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히스클리프
(續 “폭풍의 언덕”)
Lin Haire Sargeant
그것은 지금부터 60년 전인 1844년 1월 3일, 이미 죽은 지 40년이나 지난 사람이 쓴 편지였다. 에제 씨에게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고 새해 첫날 브뤼셀을 떠났지만 이 편지가 내 귀향길에 미리 예정된, 그렇게나 중요한 일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에제 씨를 생각하면 모든 게 즐거웠다. 내가 어제 기숙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언제나 그만이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반겨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멀리하였으므로 결국 나는 기숙사의 방구석에서 거의 얼어붙은 듯이 지냈다. 선생들이나 학생들이나 모두 똑같이 에제 부인이 교활하게 빗대어 하는 말에 넘어가 나를 그런 상황에 빠지게 했다. 나는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러나 냉기가 감도는 이곳에서 나의 유일한 친구인 그가 30분 정도 친절한 말로 나를 가식 없이 위로해줄 때면 나의 얼음장 같은 침묵도 깨지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를 질투하는 어제 부인은 영국 여자인 내가 하루라도 빨리 없어져주기를 바랐다.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손에 넣는 그런 여자였다.
나는 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랑했었다. 그리고 영원한 이별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와 이별을 했다. 그저 학생이나 다름없는 나에게 그는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선생과 학생이 늘상 나누던 대화처럼 우리는 그저 평범한 말을 했을 뿐, 애정이 섞인 달콤한 사랑의 속삼임은 단 한마디도 나눈 적이 없었다. 마음에 깊이 팬 주름살로 인하여, 결국 나는 무감각한 표정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입술에도 생기가 없었다. 눈은 꺼칠하고 퀭한 모습이었다. 젊었으나, 이미 젊음을 잃어버린 여자가 나였다. 브뤼셀에서는 내 젊음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나는 쓰라린 가슴을 안고 그저 묵묵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 쓰라림은 목구멍에 걸린 커다란 가시가 목을 쿡쿡 쑤셔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나를 숨 막히게 하고 굶어 죽게 만들지라도, 결코 뺄 수 없는 가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 자신의 문제를 사실대로 까발린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놀라고, 나에 대한 그들의 부드러운 인상도 깨지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내게는 인정 많은 여동생이 두 명 있었다. 그들이 이해심이 많고 나에게 헌신적이긴 하지만 그들이 내 사랑이 불륜임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설령 용인한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 이 슬픔은 그저 나만의 것이어야 한다. 사랑의 아픔은 틀림없이 인생의 불편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또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집안의 따뜻한 난로와 잠자리를 포기하고 험한 산의 절벽과 울퉁불퉁한 바위와 바위틈을 헤매는 나그네 길과 다름없으리라.
새해 첫날, 사랑하는 그를 떠나 브뤼셀에서 영국행 정기선을 탔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런던의 한길을 지나 곧바로 리즈 행 기차를 타러 갔다. 2년 전에 처음 왔을 때에, 이 커다란 도시는 마치 거칠고 거센 강물 같았다. 도시가 내 주위를 생생하고 생동감있게 물결치는 기분이었다. 그때 그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의 예전의 삶이란 모두 한낱 꿈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런던의 거리를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지나 텅 비어 있는 커다란 역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기차 칸으로 들어가 내 자리에 앉았다. 애써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가 잃어버린 그의 모습은 아직도 내 마음의 눈에 아련히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어슴푸레 보이는 바로 눈앞의 광경들에 구애받지 않고 그것을 고이 간직하고 싶었다.
선생님! 선생님이란 단어가 저에게는 당신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유럽인들이 관습적으로 누구에게나 사용하는 무슈란 단어를 제가 사용했던 것을 후회합니다. 영국인이라는 자존심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제 저는 무슈를 선생님으로 기꺼이 바꾸겠습니다.
때로는 재미있고, 때로는 엄격하며, 때로는 장난기가 있는 선생님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세련된 분이었습니다. 지식을 전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월등하셨지요. 그 때문에 저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에 대한 저의 사랑을 이끌어낸 것은 결코 눈으로는 불 수 없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외적인 힘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만 특별하고 소중한 그 무엇. 제 마음을 끌어당기는 선생님의 힘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저는 벙어리요, 성가신 존재요, 답답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으레 저를 하찮은 존재로 생각했으리란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적어도 선생님과는 말이 통했고 편안했으며 그리고 선생님에게만은 열심이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분을 선생님이라는 말 이외의 다른 말로 어찌 부를 수 있겠습니까. 아련히 떠오르는 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제가 마음속에 그대로 간작한다 해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닐 겁니다. 지금부터 저는 선생님의 모습을 고이 간직하렵니다.
그러나 나의 머릿속에 드리워진 선생님에 대한 추억은 이내 분해되고 말았다. 열차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열차가 갑작스레 움직이는 바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철로와 신호등과 이따금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세상은 깜깜한 창문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기차의 엔진이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복도 입구 쪽으로는 나이가 든 머리가 허연 여자가 내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뜨개질을 하면서 턱을 아래 위로 흔들어 대고 있었다. 나를 맨 먼저 몽상에서 빠져나오게 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리듬이었을 것이다. 그녀를 바라다보고 나서 나는 천천히 시선을 같은 칸의 다른 사람에게로 옮겼다. 은회색의 가는 머리카락에 콧수염을 기른 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값비싸 보이지만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상중인 것 같았다. 그는 창가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회색 장갑을 낀 두 손을 지팡이 위에 포개놓고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는 멀리 떨어진 어떤 작은 점, 창밖의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수 있을 만큼 먼 거리의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의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외모는 나와 너무 흡사했다. 동료 의식을 느낀 난 살며시 웃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목례를 교환했다.
그가 말했다. "창문을 열거나 블라인드를 닫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그의 말에는 뜨개질을 하고 있는 여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나이가 든 부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화가 난 듯 뜨개질 바늘을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외에는 그 남자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인사를 하고는 다시 유리창 속의 한 점을 바라다보았다. 나는 나의 아픔을 잠시 잊고 은밀히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나이가 예순은 될 것 같았다. 키는 보통이고 몸은 야왼 편이었다. 피부결은 부드럽고 윤기가 있어 보였다. 젊은이 같은 윤기가 피부의 섬세한 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외모에는 부드럽고 사려 깊고 호의적인 기색이 있었다. 그러나 턱과 입의 선이 안쪽으로 굽어 있어 다소 자신에 대하여 까다롭다고 할까, 외적인 힘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를 최고하고 생각하면서 높은 사람들의 명령만 따르는 사람 같았다. 영국 해협 건너편에서 보였던 나의 그 흥분되고 우스꽝스런 모습과 이 혼화하고 친절한 모습은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차장이 나타나 기차표를 보여달라는 말에 나의 생각이 끊어졌다. 차장은 그 남자의 표와 나의 표를 기록과 대조한 뒤 아무 말 없이 돌려주었다. 그러나 나이 든 부인의 표는 오랫동안 가만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모르는 체했다. 그러나 타고 가는 거대한 기계에서 뜻밖의 장애를 느낄 때면 승객들이 숙명적으로 갖게 되는 불안한 기분으로 그와 나는 그 과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우리의 조바심은 차장의 말 한마디로 마침내 끝이 났다.
"입스위치행 표를 예약하셨군요."
"그래요, 젊은이. 난 입스위치로 갑니다!" 뜨개질하는 소리도 내지 않고, 턱을 씰룩거리지도 않고서 아주 메스꺼운 듯한 음색으로 그녀가 말을 했다.
"이 열차가 아닌데요. 이 열차는 럭비와 더비를 경유하여 리즈로 가는 열차입니다."
그녀가 얼굴을 들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제대로 알고나 말해. 이 기차는 입스위치행 기차란 말야."
차장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아주머니. 5분 뒤면 루튼 역에 도착할 겁니다. 거기에서 내리셔서 플랫폼을 건 너 런던으로 돌아가셔야 제시간에 입스위치행 열차를 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는 계속하여 기차 안을 돌았다. 그녀는 입스위치행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다시 뜨개질을 시작하였다. 그와 나는 다소 걱정스런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얼른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왠지 우리가 발목이 잡히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녀를 향하여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걱정이 돼서 말씀드리는데요, 이 기차는 리즈로 가는 기차입니다. 저도 그곳에 가니까요."
그렇다면 그와 나는 적어도 서너 시간을 같이 가야 할 운명이었다. 그녀는 뜨개질하던 것을 내려놓고 안경 너머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입스위치로 갑니다."
"그렇지만, 이건 리즈로 가는 야간열차인데요." 나도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인은 계속 빤히 쳐다보다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이 차장에게 보여 준 표 좀 봅시다."
우리는 서둘러 고분고분하게 표를 꺼내려 손을 내밀었다. 기차가 이미 루튼 역에서 정차하기 위하여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차장이 머리 위의 클립에 끼워놓은 표를 꺼내기 위하여 일어서다가 나는 갖고 있던 책을 무릎에 떨어뜨렸다. 책이 바닥으로 굴렀다. 그것은 내가 브뤼셀에서 떠날 때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이별의 선물로서 내게는 매우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얼른 그것을 줍고자 몸을 굽혔다. 불행히도 바로 그때, 그도 또한 그것을 줍기 위하여 허리를 굽혔다.
우리는 묘하게도 머리를 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그의 지팡이와 내 안경이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 우리의 손은 각자 부딪친 머리 위로 갔다.
아픔은 별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나에게 아무런 감정의 변화를 초래하지 않았을 단순한 육체적인 충돌에 불과했겠지만, 어찌 보면 이 충돌에는 심리적인 요소가 있었다. 그 충돌로 인하여 차돌같이 단단하게 뭉쳐있던 나의 슬픔이 터지고 말았다.
나는 흐느껴 울었다. 일단 한 번 터진 봇물처럼 울음은 쉽게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내 울음을 멈추게 하려고 자신의 고통을 참고 있었다. 그가 사과를 하면서 잠시 미안한 표정을 짓자, 나는 더욱 큰 소리로 울게 되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꿀맛같이 달콤한 일상적인 친절을 모르고 지냈으므로, 낯선 사람으로부터 받은 선물과도 같은 친절에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더욱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정말 놀랐습니다. 다치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되네요. 여승무원을 부를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침내 그가 자신의 손수건으로 나에게 부채질을 해주며 말했다.
"아니에요, 됐어요." 문득 이 일이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리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울음을 다소 가라앉혔다. 그러자 내가 얼마나 바보처럼 굴었는지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표면적으로는 아픔을 참고 울음을 그쳤지만, 내면적으로는 내가 만들어 버린 슬픈 광경에 더 신경이 쓰였다. 이 때문에 나는 아주 침착해져서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사실, 부딪친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울음을 터뜨린 진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우스꽝스럽죠?"
"우스꽝스럽다뇨?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덕택에 한 가지가 해결되었는데요."
"예?" 나는 안경을 올려 쓰고 눈가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반문했다.
그가 기차 칸의 맞은편 끝을 바라보며 머리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 여자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여자는 내가 울음을 터뜨리는 꼴이 보기 싫었는지, 아니면 더 분명한 동기가 있어서 그랬는지, 우리에게서 눈을 돌리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쿵쿵거리며 나가버린 것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그는 내가 웃으니까 용기를 얻은 듯 말을 이었다. "아가씨가 무심코 운 것이 저 아주머니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역의 플랫폼에 정차하고 있는 기차의 창문을 가리켰다. 그 아주머니는 승무원의 도움을 받아 런던 방향의 제자리로 가고 있었다. 눈발을 담은 바람이 그녀의 치마와 뜨개질감을 휘감아 올리고 있었다.
"예정대로 입스위치에 도착할 겁니다. 모두 다 아가씨 덕택입니다."
"아니예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되레 고맙습니다."
"뭘요. 정신적으로 긴장하고 있었나 봅니다. 누군가가 돌아가셨나 보지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안심하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는 애도의 뜻을 나타내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얄궂은 운명의 충격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익히 잘 압니다. 예기치 않은 일을 같이 겪다 보니 벌써 오래된 친구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제 이름은 찰스 로크우드라고 합니다. 켄트 출신입니다."
"샤로트 브론테예요. 요크셔가 제 고향입니다. 아버님 이름은 패트릭 브론테입니다. 목사님이세요."
일단 안면을 익히자 말이 술술 나왔다. 역마차 여행과는 전혀 다른 기차 여행의 편안함과 속도라든가, 그 각각의 위험성 그리고 기차 승무원들 덕택에 영국의 시골이 겪은 변화, 과학적 사고와 실천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두메산골에서까지 지방의 토속적인 생활 방식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인가 등등, 같이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승무원이 등잔불을 켜려고 들어왔다. 승무원이 나가자 그가 한마디 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에 실내에 있는 셈인데요."
사실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날씨가 상당히 사나워져 있었다. 창문에서 빠른 속도로 타고 있는 한 줄기의 불빛 위로 노란 소용돌이를 그리며 휘날리는 눈발을 보니 눈의 굵기가 꽤 굵어져 있었다. 그러한 움직임에 나는 잠시 황홀한 기분을 느꼈다. 이별이랄까, 공허함이랄까, 텅 빈 것 같다고 할까,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실례합니다." 로크우드 씨가 블라인드를 내리자 그 조그만 방이 더 밝고 아늑해졌다.
그러한 추위가 어둠과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일지는 몰라도 오늘 저녁의 나의 기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기울인 무엇인가를 강력하게 떠올렸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지었던 게 틀림이 없다.
"제 말이 귀에 거슬리겠지만, 일련의 사건들은 시간이 흘러도 그 사악한 힘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강해지는 게 사실입니다. 아직 그런 것을 이해하기엔 너무 젊은 나이겠지만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열차의 속도감과 추위와 차창 밖의 어둠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렇게 조그만 빛과 아늑함을 공유했기 때문인지,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것 같은 이상야릇한 착각이 들었다. 아마 머리를 서로 세게 부딪쳤을 때부터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 뒤에 일어난 일, 예를 들어 내가 과감히 질문을 던지면 그가 마다 않고 대답을 해주곤 하던 것을 설명하자면, 적어도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의 흥미로운 얘기를 잠자코 들으며 나는 그저 머리만 끄덕인 게 아니었다.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에 대하여는 나도 내 목소리를 냈다.
"아직까지 로크우드 씨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로 힘을 갖고 있는 오래전의 사건이란 게 뭐죠?"
그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블라인드를 걷은 뒤 잠시 동안 밖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간단하고도 정확하게 대답하려니 어렵군요. 간단히 말하자면, 히스클리프란 이름의 남자를 우연히 알게 되면서부터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놀라서 몸을 움찔했다. "그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그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들어본 적이 있어요. 김머튼이라는 곳 출신의 히스클리프를 얘기하시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김머튼 근처의 폭풍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농장에서입니다. 사실 저는 그곳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만, 히스클리프 씨는 수십 년 전에 죽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그러면 제가 아는 히스클리프가 아닐 겁니다. 제가 아는 사람은 지금도 살아 있을 거예요. 1년 전에도 들었으니까요."
"거참, 이상한 일도 있군요! 하지만 이름이 똑같은 것을 보면, 틀림없이 같은 사람일 텐데 그가 살아 있을 리가 없어요. 김머튼에 히스클리프란 사람이 어떻게 둘이나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들었지요?"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생각을 정돈할 때까지 이런 식의 질문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대답을 피했다.
"김머튼 사람들 중 몇 사람이 호위스에 있는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곤 했는데 그곳의 담당 목사가 제 아버님이셨습니다. 아버님 이름은 교회의 기록에 있을 겁니다."
그는 우리의 목적지가 우연히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우리가 서로 알고 있는 사람들과 이웃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세어보았다. 그는 우리의 교회 마당을 기억해냈다. 나와 여동생들이 뛰어 놀던 갈과 샛길을 로크우드 씨도 밟아본 적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평범한 얘기들 덕택에 마음이 누그러진 나는 이전의 주제로 다시 말을 돌렸다.
"그런데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을 어떻게 알게 되셨지요?"
"그 사람한테서 1년 동안 집을 세내어 살았습니다. 그 주위에서는 아주 땅이 많고 재산도 꽤 많은 신사로 알려져 있던데요."
"그러면 정말 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들어본 히스클리프라는 사람은 건달이나 다름없는 사람이거든요. 짓궂은 애들이나 진배없어요."
"정말 이상한 일도 다 있군요. 정말입니다. 제가 말하는 히스클리프라는 사람의 초기 경력에 정말 딱 맞는 말이니까요." 로크우드 씨가 환호성을 질렀다.
"농장의 일꾼에 불과했지만, 소꿉동무이자 의남매인 언쇼 씨 딸과 집 근처에서 열심히 돌아다녔던 사람입니다. 아가씨가 알고 있는 얘기는 어떤 겁니까?"
물론 아는 게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나 혼자 간직하기로 결심했다. "언쇼씨 가족은 그곳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히스클리프가 농장 일꾼이라고 그러셨죠?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재산이 많은 신사로 변했지요?"
로크우드 씨가 웃었다. "아가씨가 그걸 물어보다니 참 신기하군요. 그 수수께끼를 명백히 설명해줄 수 있는, 히스클리프가 직접 쓴 편지를 제가 갖고 있습니다."
그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멀레디 포장지로 싼 두툼한 뭉치를 꺼냈다. 수신인이 바로 그 사람인 걸 알 수 있었다. 정말 이상했다. 멀레디 포장지는 지난 계절에 새로 생산을 시작한 것이었음에도 이 사람은 그 편지가 죽은 지 몇 십 년이나 된 사람이 부친 편지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과감히 물어보았다. "그 사람이 몇 년 전에 그것을 보냈나 보군요."
"몇 년 전이라? 분명히 몇 년 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60년 전이니까요. 큰 재산이 막 생겼을 때니까 젊었을 때지요. 그렇지만 나에게 편지를 쓴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수중에 넣으셨죠?"
"최근에 제삼자가 보낸 것입니다."
맥이 탁 풀렸다. 그가 계속 말을 하는 동안 나는 더이상 말을 가로막지 않고 듣기만 했다.
"아니죠. 언쇼 양. 그러니까 같이 자란 캐서린 아니 그 사람 말대로 하면 캐시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곳에서의 비참한 생활환경을 피해 그는 그녀의 집에서 아주 먼 곳으로 달아났습니다. 알다시피 캐시의 오빠는 그를 거의 노예처럼 취급을 했으니까요. 그가 사라진 지 몇 년이 자나 그 편지를 썼던 겁니다. 폭풍의 언덕을 떠나 있는 동안 어떻게 성공을 했는지 설명을 하면서 그녀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래서 그녀가 그렇게 했나요?"
"아니죠. 그녀는 그 편지들을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히스클리프를 누구보다도 사랑했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죠."
"두 사람 모두에게 슬픈 운명이었구요."
"그들 둘에게만 국한된 운명이 아니죠. 그 비극은 나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으니까요. 운이 없는 한 쌍이 결혼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죠."
이 말에 가만있을 수 없었다. "사랑할 때, 그것도 죽도록 사랑할 때, 같이 살면 안 된다는 얘기인가요?"
"보통은 그렇겠지만, 이 경우는 예외적이니까 뭐라 얘기할 수 없네요." 그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불룩한 갈색 소포 꾸러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편지가 왜 캐서린 손에 들어가지 않고 로크우드 씨 손에 들어왔지요?"
그는 꾸러미를 열고 서로 전혀 다른 종류의 편지 뭉치를 꺼냈다. 하나는 훨씬 크기가 크고 두껍고 짙은 글자로 꾹꾹 눌러 쓴, 빛이 바래고 거의 삭은 종이 뭉치였다. 다른 종이들은 가늘고 달필의 구식 필체로 쓴 하얀 새 종이 뭉치였다. 그가 하얀 종이 뭉치를 엄지손가락으로 밀어놓았다.
"이것을 읽어봐요. 이틀 전에 이 소포를 열어보고 내가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나를 알 수 있을 겁니다. 히스클리프에게서 내가 빌려 쓰던 집의 가정부였던 딘 부인으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그에 대해서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그녀가 내게 얘기해준 것들입니다. 그녀의 편지를 읽어 보면 알게 될 겁니다."
그가 나에게 편지를 넘겨주었다.
로크우드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저를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선생님께서 세 들어 사실 때 스러시크로스 농장의 가정부로 있던 딘입니다. 4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선생님은 그때 정말 인자한 분이셨습니다. 우리 가족의 내력을, 특히나 선생님의 집주인이자 저의 고용주이기도 한 히스클리프의 손길이 닿았던 곳에서 선생님과 같이 한가로이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의 그 친절한 성품을 되새겨보건대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 외의 것에도 선생님께서 아직 관심을 갖고 있으리라 감히 생각해 봅니다.
선생님께 말씀드렸듯이 히스클리프씨의 이야기에는 공백 기간이 있습니다. 사라졌던 3년 동안 그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사실 그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제가 여기 동봉한 편지들을 읽고 저는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 편지들은 히스클리프씨가 아직 미혼이던 캐서린 아가씨에게 보낸 것들입니다. 지금 제가 돌보고 있는 귀여운 아가씨의 어머니 말입니다. 거의 60년이란 세월 동안 이 편지들은 저는 반짇고리 밑에 숨겨두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일지도 모르는 세월이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것을 숨겨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반문하지 않고 보낸 적은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 편지들을 훔친 셈이었습니다. 어느 화창한 날 아침 어떤 소년이 가져온 편지였습니다. 캐서린 아가씨가 에드거 린튼 도련님과 결혼하기 바로 전날이었지요. 아가씨는 에드거라고 부르던 곱상한 에드거 도련님과 함게 서너 시간 전에 스러시크로스 농장에 가서 집에 없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저는 아가씨가 입을 웨딩드레스의 주름을 펴면서 지난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어, 히스클리프 씨가 기다리고 계세요." 그 소년은 조그만 손으로 편지를 저에게 전했습니다. 그 아이가 악마가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했더라도 저는 그렇게 난처한 입장은 아니었을 겁니다!
3년 동안 그 사람은 행방이 묘연했으므로 저는 그 사람이 아가씨에게서 영원히 떠나갔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 편이 나았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오렌지 한 개와 아이가 갖고 놀 만한 것을 꺼내어주면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답장을 써주기 전에 저는 편지를 옆방으로 갖고 들어가 봉투가 찢어지지 않게끔 조심스레 뜯고서 선생님께서 지금 손에 들고 계시는 바로 그것을 대강 읽어 보았습니다. 그 후에 제가 그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수십 번 읽으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실 겁니다. 히스클리프씨는 내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모를 겁니다.
텐네스 박사님 말마따나 이제 저는 늙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의 병치레가 제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취했던 행동들을 돌이켜봅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행동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경우만은 마음에 걸립니다.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아가씨에게 말을 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최근에 홀몸이 된 사람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지나 않나 생각되어 망설였습니다. 아시겠지만, 아가씨는 사촌지간인 헤어튼 도련님과 결혼을 하여 부모님의 재산을 되찾았습니다. 최근 몇 년간의 결혼생활 역시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죽자 아가씨는 더욱 슬펐습니다.
자기기만이겠지만 그분들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제가 자초한 고민거리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궁리하다가 외부인인 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지난 과거와 화해하고 죽음을 맞을 차비를 하기 위해서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히스클리프씨가 쓴 편지를 읽어보시고 선생님이 저의 위치에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지 솔직하게 얘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843년 12월 26일
김머튼에서 엘렌 딘 올림
나는 편지에서 눈을 떼고 머리를 들었다. "그분에게 가시는 중이군요."
"네, 위로라도 해드리려고 가는 중입니다. 어쩌면 이미 돌아가셨을지도 모르지요."
"참 친절하고 인자한 분이시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수십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를 돕기 위해 이런 날씨에 그 먼 거리를 여행하시다니 정말 경탄할 만한 일이네요."
"갈 필요가 있으니까 가는 건데요, 뭐. 너무 치켜세우지 마세요. 여러 복잡한 동기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이지만, 제 인생의 불행했던 시기에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아주머니에게 친근한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로크우드 씨가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브론테 양, 얼굴을 보니까 어쩐지 진실 된 판단력과 참된 박애심이 엿보이는데요."
나는 이런 아침이 싫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렇게 얘기하는 데야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가씨 얼굴에 나타난 그런 자질들을 보니까 부탁을 하나 하고 싶은데.... 나를 도와줄 힘이 있을 테니까."
"그럴 리가 있겠어요. 하지만 가능하다면 기꺼이 도와드리죠. 무얼 원하시죠?"
"이 편지를 읽어봐 주시겠어요?"
그는 다른 편지를 가리켰다. 히스클리프로부터 온 편지였다.
"편지가 제법 깁니다. 여행으로 피곤하기도 하고 죽은 사람의 골치 아픔 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겠지만 한번 읽어봐 주세요."
"제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수만 있다면 읽어 보겠습니다만, 제가 편지를 읽어 본다고 해도 그게 선생님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간단해요.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으면 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죽은 사람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방법만 알아내면 되니까요. 읽고 판단만 해주세요. 넬리가 내게 부탁했던 말을 그대로 하는 셈입니다."
바로 그때 기차가 갑자기 비스듬히 기울었다. 기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블라인드 중의 하나가 탁 소리를 내며 걷혔다.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리가 너무 신경과민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지만 밖에서 반짝거리면 흩날리는 눈 위로 우리가 블라인드를 다시 치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무원이 발 덮개와 담요를 갖고 들어왔다. 추위가 너무 심했으므로 우리는 고마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았다. 마침내 우리가 다시 편히 앉자, 로크우드 씨가 편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망설이고 있군요."
"아녜요,아녜요. 망설이는 건 없어요. 한번 읽어 보죠!"
내가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내 손끝 너머로 편지를 들고 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다음 말을 끄집어냈다.
"잊어버린 게 있다는 점을 고백해야겠군요. 편지 내용 중에 틀림없이 여자들에게는 충격적일 수도 있는 말이나 사건들이 있을 겁니다."
"로크우드씨, 제가 비록 목사의 딸이지만 지금까지 자유롭게 책을 읽어왔고 더군다나 지난 2년간 브뤼셀에서 살았습니다. 충격을 받을 리가 없어요."
"그래도, 중요한 내용만 쉽게 요약해서 말하는 게 낫겠네요. 특히 그것들을 하나하나 모두 다 읽으려면 밤을 꼬박 세워야 할 테니까요. 히스클리프가 그것을 쓰는 데 걸린 시간을 생각해 보세요. 그저 히스클리프가..."
나는 손을 올려 그의 말을 막았다. "됐습니다. 더 이상 얘기하지 마세요. 저는 글자 하나하나 다 일고 싶으니까요. 물론 저도 피곤해요. 하지만 여행을 하는 중에는 전혀 잠을 못 자는 체질이니까 괜히 억지로 휴식을 취하려는 것보다는 이 편지를 읽는 데 열중하는 편이 더 나을 거예요."
나는 브뤼셀에 있는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건방진 질문일지 모르지만 아까 물어본 질문을 다시 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데요. 히스클리프에 대한 기억의 어떤 부분이 지금 선생님을 괴롭히나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얘기해주지요. 눈이 오는 밤이었으니까 오늘 밤 같았을 겁니다. 그때 나는 폭풍의 언덕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나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꿈을 꾸다 깼다 하면서 유령을 보았습니다. 아니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에게는 일종의 폭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 몇 주일 동안 몸이 아팠습니다. 환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유령을 본 것이 저에게 어떤 영항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 그 뒤로 몇 년 동안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고지식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귀신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나요?"
"캐서린 언쇼의 망령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됐습니다." 그가 나에게 편지를 넘겨주었다. 그것에 손을 대자 손가락에서 팔로 다소 오싹한 기분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등잔불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읽기 시작했다. 로크우드씨는 휴식을 취하려는 듯 비스듬히 누워있었지만 반쯤 뜬눈으로 내가 편지를 읽는 모습을 잠시 동안 유심히 지켜보았다. 나는 편지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서 조심을 했다. 히스클리프의 비밀을 담고 있는 편지는 내가 숨기고 있는 비밀일는지도 몰랐다.
1784년 4월 10일, 김머튼
캐시
히스클리프입니다. 방금 돌아와 보어즈 헤드에 있는 나의 거실에서 이 글을 씁니다. 당신이 잠들어 있는 곳에서 불과 32킬로미터 정도 되는 곳이다. 내일 마차를 타고 페티스톤 크랙스 뒷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내 여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내게 줄 수 있는 한마디를 기다리겠습니다. 그저 그 말 한마디만 전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듣기 위해서, 내가 폭풍의 언덕에 있는 방방마다 심장의 피를 한 말씩 쏟으며 참고 견뎌내야만 당신을 데리고 나올 수 있다면, 난 그리 하렵니다. 단 한마디면 나는 당신 편이 될 것입니다. 그저 한마디 말이면 한 시간 내에 우리는 주정꾼 힌들리의 학대와 우릴 떼어놓으려 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내가 사라진 이후 나의 행적에 대해 하나하나 써놓은 이 글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왜 떠났는지, 지난 3년 동안 왜 내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떻게 내가 우리 둘을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나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나에겐 비밀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나 사이에는 어떤 비밀도 없을 겁니다. 나는 어떠한 오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게 할 겁니다. 물론 폭풍의 언덕에서 보냈던 시절, 사람들은 종종 우리 둘을 갈라놓으려 했지만 말입니다.
시선을 피하지 말고, 아무것도 생략하지 말고 읽어 보십시오. 우리의 재결합이 늦어질수록 그 1초 1초가 내 가슴속에서 비수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이 이 글을 읽도록 요구하렵니다. 내가 이렇게 요구하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 이유를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캐시. 나도 꽤 괜찮은 남자입니다. 다만 이상하게 꼬인 운명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 겁니다. 나는 이제 교육도 받았고 예절이 무엇인가도 배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함께 편히 살기에 충분한 돈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십시오. 내가 느낀 대로 당신도 느끼고, 내가 이해했던 대로 당신도 이해하도록 모든 것을 천천히 밝혀야겠습니다. 이 순간부터 다시는 우리가 헤어질 수 없도록 하렵니다. 이 글을 읽어 보십시오. 설령 내 몸이 고통과 행복으로 뒤엉켜 갈기갈기 찢어진다 해도, 내가 기다릴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떠나던 날을 기억할 겁니다. 힌들리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롭힘때문에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상하고, 당신이 나 대신 에드거 린튼을 선택한 날부터 비참한 생각이 수없이 들었어도, 그저 당신을 위해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러나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체면이 손상될 거라는 당신의 말을 듣던 순간 나는 마침내 억장의 무너지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하고 결혼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당신과 나는 어쩔 수 없이 하나입니다. 우리가 헤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곧 신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부인했습니다! 나는 내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내가 왜 아니 어떻게 방문을 뛰쳐나가 페니스톤 크랙스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하늘과 들판 사이를 지나갔는지를 나는 너무나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 밤, 폭풍이 불 것 같은 밤이었습니다. 음산한 기운이 소용돌이쳐 더욱 어두워 보이는 구름안개가 자욱이 낀 밤이었습니다. 하늘은 어찌나 새까만지 땅과 하늘이 뒤집혀버릴 듯한 밤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습니까? 그때 나는 이미 내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정말 하찮은 존재임을 알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골 촌뜨기, 상놈, 철면피, 당신이 종종 했던 말들입니다. 내 스스로 말했던 게 아닙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에드거 린튼과 대등한 위치에 있을 때 힌들리가 나를 두들겨 패고 사랑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갔다면 문제가 달랐을 겁니다. 그 당시 몇 달 동안 그가 종종 당신을 방문하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집안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왜 당신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겠습니까? 아주 훤한 얼굴에 쾌활한 말투 그리고 정다운 태도 등 그의 모든 행동거지는 제아무리 까다로운 사람이라도 틀림없이 만족시킬 매력이 있었으니까요. 그 캄캄한 하늘에서 번개가 치듯 나는 문득 나 스스로에 대하여 깨달은 점이 있었습니다.
우락부락한 몸집, 시꺼멓게 탄 얼굴, 툭툭 내뱉는 말투, 에드거 린튼의 나무랄 데 없는 태도에 비하면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비로소 고통의 참된 의미를 알았습니다. 가난과 무식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나로서는 세차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악을 쓰는 것밖에 할 게 없었습니다.
나의 이 추악한 오물더미를 어떻게 털어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까? 나에게는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대답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희망도 물론 없었습니다. 그저 발버둥 칠 수밖에 없는 본능만이 있었다고나 할까.
나는 내 처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어서 빨리 힌들리의 사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나는 누구인가? 모든 것이 안개처럼 뿌연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내 마음대로 어디엔가 갈 수 있는 재산이 있었습니다. 나는 마구간에 얼마 안 되는 금화를 숨겨두고 있었습니다. 힌들리가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정신없을 때 주머니에서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내 노동에 대한 대가로 충분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찾아서 그를 정복하기 위하여 아니 복수하기 위하여 미움을 다지며 살 수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굵은 빗줄기가 때리기 시작할 때, 나는 폭풍의 언덕으로 돌아와 마구간에서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당신은 벽에 기댄 채 김머튼을 바라보면서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나를 찾고 있었는지 에드거 린튼을 찾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천둥 번개가 치자 당신은 그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눈빛으로 당신의 얼굴에는 입맞춤을 하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저주스러웠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나는 조지프의 토끼 덫 뒤에 있는 비밀 구멍에서 금화를 꺼낸 뒤, 머리에서 피가 나서 미끈미끈할 정도로 세게 머리카락을 한 줌 잡아 뽑아 그곳에 넣어두었습니다. 그 머리카락은 아직도 그 곳에 있을 겁니다. 내가 탈곡 창고의 문을 가만히 열고 들어갔을 때 폭풍은 그 정점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마구간이 흔들렸습니다. 번개가 치자 폭풍의 언덕은 작은 장작불로 비춘 것처럼 어렴풋이 그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나는 떠났습니다.
당신은 벽에 기댄 채 굳어버린 듯 검은 윤곽만이 보였습니다. 내 눈으로 당신을 본 마지막 순간의 얘기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김머튼 이외의 곳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알았겠습니까? 내 마음 속에 의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마차 침대를 타고 당신 옆에서 잠을 자면서 나는 자의식을 갖게 되었지만, 그보다 전에 있었던 나의 출생을 알리던 첫 울음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기억이 났습니다. 창문 밖의 전나무 사이로 휘몰아쳐 올라가는 바람소리 같은 울음소리 말입니다.
내가 당신의 아버지의 코트에 싸여 폭풍의 언덕에 오던 그 어두운 밤의 여행을 되새겨보니 어떤 도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강, 배, 선원들의 번뜩이는 이빨, 여인숙의 바닥에서 주운 빵, 해적의 손에서 춤을 추던 금화, 거대한 도시..., 희미한 기억이었습니다. 석회벽에 십자가가 걸려 있는 천장이 낮은 방, 싸움질하는 소리와 기도 소리, 강물의 악취가 밴 벽 아래에 있는 건너편으로 통하는 흙으로 된 터널.... 아주 희미하게 기억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연상되는 이런 지극히 단편적인 것들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나의 출생지에 대하여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지표이자 나의 출생에 대한 실마리였습니다. 아무려면 내가 두꺼비처럼 질퍽질퍽한 강바닥의 진흙 속에세 불쑥 튀어나온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천한 신분이었지만 그래도 부모가 멀쩡히 있던 사람이고, 내 출생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넬리의 이야기를 듣고서 당신의 아버지가 나를 발견한 곳은 리버풀이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리버풀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날 밤은 아주 빨리 지나갔습니다. 블랙호스 마시에서 폭풍우 때문에 나는 어디가 어딘지 알수 없었습니다. 잘 알고 있는 길인데도 세 번씩이나 미끄러져 진창에 빠졌습니다. 세 번째에는 정말로 지친 나머지 잠시 동안 의식을 잃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나는 웅덩이에서 입 속으로 들어온 진흙의 달콤한 맛을 느끼곤 정신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유령처럼 보이는 모습이 바로 앞에 있는 것을 보고는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지옥에서 나를 잡아가기 위하여 온 저승사자라는 생각이 들자 온 몸이 떨렸습니다. 어쩌면 잘못 본 덕택에 구덩이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겼으니까요.
삼킨 오물 때문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지만 서서히 동이 트는 곳을 향하여 김머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치즈를 운반하는 수레의 짚 속에 숨어 타고 맨체스터의 시장으로 갔습니다. 피곤하기도 하고 별로 즐거운 기분도 아니었지만, 여기저기서 온 상인들과 손님들로 북적이는 활기찬 시장의 모습에 만족스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했습니다.
리버풀로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하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수백 필이나 되는 옷감을 거룻배에 싣고 있던 사람에게 백삯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발길질을 해대면서 거지발싸개 같은 도둑놈은 배에 태워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돌아서기 무섭게 옷감 더미 꼭대기에 뛰어올라 몸을 숨겼습니다. 오후 내내 면과 올로 된 옷감 속에서 쉬면서 리버풀에 다다랐습니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거룻배 주인에게 보답하는 심정으로 아직 옷과 신발에 그대로 묻어 있는 웅덩이의 진흙을 가능한 한 옷감에 묻히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옷감 더미에서 살그머니 빠져나와 부둣가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끔 조심을 하면서 도망쳤습니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섰습니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저기 썩은 진흙 구덩이에서 나오는 악취와 앞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집들에서 나오는 악취가 내 주위를 빽빽이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낯선 곳이 아니었습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옛날 생각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물속에서 칼에 베이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줄줄 흘러나오는 피처럼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이 있었습니다. 정처 없이 둥둥 떠내려가다 안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거룻배 같은 추억 말입니다.
무작정 걸었습니다. 마치 가슴속의 내 심장이 아주 꾸불꾸불한 좁은 길을 돌아가듯,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빙빙 돌아다녔습니다. 희미한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인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수많은 골목 귀퉁이에서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른쪽 멀리까지도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습니다. 창문 틈새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라도 혹시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 눈을 까뒤집고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시커멓고 커다란 물제가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시커멓고 커다란 물체를 바라보았습니다. 잔뜩 긴장한 눈에 그 물체의 모습이 서서히 들어왔습니다. 높다란 벽이었습니다. 벽 뒤로는 무엇인가가 천천히 물결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공기의 느린 움직임으로 인해 나무가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 커다란 건물이 보였습니다. 아니 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벽을 따라 오른쪽으로 걸었습니다. 울퉁불퉁하게 굽은 벽이었습니다. 강가에 인접한 꼬부랑길 모퉁이에서 갑자기 무엇엔가 부딪쳤습니다.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무릎을 끓으면서 두 손으로 건물 바닥에서 자라고 있는 잡초를 짚었습니다. 무엇인가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머리 위로 깜짝이는 불빛을 발견하였습니다. 동시에 야생 동물 같은 짐승의 희미한 울음소리와 으르렁대는 소리를 내가 계속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캐시, 내가 어디를 그렇게 빙빙 돌아다녔겠습니까?
당신이 짐작하는 데 별로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들려준 노예선 얘기를 알고 있지요? 서인도 제도와 아프리카에서 이상한 동물과 갖가지 진귀한 물건들을 가져온다는 리버풀의 노예선 얘기 말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부잣집의 이동 동물원을 둘러싸고 있는 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왜 내 기억이 그것을 찾으려 했을까요? 마차가 지나가면서 횃불이라도 비쳐야 겨우 찾을 수 있는 길이었지만 나는 어둠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길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한 바퀴 돌았던 벽 뒤에 있는 문에 도착한 나는 문의 막대기 사이로 내 기억 속의 건물을 보았습니다. 그 건물은 팔라디오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엄 당당하고 좌우가 대칭이 되는 건물이었습니다. 두려움에서인지, 너무 기뻐서인지, 몸이 떨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나의 집이었다면 나도 대지주의 아들이었을 것이며 에드거 린튼 같은 조그만 시골의 반쪽 지주쯤은 내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문 옆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복을 입고 창을 든 사람이 등불을 들고 있었으므로 다른 한 사람은 쉽게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제복 입은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보고 있는 다른 한 사람은 제법 신사같이 보였습니다. 나는 그 사람처럼 행동하기로 마음먹고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얘기를 하는 동안 잠시 기다렸습니다. 나는 이 집이 어떤 집인지를 알아야 했으니까요.
내가 그에게 다가가자, 제복을 입은 사람이 나를 한 대 치기라도 할 것처럼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를 말렸습니다. "가만있어. 이 귀신이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할지 들어 보고 싶으니까. 틀림없이 최근에 무덤에서 일어나 나온 귀신일 거야. 수의를 몸에 걸치고 있잖아."
나는 나의 옷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시내에 있었을 때에도 지금처럼 행색이 더러웠으리란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이봐, 어디 네 놈 상판때기나 좀 보자." 신사의 말을 듣고 나는 막 도망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행동을 예상한 듯 그는 지팡이를 잽싸게 앞으로 내밀어 길을 막았습니다.
"여긴 왜 왔어?"
지팡이를 그의 목구멍에 쑤셔 박고 그가 한 말을 취소하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내가 거기에 간 것은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참았습니다. 단단한 몸집의 사내였지만 내가 더 키가 컸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왜 물어요?"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얘기인데, 까불지 말고 어서 말해." 나는 그 신사의 무례함을 무시하기로 작정하고 경비원의 얼굴만 쳐다보면서 물어보았습니다. "이 집은 누구 집입니까?"
그 신사가 지팡이를 탁 치니까 경비원이 대답을 했습니다.
"교회 건물이야."
"교회 건물이 아니잖습니까?"
경비원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건 거기 가서 알아봐."
"안에는 누가 삽니까?"
그 순간 건물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 나나 신사나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경비원이 다시 웃었습니다.
"네 친구들 같은데, 너와 똑같이 생긴 놈들 말이야."
흥분하기도 했지만 시장에서 빵 한 조각 먹은 뒤로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쫄쫄 굶고 있었으므로 머리가 아찔했습니다. 같은 피를 나눠 생김생김도 비슷한 안에 있는 나의 형제들의 모습이 일순간 머리를 스쳤습니다. 잃어버린 형제가 따뜻한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반길 준비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발작하듯 신사가 경비원의 손에서 등불을 낚아채어 내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것은 그다운 행동이었습니다.
경비원이 빈정거렸습니다. "여기 멋진 놈이 하나 있습니다. 이놈의 심술궂게 생긴 이마와 날카로운 눈매를 보니까 저놈하고 싸움을 붙여놓으면 딱 좋겠습니다. 이놈이 벌써 신이 나서 으르렁대는 것 좀 보십시오. 이놈은 꼭 묶어놓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물리기 십상입니다."
나는 그 신사가 불빛 위로 나의 눈을 찾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작아졌습니다.
"이봐, 이제 자네 집인가?"
그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나의 말문을 막히게 했습니다. 그는 등불을 더욱 내 머리 가까이 갖다댔습니다. 나는 그 불기운에 머리카락이 그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말해봐, 임마."
"이곳은 도대체 뭐하는 곳입니까?"
경비원이 대답을 했습니다. "정신병원이야. 세인트 니콜라스 정신병원이란 말야. 영국에서 아주 맛이 간 놈들이 사는 곳이지."
가슴을 지팡이로 된통 얻어맞았는지 나는 뒤로 벌렁 넘어졌습니다. 등불과 지팡이가 땅바닥에 부딛치는 소리가 들리고, 신사가 나를 잡으려고 달려드는 순간 나는 잽싸게 몸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곳이든 가리지 않고 냅다 달렸습니다. 미쳤지요!
이것이 내 삶의 역사입니다. 내 목구멍을 조르기 위해 과거부터 내게 뻗쳐오는 운명의 허기진 손아귀라고나 할까? 이제 기억이 납니다. 아니 생각이 납니다. 미쳐야만 현실처럼 보이는 환상이라도 불러낼 수 있으니까요. 그 조그만 벽에 석회를 바른 방 말입니다. 벽 밑의 터널도 생각납니다. 미친 사람들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파놓은 비상 탈출구 말입니다. 심한 욕설과 발길질과 폭행 - 망할 놈의 새끼. 심지어는 그때에도 인간 취급을 못받고 위험한 동물 취급을 받으며 독방에 갇혀 있던 아이. 이제 나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혐오를 얼마나 더 보아야 할지? 어른의 키만큼 자랄 때까지인가?
캐시, 당신마저도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에드거 린튼에게로 가벼렸는 데요. 어느새 나는 도망치던 길보다 훨씬 넓은, 인적이 드문 길을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용한 집들이 길 양편에 서 있고 집들마다 커다란 장원이 있었습니다. 다니는 사람도 없고 얘기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저 철벅철벅거리는 나의 신발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 모든 것이 다 조용했습니다. 나 혼자서 밤을 즐기는 셈이었습니다.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미친놈도 휴식을 취해야 하니까요. 나는 공원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나무 밑에 덜퍼덕 누워버렸습니다. 미쳤든지, 제정신이든지, 잠을 자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미래에 대한 보다 명확한 설계를 끝낸 후 깨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깊이 잠들었을 때 나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가끔 꿈을 꿀 때마다 나는 당신을 봅니다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캐시, 내가 아는 당신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거칠다고나 할까, 시퍼렇게 멍이 든 입술, 분노와 고통으로 잔뜩 화가 난 채 나를 바라보던 눈빛 - 이것이 당신의 모습이었습니다. 피가 묻은 입술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사랑스런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먼 기억 속의, 아주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였습니다.
히스클리프, 당신이 떠날 때 난 벽에 기대어 서 있었어요. 끈적끈적한 빗물이 내 목구멍을 타고 흘러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요. 당신은 떠났고, 난 당신이 돌아오지 않으리란 걸 알았어요. 비가 그치자 습지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당신의 모습을 늑대로 바꿔버렸어요. 나도 늑대였어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을 때 우리가 하나였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였어요. 축제일이 아닌데도 신이 난 듯 당신이 야윈 얼굴로 구름 위에서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을 보았어요. 날 믿어줘요. 날 믿어주기 바래요. 나는 오직 당신을 위한 거랍니다. 땅에서 습기가 올라와 내 뱃속을 뚫고 지나가면 난 몸이 아파집니다. 습기가 널리 퍼져 있는 김머튼 교회 안뜰에서부터 꾸불꾸불 안개가 솟아납니다. 난 당신을 붙들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당신은 고집을 피우는군요.
욕심 때문에 결국에는 내 성이 한 순간에 무너질 거라고 넬리가 얘기했어요. 앞이 뿌옇게 안개가 꼈어요. 나는 벽바닥으로 떨어져 진흙탕 물에 빠졌습니다. 진흙이 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고 모든 것이 싸늘하게 식어갑니다. 내가 교회 안뜰에 누워 있을 때 묘지가 느끼는 겁니다. 내 미래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때면 당신은 돌아오겠지요. 그렇지요? 땅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난 당신이 구둣발로 초롱꽃을 밟는 소리를 들을 거예요. 내 몸 위에서 당신은 멈추어 서서 내 묘지명을 읽겠지요. 그 위에서 태양은 당신의 코트를 따뜻하게 해주고, 당신은 시원한 실바람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잠시 멋진 가락으로 휘파람을 불다가는 어슬렁어슬렁 사라지겠지요....
안돼요, 내사랑.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순 없어요. 난 죽음의 무감각을 뿌리치고, 차가운 손이라고 진흙 밖으로 내밀렵니다. 내 죽은 육신의 살점이 터지는 한이 있어도 뒤엉킨 하얀 뿌리가 바삭바삭 소리가 날 정도로 손톱으로 할퀴어 길을 만들렵니다. 나를 막을 수 없을 거예요.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뼈 마디마디를 움직일 거예요.
잔디가 부풀어오르면 내 손가락이 그것을 뚫고 공중으로 나올 거에요. 메마른 줄기 위에 감겨있는 이상한 무덤꽃. 그래요. 당신은 볼 거예요. 그러나 뽑지 마세요. 뽑을 수도 없어요. 뼈로 그대의 발목을 죌 겁니다. 그대는 내 것이 되겠지요. 이곳에서 나와 함께 있을 거에요.
목소리가 작아지고 화가 난 눈빛이 점점 희미해지자 나는 더이상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잠이 깼습니다. 그러나 캐시, 이 찢겨진 울부짖음이 당신의 목소리라면, 밤에 꾼 것이 꿈이 아니라 짜여진 운명의 틀에 맞춰 우리의 목숨을 가져가기 위해 저승 사자가 진짜로 나타난 거라면 사랑하는 사람, 이 편지를 덮어두고 지금 나에게 달려오십시오,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끔찍스런 당신의 목소리는 우리의 포옹의 홍수 속에서 녹아 사라지고 말 겁니다.
날이 환하게 밝았습니다. 눈이 부셨습니다. 정신이 들었지만 나는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캐시, 나는 당신과 폭풍의 언덕에 대한 강한 욕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점점 뜨거워지는 햇살이 당신 모습을 내 근처에 비쳐주지 않으면 내 목마름은 틀림없이 폭발할 것 같았습니다. 지난 몇 시간 동안의 일들이 내 가슴속에 가지런히 정렬해 있었습니다. 그 일들 때문에 잠시나마 당신을 잊고 있었던 것은 커다란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야 상해나 배신이나 살인 등과 같은 일상적인 범죄는 있을 수 없지만 그것은 그 이상의 범죄와도 같습니다. 우리의 본래의 영혼만 그대로 있다면 모두 먼지 티끌처럼 한순간에 사라질 범죄와는 다른 범죄 말입니다.
그러나 나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내가 아는 거라야 모두 한갓 꿈일지도 모릅니다. 캐시, 당신은 석회벽에 비치는 달빛으로 빚은 미친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 정신병원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이 순간 싱싱한 풀밭 위에 누워있지 못하고, 쇠사슬로 묶인 채 독방에 갇혀 하찮은 소리나 해대며 더러운 지푸라기에나 신경 쓰며 있을 겁니다. 내 마음은 있지도 않은 거미줄에 갇혀 있는 셈이었을 겁니다.
"눈물을 흘리는구먼." 이 소리는 내 눈꺼풀을 경계로 삼은 저승에서 들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새벽녘에 시커먼 물체가 내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모습은 어젯밤에 나에게 질문을 했던 신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내 머리에서 1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그저 살과 피로 된 존재였다면 단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었겠지만, 나의 불안한 환상 때문이 아니라면 그가 이곳에 나타날 리 만무하다는 생각에 나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물었습니다. "누구세요?"
그 사람이 말을 했습니다. "꿈꿀 때의 헛소리와는 전혀 달리 인간의 목소리로 얘기를 하는군."
"당신이 내 꿈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가 꿈속의 환상이 아니라면 그 이상의 것을 얻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움직이는군. 단단한 사람인데도 추위에 떠네. 그게 인간의 특성이지. 이봐 몸을 덥게 해봐." 이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입고 있던 긴 옷을 벗어 내 등을 감싸주었습니다.
나는 언짢은 기색을 보이며 더욱 강한 어조로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굽니까? 누구냐고요."
그 사람은 껄껄 웃었습니다. "그렇게 거친 말투로 물으면 쓰나. 내 대답을 하리다. 난 아어란 사람이오."
"나를 어떻게 찾아냈습니까?"
"줄곧 뒤를 쫓아다녔으니까, 어렵지 않았지. 미친 사람처럼 씩씩대며 고함을 치면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더군."
"그러면 밤새 여기에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소"
"왜죠?"
"두 가지 이유 때문이오. 첫째는, 젊은이처럼 사나운 사람을 내가 존경하는 이웃 동네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두려워서였소."
"또 다른 이유는 뭐죠?"
"내 밑에서 일할 사람이 한 명 필요한데 젊은이를 고용하고 싶거든."
나는 논리에는 아주 젬병인 사람이었으므로 그 두 가지 이유가 서로 모순된다 할지라도 놀랄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놀랐던 것은 그 사람의 이상한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날이 완전히 밝았습니다. 나는 그도 덜덜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도 나처럼 이슬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미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어 씨였습니다.
그는 나의 의구심을 없애려는지 계속 말을 했습니다. "H, 콧방귀를 뀌는구먼. 얼굴빛이 어둡고 내가 이상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래요. 나는 가끔 터무니없는 공상을 하는 이상한 사람이오. 내가 젊은이를 붙드는 것은 괜한 짓일 거요. 맞소?"
"왜 저를 H라 부르죠?"
그는 잠자코 나의 가슴을 가리켰습니다. 가슴에 손을 대어보았더니 가슴 바로 옆에는 당신의 열네 번째 생일날에 당신이 내게 준 메달이 있었습니다. 두 마리의 종다리가 날고 있는 모습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1799년 C가 H에게' 라는 글이 새겨진 메달이었습니다. 메달은 그대로 있었지만 쓰여진 내용을 읽기 위해 그가 내 셔츠를 열어본 게 틀림없었습니다. 나는 돈을 넣어둔 곳에 얼른 손을 대보았습니다.
"또 무너가. 내가 도둑질이라도 했을까봐 걱정하나 본데, 걱정하지 말게. 물건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니까. 내 집으로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아보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까. 나를 나무라지는 말고. 그 금화는 정직하게 얻은 것인가?"
"이건 내 것입니다."
"애매모호한 대답이군. 넘어갑시다. H. 할 줄 아는 게 있소? 자, 자.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할 줄 아는 게 있는지 궁금하다니까. 생활은 어떻게 꾸려왔소?"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들판에서 일하거나 마구간에서 일했습니다. 천하디천한 시골 머슴이었지요. 촌뜨기, 시골뜨기였습니다."
"촌뜨기의 목소리는 아닌데, 이상하군. 글을 읽을 줄 알아요?"
"예."
그는 자기 주머니에서 책을 꺼내어, 나에게 주었습니다. 잘된 일이 었습니다. 나는 책을 펼치고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인간의 마음, 그 빛에 놀랐어라
예전에 독뱀이 숨어 있던
메마른 땅, 인간의 마음에서는
더이상 달콤한 은총의 향내가 나오지 않네
사탄이 통치를 하던
메마른 땅,
영혼은
느끼리라.....
아어씨가 손을 들어 나를 막았습니다. "운율이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그런 대로 괜찮은데. 누가 가르쳐주었소?"
"내가 살던 집에 오시던 목사님입니다."
"마구간 청소부를 학교에 보냈단 얘기요? 내가 고지식해서 그런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나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 낯선 사람 앞에서 내가 살아온 과거를 말하지 않기로 작정했으니까요.
"그런데 'C'는 누구지? 몰래 사랑을 즐기던 하녀인가? 시골 젊은이의 입맞춤을 기다리는 꽃 같은 귀염둥이인가? 아니지.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 주제에 그런 목걸이를 살 만한 돈이 있을 턱이 없지. 금목걸인데. 'C'라는 돈 많은 과부가 하찮은 선물로 물 좋고 싱싱한 제비를 꼬드긴 건가?"
나는 벌떡 뛰어올라 아어 씨를 풀위에 자빠뜨렸습니다. "내가 힘이 더 센 것처럼 그녀의 생각은 당신 같은 사람의 생각보다는 훨씬 더 고상할 겁니다. 다시 그따위 얘기를 하면 입을 찢어버리겠습니다."
아어씨는 잠시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더니 화를 내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습니다.
"허허! 그렇군, 진심을 얘기하고 있군. 그 야수 같은 눈빛을 보면 틀림없이 알 수 있지. 두고 볼 만한 일이군, 정말 두고 볼 만한 일이야."
나는 그의 숨통을 걷어차서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발작을 끝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까 그의 모습이 꽤 비극적으로 변해 있었고, 목소리는 거의 흐느끼는 듯했습니다. 나는 몸을 홱 돌렸습니다.
"잠깐만." 카멜레온이 변신하듯이 그의 목소리는 웃음을 띠는 것 같았습니다. "농담도 받아들이지 못하나? 그저 장난삼아 해 본 말인데. 악의 없이 해 본 말 말이오."
"당신 같은 사람과 농담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군 맞는 말이오. H라는 사람은 놀림을 당할 사람이 아니지. 깔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구. 같이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재치 문답을 하면서 마음 편하게 반 시간을 보낼 사람도 아니지요. H라는 사람에게는 분명 모든 것이 피와 눈물일 테니까. 돌아서 봐요. 입을 쑥 내밀고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걸 보니까 다시 나를 때리고 싶은가 본데!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젊은이가 힘이 세다는 사실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거요. 나는 분명 그러지 않을 거요. 젊은이의 주먹 한 방에 넋을 잃고 추위와 허기에 반쯤 마비가 된 채 나는 여기 젖은 땅 위에 주저앉아 있소. 30초면 나를 콩가루가 되도록 두드려 팰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 아랫사람들이 졸린 눈으로 나를 기다릴 게 틀림없으니, 내 숙소로 갑시다. 활활 타오르는 불 앞에 앉아 몸을 말리면서 커피도 마시고 베이컨 빵을 먹으며 우리 일에 대해 얘기해봅시다."
그는 손을 위로 올렸습니다. 손을 뿌리치며, 이 기분 나쁘고 어리석을 정도로 자부심이 강한 작자를 해치워버리고 싶었지만, 내 뱃속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침을 같이하자는 그의 제의를 받아들인다고 내게 무슨 손해가 되겠습니까?
나는 팔짱을 끼면서 말했습니다. "혼자 힘으로 일어나세요. 따라는 가겠습니다."
아어씨는 고통스런 듯 한숨을 쉬며, 일어서는 것이 힘든 척 과장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내가 당해도 싸다는 생각이 드는데, 당연하지. 장미 가시를 단단히 잡은 셈이니까. 상처를 핥는 것으로나 위안을 삼아야겠는걸."
하녀가 숙소의 문을 열고는 나를 보자, 놀란 표정으로 얼른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러나 아어씨가 안내하는 것을 보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달아났습니다.
"벌써 저 여자를 손에 넣었구먼, 우리는 자네의 그런 절대적이고 확실한 매력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네. 자네는 손대는 것마다 금으로 변하게 하던 미다스 왕과 같은 존재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네의 영향력은 놀랄 정도일 거야. 자, 우선 우리 일 애기부터 하지."
그가 홀에서 의자를 뒤로 비스듬히 하고 졸고 있던 하인의 귀를 꽉 잡아당기자 하인은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그는 하인에게 거실의 불을 새로 지피고 2인분의 커피와 아침을 가져오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난롯가에 앉자 아어씨는 매우 들뜬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양손을 부벼대며 말을 했습니다. "이제 됐네. 다행이야. 뼛속의 습기까지도 날아갈 테니까. 안 그런가. H?"
"그렇게 부르지 마시죠."
"달리 부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면야 기꺼이 바꾸지."
"제 이름은 히스클리프입니다."
"히스클리프.....히스클리프! 이름 같지 않은데, 별로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야."
"이름 같든 아니든 그게 제 이름입니다."
"세례명인가? 성인가?"
"둘 다인 셈입니다."
"그럼 나도 그렇게 알아야겠구먼."
"히스클리프, 보잘것없는 음식을 푸념해서도 안 되지만 탐내서도 안 되네. 그러면 아랫사람들이 놀라니까. 오늘, 아니 어제 아무것도 먹지 못했나?"
그의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허겁지겁 먹는 내 꼬락서니를 그가 보지 못하도록 어깨를 돌렸습니다. 그의 큰 뜻이 담긴 말을 무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다시 손가락을 딱 꺾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존, 이 사람 좀 보게."
"네."
"이 사람이 어떤 사람 같나? 얼버무리지 말고 얘기해보게."
"너무 지저분한데요. 죄송합니다."
"지저분하다? 지저분하다고? 놀라운 얘기인데, 지저분하다? 이 사람처럼 깨끗한 사람을 난 세상에서 본 일이 없네. 까치 뱃바닥처럼 하얀 사람인데. 저 사람이 더럽다고 생각되면 우리가 깨끗하게 닦아줘야겠지. 자넨 우리 집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가장 눈 맵시가 있는 사람이니까. 저 사람 모습을 잘 봐두게."
"무슨 말씀이시죠?"
"자네 눈으로 저 사람 옷 치수를 대략 재어보란 말이야. 옷가게가 문을 열면 눈에 띄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한 벌 저 사람에게 사주게나. 어떤 옷이든 지금 저 사람이 입고 있는 옷보다는 낫겠지. 나중에 페어팩스 부인 가게에 가면 저 사람에게 어울리는 옷을 살 수 있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돌아오는 대로 더운물과 강한 산을 섞은 물을 가득 채운 통에 저 사람을 넣어 10분만 휘저어봐. 그러면 걸러지고 남는 게 있을 거야. 분명한 인간의 존재가 남거나 아니면 노력한 보람이라도 남겠지."
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는 셔츠 안에 빵을 채워넣으며 일어섰습니다. "아어씨,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건 모욕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가만히 있을 저도 아니고요. 안녕히 계십시오." 내가 빈정대는 투로 말을 하자 아어씨는 아주 사나운 눈초리로 존을 쳐다보았습니다. 존은 슬금슬금 문으로 뒷걸음질 쳤습니다. 아어씨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두둑한 지갑을 꺼냈습니다.
"앉게나. 이따위 장난을 할 게 아니라 이치에 닿는 말을 해야겠지. 히스클리프, 이렇게 하지. 자네는 일자리가 필요하지? 나는 일할 사람이 필요해. 자네 말대로 하면 가끔 하는 모욕이고, 내 말대로 하면 농담인 것의 대가로 내가 돈을 지불하겠네. 1년에 얼마를 주면 충분하겠나?"
그의 지갑이 불룩해 보였습니다. 나는 지붕에 '아'라는 문양이 새겨진 아주 멋진 마차를 그의 마당에서 보기는 했지만, 이 사람이 소유한 것들이 확실히 실속 있는 것들이라는 점을 이때에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본 것을 훨씬 초월하는 재산을 의미했습니다. 그 당시에 내가 가장 우아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에드거 린튼의 저택이었습니다. 나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린튼의 저택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저택에 내가 몸을 담을 수 있다면, 생각만 해도 짜릿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이 이상한 사람을 휘어잡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증명을 해 보인 뒤였습니다. 내가 왜 그의 갑작스런 생각을 이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분명 내가 마음 내켜 하지 않는 아첨을 나에게서 받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어쨌든 그것은 최선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앞으로 기대할 만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마 미쳤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중심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상태가 그 사람보다 나았겠습니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 사람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힌들리가 조지프에게 주던 월급의 배인 50파운드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욕심이 과하군. 욕심이 과해. 히스클리프!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더 큰 이익을 희생시키지 않도록 조심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얘기를 하는 걸 보면 대단히 깎아서 얘기하나 본데, 나는 더 잘 깎는 사람이야. 자네가 나를 꺾을 수는 없어. 이렇게 타협하지. 자네가 제시한 금액의 두 배, 즉 100파운드를 주지. 자, 이제 맘대로 하게!"
나는 놀라서 입을 헤벌리고 있었나 봅니다. "허허! 입을 헤벌리고, 나와 내 재산을 모두 먹으려 하누먼. 그러지 말아. 나는 자네에게 아주 유익한 사람이야. 나의 스코틀랜드 사람 특유의 피가 끓는군. 그렇다면 포기하고 수익 체감의 법칙에 따라야지. 200파운드면 어때?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더 이상은 안 돼."
나는 마침내 아무 말도 못하고 큰소리로 웃기만 했습니다. 아어씨가 심각한 얼굴을 지었습니다. "흠! 이제야 이일의 심각성을 아는군. 그러나 너무 늦었어. 흥정에 있어서 자네는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해. 좋아! 250파운드. 피복비와 식사대는 따로 주지. 히스클리프, 이제 졌다고 시인하지 그래. 악수나 하자고. 어려울 거 없어요."
나는 아어씨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그의 조롱의 대상이 되어도 괜찮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욕을 주는 일이라면 그가 그보다도 더 많은 돈도 기꺼이 주리라는 것을 내심 잘 알고 있었습니다.
숙소 바깥에서 본 마차를 타고 시골에 있는 아어씨의 집으로 다시 떠났습니다. 김머튼보다는 런던 쪽으로 대략 1백 킬로미터 정도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캐시, 그곳으로 갈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을까 상상해 보십시오. 1미터를 가면 그만큼 당신에게서 멀어지는 셈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의 재결합을 위해 나아가는 셈이었습니다.
아직 하인의 의무라든가 부수적인 신분을 부여받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나는 아어씨와 함께 편안하게 마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존을 아주 당황스럽고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그는 마차 꼭대기에 앉아 우리의 짐을 살피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자기 주인의 피를 빨아먹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는지, 5분이 멀다 하고 시뻘건 얼굴을 거꾸로 들이대고 창문으로 살펴보곤 했습니다.
그의 열이 오른 눈빛을 냉정하게 쏘아보면 그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셈이었으므로 나는 한층 더 만족스런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저 멀거니 바라다보는 일 이외에는 존이 섬기는 아이씨와 할 일이 없었습니다. 아어씨는 지난밤에 그 우스꽝스런 눈초리로 나를 감시하느라 피곤했는지 의자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나지막하게 코를 골고 자고 있었으니까요.
아어씨는 보통 키에 가슴은 넓고 궁둥이가 반듯한 건장한 몸집의 사람이었습니다. 숱이 많은 새까만 머리카락에 피부색이 까무잡잡한 그는 화가 나면 얼굴이 경직되고 비아냥거리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편히 쉬고 있는 그의 모습에는 완연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마차에서 선잠을 자는 것은 불편하게 보였습니다.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면 반쯤 눈을 뜨기도 했지만, 오히려 더욱 깊이 잠들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어떤 여자의 이름을 부른 것 같았지만 알아들으려고 신경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알려고 마음만 먹으면, 내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중에라도 알아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니까요.
나는 그와 점심 식사를 하면서도 그의 농담과 재치 있는 말과 오만한 말투를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의 그러한 태도를 모방해야 할지 무시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신사가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사가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신사가 되기 위해서는 본받을 만한 모델이 내게 있어야 했습니다. 이 부유한 사람이 내 눈앞에서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것은 그런 면에서 더욱더 잘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런 모습으로 나 자신을 개조할 필요가 정말 있을까요? 내 본능은 아니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나는 멀지 않은 미래를 위해 나의 마음을 열어두고 현재로서는 그저 나의 분수를 지키는 데 만족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나는 내심 혼란스러웠습니다. 내가 아어씨와 그의 이상한 편애로부터 과연 무슨 이득을 볼 것인가 이리저리 재보기도 했지만, 나의 출생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옛 기억을 새로이 이해하고서는 그 충격으로 어지러웠습니다. 깨달은 것이라고는 그저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과 그것들은 아마도 열 배쯤은 더 끔찍하리라는 점뿐이었습니다.
정신병원에서의 감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어땠을까요? 만약 내가 그 정신병원에 들어가 내 얘기를 하고 계획을 했던 대로 질문을 했더라면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나에게 손을 내밀며 나의 방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않았을까요? 만약 누구라도 나의 신분의 비밀을 눈치챘더라면 나는 지금 자유도 없고 생활 대책도 없었겠지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 그러한 생각은 극히 환상에 불과할 뿐일 겁니다. 내가 발설하지만 않는다면 아주 안전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내를 지나갈 때 나는 창가에서 뒤로 떨어져 앉았습니다.
우리가 아어 씨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날이 어두워진 뒤였습니다. 점잖아 보이는, 나이가 제법 든 가정부인 듯한 여자가 목례를 하며 여러 개의 문 중에서 하나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녀가 부드러운 말로 하인들을 깨우자 그들도 나왔습니다. 아어씨가 존에게 나를 3층의 침실로 안내하라고 얘기했으므로 나는 서둘러 커다란 계단을 올라 아주 넓은 복도를 지나갔습니다. 존이 침대라고 가리키는 시커먼 물체에 털썩 주저앉자 아래층의 사람들에게 여러 지시를 내리는 아어 씨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이 새로운 삶의 문턱에서 기도를 한다거나 저주를 한다거나 할 새도 없이 잠에 빠졌습니다.
문의 걸쇠 소리에 갑자기 잠이 깼습니다. 조지프가 와서 한대 갈기면서 훈계를 하며 깨웠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그러나 곧, 조지프의 힘센 손아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새로운 곳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에서만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침대 곁의 테이블 위에는 음식 쟁반이 놓여 있었습니다. 얼굴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식사를 가져와서 나를 깨우고 같 것 같았습니다. 나는 식사를 한 뒤 옷을 입고 방을 나왔습니다. 떠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홀 입구로 향하는 계단 끝에 있는 아주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환한 복도 양편에는 내가 나온 문과 같은 문들이 나란히 줄을 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문들 뒤에는 침실이 있었을 겁니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고나목이 새겨진 커다란 떡갈나무로 된 현관문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밖으로 달려 나가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환기를 하려고 열어두었는지 현관문이 더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지키는 사람들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전날 밤의 하인들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방마다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모두 호화스런 방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을 정도의 커다란 식장 유리창에는 환한 자주색 커튼이 걸려 있었습니다. 공작새 털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커튼이 상쾌한 산들바람에 너울대고 있었습니다. 기다란 테이블 주위에는 의자가 열네 개 있었는데 하나같이 환한 자주색이었습니다. 중국풍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꽤 많았는데, 커다란 벽난로 위에는 중국 꽃병과 동으로 된 꽃병이 많이 있었습니다. 벽에는 그림이 그려진 부채가 걸려 있었고, 청자 그릇에는 거무스름한 자두가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나는 자두를 하나 집어들어 반들반들한 테이블 한가운데로 굴려보았습니다. 자두가 테이블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가장 가까운 창문 밖으로 그 자두를 냅다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자두를 내 주머니에 가득 집어넣었습니다.
식당 옆에 붙어 있는 거실도 거의 마찬가지였습니다. 색깔만 흰색과 체리빛이었을 뿐입니다. 거실의 창문도 모두 열려 있어서 창 밖의 꽃밭에서 벌레들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두 마리의 얼룩 고양이가 정원 벽 위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번에는 복도 반대편의 문으로 빠르게 다가가서 문을 확 열어 제쳤습니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소란이 일었습니다. 난롯가에서 황동으로 된 쇠살대를 닦고 있던 가정부를 놀라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습니다. 그녀나 나나 모두 입을 쩍 벌릴 정도로 서로 놀랐습니다. 물론 나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었습니다. 게다가 나는 입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더 우스운 것은 '어'하는 소리를 내질렀는데, 그 소리가 집의 아래까지 들렸다는 겁니다.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창문의 커튼을 젖히고 정원으로 발을 옮겼습니다. 눈 옆으로 하얀 불빛이 얼핏 보였습니다. 긴 양말을 신은 어떤 남자가 울타리 너머로 급히 사라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유심히 보니까 존으로 보이는 사람이 고나목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겁니다.
어찌 되었건 나는 이러한 줄다리기에 금방 자제력을 잃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그 스파이 같은 작자에게 보고할 꺼리를 주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였으므로 나는 부엌의 고양이에게 자두를 던져 주었습니다. 고양이들이 자두를 찾으려 잽싸게 움직이자 나는 길에서 하얀 돌을 집어들어 담 위에 쭉 놓아둔 빈 화분들을 향해 던졌습니다. 그러나 화분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는 너무 단조로웠습니다. 나는 쓸데없는 장난을, 그것도 보는 사람들이 없는 데에서 한 것에 대하여 스스로를 나무랐습니다. 그때 마차를 끌던 멋진 말들이 생각났습니다. 말쪽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가끔씩 들리는 말들의 울음소리를 따라가다가 나는 드디어 마구간을 찾아냈습니다. 가시덩굴이 몹시 우거진 곳 너머에는 마구간이 있었으므로 나는 지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빙 돌아서 목표 지점에 다다랐습니다.
마구간도 장관이었습니다. 열려 있는 커다란 이중문 안의 마사는 무게도 있고 분위기도 있어 보였습니다. 열십자 모양으로 쳐진 수십 개의 가벼운 쇠창살 양옆으로는 조그맣고 기다란 창문이 일렬로 나 있었습니다. 내가 나란히 양편으로 서 있는 말 사이를 지나 앞쪽으로 걸어가니까 말들이 그 긴 머리를 내 쪽으로 돌렸습니다. 말을 누군가가 잘 보살피고 있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보살핀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처럼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잠깐 문 근처의 말들이 낯선 사람인 나를 쳐다보던 것을 멈추고 바깥의 번쩍이는 물체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내 뒤를 밟아왔을 겁니다.
그래, 그런 식으로 신경절을 계속 벌일 거면 한번 해보자. 누가 책임질 일인지... 나는 부아가 치밀어서, 편자 도구가 가득 담긴 여러 개의 커다란 캐비닛과 최고 품질의 스페인 연장들이 바닥에서부터 천장 끝까지 줄지어 걸려 있는 창고로 갔습니다. 가장 좋은 안장과 고삐를 골라 제일 총명해 보이는 적갈색의 말에 얹었습니다. 구석에서 코를 씰룩거리는 말이 가장 훌륭한 말이었지만, 헝겊 칸막이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데다 휘둥그런 말의 눈을 보니까 꽤 다루기 힘든 놈이란 생각이 들어 그 말을 제외시켰습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나는 적갈색 말을 꺼내어 올라타고는 떠났습니다. 그 스파이가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한다면 한 번 불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나는 말을 몰았습니다. 마구간 뒤의 울퉁불퉁한 벌판을 지나 마침내 돌담을 훌쩍 뛰어넘어, 꽤 키가 큰 가시금잔화 풀이 널려 있고 그 위로는 떡갈나무가 서 있는 산 위로 줄달음쳤습니다. 산꼭대기에 다다르자 나는 말을 멈췄습니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신선하고 푸른 즐거운 농촌 풍경뿐이었습니다. 그 지역의 주요 상업 중심지라고 부르는 공업 지역만이 예외로, 수평선 저 위로 매연에 찌들은 모습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헤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마을이 아주 가까이에 보였습니다. 산세가 약한 조그만 두 개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아담한 농장과 집들은 한 두 채 정도였는데 바둑판 모양의 실 울타리와 작은 숲과 목초지 사이에 예쁘게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해를 보고 위치를 확인한 뒤, 북북서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내 계산대로 하면 김머튼과 폭풍의 언덕은 그쪽 방향이었습니다. 나는 어느새 화가 풀렸습니다. 나의 영혼은 당신을 향하여 날갯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캐시, 울퉁불퉁한 산 저 너머로, 내륙 지방의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공장 굴뚝 너머로, 맨체스터 시장 너머로, 늪을 지나고, 개울을 지나고, 시냇물을 건너 그저 당신에게로 날아갔습니다. 아! 당신의 그 발그스름한 뺨을 부드럽게 만져보고 싶어서였답니다.
이렇게 우리가 헤어질 수 있었지요? 당신과 내가 얼마나 여러 번 맹세를 했습니까?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어느 누구도 우리 둘을 갈라놓지는 못하게 하리라고. 몇 번씩이나 가슴과 가슴을 맞대었습니까? 우리의 가슴이 하나가 되어 정직한 심장의 소리가 커다랗게 고동칠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함께 하리라는 것을 얼마나 우리의 귀에 대고 서로 속삭였습니까?
정말 몇 번이었을까요? 당신이 나의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곳에 있듯이 나도 당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낯선 산 위에서 낯선 말 위에 앉아, 당신의 모습을 어렴풋이 그려주는 저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가 과연 옳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서로에게 설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당신을 떠나야 했던 나는 나를 배신한 당신만큼은 죄가 없겠지요?
말고삐를 꽉 조이고 옆구리를 사정없이 걷어차며 구름들 사이로 끝없이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갑자기 격렬히 일었습니다. 폭풍의 언덕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갑자기 격렬히 일었습니다. 폭풍의 언덕으로 달려가 당신의 가슴에 안길 때까지 말입니다. 그 구름 너머에는 분명 당신이 있었겠지요.
난 정말 그럴 수 있었을 겁니다. 말은 그저 나의 신호만을 기다리며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말을 멈추었습니다. 말고삐를 잡은 나의 손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막일로 굳은 살이 잔뜩 박힌 시꺼먼 손 - 내가 지금 돌아가 보았자 나를 기다리고 있을 한없이 고고 천한 일들과 당신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야 어떻게 잠시 쉴 수 있을 뿐, 그 잠깐의 휴식이 지나고 나면 허무한 순간들이 되돌아 온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손을 보았던 겁니다. 더군다나 지금쯤이면 당신이 내 손에 입맞춤을 해주듯이 그의 손을 꼭 잡고 입맞춤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생각만 해도 기가 막혔습니다. 나는 있는 힘껏 말을 몰아 비탈길을 내쳐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두 산 사이에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아서서 그 조그만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나는 결국 마구간으로 향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올 때 길가 가시나무의 삐쳐 나온 나뭇가지에 말의 엉덩이가 스쳐 벗겨졌습니다. 말을 세우고 보니까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거미줄을 상처에 밀어 넣는 우리만의 방법으로 아주 쉽게 지혈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 지혈법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나는 땀을 흘리는 말의 가슴을 쓸어주고는 말을 제자리에 다시 넣어두었습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엉뚱한 짓을 했다고 내가 해고가 된다면 차라리 늦기 전에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편이 나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래층의 방들은 내가 나갈 때처럼 텅 빈 채 햇빛과 바람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식당의 커다란 테이블 한쪽 끝에는 갖가지 음식이 잘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먹어본 음식도 있었고 처음 보는 음식도 있었습니다. 나를 제지할 사람이 전혀 없었으므로 나는 마음껏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식당 바깥의 현관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서채에서 책장 속의 책들을 뒤져 긴 여름 하루를 보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공부 같은 것을 해본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만, 실더 목사님의 훈계처럼 무식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책장 속의 책들을 열심히 읽어봐야겠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희미한 불빛 옆에서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책 읽기에 열중했던 나는, 오후 내내 집안에서 개미 한 마리도 구경을 하지 못하고 보냈습니다.
문을 열어놓았다가 대화를 나눌 때면 급히 닫기라도 했는지 아주 멀리서 중얼중얼하는 소리를 가끔 듣기는 했습니다. 내가 다시 식당에 들어가니까 참 신기한 일이 다 일어나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테이블에 새로 촛불을 붙여놓았고, 내가 먹고 그대로 두었던 접시는 없어지고 가장자리까지 꽉 찰 정도로 새로운 음식이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놀리려고 그러나 보다 하는 생각에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나서, 나는 홀로 그 진수성찬을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난 뒤 나는 촛불을 집어 들고 잠을 자러 방으로 갔습니다. 만약 오늘처럼 앞으로도 똑같다면 나는 참 이상한 직업을 갖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되돌아보건대 그 모든 에피소드는 정말로 꿈같은 얘기입니다.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날 일은 전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나의 어리벙벙한 머리에 일격을 가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당신 생각에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거의 대부분 예상은 한 일이었지만, 대낮의 은밀한 감시는 나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은 전혀 다르게 시작되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부드럽게 깨웠습니다. 존이었습니다.
"일어나요, 얼른. 어른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그는 내가 옷을 입는 동안 옆에 서 있었는데 서두르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내가 넥타이를 매는 데 익숙하지 못하자 결국 그는 코방귀를 뀌며 그 일을 떠맡고 나섰습니다.
"도둑놈 소굴에서 온 놈이 이보다 더할지도 모르지. 틀림없어." 그는 목 주위로 셔츠의 목깃을 홱 잡아당기며 한마디 던졌습니다.
강제로든 아니든 결단코 나도 그 인간처럼 목을 잡아당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도 참았습니다. 이자식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을 때가 얼마든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존은 나를 햇볕이 잘 드는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어제 가정부를 놀라게 했던 방이었습니다. 아어씨가 조그만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앞에는 아침 식사가 놓여 있었고 어제의 그 가정부는 뒤에서 커피를 끓이고 있었습니다.
"히스클리프, 자네가 할 일을 결정했네. 들어볼 텐가?"
나는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내가 뭐라 대답하든 별 상관이 없었을 겁니다. 그는 어차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할 분이었을 테니까요. 그저 봉급을 주는 나에게 슬쩍 물어보는 척하면서 계속 환한 얼굴로 말을 이었습니다.
"하루 24시간 중 23시간은 미친 중처럼 집과 마구간 주위를 배회할 것, 무생물인 물체는 노려보고 생물체는 발로 걷어찰 것, 말이 악마를 등에 태웠나 보다 하고 착각할 정도로 말을 탈 것, 내 책들 중에서 가장 좋은 책만 골라 열심히 읽되 제본이 다 뜯어질 정도로 막 다룰 것, 고양이는 겁을 주고 개는 괴롭힐 것, 크림은 엉기게 할 것, 사람이나 동물 모두에게 가장 못된 존재로 보이도록 할 것, 이상인데 이해하겠나?"
나는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물론 그가 나를 비아냥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슨 얘기를 더 하나 보려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을지 모르니까 매일 아침 내 방에 와서 보고하도록 하게. 나는 자네의 사악한 힘으로부터 나를 보호함과 동시에 내 용도에 맞게끔 자네의 힘을 묶어둘 수 있는 금으로 된 5각의 성형 안에 있을 테니까."
내가 한마디 대꾸를 했습니다. "금으로 만들었으니까 좋을 겁니다."
"좋아! 내 강의가 빈틈이 없었다는 게 입증된 셈이니까. 기왕 부른 김에 자네가 아침의 업무를 신속하게 끝낼 수 있도록 일의 순서를 가르쳐주지. 어-!"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존에게 말을 돌렸습니다. "저렇게 활기찬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가? 저렇게 점잖게 말을 하면 우리 식솔이 고상해진다고 자네 생각하지 않나?"
"제가 뭘 압니까?"
"자네도 분명 생각이 있겠지. 어쨌건 그건 접어두기로 하세. 중요한 건 저 친구한테 업무를 맡기는 거야. 히스클리프, 듣고 있나? 좋아. 오후에는 마구간에서 다니엘 일을 거들도록 하게. 그 친구도 자기 시간을 가져야 하니까. 나야 내 궁리를 할 것이 많아. 저녁에는 자네 귀신하고 얘기해도 좋아. 그곳의 가시덤불이 옛날에는 마녀들이 모이던 장소였다고들 하니까, 알아서 해. 하지만 스물네 번째 시간은 내 것이야."
"24시간 모두 어른 겁니다.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권리를 사신 셈이니까요."
"내가 지시하고 싶은 것은 스물 네번재 시간에는 자네가 교양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라는 거야. 시계가 스물네 번째 시간을 땡 하고 치자마자 자네는 광대가 되어야 해. 습관적으로 푹 숙인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몸도 곧게 펴고 사람 잡아먹는 귀신 같은 자세를 대리석으로 된 안티노오스의 자세처럼 만들란 말이야. 같이 있는 사람이 자네에게 말을 할 때면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봐야지. 지성인처럼, 알기 쉽게 그리고 공손하게 얘기하란 말일세. 이맛살을 펴고 그늘이 드리워진 구름을 얼굴에서 걷어내. 그 한 시간뿐이야. 히스클리프, 자네가 웃을지 모르지만, 내가 명령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야."
나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나는 나를 놀리는 이 말에 대응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이해하도록 하게. 자네는 마음이 몹시 상해 있고 게다가 자존심이 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외모라도 내가 고쳐볼 작정이야. 난 그럴 만한 위치에 있으니까. 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인상이 좋아야 하네. 손님에게 저녁 대접을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손님의 목을 베어갈 것 같은 사람을 나는 쓰지 않아. 적어도 사람다운 척이라도 해야지. 이봐, 귀신같은 친구, 피부색이라도 바꿔보는 게 어때?"
가정부와 존이 이 양반의 이상한 짓거리를 보고 웃지나 않는지, 얼굴을 붉히지나 않는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둘 다 돌부처처럼 꼼짝않고 서서 무감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모든 게 다 극히 정상이라는 표정이었습니다.
매우 단호해 보이는 그의 헛소리에 나는 한마디 대꾸를 했습니다. "스물네 번째 시간에는 제가 웃어도 된다는 얘기인데 24번째 시간이라면 글자 그대로 24시를 말하는 겁니까? 아니면 밤 열한 시부터 열두 시까지를 말하는 겁니까?"
"그 시간이 탐난다는 얘기인데, 그 시간은 여자 마법사들이나 활동하는 시간 아닌가. 내 자네에게서 그 악마의 본성을 없애주지. 히스클리프. 밤 열한 시에서 열두 시 사이에 나에게 오게. 매일 밤 같이 식사나 하자고, 자네하고 내가 같이 말일세."
"식사를 같이해요?"
"으음. 자네가 내 손님이 되는 거야."
이 실크 옷을 입은 신사 앞에 놓인 섬세한 크리스털 제품과 은제품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차이나 찻잔을 아주 부드럽게 입에 갖다대는 중이었습니다. 찻잔 뒤의 아침 햇살이 찻잔을 마치 등잔불처럼 타오르게 하고 그의 손을 장밋빛으로 물들였습니다. 그 전날 말고 뼈를 쥐면서 내가 내 손을 보았을 때처럼 이번에도 나는 내 손을 보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손을 닦았지만 제아무리 닦아도 손에 박힌 옹이를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제아무리 연극을 해도 나는 이 방의 적임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정말로 웃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아어씨는 손가락을 뺨에 대었습니다. "자네 목소리의 음색이 감미로워질 수는 없을까? 지금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내 초대를 비웃기 위해 웃는 것 같군, 왜 그렇지?"
나는 대답 대신 오른손바닥을 그의 코앞으로 내밀었습니다. 두껍게 옹이가 박히고 손바닥에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때가 잔뜩 낀 손금은 나도 움찔할 정도로 추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손바닥을 1, 2분 동안 가만히 살펴보고는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았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마침내 말을 꺼냈습니다. "가소로운 얘기로구먼, 잘됐어. 그러면 자네 식으로 하지."
"제 방식대로요?"
"매일 밤 식사를 하세. 내가 자네 방으로 갈 테니까."
이때 존이 나처럼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나는 잠자코 팔짱을 끼고 설명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설명이 없었습니다. 나는 포기하고 그날 밤 시계가 열한 시를 칠 때까지 얼떨떨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나는 읽던 것을 잠시 멈추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기차 안이 몹시 추웠으므로 어깨 위에 숄을 하나 더 걸쳤다. 로크우드씨는 금방 잠이 들었었다.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은 깨어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는 손을 담요 아래로 늘어뜨려 차가운 의자 위에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놓고 있었다. 나는 담요를 살며시 끌어당겨 그 위로 덮어주었다.
나는 다시 편지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종이 위의 단어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글자 위로 무엇인가가 두둥실 떠올랐다. 얼굴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것에는 내 관심을 끌어당기고 나를 감정의 격랑에 휩싸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 침침한 열차 안에서 내가 어떤 모습을 주문으로 외어 나타나게 했을까? 사람들은 내가 읽은 편지 주인공의 모습을 나의 마음의 눈 속에 그려보려고 했겠지 하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면 추억이 나를 사로잡아, 내가 어쩔 수 없이 떠나온 에제씨의 모습을 영원히 나의 망막에 인각해 두었다고 감히 말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냐, 그녀에게 떠오르는 것은 상상 속의 사람이나 추억 속의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야. 바로 그녀 앞에서 반쯤 옷을 덮고 컴컴한 데서 자고 있는 사람이지. 버림을 받은 여자, 허무함을 느끼는 여자, 쓰라린 가슴의 여자 - 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낯선 이에게 그녀의 가련한 순정을 대신 쏟으려는 여자, 결국 이 여자는 그런 여자야.
그러나 다 틀렸다. 어둠 속에서 떠오른 여자는 내 여동생 에밀리였다. 에밀리의 얼굴은 평범한 얼굴이 아니다. 처음 그녀의 얼굴을 보면 누구나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첫인상은 또 다른 인상을 연이어 만들어 내게 마련이다. 함지박만 한 입술, 넓은 이마, 부드러운 피부, 깊은 생각을 하는 듯한 초롱초롱한 눈매 -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한 눈매, 좋아하는 사람 몇 이외는 절대로 접근을 허용치 않는 유혹적인 눈매.
나는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이지만 가족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에밀리와 나는 보통의 자매들보다는 훨씬 더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사이였다. 몇 주일이라도 우리는 같은 것을 화제로 삼아 서로 얘기하거나, 공통의 화제를 아니 공통적이라 할 수 있는 특이한 것을 화제로 삼아 열정적으로 비밀스레 상의하며 보낼 수 있는 사이였다. 그 당시 우리는 한마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에밀리는 창문도 문도 쾅 닫고 나를 보아도 못 본 체하고 내가 자기 방에 들어가는 것도 막곤 했다. 그러면 나는 몇 주일이건 몇 달이건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상태에서 기다려야만 했고, 그럴 때면 남동생 브란웰을 대신 친구로 삼아 어린 시절 먹던 고기와 음료수를 화제로 삼곤 했다.
아버지와 가정부 타비타가 우리의 비밀스런 지난 일들을 보았더라면 어린애들의 놀이란 다 그런 거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동생과 나와 남동생, 그리고 또 다른 동생 앤, 이렇게 넷이서 상상의 놀이를 하곤 했다. 놀이에 나오는 주인공이나 배경이나 내용 모두 우리에게는 너무 재미가 있어서 사제관이나 교회의 실제 세계보다 그 놀이를 더 좋아했다. 나이가 들수록 놀이는 점점 복잡해졌다. 사람들이 일기를 쓰듯 우리도 그날의 놀이 내용을 적어두기 시작했다. 점차 우리는 의식적으로 말을 보태서 기록할 줄도 알게 되었다. 놀이를 할 때에 경험했던 짜릿한 느낌을 펜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해가 갈수록 그 솜씨는 점차 발전하여 우리는 여러 국가와 그들의 관습과 역사를 창조해냈다.
내가 가장 손위였지만 대장은 항상 에밀리였다. 우리 모두 상상력이 풍부하였지만 에밀리는 그중에서도 좀 별났다. 도망치는 얘기라든가, 배가 부숴지는 얘기라든가, 군대간의 치열한 전투 같은 줄거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꾸며내서 제대로 얘기를 만들어보려고 서로 말을 나누게 되면 그녀는 그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얘기할 뿐이다. 그러나 자꾸자꾸 상세하게 묘사해 나가다 보면 눈 앞에 펼쳐지는 내용은 마침내 우리가 머리를 도리질 칠 정도로 멋지게 되어 있었다. 에밀리의 의견에 반대라도 하면 그 애는 더 이상 놀지 않고 나가버리곤 했지만 그 애의 생각이 우리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그럴듯하고 분명했기 때문에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말로써 현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에밀리의 능력은 시간이 감에 따라 더욱 커졌다. '이렇게 상상해 봐....'라는 말 한마디면 족했다. 에밀리의 말을 조금 더 들으면 들을수록 그 애가 꾸며대는 얘기는 진짜 같다는 생각이 더욱 확신에 가깝게 되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면의 벽보다도, 아니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보다도, 아니 우리 자신의 얼굴 모습보다도 더 사실적이었다.
가끔 나는 에밀리의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고 또 그러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주인공이 죽는다거나 여자 주인공이 너무 일찍 폐병에 걸린다거나 하는 다소 비극적인 대단원으로 접근하는 바람에 내가 잠도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할 정도로 너무 과민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슬리고 위협하기도 하고 열을 내며 소리를 쳐봐도 에밀리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법이 없었다.
"줄거리는 그 나름의 법칙이 있는 거야. 나는 바꾸지 않을 거야. 줄거리는 그대로 놔둘 거야. 이것이 나의 한계일지도 몰라. 난 주인공들이 해야만 하는 것을 하도록 만든 거야. 주인공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나도 그렇고"
에밀리는 언제나 그렇게 말하곤 했다. 요지부동이었다. 소설 속의 사랑스런 인물이 자신들의 운명보다 더 오래 살기를 나는 원했다. 그래서 결국은 울면서 잠이 들곤 했다.
무척 감동적인데 왜 괴로워하느냐고 얘기들을 할지도 모른다. 맞는 얘기다. 히스클리프, 내가 잃은 누렇게 색이 바랜 편지의 주인공은 에밀리 말에 따르면 거의 우리 나이 또래의 사람이었다. 폭풍의 언덕에서의 그의 어린 시절의 얘기가 나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전에 들어 본 적이 있는 얘기였다. 단지 오래전에 죽은 사람의 얘기가 아니라, 지금 격분할 만한 얘기였다.
지금까지 나는 히스클리프를 에밀리의 친구로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애만의 친구였다. 우리들이 그를 만나는 것을 에밀리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바로 그가 쓴 글을, 편지를 쓴 인물과 그 친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편지가 진짜로 60년 전의 편지라면 그 친구가 가짜인 셈이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편지가 진짜라는 사실을 나는 추호도 의심할 수 없었다.
에밀리가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궁금하게 생각했었다. 그렇게 쉽사리 동생이 나를 믿음의 경계선을 넘도록 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은 어떨까? 자신이 꾸며낸 소설과 현실을 구별했을까? 그 애는 제정신이었을까?
전에는 그저 궁금할 뿐이었지만 이제는 정말 두렵다. 생각나는 일이 있다. 비가 주룩주룩 오던 날이면 브란웰과 앤과 나, 이렇게 셋이서는 집에 갇혀 있자니 심심하기도 하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자니 좀이 쑤시는 것도 같아서 에밀리한테 우리를 좀 놀라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에밀리, 우리 좀 무섭게 해봐, 응?" 살살 약을 올리면 그 애는 동의를 했다. 그 애가 잠시 등을 돌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서로 좀 더 가까이 붙어 앉았다. 가까이 붙어 앉으면 조금 덜 무서울 것 같았지만 사실은 땀에 젖은 손에서 손으로 두려움에 대한 재미있고 으시시한 전류만이 흘렀다.
그러면 에밀리는 돌아서서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애는 얼굴을 일그러트리지는 않았다. 그저 평상시나 다름없었다. 아니 적어도 그 애의 눈을 보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더 예쁘고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 애가 좀 더 가까이 우리에게 눈을 갖다대면 우리는 움찔했다. 혐오감이랄까 흡인력이랄까 그런 것이 있었다. 죽음, 그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었으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무엇 - 피할 수 없는 것이랄까, 그러면서도 텅 비어 있는 무엇 - 이 에밀리의 눈 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크우드씨가 몸을 뒤척였다. 나는 그대로 시선을 떨구어 편지를 보았다. 그가 일어나도 자고있는 모습을 내가 바라보고 있었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차츰차츰 편지의 의미가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늦게, 나는 마구간 2층에 있는 숙소로 몇 안 되는 짐 몇 가지를 옮겼습니다. 그 숙소는 언덕 위로 향해 있었습니다. 선임자 격인 다니엘 벡 신부와 함께 근처의 오두막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던 곳이었습니다. 당신의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집에서 쫓겨났던 일이 생각나서, 처음에는 이 새로운 배치를 모욕적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언덕 위의 사과 과수원에서 부는 상쾌한 바람이 가득한 조촐한 숙소에서 일단 자리를 잡고 나니까 전혀 다른 기분이 들었습니다. 방안의 넓은 난로와 황동으로 된 팬과 떡갈나무로 짠 가구에는 동화 속의 꿈과는 정반대의 어떤 현실감이 있었습니다. 아어씨는 그러한 현실적인 것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줄에 매인 어리벙벙한 암소처럼 안팎으로 끌고 다녔었나 봅니다. 값비싼 물건으로 가득찬 그 커다란 저택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다 번쩍거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은 내 수준에 맞는 방에 앉아 이 새로운 환경을 살펴보고 있자니 발밑의 바닥이 점차 안정되어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차분해지자 내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 이 집안은 도대체 어떤 집안일까? 집주인은 도대체 왜 나를 데려왔을까? 그리고 세례를 받아 누구라도 보증을 서줄 이웃의 수많은 어린 마부들을 두고 잘 알지도 못하고 위험한 존재일지도 모르는 나를 왜 그가 선택했을까? 또 일해주는 대가로 내가 받을 수 있는 최대 액수의 다섯 배나 되는 금액을 왜 그가 지불할까? 특히 고약하고 월급만 많이 축내는 나와 같이 저녁을 먹자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뭘까?
나에 대한 아어씨의 태도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의문투성이였습니다. 오랑우탄에 대해서 알고 있는 만큼 상류층의 관습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이 점 하나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제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놈에게는 아어씨처럼 관심과 정열을 쏟는 법이 없다는 점 말입니다. 뚜렷이 눈에 보이는 목표가 없으면 그런 법이지요.
질이 좋은 침대보가 덮인 두꺼운 깃털 침대에 앉아 아래층의 말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과수원과 그 너머의 경사가 완만한 목초지를 내다보았습니다. 아어씨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바셈경이 생각났습니다. 그가 무엇을 하나 몰래 살펴보려고 어느 저녁 무렵 페니스콘 크랙스를 지나 그의 집으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열네 살 때의 일인데, 당신도 기억할 겁니다. 키가 크고 코도 큰 그가 진홍색의 가발까지 쓰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있던 깨끗한 얼굴에 둥그런 눈섭의, 여자처럼 몸매가 가냘펐던 마부가 생각날 겁니다. 오르네란 이름의 별장에서 놀다가 우리는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보곤 했었지요.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그곳에 갔을 때 우리가 무엇을 보았는지를 기억할 겁니다. 둘이서만 있게 되니까, 마부는 마부처럼 행동하지 않고, 그 호리호리한 바셈 경은 왜가리처럼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바람기 있는 수줍은 부인처럼 살살 부채를 부치던 모습을 기억할 겁니다. 그들이 서로 애무하고 키스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질겁을 하고 달아났습니다. 수캐 교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이들 두 사람의 불장난은 주변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넬리가 나중에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성령 강림절의 가면무도회에서 여자 분장을 한 바셈 경이 새벽닭이 올 때까지 같이 춤을 춘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 마부였으며, 런던에서 값비싼 물건들을 가져다 그러한 짓거리를 했다고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는다는 얘기였습니다.
- 아어씨도 동성연애를 해야 즐거움을 느끼는 바셈경과 같은 성격의 사람이 아닐까? 그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나를 붙들어둔 게 아닐까? 이러한 생각이 들자 소름이 끼쳤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니까 내가 여기에서 이미 경험한 모든 괴상한 일들이 모두 다 사실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일부러 내 뒤를 쫓아와 내가 아무리 거칠게 거절을 해도 마다 않고 좋은 일자리와 좋은 보수를 제안한 아어씨의 태도가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차분히 생각을 해보니 그 일련의 사건들이 정말 중요한 증거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침대에세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그곳을 영원히 떠나버리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의심의 여지가 없는 내 흉한 몰골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트롤 귀신, 집시, 무덤을 헤치고 시체의 살을 파먹는 굴 귀신, 마법사. 이 모두가 아어씨가 나를 부를 때 쓰는 말인데 정말 나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습니다.
- 그렇다고 정조가 헤픈 여자처럼 그의 욕정의 노리개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는 나는 내 거친 살이 남자다운 환희를 줄 가능성이 있다고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아어씨가 제아무리 멋을 부려도 그는 숨길 수 없는 남자였습니다.
나의 더럽고 험상궂은 모습을 생각할수록 아어씨에 대한 나의 의심은 더욱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지닌 계층의 사람이라고 인정을 했으면서도 너무나 일찍 그러한 생각을 품었던 나 자신이 다소 혐오스러웠습니다. 나에게 그는 정말로 색다른 계층의 괴짜인 셈이었습니다.
- 그의 태도 밑에 숨겨진 저의를 쉽게 알아낼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아니다. 그러한 태도를 나 스스로가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여기에 머물러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아어씨에 대한 의심을 일단 옆으로 제쳐놓은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물론 마음속에서는 뜨거울 불꽃처럼 야심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린튼씨 가족이 입고 있던 우아한 옷과 그들의 고상한 품행과 넉넉함이 있는 대화를 보고는, 그것들이 나에게는 너무나 먼 당신과 같은 것들이었기에, 그리고 또 당신이 그러한 것들을 동경하여 나를 멀리하였기에, 그러한 것들이 제아무리 멋이 있어도 정말 싫었던 겁니다. 나는 나의 추한 모습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적어도 그것은 명백히 나의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우아함과 고상함과 넉넉함이 갑자기 내 손이 닿는 곳에 놓여 있습니다. 거짓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아직 얻지는 못했지만 나는 뭔가 뿌듯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나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어씨가 지금대로만 계속해준다면 그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희망의 싹은 이미 자리를 잡은 셈입니다. 더불어 그를 신뢰하고 싶은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주 조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바셈 경이 마부에게 한 짓을 아어씨가 똑같이 나에게 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본때를 보여줄 작정이었습니다. 그날 마구간에서 일을 하면서 여러 번 이러한 생각이 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매번 결론은 같았습니다. - 아직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에 대하여 다니엘 백에게 알아보려 했지만 내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을 별로 없었습니다. "어른은 훌륭한 분이세요. 이상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몇 년 전에 형이 죽자 그가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그전에는 너무 짓궂고 못된 장난을 많이 한 사람이었다고만 얘기하고 다니엘 백은 입을 닫았습니다. 그가 괴벽을 부릴 수도 있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습니다.
시계가 열한 시를 칠 때까지도 나는 촛불을 켜놓고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한밤의 바람이 촉촉하고 상쾌했습니다.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과수원의 청개구리가 개골개골 우는 소리가 주변에 가득했습니다. 책을 통해 새로 알게된 사상들에 나는 정신이 팔려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철학자가 쓴 지각 작용에 관한 논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 무엇을 하기로 약속했는지를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살금살금 걷는 발자국 소리와 딸그락딸그락하는 소리, 그리고 마구간 문이 삐익 하고 열렸다가 탁 닫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방과 마구간 사이를 잇는 문의 빗장을 풀었습니다. 마구간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의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아래층의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어씨가 이미 안으로 들어와 복도 한가운데서 소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불 가져와, 불! 불을 좀 높이 들어봐!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알아야 하잖아! 프레드릭, 여기야. 존이 테이블을 놓는 것 좀 도와줘!"
그 집의 모든 하인들이 내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 사람은 서까래에 등잔불을 걸고 있었고 다른 두 사람은 제법 큼직한 테이블을 스톨 사이의 복도 한가운데에 놓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의자를 양팔에 하나씩 들고 있었습니다.
하얀 린넨을 들고 있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테이블을 내려놓자 그 위에 그것을 깔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말들이 졸린 듯 눈을 껌벅거렸습니다. 가볍게 울음소리를 내는 말들도 한둘 있었지만 대부분 가만히 있었습니다. 말들도 주인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테이블에 린넨을 깔고 접시를 놓은 뒤 의자들을 테이블에 붙여놓았습니다. 마침내 등잔불과 촛불에 불을 붙이자 마구간은 어느새 훌륭한 식당으로 돌변했습니다. 아어씨가 손뼉을 치며 지시했습니다.
"음식이 식기 전에 얼른 가서 가져와."
하인들은 그의 지시에 따르기 위하여 흩어졌습니다. 그는 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히스클리프, 어서 내려오라구. 내가 벽에 두더지처럼 구멍을 파고들어 와 자네의 막사에 진지를 구축했는데 싸워볼 텐가 아니면 돈을 걸 텐가?"
나는 잠자코 내려갔습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저를 골리는 게 취미인가 보죠. 어른을 이곳에서 쫓아내면 좋겠습니까? 어른의 장난에 가담하여 어른이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기를 바라시는 게 분명합니다. 끝에 코르크를 댄 검을 들고 싸우는 펜싱 시합 같은 모의 재치 문답에 제가 참가하기를 바라시나 봅니다."
그는 촛불 위로 허리를 굽혔습니다. "히스클리프, 브라보! 자네 승리야. 하지만 이런 게임을 즐길 만큼 경험이 풍부한 내가 아니란 점을 말해두지. 경험이 있다고 해도 그런 것에 신경쓸 사람도 아니고."
그는 기다릴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허허, 참! 이봐, 바로 그 점이 우리가 서로 고쳐야 할 점이야. 이라와. 같이 식사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럴려면 그에 맞는 옷을 입어야지."
그의 팔 위에 차곡차곡 개서 가져온 옷과 수가 놓인 조끼, 벨벳 프록코트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리 와. 그 애처로운 작업복은 얼른 벗어버리고 얼굴 좀 펴. 언제나 상황에 맞게 옷을 입고 즐겨야 하잖아."
다니엘 백이 준 옷을 벗어버리고 아어씨가 내민 옷을 받아 입었습니다. 프록코트는 팔이 조금 짧았지만 다른 옷은 그런대로 잘 맞았습니다.
"잘 어울리는데." 이렇게 말하며 그는 조끼의 아래 단추 세개를 잠가주었고 프록코트는 주름이 잘 접히도록 매만져주었습니다. "자, 이제 아랫사람들이 오기 전에 몸을 똑바로 해야지."
머쓱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굳이 왜 그렇게 해야지요? 사람들이 저를 바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잖습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지금 자네의 자세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잖아."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다닌다고 그가 핀잔을 주었던 생각이 나서 나는 자세를 똑바로 했습니다.
"그렇지, 이제 시작이군. 하지만 원숭이처럼 손을 옆구리에 대고 흔들거리면 안 되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해봐." 그는 자기의 오른손을 조끼 옆에 자연스레 놓고 왼손은 엉덩이 근처에 놓았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누가 알겠나. 교양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걸. 이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질 못하니까 자네만 손해지. 중요한 때를 대비해서 자기의 사고방식은 삼갈 줄도 알아야 해."
나는 그가 가르쳐주는 자세를 따라 했습니다.
"좋아. 하지만 너무 뻣뻣해서는 안 돼. 그렇게 하지 말란 말이야. 편안한 자세를 취하는 게 좋아. 자네와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신사도의 첫번째 덕목인 침착성을 배우니 내가 다 즐거운걸. 꼼짝할 수 없는 사람처럼 너무 긴장하면 안 되지.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오히려 불편하게 생각하니까. 신사란 모름지기 자신도 편해야 하고 자신의 외모나 태도나 말도 편해야 다른 사람들도 역시 편하게 할 수 있는 법이야."
시간이 있었다면 그가 자신의 태도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지 물어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하인들이 오고 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들의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길 아래에서부터 들려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문간에 다다르자 소리를 죽였습니다. 그 순간 아어씨는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덮개가 덮인 음식들의 배치를 지시했습니다.
"튀긴 닭은 저기에 놓고, 스튜드 플럼은 거기가 좋겠군, 삶은 야채 요리는, 그렇지! 거기에 놔야지. 와인은 바로 거기고, 샐러드도 그렇지 좋아! 자, 이제 다들 나가봐도 돼. 이제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식사를 할 테니까. 아니 문은 그냥 열어두고, 별이 총총하고 바람도 상쾌하니까 괜찮아. 존! 한 시간 뒤에 다시 오게. 자, 히스클리프, 앉지?"
나는 앉았습니다. 다음에는 그가 무슨 짓을 하는가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두 개의 잔에 와인을 따랐습니다. 내가 술잔을 입에 갖다 대려고 하자 그가 나의 손을 잡았습니다.
"어허! 친구와 건배도 하지 않고 술을 들면 어떡하나, 이 사람아. 그거야 어디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지. 친구들과 같이하는 자리를 즐기려는 술인가. 자. 누구를 위해서건 무엇을 위해서건 건배를 하고 술을 들자고!"
잠시 생각을 해 보고 대답을 했습니다. "솔직한 행동을 위하여 건배를 하겠습니다."
그가 웃으며 술잔을 올렸습니다. "진심으로 솔직한 행동을 위하여! 내가 바라던 거야."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물었습니다. "저에게 솔직한 행동을 아직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세요?"
"자네의 지난 과거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을 뿐이야. 미래의 희망에 대해서도 알고 싶고."
"저를 고용하여 이 마구간에서 일하도록 하셨잖습니까? 저는 그저 제 일을 하고 있는데 무엇이 그리 궁금하십니까?"
"궁금해할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궁금한 걸 어떡하나."
그가 닭요리 위에 덮어놓은 반구형의 덮개를 열자 신선한 밤공기 사이로 맛있는 냄새가 퍼졌습니다.
"이 닭고기를 내가 어떻게 자르는지 잘 봐, 조각을 할 때처럼 멋있게 자를 필요는 없지만 술 취한 외과 의사처럼 뼈를 썰어서 친구를 난처하게 해서는 안 되지. 뼈마디 사이를 고상하게 떼어내란 말이야. 그리고 솜씨 있고 깔끔하게 친구에게 대접을 해야지. 친구의 반바지에 국물을 떨어뜨리거나 눈에 기름이 튀도록 하면 빵점이야, 빵점. 내일은 자네가 나에게 대접을 해봐.... 자, 이 정도면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할 때도 되지 않았나? 빈말이라도 좋으니까."
별로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지만 나는 중얼거리며 내뱉었습니다. "닭고기도 맛있어 보이고 가르침도 꽤 좋습니다."
그러자 그는 만족한 듯 닭고기를 한 점 썰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넓은 마구간의 양쪽 문이 열려 있었으므로 우리는 멸이 총총한 밤하늘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여름이 한창이었습니다. 잘 익은 과일과 꽃과 풀잎의 향기로운 냄새가 가득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마구간의 건초 더미와 건강한 말들에서 나는 냄새가 말끔히 씻겼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촛불은 말들의 눈에 반사되어 반짝거렸고 그들의 거무스레한 피부 속에서는 그 빛을 잃었습니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습니다. 아어씨가 누구에겐가 선언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았습니다.
"히스클리프, 자네에게 신사처럼 행동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네. 어떤가?"
나는 목을 가다듬었지만 준비한 말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말하고 싶어도 걱정이 되어서 말하지 못했던 것을 분명히 제안했던 겁니다.
"가만히 있는 걸 보니까 기분이 상했나 본데. 젊은 사람들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야. 자제하고 내 말을 들어봐, 히스클리프. 내가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은 자네의 외면일 뿐이야. 속마음이야 자네 이외에는 누구도 알수 없고 손을 댈 수도 없는 것이잖아."
나도 모르게 대꾸가 나왔습니다. "자존심이 센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재의 나 자신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닙니다. 저는 변화를 원합니다. 변해야 하구요. 신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게 제 소망의 전부입니다."
"자네 소망이란 게 뭐야? 히스클리프란 사람, 그 사람은 나를 믿으려 하질 않아. 눈을 내리깔고 있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혹해서 그러는 건 아니고 말이야. 치료 방법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려면 그 병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만 하잖아. 이건 100퍼센트 보장할 수 있는 얘기야. 으음, 그 문제의 심연에는 어떤 여자가 있는 게 틀림 없어. 'C'라고 하던 거. 그러나 굳이 이름을 알려고 하지는 않겠네. 자네가 눈을 치켜뜨고 얼굴 표정을 흙빛으로 바꾸는 걸 보면, 내가 그 이름을 추측이라도 하려 하는 날에는 내 입술이 찢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니까. 내 입술이야 별로 잘생긴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게는 쓸모가 있거든. 그래서 참으려고 노력할까 생각하고 있는 중이네."
그는 나를 잠시 바라다보았습니다. "자네의 반응을 보면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결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여자'라고 하세. 자네 야망의 기저에는 그녀가 있지. 이봐, 인상 쓰지 말아. 자네를 무시하는 게 아니니까. 여자란 자고로 남성의 발전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어리석음의 원천이기도 한 거야. 그녀의 마음에 들려면 우선 신사의 단계에까지는 올라가야 해."
그래도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침묵을 동의로 해석한 그는 나를 향하여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앞으로는 주어진 것은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게. 히스클리프. 용기를 내. 자네가 성공하는 데에는 사실 아무런 장애가 없어. 천성이 착하겠다, 이해력도 빠르겠다. 자네의 재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자네의 마음은 그러니까 자네의 성격은 얼굴을 보면 아주 나쁘게 보이지만 건실한 것으로 입증이 될 거야. 그런대로 괜찮아. 꼴사나운 걸음걸이 때문에 약간 균형이 안 잡히기는 하지만 골격도 반듯하고 얼굴도 준수하잖아. 지금처럼 오만상을 찡그리지만 않으면 돼. 천둥 번개를 키우는 소나기구름처럼 자네는 인상을 쓰곤 하는데 꼬마 도깨비처럼 그럴 필요가 뭐 있어?"
사실, 그는 나의 어깨에 살짝 손을 대면서 나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순간 모든 게 이미 짜놓은 대로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모든 것을 달리 생각했습니다. 우아함이란 결국 그로테스크한 것이고, 친절이란 잔인한 것이며, 용기란 다 가짜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어씨의 금빛 환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나는 조롱당해 왔던 셈입니다. 못생긴 갈색의 거미가 갑자기 서까래에서 떨어져 테이블 위로 기어가는 꼴이었습니다. 내 주제에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다마스크 천을 깔아놓은 식탁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준비를 하고 앉아 있었으니까요. 나는 그것들을 바닥으로 쓸어버리고 발로 뭉갰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꼬마 도깨비일 뿐입니다. 어른께서 리버풀에 있는 빈민굴을 방문하는 동안에 주워 온 흙과 똥이 잔뜩 묻은 천한 놈입니다. 그런 더러운 놈에게 왜 그렇게 신경을 쓰십니까? 말씀해보십시오!"
그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거절하기라도 하는 듯 와인 잔을 옆으로 가만히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가 얼렁뚱당 넘어가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의 팔목을 잡았습니다. 그 바람에 와인 잔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습니다. 구석에 있는 겁이 많은 말이 뒷걸음을 치며 울어댔습니다.
잔이 바닥에서 박살이 났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겨를이 없었습니다. 의자가 뒤집히고 뒤의 스톨에 벌렁 나자빠진 사람은 나였습니다. 등 뒤로는 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어씨가 손으로 목을 졸라 나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그의 사나운 시선이 내 얼굴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습니다.
"이봐, 나한테 싸움을 걸려면 조심해야 돼. 원래 나는 칼을 차고 다니는데, 지금 칼을 차고 있었다면 너는 칼에 찔려 꼬챙이에 꿰인 꼴이 되었을 거야."
나는 그를 보고 인상을 썼습니다. "나는 이유가 뭔지를 알고 싶습니다. 반드시 알아야겠어요."
그는 나를 1분 이상 쏘아보다가 마지못해 놓아주었습니다. "이봐 히스클리프. 자네가 나보다 키가 크고 20년이나 젊다고는 하지만 자네 하나쯤은 문제가 없어. 내가 펜싱과 복싱에는 도사야 도사. 앞으로 자네의 시간표에 이것들도 집어넣도록 하지."
"이유가 뭡니까?"
"이유야 있지. 그런데 왜 그걸 굳이 알려고 하는 거지?"
"갚을 수도 없는 빚을 지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흠! 이 인간이 정말 존경스런 말을 하는구먼. 물 먹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좋아! 이유를 설명해주지. 자네에게는 설명해줄 만한 가치가 있을 거야."
"히스클리프, 자네가 요구하는 것을 설명해주지, 그러나 우선 저 하늘에 펼쳐진 수많은 별들을 잘 봐. 지구가 태양을 향해 있지. 이 별들을 볼 때마다, 우리의 작은 순간순간들이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지, 우리의 몸부림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우리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하지."
바로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아주 빠른 어떤 물체가 펄럭거리며 문에서 문으로 전광석화처럼 지나갔습니다. 아마도 박쥐이거나 밤제비였을 겁니다. 바로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날갯짓과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마구간을 가득 채운 것 같았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아어씨가 몸을 돌려 나를 향했을 때 그의 몸동작에는 결심이 엿보였습니다. "누군가를 내 자신의 모습대로 창조하는 것, 말하자면 나 자신을 복제하여 불멸을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어느 정도 있었다면 자네는 뭐라고 할 건가?"
"결혼해서 애를 낳으시면 되잖아요."
그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아니야. 그래서는 안 되지 절대 안 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가 결혼을 할 수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만 알아두도록 해."
"아직 어리고 본인이 자발적으로 원하는 어린 고아를 같은 계층에서 구하는 후견인이 되시면 되잖습니까?"
"그래도 되겠지. 그래도 될 거야. 그러나 나는 이미 자네를 선택했는데 어쩌겠나."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어씨는 다시 어둠을 향하여 돌아섰습니다. "히스클리프, 사실 자네와 내가 이 문제를 끄집어내어 얘기하는 것은 좀 무리야. 그러니 이 사실을 내가 그냥 가슴속에 묻어두도록 해줘. 사실 자네는 내가 일찍이 사랑했지만 영원히 잃어버리고 만 사람과 너무도 닮은 점이 많아."
다니엘 백이 얘기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형님 얘기입니까?"
그는 굳은 표정이었습니다. 잠시 뒤에 그가 말을 했습니다. "그분 이름은 거론하지 않도록 하세. 이 점에 있어서만큼 난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정도니까. 너무 닮았어. 놀랄 정도로. 자네를 리버풀에서 만났을 때 난 알았지. 내가 무엇을 알았는지 신경쓰지 말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어떤 행동을 초래할지에만 신경을 쓰게. 자네를 내가 만난 것은 운명이야. 내가 자네의 후견인이 되어야만 하는 증표가 있었어. 정신병원 밖에서 우리가 만나도록 운명 지워진 것도 역시 하나의 증표일 거야."
"무슨 얘기입니까? 제가 미치기라도 했다는 얘기입니까?"
"자네는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하나? 정신병원 밖에 있었다고 해서 자네가 미쳤다고 내가 생각한단 말인가?"
"그럴 겁니다. 뻔하지요."
우리는 돌아서 있었습니다. 아어씨가 테이블로 돌아가 앉았습니다. 그는 잔에 든 물을 가장 가까운 마구간의 짚에다 확 끼얹고는 와인을 채웠습니다.
"앉아서 식사나 끝내지. 히스클리프, 우리가 얘기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굶어가면서까지 그럴 이유는 없어."
나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을 했습니다.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내 귀에는 위협처럼 들리는데, 재미있어."
"그렇게 다루기 쉬운 놈이 아닙니다."
"그게 입증이 될 때까지는 아옹다옹할 필요가 없겠지. 경험을 해 보면 진실 여부가 가려질 테니까. 그러나 자기 이익에 들어맞는 일이 있을 때에는 다루기 쉬운 사람이 되리라 믿어. 자, 이젠 다음에 얘기하자고."
"신사가 되려면 부드러워야 하는데 저에게는 그런 부드러움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본래 거칠고 사나운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의 취향대로 모양을 갖출 만한 재목이 되질 못 할 겁니다. 신사의 재목은 더욱 그렇습니다."
"말주변이 좋은데!" 그는 콧방귀를 뀌며 말을 계속했습니다. "뭔가 대단히 오해하는 모양인데, 부드러움이 있는 신사도란 별것 아냐. 부스러지기 십상이고 자세히 보면 조잡한 것이야. 더 잘할 수 있는지 없는지 두고 보자고."
"제가 믿었던 사람은 딱 한 사람 그리고 딱 한 번이었습니다. 무조건 적이고 철저한 믿음이었죠. 제게는 그것이 유일한 본보기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저의 능력은 이미 소진되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어른을 믿지 않습니다. 아마 영원히 믿지 않을 겁니다."
"또다시 '결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여자'의 냄새가 나는데, 이미 자네가 경고를 했으니까 그 말은 존중하지. 내가 자네라면, 자네가 딱 한 번 믿음을 주었다는 상황, 자네가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할걸세."
나는 겸연쩍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너무 이용만 당해왔습니다. 그녀에게서도 마찬가지이고요."
캐시, 여기에서 그만 당신 얘기가 실수로 나왔습니다. "이제,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독립적인 사람이 되겠습니다. 저의 비밀을 남에게 털어놓고 싶지도 않고요."
"이제 하지. 자네와 나는 닮았어, 히스클리프. 우리는 누구나 원래 혼자야. 우리의 마음이란 게 뭔가? 추억과 마음의 상처와 맹세의 무덤이라고 할까? 이미 우리의 가슴은 죽었어. 꽤 오래되었지. 홀아비가 과부 심정을 안다고나 할까. 나는 자네를 잘 알아. 자네는 포악한 마음의 노예야."
그는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나의 양손을 잡고 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어디에 그 근원을 두고 있나를 서로 아는 이상, 겉으로는 닮아 보이면서도 숨겨진 연결 고리가 없는 사람들보다는 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겠지. 어떤가, 히스클리프?"
"그런 것 같습니다. 아직 입증이 되지는 않았지만요."
"좋아. 조만간 마음의 일치이지만 앞으로는 잘 진행될걸세."
그는 갑자기 내 손을 놓고 어떤 음식을 고르고는 나에게 물었습니다. "실러법(우유나 크림을 일게 하여 포도주 따위를 섞은 음료)를 들어 보겠나?"
그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실러법을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내가 거절하자 그는 자기 그릇에 그것을 상당히 덜어 담고는 맛있게 몇 숟갈 들다가 내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자네의 반대는 없어진 셈이고, 이제 우리 계획을 세워보자고, 자네 나이가 열일곱 살이나 열여덟 살?"
나는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사실 내가 폭풍의 언덕에 올 때 몇 살이었는지 몰랐으므로 그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몰랐습니다.
"그 고장 목사님에게서 몇 년 동안이나 공부를 했지?"
"4, 5년 정도입니다."
"책 읽는 법 말고 무얼 가르치시던가?"
"글 쓰는 법과 계산하는 법 그리고 라틴어와 역사는 약간, 자연과학은 아주 조금입니다."
"확실히 조금이라. 그렇지만 일단 시작은 했으니까 그걸 바탕으로 하면 될 거야. 내일 아침 식사 뒤는 물론이고, 매일 아침 내 서재로 가게. 내가 내주는 과제를 완전히 익힐 때까지는 서재를 떠나서는 안 되네. 그러면 매일 저녁 식사 때 내가 확인하여 잘했나 못했나 얘기해주지. 이해하겠지?"
나는 알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저녁 식사는 여기서 합니까, 아니면 다른 곳에서 합니까?"
"당분간은 여기가 좋겠어. 이곳이 마음에 들거든. 산에서 내려오는 공기가 집 안의 공기보다 훨씬 좋단 말이야. 그리고 우리들에게 시중을 드는 믿음직스런 아랫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부릴 수 있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고상하고 품위가 있거든."
그는 일렬로 나란히 정렬해 있는 말들의 머리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장난스레 말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그 대신 무엇을 원하시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공짜로 이만큼 베풀어주실 만큼 어리석지는 않은 분이시잖아요."
"맞아. 자네는 아부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구만. 내가 원하는 거야 많지. 멋진 신사로 키워주기로 약속한 시무룩하고 거친 어린 마주에게, 가능하다면 나는 협조를 원하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협조를 원하는 거야. 내가 현대판 피그말리온(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자기가 만든 상에 반한 조각가)의 허상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지. 내 노력의 대가로 나는 자네가 성공할 것을 요구하네."
"그것이 전부입니까?"
"그것이 전부입니까?" 그가 나의 말을 흉내 냈습니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자네는 너무 우쭐하고 있는 거야. 이 일은 대단히 어려워. 그래서 달콤한 매력이 있기는 하지만, 나의 야망은 커. 따라서 맹렬하게 도전해서 만족시켜야만 돼."
바로 그때 가정부 리가 들어와 아어씨의 뒤에 섰습니다. "존이 그러는 데요......"
그녀가 막 말을 시작하려 했지만 더이상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폭발음 같은 것이 들렸으니까요. 우리는 튀듯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검정말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검정말은 뒷발만 딛고 높이 일어서서 마구간 구석에 있는 스톨의 슬레이트에 연이어 말발굽질 해댔습니다.
나는 즉시 말 있는 데로 달려갔습니다. 말이 다치거나 마구간이 망가지는 것을 막아보려는 의도였습니다. 아어씨가 뒤에서 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나가보라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그에게도 합리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쨌든 나는 벽에 걸린 밧줄을 잡아채어 올가미를 만들었습니다. 말의 목을 낚아채려고 그것을 던져보았지만 말에까지 닿지를 않아 실패했습니다. 아어씨가 쇠막대기를 세우고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마도 말을 후려쳐 기절시킬 모양이었습니다.
"제가 해볼게요." 그를 가로막고, 걸려 있는 사닥다리를 꺼내다가 멀리 떨어진 담벽에 기대어 놓았습니다. 아어씨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나의 행동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돌리고 길길이 날뛰는 말보다 위치가 높은 서까래로 올라갔습니다. 살금살금 기어가서 올가미를 던지기에 좋은 위치에서 말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고는 천천히 밧줄을 잡아당기자, 마침내 말이 잠시 뒷발길질을 멈추고 자신을 잡아끄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뒤를 흘낏 돌아다보았습니다.
기회를 잡자 나는 재빨리 날렵한 동작으로 말의 등으로 뛰어내렸습니다. 말이 제대로 대응하기 전에 나는 말의 목 옆으로 납작 엎드려 땀에 젖은 말의 가죽을 두드리며 쫑긋한 귀에 대고 꼬드기는 말을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히스가 무성한 벌판에서 야생마를 길들일 때처럼 말입니다. 그 말이 서너 번 갑자기 등을 굽히고 뛰어올랐지만 꼭 잡고 있었습니다. 말의 저항이 누그러졌습니다. 내가 읊어준 옛날 노래의 매력적인 가락에 말은 노기가 풀렸습니다. 2분도 지나지 않아 길길이 뛰던 말이 완전히 잠잠해졌습니다. 말이 잠잠해지자, 나는 말에서 내려 등을 두드려주며 나직이 달래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귀리를 주고 난 뒤 말이 따각따각 안정되게 걷는 소리를 들으며 스톨에서 나왔습니다.
내가 처리한 솜씨를 보고 이젠 아어씨가 놀랄 차례였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았지만 빌제법을 진정시킨 것을 보면 자네는 좀 무모한 데가 있군. 그 말은 작년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을 거의 죽일 뻔했거든. 그 친구가 다시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있게 될지는 아직도 몰라. 말이 미쳤어. 아무래도 처치해버려야겠어."
"대단한 놈인데요."
"맞아. 대단한 놈이야.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거지. 하지만 현재 상태로 볼 때 쓸모가 없겠어. 이곳에서 격리시켜 놓지 않으면 이웃에게 분명 위험한 짓을 할 놈이야."
"말이 왜 그럽니까? 발작을 일으킬 만한 이유가 없었는데요."
"그것을 보았으니깐 이유가 있는 거지. 리, 이리 들어와 봐."
"말을 학대하기라도 했습니까?"
"그럴 리가, 마구간에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를 받았는데도 들어가면 말이 스스로 미쳐 난리굿을 칠 텐데 그럴 리가 없지. 작년에 다니엘 백의 훈련으로 제법 잘 크던 빌제법이 자네도 보았듯이 페티코트를 입은 사람만 보면, 어떤 이유에선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어. 작년 크리스마스 때 열린 승마 축제 때에는 내 손님이던 잉그램 양이 올라타니까 그녀를 메어꽂는 바람에 고삐를 꼭 쥐고 있던 그녀가 말발굽에 밟히고 말았지. 저놈의 말을 갖고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어. 다니엘 백이 달리 방법이 없다고 하니까 처치해버려야지."
나는 말의 주둥이를 툭툭 치며 먹이를 먹고 있는 말의 머리를 치켜올렸습니다. 나는 온순해진 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원하시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하지만 손해일 텐데요, 제가 고쳐보지요."
아어씨는 관심 있는 듯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실패했는데, 어쩌려고?"
"다 잘될 거라고만 믿으시면 되잖습니까. 이 멋진 놈과는 통하는 게 있습니다."
"통하는 게 있다? 좋아. 그 거친 성격을 보면 자네는 그놈하고 쌍둥이인 게 분명해. 그러니까 쌍둥이의 말은 듣겠지. 자네 마음대로 해봐. 내가 그놈을 처치하는 것은 일단 뒤로 미룰 테니까. 그렇지만 자네의 선택은 기름을 안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란 걸 명심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좋아. 하지만 어쨌든 조심하라구. 자네 묏자리를 파고 싶지 않으니까."
자꾸 웃음이 나왔지만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이것은 진심 어린 인사였습니다.
종종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리가 도움을 요청했던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달리 도울 게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접시와 음식들을 치웠습니다. 아어씨가 가구들은 계단 밑에 있는 방에 그대로 두라고 일렀습니다.
아어씨가 마구간의 문 앞에서 소리를 쳤습니다. "히스클리프, 내일까지 아니 오늘 밤까지야. 시간을 허비했으니까 과제를 잘하도록 신경 써."
그들이 떠난 뒤 나는 말들을 진정시키고 주변을 점검하느라 바빴습니다. 일단 됐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등잔불을 내려 불을 껐습니다. 나는 침실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방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나는 앞으로 고꾸라져 바닥에 코가 부딪쳤습니다. 동시에 어떤 남자가 무릎으로 있는 힘을 다해 나의 허리를 누르더니 내 귀에 대고 단호하게 얘기했습니다.
"어른은 몰라도 나는 네가 어떤 놈인지 다 알아. 이 거지발싸개 같은 놈아."
존의 목소리였습니다. 언제든지 그를 내다 꽂을 수 있었지만 그가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지 들어 보기 위해서 그러한 즐거움을 뒤로 미루기로 작정했습니다.
"잠자코 듣기만 해." 그가 으르렁거렸습니다. "어른 주위를 맴돌며 살살거리려고 하는 거지. 그래. 잠시 동안 가능하겠지. 하지만 나를 우습게 보지 마. 어른은 너무 착하기만 하셔서 세상 물정을 모르시는 분이야. 원하시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어른의 재산을 돌봐드려야 해. 내가 네 놈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알아둬. 도가 지나치면 네 놈의 모가지를 찢어발겨 버릴 거야. 그러면 어른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일 하나 하는 셈이 되겠지."
나를 더 괴롭힐 심산이었는지 내 팔을 놓고 머리카락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 나는 그를 넘어뜨리고 올라탔습니다. 그의 머리를 바닥에 찧고 머리카락을 뒤로 확 낚아채어 일으켰습니다. 나는 그를 벽에다 집어던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리가 창문에 부딪쳐 유리 조각이 튀었고, 그중의 하나가 내 눈 바로 위에 맞았습니다. 눈가에 박힌 커다란 유리 조각을 빼내자 피가 줄줄 흘러 잠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틈을 타서 그는 비틀거리며 문밖으로 사라졌습니다.
나는 얼굴에 손수건을 대고 그를 쫓아 나갔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반달이 사과나무 위로 떠올랐고 하얀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빌제법을 길들이고 내 자신도 길들일 요량으로 한밤중에 나는 아어씨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실 손필드에서의 어떤 사람들보다도 나는 그 사나운 검정말과 더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말이나 나나 똑같이 흥분을 억제할 수 없는 걸 보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전기가 통하듯 우리의 마음도 서로 통했습니다. 말이 갈기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껌벅거리며 고삐에 매인채 흥분해서 발을 구르며 들판을 날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조급하게 몸을 떠는 것을 보고 나도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과 정말 똑같은 기분을 느꼈을지라도 그것을 말리는 것이 내 임무였습니다.
쌍둥이라서 마음에 드는 정서임에 틀림없다. 나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뜨거운 피에 대해 알고 있는 내 개인적인 지식을 모두 그에게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내 몸속의 피는 얼려야 한다. 아주 차가우리만치 이성적이고 자제력이 있어야 한다. 만약 내가 자신과 똑같은 성질의 대등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내게 반란을 일으키게 될는지도 모른다.
나는 결심을 굳히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곳의 마구간에서의 내 임무는 폭풍의 언덕에 있을 때처럼 저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단순한 사역은 다니엘 벡 휘하의 아이들이 했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하는 일은 그의 기술적인 일, 즉 말에게 약을 먹인다거나 말이 새끼를 낳는다거나 말을 거세한다거나 훈련을 시킨다거나 하는 따위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빌제법을 보살피는 일이 추가로 생겨난 셈이었습니다.
캐시, 빌제법은 멋진 놈입니다. 어깨의 넓이가 무려 열여섯 뼘이나 되고 숯검정처럼 새까만 피부에 골격이 단단하고 근육도 용천수처럼 펄펄 뛰는 놈입니다. 말을 다루면서 나는 신경질을 부린다거나 초조한 빛을 보인다거나 살그머니 움직이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말이 내 행동을 예상하여 자신의 그러한 예상이 정확한 것을 알면 나를 신뢰할 테니까 그저 진지하게 행동하려 했습니다.
나는 빌제법에게 먹이를 주며 보살펴주었습니다. 스톨도 청소해 주었습니다. 매일같이 말의 털을 손질해주면서 나는 당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들 중에서 옛날의 민요를 하나 골라 불러주곤 했습니다. 그 구슬픈 가락이 그의 관심을 끄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처녀가 앉아서 노래를 부르네.
'허쉬, 바, 루 릴리.'
'내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난 몰라.'
'어디에 사는지도 몰라.....'
당신도 알듯이 그녀의 숨은 남자가 한밤중에 침실에 나타나 그 애가 자기 애라고 주장하면서 '나는 땅 위에서는 사람이고 바닷속에서는 가오리'라고 자신을 밝히며 그녀가 언제 그와 아이를 죽일 것인지 예언했다는 얘기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슬픈 얘기이지만 빌제법은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노래가 틀림없이 말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뭔가 반응이 있었을 테니까요.
나 자신을 관리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욕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아어씨와 그가 제공해 준 가정교사들이 강요하는 소소한 속박의 올가미들을 모두 싹 털어버리고 나의 속된 야망을 포기해버리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신통하게 참고 견뎠습니다. 천사가 나를 꽁꽁 붙들어 매두었든 악마가 그리했든 어쨌든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3년씩이나 나를 공부시켜 적어도 당신과 결혼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오르게 했으니까요.
꾸준히 가르친 결과, 몇 달이 지나자 빌제법은 완벽할 정도로 길이 들었지만 타지는 않았습니다. 이 말을 타는 데에는 공간도 필요했고 남의 눈을 피해야 할 일도 있었습니다. 나는 말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언덕 사이에 있는 울타리가 쳐진 조그만 목초지를 나 혼자서만 사용해도 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혹시라도 여자가 눈에 뛸까 봐 걱정이 되어 모든 것을 안전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 집에서 일하는 여자가 마구간 근처에만 와도 빌제법이 흥분하는 것을 보면 이 말은 이해할 수 없는 편견을 아직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아어씨가 승낙을 하면서 오후에는 그 어느 누구도 내가 부탁한 곳을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10월 초였습니다. 빌제법은 아가씨를 내동댕이치고 살인적인 공격을 한 뒤로는 누구도 등에 태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말을 탈 수 있을까 하고 나는 궁리를 했습니다. 결국, 말이 목초지를 마음껏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지치면 그때 잽싸게 올라타기로 결심했습니다.
말은 혼자서 한 시간 동안 신나게 뛰어놀았습니다. 그 뒤 나는 손을 말 등에 얹고 옆에 서서 따라다녔습니다. 말이 걸음걸이를 나에게 맞추도록 가르치는 신호였습니다. 말의 동작이란 얼마나 거칠고 자유분방합니까!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계속같이 달려 수평선 위로 뛰어올라 구름을 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말 안장의 앞머리를 잡고 아주 부드럽게 등 위로 올라탔습니다. 그리고는 길길이 뛰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허벅지를 꼭 붙였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젖을 짜기 위해 데리고 가는 소처럼 빌제법은 내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걸었습니다. 제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옆농장에서 일하는 여자가 그 목초지의 맞은편에 있는 헤이로 가는 지름길을 우연히 지나가는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빌제법은 이미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습니다. 나는 빌제법을 울타리 한가운데 있는 언덕으로 데리고 간 뒤 말에서 내렸습니다. 옆에 서서 맑은 눈자위로 둘러싸인 짙은 눈동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말도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침착하고 잠잖은 걸 보니까 넌 정말 휘넘(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인간처럼 이성이 있는 말)인간인가 보다. 하지만 적을 보면 즉시 뛰어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야후(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 같은 면이 너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어 그래서는 안 돼. 그래서 얘기하는 거야 말 좀 해봐."
빌제법은 눈만 껌벅껌벅할 뿐이었습니다. 거울같이 맑은 눈은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그 해맑은 눈 속으로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 내가 이 귀하게 생긴 말의 머릿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도대체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 가혹한 꾸중의 메아리일까? 페티코트의 돌풍일까? 매질의 아픈 상처일까? 도망치지 못해서일까? 함부로 올라타서일까? 사람을 내동댕이쳤다는 죄책감에서일까? 로데오 같은 격렬한 꿈일까?
그의 반항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이유는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커다란 눈을 좀 더 오래 들어다보다가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볼록렌즈 위에 비치듯이 말의 눈에 비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꺼먼 얼굴과 머리는 큼지막하게, 그 아래의 몸과 다리는 홀쭉하게, 그리고 들판과 그 위의 하늘은 조기만 헝겊 조각처럼 보였습니다. 빌제법이 보는 세상이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가 보게끔 애썼던 것은 바로 나였습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을 가리고 그의 난폭한 성질을 감싸주면서 길들이는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위안자는 오직 나뿐이었습니다.
이제 할 일은 다 한 셈이었으므로 앞으로의 내 임무는 빌제법이 자신의 치명적인 여자를 자신의 활동 범위 속에서 보고 더욱더 많은 것을 포용할 때까지 그의 통제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었습니다.
- 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아냐, 그럴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몇 주일이 걸릴지도 몰라. 그녀나 다른 여자들이나 다 자기 할 일에 바쁜데.
순간 가짜 여자를 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나는 서 있던 곳에서 스타일(사람은 넘어 다닐 수 있어도 가축은 다니지 못하도록 된 울타리나 담)의 돌기둥 머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헤이로 가는 길은 그 벽을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몸집이나 키가 대략 사람 비슷한 크기였습니다. 목초지의 어디에서 보아도 땅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에 돌기둥이 잘 보이지 않는 유리한 점도 있었습니다. 돌기둥을 이용하여 일종의 가짜 여자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꾸로 서 있는 허수아비 말입니다. 겁을 없애려는 것이지 겁을 주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돌에 여자 옷을 입혀놓으면 그것이 빌제법에게는 옷을 입은 진짜 사람처럼 보이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그 가짜 여자를 빌제법이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여자란 여자는 다 받아들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페어팩스 부인이나 리에게서 헌옷을 빌릴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게 하자면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이 나의 계획을 상세히 얘기해줘야 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더군요. 이미 그 목초지에는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셈이니까 조금만 조심하면 모두 비밀로 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상류층 사람들이 입다 버린 옷들을 취급하는 중고 옷가게로 갔습니다. 옷가게의 창고에서 나는 카나리아 빛의 보디스와 작은 가지 무늬의 파란색 페티코트와 진홍색 망토와 담황색의 둥근 모자를 골랐습니다. 그 모자는 당신이 즐겨 쓰던 모자와 비슷해서 샀습니다.
옷가지들을 스타일의 돌기둥으로 갖고 올라가서 잘 맞지 않는 옷을 입힌 뒤 잡아당겨 끼워 맞추고 핀으로 고정하고 하면서 사람처럼 치장을 했습니다. 드디어 내 작품이 완성이 되자, 나는 그 결과를 살펴보려고 뒤로 물러섰습니다. 아주 미련해 보일 정도로 뚱뚱하고 우스꽝스런 여자가 내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도 돌기둥처럼 보이지는 않고 여자처럼 보여 다행이었습니다. 빌제법에게는 충분하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계획을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마구간으로 달려가 빌제법을 타고 목초지로 가서 여자 허수아비의 모자 깃털 장식만이 보이는, 목초지의 한가운데에 말을 풀어놓았습니다. 말의 반응에 잔뜩 긴장을 하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몇 발자국을 더 걷게 했습니다.
갑자기 말을 세웠습니다. 말이 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당황한 것은 바로 나였습니다. 그 모습에 나는 숨이 넘어갈 뻔했습니다. 깃털 장식 아래의 모자를 보았을 때 그것이 당신이란 착각이 들었습니다. 스타일을 지나가고 있는 사람은 터무니없게도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착각일 뿐이라는 걸 곧바로 알았지만, 그래도 나의 심장은 고동을 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습니다. 나는 빌제법을 즉시 잡아당겨 마구간으로 줄달음쳤습니다. 이런 나약하고 어리석은 착각을 기억에서 지워 없애려 했지만, 감미롭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한 이 착각은 오후 내내 지속되었고 우리의 쓰라린 이별의 슬픔에 다시 불을 질렀습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마구간 일을 하러 갔습니다. 당신과 내가 새집을 털던 일이라던가, 김머튼 네거리로 역마차를 몰던 일이라던가, 다락방의 희미한 불빛 옆에서 금지된 책을 읽던 일 등등 여러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자기혐오의 수렁에 빠진 내가 당신이 너저분하게시리 나 이외의 다른 사람과 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고 툴툴대기도 하고 욕을 해대기도 하며 당신의 입맞춤을 거절하던 일과 같은 신물나는 일들도 떠올랐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나는 너무나 강한 추억의 격정 속에서 나 자신을 학대했습니다.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는 진통제가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나는 건축 설께를 배우고 있었으므로, 칼라잉크 세트를 꺼내어 베갯잇 위에 실물 크기의 여자 얼굴을 그렸습니다. 가능한 한 당신의 모습과 닮게 그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는 여자 허수아비가 펄럭이는 곳으로 그 그림을 들고 갔습니다.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많았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면 정말 비슷했습니다.
그때, 가을비가 오기 시작햇습니다. 문밖에 밤새 어떤 것도 놓아둘 수가 없어서, 그곳으로부터 모든 분장 도구를 집으로 가져올 때부터 내가 그 헐렁한 옷조각에 얼마나 입맞춤을 해댔는지 모릅니다. 잉크 물이 빠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은 당신을 닮은 모습을 그린 바로 그다음 날이었습니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것에 함축된 의미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의미의 모든 본질을 나는 며칠이 지나서야 이해했으니까요.
아어씨와 저녁 식사를 같이하는 것 이외에는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을 피하고 혼자 식사를 해왔으므로 여느 때처럼 외로운 아침 식사를 한 뒤에 나는 거실로 갔습니다.
아어씨는 실내복을 입고 평상시나 다름없이 런던에서 도착한 신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저어....."
"브라보!"
피그말리온 같던 내가 오늘 아침에는 분명 지휘자가 된 셈이었으므로 그는 손뼉을 쳤습니다.
"히스클리프, 그게 훨씬 나은데. 자네가 머리를 똑바로 세우고 얼굴에는 어두운 빛이 없이 손은 우아하게 잡고 방안에 들어와 제대로 말을 하는 것을 보니까, 확실히 우리가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저 문을 지나 들어올 때면 어린 황소 새끼 마냥 머리로 치받을 것 같은 표정에 손은 볼품없이 늘어뜨리고 서론도 꺼내지 않고 씩씩대고 주문만 하던 사람이..... 자네가 지금까지 나에게 부탁하는 태도는 부탁이 아니라 주문하는 식이었어."
나는 허리를 조금 굽히고 인사를 했습니다. "과거의 저로 돌아가나 봅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태도가 어른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결코 그런 건 아니고 좀 더 부드럽게 말하는 게 좋지. 부지불식간에 느는 거니까. 자네가 풍자법을 벌써 다 배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무슨 뜻이죠?"
"자네가 바로 서서 어떤 사람에게 모욕감을 주지 않고 말을 건네는 법을 배웠다 해도, 다른 것은 아직 못 배웠다는 뜻이야. 하지만 이만큼 배우고 그만두면 헛것이 되고 말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시리라 믿습니다."
"자자, 서두르지 말고. 자네 말이 맞아. 친한 친구의 실수를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넘어갈 수는 없지. 요점만 간단히 말하자면 방에 들어오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거야."
"네에?"
"바보 같은 사람이나 문지방을 건너 들어오는 거지. 신사는 입장을 하는 거야. 잘 봐!"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신문을 옆으로 밀어놓았습니다. 그는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삼각 모자와 난롯가에 놓여 있던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지팡이가 지금 수중에 없으니까 이 부지깽이를 지팡이라고 하고 내가 자네를 만나러 온 신사라고 하자고."
"이 근처의 신사는 말을 타니까 지팡이보다는 가죽 채찍을 들고 다니지 않습니까?"
"괜히 말장난이나 하려고 하지 말아. 우리는 지금 가정을 하고 있는 거야. 런던에 있다고 생각해. 이제 집사가 와서 신사가 문으로 들어온다고 말했다고 생각해."
이렇게 말하고는 아어씨는 거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사람은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에는 지팡이든 가죽 채찍이든 칼이든 들고 있다고 하자고. 어느 경우든 마찬가지니까. 오른손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야."
"오른손은 흔들 준비가 되어 있나 보죠."
"아냐, 잘 봐. 자, 신사가 한쪽 다리를 맵시 있게 문지방으로 옮기겠지. 그러면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조용히 그리고 즐거운 표정으로 방에 모여 있는 친구들을 주시한다고. 그리고 나서 한 발을 내딛는 거야. 이렇게 하면서 그는 내딛은 발을 방에 있는 주요 인사, 즉 자네를 향하게 하는 거야. 오른손은 가뿐하게 곡선을 그리면서 모자 위로 올리고 엄지와 중지 사이로 모자의 테를 잡아. 그리고 모자를 벗으면서 동시에 허리를 앞으로 숙이는 거야. 그러면 머리와 모자가 동시에 숙여지겠지. 그러나 그가 고개를 들면 모자는 왼쪽 팔꿈치 아래서 들어 가 있어. 그 신사는 주인을 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인사를 하는데. 어떻게 할까? 아니 뭐가 그리 우스워?"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오리가 춤을 추는 것처럼 이렇게 우스운 동작을 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요. 저는 그렇게 춤을 추는 것과 같은 동작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짐짓 화난 표정으로 부지깽이와 모자를 난로 위에 탁 던져버렸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내가 젊었을 적에는 이런 동작을 한두 번 취해본 게 아냐. 따라서 자네도 그럴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는 연습을 해야 돼. 먼저 자네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해. 같이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데. 자네의 사람 됨됨이와 가치를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알도록 해야 한단 말이야. 그러면 자네는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어. 나처럼 말이야."
아어씨는 좀 더 얘기를 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마침 이때 존이 들어오는 바람에 말이 끊겼습니다. 존은 점잖으면서도 아주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다소 경직된 자세를 취했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그가 부지깽이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고 들어왔으리라고 생각을 했지만, 상황은 정반대였습니다.
"서재가 어질러져 있습니다."
"서재가 어질러져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누군가가 어질러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치우면 되지, 나한테까지 얘기할 필요는 없잖아."
"뭔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의심스러운 게 뭐가 있을 수 있어?"
"어른, 설명 드리기가 좀 곤란합니다. 가셔서 한번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꼼짝 않고 서 있는 동안 아어씨가 일어섰습니다. "히스클리프씨도 같이 가시죠. 어른께서 보시는 걸 보고 싶으실 테니까."
이상하다고 할까, 다소 익살스런 표정으로 존이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그들을 따라나섰습니다.
지난번의 사소한 충돌 이후로 우리는 서로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일이 있을 때라도 그저 한마디 툭 던지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아어씨를 섬겨온 그의 주인에 대한 끈질긴 보호 의식으로 볼 때 나에 대한 불신은 수그러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묵묵히 행동을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한 존과 나 사이의 평화는 어렵게 어렵게 유지가 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존이 나에게 선사했던 내 오른쪽 눈 위의 상처 자국에 대한 앙갚음을 하고 싶어 내 주먹이 들썩들썩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싸움이 있은 뒤에 나는 앞으로 존이 나를 히스클리프 씨라고 불러야 한다는 소득을 얻었습니다.
존은 우리를 창이 나 있는 골방으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은 내가 평소에 앉아서 공부를 하던 방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처음에 보니까 내가 앉던 구석은 성년식을 위해 화사한 리본으로 장식이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 전날 내가 한쪽 귀퉁이에
가지런히 쌓아둔 책들이 펼쳐지고 찢겨진 채, 책상과 의자와 카펫 위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책상과 창문의 커튼 위에 달린 리본처럼 보이던 것들은 자세히 보니 잉크 자국이었습니다. 잉크 세트 안의 여러 색의 잉크가 여기저기로 튀어 아주 멋진 쇼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아어씨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화를 버럭 내리라고 생각을 하였지만, 그는 씨익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존을 보고 물었습니다.
"그래, 좋아. 누가 이따위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존은 자기 구두의 버클을 매만졌습니다. "말씀드릴 수가 없는데요."
"말할 수 없다고? 얘기를 해야 할 게 아냐!"
그는 음흉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히스클리프씨의 잉크인데요."
"그래. 저 사람의 잉크지. 그게 어쨌다는 거야? 얘기해봐?"
"그러니까 어젯밤 아홉 시경인가 복도에서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그래서 밖을 내다보니까 히스클리프씨가 가만히 서재의 문을 닫고 좌우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두운 곳에 있어서 저를 보지 못했는지 히스클리프씨는 그냥 현관문으로 나가더라구요."
그의 말은 정확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존이 어떤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나는 당신을 닮은 여자를 그리기 위해서 그것들을 사용한 뒤에 서재의 제자리에 가져다 두고 나가던 참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이러한 일을 비밀로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몰래 행동을 하니까 존은 내가 나쁜 짓거리를 하지 않았나 의심하였던 게 분명했습니다. 그가 서재에 들아와서 보니까 아무것도 어질러진 게 없자 있지도 않은 것을 꾸며대어 그 죄를 나에게 뒤집어씌우려고 작정했던 겁니다.
이제 아어씨가 나에게로 몸을 돌리더니 물었습니다. "히스클리프, 할 말이 있어?"
그 문제는 정말 경멸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팔짱을 끼고 대답을 했습니다. "존의 말이 맞습니다. 어젯밤 들어왔던 사람이 바로 접니다."
"무슨 일로?"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는 제 개인 용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야. 참 이상해. 일을 저지르려고 한 것 같은데. 그 동기가 뭐야? 이따위 짓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짓이잖아. 미친놈이 아니라면."
갑자기 그의 얼굴에 단호한 결심이 선 것 같았습니다. "내가 자세히 조사를 해보면 알겠지. 두 사람은 여기에 있어."
아어씨가 방에서 나가고 존과 나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차가운 눈초리로 계속 노려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가 벌레처럼 움찔하리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오판이었습니다. 그는 뻔뻔스럽게도 씨익 웃는 얼굴로 나를 마주 보았습니다. 벽난로 위의 조그만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가 홀에 있는 시계의 추가 움직이는 소리와 보조를 맞추다가 엇갈리다 다시 보조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존이 입을 열었습니다.
"실수한 거야. 안 그래? 어른께서 오늘 아주 끝장을 낼 테니까. 정말로 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거야!"
"그따위 저질스런 방법으로 나를 망신시키려고 하나 본데, 바보 같은 짓 좀 하지 마! 네놈이 아무리 돌대가리라고 해도 이 정도로는 안 되리라는 것을 알아야지."
그가 웃었습니다. "히스클리프씨, 우리 둘뿐이잖아. 그렇게 잘난 척 할 필요 없어. 같은 식구한테까지 그렇게 욕을 하는 걸 보면 얼간이는 네놈이야."
"놀고 있네. 잘해봐! 그 상판때기에 씌어진 가면은 곧 벗겨질 테니까, 후회할 날이 올걸."
나는 손가락 끝으로 내 살을 쥐어뜯으며 말을 했습니다. 존의 두툼한 목을 쥐어뜯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말 당황하는 빛이 그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아어씨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쉰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왜?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야? 이 실내복의 다자인이 이상한가? 내 평범한 얼굴이 맘에 들지 않나?"
존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잉크의 미스터리를 풀어야죠."
"잉크야 닦아버리면 되잖아. 존, 자네가 좀 닦지?"
존은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그냥 넘기고 싶지 않은 듯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 문제를 분명히 해명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누명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누명을 벗고 싶습니다."
"누명이라고? 그래, 그렇지. 자네는 아무 죄가 없어. 됐지?"
그는 손을 세게 저었습니다. 나는 머리를 숙였습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책을 줍고 나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존은 쉽게 물러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 친구가 이 방에서 걸어나가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아어씨가 이마를 찡그렸습니다. "히스클리프가 이 방에서 나가는 것을 자네가 보았다는 점은 분명해. 그렇지만 이 방에 들어왔다가 나간 사람이 히스클리프 이외에는 없었다는 것을 맹세할 수 있어? 자네 눈 이 그렇게 좋아? 존! 내가 내린 지시들이나 제대로 이행해!"
아어씨가 얘기를 시작하자 존은 혼동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다 듣고 나자 그의 표정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아어씨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청소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이 말을 하고 방을 나갔습니다. 아어씨의 훈계는 나의 호칭과 그 집에서의 나의 위치에 대하여 존에게 내렸던 지시를 상기시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존의 당황하는 표정이 진짜였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가 내린 지시들이나 제대로 이행해'라는 아어씨의 말을 듣고 존의 당황한 표정이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아어씨의 그 말에는 그러한 짓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 얘기한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존과 아어씨 사이에는 어떤 공모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목적을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아어씨와의 관계와 그에 대한 나의 불안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불안을 캐볼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습니다. 절호의 기회가 거의 내 코앞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러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아어씨가 가르치는 공부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주 한 번씩 펜싱과 댄스와 음악 개인 교습에도 열심이었습니다. 나는 상당히 잘 해냈습니다. 존의 말마따나 나는 과분할 정도의 대접을 받고 있었으므로 내가 잘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창피하고 소리를 질렀을 겁니다. 잘하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승마술에는 도가 튼 사람이라는 사실과 심지어는 아어씨에게도 가르칠 수 있는 정도라는 사실에 스스로가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빌제법의 훈련은 정말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이었습니다. 말을 다루는 일 자체가 즐겁기도 하였고 어려운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들판에서 당신을 닮은 허수아비를 볼 때마다 내가 처음에 느꼈던 감격을 느끼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기둥 위에 세운 허수아비는 사랑에 눈이 먼 나의 눈에는 캐시, 바로 당신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내가 파고 있던 도랑으로 당신이 나에게 달려올 때면 보곤 하던 바로 그 깃털 장식 모자를 쓴 당신의 고수머리와 즐거운 당신의 얼굴을 그대로 보았습니다. 나는 멀찌감치 서서 그 허수아비를 흘끗흘끗 바라다보았습니다. 아직까지는 아주 멀리에서만 빌제법이 그것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말을 타고 있는 동안 여러가지 상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힌들리는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퍼마시고, 당신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 다니다 나에게 다시 폭풍의 언덕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면 거짓말 같이 우연히 당신이 런던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헤이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시골 구경을 하러 걸어왔다가 마침 그 스타일을 건너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나는 원하기만 하면 어느 때든 언덕 위로 올라가 당신에게로 달려갈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내 얼굴을 보고는 눈이 똥그래져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겁니다. 그리고 만나서 반갑다는 시늉을 하며 팔을 활짝 벌리고 나에게로 달려오는 겁니다.
물론 나는 당신을 말 위로 끌어 올리고 어디로 갈까 하고 묻는 겁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의 상상은 끊어졌습니다. 당신을 지척에 두고 있었지만 빌제법이 있는 힘을 다하여 우리 모두를 짓밟아버릴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실제와 상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언제나 붕 뜬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빌제법을 훈련시키던 어느 날 존이 들판의 구석에서 나를 소리쳐 불렀습니다. 나는 허수아비 여자를 그에게 비밀로 하고 싶은 마음에 어쩔 수 없이 허수아비를 그대로 둔 채 떠나야만 했습니다. 나는 아어씨가 집에서 찾고 있다는 그의 얘기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어씨가 나를 찾았던 것은 심부름 때문이었습니다. 밀코트에서의 어떤 법적인 일로, 그의 일을 돕느라 우연히도 그날 오후 내내 그리고 저녁때까지 보내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날씨가 매우 추워지더니 바람이 몹시 불었습니다. 실눈이 내리는 추위 속에서 우리는 매섭게 채찍질을 하며 돌아왔습니다. 어리석게도 나는 언덕 위의 돌기둥 꼭대기에서 눈에 젖어 추위에 떨고 있을 당신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실제도 아닌 상상의 우상에 불과한 당신 모습 때문에 나는 마음이 갈갈이 찢겨 거의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나는 염치불구하고 핑계를 대고 들판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눈은 그쳤지만 날씨는 몹시 추웠습니다. 게다가 바람에 살이 에이는 듯했습니다. 검은 구름 조각들이 수정 같은 만월 위로 사납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비탈길을 올라가다 밑바닥이 부드러운 승마용 부츠 때문에 나는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 돌기둥 머리를 잡자 달에서 커다란 구름이 하나 지워지며 허수아비의 모습이 완전히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당신이 내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그런 모습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내가 본 것은 살갗이 터져 피가 흐르고 품위 없고 지저분한 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이그러지고 퉁퉁 부은 데다가 눈은 시꺼먼 모습이었습니다. 자주색 입술의 그녀는 씩 웃으며 재잘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기다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감겨 엉켜 있었습니다. 나는 머리에서 피가 끓어올라 거의 기절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습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나는 다시 눈을 떴습니다. 가끔 귀신들이 걸어 다닌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또 그렇게 믿기도 했지만 이 귀신처럼 보이는 것은 그저 내가 만들어놓은 옷과 깃털과 잉크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무서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모습은 그저 달빛의 장난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좀 더 가까이 가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베갯잇에 잉크로 그린 가는 선들이 눈에 젖어 번져 있는 데다가 바람에 찢겨져 뻥 뚫린 천이 커다란 입모양을 하고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이 괴상하고 형편없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던 겁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며 그것을 기둥에서 낚아채어 갈갈이 찢은 뒤 바람에 던져버리고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남은 것들을 걷어냈습니다. 내가 돌아가려고 몸을 돌린 순간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걸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얀 형상이 들판 아래 끝에 있는 담 위로 나부끼다가 가시나무 숲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쫓아갔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무가 뒤엉켜 있는 컴컴한 숲 끝에 도착하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담 위의 바람이 부는 쪽으로 쌓인 하얀 눈 위에 조그만 슬리퍼 자국 같은 것이 몇 개 보일 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으므로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부터 여러 날 동안 나는 끙끙 앓았습니다. 꿈에 그녀의 모습이 자주 보였습니다. 악몽이었습니다. 그녀가 손필드의 이층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내려와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보는 꿈이었습니다. 팔다리가 돌로 된 그녀가 무시무시한 발자국소리를 내며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는데 얼굴에는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기운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끔 찌그러진 가면을 쓰고 있기도 했는데 어떤 때는 당신의 얼굴이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녀가 어떤 방문을 여니까 그것은 침실이 아니라 별이 총총한 하늘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하늘 안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스르르 사라졌습니다. 꿈은 늘상 이런 식으로 끝났습니다.
다른 꿈도 한 번 꾼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잠을 자다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니까 아래층의 마구간의 돌바닥을 가로지르는 육중하고 거친 발자국소리가 들리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속에서 나는, 남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쿵, 탁 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는 곧이어 문의 빗장이 둔탁하게 들어 올려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 무슨 일인가 하고 가만히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의 침대 끝에 그녀가 달빛을 받고 서 있었습니다. 소스라칠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이끼가 낀, 말도 못 하는 돌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돌로 된 여자는 나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화강암 석관의 뚜껑이 시체 위로 털썩 주저앉는 것처럼 내 몸 위로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무거운 얼굴로 나의 이마를 짓눌렀습니다.
나는 잠이 깼습니다. 물 주전자 주위에 살얼음이 낄 만큼 추운 날씨였지만 내 온몸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습니다. 결국 그날 밤에는 아래층에서 말들과 함께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습니다. 차츰차츰 몸이 나았고, 꿈속의 무시무시한 공포는 공부하고 얘기하고 일을 하는 일상적 인 생활 속에서, 그리고 그저 나의 마음속에서만 우울한 비밀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매일 마구간에서 허수아비에게 입힐 옷을 꺼낼 때마다 나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허수아비에게 옷을 입히고 나서 그 모습을 보아도 졸거운 기분이 전혀 들지가 않았습니다. 몸서리쳐지고 전율을 느낄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계속하여 이런 방법으로 빌제법을 훈련시켰습니다. 무섭다고 포기하면 결국 미친 짓을 한 꼴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돌기둥에 옷을 입히는 방법만을 바꾸었습니다. 정말 그럴듯하게 꾸미려고 노력을 했던 과거와는 달리, 나는 보디스와 치마와 케이프와 모자를 아무렇게나 걸쳐놓았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심보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이었는지 등을 돌려서 바라다보면 허수아비는 자기 혼자서 화장을 한 것처럼 그럴듯하게 보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허수아비는 더욱 생생한 모습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겨울 내내 빌제법을 훈련시킨 결과, 4월이 되자 빌제법은 그 허수아비 모습에 제법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나는 매일 빌제법을 타고 들판을 맴돌았습니다. 허수아비로부터 3미터 이내의 거리에서 20번 정도 그 주위를 돌았습니다. 한 번씩 돌 때마다 나는 빌제법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제법은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알지를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빌제법의 치료가 끝났다고 선언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아직 반항하는 기색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반항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허수아비를 지나가지 않고 빌제법 혼자서 허수아비에게로 곧바로 걸어가 바로 그 앞에서 서 있게 하는 방법으로 빌제법을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만약 빌제법이 조용히 있게 된다면, 상으로 빌제법이 좋아하는 사과를 그 자리에서 주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만약 빌제법이 길길이 날뛰게 되면 그저 내 상처를 동여매고 그 사과로 나 스스로 달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은 얼음이 녹던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아직도 그늘진 숲이나 과수원에는 눈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산꼭대기에는 파릇파릇한 새삭들이 보였습니다. 발아래의 잔디는 이미 물기가 올랐으며 시내에서는 안개가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햇살은 약했습니다. 지빠귀가 커다란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에서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흙냄새가 담긴 바람이 부드럽게 불고 있었습니다. 평상시나 다름없이 허수아비를 변장시킨 뒤 나는 빌제법을 그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허수아비가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빌제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빌제법은 허수아비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얌전한 모습이었습니다. 허수아비는 맑게 갠 봄빛 속에서 우뚝 서 있었지만 옷은 산들바람에 조금 살랑대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눈앞에 보이던 허수아비에는 금방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활기를 띤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허수아비가 엉덩이를 흔들며 치마를 너울대고 팔을 하늘 높이 치켜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그 허수아비가 나에게 걸어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타고 있는 빌제법이 움찔하여 껑충 뛰었습니다. 빌제법은 소리를 지르며 재갈에 거품을 물고 손도끼처럼 날카로운 발굽으로 자신의 노여움을 허수아비에게 쏟아부으려 길길이 뛰었습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고삐를 잡아당겼습니다. 빌제법은 완강히 저항을 했습니다. 빌제법은 뒷다리로 서더니 빙빙 돌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다소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나는 미쳐 날뛰는 말을 통제하려고 고삐와 무릎과 발꿈치를 사용하여 내 몸의 균형을 잡느라 식은땀이 다 났습니다. 그 허수아비가 바랍에 계속 나부끼는 모습에 우리는 둘 다 소림이 끼칠 정도로 싫었던 것입니다.
간신히 말을 진정시켰다 싶었는데 갑자기 말이 다시 꿈틀대더니 단숨에 돌담으로 내쳐 달렸습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허수아비를 약간 비껴 지나갔습니다. 허수아비는 아직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공중에서 잠시 멈춘 듯한 순간 나는 허수아비에서 머리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기가 끔찍스러웠으니까요.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를 못했습니다.
이때 토끼처럼 놀란 존의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허수아비로 뒤의 담 쪽으로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손에 길다란 막대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 막대기에는 치마와 옷소매가 아직 그대로 걸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묘히 이용하면 몇 조각의 천만으로도 살아서 움직이는 물체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나는 길길이 뛰는 말의 안장에서 벌떡 일어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존에게로 몸을 날렸습니다. 나는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바로 존 앞에 착지를 했습니다. 존과 나는 벽에 몸을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 인간의 목을 두 손으로 잡고 있는 힘껏 눌렀습니다. 그의 눌린 목구멍에서 나오는 숨넘어가는 소리에 그의 목을 놔주지 않으면 살인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나는 쥐고 있던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어 댔습니다. 그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렀습니다.
나는 숨을 돌리고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왜 그러는 거야, 이 새끼야?"
그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습니다. "장난이었습니다. 히스클리프씨 진정하세요."
"그런 장난이 어디 있어? 얼마나 위험한 줄이나 알아? 왜 그러는 거야? 왜 나를 미워하는 거야?"
"장난이었다고 했잖습니까. 히스클리프씨가 무언극을 하나 보다 하고 장난삼아 해 본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 새끼야!" 나는 그의 어깨를 다시 잡아 흔들었습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너는 나를 미워했어. 내가 어른에게 해를 입힐까 봐 걱정이 되어 그런다고 하지만 나는 해가 될 만한 일을 해본 적이 없어. 아니 오히려 어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해왔어. 그런데 너는 왜 훼방만 놓느냐구? 도대체 그 이유가 뭐야?"
그는 눈알만 굴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몸을 지탱하기가 어려울 만큼 내가 심하게 다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쥐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벌벌 떨리는 손을 목으로 가져갔습니다. 나는 그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의 숨소리가 다시 정상 속도로 돌아오자 나는 다시 다그쳤습니다.
"이제 말해봐."
그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슬금슬금 나의 눈치를 보더니 성호를 그었습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다시 다그쳤습니다.
"그따위 허튼짓 하지 말고 얘기를 해봐, 이 새끼야!"
그는 질겁을 하며 불쑥 한마디를 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구 싶으면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한번 봐요."
"뭐라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나는 다시 그의 어깨를 움켜줘었지만 그가 심하게 떨고 있었으므로 손을 놓았습니다. "상처를 입히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러니까 왜 이러는지 이유만 말해."
나는 내 이웃에게서 결코 손가락질을 당해본 적이 없는 내 검은 피부와 집시 같은 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애처로움 목소리로 말을 했습니다. "더이상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미 맹세를 했으니까 그 맹세를 깰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맹세를 했어? 내 얼굴에 대해서 무슨 맹세를 했어? 괴상한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지 말고 제대로 얘기 좀 해봐."
그는 분명 내가 다시 화를 낼까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다시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으니까요.
"집안의 모든 일들이 제대로 돌아가지가 않을 겁니다. 얼굴에 불행의 검은 그림자가 씌워진 당신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어른과 그분에게 의존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정말 불행의 징조가 된 겁니다."
이 말에 나는 아어씨가 자기의 죽은 형과 내가 닮았다고 하던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행의 징조가 되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존은 일어서서 손등으로 입을 닦았습니다.
"악마처럼 생긴 당신이 정말 악마라면 어떤 것도 당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순진한 사람이라면 내 경고를 따라 이곳을 떠나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 당신이나 모두 죽게 되고 파멸하고 말 겁니다."
나는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는 쫓아갈 가치가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나는 스타일 위에 앉았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불안해하는 하인들과 꿈속에서 보았던 돌로 된 여인의 걸음걸이와 길길이 날뛰는 말들과 잉크와 피가 얼룩진 자국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빽빽한 안개처럼 고통과 적의로 바뀌어 나를 휩싸고 있었 습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나는 잠시 뒤에 머리를 들었습니다. 빌제법이 내 곁에서 조용히 새싹을 뜯어먹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의 화는 이미 사라진 것이 분명했습니다. 진정이 되자 애정 아니 습관적인 힘에 의해 그는 내게로 돌아왔던 겁니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코를 토닥여 줬습니다. 그는 나의 머리에 코를 비벼대었습니다. 그리고는 땅에 떨어진 무엇인가를 바삭바삭 깨물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를 위해 가져왔던 사과 중의 하나였습니다. 내가 존과 싸우는 동안 내 주머니에서 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변덕스러운 산들바람이 허수아비의 치맛자락을 움직였습니다. 빌제법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자기의 먹이를 조심스레 먹었습니다.
내 마음의 눈에는 말과 사람이 같아 보였습니다. 둘 다 기골이 장대한 꼴이 같은 족속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해진 옷 때문에 완전히 거지꼴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가 있을까? 나는 일어나 돌아섰습니다.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돌기둥에서 옷을 벗기기 시작했습니다. 페티코트와 보디스와 모자를 하나씩 떼어 빌제법에게 보여 주며 그의 얼굴에 대고 비벼대었습니다. 그는 코를 조금 씰룩거리면서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는 사과를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하나를 이렇게 하면서 나는 그 모두를 나의 옷 위에 걸쳐 입었습니다. 나는 내 커다란 몸에 그 옷들이 맞으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옷 솔기가 비바람에 약해지기는 했지만 입는 데에는 거의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저 손만이 떨릴 뿐이었습니다.
내가 옷을 하나하나 입는 동안 빌제법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의 관심을 끈 나는 전에 그를 달래기 위하여 불러 주곤 하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저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적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그가 사랑하는 주인이란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옷을 다 입고 나서 나는 노래를 멈추고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할래? 내 머리를 네 발굽으로 감자처럼 으깨고 싶니? 아니면 이성적인 동물처럼 내가 너를 타고 달릴 수 있도록 하겠니? 대답을 하지 않는 걸 보니 내가 한번 시험해봐야 하겠구나."
나는 말에 올라타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말은 순한 양처럼 그대로 있었습니다. 나는 빌제법을 타고 마구간으로 돌아왔습니다. 모자는 손에 들고 있었지만 다 해진 옷을 입고 무릎에는 치마를 둘둘 만 상태였습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전혀 개의치 않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아어씨가 마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을 때에는 정말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아어씨는 존이 얻어맞은 것을 보고는, 아니 그의 얘기를 듣고 그날 우리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나의 이상한 차림을 보고 미소를 지었지만 소리 내어 웃지는 않았습니다. "빌제법의 등에 치마를 입은 사람이 탄 모습을 다 보다니 전혀 믿어지지 않는데. 자네는 이런 일에는 제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자네가 이겼어!"
"당분간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특별한 작전은 다 끝났습니다."
나는 말에서 내리며 다 찢어진 옷을 벗어 쓰레기 더미 속으로 집어 던졌습니다. 아어씨가 따뜻하게 나의 손을 잡으며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뭐야?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렀나?" 아어씨는 내 이마와 어깨에 묻은 핏자국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그는 나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존과 싸운 것에 대하여 해명을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말을 타다가 벽에 굴러떨어져서 이렇습니다."
나는 존이 나를 고자질쟁이라고 부를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나에게 적대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그 이유나 목적을 알 수는 없지만 존과 아어씨가 함께 공모를 한 결과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지난 겨울 눈보라가 몹시 불던 날 밤 가시나무 숲으로 사라지던 그 하얀 모습이 아직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 다. 왜냐하면 존의 넓적한 발로는 내가 눈 속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가느다란 발자국을 만들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던 간에 분명한 것도 많았습니다. 여자 허수아비의 유령은 이미 때려눕혔으니까 다시는 룬스톤의 스타일에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며 다시는 손필의 저택에 어슬렁거리지 않으리란 사실 말입니다. 적어도 내 꿈에 더이상 나타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아직 살아 있어요. 결국 나는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그저 당신에게 얘기를 하기 위하여 침대에 누웠어요. 당신 - 나의 또 다른 마음이 부를 때면 언제나 가까이에 있던 당신을 말이에요. 내 말을 듣고 있지요? 나는 그렇게 확신해요. 당신의 다리가 내 것인 것처럼 행동하던 나를 기억할 거예요. 당신이 나보다 갑자기 키가 커지고 몸이 더 튼튼해지고 다리도 더 길어졌지만 나는 당신이 나를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지요. 내가 등에 올라타서 당신의 귀를 잡아당기면 당신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캐시, 어디에 갈 건데?'하고 묻곤 했어요. 당신의 다리가 마치 내 것인 것처럼 우리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곤 했어요.
나의 생각이 마치 당신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처럼 당신의 팔다리를 움직여서 그렇노라 얘기했지요. 당신의 발은 싫든 좋든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곤 했어요. 내가 원하는 곳이 벽이면 덩신의 발은 벽을 향했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집으로, 문으로 나가고 싶으면 문으로 향했어요. 당신의 육체를 자기 것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당신은 웃곤 했 지요. 내 발가락 사이로 당신의 부츠 바닥의 모래를 느낄 수 있었어요. 우리가 그 장난을 그만둔 게 언제였지요? 언제가 마지막이었나요? 왜 대답이 없어요?
손필드에 도착한지 만 1년이 되던 어느 여름날, 나는 드디어 빌제법의 치료가 완전히 끝났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이후 빌제법은 아어씨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나는 적갈색의 암말을 대신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하기 전에 존과 치렀던 지난번의 다소 이상한 싸움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싸우다 내 머리가 벽에 부딪칠 때의 충격이 생각보다 컸었는지 나중에 온몸에 열이 나서 한동안 위험한 상태로 보일 정도였습니다. 아어씨는 약사를 불러 상처의 피를 빼내게 하고 침대에서 꼼짝 못 하도록 했습니다. 좀이 쑤셔셔 자리에서 일어나 마구간으로 일을 하러 가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고열 때문이었는지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약사는 만약 내가 머리를 자꾸 움직이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가 없다고 선언하였으므로 열이 가라앉을 때까지 나에게 일종의 감시원이랄까 사람을 하나 밤낮으로 붙여두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니엘이 감시를 하다가 나중에는 존이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내가 고열에 시달리며 앓다가 일어나 내 침대 옆의 의자에 존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베개로 나를 숨 막혀 죽게 하고 자연사로 위장하기 위하여 그가 그러한 상황에서 나를 찾아왔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불편한 몸으로도 방어할 만한 무기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존은 더 이상 나에게 해를 끼칠 마음이 없다고 얘기하면서 나를 말렸습니다.
좀 전에 먹은 고기 수프에 마취제라도 탔는지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그대로 눕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 작자가 틀림없이 나를 놀리고 있으며 벌처럼 침을 쏠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을 마련하기 전에 자신만의 승리의 시간을 음미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끈질기게 나를 주저앉히는 심연의 꿈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쓸 때마다 변함없는 자세로 조용히 앉아 있는 그 작자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방안을 부드럽게 밝히고 있는 촛불의 그림자가 작아진 것만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아어씨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해고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가 나에게 잘해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러나 고열 때문이었는지 약에 취해서였는지, 강요에 의한 의무감과는 분명히 다른 관심이랄까 그가 나를 열심히 보살피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전에 그가 나 에게 갖고 있던 두려움과 혐오감이 이제는 비굴할 정도의 호기심으로 바뀌어 눈에 가득하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선잠을 자다 깨어보니 나의 한 손을 그가 두 손으로 꼬옥 잡고 있었습니다. 뱀굴을 더듬고 있는 사람을 뿌리치듯이 나는 움찔하며 내 손을 잡아뺐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존의 이상한 행동은 비몽사몽간에 있었던 행동이란 생각도 들고 존의 그러한 행동도 곧 그칠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에는 경멸과 적대감은 이미 사라지고 그 대신 복종심과 고독감이 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강한 호기심이라고 할까, 그러한 것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뜻밖의 순간에 나를 엿보던 일, 내가 개인 지도를 받는 동안 서재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던 일, 아어씨처럼 나를 경멸하던 일, 내가 마구간을 뛰어넘어 들어가는 것을 엿보던 일 등이 생각나서 나는 불안했습니다.
나는 존이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그래도 나의 공부는 꾸준히 진척이 있어서, 나는 순식간에 상당히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복싱이라던가 사격, 펜싱 등과 같은 육체적인 공부는 쉽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펜싱은 최근에 정말로 아어씨의 수준에 버금갈 정도가 되어 한번은 손목을 잽싸게 돌려 그의 손에서 펜싱 검을 떨어뜨리게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아어씨는 이런저런 방면에서 나에게 져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자상하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나는 아어씨의 성격을 보다 넓게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성격을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고 얘기하지 않고 보다 넓게 알 수가 있었다고 얘기하는 이유는 내가 그에게 대해서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언제나 두 가지 미스터리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아어씨가 아무리 횡포를 부려도 하인들이 그에게 매우 헌신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가 경박스러울 만큼 변덕을 부리는 것은 곧 자기 멋대로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러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랑과 존경심보다는 두려움과 미움만이 쌓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존경심이란 내가 아는 한 거의 예외 없이 그의 것이었습니다. 내가 홀에서 다니엘이나 페어팩스 부인이나 리나 다른 하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언뜻 들어 보면 그들은 그를 칭찬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에 대해서도 그들은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익히 알고 있는, 다소 고약한 내 성격 이외에도 그 집에서의 나의 애매모호한 위치 때문에 나는 그들의 입방아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허풍쟁이이자 변덕쟁이인 그에게 그들이 매력을 느끼는 데에는 어떤 비밀이 있었겠습니까?
나는 조금씩 그 해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아어씨가 말이 거칠고 하인들을 종종 호되게 나무라며 해고를 시키겠다고 위협하거나 혼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는 했지만 손필드에서 어느 누구도 실제로 벌을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좋은 예가 될 만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존은 잠이 많은 사람이라서 아어씨가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 하품을 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아어씨는 이러한 버릇에 대해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존, 다음번에도 그따위 식으로 입을 하 벌리고 하품이나 해대면 따끔하게 채가 맛을 보여 주겠어!"
어느 날 아침 존은 의자를 뛰어넘다가 커피를 엎지르고 말았습니다. "잘한다 잘해! 또 일을 저질렀어! 이제 나도 더이상 봐줄 수가 없어. 이 방에서 어서 나가! 그리고 오후 다섯 시 정각에 다시 와. 그러면 그때 손필드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채찍으로 20대는 얻어맞아야 할 거야!"
놀라운 것은 문을 닫고 나가면서 별로 개의치 않고 다시 하품을 하던 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다섯 시에 그 집 사람들 모두와 내가 본 것은 정말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아어씨는 20대를 때리기는커녕 20실링을 존에게 주면서 수면제를 사 먹으라고 훈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친근한 사람끼리 할 수 있는 뼈 있는 한마디의 충고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아어씨가 나에게 말을 할 때면 나는 정말 기분이 팍팍 상하곤 했습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에게 울화가 치미는 것을 억지로 참으려 노력했으니까요. 그러나 나 이외의 사람을 힐책할 때에는 중요한 대목에서 결코 가시가 돋친 말을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의 의도는 상처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사소하고 매력적인 상대편의 약점, 예를 들면 리가 너무 잘 킥킥거린다거나 페어팩스 부인이 너무 점잔을 뺀다거나 하는 것들을 그냥 살짝 건드려 부추겨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배려하는 셈이었습니다. 아어씨의 위트와 예측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아랫사람들은 웃음도 나오고 재미있기도 하고 주인이 월급을 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게 마음에 들기도 해서 정말 붕 뜬 기분이었습니다.
아어씨는 남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상류 생활을 하는 꽤 대단한 시골 지주이면서 정말 신사였습니다. 그에게 인생이란 언제나 휴일 같은 것이었으며, 세상 모두가 카니발의 공연장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어씨를 점점 더 잘 알게 되면서부터 그의 빈번한 웃음소리는 무엇인가를 부인하고 싶은 히스케리성의 시도, 즉 절망의 울음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단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거대한 적이 있었을까요?
내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깊은 구덩이 끝에서 그 적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곧잘 농담을 하고 즐겁게 웃었지만 말문을 닫고 침묵을 지키기 일쑤였으므로, 그가 얼마나 우울한 사람인가를 나는 분명히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어떤 사악한 것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럴 때면 그는 한동안 완전히 넋을 잃고 있다가는 갑자기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나가버리곤 합니다. 빌제법을 타다가도, 이웃의 샛길을 써레질하다가도, 마차를 타고 가다가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서 떠났습니다. 그해에는 런던에 두 번, 그리고 다른 시골에 있는 집에를 서너 번 다녀왔습니다. 지난 10년 동안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 오히려 집에 오래 있는 셈이라고 리가 나에게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내가 오기 전까지 그가 손필드에서 지냈던 시간을 다 합쳐봐도 내가 도착한 이후의 몇 달 동안만큼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내가 신이라도 나서 뿌듯한 기분을 느꼈을까요? 내가 다른 사람의 가슴속에 분명히 그러한 재미를 주었구나 하고 기뻐했을까요? 그렇게 얘기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속에 최근에 생기기 시작한 희미하고 무의식적인 무엇인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을 했으니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과 헤어지고 말았다는 그 끊임없는 고통과는 별도로, 나는 심히 비뚤어져 있던 세상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았다는 생각, 내 생각이 옳았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