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돌아온 히스클리프(續 “폭풍의 언덕”) 3

마침내 난 단단한 땅위에 무사히 두 발을 딛고 일어섰습니다. 환호와 축하와 감사의 말이 터졌습니다. 에드거 린튼에 대해서 떠들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는 아어 씨를 따로 불러 가만히 알려 주었습니다.

"이 일로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린튼을 마차에 테우고 손필드로 가겠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는 게 나을 겁니다. 지금 얘기하면 대령부인이 너무 걱정하실지도 모릅니다."

"피가 나는 걸 보면 심하게 다쳤나 본데."

"다같이 한 번에 가려고 하면 한없이 늦어질 테니까 린튼만 얼른 데리고 가겠습니다."

아어 씨가 머뭇거렸습니다. "그래. 그게 났겠다. 대령 부인과 잉그램 씨 가족들에게 신경을 쓰다보면 손필등 도착할 때에는 그 사람 반쯤 죽어 있을 거야. 상처는 어떻게 할래?"

"상처는 제가 꿰맬 수 있습니다. 아주 쉬운 일 아닙니까?"

"그래 자네 수술 솜씨는 일품이지." 그는 붕대를 감은 손을 올리며 눈을 찡긋했습니다.

"그렇지만 상처 부위가 너무 크면 어떡하지?"

"말을 타고 가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의사를 부르러 가게 되면 누군가가 저 사람하고 있어야 하니까 내가 자네와 동행하도록 하지."

"그것도 좋습니다만, 어르신께서는 다른 분들을 위해 여기에 계셔야지요. 만약 사람이 필요하면 페어펙스 부인에게 보살펴달라고 하겠습니다. 아니면 카터 선생님께 데리고 가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저런 어려운 상황들이 발생한 경우를 얘기한 뒤, 내가 에드거를 혼자 데리고 가고 아어 씨는 남아서 다른 사람들을 진정시킨 다음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아어 씨에게는 지금까지 한 일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설명하면서 볼링용 공 상자의 결쇠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그만 깜빡 잊고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얘기를 하는 동안 잉그램 양이 린튼에게 신경을 쓰는 것을 보고서도 우리는 모른 척했습니다. 그녀는 하인들을 허둥지둥 손짓으로 물러가라고 하면서 린튼을 다리 끝으로 데려가 둑길의 담벼락 위에 그를 앉혔습니다. 그녀는 옆에 앉아 잠시 얘기를 하더니 자기 손수건을 린튼의 피 묻은 허벅지에 매주고 모자로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린튼은 손과 머리를 움직이며 괜찮다고 사양을 했지만 창백한 얼굴과 떨리는 미소는 그녀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열중하고 있는 일의 성격이 변했는지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고 손은 굳어진 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더욱 강렬해 보였습니다. 서로 몸을 숙이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 살며시 뒤로 물러나니까 에드거가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는 듯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습니다.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나를 흘끗 쳐다보았습니다.

브랑쉬 잉그램이 손을 빼며 무언가 아주 단호한 얘기를 하는 듯했습니다. 그녀는 화가 난 표정으로 어떤 부분에서는 강하게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는 에드거에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작별 인사에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몸을 움찔했습니다. 그녀가 우리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에드거는 기절한 사람처럼 머리를 떨구었습니다. 하인 하나가 그를 돕기 위하여 달려갔습니다.

아어 씨가 킬킬거리며 웃어 댔습니다. "저 친구 다시 굴러떨어진 것 같아. 첮번째 보다 상태가 더 나쁜데. 저 불쌍한 친구가 즐거워할 만한 일의 숫자가 점점 적어지니까, 역시 데려가는게 좋겠어."

잉그램 양이 턱을 쑥 내밀고 우리에게로 다가왔습니다. "아어 씨가 린튼 씨를 돌보는 게 낫겠어요.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정신이 나갔나 봐요." 그녀는 쌀쌀맞은 태도로 아어 씨에게 쏘아붙였습니다.

"저 친구가 자네에게 살려줘서 고맙다고 작은 감사의 표시를 했나 보군." 아어 씨가 씩 웃으며 우리들에게 자리를 피해주었습니다.

"지금 뭐라고 그랬는데요?"

"미친 소리지 뭘 했겠어요?"

나는 무관심한 척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머리를 부딪쳐서 그런가 보지요. 의사에게 데려가야 해요."

그녀가 씩 웃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을 거예요. 그래요, 어떻게 해서든 데리고 가세요. 피곤한 남자에요."

아어 씨가 에드거 린튼을 마차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고 있는 동안그녀는 나의 팔꿈치에 손을 대더니 둑의 반대 방향으로 나를 돌려세웠습니다. "히스클리프 씨는 그러면 안 돼요."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물었습니다. "오늘 밤에요?"

", 오늘 밤에요." 그녀는 나의 팔을 살며시 쥐었다 놓으며 몸을 돌려 말을 탔습니다. 내가 깍지를 끼어 손을 내밀자 그녀는 내 손을 밟고 말을 탔습니다. 나는 린튼과 아어 씨에게 갔습니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때문에 린튼은 마차가 움직일 때까지는 우리가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어 씨는 마차가 움직이자 안장에서 뛰어내리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린튼은 문의 손잡이에 손을 대고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나는 말의 속도를 높이며 주의를 주었습니다. "지금 밖으로 뛰어내리면 네 꼴도 우습게 되고,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르니까 허튼 생각은 하지 말아."

"거지 같은 놈아. 빨리 마차를 뒤로 돌려."

"허참! 물에 빠진 놈 구해놓으니까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요즘 것들은 도와줘도 고마워 할 줄은 모른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지금 여기에 이런 인간이 있네."

우리는 언덕의 꼭대기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에드거가 다시 점잖은 말투로 말했습니다. "자네 예전의 위협으로 미루어 보건대 지금의 행동은 악의가 있는 행동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어. 나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면 마차를 멈추고 즉시 길옆으로 마차를 세우게."

그가 무모한 행동을 할 것 같아서 나는 그를 달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마차를 천천히 몰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봐. 그래. 내가 거친 말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결국 우리는 연적인 셈인데도 너는 내가 순순히 넘어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 아냐. 내가 정말로 너의 신체에 해를 입히려고 했다면 네가 떨어져서 죽게 놔두지 뭐하러 위험하게 몸을 던져서 너를 구해줘?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가를 잘 알지?"

내 말에 그가 움찔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마차를 세웠습니다. "우리 사이에 좋은 감정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고 가정을 하자고. 그러나 난 아어 씨의 감사에 보답하려는 뜻으로 너를 손필드로 데려가고 있는 중이야. 정말 말머리를 돌려 수도원으로 데려갈 수도 있어. 어떻게 할까?"

린튼의 얼굴에 주저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그는 나의 지극한 상식적인 얘기를 듣고 나에 대한 불신을 저울질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의심이 줄어들어서라기보다는 수도원으로 돌아가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에 그는 그냥 가는 편이 낫다는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좋아. 그냥 가자. 그러나 조용히 좀 해 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니까. 분명히 얘기하지만 너의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우리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동쪽을 향하여 계속 나아갔습니다. 바람이 계속 불더니 북해에서 비구름이 몰려왔습니다. 우리의 뒤에는 아직도 비교적 맑은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둑 위로 타는 듯이 빨간빛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시덤불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구간과 집으로 향한 갈림길에 도착했을 나는 마구간을 향하여 말을 몰았습니다. 나는 린튼을 흘끗 쳐다보았습니다. 그는 금방 어떻게 된 일인가 알아차렸습니다. 그가 경계하는 눈빛을 보이는 그 순간 나의 목덜미를 움켜잡았습니다.

"네 놈이 없으면 안 되겠어."

"! 히스클리프. 뭐하는 짓이야. 이게?"

그는 마구간으로 가는 동안 내내 이런 종류의 겁먹은 말을 지껄여댔습니다. 나는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보고 조용히 하라고 했었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했던 것뿐입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나갈 때 문을 열어두었었는데 아직도 그대로였습니다. 그 문을 닫고 싶은 사람은 마차에 타고 있었으니까요. 손필드에는 페어팩스 부인과 집 안에 있는 몇몇 하녀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내 손아귀 안에서 바둥거리고 있는 린튼을 마차와 함께 어두운 골방에 집어넣었습니다. 나는 말이 그 어두운 곳에서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도록 놓아두고 린튼의 목덜미를 밀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얼른 내 뒤에있는 문의 빗장을 걸고 자물쇠로 잠갔습니다.

린튼은 이때다 싶어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가 미친 듯이 복도 한가운데로 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용없어. 에드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내가 이미 다 챙겨 두었어." 나는 유유히 그의 발자국 소리를 따라갔습니다.

그의 손이 창고의 빗장에 닿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안으로 들어가 문을 탁 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그가 빗장을 다시 걸기 전에 문을 열어 제쳤습니다. 문이 확 열리는 바람에 그는 어두운 구석에 있는 병으로 나가떨어져 소리가 시끄러웠습니다. 나는 등과 유리로 된 인광 물체를 제자리에 잘 넣어 두었습니다. 그 방에는 높은 곳에 작은 창문이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램프의 심지를 위로 올리니까 활활 타는 불빛에 린튼이 구석에서 찬장에 등을 대고 구부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는 서랍을 열고 자물쇠를 꺼내어 방문도 잠갔습니다.

". 이제 다른 사람들은 들어 올수 없으니까 안전 할 거야. 에드거. 너와 단둘이서만 있고 싶거든."

그는 미친 듯이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도망갈 기회와 방어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잘 봐. 얼마나 아늑해. 바람도 불지 않고 해로운 공기도 없으니까 건강은 염려 안 해도 돼. 문도 하나고 창문도 하나뿐이야. 좋은 경치를 구경할 수 있게끔 창문이 아주 높이 달려 있지. 그게 흠이긴 하지만, 그외에는 나무랄 데가 없어.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니까, 이곳이 내 아지트 겸 사무실이야. 넌 내가 말똥이나 치우는 놈이라고 틈만 나면 얘기했잖아. 그래. 난 말하고 마구간에서 지내는 놈이니까 여기가 내겐 제격이야."

내가 이 말을 하는 동안, 그가 찬창문을 열어보았지만 나는 막지 않았습니다.

"저기 약병에 약이란 약은 다 있어. 해열제에서부터 상처에 바르는 연고까지, 없는 게 없어. 그러나 네가 다루기 힘든 약들이니까 조심해. 좀 더 구경해도 괜찮아. 그래 그 찬장에는 붕대도 있고 있을 건 다 있지. 비상시에 대비해서 말야. 계속 뒤져봐. 다른 문 뒤에서 있는 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이 가장 흥미 있는 것인지 알아볼 기회를 줄게."

그는 문을 열고서는 숨이 막히는지 다시 문을 콱 닫았습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그렇게 서둘면 안 되지. 이게 얼마나 좋은 것들인데! 난 수의사거든. 내 작업에 필요한 도구들이야. 알았어? 오늘 아침에도 이 꺾쇠와 바늘과 칼로 조그만 걸 한 건 했어. 이 끝을 좀 봐. 반짝반짝하는데! 숫돌로 잘 갈아둔 것들이야. 말도 사람처럼 종기가 나니까, 이건 그 종기를 째기 위한 란셋이고, 이건 뼈를 써는 톱, 이건 말이 난산을 하게 되면 쓰게 되는 겸자야.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크지. 그런데 이건 말야, 말에게 든 사람에게든 다 쓸 수 있는 특별한 도구 세트야."

나는 날카로운 발이 달린 상자를 집어 들었습니다. "이게 어디에 쓰는 건지 알아?"

린튼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는 내게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가죽으로 된 마구에 걸린 나무 말뚝과 쇠갈고리에 부딪혔습니다.

"몰라? 전에 본 적이 없나?" 나는 상자를 그의 코앞으로 들이대며 날카롭고 둥그런 핀셋을 가리켰습니다. "모양을 보니까 뭐에 쓰는 건지 알겠지? 말에게 갖다 대보면 작아 보이지만 아주 크게 보이는데."

린튼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음껏 질러봐. 지나가는 사람이 들어봤자 처마 밑의 바람 소리라고 생각할 거야."

창문의 덧문이 덜컥거리고 있었습니다. 비바람이 조그만 유리창을 세게 때리고 지붕과 벽의 나무가 귀신같이 으스스한 조화를 이루며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일을 얼른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도원으로 가는 들판과 언덕에도 비바람이 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서둘러 돌아올 게 뻔했습니다.

캐시. 그는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때도 아니었습니다. 역시 그다웠습니다. 그는 여러 번 계속 나를 아프게 때렸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의 턱을 한 대 갈기자 그는 예상한 대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말을 잠재울 때 사용하는 마취제를 그의 코에 대고 눌렀습니다. 그는 가볍게 신음을 하더니 파란 눈을 반쯤 뜬 상태로 나가떨어졌습니다.

나는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그의 손목과 발목을 벽 위의 갈고리의 채찍으로 단단히 동여 맸습니다. 수술하기에 좋은 자세를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가 생각보다 일찍 깨어날 때를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몸에 막대기를 대고는 거세할 때 쓰는 도구를 사용하여 능숙한 솜씨로 수술을 해나갔습니다. 다니엘과 수없이 해본 수술이었지만 이렇게 정밀하게 수술한 경험은 없었습니다.

수술하는 데에는 몇 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피도 별로 흘리지 않았습니다. 절개했던 부위에 연고를 바르니까 아주 훌륭한 외과 의사가 수술한 것처럼 말짱하게 보였습니다. 봉합한 자국도 작고 밋밋했습니다. 그 위에 붕대를 감고 바지의 단추를 잠갔습니다. 그를 묶었던 밧줄을 풀고 코밑에 냄새가 나는 소금을 두었습니다.

나는 편지 뭉치의 표지를 탁 닫아버렸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로크우드 씨가 잠이나 깨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 가만히 살펴보았다. 충격을 받아 당황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불룩 튀어나온 그의 담요는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히스 클리프! 악마 같은 인간! 미친 놈!.....

흐릿하던 것들이 명확해졌다. 나는 그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끈덕지게 그를 쫓아다닌 불행은 분명히 그의 업보였다.

나는 화가 났다. 그의 자기 정당화가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그가 깨닫도록 소리치고 싶었다. 도덕적인 존재로서의 그는 흉물스럽고 그로 테스트하겠다는 것을 그가 인정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물론 내 설교를 들을 수 없었다. 그는 나에게 말을 할 수 있지만 나는 그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내가 할수 있는 것이라고 해야 귀를 막는 것뿐이었다. 나는 분명 더 이상 읽을 의무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읽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나의 판단에 더 이상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넬리가 이 괴물의 계획을 정말 잘 저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얘기할 게 없었다.

그러나...... 그러나...... 어두컴컴한 방을 밤새껏 돌아다니며 별이 빛나는 밤에 수놓듯이 이야기를 나누고 듣던 그 옛날처럼, 에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귓속에 에밀리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겁쟁이 같으니!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부인하려는 거야? 언니는 그저 부드러운 삶의 모방이나 인정하려 하고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돌처럼 단단한 기초는 부정하고 싶지? 자기가 허약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삶은 인정해 주어야지. 존재한다는 것은 강한 사람을 위한 것이야. 현실을 똑바로 보고 그것을 따라가!"

나는 다시 무릎 위에 놓인 편지 꾸러미에 손이 갔다. 머리를 숙이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린튼은 제정신이 들자 짚에다 구역질을 해댔습니다. 그는 마취제에 취하여 심하게 구역질을 해댔으므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가 뭐라고 얘기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에 아어 씨에게 기가 막히게 잘 듣던 약이 생각이 났습니다. 필요할 때가 있는 것 같아 나는 그것을 상자에 다른 도구들과 함께 넣어두었으므로 그것을 몇 방울 그의 혀에 강제로 떨어뜨렸습니다. 2분 뒤에 그는 발작이 끝나고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충격으로 아직은 말을 못 했습니다.

나는 등잔불의 심지를 잘라내고 그의 앞에 앉았습니다. "네가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어. 내가 보여줄 게 있으니까."

나는 피묻은 것들이 담긴 쟁반을 그의 눈앞에 갖다 대었습니다. 잠시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그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쟁반을 쳐버렸습니다. 쟁반과 그 위에 있던 것들이 모두 짚 위에 떨어져 나뒹굴었습니다. 그는 몸을 구부리더니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만 울고 내 말을 들어봐. 네 눈으로 봤을 거야. 하나뿐이었지? 하나만 떼어냈으니까 아직 하나는 남아 있어. 넌 이제 반쪽 남자인 셈이야."

나는 그에게 그 약을 몇 방울 먹였습니다. 마침내 그의 가냘픈 울음소리도 멈추었습니다. 그는 나를 노려보았습니다.

"아직 아프냐?" 그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아프지 않을 거야. 서너 시간은 괜찮을 거야. 나중에는 별로 심하지 않을 테고. 네게 특별히 일급 수술을 해 주었으니까 전혀 아프지 않을 거야. 몇 주 동안이야 약간 불편하겠지만 그것 이외에 문제가 되는 건 없을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말도 안 돼! 넌 교수형에 처해야 돼. 교수형에! 이따위 짓을 한 죄로 넌 천벌을 받을 거다. 넌 오늘 밤을 감옥에서 지내야 할 거야."

"그럴까?"

"그럴까라고? 영국의 판사 중에 누가 너를 놔두겠어?"

"그럴까? 이 사건이 판사 앞에까지 가야 할 사건인가?"

린튼이 화가 나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떨어지다가 다쳤잖아. 증인도 있어. 나중에 네 바지에 피가 흐르는 것을 본 사람이 적어도 여섯 명은 돼. 그때 아어 씨가, 이곳에서 꽤 지도급 인사이신 그분이 나보고 너를 여기에 데려다 상처를 봐주라는 일을 맡기셨거든. 어떤 수술을 했는지 네가 나발 불면 상황이 급박해서 그랬다고 그러지 뭐. 불알이 으깨져서 피가 나오는 바람에 급히 제거는 해야 하겠고, 의사를 부르러 갈 시간적 여유는 없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얘기할게. 아어 씨가 내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 증언해 줄거야."

린튼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네 행동에 대하여 내가 모든 사실을 얘기할테니까. 내 말이 즉시 먹혀 들지 않는다면 난 너를 계속 고발할 거야. 그러면 결국 상부에서 다시 조사하라고 할 테고 당국에서도 진실을 알게 될거야."

"그래. 네 말이 다 옳아. 하지만 그렇게 될까? 너는 자기 얘기를 한 마디도 꺼낼수 없을 테니까 누구의 얘기가 맞는지 알 수가 없을 거야."

린튼은 머리를 두 손 사이에 처박았습니다.

"왜 못해? 도대체 어떤 상상을 해대고 있는 거야?“

"남은 한쪽 불알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 린튼은 화들짝 놀라며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하나를 그대로 놓아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네가 나발을 불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순간, 너는 오늘밤 여기에서 나에게 당한 짓을 당하게 될거야."

린튼이 움찔하며 나에게서 조금 떨어졌습니다.

"네가 내 목에 올가미를 씌우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네 목의 올가미가 더 죄어진다는 사실을 잊지마. 사람들에게 내 죄를 알리는 데 성공하면,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너는 더 잃을 게 있어도 나는 더 잃을 게 없어."

그는 말문을 닫았습니다. "네 처지를 잘 생각해봐. 현재의 상태로는 애는 낳을 수가 있어. 가문을 이어갈 수도 있어. 블랑쉬 잉그램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를 고발하면 그땐 린튼 가문은 끝장이야. 대가 끊기는 거지. 에드거가 끝장나면 모든 게 말장 헛거야."

그는 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이 없었습니다.

"이 정도면 많이 봐주는 거 아냐? 좋아. 이제 본론을 얘기하자고." 나는 그가 고개를 쳐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캐시와 결혼하려는 꿈은 버려!"

나는 그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하여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린튼의 전신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 이제 모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거야. 그래 나도 알아. 이런 선택은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겠지. 너는 캐시와 친구가 되어서도 안 되고 좋아해서도 안 되고 얘기를 해서도 안 되고 애무를 해서도 안 돼. 뭐든지 안돼. 네가 계속 말을 안 들으면 네가 결혼하는 날밤에 네가 완전히 병신이 되는 날이 될 거야. 그러지 마. 얼굴을 모로 꼬고 시무룩해 할 필요 없어. 네 앞날이 어떨 것인가를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하라구. 네가 캐시와 결혼하면 난 끝까지 너를 추적하여 남아 있는 것 한 개도 마저 잘라줄 거야. 넌 나를 막을 수 없어. 너도 알겠지만 네가 숨을 곳은 없어. 다시 한번 말해주지만 이건 농담이 아니야. 그리고 네 집과 재산과 가정을 하나하나 계획적으로 파괴할 거야. 네가 애지중지하는 사람들을 모두 매수하여 파멸의 구렁텅이로 처넣어버릴 거야. 캐시야 어쩔수 없이 예외가 되겠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네 놈 앞에서 크게 한 번 웃어 줄 거야."

그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지만 입만 다물고 있으면, 또 캐시 근처에 얼씬거리지만 않으면 그런 일은 없을거야. 너를 못살게 구는 방법도 없을거구. 캐시 이외의 여자와 결혼을 하면 그 여자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겠어. 결혼식장에서 춤을 추면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축배를 들고 덤으로 멋진 선물을 선사할 작정이야."

그가 아무리 후회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아 보았지만 결론은 나의 제안에 응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고 있었지만 나는 초조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길에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동안 했던 것들의 증거를 없앴습니다. 린튼은 한쪽 구석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를 흔들어 깨워 내가 하는 말대로 받아쓰게 했습니다. 나는 그의 트렁크를 가지러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창고의 문을 잠시 잠갔습니다. 페어펙스 부인과 마주치게 되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올게 뻔했지만 모험을 하는 셈 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러한 일은 없었습니다.

짐을 들고 마구간으로 오니까 빌제법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빗줄기가 말의 등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으므로 말의 등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마차를 이용해서 해야 할 일이 있었으므로 빌제법을 다른 말과 함께 조그만 포장마차에 묶어 두었습니다. 나는 린튼과 트렁크를 마차에 싣고 밀코트로 출발했습니다.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어지러워하고 있었으므로 한 손으로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있는 그를 부축하고 다른 한 손으로 말을 몰았습니다. 캐시, 난 정말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린튼에게 친절한 편이었습니다.

리즈로 가는 야간 역마차 시간에 딱 맞게 도착을 했습니다. 나는 담요를 쓰고 있는 린튼을 마차에 태우고 마부에게 팁을 후하게 주면서 당부를 했습니다.

"실연을 당하는 바람에 상심해서 술을 엄청 마셨거든요. 그러니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코를 만지며 얘기를 하니까 마부는 고개를 끄떡이며 윙크를 했습니다. 잘 알아서 모셔다드릴 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표정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리즈에 있는 김머튼 접속 지점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나는 손필드로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비바람이 서해로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리 길게만 느껴지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하늘에 밝은 빛이 남아 있었습니다. 엷게 채색된 담청색의 하늘을 바라보니 동쪽 수평선 위에는 별이 하나 외로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비에 깨끗이 씻긴 풀잎에서 풋풋한 냄새가 났습니다. 나는 마차의 지붕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마셨습니다. 나무 밑을 지날 때면 가끔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 세례를 받기도 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더 있었으므로 나는 지혜를 짜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손필드에 도착하니까 예상했던 대로 난리가 벌어져 있었습니다. 잔디 위에는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종횡으로 서 있고 위층의 방에는 전부 불이 밝혀져 있었습니다.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아어 씨가 현관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대령 부인도 그 뒤를 바짝 뒤따라 내려왔습니다. 대령은 그들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쿵쿵거리며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내가 마차에서 뛰어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마차를 끌고 갔습니다.

"돌아왔군! 린튼씨는 어떻게 됐어? 밀코트에 있는 의사에게 데려다주고 오는 길인가 보지?"

텐트 부인이 내 어깨를 콱 잡고 물었습니다. "속 시원하게 얘기 좀 해봐요. 살아 있는 거죠? 다 나 때문에 다친 거예요."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며 걱정할 것 없다며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린튼 씨가 써준 편지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시킨 대로 쓴 편지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대령 부인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대령이 달려 나와 그 편지를 낚아채더니 읽지도 않고 툴툴거리며 그녀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안경을 가방에 두고 안 가지고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숨을 죽이고 그 편지를 읽고 있던 대령 부인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집으로 가버렸어요. 뭐가 뭔지 알수 없으니!"

"집으로 갔어? 우리 집?"

"자기 집으로 갔어요."

"잘못 읽은 거 아냐? 로버트! 가서 안경 좀 가져와!"

"여보 아녜요. 분명히 자기 집으로 간다고 분명히 씌워 있어요." 대령 부인은 편지를 그의 코앞에 디밀고 읽어주었습니다.

 

급한 사정이 있어서 스크러시크로스 농장으로 돌아갑니다.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죄송합니다. 에드거 올림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해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야." 대령이 열을 받아 길길이 뛰었습니다. "당신 조카 말이야. 빌빌거리긴 해도 믿을 만한 데가 있겠거니 하고 자위하고 있었는데, 이건 완전히 내 실수야. 이따위 짓이나 하고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못 배워서 그렇다면 귀엽게 봐줄 수나 있지."

대령 부인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집 안에 있던 잉그램씨 가족이 그녀 주위에 모여 위로를 하며 자초지종을 묻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히스크리프, 어떻게 된거야? 린튼을 역까지 데려다주었는데도 아무 말이 없던가?"

아어 씨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산책이나 하자고 눈짓을 했습니다. 다른 여자들이 혹시라도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자기들 마음대로 말을 보태 전할까 봐 걱정이 되어 그들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졌을 때에야 내가 미리 준비한 대답을 했습니다.

캐시, 린튼에 대해서 좋게 그리고 호의적으로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내 얘기를 듣고 나서 덴트 대령은 자기 조카인 린튼의 행동레 대하여 아주 흡족해했을 뿐만 아니라 전보다 훨씬 더 그에 대하여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어 씨도 역시 내가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목격한 대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령이 집 안으로 들어가 빙그레 웃더니 한마디 했습니다. "젊은 것들이 설치고 다니니까 그렇지."

아어 씨가 서성거렸습니다. "돌아와서 보니까 아무도 없기에 자네를 찾으러 마구간에 가봤지. 마차는 돌아와있는데 자네도 린튼도 보이질 않아. 그래서 비가 오는데도 자네가 린튼을 의사에게 데려갔나보다 하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보니까 창고에 내가 이태리에서 구해온 약병이 있더라구. 처음에는 나도 상당히 놀랐어. 린튼의 상태가 아주 나쁘지 않다면 뭐 하러 그 약을 사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방금 자네 얘기를 들어 보니까 그 친구 심하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자네, 덴트 씨 부부를 위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닌가? 정말로 다치지 않은 거야? 자네가 그 약을 먹였나?"

나의 머리 회전 속도는 빨랐습니다. ". 몸의 상처가 심해서가 아니라 정신이 들라고 조금 먹였습니다. 굉장히 걱정을 하면서 자꾸 돌아가겠다고 하기에 그 약을 먹이면 좀 진정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어 씨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큰 실수를 한 것 같은데. 그 약도 잘못 복용하면 위험해. 부작용이 있으니까. 몸의 통증을 완화시키고자 할 때에만 사용해야 하는 건데. 자네가 역마차에 태울 때 어떻게 보이던가?"

나는 에드거 린튼이 떠날 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마부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했다는 것을 얘기했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잘된 것 같군. 이번에 자네는 운이 좋았어."

아어 씨는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고 나의 팔을 잡고 안으로 끌었습니다. 그러나 집안으로 향하는 순간 그가 이상하리만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므로 나는 내심 불안했습니다.

이제 잉그램 양의 방문을 기다리는 일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와이셔츠에 조끼를 입은 채 누워있었습니다. 내가 들고 있는 린튼의 편지는 새까만 글자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줄 한 줄 그 내용을 읽고 또 읽어 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날씨가 변덕을 부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과수원 쪽으로 해서 마구간으로 오라고 이미 일러두었습니다. 마침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문의 빗장을 풀었습니다. 그녀가 들어왔습니다. 품이 넉넉한 회색 코트는 비에 맞은 흔적이 있었습니다.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얼굴이 나를 향하도록 그녀를 돌려세웠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난로 불빛에 환하게 보였습니다. 이슬비에 촉촉히 젖은 그녀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나는 그녀의 목의 단추를 풀고 어깨에서 케이프를 벗겨 주었습니다. 전 날 밤처럼 그녀는 하늘하늘한 흰색의 잠옷만을 입고 있었습니다. 케이프를 그녀의 등 가운데로 내리며 그녀를 끌어당겼습니다. 그녀는 나의 키스를 거부하더니 웃으며 두 손으로 내 가슴을 밀쳤습니다.

"숨이 막히잖아요. 여자가 찾아오면 코트를 받아 걸고 의자를 갖다주며 앉으라고 권하는 게 예의란 것도 몰라요?"

대답도 하지 않고 나는 그녀의 젖은 코트를 휙 낚아채어 벽난로 쪽으로 던졌습니다. 코트에서 뜨거운 벽난로의 돌 위에 물방울이 떨어져 치지직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녀는 눈을 흘겼습니다. 그녀가 말을 꺼내기 전에 그녀를 와락 껴안고 침대 위로 쓰러졌습니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습니다.

"될까?"

그녀는 가만히 누워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린튼 씨가 한 말이 사실인가 봐요."

"뭐라고 그랬는데요?" 나는 침대 모서리에 앉았습니다.

"오늘 사고 가 났을 때 자기를 구해주기는 했지만 히스클리프씨 본심은 자기를 죽이고 싶을 거래요."

"기가 막히군! 그럴 만한 특별한 동기라도 있다던가요? 내가 피에 굶주리기라도 했대요?"

"자세한 설명은 안 했어요. 그렇지만 감이 잡히는 게 없어요."

"도사군! 무슨 도사가 이렇게 예쁘지? 린튼이 어떻게 생각하는데?"

물에 흠뻑 젖은 그녀의 벨벳 슬리퍼를 벗기고 두 손으로 그녀의 발을 따뜻하게 감쌌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뭐랄까? 어떤 부분에 있어서 그 사람이 히스클리프씨보다 더 나은 상태에 있는 것을 히스클리프씨가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상상하나 봐요."

그녀는 발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누웠습니다.

"그게 어떤 부분 같아요?"

"본인이 더 잘 알잖아요."

"그 친구가 말하는 어떤 부분이란 게 이 부분인가? , 이 부분인가 보다?"

그녀는 웃으며 몸을 빼려고 거친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때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동시에 놀라서 몸을 일으켰지만 달리 어찌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존이 우리 둘이 침대에 있는 것을 보고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뭐 부탁하실 게 있습니까?"

"아녜요, . 내일 아침 일찍 와요. 얘기할 게 있으니까."

존은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한 뒤 급히 나갔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은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아침에 얘기할 게 뭐 죠? 무슨 뜻으로 한 말이에요? 저 사람이 어떻게 왔죠?"

"오라고 했으니까 왔겠죠."

"미쳤어요? 아주 날 미친년으로 만들 작정인가 보죠?"

"참아요! 문제 될 게 뭐가 있어요?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이에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내가 시키지 않는 한 소문 내지 않을 겁니다."

"시키지 않으면요? 참 기가 막혀! 한 번 시켜 보지 그래요?"

"자꾸 그러면 정말 소문내라고 시킬 겁니다."

"그러면 그렇지. 이 저질......" 그녀는 나를 쏘아보더니 천천히 얼굴 표정을 바꾸었습니다. "철면피에 멍청이!"

"정말?"

"멍청이! 그럴 필요 없어요! 완전히 짜고 한 짓이야. 좋아한 내가 바보지."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왜 그래요. 내가 그럴 것 같아요? 오해예요. 내가 원하는 건 다른 건데."

이 말에 그녀는 울음을 그치고 꽤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침착하고 자신 있는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 보았습니다.

나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연민의 정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후회 때문이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은 괄괄하고 용기 있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다져 먹었습니다. 후회 따위는 말자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게 뭔데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예전이나 다름 없이 행동에 주길 바랄 뿐이에요. 이번 일도 다른 일처럼 그냥 편하게 생각해줘요. 누가 물어봐도 사실은 사실대로 얘기해요."

"무슨 뚱단지 같은 말이에요? 무슨 일이라니......?"

"여기에 온 첫날부터 린튼과 가까이 지냈잖아요. 나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잖아요. 린튼을 선택하기 위한 바람잡이라고나 할까. 둘 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순수한 의도에서 기꺼이 바람잡이 노릇을 하려고 했어요."

"순수한 의도?... 악마 깉으니라구."

"그 친구가 결혼하자고 하니까 잉그램 양은 반승낙을 한 상태였죠. 오늘 오후에 하마터면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나니까 마음이 급해져서, 다리 옆에서 같이 얘기할 때 남들 몰래라도 약혼식을 하자고 추근댔겠죠. 그래서 오늘 저녁에 만나자구 그랬구요. 물론 섬세한 성격의 당신이 이 말에 화를 냈을 테구요. 그는 현명하지 못하게도 계속 당신에게 요구하다가 어처구니없게도 화를 냈겠구요. 잉그램 양은 약속만 거절한 게 아니라 그와 절교까지 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거예요. 그가 그렇게 떠난 이유는 바로 그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요."

그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린튼씨와 무슨 일이 있었죠? 혹시 그 사람을 죽여버렸나요?"

"조사해보면 알게 될 겁니다. 살아서 집에 무사히 도착했을 테니까."

"자신만만한 걸 보니까 그런 일은 없었나 본데, 그건 그렇다고 쳐요. 하지만 나에게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죠? 정말 악의가 있는 거예요? 심술을 부리는 거예요?"

"악의도 있고 심술도 섞여 있고 그렇겠지요. 미쳤을지도 모르죠."

"정말 지겨운 사람이군요."

"나도 잉그램 양에게 관심이 없어요."

그녀는 나의 어깨를 쥐었습니다. "거짓말하고 있어요.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절대 그럴 리 없어요. 내 직감이 틀린 적이 없어요. 누구보다도 자신할 수 있어요."

"여자가 눈이 멀면 그런 겁니다."

"눈먼 여자에게는 눈먼 남자가 제격이겠네요. 우리는 둘 다 눈이 멀었잖아요. 아니라고 해봐요!"

나는 그녀의 손을 놓고 말했습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이미 얘기한 대로만 따라줘요. 도움이 되면 됐지 누구에게도 해가 되진 않을 겁니다. 사실 당신이 린튼과 결혼을 하면 더 높은 귀부인이 되면 됐지 더 나빠지겠어요?"

"약 올리지 말아요!"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래요. 시키는 대로 하죠. 어쩔 수 없죠 뭐. 그러나 내가 히스클리프 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부터 말하죠."

나도 일어서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자기가 무슨 네로라고 세상이 모두다 자기 것인줄 알아요?" 그녀의 얼굴에는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나를 붙잡고 나를 막 흔들어 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틀림없이 웃었을 겁니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그녀는 차라리 동상을 잡아 흔드는 것이 났겠다고 생각했는지, 제풀에 나가떨어졌는지, 하던 동작을 멈췄습니다. 그녀는 작별의 키스 대신에 두 손으로 내 가슴을 두드리더니 슬리퍼와 코트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다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잠시 서서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난 그 여자 얼굴을 봤어요."

"어떤 여자?"

"그 여자는 집시가 아니었어요."

그녀는 문을 콱 닫고 가버렸습니다. 나는 홀로 남았습니다. 나는 옷을 벗고 잠을 청했습니다. 그날 밤에도 역시 언제나처럼 혼자였습니다. 어둠을 향하여 두 팔을 벌려 보았지만 허공만이 내 품에 안기었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봐도, 아무리 꿈을 꿔봐도, 어둠 속으로 손을 내밀면, 캐시, 당신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없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정말 미친 사람이었다. 에드거 폭행 사건, 잉그램양 헌신짝처럼 차버린 일, 캐시에 대한 지고한 사랑의 맹세를 저버린 일 등을 보면 미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새로운 미친 얘기를 읽게 될까 궁금하여 나는 편지를 계속 넘겼다. 다행히도 다음 편지는 넬 리가 친필로 쓴 편지였다. 나는 그녀의 필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선생님!

히스클리프씨의 편지가 여기서부터 일부 없을 겁니다. 아가씨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 이것저것 관심을 보이면서 다른 사람들의 일에 간섭도 하고 물건들에도 마음대로 손을 댔으므로 제가 쓸데없이 편지들을 보관하는 일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저는 편지들을 없애버리기로 작정을 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용기를 내어 반짇고리를 부엌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유례없이 더운 봄 날씨에도 그대로 보관하고 있던 불씨에다 그 편지들을 태워버릴 생각이었습니다. 벽난로의 철망 아래 여러 장을 던져 버리고 또다시 던지려고 하는 순간 아가씨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급히 앞치마로 편지를 들고 있던 손을 가렸습니다. 그러한 행동에 혹시 아가씨가 무었을 감추고 있나 궁금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가씨는 자기 문제로 너무 마음이 괴로워 나의 행동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넬리, 충격을 받았어."

"아가씨, 뭐라고요?" 결혼을 했지만 가끔은 예전처럼 그녀를 아가씨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깔깔 웃으며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습니다. "천벌을 받는 것 같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누군가가 얼음장 같은 손을 내 가슴에 대고 심장을 쥐어짠다고나 할까. 그런 기분 알아?"

놀란 마음이 안정도 되었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태연히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절하고 자상한 신랑과 런던에 신혼여행을 다녀오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떻게요."

"정말 그런 기분이 들어. 이사벨라가 볼 때마다 뭐하러 그런 걸 갖고 있냐고 얘기하면서 깔깔대던 내 소중한 물건들이 들어있는 상자 있잖아. 그걸 폭풍의 언덕에서 가져다가 열어보니까 손에 이게 잡히더라고."

그녀가 손을 펴자 주홍색 실로 묶은 시꺼먼 머리카락 타래가 튀어나왔습니다. "그의 유품이야.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연결해주는 증표 같은 거지. 그 사람이 이곳을 떠난 뒤 마구간에 있는 우리 둘만이 아는 장소에서 찾아낸 거야. 넬리, 그 사람이 나에 대한 증표로 이것을 남겨 둔 거라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돌아올 텐데. 그런 생각 안 들어?"

"그럴 리가요, 아가씨. 한 줌의 머리카락이 무슨 증표가 되겠어요. 더군다나 그 후로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

"하긴 그래. 하지만 머리카락에 손을 댈 때마다 한기가 내 몸에 전해져 몸이 부들부들 떨려. 그렇다고 머리카락이 얼음처럼 차갑지도 않은데 말야. 죽을 것 같은 생각도 들어. 히스클리프가 죽은 게 틀림없다면 그가 무덤에 있건 어디에 있건 오늘이라도 나타나서 내 행복을 뺏어가려고 할 것 같아."

이래선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득 들었습니다. "아가씨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다가는 3년 전 여름처럼 병이 나서 몸을 상하게 돼요. 옛날 소꿉친구는 이제 마음속에서 지워버리세요. 그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지금 실제로 죽고 없다면 적어도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퍼뜨리면 안 되죠."

아가씨는 결혼생활에서 익숙해져서인지 옛날 친구를 두둔하지 않고 머리를 젓기만 했습니다.

"추워! 으스스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 좀 편하게 해줘!"

아가씨는 내가 앞치마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보자고 조르지도 않고 미친 듯이 부엌을 나갔습니다. 미처 다 태워버리지 못한 편지들을 모두 불살라버릴 수도 있었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폭풍의 언덕에 큰 재앙이 닥쳐 우리 모두가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반짇고리에 편지들을 집어넣었는데, 바로 그 편지들을 선생님께 부친 겁니다.

편지의 일부를 태워버린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지낸 지도 벌써 반세기가 흘렀습니다만 태우기 전에 수없이 읽어 보았고 아직도 제 기억력은 예전이나 다름없으므로 그 태워버린 편지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제가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스클리프의 얘기로 돌아가기 전에, 그의 에드거 서방님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내가 얼마나 이를 갈고 한을 품고 있었는지를 얘기해야 하겠습니다. 그가 그분에게 가한 끔찍한 고통뿐만 아니라 서방님의 큰어머니와 큰아버지에 대한 태도를 그가 얼마나 자기 멋대로 꾸며댔는가를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로크우드 씨. 에드거 서방님을 모신 게 20여 년이니까 전 정말 그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서방님은 그가 편지에서 묘사한 것처럼 행동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이기적인 쾌락을 좇아 친구분들을 무시한 저도 없었습니다. 그저 서재의 책 속에 파묻혀 지내는 것을 좋아하셨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그분보다 더 친절하고 자상하셨던 분은 세상에 없을 겁니다.

이제 히스클리프 씨 얘기로 돌아가지요. 서방님께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사실이 드러날까 봐 히스클리프 씨가 그 뒤 몇 주 동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리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곳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서방님은 스러시크로스 농장에 무사히 도착하여 얼마 동안은 바깥 출입을 전혀 하지를 않으셨습니다. 우리들은 그때 무척 당황했었습니다. 책도 멀리하고 누구도 만나려 하질 않으셨으니까요. 심지어는 캐시 아가씨와 켄네스 의사 선생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빠가 병이 난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 한 번은 이사벨라 아가씨가 그 훌륭한 선생님을 불러보았지만 선생님도 서재문 밖에서 타박만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1년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뒤늦게 나서 그러려니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부분적으로는 그렇기도 했구요.

히스클리프씨가 저지른 행위에 대하여 얘기를 하면 결국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셈이 되었으므로 캐시 아가씨에게 얘기도 못하고 몇 주일 집에만 계셨습니다. 참 딱한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속이 상한 것은 캐사 아가씨는 히스클리프에 대해서라면 어떠한 죄라도 결국에는 용서를 했을 것이란 점입니다. 캐시 아가씨도 히스클리프처럼 독한 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히스클리프는 마음대로 음모를 부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를 쓰고 궁리해낸 것들이 그렇게 쉽게 자기 뜻대로 되었겠습니까? 그 사람은 린튼 서방님이 손필드를 떠난 뒤 아가씨에게 쓴 편지에서 아가씨가 잘못되거나 다른 사람이 가로채 버리면 1년 내에 동화 속의 왕자처럼 금마차를 타고 나타나 아가씨의 무릎 위에 온갖 금은보화를 쌓아 올려주겠다고 수없이 다짐을 했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가씨도 그런 편지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이곳에서는 비밀이란 게 없었습니다. 만약 그런 편지가 왔다면 2주일 동안은 신이 나서 축제라도 벌였을 겁니다. 그러한 편지를 결코 받아 본 적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에드거 서방님 이외에도 히스 클리프에게는 또 다른 적이 있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분을 깔아뭉개려고 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만 아가씨의 오빠를 잊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분은 린튼 씨보다 더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용의주도한 계획도 모두 수포로 돌아갔을 겁니다.

실더즈 목사가 일주일에 두세 번씩 캐시 아가씨를 개인 지도하고 있었는데 폭풍의 언덕에 올 때면 그가 편지를 갖고 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히스클리프가 사라진 뒤 캐시 아가씨가 병이 나자 꽤 오랫동안 공부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개인 지도를 다시 받지 않았으므로 편지는 다른 방법으로 배달이 되었습니다. 이 당시 힌들리 서방님은 거의 매일 김머튼엘 가곤 했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일을 보러 간다고 했지만 사실은 술집에서 마시고 즐기려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서방님이 김머튼엘 갔다가 편지를 받았을 건 뻔한 일입니다. 별로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였는가 하면 그분은 폭풍의 언덕으로 걸어오면서 심심풀이라도 누구에게서 온 편지인가 하나하나 살펴보았을 겁니다. 만약 히스클리프의 필적이 담긴 편지가 있었다면 힌들리 서방님은 보는 즉시 블랙호스 마시 바닥에 쳐넣어 버렸을 겁니다. 술이 취했었다면 그분의 주머니에서 빠져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태워버린 편지에는 히스클리프가 자기의 멋진 새 친구들과 그들과의 일에 대해서 얘기를 한 것이 많다고 기억이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모두 다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내용들이었으므로 그가 얼마나 더 많은 죄를 저질렀느냐에 대하여 관심을 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선생님이 들고 계신 편지보다 더 자화자찬하는 편지를 저는 받아본 적이 없다는 점을 밝혀두어야 하겠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따위 내용들은 없어진 편지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모두가 돌아가고 히스클리프와 그의 주인인 아어 씨만 남게 되자 그들은 여행계획을 세웠습니다. 히스클리프가 파티에서 예상 이상으로 임무를 잘 수행하였으므로 아어 씨는 무척 기뻤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함께 즐겁게 보낼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습니다.

이 여행에 대해서 히스클리프는 예전의 편지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글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은 프랑스를 먼저 방문했습니다. 프랑스는 무책임한 대신들과 시대에 뒤떨어진 귀족들 때문에 아직도 번잡스러운 나라였습니다. 그곳에서는 왕궁이 가볼 만했으므로 그도 틀림없이 그곳을 가 보았을 게 분명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으므로 확신하셔도 좋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의 유지와 몇 달 동안 친하게 지내며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그 몇 달 동안은 아어 씨가 자신의 지난 잘못에 대하여 그에게 보상을 해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곳은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대여섯살 무렵 파리의 여배우이던 엄마에게서 버림받은 아이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랄까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던 아어 씨는 그곳을 떠날 때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그 아이를 손필드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가정교사를 구하라는 지시도 존에게 해두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태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어떤 음모에 말려들었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잊어버렸습니다만 히스클리프가 주교처럼 변장을 하고 그 교회의 가면을 쓴 왕자를 주교의 직표인 홀장 속에 감춰진 쌍날칼로 찌르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납니다.

그들은 비엔나를 방문해서는 오페라를 자주 감상했습니다. 그 뒤 그들은 스위스에 있는 잉그램 경을 방문했습니다. 잉그램 경은 그곳에서 수두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스클리프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곳은 독일이었습니다.

공부를 다시 시작했던 초창기에 어떤 독일 철학자의 작품을 읽고서는 신비주의에 심취했던 적이 있던 히스클리프는 독일에서 그 철학자를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그 철학자가 강의하는 대학이 있는 도시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히스클리프는 학생으로 등록을 하고 형이상학 공부에 심취했습니다. 히스클리프가 공부하는 동안 아어 씨는 그라핀 클라리라는 여자와 바빴습니다.

그러나 급한 볼일이 생겨 아어 씨는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아마 17831월이었을 겁니다. 아어 씨가 함께 돌아가자고 했지만 히스클리프는 한사코 싫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그는 그 철학자가 그에게 가르쳐주는 불가해한 형이상학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거절하는 바람에 그와 아어 씨 사이에는 다소 냉렬한 분위기가 형성이 되어 나중에 더욱 어색해지는 상황이 벌어진 걸 보면 이것은 그의 중대한 실수였습니다.

그해 여름까지 히스클리프는 자기 공부를 그만둘 수도 없었고 그만두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손필드에서는 히스클리프가 아어 씨의 우상이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제단에는 새로운 조각품이 이리저리 뛸 때마다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콩깍지에 씌인 아어 씨의 눈에는 그 새로운 조각품이 해와 달보다도 더 귀한 존재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린 여자 가정교사였습니다. 아어 씨가 데리고 있는 아델을 가르치려고 고용했는데 그만 자기가 넘어간 셈이 되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그녀를 얼굴이 창백한 계집애, 아주 훌쩍대는 암캐, 이빨이 날카로운 흰 족제비 등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그는 있는 말이란 말은 다 사용하여 그녀를 헐뜯었습니다. 정말 그녀가 그런 여자였는지 아니면 그가 질투심에서 그렇게 묘사를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어 씨가 히스클리프를 전과 다름없이 좋아했을지는 몰라도 그에게 관심을 덜 보였을 게 분명한 이상 질투심 때문에 그가 그렇게 묘사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묘사였습니다.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곳에서는 누구나 사실을 상당히 왜곡할 수 있다는 정도는 선생님이나 저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여자가 아어 씨의 재산에 흑심을 품고 있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어 씨의 재산을 이미 자기의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기가 막히게도 그녀의 이름이 생각이 납니다. 제인 에어라는 여자였습니다. 히스클리프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위선자이며 사기꾼이며 아어 씨의 재산을 조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히스클리프도 그녀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그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제정신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히스클리프가 복도 아래에서 혹은 티 테이블 건너로 던지는 그 독이 오른 시선을 매일 마주치게 되면 싫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히스클리프는 그녀가 아어 씨에게 자기의 출생이라든가 정신 상태라든가 아어 씨의 사랑에 대하여 의심하는 말을 교묘히 주입시켜 아어 씨의 마음이 자기에게 돌아서고 있다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이러한 의심은 잠시 그의 마음속에 그대로 잠복하고 있었지만 그의 난폭한 성격이 어느 한순간 갑자기 폭발하는 날에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 타올랐습니다. 한 번은 아어씨의 조끼 몇 벌이 찢겨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히스클리프는 느닷없이 그녀가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했으리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자기를 망신시키려고 그녀가 일부러 그런 일을 꾸몄다고 했습니다. 잉크를 엎지른 일이 발생했을 때는 정말 그 묘사가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그녀가 한 짓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그녀가 그런 짓을 하는 근본적인 동기를 자기가 생각한 대로 아어 씨에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아어 씨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묵묵히 앉아 그녀를 추호도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그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아어씨는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꺼냈습니다.

"히스클리프, 난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되나? 안돼?"

"물론 사랑하실 수 있죠. 하지만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여자를 사랑하시길 바라는 겁니다."

"그럼, 저 여자가 아니라면 어떤 여자면 될까?“ 아어씨가 시뻘건 얼굴로 다그쳐 물었습니다.

"수정을 보듯이 꿰뚫어 볼 수 있는 그렇게 조심성 있고 순수한 여자면 되겠군. 그러나 여자란 한 번 토라졌다가도 기회만 생기면 물고 뜯고 하는 법인데, 저 여자처럼 마음이 끌리는 여자를 어디 가서 구해?"

그의 말이 하나도 틀리는 데가 없었으므로 히스클리프는 그의 질문에 대꾸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자코 있는 걸 보니까 아직도 저 여자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나 보군. 자네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겠지. 자네는 나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내가 참지. 히스클리프, 내가 자네에 대하여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라고 얘기할 때처럼 제인도 나무랄 데가 없는 여자라고 말할 땐 그대로 좀 믿어봐. 나는 누가 이따위 짓을 했는지 알고 있어. 다 이유가 있어. 진짜로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까 날 믿어. 날 믿으라고......"

"이유가 있다. 결혼할 수 없는 불변의 이유가 있다고 얘기하셨을 때처럼 믿으면 되겠군요."

이 말에 아어씨가 화를 버럭 내며 책상을 탁 치는 바람에 잔이 떨어져 깨졌습니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나 보군,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할 만큼 건방져졌어. 이유가 바뀌었어. 저 여자란 존재 때문에 결혼하지 못할 이유가 사라진 거야. 난 제인과 결혼할 작정이야! 하느님도 막을 수 없을 거야. 하느님도 막을 수 없는 일을 히스클리프 자네가 막을 수는 없겠지!"

이 말에 히스클리프는 기분이 몹시 상했고 그 후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습니다. 매서운 겨울 날씨 같은 그들의 관계는 2, 3주나 지속되었습니다. 아어씨는 침실에서 알 수 없는 열병에 시달려 거의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분명 그는 스스로를 죽이고 있었을 겁니다.

이때 놀랍게도 그녀가 히스클리프의 행동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더군다나 히스클리프가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면 그녀도 맞서서 손가락질을 해댔습니다. 그녀가 히스클리프를 헐뜯는다는 사실을 아어씨가 믿지 않으려고 하자 히스클리프의 분노와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지요. 마찬가지로 히스클리프가 그녀를 헐뜯는다는 사실을 아어씨가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히스클리프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셈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펀딘 대차지의 관리인 자리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기억이 나시겠지만 그곳의 다른 사람들은 그 자리를 차지하면 죽어서 천당 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자리임에도 그가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자리입니다. 소작료는 꽤 되는데 세금도 없고 보수도 상당하니까 그는 스스로 피하는 척하며 펀딘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가 새로 거주하게 된 곳은 잉그램 홀 근처라서 스위스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돌아온 고분고분한 성격의 잉그램 경의 친구들과 어울려 새로운 짓거리의 유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돈에 미쳐 있었으므로 그들은 매일 밤 노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잉그램 경은 히스클리프에게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하여 이곳저곳에서 돈을 끌어 모았구요.

이 불미스런 사건으로 히스클리프에게는 한 가지 좋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히스클리프가 딴 돈이 점점 늘어가면서, 그는 아어 씨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나름대로 분명하게 알게 된거죠. 그가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이미 느꼈어야 할 감사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는 경험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히스클리프가 실제로 표현한 것은 아어 씨와 같이 지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후회였지만 거기에는 숨은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캐시 아가씨에 대한 연정이 돌연변이처럼 아어 씨에게로 변한 것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지난 얘기를 하는 것처럼 글을 쓰다 보니까 히스클리프의 중단된 편지가 시작되는 곳을 그만 지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말하고 싶습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천성이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또는 타고난 천성과는 정반대로 살든 말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해주느냐가 바로 그 사람의 일부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태워버린 부분에 대하여 요점만 선생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계속 읽어 보시고 히스클리프의 편지를 모두 숨기고 있었던 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 살펴봐 주십시오.

잉그램 경과 페릭은 테이블 위에 돈을 놓고 일어섰습니다. 페릭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잉그램경은 서성거렸습니다. 그는 내 어깨를 감싸 안고 같이 문으로 걸었습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그 정도는 능력이 있는데도 돈을 잃으면 꼭 샌님처럼 구는 놈이에요. 그러나 근본은 착한 놈이예요. 다시 오라고 할까요?"

"마음대로 해요"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에서 나와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셨습니다. 잉그램 경의 하인이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페릭의 분홍색 코트 자락이 마차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길 어귀에 다른 마차가 나타났습니다. 아어씨의 마차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히스클리프, 괜히 봉변을 당하기 전에 가야겠어요!"

아어씨의 마차가 옆으로 돌며 잉그램 경의 마차 뒤어 멈춰 섰습니다. 잉그램 경이 아어씨에게 가서 창문으로 얘기를 했습니다. 그는 인사를 꾸벅하고는 페릭이 타고 있는 마차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떠났습니다. 나는 현관문 앞에 서서 기다렸습니다.

아어씨가 나와서 서더니 안에 있는 사람과 잠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차양 친 마차 안에 여자가 있는 것 같은데 애교점만이 보였습니다. 그는 장날의 약장수처럼 한껏 멋을 부려 아주 근사한 모습이었습니다. 사랑의 묘약을 마신 사람이었습니다.

아어씨가 웃으면서 물었습니다. "이사람아, 좀 들어오라고 그러면 안 돼?"

"예예~ . 들어오세요. 대환영입니다. 하지만 저보고 도적놈 같다느니 선머슴 같다느니 하는 사람은 좀 곤란합니다."

아어씨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습니다. "야아~. 그러면 우리 둘 다 밖에 서 있어야겠는데."

"좋으실 대로 하세요."

"자네는 제인을 어떻게 흉보았더라? 피장파장인 것 같은데. 하지만 저 여자가 오늘 여기 온 건 용서하고 잊어버리기 위해서야."

"승자가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겁니다."

"승자라니? 무슨 뜻이야? 자네가 원해서 이곳으로 왔잖아."

"의심이 가는 점을 제가 공개적으로도 아니고 아주 은밀히 알려드렸는데도 에어 양은 결백하다, 진짜 범인이 누군지 안다,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래서 전 승복하고, 전적으로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어른은 저 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셨죠. 하인들도 있었으니까 그들도 어른께서 저 여자 말을 믿으신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럼 나에게 화가 난 거군!"

"물론 그렇습니다. 수백 번 잘해주다가 한 번 잘못해준다면 그건 또 다르죠. 사랑에 눈이 멀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어 양은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그저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에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 말인 것 같은데."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제 의견을 말씀드렸잖아요."

"그래, 그랬지, 히스클리프. 자네에게 내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짓들을 자네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게끔 한 사람은 나야."

"그건 말이 안 되죠. 한쪽에게는 불공평하고 다른 한쪽에게는 거짓말이 되는 셈인데 그러한 후회에 대한 설명은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내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어떤 위험이 나를 위협하고 있는지, 자네가 알면.....!"

"자네가 알면, 자네가 알면, 이 말을 자주 하시는데, 왜 속 시원히 얘기 못 하세요?"

아어씨는 턱을 쓱 문질렀습니다. "얘기할까? 나도 얘기하고 싶어. 모두 다 까발리고 싶어. 이 짐스러운 것에서 벗어나면 1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갈 것 같아. 그러나 괜히 그 말을 했다가 에어도 잃고 자네도 잃으면, 다 잃어버리는 셈인데...."

"저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아냐 믿어. 하지만 자네가 나처럼 모든 것을 제대로 판단한다고 믿어도 될까?"

"저는 어른의 가르침을 받고 다시 태어난 목숨입니다. 어른이 조각하신 대로입니다."

나는 빈정거렸습니다. "아부하지 말아. 우쭐댈 필요도 없고! 자네 마음속에는 한이 맺힌 단단하고 차가운 응어리가 있어. 난 그것엔 일체 손을 대지 않았어. 그건 죄악이야. 무자비한 거고, 난 그게 두렵지."

나는 그의 빙빙 둘러대는 말에 조바심이 났습니다. "이제 넋두리를 다 하시는군요. 그 건방진 여자가 내가 미친 짓들을 했다고 생각하건 말건 내버려 두세요. 나 같으면 친구들의 옷을 찢어놓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예 태워버리든지 하지. 언젠간 그 여자가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할 날이 오겠죠. 그때까지 살죠 뭐!!"

"제인은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아. 자네를 잘못 생각했던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 그래요? 어째 그리 마음이 변했습니까?"

아어씨는 잠시 얘기를 끌었습니다. "사실 그와 같은 사건이 재발했는데...."

"또요? 이번에도 찢어놓았습니까? 아니면 페인트로 뭉개놓았습니까? 아니면 태워버렸습니까?"

"누군가가 또 침입했어. 이번에는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칼에 찔렸지."

작년에 아어씨가 베일에 싸인 여자에게 엄지손가락을 심하게 다쳤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전에 침입한 사람을 못 보셨습니까? 하얀 옷을 입고 있던 바로 그 여자였나요?"

"여자긴 여잔데 메이슨 씨는 옷 색깔에 대해선 말이 없더라구. 내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이미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였고."

"그때 집 안에 다른 사람은 누가 있었습니까."

"에어와 덴트씨 부부. 잉그램씨 가족들이 있었지. 에어가 메이슨씨에게 붕대 감는 것을 도와 주었어."

"참 이상하네요. 잉그램은 그런 얘기하지 않던데. 어쨌거나 한바탕 소란이 났었겠습니다."

"이상할 것 없어. 잉그램은 몰랐을 거야. 그냥 비밀로 해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최선의 방책이었군요! 어떤 여자가 어른을 공격했을 때도 그렇게 하셨죠! 비밀이 비밀을 낳고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참 좋습니다.!"

"아주 대놓고 저주를 하는구나? 자네는 털어도 먼지 안 나는 사람이냐? 자네가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야?"

나는 잠시 속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린튼에 대해서 의심을 한다 해도 증거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다고 생각하시나 보죠?"

"그렇게는 생각 안 해. 그럴 필요도 없고, 바로 문 앞에서 그 몹쓸 인간들을 만났을 때 하나 같이 목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걸 보면 그들은 아침 인사를 하러 온 게 아닌 게 분명해. 아니지. 밤새 여기서 노름을 하고 있었을 거야. 부인할 텐가?"

"아닙니다."

"어떻게 이렇게 고분고분해졌어?"

"어른을 뵙고 있는데 그래야죠."

"이봐, 히스클리프. 우리 둘 다 이정도밖에 안 돼?"

"아닙니다. 그렇지만 잉그램을 친구로서 사귀도록 해 주신 분이 바로 어른이시잖아요."

"어린애 같은 말만 해라. 그 친구가 점점 사람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잖아 내 말을 자꾸 피하려고 하지 마. 이제 다 얘기해야겠어. 자네 요즘 맨날 나쁜 친구들과 형편없는 짓이나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그래도 설마설마 했지. 이렇게 형편없이 굴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어."

"제가 농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까?"

"없었어. 하지만 자네가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을 테니까, 제대로 돌볼 시간이 없었을 게 분명해."

"아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두 달 전에 제가 이곳에 왔을 때 이곳은 농장이 아니라 황무지였습니다. 이 집은 집이 아니라 방만 두 개 덩그러니 있는 노천 캠프처럼 아무렇게나 지어 내버려 둔 집이었습니다. 없는 것투성이에다가 하수도는 막혀 있지를 않나 마구간은 꼭 도살장 같았습니다. 어른의 지시를 받으려고 편지를 써도 답장도 없고 해서 다른 일로 바쁘시겠지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나는 마차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마차 안에 있는 에어양은 안에서 밖으로 문을 부채꼴로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이미 햇볕이 꽤 따가운 때였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계획을 짜야 했습니다. 이곳을 어떻게 하면 쓸만한 곳으로 만들까 궁리에 궁리를 해봐도 별반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지대는 낮고 습하죠, 나무는 계곡까지 빽빽이 집을 싸고 있죠, 들판은 마구간에서 멀죠. 그러니 어떡합니까? 그러나 들판이 좀 멀긴 해도 말에게는 이상적인 곳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제가 말에 대해선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말을 키워서 이익을 남기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일이라 다시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다시 답장이 없기에 정말 바쁘신가 보다 생각하고 마구간과 목초지를 혼자서 책임질 요량으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종마도 주문을 했습니다. 게다가 하수구 청도도 하고 집 근처의 울창한 나무숲도 가지치기를 했습니다. 집도 환기를 시키고 청소하고 가구도 들여놓았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어른의 재산에 대한 저의 책무를 이성적으로 다 처리했습니다.

제가 한 일을 인정해 주셔도 좋고 인정해 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 일을 인정해 주시면 2년 안에 조그만 이익이라도 보실 겁니다만, 부인하시면 결국 망하고 마실 겁니다."

내가 하는 얘기를 듣고 아어 씨의 얼굴에는 노여움과 놀람과 어떤 다른 감정이 일시에 교차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절규라도 하는 듯이 말을 하는 순간, 그 여자가 우리에게로 오는 바람에 얘기가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어 씨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보는 순간 굳어 있던 얼굴이 풀렸습니다. 그는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듯했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는 얼른 다른 한 손을 내밀어 나의 손을 잡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살은 생각보다 훨씬 따뜻했습니다. 물론 마차 안에 있는 동안 몸이 더워져서 그렇기는 하겠지만 활기가 거의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따뜻한 편이었습니다.

푸석푸석하고 숱이 없는 머리카락을 뒤로 틀어 올린 그녀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고 혈색이 나빠 보였습니다. 반면 아어 씨는 옆에 서 있는 그 여자의 모습에서 그녀가 아어 씨의 밝은 모습 때문이 아니라 핏기가 없는 혈색 때문에 그늘지게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에어 양이 예쁘게 보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녀는 나의 손바닥을 아어 씨의 손바닥에 살며시 갖다댔습니다. 나는 얼른 손을 빼고 싶었지만 그가 갑자기 손을 꽉 잡는 바람에 그저 멀거니 그의 눈만 쳐다보았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일단 악수나 하자. 그가 마치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따라서 나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제가 오해했다는 걸 아어 씨가 말씀드렸을 거예요." 그녀는 안경을 위로 올리며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습관적인 동작이었지만 나는 그 동작만 보면 화가 났습니다. 아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최근에야 알았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어 씨에게 정말 잘하시던데, 지난 일은 다 입어버리고 저도 친구로 받아 주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웃으며 허리를 꾸벅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에어 양이 이러는 데에는 뭔가 동기가 있으리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만약 그녀가 마음을 바꾼 것이 일종의 전략이라면 확실한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밖으로 드러내놓고 저항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지 않은 치밀하게 계획된 전략 말입니다. 아어 씨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됐다! 우린 이제 다시 친구야! 제인, 저 친구가 이 농장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다고 얘기를 했는데 사실이라면 아마 이 농장이 우리나라 제일의 명소가 될 거야!"

"히스클리프의 능력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게 들어서 이제 더 이상 놀라지 않아요. 그건 그렇고 저희가 이곳에 온 이유를 말씀하셨나요?"

아어 씨는 그녀를 옆으로 가까이 끌어당겼습니다. "제인과 결혼할 예정이야. 자네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는 걸세. 결혼식에는 오직 자네만 초대하려고 하네. 우리 결혼식에 오겠지?"

불만이 많았지만 나는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운 좋게도 나는 그들의 초대를 거절할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식 날에는 옆마을에서 마시장이 열리는데, 필요한 종마를 구하려면 내가 반드시 참석을 해야 했습니다.

어쨌든 지금 내가 맡은 역할은 친구라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완벽한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 함께 저녁이나 하자고 권했습니다. 나의 가정부인 메어리는 음식 솜씨가 좋은 데다가 요리 솜씨를 뽐내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급한 일이 있어서 손필드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섭섭해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들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들의 마차가 나무들이 우거진 구불구불한 길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문 앞의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나의 머리는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의 머리는 방금 있었던 장면에서 한 장면도 더 넘어가지 못한 채 맴돌고 있었습니다. 나를 부당하게 대우해서 속이 상했던 기억은 생각이 나는 데도 머리가 따로 놀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의 갑작스런 반전과 그 뒤에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전혀 의아하게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가 정말로 성실하다 할지라도 나의 이익에는 해가 될 게 틀림없는 그들의 결혼식에 대해서는 절망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들은 전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사라졌습니다.

아어 씨와 그녀가 하는 말을 받아들이며 나는 마음속의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손을 잡고 나란히 나갔습니다. 그들과 함께 나의 동화 같은 꿈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손필드를 물려받아 새로운 멋진 모습으로 어린 시절의 친구들과 적을 놀라게 해 주려던 꿈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습니다.

남은 것은 캐시의 모습뿐이었습니다. 그녀의 모습이 아주 선하게 눈에 보였습니다. 우리가 함께 갖고 있는 과거의 기억 속의 모습이 아니란 이곳 펀딘으로 이사를 한 모습 말입니다. 꼭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현재의 펀딘으로 당신이 와서 나와 함께 지낼 수 있는 그 날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습니다.

캐시. 왜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올 수 없을까? 그날, 당신이 나에게 느끼게 했던 모욕의 매운 맛에 괴로워하며 지난 수년 동안 형성된 수백 겹의 고통으로 허리가 휘어도 나는 폭풍의 언덕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작정을 했었습니다. 그날 - 내가 이겼노라 소리 지르며 에드거 린튼처럼 커다란 마차를 타고 옛날 대문에 떡 나타나 린튼보다 두 배는 더 좋은 옷을 입은 모습으로 마차에서 내려 린튼보다는 열 배나 더 감동적인 말로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고백할 그날, 그리고 폭풍의 언덕쯤은 수백 개라도 살 수 있는 돈을 힌들리 앞에 내던질 수 있는 그 날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라 생각한 순간 그것은 모래성처럼 일순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그러한 꿈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그마한 아니, 더 실질적은 무엇이 있습니다. 내 수입을 은행에 저축하고 최근에 카드놀이에서 딴 돈을 합쳐 내게는 5천 파운드 이상의 돈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내게는 고정적인 수입이 있습니다. 내가 운영만 잘하면 매년 그 수입은 늘어날 겁니다. 나는 이 집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린튼이 이미 끝난 사람인데 내가 왜 그를 이기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까? 그런 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중요한 건 당신을 얻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요 우리의 두 가슴속에서 뛰고 있는 심장도 하나라고 내가 언제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과소평가했다고 몹시 꾸짖으며 대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그것보다 더 순수하고 소박한 것입니다. 내가 계획했던 그런 사치스러운 것들이 없어도 우리는 같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의심한다면 우리 둘 모두가 서로를 배신하는 겁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생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저 친구로서였습니다. 당신과 나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행복할 수 없을까요? 내가 역마차를 타고 김머튼으로 가서 시골 신사가 여자에게 구혼을 하듯이 당신에게 구혼을 하면 안 될까요? 힌들도 사람인 이상 일주일이건 2주일이건 구혼 신청을 하면서 당신을 나에게 달라고 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당신이 여기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이 집 안을 장식하는 계획을 짜고, 당신이 열심히 앞마당을 가꾸고, 말들을 돌보면서 기뻐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아어 씨도 얼마나 좋아할까요. 잉그램과 그의 친구들이 당신의 매력에 흘려 밤새도록 이 집에 있으면 어떡할까요.

그러나 이 마지막 것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노름에서 손을 떼야겠습니다. 나는 절대로 힌들리를 닮아서는 안 됩니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당신을 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손가락으로 당신의 보드라운 살을 만지며 뽀얀 목덜미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는 그렇게 하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달리 생각할 겁니다. 자존심 따위는 다 버리고, 아니 자존심의 성격을 바꾸려고 노력할겁니다.

몇 달 전에 유럽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에드거 린튼의 근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심부름꾼을 한 명 고용하였습니다. 내가 받은 보고는 만족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에드거는 스러시크로스 농장에 처박혀 속세를 떠난 사람처럼 지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린튼의 집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곳에 가는 것은 이사벨라 린튼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들 얘기한다는 보고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여자들에게는 관심이 없어서 당신이 그곳을 방문하고 있는 동안에도 서재에만 틀어박혀 있다고들 얘기했습니다.

유럽으로 떠나기 전에 내개 보낸 전갈을 받고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는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일정이 자꾸 연기되는 바람에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며칠 동안의 일정을 나는 짜기 시작했습니다. 마시장이 열리는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시장에서 돌아오는 날 김머튼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떠나 있는 동안 펀딘 농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요크셔에서 체류 일정을 고정시켜 내 활동에 제한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곳에서 번창하고 있는 사업의 성공을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 사업의 성공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필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좋은 해결책이 떠올랐습니다. 아어 씨가 신혼여행을 가고 없는 동안 존은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아어 씨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나는 손필드로 달려갔습니다. 그 문제는 오후에 해결이 되었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에 그가 펀딘을 관리하되 내 계획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모든 것이 잘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떠나려면 몇 주 동안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당신을 맞이하기에 알맞게 집을 바꾸어 나의 재주와 밀코트의 가게들이 허락하는 한 지상의 낙원처럼 만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캐시! 당신을 위해 정말 멋진 것들을 샀습니다. 집시 댄서가 빙빙 돌아가는 자기로 된 자명약, 신과 여신이 예쁘게 그려진 프랑스제 금박 침대, 금빛 무늬가 들어간 크리스털로 된 병에 담긴 각양각색의 향수, 스피넷과 악보, 한 바구니 정도나 되는 중국제 스카피와 팔지, 깡통에 든 이태리제 사탕, 아프리카산 상아와 인도산 흑단으로 된 체스, 공기처럼 가벼운 수많은 장난감 등을 샀습니다. 그것들을 전부 한데 모아 가져오면서 나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그런 것들을 준비하며 방 안팎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긴들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난 행복하기만 합니다. 3주일만 지나면, 2주일만 지나면, 1주일만 지나면 당신을 만날 수 있으리란 확신 속에서 지냈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러한 행동에 메어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원래 무뚝뚝한 성격이라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놀라지도 않았고 쓰다 달다 말도 없었습니다. 가구들을 바꾸어 놓은 것을 보고 그녀가 한 말은 그저 얼마나 자주 방을 환기시키고 먼지를 털어내야 하냐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녀가 수다를 떤 적도 있었습니다. 요즘 존이 일주일에 한두 번씩 와서 농장의 일을 익히고 있었는데 그는 메어리와 앉아서 잡담을 나누곤 하였습니다. 한 번은 존이 돌아가고 나니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르신께는 그 아가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게 있다고 사람들이 쑥덕거린 데요."

나는 읽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고 그녀를 쳐다보았습니다. 메어리는 요리를 하려고 털을 뽑은 닭을 이리저리 매만지고 있었습니다.

"그래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다음 주면 결혼할 테니까 비밀에 부치기에는 어려울 텐데."

"어렵죠. 어쩜 존과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존도 폭풍 전야의 바람 같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게 알려지만 손필드에 있는 모든 것들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을 거래요."

그 화제에 대해서는 그것으로 얘기가 끝난 걸 보면 존이 더 이상 얘기를 안 했거나 그녀가 입을 다물었을 겁니다. 그녀는 존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습니다.

아어 씨가 결혼하는 날, 나는 예정대로 마시장에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결혼식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주 훌륭한 암말을 사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빌제법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다리가 늘씬하고 우아한 놈이었습니다. 펀딘에 있는 다른 말들이 놀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을 타고 시골길을 달리며 내가 학수고대하던 때가 거의 다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쁠 뿐이었습니다. 다음날 김머튼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므로 나는 이미 트렁크를 꾸려 따로 잘 놔둔 상태였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가슴이 하도 뛰어 그만 말등에서 기절할 뻔한 게 한두 번이 이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불상사 없이 펀딘에 도착했습니다.

존이 나를 기다리라고 예상을 하긴 했지만 길에서 말의 고삐를 쥔 채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는 한숨을 퍽퍽 내쉬면서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얼른 손필도로 가셔야 하겠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놀랄 겨를도 없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으므로 그날 밤에는 서리가 약간 내렸습니다. 메어리가 손이 시린 듯 손을 앞치마로 가리고 집에서 뛰쳐나오며 존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이봐요, ! 히스클리프 씨가 숨이라도 돌려야지. 어떻게 그렇게 가요! 어서 내리셔서 저녁이나 들고 가세요. , 히스클리프 씨가 식사하시는 동안 얘기를 할 수도 있잖아요. 식사도 거르고 가게 할 순 없어요!"

빵에 버터를 발라 차와 함께 허겁지겁 먹으면서 나는 아어 씨의 이상한 결혼식 애기를 들었습니다. 아어 씨가 교회에 들어갈 때는 분명 신랑이었는데 나올 떄는 신랑이 아니었다고 하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존의 얘기를 듣는 순간 차를 마시려다 말고 찻잔을 들고만 있었습니다.

아어 씨는 이미 결혼을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 사실이 바로 에어 양과의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 밝혀졌다니!

"본처가 그걸 밝혔나?"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밝혔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메이슨 씨라는 분인데 전에도 집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변호사였습니다. 제가 나중에 집에 가니까 계시더라구요."

"결혼식이 취소된 다음인가?"

"그렇습니다. 사건의 전말을 이렇습니다. 주인어른이 아침에 신이 나서 열여덟 살 총각처럼 환한 얼굴로 외출을 하셨다가 돌아오셨는데, 완전히 굳은 표정으로 에어 양의 어깨를 꽉 감싸고 계시더라구요. 리는 에어 양이 그 고통에 기절하지나 않을까 걱정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두 분 다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신혼여행을 위해 꾸려놓은 짐을 지나 홀을 나가시더라구요. 메이슨 씨와 변호사 그리고 또 다른 분, 이렇게 셋이서 그 뒤를 따라가더니, 이층의 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서로 몇 시간이나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뒤 그 세 사람이 다시 내려오는 데 교수형을 내리는 재판관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에어 양은 주인어른이 이미 결혼한 몸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아무런 죄가 없다고 말하고 변호사가 집을 나갔습니다. 목사는 주인어른께 아내가 있는데도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점잖게 얘기하고 떠났습니다. 에어 양은 어른에게서 몸을 떼더니 계단을 뛰어올라 자기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른이 따라 올라가 문 밖에 의자를 놓고 앉아 기다리셨습니다. 우리가 계단 구석에서 빠끔히 얼굴을 내밀고 엿보는 것을 발견하시고는 머리통이 깨지기 싫으면 얼른 사라지라고 막 야단일 치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부엌으로 가서 감히 그곳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부인이 있었다니 그게 누구야? 부인과는 왜 인연을 끊고 지낸 거야?"

"원래 그 여자는 어른보다 계급이 낮은 가문의 여자였다고들 합니다. 그 집에서 일하던 하녀였는데 해고를 당해 쫓겨났다는 말도 있고, 부잣집 상속녀였는데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몇 년 전에 파혼을 당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건 다른 사람들 얘기고, 존의 생각을 얘기해봐." 나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모자를 만지작거렸습니다.

"그 집에 비정상적인 점이 있다고 경고를 해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아어 씨에게 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잖아?"

갑자기 물벼락을 맞아 물을 터는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존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 질문을 피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었다고, 아니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해서 그게 문제겠습니까?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여 어른께서 지금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가서 보시면 아마 같이 우실 겁니다. 이제 저와 같이 가셔서 어른을 도와주셔야 합니다."

"에어 양의 도움이나 필요하지 내 도움이 뭐가 필요하겠어요?"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떠났다고?"

", 떠났습니다. 아니 사라졌습니다. 감쪽같이 증발했어요. 그래서 어른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계십니다. 제가 일기로는, 어른께서 밤늦게까지 문밖에 계속 앉아 계시니까 에어 양도 결국 문을 열고 나와 어른과 서재에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두 분이 하는 얘기소리가 들렸으니까 이점은 확실합니다. 저는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만, 혹시 필요한 일이라도 있을까 봐 홀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에어 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른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달래고 화내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참 뒤에 에어 양이 다시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른은 그대로 서재에 계셨구요. 얼마 뒤에 제가 살금살금 가서 보니까 어른이 소파에서 주무시고 계시기에 이불을 덮어드리고 저도 잠자리에 들어 서너 시간 잠을 잤습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리가 제 방문 앞에서 어른께서 노발대발하고 있다는 얘기를 울면서 하기에 나가보니까 어른께서는 미친 사람처럼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이 방 저 방을 살피시고는 에어 양이 없다고 소리 소리를 지르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젯밤에 나가버렸다는 얘긴데."

", 손필드에 올 때 가져온 옷 몇 벌만 챙겨서는 나가버렸습니다. 돈은 거의 갖고 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른 것도 모두 그대로 놔두고 갔습니다. 어른께서는 거의 제정신이 아닙니다. 에어 양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고민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히스클리프 씨를 찾으시다가 여기에 안 계시다는 것을 아시고는 화를 버럭 냈습니다."

"집 주변을 찾아보았습니까?"

"그럼요. 하지만 쥐새끼 하나도 없어요. 가시나무에 걸려 찢긴 옷조각이 발견됐지만 서너 달이 지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요술을 부려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도 내 계획이 있는데. 존도 알다시피 두 사람의 문제에 내가 까여들 수는 없잖아. 나는 예정대로 내일 떠나야 해요."

"그동안 두 분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하루만 집에 계시다가 저와 함께 돌아오시도록 하죠. 트렁크를 손필드로 가져가셔서 거기에서 내일 떠나셔도 될 겁니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그저 하루 아니, 한나절이면 될 테니까 들렀다 가시죠."

당신이 내 성격을 알다시피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결국 두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김머튼으로 여행을 하기로 이미 일정을 잡아놓은 상태에서 간발의 차로 그 일정을 변경해야 한다는 것은 내게는 고문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존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습니다. 잠시 들렀다가도 별로 늦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아어 씨에게 가보기로 결정은 했지만 그래도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가 죄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간섭을 했다가 결과가 나쁘면 욕이나 먹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마련해둔 방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면서 당신의 침대 옆에 있는 상아로 된 테이블 위로 아직 피지 않은 장미꽃을 담은 꽃병을 놓아두었습니다. 장미꽃이 활짝 피는 날 당신은 이곳에서 그 꽃을 보게 되리라는 일종의 맹세였습니다. 나는 문을 잠그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동안 집에 가지를 못했으므로 그 장미 꽃잎은 희망을 잃은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듯 날마다 하나씩 하나씩 힘없이 떨어지고 있을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해가 어슴푸레 지기 시작할 무렵 손필드에 도착했습니다. 이따금 차가운 비바람이 부는 스산한 저녁이었습니다. 길에 여러 대의 마차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인들이 마차에 짐을 싣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상황이 더 나빠진 게 아닌가 하는 방정맞은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는 무슨 일인가 상상하는 것조차 겁이 났습니다.

아어 씨가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해고하면서 집에서 즉시 나가달라고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곧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페어팩스 부인과 아델도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는 너무도 속이 상하여 사람들을 모두 해고하기는 했지만 돈은 아끼지 않아 말 그대로 그냥 돈을 뿌려 주는 식이었습니다. 그는 한 시간이라도 고통을 덜 받고 싶으니까 그 날 밤중으로 어서어서 집에서 나가라고만 얘기했습니다.

정말 미친 것 같았습니다. 갈팡질팡 사람들을 가능한 한 오래 붙들어두라고 존에게 지시를 하고 나는 아어 씨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에어 양이 지냈던 방에서 긴 의자에 말없이 앉아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히스클리프, 제인이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어. 내가 사준 진주도 벽난로 위에 그대로 놔두고 가버렸으니, 이 드넓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 내가 쫓아낸 셈이야. 내가 강요한 건 아니지만 죽고 말 거야. 난 살인 방조차야!"

"진정하세요! 자기가 원해서 떠난 거 아닙니까? 어른이야 그냥 있어 주기를 바랐잖아요?“

"그래 맞아, 하지만 자네는 모를 거야. 그게 다 내 죄 때문이야. 내 잘못으로 제인이 떠난 거야."

"먼젓번의 결혼 말씀이신가요?"

"그것에 대해 무슨 말을 들었구나! 말해봐! 무슨 말을 들었어?"

"말씀하시기가 두려워서 그렇게 오랫동안 숨기고 계시던 게 바로 이것입니까?"

"그래, 그러나 전부는 아냐. 그 중의 일부지. 히스클리프, 지나간 일로 나를 괴롭히지 말고 날 도와줄 생각을 좀 해봐."

"물론 도와드려야지요. 그렇지만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왜 해고하셨어요?"

"속이 상해서 그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어. 딱하다는 표정으로 비웃는 것 같았어. 나도 어떤 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좋습니다. 그 사람들을 다시 고용하셔야 합니다."

"안 돼. 제인 생각밖에 나질 않아.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며 죽어가고 있을 거야! 히스클리프, 어떻게 좀 해봐라!"

"이런 식으로 하신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어. 그 여잘 반드시 찾아야 해. 방법이 없을까?"

"무엇보다도 하인들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에어 양을 찾으려면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아어 씨도 존과 남자 몇 명은 그대로 두어 그녀를 찾게 하는 데 동의를 했습니다. 집안일을 돌봐야 할 사람도 필요했으므로 리와 요리사도 남아 있게 했습니다. 그에게서 떠나려던 사람들 중의 몇 명은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주변 16킬로미터 안에 있는 모든 집들에 사람을 보내어 수소문을 하고 신부처럼 보이는 여자가 나타나면 알려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가 밤새도록 머리를 짜낸 것만큼 나쁜 소문이 퍼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어 씨가 고집을 부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를 찾는 일이 그에게는 최우선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여자가 사라진 지만 24시간이 되었습니다. 김머튼으로 여행을 떠날 시각이었지만 여행 그 자체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어 씨는 점점 위험하게 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먹지를 않고 잠도 자지를 못 했으므로 눈만 빼꼼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미친 듯이 말을 몰고 그 지역 주변을 샅샅이 찾아다니다가 그녀가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나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내서 마침내 그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 여자가 돈이나 패물도 없이 집을 나갔으니까 아는 곳에 가 있을 게 뻔하다. 그녀가 아는 곳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그녀가 공부를 했던 로우 웃 학교와 그녀의 숙모 집뿐이다. 숙모는 돌아가시고 없지만 사촌 형제인 조지아나 리드라는 사람이 런던에서 다른 친척들과 함게 지금 살고 있다. 그러나 존은 얼른 그 학교로 말을 타고 가고 나는 런던의 사촌에게 가면 좋겠다. 런던에서 신문에 사람을 찾는 광고를 내는 것도 가능하다.

나의 이 제안이 그럴듯해 보이자 아어 씨는 만족했습니다. 적어도 미친 상태에서 의기소침한 상태로의 변화는 있었습니다. 그를 재우고 나는 런던을 향해서 떠났습니다. 그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채 일주일 만에 돌아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확고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녀에 대해서 신고하는 사람마다에게는 상금을 주겠다는 광고를 영군 전역에 냈고 병원과 시청에도 알렸습니다. 아어 씨의 결혼식을 막았던 변호사를 위시한 수많은 변호사들에게도 그녀를 찾게만 해주면 사례는 톡톡히 하겠다고 해두었으므로 그들은 전국의 변호사들에게도 연락을 할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추진되면 내가 없어도 될 것 같았습니다. 나도 이제는 김머튼으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도착해서 보니까 카터 선생님의 마차가 길에 서 있었습니다. 아어 씨는 신열이 나서 거의 탈진 상태였습니다. 그는 계속 나의 이름만을 부르고 있었으므로 나만이 그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늦은 가을이었습니다. 아어 씨의 병은 지겨우리만치 계속되었습니다. 걱정이 되기도 하고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였지만 나는 그의 침대 옆에 앉아 그를 보살피면서도 그저 당신 생각뿐이었습니다. 당신은 내 성격을 잘 아니까 그때의 심정을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캐시! 방금 초가 다 타 새로운 초를 가져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종이도 잉크도 다 떨어져 열린 창문 밖으로 몸을 기대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셔 보았습니다. 갑자기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3, 4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당신이 잠자리에서 엎치락뒤치락 몸을 움직이며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모습에 차가운 내 피부가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황홀한 기분에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습니다.

심부름을 보냈던 아이를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그 아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느릿느릿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황홀한 모습에 사로잡히면 누구나 다 얼떨결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이, 나는 당신을 마을에서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아이는 잠이 완전히 깨어 있었습니다. 관찰력이 예민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아이였으므로 그는 자기가 눈으로 본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하던 얘기들도 전부 듣고 와서는 나에게 얘기를 할 수 있는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는 당신이 린튼 식구들과 함께 교회의 신도석에 같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얘기했습니다.

린튼 씨는 2년 동안이안 언쇼 양을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이상하게도 다시 결혼을 하려고 한다. 린튼 씨는 정신병을 앓더니 다시 몸이 나아서 예전처럼 아니, 전보다 더 언쇼 양을 사랑한다.....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한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을 내게 말했습니다.

"2주일 전 일요일에 교회에서 언쇼 양을 보았는데, 그분은 김머튼에서는 일찍이 보지를 못했던 이국풍의 하얀 깃털 장식이 달린 녹색 모자를 쓰고 화사한 모습으로 앉아 있더라구요. 린튼 씨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기도를 하는 동안에도 언쇼 양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는데 설교를 하는 동안에는 언쇼 양이 벨벳 슬리퍼 끝으로 린튼 씨의 은색 구두의 버클을 계속 건드리더라구요."

뿔이 하나밖에 없는 가엾은 달팽이가 결국 껍질을 벗었구나! 그놈이 무슨 짓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내일이 지나면 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후회할 겁니다. 그러나 캐시, 당신이 그 작자하고 정말로 결혼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는 믿지를 못하겠습니다. 당신이 그 보잘것없는 강아지 새끼 같은 놈과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도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를 그저 심심풀이 땅콩 정도로 생각하여 그러는 걸 겁니다. 당신이 내가 돌아가는 게 늦어지니까 나를 혼내주려고 그러는 것일 겁니다.

린튼과의 일이 끝난 뒤 내가 당신에게 부친 편지가 도중에 어디로 사라지지나 않았는가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넬리에게도 편지를 한 통 써서 부쳤는데, 그 편지들의 우편요금이 지불된 것을 보면 편지들은 이미 배달이 되었을 거라고 확신이 듭니다.

어쨌거나 내일이면 모든 걸 설명할 겁니다. 이제 나의 얘기를 끝마쳐야 하겠습니다.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합니다. 태양이 중천에 뜨기 전에 나는 페니스통 크랙스에 도착할 겁니다.

그 뒤 여러 달 동안에 일어난 일들로 건너뛰렵니다. 첫째, 이달 말까지는 별로 특별한 일도 없었고, 둘째는 방금 들은 소식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더 빨리 폭풍의 언덕으로 보내어 당신의 손에 들어가도록 하고 싶어서입니다.

침울한 나날 속에서 몇 주가 흘렀습니다. 마침내 아어 씨에게 심각한 위험은 없으리라는 판단이 나왔습니다. 그 뒤 아어 씨는 몸이 허약한 상태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막 젖을 뗀 강아지 새끼처럼 나에게만 붙어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그를 떼어놓고 당신에게 달려가려고 작심을 했지만 상황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가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제인 에어에 대한 소식이 있나 하고 밀코트로 달려갔지만 언제나 허탕만 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녀를 찾아 나섰던 여행에서 그녀가 제아무리 멀리 있다 하더라도 돌아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녀가 떠남으로 해서 우리들이 빠졌던 낙담의 수렁에서 그저 아어 씨나 나나 헤어나올 수만 있다면 그녀가 설사 지옥에 가고 있는 중이라 하더라도 돌아오기를 바랐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은 아어 씨는 어두컴컴한 방구석에서 의기소침한 얼굴로 그저 묵묵히 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커튼을 여는 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는 누비이불처럼 두꺼운 천을 문과 창문 위에 덧대어 놓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자극을 주면 아어 씨는 머리가 쿡쿡 쑤신다고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나는 마구간에서 아어 씨의 방과 바로 붙어 있는 방으로 이사를 하여 지내고 있었으므로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도울 수가 있었습니다.

밀코트에서 소식이 올까 하는 기대에 손필드의 주인인 아어 씨는 매일 아침이면 기운을 차려 침대에서 기다시피 일어나 실내복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시커먼 선글라스를 썼습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는 힘들어하면서도 긴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소중한 제인 에어를 내가 데리고 올지도 모른다는 아침의 공상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살아 있다는 말로 그의 무의미한 생존을 그럴듯하게 미화한다는 것은 그 말의 참된 의미를 헛된 것으로 만들지는 몰라도 이런 공상을 하는 덕택에 그는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전혀 도움도 되지 않는 똑같은 소식을 매일같이 그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변호사들이 자기들의 계간지에 싣는 칼럼 하단에 현상금을 점점 높이는 광고를 내느라 바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소식이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세상 돌아가는 얘기와 런던의 신문들에 실린 기사들과 새로 나온 책들과 음악에 관한 얘기들로 그를 따분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곤 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그가 전에는 무척 즐기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즐거움도 이제는 그의 입속의 백태나 다름없었습니다. 나는 보통 잔뜩 열이 오른 상태에서 그의 방을 떠나곤 했습니다.

당신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그의 보잘것없는 사랑에 비하면 열 배 아니 백 배나 더 큰 것이었습니다. 나보다는 더 나이도 들고 더 현명할 것 같은 사람이 베개 위에서 꼼지락대는 벌레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사랑의 아픔은 단단하기나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카터 선생님과 상의도 해 보았습니다. 다른 의사들과도 상의해 보았습니다. 그가 다시 완전히 기쁨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의사들마다 다 제각기 이런저런 처방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다들 한 바탕씩 소란을 치르고 난 다음에는 오직 한 가지 처방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건강 상태가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신체적으로 볼 때는 만족할 만큼은 호전이 되었으므로 몸을 단련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이제 오직 그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펀딘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물론 나의 실제 의도는 편딘이 아니라 김머튼이었습니다. 김머튼에서 하려고 계획했던 것을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아어 씨의 일도 아닌 데다가 그가 관심을 둘 가능성이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자기의 소중한 여자와 자기의 두통뿐이었습니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선글라스를 쓰고 엉금엉금 걸어오더니 홀에서 빛이 비치자 질겁을 했습니다. 마당에서 흙을 파다 들킨 두더지 같았습니다. 그가 긴 의자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일찍 왔네. 좋은 소식이 있나? 아니지. 장승처럼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우선 앉아."

"존이 밀코트에 다녀왔는데 별다른 소식이 없습니다. 그 외에도 말씀드릴 게 있어서 일찍 왔습니다."

아어 씨는 한숨을 쉬며 손을 조금 들어올렸습니다. 이것을 내가 얘기해도 좋다는 뜻으로 생각을 해서 나는 내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셨다고 의사 선생님들이 얘기하기도 하고 펀딘도 여기에서 불과 몇 시간밖에 되지 않으니까 돌아갈까 합니다."

"자네도 떠나는구나!"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고 고통만이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그는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의 표정을 정확하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이제는 제가 필요 없고 상황이 현재와 같은 한은 저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런다? 참 이상한 이유도 다 있구먼.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댈 수 없어?"

"사실은 'C'란 여자 때문입니다." 내가 가만히 있자 그는 늘상 하던 말투로 말을 계속했습니다. "히스클리프, 'C'란 여자가 누구야? 탁 털어놓고 얘기해봐. 한사코 다른 여자와의 섹스를 거부하는 걸 보면 자넨 분명 아직도 그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어. 자네가 성직자도 아닌데 유럽의 그 예쁜 여자들이 아무리 꼬리를 쳐도 다 마다한 걸 내가 알고 있다구. 하지만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날 때도 됐잖아. 'C'란게 케롤린의 약자인가? 아니면 셀레스틴? 아니면 샤로트? 왜 얘길 안 해? 셀리아? 코라? 캐서린? 어느 거야 도대체? 그렇게 떨어져서 어떻게 살아? 그 아가씨가 살아 있다고 하자, 또 어디 있는지도 안다고 하자, 그런데 그렇게 떨어져서 지낼 수 있는 거야? 말 좀 해봐."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경우를 어른의 경우처럼 생각하시나 본데요. 저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있는 게 숨이 막힐 뿐입니다. 어른이 저와 같은 처지에 있더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니 어른께서 제정신이면요."

"거짓말! 아직도 숨기고 있어." 그는 심호흡을 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꼬치꼬치 캔다고 내 경우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자네가 어떤 이유에서 그러는지 누가 알아? 어떻게 하면 되겠어? 내가 어떻게하면 되겠느냐고?......히스클리프, 어쨌거나 하룻밤만 더 있어!"

"네에? 서재에 앉아서 책하고 얘기나 하라고요?"

"아냐. 내가 오늘은 아래로 내려갈게. 자네가 여기에서 하룻밤만 더 머물면 내가 내려가서 자네와 앉아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내 계획을 연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나는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아어 씨는 최근 몇 달 동안 아래층에 내려와 본 적이 없었으므로 하룻밤 더 머무르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또 다시 그의 말에 넘어가 손필드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에게는 또 다른 좌절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서재에서 아어 씨를 기다리는 동안, 현재의 상황에 화가나서 다 때려치우고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몸이 으스스했지만 덮을 것도 없고 해서 난로의 장작에 불을 지폈습니다. 11월이었지만 답답한 기분이 들어 창문을 열어야 했습니다.

마침내 아어 씨가 나타났습니다. 존의 부축을 받고 내려온 그는 난로 가까이에 앉았습니다.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고통에 찌든 모습은 어디로 갔나 의아할 정도로 얼굴에는 혈색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 테이블 준비해! 히스클리프. 이리 와서 카드나 하자!"

"네에?" 그는 자기 옆의 자리를 두드리며 재촉을 했습니다. "카드나 하자고. 카드 박사! 나하고 한 번 하자고."

"손 뗀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정을 생각해서 한 번 치면 됐지, 못할 것 또 뭐가 있어?"

그가 고집을 피웠으므로 나는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좋습니다. 한 번 더 친다고 달라질 것도 없죠." 내가 이기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어 씨가 베팅 액수를 자꾸 높이자고 주장했지만, 그는 카드에는 젬병이었으므로 내가 이길 것은 뻔했습니다. 그는 어떤 카드를 내려놓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내 얼굴만 쳐다보았습니다. 아무튼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열을 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상당히 편치가 못했습니다.

너무 시뻘건 눈으로 카드를 치니까 소름이 끼쳤습니다. 나는 난로에 장작을 더 얹었습니다. 아어 씨는 말없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물어보았습니다. "인간이 악마가 되면 말을 하면서 지옥에서 나온다는 속담이 있지." 그가 어떻게 카드를 치는 나는 이제 싫었습니다. 나는 마음을 먹고 속으로 가장 낮은 숫자의 카드가 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내가 바라는 카드가 들어왔습니다. 나는 낮은 숫자의 카드들을 내려놓았습니다. 이제는 아어 씨가 그들을 집어가서 고의로 져주는 게임은 그만둘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

내가 그 카드들을 내려놓자마자 그는 누가 방에 들어온 것처럼 내 어깨 너머를 슬쩍 쳐다보았습니다. 나도 자연히 아어 씨를 따라 뒤를 쳐다보았습니다. 다시 바닥에 깔린 카드들을 보니까 한 장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어 씨가 카드를 바꿔치기했던 겁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나의 다이아몬드 듀스 대신 클럽의 잭을 놓았던 겁니다!

"바꿔치기하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잉그램이 바꿔치기할 때보다 더 잘하시는데요. 하지만 계산이 틀리셨어요. 제 듀스를 가져가셨으니까 제가 진 거고 10파운드 잃은 겁니다."

아어 씨가 정색을 했습니다. "듀스가 어디에 있어? 밤새 카드를 쳐도 듀스는 구경도 못 하겠다. 자네가 억세게도 운이 좋아서 그래."

도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어서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10파운드를 가져왔습니다. 내가 아어 씨를 즐겁게 해서 내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게 된다면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갈수록 점점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질 수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운에 맡기고 아무 카드나 던져도 따고 내 딴에는 신경을 써서 낮은 숫자의 카드를 던져도 아어 씨가 얼른 바꿔치기를 해 버리니 또 따고. 더군다나 바꿔치기를 할 때 사기 치지 말라고 얘기할 수도 없고. 한 번은 그가 카드를 바꿔치는 바로 그 순간 그의 소매를 잡았는데도 그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히스클리프. 레이스가 찢어지잖아. 카드에 끌린단 말이야!"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침내 포기하고서 어떤 카드가 떨어지든 나 몰라라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카드놀이를 끝내고 나니까 그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한마디 했습니다.

"내일 밤 같은 시간에 또 하자."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자리를 떴습니다. 주머니 속의 딴 돈이 다리에 묵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침대 위에 돈을 꺼내놓고 보니까 4백 파운드가 넘었습니다! 아어 씨는 돈을 거저 주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내 목구멍에 쑤셔 넣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내가 펀딘에 있었다면 말을 팔고 사고 해서 그 정도 이익을 남기려면 얼마나 걸렸겠습니까? 아어 씨의 태도가 너무도 이상하여 나는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그가 베팅 액수를 부자연스러우리만치 올리는 것은 나를 목표로 한 것이며 그러한 무리한 태도는 그가 밑천을 고의적으로 잃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가 병이 나자 내가 그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밑천은 곧 바닥이 날 게 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손필드가 가난한 친척의 감자밭 정도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서인도 제도에 재산을 따로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하루 더 묵으면서 의사와 상의할 작정이었습니다. 나의 출발이 지연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침대 덮개에 쌓아 둔 돈더미를 보면 재산에 대한 나의 욕구가 충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결합하여 살 수 있는 미래를 설계해주는 씨암탉 같은 돈을 단지 며칠 만에 혹은 단지 몇 주 만에 몇 배로 늘릴 수 있다면 더 즐겁지 않을까요?

어쨌든 의사들은 나의 보호자인 아어 씨의 기분을 돋워주라는 충고를 했습니다. 그의 머리속에 어떤 불건전한 생각이 형성되어 있더라도 그것을 해소시켜주라고 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하면 그의 생활의 방향이 전환되어 예전의 생활은 그저 반대편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캐시. 그래서 그날 밤도, 그다음 날 밤도, 그리고 그다음 날 밤도, 아어 씨와 카드를 치면서 돈 따는 재미에 빠졌던 겁니다. 나는 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잃어보려고 노력을 해도 딸 수밖에 없었습니다. 손필드의 홀로 스며든 독에 나의 마음은 감염이 되어 있었습니다. 1만 파운드까지는 돈을 세어보았지만 그 후로는 세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돈더미가 하루하루 높아만 가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나는 아어 씨처럼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존은 무슨 소식이 없나 알아보러 밀코트에 가고 없습니다. 카드가 끝나면 밤늦게 기어나왔지만 이미 돈을 세는 것은 그만둔 상태였습니다. 정말 내가 미친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던 옛날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걱정은 더 이상 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숲을 걸었습니다. 가을바람과 비를 맞으며 겨울눈을 맞으며 나의 내면의 세계에 알맞은 상대를 발견했습니다. 나의 고귀한 보호자, 나의 고매한 선생님은 원기를 차츰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돌연변이를 일으켜 카드에만 매달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낮에는 침실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나는 꿈속에서도 카드에 중독이 되어 있었습니다. 유황분이 잔뜩 섞인 구름처럼 역병은 그의 침실문 아래에서 나의 침실로 살그머니 기어들어 와 해로운 꿈이 되어 나를 괴롭혔습니다.

내가 꾼 꿈들 중의 일부가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손필드의 가슴높이만 한 담에서부터 마당에 있는 에드거 린튼과 힌들리의 몸 위로 피할 겨룰도 없이 돈이 소나기처럼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몸이 으깨어져서 반짝이는 돈더미 사이로 피가 흥건히 흐를 때까지 무지막지하게 돈이 퍼붓는 꿈이었습니다.

이런 꿈보다는 더 희미한 꿈들이 많았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과 속삭임이 나의 꿈을 침입했습니다. 고양이와 새와 꽃들의 모습이 함께 어우러져 몸부림치다 커다랗게 변하여 나의 머리 위로 소용돌이치며 지나가면서 무엇인가를 얘기했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이 타고 목구멍이 막히는 것 같은 불안감에 나는 잠이 깨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창가로 가서 숨을 돌렸습니다. 열려 있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숲은 예전과 다름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꿈이 나를 속였던 겁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오후 내내 잠을 자다가 커다란 새가 푸드덕거리는 바람에 잠이 깨었습니다. 숲속의 새가 커다란 천사, 즉 죽음의 천사로 변하여 날카로운 검은 날개를 퍼득이며 내 방 가득히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놀라서 잠이 깨었습니다. 멍멍한 상태였으므로 내가 제정신이었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었든 실제였든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날개가 나의 뺨에 닿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꿈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인가 실제로 나의 방으로 달려드는 것이 보였습니다. 복도 문 아래로 빛이 새어들고 있었으므로 나는 어렴풋이나마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방문을 확 열어제치자 바람보다 무거운 공기의 급격한 흐름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귀를 스치고 복도 쪽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나는 그것을 쫓아갔습니다. 불 켜진 초에서 촛농이 바닥으로 흘렀습니다. 그것은 앵무새였습니다. 선원들이 서인도 제도에서 가져온다는, 인간보다도 오래 살고 인간만큼 말을 잘한다는 앵무새였습니다. 앵무새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몸과 날개가 주홍빛이었지만 어깨는 견장을 단 것처럼 파란색과 노란색이 섞인 앵무새였습니다. 앵무새는 나를 바라보더니 머리를 한쪽으로 곧추세웠습니다. 나는 팔목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어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앵무새는 몸을 틀어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더니 그쪽으로 날아갔습니다. 나는 좇아가 문을 열어보려 했으나 어떻게 빠른지 문을 닫음과 동시에 빗장을 걸어버렸습니다. 흰색의 물체만 언뜻 보았습니다. 앵무새와 앵무새의 친구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나는 서재에서 아어 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통 때와는 다른 게임을 할 작정이었습니다. 내가 계획하고 있는 게임은 아어 씨를 놀라게 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놀란 사람은 나였습니다. 아어 씨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신경을 써서 손목과 목에 레이스가 달린 검정색 새 정장을 입고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동안 아파서 깎지도 못했던 수염도 말쑥하게 깎고 머리는 뒤로 동여매었습니다. 사실 어느 면에서 보아도 나에게 익숙한 모습의 그였습니다. 최근의 그의 마음 상태로 보아선 분명 나를 놀라게 하는 다소 도도한 모습에 나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서재에 들어갈 때는 그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내 계획을 얘기하려고 작정했었지만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존이 새 카드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내가 난롯가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동안 그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나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습니다.

나는 모르는 척했습니다.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는지 아어 씨는 벌떡 일어나 방 한가운데로 걸어갔습니다.

"히스클리프, 이리 와봐." 그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는 서재의 벽에 걸려 있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아 있는 커다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책더미와 활활 타오르는 불길과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얹어놓은 신문과 의자들과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거울 속에 보였습니다.

"어때? 우리 둘이 똑같이 생겼지? 안 그래?"

뭐라 대답을 할 수도 없었으므로 입만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어깨를 꼭 잡았습니다. 나는 누가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싫어했지만 최근에는 그가 나에게 손을 대도 몸을 움츠리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히스클리프, 말해봐. 우리 모습이 어때?"

"이상하리만치 비슷한 옷을 입고 있네요. 거의 쌍둥이처럼 보입니다."

"옷을 입은 게 그렇지. 몸은 어때? 다른 점이 있나?"

"피부며 눈이며 머리카락까지도 똑같이 검고 체격도 똑같이 건장하지만, 제가 머리 반 정도는 키가 크고 단정한 몸매에 허리가 곧은 데 반 해 어른은 허리가 굽어 있고 근육이 씰룩거리니까 제가 어른보다 조금 나은 셈 아닙니까? 아마도 어른께서 정신적인 고통을 당해서 그런 모 양입니다. 죄책감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리가 있어. 세월이 약이겠지. 그런데 얼굴은 어때?"

"둘 다 성격이 거칠고 감정적이고 고집에 센 얼굴입니다."

오랫동안 들여다보니까 거울이 요술이라도 부렸는지 우리 둘이 얼굴을 뒤섞어 하나의 모습으로 바꾸어놓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히스클리프, 자넨 천성이 착한 사람인가?" 나는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 ? 물어보는데도 대답을 안 해?"

"대답은 이미 어른이 준비해 놓으셨는데 제가 미리 대답을 하면 실망하실 거 아닙니까?"

"대답 한 번 기가 막히네! 그렇게 퉁명스런 대답이 어디 있어. 인정이라든가 용서하는 마음이라든가 정다운 애정이 자네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있을까? 어떤 때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자네에겐 자만심과 잔인한 마음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

"앞에 있는 거울에 저의 모든 것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대로가 저의 참모습이 틀림없을 겁니다."

"용기도 있고 꺾이지 않는 의지력도 있고 지성도 있고 책임감도 있어. 그러나 인정이라든가 덕이라든가 진실성은 보이지가 않아."

"저는 거짓말하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렇겠지. 그러나 자네는 너무 많이 숨기고 있어.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자네가 내게 얘기한 건 별로 없어. 나는 자네의 친구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 셈이야. 그 수수께끼 같은, 이름을 댈 수 없는 'C'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어. 자네는 그 여자에게 전적으로 매달리고 있으면서도 나에게는 아무것도 얘기를 하지 않고 있으니까."

"어른에게도 비밀이 있잖아요?"

"내게 비밀이 있다는 건 자네나 나나 다 아는 사실이야. 자네가 그 비밀의 한계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자네의 비밀은 어때? 자네의 비밀은 하나 이상이야. 예를 들면 린튼에 대해서도 그래. 지난여름에도 이상한 점이 있었어. 린튼은 자네에게 어떤 사람이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어....."

나는 그 생각을 하고 싶지가 않아 몸을 돌리고 물었습니다. "어른의 비밀에 한계가 있다고 하셨는데 앵무새에 대해 물어보면 그것도 그 한계를 넘는 겁니까?"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앵무새가 오늘 저녁에 제 방에 들어왔었는데 다락방 속의 자기 거처로 나를 초대할 정도로 친절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무슨 새가 그렇습니까?"

그의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앵무새......? 아랫사람들이 키우는 거겠지......"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몇 명 안 됩니다. 그리고 어른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들 중에 새를 키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손필드에서 그런 새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새는 다락방으로 가는 길도 알고 문도 닫을 줄 아는 새였습니다. 도대체 어떤 새가 그렇게 할 줄 압니까? 얘기 좀 해 주시죠."

아어 씨는 나의 양어깨를 두 손으로 꽉 쥐고 오랫동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그가 큰 소리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소리라도 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말해야 할까? 말해도 될까?....

그의 눈에 망설이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나는 손을 올려 내 어깨를 쥐고 있는 그의 손을 치웠습니다.

"어른이나 저나 모두 서로의 얘기를 알고 싶어 하지만 얘기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피장파장 아닙니까?"

아어 씨가 머리를 끄떡였습니다. "이런 게임을 하죠. 돈을 걸고 하는 건 더 이상 재미가 없으니까 다른 방법으로 한 번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이기는 사람이 알고 싶은 것을 물어보는 겁니다. 그러면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겁니다. 어떤 질문이든 절대로 진실만을 얘기해야 합니다."

"완전히 절대적으로 진실만을 얘기해야 한다."

". 그렇습니다. 이 규칙을 지킬 것을 엄숙하게 맹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게임을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잠시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지. 하지만 이기든 지든 마냥 묻고 답하고 할 수는 없으니까 몇 번까지 물어볼 수 있는지 미리 정하자고."

"좋습니다. 합해서 다섯 번으로 하지요. 어떻습니까?"

아어 씨가 머리를 끄떡였습니다. "이제 됐습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카드를 집어 들었습니다. 아어 씨가 나의 손에서 카드를 뺏으며 말했습니다.

"하나 더! 카드로 하지 말자고. 자네는 카드 운이 억세게 좋으니까. 주사위로 하자고. 주사위로 하면 이기고 지는 확률이 똑같지. 어때?"

"결국은 최근에 어른이 돈을 잃은 게 다 제가 운이 좋아서였다는 말씀이신데, 괜찮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내 힘의 한계가 카드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으므로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존이 주사위와 컵을 가지러 간 사이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주사위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습니다. 내가 주사위를 하는 요령을 익히려면 두

세 번은 해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린튼 일에 대해서 아어 씨가 의심을 품고 있는 마당에 괜히 책임만 뒤집어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질문에 내 죄를 증명하는 꼴이 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진실만을 얘기하기로 약속을 한 마당에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약속을 깨고 싶은 마음에 나는 전전긍긍했습니다.

존이 주사위와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인사를 하고는 나갔습니다. 아어 씨와 나는 페어플레이를 위해서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그가 주사위를 흔들었습니다. 내 뒤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그의 눈에 비쳤습니다.

"그래. 운에 맡기자." 그는 주사위들을 던졌습니다. 7이 나왔습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눈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주사위가 떼구르르 구르더니 3이 나왔습니다. 나는 그의 질문을 기다리는 동안 고통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그 여자는 자네에게 어떤 사람이야? 'C'란 여자 말이야."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습니다. 지난 3년 동안 당신의 이름을 비밀스레 간직하고 한사코 얘기하지 않으려고 해왔지만 이제 소중한 내 가슴 속의 비밀이 그 껍질을 벗는 순간이었습니다.

"캐서린의 약자입니다. 캐서린 언쇼. 저는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 양자로 들어가 그녀와 함께 자랐습니다."

"그러면 여동생 아냐?"

". 하지만 여동생 이상입니다."

"물론 그 아가씨를 사랑했겠지."

"."

"자네의 사랑에 반응을 보이던가?"

"."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가 있지? 서로 굳은 맹세를 했나 본데?"

"그 이상입니다. 과거에도 저희는 하나였고 지금도 하나입니다. 저는 그녀의 일부이고 그녀 역시 저의 일부입니다."

"으흠. 좋아. 됐어.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 헤어지게 되었지?"

"그녀는 저와 결혼하면 자기가 위신을 잃게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언쇼 씨가 돌아가신 뒤 재산을 물려받은 그의 아들 힌들 리가 저를 마구간으로 몰아내는 바람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른께서 저를 발견했을 때에는 천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잖아. 아직 그 아가씨와 결혼할 생각인가?"

"결혼이란 단어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제가 캐시와 바라는 결합은 결혼 이상입니다. 그러나 물론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결혼하면 되지, 뭐가 문제가 있어! 내일 당장 불러와!"

나는 놀라서 눈만 껌벅껌벅했습니다. 꼬였던 실타래가 풀어진 셈이 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만 보이던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일 줄이야! 미로에서 탈출구를 발견한 것과 똑같았습니다.

아어 씨는 상당히 흥분해 있었습니다. 그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테이블과 난로 사이를 오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감정이 격양된 것은 기분이 좋아서이지 절망감에 빠져서는 아니었습니다.

나의 힘은 다음번 주사위 굴리기에서도 발휘되지가 않았습니다. 아어씨가 또 질문을 했습니다. 마음을 놓는 바로 그 순간 최후의 심판을 하는 소리가 들릴지도 몰랐으므로 나는 그의 말을 기다리며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리버풀의 정신병원 밖에서는 뭘 하고 있었지?"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지으니까 그가 다시 물었습니다.

"제 출생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완전한 대답을 해야지, 무슨 대답이 그래! 리버풀에는 왜 갔고, 정신병원에는 왜 갔어?"

"언쇼 씨가 저를 리버풀에서 주워왔다고 하셨는데 제 기억으로는, 부분적이고 어렴풋하기는 하지만 정신병원 근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라서였습니다. 하얀색이 칠해진 낮은 벽과 발로 채이던 기억, 그리고 욕설과 밖으로 나가는 터널......"

아어 씨의 눈이 반짝였습니다. "그래. 맞았어. 그들이 그렇게 얘기해서 난 알고 있었어! 계속해봐!"

그의 말에 무슨 뜻이 숨겨져 있는지 알아보려고 애를 쓰면서 나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정신병원을 도망쳐 나와서 잠시 동안은 도둑들이 훔친 것을 다시 훔치기도 하고 거지들에게 얻어먹기도 하면서 길에서 그럭저럭 지냈습니다. 그때 언쇼 씨가 저를 폭풍의 언덕으로 데려가 죽은 아들의 이름을 본떠 히스클리프란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용감해서 좋았어! , 주사위를 던지자고!"

이번에는 내가 이겼습니다. 아어 씨는 한 대 얻어맞을 준비를 한 듯 이 턱을 괴고 앉았습니다.

"질문!"

"리버폴이 있는 정신병원 밖에는 왜 계셨습니까?"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나는 그가 입을 떼려다 그만두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두 번씩이나 하려던 말을 꾹 참느라 얼굴이 거의 마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에야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습니다.

"아들을 찾고 있었지." 내 입술이 다 뻣뻣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드님을 왜 그곳에서 찾고 계셨죠?"

"그때로부터 15년 전에 그 애를 그곳에 넣어두었으니까. 그 애 엄마가 머리에 이상이 생겼는데 그 애 몸이나 성격이 어찌나 제 엄마를 닮았는지 그 애가 엄마처럼 될까 무서웠고 나의 피를 물려받은 애애게 그러한 비극이 생기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 애를 그곳에 맡겨 두고 매년 돈을 보내주었지. 물론 내 주소는 엉터리로 하고."

"그러면 정신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이봐. 그건 별개의 질문이잖아. 그걸 물어보고 싶으면 주사위를 굴려야지!"

내가 또 이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거리낌 없이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내가 이겼습니다. "정신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그는 입술을 핥았습니다. "9년 전에 아이가 도망쳤는데 다시는 찾을 수가 없다고 그러더라고. 그들은 매년 나의 돈을 꼬박꼬박 받고 있었으므로 그 애가 묵던 방을 예전처럼 그대로 보관하고 벽 밑의 터널은 그 애가 파놓은 대로 보존하고 있었어. 다른 한쪽 끝은 막아버렸지. 그렇게 도망친 것을 보면 그애는 분명 힘이 세고 담이 큰 애였을 거야."

주사위를 다시 굴렸습니다. 그는 나의 눈을 바라다보았습니다.

"제 이름은 뭡니까?"

"히스웃. 히스웃 아어. 언쇼 씨가 우연히 자네를 발견한 뒤 자기의 죽은 아들 이름과 자네 이름이 비슷해서 놀랐을 거야."

나는 가슴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어 씨가 물었습니다.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아무런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날 밤 자네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자네가 내 아들인 걸 알았지. 엄마의 얼굴과 똑같았으니까. 난 자네의 뒤를 쫓아갔어. 목걸이에 쓰인 글자를 보고 짐작은 했지만 자네가 이름을 나에게 말했을 때에 난 확신을 할 수 있었어. 그러나 자네가 내 아들인 것을 알고는 두려웠어. 그래 두려웠지. 끔찍하게도 닮은 모습, 그 야만적인 얼굴, 그 이상한 행동, 그 모든 것을 보곤 한 가지 결론을 내렸지. 자네도 미쳤다고. 엄마의 숙명적인 피를 물려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점도 있었어. 그래서 자네를 시험하려고 했던 거야.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네를 시험해봤지. 존은 자네엄마를 쭉 지켜봐 왔으니까 자네를 의심하고 있었고 결국 둘이 얼마나 닮았는지를 알게 되었지 그는 나 때문에 자네를 두려워한 거야.

내가 그에게 나의 확신을 부분적으로나마 가르쳐주었지. 그러자 그의 두려움은 존경심으로 바뀌었어. 나는 자네를 쭉 지켜봐 왔지. 자네의 욱하 는 성질과 잔인한 성격에 실망도 했지만 민첩한 임기응변 능력에 기분이 좋기도 했어. 자네에게 더 많은 책임을 맡겨보았지. 그러나 자네는 어떠한 도전에도 과감히 맞서 일어섰어. 난 자네를 가르쳤고 자네는 아주 빨리 내 아들로서 살기에 필요한 수준까지 올랐지. 아냐. 자넨 언 제나 내 기대 이상이었어. 난 자네가 좋아지기 시작했지. 자네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사실이 그랬어. 그래. 그 거친 외모에도 불구하고 난 자네가 좋아지기 시작한 거야. 그게 불운이라면 불운이겠지. 나의 무시에도 아랑곳않고 능력을 보여주는 데 무뚝뚝하고 냉정하면 어때? 우리 사이에는 따뜻한 그 무엇이 있는데. 둘만의 교감이랄까......"

"중간에 변화도 있었습니다."

"그래. 변화라......" 그는 난롯가로 걸어가 불을 휘저으며 말을 계속했습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니까 자넨 두려워했지. 아마도 자신의 출생 비밀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나서였을 거야. 내가 자네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이 확실했으니까 나는 곧 모든 것이 제대로 되리라 자신하고 그 여자에게 자네는 내가 병이 나기를 원한다고 믿게끔 했지. 그렇게 믿게 하는 데에는 다른 급박한 목적이 있어서였어. 자네가 대놓고 나를 원망을 하는 것을 보고는 자네가 나에게 무관 심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어. 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둘을 서로 화해시켜 때가 되면 자네를 자네 본연의 자리에 돌려놓으려는 생각이었지."

장작이 치지직 하며 타는 소리가 방안에 퍼졌습니다. 아어 씨가 결심을 한 표정으로 돌아섰습니다.

"이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되겠지. 그 여자는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자네가 여기에 있으니까. 자네는 내 아들이야. 내 사랑은 잃어버렸지만 이제 자네가 내 사랑이 되겠지. 모든 사랑은 자네에게 쏟아질 거야. 그 아가씨. 자네가 말하는 그 아가씨를 자네 신부로 이 집에 데려와!"

나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아버지!.... 그는 나의 얼굴을 난생처음으로 보는 것처럼 유심히 보았습니다. "나에게 돌아오다니 참 사랑스럽다! 가슴에 꼭 껴안고 내 귀여운 새끼라고 말하고 싶었던 적이 수없이 많았지! 그러나 이제 귀여운 새끼가 아냐. 늑대야. 그 잔인한 성격으로 내 생명까지 앗아갈 수도 있는 늑대야!"

그래도 나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내 앞에 섰습니다.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었습니다.

"히스클리프?" 그가 나를 끌어안았을 때 낯선 기분이 나의 몸에 확 퍼졌습니다. 나는 그의 머리를 벽난로의 돌에 대고 부지깽이로 으스러뜨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었습니다.

나는 울고 있었습니다. 울면서 나는 그의 품에서 가만히 빠져나와 바닥에서 주사위를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주사위를 테이블 위에 놓았습니다.

"질문이 아직 하나 남아 있습니다. 주사위를 던지시죠." 내가 또 이겼습니다. 그의 눈에는 내가 무엇을 물어보려는지 알고 있다는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갑자기 그의 몸이 완전히 움츠러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눈동자에 는 초점이 없었습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말없이 돌아서서 촛불을 들고 나에게 따라 나오라는 눈짓을 했습니다.

의당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우리는 위층 복도로 올라가 새가 사라졌던 방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는 내가 전에는 보지도 못한, 문기둥 위의 고리에 걸려 있던 무거운 열쇠 꾸러미를 꺼내어 문을 열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니까 그 뒤에 다락이 보였습니다. 끝 에는 자물쇠로 잠긴 또 다른 문이 있었습니다.

아어 씨는 문밖에서 잠시 멈추어 섰습니다. "히스클리프, 이 방에 들어갈 결심이 서 있겠지? 네 엄마는 정신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야. 내 손의 상처를 직접 보기도 했고 자기 오빠인 메이슨 씨에게 한 짓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저는 결심이 섰습니다."

그가 문을 두들겼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렸습니다.

"베르타! 베르타 아어!

"누구 이름을 부르는 거야?" 안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건 내 이름이 아냐. 절대 아냐. 그 따위 이름을 왜 내게 계속 부르는 거야?"

그가 문을 열면서 작은 목소리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자기 이름도 부인하는 망상에 빠져 있어. 사실이란 사실은 모두 다 부인하고 싶은 거지. 조심해. 아주 교활하니까."

방 한가운데의 커다란 둥근 테이블 앞에 여자 둘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앵무새는 키가 조금 더 큰 여자의 어깨에 앉아 있었습니다. 테이블의 중앙에 놓인 둥그런 등잔 불빛에 둘둘 만 종이들과 잉크 병과 잉크가 여기저기 묻어 있는 펜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얼굴도 보였습니다. 그녀는 컴컴한 곳에 서 있는 나를 향하여 몸을 돌 렸습니다.

가냘퍼 보이는 여자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오늘은 조용하세요. 불평도 안 하시고요. 아프신데도 오늘은 꿋꿋한 편이세요."

"이모야. 최근에 서인도 제도에서 왔지. 전에 있던 여자 대신 왔어." 아어 씨가 낮은 목소리로 설명을 했습니다.

"서인도 제도라니? 그곳은 내 고향이 아냐. 왜 그따위 얘기를 하는 거야? 왜 허구한 날 여기에 가둬두는 거야? 난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듣는 거야? 이 괴물아! 대답해봐."

아어 씨는 꽁무니를 뒤로 빼며 귀를 막았습니다. "지겹다, 지겨워! 그따위 얘기는 한 번 듣는 것으로 족해! 저렇게 예쁜 여자가 완전히 갔어!"

그 여자는 갑자기 앞으로 다가서더니 아어 씨의 목을 인정사정없이 조였습니다. 그들은 잠시 동안 몸싸움을 했습니다. 앵무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그때 이모라는 사람이 뒤에서 그 여자의 어깨를 잡았습니다. 그 여자는 곧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앵무새도 자기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어 씨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베르타 메이슨 아어, 이 화냥년아! 내가 속아서 저 여자와 결혼했지. 너보다도 어렸을 때야. 아차 했을 땐 이미 늦었어. 이젠 완전히 갔어. 제정신이 아냐. 멀쩡하게 보이지만 갔어. 지금 여기에 있기가 싫다고, 날 속였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속이려 들어. 히스클리프, 이게 네 엄마야!"

아어 씨가 불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거울에 빛이 비쳤습니다. 거울 속 깊숙이 아어 씨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그는 거울 속에 빠진 것 같았습니다.

"엄마라고? 난 네 엄마가 아냐. 이건 내 아들이 아냐. 그러나......" 그녀는 놀란 듯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더니 나의 뺨에 손을 대었습니다.

"손대지 못하게 해! 눈 깜짝하는 사이에 달려들 거야." 아어 씨가 그 여자와 나의 몸 사이로 팔을 넣어 막았습니다.

"아무리 그래 봤자 난 할 거야.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서라도 하고 말 거야."

그 여자는 자신 있다는 듯이 몸을 똑바로 세웠습니다. "나를 여기다 처넣은 네 놈보다 내가 한 수 위야. 난 어떻게든 여기에서 빠져나가 다시 밝은 세상을 볼 거야. 너희 두 놈에게 경고한다. 자꾸 이러면 나도 막 나가는 수밖에 없어. 나도 폭력을 쓸 거야. 너희들이 힘이 세다고 생각하겠지만, 끝까지 나를 붙잡아둘 힘은 없을걸!"

"아주 발악을 해라! 딱하다 딱해! 그래도 정신이 말짱할 때가 있더니 이젠 완전히 갔어. 네가 여기에서 도망을 친다고? 널 여기에 잡아두는 게 내 임무야. 쇠사슬에라도 묶어두니까 저 정도지, 풀어주면 아주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거야!"

"병신 같은 새끼! 문이란 문은 다 잠가봐. 그래도 도망칠 구멍은 있어. 네 맘대로 다 막아! 다 막아봐! 그래도 난 자유야!"

"잘한다! 계속 헛소리나 하구! 네가 내 마누라지? 나를 이렇게 폐인으로 만들었으니까 기뻐해야지."

그는 나를 보고 물었습니다. "히스클리프, 네 엄마의 저 꼴을 보니까 너무 반가워 목이 메니? 저 여자의 사랑스런 눈빛이 그렇게 너를 감동시키니? 저 여자의 말투에 에미로서의 정이 철철 넘쳐? 저런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려니까 창피해? 저런 여자를 보고 싶다고 한 게 기분이 나빠?"

나는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았습니다. "저희 둘만 있게 해주시죠."

그는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설마 진담은 아니겠지?"

"진담입니다.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렇게는 안 돼. 부탁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부탁하는 거야. 저 여자는 널 죽일 거야."

"말도 안 돼요. 조용히 있잫아요. 저에게는 욕을 하지 않는데요, ."

"약아서 그래. 내가 방을 나가면 그와 동시에 완력으로 이기려 들거야."

"푸후! 저를 이겨요? 갈대처럼 약한 여자 하나 못 당해내요? 더군다나 제가 아들이라면서요. 아들이라면 포악한 면이나 교활한 면에 있어서는 오십보백보일 거예요."

오랫동안 버티며 승낙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는 결국 나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각별히 주의할 것을 신신당부하고 그는 이모와 함께 방을 나갔습니다.

"좋아. 하지만 밖에서 듣고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소리를 질러. 내가 달려 들어올 테니까."

그들이 나가자 불빛이 밖으로 흘러나와 우리 둘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나와 너무 닮은 모습에 놀랐지만 곧 너무 쇠약해진 몸에 얼굴은 귀신처럼 수척한 것을 알았습니다. 내 눈앞에서 작아진 모습이었을까요?

"왜 제 어머니가 아니라고 주장을 하죠?

"오랫동안이었지요. 내 기억으로는 그래요. 난 이 방에 쭉 갇혀 지냈어요. 여기에서는 할 일이 없었어요. 그저 도망갈 궁리를 하며 갖다주는 종이에 글을 쓰는 것 이외에는. 그래서 쓰고 또 쓰고, 밤낮으로 글을 썼어요. 종이를 오랫동안 쓰기 위해서 깨알만 한 크기로 글을 쓰지요."

"뭘 쓰시는데요?"

"이 방 같은 감옥 얘기도 쓰고 아어 씨 같은 야만인 얘기도 쓰고. 또 다른 바다 위에 떠 있는 아름다운 먼 왕국 얘기도 쓰지요. 그때 난 자유의 몸이 돼요. 내가 만든 세상에서 난 자유에요. 다른 여자, 다른 남자에게서 해방이 돼요."

"여기 오시기 전에는 어디에 계셨는데요?"

"아어 씨는 내가 열대지방에서 왔다고 얘기를 하지만 다 거짓말이에요. 난 북쪽에서 왔어요. 여기보다도 더 춥고 신선한 바람이 부는 곳이에요. 황야가 생각나요. 무성한 히스 위로 햇볕이 비치고 어디를 보아도 탁 트인 들판, 마구간의 말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부엌에서 굽는 빵 냄새, 그리운 추억이에요."

"제 옛날 집 같군요."

"이상해요. 이상하게 친한 기분이 드네요. 아마 내 아들일지도 모르겠군요."

다시 한번 그녀가 나의 뺨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이번에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마침내 어머니를 만났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습니다.

갑자기 머리 위로 별이 번쩍 보였습니다. 눈으로 피가 철철 흘러내렸습니다. 어머니가 둘둘 만 종이 뭉치를 내 머리위에 들고 서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쇠막대기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그 여자는 그것으로 나를 내리친 뒤, 내가 기절을 하여 반항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만족한 듯 다시 내리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의자로 엉금엉금 기어갔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피가 묻은 종이 뭉치를 꾸깃꾸깃하게 만들어 내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소리를 지르지 못 하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어 씨는 그만 깜빡 잊고 문 옆의 의자 위에 열쇠 꾸러미를 두고 나갔습니다. 그녀는 열쇠를 하나하나 창문 구멍에 넣어보았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두꺼운 덧문을 열고 창문을 활짝 열어제쳤습니다. 그녀는 어깨에서 앵무새를 나꾸어 어둠 속으로 던졌습니다. 앵무새가 새되게 울며 날갯짓을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세찬 바람이 방으로 불어들어오자 그녀는 기쁜 나머지 치마를 활짝 펼치고 깔깔거리며 춤을 추는 것 같았습니다.

점점 기억이 혼미해져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점점 모든 것이 가물가물해졌습니다. 커다란 잉크병 밑에서 그녀는 조그만 칼을 꺼내어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 모양을 보니까 집에서 만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날이 날카로웠습니다.

그녀는 테이블에서 종이를 몇 장 집어 꾸겼습니다. 그 여자가 무얼하려고 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안 돼요! 손필드를 불지르면 안 돼요!

그러나 나는 움직일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습니다. 입이 막히어 말이 나오지가 않았습니다. 그녀는 침대 위의 커튼과 테이블보에 신나게 불을 붙였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그녀는 아어 씨가 불을 끄러 달려 들어오면 몰래 빠져나가기 위하여 한쪽으로 비켜서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방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발견한 아어 씨는 그녀를 걷어차서 바닥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춤을 추듯 엎치락뒤 치락 하면서 시뻘겋게 타고 있는 창문 쪽으로 점점 가까이 갔습니다.

집 밖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습니다. 가슴부터 다리까지 안간힘을 다 썼습니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있는 종이를 빼내고 비틀거리며 그들에게로 갔습니다.

"아버지!" 그는 어깨 너머로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여자는 몸을 구부리더니 아어 씨에게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자 칼을 빼 들었습니다. 아어 씨가 돌아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녀는 아어 씨의 등 위로 칼을 높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 여자에게 몸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순식간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습니다. 그녀의 몸이 떨어지다가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반짝이는 치마가 바람에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 핀 커다란 하얀 꽃잎처럼 그녀는 두둥실 떠가고 있었습니다.

마당에선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창문 밖으로 떠밀어버렸던 겁니다. 그녀는 아래에 깔린 돌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불꽃이 일고 무엇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불기둥이 나의 아버지의 어깨에 떨어져 그가 그 밑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숨이 막혔습니다. 젖 먹던 힘까지 내어 그 무거운 기둥을 옆으로 밀었습니다. 기둥 밑에 깔린 피투성이가 된 그를 내 팔에 안고 일어서서 비틀거리며 걸었습니다. 방향을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지옥 같은 계단을 내려왔습니다. 존이 의식을 잃은 아버지를 받았습니다. 나는 돌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혀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 모습을 노려보았습니다. 나는 머리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일주일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어 씨는 목슴은 건졌지만 두 눈을 잃은 데다가 한쪽 손을 절단했으므로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야 할 겁니다. 나는 머리의 상처와 화상만 조금 입었을 뿐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손필드는 완전히 잿덩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제 아어 씨는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변호사를 불러 그 즉시 나에게 3만 파운드를 주었습니다. 나는 잠시 그의 침대 곁에 앉아 있었지만, 이내 더듬거리는 그의 남은 한 손을 꼭 잡고 이별을 고했습니다. 포기하고 버릴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가두어둘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뿐이었습니다.

캐시!..... 리버폴에서 신세계로 가는 배표를 예약해놓았습니다. 나와 함께 신세계 미국으로 갑시다. 우리를 학대하는 사람들이 없는 세계에 가서 같이 삽시다. 그곳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겁니다. 그 방대하고 아름다운 대륙의 원주민들처럼 자유롭게 삽시다. 우리 고향의 대지 위로나 우리의 미래의 대초원 위로나 다 똑같이 부는 사나운 바람처럼 자유롭게 삽시다.

나에게 오라고 하십시오, 아니면 직접 오십시오. 여관에서 심부름하는 아이가 내 마차로 안내를 할 겁니다. 나의 사랑, 캐시. 나에게 달려오구려! 내가 당신 품 안에 안겨 죽게 해주십시오! 당신이 없는 비참한 생활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H로부터

히스클리프의 서명 아래에 딘 부인의 추신이 적혀 있었다.

제가 옆방에서 준 장난감을 심부름 온 아이가 빙빙 돌리며 갖고 노는 동안 저는 서둘러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서 이 편지를 제가 받게 된 점에 대하여 무척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자기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마저 헌신짝처럼 버리는 불효막심한 짓을 했습니다. 그가 제아무리 부자가 되고 세련되었다고 해도 저희가 예전에 알던 악마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가씨와 아가씨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저는 편지를 반짇고리에 넣고 그 사내아이에게 다시 갔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아가씨가 어제 에드거 도련님과 결혼을 하여 방금 신혼여행을 떠나고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사실 블랙호스 마시 옆으로 구불구불 난 길에서 두 사람의 마차를 가로막을 심산으로 저는 뒷문으로 이미 나가보았지만 놓치는 바람에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렸던 것입니다.

그 아이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가씨가 돌아오기 전에 쫓아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저는 웨딩드레스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게 어제 결혼식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란다. 아직 치우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지만 이제 치워야 하니까 그만 가라. 난 내 할 일이 많아."

내 말에 아이는 뒤돌아서서 뛰어갔습니다. 신세계에서의 행복이고 뭐고 저는 히스클리프의 입장이 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로크우드 씨, 그다음 얘기는 아실 겁니다. 히스클리프는 다시 사라져서 반년 동안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그가 돌아와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먼젓번에 들으신 대로입니다.

만약 제가 그 편지를 아가씨에게 전했다면 그러한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저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제 말은, 아가씨가 히스클리프 씨를 정말로 사랑했다면 린튼 서방님과 결혼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마차로 갔을 게 아니냐 하는 점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어떤 비극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을까 하는 점입니다. 저는 이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부디 선생님의 결정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내일이면 난 결혼해요. 그 사람이 가슴을 활짝 펴고 나에게 온답니다. 그러나 당신 없이 어떻게 내가 웃음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나에게 오는 그 사람은 낯선 사람이에요. 나의 매, 나의 독수리, 그 사람의 입맞춤은 당신의 입맞춤처럼 열정적이지 않고 하얀 백짓장처럼 차가워요.

당신은 내 것이 아녜요. 나를 떠났으니까요. 난 하늘에서 당신에게로 쏜살같이 날아갑니다. 이제 당신은 나와 상관없어요. 아침 햇살을 등에 지고 담을 뛰어넘어 오지도 않는 사람, 컴컴한 마구간 밖으로 손도 내밀지 않는 사람, 내 베갯머리에 대고 은밀한 얘기도 해주지 않는 사람. 다시는 언덕 위로 말을 달리지도 않는 사람.

흰 눈이 만들어 내는 밝은 햇살에 눈이 부셔 나는 눈을 떴다. 기차가 지나가자 쌓인 눈이 구름처럼 양옆으로 비스듬히 갈라지며 햇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블라인드가 걷혀 있었다. 로크우드 씨는 나처럼 이 환하고 힘찬 새로운 아침에 눈만 껌벅이고 있었으므로 차장이 걷어놓은 게 틀림없었다.

하품이 나왔다. 이번에 처음으로 기차에서 잠은 다 자보았다. 잠을 자다가 편지를 쥐고 있던 손이 풀리는 바람에 몇 장이 흔들거리는 담 요를 타고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들을 주우려고 얼른 몸을 앞으로 구부렸더니 무릎 위에 남아 있던 것들마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약이 올랐다. 그것들을 주우려고 몸을 다시 아래로 굽히려는 순간 로크우드 씨도 몸을 구부렸다. 우리가 서로 머리를 부딪치고 나서부터 친하게 된 일이 생각났다. 놀라서 똑같은 사고를 피하려고 동시에 몸을 움츠리며 둘 다 상기된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이 재미난 순간 문이 열렸다. "5분 뒤에 리즈역에 도착합니다."

차장을 이 한마디를 하고 문들 닫고 나갔다.

"제가 줍죠." 로크우드 씨가 양해를 구하고 편지를 주웠다. 그가 웃으며 머리를 들고 물었다.

"그래, 다 읽어 보셨습니까?"

""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히스클리프가 아어 씨와 화해를 했을까? 그 딱한 아어 씨, 떠나간 아가씨와 다시 결합을 했을까? 캐시가 죽기 전에 히스클리프와 캐시는 어떻게 서로를 용서했을까? 히스클리프가 위협했던 것처럼 정말로 그 끔찍한 보복극이 에드거 린튼 씨에게 일어났을까? 만약 히스클리프가 이 나라를 떠났다면 어떻게 떠났을까? 로크우드 씨가 경험했던 유령 출몰 소동의 진상은 무엇일까?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에 대하여 아직도 소문이 무성할까?

그러나 첫 번째 의문조차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차장이 담요를 걷기 위하여 다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나는 서둘러 코트를 입고 숄을 걸치고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기차가 멈추었다. 우리는 서둘러 내려 대합실로 나갔다.

로크우드 씨는 구름 떼처럼 밀려드는 군중을 뚫고 앞서 나갔다. 체구가 작은 나로서는 그의 도움이 고마웠다. 그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파도처럼 우리 주위를 돌아 지나갔다. 우리는 파도에 둘러싸인 섬 같았다. 그는 지팡이를 든 손으로는 편지 뭉치를 가스에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의 팔을 꼭 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상하리만치 조심하는 빛이 역력했다.

"브론테 양, 어떤 판정을...... 딘 부인에게 뭐라고 말하면 될까요?"

나는 망설였다. 내가 뭐라고 얘기할 수가 있을까? 죽음을 코앞에 둔 여자에게 그가 뭐라고 얘기하면 될까?

로크우드 씨 뒤로 몇몇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헤치고 두리번거리다 우리를 가리키며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중에 키가 훤칠하고 돋보이는 여자가 있었는데 까맣고 커다란 눈에 하얀 얼굴이 아름다웠다. 캐시와 에드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분명한 그녀가 찾고 있는 사람이 바로 로크우드씨라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지금 말하지 않으면 다시는 얘기할 기회가 없을 게 뻔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 쓸 거라고 얘기해주시죠." 그러나 이 나의 마지막 말은 기차가 칙칙폭폭 하는 소리에 먹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뒤에서 어떤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크우드 씨가 뒤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악수를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칼리로 가는 길로 나갔다. 집에 도착하니까 정오였다. 따뜻한 봄날의 이른 오후였다. 나는 어떤 여자의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은 시든 겨울 사과처럼 주름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젊은 사람처럼 힘 있게 내 손을 꼭 쥐었다. 나와 에밀리는 그림자가 진 한쪽 구석에 따로 앉아 있었다.

그 늙은 여자는 넬리 딘이었다. 우리는 스러시크로스 농장에 있었다. 최근에 남편을 잃은 캐서린 언쇼와 로크우드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앞에 있는 침대의 사이드 테이블 위에는 눈에 익은 누런 종이 뭉치가 보였다.

역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지던 눈 내리던 1월에서 갑자기 석 달이나 건너 뛰어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가 의아하겠지만, 지난 3개월 동안 내게는 별로 특별한 일이 없었다. 그저 평범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촌티가 줄줄 흐르는 부목사와 가정부 타비타가 어쩌다 몇 마디 건네는 것이 고작이었다. 에제 씨는 내가 편지를 해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 그 자체가 곧 대답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해서 나는 두려웠다.

에밀리하고도 별로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별로 현명한 일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히스클리프에 대하여 동생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전례가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서로 거리감만 느끼게 된 것이었다. 동생과 나는 아버지의 병환이라든가 집안일에 대한 것 이외에는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집안일도 우리는 따로따로 했다. 에밀리는 타비타와 부엌일을 하였지만 나는 혼자서 먼지를 털고 침대를 꾸리는 일을 했다. 로크우드 씨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다. 서둘러 헤어지는 바람에 다음에 한번 만나자는 약속은 못 했지만, 허워스에서 스러시크로스 농장까지는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우리가 헤어진 뒤로 몇 주 동안은 그가 연락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그래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던 그에게서 어제 연락이 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우체부였다. 내가 사랑하는 에제 씨가 편지를 보냈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잠시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안 경을 쓰고 발신지가 김머튼인 것을 안 뒤에는 맥이 풀렸다. 그러나 어 떤 편지이건 따분하게 지내고 있던 나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나는 편지를 뜯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스러시크로스 농장의 여주인이 보낸 청첩장이었다.

 

미스 브론테

동생하고 이곳에 한 번 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딘 부인이 두 분과 얘기를 하고 싶어 하니까 급히 와주셨으면 합니다. 두 분이 오실 수 있다면 내일 열한 시까지 마차를 보내겠습니다.

 

앤은 집에 없었으므로 동생이란 말은 에밀리를 지칭하는 게 분명했다. 누군가가 내 의견을 묻는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히스클리프의 편지를 읽고 갖게 된 의문점을 딘 부인이 풀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물론 기꺼이 갈 수 있었지만 에밀리가 서슴없이 따라나선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마차는 약속한 시간에 도착하였다. 로크우드 씨는 스러시크로스 농장의 현관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하였다. 그는 꽤 품위가 있어 보이는 여자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그와 비교해보니까 내가 인적이 드문 변방 같은 곳에서 따분하게 지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속이 상했다. 기쁘게 악수를 하는 것을 보니까 기차에서 보았던 시무룩한 표정을 사라지고 활기가 넘치는 만족감이 대신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기쁜 표정으로 나와 언쇼 부인, 그리고 자기 눈앞을 지나가는 모든 것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언쇼 부인만을 바라보며 그녀가 얘기를 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 우아한 여자는 현관 입구에서 낮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차도 대접하지 않고 이런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곧바로 딘 부인을 만나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딘 부인은 우리의 방문을 매우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현관 입구에서 미적거리는 것은 잔인한 일이 될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언쇼 부인이 설명을 해 주었다. "최근 며칠 동안 상태가 점점 안 좋으세요. 그러나 아직 정신은 있으시고 또 두 분을 무척 기다리고 계세요. 편지가 있는데......"

그녀는 내 팔을 꼭 잡으며 물었다. "제 말뜻을 아시죠? 고민, 고민하다가 최근에야 그 편지를 내놓을 결심을 하셨는데 그 일로 부르시는 것 같아요."

우리는 넓은 복도를 지나 열린 문으로 갔다. "어머니가 쓰시던 넓은 방이 가장 편안하시다길래 그곳으로 옮겨드렸어요. 로크우드 씨와 저는 남아서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를 안으로 안내하여 침대에 누워있는 조그만 체구의 사람에게 소개를 하고는 그들은 밖으로 나갔다. 우리와 딘 부인만 남게 되었다.

얼핏 보니까 의식이 있는 사람이 이렇게 뼈만 앙상한 모습으로도 목숨을 유지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오 판임이 금세 밝혀졌다. 그 여자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말똥말똥하게 떴다. 정신만은 아직도 멀쩡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우리를 반겼다. 전형적인 시골 여자였다. 그녀는 거두절미하고 가족 상황과 그 내력 그리고 집의 위치 등등을 물어보며 자신이나 혹은 자신의 친구들과 혹시 아는 사람들이 아닌가 자세히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에밀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러한 말을 주고받다가 마침내 서로 알고 있는 사람 이름이 하나 나왔다. 우리 집에서 일하는 타비타 얘기였다. 그녀는 타비타와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타비타가 자기의 커다란 얘깃거리의 대상이었다는 얘기까지 하게 되었다. 나는 타비타의 얘기를 반복해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러한 얘기들을 마음속으로 정리하고 있을 때 그녀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아가씨! 아가씨에 대해서는 이제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 늙은이가 여러 가지를 물어보아도 짜증 내지 않고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그 호의에 보답해야겠는데 혹시 나에게 물어볼 것은 없나요?"

이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당황하여 입을 떡 벌리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말을 계속 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분명 있을거에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입이 근질근질한가 본데. 히스클리프의 편지를 먹어 치우고 싶은 사람처럼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지만 말고 물어보세요."

이 말에서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전 아주 호기심이 많습니다. 저는 히스클리프씨 얘기의 끝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그녀는 다소 놀란 듯 쥐고 있던 내 손을 놓았다. "히스클리프의 얘기요? 끝이요?"

질문을 하라고 했으면서도 막상 이 질문에는 그녀가 이상할 정도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침대 덮개 끝을 꼬깃꼬깃 접기 시작했다.

"끝이란 건 없지요. 반복만이 있어요. 메꽃 무리의 덩굴손처럼 다시, 또다시 반복된다고나 할까......"

나는 그녀의 관심을 실제적인 문제로 돌리려고 애를 썼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그러나 이 편지들을...... 딘 부인, 이 편지를 손에 넣은 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로크우드 씨도 알고 계시는데...... 얘기 안 하시던가요? 내가 숨겨두고 있었으니까 캐시 아가씨는 보지를 못하셨어요. 그리고 린튼 서방님과 결혼을 하셨죠."

"그건 알고 있어요. 딘 부인이 편지를 숨기고 그 두 사람들이 결혼을 한 뒤에 히스클리프 씨가 돌아와서......?"

그녀는 침대 덮개를 계속 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점점 강해졌다. 그녀는 실타래처럼 꼬인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히스클리프가 돌아왔어요.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불쑥 나타나는 사람처럼 나타났습니다. 누군가가 깜깜한 밖에서 저를 부르기에 나가보니까 히스클리프였어요. 달이 뜨는 밤에 반은 악마요 반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늑대인간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한사코 집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내쫓지를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늦게 들어가면 아가씨가 화를 낼 것 같아 집 안으로 일단 들어갔죠. 아가씨는 이사벨라 아가씨와 린튼 서방님과 함께 차를 마시고 계셨습니다. 평화로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린튼 서방님에게 알렸습니다."

"그래서요?"

"짐작하시겠지만, 아가씨는 그 사람을 보자 거의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물론 서방님은 기절초풍을 한 모습으로 뻣뻣이 서 계셨습니다. 아가씨는 기뻐서 팔딱팔딱 뛰며 그의 손을 잡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적어도 남편인 린튼 서방님이 계시는 데에서는 키스는 안 하셨습니다. 히스클리프는 팽팽한 밧줄처럼 경직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런던의 멋쟁이 신사와 같은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계략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회라뇨?"

"아가씨를 독차지할 수 있는 기회지 뭐겠어요. 그 사람은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든 상관하지 말고 떠나자고 아가씨를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속셈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따귀를 맞아가면서도 아가씨가 그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 참석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게다가 아가씨와 히스클리프가 그렇게 자유로이 얘기를 나눈다면 제가 숨겨놓은 편지에 씌어진 일들이 일어날지도 몰라 두려웠지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나 보죠?"

"그를 수가 없었어요. 두 사람 다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두 사람이 각자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 자기가 다른 사람의 눈에 그대로 비친다고나 할까. 사랑과 미움이 같이하고 있었어요. 상당히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어요. 자존심도 강하고 고집도 세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화를 내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설득시키려만 했지 아가씨가 죽는 날까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화해를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에 씌여진 일들이 일어나진 않았습니다."

"린튼 씨는 어땠어요? 히스클리프 씨와 만난 일에 대해서 자기 아내에게 얘기하지 않았나요?"

"그 사건에 대해서는 내색도 하지 않으셨어요. 부인에게 일체 입을 다물고 계셨죠. 아가씨는 변덕이 죽 끓듯 하잖아요. 아마 그 사건은 그냥 웃어넘겨 버렸을 거예요. 그랬다가도 어느 순간에 마음이 변하여 히스클리프가 어디에 있는지를 서방님이 가르쳐주지 않을 것에 대해서 화를 내곤 했죠. 주인어른은 그걸 알고 계셨죠. , 알고 계셨어요!"

"그러한 심각한 성격상의 결함을 모르는 체한 걸 보면 린튼 씨는 캐서린 언쇼 씨를 아주 사랑한 게 틀림없군요. 히스클리프 씨가 복수를 하겠다고 위협했는데도 결혼을 감행한 것을 보면 굉장히 용감한 분이셨겠구요."

"젇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고 그 점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한 적이 있어요. 어떻게 해서 2년이나 지난 뒤에 결혼할 용기가 생겼는가 하고요. 손필드에 있는 히스클리프의 이상한 짓거리에 대하여 덴트 대령님 부부에게서 소식을 들었겠죠. 그 사람이 펀딘으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제 마음먹은 대로 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래요, 선입견을 갖지 않고 생각을 해보면 그랬을 게 틀림없어요."

"린튼 씨가 그렇게 사랑을 했다고 치고, 캐서린 언쇼 씨도 그만큼 사랑했나요?"

"그렇지는 않았아요. 히스클리프에 대해서 자신도 모르게 갖고 있던 애정도 애정이겠지만 아가씨는 자기 자신에게 애착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면 린튼 씨와 결혼한 이유가 뭐죠?"

"욕심 때문이었죠. 멋진 귀부인이 되어 매력적이고 부유한 남편을 갖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결혼을 한 거죠. 아가씨는 바로 이 방에서 돌아가셨어요."

그전까지 화사하게 보이던 침실이 갑자기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마치 창가의 자리 위에 정말로 시신이 누워있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방에서 얘기를 하고 있는 지금의 아가씨를 낳으신 뒤 이 방, 이 침대에서 돌아가셨어요. 저 구석의 소파 겸용의 침대에서 몇 주 동안 밤을 꼬박 새우며 간호를 했죠. 동생이 지금 앉아 있는 바로 그곳에서였어요. 오늘처럼 날씨가 맑은 3월의 어느 날이었어요. 지금처럼 창밖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어요. 아가씨는 대지의 바람에 자신이 더 강해지는 것 같다고 얘기를 했죠. 서방님은 교회에 가고 계시지 않아 그 사람은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죠."

"그 사람이라뇨?"

"히스클리프 말입니다. 마지막이잖아요. 아가씨가 운명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아가씨는 임신하고 있는 동안에 몸이 무척 약해지셨어요. 두 사람 사이에서 몸이 거의 만신창이가 되었죠. 두 사람 다 아가씨가 아프든 말든 상관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히스클리프는 분풀이로 이사벨라 아가씨와 결혼을 했고 린튼 서방님은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읽고 계셨죠. 죽음의 그림자가 아가씨를 덮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오도록 했군요."

"그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 침대에서 포옹을 했죠. 저는 두 사람이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를 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서로를 용서한 거죠. 보통 사람에게는 두 사람의 사랑이란 곧 살인과 같은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나중에 아가씨는 자신의 어깨를 꼭 잡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을 어루만졌습니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을 죽여서라도 같이 데리고 가고 싶었을 겁니다. 그날 밤 돌아가시지 전에 그렇게 말하셨으니까요."

"돌아가신 뒤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특별히 다른 일은 없었죠. 딸은 낳은 것 이외에는. 새벽이 밝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말에 에밀리는 허리를 앞으로 숙이며 무엇인가를 얘기하려다 그만두었다. 에밀리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 린튼 서방님 얘기를 하나 보죠. 물론 그분은 몹시 슬퍼하며 교회 마당에 아가씨가 묻히는 순간까지 밤낮으로 아가씨 주검 옆을 떠나지 않으셨지요. 아가씨는 납골당은 싫으니까 황야의 바람이 자기가 누워있는 곳 위로 부는 곳이 좋겠다는 얘기를 유언으로 남기셨어요."

"그러면 히스클리프 씨는 어떻게 됐어요?"

"20년을 괴로워하며 다른 사람들도 괴롭혔죠. 두 집안 모두에게 분풀이를 했어요. 온갖 수단을 다 써서 모두 자기 소유로 만들었어요. 지금의 아가씨가 힌들리의 아들인 헤어튼과 결혼하는 것을 한사코 말렸죠. 헤어튼은 히스클리프처럼 앙심을 품고 있었으니까요. 히스클리프는 자기의 오랜 적들이 행복하게 사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죠. 그러나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로크우드 씨가 목격하신 것처럼 그 사람의 삶을 시샘하던 캐시 아가씨의 망령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죽어서 캐시 아가씨의 무덤 옆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무덤 속에 있지를 않고 히스가 무성한 황무지를 아직도 산책하고 있다고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딘 부인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손을 눈가에 댔다. 눈가의 눈물때문인 것 같았다.

"그게 전부 다입니까?"

"아직 대단원의 막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만 그게 제가 아는 것의 전부입니다. 지금 로크우드 씨가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 돌아와 지금의 아가씨와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제 곧 죽을 것 같은데 아가씨가 남은 여생을 혼자서 사시게 할 순 없겠죠."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변했다. 그녀는 얼굴을 나에게 가까이 댔다. 이번에는 정말로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크우드씨는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아가씨도 저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므로 나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제가 가슴의 상처를 받은 것도 아니니까 용서니 뭐니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을 거예요. 이제 저에게 모든 것을 얘기해주셨으니까 제 의견은 말씀드릴 수 있겠죠."

나는 그녀의 손 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해야 할 일을 하셨다고 전 확신합니다."

이 말에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에밀리 쪽으로곁눈질을 하며 물었다. "저어, 아가씨. 그렇게 구석에서 가만히 계신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에밀리는 웃음이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진정으로 제 생각을 듣고 싶으신 마음은 없는 것 같은데요."

딘 부인은 에밀리에게 손짓을 했다. "제가 볼 수 있도록 가까이 좀 와요."

에밀리는 망설이지 않고 일어서서 내 맞은편 의자로 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딘 부인은 아무 말없이 잠시 에밀리의 얼굴을 살폈다.

"!" 그녀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요. 아가씨 말이 맞아요! 아가씨 말은 듣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죠. 가끔은 침묵이 금이니까요."

그녀는 머리를 흔들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나는 겁이 나서 에밀리를 쳐다보았다. 에밀리는 관심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바로 그때 언쇼 부인이 들어와서 딘 부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녀는 눈을 뜨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곤하시죠, 넬리? 이제 지치셨으니까 혼자 계시도록 하고 나갑시다. 지금 하신 얘기는 괜한 얘기예요. 아래층에 내려가셔서 차나 한 잔하시죠. "

우리가 자리에서 막 일어섰을 때 딘 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 다. "아가씨! 괜한 얘기라뇨? 전 예전이나 다름없이 정신이 말짱해요."

언쇼 부인이 우리를 보며 웃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시는데요?"

"아직 할 얘기가 남아있어요. 전해야 할 편지가 있어요."

"두분 다 아직 여기 계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딘 부인은 손을 뻗어 히스클리프의 편지를 집더니, 손을 떨며 그 편지를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가져가셔도 돼요."

에밀리는 다소 놀란 나의 얼굴을 흘끗 보더니 절을 꾸벅 하고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고맙습니다. 제가 가져갈게요."

에밀리는 편지를 둘둘 말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딘 부인은 에밀리를 다시 쳐다보지 않고 베개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를 마신 뒤 조금 더 머물라는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차로 태워다 주겠다고도 했지만 날씨가 아주 좋고 거리도 5킬로미터가 채 안 되니까 지름길로 가면 된다고 하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차를 마시는 동안 두 사람이 곧 결혼하리란 이야기를 다 시 듣고서는 축하를 해 주었다.

우리는 웃으며 이 새로운 친구들과 작별을 하고 나왔다. 누가 지나가며 듣기라도 할까봐 길에서 아주 멀리 떨어졌을 때에야 나는 나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내가 내 기분을 말한다고 해도 이미 나빠진 동생과의 관계가 더 나빠질 리가 없으리라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아무리 길길이 뛰어봐야 동생의 마음속의 비밀은 결코 밝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2분 정도는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에밀리, 난 도대체 너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어. 이 편지는 뭐하러 가져가는 거야? 딘 부인의 호의를 무시하기 싫어서 그랬다고 치자. 그래도 아래층에 내려갔을 때에는 변명이라도 한마디 했어야 하잖아? 적어도 언쇼 부인에게 돌려주는 척이라도 했어야 하잖아. 그걸 바라는 것 같던데!"

"돌려줘? 딘 부인이 편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난 몰랐어. 그리고 편지가 언쇼 부인에게 무슨 상관이 있어?"

"그래. 그럼 편지가 너와는 무슨 상관이 있니? 그건 가족의 서류야. 가족이 보관해야 하는 거야."

"그래? 히스클리프가 갑자기 언쇼 집안사람들 가슴에 돌아왔나 보지. 히스클리프가 죽은 뒤에도 그런 적은 없었어. 더군다나 그 편지는 60년 동안이나 고이 간직하던 사람이 내게 주었는데 뭐가 문제야?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걸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사람은 딘 부인뿐이야."

그러나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었다. "네가 한 짓을 생각해봐. 그 늙은 사람한테 너무 잔인하잖아! 편안하게 눈을 감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그따위로 행동해서 속이 다 시원하겠다!"

에밀리는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늙은이는 거짓말쟁이야!"

"?"

"빈틈없는 여자야. 거짓말에 도사라고."

"무슨 거짓말? 사실대로 다 얘기했잖아. 그런데 거짓말인 게 뭐가 있어?"

"! 편지 숨긴 얘기를 하나 본데, 내가 얘기하는 것은 다른 거야."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편지를 숨긴 뒤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봐."

"그게 어디가 잘못된 데가 있어? 딘 부인이 편지를 숨긴 것 이외의 다른 문제들은 사람들이 다 알잖아. 히스클리프가 사랑을 하다가 사라졌다, 캐시가 죽었다, 그녀의 딸이 태어났다, 히스클리프는 자기의 적들에게 하나하나 복수했다...... 그런데 거짓말할 구석이 어디 있어?"

"그렇게 단순한 얘기가 아냐."

"도대체 무슨 얘기야?"

"얘기할 수 없는 사연이 있어."

나는 걸음을 멈추고 발을 굴렀다. "모욕을 주지 않으면 수수께끼 같은 말로 사람이나 미치게 하고. 넌 왜 그래?"

"그래, 알았어. 간단하게 얘기해주지. 캐시는 아이가 태어나던 날 밤 죽지 않았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아이가 태어난 것과 캐시가 죽은 것은 호적에 기록되어 있다."

"그거야 가짜로 그렇게 만들 수도 있지. 린튼은 치안 판사였어. 기억해?"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에밀리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그래 좋아. 캐시가 죽지 않았고 기록도 가짜라고 치자. 그러면 넌 어떻게 그걸 알아?"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내게 얘기해줘서 알고 있어."

"그게 누구야? 자신 있으면 얘기해봐!"

"내가 왜 대답을 해야돼? 나를 또 바보라고 놀리려고?"

"그럼 네 마음대로 해."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울음이 나오는 것을 참느라 에밀리의 스커트 자락에 있는 밝은 꽃무늬를 쳐다보며 걸었다. 나는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물론 에밀리의 설명에 내심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나는 일부러 전혀 무관심한 척했다. 그 애의 지금의 기분으로 보아서는 소금을 달라고 하면 후춧가루를 줄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크게 소리를 내며 걸어도 내가 신경질이 나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걸음걸이에도 신경을 썼다. 에밀리는 등을 곧게 펴고 곧장 앞으로 걷고 있었다. 보폭이 어찌나 큰지 웅덩이를 한걸음에 성큼 건넜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느라 애를 먹었다.

짐은 잔뜩 실은 우마차가 앞에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잠시 마차에 신경을 썼다. 마차는 큰데 길은 좁았으므로 우리는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약간 비탈진 곳으로 비켜서 있어야 했다.

아침의 맑던 날씨는 어느새 변하여 하늘이 낮고 어두웠다. 눈앞의 경치도 전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언덕도 가파르고 나무도 드문드문한데다 길은 더욱 좁고 한적해 보였다.

"이건 호워스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

"."

"어디로 가는 거야?"

대답 대신 에밀리는 가파른 계곡 너머로 보이는 반대편의 길고 거친 언덕을 가리켰다. 안경을 쓴 눈으로 실눈을 하고 보니까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한 방곡 지붕들과 굴뚝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폭풍의 언덕이잖아! 너 그리로 가는 거구나!"

에밀리가 머리를 끄덕였다.

"웬일이야? 전에는 나를 데려간 적이 없었잖아."

"언니는 언제나 진실을 외면해왔어. 난 이제 언니의 그런 태도가 바뀔 수 없는 것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서 가는 거야."

화해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진실을 외면해왔어. 그렇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아. 이제 내가 진실을 똑바로 쳐다볼 테니까 네가 가르쳐 줘."

에밀리는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진심이야?"

"."

"됐어. 진심이라면, 폭풍의 언덕에 언니를 데려가서 진실을 가르쳐 줄 게. 방금 우리가 만났던 여자가 태어나던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를 해줄게. 하지만 조건이 있어."

"좋아. 얘기해봐!"

"내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게 되었는지를 캐묻지 않는다고 맹세할수 있어?"

"맹세할게." 난 진심 어린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나는 호기심도 충족시키고 동생과의 애정도 회복할 수 있다면 기꺼이 입을 다물고 있을 작정이었다.

"그럼 됐어." 에밀리의 얘기는 이랬다. “그날 밤이 어떤 분위기였나를 생각해봐. 어떤 여자의 방에서 누군가가 바쁘게 움직이는데 벽난로 위에서는 촛불이 활활 타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구. 우리가 방금 본 바로 그 방 말이야. 그 방은 1백 년 전의 스타일로 우아하게 꾸며진 방이었는데 산모가 애를 낳는 게 무척 힘들자 갑자기 분만실로 바뀌었어. 그리고 사방에는 피가 묻어 있어 보기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 피가 묻은 걸레와 피가 흥건한 물그릇, 침대 끝에 있는 요람에서 이따금씩 앵앵거리는 피 묻은 강보에 싸인 아이, 그리고 피 묻은 침대보와 그 위에 누워있는 여자를 상상해 보자구. 멋진 레이스가 달린 새 나이트가운을 입고 시체처럼 누워있는 여자.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고 하자고. 시꺼멓게 된 피부는 이미 윤기가 없고 눈을 감고 있는 그녀에게서는 숨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지만 그래도 맥박은 가냘프게 뛰고 있다고 가정하자고. 남편은 말야, 침대 앞의 의자에 앉아 그녀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의 금빛 머리카락에도 핏방울이 묻어 있다고 치자고. 물론 그가 흐느끼는 소리도 들리겠지. 간호를 하던 사람이 구석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아빠를 닮아 머리숱이 별로 없는 아이가 울어대지만 누구 하나 꼼짝하지 않는다. 벽난로 위의 시계가 새벽 두 시를 가리킨다. 시계소리만 째깎째깎 요란하다. 이렇게 상상해 보자구. 자정이 지난 시각에 창문이 열려 있고 밤바람에 커튼이 안팎으로 나 부낀다. 창밖의 담쟁이 덩굴에서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들린다.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 같더니 창문턱에 손이 보인다. 검은 그림자의 얼굴이 들어서는데 어둠 속에서 눈만 빨갛게 타고 있다. 시커먼 힘센 어깨가 물결치더니 하얀 레이스가 살짝 보인다. 까만 구두가 촛불에 반짝인다.

그때 남편은 경련을 일으키듯 히스클리프라는 말을 외친다. 그러나 그 외침소리에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꿈틀거린다. 아직 흐느껴 울고 있던 남편이 줄을 당겨 사람을 부르려고 간신히 손을 움직인다.

이때 히스클리프가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친다. "캐시를 살리고 싶으면 꼼짝하지 마! 아니면 네 마음대로 해!" 그는 한 손으로는 총을 겨누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주홍색 액체가 든 작은 병을 호주머니에서 꺼낸다. 깜박거리는 촛불에 약병은 루비처럼 보인다.

"이게 뭔지 알지? 이것으로 캐시를 살릴 거야. 그대로 꼼짝하지 말고 있어!" 그는 침대를 돌아가 남편을 반대편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힌다. 총을 그 여자의 머리맡에 있는 베개 위에 놓으며 남편이 뭐라고 얘기를 하려 하자 소리를 버럭 지른다.

"총알이 들어 있어. 지금 기분 같아서는 네 놈의 머리통을 날려 보내고 싶지만 참는 거야."

그리고는 아기가 칭얼대는 소리만이 들린다. 히스클리프는 거의 죽은 사람의 얼굴에서 헝크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가만히 귀에 대고 사랑을 속삭인다. 간호를 하던 사람이 놀라서 벌떡 일어서고 남편과 그녀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 히스클리프는 약병을 열고 산모의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약을 몇 방울 떨어뜨린다. 그리고 그는 산모의 목을 쓰다듬어준다.

남편과 간호를 하던 사람과 히스클리프가 몸을 숙이고 살펴본다. 산모가 경련을 일으킨다. 간호를 하던 사람은 히스클리프가 산모를 죽였 다고 투덜댄다. 그러나 남편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한다. 산모는 꼼짝을 않는다. 그러나 산모의 가냘픈 목에서부터 뺨으로 홍조가 올라온다. 산모가 마침내 눈을 뜬다. 눈동자가 살아서 반짝인다. 촉촉한 눈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맑다.

히스클리프가 산모의 이름을 부른다. "캐시!"

산모에게 그의 목소리는 아주 멀리서 들리는 소리 같다. 그녀가 히스클리프를 발견한다. "드디어 돌아왔군요."

산모의 또렷한 목소리에 히스클리프는 너무도 기뻐서 할말도 잊은 채 손을 꼭 잡고 입맞춤을 한다. 남편은 숨이 막힐 것 같지만 입을 꽉 다물고 있다.

산모가 다시 말한다. "돌아왔군요. 이번에도 다시 내게서 떠나겠군요."

"이제는 떠나지 않을게.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히스클리프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마치 과거를 회상하듯 산모의 몸에 손을 놓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만져본다. 산모가 그의 뺨에 손을 대고 묻는다.

"내가 죽었나 보죠? 내가 원하던 것처럼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나 보죠? 이제 우리가 꿈꾸곤 하던 아름다운 세상에서 우리가 천사가 된 건가요?"

"아냐, 캐시. 우리는 죽지 않았어. 여긴 당신 침실이야."

"떡갈나무 판자벽이 없잖아요? 우리들 책이 어디에 있어요? 이건 우리 침실이 아녜요! 그런데 넬리와 에드거...... 어떻게 된 거죠?"

"캐시! 생각해 봐. 우린 지금 아이들도 아니고 이곳은 폭풍의 언덕도 아냐. 당신은 내가 아닌 에드거 린튼과 결혼했었잖아. 당신의 침대 옆에 조용히 있는 이 사람은 말야. 당신은 이 사람의 아이를 낳았고 스러시크로스 농장의 안주인이야. 난 당신을 데려가기 위해서 여기에 온거야. 캐시, 같이 갈래?"

캐시는 천천히 방을 둘러본다. 시곗바늘이 째깎째깍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는 동안 캐시는 기억을 더듬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드거, 당신은 이제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거예요. 그런 나를 욕하시겠어요, 아니면 축복해주시겠어요?"

갑작스런 질문에 에드거 린튼은 말문이 막힌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린다. "무슨 얘기야? 아이를 남겨두고 여길 떠나겠다는 얘기야? 당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이 무법자와 살겠다는 얘기야?"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저 사람이 어떤 사람으로 보이든 이제 상관하고 싶지 않아요. 저 사람은 내게 아이이고 엄마이고 오빠이고 남편이나 마찬가지예요. 다른 사람은 이제 필요 없어요."

"나도 필요 없다고?"

". 당신과 행복했어요.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저 사람이 돌아왔으니까 저는 갈래요."

"하지만 당신이 가버리면 난 어떡하란 말이야?" 린튼은 두 손에 머리를 파묻고 울부짖는다.

"지금까지 하신 것처럼 하시면 되잖아요. 책이 가장 좋은 친구잖아요."

이 말에 린튼은 참고있던 화가 폭발한다. "좋아, 캐서린. 그러나 이 방에서는 나가는 순간부터 우리는 끝장이야. 나중에 이 새끼가 신물이 나서 애걸복걸을 해도 나나 아이는 만날 수 없을 거야!"

여기에서 간호를 하던 여자 - 넬 리가 끼어든다. "아가씨는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겁니다. 거의 초죽음이 된 상태에서 하시는 얘기잖아요."

"아냐. 난 알아. 이젠 말짱해."

"지금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아가씨는 정신이 없어서 그러신다고 쳐도 어떻게 아내 되는 사람을 이렇게 내보낼 수가 있으세요? 이미 여동생을 더럽힌 이런 작자에게 아내를 데리고 나가도록 내버려 두신단 말씀이세요?"

히스클리프가 피묻은 침대에서 캐시를 부드럽게 들어 올려 자기 가슴에 꼭 껴안자 넬리가 소리를 지른다.

"그건 살인 행위야! 움직이면 아가씨는 죽어! 이렇게 하면 아가씨는 죽는단 말이야!"

"비켜요. 이렇게 해야 캐시가 살아. 찰거머리 같은 당신들과 여기에 같이 있으면 죽어."

넬리의 말에 힘을 얻은 린튼이 다시 막고 나선다. "캐서린과 나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엄연한 부부야. 법적으로 남편과 아내라고."

히스클리프가 웃는다. 그의 이빨이 촛불에 더욱 날카롭게 보인다. "그따위 궤변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나도 법을 따르는 사람이야. 그러나 가슴과 가슴이 닿는 법을 따라. 캐시의 심장이 이제 나의 심장 가까이에서 뛰고 있어. 이게 내가 따르는 법이야."

그는 가슴에 안고 있는 가냘픈 캐시를 더욱 꼭 껴안으며 뺨을 그녀의 머리카락에 대고 부빈다. 그리고 그는 커다란 코트로 그녀를 감싼다. 그의 목 뒤로 캐시의 손이 보인다. 린튼은 끝까지 궁리를 한다. 그는 마침내 히스클리프가 베개 위에 놓아둔 총을 잽싸게 집어 든다. 히스클리프는 그를 차갑게 쏘아보며 말한다.

"조심해. 잘못하면 빵이야!"

"캐시를 내려놔. 아니면 갈겨버리겠어!"

히스클리프가 웃는다.

"날 죽이면 캐시도 죽어."

"그러면 못 쏠 줄 알아!"

"그래. 쏴 봐. 자 마음대로 쏴 봐. 캐시와 같이 가는데 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겠냐. 쏠 자신 없으면 옆으로 비켜. 캐시가 너하고 같이 산 게 잘못이지. 이제 옛날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우리는 먼 곳으로 가서 살 거야. 넌 우리를 다신 보지 못할 테니까 걱정이고 나발이고 할 필요가 없어. 우리 일은 아주 싹 잊어버려."

히스클리프는 캐시를 안고 침대를 돌아 문으로 간다. 에드거는 총을 들고 뒤를 쫓는다. 에드거 린튼이 소리를 지른다.

"치안판사의 권한으로 너를 유괴죄로 체포한다!'

히스클리프는 씨익 웃으며 허리를 굽힌다. 그러자 캐시를 덮어준 코트가 떨어진다.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잠깐 보인다.

히스클리프는 뒷걸음질로 문지방을 넘어 컴컴한 홀로 나간다. 계단을 내려가는 빠른 발자국소리가 들린다. 밖의 문을 쾅 닫는 소리가 들 린다. 넬리가 뛰어 내려가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길에는 마차가 서 있다. 마차에서 나오는 횃불 때문에 눈이 부시다. 히스클리프가 소리 지른다. "!"

풍채가 좋은 사내가 마부석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친다.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그가 마차의 문을 열고 넬리에게 얘기한다. "캐시를 돌볼 준비는 다 해두었어."

그는 넬리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마차에 싣는다. 문이 닫히고 마차는 떠나기 시작한다.

에밀리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계속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았을까? 교회의 기록을 읽다가 히스클리프나 다른 당사자가 쓴 편지를 손에 넣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몇 년 전에 딘 부인이 자기의 친구인 타비타에게 얘기한 것을 타비타가 부엌에서 같이 일하면서 에밀리에게 얘기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히스클리프가 직접 에밀리에게 얘기한 것은 아닐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어떤 얘기가 되었든 간에 나는 물어보지 않기로 이미 약속을 했다.

에밀리는 걸음을 멈추고 폐허가 된 교회 마당으로 난 비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맞은편 비탈길에는 한가운데로 물결치며 흐르고 있는 시냇 물을 피하려는 듯 비석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었다.

"저곳이 그 두 사람이 묻혀 있는 무덤이야."

"캐시하고 히스클리프?"

". 린튼도 저기에 묻혀 있어. 그의 유언대로 캐시 옆에 누워 있어."

"방금 내게 얘기해준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 이상해."

"사랑의 방법이 이상하겠지."

"그래도 이 경우에는......"

"믿지 못하겠으면 언니 눈으로 확인해봐."

"아냐. 물론 믿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만 얘기해줘!"

"좋아. 하지만 서둘러야겠어. 하늘이 어두워지는 게 비가 올 것 같아."

우리는 다시 길로 돌아와 계속 언덕 위로 걸었다. "나중 얘기는 어떻게 됐겠어? 믿을 만한 목격자가 없으니까 여러 가지 정황을 미루어 짐작해봐야 할 거야. 하지만 간단한 일이야. 이렇게 상상해 보자구."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침실로 돌아오는 넬리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쳐 있다. 하인들 중 어느 누구도 무슨 소리인가 하고 나와 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그날 밤의 일로 너무 지쳐서 마차 소리를 들었다 해도 의사나 목사가 다녀가는 소리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다. 그녀가 계단을 부리나케 올라가 복도를 지나 불이 켜진 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사방은 쥐죽은 듯이 고요하다.

린튼은 거의 미칠 지경이다. 넬리는 그런 린튼을 보면서 자신이 농간을 부린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낳았는가를 혼자서 생각해본다. 그들은 아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말없이 쳐다본다. 아이는 텅 빈 침대보 안에서 이따금씩 칭얼대고 마차 비퀴소리는 점점 멀어져간다.

그 상황에서 그들은 어떻게 할까? 누구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문을 잠그고 격렬하게 토론하며 급히 어떤 음모를 꾸몄을 게 틀림없다. 이미 벌어진 상황을 숨기고자 하는 것이 분명 딘 부인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사실을 숨기고 그럴듯한 핑계를 대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할 수 없는 재미였을 것이다. 게다가 두 가문의 명예 때문에 위기에 처해있던 그녀에게는 죄의식이 별로 없었을 게 뻔하다. 린튼은 이사벨라를 잊고 지냈던 것처럼 캐시도 잊고 지낼 준비가 되어 있다. 역사가 되풀이되듯이 똑같은 방법으로 캐시를 처리해버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서 한술 더 떠 캐시가 린튼에게는 죽은 여자나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그녀가 죽었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못할 이유도 없잖을까?

그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누구 하나 반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망을 친 두 사람은 물론이다. 히스클리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얘기한 걸 보면 린튼은 그의 말을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다. 캐시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순간 그는 법의 힘으로 그녀를 돌아오게 할 수 있으므로 결국 히스클리프는 린튼의 정보망과 법망에 걸려드는 결과가 될 것이다. 캐시가 죽었다는 얘기 같은, 자신의 이해가 직접 걸려 있는 얘기를 들으면, 부인하지 않고 확인하면 될 게 아닌가.

그저 거짓말 하나 해서 자기 가문의 명예도 보존되고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도 상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못 할 건 없지 않은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뭐냐고 딘 부인이 린튼에게 다그친다.

모든 일은 아주 간단했다. 다음날 아침 이미 짜놓은 각본대로 그녀가 죽었다고 발표한다. 물론 피 묻은 침대보를 사람들의 눈에 잘 띄도록 이미 늘어놓았다. 만약 젊은 대지주가 방에 홀로 남아서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지키고 있다면, 하인들은, 특히나 사전에 넬리의 귀띔을 들었다면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관에 넣은 시신을 빨리 묻자고 하는 말에 하인들은 그 필요성을 충분히 이해한다. 히스클리프가 사라진 것도 그 상황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하인들은 스러시크로스 농장에서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두 이해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급히 전한다.

에드거 린튼은 캐시 대신 돌을 담은 관을 파묻는다. 가족의 납골당에다가 아니라 흙무덤 속에 파묻는다. 그리고 그 위에 자기 아내의 이름이 적힌 비석을 세운다. 그가 흘린 눈물은 진짜였다. 그 뒤 넬리는 자기의 아가씨의 죽음에 대해서 수년 동안 가짜 얘기를 한다. 그 결과 나중에는 자기가 지어낸 얘기를 진짜처럼 믿게 된다. 방금 우리가 목격한 그녀의 고뇌는 아마도 진실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캐시는 그렇게 묻히고 린튼은 점점 더 철저하게 틀어박혀 지내게 되며 그들의 딸은 튼튼하게 자라서 오늘날까지 살아남게 된다. "히스클리프와 캐시는 어떻게 된 거야? 히스클리프는 폭풍의 언덕에서 혼자서 염세적인 생활을 했잖아. 캐시는 귀신이 되어 출몰했다고들 얘기하고, 이 상황에 대해서는 로크우드 씨와 딘 부인의 증언도 있잖아."

"맞아, 사람들이 얘기한 대로야. 히스클리프의 복수, 캐시가 귀신이 되어 그에게 나타난 일. 그의 죽음. 모두 있었던 대로야. 하지만 그것들은 딘 부인이 얘기한 것보다 5년 뒤의 일이야. 물론 로크우드 씨는 상황이 끝나고 난 뒤에 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알 수가 없었지."

"5...... 캐시와 히스클리프가 5년이나 같이 살았다고?"

". 추운 겨울 날씨와 추운 땅을 피해 그들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뉴올리언스 근처에 커다란 농장을 구입했어. 아어 씨의 도움이 컸지. 캐시는 곧 건강을 되찾았지만 결국 5년 뒤에 아들을 하나 낳고 죽었어. 히스클리프는 그녀의 마지막 소원대로 시신을 이곳으로 가져와 묻었어. 밤에 몰래 혼자서 묻었지. 린튼이 관 속에 집어 넣어둔 돌을 모두 꺼내고 대신 사랑하는 사람을 그 안에 넣은 뒤 자기 방으로 가져왔는데, 사람들은 그가 죽은 뒤에야 그것을 발견한 거야."

히스클리프는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꾹 참았다. 괜히 한마디 했다가는 얘기를 다 듣지도 못하고 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참고 있으려니까 입이 근질근질했다.

에밀리가 아들이 있었다고 방금 말했는데, 그 아들이 살아 있을까? 살아 있다면 그의 아들은 에밀리의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에밀리의 친구였다면 가족의 비밀스런 내력을 털어놓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지가 않다면 에밀리의 히스클리프는 쓸데없는 공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히스가 무성한 황무지의 안개 사이에서 태어난. 내 동생의 외로움의 산물이자 타비타가 비비 꼬아 놓은 얘기들이나 다름없다는 결론 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신세계 미국에서 그들의 생활은 어땠어?"

에밀리가 걸음 속도를 늦추었다. 우리는 비탈 위에 거의 다 와 있었다. 그러나 산등성이 위로 길이 꼬불꼬불 나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에밀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낮게 깔리고 우중충한 요크셔의 3월의 전형적인 날씨였다. 나는 동생의 눈의 움직임을 보고 그 애가 좀 더 높은 하늘, 좀 더 밝은 구름을 찾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생각해봐......" 목장의 한가운데에 깊고 둥근 연못이 있다. 그 연못 주위에는 무성한 떡갈나무들과 커다란 소나무 그리고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들이 있다. 아침이면 그들은 그 상큼한 나무 냄새를 맡으며 멋진 검은 말을 타고 다닌다. 날씨가 더워지면 그들은 호수 한가운데에서 보트를 탄다. 히스클리프는 보트 밑바닥의 물살에 손을 넣어 끌고 캐시는 만돌린을 켜며 그에게 노래를 불러 준다. 만약 캐시가 졸린 기색이라도 보이면 그는 물가에 보트를 대고 물개처럼 새까만 호수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가 다시 위로 나온다. 구리빛 태양은 황금빛 햇살을 쏟아 물이 어디에서 끝나고 하늘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에게 그 찬란한 햇빛은 곧 그들 한 쌍이 만들어 내는 조화의 찬란함에 다름아니다. 처음에 그들이 하나였던 것처럼 마지막에도 그들은 하나다.

저녁이면 그들은 호수의 끝없는 안개 사이로 반짝이는 새까만 숲길을 따라 산책을 하며 얘기를 나눈다. 그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 에서는 발에 밟히는 나뭇잎의 촉촉한 내음이 올라온다. 캐시는 둥그런 과일을 넝쿨에서 하나 따서 히스클리프의 이마와 뺨에 굴리며 그에게 그 시원한 느낌을 맛보도록 권하기도 한다. 히스클리프는 그녀의 손에서 그 과일을 받아들고 한 입 베어 물고 입맞춤을 한다. 그는 그녀의 혀 위로 그것을 넣어준다.

한밤중에 잠이 깨면 그들은 오래 전에 들었던 전나무 숲은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아니라 새와 곤충에 뱀이 울어대는 황홀한 소리, 캄캄한 숲의 숨겨진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그들이 잠을 자는 침대는 어린 시절의 떡갈나무로 둘러쳐진 침대가 아니다. 그 침대는 별빛을 받아 커다란 개똥벌레의 고치처럼 보이는 얇은 망사로 둘러쳐진 침대이다. 그 들은 그 침대를 널따란 베란다에 놓고 그 안에서 잠을 잔다. 그녀가 잠을 자다 손을 내밀어 더듬어보면 그가 있고 그가 손을 내밀면 역시 그녀가 있다.

우리는 계속 천천히 걷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산등성이를 돌고 있었다. 우리의 바로 코앞에 폭풍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집이 보였다. 잿빛의 우중충한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돌로 지어진 그 커다란 집은 구석구석마다 앙상한 가지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작은 창문에는 유리가 없었다.

그 집의 모습에 놀라 나는 급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에밀리가 돌아서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래도 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무엇인가 마음이 불안했다.

"따라올 거야?"

나는 움직이지 않고 대답만 했다. "지금 나에게 한 얘기가 맹세코 사실이라고 했지. 난 네 말을 진심으로 믿어. 하지만 정말 있었던 얘기야?"

"언니, 도대체 뭘 묻는 거야?"

"네가 방금 묘사한 광경이 사실이냐고 묻고 있잖아. 히스클리프와 캐시가 북미 대륙의 남부 해안으로 이민을 가서 5년 동안 그곳에서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고 그랬지? 서로 매일 사랑을 확인하며 꿈같은 포옹도 하고, 그 두 사람의 성격으로 볼 때 종종 싸움도 하고 욕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하다가 서로 화해했을 거야. 그 사람들도 먹고 마시고 일하고 돈도 쓰고 그러다가 따분하다는 생각도 들었을 거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그들도 필연적으로 겪었을 거야. 이런 일들도 물론 있었겠지?"

에밀리는 참으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래. 있었겠지."

"우화를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네가 설명해준 게 진짜 일어났던 일이란 말이니?"

꾹 참고 있던 에밀리의 표정이 냉소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말귀를 못 알아들었구나."

"네가 하는 말은 하나도 빼먹지 않고 들었어. 다 듣고 다 계산해봤어. 난 그저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 확인하려는 것뿐이야!"

에밀 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니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니? 설명만 해주면 되잖아!"

"내가 전에 얘기한 것처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는 거야. 어떤 얘기들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어떤 얘기의 핵심은 알 수가 없어. 그저 그렇구나 하고 느낄 수밖에. 그런데 언니는 그런 감각이 죽었어. 아니 그런 감각이 있지도 않았어."

얘기를 계속하면서도 나는 동생의 화난 얼굴에서 그 집으로 자꾸 눈이 갔다. 어렴풋이 무엇인가 보이는 것 같았다. "에밀리! 창문에 있는 저건 촛불이잖아?"

에밀리가 몸을 돌려 이마를 손으로 가리며 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다보았다. "촛불이 어디 있어? 지는 해가 반사되는 거잖아."

"그렇지 않았어. 너는 알고 있잖아. 날씨가 바뀌어 구름이 깔린 지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해가 어디 있어."

"잠깐 햇살이 비쳤을지도 몰라."

"말도 안 돼! 이 층 창문을 봐! 다시 촛불이 타잖아...... 어어, 움직이잖아! 누군가가 안에 있어!"

"그건 빛의 농간이야."

"아냐! 틀림없어!"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창문엔 전부 판자를 대고 못질을 해버렸으니까."

"어어! 촛불이 꺼졌다. 가서 한번 보자!"

에밀리는 그 집에서 등을 돌렸다. "안돼. 절대 안 돼. 난 보여 주고 싶지 않아. 그럴 필요도 없고. 안에 들어가봤자 텅 빈 벽밖에 볼 게 없어. 방에 사람도 없고. 온 집안이 텅 비어 알아볼 게 하나도 없어. 그게 전부야."

사실 내가 계속 그 집을 유심히 바라보니까 그 집은 텅 빈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내 눈앞의 창문들은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정말로 창문에 모두 판자를 대고 못질을 해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동생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넌 여기에서 뭘 보고 싶었는데?"

에밀리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마 옛날얘기겠지."

"그런 소리 하지 마. 네가 날 여기 데려왔잖아! 근데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들어가 보자! 난 좀 더 알고 싶단 말이야!"

"언니. 언니에겐 더 이상이 없어. 언니에게 그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에 히스클리프와 캐시가 죽었을 때 이미 끝난 일이야. 그 사람들이 죽고, 그 사람들이 살던 세상도 이미 사라지고 없어. 그러니까 끝난 거야."

그것이 전부였다. 에밀리는 그날도 그 후에도 그 문제에 대하여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김머튼의 교회를 지나 호워스로 내려올 때 불어난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는 마치 매일매일의 일상에 찌든 얼굴 밑으로 굳세고 끈기 있게 끊임없이 흐르는 삶의 속삭임, 바로 그것이었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