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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우스의 카페체노 2

7

"지금 마나우스에는 200개가 넘는 새로운 기업이 들어와 있습니다."

운전사인 클라우디오는 자랑스러운 듯이 질에게 설명했다.

"자유항이고, 브라질로부터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때문이지요."

옛날 번성했을 때의 우아한 마나우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질이 꿈꾸고 있던 화이트시티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냉방시설을 갇추고 있는 리무진에서 내다보는 마나우스는, 너저분하고 초라하게 까지 보였다. 새로 지은 고층 빌딩과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공원, 널찍한 광장은 열대의 뜨거운 열기에 페인트가 벗겨졌고 종려나무와 빨간 지붕조차 초라한 개척마을의 인상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빈틈없이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거리와 물건들이 잔뜩 쌓인 상점들은 활기에 차서 발랄한 기분이 가득 넘치고 있었다.

"먼저, 마나우스의 보배인 오페라하우스에 가시죠."

클라우디오가 제안했다.

질은 읽었던 책에는 모두 떼아뜨르 아마조니아를 <마나우스의 자랑과 기쁨>이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금세기에 백만 달러를 들여 대리석과 유리, 타일을 수입하여 지은 것이다.

"아름다워요."

질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을 내뱉았다. 최근에 보수된 오페라하우스는 청동과 금장 타일에 뒤덮인 돔을 오후 햇살에 빛내며 거대한 웨딩케익 같은 모습으로 서있었다.

"내장은 이탈리아 화가인 도미니크 드앙게리가 직접 꾸몄는데, 천장에서는 베니스제 거울이 붙여져 있습니다. 안을 구경하시겠습니까?"

운전사는 재빨리 물었다.

"다음에 보도록 하죠."

질은 살짝 웃었다.

"떼아뜨르 앞의 조각상은 아마존에 세계의 모든 배가 들어오게 된 것을 기념한 것입니다."

운전사는 성 세바스찬 광장에 서 있는 조각상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마나우스를 특징짓고 있던 아르누보풍 건물은 거의 모습을 감추고 고층빌딩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행정청과 피오 9세 때 선사 받았다고 하는 카라라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교회 뿐이었다. 질에게 있어 가장 흥미 깊었던 것은 어시장의 흔들다리와 마켓이었다. 그 색체의 풍성함에는 카메라를 사진이라도 찍고 싶은 마음이었다.

흔들다리는 우럽에서 제작되어 마나우스로 운반되어온 것으로, 비가 많이 오는 계절에는 수량에 맞추어 12미터나 높아지게 되어 있었다.

철로 된 곳이 마치 레이스와 같은 섬세한 세공으로 꾸며져 있는 마켓의 건물에도 질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 흔들다리와 마찬가지로도 그것도 유럽에서 제작된 것으로 옛날에는 양조장이었다.

"이밖에도 또 있어요."

클라우디오는 동물원과 인디안 박물관 등을 열거하였다.

한창 더운 때 마켓을 걸어 돌아다녔기 때문에 아직 풀리지도 않은 여행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질은 상냥하게 거절하였다.

"벌써 많이 돌아다녔어요.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고 싶어요. 라스 플로레스로 돌아가요."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도 너무 신경이 곤두서서 그녀는 쉴 수가 없었다. 시카고를 떠나 싫증난 생활에서 탈피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도 상대해줄 사람이 없었다. 프라이팬에서 뛰어나갔다고 했더니, 그곳은 불속. 그것이 싫다면, 시카고로 다시 돌아가서 마나우스와 사이먼 토드와의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해야 되리라고 생각한 질은 식욕을 되찾아 저녁 식사를 제법 할 수 있었다.

저녁 식사 후 질은 꽃내음이 향기로운 정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때때로 강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으로 공기가 서늘해졌다. 정원은 키가 큰 생 울타리로 이웃집과 구분되어 있었고 저쪽에서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강아지가 짖는 소리, 앵무새의 소리 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모자이크 모형의 오솔길이 만발한 하이비스커스와 부겐빌리가지에서 새의 지저귐이 조그맣게 들려왔다.

오솔길을 계속 따라가자, 본 적도 없는 열매가 달린 나무들이 들어선 작은 규모의 과수원이 있었다. 해는 이미 다 기울어졌고, 시원한 강바람이 그녀의 마음을 깨끗이 세척해주는 듯 했다.

"과일 이름을 외우지 않고서는."

질은 혼자 중얼거리며 기이한 형태의 과일을 한 개 따서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세뇨라 콜데로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자 어쩐지 더욱 피곤해진 것 같아 그녀는 그대로 잠자리에 들고 싶어졌다.

질은 사이먼의 서재로 가서 그의 책상 앞에 앉아 보았다. 책상 위의 전화기에는 보턴이 여러 개 나란히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주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질은 조금 주저했다. 아직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명령하는 일에는 익숙해지지 않은 탓이었다. '곧 익숙해질 거야.' 질은 속으로 자신을 다독 거리며 주방으로 연결된 보턴을 눌러 가정부를 불렀다.

"세뇨라 콜데로, 카페체노를 마시고 싶은데."

"알겠습니다. 그밖에 또 무엇을 가지고 갈까요?"

"아뇨. 다른 것은 필요 없어요."

수화기를 놓은 질은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펜을 들고, 사이먼의 편지지를 사용하여 휴이 부인에게 자신의 무사한 도착과 가슴 뛰는 생활을 써 나갔다.

세뇨라 콜데로가 카페체노와 과일을 담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콜데로는 질이 따온 과일이, 캐슈우너트가 생산해 낸 캐슈우라고 가르쳐 주었다.

가정부가 돌아간 다음 질은 카페체노를 마셨으나,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려 질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당황한 채 수화기를 든 다음에 통화 보턴을 눌렀다. 가정부가 이미 전화를 받고 있었다.

"토드씨 댁입니다."

"아내를 불러주시오, 콜데로."

사이먼! 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장고동이 높아짐을 느꼈다.

"전화 받았어요. 사이먼."

가정부가 조용히 수화기 내려놓은 소리가 들렸다.

"아무 일 없소?"

사이머은 단도직입적인 영어로 물어왔다. 사과는 커녕 인사말도 없었다. 마치 순종 잘하는 사원에게 보고를 요구하는 사장 같은 말투였다.

질은 어쨌든 얌전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전화 저편에서는 음악과 웃음소리 등이 들려서 사이먼이 혼자 조용한 곳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한참 동안 그 소음이 들려왔지만 드디어 텍사스 발음이 섞인 부드러운 사이먼의 목소리가 들렸다. 왠지 질은 마음이 아팠다.

"아무 말 없이 나온 건 잘못이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소."

"아니, 괜찮아요."

질은 냉담하게 억양 없는 말투로 대꾸했다.

"오늘은 무엇을 했소?"

"내가 묻고 싶은데요."

사이먼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오."

"커틀렛 토드회사에 관한 일이라면 나로서도 전혀 관계없는건 아니지요. 그것 때문에 나간 거라면."

"무슨 의미지?"

그는 날카롭게 물었다.

"별 의미는 없어요. 내가 생각한 것을 말했을 뿐이에요."

"설마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옆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인지 농담 섞인 음성이었지만, 그의 심정을 숨겨주지는 못했다.

"글쎄요."

"지금 내 성격을 이것저것 맞춰 말할 형편이 아니오."

"! 물론이겠지요."

질은 재빨리 말했다.

"내가 질문한 것에 대해서는 답을 안할 거요.?"

"글쎄, 뭐였더라?"

질은 그만 가시 돋친 말투로 대꾸하고 말았다.

사이먼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주위의 소음이 계속 들려왔다. 사이먼의 바로 옆에 어떤 여자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질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전화한 것은 무슨 특별한 용무가 있어선가요?"

사이먼은 대답하지 않앗다. 한참 뒤에 겨우 들려온 그의 음성은 갑자기 부드러워졌고 다정하기까지 했다.

"물어보고 싶었던 것은 사랑스런 내 사람에게 오늘 아무일도 없었냐는 것이었소."

"나는 걱정 없어요. 세뇨라 콜데로에게 당신이 아내를 걱정해서 전화했었다는 것도 알렸으니, 이제 끊어도 돼요."

"정말 그렇소? 오늘 아침에 당신을 침대에서 억지로 끌어내려 극적인 이별 장면을 연출했더라면 더욱 좋았을걸. 콜데로에게서 들은 말엔 너무 신경 쓰지 않도록……."

그는 우물거리다가 덧붙였다.

"그 말대로요. 그렇게 해야만 했소."

"담요에 메모를 남겨두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담요?"

그는 당황하는 것 같았다.

"담요를 덮어준 것은 당신이지요?"

사이먼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것이 바로 증거였다. 외출하기 전에 그는 질의 방에 와서 담요를 덮어주고 옆에 서서 잠자는 그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질은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가정부에게서 내가 나간 것을 들은 일은 몹시 불쾌했겠지. 잘못했소, .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신경 쓰지 않아요."

다시 한참 침묵이 흐른 후 그는 말했다.

"지금 어디에 있소?"

"당신의 서재요. 당신은?"

", 호텔 바이오."

"어머, 그래요? 마치 사욱제 현장에서 전화하고 있는 것 같이 들리는데요."

"라디오야, 정말이오."

"좋은 장소에 있는 일류 호텔이겠지요?"

"산타렌에 있어요. 월요일에는 돌아갈 거요. 월요일 밤, 떼아뜨르 아마조니아에 우리의 좌석이 예약되어 있소. 콘서트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서로를 알게 되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동안 멋진 옷을 사도록 해요."

"창피하게 하진 않겠어요."

"그럼 월요일에……."

전화가 끊어지고, 질은 자신이 너무 냉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얼굴이 뜨거웠다.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질은 방안을 서성거렸다. 볼륨을 한껏 줄인 TV는 소리 없이 화면만을 내보내고 있었다.

서재의 창은 옆집과의 경계인 정원을 향하고 있었다. 아홉시 반이었지만 잠자고 싶은 마음은 싹 달아나고 없었다. 그때 침대 머리맡의 전화가 울렸다. 가정부가 사이먼의 전화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질은 승리감을 느끼었다.

"여보세요. 사이먼?"

"필요할 때 연락이 되지 않으면 곤란하리라 생각해서……."

그는 감정을 억제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뻐요."

희망감이 줄어들며 질은 갑자기 피로를 느끼었다. 연인은 되지 못할지언정 친구라도 되고 싶었다. 질은 자신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서둘러 덧붙였다.

"사이먼, 이제 이런 방법은 끝내요. 너무 거북해요. 잠시라도 좋으니까 냉담히 대하거나 농담을 하거나 그런 식으로 해줄 수는 없어요? 다시 말하면, 적어도 당분간은 같이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서로 화만 낼 수는 없지 않겟어요?"

사이먼이 대답하기까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조금 속을 태우고 있었소. 생각할 것은 산처럼 쌓여있지, 당신의 숙부님과 둘이서 나누어 해온 것은 지금은 혼자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당신과 서먹서먹한 관계로 있을 생각은 없어요. 그렇지만 솔직이 말해서 너무 혼란스러워. 아내까지 떠맡게 되면."

"떠맡는다고요?"

질은 따지듯 물었다.

"꼭 맞는 말이군요.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렇지 않을 텐데. 역시 나는 당신의 짐이었군요. 그렇게 될 마음은 없어요. 믿어줘요. 우리들, 서로에 관한 것을 같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돼요. 사이먼, 개인적인 것이 아니에요. 애초부터 우리를 연결시킨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산에 대해서지요. 난 여분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나도 커틀렛 토드의 일원이니까 업무에 있어 내가 따돌림을 당할 이유는 없어요."

"그런가?"

냉정하고 짧은 사이먼의 말은 더 이상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 어쨌든."

질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전화한 것은 만일의 경우를 위해 주소를 알려주려고 한 거군요?"

사이먼은 질의 말을 무시했다.

"전화한 것은 쓸쓸해져서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소."

"결혼하기 전엔 어떻게 했어요, 쓸쓸할 때?"

그는 웃었다.

"결혼하기 전에 쓸쓸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소."

"알았어요. 결국 당신은 친구들을 만났겠군요, 당신에게 쓸쓸한 생각을 갖지 않게 해주는."

"몇 명 정도는."

"과연!"

질은 한숨을 쉬었다.

"몇 명인지, 물론 당신이 싫증을 내지 않는다면야!"

"전화로 이야기할 성질이 아닌 것 같소."

그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이라고 질은 확신했다.

"글쎄, 그럼 무엇에 대해 애기할까요?"

질은 비꼬듯이 물었다.

"날씨 얘기? 지금 이곳은 비가 내리고 있어요."

그러나 그는 그녀의 도전에 오해오지 않았다.

"난 트로피칼 호텔에 묵고 있소. 내가 없을 때는 메모를 시키면 돼요. 내일은 무얼 할 예정이오?"

"해님이 나와주면요?"

질은, 이 구질구질한 비가 사이먼 탓이라고 말만하지 않았지, 웬일인지 실제로 그의 탓이란 느낌이 들었다.

"해님이 없어도."

질은 단념했다. 그는 정말 쓸쓸해서 전화를 걸었을 지도 몰랐다.

"클라우디오가 이 도시를 안내해주고 있어요. 내일은 배를 타고 물의 결혼을 보러 갈 작정이에요."

"그건 안돼! 내가 돌아간 다음 주쯤에 내가 직접 데리고 갈 예정이오!"

"어머! 근사하군요."

질은 명랑하게 말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과연 물의 결혼은 갓 결혼한 부부가 볼만한 것이겠군요. 어떻게 할 거예요, 동전이라도 던져줄 거예요?"

"그럼, 모레 만나요. 푹 쉬어요, 꼬마 아가씨."

질의 응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는 끊겼다.

꼬마 아가씨……. 질은 천장을 향해 오랫동안 누워있었다. 꼬마 아가씨! 결국 그녀는 자신의 처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아이 취급을 받는 다니엘 커틀렛의 조카로서, 그 때문에 사이먼은 그녀와 결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꼬마 아가씨란 것은 결국!

일요일 아침 비는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질은 라스플로레스의 내부 평면도를 그려놓고 가구 배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점심 식사는 질의 희망에 따라 세뇨라 콜데로가 만든, 과수원에서 갓 딴 과일을 무친 샐러드였다. 그것은 매우 미묘한 맛을 내고 있었다.

오후에 태양이 얼굴을 내밀자, 질은 나무그늘 아래로 산책을 나갔다. 꼬마 아가씨. 이 말은 그녀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듯 했다. 애정어린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단순이 사실을 말한 것일까?

그날 밤 사이먼에게는 전화가 또 왔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파티 중이므로 오래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화는 간단하게 비지니스맨이 오랫동안 함께 생활을 한 부인에게 정기적인 연락을 취한 정도였다. 그래도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지 않나 하는 자신의 우려가 빗나간 듯해서, 그녀는 일단 안심하는 것이었다.

 

월요일, 질이 아침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사이먼이 뛰어 들어왔다. 그는 노란색의 반소매 셔츠에 진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스포티한 모습의 사이먼을 아직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태양에 그을려 싱그럽고 건강해 보였으며 야생적 생활에 만족하는, 어느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모험가 같았다.

뒤따라 들어온 세뇨라 콜데로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또 연극이 시작되는군.' 질은 의자를 밀고 일어나 그의 팔에 매달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합쳐졌다. 이것도 계획된 프로그램 중의 하나였다.

"쓸쓸했소."

가정부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옆에서 사이먼은 정확한 포루투갈어로 말했다.

"정말 더 기다릴 수는 없었어요."

질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일분 일분을 세고 있었어요."

"아침 식사하세요."

골데로는 어머니와도 같은 목소리로 말한 뒤 주방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에 하지."

사이먼은 팔로 질의 어깨를 감싸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일단 방에 들어서자 그의 연기는 끝났고, 그는 질을 남겨둔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질은 간막이 도어를 쾅 닫아버리고 싶었지만, 결심을 하지 못한 채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마땅히 해야 할 계획된 일인걸.' 질은 생각에 잠겼다.

사이먼은 햇볕에 그을린 가슴과 탄탄한 팔의 근육을 모두 드러낸 채 칸막이 문의 입구에 서 있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겠지?"

그가 물었다.

질은 나이트 테이블 위의 잡지를 들어 올렸다. 그를 쳐다보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지켜보려고 했다. 사이먼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의 경계인 그 문을 닫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잡지를 넘기면서 질은 겨우 말을 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 질은 눈을 들었다. 어느새 사이먼이 질의 바로 곁에 와서,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잡지를 빼앗아 바닥에다 던졌다. 그는 질의 팔을 잡은 채 그녀 곁에 앉았다.

"계속 싸우는 것도 상관 않겠소, 아니면 서로의 관계를 냉정하고 편한 것으로 해도 좋고. 어느 쪽으로 할까?"

"어쨌든 당신이 생각한대로 하고 싶어 하겠죠?"

질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응수하였다.

사이먼의 목소리는 젊고 싱싱했다.

"당신 숙부님이면 꼭 당신 마음에 들었을 거요. 그는 걸핏하면 싸우려 했지, 결코 싸움에 주저하지 않았고 또 항상 이겼소."

"혈통을 증명해줘서 고마워요."

"그것은 선전포고인가? 하지만 알다시피 당신의 숙부님과 난 잘 해나가고 있었소. 그래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거고."

사이먼은 입가에 잔인한 웃음을 떠올렸다. 질의 팔을 단단히 잡은채, 그는 그것을 잊어버린 듯했다.

"그래서, 결혼한 대가로 내 명예가 올라가 난 그것에 감사 드려야 하고?"

둘은 가만히 응시하면서 서로의 감정을 살피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였으나 각기 다른 세계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에 무관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사이먼에게 팔을 붙잡히고 있으면서 질은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만일 두 사람에게 불이 붙는 다면 이 세상 전부를 태워 버릴 기세로 타올라 버릴 것이다. 그것을 막을 수 있을지, 질은 자신이 없었다. 사이먼은 갑자기 손에 힘릉 빼버렸지만, 그것은 질을 끌어당기기 위해서였다. 그의 입술이 질의 목과 귀, 눈 할것 없이 열정적으로 더듬었다. 질은 그의 가슴을 손으로 밀며 반항하였다. 입술을 준다면 그에게 강력한 무기를 주게 되는 것이다. 질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지 못했던 의지를 불러일으켜서 그를 밀어 젖혔다.

"절대 싫어요!"

질은 소리를 질렀다.

사이먼은 일순 기가 꺾였지만, 실내복을 여미는 질에게 금방 웃음을 보였다.

"절대?"

그는 계속 냉정한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절대라는 것은 긴 시간이지."

그는 갑자기 일어서서 자신의 방으로 향하였다.

"오늘밤 8시에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안됐지만, 오늘도 저녁 식사는 당신 혼자서 해야 할 것 같소."

질의 귀에 문이 닫히고 열쇠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일어서서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싫어요! 미워요! 너무 자만하지 말아요. 오만한 당신, 정말 어쩔 생각인가요?"

만약 질이 그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다른 여자라면 기꺼이 맞아줄 거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사랑을 입에 담기만 한다면, 두 사람의 싸움은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질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8

질은 흘끗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검은 눈으로 그녀를 마주 쳐다보고 있는 낯선 여자가 있었다. 데이빗과는 몇 번이나 데이트를 했지만, 오늘 사이먼과의 데이트만큼 그녀가 정성들여 준비한 적은 없었다.

알아보지 못할 듯한 모습의 자신을 보면서 질은 우쭐하는 사람은 사이먼뿐이었다. 그녀는 풍성한 머리채를 목덜미에서 묶어 하이비스커스꽃을 꽂았다. 이 꽃과 반지 외에 액세서리는 엄마에게 물려받은 작은 다이아몬드 귀걸이 뿐이었다.

질은 빨간색과 흰색 꽃이 그려진 사파이어색의 레이스 드레스를 걸치고 자주색 벨벳 리본으로 허리를 졸라맨 후 그와 잘 어울리는 금색 그물백을 들기로 작정했다. 끝손질로 은은한 향수를 뿌리고 얇게 비쳐 보이는 푸른 숄을 집어 들고서 질은 방을 나섰다. 질은 계단위에서 발을 멈추고 계단에서 가정부와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먼을 언뜻 보았다.

그는 몸에 꼭 맞는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세련된 옷차림이었다. 질은 애타는 마음을 누르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사이먼은 사교계에 어울리는 우아함을 갖추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게 틀림없다.

세뇨라 콜데로가 먼저 질을 알아채고 눈을 돌렸다. 얼굴을 붉히며 질을 가리키는 가정부를 따라 사이먼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질은 스커트를 잡고 주의하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보세요, 여왕 같아요!"

가정부가 소리를 질렀다.

질은 남편의 시선에 자신의 노력이 헛된 것 같아 아찔했다. 홀 아래로 내려온 질은 도어로 시선을 돌린채 사이먼 옆을 지나갔다. 결코 그에게 바보 취급을 당한 체는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기다려."

날카롭고 명령적인 사이먼의 목소리, 높아지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억제하고 질은 뒤돌아보았다. 무언가 잘못 된 것은 아닐까. 질은 씁쓸했다.

질은 애써 웃음을 머금고 사이먼에게로 다가갔다. 사이먼은 손에 들고 있던 벨벳상자를 열고 그 속에서 목걸이를 끄집어 냇다. 질은 긴장하였다. 가지런히 박힌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그는 상자를 가정부에게 주고 빛나는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걸어주면서 말했다.

"결혼 선물이오. 뒤돌아봐요."

그녀의 피부에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사이먼은 가볍게 질을 껴안고 어깨에 따뜻한 입술을 대었다.

'세뇨라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군.' 그의 입술 감촉에 질은 돌연 크게 웃고 싶어졌다. 이 명연기에는 그녀도 틀림없이 갈채를 보내리라.

질은 사이먼의 팔 안에서 몸을 돌려 그를 향하였다. 이것도 시나리오대로이다. 이마를 그의 입술에 댄 다음, 질은 점잖을 빼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너무 과용하게 했군요."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오."

사이먼은 질을 떼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늘 밤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갈까요?"

질은 뺨에 홍조를 띠면서 방향을 홱 바구었다. 사이먼은 놀리듯이 인사를 했다.

"물론이오. 세뇨라, , 갑시다."

오페라하우스를 마주보고 있는 광장은 흑백 타일이 파도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떼아뜨르 아마조니아의 장려한 건물이 스포트라이트에 비춰져, 밤하늘에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질은 멋진 건물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곧 전용 좌석에 안내되고, 이어 실내의 조명이 어두워졌다.

"시즌 중이지만, 당신을 위해 이 자리를 빌렸소."

사이먼이 속삭였다.

질은 감사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너무 어두워 그가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수를 받으며 지휘자가 단상에 올랐다. 희미한 불빛에 빛나는 로맨틱한 오페라하우스를 돌아보고 질은 만족의 한숨을 쉬었다.

시카고는 이제 멀고 먼 곳이었다.

 

휴식 시간에 장내가 밝아지고 박수가 그치자 사이먼은 질 쪽으로 몸을 돌렸다.

"뭘 마시겠소?"

음악의 여운에 사로잡힌 채 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질의 손을 잡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대단한 인파로 음료수 가기에도 힘이 들었다. 사람들을 해치고 사이먼은 질에게 샴페인을 가져다주고는 그녀를 감싸듯이 하여 벽 쪽의 빈 곳으로 데리고 갔다.

"즐겁소?"

그는 남편다운 배려로 물었다.

", 아주."

질은 이 밤이 영원하도록 빌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음악이오?"

", 당신은요?"

"나도 좋아해요."

그는 개구쟁이같이 빙긋 웃어보였다.

"토드 부부는 음악에 취미가 같군."

질은 태어난 후 처음이라고 할 정도의 진지한 기분이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적인 것도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우리, 그것을 찾아갈 수 있겠죠?"

질의 얼굴을 지켜보는 사이먼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이 빛나는 호수와 같았다. 그는 손등으로 부드럽게 질의 뺨을 쓰다듬고, 슬픔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은 다른 시간에 만났어야 하는 건데."

질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의미죠?"

사이먼이 질에게 다가와 대답하려고 입을 열 때, 방해자가 나타났다. 옛날부터 알고 있던 사람인 듯한 남자가 사이먼의 어깨를 두드리며 질의 소개를 부탁했던 것이다. 그 후부터는 계속해서 개막 벨이 울릴 때까지 사람들에게 시달려 숨쉴 여유조차 없었다. 질은 사이먼을 잃어버리고 할 수 없이 혼자 자리에 돌아와 앉아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음정을 맞추고 잇는 동안, 질은 청중을 한 번 돌아보았다. 멋진 옷차림의 지배자 계급의 사람들, 하이레벨의 사람들. 질은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멋진 사람들을 본 일이 없었다. 물론 시카고에서 말이다.

질은 정면의 자리에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위험할 정도로 목덜미를 많이 판, 아주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 여인은 질에게 등을 보이고 잇는 남자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가 갑자기 질 쪽을 보자, 질 은 뚫어지게 보고 있던 것이 무안해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 지난 후 다시 한 번 그 여자 쪽을 쳐다본 질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여자와 정신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남자는 사이먼, 자신의 남편이 아닌가!

질은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여자는 사이먼을 넋이 빠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치로 미루어 보통의 관계가 아닌 듯 했다. 질은 눈을 감았다. 몸이 떨려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더구나 자기의 부인 앞에서 사이먼이 그런 식으로 행동할 줄은 그녀는 생각지도 못했다. 질은 거의 마비된 듯이 박수를 쳤다.

음악 연주가 시작되자 사이먼은 곧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살짝 보았다. 질은 미동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손 감촉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젠 음악도 잡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연주가 끝나자 질은 기계적으로 박수를 쳤다. 사이먼이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어땠소?"

그의 손이 질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장내가 밝아졌다.

질은 아무 대답도 없이 정면의 자리를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질이 일어서자, 사이먼은 그녀의 어깨에 숄을 걸쳐 주었다. 질을 자기에게 끌어당긴 다음 사이먼은 다시 한번 물었다.

"어땠소, 토드 부인?"

"덕분에 재미있었어요."

질은 쌀쌀맞게 대답하고 그로부터 떨어지려고 했지만 사이먼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연이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사이먼은 질의 턱을 잡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즐거워 보이지 않는군."

"즐거워요. 정말 좋은 음악이었어요.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는 거죠?"

질은 재빨리 자리를 떴다. 사이먼은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리려는 질의 팔을 꽉 잡았다. 왜 그녀가 화가 났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넋 나간 듯이 보고 있더군요. 이미 알고 있던 일이지만요."

질은 차갑게 웃었다.

"그래요, 이미 난 질려 버렸어요."

"그러면 자물쇠를 채워 당신을 내게 매놓지 않으면 안 되겠군."

비꼬는 듯하면서도 애정 어린 그의 말투는 질의 분노에 기름을 부을 뿐이었다.

"아뇨, 나는 성실해요. 다른 사람 뒤를 쫓아다니거나 하지는 않아요."

질의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런 마음을 나타내지 않았다.

"조금 걷지 않겠소? 그렇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테요?"

"걷는 게 좋겠어요."

집이란 말이 그녀에겐 묘하게 들렸다. ! 그 의미를 그는 알고 있는 것일까?

"클라우디오에게는 택시로 돌아갈 거라고 말해 두었소. 시장하지 않소? 목이 마르지는? 좋은 카페를 알고 잇어요."

밖으로 나오자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바로 앞에서 아까의 그 금발머리 여자가 혼자서 택시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사이먼은 그 여자를 못본 듯 했다. 만약 자신이 그 여자 앞을 가로질러 간다면 어떻게 될까? 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이먼은 질의 팔을 잡고 광장을 유유히 걸어갔다.

"정말 아는 사람이 많더군요."

금발의 여자가 택시로 곁을 스치는 것을 느끼면서 질은 말했다.

"오랫동안의 업무 결과요."

"즐거움이에요, 당신 친구 모두를 만나 볼 수 있는 것이."

사이먼은 웃었다.

"지겹게 굴거나 하지는 않을 거요, 보증해요."

시청 앞 길가에 잇는 카페 피닉스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두 사람이 앉은 야외 테이블에까지 커피의 향기가 풍겨왔다. 밤늦은 시간인데도 질은 산보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질은 카페체노에 설탕을 타면서 아직도 금발머리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질은 결단을 내려 사이먼에게 물어 보았다.

"잊어버렸을 리는 없겠죠. 내가 앉은 자리 앞에 있던 금발머리 여자 말이에요. 당신, 무릎을 꿇지 않았을 뿐이잖아요."

사이먼은 무표정한 얼굴로 질을 보았다.

"안젤라 프랑코 말인가?"

"몰라요. 소개해주지 않았잖아요. 당신 나이와 비슷한 신사 숙녀들과는 많이 만나봤지만 그 여자는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셨나 보죠?"

사이먼은 질의 말을 재미있게 듣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며 질의 질문은 무시해 버렸다.

"특별한 사람이겠지요?"

질은 그 이야기를 끌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시 말을 꺼냇다. 사실 그 여자의 이름조차도 알고 싶지 않았다.

사이먼은 힐끗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 잘 시간이군."

질은 벌떡 일어났다.

"나는 전혀 잠 잘 마음이 없어요. 그래도 돌아가야겠지요. 집이라고요? 오래 살 호텔이겠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사이먼과 질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질은 마음이 아팠다. 정말 알고 싶었던 것은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누구며 왜 소개를 시켜주지 않았을까? 소개시켜줄 필요도 없이 그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자기를 보고 한번 웃어주기만 해도 될 문제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사이먼은 차가운 사과의 말과 함께 서재에 틀어박혔다. 질은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홀로 나갔다. 사이먼의 서재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질은 이층으로 올라가려다 생각을 고쳐먹고 정원으로 나섰다.

에어컨 시설이 되어 있는 라스 플로레스에서 그녀는 도망가고 싶었다. 질은 서늘한 밤공기를 호흡하며 끊임없는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일부터는 자신이 달라질 것이다. 집안의 실내장식을 하고 커틀렛 토드사의 사무실에 가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확인할 작정이었다. 아마존크루즈에 가는 것도 좋겠다. 어쨌든 자신의 일은 스스로가 해야만 한다. 다니엘 커틀렛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조카로서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질은 정처 없이 정원을 돌아다녔다. 쟈스민 향기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강바람은 낮의 열기를 빼앗아갔다. 질은 현관 가까이에 잇는 대리석 벤치에 앉았다. 오늘 밤의 불쾌한 일들 대신 향기로운 밤의 개기에 취하고 싶었다. 머리 위에서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북반구에서 보던 별과는 정말 달랐다. 그 고요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있는 동안 질의 눈에는 눈물이 넘쳐흘렀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 아름다운 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으리라.

발자국 소리가 들려 질은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사이먼의 모습이 보이자 질의 가슴은 갑자기 죄어드는 것 같았다. 그는 질이 있는 것을 모르는 듯 몇 걸음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 역시 하늘을 홀려다 보았다. 손가락 사이에서 담뱃불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질이 앉아 있는 쪽을 쳐다보지 않은 채, 두세 걸음 접근해 왔다. 질은 말을 걸까말까 망설였다.

사이먼은 턱시도의 가슴을 풀어놓고 넥타이도 느슨히 맨체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는 자신과 집의 불빛을 받고 잇는 듯하다고 질은 생각했다. 숙부는 질이 이 안자를 사랑하게 되도록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죽음에 임했다고 해서 재산만을 지키기 위해 질을 사랑 없는 결혼으로 몰아댈 정도로 잔혹한 숙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또 사이먼도 질을 사랑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질의 목에 차가운 다이아몬드의 감촉이 잇었다. 사랑이 담겨 있지 않은 사이먼 토드의 힘을 위해서만 꾸며져 있는 비싸고 멋진 선물이었다.

사이먼은 살피듯이 질의 침실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끔씩 침실을 쳐다보면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구나. 염려할 필요는 없는데.' 질은 저녁에 칸막이 도어의 자물쇠를 확인해 두었다.

사이먼은 질의 방을 한 번 쳐다본 후 담배를 비벼 껐다. 그는 방에 돌아가려는 듯 갑자기 몸을 돌리다 어둠 속의 벤치에 앉아 그를 보고 있는 질을 발견했다.

"웬일이오!"

그는 멈추어 서서 질을 쏘아 보았다.

"무엇을 하고 있소?"

그는 화가 난 듯 했다.

"나를 감시하는 거요?"

질은 겨우 웃음을 보였다.

"그냥 여기 앉아 밤을 즐기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 그리고 나의 일거일동을 보고 있었겠지?"

"별로 흥미를 끈 행동은 하지 않았어요."

"침대에 들었으리라고 생각했소."

"내 일을 생각해 주셨다니 감격했어요."

그렇게 말한후 질은 이를 악물었다.

사이먼은 처음 보는 듯한 표정으로 질을 응시했다.

돌연 손등이 따끔했다. 모기였다. 질은 재빨리 찰싹 때렸지만, 어두워서 모기가 잡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사이먼은 질의 옆에 앉았다.

"모긴가?"

"그런 것 같아요."

"어디를 물렸소?"

그는 손가락을 혀로 적신 다음 질이 가리키는 곳에 침을 발라 주었다. 질은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당신이 혈기왕성하게 생각되는군."

사이먼은 질의 팔에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비단 같소. 모기도 고급 취미를 가진 것 같아."

질은 그와 싸우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킥킥 웃었다. 사이먼이 일어섰다.

그녀는 시카고의 추위와 눈을 밀치고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여기, 이 아름다운 정원에 앉아 쟈스민의 향기를 맞고 잇는데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오히려 잘못일거라고 생각하며 질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사이먼과 같이 있지 않아도 된다. 언제든 그가 안젤라 프랑코에게 돌아간다 해도 잡지 않으리라.

질이 잠시 생각을 하다 눈을 뜨자, 사이먼이 술잔을 들고 앞에 서 있었다.

"마셔요."

사이먼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깜빡 졸았나요?"

"그렇소."

질은 차갑고 달콤한 케쥬우를 마셨다. 사이먼이 다시 그녀 곁에 앉았다. 온화한 밤기운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당신은, 그냥 별을 보러 나오지는 않았겠죠?"

"최근에는."

질은 빈 글라스를 바닥에 놓고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당신, 변했군요. 전처럼 신경이 예민한 것 같지 않아요."

"당신 덕분이라고 생각하오, 꼬마 아가씨."

질은 웃었다.

"꼬마 아가씨? 내가 정말 그래요?"

사이먼은 손으로 질의 머리카락에 하이비스커스 꽃을 집어 세 개의 잎을 따냈다.

"열대의 꽃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질을 껴안고 키스하면서 말했다. 질은 거부하지 않았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키스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멍하니 넋을 잃고 있다가는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 한 편의 영화 장면을 보고 있는 듯도 했다. 질은 출연자이기도, 견학자이기도 했다. 밤이 영원히 계속 되듯이 그들의 키스도 끝이 없었다. 그의 체취와 함께 희미한 레몬 비누 향기도 풍겼다. 질은 숨이 가빠졌다. 이래서는 안 된다. 그는 곧 질을 안고 있던 손을 떼고 그녀의 몸을 더듬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랑에 대한 그녀의 꿈은 다 틀려버리게 된다.

사이먼의 혀가 더듬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도망가지 않으면질은 그를 보지도 않고 뒤로 물러나 무의식적으로 하이비스커스 꽃을 꼭 쥐고 자기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방문을 닫은 그녀는 사이먼의 방과의 사이에 있는 도어의 자물쇠를 확인했다.

질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질이 느끼는 것은 욕망뿐만이 아니었다. 사랑의 방아쇠가 아닌 욕망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는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것도 조금 까다로운 또 하나의 정복에 불과한 것이리라.

'사랑하도록 만들어 보겠어.'

질은 자신에게 중얼거려 타일렀다.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때 질의 머릿속에는 문득 금발의 여인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사이먼이 들여다보고 있던 두 사람의 육체는 지금도 닿고 있는 듯하다. 질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고 세련된, 구식의 도덕 따위는 신경도 쓰려 하지 않는 사람과 맞붙을 수 있을까.

희미한 소리에 질은 눈을 떴다. 가슴 두근거리며 일어났지만 무슨 소리인지,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질은 누군가가 창으로 침입하려는 것이 아닌가 겁을 내면서 창 쪽으로 눈을 돌렸다. 누가 잇는 기색은 없었다. 질은 불을 켜고 시계를 보았다. 두 시였다. 그녀는 드레스를 입은 채 잠들었던 것이다. 그때 질은 그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를 알았다. 사이먼 방과의 칸막이 도어의 손잠이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질은 일순간 이겼다는 승리감을 맛보고, 다음 순간 어설프게 그를 밀어낸 것을 생각해 내고는 두려워졌다.

질은 떨면서 누워 있었다. 그에게 용기가 생겨 자물쇠를 뜯고 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자신이 꺽어서 둘 사이의 평화유지의 유일한 방법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숨을 죽인채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드디어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멈추었다.

 

 

 

9

질이 아침 식사에 롤빵을 먹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질은 조금 꾸물거리면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 저쪽에서 사이먼의 약간 화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사이먼이 집에 있는지 조차 몰랐었다.

"여기는 내 집이야. 사무실로 전화해도 되지 않나?"

거기에 대답하는 낮고 유유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에는 그런 것은 문제 삼지 않았었는데."

"전에는 결혼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허니문 중이니까 그렇겠죠?"

일순간 침묵이 흐르고 사이먼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허니문이지."

"별로 즐거운 것 같지 않구뇨."

"전화가 즐겁지 않지."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도와줄 거라고 약속하셨잖아요. 항상 변함없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약속은 약속이지. 나중에 연락하겠소."

질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정에 몸을 떨었다. 지금 들은 이야기는 전에 자신도 들은 적이 있었다. '도움이 피리요할 때는 언제든지' 이것이 여성을 설득할 때의 사이먼의 상투어인가?

안젤라 프랑코, 떼아뜨르 아마조니아의 금발 여인. 그 두 사람 사이에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질은 정원으로 눈을 돌렸다.

", 이제 일어낫소?"

사이먼이 들어오며 질의 머리 위에 키스했다.

"별로 안색이 좋지 않군. 웬일이오? 잠을 잘못 잔 건 아니오?"

그의 말은 너무 다정하여 질은 기가 막혔다. 불과 몇 분 전에 안젤라와 이야기했던 기색은 조금도 나타나지 않았다. 질은 감정을 억누를 수 없게 되면서, 도대체 자기가 포르투갈어를 잘 이해했는지가 의심스럽게 되어버렸다.

"서두르지 않으면."

사이먼은 말했다.

"확실히 지각이군. 오늘은 무엇을 할 예정이요?"

"아직 정하지 않앗어요."

질은 소탈한 그의 말투에 맞추려 노력하면서 말했다.

"좋아요!"

사이먼은 질의 접시에서 롤빵을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마나우스에서는 오후 12시부터 2시까지가 시스타 타임이지. 한시에 카 드로우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달라고 클라우디오에게 말하시오.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은행에 가서 당신 앞으로 구좌를 개설합시다."

"그것보다도 당신 사무실에 가보고 싶어요."

"열며하지 마시오, . 내 일은 커틀렛 토드사의 경영이니까."

"나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싸우고 있을 시간이 없소. 나중에 하도록 하지 않겠소?"

질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라니, 어느 쪽이에요? 사무실? 싸움하는 것?"

사이먼은 한참 동안 질을 응시했다. 곤란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카 드로우에서 1시요. 잊지 말도록."

그는 질의 뺨에 키스했다.

"좋은 향수를 사용하고 있군."

"향수 따윈 사용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더욱 좋은데."

그는 재빨리 방을 나갔다.

 

남편과의 만날 약속에 질은 위아래 하얀 코튼드레스와 그에 맞는 날씬해 보이는 흰 샌들을 신고, 뿌렸는지 잘 모를 정도로 엷게 향수를 뿌렸다.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면서, 그런 자신에 대해 화가 났다. 사이먼이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구석구석까지 신경을 쓰게 하는 것이다. 애증이 뒤섞인 이 감정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시스타 타임인데도 길이 막혀 그녀가 드로우에 도착한 것은 한시가 지나서였다.

"길이 몹시 막혓어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사이먼에게 질은 정중히 사과했다. 냉방이 잘 된 레스토랑엔 정장을 한 비지니스맨들이 많았으나 매우 조용했고 관엽식물이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자리에 안내되자, 사이먼은 재빨리 점심 식사를 주문했다.

"마케카 드 카리오로 해주게."

"내가 좋아할지 싫어할지 어떻게 알아요?"

웨이터가 가버린 뒤에 질은 물었다.

"전형적인 브라질 요리를 먹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마케카라는 것은 스튜의 일종으로 생선 아니면 달걀이 들어 있소. 당신은 새우가 든 것을 좋아하잖소."

"지당하신 말씀이죠."

질은 작게 어깨를 움츠렸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간단해요."

사이먼은 매우 기분이 좋은 듯 했다.

"우리들은 척척 진해이 되어가고 있군."

20분 정도가 지나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마케카가 나왔다. 질은 손을 대기 전에 꺼림칙한 표정으로 음식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들어 있지요?"

"나는 요리사가 아니오. 소금, 후추에 토마토와 양파 섞은 것과 새우를 넣고 야자유에 튀긴 것이지. 시험 삼아 해봐요. 그리고 이것도 좀 넣지."

사이먼은 소스가 든 작은 병을 질 쪽으로 밀어 주었다.

"피멘타야. 너무 많이 넣지 말아요. 악마같이 매우니까."

피멘타의 매콤한 맛은 새우 맛과 잘 어울렸다.

"맛있어요."

질은 기쁜 듯이 접시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요리하는 걸 좋아해요?"

"아버지 때문에 요리를 했었죠. 최근 이년 동안엔 그다지 할 기회가 없었지요."

질은 어항 속에서 같이 살지 않는 한 두 사람 사이가 잘 되어 나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침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시 그럴 기회는 없을 것 같아요."

사이먼은 대답하지 않고 빵에 버터를 바르고 있었다.

"시카고에서 말했듯, 내가 말하는 걸 거절하는 여자는 없지. 당신도 결국 거절하지 않았고, 요리사도 그 하나요."

"그렇군요. 결국 나도 거절하지 않은 사람이지요."

질은 마지못해 인정했다. 왜 질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사이먼은 결코 모를 것이다. 사이먼의 이해심 부족, 그것이 두 사람을 갈라 놓는 원인일지도 모른다. 질은 참을성 있게 말했다.

"사이먼, 가정부 고용보다 돈을 더 유효하게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돈의 사용법을 벌써 알고 있소?"

사이먼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요."

"지금 하는 일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들어요, 요리가 차가와지겠소."

질은 웃었다.

"그렇죠. 당신은 통통한 여자를 좋아하죠."

질은 풍만한 육체의 안젤라를 떠올렸으나 곧 그 생각을 씻어버렸다. 식욕이 나지 않았다.

"난 당신에게 있어 태엽 인형밖에 되지 않는군요. 다이아몬드로 치장하여 사이먼 토드 부인으로 꾸며진 인형 말이에요."

"우리는 계약을 한 거요."

사이먼은 냉정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질은 식욕을 잃은 채 포크를 내려놓았다. 요리는 반도 없어지지 않은 채였다.

"이번에 또 뭐요?"

사이먼이 물었다.

"몰라요.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군요."

사이먼은 질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짧은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소. 이제 잘 수습될 거요."

"뭐가요? 이제부터 행복하게 생활하고 자식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 말인가요?"

사이먼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 턱의 가운데가 쏙 들어가는 게, 당신 숙부님을 생각나게 하는군. 그의 완고함뿐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은 꼭 손에 넣고 마는 것도 말이오. 그의 소망은 우리 두 사람을 결혼시키는 것이었소."

그의 손이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질은 화가 치밀어 무심코 안젤라의 이야기를 해버렸다.

"숙부님은 안젤라 프랑코를 모르고 있었나 보죠?"

사이먼은 손을 떼고 노여움에 얼굴이 굳어졌다.

"그것은 무슨 뜻이지?"

질은 낭패감을 느끼었다. 언제쯤 되어야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을까?

"별 뜻 아니에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이러쿵저러쿵 말하다니 소름끼치는군!"

"오늘 아침의 전화는요?"

질은 조용한 레스토랑에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사이먼은 창백해질 만큼 입을 꼭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당신이 지금 한말 알고 있소?"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행에서도 두 사람은 형식적인 얘기밖에 하지 않았다. 출구에서 헤어질 때 역시 차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만족하겠지? 자유스럽게 쓸 수 잇는 돈이 생겼으니. 이제 나의 의무는 끝났소."

"그것에 대해서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사이먼은 사라져 버렸다. 질은 비참했다. 지금보다 더 고독감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자기가 아무 말 없이 참고 있어야 했다.

질은 쇼핑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쓸데 없이 돈을 쓰는 것을 사이먼은 원하는 것 같았다.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그녀는 잔뜩 비뚤어진 마음으로 마나우스 구시가에 있는 쇼핑센터로 향했다. 쇼핑센터는 카니발과도 같이 붐비고 통로에까지 물건들이 넘쳐 있었으며, 세계 각국의 물건들을 원하는 대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질에겐 이미 돌아다니면서 이것 저것 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없었다.

라스 플로레스로 돌아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던 그녀의 눈에 어떤 가게의 쇼윈도우에 장식된 아름다운 블라우스가 눈에 띄었다. 마나우스 의류 협동조합이라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질은 잠깐 주저하다가 협동조합이라는 게 마음에 들어, 스크린 도어를 밀고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질 아니 또래인, 약간 통통하고 큰 눈동자를 가진 여점원이 다가와 상냥하게 말했다.

"어서 오세요. 마음껏 구경하세요."

"윈도우의 블라우스가 멋잇는 것 같아요."

", 고맙습니다, 마나우스에서 만들어진 것이에요."

"협동조합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요?"

", 원단에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하고 디자인, 바느질까지 한 것입니다."

질은 마음을 끄는 가게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벽은 시원한 하늘색으로 칠해져 있고 선반에는 밝은 색의 의류가 빽빽이 전시되어 있었다. 관엽식물과 꽃이 심긴 화분도 여기 저기에 놓여 있었으며, 파랑과 흰색의 타일이 산뜻했다.

"원하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여점원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질은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사이먼이 말한 대로이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것은 바로 돈의 힘인 것이다. 질은 잔잔한 무늬의 목면 홈드레스 코너로 발걸음을 옮겨 한 벌을 골랐다.

"예뻐요."

"그래요? 고맙습니다."

"이 일을 한 지 오래 되었어요?"

"삼 개월째예요."

그녀는 얼굴이 좀 어두워져서 입을 다물었다.

왜일까 생각하며 질은 다른 옷도 살펴보았다. 풍부한 색상은 열대의 과일에서 따온 것 같았고 디자인이며 염색, 바느질도 좋았다.

"모두 아름답군요."

질은 밝게 말했다.

"정하기가 어렵네요."

"미국 쪽이시죠? 액센트로 알 수 있어요."

여점원이 말했다.

", 그래도 여기에 영주해요."

"포르투갈어가 능숙하시네요."

질은 칭찬에 약간 기뻐하며 손을 내밀었다.

", 질 토드예요."

여점원도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에드나 피네이로라고 해요."

"당신이 디자인 하나요? 정말 멋있어요!"

에드나는 머리를 저었다.

"파트너가 했어요. 사실은, 협동조합은 부업이에요, 나는 교사지요. 오후에만 여기에 와요. 파트너는 프리 디자이너인데 오전, 오후 이른 시간에 일을 봐주고 있어요."

질은 직업이 있는 에드나가 부러웠다.

에드나는 한숨을 쉬었다.

"일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요. 내 제자들은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많아요. 그래서 이 협동조합을 몇 사람에게 원조 받아 시작했는데 꽤 어려워요. 처음에는 부자 집 사모님들이 잘 사주셨는데, 새로운 모델이 없으니까 자꾸 고객이 끊어져요."

질은 몇 장의 드레슬 집어 들었다.

"이것을 입겠어요."

물건 값을 치르며 생각해 보니, 그녀가 들어온 지 한 시간이 넘었는데 한 사람의 손님도 오지 않았다.

"주말에는 더 많겠죠?"

질이 묻자 에드나는 핑계를 대듯 말했다.

"새로운 물건은 좀처럼 들여놓을 수가 없어요."

질은 새 수표로 대금을 지불하고 주저하며 말했다.

"조금 걱정이군요. 돈으로 곤란 받는 것이 아니라면 좋겠는데."

에드나는 미소 지었다.

"아뇨, 괜찮아요. 친구들에게도 소개해주세요. 가능한 한 많은 이들에게요."

"유감스럽게도 이곳에 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친구들이 없어요."

에드나는 물건을 예쁘게 포장해 주었다.

"이제 곧 좋은 물건이 들어올 거예요."

질은 일어나기가 싫었다.

이 온화하고 상냥한 여성이라면 꼭 친구가 될 수 잇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앉아서 얘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할수가 없었다. 사이먼이 반대할 것이다.

"또 올게요."

질은 밝게 말했다.

가게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기 전에 질은 뒤돌아보았다. 에드나는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라스 플로레스에 돌아가면서 그녀는 협동조합에 대대 좀 더 알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성공한 사업가의 아내로서 자선을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게 하면 바쁘게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이먼, 가게에 있는 동안 질은 그와의 갈등을 잊고 있었다. 지금 또다시 그 문제가 엄습해왔다. 편의상 결혼? 홈드레스를 고르고 있을 동안 질은 자신이 무한히 사랑 받는 보통 가정의 아내처럼 느끼었다.

 

택시를 타고 복잡한 길을 빠져나오면서 그녀는 자유스럽게 쓸 수 있는 돈이 있는데 왜 자신이 사이먼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인지 반문해 보았다. 그를 사랑하는 지금, 안젤라의 일을 입 밖에 낸 자신의 어리석음에 질은 새삼 화가 났다.

피로와 더위에 지쳐 라스 플로레스에 돌아오자, 세뇨라 콜데로가 메로를 가지고 왔다.

"어디에 계셨어요! 주인께서 걱정되어 열번이나 전화를 거셨어요. 주인께서는 광산 캠프에 가실 계획인가 봅니다. 짐을 챙기면 클라우디오가 가지고 갈 거예요."

"세뇨라, 클라우디오에게 기다리라고 해요. 나도 사이먼과 함께 가겠어요."

가정부는 당황한 모습으로 머리를 저었다.

"정글인데요. 여자가 가는 곳이 아녜요. 주인어른도 반대하실 겁니다."

"괜찮아요. 기다리라고 해요. 그리고 잠자코 있어줘요. 난 따라갈 거예요."

질은 서둘러 샤워를 하고 티셔츠와 진으로 갈아 입었다. 그녀는 간단히 짐을 꾸리고 레인코트와 핸드백을 든 즉시 차에 올랐다.

무리도 아니지만, 가정부가 사이먼에게 알린 걱 같았다. 회사 앞에서 차에 오르자마자 사이먼은 영어로 빠르게 말했다.

"당신 미쳤소? 캠프 에스메랄다는 당신이 갈 곳이 못돼요! 곧 집으로 돌아가요. 광산촌이 어떤지 알고나 있소?"

"피크닉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나를 두고 가면 돌아왔을 때 나는 여기에 없을 거예요."

사이먼은 질을 노려보며 머리를 저었다.

"협박하는 거요?"

질은 힘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요."

"나를 쫓아다녀야 할 이유라도 있소?"

"당신이 그곳에 정말 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

사이먼은 질의 팔을 꽉 잡았다.

"나는 당신 소유물이 아니오."

"그래요. 당신은 소유물이 아니에요."

질은 가슴의 두근거림을 누르며 차분하게 말했다.

"똑같이 나도 자유예요. 이번에는 나도 에스메랄다 캠프에 가기로 했어요."

질의 팔을 너무 꽉 잡고서, 마치 사이먼은 그것으로 의사 관철을 하려는 것 같았다.

"아파요, 놔 줘요!"

질은 소리를 쳤다.

운전사인 클라우디오에게는 유리로 된 칸막이가 있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러나 뒷좌석에서 둘이 싸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지 표정이 딱딱했다. 사이먼은 팔을 놓고 유리를 두들겨 출발 신호를 보냈다.

"정말 마귀가 씌였나 보군. 알지도 못하는 일에 끼어 들려고 하니 말야."

질은 조용히 앉아 앞만 바라보았다.

"함께 가요."

자신도 이 강함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랑의 힘이라면 반드시 하늘이 도와준 것이리라.

 

 

 

10

마나우스공항에 도착해서 좌석이 하나뿐인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사이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질은 모르고 있었던 남편의 또다른 면을 발견했지만 놀라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사이먼은 파일럿 자격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비행기도 갖고 있었다.

이륙하자, 사이먼은 본래의 자신으로 되돌아온 듯 금새 활기를 되찾았다. 그는 네그로강 옆에 기체를 낮게 기울여 어떤 한 장소를 가르키면서 엔진소리보다 크게 소리를 질렀다.

"물의 결혼을 보고 싶어 했지?"

질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는 강변을 따라서 날았다. 눈 아래에는 각양각색의 배가, 검은 가에 수를 놓고 떠 있었다. 강을 끼고 넓어지던 평원과 농장은 순식간에 정글로 바뀌었다. 질로서는 처음으로 보는 진짜 아마존 경치였다. 진한 녹색빛을 내는 강물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주위의 작은 보트용 수로뿐이다.

"네그로강은 아마존보다도 물살이 빠르지."

사이먼이 설명했다.

"실제로 아마존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완만한 흐름으로, 평평한 평지를 흐르고 있소."

그는 전방의 물의 합류 지점을 가리켰다.

"저거요. 보이지? 그 유명한 물의 결혼이오."

질에게 잘 보이도록 그는 기체를 기울였다. 황색의 아마존과 흑색 네그로의 두 강은, 그곳에서는 서로 섞이지 않은 채 거품을 내뿜고, 소용돌이치며 서로의 힘을 능가하려고 싸우고 있는 듯했다.

"정말 볼만하지 않소?"

사이먼이 외쳤다.

"둘이 서로 우세를 다투고 있는 거요."

질도 엔진소리에 눌려 버리지 않도록 큰 소리를 질렀다.

"그다지 행복한 결혼이 아닌 것 같아요!"

사이먼은 뒤돌아보았다.

"아니요, 그렇지 않소. 참으로 행복한 결혼이오. 80킬로나 더 하류로 가면 결혼의 성과가

보이지."

"강력한 아마존이, 네그로를 정복하는 건가요?"

"그렇소! 네그로는 아마존에 잘 융합되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고 있지."

"그래도 어째서 이렇게 색이 틀릴까요?"

"여러 가지 얘기가 있지만, 네그로가 흘러오는 동안 강가로 부터 부엽토가 흘러들게 되어 있다오. 산성이 강하고 박테리아가 많은 흙이 말이오. 수영하기에는 아주 최적으로, 물이 참 맑아요."

"그럼 아마존은요?"

"페루에서부터 흘러오는 동안에, 진흙이 가라앉고, 비옥한 흙을 운반해 오지."

질은 정글을 뚫고 구불구불 흐르는 그 강에 곧 매료되었다. 이따금씩 개발된 곳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런 주위로는 강가에 높이 지어 놓은 집이 보였다. 토대 주위로 물이 찰싹찰싹 밀려들고 있었다.

"겨울 우기 덕분에 지금은 수위가 높아요."

사이먼이 설명했다.

"저런 집에 누가 살고 있어요? 인디안?"

"고무를 채집하는 사람인 세린케클로가 살아요. 그들 외에도 어부와 농민, 사냥꾼들이 동물과 새와 물고기를 잡고, 야자유와 견과류, 과일을 채집하기도 하지. 정글의 덕을 입고 있는 거요."

"그래도 정글은 계속 재생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아요. 세계 도처의 수집가들이 갖고 싶어 하므로 멸종되다시피 한 새와 동물도 있어요. 생태계의 균형도 깨져버리고."

질은 좌측으로 보이는 선착장을 가리켰다. 그와 인접해서 함석지붕을 한 목조건물이 쭉 늘어서 있었다.

"저것은 뭐죠?"

"빠라까오. 수집한 것을 교환하는 곳이오."

"교역소?"

"2주 정도마다 상품들을 가지고 모두 모이지. 정말 힘든 생활이오."

아마존 유역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지류가 시작되는 강이 있었다. 질의 조석에서 보아도 구름 한점 없는 하늘 아래, 한없이 넓어지는 정글로 그물망과도 같이 아마존으로 흘러 들어오는 지류가 보였다.

"여기서 보면 멋있고 아주 평화스럽게 보이지만, 지금 가는 곳은 유원지가 아니오."

"알고 있어요."

질은 냉정히 대답했다.

사이먼은 무표정하게 힐끗 질을 보았다.

"정말 그래?"

캠프 에스메랄다는, 아마존의 지류인 타파조스강 연변의 마을 산타렌과 파크 인디안 보호지역과의 중간에 있었는데, 이 둘 사이엔 수백 킬로에 걸친 정글이 가로 놓여 있었다. 산타렌의 공항에 착륙하자 지프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존 횡단도로는 정글을 개척하여 건설된 것으로, 산타렌과 보호지역을 잇고 있었으며, 캠프 에스메랄다에는 그와 교차하는 작은 도로가 통하고 있었다.

사이먼은 차를 출발시키려고 하다가 조금 주저했다.

"어쩌지, 벌써 어두워졌으니, 한밤중이 되기 전에는 캠프에 도착할 수 없겠군. 당신을 산타렌의 트로피칼 호텔에 놔두고 혼자서 갈까 하는데."

"싫어요!"

질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단호히 말했다.

"아이고!"

황혼의 희미함으로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말투는 싸움에 지친 듯이 부드러웠다.

"그럼 두 사람 모두 트로피칼 호텔에 묵기로 하지. 일찍 자고 아침 일찍 출발합시다."

질은 아무 말 없이 뒤돌아 서서 어둠이 밀려오는 정글을 바라보며 웃음을 억눌렀다. 한밤중에 남편 옆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가슴은 설레었다.

두 사람은 트로피칼 호텔의 더블 베드가 있는 크고 널찍한 방에 들었다.

"당황한 얼굴은 하지 말아요."

사이먼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한가운데 선을 그어 둡시다."

어색한 순간이었다. 질은 수트케이스를 열고, 가운을 꺼내 들었다.

"샤워를 하고 오겠어요."

"등을 닦아 줄까?"

사이먼은 팔짱을 끼고 서서, 비꼬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질은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몸이 떨려 문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한방에 있으면,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든간에 맺어지는 것이 아닐까? 질은 사이먼과 둘이서 아름다운 호텔 방에서 한밤을 보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모기장 안의 그물 침대에서 자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질은 5분쯤이나 차가운 샤워를 했다. 그녀는 젖은 머리카락을 타올로 싸고 베드룸으로 돌아왔다. 축축한 몸에 얇은 가운이 자꾸만 휘감겼다. 사이먼은 넥타이도 풀지 않은 채, 좀 전의 바로 그 장소에 서 있었다.

"배가 고파요."

질은 침착하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이먼은 모른 체 했다.

사이먼은 얇은 가운으로는 가려지지 않은 질의 육체의 곡선을 눈으로 더듬었다. 그리고 질이 반응을 보이기 전에 그녀를 껴안고 키스했다. 그 열정적인 키스는 질을 마비시켰다. 되어가는 대로 맡기는 질에게, 그는 몸을 바짝 대고 꽉 껴안았다. 눌러 부수지만 않았을 뿐이었다. 숨을 돌릴 수만 있었다면, 질은 자신이 얼마나 그를 원하고 있는지 외쳤을 것이다. 그의 손이 자신의 몸을 더듬는 것을 느끼면서, 질은 꿈의 세계를 오가고 있었다.

드디어 사이먼은, 입술을 포갠 채로 질을 안아 올려 침대로 데리고 갔다. 가운은 어느새 벗겨져 바닥에 떨어져 버렸지만, 질은 오히려 기뻤다. 벗은 질을 보면, 그녀가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을 노리고 있었겠지?"

질을 내려다보고서 사이먼이 말했다.

"뭐라고요?"

질은 이유를 모른 채, 사이먼을 응시했다.

"내 말을 알아들었을 텐데?"

질은 살며시 일어나 가운을 끌어당겼다.

"무슨 말을 했지요?"

질의 목소리는 속삭임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사이먼은 내뱉듯이 대답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잖소. 미리 대비하고 있던 것이 아니오?"

"말도 안돼요!"

질은 사이먼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문과 다름없는 그의 애무에 상처받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항상 당신 뜻대로 되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군요. 당신이 사귀는 다른 여자들과 똑같은 것을 확인하고 싶었죠?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어요. 결혼하지 않으면 안됐던 것 말이에요. 이것으로 사정이 아주 달라졌겠죠."

질은 일어서서 빠른 걸음으로, 야자나무로 둘러싸인 풀이 보이는 창가로 다가갔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별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심장이 두근두근해서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웠다. 질은 사이먼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계속했다.

"알아요. 나도 후회하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함께 있고 싶었을 뿐이에요. 언제 어디서나 말예요. 그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요? 둘만 있는 것이 고마울 뿐이에요. 당신에게 안기고 싶었지만,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았어요. 무엇이든 다 드리지요. 만족하셨겠죠?"

질은 사이먼의 침묵에 견딜 수 없어 말을 그치고 뒤돌아보았다. 이미 그는 그곳에 없었다.

"사이먼?"

대답할 사람이 없음을 질도 알고 있었다. 질은 두려움에 당황하면서도 잘 참고 있었다. '신경 쓰면 안 돼!' 질은 신경을 안정시키려고 큰 숨을 쉬면서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는 싸움을 피해 다른 방으로 옮긴 것이리라.

하지만 금방 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사이먼은 질 혼자만 산타렌에 남겨두고 캠프 에스메랄다로 떠난 것이었다.

"정말 너무 하는군!"

질은 소리치며 맨발로 의자를 걷어차고는 그 아픔을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면서 웃기 시작했다.

'내가 어리석었지. 사이먼은 틀리지 않았어.' 그녀가 정글까지 쫓아가는 것으로 그를 충분히 몰아낸 것이다. 히스테릭한 웃음을 멈추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눈물대신 나온 것이 그 웃음이었다. 기분이 진정되자, 질은 얼굴을 씻고 화장을 한 다음 데님 셔츠와 진을 입고 호텔 다이닝룸으로 내겨갔다. 그녀는 혼자서 남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혼자 남는 것은 두려웠다.

사이먼이 토요일에 데리러 올 것은 확실했다. 다음날 아침에 질이 계산을 하러 가서 보니, 주말까지 모두 계산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질은 오전 내내 포장되어 있지 않은 길을 천천히 걸어 다니거나, 사원과 시장을 돌아보고나, 부둣가에서 가에 떠 잇는 배를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산타렌은 질의 예상외로 정글의 강가에서 있는 마을인 듯했다. 마치 아직 20세기가 되지 않은 듯이 잠자고 있는 마을.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질은 또다른 물의 결혼을 보았다. 수초로 인해 녹색으로 보이는 타파조스강이 아마존에 합류하는 곳이었다. 마나우스에서 본 것과 똑같이, 물론 서로 충돌하며, 섞이지 않았다. 아마도, 질의 결혼을 상징하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사이먼은 질에게 물의 결혼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점심 식사는 호텔 베란다에서 했다. 기와지붕 너머로 폭 넓은 강이 보였다. 정글의 작은 새들이 호텔의 정원을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아름답고 조용한 광경을 보면서, 질은 침착하게 사건을 되돌아볼 여유를 찾았다.

부둣가에는, 대서양 연안인 베렌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화물선이 있지 않을까? 이 배는 여기서 800킬로미터쯤 떨어진 마나우스에도 들를 것이다. 여객용은 아니지만 간곡히 부탁하면 태워 주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좁은 선실에 그물 침대를 걸고 잠을 자고, 선장과 식사하겠지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호텔에서 수표를 현금화할 수 있는 것을 알고 질은 재빨리 환전하여 승선권을 샀다.

화물선은 금요일에, 아무일 없이 마나우스에 도착했다. 질은 택시로 라스 플로레스로 돌아가 자신의 열쇠를 사용하여 집으로 들어갔다.

마나우스 협동조합에서 산 드레스 중의 하나로 갈아입고 나서야 질은 가정부에게 자신의 귀가를 알렸다. 세뇨라 콜데로는 주방에서 요리사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질의 모습을 발견하자 깜짝 놀라서 의자를 밀치고 벌떡 일어났다.

"아니, 그냥 앉아 있어요."

질은 두 사람에게 이야기 했다.

"커피는 내가 탈 거예요."

"세뇨르 토드와 함께 오셨나요?"

가정부는 앉을 생각도 않고 물었다. 오리사는 무슨 말인지를 우물쭈물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방해할 마음은 없는데."

질은 그렇게 말하고 잔에 커피를 따랐다.

"아뇨. 그이는 안 왔어요. 혼자 돌아왔어요."

세뇨라 콜데로는 웬일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산타렌에서 화물선을 타고 돌아온 거예요. 사이먼이 내가 캠프 에스메랄다에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어요."

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가정부는 동정하는 듯한 웃음을 입가에 띠웠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자신이 말한 것을 들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으리라고 하는 뜻이었다.

"배 여행은 재미있었어요."

질은 서둘러 말했다.

"선실의 기둥 두 개에 그물 침대를 걸고 잠을 잤어요. 몸에 익을 때까지는 정말 고생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강은 육지에 있는 것과 같이 평온했고 아름다웠어요. 선장이 책을 빌려줬지요. 식사는 선장과 같이 했고요. 안전했어요."

그리고 자신의 기분을 달래주었다고 질은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장래를 차분히 생각해 보고, 계획을 실행할 결의가 굳어질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사이먼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록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해도, 그건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좌석에서 뿐이다. 질은 두 삶만 있게 될 때의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일방적인 것으로, 그에게서 반응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질은 이 비참한 사실을, 배의 갑판에서 바람을 맞으며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의 옆에서는 항상 야기되는 혼란이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린 듯했다. 두 사람은 헤어지는 편이 좋을 것이다. 라스 플로레스를 나와,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쪽이 좋을 것이다. 질은 사이먼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마나우스에 머물 예정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자신의 일을 찾아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자유항인 마나우스라면, 영어와 포르투갈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수출입 업자는 많을 것이다. 아직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는 모르지만, 미래는 어두운 것만도 아니었다. 질은 가정부를 어떻게 설득할지도 생각해 두었다. 거짓말도 그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저 세뇨라, 배여행이 너무 재미있어서 난 다음 배를 타고 내륙에 가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세뇨르 토드가 뭐라고 하실지."

질은 친밀감을 띤 웃음을 지었다.

"남편은요, 앞으로 2주일 정도는 바쁠 테니까 나를 상대해줄 틈이 없을 거라고 했어요."

가정부는 무표정 했지만, 질은 경험을 통해 그녀가 찬성하지 않음을 알았다.

"아메리카에서는요, 남편의 일 때문에 집만 지키고 있는 부인을 일요과부라 해요."

질은 어색한 몸짓으로 막연히 사과하듯이 말했다.

세뇨라 콜데로는 마지못한 듯 승낙했다.

"알겠습니다. 일요과부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말씀이지요?"

"되고 싶지도 않고, 될 마음도 없어요."

"아기가 생기면 상황도 변할 거예요."

가정부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서먹서먹한 대화를 피하듯이, 가정부는 질의 드레스를 보며 말했다.

"참 예쁘군요."

"고마워요."

질은 정말로 기뻤다.

"마나우스 협동조합에서 샀어요. 알고 있었어요?"

", 하지만 값이 너무 비싸요."

"그건 수제품이기 때문이에요."

"그럴지도 모르죠."

질이 상점에 들어갔을 때의 에드나피 네이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표정은 질이 그날의 처음 손님이라고 말해 주었었다.

그때, 순간적으로 질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해야 할 일! 질은 흥분하여 가슴 설레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례해요, 세뇨라. 잠깐 외출해야겠어요."

"이제 저녁 식사 시간이에요. 귀가는 몇 시에 하시겠어요?"

가정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질은 벌써 조리대에서 끓고 있는 커다란 남비를 보았다. 자신이 밖에서 식사를 한다면 세뇨라 콜데로의 부담이 없어질 것이다.

"몇 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저녁 식사는 밖에서 할 거예요."

 

 

 

11

"도와주고 싶어요."

질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시내까지 버스로 가서는, 거기서 다시 마나우스 협동조합까지 뛰어온 참이다. 가게에 혼자 있던 에드나 패네이로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나라 말로 떠들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안이 벙벙해서 질을 쳐다보았다.

"도와주고 싶어요."

질은 반복했다.

"나 여기서 일하고 싶어요."

에드나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안절부절 하며 말했다.

"그런 것은 무리예요."

"아니예요. 함께 일하고 싶어요. 파트너로서요. 도와 줄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어요. 기다릴 수 없을 정도예요. 여러 가지 아이디어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에드나는 천천히 물뿌리개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질의 손을 잡고, 의자에 앉혔다.

"여기 앉아 계셔요. 곧 돌아올게요."

질은 초조함과 답답함에 앉아 있을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에드나가 카페체노를 두 잔 들고 오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요. 천천히 할게요.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진 않아요."

"가정부에게서 들었어요. 그녀는 이 가게를 알고 있었는데, 이 가게의 물건은 너무 비싸다고 하더군요."

에드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마나우스에는 더 비싼 물건을 취급하는 가게가 많이 있어ㅛ."

"그래요, 파리, 뉴욕, 리오에서 온 브랜드의 상품은 그렇지요. 그런 것을 원하는 사람은 그런 가게에 가요. 그것은 좋아요. 하지만 이 가게에서 취급하는 것은 홈웨어니까 일반적으로 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선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가격도 좀 더 내리고요. 다른 곳에도 지점을 내야만 할 거고요."

"어떻게 그것들을 하란 말인가요?"

에드나는 웃으면서 질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는 거예요. 후원자가 있으면 되잖아요?"

"하긴 그렇군요."

에드나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것을 부인이 해주시겠단 말인가요?"

"그래요."

두 사람은 똑바로 서로를 응시했다.

"날 믿어주겠죠?"

에드나는 얼굴을 붉혔다.

"글쎄모르겠어요."

"나는 진지해요."

질은 감정을 누른 목소리를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무엇을 하려 해도 은행은 닫혔어요. 월요일이 되면, 나와 당신, 당신의 파트너와 셋이 은행에 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후에 나는 여기서, 가게 일을 이것저것 배우고요."

"그리고 누군가가 가게에 들어오면 상대해 주겠군요?"

에드나는 눈을 빛냈다.

"그리고 선전하는 거지요."

질은 가슴을 두근대며 계속 말했다.

"손님이 오길 원한다면 선전을 잘 해야겠죠?"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드는 이야기군요."

에드나를 돌아보며, 질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알고 있어요."

그날, 두 사람은 중국 요리집에 들어가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꿈꾸는 기분으로 이야기하는 두 사람에게는 불가능은 전혀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할 일은 산처럼 쌓여있다. 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가게들을 돌아보러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좀 더 입지 조건이 나은 장소를 찾았다.

"천천히 해요."

에드나가 말했다.

"마나우스에서는 모두 그처럼 서두르지 않아요."

"미국에서는 그 반대예요. 흥하든 망하든 해보는 거예요."

질은 여학생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돈은 조금 잃을 뿐이겠죠."

"돈 이야기를 편하게도 말씀하시는 군요."

"미안해요. 내가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위해 사용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질은 시카고에서 부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고 고민했던 것을 생각했다.

에드나는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마침내 물었다.

"그런데 댁은 어디에요?"

"루아 테레시아가예요."

에르나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진작 깨달았어야 했어요."

"무슨 의미예요?"

질이 물었다.

"마나우스의 최고급 주택가잖아요. 모두가 그런 곳에서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죠?"

"어머, 난 참 어리석군요. 근사한 곳이라고는 생각했었지만, 그곳이 특별한 곳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질은 풀이 죽어 멍하니 새 파트너를 보았다.

"날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죠?"

"그 반대예요. 마음이 넓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댁은 어디지요?"

질이 물었다.

에드나는 빙긋 웃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다지 좋은 곳은 아니에요. 리베이로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작은 아파트를 빌려서 살아요. 낡은 건물이지요. 교사의 적은 월급으로는 그것도 겨우 얻을 수 있었어요."

"혼자 살아요?"

", 부모님은 강의 상류 쪽에 있는 개척지에 들어가서 사세요. 그 근처에는 새로이 생활을 개척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충분한 토지가 있지요."

"나도 새로운 생활을 하고자 마나우스에 온 거예요. 이제야 겨우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 같군요."

"1시예요."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에드나가 말했다.

"주인께서 걱정하시겠네요."

"이곳에 없어요."

질은 에드나가 더 이상 묻지 않기를 바라며 재빨리 대답했다.

"그 분은 부인이 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나요?"

에드나는 배려하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이에게는 이러쿵저러쿵 다 말하지는 않아요."

그 이상 문제를 캐어 묻는 게 싫어서, 질은 에드나에게 작별을 고하고 택시를 잡았다. 30분정도 지나 그녀가 집에 돌아오니, 가정부가 안절부절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어른이 몹시 화가 나서 전화하셨어요."

"어디 있대요?"

질은 얼굴을 붉히고, 사이먼이 자신을 찾는 것에 곤혹스러움을 느끼면서 물었다.

"산타렌의 트로피칼 호텔로 연락해 달랍니다. 아무 것도 모르셨나보죠?"

질은 자신도 모르게 가정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면서 다독거렸다. 그녀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는 것이다.

"쉬도록 해요. 그이에게 곧 연락할 테니까요."

가정부는 납득했는지, 질이 두 계단씩 뛰어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질은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기 위해 사이먼에게 전화할 마음은 없었다. 그 사람이야말로 설명할 일이 잔뜩 있지 않은가?

그날 밤 늦게, 침대에서 막 잠이 든 질은, 밤의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전화벨소리에 잠을 깼다. 질은 재빨리 전화기를 들고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대체 어디 가 있었소!"

영어로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그의 음성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갑자기 졸음이 달아나며, 질은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겨우 진정하고 조용히 말했다.

"사이먼, 당신 전화에 잠을 깼어요."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소?"

자기 자신도 무슨 말을 내뱉을까 염려되어 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시오!"

"지금 그런 것을 말하지 않아도 되겠죠?"

", 그렇소? 호텔에 돌아오고 나서 당신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메모도 없이 나간 걸 알았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겠소? 함께 있다면, 호텔에서 당신에게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어 주었다는 것뿐이오!"

"지금은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요."

"화물선을 타고 돌아갔다는 게 사실이오? 그 무슨 어리석은 짓이오? 여자가 단 혼자서 그런 것을 타다니."

"즐거웠어요."

"즐거웠다고?"

비웃듯이 말하는 그의 음성에는, 왠지 고통이 배어 있었다. 질은 그가 산타렌에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간 일, 서로가 끌렸으면서도, 결코 마음이 하나로 되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는 평정함을 가장했다.

"즐거웠다고?"

사이먼은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내가 당신을 남겨두고 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지를 생각해 보았소?"

"너무 잘 알 정도지요."

"아침 일찍 돌아가겠소. 기다리고 있어요. 알겠소?"

"미안하지만, 난 아침 일찍 약속이 있어요."

"미용실에 가는 약속이오?"

빈정대는 투였다.

"뒤로 미루시오."

"좀 더 중요한 일이에요, 사이먼. 당신이 돌아오셨을 때 난 이미 이곳에 없을 거예요. 미안해요, 안녕!"

떨면서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는 다시 요란하게 울렸다. 질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격하게 흐느껴 울었다.

 

새벽녘이 되자, 질은 마침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전화가 울릴까고, 질은 몇 시간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그가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온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화벨은 끝끝내 울리지 않았다.

기미가 생긴 눈 밑은, 화장으로도 감출 수가 없었다. 질은 카키색 바지에 엷은 무늬가 잇는 블라우스를 입고, 마직 자켓을 손에 든 채 아침 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가장 검소한 옷들을 담은 가방은 이미 준비해두었다. 다른 옷들은 보석유와 함께 방에 남겨두고 왔다. 유일한 예외는 결혼 반지였다.

"아마존을 올라가는 증기선이 오늘 있어요. 나는 갈 거예요."

질은 먼저 가정부에게 보고했다.

커피를 따르던 세뇨라 콜데로는 깜짝 놀라서 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세뇨르 토드가 오늘 돌아오시는데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간다는 것은 말해 두었어요."

가정부는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더 이상 말리지는 않았다.

"가능한 한 빨리 그이에게 연락할게요."

"당신을 붙들어 맬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생각을 고쳐주세요."

질은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살 수가 없었다. 세뇨라 콜데로는 사이먼의 편이기 때문이었다.

"클라우디오에게 부두까지 모셔 드리도록 말할게요."

가정부가 말했다.

"아니요, 클라우디오는 그이를 위해 대기시켜 놓도록 해요. 나는 택시를 이용하겠어요."

그녀는 택시로 리베이로까지가서는, 거기서 사이먼의 앞에서 행방을 감출 작정이었다.

 

질 커틀렛 토드는 드디어 도망쳐 나왔다. 그녀가 숨어든 곳은, 에드나 피네이로의 좁고 낡은 아파트엿다. 그곳에는 버드나무를 세공한 의자와 면으로 만들어진 그물 침대가 있었다. 창은 활짝 열려진 채로, 습기 많은 열대의 공기를 차단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질은 새로이 파트너가 된 그녀에게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잠시 집을 나온 것이라고만 알렸을 뿐이었다. 에드나는 시내에 방을 빌리자고 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으로 오세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둘이서 살 정도의 방은 있어요."

질은 혼자서 주말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것에 감사하면서, 이것으로 안전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날, 아마존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그녀는 몰랐다. 브라질에서는 무슨 일이고 시간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배는 시간표 따위와는 상관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사이먼은 자신이 어디로 갔는지, 처음부터 마나우스를 떠난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느라고 고생할 것이다. 그동안에 월요일 아침 일찍 다른 은행에 다른 구좌를 개설하면 될 것이다. 언젠가는 변호사도 필요하게 되겠지만, 그때쯤은 에드나가 어떻게 알아서 해줄 것이다.

질은 또한, 사이먼이 자신의 일을 마음에 걸려한다면 찾으러 올 가능성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에도 하지 않으면 안 될 훌륭한 계획들이 많이 있었다. 새 인생의 출발이었다. 자신은 용기가 넘쳐흐르는 다니엘 커들렛의 조카이고, 만약 사이먼 토드가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해도, 그동안의 상처는 나을 거라고, 질은 믿고 있었다.

"천천히, 천천히 해요."

에드나는 질에게 충고했다.

"당신 같은 미국인은 언제나 너무 성급해요. 차분히 앉아 있지 못하는 성격 같다고요.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살고 있지요. 천천히 느긋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시나 봐요? 걱정하지 않아요 예정대로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는 거예요."

에드나는 호의가 담긴 사람 좋은 태도를 말했다. 두 사람은 사이에는 이미 확고한 우정이 싹트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게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사이에 놓은 테이블에는 새 디자인의 옷감이 펼쳐져 있었다.

 

 

 

12

질이 사이먼에게 한 마디의 말도 남기지 않고 라스 플로레스를 뒤호 한 지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전화로 그와 이야기한 것이 그의 음성을 듣는 마지막이 되고 만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을 알렸었다. 산타렌에서 그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자신은 없을 거라고.

일주일 사이에 서류가 갖추어지고, 그것에 사인함으로써 질 커틀렛 토드는 정식으로 협동조합의 일원이 되었다. 이 일주일 동안은, 일분일초가 새 경험이었다. 질은 새로운 자신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고 싶었던 것이 실현된 것이다. 가장 성가신 일은 오히려, 질이 너무 열심이라는 것이었다. 예정이 질질 연기되어 가자, 질은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전 세계에 자신의 생산을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데, 자신의 파트너가 그것을 말리는 것이었다. 다만, 한가지, 질은 옷감의 제작 과정을 디자인과 제작 부문의 두 회사에 나누는 것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머리가 어떻게 되겠어요."

웃으면서 에드나는 말했다.

"알고 있어요."

질도 응수했다.

그녀는 작품을 가지고 리오와 뉴욕, 시카고를 뛰어다니고 싶었다. 곧 전 세계가 마나우스제의 라벨이 붙은 나염에 손으로 만든 드레스로 뒤덮일 것을, 질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자 것도 하는 거예요."

어느 날, 질은 결정했다.

"남자들의 셔츠랑 수영복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았어요."

에드나만이 눈을 반짝이면서도 양식을 잃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한 가지 한 가지씩 해요, .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까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부족해요. 모두 다 생활할 수 있어야 돼요."

"모두 다 생활하고 있어요. 괜찮아요. 분명히 잘 되어 갈 수 있어요. 정말 미국인들이란!"

"모두가 미국인을 그렇게 말하죠. 달라고 달려도 조금도 즐거워하지 않는다고요."

질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뭔가 가슴 두근거리는 것을 발견하면 당신도 꽉 붙잡고 싶겠죠? 움직이며, 확인해 보고 싶지 않겠어요?"

질도 자신의 힘이 모든 것을 움직이려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있는 이상 유효하게 사용하고 싶었다.

"미국에서는 한낮에 두 시간씩이나 휴식 시간을 갖지 않아요. 너무 먹어서 앞으로 나온 배와 잠에 취한 눈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시스타는 휴식시간이에요. 그것으로 일을 계속해 갈 에너지를 보충하는 거지요."

"모두들 그렇게 말하죠. 하지만 거리를 봐요, 온통 차밖에 없죠? 집에 돌아가는데 한 시간, 다시 돌아오는데 한 시간이 걸려요."

"너무 과장인데요."

에드나가 놀렸다.

"어쨌든 적어도 우리들은 시스타를 취하지 않잖아요. 별로 그 효과는 없는 것 같지만, 손님을 위해서라면 할 수 없죠."

"금방 올 거예요."

질은 달래듯이 말했다.

"에드나, 내게 뭐라고 그랬죠? 천천히, 천천히 모두 오게 될 거예요."

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리며, 테이블에 펼쳐진 새디자인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지금까지 보다 더욱 세련되고, 색깔도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이것이라면 좀 더 폭넓게 바이어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주 내내, 질은 계속 실크나염 공장을 견학했다. 그 공장은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마을을 약간 벗어난 곳에 있었다. 에드나와 또 한 사람의 파트너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날염에 발군의 솜씨를 지닌 기술자를 찾아냈다. 단 한사람의 조수를 써서 불과 얼마 안되는 작품을 만드는 그에게, 보다 넓은 공간과 조수를 주고, 제작주임 아티스트로서 맞아들인 것은 질이었다. 옷감을 많이 만들 수 있다면, 옷도 많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에드나는 질이 쓰는 돈을 걱정했다.

"우선 옷을 팔아요. 이 이상 옷감도 옷도 필요 없어요. 우리들도 예비금은 있어요."

"에드나, 내 돈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려요."

질이 대답했다.

"당신은 이 일에 신참이에요."

에드나가 경고했다.

"잘못은 언제든 생기는 거예요. 서로에게 곤란한 경우를 당하고 싶지는 않아요."

"내 일은 내가 걱정할께요."

질은 단호하게 말했다.

"마치 내가 돈을 쓰고 싶어 안달인 것 같잖아요? 그렇지만 당치도 않아요. 우리들은 하나에서부터 진행해가고 있잖아요? 매일 몇 벌의 셔츠나 드레스를 팔면 된다는 게 아니에요. 그것이 한 타스라도요. 우리들은 그것을 살릴 수 있어요. 에드나, 그냥 앉아서, 일 년 분의 채무를 지불하기 위해서만 할 건지, 그렇지 않으면 뭔가를 해내든지 둘 중의 하나예요."

"당신의 말 대로에요. 우리들도 협동조합을 시작했을 때는 계획이 산더미처럼 있었지만 현실에서 산산조각 났어요. 그때는 모두가 일해서 얼마간의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잘 해 나가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요."

"그것으로 안 돼요."

질은 다시 단호하게 주장했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항상 문을 활짝 열어줄 만큼 낙관적이지 않아요.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만 해요. 다른 도시에서 일하는 것도 좋아요. 예비자금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나는 찬스를 잡고 싶어요. 하게 해줘요."

"나는 그냥 손님이 이 가게에 와서 뭔가 사주면 그것으로 좋은데."

에드나는 신음했다.

"그렇게 될 거예요. 이 광고를 보면 금세 그렇게 되겠죠."

질은 조그마한 광고 대리점을 발견해서, 이미 초고를 손에 넣고 있었다. 이번 주말에 마나우스의 지방신문에 게재될 예정이었다. 질은 대답하게도 편집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선전해 주겠다는 약속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지방 TV 방송국에 전화한 결과, 한 방송국이 협동조합에 관해서 보도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질은 하루종일 생각할 틈도 없이 바쁘게 일했다. 그러나 밤에, 에드나의 아파트에서 그물 침대에 눕게 되면,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사이먼이 그리웠다. 그와 지낸 순간 순간이 손에 잡힐 듯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 갈색머리, 그의 모든 것이 기억에 새겨져 있었다. 눈을 감기만 하면, 사타렌에서 자신의 옆에 서 있던 그가 보이는 것 같았다. 질의 마음속에서 그에 대한 사랑은 날마다 자랐고, 바빠지면 바빠질수록 뿌리를 뻗으며 퍼져갔다.

그러면서도 질은, 그가 그럴 마음이 있으면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설령 50만의 인구가 있고, 전 세계에서 오는 관광객으로 붐비는 대도시라해도, 만약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자신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는 질이 시카고에 돌아가지 않고 마나우스에 있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은, 가능한 한 자신의 흔적을 숨기려고 했다. 질은 재빨리 은행 예금 구좌를 다른 은행으로 옮겼지만 어느 멍청한 탐정이라도 그것은 곧 알아낼 것이다. 그때 질은 빈틈없이 루아 테레시아가의 주소를 이용했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남겼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만약 그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면뒤쫓아 오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서, 그에게 사죄 전화를 걸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가정부를 속인 것도 미안했다. 질은 진심으로 세뇨라 콜데로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고, 그녀를 몹시 만나고도 싶었다. 언젠가는 만나서 사과하고 싶었다.

일에 빠져 있으면, 머리는 - 마음까지는 무리라고 해도 - 에 몰두할 수 있었다. 모드에게 있어서 질은 구원의 신이었다. 질의 어깨에는, 지금은 더 많아진 종업원들과 그 가족의 생활이 걸려 있었다. 이제는 목표를 내세우고, 그것을 향해 전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주일이 지나, 질과 에드나는 하루의 매상을 계산하고 있었다. 광고가 효과를 나타내서, 점점 많은 손님이 가게를 찾게 되었다.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에드나가 기쁜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멀었어요."

질의 대답이었다.

"전 세계에 불을 붙이기는 아직 멀었다고요. 그 때문에 나는 베렌에 가서 백화점과 교섭해 보려고 해요."

에드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바렌은 여기서 1,600km나 떨어진 곳이에요!"

"그렇군요."

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별로 걸어갈 마음은 없어요. 비행기로 갈게요."

"하지만 제품에 무슨 일이 생기면? 너무 멀어요."

"우리 제품은 일급품이에요. 문제같은 건 안 생겨요. 여하튼 다음 주에 상품 견본을 들고 베렌에 갈 작장이에요."

"산타렌쪽이 가까워요. 먼저 그쪽으로 하지요?"

"안 돼요."

쌀쌀맞게 대답했지만, 질은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금광 덕택에 산타렌에는 사람도 돈도 많이 있어요."

"어느 쪽이든 비행기로 가게 되겠죠? 그렇다면 베렌 쪽이 유효해요."

대서양 연안의 아마존 하구에 있는 베렌은 100만에 가까운 인구를 포용하고 있고 그만큼 상점도 많았다.

"산타렌이 더 나아요."

에드나는 게속 고집했다.

어떻게 해야 화제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산타렌에 갈 수는 없었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10만이란 인구 비율에 도시는 작다. 어디서 사이먼과 맞닥뜨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질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렸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뛰어드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뭐라고 하지? 행동은 어떻게 하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그에게서 멀어질까?

"정말 완고하군요."

에드나의 음성이 들렸다.

질은 멍청한 시선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전에도 내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지요? 난 정말 숙부님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고, 질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직 사이먼을 만날 수는 없다. 그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때까지는 무리다. 하지만 그런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뭔가 남편하고 관련이 있나요?"

질의 프라이버시를 손상하고 싶지는 않다는 듯 에드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질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입 밖에 내고 싶지는 않지만."

에드나는 말하려다가 멈추었다.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알아요."

질은 그녀의 말을 가로 막았다.

"일은 일, 그리고 언제까지고 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요?"

"그래요."

"그렇다면 먼저 베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산타렌에 들르는 건 어때요?"

에드나는 빙긋이 웃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할 수 없죠. 하지만 내가 찬성하는 것은 당신이 기운 냈으면 해서예요. 당신은 어제 남편을 만날까 싶어서 벌벌 떠는 것처럼 보여요. 잠시만이라도 그분의 일을 잊도록 하세요."

그를 잊으라고! 아픔도, 안타까움도 없이 그를 생각 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밤은 함께 나가요. 매일 밤 남편으로부터의 전화만 기다리지 말고요."

에드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주방에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 질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4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4주일간, 사이먼의 연락은 물론, 모습도 볼 수 없었다.

"무슨 뜻이에요?"

질은 날카롭게 물었다.

"알고 있을 텐데요."

에드나는 식기를 늘어놓으면서 말했다.

"전화가 울릴 때마다 깜짝 놀라고, 벨이 울릴 적마다 뛰어나가잖아요."

"바빠서 그이를 생각할 틈이 없어요. 조금 신경질적이 되어 있긴 하지만요."

"그렇게 생가하고 싶은 거겠죠. 그물 침대의 잠자리는 불편하겠지만요, 그렇다 해도 잠 못 이루며 뒤척이는 게 너무 심하고 사람을 봐도 건성일 뿐이에요. 만약 남편이 그립다면 먼저 전화하세요."

질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가지 에드나와 사이먼의 일을 이야기한 적은 없었고, 앞으로 할 마음도 없었다. 어떻게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가? 결국 결합될 수 없었던 결혼, 편의상의, 계약상의 결혼이라는 것은 결코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오늘 밤엔 함께 나가는 거예요?"

에드나는 다짐하듯 다시 말했다.

", 당신은 너무 일만 해요."

"그에 맞게 수익이 계속 오르고 있잖아요."

질은 발끈해서 쏘아대듯이 말했다.

에드나는 질의 옆으로 와서 얶애에 손을 얹었다.

"알고 있어요. 감사하고 있고요. 모든 것이 기적처럼 잘 되어가고 있어요. 정말 고마워요."

"내가 짜증을 냈군요, , 이젠 식사할까요?"

아침에 잠이 깰 때마다 질은 사이먼이 몹시 그리웠지만, 시간은 흥분 속에 잘 지나갔다. 돈의 위력도 있기는 했으나 질의 열성 덕분에 여러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가 구상되었다. 질은 하루종일 바쁘게 일했지만, 밤에 에드나의 아파트에 돌아오면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은 사이먼의 곁으로 날아갔다. 전화가 걸려올지도 모른다. 마냑 그가 그럴 마음이 되면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질은 에드나와 자신의 잔에 커피를 따르고, 오렌지 쥬스와 롤빵이 준비된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런 식인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갑자기 에드나가 말을 꺼냈다.

"이런 식이라니요? 나는 건강해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을 때 하고 있어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 당신의 아파트를 점령했다는 것 정도예요."

에드나는 빙긋이 웃었다.

"계속 점령해도 좋아요. 언제든 남편이 데리러 올 거로 생각하는데요, 그땐 꼭 옆에서 구경하고 싶은 걸요."

"백발에 걸음도 못 걷게 될 때까지? 무리예요."

에드나는 양보하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 밤은 함께 가요. 아무 핑계도 대지 말고요."

질은 말다툼할 기력도 없었지만 최후의 저항을 보였다.

"에드나, 떼아뜨로 아마조니아요? 남편은 그곳에 지정석을 갖고 있어요. 난 갈 수 없어요. 그일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요."

"괜찮아요. 이런 근사한 콘서트는 놓치고 싶지 않아요. 표는 3층석이에요. 그것 밖에 살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괜찮겠죠?"

"하지만 휴식 시간에는 사이먼이 나올 거예요."

"3층까지는 안 올라와요. , 어떡할래요?"

질은 입을 다물었다. 항복이다. 자신이 사이먼을 보게 된다고 해도, 사이먼이 자신을 발견할 확률은 적다.

"3층 어느 쪽이에요?"

질이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중앙 뒤쪽이에요. 남편의 자리는요?"

"오른쪽이에요."

에드나는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 지었다.

"우리들을 알아차릴 리가 없어요. 독수리눈이라도 되지 않는 한은요."

"누구의 공연이랬죠?"

"리오에서 온 무반주의 합창단이에요, 잘하고, 그만큼 유명하죠. 꼭 마음에 들 거예요."

"그렇다면 갈게요."

질은 한숨을 쉬었다. 걱정거리가 또 늘었다. 만약 사이먼이 오페라하우스에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조금 마음이 가라앉을까?

 

"이것을 입기로 했어요."

저녁 식사 후, 질은 가게에서 가져온 어깨끈 없는 드레스를 걸쳤다. 검은색 코튼에 꽃무늬가 점점이 있고, 무릎까지 길게 터져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거기에 새빨간 샌들을 신었다.

"모두들 돌아볼 거예요."

에드나는 일부러 심술궂게 말했다.

"에드나, 당신도 놀라운데요."

질은 조금 수줍은 듯이 말했다. 에드나 역시 검은 코튼의 조금 헐렁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원래보다 조금 날씬하게 보여 아주 매력적이었다.

"정말 즐거운 칭찬이군요. 하지만 그 드레스에 모두가 황홀하게 빠져 돌아보는 게 더 흥미 있을 거예요."

"글쎄요, 필요하다면 그곳에서 팔아도 좋아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질은 콘서트가 즐겁게 기다려졌다. 가서 즐기는 것이다. 사이먼에 대한 감정을 테스트할 좋은 기회이다. 만약이라도 그가 있다면 냉정하게 행동하게 될 것이다. 없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고마운 것이고.

곤란한 것은, 질 자신이 어느 쪽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간판을 늘어놓을까요? <당신도 마나우스 협동조합 제품인 이 호화로운 의상을 구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써서 말예요."

웃으면서 에드나가 말했다.

질은 다시 한번거울을 향하고 서서 머리를 다듬었다.

"누군가를 위해 특별히 멋을 낸 것이리라고 모두들 생각하겠어요."

향수를 뿌리고 있는 질에게 에드나가 농담 비슷하게 얼버무렸다.

"마나우스 협동조합을 위해 한껏 멋을 부린 거예요."

 

 

 

13

떼아뜨르 아마조니아를 향해 산 세바스찬 광장을 걸으며 질은 언제 사이먼의 리무진을 발견하게 될까 계속 조마조마했다.

에드나는 금방이라도 심장발작을 일으킬 것 같은 태도를 이젠 버리라고 질에게 주의를 주었다.

"무슨 말이에요? 난 건강해요."

내심 벌벌 떨면서도 질은 큰소리 쳤다.

"흡사 모자이크 틈새로 빠져 들어가서 사라지고 싶어 하는 듯한 걸음걸인데요."

"짐작이겠지요."

질은 조그맣게 말했지만, 조금은 긴장이 풀어졌다. 하지만 극장 앞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사라지든지 투명해지고 싶다고 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물쭈물 하지 말아요."

그녀는 친구에게 인사하는 에드나를 재축했다.

질은 에드나를 억지로 끌듯이 하면서 3층으로 올라갔다. 아직 공연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사이먼의 자리에 눈길을 주니 비어 있었다. 즐거워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이었다.

", 말해줘요. 당신이 말하는 그 괴물은 어디 있죠?"

에드나가 소곤거렸다.

"없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질은 대답했다.

"그럼, 온다고 한다면 어느 자리에요?"

"1층 오른쪽, 무대에서 두 번째 지정석이에요. 이젠 만족했어요?"

에드나는 끄덕이며 프로그램을 펼쳤다.

"침착해요, . 즐기기 위해서 온 거니까요."

무대의 연주는 훌륭했지만, 질의 눈은 마침내 그림자가 된 지정석으로 향하곤 했다.

1부의 프로그램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질은 가슴이 철렁했다. 지정석 쪽의 문이 열리며, 두 개의 그림자가 들어온 것이다. 사이먼! 빌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복도에서 희미하게 들어온 빛에, 턱시도 차림인 그의 모습이 보였다. 함께 있는 사람은 새빨간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여자, 안젤라 프랑코가 틀림없었다. 질은 의자를 꼭 잡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에드나의 손이 가만히 질의 손을 감쌌다. 질의 마음을 헤아린 그녀의 동정심이었다.

휴식 시간까지 계속된 노래는 질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여길 나가야겠어요."

불이 켜지자, 질은 마음이 혼란해서 에드나에게 말했다.

"언제까지고 도망 다닐 수는 없어요."

에드나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잠깐 바깥에 나가요. 그리고 돌아와서 끝날 때까지 노래를 듣도록 해요."

질은 망설이며 꽁무니를 뺐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싫어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괜찮아요. 복도에 나가서 기분을 가라앉히는 것뿐이에요. 그거라면 괜찮죠?"

질은 무의식중에 지정석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무도 없었다. 질은 에드나의 팔을 잡고 가만히 토닥거렸다.

"친절하게 신경 써 주어서 고마워요, 에드나. 당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할지 몰랐을 거예요."

휴식시간 후, 자리에 돌아왔을 때쯤 질의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에드나는 계속, 질에게는 그녀의 인생이 잇고, 스스로 해나갈 수 밖에 없다는 자신감을 되찾아주려고 노력했다.

사이먼은 옆에 안젤라 프랑코를 데리고 다시 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사이먼은 금발의 여자에게 열심히 말을 걸었고 그동안 그녀는 오페라글라스(공연을 잘 보기 위해 사용하는 작은 쌍안경)으로 장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질은 프로그램에 몸을 숙였다. 안젤라 프랑코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머, 어쩌면!"

에드나는 질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어서 두 가지 중에 한가지를 선택해요. 얼굴을 들고 웃어주든지, 도망치든지요. 당신 남편이 이쪽을 보고 있어요. 당신을 발견했나 봐요."

질은 눈앞이 아찔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상관없어요."

프로그램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질은 말했다.

"왜 조명을 끄지 않는 것일까요?"

"내가 보니까, 많은 사람 중에서도 굉장히 멋있는 사람이군요. 당신을 계속 보고 있어요."

질은 눈을 들지 않았다. 고맙게도 곧 장내가 어두워졌다.

"왜 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거죠? 왜 날 데리고 았어요?"

질은 신음하듯이 말했다.

에드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수를 받으며 가수들이 무대에 등장했다. 질은 노래에만 주의를 기울이려고 애쓰며 역시 같이 박수를 보냈다. 무대를 향해 다시 돌아앉은 사이먼의 모습은 어렴풋하게 밖엔 보이지 않았다.

 

세 번의 앙콜 후, 마침내 공연은 끝났다. 두 번째의 앙콜을 받는 동안, 사이먼과 안젤라 프랑코는 자리를 떴다. 질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신경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적어도 사이먼과는 대결하지 않고 끝난 것이다.

대결 같은 건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떠난 뒤의 사이먼에게는 좋은 일투성인 것만은 분명했다. 아내가 있는 이상 다른 여자에게서 결혼을 강요당할 일도 없을 것이다. 커틀렛 토드사를 수중에 넣고 다니엘 커틀렛의 재산도 관리한다. 이제 그의 마음에 걸릴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오페라하우스 밖은 밤바람이 시원했고, 별이 총총 박혀 있었다. 남십자성은 마치 고층빌딩의 꼭대기에 걸린 것처럼 보였다. 질과 에드나는 흰색과 검은색의 모자이크 무늬 보도블록 위를 천천히 산책했다. 환하게 불이 켜진 광장에 파티에서 돌아가는 사람들이 즐거운 듯이 떠들썩하며, 축제 기분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마음은 진정되었어요?"

에드나가 물었다.

"조금은요."

"잘 됐어요. 이것으로 이젠 당신은 두 다리를 서서 잘 수 있어요. 표창장을 드리지요. 질 토드, 당신은 이제 자신의 인생을 걸 권리를 손에 넣었어요."

질은 웃었다. 뭔가에 해방되고 자신감이 붙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그녀를 잡으며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렸다.

", 할 이야기가 있소."

질은 걸음을 멈추었다. 목소리가 얼른 나오지를 않았다. 사이먼의 얼굴은, 그녀의 기억에 있는 것보다 여위어 보였다. 그는 우울하고, 뭔가 응어리진 것 같은 눈기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한채 꼼짝않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을 피해서 가는 사람들, 차들의 소음, 사람들의 웅성거림, 머리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조차 질의 마음에 없었다. 에드나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 앞으로 계속 가려고 했다.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무언의 대화 중에서 질은 문득 친구를 생각했다. 목소리를 짜내느라고 그녀는 고생했다.

"에드나?"

에드나는 두 사람을 돌아보고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되돌아왔다.

"이쪽, 이쪽은 남편이에요."

질은 말을 더듬었다.

"사이먼, 이쪽은 에드나 피네이로예요. 나의 파트너죠. 함께 일하고 있어요."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에게 질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들은 옷을 만들고 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손으로 만들어요."

에드나는 질에게 미소 지었다.

", 나중에 봐요."

"안 돼요."

질은 에드나를 제지했다.

"가지 말아요. 함께 돌아가요."

"차를 기다리게 해놓았어요, 세뇨리따."

사이먼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느 쪽인지 모르지만 모셔다 드릴까요?"

"괜찮아요. 기분 좋은 밤인걸요."

에드나는 명랑하게 말했다.

"걸어서 돌아가겠어요. 그러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그렇지만 사이먼은 고집스럽게 질과 에드나의 팔을 잡고 광장을 가로질러 리무진으로 이끌고 갔다.

"클라우디오, 세뇨리따 피네이로를 모셔다 드리게. 그 다음엔 라스 플로레스로 돌아가도 좋아 우리들은 알아서 할 테니까."

운전사는 모자에 손을 대고, 에드나를 위해 문을 열었다.

"전화해요."

차에 오르면서 에드나가 질에게 속삭였다.

질은 말할 기력도 움직일 기력도 없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리무진은 곧 차의 물결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사이먼은 질을 거리 맞은편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 이야기해도 되겠소?"

"좋아요."

동요되는 감정에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질은 손을 사이먼에게 잡힌 채 옆에 있는 벤치에 않았다. 뒤에 있는 가로등이 사이먼의 얼굴을 뚜렷하게 비추고 있었다.

"전에 말했을 거요. 필요한 때는 믿어도 좋다고……."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말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생각해주었으면 하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필요 없는 거요?"

"말씀하신 것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 약속을 누구에게나 한다는 것도요. 믿어도 좋겠다는 생각은 유감스럽게도 해본 적이 없군요."

사이먼은 조심스럽게 질을 바라보았다.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면 미안하오. 그 약속은 내가 마음 쓰고 있는 사람 외에는 하지 않아요."

질은 몸을 굳히고, 무의식중에 손을 뺐다. 안젤라 프랑코에게도 또한 그럴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사이먼은 계속했다.

"안젤라 프랑코의 일이겠지."

질은 그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실을 원하며, 그것을 주려고 했었다.

"안젤라 프랑코는 당신 숙부님에게 소중한 사람이었소. 두 사람은 몇 년 동안이나 계속 사귀고 있었소. 내가 말한 것을 알겠소?"

"."

질은 소곤거리듯이 대답했다. 숙부님은 아버지의 동생이다. 사이먼에게서 오는 편지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숙부님이 결혼했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가?

"몇 년 전인가, 숙부님은 그녀에게 약속했었소. 그녀는 마나우스에 광대한 토지를 갖고 있었는데 숙부님이 생전에 그녀를 대신해서 관리하고 있었소. 그것을 당신에게 알려 걱정 시킬 마음은 없었지만, 숙부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녀를 보살펴 달라고 내게 부탁했었소. 나는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오."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질의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미안해요, 전혀 몰랐어요. 왜 가르쳐주지 않았죠? 숙부님은 그녀를 사랑했었나요?"

"그렇소."

질은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숙부님은, 당신을 더욱 사랑했소."

사이먼은 질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 놓았다.

"춥지 않소?"

"아니요."

사이먼은 윗옷을 벗어 질의 어깨를 감쌌다.

"당신은 좀 어리석은 사람이오. <>라고 말하고 싶을 때, 언제나 <아니오>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오."

희미하게 레몬 향기가 나는 옷에서 그의 온기가 느껴지자, 질은 참을 수가 없었다. 사이먼은 질의 손을 잡고, 입술에 가져갔다.

"왜 그런 식으로 도망갔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소?"

"그럴 마음이 있다면 날 찾을 수 있었을 거예요."

질은 힘없이 저항했다.

"내가 산타렌 공항으로 급히 가려고 할 때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었소. 지프는 도랑에 타이어가 빠져 뒤집혔고, 나는 그 밑에 깔렸었소."

질은 눈에 놀라움이 넘쳤다.

"어머, 사이먼, 다치지 않았나요?"

그녀는 그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하죠? 날 용서하지 못하겠군요?"

그는 웃으며 질을 끌어 안았다.

"괜찮았소. 오히려 지프가 우산 대신이 되어 주었소. 다만, 덕분에 라스 플로레스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당신이 나가 버린 뒤였소."

그에게 안겨,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질이 중얼거렸다.

"몰랐어요. 생각도 못 했어요. 당신은 불사신이리라고 나는 생각했었어요."

사이먼은 질의 몸을 일으켜서, 얼굴이 마주 보이도록 했다.

"정말 내가 찾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오?"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기 저기 흔적을 뿌린거요?"

질은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많았어요?"

"그날, 마나우스를 떠나는 증기선은 없었소. 차를 샀는지 빌렸는지도 조사해 보았소. 비행기를 탄 아름다운 미녀도 없었고, 버스를 탔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소. 당신이 마나우스를 떠나지 않은 것만 알면 그 다음에 차는 것은 간단한 거요."

"은행이군요."

"물론이오. 일요일에는 은행 지배인에게 잘 살피도록 말해 두었소."

"하지만 데리러 오지 않았잖아요?"

"물론 데리러 가지 않았소."

사이먼은 질을 끌어안고, 머리에 키스했다.

"오늘 밤도 날 발견하지 못했다면요?"

질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안젤라가 찾아냈소. 그때 연주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뛰어 올라가 당신을 끌어냈을 거요."

"그녀를 내버려두고요?"

사이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가라고 한거요. 계속 당신에게로 가도록 날 재촉했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거군요?"

질은 그 이유를 두려워하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당신 일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었소.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이오."

"앞으로도 계속 할 작정이에요."

"남편이 있고, 집이 있고, 가족이 있어도 말이오?"

질은 그의 목을 안으며, 다정하게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어떻게 되겠죠."

"시카고를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소? 그리고 그그남자는……."

"사이먼."

질은 그가 마치 다 말하기도 안타깝다는 듯이 속삭였다.

"왜 그런 것을 묻지요?"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청바지에 셔츠를 입은, 너무도 젊고 사처받기 쉬운 아가씨로 보였소. 그렇게 차갑고 비정하게 결혼을 신청하는 것이 아니었소."

"하지만 당신은 프로포즈했고, 게다가 나를 매정하고 무자비하게 취급했어요."

질은 부드럽게 그를 힐책했다.

사이먼은 더욱 강하게 질을 끌어안았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질은 조금 두려워하면서 물었다.

그는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말이 막히는 듯이 잠자코 있더니, 낮은 음성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시카고에서 당신은 말하지 않았소? 나를 사랑하지도 않고 얖으로도 사랑할 수 없다고, 나는 그것을 우습고 어리석은 로맨틱한 견해라고 생각했소. 당신을 안고, 키스하고, 사랑이란 넌센스라는 걸 가르쳐주려고 했소. 하지만 당신에게 입술이 닿은 순간, 내게 뭔가가 생긴 거요. 당신을 원했소. 곧 당신을 원하게 된 거요."

"그렇다면 왜 말해주지 않았죠?"

사이먼은 웃었다.

"당신에게 말한다고? 다니엘 커틀렛 조카에게, 만난 지 10분정도 밖에 안 됐는데, 당신의 입술이 달콤하다고?"

그는 갑자기 질에게 입술을 갖다 댔다.

"지금도 훌륭하오."

그 기쁜 말에도, 질은 웃을 수 없었다. 헛되이 낭비한 시간, 끝없을 듯한 고통-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니.

"아주 조그만 표시라도 보여주었다면."

그녀는 유감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것보다 난 당신을 시험해보고 싶었소. 지금에 와서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절실히 깨닫고 있소. 내 제안은 어떤 여자도 거절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을 거요. 돈의 제안 말이오. 당신은 반대하지 않았소. 난 당신이 반대했으면 했지. 그것과 동시에 당신을 사랑하고, 또 당신이 날 사랑하게 하고 싶었소. 그런데 숙부님과 내가 일해서 만든 돈이 우리들 사이에 일시적이지만 장해물이 된 거요. 그것이 화가 났었소. 당신의 것이지만, 당신이 원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소. 당신이 재산을 지키기 위해 나와 결혼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소. 그때는 당신이 미울 정도였다오."

질은 고개를 흔들며, 손을 그의 입술에 가져갔다.

"결혼한 건 돈 때문이 아니에요."

사이먼은 그녀의 손에 키스하고, 그 손을 꼭 잡았다.

"지금은 알고 있소. 당신이 훌륭하게 돈을 쓰는 것을 봤기 때문이오. 당신이 소박한 생활에 만족하며, 오히려 절약하는 것을 보고, 돈의 가치에 대한 내 가치관도 바뀌었소."

"첫눈에 반했기 때문이 아니오?"

질은 미소 지었다.

"첫 번째 경우지요. 내가 결혼 반지를 주었을 때 알아주리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화난 것처럼 보였어요."

그녀는 그의 손을 보았다. 반지는 아직도 끼워진 채였다.

"가장 기쁜 선물이었소."

"그런데 한 마디도 안 했군요."

"결혼식 후 당신의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오.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그때만큼 내가 외톨이라고 느낀 적은 없었어요."

질은 중얼거렸다. 이제는 아득한 옛날 일로만 생각될 것이다.

사이먼은 질을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당신의 남편이고, 연인이며, 친구요. 이제 결코 당신을 쓸쓸하게 만들지는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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