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이 많은 장소로 가는 것
가령
개기월식
개기일식
갱년기
개기월식
거짓말을 제조하다
거짓말을 타전하다
계절병
고생대 마을 – 사북
고장 난 심장
곰곰
곰을 찾아서
구리
그도 그렇겠다
그해 여름
기억의 재구성, 데드 슬로우
기차표 운동화
기타는 종, 노래는 총알
기타여
기향 국수
깊은 일
꿈의 환전소
꼴라쥬 몽(夢)
나무가 있는 요일
내간체
내 책상 위의 2009
넘보라살 혹은 The invisible
뉴타운 천국
다뉴세문경
단풍나무 고양이
대낮의 부림 나이트로 오실래요?
독거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둥근 밤
뛰어다니는 비
뢴트겐 사진
리라들
마스크드레스
마침표
목숨 시 전농 스트리트 – 박진성 시 ‘목숨’에 바쳐
몽
몽유병
미리우(美里雨)
배롱나무의 안쪽
백퍼센트 호텔
벚꽃 대국
불혹, 블랙홀
비굴 레시피
비망록
비처럼 음악처럼
빌라에 산다
빗살무늬토기
사랑
사랑 2.0
삶은 나
상수리나무
색연필 숲
생계
세월호못봇
수학여행 가는 나무
시간들
시구문(屍口門) 밖, 봄
시집가는 날
식객(食客)
식사(食死)하세요
실내악(室內樂)
실패라는 실패
아주 작은 형용사야
안개 사용법
안개 유원지
알쏭달쏭 별별 이야기
어떤 삶의 가능성
어떤 섬의 기능
어항 골목
언어 물회
여름 언니들
여자비
여행 온 아이가 여행 온 아이에게
연못
연희-하다
열려라 참깨
오후 세 시
옥탑방
외롭고 웃긴
와유(臥遊)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
유령처럼 등장한 하루
육교(肉交)
음악처럼, 비처럼
이 별의 재구성 혹은 이별의 재구성
인생 국수집
작고 즐거운 주전자들
전갈
정치적인 시
종이 피아노
중얼거리는 나무
짜가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천남성
총잡이들의 세계사
‘축 생일’
춘천, 씨놉시스
카만카차
카이로
케익꽃
탈모
투명 고양이
‘풋’을 지나서
하시시
함부로
합체
해바라기 축제
해피 투게더
혹부리 사내
화란
화전(花田) 간다
흑국 보고기
흰, 국화 옆에서
Post 아현동
timeless time
#YoSoy132
1인 가족
5시를 그린다
가능성이 많은 장소로 가는 것
안현미
설악의 북쪽, 겨울,
혹독하게 황홀한, 적막
한 번도 무릎 꿇지 않은
유목민의 영혼을 가진 바람은 말하네
네 그림자처럼 모든 것이면서 유일한 지도를 가지고 싶어
그림자도 없이 늘 떠돌아야 하는 내 운명은 너무 추워
수행자의 영혼을 지닌 나무는 답하네
가능성이 많은 장소로 가는 것
그런 영혼의 지문을 가진다는 건
군말이 불필요한 매혹이야
설악의 북쪽, 경울,
황홀하게 혹독한, 풍경
한 번도 무릎 꿇지 않은
가능성이 많은 장소로 가는 것
가령
안현미
1
케이블티비에서 일 년 전에 죽은 사내가
죽음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내의 전생(前生)이었다
2
가령 당신이 수원에서 기차를 탔다고 합시다
가야 할 곳은 시원이라고 합시다
당신은 까무룩히 졸았다고 합시다
당신의 꿈속에선 비가 내렸다고 합시다
빗속을 달려오는 회색빛 자동차도 있었다고 합시다
그래도 당신이 가야 할 곳은 시원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눈을 떠보니 수원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당신은 떠났던 것일까요?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요?
시원(始原), 시원은 오직 당신의 꿈속에만 있다는걸
가령(街靈), 당신이 믿는다면
나는 당신의 전생을 들고
다신의 꿈속에 도착할 수 있겠습니다
3
케이블티비에서 일 년 전에 죽은 사내가
죽음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내의 후생(後生)이었다
개기월식
안현미
사내의 그림자 속에 여자는 서 있다 여자의 울음은 누군가의 고독을 적어 놓은 파피루스에 덧쓰는 밀서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울음인지 밀서인지 고독인지 피아졸라의 음악처럼 외로운 것인지 산사나무 꽃그늘처럼 슬픈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 것인지 그게 다인지 여자는 눈, 코, 입이 다 사라진 사내의 그림자 속에서 사과를 베어먹듯 사랑을 사랑이라고만 말하자, 고 중얼거리며 사내의 눈, 코, 잎을 다 베어먹고 마침내는 그림자까지 알뜰하게 다 베어먹고 유쾌하게 사과의 검은 씨를 뱉듯 사내를 뱉는다.
개기일식
안현미
사내의 그림자 속에 여자는 서 있다 여자의 울음은 누군가의 고독을 적어놓은 파피루스에 덧쓰는 밀서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울음인지 밀서인지 고독인지 파아졸라의 음악처럼 외로운 것인지 산사나무 꽃그늘처럼 슬픈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 것인지 그게 다인지 여자는 눈, 코, 입이 다 사라진 사내의 그림자 속에서 사과를 베어 먹듯 사랑을 사랑이라고만 말하자,고 중얼거리며 사내의 눈, 코, 입을 다 베어 먹고 마침내는 그림자까지 알뜰하게 다 베어 먹고 유쾌하게 사과의 검은 씨를 뱉듯 사내를 뱉는다
갱년기
안현미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호르몬이 울고
호르몬이 그리워하고
호르몬이 미워하고
다 호르몬이 시키는 일이라는 걸.
매일매일 죽지도 않고 찾아와
죽고 싶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국수 가락처럼 긴
사생과 결단의 끝.
당신,
내가 살자고 하면 죽어버릴 것 같은
내가 죽자고 하면 살아버릴 것 같은.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크게 잘못 살고 있었다는 걸
크게 춥게 살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따뜻한 국수가 고팠다는 걸.
거짓말을 제조하다
안현미
우우, 우, 우 그녀의 더듬이가 쥐오줌 번진 책장을 더듬고 있다 불 꺼진 방 전기장판은 얼음장 위에 신문지 같다 그녀의 더듬이는 의수를 닮았다 우우, 우, 우 비키니 옷장 속에는 아귀 같은 짐승이 웅크리고 앉아 그녀의 잠을 아귀처럼 먹어치우고 있다 우우, 우, 우 그녀의 더듬이가 의수 같은 그녀의 더듬이를 부빈다 쥐오줌 번진 책장 속에선 벌레가 된 사내가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있다 그녀의 의수 같은 더듬이가 제조하는 현은 세상의 슬픔 따위에는 울지 않는다 우우, 우, 우 산동네의 겨울은 길다 차라리 신은 봄 같은 건 제조하지 말았어야 한다! 고 그녀의 더듬이는 쓴다 우우, 우, 우 그녀의 더듬이가 운다 네 울음은 불온하다, 고 누군가 그녀의 불면 속으로 걸어들어와 딸깍, 그녀의 더듬이를 자른다 우우, 우, 우 봄을 제조한 신은 위대하다, 위대하다! 불 꺼진 방에서 벌레처럼 납작 엎드린 그녀가 거짓말을 제조하기 시작한다 더듬더듬, 시 같은 거짓말을!
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계절병
안현미
고독은 나무처럼 자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하나의 커다란 구멍이고 끝끝내 삶은 죽음입니다 거대한 고래처럼 거대한 고독이 두려운 나머지 시간을 밀거래하는 이 도시에서 서로가 서로의 휴일이 되어주는 게 유일한 사랑입니다 병인을 찾을 수 없는 나의 우울과 당신의 골다공증 사이를 자객처럼 왔다 가는 계절 그 그림자를 물고 북반구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의 날개 같은 달력 한장 가없는 당신 나의 엄마들 왜 모든 짐승들에겐 엄마라는 구멍이 필요한지, 시간조차 그 구멍으로부터 발원하는 발원수 같은 건 아니겠는지 시도 때도 모르고 철없이 핀 꽃처럼 울다가 웃다가 고독은 나무처럼 자라고 계절은 바꾸어 타고 먼먼 바다로 헤엄쳐가는 물고기가 수면 밖으로 제 그림자인 양 쳐다보는 나무는 엄마라는 구멍처럼 고독합니다 가엾은 당신 나의 엄마들 끝끝내 삶은 죽음일 테지만 죽기 위해 제 기원을 찾아 뭍으로 돌아오는 거대한 포유동물처럼 젖이 아픈 계절입니다
고생대 마을 – 사북
안현미
해발 855m 푯말 꽂힌 추전역에 내려 나의 '폭풍의 언덕'을 찾아갈 때, 그때 그 고갯마루에서는 바람을 불러 어떤 힘을 주물럭주물럭 만들고 있는 풍차 같은 사내도 있었을 테지만 내가 사로잡힌 건 풍차도 바람도 아니고 그걸 품고 기른 5억 8000만 년 된 막장의 어둠이었어 그러니까 내가 찾아가는 건 '폭풍의 언덕' 이 아니라 '폭풍의 무덤' 이었던 거지 컹컹 사납게 울부짖는 어둠 속에서 남인수를 좋아하던 아버지 검은 얼굴로 돌아와 유독 가스 탐지를 위해 탄광 속에 둔 카나리아처럼 노래 부를 때나는 아버지의 희망의 카나리아였는지도 몰라 5억 8,000만 년 된 어둠의 고생대 검은 석탄을 캐낼 때 나 아버지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어두웠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카나리아였지 나 이제 아버지 무덤 앞에서 중얼거리지 아버지 그 두려움을, 불꽃 같은 어둠을 아버지라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결국 두려움도, 어둠도 피붙이 같겠지요' 한때는 산업 전사라 불렸고 또 한때는 폭도라 불렸던' 우리들의 아버지!
고장 난 심장
안현미
빨간 장미 서른세 송이를 들고 여자가 나를 찾아왔어요 여자의 눈물이 너무 딱딱해 나는 캐낸 눈물로 당신의 심장을 끓이면 좋겠다 생각해요 모래시계를 들고 찾아온 죽음은 백년 동안의 고독이 매장되어있는 화장터에서 활활 타오르고 모래시계에선 시간이 자꾸 흘러내려요 흘러내리는 시간을 가시로 꽂아 놓으며 여자는 중얼거려요 막장에서 석탄을 캐내던 내 아버지의 분노는 어디로 갔나요? 그 여름 국립의료원 중환자실에서 끝내 시간을 놓아버린 내 엄마는요? 어디까지가 바닥인가요? 왜 생(生)은 고장투성이인가요? 당신, 생은 다 그런 거라고 눙치지 말아요 시시해요 시(詩)까지 시시해요 시체처럼 평온했음 좋겠어요 내 영정사진 앞에서 향나무 향이나 실컷 마시다 배불렀음 좋겠어요 불도 들어오지 않는 다다미 방에서 돌아오지 않는 식구들을 기다리다 보면 애국가 울려 퍼지는 화면조정 시간이예요 치지지지 아무것도 수신되지 않던 자정의 TV 화면을 나의 내면이라고 부를까요?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을 테지만 그곳으로 나를 데려다주겠지요? 그때서야 고장 난 심장은 두근두근 따끈따끈 치지지지 나는 나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빨간 장미 서른 세 송이를 들고 내 여자가 오늘 나를 찾아왔어요 그게 사랑이었다 해도 무슨 상관이예요 내 여자의 눈물은 딱딱하고 내가 캐낸 눈물은, 당신은 시체처럼 차가워요 시체처럼 딱딱해요 생이 고장 난 심장 같다는 건 하나의 농담이지만요
곰곰
안현미
주름진 동굴에서 백 일 동안 마늘만 먹었다지
여자가 되겠다고?
백 일 동안 아린 마늘만 먹을 때
여자를 꿈꾸며 행복하기는 했니?
그런데 넌 여자로 태어나 마늘 아닌 걸
먹어본 적이 있기는 있니?
곰을 찾아서
안현미
나는 두 개의 가을과 한 개의 여름, 여덟 개의 아침을 지나왔습니다
두 마리 토끼와 한 그루의 미루나무를 만났고,
우주로 날아가는 케익꽃을 들고 애드벌룬처럼 부풀어올랐습니다
나는 아홉 개의 비밀과 네 개의 방을 훔쳤고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무서웠고
지혜로운 돌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두 마리의 토끼와 한 그루의 미루나무와 우주로 날아가는 케익꽃이 하나로 어우러지면
지혜로운 한 마리의 곰과 같습니다
알 수 없는 말들에게선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이 생겨났고, 동굴은 어둠까지 아름다웠습니다
시작합시다! 어느 날 지혜로운 돌은 침묵의 언어로 말을 걸었고
그날 두 개의 가을과 한 개의 여름, 여덟 개의 아침과 함께 나는 나를 지나갔습니다
구리
안현미
누군가 정성으로 아니 무심으로 가꿔놓은 파밭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파 한단을 다듬는 동안 그동안만큼이라도 내생의 햇빛이 남아있다면, 그 햇빛을 함께해줄 사람이 있다면, 여름과 초록과 헤어지는 일쯤은 일도 아닐까 무심으로 무심으로 파 한단을 다듬을 동안
망우리 미자 딸기원 지나 누군가 무심으로 아니 정성으로 가꿔놓은 파밭 지나 구리 지나 여름을 통과하는 동안 하얗게 하얗게 파꽃이 피는 동안 여름과 초록과 헤어지는 동안
그도 그렇겠다
안현미
그리하여 그도 그렇겠다 글렌굴드를 듣는다 당신은 가벼울 필요도 없지만 무거울 필요도 없다 내 생의 앞 겨울을 당신을 훔쳐보면서 설렜으니 그 겨울은 거울처럼 깨져 버렸고 깨진 겨울의 파편을 밟고 당신은 지나갔다 글렌굴드를 듣는다 지나치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 그게 시라고 나는 생각해 오고 있다 그게 나무라고 나는 생각해 오고 있다 포도나무가 있는 여인숙에 홀로 투숙한 여행객의 고독처럼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서 있어야할 자리라고 매일 아침 자신을 속이는 어떤 허무처럼 일인용이고 일회용인 한 개도 재미없는 삶처럼 그리하여 죽음처럼 글렌굴드를 듣는다 출근과 퇴근 누가 만든 미로일까? 당신은 무거울 필요도 가벼울 필요도 없다 당신이 없는 겨울처럼 거울을 들고 사랑의 부재 또한 사랑 아니겠는가 지금은 그런 생각도 해보는 겨울이다
그해 여름
안현미
목마르지도 않은데도 물이 몸에 좋다는 이유로 습관적으로 물을 마셔왔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물맛을 잃어 버린 기분이에요,라고 말하고 여자가 팔려갔다
여자와 함께 켜놓았던 눈부신 날들도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난독증을 앓는 착란의 바람이 집창촌 골목 다닥다닥 붙은 유리벽을 흔들고 지나갔다
이방의 어느 골목인 듯 모국어가 그리웠다
생은 결국 플러스 제로와 마이너스 제로만을 해답으로 가진 수학 공식 같았다
우리벽에 걸린 블루마린빛 시계는 자살했고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그녀들의 방
거울 속엔 마스카라가 얼룩진 얼굴들이 검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슬픔은 팡이 팡이 피어오르는 곰팡이 꽃처럼 습관적으로 습한곳만 더듬거렸다
습관적으로 희망하고 반복적으로 절망하는 날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았다
물음이란 본디 목마른 여름날 오후의 햇살들처럼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게
이 별책 부록같은 골목의 불문율이었다
그해 여름 팔려간 여자의 화장대 거울은 땀을 뻘뻘 흘리며 목마른 시인의
가면을 뒤집어 쓰고 팔리지 않는 위독한 모국어로 詩를 쓰고 있었다
기억의 재구성 ; 데드 슬로우
안현미
기차를 타고 낯선 도시에 낯선 여자의 손을 잡고 도착한 나는 다섯 살 훗날 그 낯선 여자는 친언니로 밝혀진다
녹슨 가위를 들고 동맥을 오리는 나는 열여섯 살 피 흘리는 동맥을 보고 기절하는 나는 열여섯 살 훗날 그것은 동맥이 아니라 기억이라고 밝혀진다
방금 출시된 최신형 기억을 들고 맥락을 잃어버린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나는 마흔 두 살 훗날 그 여자는 무면허 기억판매자로 밝혀진다
(열여섯부터 마흔둘까지는 다른 이름으로 저장)
간혹 데드 슬로우(죽을 만큼 천천히) 죽고 싶었을 뿐
그 중 어떤 것도 거짓은 아니리라
더 이상 출시되지 않는 1997년산 기억에 의하면 친언니로 밝혀진 여자는 은행원의 아내였으나 더 이상 은행원의 아내가 아니며 동맥이 아니라 기억을 오린 녹슨 가위는 녹슨 가위가 아니라 녹슨 기억이었으며 맥락을 잃어버린 여자가 무면허로 판매한 기억은 훗날 진품으로 감정된다
(열여섯부터 마흔둘까지는 다른 이름으로 저장)
간혹 데드 슬로우(죽을 만큼 천천히) 살고 싶었을 뿐
그중 어떤 것도 거짓은 아니리라
기차표 운동화
안현미
원주시민회관서 은행원에게
시집가던 날 언니는
스무 해 정성스레 가꾸던 뒤란 꽃밭의
다알이랴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지요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갔던 언니는
시민회관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 내게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단풍이 흐드러지고 청군 백군 깃발이 휘날려도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
인편에 보내준 기차표 운동화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닥토닥
집으로 돌아온 가을 운동회날
언니 따라 시집가버린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들만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지요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안현미
염색공은 골몰한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어떤 색을 입힐 것인가
고심의 고심을 거듭하던 그가
얼결에 페인트 통을 엎질렀을 때
우리는 태어났다
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실수
돌이킬 수 없는 얼룩들
당신이 갓 태어난 아이를 보며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거나
툭하면 허물어지는 성벽을 가진 것은
그 때문
내정된 실패의 세계 속에 우리는 있다
플라스틱 병정들처럼
하루치의 슬픔을 배당받고
걷고 또 걸어 제자리로 돌아온다
우리는 그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풀리지 않는 숙제
아무도 내일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
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
부끄러움이 만드는 길을 따라
서로를 물들이며 갈 수 있다
절벽이라고 한다면 갇혀 있다
언덕이라고 했기에 흐르는 것
먼 훗날 염색공은
우리를 떠올릴 것이다
우연히 그의 머릿속 친구가 켜지는 순간
그는 휴지통을 뒤적여 오래된 실패를 켜낼 것이다
스스로 번져가는 무늬들
빛을 머금은 노래를
* 빅토르 하라.
기타여
안현미
기타의 현을 끊고 시인의 노래는 서글픈 모음들을 술잔 속으로 빠뜨린다 비타민B가 부족한 야맹증 환자처럼 나는 캄캄하다 시인의 서글픈 노래만이 내 영혼의 귀를 하얀 붕대처럼 감는다 시시해서 죽이고 싶다가도 시시해서 죽이기조차 귀찮은 그들보다 더 시시한 나, 불멸할 질투와 애증, 살아온 날 동안 흘린 눈물만큼의 술을 지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 나를 벗고 싶다고 지껄이는 환절기 저기 환속한 비구가 걸어간다 심장이 불덩이 같다 내 눈물이라도 얼려 먹어야겠다 지랄 금지, 애인이 두고 간 포스트잍에 쓴 작별 인사 붕괴된 나라 러시아제 망원경을 들고 무용수들의 기형적인 발가락만 들여다볼까? 노랑 풍선을 사고 노사모에나 가입할까, 어차피 나를 속일 거라면 죽을 때까지 속여줘! 내 말이 아니라 테라야마 슈우지의 말이 아니라 테라야마 슈우시가 돈을 주고 잔 터키탕에서 일하던 여자가 속삭였던 말이 오늘은 시처럼 들린다 시시하고 시시한 나라는 방에서 무덤으로 이동하는 게 인생이다 오늘은 자꾸 어딘가로 가려고 하는 영혼에게 책에서 훔쳐 온 문장 하나를 읽어준다 일주일 내내 현명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기향 국수
안현미
대륙에서 돌아온 남자가 국수를 삶는다
국수 그릇은 두 개
국수 그릇은 두 개
사랑은 기어이는 사랑을 못내 지나가야 할 터인데
한 여자를 오랫동안 등지지 못해
여백이 아주 많이 남아 있는 등을 돌리고
대륙에서 돌아온 기향씨가 국수를 삶는다
후루룩 후루룩
후루룩 후루룩
사랑은 기어이는 사랑을 뜨겁게 넘겨야 할 터인데
한 남자를 오랫동안 등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나도 그냥 그대로 놓아둔 적 있다
어떤 미련과 어떤 불안과 어떤 난처를
오늘밤 펄펄 눈은 나리고
어쩔 수 없이 국수를 삶는 등이 있다
어쩔 수 없이 서러운 밤이 있다
깊은 일
안현미
그날 이후 누군가는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다
그것은 깊은 일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는 밤
아무래도 이번 생은 무책임해야겠다
오래 방치해두다 어느 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마음처럼
오래 끌려다니다 어느 날 더 이상 쓸모없어진 어떤 미움처럼
아무래도 이번 생은 나부터 죽고 봐야겠다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삶을 살아야겠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혼자 밥 먹는, 혼자 우는, 혼자 죽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야겠다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지만 침묵해서는 안 되는
그것은 깊은 일
꼴라쥬 몽(夢)
안현미
1
작은 새 장독대에 날아와
니 말은 다 거짓말
니 말은 다 거짓말하고
즐겁고 발랄하게 울고 간 뒤
스티로폼 꽃밭엔 도라지꽃 피었습니다
묘비명처럼 피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으며
나는 무엇에서도 도망가지 않는
나는 까다로운 사람!"
2
꿈을 꾸었는데 1에서 즐겁고 발랄하게 울고 간 작은 새가
미루나무 옹이에다 장님의 말을 콕콕 찍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어둠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
그대가 내 몸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을 때 그것이 어둠이구나."
3
꿈속에서 나는 꿈사냥꾼이었는데
1 작은 새와 2 장님은 나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내가 두려운 것은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의 그림자 속에 심겨진 나무라는 사실"뿐이었습니다.
4
1 니코스카잔차키스
2 미셀 투르니에
3 카자르 사전
꿈의 환전소
안현미
그 이야기에 따르면 그 꿈의 환전소는 도서관 가는 길에 있다고 한다 그곳에는 도깨비방망이를 잃어버린 이상하고 어이없는 도깨비들이 죽은 나무나 들여다보면서 일년 내내 주문만 외우고 있다고 한다 시 나와라 뚝딱! 씨 나와라 뚝딱! 이상하고 어이없이 아름다운 그 환전소에는 슬픈 것들이 그리운 것들로 옮겨가 앉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선 안 되는 듯 절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이상하고 어이없는 도깨비들은 계속 이상하고 어이없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뚝딱뚝딱하면 시가 나오고……
그 이야기의 또다른 판본에 따르면 그 꿈의 환전소는 악마와 천사의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한다 그 옆에는 한그루 거대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는 자신의 그림자를 일년 내내 들여다보면서 09시부터 18시까지 매일매일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지겹지도 흥겹지도 않은 나라에서 이상한 것은 그 나무 그림자에선 일년 내내 이상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도깨비처럼 나타나 일년 내내 일요일을 환전해주고……
나무가 있는 요일
안현미
목요일의 아이는 길을 떠나고 비가 온다
투명한 벽 꽃피는 유리 목요일의 아이는 길을 떠나고 비가 온다
일렁이는 검은 강은 바람의 일기장 자신조차 모르는 가면의 가면 목요일의 아이는 길을 떠나고 비가 온다
헤매는 자의 영혼 나무의 뼛속에 꽂힌다
목요일의 아이는 길을 떠나고 길을 떠나고 저 혼자 남아 쓰러지는 빗살 꽂으며 떨고 있는 한 그루 미루나무 강은 일렁이거나 다만, 고요할 뿐인데 목요일의 아이는 길을 떠나고
내간체
안현미
결혼 후 한 계절이 지났습니다 입덧이 시작되었고 제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있습니다 너무 서둘러 시집왔나 생각해봅니다 입안이 얼얼하고 간혹 어린 엄마였던 언니가 너무 사무칩니다
삶의 비애를 적확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닐 테지만 나를 보아 너무 서둘지 않아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어리고 영민한 여자가 현모양처가 되기란 동서남북 이 천지간에서 얼마나 얼얼해야 하는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너도 곧 엄마가 되겠구나 무구하게 당도할 누군가의 기원이 되겠구나 여러 계절이 흘렀으나 나는 오늘도 여러개의 얼음을 사용했고 아무도 몰래 여러개의 울음을 얼렸지만 그 안에 국화 꽃잎을 넣었더니 하루 종일 이마 위에 국화향이 가득하였다 그 향을 써 보낸다 그저 얼얼하다 삶이
내 책상 위의 2009
안현미
그림과 음악과 호찌민 평전이 있다 먼지가 두껍게 앉은 스탠드도 있다 까망도 있다 의무감도 있다 최선을 다해보려 낑낑대는 나도 있다 없는 것들까지 있다 밤도 있다 겨울도 있다 아킬레스건도 있다 꿈도 있다 21세기가 있다 100명의 소녀들에게 아침을 나눠주는 당신이 있다 영원이 있다 희미한 희망이 있다 까망을 사랑하는 빨강이 있다 파랑과 합체하는 빨강도 있다 무채색과 어울리는 바람도 있다 색깔론이 있다 분단과 녹슬어가는 자본주의가 있다 바겐쎄일이 있다 후일담도 있다 MB노믹스도 있고 MB악법도 있다 30년과 10년 종류별 '잃어버린'도 있다 그림과 음악과 호찌민 평전이 있다 먼지가 두껍게 앉은 스탠드도 있다 뉴타운 천국 실업자천국 씨네마천국 김밥천국 호기심천국 천국도 종류별로 있다 그때 그 시절! 복고열풍도 있다 냉전도 반민주도 복고 복고, 지지고 볶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던, 엄마만 없다
넘보라살 혹은 The invisible
안현미
빨주노초파남보 너머
넘보라살*
보이지 않는 빛
어두컴컴한 자궁, 술집에서 술병의 구멍처럼만 보는 사내들과 조개탕에 소주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 취기를 꺾지 못하는 여자의 새벽은
헛구역질을 해대고,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벌어진 조개처럼 껍데기만 쌓인 말들의 무덤...... 사랑에 대하여, 순정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더는 말하지 않는 사내들 틈 조개탕이 되었던 술자리 함부러 더듬는 혀들을 거세하고 싶던 살의 마저 난장 뒤의 쓸쓸함을 견디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를 부정하지 말라!
다리 위에서 `절규`하던 사내는 내 아들이었다, 고 절규하는 보이지 않는 여자
보이지 않는 절규
보이지 않는 여자
보이지 않는 빛
그러나 반드시 존재하고 있는
넘보라살 혹은 The invisible !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고요?
* 자외선의 다른 이름
뉴타운 천국
안현미
저녁을 훔친 자는 망루에서 펄럭거리는 깃발에 피를 퍼부었고, 권력과 자본의 화친은 미친 화를 불러왔다
북적이는 시장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며 지혜롭게 늙어가던 포도나무는 철거용역들이 함부로 휘갈긴 빨강 락카 스프레이 해골들만 득시글득시글 거리는 철거촌에서 포크레인에 찍혀 죽었다
한 번 태어났지만 돈이 없으면 두 번도 세 번도 죽어야 하는 세상
저녁을 훔친 자들만의 장밋빛 청사진
뉴타운 천국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내 집 주니 새 집 주네?
풀 풀 풀 정처도 없이
뿔 뿔 뿔 정체도 없이
어떤 사람들은 어느 날 느닷없이 자신의 왼손을 잘리고 남은 생을 오른손잡이로 살아가야 하는 왼손잡이처럼, 자신의 뿌리를 잘리고 남은 생을 자신의 뿌리 바깥에서만 살아가야 한다
다뉴세문경
안현미
언젠가 나는 거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오늘밤이 될지는 몰랐지만 말입니다
거울 밖엔 장미가 한창입니다
어디선가 몰려온 구름처럼 무거운 음악이 흐르는
이 곳을 빠져나가면 앞도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는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사랑에 빠져버릴 수 있었던 초능력을 상실한 지 너무 오래
다시 장미는 피는데 나는 죽은 사람인 것만 같습니다
자명종이 울리는 밤입니다
다른 세상이 열릴 것만 같은 밤입니다
언젠가 나는 거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물냉면을 먹고 낙산 성곽 길을 내려오던 밤,
당신이 내게 건넨 다뉴세문경을 닮은 거울에 대하여,
그 거울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무늬에 대하여,
오랜 세월 땅 속에 묻혀있던 그 거울에 비쳤을
오래된 어둠에 대하여, 오래된 두려움에 대하여,
그 거울에 새겨진 삼각형문이 주술에서는
재생을 의미한다고 말해주던 당신의 옆얼굴에 대하여,
다시 자명종이 울리는 밤입니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거울 속입니다
단풍나무 고양이
안현미
1
장마전선이 북상하는 중이었다
우산도 없이 학교에 간 아이가
어린 고양이를 안고 돌아왔다
며칠 밤 내내 울음을 쏟아놓던 고양이
탈수증 환자처럼 털빛은 사그라지고
눈동자엔 눈곱처럼 죽음이 붙어 있다
동물병원 늙은 수의사는 청진기도 대보지 않고
함부로 가망이 없다 했다
2
묘지를 찾아가고 있었다
죽은 고양이와 함께
종착역에서 종착역으로
요령부득 구겨진 구두코만 바라보며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모든 것들이 삶이고 죽음이라고
죽은 고양이가 담긴 상자 속에서
나를 지나 저 생으로 건너가는 냄새
너는 왜 내게로 와서 목숨을 끊었니
나는 신부도 아닌데
희생양이 아닌 희생 고양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보시는 육보시라고
부처라는 사내가 말했다지
3
단풍전선이 남향하는 중이었다
일기예보에선 어떤 삶과 죽음도 예보되지 않았지만
단풍나무를 물들인 어린 고양이의 목숨
온 천지간(天地間)을 울긋불긋 물들이며 활활 번져가고 있었다
오드아이를 가진 고양이처럼 가을이 깊었다
대낮의 부림 나이트로 오실래요?
안현미
장바구니를 들고 와도 좋아요 입장료 3천 원만 내시면 검은 커튼이 쳐진 카운터에서 웨이터 클놈을 찾으세요 시장바구니에 담긴 생선처럼 한물간 스타들도 있어요 조용팔과 너훈아 패쓰김이 보이지요? 왕년의 스타들 노래를 들으며 휙휙 돌아버린 세상 우리도 빙빙 돌아봐요 파트너가 없으시다구요? 정육점 불빛 같은 조명 아래 남자들을 못 보셨군요? 거기 전깃줄의 제비처럼 양복을 빼입은 남자들이 총총히 앉아있잖아요? 그들 모두 저격수를 기다리는 제비들이죠 장바구니에 담아온 장총을 꺼내세요 그리고 마음에 드는 제비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요 총알이 빗나가도 제비는 영락없이 당신에게 사로잡힐 테니 걱정 같은 건 붙들어매세요 이제 준비가 되셨나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학원으로 갈 테고 남편은 부림장에서 열심히 땀흘리고 있을 테니 안심하세요 그럼 시작할까요? 간드러지게 꺾이는 트롯트에 맞춰 비듬 낀 일상을 털어 버리세요 부림나이트가 왜 부름나이튼지 아세요 사모님? 반찬 걱정 돈 걱정 오만 걱정 다 잊어버리고 신나게 몸부림치는 곳이라서 <부림나이트>죠 <몸부림나이트>는 좀 저급하잖아요 우리 고급스럽게(몸) 부림(復臨) 쳐봐요 한물간 삶도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신다구요? 그럼 내일도 대낮의 부림 나이트로 오실래요? 싸모님!
독거
안현미
일요일은 동굴처럼 깊다 압력밥솥에서 압력이 빠지는 소리를 베토벤 5번 교향곡 운명만큼 좋아한다 그 소리는 흩어진 식구들을 부르는 음악 같다 일요일은 음악 같다 십자가는 날개 같다 천사의 날개 고난 버전 같은 십자가 아래 누군가 깨지지도 않은 거울을 내다 버렸다 교회에 가듯 그 거울 속에 가서 한참을 회개하다 돌아왔다 의문에 휩싸였다 풀려난 사람처럼 일요일은 아파도 좋았다 크게 잘살지도 못했지만 크게 잘못 살지도 않을 것이다 비록 지갑엔 천원 밖에 없고 깊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삭제 당했지만 자꾸 회개하고 싶은 일요일 압력 빠진 압력밥솥처럼 푸근한 일요일 세상천지 어디 한 곳 압력을 행사할 데가 없는 이 삶이 고맙다고 기도하는 일요일 거꾸로 읽어도 일요일은 일요일 그래서 자꾸 거꾸로 읽고 싶은 일요일 무료도 유료도 아닌 일요일 사랑할 수는 있었지만 사랑을 초과할 수는 없었던 인생을 헌금 바구니처럼 들고 있던 우리의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안현미
서둘러 밥을 먹고 낙산으로 산책 가는
점심시간
산동네 담벼락에 누군가 그려놓은 낙타가
베란다 그늘 아래 서 있다
그늘 아래서 꿈꾸고 있다
시원한 꿈이겠다
내가 탐하는 그늘은 고비사막에 있다
내 더듬이는 한번 더듬은 것들을 지문처럼 새긴다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나는 그게 시라고 생각한다
서둘러 산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점심시간
내가 먹은 밥은 그곳에 있다
나는 그게 시라고 쓰고 싶다
둥근 밤
안현미
새벽의 국도를 달리는 걸 좋아해
보는 사람 없어도 켜져 있는 가로등들과
어둡고 조용한 가로수들 그리고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아도 좋은
어디에도 없는 사랑을 향해
달리는 암흑 속 어딘가
바다가 있다고 믿으며
새벽의 국도를 달리는
8월의 나비와 9월의 나비가
몸을 섞는 삶도 죽음도
둥근 밤
뛰어다니는 비
안현미
수협 조끼를 입은 남자가 박카스를 돌리자
대게철이 시작됐다 주황색은 어디서 왔을까
달을 찍고 싶었으나 귤을 찍는다
인생이 대개 그와 같다.
호불호를 떠나야 한다
여자도 남자도 극복해야 한다
낯설고 두려운 세계로 초대된 우리들
내 불행은 내가 알아서 할 것
대게는 대게로
고양이는 고양이로
나는 나로 죽을 것이다
할머니라고 아홉 번이나 불렸고
삼만 살처럼 피곤해도
소만(小滿)에는 립스틱을 사자
동문하고 서답하자
내 물음과 내 울음은 내가 알아서 할 것
주황색은 어디서 왔을까
뢴트겐 사진
안현미
나 자주자주 까먹어요
슬픔을 고독을 사탕처럼 까먹어요
여러 빛깔의 사탕처럼
여러 빛깔의 사랑을 까먹고도 나 배고파요
나 배고파 어느 날은 몰래 사내의 꽃나무 열매를 까먹고선 까무룩 혼절해요
사랑은 혼절이 아니면 혼돈이에요
내가 틀린 걸까요?
나 자주자주 까먹어요
월요일을 예술가를 부엌을 생활을 까먹어요
까먹어도 까먹어도 줄지 않는 고독
까먹어도 까먹어도
돌아오는 계절들 까먹다 까먹다
마침내는 나까지 까먹고
나는 그저 우는 아이의 막대사탕 같은 엄마예요
내가 틀린 걸까요?
리라들
안현미
녹슨 호미를 들고 뒤란 꽃밭의 잡초를 솎아 낼 때,
슬픔은 슬픔의 얼굴을 버려두고 아리랑을 부른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마루 기둥의 자명종 새로 두 시를 알리고
녹슨 리라의 현을 뜯듯 한 때의 소나기가 다녀가는 마당
'Ann도 오고 비도 온날'이란 긴 이름을 달아준 여름 화병처럼 아름답고
환타처럼 달큼하던 여름 일상은 일상의 얼굴을 버려두고 아리랑을 부른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빨강은 더욱 빨갛게 파랑은 더욱 파랗게 제 몫의 색깔로 빛나는 스케치북
낮에는 돈 벌고 밤에는 시 쓴다 개미처럼 쓴다 까맣게 까맣게 쓴다
까맣게 까맣게 언어는 언어를 버려두고 아리랑을 부른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일곱 개의 낮과 일곱 개의 밤이 매일매일 공평하게 배달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일곱 개의 현을 가진 나의 리라들 고삐 풀린 말처럼
다다다다 언어의 대륙을 질주하는 나의 리라들
마스크드레스
안현미
책 한 권 질문 하나 침묵 두 개를 들고
여자가 도착했네
자신이 내쉰 숨을
자신이 다시 들이쉬면서도
숨 막히게 아름다운
마스크를 쓴,
태양 하나 달 하나 지구 두 개를 들고
여자가 도착했네
사랑을 바늘처럼 들고
버려진 숨결들을 꿰맨
숨 막히게 아름다운
마스크드레스를 입은
마침표
안현미
자하문 고개를 넘어갔지요 서쪽 하늘에선 노을이 지고 있었고 나는 세검정(洗劍亭)에 도착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지요 내가 도착해야 하는 곳은 해가 뜨는 곳이고 당신이 도착해야 하는 곳은 해가 지는 곳 해가 뜨는 곳과 해가 지는 곳 사이에 세상의 모든 아침과 저녁이 있지요 사랑은 그렇게 모든 것이죠 그녀가 맨발로 다다르고 싶어 했던 천상의 시간일지도 모르고 그가 가지 않았으나 꿰뚫어본 0시의 어둠일지도 모르는 채 그것은 그렇게 그냥 이미 내게 도착했거나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요 아프지 말아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녔어, 라고 말해주기에 나는 당신 때문에 아픈 걸 테지요 이제 마음을 도려낸 칼을 씻고 그렇게 그냥 세검정처럼 시간을 잃어야 할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요.
목숨 시 전농 스트리트 - 박진성 시 「목숨」에 부쳐
안현미
네가 이 거리로 도착하던 날은 네가 빠뜨린 눈물 하나 목련꽃으로 피는 봄밤이었지 우리가 모두 한 개의 작은 슬픔의 꽃씨였던 때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는데 너는 시구문(屍口門) 밖을 다녀온 사람의 낯빛을 하고선 손을 내밀었지 낮 동안 모니터를 닦다 돌아온 내 지친 손이 네 손을 잡을 때 목숨은 아직 뜨거움이어서 네 손과 내 손이 따뜻해졌지 3월인데 우린 아프고 가엾은 영혼이었지 3월인데 알프라졸람과 폭설 속에서 우린 술을 마셨지 식어버린 닭도리탕을 다시 데우고 데우면서 술과 병을 나누어 마셨지 나누어 마신 술병들 새로 비탈에 선 느티나무 같아서 뿌리를 뻗어 목, 숨, 목, 숨, 시인아 시인아 숨쉬러 가자 발작할 것 같았지만 같은 해에 등단한 우리의 발이 디디고 있건 목숨시 전농스트리트 네가 빠뜨린 눈물 하나 목숨꽃으로 피던, 봄이고 밤이었던 봄밤을 기억해다오 오오 목숨!
몽
안현미
귀가 잘린 사내가 화구를 메고
꿈속으로 걸어들어와
피 묻는 헝겊을 주고 퇴장한다
헝겊엔
‘세잔의 사과는 세잔의 사과일 뿐’
나는 그의 귀를 선물받은 창녀를 모르고
꿈을 찍은 구로자와 아키라도 모르는데
내 꿈속에는 「라쇼몽」에 내리던 비가 내리고
아내와 도둑이 등장한다
나는 프로이트도 모르는데
숲 속에선 빨간 사과가 익어가고
도둑은 사과를 삼키고
사무라이는 살해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사무라이와 도둑에게 버림받고
나뭇꾼은 내 아이를 데리고 나생문(羅生門)을 떠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꿈 밖에서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누르고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온
주, 홍, 글, 씨
세잔의 사과는 세잔의 사과일 뿐
다만 그뿐
몽유병
안현미
남종면 향리 느티나무......
......너처럼 깊게 뿌리박고싶어
.......매일밤 무서운 잠으로부터
맨발로 도망쳐 .........
너를 부둥켜안고
잘못태어났어
......어났어태못잘
흐느껴 우는 병속의 여자
깨지지도 않는 날들이
.....악몽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감옥에서
슬프게 그러나 곱게 미친,
..........그 여자
어둔 잠 속 나를 위해
매일밤 느티나무 네 잎의 숨결을......
훔치러 가던 그 여자
어느 날 성난 사내가 안에서 지른 빗장으로
그 여자 영영 돌아가 버리고.......
그 여자가 전해주던 네 잎의 숨결
.......받지 못하는 내 꿈은
꽃병에 담긴 물처럼
...........썩어가고 있어
나 몽유병에 꽂혀 죽어 가고 있어
잘...잘못...태...태어나...난 게 아...아니라
잘...잘못...꿈...꿈꾼 건가봐!
미리우(美里雨)
안현미
당신의 눈동자 속에는 한 그루의 미루나무가 서 있고 미루나무 꼭대기에선 당신의 어머니를 닮은 여자가 용접 불꽃을 떨어뜨리며 구름을 조각하고 있다 용접 불꽃이 떨어진 자리엔 마을의 아기들이 자라는 꽃밭이 있고 꽃밭지기 늙은 장님은 젖동냥을 하러 나가 늪에서 헤매고 있다 꽃밭에선 여덟 번째 여름이 여덟 번째 가을을 막 출산하려 하고 마을의 이장은 새로 태어날 계절을 위해 서낭당에 재를 올리는 중이다 물초롱을 닮은 구름은 곳집 그늘에다 비를 내리고 비는 곳집 그늘을 싣고 젖동냥을 나선 장님의 하초를 지나 이장의 초록빛 영농 후계자 모자를 지나 아기들이 자라는 꽃밭을 짓밟은 구두 발자국에서 잠시 쉬다 비행접시 모양의 구름을 타고 마을을 떠난다 막 태어난 여덟 번째 가을은 꽃밭으로 달려가 8명의 난쟁이들을 바구니에 담고 미루나무 꼭대기의 여자에게로 가 청혼한다 화요일이면서 엄마인 여자는 용접 불꽃을 여덟 번째 가을에게 건네주고 8명의 난쟁이가 든 바구니를 들고 나팔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 구름 속에선 세상의 ∞한 아픔을 대신해서 불어주는 8명의 난쟁이들의 나팔 소리가 들리고 화요일이면서 엄마인 여자는 제 살과 피를 짜내 검은 유두빛 약을 달인다 8명의 난쟁이들 중 가장 작은 난쟁이가 약을 가지고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의 우물에선 젖이 출렁거리고 꽃밭지기 늙은 장님은 눈을 뜨고 꽃밭을 망쳐놓았던 구둣발 자국에선 다시 꽃이 피고 마을 이장의 오랜 두통거리였던 꽃의 씨들이 탱글탱글 익어간다
비 내리는 아름다운 마을 어귀 서낭당엔 한 그루의 미루나무가 서 있고 미루나무 꼭대기엔 당신의 어머니를 닮은 여자가 조각한 당신의 눈동자가 걸려 있다
배롱나무의 안쪽
안현미
마음을 고쳐먹을 요량으로 찾아갔던가, 개심사, 고쳐먹을 마음을 내 눈앞에 가져와보라고 배롱 나무는 일갈했던가, 개심사, 주저앉아버린 마음을 끝끝내 주섬주섬 챙겨서 돌아와야 했던가, 하여 벌벌벌 떨면서도 돌아와 약탕기를 씻었던가, 위독은 위독일 뿐 죽음은 아니기에 배롱나무 가지를 달여 삶 쪽으로 기운을 뻗쳤던가, 개심사, 하여 삶은 차도를 보였던가, 바야흐로 만화방창(萬化方暢)을 지나 천우사화(天雨四花)로 열리고 싶은 마음이여, 개심사, 얼어붙은 강을, 마음을 기어이 부여잡고 안쪽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만삭의
백퍼센트 호텔
안현미
악어가죽 가방을 든 여자가 도착한다 결정적으로 코를 빠뜨린 녹색 가디건을 입고 있다 비에 젖은 트렁크에선 빗물이 떨어지고 있다 호텔로비의 괘종시계는 자정을 가리킨다 콧수염을 손질하던 카운터의 남자가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묻는다 얼마나 투숙하실 건가요? 나는 이곳에서 일곱 번의 봄을 사용할 거예요 호텔 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빗속엔 얼마간의 아프리카 향이 함유되어 있다 전망이 좋았으면 좋겠어요 결정적으로 여기는 백퍼센트 호텔이지요 일곱 번의 봄을 충분히 사용하실 수 있답니다 그러나 당신은 결정적으로 코를 빠뜨렸으니 당신은 당신 자신을 견뎌야 할 겁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여자는 신중하게 대답을 골랐다 AEC8
그것은 거의 아름다웠다
벚꽃 대국
안현미
우리는 밤새도록 사랑을 했네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쉰 살의 당신과 열아홉 살의 나
첫 직장에 입사하는 나와
대학교를 졸업하는 당신
산산조각으로 희고 검은
우리는 밤새도록 사랑을 했네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돌을 던진 당신과 사표를 쓴 나
기차를 타러 가는 당신과
실업급여를 타러 가는 나
산산조각으로 산산조각으로
우리는 밤새도록 사랑을 했네
죽여줄 때까지 죽고 싶을 때까지
중력과 권력 AI와 고독에 맞서며
서른 살의 나와 아홉 살의 당신
탈을 쓴 당신과 털을 기른 나
검은 돌이 흰 돌을 사랑하듯
희고 검은 산산조각으로
우리는 밤새도록 사랑을 했네
죽여줄 때까지 죽고 싶을 때까지
무한하면서 유한한 유한하면서 무한한
미래이면서 반미래인 반미래이면서 미래인
하나의 거울이 두 개의 얼굴을 비추듯
두 개의 얼굴을 하나의 거울이 비추듯
불혹, 블랙홀
안현미
칼 쎄이건의 저서『코스모스』를 참조하자면 약 150억년의 나이를 가진 우주의 역사를 달력의 년으로 줄인다면 지구의 탄생은 9월 중순 어느날 일어난 사건이며 그후 10일쯤 지나 최초의 생물이 싹트고 인간의 조상이 불을 사용하게 된 것은 12월 마지막 날의 마지막 15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으며 지나가는 시간을 잠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잠시 사는 것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으며 지나가는 시간을 잠시 씹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잠시 사는 것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삶을 인용해서 살고 있는 것만 같은
불혹, 블랙홀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꼭꼭 씹어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는 일만으로도
나는 잠시 너를 사랑하는 것
* 어디선가 읽고 메모해두었지만 어디서 읽은 건지는 잊었다. 잊어먹는 동안에도 나는 살고 있었던 것이고 곤드레나물밥은, 시간은, 가끔 맛있었다.
비굴 레시피
안현미
재료
비굴 24개 / 대파 1대 / 마늘 4알
눈물 1큰술 / 미증유의 시간 24h
만드는 법
1. 비굴을 흐르는 물에 얼른 흔들어 씻어낸다.
2. 찌그러진 냄비에 대파, 마늘, 눈물, 미증유의 시간을 붓고 팔팔 끓인다.
3. 비굴이 끓어서 국물에 비굴 맛이 우러나고 비굴이 탱글탱글하게 익으면 먹는다.
그러니까 오늘은
비굴을 잔굴, 석화, 홍굴, 보살굴, 석사처럼
영양이 듬뿍 들어 있는 굴의 한 종류로 읽고 싶다
생각컨대 한순간도 비굴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므로
비굴은 나를 시 쓰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체하게 하고
이별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당신을 향한 뼈 없는 마음을 간직하게 하고
그 마음이 뼈 없는 몸이 되어 비굴이 된 것이니
그러니까 내일 당도할 오늘도
나는 비굴하고 비굴하다
팔팔 끓인 뼈 없는 마음과 몸인
비굴을 당신이 맛있게 먹어준다면
비망록
안현미
마침표 같은 눈물이
단 한 방울이라도 바닥에 떨어져
찍히는 날엔 모 든 것이 끝이다, 라고
믿는 사내의 가슴속엔 총알이
자동으로 튕겨져 올라오는
말줄임표의 탄창이 있다.
올 봄엔 벚꽃이 피면, 그게
모두 하나하나의 마침표처럼
보일 것 같 아. 후두둑.
떨어지는 마침표 아래서.
나는 아무도 몰래 울게 될 것
같아. 그리고는 말간 얼굴로.
내 몸속에 나이테 하나를 더
간직하겠지.
그 속에 앉아 백 년쯤 기다리는 여자가 될 테야.
말줄임표의 탄창을 닦으며. 무섭지?
비처럼 음악처럼
안현미
새춘천교회 가는 길 전생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을 때 흩뿌리는 몇 개의 빗방울 당신을 향한 찬송가 같았지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찬송가를 불렀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지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기도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담배불을 붙어줬던가
그 교회 길 건너편엔 마당에 잡초 무성한 텅 빈 이층 양옥집도 있었던가
그 마당에 우리의 슬픔처럼 무성한 잡초를 모두 뽑고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쑤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
그렇게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꼬드겨보고 싶었던가
그럴까 봐 당신은 이 생에 나를 술래로 세워놓고 돌아오지 않는 기차를 탔던가
춘천을 떠나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다 공지천 `이디오피아` 창가에 앉아 돌아오지 않는 당신의 눈썹에서 주워온 몇 개의 비애를 안주로 비루를 마실 때 막 사랑을 하기 시작한 연인들의 백조는 물 위에서 뒤뚱뒤뚱, 그 뒤뚱뒤뚱거림조차 사랑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는데 아직도 찬송가처럼 몇 개의 빗방울 흩뿌리고 있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
빌라에 산다
안현미
극락은 공간이 아니라 순간 속에 있다 죽고 싶었던 적도 살고 싶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꿈을 묘로 몽을 고양이로 번역하면서 산다 침묵하며 산다 숨죽이며 산다 쉼표처럼 감자꽃 옆에서 산다 시 옆에서 산다 착각하면서 산다 올챙이인지 개구리인지 헷갈리며 산다 술은 물이고 시는 불이라고 주장하면서 산다 물불 안 가리고 자신 있게 살진 못했으나 자신 있게 죽을 자신은 있다고 주장하며 산다 법 없이 산다 겁 없이 산다 숨만 쉬어도 최저 100은 있어야 된다는 데 주제넘게 정규직을 때려치우는 모험을 하며 산다 시대착오를 즐기며 산다 번뇌하며 산다 죽기 위해 산다 그냥 산다 빌라에 산다 그런데,
어머니는 왜서 자꾸 어디 니이껴 하고 물을까
빗살무늬토기
안현미
1
2층 통유리 찻집 <파우>
여자는 사선으로 쓰러지는 비를 바라본다
2
너른 운동장 너머 먼 숲이
공을 차다 돌아가는 아이들의 얼굴처럼 푸르다
살아있는 것들의 환한 소란스러움!
3
비가 성큼 다가선다
비파(琵琶)다
묵은 슬픔이 활 위에서 아슬아슬하다
4
<파우> 창밖
흙탕물 웅덩이
노란 비옷의 사내가
파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자전거 바큇살에 낀 빗살이
자막처럼 튀어 오른다
빗살이 여자의 가슴을 찌른다
사내는 돌아오지 않는다
5
<파우>는 무덤 속
아니,
나의 전생 같다
0
여자는
발굴되지 못한
빗살무늬토기
사랑
안현미
연암은 열하를 일러 '사나이가 울 만한 곳'이라 했다는데
당신은 바다를 일러 '사랑이 울 만한 곳' 이라 한다.
지금은 세계가 확장되는 시간
난 한번도 세계를 제대로 읽어본 적 없다
그건 늘 당신으로부터 사랑이 왔기 때문
그밖의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아주 나중에 말할 수 있다
지금은 사랑이 확장되는 시간
물고기가 키스하는
이 명랑, 이 발랄!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떤 시간을 활용할 지 아는 연인처럼
혹은 맨 처음 바다로 나아간 최초의 사람처럼
우리는 진짜 인생을 원해
저 바람 좀 봐 애인을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저 파랑, 저 망망!
그리고 공연히 무작정의 눈물이 왔다
사랑 2.0
안현미
옥상 장독대 위 산당화
산당화 위 안테나
안테나 위 뭉게구름
뭉게구름 위 비행기
떴다 떴다 비행기 우리 비행기
그해 내 마음의 가장 높은 봄을 지나
아득히 날아가던 너라는 비행기
삶은 나
안현미
나는 나의 발명가 화요일이면서 엄마인 여자
나는 나의 꽃밭 쓸데없이 아름다운 생각들을 심어 놓은 꽃밭
나는 나의 채집가 휘발하는 시간의 뒷모습을 채집해 놓은 액자
나는 나의 조각가 고독 속에서 영혼을 꺼내는 우울한 조각가
나는 나의 방랑자 지도에도 없는 나를 방랑하는 가난한 방랑자
나는 나의 자궁 스스로 엄마가 되어 나를 낳는 자궁
나는 나의 식자공 자음과 모음을 두드려 만드는 시
나는 나의 테러리스트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파괴할 생각에 찬 테러리스트
테라스를 지나 세상의 고독한 사람들이 꿈속으로, 애인 속으로, 사이버 게임 속으로,
혹은 불면 속으로 들어가 있을 시간, 나는 소녀와 엄마와 창녀를 한 몸에 한 영혼에
가진 치명적인 여자 나는 추문을 일으키는 여자이고 더없이 멋진 여자이니* 테라스를 지나
나는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파괴할 생각에 찬 나의 테러리스트
나는 자음과 모음을 두드려 시를 만드는 나의 식자공
나는 스스로 엄마가 되어 나를 낳는 나의 자궁
나는 지도에도 없는 나를 방랑하는 가난한 나의 방랑자
나는 고독 속에서 영혼을 꺼내는 우울한 나의 조각가
나는 휘발하는 시간의 뒷모습을 채집해 놓은 나의 채집가
나는 쓸데없이 아름다운 생각들을 심어 놓은 나의 꽃밭
나는 화요일이면서 엄마인 나의 발명가
나는 나의 그림자의 나
푹푹 삶아 먹는
삶은 나
상수리나무
안현미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배봉산 근린공원에 갔지 사는 게 바빠 지척에 두고도 십 년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그곳 상수리나무라는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지 고독인지 낙엽인지 죽음인지 삶인지 오래 묵은 냄새가 푸근했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날 죽음이 다음이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배봉산 근린공원에 갔지 바퀴 달린 신발을 신은 아이는 바퀴를 굴리며 혼자 놀고 있었지 어차피 잠시 동안만 그렇게 함께 있는 거지 백 년 후에는 아이도 나도 없지 상수리나무만 홀로 남아 오래전 먼저 저를 안아버렸던 여자의 젖가슴을 기억해 줄 테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날 그곳에 갔지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지 죽음이 다음이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상수리나무를 만나러 갔지
색연필 숲
안현미
매일매일 내게로 여행 오는 숲
오늘은 그 숲의 나무를 다르게 번역한다
자전거 여름곰 필경사 자가수분
시신경 나침반
참 아름답고 먼
은빛 바퀴처럼 구르는 생각들
그 생각들의 날개를 달고
날숨과 들숨의 경계로 날아가는
눈 먼 단어들
자전거 여름곰 필경사 자가수문
시신경 나침반
참 아름답고 먼
하시시 하시시 오늘 그 숲에선 시(詩)가 들린다
12색 크레파스는 12월을 닮았다
생계
안현미
스피노자는 생계를 위해 렌즈를 갈았다는데 나는 어쩌다 생계를 잃고 쑥을 뜯고 밤을 줍고 잣을 까고 은행을 모으며 밤나무의 밤은 향나무의 향은 어떻게 오는지 궁금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낮에 저주받을 것이며 밤에 저주받을 것이다 잠잘 때 저주받고 일어날 때 저주받으리라*
스피노자는 생계를 위해 렌즈를 갈았다는데 나는 어쩌다 생계도 잃고 기꺼이 저주받더라도 생의 고통을 갈고 닦으며 우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지옥 속에 지옥을 사주하고 가난 속에 가난을 저주하는 자들은 누구인지 묻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 스피노자가 유대 공동체로부터 파문당하며 들었던 저주
세월호못봇
안현미
끝내기 위해서는 시작해야만 한다고 쓴다 끝날 줄 알면서도 시작했다고 쓴다 그리하여 개조해야 할 특별대책과 특급망언 들만 부표처럼 떠 있는 맹골수도 속으로 세월호는 침몰해야만 했다고 쓴다 100일이 넘도록 오직 하나 진실을 알고 싶다며 눈물의 입구에서 눈물의 비상구까지 애통하게 견뎌온 엄마들이 있다고 쓴다 이제 그만 유사대책과 유사눈물에 최선을 그만두자고 쓴다 최악을 그만두라고 쓴다 그게 뭐든 누구든 희망고문은 그만 닥치라고 쓴다 진보도 보수도 멀었다고 쓴다 이제 그만 그리운 이름 옆에서 살고 싶다고 쓴다 죽고 싶다고 쓴다 내 새끼가 너무 보고 싶다는 말이 못이 되어 박혔다고 쓴다 다 판다더니 정말 다 팔았다고 쓴다 지옥까지 팔았다고 쓴다 그게 뭐든 누구든 내 새끼를 보고 싶다는 말에 못박혀야 한다고 쓴다
죽어도 죽어도 죽을 수는 없다고 쓴다 죽어도 죽어도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고 쓴다
수학여행 가는 나무
안현미
나무는 쓴다 우리 모두가 연루되어 있다고 겨울에도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수요일에도 수요일에도 수요일에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쓴다. 결국 떠날 수 있는 건 없다고 쓴다 다만 울음이 바닥났을 뿐이라고 나무는 쓴다.
나무는 운다 굴뚝 위에 독재 위에 철탑 위에 올라간 사람들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위해 나무는 운다. 우리는 까닭이고 바보라고 나무는 운다
뿌리는 간다. 어둠을 뚫고 바위를 타고 계급을 넘어 뿌리는 간다. 울음을 찾아 울음의 핵심을 향해 울음의 연대를 위를 뿌리는 간다 사월로 오월로 세월에로 뿌리는 간다
나무는 난다 세계는 늘 위독하지만 특별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특별해진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그 특별한 사랑을 기억하며 기록하며 나무는 난다 나무는 날아오를 것이다
시간들
안현미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하여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일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일곱 걸음을 더 걸어와 다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태백에 왔습니다 한때 간곡하게 나이기를 바랐던 사랑은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사랑이 죽어서도 나무인 것은 시간들의 일이었습니다
시구문(屍口門) 밖, 봄
안현미
착란에 휩싸인 봄이 그리워요. 비애도 회한도 없는 얼굴로 당신들은 너무나 말짱하잖아요. 착란이 나를 엎질러요. 엎질러진 나는 반성할까, 뻔뻔할까, 나의 죄는 가난도 가면도 아니에요. 파란 아침이고 시구문 밖으로 나가면 끝날 이 고통도 아직은 내 거에요. 친절하지 않을래요 종합선물세트처럼 주어지는 생을 사는 건 당신들이지 나는 아니에요. 나는 착란의 운명을 타고난 빛나지 않는 별, 빛나는 별도 언젠가는 늙고 죽어요 우리 모두는 그런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만 영원을 살 것처럼 착란 속에서 살며 비애도 회한도 모르는 얼굴로 우리들은 너무나 말짱해요 착란에 휩싸인 봄이에요 사랑 받을 수 있다면 조국을 배신하겠어요 친구도 부정할 거예요 전 세계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가 아니죠 에디뜨 삐아프의 말이지만 그녀는 조국을 배신하지도 친구를 부정하지도 않았어요 같은 이유로 나는 착란에 휩싸여요 죽은 사람들만 불러모아 사망자 주식회사를 만들고 영원히 죽고 싶은 나는,
시구문 밖, 봄 활짝 핀 착란이 그리워요
시집가는 날
안현미
일요일, 시집갈 준비를 하러 간다
청량리역 500원짜리 입장권을 산다
무궁화호 기차에서 내린 시어머니의 산나물 배낭을 옮겨 진다
시계탑 위 햇빛이 수줍다
붉은 신호등 안에 갇힌 사내가 오늘은 저승사자 같다
백발성성한 시어머니의 옆얼굴을 슬쩍 훔쳐본다
아이 같다 사슴 같은 눈망울로
윤년 윤달에 수의를 사면 오래 산다고
조심스레 말하던 끝에 그럼 내가 사드릴께요, 했다
일요일, 시어머니 저세상으로 시집갈 때 입을
옷 한벌 사러 간다
족두리, 장삼, 치마, 버선, 손 싸개, 손톱 담는 주머니.....
옷태를 황천강에 비춰볼 땐 시집오던 날 같으실라는지
"수의를 높은 곳에 두면 오래오래 산다니 낮은 곳에 두렴"
함께 간 외숙모님 삼베옷을 쓸어보며 농을 건네신다
나는 그저 웃는다
박카스 한병과 삶은 고구마를 손에 쥐어주며
"고맙다, 우리 애기씨 옷도 사주고. 니가 큰일 했다" 하신다
시집와 겨우 옷 한벌 사드린 일밖에 한 게 없는데
겸연쩍어 박카스만 홀짝이다
집으로 돌아와 높은 곳에 수의를 올려놓는다
참기름 듬뿍 넣어 산나물을 무친다
생과 사를 무친다
시어머니 새색시 같다
식객
안현미
미술관 앞에서 애인처럼 만났다. 빨간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수영장과 목욕탕을 지나 라일락 꽃나무 아래서 마늘빵을 나눠 먹었다. 책방에 들러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란 제목의 똑같은 책을 사서 나눠 가졌다. 커플링처럼 나눠 가진 책. 어두워지기 시작한 골목으로 봄비가 왔다. 음악이 왔다. 고독도 왔다. 같은 제목의 책을 나눠 지녔듯 같은 착각을 나눠 가졌다. 그사이 애인들이 왔다. 아랍 탁자와 아랍 탁자 사이. 시간은 봄비와 음악과 고독을 연주하고 애인들은 달콤했다. 네팔 고산에서 야생하는 야크 젖으로 만든 치즈를 불에 구워 얇게 썬 사과와 함께 먹는 맛처럼. 같은 착각을 마지막까지 나눠 갖고 손을 흔들었다. 시구문 밖으로 들어서자 시간은 할증으로 포맷되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봄은 춘궁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식사(食死) 하세요
안현미
저는 성냥공장에 다녀요
그렇다고 제가 성냥팔이 소녀처럼 고아는 아니예요
제겐 부양해야 할 계부와 엄마도 있는걸요
저는 매일 공장에서 돌아와
계부와 엄마를 위한 식탁을 차려요
오늘은 제 생일이에요
엄마는 매번 똑같은 동화책을 선물해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가난이 죄는 아니니까요
그러나 조금 쓸쓸하긴 해요
계부와 엄마만 마시는 술을 사기 위한 돈을
조금만 아껴줬다면 어땠을까요
일 년에 겨우 한 번 있는 생일인데 말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저는 가끔 댄스홀에도 가는걸요
그렇지만 아무도 내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네요
저는 춤을추고 싶은데 말예요
가끔 저는 방화범을 꿈꿔요
세상을 확 불 질러 버리고 싶은 걸까요
저는 불을 훔친 코카서스의 사내도 아닌 데요
제 간땡이가 부은걸까요
오늘은 성냥공장에서 돌아와
아주 특별한 식탁을 차렸어요
맛있게 드셔 주세요
실내악(室內樂)
안현미
봄이 오는 쪽으로 빨래를 널어둔다
살림, 이라는 말을 풍선껌처럼 불어본다
옛날에 나는 까만 겨울이었지
산동네에서 살던,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실패하고 얼어 죽기엔 충분한
그런 무서운 말들도 봄이 오는 쪽으로 널어둔다
음악이 흐른다 빨래가 마른다
옛날에 옛날에 나는 엄마를 쭉쭉 빨아 먹었지
미모사 향기가 나던 연두, 라는 말을 아끼던
가볍고 환해지기엔 충분한
살림, 이라는 말을 빨고 빨고 또 빨아
봄이 오는 쪽으로 널어두던
실패라는 실패
안현미
퇴근길 청량리 종점행 지하철에서
발음이 뭉개진 어떤 사내
바늘이 들어 있는 실패를 불쑥 들이민다
사내는 자신의 발음처럼 뭉개진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가졌다
천 원짜리 한 장을 지불하고 산 실패
어쩌면 사내는 실패가 아니라
자신의 뭉개진 生을 팔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사창가를 지나며 중얼거린다
통유리창 마네킹 같은 어린 창녀아이
몇개의 실패를 팔고 싶으세요?
저는 대충 빨리 늙어도 괜찮거든요,
하는 얼굴로 내 손 안에 있는 실패를 본다
너는 내 실패도 받아주고 싶은거니? 어째서?
패를 잘못 뽑아든 어린 창녀아이와
홍등 아래 마주보고 서서 서로의 실패를 감아준다
실패엔 나와 발음이 뭉개진 사내와 어린 창녀아이의
엉킨 실타래 같은 꿈이 감긴다
색색깔의 실패!
사내는 뭉개진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실패를 팔고
어린 창녀 아이는 바늘을 집어삼킨 어굴로 실패를 살고
나는 곰곰이 실패라는 실패를 바느질한다
아주 작은 형용사야
안현미
나무 난로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여자의 갈비뼈 하나를 꺼내 들고
한 사내가 시간을 쪼개고 있다
난로 위엔 시간으로 끓인 주전자가
저 혼자 은밀하게 끓어오르며
노란 잠수정처럼 떠오르고 있다
시간을 쪼개다 지루해진 사내는
여자의 갈비뼈를 시간의 장작더미 위에 던져놓곤
정물처럼 버려져 있는 여자 속으로 들어간다
나 삼류야 양아치야 독 많은 옻나무야
뒷산 올빼미야 (넌) 아주 작은 형용사야
이제 네 갈비뼈는 너무 무뎌졌고
정물 같은 너도 지루해
나무 난로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시간으로 끓인 주전자엔
지루함도 바닥이 난다
여자는 식어버린 나무 난로에 기대
무뎌진 갈비뼈를 들고 밑줄 긋는다
나 아주 작은 형용사야
안개 사용법
안현미
안개 핀 호수를 건너 태백 이전으로 날아가는 시간들, 날아가 아픈 이마 위에 놓여질 착한 물수건 같은 시간들, 그 이마 위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를 미열들, 그 미열들을 끌어안고 안개꽃이 되고 있는 저 여자 제 꼬리를 문 물고기 같은 여자 한때 나였던 저 여자 활엽수 같은 웃음소리를 지닌 저 여자 '안개라는 건 누군가가 혼자서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에요' 십자말풀이처럼 안개를 사용하던 여자 한때 나였던 저 여자 안개를 끓여 모유처럼 배부르게 먹이던 여자 그 안개에선 극지까지 다녀온 바람의 냄새가 나고 말라죽은 나무의 이야기가 우러났다 그 안개를 '사랑'이라고 사용한 건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안개가 열일곱 묶음의 안개꽃이 된 건 시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안개유원지
안현미
모닥불이 톡, 톡 타오르고 있었다 강물 위로
네온사인 휘황한 유원지가 부표처럼 떠 있다
여름치마를 입은 계집아이는
새파랗게 질린 제 발목에 열중하고 있다
아스날 10개를 씹어 먹고도 피 한 방울 안 흘리는 노는 년이 돼야지
사내가 눈이 퉁퉁 부은 여자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며 말한다
눈이 퉁퉁 부은 여자는 대답 대신 시리게 찬 맥주만 단숨에 들이켠다
여름치마를 입은 계집아이가 방백을 하듯 중얼거린다
아저씨 대사는 삼류 연극 속 깡패 대사 같아요
언니는 그런 말에 감동이나 하구 멍청하게
지루해진 계집아이가 모닥불을 쑤석거리기 시작한다
사내는 여자의 비어 있는 술잔에 거품만 가득 따라준다
거품 속으로 여자의 눈물이 한 방울 똑 떨어진다
유원지에 버려진 여자 말예요 트렁크에서 발견된
이곳에선 살해되는 일마저 오락 같았을까요
호반 위로 밤안개가 짙게 깔리기 시작한다
안개는 부표처럼 떠 있는 유원지를 삼켜버리고
계집아이의 발목을 지나 여름치마 가득 안개꽃을 수놓는다
사내가 뿔테 안경을 벗어 흐려진 안경알을 닦고 있다
유원지의 겨울밤이 맛없는 인생처럼 타들어 가고 있다
똑똑 누군가 면도칼을 꼭꼭 씹고 있었다
알쏭달쏭 별별 이야기
안현미
파멸과 죽음을 물어다 주는 새 부엉이
풍향계가 가리킬 수 없는 방향으로 불어 간 바람
양, 황소, 쌍둥이, 게, 사자, 처녀……
별의 사용 부족으로 치매를 앓고 있는 천문학자가
2단 구구단처럼 외우는 황도 12궁
그때 천문학자의 눈가에서 별처럼 빛나던 물
봄의 대곡선, 여름의 대삼각형
가을의 사각형, 겨울의 다이아몬드
어느 날 불현듯 별을 좇아 수학을 버린 수학자가
아득한 밤하늘에 그리는 별들의 지도 위의 보이지 않는 꼭짓점들
그때 물병을 안고 등장하는 처녀
반인반수(半人半獸)를 사랑한 처녀
울다 잠든 천문학자의 얼굴을 물병자리 별처럼 바라보는
마법처럼, 찰박찰박 물소리를 음악처럼 연주하는
죽음은 없답니다 죽음은 껍데기를 벗는 일에 불과하지요
쿨룽 라마의 잠언을 詩처럼 읊는
전생에는 별들의 궤적을 짚으며 여러 生을 占치던
꼬끼오! 아침이면 닭의 모가지를 치던
어떤 삶의 가능성
안현미
스물두살 때 머리를 깎겠다고 전라도 장수에 간 적 있다 그곳엔 아주 아름다운 여승이 있었고 나와 함께 그곳에 머물던 경상도 아가씨는 훗날 운문사 강원으로 들어갔다 나는 돌아왔다 돌아와 한동안 무참함을 앓았다 새로운 인생이 막 시작되려는 중이었는데 내겐 거울도 지도도 없었고 그저 눈물뿐이었다 나는 나를 꺼내놓고 나를 벗고 싶었으나 끝내, 나는 나를 벗을 수 없었고 새로운 인생이 막 시작되려는 중이었는데 나는 감히 요절을 생각했으니 죄업은 무거웠으나 경기장 밖 미루나무는 무심으로 푸르렀고 그 무심함을 향해 새떼가 로켓처럼 솟아올랐다 다른 차원의 시간이 열리고 있었다 업은 무거웠으나 그런 날이 있었다
어떤 섬의 가능성
안현미
읽어보지 못한 소설의 제목을 읽으며 어떤 섬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당신을 생각한다 그 가능성의 다른 이름은 미셀 우엘벡이 될 가능성도 있고 내가 살아보고 싶었던 죽음일 가능성도 있다 혹은 내 인생에 스무 살 때 등장해 '넌 도라지꽃을 닮았어'라는 한 문장을 말한 이후 내 인생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 사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경우의 가능성으로 어떤 섬의 가능성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넌 도라지꽃을 닮았어' 이처럼 느닷없는 가능성, 불현듯 생을 육박해오는 그 가능성 불멸의 가능성 편서풍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 서른일곱 살에 국토의 최남단 마라도 간 친구를 생각하는 밤이다 고도로 고도로 간 시인을 생각하는 밤이다 서른일곱이 아니라 일흔일곱 살이었다 해도 그 가능성은 가능성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아으 취한 밤이고 탕진해도 탕진해도 바닥나지 않는 가능성을 저주하는 밤이고 죽음 이후에도 내가 나일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생각하다가 머리통이 박살 날 것 같아 그냥 '무얼 원해?' '어떤 섬의 모든 가능성!'이라고 서둘러 술잔을 비우는, 취한 밤이 아니고 취한 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 어떤 섬의 가능성: 미셀 우엘벡의 소설 제목.
어항 골목
안현미
고장 난 가로등처럼 서 있는 사내를 지나 방금 도착한 여자의 어깨에선 사막을 건너온 바람의 냄새가 났고 이 도시의 가장 후미진 모퉁이에선 부레처럼 골목이 부풀어 올라 고장 난 가로등처럼 서 있던 사내의 구두가 담기고 있다 첨벙, 여자는 의족(義足)을 벗고 부풀어 오른 골목으로 물소리를 내며 다이빙 한다 꼬리지느러미를 활발히 흔들며 언어 이전으로 헤엄쳐 간다 주름잡는다 여자의 주름에선 언어 이전에 있는 어떤 어항에서 꺼낸 것 같은 언어가 버블버블 푱푱 투명한 골목을 유영한다 인간의 남자를 사랑하여 아낌없이 버렸던 모든 것들이 버블버블 다시 태어난다 그 사이 젖은 구두를 벗은 사내도 산소통을 부레처럼 달고 언어를 떠나온다 어항 골목 고장 난 가로등엔 물고기 달이 켜진다 푱푱 골목 밖으로 여자의 의족이 폭죽처럼 떠오른다
언어 물회
안현미
말린 물고기만 씹으며 겨울을 난 사내가
물고기를 물에 말아 알뜰하게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있다
사랑할 때 애인의 몸을 뜯어 먹는 여자처럼
시든 언어만 씹으며 늙어가는 여자가
언어를 언어로 꿰어 멸망한 부족의 목걸이를 만들고 있다
죽을 때 스스로의 몸을 깊은 숲에 두는 족장처럼
사위어가는 것들의 모든 우울함으로 꽃은 피고
우울한 물고기의 이름은 우울한 물고기다
그것이 한계다
한계와 임계 사이에 언어가 있다
언어는 우울한 물고기 이름이다
이를테면 제대로 실패한 자만이 실패를 싱싱하게 맛볼 수 있다
여름 언니들
안현미
빨강과 파랑 초록과 보라
색깔을 레고처럼 가지고 노는
여름 언니들
여름은 비밀이 가득한 계절
파랑 물방울 사전, 초록 보라 선풍기, 빨강 코 수은주
낱말을 레고처럼 가지고 노는
여름 언니들
그 비밀의 온도 사상 최고치 경신!
팡, 팡, 팡
폭죽처럼 터지는
여름 언니들
더 이상 비밀은 비밀도 아니어서
눈물과 비밀 여자와 여자라는
레고를 가지고 제2의 성(城)을
쌓았다 허물고 허물었다 쌓는
여름 언니들
마침내, 여름 언니들 그 성의 여왕으로 등극!
여자비
안현미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 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메이던 소리
여행 온 아이가 여행 온 아이에게
안현미
여덟 번째 너를 눈 속에 보내며 운다
- 윤대녕, 『눈의 여행자』
연필 여덟 잘로 시를 쓰는 나를 너는 엄마라고 부르지
엄마라는 말은 시인이라는 말처럼 아득하지
여덟 살의 너는 내게 시를 생일 선물하지
연못
안현미
1
바쇼의
오래된 연못
개구리 한마리
퐁당!
2
퐁당퐁당
나를 던지자
바쇼 몰래
나를 던지자
연못아! 퍼져라
멀리멀리 퍼져라
건너편에 앉아서
하이쿠를 읊는
우리 바쇼 손등을
간질어주어라
3
사슬을
끊고
나를 던져
그, 대, 로
늪
4
사바의
인연의 늪
개구리 한 마리
아으!
연희 - 하다
안현미
장원에는 고양이와 꿩이 살고
자정이 오면 스무개의 창문은 목련처럼 피어오른다
나는 장원의 심부름꾼
고양이, 꿩, 창문, 목련의 꿈을 작물처럼 가꾸는 자
손님들은 계절마다 얼굴을 바꾸고
나는 계절마다 버려진 얼굴을 뒤집어쓰고
나는 유희하는 자
나는 연희하는 자
나는 환희하는 자
생각해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바람은 불어오고
또다른 국면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다
고양이, 꿩, 창문, 목련, 물고기, 언어처럼
아아
꿈이 없다면
꿈이 없다면
나는 장원의 심부름꾼
우주로 쏘아올린 인공위성처럼
자정이 오면
09:00~18:00까지의 나는 나를 작동하고
아아
꿈이 없다면
꿈이 없다면
열려라 참깨
안현미
이슬람의 세계에서는 '밤 속의 밤'이라 불리는 어떤 밤이 있다.
그날 밤은 하늘의 비밀문이 열리고, 물병 속의 물이 달콤해진다고 한다.
그런 밤에 나는 비밀을 받아 적는 시인, 쑥쑥 자라는 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이 신비한 모래의 춤 속으로 달려가고,
신데렐라가 마차로 변한 호박을 타고 파티장에 가고,
엘리스가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여행을 하는 마술 같은 시간.
열려라 참깨!
그 세계에선 서류를 작성해야 되는 일들이나 인생을 망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고,
나는 호모 루덴스, 방황하는 자, 눈으로 만든 사람.
빗자루로 만든 두 팔을 들고 꿈꾸는 몽상가,
열려라 참깨!
비밀의 문은 열리고, 나는 백 년 전에 태어난 시인과 수은이 벗겨진 거울 속으로 여행을 가고, 세헤라자데가 되어 아내에게 배신당한 슬픈 왕을 위로하고, 알라딘의 램프의 요정 지니와 같이 사막을 아쿠아 마린빛 바다로 만들고,
열려라 참깨!
나는 물병 속의 달콤한 물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어린 당나귀,
당나귀의 노래를 꽃으로 만드는 마녀,
마녀의 고독을 시로 적어주는 검은 고양이,
고양이에게 물방울을 선물하는 생쥐,
쥐구멍에도 햇빛을 선물하는 두 개의 태양,
사다리를 타고 태양을 청소하러 가는 청소부
열려라 참깨!
나의 시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물병 속의 물이 달콤해지기를 기원하는 주문
열려라 시(詩)
오후 세 시
안현미
시간을 오려내는 거예요
오후 세 시는 권태롭다면서요?
스케치북 안에서 아버지는 외눈박이 거인이에요
엄마가 물을 주고 있는 꽃밭엔
갈라진 혓바닥 같은 꽃들이 다투어 피고 있어요
싸립문으로 구렁이가 들어와요
쉬, 쉭, 쉬이익
놀란 계집아이가 울음을 터트려요
목젖이 보이는 불안이 솥으로 뛰어들어요
뱀껍질, 눈알, 크레용, 불안을 섞은
검은 솥이 통째로 끓어요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스며들어요
문 밖에서 흔들리는 종소리가 주문 같아요
외눈박이 거인이 팔팔 끓는 솥을
계집아이 머리 속에 쏟아 부어요
아이의 하얀 원피스가 피로 물들어요
그러자 스케치북 안에선
구렁이를 탄 계집아이가
오후 세 시로 날아가요!
옥탑방
안현미
12개의 사다리를 올라가면 녹슨 열쇠 구멍 속에 갇혀있는 옥탑방이 있지 그 방에는 먼지 쌓인 편지들과 당신이 선물한 액자가 있지 액자 속에선 시간을 잃어버린 여자가 삭발을 하고 녹슨 가위는 액자를 오리고 있지 불면을 앓고 있는 컴퓨터는 반송된 e-메일로 용량이 부족하고 커튼도 없는 창문에선 별도 뜨지 않지 물도 주지 않는 선인장은 뿌리가 썩어가고 있지 옥탑방이 울고 있기 때문이지 잃어버린 시간이 울고 있기 때문이지 울고 있는 옥탑방 낡은 침대에선 곰팡이꽃이 피고 포자처럼 무성생식 하는 액자 액자들 12개의 사다리를 올라가면 녹슨 열쇠구멍 속에 갇혀있는 내가 있지 내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 분열을 앓고 있는 나는 나를 사랑한 당신을 사랑한 나를 증오하지 증오하는 나를 사랑하는 나는 녹슨 가위를 들고 동맥을 오리지 피 흘리는 나를 안아주는 나는 당신이 선물한 액자 속에 있는 당신이 사랑한 삭발한 여자에게 말해주지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건 사랑도 아니었지 그냥 지상에서 가장 높은 방에 서로를 모셔두는 일이었지 그래서 당신과 여자는 울지 못하고 옥탑방만 울고 있는 거지
와유(臥遊)
안현미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 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외롭고 웃긴
안현미
잿빛 눈믈을 훔쳤지. 거긴 외롭고 웃긴, 새장 속, 우린 대부분의 인생을 침대에서 흘려보내, 랄라, 새장 밖으론 헛되고 헛되고 헛되어 아름다운 시간들이 흘러가고, 랄라, 잿빛 눈물을 훔쳤지, 거긴 외롭고 웃긴, 세상 속, 우린 대부분의 인생을 침대에서 흘려보내, 랄라, 봄밤으로부터 봄밤까지, 무의미로부터 무의미까지, 호모사피엔스로부터 호모 사피엔스까지, 눈물로부터 눈물까지, 혁명을 말하는 자도 외롭고 혁명을 말하지 않는 자도 외롭다*는 걸 우리는 본능적으로 예감했지만, 거긴 외롭고 웃긴, 너무 빤해서 아름다운 통속(通俗)의 세계, 헛되고 헛되고 헛되어 아름다운 우리들, 앵무새 같은, 외롭고 웃긴, 랄라, 우린 대부분의 인생을 침대에서 흘려보내, 스프링이 고장 난 매트리스처럼, 삐꺽 삐꺽 삐꺽, 외롭고 웃긴, 세상 속에서 한통속으로, 흘러가는 시간들, 헛되고 헛되고 헛되어 아름다운, 랄라, 우린 대부분의 시간을 새장 속에서 흘려보내네, 앵무새 같은 우린, 겨우, 잿빛 눈물만 훔치는 우린, 랄라라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
안현미
귀퉁이가 닳고 닳은 통장
지출된 숫자 같은 앙상한
나뭇가지 하나 없어도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
고향집 감나무 꼭대기
까치밥같이 붉은 도장밥 먹으며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
상처도 밥이고
가난도 밥이고
눈물도 밥이고
아픔도 열리면
아픔도 열매란다, 얘야
까치발을 딛고 나 엄마를 따먹는다
내 몸속에는 까치밥처럼 눈물겨운 엄마가 산다
유령처럼 등장한 하루
안현미
그는 시간의 추종자 시간을 먹는 시간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촛불은 시간의 사용자 시간을 불살라 無에 다다를 수 있다 보여주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타임머신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도 자신에게 도착할 수 없었을까
그녀는 시간의 발굴가 비행기를 집어 타고 날짜 변경선을 넘는다
유령처럼 등장한 하루로 망명하는 망명자라고 명명하며
멜콩델타* 가는 길 고무나무 농장에서 만난 열대의 아이들
1달러 1달러하며 그 아이들이 팔던 것도 시간이었을까
* 멜콩델타를 흐르는 강물은 중국과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의 국경을 거쳐 베트남을 흘러 남중국해로 흘러간다. 여러 국경을 여행해 온 큰 강물을 만나러 가는 길은 몇 개의 生을 거듭 윤회한 나 자신을 만나러 가는 길 같았다.
육교
안현미
낙타의 쌍혹 같은
사내의 고환을 타고
달도 없는 밤을 건넌다
육교(肉交)
새벽은 멀다
수상한 골목
검은 구두 발자국 소리
누군가 지나가고 있다
50촉 백열등 불빛처럼
신음소리 새어나간다
정작, 불온한 것은
그립다는 것이고
사막이 아름다운 건
흔적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청량리 588번지
오아시스도 낙타도 없는 사막
새벽은 멀고
육교의 마지막 계단으로 내려와
달을 본다
토끼 눈을 한 사내가
방아를 찧고 있다
뼈를 찧고 있다
음악처럼, 비처럼
안현미
새춘천교회 가는 길 전생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을 때
흩뿌리는 몇 개의 빗방울 당신을 향한 찬송가 같았지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찬송가 불렀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지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기도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담뱃불을 붙여 줬던가
그 교회 길 건너편엔 마당에 잡초 무성한 텅 빈 2층 양옥집도 있었던가
그 마당에 우리의 슬픔처럼 무성한 잡초를 모두 뽑고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 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쑤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
그렇게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꼬드겨보고 싶었던가
그럴까 봐 당신은 이 생에 나를 술래로 세워놓고 돌아오지 않는 기차를 탔던가
춘천을 떠나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다 공지천 이디오피아 창가에 앉아
돌아오지 않는 당신의 눈썹에서 주워 온 몇 개의 비애를 안주로 맥주를 마실 때
막 사랑을 하기 시작한 연인들의 백조는 물 위에서 뒤뚱뒤뚱,
그 뒤뚱거림조차 사랑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는데
아직도 찬송가처럼 몇 개의 빗방울 흩뿌리고 있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
이 별의 재구성 혹은 이별의 재구성
안현미
나하고 나 사이에 늙고 엉뚱한 종족들이 있지 내 별로 놀러 오는 나들 나들 때문에 그 종족들은 불편하다고 불평하며 불안했어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사랑했지 난 정드는 게 특기니까 하루가 영원 같고 영원이 하루 같은 무협 판타지 같은 날들이었어 난 그날들을 CD로 구웠지 구워진 CD 속에서 난 무릎이 아팠어 너무 많은 감정을 과소비하고 게다가 너무 많은 눈물을 삭제했으니까 수만년 전부터 이 별은 아팠어 늙고 엉뚱한 종속들은 이 별의 종말을 전지구적으로 살포하면서 우리 종족의 언어를 모두 쓰레기통에 넣고 서둘러 이별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우리 종족의 위대함은 휴지통이라는 아이콘에 있지 '복원'이란 단추를 내장하고 있는 그러니까 이별은 이 별로 굽거나 이별을 이별로 굽는 따위의 일은 우리 종족에겐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란 거지 고통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통을 받는 방법은 선택할 수 있다, 빅토르 프랑클, 멋지지? 이게 이 별의 재구성 혹은 이별의 재구성이란 엉터리 판타지 같은 이 시에 대한 키워드야, 친절하지?
인생 국수집
안현미
시인의 외상값을 갚아주는 밤이다 삶의 비애와 불가해함에 대한 질문 위에 자신의 시는 있다고 했던가 나는 나 때문에 고생이었다*고 하더니 그토록 좋아하던 술도 그토록 고생시키던 나도 잊고 와불처럼 누운 지 여러 해째다 민생국수집에 와 시인의 외상값을 갚아주는 밤이다 소주 열두 병이라니 예수의 열두 제자도 아니고 안주도 없이 안녕도 없이 소주 열두 병을 물처럼 마시며 빈 병들을 비애처럼 부둥켜안고 울었을라나 매일 밤 삶의 비애를 견디려 민생국수집에 나와 앉아 혼자 술을 마신다 소주 열두 병 외상값을 대신 갚으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시인이 벌떡 일어나 너도 너 때문에 고생이구나 혼꾸녕을 내줄지도 모른다고 술주정인지 기도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민생국수집을 인생국수집으로 헷갈리는 중이다
작고 즐거운 주전자들
안현미
음악이 담겨 있어요
당신은 막 1루를 지나고 2루를 지나고 3루를 지나 홈으로 들어와요
멀리 담장 밖으로 날아간 야구공은 당신의 슬픔쯤이라고 해둘게요
얼른 안경을 닦고 당신 멋대로 사세요
음악은 당신의 야구 방망이
어떤 여자가 음악처럼 당신을 즐겁게 할 수 있나요
그러니 겁 없는 아이처럼 사세요
당신의 슬픔은 담장 밖으로 날아간 야구공 뭐가 더 불필요하겠어요
당신의 작고 즐거운 주전자는
당신의 1루와 2루 사이를 2루와 3루 사이를 3루와 홈 사이를
다이아몬드를 깎듯이 세심하게 세공하는 여자
멀리 담장 밖으로 날아간 야구공의 터진 실밥 같은 여자
타율도 방어율도 게임의 법칙도 모르는 여자
9회 말 대역전 같은 건 꿈도 꾸지 않는 여자
그러니 얼른 안경을 닦고 당신 멋대로 사세요
다이아몬드 구장 귀퉁이에 버려진 작고 즐거운 주전자들
마이너리거들 당신을 위해 제뼈로 당신의 진로를 그리는 여자들 따위는
얼른 대타를 기용하듯 작고 즐거운 주전자들로 대치하고
당신은 메이저리거처럼 얼른 안경을 닦고 당신 멋대로 사세요
음악이 담긴 작고 즐거운 주전자가 시속 161km로
당신의 심장에 꽃히기 전에
전갈
안현미
- 천안이나 아산을 지날 일이 있으면 연락하렴. 죽기 전에 한번 봐야겠다.
구 선생님
여름 감기를 얻었고, 감기를 얻듯 애인들을 얻었던 시절들은 아주 오래전에 지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끌림, 들림, 홀림, 울림. '림'으로 끝나는 단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새벽에는 가을의 약속을 겨울의 약속으로 변경했으며, 꽃병 속에 그려진 하얀 새는 빨간 부리로도 충분히 슬픕니다.
구 선생님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방학 중에 읽으면 좋겠다고 칠판 한가득 판서해주시던 그 책 목록들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때 날리던 흰 분필 가루들과 분필 가루가 묻은 선생님의 손가락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그 책들을 붙들고 겨우겨우 건너온, 사소했지만 힘겨웠던 80년대 제 유년을 기억합니다. 그때 판서를 하시던 선생님의 뒷모습을 기억합니다.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사막의 고독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전갈의 뒷모습을 닮았던.
구 선생님
나이를 거꾸로 센다는 미얀마의 올랑 사키아라는 부족을 생각합니다. 태어나면 60살이고 60년이 지나면 0살이 된다는 그 부족의 나이 계산법을 생각합니다. 제가 지나온 연대기를 생각합니다. 87년이나 86년을 지날 일이 있으면 연락 주십시요. 죽기 전에 저도 한번 봐야겠습니다.
정치적인 시
안현미
우리는 선천적으로 두개의 음악을 가지고 있다. 들숨과 날숨! 낮에는 돈 벌고 밤에는 시 쓴다. 운에는 울고 율에는 웃자. 그리하여 실천으로 우리의 운율은 울음이 되고 웃음이 되고 종내에는 음악이 되고 시가 되고 밥이 되고 법이 되고 사랑이 된다. 음, 파, 음, 파 우리는 숨 쉬자. 기억하자. 실천하자. 후천적으로 조작되고 오염되기 이전 우리들의 최초의 들숨과 날숨으로, 실천적으로, 실천적으로 정치하게!
종이 피아노
안현미
문방구집 아이가 피아노가방을 들고 담쟁이 넝쿨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막다른 골목다다미 방에서 아이의 피아노 소리를 드는 아이다
하얀 건반 위를 달리며 콩콩 뛰어다니는 문방구집 아이의 과외시간
'파레스' 주방으로 일하러 간 엄마는 매일 새벽에나 돌아올 것이므로 아이는 무섭다
피아노 소리가 담쟁이 넝쿨을 저렇게 무성하게 키우는 걸까
발육부진의 아이는 음악책을 꺼내놓고 누런 갱지 위에 피아노 건반을 그린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시라솔파미레도
검은 건반까지 꼼꼼히 그려넣어도 시간은 더디 가고,
무서운 아이의 머리 속에선 레이스가 달린 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이가
아무도 모르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면 엄마는 안 오시고, 못오시고
엄마 대신 팬케익을 굽는 피아노소리 따라라 라라 따라
아이는 담쟁이넝쿨보다 높이 올라가 팬케익 같은 노란 태양을 따려는데
느닷없이 종이 피아노의 현이 뚝
문방구 집 아이가 피아노 가방을 들고 담쟁이넝쿨 밖으로 뛰어간다
종이 피아노에선 더 이상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엄마는 새벽에나 돌아올 것이다
다다미방에서 발육부진의 아이는 고장 난 생을 살 것이다
중얼거리는 나무
안현미
빅토르 최는 화부였지
빅토르 최는 화부였지만 노래를 불렀어
빅토르 최는 화부였지만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는 시였어
우리는 모두 노래들인지도 몰라
노래를 멈추지만 않는다면 멈추지만 않는다면
나무는 가수였지
나무는 가수였지만 노래를 부르지 않았어
나무는 가수였지만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불리지 못한 노래는 울음이었어
우리는 모두 울음들인지도 몰라
조금만 생각해보면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칙칙폭폭 기차는 달려가네
칙칙폭폭 화부의 노래는 활활 타오르고
칙칙폭폭 나무의 울음은 전속력으로
칙칙폭폭 나무는 달려가네
칙칙폭폭 비는 내리고
중얼거리는 나무 마디마디
사나운 허무들과 싸우는 영혼들
칙칙폭폭 그 빗물로
슬픔의 수력발전소를 쉼 없이 돌리네
우리는 모두 노래들인지도 몰라
우리는 모두 울음들인지도 몰라
조금만 생각해보면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짜가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안현미
'시인은 죽었다'
허블 우주 망원경
블랙홀
시간의 띠(뫼비우스)와 공간의 일그러짐을 클릭하라
치사량의 열정과 눈물 한방울만큼의 광기와 고독
개미의 페로몬 같은 상상력을 복용할 것
보르헤스와 랭보와 백석과 소월의 키워드를 해독할 것
시인은 그렇게 복제된다
여기는
사이버 우주
사이보그 si-in
시인의 영혼을 처형하라!
그리고
낡은 시대와 서둘러 작별하라
시,인,은,죽,었,다
디스켓에 시인의 사리(舍利)를 저장하고
e-메일로 전송할 것
나는 온라인으로부터 왔다
나는 새로운 세상의 신(神)이다
이때 떠돌이 시인 등장
책상 앞으로 다가가 막을 내리듯 플러그를 뽑는다
(100년 동안 안전)
태초의 빛처럼 무대가 밝아지면
시인은 다음과 같이 원고 위에 적고 있다
짜가투스트라는......
천남성
안현미
한 해는 여자로 한 해는 남자로 산다
사월의 뱀을 보고 놀란 영혼은
사월보다도 크고 쉰 살보다도 크다
한 해는 남자로 한 해는 여자로 산다
시도 시 아닌 것도 없다
천남성 속에도 뱀 속에도 개구리 속에도
사월은 있다
총잡이들의 세계사
안현미
세상은 흙먼지 날리는 무법천지의 서부와도 같다고 아이가 말했을 때 나는 지붕 위에 올라 앉아있는 마네킹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아이의 염색한 머리 색깔과 마네킹의 머리 색깔이 같아서였는지도 모른다 피나 콜라다 빛 머리 색깔, 이방인처럼 낯선 아이의 말풍선 속에서는 욜라 짱나 담탱이 같은 해체된 모국어가 쉴 새 없이 튀어나오고 구겨진 교복엔 기름때가 얼룩져 있다 지구의 반대편에선 검은 오일 때문에 유혈 전쟁이 한창이지만 검은 오일이 장전된 총을 들고 짙은 선탠이 된 자동차 뒤꽁무니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아이의 총에선 불꽃이 일지 않는다 선탠이 된 차창이 스르르 열리고 가발 쓴 대머리 아저씨가 골드카드에 사인을 할 때 아이는 서부의 총잡이 존 웨인이 되어 조수석 짙은 화장을 하고 마네킹처럼 앉아있는 제 또래의 여자아이를 구출하는 상상을 한다 다행히 그건 이 도시에서 무시로 일어나는 일이어서 아이는 제 총을 가발 쓴 대머리 아저씨의 머리통에 들이밀지 않고 만국기가 펄럭이는 주유소 앞 바보 같은 허풍선이 거인 풍선 인형만 펄럭펄럭 춤을 추고 있다
축 생일
안현미
오늘은 내 생일인데 밥상이 날아가고 핸드폰이 날아가고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던 삼겹살이 날아가고 소주병이 날아가고
뜻밖의 밤
오늘은 내 생일인데 생일 폭죽처럼 머리통이 터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돈, 돈, 돈 우린 돈 게 분명해
뜻밖의 밤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울리는 알람이 있다고 믿는다 했다 꼭 사랑이 아니라도 울리는 알람이 있다는 말은 생략, 그건 좀 슬픈 이야기니까
뜻밖의 밤
우리는 사랑을 향해 동행할 수도 있었는데 늙은 저녁 서로의 외롭고 긴 외출을 기다려줄 수도 있었는데 가난한 내가 무작정의 우리로 확대될 수도 있었는데 대략 그 정도의 빚을 지고 싶었을 뿐인데
뜻밖의 밤
밥상이 핸드폰이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던 삼겹살이 소주병이 날아가고 오늘은 내 생일인데 사랑해, 라는 말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촛농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작별을 생일 선물처럼 들고
뜻밖의 밤
영원히 그 코없는 밤은 오지 않을 듯이*
뜻밖으로 이마가 맑아지는
* 이상의 시 <아침>에서 인용
춘천, 씨놉시스
안현미
1 - 청량리역 혹은 뽀르뚜갈 광장
경춘선을 타기로 했다. 즉흥적으로. 봄이었으므로. 그러나 곧바로 떠나는 기차는 없었다. 그 순간 우리는 이 즉흥적인 여행을 그만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청량리역 광장이 아닌 뽀루뚜갈 광장에 서 있는 이국의 여행자들처럼 밤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불리는 낮과 밤의 경계 위를 어슬렁거리며 광장의 시계탑 위를 물들이는 붉은 노을을 공유하며.
2 - 기차 안과 밖
어두운 차창 밖으로 몇 겁의 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있다. 당신과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전생 혹은 전전생을 시청 중이다. 홍익회의 삶은 계란과 캔맥주를 홀짝이며. 이어폰의 리시버를 한쪽씩 나누어 꽂고 우리가 듣는 음악은 부에나 비스따 쏘셜 클럽의 이브라힘 페레르가 부르는 「 Dos Gardenias」. 이국적인 그 음악은 전생의 당신을 닮았다. 당신은 노래한다. "치자꽃 두 송이를 그대에게 주었네 사랑한다 말하고 싶어서 잘 돌봐주세요 그것은 당신과 나의 마음입니다."
3 - 새춘천교회 그리고 일요일
그리고 일요일, 우리는 예배당을 찾아간다. 성경책도 믿음도 없이. 그러나 당신을 향한 찬송가처럼 몇개의 빗방울 흩뿌린다.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부른다. 당신은 말한다. " 이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어."
4 - 공지천과 이디오피아
언젠가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열아홉 혹은 스무살 봄에. 사랑을 시작해도 부동산 투기를 시작해도 외국어 공부를 시작해도 실패하기 딱 좋은 나이, 실패해도 상관없는 나이, 즉흥적이어서 아름다운 나이, 열아홉 혹은 스무살 봄.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히 서로가 서로를 향해 찬송가를 불렀지. 찬송가책도 미래도 없이.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 언젠가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전생 혹은 전쟁 같았던 그 봄 춘천에.
카만카차
안현미
안개를 달아 드려요
칠레행 비행기를 타고 목요일에서 수요일로 날아오세요
망명정부의 소설가처럼 수염을 길러도 좋아요
이곳은, 지도엔 없는 마을 '카만카차'
안개광장을 가로질러 가스등이 켜진 골목
카페 '세상 끝 등대'로 오세요
연애소설 읽는 노인과 패튼 장군 세풀베다가
열매의 안개를 마시며
감상적 킬러의 고백을 듣고 있는
바로 그 집이에요
자, 서둘러요
이곳은 안개의 마을 카만카차
안개로 차를 달이고
안개로 빨래를 하고
안개로 홰나무를 기르는 마을
카만카차에선 가이드북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안개 때문이죠
삶이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 꾸는 한 장의 꿈이라면
안개를 달인 한 잔의 차가 삶이기도 하죠
어디선가 자정을 알리는 시계소리가 들려요
목요일이에요
다음 비행기는
짙은 안개 때문에 결항이에요
카이로
안현미
1
일몰 후 아홉 번째의 달이 떴고
그는 동쪽 식탁 위에 왜가리처럼 놓인 촛대에 불을 붙였다
설명하고 싶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차원으로
그는 침묵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가 사용하는 침묵은 골동품처럼 지혜로왔다
2
그때 폭설 속에 묻어 둔 술병을 꺼내러 갔던 여자가 돌아왔고
그 여자가 데리고 온 낯선 공기는 순식간에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데려갔다
3
인생이란 원래 뭘 좀 몰라야 살맛 나는 법
4
아홉 번째 핫산이 돌아왔다
설명하고 싶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차원으로
그는 인생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가 사용하는 인생은 침묵처럼 두꺼웠다
5
다시 아홉 번째 달이 뜨고
다시 시간은 골동품처럼 놓여 있고
다시 이야기는 반복된다
설명하고 싶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차원으로
원래 인생이란 뭘 좀 몰라야 살맛 나는 법
케익꽃
안현미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케익꽃이 날아다닌다
그 뒤를 따라 엄마꽃이 따라간다
모래가 케잌꽃을 감싸준다
엄마꽃도 케익꽃을 감싸준다
점점 바람에 휘날려 우주로 간다
너는 사막에 불시착한 눈사람 같아
연필 여덟 자루로 시를 쓰는 나는
네 시가 사막에 내리는 눈처럼 불가해 부끄럽지
곧 너는 여덟 번째 너와 헤어져 아홉 번째 너를 만나게 될 거야
나는 그때도 가난하지
이 별에 불시착한 너의 우주선을 수리해줄 수 없지
시인이란, 그렇게 시시하지
그렇지만 여행 온 아이야
나는 네가 태어나 처음 쓴 시를
설위표(雪位標)처럼 내 시 속에 놓아둔다
여행 온 아이가 여행 온 아이에게 시간을 묻듯이
탈모
안현미
말이 끝났지만 한동안 팽팽하다 서로 미루다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는 건, 언제나 성질이 급한 너였다
통화가 끝나면 늦가을 낙엽 지듯 기울어지는, 쏟아져 내리는 안테나들 한동안 통화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말하지 않았는데, 본 것일까
가슴 안까지 전파가 흘러왔다가 빈구덩이에 한동안 비듬 같은 먼지만 쌓일 텐데,
당분간 필요 없을 안테나가 흔들린다
바람에 날리는 비듬 소리에만 귀 기울인다
내 전화기가 꺼져있어도
세상은 언제나 통화 중이었다
투명 고양이
안현미
매일매일 출근해
바닥을 견디는 것
자신을 견디는 것
길고양이의 왼쪽 귀 끝
중성화 수술 표시로 잘려 나간 삼각형의 투명처럼
거기서부터 삶을 거기서부터 죽음을
Ctrl+C, Ctrl+V 처럼
인생은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데
투명한 삼각형에 연루되어
그늘지고 멍든 쪽으로
공손하게 두 발을 모으고 있는
왼쪽 귀가 잘려 나간
길고양이의 결가부좌처럼
거기서부터 죽음을 거기서부터 삶을
Ctrl+X, Ctrl+V처럼
인생은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데
매일매일 출근해
바닥을 시작하는
자신을 시작하는
투명 고양이
'풋'을 지나서
안현미
태양은 은둔중이고 능소화는 절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마가 아니라 장미를 추구하는 자들
오늘의 추천 계절은 여름
오늘의 추천 아이템은
나무와 나와 무(無)
나는 무(無)와 나를 접붙여 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절정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의 추천 계절은 여름
우리는 장마가 아니라 장미를 추구하는 자들
태양은 은둔중이고 능소화는 절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하시시
안현미
바람이 분다
양귀비가 꽃 피는 그녀의 옥탑방
검은 구두를 신은 경찰이 어제, 다녀갔다
하시시 웃고 있는 여자
환각을 체포할 수 있는 영장은?
검은 구두를 신은 경찰이 오늘, 다녀갔다
사랑은 떠나지 않아도 사내는 떠났다
하시시 울고 있는 여자
검은 구두를 신은 경찰이 내일, 다녀간다
하시시 피어오르는 향기
그림자를 체포할 수 있는 영장은?
마리화나 같은 추억
하시시 바람이 분다
아편과 같아 사내는,
중독을 체포할 수 있는 수갑은?
그녀의 옥탑방
하시시
양귀비꽃 붉다
* 하시시 : 인도 대마초 마약 이름
함부로
안현미
햇살이 내리꽃히는
한낮의 논
피를 뽑으러 들어간 아버지 종아리에서
피를 빨고 있는 거머리
피를 뽑기 위해 피를 빨리는 무서운 생업!
아비 없는 자식이 아버지가 된 세월......
함부로
돌아와
거머리에게
피를 빨리며
합체
안현미
우주 체험을 한 뒤에 전과 똑같은 인간일 수는 없다―슈와이카트(우주비행사)
하루 종일 분홍눈이 내렸다
세로도 가로도 없는 그 공간을 '방'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우주'라는 말을 발견했다
그 후 우리는 '하나는 많고 둘은 부족한' 별에 착륙했고
중력은 희미했고 궤도를 이탈한 계절은 랜덤으로 찾아왔다
어제는 겨울 오늘은 여름 낮에는 가을 밤에는 봄
우리는 당황했지만 즐거웠고 우리는 은밀했다
이상했지만 세계는 완벽했고 중력은 충분히 희박했다
검색창 밖으로 하루 종일 푹푹 분홍눈이 내렸고
하루 종일 우주선처럼 둥둥 떠다녔다
사랑과 합체한 사랑은, 그리고 또 우리는
그 후 '하나는 많고 둘은 부족한' 별의 거북무덤엔 이렇게 기록되었다
사랑을 체험한 뒤엔 전과 똑같은 인간일 수는 없다!
해바라기 축제
안현미
망루에 올라 해바라기 꽃밭을 본다 그 수많은 꽃들이 바라보는 태양처럼 사내는 눈부시다 해시계를 삼킨 황금 물고기 귀걸이를 찰랑대며 여자는 묻는다 누구에게나 일생을 걸고 해바라기 꽃을 꺾듯 꺾어야 하는 게 있다면 몽롱한 눈빛의 유디트가 헬멧처럼 들고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목 같은 게 아니겠냐고 망루 아래서 여자의 말을 엿듣던 뱀은 서둘러 허물을 벗어 던지고 해바라기밭을 떠난다 어느덧 태양은 엑셀파일의 함수마법사 중 시간의 함수로 구해놓은 듯 망루 꼭대기 위로 정각에 도착한다 목이 마른 사내는 피크닉 바구니에서 꺼낸 술병의 목을 부여잡고 기어히 목을 칠 테냐고 묻는다 여자는 축제는 축제니까, 라고 해바라기씨를 깨물 듯 또박또박 대답한다 망루 꼭대기에서 여자의 말을 엿듣던 태양은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여자는 최면을 건다 레드 썬 탁! 그러자 뱀이 벗어 던지고 달아난 허물 속에선 화가의 잘린 귀와 귀를 자른 칼이 튀어 나온다 여자는 잘린 귀를 확성기처럼 들고 쉭- 태양의 목을 친다 순간 꽃밭에선 해바라기꽃들의 노랑 비! 명들이 폭죽처럼 튀어 오르고 달아난 뱀은 깜짝 놀라 다시 허물 속으로 달아난다 피크닉 바구니를 헬멧처럼 들고 여자는 망루를 내려간다 피크닉 바구니에선 덜그럭 덜그럭 누군가의 목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난다
해피 투게더
안현미
도둑처럼 사내의 입술이
사내의 입술을 훔쳐 달아날 때
달맞이꽃은 달을
붕어빵은 붕어를
불새는 불을
칼국수는 칼을 집어삼킨다
하하 해피 투게더
창녀처럼 그녀의 입술이
그녀의 젖가슴을 파고 들 때
구멍은 구멍을
편견은 편견을
폭력은 폭력을
아버지는 아버지를 버린다
하하 해피 투게더
해피?
투게더?
그녀와 그는 잠깐 행복하고 오래도록 함께 불행했다 그래도 그들은 그게 사랑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그녀와 그는 도둑과 창녀 나의 엄마와 아버지 여기에 *너의 슬픔을 녹음해, 세상 끝에 묻어줄게 내 영혼의 울림통은 매일매일 들이닥치는 불행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녹음했지만 세상 끝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나의 매일매일은 언제나 세상 끝에서 시작되었으므로 나는 오래도록 불행과 함께 행복했다 하하 해피 투게더!
* 영화 「해피 투게더」의 대사
혹부리 사내
안현미
사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건 157번 버스가 청량리 굴다리를 막 지나갈 때였다 밤새 홍등이 내걸렸던 골목에선 비릿한 사향 냄새 안개처럼 풀려 나오고 그 골목의 꽃들은 흡반처럼 그 안개를 빨아먹고 흐드러지고 있었다 수상하다면 수상한 날이었지만 수상하지 않은 날이 더 수상한 그 골목에서 그러니까 일상이 수상한 일들로 반복되는 그 골목에서 부리부리한 사내의 출현은 그닥 수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 골목의 포주들은 함부로 씨를 뿌리고 가는 사람들에게만 상냥했고 아침의 행인들은 무관심함을 가장했다 그 상냥함과 무관심 사이에서 사내는 어떤 환영처럼 유리벽 속에서 걸어 나왔던 것인데 사내는 왼쪽 볼에 씨방 같은 혹을 달고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나를 일갈한 뒤 수상하다면 수상한 벽처럼 걸어갔다 사내로부터 환청처럼 어떤 여자의 비명소리 안개처럼 풀려 나오고 수상하다면 수상하게 그 골목의 꽃들은 환상처럼 혹을 매달기 시작했다
화란
안현미
1
엄마는 노루모산을 끼고 살았다
신이 되려는 중인지
2
너는 내일 표를 들고 기차를 탔고 짝짝이 구두를 신고 있었고 우리는 신화의 시간을 잃어버렸고 세계의 오존층은 구멍이 났고 전쟁, 지진, 쓰나미, 기아, 자살 폭탄 테러…… 신이 되려는 중인지 엄마는 노루모산을 끼고 살았고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기록할 수도 기록하지 않을 수도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그런 날이 있었다
화전(花田) 간다
안현미
좌석이 없는 좌석버스를 타고 간다
삼표연탄 이름만 남아있는 자리
백미러같은 낮 달 떠있다
'이번 정류장은 수색극장 앞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구름다리입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구름다리 건너
검문소 앞에서 검문 당하는 청춘(靑春)
이등병의 배지를 달고 있다
물빛처럼 푸른 군복
수색엔 온통 일렁이는 것들만 살고 있다
‘...... 다음 정류장은 항공대학교입니다’
빨간 애나멜 구두를 신고
파란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내던
삼표연탄보다 활활 타오르던 시절 어디에도 없다
좌석이 없는 生을 타고 간다
꽃밭은 없고 이름만 남아있는
화전(花田) 간다
흑국보고기
안현미
쓸쓸하고 퇴락한 나라
서럽고 황폐한 나라
걸인조차 돌아오지 않는
유령의 나라
진폐증을 앓는 검은 뼈들이
화광(火光)아파트 베란다에서
검은 해바라기 꽃으로 피는 나라
아버지의 청춘이 묻힌 나라
어머니가 늙어가는 나라
방문을 향해 놓인
주인 없는 신발들만 사는 나라
주인 없는 신발들만 우는 나라
내 아버지는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주항항 광부였고
내 어머니는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합숙 밥해주는 아줌마였지만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은 한번도 대한석탄공사 연탄처럼 활할 타오른 적도 없는
막장 같은 나라
뼈만 아픈 나라
천제단도 있고
발원수도 샘솟지만
무저갱의 검은 피만 쏟아지는 나라
서럽고 황폐한 나라
태백이 아니라
태백이 아니라
흰, 국화 옆에서
안현미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환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 일 아닌 일에도 심장이 뛰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벚꽃이 다녀가더니
목련이 오고 목련 뒤에는 라일락이
라일락 다음엔 작약과 아카시아가
아카시아에 이어 장미가 다녀갔다
그제는 마흔 살, 시인이 되고 싶다던 후배가
장미를 따라갔다
빌어먹을 흰, 국화 옆에서
가만히 들여다본다
장미, 아카시아, 작약, 라일락, 목련, 벚꽃……
이어달리기를 하듯 왔다 간
환한 꽃들처럼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다녀간다
Post 아현동
안현미
오늘은 아현동 산동네에 갔다
오래전 월세 들어 살던 방,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하던 방, 연탄불을 놓던 방, 이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울먹이던 방, 외롭던 방, 고맙던 방, 아주 아주 춥던 방,
그시절 내마음에 전세 들어 살던 첫 애인을 생각하는 밤, 나의 아름다운 남동생의 흐려진 얼굴빛을 걱정하는 밤, 고단한 토끼에게 아무 약효도 없는 안약을 건네던 밤, 가난한 추억과 합체하던 밤,
아현동 산동네를 내려와 찾아간 [BAR 다] 어눕고 낡은 나무 계단 끝에서 화장실이 어딘지 모르고 서 있는 머리 긴 외국 남자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why?"라고 물으며 괜시리 친절하고 싶던 밤, 함께 여기를 뜨자고 말하면 주저 없이 따라가고 싶던 밤, 국적도 모국어도 잃어버리고 싶던 밤, 나 스스로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왜? 라고 자꾸 되묻던 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열정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니? 왜?
timelss time
안현미
한국 담배인삼공사는 7월 1일부터 신제품 timeless time(무한한 시간)을 전국 동시 판매에 들어간다. timeless time 담배는 향이 풍부하게 발현되도록 상위등급의 황색종 담배를 주원료로 사용했으며, 쓴맛을 없애기 위해 순잎살만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디자인은 고급스러운 진주빛 바탕으로 충분한 여백을 살리면서 흑색 글자를 사용해 전체적인 편안함을 주고 있다. 필터는 탄소 복합필터로 타르 7mg/cog, 니코틴 0.7mg/cig에 길이 84mm이며, 가격은 1천4백 원이다. 출처:2000년 6월 30일 306호 동부신문
8번째 time을 빨고 있다
사내는 도착하지 않는다
텐테이블에선 사티의 짐노페디 8번이 반복되고 있다
여자는 무가당 담배 클럽 동인 앞으로 보낼 밀서를 집어 든다
통유리 창밖엔 8번째 계절이 막 도착하고
진주빛 구름 속에선 출처를 알 수 없는 리볼버 권총이 불시착한다
비행접시 모양의 재떨이엔 샤넬 No 8 루즈 묻은
필터가 time의 찌꺼기와 함께 담겨 있다
사내는 도착하지 않는다
계산대에선 주인이 죽어버린 시계의 건전지를 갈아 끼우고 있다
여자의 표정 84mm가 사라지고 있다
주인이 여자에게 걸어와 살아난 시계를 가리킨다
여자는 밀서를 건네받을 사내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1천4백 원어치만큼의 시간을 살 수 없겠냐고 묻는다
주인은 바쁠 일 따위는 없지만
이미 사내는 다른 시간 속으로 떠나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여자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당신은 시간을 도둑맞은 여자라고
#YoSoy132
안현미
그 입 가만히 있으라 #YoSoy132 나는 132번째 사람이다 전원 다 구조했다더니 한 명도 구하지 못한 그 입 가만히 있으라
내 새끼가 너무 보고 싶다는 한 어머니의 비수처럼 박히는 말을 그 피 흘리는 말을 쏟아붓기도 아까운 그 입 가만히 있으라
우리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그 입 우리 아이들의 빼앗긴 봄을 살려낼 수 없는 그 입이야말로 가만히 있으라
#우리가 305번째 세월호다 그만하자고? 무엇을 위해? 다시 또 침몰하기 위해? 무능을 유지하기 위해? 그 입 가만히 있으라 맹목의 그 입이야말로 가만히 있으라
그 몰염치에 비수를 꽂기 전에 그 입 가만히 있으라 다시 살아올 수 없는 내 새끼가 아닌 개새끼들은 그 입 가만히 있으라
1인 가족
안현미
새벽 5시, 세탁기를 돌린다 특별시의 시민으로서 세탁기를 돌린다 얼굴도 모르는 이웃들이 함께 살고 있는 8가구 다세대주택의 새벽을 돌린다 필시 누군가의 단잠을 깨울 것이 분명하지만 특별시의 시민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신없이 세탁기를 돌리고 출근을 하고 야근을 하고 정신없이 살아야 한다 정신없이도 살아남아야 한다
새벽 5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을 돌린다 얼굴도 모르는 강박을 돌려야 한다 층간 소음 다툼으로 살해당할 각오를 하면서도 세탁기를 돌려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신없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을 돌려야 한다 특별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5시를 그린다
안현미
식탁을 차려놓고
무채색의 여자 창밖을 보고 있다
커피포트에서 끓고 있는 시간의 찌꺼기
주인을 기다리는 빈 의자
- 사랑은 길드는 거야
사막의 은빛 여우 같은 햇살
창문을 넘어 부엌으로
폴짝 뛰어내린다
붉은 방
5시
그를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