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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카와 이에야스 2

1. 별리

 

1

스고가와의 강바닥은 맑고 싸늘했다. 카고사키 모래톱에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후로타니에서 들리는 듯싶은 여우의 캥캥거리는 소리가 두서너 번 귀청을 울리더니 닭 울음소리가 뚝 그치고 집안은 싸늘한 정적에 휩싸였다. 사카이 우타노스케는 동남쪽 창고의 지붕을 가로지르는 아침 안개의 빠른 흐름에 걸음을 멈추었다.

"가을이로구나......"

문득 입 밖에 낸 말의 불길함에 놀라 저도 모르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오다이가 이 성을 떠나는 날이었다.

'오다이 님은 밝은 빛을 안고 시집을 오셨는데......'

다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누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을 말아야지......'

그는 이 집에서 오다이를 맞았다. 그리고 지금은 이 집에서 오다이를 떠나보내려 하고 있다. 인간 세상의 슬픔보다도 더 격렬한 감정이 가슴을 적셔 하마터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릴 뻔했다. 그는 우선 현관 안팎을 돌아보았다. 하인 셋이 부지런히 통로를 쓸고 있었다. 쓸고 난 자리에 다시 낙엽이 떨어져 내렸다.

"수고들 하는군, 수고가 많아."

하인의 인사에 답하면서 우타노스케는 밤새 만들게 한 문 밖의 대나무 울타리를 둘러보았다. 시집올 때도 그러했지만, 이혼당하고 떠나는 오다이를 배웅하려고 오늘도 성안 아낙들이 모여들 터였다. 감정이 북받쳐 오다이의 소맷자락에 매달리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자식을 남기고 떠나는 오다이의 마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 열일곱 살이신데......'

히로타다는 오다이에 대한 사랑을 가신들한테까지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이마가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조심성 외에 카리야에지지 않으려는 심정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까짓 여자 한두 사람 가지고."

애써 태연하려는 그 태도에는 가신들에게 자신의 비탄을 보이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깔려 있었다. 오다이가 이성을 잃게 되면, 이러한 히로타다의 배려도 허사가 된다. 떠나가는 어미 새의 자세는 뒤에 남는 타케치요에게 그대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과연 도련님의 생모답게 의연하고 담담하다.'

이런 인상을 남기고 떠나게 하는 것이 오다이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겠으나, 누구든지 마님께 매달리려는 자가 있거든...... 지체 없이 꾸짖도록 하라."

문 밖을 돌아보고 있는 청지기 오다 와헤에에게 다짐을 주었다.

"그래도 접근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오다는 안타깝다는 듯 반문했다. 같이 목화를 심고 길쌈을 배운 아낙네들이 오다이를 얼마나 따르고 또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타노스케는 목이 메었다.

"그럴 때는......"

다시 문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성주님의 노여움을 사서 헤어지게 되었다고 하여라."

차차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모밀잣밤나무 잎에서 뚝뚝 이슬이 떨어져 내렸다. 우타노스케는 그 이슬 아래를 지나, 이번에는 오다이가 오카자키에서 마지막 꿈을 꾸었을 별채 쪽으로 걸어갔다.

 

2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막 일어난 어린 시녀가 부엌에서 조반을 짓느라고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우타노스케는 모른 척하고 늦게 핀 백일홍을 향해 정원으로 가다가 깜짝 놀랐다. 바로 눈앞에 오다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미 머리는 단정하게 빗고 있었다. 화장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나 옆모습은 향기로울 정도로 아름다웠고, 눈이 약간 부어 있었다. 우타노스케는 말을 걸려다가 그만두고 슬며시 몸을 뒤로 뺐다. 오다이는 턱 밑에 하얀 손을 모아 합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향하고 있는 방향에는 타케치요가 있는 후로타니의 거처가 있었다. 무엇을 빌고 있는지, 뒤에 우타노스케가 있는 줄도 모르고 뚫어지게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타노스케는 다시 한 걸음 더 물러나 백일홍으로 가만히 손을 가져갔다. 목덜미에 꽃잎과 이슬이 함께 떨어지면서 슬픔이 찡하게 마음을 울렸다.

'운명......'

그것과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친 느낌이었다. 이 젊은 어머니는 여기 갇힌 후 한 번도 타케치요를 만나지 못했다. 만나게 해달라고 히로타다에게 조른 것을 우타노스케는 알고 있었다. 만나도록 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유모인 오사다가 데리고 우타노스케의 아내를 배웅하는 것처럼 하면 되었다. 그러나 히로타다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기는 대나무 울타리를 베기까지 하며 찾아오기만, 타케치요를 만나게 하면 오다이를 여기 가두어놓은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다이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우타노스케는 다가갔다.

"마님."

오다이는 깜짝 놀라 우타노스케를 돌아보았다.

"끝내...... 이별의 날이 오고야 말았군요."

말하고 나서 우타노스케는 눈길을 막 물들기 시작한 동쪽 구름 언저리로 돌렸다.

"이별을 아쉬워하는 아낙네와 하인들이 수없이 문전에 몰려올 것입니다. 그때 잘 눈 여겨 보십시오."

"무엇을 보라는 말씀인가요?"

맑은 목소리였다. 슬픔과 싸워 이기려 노력하고, 이미 그것을 극복한 목소리였다.

우타노스케는 가슴이 뭉클하여 그녀와는 반대로 목소리가 잠기면서 굳어졌다.

"많은 여자와 아이들 중에서 무심히 마님을 배웅하는 한 사림이 있을 것입니다. 오사다 님에게 안겨 스고가와의 성벽 옆 큰 팽나무 밑 근처에서."

"타케치요 말인가요. 우타노스케 님?"

"글쎄요,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타케치요라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말씀은 안 만나시겠다는......?"

"우타노스케 님."

"."

"염려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저는 이미 구원을 받았어요. 이 눈으로 보고 만나는 것만이 만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타케치요......라면 계속 제 마음속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마님......"

우타노스케는 참다못해 두서너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오히려 제가 더 당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3

"많은 폐를 끼쳤어요. 떠날 때는 남의 눈도 있고 하니 말을 나눌 수 없을 거예요.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다이는 침착하게 일어나 짧은 소맷자락을 안 듯이 하고 허리를 구부렸다. 갓 출가했을 때는 인형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우타노스케의 자세를 바꾸에 할 만큼 기품과 침착성을 지니고 있었다.

"마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라 의리라는 것을 원망할 따름입니다. 그 대신......"

우타노스케는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분기하는 모습으로 자기 가슴을 쳤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그의 가슴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타케치요 님은...... 타케치요 님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오카자키의 늙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반드시 이 나라 제일가는 무장으로 기르고야 말겠습니다."

", 해가 뜨는군요. 저 푸른 하늘."

"마님!"

"우타노스케 님, 여러분한테는 반드시 밝은 해가 비칠 거예요."

오다이는 웃지 않았으나 우는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남의 눈에 띄면 히로타다의 마음을 배반하는 것이라 생각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가벼운 목례를 남기고 곧장 별채로 사라져 갔다.

오다이의 출발은 그로부터 일 각반 뒤 다섯 점이었다. 그 길은 우타노스케의 집을 나와 스고 망루를 거쳐 강을 따라 후죠몬으로 향하게 된다. 표면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좋지 못한 일이 있어 이혼당하는 추방자 같은 것이어서 카리야에서 마중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오다이는 그 오빠인 시모츠케노카미의 생각이 모자라 이혼하여 돌려보낸다.'

형식은 그랬다. 오다이가 헤어지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같은 마츠다이라 일족인 카타하라의 키이노카미 이헤히로에게 출가한 오다이의 언니도 이날 함께 카리야에 돌려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여섯 점 반이 되자 우타노스케의 집 뒷문 앞에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낙네들은 얼굴을 가리지 않았으나 남자들은 모두 삿갓으로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맨 처음에 온 사나이는 그 떡 벌어진 어깨만 보아도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는 오쿠보 신파치로였다. 그는 아낙네들을 헤치고 대나무 울타리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구부리고 짚신의 끈을 단단히 묶었다. 이미 신파치로는 호송하는 자들의 뒤를 따라 오다이를 배웅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이 집 주인인 우타노스케 역시 짚신을 신고, 신파치로의 차림을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가마는 스고 문 밖에 놓여 있어, 오다이는 거기까지 걸어가게 된다. 표면적인 호송인은 카네다 타다스케와 아베 사다츠구 두 사람이었으나, 모인 사람들 중에는 아베 오쿠라, 이시카와 아키, 오쿠보 신파치로 등도 섞여 있다.

오다이가 걸어 나오자 먼저 아낙네들 가운데서 흐느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엾어라, 신도 부처님도 안 계신단 말인가."

"정말이야, 이렇게 훌륭하신 마님을."

"성주님은 슬픈 나머지 병환이 나셨다는군."

어느 틈에 여자들은 진상을 꿰뚫어보고, 눈앞에 오다이가 걸어 나오자 목을 놓아 울었다. 오다이는 그 여자들 중에서 케요인의 모습을 찾았다. 자기와 타케치요의 얄궂은 인연도 안타까웠으나 어머니와 자신의 처지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펐다. 스고 문의 성벽을 막 나서려 할 때였다.

"마님!"

날카롭게 소리 지르며 무섭게 달려오는 여자가 있었다.

 

4

"이봐, 소란을 피우면 안 돼!"

카네다 타다스케가 소리를 질렀지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여자를 떼어놓을 수는 없었다. 여자는 오히려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주위 사람들을 꾸짖었다.

"조용히들 하시오."

여자는 내전의 로죠스가였다. 오다이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멎었다. 유리도 코자사도 없는 내전에서는 이 여자만이 둘도 없는 오다이의 충복이었는데, 그 스가가 가리키는 곳을 보고는 오다이도 깜짝 놀랐다.

'......타케치요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를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유모 오사다도 아니고 카메죠도 아니었다. 소실인 오히사였다. 오히사는 타케치요를 높이 쳐들 듯이 안고 큰 팽나무 밑에 서 있었다. 역시 표정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두 눈에는 번쩍 번쩍 빛나는 것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오른쪽에는 여섯 살 난 칸로쿠가 서 있고, 왼쪽에는 타케치요와 동갑인 케이신이 하녀 만에게 안겨 있었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오다이에게 히로타다의 총애를 빼앗긴 오히사가 일부러 오다이의 이번 불행을 고소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반대인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의 괴로움은 나도 잘 알아요.'

그러나 동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얼굴이 창백했다. 걸어서 거기까지 따라온 노신들 가운데도 얼굴빛이 변한 사람이 있었다. 크게 뜬 오다이의 눈에 마음속의 폭풍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오다이는 숨을 쉬지 않았다. 눈도 깜짝 않고 걸음도 내딛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이상 오히사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입으로는 꿋꿋한 말을 하여 억센 의지를 보였으나, 자기 자식의 모습을 앞에 두고는 뼈와 피가 얼어붙는 충격을 받았다.

타케치요는 여전히 토실토실 살이 쪄 있었다. 작은 주먹은 오늘도 꼭 쥐어져 있고 손목도 잘록했다. 이따금 하늘을 쳐다보고 모인 사람들을 보기도 했으며 오히사의 귀불 언저리를 바라보기도 했다. 눈은 생기가 감돌고 위를 쳐다볼 때마다 시원스런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는 했다. 아직 어머니의 얼굴을 익혀 기억에 남길 나이는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뒤 이렇게 떠나는 어머니를 떠올릴 날이 과연 올까? 오다이는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눈꺼풀 속에서 말렸다. 이것이 지금 당장은 어머니로 오다이가 보일 수 있는 필사적인 사랑이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이렇게 남의 손가락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허영이 아니었다. 그런 어머니가 낳은 자식이라고 경멸받게 된다면 후회는 평생토록 이어질 것이었다.

'이것이 모자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마지막 날......'

이런 생각을 하자 오다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얼른 팽나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또다시 눈물을 말리면서, 오히사가 왜 타케치요와 함께 이처럼 자기를 배웅해주는가 하는 데에 생각을 돌리려고 애썼다. 오다이의 성격상 이것이 오히사의 보복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타케치요를 잘 길러 형제가 서로 돕고 화목하게 할 테니 안심하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스가, 오히사 님께 이야기 잘 전해주세요."

오다이는 발밑에 몸을 던져 울고 있는 스가에게 말하고 스고 문을 향해 걸었다.

 

5

가마가 성을 떠난 후에도 뒤따르는 사람의 수는 줄지 않았다. 배웅하는 군중들 중에서 어느 틈에 50여 명이 따라나섰다. 카라야의 미즈노 시모츠케노카미와 오카자키 가신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시모츠케노카미가 그들을 영내로 끌어들여 모두 죽이려 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오다이를 카리야까지 은밀히 배웅함으로써 시모츠케노카미의 마음을 달래려는 듯했다. 야하기가와를 건넜을 때 아베 사다츠구가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신파치, 도대체 어디까지 배웅할 생각인가?"

"물론 카리야 성 입구까지지."

"어째서 배웅을 하나?"

"마님과 헤어지는 것이 괴롭기 때문에."

무뚝뚝하게 대답한 뒤 덧붙였다.

"나는 혼례는 좋아하지만 이별은 찬성하지 않아. 시모츠케노카미도 괴로울 거야, 자네는 정식 호송인이니 성에 들어갈 수 있을 거네. 성에 들어가거든 우리가 작별을 애석해하며 따라왔다고 말이라도 전해주게."

날씨가 너무 좋은 것이 오히려 눈물을 자아내어 오다이는 가끔 눈을 감았다. 남 앞에서는 울지 않았으나 가마에 오르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 눈물 속에서도 끝까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역시 오히사에게 안긴 타케치요였고, 이복형제를 데리고 나와 배웅해준 오히사의 마음 씀씀이였다. 오히사에게도 여러 가지 감화가 있었을 것이다. 여자 특유의 질투, 그리고 승리감과 슬픔도.

'그런데도 오히사는 나를 배웅해주었다......'

좁은 여자의 소견으로 가장 소중한 일족의 결속을 어지럽히는 잘못은 저지르지 않겠어요. 발돋움하고 그렇게 외쳤던 것처럼 오다이에게는 생각되었다. 오다이는 오히사에게 뒤지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냉정을 유지하고 분별해야 할 것을 분별해나가는 것이 오히사에게 보답하는 길이며, 타케치요에 대한 이별의 선물이라 생각했다. 야하기가와를 건너자 주위의 가을 경치는 더욱 짙어졌다. 추수한 논 사이에 점점이 보이는 대밭의 초록빛마저 벌써 겨울을 기다리는 듯했고, 군데군데 붉은 잎이 섞인 옻나무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사람의 일생에도 가을은 있다......'

오다이는 그 가을을, 머지않아 찾아올 겨울과 봄을 위해 겸허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마를 좀 세우세요."

오다이는 오다와 마츠다이라가 피를 흘리며 싸운 안죠성이 보이자 조용히 안에서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카네다 타다스케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가마를 내리겠으니 신발을."

"."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가마에 집중되고,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다이가 여기서 오카자키에 마지막 이별을 고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다이는 얼른 가마 밖으로 내려섰다.

"여러분들의 배려를 평생 잊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제 적의 땅이니 여기서 여러분들과 헤어지고 싶군요."

아베 사다츠구와 카네다 타다스케는 깜짝 놀라 멈추어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안 됩니다. 성주님의 분부이십니다. 카리야 성까지 모시는 것이 저희들의 임무입니다."

신파치로가 고함지르듯 말했다.

 

6

"만일 마님 신변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다면 성주님은 물론이고 카리야 성주님께도 면목이 서질 않습니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삿갓 속에서 꾸짖고 있는 것은 사카이 우타노스케였다. 그는 오다이가 출가해오던 날의 사건을 상기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어조에는 자기 자식을 꾸짖는 듯한 투가 있었다. 오다이는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맑은 대기가 그대로 살갗에 반사되어 떠오르는 듯 해맑은 오다이였다.

"그 정성을 나보다도 타케치요에게 기울여주세요."

열일곱 살의 여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훈계하는 듯한 어조였다.

"여러분은...... 타케치요에게...... 다시없는 보배, 그러므로 저는 이 이상의 배웅은 바라지 않습니다."

"고정하십시오. 마님은 그 소중한 타케치요의 어머니시니, 저희들은 만일의 경우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공연한 심려는 놓으십시오."

아베 사다츠구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오다이의 눈에 다시 살짝 눈물이 고였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은 감정에 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탓이었다.

"이유를 말해야 할 것 같군요. 그럼 들어보세요."

"......"

"카리야의 성주인 오빠의 성격은 여러분보다 제가 더 잘 알고 있어요. 급한 성격, 과격한 성격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 한 가지로 제 마음을 헤아려주세요."

"......"

"만약 여러분께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긴다면 타케치요가 자란 뒤, 분별없는 어머니였다고 저를 크게 원망할 것입니다. 그토록 혁혁한 무공을 세운 사람들을 일시적인 슬픔에 사로잡혀 적지에 끌고 들어가 헛되이 목숨을 잃게 한다면 저는 못난 어미였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카네다 타다스케가 정신이 번쩍 드는 듯 얼굴을 들고 일행을 돌아보았다. 모두 돌처럼 굳어진 채로 서 있었다. 오다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조심은 미리 해야 하는 것...... 이것은 제 아버님 우메몬다이부의 가르침이었어요. 아니, 그뿐만이 아닙니다. 타케치요와 시모츠케노카미와는 조카와 외삼촌. 그 사이에 원한의 씨앗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발 부탁이에요! 타케치요의 미래를 위해서에요! 제 말을 듣고 제발 돌아가 주세요."

갑자기 남자들의 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 어깨도 어느 삿갓도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님!"

우타노스케가 쥐어짜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어리신 마님 앞에 저는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나잇살이나 들어 가지고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에는 소중한 타케치요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돌아갑시다. 돌아가서 오늘 마님이 말씀하신 당부를 잊지 맙시다."

이렇게 하여 오다이의 가마는 아베 사다츠구가 불러온 농부의 손에 맡겨졌다. 오카자키의 노신들은 오다이의 재촉을 받고 계속 뒤를 돌아보면서 성으로 돌아갔다. 오다이는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가마를 들게 했다. 그제야 고독이 온몸에 스며들어 흐느껴 우는 소리가 가마 밖까지 새어나왔다. 오다이의 언니, 마츠다이라 키이노카미 이에히로의 부인인 경우에는 이런 배려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호송한 16명이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도 시모츠케노카미에게 살해되었다. 하늘에는 한 점 구름도 없는 날에.

 

 

2. 희망의 매화

 

1

여기저기 매화가 피기 시작하고 그 위에 엷게 눈이 덮여 있었다. 세배를 하러 성을 찾아왔던 집안 아이들도 이제 거의 모두 물러갔다. 큰방에 앉아 세배를 받던 성주 히로타다는 가끔 등을 구부리고 기침을 했다. 약간 열도 있는 듯했다. 얼굴이 벌겋게 분홍빛으로 달아오르고 눈은 물을 부은 듯이 젖어있었다.

"그럼 우리도 그만 물러가는 것이 좋겠군."

아베 오쿠라가 은발에 수심을 담은 눈으로 사카이 우타노스케를 돌아보았다.

"그럼, 감기 조심하십시오."

우타노스케는 히로타다 앞으로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동생을 대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토다 단죠님의 영애 마키히레님에 대한 일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히로타다는 으음 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두서너 번 기침을 했다. 무언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의 새봄을 맞이했을 뿐인데, 이미 인생에 지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베 오쿠라는 잠자코 있었으나 사카이 우타노스케는 그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두려워 지난해 가을에 이혼한 오다이를 아직 잊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다. 일족을 결속시키는 무장의 입장으로, 한번 결정한 일에 대해 언제까지나 연연해하는 허약한 모습을 보기란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위의 상황은 점점 더 험악해지고 있었다. 코앞에 있는 안죠 성에서는 오다 노부히데가 자기 아들 노부히로를 성주로 삼아 착실하게 군비를 확장하고 있었고, 오다이의 오빠 미즈노 노부모토도 오다이의 이혼을 계기로 지금은 분명히 적의를 품고 오카자키성을 노리고 있었다. 순푸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상경할 뜻을 번복할 리 없으므로, 두 세력 사이에 낀 마츠다이라의 운명은 잔뜩 흐린 오늘의 날씨보다도 더 암담했다.

"올해에는 기어코 해보겠다."

경사스러운 설날, 이 한 해를 어떻게 헤쳐 나갈까 마음에 불안을 품고 있는 일족에게 강력한 한마디를 들려주었으면 싶었다. 그런데 히로타다는 연말을 보았을 때보다도 더 수척해 있었다. 토리이 타다요시와 오쿠보 형제들이, 재혼 이야기가 나도는 타와라 성주 토다 단죠의 딸에 대한 말을 했을 때도 우물우물하며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큰방을 나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베 오쿠라가 중얼거렸다.

"결코 무리가 아니오, 마님과의 금실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우타노스케는 혀를 찼다.

"들리는 소문으론 연말부터 내전에 들어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 계시다는 군."

"나는 그보다도 가슴에 병이라도 생기시지 않았나 싶어 여간 걱정이 되지 않아요."

"어쨌든 올해도 복잡한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으니 영감도 감기 들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두 사람이 나란히 무사 대기실에서 현관으로 나왔을 때였다.

아베 노인 쪽에서 말을 걸었다.

"이대로 돌아가겠소?"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지요."

우타노스케는 낮게 깔린 하늘에서 너풀너풀 내리는 눈을 손바닥으로 받았다.

"이렇게 우울한 기분으로 돌아가면 집에 가서 잔소리를 들을 거요."

"그럼 기분전환이나 하러 갈까요?"

"그럽시다."

우타노스케는 얼른 대답하고 나서야 비로소 빙긋이 웃었다.

 

2

두 사람이 기분전환으로 들러보자고 한 곳은 둘째 성이라고는 하나 이름뿐인 적자 타케치요가 있는 집이었다. 타케치요도 오늘은 유모인 오사다에게 안겨 상심에 빠진 아버지와 함께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혈색이 아주 좋았다. 아버지 히로타다가 허약한 체질이었는데 비해 타케치요는 아주 건강했다. 두 돌을 맞았을 뿐인데도 제법 서툰 말을 하기 시작했으며, 사방을 휘저어가면서 돌아다니려 했다. 히로타다는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도 싫증이 났는지 잠시 후 말했다.

"데리고 나가거라."

눈살을 찌푸리고는 덧붙였다.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니까."

누가 보아도 타케치요는 아버지보다 헤어진 오다이를 더 많이 닮았다. 아니, 오다이라기보다도 그녀의 아버지 미즈노 타다마사를 쏙 빼다 박았다. 둥그스레하고 넉넉한 턱에 한 일자로 다문 입이 귀여웠고, 총총한 두 눈은 가끔 번쩍하고 빛을 뿜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이 조부인 타다마사를 닮았기 때문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모두들 히로타다의 아버지 키요야스를 닮았다고 했으며, 그렇게 생각하려 하고 있는 듯했다. 히로타다의 나약함을 이야기할 때마다 오카자키 집안사람들은 키요야스의 무용을 회고하며 그를 흠모했다.

"도련님에겐 활기가 있어요. 할아버님을 꼭 닮으셨지."

지금도 성곽을 나가 사카타니에 이르렀을 때 아베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길가에 있는 매화 한 가지를 꺾어들었다.

"타케치요 님에게 드릴 선물인가요?"

", 허나 난 타케치요 님이 첫 출정하실 때까지 이 세상에 살아 있지 못할 테지. 이 엄동설한에 피어나는 패화의 의기로 잘 부탁하네, 자네들에게."

"하하하......"

그제야 우타노스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오늘 집을 나온 뒤 처음 웃는 웃음이었다.

"매화의 의기, 그것을 바친단 말인가요?"

이렇게 말하면서 아베 노인의 귀밑에 붙은 눈송이를 털어준 다음 품속에 손을 넣어 묘한 모양의 것을 끄집어냈다.

"그게 뭔가?"

"선물입니다."

"보릿짚으로 만든 고양인가?"

"천만에. 이건 말입니다, 영감."

", 그게 말이라고?"

"제가 직접 만든 것이지요. 이 장난감은 견마지로를 뜻하는 말입니다."

"하하하......"

이번에는 아베 노인이 웃기 시작했다. 그 웃는 아베 노인의 눈에 엷게 눈물이 맺힌 것은 나약한 성주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아직 어린 젖먹이한테 기대를 거는 작은 성의 무사가 느끼는 애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렇구나, 한 가문의 중신인 몸으로 손수 그 장난감을 일부러 짬을 내어 만들어왔구나."

"그것 참, 도련님이 기뻐하시겠는걸. 무엇보다도 좋은 선물이지. , 어서 가세."

두 사람은 다시 한참 동안 묵묵히 걸었다.

눈이 점점 더 세차게 퍼부어, 오쿠라가 꺾어든 매화가지는 꽃인지 눈인지 모를 만큼 하얗게 되었다. 두 사람은 가끔 머리를 흔들어 귀밑머리의 눈을 털면서 망루를 따라 걸어갔다.

"이리 오너라."

둘째 성의 문에 들어서서 두 사람은 커다란 소리로 함께 부르고는, 그 소리에서 지금까지 없던 홀가분한 마음을 읽으려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3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하녀가 나오기 전, 두 사람은 현관에 수많은 신발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모두 여기 모여 있는 모양이군."

우타노스케가 중얼거리는데, 안에서 오쿠보 신파치로가 큰소리로 말했다.

"오실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어서들 들어오시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며 옷자락을 털고 곧장 툇마루에 올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정면에서 힘찬 타케치요의 목소리.

"하버지."

", ."

아베 노인이 먼저 앉았다.

다다미 여덟 장짜리의 방 두 칸을 터놓은 수수한 방안, 정면 상에는 네모로 자른 희고 붉은 떡에, 장수를 비는 멧돼지 고기, 무와 같은 음식이며, , 거북 따위로 깎은 장식물 등이 조촐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한 것들을 뒤로하고, 한발 먼저 본성을 나온 토리이 타다요시가 싱글벙글 웃으며 타케치요를 앉고 있었다. 오쿠보 형제와 이시카와 아키, 그리고 아베 시로베에 등도 모여 유모가 마련한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우타노스케도 아베 노인과 나란히 앉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다 같이 입을 모아 말하며 새해 인사를 하는데, 머리 위에서 상반신을 흔들며 타케치요가 버둥거렸다.

"하버지."

아직은 어느 가신을 보더라도 할아버지라 불렀는데, 이 한마디가 그 자리에 모인 노신들의 마음을 여간 안타깝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 아이는, 자기에게 거는 일족의 절실한 기대를 알고 있을까?'

", 할아버님을 그대로 빼다 박았군."

아베 노인은 매화 가지를 들고 토리이 타다요시 곁으로 다가갔다.

", 이번에는 내가 좀 안아봅시다. 선물을 드리려고 하니."

아베 노인보다 더 머리가 하얀 은발의 타다요시 손에서 타케치요를 받아 안고 높이 쳐들면서 아베 노인은 다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할아버님은 오와리까지 공격하시고, 오다 따위에게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으셨답니다. 할아버님을 닮으셔야 합니다."

우타노스케는 품속에서 보릿짚 말을 꺼내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이 어린 몸은 이제 어머니와 생이별을 한 상태였다. 아버지는 일족의 신뢰를 얻지 못해 고민하고 있으며, 강한 세력의 틈바구니에 낀 약소한 성이라서 친척들 가운데서는 오다 파, 이마가와 파로 나뉘어 암투를 벌이는 사태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이 아이의 어머니를 쫒아버려야만 했던 아버지도 가엾고 그 아들도 가련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의논이라도 한 듯이 이곳에 모여 앉은 가신들의 처지 역시 슬펐다. 누구랄 것 없이 모두 마츠다이라 가문의 기둥, 할아버지도 이룩하지 못하고 아버지도 이루지 못한 생활의 안정에 대한 기대를 이 철없는 어린아이에게 걸고 부지런히 살아가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타케치요만은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기쁜지 아베노인이 준 매화 가지를 토실토실한 손으로 움켜쥐고 다시 소리치며 타다요시의 허연 머리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하버지."

"정말, 씩씩하시군."

꽃잎이 우수수 주위에 날았다. 그러자 갑자기 기묘한 소리를 지르며 오쿠보 신파치로가 울음을 터뜨렸다. 마침 그가 들고 있던 잔 속에 꽃잎 하나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4

"신파치로, 그게 뭐 하는 짓이냐, 정초부터."

형 신쥬로가 꾸짖었다.

"운 것이 아니라, 너무 기뻐 웃은 겁니다."

"이 억지쟁이가 또 엉뚱한 소리를 하는구나. 네 소원이란 자식에게 솜옷을 사주는 일이 아니더냐?"

"와하하하, 그것도 있지. , 그것도 있어요."

신파치로가 우는 웃는지 모를 얼굴을 술잔을 향해 숙이고 사카이우타노스케는 기다렸다는 듯이 품속에서 슬며시 그 장난감 말을 꺼내 타케치요에게 내밀었다. 타케치요의 눈이 빛났다. 아이는 그것이 말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입을 꼭 다물고 조심스럽게 노려보았다.

"!"

그러더니 이번에는 매화가지로 우타노스케를 때렸다. 와아 하고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들 히로타다의 상심으로 침울해진 마음을 이 어린아이를 보며 털어내려 했다.

"꽤나 맵군 그래. 이것은 개가 아니라 말입니다. , ."

"-"

타케치요는 흉내를 내고 나서, 이번에는 매화 가지를 내던지고 그 장난감에 덤벼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싱글벙글하며 보고 있던 매화가지를 내던지고 그 장난감에 덤벼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싱글벙글하며 보고 있던 토리이 타다요시가 아베 노인에게 말했다.

"도련님이 말을 타시게 될 때까지 만이라도."

아베 노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한테 돌아온 잔을 받으면서 타케치요를 유모인 오사다에게 넘겼다.

"오래오래 살아야지. 그럼 잔을 받겠소."

그리고 이 잔이 우타노스케한테 돌아갔을 때였다. 이시카와 아키는 우타노스케가 다 마시기를 기다렸다가, 우타노스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마츠다이라의 모든 중신들에게 의논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못 들었습니까. 내전의 소문을?"

"내전의 손문이라니...... 성주님의 술 말이오?"

아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새 여자 말이오."

", 성주님이 새 여자를...... 그럴 리가 없지. 마님을 카리야 성으로 보내신 뒤로부터는 오히사 님한테도 가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로죠들까지도 그토록 마님을 생각하셨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정도예요."

"그렇다면, 그게 원인일 겁니다."

"그것이라니?"

"술기운에 그러셨을 게요. 밤중에 목욕을 하시다가 하녀더러 오다이냐고......"

"...... ...... 뭐라구요?"

신파치로가 옆에서 끼여들었다.

"너는 가만히 있어."

형이 제지했다.

"그러면 하녀가 마님으로 보였단 말이오?"

"상당히 닮은 데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술만 취하면 불러들여 목욕을 하신다더군요."

이시카와 아키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이 소문이 퍼지면 안 되니 일체 입밖으로 내지 말도록 하시오. 입을 다물어요."

지금까지 눈을 감고 묵묵히 듣고만 있던 토리이 타다요시가 단호한 어조로 모두에게 말했다. 타케치요는 어느 틈에 토코노마의 장식물 곁으로 가서 장난감 말을 세우고 있었다.

 

5

사카이 우타노스케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흥망성쇠를 예측할 수 없는 난세라고는 하나 이것은 너무도 비참한 조짐이었다. 열네 살에 불과한 오다이를, 가문을 위한 일이라고, 억지로 히로타다를 설득하여 오카자키 성으로 맞아들이게 한 것은 우타노스케였다. 그때는 마츠다이라의 안전을 위해 더없이 필요한 혼사였으나. 열여섯 살의 히로타다는 그 정략결혼을 몹시 싫어했었다. 오다이 역시 마찬가지 였을 것이었다. 신부는 세태를 보는 눈도 체념도 남편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다. 끈질긴 인내로 서서히 히로타다의 마음을 사로잡고, 드디어는 가신들의 신망까지 한 몸에 모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타케치요가 태어났다. 그때 온 성안이 기뻐하던 일이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우타노스케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상하를 막론하고 총체적인 난세, 살아남기 위해 짝지어진 부부가 이번에는 살아남기 위해 생나무 쪼개지듯 갈라져나갔다. 오다이의 오빠 미즈노 노부모토가 오다 노부히데의 편에 가담했기 때문에, 이마가와 쪽이 두려워 오다이와 헤어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오다이는 남편과 자식에게 마음을 남기고 오카자키를 떠났다. 그날의 슬픔 역시 히로타다에 못지 않을 정도의 무상감으로 우타노스케의 마음을 바싹 죄고 있었다. 히로타다가 오다이를 잊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더 단죠의 딸을 빨리 후실로 정하라고 권했다.

'그렇구나, 마님의 환상을......'

안타까운 심정은 또 있었다. 인정에 매달려 있을 시대냐고 꾸짖고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가엾은 생각이 밀물처럼 들이닥쳐 마음을 적셨다. 애꿎게 호족 집안에서 태어난 죄로 혼인도 이혼도 정략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에 대한 불평이 점점 더 병든 몸을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 이것도 어쩔 수 없었다.

여자. 그것이 젊음을 발산하는 배출구라면, 우타노스케는 오히려 안도했을 터였다. 그러나 술에 빠진 신경이 기묘한 환상을 보게 하여, 하녀를 헤어진 아내로 착각하는 상황이라면 사태가 너무 심각했다. 무장의 그릇이 아니었다. 아버지 키요야스와는 비교도 안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성장과정을 통해 어릴 적부터 섬겨온 자기에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다. 간언을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이번에는 토리이 노인이 아주 조용한 어조로 이시카와 아키에게 말을 걸었다.

"그 소문은 어디서 들었소?"

"성주님 말을 관리하는 하인이 하녀에게서 들었다고 합니다."

"입막음은 했겠지요?"

"물론입니다."

"어쨌거나 그처럼 성주께서 실성하셨다니 예삿일이 아닙니다. 마사이에님......"

자기 이름을 부르자 우타노스케는 가면과도 같은 타다요시의 얼굴에 눈길을 돌리고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밖에서는 눈이 멎었는지 창이 약간 밝아졌다.

 

6

토리이 타다요시는 와타리에 살기 때문에 히로타다와 가깝다고는 할 수 없었다. 히로타다 곁에서 정치- 그렇다고는 하나 아직 직책도 정해지지 않은 시대여서 중신들은 어른이라거나 영감이라고 불리고 있었다는 혼다 히이하치로, 사카이 우타노스케, 이시카와 아키, 우에무라 시로쿠로, 아베 오쿠라 등 다섯 명이 맡아보고 있었다. 누대의 중신들 중에서도 원로인 타다요시의 말은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름이 불린 것은 우타노스케 혼자였으나 일동의 눈길은 어느 틈에 타다요시에게로 집중되었다.

"흔히 있는 일이지요."

그러한 긴장을 의식한 타다요시는 우선 가볍게 말을 돌린 다음 할 이야기를 했다.

"저는 곧 와타리로 돌아가야겠소. 그러니 여러분이 노신들에게 잘 말씀드려주시오, 타와라의 단죠 님 댁과 혼삿말도 나왔으니 말이오. 중요한 것은 그 여자의 사람됨이오. 그렇지 않소, 영감?"

"그렇습니다."

아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마츠다이라에는 결코 여기 모인 몇몇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소."

"바로 그 점입니다. 마사이에, 아시겠소?"

우타노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노인들은 조심스러웠다.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세력의 어떤 손길이 성안까지 뻗칠 지 알 수 없었다.

강할 때는 다툼이 없으나 약해지면 반드시 분규가 일어난다. 오다파, 이마가와 파로 갈라진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 하더라도, 때로는 그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야심을 펴려는 자들마저 생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본래의 마츠다이라 파 등의 세 파가 넷으로 나뉘어 망국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는 위험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었다.

앞서는 종조부뻘인 마츠다이라 노부사다가 오다 편과 내통하였고, 지금은 또 숙부인 쿠란도 노부타카가 계속 히로타다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성주님의 마음이 흐트러져 있다. 실성하셨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타케치요 님 신변이오."

타다요시는 토코노마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타케치요를 돌아 보았다.

"어떻겠소, 마님이 계셨을 때처럼 본성 성주님 곁으로 모셔서 히사님에게 양육을 부탁드리면 말입니다. 아니, 지금 당장 그 대답을 듣겠다는 것은 아니오, 여러분들이 잘 상의해보십시오."

히사란 타케치요에게는 왕고모가 되는, 즉 선대인 키요야스의 누님이었다.

"타케치요 님을 둘째 성으로 옮겨 모신 것은 존중하는 뜻에서지만, 실은 경솔한 처사라 할 수 있지 않겠소? 우리 성에서는...... 뭐니뭐니해도 타케치요 님이 희망이니까 말이오."

"잘 의논해보겠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우타노스케도 같은 의견이었다. '적자'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이곳으로 옮기기는 했으나. 바로 그 직후 은근히 후회하고 있었다. 이것 역시 마츠다이라가 강대했더라면 물론 하지 않아도 될 후회였다. 그러나 지금은 성안에도 안심할 수 없는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어느 것이나 모두라는 생각이 들자 우타노스는 다시 히로타다가 못마땅했다.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만일 타케치요를 돌보는 여자에게 적의 손길이 뻗쳐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7

노신들이 타케치요의 방에서 물러난 것은 오시에 가까워서였다. 타케치요는 혼자 있게 된다는 것을 알고 오사다의 품에서 바둥거렸다. 가지 말라는 소리는 아직 하지 못했으나 두 팔을 내밀고 계속 부르고 있었다.

"하버지, 하버지......"

그럴 때마다 일동은 타케치요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생모와 이별하고 아버지와도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움이 어린것에게 마냥 사람을 그리워하게 했다. 오쿠보 형제는 모두 눈이 빨개져서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성문을 나와 산중으로 돌아갔다.

'그렇다, 타케치요 님을 본성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성안에 거처를 가진 우타노스케는 성문께까지 토리이 타다요시를 배웅하고 잠시 거기 서서 앞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모두가 타케치요를 존중하고 타케치요를 중심으로 하여 살겠다는 것은 결국 히로타다의 무력함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헤어질 무렵 타다요시는 우타노스케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타케치요 님은 우리 모두의 깃발이오."

사실 그의 말대로였다. 마츠다이라 일족은 오다이의 이혼과 히로타다의 상심으로 기치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타케치요라는 깃발을 히로타다 곁에 세우고, 오다이 못잖은 부인을 하루 속히 성에 맞아들여 본진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타노스케는 엷게 깔린 눈 속에서 가까이 보이는 산과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 이대로 집에 돌아갈 때가 아니었다. 혼자 되돌아가 성주를 만나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형식적인 새해 인사가 아니라 내전에까지 들어가 히로타다와 같이 술을 마시고 같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하여 친밀감을 유지하면서 해야 할 일을 착착 진행시키는 것이 자기 임무라 여기고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돌렸다. 도중에 여러 가신들을 만나 그들이 하는 인사에 꾸벅 머리를 숙이며 답했다.

"힘냅시다."

그러나 생각은 이미 거기에 있지 않았다.

눈은 어느새 멎었고, 내릴 눈도 곧바로 녹아버렸다. 군데군데 '머위의 새순'이 검은 지면을 뚫고 힘차게 싹터 올라 보는 이의 마음을 북돋아주듯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 어서 봄을 맞이해야지....."

어쨌거나 측근에 있으면서 히로타다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여간 불찰이 아니었다.

"그 여자를 이리 부르십시오."

무릎을 맞대고 앉아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고, 그 여자의 됨됨이와 집안 내력을 알아두었어야만 했다. 우타노스케는 다시 뚜벅뚜벅 정면의 현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무사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성주님은 안에 계신가......"

큰 서원을 들여다보았으나 히로타다는 이미 거기 있지 않았다. 화로의 숯불이 하얀 재가 되어 하늘하늘 움직이고 있었다. 우타노스케는 곧장 내전으로 이어진 복도를 건너갔다. 일부러 크게 기침을 하면서 하녀들을 지휘하는 로죠 스가의 방 앞에 서서 고함지르듯 말했다.

"여봐라, 마사이에게 '도소주'에 취해, 목욕을 하고 싶어 찾아왔다고 성주님께 아뢰어라."

 

 

3. 욕실 문답

 

1

히로타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그 여자를 자기 방에 불러들여 허리를 주무르게 하고 있었다. 방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단숨에 들이켠 술이 겨우 기침을 가라앉게 하고, 후끈후끈하게 가슴에서부터 허리로 퍼져 나갔다. 눈을 사르르 감고 깜빡깜빡 졸고 있으려니, 피부에 와 닿는 부드러운 손놀림이 또다시 오다이를 떠올리게 했다. 얼마 안 되는 세월이었지만 오다이는 이미 히로타다에게는 육체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헤어진 다음에야 그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한 팔이 잘려나감 것이 아니라 '폐부'의 어딘가가 빠져나가버린 느낌이었다.

"오다이......"

중얼거리는데, 어느 틈에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에 이슬이 맺혔다. 가신들은 이러한 자신을 결단력이 없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비난을 받을수록 도리어 환영은 더욱 짙어졌다.

'인정도 모르는 것들......'

사나이가 아무리 많은 여자와 접촉하더라도 '아내'는 결국 한 사람뿐, 나는 그 한 사람을 만났다가 쫓아버리고 말았다. 소실은 따로 한 사람 있었다. 일족은 마츠다이라 노리마사의 딸 오히사. 오히사에게는 타케치요의 이복형 칸로쿠와, 타케치요와 같은 날 태어나 타케치요의 운을 가로막지 않도록 기저귀를 찬 채 출가시킨 케이신 등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다이가 떠나자 히로타다는오히사를 찾아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어쩐지 오다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고독을 견디고 있는 것은 자기 혼자만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오다이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다이 이상으로 깊은 고독에 빠져들었고, 그리고는 이 비탄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길이 없었다.

'잊기를 바라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이런 심정에서 그만 술을 과음하게 되었고, 그것이 오하루에게 손을 대는 원인이 되었다.

지난해 1226일이었다. 타케치요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스가를 상대로 잔을 거듭했고, 그날도 화제는 오다이에 대한 것이 거의 전부였다. 추위가 유난히 심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목욕을 하기로 했다. 밖에는 젖과 같은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욕실은 그 이상으로 하얀 김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날 밤 오다이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욕실의 하얀 김 속에 나신을 드러내고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데, 김 속에 희미하게 오다이가 떠올랐다.

"때를 밀어드리겠어요."

"뭐라고!"

히로타다는 정신없이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여자는 벌벌 떨었다. 그 떨림은 카리야에서 시집온 날 밤의, 오다이의 떨림과 같았다.

"오다이, 오다이가 맞지?"

"아닙니다. 오하루라고 합니다."

"아니야, 오다이야."

"죄송합니다. 오하루...... 오하루입니다."

"또 그런 소리를 하는군. 오다이라고 하는데도!"

오하루에게 허리를 주무르게 하면서 그때의 일을 다시 뇌리에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성주님은 어디 계시느냐? 마사이에가 목욕하러 왔다고....."

우타노스케의 목소리가 복도의 정적을 깨뜨리고 들려왔다.

 

2

히로타다는 오하루의 손을 가만히 누르고 귀를 기울였다. 아마 우타노스케가 로죠 스가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스가가 어느 방에선가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거실에 계신다면 안내는 필요 없다. 군신의 수어지교는 우리 오카자키의 오랜 관습이야."

우타노스케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뢰옵니다. 사카이 우타노스케 님......"

스가가 성주의 방과 이어진 작은 방으로 우타노스케를 안내했을 때 히로타다는 양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밖에까지 들리는 소리로 대답했다.

"상관없으니 들어오라고 일러라. 군신의 수어지교는 오카자키의 관습이니......"

그리고 얼른 손을 떼고 물러가려는 오하루를 돌아보며 꾸짖었다.

"괜찮아. 계속 주물러."

우타노스케는 빙그레 웃고 스가를 따라 들어와 천천히 앉으면서 절을 했다.

"목욕을 하고 싶다고 했소?"

", 이시카와 아키가 말했습니다. 아키는 또 말을 돌보는 시동한테서 들었다고 합니다."

히로타다는 고개를 꼬고 쓴웃음을 떠올렸다.

"그 욕실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중이오."

"과연 훌륭한 욕실입니다."

우타노스케는 지지 않았다. 그는 똑바로 오하루를 응시하고 옆모습, 어깨, 허리, 무릎을 훑어보았다. 과연 키도 체구도 오다이를 닮았다. 잔뜩 겁을 먹고 눈을 내리깔았기 때문에 눈매는 보이지 않았으나 부드러운 살결, 둥그스레한 목덜미 등 무언가 자극적이었다. 우타노스케는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로죠 스가를 돌아보고, 턱으로 여자를 가르켰다.

"이름은 뭐라고 하는가?"

", 오하루라고 합니다."

"출신은?"

"카모고리의 히로세 출신입니다. 이와마츠 하치야의 친척입니다."

", 하치야의 친척이라고......?"

이와마츠 하치야는 현재 토사무라이로 오늘도 무사 대기실에서 바위 같은 어깨를 떡 벌리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지난번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어, 그 후부터는 '애꾸눈 하치야'라고 불렀다.

", 그 애꾸눈의 친척이군......"

우타노스케는 다시 한번 오하루를 자세히 훑어보고 나서 스가에게 눈길을 돌렸다.

"스가, 그대의 임무는 무엇이었지?"

", 내전의 하녀들을 단속하는 일입니다."

", 단속이 임무라면, 그대는 장님인가? 눈은 잘 보이는가?"

"......."

"내 눈에는 오하루, 이미 성주님의 손이 닿은 것으로 보이는데 대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나?"

"...... , 그런데......"

"그렇게 보였다면 어째서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 그냥 하녀로 둔다면 성주님께 죄송스러운 일이 아닌가?"

엄한 목소리로 꾸짖는데, 참다못한 듯 히로타다가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릴 하는군, 마사이에. 나는 아직 그 여자를 첩으로 삼지 않았소."

 

3

히로타다가 일어나 앉자 우타노스케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성주님답지 않은 말씀입니다. 시중을 들라고 분부하셨는데 그대로 둔다면 이 우타노스케가 중신들을 볼 낯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지 않으면 되지 않소?"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규칙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주님의 지금 그 말씀은 너무 경솔하시다고 생각합니다."

"또 불평이오, 아니면 꾸짖는 것이오?"

"하하하."

우타노스케는 활달하게 웃었다.

"정초부터 기분 나쁘게 해드릴 순 없지. 그렇지 않은가, 스가?"

"...... ."

"그대의 실수는 내가 성주님께 잘 말씀 드리기로 하지. 성주님은 지금 너무 외로우셔. 성주님, 술을 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히로타다는 대들 듯이 우타노스케를 노려보았다.

"술을 가져오너라."

그리고는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나도 마시고 싶었소."

오하루라 불린 하녀는 다시 머뭇머뭇 히로타다를 쳐다보고 우타노스케의 눈치를 살폈다. 우타노스케는 그 거동을 못마땅한 듯 가만히 지켜보았다. 카모고리히로세 출신이라는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카모고리 '성채'는 사쿠마 일족 쿠로에몬 타케타카가 차지하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거기까지 오다의 손이 미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물론 애구눈 하치야가 친척이라면 그런 걱정은 없을 테지만.

"잠깐."

우타노스케가 다시 말했다.

"애꾸눈이 친척이라고 했지. 어떤 친척인가?"

", 사촌 여동생입니다."

옆에서 스가가 대답했다.

"사촌이라...... 좋아. 그럼 그 여자에게 계속 시중을 들게 하라."

히로타다는 우타노스케의 지시를 '바보'처럼 멍청히 듣고 있었다. 이성으로는 그들의 우려를 알고 있으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못 견딜 정도로 불쾌했다. 무슨 말만 하면 아버지 키요야스의 이름을 들먹이며 압박해오고는 했다. 반발과 체념으로 피로가 쌓인 침묵이었다.

여자들이 나간 뒤 우타노스케는 나직한 소리로 불렀다.

"성주님!"

그리고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이것은 중신들 모두의 의견입니다. 타케치요 님을 본성으로 데려올 수 있게 허락해 주십오."

"어째서? 나 한 사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말이오?"

"비아냥거리지 마십시오. 혹시 다른 마음을 가진 자가 나타나 타케치요 님에게 만일의 일이 생기면......"

"그것이 중신들의 뜻이라면."

우타노스케는 혀를 찰 뻔하다가 간신히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고생을 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선이 가는 사람이라 성질이 비뚤어져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키요야스 시대에는 없던 일, 이렇게 말하려다 그것도 참았다.

"타케치요 님과 마님이 함께 계셔서 성주님 주변이 활기에 넘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타케치요의 성이란 말이오? 아버님에게서 타케치요에게로...... 나는 필요가 없군."

우타노스케는 어깨를 딱 폈다.

"성주님!"

저도 모르게 히로타다를 노려보았다.

 

4

"성주님의 말씀, 무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줄 생각합니다."

"나도 무장이란 말이오? 그대들은 나를 무장으로 인정하시오?"

"점점 더 뜻밖의 말씀을 하시는군요. 이 난세를 살아남으려는 마츠다이라의 우두머리가 무인의 뜻을 버리셨다는 말씀입니까?"

"소실 하나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간섭받는 나는 그대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지 않소?"

우타노스케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농담이라 할지라도 그런 말은 삼가주었으면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안에서는 모두 이 성주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마님이 곁에서 빛을 비쳐주고 계셨던 거야."

오다이가 떠난 뒤부터, 어느 틈에 이런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이 젊은 성주가 고지식한 탓이라고 중신들은 부인하고 있으나, 성주는 점점 더 빗나가고 있었다.

"성주님......"

우타노스케의 어깨가 한숨으로 크게 흔들렸다.

"저희들의 우려가 성주님께는 그토록 야속하게 들리십니까?"

"고맙게 들릴 뿐이오."

"조금 전의 그 여자...... 그 여자 역시 신분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심상치 않은 공기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소."

히로타다는 손을 내저었다.

"그대들의 충성심은 알고 있으나. 나는 내 자신이 살아 있는지 어떤지를 시험해보았을 뿐이오."

"무슨 말씀인지......"

"오히사도, 오다이도 모두 그대들에게 강요받은 여자였소. 그리고 이번에는 또 토다 단죠의 딸을 나에게 강요하려 하고 있지 않소? 그래서 시험해본 것뿐이오."

"목욕 시중을 드는 그 여자를 말씀입니까?"

"그렇지만 내가 이 손으로 직접 택한 최초의 여자요.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소."

여기까지 말하고 히로타다는 갑자기 눈을 빛냈다.

"마사이에, 이리 가까이 오시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대의 눈에는 내가 바보로 보이시오?"

"?"

"그렇게 보였더라도 상관없소. 나는 잠시 일족의 마음을 탐색해보고 있는 거요."

우타노스케는 숨을 꾹 죽이고 히로타다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실 같기도 하고 궁지에 몰린 나머지 뱉어낸 핑계 같기도 했다.

"성주님께서는 일족 중에서 어느 분을 의심하고 계십니까?"

"숙부 쿠란도."

"......노부타카 님이."

"그리고 은퇴한 증조부도."

"?"

"타케치요의 할머니인 여승도, 그대의 본가인 쇼겐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소."

우타노스케는 또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소, 그대의 생각과 일치하오?"

"황송하지만...... 일치한다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아니란 말이오?"

"성주님! 그런 의심을 품으시면 가까이하려는 사람까지 적으로 돌리게 된다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알겠소.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맙시다. 나는 말이오, 목욕 시중을 드는 여자에게 빠진 것처럼 위장하고 역심을 품은 자들을 낱낱이 가려내 보이겠소."

이때 하녀들이 스가를 앞세우고 술상을 들고 왔다. 그 뒤를 오하루도 따라왔다.

"오하루, 이리 오너라."

히로타다는 여자들 중에서 그 여자를 가까이 불렀다.

 

5

우타노스케는 술자리가 마련되고 몇 순배 잔이 돌았는데도 여전히 히로타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타케치요를 본성으로 데려오는 것도, 토다 단죠의 딸과의 혼사도 히로타다는 별로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언가 마음이 걸리는 것이 있었다. 오다이가 있을 때는 찾아볼 수 없던 이상한 고집이 요즘 부쩍 눈에 띄었다. 오하루라는 여자만 해도,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가까이하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다이를 잊지 못하는 고독 때문임이 분명한데도 뜻밖의 말을 했다. 숙부 쿠란도 노부타카를 경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으나, 같은 성에 사는 아흔 살에 가까운 증조부나 타케치요의 할머니이자, 오다이의 생모 케요인까지 의심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어쩌면 심신쇠약이 의심에 의심을 낳아, 결국에는 누구랄 것 없이 가신들을 모두 의심하게 되는 징후로 나타나는 건 아닐까? 히로타다는 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어 오하루를 껴안았다. 오하루는 동석한 사람들을 의식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떨고 있었다.

", 네 손으로 한 잔 따라라. 마사이에, 그대도 술을 드시오."

우타노스케는 가볍게 절을 하고 부자연스러운 히로타다의 모습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술자리에 익숙한 듯 다른 여자들의 동작은 나긋나긋했으나, 히로타다 자신을 우타노스케를 의식해서 그런지 어색하기만 했다.

"오늘부터 너는 내 곁에서 자도록 하여. 마시이에가 허락했다. 알겠나. 모두들?"

우타노스케는 스가가 따른 잔을 받아 마시면서 생각했다.

'역시 오늘은 오지 않는 것인데 그랬구나......'

병 때문인 듯했다. 무슨 일에서나 심한 압박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 압박이 반발이 되어 튀지 않으면 좋으련만 때로 차마 귀로 들을 수 없는 도전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토다 단죠의 딸과의 혼사나 타케치요의 일도 자기 의사는 아니라고 하면서, 창백한 얼굴에 짓궂은 미소를 짓고는 오하루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마사이에, 잘 부탁하오."

깊은 생각이 있어 한 일이라고 우타노스케는 간언을 봉쇄하고는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해가 지기 전에 우타노스케는 암담한 심정으로 히로타다의 거실을 나왔다.

'이대로는 둘 수 없다!"

그러나 정초부터 더 이상 감정의 알력을 가져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자제했다. 하카마 주름을 바로 잡으며 옆방에서 다시 그 옆방을 지나 마루로 나왔을 때였다. 자세를 바로 하고 단정히 앉아 있는 이와마츠 하치야의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치야는 바위 같은 어깨를 떡 펴고, 방 쪽에 등을 돌린 자세로 병풍처럼 앉아 있었다. 곁에는 작은 칼이 놓여 있고, 어떤 괴한도 근접시키지 않겠다는 기개가 감도는 외눈이 번쩍이고 있었다.

"하치야로군."

"."

"날씨가 몹시 찬데도 계속 여기 앉아 있는 건가?"

"제 임무입니다."

우타노스케가 자리를 뜨고 난 뒤 거실에서 들리는 떠들썩한 소리가 복도까지 흘러나왔다. 우타노스케는 조용히 하치야 곁에 한쪽 무릎을 짚고 서서, 나직이 불렀다.

"하치야......"

 

6

"오하루가 자네 사촌여동생인가?"

"."

"성주님께서는 기분이 울적하신 것 같아. 지금까지는 내전을 훌륭히 다스린 성주님이셨는데......"

"그 말씀은 오하루를 없애라는 뜻입니까?"

우타노스케는 깜짝 놀라 하치야의 애꾸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반짝 반짝 기름을 부은 듯이 빛나는 한쪽 눈에 분명 이슬이 내비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텐가?"

"언제라도."

대답하고는 굵은 눈물을 무릎에 뚝 떨어뜨렸다. 오하루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그 눈물은 성주의 행위가 초래한 것이라고 우타노스케에게 호소하고 있는 듯했다.

"하치야."

"."

"친척이라면, 생각하는 것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테지?"

"없습니다. 그래서는 충성이 되지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네 눈엔 성주님의 잘못이라고 씌어 있어."

"당치도 않습니다!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하치야, 나는 자네를 책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것이 자연스러운 인정이지만 원망은 말게. 성주님이 너무 가엾단 말일세. 언제까지나 떠나가신 마님을 잊지 못하고 계시네."

하치야는 고개를 숙이는 대신 점점 더 어깨를 치켜들고, 보이지 않는 눈에서도 뚝뚝 눈물을 떨어뜨렸다.

"나는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데, 욕실에서의 소문은 사실인가?"

하치야는 대답 대신 외눈을 흘끗 우타노스케에게로 돌렸다.

"그날 밤의 숙직인 자네였나?"

하치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치할 날을 지시해주십시오."

"자네 친척이니 그럴 수는 없지. 우매한 성주가 아니시니 언젠가는 스스로 깨달으실 것일세. 스가에게 명령하여 오하루를 잠자리에 들게 할 테니, 욕실에서의 일은 절대로 밖에 소문이 나지 않도록 주의하게."

하치야는 조용히 우타노스케를 쳐다보면서 줄줄 눈물을 흘렸다. 이 무뚝뚝한 자가 그토록 오하루를 사랑하고 있었다니, 그날 밤 히로타다의 행동이 무척이나 비위에 거슬렸을 것이 분명했다. 우타노스케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불안을 느꼈다.

"오하루는 아직 성주님 앞에서 겁을 먹고 있는데, 자네는 무슨 짐작이라도 가는 일이 없는가?"

"있습니다."

"말해보게. 앞으로는 많은 참고가 될 테니."

이 말에 하치야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오하루에게는 남편으로 정해진 약혼자가 있습니다."

"아니 약혼자가......? 이제 알겠네. 자네 친구인가?"

하치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누군가? 어떤 사람인가, 어서 말해보게."

"....... 바로 이....... 이와마츠 하치야...... 접니다."

", 자네라고......?"

주위가 어두워지고, 한기가 다시 싸늘하게 살갗에 스며들었다.

 

7

"그랬었군, 자네였군......."

우타노스케는 다시 한번 나직이 신음했다. 잠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찾았다.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길한 실이 타케치요의 생모 오다이가 떠나고 난 성안에 팽팽하게 쳐진 듯해 등골이 오싹해졌다. 한낱 목욕 시중이나 드는 여자 따위가 히로타다의 눈에 띄리라는 생각을 하치야는 꿈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우직하기 그지없는 그가 목숨 걸고 지키려는 히로타다의 안전을, 목욕탕 밖에서 자기 아내가 될 여자로부터도 확실하게 보호하겠다는 충성심에서 지켜봤을 것이다. 그런데 약혼한 여자가 히로타다의 마음을 사로잡은 채 떠난 오다이를 닮았을 줄이야. 하치야의 눈물도 이제는 이해되었다. 오하루를 빼앗긴 외로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사나이의 마음에는, 연줄을 통해 출세를 노린다고 비난할 세상 소문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가, 자네 약혼자였었군. 그런데...... 성주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신가?"

"모르시겠지요. 아시기 전에 고모와는 인연을 끊어 두었습니다."

"모두가 내 잘못 때문일세. 하치야, 용서해주게."

하치야는 다시 의연하게 자세를 고치고 한 일자로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싸움 때문인지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상대가 우직한 사나이라는 것이 우타노스케로서는 더욱 견딜 수 없었다.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워진 난세라 유례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숙적의 성을 공략하면 미녀 또한 하나의 노획물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사이에 두고 가신들과 다투는 대장은 아직 마츠다이라 일족 중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 과오를 히로타다에게 범하게 하고 말았다. 더구나 그것을 히로타다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마음 약한 히로타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괴로워할지 그것이 여간 걱정되지 않았다.

"부탁이 있는데, 이 일을 성주님께는 비밀로 해줄 수 있겠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 하치야는 이미 이 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잊기 어려운 일이겠지. 하나 상대는 모르고 한 일일세. 아무튼 내가 자네 배필을 주선하겠네, 깨끗이 잊도록 하게."

"이미 스고의 강물에 씻어버렸습니다."

"고맙네. 작은 허물도 크게 보이는 것이 지금의 오카자키, 참아주게. 부탁일세."

말하는 동안 우타노스케는 그만 울음이 터질 것 같이 얼른 그 자리를 떴다. 거실에서 나던 떠들썩한 소리가 요란한 웃음소리로 변해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런 흐름 속에 가만히 앉아, 성주에게 빼앗긴 자기 여자가 차츰 정을 더해가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바라보는 괴로움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으랴. 외곬인 사나이 인만큼 여자에게도 한결같은 정을 기울였을 것이 틀림없다. 우타노스케는 큰 복도로 통하는 모퉁이에서 다시 한번 조용히 돌아보았다. 저물어가는 복도에 우람한 바위가 하나 놓여 있는 것처럼 하치야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외눈만이 살아 있는 짐승처럼 젖은 채 빛나고 있었다.

"용서해주게."

우타노스케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복도를 꺾어 들어갔다. 이미 성안에는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거의 없고, 여기저기서 등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이제야 겨우 구름을 떨쳐버리고 숨을 토해내듯 하얗게 보였다.

 

 

4. 옛 남편을 그리며

 

1

오다이는 그날 밤도 꿈을 꾸었다. 히로타다와 타케치요가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에서 도움을 청하는 꿈이었다. 눈을 뜨자 이미 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두 젖가슴 사이의 골짜기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오다이는 잠시 숨을 죽이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낭조인 듯 돌축대에 밀려와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베개 밑에서 들려왔다. 열네 살이 될 때까지 오다이가 자란 카리야 성안의 시오미 전각 한 모퉁이이었다. 솔바람도 파도소리도 옛날 그대로였으나, 성안의 분위기는 오다이가 오카자키 성에서 맞았던 변화에 못지않았다. 아버지 미즈노 우에몬다이부 타다마사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의 측근도 모두 성을 떠나고 없었다.

배다른 오빠 노부모토는 생전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을 지우기라도 하듯 개혁과 개조를 단행했다. 때때로 쿄토에서 찾아오는 렌가 소리꾼에 취미를 붙여, 그 자신의 거실도 큰 서원도 낯선 성을 찾아온 듯한 느낌을 줄 만큼 변모를 새롭게 하고 있었다. 사이가 좋았던 친오빠인 노부치카도 없었고, 단 하나뿐인 하녀와도 아직은 깊은 정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은 한층 더 오카자키를 떠나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타케치요의 얼굴이 보이고, 잠자리에 들면 히로타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다이는 일어났다. 손뼉을 쳐서 하녀에게 세숫물을 가져오게 하여 묵묵히 아침 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젖가슴 사이의 땀을 닦고 양치질을 한 다음 머리를 빗고 나서 여느 때처럼 직접 창을 열었다. 친정에 돌아왔다기보다 먼 섬에 유배당한 것과도 같은 슬픈 이별 후의 생활. 그녀는 판에 박은 듯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습관이 된 듯 오카자키가 있는 쪽의 아침 하늘을 향해 합장했다.

처음에는 타케치요와 히로타다의 평안과 무사함을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불에게 기원할 생각이었던 것이, 언제부터인지 헤어진 남편과 자식에게 직접 손을 모으는 애절함으로 변해 있었다. 여성에게는 기도해야 할 신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자식이 바로 신이고 부처님이었다.

"타케치요도 지금쯤은 일어났겠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문득 미소를 떠올렸다. 새삼스레 합장을 하지 않더라도 마음에서 사라진 적이 없는 아들. 그 자식이 있기 때문에 살아갈 힘을 얻고 있는 오다이.

"정말, 아기야말로 구원의 부처님......"

기도는 언제나 길었다. 바다가 붉은 빛을 띠기 시작하고, 가까이 있는 나무에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옮아올 때까지 계속 기도를 드렸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하녀가 말을 건넸다. 오다이와 같은 일곱 살인 시노는 아시가루의 딸이었다.

"스기야마 모토로쿠님이 급히 뷥겠다고 성문 밖에 와 계십니다."

"아아."

오다이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돌아보았다.

"어서 모셔라. 나도 부탁할 일이 있었다."

시노는 아직도 피지 않은 꽃망울의 딱딱함을 온몸에 지닌 무표정한 동작으로, 잠시 후 서른 남짓한 한 무사를 데리고 왔다.

"이른 아침이지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스기야마 모토로쿠는 이 성안에서 외톨이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아버지가 아끼던 총신의 아들로 겨우 오빠 밑에서 일하게 된 중신의 한 사람이었다.

 

2

스기야마 모토로쿠가 오다이와 마주앉자 시노는 곧 물러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오다이는 모토로쿠에게 눈길을 보냈다.

"오카자키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요?"

", 사카이 우타노스케 님으로부터 도련님이 무사히 해를 넘기셨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반가운 소식이군요. 마음이 피로해서 그런지 꿈자리가 좋지 못해 걱정하고 있었어요."

"마님......"

"."

"오늘 아침에는 성주님을 모시고 마장에 다녀왔습니다마는......"

모토로쿠는 이렇게 말하고, 수심을 띠고 있으면서도 나날이 아름다움을 더해가는 오다이의 모습에서 눈길을 돌렸다.

"저더러 마님의 재혼을 권하고 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다이는 미소를 떠올렸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성주님 말씀으로는 오카자키보다 늦어지면 마님이 불쌍하시다고......"

"오카자키보다 늦어지다니요......?"

", 오카자키에서는 타와라의 토다 단죠의 따님을 새 마님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아니, 타와라의......"

오다이의 얼굴이 긴장되었다.

"그렇군요. 타와라의......"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가슴에 찡하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현실적으로 볼 때는 헤어진 남편. 질투가 있을 리 없는데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 것은 어째서일까? 타케치요가 어머니라 부르게 될 여자에 대한 질투 때문일까, 아니면 미련 때문일까? 그 심정을 잘 아는 스기야마 모토로쿠는 여전히 밝은 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남녀 간의 일은 성주님께서 잘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번 경우처럼 이혼한 뒤에는 먼저 가는 쪽이 이기는 것, 뒤에 남으면 가엾으니 네가 가서 권하고 오라고......"

"......"

"어떻습니까, 마님. 이제 그러한 생각을 가져보시는 것이?"

"모토로쿠......"

"."

"잠시만...... 잠시만 더 이대로 있게 해주세요."

"마님은 간단하게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성주님의 뜻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주님은......"

말하다 말고 모토로쿠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일단 마음이 결정되면 옳고 그름의 분별을 잃는 분이시라."

오다이는 그것도 잘 알고 있었다. 히로타다가 이마가와를 두려워하여 오다이아의 이혼을 받아들였을 때 오빠 노부모토는 불같이 노하여 오카자키에서 오다이를 호위해오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 없애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오다이는 그러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야하기가와를 건너기가 무섭게 곧 배웅나온 사람들을 오카자키로 돌려보내 무사할 수 있었는데, 그런 무서운 성격을 가진 오빠이므로 방심하지 말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마님은 아직 모르고 계십니다."

모토로쿠는 다시 무겁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얘기가 나오고 있는 곳은 두 군데입니다. 하나는 히로세의 사쿠마님, 또 하나는 아구이의 히사마츠님. 어느 쪽이든 선택하지 않으시면 마님의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성주님은 워낙 고집이 강하신 분이라 혈육이라 해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오다이는 당황하며 모토로쿠의 말을 끊었다.

"그런 말이 혹시 오빠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모토로쿠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한층 더 소리를 낮추었다.

"마님은 토쿠로님의 마지막 소문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토쿠로란 오다이가 마츠다이라 집안으로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성 밖 쿠마무라에 사는 타케노우치 나미타로의 여동생을 만나러 다니다가 오다 쪽 자객에게 쓰러진 성주 노부모토의 동생, 즉 오다이의 친오빠인 노부치카였다. 오다이는 물론 그 소문을 듣고 있었다. 성주의 아들로 태어나 성 밖에 여자를 둔다는 것만으로 예사로운 일이 아닌데, 그 때문에 결국 목숨까지 잃었다는 소문은 이미 오카자키까지 퍼져 있었다.

"실은 노부치카 님이 살아 계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아니, 둘째 오빠가 살아 계시다고요?"

", 그래서 성주님의 가혹한 처사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님, 토쿠로 님은 성주님의 뜻을 거역했기 때문에 무고한 누명을 쓰고 성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여기저기 방황하고 계시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그것이 정말입니까?"

모토로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므로 마님도 성주님을 거역하시면 안 됩니다."

"......"

"사쿠마 님이냐 아니면 히사마츠 님이냐, 어쨋든 마음을 정하셔야 할 때가 왔습니다."

오다이는 숨을 죽이고 모토로쿠를 바라보았다. 둘째오빠 노부치카가 형에게 거역하다가 누명을 쓰게 되었다니.

"토쿠로 님은......"

모토로쿠는 다시 무료정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성주님이 오다쪽에 가담하려는 것을 반대하셨답니다. 그 반대를 봉쇄하기 위해 성주님은 자신이 다니시던 쿠마의 집을 이용해 나미타로 님의 여동생 오쿠니와 함께 노부치카 님을 부정한 사람이라는 오명을 씌워 살해하려 하셨습니다...... 노부치카 님도 병법에는 남다른 분이라 살해당한 것처럼 위장하고 간신히 위험을 모면하셨다고 합니다. 성주님은 일단 마음이 결정되면 결코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거기 모토로쿠 있는가. 모토로쿠!"

성벽을 따라 자란 벚나무 부근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성질이 급한 시모츠케노카미 노부모토 성주는 스기야마 모토로쿠를 파견한 것만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아 마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직접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저토록 성급하시니......"

모토로쿠는 씁쓸히 웃었다.

", 여기 있습니다."

큰소리로 대답하고 나서, 빠르게 덧붙였다.

"어느 쪽이건 하루 이틀 안으로 결정하여 답하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얼른 일어나 현관으로 나가 마중했다. 이때 벌써 노부모토는 고삐를 하인에게 맡기고 채찍을 두 손으로 쥐면서, 터질 듯 커다란 소리로 말하며 정원을 돌아오고 있었다.

"오다이 좋은 아침이구나, 바닥 붉게 타고 있어. 나가 보지 않겠니? 아침 해가 대야만큼이나 크구나."

 

4

"어서 오세요."

오다이는 두 손을 짚고 오빠를 맞이했다. 시모츠케노카미 노부모토는 다시 활달하게 웃고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히로타다의 무기력한 웃음에 익숙해 있는 오다이에게는 이 오빠의 목소리가 가슴을 때리는 채찍으로 생각되었다.

"어때, 결정했느냐?"

", 하루 이틀 안으로 정하시겠다고 합니다."

모토로쿠가 적당히 둘러대어 말했다.

"하루 이틀 안이라...... 벌써 정했어야 하는데."

노부모토는 모토로쿠를 무시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오다이, 오카자키의 히로타다라는 놈은 멍청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주위가 울릴 만큼 큰소리였다.

"토다 단죠의 딸을 후실로 삼는다는구나. 마츠다이라 가문에 백해무익한 혼사야."

오다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대로 눈길을 무릎에 얹은 손으로 떨구었다.

"내 눈은 틀림이 없어. 머지않아 오다와 이마가와 양가 사이가 틀어지면 마츠다이라에게 선봉을 서라고 명할 것은 뻔한 일. 그때 토다가 뒤에서 도와주리라 생각하고 있을 테지. 하지만 토다 일족에게 그런 의리가 있을 성싶으냐? 그렇지 않은가, 모토로쿠?"

"...... ."

"정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마츠다이라의 뒤에서 언제든지 활을 당길 녀석이야."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나와 인연을 끊고 토다와 손을 잡다니. 기우는 마츠다이라 가의 운명이 가련할 뿐이다...... 오다이."

"."

"너도 한때는 불쌍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너에게는 복이 될 것이다."

"......"

"하루 이틀이니 뭐니 하지 말고 오늘 중에 생각을 정하는 것이 좋아. 히로세냐 아구이냐, 네 선택에 맡기겠다. 이건 남매의 정으로 하는 말이다."

오다이는 다시 시선을 무릎에 떨구고 겨우 눈물을 참고 있었다. 표면적인 슬픔도 아니고 반감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여자의 운명'과 대결할 수밖에 없는 애수였다. 마츠다이라 집안으로 출가할 때도 그랬지만, 오다이는 언제나 이 카리야 성을 지탱하기 위한 하나의 초석에 불과했다. 어느 집안과 어떻게 맺어져야 살아남느냐 하는 계산이 오다이의 앞길을 결정했다. 아니, 그것은 오다이 한 사람의 운명이 아니라, 거듭되는 전란으로 질서와 도의를 상실당한 모든 여자들의 운명이었다.

"아버님은 마츠다이라와 맺어짐으로써 미즈노와 마츠다이라가 다 같이 편안할 줄 아셨지만, 세상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고 있어. 지금은 말이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오다 쪽에 가담하는 자와의 혼사가 아니면 안 돼. 오다는 뜨는 해, 이마가와는 지는 해. 너는 지는 해에 쫓겨나서 오히려 아침 해 속으로 들어온 게야. 너도 행운이고 나도 행운이지. 알겠느냐? 오늘 중으로 마음을 정하도록 해라."

이렇게 말하고 노부모토는 일어나 모토로쿠를 재촉했다.

"모토로쿠, 다시 한 바퀴 말을 달려보세. 좋은 아침이야!"

오다이는 마루에 두 손을 짚고 묵묵히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5

오다이는 시노가 가져온 밥상을 받고 수저를 대는 척하다가 그대로 밀어놓았다. 배는 고팠으나 전혀 식욕이 없었다.

'대관절 나는 오카자키에 무엇을 두고 왔을까......?"

타케치요가 자기 생명의 반을 빼앗아 태어났고, 히로타다의 애무가 자기 몸에 허약한 마음을 심어 넣었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이 허탈감이 이토록 오래 계속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온몸이 나른하고 이따금 가벼운 기침이 나왔다. 혹시 히로타다의 병이 옮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는 그 병까지도 그리워졌다. 가능하다면 이대로 머리 깎고 '암자'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타케치요를 낳을 때처럼 기도로 일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허락될 것 같지 않았다.

오다이는 한참 동안 멍하니 방 가운데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창은 햇빛을 가득 받아 잎이 진 단풍나무 그림자가 그려놓은 듯이 비치고 있었다. 때때로 새들이 날아와 요란한 소리로 지저귀었다. 오카자키 성보다는 바다가 가깝고, 서풍이 적은 탓으로 봄이 빨리 왔다. 손가락으로 꼽아보니 벌써 헤어진 지 반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싶다는 생각이 한시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물론 오다이는 재혼 상대를 둘 다 알지 못했다. 이런 약한 마음으로 낯선 남자에게 시집가서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오다이는 다섯 점 반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노를 불렀다. 오카와의 켄콘인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오빠에게 말하면 가마를 마련해주겠지만, 도리어 그것이 번거로워 시노와 하인 하나를 데리고 몰래 성을 나섰다. 햇빛은 점점 더 따뜻하게 내리쬐어, 벌써 줄무늬를 이루며 자라기 시작한 보리 이삭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히로세의 사쿠마냐.

아구이의 히사마츠냐.

어느 쪽을 택하건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오다이는 어느 쪽이든 그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의 묘를 찾아가면 무슨 암시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허망한 희망을 품고 걸어가고 있는데, 화창한 햇빛마저 눈부셔 도리어 부담스러웠다. 쿠마무라의 어귀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이보시오. 아가씨들."

삿갓을 깊숙이 눌러쓴 떠돌이 무사인 듯싶은 사나이가 부르는 바람에 오다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너희들은 카리야의 미즈노 댁 하인들인 듯한데...... 오카자키에서 이혼당한 오다이 마님에 대한 일을 아는가?"

"오다이에 대한 일......"

그 목소리는 어딘가 귀에 익었다.

'혹시 살아 있다는 오빠 노부치카 아닐까?'

오다이가 카츠기를 쳐들자 이번에는 무사가 움찔하고는 홱 몸을 돌렸다.

"혹시......!"

오다이는 하인에게 눈짓을 하고 저도 모르게 몇 걸음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6

다부진 체격이었으나 키도 목소리도 많이 닮았다. 오다이의 눈짓으로 하인은 남자 뒤를 쫓아갔다. 시노는 의아한 듯 오다이를 쳐다보며 따라왔다. 길은 앞에서 정자 모양으로 갈라져 있었다. 정면은 쿠마의 젊은 도련님이라 불리는 타케노우치 나미타로의 집 해자이고, 그 너머에는 견고한 토담이 있었다. 하인은 무사의 뒤를 따라 오른쪽으로 꼬부라졌다. 길 한쪽에 억새 그루터기가 점점이 이어져 있고, 군데군데 잎 떨어진 개암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정자 모양의 길에 이르러 오다이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머리 위의 개암나무에서 까마귀 네댓 마리가 떼 지어 울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에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다. 2년 전 이 쿠마의 집에서 살해되었을 오빠 노부치카. 살아 있다는 것은 큰오빠 노부모토아의 불화를 부추기기 위한 계약이 아닐까. 아니, 그 소문이 사실이어서 살아 있다면 더군다나 따라가서는 안 될 상대인 지도 모른다. 오다이는 후회했다.

"시노, 불러와라. 성묘 길이 늦어지겠다."

"."

시노가 달려갔다. 그런데 채 2, 30걸음도 가기 전에 앞길 모퉁이에서 해자를 따라 돌아나오는 하인의 모습이 보였다. 하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반지르르한 마에가미에 보랏빛 모토유이,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젊은이 한 사람을 동반하고 있었다. 시노는 오다이에게 알렸다.

"쿠마 도련님과 같이 왔습니다."

오다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카츠기 너머로 나미타로를 바라보았다. 쿠마무라의 토호이자 타케노우치 집안의 종손 나미타로와는 아버지가 생존했을 때 두 번 만난 일이 있었다. 신을 섬기는 가문이므로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는 나보쿠쵸 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었다. 이 나미타로의 여동생 오쿠니에게 오빠 노부치카가 정신을 빼앗겼다가 자객의 손에 죽고 말았다. 그건 그렇다 하고 나미타로의 불가사의한 젊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이는 오다이보다 서너 살 위일 텐데도 아직 마에가미도 풀지 않고, 눈과 입술은 예나 다름없이 젊었다.

"성묘를 가시는 길이라지요?"

나미타로가 밝은 미소를 눈가에 띠었다.

"아버님의 영혼이 우리를 만나게 해주신 것 같군요. 잠시 시어 가시지요."

오다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집에 얽힌 오빠 노부모토와 노부치카의 암투가 결단을 가로막고 있었다. 오다이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나미타로는 격의 없이 껄껄 웃었다.

"이 하인이 어떤 분과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데, 그 사람이 저희 집으로 들어갔다는군요. 그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소개해드릴 분은 확실히 있습니다. 안내할 테니 들어가시지요."

그러는 동안 하인은 뒤에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오다이의 안색을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마님, 아까 그 떠돌이 무사, 확실히 쿠마 저택으로 사라진 것 같은데요......"

오다이는 아직도 말없이 해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잔잔한 물위에 까마귀 그림자가 비쳤다가는 사라졌다.

 

7

오다이는 쿠마의 집에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오빠 토쿠로 노부치카가 목숨을 잃은 곳이기 때문이다.

"정 그러시다면."

살아 있건 죽었건 혈육인 오빠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갔다고 하면 노부모토도 크게 노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들렀다 가자......'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자기를 보고 달아나듯 사라져버린 아까 그 사나이의 뒷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나미타로는 그러나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앞장서서 오다이를 제단이 있는 방으로 인도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런 뒤 서원식으로 꾸민 객실로 안내했다. 제단이 마련된 곳은 신전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그 좌우로 방이 이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작은 신사를 중심으로 사방에 해자를 둘러친 아주 고풍스러운 성곽구조로, 객실 창을 통해 정원 너머로 성벽과 망루가 보였다. 나미타로는 객실로 오다이를 안내하여 손수 창을 열었다.

"저 시든 싸리나무가 있는 곳......"

정원을 가리키면서 자리에 앉았다.

"노부치카 님은 저 부근에서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오다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햇빛 속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날 밤은 싸리 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달이 유난히 아름다웠지요. 자객은 저 세면대 뒤에 숨었다가 갑자기 노부치카 님에게 달려들어......"

나미타로는 일단 말을 끊고 다시 미소 지었다.

"이 나미타로가 새삼스럽게 그 일에 대해 말씀 드리는 뜻을 아시겠습니까?"

"."

"모든 것이 다 오다냐 이마가오냐 하는 싸움이 원인이었지요."

"그러시면 형제가 싸운 원인도 알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나미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세상에서 본 가장 무서운 수라장...... 덕분에 나도 여동생을 잃었습니다."

"여동생이라면 오쿠니 님......"

"."

나미타로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시모츠케노카미 님은 무서운 분입니다."

오다이는 잠자코 있었으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역시 소문은 사실이었구나......'

오쿠니와 눈이 맞아 이 집에 드나든 것은 노부치카가 아니라 노부모토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오다냐 이마가와냐 하는 의견 차이 때문에 노부치카를 여기까지 유인하여 자기 애인과 함께 죽여 없앴다.

"오다이 님도 그 여파로 저 이상으로 슬픔을 맛보셨습니다......"

나미타로는 비탄에 잠긴 오다이의 옆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좌절하시면 안 됩니다. 오카자키에 남아 계신 도련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셔야 합니다."

"나미타로 님."

오다이는 결심한 듯 물었다.

"저와 만나게 해주시겠다고 한 분은 누구인지요?"

 

8

"소개해드리고 싶은 분이란......"

말하다 말고 나미타로는 다시 애매하게 웃었다.

"토쿠로 님의 영혼은 아닙니다."

"토쿠로 님의 영혼이 아니라면......"

"묻지 마십시오. 영혼이 슬퍼하실 겁니다. 단지 이 나미타로는 신을 섬기는 사람이라 영혼과 자유롭게 교감할 수 있는 모든 영혼의 슬픔과 기쁨을 알 수 있다고 말씀 드린 것뿐입니다."

"...... ."

오다이는 가볍게 두 손을 짚고 나미타로의 표정을 읽으려고 했다. 나미타로는 그 모습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다이 님에게 재혼 이야기가 있으시다고요?"

"."

"히로세냐 아구이냐...... 그것 때문에 망설이고 계시다는데 이 역시 영혼의 교감이었습니다마는......"

오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오빠는 죽지 않았다...... 나미타로와 관련이 있는 곳에 살아 있다.'

이렇게 생각되는 순간 묻고 싶은 말이 가슴 가득 차올랐으나, 그것은 묻지 말아야 하는 일이었다. 큰오빠 시모츠케노카미의 눈을 피해 살고 있는 유령. 그 유령을 밝은 곳으로 끌어낸다는 것은 지나치게 잔인하다. 골육상잔의 이 세상에 그와 같은 유령은 얼마나 많은 것일까.

"오다이 님은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글쎄, 그것이......"

"아니, 전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미타로는 다시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많이 망설이고 깊이 잘 생각하라...... 이것도 영혼의 계시입니다."

"."

"오다이 님 생각으로는 오카자키와 멀어지는 것이 두렵다. 만일 자식과 적이 되면...... 이것이 망설이는 원인이겠지요?"

오다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떨구었다. 무서우리만큼 정확하게 자신의 두려움을 꼬집어내는 바람에 얼른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녀가 차를 가져왔다. 창밖의 햇빛은 점점 더 화창해지고, 지난날의 비극을 알고 있는 싸리나무 뿌리에 메추라기가 날아와 한가로이 모이를 찾고 있었다. 나미타로는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오다이의 감정이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혈육으로서, 또 여자로서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이 나미타로도 그 심정을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 미망에 사로잡혀 앞길의 파도를 잘못 보셔서는 안 됩니다."

"...... 그래요."

"어차피 평생을 같이 살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 운명에 순응할 길이 있을지도 모르니 많이 고민도 하고 생각도 하시라고...... 이렇게 말씀드려도 무리겠지요. 그래서 오다이 님께 소개해 드리고 싶은 분...... 이라고 말씀 드렸던 것인데 어떻습니까?"

오빠를 만나게 해주려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대관절 누구를 만나게 해주려는 것일까? 오다이는 나미타로의 호의를 덮어놓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만나기 전에 누구인지 알려주실 수는 없을까요?"

"알겠어요."

나미타로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례를 하고 방을 나갔다.

"이것이 어떤 암시가 된다면, 역시 영혼의 인도일 것입니다. 그럼 잠시 여기서......"

 

9

얼마 후 나미타로가 돌아왔다.

"저와 친척이라고 소개하겠습니다. , 이리 오시지요."

오다이를 안내하여 별채로 가는 복도를 건너갔다. 이곳은 새로 지은 집으로 족자도 훌륭했고, 화병대가 모두 아름다운 자개로 되어 있었다. 아마 최근에 객실로 꾸민 듯했다. 왼쪽에 있는 서원의 창에서 비쳐드는 햇빛 속에 병풍에 그려진 '이세 이야기'의 설화가 뚜렷이 부각되어 보이고, 정면에 열한두 살로 보이는 소년과 그 시종인듯한 두 사람의 무사가 앉아 있었다. 상좌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미 마흔 줄을 넘긴 중년의 무사, 다른 사람은 스물대여섯 살로 보였다. 오다이가 나미타로의 안내고 방에 들어가자, 정면의 소년이 버릇없이 오다이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정말 오쿠니를 닮았어."

"친척이니 닮았겠지요. , 좀더 앞으로 나와 앉으세요. 킷포시님이 잔을 주신다니까."

나이 든 무사는 아주 소탈하게 오다이를 손짓해 부르면서 물었다.

"오노부님이라고 하신다죠?"

"...... 그렇습니다."

"나는 여기 계신 오다 킷포시 님의 부하 히라테 마사히데, 이 사람은 아구이의 히사마츠 야쿠로라고 합니다."

오다이는 깜짝 놀라 소년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나서 히사마츠 야쿠로에게 두 손을 짚고 절했다.

'이 소년이 그 유명한 오다 노부히데의 아들이란 말인가......'

또 한 사람이 지금 자신의 혼인 상대로 거론되고 있는 히사마츠 야쿠로 토시카츠라는 것보다도, 킷포시를 소개받은 놀라움이 더 컸다.

"킷포시 님, 잔을......"

히라테 마사히데가 말하고, 소년은 쾌활하게 시녀에게 턱짓을 했다.

"잔을 손에 들려주어라."

그리고는 오다이에게

"그대는 무엇을 좋아하나? 오쿠니는 코와카도 뛰어났지만 코우타도 잘 불렀는데."

이렇게 말하고 앉은 자세로 구부리고 있던 한쪽 다리를 펴면서 느닷없이 오다이 앞으로 확 내밀었다. 오다이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그때 이미 소년은 손에 든 부채를 확 펼치고, 변성기에 접어든 목소리로 낭랑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죽음이란 정해진 운명 추억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네. 운명 이야기로 지새는 밤의......

"그만 두시지요. 오노부가 놀라고 계십니다."

마사히데가 웃으면서 손을 쳐들었다.

", 영감은 노래를 싫어했었지."

소년은 다시 훌쩍 다리를 오므리고, 오다이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할 줄 아나?"

"재주가 없어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

오다이는 대답하면서 갑자기 가슴속에서 싱싱하게 움트기 시작하는 감정에 부딪쳤다.

'이 아이가 오다의 적자......'

그렇다면 이 아이는 머지않아 오카자키에 두고 온 타케치요와 한 치의 땅을 놓고 전쟁터에서 맞설 숙명의 상대가 아닌가. 오다이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은 코우타를 좋아하십니까?"

 

10

오다이의 질문을 받고 킷포시는 내뿜듯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무장이란 말이야."

"그러시면?"

"코우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날엔 여기 있는 영감한테 혼이 나."

"호호호......"

"무장은 말이야, 첫째로 말 타고 멀리 달리기, 둘째로 매사냥, 셋째로 무사이야기, 넷째로 수영이야, 그렇지 영감?"

"그렇습니다."

"코와카니 코우타니는 영감이 없을 때 하는 것이야. 물론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지만......"

"그러면, 무엇을 정말 좋아하시나요?"

"첫째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는 것."

"!"

"그 다음은 선 채로 물에 밥을 말아먹는 것."

"선 채로......"

", 그대로 서서 먹어본 적이 있나? 창자가 서기 때문에 얼마든지 들어가거든. 일곱 공기나 여덟 공기는 문제없어. 반찬은 야채와 된장이면 그만이야."

여기까지 말하는데 마사히데가 부채 자루로 방바닥을 탁 쳤다.

"이런 말도 하면 안 된다는 거야? 젠장."

오다이 곁에서 나미타로는 큰소리로 웃었다. 오다이 역시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그냥 웃어 넘길 수만은 없는 감정도 남아 있었다. 오다 노부히데는 지금 안죠 성에 있는 서자이자 맏아들인 노부히로보다 이 킷포시에게 훨씬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래서 오다 가문의 지혜 주머니라고 하는 총신 히라테 마시히데를 일부러 사부로 삼아 훈육시키고 있었다.

어리석어 보이는 장난 속에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대담한 성격이 드러나 보였다. 히라테 마사히데도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가끔 고삐를 죄고는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 히사마츠 야쿠로는 근엄한 성격인지 내쳐 씁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오다이는 하녀가 받쳐 든 술병에서 술을 조금만 따르게 하고, 잔을 들면서 다시 한번 킷포시의 면모를 훔쳐보았다.

"고맙게 받겠습니다."

눈썹이 잔뜩 치켜 올라가 있고,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마사히데의 꾸중을 듣고 뾰로통해진 불그레한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방석에서 빠져 나온 왼쪽 무릎을 덜덜 떠는 모습은 보기 사나왔다. 오다이가 잔을 놓았을 때였다.

"그럼......"

나미타로가 재촉했다.

"매사냥을 오게 되거든 다시 만나요."

오다이가 공손히 절을 하고 일어서는데 킷포시가 말했다.

"다음에는 코와카를 추어 보이겠어. 그대도 뭔가 한 가지를 배워두도록."

복도에 나오자 나미타로는 오다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소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주 활달하시더군요."

"그것뿐입니까?"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나미타로는 미소 지으며, 오다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말했다.

"오카자키의 아드님과는 좋은 경쟁상대...... 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까?"

 

11

오다이도 애매하게 미소를 지었다.

"타케치요는 이제 겨우 세 살입니다."

"그러니까, 장래를 생각하는 것이 소중하다고......"

나미타로는 다짐하는 듯한 눈매로 말하고 아까 그 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다이는 따끔하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이 집 주인 나미타로는 은연중에 오다이에게 재혼을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머지않아 오다 킷포시와 마츠다이라 타케치요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이 두 사람 역시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숙명적으로 전쟁터에서 만나야만 하는 것일까.

"오닌의 난 이래, 여기저기서 전란이 너무 오래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아까 그 방으로 돌아오자 나미타로는 손뼉을 쳐서 하녀에게 차를 가져오게 했다.

"에치고의 우에스기ㅡ 카이의 타케다, 사가미의 호죠,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만히 창에 비친 햇살을 보면서 손가락을 꼽았다.

"모두 쿄토를 목표로 움직이고 있다...... 는 것은 전쟁에 지친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천하통일을 꿈꾸는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마는, 모두 쿄토와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오다이는 온몸을 경직시키고 눈길을 정원의 햇빛에 두고 있었다.

"만약 토쿠로 노부치카 님이 이 세상에 계시다면 무어라고 하실지. 아직도 마츠다이라와 이마가와는 영원히 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계실지."

오다이는 저도 모르게 기저귀를 찬 타케치요의 얼굴과 헤어진 남편을 흰 빛 속에 나란히 놓고 있었다. 히로타다는 전 생애를 통해 이마가와와 떨어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마가와가 있는 한 오카자키는 안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반대일 경우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터였다. 만약 오다가 미카와를. 하고 생각하면, 거기에는 오카자키의 슬픈 종말밖에는 없었다. 오다이가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나미타로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자기가 최근에 보고 온 쿄토 이야기, 나니와 이야기, 이시야마 법당의 신도 이야기, 그리고 번창을 거듭하고 있는 사카이 이야기 등. 이야기 끝에 나미타로는 오다 노부히데가 킷포시를 가끔 이 집에 보내는 이유를 말하면서, 미소를 함께 슬쩍 덧붙였다.

"히사마츠 야쿠로 님은 의리가 두터우신 분."

역시 오다이에게 아구이로 시집가서, 앞으로 다가올 타케치요와 킷포시의 시대에 대비하라는 권고인 것 같았다. 오다이는 그 말을 적당히 흘려들으며 쿠마의 집을 나섰다.

해는 아직 높았다. 끝없이 푸른 하늘에, 히로타다와 히사마츠 야쿠로, 그리고 타케치요와 킷포시의 얼굴이 겹쳐졌다. 헤어진 남편, 그가 왜 이토록 그리운 것일까.

"아까 그 떠돌이 무사는 사람을 잘못 본 것이었을까요?"

오다이는 하인이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성묘는 그만두기로 하자."

느닷없이 말하는 바람에 시노가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을 때, 오다이의 눈에서는 햇빛을 받아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시노는 하인과 얼굴을 마주보았다. 성에 들어가기 전 오다이는 두 사람을 돌아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쿠마의 집에 갔었다는 말은 하지 마라."

 

 

5. 벚꽃 목욕

 

1

마장에는 벚꽃이 만발해 있었다. 아니, 이미 떨어져버린 것도 있어 땅 위 절반은 꽃잎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히로타다는 그 꽃과 꽃 사이를 쉬지 않고 세 번이나 말을 달렸다. 오랫동안 매사냥도 나가지 않고 마장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탓으로 몹시 숨이 찼다. 온몸에 땀이 배어 끈적거렸으나 울적해진 감정을 푸는 길은 달리 없을 것 같았다.

"하지야, 어서 따라와!"

네 번째로 다시 해자 가장자리에서 만쇼 사 지붕을 바라보면서 말을 돌렸을 때, 이와마츠 하치야가 창을 어깨에 맨 채 돌에 부딪쳐 비틀거리며 말 앞으로 왔다. 히로타다가 자랑하는 흰색 바탕에 잿빛 반점이 있는 말이 깜짝 놀라 앞발을 쳐들고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히로타다의 눈앞에 만발한 꽃의 물결이 핑그르르 돌았다. 땅 위의 꽃잎이 산산이 흩어지고 히로타다의 몸은 엉덩방아를 찧은 하치야와 땅바닥에 나란히 놓였다.

"훌륭하신 낙마입니다."

"고얀 놈."

들고 있던 채찍이 하치야의 어깨에서 철썩 울렸다. 원망스러운 듯한 하치야의 외눈이 번쩍하고 히로타다를 응시했다.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히로타다는 얼른 일어나 옷에 묻은 풀잎을 털었다.

"하치야!"

"."

"너는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지?"

"어찌...... 그런 당치도 않은 말씀을."

"나에게 오하루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어."

"절대로 아닙니다. 오하루와 저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오늘은 새로운 마님께서 출가해오시는 경사스러운 날. 다치시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이때 다시 한번 철썩하고 채찍이 머리 위에서 울었다. 하치야의 외눈이 다시 껌뻑거렸다.

"뭐가 경사스럽다는 말이야. 듣기 싫다!"

", 다시는 아무 말도 않겠습니다."

"내가 원해서 맞는 아내가 아니다. 너도 오하루도 그것을 몰라.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원망하고 있어."

"다시 말씀 드립니다마는, 원망 같은 것은 추호도......"

"닥쳐!"

"."

"나는 오하루를 너한테서 빼앗았어. 빼앗았으면 좀 더 사랑해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너의 그 외눈이 말하고 있다."

히로타다는 이미 땅에 꿇어앉은 하치야를 보고 있지 않았다. 채찍을 두 손으로 휘면서 자기감정을 이기지 못해 신경질적으로 꽃 아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말은 히로타다를 떨어뜨리고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뒤따르던 하인은 아직 마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와마츠 하치야는 벌떡 일어나 말고삐를 집어들었다.

"한 바퀴 더 도시겠습니까?"

히로타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깨닫고 보니 눈에 가득 눈물을 담고 천천히 주위를 거닐고 있었다. 요즘에 와서 겨우 기분이 풀려 이만하면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때 다시 기분을 상하게 하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것은 카리야로 돌아간 오다이가 오다 쪽에 가담해 있는 집과 재혼하리라는 소문이었다. 상대는 이구이의 히사마츠 야쿠로 토시카츠. 그 소문을 로죠 스가가 히로타다에게 알렸을 때 히로타다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2

"하하하하, 오다이가 히사마츠 따위의 아내가 된단 말인가. 웃기는 일이야, 하하하하."

그 웃음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히로타다가 손에 들었던 찻잔을 정원의 돌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무도 오다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물론 히로타다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더욱 기분이 나빠져서 따로 방이 주어진 오하루한테도 가지 않았다. 노신들은 스가를 꾸짖었다. 그 때문에 토다 단죠의 딸과의 혼담이 더욱 빨리 진행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이 혼사 날이라 하치야도 안심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때 낙마하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성주님."

하치야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한 바퀴만 더 달리지 않으시겠습니까?"

히로타다는 걸음을 멈추고 하치야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치야!"

"."

"너는 사람을 믿을 수 있느냐?"

", 사람과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세상, 믿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으음, 인생은 전광석화, 목숨은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믿지 않으면 안 되겠지."

"한 바퀴만 더 달리시면?"

"하치야."

"."

"나무를 흔들어 벚꽃을 떨어뜨려라."

"?"

"벚나무를 말에 매고 내가 나무를 흔들 테니 너는 그 꽃잎을 주워 모아라. 그리고 옷을 벗어 그 안에 넣어라."

"옷을 벗어서......"

"그래, 난 양보할 수 없다, 벗어!"

"."

하치야가 어리둥절하여 옷을 벗는 동안 히로타다는 고삐를 한데 모아 말을 어린 벚나무 줄기에 매었다.

"됐느냐, 하치야?"

"."

하치야의 우람한 오른쪽 팔에서 가슴에 걸쳐 새겨진 칼자국을 본 히로타다다.

"아주 멋지군."

채찍을 높이 쳐들어 철썩 후려진 것은 말이 아니라 하치야였다.

"하지야 즐겁지?"

"."

두 번째부터는 세찬 채찍질소리가 말의 목에서 울렸다. 말은 깜짝 놀라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때마다 꽃잎이 벌거벗은 하치야를 가만히 감쌌다.

"와하하하하, 말이 날뛰면 꽃이 진다는 것은 정말이었어. , 꽃을 모아라, 꽃을 모으란 말이다. 와하하하하."

나중에는 말만을 때리는 것이 아니었다. 춤추는 듯한 동작으로 닥치는 대로 나뭇가지를 후려쳤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이런 기괴한 짓을 하는 것일까? 어쨌든 하치야는 이렇게 함으로써 성주의 기분이 풀린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경사스러운 날이야. 경사스러운......"

하치야는 아직도 쌀쌀한 3월의 바람을 맨 몸으로 받으면서 외눈을 바쁘게 굴려 자기 옷에 꽃잎을 주워 담았다.

잠시 동안 사람도 말도 꽃 속에서 춤을 추었다.

 

3

격한 행동 때문에 히로타다의 얼굴은 타는 듯한 분홍빛에서 창백하게 변했다. 그런가 하면 이마에서는 줄줄 땀이 흐르고, 꽃잎이 하나 둘 달라붙기 시작했다. 무슨 일에나 필로가 빨리 오는 것이 요즘의 히로타다였다.

"와하하하."

웃음소리가 심한 기침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이제 됐다."

히로타다는 옷 속의 꽃잎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대라, 그만 돌아가자."

"."

하치야는 창을 메고, 꽃을 싼 옷을 옆구리에 끼고는 말고삐를 풀어 가지고 왔다. 말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아 눈에 인광을 번뜩이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히로타다는 말목을 툭툭 치고 훌쩍 올라탔다.

"하치야, 따라와."

이번에는 아까처럼 무모하게 달리지는 않았다. 강을 따라 스고 성벽으로 들어선 뒤 사카타니 문까지 가는 동안 가끔 말 위에서 하치야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큰 대문에서 이 근처까지 말끔히 쓸려 있었다. 출가해오는 마키히메를 맞이할 준비였다. 본성에 이르렀을 때 근시가 눈이 휘둥그레져 두 사람 곁으로 달려왔다. 분명 발가벗은 하치야를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히로타다는 묵묵히 말에서 내려 고삐를 측근무사에게 넘겨주고 큰 현관으로 갔다.

"하치야, 들어오너라."

숨을 몰아쉬며 이와마츠 하치야도 성주 뒤를 따랐다. 성안에서 벌거숭이로 다닌다. 이것만도 괴이한 일이었다. 그런데 히로타다는 바깥채 거실에는 들르지도 않았다. 주방 옆 큰 복도를 가로질러 곧장 내전으로 향했다. 하치야가 잠시 머뭇거렸을 때였다.

"들어와."

다시 턱으로 명령했다. 지난번 본성으로 옮겨와 왕고모의 손에서 자라고 있는 타케치요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취했다가 그곳도 지나쳐갔다. 대관절 어디까지 벌거숭이 하치야를 데리고 갈 것인가.

", 성주님......."

이제부터 주위에는 여자들뿐이었다. 하치야는 다시 히로타다를 불렀다.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따라와!"

전에 오다이의 거실이었던 방 앞을 지나 가운데 정원을 오른쪽으로 꺾었을 때, 어지간한 하치야도 소리를 질렀다.

"!"

지금도 오하루 아씨라 불리는 자기 사촌여동생 오하루의 방으로 갈 작정인 듯했다. 그곳에서 다시 전처럼 심술궂게 놀림당할 생각을 하니 숫된 하치야로서는 죽기보다 괴로웠다. 문 앞에서 히로타다는 또 하치야를 흘끗 돌아다보았다. 하치야는 체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만은 성주가 화를 내게 해서는 안 되었다. 꽃을 싼 옷을 들고 입구에 불쑥 얼굴을 내밀었을 때 안에서는 오하루와 시녀가 깜짝 놀라 히로타다를 맞아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오하루, 바구니를 가져와."

히로타다가 말했다.

"거기에 벚꽃을 담는 거야. 하치야가 추울 테니 빨리 해라."

오하루는 하치야를 보고 애처로울 정도로 쭈뼜거렸다.

 

4

히로타다는 하치야가 걱정했던 것만큼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각오하고 있던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꽃을 주고 옷을 입도록."

오하루가 바구니를 가져왔을 때는 문득 밝은 미소를 띠며 하치야를 보았다.

"참 재미있었지, 하치야?"

". 그런데 이 꽃을 무엇에 쓰시렵니까?"

"이것 말이냐, 이것으로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내 마음을 씻을 생각이다."

"성주님의 마음을......"

"좋아, 이제 됐어. 옷을 입고 나가거라."

하치야는 그제야 안도하고 옆방으로 가서 옷을 입고 물러나왔다.

"성주님, 축하드립니다."

하치야가 물러간 뒤 오하루는 조심스레 히로타다에게 오늘의 축하 인사를 했다.

", 축하......? 거짓말 마라."

"?"

"그대마저도 누구한테 배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아니, 꾸짖는 것은 아니니 겁먹을 건 없어. 나도 오늘만은 어린아이로 돌아가 마음을 바르게 갖고 싶어."

그리고는 지그시 오하루를 바라보았다.

"역시 닮았어......"

오하루도 이젠 그 뜻을 알고 있었다. 오하루는 오하루로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오다이의 그림자로서 성주 가까이 있게 되었을 뿐이다.

"히사마츠 야쿠로 따위의 아내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대는 모르는 일이야. 꽃이나 들고 오도록 해."

"이 꽃을...... 어디에 쓰시려는지요?"

"욕탕이야. 목욕물은 받아 놓았겠지?"

"."

"지금 들어갈 테니 가지고 와."

"."

"욕탕 안에 그 꽃을 잔뜩 띄우도록."

오하루는 고개를 갸웃하고 히로타다의 뒤를 따라갔다.

오늘은 경사스러운 혼인날. 마장에서 마음껏 달린 뒤 목욕을 하고 머리를 손질한다. 여기까지는 아무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이 꽃을 욕탕에 띄우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지금의 오하루에게는 욕실에 가는 것도 괴로운 일의 하나였다. 전에 친구였던 하녀들이 어떤 눈으로 자기를 볼 것인지 생각만해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때를 밀러 들어갔다가 성주님을 홀리다니. 여자의 기량은 수단에 달렸어."

이런 소리를 첩으로 인정받기 전에 듣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던 일까지 있었다.

"벚꽃이란 한꺼번에 피고 한꺼번에 지는 깨끗한 꽃이야."

"."

"두 남편을 맞을 정도로 미련스러운 꽃은 아니야."

"."

"사람의 목숨은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은거. , 그대도 옷을 벗어라."

"? 하지만 그것은......"

깨닫고 보니 욕실 문 앞에 옛 동료가 두 손을 짚고 엎드려 있었다. 하지만 히로타다는 그쪽은 보지도 않았다.

"그대와 둘이 벚꽃을 띄운 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거야. 마음을 씻고 이 히로타다가 무사도를 꽃과 겨루어보겠다. , 들어오너라."

 

5

오하루는 두려움과 수줍음 때문에 엎드려 있는 하녀에게 물러가라고 말할 분별조차 없었다. 히로타다는 갑자기 옷을 훌훌 벗었다. 하녀가 얼른 받아 들고 곧 오하루의 뒤로 돌아갔다.

"아아......"

오하루는 비명을 질렀다. 수줍음보다 역시 두려움이 컸다.

"빨리 하라."

샅 가리개 하나만 걸친 히로타다는 재빨리 오하루의 손에서 꽃이 든 바구니를 빼앗아 들고 욕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안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 속에서 히로타다의 몸은 그 김보다도 더 희게 보였다. 좁은 욕실 한쪽 구석에 있는 욕탕 쪽으로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도깨비라도 보는 것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당시 욕실의 대부분에는 욕탕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욕탕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히로타다의 아버지 키요야스의 유물이었다. 전쟁터에서는 김이 나는 뜨거운 물로 목욕할 수 없다. 끓인 물을 그대로 통에 붓고, 때로는 가까이에서 활시위소리를 들으면서 목만 내 놓고 들어앉아 호쾌하게 웃어대던 지로사부로 키요야스.

"극락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 하하하하."

그는 자기 집 욕실에까지 그 취미를 들여놓았다. 히로타다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간 적은 없으나 항상 물을 채워두게 했다. 오늘은 그 욕탕에 꽃을 뿌리고 몸을 날리듯이 탕 안으로 뛰어 들었다. 가득 찼던 탕 속의 물이 꽃잎과 함께 쏴아 하고 밖으로 넘쳤다.

"와하하하하......"

정상을 벗어난 히로타다의 웃음소리가 좁은 욕실에 메아리치고, 꽃향기가 김에 섞여 밖으로 풍겨 나왔다.

"어서 오지 못하겠어? 꽃이야, . 사방에 꽃이 그득한데 무엇을 하고 있는 게야!"

"....... ."

오하루는 비틀거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고, 가슴을 가리고 몸을 구부리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문을 닫자 안은 어두컴컴했다. 김이 서린 사방등위에서 공기통으로 스며드는 빛이 천장만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얼마 동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이윽고 사방등 근처에서부터 훤하게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흩어진 꽃잎이 몸을 구부린 오하루의 발밑에 자개처럼 깔려 있고, 탕 속은 아직도 하얀 꽃잎투성이었다. 그 하얀 꽃 속에서 히로타다의 머리만이 떠올라 있고, 그의 두 눈이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오하루는 왠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마음속에 두려움을 품고 있던 탓인지, 히로타다의 머리가 어떤 그림에서 본 효수당한 사람의 머리처럼 보였던 것이다. 오하루는 얼른 그 망상을 털어버렸다. 경사스러운 날에 이런 불길한 것을 연상하는 자신의 방자함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이.

"오하루......"

"...... ."

"거기서 일어서 보아라."

"."

"일어서라고 하지 않았느냐."

"...... ."

오하루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억제하고 조심조심 문 앞에서 일어섰다.

 

6

오하루는 지금까지 여자로서는 사랑받는 것이 행복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계기에 뜻하지 않은 사람에게 사랑받게 된 자신을 선택된 행운아라며 황홀하게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발끝으로 서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두려움과 불안만을 가져다주었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볼 여유도 없었으나, 그 이유 가운데 한 가지만은 머뭇머뭇 문 앞에서 알몸을 드러낸 순간 깨닫게 되었다. 다름이 아니었다. 상대의 의사에 따라 조종당할 뿐 자신의 의사는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는 슬픈 자신의 입장 때문이었다.

오하루가 일어서자 히로타다는 다시 한참 동안 오하루의 나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며 바라보고 있을까. 비록 그것이 사랑을 동반한 응시라 해도 오하루로서는 채찍으로 매를 맞는 것과 다름없는 고통이었다. 갑자기 히로타다는 꽃향기에 숨이 막혔다. 더운 물에 잠긴 꽃잎이 지은 향기를 풍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하루!"

심한 기침이 멎자, 그 기침으로 화가 난 듯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웃어봐! 왜 울상을 짓는 거야? 웃으라고 했잖아!"

히로타다는 다시 눈을 부릅뜨고 욕탕 속의 꽃을 휘저었다. 오하루는 웃었다. 아니, 웃을 작정이었다. 그녀는 얼마나 굳어지고 일그러진 얼굴이 될 것인가를 알면서도 웃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히로타다가 눈길을 돌렸다. 오하루는 주위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길을 돌린 뒤의 히로타다가 어떤 형태로 신경질을 폭발시킬 것인가를 생각하니 자신의 슬픔과 애처로움에 눈물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오하루는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죽일 것이다. 틀림없이 죽일 것이다......'

히로타다는 얼굴을 돌린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하루."

부르는 히로타다의 목소리는 작았다.

"...... ."

오하루가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꽃잎이 온몸에 달라붙은 히로타다는 탕 속에 서 있었다.

"등을 밀어줘, 이대로 욕탕 속에서."

"."

오하루는 이끌리듯 다가가서 대야에 물을 펐다.

"오하루, 나를 두려워하고 있군."

욕탕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히로타다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도 두려운가?"

"...... 아니, 아닙니다."

"내가 왜 이런 식으로 목욕을 하는지, 그대는 모를 거야."

"."

"이것은 내가 살아서 하는 마지막 목욕이야."

오하루는 다시 흥분하게 해서는 안 된다 싶어 잠자코 있었다.

"나는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의사대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었어. 오늘부터는 다시 태어나려고 해. 그러니 아버님이 즐겨 쓰시던 전쟁터용 욕탕에서 갓난아이의 목욕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아."

"."

"그 갓난아이의 목욕을 그대의 손을 빌려서 했으면 싶어 웃으라고 했어. 그랬더니 그대는 울음을 터뜨렸어."

말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어깨 너머로 살짝 들여다보니, 이번에는 히로타다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7

"성주님, 용서해주십시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 제가 무지하여 성주님의 뜻도 헤아리지 못하고......"

오하루는 갑자기 히로타다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다시 쓰다듬듯 그의 여윈 어깨부터 씻기 시작했다.

"성주님 같은 어른에게는 깊은 슬픔 같은 것은 없으시리라......"

"그래?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한다고만 생각했나?"

"."

두 사람 사이에는 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하루는 어린아이를 다루듯이 오른팔에서 목덜미, 목덜미에서 왼팔로 씻어 내려갔다. 히로타다는 그녀가 하는 대로 맡겨두고 있었다.

"성주님, 밖으로 나오시지요, 다리를......"

"으음."

히로타다는 순순히 욕탕에서 나와 다리를 내밀었다. 그 다리를 받쳐 들 듯이 하고 씻는 동안 오하루는 점점 더 히로타다가 가엾게 느껴졌다.

'예전 마님의 대용품이라도 좋다. 이 외로운 성주님을 위안해드려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오늘 시집을 오는 마키히메가 걱정스러웠다. 적의도 아니고 질투도 아니고, 역시 그것은 두려움일 것이었다.

'성주님은 두 번 다시 내 곁에 오시지 않는다.'

"오하루."

히로타다가 말했다.

"나는, 평생에 단 한 번, 인간으로서의 의지를 관철시켜보겠어."

"그러시면?"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새로 오는 아내는 내 곁에 오지 못하게 하겠어."

"아니...... 어떻게 그런......"

"꼭 그렇게 할 거야.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이 성을 떠나 재혼하는 오다이에 대한 오기 때문은 아니야."

오하루는 깜짝 놀라 숨이 막혔다. 히로타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오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이미 오기를 부리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고 오하루는 생각했다.

"이것은 주위 사정의 변화에 마음까지도 흔들리는 나약한 인간에 대한 반항이야. 누가 어떻게 다른 데로 마음을 바꾸건 이 히로타다는 움직이지 않겠어."

여기까지 말하고는 갑자기 오하루의 어깨에 손을 뻗쳤다.

"몸이 차군."

히로타다는 말했다.

오하루는 깜짝 놀라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어깨에 얹힌 히로타다의 손은 유난히도 뜨겁고, 자기를 내려다보는 눈에는 빛이 깃들여 있었다. 오하루는 처음 히로타다에게 사랑을 받은 날과 같은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꼈다. 오다이의 그림자. 오하루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 그림자를 딛고 서서 새로운 마님과 겨루게 될 것이 두려웠다.

"성주님."

"오하루...... 이젠 겁낼 것 없어. 나는 그대를 멀리하지는 않겠어. 그대는 나를 무서워하고 있지?"

"...... ."

이제 완전히 욕실에 익숙해진 눈에 그 내부가 지나치게 밝을 만큼 똑똑히 보였다.

바닥에는 꽃.

주위에는 가득해 숨막힐 듯한 향기.

오하루는 비로소 히로타다의 얄팍한 가슴에 얼굴을 꼭 밀어붙였다.

 

 

6. 봄의 천둥소리

 

1

사카이 우타노스케의 집 앞에는 아낙네들로 붐비고 있었다. 타와라의 토다 단죠자에몬 야스미츠의 딸 마키히메의 행렬이 방금 우타노스케의 집에 도착했다. 도중의 적의 습격을 받았던 오다이의 혼인 때와는 달리 행렬은 어디까지나 순조로웠다. 가마는 하녀의 것을 합쳐서 네 채, 그것을 말 탄 무사 일곱 명이 호위하고 있었다. 그다지 호화롭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호족답게 함, 주방 상자, 장궤, 병풍 상자, 호카이 등을 갖추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마꾼과 일꾼들이 모두 짓토쿠를 입고 하얀 띠를 매고 온 것이다.

"이것이 쿄토식이라는군."

"타와라 성주는 슨푸 성주를 본떠서 쿄토식으로 하신 모양이야."

"그러나저러나 새 마님은 어떤 분이실까?"

"먼저 마님이 대단한 미인이셨으니 그분만은 못하시겠지."

"성주님은 아직껏 먼저 마님을 못 잊으신다니 여간 걱정이지 않아."

혼인 행렬을 총지휘해온 것은 마키히메의 오빠 노부미츠. 이번에도 신부를 기다렸다가 시중드는 사람은 우타노스케의 아내였다. 가마가 툇마루에 놓이고 우타노스케의 아내가 가마 문을 열었다. 사람들의 눈빛은 한결같이 빛났다. 먼저 희고 가냘픈 손이 나타났다. 우타노스케의 아내는 그 손을 받들 듯이 하고 한 무릎을 꿇었다. 겉옷은 마름모꼴 무늬의 흰 비단옷, 고의는 질이 좋기로 유명한 카가의 비단, 속옷은 홍매화 무늬, 사뿐히 일어나자 주위가 갑자기 환해질 만큼 늘씬하게 키가 컸다.

"대단한 미인이신데."

누군가가 말했다.

"하지만 좀 여위신 것 같아."

"그건 먼저 마님과 비교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야."

"정말, 누가 더 아름답다고 할 수가 없어. 보는 눈에 따라 다르니까."

마키히메는 그 소리가 귀에 들어왔는지 흘끗 눈길을 보내왔다. 그 눈은 아주 부드러운 인품이 온화하리라고 생각되었다. 재원이라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우타노스케 부인은 전에 오다이를 인도했을 때와 같은 순서로 곧장 마키히메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잠시 쉰 뒤 본성으로 들어가 잔치에 참석하게 될 것이다. 시녀들이 차례차례 가마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간 뒤, 말을 끌고 나가는 자, 가마를 치우는 자들이 한바탕 수선을 떨었다. 우타노스케는 마키히메의 오빠 노부미츠를 별실로 안내하여 양가가 오래도록 번창하기를 빈다는 덕담을 나누었다.

"양가의 앞날을 축하하듯 날씨마저 화창하니 다행입니다."

",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벚꽃 차가 준비되어 두 사람 앞에 놓이고, 주객은 차를 마시고는 잔을 옆에 놓았다.

이때 하인 하나가 우타노스케 앞에 나타나 무언가 소곤소곤 귀엣말을 했다.

", 성주님의 명령으로 이와마츠 하치야가......?"

우타노스케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노부미츠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방을 나갔다.

"하필 이럴 때 성주님께서...... 무슨 일일까?"

이미 모든 절차는 협의가 끝났을 텐데.

 

2

아직 형식적이고 번거로운 예법이 없던 시대였다 우타노스케는 이와마츠 하치야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성주님의 명령으로 왔다고......?"

성큼성큼 상좌에 가 앉으며 물었다.

"말해보게, 무슨 일인지."

하치야는 외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 자세를 바로 했다.

"마키히메 님의 행렬을 본성에 들여놓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 뭐라고!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성주님이 하셨다는 말인가?"

", 분명히 말씀 드리고 오라는 분부이십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타노스케는 내뱉듯이.

"이번 혼사는 오카자키 가문 전체의 경사야. 본성으로 안내하지 않고 어디서 혼례식을 치른단 말인가."

", 본성은 타케치요 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마키히메 님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지금 와서 그런 당치도 않은 일을!"

"이것은 절대로 제 의견이 아닙니다. 성주님의 명령이십니다."

"으음."

우타노스케는 신음했다.

성주는 입버릇처럼 이 성은 아버지의 것이고 자식의 것이기는 하나 내 것은 아니라고 말했었다. 그 비뚤어진 생각이 이런 큰 일을 당해 비아냥거림으로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정신 나간 짓이야!'

"여기까지 온 행렬인데, 그렇다면 어디로 안내하라고 하셨는가?"

"둘째 성으로 안내하라 하셨습니다."

"둘째 성...... 하치야!"

"."

"그대는 정신이 나간 것 아닌가? 누가 뭐라고 해도 한 성의 내전 마님, 그분의 혼례식을 둘째 성에서 거행하다니, 그래 가지고야 어떻게 상대방에게 낯을 들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말씀 드립니다마는, 이것은 제 의견이 아닙니다."

우타노스케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성주는 이렇게 까지 빗나가는 것일까. 이 말을 들으면 마키히메의 오빠 노부미츠가 얼마나 굴욕을 느끼고, 또 얼마나 분노를 터뜨릴 것인지 생각해 보았을까.

"알겠다."

우타노스케는 벌떡 일어났다.

"내가 직접 성주님께 말씀 드리겠다. 일부러 상대방을 노하게 하다니 이게 무슨 사돈관계이고 잔치란 말인가."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성주님의 뜻은 분명히 전해드렸으니까요."

"알았네. 자네는 내가 간 뒤에 돌아가도록 하게."

이렇게 내뱉고 우타노스케는 현관으로 달려갔다. 반각 남짓 휴식한 뒤 본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미 중신의 부인들은 마키히메의 옷을 갈아입히고 있었고, 하인들은 현관 옆 대기실에서 짚신도 벗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우타노스케는 달려가면서 다시 혀를 찼다. 바깥에는 아직도 밝은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둘째 성은 길도 깨끗하게 쓸려 있지 않았다. 우타노스케가 부리나케 현관에 들어섰을 때, 그 곳에는 이미 노신들의 지시로 촛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성주님! 성주님! 성주님은 어디 계시오?"

우타노스케는 부근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큰소리로 외치며 본성 안채에 있는 히로타다의 휴게실로 달려갔다.

"우타노스케입니다. 성주님 계십니까?"

방안은 조용하기만 할 뿐 한마디 대답도 없었다.

 

3

히로타다는 목욕을 하고 나와 불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거실에 앉아 시동에게 머리를 만지게 하고 있는 참이었다.

우타노스케는 그 앞에 대들 듯한 표정으로 가서 앉았다.

"성주님!"

히로타다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우타노스케요?"

틀림없이 여느 때처럼 흥분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왔는데, 뜻밖에 목소리도 태도도 조용했다.

"하치야에게 명한 말, 전해 들었소?"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이제 와서 그런 분부를 내리실 수 있습니까?"

"내 생각이 좀 늦었소. 반 각 정도 지연되어도 상관없으니 둘째 성에다 준비하도록 하시오."

"성주님!"

우타노스케는 무릎 걸음으로 다가갔다.

"마키히메 님은 소실이 아닙니다."

"......"

"어째서 본성에 들이지 않으시려는지 저희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히로타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과 다름없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우타노스케는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다.

"성주님! 어째서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까? 시간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 성에다 준비하라고 하지 않았소."

"어찌하여 둘째 성에서...... 이것도 저희들을 비꼬는 것입니까? 물론 저희들은 타케치요 님이 둘째 성에 계시는 것이 위험하므로 본성에 옮기시도록 청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모두 가문을 위한 일입니다. 저 혼자의 생각으로만 여기신다면 난처한 입장은 물론 오늘 일이 낭패로 돌아갑니다."

"우타노스케, 그대는 나에게 명령하는 거요? 그대가 언제부터 성주가 됐소?"

히로타다는 그제야 눈을 크게 떴다.

"오늘의 일은 내게 생각이 있어 정한 일이니 준비한 것들을 속히 둘째 성으로 옮기도록 하시오. 그대가 지시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직접 할까요?"

우타노스케는 히로타다에게 노려보는 시선을 못 박은 채 입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언제부터 성주가 되었느냐는 물음에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때였다. 역시 하치야의 전갈로 알았는지 이시카와 아키와 혼다 헤이하치가 큰소리로 부르면서 들어왔다.

"성주님! 성주님은 여기 계십니까?"

히로타다의 눈이 번쩍 빛났다.

"성주님, 혼례식을 둘째 성에서 거행하신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노려보듯이 하고 앉아 있는 우타노스케의 모습을 보자 이시카와 아키는 무섭게 히로타다에게 대들었다.

"시끄럽소!"

"."

"내 명령을 듣지 못하겠소? 대답하시오."

"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은 나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오. 가령......"

말을 시작하다 말고 히로타다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내가 과연 마키히메를 사랑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대들로서는 알 수 없을 것이오. 만일에 뜻이 통하지 않아 그 때문에 마키히메가 한을 품게 된다면, 같은 성안에 타케치요를 놓아둘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굳이 마키히메를 본성에 들여놓겠다면 타케치요를 둘째 성으로 옮긴 후에 하시오."

평소에 없는 조용한 목소리로 설득하자 노신 세 사람은 그제야 비로소 가만히 얼굴을 마주 보았다.

 

4

"내가 일부러 일을 복잡하게 꾸미려는 것은 아니요. 상대방에게는 본성은 타케치요의 거처라고 하면 그만이오. 내가 늦게 깨달아서 이런 일이 생겼소. 그러나 준비된 것을 옮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겠소. 이래도 그대들은 못마땅하다는 말이오?"

히로타다의 반문에 세 사람은 또다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았다. 그러나 말은 논리정연 했다. 곰곰 생각해보면, 히로타다가 한 말의 이면에는 마키히메와 친밀해질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텐데도, 때가 때이니 만큼 당황하는 마음만이 앞섰다.

"아직도 모르겠소? 타케치요를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과 접근시켜 놓고도 그대들은 불안하지 않다는 말이오?"

이런 질문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서로 재촉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이 나가자, 히로타다는 안도한 듯 크게 어깨를 흔들었다.

"이제 됐어."

불쑥 말하며 시동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성안이 떠들썩해졌다. 상대방 행렬이 성안에 들어온 뒤, 예정했던 식장만이 아니라 내실의 거처까지 변경되었으므로 나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사카타니에서 외곽 정문에 이르는 길을 깨끗이 하기 시작하는 자, 본성에서 부랴부랴 주방 도구들을 옮기는 자, 촛대를 나르는 자, 병풍을 메고 가는 자 등 흡사 불난 자리 같았다. 본성은 하치만 성채라 불리는데, 히로타다의 아버지 키요야스가 현재 오다 씨의 손에 점령당한 안죠 성을 이리 옮겨다 지은 것이다. 돌담 높이는 평지에서 45, 그 입구인 누문에서 사카타니를 거쳐 둘째 성 바깥의 카부키몬까지의 거리는 2정하고 20간 남짓. 둘째 성의 돌담은 지상에서 불과 2간밖에 되지 않으므로 본성에서 둘째 성으로 가는 길은 고갯길이었다. 더구나 좌우가 구불구불하여 문의 수만도 대여섯은 지나야만 했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보고 우타노스케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본성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시각은 여덟 점 반이었으나, 이미 여덟 점을 지나려 하고 있었다. 이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당연히 본성에 들어갈 줄 알고 따라오던 행렬이 둘째 성으로 접어들었을 때 마키히메와 그 오빠 노부미츠가 품을 의혹이었다. 한쪽은 지상에서 45, 다른 쪽은 지상에서 2간 남짓. 누가 보아도 그 차이는 뚜렷하다. 만일 마키히메가 거센 기질의 여자여서 무슨 일로 본성에 들어가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하여 납득시킬 것인가. 그리고 노부미츠의 기질은 알지 못하나, 그의 아버지 단죠라면 분연히 자리를 걷어차고 돌아가겠다고 할 것임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었다. 히로타다의 말에는 역시 우타노스케의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었다. 아니, 우타노스케에게만이 아닐 터, 지금은 남의 마음을 믿을 수 없는 난세였다. 만일 마키히메와 성주의 마음이 맞지 않아, 그 불만이 타케치요에게 미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이것은 노신들 모두의 가슴에 와 닿는 불안이었다.

'정말 큰일났구나......'

우타노스케는 우선 자기 방으로 돌아와 직접 자기 손으로 약탕의 약을 따랐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노부미츠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이때 부인이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내며 방에 들어왔다.

"마키히메 님의 옷은 다 갈아입혔습니다. 노부미츠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두를 것 없어요."

우타노스케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이질풀 달인 약을 쭉 들이켰다.

 

5

"전투의 진토가 아닌 이런 일에는 익숙지 못한 자들뿐이어서......"

우타노스케는 노부미츠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실수가 있을지 몰라 다시 한 바퀴 돌아보고 왔습니다마는, 생각대로 일이 잘 진행되지 않는군요. 하하하하."

헛웃음을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노부미츠는 아직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듯.

"그렇겠지요. 이런 일은 원래 예정한 대로는 진척되지 않는 법이니까요."

의외로 느긋하게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냐는 반응이었다. 우타노스케는 안도했다.

"그렇습니다. 만약 비라도 내린다면 밤이 될지도 모르는 형편이라."

"아니, 밤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걸요."

그 후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슨푸의 인물평을 주고받으면서, 뒷일을 부탁한 이시카와 아키의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키로부터 준비가 끝났다는 연락이 온 것은 일곱 점이 지나서 였다. 대기하고 있던 짓토쿠 차림의 일꾼들을 독촉하여 우타노스케의 집에서 행렬이 나간 것은 주위가 장밋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저녁나절이었다.

이번에도 양쪽에 친척들이 줄지어 서서 배웅했다. 선두에는 우타노스케, 거의 그와 나란히 선 토다 노부미츠, 그 뒤로 우타노스케의 부인의 안내로 마키히메가 좌우에 선 세 명의 시녀로부터 호위를 받으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바닷바람과 육지의 바람이 엇바뀌는 시각인 듯, 바람이 잔 조용한 저녁놀 속에서 우수수 벚꽃이 떨어져 내렸다.

", 과연 훌륭하군요."

도리의 간수가 94, 대들보가 2간 반인 본성 공동 주택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노부미츠가 우타노스케에게 말했다. 우타노스케는 가슴이 철렁했다. 거기서 본성을 바라보고 있는 노부미츠의 눈이 무서웠다.

"저 성이 하치만 성임이 틀림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선대인 키요야스 님께서 안죠 성을 옮겨 모시고 명명하신 이름이라 들었습니다마는."

"."

"그때 손수 소나무를 한 그루 심으셨다고...... 바로 저것이군요."

흰 부채로 망루 너머로 보이는 사부로 소나무를 가리켰을 때 우타노스케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공동주택 문을 들어섰다. 그리고 방금 소나무를 가리킨 쪽과는 반대방향으로 우타노스케가 묵묵히 꺾어들었을 때 예상했던 대로 노부미츠는 고개를 갸웃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우타노스케는 겨드랑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쪽입니까?"

"이쪽입니다."

"그렇다면 저것은 하치만 성이 아니라......?"

우타노스케는 정중하게 절을 했다.

"하치만 성에는 현재 도련님이 계십니다."

"흐음."

노부미츠는 숨을 죽이고 흘끗 마키히메를 돌아보았다. 우타노스케도 온몸을 경직시키고 마키히메의 기색을 살폈다. 마키히메에게는 아직 주위의 경관을 돌아볼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약간 우수에 잠긴 갸름한 얼굴에서 한 발짝 한 발짝 아내의 길로 다가가는 무감동한 수심이 엿보일 뿐이었다. 노부미츠는 다시 한번 시선을 본성의 사부로 소나무에게 옮겼다가 우타노스케에게 나직이 말했다.

"그럼 안내를."

우타노스케는 전신에 흥건히 땀이 배었다.

 

6

마키히메는 오카자키 쪽에는 열여덟 살이라고 했으나, 실은 열아홉 살로 음양오행설에서 말하는 액년이었다. 결혼 적령기는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 사이. 그런데 왜 이렇게 혼기가 늦어졌을까. 그녀에게도 역시 가슴앓이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신랑인 성주는 해가 바뀌면 스무 살, 그런데도 벌써 세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마키히메는 은근히 자신의 만혼을 서글프게 생각했다.

두 아이는 소실 오히사의 아들.

한 아이는 정실 오다이의 적자.

적자가 있는 집에 출가한다는 것이 여자에게는 하나의 무거운 짐이었다. 소실 오히사에 대한 것은 타와라에까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정실 오다이의 이야기는 이것저것 마키히메의 귀에도 들어왔다. 출가할 때 목화씨를 가지고 가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이야기, 우유로 소를 만들어 성주를 기쁘게 했다는 이야기, 타케치요를 낳기 위해 약사여래불에 기도를 드린 이야기 등, 그 어느 것도 모두 오다이의 슬기로움과 성실함을 말해주는 내용뿐이었다. 게다가 오다이의 미모는 부근 일대에서 제일간다는 소문이었다.

'그런 분의 뒤를 이어 출가한다는 것은......'

마키히메는 혼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정색을 하며 사양했으나 아버지와 오빠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오다이와 겨룰 마음은 전혀 없었고, 여자로서 처음부터 자기가 뒤떨어진다고 체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체념한 모습으로 과연 성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 그것이 큰 걱정이었다. 오카자키 성주가 미남이라는 것 역시 부근 일대에 널리 소문이 나 있었다. 따라서 소실인 오히사에 대한 질투보다도 이혼을 당한 오다이에 대한 선망이 머릿속에 가득하여 자기가 지금 둘째 성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타와라는 원래 작은 성이었다. 그에 비해 이곳은 성의 외부구조는 훌륭했으나 내부는 의외로 소박했다. 이 역시 무로 이름을 떨친 가문 탓이라 믿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큰방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양가의 예물이 쌓이고, 주고받는 인사와 축사가 끝날 때까지 그저 마음을 졸이고 있었을 뿐이다.

'대관절 어느 분이 성주일까?"

혼례의식이 쿄토식과 시골식이 섞여 있는 데다, 장소가 다르고 가풍이 다르기 때문에 어디서 성주가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예물 교환이 끝났다. 우타노스케 부인은 다시 신부에게 손을 내밀어 휴게실로 안내했다. 그곳 역시 세워놓은 병풍만이 훌륭했을 뿐 방의 구조는 타와라보다도 못한 것 같았다. 물론 오빠 일행과는 헤어졌고, 거기에는 우타노스케 부인과 자기가 데리고 온 세 명의 하녀들만 있었다.

"여기가 앞으로 아씨의 거실이 될 것 같습니다."

비로소 마키히메는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별로 불만스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검소한 것이 가풍이라면 출가해오는 사람 역시 가풍에 순응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때 하녀가 다시 귀띔을 했다.

"여기서 성주님과 대면하시는 것이 관습인 듯합니다."

"그래? 거울을 이리 주지 않겠니?"

마키히메는 가슴이 갑자기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7

마키히메가 막 거울을 치웠을 때 전갈이 왔다.

"지금 성주님께서 건너오십니다."

그 말에 이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마키히메는 혼기를 놓친 자신의 혈관이 피부 속에서 수줍게 설레고 있음을 느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자기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문 앞에 흰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그림자는 거의 망설임이 없었다.

"실례하오."

뒤에 칼을 든 부하 하나를 거느리고 조용히 말하며 마키히메 앞을 지나 상좌로 갔다. 마키히메는 두 손을 무릎 밑으로 약간 내리고 그를 맞았다.

"마키히메요?"

", 그렇습니다."

잠시 말이 끊겼다.

"먼 길에 피로가 심하겠소."

"변함없이 영원토록 보살펴 주십시오."

"나도 잘 부탁하겠소."

히로타다는 이렇게 말하고 서슴없이 마키히메에게 눈길을 던졌다. 이미 그 어디에도 불쾌하다는 감정은 드러나 있지 않았다. 마키히메도 고개를 들어 자신의 일생을 맡길 상대를 바라보았다. 소문과 다름없이 단정한 용모였다. 시원스런 눈매와 단정한 입술을 보고는 다시 당황하며 눈길을 깔았다. 그것은 행복하다기보다 울고 싶은 감동과 함께 몸을 떨게 만드는 한 순간이었다.

'이 사람이...... 이 잘 생긴 남자가 오늘부터 내 남편이 되는 것일까......'

이때 멀리 북쪽의 시모이나 부근 산맥 너머에서 천둥소리가 무겁게 들려왔다.

"아아, 봄에 천둥이 치다니 보기 드문 일이네요."

우타노스케 부인이 말하자 히로타다는 잠시 천둥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표정이었다.

"정말 그렇군요. 봄에 천둥이라니 희한한 일이예요......"

마키히메도 하녀도 다 같이 맞장구를 쳤다. 멀리서 울리던 천둥소리가 급히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지, 묵직한 울림이 공간을 제압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이때 잔치 복장을 한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두 소녀가 차와 과자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하녀들이 받아들어 히로타다와 마키히메 앞에 놓았다. 히로타다는 천둥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얼굴로 차를 마셨다.

"부슬부슬 비도 내리기 시작하는 것 같군."

",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사스럽다는 말이오?"

히로타다는 문득 우타노스케 부인을 돌아보고 말했다.

"나는 또 벼락이 우와나리를 하려고 온 줄 알았는데......"

이 말에 하녀들은 저도 모르게 옷소매를 입에 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와나리라는 것은 남편이 재혼했을 때 그 전처가 친척들과 함께 절굿공이나 밥주걱 또는 빗자루 같은 것을 들고 후처를 찾아가 때리는 풍습을 말한다.

'익살스러운 성주님.'

후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씁쓸했으나, 이 한마디로 마키히메의 마음은 한결 풀어졌다. 그녀 역시 소맷자락에 입을 대고 살포시 웃었다.

 

8

다 같이 웃음 터뜨리는 것과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세 번째 연락으로 신랑과 신부가 휴게실을 나설 무렵부터 천둥을 동반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비를 맞으면 만발한 벚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고 합니다."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모두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히로타다와 마키히메가 나란히 앉으니 신랑이 더욱 늠름해 보였다. 여기가 둘째 성만 아니었다면 노부미츠의 마음은 훨씬 더 즐거웠을 것이 틀림없다. 유서 깊은 본성 하치만을 아들에게 비워주겠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일족이 많은 오카자키 성의 일이므로 어떤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러려니 하고 노부미츠는 선의로 해석하고 잔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쏟아졌다. 가끔 번개도 섞여, 줄지어 세워놓은 촛불보다 더 밝게 창살을 비추고는 했다. 암나비와 수나비의 손잡이 장식이 달린 술 주전자로 신부의 잔에 교대로 술을 따르고 있을 때, 어딘가 가까운 곳에 벼락이 떨어졌다. 순간 마키히메는 깜짝 놀라는 듯했으나 그래도 잔은 무사히 받았다.

"좀처럼 멎지 않는군요. 이 천둥이."

"이 근처 지상을 맑게 할 작정인지도 모르지요."

"새 출발이니까 말입니다."

"이제 양가는 만세, 이마가와 댁도 만만세가 될 것입니다."

마키히메는 잔을 내려놓고 연회석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를 떴다. 약간 입에 대었을 뿐인 언약을 의미하는 술에, 천둥소리는 야릇한 흥분을 더했다. 눈앞에 신랑인 히로타다의 늠름한 얼굴이 계속 떠오르고 그때마다 전신이 몽롱하게 달아올라, 소리를 지르면서 무언가를 움켜쥐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혔다.

'나는 기꺼이 성주를 모실 수 있을 것이다......'

그 생활이 오늘밤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을 하니 얼굴도 귓불도 불처럼 달아올랐다.

"아씨."

옷을 갈아입는 것을 거들던 집에서 데려온 하녀 하나가 소리를 낮추었다.

"여기는 오카자키의 둘째 성입니다."

여느 때 같으면 예사로 들어 넘길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러나 마키히메는 그런 말을 새겨들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첫날밤의 잠자리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성주님이 계시는 곳이면 그곳이 바로 본성...... 무언가 네가 잘못 들었을 테지."

"하지만......"

시녀는 뒤로 돌아가 때를 매면서 말했다.

"본성에 새로운 소실이 있는 것 같아요."

"알고 있어. 버릇이 없구나."

물론 그것이 오히사인 줄 알고 꾸짖은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는 하녀도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비는 해시 가까이 되어서야 멎었다. 그전부터 코와카니 노래니 하여 연회장은 떠들썩했고, 작은 북과 피리소리가 둘째 성 가득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연회가 끝난 것은 일곱 점이 지나서였다. 그날 밤 히로타다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마키히메의 잠자리에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것도 관습이려니 하고 마키히메는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몸을 지그시 억제했다.

 

 

7. 아득한 염원

 

1

"마님을 뵙겠다고 낯선 나그네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아시가루 요스케가 서신 한 통을 손에 들고 정원을 통해 안채로 들어왔다. 오다이는 바느질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그 서신을 받아들였다. 봉함 앞면에는 분명히 자기 이름이 씌어 있었고, 뒷면에는 쿠마무라, 타케노우치 나미타로라 되어 있었다. 쿠마무라 저택에서 소개장을 가지고, 어째서 남편 토시카츠가 아니라, 자기 앞으로 보냈을까 하고 오다이는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사도노카미로 임명된 아구이의 히사마츠 야쿠로 토시카츠의 저택. 오다이가 재혼한 지도 벌써 8개월 남짓. 계절은 이미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저택은 어마어마한 성채와 같은 구조는 아니었다. 쿠마 저택보다 다소 규모가 작고 또 평지에 지은, 진지와도 같은 집이었다.

남편은 어제 나고야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가만히 봉함을 뜯어보니 그것은 오다이에게 남편 사도노카미, 곧 야쿠로 토시카츠에게 잘 말해서 가신 한 사람을 써줄 수 없겠느냐고 한 추천의 글이었다. 나미타로의 친척으로, 이름은 타케노우치 큐로쿠라고 했다. 토시카츠가 나고야나 후루와타리 성에 나가 부재중일 것으로 생각되어 마님께 부탁을 드린다고 씌어 있었다.

"어떤 사람인지 들게 하라."

전에는 겹겹으로 해자를 두른 성안 깊숙한 곳의 마님이었지만, 지금은 다이묘란 이름뿐 하찮은 일개 성주의 아낙에 지나지 않았다. 오다이가 바느질감을 치우고 기다리고 있으려니 마구간 옆 감나무 밑에서 아시가루가 키가 큰 한 사나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 사나이를 바라보며, 무심코 생각하는 찰나였다.

'혹시 어딘가에서......'

오다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기억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쿠마 저택 밖에서 본 이후 한시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은 동복오빠, 토쿠로 노부치카가 틀림없었다. 오다이가 깜짝 놀라 말을 건네려 했을 때 노부치카는 아시가루 뒤에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오다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신호임이 분명했다.

"마님, 모시고 왔습니다."

선 채로 아시가루가 말했다. 노부치카는 툇마루 아래서 한쪽 무릎을 꿇고 절했다.

"쿠마 도령의 소개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타케노우치 큐로쿠라고 합니다."

"타케노우치 큐로쿠......"

오다이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 새기려는 듯이 되풀이했다.

"나미타로 님의 친척인가요?"

", 친척이기는 하지만, 아주 먼 일가입니다. 일가 중에서도 맨 끄트머리지요."

"알겠어요. 요스케, 잠시 나가 있어요."

아시가루는 아무렇게나 꾸벅 절을 하고 사라졌다.

"오빠......"

"!"

노부치카가 오다이의 말을 가로 막았다.

"큐로쿠란 잡니다. 가능하시면 이 댁 아시가루로 있게 해주십사 하고 찾아왔습니다."

오다이는 잠시 아무 말도 않고 몰라볼 정도로 변해버린 오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큐로쿠는 그런한 오다이의 놀람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머지않아 다시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합니다. 오카자키의 마츠다이라 히로타다 님은 타와라 부인을 맞이하신 뒤 갑자기 전의에 불타 가까운 시일 안에 안죠 성을 탈환하시겠다고 말을 모으며 창을 벼르고 있다 합니다."

단숨에 말하고 나서 큐로쿠는 미소도 띠지 않고 다시 한번 꾸벅 머리를 숙였다.

 

2

타와라 부인이란 오다이가 떠나온 후 오카자키 성의 히로타다에게 출가한 토다 가문의 마키히메를 마츠다이라 일족이 부르는 이름이었다. 타와라 부인에 대한 풍문은 오다이도 들어 조금은 알고 있었다. 아니, 마음속 어딘가에서 계속 관심을 쏟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히로타다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은데, 그 원인은 히로타다가 부인을 본성에 들이지 않은 탓이라는 소문이었다. 오다이는 그러는 히로타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내 아내는 그대 한 사람뿐."

헤어질 때의 그 열띤 목소리가 안타깝게도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오다이는 이 집으로 출가해왔다.

'용서하십시오......'

히로타다의 환상이 떠오를 때마다 오다이는 이 말을 되풀이했다.

'언젠가...... 언젠가는 타케치요, 타케치요에게 도움 될 때가 있으려니 해서요.'

이러한 오다이 앞에 하필이면 죽었다던 노부치카가 하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히로타다가 안죠 성 오다 노부히로에게 도전하리라는 소식을 알리고 있다. 오다이는 잠시 눈을 감고 타케노우치 큐로쿠라고 자신을 소개한 오빠의 심중을 헤아려보았다.

"그래서......"

얼마 후 눈을 뜨고 물었다.

"그 전쟁은 어느 쪽에 승산이 있을까요?"

오다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 이 큐로쿠의 판단으로느 십중팔구...... 마츠다이라 쪽은 승산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요?"

"비록 오다 노부히로 님의 성이라고는 해도 그 배후에는 떠오르는 태양 같은 아버님 노부히데 님이 계십니다. 또 마님의 오빠이신 미즈노 시모츠케노카미, 이 댁 주인이신 히사마츠 사도노카미, 히로세의 사쿠마 일족도 이미 노부히데 님 편이나 다름없고, 마츠다이라 일족 중에서도 노부사다 님은 전부터 오카자키의 적, 게다가 이번에는 미츠키의 쿠란도 노부타카 님의 향배도 의심스럽다는 소문입니다. 이쯤 되면 마츠다이라에게는 승산이 없으리라고......"

오다이는 다시 잠시 동안 오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오빠의 얼굴에, 오카자키 본성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뛰놀고 있을 자기 아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일족 중에 또다시 향배가 의심스러운 사람이 나타난 것은......"

", 히로타다 님의 평판이 그렇게 좋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심성은 착하신 분인데, 어째서 그럴까요?"

"그것은...... 이런 시대의 무장으로는 그 착한 심성이 도리어 나약해 지거나 고집을 부리게 하여...... 이번 출전 결정에도 오카자키 노신들은 모두 탐탁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십중팔구 승산이 없을 것이라는 전쟁, 그 전쟁을 감히 결행하겠다고 주장하는 히로타다의 고집 또한 슬프게도 오다이로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일족의 꼭두각시가 되고 싶지 않아."

입버릇처럼 이 말을 되풀이하던 히로타다였다. 그러한 남편의 격앙된 감정을 오다이는 자신의 사람을 기울여 한껏 감싸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사람도 없었다. 오다이는 오빠로부터 눈길을 돌려 맑게 갠 하늘을 올려보았다. 한결 높아진 하늘, 추녀에 드리워진 노송나무 그늘 사이로 흰 구름이 흘러갔다. 어딘가에서 때까치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대지에는 이미 가을 기운이 짙어지고 있었으나, 아직 농부들의 가을걷이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 전쟁을 시작하면 많은 백성들의 원한을 사고 유랑민과 도적의 무리가 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다이에게 오카자키 성은 이미 손에 닿지 않는 하늘의 구름이었다.

"큐로쿠 님."

"그냥 큐로쿠라 부르십시오."

"아직 그럴 수는 없어요."

오다이는 이렇게 말하며 가만히 눈언저리로 옷소매를 가져갔다.

"전쟁을 중지시킬 수는 없을까요?"

"없습니다."

오빠의 대답은 단호했다.

"저는 예사 하인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집에서 일하겠다고 하는 이유는?"

"그것은......"

이번에는 오빠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 댁 대장의 말고삐를 잡고 어떤 전쟁이든 모시고 싶은, 다만 그것뿐입니다."

"......"

"운이 좋으면 그것으로 공도 세울 수 있겠지요. 오카자키에 제일 먼저 입성하는 용사, 그런 게 이 하인의 꿈...... 이라고 웃어넘기지는 마십시오. 무가를 섬기는 하인으로서 그 밖에는 어떤 꿈도 가질 수 없는 시대입니다. 어떻습니까? 쿠마의 주인도 마님께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천거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오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 아시가루, 요스케라고 합니다. 요스케의 방으로 가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세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전에 미즈노 토쿠로 노부치카였던 그는 아주 익숙한 하인배 같은 태도로 공손히 오다이에게 절하고 물러갔다. 오다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집으로 오다이의 출가를 결정하게 한 것은 쿠마의 타케노우치 나미타로였다. 나미타로는 오다이에게, 오다 쪽 사람한테 출가하여, 만일의 경우 타케치요의 구명을 부탁할 수 있는 입장에 있을 것을 암시했다. 그 나미타로가 이번에는 오빠를 이 집에 두도록 부탁해왔다. 오다이는 그 깊은 내막까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나미타로가 오빠를 조종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빠가 나미타로를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다만 두 사람이 무언가를 통해 깊이 맺어져 있다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오다이는 다시 바느질감을 꺼냈다. 요즘에는 손을 움직이고 있는 편이 도리어 생각을 정리하기가 쉬웠다.

"오카자키에 맨 먼저 입성하는 용사......"

오빠는 그렇게 말했다. 만일의 경우 자기 손으로 타케치요를 사로잡아 그 공을 내세워 구명을 도모할 생각임이 틀림없었다. 이러한 음모 속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남편 야쿠로 토시카츠를 끌어들여도 가연 괜찮을까?

갑자기 문 앞에서 인마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야쿠로 토시카츠가 나고야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반각만 일렀더라도 오빠와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었을 것이다. 오다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바느질감을 치운 뒤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매만졌다. 현관에서 토시카츠의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3

이 집에도 안채와 바깥채의 구별은 있었다. 오다이는 머리를 매만지고 나서 바깥채와는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둔 안채로 통하는 장지문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남편을 기다렸다. 바깥채에서는 이미 야쿠로 토시카츠가 가신을 불러 큰소리로 명하고 있었다.

"드디어 전쟁이야!"

평소의 점잖은 목소리에 비해 오늘은 매우 긴장미가 느껴졌다. 아마도 자세를 바로 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을 것이었다.

"지난 미노 공격 때 주군 단죠 노부히데 님이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난 것을 마츠다이라 쪽이 얕보고 안죠 성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가 있다."

토시카츠는 어색하게 껄껄 웃었다.

"이거야말로 우리로서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호. 오다 군의 질풍노도 기세를 모르는 자들이지. 언제 급한 연락이 올지 모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그런데 영지에서 차출할 장정들의 수는?"

", 농민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 힘을 합쳐 벼를 베어들이라고 하라. 만일의 경우 논의 벼가 짓밟히기라도 하면 일찍 베는 것보다 몇 갑절 더 손해를 보게 된다. 그리고 열다섯에서 서른 살까지의 남자들은 준비를 단단히 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라."

"열다섯 살에서 서른 살까지."

"그렇다. 이들이 출전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일손을 놓지 않도록. 한 해의 생명줄, 추수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라."

"알겠습니다."

이때 누가 차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차는 됐다. 안에서 마시겠다. , 짐 실을 말은 사십 필 정도 준비하도록."

그대로 기다리고 있는데 오다이가 앉아 있는 맞은편 장지문이 홱 열렸다.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오다이는 무릎에서 내린 두 손을 내밀어 남편의 칼을 옷소매로 싸안듯이 받았다.

"부인,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소."

토시카츠는 아내에게 더없이 다정했다. 목소리부터가 장지문 너머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오다이의 코끝은 마른풀과 땀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오다이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활짝 개었어, 좋은 날씨로군."

거실에 들어선 토시카츠는 잠시 추녀 밖을 내다보고 나서 대범하게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오랜만의 풍작이라, 이대로 날씨가 좋으면 백성들이 얼마나 기뻐할지. 그런데 분수도 모르고."

토시카츠는 크게 혀를 찼다.

"바보 같은 사람이야!"

그것은 물론 추수도 기다리지 않고 전쟁을 걸어오는 오다이의 전남편 마츠다이라 히로타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다이는 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으로 칼걸이에 칼을 걸고 조용히 남편 앞으로 돌아갔다.

"부인."

"."

"드디어 당신의 원한을 갚을 때가 왔소. 분수를 모르는 오카자키가 안죠 성을 넘보고 군사를 일으킨다고 하오.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겠소."

오다이는 잠자코 고개를 수그렸다. 이혼당한 아내이기 때문에 오카자키에 원한을 품고 있다고 단순하게 단정하고 있는 남편이 가엾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4

"안죠는 원래 마츠다이라 가문의 조상이 쌓은 성, 집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오만, 그렇다고 지금 마츠다이라의 형편으로......"

토시카츠는 하녀가 가져온 물수건으로 천천히 목덜미와 이마의 땀을 닦았다.

"뺏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 이제 당신 마음도 후련해질 것이오. 오다 단죠 같은 분이 자기 맏아들에게 지키게 한 성을 쉽사리 내줄 리 없지. 오카자키의 운명도 끝장이오. 자업자득이지."

오다이는 그래도 얼굴빛만은 바꾸지 않았다. 하녀가 가져온 찻잔을 조용히 남편 앞에 놓았다.

"우선 차부터 드시지요."

"그래요, 맛이 아주 좋군! 도중에 목이 말라 몇 번이나 말을 내릴까...... 했지만 갈증 후의 감로수를 생각하며 달려왔소."

"그러시면 한잔 더."

"그럽시다. 맛이 정말 좋아!"

거푸 두 잔을 맛있게 마시고 나서 토시카츠는 더욱 온화한 눈길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전쟁이 벌어질 거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후루와타리에서 연락이 오는 즉시 출정해야 하오. 알겠소?"

"."

"각오는 되어 있겠지요?"

"저는 무사의 아내예요."

"하하하...... 내가 그만 실수를 했군. 미즈노 시모츠케노카미의 여동생인데. 이번에야말로 나는 당신의 원수를 갚을 작정이오."

"......"

"갑옷을 벗으면 평범한 지아비, 난들 좋아서 전쟁터에 나가겠소. 다만 이러한 난세를 사는 사나이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 그대도 이 점을 헤아려주시오."

오다이는 다시 남편의 땀 냄새를 착잡한 심정으로 맡았다. 뛰어나게 용맹하다거나 남달리 활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토시카츠였다. 모든 것을 각오하고 시집온 이상 그 고지식함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채였다. 가장 괴로운 것은 잠자리에서의 꿈이었다. 토시카츠가 포옹해오면 오다이의 몸도 뜨거워졌다. 그러나 잠든 후 꾸는 꿈속의 남편은 언제나 히로타다였다.

'마음은 전남편, 몸은 지금의 남편......"

여자에게 재혼이란 그 얼마나 안타까운 비탄일까. 이런 꿈을 꾼 뒤에는 언제나 베개가 흠뻑 젖었다. 그런데도 토시카츠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대의 친정은 나에게 분에 넘치는 가문이오."

"과분한 말씀입니다."

"아니오. 나는 한 번도 마음속으로 그대를 소홀하게 생각한 적이 없소. 그런 까닭에 더욱......"

"."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 가지 있소."

"말씀하시지오. 무슨 일인가요?"

"당신과 나 사이에 아직 아기가 생기지 않은 것...... 마음에 걸리는 일은 바로 그것이오."

오다이는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아직, 그렇지요?"

"...... ."

"내가 또 공연한 말을 했군. 걱정하지 마시오. 난 무운을 타고난 사나이. 쉽게 죽지 않아요. 나 없는 동안 집안 잘 돌보고 내 무공을 빌어 주시오."

"...... ."

 

5

오다이는 다시 자기 자신의 불성실함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 오다이는 아직 토시카츠를 위해 무운을 빈 일도, 자식에 대해 생각해본 일도 없었다. 오카자키 성에 있을 때는 타케치요를 점지해 주십사 하고 추운 겨울에 목욕재계하고 치성까지 드렸는데.

"나는 말이오, 그대를 위해서라도 공을 세우겠소. 카리야의 사위가 범용해서야 어디에 쓰겠소? 그런데......"

토시카츠는 흘끔 옆방을 살피듯 하고는 말했다.

"물이 아직 덜 끓었소? 나는 나고야에서 아침 식사를 안 하고 왔는데."

오다이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지금도 자기만을 생각하고 토시카츠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부터 자신이 미워졌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일단 결심한 것을 포기할 오다이는 아니었다. 상을 차려오게 하면서도 오다이는 타케노우치 큐로쿠라 자칭하고 나타난 자기 오빠를 어떻게 하면 토시카츠와 만나게 할 것인가 곰곰 생각했다. 밥상 역시 오카자키의 히로타다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간소하여, 된장절임을 한 마른 정어리 한 마리를 곁들였을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차린 상이라 국도 없었다. 밥은 물론 현미였는데, 토시카츠는 따뜻한 물에 말아 훌훌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음식 시중은 하녀의 몫이어서 결코 오다이에게는 손을 대지 않게 했다. 무장의 집안이었지만 부인을 대하는 품위는 높았다. 밥을 다 먹은 토시카츠가 야채절임 그릇에 부은 물을 공기에 옮겨 마시기 시작했다.

"쿠마 저택의 나미타로 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오다이는 빙 둘러 나미타로의 인물평을 통해 남편의 마음을 떠보고 일이 성사될 것인가의 여부를 짚어보려 했다.

", 쿠마무라의...... 그 사람 상당한 인물이오. 쿠마의 노부시들과도 줄이 닿고, 나니와에서 사카이 해적들까지 움직이고 있소. 물의 세력은 대수롭지 않지만......"

토시카츠는 말하다 말고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하녀가 상을 물리러 들어왔다. 상을 내가는 하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엿듣는 자는 없겠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

오다이도 일어나 정원을 내다보았다.

"그 사람은 은밀하게 활동하는 오다의 군사요."

"?"

"단죠 님이 이따금 킷포시 님을 쿠마 저택으로 보내는 것도 그 때문인데. 앞으로 천하는 근왕의 것이라면서......"

"근왕이라 하시면?"

"그 사람은 쿄토의 쇼군 아시카가 일족은 이미 운이 다했다고 단언하고 있소. 이것은 난쵸와의 싸움, 호쿠쵸를 휘저어놓은 천벌, 그러므로 아시카가의 뒤를 이어 천하의 민심을 수습할 사람은 근왕, 즉 천황을 받들고 싸우는 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거요...... 알겠소?"

오다이는 갑자기 정색을 하는 남편의 태도에서, 자기 목적의 성공 여부를 캐내기 위해 진지한 눈빛으로 살그머니 남편으로 다가갔다.

"천황을 받들고 싸운다는 것은 어떤......?"

토시카츠는 장밋빛으로 물들어가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내 아내지만 정말 아름다워......'

 

6

토시카츠는 약간 자랑스럽기도 했다. 오다이의 얼굴이 이처럼 아름답게 빛난 것은 시집온 이후 처음이었다.

"헤이지가 망하면 갠지가 흥하고, 밤이 가면 아침이 오는 것이 천하의 이치. 지금은 천황에게 등을 돌린 아시카가 쇼군이 망하는 황혼. 다음에 일어날 자는 근왕의 아침이라 할 수 있지.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래서 노부히데 님은 천황께 헌금을 바치시고, 고맙게도 봉서까지 받았던 거요. 아니 그뿐만이 아니오. 아츠타 신사와 이세 대신궁에도 계속 막대한 봉납을 하고 있소. 그 다리를 놓은 인물이 바로 쿠마의 젊은 도령 나미타로요, 알겠소?"

오다이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째서 헌금이 쇼군을 망하게 하는 것일까?

"치성을 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신앙으로......?"

토시카츠는 빙긋이 웃었다.

"아니, 그 어느 쪽도 아니오. 이것을 정치라 하오. 아니, 양쪽 모두이니 정치라고나 할까."

"......"

"말하자면 하나의 깃발이라 할 수 있소. 이 난세는 신과 천황을 무시한 벌로서 온 것이오. , 나를 따르라! 나를 따라 신과 천황을 받들면, 난세는 태평세상이 된다! 이렇게 부르짖으며 싸워야만 비로소 안심이 모여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거요. 그리고 또......"

토시카츠는 오다이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는 것을 보고 자세를 바로 하였다.

"당신은 화총이라고 들어본 적 있소?"

"아니, 없습니다."

"그럴 거요. 나도 화승총에 대한 말을 듣고 정말 간담이 다 서늘해졌소."

"그것은...... 음식 이름인가요?"

"아니, 무기요. 무기! 공중을 나는 가공할 무기요. 화살 같은 것은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먼 거리에서 탕 하고 울리면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사람이 푹 쓰러져 죽는 거요. 아니, 말해도 믿어지지 않을 거요. 소리가 사람을 죽이다니...... 참으로 무서운 무기가 등장했소."

"......?"

"그런 무기를 말이오. 나미타로가 사카이 부근에서 구한 모양인데. 그 무기와 그것을 뛰어나게 다루는 명수들을 노부히데 님에게 바쳤어요. 거짓말이 아니오. 킷포시 님도 이미 극비리에 그 사용법을 배우고 있소. 그 무기와 근왕으로 모든 백성의 고통을 구하라고 진심 어린 기원을 담아 선물했어요."

오다이는 그 내용이 너무나 황당하여 얼른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남편 토시카츠가 나미타로를 신임하는 이상으로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쿠마의 젊은 도령은 결코 예사 사람이 아니군요."

"대단한 사람이지."

"실은 그 나미타로 님이 부하를 한 사람 추천해왔어요. 이 추천장을......"

오다이는 내심 안도하면서 서신을 내놓았다.

토시카츠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것을 펼쳐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다.

"이 큐로쿠라는 자는?"

"이시가루 방에서 기다리게 했어요."

"흐음."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하는 토시카츠의 얼굴에는 문득 의아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튼 만나보지."

 

7

큐로쿠가 다시 뜰 앞으로 불려나올 때까지 토시카츠는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니?"

큐로쿠가 고개를 들었을 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그대와 어디선가 만난 것 같군. 혹시 후루와타리 성에서 만나지 않았었나......?"

"아닙니다. 그런 곳에는 가본 일도 없습니다."

"으음, 이 추천서는 아내의 손을 거쳐 받았네. 추천하신 분과는 나도 가까워지기를 원하고 있지. 그런데 한 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

오다이는 깜짝 놀랐으나 뜰의 오빠는 천치라도 된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쿠마의 젊은 도령의 추천이라면, 굳이 나같이 미미한 사람 밑이 아니라도 후루와타리 성이든 나고야 성이든 어디라도 갈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나를 택했나?"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뭣이, 모르겠다고?"

", 단지 저는 무인을 모시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나미타로 님이 나에게 찾아가라고 하던가?"

", 이 댁 주인은 도량도 넓으시고 앞으로 출세하실 분이므로, 변변치 못한 너라도 잘 가르쳐주실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충성과 의리를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으음, 그런데 그대와 나는 틀림없이 어디선가 만난 일이 있어. 정말 기억이 없나?"

", 전혀......"

토시카츠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하다가, 오다이를 돌아 보았다.

"당신이 보기에는 어떻소?"

오다이는 두 손을 짚고 말했다.

"성주님이 보셨다는 사람은 이 자와 매우 닮은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저도 처음엔 가슴이 섬뜩했어요."

"당신도...... 낯이 익은 사람 같았다는 말이오?"

", 그래서 한동안은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와 닮았소?"

오다이는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카리야의 오빠와."

"오오!"

토시카츠는 무릎을 쳤다.

"맞아, 그 말을 듣고 보니 카리야의 시모츠케노카미 님을 닮았군 그래. 그러니 잘 생각이 안 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한쪽은 카리야의 성주이시니 너무나 체통이 다르지. 아무튼 좋아. 내 밑에 있도록 허락하겠네. 쿠마 도련님의 말을 잊지 않도록."

",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됐네, 그만 방에 돌아가 지시를 받도록 하게. 그대의 대장은 히라노큐조일세."

"감사합니다."

큐로쿠는 이번에도 쫓기다시피 그 자리를 물러났다.

토시카츠는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눈을 떼지 않았다.

"부인......"

"."

"저 자에게 방심해선 안 되오."

"무슨 수상한 점이라도?"

토시카츠는 다시 부드러운 표정이 되어 말했다.

"단죠 님이 그대를 의심하고 보낸 첩자인지도 몰라요. 오카자키에 아들을 두고 왔기 때문에. 그러나 염려할 건 없소. 그대의 마음은 내가 잘 알고 있소."

오다이는 안도하고 이 선량한 남편에게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합장했다.

 

 

8. 안개 속에 묻힌 성

 

1

정원에서 화톳불이 스러져가고 있었다. 동쪽 하늘이 훤해지면서 불길이 점점 기세를 잃어갔다. 그러나 실내의 등잔불은 사람들의 그림자를 뚜렷이 벽에 새겨주고, 방에 늘어앉은 부장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비장감마저 흐르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아베 오쿠라와 그 동생 시로베에. 왼쪽에는 사카이 우타노스케와 이시카와 아키, 중앙의 히로타다를 에워싸듯이 하고는 마츠다이라 게키, 오쿠보 형제, 혼다 헤이하치로, 아베 시로고로의 순으로 둥글게 진을 이루고 있었다. 모두 경장이 아니라 중무장에 가까운 차림으로, 그 표정은 한결같이 나무로 조각한 나한을 보는 것 같았다. 히로타다가 말했다.

"타케치요를 이리로."

히로타다는 거의 무표정이었다. 하얀 하치가네에 불빛이 아른 거리고, 갑옷을 차려 입으니 도리어 가련함이 더했다. 왕실의 인형 같은 분위기마저 감도는 듯했다. 히로타다의 명으로 그의 고모 즈이넨인이 타케치요를 안고 히로타다 앞으로 나왔다.

", , ......"

타케치요가 생글거리면서 아직 잘 돌지도 않는 혀로 아버지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히로타다는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아들의 목과 손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타케치요는 즈이넨인의 품에서 바둥거리며 아버지 쪽으로 가려고 했다. 즈이넨인은 그 뜻을 살펴 아기를 내밀었다.

"안아보시지요."

히로타다는 무릎 위에 있는 지휘봉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 눈은 여전히 타케치요에게서 떠나지 않은 채 작은 소리로 말했다.

"부탁합니다."

즈이넨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베 오쿠라와 사카이 우타노스케는 이 이별을 차마 보지 못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혼다 헤이하치로는 정원을 내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곧 일곱 점 반이 되겠군."

시동이 술과 카치구리를 가져왔다. 즈이넨인은 타케치요를 안은 채 히로타다의 뒤로 돌아가, 여전히 혀 짧은소리로 떼를 쓰는 타케치요를 달래고 있었다. 히로타다의 손에서 질그릇 술잔이 돌기 시작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다지 비장한 빛은 보이지 않아, 히로타다가 타케치요를 바라보던 때보다 오히려 분위기가 누그러져 있었다.

"들겠소?"

오쿠보 진시로가 혼다 헤이하치로에게 잔을 건네었다.

", 물론이오."

헤이하치로는 새 갑옷을 입은 몸으로 후후후 하고 웃었다. 정원 앞에 말이 준비된 듯 갑자기 요란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술잔이 다시 히로타다의 손에 돌아왔을 때.

"모두 준비 됐소?"

히로타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 하고 질그릇 잔을 깨뜨렸다.

"! ! !"

다 같이 외치며 높이 칼을 쳐들었다. 그리고는 아베 시로고로를 선두로 하여 성큼성큼 정원으로 걸어 내려갔다. 엄숙한 출전의식답지 않고 왠지 한가로운 분위기였다. 히로타다 앞에 애꾸눈 하치야가 말을 끌고 왔을 때였다.

", , !"

다시 뒤에서 티 없는 타케치요의 목소리가 들렸다.

 

2

날이 새기도 전에 오카자키 군사들은 성을 나섰다. 어제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아직 노부히데의 원군은 안죠 성에 도착하지 않았다. 성에 있는 병력은 약 600. 어쩌면 적은 지금까지도 이 기습을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고, 대장의 말고삐를 잡은 하치야는 이슬 맞은 풀을 밟으면서 생각했다. 아직 날은 완전히 새지 않았고, 부채꼴의 우마지루시를 어깨에 멘 아시가루가 꾸벅꾸벅 졸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말 위의 히로타다는 성을 나온 뒤에도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이 작전을 적이 설마 모르고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예측하기 어려운 오다 노부히데의 전략을 잘 알고 있었다. 성을 나서기까지는 불안한 마음이 적지 않았다. 사실 이 작전이 모험이라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중신들은 모두 재고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렸다.

히로타다는 날로 쇠약해지고 있는 자신의 체력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미루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선조가 쌓고, 조부 때까지 마츠다이라의 본거지였던 안죠 성, 그것을 자기 대에 적에게 빼앗긴 채 탈환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저승에 가서 아버지를 대할 면목이 없었다. 이대로 피를 토하며 적의 유린을 기다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초조하게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 미노로 쳐들어갔던 오다가 패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

히로타다는 안죠 성 공격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타와라 부인과의 불화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나도 정말 잔인해......'

지금도 히로타다는 말 위에서 문득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부인은 아직 처녀였다. 히로타다는 오하루만을 총애하고 지금껏 부인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부인은 그것을 원망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오다이처럼 사람을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지혜가 없었다. 노신들의 충고에 따라 이따금 둘째 성에 들르면, 체면도 자존심도 버리고 다그쳐오고는 했다.

"저의 어디가 마음에 드시지 않습니까?"

몸을 내던지며 흐느껴 울었다.

"떨어지지 않겠어요. 떨어지지 않겠어요. 말씀을 듣기 전에는 떨어지지 않겠어요."

때로는 그 도가 지나쳐 막말까지 했다.

"목숨을 끊겠어요. 그래서 제가 얼마나 치욕을 당했는지 아버지와 오빠에게 알리겠어요."

이럴 때 히로타다는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치밀고는 했다. 그녀와는 달리 명령만 내리면 그대로 움직이는 오하루와 비교되며 그녀를 끌어안을 생각은커녕 피로감만 느끼고는 했다.

"용서하오, 나는 병이 들었소."

결국에는 짜증이 분노로 변하여 거칠게 뿌리치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 타와라 부인이 언제부터인지 돌아서서 무기력하다고 히로타다를 헐뜯고 있었다. 이름도 없는 천한 계집은 사랑할 수 있어도 자기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비웃었다. 그런 말을 전해들을 적마다 히로타다의 가슴에는 정체 모를 초조감과 분노가 치밀었다. 갑자기 선두에서 소라고둥소리가 울렸다. 날은 어느 틈에 환하게 밝아왔다. 젖과 같은 안개가 싸늘하게 뺨을 스쳤다.

 

3

"우마지루시를 가져오너라!"

비로소 굳은 목소리로 명을 내린 히로타다는 우마지루시를 안장 옆에 세우도록 했다. 다시 소라고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발대가 이미 강둑에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규모는 약 500. 선발대는 누렇게 물든 논을 따라 몇 갈래로 갈라진 좁은 길로 산개하여 안개 속에서 함성을 지르며 진격해갔다. 물론 성안 군사들은 반격해 나올 것이고, 그러나 부근 지리에 대해서는 이쪽이 더 잘 알기 때문에 훨씬 유리했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하지만 신중하게 처신하십시오."

안개 속에서 본진의 대장 아베 오쿠라가 달려왔다. 히로타다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이미 전의에 불타고 있는 총신의 마음과 눈을 확인했다. 열한두 살 때부터 자주 느껴온 전쟁터의 공기는 히로타다에게는 별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죽느냐 사느냐? 그 조차도 성을 나서면 자기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느껴지곤 했다.

"오쿠라, 내 뒤를 따르라."

본진은 안죠 성 서남쪽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으로 진군하여 안개가 걷히기 전에 산개를 끝내고 거기서 모든 것을 지휘할 예정이었다. 행렬의 지휘는 아베 오쿠라. 히로타다의 호위는 우메무라 신로쿠로와 창을 멘 애꾸눈 하치야가 맡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안개를 뚫고 함성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안개 속에 같은 편 군사끼리도 서로의 모습을 아직은 알아볼 수 없었다. 성안의 군사들이 허둥지둥 당황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목표로 삼은 성 앞 언덕이 수묵화처럼 희미하게 떠오를 무렵이었다. 그 앞 누렇게 익은 벼 포기 사이에서 갑자기 참새 떼가 언덕을 뒤덮으면서 날아올랐다. 아베 오쿠라는 깜짝 놀라 말을 멈추면서 외쳤다.

"성주님!"

그러나 그 소리는 히로타다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그는 점점 걷히기 시작하는 안개 속으로 계속 말을 달리고 있었다. 해는 이미 높이 솟아 있었다. 아버지 키요야스 때부터 사용해온 우마지루시인 금부채가 안개 속에서 아름답게 반사되면서 투구의 마에다테가 곧바로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성주님!"

아베 오쿠라는 말을 달려 히로타다를 따라 잡았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성안의 군사가 이미 나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뭣이, 성안 군사가?"

"참새 때 날아가는 방향이......"

말하고 있는데 또다시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한 무리의 참새 떼가 짹짹거리며 아군 쪽으로 날아왔다. 히로타다는 싱긋 웃었다. 적병이 성에서 나오는 편이 도리어 오카자키 군에게는 승산이 있었다. 성채가 아니라 야전에서라면 모두 일기당천의 용맹을 발휘했다.

"이긴 것과 다름없어. 그렇지, 오쿠라?"

오쿠라는 고개를 저었다.

"성을 나왔다면 그럴 만한 승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상대는 소문난 오와리의 군사입니다."

"알고 있어. 좌우간 이 언덕에 곧 깃발을 꽂도록."

 

4

깃발을 꽂았을 무렵 안개는 서서히 걷혔다. 어디를 보나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황금빛 논, 그 사이를 누비며 진격해 가는 아군의 모습이 개미처럼 이어져 있었다. 아직 깃발을 세우지 않은 채 사방에서 성문을 향해 육박해 들어가고 있는데, 성안에서는 화살 하나 날아오지 않았다. 히로타다는 말에서 내리려고 고삐를 하치야에게 주면서 문득 뒤를 돌아 보았다.

"아니?"

아직 아군이 거기까지 진격했을 리가 없는 곳에서 번쩍하고 창끝이 번뜩였다.

"오쿠라, 저것은......"

아베 오쿠라가 달려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으음, 역시......"

"아군인가?"

"적입니다."

", 적이......"

히로타다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높아졌을 때였다.

", ......"

뜻밖의 방향에서 소라고둥이 울리고 동시에 흰 기가 논둑 위에 세워졌다. 하나, , . 그 맨 앞 검게 물든 오요서의 깃발을 보았을 때였다.

"아아!"

히로타다는 말 위에서 외쳤다.

"히사마츠 야쿠로, 이 건방진 녀석!"

아베 오쿠라는 잠자코 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참새 떼가 또 머리 위를 스치고 아군 쪽으로 날았다.

"성주님, 이미 원군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으음."

히로타다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하치야, 고삐를."

"."

한번 건네받았던 고삐를 다시 넘겨주었을 때, 히로타다의 말은 껑충 일어섰다가 언덕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성주님!"

오쿠라의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가볍게......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성주님!"

하치야는 외눈을 번뜩이며 쏜살같이 말보다 앞서 달렸다.

", ......"

적의 소라고둥이 다시 울렸다. 히로타다의 적진공격은 확실히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선두가 오다이의 남편 히사마츠 야쿠로 토시카츠라는 것을 안 순간, 히로타다의 피는 거꾸로 치솟았다.

"토시카츠 이 녀석!"

오다이가 아직 오카자기 성에 있을 때, 히로타다는 토시카츠의 아버지 사다마스와 오노의 성주 우에노 타메사다의 분쟁을 화해시킨 적이 있었다. 그 은혜도 생각지 않고 오다이의 남편으로서 공격해오는 토시카츠에게 히로타다의 증오가 폭발했다. 먼저 원군부터 단숨에 무찔러버리지 않으면 아군은 앞뒤로 적을 맞게 되어 있었다. 성안의 군사가 반격해오기 전에 라는 생각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인간적인 분노가 훨씬 더 컸다. 언덕을 달려 내려간 순간, 몇 개의 화살이 히로타다를 향해 날아왔다. 날아오는 화살 속에서 히로타다는 칼을 뽑았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좌우로 후려쳐 그 화살들을 떨어뜨렸다. 이어투구의 마에다테에 비스듬히 칼을 대고 곧장 토시카츠의 본진으로 뛰어들었다.

 

5

오다 노부히데는 그때 벌써 히사마츠 야쿠로의 배후까지 깃발을 내린 채 진격해와 있었다. 그는 안장을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오카자키의 애송이 녀석은 돌았어. 와하하하. , 어서 고둥을 불러라. 고둥을 불어."

"성주님, 깃발은?"

"아직 세우지 마라, 너무 일러. 성안 군사들이 반격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녀석의 코앞에 세우도록 하라."

그때 이미 하치야는 창을 꼬나들고 히사마츠의 선봉을 향해 돌진해가고 있었다. 찌른다기보다는 주위를 후려쳐서 히로타다의 진로를 열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와마츠 하치야가 여기 있다! 길을 비켜라."

우르르 좌우로 흩어지는 군사들 속에서, 아시가루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타케노우치 큐로쿠, 나와 승부를 겨루자!"

"닥쳐, 애꾸눈 하치야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느냐?"

자기를 큐로쿠라고 한 아시가루는 그 말엔 대답하지 않고 토시카츠에게 고함쳤다.

"성주님! 피하십시오."

토시카츠는 순순히 말을 뒤로 돌렸다.

"비겁하게 도망치느냐, 토시카츠! 게 섰거라!"

좁은 논둑을 가로막고 있는 아시가루 때문에 토시카츠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하치야, 빨리......"

히로타다는 앞발을 높이 쳐든 말 위에서 재촉했다. 그러나 타게노우치 큐로쿠는 침착한 표정으로 하치야에게 창을 겨눈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와아!"

뒤에서 함성이 울렸다.

성안 군사들이 반격해 나온 모양이었다.

"이놈!"

히로타다의 말이 다시 껑충 뛰어올랐다. 금부채 모양의 우마지루시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의 수는 더욱 많아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말의 엉덩이에 맞았다. 애꾸눈 하치야는 그때 비로소 자기 이마에 흐르는 땀에 생각이 미쳤다. 빗줄기처럼 흐르는 땀방울이 성한 눈의 움푹한 곳으로 흘러들었다. 그때마다 상대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그런데 상대의 이마에는 땀방울 하나 흐르지 않았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이런 느낌과 더불어 그는 본능적으로 싸움이 불리함을 깨달았다. 머지않아 퇴로가 끊길 우려가 있었다.

"성주님! 후퇴하십시오."

그러나 그 소리는 히로타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성주님! 아베 시로고로가 여기 있습니다."

"오쿠보 신파치로 타다토시도 있습니다."

위급하다고 느낀 두 사람이 좌우에서 히로타다를 감쌌다. 아베 오쿠라는 이미 근처에 없었다.

"성주님! 후퇴하십시오."

바로 등 뒤에서 히로타다가 탄 말의 거친 숨소리를 느끼면서 하치야가 다시 한번 외쳤을 때였다. 오른쪽 숲에서 와아 하고 또다시 함성이 일었다.

"."

누군가가 소리쳤다.

"오다 노부히데의 우마지루시다."

'아뿔사!'

하치야는 오다 노부히데가 여기 나타났다면 이미 승산은 없다고 생각했다. 신출귀몰함을 장기로 하는 이 맹장은 반드시 히로타다의 퇴로를 차단할 것이다.

"성주님! 후퇴를......"

다시 외쳤을 때였다. 탕하고 대지를 흔드는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동시에 하치야는 털썩 오른쪽 무릎을 꿇었다. 화살도 맞지 않고 창에도 찔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른쪽 허벅지가 불에 단 부젓가락에 찔린 것처럼 쑤셔왔다.

 

6

하치야는 의문으로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마지막으로 찔러올 적의 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적은 하치야를 찌르지 않았다. 용맹한 애꾸눈 무사의 목이 오늘의 싸움터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보물일 텐데도, 타케노우치 큐로쿠라고 자신을 소개한 아시가루.

"하아, 이게 화승총이란 말인가......"

하치야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너는 대장의 방패가 되어 잘 싸웠다."

그러더니 그대로 창을 거두어 토시카츠의 부대로 돌아가 버렸다. 하치야는 한 순간 멍하니 있다가 비로소 허벅지에 흐르는 피를 깨달았다.

"이상한 놈 같으니라구! 적을 동정하다니."

그는 역시 큐로쿠에게 찔린 줄로만 알았다. 소리만으로 쓰러뜨리는 무기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상처는 허벅지를 관통하고 있었다.

'놀라운 솜씨야, 창을 내지르는 것이 보이지도 않았어.'

그는 준비된 헝겊을 허리춤에서 꺼내 허벅지를 묶었다. 이미 사방의 포위망은 아주 가까이까지 압축되어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못하는 자기의 목숨이 끊어질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요란한 소라고둥소리, 칼이 부딪치는 소리,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 윙윙거리는 활시위 소리, 그런 것들이 점점 멀어지고, 푸른 하늘만이 그의 의식을 무겁게 짓눌렀다. 문득 귓전에서 자기를 꾸짖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깨달았다.

"하치야, 일어나!"

"...... ."

"나는 혼다 헤이하치로다. 하치야, 일어서! 너는 이러고도 오카자키의 무사냐!"

"...... ."

"일어서지 못하면 기어라. 기어서라도 성주님을 지켜야 한다."

", 기겠습니다."

하치야는 두 손으로 땅을 짚어가며 기었다. 이미 그의 시력은 거의 상실되어 주위를 분별할 수도 없었다.

"성주님! 성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치야는...... 하치야는......"

하치야는 기어가면서 자기 몸이 뒹굴어 논두렁으로 떨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에서는 연분홍빛 안개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주님! 하치야는...... 하치야는 기어가겠습니다."

이미 주위에 혼다 헤이하치로는 있지 않았다. 그 무렵, 오른쪽 풀숲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오다 노부히데의 원군은 어느 틈에 오카자키 군의 본진을 두 겹으로 에워싸고 서서히 그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마츠다이라 군은 완전히 둘로 갈라져 양쪽 모두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성문을 열고 반격해 나오는 정병과 이미 도착했으면서도 성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원군에게, 이를테면 교묘하게 쳐놓은 거미줄에 걸리고 말았다.

앞에도 적, 뒤에도 적. 오다이에 대한 감정 때문에 오요성의 깃발을 보자마자 언덕을 달려 내려왔던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었다. 히로타다는 그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도 노부히데에 의해 토벌되었고, 자기 역시.

'어차피 죽을 바에는......'

그는 고삐를 당겨 말머리를 노부히데의 본진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곁에 있는 마츠다이라 게키를 향해 엄숙하게 말하며, 푸른 하늘에 흰 칼날을 세웠다.

"게키, 내 뒤를 따르라! 마지막이 될 것이다."

 

7

"!"

게키는 대답과 함께 히로타다를 따랐다. 이미 히로타다의 말에는 화살 세 개가 꽂혀 있었다. 맑게 갠 가을 햇살 아래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우마지루시뿐이었다. 오다 노부히데는 그 모습에 다시 안장을 두드리며 기뻐했다. 바야흐로 모든 것은 생각했던 대로 되고 있었다.

"쏘지 마라. 탄환이 아깝다."

그는 처음으로 싸움터에 선을 보인 화승총이, 상대방의 무지 때문에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더구나 최초의 귀중한 한 방이 히로타다를 명중시키지 못하고, 그 앞에서 분전하는 애꾸눈 하치야를 맞혔다. 그리고 그 하치야 조차도 자기를 쓰러뜨린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미 우리가 포위하고 있다. 빗나가면 아군이 상하니 화승총은 그만 쏘아라."

사실 화승총을 동원할 필요도 없이, 사방의 오다 병사들은 히로타다의 우마지루시를 향해 창을 겨누며 앞을 다투어 덤벼들고 있었다. 활 부대 역시 히로타다를 겨냥하고 있었다. 노부히데에게는 초조해하는 히로타다가 우스웠다. 두 사람의 거리는 아직도 200간 남짓 되었다. 그 사이에는 작은 강이 분지를 누비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 분지까지 히로타다가 닿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맨 먼저 창을 들고 덤벼든 군사를 히로타다는 단칼에 베어 쓰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화살 하나가 말의 목에 명중했다. 말이 벌떡 곤두서는 순간 금빛 부채가 그림처럼 빛났다.

"과연 그 아비에 그 아들. 말머릴 돌리지 않는군."

히로타다는 드디어 분지까지 이르렀다. 금빛 부채가 관목 그늘에 가려 노부히데의 눈길에서 사라졌을 때, 오카자키의 무리 속에서 군사 하나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분지를 향해 뛰어들었다. 히로타다의 최후가 다가온 것이 분명했다. 등에 꽂은 작은 깃발은 연보랏빛 테두리에 큰 대자였다.

"오쿠보 신파치로 다급했군."

이어 또 한 사람. 이번에는 접시꽃이 그려진 깃발에 화살이 꽂힌 채 열십자로 칼을 휘두르며 히로타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저건 혼다 헤이하치로인가?"

노부히데의 관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혼전 중에 맨 처음 히로타다의 위급을 발견한 것은 오쿠보 신파치로 타다토시, 이어 그 사실을 알고 아수라처럼 포위망을 뚫고 달려온 것은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토요였다. 두 사람 외에 마츠다이라 게키와 아베 시로고로 타다마사 등이 겨우 히로타다의 말 앞에 있을 뿐, 잇따라 덤벼드는 오와리 군사의 포위 앞에서 이미 뚫고 나갈 방법이 없었다.

"성주님! 다 같이 죽읍시다."

이렇게 말하며 오쿠보 신파치로는 왼쪽의 적을 맞아 싸웠다. 그때 칼을 휘두르며 다가온 헤이하치로가 느닷없이 말의 재갈을 움켜쥐고는 오른쪽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미쳤느냐, 헤이하치로! 곧장 쳐들어가라. 노부히데 본진이 바로 눈앞이다."

"시끄러!"

헤이하치로는 이미 주종간의 존칭마저 쓰지 않았다.

"도망쳐야 해! 천치 같으니!"

"멈춰라!"

"멈출 수 없다. 여기에서 나갔다가는 적의 화살로 고슴도치가 돼."

히로타다는 이를 갈며 무어라고 소리쳤으나, 헤이하치로는 말을 점점 더 분지 안으로 몰아갔다.

 

8

강 양쪽 어디에도 나무다운 나무 한 그루 없었다. 갯버들과 감탕나무, 야생 뽕나무가 아직 약간의 잎을 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가까스로 몸을 숨길만한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성주!"

헤이하치로는 달려들 듯한 기세로 히로타다를 돌아보았다.

"이러고도 성주는 마츠다이라의 우두머린가?"

"말이 지나치구나. 헤이하치로."

"잔소리 말고 어서 말에서 내려."

"...... 뭐라고! 나에게 명령하느냐?"

"그렇다!"

외치면서 헤이하치로는 갑자기 히로타다에게 덤벼들었다. 그것은 이성의 격투가 아니라 흥분한 사나이와 사나이의 싸움이었다. 이렇게 되면 히로타다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피로가 그를 꼼짝도 할 수 없게 했다.

"에잇!"

헤이하치로는 외치면서 히로타다의 몸을 번쩍 쳐들어 논둑에 내던졌다.

", ...... 무례한 놈!"

"무례는 나중에 사과하겠다. 목숨은 하나뿐이야."

헤이하치로는 내던진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히로타다의 가슴팍에 올라타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투구를 얻어야겠다."

"헤이하치로! 네놈은......"

"사과는 저승에 가서 하마."

이미 히로타다에게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순식간에 투구가 벗겨지고, 그의 머리에는 헤이하치로의 유난히 무겁고 땀내가 나는 투구가 강제로 씌워졌다.

"잘 계시오!"

자신의 작은 깃발을 히로타다의 등에 꽂아주며 헤이하치로는 소리쳤다. 히로타다는 투구를 고쳐 쓸 힘도 없이 거친 숨결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그 시야에 아버지 때부터 사용해온 금빛 부채의 우마지루시가 번쩍 빛났다가 사라졌다. 오다 노부히데는 자기의 시야에서 사라진 히로타다가 다시 분지에 그 모습을 나타내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자청해서 사지에 들어오다니. 나이 차이를 생각하는 순간 알 수 없는 감회가 가슴을 스쳐지나갔다.

'가엾군......'

그러나 그 때문에 경계를 늦출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의 양편에는 만약 히로타다가 강을 건너 모습을 나타냈을 때를 대비해 20명가량의 궁수가 시위에 화살을 메긴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창 부대는 그 전방에 매복시켜 놓았다.

"아니 저것은?"

노부히데는 손을 이마로 가져갔다. 관목 사이에서 다시 금빛 우마지루시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었구나. 끈질기게도......"

중얼거렸을 때 말은 전방에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화살이 일제히 날았다. 어느 화살이라 할 것 없이 모두 빨려들 듯 히로타다의 갑옷에 꽂혔다. 그러나 말도 사람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창부대가 함성을 지르며 말 앞을 뛰어나갔다. 그래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토요가 히로타다의 우마지루시를 세우고 땅 끝까지라도 달려가겠다고 결심한 최후의 돌격이었다.

 

9

창부대의 공격으로 거리는 서서히 좁혀졌다. 노부히데는 눈길을 떼지 않고 사람과 말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전신에 중상을 입었을 텐데, 자세도 무너뜨리지 않고 말고삐를 쥔 손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무서운 투지에 노부히데는 가슴이 섬뜩했다.

"으흠!"

노부히데는 신음했다.

"과연 키요야스의 아들답게 용감하다."

노부히데가 달려나가 맞아 싸우려는 기색에 누군가 뒤에서 말렸다.

"성주님!"

후진의 참모로 나고야에서 따라온 킷포시의 사부 히라테 나카츠카 사노타유 마사히데였다. 노부히데는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양쪽에서 힘센 젊은이 두 사람이 오다의 자랑인 긴 창을 꼬나들고 뛰쳐나갔다. 양쪽 모두 창의 손잡이에 붉은 칠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칠인창이란 명예를 얻은 창 솜씨들이었다.

"히로타다 님에게 오다 마고사부로 노부미츠가 도전하오."

"아즈키자카 칠인창의 나카노 마타베에가 여기 있소!"

두 사람은 동시에 우렁차게 소리 지르면서 날쌔게 말의 콧등에 창을 들이댔다. 말이 비로소 멈추었다. 순간 말 위에 있는 장수의 투구가 약간 기울었다. 이어 팔이 축 늘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상체가 힘없이 오른쪽으로 크게 흔들렸다. 두 사람이 한 발 물러섰을 때 상대가 그대로 말에서 털썩 떨어졌다.

"마츠다이라 히로타다, 오다 노부히데에게 도전한다......"

이렇게 말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카노 마타베에가 벼락같이 창을 내지르려고 했을 때였다.

"멈춰라!"

노부히데가 제지했다.

"이미 숨이 끊어졌다."

노부히데는 천천히 주검 앞에서 다가가 금빛 부채의 우마지루시를 뽑아 투구 위에 놓았다. 그리고 큰 눈을 스르르 감으면서 말했다.

"훌륭하군!"

순간 주위의 온갖 소리가 멎고 숙연해졌다. 히라테 마사히데가 천천히 걸어 나와, 한쪽 무릎을 꿇고 투구로 손을 가져갔다.

"얼굴을 확인하시죠. 히로타다가 아닐 것입니다."

"알고 있네, 알고 있어."

노부히데가 말렸다.

"혼다 헤이하치로일 게야. 알고 있네...... 하지만 마츠다이라 히로타다로 대하는 것이 좋겠어. 참으로 훌륭해."

히라테도 합장했다. 이 소란 속에 분지로 쳐들어간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오쿠보 신파치로도, 아베 시로고로도, 마츠다이라 케키도. 누구의 지시였는지 오카자키 군은 깃발을 내리고 물러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도 히로타다 곁으로 달려가기 전의, 혼다 헤이하치로 지시였는지도 모른다. 해는 아직도 높이 떠 있었다. 추격에 대비한 오카지키 군의 양동작전이 예측되었으나 승패는 이미 결정되었다. 안죠 성 망루에는 여전히 오다의 깃발이 빛나고 있었다.

 

 

9. 도라지꽃 채찍

 

1

타와라 부인은 새 성의 정원에서 일곱 가지 가을 풀을 꺾고 있었다. 일곱 가지 풀이라고는 하나 솔새는 너무 쓸쓸해 보였다. 그 대신 국화를 곁들여 히로타다를 문병하러 왔다. 그녀 곁에서 타와라에서 데리고 온 시녀 카에데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웅크리고 앉아 부인이 잘라주는 꽃을 받아들고 있었다.

"카에데, 나는 성주님을 미워하는 것일까, 그리워하는 것일까?"

카에데는 버릇처럼 얼른 사방을 두러보고 나서 말했다.

"아직 숫처녀라는 것을 아시면 타와라 성주님이 얼마나 노하실까요."

"그럼 역시 미워하고 있는 것일까?"

"미워하셔야 할 텐데도 사모하고 계셔요. 그것이 저는 분합니다."

타와라 부인은 도라지꽃을 잘라 들고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라지꽃은 별로 향기가 없구나."

"마님!"

"?"

"오하루는 소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떻다는 거냐?"

"성주님 곁에서 왜 멀리 떨어져 있게 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마님의 생각을 알 수 없습니다."

타와라 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허리를 구부려 다른 꽃을 찾으면서 분별없이 말하는 시녀를 원망했다. 성주가 자기 몸에 손도 대지 않는 것은 오하루가 있기 때문임은 틀림없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히로타다의 기질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속에서 불길이 타오를 때마다 남편을 조르면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소원을 성취할 때까지는."

그러면서 언제나 피하곤 했다. 선조의 거성이었던 안죠 성을 탈환할 때까지 다른 일은 일체 생각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때문에 서둘러 전쟁을 시작했으나, 오카자키 군은 도리어 크게 피해를 입었다. 헤이하치로가 충성심을 발휘하여 대신 죽지 않았다면 성주는 목숨을 잃고 성도 노부히데에게 빼앗겼을 것이라는 소문이 쉬쉬하며 널리 퍼져 있었다. 실제로 상처를 입은 성주는 오쿠보 신파치로에서 업혀 성으로 돌아와서는 그 길로 병석에 드러눕고 말았다.

"마님."

카에데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같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먼저 오하루를 쫒아버리겠어요."

"카에데, 쓸데없는 말을 하는구나. 그러면 성주님의 마음은 한층 더 멀어지실 게다."

"아니, 멀어지시지 않아요. 멀어지시지 않도록 하겠어요."

타와라 부인은 다시 침묵했다.

"오하루의 좋지 못한 품행을 마님은 알고 계십니까?"

"좋지 못한 품행이라니?"

"지난번 전투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온 이와마츠 하치야의 집에 몰래 드나들고 있다는......"

넌지시 한 마디하고 가만히 마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만일 이대로 두시면 성주님은 다시 전쟁을 결심하시어 어떤 불행을 초래할지 모릅니다. 오하루를 멀리하도록 하시고 성주님의 마음을 마님 손으로 부드럽게 해드리는 것이 여자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타와라 부인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하치야에게...... 그것이...... 그것이...... 정말이냐?"

 

2

오카자키에 출가해온 지 이미 6개월. 아직까지도 부부관계를 거부당하고 있는 타와라 부인이었다. 질투와 한탄으로 몇 번이나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아니, 그것이 이 성에서 떠난 오다이를 잊지 못하는 데서 온 자신에 대한 몰인정임을 알았더라면 부인은 벌써 오카자키의 흙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자기가 오다이에 비해 여러 면에서 뒤진다는 것을 그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히로타다는 그런 눈치를 아내 앞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히로타다는 그런 눈치를 아내 앞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러한 기미를 느낄 정도로 예리한 감각이 그녀에게 없었는지 알 수 없기는 했다.

자기도 한때는 병을 앓은 몸, 히로타다도 허약해 보였다. 허약한 그 몸으로 솟아오르는 태양과 같은 오다 노부히데와, 조상이 쌓은 성을 놓고 서로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히로타다의 숙명을 그녀는 묵묵히 지켜보며 한껏 참아왔다. 그러나 인내에도 한계가 있는 듯 그녀는 이따금 혼자 울었다. 자기도 시집오기 전처럼 다시 가슴을 앓다가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종종했다. 그런데 얄궂게도 출가 이후 병색은 씻은 듯이 가시고, 있는 것은 오로지 히로타다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혀 만나지 못하고 있다면 혹시 체념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히로타다는 한 달에 한두 번은 반드시 찾아왔다. 카에데는 그 일을 두고 노신들의 지시라고 하지만,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히로타다를 볼 때마다 부인의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안타까움은 더욱 심해졌다.

'오늘 밤에는......'

온몸을 불태우며 고대하다가 거부당했을 때의 쓸쓸함은 아마 카에데도 모를 것이었다. 그런 뒤에는 반드시 악몽을 꾸고는 했다. 오하루가 뱀이 되어 그 싸늘한 몸으로 히로타다를 친친 감아나가는 꿈이었다.

'오하루만 없다면......'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여자는 약했다. 지금은 고독과 질투와 애절한 그리움으로 언제 미칠지 몰라 두려울 뿐이었다. 그 오하루가 남편의 눈을 속여 가며 애꾸눈 하치야를 종종 찾아간다고 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자기가 고민한 것으로 보다도 용서할 수 없었다.

"오하루는 미천한 종의 신분으로 성주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게 된 여자라 하지 않는가?"

", 욕탕에서 성주님의 목욕 시중을 드는 여자였다고 합니다."

카에데는 주인의 감정에 불을 지펴 애를 태우게 만들고는 슬쩍 말문을 돌렸다.

"도라지꽃을 좀 더 꺾지 않으시겠어요?"

부인은 잠자코 멀리 산맥 위의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에 파란 하늘이 비치고, 이따금 눈썹 언저리에 경련이 일어났다. 매일같이 남편을 기다리면서부터 그녀의 살결도 타와라에 있을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어딘지 모르게 메마른 느낌이었는데, 요즘에는 손을 대면 촉촉하게 묻어날 정도로 윤기가 돌았다.

"카에데."

"."

"네가 한 말, 단순히 소문만은 아니겠지?"

"오하루에...... 대한 것 말씀입니까?"

"하치야는 성주님을 모시는 무사가 아니냐. 나중에 사죄한다 해도 용서받지 못한다."

"호호호......"

카에데는 꽃그늘에서 웃었다.

"두 사람은 전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 두 사람 사이를 성주님께서 갈라놓으셨다는 것을 본성 하녀 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3

카에데는 이미 스물네 살, 평생을 성에서 봉사하는 여자로서 차차 잔인한 버릇이 나올 나이었다. 그녀는 흘끔 부인을 바라보았다.

"소문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꽃에서 부스러기를 떼어내면서 살짝 비위를 건드렸다.

"그것만이 아니라니?"

"먼저 마님 같았으면 벌써 벌이 내렸을 텐데, 타와라 마님은 너무 단속이 허술하시다고......"

"아니, 그런 소문까지?"

", 가풍의 문란은 가문의 수치입니다. 그런 소문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타와라 부인은 다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카에데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규방의 비밀이야 어떻든 이 성의 안주인은 바로 자신. 성에서 부리는 여자들의 단속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부인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성주님을 위해서라도 오하루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나약한 히로타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그런 소문까지 나돌게 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가증스러운 여자였다.

"카에데."

"."

"네가 직접 오하루를 불러오너라."

카에데는 깜짝 놀란 듯 얼굴을 들었다.

"불러와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나는 성주의 정실이 아니냐."

"하지만...... 만일 그것이 성주님의 귀에 들어가면?"

"만일 하인들이 퍼뜨리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내가 직접 성주님께 말씀 드리겠다."

카에데는 점점 더 창백해지는 부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과연 마님은 오하루를 다스릴 수 있을까?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었음이 틀림없었다.

"오하루 님은 마님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하치야는 성주님의 측근 무사입니다. 마님의 손이 미치지 못합니다."

카에데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하다가, 앞서 자기가 선동한 것도 잊어버린 듯이 말했다.

"마님, 이 일에는 단단한 결심이......"

"결심이 섰기에 불러오라고 한 것 아니냐."

"하지만...... 성안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못된 여자입니다. 혹시 마님이 오하루를 용서하신 뒤, 하치야가 성주님께 마님의 질투에서 나온 말이라고 중상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는......"

타와라 부인은 당황했다. 역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카에데......?"

카에데는 어제부터인지 그러한 여자 특유의 착각에 빠져 있었다. 자기 마음속에 행복한 동성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줄은 모르고, 선량한 주인을 위해 계략을 꾸미지 않고는 뱃길 수 없었다. 그것이 충성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마님!"

카에데는 버릇처럼 또 사방을 둘러보았다.

"소문이 나게 만든 오하루의 부주의, 이것 하나만으로도 죄가 됩니다. 오하루가 다시는 성주님이나 하치야를 만나지 못하도록 엄하게 다스리십시오."

"엄하게?"

카에데는 또다시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갸름한 얼굴을 긴장시키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남자로 말하면 목을 베는 것 같은......"

 

4

오하루는 그날도 히로타다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화살을 맞은 히로타다의 상처는 거의 아물고, 격렬한 적개심도 되살아났다. 그러나 아직 식욕을 찾지 못했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장 노신들로부터 뒤처리에 대해 들을 때는 고뇌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밀담을 나눌 때는 물론 여자들을 멀리했으나, 어렴풋이 그 상황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다 노부히데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여세를 몰아 오카자키 성을 공격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본진은 오와리로 철수하여 미노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오카자키는 배후에서 무너뜨리려고 여러 가지로 책략을 꾸미는 모양이었다.

히로타다의 병 깊은 몸과 이번의 패전을 이용하여 일족의 이간을 도모하려는 듯, 우에노 성에 있는 사카이 쇼겐이 감시 받기도 하고, 히로타다의 숙부 마츠다이라 쿠란도 노부타카에게 밀정을 보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히로타다는 앙상한 어깨를 으쓱거리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나는 재상을 섬기는 자. 이번 중궁 순산을 기원해 대사령이 내려져 죄인들을 사면한다는데......"

이마에 구슬땀을 흘리며 창백한 얼굴로 '슌칸' 같은 것을 부르기 시작하면, 오하루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렸다.

'성주님 역시 키카이가시마 같은 곳에 계시는구나......'

즐거워서 부르는 노래도, 심심풀이도 부르는 노래도 아니었다. 가신들에게 필사적으로 자신이 건재함을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건강하다. 모반 따위는 꿈도 꾸지 마라.'

더구나 히로타다가 번민하는 까닭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부터 오하루의 여자로서의 마음은 미묘하게 움직였다. 처음에서 무서웠다. 다음에는 자기가 오하루란 여자로서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슬펐다. 하지만 지금은 그 슬픔도 사라져 없어지고, 자기도 성주가 그토록 잊지 못하는 오다이처럼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약을 달이는 데도, 죽을 권하는 데도 그 마음이 반영되는지 히로타다의 총애는 오하루에게 더욱 쏠렸다. 요즘에 와서는 오하루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오다이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토록 깊이 성주를 사로잡은 현명한 사람을 닮은 자기가 행복하다고 여길 때조차 있었다. 오하루는 자기 방에 돌아와 그 길로 곧장 내종사촌 오빠 하치야를 문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치야의 상처는 히로타와 비교도 되지 않을 중상이었다. 허벅지를 관통당해 논바닥에 굴러 떨어진 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이미 적의 손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르고 필사적으로 성주를 찾아 분전했던 모양이다. 성주도 그가 살아 돌아온 것이 이상할 정도라고 했다. 이제는 자기가 오하루의 마음을 완전히 붙든 줄로 믿는 히로타다가 오하루에게 말했다.

"문병을 가야 해. 친척이 아니냐."

허락이 떨어진 후 오하루는 벌써 네 차례나 하치야를 찾아갔다. 목숨은 건질 것 같았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회복이 아주 늦었다. 오하루는 벗으려던 겉옷을 다시 고쳐 입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이때 하녀가 전갈을 해왔다.

"타와라 마님께서 사람을 보내셨어요."

"마님께서 내게......?"

복도에 카에데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5

'타와라 마님이 사람을?'

오하루는 아무 의심도 없는 맑은 눈길을 카에데에게 보냈다. 카에데는 그 눈길을 피하듯 다소곳이 절했다.

"타와라 마님께서 직접 하실 말씀이 있으니 모시고 오라는 분부이십니다."

"직접 하실 말씀이라니......"

"성주님을 간호하신 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만......"

"일부러 그렇게까지......"

송구스럽군요. 라고 말하려 했으나 아직 그런 어른스러운 말에는 익숙지 못한 오하루였다. 물론 거절할 생각 같은 것은 꿈에도 없었다.

'무슨 일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 앞장서세요."

겸연쩍어하며 카에데의 뒤를 따랐다. 아직 열일곱 살에 불과한 오하루에게 카에데는 이미 어엿한 숙녀였다. 성주에게 사랑받는 행복은 누리고 있었으나, 정실부인의 질투가 자기에게 미치고 있으리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내전 현관에서 하녀를 돌려보낸 뒤 두 사람은 곧장 '타케치요의 성'이라 불리는 하치만 성을 나서서 타와라 부인이 사는 새 성으로 향했다. 화창한 가을 햇빛이 부드럽게 목덜미를 어루만져, 처음으로 마님을 만나는데도 어렵거나 기가 죽지는 않았다. 같은 성주에게 사랑받고 있는 여자로서의 자학적인 친근감이 어딘가에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마님의 심기는 어떤가요?"

이렇게 묻는데 카에데는 호호호 하고 큰소리로 웃었다.

"오하루 님이 여러모로 성주님의 시중을 잘 들어주시니 기뻐하고 계시겠지요."

오하루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입 속에서 중얼거렸다.

"부끄럽군요."

카에데는 또 웃었지만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 주위에는 감귤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고, 색이 변하지 않은 것이란 젖꼭지나무와 소나무뿐이었다. 군데군데 옻나무와 단풍의 붉은 잎이 섞이고, 스고가와 물줄기에 새하얀 구름이 비치고 있었다. 카에데는 현관에서 오하루를 돌아보더니, 갑자기 예리한 어조로 야유를 던졌다.

"이 새 성과 하치만 성과는 어느 쪽이 더 훌륭할까요?"

"......?"

오하루는 반문했을 뿐 잠자코 신을 가지런히 벗었다. 그곳에 이르러서야 심장의 고동이 약간 빨라졌다. 하지만 결코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오하루 님을 모셔왔습니다."

카에데의 말을 귓전으로 들으며 오하루는 문지방 너머에서 두 손을 짚었다.

"부르심을 받고 오하루가 왔습니다."

상대의 대답은 없었으나 오하루는 상기된 얼굴을 조용히 들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타와라 부인의 물기를 머금은 듯한 눈이 날카롭게 자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뜻 보니 모양 좋게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님."

카에데가 말했다.

"오하루 님은 임신하신 것 같은데, 마님이 보시기에는......"

오하루는 얼굴이 빨개져, 당황하면서 무릎에 옷소매를 올리며 가리듯 했다.

 

6

오하루는 혹시나 했지만, 아직 자기가 임신한 사실을 깨닫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보니 살갗의 윤기와 눈초리에 임신인 듯한 수척함이 희미하게 드러나 보이기도 했다.

"오하루......"

부르고 나서 타와라 부인은 다시 시기하듯 오하루의 온몸을 뚫어지게 훑어 내렸다.

'이 여자가 성주님의 사랑을......'

생각만 해도 어지럼증이 날 지경인데, 오하루는 임 사랑의 흔적을 태내에 품고 있다. 타와라 부인은 왈칵 속이 뒤집혔다. 눈앞에 커다란 구슬이 되어 미처 날뛰는 뱀의 무리가 보였다. 피라는 피가 모두 머리 위로 솟구쳤다가 이번에는 한꺼번에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하루......"

"."

"그런 모습으로 감히 내 앞에 나타나다니......"

", 부르신다고...... 하기에."

"그러고도 성주님을 대할 낯이 있는가?"

"성주님...... 이라시면......?"

"방자하다! 그 뱃속에 든 것은 누구의 자식이냐?"

오하루는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가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였다. 자기가 아직 임신했다고는 생각지 못하는 오하루였다.

"너는...... 성주님의...... 사랑을 받았지?"

"."

"내 앞에서 분명히 말하여라. 지난번 안죠 성 전투가 끝나고 나서...... 사랑을 받았지?"

"...... ."

오하루는 타와라 부인이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전투가 끝난 뒤 부상을 입은 성주님에게 애무해달라고 졸랐다...... 고 해서 그것을 꾸짖으시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오해였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절대로 그런......"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성주님이 먼저......"

"뭣이! 성주...... 성주님이 먼저......"

바로 이 한마디는 타와라 부인이 귀를 막고 싶은 슬픈 말이었다.

"!"

카에데가 놀라며 일어섰을 때, 이미 타와라 부인은 성주의 거실을 장식하려고 잘라두었던 도라지 꽃다발을 움켜쥐어 거칠게 오하루를 때리고 있었다.

"뻔뻔스럽게...... 감히...... 성주님의 이름까지 더럽히다니! 이제는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어!"

때릴 때마다 꽃잎이 날리고, 줄기의 쓴 냄새가 방안에 풍겼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를......"

꽃 밑에서 오하루는 몸을 구부리고 계속 빌었다.

머리가 흐트러졌다. 목덜미에 꽃잎이 흩날렸다. 얼굴이 파랗게 멍이 들었다.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할 수 없다! 어서 그 자식의 아비가 누군지 이름을 대라"

"아비라니. 무슨......?"

"아직도 입을 열지 못하겠느냐? 그것은 성주님의 핏줄이 아니야. 그 하치야란 놈과 간통한 불의의 씨라는 것은 성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성주님이 먼저......성주님이 손을......"

타와라 부인의 경련하듯 광란하는 질타 속에 왠지 오하루는 사죄를 멈추고 있었다.

 

7

하치야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오하루의 마음에는 이상한 반감이 치솟았다. 이름도 없는 아시가루의 딸로 태어나 강하게 살아온 과거의 생활이 문득 눈을 부릅떴다. 본능적으로 이 일은 타와라 마님의 질투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리고 자기가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빈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상대는 이런 식으로 나를 성주님 곁에서 몰아내려 한다고 생각한 오하루는 이를 악물고 때리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타와라 부인은 한참 동안 매질을 그치지 않았다. 카에데도 그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매질에도 매질을 계속할 만한 반항이 필요했다. 전혀 반항하지 않는다면 때리는 쪽의 피로만 쌓일 뿐이었다.

"어째서 잠자코 있느냐?"

거친 숨결을 몰아쉬며 타와라 부인이 때리던 손을 멈추었다.

"변명할 구실이 없어서일 것입니다."

옆에서 거들며 카에데는 웃었다.

"그렇게 소문이 났으니 변명은 통하지 않지요. 더구나 성주님께서 조사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까요."

성주님이라는 말을 듣고 오하루는 놀랐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변명을 하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미 울고 있지도 않았다. 당시 아시가루의 가난은, 딸이 태어나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솜옷 한 벌이라도 새로 지어주면, 이웃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저 아이는 복도 많구나."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시가루의 피가 오하루의 몸속에서 무섭게 눈을 떴을 것이 분명했다.

"성주님의 내명도 계셨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카에데가 다시 그 말을 입에 올렸을 때였다. 타와라 부인보다 먼저 오하루가 말했다.

"성주님은 절대로 그런 말씀 하시지 않습니다."

자신감에 넘치는 싸늘한 목소리,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성주님의 이름으로 저를 베시겠습니까...... 어디 베십시오. 제가 하치야를 문병한 것은 성주님의 분부였습니다."

"닥쳐욧!"

이번에는 카에데가 파랗게 질렸다. 만일 사건이 복잡해지면 타와라 부인으로서는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 카에데가 점점 창백해져 가는데 비해 오하루의 얼굴에는 핏기가 되살아났다. 조용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말했다.

"이제 그만 물러갈까요. 아니면 다시......"

카에데의 손이 몰래 품안에 숨긴 단도 쪽으로 옮겨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하루는 천천히 타와라 부인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타와라 부인은 꽃잎이 다 떨어진 도라지 줄기를 아직도 손에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깨는 심하게 파도치고 숨결도 여전히 거칠었다. 그러나 눈에서 이글거리던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남모를 공포가 깃들이고 있었다. 증오와 곤혹스러움이라기보다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목숨과 목숨의 대결이 될지도 모르는 긴박간이 떠돌았다. 이것도 일종의 슬픈 전쟁. 바깥은 아직 지나칠 정도로 밝았다. 누군가가 이 장면에 맞닥뜨렸다면 사건은 더 이상 여자들의 손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았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10. 한 톨의 쌀

 

1

진눈깨비가 내려 아구이 골짜기에는 흰 물감을 칠한 듯 안개가 자욱했다. 겨울이 이미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히사마츠 사도노카미 토시카츠는 안채 거실 툇마루에 서서 오다이에게 자기 가문의 내력을 설명하고, 아구이 골짜기에 사는 백성들의 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손으로 가리켰다.

"저것 좀 보시오, 오다이. 어디서나 연기가 나고 있지 않소? 영주는 말이오, 이것을 가장 기뻐해야 하오."

오다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남편이 가리키는 아구이 여덟 마을의 골짜기와 언덕을 바라보았다.

"올 가을의 내 지시는 잘못되지 않았소. 원래 이 아구이 골짜기의 쌀 맛은 오와리에서 미카와에 걸쳐 으뜸이오. 점토질로 토질이 좋거든. 이 좋은 쌀 맛을 내 마음으로 삼고 싶소. 그래서 부하들에게는, 저기 왼쪽에 보이는 우리 가문의 시주절 토운인에 참선을 시켜 언제나 이 말을 되새기게 하고 있소만......"

말하다 말고 토시카츠는 품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 오다이에게 건넸다. 한 톨의 쌀 속에 해와 달을 간직하고 반 되들이 냄비 안에 산천을 삶는다.

"그 한 톨의 쌀이 지닌 풍요로움...... 우리 가문에 전해오는 덕으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려는 마음이 그 속에 있소. , 그대에게 우리 조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 일이 있던가?"

오다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 그렇군. 그럼, 말해주리다. 우리 선조는 칸쿄의 손자에 해당하는 아구이마로라는 분인데, 배를 타셨다가 오노에 표류하여 이 아구이에 정착하셨다 하오."

"그 말씀이라면 들었습니다."

"아니, 내가 이야기했다는 말이오?...... , 그렇군."

토시카츠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 조상님 말인데. 그분은 결코 강제로 토지를 뺏고 주인을 쫓아내는 그런 무도한 짓으로 이 골짜기의 영주가 된 것은 아니오. 어디까지나 덕...... 덕을 첫째로 하여 이 골짜기의 토착민을 대하고 있는 동안 어느 틈에 어른이라 자연스럽게 불리고 추앙을 받아......"

이 이야기 역시 오다이는 벌써 두세 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듣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에 비하면 오카자키 같은 것은 상대가 되지 않소."

역시 오늘도 토시카츠의 이야기는 이 문제로 귀착되었다. 오다이는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가슴에 느꼈다.

"그대의 친정인 미즈노 씨는 오카와에 켄콘인이라는 훌륭한 칠당가람을 지어 조상과 백성들을 위해 기도한 가문이라 이야기가 달라요. 하지만 오카자키는 가문조차 확실치 않소. 그러던 것이 힘으로 주위를 제압하고 어느 틈에 토호가 되었어요. 그러니 결국에는 싸우다가 망하는 것이 순리일지도......"

오다이는 가만히 남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토운인의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지붕을 쳐다보았다. 지붕 위에 날개 젖은 비둘기 세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마리가 새끼 같다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처럼 덕이 모자라는 오카자키라면 내 한 몸을 바쳐서라도 하는 못다한 정이 슬프게도 아직 가슴에 맺혀 있었다. 어미인 듯한 한 마리가 새끼비둘기한테 다가가 깃털을 다듬어주기 시작했다.

"무엇을 보고 있소?"

갑자기 토시카츠가 오다이 앞으로 얼굴을 디밀며 밝게 웃었다.

", 저 어미와 새끼비둘기, 하하하. 내 마음도 그대와 마찬가지요. 저 새끼비둘기, 우리 사이에도 어서 저런 것이 있었으면......"

 

2

오다이는 다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절절하게 자신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를 생각했다. 남편이 이토록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있는데, 오다이의 가슴에는 아직도 히로타다와 타케치요 두 그림자가 함께 살아 있었다. 타케치요는 내 아들이다. 아들에 대한 생각은 평생 가슴에 품고 있어도 신이나 부처님 모두 용서하실 터. 하지만 남편 있는 몸이 남편 이외에는 하고 생각하면, 마음으로는 전 남편을 품고 있으면서 허깨비인 몸은 토시카츠에게 맡기고 있는 자신이 불결해서 견딜 수 없었다. 출가하기 전에 이미 굳게 마음을 정하였는데, 어째서 떨치지 못한 채 언제까지 구애받고 있는 것일까. 토시카츠는 어느 틈에 다가와 오다이와 몸을 다 붙이고 서 있었다.

"지난번 전투에서 간신히 목숨만 건져 허둥지둥 도망갔으면서도, 오카자키는 아직도 끈질기게 안죠 성의 탈취를 꿈꾸고 있는 것 같소. 나는 그 망집을 신불의 벌이라 생각해요. 빼앗은 것은 빼앗기는 것이 도리요. 그런데도 빼앗을 때의 일은 잊고, 빼앗겼을 때의 분함만 생각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타와라와 요시다의 두 토다 씨를 통해 이마가와에게 원병을 청하고 있는 모양이오."

"그러면 또 전쟁을......"

오다이는 깜짝 놀라 남편을 돌아보았다.

토시카츠는 태연히 웃었다.

"타와라 단죠에게 보기 좋게 거절당한 것 같소."

오다이는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병든 히로타다가 더 이상 무리한 전쟁을 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전쟁에 진 불쾌감의 해소로 내전이 몹시 어지러워져 있는 모양이오. 타와라 부인과 소실의 다툼이 있었는데, 부인이 친가에 고자질을 했다 하오. 그게 원인이 되어 거절당했다는 소문인데, 그러한 일은 나도 자세히 알고 싶지 않소."

"타와라 부인의 고자질이라니......?"

"그야 여자들의 다툼일 테지. 오다 쪽에서도 오카자키의 이런 분란을 틈타 여러 수단을 강구하고 있소. 그러니 이제는 이마가와 쪽으로 누가 볼모로 가서 직접 구원을 청할 수밖에 도리가 없을 거요."

이때 시도이 토시카츠를 부르러 왔다. 밖에 무슨 볼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오다이는 토시카츠가 나가자 문을 닫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만일 오카자키가 이마가와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보내야 할 볼모가 있다면, 그것은 누구일까? 타와라 부인은 물론 아닐 것이다. 오히사가 낳은 칸로쿠일까? 아니면 자기가 낳은 타케치요일까?

사방은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어지러운 빗발소리가 더욱 마음을 처량하게 했다. 오다이는 조용히 일어나 잠시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자기가 떠나온 뒤 계속해서 들려오는 오카자키의 흉보. 패전, 질병, 내전의 어지러움 등 마음 아프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슨 저주라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오다이는 온몸이 오싹해졌다. 그 원인이 지금의 남편을 속이고 있는 자신의 부정에 있는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자기가 미련을 끊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히로타다의 미련도 이어지며, 여기에서 비롯되어 불행이 한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불교의 가르침인 윤회에 문득 생각이 미쳤다. 오다이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고 방구석에 놓인 궤 쪽으로 다가갔다. 오다이는 토시카츠에게는 숨긴 채 그 속에 아직 끊지 못하는 미련의 흔적들을 몇 가지 간직하고 있었다.

 

3

맨 먼저 꺼낸 것은 접시꽃 무늬가 있는 찻잔받침이었다. 다음에는 타케치요의 출생을 기념한 '시자 향합'. 다른 하나는 마키에 향로로, 지금도 오카지키 성에서 불행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오다이의 생모 케요인의 애용품이었다. 이러한 물건들을 저물어가는 곁방 다다미 위에 늘어놓고는 오다이는 옛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찻잔받침은 히로타다가 거실에 왔을 때 찻잔을 얹어 내놓았던 추억의 물건. '시자 향합'은 타케치요, 마키에는 케요인. 이렇게 모든 애착이 그대로 오카자키와 이어져 있었다.

'이처럼 큰 부정이 또 있을까......?'

죽은 셈치고 시집왔는데, 그것들은 아직 생생한 집착이 되어 계속 마음 깊은 곳에서 오다이를 부르고 있었다. 타케치요의 얼굴이 보였다. 히로타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줏빛 두건에 감추어진 오다이와 닮았다고 하는 케요인의 눈이 보였다.

"아아......"

오다이는 그 집착의 물건들 위에 엎드러져 울기 시작했다. 이들 물건이 있는 한 오다이는 결코 토시카츠의 아내가 될 수 없다. 이 물건들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갖고 있는 것은 부정한 일. 태우든지 버린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날 일도 아니었다. 이 물건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부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줄 알면서 그대로 숨겨둘 수는 없다. 타케치요도 히로타다도 케요인도 모두 행복하기를. 그리고 지금의 남편 토시카츠도. 토시카츠의 곁을 떠나거나 오카자키에 대한 애착을 끊지 않으면 이 행복은 양립될 수 없다. 애착을 가지면 부정이 되고, 정숙에 마음 쓰려면 애착을 끊어야만 한다.

"오다이......"

갑자기 부르는 바람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째서 울고 있소? 하녀들이 마음이라도 상하게 했소?"

언제 돌아왔는지 등 뒤에 토시카츠가 서 있었다. 오다이는 당황했다.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을 때여서 토시카츠에게 마음속을 들여다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들여다보인다면 그것은 오다이의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토시카츠의 불행일 터였다. 남의 불행을 자기 불행 이상으로 가슴 아파하는 천성, 오다이는 느닷없이 토시카츠에게 몸을 던졌다.

"용서하십시오. 모처럼 기분 좋으신 성주님의 흥을 깨고 말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러한 모습을 아직 본 적이 없는 토시카츠는 깜짝 놀라, 그 역시 오다이의 어깨를 껴안았다. 부드러운 몸이 격정으로 파도치며 토시카츠의 손에 탄력적인 선율을 전해왔다.

"나는 말이오......"

토시카츠는 말했다.

"그대를 나에게 보내주신 신불에게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소. 오늘도 그 감사의 뜻으로 백성들의 도조를 이 할 감해주고 왔소. 행복을 나 혼자 독차지해선 안 됩니다. 한 톨의 쌀에도 이처럼 자연이 가르쳐주는 풍성한 교훈이 있어요."

오다이는 더욱 격렬하게 토시카츠에게 매달려 흐느껴 울었다.

 

4

"나는......"

토시카츠는 말을 이었다.

"그대와의 사이에 아직 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한 것은 내 덕이 모자란다는 신불의 깨우침이라 생각하고 있소. 이제부터라도 그 점을 명심해서 살생을 삼가겠소. , 울음을 그쳐요. 울지 마시오."

이미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오다이의 집착을 오카자키로 이어주는, 미련을 끊지 못한 물건들은 아직 토시카츠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오다이의 자세가 본능적으로 그것을 시야에서 가리고 있었다. 자신의 떳떳하지 못한 갈등을 눈치 채지 못한 토시카츠, 지나치게 선량한 토시카츠의 독단적인 짐작이 더욱 더 애절하게 오다이의 마음을 찔러왔다. 하녀가 등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주위를 밝히는 불빛에 토시카츠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미련을 끊지 못하고 있는 물건들이 토시카츠의 눈에 띄었다.

"수고했다. 저녁은 안에서 먹겠다. 주방에 가서 그렇게 알리도록 해라."

하녀가 등잔을 놓고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토시카츠는 고개를 갸웃하고 먼저 케요인의 마키에 향로부터 집어 들었다. 오다이는 숨을 죽였다. 아직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는데, 그것이 토시카츠의 눈에 띄고 말았다.

"허어, 칠이 참 훌륭하군......"

토시카츠는 향로의 뚜껑을 열고 잠시 코끝에 대보았다.

"어떤 물건이오. 이것은?"

"저어......"

오다이는 어떻게 하면 토시카츠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을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오카자키에 계신 어머님의 물건입니다.'

", 오토미 님의......"

토시카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아마 케요인이라 하신다지? 복이 없는 분이셨어."

", 세상을 버린 사람처럼...... 오카자키 성 한구석에서 여생을 보내고 계십니다."

토시카츠도 오다이의 생모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일대에서 소문이 자자한 미모의 소유자로, 그 때문에 남편을 계속 바꾸어야만 했던 가엾은 사람. 미야노 젠시치라는 하급무사의 집에서 태어나, 그 뛰어난 미모로 오코우치고의 영주 사에몬노스케 모토츠나의 양녀로 들어갔다. 그 뒤 모토츠나의 정략적 도구가 되어 이 성 저 성으로 시집을 다녔다. 몇 번째인가로 출가한, 오다이의 아버지 미즈노 타다마사와의 사이에서 다섯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지만 다시 마츠다이라로 출가해야만 했던 슬픈 사연을 가진 사람. 미즈노 타다마사가 히로타다의 아버지 키요야스와 싸우고 화의 했을 때, 카리야 성 밖에 있는 모밀잣밤나무 저택의 술자리에서 오토미는 키요야스의 눈에 띄었다. 그때 오토미는 스물네 살, 키요야스보다 여섯 살이나 위였으나 스무 살 안팎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말을 들어 알고 있었다.

"참으로 미인이로군, 나에게 주지 않겠소?"

히로타다와는 달리 호걸풍이었던 키요야스는 오토미를 보았을 때, 다섯 아이의 어머니를 승전의 전리품으로 요구했다고 한다.

'그렇구나, 어머니의 애용품을 보고 울고 있었구나.'

선량한 남편 토시카츠는 이렇게 생각하고 더욱 오다이를 사랑스럽게 여겼다.

 

5

"케요인 님은 오카자키에 가시기 전에 이혼하고 잠시 성 밖에 있는 메밀잣밤나무 밑 별채에 계셨다고 들었는데."

"...... 그래요."

"미즈노 타다마사의 부인인 몸으로 오카자키에 출가하셨으니 안타까운 일이었소. 그대는 메밀잣밤나무 밑의 별채를 기억하고 있소?"

"."

"지금도 카리야 사람들은 그 저택을 어머니 집으라고 부른다더군. 그대의 형제들이 어머님을 사모하여 부른 호칭이 그대로 남았을 거요.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마츠다이라의 말로를 알 수 있소."

토시카츠는 이렇게 말하고 이번에는 히로타다의 찻잔받침을 집어 들었다. 오다이는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찻잔받침에는 접시꽃 무늬가 뚜렷하게 그려져 있었다. 만일 오다이가 아직 히로타다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토시카츠가 깨닫게 된다면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눈을 감은 채 오다이는 마음속으로 두 손을 모았다. 싫어할 이유가 없는 남편. 불같은 패기는 없으나 따스한 봄날의 흙과도 같이 포근한 남편. 그 남편을 진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은 지금 그 남편이 손에 들고 있는 찻잔받침에 숨겨져 있었다.

"접시꽃 무늬가 그려져 있군."

토시카츠는 찻잔받침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이것도 칠이 자주 잘 되었어."

오다이는 또다시 소리 내어 울면서 남편 앞에 엎드렸다. 아마 토시카츠는 그것도 역시 어머니의 물건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 선량함도 견딜 수 없었지만, 그런 남편을 속이는 자신의 죄의식에 몸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그대의 탄식은 나도 이해할 수 있소."

토시카츠는 말했다.

"오토미 님...... 케요인 님만큼 모진 바람에 시달린 꽃도 아마 없을 거요. 너무 아름답게 태어난 것이 불행이었소...... 하지만 이제 와서 울어본들 소용없는 일이오. 하다못해 노후의 평안만이라도 나는 그대와 함께 빌겠소. , 밥상이 곧 올 거요. 가신들에게 눈물을 보여선 안 되오."

이미 사방은 완전히 캄캄해졌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는지 토운인의 노송나무에서 망루의 소나무 쪽으로 윙윙거리고 솔바람이 건너왔다. 토시카츠는 오다이가 울음을 그치자 안심한 듯 식사를 마치고 바깥채로 돌아갔다. 오다이는 그런 뒤 상 앞에 앉았다. 식사할 경황도 없었다. 케요인과 타케치요, 히로타다와 토시카츠가 끊기 어려운 애정의 굴레 속에서 업화의 수레를 굴리고 있었다. 일찌감치 자리를 펴게 하여 몸을 뉘였으나 잠들 수도 없었다. 축시가 지나 오다이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합장했다. 일체의 번뇌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절박한 괴로움이었다. 오다이는 모든 것을 잊고자 마음을 모아 관음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동녘 하늘이 불그스름해졌을 때 오다이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정원에서 들려오던 뜰을 쓰는 소리가 뚝 그치고 이어 똑똑 덧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냐?"

 

11. 벚꽃 목욕

 

1

마장에는 벚꽃이 만발해 있었다. 아니, 이미 떨어져버린 것도 있어 땅 위 절반은 꽃잎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히로타다는 그 꽃과 꽃 사이를 쉬지 않고 세 번이나 말을 달렸다.

오랫동안 매사냥도 나가지 않고 마장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탓으로 몹시 숨이 찼다. 온몸에 땀이 배어 끈적거렸으나 울적해진 감정을 푸는 길은 달리 없을 것 같았다.

"하지야, 어서 따라와!"

네 번째로 다시 해자 가장자리에서 만쇼 사 지붕을 바라보면서 말을 돌렸을 때, 이와마츠 하치야가 창을 어깨에 맨 채 돌에 부딪쳐 비틀거리며 말 앞으로 왔다.

히로타다가 자랑하는 흰색 바탕에 잿빛 반점이 있는 말이 깜짝 놀라 앞발을 쳐들고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히로타다의 눈앞에 만발한 꽃의 물결이 핑그르르 돌았다.

땅 위의 꽃잎이 산산이 흩어지고 히로타다의 몸은 엉덩방아를 찧은 하치야와 땅바닥에 나란히 놓였다.

"훌륭하신 낙마입니다."

"고얀 놈."

들고 있던 채찍이 하치야의 어깨에서 철썩 울렸다. 원망스러운 듯한 하치야의 외눈이 번쩍하고 히로타다를 응시했다.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히로타다는 얼른 일어나 옷에 묻은 풀잎을 털었다.

"하치야!"

"."

"너는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지?"

"어찌...... 그런 당치도 않은 말씀을."

"나에게 오하루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어."

"절대로 아닙니다. 오하루와 저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오늘은 새로운 마님께서 출가해오시는 경사스러운 날. 다치시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이때 다시 한번 철썩하고 채찍이 머리 위에서 울었다. 하치야의 외눈이 다시 껌뻑거렸다.

"뭐가 경사스럽다는 말이야. 듣기 싫다!"

", 다시는 아무 말도 않겠습니다."

"내가 원해서 맞는 아내가 아니다. 너도 오하루도 그것을 몰라.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원망하고 있어."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원망 같은 것은 추호도......"

"닥쳐!"

"."

"나는 오하루를 너한테서 빼앗았어. 빼앗았으면 좀 더 사랑해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너의 그 외눈이 말하고 있다."

히로타다는 이미 땅에 꿇어앉은 하치야를 보고 있지 않았다. 채찍을 두 손으로 휘면서 자기감정을 이기지 못해 신경질적으로 꽃 아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말은 히로타다를 떨어뜨리고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뒤따르던 하인은 아직 마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와마츠 하치야는 벌떡 일어나 말고삐를 집어들었다.

"한 바퀴 더 도시겠습니까?"

히로타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깨닫고 보니 눈에 가득 눈물을 담고 천천히 주위를 거닐고 있었다.

요즘에 와서 겨우 기분이 풀려 이만하면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때 다시 기분을 상하게 하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것은 카리야로 돌아간 오다이가 오다 쪽에 가담해 있는 집과 재혼하리라는 소문이었다. 상대는 이구이의 히사마츠 야쿠로 토시카츠. 그 소문을 로죠 스가가 히로타다에게 알렸을 때 히로타다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2

"하하하하, 오다이가 히사마츠 따위의 아내가 된단 말인가. 웃기는 일이야, 하하하하."

그 웃음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히로타다가 손에 들었던 찻잔을 정원의 돌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무도 오다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물론 히로타다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더욱 기분이 나빠져서 따로 방이 주어진 오하루한테도 가지 않았다.

노신들은 스가를 꾸짖었다. 그 때문에 토다 단죠의 딸과의 혼담이 더욱 빨리 진행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이 혼사날이라 하치야도 안심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때 낙마하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성주님."

하치야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한 바퀴만 더 달리지 않으시겠습니까?"

히로타다는 걸음을 멈추고 하치야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치야!"

"."

"너는 사람을 믿을 수 있느냐?"

", 사람과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세상, 믿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으음, 인생은 전광석화, 목숨은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믿지 않으면 안 되겠지."

"한 바퀴만 더 달리시면?"

"하치야."

"."

"나무를 흔들어 벚꽃을 떨어뜨려라."

"?"

"벚나무를 말에 매고 내가 나무를 흔들 테니 너는 그 꽃잎을 주워 모아라. 그리고 옷을 벗어 그 안에 넣어라."

"옷을 벗어서......"

"그래, 난 양보할 수 없다, 벗어!"

"."

하치야가 어리둥절하여 옷을 벗는 동안 히로타다는 고삐를 한데 모아 말을 어린 벚나무 줄기에 매었다.

"됐느냐, 하치야?"

"."

하치야의 우람한 오른쪽 팔에서 가슴에 걸쳐 새겨진 칼자국을 본 히로타다다.

"아주 멋지군."

채찍을 높이 쳐들어 철썩 후려진 것은 말이 아니라 하치야였다.

"하지야 즐겁지?"

"."

두 번째부터는 세찬 채찍질소리가 말의 목에서 울렸다. 말은 깜짝 놀라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때마다 꽃잎이 벌거벗은 하치야를 가만히 감쌌다.

"와하하하하, 말이 날뛰면 꽃이 진다는 것은 정말이었어. , 꽃을 모아라, 꽃을 모으란 말이다. 와하하하하."

나중에는 말만을 때리는 것이 아니었다. 춤추는 듯한 동작으로 닥치는 대로 나뭇가지를 후려쳤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이런 기괴한 짓을 하는 것일까? 어쨌든 하치야는 이렇게 함으로써 성주의 기분이 풀린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경사스러운 날이야. 경사스러운......"

하치야는 아직도 쌀쌀한 3월의 바람을 맨 몸으로 받으면서 외눈을 바쁘게 굴려 자기 옷에 꽃잎을 주워담았다.

잠시 동안 사람도 말도 꽃 속에서 춤을 추었다.

 

3

격한 행동 때문에 히로타다의 얼굴은 타는 듯한 분홍빛에서 창백하게 변했다. 그런가 하면 이마에서는 줄줄 땀이 흐르고, 꽃잎이 하나 둘 달라붙기 시작했다.

무슨 일에나 필로가 빨리 오는 것이 요즘의 히로타다였다.

"와하하하."

웃음소리가 심한 기침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이제 됐다."

히로타다는 옷 속의 꽃잎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대라, 그만 돌아가자."

"."

하치야는 창을 메고, 꽃을 싼 옷을 옆구리에 끼고는 말고삐를 풀어 가지고 왔다. 말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아 눈에 인광을 번뜩이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히로타다는 말 목을 툭툭 치고 훌쩍 올라탔다.

"하치야, 따라와."

이번에는 아까처럼 무모하게 달리지는 않았다. 강을 따라 스고 성벽으로 들어선 뒤 사카타니 문까지 가는 동안 가끔 말 위에서 하치야를 내려다 보았다.

오늘은 큰 대문에서 이 근처까지 말끔히 쓸려 있었다. 출가해오는 마키히메를 맞이할 준비였다.

본성에 이르렀을 때 근시가 눈이 휘둥그래져 두 사람 곁으로 달려왔다. 분명 발가벗은 하치야를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히로타다는 묵묵히 말에서 내려 고삐를 측근 무사에게 넘겨주고 큰 현관으로 갔다.

"하치야, 들어오너라."

숨을 몰아쉬며 이와마츠 하치야도 성주 뒤를 따랐다.

성안에서 벌거숭이로 다닌다. 이것만도 괴이한 일이었다. 그런데 히로타다는 바깥채 거실에는 들르지도 않았다. 주방 옆 큰 복도를 가로질러 곧장 내전으로 향했다.

하치야가 잠시 머뭇거렸을 때였다.

"들어와."

다시 턱으로 명령했다.

지난번 본성으로 옮겨와 왕고모의 손에서 자라고 있는 타케치요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취했다가 그곳도 지나쳐갔다. 대관절 어디까지 벌거숭이 하치야를 데리고 갈 것인가.

", 성주님......."

이제부터 주위에는 여자들뿐이었다. 하치야는 다시 히로타다를 불렀다.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따라와!"

전에 오다이의 거실이었던 방 앞을 지나 가운데 정원을 오른쪽으로 꺾었을 때, 어지간한 하치야도 소리를 질렀다.

"!"

지금도 오하루 아씨라 불리는 자기 사촌 여동생 오하루의 방으로 갈 작정인 듯했다. 그곳에서 다시 전처럼 심술궂게 놀림당할 생각을 하니 숫된 하치야로서는 죽기보다 괴로웠다.

문 앞에서 히로타다는 또 하치야를 흘끗 돌아다보았다. 하치야는 체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만은 성주가 화를 내게 해서는 안 되었다.

꽃을 싼 옷을 들고 입구에 불쑥 얼굴을 내밀었을 때 안에서는 오하루와 시녀가 깜짝 놀라 히로타다를 맞아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오하루, 바구니를 가져와."

히로타다가 말했다.

"거기에 벚꽃을 담는 거야. 하치야가 추울 테니 빨리 해라."

오하루는 하치야를 보고 애처로울 정도로 쭈삣거렸다.

 

4

히로타다는 하치야가 걱정했던 것만큼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각오하고 있던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꽃을 주고 옷을 입도록."

오하루가 바구니를 가져왔을 때는 문득 밝은 미소를 띠며 하치야를 보았다.

"참 재미있었지, 하치야?"

". 그런데 이 꽃을 무엇에 쓰시렵니까?"

"이것 말이냐, 이것으로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내 마음을 씻을 생각이다."

"성주님의 마음을......"

"좋아, 이제 됐어. 옷을 입고 나가거라."

하치야는 그제야 안도하고 옆방으로 가서 옷을 입고 물러나왔다.

"성주님, 축하 드립니다."

하치야가 물러간 뒤 오하루는 조심스레 히로타다에게 오늘의 축하 인사를 했다.

", 축하......? 거짓말 마라."

"?"

"그대마저도 누구한테 배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아니, 꾸짖는 것은 아니니 겁먹을 건 없어. 나도 오늘만은 어린아이로 돌아가 마음을 바르게 갖고 싶어."

그리고는 지그시 오하루를 바라보았다.

"역시 닮았어......"

오하루도 이젠 그 뜻을 알고 있었다. 오하루는 오하루로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오다이의 그림자로서 성주 가까이 있게 되었을 뿐이다.

"히사마츠 야쿠로 따위의 아내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대는 모르는 일이야. 꽃이나 들고 오도록 해."

"이 꽃을...... 어디에 쓰시려는지요?"

"욕탕이야. 목욕물은 받아 놓았겠지?"

"."

"지금 들어갈 테니 가지고 와."

"."

"욕탕 안에 그 꽃을 잔뜩 띄우도록."

오하루는 고개를 갸웃하고 히로타다의 뒤를 따라갔다.

오늘은 경사스러운 혼인날. 마장에서 마음껏 달린 뒤 목욕을 하고 머리를 손질한다. 여기까지는 아무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이 꽃을 욕탕에 띄우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지금의 오하루에게는 욕실에 가는 것도 괴로운 일의 하나였다.

전에 친구였던 하녀들이 어떤 눈으로 자기를 볼 것인지 생각만해도 몸이 움츠러 들었다.

"때를 밀러 들어갔다가 성주님을 홀리다니. 여자의 기량은 수단에 달렸어."

이런 소리를 첩으로 인정받기 전에 듣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던 일까지 있었다.

"벚꽃이란 한꺼번에 피고 한꺼번에 지는 깨끗한 꽃이야."

"."

"두 남편을 맞을 정도로 미련스러운 꽃은 아니야."

"."

"사람의 목숨은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은거. , 그대도 옷을 벗어라."

"? 하지만 그것은......"

깨닫고 보니 욕실 문 앞에 옛 동료가 두 손을 짚고 엎드려 있었다. 하지만 히로타다는 그쪽은 보지도 않았다.

"그대와 둘이 벚꽃을 띄운 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거야. 마음을 씻고 이 히로타다가 무사도를 꽃과 겨루어보겠다. , 들어오너라."

 

5

오하루는 두려움과 수줍음 때문에 엎드려 있는 하녀에게 물러가라고 말할 분별조차 없었다.

히로타다는 갑자기 옷을 훌훌 벗었다. 하녀가 얼른 받아 들고 곧 오하루의 뒤로 돌아갔다.

"아아......"

오하루는 비명을 질렀다. 수줍음보다 역시 두려움이 컸다.

"빨리 하라."

샅 가리개 하나만 걸친 히로타다는 재빨리 오하루의 손에서 꽃이 든 바구니를 빼앗아 들고 욕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안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 속에서 히로타다의 몸은 그 김보다도 더 희게 보였다. 좁은 욕실 한쪽 구석에 있는 욕탕 쪽으로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도깨비라도 보는 것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당시 욕실의 대부분에는 욕탕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욕탕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히로타다의 아버지 키요야스의 유물이었다.

전쟁터에서는 김이 나는 뜨거운 물로 목욕할 수 없다. 끓인 물을 그대로 통에 붓고, 때로는 가까이에서 활시위소리를 들으면서 목만 내 놓고 들어앉아 호쾌하게 웃어대던 지로사부로 키요야스.

"극락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 하하하하."

그는 자기 집 욕실에까지 그 취미를 들여놓았다.

히로타다는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간 적은 없으나 항상 물을 채워두게 했다. 오늘은 그 욕탕에 꽃을 뿌리고 몸을 날리듯이 탕 안으로 뛰어 들었다.

가득 찼던 탕 속의 물이 꽃잎과 함께 쏴아 하고 밖으로 넘쳤다.

"와하하하하......"

정상을 벗어난 히로타다의 웃음소리가 좁은 욕실에 메아리치고, 꽃향기가 김에 섞여 밖으로 풍겨나왔다.

"어서 오지 못하겠어? 꽃이야, . 사방에 꽃이 그득한데 무엇을 하고 있는 게야!"

"....... ."

오하루는 비틀거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고, 가슴을 가리고 몸을 구부리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문을 닫자 안은 어두컴컴했다. 김이 서린 사방등위에서 공기통으로 스며드는 빛이 천장만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얼마 동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이윽고 사방등 근처에서부터 훤하게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흩어진 꽃잎이 몸을 구부린 오하루의 발 밑에 자개처럼 깔려 있고, 탕 속은 아직도 하얀 꽃잎투성이였다.

그 하얀 꽃 속에서 히로타다의 머리만이 떠올라 있고, 그의 두 눈이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오하루는 왠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마음속에 두려움을 품고 있던 탓인지, 히로타다의 머리가 어떤 그림에서 본 효수당한 사람의 머리처럼 보였던 것이다.

오하루는 얼른 그 망상을 털어버렸다. 경사스러운 날에 이런 불길한 것을 연상하는 자신의 방자함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이.

"오하루......"

"...... ."

"거기서 일어서 보아라."

"."

"일어서라고 하지 않았느냐."

"...... ."

오하루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억제하고 조심조심 문 앞에서 일어섰다.

 

6

오하루는 지금까지 여자로서는 사랑받는 것이 행복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계기에 뜻하지 않은 사람에게 사랑받게 된 자신을 선택된 행운아라며 황홀하게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발끝으로 서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두려움과 불안만을 가져다주었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볼 여유도 없었으나, 그 이유 가운데 한 가지만은 머뭇머뭇 문 앞에서 알몸을 드러낸 순간 깨닫게 되었다. 다름이 아니었다. 상대의 의사에 따라 조종당할 뿐 자신의 의사는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는 슬픈 자신의 입장 때문이었다.

오하루가 일어서자 히로타다는 다시 한참 동안 오하루의 나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며 바라보고 있을까. 비록 그것이 사랑을 동반한 응시라 해도 오하루로서는 채찍으로 매를 맞는 것과 다름없는 고통이었다.

갑자기 히로타다는 꽃향기에 숨이 막혔다. 더운 물에 잠긴 꽃잎이 지은 향기를 풍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하루!"

심한 기침이 멎자, 그 기침으로 화가 난 듯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웃어봐! 왜 울상을 짓는 거야? 웃으라고 했잖아!"

히로타다는 다시 눈을 부릅뜨고 욕탕 속의 꽃을 휘저었다.

오하루는 웃었다. 아니, 웃을 작정이었다. 그녀는 얼마나 굳어지고 일그러진 얼굴이 될 것인가를 알면서도 웃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히로타다가 눈길을 돌렸다.

오하루는 주위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길을 돌린 뒤의 히로타다가 어떤 형태로 신경질을 폭발시킬 것인가를 생각하니 자신의 슬픔과 애처로움에 눈물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오하루는 와앙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죽일 것이다. 틀림없이 죽일 것이다......'

히로타다는 얼굴을 돌린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하루."

부르는 히로타다의 목소리는 작았다.

"...... ."

오하루가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꽃잎이 온몸에 달라붙은 히로타다는 탕 속에 서 있었다.

"등을 밀어줘, 이대로 욕탕 속에서."

"."

오하루는 이끌리듯 다가가서 대야에 물을 펐다.

"오하루, 나를 두려워하고 있군."

욕탕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히로타다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도 두려운가?"

"...... 아니, 아닙니다."

"내가 왜 이런 식으로 목욕을 하는지, 그대는 모를 거야."

"."

"이것은 내가 살아서 하는 마지막 목욕이야."

오하루는 다시 흥분하게 해서는 안 된다 싶어 잠자코 있었다.

"나는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의사대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었어. 오늘부터는 다시 태어나려고 해. 그러니 아버님이 즐겨 쓰시던 전쟁터용 욕탕에서 갓난아이의 목욕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아."

"."

"그 갓난아이의 목욕을 그대의 손을 빌려서 했으면 싶어 웃으라고 했어. 그랬더니 그대는 울음을 터뜨렸어."

말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어깨 너머로 살짝 들여다보니, 이번에는 히로타다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7

"성주님, 용서해주십시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 제가 무지하여 성주님의 뜻도 헤아리지 못하고......"

오하루는 갑자기 히로타다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다시 쓰다듬듯 그의 여윈 어깨부터 씻기 시작했다.

"성주님 같은 어른에게는 깊은 슬픔 같은 것은 없으시리라......"

"그래?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한다고만 생각했나?"

"."

두 사람 사이에는 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하루는 어린아이를 다루듯이 오른팔에서 목덜미, 목덜미에서 왼팔로 씻어 내려갔다. 히로타다는 그녀가 하는 대로 맡겨두고 있었다.

"성주님, 밖으로 나오시지요, 다리를......"

"으음."

히로타다는 순순히 욕탕에서 나와 다리를 내밀었다. 그 다리를 받쳐 들 듯이 하고 씻는 동안 오하루는 점점 더 히로타다가 가엾게 느껴졌다.

'예전 마님의 대용품이라도 좋다. 이 외로운 성주님을 위안해드려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오늘 시집을 오는 마키히메가 걱정스러웠다. 적의도 아니고 질투도 아니고, 역시 그것은 두려움일 것이었다.

'성주님은 두 번 다시 내 곁에 오시지 않는다.'

"오하루."

히로타다가 말했다.

"나는, 평생에 단 한 번, 인간으로서의 의지를 관철시켜보겠어."

"그러시면?"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돼. 새로 오는 아내는 내 곁에 오지 못하게 하겠어."

"아니...... 어떻게 그런......"

"꼭 그렇게 할 거야.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이 성을 떠나 재혼하는 오다이에 대한 오기 때문은 아니야."

오하루는 깜짝 놀라 숨이 막혔다. 히로타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오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이미 오기를 부리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고 오하루는 생각했다.

"이것은 주위 사정의 변화에 마음까지도 흔들리는 나약한 인간에 대한 반항이야. 누가 어떻게 다른 데로 마음을 바꾸건 이 히로타다는 움직이지 않겠어."

여기까지 말하고는 갑자기 오하루의 어깨에 손을 뻗쳤다.

"몸이 차군."

히로타다는 말했다.

오하루는 깜짝 놀라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어깨에 얹힌 히로타다의 손은 유난히도 뜨겁고, 자기를 내려다보는 눈에는 빛이 깃들여 있었다. 오하루는 처음 히로타다에게 사랑을 받은 날과 같은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꼈다.

오다이의 그림자. 오하루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 그림자를 딛고 서서 새로운 마님과 겨루게 될 것이 두려웠다.

"성주님."

"오하루...... 이젠 겁낼 것 없어. 나는 그대를 멀리하지는 않겠어. 그대는 나를 무서워하고 있지?"

"...... ."

이제 완전히 욕실에 익숙해진 눈에 그 내부가 지나치게 밝을 만큼 똑똑히 보였다.

바닥에는 꽃.

주위에는 가득해 숨 막힐 듯한 향기.

오하루는 비로소 히로타다의 얄팍한 가슴에 얼굴을 꼭 밀어붙였다.

 

 

12. 봄의 천둥소리

 

1

사카이 우타노스케의 집 앞에는 아낙네들로 붐비고 있었다. 타와라의 토다 단죠자에몬 야스미츠의 딸 마키히메의 행렬이 방금 우타노스케의 집에 도착했다.

도중의 적의 습격을 받았던 오다이의 혼인 때와는 달리 행렬은 어디까지나 순조로왔다.

가마는 하녀의 것을 합쳐서 네 채, 그것을 말 탄 무사 일곱 명이 호위하고 있었다. 그다지 호화롭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호족답게 함, 주방 상자, 장궤, 병풍 상자, 호카이 등을 갖추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마꾼과 일꾼들이 모두 짓토쿠를 입고 하얀 띠를 매고 온 것이다.

"이것이 쿄토식이라는군."

"타와라 성주는 슨푸 성주를 본떠서 쿄토식으로 하신 모양이야."

"그러나저러나 새 마님은 어떤 분이실까?"

"먼저 마님이 대단한 미인이셨으니 그분만은 못하시겠지."

"성주님은 아직껏 먼저 마님을 못 잊으신다니 여간 걱정이지 않아."

혼인 행렬을 총지휘해온 것은 마키히메의 오빠 노부미츠. 이번에도 신부를 기다렸다가 시중드는 사람은 우타노스케의 아내였다.

가마가 툇마루에 놓이고 우타노스케의 아내가 가마 문을 열었다. 사람들의 눈빛은 한결같이 빛났다.

먼저 희고 가냘픈 손이 나타났다. 우타노스케의 아내는 그 손을 받들 듯이 하고 한 무릎을 꿇었다.

겉옷은 마름모꼴 무늬의 흰 비단옷, 고의는 질이 좋기로 유명한 카가의 비단, 속옷은 홍매화 무늬, 사뿐히 일어나자 주위가 갑자기 환해질 만큼 늘씬하게 키가 컸다.

"대단한 미인이신데."

누군가가 말했다.

"하지만 좀 여위신 것 같아."

"그건 먼저 마님과 비교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야."

"정말, 누가 더 아름답다고 할 수가 없어. 보는 눈에 따라 다르니까."

마키히메는 그 소리가 귀에 들어왔는지 흘끗 눈길을 보내왔다. 그 눈은 아주 부드러운 인품이 온화하리라고 생각되었다. 재원이라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우타노스케 부인은 전에 오다이를 인도했을 때와 같은 순서로 곧장 마키히메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잠시 쉰 뒤 본성으로 들어가 잔치에 참석하게 될 것이다.

시녀들이 차례차례 가마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간 뒤, 말을 끌고 나가는 자, 가마를 치우는 자들이 한바탕 수선을 떨었다.

우타노스케는 마키히메의 오빠 노부미츠를 별실로 안내하여 양가가 오래도록 번창하기를 빈다는 덕담을 나누었다.

"양가의 앞날을 축하하듯 날씨마저 화창하니 다행입니다."

", 앞으로도 잘 부탁 드립니다."

벚꽃 차가 준비되어 두 사람 앞에 놓이고, 주객은 차를 마시고는 잔을 옆에 놓았다.

이때 하인 하나가 우타노스케 앞에 나타나 무언가 소곤소곤 귀엣말을 했다.

", 성주님의 명령으로 이와마츠 하치야가......?"

우타노스케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노부미츠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방을 나갔다.

"하필 이럴 때 성주님께서...... 무슨 일일까?"

이미 모든 절차는 협의가 끝났을 텐데.

 

2

아직 형식적이고 번거로운 예법이 없던 시대였다 우타노스케는 이와마츠 하치야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성주님의 명령으로 왔다고......?"

성큼성큼 상좌에 가 앉으며 물었다.

"말해보게, 무슨 일인지."

하치야는 외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 자세를 바로 했다.

"마키히메 님의 행렬을 본성에 들여놓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 뭐라고!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성주님이 하셨다는 말인가?"

", 분명히 말씀 드리고 오라는 분부이십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우타노스케는 내뱉듯이.

"이번 혼사는 오카자키 가문 전체의 경사야. 본성으로 안내하지 않고 어디서 혼례식을 치른단 말인가."

", 본성은 타케치요 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마키히메 님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지금 와서 그런 당치도 않은 일을!"

"이것은 절대로 제 의견이 아닙니다. 성주님의 명령이십니다."

"으음."

우타노스케는 신음했다.

성주는 입버릇처럼 이 성은 아버지의 것이고 자식의 것이기는 하나 내 것은 아니라고 말했었다. 그 비뚤어진 생각이 이런 큰 일을 당해 비아냥거림으로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정신 나간 짓이야!'

"여기까지 온 행렬인데, 그렇다면 어디로 안내하라고 하셨는가?"

"둘째 성으로 안내하라 하셨습니다."

"둘째 성...... 하치야!"

"."

"그대는 정신이 나간 것 아닌가? 누가 뭐라고 해도 한 성의 내전 마님, 그분의 혼례식을 둘째 성에서 거행하다니, 그래 가지고야 어떻게 상대방에게 낯을 들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말씀 드립니다마는, 이것은 제 의견이 아닙니다."

우타노스케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서주는 이렇게 까지 빗나가는 것일까. 이 말을 들으면 마키히메의 오빠 노부미츠가 얼마나 굴욕을 느끼고, 또 얼마나 분노를 터뜨릴 것인지 생각해보았을까.

"알겠다."

우타노스케는 벌떡 일어났다.

"내가 직접 성주님께 말씀 드리겠다. 일부러 상대방을 노하게 하다니 이게 무슨 사돈관계이고 잔치란 말인가."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성주님의 뜻은 분명히 전해드렸으니까요."

"알았네. 자네는 내가 간 뒤에 돌아가도록 하게."

이렇게 내뱉고 우타노스케는 현관으로 달려갔다.

반각 남짓 휴식한 뒤 본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미 중신의 부인들은 마키히메의 옷을 갈아입히고 있었고, 하인들은 현관 옆 대기실에서 짚신도 벗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우타노스케는 달려가면서 다시 혀를 찼다.

바깥에는 아직도 밝은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둘째 성은 길도 깨끗하게 쓸려 있지 않았다. 우타노스케가 부리나케 현관에 들어섰을 때, 그 곳에는 이미 노신들의 지시로 촛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성주님! 성주님! 성주님은 어디 계시오?"

우타노스케는 부근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큰소리로 외치며 본성 안채에 있는 히로타다의 휴게실로 달려갔다.

"우타노스케입니다. 성주님 계십니까?"

방안은 조용하기만 할 뿐 한마디 대답도 없었다.

 

3

히로타다는 목욕을 하고 나와 불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거실에 앉아 시동에게 머리를 만지게 하고 있는 참이었다.

우타노스케는 그 앞에 대들 듯한 표정으로 가서 앉았다.

"성주님!"

히로타다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우타노스케요?"

틀림없이 여느 때처럼 흥분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왔는데, 뜻밖에 목소리도 태도도 조용했다.

"하치야에게 명한 말, 전해들었소?"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이제 와서 그런 분부를 내리실 수 있습니까?"

"내 생각이 좀 늦었소. 반 각 정도 지연되어도 상관없으니 둘째 성에다 준비하도록 하시오."

"성주님!"

우타노스케는 무릎 걸음으로 다가갔다.

"마키히메 님은 소실이 아닙니다."

"......"

"어째서 본성에 들이지 않으시려는지 저희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히로타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과 다름없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우타노스케는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다.

"성주님! 어째서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까? 시간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 성에다 준비하라고 하지 않았소."

"어찌하여 둘째 성에서...... 이것도 저희들을 비꼬는 것입니까? 물론 저희들은 타케치요 님이 둘째 성에 계시는 것이 위험하므로 본성에 옮기시도록 청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모두 가문을 위한 일입니다. 저 혼자의 생각으로만 여기신다면 난처한 입장은 물론 오늘 일이 낭패로 돌아갑니다."

"우타노스케, 그대는 나에게 명령하는 거요? 그대가 언제부터 성주가 됐소?"

히로타다는 그제야 눈을 크게 떴다.

"오늘의 일은 내게 생각이 있어 정한 일이니 준비한 것들을 속히 둘째 성으로 옮기도록 하시오. 그대가 지시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직접 할까요?"

우타노스케는 히로타다에게 노려보는 시선을 못박은 채 입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언제부터 성주가 되었느냐는 물음에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때였다. 역시 하치야의 전갈로 알았는지 이시카와 아키와 혼다 헤이하치가 큰소리로 부르면서 들어왔다.

"성주님! 성주님은 여기 계십니까?"

히로타다의 눈이 번쩍 빛났다.

"성주님, 혼례식을 둘째 성에서 거행하신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노려보듯이 하고 앉아 있는 우타노스케의 모습을 보자 이시카와 아키는 무섭게 히로타다에게 대들었다.

"시끄럽소!"

"."

"내 명령을 듣지 못하겠소? 대답하시오."

"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은 나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오. 가령......"

말을 시작하다 말고 히로타다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내가 과연 마키히메를 사랑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대들로서는 알 수 없을 것이오. 만일에 뜻이 통하지 않아 그 때문에 마키히메가 한을 품게 된다면, 같은 성안에 타케치요를 놓아둘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굳이 마키히메를 본성에 들여놓겠다면 타케치요를 둘째 성으로옮긴 후에 하시오."

평소에 없는 조용한 목소리로 설득하자 노신 세 사람은 그제야 비로소 가만히 얼굴을 마주 보았다.

 

4

"내가 일부러 일을 복잡하게 꾸미려는 것은 아니오. 상대방에게는 본성은 타케치요의 거

처라고 하면 그만이오. 내가 늦게 깨달아서 이런 일이 생겼소. 그러나 준비된 것을 옮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겠소. 이래도 그대들은 못마땅하다는 말이오?"

히로타다의 반문에 세 사람은 또다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았다. 그러나 말은 논리정연했다. 곰곰 생각해보면, 히로타다가 한 말의 이면에는 마키히메와 친밀해질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텐데도, 때가 때이니만큼 당황하는 마음만이 앞섰다.

"아직도 모르겠소? 타케치요를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과 접근시켜 놓고도 그대들은 불안하지 않다는 말이오?"

이런 질문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서로 재촉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이 나가자, 히로타다는 안도한 듯 크게 어깨를 흔들었다.

"이제 됐어."

불쑥 말하며 시동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성안이 떠들썩해졌다. 상대방 행렬이 성안에 들어온 뒤, 예정했던 식장만이 아니라 내실의 거처까지 변경되었으므로 나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사카타니에서 외곽 정문에 이르는 길을 깨끗이 하기 시작하는 자, 본성에서 부랴부랴 주방 도구들을 옮기는 자, 촛대를 나르는 자, 병풍을 메고 가는 자 등 흡사 불난 자리 같았다.

본성은 하치만 성채라 불리는데, 히로타다의 아버지 키요야스가 현재 오다 씨의 손에 점령당한 안죠 성을 이리 옮겨다 지은 것이다.

돌담 높이는 평지에서 45, 그 입구인 누문에서 사카타니를 거쳐 둘째 성 바깥의 카부키몬까지의 거리는 2정하고 20간 남짓. 둘째 성의 돌담은 지상에서 불과 2간밖에 되지 않으므로 본성에서 둘째 성으로 가는 길은 고갯길이었다. 더구나 좌우가 구불구불하여 문의 수만도 대여섯은 지나야만 했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보고 우타노스케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본성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시각은 여덟 점 반이었으나, 이미 여덟 점을 지나려 하고 있었다.

이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당연히 본성에 들어갈 줄 알고 따라오던 행렬이 둘째 성으로 접어들었을 때 마키히메와 그 오빠 노부미츠가 품을 의혹이었다.

한쪽은 지상에서 45, 다른 쪽은 지상에서 2간 남짓. 누가 보아도 그 차이는 뚜렷하다.

만일 마키히메가 거센 기질의 여자여서 무슨 일로 본성에 들어가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하여 납득시킬 것인가. 그리고 노부미츠의 기질은 알지 못하나, 그의 아버지 단죠라면 분연히 자리를 걷어차고 돌아가겠다고 할 것임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었다. 히로타다의 말에는 역시 우타노스케의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었다.

아니, 우타노스케에게만이 아닐 터, 지금은 남의 마음을 믿을 수 없는 난세였다. 만일 마키히메와 성주의 마음이 맞지 않아, 그 불만이 타케치요에게 미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이것은 노신들 모두의 가슴에 와닿는 불안이었다.

'정말 큰일났구나......'

우타노스케는 우선 자기 방으로 돌아와 직접 자기 손으로 약탕의 약을 따랐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노부미츠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이때 부인이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내며 방에 들어왔다.

"마키히메 님의 옷은 다 갈아입혔습니다. 노부미츠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두를 것 없어요."

우타노스케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이질풀 달인 약을 쭉 들이켰다.

 

5

"전투의 진토가 아닌 이런 일에는 익숙지 못한 자들뿐이어서......"

우타노스케는 노부미츠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실수가 있을 지 몰라 다시 한 바퀴 돌아보고 왔습니다마는, 생각대로 일이 잘 진행되지 않는군요. 하하하하."

헛웃음을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노부미츠는 아직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듯.

"그렇겠지요. 이런 일은 원래 예정한 대로는 진척되지 않는 법이니까요."

의외로 느긋하게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냐는 반응이었다. 우타노스케는 안도했다.

"그렇습니다. 만약 비라도 내린다면 밤이 될지도 모르는 형편이라."

"아니, 밤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 걸요."

그 후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슨푸의 인물평을 주고받으면서, 뒷일을 부탁한 이시카와 아키의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키로부터 준비가 끝났다는 연락이 온 것은 일곱 점이 지나서였다. 대기하고 있던 짓토쿠 차림의 일꾼들을 독촉하여 우타노스케의 집에서 행렬이 나간 것은 주위가 장밋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저녁나절이었다.

이번에도 양쪽에 친척들이 줄지어 서서 배웅했다.

선두에는 우타노스케, 거의 그와 나란히 선 토다 노부미츠, 그 뒤로 우타노스케의 부인의 안내로 마키히메가 좌우에 선 세 명의 시녀로부터 호위를 받으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바닷바람과 육지의 바람이 엇바뀌는 시각인 듯, 바람이 잔 조용한 저녁놀 속에서 우수수 벚꽃이 떨어져 내렸다.

", 과연 훌륭하군요."

도리의 간수가 94, 대들보가 2간 반인 본성 공동 주택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노부미츠가 우타노스케에게 말했다.

우타노스케는 가슴이 철렁했다. 거기서 본성을 바라보고 있는 노부미츠의 눈이 무서웠다.

"저 성이 하치만 성임이 틀림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선대인 키요야스 님께서 안죠 성을 옮겨 모시고 명명하신 이름이라 들었습니다마는."

"."

"그때 손수 소나무를 한 그루 심으셨다고...... 바로 저것이군요."

흰 부채로 망루 너머로 보이는 사부로 소나무를 가리켰을 때 우타노스케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공동주택 문을 들어섰다. 그리고 방금 소나무를 가리킨 쪽과는 반대방향으로 우타노스케가 묵묵히 꺾어들었을 때 예상했던 대로 노부미츠는 고개를 갸웃하고 걸음을 멈추었

.

우타노스케는 겨드랑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쪽입니까?"

"이쪽입니다."

"그렇다면 저것은 하치만 성이 아니라......?"

우타노스케는 정중하게 절을 했다.

"하치만 성에는 현재 도련님이 계십니다."

"흐음."

노부미츠는 숨을 죽이고 흘끗 마키히메를 돌아보았다.

우타노스케도 온몸을 경직시키고 마키히메의 기색을 살폈다.

마키히메에게는 아직 주위의 경관을 돌아볼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약간 우수에 잠긴 갸름한 얼굴에서 한 발짝 한 발짝 아내의 길로 다가가는 무감동한 수심이 엿보일 뿐이었다.

노부미츠는 다시 한번 시선을 본성의 사부로 소나무에게 옮겼다가 우타노스케에게 나직히 말했다.

"그럼 안내를."

우타노스케는 전신에 흥건히 땀이 베었다.

 

6

마키히메는 오카자키 쪽에는 열여덟 살이라고 했으나, 실은 열아홉 살로 음양오행설에서 말하는 액년이었다. 결혼 적령기는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 사이. 그런데 왜 이렇게 혼기가 늦어졌을까. 그녀에게도 역시 가슴앓이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신랑인 성주는 해가 바뀌면 스무 살, 그런데도 벌써 세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마키히메는 은근히 자신의 만흔을 서글프게 생각했다.

두 아이는 소실 오히사의 아들.

한 아이는 정실 오다이의 적자.

적자가 있는 집에 출가한다는 것이 여자에게는 하나의 무거운 짐이었다.

소실 오히사에 대한 것은 타와라에까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정실 오다이의 이야기는 이것저것 마키히메의 귀에도 들어왔다. 출가할 때 목화씨를 가지고 가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이야기, 우유로 소를 만들어 성주를 기쁘게 했다는 이야기, 타케치요를 낳기 위해 약사여래불에 기도를 드린 이야기 등, 그 어느 것도 모두 오다이의 슬기로움과 성실함을 말해주는 내용뿐이었다. 게다가 오다이의 미모는 부근 일대에서 제일간다는 소문이었다.

'그런 분의 뒤를 이어 출가한다는 것은......'

마키히메는 혼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정색을 하며 사양했으나 아버지와 오빠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오다이와 겨룰 마음은 전혀 없었고, 여자로서 처음부터 자기가 뒤떨어진다고 체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체념한 모습으로 과연 성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 그것이 큰 걱정이었다. 오카자키 성주가 미남이라는 것 역시 부근 일대에 널리 소문이 나 있었다. 따라서 소실인 오히사에 대한 질투보다도 이혼을 당한 오다이에 대한 선망이 머릿속에 가득하여 자기가 지금 둘째 성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타와라는 원래 작은 성이었다. 그에 비해 이곳은 성의 외부구조는 훌륭했으나 내부는 의외로 소박했다. 이 역시 무로 이름을 떨친 가문 탓이라 믿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큰방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양가의 예물이 쌓이고, 주고받는 인사와 축사가 끝날 때까지 그저 마음을 졸이고 있었을 뿐이다.

'대관절 어느 분이 성주일까?"

혼례 의식이 쿄토식과 시골식이 섞여 있는 데다, 장소가 다르고 가풍이 다르기 때문에 어디서 성주가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예물 교환이 끝났다. 우타노스케 부인은 다시 신부에게 손을 내밀어 휴게실로 안내했다. 그곳 역시 세워놓은 병풍만이 훌륭했을 뿐 방의 구조는 타와라보다도 못한 것 같았다. 물론 오빠 일행과는 헤어졌고, 거기에는 우타노스케 부인과 자기가 데리고 온 세 명의 하녀들만 있었다.

"여기가 앞으로 아씨의 거실이 될 것 같습니다."

비로소 마키히메는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별로 불만스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검소한 것이 가풍이라면 출가해오는 사람 역시 가풍에 순응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때 하녀가 다시 귀띔을 했다.

"여기서 성주님과 대면하시는 것이 관습인 듯합니다."

"그래? 거울을 이리 주지 않겠니?"

마키히메는 가슴이 갑자기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7

마키히메가 막 거울을 치웠을 때 전갈이 왔다.

"지금 성주님께서 건너오십니다."

그 말에 이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마키히메는 혼기를 놓친 자신의 혈관이 피부 속에서 수줍게 설레고 있음을 느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자기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문 앞에 흰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그림자는 거의 망설임이 없었다.

"실례하오."

뒤에 칼을 든 부하 하나를 거느리고 조용히 말하며 마키히메 앞을 지나 상좌로 갔다. 마키히메는 두 손을 무릎 밑으로 약간 내리고 그를 맞았다.

"마키히메요?"

", 그렇습니다."

잠시 말이 끊겼다.

"먼길에 피로가 심하겠소."

"변함없이 영원토록 보살펴 주십시오."

"나도 잘 부탁하겠소."

히로타다는 이렇게 말하고 서슴없이 마키히메에게 눈길을 던졌다. 이미 그 어디에도 불쾌하다는 감정은 드러나 있지 않았다.

마키히메도 고개를 들어 자신의 일생을 맡길 상대를 바라보았다. 소문과 다름없이 단정한 용모였다. 시원스런 눈매와 단정한 입술을 보고는 다시 당황하며 눈길을 깔았다. 그것은 행복하다기보다 울고 싶은 감동과 함께 몸을 떨게 만드는 한순간이었다.

'이 사람이...... 이 잘생긴 남자가 오늘부터 내 남편이 되는 것일까......'

이때 멀리 북쪽의 시모이나 부근 산맥 너머에서 천둥소리가 무겁게 들려왔다.

"아아, 봄에 천둥이 치다니 보기 드문 일이네요."

우타노스케 부인이 말하자 히로타다는 잠시 천둥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표정이었다.

"정말 그렇군요. 봄에 천둥이라니 희한한 일이예요......"

마키히메도 하녀도 다 같이 맞장구를 쳤다.

멀리서 울리던 천둥소리가 급히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지, 묵직한 울림이 공간을 제압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이때 잔치 복장을 한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두 소녀가 차와 과자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하녀들이 받아 들어 히로타다와 마키히메 앞에 놓았다. 히로타다는 천둥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얼굴로 차를 마셨다.

"부슬부슬 비도 내리기 시작하는 것 같군."

",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사스럽다는 말이오?"

히로타다는 문득 우타노스케 부인을 돌아보고 말했다.

"나는 또 벼락이 우와나리를 하려고 온 줄 알았는데......"

이 말에 하녀들은 저도 모르게 옷소매를 입에 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와나리라는 것은 남편이 재혼했을 때 그 전처가 친척들과 함께 절굿공이나 밥주걱 또는 빗자루 같은 것을 들고 후처를 찾아가 때리는 풍습을 말한다.

'익살스러운 성주님.'

후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씁쓸했으나, 이 한마디로 마키히메의 마음은 한결 풀어졌다. 그녀 역시 소맷자락에 입을 대고 살포시 웃었다.

 

8

다 같이 웃음 터뜨리는 것과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세 번째 연락으로 신랑과 신부가 휴게실을 나설 무렵부터 천둥을 동반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비를 맞으면 만발한 벚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고 합니다."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모두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히로타다와 마키히메가 나란히 앉으니 신랑이 더욱 늠름해 보였다. 여기가 둘째 성만 아니었다면 노부미츠의 마음은 훨씬 더 즐거웠을 것이 틀림없다. 유서 깊은 본성 하치만을 아들에게 비워주겠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일족이 많은 오카자키 성의 일이므로 어떤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러려니 하고 노부미츠는 선의로 해석하고 잔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쏟아졌다. 가끔 번개도 섞여, 줄지어 세워놓은 촛불보다 더 밝게 창살을 비추고는 했다. 암나비와 수나비의 손잡이 장식이 달린 술주전자로 신부의 잔에 교대로 술을 따르고 있을 때, 어딘가 가까운 곳에 벼락이 떨어졌다. 순간 마키히메는 깜짝 놀라는 듯했으나 그래도 잔은 무사히 받았다.

"좀처럼 멎지 않는군요. 이 천둥이."

"이 근처 지상을 맑게 할 작정인지도 모르지요."

"새 출발이니까 말입니다."

"이제 양가는 만세, 이마가와 댁도 만만세가 될 것입니다."

마키히메는 잔을 내려놓고 연회석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를 떴다. 약간 입에 대었을 뿐인 언약을 의미하는 술에, 천둥소리는 야릇한 흥분을 더했다.

눈앞에 신랑인 히로타다의 늠름한 얼굴이 계속 떠오르고 그때마다 전신이 몽롱하게 달아올라, 소리를 지르면서 무언가를 움켜쥐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혔다.

'나는 기꺼이 성주를 모실 수 있을 것이다......'

그 생활이 오늘밤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을 하니 얼굴도 귓볼도 불처럼 달아올랐다.

"아씨."

옷을 갈아입는 것을 거들던 집에서 데려온 하녀 하나가 소리를 낮추었다.

"여기는 오카자키의 둘째 성입니다."

여느 때 같으면 예사로 들어넘길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러나 마키히메는 그런 말을 새겨들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첫날밤의 잠자리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성주님이 계시는 곳이면 그곳이 바로 본성...... 무언가 네가 잘못 들었을 테지."

"하지만......"

시녀는 뒤로 돌아가 때를 매면서 말했다.

"본성에 새로운 소실이 있는 것 같아요."

"알고 있어. 버릇이 없구나."

물론 그것이 오히사인 줄 알고 꾸짖은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는 하녀도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비는 해시 가까이 되어서야 멎었다.

그전부터 코와카니 노래니 하여 연회장은 떠들썩했고, 작은 북과 피리소리가 둘째 성 가득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연회가 끝난 것은 일곱 점이 지나서였다.

그날 밤 히로타다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마키히메의 잠자리에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것도 관습이려니 하고 마키히메는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몸을 지그시 억제했다.

 

13. 아득한 염원

 

1

"마님을 뵙겠다고 낯선 나그네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아시가루 요스케가 서신 한 통을 손에 들고 정원을 통해 안채로 들어왔다.

오다이는 바느질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그 서신을 받아들였다.

봉함 앞면에는 분명히 자기 이름이 씌어 있었고, 뒷면에는 쿠마무라, 타케노우치 나미타로라 되어 있었다.

쿠마무라 저택에서 소개장을 가지고...... 어째서 남편 토시카츠가 아니라, 자기 앞으로 보냈을까 하고 오다이는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사도노카미로 임명된 아구이의 히사마츠 야쿠로 토시카츠의 저택.

오다이가 재혼한 지도 벌써 8개월 남짓. 계절은 이미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저택은 어마어마한 성채와 같은 구조는 아니었다. 쿠마 저택보다 다소 규모가 작고 또 평지에 지은, 진지와도 같은 집이었다.

남편은 어제 나고야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가만히 봉함을 뜯어보니 그것은 오다이에게 남편 사도노카미, 곧 야쿠로 토시카츠에게 잘 말해서 가신 한 사람을 써줄 수 없겠느냐고 한 추천의 글이었다.

나미타로의 친척으로, 이름은 타케노우치 큐로쿠라고 했다. 토시카츠가 나고야나 후루와타리 성에 나가 부재중일 것으로 생각되어 마님께 부탁을 드린다고 씌어 있었다.

"어떤 사람인지 들게 하라."

전에는 겹겹으로 해자를 두른 성안 깊숙한 곳의 마님이었지만, 지금은 다이묘란 이름뿐 하찮은 일개 성주의 아낙에 지나지 않았다. 오다이가 바느질 감을 치우고 기다리고 있으려니 마구간 옆 감나무 밑에서 아시가루가 키가 큰 한 사나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 사나이를 바라보며, 무심코 생각하는 찰나였다.

'혹시 어딘가에서......'

오다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기억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쿠마 저택 밖에서 본 이후 한시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은 동복오빠, 토쿠로 노부치카가 틀림없었다.

오다이가 깜짝 놀라 말을 건네려 했을 때 노부치카는 아시가루 뒤에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오다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신호임이 분명했다.

"마님, 모시고 왔습니다."

선 채로 아시가루가 말했다. 노부치카는 툇마루 아래서 한쪽 무릎을 꿇고 절했다.

"쿠마 도령의 소개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타케노우치 큐로쿠라고 합니다."

"타케노우치 큐로쿠......"

오다이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 새기려는 듯이 되풀이했다.

"나미타로 님의 친척인가요?"

", 친척이기는 하지만, 아주 먼 일가입니다. 일가 중에서도 맨 끄트머리지요."

"알겠어요. 요스케, 잠시 나가 있어요."

아시가루는 아무렇게나 꾸벅 절을 하고 사라졌다.

"오빠......"

"!"

노부치카가 오다이의 말을 가로 막았다.

"큐로쿠란 잡니다. 가능하시면 이 댁 아시가루로 있게 해주십사 하고 찾아왔습니다."

오다이는 잠시 아무 말도 않고 몰라볼 정도로 변해버린 오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큐로쿠는 그런한 오다이의 놀람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머지않아 다시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합니다. 오카자키의 마츠다이라 히로타다 님은 타와라 부인을 맞이하신 뒤 갑자기 전의에 불타 가까운 시일 안에 안죠 성을 탈환하시겠다고 말을 모으며 창을 벼르고 있다 합니다."

단숨에 말하고 나서 큐로쿠는 미소도 띠지 않고 다시 한번 꾸벅 머리를 숙였다.

 

2

타와라 부인이란 오다이가 떠나온 후 오카자키 성의 히로타다에게 출가한 토다 가문의 마키히메를 마츠다이라 일족이 부르는 이름이었다. 타와라 부인에 대한 풍문은 오다이도 들어 조금은 알고 있었다. 아니, 마음속 어딘가에서 계속 관심을 쏟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히로타다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은데, 그 원인은 히로타다가 부인을 본성에 들이지 않은탓이라는 소문이었다. 오다이는 그러는 히로타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내 아내는 그대 한 사람뿐."

헤어질 때의 그 열띤 목소리가 안타깝게도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오다이는 이 집으로 출가해왔다.

'용서하십시오......'

히로타다의 환상이 떠오를 때마다 오다이는 이 말을 되풀이했다.

'언젠가...... 언젠가는 타케치요, 타케치요에게 도움될 때가 있으려니 해서요.'

이러한 오다이 앞에 하필이면 죽었다던 노부치카가 하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히로타다가 안죠 성 오다 노부히로에게 도전하리라는 소식을 알리고 있다.

오다이는 잠시 눈을 감고 타케노우치 큐로쿠라고 자신을 소개한 오빠의 심중을 헤아려보았다.

"그래서......"

얼마 후 눈을 뜨고 물었다.

"그 전쟁은 어느 쪽에 승산이 있을까요?"

오다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 이 큐로쿠의 판단으로느 십중팔구...... 마츠다이라 쪽은 승산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요?"

"비록 오다 노부히로 님의 성이라고는 해도 그 배후에는 떠오르는 태양 같은 아버님 노부히데 님이 계십니다. 또 마님의 오빠이신 미즈노 시모츠케노카미, 이 댁 주인이신 히사마츠 사도노카미, 히로세의 사쿠마 일족도 이미 노부히데 님 편이나 다름없고, 마츠다이라 일족 중에서도 노부사다 님은 전부터 오카자키의 적, 게다가 이번에는 미츠키의 쿠란도 노부타카 님의 향배도 의심스럽다는 소문입니다. 이쯤 되면 마츠다이라에게는 승산이 없으리라고......"

오다이는 다시 잠시 동안 오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오빠의 얼굴에, 오카자키 본성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뛰놀고 있을 자기 아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일족 중에 또다시 향배가 의심스러운 사람이 나타난 것은......"

", 히로타다 님의 평판이 그렇게 좋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심성은 착하신 분인데, 어째서 그럴까요?"

"그것은...... 이런 시대의 무장으로는 그 착한 심성이 도리어 나약해 지거나 고집을 부리게 하여...... 이번 출전 결정에도 오카자키 노신들은 모두 탐탁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십중팔구 승산이 없을 것이라는 전쟁, 그 전쟁을 감히 결행하겠다고 주장하는 히로타다의 고집 또한 슬프게도 오다이로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일족의 꼭두각시가 되고 싶지 않아."

입버릇처럼 이 말을 되풀이하던 히로타다였다. 그러한 남편의 격앙된 감정을 오다이는 자신의 사람을 기울여 한껏 감싸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사람도 없었다.

오다이는 오빠로부터 눈길을 돌려 맑게 갠 하늘을 올려보았다. 한결 높아진 하늘, 추녀에 드리워진 노송나무 그늘 사이로 흰 구름이 흘러갔다.

어딘가에서 때까치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대지에는 이미 가을 기운이 짙어지고 있었으나, 아직 농부들의 가을 걷이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 전쟁을 시작하면 많은 백성들의 원한을 사고 유랑민과 도적의 무리가 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다이에게 오카자키 성은 이미 손에 닿지 않는 하늘의 구름이었다.

"큐로쿠 님."

"그냥 큐로쿠라 부르십시오."

"아직 그럴 수는 없어요."

오다이는 이렇게 말하며 가만히 눈언저리로 옷소매를 가져갔다.

"전쟁을 중지시킬 수는 없을까요?"

"없습니다."

오빠의 대답은 단호했다.

"저는 예사 하인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집에서 일하겠다고 하는 이유는?"

"그것은......"

이번에는 오빠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 댁 대장의 말고삐를 잡고 어떤 전쟁이든 모시고 싶은, 다만 그것 뿐입니다."

"......"

"운이 좋으면 그것으로 공도 세울 수 있겠지요. 오카자키에 제일 먼저 입성하는 용사, 그런 게 이 하인의 꿈...... 이라고 웃어넘기지는 마십시오. 무가를 섬기는 하인으로서 그 밖에는 어떤 꿈도 가질 수 없는 시대입니다. 어떻습니까? 쿠마의 주인도 마님께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천거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오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 아시가루, 요스케라고 합니다. 요스케의 방으로 가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세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전에 미즈노 토쿠로 노부치카였던 그는 아주 익숙한 하인배 같은 태도로 공손히 오다이에게 절하고 물러갔다.

오다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집으로 오다이의 출가를 결정하게 한 것은 쿠마의 타케노우치 나미타로였다.

나미타로는 오다이에게, 오다 쪽 사람한테 출가하여, 만일의 경우 타케치요의 구명을 부탁할 수 있는 입장에 있을 것을 암시했다. 그 나미타로가 이번에는 오빠를 이 집에 두도록 부탁해왔다.

오다이는 그 깊은 내막까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나미타로가 오빠를 조종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빠가 나미타로를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다만 두 사람이 무언가를 통해 깊이 맺어져 있다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오다이는 다시 바느질감을 꺼냈다. 요즘에는 손을 움직이고 있는 편이 도리어 생각을 정리하기가 쉬웠다.

"오카자키에 맨 먼저 입성하는 용사......"

오빠는 그렇게 말했다. 만일의 경우 자기 손으로 타케치요를 사로잡아 그 공을 내세워 구명을 도모할 생각임이 틀림없었다.

이런한 음모 속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남편 야쿠로 토시카츠를 끌어들여도 가연 괜찮을까......?

갑자기 문 앞에서 인마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야쿠로 토시카츠가 나고야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반 각만 일렀더라도 오빠와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었을 것이다. 오다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바느질감을 치운 뒤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매만졌다.

현관에서 토시카츠의 함찬 목소리가 들렸다.

 

3

이 집에도 안채와 바깥채의 구별은 있었다. 오다이는 머리를 매만지고 나서 바깥채와는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둔 안채로 통하는 장지문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남편을 기다렸다.

바깥채에서는 이미 야쿠로 토시카츠가 가신을 불러 큰소리로 명하고 있었다.

"드디어 전쟁이야!"

평소의 점잖은 목소리에 비해 오늘은 매우 긴장미가 느껴졌다. 아마도 자세를 바로 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을 것이었다.

"지난 미노 공격 때 주군 단죠 노부히데 님이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난 것을 마츠다이라 쪽이 얕보고 안죠 성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가 있다."

토시카츠는 어색하게 껄껄 웃었다.

"이거야말로 우리로서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호. 오다 군의 질풍노도 기세를 모르는 자들이지. 언제 급한 연락이 올지 모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그런데 영지에서 차출할 장정들의 수는?"

", 농민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 힘을 합쳐 벼를 베어들이라고 하라. 만일의 경우 논의 벼가 짓밟히기라도 하면 일찍 베는 것보다 몇 갑절 더 손해를 보게 된다. 그리고 열다섯에서 서른 살까지의 남자들은 준비를 단단히 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라."

"열다섯 살에서 서른 살까지."

"그렇다. 이들이 출전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일손을 놓지 않도록. 한 해의 생명줄, 추수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라."

"알겠습니다."

이때 누가 차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차는 됐다. 안에서 마시겠다. , 짐 실을 말은 사십 필 정도 준비하도록."

그대로 기다리고 있는데 오다이가 앉아 있는 맞은편 장지문이 홱 열렸다.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오다이는 무릎에서 내린 두 손을 내밀어 남편의 칼을 옷소매로 싸안 듯이 받았다.

"부인,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소."

토시카츠는 아내에게 더없이 다정했다. 목소리부터가 장지문 너머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오다이의 코끝은 마른풀과 땀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오다이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활짝 개었어, 좋은 날씨로군."

거실에 들어선 토시카츠는 잠시 추녀 밖을 내다보고 나서 대범하게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오랜만의 풍작이라, 이대로 날씨가 좋으면 백성들이 얼마나 기뻐할지. 그런데 분수도 모르고."

토시카츠는 크게 혀를 찼다.

"바보 같은 사람이야!"

그것은 물론 추수도 기다리지 않고 전쟁을 걸어오는 오다이의 전남편 마츠다이라 히로타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다이는 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으로 칼걸이에 칼을 걸고 조용히 남편 앞으로 돌아갔다.

"부인."

"."

"드디어 당신의 원한을 갚을 때가 왔소. 분수를 모르는 오카자키가 안죠 성을 넘보고 군사를 일으킨다고 하오.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겠소."

오다이는 잠자코 고개를 수그렸다. 이혼당한 아내이기 때문에 오카자키에 원한을 품고 있다고 단순하게 단정하고 있는 남편이 가엾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4

"안죠는 원래 마츠다이라 가문의 조상이 쌓은 성, 집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오만, 그렇다고 지금 마츠다이라의 형편으로......"

토시카츠는 하녀가 가져온 물수건으로 천천히 목덜미와 이마의 땀을 닦았다.

"뺏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 이제 당신 마음도 후련해질 것이오. 오다 단죠 같은 분이 자기 맏아들에게 지키게 한 성을 쉽사리 내줄 리 없지. 오카자키의 운명도 끝장이오. 자업자득이지."

오다이는 그래도 얼굴빛만은 바꾸지 않았다. 하녀가 가져온 찻잔을 조용히 남편 앞에 놓았다.

"우선 차부터 드시지요."

"그래요, 맛이 아주 좋군! 도중에 목이 말라 몇 번이나 말을 내릴까...... 했지만 갈증 후의 감로수를 생각하며 달려왔소."

"그러시면 한잔 더."

"그럽시다. 맛이 정말 좋아!"

거푸 두 잔을 맛있게 마시고 나서 토시카츠는 더욱 온화한 눈길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전쟁이 벌어질 거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후루와타리에서 연락이 오는 즉시 출정해야 하오. 알겠소?"

"."

"각오는 되어 있겠지요?"

"저는 무사의 아내예요."

"하하하...... 내가 그만 실수를 했군. 미즈노 시모츠케노카미의 여동생인데. 이번에야말로 나는 당신의 원수를 갚을 작정이오."

"......"

"갑옷을 벗으면 평범한 지아비, 난들 좋아서 전쟁터에 나가겠소. 다만 이러한 난세를 사는 사나이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 그대도 이 점을 헤아려주시오."

오다이는 다시 남편의 땀냄새를 착잡한 심정으로 맡았다. 뛰어나게 용맹하다거나 남달리 활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토시카츠였다. 모든 것을 각오하고 시집온 이상 그 고지식함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채였다.

가장 괴로운 것은 잠자리에서의 꿈이었다. 토시카츠가 포옹해오면 오다이의 몸도 뜨거워졌다. 그러나 잠든 후 꾸는 꿈속의 남편은 언제나 히로타다였다.

'마음은 전남편, 몸은 지금의 남편......"

여자에게 재혼이란 그 얼마나 안타까운 비탄일까. 이런 꿈을 꾼 뒤에는 언제나 베개가 흠뻑 젖었다. 그런데도 토시카츠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대의 친정은 나에게 분에 넘치는 가문이오."

"과분한 말씀입니다."

"아니오. 나는 한 번도 마음속으로 그대를 소홀하게 생각한 적이 없소. 그런 까닭에 더욱......"

"."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가지 있소."

"말씀하시지오. 무슨 일인가요?"

"당신과 나 사이에 아직 아기가 생기지 않은 것...... 마음에 걸리는 일은 바로 그것이오."

오다이는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아직, 그렇지요?"

"...... ."

"내가 또 공연한 말을 했군. 걱정하지 마시오. 난 무운을 타고난 사나이. 쉽게 죽지 않아요. 나 없는 동안 집안 잘 돌보고 내 무공을 빌어 주시오."

"...... ."

 

5

오다이는 다시 자기 자신의 불성실함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 오다이는 아직 토시카츠를 위해 무운을 빈 일도, 자식에 대해 생각해본 일도 없었다.

오카자키 성에 있을 때는 타케치요를 점지해 주십사 하고 추운 겨울에 목욕재계하고 치성까지 드렸는데.

"나는 말이오, 그대를 위해서라도 공을 세우겠소. 카리야의 사위가 범용해서야 어디에 쓰겠소? 그런데......"

토시카츠는 흘끔 옆방을 살피듯 하고는 말했다.

"물이 아직 덜 끓었소? 나는 나고야에서 아침 식사를 안 하고 왔는데."

오다이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지금도 자기만을 생각하고 토시카츠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부터 자신이 미워졌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일단 결심한 것을 포기할 오다이는 아니었다.

상을 차려오게 하면서도 오다이는 타케노우치 큐로쿠라 자칭하고 나타난 자기 오빠를 어떻게 하면 토시카츠와 만나게 할 것인가 곰곰 생각했다.

밥상 역시 오카자키의 히로타다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간소하여, 된장절임을 한 마른 정어리 한 마리를 곁들였을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차린 상이라 국도 없었다.

밥은 물론 현미였는데, 토시카츠는 따뜻한 물에 말아 훌훌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음식 시중은 하녀의 몫이어서 결코 오다이에게는 손을 대지 않게 했다. 무장의 집안이었지만 부인을 대하는 품위는 높았다.

밥을 다 먹은 토시카츠가 야채절임 그릇을 부신 물을 공기에 옮겨 마시기 시작했다.

"쿠마 저택의 나미타로 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오다이는 빙 둘러 나미타로의 인물평을 통해 남편의 마음을 떠보고 일이 성사될 것인가의 여부를 짚어보려 했다.

", 쿠마무라의...... 그 사람 상당한 인물이오. 쿠마의 노부시들과도 줄이 닿고, 나니와에서 사카이 해적들까지 움직이고 있소. 물의 세력은 대수롭지 않지만......"

토시카츠는 말하다 말고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무릎을 탁쳤다.

하녀가 상을 물리러 들어왔다. 상을 내가는 하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엿듣는 자는 없겠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 보았다.

"."

오다이도 일어나 정원을 내다보았다.

"그 사람은 은밀하게 활동하는 오다의 군사요."

"?"

"단죠 님이 이따금 킷포시 님을 쿠마 저택으로 보내는 것도 그 때문인데. 앞으로 천하는 근왕의 것이라면서......"

"근왕이라 하시면?"

"그 사람은 쿄토의 쇼군 아시카가 일족은 이미 운이 다했다고 단언하고 있소. 이것은 난쵸와의 싸움, 호쿠쵸를 휘저어놓은 천벌, 그러므로 아시카가의 뒤를 이어 천하의 민심을 수습할 사람은 근왕, 즉 천황을 받들고 싸우는 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거요...... 알겠소?"

오다이는 갑자기 정색을 하는 남편의 태도에서, 자기 목적의 성공 여부를 캐내기 위해 진지한 눈빛으로 살그머니 남편으로 다가갔다.

"천황을 받들고 싸운다는 것은 어떤......?"

토시카츠는 장밋빛으로 물들어가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내 아내지만 정말 아름다워......'

 

6

토시카츠는 약간 자랑스럽기도 했다. 오다이의 얼굴이 이처럼 아름답게 빛난 것은 시집온 이후 처음이었다.

"헤이지가 망하면 갠지가 흥하고, 밤이 가면 아침이 오는 것이 천하의 이치. 지금은 천황에게 등을 돌린 아시카가 쇼군이 망하는 황혼. 다음에 일어날 자는 근왕의 아침이라 할 수 있지.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래서 노부히데 님은 천황께 헌금을 바치시고, 고맙게도 봉서까지 받았던 거요. 아니 그뿐만이 아니오. 아츠타 신사와 이세 대신궁에도 계속 막대한 봉납을 하고 있소. 그 다리를 놓은 인물이 바로 쿠마의 젊은 도령 나미타로요, 알겠소?"

오다이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째서 헌금이 쇼군을 망하게 하는 것일까?

"치성을 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신앙으로......?"

토시카츠는 빙긋이 웃었다.

"아니, 그 어느 쪽도 아니오. 이것을 정치라 하오. 아니, 양쪽 모두이니 정치라고나 할까."

"......"

"말하자면 하나의 깃발이라 할 수 있소. 이 난세는 신과 천황을 무시한 벌로서 온 것이오. , 나를 따르라! 나를 따라 신과 천황을 받들면, 난세는 태평세상이 된다! 이렇게 부르짖으며 싸워야만 비로소 안심이 모여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거요. 그리고 또......"

토시카츠는 오다이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는 것을 보고 자세를 바로 하였다.

"당신은 화총이라고 들어본 적 있소?"

"아니, 없습니다."

"그럴 거요. 나도 화승총에 대한 말을 듣고 정말 간담이 다 서늘해졌소."

"그것은...... 음식 이름인가요?"

"아니, 무기요. 무기! 공중을 나는 가공할 무기요. 화살 같은 것은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먼 거리에서 탕 하고 울리면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사람이 푹 쓰러져 죽는 거요. 아니, 말해도 믿어지지 않을 거요. 소리가 사람을 죽이다니...... 참으로 무서운 무기가 등장했소."

"......?"

"그런 무기를 말이오. 나미타로가 사카이 부근에서 구한 모양인데. 그 무기와 그것을 뛰어나게 다루는 명수들을 노부히데 님에게 바쳤어요. 거짓말이 아니오. 킷포시 님도 이미 극비리에 그 사용법을 배우고 있소. 그 무기와 근왕으로 모든 백성의 고통을 구하라고 진심 어린 기원을 담아 선물했어요."

오다이는 그 내용이 너무나 황당하여 얼른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남편 토시카츠가 나미타로를 신임하는 이상으로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쿠마의 젊은 도령은 결코 예사 사람이 아니군요."

"대단한 사람이지."

"실은 그 나미타로 님이 부하를 한 사람 추천해왔어요. 이 추천장을......"

오다이는 내심 안도하면서 서신을 내놓았다.

토시카츠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것을 펼쳐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다.

"이 큐로쿠라는 자는?"

"이시가루 방에서 기다리게 했어요."

"흐음."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하는 토시카츠의 얼굴에는 문득 의아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튼 만나보지."

 

7

큐로쿠가 다시 뜰 앞으로 불려나올 때까지 토시카츠는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니?"

큐로쿠가 고개를 들었을 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그대와 어디선가 만난 것 같군. 혹시 후루와타리 성에서 만나지 않았었나......?"

"아닙니다. 그런 곳에는 가본 일도 없습니다."

"으음, 이 추천서는 아내의 손을 거쳐 받았네. 추천하신 분과는 나도 가까워지기를 원하고 있지. 그런데 한 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

오다이는 깜짝 놀랐으나 뜰의 오빠는 천치라도 된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쿠마의 젊은 도령의 추천이라면, 굳이 나같이 미미한 사람 밑이 아니라도 후루와타리 성이든 나고야 성이든 어디라도 갈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나를 택했나?"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뭣이, 모르겠다고?"

", 단지 저는 무인을 모시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나미타로 님이 나에게 찾아가라고 하던가?"

", 이 댁 주인은 도량도 넓으시고 앞으로 출세하실 분이므로, 변변치 못한 너라도 잘 가르쳐주실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충성과 의리를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으음, 그런데 그대와 나는 틀림없이 어디선가 만난 일이 있어. 정말 기억이 없나?"

", 전혀......"

토시카츠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하다가, 오다이를 돌아 보았다.

"당신이 보기에는 어떻소?"

오다이는 두 손을 짚고 말했다.

"성주님이 보셨다는 사람은 이 자와 매우 닮은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저도 처음엔 가슴이 섬뜩했어요."

"당신도...... 낯이 익은 사람 같았다는 말이오?"

", 그래서 한동안은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와 닮았소?"

오다이는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카리야의 오빠와."

"오오!"

토시카츠는 무릎을 쳤다.

"맞아, 그 말을 듣고 보니 카리야의 시모츠케노카미 님을 닮았군 그래. 그러니 잘 생각이 안 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한쪽은 카리야의 성주이시니 너무나 체통이 다르지. 아무튼 좋아. 내 밑에 있도록 허락하겠네. 쿠마 도련님의 말을 잊지 않도록."

",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됐네, 그만 방에 돌아가 지시를 받도록 하게. 그대의 대장은 히라노큐조일세."

"감사합니다."

큐로쿠는 이번에도 쫓기다시피 그 자리를 물러났다.

토시카츠는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눈을 떼지 않았다.

"부인......"

"."

"저 자에게 방심해선 안 되오."

"무슨 수상한 점이라도?"

토시카츠는 다시 부드러운 표정이 되어 말했다.

"단죠 님이 그대를 의심하고 보낸 첩자인지도 몰라요. 오카자키에 아들을 두고 왔기 때문에. 그러나 염려할 건 없소. 그대의 마음은 내가 잘 알고 있소."

오다이는 안도하고 이 선량한 남편에게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나 오는 마음으로 합장했다.

 

14. 안개 속에 묻힌 성

 

1

정원에서 화톳불이 스러져가고 있었다. 동쪽 하늘이 훤해지면서 불길이 점점 기세를 잃어갔다.

그러나 실내의 등잔불은 사람들의 그림자를 뚜렷이 벽에 새겨주고, 방에 늘어앉은 부장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비장감마저 흐르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아베 오쿠라와 그 동생 시로베에. 왼쪽에는 사카이 우타노스케와 이시카와 아키, 중앙의 히로타다를 에워싸듯이 하고는 마츠다이라 게키, 오쿠보 형제, 혼다 헤이하치로, 아베 시로고로의 순으로 둥글게 진을 이루고 있었다.

모두 경장이 아니라 중무장에 가까운 차림으로, 그 표정은 한결 같이 나무로 조각한 나한을 보는 것 같았다.

히로타다가 말했다.

"타케치요를 이리로."

히로타다는 거의 무표정이었다. 하얀 하치가네에 불빛이 아른거리고, 갑옷을 차려입으니 도리어 가련함이 더했다. 왕실의 인형 같은 분위기마저 감도는 듯했다.

히로타다의 명으로 그의 고모 즈이넨인이 타케치요를 안고 히로타다 앞으로 나왔다.

", , ......"

타케치요가 생글거리면서 아직 잘 돌지도 않는 혀로 아버지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히로타다는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아들의 목과 손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타케치요는 즈이넨인의 품에서 바둥거리며 아버지 쪽으로 가려고 했다. 즈이넨인은 그 뜻을 살펴 아기를 내밀었다.

"안아보시지요."

히로타다는 무릎 위에 있는 지휘봉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 눈은 여전히 타케치요에게서 떠나지 않은 채 작은 소리로 말했다.

"부탁합니다."

즈이넨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베 오쿠라와 사카이 우타노스케는 이 이별을 차마 보지 못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혼다 헤이하치로는 정원을 내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곧 일곱 점 반이 되겠군."

시동이 술과 카치구리를 가져왔다.

즈이넨인은 타케치요를 안은 채 히로타다의 뒤로 돌아가, 여전히 혀 짧은소리로 떼를 쓰는 타케치요를 달래고 있었다.

히로타다의 손에서 질그릇 술잔이 돌기 시작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다지 비장한 빛은 보이지 않아, 히로타다가 타케치요를 바라보던 때보다 오히려 분위기가 누그러져 있었다.

"들겠소?"

오쿠보 진시로가 혼다 헤이하치로에게 잔을 건네었다.

", 물론이오."

헤이하치로는 새 갑옷을 입은 몸으로 후후후 하고 웃었다.

정원 앞에 말이 준비된 듯 갑자기 요란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술잔이 다시 히로타다의 손에 돌아왔을 때.

"모두 준비 됐소?"

히로타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 하고 질그릇 잔을 깨뜨렸다.

"! ! !"

다 같이 외치며 높이 칼을 쳐들었다. 그리고는 아베 시로고로를 선두로 하여 성큼성큼 정원으로 걸어 내려갔다.

엄숙한 출전의식답지 않고 왠지 한가로운 분위기였다. 히로타다 앞에 애꾸눈 하치야가 말을 끌고 왔을 때였다.

", , !"

다시 뒤에서 티없는 타케치요의 목소리가 들렸다.

 

2

날이 새기도 전에 오카자키 군사들은 성을 나섰다.

어제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아직 노부히데의 원군은 안죠 성에 도착하지 않았다. 성에 있는 병력은 약 600. 어쩌면 적은 지금까지도 이 기습을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고, 대장의 말고삐를 잡은 하치야는 이슬 맞은 풀을 밟으면서 생각했다.

아직 날은 완전히 새지 않았고, 부채꼴의 우마지루시를 어깨에 멘 아시가루가 꾸벅꾸벅 졸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말 위의 히로타다는 성을 나온 뒤에도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이 작전을 적이 설마 모르고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예측하기 어려운 오다 노부히데의 전략을 잘 알고 있었다. 성을 나서기까지는 불안한 마음이 적지 않았다. 사실 이 작전이 모험이라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중신들은 모두 재고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렸다.

히로타다는 날로 쇠약해지고 있는 자신의 체력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미루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선조가 쌓고, 조부 때까지 마츠다이라의 본거지였던 안죠 성, 그것을 자기 대에 적에게 빼앗긴 채 탈환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저승에 가서 아버지를 대할 면목이 없었다. 이대로 피를 토하며 적의 유린을 기다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초조하게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 미노로 쳐들어갔던 오다가 패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

히로타다는 안죠 성 공격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타와라 부인과의 불화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나도 정말 잔인해......'

지금도 히로타다는 말 위에서 문득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부인은 아직 처녀였다. 히로타다는 오하루만을 총애하고 지금껏 부인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부인은 그것을 원망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오다이처럼 사람를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지혜가 없었다. 노신들의 충고에 따라 이따금 둘째 성에 들르면, 체면도 자존심도 버리고 다그쳐오고는 했다.

"저의 어디가 마음에 드시지 않습니까?"

몸을 내던지며 흐느껴 울었다.

"떨어지지 않겠어요. 떨어지지 않겠어요. 말씀을 듣기 전에는 떨어지지 않겠어요."

때로는 그 도가 지나쳐 막말까지 했다.

"목숨을 끊겠어요. 그래서 제가 얼마나 치욕을 당했는지 아버지와 오빠에게 알리겠어요."

이럴 때 히로타다는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치밀고는 했다. 그녀와는 달리 명령만 내리면 그대로 움직이는 오하루와 비교되며 그녀를 끌어안을 생각은커녕 피로감만 느끼고는 했다.

"용서하오, 나는 병이 들었소."

결국에는 짜증이 분노로 변하여 거칠게 뿌리치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 타와라 부인이 언제부터인지 돌아서서 무기력하다고 히로타다를 헐뜯고 있었다. 이름도 없는 천한 계집은 사랑할 수 있어도 자기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비웃었다. 그런 말을 전해들을 적마다 히로타다의 가슴에는 정체 모를 초조감과 분노가 치밀었다.

갑자기 선두에서 소라고둥소리가 울렸다.

날은 어느 틈에 환하게 밝아왔다. 젖과 같은 안개가 싸늘하게 뺨을 스쳤다.

 

3

"우마지루시를 가져오너라!"

비로소 굳은 목소리로 명을 내린 히로타다는 우마지루시를 안장 옆에 세우도록 했다. 다시 소라고둥 소리가 울려퍼졌다.

선발대가 이미 강둑에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규모는 약 500. 선발대는 누렇게 물든 논을 따라 몇 갈래로 갈라진 좁은 길로 산개하여 안개 속에서 함성을 지르며 진격해갔다.

물론 성안 군사들은 반격해 나올 것이고, 그러나 부근 지리에 대해서는 이쪽이 더 잘 알기 때문에 훨씬 유리했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하지만 신중하게 처신하십시오."

안개 속에서 본진의 대장 아베 오쿠라가 달려왔다.

히로타다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이미 전의에 불타고 있는 총신의 마음과 눈을 확인했다.

열한두 살 때부터 자주 느껴온 전쟁터의 공기는 히로타다에게는 별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죽느냐 사느냐? 그 조차도 성을 나서면 자기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느껴지곤 했다.

"오쿠라, 내 뒤를 따르라."

본진은 안죠 성 서남쪽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으로 진군하여 안개가 걷히기 전에 산개를 끝내고 거기서 모든 것을 지휘할 예정이었다. 행렬의 지휘는 아베 오쿠라. 히로타다의 호위는 우메무라 신로쿠로와 창을 멘 애꾸눈 하치야가 맡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안개를 뚫고 함성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안개 속에 같은 편 군사끼리도 서로의 모습을 아직은 알아볼 수 없었다. 성안의 군사들이 허둥지둥 당황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목표로 삼은 성 앞 언덕이 수묵화처럼 희미하게 떠오를 무렵이었다. 그 앞 누렇게 익은 벼 포기 사이에서 갑자기 참새 떼가 언덕을 뒤덮으면서 날아올랐다.

아베 오쿠라는 깜짝 놀라 말을 멈추면서 외쳤다.

"성주님!"

그러나 그 소리는 히로타다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그는 점점 걷히기 시작하는 안개 속으로 계속 말을 달리고 있었다. 해는 이미 높이 솟아 있었다. 아버지 키요야스 때부터 사용해온 우마지루시인 금부채가 안개 속에서 아름답게 반사되면서 투구의 마에다테가 곧바로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성주님!"

아베 오쿠라는 말을 달려 히로타다를 따라 잡았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성안의 군사가 이미 나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뭣이, 성안 군사가?"

"참새 때 날아가는 방향이......"

말하고 있는데 또다시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한 무리의 참새 떼가 짹짹거리며 아군 쪽으로 날아왔다.

히로타다는 싱긋 웃었다. 적병이 성에서 나오는 편이 도리어 오카자키 군에게는 승산이 있었다. 성채가 아니라 야전에서라면 모두 일기당천의 용맹을 발휘했다.

"이건 것과 다름없어. 그렇지, 오쿠라?"

오쿠라는 고개를 저었다.

"성을 나왔다면 그럴 만한 승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상대는 소문난 오와리의 군사입니다."

"알고 있어. 좌우간 이 언덕에 곧 깃발을 꽂도록."

 

4

깃발을 꽂았을 무렵 안개는 서서히 걷혔다. 어디를 보나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황금빛 논, 그 사이를 누비며 진격해가는 아군의 모습이 개미처럼 이어져 있었다. 아직 깃발을 세우지 않은 채 사방에서 성문을 향해 육박해 들어가고 있는데, 성안에서는 화살 하나 날아오지 않았다.

히로타다는 말에서 내리려고 고삐를 하치야에게 주면서 문득 뒤를 돌아 보았다.

"아니?"

아직 아군이 거기까지 진격했을 리가 없는 곳에서 번쩍하고 창끝이 번뜩였다.

"오쿠라, 저것은......"

아베 오쿠라가 달려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으음, 역시......"

"아군인가?"

"적입니다."

", 적이......"

히로타다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높아졌을 때였다.

", ......"

뜻밖의 방향에서 소라고둥이 울리고 동시에 흰 기가 논둑 위에 세워졌다.

하나, , .

그 맨 앞 검게 물든 오요서의 깃발을 보았을 때였다.

"아아!"

히로타다는 말 위에서 외쳤다.

"히사마츠 야쿠로, 이 건방진 녀석!"

아베 오쿠라는 잠자코 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참새 떼가 또 머리 위를 스치고 아군 쪽으로 날았다.

"성주님, 이미 원군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으음."

히로타다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하치야, 고삐를."

"."

한번 건네 받았던 고삐를 다시 넘겨주었을 때, 히로타다의 말은 껑충 일어섰다가 언덕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성주님!"

오쿠라의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가볍게......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성주님!"

하치야는 외눈을 번뜩이며 쏜살같이 말보다 앞서 달렸다.

", ......"

적의 소라고둥이 다시 울렸다.

히로타다의 적진공격은 확실히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선두가 오다이의 남편 히사마츠 야쿠로 토시카츠라는 것을 안 순간, 히로타다의 피는 거꾸로 치솟았다.

"토시카츠 이 녀석!"

오다이가 아직 오카자기 성에 있을 때, 히로타다는 토시카츠의 아버지 사다마스와 오노의 성주 우에노 타메사다의 분쟁을 화해시킨 적이 있었다. 그 은혜도 생각지 않고 오다이의 남편으로서 공격해오는 토시카츠에게 히로타다의 증오가 폭발했다.

먼저 원군부터 단숨에 무찔러버리지 않으면 아군은 앞뒤로 적을 맞게 되어 있었다. 성안의 군사가 반격해오기 전에 라는 생각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인간적인 분노가 훨씬 더 컸다.

언덕을 달려내려간 순간, 몇 개의 화살이 히로타다를 향해 날아왔다. 날아오는 화살 속에서 히로타다는 칼을 뽑았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좌우로 후려쳐 그 화살들을 떨어뜨렸다. 이어 투구의 마에다테에 비스듬히 칼을 대고 곧장 토시카츠의 본진으로 뛰어들었다.

 

5

오다 노부히데는 그때 벌써 히사마츠 야쿠로의 배후까지 깃발을 내린 채 진격해와 있었다.

그는 안장을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오카자키의 애송이 녀석은 돌았어. 와하하하. , 어서 고둥을 불러라. 고둥을 불어."

"성주님, 깃발은?"

"아직 세우지 마라, 너무 일러. 성안 군사들이 반격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녀석의 코앞에 세우도록 하라."

그때 이미 하치야는 창을 꼬나들고 히사마츠의 선봉을 향해 돌진해가고 있었다. 찌른다기보다는 주위를 후려쳐서 히로타다의 진로를 열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와마츠 하치야가 여기 있다! 길을 비켜라."

우르르 좌우로 흩어지는 군사들 속에서, 아시가루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타케노우치 큐로쿠, 나와 승부를 겨루자!"

"닥쳐, 애꾸눈 하치야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느냐?"

자기를 큐로쿠라고 한 아시가루는 그 말엔 대답하지 않고 토시카츠에게 고함쳤다.

"성주님! 피하십시오."

토시카츠는 순순히 말을 뒤로 돌렸다.

"비겁하게 도망치느냐, 토시카츠! 게 섰거라!"

좁은 논둑을 가로막고 있는 아시가루 때문에 토시카츠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하치야, 빨리......"

히로타다는 앞발을 높이 쳐든 말 위에서 재촉했다. 그러나 타게노우치 큐로쿠는 침착한 표정으로 하치야에게 창을 겨눈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와아!"

뒤에서 함성이 울렸다.

성안 군사들이 반격해 나온 모양이었다.

"이놈!"

히로타다의 말이 다시 껑충 뛰어올랐다. 금부채 모양의 우마지루시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의 수는 더욱 많아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말의 엉덩이에 맞았다.

애꾸눈 하치야는 그때 비로소 자기 이마에 흐르는 땀에 생각이 미쳤다. 빗줄기처럼 흐르는 땀방울이 성한 눈의 움푹한 곳으로 흘러들었다. 그때마다 상대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그런데 상대의 이마에는 땀방울 하나 흐르지 않았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이런 느낌과 더불어 그는 본능적으로 싸움이 불리함을 깨달았다.

머지않아 퇴로가 끊길 우려가 있었다.

"성주님! 후퇴하십시오."

그러나 그 소리는 히로타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성주님! 아베 시로고로가 여기 있습니다."

"오쿠보 신파치로 타다토시도 있습니다."

위급하다고 느낀 두 사람이 좌우에서 히로타다를 감쌌다. 아베 오쿠라는 이미 근처에 없었다.

"성주님! 후퇴하십시오."

바로 등 뒤에서 히로타다가 탄 말의 거친 숨소리를 느끼면서 하치야가 다시 한번 외쳤을 때였다. 오른쪽 숲에서 와아 하고 또다시 함성이 일었다.

"."

누군가가 소리쳤다.

"오다 노부히데의 우마지루시다."

'아뿔사!'

하치야는 오다 노부히데가 여기 나타났다면 이미 승산은 없다고 생각했다. 신출귀몰함을 장기로 하는 이 맹장은 반드시 히로타다의 퇴로를 차단할 것이다.

"성주님! 후퇴를......"

다시 외쳤을 때였다. 탕하고 대지를 흔드는 이상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동시에 하치야는 털썩 오른쪽 무릎을 꿇었다.

화살도 맞지 않고 창에도 찔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른쪽 허벅지가 불에 단 부젓가락에 찔린 것처럼 쑤셔왔다.

 

6

하치야는 의문으로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마지막으로 찔러올 적의 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적은 하치야를 찌르지 않았다. 용맹한 애꾸눈 무사의 목이 오늘의 싸움터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보물일 텐데도, 타케노우치 큐로쿠라고 자신을 소개한 아시가루.

"하아, 이게 화승총이란 말인가......"

하치야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너는 대장의 방패가 되어 잘 싸웠다."

그러더니 그대로 창을 거두어 토시카츠의 부대로 돌아가버렸다.

하치야는 한 순간 멍하니 있다가 비로소 허벅지에 흐르는 피를 깨달았다.

"이상한 놈 같으니라구! 적을 동정하다니."

그는 역시 큐로쿠에게 찔린 줄로만 알았다. 소리만으로 쓰러뜨리는 무기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상처는 허벅지를 관통하고 있었다.

'놀라운 솜씨야, 창을 내지르는 것이 보이지도 않았어.'

그는 준비된 헝겊을 허리춤에서 꺼내 허벅지를 묶었다. 이미 사방의 포위망은 아주 가까이까지 압축되어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못하는 자기의 목숨이 끊어질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요란한 소라고둥소리, 칼이 부딪치는 소리,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 윙윙거리는 활시위 소리, 그런 것들이 점점 멀어지고, 푸른 하늘만이 그의 의식을 무겁게 짓눌렀다.

문득 귓전에서 자기를 꾸짖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깨달았다.

"하치야, 일어나!"

"...... ."

"나는 혼다 헤이하치로다. 하치야, 일어서! 너는 이러고도 오카자키의 무사냐!"

"...... ."

"일어서지 못하면 기어라. 기어서라도 성주님을 지켜야 한다."

", 기겠습니다."

하치야는 두 손으로 땅을 짚어가며 기었다. 이미 그의 시력은 거의 상실되어 주위를 분별할 수도 없었다.

"성주님! 성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치야는...... 하치야는......"

하치야는 기어가면서 자기 몸이 뒹굴어 논두렁으로 떨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에서는 연분홍빛 안개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주님! 하치야는...... 하치야는 기어가겠습니다."

이미 주위에 혼다 헤이하치로는 있지 않았다.

그 무렵, 오른쪽 풀숲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오다 노부히데의 원군은 어느 틈에 오카자키 군의 본진을 두 겹으로 에워싸고 서서히 그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마츠다이라 군은 완전히 둘로 갈라져 양쪽 모두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성문을 열고 반격해 나오는 정병과 이미 도착했으면서도 성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원군에게, 이를테면 교묘하게 쳐놓은 거미줄에 걸리고 말았다.

앞에도 적, 뒤에도 적.

오다이에 대한 감정 때문에 오요성의 깃발을 보자마자 언덕을 달려 내려왔던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었다.

히로타다는 그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도 노부히데에 의해 토벌되었고, 자기 역시.

'어차피 죽을 바에는......'

그는 고삐를 당겨 말머리를 노부히데의 본진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곁에 있는 마츠다이라 게키를 향해 엄숙하게 말하며, 푸른 하늘에 흰 칼날을 세웠다.

"게키, 내 뒤를 따르라! 마지막이 될 것이다."

 

7

"!"

게키는 대답과 함께 히로타다르 따랐다. 이미 히로타다의 말에는 화살 세 개가 꽂혀 있었다.

맑게 갠 가을 햇살 아래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우마지루시뿐이었다.

오다 노부히데는 그 모습에 다시 안장을 두드리며 기뻐했다. 바야흐로 모든 것은 생각했던 대로 되고 있었다.

"쏘지 마라. 탄환이 아깝다."

그는 처음으로 싸움터에 선을 보인 화승총이, 상대방의 무지 때문에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더구나 최초의 귀중한 한 방이 히로타다를 명중시키지 못하고, 그 앞에서 분전하는 애꾸눈 하치야를 맞혔다. 그리고 그 하치야 조차도 자기를 쓰러뜨린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미 우리가 포위하고 있다. 빗나가면 아군이 상하니 하승총은 그만 쏘아라."

사실 화승총을 동원할 필요도 없이, 사방의 오다 병사들은 히로타다의 우마지루시를 향해 창을 겨누며 앞을 다투어 덤벼들고 있었다.

활 부대 역시 히로타다를 겨냥하고 있었다. 노부히데에게는 초조해하는 히로타다가 우스웠다. 두 사람의 거리는 아직도 200간 남짓 되었다. 그 사이에는 작은 강이 분지를 누비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 분지까지 히로타다가 닿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맨 먼저 창을 들고 덤벼든 군사를 히로타다는 단칼에 베어 쓰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화살 하나가 말의 목에 명중했다. 말이 벌떡 곤두서는 순간 금빛 부채가 그림처럼 빛났다.

"과연 그 아비에 그 아들. 말머릴 돌리지 않는군."

히로타다는 드디어 분지까지 이르렀다. 금빛 부채가 관목 그늘에 가려 노부히데의 눈길에서 사라졌을 때, 오카자키의 무리 속에서 군사 하나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분지를 향해 뛰어들었다.

히로타다의 최후가 다가온 것이 분명했다.

등에 꽂은 작은 깃발은 연보랏빛 테두리에 큰 대자였다.

"오쿠보 신파치로 다급했군."

이어 또 한 사람. 이번에는 접시꽃이 그려진 깃발에 화살이 꽂힌 채 열십자로 칼을 휘두르며 히로타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저건 혼다 헤이하치로인가?"

노부히데의 관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혼전 중에 맨 처음 히로타다의 위급을 발견한 것은 오쿠보 신파치로 타다토시, 이어 그 사실을 알고 아수라처럼 포위망을 뚫고 달려온 것은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토요였다. 두 사람 외에 마츠다이라 게키와 아베 시로고로 타다마사 등이 겨우 히로타다의 말 앞에 있을 뿐, 잇따라 덤벼드는 오와리 군사의 포위 앞에서 이미 뚫고 나갈 방법이 없었다.

"성주님! 다 같이 죽읍시다."

이렇게 말하며 오쿠보 신파치로는 왼쪽의 적을 맞아 싸웠다. 그때 칼을 휘두르며 다가온 헤이하치로가 느닷없이 말의 재갈을 움켜쥐고는 오른쪽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미쳤느냐, 헤이하치로! 곧장 쳐들어가라. 노부히데 본진이 바로 눈앞이다."

"시끄러!"

헤이하치로는 이미 주종간의 존칭마저 쓰지 않았다.

"도망쳐야 해! 천치 같으니!"

"멈춰라!"

"멈출 수 없다. 여기에서 나갔다가는 적의 화살로 고슴도치가 돼."

히로타다는 이를 갈며 무어라고 소리쳤으나, 헤이하치로는 말을 점점 더 분지 안으로 몰아갔다.

 

8

강 양쪽 어디에도 나무다운 나무 한 그루 없었다. 갯버들과 감탕나무, 야생 뽕나무가 아직 약간의 잎을 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가까스로 몸을 숨길 만한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성주!"

헤이하치로는 달려들 듯한 기세로 히로타다를 돌아보았다.

"이러고도 성주는 마츠다이라의 우두머린가?"

"말이 지나치구나. 헤이하치로."

"잔소리 말고 어서 말에서 내려."

"...... 뭐라고! 나에게 명령하느냐?"

"그렇다!"

외치면서 헤이하치로는 갑자기 히로타다에게 덤벼들었다. 그것은 이성의 격투가 아니라 흥분한 사나이와 사나이의 싸움이었다.

이렇게 되면 히로타다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피로가 그를 꼼짝도 할 수 없게 했다.

"에잇!"

헤이하치로는 외치면서 히로타다의 몸을 번쩍 쳐들어 논둑에 내던졌다.

", ...... 무례한 놈!"

"무례는 나중에 사과하겠다. 목숨은 하나뿐이야."

헤이하치로는 내던진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히로타다의 가슴팍에 올라타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투구를 얻어야겠다."

"헤이하치로! 네놈은......"

"사과는 저승에 가서 하마."

이미 히로타다에게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순식간에 투구가 벗겨지고, 그의 머리에는 헤이하치로의 유난히 무겁고 땀내가 나는 투구가 강제로 씌워졌다.

"잘 계시오!"

자신의 작은 깃발을 히로타다의 등에 꽂아주며 헤이하치로는 소리쳤다.

힐타다는 투구를 고쳐 쓸 힘도 없이 거친 숨결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그 시야에 아버지 때부터 사용해온 금빛 부채의 우마지루시가 번적 빛났다가 사라졌다.

오다 노부히데는 자기의 시야에서 사라진 히로타다가 다시 분지에 그 모습을 나타내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자청해서 사지에 들어오다니. 나이 차이를 생각하는 순간 알 수 없는 감회가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가엾군......'

그러나 그 때문에 경계를 늦출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의 양편에는 만약 히로타다가 강을 건너 모습을 나타냈을 때를 대비해 20명가량의 궁수가 시위에 화살을 메긴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창 부대는 그 전방에 매복시켜 놓았다.

"아니 저것은?"

노부히데는 손을 이마로 가져갔다.

관목 사이에서 다시 금빛 우마지루시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었구나. 끈질기게도......"

중얼거렸을 때 말은 전방에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화살이 일제히 날았다. 어느 화살이라 할 것 없이 모두 빨려들 듯 하로타다의 갑옷에 꽂혔다. 그러나 말도 사람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창부대가 함성을 지르며 말 앞을 뛰어나갔다.

그래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토요가 히로타다의 우마지루시를 세우고 땅끝까지라도 달려가겠다고 결심한 최후의 돌격이었다.

 

9

창부대의 공격으로 거리는 서서히 좁혀졌다.

노부히데는 눈길을 떼지 않고 사람과 말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전신에 중상을 입었을 텐데, 자세도 무너뜨리지 않고 말고삐를 쥔 손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무서운 투지에 노부히데는 가슴이 섬뜩했다.

"으흠!"

노부히데는 신음했다.

"과연 키요야스의 아들답게 용감하다."

노부히데가 달려나가 맞아 싸우려는 기색에 누군가 뒤에서 말렸다.

"성주님!"

후진의 참모로 나고야에서 따라온 킷포시의 사부 히라테 나카츠카 사노타유 마사히데였다.

노부히데는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양쪽에서 힘센 젊은이 두 사람이 오다의 자랑인 긴 창을 꼬나들고 뛰쳐나갔다.

양쪽 모두 창의 손잡이에 붉은 칠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칠인창이란 명예를 얻은 창솜씨들이었다.

"히로타다 님에게 오다 마고사부로 노부미츠가 도전하오."

"아즈키자카 칠인창의 나카노 마타베에가 여기 있소!"

두 사람은 동시에 우렁차게 소리지르면서 날쌔게 말의 콧등에 창을 들이댔다.

말이 비로소 멈추었다.

순간 말 위에 있는 장수의 투구가 약간 기울었다.

이어 팔이 축 늘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상체가 힘없이 오른쪽으로 크게 흔들렸다.

두 사람이 한 발 물러섰을 때 상대가 그대로 말에서 털썩 떨어졌다.

"마츠다이라 히로타다, 오다 노부히데에게 도전한다......"

이렇게 말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카노 마타베에가 벼락같이 창을 내지르려고 했을 때였다.

"멈춰라!"

노부히데가 제지했다.

"이미 숨이 끊어졌다."

노부히데는 천천히 주검 앞에서 다가가 금빛 부채의 우마지루시를 뽑아 투구 위에 놓았다. 그리고 큰 눈을 스르르 감으면서 말했다.

"훌륭하군!"

순간 주위의 온갖 소리가 멎고 숙연해졌다.

히라테 마사히데가 천천히 걸어나와, 한쪽 무릎을 꿇고 투구로 손을 가져갔다.

"얼굴을 확인하시죠. 히로타다가 아닐 것입니다."

"알고 있네, 알고 있어."

노부히데가 말렸다.

"혼다 헤이하치로일 게야. 알고 있네...... 하지만 마츠다이라 히로타다로 대하는 것이 좋겠어. 참으로 훌륭해."

히라테도 합장했다.

이 소란 속에 분지로 쳐들어간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오쿠보 신파치

로도, 아베 시로고로도, 마츠다이라 케키도.

누구의 지시였는지 오카자키 군은 깃발을 내리고 물러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도 히로타다 곁으로 달려가기 전의, 혼다 헤이하치로 지시였는지도 모른다.

해는 아직도 높이 떠 있었다.

추격에 대비한 오카지키 군의 양동작전이 예측되었으나 승패는 이미 결정되었다.

안죠 성 망루에는 여전히 오다의 깃발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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