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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히스클리프(續 “폭풍의 언덕”) 2

아어씨는 일년 내내 나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별난 버릇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한겨울에는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러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으므로 나의 방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우리는 마구간에서 식사를 다시 시작하여, 전보다 훨씬 멋진 음식을 차려놓고 말들의 눈을 즐겁게 했습니다.

한여름에는 같이 앉아서 와인을 마시며 아스파라거스라든가 굴을 안주로 삼아 먹기도 했고 석류를 까먹기도 했습니다. 내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리란 생각이 드는 음식을 주문하는 것은 그의 유별난 취미였습니다. 내가 정말 당황해하면 그는 아주 재미있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당황해하지 않으면 더더욱 재미있어했습니다. 푹푹 찌던 한여름의 밤도 거의 끝나갈 무렵, 우리는 둥그런 산꼭대기에서 부는 선선한 바람을 즐기기 위하여 양복 조끼를 벗어버리고 마구간 뒤의 과수원으로 손에 와인 잔을 든 채 나갔습니다. 시원한 풀밭 위에 앉아 촉촉한 공기에 흠뻑 젖은 채 우리는 어둠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계곡 아래위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다가 너울거리는 오렌지빛 불씨를 보고는 아어씨가 시가에 불을 붙여 피우고 있다는 것을 일았습니다. 그러한 분위기는 나에게 다소 메스꺼운 기분을 느끼게 했습니다. 불결한 몸과 마음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자네의 신분은 그 근본부터 잘못되는 바람에 어긋나고 말았어." 귀뚜라미 울음소리 사이로 아어씨가 10분 전에 중단했던 얘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향유하고 싶어 하면서도, 자네는 그러한 법을 업신여기고 있어."

"가족도 없고 재산도 없는 제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법과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가족과 재산 그리고 자신들과 같은 계층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게 법 아닙니까?"

"그러나 자네도 재산이 있으면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와 똑같은 법이 있으면 하고 원할 게 아닌가?"

"전 재산이 있어도 법적으로 어떤 보호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재산을 모은다면 그건 저의 기본적인 비범한 능력에 의한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필연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오직 그런 원칙하에서 재산을 소유할 테고, 그러한 재산을 제가 잃어버린다면 이미 제가 제 자신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일 겁니다. 같은 사람이라는 전제하 에서만 인간의 존재와 재산은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한 매듭이 풀리면 모든 것이 꽝인 셈입니다."

"그 말은 인정할 수 없는데, 하지만 잠시 그 주장은 논외로 하고 자네의 말 중에서 어디가 틀렸는가 하는 점만 얘기해보도록 하지. 현재의 자네란 사람은 전적으로 재산에 관한 법률에 의존하고 있는 거야. 왜냐하면 그러한 법이 있는 덕택에 아무리 작은 땅이라도 이곳 주변의 사람들이 나서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니까.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나의 땅에 조금씩만 차지해도 그들은 자네처럼 교육을 받고 자네처럼 옷을 입을 수 있는 재산을 소유하게 되는 셈이야."

"그것이야 어르신과 상관있는 일이지 저와는 전혀 관련이 없지 않습니까? 어르신의 땅을 보존해주는 것은 어르신의 능력이고, 어르신을 저의 은인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저의 능력입니다."

"히스클리프, 꽤 쌀쌀맞은 궤변을 늘어놓고 있어. 역시 자네다워. 그러나 자네의 생각은 정말 상상 이상이야. 자네의 이론, 자네 개인의 주체성의 우월함을 하나의 원칙으로 삼는다면 사이비 종교의 교주도 가능해, 하지만 그 결과는 무질서밖에 없을 거야."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대로 파악해서 제 방식대로 하면 전례가 없을 정도로 완전한 조화가 이루어질 겁니다. 제가 어르신께 한번 보여 드리겠습니다. 어르신의 방식대로 하면 그 귀중한 법이라는 것은 이미 확정된 것인 셈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어씨는 시가만 뻐끔뻐끔 빨아대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관습과 이성이 수년 동안 이루어놓은 것 대부분은 민법과 도덕법 속에 성문화되어 있네. 이러한 법들은 제대로만 따른다면 개개인의 평화공존, 그러니까 이해관계의 거래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지. 그러한 법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이 뒤따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보장될 거야."

"저는 어리신의 그 '최대 행복'이란 말이 정말 싫습니다. 그것은 미온적인 타협의 결과이고, 단지 긍정적으로 볼 때만 어떤 장점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것은 모든 진실되고 심오하고 강한 존재를 통해 창출되는 것입니다."

"자네의 '진실되고 심오하고 강한 존재'란 자신의 존재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고삐가 풀린 망아지 새끼처럼 자신보다 평범한 생물체들을 무자비하게 학대하는 것 같은데..... 자네의 신념은 강한 자들에게나 도움이 되는 거야."

"하지만 인간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힘입니다. 저희가 배운 대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의 단순한 기계적인 움직임을 초월한 생명력이란, 개인의 지각을 의지력으로 집중시킬 때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곧, 의지력이 전혀 없는 하찮은 수천의 생명체를 합친 정도의 가치를 갖는 최고의 생명력 아닙니까?"

바람에 날린 시가의 불씨가 어두운 하늘에서 커다란 호를 그렸습니다. 아어씨는 시가를 언덕 아래로 휙 던졌습니다. "스스로가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을 해서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를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나 보구먼."

"아닙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반박할 수 없는 진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드런 겁니다.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사회의 안녕에 대해서는 추호도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약 모든 사람이 저의 신념을 따른다면 세상 사람들은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삶의 기쁨을 얻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혼을 가 진 사람 누구나가 다 자신의 운명에 맞추려 한다면, 또 영감에 따라 기꺼이 행동하려 한다면, 전에는 알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는 일련의 아름다운 색깔들로, 개개인의 개성이 만개할 겁니다."

"혼란과 광기와 무정부 상태란 곧 지구의 파멸이야. 히스클리프, 자네의 생각대로 하면 자신의 병적인 철학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싶은 사람에게 백지위임장을 내주는 꼴이 될 거야. 광기가 극에 달할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 매력적이게 되고 그 해약은 더욱 커지는 셈이란 걸 알아두게. 안 돼, 그래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어."

"어르신은 무신론자이시죠?"

"그건 왜 물어?"

"영감이란 원래 병이 나면 떠오르는 겁니다. 어르신은 지금 그러한 세계를 말씀하시나 본데, 제가 말하는 세계는 신도 있고 악마도 있고 우리들을 인도할 성령도 있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것들입니다. 그것들의 부름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곧 우리가 그들이 뜻하는 바에 보다 민감해지는 겁니다."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다하는군.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었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선에 이르는 밝은 길이야. 아래로 향하거나 안으로 향한 음침한 길은 광기와 고독과 기만에 이를 뿐이야."

"신념이 부족하시군요. 어르신의 믿음이 영감을 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의 믿음은 저에게 극도의 기쁨과 고통이 함께하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 제 존재가 지닌 최고의 멋이 확인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극도의 상황에서만 우리가 진실로 살아 있는 셈입니다."

아어씨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잠시 마치 유령의 얼굴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시가에 불을 붙일 때 보이는 불빛을 통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습니다. 그가 불을 붙이고 나서 말했습니다. "기쁨과 고통이라.... 이것이 자네에게 삶의 본질을 이루어준다.... 물론, 나는 자네가 이 둘 모두를, 그것도 격렬히 느끼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아. 그러나 아직 자네가 경험해보지 못한 극한상황이 있지. 아마도 자네는 그러한 것들이 있는지는 꿈에도 알 수가 없을 거야. 내 나이의 반밖에 살지 못한 자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자네는 매일 두려움을 벗하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보지는 못했어. 자네가 그런 길을 걸을 운명은 아니었고, 그러나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상황에서 자네가 그런 길을 걸어왔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철학적인 노래를 부르고 있을걸세."

우리의 토론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끝났습니다. 아어씨는 나의 주장을 그저 젊은이의 객기 정도로 간주하여 반박할 수 없게 만들곤 했습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습니다. 그가 업신여긴다고 그것이 뭐 그리 대수였겠습니까? 나는 그가 그저 추측하고 있는 정도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어씨가 말을 꺼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물어보지.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아나?"

다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했습니다. "아뇨."

"자네가 내 집에 온 지 1년이 되는 날일세. 우리 둘 모두에게 지난 1년이 매우 유익했던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건배를 하자고."

우리는 건배를 했습니다. 그는 잔을 쭈욱 비우고 병에서 술을 한 잔 더 따랐습니다. 나는 사양 했습니다.

"자네가 내 칭찬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칭찬을 해야겠어. 지난 1년동안 자네는 참 많이 발전했어. 리버풀에서 만났던 그 더럽고 몸집만 큰 괴물 같던 자네를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은 것을 생각하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회가 솟구치는구먼. 아냐, 대꾸할 생각은 하지 말게. 거짓말 아니면 자화자찬일 테니까. 그러면 어느 경우든 내가 자네에게 가르쳐준 규칙을 깨게 되는 셈이야. , 다른 얘기를 하세. 오늘 이곳에 왔던 덴트 대령을 알지?"

". 제가 무심코 서재에 들어가니까 어르신께서 그 분하고 얘기를 하고 계셨지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자마자 자네는 체스터필드 경의 책에서 읽은 것처럼 아주 멋지게 절을 하며 '실례했습니다'라고 얘기를 하더구만. 자네가 나간 뒤 그 친구가 '저렇게 잘생긴 친구가 누구냐'고 나에게 묻기에, 북쪽에서 온 내 친척인데 자네 부모가 나에게 교육 좀 잘 시켜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해두었어. 그 친구 조카가 조만간 이곳을 한번 들를 건데 자네와 나이가 거의 비슷하니까 두 사람을 한번 만나게 해주자고 그 친구가 먼저 제안을 하더구만. 내 철학대로 처음에는 거절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네. 자네를 더 이상 숨겨둘 필요는 없겠지? 자네는 신사의 자질, 자세라든가 말하는 태도라든가 모든게 다 제대로 되어 있으니까, 자네를 한번 시험해 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시험을요? 그 조카라는 분과 대화하는 걸 말입니까?"

"그래. 그럴 계획이야. 다른 계획도 있고, 이곳 유지들도 초대하여 일주일 동안 내 집에 머물게 하며 극진하게 대접할 작정일세. 낮에는 말도 타보고 야유회도 열고 게임도 하고 밤에는 음악을 들으며 춤도 추고 축제 분위기를 한번 느껴보자고. 자네는 북쪽에서 온 내 친척의 자격으로 참석하라고, 지리적 여건 때문에 다소 시골티가 나지만 신사의 자질을 타고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젊은이로 가장하고, 자네가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같이 식사하고 춤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자네가 실수를 해서 내가 지난 1년 동안 자네를 가르치기 위해서 공들인 것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면, 자넨 스스로가 가짜임을 입증하는 셈이 되고 내게는 믿을 만한 가치가 없는 건달밖에 되지 않을 거야. 자네가 제대로 처신을 해내면 자네는 천재이자 정말 신사라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 되겠지. 어때? 할 만한가?"

"좋습니다."

"됐어. 난 자네가 망설이거나 싫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아주 자신 있게 얘기하누만."

"제 능력으로는 못 할 일이 없다고 말씀해오셨잖습니까?"

"아무래도 너무 자신이 있는 것 같아. 자네가 해내야 할 수많은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쉽게 생각하다가 말이라도 한마디 실수를 하게 되면 자네 정체가 드러나게 될 거야. 우리는 도박을 하는 거야. 자네는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 그러니까 내 말을 잘 듣게, 언제나 자신의 능력에 대해 속으로 끊임없이 쾌재를 부르는,

정하고 침착한 성경에서 나오는 그러한 자신감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봐."

"말씀을 계속해주시지요. 저에게 어떤 일이 힘들겠습니까?"

"힘든 일은 마구간에서 이미 다했지. 그런 일을 다시 맡기려는 게 아냐. 오히려. 탄탈루스(제우스 신의 아들. 신들의 비밀을 누설한 죄로 호수에서 턱까지 물에 잠겨 물을 마시려 하면 물이 빠지고, 나무 열매를 따 먹으려 하면 가지가 뒤로 물러나 고생했다고 함)의 역할을 맡으라는 거야. 자네에게 커다란 상을 줄 테니 그 상을 타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돼. 그 일주일 동안 자네가 신사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확인시키면, 자네의 행동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 없으면, 자네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쑥덕거릴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도록 하면, 모든 면에서 내 친구의 조카와 딱 부러지게 어울릴 만큼만 행동을 하면, 다음 달에 내 자네를 데리고 여행을 떠나지."

"어디를 가시는데요?"

"유럽 여행이나 할까 해.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스코틀랜드 남부, 그리고 가능하면 러시아와 독일도 다녀오려고 하지. 자네가 성공한다면 젊은 신사의 멋진 교육과정을 끝마치는 의미에서 훌륭한 여행을 하게 될걸세."

"실패하면 어떻게 됩니까?"

"펀딘에 감독이 하나 필요하니까 자네가 그 자리나 지키면 되겠지. 그 자리는 자네에게 과분한 것이긴 하지만, 자네가 운이 있어서 대담하게 성공했을 때 내가 자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야. 자네 생각은 어때?"

"정말 마음에 듭니다. 기대하시는 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잘 해봐! 너무 자만하지 말고,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처신 해야 돼. 이미 파티 날짜를 다음 주 화요일로 정해 놓고 손님들도 초대해놓았는데 자네가 기꺼이 응해주니 나도 기분이 좋은데."

이 말에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나는 손님들의 이름을 물어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친구 부부와 조카를 초대했지. 조카 이름이 아마 린튼이라고 했을 거야."

린튼! 그 이름! 그 사람이 얘기한 린튼 - 헤롤드 덴트 대령의 조카. 이 미지의 사내를 나의 적이었던 에드거 린튼이라고 생각하자 내 마음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대령의 친척이 내가 칼로 가슴을 찔러 죽이는 상상을 수없이 했던 바로 그 작자, 핏자국이 나도록 두들겨 패고 싶었던 그 얍상한 얼굴의 작자, 정말 수백 번이라도 죽이고 싶었던 작자는 분명 아니었을까요? 바로 그 작자였을까요?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분명 그럴 리가 없었습니다. 린튼이란 이름이 흔하지는 않았지만 그 지역에 린튼이란 성을 가진 세대가 열두 세대 정도는 되었을 테니까. 그 조카란 사람도 그들 중의 한 명이었을 겁니다. 그 사람이 왜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린튼이어야 합니까? 시간을 멈추게 하지 않고서는, 세상이 망하지 않고서는, 그와 내가 한 장소에 같이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강물이 지나가듯 내 귓속을 으르렁거리며 지나가던 아어씨의 말소리가 멈추었습니다. 그는 다른 손님들과 손님으로 올 아름다운 젊은 아가씨들에 대하여 계속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내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 조카라는 분에 대하여 뭐 좀 아시는 게 있습니까?"

"그건 왜 물어? 덴트 대령이 나를 보자 내가 그와 마음이 통할 거라 생각해서 한 말인데 뭘. 나도 궁금할 뿐이야."

"그렇군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그는 와인을 마시며 말을 이었습니다.

"그 사람으로 정한 게 자네에게 잘된 일이야. 손님 중에서 나이로 볼 때 그 친구 나이가 자네와 엇비슷하니까. 자네의 심사위원으로는 그 친구가 제격일 거야. 그 친구가 덴트 대령을 몇 년 전에 방문했을 때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대로인지 한 번 보도록 하자고. 그 친구는 자네하고 달라, 아니지 전혀 다르지. 호리호리하고 잘생긴 얼굴에 학자풍의 젊은이야. 격려를 해줄 만한 친구야. 대령은 이 친구를 자기 가문의 상속인으로 정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실외에서라면 그 친구 하나쯤은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가능하면 실외에 있도록 하는 게 좋아. 응접실에서는 또 문제가 다를지도 몰라. 난 그 친구가 대단히 세련된 친구였다고 기억하고 있거든."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성이 린튼이라고 했잖아. 자네처럼 북부 출신이야. 이름이 나와 비슷했는데.... 내 이름은 아니고.... 에드먼드.... 아니 아니.... 맞아. 에드거라고 했어! 에드거 린튼."

에드거 린튼! 바로 그 작자! 요술이라도 부렸는지 내가 가장 미워하는 작자가 환상 속에서 형체를 드러내어 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나에 대하여 혐오감과 경멸감을 갖고 있는 그가 내 상대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가 내 참모습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그 광경을 상상해보니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 고상한 척하는 잘난 것들과 함께 거실로 들어오겠지. 그러면 그 파란 눈과 내 까만 눈이 마주치겠지. 눈이 다소 똥그래지겠지. 파리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얘기하겠지.

', 이 뻔뻔스러운 사기꾼 놈아, 돼먹지도 못한 놈이 도망을치더니..... 저 놈이 하인들 방에 나가 있어야지 여기엔 왜 와 있습니까?'

이것이 내가 그 어두운 언덕에서 아어씨 옆에 앉아 느꼈던 공포에 휩싸인 최초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죄지은 일도 없는데 죄인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용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었으니까 폭풍의 언덕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고 해서 내가 잘못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나의 위치는 이상하기는 하지만 정당하고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난 본명 아니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조카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어씨였으므로 사기를 쳤다면 아어씨가 친 겁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린튼이 나의 이력을 폭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니까 처음에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쉬웠습니다. 그가 나를 보는 순간 무심코 말을 하지 않는 한 아어씨가 나를 소개하는 순간 린튼이 가만히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러시크로스 농장의 상속인이라면 파티 주최자가 나를 조카로 소개하는데 예의도 없이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하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의가 무엇인지 아는 그가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나에게는 나중에 그의 교묘한 폭로에 대비해 선수를 치고 나올 능력이 틀림없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조심해야 할 것은 오직 첫 대면 순간뿐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자연스레 모든 것이 진행되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뜨거운 애플 소스를 그에게 튀기자 그가 얼마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는지가 기억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인이 되었지만 그의 입을 막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을 잠시 제쳐두어야 했습니다. 아어씨가 일어서며 말을 했으므로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했으니까요. 문 앞에 서 있는 그를 비추고 있는 촛불 이외에는 사방이 컴컴했으므로 그는 집에까지 같이 걸어가자고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그는 돌아서서 예사롭지 않게 정중한 태도로 악수를 청했습니다.

"이제 마구간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그만두도록 하지. 자네도 옛날의 자네가 아니니까 옛날 식으로는 안 되겠지. 내일부터는 계속 집안에서 같이 식사를 하도록 하자고."

1년 사이에 나란 존재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보한 셈이었습니다. 내가 처한 현재의 새로운 상태가 과연 적합한 것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검증을 거쳐야 하지만 말입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황량한 들판으로 난 컴컴한 길을 지나 나는 나의 숙소를 향했습니다.

어느 곳에선가 문득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존이 나와 같이 걷고 있었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히스클리프씨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친조카라는 말을 어른께서 우리 모두에게 했어요."

"그래요? 그래서요?"

"그 말씀을 하시던가요?"

", 그런 걸 왜 묻는 겁니까? 사실이든 거짓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었어요? 손필드에서 그분의 말씀은 모든 일의 시작과 끝입니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둬요. 존과 나는 그저 가만히만 있으면 됩니다."

"그게 바로 어른이 즐기시는 오묘한 게임입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면 나도 내 게임을 즐기고 존도 그러면 되잖아요."

"게임 속의 게임이라. 그러나 어른의 게임판이 가장 크지요. 히스클리프씨. 그 게임에 너무 빠지면 안 됩니다."

그가 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습니다. 나는 그를 뒤로 하고 길을 갔습니다. 나는 그의 쉰 목소리에 정나미가 떨어졌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이든, 그가 의심하고 있는 게 무엇이든, 일주일 뒤에 일어날 일들과 비교해보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고 갑자기 출세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즐거운 기대감으로 설레는 그 집의 파티가 있기까지는 일주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생각들은 이러한 환상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이제 린튼과늬 중요한 조우는 미래에 맡기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기로 하고 그 대신 과거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다 보니 놀라운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캐시, 나보다 린튼과 같이 있는 것이 좋고, 나와 결혼을 하면 당신의 체면이 말이 아닐 거라고 하는 말을 어깨너머로 들은 뒤 내가 당신과 폭풍의 언덕을 떠났다고 말한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러한 말에 내가 놀라 그랬다고 칩시다. 그러나 당신이 그 말을 하기 바로 전에는 무슨 말을 했습니까?

당신과 넬리가 얘기를 나누고 있던 등이 높고 긴 나무 의자 뒤의 벤치에서 나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자 차츰차츰 잠에서 깨어 완전히 정신이 들었을 때 당신이 나의 이름을 거론했습니다. 그때 숙명적이랄까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들었던 겁니다.

그러나 지금 린튼을 기다리면서 내가 무엇을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가 하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습니다. 너무 두려워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 - 그 사실을 내가 1년 전에 알았다면 나란 존재는 그 즉시 분해되었을 것이며 나의 심장은 터지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어떤 새로운 힘에 의하여 억지로 별로 달갑지도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에드거 린튼과 결혼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린튼이 당신에게 자기 마누라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했었다고 넬리에게 말했었지요. 당신은 그 프로포즈를 받아들였다고 얘기했었지요. 그게 정말 사실이었습니까? 정말 내가 그 말을 들었습니까? 아니면 너무 두려워서 내가 이 믿을 수 없는 기억력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당신이 린튼과 히득거리며 같이 지낸다는 사실은 내게는 별로 새로운 뉴스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수년 동안 당신은 그와 함께 나를 얼마나 괴롭혔습니까? 당신들 사이의 문제는 이미 연애라는 정도를 휠씬 넘어서 있지 않았습니까?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아니면 내가 그렇게 상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독히 일만 했던 패배자 - 그 패배자인 나는 멍청하게 잠이나 자는 것이 유일한 도피의 방법이었으므로 딱딱한 벤치에 누워있으면, 히스클리프가 없어졌다고 얘기하는 넬리의 목소리와 당신의 포근한 목소리 등등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곤 했습니다. 그 장면 하나하나를 난 이미 수도 없이 선명히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래서......

그날 린튼과 약혼을 했습니까? 그 문제에 대하여 나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곧 알게 되겠지만 나는 아직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요. 당신이 부분적으로 알고 있고 이제 곧 전부 다 알게 되겠지만 그러한 결혼이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모종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게다가 내일이면 당신과 나는 영원히 하나로 결합될 겁니다. 당신이 짓궂은 린튼과 잠시 재미난 시간을 보낸다고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그 인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게는 백지나 다름없습니다. 그 작자를 진지하게 생각해줄 수 없습니다. 그런 인간과 결혼하고 싶다고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분명 자학적인 공상의 산 물일 겁니다. 내 기억력으로는 아닙니다.

공상을 해서 그랬든 기억을 해내서 그렇든 역시 어느 정도는 위안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린튼과 결혼하겠다고 하는 악몽 속에서 당신이 결혼 못하겠다고도 얘기합니다. 당신의 영혼입니다. 그것이 반기를 듭니다. 당신의 영혼은 내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당신 영혼의 존재를 나는 믿습니다.

이것은 외부의 사건들만큼 커다란 나의 경험의 일부였었고 또 지금도 그 일부인 꿈의 세계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고 있는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정말로 에드거 린튼과 결혼을 약속했다면 그렇게 도망치듯 그곳을 떠난 난 얼마나 바보였습니까? 내가 그대로 그곳에 머물렀다면 어떻게 해서든 막을 수 있었을까요?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당신이 나와 결혼하면 거지 아내밖에 안 되었을 겁니다. 출세하기 위해서 당신을 떠난 건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말 한마디 못 하고 떠났으니!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나는 말은 안 했어도 우리의 사랑의 끈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으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당신에게 곧 돌아가리란 사실을 당신이 알고 있으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끈이 정말로 그렇게 강했을까요? 나를 잊어버렸습니까? 나도 당신에게 말을 해야 합니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마침내 파티가 열리기 전날 이 괴로운 생각들과 더불어 즐거운 기분이 물결쳐온 것은 이율배반적이었습니다. 린튼을 만나면 그저 당신을 만나 얘기하던 사람이려니 생각하고 몇 시간 동안 얼굴을 맞대고 있을 작정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당신의 손을 잡기라도 했다면, 아 그건 정말 아픔일 겁니다. 당신이 내뿜었던 숨이 그 인간 주위를 맴돌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환한 얼굴빛이 그 인간의 눈에는 빛날지도 모릅니다. 잘된 일입니다. 이 더러운 저촉으로부터 난 신성한 본질을 빼낼 수 있을 겁니다. 당신 사랑의 이 잘못된 옹호자를 통하여 나는 성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나의 헌신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을 겁니다.

나와 내 사랑 당신 사이에 있는 그 사람에 대해서 분명히 갖고 있는 미움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묻어두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상한 행복감이 더욱더 강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미움은 없어졌어도 욕망은 있었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졌어도 기대감이 고동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의 얼굴을 떠올려보니 그것은 그 인간의 얼굴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그 둘을 분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도착하던 날, 어떤 사람의 모습을 처음으로 얼핏 보고 나서는 숨이 넘어갈 듯 사모하게 된 사람처럼, 나는 안절부절하며 아어씨 집의 현관 너머로 에드거 린튼의 모습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주먹으로 한 대 올려붙이는 게 아니라 고통이 휘몰아치는 내 영혼으로 그를 압도하고 싶었습니다.

에드거 린튼이 마침내 손필드에서 나타났습니다. 그가 현관 입구에 나타나자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나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날씨가 어둡지도 않았습니다. 나의 운이 나빴습니다. 사실 세상은 전이나 다름없이 그대로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선을 서로에게 고정시킨 그 순간 나란 존재의 새로운 서막이 열리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나는 하루 종일을 서재의 창문에서 보냈습니다. 마침내 자갈길 위로 마차의 바퀴소리가 들리고 멋진 마차가 집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에드거 린튼이 먼저 내렸습니다. 그는 반짝이는 금발의 머리와는 대조적으로 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는 등을 내게로 향한 채. 고질적인 관절염이 있는 큰아버지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조심스럽게 도왔습니다. 그 뒤 틀림없이 그의 큰어머니인 듯한, 옷을 꽤 잘 차려 입은 금발의 여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가 내리는 것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는 덴트 대령이 뭐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나는 태양빛을 받은 에드거 린튼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씁쓰레한 추억이 내 앞에 그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에드거 린튼은 예전처럼 잘생긴 얼굴에 머리는 금발이었습니다. 내가 떠나던 날 밤 늦게 그가 당신을 만나러 왔을 때 얼핏 보았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큰어머니를 집 안으로 안내하는 동안 나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의 윤곽을 눈이 뚫어지게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술사가 나로 하여금 그의 매력을 보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난주에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당신의 모습을 계속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당신 얼굴과 당신이 걷는 모습을 계속 떠올렸단 말입니다. 그가 당신의 자태와 당신의 독특한 버릇을 빼닮을 만큼 많은 시간을 당신 앞에서 보냈습니까? 아니면 신비한 연금술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당신의 영혼의 일부가 당신의 상대 남성인 이 인간에게 붙어버렸다는 얘깁니까? 나는 그것이 마법이었는지, 그물을 나에게 던져 나를 사로잡은 것이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홀 입구에서 서로 맞은편에 서 있었습니다. 아어씨는 손님을 맞느라 분주했습니다. 새로운 손님이 으레 그렇듯이 에드거 린튼은 서서 기다리며 주위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습니다. 나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그를 꾸준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모습이, 당신의 사랑스런 모습이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 얼마나 중첩이 되어 지나갔는지 모를 겁니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울을 일렬로 붙여놓은 대기실에 들어선 공단으로 만든 옷을 걸친 귀족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폭풍의 언덕의 담배연기 자욱한 구릿빛 부엌에서 그와 내가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넬리와 조지프가 난롯가에서 수다를 떨고 토라진 당신이 우리 사이의 분위기를 엉망진창으로 만들던 그런 분위기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나를 얼핏 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심장이 두 번 뛰는 순간 그가 갑자기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는 눈을 치켜뜨고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속으로 제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빌었습니다.

그 긴장된 짧은 순간, 나는 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흑인의 얼굴을 한 야만인인 내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위협적인 자세로 금박이 수놓인 조끼에 적포도주 빛의 화려한 벨벳 양복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망막 뒤로는 흙이 잔뜩 묻은 가죽 바지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야윈 모습의 집시 소년이 흐릿한 영상으로 중첩이 되어 있었습니다.

집시 소년이 사라진 지 이미 1년이 되었습니다. 물론 에드거 린튼은 아주 흡족해했을 겁니다. 집시 소년의 존재는 에드거 린튼이 캐서린 언쇼에게 구혼을 하는 데 귀찮은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못생긴 아이가 말끔하게 얼굴을 닦고 멋진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고 귀족의 시골 저택에 나타난 겁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기 눈을 의심했을 겁니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아니,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지? 정말 기가 막힌 일이네." 하면서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재미난 표정으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다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나의 모습은 그에게는 결국 너무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을 본 것보다도 더 많이 나를 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알던 히스클리프라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내가 그를 빤히 바로발 때 이미 내 얼굴에는 내가 그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의 표정이 바뀌고 그가 막 말을 하려는 찰나, 아어씨가 팔을 잡아끌어 나를 덴트씨 부부에게 소개했습니다.

"제 조카 히스클리프입니다. 에드워드 히스클리프라고 합니다. 제 이름과 이름이 같지요. 혼동을 막기 위하여 가족끼리는 성을 부릅니다."

호리호리하고 상냥하게 생긴 어떤 금발의 부인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배운대로 공손한 태도로 대해야 했습니다. 나는 손을 잡고 허리를 숙였습니다. 아어씨는 주근깨가 있는 핑크 빛 넓적한 얼굴에 조그만 하얀 롤 머리 장식을 한 가슴이 두툼한 남자를 소개했습니다. 바로 덴트 대령이었습니다.

", 그래요. 그 훌륭한 종마를 타고 들판을 달리던 젊은이구먼. 헌즈 헌트 이후로는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하던 벽을 뛰어넘던데. 나는 이 젊은이가 다음번에는 헤이의 첨탑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고 조지린 경과 얘기한 적도 있습니다."

"정말 히스클리프는 승마의 명수예요. 그가 빌제법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 언젠가 얘기를 해드릴 테니까 나중에 꼭 저에게 한번 귀띔을 해주십시오. 대령을 놀라게 할 만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요. 정말 말 타는 데에는 대령 못지않은 친구입니다. 내가 보장합니다."

"좋지요. 정말 좋습니다. 이거 그 말을 들으니 황홀한데요. 이 망할 놈의 관절염이 하루만 가라앉아도 저 친구와 멋진 승마 경주를 해보고 싶은데, 저 친구가 승마에서는 나의 후계자가 될 겁니다."

대령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린튼의 등을 툭 치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서재에나 말등에서나 허구한 날 책을 손에 놓는 법이 없다 보니까 몸이 많이 상했어요. 적어도 이번 주만은 다 때려치우고 낮에는 남자들하고 운동도 좀 하고 밤에는 아름다운 잉그램 가의 아가씨들과 얘기도 하라고 확실히 일러두었습니다."

그가 조카의 얼굴을 곁눈질하며 팔꿈치로 갈비뼈를 쿡 찔렀습니다. 큰아버지의 속된 행동에 당황한 에드거 린튼의 기분을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놀라서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나에게 미소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덴트 대령 부인이 앞으로 나오며 그의 팔을 꼭 잡았습니다. "여보, 에드거를 놀리고 계시잖아요. 저 사람의 건강은 이제 꽤 괜찮은 편이에요. 당신도 책을 좀 읽어야 돼요."

그리고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제 조카가 기분 전환을 하는 게 좋겠는데, 이번 주에 같이 친구가 되어주시겠어요?"

". 그렇게 하겠습니다. 누구의 부탁인데 거절하겠습니까."

그녀의 눈은 파란색이었는데 눈매는 남편과 닮아 보였습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고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녀는 얼굴에 보조개를 지으며 나를 보고 웃었습니다.

에드거 린튼이 나를 사귀는 것은 특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다시 그를 쳐다보니까 그는 눈과 얼굴이 뻘겋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가 무엇인가를 누설할 위험이 잠시 동안은 사라진 셈이었습니다.

나는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습니다. "린튼씨,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히스클리프씨."

그는 ''란 단어에 다소 힘을 주어 대답을 했습니다.

아어씨는 린튼씨 부부와 따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내가 젊은 세대의 주인 노릇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에드거 린튼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그가 내 앞에 서 있었으므로 나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 순간 그는 어떤 신비하고 숭고한 빛에 둘러싸인 것 같은 기분이 나에게 들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는 듯했습니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만져보고 싶었습니다. 숨어 있는 당신의 모습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커다란 파란 눈을 더듬어가며 나는 목이 메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니까 그는 긴장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머리를 살짝 가로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진짜 히스클리프요? 세상에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쥐며 말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모욕을 느낄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는 얼른 손을 뒤로 뺐습니다. "어쨌든 놀라운데요. 이렇게 변하다니. 이렇게 한자리에서 만나는 것도 놀라운 일이고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자초지종을 얘기하지요."

나는 그의 어깨를 만지려다가 그만두었습니다. 감정에 휩싸여 그를 포옹하지나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신 홀에 붙어 있는 조그만 방으로 들어가자고 눈짓을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눈치가 빠른 아어씨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습니다. "설명해줄게요.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폭풍의 언덕에서의 나의 이력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둬요. 나의 비밀을 지켜주겠습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다시 꼭 잡았습니다.

이번에는 그가 자기 손을 가만히 누르며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죠. 이렇게 성공한 모습이 참 반갑습니다.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럼요." 황금빛 미래에 대한 꿈이 내 앞에 펼쳐졌습니다. 이번 주에 그와 나는 나란히 말을 타며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친형제처럼 지내리라. 그는 내가 없는 동안에 당신이 어떻게 지냈는지 나에게 얘기해주리라. 그러면 나는 그에게 미래에 대한 나의 소망을 말하리라. 이번 주말이면 그가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을 전하라리. 2, 3년 뒤 내가 재산을 모아 당신은 내 여자요 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날, 그는 우리의 보물 같은 친구가 되리라. 우리의 빛나는 영적인 교섭의 제삼자가 되리라.

"그건 그렇다치고, 어떻게 아무 말도 없이 훌쩍 떠날 수가 있었습니까? 도대체 히스클리프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요."

"너무 사정이 급박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죽이고 싶을 만큼 질투심이 생겨 결국 떠나고 말았던 내 자신이 떠오르면서 고통스러웠던 삼각관계가 내 마음속에서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이 친구와 무순 관계가 있을까? 당신이 그와 약속을 하던 그 끔찍한 순간의 망령을 아직 묻어두지는 못하면서.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면서도 그 당시에 내가 그에게 가졌던 감정이 반짝이는 비누 거품처럼 흩날려 나는 용인하기가 싫었습니다.

"말을 하고 떠났어야죠. 캐서린이 병이 났습니다."

- 당신이 병이 났다! 나는 몸을 벌벌 떨었습니다. 그 튼튼하던 당신이 병이 나다니, 내가 꾸었던 꿈과 똑같았습니다. 그에게 하려던 말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냉담하게 계속 얘기를 했으므로 나는 당신의 현재의 건강 상태에 대하여 서둘러 물어보았습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하지만 좋지 않은 얘기에는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여 걱정이 됩니다. 켄네스 선생이 히스클리프씨에 대해서는 일절 얘기하지 말라고 주변 친구들에게 일러놓았습니다."

"나에 대해서요?" 나는 멍청하게도 다시 물었습니다. "나에 대해서가 아니겠지요?"

"히스클리프씨에 대해서 언급을 하면 그 사람은 흥분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 정도가 너무 위험해요. 그 사람은 히스클리프씨가 화가 나서 그곳을 포기하고 떠났거나 아니면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떠나려는 기미를 가족들에게 정말 알려주었어야 했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저지른 나의 행동의 결과가 결국 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왜 사전에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떠난 것은 결국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칠 수 있는 방법도 내게 있는 셈이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캐시에게 모든 걸 잘 설명해주세요."

그는 웃으며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지요. 다음 주에 스러시크로스 농장에 돌아가는 대로 모든 걸 그 사람에게 얘기하지요."

이 순간 나는 어떤 용서의 행동이라도, 어떤 구원의 예언이라도, 어떤 파멸로부터의 모면이라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 그에게 감사를 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때 아어씨의 작은 목소리가 크게 변했습니다. "히스클리프, 린튼씨와 이리 와봐. 내일 일정을 짜고 있는데 자네가 필요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합석을 했습니다.

"덴트 대령 부인이 얘기해서 알았는데 린튼씨가 자네처럼 야외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누만."

"그렇습니까? 이거 놀라운 일입니다. 제가 그런 특별한 취미를 갖고 있을 줄은 저도 모로는 일인데."

"이 사람! 그렇게 내숭 좀 떨지 마. 자네가 고상한 것들을 좋아한다는 것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미 알고 있어."

아어씨가 눈을 찔끔하고 말을 계속했습니다. ", 자네는 후미지고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좋아하지. 몰래 숨어서 고매한 사상에 대해서 궁리하고 스코틀랜드의 전설적 시인인 오시언이 쓴 시를 읽으려고 말이야."

에드거 린튼이 중얼거렸습니다. "-. 그 시인이요? '포효하는 바다가 많다고 하지만 가을의 시커먼 구름처럼 그렇게 음울한 것이 또 있겠습니까?'라고 오시언이 쓴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그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 시의 뒷부분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응수를 했습니다.

"죽음이 그의 손에서 파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두 눈은 시뻘겋게 불타고 있었습니다."

아어씨가 말을 받았습니다. "이곳에는 파도가 치는 해변도 없고 동화 속에 나오는 비밀의 동굴도 없지만 진짜 오래된 유적이 몇 있습니다. 히스클리프, 내일은 혼자서 말을 타고 다니지 말고 자네가 자주 가던 수도원에 린튼씨를 데려가 보게."

덴트 대령 부인이 나섰습니다.

"한 사람만 가면 안 되죠."

"그럼 모두 같이 가시죠."

그녀는 대환영이었습니다. 아어씨가 말을 이었습니다. "좋지요. 그 수도원은 헨리 왕 시절에 수탈을 당한 수도원인데 여기에서 약 한 시간도 채 안 걸리는 곳에 있습니다. 괴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흥미를 제공해 줄 수 있을 만큼 신비한 곳입니다."

"기기 막히겠군요! 바로 그거예요!" 덴트 대령 부인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내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즈음에는 박쥐와 올빼미들이 드나들긴 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곳이죠. 지금도 지하 감옥의 고문 도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헨리 왕의 병사들이 수사들을 설득하여 영국의 정교를 믿도록 하는 데 사용했는지, 수사들 자신들이 욕정을 참고 하늘을 향한 영혼을 밝게 하기 위하여 사용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못이 박힌 둥근 바퀴라든가 쇠톱니막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덴트 대령 부인이 감탄을 연발했습니다. "야아, 대단하겠는데요. 두 분이서만 재미를 보시면 안 되죠. 같이 가서 지하 감옥을 꼭 봐야겠어요. 그런 게 바로 여행의 묘미 아니겠어요?"

"바로 그겁니다. 저와 린튼씨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아어씨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린튼씨에게는 빌제법을 타도록 하지요, 헨리 왕이 남겨 두었을지도 모르는 수사가 유령이 되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두 사람은 척후 활동을 하면서 에스코트를 하도록 해야 합니다."

"저희가 그곳에 도착하는 대로 유령들을 해치우겠습니다."

"종과 책과 촛불로 때려주면 될 겁니다." 린튼이 이 말을 하고 웃자 대령이 말을 받았습니다.

"그게 바로 용기란 거지."

"내일 날씨가 좋으면 같이들 가십시다. 페어팩스 부인에게 음식을 장만하도록 시키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자아, 이제 바람이나 쐬러 저와 함께 밖으로 나갑시다. 정원에 장미 덩굴을 새로 가꾸어놓았는데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정원에서 한 5분가량 있었을까, 존이 와서 잉그램씨 가족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어씨와 나는 얼른 앞으로 나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장미 주위를 서성이며 가위를 가지러 간 정원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향해 나 있는, 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길 아래의 모퉁이를 막 도는 순간 아어씨가 신이 난 듯 몸을 흔들며 나의 등을 손바닥으로 툭 쳤습니다.

"이 친구 대단해. 손님들이 자네를 대단히 좋아하니 말야. 대령 부인이 자네를 쳐다보면서 그 파란 눈에 불꽃이 튀도록 자네의 새까만 멋진 눈을 부러워하기까지 하고, 대령은 자네가 린튼을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사내다운 사내라고 생각하고 말이야."

"그렇게 인정을 해주니 저도 기쁩니다."

"린튼이란 친구는 태도가 꽤 유별난 편이야.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히다가 웃기도 하고 활기를 띤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걸 보면, 내가 생각한 것처럼 수줍어하는 성격의 사람이 아냐. 자네는 그 친구와 벌써 한패거리가 된 것 같은데, 그 친구를 흘린 거야 뭐야?"

"어른이 가르쳐주신 대로 인사만 했을 뿐입니다."

"으음... 아냐 그 이상이야. 자네 눈을 보면,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뭔가 내게 숨기는 게 있어. 이건 나중에 얘기하자고, 잉그램씨 가족이 오고 있으니까."

우리는 홀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다소 눈이 부셔서 처음에는 그 광경을 자세히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내 눈이 빛에 적응을 하고 나자, 아어씨가 키가 크고 당당한 풍채의 검은 머리의 부인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이로 볼 때 미망인인 잉그램부인이 분명했습니다. 멘치에 반쯤 누워 모자로 부채질을 하고 있는 젊은이는 잉그램 부인의 아들이었습니다. 런던에서 재미있게 놀던 때를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는 여기에서 어떤 시골 놀이를 하는지 한번 따라 해보려고 고향으로 서둘러 돌아온 사람 같았습니다.

딸이 두 명 있었는데 서로 얼굴은 달랐지만 둘 다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둘 중에 키가 더 큰 여자가 훨씬 인상적이었는데 그 아름다움에는 당당함과 힘과 자제력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녀가 나의 모습을 보고 까만 눈을 깜박거릴 때의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외적인 완벽함이랄까, 밖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치명적인 독액이 마음속에 준비된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밀짚모자에 하얀 리본을 잔뜩 꽂아놓은 것 말고는 전혀 결점을 찾아볼 수 없는 상큼한 아가씨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주 잘못 된 것이었으므로, 나는 눈에 띄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얼른 마음을 다져 먹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블랑쉬 잉그램이었습니다. 밖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곧 다른 손님들이 장미꽃을 한 아름씩 안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덴트 대령 가족은 잉그램씨 가족을 알고 지낸 지가 꽤 오래되었지만, 에드거 린튼은 초면이었으므로 소개를 해야 했습니다. 린튼이 하얀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문 위의 부채꼴 모양의 채광창에서 나오는 강렬한 햇살을 받으며 태양신처럼 서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왁자지껄하고 분주한 곳에 있으면 가끔 겪곤 하는 멍멍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마치 팬터마임을 하듯 잉그램양이 금빛 작은 기둥으로 걸어 나가더니 자신 있게 린튼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린튼은 그 손을 잡고 인사를 하고는 그녀에게 장미꽃을 선물했습니다.

그가 인사를 하느라 허리를 굽힌 순간 빛을 받은 그의 머리카락이 앞으로 쏠리며 그녀의 팔을 스쳤습니다. 누구나 매료될 만한 멋진 광경이었다고 얘기들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 반대였습니다. 에드거 린튼과 블랑쉬 잉그램이 서로의 아름다움과 재산과 자신감에 일심동체가 된 것을 본 순간 내가 그들에 대하여 갖고 있던 모든 매력은 갑자기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게 하는 얘기나 거울에 반사되어 밝게 빛나는 햇빛도 나에게는 아무런 매력이 없었습니다. 나에게는 린튼 주위를 아주 두텁게 감싸고 있는 두려움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에서 정을 느끼며 행복의 꿈에 젖어 있을 당신 생각에 내가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그의 진면모를 내가 제대로 볼 수만 있었더라면 나는 그 불을 꺼버렸을 겁니다. 당신 생각이 사라지자 나에게 남은 것은 차가운 적대감뿐이었습니다. 린튼은 모든 행동에 있어서 완벽할 정도로 위엄 있게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엄은 그저 복수심에 다름아니었습니다. 그가 겸손한 태도로 나에게 손을 내민다면, 축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뒤통수를 때리기 위한 위선일 겁니다.

내가 꿈꾸던 형제애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쓸데없는 나만의 희망 사항이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 외롭게 태어난 게 죄입니다. 우리 두 사람 중에 단지 한 사람만이 당신과 결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린튼과 나를 갈라놓았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더 근본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출생의 현저한 차이가 역시 우리 둘을 갈라놓은 겁니다. 그의 충정이란 생색을 내기 위한 것이며 실제적인 악의를 숨기기 위한 겸손일 뿐입니다. 나는 나 스스로 지켜야만 합니다.

내가 이러한 비극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존이 편지를 갖고 들어와 아어씨에게 전했습니다. 아어씨는 편지를 읽고 난 뒤 나를 옆으로 불러, 사업상 문제가 갑자기 생겼는데 오늘 중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밀코트에 있는 변호사를 찾아가 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지체 없이 그의 지시에 따르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그 심부름을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돌아오리란 생각에 그는 안심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시간을 끌며 신중하게 처리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알고 있던 사실들이 최근에 너무나 급격히 바뀌어, 나는 우울하기도 했고 마음이 산란하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몇 시간 동안 말을 타고 가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것은 분명히 행운이었습니다. 티타임이 지나서야 나는 돌아갔습니다. 티 타음이 지나면 그들은 거실에서 모여 앉아 오락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시원한 여름날 저녁보다도 황혼의 땅거미가 더욱 어둡게 드리워진 가시덤불을 걸어서 지날 때, 아어씨가 쉰 듯한 목소리로 힘차게 부르는 노랫소리와 함께 피아노 연주하는 소리가 단속적으로 아주 선명히 들렸습니다. 거의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노란 불빛이 거실 창문 밖의 관목 속에서 젖어 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크리스털 샹들리에에 달린 24개의 착은 초에 불을 붙여놓은 게 틀림없었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창이 밖으로 열려 있었습니다. 산들바람에 방 안팎으로 리드키컬하게 움직이는 하늘하늘한 커튼은 나에게 그곳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습니다. 노랫소리가 멈췄습니다. 왁자지껄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뜨거운 양초 냄새가 풍겼습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길에서 벗어나 수풀가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커튼이 내 얼굴에 닿았다가 스치고 지나가자 방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땅바닥은 내가 서 있는 땅바닥보다 약간 높았습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샹들리에의 밝은 조명을 받아 그림 속의 신들이 무대에서 움직이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뒤에 있는 카드 테이블에 있었고 내 쪽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피아노 주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드거 린튼은 혼자 서 있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반짝이는 이와 노출된 부드러운 어깨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자세로 앉아 아어씨를 보고 웃었습니다. 아어씨는 머리를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하고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습니다. 그는 익살스런 행동을 한 뒤 잠시 그러한 태도를 취하곤 했습니다. 그러한 자세를 끝내며 어깨를 으쓱하면 사람들에게서 또다시 웃음바다가 일었습니다.

"조카라는 분은 독선적인 면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면이 전혀 보이지 않네요. 조카는 말한테만 엄격하고 아어씨는 자신에게만 엄격한가 봐요. 사람들이 아어씨가 추상같은 명령을 내려지 않을까 해서 그 방향과 성격을 추측해보고는 지레 겁을 먹나 봐요."

"아주 사랑스런 사람에게야 요구하고 싶은 게 많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저 한 가지만 요구할 겁니다."

"그게 뭔데요?"

"빈에서 부쳐온 새 음악이지요. 그걸 한번 연주해주구려. 한번 불러 보고 싶었지만 반주자가 없어서 부르지 못한 아리아예요."

", 모차르트의 곡이군요. 이분 분부는 그래도 부드러운 편이니까 기꺼이 분부를 받자옵겠습니다."

그녀는 악보를 넘기다니 어려운 악절을 찾아냈습니다. 덴트 대령이 앞으로 몸을 숙여 아어씨에게 뭐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수풀 사이로 갑자기 휙 바람이 불더니 커튼이 방으로 빨려 들어가고 피아노 위에 놓은 촛대의 초가 격렬히 타오르는 바람에 나는 그의 첫번째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바람은 곧바로 수그러들었습니다.

"..... 무엇보다도 그 멋진 친구가 한번 시간을 내서 크롬월을 봐주었으면 합니다. 누가 재채기만 해도 망할 놈의 말이 겁을 먹거든요."

"그럼요. 히스클리프씨는 빌제법을 고쳐놓았잖아요." 잉그램 양이 연주하면서 말했습니다.

"뭐요! 내 조카의 말 다루는 솜씨를 비웃는 거요?" 아어씨가 짐짓 놀란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녜요. 조카님이 잘못했다는 말이 아녜요. 솜씨가 모자란다는 말도 아니구요. 빌제법이 너무 거칠어서 처치해버렸어야 했다는 뜻이었어요. 제가 경험했잖아요. 지난겨울 제가 여기에 왔을 때 그 말에 채인 사람이 누구예요? 누가 어떤 방법을 썼더라도 그 말을 그만큼 고쳐 놓지는 못했을 거에요."

"나도 믿기지가 않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니까 믿겠더라구요. 지금은 그 놈이 착한 아이같이 굴어요. 하여간 그 친구는 도깨비 같은 친구입니다. 말이 여자를 무서워한다고 여자 허수아비를 이용하지 않나, 별 괴상한 짓이란 짓은 다 하나 봅니다. 나도 말을 내 조카한테 맡겨야 해요."

이때 대령이 창문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나는 다소 놀랐습니다. 나는 냅다 뒤로 튀었습니다. 하지만 방안에서 갑자기 린튼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에드거 린튼은 벽에 기대놓은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게 틀림없었습니다.

"큰아버지,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 알았다. 어머니에게서 네가 이웃집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아가씨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이미 그 아가씨로 마음을 결정했다더구만. 그러나 다 경우 따라야지. 이제 이곳에 왔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얼굴 찡그리면 안 돼. 내가 네 나이 때에는 방안에 예쁜 아가씨들이 있으면 창가에 혼자 앉아 있는 법이 없었지. 에드거, 창피한 줄 알아야 돼!"

화제를 바꾸려고 그랬는지, 에드거 린튼은 아어씨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히스클리프씨의 말 다루는 솜씨가 대단한가 봅니다. 분명 승마술을 높이 평가해주는 곳에서 자란 것 같은데, 말을 몹시 좋아하는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제 조카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사실 히스클리프는 제 사촌의 아들입니다. 그런데도 히스클리프를 그냥 조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렇게 부르는 습관이 들어서이기도 하지만 제가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

에드거 린튼이 일어서서 피아노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의 뒷머리가 바로 내 코앞에 보였습니다. 그는 오후에보다는 좀 더 침착하고 진지하게 보였습니다.

"친가쪽입니까, 아니면 외가 쪽입니까?"

"외가 쪽인데 가족들은 북부 지역에 삽니다. 외가 쪽이냐 친가 쪽이냐는 제게 별로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아어씨가 교묘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잉그램 양,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첫 소절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처럼 요란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습니다. 카드 놀이를 하던 사람들은 카드를 내리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대령은 졌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푹 파묻었습니다. 에드거 린튼은 그녀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려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아어씨가 깊은 숨을 내쉰 뒤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바리톤이었는데 멋이 있었습니다. 그와 잉그램 양은 호흡이 잘 맞았고, 그 활기찬 아리아는 그들에게 제격이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대령도 음악에 맞추어 조그만 머리 장식을 끄떡이며 즐겁게 듣고 있었습니다. 린튼의 얼굴이 점차 달아오르는 것을 보면, 그의 마음도 한껏 부풀어 오르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테너 파트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을 찾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나서서 멋지게 해냈습니다. 새처럼 떨리는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반주의 변화에 따라 풍부한 바리톤 음색 위로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수풀 속에 숨어서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동안 나는 다시 한번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머릿속이 다 윙윙거리는 듯했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 - 음악가와 청중들의 화려한 모습에 나는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세속적인 인간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셈이었습니다. 온 신경을 집중시키면, 나 는 그들의 행동, 어깨의 균형 잡힌 자세, 심지어는 대화할 때의 태도까지도 그대로 모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연스런 기품은 어떻습니까? 힘들이지 않아도 절로 우러나오는 그들의 고귀함은 또 어떻습니까? 나는 거실에서 식당으로 들어갈 때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숙녀가 마차에서 내릴 때는 어떻게 손을 잡아주어야 하는지 등등을 배웠습니다. 대화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교적인 인사말을 수백 가지는 암기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연습을 해도, 내가 아무리 시구를 암송해도, 역시 나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내가 그 한계를 넘어서 살 수는 없었습니다. 린튼이 나를 대등하게 받아들이고 형제처럼 감싸안아 주리라고 내가 어떻게 꿈을 꾸었는지? 그에게 헐크처럼 생긴 몸집에, 쟁기질하기 위하여 어깨를 굽히고, 매를 맞을까 봐 머리를 푹 숙인 모습이 히스클리프의 참모습이었을 겁니다.

"안에 들어가서 같이 계시지 않고, 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계십니까?" 존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작게 들렸습니다. 그가 살금살금 나타나는 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나는 여념이 없었습니다. 내가 몰래 안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그가 본 것에 화가나 주먹을 들었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는 그만두었습니다. 그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이곳이 제격이겠지."

"아닙니다. 이곳은 박쥐나 두더지나 저 같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곳입니다. 히스클리프 씨는 저분들하고 밝은 곳에 같이 계실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화려한 금빛 레이스의 옷을 입은,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분이 왜 그러십니까? 린튼씨에게서는 젖먹이 아이같은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얼었던 눈이 녹듯 무엇인가가 분명히 스스르 녹았습니다. 존이 반짝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얘기를 계속했습니다. "옷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마. 화려한 내 옷이 린튼의 회색 실크보다 더 나을지는 몰라도 그의 예의범절은 순금이나 다름없어. 그에 비하면 내 것은 도금한 거나 마찬가지지. 한 대 치면 부서져 흩어질지도 몰라. 내가 방에 들어가면 실수나 크게 저질러 어른의 체면에 누만 끼칠걸."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존이 경멸하는 투로 내뱉었습니다. 나는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존의 말이 맞다고 가정하자구. 그러나 존은 사람을 판단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있어."

"히스클리프씨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많이 압니다. 처음부터 난 약속을 했습니다. 히스클리프씨를 계속 지켜보겠다고. 그래서 그렇개 해 왔습니다. 어른이 히스클리프씨의 역량을 시험하는 것을 지켜봐 왔습니다. 그런다고 야단도 많이 맞았고요. 이제 어른은 여러 가지 일들을 당신 마음대로 하실 겁니다. 어른의 흉을 보려는 게 아닙니다. 내 말뜻은 어른이 아주 멀리까지 생각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존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나는 이번 주 내내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른은 히스클리프씨 당신을 어느 목표 지점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별의별 걱정을 다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그 목표 지점을 통과하도록 말입니다. 이번에도 이 주변의 다른 지주들처럼 얘기도 잘하셨고 책에서 배운 대로 행동도 잘 하셨습니다. 보장합니다. 예절 예절 하는데, 대령이 어떻게 하나를 보았어야죠. 팔꿈치를 탁자에 괴고 소파에 누워 턱에서 양목 조끼로 기름이 뚝뚝 흐르는 꼬락서니 하고는... 주방에서 모두 웃었습니다. 다들 히스클리프씨, 당신이 저 사람들을 한 방 먹였다고 합니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하인들이 내 편을 들다니?

"어른과 여행을 갈 기회를 놓칠까 봐 걱정을 하고 있다면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세요. 집에 혼자 계실 양반도 아니지만 혼자서 떠나실 분도 아닙니다. 여행은 같이 떠나기로 이미 계획이 잡혀 있어요. 이미 외국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신 지가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어른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실 겁니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얘길 해주는 거요?"

"히스클리프씨, 전 당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잘못될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는데 당사자만 그것을 모른다고 하면 그 사람이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겁니다. 그건 수치입니다."

말 싸움을 하다 보니까 우리는 노래 부르는 사람들과 아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음악이 잠시 끊긴 동안 누군가가 우리의 목소리를 들은 게 틀림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린튼이 갑자기 창문 쪽으로 걸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잽싸게 존을 수풀 뒤로 끌어넣었습니다. 나는 숨을 죽였습니다. 린튼은 그 허여멀건 얼굴을 붉히고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여기저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이미 날이 꽤 어두웠으니까요. 충동적으로 나는 불빛이 있는 데로 나갔습니다. 그는 얼른 몸을 뒤로 뺐습니다. 나는 그를 보았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환희와 치욕감이 묘하게 뒤섞여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창에서 멀어져서는 다시 노래를 부르지 않고 살며시 웃으며 큰아버지 옆에 앉았습니다.

"두 분은 서로 좋아하지 않는 사이군요?" 존이 내 옆에서 나지막이 물었습니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서로 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오." 나는 떨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자기기만의 마지막 켜가 벗겨졌습니다. 린튼 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선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위선의 가면을 쓰고 나를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미움과 같은 강렬한 감정을 소유할만한 인물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나를 경멸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인물을 그가 왜 미워하겠습니까? 재산이라든가, 사회적 위치, 아름다움,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한다면 당신의 사랑 등등 그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소유한 것들 중에 어떤 것도 내가 빼앗아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나는 그것이 오산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했습니다.

"저 사람은 신경 쓰지 마세요. 밟아 죽일 가치도 없는 달팽이 같은 존재입니다. 제 껍질 속에서 살도록 내버려 두세요."

"그러는 편이 낫겠지."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간 바로 그 순간,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이 화려하게 노래를 마쳤습니다. 나도 덩달아 박수를 쳤습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습니다.

"히스클리프씨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이 무대의 중심은 히스클리프씨가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축하의 벌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방을 가로질러 그녀에게로 가서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잉그램양께서 개인적으로 벌을 주신다면 그 벌은 상과 다름 없을겁니다. 그저 명령만 하십시요. 뭐든지 하라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노예입니다."

"멋지군요. 하지만 히스클리프씨는 결코 노예가 아녜요. 아어씨에게 얘기하고 있었지만, 당신은 사람과 말 모두의 군주가 되고 싶은 야망속에서 사는 사람이에요."

"큰아버지도 참! 그 옛날얘기를 또 하셨군요."

대령이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그 녀석을 기가 막히게 해치웠다죠. 참 대단합니다."

"고맙습니다만,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불쌍한 야생마를 그저 꾸준히 돌보아주었을 뿐입니다. 흔하디흔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럼 언제 우리 집에 한 번 와서 우리 마부에게도 그 방법을 가르쳐주면 고맙겠소."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구간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대령이 막 대답을 하려는 찰나 잉그램양이 끼어들었습니다. 그녀는 얘기가 수의사 얘기까지 흘러갈까 봐 그랬을 겁니다.

"히스클리프씨, 나는 그 말을 수긍할 수가 없네요. 말이 변한 것은 그 방법 때문이 아니라 히스클리프씨의 강인한 성격 때문입니다. 조카님에게는 분명 명령을 즐기는 사람의 분위기가 있어요."

나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명령하는 게 제 포부라고 칩시다. 그래도 말을 길들여서 제 포부를 다 실현할 수는 없죠. 그런 포부는 너무 작은 포부입니다."

"그건 그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에요. 보다 포괄적인 행동을 위한 위장에 불과한 것이란 말이죠. 히스클리프 씨는 속이 너무 깊어서 알수가 없어요. 당신이 심부름을 가서 없다고 아어씨가 우리를 설득했지만 나는 당신이 전적으로 다른 일로 바빴다고 생각해요. 교수형을 당하고서도 부활했던 그 유명한 노상강도 딕 터핀이 바로 히스클리프씨란 생각이 들어요. 히스클리프씨는 여기에 없는 동안 다른 무대에 나타나 보석이 담긴 무거운 상자들을 마구간으로 옮겼을 거예요."

잉그램 부인이 앞으로 나서며 타일렀습니다. "블랑쉬!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히스클리프 씨는 너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오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함부로 얘기하면 저 분도 화를 낼거야."

블랑쉬 잉그램은 들고 있던 부채로 가로 저으며 어머니의 말을 막았습니다. "엄마. 이 사람은 제 말뜻을 이해해요."

나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부인, 사실을 사실대로 얘기하는데 어떻게 제가 화를 낼 수가 있습니까? 잉그램 양이 무심코 한 말에 제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셈입니다."

나는 린튼을 흘끗 바라보았습니다. "제 직업은 노상강도입니다. 오늘 저녁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해서 다이아몬드 목걸이 세 개를 강탈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좀 더 강도질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밤 주무실 때 여자분들은 방문을 꼭꼭 잠그시기 바랍니다."

내 말에 대령부인과 메어리 잉그램이 낄낄거리며 웃었습니다. 에드거 린튼은 곁눈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잉그램 부인은 고개를 바짝 세우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잉그램 부인이 딸에게 말했습니다. "알았어! 둘이서 궁합이 잘 맞는다!"

"그렇습니다. 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니까 원하는 것을 갖고 계신 분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웃는 얼굴로 저에게 주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손가락으로 목을 스윽 베는 시늉을 했습니다. 곁눈질을 해서 보니까 린튼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바라던 대로였습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생각나게 하려는 나의 의도를 그는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의자에만 앉아 있던 잉그램 경이 일어서며 점잖게 말을 시작했습니다. "딕 터핀은 그 시대의 선망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것보다 훨씬 좋은 친구와 있습니다."

린튼은 이 대목에서 입술을 꼬옥 깨물며 일어서서, 피곤하니까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다고 말하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대령을 놀지 않고 잠이나 자려면 뭣 하러 왔냐고 투덜대면서 샤리드 게임이나 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잉그램 부인이 그 게임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얘기하자 누군가가 카드놀이를 하자고 했습니다.

"좋아요! 휘스트로 합니다. 휘스트 토너먼트!"

그래서 카드놀이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카드 놀이를 하며 밤을 보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과 잉그램 경, 대령 부인 그리고 나는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나는 노상강도의 역을 했습니다. 잉그램 경은 조나단 와일드라도 된 것처럼 우쭐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단지 서너 살밖에 더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자들의 물욕과 자존심에 대하여 일부러 흉을 보면서 그들이 밤새 재니를 잃지 않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다른 테이블에서는 불꽃이 튀고 있었습니다. 아어씨는 메어리 잉그램과 함께 히히덕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불랑쉬 잉그램보다는 못생겼지만 성격은 더 좋았습니다. 덴트 대령은 사정없이 잉그램 부인과 블랑쉬의 약을 올리다가 린튼의 흉을 보고 있었습니다. 린튼은 피곤한지 구석에 처박혀 책을 읽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린튼의 태도에 가만히 있을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린튼이 읽고 있던 책을 빼앗기로 작정했습니다. 친구들보다는 책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린튼은 한사코 책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녀에게 책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덴트 대령 부인이 다음 날 아침에 수도원에 가야 하니까 일찍 일어나서 자고 하는 것으로 그날 저녁은 끝이 났습니다. 덴트 대령은 날씨가 좋을 것이라고 장담을 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나의 비밀스런 데뷔에 대하여 다른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에드거 린튼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갔지만 잉그램 경은 달랐습니다. 그는 악수를 하면서 참 좋은 친구라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의 누이인 블랑쉬는 머리에 꽂고 있던 장미를 빼서 부채 밑으로 몰래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어씨는 진심으로 내가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습니다. 나는 마구간으로 갔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린튼 이외에는 특별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부터 뚜렷하던 까만 글씨가 깜빡거리며 희미해지기 시작하여 자꾸 종이에 눈을 더 가까이 대야만 했다. 결국에는 너무 가까이 대어서 나는 한 글자도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글자들이 뿌연 얼룩처럼 보였다. 침울한 얼굴을 한 힘차고 시커먼 모습이 거친 손을 뻗어 종이 뒷면에 한 자 한 자 글씨를 쓰고 있는 모습이 보이 는 것 같았다.

선잠이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나는 머리를 세게 흔들며 글자에서 눈을 떼려고 애를 썼다. 램프의 불빛이 흐려지고 있었다. 심지를 잘라줘야 했다. 불꽃을 조절하려고 덮고 있던 담요를 치우고 일어나니까 공기가 너무 차가워 갑자기 정신이 번뜩 드는 듯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노출된 얼굴과 손의 피부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로크우드씨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행여 그의 몸에라도 닿으면 그가 놀라 깰까봐 나는 조심조심하며 담요를 다시 덮어주었다. 편지들을 무릎 위에 놓았다. 누런 종이의 빛이 따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려는 듯 나를 유혹했지만, 금방 가까이 가지를 못했다. 나는 이미 달갑지 않은 사실에 화가 나 있었다.

논리적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판단을 이미 내려두고 있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히스클리프와 에밀리의 히스클리프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는 부인할 수 없었다. 나는 판단을 내려야 할 위치에 있었다. 나는 에밀리의 친구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자세히 알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 동생 에밀리가 식구들 이외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은 히스클리프뿐이었다. 따라서 자연히 그는 우리의 관심사 중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언제나 거리감이 있었다. 우리가 그를 만나거나 보는 것을 그녀는 한사코 허락하지 않았다. 막내 동생 앤과 내가 에밀리가 어린 마부와 들판을 돌아다니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다거나, 히스클리프와 혼자서만 알고 지내려 하는 것을 괴벽스러운 행동으로 치부했다면, 우리는 그 일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경우에도 자기 생각대로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궁리에 궁리를 하고 분명 머리를 맞대고 얘기하기도 했다. 물론 아버지와 이모에게는 그녀가 그 이상한 친구에 대해서 한 얘기들을 모두 비밀로 했다. 낯선 사람이 나에게 건네준 읽을 거리에서 나오는 폭풍의 언덕의 사건들에 대한 설명이나 사람들에 대한 묘사라든가, 심지어는 어떤 말들은 내가 에밀리에게서 직접 듣고 앤과 다시 얘기해본 것과 똑같았다. 히스클리프는 그녀가 얘기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동생 편이 아닐지라도 기가 막힐 정도로 각본이 잘 짜여진 사기 행각의 희생자였다고 의심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벌떡 일어서서 길길이 뛰며 잠자고 있는 사기꾼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보여준 바로 그 편지들 이외의 다른 것이 있다던가, 아니면 그 이상을 그가 알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점잖은 신사인가를 직접 체험해보았다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이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은 에밀리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가 지금 혼란스러워하고 편지를 계속 읽을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이유 때문에 분해서 몸을 떨고 있었다.

캐시에게 편지를 전해주지 않은 딘 부인이란 사람은 어떤 종류의 괴물인가? 그녀가 편지를 전해주었더라면 그렇게 오래 이별해 있던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 행복한 결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캐시는 사기 결혼을 당하고 만 셈이었다. 이렇게 남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이 자기의 책임이었다고 생각하던 여자가 이제 와서 용서받기를 원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처럼 그렇게 절절한 사랑이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열렬히, 그렇게 끊임없이 사랑하고, 열심히 노력을 한 히시클리프! 그토록 필사적으로 전념하는 사랑이란, 그 나름의 의지가 작용하여, 신비스럽기는 하겠지만 반드시 하나의 방향, 즉 그리워하는 두 마음이 결국 하나가 되는 방향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 기구한 운명에 대하여 나는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맞은편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들리자 나는 얼른 머리를 숙이고 편지로 눈을 돌렸다. 로크우드씨가 기지개를 켠 뒤 회중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저어 브론테양. 편지를 읽는 동안 제가 꽤 잤나 봅니다. 히스클리프란 사람 어때요?"

"아직 다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읽은 것을 종합해볼 때 그 사람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는 얘기예요."

그는 몸을 숙여 내 무릎 위에 놓은 편지 꾸러미를 살펴보았다. "아하, 반쯤은 보셨군요. 미리 왈가불가해서 괜히 아가씨의 판단에 편견이 스미게 하고 싶지는 않군요. 그러나 한 시간 정도 더 읽어 보면 아가씨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내 생각이 해를 입을 단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겠죠. 그러나 지금은 히스클리프가 참 안 됐다는 생각에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 몹시 궁금해요. 캐시는 정말 에드거 린튼과 결혼을 했나요?"

"그럼요, 넬리의 설명에 따르면, 히스클리프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둘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죠."

"그게 언제였나요?"

"그가 편지를 주고 떠난 뒤이니까 결혼한 뒤 약 반년 동안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행동이 어떻던가요? 화를 내던가요? 괴로워하던가요?"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는 여섯 달 동안 혼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고 하니까. 그러한 감정을 밖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고 믿어도 되겠죠."

로크우드 씨의 목소리에 섞여 있는 비웃음이 나는 맘에 들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히스클리프는 자신을 부당하게 취급한 사람들에게 아주 관대한 아량을 베푼 셈이군요."

"그렇겠죠. 잠시 동안은."

"잠시 동안이라뇨?"

"나중에는 에드거의 여동생을 유혹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첫사랑의 여자가 결혼하니까 그도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권리가 있잖아요."

"에드거의 여동생을 사랑하지 않는다, 캐슬 예전처럼 열렬히 사랑한다고 공공연히 얘기만 하지 않았다면 그렇겠죠. 두 사람 다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캐시는 마지막에 그의 사랑에 대해서 보답을 했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다 결국 물어보고 말았다. "마지막이라면, 캐시가 죽기 전을 뜻하는 건가요?"

"그렇죠. 그리고....." 그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얘기했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구요. 폭풍의 언덕에서 제가 겪었던 일에 대해 얘기를 했었죠. 동네 사람들 말에 따르면, 그녀는 그가 무덤에 묻힐 때까지 20년 동안 매일 그를 찾아와 같이 살자고 했다고 하니까요."

그는 몸을 으스스 떨더니 담요를 더 가까이 당겼다. "그 집은 히스클리프가 죽은 뒤 곧바로 문에 편지를 대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은 빈집이 아니었다고들 합니다. 그들 둘이 살고 있었다고 얘기들을 합니다."

이 이야기에 별로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보다 현실성 있는 얘기로 화제를 바꾸었다.

"딘 부인이 여주인과 그곳에서 아직도 살고 있고 선생님도 그곳엘 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아닙니다. 그 가족은 스러시크로스 농장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까 지금은 캐시와 에드거의 딸이 그 집의 주인입니다."

"- . 캐시의 딸이 살아 있군요."

"그렇죠, 내일. 아니 오늘이라도 만나볼까 합니다. 만난 지가 벌써 꽤 되었지요. 참 이상해요. 저와 나이가 거의 비슷하니까 상당히 변해있을 텐데도,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느날 저녁의 금빛 머리카락이 흩날리던 그녀의 모습을 제 마음속에서 지울 수가 없어요. 그 새까만 눈이 참 예뻤어요....."

로크우드씨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는 창밖의 먼 곳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가 그 마지막 말을 할 때 그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럽고 눈빛이 그리움에 가득 찬 모습이었으므로 나는 그가 이번 여행을 가는 목적이 침상에 누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을 위한 여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다른 동기가 있어서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차가 흔들리자 그는 눈이 점차 무거워지는 듯하더니 깜빡깜빡하다가 잠이 들었다. 나는 혼자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블라인드의 한쪽을 들추고 밖을 빠끔히 내다보았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차는 이미 정해진 코스를 향해 어둠을 뚫고 포효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기차는 나날이 다르게 보다 안전하고 편안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그리고 10년 전의 그 더럽고 시끄럽고 지루한 여행은 영원히 사라져버렸지만, 아직도 나는 이러한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겹쳐지는 여행이 낯설고 부자연스러워 신경이 쓰였다. 어둠을 뚫고 미래를 향하여 기침을 해대며 뇌성을 울려대다가는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폭풍과 구름 사이를 돌진해가는 이 쏜살같고 덧없는 타임 캡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에 마음을 붙들어 매두다 보면 무서워질 것 같았다. 히스클리프의 편지에서 좁은 실내로 전달되는 느낌은 따뜻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음침한 느낌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나는 거기에서 도피처를 찾기로 했다.

잠이 깼습니다. 오늘 다른 할 일이 없다면 에드거 린튼과 당신 사이에 공식적인 연결 고리가 정말 있는지 단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연결 고리가 있다면, 그가 그것을 끊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내가 가르쳐주어야 했습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이것을 해낼 것인지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내가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든 찾아낼 수 있으리란 단호한 결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가 기회가 오면 그 기회를 잡으려고 마음먹고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거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날씨 문제가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전날 밤 덴트 대령이 낙관했던 것과는 달리 어제만 해도 경쾌하게 불던 바람이 이제는 낮고 음산한 구름 속에서 불어왔으며 그 구름 사이로 이따금 햇살이 비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령 부인 은 정오가 되면 구름이 걷히고 날씨가 좋아질 게 분명하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잉그램 부인이 나섰습니다.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이렇게 구름이 낮게 까리면 언제나 비가 오는 법이잖아요.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니까. 다른 분들이 간다고 해도 저는 안 가고 싶어요. 단순한 놀이를 위해 건강을 해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날씨 예보에는 자신이라도 있는 듯 대령은 자기가 나가서 살펴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밖에서 나무 밑을 느릿느릿 왔다 갔다 하자 여자들은 한껏 긴장한 채 창밖을 주시했습니다. 그는 손가락에 침을 바르고 하늘을 향하여 잠시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향해 선언하듯 말했습니다.

"비가 올 겁니다. 야유회는 포기해야겠습니다."

잉그램 부인이 웃으며 잘난 척 머리를 끄떡였습니다. 그러나 대령 부인은 손으로 가슴을 탁치며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아이, 그렇지 않아요! 다시 생각해 보세요."

"분명 비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자연의 법칙을 제 마음대로 바꿀 순 없습니다."

"먼젓번의 제 생일날 기억하세요? 큰 비가 올 것 같아서 노르만 성에 가려던 계획을 다음 날로 취소했는데 결국 비는 안 오고 오후에 해만 쨍쨍 나던 날 말이에요. 그다음 날엔 병이 나는 바람에 저는 가을까지 그곳 구경을 못했어요."

잉그램 부인이 이미 끝난 얘기라는 투로 말했습니다. "봐요! 맘에 내키지 않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이런 날씨에 야유회를 가서 저나 아이들의 건강을 해치고 싶지는 않아요."

이때 블랑쉬 잉그램이 승마복 위에 깃털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끼어들었습니다.

"엄마! 엄마 의견만 말하세요. 나는 비가 오든 안 오든 상관없어요. 나는 오늘 밖으로 나갈 거예요!"

"감기라도 걸리면 어찌려고 그러니? 내 생각도 좀 해줘야지. 네 아빠가 살아 계시다면 뮈라고 그러시겠어?"

"언제나 하시던 대로 별일 아니라고 그러시겠죠!"

그녀는 어머니에게 대들기라도 할 것처럼 쏘아보았습니다. 대령 부인이 다른 사람들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며 중얼거렸습니다.

"날씨가 곧 좋아질 겁니다."

"아녜요, 큰어머니. 실망하실 것 같아요."

에드거 린튼이 밖에서 들어오면서 끼어들었습니다. 그는 나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습니다.

"잠시 밖을 산책하다 보니까 곧 소나기가 올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자켓의 소맷자락을 내밀며 대령 부인에게 만져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블랑쉬 잉그램이 다가와 손으로 만져보고는 소맷자락을 툭 쳤습니다.

"푸훗! 별것도 아닌데 뭘요."

"별거 아니라뇨? 소맷자락이 다 젖었잖아요. 짜면 물이 나올 겁니다."

에드거 린튼의 목소리에는 성이 난 음색이 실려 있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차라리 물이 콸콸 쏟아질 거라고 말하지 그래요. 그따위 사소한 일로 단념하려고 하다니 정말 소심한 사람이군요!"

대령 부인이 말렸습니다.

"에드거는 감기가 잘 걸려요. 에드거, 무리하지 말고 집에 있거라."

"에드거를 어린애 다루듯 하면 사람만 버려요, 여보. 날씨가 좋아지면 다같이 가야 하지만....."

대령이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말하다가 팔짱을 가 채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날씨는 절대 개지 않을 거야!"

나는 그저 말없이 창문 밖을 내다보는 것외에는 어쩔 방도가 없었습니다. 잉그램 경이 여동생 메어리와 함께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재잘대고 있었지만 그는 하품을 하며 내려오다, 모든 사람들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잠시 멈추어 섰습니다.

"엄마가 변덕을 부려서 다 집에 있자고 하니까 모두들 속상해 하잖아요"

"블랑쉬, 내가 변덕을 부린 게 아니라 비가 올 거란 말이야!"

잉그램 경은 이 말을 하고 에드거 린튼이 앉아 있는 소파의 한쪽 구석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은 코를 씰룩거리고 눈에 불을 켰습니다. "두 분 다 한통속이군요. 한 사람은 감기, 한 사람은 두통이라니 참! 히스클리프 씨는 침울해서 집에 남아 있을 게 뻔하고, 어때요, 맞죠? 뭐하러 그렇게 서 있어요? 같이 가서 저 나약한 사람들하고 같이 있어야죠."

이때 마침 아어 씨가 들어와 이 쓸데없는 수다가 끝난 것이 참 다행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항의했습니다.

"야유회는 연기해야 합니다. 비가 꽤 올 것 같으니까...."

"아어 씨, 구름 몇 점이 있다고 야유회를 연기할 필요는 없겠죠?"

그러자 아어 씨는 두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내가 날씨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이라도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제 주제에 어디 감히.... 그러니까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잠시 기다립시다. 아랫사람들이 모두 다 준비해놓았으니, 햇볕이 비치는 대로 떠나기로 합시다."

블랑쉬 잉그램은 창문 쪽으로 어머니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와아! 엄마, 봐요!"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채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여동생의 손을 잡고는 문밖으로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잉그램 부인을 쳐다보았습니다. 마침내 그녀가 용감무쌍한 목소리로 소리를 쳤습니다.

"해가 났어요!"

"이제 됐어요!"

대령 부인이 박수를 쳤습니다. 아어 씨는 큰소리로 지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자, 15분 내로 마차를 준비시킬 테니까 덮개와 파라솔과 스케치북 등을 빨리 챙기세요."

잉그램 경은 툴툴대며 플러시 천으로 된 베개를 머리 위로 푹 덮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손님들과 하인들은 길에 대기시켜놓은 마차 주위에 서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바람에 숄과 광주리가 날리더니 마른하늘에 번개가 쳤습니다. 모두들 애써 침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빗줄기가 뿌리기 시작하자 어느 누구도 점잔만 빼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춥기도 하지만 속이 상하여 몸을 벌벌 떨었습니다. 그녀의 모자에 달린 하늘하늘한 깃털은 비바람에 흐트러져 원숭이 꼬리처럼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추위와 속상함이 그날 오후의 일과가 되어버렸습니다. 창밖으로 그리고 굴뚝 안으로 비가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존이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불길은 계속하여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꺼졌습니다. 같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똑같았습니다.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하였지만, 그저 모두들 우울한 표정들이었습니다. 아어 씨가 오락이나 하자고 제안하였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을 즐겁게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답답했습니다. 우리는 야유회에 가려고 꾸려놓은 바구니들을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던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대신했습니다. 서재의 불길은 훈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사람들도 점차 기분이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가 전날 방처럼 휘스트 토너먼트를 하며 재미있게 놀아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말에 어느 누구도 놀리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1점당 1페니를 걸자고 제안하자 대부분 흔쾌히 동의를 했습니다.

아어 씨는 예외란 걸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놀음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노름이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 종종 얘기하던 것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페어로란 카드놀이를 했다면 1만 파운드도 쉽게 임자가 바뀔 정도이니까 요즘의 노름꾼은 하룻밤 사이게 한 가족 이상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판돈을 현재의 평범한 수준 이상으로는 높이지 않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걸기로 내심 작정을 했습니다. 아어 씨에게서 받은 월급의 대부분과 힌들리가 떨어뜨렸던 금화를 나는 결혼 자금으로 생각하고 따로 떼어, 아어 씨가 조언해주는 대로 밀코트 은행에 저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은행에 갖고 있던 돈이라야 450파운드 정도였으니까 나에게는 큰 돈일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쌈짓돈에 불과한 돈이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5파운드를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5파운드를 잃으면 에드거 린튼처럼 난롯가에서 책이나 읽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다가도록 이러한 작전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서너 시간 만에 나는 잃어도 좋다고 생각한 돈의 두 배 이상을 땄으니까요. 당신도 기억할 겁니다. 우리가 폭풍의 언덕에 있는 부엌에서 라운드 게임(조를 짜지 않고 각자가 단독으로 행하는 놀이)을 할 때나 혹은 힌들리와 내가 내기로 동전 던지기 시합을 할 때면 으레 내가 이기니까 넬리는 내가 정말로 손재수가 좋다고 얘기했습니다. 힌들리는 내가 동전으로 요술을 부렸다고 욕을 해대면서 여러 번 나를 때렸습니다. 그는 그러고 나서도 똑같은 내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심지어는 당신도 내가 카드에 암호 표시를 해놓았다고 하면서 바른대로 대라고 야단이었지요. 그러나 나는 그따위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이길 때마다 나도 놀라 그저 기분만 잡치곤 했습니다. 힌들리가 노름을 하면서 점점 타락해가는 것을 보고 느끼는 기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카드에는 손도 대지를 않았지만, 다시 내 운이 돌아오는 것을 보니 기뻤습니다. 나는 오후 내내 계속 적당히 돈을 땄습니다.

차를 마시고 나자, 아어 씨가 계속 노래를 부르는 것에 실망한 잉그램 부인은 메어리 잉그램의 목이 쉰 것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이층의 침실로 보냈습니다. 에드거 린튼이 소파에서 일어나 새로 끼어드는 바람에 게임은 이제 블랑쉬 잉그램과 잉그램 경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꺼림칙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카드를 잘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끼어들어 남에게까지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중얼거리며 자진해서 열외를 했던 그가 정작 카드를 하겠다고 나선 것을 보면 돈이라도 좀 더 벌자는 게 그의 목표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저는 카드놀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카드가 사교 활동의 도구라는 장점은 있지만, 사람들이 서로 눈에 불을 켜고 카드를 치다가 라이벌 의식이 생기기도 하고 혹은 돈을 잃었다고 성질을 내기도 하기 때문에 종종 그 장점이 손상을 입는 것을 보면 저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카드를 하다 보면 사람이 추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신경 쓸 거 없어요. 린튼 씨의 경우에는 그렇게 될 염려가 없으니까요. 강인한 성격이시잖아요."

린튼으로서는 블랑쉬 잉그램이 정말 의도적으로 빈정거리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메어리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가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그의 다리가 나의 다리를 스쳤습니다. 우리는 둘 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부지깽이라도 닿은 듯이 흠칫 뒤로 물러났습니다. 잠시 동안이나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극도의 혐오감을 서로 숨기지는 못했지만, 린튼은 자신이 숨기고 있던 혐오감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는 생생하게 깨달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진실된 감정은 숨긴 채 공손한 사람인 척 한마디를 중얼거렸습니다.

"미안합니다."

잉그램 경은 자기의 하인에게 새 카드를 가져오라고 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블랑쉬 잉그램은 그것을 보고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린튼의 표현 방식대로 우유처럼 온화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만족할 만한 무엇인가를 우리의 얼굴에서 찾고서는 더이상 그 문제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새 카드가 도착했습니다. 먼저 블랑쉬 잉그램이 지난밤에 카드를 어떤 식으로 쳤는지 열심히 설명을 했습니다. 만약 내가 신비스러울 정도의 야만성을 갖고 있어서 딕 터핀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남동생 테도 잉그램은 버릇이 없으니까 조나단 와일드라고 할 수 있고, 린트은 외견상 완벽할 정도로 신사적이고 태도도 좋으니까 분명 멋쟁이 보나쉬라고 할 수 있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이 멋쟁이 보나쉬는 신사 중의 신사였습니다. 그는 영국 남서부의 온천 도시 바드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도박의 한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가명을 쓰고 활개치듯 재산을 모은 그는 신사 중의 신사라고 전 영국에 소문이 난 뒤에도 으레 똑같은 방법으로 텅 빈 주머니를 채웠습니다. 따라서 린튼이 그 세련된 매너로 어느 누구를 놀리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가 '꼼짝 말고 던져'라고 소리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정말 보나쉬라면 예절도 바르고 탐욕스러운 마음도 있을 테니까 이 수수께끼 같은 카드를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겁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카드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몹시 당황스럽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 소리쳤습니다. "아이구야, 엄살떨지 말아요. 보나쉬 씨. 그게 바로 당신이 머리가 좋다는 증거예요. 원래 보나쉬란 사람은 사기 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어서 무식한 사람들한테는 유식한 척하고, 유식한 사람들한테는 무식한 척하던 사람이에요. 사람들이 그를 정말로 무식하다고 믿을 만큼 그는 사악한 지능을 숨기고 어리석은 척할 수 있었던 사람이에요!"

린튼이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잉그램 양. 또다시 나를 기대 이상으로 추켜세우시는군요. 나는 위선을 부릴 자격이 없어요. 한 인간의 외모가 칭찬을 받을 만하고 말고는 일단 논외로 칩시다. 그러나 그 외모라는 것이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인 이상은 나는 그 자체로 만족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사기를 치는 것을 보면 나는 그 비범함에 경탄을 금치 못할 뿐입니다."

그는 나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린튼의 파트너인 잉그램 경은 그의 어깨 위로 몸을 구부려 게임의 기초 원리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나의 아름다운 파트너는 그녀의 조롱거리가 사라진 것을 알고서는 나에게로 말을 돌렸습니다.

"딕 터핀씨, 지난밤에는 어떤 금은보화를 약탈했죠?"

"금도 은도 아니지요. 값을 매길 수 없는 아주 비싼 겁니다. 금은보화야 써버리면 그만이지만 이건 내가 영원히 보관을 할 것이니까 값을 매길 수 없어요."

"너무 과대포장을 하니까 알맹이가 뭔지 알 수가 없군요. 어떤 보물인데요?"

"장미입니다."

사실은 정말 값어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받은 지 2분도 되지 않아 창밖으로 던져버렸으니까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습니다. "장미요? 장미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건네주는 사람의 손이 가치가 있으면 장미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럼 이게 미디스 왕의 손인가요?"

그녀는 다소 큰 자신의 손을 테이블 위로 뻗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위로 들고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러나 손에 입을 대지는 않았습니다.

"아닌데요. 미다시 왕의 손보다 더 요술을 잘 부르는 걸 보면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큐피트의 화살 같은데요."

"엉큼하군요. 큐피트의 화살을 가슴에 맞은 사람은 종종 피를 흘리고 죽는다는 거나 알아요?"

"목숨이라도 걸 겁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라면 틀림없이 부드러운 여자겠죠. 너무 쌀쌀맞게 굴지 마세요. 그래야 우연이라도 사건이 생기죠!"

잉그램 경이 자리를 고쳐 앉고 첫 패를 돌리다 이 말을 들었습니다. "기대는 금물입니다. 누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여전히 쌀쌀맞게 굴겁니다. 틈만 나면 콩 볶듯 바가지를 박박 긁어대는 여편네처럼 남자를 쥐고 흔들어야 작성이 풀리는 여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푸훗! 남 말 하고 있어요. 옛날얘기를 해드릴게요. 태도는 바지 멜빵으로 메어리의 손목을 침대 모서리에 묶어두고 장난감 채찍으로 때리곤 했어요."

"그렇게 얘기하면 나도 어쩔수가 없지. 좋아, 그때 일을 생각해 보자구. 멜빵은 내 것이었지만 채찍은 누구 거였지? 누나 겨였으니까 실제로는 누나가 때린 셈이잖아."

"말도 안 돼. 거짓말이나 뻑뻑 해대고, 린튼씨 얼굴이 다 빨개지잖아. 린튼씨, 동생을 정말 그렇게 다뤘겠어요?"

그가 정말 오빠라면 자기 여동생을 지금 묘사한 식으로는 다루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에데거 린튼에게 들었나 봅니다.

블랑쉬 잉그램은 동생을 쳐다보며 오만상을 썼습니다. "린튼씨 여동생은 몇 살이죠?"

"열여섯 살이니까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셈이죠."

잉그램 양은 그녀가 예쁠 거라는 생각을 했나 봅니다. "다들 예쁘다고 그러겠죠. 쫓아다니는 사내들도 많겠네요."

"아뇨, 아직 어린데요, . 게다가 마을과 너무 외떨어져 있어서 아주 한적하게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 두 분 다 작년에 돌아가셔서 아직 탈상도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다소 놀랐습니다. 그제서야 린튼의 복장이 시종 어두운 색깔이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최근에 풀이 죽어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그가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데 일조를 했을 겁니다. 우리는 애도의 뜻을 표하고 조용히 게임을 했습니다.

잉그램 양이 장난삼아 한마디 했습니다. "동네가 그렇게 외떨어져 있으면 변변한 여자도 없겠네요. 여자들이 모두 촌티가 나서 린튼씨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없을 것 같아요."

린튼이 열심히 말을 받았습니다. "사실은 어디에 내놔도 흠잡을 데가 없는 여자가 하나 있습니다. 저도 반했고요. 제 말뜻은 누구나 반할 거라는 얘깁니다."

그는 혼란스러운 듯 나를 바라다보았습니다.

"야아, 드디어 꼬투리를 하나 잡혔구나!" 린튼이 대답을 하지 않자 잉그램 경은 블랑쉬에게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그러지 말아, 나는 호의를 보이는 거야. 내가 친근한 관심을 갖고 있고 내 질문에도 악의가 없다는 사실은 린튼 씨도 알고 있어. 그렇죠, 린튼 씨?"

"네에. 그렇죠....."

"근데 그 여자가 누구예요? 이름이 뭐죠?"

그녀의 대담함에 잉그램 경이 놀란 시늉으로 두 손을 들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물었습니다. "축하할 일이 언제쯤 있겠어요?"

린튼은 그녀의 질문에 개의치 않고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려 노력했습니다. "그 여자 친구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아닌데요. 그저 친구일 뿐이예요."

"피이! 새빨간 거짓말! 그 예쁜 여자 친구와 특별한 관계라는 말을 이미 대령님에게 들었는데도요? 린튼씨 어머니도 승낙했다는데!"

"그게 사실이면 또 어떻습니까? 내가 누구 좋아하든 그 권리는 나에게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성을 내자 잉그램 경이 끼어들었습니다. "참아요 참아! 누나는 원래 저리니까 누구도 말릴 수 없어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무시해버리는 게 상책입니다."

"테도,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미안해요, 린튼 씨. 꼬치꼬치 물어본 걸 사과할게요. 주제도 모르고 행동해서 미안합니다. 신중하게 행동하려면 이제 린튼씨의 도움을 받아야 할까 봐요."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상황을 오해하도록 한 사람은 저였을 겁니다. 그 여자 친구와의 관계는 창피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신중할 필요도 없고요. 숨길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블랑쉬 잉그램은 무슨 말인가를 기대하며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그는 나를 흘끗 보고는 턱을 거만스럽게 올렸습니다.

"캐서린 언쇼입니다."

"근처에 사나 보죠?"

". 가족이 땅 부자인데다가 그곳에서 가장 오래된 토박이입니다."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나요?"

"제 동생과 친구였으니까 몇 년 되었지요."

"그럼 한다리 건넌 친구인 셈이네요."

"그런 셈이죠."

"서로 약속한 건 없나 보죠?"

린튼은 다시 내 눈을 피하며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 건 없어요."

그녀가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게 분명...."

상황이 한참 재미있게 되어가고 있는 때에 존이 들어와 10분 후에 식사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담배 한 대는 피울 수 있겠구먼!" 아어씨가 소리치자 우리는 카드를 내려놓았습니다. 여자들은 화장실로 달려가 옷매무새를 고쳤습니다. 아어씨와 잉그램 경은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린튼과 나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우리 둘만 남게 된 것을 알고서는 성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꽉 잡아당겨 다시 자리에 주저앉혔습니다.

"한마디쯤은 하셔야겠죠, 나리." 그가 다시 일어서려고 하였지만 나는 그가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에 테이블을 꽉 붙여버렸습니다. 그는 의자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면 소리를 지른다!" 에드거 린튼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질러봐, 못할걸."

"네 놈에게 얘기하는 게 아냐!"

"난 네 놈 몸에 손도 안 댔어" 내가 조그만 목소리로 대꾸하자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습니다. 그는 반항하던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이제 몇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야겠다. 너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정말 캐시와 결혼할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 드냐?"

기대했던 것보다 더 강한 투로 그가 대답을 했습니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그 여자를 차버리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떠난 주제에."

"그래, 체스터필드 경이라면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얘기해 줄 거라고 어제 네 입으로 얘기했지. 그러나 그러한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얘기해 주지. 캐시와 나 사이에는 말이 필요 없어서 그렇게 한거야."

"잘났군. 멋대로 생각해둬. 캐시는 너를 잊은지 오래니까 더이상 괴롭힐 필요가 없겠지."

"모르는 얘기하지 말아. 캐시가 자기 자신을 잊을 리 없는 것처럼 나를 잊을 리도 없어."

"이미 잊은 지 오래야. 헛물 들이켜지 마."

"잊었다구. 자기 입으로 캐시가 내 걱정을 해서 병이 났다고 한 게 언젠데?"

"다 지난 얘기야. 그 여자는 네 이름을 뻥긋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둬. 벌써 6개월 이상이나 되었어. 네 놈은 창밖의 남자야. 캐서린에게는 별 볼 일 없는 존재야."

"병신 같은 소리! 내 마음속 깊이 캐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캐시의 마음속에서도 영원히 내가 자리 잡고 있어."

"그래, 정말 잘났군. 그건 오늘 밤에 분명히 알아차렸으니 걱정 마."

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 내 손아귀롤 힘껏 비틀었습니다. "말해봐!"

그는 내 손을 잡아떼려고 몇 번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자, 나에게 협조하는 것이 빨리 도망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는지 반항을 멈추었습니다. 나는 그가 대답을 할 수 있을 만큼만 손아귀의 힘을 뺐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을 유혹하는 놈이 무슨 캐서린에 대한 사랑 운운하는 거냐?"

"유혹이라? 우습군. 그건 손님이니까 돌봐주는 거야."

"내 목에서 손을 떼. 아니면 정말 밖으로 소리를 지를 거야. 하인들이 복도에서 왔다갔다하고 있으니까."

손을 놓고 나서도 그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습니다. 그는 화도 나고 무섭기도 한지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잉그램 양과 히히덕거리는 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나 본데, 그럴지도 모르지. 여자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쯤이야 너에겐 아무것도 아닐 거야. 그러나 캐서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캐서린이 오늘 오후에 일어난 일을 알면 네가 얼마나 그 여자를 무시하는지 분명히 알게 될 거야. 내가 분명히 전해주지."

마음 같아서는 한대 올려붙이고 싶었지만 홀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그만두었습니다. 담배 피우러 나갔던 사람들이 이미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들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습니다. 나는 내 영혼의 모든 힘을 다음 말로 집약시키는 데 만족했습니다.

"얘기했다가는 넌 죽어! 지금 이 순간부터 넌 그 여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알아둬."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린튼이 침착하게 말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는 사람들이 옆에 있으니까 용기가 나는 듯했습니다.

"무슨 이유로 나에게 명령을 하는 거지? 네가 도대체 무슨 상관있냐? 캐서린에 대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관심 끊어. 너는 절대 나를 말리지 못해. 가능한 캐서린과 일찍 결혼해주지."

"지옥에 가서나 꿈꿔봐. 병신 같은 녀석!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돼."

아어씨가 서둘러 말렸으므로 그는 대꾸를 하지 못했습니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못했습니다. 술이 많이 취해서인지 아어씨는 우리의 싸움에 아랑곳없이 머리를 문틈에 대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가자고 말했습니다. 나는 일어나서 린튼에게 아주 깊숙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내가 한 말을 믿을 날이 올 거다." 나는 이 말을 던지고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어깨 너머로도, 그림으로도, 거울로도, 당신은 자신의 진면모를 알 수 없다고 얘기들을 합니다. 에드거 린튼과 이사벨라가 당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전에는 나도 그걸 몰랐지요. 그래서 그들이 내 벌거벗은 몸이라도 본 것처럼 나는 그때 부끄러웠지요.

하지만 당신과 내가 함께 있으면 모든 게 괜찮았어요. 우리가 말을 하지 않을 때에도 좋았던 것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도 괜찮았어요. 거리를 재보려고도 하지 않았고요. 말이 없는 게 더 좋았어요. 말이 없으면 눈에 장벽이 없으니까요. 그리고는 다른 사람의 시선도 없으니까요.

당신의 눈도 내 눈처럼 새까만 색이었지만 에드거가 당신을 만난 이후로 당신은 내 눈과 그의 눈의 차이를 재기 시작했지요. 그러한 비교에 나는 두려웠어요. 나와 떨어져 있을 수 있었던가요. 당신은? 그게 가능했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린튼 가족과 같이 있어도 당신과 눈을 마주하면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소용돌이 속에 빨려들어 가는 것처럼 기뻤어요. 하지만 당신과 떨어져 유람하면서 내 마음을 기댈 곳이 없었어요. 현기증이 나고 몸에 열이 났어요. 그런데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지요? 그런 일이 없었지요. 그것은 그런 일이 아니었지요.

그러나 다음날 우리가 눈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나요? 그건 우리가 모르던 일의 일부였을까요? 그런 일이 있었나요?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내가 어떻게 린튼의 집으로 두둥실 떠갔을까요? 내가 어떻게 그 커다란 소용돌이를 피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어요.

린튼은 저녁 식사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는 카드놀이에서 돈을 잃어 열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음식이나 술 같은 걸로 놀이가 중단되는 것이 싫었던 겁니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랐습니다. 그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 같은 활기를 갑자기 되찾은 듯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메어리 잉그램이 올라와서 여기저기 다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테이블 저쪽 편의 의자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의 상태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하고 자신이 아팠던 경험들 중에서 기억나는 것들을 얘기해주기도 하며 그녀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내 쪽에서 보면 그와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되어 마 음이 편했습니다. 더 이상 얘기할 만한 것도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린튼과의 사건들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진척이 된 상태였습니다. 나는 더 인상적인 대화법을 알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가능한 한 린튼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 웃으면서 다가왔지만 나는 멋진 작전을 써서 아어씨가 우리 사이에 위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어씨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 양반이야 내 작전을 금방 간파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씩 웃으며 그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습니다. 나도 그가 무엇을 잘못하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을 훤히 읽고 있었습니다. 그의 실수로 내 계획이 착착 진행이 되는 것은 잘된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습니다. 우리는 게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운이 파도타기를 한다고나 할까. 오후에 제법 쏠쏠하게 들어오던 돈이 잉그램 경에게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판마다 이겼습니다. 더군다나 오후처럼 판이 작지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린튼이 판돈을 계속 올리자고 주장을 한 것이었습니다. 테이블 한가운데로 금화를 던질 때마다 그는 병적이라 할 만큼 흥분하여 눈이 다 번뜩거렸습니다. 그래 봤자 그 대부분은 잉그램 경의 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캐시, 당신이 좋아하는 그가 노름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그가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를 아나요? 그의 고귀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그의 투명한 파란 눈이 탐욕으로 빛나는 것을 본적이 있나요? 나는 당신이 그런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처럼 그에게 어느 정도 애정이 있다는 사람도 그 꼴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을 겁니다.

아어씨는 판돈을 올리는 것을 무례하게 대놓고 막을 수는 없었지만, 물론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의 평범한 내기에서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무리하게 배팅을 하는 것을 보고서도 아어씨는 적극적으로 말릴 아무런 방법이 없었습니다. 여자들이 잠자러 갈때 계산해보니까 나는 본전을 제외하고도 제법 돈을 땄습니다.

존이 맛이 기가 막힌 꽤 오래된 포트 와인을 가져왔습니다. 아어씨는 우리에게 자기 전에 마시면 좋은 술이라고 권하며, 편안한 잠자리를 위하여 건배를 제안했습니다.

"아직 열두 시도 되지 않았는데요. 한 판 더 해야겠어요."

린튼이 대답하자 덴트 대령이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직도 잃을 돈이 있는 모양이구나?"

"큰아버지도 참! 놀지 않으면 놀지 않는다는 화를 내시고 놀면 논다고 화를 내시면 전 어떻게 합니까?"

"그래. 행운의 여신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봐라. 행운의 여신이 다른 사람에게 입맞춤하는 동안 엉뚱한 짓이나 하지 말고."

에드거 린튼의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카드를 칠 사람이 없을 겁니다. 따는 사람이 있으면 잃은 사람도 있는 법이죠!"

대령은 와인을 쭉 들이키고 잔을 내려놓았습니다. "말도 못 하겠구먼. 네가 카드를 치건 말건 난 상관하지 않으마. 지금이나, 내가 죽은 다음에나, 내 재산에서 한 푼이라도 빼갈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말고 네 재산이나 잘 간수해."

그는 안경을 올려 쓰고 예비 상속인에 대한 위협이 효과를 발휘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린튼은 잠시 망설이더니 본의 아닌 억지로 그에게 허리를 굽혀 사과를 했습니다.

카드에 탐닉은 하면서도 그는 중요한 기회를 잃을 만큼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조카가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는 만족해하며 일어섰습니다. "나는 가서 자야겠다."

아어씨도 일어섰습니다. "이 젊은 멋쟁이들끼리만 놀 수 있게 대령과 내가 자리를 비켜줍시다. 우리같이 늙은 사람들은 오늘 밤 쉬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일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겁니다."

아어씨는 자리를 뜨기 전에 나보고 찬장 쪽으로 오라는 눈짓을 했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지하실의 포도주에 대하여 얘기를 하는 척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등 뒤로 하고 포도주병 위의 상표를 가리켰지만 입으로는 '잉그램을 잘 살펴보라'는 시늉을 하며 눈썹을 치켜떴습니다.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돈이 갑작스레 테도 잉그램 경의 주머니로 철철 흘러 들어가는 데에는 행운의 여신이 돌보는 것 이외에도 무언가 수상쩍은 데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하인을 시켜 자기의 여행용 가방에서 꺼내 와 사용하고 있던 카드에는 무슨 표시가 있으리란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포도주와 코르크 마개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나는 포도주병 상표 한쪽 귀퉁이를 뒤로 벗겨내고 엄지손가락의 손톱으로 상표를 긁어보기도 했습니다. 나는 아어씨를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떠났습니다. 그는 린튼과 같은 탐욕스런 노름꾼이나 내가 노름을 할 때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놓고서 알아봐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상기시키고는 떠난 겁니다.

다시 한번 린튼과 나는 그날 저녁 둘이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빈 술잔의 움푹 패인 곳으로 손으로 잡고 들어 올려 유리를 통하여 난롯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과 다른 손가락 사이로 잔을 빙빙 돌렸습니다. 난로 속의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새 술병의 코르크 마개를 따서 린튼에게 다시 한잔을 따라주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잔을 비우고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한 잔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잔이 찰랑찰랑 차도록 따라주었습니다.

테도 잉그램이 커다란 모자 상자처럼 보이는 것을 한 손에 들고 돌아와 빈손으로 잔을 들고 건배를 제안했습니다. "멋진 날씨와, 멋진 여자들과, 멋진 게임을 위하여!"

우리는 다같이 '위하여'를 외쳤습니다. 에드거 린튼은 술 취한 목소리로, 나는 찜찜한 목소리로 건배를 했습니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게임에서 맑은 정신으로 임하고 싶었습니다. 잉그램 경이 일부러 과음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아차렸습니다. 아마도 그 역시 맑은 정신을 필요로 했을 겁니다.

잉그램 경은 찬장 위에 모자 상자를 올려놓으며 점잖게 물었습니다.

"저 안에 뭐가 들어 있을 것 같습니까?"

"보아하니 피도 눈물도 없는 머리겠지요."

"여섯 개나 들어 있는 데도요?"

그가 뚜껑을 열자 린튼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여섯 개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모자를 쓴 얼굴도 있었고 가발을 쓴 얼굴도 있었습니다. 가면들이었습니다. 육각형의 모양으로 빙 둘러 세워놓은 마스크들은 여섯 개의 방향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얀 물방울무늬가 있는 피에로, 음흉한 모습의 할리퀸, 위세 당당한 모습의 빨간 모자를 쓴 군인, 까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험악한 인상의 인디언, 입이 시뻘건 호랑이, 한쪽에서 보면 나비처럼 보이고 다른 한쪽에서 보면 새처럼 보이는 얼굴 등 모두 여섯 개였습니다.

"아니.... 이게 제스쳐 게임을 하려는 건가?" 에드거의 질문에 잉그램은 경기 아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가 스탠드를 손으로 휙 돌리자 히죽 웃던 모습들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더니 마치 미친 사람의 얼굴처럼 눈과 입이 따로따로 놀고 있었습니다.

"전부 런던에서 유행하는 것들입니다. 이 가면을 쓰면 클럽의 잭을 잡았을 때는 씩 웃을 수 있고 2자를 잡았을 때는 울고 싶은 표정을 지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모두 가면을 쓰고 하는 것이니까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죠."

"난 군인을 쓰죠." 린튼이 손을 내밀어 돌아가는 스탠드를 멈추었습니다.

"꽤나 성미가 급하시구먼.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노름을 하기 위한 가면이니까 가면을 선택하려면 노름을 해야 합니다. 바닥의 판에 손을 대보세요. 검정색 쇠 위에는 뼈만 앙상한 손이 여섯 개가 그려져 있습니다. 가면이 그중의 하나에 멈추면 그게 자기 것이 되는 겁니다."

린튼이 스탠드를 돌리자 회전판이 돌다가 끼릭끼릭 하는 소리를 내며 멈추었습니다. 린튼은 피에로가 걸렸습니다.

"잘 걸렸네요.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피에로는 행운을 갖다주죠. 물론 오늘 밤 보름달이 떴는지 안 떴는지 나는 모릅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알 수가 없죠. 히스클리프씨 차례입니다."

나는 호랑이를 뽑았습니다. 잉그램 경이 유행을 따라 이러한 가면을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 가면을 쓰고 있자니까 다른 얄궂은 이유가 있어서 그가 그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가면을 쓴 상태에서 그가 속임수를 쓰면 다른 사람들은 이기기가 무척 어려우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호랑이 눈은 그러한 사기에 대비하여 번득거리고 있었습니다.

스리 카드 루 놀이를 했습니다. 나는 첫 판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잉그램 경이 엄지손톱으로 카드 중의 한 장에 표시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테이블 위에 카드들을 내려놓으며 유심히 살펴보니까 무늬가 그려진 뒷면에 비슷한 자국들이 작게 나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그 비밀 표시를 알고 있었으므로 같은 ㅂ이나 번호를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잉그램 경의 다른 한 손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확인을 해 보았습니다. 명색이 신사라고 자처하는 사람을 무작정 사기꾼으로 몰아붙인다면 내 책임이 막중해지니까요. 잉그램 경이 패를 돌릴 차례였습니다. 나는 그가 커다란 액수를 배팅하기 전에는 일단 자기 카드를 먼저 본 뒤에 우리들의 카드 뒷면을 유심히 살피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는 우리들을 엿 먹이고 있던 셈이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와인 잔에 손을 대는 척하며 곧바로 카드 판 위에 잔을 엎었습니다. 그리고는 잽싸게 일어나 사과를 했습니다. "이거 어떡하죠? 정말 미안합니다! 잉그램 경의 카드인데!"

나는 얼른 벨을 눌러 존을 불렀습니다. 잉그램 경이 카드에 손을 대거나 린튼이 테이블에서 술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고 있는 것을 알아채기 전에 나는 손수건으로 카드를 닦았습니다. 존이 들어오자 나는 그 끈적끈적한 카드들은 건네주면서 조심스럽게 잘 닦은 뒤 마를 때까지 나의 방에 두라고 말했습니다.

"추태를 부려 죄송합니다."

"아뇨, 됐어요. 카드가 망가진 것도 아닌데요, . 이리 주게 어디 한번 보자고!"

존은 가면들을 쓴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또 나의 말과는 정반대의 명령에 어찌할 줄을 몰라 쭈삣거렸습니다.

"그래도 그러시면 됩니까? 겉으로 봐도 멀쩡한 수제 카드를 버려놓았으니까 가능하다면 원상상태로 고쳐놓아야죠."

"네에..... 대단한 일도 아닌데요. . 존이 저희 집에서 일하는 사람에게서 새 카드를 가져오라고 하려면... "

그는 자기 침실을 향하여 맥없이 손짓을 했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 집에 오신 손님인데 카드정도야 제가 내놓아야죠. , 가서 카드 한 벌만 찾아오게나."

존이 인사를 하고 막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나는 나중에 생각이 난 듯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뒷면에 무늬가 없이 그냥 금박만 입혀진 카드 있지? 그걸 좀 갖고 오게."

존은 구둣발 소리를 내며 나갔습니다.

잉그램 경은 두 손으로 가면을 벗어들고 잠시 동안 만지작거렸습니다. "이거 히스클리프 씨를 너무 우습게 보았나 봅니다."

"흔히들 쓰는 수법을 쓰지 않기로 약속했지요! 카드를 꽤 치셨나 보지요?"

"전혀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치는 것을 볼 기회는 꽤 많았습니다."

이때, 술이 취해 꼴이 더욱 가관으로 되어가고 있던 에드거가 '힌들리'라는 단어처럼 들리는 말을 내뱉었지만 내가 째진 호랑이 눈으로 쳐다보니까 그는 갑자기 바지에 엎지른 술을 털어내는 데 몰두했습니다.

잉그램 경이 가면을 다시 쓴 바로 그 순간 컴컴한 문간에서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갑작스런 침입자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하여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었습니다. 그녀는 맨발인 채 흰색의 잠옷 위에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있었습니다. 린튼이 머리를 모로 꼬고 시선을 돌렸습니다. 나는 일어서서 인사를 했습니다.

"테도, 미안! 정말 웃긴다. ! 너한테 딱 어울려. 그렇죠. 히스클리프씨?" 그녀는 동생의 의자 너머로 몸을 기대어 섬세한 레이스가 달린 나이트가운을 마치 날개처럼 그의 등 뒤로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화가 난 듯 그녀를 찰싹 쳐 밀었습니다.

"블랑쉬 누나, 정신 차려. 그러다간 나이트가운에 차이겠다."

"지금 그럴 작정이야." 그녀는 의자 뒤에 걸어두었던 잉그램 경의 프록코트를 홱 잡아채어 거들먹거리며 입었습니다.

"린튼씨 보세요. 나도 이제 정숙하게 보이죠?"

"누나!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어서 나가봐."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단 단호했습니다.

"아 그래? 술 마시면서 가면을 쓰고 노름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어때? 그건 허튼 짓이 아닌가?"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왜 안 돼."

"여자가 여기 있으면 뭘 해. 가서 잠이나 자."

"헛소리하지 마. 여기 여자가 어디에 있어."

그녀는 난롯가로 가서 난로 굴뚝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손가락을 문질러 시꺼먼 그울음을 묻힌 뒤 윗입술과 뺨에 꼬리가 위로 향하도록 콧수염을 그렸습니다.

"이 방에 여자가 있다고 하는데, 히스클리프씨 여자가 있어요."

"없죠. 저 양반한테 잘못 보았다고 얘기하세요. 그렇지만 이름도 모르는 야성적인 성격의 사람이 하나 있긴 있습니다. 우리 가는 데에 그분을 초청하고 싶으니까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린튼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는 의자에 푹 구부리고 앉아 인사불성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실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히스클리프씨, 자꾸 부추기지 마세요."

그의 누이의 농담에 대한 나의 일갈에 그의 반대는 한칼에 죽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견뎌내려면 한번 되게 혼이 나 봐야 하죠."

블랑쉬 잉그램은 징징 짜는 소리를 내며 입을 비죽 내밀었습니다.

"좋아. 굳이 여기에 있겠다고 하니까 한 번만 하고 가."

그녀가 그의 얼굴에 키스를 하자 그는 손수건으로 열심히 뺨의 키스 자국을 지웠습니다. 그녀는 찬장으로 걸어가 군인 가면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자 잉그램 경이 소리를 쳤습니다.

"안 돼! 판을 돌려서 나오는 걸 집어. 우리도 그랬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재수가 없어!"

"벌써 집었는데 다시 돌려놓는다고 재수가 좋아지나?"

그가 총알같이 그녀를 향하여 돌진하였지만 그녀는 날쌔게 피했습니다. "잡아봐. 못 잡을걸. 하지만 내가 봐줬다. 다른 모자를 쓸게."

그녀는 판을 돌려서 나온 가면을 들고는 자기의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숯으로 그린 콧수염 프록코트를 입고 모자를 쓴,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촛불 옆에서 보니까 그녀는 진짜 젊은 사내아이처럼 보였습니다. 그 녀는 남성 역이든 여성 역이든 어떤 역에도 어울리는 고전 연극의 배우처럼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잉그램 경의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그래 봤자야. 여자들은 페어플레이를 모른다고."

그녀는 그를 등지고 앉았습니다. 그녀는 신도 신지 않은 한 발을 나의 의자 위에 올려놓고 무릎에 기댄 채 턱을 앞으로 쑥 내밀었습니다.

"시가나 한 대 피워볼까?"

나는 상자에서 시가를 한 개 꺼내어 잘 다듬은 뒤 그녀의 입에 물려 주었습니다. 내가 그녀 앞에 있는 촛대를 들어 가까이 대주자 그녀는 불을 붙이는 동안 내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시가를 처음 피워본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내 어깨 너머를 흘끗 쳐다보며 연기를 내뿜었습니다. "고맙기도 하셔라."

존이 새 카드를 갖고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는 거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눈짓을 하며 카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습니다.

나는 블랑쉬 잉그램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 이제 가서 자도 괜찮아. 가기 전에 이 젊은 친구한테 와인 한 잔 따르시겠나?"

존이 술을 한 잔 따른 뒤 인사를 하고 나갔습니다. 그녀는 아주 멋지게 잔을 비웠습니다.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 거야?"

"루 게임을 하고 있어. 누나는 베팅을 하면 안 돼. 오후에 돈을 다 잃었으니까."

"판돈은 대줘야지. 테이블 위에 있는 돈은 다 네 것이잖아?"

"어떻게 갚으려고?"

"그 정도는 딸 거야. 재수가 없어서 잃으면 엄마한테 갚아달라고 할게. 내가 부탁하면 엄마는 뭐든지 들어주잖아."

"그래 멍청한 짓 실컷 해봐라. 앉기나 하자구. 자 여기 있어."

그는 그녀에게 돈을 세어주었습니다. 그녀는 추위를 타는 지 내 맞은편 의자에 발을 깔고 앉았습니다. 잉그램 경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다보더니 린튼 쪽을 보고 머리를 끄떡였습니다.

"차례가.....?"

린튼은 분명 게임을 할 의사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가면은 목둘레까지 내려와 있었으며 그의 숨소는 코를 고는 소리처럼 거칠게 들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어깨에 손을 대자 그는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뺐습니다. 경계심 때문이랄까. 그 무엇 때문인지 그는 몸을 움직였습니다.

"손대지 마. 도움 같은 것 필요 없으니까. 게임 할 준비는 나도 되어 있어요."

나는 멋쩍어하는 표정을 짓고 카드를 섞었습니다.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잉그램 경은 아무런 표시가 없는 금박을 입힌 카드 뒷면만을 보게 되었으므로 게임과 베팅에서 몸을 사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도 모험을 가급적 삼갔습니다. 그러나 블랑쉬 잉그램은 대담하고도 무모했습니다. 실제로 테이블 위에 놓을 수 있는 만큼까지만 베팅 을 할 수 있다는 규칙을 세우지 않았다면 베팅은 끝도 없었을 겁니다. 이 베팅 규칙이 없었다면 그녀는 사냥꾼용의 뚜껑이 앞뒤로 달린 회중시계며 에메랄드 목걸이며 여동생의 애완용 개까지 모두를 잃었을 겁니다.

졌기 때문에 잃었던 거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판마다 죽지 않고 겁도 없이 달려들었으니까요.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서두르기만 했습니다. 세보지도 않고 돈을 걸고 그저 새로운 재미를 위해 게임을 했으니까요.

에드거 린튼도 블랑쉬 잉그램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돈을 잃었습니다. 그는 큰아버지의 훈계에 영향을 받았거나, 아니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이 없었을 겁니다. 그는 무표정하면서도 경멸하는 눈초리로 베팅 액수를 조용히 결정해냈습니다. 그는 계속 술을 마셔댔으므로 한 잔을 더 마실 때마다 침착성을 그만큼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이기는 사람은 나였으므로 그는 더욱 침착성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실, 즉 내가 집중만 하면 원하는 대로 카드를 가질 수 있는 능력에 무엇인가가 최초로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전에 얘기했지만, 나는 운에 맡긴 승부를 할 때마다 대체로 행운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게임이 특별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에는 전혀 알지를 못했습니다. 아니면 그 러한 능력은 이러한 특이한 사람들과 환경-비바람이 몰아치는 늦은 시각, 나의 오래된 적이 가까이에 있고 괴기한 모습의 가면은 난롯불을 받아 번쩍이고 나 스스로도 가면 뒤에 숨어 있는 환경-이 어우러져 그날 밤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나는 내 마음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신속하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테이블이라든가 잔이라든가 가면, 카드, 그리고 카드를 잡고 있는 손 등 모든 것들이 내부까지 투명하게 보이는 듯했습니다. 모든 그림자들이 갖고 있는 의미가 환히 보이는 듯했습니다. 갑자기 나는 나의 힘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드를 돌릴 때 클럽 중에서 잭이 들어왔으면 하고 상상을 하면 정말 잭이 들어왔습니다. 나는 탄식이 나왔습니다.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일단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자 나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려니 생각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필연적인 일이라고까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전에 그저 흘끗 보았던 반신반의하던 미래로 가는 길이 확인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잉그램 경이 케이블 한가운데 있는 돈을 나에게로 쓸어주면서 말했습니다. "린튼 씨, 잘 안되나 봅니다. 이제 히스클리프 씨에게 돈이 붙는데, 운이야 왔다 갔다 하는 거니까 알 수가 없겠죠. 날이 새기 전에 돈이 붙기 시작할지도 모르죠."

"틀렸습니다. 히스클리프 씨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안 돼요. 저 사람에게만 재수가 따라붙죠. 어렸을 때도 그랬으니까요."

나는 잉그램 경에게 귓속말로 얘기를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린튼의 쾡한 눈이 촛불에 번득였습니다. 그의 목 아래로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 시가를 한 모금 빨면서 쿡 내뱉었습니다. "오늘 완전히 한 쾌 잡는군요. 어쩌면 그렇게 잘해요?"

린튼이 중얼거렸습니다. "행운의 여신은 저 사람을 제일 사랑하지만 결혼은 나하고 할 겁니다. 봄에 결혼할 거니까. 술이나 더 합시다!"

잉그램 경은 나에게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그의 술잔을 손으로 막았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만 마십시다. 우리 모두 취한 것 같아요. 병도 비었고." 나는 우리가 마신 첫 번째 술병을 뒤집어 보이며 그에게 말했습니다. "구두쇠! 도둑놈 같은 녀석!"

린튼은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의자를 뒤로 차서 바닥에 쓰러뜨렸습니다. "술이 가득 든 병을 다리로 슬쩍 밀어두는 걸 다 봤어. 네가 무슨 권한이 있어, 임마. 거지 주제에! 어이! 이거 못 놔!"

잉그램 경이 그를 붙잡고 그의 주정을 잠재우려 했으므로 이 마지막 말은 잉그램 경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술이 많이 취했습니다. 이러다간 점점 추해지니까 가서 잠이나 잡시다. 이러면 주인에게 욕보이잖아요."

"주인? 저 녀석이 주인이라고? 웃기는 소리군!" 린튼은 잉그램 경을 뿌리치려다가 내가 밀어두었던 병을 차서 넘어드렸습니다. 병이 바닥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떼구르르 굴렀습니다.

그가 낄낄거리며 웃었습니다. "우습군 정말! 저 놈이 주인이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집시 주제에 처지가 바뀌었다고? 에잇, 사기꾼 놈아!"

블랑쉬 잉그램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불어로 얘기를 했습니다. "린튼, 그만해요! 아니면 나중에 후회할 일이 있을 거요! 히스클리프씨에게 억하심정이라도 있어요? 해를 끼친 것도 없는데 왜 그래요? 좋은 친구잖소!"

"좋은 친구라고! 좋은 친구라고 생각한다? 저 인간이 늑대란 걸 모르나 보지?"

"갔군 갔어. 가서 잠이나 자요."

"좋아. 이건 뭐야? 이 사기꾼이 밤새 카드 놀이에서 사기를 쳤다고."

블랑쉬 잉그램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린튼씨, 히스클리프 씨가 사기를 쳤다면 내가 먼저 알았을 거예요."

"그래도 사기를 쳤어. 소매치기나 다름없어."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 결국 나는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블라우시 잉그램이 내가 속인 증거가 있냐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아냐구요? 나는 노름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고 저 녀석은 주머니 속에 다른 카드를 갖고 다니는 놈입니다. 주머니를 뒤져보면 알 겁니다."

잉그램 경이 마침내 팔로 그의 어깨를 붙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나 알고 있어요? 히스클리프 씨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내쫓을 수도 있어. 자꾸 이러면 저 사람도 어쩔 수가 없을 거요. 나도 저 사람 편을 들 수 밖에 없고."

"저 사람을 내쫓고 싶으면 내쫓으세요. 나도 동생과 같은 편이 되어 드릴게요. 이래 본 적은 없지만 동생보다도 더한 사람이 바로 나예요!"

나는 모멸 섞인 눈초리로 린튼을 바라다보았습니다. "저 사람하고 싸워요? 저 얼간이하고요? 잉그램 양, 당신하고 싸우는 게 나을 겁니다."

이 말에 에드거 린튼은 잉그램 경이 붙잡고 있던 한팔을 비꼬아 풀더니 테이블에서 빈 병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는 그 병으로 나를 내리쳤지만 빗나가 호랑이 가면의 귀에만 상처를 냈습니다. 잉그램 경이 그의 두 팔을 자기 옆구리에 대고 꼼짝 못 하게 눌렀습니다. 내가 그 지렁이 같은 놈을 정말 없애버리려고 작정한 순간 블랑쉬 잉그램이 나를 제지하려고 팔을 뻗다가 말고 어정쩡한 자세로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은 내 어깨 너머의 무엇인가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메어리니?" 나는 몸을 돌려씁니다. 찬장 옆의 침침한 곳에 머리카락이 시커먼 어떤 여자가 잉그램 양의 가운 비슷한 하얀 가운을 입고 서 있었습니다. 그녀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그 길고 까만 머리카락은 케어리의 머리카락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빨간색의 인디언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우리가 린튼과 싸우고 있는 동안 그것을 쓴 게 틀림없었습니다.

"메어리야? 가면은 왜 썼어? 왜 아무 말 않는 거야?" 블랑쉬 잉그램이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대답이 없이 우리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왔습니다. 잉그램 경은 그녀가 그 집에서 일하는 하녀인데 장난을 치나 보다 하고 말했지만 우리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습니다. "메어리, 그렇게 하니까 무섭잖아. 가면 좀 벗어!"

그래도 그 여자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테이블 주위의 불빛 옆으로 다가섰습니다.

잉그램 양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메어리가 아냐! 메어리가 아냐!"

블랑쉬와 테도와 에드거는 나와 그 이상한 여자만을 불빛이 환한 가운데 두고 모두 물러선 것 거처럼 보였습니다. 그 여자가 내게 다가왔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고 그녀를 제지할 수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천천히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더니 가면을 벗기고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그녀가 쏘아보는 눈빛에 압도되어 방 끄트머리가 점점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불빛 아래로 보이는 가면의 모양은 나의 눈앞에서 모양이 변했습니다. 조각을 해 놓은 인디언의 뺨과 무시무시한 입이 흉한 모습으로 변하더니 히죽 웃는 모습만이 보였습니다. 여자 허수아비 같았습니다.

나와 그 여자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들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었습니다. "저 가면을 벗겨봐야겠어요."

그녀는 소리를 지르더니 정말 그 이상한 여자의 가면을 벗기려고 했습니다. 옥신각신하는 중에 하얀 나이트가운은 번쩍 빛나는 듯하더니 인디언 가면이 바닥 위로 떼구르르 굴러떨어졌습니다. 그 여자는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나이트가운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휘감겨 올라가고, 음산하고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는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 열심히 그녀를 뒤쫓아갔지만 그 여자가 발판을 걷어차는 바람에 고꾸라지며 옆에 있는 테이블을 넘어뜨려 그 위에 있던 것이 모두 다 쏟아졌습니다.

우리가 블랑쉬 잉그램을 간신히 일으켜 세우고 그녀가 다친 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에는 이미 그 이상한 방문객의 추적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게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존과 리가 들어와 가구들을 제자리에 놓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어씨가 실내복 차림으로 나타났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잉그램 경이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홀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술 마시고 소란이라도 피워 기분이 언짢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여자가 누구였어요?" 나는 블랑쉬 잉그램이 입고 있는 옷에서 촛농을 닦아내면서 조그만 목소리로 물어보았습니다.

"메어리는 아니었어요." 내가 자꾸 물어보니까 그녀는 정나미가 떨어질 듯한 리의 시선이 싫은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갔습니다.

에드거 린튼은 소파에 푹 주저앉아 머리를 손에 파묻고 있었습니다. "린튼씨의 잠자리 좀 준비해주세요."

잉그램 경과 나는 린튼의 팔을 우리의 양 어깨에 걸고 그를 위층의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린튼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 나는 내가 그를 돌보겠다고 했습니다. 잉그램 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습니다.

"훌륭한 분이시니까, 이 사람의 결례를 용서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아까보다 못한 일에 사람을 죽이는 것도 보았습니다. 더군다나 몹시 취해 있으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그날 밤 세번째로 그와 나는 둘이만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드러누워 흐리멍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촛불의 모습이 그대로 비춰져 있었습니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습니다.

"에드거, 정신이 들어?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해." 그는 완전히 맛이 간 사람처럼 말했습니다.

"우린 꽤 오래된 친구지?"

"친구인 적은 없었어."

"우리 사이에는 그래도 끈이 있잖아. 케케묵은 끈 말이야."

"나가봐."

"술에 취해서 기억을 할 수 없겠지. 이해할 수 있어."

"끈이란 건 없어. 넌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난 너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야."

"웃기는 소리!"

"웃기는 소리는 네가 하고 있잖아."

나는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차고 끈적끈적한 손바닥을 꽉 쥐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도 우리는 서로 아는 사이였으니까 내일 너의 안전을 위해 최고의 친절을 베풀어주지."

"내 안전을 위해?"

"그럼. 너와 난 내일 말을 타고 야외로 갈 테니까. 가다 보면 둘이서만 있게 되는 경우도 있을 거야. 이런 시골에서 멀리까지 말을 타고 나가다 보면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어. 길이 없는 곳도 많고 길을 잃는 경우도 많으니까. 또 잘못하면 말에서 떨어져 머리를 바위에 부딪치는 경우도 있어. 아무리 똑똑해도 어쩔 수가 없는 거야."

에드거 린튼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습니다. "어어..... 그럼 마차를 타지."

"이미 큰아버지가 결정을 했으니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큰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겠지. 재산도 탐이 나고, 그렇지? 큰아버지 집이 스러시크로스 농장 정도는 능히 될 텐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무런 상관이 없지. 나도 알아. 캐시를 사랑할 권리도 신사처럼 행동할 권리도 내겐 없어. 너에 대해서 신경을 쓸 권리도 없어 이게 바로 네 생각이지?"

나는 다시 그의 무감각한 손바닥을 비틀었습니다.

"이러지 마! 혼자 있게 내버려 둬!"

"그렇게 할 수는 없어. 혼자 있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야. 특히 내일은 안 돼!"

"내일?"

"내일 일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생각이야. 네 놈이 치명적인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말이야."

"치명적이라고....."

"그래, 네 놈에게 치명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은 캐시가 바라는 게 아냐. 너나 나나 캐시의 노예이니까, 그렇겠지?"

린튼의 얼굴이 몹시 창백해졌습니다. 그의 이마에 새로이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습니다. 나는 그의 뺨을 툭툭 건드리며 일어섰습니다. "잘 자게. 내가 자네의 미래에 대해 예견하는 것만큼 달콤한 꿈이나 많이 꿔두라고." 나는 이 말을 해주고 그 방을 떠났습니다.

아침 일가 존이 와서 아어씨가 나를 찾는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내가 무슨 일로 그러는지 이유를 물어 보았지만 그는 그저 머리를 흔들면서 '어른이 즐기시는 오묘한 게임입니다' 라고 아어씨가 자주 사용하던 말만을 되풀이했습니다.

"그 커튼 줄에 손대지 마." 아어씨의 목소리였습니다. 침실이 어두웠습니다. 그가 누워있는 벨벳 시트가 깔린 침대 주위에는 아주 짙은 그림자가 깔려 있었습니다. 아어씨의 얼굴은 베개의 색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창백했습니다. 방에는 음울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내가 걷으려고 했던 창문의 두꺼운 커튼 사이로 아주 가느다란 은빛 줄기만이 하나 새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손을 내렸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몸이 불편하신가 보지요?" 나는 아어씨의 방에 불려 와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냐. 할 말이 있는데...." 그는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나는 다시 손을 뻗어 커튼을 확 잡아당겼습니다. 작두날처럼 날카로운 햇살이 일순간 방안을 비추었습니다. 은은한 빛을 내던 침대 깊숙이 햇살이 닿았습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팔로 눈을 가리면서 아어씨가 소리쳤습니다.

"다치셨잖아요!" 강한 햇빛에 아어씨의 얼굴은 더욱 헬쓱해 보였습니다. 머리는 형클어져 엉망이었습니다. 나는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침대 시트 위에 핏자국이 보였습니다. 그의 오른팔 주위에 피가 뒤엉켜 있었습니다.

"어떻게 되신 거예요?" 나는 더 잘 살펴보기 위하여 그의 어깨 위에 손을 대고서 몸을 구부렸습니다. 아어씨는 화가 났는지 나를 확 밀쳤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고? 적반하장이군! 네 놈이 무슨 짓을 했나 스스로에게 물어봐! 술 마시고 노름하고 오만가지 법석을 밤새 떨어놓고서는. 내가 이따위 고통이나 당하려고 너 같은 놈을 키웠는지 알아?"

"피가 흘러요." 나는 그가 해대는 푸념을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습니다. "이유를 말씀해주셔야죠. 어디를 다치신 거예요?"

대답 대신에 그는 침대 시트에서 손을 떼었습니다. 손수건을 꼭 동여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손수건을 풀었습니다. 핏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 사이로 빨간 피가 스며 나왔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처난 손을 잡고 살펴보았습니다. 손에 땀은 없었지만 뜨거웠습니다.

"손바닥이 날카로운 칼날에 베였군요. 엄지손가락의 지문 깊숙이까지 상처가 났는데요. 조금 더 힘을 주어 칼을 휘둘렀다면 손가락도 잘려 나갔을 뻔했습니다."

지난밤의 그 수수께끼 같은 여자가 생각이 나서 물었습니다. "누구에게 당하셨어요?"

"내가 당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

"누군가가 칼을 들고 이렇게 휘둘러댔을 텐데. 어르신이 직접 자해를 하시지는 않았을 거구요. 게다가 어젯밤에는 불청객이 침입했었잖아요."

아어씨 눈이 달아오른 불빛처럼 이글거렸습니다. "자네가 본 게 뭔데?"

"하얀 옷을 입은 여자였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여자라고? 정말 그런 여자라면 귀신이야. 귀신, 술과 담배에 절어서 머리가 띵띵할 때 방탕한 겁쟁이들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거야."

"블랑쉬 잉그램을 넘어뜨릴 만큼 힘이 세었는데요." 잠시 그의 긴장된 모습에 미소가 스쳤습니다.

"잉그램양에게 그렇게까지 했다고? 금시초문인걸."

나는 갑자기 자제력을 잃었습니다. "뭐라 말씀하시든 분명히 사람이 들어왔던 게 틀림없습니다. 어른을 미워하는 여자가 나타나서 상처를 입혔습니다! 상처를 입히려고 작정하고 그런 거니까 더 심하게 다쳤을지도 모릅니다."

"입 닥쳐!" 그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그는 탈진하여 누우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난 누구에게 공격을 받은 게 아냐."

"아니라뇨? 어쨌든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의사를 먼저 불러와야 하겠습니다."

"안 돼." 그는 성한 팔로 나를 제지했습니다. "아냐. 자네가 의사 노릇을 해줘."

나는 그가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그가 다시 나를 막았습니다.

"진담이야. 히스클리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래. 아무도 알면 안 되니까 그러는 거야. 존도 알면 안 돼. 그럴 거였으면 아침에 존을 불러 지시를 했을 거야. 자네만 알고 있어. 여기에서 본 일을 밖에 나가 얘기하면 안 돼. 맹세할 수 있지?"

"괜히 지체하면 안 돼요. 카터 선생님을 불러올게요."

"먼저 다짐부터 해."

", 알겠습니다. 얘기하지 않을게요. 이제 가보겠습니다."

"자꾸 성가시게 하지 마. 자네가 의사 노릇을 하라고 얘기했잖아. 다니엘이 말을 수술하는 걸 옆에서 도와준 적이 있지?"

"."

"그러면 수술하는 법을 약간 배웠겠지?"

". 조금은....."

"다니엘 말로는 자네 솜씨가 자기를 능가한다고 하던데. 어쨌든 좋아. 이 베인 상처를 자네가 꿰매야겠어. 알아듣겠어? 엄지손가락 상처가 심한 걸 자네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까. 한번 잘 꿰매봐. 말의 상처를 꿰매듯이 사람의 상처도 바늘로 단단히 꿰매기만 하면 돼. 가서 수술도구를 가져와.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까 보는 사람은 없을 거야."

아어씨는 짓궂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혹시 보는 사람이 있어도 잉그램 방이 바로 이 옆방이니까 자네가 그녀에게 볼일이 있어 왔다 가는 줄로 알 거야."

나는 그의 상처를 대강 다시 묶고 나갔습니다. 내가 10분 뒤에 수술 도구 상자를 들고 돌아오니까, 그는 깜빡 잠이 들었는지 내 발자국 소리에 소스라치게 날라며 눈을 떴습니다.

"괜찮아요. 다들 자고 있습니다." 나는 가장 작은 바늘과 집게를 상자에서 골랐습니다.

"꽤 아플 텐데, 식당에서 브랜디를 좀 가져다 드릴까요?"

"좋지. , 더 좋은게 있다. 화장대에 있는 가운데 서랍을 열어봐. 그래. 거기. 그 작은 약병하고 잔을 꺼내."

나는 그것들을 꺼냈습니다. 그 작은 약병에는 액체가 담겨 있었습니다. 불빛에 그것을 비춰 보니까 빨간색이었습니다.

"됐어, 잔에 물을 반쯤 따르고, 병의 눈금에 표시된 만큼만 약을 따라."

나는 눈금을 제어 따르며 물어보았습니다. "아편인가요?"

"아냐. 아니 나도 모르지. 아편이 눈곱만큼은 들어 있겠지. 이태리에 있는 약초상에게서 얻은 거야. 싸우다 다쳤을 때를 대비해서 구해둔건데. 전혀 필요가 없어서 부적처럼 갖고만 있었어. 통증을 없애줌과 동시에 심장을 보호해주는 약이야. 그렇지. 거기에...... 으음 ..... 약기운이 올라오는 거 같은데."

그는 침대 모서리로 다리를 휙 돌리더니 손을 테이블 위로 내밀었습니다. "시작해!"

나는 스폰지로 상처를 닦고 수술을 시작했습니다. 찢긴 자리의 상처가 깊었습니다. 나는 피부를 봉합하기 전에 근육을 먼저 꿰매야 했습니다. 이태리 마법주로 튼튼하게 무장한 사람일지라도 그러한 수술은 굉장한 불안을 초래할 게 뻔했습니다. 상상만 해봐도 소림이 끼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될 수 있으면 환자를 약을 올려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상처가 지독한 걸 보니까 칼로 찌른 다음에 비틀었나 본데요. 뼈마디로 옆까지 상처가 났어요. 가면을 쓴 여자가 누군데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상처를 냈습니까?"

나의 가시 돋친 말이 적중했습니다. 아어씨는 뺨을 벌겋게 붉히더니 이맛살을 찌푸렸습니다. "얘기했잖아? 나를 공격한 사람은 없다고.....!"

"그게 말이 됩니까?"

".... 이 세상에서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나에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워. 만약 계속 그딴 생각을 하고 싶으면 입이라도 다물고 있어. 그런 생각조차도 하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난 망해. 잠깐 기다려봐. 그 여자가 가면을 쓰고 있었다고 했지?"

나는 어젯밤에 사고가 일어났던 상황을 그대로 설명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상처 자국이 제법 길었으므로 나는 일부러 이야기를 질질 끌었습니다. 잉그램 경이 사기 친 얘기, 블랑쉬 잉그램이 나타난 얘기, 린튼이 툴툴거리던 얘기도 했습니다. 물론 내가 카드 놀이를 끝내주게 한 것이라든가 린튼의 비밀 거래는 생략했습니다.

아어씨는 내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밝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뭐랄까, 전에 곪아 있던 화가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수술이 끝날 때쯤에는 껄껄 웃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약에 취했는지 평상시에 하던 것 이상으로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아이고야~. 그래서 그 친구들을 모두 거덜냈다고! 잉그램의 속임수를 못 본 척해준 것은 자네가 친절을 베푼 것이나 다름없어. 빈틈없이 잘한 거야. 끗발이 올라 런던에서 유행하는 가면을 쓰고 놀던 광대같은 녀석을 두 손 들게 했으니까 앞으로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겠는데, 린튼에게도 신중하고 부드럽게 대해주었다고? 까닭도 없이 무뚜뚝하고 자제력도 없는 그 친구 태도에 사실은 무척 당황했었는데, 그리고 뭐 잉그램 양도 마음껏 요리했다고? 참 기가 막혀. 그러나 조심해. 자네가 얻었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하렘의 노예가 아니야. 한번 돌아서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만큼 깐깐한 여자야!"

"잉그램양에 대해서는 딴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 자네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여자 생각만 하고 있지. 그러나 잉그램 양도 한가지 장점은 있어. 그녀의 라이벌이 그림의 떡이라면 그녀는 풋풋한 생과일이나 마찬가지야."

이 말에 나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아래층에서 발소리가 들리는데요. 제가 이곳에 온 걸 비밀로 하려면 지금 나가야겠습니다."

나는 문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 조용히 해. 밖에까지 발소리가 들리겠다."

"그럼 창문으로 나가겠습니다."

"- 단한 친구야. 로지아 지붕이 아래층에 있다는 것을 다 기억하고 있으니. 내 형과 내가 자네 나이였을 때니까 20년 전일 거야. 우리가 그곳으로 종종 다녔었는데 지금은 전혀 사용을 하지 않고 있지. 그래도 아직 쓸모가 있을 거야. 이 피 묻은 천 조각을 싸서 자네 상자에 넣을 테니까 나중에 태워 없애. ... 히스클리프, 적어도 오늘만은 주인의 의무를 대신 맡아서 해봐. 사람들에게 내가 몸이 좀 아프다고 얘기하고."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먼저 포도 넝쿨이 뒤덮인 아래의 지붕 위로 상자를 떨어뜨렸습니다. 내가 한 발을 창문 밖으로 걸쳐놓았을 때 아어씨가 다시 나를 불렀습니다.

"조심해 가, 히스클리프, 들리나?" 그가 짐짓 점잔을 빼며 말했습니다.

"어젯밤에 집안에 들어왔다가 놀라 달아난 건 좀도둑이야."

나는 그가 어젯밤의 사건을 공식화하기로 작정을 하여 이렇게 짓궂은 방법으로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좀도둑이 있었는데요?"

"하얀 옷을 입고 가면을 쓴 행자 모습의 집시 여자 말이야. 자네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놀 때에 잠시 나타났다가 부엌으로 갔다며, 부엌에서 요리사와 잠깐 마주쳤다가 도망친 여자 말이야."

"잃어버린 건 없습니까?"

"잉그램 경의 가면을 훔쳐서 도망가다가 떨어뜨렸어."

"뭐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군요. 말씀대로 정말 지독한 여자였어요. 화가 지독히 났었거나 아주 고통을 받던 여자인 것 같아요. 잘은 모르지만 손가락에 상처를 그리 깊이 내놓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걸 보면 사람 목을 베고도 그랬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라고는 하지만 내 스스로 본 것은 옮겼을 뿐이었습니다. 우리 둘밖에 없는데 그가 그런 식으로 모르는 척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어씨는 나를 잠시 쏘아보더니 갑자기 표정이 바뀌었습니다. "꺼져. 얼른 꺼져버려! 정말 재수 없는 놈! 그 싸가지 없는 소리는 듣기도 싫어! 좀 더 건전한 방향으로 생각할 수는 없어?"

그는 마치 나를 밀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갑자기 힘을 쓰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나는 로지아 지붕으로 펄쩍 뛰어 도망쳤습니다.

두 시간 뒤에 내가 아침 식사를 하러 가니까 어젯밤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문을 열었습니다. 잉그램 경이 자기 어머니와 여동생 메어리 그리고 대령 부인에게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모두들 그 사람 주위에 몰려 서 있었습니다.

"히스킬리프씨, 기가 막힌 소식이 있어요! 어젯밤에 나타났던 여자는 집시랍니다. 도둑 일당 중의 한 명 같은데 오늘 아침까지 헤이 광장에 진을 치고 있다가 소리 없이 사라진 것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잉그램 부인이 두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세상에...... 그 요상한 여자한테 자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뻔했네!"

덴트 대령이 커피를 마시다가 그만두고 꼬고 앉은 다리 위로 손가락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잉그램 부인, 그런 여자 때문에 위험했던 게 아닙니다. 그런 인간들의 수법은 난 잘 알아요. 그 여자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당이 먼저 들여보낸 스파이에 불과해요. 값 나가는 물건이 어디 있나, 어떤 것들이 있나, 그 물건 주인들이 어디에 있나 등등을 몰래 알아보기 위해서 여자가 먼저 들어와서 확인한 다음, 숨어 있는 패거리들에게 보고를 하면 불시에 집에 쳐들어오려 했던 겁니다."

열려진 창문 옆에서 커피를 마시며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던 블랑쉬 잉그램이 끼어들었습니다. "밴시처럼 접근했는데 그녀가 몰래 들어왔다는 것은 말도 안 돼요. 그 여자의 주요한 관심사는 팔찌 같은 시시한 게 아니라 히스클리프씨였어요."

잉그램 부인이 손잡이가 달린 안경을 올려쓰며 물었습니다. "너도 거기에 있었다는 얘기 아냐? 남자들끼리 한밤중에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 있었다는 거냐?"

", 엄마. 전 거기 있었어요. 테도도 있었구요. 테도말고 더 쓸 만한 보호자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친절한 히스클리프씨도 환영을 했는데요, ."

그녀는 장난기가 섞은 표정으로 나에게 머리를 꾸벅했습니다. 나는 잉그램 경의 윙크를 무시하고 이 사건은 카드놀이를 한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그 뒤 나는 화제를 바꾸어 아어씨가 몸이 편찮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모두들 대단한 걱정을 표명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마차의 좌석 배치를 끝냈으니까 야유회를 갈 준비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 굳이 말을 타고 가겠다고 하자 잉그램 부인은 위험한 딸을 옆에 끼고 가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덮개가 없는 조그만 2륜 마차를 타고 가기로 타협을 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 어머니를 수도원까지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히스클리프씨와 린튼씨는 탈 수가 없는데." 메어리 잉그램이 걱정을 했습니다.

"린튼씨와 저는 말을 타고 갈 겁니다. 아어씨가 빌제법을 타도 좋다고 허락하셨으니까요."

"이놈의 다리만 성했으면 나도 타고 가는 건데." 덴트 대령이 아쉬운 듯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안 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에드거는 오늘 아침에 몸이 좋지 않아서 집에 있겠대요."

"아프다고?" 덴트 대령의 얼굴이 갑자기 시뻘개졌습니다. "젊은 놈이 아프다는 게 말이 돼! 같이 가기 싫으니까 책이나 너댓 권 읽으려는 심보지 뭐야!"

그는 툴툴대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애를 썼습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지팡이를 짚었습니다.

"내가 가도록 만들어주지!"

"여보, 그렇게 덤비지 말아요! 에드거는 어젯밤 사건으로 마음이 산란해서 그래요."

", 그래요? 그까짓 여자 때문에 훌쩍거리면서 숨는다는 거요? 그래 당신은 그따위 놈을 우리 덴트 가문의 대를 이을 놈으로 정하자는 거요? 한번 두고 보라고!"

부인이 답답한 심정으로 두 손을 쥐어트는 동안 대령은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우리는 그의 지팡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홀에서 점차 멀어져 침실로 가는 계단을 향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틀 전에 예상했던 대로 일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에드거와 나는 말을 함께 타고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을 섰습니다. 그러나 당신에 대한 사랑의 말은 한마디도 없이, 아니 서로 아무 말도 않고 갔습니다. 에드거는 그저 묵묵히 냉랭한 태도를 지었습니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는 거짓말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는 어젯밤 술을 상당히 마신 데다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얘기한 것들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내 옆 가까이에서 말을 타지 않으려 한다거나 마차가 시야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린튼이 말을 다루는 것을 관찰할 기회는 충분했습니다. 그는 말에 너무 신경을 써서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무릎을 너무 꼭 붙여서 안장에 부딪히는 소리가 타닥타닥 났습니다. 그는 부츠를 등자에 꼭 붙이고 있고 주먹은 고삐를 너무 꽉 쥐어 핏기가 없었습니다. 빌제법은 갈기를 세우고 나를 향해 눈알을 굴렸습니다. '내 등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게 도대체 뭐지?' 빌제법의 두 눈이 이렇게 나에게 물어보는 것 같았습니다. 에드거가 말을 너무 천천히 몰았으므로 수도원으로 가는 행렬은 굼벵이가 기는 것처럼 느렸습니다.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내가 전에 타본 적이 있는 미네르바를 타고 가야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나는 서두리지 않고 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어젯밤부터 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길에서 예정과 속도가 달라도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잉그램 양은 참지를 못했습니다. 먼젓번에 낙마를 해서 포기했던 그녀는 말타기의 즐거움을 목숨을 걸고라도 확실하게 즐기고 싶은 듯 린튼의 주의와 잉그램 부인의 제지에도 아랑곳없이 말이 최고 속력을 내도록 채찍질을 해댔습니다. 잉그램 부인이 애걸복걸하며 말렸지만 그녀는 몇 번씩이나 2륜 마차가 우리 둘을 앞서 나가도록 했습니다. 아마도 나와 경주를 하려고 유혹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기 어머니도 히스테리컬하게 말리는 바람에 그녀는 결국 이러한 장난을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채찍으로 린튼의 목을 낚아채려고 했습니다. 일단 성공을 하면계속 장난을 치기가 쉬웠으므로 그녀는 내 옆에서 바짝 마차를 몰아붙이며 과일 던지기 놀이를 시작했습니다. 이 나들이를 위해서 그녀는 양치는 소녀처럼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과와 배를 담은 예쁜 바구니를 한쪽 팔에 들고 다른 쪽 팔로는 그 구부러진 몸의 균형을 잡아야 했습니다. 나는 앞길로 정찰한다는 핑계로 미네르바를 전속력으로 몰아 다른 사람들을 멀찌감치 떼어놓았습니다. 이 길은 나에게도 낯설었기 때문에사실 그것은 핑계가 아니었습니다. 혼자서 말을 탈 때면 나 는 늘 반대편 길로 해서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편 길은 너무 비좁아서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벅찰 정도였습니다.

캐시. 우리가 사랑을 속삭이던 여느 날과 다름없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꼬리를 치면 나뭇잎의 부드러운 바닥이 한껏 자태를 뽐내며 반짝이고, 갑자기 센 바람이 소리를 내며 몰아치면 풀들이 납작 엎드려 가지가지마다 몸을 구부리던 그날들을 당신은 기억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둘 다 아직 어렸을 때 풀이 무성한 아주 가파른 산비탈 꼭대기 위에서 아래로 몸을 굴리면서, 즐거워하던 때의 날씨와 같았습니다. 넬리는 당신의 앞치마에 든 풀물 자국을 보고는 참 많이 야단치곤 했지요! 나이가 들자 우리는 야생말을 타고 바로 그 언덕을 힘껏 달려 내려오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달리다 보니 당신과의 추억들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반대편 언덕 위에 있는 나무들 너머로 보이는 수도원으로 가는 길목의 가파른 내리막길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에는 당신이 정말 그리웠습니다.

내 뒤를 따르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직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말에서 내려 다리가 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안전한지 살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일단 길 아래로 내려가 첫번째 모퉁이를 지나고 나니까 내가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기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무들이 울창했지만 가파른 경사 때문에 나무의 몸통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언덕과 거의 평행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나무들이 너무 빽빽하여 안으로 들어가니까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만큼 어두웠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보는 것도 숨쉬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생물의 페에 해로운 수증기들이 공기 중에 빽빽히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목 뒤의 머리카락이 쭈삣 섰습니다. 나는 급히 미네르바를 세웠습니다.

바람 한 점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귓가를 맴돌던, 나뭇잎이 즐거이 살랑대던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를 방해하던 것은 분명히 예상 못 했던 공백이었습니다. 잠시 딴생각을 해서 그렇게 느낀 것이 분명했습니다. 산골짜기가 가파르고 나뭇잎이 무성하여 바람기도 없는 공기의 흐름이 막힌 게 틀림없었습니다. 바람도 불지 않고 새소리도 들리지 않은 이러한 적막강산과도 같은 분위기 속의 고요함은 사실 죽음과도 같은 침잠의 상태였습니다. 계곡 바닥을 졸졸 흐르는 물소리만이 아주 멀리서 실날 같이 들려왔습니다.

미네르바가 천천히 걷도록 고삐를 늦춰 주었습니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니까 촉촉한 야생의 내음이 났습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 내음은 더 강해졌습니다.

마지막 귀퉁이를 도니까 육중한 돌 아치의 윗부분이 보였습니다. 다리는 수도원으로 흐르는 냇물의 양 끝을 가로질러 놓은 것 같은데 아직 냇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대해서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이곳은 평범한 수사들이 다니던 곳이 아니라 '언덕의 레드 경'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시뻘겋다기보다는 오히려 시꺼면 편이었는데 얼굴만 빼놓고는 고양이처럼 짧고 윤이 나는 검은 모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날카롭게 갈라진 발굽을 발대신 달고 다녔는데 무척 빨갰다고 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수도원을 세우고 부수는 일을 반복하기 전에는 그는 거의 잊혀진 인물이었습니다. 돌 건물이 오래되어 지붕이 못 쓰게 되니까 그는 언덕 안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언덕은 꽤나 깊숙해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천장과 벽에 달린 거대한 크리스털 거울에는 말이 없는 실크와 새틴과 금박이 입혀진 비품들만이 이중삼중으로 보이고, 삐죽 튀어나온 반짝이는 얼음덩어리 위로는 이름도 모르는 신선한 열매들이 잔뜩 열려 있었습니다. 마치 대궐 같았습니다. 그러나 볼썽사나운 레드 경의 그림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레드 경은 이 아름다운 거주지로 많은 사람을 유인하여 불로장생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가 아직 살아 있을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가 바위틈에서 튀어나와 나를 아래로 잡아끌까?

미네르바가 가만히 울어대는 소리에 나는 언덕 아래에 도착한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나는 무아지경에 빠진 사람처럼 미동도 않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섭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말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며 사람들이 건널 수 있는지 재어보았습니다.

다리는 너무 형편이 없었습니다. 로마인들이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아치는 2천년 전이나 다름없이 견고했지만, 아치 위에 덮어놓은 비교적 근래의 것으로 보이는 떡갈나무로 된 들보는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남쪽 끝부분이 썩어 있었고 다리의 중심부에는 마차가 푹 빠질 만큼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나는 걸어서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흐르는 물 위로 보이는 돌의 높이가 15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아찔하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조금 전에 블랑쉬 잉그램에게서 얻은 배를 충동적으로 구멍 속으로 던져보았습니다. 배는 아치의 한쪽 끝에 맞고 튕겨나와 곧바로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배가 아주 천천히 떨어지는 것 같더니 이윽고 녹색의 때가 낀 표석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습니다.

마차가 지나갈 수 없을 게 뻔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리의 북쪽 부분을 두드리며 살펴보았습니다. 말이 다리를 건너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가져온 물건들은 에드거와 내가 말 등에 싣고 운반할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걸어서 건너야 할 것 같았습니다.

미네르바에 올라탈 때 몸이 떨렸습니다. 이곳의 공기는 꽤 쌀쌀했으며 풀 냄새도 한층 짙었습니다. 나는 빠른 속도로 언덕을 되올라갔습니다.

다리 한쪽 끝에 마차를 세워놓고 다리를 건너, 우리는 마침내 시끄러운 골짜기를 벗어나 햇빛이 환히 비치는 산꼭대기에 다다랐습니다. 수도원이 한눈에 훤히 보이자 사람들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다같이 기뻐했습니다. 그 어떤 조경사도 크롬웰의 군대보다 더 미학적으로 설계는 하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지붕은 잡석처럼 부스러져 있었지만 대부분의 벽기둥은 온전한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반쯤 쓰러진 벽기둥도 있었고 더 밑으로 쓰러진 벽기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미로 같은 복도를 해매고 다니며 놀라기도 하고 무서운 소리도 들을 수 있었으므로 이런 불완전한 윤곽은 수도원 전체의 모습을 더 멋있게 하는 셈이었습니다.

지붕이 완전히 부서진 뒤 상당히 세월이 흘렀으므로 수도원은 말 그대로 제멋대로였습니다.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곳에는 들장미가 자라고 있었고, 기도 소리가 들리던 곳에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계단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고, 홀과 방에는 양떼가 뜯어먹었는지 풀들의 길이가 짧았습니다. 양 떼들에게 이곳은 휴일의 목장이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잡초 사이에 듬성듬성 보이는 돌계단은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윤이 나는 모자이크 장식 위에는 예수님의 얼굴과 반짝이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이곳을 지나간 사람에게 지나간 세월을 일깨워주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예배당도 파괴를 면치 못하여 지붕은 불에 타 없어지고 동서쪽의 높은 벽만 남아 있었으며 서쪽 벽에는 커다란 장미꽃이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만이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테도! 히스클리프씨! 바구니를 이리로 가져오세요.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았어요. 우리를 반기는 사절단이 있어요!" 먼저 예배당으로 달려간 블랑쉬 잉그램이 우리를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일하느라 엎드리고 있는 거죠? 아주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나 본데요."

들고나는 햇빛에 비친 그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사람의 모습을 한 수많은 조각품들이 풀밭에 평화롭게 누워 손을 가슴에 포개놓은 채 눈을 감고 자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왔는데도 눈썹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나팔소리가 들려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모두 돌로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대의 기사와 귀부인들의 대리석상이었습니다.

"연회용 테이블이 있어요!" 블랑쉬 잉그램이 아주 용감한 기사의 돌 가슴을 덮고 있는, 손잡이가 구부러진 커다란 둥근 갑옷을 지팡이로 툭툭 치면서 외쳤습니다.

"당신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는 기사의 툭 튀어나온 발가락 위에 과일 부가니를 걸었습니다. 존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마차에 남아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들의 눈총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인 역할을 맡아 천을 깔고 먹을 것을 그 위에 벌여 놓았습니다. 혼자서 주위를 둘러보던 덴트 대령 부인이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내려왔습니다.

"정말로 수도원이 있네요. 얘기하던 그대로예요. 고문대도 있고, 쇠로 된 단두대도 있어! 상상만 하던 것들이 있어! 해골을 쇠사슬로 벽에 걸어놓았어요!"

그녀의 말에 지친 사람들이 생기를 찾았습니다. 심지어 주교 석상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앵그램 부인까지도 일어나서 덴트 대령 부인을 따라 서쪽 벽 뒤의 길로 갔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그 길은 고문실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얄궂게도 수사들은 고문실을 후진에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들이 뼈더미를 보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나는 전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소리를 지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나의 일만 계속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도 내 뒤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캐시! 여기까지의 글을 읽고 놀라지나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화가 나서 편지를 내팽개쳤거나 찢어서 발로 뭉개버리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미안한 얘기지만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글을 읽는 동안 내가 일부러 이 모든 것을 쓰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내 글의 중심에는 당신이 있었습니다.

언덕 위의 풀밭에는 들꽃이 듬성듬성 있었다고 얘기했지요. 석상 사이에는 들장미, 패랭이꽃, 데이지꽃, 양지꽃과 같은 한여름에 피는 예쁜 꽃들이 무성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 임시로 만들어놓은 테이블의 중앙에 꽂아두려고 이 꽃들 중에서 아주 싱싱하고 예쁜 것들을 뜯어서 테이블의 중앙에 놓았습니다. 나는 접시와 은식기를 그 주위에 놓았습니다. 우리가 여기저기 움직일 때마다 근처의 외로운 떡갈나무에서 도토리가 토독토독 떨어졌습니다.

나는 혼자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면서 운명은 내 손 아래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 꽃으로 장식된 테이블 옆에 앉으며 물었습니다. "웃으시는군요. 누가 귀에다 재미난 얘기라도 했나요?"

"재미난 얘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용감한 기사가 이런 곳에서 이렇게 멋있는 여자와 단둘이 있게 되다니 꽤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말하기에 나도 그렇다고 얘기한 겁니다."

나는 무릎을 하나만 구부리고 그녀 옆에 앉았습니다.

"? 그럼 저 기사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쳐주겠네요."

그녀는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자기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 기사는 말이 없어도 제 가슴은 할 말이 많지요." 나는 꽃을 매만지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나의 입술에 대었습니다. 그녀는 얼른 뒤로 몸을 뺐습니다.

"피잇! 엉터리. 그러다간 장미 가시에 찔려 죽어요."

"잉그램 양의 화살에 찔려 아프다고 얘기했잖아요. 어떻게 치료해줄래요?"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는 잠시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녀는 황홀한 듯 나의 손을 입으로 갖다 대고는 베인 상처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습니다.

"됐어요! 상처를 다 치료해줬으니까 더 이상 불평할 필요는 없겠죠."

그녀의 아랫입술에서 피가 한 방울 떨어지려는 순간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었습니다. 나는 좀 더 가까이 다가앉았습니다.

우리의 숨결이 뒤섞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술이 닿기 바로 전에 그녀는 머리를 돌렸습니다. "엄마가 알면 뭐라 그럴까요?"

"어려운 질문이 아녜요. 잉그램 부인은 내가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물어보실 겁니다."

"그럼 뭐라고 대답할 거죠?"

"이것도 쉬운데요. 내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얘기하죠."

"네에?"

"알 수가 없어요. 현재로서는 그저 추측하고 기대하는 것뿐이니까요."

그녀는 앞치마에서 꽃을 하나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놓았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엄만 별로 좋아하지 않을걸요."

"엄마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잖아요."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죠."

"그럼요."

"그렇지만 자신의 즐거움과 관심이 서로 분명히 배치될 때는 어떻게 하죠?"

"정열의 기쁨이란 그 자체가 흥미 있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항상 비교를 해보는 습성이 있어요."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죠?"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죠." 나는 그녀의 볼에 입술을 댔습니다.

"겪어봐야 한다구요?"

"오늘 밤 사람들이 다 잠이 들면 내 방으로 와요."

그녀는 몸을 조금 뺐습니다.

"마구간에 있는 방이요? 거기에서 뭘해요? 한밤중에 빌제법을 태워주려고요?"

"블랑쉬가 원한다면 태워주지요." 나는 그녀에게 입맞춤을 했습니다.

"안 돼요. 사람들이 봐요."

"누가요? 엄마가요?"

". 엄마나 내가......"

나는 입맞춤을 하며 그녀의 말을 막았습니다. "어머니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해요."

"어떻게요?"

"재산이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 내가 블랑쉬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시니까 어머니는 당연히 방어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에드거 린튼이 부자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죠. 게다가 큰아버지인 덴트대령이 돌아가시면 더 부자가 될 거구요. 린튼에게로 엄마의 관심을 돌려놓아요. 반대하실 리도 없고 걱정도 사라질 테고 여러 가지 면에서의 경계심도 느슨해질 겁니다."

블랑쉬 잉그램은 웃었습니다. 그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내 제안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습니다.

"알았어요. 엄마가 들으라고 린튼의 귀에 대고 속닥거리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야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요. 잠깐! 그만 얘기해야겠어요. 린튼이 오고 있어요."

린튼이 모퉁이를 막 돌아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빌제법의 등에 대령을 태우고 오고 있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 얼른 일어서서 앞치마에 남아 있는 꽃잎을 내게 뿌리며 윙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에드거와 대령을 두 팔을 벌리며 반겼습니다. 그녀는 그들과 나란히 팔짱을 끼고 주교 석상 위에 앉았습니다. 대령은 아주 흡족해했지만 에드거 린튼은 당황하는 기색으 역력했습니다.

잉그램 부인과 다른 사람들이 서로 짜기라도 한 듯 다른 방향에서 나타나 해골의 섬뜩한 매력에 대하여 큰소리로 떠들어댔습니다. 잉그램 부인은 딸이 린튼과 함께 있는 광경을 보고는 안경을 올려 썼습니다. 그녀는 그 광경을 보고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윌프레드 경의 방패 너머로 고기와 와인 잔을 건네주었습니다. 내가 야유회에 대해서 2인자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면 얼마나 놀랄까 생각하고서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내가 푸딩을 돌리는 동안, 블랑쉬와 메어리는 꽃을 줍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식사를 끝냈을 때 우리는 향기로운 꽃으로 된 월계관을 목에 두르고 있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은 린튼의 팔을 지팡이로 나꿔채어 끌어당기고는 그의 꽃목걸이가 가장 멋있게 보이도록 각도를 조정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엄마와 메어리에게 어떤지 칭찬을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금목걸이에다가 수레국화 목걸이를 대니까 너무 잘 어울린다! 너무 멋지다!"

에드거는 웃으면서도 얼굴을 붉혔습니다. 그는 블랑쉬 잉그램의 노래에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누가 파이프를 연주하는지를 전혀 알지를 못했습니다. 윌프레드 경도 꽃으로 만든 왕관을 받았습니다.

대화가 점차 시들해지더니 사람들이 졸기 시작했습니다. 먹다 남은 푸딩 위로는 벌들이 마음껏 휘젓고 다녔습니다. 나는 도토리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아어씨는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언제나 환영을 했지만, 나의 속셈은 오시안 시집을 읽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나무 꼭대기에서 바라보면 저 먼 수평선 위로 특별한 모양의 탑이 보였습니다. 우리가 페니스톤 크랙스에서 바라보면 남쪽 수평선 끝에 보이곤 하던 그 탑이 분명했습니다. 그 모양이 'H'자 모양이라서 거인의 의자라고 부르던 일이 생각납니까? 우리는 그가 의자에 앉아 서쪽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내가 그 탑을 바라 보는 바로 그 순간, 당신도 그 탑을 바라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다소 위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공간의 한 점을 동시에 눈으로 더듬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느 나무 끝에 앉아서 흔들거리는 가지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조그만 탑을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때 '분명히 해요'라고 하는 마음의 목소리가 희미해져 가는 기억처럼 어렴풋이 들렸습니다.

나는 속삭이듯 당신의 이름을 불러 보았습니다. 환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생생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주변은 모두 고요했습니다. 오늘은 마치 신기루처럼 보이는, 수평선 위의 가물거리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수평선이 뿌옇게 변했습니다. 아마도 안개가 점점 자욱히 끼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낮잠을 자고 있던 사람들이 일어날 기미를 보여, 그들이 눈을 뜨기 전에 나는 조용히 내려가 수도원으로 향한 길로 나섰습니다. 나는 해골들과 또 다른 사람과 약속이 있었습니다.

나는 돌을 깎아 만든 방에 앉아 해골을 바라보며 린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그는 여태껏 고문실을 본 적이 없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한번 구경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나타나면 나는 그를 감금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아니 나의 가슴에 묻어둔 당신의 일부로부터 메시지를 들은 겁니다. 나는 운명적으로 그런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끔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서툰 기타 소리가 들렸습니다. 메어리 잉그램의 연주였습니다. 린튼은 혼자였습니다. 그는 문 앞에서 쭈삣거리며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화관을 쓴 머리는 역광을 받아 가장자리만 빛났습니다.

"한마디 하셔야지요." 그가 움직이기 전에 나는 그의 팔을 단단히 잡았습니다.

"도와주러 올 사람이 없어. 너무 멀리들 있거든. 그러니까 저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면 상대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

나는 내 뒤에서 히죽 웃고 있는 석상을 가리켰습니다. 그는 내 손을 뿌리치려 했습니다.

"이봐, 히스클리프. 방금 너를 찾고 있었으니까, 나를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어. 이따위 엉터리 수작 부리지 말고 손이나 놔."

"수작을 부린다?"

"너하고 심각해지고 싶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야. 협박을 해봤자 다 쓸데없는 짓이야. 협박을 실행으로 옮기기에는 넌 너무 힘이 부족해. 지금 나에게 해코지를 하면 너만 손해야. 그렇게 멍청하게 굴면 내게서 빼앗아가고 싶은 것뿐 아니라 이미 얻은 것도 잃게 돼. 말똥이나 치우는 놈에게 그래도 상당한 것들인 것 같지만 말야."

"내가 딜레마에 빠졌다?"

"그래. 말똥이나 치우는 놈이라 무식해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잘못한 게 있으면 잘난 네 놈이 고쳐줄 거냐? 캐시하고 결혼할 생각이라며?"

"캐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잠시 잊고 얘기하자. 너나 나나 그녀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테니까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고. 네가 캐시하고 결혼할 맘이 있는가 없는가만 얘기해."

"해야지."

"그걸 막고 싶은데, 어떻게 해 줄까? 가르쳐줄까?"

"유일한 해결책은 폭풍의 언덕으로 돌아가서 캐시와 상의하는 것이야. 그러나 너 같은 놈은 분명히 그러질 못할 거야."

"잘 아는구나. 내게 이성이라든가 논리가 있어야지. 그렇다고 네 놈이 상관할 바는 아냐. 어떤 일이든 너와 나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만 알아두면 돼."

"그러면 다시 딜레마에 빠져."

"그렇다고 치자. 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난 네 놈이 캐시와의 관계를 끊어주길 원하는 거야. 그렇게 하는 게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하게 해 주려는 거야."

"그렇게 할 수는 없을걸. 뇌물로 나를 막으려 해도 돈이 있냐, 협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냐. 나에게 해를 가하면 너에게 두 배로 갚아줄 수 있어. 그래도 무슨 수가 있겠냐?"

내가 아무 말도 하지를 않자 그는 친절하고 적당한 목소리로 살살 꼬드겼습니다. "내 명색이 치안 판사야. 네가 이따위 협박을 하면 감옥에 처넣어 버릴 수도 있어. 그러나 옛정을 생각해서 참기로 하지. 이제 그만두자고. 다른 사람들에게 일절 얘기하지 않을 테니까 이런 우스운 짓은 그만둬. 알겠냐?"

대답 대신에 나는 해골의 목을 잡고 냅다 의자 위로 던져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닥에 조각이 나는 것을 보고 린튼은 움찔하며 벌벌 떨면서도 도망가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세워 그의 무릎을 쥐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잘 생각해봐. 미리 상상을 했다가 대답을 하거나 어떤 편견을 가지고 대답하지는 말아. 내가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아둬. 난 살아 있는 한은 내가 하기로 마음먹은 건 꼭 하는 사람이야. 이런 기분에도 내 말을 들을 수 있겠지?"

"다 듣고 있어."

"캐시와 결혼하려는 마음을 지금 당장 포기하지 않으면 아주 불편하고 불유쾌한 방법으로 결혼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해주지. 넌 이제 마지막이야."

"죽이겠다는 거야?" 태연한 척하던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일시적으로 마음이 변해서 캐시가 너를 좋아한다고 치자. 그러면 너를 죽일 수밖에 없게 되는 거야. 만약 이 자리에서 네가 나에게 약속을 하지 않으면 정말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어."

그의 무릎이 으스러져라 나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할래?" 내가 힘을 주니까 움찔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 협박이 통할 줄 알아? 네 놈이 한 짓을 대령에게 얘기하면 모든 게 다 수포로 돌아갈걸."

"그럴까? 그렇게 재산이 많고 그렇게 고집이 센 양반이 그런 건강상태에서 네 놈의 넋두리를 듣고 싶은 기분일까? 정말 웃기는 소릴 하는군."

"오늘밤 편지를 써서 자초지종을 알리면 돼. 우리 사이에 최근에 있었던 일들과 네 놈에 대한 모든 것을 상세히 적어 보낼 테니까."

"그게 대답이라고?"

"그래"

나는 그의 무릎을 툭툭 치면서 일어섰습니다. "그렇겠지. 역시 내 생각대로야. 그러나 반드시 확인 시켜주겠어." 나는 조각이 난 뼈를 냅다 걷어차고는 린튼이 제멋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두고 나왔습니다.

꽃을 한 아름 안고 나에게 다가와 꾀꼬리처럼 아름답게 휘파람을 불며 시를 읽어주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에요. 그 사람과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냥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거나 날 불쾌하게 만들어 내 마음을 괴롭게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의 등 주위가 얼어붙을 것 같던 겨울날 당신과 나는 망아지 새끼처럼 몸을 같이 비며대며 그 한가운데가 안전한 곳이라는 걸 알았지요.

무언가가 변했어요. 바람이 불고 구름이 달을 가리자 당신은 문으로 향했어요. 나는 무서웠어요. 우리는 나이가 들어 있었어요. 나는 커다란 머리 장식을 달고 다이아몬드 버클이 달린 비단같이 부드러운 벨트를 매고 있는 여인을 그려보았어요. 그녀와 함께 있는 남자는 금발에 금마차를 타고 있었어요. 난 당신이 미웠어요.

그 사람이 내 몸에 손을 대면 그 손길은 고양이를 어루만지는 듯 부드러웠어요. 당신을 믿었건만, 당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나는 당신이 그런 사람인 게 싫었어요. 나는 당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원했어요.

언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건 시간은 평소와 다름없이 흘렀습니다. 우리의 진짜 감정이야 어떻든 에드거 린튼과 나는 30분 동안 서로에게 매우 공손하게 말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티 타임이 되었지만 블랑쉬와 메어리와 대령 부인은 게임을 한 번 더 하자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술래잡기도 하고 필드 테니스도 했습니다. 바람이 거세지자 우리는 철자 바꾸기 놀이를 했습니다. 잉그램 경은 재미가 없는지 잠이나 자겠다고 가버렸습니다. 론 볼링(잔디에서 나무 공을 굴리는 놀이)을 하고 싶었지만 볼과 핀이 아래에 세워 둔 마차 안에 있었습니다.

내가 일어섰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말을 타고 갔다 오면 5분밖에 걸리지 않을 겁니다. 상자들을 혼자서 가져오기에는 좀 그러니까 둘이서 가면 좋겠는데, 린튼 씨가 같이 갈래요?"

린튼이 차를 먼저 마시고 가는 게 좋겠다고 하자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야유를 보냈습니다. 차를 마시고 나면 배가 불러 운동을 할 수 없고 그사이에 해가 들어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 따라나서겠다고 하자 그녀의 어머니가 화를 냈습니다. 그녀에게라기보다는 런튼의 무책임한 태도에 대한 것이었으므로 그는 마지못해 일어서고 말았습니다.

좁은 골짜기 끝으로 말을 달리면서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네 계획을 모를 줄 알고.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그러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허튼 생각은 꿈에도 하지마. 네가 먼저 내려가. 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네 뒤를 따라갈 테니깐. 네가 뒤로 돌아서면 그 즉시 나는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모든 사실을 폭로할 거야. 그 결과에 대해서 난책임 못져"

"그렇게 하시죠." 나는 정중하게 대답을 하고는 미네르바 옆구리를 찼습니다.

우리는 쏜살같이 비탈길을 달렸습니다. 썩은 나뭇잎과 잔디가 뿌리째 공중으로 튀었습니다. 우리는 뻑뻑한 숲에서 단번에 다리 위로 뛰어올라 같은 속도로 다리를 건넜습니다. 다리 바닥에 있는 구멍 옆으로 건너뛰면서 보니까 오금이 저릴 정도였습니다. 나는 멀찍이 말을 세우고 런튼을 기다렸습니다.

맞은편 언덕은 나뭇잎이 무성하여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뭇잎 사이로 런튼이 아주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바위 사이의 길로 살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빌제법은 고개를 한껏 움츠리고 있었습니다. 린튼이 긴장하여 고삐를 있는 힘껏 당기고 있었으므로 말은 조금만 더 화가 나면 길길이 날뛸 것 같았습니다.

새로운 장난을 쳐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구멍으로 보니까 다리의 교각이 바위 양쪽에 r자 모양으로 세워져 있었는데 한쪽은 경사가 가파르고 한쪽은 완만했습니다. 그를 그 구멍으로 떨어뜨리면 다시는 나를 귀찮게 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린튼 때문에 내가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가 말을 타고 있는 자세는 몹시 불안정했습니다. 만약 말이 갑자기 뛰기라도 하면 에드거는 말에서 떨어져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뻔했습니다. 그가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면 빌제법이 나를 보게 될 테니까 내가 손만 들어도 내가 원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차가 다리 앞에 있으니까 만약 하인들이 다리 쪽을 우연히 보기라도 하면 그 사고를 목격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무가 너무 빽빽하여 나는 다른 사람들을 볼 수가 없는데 말이 냅다 달리다 사람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점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본다고 해도 내가 뭐 특별한 잘못도 없으니까 괞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드거와 나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완벽했고 어젯밤 잘못 행동한 사람은 에드거였는데 왜 그러한 의문이 있었을까요?

캐시, 그러한 일이 생기면 당신은 어떨까요? 우리 사이에는 비밀이 있을 수가 없으므로 언젠가는 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러한 일이 생기면 당신의 슬픔과 노여움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다리 끝에서 말과 린튼이 멈춰 섰습니다. 그는 말안장의 앞머리를 어설프게 잡고 말에서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에드거가 조심해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말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데도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안장에서 땅바닥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매사에 그리 신경을 쓰는 그의 소심한 성격으로는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드거는 말을 몰면서 내가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고서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내 쪽으로 손을 흔들었습니다. 거리를 재어보니까 네 발자국만 더 오면 바로 구멍 앞에 도착할 것 같았습니다. 만약 빌제법이 갑자기 날뛰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는 구멍으로 떨어지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처 말릴 겨를도 없이 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뒤쪽의 언덕이 시끄러웠습니다. 누군가 말을 타고 수도원에서 계곡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나무 잎새 사이로 치맛자락이 언뜻 보였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 마구간에 있던 말을 타고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어 씨가 몸이 꽤 나아서 지름길을 질러 수도원엘 오니까, 말이 타고 싶어서 하루 종일 안달을 하던 블랑쉬 잉그램이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어 씨의 말을 타고 우리를 놀래키기 위하여 왔구나 하는 생각이 퍼 뜩 들었습니다.

누가 오나 궁금해진 에드거는 바보처럼 너무 짧게 쥐고 있던 고삐에 신경을 쓰지 않아 말머리도 돌려야 하는 데도 자기 몸만 돌렸습니다. 내가 그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운명이 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은 다리에 거의 다 와서는 나무가 울창한 비탈길로 사라져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녀가 타고 있는 말의 발굽소리가 다리의 나무 바닥에서 따각따각 났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길이 막힌 것을 발견하고는 고삐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지만, 말은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말의 엉덩이를 채찍으로 쳤습니다. 말은 에드거의 부츠 바로 옆으로 미끄러졌다가는 이히힝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에드거는 뒤로 훌쩍 비켰습니다. 구멍 바로 근처였습니다. 그녀의 페티코트가 말의 얼굴에 씌워졌습니다.

아우성치는 소리며, 페티코트와 채찍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서, 옛날 기억이 살아났는지 빌제법은 이히힝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에드거가 잡고 있던 고삐를 휙 낚아채며 내 옆으로 지나갔습니다. 에드거는 잡고 있던 고삐가 갑자기 끌리는 바람에 몸의 균형을 잃고 잠시 비틀거리더니 구멍으로 떨어졌습니다.

나는 얼른 말에서 내려 달려갔습니다. 블랑쉬 잉그램이 말과 씨름을 하는 것에는 신경을 쓸 틈이 없었습니다. 나는 구멍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캐시, 당신이 나를 비난하고 싶다 하더라도 다음 얘기를 조금 더 읽고 결정하십시오. 이 순간 그가 가만히 서 있기만 했어도 아무 일이 없었을 테고, 아니면 실제보다 좀 더 천천히 움직였어도 괜찮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괜한 고생도 하지 않고 야단을 맞지도 않고 린튼을 제거했을 겁니다. 그러나 본능적이랄까 숙명적이랄까 나는 모든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으므로 즉각 행동을 했던 겁니다.

에드거는 운이 좋아서였는지 필사적으로 노력을 해서였는지 약 3 미터 아래에서 두 개의 교각이 서로 만나는 곳의 버팀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아치의 지붕 아래로 미끄러지는 순간 잡았는지 한팔을 V자 모양으로 굽히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 팔은 적어도 12미터는 족히 되는 아래의 날카로운 바위를 향하여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올려다보는 에드거의 얼굴은 창백했습니다. 그는 숨이 막히는지 아니면 두려워서 그러는지 아무 말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코트를 벗고 배를 땅에 대고 누워 코트의 소매 끝을 내려다보았지만 길이가 짧았습니다. 설사 코트 소매가 그에게까지 닿았더라도 그는 그것을 잡을 힘이 없었으므로 내가 직접 내려가야 했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떨어 지지 않고 내려 갈수 있을까 하고 궁리를 했습니다. 만약 내가 구멍의 끝을 잡고 매달려도 에드거와 아치의 모서리에는 닿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보았자 그가 매달려 있는 곳에서부터 나의 발밑까지는 1.2미터 가량이 모자라지만 에드거가 팔을 뻗으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려가면서 혹시라도 그를 건드리지 않으려면 나의 몸을 흔들었다가 파리처럼 아치에 달라붙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저것 재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에드거의 손목은 자기 손목을 지탱하느라 덜덜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다리 끝에서 그립을 잡고 구멍 아래로 몸을 던졌습니다. 나의 부츠 뒤축이 쭈르륵 땅에 끌리고 손도 조금 미끄러졌습니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잡아당겼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찼습니다. 순간적으로 마음을 비우고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다리 바닥 아래의 길다란 나무에 이끼가 끼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치의 돌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옅은 녹색으로 보였습니다. 물 흐르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습니다.

나무가 발아래에서 들리는 소리를 확대 반사시키는 공명판의 구실을 하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나는 발아래에 무엇이 있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솟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쪽 손 아래에 있는 나무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얼른 몸을 뒤로 흔들었다가 가장 가까운 곳의 아치 위로 뛰어내렸습니다. 나는 튀어나온 돌 위에 부딪치는 순간 몸을 납작하게 수그리며 다리와 팔로 바위를 꼭 잡았습니다. 배 밑에 깔린 돌들이 쭈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지면서 나도 약간 미끄러졌습니다. 그러나 에드거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에드거 린튼이 숨이 찬 목소리로 소리쳤습니다.

"좀 버텨봐." 나는 두 교각 사이로 굴뚝 청소부처럼 내려갔습니다. 린튼의 팔을, 아니 린튼의 소맷자락을 양손으로 붙잡고 당기기 시작했습니다. 잡아당기는 각도가 별로 좋지 않아서 조금 위로 끌어당기는 데에도 꽤 힘이 들었습니다. 위에는 블랑쉬 잉그램이 보였습니다.

그를 잡아당기다 보니까 커다란 돌이 굴러떨어지는 게 조약돌처럼 작게 보였습니다. 에드거 린튼은 내가 고의로 자기를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벌 떨면서 나의 옷자락을 꼭 쥐고 놓지 않았습니다. 공포에 질려 그가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는 날에는 그나 나나 다 같이 떨어져 죽을 게 뻔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가 한쪽 다리를 위로 올릴 수 있을 정도까지 끌어 올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암벽에 두 다리로 버티고 섰습니다. 나는 그의 몸을 균형을 잡아주기 위하여 허리를 낮추어 그와 같은 자세를 취했습니다. 빰이 찢기고 허벅지에서는 피가 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올라오다가 뾰족한 곳에 걸린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이제 됐다." 잠시 동안은 안전했으므로 우리는 바위 틈새에 가슴과 가슴을 맞추고 몸의 균형을 잡고 서 있었습니다. 그는 얼떨떨하여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습니다. 그가 정신을 차리도록 하기 위하여 말을 걸었습니다.

"에드거, 내 목에서 손을 빼서 다리 위로 뻗어봐." 그가 내 목을 너무 세게 잡는 바람에 숨이 다 막혔습니다.

"그렇게는 못 해! 그러면 나를 떠다밀 작정이지! , 이제 내가 떨어지면 너도 죽어!"

"내가 떨어지면 너도 죽기는 마찬가지야. 자꾸 날 붙잡고 바둥대면 결과는 뻔해. 네 마음대로 해!"

이 말에 그는 마음이 바뀌었는지 조용해졌습니다. 그는 내 목에서 손을 놓고 바위를 잡았습니다. 위에서 소리가 들려 올려다보니까 블랑쉬 잉그램이 사색이 되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존도 있었습니다.

"여기 밧줄이 있습니다!" 존이 외쳤습니다.

나는 그에게 밧줄 한쪽 끝을 다리 난간에 꼭 맨뒤에 아래로 내려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린튼을 안전하게 밧줄로 묶자 존이 같이 온 하인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끌어올렸습니다. 안도의 탄성이 여자 하인들에게서 터져 나왔습니다. 아어 씨와 블랑쉬 잉그램의 목소리도 들렸습니다. 우리가 기를 쓰며 발버둥 치고 있는 동안 집에 있었던 그가 다리 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 신기했습니다.

나는 자부심이 강한 잉그램 양이 자기 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창피하게 생각할까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존이 나에게 밧줄을 내리는 동안, 그녀가 이러쿵저러쿵 이 일에 대해서 자꾸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는 이 불행한 사건의 가해자가 아니라 영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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