 뭐요?"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호크는 엔젤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손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천 조각과 육체가 자신을 더욱 화나게 했다.

"대체 그게 무엇이오, 젠장!"

호크가 이를 갈았다.

"사랑이에요."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사랑?"

호크의 목소리는 불쾌감으로 떨고 있었다. 사랑이란 단어는 그에게 한마디로 저주스런 말이었다.

"그 말은 여자가 섹스에 대해 하는 말이오. 그런데 당신은 데리에게서 그걸 얻지도 않았잖소. 귀여운 엔젤, 뭐가 거짓말이오? 사랑이오, 아니면 데리와의 섹스를 원하지 않는 거요?"

엔젤은 잠자코 호크를 쳐다보았다.

"대체 데리에게 빚진 게 뭐요? 말해요, 망할 여자 같으니! 당신 거짓말 좀 들어 봅시다."

호크는 집요하게 따졌다.

엔젤은 생판 처음 보는 이를 보듯 호크를 쳐다보았다.

"이제껏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나요? 어머니, 아버지, 형제, 누이, 아이들, 누구라도?"

"데리가 남동생이라는 말을 하는 거요?"

"비슷하죠."

엔젤은 호크의 차가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비슷한 거요?"

"스물네 시간요."

호크는 주춤했다. 마치 그 대답이 무엇을 말하는지 자신이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듯한 어조로 말을 하지 않는가.

"이해가 안 되오."

호크는 엔젤을 잡고 있는 팔에서 힘을 뺐다.

"알아요.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날 몰아 대지 마시오. 안 가르쳐 주면 데리에게 물어 보겠소. 그리고 그 어린애가 알아선 안 될 일도 말해 주고."

이미 굳어진 표정을 더 일그러뜨리며 호크는 벌컥 화를 냈다.

엔젤은 눈을 꼭 감았다. 이 남자는 자기를 파괴했듯이 데리의 꿈도 쉽사리 망가뜨릴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 없어야 돼!

"데리는 스물네 시간 안에 내 시동생이 될 뻔했어요."

공허한 엔젤의 목소리에 호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랜트, 그게 그 사람의 이름이 맞죠? 그랜트?"

"맞아요."

"무슨 일이 생긴 거요?"

"죽었어요."

"언제."

엔젤은 노골적인 호크의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언젠가는 생길 거라 짐작했었다. 절벽을 내려오며 엔젤은 끊임없이 이 질문에 준비를 했다.

'호크에게 사실을 말하면, 4주 동안 동정심 때문에라도 날 심하게 괴롭히진 않을 거야. 잠시 휴전이 될 수도 있어.'

엔젤은 용기가 생겼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는 마음속에 가지각색의 빛을 모아 한 송이 장미를 그려 보았다.

"그랜트는……."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 이름을 들으면 다시 옛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에 엔젤은 한동안 그랜트의 이름을 소리내 부른 적이 없었다.

엔젤은 흥분이 가라앉고 냉정을 되찾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랜트는 4년 전 어젯밤에 죽었어요. 결혼식 전날이었죠. 그랜트의 부모님, 제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셨죠."

호크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자신이 지금 듣고 있는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차라리 거짓말을 들었다면 좋았을걸……. 거짓말은 쉽게 무시하고 잊어버릴 수 있지만 진실은 그럴 수 없었다. 진실은 사람을 괴롭혔다. 그 사실이 호크를 괴롭혔다.

엔젤의 고조된 감정이 분노와 무기력, 고통으로 출렁이며 호크의 머리 위에서 깨져 내렸다. 하지만 엔젤의 목소리나 얼굴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그늘진 눈만이 바윗덩이에 갈가리 찢기는 파도와 같은 색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엔젤은 차가운 말투로 하던 말을 계속했다. 눈은 말라 있었다. 몸에 매달려 있는 조그만 방울들이 흔들거리며 비정한 아름다움과 아픔을 호소하며 짤랑거렸다.

"저도 죽었을 거예요. 데리가 화염에 쌓인 차에서 날 구해 내지 않았다면요. 전 심한 화상을 입었는데 데리는 날 살려 내려고 무척 애를 썼죠. 그 후 다시 걷게 될 때까지 데리가 날 극진히 돌봐 주었어요."

"그럼 도대체 왜 데리와 자지 않은 거요?"

조용한 엔젤의 음성에 격한 감정이 흐르는 걸 느낀 호크는 화가 나서 퉁퉁거렸다.

"우리가 서로에게 느끼는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에요."

호크는 잠자코 엔젤의 설명을 계속 기다렸다.

엔젤은 호크를 응시했다. 그 눈에는 따뜻함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을 이해시켰는지 모르겠군요. 데리는 나와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어린 시절, 부모님, 그랜트, 그리고 여름 해변에서의 야유회……. 즐거운 웃음소리, 벽난로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그리고 난생 처음 느껴 본 사랑의 아름다움. 데리는 그날 밤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우리의 약혼 발표와 맹세 그리고……."

"추모 사당이라도 세우지 그랬소?"

호크가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이미 죽은 사람이긴 했지만 엔젤이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생각에 어이없는 분노가 꿈틀댔다. 그 분노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엔젤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부르르 떨리는 분노를 겨우 진정하고 고른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참 말을 잘 만들어 내는군요. 전 아주 손쉬운 사냥감이었죠, 그렇지 않아요?"

"어젯밤 항해를 포기하고 집으로 달려온 이유가 그 때문이오? 나랑 다시 자게 될까 두려워서?"

호크의 얼굴에는 거친 표정이 떠나지 않았다.

"아뇨, 난 다시 당신과 자게 되는 게 두렵지 않아요.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 줘 봤자라는 걸 알게 됐을 뿐이에요."

"당신의 처녀성이 진짜 진주였단 말이오?"

호크가 비아냥거렸다.

"아뇨,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당신이 진짜 돼지였으니까요."

잔인한 침묵의 순간이 흘렀다. 잠시 후 호크가 낮고도 험악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왜 내게 몸을 주었소, 엔젤? 당신이 준 거지 내가 뺏은 건 아니었소. 아니면 스스로 위안이라도 삼으려고 데리에게 거짓말을 한 거요? 당신은 불쌍한 여자요. 노련한 이 호크에게 당신이 당했으니."

엔젤은 어젯밤 마음껏 울었던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눈물을 참을 수 있으니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가슴 아픈 질문이 왜에서 어떻게로 바뀌었다.

'내가 어떻게 이 남자를 그토록 잘못 판단했을까?'

그 대답이 떠오르자, 엔젤은 서슴없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어리석었죠. 사랑을 욕망과 혼돈한 거예요. 결과는 그 어떤 것도 아니었어요."

호크의 눈이 커지더니 실눈이 되었다. 눈동자가 깊고 선명한 갈색 눈 속에서 새까만 점처럼 보였다.

자신이 습관적으로 빈정거리며 사랑이 어쩌고 할 때처럼 엔젤은 그 말을 사용했다. 호크는 할 말을 잃었다. 일찍이 자신이 몹시 상처를 받았듯이 지금 자신이 엔젤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말이 아닌가.

갑자기 호크는 몹시 괴로워졌다. 엔젤이 그토록 끔찍하게 상처를 입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 정도로 상처를 받으려면 우선 사랑했어야 하니까.

하지만 호크는 열여덟 살 이후로 사랑을 믿지 않았다. 자신을 위한 사랑은 물론 그 누구를 위한 사랑도.

"더 질문할 게 없나요?"

엔젤은 차분하게 물었다.

호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좋아요, 낚시하러 가죠."

말투가 사무적이었다.

차분하고 냉기 어린 엔젤의 어조가 호크를 아프게 했다. 호크는 시무룩해서 말했다.

"바다처럼 차갑군요."

엔젤은 눈앞에 펼쳐진, 구름이 잔뜩 낀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다보았다.

"바다는 차갑지 않아요. 바다는 생명으로 충만해 있죠. 하지만 난 독수리처럼 차갑죠. 삶이 아닌 죽음으로 가득 찬 독수리. 오늘 오후에 낚시하러 갈 생각인가요?"

"당신 목이라도 분질러 놓고 싶군."

"그건 유감스럽군요. 목은 아직 부서진 적이 없는 유일한 부분인데."

호크는 엔젤 쪽으로 몸을 굽히며 갑자기 상냥하게 말했다.

"당신의 마음은 포함 안 시키오?"

"내 마음은 당신을 만나기 오래 전에 부서졌죠."

"엔젤……."

따뜻한 호크의 음성이 엔젤의 관자놀이를 스쳐 지나갔다. 엔젤은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올라 자신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그런 식으로 날 부르지 마세요."

엔젤은 단호하게 말했다.

"왜요? 그가 엔젤이라 불러서 그러오?"

"그라뇨?"

호크는 코를 벌름거렸다. 그리고 엔젤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를 맡으려고 더 바싹 엔젤 곁으로 다가섰다.

"당신이 사랑했던 그 남자, 데리의 형 말이오."

호크의 몸에서 나오는 위험한 열기가 느껴져 엔젤은 얼른 뒤로 물러섰다.

"서두르지 않으면 물때를 놓치겠어요."

"대답하시오."

엔젤이 고개를 홱 돌리자 작은 방울들이 짤랑거렸다. 엔젤이 아주 작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바로 곁에 선 호크에게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랜트는 엔지, 귀여운 사람, 자기, 사랑하는 사람, 우리 아기라 불렀어요. 나만의 태양, 숨겨 놓은 나의 사랑, 나의……."

"하지만 그와 자진 않았잖소."

더 이상 듣고 있기가 싫어 호크는 거칠게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요.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그랜트를 향한 내 사랑 중 가장 슬프고 아픈 부분이라구요. 오 하느님, 내가 그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엔젤은 멈추려고 했으나 거침없는 말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애써 다시 쌓아 올린 평화가 그 말들 때문에 부서져 버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특히 지금!"

엔젤은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호크는 놀라 '' 하고 숨을 멈췄다. 엔젤은 자기 품안에서 보낸 비참한 첫날밤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엔젤은 여전히 말을 계속했다. 너무 낮은 음성이어서 단어 하나를 알아듣는 데도 집중을 해야 했다. 호크는 엔젤의 말을 들으며, 아직 아물지 않은 자신의 상처에 갈고리가 헤집고 들어가 연약한 속살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랜트가 죽을 줄 알았더라면 그와 잤을 거예요. 하지만 그때 난 어렸어요.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했어요, 평생토록. 그런데 그랜트는……."

엔젤은 감정이 복받쳐 목소리가 떨렸다. 그랜트의 이름을 입 밖에 내면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그랜트는 날 위해 첫날밤을 완벽하게 치르고 싶어 했어요. 우리 둘만의 집, 우리 둘만의 침대……. 멋진 사랑을 나눌 모든 권리를 느긋하게 누리길 원했죠."

호크는 색욕과 분노에 휘말려 엔젤을 범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돌이킬 수 없듯이 그 순간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바꿀 수 없는 일로 자책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꿀 수 있는 것, 남아 있는 것은 미래였다. 지옥을 경험한, 찢긴 날개를 단 푸른 눈의 천사와 표독스런 검은 발톱으로 천사의 따뜻한 몸을 꿰뚫은, 천국을 알지 못하는 독수리.

호크는 과거는 접어 두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치료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과거에서 배울 수는 있었다.

그건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실수를 통해 배워가는 것.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소. 엔젤이라 부르는 걸 왜 싫어하는 거요?"

호크는 담담하게 다시 되물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엔지라 불러요. 왜 당신만 유독 엔지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하죠?"

"처녀성을 내게 준 건 특별한 게 아니오?"

"당연히 그래야겠죠. 하지만 이젠 그것도 우습게 끝났죠. 그러니 전혀 알 바 아니죠."

엔젤이 호크를 흉내내듯 비아냥거렸다.

"계속 날 시험해 보시오. 그럼 내 한계를 보게 될 테니."

호크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강조하며 단언했다.

엔젤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호크의 한계를, 그가 상처 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듯이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내가 당신의 한계를 보는 게 어떻다는 거죠? 나 같은 사람하고 말다툼할 생각 마세요, 호크. 난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이니, 그 점에선 내가 우세하죠."

"그럼 데리는 어떻게 되지?"

호크는 능청스럽게 말하고는 엔젤의 표정을 살폈다.

엔젤은 고통에서 새어 나온 자신의 잔인성에 갑자기 제동을 걸었다. 자신이 뱉어 낸 면도날에 베여 주위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지독한 쾌감을 주는지 잊고 있었다.

하지만 잔인성은 더욱 심한 잔인성을 낳을 뿐이었다. 주위 사람들을 망쳐 놓고,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자기 파괴의 소용돌이 속으로 자신을 추락시킬 것이다.

과거의 교훈을 잊었음을 깨닫자 엔젤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얼굴에 점점 핏기가 가셔 고뇌에 찬 눈빛을 제외하곤 완전히 창백해졌다.

'호크 때문에 나를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해. 데리를 망치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아.'

"엔젤은 사고가 발생한 후 내가 지은 이름이에요.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호크는 낮고 확고하고 무감동한 엔젤의 목소리에서 냉기를 느꼈다.

"한때 죽었던 어떤 것이 소생하여 천사가 돼죠. 나처럼 살아 있다가 죽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거죠."

호크는 엔젤을 팔에 안고 싶은 욕구를 애써 참았다. 하지만 손을 옆구리에 붙이고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엔젤이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자신을 공격하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크는 엔젤을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잔인한 상처를 주고 치료를 해주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니까. 자신이 엔젤에게 준 것이라곤 공허함과 사랑에 대한 깊은 호기심뿐이었다. 약하고 부질없는 감정이란 걸 알면서도.

호크는 다시 질문들을 퍼부었다.

"데리를 위해서라면 다시 나랑 자겠소?"

엔젤은 호크의 질문이 욕망보다는 호기심에 더 가까움을 알아차렸다.

"날 원하지 않잖아요. 그러니 그 질문은 성립이 안 돼요."

"어째서 내가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요?"

엔젤은 기가 막힌 듯 '' 하고 코웃음을 쳤다. 호크를 바라보는 눈빛이 비취처럼 차가웠다.

"보트에서의 참사를 나만큼이나 즐기지 않았잖아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다리 걸어 마루에 넘어뜨려 놓고 때리진 않을 테니. 앞으로 서툰 짓은 안 할 거예요. 장담하죠."

엔젤은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여 호크의 금시계를 들여다보았다.

"20분 내로 조류가 바뀌겠어요. 어느 쪽을 선택하겠어요, 호크? 낚시? 아니면 미끼 자르는 일?"

", 난 항상 낚시만 할 거요."

호크는 엔젤의 원피스를 통해 스며 나오는 온기를 느낄 정도로 몸을 굽혔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하지만 엔젤의 몸에는 닿지 않을 정도로.

"정말 날 사랑했다고 생각하시오, 엔젤?"

마음속에 품었던 스테인드글라스 장미가 갑자기 수천 개의 파편이 되어 흩어져 버렸다. 갑자기 호크 곁에 있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엔젤은 몸을 돌려 오솔길로 달렸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은방울들이 애처롭게 울어댔다. 그 듣기 좋은 소리는 살짝 몸을 피할 수 없었던 한방의 일격처럼, 벌어진 상처처럼, 어떻게 피를 흘리는지 가르쳐 준 낚싯바늘처럼 호크의 귓전을 때렸다.

호크는 엔젤이 좁은 길에서 넘어질까 걱정하며 뒤쫓아 뛰기 시작했다. 날개를 찢겨 더 이상 날지 못하고 추락하는 천사를 떠올리며.

거리를 좁혀 호크가 엔젤을 붙잡았지만 엔젤은 사랑에 대한 호크의 질문에 대답을 거부하며 침묵만 지켰다.

호크는 다시 묻지 않았다. 엔젤이 자기만큼이나 고통스런 진실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17

"내가 들겠소."

호크는 평방 60센티미터나 되는 무거운 스테인드글라스 틀을 엔젤의 손에서 건네받았다. 엔젤은 순순히 응했다. 반대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호크는 자신에 비해 월등하게 민첩하고 힘이 센데…….

엔젤은 캐리 부인에게 줄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대강 훑어보는 호크를 쳐다보았다. 대낮이라기보단 황혼이 질 때처럼 응접실은 침침했다. 그래서 유리들도 값싼 종이 위에 칠해 놓은 크레용처럼 평범하고 무딘 색깔로 변해 있었다.

호크는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손에 든 유리에 광채가 쏟아졌고, 갖가지 색채들이 여기저기서 번뜩이더니 잔잔하게 흩어져 퍼져 나갔다.

찬란한 색채에 기가 질린 듯 호크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 있었다. 일 분, 이 분, 삼 분, 계속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호크는 시간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유리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세웠다가 다른 쪽으로 돌려 보았다. 손 안에 쏟아져 들어오는, 황홀하고 육감적이고 다채로운 색채에 넋을 잃고서.

마침내 고개를 들고 자기를 지켜보는 엔젤을 바라보았다.

"내가 스테인드글라스를 사랑하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스테인드글라스는 생명 같아요. 비추는 각도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죠?"

호크의 손아귀에서 반짝이는 광채를 바라보며 엔젤이 말했다. 그 말이 호크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 엔젤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호크가 눈치 채지 않길 바라며 엔젤은 현관문을 조용히 닫았다.

"내 인생관이 너무 어둡다는 말을 하려는 거요?"

호크가 조용히 물었다. 엔젤의 말을 듣기만 한 게 아니라, 그 말의 미묘한 뜻도 이해했던 것이다.

'예상했어야 했어. 호크는 머리가 비상하고 영리하니까.'

"아뇨. 스테인드글라스와 빛의 성격에 대한 내 의견을 말했을 뿐이에요."

엔젤은 호크를 외면한 채 차를 향해 걸었다. 해변에서 호크와 대화를 나눈 이후 3일 동안 개인적인 냄새를 풍기는 화제는 조심스럽게 피해 왔다.

"나를 빗댄 말이 아니라는 말이오?"

호크는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

", 당신을 빗댄 말이 아니었어요."

엔젤은 차 트렁크를 열고 낡은 누비이불을 들추더니, 호크에게 유리를 그 위로 얹으라고 손짓했다.

"이런 건 값이 얼마나 나가오?"

호크가 물었다.

엔젤은 그 골치 아픈 유리를 쉽게 다루는 호크를 부러운 눈초리로 지켜보았다. 호크가 힘 있고 유연하고 단단한 육체에 남성적인 우아함을 보이며 움직일 때마다, 엔젤은 새삼 놀라곤 했다.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호크는 조명의 각도와 움직임, 조명의 방향이 변경됨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그리고 유리처럼 단 한 번의 부주의에도 자신을 뼛속까지 베어낼 사람이었다.

"이처럼 작은 작품은 천에서 2천 달러 정도 나가죠."

엔젤은 날랜 손놀림으로 스테인드글라스를 이불로 싸며 말을 이었다.

"화랑으로 나가는 수수료와 재료값은 물론 제외하고요. 좋은 유리는 무척 비싸거든요."

엔젤은 트렁크 문을 닫았다.

"밴쿠버 화랑에는 작품이 몇 점이나 전시되어 있소?"

"스물세 점."

엔젤은 차 열쇠를 찾아 지갑을 뒤적거렸다.

"다 팔았소?"

동그래진 엔젤의 눈이 크리스털처럼 맑은 호크의 갈색 눈에 박혔다.

"세 점을 제외하고요."

"팔린 작품은 작은 것들이오?"

"아뇨. 꽤 큰 것들이죠. 그런데 왜 묻죠?"

호크는 엔젤의 궁금증을 무시했다.

"한 해에 전시회는 몇 번이나 하죠?"

지갑에서 열쇠를 꺼낸 엔젤은 의아한 듯한 눈길로 호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말싸움을 하는 것보다 대답하는 게 수월했다. 호크가 관심을 가져도 별로 상관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돈은 안전한 이야깃거리였다. 그건 감정적인 것처럼 사적이지 않았다.

"올해 세 번 했어요. 시애틀에서 한 번, 영국의 포틀랜드에서 한 번, 그리고 밴쿠버에서 한 번요."

"모두 성황리에 끝났소?"

"."

"그럼 이글 헤드에서 나오는 돈은 별로 필요치 않겠군, 그렇지 않소?"

"그래요."

"하지만 데리에겐 필요하고."

"맞아요."

"왜 그렇소?"

엔젤은 잠시 멈칫했으나 아무려면 어떠냐는 식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언제든 직접 데리에게 물어 볼 수도 있고, 비밀에 붙일 만한 일도 아니었다.

"데리는 외과 의사가 되고 싶어해요. 그 말은 6년에서 10년 정도 상급반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죠. 하버드에 합격했지만 장학금은 받지 못하죠. 법률상 데리는 부자거든요."

"이글 헤드."

"그래요."

"이제야 알겠군."

"정말요?"

엔젤은 곁눈으로 힐끗 호크를 쳐다보았다.

"이번 한 번만 부연 설명을 하죠."

엔젤은 급히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데리가 철이 없어서도 아니고 일시적인 기분으로 하는 일도 아니에요. 우리 부모님은 교통 사고로 즉사하셨어요. 하지만 데리의 부모님과 형은 아니었죠. 데리는 두 사람을 차에서 끌어냈지만, 피를 흘리며 죽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요. 그들을 살릴 재간이 없었던 거죠."

호크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눈동자는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으며, 눈 밑은 거무스름해졌다. 호크는 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엔젤의 눈에 가득 찬 수심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당신은? 데리가 차에서 끌어냈을 때 당신은 의식이 있었소?"

호크는 마침내 엔젤이 아파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물었다.

". 하지만 난 데리를 도울 수 없었어요."

호크는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몰라 고민했지만, 엔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았다. 그리고 그 대답이 얼마나 자신을 아프게 할 것인지도 알았다.

'데리에겐 호크가 필요해. 호크를 이해시켜야만 해.'

엔젤은 비통한 심정으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쇄골이 박살나고, 갈비뼈는 부러지고, 두 다리는 여러 군데 골절상을 입었어요. 데리의 어머니는 의식이 없었지만 형은 어머니보다 운이 없었죠. 난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누워 있었는데 그랜트의 고통스러운……."

엔젤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다시 말을 시작했지만, 그 한마디 한마디는, 날카로운 날로 모든 걸 찢어 버리는 가루 유리같이 아무 색깔도 없었다.

"모든 게 끝났을 때, 데리는 흐느껴 울며 피로 뒤범벅이 될 때까지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어요. 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죠."

"엔젤."

호크는 손가락으로 엔젤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괜한 질문을 했다고 내심 후회했다.

엔젤은 얼른 호크에게서 물러났다.

"그때 데리는 의사가 되겠다고 맹세했어요. 의사가 되어 자신이 구해 주지 못한 가족을 대신할, 다른 생명을 구하려고요. 그것이 어머니가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형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는 걸 멀뚱멀뚱 바라만 본 잔인한 삶과 데리가 타협한 것이었죠."

엔젤은 호크를 올려다보고 깜짝 놀랐다. 호크의 거무퉤퉤한 얼굴에 슬픔과 고통이 배어 있지 않은가.

엔젤은 호크가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데 깜짝 놀랐다.

"데리를 정말 좋아하나 보죠, 호크? 데리도 당신을 좋아해요. 그 이유는 하느님이나 아시겠지만."

엔젤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호크의 매서운 말씨를 데리가 웃음으로 넘기는 걸 엔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호크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나를 보면 그랜트 생각이 났는지 모르지요."

"당신은 데리의 형과 전혀 딴판이에요."

", 그래요?"

호크가 눈썹을 치켜 올리자, 엔젤은 화가 났다.

"그랜트는 사랑을 할 능력이 있었죠."

엔젤은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그럼 분명 사랑도 받았겠군요."

호크도 비아냥거리며 되받아쳤다.

"무슨 뜻이죠?"

"그랜트의 어머니는 그를 사랑했고 데리나 당신도……."

"그랬어요."

"그는 분명 행복했겠군요."

호크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조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서술을 하고 있었다, 사랑을 받았으니 분명 행복했겠다고.

"당신도 사랑을 받았죠, 그렇지 않소, 엔젤? 당신 부모, 그랜트, 데리, 칼슨까지도. 각자 다른 방식으로 모두 당신을 사랑했소."

"맞아요. 나도 그들을 사랑했고요."

엔젤은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은 사랑에 이어져 있지. 신기하고 친밀한 연결고리!"

호크는 독수리 발톱같이 혹독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당신 부모님도……."

엔젤은 중도에서 하던 말을 멈추고 말았다.

호크의 너털웃음이 엔젤의 말을 막았고, 엔젤의 마음을 찢어 놓았다. 엔젤은 호크를 어루만지려는 듯 손을 뻗었다.

"호크, 그만 웃으세요."

그때 호크가 말을 시작했다. 그 얘기는 웃음소리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할 당시 나를 가진 지 6개월이었소. 아버지가 나의 친아버지가 아니었던 게 문제였지. 그 당시엔 아버지도 그걸 몰랐소. 그런데 내가 여섯 살 때 어머니가 그 사실을 말했소. 어떤 떠돌이와 도망치기 전 내 셔츠에 메모를 꽂아 두었던 거지."

호크는 냉소적인 웃음을 입가에 지었다.

"멋진 수법이잖소? 아이를 남자에게 떠넘기면서 그 남자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말이오."

엔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호크의 선명하고 쓸쓸해 보이는 눈은 온통 과거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버진 날 데리고 있었소. 왜 그랬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소. 물론 젠장할 사랑 때문은 아니었소. 할머니도 우리와 함께 살았지만 사랑 따윈 보여 주지 않았소. 으음, 친절하기는 했소. 난 굶주리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날 때릴 때 허리띠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지."

허락 없이 낚시 도구를 만졌다가 실컷 두들겨 맞았다는 호크의 말을 기억하고 엔젤은 움찔했다. 그 당시에는 그저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이제 호크에 대해 좀 알 것 같았지만 마음은 전혀 편치 않았다.

"우리 어머니가 떠났을 때 난 일하는 법을 배웠소. 채소를 재배하고, 닭을 키우고, 신문 배달에다 뭐든 했소. 번 돈은 방세와 식비로 그들이 가져갔소."

"하지만 당신은 조그만 아이였잖아요."

엔젤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난 그들의 음식을 먹었소. 그들이 주는 옷을 입었고, 그들이 준 이불을 덮고 잤소."

호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그 얘기를 그만두었다. 가난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사랑을 받지 못한 건 달랐다.

"그들이 나를 이용해 배를 채우진 않았소. 우리 농장은 일이 별로 없었소. 땅은 60만 평 정도였는데, 만 평에 댈 만한 물도 없었으니까. 그곳은 건조한 서부 텍사스였소. 그 땅에서 딱 하나 좋은 것은 늘 싸움과 소동이 일어난다는 거였소. 사소한 싸움보단 큰 소동을 일으키는 게 더 재미있었소."

호크는 몸을 홱 돌리더니 엔젤의 차로 가,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

엔젤은 전혀 의심치 않았던 호크의 다른 면에 여전히 사로잡힌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서부 텍사스처럼 거친 호크의 과거.

엔젤은 더 알고 싶어졌다. 들어야 할 게 아직 더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은 소년들도 사랑을 알게 돼. 칼슨도 그 중 하나야. 어린 시절의 아픔도 호크에 못지않아. 잠자리를 얻고, 백인 사회에서 일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어. 그렇지만 칼슨은 사랑하는 법을 알아. 그런데 호크는 왜?'

호크는 운전석 문을 열고 엔젤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엔젤은 운전대 앞에 앉아 열쇠를 돌려 시동을 켰다. 엔젤이 곁눈질하는 걸 호크는 알지 못했다.

호크는 엔젤에게 문을 열어 주는 일을 제외하곤, 엔젤이 옆에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호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과거의 어떤 일에 빠져 있는지, 그 일들이 무슨 색깔을 띠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예리한 날을 세우고 있고,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었는지 엔젤은 궁금했다.

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호크가 과거를 얘기하는 순간부터 엔젤은 느낀 게 있었다. 자신에게 보여 준 호크의 색깔은 잔인할 정도로 어둡고, 오싹할 정도로 강렬했지만 대단히 유혹적이라는 것이었다.

엔젤은 아무 말 없이 캐리 부인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현관에 주차한 후 주저하는 눈길로 호크를 살폈다. 처음엔 호크가 함께 올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이젠 집 안에 들어갈 생각인지 아니면 차 안에서 기다릴 생각인지 그것이 의문이었다.

호크는 엔젤을 쳐다보았다.

"목적지가 어딘지 몰라도 도착한 것 같은데요?"

", 여긴 캐리 부인 댁이에요."

호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닌 얼마 전에 엉덩이를 다쳤어요. 그래서 직접 운전할 수 있으실 때까지 내가 식료품을 사다 주고, 의사에게 모셔다 드리고 있어요."

호크는 캐리 부인이란 이름을 듣자 미간을 좁혔다.

"캐리 부인이라, 이름을 들은 적이 있소."

"잼과 젤리요."

엔젤이 차 문을 열면서 말했다. 호크는 차에서 나와 엔젤과 함께 트렁크 문을 열고 이불에 싸인 유리를 꺼내며 물었다.

"병에 든 것 말이오?"

"아침에 크르와상에 발라 먹은 것 말예요."

호크는 알겠다는 듯 '아하' 하더니 입술을 핥았다.

"이제야 그 이름을 기억하겠군. 오늘도 잼을 좀 살 거요?"

"내가 사겠다고 하면 고양이더러 날 물어뜯으라고 할 거예요. 난 할머니가 만든 맛있는 잼을 줄곧 먹어 왔어요. 그건 선물이에요. 마지막 한 스푼까지도요."

"그래서 더 달콤했군요."

호크가 덩달아 즐거워했다. 이런 모습에 엔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호크와 함께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기대도 못한 일이었다.

"그래요."

"너무 놀란 표정을 짓지 마시오, 엔젤. 선물이 어떤 의미인지는 나도 알고 있소. 난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때마다 마음을 조이며 선물을 기다리곤 했소. 나중엔 기대도 않았지만."

엔젤은 호크의 어두운 어린 시절이 안쓰러워 눈을 감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녹색 리본이 달린 조그만 막대 사탕을 주신 적이 있었소. 난 그것을 크리스마스 아침까지 간직했소. 보통 그때쯤 애들이 받은 선물들을 펼쳐 보잖소."

엔젤은 호크가 가엾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벌판으로 나가 사람이 없는 곳까지 걸어갔소. 지금도 바스락거리는 포장지의 감촉을 느낄 수 있소. 신선한 박하 향과 녹색 리본에, 빨갛고 하얀 줄이 그어져 있는 사탕. 그건 내가 맛본 가장 달콤하고 맛있는 사탕이었지. 난 닳아서 해질 때까지 그 리본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소."

호크는 달콤하면서도 가슴 아픈 추억을 떨쳐 버리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소."

엔젤은 선물과 웃음과 사랑으로 가득했던, 자신이 보낸 크리스마스와 생일을 떠올리며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그 모든 것을 3년 전에 잃어버렸다.

'하지만 나에겐 잃어버릴 거라도 있지 않은가.'

수년간의 추억들, 수년간의 사랑.

하지만 호크에겐 드물었던 순간들-기억에서 사라져 가는 박하 향, 그리고 소년의 호주머니에서 해질 대로 해진 녹색 리본밖엔 없었다.

 

18

엔젤은 트렁크 문을 조용히 닫고 호크를 따라 캐리 부인의 현관을 향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잠시 기다렸다. 캐리 부인이 현관에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호크는 엔젤의 굳어진 얼굴, 깨물어서 움푹 팬 아랫입술을 보았다. 무엇이 엔젤을 화나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혀끝으로 그 흔적을 씻어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사탕에 대한 추억과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호크는 놀라울 뿐이었다. 엔젤을 유혹하기보단 위로해 주고 싶어 하다니, 이럴 수가. 호크는 엔젤의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또한 하고 싶은 것은…….

캐리 부인이 문을 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가 호크의 가슴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 부인은 안경을 다시 끼고, 현관에 버티고 선 뜻밖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엔젤은 상냥하게 인사를 했지만 슬픈 호크의 과거 때문에 여전히 마음이 착잡했다.

"마일스 호킨스 씨를 소개할게요. 이분은 캐리 부인이세요."

"호킨스 씨?"

그 노인네는 머리를 끄덕였다.

"호크라 불러 주세요. 캐나다에선 다들 그렇게 부르죠."

호크는 곁눈질로 엔젤을 슬쩍 보았다. 그러고 그 노인네의 차갑고 말라빠진 손을 잡으며, 다른 손으로 이불에 싸인 스테인드글라스를 들어올렸다.

"반갑습니다, 캐리 부인."

노파는 빈틈없는 검은 눈으로 앞에 선 남자를 뜯어보았다. 그러곤 갑자기 고개를 한 번 끄덕했다.

"그런 별명이 어울리는 사람은 별로 없지. 댁에겐 어울려요. 들어와요, 호크 씨."

그러곤 엔젤을 향해 부산하게 말했다.

"엔지야, 너도. 홍차가 끓고 있어."

커다란 주황색 수고양이가 식당으로 향하는 부인의 지팡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누비고 다녔다. 불안감을 참다못한 엔젤은 결국 허리를 굽혀 그 무거운 고양이를 들어올렸다.

"타이거,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엔젤은 상냥하게 꾸짖고는 고양이를 볼에 비벼대며 부인을 따라 식당으로 들어갔다. 수고양이는 주황빛이 도는 교활한 눈으로 엔젤을 쳐다보고는 코를 얼굴에 비벼대며 벗어나려고 했다. 캐리 부인이 의자에 앉아 고양이의 작은 발에 걸려 넘어질 위험이 없어지자 엔젤은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한잔 따라 주겠니? 어젯밤 손을 잘못 놓고 잤나 봐. 오늘 아침부터 잘 움직이질 않네."

엔젤은 걱정스런 눈길로 캐리 부인을 보았다.

"맥케이 의사에게 전화는 하셨어요?"

노인네는 덤덤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엔지, 내 나이 일흔아홉이다. 몸이 말을 안 듣는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니?"

"이따가 데리를 데리고 맥케이 의사를 뵈러 갈 거예요. 그때 할머니를 모시러……."

"됐어. 차나 따르렴. 의사의 치료보단 홍차 한 잔이 훨씬 도움이 되지. 앉으시게, 호크 씨. 들고 있는 것은 조리대 위에 두고."

캐리 부인은 단호하게 말을 잘라 버렸다.

엔지는 차를 따르고 비스킷을 올려놓은 쟁반을 부인에게 건네주었다.

"의사 말인데요, 제 생각엔……."

엔젤이 다시 끊어진 말을 시작했다.

"몇 년 전 일이 기억나는구먼."

캐리 부인은 다시 엔젤의 말을 막았다.

"데리가 안달이 나 헐레벌떡 여길 뛰어 들어와서는 네가 작업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말하더구나. 아마 너무 오래 일을 했거나 뭐 그랬나 봐. 맥케이 의사가 왕진을 오셔서 툭툭 건드려 보고, 찔러 보고, 귀에 대고 들어 보고 했는데도 넌 깨어나질 않는 거야. 의사 말이 넌 이상이 없으니 충분한 수면을 취하면 나을 거라고 하더구나."

"알아요, 하지만……."

찻잔을 내려놓는 캐리 부인이 엄숙한 표정을 지어 엔젤은 감히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글쎄, 난 아무 이상도 없어. 다시 젊어지는 게 이상한 일이지. 의사가 시간을 돌려놓을 수 있는 날이 오면 그때 불러서 아침에 피로하다고 말하마."

엔젤은 한숨을 내쉬더니 부인을 설득하는 일을 포기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제가 받을게요."

엔젤은 재빨리 거실로 향했다. 캐리 부인이 뒤에서 천천히 따라갔다.

엔젤은 상대방과 몇 마디 나누고는 캐리 부인에게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뒤돌아 부엌으로 들어오는 순간, 엔젤은 호크가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종종 그렇게 하오?"

호크는 엔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전화 받는 거 말예요?"

자리에 앉으며 엔젤이 말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자신을 혹사하는 것 말이오."

"아뇨."

엔젤은 확고하게 잘라 말했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만 그렇게 하오?"

호크는 캐리 부인이 들을까 봐 아주 낮게 속삭였다.

엔젤은 가만히 차만 홀짝홀짝 마셨다.

"얼마나 오랫동안 해온 거요?"

"뭘요?"

"생각도, 감각도 모두 없어질 때까지 일하다가 몸이 고장 나 바닥에 뻗어 버리는 것 말이오."

대답을 하지 말까 하고 잠시 망설였으나, 그래 봤자 별 상관이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데리에게 물을 테니까.

또한 엔젤은 말하고 싶었다. 호크가 자기를 얼마나 오판했는지를 밝혀 잔인할 정도의 쾌감을 맛보고 싶어서 말이다.

"그런 지 3년이 넘었어요."

엔젤은 차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는 죽었는데 난 살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무덤 속에 기어 들어가 그랜트 곁에서 죽는 일을 제외하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칼슨이 깨우쳐 준 바로 그날 밤이었죠."

"하지만 당신은 죽지 않았잖소."

"칼슨이 못하게 했어요."

엔젤은 칼슨의 잔인한 행위를 기억해 내곤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칼슨이 괜히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랜트는 죽었지만 엔젤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잔인하게 군 것이었다.

하지만 칼슨도 대가를 치렀다. 엔젤이 일 년이나 용서하지 않고, 말도 걸지 않고, 그를 보거나 그가 보낸 편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까. 그때 엔젤은 칼슨이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식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엔젤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엔젤의 마음속에 그랜트의 삶과 죽음이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데리의 연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칼슨의 연인 또한 될 수 없었다.

"칼슨이 당신을 사랑했소?"

호크는 덤덤하게 물었다.

"그랬죠. 그랜트보다 먼저요. 하지만 난 그런 감정으로 그 사람을 대한 적이 없어요."

"인디언이라서?"

엔젤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칼슨이 그랜트가 아니어서요."

"하지만 그랜트가 죽은 후엔?"

호크는 끈질겼다. 엔젤은 지친 몸짓으로 눈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여전히 칼슨은 그랜트가 될 수 없죠. 난 그 때문에 칼슨을 비난했어요. 데리와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요."

호크는 뭔가를 묻기 위해 입을 달싹였다. 엔젤은 자신이 호크에게 무슨 말을 할지라도, 호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말로 인해 상처받으리라는 점을 갑자기 깨달았다. 수년간 애써 잊어버리고 살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젠 그만 해요, 호크. 제발. 과거 일을 들추어내어 날 고문하고 싶은 거예요?"

엔젤은 맥 빠진 목소리로 부탁했다.

호크는 혼동과 분노가 서린 엔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꼭 감았다.

"그렇지 않소."

아주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럼 왜 이러는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에 대해 꼭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오."

호크가 감았던 눈을 떴다. 눈동자는 깨끗하고 잔잔하고, 깜깜한 밤처럼 깊었다.

"꼭 알아야만 하오."

"왜죠?"

엔젤은 너무나 절망적인 기분이 들어 냉정을 잃을 것만 같았다.

"자기 자신은 제쳐 두고 타인만 사랑하는 여자는 여태껏 본 적이 없기 때문이오."

호크가 조용한 어조로 말하자 엔젤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만약 호크가 자신의 고통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다면 질문과 대답을 애써 피하지 않으리라. 자신은 데리가 괴로워하고, 칼슨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 배우려는 다른 누군가의 기회를 자신이 뺏을 수는 없지 않는가.

갑작스럽게 침묵이 맴돌았다. 응접실을 따라 걸어오는 캐리 부인의 지팡이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케런한테 온 전화야. 케런이 낡은 농가의 나무딸기 송이가 올해는 굵을 거라는구나."

", 맛있겠다."

엔젤이 입맛을 다시자 캐리 부인의 얼굴에 행복이 스쳐갔다.

"난 그걸 딸 수는 없지만 잼은 만들 수 있지."

"우리가 얼마든지 딸기를 따 드릴 수 있어요."

엔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호크가 먼저 말을 했다.

"나무딸기 밭에 앉은 독수리 한 마리란 말이지?"

캐리 부인은 떨어진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낄낄거렸다.

"고맙구먼. 그럼 일을 시작해도 되겠구먼."

호크의 입가가 약간 치켜 올라갔다. 호크는 엔젤을 쳐다본 후,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놓인 부엌 조리대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엔젤을 보았다. 엔젤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크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조리대로 갔다.

"이건……."

이불에 싼 작품을 들어 올리며 호크는 말을 이었다.

"백 년간 간직해도 좋을 물건입니다."

그러고는 창가로 갔다. 햇빛이 식탁 위를 비추어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호크는 캐리 부인이 보지 못하게 스테인드글라스를 몸으로 가리고는 이불을 벗겨 냈다. 그러곤 잽싸게 옆으로 비켜서서, 유리를 햇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세웠다.

유리는 빛을 번뜩이며 식당을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였다.

캐리 부인은 보행 보조기에 몸을 기대선 채, 오색찬란한 색깔로 식당을 넘실거리게 만든 그 유리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예쁜 건 생전 본 적이 없구나. 이 색깔들을 좀 봐. 어이구, 내 맹세하는데 저 젤리는 먹어도 될 것 같구먼."

부인은 넋을 잃고 말했다.

엔젤은 캐리 부인이 기뻐하는 모습에 자신도 기뻤다.

"좋아하시니 기쁘군요. 그건 할머니 거예요."

노인네는 고개를 돌려 엔젤을 쳐다보았다.

"이건 너무 과해, 엔지. 내가 어떻게 이걸 받아. 아이쿠, 분명 엄청난 시간을 들여……."

"전 할머니 잼을 평생 먹었는걸요."

엔젤은 부인 말을 상냥하게 막았다.

"할머닌 수년간 다른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셨잖아요. 제발 그냥 받으세요. 할머니 드리려고 만든 거예요."

캐리 부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부인은 실내복 호주머니에서 라벤더 향기가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을 비볐다. 그리고 엔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엔젤은 일어서서 캐리 부인을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한 걸음 물러선 엔젤은 식당 안을 내리쬐는 햇살처럼 강렬한 호크의 시선과 마주쳤다. 호크는 애정의 순간들과 두 여자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법석거리는 장면을 마음에 새겨 넣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걸 어디에 걸고 싶으세요?"

호크가 캐리 부인에게 관심을 돌리며 물었다.

"아침마다 볼 수 있게 저기다 걸 게나. 내 나이가 되면, 아침에 일어날 때 즐겁게 해줄 뭔가가 필요하지."

"그런 건 누구에게나 필요하죠."

호크가 엔젤에게 재빨리 곁눈질을 하며 말했다.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벽에 거는 동안, 엔젤과 캐리 부인은 머리를 맞대고 부인한테 필요한 물건의 목록을 만들었다. 두 여자가 목록 작성을 끝냈을 때 호크도 일을 마쳤다.

호크는 엔젤에게서 목록을 건네받아 죽 훑어보았다.

"당장 필요한 것들입니까?"

", 아니. 1, 2주는 괜찮다우."

"그래요? 엔젤은 며칠 동안 절 데리고 낚시를 갈 겁니다. 마지막 여행이…… 연기되었거든요."

낚시란 말에 엔젤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안내를 맡겠다고 했을 때 낚시 여행도 포함되리라는 걸 알지 않았던가.

이틀 전에는 그 여행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웠다.

엔젤은 한 사내아이를 보고 있었다. 호주머니에 너덜거리는, 해진 녹색 리본을 간직하고 있는 소년.

호크를 따라 차를 향하는 엔젤은 유달리 조용했다. 호크 앞에서 다시 나약해지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도 그 남자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게 되다니…….

"데리를 병원에 데려갔다 올 동안, 난 보트를 물에 띄우겠소."

호크가 엔젤의 옆모습을 보며 제안했다. 엔젤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끄덕이기만 했다.

"출발 전에 어디 전화 통화할 데는 없나요?"

"아니오. 거래의 절반은 이미 이루어졌소. 골치 아픈 협상을 한 번만 더 하면 이 거래는 성사되든지 산산조각이 나든지 결말이 날 거요."

호크의 어조가 워낙 무관심하게 들려 엔젤은 은근히 호기심이 생겼다.

"마치 남의 말 하듯 하는군요."

"난 부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오. 자동차 경주를 그만둔 이후 여러 번 돈을 벌기도 하고 잃기도 했소. 그때마다 삶의 의욕이 생겼소. 나에게 돈이란 건 득점을 기록하는 수단에 불과하지."

엔젤은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호크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데리가 진찰을 받을 동안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면서도 그 말을 되씹어 보았다. 호크를 따라 선착장으로 내려가면서도 이리저리 뒤집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전체 도안에 딱 들어맞지 않는 여러 개의 유리 조각 같았다.

북쪽에서 바람이 불었다. 호크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끊임없는 잔물결을 만들어 냈다. 찰랑이는 머리를 비추는 빛이 야성적인 흔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엔젤은 호크의 옆모습을 훔쳐보고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엔젤이 보고 싶었던 것은 손목에 찬 시계였지, 야성적으로 번뜩이는 눈빛이 아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시계를 들여다본 엔젤은 얼굴을 찌푸렸다. 목적지인 니들 만에서 4분의 3정도 지점인, 조류가 바뀌는 인디언 헤드에서 낚시할 생각이었는데 바람이 문제였다.

다행히도 바람이 잘 불어 준다면 해질녘이면 니들 만에 도착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바람이 너무 세게 불면, 도중에 잠시 멈추어 바람을 피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산과 섬들이 보호막을 치고 있었지만, 작은 배가 폭풍우 속에서 인사이드 패시지를 통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엔젤은 법이 허용하는 최고 속도로 배를 몰아 선착장을 벗어났다. '프랑스인의 웅덩이' 위를 홱홱 달리는 보트나 해안을 떠다니는 통나무를 무시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캠벨 강을 떠났다.

바람은 바다에 흰 파도를 일게 할 정도로 꾸준히 불었다. 엔젤은 라디오 볼륨을 높여 북쪽에서 내려온 낚시꾼들의 얘기를 들었다. 북쪽 바람도 여기에 비해 썩 나쁘지 않다고 했다. 한결 마음이 놓인 엔젤은 긴 여정에 들어갔다.

호크는 자신의 존재가 엔젤의 신경을 자극할까 봐 일부러 선실 밖에 있었다. 끊임없는 엔진의 소음과 하얀 물거품, 바다 위로 불쑥 떠오르는 녹회색의 산들이 어우러진 모습에 긴장이 한껏 풀어졌다.

몇 시간 후 호크는 배 뒤쪽의 폭신한 의자에서 일어났다. 바람과 물보라가 갑자기 세어져 선실로 들어가지 않으면 물에 흠뻑 젖어 오들오들 떨 판이었다.

호크가 선실로 들어오는 기척을 느낀 엔젤은 고개를 들었다.

"바깥이 더 험해졌나요?"

"약간."

호크는 선실 유리막을 통해 뱃머리 너머를 응시했다. 흰 거품이 섬 사이 협곡을 통해 검푸른 바다 위로 연이어 밀어닥치고 있었다.

"낌새를 보니 앞으로 더 거칠어질 것 같소."

"그렇게 되면 최악이겠어요."

엔젤은 호크의 말에 동의하며 헤쳐 나가야 할 거친 물결의 정도를 측정했다.

"저 두 섬 사이의 좁은 해협을 통과해 북쪽으로 향하는 다른 길을 택해야겠어요.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훨씬 안전하죠."

호크는 조종실 뒤편 탁자 앞에 놓인, 푹신하고 긴 의자에 몸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러곤 보트를 조종하는 엔젤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세찬 바람에 휩쓸리는 바닷물이 배를 이리저리 흔들어 대며, 하얀 광택이 나는 선체를 쉴 새 없이 때려 댔다. 그러면서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배를 몰아, 갈매기가 울부짖고 있는 섬으로 이끌고 갔다.

"저길 봐요."

호크는 엔젤의 팔을 툭 치며 오른쪽으로 50여 미터 정도 떨어진, 험준한 절벽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갈매기들이 바위에서 낙하하여 물 위로 솟아오르는 청어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바람의 위협에서 안전한, 푸른 바다의 매끄러운 수면에는 잔잔한 물거품이 일고 있었다.

엔젤은 태양의 각도를 측정하여, 앞으로 여행할 거리를 짐작해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기에 낚싯줄을 던져 봤으면 정말 좋겠는데……."

"그런데?"

호크는 낚시질을 하지 않으려는 엔젤의 마음을 꿰뚫으며 물었다.

"만조가 되면 파도가 거칠어져요. 우리는 나흘이나 여유가 있어요. 어두워졌을 때 이런 거친 조류 속을 헤매고 싶지 않아요."

호크는 그때서야 바닷물의 푸른색이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두 조류가 부딪치면서 생기는 파편들이 꾸불꾸불한 형태를 만들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현재 조수는 정체되어 있는 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호크는 들이치는 바닷물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체된 조수인데도 이 정도로 활기차면, 거세게 흐를 땐 어떨까를 가히 상상할 수 있었다-거대한 물줄기가 바위로 뒤덮인 해협에 부딪히며 엄청난 거품을 만들었다가 격렬하면서도 고요한 소용돌이로 바뀌는 것을.

지금 엔젤과 호크가 위치한 인사이드 패시지는 수많은 섬들에 의해 작은 통로들이 미로처럼 엉켜 있었다. 그 미로 안에는 바위와 해협, 조류와 역류로 응축된 태평양의 정기가 어려 있었다.

섬 몇 개는 규모가 꽤 컸지만, 몇몇은 암초로 덮인 옥석 정도의 크기였다. 설사 대낮이고 항해 지도를 참고한다 하더라도, 정체된 조류에서 암초들로 이루어진 장애물을 통과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거라고 호크는 생각했다.

조류가 몰려오는 컴컴한 밤에 보트를 조종하는 것은, 부상당한 손목으로 자동차 경주를 하는 것만큼 고역스러운 일일 것이다.

한때 죽든 살든 괘념치 않던 혈기 왕성했을 당시, 호크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구태여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반면에 엔젤은 상황에 잘 대처하고 있었다.

엔젤은 자동차 레이서였던 당시의 호크를 떠올려 보았다. 빈틈이 없으면서도 행동은 조화를 이루고, 손은 유연하게 핸들을 꽉 잡고 가장 안전한 코스를 식별해 내던 그를.

호크는 뒤로 물러앉아 능숙한 엔젤의 솜씨에 흡족해했다. 예기치 않은 인사이드 패시지의 아름다움과 위험을 만날 때마다 엔젤에게서 새로운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엔젤은 지나친 호크의 배려를 무시할 수 없어 곁눈질로 그를 쳐다보았다. 수수께끼 같은 남성다운 얼굴 내면에 무슨 꿍꿍이가 숨어 있는지 궁금했다.

"뭐 잘못된 게 있나요?"

"아니, 아주 잘하고 있소. 그렇게 멋진 솜씨는 보는 것만도 즐겁소."

호크의 칭찬에 엔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마워요."

"그랜트에게 배운 거요?"

엔젤이 순간 속눈썹을 내리 깔아 청록색 눈을 감추어 버리고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요."

짧게 답한 엔젤은 다음 질문을 기다렸지만 더 이상 질문은 없었다.

 

19

호크는 뱃머리의 네모난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연통이 있던 곳에 희끄무레한 점들이 어른거리는 걸 제외하면 뱃머리는 칠흑같이 깜깜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조종실에 달린 선실 문을 열었다. 갑판까지 깔려 있는 긴 양탄자 위에서 그가 신은 샌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조종실 너머로 보이는 선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예상대로 엔젤은 배의 뒤쪽에서 자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니들 만 해안에 늘어선 바위 위에서 자지 않는 한, 그곳은 호크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붙박이 의자 몇 개와 엔진을 덮은 평평한 갑판이 어우러져 2인용 침대 크기의 공간이 있었다. 맞춘 듯 끼워져 있는 갑판 침대는 상당히 안락했다.

하지만 무척 서늘했다. 이른 새벽 공기가 확실히 매서웠던지, 엔젤은 머리카락만 빠끔히 내놓고 침낭 속에 쏙 들어가 있었다.

호크는 엔젤을 깨우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하며 다가가,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그 머리카락은 서늘하다 못해 차가웠고, 이상한 생기가 흘렀다. 머리카락은 호크의 손이 닿을 때마다 굽실거리면서 진주같이 사방의 빛을 모으고 있었다.

호크는 며칠 전 뱃머리에서 검정 누비이불 위에 엔젤을 뉘었을 때 느꼈던 머리카락을 기억했다. 창백하게 빛나던 머리카락과 살결을 보며, 따뜻한 저수지에 들어가듯 엔젤의 품안에 자신을 파묻고 싶었다.

엔젤은 몹시 아름다웠고, 호크는 너무 잔인했다.

엔젤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손에 감은 호크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자신은 엔젤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엔젤은 그 어떤 남자에게도 준 적이 없는 것을 호크에게 주었다. 호크는 엔젤에게 되돌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지 못한 채, 그것을 가졌다. 게다가 자기의 세계를 파괴하고, 삶과 사랑과 여성에 대한 자기의 신념을 부수어 버렸다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걸 엔젤이 고의적으로 한 짓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 아님을 호크는 오늘에야 깨달았다. 호크가 엔젤의 순수함이 얼마나 깊은지 몰랐던 만큼, 엔젤도 호크의 냉소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엔젤도 호크도 이제는 알게 됐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여자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엔젤이 호크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반면에 호크는 사랑이 결핍된 남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엔젤에게 가르쳐 주었다.

호크를 바라볼 때마다 엔젤의 눈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엔젤은 호크를 피해 다녔다. 엔젤의 심정을 동요하게 하는 것은 오직 호크의 질문들뿐이었으니까. 독수리의 발톱처럼 마음속을 헤집고 쥐어짜는 고통을 느끼게 하는 질문들.

하지만 호크는 질문을 해야만 했고 알아야만 했다. 부드러운 엔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진실보다 더 끌리는 것은 이 세상에 없었다.

호크는 창백한 머리카락을 천천히 풀어 주었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주는 따뜻함을 놓치는 순간 그의 손끝에 냉기가 느껴졌다. 부드러운 금발머리를 어루만지던 손놀림은 침낭의 차가운 촉감을 느끼고서야 멈추었다.

호크는 몸을 일으켜, 말없이 동쪽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는 태양처럼, 소리 없이 선실로 되돌아갔다.

엔젤은 진한 커피 향과 베이컨 굽는 냄새에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 앉았지만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아 정신이 몽롱했다. 공기가 차갑고 하늘이 다채로운 색채로 물들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지금이 새벽녘이고 바깥임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배가 약하게 흔들렸다. 순간 기억들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호크.

낚시 여행의 첫날.

"달걀은 몇 개요?"

호크가 선실 문을 열고 나와, 잠에서 깨어나려고 허우적거리는 엔젤을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프라이예요, 찜이에요?"

엔젤이 묻자 호크는 능청맞게 대꾸했다.

"달걀을 깨 봐야 알겠소만."

"결과를 알려 줘요."

엔젤이 빙긋 웃었다.

호크는 고개를 까닥하고 풍로로 걸어갔다. 잠이 덜 깬 엔젤의 단정치 못한 모습에 호크의 몸은 욕망으로 꿈틀거렸다. 예전엔 이런 감정을 느낄 때면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욕망만큼이나 깊은 후회가 마음을 푹 적셨다.

엔젤은 침낭을 접고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종종걸음으로 선실로 들어왔다. 그러고 난 뒤 풍로의 열기가 밖으로 새 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바로 닫았다.

"오믈렛은 내가 만들까요?"

엔젤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호크의 큰 키와 우람한 어깨가 선실을 꽉 채워 버려, 선실이 너무 작아 보였다.

"괜찮소. 나도 가끔 요리하는 걸 즐기오."

엔젤은 문 바로 앞에서 어정거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담홍색 스웨터 밑으로 삐져나온 셔츠 자락, 양말을 신은 발은 왠지 약점을 드러낸 듯이 보였다. 어젯밤 엔젤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낭 속으로 들어간 게 분명했다.

"나도 오늘밤엔 당신 식대로 해봐야겠소."

호크는 엔젤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날렵한 몸짓으로 달걀을 프라이팬에 깨뜨렸다.

"내 식이라뇨?"

"옷을 입고 잠자리에 드는 것 말이오. 밤새 옷을 밖에 걸어 두면 얼마나 차가워지는지 잊고 있었소."

"특히 침대에서 몸이 따뜻해져 있을 땐 더 그렇죠."

"프라이요."

"뭐라고요?"

호크의 말에 엔젤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 노른자를 깨지 않았군요. 고마워요. 전 두 개 먹겠어요."

엔젤은 호크의 입가가 치켜 올라가는 걸 보고 살포시 웃었다. 호크의 눈매에 잡힌 주름이 보일 정도로 엔젤은 그 가까이에 서 있었다.

엔젤은 숨을 죽이고 호크가 웃기를 기다렸다. 호크가 자기의 기대를 저버리자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연어를 낚았을 땐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자 호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물에 벌써 나갔어야 했는데, 내가 늦잠을 자 버렸군요."

"별로 상관없는 것 같소."

"왜요?"

"바람."

호크가 간결하게 말했다.

"파도가 저렇게 날뛰고 있으니."

호크는 뱃머리 쪽을 주걱으로 가리켰다.

엔젤은 더 자세히 보려고 천천히 호크 옆을 지나갔다. 통로가 너무 좁아 호크의 몸을 스치지 않을 수 없었다. 널찍한 어깨, 탱탱한 엉덩이, 청바지와 셔츠에 드러난 근육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하지만 일이 더 꼬였다. 비누 냄새와 신선한 로션 냄새, 털실로 짠 옷과 남성적인 따뜻함이 엔젤을 꼼짝 못하게 했다.

엔젤은 참을 수 없어 뱃머리로 뛰어나갔다. 이런 아침이 최악임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항상 그랬다. 이런 아침엔 이성적 판단에 앞서 심장이 먼저 뛰었다. 호크 같은 남자가 주변에 있으면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위험했나?

엔젤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우리의 비참했던 사랑 나누기 이후, 호크는 질문할 때를 제외하고는 내 주위에 얼씬도 안 했어. 아니야, 섹스야. 그 일이 사랑이었다면 결론은 상당히 달랐졌겠지만…….'

세차게 부는 바람을 보고 있으려니 남성의 존재로 다가왔던 호크와, 섹스와 사랑의 차이점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니들 만을 떠받치고 있는 절벽 너머의 바다에는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흰 파도와 바람에 찢겨 나간 물보라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낚시가 전혀 불가능했다.

"당신 말이 맞았군요. 흰 파도가 저렇게 날뛰고 있으니 생명을 걸지 않는 한 저런 바다와 모험을 하진 않을 거예요."

호크는 엔젤을 지나 폭풍 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변한 것은 전혀 없었다.

"이런 바람은 얼마나 지속되오?"

"대략 한 시간에서 한 주까지. 오후까진 틀림없이 멈출 거예요."

"만일 멈추지 않으면?"

엔젤은 한숨을 쉬었다.

"카드 놀이 할 줄 아세요?"

다시 한 번 호크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기꺼이 배우고 싶은데."

엔젤은 호크의 낮고 굵직한 음성을 들으며, 과연 그가 자신에게 배우고 싶어 하는 게 카드놀이뿐이지 의심스러웠다. 거칠기만 한 호크의 내면에 냉소와 증오만큼이나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불타고 있으리란 생각이, 아무리 물리치려 해도 엔젤을 사로잡고 있었다.

엔젤 자신에 있어서는 늘 그랬다. 삶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그랜트를 향한 사랑만큼 깊었다. 지금은 그런 사랑과 분노의 감정에서 벗어났지만.

'만약 내가 폭력, 분노, 잔인함만 경험해 왔다면 어땠을까? 한 번도 사랑을 느껴 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엔젤은 호크가 한 말, 씁쓸하게 인정하던 호크의 말을 기억했다.

'사랑은 사랑에 이어져 있지. 신기하고 친밀한 연결고리!'

그래서 호크는 항상 밖으로만 떠돌았던 것이다.

'고립된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잃지 않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희망 없이 버틸 수 있을까?'

엔젤은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달걀이 식어 가오."

일상적인 호크의 말투에 엔젤은 현실로 돌아왔다. 엔젤은 호크가 만든 음식을 먹고, 그가 따라 주는 커피를 마셨다. 호크가 식사를 하려고 맞은편에 앉았을 때, 식탁 아래로 두 사람의 무릎이 잠깐 맞부딪쳤다.

조그만 보트 안에 단둘이 갇혀 있다는 사실은 북풍이 바다 위로 몰아치듯, 잔잔했던 엔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아침식사가 끝날 때쯤 엔젤은 카드 놀이판 앞에서 호크와 머리를 맞대고 하루를 보내진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엔젤은 벌떡 일어나 싱크대로 걸어가 접시를 씻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린 채 물었다.

"부야베이스(마르세유 명물인 생선 스튜)를 좋아하세요?"

"좋아하오."

호크는 엔젤이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자신의 몸이 약간만 스쳐도 엔젤이 움찔한다는 걸 눈치 챘다. 자신이 엔젤의 두려움을 샀다는 사실에 심기가 편치 않았다.

"전 지금 비치커머(태평양 제도의 백인 부랑자)들이 먹는 스튜 요리 비슷한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게를 잡을 만한 도구를 미처 준비하지 못했어요."

그러자 호크는 선실 안에 달려 있는 벽장 중 아래쪽의 하나를 가리켰다.

"왼쪽에서 첫 번째 벽장을 열어 봐요."

엔젤은 허리를 굽혀 그 벽장문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엔 둘둘 감겨 있는 노란 플라스틱 로프와 접는 철망이 들어 있었다. 엔젤은 의기양양하여 그 물건들을 집어 들고 호크에게 씽긋 웃어 보였다.

"어떻게 준비했어요?"

"당신이 게 요리를 좋아한다고 데리가 말해 주더군. 낚시 가게 주인이 그 덫이면 게잡이로 괜찮다고 했소."

엔젤은 호크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자기를 기쁘게 해줄 물건을 사러 밖에 나갔던 것이다.

"고마워요.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있소. 그래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즐거웠소."

호크의 목소리는 눈빛처럼 깊고 상냥했다.

엔젤은 그 덫을 단단히 움켜쥔 채, 호크의 선명한 갈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제껏 갈색이 그렇게 따뜻한 색깔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랬다. 황금색이 드문드문 섞인 호크의 갈색 눈은 깊고 따뜻했다. 마치 자유롭게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머금은 눈.

엔젤은 갑자기 숨쉬기가 어려웠다. 호크가 곁에 있어서 느끼는 공포가 아니었다. 그건 확실히 아니었다. 왠지 맥이 빠져, 호크에게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우선 대합이 있어야 하는데……."

엔젤의 목소리가 컬컬했다.

"대합?"

", 대합이요. 그리고 들통이……."

엔젤은 확고히 하듯 그 말만 되풀이했다.

"끝에서 세 번째 벽장에 보면 들통이 있소. 하지만 대합은 없는데?"

호크의 말투에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엔젤은 호크의 말을 알아채고 눈을 크게 떴다. 호크는 다리를 쭉 뻗더니 그 벽장 문고리를 발가락에 걸었다.

"들통, 꼬챙이, 해변에서 신을 신발."

호크가 죽 나열했다.

"필요한 건 다 생각해 냈군요."

"아니오. 난 배우려고 노력할 뿐이오."

호크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엔젤은 손이 아플 정도로 철망을 꽉 쥐었다. 호크가 낚시에 대해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겁먹은 표정은 짓지 마시오, 엔젤. 그냥 당신답게 행동하는 것 외에 바라는 건 없으니."

목소리가 몹시 낮아 엄숙하게 들렸다.

엔젤은 움찔 놀랐다.

"너무 무리한 요구요?"

호크의 목소리에 호기심과 후회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엔젤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녜요. 무리한 요구는 아니에요. 하지만……"

목소리가 갑자기 갈라졌다. 엔젤은 눈을 감았다. 맥박이 안정되고 더 이상 목이 메지 않을 때까지 마음속에 선홍색 장미를 떠올렸다.

호크는 엔젤을 지켜보며, 엔젤이 낚싯바늘에 다쳤던 일과 자기를 낚아채 피를 흘리게 한 독수리를 떠올리고 있을 거라 추측했다. 슬픔과 고통에 빠진 엔젤을 어루만지며 위로하고, 기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호크를 압도했다.

강렬한 충동으로 호크는 마음이 몹시 동요되었다.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엔젤을 안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엔젤이 자신에게서 달아날 것이고 그러면 둘 다 상처를 받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엔젤은 해변에서 쓸 물건들을 서둘러 챙겼다. 썰물이 되면서 니들 만으로 흘러가는 샛강 어귀에 조그만 모래톱이 만들어졌다.

기다랗고 좁다란 그 만은 만이라기보다는 산골짜기 같아 보였다. 깊이 500 내지 600미터에 넓이 24미터도 채 안 되는 인사이드 패시지로 통하는 니들 만은, 뾰족한 절벽과 바위와 삼목으로 꽉찬 언덕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니들 지류가 흘러드는 지점에서 절벽이 사라지고 좁은 협곡이 나타났다.

해변은 조그마하고 모래와 작은 자갈로 덮여 있었다. 해변이 절벽과 어우러지면서 점차 바위들이 나타났다. 그런 곳에는 대합이 돌멩이에 착 달라붙어 있게 마련이었다.

엔젤은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키를 움직이면서 뱃머리를 모래톱 위 해안으로 몰았다. 호크는 엔젤에게 익숙한 유연한 동작으로 뱃머리를 훌쩍 뛰어넘어 발을 땅에 디뎠다. 엔젤은 짐을 호크에게 던져 주고, 물이 빠질 때를 대비해 배를 뒤로 조금 빼고 정박했다. 그러고는 청바지를 벗고 해안까지 헤엄쳐 갈 준비를 했다.

호크는 물에 몸을 담그고 엔젤을 기다렸다. 그 역시 청바지를 벗고 수영복 차림이었다. 빨간 스웨터가 검정색 수영 팬츠와 어울리지 않았다. 차가운 물 위로 햇볕에 그을린 단단한 허벅지가 조금 드러났다. 두툼한 셔츠와 근육질의 맨다리 위로 짧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은 놀랄 만큼 육감적이었다.

호크는 바다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난간에서 주저하는 엔젤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또 하나의 물건을 나르듯 엔젤을 땅으로 옮기려고 손을 뻗쳤다.

이 사람이 칼슨이나 그랜트였다면 엔젤은 서슴없이 뱃머리에서 발을 뗐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호크였다. 엔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평소대로 행동하라던 호크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찬물을 싫어하는 걸 어떻게 알았죠?"

엔젤은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호크는 웃음기 어린 표정을 짓더니 엔젤을 번쩍 들어올렸다.

"운 좋은 추측이오."

엔젤은 한 손으론 청바지를, 다른 손으론 호크를 붙잡았다. 자신의 맨다리를 잡고 있는 호크의 손에서 나는 열기에, 엔젤은 공포 비슷한 불편함을 느꼈다. 몸이 뻣뻣해지는 걸 막을 재간이 없었다.

호크 역시 그걸 느꼈지만 말 한마디 없이 엔젤을 해변에 내려놓았다. 은밀한 순간을 더 끌려고도 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호크는 도대체 엔젤이 땅에 옮겨 준 걸 고마워하는 건지, 아니면 빨리 내려놓은 걸 고마워하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별거 아니오. 천사들은 무게가 별로 안 나가잖소."

호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호크는 엔젤에게서 몸을 돌려 청바지를 입었는데, 젖은 다리에 달라붙은 뻣뻣한 직물이 신경 쓰였다. 차가운 물이 발목 주변에서 찰랑거리고, 신고 있는 고무 샌들 사이로 굵은 모래가 들어왔다.

호크는 자기 손 안에서 달아올랐던 엔젤의 부드러운 살결의 촉감을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그리고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무의식적인 반사작용과 몸을 움츠리던 모습도…….

'얼마나 고통이 컸으면 단 한 번의 경험으로 그런 반사 작용이 몸에 뱄을까!'

호크는 엔젤에게 다가갈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그녀에게 안겨 주었는지 느꼈다. 여자들도 그런 강한 감정과 심한 고통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또한 지금 엔젤의 고통을 느끼듯, 자신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호크와 엔젤 사이에 흐르는 복잡한 감정들은 부지불식간에 호크를 좌절시키고, 곤혹케 하고, 속박시켰다. 과거에 대한 호크의 믿음을 갈가리 찢으며 괴롭혔던 엔젤의 진실처럼.

호크는 천천히, 그리고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깨달음의 과정을 얼마나 더 견뎌 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20

엔젤도 청바지를 다시 껴입은 다음, 바지를 무릎까지 돌돌 감아올리고는 호크를 도와 급류 지점 너머로 짐을 날랐다. 샛강 옆에 조그만 풀밭이 있었다.

두 사람은 들통과 꼬챙이를 제외한 모든 짐을 그곳에 옮겨놓았다. 짐을 다 옮기고 나서 엔젤은 해변 쪽을 향해 걸어갔다.

하늘은 높고 청명하고, 출렁이는 바다처럼 깊고 차가웠다. 절벽 주변을 제외한 바다는 온갖 푸른색을 다 보여 주고 있었다. 바다는 낮게 드리워진 나뭇가지에 반사되어 녹색으로 변했다. 구름 몇 점이 바다 위로 두둥실 떠다녔으나, 태양에 반짝이는 바다에 물결을 일으키진 못했다. 바람은 잔잔했으나 바위가 많은 해변 쪽을 조금씩 물어뜯고 있었다.

엔젤은 썰물로 인해 드러난 해안선을 살펴보았다. 좁긴 했지만 조개잡이로는 충분했다.

"대합을 파 본 적이 있어요?"

"서부 텍사스에는 대합이 별로 없소."

엔젤은 살며시 웃어 보였다.

"그렇겠군요. 짐작이 가네요."

엔젤은 바위와 모래가 뒤범벅이 되어 해수면으로 삐죽 올라온 곳에 쭈그리고 앉았다.

"대합은 썰물 때면 눈에 쉽게 띄어요. 몇 센티미터만 파면 되죠. 하나를 발견하면 근처에 더 많이 있고요."

호크도 옆에 쭈그리고 앉아 엔젤이 꼬챙이로 모래와 바위 사이를 긁어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조개잡이용 꼬챙이는 아니었지만, 바위가 너무 많아 그 꼬챙이를 쓸 수밖에 없었다. 엔젤이 사용한 꼬챙이는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것이었는데, 손잡이가 붙어 있고 단단한 정원용이어서 돌이나 소금물에도 끄덕없었다.

엔젤은 함성을 지르며 모래 묻은 손을 앞으로 내보였다. 손바닥에 대합 몇 마리가 놓여 있었다. 호크는 손에 놓인 덩어리가 대합이라는 걸 짐작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모래로 뒤범벅이 되어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대합?"

호크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엔젤을 쳐다보았다.

"그럼요. 이걸 보세요."

엔젤이 물에 헹궈 내자 통통한 조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합이로군."

호크가 동의하자 엔젤은 씽긋 웃었다. 그러고는 들통에 바닷물을 반쯤 채우고 대합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물이 빠진 지역을 신이 나서 헤집고 다녔다.

"보통은 하루나 이틀 정도 지난 후 조개를 먹어요. 조개 속에서 모래가 빠져야 하니까요. 하지만 난 지난여름 이후로 부야베이스 맛을 보지 못해 참을 수 없네요. 괜찮겠어요?"

호크는 너그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괜찮소. 난 상관없소."

엔젤은 호크의 말투가 뜻밖에 상냥한 데 놀랐다. 호크가 옆에 바싹 붙어 앉아 모래를 파는 바람에 두 사람의 다리가 서로 스쳤다. 엔젤은 뜨끔하여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호크의 잘못은 아니었다. 해변가가 좁은데다 호크는 호크대로 차가운 모래를 파헤치며 즙이 많은 조갯살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엔젤은 호크가 풍기는 남성적 체취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 깜박 잊었는데, 대합은 좋아하세요?"

"오늘 저녁이 되면 알게 되겠죠."

한참 동안 꼬챙이로 바위와 모래를 긁어 대는 소리만 낮게 들렸다. 호크는 꼬챙이를 옆에 내려놓고 방금 판 모래 속을 살펴보았다. 그는 모래 속에서 굴곡진 대합 껍질의 빗살무늬를 손끝으로 구별할 수 있는 감각을 상당히 빨리 익혔다.

", 이거 봐요, 엔젤. 당신이 시킨 대로 하니까 잘 되는데요!"

호크는 한 움큼의 대합을 내보이며 중얼거렸다.

엔젤은 거무스름한 덩어리를 들여다보고는 살짝 웃었다.

"대합 잡이는 배우기 쉬워요."

호크와 엔젤은 사이좋게 대합을 파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엔젤은 낚싯바늘이 등에 박히기 전에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도 호크가 신경은 쓰였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낚싯바늘에 의한 상처가 엔젤의 신경을 건드렸다. 상처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데리에게 등을 좀 봐 달라고 할 작정이었지만, 데리는 언제나 다리에 한 깁스만큼이나 긴 공식들에 푹 빠져 있었다. 혼자 상처를 소독해 보려 했으나 넌더리가 나 포기했다. 상처를 효과적으로 치료하려면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곡예사쯤 되어야 하리라.

두 사람은 대합이 별로 살지 않는 반암(얼룩무늬가 박혀 있는 암석)까지 썰물을 따라 내려갔다.

엔젤은 일어서서 몸을 쭉 펴다가 어깨의 상처가 땅겨 얼굴을 찌푸렸다. 억지로라도 걸어야 했던 지난날처럼 이 고통도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서 지워 버렸다.

칼슨이 분명히 말했듯이 치료가 안 되는 것은 참아야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엔젤은 대합이 든 들통을 들어올렸다.

"스무 개는 당신 몫이고 스무 개는 내 몫이에요."

"내가 대합을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할 거요?"

호크는 장난기 어린 투로 의문을 제기했다.

엔젤은 욕심이 난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대꾸했다.

"그럼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죠. 하지만 이것들은 별로 큰 놈들이 아니죠."

그러자 호크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엔젤의 손에 들린 들통을 건네받아 들어올렸다.

엔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호크는 대합을 헹구고 빳빳한 솔로 문지른 다음 다시 헹구었다. 그러고는 들통에 대합을 집어넣고 바닷물을 채운 뒤 엔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음은 뭐요?"

"들통을 그늘에 놓아두기만 하면, 다음 일은 자연히 알아서 될 거예요."

엔젤은 신바람이 나서 활기차게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는 게잡이를 할 거예요."

엔젤은 짐을 모아 둔 곳으로 가, 게 덫과 베이컨 한 조각을 꺼내 들고 호크에게 돌아왔다.

"게잡이는 대합에 비해 좀 더 까다로워요."

"더 빨라서?"

호크의 물음에 엔젤은 방긋 웃었다.

"훨씬."

엔젤은 만으로 비스듬히 이어진 편편한 바위로 호크를 데려갔다. 그 바위는 푸른 물속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엔젤은 커다란 베이컨 조각을 덫의 밑바닥 철사에 재빨리 끼우고, 그물을 물 밑으로 내렸다. 덫은 뭉툭한 깔대기 모양이었으나 크기가 다른 망사 반지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들은 베이컨 냄새를 맡는 즉시 달려들죠."

"덫엔 덮개가 없는데, 저 조그만 것이 밖으로 기어 나오려 하면 어떻게 하오?"

"그 부분이 어려운 점이에요. 게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해요."

엔젤은 호크의 지적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말했다.

덫이 바닥에까지 내려갔다. 엔젤은 소리 죽여 숫자를 셌다. 백까지 세고 나서 두 손으로 덫을 끌어올리다가 힘차게 홱 당겼다.

물 위로 그물이 올라오자, 게 한 마리가 그물 가장자리에서 까닥거리더니 물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에잇! 꽤 큰 놈이었는데."

엔젤은 놓친 게가 아쉬워 투덜거렸지만 호크는 게가 사라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난 게를 좋아하오."

"저도 그래요. 다행스러운 건 게가 미련하다는 거예요. 먹이를 물러 다시 돌아올 거예요."

엔젤은 덫을 내리고, 수를 세고, 빠른 동작으로 그물을 들어 올리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덫을 올릴 때마다 갖가지 실망의 표정을 지었다. 그물에 걸린 게들은 너무 작거나 먹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20분쯤 지나자 엔젤은 지치고 미끼는 너덜거렸다.

"내가 해볼까요?"

호크는 덫으로 손을 뻗으며 제안했다.

엔젤은 잠자코 밧줄을 호크에게 건네주고는 스웨터를 벗어 목 주위에 묶었다. 태양은 바위와 바닷물 위로 햇살을 내리비추며 공기를 데웠다. 만 너머로 바람이 불긴 했지만, 바위로 둘러싸여 움푹 들어간 절벽 사이는 따뜻했다.

호크는 덫을 내리고, 수를 세고, 끌어당겼다. 덫은 새끼 한 마리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호크는 눈을 껌벅이며 엔젤을 쳐다보았다.

", 깜박했군요. 똑바로 끌어당겨야 해요. 덫에 달린 통을 엎으면……."

"게들이 달아나겠군요."

호크가 엔젤을 도와 말을 마쳤다.

엔젤은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 불어 넘겼다.

몇 번 더 해본 후 호크는 감을 잡았다.

엔젤은 경사진 바위에 앉아 호크가 일하는 걸 지켜보았다. 단단한 팔로 덫을 재빨리 들어올리자 안에 든 것들이 맥을 못 출 수밖에 없었다.

호크는 지칠 줄 몰랐다. 처음이나 스무 번째에나 힘 들이지 않고 덫을 올렸다 내렸다 했다. 엔젤은 머리를 무릎에 괴고는 남자와 바위와 바다를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구상하며, 우아하고 힘있는 호크의 육체를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그때 호크가 엄청나게 큰 게를 끌어올리고는 그걸 끄집어내려고 무심결에 통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안 돼요."

엔젤은 급히 소리쳤다. 그러고는 호크에게로 몸을 던져, 게를 만지기 전에 손을 홱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호크는 자기 손목을 붙잡고 있는 갸름한 손을 쳐다보았다.

"이 집게발이 상처를 낼 수 있어요."

엔젤은 호크에게 설명해 주고는 손가락을 집게처럼 만들더니 게의 뒤쪽을 잡아 덫에서 꺼냈다. 게는 수놈이었고, 20센티미터는 더 되어 보였다. 그 게는 집게발을 흔들어대며 성이 난 듯 까닥거렸다.

호크는 두터운 집게를 쳐다보며, 엔젤이 다시 한 번 몸을 던져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 주었음을 깨달았다.

"처음엔 낚싯바늘이고, 이번엔 게군. 둘 다 고맙소."

호크는 손가락으로 엔젤의 볼을 살짝 건드렸다. 호크의 손은 바닷물 때문에 차가웠고, 엔젤의 볼은 태양 아래에서 뜨거워져 있었다. 차가운 호크의 손은 엔젤에게 몹시 자극적이었다.

엔젤은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호크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미리 경고했어야 했어요."

호크는 다시 차가운 밧줄로 손을 뻗었다.

"몇 마리나 더 필요하오?"

"이거면 충분해요."

호크는 엔젤을 곁눈질하며 장난스레 제안했다.

"내 몫의 대합과 당신 몫의 게는 언제든 바꿀 수 있소."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호크는 빙긋 웃으며 허리를 굽혀, 덫을 바다 밑으로 내리고 숫자를 셌다. 엔젤이 좁은 해변을 걸어가 들통에 게를 떨어뜨리는 모습이 보였다.

엔젤이 입고 있는 물 빠진 청바지가 엉덩이와 다리 윤곽을 그대로 드러냈다. 머리를 한데 모아 묶었지만, 많이 움직인 탓에 느슨해져 있었다.

호크는 우아한 엔젤의 모습을 보자, 한때 엔젤이 번민으로 방황하고 실의에 빠졌다가 데리의 노력으로 힘겹게 회생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밧줄을 너무 꽉 쥐고 있던 탓에 호크는 손이 아팠다. 자신 때문에 실의에 빠진 엔젤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껏 거짓으로 똘똘 뭉친 여자를 너무 많이 봐 왔다.

호크는 하마터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여자를 그냥 지나칠 뻔했다.

"게들에게 공짜 점심이라도 제공할 생각이세요?"

엔젤이 호크 옆으로 다가와 쾌활하게 말을 건넸다.

호크의 쓸쓸해 보이는 표정과 긴장감이 자신의 몸을 휘감는 것을 느낀 엔젤은 마음이 흔들렸다.

"호크?"

엔젤은 호크의 몸에 흐르는 전율을 보았다.

돌아서서 엔젤을 쳐다보는 호크에게서 욕망과 희망, 외로움이 흘러나왔다. 가지각색 감정이 쏟아져 나와 두 남녀를 비추는 동안, 엔젤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엔젤은 그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호크 같은 남자를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엔젤은 부들부들 떨며 호크에게 손을 내밀다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호크?"

엔젤이 속삭였다. 호크는 몸을 틀고는 재빨리 힘차게 덫을 끌어올렸다.

"아무것도 아니오, 엔젤. 생각을 좀 했을 뿐이오."

"무엇을요?"

엔젤은 큰 잘못이라도 한 듯 재빨리 덧붙였다.

"미안해요.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죠?"

"난 여자들과 거짓말에 대해 생각했소. 그리고 진실과 천사에 대해서도."

엔젤은 질문을 안 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무엇이 호크를 진실과 사랑에서 등을 돌리게 했는지 꼭 알아야만 했다.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버린 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죠, 그렇죠?"

"무슨 이유 말이오?"

"당신이 여자를 싫어하는 이유 말예요."

호크는 덫을 끌어올렸다. 텅 비어 있었다. 다시 덫을 내렸다.

"내가 모든 여자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오. 더 이상은……."

"쉽지 않죠?"

"뭐가 말이오?"

"날 미워하지 않는 것."

호크는 잠자코 엔젤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엔젤의 말이 맞아.'

엔젤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고된 세상을 헤쳐 오면서 익혀 온 모든 반사 작용을 거역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엔젤을 미워하기란 불가능했다. 엔젤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과 같은, 가슴 저미는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고뇌에 찬 눈빛과 애써 짓는 웃음 속에 이 여자가 지닌 온갖 생명의 색채들이 스며 있지 않은가.

"당신을 싫어하지 않는 건 무서울 정도로 쉬운 일이오."

호크는 부드럽고도 뜨거운 눈빛으로 엔젤을 쳐다보았다.

엔젤은 숨이 막혔다.

'무서울 정도로? 맞아. 그게 요점이야. 한순간에 신념이 박살나 버리는 것.'

엔젤도 그런 경험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자신의 판단을 불신하게 한 호크 때문이었고, 다른 한 번은 삶 그 자체를 불신하게 만든 사고 때였다.

파괴되어 버린 자신의 세계에서 기어 나와, 안정을 기대할 수 없는 새로운 곳에서 다시 처음부터 걸음마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사랑은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데리의 사랑, 칼슨의 사랑. 마침내 엔젤은 그랜트에 대한 기억들을 접어 두고, 후회와 비통함에서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신념이 산산조각난 가운데 발가벗겨져 홀로 서 있는 호크는 얼마나 더 비참할까. 호크, 사랑이라곤 전혀 느껴 보지 못한 사람.'

엔젤은 비통한 심정으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푸른 바다의 품에서 덫이 당겨지는 소리에 엔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물에 시꺼멓고 못생긴 물체가 달려 있었다. 이젠 자신이 선택한 세계, 자신이 사랑한 세계로 돌아와야 했다. 엔젤은 어두운 생각을 툭툭 털어 버리고 벌떡 일어나 호크의 팔 너머로 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큰 놈이군요. 정말 멋져요."

엔젤이 기쁨에 넘쳐 소리 질렀다. 호크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엔젤을 바라보았다.

게는 덫에 붙어서 돌기가 달린 집게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볼품없는 놈인데."

"껍질이 단단할수록 살이 맛있어요."

"옛 속담과는 다르군요."

"새로운 세상에선 새로운 속담이 생기죠."

엔젤은 즐거운 듯 톡 쏘았다. 그러고는 덫을 힘차게 흔들고는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게를 날렵하게 집어 해변가로 올라갔다. 호크도 밧줄을 감고, 덫을 들어 올린 후 엔젤을 따라갔다.

엔젤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운 여자가 어떻게 이빨과 발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았는지 의문스러웠다. 위험해 보이는 게를 잽싸게 붙잡던 엔젤의 모습을 떠올리며 호크는 씩 웃었다.

어쩌면 이빨과 발톱이 천사 앞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묻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21

호크는 물을 건너 보트에서 해변으로 돌아왔다. 엔젤은 낡은 누비이불 위에 몸을 쭉 펴고 누워 턱을 괴고는, 땡벌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호크를 기다렸다. 그 벌들은 만발한 야생꽃 사이를 바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꽃에게 동정이라도 느끼오?"

엔젤 옆으로 다가오며 호크가 물었다.

"꽃에게 동정을 느낄 이유가 뭐 있나요?"

"벌이 이꽃 저꽃 기웃거리며 꿀을 홀짝이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날아가 버리잖소."

"그건 벌의 시각일 뿐이에요."

엔젤은 씽긋 웃으며 우아하게 몸을 굴려 앉았다. 호크는 엔젤에게 소다수를 건네며 언뜻 그 웃음을 보았다. 호크는 엔젤이 병을 받아들기 전에 얼른 소다수 뚜껑을 열었다.

"그럼 다른 시각은 뭐요?"

호크가 펑 소리를 내며 맥주 병마개를 땄다.

"꽃의 시각이죠."

"그것은?"

호크는 여성스럽게 웃는 엔젤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부추겼다.

"꽃이 이 벌 저 벌을 쫓아다니는 거죠."

검은 콧수염 아래로 호크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하얀 이가 번쩍거리면서 낮고 거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엔젤은 웃고 있는 호크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굳은 표정이 누그러져 훨씬 젊어 보이면서, 경험과 따뜻함을 갖춘 얼굴로 변해 있었다. 처음부터 상당히 잘생긴 얼굴이라 생각했지만, 웃는 모습은 요사스런 이교도들의 신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호크는 돌아앉더니 엔젤을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엔젤은 몇 년간의 어둠 끝에 태양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호크의 표정이 바뀔 때마다 엔젤의 청록색 눈은 술에 취한 듯 몽롱했다.

"이 벌 저 벌 쫓아다닌다고?"

호크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엔젤, 당신은…… 독특한 사람이오."

"당신도 그래요. 당신이 웃을 땐…… 굉장해요."

엔젤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했다.

호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엔젤을 보며, 웃음으로 반짝이던 눈이 순식간에 갈색 불꽃처럼 타올랐다. 아무리 세밀하게 살펴도 엔젤의 눈에 공포의 그림자나 불편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행복에 들떠 있는 눈동자만이 보일 뿐이었다.

"나도 좀 더 자주 웃어야겠소."

호크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엔젤의 시선이 호크와 마주쳤다.

"그러면…… 특별할 거예요."

호크는 천천히 엔젤에게 손을 뻗었다. 빛나는 둥근 눈썹, 곧은 콧잔등, 높고 경사진 광대뼈를 손끝으로 훑어 내렸다. 입술로 천천히 엔젤을 맛본 호크는 따뜻한 살결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호크는 다시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자기 몸속으로 스며드는 엔젤의 사랑을 느꼈다. 그 사랑에 닿는 모든 것들이 찬란한 색채로 바뀌는 것 같았다.

호크는 엔젤의 눈 속에서 커져 가는 기쁨이 공포의 그림자로 바뀌기 전에 천천히 손을 뗐다.

"저녁식사를 위해 그밖에 할 일이 있소?"

호크가 얼른 화제를 바꾸기 위해 즉흥적이었던 몸짓의 잔재들을 모으려고 했지만, 엔젤은 호크의 덤덤한 말 이면에 감추어진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호크가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만지는 동안 자신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엔젤은 호크와 가까워지면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생각하자 전신이 오싹해졌다. 처음엔 상냥스럽지만 어느 순간 공격적이 되고 상처를 주지.

"…… 물고기."

엔젤은 목소릴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물고기."

호크는 만이 좁아지는 곳을 쳐다보았다. 인사이드 패시지에는 바람이 불고 흰 거품이 일고 있었다.

"게와 대합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소."

호크는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만에서 대구 낚시는 어때요? 운이 좋다면 넙치를 낚을지도 모르죠."

"연어는?"

엔젤은 한숨을 쉬었다.

"그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뭐든 가능하죠."

'독수리가 웃기도 했는데 그까짓 게 뭐가 힘들겠어!'

두 사람은 낚시 도구들을 묶었다. 이번에는 엔젤 스스로 강을 건넜다. 대낮의 열기로 데워진 바닷물은 따뜻했다. 보트에 도착했을 때 물은 엉덩이까지 찼다.

뱃전은 눈높이에 왔고, 사닥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힘든 일이 남았군요."

엔젤은 들통을 든 손을 흔들었다.

호크는 아무 말 없이 들고 있던 물건들을 갑판에 던지고는, 뱃전을 붙잡고 힘차게 뛰어올라 배 안으로 들어갔다.

호크가 몸을 굽혀 엔젤의 손에서 들통을 낚아채자 엔젤은 못 믿겠다는 듯이 그를 빤히 보았다.

"힘든 일이 뭐요? 게를 씻는 일?"

엔젤은 호크가 자기를 놀리려는 게 아님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말뜻을 정말 모르고 있었다. 엔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왜 신은 신체적인 재능을 불공평하게 분배했는지 소리 없이 물었다.

"보트에 오르는 일 말이에요."

엔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우리 신체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죠. 그게 너무 안타까운 부분이에요."

호크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엔젤의 말뜻을 이해했다.

웃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수염이 씰룩거리며 어두운 불빛에 반짝거렸다. 호크는 머리를 숙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들통을 엎지 않으려고 몸으로 받쳤다.

자신의 한계에 기분이 나빴지만 엔젤은 방긋 웃었다.

", 웃어 봐요. 앙갚음을 해줄 테니."

엔젤이 씩씩거렸다.

낮게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엔젤을 자극시켰다. 호크는 고개를 들고 뱃전에 기대서서 엔젤을 보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싱긋 웃었다.

약간 비뚤어진 양쪽 송곳니와 윗입술에 난 상처가 엔젤의 눈에 띄었다. 이런 조그만 단점들이 머프 유리의 흠집처럼 호크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다.

곧 호크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고 눈에 선명하고 엄한 빛이 떠올랐다.

"도와주겠소."

호크의 말에 엔젤은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 날개를 빌려 주겠다는 건가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호크는 팔을 붙잡고 엔젤을 끌어올렸다. 한 발로 중심을 잡고 엔젤의 정강이가 뱃전에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끌어올렸다. 순간 엔젤은 움찔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를 본 호크는 아주 천천히 엔젤을 갑판에 내려놓았다.

등에 난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엔젤은 몸의 긴장을 풀려고 애쓰며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오.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프지 않았어요."

"몸을 움츠렸잖소."

"아직 등이 좀 쑤셔요."

"한번 봅시다."

지난번 호크가 낚싯바늘로 난 상처를 소독했던 일이 생각나 엔젤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오늘은 블라우스 속에 수영복을 입은 데다, 은밀함을 풍기는 새벽녘도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천사와 독수리 둘 다 침대에선 어울리지 않는 짝임을 알고 있으니까.'

"좋아요."

마침내 엔젤이 승낙했다.

엔젤은 호크에게 등을 보이고 재빨리 단추를 풀었다. 블라우스의 긴 소매에서 팔을 빼려고 어깨를 구부리자, 상처 부위가 다시 쑤셨다.

"데리에게 봐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호크가 ''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쉬자 엔젤은 말을 멈췄다. 호크는 연약한 살결에 난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낚싯바늘이 스친 곳은 부풀어 있었다.

호크의 입이 일()자로 굳게 다물어졌다. 자신을 보호하려고 엔젤이 몸을 던졌던 일을 기억했다.

그런데도 호크는 엔젤에게 다시 피를 흘리게 하고, 더 심한 상처로써 그 빚을 갚았다.

"마지막으로 소독한 게 언제요?"

호크는 매서운 말투로 물었다.

엔젤은 호크의 말투에 바짝 긴장이 되었다.

"소독한 적 없어요. 손이 안 닿아서요."

호크는 낮게 '에잇' 하고 화를 냈다.

"물을 좀 데워야겠소."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엔젤은 반대하려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대구 낚시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 오후 내내. 그리고 잠깐 낮잠을 잘 시간도 있겠는걸.'

어젯밤 엔젤은 작은 배 안에서 호크의 존재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잠을 설쳤다. 보트가 크다고 해서 나을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자신과 호크가 한세상에 산다는 생각만 해도 때론 안절부절못했다.

호크가 물을 끓이는 동안, 엔젤은 밤에 침대로 썼던 갑판 위에 침낭을 깔았다. 그리고 천천히 엎드렸다.

수영복만 입었지만 별로 춥지는 않았다. 태양이 머리 바로 위에서 움푹하게 들어간 작은 만 위로 따뜻함과 빛을 내려 주고 있었다. 보트는 아주 조금씩 흔들리며 물의 움직임에 따라 물 위를 오르내렸다.

제멋대로 불어 대는 바람이 나무를 스칠 때면, 나뭇잎이 부스럭거리며 살랑거리는 소리가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어우러졌다.

"깨어 있소?"

"…… ."

엔젤은 긴장이 풀린 상태라 뭐라 말할 생각도 못하고, 얼굴을 돌려 호크를 보았다.

호크는 허기진 눈빛을 숨기기가 힘들었다. 깨끗한 살결을 가로지른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속눈썹 아래로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뜨거운 햇살로 인해 볼에 발그레한 홍조가 일었고, 마음이 평온한 탓에 둥근 입술은 짙고 육감적이 빛을 띠며 촉촉해져 있었다. 청록색 수영복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엔젤의 눈빛처럼 생생했다.

엔젤은 머리에 꽂은 장식 핀을 빼 버리고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겼다. 머리카락은 검정색 이불을 뜨겁게 달군 햇빛에 반사되어 금빛으로 출렁거렸다. 부드러운 어깨 곡선, 유혹적으로 튀어나온 거뭇한 등뼈, 서로 대조를 이루는 날씬한 허리와 놀랄 만큼 동그란 엉덩이, 그리고 수영복 때문에 더욱 강조된 우아한 다리 곡선……. 엔젤의 몸에선 순수한 여성미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호크는 몸을 타고 흐르는 욕망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호크는 한참 지나서야 겨우 엔젤 곁에 앉았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더운물에 가제 수건을 적셔 쥐어짜는 데 마음을 집중했다. 수건을 짜는 소리는 바다와 태양과 떠도는 바람 소리처럼 유동적이고 감각적이었다.

뜨거운 욕망은 허벅지 사이에서 줄기차게 호크를 괴롭혔다. 호크는 얼굴을 찡그리며 가제 수건을 반듯하게 접어 상처 위에 얹었다.

"너무 뜨거우면 말해요."

엔젤은 눈 밑에 물기가 번득일 때까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아프오? 다시는 당신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소, 엔젤."

상냥하나 단호한 목소리였다.

엔젤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아프지 않아요, 호크."

"좋소. 곧 돌아오리다."

호크는 수영 팬티 위로 청바지를 입고 돌아와서는 수건을 헹구어 다시 뜨겁게 했다. 2의 천성이 되어 버린 부드러운 손길로, 호크는 수건을 상처 위에 얹었다.

"괜찮소?"

호크가 조용히 묻자 엔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카락 사이에서 빛이 물결쳤다.

호크는 옆에 앉아 생각에 잠긴 눈으로 엔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수건으로 닦아 내자 조롱이나 하듯 상처는 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 누구도 다친 호크를 나서서 구해 준 적이 없었다. 이기심이 없는 엔젤의 마음은 그녀의 순수함만큼이나 호크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이제 호크는 어떤 여자보다 엔젤을 원했다. 하지만 다시는 엔젤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결심이 욕망보다 더 강했다. 이제껏 이 여자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당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잃으며 살아왔다.

아름다운 엔젤의 눈빛에는 너무나 많은 고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낚싯바늘이 내게 박히게 내버려 두지 그랬소."

엔젤이 바다처럼 깊은 청록색 눈을 커다랗게 뜨자, 비로소 호크는 자기 생각을 큰 소리로 말해 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럴 순 없었어요."

엔젤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왜요? 다른 사람이면 그랬을 거요."

엔젤은 변명을 하려다 결국 어깨만 움찔했다.

"그냥 그럴 순 없었어요. 무슨 일이 생길지 난 알았지만 당신은 몰랐잖아요. 예상 못한 일을 어떻게 피하겠어요?"

"그게 삶이오."

호크는 냉소적으로 말하고는 곧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오래 전에 당신을 알았다면 좋았을 거요. 오래 전에……."

호크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수건을 다시 헹궈 엔젤의 상처 위에 살짝 올렸다.

"오래 전에, 뭐요?"

엔젤은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호크를 지켜보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차가운 약탈자의 모습으로 다시 돌변했는지 궁금했다.

"어떤 여자죠, 호크?"

"여럿이었소."

호크는 다시 차갑고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지만 손길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갑자기 얼굴이 경멸로 가득 차면서 단단히 굳어 버렸다.

"그것도 완전한 사실은 아니군. 실은 단 한 여자였소, 첫 번째 여자! 여자가 남자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모든 걸 내게 가르쳐 준 여자였지. 사랑만은 제외하고……. 그 여자의 마음속에 그런 건 있지도 않았소."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엔젤은 눈을 꼭 감았다. 고통만 가져다 준 기억들로 눈살을 찌푸리는 호크를 볼 용기가 이제 없었다. 엔젤은 호크의 몸속 깊은 곳에서 불타는 욕망과 그리움을 느끼며 안절부절못했다.

'누굴까? 그 여자가 어떻게 했기에 증오밖에 모르는 사람이 됐을까?'

엔젤이 눈을 떴을 때 호크는 가고 없었다.

막 소리쳐 부르려는데 호크가 김이 올라오는, 물이 든 대야를 들고 선실에서 나타났다. 호크는 자리에 앉아 허리를 굽히고는 상처 부위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엔젤은 숨을 죽였다.

"아프오?"

호크가 손을 떼며 묻자 엔젤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숨을 헐떡인 건 아파서가 아니라 행복 때문임을 호크에게 알려 줄 방법이 없었다.

호크의 점잖은 손길은, 뜨거운 물로 염증을 제거하듯 고통을 없애 주며 엔젤의 몸속에 퍼졌다. 다시 수건을 얹자 따뜻한 열기가 상처를 가라앉혔고, 엔젤은 숨을 '' 내쉬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호크가 보이는 뜻밖의 다정함에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호크 역시 엔젤이 자신의 손길에 몸을 맡긴 걸 알아챘다. 엔젤에게 고통밖에 줄 게 없다는 사실 때문에 괴롭던 심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호크는 자신이 남을 파괴하고 괴롭히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싶었다. 자신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엔젤에게 어떤 식의 상처-오래 전에 자신이 망가지듯 엔젤을 완전히 망쳐 놓을, 깊고 파괴적인 상처-도 되지 않는다는 믿음도 필요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잔인함과 그로 인한 결과들을 깡그리 없애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사실을 엔젤에게 해명하려고 해볼 수는 있으리라. 그러면 자신을 해칠 의도는 아니라는 것을 엔젤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엔젤이라는 여자를 해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지.'

열여덟 살 이후로 호크가 해온 일은, 자신이 당한 것처럼 잔인하게 여자를 이용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마침내 호크의 입에서 수건을 헹구는 물소리처럼 조용히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버진 열두 살 때 트럭에 깔려 돌아가셨소. 애를 썼지만……. 난 손을 쓸 수가 없었소."

엔젤은 손을 오그려 손가락으로 이불을 톡톡 쳤다. 살면서 겪는 많은 일 중 하나라는 식으로 호크는 덤덤하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할머니와 나, 단둘이서 농장을 꾸려 갈 수는 없었소. 그렇다고 일꾼을 고용할 돈도 없었고. 할머니에겐 나 말고 손주가 하나 더 있었소. 내게 입버릇처럼 말하던 진짜 손주, 고모의 딸이었소."

침묵의 시간이 잠시 흘렀다. 호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와 함께 살러 왔을 때 지나는 열여덟 살이었소. 억세고 난폭하고 겨울 바람처럼 차가운 여자애였소."

지나가 호크에게 증오를 가르쳐 준 여자였음을 엔젤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호크의 야멸차고 경멸 섞인 말투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이 농장을 꾸려 나갔소. 끔찍한 노동이었소. 내가 열네 살 되던 해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지나가 내 보호인이 되었소."

호크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과 엔젤의 청소년 시절을 비교해 본 것이다. 해변의 나들이와 깔깔거리는 웃음. 순수함.

"지나는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날, 날 유혹했소."

엔젤은 충격을 숨길 수가 없었다.

"당신은 겨우 열네 살이었는데요!"

"내 몸은 어른스러웠고 난 그 2년간 나도 모르게 여자를 그리워했었소. 지나는 그걸 알고 있었던 거요. 그 여자는 남자의 모든 걸 파악하고 있었소. 타고난 창녀였지. 인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없고, 남의 피를 짜내는 게 특기고."

엔젤은 조그맣게 '' 소리를 냈다.

"그땐 지나가 어떤 여잔지 몰랐소. 내 몸은 어른이었지만 판단력이나 감성은 아이였으니까. 난 지나가 신이 만든 가장 완벽한 여자라고 생각했소."

자책으로 가득 찬 어조였다.

호크의 숨죽인 씁쓸한 웃음소리가 엔젤의 신경을 자극했다. 고통을 참지 말라는 말이 튀어나오려 했으나 참았다.

그때의 고통이 아직도 호크의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사실은 달랐소. 나야말로 신이 만든 가장 멍청이였지."

엔젤은 팔꿈치를 대고 일어서며 호크를 쳐다보려고 몸을 비틀었다.

"당신은 어린애에 불과했어요. 어디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 여자가 그…… 그런……."

"여우?"

호크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창녀! 더러운 여자! 난 지나를 그렇게 불렀소. 더 심하게도. 딱 어울리는 명칭이지. 더 심한 것은……."

호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무런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지나는 우리에게 돈이 필요하다고 했소. 그래서 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했소. 보트 경주, 자동차 경주. 난 운동신경이 뛰어났고 세상에 겁날 게 없던 철부지였소. 난 여기저기서 승리를 거뒀소."

엔젤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난 돈을 지나에게 주었소. 그리고 지나는 은행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지 않게 했지. 우린 2년간 잘 지냈소. 우린 언제나 급할 때 쓸 돈이 있었으니까."

호크는 수건이 엔젤의 등에서 떨어진 걸 깨닫고 조용히 엔젤에게 명령했다.

"누워요."

엔젤은 호크가 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머뭇거렸다. 하지만 곧 단단한 손이 어깨 위를 가볍게 눌렀다.

엔젤은 포기하고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뜨거운 물속에서 수건을 짜고 있는 호크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호크가 수건을 등에 올려 가볍게 누르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난 계속 경주를 했소. 벌어 들이는 돈이 농장 일과는 비교도 안 되었으니까. 그때 지나가 와서 계획 하나를 내놓았소. 농장을 팔고 그 돈으로 진짜 경주용 차를 사자는 거였소."

호크는 자신과 지나에 대한 경멸에 몸을 떨며 또박또박 끊어 말을 했다.

"난 좋아서 어쩔 줄 몰랐소. 텍사스에서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데다, 그 여자가 자기 몫의 농장까지 팔아 나를 일류로 만들어 준다고까지 하니, 더 바랄 게 뭐가 있었겠소?"

'사랑!'

엔젤은 중얼거렸다. 호크가 사랑을 잔인한 속임수라고 여기는 이유를 엔젤은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린 변호사에게 가 서류에 서명을 했소. 내가 열여덟이 되던 해, 바로 지나가 내 법적 보호인의 자격을 상실하는 날 그 돈이 내게 오기로 된 게 골자였소. 우린 결혼을 하고, 경주용 차를 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였지."

호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엔젤은 긴장했다. 물어선 안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자기에게 무슨 권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자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요?"

엔젤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22

엔젤은 호크가 대답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크는 움칫하며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차가웠고 아득했다. 호크의 마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열여덟 번째 생일날, 빛나는 플라스틱 트로피를 손에 들고 바보처럼 웃으며 경주에서 돌아왔소. 하지만 집 안에는 아무도 없고 한 젊은 여자만 있었소. 낯선 여자였소. 임신 중이었는데 내가 쳐다보자 깜짝 놀라 나를 마주 보았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자 엔젤은 말을 꺼냈다.

"이해할 수 없어요."

"나도 이해할 수 없었소. 그 여자는 내게 말했소. 자기 남편이 현금으로 지나에게서 그 농장을 구입했으니, 내 등에 걸친 옷을 빼고는 모든 물건들이 자기들 소유라고."

침묵이 길어지자, 엔젤은 호크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마침내 호크는 다시 입을 열었다. 과거가 더 이상 자신을 해칠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목소리는 단조롭고 덤덤했다.

오히려 그 과거는 엔젤에게 상처를 주었다. 크리스마스 때 받은 막대 사탕을 간직하고 있는 소년. 단 한 번밖에 없었던 하찮은 일이지만, 누군가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준 상징 같았던 사탕과 그 달콤한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소년을 엔젤은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그 변호사 사무실에서 농장의 절반을 지나에게 양보한다고 서명했던 것 같소."

호크가 말했다. 목소리에는 경멸과 조롱기가 섞여 있었고, 눈은 겨울 하늘처럼 차가웠다.

"지나는 한동안 그 변호사와 잠자리를 함께 했던 것 같소. 상황을 미루어 보아 난 외톨이가 되어 버렸고……, 지나는? 그 여자는 떠나 버렸죠. 텍사스의 흙이라곤 만져 보지도 못한 남자들과 대도시의 불빛을 찾아 말이오."

"그 후에 당신은 어떻게 했어요?"

잠시 후 엔젤이 물었다. 목소린 부드러웠으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알고 있는 호크라면 지나를 추적해 붙잡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호크는 지나에게 이용당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 당시 호크는 누구를 추적하고 파멸시키는 데는 관심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자동차 경주를 했소."

그 간결한 말 속엔 엔젤이 알고 싶은 것 이상이 내포되어 있었다. 엔젤은 죽기 살기로 자동차에 미쳐 있는 젊은 호크를 보았다.

"그땐 여자도 있었소. 내가 이기고 있는 동안은 말이오. 많이 지기도 했고 차가 충돌하는 일도 많았소. 그때마다 여자들은 날 떠나 버렸소. 다시 이기기 시작하면 그 여자들은 왱왱거리는 검은 파리 떼처럼 돌아오곤 했지."

호크의 목소리에 담긴 경멸에 엔젤은 눈을 감았다. 그건 자신과 여자들에 대한 경멸이었다.

"다행히 죽진 않았군요."

흥분을 가라앉히며 엔젤이 말했다.

"한참 지나서야 난 그걸 깨달았소. 처음에는 내 곁에 있는 모든 여자들에게 일종의 실망감을 느꼈소."

엔젤은 몸이 오싹해졌다.

호크가 다시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때 웃기는 일이 생겼소.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난 인생을 더 소중히 생각하게 된 거요. 스물세 살이 되자 자동차 경주가 남자에게 그렇게 멋진 밥벌이가 아님을 깨달았소. 차사고 후 6개월이 지나서야 경기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다시 3년이란 세월을 보낸 후에야 경주를 완전히 그만둘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모을 수 있었지."

"그리곤 뭘 했어요?"

"증권 거래를 했소. 땅을 사고 파는 일이지. 내겐 재능이 있었소. 자동차 경주처럼. 맞아, 자동차 경주와 같았지. 나는 이익과 손해에는 별 관심이 없었소. 내게 의욕을 불러일으켜 주면 족했소."

"지금은?"

엔젤이 속삭였다. 호크는 주춤거렸다. 엔젤의 매끄러운 등을 따라 손길을 움직이며 자신과 함께 했다가 떠나 버린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공허한 하늘, 싸늘히 식은 심장, 흥미를 잃은 사냥, 그리고 한줌의 재를 떠올렸다.

"이젠 그걸로 만족하지 않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만 말이오."

처량한 호크의 목소리가 독수리의 발톱처럼 엔젤을 파고들며 온몸을 찔렀다. 엔젤은 잠시 눈을 감았다. 호크를 만지고 싶었다. 인간적인 애정을 주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는 호크를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도 호크가 두려웠고, 흔들리기만 하는 자신이 두려웠다.

처음 섹스를 했을 때의 황홀함이 떠오르며, 온몸으로 강한 관능적인 욕망이 퍼져 나갔다. 고통과 경멸과 분노로 끝난 그 종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호크는 엔젤의 옷을 올리고 몸에 살짝 손을 얹으며, 항생 연고를 집어 들었다. 연고는 청바지를 가지러 갔을 때 가져온 것이었다-호크의 뭉툭한 욕망의 상징을 감추고 있는, 수영복 위로 입고 있는 그 청바지 말이다.

호크는 엔젤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부드럽게 항생 연고를 발라 주었다.

"이제 등이 좀 어떻소?"

"좋아졌어요. 훨씬 덜 아파요."

엔젤은 힘없이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엔젤."

호크에게 등을 돌린 채 꼼짝 않던 엔젤은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카락이 얼굴로 흘러내려, 호크가 보기 전에 눈물을 가려 주었다. 하지만 호크는 목소리에서 눈물을 보았다.

호크는 엔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눈물이 엔젤의 속눈썹에서 반짝거렸다.

"미안하오."

호크는 다시 엔젤을 만지기가 두려웠고, 다시 상처를 주는 게 두려웠다.

"다시는 당신에게 상처 주지 않을 거요. 당신이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는 걸 몰랐소."

반짝이던 눈물이 말라가자 엔젤은 눈을 떴다. 호크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눈은 후회로 그늘져 있었다.

"이젠 괜찮아요."

엔젤이 속삭였다.

호크는 천천히 엔젤을 팔로 감아 꼭 껴안으며 위로의 말을 중얼거렸다. 눈물이 마구 솟았지만 엔젤은 복받치는 설움을 어떻게 억눌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호크의 삶은 엔젤과는 너무 달랐다. 엔젤은 호크가 왜 거칠고, 몰인정하고, 공격만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부드러움이나 사랑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를.

그렇지만 호크는 아주 간절히 사랑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엔젤 자신이 그와 똑같은 욕망을 느낀 적이 없었다면 분명 그에게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엔젤은 떨리는 손으로 호크의 볼을 어루만졌다.

"이제 됐어요, 호크. 이제 이해할 수 있어요. 당신은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고, 난 증오를 느껴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엔젤……."

엔젤의 얼굴에 슬픔이 깃들었다.

"그랬으니 우린 서로 잘못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내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체한다고 믿은 거죠? 그래서 날 배우라고 부른 거죠?"

호크는 엔젤의 슬픔과 떨리는 입술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그렇소."

"난 형편없는 배우죠."

"맞소. 이제야 그걸 알겠소."

호크는 이렇게 속삭이고는 엔젤의 팔과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호크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들어 봐요! 당신이 내게 한 짓을 난 비난하지 않아요."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한 듯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난 당신을 비난했소."

"하지만……."

"당신은 어떤 남자에게도 주지 않았던 것을 내게 주었소. 그리고 난…… 난 다른 모든 여자들에게 주었던 걸 당신에게 주었지. 난 당신의 순수함에 충격을 받았소. 당신의 진실이 날 파괴시킨 거요. 그래서 난 당신을 괴롭혔소. 아주 심하게 말이오. 그래서 당신은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고."

호크의 입술이 엔젤의 손을 지나, 떨고 있는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통 외에도 뭔가 당신에게 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 파괴하는 것 외에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을 위해 쓰도록 해주시오. 난 당신을 건드리지 않을 거요. 손과 입과 숨결로 만지는 것 외에는 당신을 건드리지 않을 거요."

엔젤은 호크의 선명한 눈을 들여다보며, 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평탄치 못한 과거에서 아름다움을 창조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호크의 얼굴은 더 이상 잔인하지 않았다. 그 얼굴에는 희망이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다-한번도 받아 보지 못한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하늘만큼이나 차갑고 쓰라린 공허감 속에서 결국 오지 않을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호크는 손으로 엔젤의 체온을 느끼고, 가슴에 기대 달콤한 엔젤의 숨소리를 느끼고, 자기에게 몸을 내맡긴 채 떨고 있는 엔젤의 순수함을 느꼈다.

"좋아요."

속삭이는 엔젤의 목소리가 세상의 어떤 선물보다 더 호크를 설레게 했다. 자격이 없는 자신에게 보여 준 신뢰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엔젤의 머리카락을 애무하는 호크의 손이 떨렸다. 엔젤을 가볍게 끌어안고 아기를 재우듯 천천히 어루었다. 호크는 눈을 감고 자기 팔에 안겨 있는 엔젤에게 몰두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로 엔젤의 이마, 눈꺼풀, 골이 진 볼에 키스했다. 엔젤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고, 햇살에 빛나는 따스한 느낌을 입으로 가져갔다.

호크는 매끄러운 엔젤의 곱슬머리에 얼굴을 묻고, 머리가 아찔해질 때까지 달콤한 엔젤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엔젤이 뺨으로 자신의 가슴에서 반짝이는 검은 털을 문지르자, 호크는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았다.

호크는 집게손가락으로 엔젤의 얼굴을 비스듬히 올려서는 한참 동안 신비로운 청록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은 광채를 띠고 있었을 뿐 그늘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호크는 천천히 자기 입술을 엔젤의 입술로 가져갔다.

입술이 닿자 그 느낌이 무척 달콤하고 부드러워 엔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엔젤은 속눈썹을 내리 깔아 눈물을 감추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을 쉬자, 따뜻하고 상냥하고 신중한 호크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호크는 촉촉한 혀끝으로, 행복을 맛보고 있는 엔젤의 입가를 적셔 가며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엔젤의 입 위에 자기 입을 여러 번 가볍게 댔다. 호크는 엔젤의 입술에 닿을락말락하게 감질 나는 키스를 했다. 그 애무는 매번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그리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엔젤의 이마와 눈과 웃음 띤 입가를 어루만지는 동시에 입술에 혀를 가져갔다. 여기저기 섬세한 애무로 그녀를 숭배하고 있는 호크의 입술은 긴장되어 있고 달콤했다.

몸속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아득한 열기와 함께 엔젤은 천천히 무너져 갔다. 목에서 가벼운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물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내려와, 혀끝으로 자신을 적시고 있는 호크의 입술까지 적셨다.

호크는 엔젤의 눈물을 느끼고 머리를 들었다.

"엔젤? 왜 그러오?"

요동치는 흥분으로 목소리로 낮고 굵어졌으나 상냥했다.

"당신은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게 해주었어요."

그녀는 호크의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한번도 내가 이렇듯 아름답다고 느껴 본 적이 없어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기쁨에 사로잡힌 호크는 우쭐해졌다.

"고맙소."

호크는 걸걸한 목소리로 답하고는 엔젤의 뺨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을 만지고 있으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배우는 것 같소."

호크가 민감한 귓볼에 입술을 대자 엔젤은 부르르 떨었다. 호크는 가볍게, 육감적이며 격정적으로 혀를 움직였고, 혓바닥을 아래로 말아 귓속의 은밀한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엔젤은 전율을 느끼며 신음 소리를 냈다. 호크는 머리를 들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엔젤을 들여다보았다. 팽팽히 긴장된 엔젤의 육체에서 환희와 열정이 커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호크는 엔젤의 목으로 손을 가져가, 엄지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과 뛰는 맥박을 음미했다.

엔젤의 손도 호크를 향해 올라왔다. 호크의 허리에 닿은 손가락은 따뜻했다. 엔젤이 자신의 품으로 파고들자 호크는 등을 움츠렸다. 호크는 그녀의 손길로 인해 커져 가는 자신의 욕망을 들키고 싶지 않아 눈을 꼭 감았다.

"당신은 정말 포근해요."

엔젤은 머리를 돌려 호크의 가슴팍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 털북숭이고요."

엔젤은 고개를 들었다. 행복과 쾌락으로 눈이 반짝거렸다.

"가서 셔츠를 가져오겠소."

호크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자신을 억제하려고 긴장한 나머지 말투가 딱딱해졌다. 엔젤이 남자의 맨가슴에 익숙하지 않을 거라는 짐작을 못한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그랜트의 가슴이 데리처럼 매끈했다면, 남자 몸에 난 거친 털을 만져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셔츠 입지 마세요."

엔젤이 재빨리 호크를 제지했다.

"정말이오?"

엔젤은 매끄럽고 탄력 있는 호크의 털북숭이 가슴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난 당신을 느껴 보고 싶어요. 당신이 괜찮다면요."

호크는 눈을 떴다. 그러고는 엔젤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 위로 천천히 가져갔다.

"당신이 만져 주는 게 좋소."

'미치도록.'

호크의 욕망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남성이, 맥박이 한 번 뛸 때마다 청바지 안에서 더욱 강렬하게 그를 압박해 왔다. 그렇지만 호크는 엔젤이 선사하는 순진한 고문을 다른 여자들이 안겨 주는 어떤 생리적인 쾌락과는 바꾸지 않을 것이다.

"정말이에요?"

엔젤의 눈과 목소리에 그리고 애무를 멈춘 손에 망설임이 엿보였다.

"이보다 더 확신해 본 일은 없었소."

호크는 머리를 숙여 엔젤의 입술 위에 입을 가져갔다. 혀로 조심스럽게 자극하자 마침내 엔젤의 입술이 벌어졌다. 조그맣고 하얀 이를 본 호크는 넋을 잃었다.

호크는 달콤하고 촉촉한 입술을 천천히 음미했다. 혓바닥을 엔젤의 혀에 대고 느끼는 단 한 번의 맛과 민감한 접촉을.

엔젤의 몸속에 흐르는 전율이 호크의 육체에 메아리치면서, 몸이 뜨거워졌다. 거추장스런 옷 위를 누르는 살결은 속박에서 벗어나겠다고 안달하는 듯했다.

호크는 다시 부드러운 엔젤의 입술을 탐했다. 엔젤은 그의 몸을 가까이 당기며 무언의 초대를 했다. 그녀의 혀는 짓궂게 위에서 눌러 대는 호크의 혀를 대담하게 입 안으로 끌어들이며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호크가 부드러운 애무로 이에 답하자 작은 탄성이 엔젤의 목 안에서 터져 나왔다.

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결국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며 엔젤의 입술이 호크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때에도 키스는 계속됐다. 엔젤은 촉촉하고 따뜻한 자신의 입 안을 호크의 맛으로 가득 채우고는, 몸을 휘감는 환희의 물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크는 뜨거워진 손바닥으로 엔젤의 볼에서 어깨, 팔에서 손끝까지를 죽 훑어 내려갔다. 자신의 머리를 엔젤의 머리에 비벼대면서,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녀의 팔을 서서히 풀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엔젤의 손가락 사이에 살짝 끼우고는 뜨겁고 예민한 엔젤의 살결을 건드렸다. 보들보들한 팔 안쪽으로 손을 넣어 황홀한 유혹을 하기도 했다. 애무도 키스처럼 끝이 없었다. 엔젤은 전신을 떨며 호크의 존재에 정신이 멍했다. 그가 가져다 준 충족감이 자신의 몸속을 흐르고 있음을 보여 줄 때까지, 호크의 애무에 몸을 내맡겼다.

깊이 파인 수영복에 손바닥을 대면서 키스는 더욱 깊어졌다. 호크는 매끄러운 천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한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는 부드러운 살을 느껴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손은 단단히 부푼 엔젤의 가슴을 스치며 늑골로 미끄러져 올라갔다. 매끄럽게 올라간 곡선은 엔젤의 신음 소리 못지않게 호크를 흥분시켰다.

그때서야 호크는 엔젤의 입에서 입술을 떼고, 흥분되고 긴장된 목덜미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엔젤은 호크의 입술과 손길이 주는 놀라운 충격에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완전히 내맡겼다. 호크는 세심한 배려를 하며 목의 우묵한 부분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격동하는 엔젤의 맥박을 혀와 입술로 느끼면서…….

호크의 입술이 가슴 위로 옮겨가자 엔젤은 몸을 떨며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굽혔다. 호크는 매끄러운 수영복 위로 윤곽을 드러낸 가슴을 살짝 깨물었다. 엔젤은 낮게 신음을 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아픔과 즐거움을 번갈아 주며 호크의 몸속에 퍼져나갔다. 호크는 남성의 욕망으로 인해 육체적 고통을 느끼면서도 엄청난 환희를 만끽했다. 호크는 수영복의 끈을 잡아당겼다. 매듭이 풀려 수영복이 엔젤의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엔젤은 숨을 죽이며 자기의 맨가슴 위로 뜨거운 호크의 입술을 느끼기를 열망했다.

갑자기 엔젤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고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자신은 그랜트를 사랑하고 원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이건 호크라는 남자처럼 경험 밖의 일이었다.

호크는 엔젤의 변화를 느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입술은 더 이상 엔젤의 몸을 더듬지 않았다.

"호크?"

엔젤은 기진맥진한 듯했다.

"당신 등에 붕대를 감을 시간인 것 같소. 배를 바닥에 대고 누워 눈을 감고 있어요."

호크는 일어서 몸을 홱 돌렸다.

단어들이 마음속에 울리며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붕대를 감는다고 엔젤이 눈을 감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자신의 욕망에 엔젤을 겁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욕망을 숨길 재간은 물론, 욕망이 아무리 커지고 잔인해져도 덤비지 않겠다는 확신을 엔젤에게 줄 재간이 없었다.

호크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선실로 들어가, 구급상자를 찾는 데 일부러 뜸을 들였다. 크기와 모양이 다른 붕대 중 하나를 고르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마치 엔젤의 생명이 붕대에 달려 있는 것처럼.

호크는 아직 엔젤에게 주고 싶은 즐거움을 완전히 보여 주지 못했다. 그리고 엔젤은 여전히 호크가 두려웠다.

 

23

엔젤은 선실 쪽을 외면하고 배를 깔고 누웠다. 호크가 돌아왔을 때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엔젤은 아름다운 장미를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장미는 열정과 욕망이 들끓는 곳으로 황망히 떨어져 나갔다.

매순간 느끼는 욕망과 좌절감으로 엔젤은 마음이 흔들렸다. 육체는 끝없이 화끈거리고 아팠다. 그런 감정은 결코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엔젤은 당황스럽고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욕망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호크가 자기 곁을 떠나지 않고 곁에서 애무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매순간 간절했다.

엔젤은 호크와의 섹스로 받았던 고통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호크가 다시는 자기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리라 믿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자신을 애무하던 호크라는 사람은 며칠 전 아무렇게나 자기를 다루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약탈자가 아니라 이젠 연인이었다.

자신을 만지는 호크의 손길이 그의 심정을 말해 주듯 꿈틀거렸다. 온 세상을 다 차지한 듯 황홀했다. 그렇게 집요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욕망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호크는 날 원해. 아무리 애써 숨기려 해도 그는 날 원해. 나도 그렇고.'

호크는 엔젤의 상처 위에 놓인 두툼한 수건이 살며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엔젤의 등을 호크는 따뜻한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엔젤이 전율했다.

호크는 엔젤의 등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걱정스럽게 물었다.

"춥소?"

태양이 머리 위에 있었지만 바닷가란 항상 서늘하다는 것을 호크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이 손놀림을 멈추면요."

엔젤이 속삭였다.

호크는 움찔 놀랐다. 가슴이 갑자기 심하게 뛰었다. 손이 덜덜 떨려, 붕대를 풀어 엔젤의 등에 반반하게 펴 놓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가까스로 일을 해치우곤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열십자로 파인 수영복 사이로 드러난 따뜻한 살결에 입을 맞추었다.

"이건 좋소?"

엔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내 팔에 꼭 매달려 있었을 때, 당신이 더 이상 내 손길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소."

"난 그냥…… 놀랐어요."

엔젤은 솔직히 고백했다.

호크는 엔젤의 등골을 따라 관능적으로 핥아 내려가다 민감한 부분에서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따뜻한 손으로 엔젤의 발목부터 탄력 있는 다리를 가볍게 주물렀다.

등뼈 아래 민감한 신경을 이로 살살 건드리자 엔젤은 기쁨의 물결에 휩쓸렸다.

"왜 놀란 거요."

호크가 속삭였다.

엔젤은 대답 대신 얼핏 호크의 이름처럼 들리는 신음 소리만 되뇌었다.

"엔젤?"

"난 자신을 안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를 원하는 게 어떤 건지 잘 안다고 생각했죠."

엔젤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엔젤이 숨을 확 내뱉었다. 뜨겁고 강인한 호크의 손이 허벅지를 따라 죽 미끄러지자, 원초적 본능이 몸을 타고 줄달음쳐 자신을 녹였다.

"내가 틀렸어요, 호크. 당신이 날 만질 때마다 난 새로운 것을 배워요, 아름다움을요."

호크는 '' 소리를 내더니 눈을 꼭 감았다. 그러곤 엔젤의 등 오목한 곳에 뺨을 얹고 그 부드러운 피부 위에 축축한 입김을 남겨 놓았다.

지금까지 엔젤 같은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오래 전에 자신이 포기해 버린 것들-상냥함, 관대함, 따뜻함, 진실-을 믿고 싶게 만든 여자. 호크는 거짓이 없는 이 여자를 숭배하고 싶었다.

호크의 손바닥이 엔젤의 오른쪽 다리를 따라 내려가며 다시 어루만졌다. 다리 근육이 움직이고 구부러지며 호크의 접촉에 반응했다. 장딴지는 무척 매끄럽고 유연하고 단단했다. 햇빛에 탄 발목에는 희미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호크는 손놀림을 멈추고, 옛 상처의 흉터들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엔젤의 피부는 팽팽하고, 따뜻하고, 믿기 어려울 만큼 생생히 살아 있었다. 한때 부상당하고, 뼈가 부러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데리의 격려가 없었더라면 상처 입고 절망에 빠졌을 천사!

호크는 자기가 엔젤의 발목을 꽉 붙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발목을 살살 어루만지며 사라져가는 상처를 입술과 혀끝으로 쓰다듬었다.

"미안하오. 내가 발목을 아프게 했소?"

호크가 속삭였다.

엔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찰랑이는 머리카락에 햇빛이 쏟아져 반짝거렸다.

"정말이오?"

호크는 엔젤의 살결에 천천히 입을 맞추고 볼을 비볐다. 갑자기 정적이 감도는 걸 느낀 엔젤은 팔꿈치를 받치고 어깨 너머로 호크를 올려다보았다. 호크의 눈에는 적나라한 강렬함과 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호크?"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호크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 같은 모습.

"뭐 잘못됐나요?"

호크는 활 모양으로 굽힌 엔젤의 다리 위에서 콧수염을 매만지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소. 단지 데리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생각하던 참이었소."

"데리에게요?"

엔젤은 바다처럼 깊은 눈으로 호크의 표정을 살폈다.

"사랑스런 엔젤, 난 데리에게 당신을 빚졌어. 누구와도 나눈 일이 없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데리 덕분에 경험했거든."

눈물이 퍼져 눈앞이 잠시 흐릿했다. 엔젤은 떨고 있는 입으로 호크의 이름을 속삭였다.

호크는 볼 끝에 매달린 엔젤의 눈물을 얼른 혀끝으로 핥았다.

호크를 안으려고 엔젤은 몸을 돌렸다. 호크는 엔젤이 몸을 완전히 일으키기 전에 부드럽게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 십자형으로 묶여 있는 수영복 끈을 풀었다.

수영복이 흘러내리자 단단한 엔젤의 가슴 곡선이 드러났다. 한 번도 태양을 본 적이 없는 살결은 부드러운 진주 빛이었다. 오똑 선 가슴 끝은 우아한 연분홍빛이었다.

호크는 엔젤의 가슴을 입으로 가볍게 애무하며, 육감적인 열기와 촉촉한 여운을 그곳에 남겼다.

엔젤은 열정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지금처럼 발가벗은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호크가 옷을 모두 벗겼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때는 뱃머리의 희미한 불빛이 은밀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은 태양과 호크의 밝은 갈색 눈이 불타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본 당신의 모습 중에 지금이 가장 아름답소."

호크가 천천히 엔젤의 가슴을 다시 애무했다. 뜨거움과 촉촉함으로 엔젤이 달아오르자, 호크의 목소리는 더욱 낮고 굵직해졌다.

"그리고 난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여자로 기억하고 있소."

호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호크……."

갈망의 물결이 엔젤을 휩쓸었다.

"당신이 나를 약하게 만드는군요."

엔젤의 빛나는 머리카락이 호크의 배 위로 헝클어졌다. 엔젤이 머리를 무릎에 대자, 호크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기의 남성이 점점 더 딱딱해지고 커지는 것을, 엔젤이 느꼈음을 깨닫고 갑자기 움찔했다.

하지만 엔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호크는 눈을 꼭 감았다. 다른 모든 여자들이 자기 마음속에서 사라진 후에도 이 순간만은 기억할 것이다.

호크는 엔젤을 부드럽게 안아 올려 입술로 얼굴 이곳저곳을 애무했다. 호크의 입술이 자신의 입을 스치자, 엔젤은 신음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굵고 검은 호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지면서, 그의 입술이 주는 육감적인 흥분을 간절히 원했다.

호크는 혀를 엔젤의 이 사이로 살짝 넣은 다음, 혓속 깊숙이 집어넣었다가 빼고는 다시 집어넣으면서, 점점 엔젤을 자극했다. 엔젤은 호크의 몸을 꽉 안고 자기 가슴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그의 품속에서 몸을 비틀며 단단한 젖꼭지로 그를 자극했다.

혀로 천천히 애무를 계속하는 동안, 호크의 손가락은 엔젤의 등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수영복을 다리 밑으로 내리며 굴곡진 엉덩이 계곡을 지나 은밀하고 예민한 부분을 잠깐 만졌다.

육감적인 불꽃을 튀기며 엔젤의 신음 소리가 호크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호크는 엔젤의 허리를 꽉 껴안아 무릎 위로 흔들어 댔다. 그러고는 엔젤의 발목에 걸린 수영복을 걷어 내고, 손끝으로 다리 안쪽의 보드라운 살결을 애무했다. 반짝이는 갈색 털 사이에 숨어 있는 뜨거운 액체가 느껴졌다.

엔젤은 눈을 감았다. 다시 한 번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엔젤의 몸 깊은 곳에서 뜨거운 액체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호크의 손놀림에 따라 강한 환희가 자신의 몸속으로 몰려들었다.

호크는 엔젤을 한 번 더 들어 올려 검정 침낭 위에 뉘었다. 엔젤은 어깨와 팔에 뭉친 단단한 호크의 근육에 입을 맞추었다. 자기의 애무에 호크의 몸이 떨렸다. 엔젤은 그의 가슴을 입술과 혀와 이로 애무하면서, 숨 막혀 하는 호크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그때서야 호크는 다시 엔젤의 입술을 찾아 깊은 키스로 그녀를 채웠다. 엔젤은 호크에게 매달리면서 근육질인 그의 육체를 꽉 끌어안았다.

호크가 키스를 끝낼 쯤, 엔젤은 숨을 헐떡거리며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호크는 한참 동안 가늘게 새 나오는 탄성과 보드라운 살결이 뜨겁게 전율하는 육체의 흐느낌을 황홀하게 지켜보았다. 허벅지 안쪽을 가볍게 누르자, 엔젤은 몸을 뒤척이며 자신을 더 노출시켰다.

호크가 손가락으로 엔젤의 보드라운 속살을 더듬으며 이곳저곳을 훑자, 엔젤은 천천히 몸을 비틀며 맹목적으로 엉덩이를 흔들어 댔다. 호크는 아주 천천히 더욱 깊은 애무를 해 나갔다.

엔젤은 자신을 부르는, 달콤하고 강렬한 흥분에 빠져 들었다. 호크는 몸을 굽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는 입을 자신의 허기진 입술로 강하게 빨았다.

엔젤의 반짝이는 눈 속에 뜻밖의 즐거움이 어려 있었다.

호크는 엔젤의 목을 더듬으며 부드럽지만 열정적으로 반응하며, 자신에게 미친 듯 매달리는 따듯한 비단결 같은 육체를 음미했다.

엔젤은 호크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호크가 입술을 빼앗았던 것이다.

자신을 그토록 신뢰하는 엔젤의 몸속에 더 깊숙이 들어가고 싶었지만, 호크는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내가 당신을 아프게 했소?"

부드럽고 뜨거운 엔젤의 입술을 애무하며 호크가 말했다.

엔젤은 그 질문에 무언의 몸짓으로 대답했다-엉덩이를 움직이며, 감질 나는 애무에 안타까워하며, 호크가 자기를 가져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호크는 머리를 숙여 입으로 엔젤의 가슴을 애무하고는 거뭇한 배꼽을 지나 마침내 뜨겁고 달콤한 신비의 계곡으로 향했다.

천사와 그 천사를 숭배하는 독수리만을 남기고 세상은 멈추어 버렸다. 달콤한 절정에 오른 천사의 외침만이 텅 빈 하늘을 가득 채웠다.

천천히 눈을 뜬 엔젤은 여전히 상상을 초월하는 즐거움에 취한 채, 호크를 감싸 안으며 뜨거운 그의 가슴에 볼을 문질렀다.

호크는 엔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까이 끌어당겼다. 엔젤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호크의 불타는 눈을 들여다보았다. 자기가 느꼈던 것, 여전히 느끼고 있는 것을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난처하기만 했다.

두 사람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호크의 키스로 여전히 화끈거리는 입술을 달싹여 엔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을 고백했다.

"사랑해요, 호크."

호크는 눈이 갑자기 검게 변하면서 온몸을 떨었다.

"엔젤. 그럴 의도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호크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목구멍에 걸렸다. 호크는 엔젤의 눈꺼풀에 부드럽게 키스하곤 눈을 감겼다. 푸른 눈 속에서 빛나는 감정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다시 당신에게 상처를 주느니 내 목을 비틀어 버릴 거요. 난 너무 오랫동안 증오만 해왔소, 엔젤. 그것도 너무 자주. 내가 사랑을 하긴 너무 늦어 버린 것 같소."

호크의 목소리에 담긴 절망과 후회는 조금 전 느꼈던 환희만큼이나 엔젤에겐 큰 고통이었다.

엔젤은 손을 올려 호크의 얼굴을 감싸며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랑했다-상냥함과 증오, 가슴 벅찬 현재와 냉혹했던 과거까지도.

엔젤은 호크와 처음 키스할 때처럼 달콤하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사랑한 건 당신이에요, 사랑의 관념이 아니라. 당신이 답례로 날 사랑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과 몇 주 같이 머물고 싶어요. 더 이상은 부탁하지 않을게요. 단지……."

광채로 빛나던 엔젤의 눈엔 쓸쓸한 그늘이 어려 있었다.

"당신이 떠날 때는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가세요. 모든 게 끝났을 때, 그땐 알게 되겠죠."

엔젤이 속삭였다.

"엔젤."

호크의 목소리가 떨렸다.

"괜찮아요, 내 사랑."

엔젤은 호크에게 입을 맞추고는 환하게 웃었다.

"난 당신을 사랑하고 놓아줄 수 있을 만큼 강해요. 하지만 당신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을 거절하진 마세요. 멋진 독수리의 날개 위에서 몇 주간의 비행 말예요."

엔젤의 부드러운 손이 호크의 몸을 자신의 입술로 당기자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엔젤은 그의 열기가 솟아나도록 그가 가르쳐 준 방법으로 입술을 놀렸다.

"제발 내 사랑을 거부하지 마세요."

엔젤이 속삭였다.

 

24

호크는 낮게 신음 소리를 내며, 달콤한 엔젤의 입술을 깊숙이 빨아들였다. 그는 나긋나긋한 엔젤의 육체에서 발산하는 열기에 한참 동안 흠뻑 취해 있었다.

그러자 힘들게 억제해 온 갈망이 터져 나오려고 하며 마음을 헤집었다. 호크는 육감적인 엔젤의 몸짓을 저지하며 두 팔로 엔젤을 껴안았다.

"당신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있소."

원초적인 갈증을 가라앉히느라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엔젤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호크를 올려다보았다. 입가에는 의미 모를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난 경험이 없을 뿐이지 바보는 아니에요. 당신은 자신의 만족은 생각지 않고 내게 모든 걸 주었잖아요. 이제 당신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요."

"엔젤…… 엔젤."

자기를 억제하느라 낮고 긴장된 목소리였다.

"?"

엔젤은 덤덤히 말했다.

"난 당신을 너무나 원하고 있소. 하지만 당신을 다시 다치게 할까 두렵소. 당신은 모를 거요!"

"그럼 내게 보여 줘요, 호크."

엔젤은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호크의 가슴에 입술을 갖다 대고 애무를 시작했다.

"당신의 여자가 되고 싶어요."

"진심이오?"

호크의 눈이 반짝였다. 목소리는 감정에 복받쳐 떨렸다. 갑자기 호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결국 엔젤에게 거부당할 것이며, 그래서 만지는 게 두려운 듯이.

엔젤은 자기 앞에 바싹 다가서 있는 구릿빛 피부의 남자를 올려다보며, 그가 첫날밤을 떠올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마음 내키는 대로 엔젤을 갖고 상처를 주었던 그날을. 또한 근육질의 육체를 휘감는 열기와 낡은 청바지 속에서 팽팽해진 굶주림을 알아차렸다. 엔젤은 의도적으로 호크에게 손을 뻗어, 그의 물건을 꽉 움켜잡았다.

엔젤의 손이 닿자 그건 팽팽히 당겨진 활처럼 긴장했다. 호크의 눈 속에서 어두운 격정의 불꽃이 튀자, 엔젤은 흥분했다.

"그럼요.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걸 내게 가르쳐 주어야 해요. 그렇게 해주겠어요?"

갑자기 울려 퍼지는 호크의 웃음소리가 탁하고 퉁명스럽게 들렸다. 호크가 엉덩이를 유연하게 움직이자 엔젤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엔젤은 호크에게서 배운 대로, 격렬하면서도 부드럽게 그의 몸을 손톱으로 더듬어 내려갔다. 호크는 엔젤의 손을 들어올려 부드럽게 깨물면서 말했다.

"이렇게 애무하는 법을 언제 배웠소?"

쉰 목소리로 묻는 호크의 육체는 욕망으로 달아올랐다.

"당신이 가르쳐 주었잖아요."

"언제?"

"당신이 내게 이렇게 해줬을 때."

엔젤은 호크가 한 것처럼 거칠게 그의 손을 깨물었다.

호크는 자신이 했던 다른 애무를 생각해 보았다. 은밀한 접촉, 가냘픈 비명 소리, 뜨거운 환희의 액체. 경험은 없었지만 엔젤은 자신이 자제심을 완전히 잃을 정도로 몸을 완전히 내맡겼다.

자신은 꿈도 못 꿀 만큼 순진하고 착하고 육감적인 여자.

"엔젤, 당신에겐 나보다 나은 사람이 어울려요."

"당신보다 나은 사람은 없어요."

엔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확신과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아니오. 그런 사람은 많소."

"나한테는 아니에요."

엔젤은 딱 잘라서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호크는 눈을 감았다. 엔젤은 바보도 아니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든 없든, 자신을 사랑하든 하지 않든 간에 호크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호크는 엔젤이 좋은 사람과 만나도록 하기 위해선 자신이 멀리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당신에게 고통 외에는 줄 게 없소."

호크는 절망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호크, 나에겐 더 이상 받을 고통이 없어요. 내 모든 것들은 언제고 부서질 수 있고, 이미 부서졌어요. 마음과 육체 모두."

"엔젤."

호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내게 상처 줄까 봐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나를 가지는 것에 대해 자신을 책망하지 마세요.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성숙한 여자라고요. 당신의 여자 말예요, 호크. 당신이 날 원하는 한은요."

엔젤은 호크의 허리띠에 천천히 손을 댔다. 조금 전에 경험했던 육감적인 욕망 이상의 흥분이 마음속에서 치솟았다. 격한 흥분으로 손이 심하게 떨리는 바람에, 평소답지 않게 손놀림이 서툴렀다.

호크는 우울한 눈으로 엔젤을 유심히 살폈다. 자신 때문에 그토록 고통을 받았으면서 자신을 진심으로 원하다니…….

허리띠가 완전히 벗겨졌다. 엔젤은 날렵하게 자신의 옷을 벗겨 내던 호크의 솜씨에 비해 자신은 너무 서투르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청바지에 달린 단추를 여는 일은 허리띠를 풀기보다 더 힘들었다. 마치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것 같았다. 동작 하나하나가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그때 엔젤은 많은 방법으로 '아뇨'라고 말할 수 있음을 갑자기 깨달았다. 어쩌면 호크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인지 모른다. 그는 능숙한 애인이다. 그렇다, 호크는 자신에게 부드럽게 말한 것이었다.

호크가 굶주려 있기는 했다. 하지만 어떤 남자고 그런 상황에선 마땅히 그랬으리라. 본능적인 욕망은 사랑이 아니다. 그건 관심도 아니고, 어느 정도의 자극이 오면 생기는 단순한 생리적 반사 작용에 불과한 것이다.

'거기엔 사적인 감정은 없었던 거야. 놀랄 것도 없어, 엔젤.'

엔젤은 혼자 중얼거리며 마음을 진정했다.

'호크는 내게 준 상처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 거야. 내 고통의 기억을 지워 주기 위해서 짜릿한 황홀감을 주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내가 오해를 한 거지. 난 그의 애무를 애무 이상으로 받아들였어. 다시 한 번.'

엔젤은 부질없는 노력을 그만두고 손을 무릎 위에 털썩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검은 침낭 위에 누우면서 자신의 몸을 덮었다.

"미안해요, 호크. 난 또다시 당신을 오해했군요."

엔젤이 조그맣게 중얼거렸지만 호크의 귀에는 그 말이 또렷하게 들렸다. 돌아눕기 직전에 보였던 눈 속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분명히.

"무엇을 오해했단 말이오?"

엔젤은 아름다운 장미를 마음속에 떠올렸다. 번쩍이는 태양 아래 꽃잎을 오므리는 심홍빛 장미.

"엔젤."

호크는 머뭇거리며 엔젤의 어깨를 건드렸다.

장미가 부르르 떨더니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엔젤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여러 번 심호흡을 했다. 여전히 호크를 외면한 채, 눈을 허공에 두고 말했다.

"당신이 단지 나한테 미안해한다는 것을 몰랐어요."

거의 안정을 되찾은 듯 목소리가 차분했지만, 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것이 호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엔젤, 그게 아니라……."

호크는 매끄럽고 온기 있는 어깨를 툭툭 치며 상냥하게 말을 붙였다.

"제발 그만 하세요."

엔젤은 처절할 정도의 침착함을 보이며 호크의 말을 막았다.

"괜찮아요, 호크. 더 이상 저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낄 필요 없어요. 당신이 말했듯이 그건 열정의 값싼 대가일 뿐이에요."

"내가 말했다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호크의 손놀림이 멈추었다.

"바로 지금요. 내가 연인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을 당신이 알게 해준 바로 지금 말이에요."

엔젤은 거칠게, 아니 목이 메듯 웃었다.

"그놈의 청바지 단추 정도는 열 수 있는 여자를 원하는 걸 누가 책망하겠어요!"

호크는 엔젤의 손에서 침낭을 잡아끌었다. 엔젤은 다시 나체가 되었다. 몸을 돌려 침낭을 당기려고 손을 뻗자, 호크가 그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엔젤의 손을 자신의 허리띠로 잡아끌었다.

"난 무수한 남자들의 옷을 벗긴 여자를 원치 않소. 난 나를 너무 원한 나머지, 손이 떨려 바지 허리끈을 풀 수 없는 그런 여자를 원하오. 이제껏 그런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지. 그래서 지금까진 그런 여자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소."

마지막 단추가 좁은 구멍에서 빠져 나왔다. 호크는 엔젤의 손을 낡은 청바지 안으로 잡아당겼다. 수영 팬티 안에 숨은, 딱딱해진 물건 위에 엔젤의 손이 닿자, 호크의 목에서 깊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신이 느낀 건 욕정이 아니오."

호크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눈은 격정으로 검어졌다.

"그건 내가 어떤 여자에게도 느껴 보지 못한 사랑이오. 그리고 그건 아주 좋은 느낌이었소. 왜냐하면 당신은 어떤 여자보다 소중한 여자니까."

호크는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봉지를 꺼냈다. 그리고 수영 팬티와 청바지를 홱 벗었다. 엔젤에게 욕망이 스쳐 지나갔다. 호크는 엔젤이 본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호크는 뜨거워진 몸으로 엔젤을 끌어당겼다.

"이젠 못 참겠소, 엔젤. 당신을 너무나 갖고 싶소."

엔젤의 목에 입술을 파묻으며 호크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재빨리 엔젤의 몸 위로 올라가, 다리 사이에 자신의 몸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엔젤을 향해 엉덩이를 움직이며,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엔젤은 몸을 가늘게 떨며 신음했다. 호크를 향해 몸을 거세게 돌리며 민감한 자기 발바닥을 호크의 종아리에 댔다. 그러고는 자기 몸속으로 그를 받아들이려고 본능적으로 발버둥 쳤다.

"지금요, 호크."

"나의 사랑하는 엔젤."

호크는 엔젤의 몸을 유연하고 힘찬 동작으로 잡아끌었다.

곧 호크는 엔젤의 일부가 되었다. 자기의 욕망 때문에 엔젤이 다칠까 봐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하지만 엔젤은 아파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호크는 엔젤과 잘 어울렸고, 엔젤의 몸속에 가만히 있으면서도 상냥하게 애무하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엔젤은 호크의 목에 얼굴을 묻고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희열에 찬 자신의 기분을 표현했다.

욕망으로 몸을 주체하기 힘들었으나 호크는 천천히 움직였다. 완벽하게 일치하는 두 사람의 육체가 자아 내는 조그만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고.

엔젤은 호크의 몸을 더 깊이 느끼고 싶어, 그의 엉덩이를 다리로 감싸고는 힘차게 끌어당겼다.

욕망을 채우려는 엔젤의 발버둥에 호크는 움찔 놀랐다. 호크는 두 사람이 원하던 것을 단번에 주었다.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야성적인 쾌락을 맛보면서도, 호크는 엔젤을 아프지 않게 하려고 몸을 약간 빼내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 호크는 엔젤이 뿜어내는 은밀한 진동이 자신의 몸에 퍼지는 걸 느꼈다. 이제는 오랫동안 참아 온 욕망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되었다. 호크는 엔젤의 몸속에서 활처럼 휘었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절정의 비명을 질러 댔다.

호크와 엔젤은 서로의 팔에 누워 여유 있고 달콤한 시간을 즐기며, 햇빛과 하늘 그리고 엉겨 있는 육체 아래로 살살 움직이는 보트의 그림자를 의식했다.

호크는 어깨로 흘러내린 엔젤의 머리카락을 입술로 매만져 주었다. 엔젤의 이마, , 은밀한 귓속 깊숙한 곳,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엔젤은 손가락을 움직여 호크의 등을 따라 내려가 힘 있는 엉덩이 근육과 그 너머로, 일찍이 그가 자신에게 했듯이, 거뭇거뭇한 곡선을 따라 훑어 내려갔다.

호크는 신음 소리를 내며 엔젤의 몸속에서 더 단단해졌다. 극도로 민감해진 살을 타고 충격이 빠르게 엔젤에게 전해졌다. 엔젤은 호크가 부드러운 여성의 곡선을 음미했듯이, 남성의 윤곽을 음미하며 아주 천천히 그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엔젤, 당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오?"

호크는 호기심과 흥분으로 걸걸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채 대답하기도 전에 호크가 더 깊숙이 들어와, 엔젤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호크는 엔젤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비명을 자기 입으로 덮었다.

"이게 당신이 원하는 거요?"

엔젤의 육체가 다시 뜨거워지자, 호크는 다시 몸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느꼈다.

엔젤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은밀하고 황홀한 애무에 본능적으로 자기 몸을 호크에게 밀착시켰다.

호크는 열정에 사로잡혔다. 욕망이 순식간에 엔젤의 긴장된 육체 속에서 녹아 버리면서 갑자기 잔잔해졌다.

"호크?"

엔젤은 벌써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남자들이 그렇게 빨리……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몇 분 전이었다면 당신 말에 동의했을 거요."

호크는 엔젤의 위로 몸을 휘었다. 엔젤이 신음하며 몸을 착 밀어붙이고 단단해진 남성을 어루만지자, 호크는 욕망이 불타올라 숨을 멈췄다.

"우리 둘 다 잘못 생각했소. 독수리와 천사가 사랑을 나눌 땐 규칙도 바뀌나 보오."

 

시계에 부착된 자명종이 유리를 가르는 절단기처럼 가차 없이 호크를 깨웠다. 호크는 자명종을 끄려고 뒤척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숨결을 느꼈다.

황홀한 순간들이 육감적으로 밀려들어 머릿속에 압축되어 있던 엔젤의 몸을 미미한 부분까지 기억나게 했다.

엔젤의 열기와 관능이 풍기는 매끈한 살결을 느끼자, 호크는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엔젤을 향한 자신의 욕망이 너무 강해 호크는 내심 놀랐다. 어떤 여자와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심지어 지나가 자신을 살살 꼬드겨 격렬하게 달아올랐을 때도 이런 감정은 느껴 보지 못했다.

호크는 손을 뻗어 조그만 충전용 전등을 켰다. 희미한 노란빛의 조명이 뱃머리에 놓인 침대의 모습을 드러냈다. 호크의 팔에 기댄 엔젤의 창백한 머리카락이 금빛으로 번쩍였다. 속눈썹이 길어 눈 가장자리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붉은 입술은 서로 주고받았던 열정적인 키스로 여전히 조금 부풀어 있었다.

호크가 몸을 굽혀 엔젤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가볍게 대자, 엔젤은 씽긋 웃으며 따뜻한 그의 품안에 더 깊이 파고들며 뭐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잠시 후 호크는 엔젤이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보인 행동은 자신을 향한, 깊고도 진실한 엔젤의 사랑이 그렇듯 무의식적인 반사 작용이었다.

"엔젤, 귀엽고 착한 내 여자. 당신과 어떻게 해 나가야 할까?"

해답은 없었다. 단지 현재, 바로 이 순간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호크가 익히 알고 있는 엔젤의 관대함과 따뜻함이 호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크는 엔젤을 깨우지 않았다.

몇 분 후 호크는 침낭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엔젤의 가슴을 찾았다. 그러곤 목덜미에 입술을 편안히 갖다 대면서 손으로 가슴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호크는 천천히 몸을 애무하며 말없이 엔젤을 깨웠다. 엔젤은 호크의 어루만짐에 따라 움직이며, 비몽사몽 상태에서 아름다운 관능의 꿈속을 맴돌았다.

엔젤은 호크를 갈망하는 듯했다.

"엔젤."

엔젤의 다리를 벌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호크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엔젤."

엔젤은 호크의 낮고 굵직한 목소리에 쌍꺼풀을 파닥거리며 눈을 떴다. 호크는 엔젤이 깨어나 의식을 차리길 기다리며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엔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그녀를 완전히 점령했다.

호크가 천천히 공격해 들어오자 엔젤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답례라도 하듯 절정을 향한 엔젤의 가냘픈 신음 소리가 호크의 몸을 타고 넘실거렸다.

두 사람은 차갑지도 어둡지도 않은, 단지 뜨겁고 밝고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 속으로 빠르게 선회하며 함께 날아올랐다.

엔젤은 가까스로 숨을 돌리자, 따뜻하고 힘센 호크의 어깨에 기대어 자기의 사랑을 속삭였다. 호크는 자신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엔젤의 사랑에 답했다.

엔젤은 다시 한 번 환희의 비명을 질렀다.

"호크, 물때를 또 놓치겠어요."

엔젤은 숨을 헐떡이며 겨우 말을 꺼냈다.

호크가 엔젤의 목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엔젤의 다그침에, 호크는 향기로운 피부에서 입술을 떼지 못하며 자백했다.

"자명종을 좀 빠르게 맞춰 놓았소."

엔젤은 말뜻을 얼른 알아차리고는 눈빛을 반짝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영리한 독수리군요. 당신에게 상을 줘야겠어요."

"이미 주었잖소."

호크는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엔젤은 아름다운 호크의 웃음소리를 듣자 숨을 죽였다. 그리고 호크의 입술에 떨고 있는 자기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 동작은 단단하고 다정한 남자를 향한 사랑의 깊이를 새롭게 재어 보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호크는 엔젤이 떨고 있는 걸 궁금해 하며 물었다.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런 생각을 못하게 하겠소."

호크는 눈을 꼭 감고 격분한 어조로 말하며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 신이여, 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난 당신을 사랑할 수도, 그렇다고 놓아줄 수도 없소."

엔젤은 호크의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쓸어 주었다. 다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슬펐지만 사실 그랬다. 자신이 매순간 속삭이는 사랑이 호크에겐 기쁨보다는 고통이라는 사실을 엔젤은 알고 있었다. 호크는 엔젤에게 상처 입히길 원치 않았다.

그러나 호크는 아직도 자신이 사랑할 능력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엔젤이 자기를 사랑한 만큼, 자신이 엔젤에게 상처를 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껏 무수한 고난에 부닥칠 때마다 그 사실들을 인정했듯이 엔젤은 이번 일도 받아들였다.

엔젤은 과거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솜씨로 장미의 평온함을 느껴 보려고 노력했다. 곧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당신이 하려는 게 무엇인지 잘 알아요."

엔젤은 호크에게 천천히 키스를 하고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낚시를 갈 거예요. 그리고 우린 아름다운 연어를 낚을 거예요."

호크는 고개를 들어 엔젤을 쳐다보았다. 맑고 어두운 눈 속에 고통과 슬픔, 연민이 어려 있었다. 엔젤은 눈물을 흘렸다.

"호크, 제발 날 믿으세요. 당신은 결코 날 아프게 하지 않을 거예요. 내겐 당신의 그 마음만 있으면 돼요. 제발 자신을 탓하지 마세요."

호크는 자신의 슬픔과 고뇌가 엔젤의 눈에 비치는 걸 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신념과 사랑이 엔젤의 눈동자 저편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알아챘다. 엔젤은 호크의 모든 아픔을 이해했다.

어찌됐든 엔젤은 호크를 사랑했다. 호크는 엔젤의 손바닥에 상냥하게 입을 맞추며, 엔젤이 자신을 받아들였듯 자신도 엔젤을 받아들였다.

 

25

매분, 매시간……, 시간은 쓰라린 아름다움을 간직하며 호크를 휩쓸고 지나갔다. 엔젤은 하루하루 석양이 질 때마다 자신에게 한 발짝 다가오는 여름의 끝을 맞이하기 싫어서 지나가는 날짜를 세어 보지 않았다.

엔젤은 그랜트를 사랑했다 잃어버리면서 더 이상 과거 속에서 방황하지 않아야 함을 배웠다. 이젠 이별을 예감한 사랑을 겪으면서 미래에 살지 않아야 함을 배웠다. 대신 매순간을 위해 살았다.

호크의 웃음을 보거나 접촉할 때마다, 같이 공유한 기억 속에서 엔젤은 더욱더 호크를 사랑했다.

"엔지 누나?"

데리가 부르는 소리에 엔젤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갑자기 몸을 트는 바람에 귀에 달린 작은 은방울들이 가냘프게 울렸다.

"작업실에 있어."

데리는 목발에 기댄 다리를 달랑거리며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색하게 목발을 짚던 모습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 또한 엔젤과 호크의 관계가 바뀐 것에 대해서도 이젠 어색해하지 않았다. 호크가 데리와 이야기를 나눈 건 엔젤도 알지만,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몰랐다.

그랜트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데리가 괘씸하게 생각할까 봐 엔젤은 두려웠다. 하지만 데리는 엔젤을 끌어안고 지금처럼 아름다워 보인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호크 씨는 어디 있죠?"

데리가 물었다.

"전화……."

"전화를 하고 있다고요?"

데리가 짐짓 점잔을 빼면서 끝맺음을 했다.

"이번엔 어디예요?"

"아마 동경일걸. 런던, 뉴욕, 휴스턴, L·A와는 이미 통화했고 마우이 섬에 휴가를 간 누군가하고도 통화를 했으니까."

호크는 지난주 내내 전화를 했다. 엔젤은 날짜를 세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지만, 호크가 예정 날짜보다 더 머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호크가 처음 섬에 왔을 때 언급했던, 복잡한 사업이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내 짐작으론, 사업이 막바지에 온 것 같애."

"어쩌면 호크와 난 같은 비행기로 섬을 떠날 것 같아요."

내일 데리는 마침내 깁스를 떼고 하버드 대학으로 날아갈 것이다. 의사가 되겠다던 데리의 꿈은 호크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높은 값으로 이글 헤드를 샀던 것이다.

기뻐하는 데리를 보자 엔젤도 기뻤지만, 떠난다는 말에 엔젤의 얼굴에 얼핏 고뇌가 스쳤다.

"에잇, 누날 보러 시애틀로 갈게요."

데리가 재빨리 위로의 말을 했다.

데리는 호크가 당연히 시애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호크의 방문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엔젤은 빙긋 웃으며 데리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여름이나 방학 때 꼭 놀러 와."

하지만 데리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자, 엔젤의 입가가 슬프게 일그러졌다.

'그래, 데리는 내게 돌아올 거야. 하지만 호크는 오지 않겠지.'

"난 스케치북을 들고 이글 헤드에나 갈까 해. 호크가 5시 전에 전화를 끊거든, 스미스 씨의 농가로 가는 길을 가르쳐 줘. 나무딸기가 한참 무르익었는데, 호크는 아마 딸기를 따 본 적이 없을 거야."

"하지만 연어는 낚아 보았죠?"

엔젤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새벽에 연어를 낚아 보았지.'

호크도 연어가 꼬리를 세우고 찬란한 바다 위를 퍼덕거리던, 그 원초적인 힘과 스릴을 체험했다. 고통이 사라진 후에도 마구 날뛰는 은빛 생명체를 보며 호크는 경외감과 기쁨을 느꼈다. 오랫동안 계속된 몸부림을 엔젤이 간직할 추억이라 여기며 말이다. 하지만 엔젤에겐 고통이 사라지지 않겠지.

엔젤은 이제껏 호크 같은 사람을 사귄 적이 없었다. 그가 가 버리고 난 이후의 삶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왜 그 연어를 놓아주었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죽이긴 너무 아름다워서겠지."

"호크가 낚은 다른 고기들은요? 우린 고기를 다 먹어 치웠고, 마지막 한 조각을 두고 티격태격했잖아요."

"그것들은 새벽의 첫 연어가 아니었잖아."

엔젤은 덤덤히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호크를 기억하고 사랑하리라고 생각했다.

데리는 격해진 엔젤의 감정을 눈치 채고 잠시 망설이다 조용히 말했다.

"교통 사고에서 누날 끌어낸 건 나일지 모르지만 누날 다시 살려 낸 사람은 호크예요. 누나, 난 정말 기뻐요. 때로 누날 평생 불행하게 한 장본인이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두려웠거든요."

엔젤은 데리를 꽉 안아 주고는 스케치북을 움켜쥐고 그곳을 뛰쳐나왔다.

엔젤은 이글 헤드 꼭대기로 향하는 가파른 샛길을 오르며 데리가 한 말을 생각했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손목과 발목에 찬 조그만 방울이 울어대며 엔젤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정상에 올라 다리를 쭉 펴고 앉았을 때도, 무릎에 놓은 스케치북은 잊어버린 채, 데리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엔젤의 눈앞에는 쉴 틈 없이 출렁이는 바다와, 상록수가 무성한 섬들이 들쭉날쭉한 인사이드 패시지가 펼쳐져 있었다. 봉우리들이 잇따라 동쪽으로 떨어져나가더니, 너무 깊어 검은색에 가까운 푸른 물에 가리어 저 멀리로 기울어져 갔다.

호크를 알 때까진, 거칠고도 평온한 이 땅이 엔젤의 의식 속에 기억된 적은 없었다. 호크는 땅 그 자체와 같았다-돌과 따뜻함의 모순, 깊은 밤과 오후의 모순, 수수께끼같이 멀어져 가는 수평선과 친밀한 공기가 주는 감촉의 모순, 바다의 소금과 수확을 보증하듯 주렁주렁 매달린 딸기의 달콤함이 주는 모순을 가진 땅.

"이 땅을 사랑하고 있죠?"

호크의 음성에 엔젤은 놀라지 않았다. 전망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심장 박동 소리를 느끼듯 왠지 호크가 오리라는 예상이 점점 분명해졌으니까.

"당신을 제외하면 제일 사랑해요."

엔젤은 덤덤히 말하다가, 갑자기 그토록 힘들게 피해 왔던 말을 지금 무의식중에 내뱉었음을 깨달았다. 호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말한 것이다. 그 말로 호크에게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다.

"지금 몇 시죠?"

엔젤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5시쯤 되오."

"딸기 따러 갈 시간 있어요?"

"시간을 내겠소."

엔젤은 호크의 검은 눈을 들여다보며, 어두운 미래가 소리 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떠날 거야, .'

함께 있으려고 시간을 따로 냈다는 사실 속에는 이별에 대한 예감이 서려 있었다.

"엔젤……."

호크는 엔젤의 눈 속에 드리워진 그늘을 보면서, 갑갑한 듯 엔젤의 이름을 불렀다.

머리 위로 새끼 독수리가 꺅꺅거렸다. 텅 빈 하늘만 남을 때까지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고성이 울려 퍼졌다.

"서두르는 게 좋겠어요. 시간이 많지 않아요."

엔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은빛 방울이 흐느껴 울었다.

절묘한 방울 소리가 수천 개의 조그만 칼날처럼 호크의 가슴속을 마구 찔렀다. 호크는 팔로 엔젤을 감싸 안고는 세상이 발 밑에서 부서져 내리기라도 하듯 있는 힘을 다해 입을 맞추었다.

바윗길로 자신을 인도하도록 호크가 팔에서 풀어 준 순간까지 시간은 멈추어 버렸다. 마치 한순간에 누군가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하듯 상대를 곁눈질하거나 웃음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산을 내려갔다.

딸기밭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은 계속됐다. 거기서부터 울퉁불퉁하고 황폐한 길은 보이지 않았다. 오래 전에는 잘 정리된 논과 밭, 그리고 죽 늘어선 집들의 정원이 보였던 곳이었다. 이제 논과 밭들은 거의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엔 산림이 다시 들어섰다. 남은 것이라곤 허리 높이의 자연석 울타리가 전부였는데, 거기엔 돌무덤이나 벌판할 것 없이 땅 위로 마구 뻗은 나무딸기 덤불이 빽빽하게 감겨 올라와 있었다.

무성하고 당당한 덩굴 장미가 황폐해진 벽돌을 덮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농장의 잔존물이었다. 엔젤의 마음속에 활짝 피어오르는 그 의기양양하고 평온한 심홍색 장미가 바로 이 덤불에서 착안된 것이었다.

엔젤은 어렸을 때 스미스 씨의 농가와 덩굴장미를 처음 보았다. 그 이후로 그 장미가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트렁크 닫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호크가 한 손에는 빈 들통을, 다른 손에는 소풍 바구니를 들고, 어깨엔 두꺼운 이불을 걸치고 다가왔다.

엔젤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어두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지워 버렸다. 지금은 오직 이 순간-자신을 기다리는 호크와 가슴이 터질 듯이 아름다운 호크의 웃는 모습-만 있는 것이다.

달콤한 방울 소리를 들으며 엔젤은 호크를 향해 걸어갔다. 소풍 바구니를 보고는 보답으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것까지 생각해 낸 그를 사랑하며.

"야유회라, 멋진 생각이에요."

엔젤이 상냥하게 말하자 호크는 씩 웃으며 대꾸했다.

"숨은 동기가 있지. 데리도 좋아하지만, 당신과 단둘이 있는 시간도 갖고 싶었소."

엔젤의 얼굴이 다시 고요해졌다. 엔젤은 호크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보트를 탈 때나 집이 온통 깜깜해지는 늦은 저녁이 돼야 둘만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둘이서 침묵을 공유하고, 가볍게 접촉하면서 서로에게서 느끼는 즐거움을 감동적으로 말할 시간이 지금까지 충분치 않았다.

시간이 정말 충분치 않았다.

'얼마나 남았지? 별로 많지 않아.'

엔젤은 일부러 그 오래된 덩굴장미를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그 장미는 반짝이는 심홍색 잎에 풍부한 오후 햇살을 모으며 활짝 피어 있었다.

엔젤은 석양이 질 때마다, 겨울이 곧 닥치리라는 사실을 이 연역한 장미가 알고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호크는 엔젤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엔젤이 슬퍼하는 걸 눈치 챘지만 위로해 줄 수 없어 난감했다.

자신이 엔젤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었는지 생각하자 호크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랑을 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안쓰러워하며 엔젤의 상처는 더욱 커지겠지.

호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자기 몸속 깊숙한 곳에 한 천사가 웅크리고 숨어 있는 걸 보아 왔다. 그 천사는 자신을 바라보며 살며시 웃음을 지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 천사의 곁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아직은 아니었다. 기적 같은 엔젤의 사랑을 몇 시간 더 맛보아야만 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호크는 엔젤에게 속삭여 물었다.

"중간으로."

엔젤은 입술을 호크의 입술에 비벼대며 중얼거렸다.

"나무딸기 덤불 중간에 길이 나 있어요. 그곳에 열려 있는 딸기가 가장 달콤해요. 가시에 뒤덮여 있죠."

"모기도 있소?"

"조금. 공짜란 건 없잖아요, 알죠?"

호크가 빙그레 웃었다.

"기억하오. 그래서 모기약을 가져왔지. 당신의 부드러운 이빨이 아니라면 물어뜯기고 싶진 않거든."

한 차례 전율이 엔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호크가 자신을 만질수록 더욱더 그의 손길이 그리웠다. 엔젤은 호크와의 성행위, 그를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것에 결코 싫증이 나지 않았다.

"내 주머니 안에 있소. 꺼내 주겠소?"

호크는 들통과 소풍 바구니를 든 손을 내밀어 보이며 자신은 모기약을 꺼낼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엔젤은 청바지 뒷주머니를 먼저 뒤졌다. 거기는 텅 비어 있었다. 앞주머니를 살피려고 닳고 꽉 끼는 옷 속에 손을 넣어 꼼지락거렸다.

"아무것도 없어요."

호크가 수염 아래로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계속 찾아봐요, 있을 테니."

엔젤은 호크의 말을 믿고 몇 초간 주머니에 손가락을 넣고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청바지 속에서 뜨겁고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남성이 느껴졌다.

"날 놀렸군요."

엔젤은 짐짓 화난 체하며 샐룩거렸다.

"놀림을 당한 사람은 바로 나요."

호크는 웃음을 감추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때 엔젤의 손이 주머니 안에서 움직이자 호크는 움찔했다.

"셔츠 주머니요, 엔젤."

엔젤은 장난기로 반짝이는 눈과는 대조적으로 순진한 표정을 짓고, 아주 천천히 호크의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모기약은 정말 셔츠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엔젤은 얼얼할 정도로 톡톡 쏘는 모기약을 호크의 피부에 발라 주고 자신도 발랐다. 그리고 그 조그만 병을 호크의 청바지 앞주머니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약은 벌레에게만 효과가 있소."

호크가 지적해 주었다.

"다행이군요."

엔젤이 유혹적인 표정을 짓자 호크의 눈이 반짝였다.

엔젤은 돌아서서 나무딸기 덤불을 향해 뛰었다. 손목과 발목에 찬 은방울이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호크는 잠시 엔젤의 우아한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일시적인 충동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쓰라린 욕망을 느꼈다. 손에 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엔젤의 뒤를 밟으며 뛰었다.

엔젤은 나무딸기 밭을 헤쳐 나가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호크를 부르는 감미로운 은방울 소리로 미루어 가까이 있음이 분명했다.

호크는 나무딸기가 아직 채 자라지 않은 개간지에서 엔젤을 붙잡았다. 공기는 무르익은 과일의 은은한 향기로 가득 찼다. 잎들이 산들 바람 아래로 가물거리며 게으르게 살랑댔다. 과일을 짊어진 줄기들은 맑은 군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휘청거리고 있었고, 끝이 들쭉날쭉한 청록색 잎들은 금빛 햇살에 떨고 있었다.

"데리 말이 맞았소. 당신은 섬의 아름다운 곳은 모조리 알고 있군. 아니면 당신이 모든 장소에 아름다움을 불러오든지."

호크가 엔젤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건 당신 때문이에요. 이 농가가 이렇게 아름다워 보인 적이 없었어요."

엔젤은 목소리를 깔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호크의 손에서 들통을 받아 쥐고, 그가 이불을 펴고 소풍 바구니를 나무 그늘에 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호크가 막 일을 끝내자, 엔젤은 말없이 들통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자기 손을 깍지 끼고 열매가 풍성한 덤불로 이끌었다.

"딸기를 따는 일은 대합잡이와 게잡이를 섞은 일이죠. 당신이 부주의하면 검은 딸기 덤불이 게처럼 당신을 공격해요."

엔젤의 말에 호크는 넌지시 말했다.

"공짜는 없다는 말이오?"

"공짜는 없죠. 딸기를 따는 첫 번째 규율은, 따기가 쉬운 건 무엇인가에 이미 쪼였다는 사실이에요."

호크는 씩 웃었다.

"다음 규율은 뭐요?"

"들통에 딸기를 담을 때 하나 이상은 먹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배탈이 나죠."

"경험으로 배운 건 아니오?"

호크가 추측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나요?"

엔젤은 좋은 딸기 고르는 방법을 직접 시범해 주었다-흐늘거리지 않으면서 익어야 하고, 퍼렇지 않으면서 시큼해야 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침묵을 지키며 사이좋게 딸기를 땄다.

"이건 익은 거요?"

호크가 딸기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엔젤은 입을 벌리고 기다렸다. 호크가 비식 웃으며 입에 넣어 주자, 엔젤은 혀를 찼다.

"약간 시큼해요."

엔젤은 바로 옆 줄기에 달린 나무딸기 송이를 쳐다보았다. 그 중 가장 잘 익은 딸기를 하나 따더니 호크에게 주며 말했다.

"먹어 봐요."

호크는 그 딸기를 입으로 받으며 엔젤의 손가락도 같이 핥았다. 호크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당신 맛이 나는군. 믿을 수 없을 정도야."

호크는 다시 입을 벌리고 말없이 기다렸다. 엔젤은 딸기 하나를 더 그 입 속에 쏙 집어넣었다. 그는 다시 입을 벌렸다. 그리곤 다시 또다시……. 결국 엔젤은 웃음을 터뜨리며 발꿈치를 들고 호크에게 키스했다.

호크와 나무딸기의 향이 엔젤의 감각을 휩쓸고 지나갔다. 엔젤은 갑자기 호크에게 매달려 격렬하게 키스를 했다. 포옹이 끝나자 두 사람은 기진맥진했다.

"캐리 부인은 얼마나 원하시오?"

호크의 눈에 선명한 갈색 불꽃이 일었다.

"몇 들통이라도요."

호크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럼 빨리 일을 시작해야겠군."

호크는 마지못해 엔젤에게서 물러섰다.

다시 딸기를 따기 시작했다. 서로 곁눈으로 몰래 훔쳐보며 열심히 일했다. 각자의 들통을 채운 뒤 더 큰 통에 옮기고, 다시 따기 시작했다.

"통에 넣는 것보다 먹는 게 더 많군요."

엔젤은 살짝 눈을 흘기며 호크를 나무랐다.

호크가 엔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입가가 몰래 훔쳐 먹은 아이처럼 진한 딸기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탈이 나더라도 뜨거운 물병을 움켜 안고 있지는 않을 거요."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고는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잠시 후 엔젤이 엄청난 딸기를 발견했다. 알이 꽉 차고, 짙은 색깔에 달콤한 액체가 터져 나올 것 같은 그 딸기는 엔젤의 손바닥 위에서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엔젤은 들통을 내려놓고 호크에게로 달려갔다.

"이건 내가 본 것 중 가장 완전한 딸기예요."

엔젤은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그걸 집어 들며 말했다.

", 입을 벌려요."

딸기보다는 엔젤의 입술에 얼룩진, 투명하고 빨간 즙이 호크의 눈에 더 띄었다.

"당신이 발견한 것이니 당신 거요."

"이 딸기엔 당신 이름이 씌어 있는걸요."

호크의 입가가 부드럽게 치켜 올라갔다. 호크는 티 하나 없는 딸기를 바라보았다.

"안 보이는데?"

"당신의 위치에선 빛의 각도가 나쁜가 봐요."

엔젤은 손바닥에 있는 딸기를 굴려 고정시켰다.

"보이죠? 바로 여기, 당신 이름이잖아요."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곳엔 엔젤의 선물에 함축된 사랑밖에 보이지 않았다. 호크는 천천히 머리를 숙여 손바닥에 놓인 딸기를 핥고는, 그 딸기가 놓였던 곳에 입을 맞추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호크의 아픔은 욕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관계가 있다면 눈에 사랑을 담고 자신을 바라보는 천사와 있을 것이다.

호크는 엔젤이 지닌 따뜻함과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묻고 싶었다-엔젤이 가진 과거와 미래의 비밀을 전부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리고 달콤하고 정열적이고 용기 있는 엔젤의 사랑을 자기도 차지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물어 보려고 입을 열면서도 차마 물어 볼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은 따로 있었다.

"이 나무딸기들은 야생이오?"

주위를 둘러싼 덤불을 보며 호크가 물었다.

"아뇨. 이것들은 집 고양이가 야생으로 돌아간 것과 유사해요. 인간이 먹으려고 씨를 뿌리고 가꾸다가 나중에 제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 둔 거지요. 그러면 대체로 시들어 죽고 말아요. 하지만 어떤 것들은 살아남죠. 그리고 적절한 시기가 오면 가장 강한 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야생 열매를 맺는 거죠. 호크, 바로 당신처럼요."

호크는 나무딸기가 든 통을 손에서 슬그머니 놓았다. 그리고 날렵한 동작으로 엔젤을 꼭 껴안으며, 자신이 아는 모든 말들을 속삭였다. 엔젤의 이름을 노래인 양 읊으며 키스를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이성을 잃고 몸을 떨었다.

호크는 엔젤을 이불로 안아 날라, 이번이 처음인 양 아주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옷을 벗기며 불을 뿜어 대는 달콤한 입술로 엔젤을 태워 버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호크는 엔젤에게 다가가 몸과 마음을 태웠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파괴시키고 다시 태어나게 한 아름다움과 그 남자의 팔에 안긴 채 맞는 죽음과 부활을 엔젤은 사랑했다. 엔젤은 열정과 욕망을 담아 호크를 애무했고, 뜨겁고 달콤한 입으로 호크의 육체를 숭배했다. 호크가 한 것처럼.

호크는 엔젤을 끌어당겨, 천사의 황홀한 열정 속에 자신의 영혼을 파묻었다.

자신의 팔에 안겨 잠든 엔젤을 바라보다 호크는 창 너머로 달빛과 어두움이 햇살에 쫓겨 달아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천천히 엔젤에게서 몸을 빼냈다.

엔젤이 깨어나면 떠날 용기가 나지 않으리라. 함께 있으면 자신은 엔젤이라는 우물에서 사랑을 계속 퍼 마시며 그녀를 힘들게 할 것이다.

'난 엔젤을 파괴하게 될 거야.'

호크는 아주 오랫동안 침대 옆에 서서 잠들어 있는 자신의 천사를 지켜보았다. 몸을 굽혀 만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참았다. 엔젤의 베개 위로 손을 가져갔으나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소리 없이 집 밖으로 걸어 나왔다.

햇살이 엔젤을 깨우며 베개를 가로질러 흩어졌다.

엔젤은 졸린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호크에게 손을 뻗었다.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엔젤은 갑자기 그 자리에 고정되어 버렸다.

녹색 끈에 묶여 있는 막대 사탕이 호크의 베개 위에 놓여 있었다.

엔젤은 얼굴을 손에 파묻고 울었다. 호크가 떠난 것이다.

 

26

데리는 애써 단호한 웃음을 지으며 새파랗게 질린 엔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당장 하버드에 갈 필요는 없어요. 호크가 진행 중인 일을 결말 짓고 올 때까진 여기 있을게요."

"실없는 소리!"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지나치게 어둡고 피부는 속이 비칠 듯이 투명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그래."

엔젤은 호크의 일에 대해 데리에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일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엔젤 곁을 떠난 걸로 알고 있는 데리를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집에서 몇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타향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일만으로도 데리에겐 벅차지 않은가. 그런데 자신의 일로 부담을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데리가 굳이 자기와 함께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엔젤은 혼자 있고 싶었다.

"짐 꾸리는 걸 도와줄까?"

"아녜요. 어제 누나가 딸기 따러 나간 동안, 메트와 데이브가 도와 줘서 다 쌌어요. 호크 씨가 가구나 딴 물건들은 가져가지 말라고 했어요. 지금 있는 그대로 두고 가라고요."

격한 감정이 밀려와 가까스로 되찾은 평정을 흐트려 놓았다.

딸기를 먹여 주고, 손을 맞잡아 깍지를 끼고, 달콤함을 입 안에 가득 채우며 함께 깔깔거렸던 게 불과 어제 일이 아니던가. 열정의 불꽃이 타오르자, 두 사람은 입을 맞추며 딸기보다 더 야성적이고 달콤한 열매의 맛을 보았지.

"이제 남은 건 비행기에 실을 여행 가방 하나예요. 가방은 이미 꾸려 놓았어요."

현관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 본토로 떠날 예정인 데리의 친구 하나가 데리를 데리러 온 것이다. 다시 경적이 울렸다.

엔젤은 작업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데리가 문 옆에 세워 둔 작은 여행 가방을 집어 들었다.

"서두르는 게 좋겠다."

"누나……."

엔젤은 몸을 돌려 데리의 팔에 안겼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널 사랑해. 언제고 내가 필요할 땐 네게 바로 달려갈게."

"누날 두고 떠나는 게 마음이 편칠 않아요. 누나가 얼마나 호크 씨를 그리워하는지 알고 있는데……."

데리의 목소리엔 엔젤에 대한 걱정이 어려 있었다.

엔젤은 데리의 눈에서 자기를 향한 사랑을 느꼈다.

"방금 다림질한 셔츠를 내 눈물로 적시기 전에 어서 가."

데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밤 11시쯤 이 번호로 전화하면 내가 받을 거예요. 전화할 거죠?"

데리는 재빨리 입을 맞추고는 여행 가방을 움켜쥐고 다리를 약간 절면서 밖으로 나갔다.

엔젤은 눈물로 시야가 흐려질 때까지, 떠나는 데리를 창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더 이상 데리를 태운 자동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해변으로 나갔다. 그러곤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냥 걸었다.

호크를 잃은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느낀 지금에야, 자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절감했다. 깨진 유리 조각을 삼킨 듯, 그 고통은 매순간 새롭게 다가왔다.

데리에게 전화 걸 시간이 될 때까지 엔젤은 텅 빈 집 여기저기를 천천히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작업실로 돌아와 전등이란 전등은 모두 켜 놓고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어둠이 점차 사라지는 새벽녘까지 도안을 그렸다 찢어 버리고 다시 그려 보기를 되풀이하며, 자신의 고통과 사랑을 표현해 낼 도안을 그렸다. 과거의 고통스런 경험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싶었다.

새벽녘에 드디어 원하던 도안을 완성했다.

엔젤은 창조에 대한 절실함에 몰두하여 하루 종일 일만 했다.

먼저 침실 창문 크기인 높이 1.8미터, 넓이 1.2미터의 틀에 맞도록 스케치의 비율을 확대했다. 그러고는 검정색 마커를 사용하여 두꺼운 종이 위에 설계도를 베꼈다. 그 다음에 설계도를 벽에 고정시키고, 자신이 선택한 색깔들에 맞추어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눠야 하는지 세어 보았다.

유리를 고르는 일에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각각의 유리 조각은 주요 디자인에 쓰일 청동과 갈색 유리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제 가치를 뽐낼 수 있어야 했다. 엔젤은 여러 가지 색조의 금빛 머프 유리 중 마음에 드는 것을 몇 개 골랐다.

엔젤은 만족해하며 자신이 고른 유리를 침실로 가져갔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유리로 덮인 창문에 그 머프를 기대 놓고, 빛이 쏟아져 내리는 걸 지켜보았다. 그러곤 유리를 몇 번이고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엔젤은 갑자기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결함이 많은 이 유리에서 자각을 한 한 여자의 미소를 엿본 것이다. 팔에 난 잔털이 쭈뼛쭈뼛 섰다.

엔젤은 민첩한 손놀림으로 잘라 낼 부분에 표시를 했다. 이제껏 머프 유리를 조각으로 잘라 낸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도안을 조명 아래의 작업대 위에 꽂아 놓고 스케치북 위에 처음 그렸던 황금빛 구름을 잘라 냈다.

구름을 잘라 내자마자, 엔젤은 또 하나의 규율을 깨뜨려 순서 없이 일을 했다. 섬세한 붓을 들고 유리에서 보았던 영상을 채워 넣었다. 슬픈 미소, 천천히 뜨이는 눈,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표현하려고 몇 차례 섬세한 획을 그었다.

엔젤은 가마로 몸을 돌렸다가 다시 유리를 고르려고 돌아왔다. 몇 시간을 고르다가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임을 깨달았다. 자동차 사고 이후 사용하지 않던 투명한 유리였다. 자신이 설정한 주제에 그 유리만큼 적합한 것이 없었다-그 작품의 초점인, 공허한 하늘에서 날아 내려오는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에서 발하는 비스듬한 크리스털 유리의 빛.

엔젤은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뱃속에서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면 뭔가를 먹었고, 눈이 피로해서 더 이상 작업에 집중할 수 없을 때에만 잠을 잤다.

엔젤은 이런 순간들이 두려웠다. 밤이 찾아오면, 공허하게 울리는 텅 빈 방들처럼 자신의 마음도 공허했다. 엔젤은 은방울들을 달고 다니며, 이 작은 소리가 침묵뿐인 공허함을 채워 주길 바랐다.

독수리를 만드는 데 며칠이 걸렸다. 다양한 빛깔의 갈색과 청동색 유리를 산화 부식시켜 주요 부분들을 연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산화 부식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한없는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지만, 엔젤은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 일하는 순간에는 자신이 숨쉬고 있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할 수 있었다.

마침내 독수리를 완성했다. 작업대 위에는, 멋진 청동 그물 속에서 갈색 깃털들과 70개 이상의 부식 유리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엔젤은 조각들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유리를 끼워 놓으려고 골라 낸, 윤이 반지르르 나는 마호가니제 틀을 커다란 작업대에 고정시켰다. 그 작업대는 틀을 여기저기 옮길 수 있도록 홈을 깊게 판 걸 제외하면, 바퀴가 달린 이동 탁자와 비슷했다.

작업대에 놓인 유리를 세로로 기울일 수 있도록 작업대 표면이 비스듬했다. 그렇게 하면 유리가 제자리에 안전하게 고정되면서도 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그 장치는, 너무 커서 엔젤이 쉽게 들 수 없는 작품을 만들고 진열하는 데 사용되었다.

엔젤은 식사를 할 때나 작업장 소파에서 잠깐 선잠을 잘 때를 제외하곤,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이 꾸준히 일했다.

나중에는 잠도 자지 않고 창조물에 완전히 몰두하였다. 윤이 나고 반짝거리는 유리, 은은하게 깔려 있는 희망의 빛,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커다란 심홍색 물방울, 그 물방울에 비친 독수리의 그림자,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딱딱하고 각진 크리스털 껍질.

마침내 마지막 조각을 납땜질하고, 시멘트를 바른 뒤 다시 그걸 떼어 냈다. 그러곤 유리 표면을 윤이 나도록 문질렀다.

작업을 끝내고 엔젤은 한숨을 길게 쉬며 탁자에 몸을 기댔다. 귀고리가 흔들리며 짤랑거렸다. 마음의 정리는 끝났으나 아직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외롭고 적막한 이 순간, 엔젤은 앞에 놓인 공허함과 마주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엔젤은 작업대를 침실로 밀고 갔다. 떨리는 손으로 유리를 들어 수직으로 세웠다. 스테인드글라스 작품과 그 너머 어두움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빛도 비치지 않은 유리는 황량한 무색에 가까웠다, 엔젤의 마음처럼.

엔젤은 호크가 떠난 뒤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던 침대를 쳐다보았다. 침대 맡 램프 아래에는 녹색 끈에 묶인 막대 사탕이 그대로 베개 위에 놓여 있었다. 엔젤은 소리 없이 울부짖으며 그걸 집어 들었다. 리본이 부스럭거리며 호크의 과거 흔적인, 어린 시절 단 한 번 겪은 달콤하고 행복한 경험의 소리가 더욱 선명히 들렸다.

완전히 기진맥진하였지만, 잠을 잤다가 다시 깨어나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엔젤은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다. 몇 주 만에 처음으로 그곳을 쭉 둘러보았다. 난장판이었다. 보통 때는 일을 하면서 방을 치웠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리 조각들이 작업대 위에 수북이 쌓여 있고, 시험 삼아 써 보고 던져 둔 물감들이 바닥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엔젤은 적막 속에서 조그맣게 울리는 방울 소릴 들으며 작업실로 걸어갔다.

유리 부스러기들이 번뜩이는 어수선한 작업대 옆에 서자 현기증이 났다. 몸을 기대려고 작업대로 손을 뻗었으나 너무 늦었다. 작업대가 기울면서 엔젤은 어둠 속에 깊숙이 빠져 들었다.

 

힘 좋은 검정색 BMW가 램지 저택 현관에 멈추었다. 운전사는 한참 동안 어둠 속에서 꼼짝 않고 앉아, 저택의 북쪽에서 새 나오는 불빛을 뚫어져라 보았다.

호크는 돌아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고, 여기 와 있는 것 자체도 부정하려고 애썼다. 떠날 때처럼 엔젤에게 해줄 것 없이 돌아온 자신이 미웠다. 그렇지만 엔젤을 떠나 있을 수는 없었다.

엔젤이 없는 삶이란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호크는 천천히 차 문을 열었다. 현관에 깔린 돌이 기우는 달빛에 비쳐 희미하게 반짝였다. 소리 없이 걷는 모습이 인간이라기 보단 그림자 같았다.

그림자가 잠시 멈추었다.

문이 열렸다. 호크는 안으로 발을 들여 놓으며 엔젤의 이름을 불렀다.

"엔젤?"

메아리만이 돌아왔다.

"엔젤!"

침묵은 어두운 밤의 그림자 같기도 하고, 죽음 같기도 했다.

호크는 응접실을 내달려 엔젤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기울어진 작업대 옆으로 깨어진 유리 조각들이 반짝였다. 의식을 잃은 엔젤은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 사이에 가려 있었다.

호크는 엔젤 옆에 무릎을 꿇었다.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마치 유리 조각이 깨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맥박을 짚으려고 엔젤의 목으로 가져간 손이 바르르 떨렸다. 맥박이 약하게 뛰고 있었다. 호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호크는 엔젤을 덮고 있는 유리 파편들을 조심스럽게 걷어 냈다. 마지막 청동 조각을 주워 들자, 엔젤이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라도 움켜쥐고 있을까 걱정하며 엔젤의 손을 조심조심 폈다. 그건 녹색 끈에 묶인 막대 사탕이었다.

호크는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 소리 내어 울었다.

옷을 벗기고 침대로 옮겼을 때도 엔젤은 의식이 없었다. 맥케이 의사가 진찰을 하곤, 졸리고 짜증 섞인 어조로 호크가 이미 짐작하고 있는 일을 말해 주었다. 너무 부려먹어 정지돼 버린 육체가 회복될 때까지 깊은 잠에 빠진 것이었다.

호크는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가 엔젤을 팔로 감싸 따뜻하게 했다. 호크의 맑은 갈색 눈이 밤새 엔젤의 잠자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태양이 힘차게 산 위로 떠오르더니 스테인드글라스 틀에 빛을 퍼부었다. 빗각이 진 투명한 유리날에서 햇살이 무지갯빛으로 분열되었다. 환상적인 색채의 그림자가 방을 가로질러 몰래 스며들더니 엔젤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너울대는 빛에 관심이 끌린 호크는 무지갯빛 음영이 어른대는 엔젤의 얼굴에서 시선을 옮겨 광채 속에 선 유리 작품을 바라보았다.

호크는 고요하면서도 놀랄 만큼 생생한 그 스테인드글라스에 넋이 나갔다.

푸른 하늘에서 날아 내려오는 독수리가 황금빛 구름을 찢어발기려고 발톱을 세우고 있었다. 발톱이 구름에 닿자 커다란 심홍빛 방울이 햇빛에 번쩍이며 솟아나왔다.

'뭔가가 더 있다. 구름 속에 뭔가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된 호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금빛 구름이 가진 불가사의에 끌려 스테인드글라스로 다가갔다.

소용돌이치는 구름은 바람을 타고 휘날리는 여자의 머리카락으로 변형되었다. 비스듬히 곁눈질하고 있는 두 눈은, 명암이 섞여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게 무척 활기차 보였다. 여자의 수수께끼 같은 웃음은 고뇌나 무아지경에 빠진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두 감정이 아름답고도 섬뜩할 정도로 잘 혼합되어 나타난 표정 같기도 했다.

호크는 주먹으로 입을 가려 '' 소리를 내며, 몸을 기울여 독수리의 발톱이 구름을 찢어 내면서 솟는 핏빛의 액체 방울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장미 한 송이가 심홍색 눈물방울 속에 깊숙이 새겨 있었다.

호크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냉정하고 잔인한 독수리가 무기력한 황금빛 구름을 발톱으로 파헤치는 모습이 의미심장했다.

호크는 천천히 눈을 떠 엔젤이 그린 자신의 영상과 마주했다.

독수리는 웅대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순간에 포착된 그 맹금은 여러 가지 색조의 청동색과 갈색의 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힘과 우아함과 날렵함이 날개와 몸의 곡선을 따라 은연중에 드러났고, 발톱은 아래로 향해 있었으며, 황록색 눈은 먹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작품에는 뭔가가 더 있었다. 너무 작아 거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독수리의 눈에 심홍색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호크는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 조그만 눈물방울을 들여다보았다. 눈물방울에 엷고 가냘픈 장미 봉오리의 윤곽이 새겨져 있었다. 희망에 대한 일종의 암시 같았다. 그 장미는 이제껏 겪었던 사랑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호크에게 가르쳐 주었다.

호크는 심홍색 눈물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랑을 몇 번이나 자기 팔에 안았고, 절정에 도달한 사랑이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들었고, 뜨겁고 달콤해진 사랑이 자기 곁에서 겁내지 않는 것을 느꼈고…….

그런데 자신은 모험을 하기가 두려워 사랑을 외면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가.

이제 호크는 햇살이 유리를 꿰뚫고 내리쬐듯 분명히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산산이 부서진 과거의 파편들이 영혼을 무자비하게 찢어 사랑이 싹트고 자랄 여지를 남김으로써 아름다움으로 바뀌었다.

호크가 꼼짝 않고 빛과 색깔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데 방울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 보니, 엔젤이 텅 빈 침대 위에서 팔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침대로 조용히 걸어간 호크는 자신이 왜 돌아왔는지 깨달았다. 다시는 엔젤을 떠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엔젤을 팔에 안았다. 사랑이 무엇이지 배운 것이다.

엔젤은 맹금이라도 사랑을 배울 수 있다는 희망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모든 것을 호크에게 베풀어 주었다.

호크는 독수리가 결코 냉정하고 잔인하지 않다는 것도 배웠다. 괴로움과 아름다움을 경험케 하여 천사의 눈을 뜨게 해준 도구였을 뿐이었다. 독수리는 천사와 아름다움을 함께 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자각도.

은방울을 딸랑거리며, 엔젤은 본능적으로 따뜻한 호크의 나체를 향해 다가왔다. 호크는 천천히 입을 맞추며 엔젤을 소중히 어루만졌다.

엔젤이 눈을 떴다. 호크를 향한 눈은 의혹과 희망이 뒤섞여 반짝였다.

호크는 밝은 황금색 구름 같은 엔젤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비볐다.

"호크……?"

"당신을 사랑해, 엔젤."

호크는 뜨겁고 달콤한 엔젤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고 오랫동안 사랑을 속삭였다. 사랑의 속삭임과 애무는 호크가 엔젤의 일부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어루만지고 불태우며-자신들이 놓쳐 버린 것을 다시 찾았다. 속삭임들은 절정에 이르는 부드러운 비명으로 바뀌었다. 그 비명은 방울의 떨림 속에서 '당신을 사랑해'라는 속삭임으로 또다시 바뀌었다.

거짓말을 모르는 여자와 진실을 발견한 남자는, 쏟아지는 온갖 색채에 흠뻑 젖어, 사랑의 힘으로 서로의 상처를 치료했다.

두 사람은 상대의 팔에 안겨 평화로운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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