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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사랑(Dying for you)

또 한 번의 사랑(Dying for you)

Chalotte Lamb

 

1

애니는 어느 쌀쌀한 봄날 저녁 첫 번째 전화를 받았다.

"날 기억하오?" 남자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목 뒤의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제 막 런던에 있는 아파트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녀는 혼자였고,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 다이애나와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가 결혼했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구시죠?" 결혼식이 열린 호텔의 바에서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을 밴드 중의 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물었다. 그들 다섯 모두 술에 취하면 이런 장난을 능히 하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고 곧 전화가 끊겼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동응답기의 스위치를 켰다. 오늘 밤 그녀에게는 기분 좋은 전화가 필요했다.

그녀는 피부에 스치는 실크의 매끄러운 감촉에 만족하며 돌아섰다. 애니는 고급스런 옷을 좋아했다. 다이애나의 웨딩드레스와 자신이 입을 신부 들러리 의상도 직접 골랐다. 아몬드 빛 그린 색의 드레스는 그녀의 눈색깔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그 드레스는 나중에라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이의 드레스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드레스도 빅토리아풍이었다. 애니는 검고 긴 머리를 시뇽 스타일로 올리고 양치류와 제비꽃으로 꾸며진 빅토리아 식의 부케를 옮겼다.

그녀는 부케에서 가장 싱싱하고 예쁜 꽃을 골라 그것을 시집 사이에 넣었다. 꽃을 책 사이에 끼워두었다가 몇 년이 지나 우연히 발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인생에 있어서 중요했던 어느 날을 떠올리는 것이다. 즐거운 기억들 뿐만 아니라 가슴 아픈 기억도 있다. 그녀는 오늘이 아주 중요한 날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하품이 나왔다. 시계를 보자 자정이 지나 있었다. 그녀는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애니는 무대에 서지 않을 때는 시간에 엄격한 편이었다. 대부분 10시 무렵이면 침대에 들고 아주 일찍 일어났다. 내일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내일은 7시에 일어나서 최신 디스크 작업을 한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사진 촬영을 해야 했다.

초록색 실크 드레스를 벗고 짧은 나이트 드레스와 이에 어울리는 네글리제를 걸친 그녀는 화장대에 앉아서 화장을 지우고 크림을 발랐다. 늦고 피곤하더라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항상 이 과정을 거친다.

"대중의 시선을 끌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당신에 관한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일 거야. 그러니 항상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해. 언제라도 무대로 나갈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한다구!" 몇 년 전 필립이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녀는 그 생각이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사실 이 말은 그녀에게 있어 성공과 명예에는 희생이 뒤따른다는 최초의 경고였다.

필립은 날카롭게 그녀를 살펴 봤다. "그럴 수 있겠어, 꼬마 아가씨? 진짜 일을 벌이기 전에 결정을 해. 일단 뛰어 들면, 괴로운 일이 있어도 우는 소릴 해선 안 돼. 포기하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해. 아직 당신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어."

그녀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크고 우수에 젖은 녹색 눈으로 필립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 돌아갈 곳이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수가 되고 싶어요."

그 다음엔 모든 것이 단순했다. 필립이 미처 경고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힘든 면도 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간단했다.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벌이는 신경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치뤄야 했다. 대중은 어떠한 여유도 주지 않는다. 그들을 방치하면 그들이게 휩쓸리고 만다.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그들이 관심과 애정이 진정인지 아니면 그냥 이용하려는 것인지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며, 한번 상처를 받게 되면 움츠려 들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애니는 본능적으로 대중이 지나치게 거칠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음악이 근본적인 생명력을 잃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처를 받는 것은 음악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볼 수도 있다. 그녀의 가장 뛰어난 곡들은 필립이 결코 깨닫지 못했던 그에 대한 그녀의 비밀스런 감정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가 아직도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인 열일곱 살의 아이인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 필립은 냉철한 사업가였지만 그녀에게는 친절했고 사려 깊게 행동했다. 그는 그녀를 마치 딸이나 누이처럼 대했다. 처음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필립은 그녀를 여자로 보지 않았다.

그녀의 노래가 보다 성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써왔던 사랑이나 슬픔의 감정들은 그녀가 진정 느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필립에 대한 사랑으로 그녀의 노래들은 더욱 개인적이고 사실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지난 6개월간 가장 뛰어나 작품들을 썼다. 필립과 다이애나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상심한 그녀는 완성도 높은 작품을 일주일에 두,세 개씩 쏟아냈다.

최소한 그녀는 바쁘게 지낼 수 있었다. 지난 6개월 동안, 새 음반과 유럽 순회공연을 준비하면서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깊게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지난 8년간 도움이나 충고, 따뜻한 애정이 필요할 때면, 필립과 다이애나에게 의지해 왔다. 필립은 그녀의 대리인이자 매니저로 처음 런던에 왔을 때부터 그녀를 돌봤으며, 그의 사무실에서 비서로 근무하던 당시 스물두 살의 다이애나 애보트를 발견한 것도 그였다. 다이애나는 필립을 위해 일하면서 애니와 아파트를 함께 사용했다. 다이는 따뜻한 갈색 눈을 가진 마음씨 좋은 아가씨로 항상 미소 띤 얼굴로 애니가 관련된 모든 일들을 처리해 주었다. 애니는 필립과 다이애나 모두를 사랑했다.

필립은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성적 매력이 있었다. 흔들림 없고 냉소적인 푸른 눈과 토피 빛깔의 머리에 키가 큰 그는 늘 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애니는 수년간 그가 다른 여자들과 사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대부분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소나마 위안을 삼으면서 말이다. 그의 삶은 일 때문에 너무 바쁘고 복잡했다. 여자들은 그가 전화해 주기를 기다리는데 지쳐 떠나갔다. 애니는 필립이 언젠가는 자신이 더 이상 열일곱 살 소녀가 아니라 성숙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필립이 다이애나와 사랑에 빠질 거라고 상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삼 개월 전 미국 순회공연 중에 수하물에 문제가 생겨서 두 사람이 비행기를 놓쳤었다. 거기다 이틀간 눈보라가 몰아쳐서 일행을 쫓아 비행기를 타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필과 다이가 단둘이 그렇게 오래 있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제야 그를 알 것 같아." 후에 다이애나는 이렇게 말했다. 애니는 그녀와 필립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창백해진 채 멍하니 있었다. "우습지? 몇 년 동안이나 알고 지냈는데. 일단 시작되니까 꼭 양파를 벗기는 기분이었어.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이 있더라구. 호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어. 바람은 칼날 같았고, 눈은 2미터나 쌓였지. 거기다 전기까지 끊겨서 TV도 못보고, 난방도 안 되고, 그리고 불을 켜지도 못했어. 그래서 우린 코트를 입은 채로 누비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얘기하고 또 얘기했어."

"그리곤 사랑에 빠졌다?" 애니가 애써 웃음 지으며 물었다. 다이애나가 행복에 빛나는 얼굴을 끄덕였다. "그래. 우린 사랑에 빠졌어. 미쳤지? 몇 년이 지나서야 이러다니. 마치 우리 사이에 벽이 있다가 갑자기 허물어진 것 같아."

처음에 애니는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이 갑작스런 소식에 상처받았고 질투심을 느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를 사랑했기 때문에 본심을 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필과 다이는 그 뉴스가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잘 된 일이었다. 그녀는 필립에 대한 마음을 다이애나에게 털어놓지 않았었다. 또 필립이 자신의 감정을 알도록 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그녀의 마음을 몰랐다. 그러니 그냥 전처럼 행동하면 됐다.

정말 우스운 건 그녀가 둘 모두를 사랑하며,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혼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말이다.

그녀가 필립을 처음 만난 것은 한 친구의 파티에서 노래를 불러주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직업적인 가수가 되겠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처음 필립이 다가와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그를 믿지 않았다. 당시 그녀는 자신감도 없고 아주 비관적이었지만, 어떤 본능적인 직감으로 그를 믿게 되었고, 결국엔 그 직감이 옳았다.

그가 그녀에게 약속했던 모든 것들이 현실로 다가왔다. 처음엔 천천히, 그리고 최근 몇 년간은 아찔할 정도의 속도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밤에 클럽에서 일하면서, 낮에는 노래연습, 춤 교습을 받았다. 그리고 필립은 그녀의 진짜 경력이 시작되는 첫 음반 계약을 따냈다. 지금 그녀는 미국에도 알려졌으며, 두 주일 후엔 파리의 대규모 콘서트를 시작으로 유럽 순회공연을 시작한다.

그녀는 영국에서도 스타라는 이름 뒤에 따르는 여러 문제점을 겪었다. 예를 들어 괴전화 같은 것 말이다. 지금은 그녀의 전화번호가 전화번호 책에 실려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자주 걸려오지는 않았다. 일부 사람들만이 그녀의 번호를 알고 있다. 몇 년 전 팬들이 밤낮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문제가 된 이후 취해진 조치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런던에서 독립돼 존재하는 것 같은 이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길을 따라 나무가 쭉 심겨져 있고, 교통량도 거의 없었다. 부유한 이곳 거주자들의 차나 배달차량만이 눈에 띨 뿐이다. 건물 주변으로 대규모 정원이 꾸며져 있어서 꼭 전원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주변이 꽃과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서 따뜻한 날에는 향긋한 시골 냄새가 나기도 했다.

애니가 옮겨 온 이 호화로운 플랫식 아파트의 가장 중요한 점은 철저한 보안체계였다. 이곳엔 정복을 입은 경비원과 험한 모습의 경비견이 있으며, 밤새 순찰차가 주변을 감시했다. 그리고 건물의 출입문인 자동문은 문에 설치된 컴퓨터에 맞는 카드 열쇠를 제시하고 개인 안전번호를 쳐야만 통과할 수 있었다.

이곳은 거주자들이 TV나 라다이오를 크게 틀거나 난잡한 파티를 열지도 않으며, 서로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는 몇 안 되는 아파트였다. 방은 두 개로 그녀와 다이가 각각 하나씩 사용했었다.

이제 애니는 이곳에서 혼자 살 것이다. 애니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혼자 살아본 적이 없었다. 필립을 만나기 전에는 엄마와 계부, 그리고 이복 남동생들과 런던에서 살았다. 가족들은 애니가 집을 나가자 오히려 안도했다. 집이 좁았을 뿐만 아니라 애니와 계부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집을 나온 이후 그들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혼자 산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그녀는 정적에 귀를 기울였다. 부엌의 냉장고와 중앙난방에서 윙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주위에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너무 조용해서 마치 달나라에 혼자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각 층의 아파트마다 입주자가 있었다. 아주 인기 있는 곳으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대기자 명단이 있을 정도로, 오가며 많은 유명 인사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중 얼마간은 다른 집을 가지고 있으면서 런던에 들릴 때만 이곳을 사용하기도 했다. 관리가 잘 됐으며, 수영장과 사우나실, 장비를 잘 갖춘 체육관까지 있어 아주 편리했다.

승강기가 있고, 현관 옆에는 언제나 포터가 대기하고 있으며, 쓰레기는 승강기 옆의 낙하장치에 던져넣기만 하면 돼서 생활하기도 아주 편했다. 또 팬들이 이곳을 알아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더라도 지하통로가 있어서 들키지 않고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애니는 여기가 완전히 안전하다고 여겼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니 그깟 전화 때문에 초조해 하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더구나 음탕한 말도 아니었으니까. 아마 밴드 부원중 하나가 장난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애니는 침대에 누으면서도 여전히 그 전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농담일 텐데, 그 말이 왜 이렇게 걸리는 걸까? 그녀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날 기억하오? 그 말은 질문이었을까 아니면 명령이었을까? 어느 쪽이었든 그 말은 생애 처음으로 혼자 남겨지게 된 그녀를 혼란스럽게 한 것이 사실이었다.

오늘밤 그녀는 아주 쉬운 목표물이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예식장에서 그녀는 필립과 다이애나가 그녀의 기분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애써서 발랄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행복해 질 권리가 있었다. 그들의 뜻 깊은 날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제 십 대 소녀가 아니라 스물다섯이나 먹은 어른이니, 자기 하나쯤은 스스로 건사할 수 있었다. 대서양을 몇 차례나 왕복했고, 프랑스어와 이태리어도 어느 정도 하며 지금은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었다. 현대의 음악 산업은 국제적인 규모라서 여행은 필수적이며, 따라서 여러 언어를 익히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 필립의 생각이었다.

, 이제 자기연민은 그만두자! 살아가는 방법을 충분히 알고 있으니, 잘 해나갈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차도 운전할 수도 있고, 요리도 할 줄 안다. 그리고 호신술도 배웠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남자를 어깨 너머로 집어던질 수도 있었다. 확실히 그녀는 혼자 살 수 있으며, 지금의 어려운 상황도 극복할 것이다. 그리고 해야 한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몸을 뒤척이다 잠에 빠져들었다. 밤중에 어렴풋이 전화벨 소리를 들었지만, 자동응답기가 작동되자 무시해 버렸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서둘러 나가느라 응답기를 들을 새도 없이 그냥 작동만 시켜놓고 일을 나갔다.

사진을 찍는 것은 따분한 일이었다. 꼭 진열장에 있는 마네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끝날 무렵엔 억지로 웃느라 얼굴이 아플 지경이다.

"행복한 표정 좀 지어 봐요!" 사진사가 재촉했다. "미안해요, 그렇지만 난 정말 사진찍는게 싫다구요!" 애니가 불평했다.

", 어서 긴장을 풀고. 조금만 더 하면 끝날 거예요." 밴드 부원들이 사진사 뒤에서 손으로 코끼리 귀를 만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그녀가 자연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훨씬 좋군!" 사진사가 말했다.

스무 살의 몸집 큰 소년 같은 드러머인 브릭이 나가면서 그녀를 보고 씩 웃었다. "전에 책에서 읽었는데 원시 종족들은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믿었대. 애니,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는 밴드의 농담꾼으로 그의 말에 다른 부원들이 낄낄댔다.

"난 단지 내 사진이 싫을 뿐이야!" 그녀는 어젯밤 전화한 것이 브릭이 아닐까 생각하며 투덜거렸다. 그가 그녀의 선명한 초록색 눈, 윤기나는 검은 머리 그리고 작고 창백한 삼각형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얼마 전에 어떤 기자는 그녀의 모습을 비 맞은 새끼 고양이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 그 기사를 읽고 애니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동료들은 목을 젖히며 웃어 댔었다.

"좀 진지해져 봐요." 브릭이 그녀를 향해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자긴 사진발을 끝내 주게 받잖아! 그러니 계속 사진을 이용해야 해. 요즘엔 자기 얼굴이 거의 매일 잡지나 신문에 실리잖아." 그녀는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카메라를 싫어하는 건 완전히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설명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브릭, 어젯밤에 전화했었어?"

"당신한테? 아뇨. 나한테 부탁했었어요? 피로연이 시작된 이후론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부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웃어댔다. 애니도 얼굴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래, 브릭은 아냐. 그리고 다른 부원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들도 아니었다. 그들이 한 장난이었다면 당장에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여러 시간동안 연습을 했다. 점심도 거른 채 단지 요구르트와 사과 한 개를 먹었을 뿐이다. 필립은 살이 찌면 그가 수년간 공들여 만든 이미지를 망친다고 화를 낼 것이다. "이 세계에선 `이미지'가 전부야! 본래 당신의 모습이 아니라 대중이 당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이미지야. 그러니 항상 그들이 바라는 바를 생각해야 해." 필립은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리고 대중은 필립의 의도대로 슬픈 얼굴로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고독한 반항아의 모습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긴 검은 머리를 창백한 얼굴 주위로 늘어뜨리고 화장으로 커다란 눈과 큼직한 입을 강조했다. 무대 의상은 단순하고 비싸지 않은 것으로, 그녀의 날씬함과 연약함을 강조하기 위해 대부분 검정색을 입었다. 몇 년 동안 노래는 바뀌었지만, 노래하는 분위기는 여전히 똑같았다. 팬들은 그런 그녀를 좋아했다.

때때로 그녀는 자신이 필립이 창조한 모습 속에 갇혀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모습은 처음 노래를 시작했을 때는 어울렸을지 모르지만 이젠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

"필과 다이가 보고 싶은 거야?" 연습실을 떠나면서 브릭이 물었다. "우린 저 아래 인도 식당에 갈 건데, 같이 가서 카레를 먹는 게 어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기름기가 너무 많아. 집에 가서 먹을래, 다들 안녕."

집에 돌아온 그녀는 습관적으로 응답기를 켰다. 그리고 편지들을 살펴보았는데 대부분 음악을 하면서 알게 된 친구들이 보낸 것이었다. 필립의 사무실에서 필립대신 비서가 서명해서 보낸 순회공연에 관한 편지 한 통, 전화요금 고지서, 그리고 전에 밴드에서 일했던 친구가 순회공연 중에 부다페스트에서 보낸 편지도 있었다.

편지를 읽으며 갈겨 쓴 글씨를 보고 웃던 그녀는 응답기에서 흘러나오는 속삭이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루 종일 너무 바빠서 지난밤의 장난전화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를 기억하지 못했소?" 하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자 모든 것이 떠올랐다.

전화는 곧 끊겼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난 당신을 기억해, 애니. 모든 걸 다 기억하오."

식은땀이 척추를 따라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동응답기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다른 말은 없었다. 전화가 다시 끊겼다.

대체 누구지? 브릭은 아냐. 이건 그의 우스꽝스런 농담이 아냐. 이 전화들은 농담이 아니라구. 협박을 하는 건가? 함정에 빠뜨리려는 건가? 확실하게 떠오르는 생각은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전에 결코 그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 남자를 모르며, 만난 적도 없다고 확신했다. 만났다 해도 아주 잠깐 우연히 만났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잊어 버렸을 것이다.

그는 왜 그러지 못했지?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만난 적도 없는데 그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자신의 환상을 믿는 미친 팬일까? 전에 그런 일에 대해 들은 적은 있지만, 그녀에게 일어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액센트는……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완벽한 영어긴 한데 외국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파트에 혼자 있다는 걸 강하게 의식했다. 다시 밤이었고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이 건물에서 깨어있는 사람은 그녀 혼자뿐일까?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서 가로등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유황색이 넓게 퍼져있는 런던의 하늘이 보였다. 애니는 건너편의 높은 건물을 보았다. 불이 켜진 곳도 있고 꺼진 곳도 있었다. 그쪽에도 사람들이 있었고, 또 애니의 위층이나 아래층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혼자라는 사실이 잊혀지지가 않았고 더럭 겁이 났다.

그때 전화벨이 다시 울리자 그녀는 펄쩍 뛰었다. 휙 돌아선 그녀는 방 저쪽을 응시했다. 자동응답기를 다시 켜 놓지 않았었다. 결국엔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며, 벨이 계속 울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욕실로 가서 전화벨이 들리지 않게 샤워기를 세게 틀고는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세찬 물줄기를 잠그고 욕조 밖으로 나와 타월지의 로브로 몸을 감쌌을 무렵 집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가 맨발로 부엌으로 향하려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화가 났지만 못 들은 척하고 부엌에 가서 저녁으로 샐러드를 만들었다. 전화벨은 계속해서 울리고 또 울렸다. 그는 예상밖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집에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왜 포기하지 않는 거지?

물론 그녀는 집에 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혹시 아는 것일까?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일까? 바깥의 어딘가 이 근처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가 이 근처에 살고 있거나 저 아래 길에 있다면, 그녀의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봤을 테고, 당연히 그녀가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전화를 거는 사람이 그 사내가 아닐 수도 있잖아? 신혼여행 중인 필과 다이가 안부를 물으려고 전화했을 수도 있어. 이 늦은 밤에 전화를 받지 않으면 걱정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거실로 뛰어나가 전화기를 잡아챘다.

"여보세요?" 그녀가 숨이 차서 말했다.

"얼마나 있어야 전화를 받을까 궁금해 하고 있었소." 속삭이는 목소리에 그녀의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 거예요? 장난 그만 해요. 날 내버려 두라고. 당신 대체 누구예요?" 그녀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빠르게 말했다.

"아직도 나를 기억해 내지 못했소? 괜찮소, 곧 생각해 낼 거요."

"이봐요, 지금은 늦은 시간이고 난 아주 피곤해요. 전화 끊어요, 그리고 다신 전화하지 말아요!" 그녀가 불안정하게 외쳤다.

"잘 준비는 다 했소?" 그 말에 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녀가 로브 아래에 아무것도 안 걸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주 피곤할 거요. 힘든 하루였을 테니까. 잠을 못 자게 할 생각은 없소. 그냥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오." 그리고 부드럽게 덧붙였다. "곧 당신을 만나게 될 거요, 애니."

전화가 끊겼다. 그녀는 솟구치는 공포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지금 오고 있는 거야. 도대체 무슨 뜻이지? 그녀는 현관문으로 달려가서 문이 잠겼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일상적인 정적 속에서 발소리나 벨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며 현관에 서 있었다.

몇 분이 지나고서야 이곳의 보안 시스템이 생각났다. 그는 이곳에 올 수 없다. 아래층에 있는 야간 경비가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허락을 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완전히 안심하지 못하고,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화도 없었고, 문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불안에 떨며 거실로 가서 침묵하고 있는 전화를 지켜보며 기다렸다.

그가 적어도 오늘밤엔 오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는데 2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경찰에 신고하고 호텔로 가는 것을 생각해 봤다. 하지만 정신병자의 전화 때문에 집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필과 다이가 돌아와서 이 얘기를 들으면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혼자 지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 이건 신경전이야. 뭣 때문인지 이 남자는 그녀에게 겁을 주려하고 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신고를 한다 해도 경찰이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전화를 추적하는 정도일 것이다. 전화번호를 다시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가 어떻게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아냈을까, 그렇다면 새 번호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누구지? 누구길래 그녀에 대해서 그처럼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거지?

그녀는 침대에 누워 애써 잠을 청했다. 아침에 깬 그녀는 간밤의 꿈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전화가 울리고 예의 그 목소리가 꿈에도 출현했다. 낯설고 공포감을 주는 불빛이 있었고 바다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멀리서 들려오는 런던 거리의 소음이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밤중에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바다 소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섬광은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었을 것이다.

그녀와 밴드는 그날 여덟 시간이나 연습을 했다. 그래서 다른 것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응답기에 또 메세지가 남겨져 있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도착해서 응답기를 틀 때, 그녀는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안도감에 그녀는 쓰러질 것 같았다. 다음날도 그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응답기를 틀었다. 이번에는 필립의 사무실에서 짧은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예의 그 목소리는 없었다. 그녀와 술래잡기 놀이하는데 지쳐서 게임을 그만뒀거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렸나 보다.

이틀 후 그녀는 필립과 다이애나에게서 엽서를 받았다. 푸른 하늘과 야자수, 선명한 파란 바다가 담긴 그림엽서였다. 재미있는 내용과 함께 파리에서 밴드와 그녀를 만날 거라는 말로 엽서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실제 공연장에서 연습을 해야했고, 순회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신문과 인터뷰도 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애니는 관광을 하고 싶었다.

애니는 혼자 다니는 것에 익숙해져서 파리로 떠나는 날 히스로 공항에도 혼자 운전을 하고 갔다. 장비들은 트럭에 실려 육로를 거쳐 바다를 건너간다. 밴드 부원들도 이 방법을 택했다. 특히 브릭은 자신의 눈을 벗어나면 드럼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길까봐 신경과민이 돼있었다. 그러나 애니는 훨씬 빠르고 편안한 비행기를 선호했다.

더 이상 괴전화는 없었다. 그녀는 다시 편안하게 잠잘 수 있게 됐고, 다이와 필을 만나길 고대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들이 그녀에게 보다는 서로에게 더 속해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고통스럽고 힘들겠지만 새 관계의 거북한 첫 단계를 잘 이겨 나가리라고 결심했다. 두 사람 모두 그녀에겐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살아가면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녀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는 필에 대한 감정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밴드 부원들이 그들의 악기를 실은 채 자동차로 프랑스를 횡단하고 있을 동안에 그녀는 이미 파리에 도착했다. 부원들은 도중에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애니가 있는 호텔에 합류하기로 했다.

필립의 비서가 공항에서 운전기사가 딸린 자동차를 타게 될 것이라고 애니에게 전해줬다. 그녀는 필이 비행 중에 별 문제가 없도록 고용한 두 명의 안전요원의 보호를 받았다. 그들은 모두 일등석에 있었는데, 누군가 애니에게 말을 걸 경우를 대비해서 안전요원들은 통로쪽에 앉고, 애니는 창가에 앉았다.

그녀는 흰 실크 셔츠에 검정 스키 바지와 부츠를 신고 검은색과 주홍색이 섞인 스키 잠바를 입었다. 몇몇 승객들이 지나가면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샤를르 드 골 공항에 도착한 뒤 VIP통로로 빠져나와 즉시 옆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커다란 검정색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안전요원들이 다가가 어두운 색 정장을 입은 운전기사와 몇 마디를 나누었다. 기사는 애니를 위해 문을 열어주며 고개를 반쯤 숙이고 프랑스어로 환영의 말을 중얼거렸다. 가방을 차에 싣는 동안 애니는 뒷좌석에 올라 호화스러운 가죽으로 장식된 내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전요원들은 그녀와 함께 가지 않고 영국으로 돌아간다. 필요할 때면 프랑스 안전팀이 인계를 받을 것이다. 기사는 핸들을 점검한 후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그녀는 검은 유리창을 통해 멀어져가는 공항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주의를 다시 앞으로 돌려 기사를 쳐다본 것은 몇 분이 지나서였다. 그녀는 차에 탈 때 그의 얼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었다. 지금도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부드러운 검은 머리와 넓은 어깨를 가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볕에 그을고 강해보이는 목이 하얀 칼라 위로 드러나 있었다. 기사는 공항을 떠난 후로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이 오히려 고마왔다. 프랑스에서 불어를 쓴다는 것에 대해서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이다. 수 년 동안 불어를 공부했고, 과외선생을 상대로 말하는 것은 어느정도 쉬웠지만 프랑스 본토인과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틀리기 때문이다.

그녀는 따분해져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교통량이 아주 많았는데도 차는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강력한 차의 엔진 때문에 그녀는 신경질적이 되었다. 그녀는 앞으로 몸을 기울여 속도를 늦추라고 말하려다가 왠지 모를 생각에 그만두고 말았다.

넓은 고속도로 양쪽으로 점점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붕들, 건물들, 그리고 교회의 뾰족탑들이 보였다. 차는 익숙한 도로 표지판을 지나쳐 도시로 진입하는 입구를 계속해서 지나갔다. 애니는 운전기사가 파리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잃은 것일까? 목적지를 잘못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녀가 모르는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차가 톨게이트에 다가가자 그에게 물어 보려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애니는 리무진이 속도를 줄이자 커다란 도로 표지판을 올려다보았다. 리용? 그곳은 프랑스 중심부에 있는 곳인데, 왜 그 방향으로 가는 거지?

차가 자동티켓 판매기가 있는 곳에 다다르자 운전사는 밖으로 몸을 내밀어 티켓을 받았다. 차단기가 올라가자 차는 깊고 낮은 엔진 소리를 내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애니는 앞으로 몸을 기울여 간막이 유리를 두드렸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그녀는 영어로 묻고서 다시 불어로 물었다. "무슈, 우 알레 부?"

그는 고개는 돌리지 않았지만 잠시 거울을 흘끗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검고 빛나는 눈을 슬쩍 볼 수 있었다.

"파리로 가기로 돼 있잖아요? 길을 모르는 거예요? 되돌아가야 해요. 알겠어요, 무슈?" 그녀는 확실치 않은 발음으로 불어를 들먹이며 말했다.

그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차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고,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몸이 흔들려 옆의 가죽 손잡이를 잡아야만 했다. 그녀는 시속 16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리고 있을 거라고 멍하니 생각했다. 또 다른 도로 표지판을 스쳤다. 베르사이유? 파리에서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인데,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리무진이 속력을 늦추더니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또 다른 톨케이트 앞에 줄을 섰다.

애니는 좀 안심이 되었다. "돌아가는 건가요?" 파리를 지나쳐 온 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으니까 시로 돌아가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공항에서 파리 가는 길조차 잘 모르는 이 운전사에게 그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아니면 이 사람이 지리를 잘 모르는 외국인을 놀리고 있는 걸까? 주행거리에 따라 수고비를 받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필은 많은 돈을 지불하게 될 것이다. 필립에게 이 사실을 꼭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맨 앞에 이르러 운전사가 기계 안으로 동전을 던져 넣자 차단기가 올라갔다. 리무진은 먹이 사냥을 나가는 표범처럼 강력한 힘으로 앞으로 전진했다.

애니는 의자 뒤에 기대어 신경질적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운전사가 어서 턴을 해서 파리로 향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대신 초록의 들판과 숲 사이에 난 좁고 구불구불한 국도로 방향을 돌리더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애니는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그녀는 다시 좀 더 강하게 유리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우 알레 부, 무슈? 아레떼 세뜨 브와띠르." 화가 더 치밀자 불어로 말하는 것을 잊고, 영어로 화를 냈다. "무슨 짓이에요? 어디로 가는 거죠? 차를 멈춰요, 내려줘요!"

여전히 아무 대꾸도 없었다. 심지어 돌아보지도 않았다. 차가 커브길에 들어 속도를 낮추자 애니는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은 잠겨 있었고 그걸 풀 방법이 없었다. 분명히 운전석에서 조정한 것이다. 차가 아직 커브길을 돌고 있는 동안에 그녀는 다른 쪽의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 문 역시 잠겨있었다.

그녀는 좌석의 끝에 주저앉았다. 완전히 갇힌 것이다. 얼굴은 창백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그의 검은 눈빛을 마주 보았다.

쉰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곧 당신을 만나게 될 거라고 했잖소, 애니."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의 정체를 깨닫자 그녀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2

잠시 동안 애니는 너무나 놀라서 굳어진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상황을 타계해 보려고 애를 썼다. "당신 누구에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위의 거울을 쳐다보았지만 그의 눈조차 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올리브색 얼굴의 옆모습과 검은 머리카락만이 보였다. 쭉 뻗은 콧날과 강한 턱선을 가진 거친 얼굴이었다. 애니는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그리고 뭘 계획하고 있는지를 파악해 보려고 애쓰면서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전에 만났었나요?" 그녀가 물었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내부의 떨림을 감추려는 듯 웃었다.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전 아주 많은 사람들을 만나거든요. 그래서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기는 힘들어요. 팬들은 콘서트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사인을 요청하고 말을 걸려고도 하죠. 그런데서 만났나요? 제 팬인가요?"

그러나 그는 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거의 확신했다. 그녀의 팬들은 주로 십대나 이십대 초반으로 최신유행을 쫓아 비슷한 옷과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소녀들이 그녀를 흉내내어 옷을 입고, 심지어 그녀가 몇 년 전 잠깐동안 했던 스타일인 검은 매니큐어와 립스틱까지 쫓아했다.

30대로 뵈는 이 남자는 나이로 봐서 그녀의 팬은 아닌 것 같았다. 어두운 색 정장과 흰 와이셔츠에 역시 어두운 색의 넥타이를 한 그의 옷차림을 봐도 그랬다. 그의 의상을 눈여겨 보다보니 그것들이 아주 고급품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정장은 아주 비싸보였는데, 가게에 진열돼 있는 기성복이 아니라 맞춤복 같았다. 셔츠와 넥타이도 세련돼 보였다.

그녀는 당황했다. 일반적으로 옷은 그것을 입은 사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옷차림으로 보아 그는 상당한 지위에 있으며 보수적인 것 같았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그는 전형적인 유괴범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괴범들이 다 그렇고 그렇게 생겼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 경우도 경찰의 용의선상에서 제외되기 위한 영리한 위장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가 계속 아무 말도 안하자 그녀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말을 붙여봤다.

"당신이 누군지 말해줘요."

"나중에." 그는 돌아보지 않고 눈을 도로에 고정시킨 채 말했다.

그녀의 감정이 폭발했다. "이봐요,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도착하면 알게 될 거요."

"지금 말해줘요." 그녀는 애써 냉정하고 침착하게 말했지만, 목은 건조하고 입은 뻣뻣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를 옮겼다. 태양에 그을은 단단하고 능력 있어 보이는 긴 손가락이 핸들 위에 놓여있었다. 그녀를 두렵게 하는 힘이 느껴졌다. 애니는 유리창 밖으로 프랑스의 시골풍경을 내다보았다. 봄이 이제 막 시작돼 나무에 새 잎이 조금씩 돋아나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렀지만 태양은 아직 그렇게 뜨겁지 않았다. 그는 어디서 살갗을 태웠을까?

그러자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첫 번째 전화에서 희미한 외국 억양을 알아챘었다. 프랑스인일까? 아니면 다른 나라일까? 그가 다른 나라에서 왔다면 아주 더운 곳, 시실리 같은 곳일까? 그녀는 궁금했다. 시실리아인들이 종종 사람들을 납치해서 몸값을 요구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운전사의 검은 머리와 올리브 색 피부를 보았다. 그는 이탈리아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이번 공연에는 이탈리아 공연도 포함돼 있었다. 왜 그곳에 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파리에서 그녀를 납치한 걸까?

"날 납치한 거예요?" 그녀는 거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을 붙잡고 물었다.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대답을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시인인 셈이다. 적어도 그 말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사람들이 곧 나를 찾기 시작할 거예요."

그는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리인, 밴드 부원들, 공연 매니저…… 우리 팀 사람들이 파리로 오고 있다구요. 내가 호텔에 없으면 경찰을 부를 거에요."

그는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그녀는 그가 분별력을 갖도록 계속 시도했다.

"당신이 날 납치한 걸 모를리 없어요. 그들은 먼저 공항에 알아볼 거고 내가 차에 탔다는 걸 알아낼 거라구요. 런던에서 함께 온 안전요원 두 명을 포함해서 내가 당신 차에 타는 걸 본 사람들이 많아요. 안전요원들은 당신을 봤어요, 그리고 당신 차 번호도 체크해 두었을 거라구요."

하지만 그 사람들이 정말 그랬을까? 그들이 운전사와 얘기를 하고 차를 본 것은 확실하지만 리무진의 번호까지 봐둘 생각을 했을까? 또 주변에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안전요원이 딸려있고, 또 극성스런 팬들로부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공항 측에서 신경 쓰는 것을 봤다면 그녀를 주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유럽에서 그렇게 큰 스타는 아니었다. 대중매체에서도 그녀의 도착에 그렇게 흥분하지 않았다. 이제야 유럽에서의 레코드 판매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그녀는 그다지 큰 뉴스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일주일 후 콘서트 시작과 더불어 관심을 가질 터였다. 그래서 공항에서 그렇게 특별했던 점은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예약한 리무진이었을 텐데, 그게 당신인가요? 리무진 회사에서 나온 거예요? 그렇다면 즉시 당신을 추적할 거예요."

그가 웃었다. 그것이 애니의 신경을 거슬렸다. "왜 이러는 거죠?" 갑자기 실날 같은 희망이 떠올랐다. "그다지 완벽한 장난은 못되는군요. 아직 다 짜 맞추진 못했지만, 지금 날 필과 다이에게 데려가는 거죠? 필의 아이디어죠?" 필은 농담을 실천하기로 유명했다. 그녀가 전화와 연관시켜서 모든 걸 거기에 맞추려 하지 않았다면 훨씬 전에 그걸 생각해 냈을 것이다.

"애니, 이건 장난이 아니오." 그의 말에 다시 공포가 밀려왔다.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침착하고 자연스럽게 호흡하려 하면서 다시 뒤로 기대앉았다. 눈을 감고 모든 생각들을 몰아내고 진정하려고 애썼다.

자제력을 잃을 때가 아니었고, 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문은 잠겨있었고, 어두운 유리 때문에 바깥에서 내부를 들여다 볼 수도 없었다. 그러니 손을 흔들거나 소리를 질러 시선을 끌지도 못했다. 그가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든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대로 앉아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지? 그의 계획을 알 수만 있다면…… 그는 위험스런 미치광이나 범죄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올리브색 피부에 검은 머리, 검고 반짝이는 눈을 가진 그가 굉장히 매력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생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내긴 했지만 프랑스에서 태어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그녀도 절반은 프랑스인이었다.

애니가 프랑스를 방문한 건 단 두 번이었다. 그래서 순회공연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들러보고 싶은 나라가 프랑스였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동안엔 한 번도 찾아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언젠가 반드시 <주라산맥> 근방의 아버지 고향을 찾아보리라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렇게 멀리 여행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공연을 하다보면 거기에 전념해야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이 남자처럼 검게 그은 올리브색 피부와 어두운 색 눈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키도 별로 크지 않았고 호리호리해서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애니는 아버지에게서는 검은 머리를, 피부색과 녹색의 눈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어렸을 때는 엄마처럼 금발머리였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의 개성을 모두 물려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오히려 아버지를 좀 더 닮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열 한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숭배하다시피 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의 어린 시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특히 어머니가 일 년도 안 돼 재혼함으로써 그 충격은 더욱 컸다. 애니는 새아버지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계부인 버나드 테일러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마저도 그녀를 그렇게 대했다.

조이스 테일러는 딸이 전 남편이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재혼한 자신을 비난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딸의 공개적인 비난에 분개했다. 그녀는 재혼한지 2년이 지나 아들 쌍둥이를 낳았고, 그 애들에게 온 정성을 기울였다. 그녀는 늘 남자의 여자였으며, 불친절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딸에게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아들들에게만 관심을 쏟았다.

버나드가 애니를 때리기 시작했을 때도 조이스는 그를 말리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애니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네가 그에게 잘 했더라면 그 역시 잘했을 거야. 다 네가 자초한 결과야."

열네 살 무렵부터 애니는 될 수 있는 한 밖에서 머물려고 애썼다. 버나드를 싫어하는 만큼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서 자라 집을 떠나도 될 날만을 기다리며 살았다. 필립이 가수의 길을 제안하자 그녀는 짐을 챙겨 집을 떠났다. 어머니가 자신을 그리워하지도 않을 것이며, 계부와 이복동생들도 그녀가 떠나는 걸 반기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며 돈을 빌리려고 그녀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녀의 모든 재정문제는 필립이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처리한 것도 필립이었다. 그후 그들이 콘서트에 찾아온 적이 있어서 그들을 잠깐동안 만나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사라져 버렸다. 필립이 더 이상 돈을 줄 수 없다고 확실히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난 시절의 불행한 기억으로 괴로웠기 때문에 오히려 안심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지만 않았더라면 어머니가 버나드 테일러와 재혼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녀의 삶도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애니의 행복한 어린 시절은 열한 살로 끝났고, 그 후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외롭고 불행하게 보내야 했다. 그 시절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울했다. 그녀는 추억을 저 편으로 밀어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 아주 조용하군." 운전사가 말을 꺼내자 그를 바라 봤지만, 그의 옆모습과 늘어진 속눈썹만이 보였다.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요. 내가 도착하지 않으면 친구들이 무척 당황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궁금해 할 거라구요."

"그들은 곧 알 수 있을 거요." 냉정한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주춤했다.

"무슨 뜻이죠? 그들에게 전화를 했나요?" 뭐라고 말했다는 거지? 그녀가 납치됐다고 말하고 거액의 몸값을 요구한 걸까?

그녀는 힐끔힐끔 그를 보는 대신에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싶었다. 사람의 눈은 그들에 대해 많은 것을 얘기해 준다. 그러나 이 남자는 아니었다. 그의 눈은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바닥이 없는 우물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어떤 친밀감이 느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미리 전화를 걸어서 무의식적으로 친숙하게 느끼도록 계획을 짠 것일까?

차는 속력을 늦춰 오른쪽으로 커브를 틀어 지금껏 달리던 도로를 벗어났다. 그리고 나무와 풀이 무성한 꼬불꼬불한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이건 도로가 아냐! 그녀는 그 길이 집으로 들어가는 차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후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 크지 않은 단독주택으로 지붕의 분홍 타일에는 이끼가 껴있고, 벽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창문마다 검은 색이 칠해진 셔터가 있는 이층집이었다. 집 주변에는 나무와 정원이 있었다.

차가 현관 앞에 멈추자 애니는 주변에 다른 집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 집이 숲 가장자리에 서 있는 걸 보고 풀이 죽었다. 집 뒤로는 숲이 펼쳐져 있었고, 집 앞에만 얼마간의 평지가 있을 뿐이었다. 이보다 더 고립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집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신경이 날카로와 지고 내부의 공포감이 커져가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주기 위해 차를 돌았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그를 도전적으로 보면서 완강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안 내릴 거예요. 다시 파리로 데려다 줄 때까지 꼼짝도 안 할거라구요. 제발 파리로 데려다줘요, 그럼 다 잊을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가 차 안으로 긴 팔을 뻗어 그녀를 붙들어 앞으로 홱 끌어냈다. 그는 보기보다 힘이 세서 그녀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거의 떨어질 뻔 했고, 다음 순간에는 허리에 감긴 팔에 들어 올려져서 차 밖으로 나왔다. 발로 차고 저항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탈출하려는 격렬한 시도를 무시한 채 그녀가 마치 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팔로 붙들어 안고 현관 계단으로 데려갔다. 그가 현관문을 여는 동안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을 깨물었다. 그는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냈지만, 집안에 들어설 때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발로 현관문을 닫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팔은 여전히 그녀의 허리에 감고서 그녀를 자신에게 밀착시켰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몸을 따라 미끄러졌고, 느리면서도 고의적인 접촉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그의 가슴을 쓸어내렸고, 허벅지가 서로 부딪혀 옷감을 통해 그의 피부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감정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전기충격 같은 흥분을 느꼈다. 격렬한 육체적인 욕망이 그녀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숨이 가빠지고 몸이 떨려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긴 검은 머리가 흩뜨려지면서 한 웅큼의 머리가 그녀의 얼굴 위로 흘러 내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아몬드 그린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겁먹은 어린아이의 눈과 같았다.

그가 그녀가 깨물었던 손을 들어 살펴보자 애니도 보았다. "피가 나잖아." 그는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아주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군."

그는 상처 위로 혀를 갖다대고 피를 핥았다. 그 모습에 애니의 신경이 따끔거렸다. 그 작은 몸짓이 그녀에게 친밀하게 느껴졌고, 미세한 떨림이 그녀의 몸에 퍼져 나갔다.

무슨 동기에서인지 몰라도 그녀에게 겁을 주고, 동시에 유혹하는 이 사내에게 납치된 것이 실제 상황이라는 걸 깨닫고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두려움을 감추려 애썼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똑바로 그를 쏘아보면서 자신이 침착하고 자신만만하게 보이길 바랐다.

"일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날 파리로 데려다 주는 게 어때요? 납치가 아주 중대한 범죄라는 것 알잖아요."

"아주 중한 범죄지."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동의했다. 조롱하는 것같은 어조에 그녀의 얼굴이 벌개졌다. "당신 나머지 인생을 감옥에서 썩을 수도 있다구요!"

"먼저 나를 잡아야 할걸." 길고 힘 있어 보이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린 검은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그가 냉정하게 지적했다. 그 가벼운 접촉이 그녀의 척추에 차가운 공포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손짓에는 부드러움과 상냥함이 담겨 있었다. 애니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가 어떻게 하려는 건지 두려워졌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방을 보러 갑시다."

위가 메슥해졌다. 그가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얼굴에 땀이 배이기 시작한 것을 눈치 챘는지 궁금했다. 그가 그녀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알아챘더라도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 후에 점심을 먹을 거요." 그가 덧붙이자, 그녀는 화가 났다.

"난 배 안고파요! 먹을 수가 없어요, 아프다구요!"

"뭘 좀 먹으면 훨씬 더 나을 거요." 그녀가 아이라도 되는 듯이 그가 말했다. "난 요리사가 아니니 대단한 음식은 아니겠지만, 샐러드와 치즈, 그리고 과일이 아주 많소. 오늘 아침에 신선한 걸로 사왔지. 괜찮은 맛이라는 걸 당신도 알게 될 거요. 게다가 기막힌 포도주도 있거든."

"난 포도주 안 마셔요!"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포도주를 안 마신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을 놓치고 있는 거요. 여기 있는 동안 그 즐거움을 맞보는 걸 가르쳐 주겠소. 신경을 가라앉히고 긴장을 푸는데 도움이 될 거요."

그것이 바로 그녀가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탈출할 기회를 엿보기 위해서는 방심하지 말고 그를 경계해야 했다.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한다면 어두워질 때까지 나무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근처의 마을까지 걸어가면 될 것이다.

"내가 진정되길 바란다면 날 내보내 줘요." 그는 아무 대꾸 없이 그녀를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그녀는 몇 발자국 걸어가 이층으로 가는 계단과 그늘진 홀을 둘러보았다.

"당신 집인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눈빛을 보고 그의 집이 아닌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봐요, 뭐라고 불러야하죠? 아직 당신 이름도 안 가르쳐 줬어요. 최소한 뭐라고 부를지는 알려줘야죠. 그냥 아무개 씨라고 불러요?"

그는 주저하듯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무뚝뚝하게 말했다. "마크요."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 때문에 그게 본명인지는 물어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마크," 그녀가 이름을 한번 되뇌어 보았다. "당신 프랑스인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가 그녀를 놀렸지만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냥요." 그녀는 그들을 둘러싼 정적에 귀를 기울였다. 차 소리조차 나지 않는 가운데 집 뒤의 숲에서 끊임없이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왠지 그 소리가 친밀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그녀는 그 소리가 어느 날 밤이던가 꿈 속에서 들었던 바다 소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파도 소리도 아니었다. 바람결에 속삭이듯 바스락거리는 수많은 나뭇가지들이 내는 소리였던 것이다.

대체 이 소리가 왜 그녀의 꿈 속에서 들린 거지?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와본 적도 없는 곳인데, 어떻게 꿈에서 이 소릴 들을 수 있었지? 아마 그가 여기서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같이 녹음이 된 것이다.

"여기서 전화를 했나요?" 그녀의 질문에 그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화는 끊겼소."

그녀는 그 말에 낙담했다. 그럼 텔레파시가 통한 것이었을까? 그가 그녀에게 전화할 때, 머릿 속에서 이 소리를 떠올리고 있었고 그것을 그녀가 들었을 것이다. 텔레파시는 전혀 두려울 게 없었다. 필이나 다이와 함께 일할 때 종종 생각이 전이되는 경험을 했었기 때문이다. 서로 의기투합하고 있다면 그런 일은 더 자주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 남자와 생각이 같지 않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왜 전화가 끊긴 거죠?" 집에 가구라곤 거의 없어서인지 말이 낯설게 울린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여긴 누군가 사는 데 같지 않았다.

"필요 없으니까."

"그럼 나한텐 어디서 전화한 거죠?"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냉담하게 바라보았다.

홀이나 방들은 창문의 셔터가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음침했다. 그녀는 얼핏 어두운 색 오크목 가구와 가죽의자, 그리고 담쟁이 덩굴과 푸른 꽃무늬가 그려진 벽지를 보았다.

"다른 사람은 없나요?"

그가 다시 한번 웃었다. "아무도 없소. 완전히 우리뿐이오, 애니."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무슨 일인지 만이라도 얘기해 줘요. 날 왜 여기에 데려왔냐구요? 돈을 원하는 거예요? 나를 보내주기 전에 회사에 전화해서 거액을 요구하면 되잖아요." 흥분해서 그녀의 머릿속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필립이 돈을 지불한다 해도 날 보내 줄까? 살아있는 채로?

그녀는 이미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납치범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밝혀지는 걸 막기 위해 희생자를 죽이지 않았던가? 공포가 위를 조여왔고 고통스런 떨림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이건 돈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오!" 그의 내뱉는 듯한 말에 그녀가 그를 쳐다보았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가 그녀에게서 바라는 것이 대체 뭐지?

"그럼 왜 날 여기에 데려온 거죠?" 그녀는 조그만 단서라도 찾으려고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강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얼굴 선은 그녀의 긴장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정말로 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있는 거 아녜요?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지를 물었죠? 대답은 `아니'에요. 전에 만난 적도 없다고 확신해요. 난 기억력이 아주 좋아요. 그러니 우리가 만난 적이 있다면 생각이 났을 거예요."

그의 검은 두 눈이 최면을 걸듯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기억하게 될 거요, 애니. 기다릴 수있소. 난 이미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소."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몸이 다시 떨려왔다. 조심하지 않으면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를 그가 깨닫게 될 것이다. 눈치 채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는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애니, 그만하고 이층으로 갑시다. 방을 보여주겠소."

그녀는 발을 꼭 붙이고 서서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이층으로 가려는 그에게 저항했다.

"내 의사에 반해서 날 여기에 잡아둘 수는 없어요. 그러니 그만둬요. 프랑스에선 유괴에 대한 형벌이 어떤지 몰라도, 수년간을 감옥에서 썩고 싶지는 않겠죠? 이봐요, 단지 나를 더 알고 싶은 거라면, 점심을 같이 하겠어요. 그러면 나를 다시 파리로 태워다 줄 수 있죠? 거기서 다시 당신을 만나보면 되겠군요. 공연 티켓을 줄게요. 그리고……."

그의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군. 내 생각엔 당신이 나와 만날 약속을 하더라도, 내가 만나게 될 사람은 경찰같은데? 난 바보가 아니야, 애니. 여길 떠날 수만 있다면 무슨 약속이라도 할 준비가 돼 있잖소?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게 아니오, 애니. 그런 식으로 보지 말아요." 그의 말은 설득력 있었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렇다면 제발 날 보내줘요, 마크. 부탁이에요."

그는 창백한 그녀의 손가락을 붙잡고 내려 보더니, 천천히 자신의 그을은 손가락과 깎지를 꼈다. 애니는 불현듯 다가오는 어떤 느낌에 사로잡혀 깜짝 놀랐다.

"아직은 안 돼. 내 손님으로 잠깐만 있으면 돼요. 파리보다도 여기가 훨씬 편안하고 평온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요. 밖에서 기다리며 만나달라고 소동을 피우는 열성 팬들도 없고 걸려오는 전화도 없을 거요. 걱정은 그만하고 즐겨봐요." 그녀는 냉정하게 그를 관찰했다. 그녀가 침착하게 우호적으로 애써본다면, 그가 분별력을 갖도록 설득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뺐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버려 두었다. 애니는 그가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것을 의식하며 위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기요." 그는 층계 근처의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문지방에 멈춰 서서 그가 어두운 방을 가로질러 유리창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창문을 열어 셔터를 올리자 빛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를 쳐다보던 그녀는 갑작스런 햇빛에 눈이 부셔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충격과 경악, 혼란이 뒤범벅이 된 이상한 섬광을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아주 기묘한 감정이 일었다. 그것이 사라지자 그녀는 크게 확대되어 멍해진 초록색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마치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안다는 듯, 그녀의 생각이나 감정을 읽은 듯 호기심어린 열정을 가지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것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건 아주 위험스러웠다. 이제부터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애니?"

"욕실이 어디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녀가 물었다.

그의 한숨 소리를 들린 것 같다. 그가 몸짓으로 가리켰다. "저 문을 통해서 가요. 난 내려가서 점심준비를 하겠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요. 나중에 차에서 당신 가방을 가져다주지. 점심 먹고 짐을 풀어요."

그녀는 그가 계단의 끝에 다다르는 소리를 기다렸다가 창문으로 가 보았다. 여기서부터 땅까지 얼마나 될까? 가까이에 배수관이 있으면 그걸 타고 내려갈 수 있을 텐데.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는 배수관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것이 욕실 바깥쪽에 있는 것이었는데, 욕실의 창문은 그녀가 통과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그곳에서 땅바닥까지도 아주 먼 거리처럼 보였다. 그녀는 창문으로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지거나 하는 위험을 무릅쓰기는 싫었다. 영화에서 배우들이 천을 이어묶어서 그것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거라면 그녀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된다. 바로 아래쪽에서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며,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부엌인 것 같았다. 지금 탈출을 시도한다면, 그가 즉시 알아챌 것이다.

욕실은 아주 잘 꾸며져 있었고 화장품과 욕실용품들이 잘 갖춰져 있었다. 애니는 씻고 나서 가능한 한 덜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일부러 맨얼굴 그대로 두고, 긴 검은 머리는 머리 뒤에서 둥글게 묶어 올렸다.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던 그녀는 커다란 눈동자에 어린 흥분을 보고 재빨리 돌아섰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매력을 인식한다는 것은 아무리 머릿속의 생각이라 해도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것이다. 사실 매력적인 것 이상이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부터 그녀는 그에게 매혹되었고, 그건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겁먹지 말라고,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계속 말하겠지만, 그가 그녀를 납치해서 강제로 여기에 데려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왜 그런 것일까? 일이 어떻게 될지 그녀는 생각하기가 두려웠다.

그는 미친 걸까? 그들이 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봐도 그렇잖아! 그래, 둘중의 하나가 제정신이 아닌 거야, 그렇지만 난 아냐. 그녀는 오늘 이전에 그를 만난 적이 없다고 100퍼센트 확신했다.

그녀는 그가 셔터를 올렸을 때, 스쳐지나가던 현기증을 생각했다. 꼭 전에도 한번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아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지? 잠깐 동안 그녀는 뭔가가 떠오를 것 같은 생각에 사로 잡혔다. 그러다 그녀는 화가 나서 생각을 저쪽으로 밀어냈다. 지금 그녀는 그가 바라는 대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환상 속으로 그녀를 이끌어 가게 나둬서는 안 된다. 같이 미쳐버릴 테니까.

좀 진정이 되자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문을 열자 금색 가구와 흰 벽에 빨강과 흰 색의 줄무늬 커튼으로 장식된 부엌이 한 눈에 들어왔다. 창의 선반에는 히야신스가 담긴 꽃병이 놓여있었다. 부엌은 온통 꽃과 커피의 향기로 가득했다.

그녀가 입구에서 머뭇거리고 있자 마크가 돌아보았다. 그는 눈을 좁히며 그녀의 얼굴이며 머리를 살펴보더니, 빈정대듯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꼭 열다섯 살짜리 같군!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거요?"

"맘대로 생각해요." 그녀는 그의 눈을 피하며 새침하게 말했다.

그가 그녀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거두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말했잖소, 날 두려워 할 필요 없다고. 돈 때문에 당신을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해치지도 않을 거요. 당신에게 갑자기 달려들지도 않을 거요. 당신이 원하지 않는 강제로 어쩔 생각은 없소."

그녀의 뺨이 달아올랐다. "날 강제로 데려와서 억지로 여기 있게 하고 있잖아요!"

"당신을 충분히 내 옆에 둘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소." 그가 냉정하게 말했다.

"뭘 위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죠?"

"당신이 나를 알 수 있는 시간. , 이리 와서 앉아요. 점심을 먹읍시다."

그가 방금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하느라 멍하니 식탁에 앉아 그가 차려놓은 음식을 보았다. 커다란 그릇에 드레싱을 얹은 야채샐러드, 검은 올리브와 완전히 익힌 계란, 토마토가 놓여 있었고, 바둑무늬 천이 깔린 빵 바구니, 그리고 프랑스 치즈를 담은 접시, 과일 등이 준비돼 있었다.

그때까지는 시장한 줄 몰랐는데,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보니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마음껏 들어요." 그가 맞은편에 앉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아보카도와 상추, 오이, 피망이 들어간 샐러드와 계란, 토마토, 올리브, 흰 프랑스 치즈인 브리, 그리고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빵을 가져왔다.

"음식이 변변치 못해 미안하오."

"아주 맛있어요. 난 늘 피크닉을 좋아했죠. 꼭 실내 피크닉 같잖아요."

"그렇지만 피크닉 음식은 야외에서 즐겨야 제 맛이 나지." 그녀의 잔에 백포도주를 따라주면서 그가 말했다. 그 순간 애니는 또다시 전에도 이런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당황했다.

애니가 훅하고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시자, 그가 긴장해서 그녀를 바라봤다.

"애니?"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떠 멍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가 그녀와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뭘 느꼈는지 말해봐요."

"모르겠어요. ,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 뭔가 있었소." 그의 검은 눈이 빛났다. "당신은 기억하기 시작한 거요."

 

3

"대체 우리가 언제 만났다는 거죠? 이따위 장난, 당장 집어치워요!" 애니의 감정이 폭발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포도주나 맛봐요."

"영국에서였나요? 런던인가요?"

"지금은 때가 아니오. 당신은 기억해 낼 거요." 그러나 그녀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스치는 생각과 부드러워지거나 꽉 다물거나 하는 입술 등 그의 표정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그들이 영국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그들이 만난 곳은 영국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 어디서였을까? 그녀는 알아내기로 작정했다.

"미국?" 그가 머리를 저으며 웃었다. 애니는 아직까지 가 본 나라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여기, 프랑스군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다. "그렇죠?" 그녀가 천천히 물었다.

"당신도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군." 열정과 흥분이 어려 깊고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이번에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그녀였다. 그럴 수가 없었다. 갑자기 얼굴에 홍조가 밀려와 눈을 내리깔았다.

마침내 쉰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난 정말 생각나지 않아요, 정말 미안해요. 프랑스엔 두 번 왔었는데, 아마 그때 여행 중에 만났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왔을 때 친구와 그애 여동생과 함께 노르망디에서 2주간 머물렀을 때예요. 우린 바다 바로 옆의 멋진 호텔에 머물렀죠. 그해 여름은 무척 더웠어요. 해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거기서 만난 거죠?"

그는 고개를 저으며, 의자 뒤로 기대앉더니 와인을 홀짝였다. 눈꺼풀이 눈을 반쯤 덮고 있었고 두 다리는 옆으로 쭉 뻗었다. 애니는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의 셔츠 아래로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들썩이는 근육의 움직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의 허리와 히프는 아주 날씬했는데 긴 다리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가 좋아하는 타입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길고 유연한 그의 몸은 아주 섹시했다.

눈을 위로 향한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애니는 시선을 돌렸지만, 얼굴이 더욱 빨개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우리가 만난 곳은 어디죠? 우리가 만났던 곳을 알면 더 쉽게 기억할지도 몰라요. 왜 말하지 않는 거예요?"

"나의 도움 없이 기억해야 하니까." 그가 냉담하게 말했다.

"왜죠?"

그는 그 질문을 무시하며 손짓을 했다. "어서 샐러드를 좀 먹어봐요. 너무 핏기가 없어 보여요. 그래서 그렇게 시무룩한 건지도 모르지."

"내가 기분이 안좋은 건 당신이 나를 납치했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반박했다. 그리고 와인 잔을 집어 들어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천천히 마셔요. 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빨리 마시다간 곧 취해 버릴 거요."

그녀는 식탁 중앙에 놓여 있는 술병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병을 잡기 전에 마크가 먼저 들어 그녀 잔에 반을 채우더니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더 마시기 전에 먼저 뭘 좀 먹어요. 빈 속에 술을 마시는 건 어리석은 짓이오."

"명령 좀 그만할 수 없어요?" 그리고 그녀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치즈와 빵, 그리고 레몬, 허브, 식초, 오일을 섞은 알싸한 드레싱을 얹은 샐러드 등 모든 것이 다 맛있었다. 이렇게 왕성한 식욕은 지금까지의 긴장 탓인 것 같기도 하고, 포도주 때문인 것도 같았다.

과일을 좀 먹고 나서 커피를 마셨는데, 여태까지 애니가 마셔 본 것 중 최고였다.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그가 씽긋 웃었다.

"고맙소. 비결은 원두에 있소. 커피를 마실 때마다 필요한 양만큼만 갈면 돼요. 그렇지 않으면 맛이 덜하지."

"난 집에서 인스턴트커피를 마셔요." 그녀의 고백에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인스턴트? 그건 비교가 안 돼지."

"그렇겠죠. 하지만 신선한 커피를 만들어 마실 시간도 또 에너지도 없어요. 매일같이 엄청난 양의 일을 하거든요. 집에 갈 때쯤이면 완전히 지쳐서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그냥 쓰러져 편안히 TV, 잡지나 보고, 오랫동안 목욕이나 하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도 팝스타들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나요? 단지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놀기나 하고, 진짜 노래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을 거라고 말이에요. 그건 사실이 아녜요. 우리들 모두 자신의 일을 알고 있고, 다들 아주 열심히 일하죠. 똑같은 곡을 되풀이해서 연습하고, 특정한 부분은 잘 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해야 해요. 마침내 녹음에 들어가도 녹음작업 하는 사람들이 만족할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죠. 굉장히 지치는 일이에요. 목은 끔찍하게 아프구요. 순회공연이라도 하게 되면 더 끔찍해요. 매일같이 연습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밤이면 라이브 공연을 해야 하고, 나라를 가로질러 여행을 하거나 대륙을 건너기도 하죠. 있는 에너지, 없는 에너지까지 다 쏟아 부어야 한다구요."

"난 단지 인스턴트 보다는 신선하게 갈아 마시는 커피가 더 낫다는 걸 말했을 뿐인데. 당신의 생활방식에 대한 공격은 아니었소." 그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웃었다. 긴장이 풀렸다. "이런, 미안해요. 얼마 전에 인터뷰를 했는데, 글쎄 그 기자가 직업가진 여성들이 가족들에게 진짜 음식대신 전자렌지용 음식을 사다가 요리를 해준다면서 그들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구요.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린 크게 언쟁했고, 그 사람은 날 완전히 뭉개는 기사를 썼죠." 그는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반쯤 감은 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신 삶에 남자는 없지 않소? 아니면 여태껏 그를 감춰놓은 거요?"

그녀는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의 열기와 길고 가는 몸에 흐르는 긴장이 느껴졌다. 목 뒤가 뻐근해졌다. 누군가 그녀를 이렇게 완전히 옭아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팬들은 종종 강박관념적인 집착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스타는 항상 동경하며 멀리서 숭배할 수 있는 성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애니에게도 그런 환상 속에 있는 팬들이 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했던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때때로 존 레논의 죽음에 대한 악몽을 꾸기는 하지만, 팬들에 대해 육체적인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자신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또한 아직은 그런 광기를 불러일으킬 만한 세계적인 스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집이나 스튜디오주변에서 그녀가 모는 차를 응시하면서 그녀를 뚫어지게 보는 남자 팬을 볼 때면 늘 섬찟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녀가 대답을 않자, 그가 긴장하며 다시 물었다. "연인이 있소?"

대답을 않으려고 했지만, 어두운 그의 눈빛에 입고 말았다.

"없어요." 속삭이는 그녀의 말에 그가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이 만족의 빛을 띠었다. 그녀는 서둘러 일어나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마크도 그녀를 도와 식기 세척기에 접시를 넣는 법과 작동시키는 법을 보여 주었다. 부엌이 얼룩하나 없이 깨끗해지자 그가 말했다. "차에서 가방을 꺼내다 주겠소."

함께 부엌을 치우는 동안 그가 아주 이성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그에게 간청해 보기로 했다. 초록색 눈을 크게 뜨고 달래듯이 말했다. "제발 날 파리로 데려다 줘요. 이건 옳지 못해요. 벌써 친구들이 나를 찾기 시작했을 거예요. 경찰을 부를 거라구요."

"내일까지 당신을 기다릴 사람은 없을 거요." 그가 냉랭하게 알려줬다. "호텔엔 당신이 하루나 이틀정도 친구를 방문한다고 일러뒀소."

그녀가 날카롭게 숨을 들이쉬었다. "누가 그랬다는 거죠? 당신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이층에 있을 동안 차에서 호텔로 연락했소."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큰 희망은 갖지 말아요. 내 차는 안전장치가 돼있고, 차 열쇠는 항상 내가 몸에 지니고 있으니까."

"날 얼마나 오래 여기에 가두어 둘 거죠?"

"오늘밤만."

몸이 굳어지며, 심장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오늘밤 그녀를 위해 계획한 것이 무엇일까? 혼란스런 생각 속에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떨렸다. 그가 그녀에게 내용을 떠올리자 본능적인 리듬이 혈관을 달렸다. 그는 그녀를 납치해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러니 그 말은 명백히 오늘밤 그녀를 소유하겠다는 의미였다.

애니는 위가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를 저지할 기회가 있을까? 그녀가 싸우기에 그는 너무 크고 힘이 셌다. 경쟁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가 눈치 채기 전에 무거운 물건으로 그를 내려치는 정도일 것이다. 육체적인 폭력을 가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창백해 졌다.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피를 흘릴 것이고, 죽을 수도 있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호텔에 뭐라고 했든, 매니저가 와서 내가 없는 것을 알면 당황할 거예요. 그는 내게 프랑스인 친구가 없는 걸 알아요."

"당신 매니저는 지금 신혼여행 중이잖소? 그가 신혼여행을 단축시킬 일이라도 있는 거요? 그가 결혼한 여자, 다이애나 애보트는 당신과 함께 살았었지."

애니는 그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드러날 때마다 충격을 받았지만, 그가 냉정하게 다이애나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녀의 결혼까지 언급하자 화가 치밀었다. "그래요." 그녀가 짧게 대꾸했다. "당신이 어떻게 그모든 걸 알았는지 물어봐선 안 돼는 거겠죠?"

이 상황이 즐거운 듯 그가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 "신문을 읽었소. 거기에 다 있더군, 당신 기사가 나온 신문을 안 읽소? 결혼식에 대해서도 보도됐었소. 모든 기사에 신부, 다이애나 애보트가 당신의 오랜 친구이며, 수년간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당신의 팬레터 관리나 언론쪽 일 등 당신과 관련된 모든 일을 처리해 왔던 비서 겸 보디가드라는 얘기가 나왔더군. 한두 신문에서는 당신이 혼자 살게 될지 그녀의 일을 대신할 새로운 사람을 구할지에 대한 추측까지도 실었더군."

애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날 밤 내게 최초의 전화를 했어요, 결혼식 직후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은 내가 돌아오면 아파트에 혼자 있는 걸 알았겠군요? 모두의 관심이 됐던 결혼식, 그런 감정적인 날 직후에 내가 당신의 음산한 메시지에 무방비 상태이길 기대한 거죠?" 그녀는 그를 경멸하듯 보았다. "그건 아주 야비하고 고의적인 거였어요, 안 그래요? 내가 혼자 있고 침울한 때를 틈타 내게 공포심을 주려는 것이었어요. 당신, 새디스트예요? 여자를 겁주면서 흥분을 느끼는 거예요?"

"겁을 주려고 전화한 게 아니오. 단 두 마디뿐이었잖소." 그가 그녀를 응시하더니, 그 말을 되풀이했다. "날 기억하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처럼,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러 내렸다.

"이 말에 왜 겁을 먹지?" 그의 말이 옳았다. 그 두 마디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어패가 있었다. 그 말은 협박같지도 않았다. 그 묘한 메시지를 듣고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에게조차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에서, 그녀는 그 말, 어조, 목소리에 충격을 받았다. 꿈속에까지 나타났고 다음에 걸려 온 전화들은 첫번째 전화의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만날 거라는 그의 약속은 실현됐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어요." 그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런 효과가 있을지 몰랐다거나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말은 말아요. 난 당신이 의도적으로 그랬다고 확신해요. 자신이 의도한 바를 철저히 성공시키고 또 기회도 놓지지 않다니, 당신 정말 놀라워요."

"때를 신중히 고른 것은 사실이오." 뻔뻔스럽게도 그가 인정했다. "당신과 함께 살던 친구가 유럽공연을 떠나기 직전 결혼을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난 지금이 당신에게 접근할 절호의 기회임을 알았지."

"날 납치한 걸 말하는 것이겠죠!"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일을 준비했을지 궁금해 하며 그녀가 되받았다. 그녀는 이 모든 것 뒤에 놓여있을 그의 강박관념과 환상에 생각이 미치자 몸서리가 쳐졌다.

"다른 방법이 없었소."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의 밝은 초록색 눈동자는 걱정스레 그를 주시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까지는 합리적이고 분별있어 보였다. 그가 덧붙였다. "난 당신과 말을 해야 했소. 당신의 유럽 순회공연이 곧 시작된다는 것과 프랑스에 아주 잠깐 동안만 있을 거라는 걸 알았소. 그러고 나면 자유시간이라곤 거의 없는 여행을 수 주간 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소. 그러니 당신 동료들이 당신과 합류하기 전인 이 이틀간이 내가 당신과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소."

"단 이틀간이라뇨?" 그녀는 그를 쳐다보며 천천히 되뇌었다. "그 다음엔 날 파리로 돌려보내 준다는 건가요?" 그녀는 여전히 그를 믿기가 두려웠다.

"내일 밤이면 파리에 도착할 거요."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거예요?" 그녀가 반박하자, 그는 뭔가 심각히 생각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믿어요.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소. 당신 동료들이 당신을 찾을 무렵이면 당신은 호텔에 안전하게 돌아가 있을 거요. 우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간에 말이오."

마치 총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간에? 너무 놀라서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몸속으로 전율이 흘렀고, 일어날지도 모르는 충격적인 영상이 떠오르자 그녀는 눈을 내리 깔았다. 그녀 위에 놓인 유연하면서도 강한 힘을 지닌 벌거벗은 그의 황갈색 몸뚱이, 그녀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 그리고 그의 입술은…….

자신의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엉뚱한 상상에서 깨어나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런 것을 상상하다니, 대체 그녀는 어떻게 돼가는 것일까?

그녀는 그런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 그녀의 마음인지 육체인지 궁금해졌다. 불과 몇 센티 떨어진 곳에서 그가 격렬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그와 자신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상상한 것은 그녀의 육체가 감각적으로 그에게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음과 육체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니까. 그러니 그 둘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 신경과 감각기관, 피와 세포, 이 모든 것들이 하나를 형성하는 부분이다. 그중 하나를 건드리면 결국 그것들 모두를 건드리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이 남자는 단순히 그녀를 아는 것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육체와 정신, 전부를 소유하길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화가 나서 저항하려 하지만 놀랍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하는 내부의 욕망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가방을 갔다 줄 테니 오늘밤 필요한 걸 꺼내도록 해요." 부엌을 나서며 그가 냉담하게 말했다.

애니가 그를 쫓아 홀로 나가자, 현관문 앞에서 멈춘 그가 돌아서며 말했다. "이층에서 기다려요. 가방은 내가 가져다주겠소."

그는 당연히 그녀가 탈출을 시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주저하듯 계단을 오르자 그는 현관에 서서 그녀가 방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녀는 구두굽이 소리로 그가 차에 다가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많이 가지도 못하고 그에게 붙잡힐 거라는 상식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대신에 그녀는 얌전히 같은 층에 있는 다른 방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정면에 있는 큰 침실은 그의 방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셔터가 내려져 있어서 오후의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방안을 침침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호기심 때문에 문에 서서 방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맞은 편 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그만 몸이 굳어버렸다. 그것은 거울에 비친 모습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십대들 취향의 영국 음악 잡지에 실린 실물크기의 컬러 포스터였다. 그는 그것을 그의 침대 맞은 편에 붙여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 사진이 방에 있는 유일한 사진은 아니었다. 아찔해져서 벽을 천천히 둘러보던 그녀는 사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공간에 그녀의 얼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레코드의 재킷에서부터 잡지에 난 사진, 신문 기사, 그녀를 스케치한 것, 수채화, 유화, 그리고 그녀의 사인이 든 흑백 사진까지 있었다.

이런 일을 하는 팬들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이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으며, 당연히 그런 팬들은 자신들의 우상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십대 즉, 어린 아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어른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 사이의 아이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십대가 아니었다. 그의 망상은 도를 지나쳤다. 충격 때문에 그녀는 얼어붙는 것 같았고,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미친 게 틀림없어!

세상에 이럴 수가, 당장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때 계단을 올라오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그녀의 방으로 돌아갈 시간은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이 묵을 방 앞에 잠시 머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그곳에 없다는 것을 즉시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마룻바닥의 삐꺽거리는 소리로 그가 가방을 내던지고 자신의 방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냄새와 그가 몰고 온 차가운 공기, 그리고 애프터 셰이브 로션 냄새인 것 같은 소나무 향기로 그녀는 그가 바로 뒤에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몸이 떨려왔다.

"내 방을 찾았군."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이 잘 볼 수 있도록 불을 켜야겠지."

그가 전깃불을 켜자, 그녀는 부셔서 눈을 깜빡였다.

"당신 레코드를 모두 모았소."

그녀는 창문 밑에 있는 커다란 스피커가 딸린 값비싸 보이는 오디오를 보았다. 그리고 선반에는 컴팩트디스크와 싱글 음반, 테이프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들이 놓여 있었다.

"저게 전부 내 것이라구요?" 선반에 있는 것은 수 십개는 족히 돼 보였다. 그녀는 그렇게 많이 취입하지는 않았다.

"언어가 다른 거요. 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그리고 미국 버전도 있소. 다들 영국

버전과 표지는 똑같더군." 마치 그가 이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이기라도 한 양, 그의 어조는 일상적이고 전문적으로 들렸다. "난 영국 버전을 제일 좋아하오. 그게 진짜 오리지널이고 가장 잘 된 것이니까. 그래도 난 프랑스판을 듣는 걸 즐기지. 프랑스 버전으로 하나 들어보지 않겠소?"

"아뇨, 그만둬요!" 그녀가 외쳤다.

"자기 노래 듣는 걸 좋아하잖소?" 그의 얼굴은 놀리는 빛을 띠었지만 놀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알아낸 것이겠지만 그가 그녀의 사생활의 어디까지를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건 일이에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작업을 할 때는 그걸 즐기면서 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요. 떠올리고 싶지 않아요."

"내 방이 마음에 드오?" 그녀는 그의 완곡한 질문이 사실은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녀의 사진에 대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대답하기는 싫었지만, 이미 그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그는 그녀가 대답을 할 때까지 계속해서 물을 것이다.

"저 그림들은 누가 그린 거죠?" 그의 대답을 듣고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내가 그린 거요."

가까이에 있는 자그마한 스케치를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그 방에서 가장 큰 유화의 밑그림이었다. 그녀가 주저하듯 말했다. "아주 훌륭해요. 그림을 그려요? 화가인가요?"

그는 짐짓 찡그리는 표정을 지으며 검은 속눈썹 사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술 학교를 일년간 다녔었소. 내 인생을 걸 만큼 재능이 없다는 걸 알고 포기했지. 그렇지만 지금도 그림은 즐겨 하고 있소."

그가 말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침대 옆 낮은 탁자 위에 놓인 은 테두리가 장식된 액자를 발견했다. 나무가 울창한 가파른 언덕에 접해있는 목초지에 세워진 스위스 풍의 아담한 집이 있고, 그 바깥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애니는 액자를 집어 들어 가까이서 오랫동안 보았다. 사진에는 모두 세 명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지금보다 젊은, 20대 초반의 마크였고, 웃고 있는 다른 두 사람은 검은 머리에 그을은 피부를 한 중년의 남자와 여자였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본 애니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긴 하지만 사진 속의 남자와 마크가 닮았고 생각했다. 이분들이 그의 부모님일까? 그럼 이 사진은 어디서 찍은 거지?

"아주 멋진 곳인데요. 어디죠? 스위스인가요?"

그가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거긴 프랑스요. 쥬라 산맥 근방이지."

그녀는 머리를 홱 돌렸다.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쥬라>? ……정말 놀랄 일이군요. 아버지 고향이 거기거든요."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고 있소."

그녀도 그럴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그가 모르는 부분이 있기나 한 걸까? 그녀는 다시 사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럼 이분들이 부모님이신가요? 아주 많이 닮았어요."

그가 웃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똑같다는 얘길 많이 듣소."

"근데 쥬라에선 뭘하고 있었던 거죠? 휴가를 보내는 건가요? 등산을 했어요?" 그의 부모님은 강인하고 바깥생활에 익숙해 보였다. 그녀의 가족이 그곳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로 휴가를 보내러 간 걸까? 그녀는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빽빽한 소나무 숲과 여름 날의 향기, 그리고 봄과 여름이면 야생화가 가득 피고, 소떼들로 가득 찬 계곡 사이의 목초지를 뛰어다니던 일 등 고향에 대한 향수어린 추억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쥬라를 찾아가 본 적은 없었다.

"난 거기서 태어났소."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해서 그녀는 잠시동안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가 반복했다. "쥬라에서 태어났다구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한 우연의 일치군요."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과 같은 곳 출신이라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 그녀에게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을까? 팬들은 아주 사소한 사실을 부풀려서 그것을 대단한 예시나 암시처럼 만들어 버리곤 한다.

그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 이건 우연이 아니오. 되풀이 되는 것이지."

그 말에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되풀이라뇨?"

"운명의 되풀이, 당신은 운명을 믿지 않소, 애니?"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녀는 서둘러 말했지만, 엄밀히 말해 진심은 아니었다. 물론 그녀도 운명이나 숙명, 혹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야기되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 그것을 뭐라 부르던 간에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인생은 불가해하고 놀라운 대립의 연속이었다. 그녀의 직업도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하게 된 것이었다. 미래를 위한 진정한 계획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즐기며 살아 온 그녀의 인생에 필립이 걸어 들어와 그녀의 인생을 관리하며 직업을 주었고, 이제 그녀를 국제적인 스타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필립의 인생 역시 운명의 영향을 받았다. 그녀를 돌볼 다이애나를 처음 발견한 것은 필립이었지만 그러고서 수년이 지나도록 그는 다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었다. 그 두 사람이 미국의 한 가운데서 폭설에 꼼짝도 못하게 묶여 사랑에 빠질 기회를 갖도록 끼어 든 것도 오직 운명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녀는 운명과 숙명을 믿었다. 그렇지만 미친 게 틀림없는 이 남자의 말에 동의하기는 싫었다. 그둘이 서로 운명적으로 얽혀 있다고 믿도록 그를 부추기고 싶지도 않았다.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떠올라 그녀가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난 그곳에 가본 적이 없어요. 우리가 거기서 만났다고 착각하는 거라면요."

깊고 어두운 눈빛이 그녀의 눈을 붙잡았다. "우리가 만났던 곳은 거기요."

"말했잖아요, 거기에 가 본 적 없다고!"

"기억하게 될 거요." 단지 그 말뿐이었다. 애니는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

"잘 들어요. 우린 결코 만난 적이 없어요, 난 쥬라에 가본 적도 없다구요."

 

4

애니는 화가나서 격렬하게 외쳤지만, 그것은 금방이라도 그녀가 그의 말을 믿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고, 애니는 계속 반신반의 하고 있었다. 그를 만났던 걸 잊을 수도 있을까? 그녀가 쥬라에 갔었던 걸 잊어버린 걸까?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것을 잊을 수 있는 거지? 그렇지만 그럴 수도 있잖아? 사람들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회복되더라도 모든 것이 생각날 때까지 인생의 몇 일, 몇 주일, 혹은 몇 달간의 기억을 잃어버리기도 하잖아. 그녀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녀는 집을 떠나 필립과 다이애나와 함께 일을 하기 시작한 이후의 일들을 떠올려 봤다. 그러나 아주 짧은 기간이라도 그들과 떨어져 있었던 때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만약 그녀가 몇 시간 동안이라도 시야에서 사라졌다면, 분명히 뭔가 말이 있었을 것이다.

제발, 그만둬! 그녀는 화가 나서 마음속으로 격렬하게 외쳤다. 넌 그에 대한 기억을 잃은 게 아냐. 기억상실증에 걸리지도 않았어.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야. 그에게 휘둘리는 것은 이제 그만두자.

미칠 것만 같았다. 그가 그녀에게 쏟아 붓는 말들을 흘려 들으려면 상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온전한 정신으로 있어야 했다.

그녀는 돌아서서 자신이 사용할 방으로 향했다. 그가 차에서 가져온 가방들이 방문의 바로 안쪽에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지도 않은 채 가방들 쪽으로 달려 나갔다. 때는 이미 늦어서 뭔가에 둔탁하게 부딪혔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녀가 혼자 일어서기도 전에 그가 벌써 다가와 있었다. 그는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는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녀의 이마를 살펴본 그의 얼굴이 어둡게 일그러졌다.

애니는 뺨에 축축한 것이 흐르는 걸 느끼자 그것이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닦아낸 손 끝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죽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거요?" 팔을 둘러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도와주며 그가 말했다.

"몰라요." 그녀는 갑자기 자기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뾰로퉁해져서는 내뱉었다.

그녀의 가방들을 내려다보던 그가 갑자기 외쳤다. "저걸 좀 봐요! 어떻게 된 건지 가방 위에 있는 금속조각이 떨어져 있소. 꼭 톱처럼 생겼잖아! 다시 꽂을 수 있는지 나중에 살펴보겠소. 그 위로 넘어지기라도 했으면 머리가 남아나지 않았을 거요. 다음번엔 이렇게 가볍게 지나가지 않을 거요."

그녀가 방을 가로질러 나가려고 하자, 마크가 그녀를 옆에 있는 침대에 앉혔다.

"당신 머리를 닦아낼 물을 가져올 테니 여기 좀 있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그가 자신에게 불복종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명령을 내린 것에 대해 분개했지만, 머리가 아찔해지면서 현기증이 나자 그녀는 눈을 감고 말았다.

상처가 아파오자 그녀는 주춤거리며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만져보았다. 상처는 엄청 크게 느껴졌고, 뜨겁고 단단한 옥석처럼 살이 바깥쪽으로 부풀어 있었다.

"만지지 말아요!" 물을 담은 큰 그릇과 무명 붕대, 그리고 수건을 가지고 돌아온 마크가 외쳤다. 그는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가까이서 머리에 난 상처를 살펴보며 피를 닦아냈다.

"…… 괜찮을 거요. 심각하진 않아요. 상처는 조그맣고 피는 벌써 멈췄소. 그렇지만 보기싫은 멍자국은 남아있을 거요. 상처가 다 낳을 때까지 머리로 가리고 있으면 되겠군." 그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었다. "오늘밤엔 붕대를 감고 자도록 해요."

그녀는 여전히 아찔한 기분을 느꼈지만, 이번엔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상처를 살피는 동안 마크가 그녀 옆에 아주 가까이에서 무릎을 꿇고 있어 그의 몸이 그녀의 허벅지에 거의 기대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이렇게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항거하기 어려운 육체적인 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쪽으로 몸을 더 기울여 그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고, 다리 쪽으로 더 움직여오자 가슴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고 젖꼭지가 단단해졌다.

"붕대를 감아줄까?" 그가 다시 물었다.

그녀는 숨이 가쁘고 목소리가 쉬어 말하기가 어려웠지만, 침착하고 분별있는 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그녀는 그가 가까이 있음으로 해서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를 감추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그냥 나둘래요. 붕대를 감아버리면 공기가 안 통하잖아요."

그가 동의했다. "그렇겠군." 그는 잠시 동안이라도 이마를 드러내놓으라고 관자놀이 근처의 비단 같은 검은머리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의 행동에 애니는 시선을 돌려 호흡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자 그럼, 내가 의사놀이하고 있을 때 다른 상처도 보여 봐요." 그가 웃자 그녀도 머리를 젖히며 웃었다.

"됐어요, 다른 건 없어요."

"좋소."

그는 손을 닦느라 시선을 아래로 향해 숱많고 검은 속눈썹을 올리브 빛 피부에 드리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들키지 않고 그를 훔쳐볼 수가 있었다. 그가 지금 그녀에게 보여준 온화함과 자상한 배려는 그녀를 혼란과 모순 속에 빠트렸다.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와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이 남자는 거친 외모를 가졌지만, 그가 원한다면 아주 놀라울 정도로 어떤 여자에 못지않게 부드러워질 수도 있었다.

그 순간 그가 얼굴을 들었다. 너무 순식간이라서 그녀는 눈을 돌릴 사이도 없이 그의 시선에 사로잡혀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눈빛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자석에 이끌리듯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애니." 그가 속삭이며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전율이 그녀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그녀는 못 박힌 듯이 꼼짝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기대오자 그녀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숨을 멈춘 채 기다렸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자 그녀는 눈을 감으며 신음했다. 그의 입술의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녀는 그 느낌이 좋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두려울 정도였다. 그가 키스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되었다. 내버려 둔다면 결과는 뻔했다. 갑자기 두려워져서 그녀는 그를 밀어냈다.

그녀는 잠시 후 마크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눈을 뜨는 것을 보고 그 역시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우주의 블랙홀처럼 어둡고 그윽하게 빛나고 있는 그의 홍채를 보았다. 그는 한 발자국을 더 내딛어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아 끌어당겼다.

"그러지 말아요." 그의 표정을 본 그녀는 몸서리가 쳐졌다. 그의 표정에 나타난 것과 같은 욕망와 열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애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가 머리를 숙여 그녀와의 접촉에 굶주린 듯 격렬하게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는 몸을 비틀어 빠져 나가려고 했지만, 마침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는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몸을 그녀에게 밀어부쳤다. 그러는 동안 다른 한 손은 그녀의 목에서부터 허리에 이르기까지 탐험을 계속했다. 그의 손의 가벼운 애무는 그녀의 몸속에 거친 감각의 물결을 일으켰다. 애니는 전 생애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몸이 이렇게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피부가 뜨겁게 타올라서,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열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아팠고,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그의 셔츠자락을 움켜잡았다.

전엔 이런 식으로 키스해 본적이 없었다. 이것은 심지어 키스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건 마치 그의 속으로 용해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몰라서, 거의 쓰러질 것 같은 아찔한 기분에 그를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그녀의 하얀 실크 셔츠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셔츠를 밀치고 들어가 레이스 브라를 밀쳐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젖가슴을 찾아낸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애니는 목구멍 깊숙히 만족의 신음을 내며 몸을 활처럼 굽혔다.

"애니, 애니……." 그가 속삭였다. 그의 몸이 떨렸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키스를 멈추고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내부에는 아직도 흥분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다. 그가 데리고 간 새로운 세계에서 돌아오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떠 그를 바라봤다.

"누군가와 잠자리를 한 적이 있소?" 낮고 거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그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죠? 내 사생활은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그런 질문은 하지도 말아요!"

그가 계속해서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의 매니저가 당신의 연인이었다는 기사가 있더군."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신문은 늘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기사를 써댄다구요!"

꿰뚫을 것 같은 눈빛을 하며 그가 미간을 좁혔다. "전혀 근거 없는 말이라는 거요?"

그녀는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어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관자놀이의 맥박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턱을 치켜 올렸다. "필과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결국 그것은 사실이었다. 필은 그녀의 감정이 단순한 애정을 넘어서 보다 사적인 것이었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상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만약 알았다면 그걸 드러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냉철한 사업가이긴 해도 감정적인 면에서는 구제불능이기 때문이다. 애니는 그가 깨달았다는 눈치를 전혀 볼 수가 없었다. 필은 항상 사랑에 대해서는 둔했다. 자신이 다이애나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또 다이애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그렇게 오랫동안 깨닫지 못한 것도 그래서였다. 서로에 대한 사랑은 운명이 그들을 함께 묶어주기 전까지 수년간 감정의 표면아래 묻혀 있었을 것이다. 순간 애니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든 표현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감사했다. 최소한 그녀는 고통스런 기억은 갖지 않은 셈이니까.

"그렇더라도 그가 당신의 친구와 결혼했을 때, 기분이 어땠소?"

"난 신부 들러리였어요! 그들을 위해서 기뻐하지 않은 적이 없다구요!" 그녀의 눈이 반항으로 크게 떠졌다. 그가 건지려는 것이 그것이라면 그는 더 이상 개인적인 추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 기자예요?" 그녀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갑자기 떠오른 그 생각이 사리에 맞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핵심을 찌른 것이 아닌가 하여 날카롭게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아니, 난 언론에 종사하지 않소."

"그럼 뭐예요, 직업이 있을 거 아니에요?"

"난 사업가요."

"어떤 일을 하는데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신경 쓸 문제가 아니오……."

"당신이 질문을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어요!"

"당신이 대답을 회피하면, 나도 그럴 수 있소!" 그가 웃으며 놀려댔다. "당신의 매니저에 대해 말해 봐요, 그 사람 아주 매력적이라고 들었소. 또 열 일곱 살 이후로 당신 인생을 관리한 게 그 사람이라는 소리도 들었소. 데이트는 말할 것도 없고 혼자 어디 나가는 것도 안 되고, 노래하지 않을 땐 가둬둘 정도로 당신에 대한 소유욕이 강하다는 게 사실이오?"

그녀는 화가 나서 외쳤다. "물론 아니에요! 그건 다 필립이 인터뷰를 허가해주지 않으니까 매스컴에서 날조한 거예요. 내게 접근할 수 없으니 대신 악의가 담긴 가십을 만들어 내는 거라구요. 그게 그들의 방식이에요. 협조해 주지 않으면, 다른 방식으로 앙갚음을 하죠."

"어쟀든 그는 당신의 인생을 바꿔놓았잖소? 당신은 그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을 것이고, 그러다가 그와 아주 조금은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지 않겠소?"

"한 때, 아주 조금은……." 그녀는 화나기도 하고 또 놀랍기도 한 심정으로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 자신의 음성을 들었다. 그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 전혀 내비친 적이 없는데. 얼굴에 붉은 기운이 퍼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만,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대답이 아주 중요하다는 듯이 그가 물었다.

그녀는 대답을 해야 했다. 그가 자신이 필립을 심각하게 사랑했다고 생각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래요! 그렇지만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군요! 어쨌든 전혀 심각하지 않았어요. 그가 다이애나와 데이트를 시작하기 전에 아주 잠깐 그랬을 뿐이에요."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사람은 없었소?"

"그만 두지 못해요!"

"아니, 안 돼지." 그의 얼굴은 심각해 보였고, 어딘지 불안정하게 목소리가 허스키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애니, 난 내가 당신의 유일한 연인이었는지 알고 싶어."

"당신은 내 연인이 될 수 없어요!"

"예전에도 그랬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거요."

처음에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는 머리끝까지 빨개져 버렸다. "당신 제 정신에요? 당신이 내 연인이었다니! 난 결코 당신과 잔 적이 없어."

"확신하오?" 그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그 순간 그녀는 또 다시 뭔가가 잡힐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전에도 그가 이런 표정 짓는 것을, 또 예의 매력적인 미소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열정에 사로잡혀 깊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분노를 다시 끌어 모으려고 애쓰며, 숨을 들이마셨다. "소용없으니까, 그만 혼란시켜요. 내 기억은 아무 이상 없어요. 열일곱 살 이후의 일들은 다 얘기할 수 있어요. 다이나 필 없이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고, 만약 내가 기억상실증에 걸렸거나, 몇 시간이라도 사라진 적이 있었으면 내게 알려줬을 거예요."

"애니, 들어봐……." 그가 말을 이으려고 했다. 애니는 화가 나서 그가 말을 맺기도 전에 끼어들었다.

"아뇨, 들어야 할 사람은 당신이에요! 당신이 뭘 끌어내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 포기하는 게 나을 거예요. 난 전에 당신을 만난 적 없어요, 그리고 당신이 내 연인이었던 적도 없구요."

그녀는 서투른 손길로 단추를 더듬어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 그가 열정어린 눈길로 그녀를 주시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전에도 당신 연인이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거요."

애니는 그를 절망적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었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당신을 신뢰할 수 있겠어요? 이 방은 문도 잠글 수가 없다구요. 당신이 좀 전에 한 일로 봐서 한밤중에 당신이 들어와 날 어떻게 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죠?"

"그런 일은 없을 거요." 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래도 두렵다면 문 앞에 가구를 옮겨다 놓으면 되잖소? 그렇지만 날 두려워할 필요는 없소, 애니. 잠자리에 들면 당신 집에 있는 것처럼 안심하고 지낼 수 있을 거요."

그녀는 다시 한번 그에게 호소했다. "그럴 작정이라면, 날 오늘밤 파리로 데려다줘요, 제발. 여기에 있을 수 없어요. 돌아가야 한다구요."

"내일이오.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하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뭣때문에요? 왜 날 여기에 두려는 거죠? 왜 못 가게 하는 거예요?"

"말했잖소. 당신과 얘기를 하고 싶다고. 언젠가는 당신도 이해할 거요, 하지만 아직은 설명할 수 없소. 난 당신이 어떤 암시없이 기억해 내길 바래. 그럴 거라고 믿소. 단지 몇 시간이면 되오,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요."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난 너무 긴장해서 완전히 지쳐 버렸어요, 모르겠어요? 중요한 공연을 앞두고 이래선 안 돼요.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 긴장을 풀고 편안히 쉬어야 한다구요!"

"그럼 침대에 누워서 두 시간정도 자도록 해요. 뭐 필요한 건 없소? 당신이 쉴 동안 가방을 풀어둘까?"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몇 가지만 꺼내면 돼요. 날 파리로 데려다 주지 않을 거면, 당장 나가요, 날 혼자 내버려두라구요. 난 완전히 지쳐버렸고 당신과 한 방에서는 쉴 수가 없어요."

그의 얼굴이 굳어지고 눈은 흑요석처럼 빛났다. 그는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애니는 얼른 그의 뒤를 쫓아가서 문을 닫고 문 앞에 의자 두 개와 작은 테이블을 옮겨 쌓아 올렸다. 그를 영원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길은 막아놓은 셈이니 그를 늦출 수도 있고 또 그가 들어오려 한다는 것을 미리 알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시간 후에 오겠소."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펄쩍 뛰고 말았다.

그가 듣고 있었다. 그녀가 가구 옮기는 소리를 문 뒤에서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될 대로 되라지, . 알게 뭐야! 작은 가방 하나를 열어 필요한 것을 꺼내면서 그녀는 도전적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레이스가 장식된 빅토리아 스타일의 긴 휜색 실크 잠옷과 거기에 어울리는 네글리제를 침대 위에 꺼내놓고, 욕실로 들어가 씻었다. 머리를 다시 길게 빗어내렸다. 거울에 비친 발그레한 얼굴과 열정의 흔적이 남아있는 눈을 본 애니는 화가 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녀는 매우 다르게 보였다. 너무 많이, 또 너무 빠르게 변해 버렸다. 그가 그녀를 여기에 데려 온 지 겨우 몇 시간이었지만,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역시 그것을 알아챌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녀의 눈은 비밀을 간직한 듯 보였고, 입은 그의 키스로 부풀고 색도 더 짙어 보였다.

그가 자신의 내부에 불러일으킨 열정과 욕망이 떠올라 당황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직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원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몸이 떨려왔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한 남자를 원하는 거야. 그리고 그는 내가 어떤 기분인지를 알고 있어. 그럼 왜 중간에서 그만둔 거지? 난 그가 멈추지 않길 바랐고, 그 역시 그걸 알고 있었는데.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그녀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그는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었다.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신문기사에서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겠지만, 어떻게 내부의 생각까지 알 수 있는 거지? 그녀는 그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언제라도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두려워졌다.

그녀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에서 몸을 돌려 서둘러 욕실을 나왔다. 그녀는 프랑스에 도착한 이후에 받은 모든 충격을 잊고 자신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이곳에 겨우 몇 시간 있었을 뿐이지만 몇 주일은 된 것 같았다. 힘을 다 써버려서 완전히 지쳐있었다. 피곤하다는 사실조차 생각해내기 힘들었다.

그녀는 신발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실크 셔츠와 스키 팬츠를 벗고 캐미솔과 레이스 팬티만을 입고 침대에 들었다. 방안이 점점 어두워졌다. 정원에서부터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이 자장가처럼 들렸다. 애니는 덮고 있는 누비이불의 무게에서 따뜻함을 느끼면 점차 잠에 빠져들었다.

꿈을 꾸기 전에 몇 시간은 족히 잔 것 같았다.

그녀는 꿈 속에서 소나무 숲을 헤매고 있었다. 혼자 있었지만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숲은 온통 소나무와 양치류, 그리고 가시금작화의 노란 꽃 내음으로 가득했다. 키가 큰 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비스듬히 쏟아지고, 발아래에서는 잔가지와 솔방울들이 바스러지는 소리를 냈고 몇 마리 새들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숲 저쪽은 깊은 정적에 싸여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어두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애니는 자그마한 개간지에 이를 때까지 천천히 걸었다. 나무들 사이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는 그녀의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키가 큰 어두운 형체가 햇빛이 비치는 개간지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녀는 기쁨에 넘쳐 두 팔을 벌리고 뛰어갔다. 그가 그녀를 들어 올려 자신에게 꼭 밀어붙이더니, 빙글빙글 돌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꿈들이 늘 그렇듯 이 꿈도 명백한 이유 없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전히 소나무 숲이었지만 이번엔 밤이었다.

그녀는 나무 사이를 걷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무거운 망태기를 가지고 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자 그녀는 다른 오솔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는 개간지에 세워진 자그마한 오두막집이 보였다.

오두막집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기쁨으로 다시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뛰어가서 오두막의 문을 열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곳은 텅 비어있었고, 어두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몇 년간 아무도 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가 발을 들여놓았던 흔적조차 없었다.

그녀가 그 상황을 이해하기 직전에 자신이 어두컴컴한 깊은 숲속의 무겁게 가라앉은 정적 속에서 흐느끼며 달려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상실의 슬픔으로 가득 차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그녀는 매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갑자기 소음과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번개처럼 번쩍이는 불빛이 보였고, 기관총 소리,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애니는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슬픔에 압도되어 버렸다. 고통이 너무 커서 꼭 죽을 것만 같은 기분에 그녀는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애니! 애니……!" 뭔가가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무거운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애니는 불빛에 잠이 깨서 팔꿈치를 짚고 일어나 거칠게 방안을 둘러보았다.

마크가 방으로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탁자와 의자가 나뒹굴고 있었고 한 의자의 다리는 부서져 있었다. 전깃불이 켜지고 자신에게 서둘러 다가오는 마크가 보였다.

그녀 위로 몸을 숙이는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괜찮소, 애니? 비명이 ……악몽을 꾼 거요?"

떨리는 얼굴로 그녀가 속삭였다. "꿈을 꿨어요, 아주 끔찍했어요……."

마크는 마치 아이에게 하듯이 이불을 끌어당겨 그녀의 드러난 어깨를 덮어 주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그녀를 끌어당겨 안고는 부드럽게 달래 주었다.

"이제 다 끝났소. 괜찮을 거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여기 있잖소. 다시는 당신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소. 당신도 그걸 알잖소? 난 당신을 위해 죽을 수도 있어."

이것은 그런 상황에서 상대를 달래기 위한 감정적인 약속이었다. 그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실제로 하지도 못할 약속을 하는 것이 듣기 싫었다. 일반적인 상식이 그의 말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사랑하거나 그런 말을 하지 않는 시대에 성장했다. 이제껏 애니를 그런 열정을 가지고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그가 아무 뜻 없이 과장시켜 단지 그녀를 달래려고 말하는 상황에서, 그런 이상적인 사랑의 약속을 믿은 후의 결과가 두려웠다.

몸이 아주 심하게 떨려와 그녀는 그에게 기대야만 했다. 얼굴을 그의 셔츠에 묻고 그의 몸의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어떤 꿈이었는지 말해봐요." 그녀를 끌어당기며 그가 말했다.

그녀는 꿈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너무나 생생하고 진짜 같았다. "난 소나무 숲속에 있었어요." 그녀는 전후 상황을 떠올리며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명백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이 쥬라의 숲과 계곡에 대한 얘기를 해서 그래요." 그녀는 눈썹을 찌푸렸다. "당신도 거기에 있었던 것 같아요. 얼굴이 기억나진 않지만, 남자가 있었거든요."

그녀는 엄격하게 말해서 정직하지 못했다. 그녀는 꿈속의 남자가 마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두 팔로 자신을 끌어안고 키스한 남자가 누군지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마크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주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순간의 공포가 떠오르자 눈을 감고 숨을 삼켰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어요. 난 울면서 달리고 있었어요. 기관총 소리가 들리고, 헤드라이트가 비추고, 남자들의 외침이 들렸는데…… 그건 외국어, 그래요, 독일어 같았어요. 세상에 내가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거예요. 아마 최근에 본 영화 때문일 거예요."

마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손은 계속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누군가 달아나려고 나무 사이를 달리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총에 맞은 것 같았어요, 보진 못했지만 너무 무서워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죠."

오랜 침묵이 흐른 뒤에 마크가 입을 열었다. "그게 꿈의 전부요? 그 부분에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거요?"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젖어있는 걸 알고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마크를 밀치고는 침대 옆의 휴지를 뽑아 코를 풀었다.

그녀는 그때서야 자신이 팔과 어깨가 거의 다 드러나는 아슬아슬한 실크 캐미솔만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크는 아주 얇아서 거의 안 입은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런 그녀를 마크가 거친 숨을 내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이불을 끌어당겨 두르고는 화난 초록색 눈을 돌려 그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악몽을 꾼 게 언제였는지 기억할 수도 없어요. 이렇게 겁먹었던 적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놀랄 일도 아니잖아요? 당신이 나를 이런 상황 속으로 밀어 넣고 나서 난 계속 불안에 떨고 있었으니까, 악몽을 꾸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그러니 지금이라도 날 파리로 데려다 줘요! 그런 꿈을 꾸고 난 후라 너무 무서워서 다시 잠들 수도 없을 것 같아요. 다시 꿈을 꿀 것 같다구요."

"아마 그럴 거요." 그의 조용한 어조에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어쩜 그렇게 차분할 수 있죠? 아주 끔찍했다구요, 오늘밤 다시 꿈을 꾼다면 견딜 수 없어요.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예요!"

"이해할 수 있소." 그의 말에 애니는 깜짝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당신이 이해하다니, 무슨 뜻이죠?"

"그런 꿈을 수년 간 되풀이해서 꾸었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요."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애니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항상 악몽을 꾼다는 거예요?"

"당신이 꾼 그 악몽 말이오."

"내가 꾼?" 그녀는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숲과 오두막……이런 것들에 관한 꿈을 꾼단 말이오."

애니는 얼어붙어 버렸다. 아까 꿈에 대해 말할 때, 오두막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굴을 들어 그의 얼굴 위를 방황했다. 그는 진지해 보였다.

"오두막이라뇨?"

그가 한숨을 지었다. "오두막에 대해서는 꿈을 꾸지 않았소? 숲 사이에 있는? 둘레에 목재들이 쌓여져 있는 나무꾼의 오두막이었는데."

그녀는 침묵했다. 그리고 오두막의 벽 둘레에 쌓여 있던 통나무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어서 그곳에 가서 자기를 기다리는 남자를 만나려고 열심이었던 기억을 애써 감추며 오두막에 대해서만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곳에 대한 꿈도 꿨군, 그렇지?" 그녀를 지켜보던 마크가 재촉하듯 물었다.

"그래요. 당신이 어떻게 그걸 알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녀는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애썼지만, 두려움과 공포로 신경이 날카로와져서 똑바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날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 건가요?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안 되잖아요. 텔레파시 같은 걸 이용해서 내 머릿속에 어떤 생각을 집어넣은 거예요? 당신,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난 아무 짓도 안했소." 그는 그녀에게 확인시켰지만, 그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럼 어떻게 내 꿈에 대해서 당신이 알고 있는 거죠? 내가 그런 악몽을 꾸도록 어떤 수를 쓴게 틀림없어요. 뭐죠? 최면을 걸었나요? 그럴 수도 있다면서요.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서 그들이 깨어난 후에 최면 건 대로 행동하게 하고서 모든 걸 잊어버리라고 말하죠, 최면 걸렸던 사실조차도 말이에요."

그가 머리를 저었다. "난 그러지 않았소, 애니."

"그럼 어떻게 내 꿈을 알고 있느냐구요?"

"말했잖소, 나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의 눈을 응시했다. "말도 안 돼요.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어떻게 같은 꿈을 꿀 수가 있겠어요? 왜 당신이 나랑 같은 꿈을 꿔야하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죠?"

"우리 둘 다 같은 곳에 관한 꿈을 꾸기 때문이오."

"알아요. 꿈은 무의식에서 온다죠. 그렇지만 나의 무의식은 당신과는 다르잖아요!"

"꿈은 우리의 삶에 관한 거요, 애니. 오늘, 어제 그리고 작년에 우리가 했던 것들에 관한 거지. 과거에 관한 꿈도 꾸고 현재에 관한 꿈을 꾸기도 하지. 시간이 온통 뒤섞이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는 거요."

그녀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렇지만 내가 방금 꿨던 꿈은 내 인생에 관한 것이 아니에요! 난 그곳을 몰라요, 단지……."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멈췄다. 그가 그녀에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단지 쥬라에 대한 꿈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건 당신이 사진을 보여주고 그곳에 대한 말을 해줘서 그런 거예요. 난 거기에 가본 적 없으니, 기억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은 하지도 말아요. 아버지가 거기서 태어나셨고, 아버지의 가족이 수세대 동안 그곳에서 사셨다고 말씀하신 걸 들었지만, 날 거기에 데려가신 적은 없었어요. 언젠가는 가봐야지 하는 생각은 해 봤지만, 아직까지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

"애니, 이해를 못하고 있군……." 애니는 화가 나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말했죠, 거기 간 적 없다고.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삶에선 절대 아니에요."

그 말이 메아리치면서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녀는 재빨리 마크를 보았다. 뭔가에 충격을 받은 듯 그의 얼굴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낮은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래, 이 생에선 절대 아니지, 애니. 그렇지만, 당신은 거기에 있었소. 당신은 기억을 하기 시작한 거요. 난 당신이 자극을 받으면 기억해 내기 시작할 거라고 확신했소. 당신은 내가 겪었던 그대로 겪고 있는 거요. 당신이 좀 전에 꾸었던 꿈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오. 오두막, 숲속의 길, 어두움, 그리고 번쩍이는 빛, 협박하는 목소리, 기관총. 이 모든 것이 사실이오. 나는 몇 년간이나 거기에 대한 꿈을 꾸고 있소. 아주 당연한 이유 때문에 세세한 것까지도 다 기억하고 있소. 내가 거기서 죽었으니까."

 

5

잠시 동안 그녀는 너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한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은 채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놀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애니를 마크가 뚫어지게 응시했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덧붙이지지도 않고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거칠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미쳤군요! 완전히 어떻게 된 거야."

"애니, 들어 봐……."

"이미 충분히 들었어요." 그녀가 분노에 차서 말했다. "그런 말도 안 돼는 소리는 더 이상 듣지 않겠어요. 당신은 도움이 필요해요. 문제가 심각한 것 같아요. 하지만 난 의사도 아니고, 날 희생해 가면서까지 당신이 환상놀음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예요!"

그녀는 그를 밀쳐내고, 캐미솔과 팬티만 걸쳤다는 것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맨발로 문을 향해 뛰었다. 마크가 일어나서 그녀를 뒤쫓아 왔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자신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돌려 세웠다.

"이건 환상이 아니야, 애니! 당신의 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구."

"당신이 내 머릿속에 주입시킨 게 틀림없어요!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그랬을 거예요."

"이것 봐, 아직까지 누구도 다른 사람의 꿈에 영향을 끼치는 방법을 개발하지는 못했어."

"말했잖아요, 나한테 최면을 걸었을 거예요."

"맹세컨데, 그러지 않았소!" 그의 얼굴은 진지해 보였고, 검은 눈은 번쩍이고 있었다. "애니, 사람의 꿈은 아주 사적이고 개인적인 거야. 그럼 그 꿈들이 어디서 오는 거겠어? 자신에게 물어봐."

"난 알지도 못하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요!" 다시 한번 달아나려고 바둥거리면서 그녀가 외쳤다. 그가 그녀를 자기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애니, 그건 기억이야. 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그건 바로 우리 둘에 관한 거지."

그는 끔찍할 정도로 확신하고 있었다. 애니는 그를 믿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녀는 순전히 공포심에서 그를 칠만한 것이 없을까 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가방들 중에서 가장 큰 것에 눈길을 멈췄다. 가방은 아직도 문 근처에 있었다. 애니는 손잡이를 움켜잡고 돌아서서 마크를 향해 정면으로 던졌다. 가방은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그는 고통과 충격으로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면서 뒤로 나자빠져 카펫 위로 쭉 뻗어버렸다.

애니는 그가 다쳤는지 살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으로 빨리 복도를 가로질러 한번에 두 계단씩 층계를 내려갔다. 홀의 의자에 아까 도착했을 때, 마크가 벗겨준 검정과 붉은 색이 섞인 스키 재킷이 놓여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현관을 향해 뛰어가면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낚아챘다. 옷을 걸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도 않았다.

바깥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바람에는 물기가 섞여있었다. 그녀는 발작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녀는 뒤에서 문이 탁하고 닫히는 것도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녀 방의 창가에서 내다보았던 숲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뛰어가면서 약간의 온기에도 감사하며 스키 재킷을 걸쳤다. 구름이 달 위를 가로지르고 있어서 별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서 나오는 불빛만으로도 정원의 길과 우거진 숲을 분간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까 오후에 창문에서 보아두었던 나무문으로 향했다. 그 문은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임에 틀림없었다. 마크가 찾는 걸 포기할 때까지 일단은 나무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숲을 가로질러 마을을 찾아가면 될 것이다. 분명히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다. 이곳이 고립된 지역은 아닐 테니까. 어느 쪽으로든, 나무와 숲에 가려서 지금 그녀에게는 안 보이지만 마을이 있을 것이다.

그녀가 생각했던 대로 문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문에 도착해 금속으로 된 빗장을 열고 있을 때, 마크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두려움이 솟구쳤다. 그녀는 힘차게 내달렸다. 심장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빨리 뛰었고, 점점 숨이 차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달아나야만 했다. 그에게 잡혀서는 안 된다.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부터는 언덕을 올라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워졌다.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온통 나무들로 덮여 깜깜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가지들을 헤치면서 가야했다. 나뭇가지들이 길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세차게 잡아당기기도 했다.

한쪽 다리에 쥐가 나서 숨 막힐 듯 신음을 하며 몸을 굽혔다. 한 발자국이라도 뛰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녀는 고통으로 잠시 멈춰섰다. 그리고 아픔을 참으며 길을 벗어나 나무에 몸을 기대어 옆으로 옆으로 나아갔다. 그러는 동안 한 손으로는 쥐가 난 다리를 마사지하면서 고통스런 숨을 내쉬었다. 그 숨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그녀는 한동안 마크가 추적해 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마크의 발아래에 밟히는 마른 솔방울과 잔가지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그가 나무사이의 어지러운 길을 뚫고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그녀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녀는 그가 지나쳐가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점차 속도를 늦추더니 마침내 멈춰 섰다. 그녀는 공포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의 소리를 들으려고 한다는 걸 알았다. 거칠고 갈라진 그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애니는 숨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얼굴을 딱딱한 나무껍질에 대고 숨소리가 나지 않기를 바랐다. 몸이 심하게 떨려왔다.

"애니! 애니, 바깥에 이렇게 있으면 안 돼. 여긴 너무 춥소, 이러다간 오한이 들 거요." 긴 침묵이 이어지더니 그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애니!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어리석은 짓이오. 이 어두운 숲 속에 있다간 다칠지도 모르오. 숲 속 어딘가에 옛 채석장 터가 있어서 거기로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죽을지도 몰라. 그렇지 않더라도 쓰러진 나무 위로 넘어져서 다치면 며칠이라도 고통 속에서 그냥 누워있어야만 할 거요."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그녀가 의지를 배반하기길 기다리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분노에 차서 외쳤다. "밤을 꼬박 새서라도 당신을 찾아내고야 말겠소! 난 포기하지 않을 거요."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격렬하게 몸이 떨려왔다.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잠시 기다리더니, 그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개의치 않고 걷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는 길을 따라 가지 않고 숲 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다음 소리는 좀 더 멀리서 들려오긴 했지만, 그녀와 같은 높이에서 들려왔다. 그는 길의 저쪽, 그녀가 있는 곳의 반대편에서 나무들을 조심스럽게 탐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고개를 들어 몸을 숨기고 있는 나무 주변을 살펴보았다. 깜깜했기 때문에 멀리까지 볼 수는 없었다. 어둠 속으로 강렬한 노란 불빛이 퍼지면서 숲 주변이 훤하게 비춰졌다. 마크의 모습이 보였다.

애니는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그녀의 꿈이 사실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공포에 빠져 고함소리와 기관총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무 뒤로 숨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를 비추고 지나갔던 불빛이 다시 돌아와, 그녀는 마치 강렬한 불빛에 아찔해져 있는 나방처럼 그 속에서 꼼짝 못하고서 있었다.

마크가 그녀 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불빛은 어둠 주변에 원을 만들며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비명을 멈추고 뛰기 시작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단지 도망쳐야 한다는 것만 의식했다.

채 멀리 가기도 전에 그가 그녀를 따라 잡았다. 그녀는 자신의 괴로운 숨소리 너머로 그의 거친 호흡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살피려고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것이 실수였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뭇가지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세차게 쳤다.

그녀는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마크가 달려와 태클을 걸 듯이 그녀에게 몸을 날렸다. 그들의 몸이 충돌했다. 마크가 그녀를 넘어뜨렸고, 그 충격으로 그녀는 잠시 동안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축축한 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바닥에 대고 있었다. 거친 호흡을 통해 솔방울이며 나뭇잎, 버섯 등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마크가 위에서 육중하게 내리누르고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가슴을 들썩이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몇 분이 지나 그가 몸을 움직이는 듯했지만 어깨를 들어 고개를 돌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완전히 탈진해서 도망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 위에 몸을 반쯤 기대서 여전히 서로 닿은 채로 그녀 옆으로 누웠다. 그가 플래시를 켜 그녀에게 비췄다. 그녀는 오싹하고 아찔해져 눈을 깜빡였다. 아무것도 불 수 없었다.

"눈을 멀게 만들 작정이에요!"

"당신 얼굴을 살피려는 것뿐이오."

"이제 봤으니, 그 빌어먹을 플래시는 꺼요!"

그는 끄는 대신 불빛을 옆으로 돌려 빛이 직접 그녀의 눈을 쏘지 않도록 했다.

"얼굴이 아주 끔찍하군, 꼭 공포영화에서 빠져나온 사람같아. 나뭇잎이며 거미집이 온통 묻었고, 머리엔 잔가지들도 붙어 있소." 그가 자유로운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리더니 머리에서 잔가지와 나뭇잎들을 떼어냈다.

격렬한 떨림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그의 손길이 익숙하게 느껴지고 육체적인 친밀감이 들어 그녀는 당황했다. 마치 그가 그녀를 애무하거나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릴 때의 기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혹은 그들이 과거에 사랑을 나눴던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생각해냈으면 하고 그가 바랬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잖아? 그렇지만 그가 어떻게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도록 암시를 줄 수가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혹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분별력 있고, 현실적이어서 어리석지는 않다고 여겼었다. 그녀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입술을 스치자, 놀랍게도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벌어졌다. 마크가 그녀를 격렬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녀도 그를 응시했다. 플래시가 꺼졌다. 어둠이 그들을 감쌌다.

"건전지가 다 됐나보군요." 그녀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내가 껐소. 건전지를 아끼려고." 그렇게 말하면서 좀 더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난 추워요,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요." 그녀는 신경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말했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너무나 가까이에 있었다. 흥분으로 날뛰는 피로 그녀의 귀가 울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늘 어두운 숲속에 눕기를 좋아했었지, 나와 함께 말이오." 마크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또 시작인가요! 말했죠, 난 한마디도 믿지 않는다고.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하긴 그때는 여름이었군." 그가 그녀의 숱 많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여름 날 밤이었지……. "

그가 옆으로 누워 한 팔을 그녀에게 두르자 그들의 몸은 어깨에서 무릎까지 바싹 맞닿았다.

"지금은 여름도 아니고, 춥다구요." 구름 낀 하늘에서 시선을 돌려 그의 얼굴을 보려고 애쓰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를 보며 빛나고 있는 그의 두 눈뿐이었다. 그의 머리 너머로 봄 밤의 흥분과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바람에 밀려 구름이 달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달 뒤쪽으로는 어둠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쩍이며 더 가깝게 다가왔다. 애니는 또 다시 전에도 이랬었다는 이상한 생각에 마음이 흔들렸다.

이런 적이 전에도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이렇게 어두운 숲 속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축축한 땅 위에 함께 누워있었다. 어느 따뜻한 여름 밤, 야생의 마늘과 풀냄새를 맡으며…….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벌써 저만치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좀전에 그가 길고 따뜻한 여름 밤의 사랑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정말로 알고 싶었다. 부지불식간에 세뇌를 당한 걸까? 그녀의 의지가 너무 약해서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손에서 놀아나는 것일까?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 마크가 그녀 위로 몸을 숙여왔다. 그를 피해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그녀가 모든 것을 망각해 버릴 정도로 굶주린 듯이 키스했다. 그녀는 마음이 착찹해졌다. 그녀는 팔로 그를 감싸 안았다. 마크의 손이 그녀 위로 미끄러지며 재킷을 밀치고 들어왔다. 기쁨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그의 손과 그녀의 피부 사이의 유일한 장애물은 얇은 실크 캐미솔뿐이었다. 숨이 가빠져서 심장이 멈춰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그녀는 내부의 욕망이 너무도 강해서 울고 싶어졌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그녀는 그의 머리를 손으로 끌어당겼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미끄러졌다. 그녀의 피부에 따뜻하고 촉촉한 것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엉덩이로 미끄러지더니 허벅지로 향했다. 그의 손가락들은 허벅지 안쪽을 따라 자그마한 실크 팬티 속으로 관능적인 탐험을 계속하며 그녀를 고문했다. 그의 손가락이 허벅지 사이의 따뜻하고 촉촉한 그곳에 닿자 애니는 지진이라도 난 듯이 충격을 받았다.

헐떡이며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안 돼요! 싫어요!" 충격 때문에 열기가 식으면서 그녀가 신음했다. 지독한 열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몸이 떨려왔다.

마크가 얼굴을 들었다. 그는 고통스러운듯 날카롭고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애니……."

바다처럼 깊은 목소리에 담긴 욕망에 그녀는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았다.

"안 돼요, 난 못해요." 속삭이는 듯한 작은 소리를 억지로 쥐어짰다. 목이 바싹 말라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달이 구름에서 나왔다. 희고 창백한 달빛이 나무들 틈으로 스며들어와 둘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그의 피부는 팽팽해져 있고, 눈은 정열로 빛나고 있었다. 입가에는 좌절로 억제된 긴장이 서려 얼굴이 어둡게 홍조를 띠고 있었다.

애니는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가까이 왔었는지를 깨닫자 충격으로 창백해져 버렸다. 입술과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날 놔줘요!"

잠시 그녀는 그가 거절하리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에 떨면서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그가 눈을 감더니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일어서서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녀는 몸이 떨려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기대어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마크가 플래시를 집어 들어 불을 켰다. 애니의 저항적인 표정을 보더니 불이 다시 꺼졌다. 뭔가가 떠오른듯 마크가 물었다.

"플래시를 켰을 때 왜 비명을 지른 거요?"

"깜짝 놀라서 그랬죠."

"제발, 애니! 진실을 말해 봐요!"

"진실을 다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뭐하러 내게 그런 걸 묻죠?"

"당신이 직접 말하는 걸 듣고 싶어. 애니, 당신은 여전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겠지만,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과 또 당신도 그걸 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 , 왜 비명을 지른 거지?"

대답하길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샤를르 드 골 공항에서 그녀를 만나 이곳에 데려온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동안 악몽을 꾼 것을 비롯해서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이제 놀라는 단계를 지나서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꿈을 생각나게 했어요. 됐나요? 당신이 내게 불을 비추자 다시 꿈을 꾸는 것 같았다구요. 여기 있는 모든 것들, 나무며, 어둠이며…… 게다가 난 붙잡힐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뛰고 있었구요. 플래시가 비춰지자 갑자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됐어요. 어쩔 줄 모르는 혼란 속에서 공포에 빠져든 거예요."

그녀가 부르르 떨자 마크는 플래시를 다시 켜 그녀의 얼굴을 살피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이리와요. 당신이 폐렴에 걸리기 전에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소."

그가 허리에 팔을 감아왔지만 밀어낼 힘조차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숲을 지나서 정원으로 향하는 동안 그가 자신을 이끄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괜찮소?" 그녀가 비틀거리자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곁눈질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 물론이죠. 아주 좋아요. 대단히 아름답고 평화로운 날이었잖아요. 깜깜한 숲속을 뛰어다니다가 가시금작화 덤불에 넘어지고 또 나뭇가지로 얼굴을 얻어맞기도 하고. 내가 왜 괜찮지 않겠어요?"

"당신은 달아날 필요가 없었소, 애니. 내일 파리로 데려다 주겠다고 말했잖소. 내 말을 믿어요."

그의 목소리에서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난 도망쳐야만 했어요, 마크. 당신이 한 말들은……. "

"미친 소리들이지. 나도 이해하오."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그래요! 당신이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그 말들은 날 두려움에 떨게 했어요. 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싫어요.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 해요."

"얘기는 집에 가서 합시다." 간단히 대꾸한 그는 그녀를 재촉해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환영하는 것처럼 보여서 애니는 거의 울 뻔했다. 불과 한 시간 전 벗어나려고 애썼던 것을 생각하니 바보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땐 이곳이 감옥이나 정신병원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집으로 보였다. 그녀는 완전히 지쳐서 자신이 경험한 열정을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처해있는 어리둥절한 상황의 또 다른 일면뿐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마크가 그녀를 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밀었다.

"목욕을 하도록 해요. 난 먹을 걸 좀 만들겠소. 오믈렛이 어떨까? 양념야채 오믈렛을 만들 수 있소. 부엌 문을 열면 바로 오른쪽에 자그마한 야채밭이 있어서 골파, 사철쑥, 파슬리 같은 것들이 있지. 당신은 이 오믈렛을 아주 잘 만들었었는데……."

그녀는 공허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은 그를 위해 오믈렛을 만들어 준 적이 없었다. 그가 다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계속 부정하는 일에도 신물이 났다. 우선은 그녀의 머릿속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이 최선의 길일 것이다.

가방에서 깨끗한 속옷과 스웨터, 진을 꺼낸 그녀는 욕실로 들어갔다. 문의 잠금장치가 돼있는 걸 보고 안심하면서 뜨거운 욕조로 가 목욕용 방향제를 뿌렸다. 그리고 욕조가 채워지는 동안 떨리는 손으로 옷을 벗었다.

이빨이 맞부딪혔다. 물을 만져보고 재빨리 욕조로 뛰어들어 차가운 피부에 뜨거운 열기가 와닿자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아무 움직임 없이 그대로 물속에 잠겨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숲 속에서의 일을 떠올리자 위가 동요했다. 강렬한 욕망이 달구어진 칼이 되어 마음을 찌르는 것 같았다.

"세상에 맙소사, 도대체 내가 어떻게 된 걸까?" 그녀는 눈을 번쩍 뜨며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녀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숲속에서의 기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벽의 타일을 필사적으로 세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행동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난 미쳐가고 있는 게 틀림없어. 광기는 전염되기 쉬운 것이어서 마크에게 옮은 거야. 심지어 어제까지는 그를 알지도 못했는데, 이런 식으로 그를 느끼다니, 이건 너무 빨라!

지난 수년간 그녀는 필립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다. 불과 이주 전에도 그가 다이애나와 결혼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었다. 심장이 터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조금 전에 겪은 일은 적어도 그 생각을 타파시켰다. 필에 대한 감정은 단지 애정에 불과했다. 이젠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누구도 사랑해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자신을 끔찍한 가정생활에서 구출해 준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을 한 것이다. 그녀는 필립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빚졌다. 그래서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애정을 사랑이라고 믿어버리기가 쉬었을 것이다. 필과 다이는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였으며,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그러나 결코 필립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그녀가 잘 다룰 수 없는 폭발하기 쉬운, 다이너마이트처럼 위험하다는 것은 알았다. 잘못 움직이기라도 해서 자신을 날려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애니, 앞으로 5분만 더 주겠소!" 밖에서 마크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그 바람에 욕조의 물이 출렁거려 밖으로 흘러 넘쳤다.

"당신, 괜찮소?" 그가 문에 바싹 기대어 물었다.

"괜찮아요. 금방 나갈게요."

마지못해 욕조에서 일어선 그녀는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는 꼭 탄광에 있다가 나온 것 같은 모습에 얼굴을 찡그렸다. 서둘러 얼굴을 씻고 머리를 감았다. 일어서서 몸에 물을 끼얹은 다음 욕조 바깥으로 나왔다.

재빨리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입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는 훨씬 따뜻하고 편안해진 기분이었다.

그녀가 부엌으로 들어오자 마크가 고개를 들었다.

"정확하군!"

다시 스토브로 몸을 돌리면서 그의 눈이 그녀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녀는 긴장한 채 그가 자신의 모습에 대해 할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젖은 머리를 리본으로 목덜미에서 하나로 묶고, 몸에 꼭 달라붙는 비취빛 녹색 스웨터와 꽉 끼는 진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왠지 실망스런 기분이 들었다.

마크는 황금색의 먹음직스런 반원형 오믈렛을 데워진 접시에 담아 식탁 위에 놓고 손짓을 했다. "내 걸 만드는 동안 앉아서 들어요."

그녀는 식탁의 의자를 빼냈다. "이 오믈렛, 아주 맛있어 보여요. 당신 요리사나 뭐 그런 일을 하나요?"

그가 웃었다. "아니오, 난 평범한 프랑스인일 뿐이오." 그가 프라이팬에 계란을 더 깨뜨려 넣더니 포크를 가지고 환상적인 손놀림을 했다. 그리고 그 위에 잘게 썬 야채를 뿌렸다.

달걀과 야채 냄새를 맡자 위가 요동을 쳤다. 식탁에는 샐러드와 얇게 썬 프랑스 빵, 그리고 과일이 놓여져 있었다.

오늘밤의 부엌은 아주 다르게 보였다. 천정의 조명을 약하게 하고 촛불을 켜놓아 아주 로맨틱한 분위기였다.

그녀가 음식을 반쯤 먹었을 때, 마크가 식탁에 앉았다. "왜 포도주를 안 따랐소?" 마크가 불평을 하더니, 백포도주 병을 집어 들어 그녀의 잔에 얼마간 따르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

"당신 어머니께서 요리를 가르쳐 주셨나요?"

"그렇소. 수업이 끝나면 부엌에서 어머니를 돕곤 했소. 아버지께서도 가끔 요리를 하셨소."

"쥬라에서요? 마을에 살았나요?"

"아주 작은 마을로 집 몇 채와 오래된 교회가 있소." 그는 식사를 계속하면서 말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속눈썹 너머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쟝 데 뺑St Jean-des-Pins>이라는 곳이지."

애니는 그러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숨을 들이마시면서 포크를 내려놨다.

"아버지 고향도 거기예요."

"알아요. 난 그를 알고 있소."

순간 그녀는 멍해져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아버지를 안다구요? 어디서 그를 만났죠? 아빤 거기를 떠난 이후로 다시 찾아가신 적이 없어요."

"어렸을 때의 그를 아는 거요."

그녀는 웃었다. "당신 어렸을 때를 말하는 거겠죠."

그가 고개를 들어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니, 내 말 그대로요.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일곱 살이었소."

충격과 혼란으로 귀가 아찔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그가 태어난 해가……."

"1936."

그녀의 아버지의 생년월일 정도는 쉽게 추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지 않으려고 애썼다.

"맞아요, 1936년이에요. 그리고 할머니가 아빠를 데리고 영국으로 간 것이 1945년이었어요. 그뒤로 그는 쥬라로 돌아간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그러니 거기서 그를 만났을 리 없죠. 당신은 그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잖아요……." 그녀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24! 아빤 당신이 태어났을 땐 적어도 24살은 됐을 거예요."

"오믈렛이나 먹어요." 이 말뿐이었다.

애니는 더 이상 배고프지 않았지만, 접시를 비우고 별 생각없이 마지막 잔이라고 생각을 하며 포도주 잔을 비웠다. 마크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을 다시 채웠다.

"아버지가 할머니에 관해 말해주신 적이 있소?"

"가끔요. 그렇지만 아빤 내가 겨우 열한 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빠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요. 그리고 할머니께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는걸요. 전쟁 후에 영국으로 건너 오셨다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할머닌 전쟁 중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처음 런던에 도착해서 정부쪽에서 번역 일을 하셨다나 봐요. 아빤 할머니의 전쟁 중의 활동에 관해선 가끔 몇 마디 하셨을 뿐 거의 얘기하시지 않았어요."

마크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과연 피에르답군. 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완고했지. 비밀이 많은 소년이었소. 자기 아버지를 쏙 빼닮았지. 당신도 1940년 독일군이 첫 공격을 가했을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쟈크 듀몬트에 대해선 들어 봤겠지? "

"전쟁 초기에 할머니가 혼자되셨다는 것은 알아요." 애니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가족에 관한 질문을 결코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죽은 남편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을 꺼렸으며 재혼한 후로는 그녀의 첫 결혼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애니는 어머니가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계부가 길길이 날뛴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겁이 많은 어머니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았다.

마크가 그녀의 표정을 읽기라고 하려는 듯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 할아버지는 전쟁이 나자마자 프랑스 육군에 입대해 그의 부인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집을 떠났소. 그리고 다시 돌아와선 다시 한번 참전하겠다고 말한 후 몇 달되지 않아서 그녀를 다시 만나지도 못하고, 마을에 조그만 가게 하나와 하나뿐인, 당시 네살이던 아들 피에르만을 남긴채 전사했소."

애니는 결코 이런 가족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품지않고 귀 기울여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그녀의 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마크가 포도주를 홀짝였다. 그들 사이에서 타고 있는 촛불을 바라보는 그의 눈도 깊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을의 다른 여자들과는 달랐소. 영국인 할머니 덕분에 영어를 제 2 외국어처럼 쓰며 자랐지. 그녀는 결혼하기 전에 대학에서 언어학 학위를 땄소. 그녀가 결혼하기로 정해진 것은 열여덟 살이었을 때요. 그녀의 부모가 원한 일이었소. 그녀의 부모님은 친한 친구의 아들인 쟈크 듀몬트를 좋아했소. 사실 그들은 먼 일가였소. 애니는 태어나서부터 그를 알고 지냈소. 그녀 역시 그를 좋아했지."

그녀는 애니라는 이름에 흠찟 놀라서 그를 보았지만 그는 그녀를 의식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한 쪽 손에 기대고 있는 그의 얼굴은 촛불 속에서 꿈꾸는 듯했고, 이마에는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그녀가 내게 말했소. 그들은 단지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고, 그들 둘 다 특별히 다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결혼에 동의했다고 말했소. 그녀는 스물 한 살이었고, 그는 그보다 좀 더 위였소. 돈은 별로 없었지만 그들은 서로 좋아하는 친구였기 때문에 괜찮은 결혼 생활을 했소. 그들의 생활에는 어떤 기복이나 정열이 없었소. 아주 평온하고 현실적이었지."

애니는 그런 결혼 생활을 할 자신이 없었다. 마크가 그녀와 눈을 마주치더니 그녀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가 죽자 그녀는 아주 당황했고 또한 그를 무척 그리워했소. 그는 그녀의 가장 좋은 친구였고 그가 그렇게 돼서 화가 난다고 내게 말하더군. 그래서 프랑스가 점령당하자 그녀는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게 된 거요. 그 활동은 그녀가 슬픔을 잊는 것을 도와주었고 또 남편의 자리를 대신 하고 있다는 기분도 갖게 해 주었지. 쥬라는 스위스와 독일에 면한 국경지역이기 때문에 활동이 많을 수 밖에 없었소."

"아주 위험했겠군요." 그녀의 말에 마크가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오. 지역 전체에 독일군이 가득했소. 프랑스 남부 지역은 자유 프랑스 정부가 통치했지만 국경지방의 관리에 대해서는 독일이 포기하지 않았소. 아무도 스위스를 오가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지."

"그렇지만 소용없었다는 건가요?"

"그 지방 태생의 레지스탕스 요원들은 그 지역을 훤히 알고 있었소. 그들은 프랑스에서 피신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렸소. 예를 들면 독일 통치지역에 추락한 영국공군들의 목숨을 구한 것도 그곳 사람들이었소. 그들은 밤에 산과 숲을 지나 멀리 돌아가는 길을 통해 스위스로 보내졌소. 밤에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안내자와 함께 이 집에서 다음 집으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지. 그 지역의 레지스탕스 요원들은 그들이 무사히 국경을 통과하고 강을 건너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거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던 거요."

"당신의 가족이 레지스탕스에 가담했었나요?"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의 입이 일그러졌다. "난 그 영국공군중의 한 사람이었소, 애니."

 

6

애니는 그런 대답이 나오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크게 동요했다. 몸이 떨리고 창백해져서 벌떡 일어섰다.

"제발 그만해요! 잠시나마 당신이 아주 정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음 순간 미치광이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요. 더 이상 듣기 싫어요. 식탁을 치우고 커피 만드는 걸 도운 뒤 자러 가겠어요."

"안 돼, 애니. 내일 당신을 파리로 데려다 주겠다고 한 약속은 지킬 거야. 그렇게 되면 그 말은 곧 시간이 별로 없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당신은 오늘밤 내 얘기를 들어야 해." 그가 그녀의 팔을 붙잡고 가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렬한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 알아요. 당신이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해해. 그렇지만 난 절대 미치지 않았소. 내 얘기를 다 들으면, 전부를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기 시작할 거요. 적어도 내 얘기를 마치게는 해 줄 수 있잖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그의 얘기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의 변화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녀의 꿈이나 그에 대한 강렬한 감정, 그를 알고 있었던 듯한 기분…… 전에도 그랬었다는 섬뜩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전혀 불가능한 그 모든 느낌을 그녀 스스로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런 논리를 믿기에는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계속 생각했다. 어쩌면……?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전에 그를 알았었는데 그녀가 단지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미친 건 그가 아니고 그녀가 아닐까?

그러나 방금 전 그의 말로 그녀의 그런 생각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가 이상하고 암시적인 말들을 하긴 했지만, 지금 한 말은 믿기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그가 미친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달리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애니는 전생을 기억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지금부터 믿을 생각도 없었다.

"당신이 내 말을 듣게 하려고 애를 많이 썼소. 그러니 애니, 제발 잠깐만 앉아 있어요. 커피를 준비하고서 내 얘기를 다 들려주겠소." 그가 깊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그 얘기가 말도 안 되는 소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걸 들어야 하고, 또 그가 그녀에게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비참하게 인정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당신처럼 어떻게 된 게 분명해요." 그녀가 항복하며 중얼거렸다.

그가 안도한 듯 웃었다. "호기심 때문이라고 인정해요. 뒷얘기가 궁금한 거 아니오?"

"그래요, 그걸 다 믿는다고 장담은 못하겠지만요. 아주 흥미 있는 이야기니까요."

그녀가 식탁에 앉자 그는 익숙한 솜씨로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애니는 부엌에서 움직이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굴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며, 유연해 보이는 가늘고 긴 몸을 바라보자 그녀의 감각이 열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녀 속에서 정념의 불길이 일었다. 입술이 바싹 타고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숲 속에서 일어났던 일이며 그의 몸이 그녀 위에 있던 느낌 등이 떠올랐다. 그를 안지 불과 몇 시간도 안됐고, 그녀를 납치해 억지로 이곳에 있게 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이렇듯 강한 충동을 느낀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순식간에 강렬한 열정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여지껏 감춰져 있었던 자신도 모르는 면이 드러난 것이다.

커피 끓는 소리가 들렸다. 마크가 컵이며 받침, 스푼, 설탕과 크림, 초콜릿으로 덮인 박하사탕 접시 등을 꺼냈다.

그가 능란한 솜씨로 스푼을 정확한 각도로 놓았다.

"여태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군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은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를 곁눈질했다.

그가 저렇게 섹시한 것은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그를 만났더라면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기를, 또 지금까지 만나 본 다른 남자들과 별로 다르지 않기를 바랬다. 그는 쉽게 잊혀질 남자가 아니었다.

"나중에 알려주지." 스토브에서 커피를 가져오며 그가 약속했다. "여기서 들겠소, 아니면 라운지로 가겠소?"

"얘기가 얼마나 되는데요?"

"아주 길어요."

"그렇담 좀 더 편한 곳으로 옮겨야겠네요. 여기엔 더이상 못 앉아 있겠어요."

"라운지에 장작불을 피워뒀으니 거기가 더 따뜻할 거요."

애니는 쟁반을 들고 나가는 그를 따라 나섰다. 촛불이 벽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낮에 잠깐 보았던 라운지는 셔터를 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빛으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오늘밤 이곳은 소나무 장작이 희미한 향기를 풍기며 타고 있는 벽난로의 황금빛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애니는 난로 옆에 있는 초록색 벨벳의자에 앉았다. 마크는 낮은 테이블에 촛불을 내려놓고 커피를 따랐다.

"크림?"

"됐어요."

"설탕은?"

"괜찮아요."

그가 진한 블랙커피를 건넸다.

"고마워요." 그녀는 향기를 들이마시며 감탄했다. "향기가 정말 좋은데요."

"사탕을 좀 들어요."

"고마워요." 그녀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사탕 한 개를 입에 물었다.

마크가 손에 커피 잔을 쥐고서 다른 안락의자에 앉았다.

"진짜 불을 보는 것은 참 즐겁군요." 애니가 불을 바라보며 멍하니 말했다. "내 아파트는 중앙난방이거든요. 진짜 불은 아주 안락한 느낌이 들어요, 그렇죠?"

"그렇지, 하지만 숲에선 아주 위험할 수 있소." 마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쥬라에서도 여름에 불이 나곤 하오. 20년 이상이나 자라온 나무들을 순식간에 없앨 수 있지. 더 나쁜 것은 불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면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거요. 불은 오렌지 색 혀를 날름거리며 바람에 실려 검은 연기를 퍼뜨리며 산 전체로 퍼져나가지. 맞딱드리는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면서 말이오. 전쟁도 마찬가지요. 사람들은 자제력을 잃고 평화로울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게 되는 거요. 모든 걸 망쳐버리지.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걸 포기하지 않으면 벗어나고 싶어도 어쩔 수 가 없소."

"화재를 경험한 적이 있나요?" 가능한한 일상적인 대화를 지속하려고 애쓰면서 그녀가 물었다.

"그렇소. 이십 대 초반의 어느 여름이었을 거요. 가족들과 쥬라에 있었는데, 산불이 났소. 십대 애들이 숲으로 피크닉을 가서 바비큐를 하려다가 불씨가 마른 풀잎에 옮겨 붙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불길이 거세졌소. 마을 전체가 소방대를 도와 불 진화에 나섰지. 공중에서 물을 분사할 수 있는 비행장비까지 동원했지만 바람이 거세게 불어 불길은 점점 마을로 퍼져갔소. 그래서 모든 것을 잃게 되는구나 생각하기도 했지. 다행히 바람이 잠잠해지면서 한 시간정도 뒤엔 불길이 잡혔소. 그렇지만 난 그 사실을 훨씬 뒤에야 알 수 있었소. 불에 탄 떨어지는 소나무 가지에 맞아 정신을 잃고 말았거든." 그가 앞으로 내려온 검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자 이마에 톱니모양의 희미한 상처가 보였다. "그때 난 이 상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내려 상처를 가려야 했소. 그렇지만 크게 화상을 입지 않은 것만도 운이 좋았지."

"그리 심하지 않아요. 보여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예요. 머리카락으로 완전히 가려지는데요." 위로의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의 말을 되씹고 있었다. "머리의 상처가 심했나요?"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뇌진탕을 일으켰어요?"

"사람들이 그러더군." 수긍할 수 없다는 투로 그가 말했다. "내가 아는 건 그때가 모든 것을 기억해 낸 최초의 순간이라는 거요."

애니는 날카롭게 숨을 몰아쉬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이 그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아냐, 애니. 모든 걸 다 뇌진탕 탓으로 돌릴 순 없소. 어렸을 때부터 전생을 단편적으로 기억하곤 했소. 아주 일상적인 일들, 창밖의 비 내리는 모습이나 주전자가 끓는 모양을 보고 있거나 누군가가 웃고 있었소. 갑자기 섬광처럼 기억이 떠올랐던 거요. 마치 머릿속에서 필름이 다시 돌아가듯 순식간에 아주 선명하게 말이오."

그녀는 긴장했다.

"내 말 뜻 알겠소?" 그녀도 그런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그가 재촉하듯 물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만난 후에 그런 경험들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단조로운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아주 일상적인 일들이 기억을 일깨우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소. 한번은 나뭇잎들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긴 검은 머리를 스카프로 묶은 여인을 바라보던 기억이 떠올랐소. 비 내리는 숲 속을 지나 나를 만나러 오는 중이었지. 두려움과 격렬한 흥분이 동시에 느껴지더군."

"그건 당신이 전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일 거예요." 애니는 여전히 상식적인 설명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럴 수도 있을 거요. 그때 내가 겨우 일곱 살이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오. 그 느낌이 너무 강하고 생생해서 영화를 떠올린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거요. 그건 또 아주 개인적인 기억들이었소. 그 기억속의 장면이 내게 있었던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소. 그날 밤 난 악몽을 꾸었지. 밤에 숲 속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있었소. 나무들 사이를 계속해서 달렸지만 결국엔 붙잡히고 말았지. 꿈은 내가 총에 맞는 걸로 끝났소."

"총이라구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혀끝으로 입술을 축였다. "내 꿈속에서도 그 소리가……." 그녀는 기억하기가 싫은 듯 말을 끊었다.

"알아요." 조용하고 침착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당신은 기관총 소리를 들었고 누군가가 죽었다는 걸 알았을 거요. 그게 바로 나였소."

애니는 커피잔을 든 채 벌떡 일어났다. 뜨거운 액체가 다리에 쏟아졌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요?" 마크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그녀의 바지를 보았다. "괜찮소? 데지 않았소?"

그녀가 커피를 털어내면서 말했다. "아뇨, 그렇게 뜨겁지는 않았어요. 불 앞이라 금방 마를 거예요."

그녀는 의자를 불 가까이로 끌어당겨 다리를 쭉 뻗은 채 난로 앞에 앉았다. 불 기운이 닿자 젖은 바지에서 김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이게 다 당신 탓이에요. 당신이 날 펄쩍 뛰게 만들었잖아요. 다신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럴 수 없소. 나를 미쳤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소. 일생 동안 난 전생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기억해 냈고, 뇌진탕이 걸린 이후로 그 전생을 다시 살고 있는 나를 발견했소. 날 몽상가라고 불러도 좋아요. 내내 전생에 대해 꿈을 꾸어왔지만, 깨었을 때는 기억 속에 일부만이 남아 있을 뿐 전부가 기억난 적은 없었소. 그러다가 외부의 사건들, 비라든지 휘파람 소리, 총성 등이 계기가 되어 다시 떠오르는 거요."

"아니면 당신이 아주 심각한 뇌진탕에 걸려 그 이후로 이 모든 걸 상상해 냈거나요!"

그가 머리를 저었다. 그러자 그의 검은 머리에 불빛에 반사되어 불길이 일렁였다. 순간적으로 애니는 또 다시 친숙한 느낌에 사로잡혀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불 옆에 앉아 있는 그를, 그의 검은 머리에 반사되는 불길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벅찬 감정이 복받쳐 오르면서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자신의 격렬한 감정에 온몸이 떨려왔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격렬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 속에 절망과 슬픔이 메아리쳐 꼭 죽을 것만 같았다.

"아니, 상상해 낸 것이 아니오. 실제 있었던 일이지, 기록으로도 남겨져 있소. 그는 실제 했던 사람이오. 이름은 마크 그랜트요."

그 이름을 듣고 그녀는 훅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마크는 계속 얘기를 이어나갔다.

"다들 숲 속에서 달아나다가 총에 맞은 영국공군을 알고 있소. 그는 그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언덕의 묘지에 묻혔소. 무덤에는 이름과 사망 날짜를 새긴 아주 평범한 비석이 서 있소. 그와 그의 무덤은 우리 마을의 긍지였고, 그는 우리 마을 역사의 일부가 되었소. 그래서 다들 그의 이름을 따 아들의 이름을 지을 수 있으면 행운이라고 생각했지. 학교 다닐 때, 우리 반에만 해도 마크라는 이름이 넷이나 있었소."

"바로 그거예요. 당신은 그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거예요. 묘지에 있는 영국군의 묘는 그것뿐인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마을 전설의 핵심이 되었다? 그것 참 드라마틱한 얘기네요, 그러니 마을 소년에게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을 거예요. 더구나 이름까지 같으니까 말예요! 전쟁은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것으로 로맨틱하고 또 아픔도 없는 역사일 뿐이죠. 영국에서 아이들이 그 시대의 비참함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로빈 훗 놀이를 하듯이 말이에요. 역사는 미화되기 마련이죠. 당신도 그 영국공군 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혼란스럽지만 동정적인 눈으로 그를 보았다.

"마크, 모르겠어요? 그 이야기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당신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었어요. 그러다 당신이 그 사고에서 의식을 찾으면서 소방 활동을 전쟁행위로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의 얼굴은 어둡고 무표정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의도가 그에게 제대로 전달됐는지, 아니면 그가 아직도 환상을 쫓으려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달래듯이 한마디 덧붙였다. "당신은 머리에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었었잖아요. 그 꿈은 어땠죠? 독일군의 총에 맞은 채로 숲속에 누워 죽잖아요. 그 영국 공군은 틀림없이 머리에 총을 맞았을 거예요. 모든 게 딱 들어맞아요, 모르겠어요?"

마크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만 제외하면. 그 누구도 숲속의 작은 오두막에서 그를 보살펴 줬던 사람에 대해서는 모르지. 그는 비행기 충돌사고로 수 주간 다른 곳으로 움직인 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를 간호해 주고, 먹을 것을 넣어주고 독일군의 눈을 피해 기회가 다을 때마다 그를 찾아왔던 사람에 대해서는 모르오. 그 영국인과 앤 듀몬트 사이에 있었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오. 그녀가 전혀 언급을 안했기 때문이지. 레지스탕스 동료 한둘은 그녀가 그를 돌보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둘이 사랑에 빠진 것까진 몰랐소. 그녀는 사생활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소. 그래서 어렸을 때, 내게 앤 듀몬트나 그녀의 아들에 대해 말해 준 사람은 없었소. 그녀 가족의 대부분은 죽었거나 이주해 버렸으니까. 난 단지 영국공군이 레지스탕스에 의해 보호받았지만 결국엔 잡혀 총에 맞았다는 얘기만을 들었을 뿐이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뭔가를 묻듯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그 죽은 남자와 앤 듀몬트에 대해 알겠소?"

"우연히 들은 얘기들을 한데 섞은 거겠죠."

그녀는 다른 가능성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혼란을 불러일으킬 테니까.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오, 애니."

"할머니와 그 죽은 남자에 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건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일 거예요. 당신 혼자 꾸며낸 얘기겠죠. 당신은 그녀가 레지스탕스였다는 것을 알았고, 또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알았죠. 그런 사실들이 얽혀 꿈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가 머리를 저었다.

그녀는 그를 초조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전생에 당신이 영국인이었다면 왜 프랑스에서 태어난 거죠?"

"그건 나도 모르겠소. 단지 그렇다는 것만을 알 뿐이오. 내가 프랑스에서 죽었기 때문일까? 아마 당신도 영국에서 죽었기 때문에 영국인으로 태어난 걸 거요."

그녀가 날카롭게 숨을 들이 마셨다. 그가 그렇게 믿으리라는 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할머니의 환생이라는 건가요?" 그녀는 히스테리에 가깝게 웃기 시작했다. "세상에 마크, 이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몰라요?"

그가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붙잡았다. 그가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는 그를 내려다 보아야 했다. 그가 손을 움켜잡고서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은 그녀와 똑같아, 애니. 당신도 알잖소? 당신도 그녀가 젊었을 때의 사진을 봤을 거요. 사고가 있고 몇 년 후, 레코드 재킷에 있는 당신 얼굴을 보았지. 내가 애니를 만났을 때보다 어리긴 했지만 즉시 당신을 기억해 낼 수 있었소. 그해 여름 그녀는 32 세였고,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은 22살이었소. 그녀가 결혼한 게 그 나이였지. 그 이후의 십년은 그녀에겐 무척 힘든 시기였소. 많은 일이 있었지." 그가 얼굴은 찌푸렸다. "그 십여 년간 세계에도 많은 일이 일어났지. 영국처럼 프랑스에서도 불경기, 실업, 미래와 또 다른 전쟁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소. 그리고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소. 애니는 나와 만나기 전 고생을 많이 했소. 그게 얼굴에 다 씌어 있었소. 말라서 주름이 져있었어. 눈과 입은 그 동안 겪은 일들에 대해 많은 것을 얘기해 주더군.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웠소."

어리석게도 애니는 격렬한 질투를 느꼈다. 그녀의 할머니에 대해 말하는 그의 얼굴, 그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는 만나본 적도 없는 죽은 여인과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그녀는 상처를 입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질투의 감정을 없애지 못하는 것처럼 그의 환상도 제거하지 못했다.

그녀를 쳐다보는 마크의 눈에 불빛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리고 애니, 당신 역시 아름답소."

재빨리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제야 내가 동일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군요!"

"내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지. 내 인생은 이전의 마크 그랜트와는 아주 달라, 당신의 인생이 당신 할머니의 인생과 같지 않은 것처럼. 그렇지만 그건 표면의 차이일 뿐이오. 그건 일상의 아주 세세한 부분들, 어디서 태어났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떻게 살아가는지의 차이일 뿐이지. 중요한 건 내적인 것, 계속 영원히 남아있는 내부의 마음이오."

그녀는 아연해졌다. 그런 그녀를 보고 그가 웃었다.

"그러니까 당신 할머니를 더 닮아 보이는군, 그녀는 말이 별로 없는 여자였지. 생각이 깊은 여자였소. 당신처럼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 머리를 높이 올려 묶곤 했소. 그리고 거의 상복을 입고 있었지. 당시 프랑스 시골에서는 과부가 되면 수년간 상복을 입었고, 심지어 평생을 입는 사람도 있었소. 그녀가 노래를 자주 했다는 걸 알고 있소? 단련된 소리는 아니었지만 정말……."

"당신이 그 모든 걸 알 리가 없어! 당신이 다 꾸며낸 거야! 손녀인 나도 그 분에 대해선 잘 모르는데!"

"난 그녀를 내 목숨보다도 사랑했소. 그리고 실제로 난 그녀를 위해 죽었소."

애니는 길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독일군이 도착했을 때 그녀는 나와 함께 있었소. 그들이 그녀를 발견했다면 그녀 역시 총에 맞았을 거요. 그러나 먼저 레지스탕스에 대해 알아내려고 고문을 했겠지. 난 그렇게 놔둘 수가 없었소. 그녀는 나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잡히면 동지들이 위험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소. 그녀는 매우 용감했지만 고문 때문에 친구들을 배신하게 될까봐 두려워했소. 내가 그녀를 떠다 밀고는 군인들을 내 쪽으로 유인해 그녀가 마을로 달아날 시간을 벌기 위해 가능한한 요란스럽게 다른 방향으로 달렸소. 그들에겐 훈련견과 서치라이트가 있었으니 나를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였지. 그냥 포기해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놈들이 나를 도와줬던 사람들에 대해 고문하리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총에 맞을 때까지 계속해서 달렸던 거요."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지자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그의 이야기에 감동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사실적이어서 믿고 싶지 않았다. 한 영국공군이 프랑스의 한 마을 어귀의 숲에서 죽었고, 마을의 묘지에 묻혀 있으며 또한 마크의 이름이 그의 이름을 딴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나머지 이야기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아주 로맨틱한 얘기군요." 그녀가 즉시 말을 받았다. "그렇지만 내가 정말 그 얘기를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는 말없이 어두운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건 너무 억지예요. 당신은 상상력이 풍부해서 정말로 그 일이 정말 일어났다고 믿고 있는 거겠지요. 하지만 나를 믿게 하는 건 어려울 걸요." 애니는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벽난로 위 선반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 "많이 늦었어요. 피곤해서 이만 자러가고 싶어요."

그녀가 일어나자 마크도 따라 일어났다. 성급히 문으로 가려던 그녀는 그와 부딪쳤다. 그들의 몸이 서로 닿자 그녀는 거의 숨이 멈추는 듯했다. 그녀는 펄쩍 뛰며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애니, 가지 말아요." 쉰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가야해요."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가야한다구요, 마크! 정말 긴 하루였고 이젠 완전히 지쳤어요."

"당신은 날 믿어야 해. 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어. 제발 마음의 문을 닫지 말아요. 당신이 기억해 내기 시작했다는 거 알고 있소. 그러니 그걸 부정하려고 하지 마. 마음의 문을 열고 믿으려고……."

공포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 "난 당신처럼 미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그를 밀치고서 문으로 향했지만 마크가 뒤따라와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돌려세워 자신의 몸에 기대게 했다.

"보내줘요, 마크!" 그녀의 호소를 무시한 채 그는 팔을 그녀의 허리에 둘러 강하게 끌어 안았다.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뺨에 뺨을 갖다 댔다. 그의 옷을 통해 피부의 온기가 느껴졌고, 벽처럼 버티고 있는 그의 몸의 단단한 근육을 느꼈다. 그녀는 그를 밀쳐 낼 재간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겁내지 말아요, 애니. 그 어느 것도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고, 나 역시 그러지 않을 거요.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 듣겠소? 당신은 여기서 나와 함께 있어도 안전해요."

그가 얼굴을 그녀의 목에 파묻었다. 그의 입술의 열기가 느껴지자 불안으로 몸이 떨려왔다. 그러나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몸을 압박하는 그에게 격렬히 반응하는 자신이 더욱 두려웠다.

"이러지 말아요!"

마크의 입술이 천천히 위를 향했다. 애니는 입술이 닿는 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돌렸다.

"그만해요! 날 보내줘요!" 그녀가 몸부림치면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허리에 둘러져 있던 팔이 떠났나 싶더니 순식간에 그의 손이 가슴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가슴을 어루만지자 그녀는 충격으로 숨을 헐떡였다. 그녀가 입을 떼는 순간 마크가 얼굴을 돌려 미처 피하기도 전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고서 굶주린 듯 격렬하게 키스했다. 애니는 그의 키스에 응답하고픈 고통스러운 욕구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에게 키스를 되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감정에 지지 않고 그녀에게 느끼기를 멈추고 생각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었다. 잘 생각해 보라구, 어서!

그가 정말로 키스하고 있는 것은 네가 아니야! 그녀라구. 그의 꿈속의 여인, 그가 수년간이나 사로잡혀 있는 그 여인, 반세기 전에 자신이 그녀를 위해 목숨을 버렸다고 믿는 바로 그 여인이라구. 그의 갈망과 열정은 모두 환상이며 자기기만이었다. 그가 정말로 사랑하는 여인이 이미 죽어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대신 그녀는 살아있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바로 네 할머니라구! 그녀의 마음이 그 사실을 가차 없이 상기시켰다. 마크는 바로 네 할머니와 사랑에 빠져있는 거라구.

미쳤어, 그녀는 생각했다. 완전히 미쳤어. 마크의 손가락이 그녀의 목을 쓰다듬자 열기가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며 입을 목으로 미끄러뜨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스웨터 안으로 들어와 가슴의 따뜻한 살을 애무했다. 그녀는 그의 손길이 주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쾌감에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이건 미친 짓이야. 그가 자신이 어루만지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러는 건 정말 미친 짓이야. 왜 그가 하는 짓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는 거지?

그건 네가 어리석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가 널 거의 세뇌시켰기 때문이지. 이걸 당장 멈추게 하지 않으면 너도 곧 그처럼 미쳐버릴걸! 그가 네게 키스하는 건 네가 단지 그녀와 닮았거나 혹은 그녀의 젊은 시절과 닮았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야. 그가 키스하는 건 그녀고, 상처받는 건 너뿐이야. 왜냐면 넌 벌써 그와 반쯤은 사랑에 빠졌으니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니야! 그녀는 강력하게 부정했다. 난 아냐. 사랑하지 않아. 그렇지 않다구.

불과 일 주일 전에 그녀는 필립을 사랑한다고 여겼었다. 단지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필립을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마크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전화해 "날 기억하오?"하고 물었던 날, 필립과 다이애나의 결혼으로 우울하고 버려진 듯한 기분을 맛보았었다. 그 일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지난 열 두 시간 동안 시간은 제멋대로 왜곡돼 버렸다. 그녀는 마크를 만나기 전엔 자신이 어땠는지를 기억해 내는 것이 힘겹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의 그녀는 인생관을 비롯해 자신에 대한 생각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을 원해, 애니. 난 당신이 필요해." 그 말은 마치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효과를 냈다.

그녀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뻣뻣해졌다. 지금 그를 멈추지 않는다면 오늘밤을 그의 침대에서 끝내게 되리라는 건 분명했다. 그렇게 하자고 그가 그녀를 설득하리란 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부인하겠지만 그녀를 필요로 한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유혹하고는 있지만 어쨌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크는 오늘밤 그녀와 자려는 것이다.

그녀의 가슴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오그라 들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달아나 그를 멈춰야 했다.

그는 눈을 감고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는 지금 무방비 상태였다. 이보다 더 나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애니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방 저쪽으로 밀쳤다. 그리고는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계단을 뛰어올랐다. 방에 도착하기 전에 그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에게 붙잡히기 전에 방문을 닫고 조그만 서랍장을 끌어다 놓을 수 있었다.

"애니, 날 들여보내 줘!" 마크의 힘에 문이 삐걱거리자 문 앞에 갖다놓은 서랍장에 기대어 있던 애니의 몸이 떨렸다.

"가요, 마크!"

"왜 두려워하는 거요? 나 때문이오? 날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니까, 이젠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소? 난 당신의 머리카락 하나도 다치지 않을 거요." 열정과 급박함으로 거칠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느끼는지 모르겠소, 애니?"

"난 내 할머니가 아니에요!" 그녀가 씁쓸하게 내뱉었다.

침묵이 흘렀다. 잠시 동안 그의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애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가 지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크, 제발! 그만 침대로 돌아가요. 날 내버려 둬 줘요. 오늘 하루만으로 충분해요.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건 당신의 꿈속에서나 찾아요. 날 그녀의 대역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그녀는 비틀거리며 방을 가로질렀다. 그가 조용히 뭔갈 말하는 것이 들리자 그녀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아버렸다.

"이젠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 그녀는 침대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목이 메어 숨이 막힐 정도로 흐느꼈다. 그녀는 그가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녀가 아주 심하게 상처받았다는 걸 깨닫는 것만은 정말 피하고 싶었다. 자신이 사랑에 빠지는 것을 막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그들이 만난 지 불과 열 두 시간이지만 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져 어쩔 도리 없이 끝도 없이 어둠 속을 구르듯이 그녀 역시 어쩔 수 없이 그와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7

애니는 겨우 잠이 들었지만, 꿈 때문에 계속 깨어나야 했다. 매번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집안에 휩싸인 정적과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 땀이 배곤 했다. 마침내 기억을 해낸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침대 옆의 램프를 켜 시계를 보고는 또 다시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다. 아침이 아직도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피곤했기 때문에 불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누어 잠을 청하는 것이다. 거의 잠이 들만하다가 한 시간이나 두 시간 후면 또 꿈 때문에 어김없이 다시 깨어났다.

아주 긴 밤이었다.

마지막에 꾸었던 꿈은 열정적이고 관능적이며 에로틱한 것이었다. 그들은 숲에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풀밭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마크의 팔에 안겨 그와 키스를 나누었고 그들의 몸은 성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좀 더 다가가 그의 일부가 되고 싶은 기쁨에 찬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꿈은 끝났다.

애니는 너무나 갑작스러워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떴는데도 머릿속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실망과 좌절감을 느꼈고, 동시에 멍한 기분에 신음했다. 그러나 완전히 잠에서 깨자 그녀는 충격으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 어디에선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니는 창백해졌다. 무슨 일이지? 그녀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문으로 달려가 잠시 동안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마크였나? 쉰 듯한 소리였지만 마크 목소리 같았다. 그가 습격을 받은 걸까? 누군가 이 집에 들어왔단 말이야? 강도? 마크는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 그녀가 해 놓은 장애물은 문제도 안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마크를 도와야 했다. 애니는 서랍장을 옮기는데 애를 먹었지만 마침내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부서진 의자 다리를 집어 들고는 문밖으로 나섰다.

외침은 멈췄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여전히 다급하게 중얼거리는 마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크의 방에서 나고 있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미약한 무기를 손에 쥔채 떨리는 가슴으로 재빨리 방안을 둘러보았다. 거기에는 누가 침입했다거나 격투가 벌어진 것 같은 흔적은 없었다. 마크가 얼굴을 위로 하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침대 위로 쭉 펼쳐진 팔이 침착하지 못하게 계속 뒤척이며 내는 소리는 그녀의 피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애니는 자신이 보게 될 것에 두려움을 느끼며 침대 쪽으로 살그머니 다가갔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떨리는 입술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속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고통에 그녀는 들고온 의자 다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가 지금 어떤 꿈을 꾸는지, 그 꿈을 왜 참을 수 없는지 잘 알 것 같았다. 그의 위로 몸을 숙이고서 그녀는 다급히 말했다. "마크, 마크! 일어나요!"

그가 깊은 숨을 들이마시더니 울음을 멈췄다. 그는 잠시 동안 아주 조용히 누워있었다. 새벽의 어슴프레한 빛 속에서 숱 많고 새까만 그의 속눈썹이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가 길고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니?"

그 괴로운 신음소리가 그쳤다는 안도감에 그녀도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악몽을 꿨어요."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마치 며칠이나 앓은 사람처럼 보였다. 애니는 그의 흐트러진 검은 머리를 쓰다듬고 그의 머리를 자신의 팔에 안아 달래주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내가 비명을 크게 지른 거요?" 그의 입이 뒤틀렸다.

"미안하오. 자주 이러는 건 아니오. 꿈이 너무 생생하면 이러곤 하지." 그가 희미한 빛 속에서 침대 옆 탁자의 시계를 보았다. "지금이 몇 시요?"

"6시가 막 지났어요." 그녀도 그에게 무슨 꿈이었는지 묻지 않았고, 그 역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밤 그들이 같은 꿈을 꾸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떻게, 또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꿈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공포와 슬픔이 애니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아마 마크의 꿈은 더 나빴으리라.

"당신을 이렇게 일찍 깨우다니 미안하군!" 마크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어나 앉았다. 그제서야 애니는 그가 벌거벗은 채 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의 드러난 팔과 그을은 어깨, 그리고 검은 털이 무성한 근육이 잘 발달된 가슴에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가슴의 털은 나머지 몸을 가리고 있는 시트 아래로 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몸 깊은 곳에서 깊고 율동적인 떨림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입이 말라서 불안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커피나 좀 만들어 올게요."

그녀는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그녀의 감정을 눈치챌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았다. 당황으로 얼굴이 빨개져서 돌아섰지만 마크가 그녀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 그녀의 팔을 붙잡아 홱 잡아당겼다. 그녀는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 나동그라졌다.

그녀가 다시 일어서려고 버둥거리자 그가 그녀의 어깨를 매트리스에 내리누르며 그녀 위로 몸을 활처럼 구부려 열기어린 초록색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밤새 당신에 대한 꿈을 꾸었소, 애니."

"말하지 말아요!"

자신의 꿈을 떠올리자 그녀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목구멍이 타는 듯 아팠다.

"애니." 그가 목쉰 소리로 부르더니 그녀에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를 향해 몸을 숙이자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벗은 피부가 닿자 그 충격이 온몸에 욕망의 물결로 퍼져나갔다.

잠시 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자 저항의 말은 삼켜져 버렸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그의 키스의 열기와 굶주림이 그녀를 씁쓸하게 했다. 그녀는 온통 혼란스러워 더 이상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감겨졌다. 그녀는 그들이 침대에 누워있는지 아니면 숲 속의 향긋한 풀 위에 있는 것인지, 서늘한 봄날의 새벽인지 아니면 긴 여름날의 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단지 지금 자기에게 키스하고 있는 이 남자를 사랑했었고, 사랑하고 있으며, 또 언제까지나 사랑할 거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육체는 정열과 친밀감, 그 달콤함을 기억한다는 듯이 더욱 가까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가슴은 쓸어내렸다. 그의 심장이 떨리고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점차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크의 어깨는 비단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했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근육이 수축했고 목은 팽팽히 긴장했다. 그의 죽음을 생각하니 고통스러웠다. 그는 이렇게 강하고 생동감 있었다. 그녀는 어두운 숲 속을 가르는 서치라이트를 보았고 기관총이 난사되는 소리와 그녀의 목구멍 속에서 터져 나오는 침묵의 비명을 들었다.

난 그를 사랑해, 손으로 그의 머리를 움켜잡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손가락 사이로 숱많은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얼굴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을 찾았다. 만약 그가 죽는다면 나도 죽고 말 거야.

그 영국공군이 숲 속에서 죽었을 때 할머니가 느낀 감정도 이런 것이었을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자신의 생각에 그녀는 몸이 굳어졌다. 난 이 얘기를 믿는 거야,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거야.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믿기 시작했어. 하지만 뭘로 그걸 믿을 수 있지? 그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라고, 그가 내게 하는 모든 말이 단순히 꾸며낸 얘기가 아니란 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애니," 그가 그녀의 입술에 대고 신음했다. 그녀는 몸 위에 놓인 그의 무게에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몸이 자신의 몸에 부딪히면서 느껴지는 쾌감에 온몸이 떨려왔다. 그러면 중간에 깨버린 꿈이 생각나고, 막 사랑을 나누려는 찰나에 잠에서 깼을 때 느낀 좌절감이 떠올랐다. 그 생각은 그녀의 마음을 좀먹으며 순간적으로 차가워졌다가 다음엔 그녀를 뜨겁게 달구었다.

마크가 갑자기 거친 호흡을 뱉으며 키스를 멈추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검은 눈은 눈물이 고인 듯 반짝였다.

"좀 더 있으면 난 멈추지 못할 거요, 애니. 그러니 마음을 결정해요. 강요하진 않겠소.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내겐 무척 힘든 일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소. 당신을 사랑하게 해줘."

"당신을 알 수가 없어요. 우린 겨우 어제 만났다구요. 당신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게 뭐죠? 당신 직업이 뭔지, 어디서 사는지, 당신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요. 당신은 많은 말을 했지만 그것들이 다 진실이라는 증거는 어딨죠? 당신은 유례없는 거짓말쟁이일 수도 있고, 미쳤을 수도 있어요.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가 그녀의 혼란스런 녹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바로 유일한 증거요, 애니. 당신이 믿든 믿지 않든. 인생은 법정이 아니오. 증거 제시나 변호사도, 배심원도, 판사도 없지. 우리 모두는 자신의 본능에 의지해야만 하는 거요. 난 나의 전생이 있다는 걸 확신하오. 내가 전생의 일부를, 특히 총에 맞기 전 몇 달간을 기억한다는 것을 믿어요. 증명할 수는 없소. 당신이 당신 할머니의 환생이라는 것과 우리가 잠시 동안 연인이었다는 걸 증명할 수 없는 것도 그렇소. 그걸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은 당신 자신의 마음먹기에 달린 거요."

애니는 길고 떨리는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의 말이 옳다. 그를 믿든 그렇지 않든 이 모든 것은 그녀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그녀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전하고픈 말을 표현하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몸을 부르르 떨며 그녀는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맥박 치는 따뜻한 피부에 입 맞추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서서히 탐험을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은 매끄러운 그의 어깨를 따라 완만한 뼈의 곡선과 피부의 굴곡을 따라 미끄러져 나가 두터운 근육질의 가슴으로 키스를 이어갔다. 그의 피부에서 짠맛이 느껴졌다. 그녀가 꿈에서 꾸었던 것과 꼭 같았다. 이제 그녀는 꿈이 멈춰진 곳에서 더 전진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더 친밀하게 느끼고 싶었으며 이전까지 알던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 자신을 아는 것처럼 그를 알고 싶었다. 또한 그들의 육체가 마침내는 완전히 하나로 맺어지기를 바랐다.

마크는 신음소리를 내뱉었고 그의 근육이 긴장하는 것이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길고 풍성한 그녀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의 팔이 그녀의 등을 감쌌다.

"애니, 내 사랑……." 그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그녀의 얼굴이 더 아래로 내려가자 충격과 기쁨의 탄성을 터져나왔다.

그녀의 꿈에서도 그들은 이렇게 사랑을 나눴다. 꿈과 현실이 일체가 되어 그녀는 억제나 두려움이 없는 관능의 세계에 팽개쳐졌다. 마크가 더 거칠고 격렬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갑자기 일어나 무릎을 꿇고 앉더니 격렬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건 필요없어!" 하고 외친 그는 그녀의 긴 실크 나이트 드레스의 단추를 풀어헤쳤다. 그녀는 그가 옷을 벗어내기 쉽도록 몸을 들어올렸다. 한 손으로 옷을 바닥에 집어던지면서도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창백한 시트에 누워있었지만 그녀의 떨리는 피부는 그보다 더 창백했고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마크의 시선이 딱딱해진 핑크 빛 유두와 작고 둥근 가슴을 지나 평평한 배에서 날씬하고 새하얀 허벅지 사이의 검은 숲으로 이어지자 그녀는 긴장했다.

격렬해진 마크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그리고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는 그녀에게 침입하기 시작했다.

애니가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당신을 다치게 한 거요?" 마크가 굳어지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아뇨, 계속해요."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그의 몸에 팔을 둘러 그를 다시 끌어당겼다. 그녀는 너무나도 뜨거워 불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을 얻기 전에는 진정할 수 없을 것 같은 만족감을 재촉하며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마크가 다시 한번 시도하자 애니는 신음소리를 막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의 변화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고 있는 동안에도 근육이 굳어져 그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마크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당신 처녀로군, 그렇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제발 멈추지 말아요, 마크……." 그녀는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준 거야."

"상관없어요, 그러니……."

"당신이 고통스럽다면 우리 둘 모두 즐거울 수 없어." 그가 그녀에게서 몸을 굴려 그녀 옆에 누웠다. 긴 한숨이 이어졌다.

"언젠가는 벗어나야 할 텐데 지금이라고 안될 이유가 없잖아요?"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두렵기 때문이오." 마크가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갑작스레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 알겠어요. 그것 때문이었군요? 마크, 미안해요." 그녀는 미소를 띤 채 속눈썹을 내리깔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문제라면 방법이 있지 않겠어요?"

마크가 그녀의 손가락을 붙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웃고 있는 그의 눈에 기쁨이 일렁였다. "당신 참 빨리 배우는군. 당신이 아주 정열적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다른 때라면, 애니. 하지만 지금은 아냐.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해 인내심을 길러야 할 거요. 처음에는 그리 좋지 않을 수도 있소. 무작정 밀고 나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오. 영원히 혐오감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 우리 둘다 그건 바라지 않잖소?"

"그래요, 하지만……."

"한 번에 한 걸음씩만 천천히 나갑시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빛났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이런 일은 시간이 걸리는 거요. 또 적당한 분위기도 필요하지."

좌절감이 엄습해 왔다. 마크가 그것을 눈치 챘다.

"가엾은 애니, 당신 정말로 원하고 있군?"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얼굴이 뜨거워졌지만 그녀는 웃음을 띠려고 애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은 음악과 같은 거요. 즉흥 연주를 하기도 해야하고, 또 새로운 변하를 추구하기도 해야하지……."

마크가 가까이 다가와 몸을 기대며 키스해 오자 그녀는 열정적으로 입술을 벌려 그를 맞았다. 마크의 손이 고문하듯이 부드럽게 그녀를 애무했다. 그녀는 밀려드는 쾌감에 숨을 헐떡이며 두 눈을 감았다. 키스가 목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더 아래로 이어졌다. 그의 입술은 따뜻했으며 스치듯 지나가면서 그녀를 자극했다. 그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스치자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좀전에 그를 거부했던 그 비밀스런 곳에 그의 혀의 촉촉한 침입이 느껴졌다.

애니는 새로운 관능을 발견했다. 거칠고 미칠 것 같은 리듬이 그녀를 엄습해와 그녀는 자신의 몸을 통제할 능력을 잃어 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달아오른 열기로 피부는 번들거렸고 입술은 열린 채 낮은 신음소리를 내뱉았다. 절정을 향해 나아가면서 그녀는 그 격렬함 외의 모든 것은 잊어버렸다.

열망이 너무나 강해 그녀는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기쁨에 찬 그녀의 탄성은 계속되다 서서히 느려지더니 마침내 멈추었다. 그녀는 마치 죽은 것처럼 조용하고 창백하게 누워있었다.

마크가 다시 그녀 옆에 몸을 뉘었다. 애니는 거의 잠이 들었다. 백 년정도는 거뜬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동화속의 공주처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 주위에 가시덤불도 없고 마법에 걸리지도 않았으면 또 왕자가 침대에, 그녀 옆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오랫동안 함께 누워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그녀였다. "고마워요."

"나 역시 즐겼소." 마크가 허스키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녀가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었다. "이번엔 내가 당신을 위해 하게 해줘요……."

"다음에." 그의 손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말하기는 싫지만 시간이 없소. 아침을 먹고 파리로 떠나야지."

"지금?"

"어제는 그곳에 가려고 필사적이었잖소?" 그의 미소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겨우 어제라구요?" 마치 그와 평생을 같이 있었던 것 같이 느껴졌다. 이제는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소, 겨우 어제였소." 그가 진지한 어조로 말하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란 참 이상한 것 같아요. 겨우 24시간을 알았을 뿐인데도 평생 동안 알아왔던 것처럼 느껴지니 말이에요."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서요." 마크가 정정하자 그녀는 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마크, 나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사실인지?" 그의 어두운 눈이 확신으로 빛났다. "애니, 그건 사실이오."

그녀는 그에게 상처를 줄까 두려워 달래듯이 말했다. "당신이 확신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난 아니에요. 확신하고 싶긴 하지만요. 나도 그걸 믿고 싶다구요. 그리고 어느 정도 사실인 부분도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순 없어요."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소, 애니. 내가 당신을 여기에 데려온 것은 우리가 전에 알았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였지, 하지만 이제는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소. 지금 이 순간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오. 우리가 전생이 있고, 지금은 그때를 잊어버렸다고 하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거요. 오히려 전생을 기억하는 것이 다시 시작하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잖소? 또 어쩌면 당신이 맞을지도 모르오. 내가 과도한 상상력이나 어린 시절의 강박관념의 희생자일 수도 있는 거니까."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녀는 몸을 기대어 부드럽게 그의 입에 키스했다. 그들의 입술이 열정적으로 부딪쳤다.

입술을 떼며 마크가 한숨섞인 소리로 말했다. "서둘러야겠소. 당신은 1시에 프랑스 음반회사의 전무이사와 그의 수행원들과 점심식사를 하기로 돼있소. 그 후에는 호텔 볼룸에서 기자회견이 있을 거요."

그는 침대에서 미끄러져 나가 의자에 걸린 금색과 검정색 줄무늬의 로브를 집어 몸에 걸치고 허리에 끈을 매었다.

애니는 아찔해졌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은 약속이 없어요. 설사 있다고 해도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죠?"

욕실로 향하면서 그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프랑스 측 음반회사의 언론 담당 매니저가 콘서트 전에 기자회견할 계획을 세웠소. 당신의 모든 약속이 기록된 스케줄 표를 보았지."

"당신이 어떻게 그걸 볼 수 있었냐구요!" 애니의 물음에 그는 단지 어깨너머로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리고 욕실 문을 닫아버렸다.

대체 그는 누구지? 자신의 방을 가로지르면서 애니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무엇일까? 그녀는 그들의 첫 만남부터 그가 훨씬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에 대한 비공식적인 정보까지도 알아냈다. 기자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가 언론에 종사한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녀의 유럽 순회공연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샤워를 하고 다이애나와 필이 기자회견에 대비해서 준비해 준 옷 중에서 한 벌을 골라 입었다. 그 옷들은 모두 애니의 대중적인 이미지, 슬프고 외로운 방랑자 같은 이미지에 어울리도록 디자인된 것들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다른 가수들이 입는 것과 같은 번쩍이는 의상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주로 블랙진에 검정색 탱크톱이나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맨발로 무대에 오르곤 했다. 그녀는 필립의 주장에 따라 젊고 현대적인 감각의 디자이너가 특별히 그녀를 위해 만든 의상을 입었다. 그 의상들은 다 비슷해 보였지만 치밀한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디자이너들은 그녀의 의상을 대중적으로 변형시켜 아이들에게 싼 가격에 팔아 소득을 올렸다.

오늘 그녀가 입은 검은 탱크톱은 히프에 걸쳐진 블랙진 위로 허리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쌀쌀한 날씨 때문에 기자들과 만나기 전까지는 착 달라붙는 탱크톱 위에 흰 스웨터를 걸치기로 결정했다.

막 머리를 만지려는데 마크가 노크를 했다. "아침 식사하러 내려와요. 내가 준비해 뒀소."

"짐을 싸야하긴 하지만 먼저 먹고 나서 할래요." 문을 열자 그는 다시 어제의 양복을 갖춰 입고 파란색 줄무늬 셔츠와 다크블루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우아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의 거친 모습까지 가려주지는 못했다.

"아주 멋지군." 그가 미소를 띤 채 중얼거렸다. "난 당신이 검은 색만 입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필립이 만들어낸 이미지예요. 이 스웨터 아래에도 검은 색 탱크톱을 입고 있죠. 이따가 기자들을 만나기 전에 스웨터를 벗을 거예요."

그들은 아침 식사로 방금 짠 신선한 오렌지 쥬스와 커피와 함께 따끈한 크로아상을 먹었다. 그가 오븐을 열고 황금빛으로 완벽하게 구워진 초승달 모양의 빵을 꺼냈을 때 그녀는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갓 구어낸 패스트리의 달콤한 내음이 부엌에 가득 찼다.

"당신이 만든 거예요?" 그녀가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이 묻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내가 한 거요, 어머니가 가르쳐주셨지.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내려오자마자 오븐을 켜고 꽁꽁 얼려진 크로아상 여섯 개를 꺼내서 적당한 온도에 오븐에 집어넣은 것뿐이오. 다 하는 데 겨우 12분 걸렸지."

"놀라워요." 애니가 패스트리를 한 입 먹으면서 말했다. "…… 엄청난 칼로리를 생각하면 먹으면 안 되겠지만 안 먹을 수가 없군요. 프랑스인들의 음식 솜씨는 정말 최고예요."

"논쟁의 여지가 없는 말이오." 맞은편에 앉아서 쥬스를 홀짝이던 마크가 그녀에게 씩 웃어보였다. "아버지에 대해서 기억나는 걸 말해봐요. 그분은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에 사는 걸 어떻게 생각하셨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지는 않으셨소? 그는 토박이 프랑스인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빠가 좋은 직장을 가지고 영국 생활에 안정되게 정착하고 계셨다는 건 알 수 있었어요."

"당신은 결혼을 하면 가족을 아주 세심하게 잘 돌봐 줄 것 같군."

그녀가 테이블 저쪽의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당신은 결혼한 적 없나요?"

"아직까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소."

"그렇지만 수년간에 걸친 관계는 있었겠죠? 그건 그렇고 당신 정말 몇 살이에요?"

그의 검은 눈동자가 놀리는 눈빛을 띠었다. "어제 말했는데 잊어버렸소? 서른 넷, 당신보다 정확히 열 살 위지. 그리고 물론 여자들과 데이트했었고, 그중 몇과는 잠을 잤다는 것도 인정하지. 하지만 서로 진지하지는 않았소. 누군가를 아주 좋아하고 아주 끌리기는 하지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는 거요. 그래서 그들을 잃더라도 심한 상처는 받지 않는 거지."

애니는 커피를 더 따랐다. 얼굴을 찌푸린 채 그녀가 말했다. "난 잘 모르겠어요. 연애하고는 거리가 멀었거든요. 이따금씩 필립이 주선한 팝스타와의 의도적인 데이트를 제외하고는 말이에요. 더 이상의 진전이란 아예 상상할 수도 없죠."

"그는 정말 당신의 모든 삶을 좌우했나 보군, 안 그렇소?"

"처음 만났을 때 난 너무 어려서 필립은 내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말고 나를 보호해야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다이애나와 함께 살게 된 거예요. 처음에는 어디든 함께 다니게 했을 정도예요. 그는 순식간에 스타가 된 순진한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죠. 그가 돌보던 젊은 스타들이 마약중독이나 알코올중독에 걸리기도 하고 에이즈로 죽은 경우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지키기로 결심한 거예요. 그가 그렇게 한 것에 대해 지금은 무척 감사하게 느껴요. 때때로 자유가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나 반항하기도 하고 그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대부분 너무 바빴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볼 시간조차 없었어요. 더구나……."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마크가 눈을 찌푸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더구나 당신은 조금은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확 퍼졌다. "수년간 사춘기 소녀처럼 그에게 반해있었죠." 그녀는 인정했다. "그가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았나 싶어요. 언제나 엄마보다는 아빠를 더 사랑했죠. 그리고 그분이 너무나 그리워요. 필은 아빠와 닮지는 않았지만 날 보호해 주었고, 또 아버지처럼 인자했죠. 난 그 점을 사랑했어요. 엄마가 그렇게 빨리 재혼을 하자 화가 났고, 당연히 계부를 미워하게 됐죠. 그 역시 나를 좋아하지 않았구요. 난 성가신 존재였죠. 내 존재는 그가 아내 인생의 첫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니까요. 그는 그걸 질투했어요. 게다가 내가 그에게 골을 내고 툭하면 말대꾸를 하고 하니까 나를 때리기까지 했죠."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난 전형적인 반항기 많은 십대였고 그게 어떤 상황에서는 재앙의 불씨가 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는 그걸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켰죠. 엄마에게 불평을 하면 엄만 늘 그게 내 잘못이라고 했어요."

진지한 표정으로 마크가 말했다. "아주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군."

"끔찍했죠. 아빠가 돌아가신 그 순간부터 내 생활은 엉망이었어요."

"필을 만나기 전까지." 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필은 아주 적당한 때에 나를 발견했죠.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거예요. 아마 집에서 도망쳐 런던에서 살다 거리에서 최후를 맞았겠죠.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져요."

마크가 그녀의 손을 잡아 입술로 가져갔다.

"그렇다면 필에게 질투심을 느낄 필요는 없겠군." 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허스키하게 웃었다. "전혀 없죠."

그녀는 그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를 들었다. 부엌의 시계를 쳐다본 그가 말했다. "서둘러야겠소. 내가 여길 치우는 동안 당신은 올라가서 짐을 싸요. 난 말끔하게 치우는 걸 아주 좋아하지."

"도와줄게요." 일어서며 그녀가 말하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5분도 안 걸릴 거요. 짐을 옮길 때면 소리를 질러요, 내가 들어다 차에 실어줄 테니."

애니는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떠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파리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또 소란스런 팬들과 리허설, 공연, 이곳에서 저곳으로 끊임없이 여행해야 하는 바쁜 일상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동안 시간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다른 행성에서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세상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다. 그 큰 변화가 겨우 24시간 안에 일어난 것이다. 몇 주간은 떠나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젠 전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방안을 둘러보며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충격을 떠올리며 천천히 가방을 쌌다. 방을 치우고 침대 시트를 정리했다.

"애니, 준비 다 됐소?" 아래층에서 마크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요!" 애니가 대답하자 그가 올라와 가방들을 차로 옮겼다. 차는 바로 집 앞에 주차돼 있었다.

"뒷 자석에 타겠소, 아니면 나와 함께 앞에서 가겠소?" 그가 놀리듯 물었다.

그녀는 짐짓 얼굴을 찌푸려 보이면서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가 서서히 나아가자 그녀는 어깨너머로 집을 바라보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서 마크가 부드럽게 말했다. "다시 보게 될 거요."

"그래요? 당신은 과거처럼 미래를 읽을 수도 있나보죠?" 그녀의 조롱에 그가 씽긋 웃었다.

"그러길 바라는 거요."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 역시 그들이 함께 하는 미래를 바라고 있음을 깨달았다. 장애물이 많을 것이다. 지금 같은 감정이 영원히 지속되지도 않을 것이며 그녀를 더 알아갈수록 그녀에 대한 그의 집착도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그녀의 직업은 그들의 감정이 시들어 완전히 죽어버릴 때까지 그들을 갈라놓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녀는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희망은 어둠 속의 빛처럼 그녀의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느낌이 멈추지 않길 바랐다. 그녀는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더 행복했다. 애니는 차를 운전하고 있는 그의 옆얼굴의 곡선과 그을은 피부, 빛나는 검은 두 눈을 반쯤 덮고 있는 짙은 속눈썹이며 따뜻하고 온화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그의 입매를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그를 바라볼 때마다 찌르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녀는 큰 소리로 소리 내어 웃고 싶었다. 혈관을 타고 기쁨이 샘솟는 것 같았다. 맘만 먹는다면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 대해 더 얘기해줘요. 쥬라의 겨울은 춥나요?"

"정말 춥지! 어떨 때는 몇 주간이나 눈에 덮여 있을 때도 있소." 마크가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 겨울을 참 좋아했지. 다들 그랬소. 노는 방법이 참 다양했지. 스케이트, 스키, 썰매까지. 남자 아이들은 월요일이면 앞 이빨이 부러지거나 시커멓게 멍든 눈에 부러진 팔을 해가지고 등교하곤 했소. 그땐 왜 눈이 오면 부모님이 투덜거리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었소. 그래서 진정한 즐거움을 모르는 분들이라고 생각했었지."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걱정한 것이었을 텐데 말이에요."

"분명히 그러셨을 거요. 어머니는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시는 분이었소. 사실 다른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으셨소. 하루의 대부분을 집안 일이나 정원 일을 하면서 보내시지. 아주 뛰어난 정원사시오. 어머니는 꽃보다는 채소를 더 좋아해요. 아주 현실적인 분이오."

"그리고 그분이 요리를 가르치셨구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시간이 나실 때마다 마침 옆에 있곤 했으니까. 난 친구들과 더 자주 어울리는 편이었소. 럭비, 전쟁놀이, 나무타기도 했지."

"요리를 아주 잘 하시나 봐요?"

"물론이오. 가장 뛰어난 재료는 어머니가 직접 재배한 신선한 야채라고 주장하시지. 향료 식물을 키우는 작은 밭과 조그만 과수원이 있어서 겨울에도 과일이나 야채를 시장에서 사는 일은 거의 없소. 겨울에 가끔 저녁에 쓸 양배추를 가지러 나가면 그걸 찾아 깊이 쌓인 눈 속을 파내야 하곤 했소. 집에 돌아 때쯤이면 손가락이 얼어버렸지."

애니는 마크의 어린 시절이며 그의 가족, 쥬라 산맥과 그곳 계곡에서 살아왔던 얘기를 듣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아주 따뜻하고 낭만적인 것 같았다.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고향에 돌아간 기분일 것 같았다.

갑자기 도로 표지판이 눈에 들어와 그녀는 파리에 거의 다 왔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녀는 신경이 곤두섰다. 마크는 그녀가 없어진 것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해 아무도 찾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필과 다이가 전화를 했거나 프랑스 음반 회사에서 접촉을 시도하다가 그녀가 호텔에 없는데다 심지어 체크인도 하지 않았고 사실상 실종됐다는 걸 알지나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마크가 체포라도 된다면 어떡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를 쳐다보았다.

"마크, 호텔까지 가는 대신 아무 데나 내려주는 게 어때요? 택시를 타면 될 거예요."

그는 즐거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그래야 하지?"

"경찰이 호텔 주변에 깔려 있을 테니까요."

"그럴 일은 없을 거요."

"마크!" 그녀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무릎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걱정말아요. 말했잖소, 다들 당신이 친구를 만나러 간 줄 알고 있을 거요."

그들은 파리의 교통지옥 속으로 들어갔다. 차들의 홍수가 그들을 둘러쌌고, 그 난폭함에 놀란 그녀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경적소리와 타이어가 끌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차들이 추월하면서 그들의 차를 거의 덮칠 듯 했고, 운전자들은 프랑스어로 욕설을 퍼붓기 위해 몸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운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러나 마크는 매일같이 여기서 운전을 한다는 듯이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주 익숙해 보였다.

그녀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에서 살아요?" 그건 자신의 얘기를 할 때 그가 빠뜨린 부분이었다. 과거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얘기했지만 현재에 관한 얘기는 하나도 없었다.

"일주일 내내. 금요일 밤에는 시골로 가곤 하오." 그녀의 눈이 커졌다. "방금 우리가 떠나온 곳이 당신 집이란 말인가요?" 사실 그녀는 그가 그 집을 일주일 가량 빌렸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소."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주말과 여름 휴가를 그곳에서 보내지. 전원에서의 생활이 더 좋긴 하지만, 주중에는 도시에서 보내야 하오. 워낙 바빠서 매일 밤 늦게까지 일을 붙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오."

"그러고 보니 여지껏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말 안 해줬어요!"

"기다려요." 멋진 상점들이 즐비한 넓은 가로수 길을 따라 천천히 차를 몰면서 그가 말했다. 잠시 후 그는 좁은 길로 꺽어지더니 파리의 한 특급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유니폼을 입은 포터가 그들을 맞으러 서둘러 뛰어나와 애니 쪽 문을 열고 그녀가 나오는 것을 도왔다.

마크가 그에게 차 열쇠를 맡기며 불어로 말했다. "차 좀 주차시켜 주게, 쟝 피에르. 그리고 마드모아젤 듀몬트의 짐을 옮겨주게."

포터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엥 씨르, 무슈 빠스칼."

애니는 그 남자가 마크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충격을 받았다. 마크가 이곳을 자주 출입하는 고객임이 확실했고, 그것은 곧 그가 부유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긴 아주 비싼 호텔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애니는 빠스칼이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필과 다이와 최근에 나눈 대화에서 수도 없이 들어왔던 바로 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마크 빠스칼은 그녀의 디스크를 찍어 낼 프랑스 음반 회사의 전무 이사였다. 결국 그녀는 마크와 점심식사를 하러 파리로 돌아온 것이다!

 

8

"내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모든 장애물들을 내가 직접 제거하고 싶었기 때문이오."

얼마 후 숨죽일 듯이 아름다운 파리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애니의 스위트에 단둘만이 남게 되자 마크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당신이 다 옳죠!" 애니가 그를 노려보며 불평을 터뜨렸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당신은 내가 하는 말엔 귀도 기울이지 않았을 거요. 아마 나를 비웃었을걸. 모든 걸 농담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오. 당신이 내 얘기를 받아들이게 하려면 당신의 마음에 충격을 줘야만 했소."

"날 세뇌한다는 뜻이겠죠!"

그의 눈이 번뜩였다. "아냐, 애니. 그게 아니오! 당신에게 접근할 다른 방법은 생각해 낼 수가 없었소. 난 당신이 전생에 대해 어느 정도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조차 몰랐소. 하지만 당신은 당신 할머니의 모습을 정말로 닮았소. 내가 꿈에서 보았던 그 여인 말이오. 당신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지."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과 어조에 그녀의 심장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가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말을 믿어요. 아주 오랫동안 내가 꿈속의 그 여인을 상상해 낸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소. 난 당신 할머니의 사진도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오. 내가 꿈에서 보았던 그 애니가 우리 마을에 살았었던 안나 듀몬트와 동일 인물인지 조차 몰랐소. 여기저기 물어보고 조사해 보았지만 그녀를 자세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지. 몇몇 할머니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의 기억은 너무 희미했소. 그녀가 마을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는 그 공군과 어떤 관계가 있었다고 말해준 사람은 전혀 없었소. 그러다가 당신의 사진을 보게 되었고, 당신 둘의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그래서 당신이 그녀의 손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거요. 전쟁 후 그녀가 영국으로 건너갔다는 것과 당신 아버지의 이름이 피에르 듀몬트였다는 걸 알고는 당신이 누군지 확신할 수 있었소. 그러나 같은 가족끼리 서로 닮았다고 해서 그걸 환생이라고 할 수는 없었소."

"그래요, 당연히 그럴 수 없죠!"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 "당신이 그 사실을 깨닫다니 정말로 기쁘군요, 마크!"

"나도 당신만큼은 합리적이오, 애니. 난 미치지 않았소. 하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것일수록 오히려 그 가능성이 더 클 수도 있는 거요. 나는 내가 만약 그 영국인의 환생이라면 이 세상 어딘가에 내가 사랑했던 그 여인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소. 난 그녀를 찾아야만 했소. 그러다가 당신의 사진을 보았고, 육체적으로 닮은 것외에 다른 것도 찾아내야 한다는 걸 알았소." 말을 잠시 멈춘 그의 입이 스스로를 비웃듯이 일그러졌다. "난 은연중에 당신이 나와 같은 꿈을 꾸기를 바랐지."

"난 꾸지 않았어요." 자신이 납치됐다고 여기게 만들고 그것이 또한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고 차갑게 말한 그에게 그녀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그 꿈을 꾸었소." 그의 부드러운 어조에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내게 최면을 걸었다는 걸 인정해요! 그 꿈들은 당신 집에 있을 때 꾼 거예요. 당신이 내 머리에 심어준 거라구요. 그리고 내가 깨어나기 전에 내가 최면에 걸렸다는 걸 잊어버리도록 한 거예요, 안 그래요?"

"아니오, 애니." 그가 거칠게 말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오."

"당신 말 믿지 않아요! 왜 그걸 믿어야 하죠? 내가 납치당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하면서 날 속인 거라구요. 당신의 꿈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내 말을 믿도록 당신에게 최면을 거는 건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을 거요." 마크는 아주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난 단지 당신이 내가 사랑했던 그 여인인지 알 필요가 있었소. 당신을 시골로 데려간 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소. 대체 내가 왜 최면까지 걸어가면서 당신을 속여야 한다는 거지?"

"내가 우리 할머니의 환생이기를 굉장히 바랐다는 건 당신도 인정했어요. 당신은 그 문제에 집착하게 됐고, 내가 그녀라고 확신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진행한 거예요, 안 그래요?"

"틀렸소, 애니. 당신이 그녀이길 원했지만 그건 당신이 진짜 그녀일 때의 이야기요." 그들은 각기 비난과 강요의 눈빛으로 서로를 단호하게 쳐다보았다.

"만약 내가 아니라면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때는 어쩔 거죠? 그럼 흥미를 잃겠군요."

전화벨이 울렸다. 마크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재빨리 돌아서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받았다.

애니는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옆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마크의 정체와 그가 지난 하루 동안 자신을 데리고 게임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충격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태 이렇게까지 화가 났던 적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어버린 기분이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그녀는 파리에 있을 동안 머물 사치스러운 스위트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쾅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에 애니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마크를 돌아봤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야겠소. 내 부하직원들이 도착해서 바에서 기다리고 있소. 당신이 카메라를 상대하기 전에 점심을 끝냈으면 하오."

"먼저 내려가요. 화장도 좀 고치고 머리도 좀 손봐야겠어요."

"아니, 기다리겠소." 그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5분 정도는 줄 수 있소. 서둘러요."

그녀는 이를 앙 다물고 일어나 아무 말 없이 욕실로 향했다.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매순간 그를 의식하게 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지금껏 느껴온 모든 끌림에 대해서 의심해 봐야 할 판이었다. 그가 이 모든 걸 아주 면밀하게 계획했을 터였다. 그가 누누히 말했듯이 그녀가 그의 말을 믿게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가 어디까지 준비를 해두었을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것이다.

그녀의 상상력은 굳이 최면술이 아니더라도 정신 상태와 잠재의식을 혼란시키는 약물이 있지않을까 하는 데까지 뻗쳤다. , 이건 미친 짓이야! 그녀는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를 빗어 시뇽 스타일로 묶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생각해 낸 설명들은 하나같이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그에게 시선을 두었던 그 순간부터 그녀가 느꼈던 끌림에 대해서는 정말 설명이 필요했다.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데이트 해 본 남자들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나마 그들도 밴드들과 공연여행을 하거나 녹음작업을 하면서 만난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강렬한 충격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마크는 달랐다. 첫날 파리를 향해 가고 있었을 때 그가 말을 건네기 전에도 그녀는 그에게 강한 육체적인 매력을 느꼈다. 그녀는 그날 차의 뒷좌석에 앉아서 그의 검은 머리와 올리브빛 피부, 넓은 어깨와 검은 눈을 바라보며 그가 여지껏 본 중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났다.

전에는 누군가가 그렇게 강렬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후에 일어났던 일은…… 그들이 숲에서 그리고 침실에서 어떻게 사랑을 나눴는지를 떠올리자 거울 속의 그녀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눈을 감고 신음했다. 그걸 왜 그냥 내버려두었을까? 강제적인 것이었다고 스스로를 타일러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는 그를 원했었다. 아직도 그렇다는 걸 인정하자 입이 말라왔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녀는 맹세코 자신이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열중해 만난 지 몇 시간도 안된 남자와 침대로 향할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마크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이 다른 세기였다면 그녀를 홀린 죄로 그를 고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섀도와 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사진을 찍기 전에 다시 화장할 기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먼저 마크와 그의 스태프들과 점심식사를 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서기는 충분했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자 참을성 없이 방안을 서성이는 마크가 보였다. 그가 무자비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런 나오셨군! 난 당신이 종일 욕실에 있으려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던 참이었는데!"

그녀는 흰 스웨터를 벗어서 이제는 필과 다이애나가 골라준 옷을 겉에 입고 있었다. 마크는 눈살을 찌푸린 채 옷차림을 눈여겨보았다. 부드럽게 부풀어 오른 가슴 사이의 깊은 골짜기가 드러나는 목선에 시선이 닿자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2의 피부처럼 찰싹 달라붙은 검은 탱크톱은 허리 위까지만 와서 그녀의 창백한 피부를 노출시키고 있었다.

"준비했다는 옷이 그 거요?"

"그래요! 맘에 안 들어요? 밴드들은 이 옷이 아주 섹시하다고 하던데." 그녀가 턱을 치켜들고 도전적으로 말했다.

"물론 그랬겠지." 그가 잇새로 말했다. 시계를 보는 그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다른 옷을 찾아볼 시간이 없소. 지금은 그냥 가겠지만 앞으론 당신이 입을 계획인 옷들을 살펴볼 거요. 우리가 팔아온 당신의 이미지는 슬프고 여린 거리의 가수였지 섹시한 이미지는 아니었으니까."

"전에는 안 그랬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달라요." 공격적으로 그녀가 말했다.

마크가 눈빛을 빛내며 그녀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 그러신가? 그 문제에 관해선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 그가 스위트의 문을 열면서 나오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어서 갑시다, 늦겠소!"

그녀는 화가 났다. 마크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않고 침착하게 그를 지나쳐 갔다.

그들은 이상한 커플이었다. 애니는 잘 닦여진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검은 색 탱크톱에 꽉끼는 검은 진을 입은 그녀는 섹시해 보였고, 우아하게 재단된 짙은 색 정장을 한 마크는 말 그대로 권위적으로 보였다. 자신의 꿈의 세계를 절실하게 얘기하던 그 남자와 지금 그녀의 옆에 서있는 남자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밖에서 그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힘이 넘치고 잘 생긴 그의 외모에 감탄을 할 것이다. 아무도 마크가 환생이나 꿈을 사실로 받아들일 거라고는 감히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고방식이나 생활 역시 아주 보수적으로 보였다.

이런 모습의 그와 처음으로 맞닥뜨렸다면 나의 반응은 어땠을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그가 기괴한 유괴사건을 벌인 건 단순히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관계가 지금 같아지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들이 오늘에야 처음 만났다면 그들은 단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스태프들과 함께 점심을 들었을 것이고, 애니는 그 다음 며칠 동안은 신문사를 비롯한 여러 언론들과의 인터뷰, 리허설, 음향 점검, 그리고 공연을 위한 그 밖의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뻤을 것이다. 파리 공연이 끝나고 나면 그녀는 다음 공연지로 떠나야만 했을 것이다. 아마도 마크를 만날 시간은 거의 없었을 것이며 그가 접근하거나 강한 인상을 심을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호텔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았는지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이내 여기저기서 속삭임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몇 사람이 그녀를 향해 나오기 시작했다.

"맙소사." 그녀는 사람들과 얘기할 때를 대비해서 익혀두었던 불어를 생각해 내려고 애쓰면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소?" 마크는 그녀의 시선을 쫓아가더니 투덜거렸다. "지금은 팬을 상대할 시간이 없소. 빨리 갑시다."

그가 그녀에게 팔을 두르더니 재빨리 호텔의 식당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을 맞은 급사장에게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안톤, 우리는 지금 쫓기고 있소. 사람들을 좀 막아주겠나?"

급사장은 전혀 놀라지 않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비엥 씨르, 무슈 빠스칼."

마크와 애니가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의 커다란 테이블로 가는 동안 급사장은 몇몇 대담한 팬들을 가로막고 서서 단호하지만 예의바른 어조로 경고하고 있었다. "점심 예약을 하지 않으셨으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살뤼(안녕)!" 마크가 앉아있는 여섯 명의 사람들에게 인사하자 그들도 서둘러 일어나 마크에게 답례했다.

"살뤼."

"봉쥬르." 인삿말이 오갔고, 몇몇은 영어로 인사를 보내기도 했지만 불어 액센트가 강했다.

그들은 애니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는 그녀도 사람들에게 주시 당하는데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어색했다. 얼굴이 붉어졌고,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침실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부끄럼을 타기보다는 자의식이 강한 편으로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것이 두려웠다. 애니는 자신이 긴 검은 머리와 슬픔에 찬 푸른 눈의 작고 마른, 아주 평범한 여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일하게 특별한 것이 있다면 목소리였다. 그녀는 노래를 할 수 있었다. 그건 그녀에게 내려진 축복이었다. 그것 때문에 평범했던 그녀의 인생이 변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런 목소리를 주신 하느님께 매일 마음 속 깊이 감사를 드린다.

", 드디어 그녀가 왔소." 마크가 그녀에게 팔을 두르며 경쾌하게 말했다.

그녀의 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마크가 느꼈을까? 그녀는 궁금했지만 그의 눈을 바라보는 위험은 피했다.

그가 스태프들을 한 사람씩 소개했다. "이 친구는 라울이요, A&R의 책임자요."

애니는 음반회사의 가장 중추적인 부분인 `아티스트&레퍼토리' 부서의 책임자인 자그마한 키의 젊어보이는 남자와 악수를 했다. 라울은 그녀 또래로, 젊은 시절의 나폴레옹을 연상시켰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유명 디자이너의 것으로 돈을 아주 잘 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쪽은 라울의 보좌관으로 새로운 인물을 찾아내는 일을 하는 시몬느와 제라르요." 마크가 활기차게 말을 이었다. 그들은 더 어려 보였다. 여자는 스물두 살 정도로 보였는데 헝클어진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고, 남자쪽은 열여덟에서 스물다섯 정도로 마른 몸매에 아주 진지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들은 둘 다 검은 색 바지와 셔츠에 분홍색 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래서 마치 쌍둥이처럼 보였다.

"최근에 쓸만 한 사람을 좀 발견했나요?" 애니의 질문에 그들은 어깨를 으쓱했다.

"매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는 있지만……."

"정말 참신하고 특별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시몬느의 대답을 제라르가 마무리했다.

"당신도 이 분야 일이 어떤지 잘 아시겠죠."

"뛰어들기가 정말 어려운 세계죠." 이번에도 시몬느가 말을 시작하고 제라르가 말을 맺었다.

애니는 그들이 항상 같이 다니고, 말도 늘 그런 식으로 하는지 궁금했다.

"전 시작할 때 아주 운이 좋았어요, 그래서 오늘날의 제가 있는 거 같아요."

그들은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들은 일제히 영어로 말했다.

"여기는 프랜신느. 그녀는 미술부서의 책임자요. 당신 불어판 레코드의 재킷은 그녀 담당이지. 그러니 당신 맘에 안드는 점이 있다면 그건 다 그녀의 책임이오!"

그 말에 긴 다리를 가진 키 큰 금발머리 여자가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파란 눈은 차가웠다.

"맘에 안드는 점이 없길 바래요." 그녀가 재빨리 애니에게 경고했다.

"전혀 없었어요." 애니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주 멋지던데요."

"고마워요.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요. 막 당신의 새 로고를 봤는데, 정말 멋졌어요. 특히 검정색과의 대비는요." 그녀가 테이블 위의 레코드 재킷을 보면서 말했다.

바탕인 검정색에 대비돼서 애니의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짙은 검은 속눈썹을 가진 고양이의 눈같은 초록색 눈동자가 도드라지게 디자인 되어있었다.

"처음에 이 아이디어를 들었을 때 좀 우스웠지만, 제 매니저가 정말 맘에 들어했거든요."

"우리도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요." 프랜신느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 로고는 영국 측 음반 회사의 이미지 창출 부서에서 이번 앨범을 위해 수개월간 공들여 만든 것이었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 가수의 음반이 무엇을 말하는지 팬들이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로고, 요즘에는 그런 로고가 레코드 성공의 필수적인 한 요소가 되어가는 추세였다.

마지막 스태프는 회사의 광고부서의 책임자인 루이스로, 그는 애니에게 프랑스 공연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이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급사장이 와서 물었다.

"그럽시다." 그렇게 말한 마크는 애니를 위해 그와 라울 사이의 의자를 빼주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미리 주문을 해 두었소. 바꾸고 싶은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요. 런던 사람들에게 미리 당신이 특별히 싫어하는 음식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없다고 하더군."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는 편이죠."

첫 코스는 토끼 고기와 자두 요리였는데, 롤빵, 오이 피클과 저민 토마토, 양파와 사각사각한 양상치가 함께 나왔다.

"맛있는데요." 애니의 말에 마크의 눈썹이 뭔가를 묻듯이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웃었다.

"쥬라에선 늘 이런 걸 먹지."

"거긴 마크의 고향이죠." 라울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늘상 그곳 얘기를 해대요."

라울이 웃었다. "그곳을 아주 자랑스러워해요. 당신은 가본 적 있나요?"

애니는 즐거운 빛을 띠고 있는 마크의 눈길을 피하면서 머리를 저었다.

"저도예요, 하지만 마크 덕분에 그곳이 마치 천국의 한 부분인 것처럼 느껴진다니까요." 라울이 큰 소리로 웃었지만, 마크는 웃지 않았다.

"당신 고향은 어디에요?" 애니가 물었다.

"전 파리 토박이죠." 그의 어조에는 쥬라보다는 파리에서 태어난 것이 아주 다행이라는 느낌이 배어있었다.

"당신도 프랑스가 크게 파리와 그 나머지 지역으로 이분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거요. 파리인이 아니면 프랑스인인 거요. 공통점 같은 것은 필요 없지."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이 라울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우린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죠. 파리에서는 프랑스 각 지방의 특산 요리를 다 맛볼 수가 있거든요."??

"`뽈레 오 벵 존느'도 맛볼 수 있소." 마크의 말이 있은 뒤 곧 웨이터가 음식을 실은 손수레를 끌고 다가왔다. "이번 음식도 쥬라의 특별식이오. 쥬라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노란 와인으로 병아리 고기에 크림과 벌꿀 집 모양의 암갈색 버섯인 삿갓버섯을 곁들인 요리지. 내 생각으로는 쥬라의 소나무 숲에서 나온 것들로 만든 음식들이 가장 맛있는 것 같소."

라울이 애니에게 윙크를 해 그녀는 앞에 놓인 `뽈레 오 벵 존느'가 담긴 접시를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마크가 부드럽게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쥬라에 갈 수 없다면, 차라리 쥬라를 당신 앞으로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지." 자신을 좀처럼 놔두지 않으며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대하자 그녀의 맥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는 방식이나 그가 그녀에게 말을 걸 때마다 어조가 변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기라도 하면 어쩌지? 그녀는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랬다. 테이블 아래서 그가 무릎을 그녀에게 갖다대고 또 그의 손이 자주 그녀의 손가락이나 팔, 허벅지를 스치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 사소한 접촉들 때문에 그녀는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으며 입술이 말라왔다. 그녀는 아직도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왜 그녀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더 이상 밀어 부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충분히 그랬으니까. 낯선 사람들이 둘러싸여 있는 테이블에서 그에게 그런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닿는 것을 피해보려고 무릎을 옆으로 비키고 그의 손을 밀쳐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오히려 마크를 즐겁게 만들었다. 그녀의 시선과 맞다을 때마다 그의 눈빛이 놀리듯이 빛났다.

식사 후 루이스와 마크는 기자들과 만나는 장소로 그녀를 안내했다. 이제는 사진찍는 데 어느정도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그 일은 기운 빠지고 말할 수 없이 따분한 일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인형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 일에서 해방되자 스위트로 올라가서 쉴 수 있었다. 마크가 그녀를 따라왔지만 그가 거실에서 낮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기 시작하자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겨우 5분쯤 지났을까 스위트의 현관에서 크게 벨 소리가 들렸다. 마크가 대답을 하면서 문으로 뛰어가는 동안에도 벨은 계속 울렸다. 마크가 문을 홱 열어젖히면서 화난 소리로 말했다. "벨 좀 그만 눌러요!" 그러다 갑자기 그의 어조가 변했다. "이런 당신들이었군!"

애니는 잠이 덜 깨 하품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필의 목소리가 들리자 잠이 확 달아났다.

"벌써 지쳤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그러면 안 되지……. 어이, 마크! 잘 지냈소? 잘 진행되고 있소? 문제는 없고? 없어요? 그거 잘됐군요. 내 아내를 아직 만나보지 않았죠? 다이애나, 이쪽은 프랑스 측 음반 회사의 전무이사 마크 빠스칼이야."

애니는 침대에서 거의 굴러 떨어지듯 나와 문을 열고 뛰어나가다 막 손님들을 안으로 안내하던 마크와 부딪칠 뻔했다. 다이애나와 필이 돌아보며 웃었다.

"거기 있었군!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치다니 어떻게 된 거지? 우리가 없는 동안 정력을 낭비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는데, 당신 꼴을 보라구." 필이 그녀를 훑어보며 꾸짖듯 말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양 뺨에 키스했다. 파란 두 눈이 냉정하게 그녀를 살펴보았다. "…… 어쨌든 아주 달라보여! 2주 동안 못 봐서 그런 건가? 괜찮은 거야?"

"그럼요." 그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난 이제 어른이라고요, . 알아서 할 수 있어요." 그녀는 돌아서서 다이애나를 꼭 껴안았다. "둘 다 아주 멋지게 태웠군! 아주 멋있어. 결혼하니까 어때, 다이애나? 해 볼 만해?"

"지금까지는." 다이애나가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 "코는 안 골거든. 아파트에서 혼자 지내보니까 어때? 외롭지는 않았니?"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애니는 안심시키듯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좀 이상했는데, 혼자서 지내는 것도 괜찮았어. TV프로 때문에 싸울 일도 없고 말야. 음악소리를 낮출 필요도 없고!"

다이애나가 웃었다. "이웃에서 얼마나 불평을 했을지 짐작이 간다!"

"이 호텔, 차 맛이 괜찮소?" 필이 거실로 가며 물었다. 다들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차 말이오? 영국 손님들이 종종 있을 테니 있긴 하겠지만, 잘 끓이는지는 모르겠소." 마크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차를 부탁해요……. 몇 잔이나? ? 애니, 당신은?"

"저도요." 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애나가 룸서비스를 부탁하는 마크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애니의 귀에다 속삭였다. "섹시함 그 자체다! 그가 자신의 시골집에 널 초대했다며? 어땠어?"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걸까? 애니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좀 멀더라. 아주 평화로운 곳이야."

"저 사람 결혼했니?"

애니가 고개를 젓자, 잔뜩 궁금해 하는 다이애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누가 또 있었는데?"

애니의 신경이 곤두섰다. 어떻게든 대답을 해야 했다. 마침 수화기를 내려놓은 마크가 도움을 청하는 그녀의 눈길을 보고는 그들에게 다가와 다이애나에게 기분 좋게 말을 걸었다. "애니가 내 친구들에 대해 얘기하던가요? 모두들 애니를 만나고 싶어 해서 애를 먹었다니까요."

다이애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순회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그녀가 충분히 쉴 수 있었으면 했는데요."

"물론 충분히 쉬었을 겁니다. 나 역시 이번 공연의 성공을 위해 굉장히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모두들 다음 1,2주간 레코드가 많이 팔리길 고대하고 있죠. 그녀는 벌써부터 시선을 모으고 있어요. 이번 순회공연이 끝날 때쯤이면 아주 빅 스타가 되어있을 거요."

그는 의도했던 대로 다이애나의 주의를 돌리는데 성공했다. 그녀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물론이죠! 프랑스에서만이 아니라 전 유럽에서요." 그녀가 애니에게 팔을 둘러 꼭 껴안았다. "그렇지?"

애니가 웃었다. "그렇게 되어야지!" 그녀는 내심 마크가 그렇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재치 있고 설득력 있게 진실을 감춘데 대해 놀랐고, 동시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궁금증을 느꼈다. 그가 말한 것중 진실한 부분이 있을까? 마크가 뚫어지게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읽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필과 다이애나의 도착으로 상황이 변했다는 것을 그도 눈치 챈 것이다. 그들의 도착으로 애니는 마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맺어온 따뜻하고 친근한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필과 다이애나와의 우정에 비해 그를 안 시간이 얼마나 짧은 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마크와 단둘이 있을 때에는 자신을 가릴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니라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으로 그를 대면해야만 했었다.

갑자기 그녀는 마크와 24시간을 함께 보내고 난 지금, 전보다 자신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대중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며 과대포장되어 있다는 것을 잊고 그것을 믿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지난 수년간 그녀는 진실된 자아와 사람들에 의해서 꾸며진 가면 사이의 괴리감이 커진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바빴다. 열일곱 살 때는 만들어낸 이미지에 맞게 그들이 그녀를 대신 해서 대답해 주었었다. 애니는 그 문제에 관해서 한 번도 언쟁을 한 적이 없었다. 사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내가 누구지? 정말 내 생각은 어떻지? 내 기분은?

그녀는 필과 다이애나가 일러준 대로 말했고, 그들이 골라준 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녀가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나이트클럽, 레스토랑, 호텔이나 리조트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렇게 인형처럼 다뤄지는 것에 대해서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 둘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을 뿐이다. 결국 그녀는 그들에게 빚진 것이 많았으니까. 그녀는 그들을 좋아했고, 그들에게 감사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그녀 자신의 삶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이런 사실을 직시하도록 도와준 것이 마크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립을 결심하게 된 그녀가 한 최초의 결정은 더 이상 그를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마크를 보면서 그가 자신의 생각을 읽도록 내버려 두었다. `더 이상 내게 접근하지 말아요, 마크. 이제 끝났어요. 난 당신을 믿지 않아요, 그리고 다시 당신을 만나고 싶지도 않아요.'

 

9

파리에서의 첫 공연은 완전히 매진이었다. 애니는 프랑스에서 이 정도의 반응을 일으킬 정도로 자신이 알려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마크와 스태프들의 노력이 일궈낸 놀라운 결과였다. 그들은 몇 달 전부터 공연 분위기를 조성해 왔다. 그녀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여러 방송매체에 끊임없이 가십거리를 제공하고, 공공장소에 포스터를 붙이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음악 잡지와의 인터뷰 기사에는 더욱 더 신경을 썼다.

"지난 몇 주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 기사가 실렸죠." 광고부 책임자인 루이스가 만족감과 자부심이 듬뿍 담긴 어조로 말했다. "티켓은 발매를 시작한 지 며칠 안 돼서 다 팔렸구요. 이번 공연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프랑스는 외국 가수에게 쉬운 시장이 아니잖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첫번째 공연이 이렇게 잘될지는 예상치 못했어요."

"당신이 굉장한 일을 해낸 거예요!" 그녀의 치하에 그가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공연기간 동안 난 늘 당신 곁에 있으면서 부차적인 문제들을 처리해 줄 겁니다. 그러니 필요할 때면 주저하지 말고 도움을 청해요."

"그럴게요." 그녀는 필이나 그의 스태프들이 알아서 해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마고 약속했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까지 특별히 골치를 앓은 적이 없다는 점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새벽녘에 눈을 떴다. 가볍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침 일찍 리허설을 하기 위해서 공연장으로 차를 몰았다. 공연 무대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아직 망치질 소리가 계속되고, 안전점검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무대나 좌석이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번 공연에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건 모두들 절대 사양이었다!

무대 아래에서는 전기기사들이 회로를 테스트하느라 바쁘게 움직였고, 이따금씩 마이크를 테스트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근육질의 청년들이 악기들을 무대로 옮기고 있었다. 키보드와 드럼이 넓은 자리를 차지했으며, 커다란 앰프들은 진작에 무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간혹 물건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스테디움을 울렸다.

"조심해! 그게 다 돈이라구!" 지방공연 매니저가 호통을 쳤다.

"미안해, ! 이 친구가 날 밀었단 말야!" 일을 낸 남자가 골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디로 가야죠?" 누군가가 소리치면 잭이 돌아서서 또 외친다.

백보컬들이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반복해서 연습하고 있었다. 애니와 밴드, 댄서들은 자신들의 동작을 연습했다. 무대 위에서의 그들의 움직임은 세세한 부분 하나까지 무대 안무가가 계획한 것으로 런던에서 수차례 연습했었다. 이제 그들은 연습했던 공연을 대규모 야외무대에 재현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 무대에서는 늘어진 전선에 걸려 넘어지거나 무대 밖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했다. 그들이 각자 자신들의 리허설을 하는 동안 전기기사들은 공연 때의 다양한 조명의 변화를 시도하면서 전기회로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조명을 점검했다.

"꼭 정신병원 같군." 브릭이 즐거운 듯 씩 웃어보였다. "공연을 준비하는 걸 안 좋아해? 난 온몸이 짜릿한데……."

"?" 댄서들이 팔을 저으며 높이 뛰어오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애니가 물었다.

"아드레날린이 넘친다고!"

"무대에 서는 게 전혀 안 두려워?" 애니는 팔팔한 그가 부러웠다.

"당신만큼은 두려워하진 않아! 오늘밤 무대에 설 때까지 기다리기가 싫어." 그가 눈을 반짝이며 드럼치는 시늉을 해보였다. "일단 무대에 서서 드럼을 치기 시작하면 날 수도 있을 정도로 흥분하지. 하고 싶은 대로 거칠고 시끄럽게 드럼을 치며 몰입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라이브 공연이거든! 다른 사람들의 불평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구. 드럼은 멋진 섹스와 같아. 사람들이 늘 훼방을 놓으려고 하거든."

밴드 부원들이 그 소리를 듣고 키득거렸다. 그러나 애니의 귀에는 브릭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의 다른 쪽 끝에서 마크가 필과 얘기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머리 위의 육중한 조명 세트를 올려보고 있었다. 크레인 위의 한 남자가 무대 아래서 워키토키를 들고 있는 남자의 지시에 따라 조명들을 정비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크는 검정색 스웨터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아주 섹시해 보였다. 입안이 바싹 말라와 애니는 시선을 돌렸다. 그를 보고 있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 며칠간 그의 방식에서 벗어나려고 애써왔다. 그리고 오늘밤 공연이 끝나면 그녀와 팀은 다음 공연장인 리용으로 떠날 것이다. 그가 그들과 함께 갈 확율은 아주 희박했다.

긴 하루였고, 그녀는 아주 피곤했다. 거의 하루 종일 서있었기 때문에 이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그만 하고 좀 쉬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다이애나가 노래 부르는 중간에 끼어들며 애니에게 팔을 둘렀다. "정말 그래, 하지만 도중에 멈추면 리듬이 깨져. 그러기 전에 더 해두는 게 나아."

"이제 그만 해, 애니!"무대 정면의 좌석에 있던 필이 외쳤다. 돌아보자 필과 그 옆에 서있는 마크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전기기사들이 조명을 전부 켰고, 약해진 오후의 햇빛 속에 강렬한 불빛이 퍼지자 눈이 멍해졌다.

그녀는 잠시 동안 아찔해져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기관총이 발사되는 소리와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맙소사, 애니! 왜 그래?" 어디선가 다이애나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 순간 애니의 눈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조명을 꺼!" 무대 아래에 있던 마크가 외쳤다. 전기기사가 서둘러 그의 말을 따랐고, 이윽고 조명이 꺼졌다. 어둠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애니는 눈에 눈물이 잔뜩 고인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다이애나가 두 팔로 애니를 감쌌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녀의 어깨와 등을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는 말을 중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여기 있잖니…… 넌 안전해……. 왜 그랬어?"

마크가 무대 위로 뛰어올라왔다. 애니는 다이애나의 어깨 너머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에는 방금 그녀에게 생긴 일을 이해한다는 눈빛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본 것, 들은 것, 경험한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어서 호텔로 데려가." 필이 다이애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나가야 해. 몇 시간 전에 보냈어야 하는 건데. TV난 음악 등 어떤 소음도 안 돼. 그리고 당신은 소파에서 좀 쉬도록 해, 잠들지는 말고."

"내가 데려가겠소." 필과 다이애나가 깜짝 놀라서 마크를 보았다.

다이애나가 예의바른 미소를 지었다. "친절하시군요, 하지만 애니를 돌보는 게 제 일이예요?"

마크는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초조해 하는 것이 느껴졌다.

"가자." 다이애나는 애니를 무대 밖으로 이끌었다. 애니는 마크의 주시하는 눈빛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가 거기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지 않았더라도 그 환상을 보았을까?

호텔에서 그녀는 아주 힘겹게 잠이 들었지만 꿈 때문에 자주 깨야했다. 깨어나서 한동안은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딘지 몰라 멍하니 침실을 둘러보다가 다시 잠에 빠지곤 했다. 그녀는 완전히 지쳐 있어서 악몽조차도 잠을 막지는 못했다.

다이애나가 홍차를 가져와 그녀의 잠을 깨웠다. 옷을 갈아 입고 공연장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그들이 탄 차는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는 검은 유리로 돼 있어서 팬들은 그녀가 탄 차가 지나가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뭐 좀 먹을래?" 다이애나가 물었다.

그녀는 속이 울렁거려 고개를 저었다. "샌드위치라도 좀 먹어 봐." 다이애나는 애니가 콘서트 전에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설득해 보려고 노력했다.

"먹는 얘긴 꺼내지도 마, 가자."

차가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아가자 그들은 재빨리 차에서 내려 의상실로 직접 연결되는 통로로 들어갔다. 밴드들이 긴장한 채 창백한 얼굴로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브릭만이 쌩쌩했다. 그가 애니에게 말을 하는 동안 공연 매니저가 그에게 거대한 햄버거를 가져다주었다. 리드 기타 리스트가 브릭이 입을 벌려 햄버거를 먹는 것을 보더니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전혀 긴장이 안 돼?" 애니가 브릭의 입에서 시선을 떼고 비난조로 물었다.

"난 배가 고프다구. 개처럼 일했잖아." 그가 변명했다.

"넌 언제나 배가 고프지!" 다른 부원들이 잡지, 신발, 책 등을 브릭에게 집어던지면서 조소했다.

"너희들은 전부 정신적인 장애자들이야!" 브릭이 물건들을 피하면서 킬킬댔다.

"긴장돼?" 필이 애니에게 키스하면서 물었다.

"그냥 멍해요."

"일단 무대에 서면 괜찮아진다는 거 알잖아!" 그가 안심시켰다. 공연장에서 들려오는 함성소리에 애니는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들의 술렁임과 오픈 밴드인 프랑스 밴드의 연주소리로 공연장이 들썩였다.

"나도 알아, 도울 방법이 전혀 없다는 거. 속이 안 좋아본 적이 없으니 알게 뭐야." 애니는 브릭을 노려보았다. "프랑스 사람들도 이런 음식을 먹다니 정말 놀랐어. 입맛이 더 나은 줄 알았거든. 이렇게 커다란 햄버거도 만들줄 안단 말야!" 브릭이 행복하다는 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틀림없이 말고기로 만들었을 거야!" 리드 기타리스트가 심술궂게 말했다.

브릭은 정말 놀란 것 같았다. "농담하는 거지? 그들이 말고기를 먹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자 브릭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필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오픈 밴드가 잘해서 분위기를 잘 잡아주고 있어." 그가 시계를 보았다. " 몇 분 후에 밴드가 나가고 당신은 사인에 따라 나오면 돼."

애니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이마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토하지는 않았지만 위가 진정되도록 목 뒤를 시원한 물로 적셔줘야 했다. 그녀는 화장을 손보면서 잠시 그곳에 있었다.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애니?"

그녀는 바짝 긴장했다. 마크의 목소리였다. 그가 여기 웬일이지? 그를 볼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 침을 두 번이나 삼켜야 했다.

"?"

"밴드가 나갔소. 당신 차례는 이제 5분 남았소."

"……." 위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문이 열렸다. "들어가도 되겠소?"

"안 돼요! 나가요! 필은 어딨죠? 다이애나는요?" 그녀는 동요했고 두려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려!" 마크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는 그녀가 저항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잡아서 강하게 끌어안았다.

"놔줘요! 다이애나는 어딨는 거지? 늘 옆에 있었는데. 필은…… 다들 어디 간 거야?" 그녀는 그에게 기대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면서 그를 밀쳐보려고 했다.

"그들은 위층에서 기다리고 있소. 내가 당신을 데려오겠다고 했소. 여기 프랑스에선 당신은 내 스타니까. 그래서 당신이 떠날 때까진 내가 당신을 돌보겠다고 했소." 그는 그녀가 겁먹은 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난 그들이 편해요. 그들을 데려다 줘요."

"아냐, 애니. 당신은 그 사람들이 필요 없어." 마크가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그의 입술이 관자놀이에 닿았다. "당신이 그랬잖소, 이제 어른이라고. 필과 다이애나가 늘 옆에 있지 않아도 될 거요."

"당신도 필요 없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그의 목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그의 살 내음을 맡으니 몸이 떨리고 맥박이 요동을 쳤다. 그가 총에 맞아 죽어가는 꿈이 떠올라 눈물이 솟구쳤다.

"당신은 그런가?" 그가 그녀의 척추를 쓰다듬으며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난 당신이 필요해. 공기와 빛, 그리고 머리 위의 하늘이 필요하듯이 당신이 필요해."

부르르 몸이 떨려왔다. "호텔에서 또 그 꿈을 꿨어요. 몇 번이나 다시…… 그건 다 당신 때문이에요. 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당신을 만날 때까지는요. 앞으로 평생 동안 그럴 거예요.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실에 대한 꿈을 꿀 거라구요."

그가 감긴 눈 위에 키스했다. "지금은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요. 가서 노래를 불러야지."

"못하겠어요!" 그녀는 그를 꽉 움켜쥐면서 울부짖었다.

"당신은 할 수 있소. 내가 거기에 있겠소. 나를 위해서 노래해요, 애니. 이번엔 나를 위해서 노래하는 거요." 그의 목소리에는 강한 소유욕이 배어있었다.

마크의 입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는 저항을 멈췄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고 팔을 그의 목에 둘러 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그를 필요로 했다.

마크가 먼저 입술을 떼었다. 호흡은 거칠고 얼굴은 욕망으로 붉어져 있었다.

"나갈 시간이오!" 그가 투덜대면서 그녀를 문으로 떠밀었다. 밖의 통로는 그녀를 보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그들은 영어나 불어로 그녀에게 행운을 빌어 주었다. 그녀는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기계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교수대에 끌려가는 죄수처럼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대 가장자리에 가서 멈추었다. 마크는 여전히 그녀에게 팔을 두르고 있었다. 필과 다이애나가 다가와 인사를 했지만 마크는 여전히 소유욕을 드러내며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필과 다이애나가 호기심과 놀람, 그리고 질문이 담긴 눈으로 자신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무대의 중앙에서는 붉은색과 은색으로 된 번쩍이는 의상을 입은 사회자가 관객들을 부추기고 있었다. 관객들은 흥분해서 그녀의 이름을 되풀이해 부르고 있었다. "애니! 애니! 애니!"

웃고 있던 사회자가 드디어 그녀에게 사인을 보냈다. ", 드디어 그녀가 나오겠습니다……." 드럼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여러분이 보러오신 그 숙녀분이 대 순회공연의 첫 공연지인 여기 프랑스에 왔습니다." 드럼소리가 이어지면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보여줍시다. 여러분이 크고 분명한 소리로 불러 보십시오. 우리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줍시다. 작지만 야성적이고 아주 멋진 그녀……."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드럼소리가 이어졌다. "애니 듀몬트입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마크가 그녀의 머리에 키스하더니 부드럽게 그녀를 앞으로 밀었다. 애니는 연습한 대로 기계적으로 무대 중앙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귀가 멍멍해질 정도였다. 파란 조명이 그녀를 감쌌고 애니는 언제나 공연의 시작과 끝에 하는 포즈를 취하며 무대 가운데 섰다. 그것은 필과 다이애나가 계획한 것으로 다리를 벌리고 양팔을 위로 뻗어 그녀가 관객들을 온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환호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며 미소를 지었다.

"살뤼! 싸 바?" 그녀가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살뤼, 애니!" 관중들이 응답했다.

"여러분,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는 필과 다이애나가 준비한 대본대로 이어나갔다.

그녀가 첫 노래를 부를 때가 되자 관중들은 완전히 그녀에게 몰입되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며 그녀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드레날린이 용솟음쳤고, 긴장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노래를 끝냈을 때는 마치 산의 정상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용수들이 번쩍이는 의상을 입고 무대에 뛰어들었다. 애니가 그들의 이름을 호명하자 관객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터뜨렸다. 애니도 춤을 같이 춤을 추다가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우울한 분위기의 노래가 탄식하듯이 시작되자 공연장은 핀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관중들은 노래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잠시 후 브릭의 드럼 솔로가 이어졌다. 그의 드럼소리는 우울한 파리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고 관중들은 그것에 환호했다. 브릭은 인기가 있었다. 그의 순서가 끝나자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외쳐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몇 번이고 다시 인사를 해야 했다.

그날 밤은 모두에게 아주 성공적인 밤이었다. 애니는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고 청중은 애니와 그녀의 밴드를 계속 붙잡았다. 그들이 무대를 떠나려고 할 때마다 청중들은 앵콜을 외쳐댔다. 마침내 무대에서 벗어난 그들은 흥분으로 얼굴이 상기되었고, 기분이 최고조에 달해 날아갈 것 같았다. 샴페인을 터뜨렸고, 글래스가 거품으로 넘쳐흘렀다. 모두가 기쁨에 겨운 키스를 주고받았고 애니는 거의 모두에게 키스를 받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세찬 포옹을 받아서 다음 날이면 온몸이 멍투성이 일 것 같았다.

필과 다이애나도 그녀에게 키스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경이롭고 멋졌으며, 마법이 걸린 것 같은 무대였다고 극찬을 했다.

그녀는 방의 저쪽에 있는 마크를 보았다. 그는 격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동자가 마주치자 몸 전체가 떨려왔다.

방안의 소음과 북적거리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멀리 떨어져 숲 가장자리에 평화롭게 서있는 그 집을 떠올렸다. 또 숲의 어둠 속에서 예기치 못했던 감정에 압도되어 마크의 팔에 안겨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수많은 군중 앞에서 노래하고, 팬들의 외침과 법석 속에 있는 것은 익숙했다. 하지만 마크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너무나 생소한 것들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

"이제 무대의상을 벗고 샤워를 해야지. 호텔에서 파티가 마련돼 있어." 옆에 있던 다이애나가 말했다.

"?" 애니가 펄쩍 뛰며 물었다.

"걱정 마. 겨우 백여 명일 거야." 다이애나가 웃었다.

공연 뒤에는 늘 분위기가 고조되어서 좀처럼 진정되지가 않았다. 브릭의 기분은 최고였다. 드럼 스틱을 가지고 사람들의 머리와 테이블, 의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술이나 마약을 해서가 아니라 단지 흥분한 것뿐이었다.

애니도 종종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무대에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공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빠져 나간 에너지는 관객들에게서 열 배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 공연 후 몇 시간 동안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밤은 달랐다. 오늘밤 그녀는 마크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나서 파티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가진 몇 벌 안 되는 옷 중 하나로 목선이 낮고 등은 거의 드러나며, 꽉 조이는 허리선에 짧은 플레어스커트로 그녀의 날씬한 다리를 엿볼 수 있었다.

그녀가 등장하자 모두들 휘파람을 불었다. 브릭이 거칠고 우스꽝스런 목소리로 그가 작사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너무 섹시해서 괴로울 정도예요, 너무 섹시해요. 그녀가 걷는 모습만 봐도……."

애니는 그에게 쿠션을 집어던졌다.

잠시 후 경호원들이 그녀와 밴드를 비밀통로로 데리고 나가 대기하고 있던 밴에 태워 호텔로 데려갔다. 그들은 호텔에 마련된 커다란 방으로 안내되었다. 거기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애니는 샴페인 잔을 여러번 받았지만 그냥 홀짝이기만 했을 뿐이다. 이미 기분은 최고였기 때문이다.

마크도 거기에 있었지만 그녀 곁으로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강력한 눈빛에 그녀는 블랙홀의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가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걸자 그녀는 눈길을 돌려 대답을 해야만 했다. 마크는 다시 사람들 속에 섞여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애니의 마음속에 내내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손에 델 듯이 뜨겁게 욕망이 타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오늘 청중들이 아니라 마크만을 위해서 노래를 불렀다. 내내 그를 의식하면서 자신을 다 바쳐서 노래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마크를 보자 콘서트 이후의 득의만만하던 기분이 서시히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다가오자 몸이 뻣뻣해졌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잘 시간이오."

그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항의의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아직 초저녁이라구! 괜히 흥 깨지 말아요!"

그러나 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아주 창백했다. "나 정말 피곤해요."

"방까지 데려다 주겠소." 마크의 말에 다이애나가 살피듯이 쳐다보고 필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와 마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를 살피듯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지껏 그녀를 보살펴주고, 자러가라고 얘기해 주는 것은 늘 그들의 임무였다. 그리고 콘서트 전에 같이 있어주고 무대까지 안내해 주는 것도 늘 그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오늘밤은 마크가 안내 역할을 했다. 그들은 놀라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안심시키듯이 그들에게 키스하며 밤인사를 했다. "파티에 남아서 더 즐겨요. 너무 피곤해서 도저히 깨있을 수가 없어요."

그들은 그녀가 가는 것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질문은 일단 접어두기로 한 것 같았다.

조용한 호텔 복도를 걸으면서 마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따라 스위트로 들어왔다.

그녀는 당황했지만 도전적으로 말했다. "잘 자요, 마크!"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더니 강한 소유욕을 드러내며 키스했다. 그가 얼굴을 들고 붉게 달아오른 졸린 그녀의 얼굴을 내려 보았다.

"당신은 날 위해 노래했어, 그렇지?"

"그래요." 그의 입술을 찾아 다시 키스하고 싶은 마음에 내뱉듯이 말했다.

그가 미소 지었다. "잘 자, 애니."

그의 입술이 다시 내려오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발끝으로 서서 입술을 맞았다. 그러나 키스는 짧고 신사적이었다. 그리고서 그를 갖고 싶은 마음에 죽을 것만 같은 그녀를 남겨둔채 마크는 떠나버렸다.

다음날 아침 필과 다이애나를 만나자 그녀는 초조해졌다. 비록 그들이 궁금한 점은 잔뜩 있지만 마크에 관해서는 함구하기로 했다는 것을 곧 깨달았지만 말이다. 애니는 그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분위기가 경직되고 필과 다이애나의 표정이 변하며 묻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는 것을 보았다. 차라리 속 시원히 질문하길 바랐을 정도였다. 그래야 분위기가 좀 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질문을 한다 해도 별 다를 건 없었다. 그녀 자신조차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히 몰랐으니까.

그들은 오후에 리용으로 떠나야 했다. 정오가 되서야 일어난 밴드부원들은 기운을 다 써버린듯 창백한 몰골이었다. 브릭조차도 진이 빠져서 말 한마디 하기도 힘겨워보였다. 늘 요란법석을 떨던 식사시간에도 침묵을 지켰을 정도였다. 그들은 오후 세 시에 호텔을 떠나 리용으로 가기위해 호화스럽게 장식된 버스를 탔다. 브릭은 파리를 떠나자마자 잠이 들었다.

떠날 때도 마크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도 리용으로 떠났을까? 그녀는 궁금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그가 보고싶어졌다. 그는 늘 그녀의 마음 속에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를 보았다. 그리고 잠에 빠져 그가 한 말, 그가 그녀를 바라보던 것, 또 그의 입술이 닿던 느낌을 떠올리며 그에 대해 꿈을 꿨다.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다. 그를 본 지 몇 주는 된 것 같았다.

그녀가 다음 공연을 위해 막 무대에 오르려고 할 때 그가 나타났다. 그를 보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피곤하고 우울해서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이 벅찰 정도였는데 그의 등장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그녀를 향해 웃는 그를 보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눈이 반짝였다.

"내가 데려다 주겠소." 그가 지금까지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던 필과 다이애나에게 말했다.

그들이 약간 성난 눈으로 애니를 쳐다보았지만 애니는 그들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마음을 눈에 고스란히 드러낸 채 마크를 보고 있었다.

한마디 하려던 그들은 입을 다물고 공연 잘하라는 인사와 함께 그녀에게 키스하고는 사라졌다. 그들이 채 나가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마크의 팔 안에 있었다.

"내가 그리웠소?"

그녀는 일부러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는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그에게 매달려 키스했다. 마크는 의상실에 있는 작은 소파에 앉아서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다시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단둘이 있을 때면 그녀는 그들 사이의 어두운 면들 - 마크는 늘 인식하고 있을 꿈이며 그늘진 과거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곤 했다. 그녀에겐 마크가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하고 있는 바로 지금, 현재의 이 순간이 가장 중요했다.

"오늘밤도 날 위해, 나만을 위해 노래해 줘." 그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했다.

그녀는 열정을 가지고 공격적으로 공연에 임했고 밴드들은 그녀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청중들은 더욱 더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공연은 지금까지 중에서 최고였다.

공연이 끝나고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모두들 그녀를 포옹하며 정말 멋졌다고 찬사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방 건너편에 있는 마크의 눈길을 느끼며 그에게만 눈길을 주었다. 이번에도 그녀가 이만 파티에서 물러갈 시간이라고 말한 것은 마크였다. 방으로 안내해 준 것도 마크였다.

다들 그들에 대해서 알게 돼서 밴드들은 농담을 하며 그녀에게 의미있는 웃음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마크가 옆에 없을 때만이었다. 다들 그의 화를 자초할 정도의 위험은 무릎쓰지 않았다. 그에게 어느 정도 주눅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다이애나가 그간 그녀와 필을 괴롭히는 문제를 입밖에 냈다.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는 주저하듯 확신이 없어 보였다. "심각한 관계야, 애니? 글쎄……. 그는 너보다 나이가 훨씬 많잖아. 그리고 프랑스인이고……."

애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그야 물론 프랑스인이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도 그런데. 나도 반은 프랑스인이라구."

다이애나는 처음 듣는 얘기인 듯 당황했다. "그렇지, 깜빡 잊고 있었어. 난 네가……하지만 여기서 산 적은 없잖아."

"그래도 난 여전히 반은 프랑스인이야. 그리고 마크는 나보다 열 살 연상이고.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런 남자에게는 여자들이 아주 많았을걸. 저 정도로 섹시한 남자라면 연애사업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을 거야."

"난 그의 과거에 대해서 다 알아." 애니는 의식적으로 냉담하게 말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알면 아마 놀랄걸." 놀라는 것뿐이겠어, 아마 훨씬 더 걱정을 하겠지. 애니는 생각했다.

"그가 너에게 전부를 말했다고 확신하지 마!" 다이애나가 붉어진 얼굴로 성급하게 말을 이었다. "애니, 넌 여지껏 보호받으면서 살아왔어. 그러니 네가 그런 남자를 만나서 잘 해나갈 수 있을지 걱정되는 건 당연한 거야."

"난 배우고 있는 중이야." 애니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난 스물 넷이야! 날 그냥 내버려 둬, 알았어?"

다이애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넌 갑자기 너무 변했어. 우리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그녀는 말을 멈추고는 걱정스레 애니를 보았다. "필과 내가 결혼한 것에 대해 화가 난 건 아니지?"

그런 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아주 먼 옛날 얘기였다. 그 사건은 애니에겐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이애나에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너무 잘됐다고 생각하는걸. 둘이 행복한 게 눈에 보여. 아주 멋진 일이지.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지만 이제 변해야 할 때도 되지 않았니? 너무 편해서 내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너와 필이 잘 돌봐주었지. 이젠 나도 할 수 있어, 난 내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발견하고 있는 중이야."

다이애나는 여전히 당황한 것 같았고 더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미소를 지었다. "잘됐구나, 애니. 그래도…… 조심해, 알겠지? 마크 파스칼은 세상물정에 밝고 경험이 많은 사람이야, 반면에 넌 그렇지 않고. 우린 단지 네가 상처 입는 걸 원치 않을 뿐이야. 필이 직접 그에게 묻거나 조사를 해서라도 그가 결혼하지 않았는지 확인해 봐야해."

"안했어." 애니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다이애나가 참을성없이 거의 동정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애니, 그가 그렇게 말했을지 모르지만,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어. 만나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거야. 필립은 수년간 알아왔기 때문에 그를 신뢰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거야."

"그거야 그렇지." 갑자기 혼란이 그녀를 덮쳐왔다.

"필더러 그에 대해 조사해 보라고 하자. 결국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잖아! 남자들은 다 어느 정도는 사기꾼이야."

애니는 주저했지만 끝내 동의했다. "좋아." 그녀는 필립이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믿었다. 그러나 지난 몇 주간을 돌이켜 보자, 그녀는 필과 다이가 결혼한 뒤 많은 것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아니면 마크를 만난 이후였던가? 대체 그는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을까?

"그가 우리와 너를 갈라놓도록 놔두지 마! 처음 시작할 때부터 넌 필립과 함께 일해왔어. 이제 네가 대스타가 되자 잘 알지도 못하는 낯선 사람을 끼워 넣는 건 공평하지 않아."

"그렇지 않아." 하지만 애니는 확신하지는 못했다. 마크가 필립과 그녀의 관계를 비집고 들어오고 있는 건 사실이었으며 그녀도 그것을 알 수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그렇게 하고 있는 거야. 그는 바보가 아냐. 네가 국제적인 스타가 된다면, 네가 벌어들이는 돈은 엄청날 거라구. 널 보자마자 그걸 원하게 된 거야, 틀림없어."

"아냐, 그는 그러지 않았어!" 그녀는 부정했지만, 내심 정말 그런 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뭐지?

"너도 확신은 못하는구나, 그렇지?" 다이애나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마크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를 안 시간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그가 전생을 기억한다거나 전생에 그녀를 알았었다는 것은 지어낸 얘기일 수도 있다. 다이애나가 맞는 걸까? 단지 그녀가 미래에 벌어들일 돈에만 관심이 있는 것일까? 확실히 그는 강한 소유욕을 보이면서 그녀를 보살피는 일을 자신이 맡아하려 했다. 그리고 늘 곁에 머물면서 다가올 기회를 엿보다 그녀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홱 나꿔채 버리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녀가 자신에게 속해있음을 확실히 해두려고 했었다.

"필이 그에 대해 조사해 볼 때까지만이라도 그와 좀 거리를 두는 게 어때?" 다이애나의 애원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곧 프랑스를 떠날 텐데, 그를 다시 보게 될지도 확실치 않은걸 뭐."

필은 몇 군데 전화를 해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깨끗해 보여. 특별히 감출만 한 것은 없는 것 같아. 하지만 좀 더 깊이 파보면 뭔가 있을 거야."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애니가 도전적으로 말했다.

"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애니. 좀 더 알아볼 때까지 기다려 봐."

리용 공연 후 그들은 국경을 지나 스위스와 독일로 가서 몇 차례의 공연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들이 출발하기 위해 차에 타기 직전에 마크가 빨간색 페라리를 타고 나타났다.

"저 차를 내게 팔 것 같아?" 브릭이 그녀에게 물었다. "나 좀 한 번 타보게 부탁좀 해봐. 핸들을 잡아볼 수 있다면 내 드럼 스틱도 내놓을 수 있어."

마크에게 그 말을 전하자 그는 웃으면서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 불어로 빠르고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이 차를 맡긴 적은 한 번도 없소. 더구나 자기 차를 벌써 두어 번은 박살냈을 법한 스무 살짜리 애숭이에게 맡길 생각은 더더욱 없소!"

"브릭은 좀 무모한 편이죠." 그녀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브릭에게 거절의 말을 전했다.

"자기 혼자 잘났군!" 브릭의 조소에 마크가 빙그레 웃었다.

"내가 자네 목숨을 구한 거야. 아주 위험한 차거든."

그 말이 브릭을 더욱 흥분시켰다. "난 차나 여자 모두 위험한 걸 즐긴다구!" 브릭은 동료들에 의해 전용 버스로 끌려 가면서 투덜거렸다.

"나 역시 그래." 마크가 애니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다이애나와의 약속이 떠오르자 애니는 당혹스러워 말했다. "나도 버스를 타고 가는 게 낫겠어요."

"당신은 그들이 아니라 나와 같이 가게 돼 있소."

그녀는 경직된 채 머리를 저었다. 검은 머리가 얼굴 주위로 흘러 내려왔다. "미안해요, 마크. 같이 갈 수 없어요. 밴드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기분이 상할 거예요. 며칠동안은 부루퉁해 있을 거라구요. 그들이 들러리인 양 나 혼자 특별히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과 함께 가기를 기대할 거예요."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남은 순회공연 중에 얼마든지 그들과 함께 다닐 시간은 많을 거요. 한 이틀만 나와 있자는 거요. 수요일까지는 리허설이 없잖소. 그러니 우린 시간이 많소."

"무엇을 위한 시간 말이죠?"

그가 그녀에게 팔을 두르더니 페라리의 조수석으로 가도록 그녀를 재촉했다. 그녀는 저항했다. "마크, 안 돼요. 짐들이 다 버스에 있다구요. 필과 다이애나도 무슨 일인지 걱정할 거구요!"

그들은 호텔이나 공연장 등 모든 것이 잘 준비돼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이미 몇 시간 전에 공연지로 떠나고 없었다.

"밴드 사람들이 나와 같이 있다고 말해줄 거요." 마크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나서 브릭과 다른 사람들을 불렀다. "애니는 내가 데려가겠소. 공연 때까지는 도착할 거요."

"이봐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대체 어떻게 돼 가는 거지?" 브릭이 놀라서 외쳤다.

마크가 페라리에 올라 타 자동차 키를 돌리자 차는 기분 좋게 부르릉 소리를 냈다. 브릭이 차를 향해 달려올 때쯤 페라리는 총알 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안전벨트를 매요!" 그녀가 무력하게 브릭의 성난 얼굴을 돌아보고 있자 마크가 말했다.

"어디로 가는 거죠?" 갑자기 다시 단둘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불안스레 물었다. 어쩌려는 거지? 그가 교활한 장사꾼일지도 모른다는 다이애나의 생각이 옳았던 걸까? 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일까?

"쥬라." 그녀는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마크가 그녀를 힐끗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리용의 숨막힐 듯 혼잡한 고속도로 안으로 차를 몰았다. "예상하지 못했다니 놀랐는걸!" 그가 중얼거렸다. 당연히 그녀는 예상했어야 했다. 그녀가 마크의 일신상의 문제와 필의 역할에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다이애나의 걱정에 귀가 솔깃하지 않았다면 아마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거긴 너무 멀잖아요?"

"당신은 거리 감각이 좀 없군? 여기서 쥬라까지는 그리 멀지 않소. 오늘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을 거요. 우리 마을 근처의 내가 아는 음식점에 예약을 해 뒀소. 지방 특별요리를 정말 잘하는 곳이오. 단순하지만 아주 편안하고 사람들도 친절하지."

"당신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건가요?" 심장이 숨 막힐 듯이 빨리 뛰었다. 그녀를 집에 데려갈 정도라면 그는 아주 진지하다는 얘기며, 더 중요한 것은 다이애나의 짐작이 확실히 틀렸다는 것이다.

"그건 내일이오. 그분들이 맘에 들 거요, 그리고 그분들도 당신을 마음에 들어하실 거요.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은 지쳤어, 충분히 자지도 못했을 테니 뒤에 기대어 잠깐 쉬도록 해요."

그녀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아주 지쳐있었다. 지난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버려서 조금이라도 쉬어야 했다.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에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녀의 마음은 쥬라로 달려가고 있었다.

, 놀랍게도 그녀는 그 말을 떠올렸다. 난 집에 가는 거야. 아버지가 돌아가신 열한 살 이후로 그녀는 진정한 집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그녀는 이 세상에 자기 혼자뿐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녀 역시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래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쥬라에 속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느새 그녀는 잠에 빠져 짙은 녹음의 숲과 계곡, 상쾌하고 시원한 공기, 야생 꽃들이 만발한 들판에 대한 꿈을 꾸었다.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흰 눈으로 뒤덮인 산들을 뒤로 하고 있는 낮은 언덕배기에는 푸르스름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본 적이 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그녀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그곳에 대해 얘기해 주었고, 지난번 마크가 말해줬었다. 그리고 전에도 꿈에서 여러번 그곳을 봤었다. 생시에 그곳을 본다해도 아주 익숙할 것이다.

차가 스위스 국경지대로 오르자 공기가 점점 차졌다. 하늘은 푸르고 크리스탈만큼이나 투명했다. 애니는 마크의 여분의 스웨터에 감사했다.

"파자마도 있으니 나중에 입어요. 칫솔만 사면 될 거요."

"차에 내 가방을 두고 온 건 당신 때문이에요."

"생각할 시간을 줬더라면 같이 오려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녀는 그에게 인상을 찡그렸다. "도대체 남자들은 왜 그렇게 제멋대로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필과 다이애나가 걱정할 거예요."

"나에게 굉장히 화를 내겠지."

"그들은 당신에 대해서 잘 모른다구요!"

"내가 당신을 빼앗아 가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하겠지."

그녀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단번에 그것을 간파한 그의 통찰력에 놀랄 따름이었다.

오랫동안 그녀를 응시하던 그의 입이 비틀렸다. "사실 난 그렇게 할 거요." 그의 말에 전율이 온몸은 치달았다. 필과 다이애나의 경고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원하는 걸까, 아니면 필의 확신대로 그녀가 대스타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St jean-des-Pins마을의 변두리에 다았을 때도 여전히 햇빛이 있었다. 마크는 흰 페인트가 칠해진 작은 음식점을 지나면서 속도를 늦추었다.

"우리가 머물 곳이오. 많은 낚시꾼들이 우리 고장의 강을 찾곤 하오. 그리고 스위스의 호수로 가려는 사람들도 종종 이곳에 머물곤 하지." 그는 소나무 숲 사이로 난 끝이 없는 것 같은 곧은길을 운전해 나갔다.

"어디에 가는 거죠?" 소나무 숲의 음침한 그림자들을 보면서 애니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곧 어두워질 것 같아요." 해는 어느새 져버렸고, 숲은 벌써 밤인 것처럼 깜깜했다.

마크가 길에서 벗어나 나무들 옆으로 좁게 난 오솔길로 가기 시작했다. "안 돼요!" 애니는 갑자기 공포로 몸이 굳어지면서 외쳤다. 그녀는 이 길을 알고 있었고, 지금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도 깨달았다. "싫어요, 마크! 데려가지 말아요, 제발요!"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겁내지 말아요, 내가 있잖소. 내가 돌봐 주겠소."

그녀는 손잡이에 손을 뻗쳐 나가려고 몸부림쳤다. 마크가 차를 멈췄다. 그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리자 마크도 차에서 내려 그녀를 붙잡았다.

"왜 그렇게 겁을 먹는 거요? 이제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소." 그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여기가 그곳이란 걸 아는군요." 온 몸이 떨려와 애니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여기 꿈을 꿨었어요. 그러니 실제로 일이 벌어진 그곳에 간다면 더 끔찍할 거예요. 참을 수 없을 거라구요!"

마크가 그녀를 끌어안아 뺨을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검은 머리에 기댔다. "들어봐, 애니. 숲의 소리를……."

그들 주위의 모든 것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바람에 살랑거리고, 물이 끓는 것처럼 바스락거리고, 잔 나뭇가지들이 부러지고 떨어지는 소리들이 들렸다. 숲은 고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려운 동시에 매혹됐다.

"날 믿어요. 단지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이 오솔길을 따라 거기……."

"오두막까지 말이죠?" 그녀가 몸서리를 치면서 내뱉었다. "이 길이 어디로 통하는지 나도 알아요. 거기 가면 아주 괴로울 거예요. 난 그곳에 대한 꿈이 싫어요……. 거기는 웬지 기분이 좋지 않아요. 또 아무것도 없을 거구요. 그는 가버렸으니까, 영원히 말예요." 꿈에서 느꼈던 무서울 정도의 상실감이 그녀를 덮쳐왔다.

"내가 있잖소." 그가 그녀의 뺨에 키스하며 속삭이자 그녀는 시간적인 혼란 속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마치 그가 다시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를 팔로 감싸안았다.

", 마크! 대체 내가 어떻게 된 거죠? 너무 무서워요. 내가 미치고 있는 건가요? 난 갈 수 없어요. 갈 필요도 없어요.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가요."

"당신이 봤으면 해. 당신 눈으로 직접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걸 보길 바래."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마침내 한숨을 쉬며 항복했다. 그가 옳다. 그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봐서 확인해야만 했다.

길은 가파랐고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애니는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 펄쩍 뛰었으며, 두 눈을 크게 뜬 채 계속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오두막이 보이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내가……내가 기억하는 모습……그대로예요." 꿈속에서 본 모습 그대로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이곳을 꿈속에서만 봐 왔을 뿐이다. 마크가 그녀의 꿈을 조종하지 않았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떻게 그녀가 이곳을 기억하도록 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이렇게 생생하게 말이다. 그녀는 이곳을 마치 전생에서 봤었던 것처럼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도 기억이 났다. 오두막 주변에 장작들이 쌓여있는 모습, 나무들로 지붕을 인 모양새며, , 덧문이 있는 창, 나무로 만든 물받이 통, 오두막 주변의 개간지, 오두막의 양 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소나무 숲, 그리고 근처에서 자라는 산 양물푸레나무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애니는 오두막의 문을 보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들어가기 싫어요! 제발 그러지 말아요!"

"나와 함께라도?"

애니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래야만 한다면……." 그가 옆에 있어준다면 뭐든 대적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열쇠는 어디에 두었소?" 마크가 묻자 그녀는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즉각 대답했다.

"현관계단 아래에."

그녀는 순간 창백해지면서 얼어붙어 버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마크가 크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천천히 나무계단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그의 손에는 열쇠가 들려있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문에 열쇠를 밀어 넣자 금속성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마크가 문을 열었다.

애니는 몸이 굳어서 긴장한 채 안을 둘러보며 문지방에 서 있었다. 안의 공기는 눅눅하고 차가웠다. 한쪽 구석에는 낡은 의자와 짚으로 만든 요를 깔아놓은 나무 침대가 있고, 가운데에는 지붕으로 통하는 굴뚝이 연결된 녹슨 스토브가 놓여져 있다. 선반에는 머그잔과 접시가 몇 개 놓여 있고, 벽을 따라서 장작이 쌓여 있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할 수 있었다. 한쪽이 깨진 파란색 테두리를 한 얇은 흰 접시의 위치까지도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마치 어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익숙했다.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얼굴을 나무 벽쪽으로 둘리고 벽에 기대어 흐느꼈다. 추억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는 기차처럼 압도적으로 그녀에게 밀려왔다. 들판과 역, 사람들…….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시간과 장소들, 이미지의 혼돈 속에서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 둘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안 돼. 제발……."

마크가 뒤에 바싹 다가와서 그녀를 안았다. "……달링, 울지 마……울지 마. 당신이 이렇게 동요한다면 나가는 게 낫겠어."

그녀의 그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과거로 돌아가 여기 오두막이 아닌 숲 속의 나무 아서 그의 팔에 안겨 있었다. 그들은 풀숲을 침대삼아 사랑을 나누었다. 애니는 뭉개진 풀들에서 나는 상큼한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 내음을 들이마셨다. 그 속에는 그녀가 그의 팔 안에서 느꼈던 온갖 격렬한 기쁨이 함께 묻어나왔다. 그녀의 손이 관능적으로 그의 피부며 넓은 어깨, 척추의 움푹 들어간 곳을 쓰다듬었다. 그의 몸의 강력함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가 고통스러운듯 거친 숨을 내쉬며 그녀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이렇게 있기를 바라며 그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달빛이 그들의 창백한 몸에 얼룩을 만들어 마치 잔잔한 물결이 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처한 위험한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지르는 쾌락의 탄성은 더욱 깊고 거칠었다. 그들은 절망과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그들은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오직 사랑만이 의미 있는 것이었지만 사랑은 너무도 약하고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그녀는 점점 커지는 고통에 낮게 신음했다. 그를 만나고 난 바로 다음날 이었다. 하루가 지나서였다. 그를 죽인 놈들이 그의 시체를 마을로 옮겨와 그의 신원과 그를 보호해 준 사람을 대라고 마을 사람들을 윽박질렀다. 애니는 가게 입구의 계단에 서서 그의 시신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의 몸은 이제는 검게 말라붙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현재로 돌아오려고 몸부림을 쳤다.

"왜 날 이곳으로 데려온 거죠? 난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너무 고통스러워요."

"애니, 그건 아주 오래 전 일이오. 이제 우리를 다치게 하지는 못해." 그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방금 기억해 낸 것을 말해봐요. 뭔가를 생각해 낸 거야, 그렇지?"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숲에서 사랑을 나눈 후 우린 여기…… 이 오두막으로 돌아왔어요." 그가 그녀와 그녀가 하는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그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녀의 차가운 몸에 손의 온기를 전해주어 그녀를 안심시켰다.

"당신이 우리의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죠." 그녀가 그것을 기억해 내는 순간 그걸 말하는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머리가 온통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우린 그럴 수 없다고도 말했어요. 그렇게 했다간 마을에서의 내 삶은 끔찍해질 거라면서요. 통용되지 못하는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나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라구요. 우리 둘 다 전쟁에서 살아남으면, 다시 나를 찾아와 결혼하겠노라고 말했죠. 하지만 만약 살아남지 못해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타오르던 촛불처럼 제 몸을 불사르고 마치 우리가 이곳에서 함께 있지 않았다는 듯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순간 그녀는 하얗게 질리더니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왜 그러지?" 마크가 그녀의 변화를 눈치 채고 즉각 물었다.

애니는 그를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돌려 오두막 안을 둘러보았다. 마크는 얼굴이 창백해져 긴장한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뭐 때문이야, 애니?"

애니는 창문 근처에 쌓여있는 장작더미를 응시했다. "저기……저기예요." 그녀는 벽이 드러나도록 쌓여있는 장작더미를 밀쳐냈다. 잠깐 멈칫했던 마크도 그녀를 도왔다. 지저분하고 힘든 일이었지만 애니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지 못했다.

5분 후 그녀는 죽은 듯이 멈춰서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서 오두막 벼 제일 아래에 칼로 새겨진 이니셜을 만져보기 위해서 떨리는 손을 들었다. 글자들은 희미해져 있었지만 아직 분명히 읽을 수는 있었다. 그들 두 사람 이름의 첫 글자인 `A&M'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 `영원히'라고 새겨져 있었다. 반세기의 시간도 그것들을 없애지는 못했다. 그녀는 `영원히'라는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래서 그들이 환생한 걸까?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영원에까지 도달한 것일까?

마크도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글자들을 만져보고는 그것들을 응시했다. "세상에, 마크……." 그녀가 그를 돌아봤다. "아직도 여기 있어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빛났다. "우리도 여기 있소, 애니." 그의 호흡이 점차 빨라졌고, 피부가 홍조를 띠었다. "당신을 사랑해." 그는 격앙된 어조로 말하고는 뜨겁고 격정적으로 키스를 했다.

그녀가 품어왔던 모든 의심들이 사라졌다. 그녀는 아주 오래 전에 이 남자를 사랑했었고, 사는 모습과 시간은 다르지만 지금도 그때처럼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전생에는 죽음이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았지만, 이제 그들은 또 한 번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마크가 마지못해 입술을 떼고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사랑, 난 오래 전부터 당신을 사랑했소. 과거를 기억해 낼 때부터 언젠가는 당신을 찾게 될 거라는 걸 알았어. 그리고 당신의 사진을 본 뒤로 당신인 걸 깨달았지. 내 머릿속엔 당신을 찾겠다는 생각뿐이었소. 당장 그러고 싶었지만, 기다리면서 계획을 세워야 했어. 당신이 날 미쳤다고 생각할까봐 두려웠어."

"사실 그랬어요." 그녀는 반은 웃으며, 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나를 믿잖소." 그가 확신한다는 듯 눈을 빛냈다.

"우리가 만난 이후 조금씩 기억나곤 했어요…….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선명해요, 단지 환상이 아닌 걸 알아요. 실제 있었던 일을 기억하게 됐으니까요……."

"당신이 심정 이해해.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아. 어떤 것은 선명하고, 다른 것은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거야. 우린 함께 살아가고, 전에는 못 가졌던 아이들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야." 그가 말을 멈추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래요?" 애니가 경계하며 물었다.

"난 프랑스에서만 살아왔소. 당신 생각은 어때? 난 타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6개월은 여기서, 나머지 6개월은 영국에서……하지만……."

"파리에서 살면 행복할 거예요. 내가 반은 프랑스인이라는 거 잊었어요? 게다가 당신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나의 집이에요. 필과 다이애나와도 계속 일할 수 있을 거구요. 필이 매니저를 계속 못할 이유는 없잖아요?"

"물론이지. 난 내 사업이 있으니까. 필이라면 오케이요. 그가 맘에 들어. 우호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거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내 사랑." 그가 입술로 그녀의 뺨을 애무하고, 속눈썹과 눈꺼풀에 키스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오."

그녀는 그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그에게 키스했다. 그녀는 이렇게 키스하고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있다면, 이 춥고 작은 오두막에 영원히라도 머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크가 깊은 숨을 쉬며 그녀를 밀어냈다.

"너무 늦었소, 밖은 칠흑같이 어두워. 이제 돌아가는 게 낫겠어."

그는 그녀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그들은 팔을 서로에게 두른 채 오두막을 떠났다. 마크가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고, 그의 얼굴은 그녀도 지금 맛보고 있는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늘 저녁 우리는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모든 것에 관해 얘기할 거요. 애니,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알고 싶은 것뿐이오. 아침엔 당신을 가족에게 데려가서, 내가 평생을 기다려 온 여인을 만났고, 그녀와 결혼할 거라고 말할 거요. 그녀가 좋다고 말하자마자 결혼할 거라고!"

"좋아요." 애니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