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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의 낙원

독수리의 낙원

Chalotte Lamb

 

1

"이젠 남편이라면 지긋지긋해. 할 수만 있다면 총으로 쏴서 없애 버렸으면 좋겠어."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큰 목소리에 레스토랑 안의 손님들이 일제히 새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들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동행인 피터만이 사방을 둘러보며 얼굴을 붉혔다.

"떠들지 마. 장소를 생각해야지."

피터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게 신경 곤두세우지 않아도 어쨌든 이혼은 성립된 거라구. 새라 쪽에 잘못이 없는 이상 스티븐슨이 어쩌겠어?"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렇게 질질 끌며 지연작전을 펴고 있잖아요. 내가 선임한 변호사가 그 동안 몇 번이나 연락을 취했는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답장도 없다는 거예요. 앞으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나를 골탕먹일 게 분명해. 남을 궁지에 몰아넣고 쾌감을 느끼는 이상성격자거든. 그런 인간은 일찌감치 없애 버리는 게 사회적으로도 좋을 거예요."

"하여튼 저녁식사나 끝내자구."

피터는 주위 사람들이 귀를 곤두세우고 있음을 의식하고 어색하게 권했다.

그러나 새라는 앞에 놓여 있는 생선요리를 물끄러미 내려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요리 접시를 옆으로 밀어 놓는다.

그것을 바라보던 피터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왜 그래? 접시에 뭐가 묻었나?"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화가 치밀어서"

짜증스럽게 내뱉은 새라는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리며 연인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한다.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피터. 결코 무분별한 비상수단은 취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 짓이야말로 알렉스가 원하는 바니까요."

"맞아, 이런 경우엔 끈기가 제일이라구."

부드럽게 속삭여 주는 피터의 눈을 보며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항상 부드럽고 조용하며 자제심을 잃지 않는 피터이 사람은 알렉스완 너무나 대조적이다. 얼굴 생김새도 온후한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으며, 매력적이기보다는 차분하고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 어떻게든 끈기 있게 참아볼 거예요."

새라는 쓴웃음을 띠우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난 신경이 무디질 못해요. 알렉스는 어떻게 하면 내가 화를 내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이렇게 질질 끌어가는 전술을 써서 그에게 무슨 득이 있는지 그 점을 이해할 수 없군."

그는 스테이크를 말끔히 먹은 후 의자 등에 몸을 기댔다.

"별거를 시작한 지 일 년이나 됐지만 그는 당신 앞에 얼굴 한번 내민 일도 없거니와 만나자는 의사표시도 한 적이 없잖아. 아직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새라는 차갑게 웃으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천만에그는 이혼이 성립되지 않는 한 우리들이 결혼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기뻐하는 거죠. 그런 남자와 결혼했던 게 큰 실수였지. 구태여 변명을 하자면 당시 l9살밖에 안 됐던 나로서는 상대방의 인간성까지 꿰뚫어볼 만한 눈을 못 가졌었으니까 무리도 아니에요. 딸자식의 그런 무분별한 짓은 부모가 바로잡아 줘야겠지만 공교롭게도 우리 부모님은 그런 식견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당시엔 부모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하더라도 난"

새라는 다음 말을 입속에서 얼버무리다가 그만 입술을 꼭 깨문다. 그 당시는 누가 어떤 충고를 해와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알렉스와의 사랑에 폭 빠져 있었다. 지금으로선 후회막심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부모님께서도 처음에는 걱정을 하면서도 잠자코 계셨으며, 그후 딸의 연인을 만나본 후로는 오히려 열성적으로 결혼을 권했었다.

알렉스는 무슨 일이든 성취해야겠다는 생각만 하면, 그 상대가 누구든 간에 간단히 정복하는 탁월한 능력과 연기력을 지닌 사람이다. 현직 영화감독을 집어치우고 배우가 되면 성공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새라는 마음속으로 알렉스를 저주했다.

그릇을 치우러 온 웨이터가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새라의 접시를 보고 걱정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혀가자미 요리가 입에 맞지 않으셨던 모양이죠? 그럼 다른 요리로 준비할 걸"

"아녜요, 맛있었어요. 하지만 식욕이 없어서"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커피만 마시면 되겠어요."

"나도."

피터도 따라서 주문했다.

웨이터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돌아가자 새라는 소리를 죽이고 킥킥 웃으면서 소근거린다.

"어쩐지 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 같아요."

새라를 바라보는 피터는 흐뭇한 표정이다.

"내일부터 얼마 동안 당신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네덜란드에 가고 싶지가 않군. 새라도 같이 가는 게 어때? 비행기표와 호텔예약을 2인분으로 하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지. 암스테르담은 아주 멋진 도시야. 사적도 풍부하고 명소도 많아. 운하 옆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영국에서 일부러 여행을 갈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구."

새라는 유감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따라가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지만 내일 점심은 꼭 같이 들겠다고 엄마와 약속을 했어요.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내일이 부모님 결혼기념일이에요."

결혼기념일에 찾아가겠다는 약속은 벌써 한 달 전부터 통화할 때마다 어머니와 다짐한 일이다. 결혼기념일과 생일은 친정인 캘스로프 가의 일대 행사였다. 내일도 오빠 둘, 그리고 언니 재니, 외삼촌과 이모들이 부부 동반하여 아이들까지 데리고 올 것이다. 이제 와서 못 가겠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 그랬었지! 난 참 까맣게 잊고 있었네."

피터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자기 집안사람들도 가족관계가 아주 친밀하기 때문에 사정을 쉽게 이해한다. 이런 점도 알렉스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알렉스는 일가친척 하나 없는 천애의 외톨이며 모든 일에 자기중심적이다. 그러한 그로서는 가족끼리 혹은 친척끼리 나누는 기쁨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정말로 유감스럽군요. 다음에는 꼭 암스테르담 운하에 데리고 가줘요."

", 약속하지."

쾌히 승낙한 피터는 녹색을 띤 새라의 맑은 눈동자를 강렬하게 응시한다.

"아주 아름다와, 오늘밤의 새라는."

"오늘밤만? 싫어요."

그녀는 웃으면서 눈을 곱게 흘겼으나 피터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하다.

"물론, 오늘밤만이 아니지. 난 만날 때마다 당신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게 돼. 이처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성이 지상에 있다는 그 자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 정도로 해둬요."

지나친 찬사에 새라는 자신도 모르게 한쪽 손을 내밀어 다정한 연인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그는 그 손을 자기 두 손으로 감싸고, 그녀의 타원형 얼굴과 풍성한 갈색 머리칼을 집어삼킬 듯한 시선으로 훑어본다.

"새라는 수수께끼 같은 여자야"

피터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중얼거린다.

"그렇게 가만히 있을 때는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청초함이 드리워 있어 무상의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일단 입을 열어 웃거나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마치 불과 같은 정열을 느끼게 하지."

그는 자신의 약혼녀를 황홀한 듯 응시하더니, 아까부터 잡고 있던 손을 살짝 들어 올려서 손등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다.

"새라 같은 여인을 만나게 되어 나는 마음속 깊이 감사하고 있어요."

"나도요."

그녀는 진심으로 공감한다는 표정이다. 몇 해 전이었다면 피터처럼 조용하고 신중한 성격의 남자에게서는 어딘지 모자라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지루해서 도망치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알렉스와의 이혼을 결심하게 된 그 소동이 있기 전의 생각이다. 산산조각 난 마음을 부둥켜안고 알렉스 곁을 떠난 지금은 피터의 온유함이 무엇보다도 따뜻하다.

웨이터가 커피를 가지고 오자 피터는 아쉬워하며 새라의 손을 놓았다. 그는 남의 이목을 끄는 일은 절대 피하고 있다. 교제를 시작할 때부터 그랬다. 그래서 새라도 그때부터는 자신의 의상이 너무 자극적이지 않은지 신경을 써왔다. 피터가 좋아하는 유형은 청결감 있는 밝은 색조, 우아하고 고상한 디자인이다.

옷차림뿐만 아니라 무슨 일에든 상식적이고 평범한 선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그가 바라는 생활태도인데, 이 점도 알렉스 스티븐슨과는 정반대다.

알렉스는 최상류층이나 부유층과 동석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태도와 의상을 고집했다. 작은 배의 갑판 위를 닦을 때나 입을 낡아빠진 청바지와 스웨터 차림으로 고급 파티 자리에 뛰어들기 일쑤다. 그래서 고상한 취미를 지닌 사람들이 놀라와하는 모습을 보고는 은근히 만족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아내의 의상에 대해서도 일일이 간섭했는데, 대개는 눈이 부실 정도의 화려하고 대담한 드레스를 입히고 싶어 했다. 남편의 뜻을 쫓아서 몇 년간은 그가 원하는 옷들을 입었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파경에 이른 다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새라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새라 자신의 삶이 아니라 남편의 애완동물에 지나지 않는 노예적인 삶이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앞에 앉아 있는 피터를 바라보면서 새라는 같은 과오를 두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했다.

상대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존중해 주는 것과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내팽개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앞으로는 다른 누구의 생각이 아니라 내 자신의 생각과 신념에 바탕을 두고 살아갈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거야?"

커피를 다 마신 피터가 웨이터에게 눈짓으로 계산서를 재촉하며 물었다.

"당신이 네델란드에 가는 일을 생각했어요."

새라는 양심을 잠시 돌려놓고 말했다.

"얼마 동안은 쓸쓸하게 지내겠군요. 내일 몇 시 비행기죠?"

"아침 10시야."

그는 웨이터에게 돈과 팁을 건네주면서 대답했다.

"가급적 내일 안에 전화를 걸 생각이지만, 거래처 사람들이 준비하는 저녁식사 시간이 길어지면 호텔에는 밤늦게야 돌아올지도 몰라."

"전화는 친정으로 걸어 줘요. 내일은 그곳에서 묵을 생각이니까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피터의 안내를 따라 출구로 향했다. 크림 색 실크 드레스의 점잖은 차림이지만, 그녀의 몸매가 워낙 날씬하고 아름다운지라 주위 사람들이 선망의 눈길로 흘끗흘끗 쳐다본다.

"그럼, 주말은 친정에서 줄곧 지낼 거야?"

새라를 위해 문을 열어 주면서 피터가 말했다. 그녀는 감사의 미소를 띠우고 보도로 나섰다.

"일기예보를 들으니 날씨도 좋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모처럼 나들이를 하는 김에 바다냄새라도 듬뿍 마시고 돌아올 생각이에요."

"그럼, 일요일 아침 당신이 일어난 후에 전화를 걸도록 할게. 월요일에는 사무실에 출근하겠지?"

"출근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조스의 먹이가 될 테니까요."

새라는 피터의 자동차 조수석에 올라타면서 상냥하게 웃었다. 그녀가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는 광고회사 사장 조지 제롬은 본명보다도 식인상어 '조스'란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거나 웃을 때 튼튼해 보이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는 버릇이 있는데다가, 일단 화가 나면 심기가 약한 사람은 졸도할 만큼 떠들어대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그런데 그가 화를 잘 내는 경우의 대부분은 부하직원이 시간을 안 지키거나 업무처리가 느슨할 때다.

피터는 자동차를 몰기 시작했다. 차는 어두운 시가지를 매끄럽게 달려 나갔다.

"어차피 친정에 가는 길이니 스티븐슨이 집을 팔려고 내놨는지 확인해 보는 게 어떻겠어? 그 집이 팔리지 않는 한 이혼을 하더라도 당신은 아무 것도 받지 못할 테니까 말야."

", 확인하고 오겠어요."

그녀는 생각에 잠기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알렉스가 언제까지라도 그 집을 팔지 않으려 한다면 어떤 강행수단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변호사도 말했어요. 그곳 말고는 살 집이 없다면 몰라도 그는 뉴욕에도 그리고 런던에도 아파트를 빌어 가지고 있거든요. 엄마 말에 의하면 요즈음엔 그 집안에 틀어박혀 있지도 않은 것 같구요. 하지만"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생각이 들 때는 어차피 알렉스와는 헤어지는 마당이니 재산권 따위는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건 안 돼."

피터가 차분히 설득한다.

"당신은 횡포를 부리는 남편에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몇 년씩이나 참아왔잖아. 그런데다가 그 집에 있는 가구의 대부분은 친정 부모의 도움으로 장만한 것이고, 집을 뜯어고친 일도 당신 혼자서 했다며? 그런 것에 상당하는 돈을 내놔야 하는 건 이혼을 제안한 남편이 져야 할 당연한 의무지."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음 말을 이었다.

"혹시 그가 돈 내놓는 걸 아까와하는 게 아닐까?"

"나를 화나게 하려는 짓이라구요! 이쪽에서 화를 내며 대들기를 기다리는 게 분명해요. 그때까지는 한푼도 내놓지 않을 생각일 거구요."

새라의 녹색 눈동자에 분노의 불길이 타오른다.

그녀의 작은 방이 있는 아파트 앞까지 오자 피터는 차를 세우고 연인의 입술에 달콤한 키스를 했다.

"들렀다 가고 싶지만 아직 짐을 덜 쌌어. 내가 이곳에 없는 동안 혼자서 속끓이지 마. 스티븐슨 따위는 무시해 버리면 된다구."

"알았어요. 노력해 볼게요."

새라는 고개를 까닥이며 피터와 헤어지기는 했지만 그가 말한 대로 할 자신은 없었다. 알렉스가 행동으로 나온다 해도 그것을 무시해 버리면 가벼운 기분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이쪽에서는 변호사를 통해 연락을 취하는데도 저쪽에서는 반응이 전혀 없는 상태다. 그런 일을 생각할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서 그의 집 창문에 콘크리트 벽돌이라고 던져 볼까 생각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창문을 깬 다음 '이래도 모르는 척하려면 해보라'고 떠들어댈 경우, 알렉스는 창밖에 서 미친 듯이 날뛰는 여자에게는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우리 집에 전화를 건 다음 휘파람을 불며 소파에 벌렁 드러누울 게 뻔하다.

그는 상대방을 무참히 완패시키는 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혼자서 이혼교섭에 나선다면 의심할 나위도 없이 그의 함정에 말려들 것이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새라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다음날 토요일, 조그마한 여행가방에 짐을 챙겨 넣은 새라는 채링크로스 역에서 기차를 타고 젠트 주의 해안지대로 향했다.

런던 32개구 중에서도 제일 도심에 가까운 캄덴 지구에 살고 있는 그녀로서는 자가용차는 이제 무용지물이었다. 직장에는 버스로 한 구역만 타면 갈 수 있고, 바쁠 때면 언제나 택시를 잡을 수 있다.

물론 데이트를 할 때는 피터가 차로 데리러 오고 바래다주며, 친정에 갈 때도 자동차보다 기차 편이 빠르고 안전하다. 그녀의 부모는 롬니마시라는 광활한 목초지대 외곽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데, 막내딸이 런던에서 돌아올 때는 언제나 역까지 마중을 나와 준다.

그날도 시골의 조그마한 간이역에 내린 새라는 저쪽 주차장에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금방 알아보았다. 그녀가 손을 흔들자 존 캘스로프는 달려와서 딸의 짐을 받으며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플랫폼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안 됐구나. 나오려는데 마침 전화가 걸려왔지 뭐냐."

"아이 아버지, 그런 일엔 신경쓰지 마세요."

새라는 등을 쭉 펴서 아버지의 볼에 키스했다.

캘스로프 씨는 l90cm 가까운 장신인데다가 무척 여위어서 장대처럼 휘청거린다. 마말레이드를 섞은 것 같은 오렌지 색 머리에는 백발이 희끗희끗 눈에 띄고 굵은 눈썹은 벌써 하얗게 세었는데, 반짝이는 담갈색 눈과 건강하게 뵈는 얼굴색은 50대 초로 같지가 않다.

그는 마음도 아주 젊어서 이전부터 계속해 오던 조깅과 테니스 경기에 더하여 작년부터는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그는 노화방지를 위해 일 년에 한 가지씩 새로운 취미에 도전하겠다는 선언까지 했었다.

새라는 아버지 뒤를 따라 주차장으로 갔다. 그리고 캘스로프 집안사람들 모두가 '귀부인'이라 부르는 자동차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 구식 폭스바겐을 아버지는 막내아들처럼 사랑하며, 언제나 윤이 번쩍번쩍 나게 닦아 둔다.

경쾌한 엔진 소리를 내면서 친정집이 있는 화이트애버스 마을로 귀부인을 모는 캘스로프 씨는 딸의 물음에 가족들의 소식을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모두 건강한 것 같군요. 아버지는 어떠세요? 가게는 잘 돼요?"

"큰돈은 벌리지 않지만 그런대로 순조롭게 돼가고 있다."

존 캘스로프는 화이트애버스 근교의 유일한 도시인 라이 시가지에 약국을 열고 있다. 아침저녁 왕복 때마다 광활한 롬니마시를 가로질러서 다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은 많이 걸린단다. 그러나 철 따라 변하는 초원의 경치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통근을 즐거워하는 것 같다.

지난날 바다보다 낮았다는 롬니마시는 모래흙으로 자연히 매립되어 이제는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목초지대가 되었다.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양떼 사이로 수를 놓은 듯 구불구불 나 있는 도로가 종횡으로 달리고 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은 방향감각을 잃는 수도 더러 있지만, 곳곳에 서 있는 중세 교회의 첨탑들이 그런 여행자들을 위해 길잡이가 되어 준다.

귀부인의 조수석에 앉아서 초여름의 롬니마시를 바라보고 있는 새라의 눈에는 달콤한 향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대부분을 이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지내왔었다. 꼬불꼬불한 오솔길이며 갈림길이 어디에 있는지까지도 환히 알고 있다. 그 오솔길을 어린 시절에는 자전거를 타고 달렸고, 결혼한 후에는 알렉스의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했었다.

결혼식도 저 앞에 보이기 시작한 화이트애버스 마을의 교회에서 올렸었지. 그 낡은 석조건물의 모습도, 그리고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삼나무도, 묘지 가장자리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도 그때와 전혀 변함이 없다. 새라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그러니? 피곤하냐?"

아버지의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이 조수석을 향하자 그녀는 이내 미소를 띠웠다.

"런던과 같은 도시에서 살면 누구나 피로해지게 마련이에요. 역시 고향이 제일 좋군요."

"너도 차츰 엄마를 닮아가는 것 같구나."

캘스로프 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핸들을 급하게 꺾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오솔길로 접어든 것이다.

"어머, 구도로가 아니라 새 길로 가시게요?"

가벼운 말투로 묻는 딸에게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네 엄마가 기다리고 있으니 오늘은 새 길로 가자꾸나."

새 길로 불리기는 하지만, 이 길도 사람이 왕래하기 시작한 지 벌써 수백 년이나 된 옛길이 길로 가는 편이 훨씬 가깝다.

구도로는 바닷가 언덕 밑 해안선을 따라 뻗어 있는데 봄철에는 밀물이 이따금 방파제를 넘어 언덕까지 밀려든다. 그래서 이곳 사정에 어두운 운전자가 목숨을 잃는 사고도 종종 일어난다. 물론 이 지방 사람들은 밀물의 높이를 알고 있으므로 밀물이 많이 들 때는 새 길만 사용한다. 그러나 그럴 위험이 없는 때, 특히 주말의 한가한 때는 구 도로로 차를 몰면서 바다 경치를 즐기는 일도 적지 않다.

"구 도로로 돌아가면 그 집을 볼 수 있을 텐데"

새라는 낮은 소리로 종알거렸다.

"'팔 집'이라고 광고를 내걸었나요?"

"글쎄다, 그쪽으로는 지나다니지 않아서 잘 모르겠구나."

새라는 아버지의 옆얼굴에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직접 보지는 않았더라도 집을 팔려고 내놨다면 그것쯤 모를 아버지가 아니다. 이 근방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뉴스는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그날 중에 전 롬니마시를 달려 이 마을 저 마을로 전해지는 게 보통이다. 아버지는 일부러 질문의 화살을 회피하는 게 분명하다.

왜 그러는 걸까? 요 몇 주일 사이에 알렉스가 찾아와서 뭔가 타협을 하자고 제안한 걸까? 자신은 이번 이혼소동에 부모가 간섭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어쩌면 알렉스는 장인 장모를 이 사건에 끌어들이는 작전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부모는 알렉스를 지극히 사랑했었고, 특히 아버지는 연령차를 초월해 친구로 대해 왔었다.

두 사람은 알렉스의 요트를 타고 이따금 바다낚시를 즐기기도 했었고 롬니마시를 누비면서 강낚시와 야생조 관찰도 했다. 아버지는 해오라기 집을 발견하는 데는 도가 튼 명수였다. 풀이 무성한 숲속을 숨을 죽이면서 기어가 어미새에게 들키지 않고 해오라기 집을 관찰하는 방법도 알렉스에게 가르쳐 주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하며 몇 시간이고 어미새와 새끼들을 바라보다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핸들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옆얼굴에 고뇌의 빛이 서리어 있음을 읽은 새라는 입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가슴속에 묻어 버렸다. 딸과 사위, 어쩌면 딸과 친구 사이에 끼어서 고민하는 부모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런 몰염치한 짓은 알렉스와 같은 무신경한 사람이나 할 짓이다.

이윽고 자동차는 길가에 나 있는 문을 지나 이곳저곳 이끼가 끼어 있는 고풍스런 석조건물 앞에 멎었다. 새라는 얼른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어머니의 가슴을 향해 달려갔다.

"기차가 연착했던 게로구나. 기다려도 오질 않아 여간 걱정하지 않았다."

몰리 캘스로프는 딸을 껴안으면서 마음이 놓인다는 듯 말했다.

"아뇨, 정각에 도착했는걸요. 엄마 시계가 빨랐던 거 아녜요?"

딸의 여행가방을 든 존 캘스로프가 서서히 다가왔다.

"네 엄마는 요즘 신경이 날카로와졌나 봐. 아무래도 나이 탓인가 보다."

몰리는 마치 닭을 쫓듯 에이프런을 휘휘 치켜 올리며 남편을 집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도 남편과 같은 50대인데, 풍성한 금발에는 흰머리가 하나도 없어서 언뜻 보기에는 새라의 언니라고 해도 속을 만큼 젊어 보인다. 십대에 결혼한 이후 아내로서 엄마로서 만족하며 살아온 자신감과 행복감 이 맑고 파란 눈에 언제나 부드럽게 웃음을 드리운다.

"다들 어디 갔어요?"

새라가 물었다.

"모두 거실에 모여서 얘기를 나누고 있단다. 네가 오면 '이 집은 만원입니다'란 쪽지를 문 앞에 써붙여야겠다며 웃고들 있었지."

몰리는 즐거운 듯 웃으면서 딸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앤은 이층에서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고, 스테파니와 제임스 부부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정원에서 법석을 떨고 있단다. 오히려 그들이 더 애들 같다니까. 그리고 재니는여기 있고."

그녀가 주방문을 열자 한쪽 손에 큰 접시를 들고 한쪽 손에는 스푼을 든 재니가 어머니와 동생을 향해 만면에 웃음을 띤다.

"이제 다 담았어요. 엄마는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단다."

"아이, 맛있는 냄새"

새라는 그리웠던 주방을 오랜만에 둘러보며 말했다.

"도울 일 없어, 언니?"

"됐어, 내 뛰어난 요리 솜씨를 그곳에서 지켜만 보라구. 이젠 거의 다 만들었지만"

여성적인 어머니의 체구를 이어받은 새라와는 대조적으로 언니인 재니는 머리 색깔도, 눈 색깔도, 그리고 키가 훤칠하게 큰 것까지도 아버지를 그대로 쏙 빼닮았다. 10년 전에 결혼하여 딸이 하나 있는데, 남편인 랠프는 지금 3개월 예정으로 인도에 가 있다.

그는 농담을 잘하며 고등학생처럼 쾌활한 성격의 인물이다. 그러한 랠프가 열대병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의학자고, 인도와 아프리카의 현지조사차 출장 갈 때 이외에는 연구실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일에 열중한다는 사실이 새라로서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정원에서 놀고 있는 애들을 모두 불러오너라, 새라."

캘스로프 부인이 채반으로 야채의 물기를 빼면서 말했다.

"손을 깨끗이 씻으라고 하고, 애들에게"

"제임스와 스테파니에게도 손을 씻으라고 해야겠죠?"

새라는 방긋 웃으면서 주방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식사야! 밥들 먹어요!"

그녀는 큰소리로 외쳤다.

아주 즐거운 하루였다. 법석을 떨면서 점심식사를 끝내자 이렇게 좋은 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가족들은 모두 바구니에 간식을 담아 가지고 전원이 피크닉을 나가기로 했다.

3월초, 상큼한 공기를 마시며 일행은 데이지 꽃과 미나리아 제비꽃이 만개한 풀밭 위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은 공 던지기를 하기도 했고 데이지로 목걸이를 만들면서 놀기도 했다. 남자들은 개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서 물총새를 관찰했다. 여자들은 정답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새라는 싱그런 풀냄새가 나는 풀밭 위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스르르 감고는 옆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알렉스와 별거를 시작한 이후 가족 간의 얘기에는 끼어들지 않기로 한 것이다. 즐거운 화제 후에 바람직하지 못한 이혼 얘기를 거론하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해서 피터를 화제에 올리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곤 했기 때문이다. 피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왠지 가족들은 그를 경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초여름의 풀밭에서 가족들과 이처럼 단란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이들은 들꽃의 이름을 알아맞히기도 하고 쐐기풀 가시에 찔려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집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풀밭 위에서는 다과회가 시작되었는데, 가까이 있는 나무 위에서는 뻐꾸기가 울어댔다. 그러자 그 소리에 화답하듯 멀리 있는 나무 위에서도 또 다른 뻐꾸기가 울어댄다. 도회지에서는 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이중창이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준다.

롬니마시가 황혼빛에 물들 무렵, 일행은 휴지를 줍는 등 피크닉의 뒤처리를 하고 귀로에 올랐다.

집에 돌아온 다음 그들은 잠시 쉬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캘스로프 부부가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하면서 건배를 했다. 건배에 쓰인 글라스는 오늘 이 결혼기념일 선물로 새라가 사가지고 온 것이었다.

건배가 끝나자 캘스로프 부부와 오늘밤 이곳에서 묵기로 한 새라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모두들 각기 자기 집을 향해 출발했다. 아이들은 지쳤으면서도 더 놀다 가겠다며 칭얼댔는데, 그들을 달래다 보니 새라도 까닭없이 울고 싶어졌다.

일요일 아침이 안개 속에서 차갑게 밝아왔다. 모처럼 늘어지게 늦잠을 잔 새라는 느지막한 아침식사를 든 다음 문득 자신의 오두막집 생각이 나서 부모에게 말했다.

"운동삼아서 산책 좀 하고 오겠어요."

부모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세 사람이 함께 나가자고 제안해 왔다.

"금실이 좋으신 건 여전하군요."

그녀는 부모를 놀려댔다.

"바다 쪽을 거닐고 싶어요."

"그 길은 어제 왔던 길하고 비슷할 텐데."

캘스로프 부인이 당황한 듯 다급하게 말했다.

"그보다는 우리 마을길을 걷자꾸나."

새라는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 그곳에 '팔 집'이라는 광고가 나붙었는지 알아보려구요."

무거운 한숨이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런 건 붙어 있지 않단다."

캘스로프 부인은 딸에게서 남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역시 말해 줘야겠어요."

"여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그건 안 돼."

"무슨 말씀이세요?"

새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제게 숨기시는 게 있죠? 알렉스와 관계있는 얘긴가요?"

딸의 질문과 시선을 외면하면서 존 캘스로프는 아내에게 속삭였다.

"역시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었나 봐."

"그러지 마세요."

새라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두 분이 알렉스와 짜고 나를 함정에 빠뜨릴 셈이죠?"

"우리가 그런 짓을 할 리 있니?"

몰리는 울상을 지으며 딸을 바라본다.

"하지만 불쌍한 알렉스는"

"불쌍한 알렉스라뇨?"

새라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알렉스의 어떤 점이 불쌍하다는 거예요?"

"하지만 너도 생각을 좀 해봐라. 철이 들 때까지 육친의 정이라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자라난 알렉스가 아니냐?"

"그렇지요."

새라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불쌍하고 가련해서 울고 싶어지는군요. 그처럼 눈물겨운 자기의 신상 얘기를 아버지와 어머니께 털어놓고, 마음 약한 두 분의 마음을 사로잡았군요.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죠? 말해 주세요."

존은 난처해하는 아내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괴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면 당신이 얘기해요."

캘스로프 부인은 마음을 결정했다는 듯 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집에는 지금 알렉스가 와 있단다."

귀에서 멍하는 소리가 났다.

"그럼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그곳에 갔더라면 싫더라도 그 사람과 만날 뻔했겠네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부모를 노려보았다.

존은 힘없이 눈길을 돌렸지만 몰리는 비난하는 딸의 시선을 받으면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미리 말해 준 게 아니냐. 가고 안 가고는 네 자유의사에 달렸지."

새라는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현하며 아버지를 빤히 쳐다봤다.

"아버지는 제게 그런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셨던가요? 그리고 은밀히 알렉스를 부른 사람도 아버지셨죠?"

"네가 이곳에 올 거라고 말해 줬을 뿐이다."

캘스로프 씨는 마음이 괴로운 듯 의자 위에 앉은 채 자세를 바꿨다.

"별거를 한 지 일 년이 다 됐다. 변호사 선임이든 재산분배 따위는 그대로 진행을 시키더라도 이제 당사자끼리 만나서 냉정하게 얘기해 볼 필요가 있잖니? 네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만, 4년 동안이나 사이좋게 지낸 너희가 아니냐."

"예상했던 대로군요."

새라는 눈썹을 곤두세우며 내뱉었다.

"제가 예상했던 대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사람에게 설득당한 거예요.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벌써 잊으셨어요? 나를 속이고 여비서를 싱가포르까지 데리고 갔어요. 불륜의 관계는 없었다고 하지만 그 말을 누가 믿겠어요? 그리고 후에는 그 여비서가 알렉스와 부정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아 결국 남편으로부터 이혼까지 당했구요."

"하지만, 알렉스는 비서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 말하고 있잖니?"

"사실이라는 증거가 그곳 호텔의 숙박기록에 남아 있어요. 두 사람이 묵었던 방이 이웃한 별개의 방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벽에 나 있는 문으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방이었더래요. 그리고 그 문이 열려 있는 것을 호텔 종업원이 목격했다고 하구요. 그 정도의 증거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그 비서의 남편이 말했었고, 그건 저도 동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얼굴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말미암아 벌개졌다.

이런 과거 얘기는 꺼내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알렉스가 지금에 와서 별거의 이유를 자기 편한 대로 각색하고 부모까지 조종한다면 새라로서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지금 나가면 오전 막차를 탈 수 있을 거예요."

새라는 문득 런던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의자에서 일어났다.

", 돌아가겠어요."

"얘야, 그렇게 서두르지 말아라."

그녀의 어머니는 울상이 되어 새라를 붙들었다.

"알렉스를 만나기 싫으면 안 보면 될 게 아니니?"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내가 가지 않으면 그쪽에서 쳐들어올 거예요. 저는 그 사람 얼굴을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새라는 충격과 분노에 몸을 떨면서 이층으로 달려올라가 짐을 챙겼다. 오랜만에 친정에서 맛보았던 느긋한 기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이었던 것은 부모특히 아버지 마음이 알렉스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는 듯이 보이는 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만은 자기편이 돼줄 거라고 믿었는데, 그게 자신만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을 줄이야

새라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짐을 챙겼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어머니는 아까부터 줄곧 울고 있었던 것 같다. 눈 가장자리가 빨갛게 부어 있고 어깨는 축 처져 있다.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본 새라는 북받쳐 오르는 마음으로 가서 끌어안았다.

"엄마를 괴롭혀서 죄송해요. 기회를 봐서 곧 또 올게요. 하지만 알렉스와 날 재결합시키겠다는 생각은 아예 마세요. 부탁이에요."

"너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돼서 그랬단다. 그리고"

여기까지 억지로 말한 캘스로프 부인은 그만 말을 잇지 못했다.

", 알고 있어요."

새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얼른 어머니의 볼에 키스했다.

"아이구, 나 좀 봐! 기차 놓치겠네, 빨리 가야지."

현관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의 뒤를 캘스로프 씨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따라갔다. 그의 눈썹은 한일자로 뻗어 있고 입은 꽉 다물어진 채였다.

어제는 그렇게도 날씨가 좋더니 오늘은 바다에서 습기 먹은 바람이 불어와 롬니마시에 짙은 안개를 드리우고 있다. 그리고 어제와는 대조적으로 자동차에 탄 아버지와 딸은 한번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역에 도착했다. 한적한 시골 간이역의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말없이 각각 먼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레일에 덜커덕 소리를 내면서 달려온 기차가 플랫폼에 서서히 정차했을 때에야 비로소 새라는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고는 작별 키스를 했다. 그러자 캘스로프 씨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새라. 너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어. 그것만은 알아 다오."

", 물론이에요."

그녀는 마음속으로 아버지의 말을 긍정하면서 열차에 올라탔다. 부모의 지극한 애정을 일시적이나마 의심했던 일이 새삼 후회스럽다. 두 분 모두 딸자식의 행복을 위해 마음을 써주셨는데이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어떤 것이 딸의 행복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었던 듯하다.

새라는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의 창문 밖으로몸을 내밀고 플랫폼에 서 있는 아버지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좌석에 앉아서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주말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손님들로 붐빌 시간은 아직 안 됐기 때문인지 좁은 객실의 손님이라고는 자기 말고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열차는 차츰 속력을 내면서 다음 정거장인 애슈퍼드를 향해 목초지대를 딜리고 있다. 안개는 점점 짙어지는 것 같다. 어쩌다가 나무와 농가의 지붕이 희미하게 모습을 나타낼 뿐, 밖은 온통 불투명한 백색의 세계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열차의 속도가 더해짐에 따라 몸도 많이 흔들린다. 창밖을 내다보던 새라는 정면을 향해 똑바로 앉아서 좌석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알렉스와 얼굴을 마주치기 직전에 용케도 피했다는 안도감이 이제야 느껴진다.

별거를 하게 된 이유 중 극히 일부만을 부모에게 털어놓았던 게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진상을 알게 되면 부모도 이번과 같은 알렉스의 계략에 가담할 리 만무하다. 알렉스의 이름만 들어도 혐오감을 느끼게 될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두번 다시 생각하기 싫은 과거를 자기 입으로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새라는 몸을 치떨며 눈을 떴다. 몸이 몹시 흔들린다. 바로 그 순간 이 세상에 종말이 닥쳐온 것 같은 무서운 충격음이 울림과 동시에 열차 전체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있는 힘을 다해서 좌석을 붙잡았지만 그녀는 공중으로 튀어오르며 문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요동하던 열차가 움직임을 멈추고 굉음도 가라앉아 무거운 정적이 열차를 감싸고 있을 때, 새라의 몸은 버려진 인형처럼 객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2

겨우 눈을 떴을 때 새라는 순간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두통이 심해 토하고 싶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누군가가 걱정스럽게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중년남자의 얼굴은 누군지 전연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입고 있는 수수한 색깔의 제복은 어쩐지 낯익은 옷차림 같은 생각이 든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그녀는 눈을 크게 떠보았다. 그러나 눈 위에 불투명한 막이 덮였는지 시계 전체가 희미하다.

"나는 어떻게 된 겁니까?"

가까스로 짜내는 듯한 목소리는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가냘프고 쉬어 있다.

"안심하세요, 괜찮으니까요."

대답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어쩐지 자신에 차 있는 느낌이 아니다.

새라는 다른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무엇을 알고 싶었는지 그만 잊고 말았다. 머리가 다시 쿡쿡 쑤셔 와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남자의 얼굴에서 깜짝 놀라는 표정을 발견한 것과 손가락 끝에 축축한 감촉이 전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떨리는 손가락을 들여다본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머, "

너무나도 지쳐 있어 눈꺼풀이 절로 덮여진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남자의 위로 하는 듯한 소리를 들으면서 새라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눈부신 빛을 얼굴에 받으며 새라는 깜박깜박 눈을 떴다.

그 빛은 흰 옷을 입은 의사가 비추고 있는 것이었다. 이 병원에서는 의사가 한밤중에 회진을 하는 걸까?병원?

", 왜 입원한 거죠? 중병인가요?"

불빛이 꺼지고 차디찬 탈지면 같은 것이 얼굴에 난 땀을 문지른다. 이마 위를 주시하면서 의사가 조용한 소리로 물었다.

"아픕니까?"

", 몹시 아파요."

새라는 의사 뒤에서 이쪽을 기웃거리는 황소의 머리를 보았다.

"아니, 어떻게 됐길래 병원 안에 소가 있나요?"

"? 어디에 소가 있단 말이오?"

"선생님 뒤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새라가 손가락질을 하자 소는 어찌된 일인지 사람의 말을 한다.

"들것 준비가 끝났습니다, 선생님."

"뭐야? 자네였던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라구."

의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하얀 붕대를 꺼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에 부드러운 가제를 대더니 재빠른 솜씨로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새라는 문득 자신이 열차 객실 바닥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 어디서 기차에 탔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이곳이 기차 속이라는 점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객실 밖 통로를 오가는 사람들이 열려 있는 문을 통해 의아스럽다는 눈초리로 기웃거리고 있는 것도 보인다.

"기차가 무슨 사고를 일으켰나요?"

"아무 기억도 나지 않습니까?"

"기억이 나지 않아서 묻는 게 아닙니까?"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새라는 정신을 차려 의사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중상을 입은 건가요?"

"손발의 타박상은 가벼우니까 치료할 것도 없어요."

의사는 위로하듯 말했다.

"머리는 좀 세게 부딪친 것 같군요. 전두부에 찢어진 상처가 있습니다. 이건 봉합할 필요가 있는데, 아주 조금만 꿰매면 됩니다.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미스"

"미세스예요."

그녀는 분명하게 말했다.

"미세스 스티븐슨이에요. 저어내 남편"

거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그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쩐지 불쾌한 생각이 들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남편에게 연락을 하고 싶겠지요. 그건 안심하세요. 그런 일은 병원에서 잘 해줄 겁니다."

새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알렉스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은 생각도

이때 돌연 몸이 들리더니 들것에 실리는 느낌이다. 열차 밖으로 나온 들것은 하얗게 뒤덮인 안개 속을 뚫고 구급차 속으로 옮겨졌다. 그뒤를 따라 간호원 한 명이 올라탄 후 문이 닫혔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새라는 머리맡에 앉아 있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부상자가 많은가요?"

"충격에 의한 빈혈과 가벼운 타박상을 입어서 응급치료를 받은 사람은 몇 명 있지만 병원으로 옮겨지는 부상자는 당신 한 사람뿐이에요."

간호원은 환자의 맥박을 재면서 쾌활하게 말했다.

"그럼 나만 특별대우인 셈이군요."

새라는 쌀쌀하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어떤 병원으로 옮겨가는 건가요?"

"윌스버러 병원입니다. 알고 계신가요?"

고개를 끄덕이자 이마에 심한 통증이 와서 새라는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자신이 기차를 타고 어디에 갈 생각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상처가 쑤셔 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슴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불안감의 이유도 뚜렷하지 않은 채 답답하기만 하다. 무언가 알렉스와 관계있는 일이라는 것만이 희미하게 의식됐다.

응급실로 옮겨진 다음 또 다른 새로운 간호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절차상의 질문을 해왔을 때도 머릿속에 구멍이 난 것 같은 기억의 공백상태는 메워지지 않았다. 기억이 상실되어 있는 부분은 사고를 당하기 직전의 단 몇 시간일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분명히 알고 있고, 알렉스의 가족과 친척에 관한 일도 모두 기억이 난다. 잊고 있는 부분의 기억도 사고의 충격에서 회복되면 틀림없이 되돌아오겠지.

그 기차에 탔던 이유는 아마 런던으로 쇼핑을 하러 가기 위해서였을 거다. 아니면 일손이 좀 한가해진 알렉스와 만나서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곧 기억이 되살아나겠지일부러 그런 증세까지 호소해서 의사를 놀라게 할 필요는 없다. 특별히 질문을 해오지 않는 한 이 문제는 내 가슴속에 묻어 두자새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름은?"

간호사가 첫 질문을 해왔다. 새라는 애써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새라 스티븐슨이에요."

"결혼은 했어요?"

"."

"남편 이름은?"

"알렉스 스티븐슨입니다."

"주소와 전화번호를 대주세요."

새라는 거리낌 없이 척척 대답했다.

"연령과 생년월일을 말해 주시겠습니까?"

이번에도 새라는 척척 대답했는데 간호사는 생년월일을 기입한 다음 연령란을 정정하며,

"자기 나이를 잘못 말하면 곤란합니다."

라고 한마디 내뱉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서 항의하는 새라의 말은 무시하고 곧 다른 질문을 던졌다. 용지의 난을 모두 기입하자, 이제 엑스레이를 찍으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새라는 휠체어에 옮겨졌고 모포로 몸이 싸여졌다.

"초여름인데 모포로 싸다니 이건 너무하지 않아요?"

그녀는 호소했다. 기억에 공백부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이 초여름이란 것쯤은 분명히 알고 있다.

"크게 충격을 받은 환자는 감기에 걸리는 일이 흔히 있답니다."

간호원이 설명해 준다.

그녀는 새라가 탄 휠체어를 밀고 방사선과로 갔다. 새라는 그곳에서 여러 각도로 머리 사진을 찍었다. 필름이 현상되고 그것을 담당의사가 검사하는 동안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그녀에게는 따끈한 홍차가 배달되었다.

30분쯤 지났을까, 의사는 새라를 진찰실로 불러들이더니 두개골과 뇌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새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상처의 봉합수술만 끝나면 댁으로 돌아가도 되겠습니다."

의사는 쾌활하게 말했다.

", 두통이나 현기증을 느낀다든지 시각에 이상이 나타날 때는 곧바로 병원에 와서 진찰을 받도록 하십시오."

"저어상흔이 나중까지 남겠죠?"

의사는 미소 지었다.

"머리털이 난 부분에서 이마 쪽으로 한 땀 정도는 상처가 남을는지 모르지만 그건 머리 모양을 바꿔서 쉽게 감출 수 있을 겁니다."

간호사가 수술용 기구를 담은 수레를 밀고 오자 새라는 조금 겁이 났다.

"수술을 받으려면 몹시 아프겠죠?"

"아니, 부인은 초등학생인가요?"

의사는 놀려댔다.

"안심하세요. 국부마취를 하기 때문에 통증은 전혀 느끼지 못할 겁니다."

수술 중에는 몸을 움직이지 말라는 주의를 받고 수술대 위에 올라간 새라는 공포심과 싸우면서 눈을 꼬옥 감고 긴장을 했다. 마취 덕택으로 통증은 조금도 느끼지 않은 채 수술은 끝이 났다. 안정을 취하고 있는데, 의사와 간호사가 낮은 소리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족에게는 연락을 했나?"

", 곧 남편 되시는 분이 이곳으로 올 겁니다."

새라는 그 말을 듣고 또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스가 와준다면 이제 안심해도 된다. 의식을 회복한 후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대하게 되면 마음의 위안을 받겠지. 기억의 공백부분에 대해서도 알렉스가 사정을 설명해 주면 틀림없이 되살아날 것이고.

봉합수술을 끝낸 의사는 간호사가 상처에 붕대를 고쳐 감는 동안 손을 씻으면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당분간 몸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갑작스런 동작이나 운동은 피하십시오. 특히 한 이틀 동안은 침대에서 안정하는 게 좋습니다. 다음 주에는 실을 뽑게 되니 귀가하기 전에 접수창구에서 진료예약을 해두시구요."

간호사가 따라오기는 했지만 새라는 이번에는 부축을 받지 않고 자기 발로 걸어서 대기실로 돌아왔다. 새로 준비한 홍차 컵과 몇 권의 잡지를 간호사가 갖다놓고 돌아간 다음, 그녀는 좁은 대기실에 혼자 남게 되었다. 홍차를 마시고 나서 잡지를 뒤적여 봤지만 작은 글씨를 읽을 생각은 나지 않았다. 빈 컵과 함께 잡지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그녀는 의자 등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통증은 가셨으나 상처 언저리가 차디차게 저려오는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새라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눈을 떴다.

"알렉스, 와주었군요!"

어찌나 반갑던지 환성을 지르려고 했지만 나오는 목소리는 빈 듯하고 힘이 없다. 서둘러 일어났던 것이 잘못이었던 듯, 새라는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몸의 중심을 잃었다. 그 순간 문 쪽에서 달려온 알렉스가 그녀의 몸을 얼른 잡아 주었다.

"새라괜찮아?"

알렉스의 목소리도 묘하게 쉰 목소리였고 왠지 모르게 망설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아내의 사고소식을 들었을 때 받은 충격이 상당히 컸던 것 같다.

새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양팔을 남편의 허리에 감고 자기 체중을 맡겼다. 겨우 마음이 놓이는 것 같다.

"괜찮아요, 이렇게 당신이 와주신 걸요."

든든한 어깨에 매달리며 속삭일 때, 남편은 여느 때와는 달리 긴장하는 것 같다. 남편의 체온이 전해져 오는 듯도 하고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니까요. 그보다 어서 집으로 데려다 줘요.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 주지만 나는 아무래도 병원이란 곳이 싫단 말예요."

"알았어, 가자구."

알렉스는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아내의 다갈색 머리에 볼을 가볍게 부볐다.

살며시 웃으며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순간 새라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기쁨이 가슴에서 용솟음쳤다. 서로 알게 되고 또 결혼한 지가 벌써 여러 해나 됐건만, 아침저녁으로 남편의 얼굴을 대할 때마다 아직도 이런 신선한 감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단단한 장신의 몸에서 발산되는 매력적인 우아함그러나 무엇보다도 알렉스의 강렬한 개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그의 눈일 것이다. 머리털 색깔과 같은 검은빛 동공을 금갈색 홍채가 둘러싸고 있는 모양은 높은 하늘에서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눈을 연상케 한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요. 둘이만 있고 싶단 말예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알렉스는 놀란 듯 또 한번 몸을 긴장시키더니 아무 말 없이 아내를 부축하고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구급차에 함께 실어 가지고 왔던 새라의 짐은 병원 접수창구에 보관돼 있었다. 알렉스가 영수증에 사인을 하는 동안, 새라는 건네받은 여행 가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 가방은 몇 해 전인가 분명히 자신이 산 것인데 지금까지 평상시 외출 때는 가지고 다닌 일이 없다. 그렇다면 런던에서 하루나 이틀쯤 묵을 계획이었단 말인가?

사인을 끌낸 알렉스는 현관 앞에 세워둔 은색 자동차에 아내를 태운 다음 여행 가방을 트렁크 속에 넣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자동차가 병원 정문을 지나 큰길로 미끄러져 나가자 새라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은 기분이다.

"아버지, 어머니에게도 사고소식을 알렸어요?"

그녀는 좌석 등에 깊이 파묻히면서 눈을 감고 물었다.

", 내가 전화를 걸었어."

알렉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시더군. 같이 가자고 하시는 걸 내가 억지로 말렸지. 여럿이 와봤자 당신만 피곤하게 만들 것 같아서"

자상한 어머니를 납득시키기까지는 알렉스도 어지간히 애를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눈을 감은 채 쓴웃음을 지었다.

", 네 바늘쯤 꿰맸다고 의사가 말했어요. 아직도 마취가 풀리지 않아서인지 이마 가장자리에 아무런 감각이 없어요. 어쩐지 내 얼굴 같지 않은 게 묘한 기분이 들어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는 걱정이 된다는 듯 말했다.

"의사 말에 의하면 이틀쯤 침대에서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다고 하더군."

", 그 말은 나도 들었어요."

남편에게 너무 걱정을 끼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새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직도 기억이 되돌아오지 않은 부분에 대해 털어놓고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마음 같아선 한시라도 빨리 묻고 싶지만 가기 싫은 병원으로 다시 끌려갈 상상을 하니 차라리 기억이 되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기억을 상실한 건 불과 며칠간이다. 그 며칠 사이에 인생을 크게 좌우할 만한 중대사건이 일어났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사건이 일어날 만한 징후는 조금도 없었다. 결혼생활은 행복했고 무사 평온한 매일매일이었던 것이다.

알렉스를 위해서 요리를 만들었고 그의 시중을 들었었다. 요트를 타고 바다에 나갈 때도, 롬니마시에서 드라이브를 할 때나 산책을 할 때도 언제나 두 사람이 함께 다녔다.

남편이 해외촬영으로 집을 비우게 될 때면 집안 정리와 정원 손질을 하는 사이사이에 친정으로 달려가서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읽고 싶었던 책을 모조리 읽어대는 등 나름대로 즐거운 생활을 했다. 물론 밤이 되면 알렉스에게서 국제전화가 걸려왔고, 침대에 들기 전에 남편에게 편지를 쓰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 중의 하나였다.

돌연 작은 기억의 단편이 새라의 머리를 스쳐가려고 한다. 그녀는 그것을 얼른 포착해서 머릿속의 스크린에 크게 비춰 봤다. 기억 속의 자신은 자기 집 서재 벽 옆에 세워 놓은 접는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집시처럼 머리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천장 가까운 쪽의 기둥에 페인트를 다시 칠하고 있는 중이다. 저곳을 칠한 것은 며칠 전쯤의 일일까? 서재 안의 가구를 바꿔 놓으려고 했었는데 그것은 끝까지 마무리 지었던가?

감았던 눈을 뜨고 도로의 전방을 바라보는 새라는 아직도 기억의 실마리를 더듬어 나가고 있었다. 녹색과 금색의 벽지를 서재에 바른 기억도 난다. 그것은 알렉스가 어딘지 멀리 가 있을 때의 일이다. 어디였을까? 로마? 아니면?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자동차는 속도를 약간 떨어뜨리며 마을길을 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집 저집의 정원에는 라일락과 석남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고, 광장에서는 많은 관중들의 박수와 환호 속에 크리켓 게임이 진행되고 있다. 모든 것이 예전부터 보아 온 낯익은 풍경들이다.

그런데도 무의식 저편에 뭔가가 잘못돼 있는 듯한 생각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 알렉스의 얼굴을 대하고 난 다음부터, 잊고 있었던 정체불명의 불안감이 또다시 밀려오고 있음을 그녀는 깨달았다.

"알렉스, 나 어쩐지 무서워요."

불안에 눌려서 중얼거린 새라는 그 순간 남편의 옆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이상의 걱정을 끼치는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신경을 쓸 만큼 심하지는 않지만기억이 나질 않아요. 사고를 당하기 며칠 전의 일들이"

알렉스의 한쪽 손이 핸들을 떠나 무릎 위에서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흔히 있는 일이야. 걱정할 것 없어."

그는 힘차게 말했다.

"큰 충격을 받았을 때 그 전후의 기억들이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건 마음이 상처입게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자기보호 본능이야. 충격이 가라앉게 되면 기억도 곧 되돌아올 거야."

갑자기 바로 눈앞의 커브 길에서 요란한 타이어 소리가 들려왔다. 웬 자동차가 맹렬한 속도로 나는 듯이 달려오고 있다.

알렉스는 재빨리 새라의 손을 놓고는 두 손으로 핸들을 돌려서 간발의 차로 충돌을 피했다. 그 무모한 차가 스쳐간 다음 그는 운전을 계속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미친놈이로군, 스피드광이야! 이쪽에서 피하지 않았더라면 정면충돌해서 큰 사고가 날 뻔했어."

새라는 식은땀을 훔쳐내며 좌석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위험을 면했다는 건 알았지만 이가 딱딱 맞부딪칠 정도로 떨리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놀랐지? 기분이 좀 나쁠 거야."

지금까지와는 다른 목소리로 걱정스럽다는 듯 알렉스가 묻는다.

"아뇨이젠 괜찮아요."

그녀는 억지웃음을 띠웠다.

"난 아주 겁쟁이가 되고 만 것 같아요. 그리고 어제 일도 기억 못하니 뇌세포의 노화가 시작된 것 같기도 하구요."

"나는 잊지 않고 기억했잖아?"

가벼운 말투에 어울리지 않게 묘하게도 쉰 것 같은 알렉스의 목소리를 듣고는 새라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세상 모든 걸 다 잊는다 해도 당신을 잊을 리 있겠어요?"

알렉스를 알기 이전의 19년간을 용케도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왔었다는 생각을 지금도 이따금 할 때가 있다. 그 날들은 아무런 불만 없이 행복하게 지내던 어린 시절이었고, 사춘기가 된 다음에는 남들처럼 몇 명의 남자 친구들과도 사귀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그 지방의 작은 신문사 기자로 거뜬히 취직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참 인생은 알렉스와 만난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까지의 새라 캘스로프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정의 소녀라는 껍질 속에서 가만히 잠자고 있던 번데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알렉스를 알고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완전한 여성으로 거듭 태어나 밝은 세계를 훨훨 날았던 것이다. 알렉스야말로 자신의 인생이며 우주 그 자체였다. 비록 자신의 이름까지 잊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생명이 남아 있는 한 그를 잊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새라는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그의 웃옷에 볼을 부비며 속삭였다.

"사랑하고 싶어요."

알렉스는 대답 대신 목을 돌려 아내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한 다음,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운전에 전념했다. 그의 어깨에 기댄 채 새라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자동차가 마을을 지나 해안도로로 나왔다는 것은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바닷바람의 한기를 맡고서야 알았다.

집 가까이 왔다는 안도감 때문에 꼬박꼬박 졸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동차가 조용히 멎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새라는 몸을 발딱 일으켰다. 그 순간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지만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제 내 집에 온 것이다. 앞뜰에 핀 라일락과 석남의 꽃향기가 진동하고, 머리 위에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꺼꺼 갈매기 소리가 들려온다.

알렉스가 차 앞을 돌아 조수석 문을 열러 왔다.

"방에까지 안아다 줄게. 오늘은 특별 서비스야."

그는 익살맞게 말하고는 아내를 번쩍 들어 그 단단한 팔로 안았다.

새라는 웃으면서 남편의 목덜미를 잡았다. 바하마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던 날 남편은 이렇게 집까지 안고 들어갔었다. 저 아래 보이는 바다에서 찬바람이 불어오고 목의 가지를 흔들어대던 늦가을 날이었다. 신혼여행의 2주일 동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꿈속처럼 황홀하게 지냈지만, 이렇게 안겨서 집안으로 들어갈 때는 어쩐지 불안했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신혼기분에서 깬 알렉스가 혹 자기에게, 그리고 결혼생활에 권태를 느끼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가슴 졸였던 것이다. 물론 그런 불안감은 4년 동안의 결혼생활 사이에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도 지금 이유없이 불안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새라는 남편의 목덜미를 더 세게 잡으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집에 들어가기는 이번이 두 번째로군요."

한 손으로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간 알렉스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내의 얼굴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 속에 달콤한 욕망의 빛이 번득이는 순간, 새라의 심장은 균형을 잃고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사랑의 기쁨을 알았던 당시처럼 아찔한 욕망으로 몸이 불처럼 뜨거워진다. 이것도 사고를 당한 후유증의 하나일까?

"지난번에 이처럼 안고 들어갈 땐 여기서 키스를 하는 영광이 있었는데"

조용히 속삭이며 내려오는 입술을 향해 새라는 재빨리 얼굴을 쳐들었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면서 녹을 듯 달콤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두 사람의 정열이 격렬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이내 얼굴을 쳐들었다.

꼭 껴안긴 채 계단을 오르면서 새라는 남편의 얼굴을 살며시 올려다보았다. 턱과 광대뼈 언저리에 평소에는 없었던 긴장감이 감돈다. 입 밖에는 내지 않지만 처음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그를 긴장시키는 것 같다. 그처럼 남편에게서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행복감이 가슴 가득히 퍼져 온다.

커다란 침대 한복판에 조용히 내려졌을 때 새라는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또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듯 종알거렸다.

"그렇게 무거웠어요?"

체력엔 자신있다는 그가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어리광 같지만 부탁을 해도 괜찮겠어요? 나이트가운 좀 갖다 줬으면"

알렉스는 그 순간 움찔하며 허리를 쭉 폈다. 하지만 왠지 그 이유는 말하지 않은 채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침실 벽에 붙어 있는 붙박이 옷장 앞에 가서 서랍을 열더니 옷가지를 꺼내기 시작했다.

새라는 침대 위에서 쾌활한 웃음을 던졌다.

"남자들은 옷 찾는 솜씨가 왜 저렇게 서투른지 모르겠어. 파자마나 나이트가운은 속옷과 같은 장소에 있어요. 제일 윗서랍을 열어봐요."

남편이 윗서랍을 여는 모습을 확인한 새라는 눈길을 떼고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의사의 주의를 지켰던 덕택에 상처의 통증은 가셨으나 단추를 끄르려고 하니 레몬 색 실크 블라우스에 방울방울 핏자국이 묻어 있는 게 아닌가? 소매에도 시커먼 것이 묻어 있다. 객차 바닥에 넘어졌을 때 팔꿈치로 바닥을 문지른 것 같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블라우스를 벗고 여기저기 더렵혀진 회색 스커트의 지퍼를 내렸다.

그제서야 알렉스가 돌아와서는 다행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면 되나?"

그가 내미는 얇은 나이트가운을 보고 새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어디서 났어요?"

새것 같은 순백색 나이트가운이다.

"이건 내게 아니에요."

"새라 거야. 지난 크리스마스 때 내가 사다 줬잖아."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해내려고 했지만 알렉스의 눈이 자신의 속옷차림의 모습을 찬찬히 관찰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당혹스러워져 생각을 멈췄다. 처음으로 부부의 인연을 맺던 첫날밤처럼 전신이 떨려 오고 남편을 요구하는 갈망이 이상하리만큼 신선하고 강력하게 엄습해 온다.

알렉스는 나이트가운을 침대 위에 놓고는 방바닥에 무릎을 꿇으면서 아내의 입을 달콤한 키스로 덮었다. 그의 손가락이 새하얀 어깨를 더듬다가 가장자리를 레이스로 장식한 얇은 속옷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그러나 잠시 후 새라는 몸을 빼더니 분위기에 걸맞지 않은 목소리로 깔깔대며 웃었다.

"달링, 안 됐지만 의사의 지시에는 따라야지요? 의사 선생님이 말했어요, 당분간은 운동을 삼가라고."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또 어깨로 숨을 쉬며 일어서는 알렉스를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반짝이는 녹색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맞아, 나도 의사에게서 들어 놓고는 그만 깜박 잊었었군 그래."

그는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빨리 나이트가운으로 갈아입고 누워. 나는 아래층에 내려가서 스크램블드 에그라도 만들어 가지고 올게. 마실 건 뜨거운 우유가 어떨까? 좀 먹은 다음에 일찍 자야지."

"누군가가 수면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일찍 잘 수 있겠죠."

새라는 흰 나이트가운을 펼치면서 놀려댔다. 속옷을 벗고 가운을 머리에 뒤집어쓰면서 문득 문 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아직도 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알렉스가 보인다.

"훔쳐보다니, 짓궂군요."

그녀는 눈을 흘기고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서는 문을 향해 손으로 키스를 마구 던졌다. 남편의 모습이 문에서 사라지고 계단을 두 계단씩 껑충껑충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어린애 같은 어른이라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으나,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알렉스가 선물한 나이트가운의 기억까지 없으니 아마 다른 부분도 꽤 많이 기억 속에서 사라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 기억들이 돌아오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일이 걸릴 것인가? 알렉스도 마음속으로 걱정을 많이 하는 듯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그는 심각하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나 태도가 언뜻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지만, 사실은 그의 연기임에 틀림없다는 것쯤은 4년 동안이나 함께 살아온 아내의 직감으로 알 수가 있다.

병원 대기실에 들어설 때부터 그는 이상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뭘 걱정하고 있었던 것일까? 엑스레이 검사결과에 대해 자기 혼자서만 의사에게서 무엇인가 이상이 있음을 들었던 걸까? 하지만 중대한 증세가 일어날 듯한 징후가 보였다면 그처럼 쉽게 퇴원시켰을 리가 만무하다. 도대체 알렉스는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3

누군가가 침대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새라는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머리가 띵하면서 어지러워 왔다.

"알렉스?"

잠에 취한 눈을 부비며 크게 떠보니 역시 알렉스가 누우려 하고 있다. 창에서 스며드는 달빛이 역광으로 비쳐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 마음 놓고 어서 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정말로 그러기를 원하는지 어쩐지는 알 수가 없다. 그의 손은 주저하는 듯하면서도 슬그머니 새라의 나이트가운 위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알렉스는 아까 손수 만들어 가지고 온 스크램블드에 그를 한 숟가락씩 떠먹여 주는 동안에도 마치 첫사랑을 앓는 사람처럼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한 후 4년 동안 그의 사랑을 의심해 본 일은 한 번도 없었으나, 그 사랑을 좀 더 다정다감하게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을 느낀 적은 있었다. 그런데 그 알렉스가 평소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던 주방에 갔을 뿐만 아니라 손수 식사를 떠먹여 주기까지 한 것이다. 이처럼 배려해 주는 남편의 깊은 사랑에 새라는 새삼스럽게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녀는 살며시 몸을 돌려 자기 등이 남편의 몸에 가까와지도록 움직였다. 따뜻한 손이 뻗어오더니 앞가슴 언저리를 부드럽게 문지른다.

"어서 자, 새라."

목덜미에 가벼운 키스를 하면서 알렉스가 속삭였다.

"푹 자라구."

그러나 한번 눈을 뜬 새라의 머릿속은 꿈나라를 가는 대신 잊어버린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 나이트가운이 지난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했으니, 그 무렵의 기억을 차례로 더듬으면 무엇인가 단서를 잡게 될지도 모른다.

작년 크리스마스 땐 외출하지 않고 이 집안에서 단둘이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다음날인 26일은 맑게 갠 날이었고 몹시 추웠다. 그날은 친정 부모의 점심식사 초대를 받아 산책삼아 걸어서 친정집에 갔었던 일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갈매기 두 마리가 물고기 한 마리를 서로 뺏으려고 다투는 장면을 보았지. 그 갈매기들은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허겁지겁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갔는데 우린 그걸 보고 허리를 잡으며 웃었어.

선물 꾸러미를 푼 것은 친정에서 돌아온 후였다. 알렉스에게 준 선물은 영화관계 서적 몇 권과 모던 재즈의 신곡 레코드 한 장이었던가? 그래, 분명 그것뿐이었어. 반대로 알렉스에게서는 정말 산더미 같은 선물을 받았었다. 생각해 보면 반 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때 받은 선물 꾸러미 하나하나를 기억해 낸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므로 이 나이트가운에 관한 한 오늘 당했던 사고와는 무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이 좀 가라앉자 새라는 남편의 조용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처럼 온몸으로 알렉스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있으면 정말 평화롭고 따스한 기분이 든다.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기가 아직도 없는 게 유감이지만

아기 얘기만 하면 왜 알렉스는 그렇게 화를 내는 걸까? 성인이 되기 전에 부모와 사별한 그이니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아기를 갖고 싶어할 텐데어린 시절의 어떤 체험이 그로 하여금 아기를 혐오하도록 만든 걸까? 하지만 그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런던에 있는 고아원에서 자라났다고 하는 얘기가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 지금까지 들어온 사실의 전부다. 그 이상의 것을 알고 싶어서 물으면, 그때마다 알렉스는 무섭게 화를 내곤 했던 것이다.

밤 바닷가에 밀려드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새라의 생각은 알렉스를 처음 만나던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 지역 독자들만 대상으로 발행되던 지방신문으로서는, 최근에 해변의 빈 집을 사들인 남자가 실은 신진 인기감독이란 사실은 놓칠 수 없는 일대 뉴스였다.

편집장은 곧 전화를 걸어서 회견을 요청했는데, 본론에 들어가기도 전에,

"들어본 일조차 없는 신문에는 난 용무가 없소."

라며 그 남자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편집장은 갓 입사한 풋내기 기자이자 유일한 여자였던 새라에게 예고 없이 특별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급적 유혹적인 드레스를 입고 추파를 던지며 상대방에게 접근하라는 조언까지 해주었다.

"그런 남자는 의외로 여자에게는 약한 법이다."

라는 게 편집장의 의견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편집장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던 게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만일 그가 시킨 대로 했더라면 틀림없이 문 밖에서 내쫓겼을 것이다. 그녀는 유혹적인 드레스 대신 새하얀 팬츠 슈트 정장을 입고 가서 조심조심 문을 두드렸다. 바람이 몹시 세게 불던 날이어서 애써 매만진 머리는 제멋대로 흩날렸다. 그때는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상기되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 풋내기 여기자를 보고 알렉스는 유쾌했는지 집안으로 안내했고, 음료수를 권하면서 묻지도 않은 말까지 거침없이 말해 주었다. 그 덕택에 새라는 멋진 인터뷰 기사를 써낼 수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헤어질 때는 다음날 식사에 초대까지 했다. 새라는 그만 기절할 정도였다.

그날을 출발점으로 두 사람은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첫눈에 알렉스의 매력에 사로잡힌 새라에게는 자신의 행운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가족과 친구들은 모두 화려한 여자관계로 소문을 퍼뜨리고 있던 33살의 영화감독이 무명의 l9살 아가씨와 진정한 교제를 할 리가 없다며 입을 모았다. 더구나 그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리라고는 새라 자신도, 그리고 주위 사람들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알렉스가 진심으로 결혼을 신청하고 있음을 이해한 순간 새라는 엉겁결에 승낙했다. 하지만 꿈속을 헤매는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서 혼자 있게 되자, 그의 진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도 명예도 모두 성취된 지금은 오직 자신의 혈육인 2세만을 갈망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게 그의 진의였을까?

당시 새라는 알렉스가 자신에게 청혼한 진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가족관계에 대해서 질문을 했으나, '살붙이는 한 사람도 없는 천애의 고아'라는 대답이었다.

세라는 그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가까운 가족은 없다 하더라도 같은 피를 나눈 먼 친척이라도 있을 게 아닌가. 그러나 그 점을 더 꼬치꼬치 캐묻는 건 그의 분노만 불러일으킬 뿐이란 점을 새라는 몇 차례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알렉스가 별 저항 없이 지껄이는 것은 17살 되던 해에 카메라맨의 조수가 되어 텔레비전 방송국에 채용된 이후의 인생뿐이었다.

25살 때 이미 한 프로그램의 프로듀서로서 높은 평가를 얻은 뒤 그는 극장영화 분야에 진출했다. 감독으로 데뷔한 첫 번째 작품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명성은 단시일 내에 높아지게 되었다. 이제 그는 어느 회사에도 묶이지 않은 자유계약 감독으로서 자기 마음에 드는 작품만을 골라서 극장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 수많은 명작과 성공작을 계속 내고 있는 것이다.

새라가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알렉스는 아기를 원하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결혼한 후 일 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는 동안 그녀는 차츰 초조해졌고, 기회있을 때마다 갖가지 형태로 아기에 관한 화제를 끄집어냈다. 사랑하는 남편의 아기를 낳아서 기르는 기쁨을 하루라도 빨리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결혼 초 알렉스는 '아직 이르다'며 웃음으로 얼버무렸으나, 얼마 지나니 아내가 '아기'라는 한 마디만 입 밖에 내도 얼굴빛을 바꾸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왜 그러는 걸까? 엄마가 되고파하는 바람은 날로 더 강해지는데

새라는 나직이 한숨을 내뱉으면서 베개 위에서 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자기 몸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이 가해지면서 귓가에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잠이 안 와? 상처가 아파?"

"아픈 정도는 아니지만"

새라는 모호한 대답을 하고 침대 속에서 기지개를 켰다. 최근에는 알렉스가 화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적당한 구실을 펴는 게 몸에 배다시피 한 느낌이 드는데, 이런 면에까지 신경을 쓰는 게 잘하는 짓일까? 종종 고개를 드는 의문이 머리를 어지럽히곤 한다. 남편이 좋아하는 색상과 디자인의 옷을 몸에 걸치고, 남편이 권하는 책을 읽고 모든 일의 판단도 하나부터 열까지 남편에게 맡겨 버리는 생활에 이렇다 할 불만을 느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과연 행복한 걸까?

"병원에서 받은 수면제가 있어. 먹겠다면 갖다 줄게."

알렉스가 말했다.

"필요 없어요. 아직은"

새라는 어둠 속에서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남편의 몸에 다시 다가갔다. 따뜻한 손바닥이 가슴 언저리를 부드럽게 문질러 온다.

"그렇게 손을 대주는 게 수면제보다 나아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 다음 알렉스의 손이 나이트가운의 자락을 걷어 올리더니 보드라운 허벅지를 쓰다듬는다.

", 어디에 가던 길이었나요?"

새라는 자신이 고민하던 바를 털어놓고 말았다.

"그 기차를 타고 어디에 가려 했던 거죠?"

"런던에. 하지만 기억을 되돌리려고 애를 쓰는 건 별로 좋지 않아요."

알렉스는 그녀의 등에 얼굴을 문질렀다.

"자아, 어서 자라구."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아요, 그 일이 자꾸 신경 쓰여서."

"그럼 잠이 들도록 해주지."

길쭉한 손가락이 갑자기 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새라의 몸은 일시에 흥분되어 짜릿한 경련이 온몸을 달아오르게 한다.

"안 돼요, 이러면"

거부의 뜻을 나타냈지만, 그녀의 두 손은 자기도 모르게 알렉스의 검은 머리카락을 힘껏 잡고 있었다.

알렉스는 아내의 몸을 똑바로 눕히고는 탐닉하듯 키스로 입술을 막았다. 이윽고 아쉬운 듯 떨어진 그의 입술은 그녀의 손목으로 옮겨졌다가, 어깨를 향해 하얀 팔을 서서히 더듬어 올라갔다. 이따금 폭풍과 같은 한숨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다. 고뇌의 신음소리 같은 나지막한 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용케도 독수공방을 견뎌냈어."

새라는 어둠 속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혼자서 어디 갔었어요?"

남편이 어디엔가 갔었던 일까지 잊었단 말인가?

"해외 로케이션? 언제 돌아왔어요?"

"얘기를 자꾸 하는 건 좋지 않대두."

알렉스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뭔가를 물으려는 새라의 입술을 정열적인 키스로 막았다.

그러나 기억이 조금씩 살아나려 하고 있는 한 그녀는 남편의 애무에 응할 수가 없었다.

"부탁이에요. 참아 줘요, 알렉스."

그녀는 남편의 입술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며 호소했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은 대체 어느 때부터인가요? 지금이 6월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의 일도 기억하구요하지만 봄철 부활절 때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미간을 찡그렸지만 금방 즐거운 추억이 떠오른 듯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요, 아몬드 초콜릿을 듬뿍 넣은 계란대형 은색 달걀을 당신에게서 받았었지요. 다음날 그걸 재니네 집에 가지고 갔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들이 다 먹어치웠죠. 그날은 로버트와 제임스도 가족을 데리고 언니 집에 왔었구요. 어머, 점점 생각이 나네요. 금년 부활절은 4월초였었죠. 그리고 당신이 해외 로케이션을 갔던 건 그후일 거예요."

알렉스는 새라의 얼굴을 진지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등을 보이며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초조하게 생각지 말라고 했잖아. 무리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야!"

큼직한 등 너머로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 속에서 새라는 억제하고 있는 남편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욕망이 최고조에 달했다가 불발로 끝난 것을 무척 안타까와하고 있는 듯하다. 결혼 초에도 침대 속에서 자기가 남편의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부끄러워서 망설일 때는 이따금 저렇게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알렉스는 여러 의미에서 아내를 완전히 자기 소유로 만들고 싶어 했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자기 한 사람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장기간 해외 로케이션에 나갈 때도 그는 새라가 집을 비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구촌 어디에 있든지 밤에는 반드시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날씨는 어떠냐, 정원에는 꽃이 피었느냐, 어떤 책을 읽느냐, 지금 어떤 레코드를 듣고 있느냐 등등. 로케이션 지역을 이동할 때마다 새라는 아름다운 풍경사진이 인쇄된 그림엽서를 받았고, 그녀 자신도 매일 밤 그날 있었던 일을 모두 편지에 적어 남편에게 보냈었다.

한편 새라는 일에 관한 한 알렉스의 생활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업무상 친하게 지내는 동료들을 소개받은 일도 거의 없었고, 런던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 찾아가 본 일조차 없었다. 물론 업무 이외의 일로 둘이 함께 외출한 적은 많았다. 바하마와 카나리아 제도에서 짧은 휴가를 즐긴 일도 있었다. 그러나 알렉스가 가장 행복해 보일 때는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바닷가의 집에서 부부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때였다. 그리고 그가 행복해하면 그것이 곧 새라에 있어서도 최상의 행복이었다.

"미안해요, 알렉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종알거리면서 남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부탁이에요, 화를 푸세요."

"나 화나지 않았어."

그는 부드럽게 말하면서 돌아누워 아내를 꼭 껴안았다.

", 이렇게 안아 줄게. 이제 안심하고 자요."

그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새라는 서서히 꿈나라로 들어갔다.

 

꿈과 현실이 뒤섞인 여러 가지 기억의 단편들이 소용돌이치는 머리를 흔들면서 새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만 더 있으면 잊혀진 기억의 덩어리를 찾아낼 듯한 기분도 든다. 이 소용돌이의 어딘가를 꽉 잡을 수만 있다면

갑자기 아래층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확 깨는 것을 느끼면서 서둘러 눈을 떠보니,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안에 남편의 모습은 없었다. 벌써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 같다. 그녀는 조심조심 일어나서 아버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리 해도 이것은 헛수고야, 알렉스. 위험하다는 걸 왜 모르나?"

평소리 아버지답지 않게 몹시 격분한 목소리다. 그 말에 대답하는 알렉스의 어조에서도 절박한 느낌이 울려왔는데, 말이 너무 빨라 알아들을 수가 없다. 평소에는 그토록 사이가 좋은 장인과 사위인데 도대체 무슨 일로 언쟁을 벌이고 있는 걸까? 더구나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이번에는 아버지가 또 뭐라고 떠드는데 목소리가 낮아서인지 "그래, 당치도 않아"라는 말과 "무분별도 분수가 있지."라는 말만이 겨우 들릴 뿐이다.

새라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옷장 앞에 가서 조금 열린 문 틈으로 손을 넣어 아래층에 입고 내려갈 가운을 찾았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은 웬일인지 알렉스의 옷가지뿐이다. 그녀는 놀라서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곳엔 자기 옷이라곤 없었다. 다른 칸도 모두 열어봤지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가 남자용 재킷과 바지, 와이셔츠뿐이다. 여자 옷은 하나도 걸려 있지 않다. 웬일일까? 옷가지를 옮겨 두었다 해도 일부러 침실 이외의 장소에 갖다 둘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때 아래층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자동차 엔진을 거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는 그대로 돌아가려나 보다. 날 만나보지도 않은 채 왜 그냥 가시는 걸까? 이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조용한 발자국 소리가 층계를 따라 올라왔다.

알렉스의 얼굴이 문 앞에 나타나는 순간 새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 내 옷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알면 가르쳐 줘요."

알렉스는 한순간 얼떨떨해하며 눈을 깜박이더니 곧 무서운 얼굴로 아내를 노려보았다.

"이틀 동안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의사가 말했어. 함부로 침대에서 떠나는 건 용서치 않을 거야."

그가 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새라를 번쩍 안아다 침대에 눕혔다.

"자아, 알겠지? 곧 아침식사를 가지고 올 테니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는 거야."

"아버지는 날 보러 오셨었죠? 그런데 왜 그냥 돌아가셨나요?"

새라는 누운 자세를 고쳐 주는 남편에게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 자고 있을 거라고 그랬어."

알렉스는 무척 바랜 진 바지 허리에 한쪽 손을 대고 한쪽 손으로는 검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침식사는 청어 구이가 어때?"

"과일이나 줘요. 다른 건 먹고 싶지 않아요. 그보다 저어내 옷을 어디다 두었을까요?"

그것만 알아내면 나머지 다른 기억도 모두 되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알렉스는 재빨리 문 쪽으로 걸어갔다.

"지금 새라에게 필요한 건 옷보다도 충분한 휴식과 영양이야. 아침식사를 과일로 때운다는 건 말도 안 돼. 당신이 뭐라든 나는 청어 구이를 갖고 올 거야."

그는 새라가 부르는 소리도 무시하고 달려가 버렸다. 때마침 전화 벨이 울렸다. 알렉스가 수화기를 들고 낮은 목소리로 응대하기 시작했다.

새라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옷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또다시 생각이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최근 알렉스와 싸움을 했던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자기 물건들을 객실로 쓰는 두 방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생활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어젯밤 그가 '독수공방' 운운한 중얼거림과 병원으로 찾아왔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한 태도도 설명이 될 수 있다.

그 순간 갑자기 뜻밖의 장면이 뇌리에 떠올라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신이 이 방에 산더미처럼 꺼내 놓은 옷가지를 여행 가방에 차곡차곡 담으려고 했었다. 그날은 하루종일 줄곧 울었던 것 같다. 짐을 꾸리는 손은 떨렸고, 그 위에 계속 눈물 방울이 떨어졌던 것 같기도 하고

그때 그 상황에 처했던 자기의 마음속을 열심히 기웃거려 보려고 했으나, 기억은 흐르는 물처럼 멀리 사라져 공백 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가고 만다. 그러나 많은 옷가지를 자기 손으로 꾸렸던 일이 있음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울면서 짐을 싸가지고 어디로 갈 작정이었을까? 그때 알렉스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병원 창구에서 되돌려 받은 짐은 작은 여행 가방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짐들은 그대로 기차에 실려 종점인 런던까지 갔단 말인가? 여행 가방에는 주소와 이름을 써붙인 표가 붙어 있으니 늦게라도 되찾을 수야 있겠지만

기억을 되살려 보려다가 그만 지쳐서 한숨을 내쉬었을 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에 쟁반을 받쳐 든 알렉스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은은하게 풍겨 오는 청어 구이 냄새에 새라는 갑자기 식욕을 느껴 일어나 앉았다.

알렉스는 쟁반을 그녀의 무릎 위에 놓고 등 뒤로 베개를 쌓아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하루종일 침대 속에 있어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갑갑증이 나요."

새라는 말하면서 남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현대문명의 상징과 같은 영화와 텔레비전 세계를 살아가는 알렉스가 어떻게 이토록 야성적인 매력을 계속 지닐 수 있는 걸까?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 때문에, 아니면 육친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고독하게 자라났기 때문에 이런 야성적인 용모를 지니게 된 걸까?

"쓸데없는 걱정은 집어치우고 식기 전에 어서 먹으라구."

알렉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가벼운 읽을거리를 보는 것쯤은 상관없겠죠?"

금방 즙을 낸 오렌지 주스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그녀는 애원 섞인 웃음을 남편에게 던졌다.

"괜찮을 거예요. 신문 좀 갖다 주시겠어요?"

"오늘은 마을에 갈 예정이 없고, 요즈음 신문은 사온 게 없어."

퉁명스럽게 대답한 후 타협하는 듯한 웃음을 띤다.

"그 대신 최근에 산 추리소설을 갖다 줄게. 그거라면 가볍게 즐기면서 읽을 수 있을 거야."

"그럼, 오는 길에 라디오라도 갖다 줘요."

새라는 문 쪽으로 걸어가는 남편의 등을 향해 달콤하게 속삭였다.

", 음악을 듣고 싶거든요."

"그럼 레코드를 가져올게. 시끄러운 잔소린 듣고 싶지 않겠지?"

대답을 남기고 알렉스는 계단을 내려갔다.

새라는 청어 구이를 말끔히 먹어치운 다음 커피도 한 잔 마시고는 모자라서 두 잔째를 포트에서 따랐다. 평소보다 커피를 연하게 탄 것은 강한 자극물이 좋지 않을 거라는 배려 때문이겠지. 결혼한 후 알렉스가 이처럼 세세한 데까지 신경을 써주는 것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면서 새라는 행복한 웃음을 입가에 지었다.

아래층에서 또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고, 알렉스가 바삐 수화기를 들러 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있으면서도 없다고 따돌릴 만큼 전화 받기를 싫어하는 그도 안 됐지만 당분간은 자신이 직접 전화를 받아야 할 거다.

아침식사를 끝낸 새라는 쟁반을 침대 발치 쪽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얼굴의 상처에 격렬한 통증이 일었다. 한참 동안 베개에 몸을 기댄 채 숨도 크게 못 쉬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긴장을 풀고 급격하게 몸을 움직인 데 대한 비상경고인 듯하다.

"어떻게 된 거야?"

극도의 불안감이 깃든 목소리가 문 쪽에서 날아왔다. 눈을 떠보니 휴대용 레코드플레이어를 가슴에 안은 알렉스가 문 앞에 얼어붙은 듯이 서 있다.

새라는 일부러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얌전하게 식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어요. 착한 아이죠?"

조금 전의 통증 때문에 아직도 현기증이 난다는 말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다.

알렉스는 안심했다는 듯 방안에 들어와서는 침대 옆에 놓인 테이블에 플레이어 세트를 장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아래층에 내려가더니 이번에는 레코드 한아름과 여러 권의 원고 뭉치가 들어 있는 파일을 들고 왔다. 예의 추리소설이라며 새라에게 책을 건네준 다음 창가의 의자 위에 파일을 내려놓았다.

"나도 이곳에서 일을 할까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방해라니! 이렇게 즐거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새라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지 않고, 심술궂게도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척하다가 알렉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글쎄요? 일단 해보시죠."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음악을 틀어 주시겠어요? 빌리 조엘의 레코드를 가지고 왔나요?"

알렉스는 새라가 부탁한 레코드를 튼 다음 창가로 다가가 의자에 앉더니 원고를 보기 시작했다. 하얀 카펫 위에 쭉 뻗은 긴 다리가 빌리 조엘의 경쾌한 곡에 맞춰 가볍게 리듬을 타고 있다. 그 카펫도, 그리고 그가 앉아 있는 핑크 색 벨벳 의자도 부모로부터 받은 결혼 축의금으로 새라가 산 거다.

알렉스는 주택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빈 집을 사서 이사한 후로 실내장식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었다. 새라가 결혼하여 이 집에 온 후 청소는 부지런히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공기가 내부에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곳을 가정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따뜻한 공간으로 바꾸기 위해 제일 먼저 침실의 인테리어부터 시작했었다. 가구를 사들이고 벽지를 사다가 도배를 새로 하고 커튼도 바꾸었다. 그리고 알렉스가 장기간의 로케이션을 떠날 때마다 조금씩 손을 봐서 2년여 만에 집안을 완전히 개조했던 것이다.

창가에 있는 알렉스는 언제나 그랬듯이 경이적인 속도로 원고를 읽어나간다. 유명 무명의 작가들의 시나리오 원고들이 산더미처럼 배달되기 때문에, 남보다 몇 배 빠른 속독력이 없으면 다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다 읽은 원고를 의자 밑에 내려놓고는 다음 원고를 읽기 시작했는데 그 작품에 어느 정도 흥미를 느낀 것 같다. 그가 그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 것을 보고 새라도 남편이 가져다 준 책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이윽고 줄거리 속에 폭 빠져들었다.

명탐정의 활약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책을 반쯤 읽었을 때 알렉스의 큰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원고 뭉치가 방바닥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오늘은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나요?"

", 별로."

그는 원고를 되는 대로 마구 집어서 파일 속에 쑤셔 넣는다. 그리고 침대 옆으로 와서는 레코드를 바꾸려 했다. 아침부터 여러 곡을 계속 들어온 새라가 좀 쉬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플레이어의 스위치를 껐다.

"점심에는 뭘 먹겠어?"

"샐러드 재료가 있나요?"

무심코 되물은 순간 새라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온몸이 오싹해지며 참담한 생각이 가슴을 찌른다. 기억의 공백부분에서 또 무엇인가가 떠오르려 하는 것 같다.

"어떻게 된 거야? 상처에 통증이 오나?"

걱정스러워 중얼대는 알렉스의 목소리에 떠오르려던 그 무엇인가는 금방 사라져 버렸고, 울고 싶을 정도로 슬픈 마음과 초조한 심경만이 가슴속에 남았다.

"아아뇨, 하지만 어쩐지무서워져요."

새라는 두 팔을 뻗어 남편에게 매달리며 속삭였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 이제 미쳐 버릴 것만 같아요."

알렉스는 아내를 껴안고 다갈색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이처럼 사랑해 주는 남편이 있잖아. 무서울 건 하나도 없다구."

그는 새라를 살며시 침대 위에 눕힌 후 불안감으로 싸늘하게 식은 그녀의 입술에 불 같은 정열의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 정열을 자신의 몸속에 빨아들이고 싶은 듯, 새라도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고 있는 한 아까와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힐 염려는 절대로 없겠지. 비록 어떤 기억이 되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무섭지는 않을 거야

과연 그럴까? 기억이 되돌아오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래도 그것이 불안의 원인인 것 같다. 모든 기억이 되돌아오는 순간, 무엇인가 무서운 사실이 드러날 듯한 불길한 예감이 가슴속에서 커져 가는 게 느껴진다. 지금은 공백밖에 보이지 않는 화면 뒷부분에 잊고 싶은 사실을 포함한 검은 탁류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기억이 되돌아옴과 동시에 탁류가 단숨에 댐을 넘어서 엄습해 올 것만 같다. 그래서 이 행복을, 이 평화를, 그리고 사랑하는 알렉스를 어디엔가로 실어 가는 게 아닐까? 지금은 이렇게 진한 사랑으로 맺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가 오면

새라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면서 입술을 떼고 남편의 목줄기에 달라붙으며 속삭였다.

"부탁이에요, 알렉스. 나를 혼자 있게 하지 말아요, 나를 두고 어디론가 떠나지 말아 줘요."

"절대 그럴 리 없어. 내가 그런 짓을 할 것 같아?"

아내의 불만이 전염이라도 된 듯 거친 목소리로 알렉스가 대답 했을 때 맹속력으로 다가오는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그는 깜짝 놀라며 머리를 들더니 귀를 곤두세웠다. 자동차의 속드가 떨어지면서 집 현관 근처에서 멎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분명히 이 집에 오는 자동차다. 새라는 어쩐지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림없이 아버지일 거예요. 어쩌면 어머니도 함께"

그녀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알렉스는 벌떡 일어나 급히 창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흘끗 창밖을 내려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에서 뛰어나갔다.

계단을 쾅쾅거리며 내려가는 요란한 소리를 들으면서 새라는 침대 위에 누운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렉스는 왜 저토록 안색이 변해서 아래로 달려간 걸까? 더구나 그저 단순히 놀라서 뛰어간 표정이 아니라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사람마냥 몹시 화가 나 있다. 부모가 딸의 문병 온 것을 보고 화를 내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생각해 보니 아까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도 분명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새라는 휘청거리는 다리를 끌고 창가로 가서 창틀에 몸을 기대어 앞뜰을 내다보았다. 현관 앞에 서 있는 차는 아버지가 아끼는 '귀부인'이 아니라 새하얀 스포츠카였다. 지금 막 운전석의 문이 열리면서 여자의 늘씬한 다리와 금발 머리가 밖으로 나오고 있다.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순간 그 여자가 누구인지 생각났다.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다. 머릿속의 댐이 무너지면서 갇혀 있던 시커먼 탁류가 굉음과 함께 엄습해 왔다.

 

4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강렬한 귀 울림 저쪽에서 분노가 뒤섞인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함부로 여기 오지 말라고 했지?"

새라는 몸이 기우뚱하며 뒤로 자빠질 것 같아서 옆에 있는 의자에 얼른 앉았다. 10분 전쯤까지 알렉스가 앉아 있던 벨벳 의자다.

"LJ가 보냈어요. 선생님께서 급히 이 시나리오를 읽어 주셨으면 좋겠다며 나를 보낸 거라구요. 이 작품이야말로 선생님께서 대망하시던 작품이래요."

냉랭한 목소리가 알렉스의 물음에 대답했다.

새라의 온몸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마들렌 벤틀리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도 왠지 식은땀을 흘리며 오한을 느꼈었다. 극도로 세련된 우아함, 도시적인 감각, 지나칠 만큼 강한 자신감과 자기주장. 모든 면에서 마들렌은 알렉스가 좋아하는 여성의 이미지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새라 자신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여자처럼 보였던 것이다.

다분히 그런 여자이리라는 건 만나기 전부터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만나기 몇 달 전에 마들렌이 알렉스의 새 비서로 채용된 이후, 전화로 몇 차례 통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다.

"알렉스 선생을 부탁해요. 바꿔 줄 수 있겠죠?"

버릇없고 방자한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그 이후 전화를 할 때마다 마들렌은 자기가 용건이 있는 사람은 알렉스 단 한 사람뿐이며, 말투조차 촌스럽고 젖비린내 나는 여자는 빨리 전화통에서 꺼지라는 식의 태도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오한은 어쩌면 그 후에 일어날 사태를 여자의 육감으로 재빨리 예지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고라면 우체통에 넣으면 될 게 아냐!"

알렉스가 화를 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은쟁반에 옥구슬 굴리는 요염한 마들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층에서 듣고 있던 새라는 이를 악물었다.

남편과 마들렌의 정사가 폭로되던 날까지 자신은 인간을 증오한다는 일을 전혀 모르고 살아왔었다. 어린 시절엔 행복한 가정과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파묻혀 자라났고, 알렉스를 알고부터는 그가 주는 행복감에 만족하며 평온한 결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이 겉치레뿐인 가짜였음을 알았을 때는 가슴을 에어내는 고통에 온몸이 휘청거렸다. 그토록 무서운 감정이 지금까지 어디에 감춰져 있었을까를 생각하고는 자신이 두려울 정도였다.

"LJ의 성격을 잘 아시면서 그러세요?"

마들렌은 코웃음을 쳤다.

"이 시나리오가 금요일에 도착했을 때, 그의 위대한 직감이 뭔가를 속삭였던가 봐요. 그리고 집에 가지고 가서 읽어보니 직감이 적중했다나요. 그래서 곧 교섭에 들어갈 건데, 사전에 우선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다는 거예요. 그 각본의 미끈한 맛을 화면에 생생하게 살릴 수 있는 감독은 선생님 말고는 없다고 하더군요."

"알았어. 그럼 그 훌륭한 작품이라는 걸 어서 이리 줘."

새라는 의자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억지로 참고 있었다. 창문이 약간 높아서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얘기소리만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놀랄 만큼 명확하게 들려온다. 그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무수한 화살이 몸에 와 박히는 듯한 아픔이 온몸을 저며 온다.

알렉스는 내가 기억의 일부를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적어도 내가 고백하기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태연한 태도로 '흔히 있는 일'이라는 식으로 가볍게 받아넘길 수가 있겠는가. 아마 좀 더 다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머리 회전이 빠른 알렉스니까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아내가 안도의 빛을 띠며 몸을 기대오는 순간 모든 것을 알아차렸던 거다. 그리고 뜻밖에 굴러들어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착해서 아내를 자기 뜻대로 조종하기 시작한 것이리라.

불과 며칠간의 기억만을 상실했던 걸로 착각한 자기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작년 크리스마스라고 생각한 것은 재작년의 크리스마스다. 올 봄의 부활제라고 생각했던 것도 실은 작년 봄의 일이고결국 작년 6월경부터 거의 1년간의 기억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알렉스는 무슨 짓을 했던가? '안달하는 건 좋지 못하다' '기억이 자연스럽게 되돌아오도록 기다리라'는 등 화제를 돌렸고, 태연한 표정으로 키스와 애무를

새라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으면서 가벼운 신음소리를 냈다. 저런 남자는 무서운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보다도 이 손으로 벌을 내리는 편이 훨씬 빠를는지도 모른다.

은방울을 흔들어대는 듯한 웃음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 어차피 살인으로 내 손을 더럽게 할 바에는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나 매한 가지다. 그렇다면 저 교활한 웃음소리의 주인공도 알렉스가 갈 길에 동행을 시켜 줘야지

"그런 표정을 LJ에게 보여주고 싶네요. 마음에 안 드시나 보죠?"

마들렌의 저 간드러진 목소리.

"이것 말고도 읽어야 할 원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오늘도 아침부터 내내 읽고 있었어. 이제 원고라면 진저리가 나."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짜증 섞인 알렉스의 목소리다. 아마 상대에게는 눈치 채이지 않도록 이층 창가를 흘끔흘끔 올려다보면서 상대방을 빨리 돌려보낼 궁리를 하고 있겠지.

아내의 기억을 회복시켜 주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마들렌의 모습을 한번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머리 좋은 알렉스가 모를 리 없다. 그처럼 교활한 머리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아내의 기억상실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십분 이용하려 드는 사람이다. 아내가 자기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 잘 알면서도 태연하게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고, 일이 잘 풀리면 그것을 기정사실화하여 이혼에 제동을 걸려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만약 마들렌이 알게 된다면

갑자기 새라는 숨을 죽였다. 이처럼 단순한 일을 어째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아내에게 애인의 모습을 보여 주기 싫은 것과 마찬가지로 별거중인 아내를 집안에 데려다 놓은 현장을 애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두뇌회전이 빠르다 해도 이런 궁지에서 탈출할 실마리를 찾아내기는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새라는 소리를 죽여 웃었다.

"음료수라도 한 잔 마시고 좀 쉬어 가라는 말씀을 하실 만도 한데"

종알대기 시작한 마들렌의 음성에 새라는 귀를 곤두세웠다.

"저는 수백 킬로를 쉬지 않고 달려왔다구요. 아침의 교통체증 속을 겨우 뚫고 출근했더니,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LJ가 원고를 떠맡겼단 말예요. 오늘 중으로 선생님께 꼭 전해 드리라구요."

"그렇다면 속달로 부쳤어도 될 것을"

그의 난처해하는 목소리가 대꾸한다.

"그보다는 제가 직접 전달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생각이 잘못이었던 것 갈군요. 왜 제가 와서는 안 될 일이라도 있나요?"

"맞아."

라고 새라는 알렉스 대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자문해 보았다. 나는 왜 이런 곳에 고양이처럼 숨어서 남의 대화나 엿듣고 있는 걸까? 숨지 않으면 안 될 잘못이라도 저질렀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단지 순간적으로 기억을 잃어 이중인격의 비열한 악한의 덫에 걸려들었을 뿐이다.

새라는 창틀을 붙잡고 가까스로 일어섰다. 알렉스는 앞뜰의 문 옆에서 현관으로 통하는 길을 가로막듯이 버티고 서 있어 등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들렌은 또렷이 보인다. 그녀의 전신을, 그녀의 교태스런 몸짓을 증오와 적의에 찬 눈으로 새라는 바라보았다. 금발 머리끝에 내리쬐는 햇살이 천사의 화관과 같은 둥근 빛의 고리를 지어 준다. 하지만 관을 쓰고 있는 인물은 천사와 정반대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여자다. 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은 변함없이 멋들어진 고급품 일색인 듯하다.

귓불과 목줄기에서는 진주가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고 실크 슈트 자락 밑으로는 길고 균형 잡힌 다리가 늘씬하게 뻗어 있다. 패션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데는 안성맞춤일지 몰라도 이 자연스런 풍경 속에서는 몹시 눈에 거슬린다.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으신 것 같군요?"

알렉스의 대답을 기다리다 지쳤다는 듯 마들렌이 말을 이었다. 무척 원망이 서린 불평인 듯한데, 그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양손을 벌리며 '환대'할 것으로 생각했기에 그 먼 길도 마다 않고 일부러 달려왔을 텐데 말이다. 그야 어쨌든 이제 이 따위 어릿광대놀이는 끝을 내야겠다. 새라는 당당하게 창문을 열고 초여름의 미풍 속으로 몸을 내밀었다.

마들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층을 올려다보는 것과 동시에 마치 등에 총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알렉스가 몸을 휘청거리며 돌아섰다.

진짜로 총을 쏘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새라는 생각했지만, 그런 속마음을 마들렌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은 계략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새라는 당장에라도 넋을 빼앗을 것 같은 함박웃음을 띠며, 사실은 쏴죽이고 싶은 남자를 향해 달콤한 콧소리까지 냈다.

"저어, 달링, 나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작정이세요?"

훈훈한 산들바람이 속옷을 걸치지 않은 어깻죽지에 불어와 큼직하게 팬 나이트가운의 앞가슴 부분을 펄럭이게 했는데, 그것은 계산했던 바였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두 사람의 얼굴은 하나같이 넋 나간 사람처럼 입을 벌린 채, 텔레비전의 정지화면처럼 동작을 멈추고 있었다. 그래도 아내가 이층에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던 알렉스는 좀 나은 편이었다. 마들렌은 유령의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표정,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그 유령이 맨 살갗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있다는 점에 몹시 당황하는 듯하다.

역전승이라고까지야 할 수 없지만 새라는 어느 정도 복수를 한 통쾌한 기분이었다. 알렉스의 깜짝 놀라는 표정도 참 가관이다.

한 남자를 둘러싸고 삼각관계가 벌어졌고, 그 관계에서 승리한 정부가 남자의 침실 창가에서 뜻하지도 않았던 여자를 목격한다. 더구나 그 여자는 싸움에서 패하여 집을 나갔어야 할 아내였다이런 극적인 상황도 세상에서 흔치 않은 일이니,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사용하면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를 죽이기 전에 알렉스에게 선물삼아 가르쳐 줘도 좋을 것 같다.

"어머!"

마들렌이 목 메는 듯한 소리를 냈다.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 같다.

"정말로 오래간만이군요!"

새라는 아무 것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는 듯이 마들렌을 무시하면서 알렉스를 향해

"빨리 올라오세요, 달링."

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창문에서 몸을 뗐다.

창 밑에서는 마들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알렉스를 추궁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두 분은 이혼한 게 아니었던가요? 내가 듣기로는"

"난 바빠!"

퉁명스런 목소리에 이어 알렉스의 발소리가 현관으로 다가오더니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그로부터 몇 초쯤 뒤에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맞먹을 정도의 자동차 문이 닫히는 굉음이 나더니 마들렌의 차가 멀리 사라져 갔다.

알렉스가 침실로 들어섰을 때, 새라는 침대 위에 엎어져서 어깨로 숨을 쉬며 문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의 집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지만, 지금은 숨이 막혀서 움직일 수조차 없고, 무엇보다도 그전에 알렉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에잇, 나쁜 놈!"

새라는 악물은 이 사이로 쥐어짜내듯이 소리쳤다.

"사기꾼, 비겁자!"

넘쳐 나오는 샴페인처럼 욕설이 마구 터져 나왔다.

알렉스는 문 앞에 선 채 꼼짝도 않고 있다.

"이런 비겁한 짓을 하다니, 그래도 인간이야?"

아무 대답이 없다. 처음부터 새라도 알렉스에게서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당신은 짐승보다도 더럽고 교활해!"

그녀는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해 남편의 벨트 근처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러댔다. 알렉스는 침대와의 거리를 충분히 유지한 채, 슬슬 옆걸음질로 방안에 들어섰다.

"이 악마! 거짓말쟁이! 파렴치한! 건달!"

새라의 분노는 그칠 줄을 모른다.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렇지 않아?"

알렉스가 침대 발치로 다가서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변명하자 새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구? 뻔뻔스럽기는!"

"생각해 봐."

그는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침대 끝에 앉았다. 시선은 새라의 얼굴에 붙박아 둔 채 있다.

"사고를 당해 그렇잖아도 충격을 받은 당신한테 내가 처음부터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새라는 이중으로 충격을 받았을 거야. 그러면 제정신을 잃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나는 우선 당신을 안심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던 거라구."

사태가 이쯤 되었는데도 태연한 말투로 핑계를 대는 그의 배짱과 좋은 머리에 비록 분노는 치밀어 올랐지만, 새라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상하게도 인도적 견지에서 배려를 했단 말이군요? 그런 식으로 나를유혹하려고 한 것도?"

남편에 대한 분노를 느낌과 동시에 이런 극한상황에서도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자신에 대해 화가 났다. 간발의 차로 알렉스의 독 이빨을 피하기는 했지만, 한 침대 속에 누워 하룻밤을 지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녀는 분노의 눈초리로 알렉스를 노려보았다.

"새라는 내가 일방적으로 유혹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침착하고 냉랭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새라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못된 인간아!"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극히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잖아. 난 그런 부부들이 당연히 하는 행동을 하려고 했을 뿐이고인간의 본능에 따라서 말야."

"본능? 인간의 본능? 발정한 들고양이의 본능이었겠지."

이를 악물고 내뱉은 자신의 말에 상대방이 얼른 눈을 감고 분노를 씹으려는 표정을 보고는 마음이 약간 누그러졌다. 튼튼한 방탄조끼를 두르고 있는 알렉스의 마음에도 역시 약점은 있는 것 같다.

"그야 어쨌거나 내가 기억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우리 부모님은 알고 계신 거예요?"

"물론이지."

알렉스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내가 취한 조치에 대해서도 흔쾌히 이해를 하셨구."

"어머, 또 거짓말!"

그녀는 분노를 겨우 참으면서 추궁했다.

"오늘 아침 아버지가 한 말이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해요. 그때는 아무 영문도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모든 게 짐작된단 말예요. 부모님께서 당신의 태도를 흔쾌히 이해했다니, 말도 안 돼! 웃기지 말아요, 아까는 우리 아버지를 큰소리로 몰아붙이구서는대체 뭐라고 거짓말을 해서 우리 아버지를 그냥 되돌아가시게 한 거죠?"

"나는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렸을 뿐이야. 당신이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너무나도 부드럽고 자연스런 어조였으므로 그 순간 새라는 알렉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저 그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핏기가 싹 가시며 종잇장처럼 하얘졌다.

"분명히 밝혀 두겠는데"

새라는 귀에 거슬릴 만큼 낮은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나는 당신을 증오하고 있어요. 이렇게 얼굴을 마주대고 있는 것조차 괴로울 정도로."

새라가 내뱉은 말에 다소 충격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단순한 분노 때문인지 알렉스의 금갈색 눈 중심의 검은 눈동자가 예리한 빛을 발했다. 거무튀튀하게 탄 얼굴이 일그러지고 입술은 한일자로 꽉 다물어졌다. 순종의 본보기와 같았던 아내로부터 이 정도로 적의에 찬 폭언을 들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말로는 아직도 너무나 온건하다고 새라는 생각했다. 유감스럽게도 알렉스에게 사랑을 느꼈던 시기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려서 세상물정을 모르던 시절의 일이다. 이 남자의 정체를 속속들이 알게 된 이상, 앞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간에 사랑이란 감정이 되살아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다소나마 알렉스에게 타격을 주었다는 승리감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도전적으로 턱을 내밀고 반격에 대비하고 있던 새라는 그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풀리고 금갈색 눈에 당당한 빛이 깃드는 것을 보는 순간 후회감에 맥이 빠지고 치가 떨려 왔다. 알렉스의 사전에 '패배'라는 단어는 실려 있지 않은 듯하다. 아무리 불리한 국면에 직면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교묘하게 역전시켜서 자신의 승리로 이끌고 만다. 지금까지 그와 정면으로 대결하여 이혼담판을 하지 않은 것도 실은 그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알렉스는 입술에 엷은 웃음까지 띠면서 반격을 개시했다.

"혐오감을 나타내는 방법치고는 정말 이상하게 나타내더군. 병원에서 처음 봤을 때의 첫마디 말은 그만두고라도 어젯밤 침대 속에서"

"그건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었어요!"

새라는 뼈아픈 기억을 더듬으며 소리쳤다. 그리고 능글맞게 웃는 알렉스의 얼굴을 보자 때묻은 빗자루라도 가져다가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쓸어버리고 싶어졌다.

"그 반대인지도 모르지, 달링."

일부러 내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로 그가 되받았다.

"기억을 상실했기 때문에 오히려 진실을 털어놓게 됐는지도 모를 일이란 말야. 그 진실이란 물론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일 테고, 새라는 다른 건 모두 다 잊더라도 나만은 잊을 수 없다고까지 말했잖아."

",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이로군."

새라는 히스테릭한 절규를 내뱉으며 종알거렸다.

"내 기억이 영원토록 되돌아오지 않았으면 했겠죠? 기억이 되살아나면 불리한 일만 생길 테니까. 그래서 그 따위 소릴 한 거죠?"

새라는 베개를 밀치며 몸을 일으켜 알렉스의 흉내를 냈다.

"무리하게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쓰지 마, 달링. 기억이 자연스럽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라구, 달링."

"사실 당신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돌아왔잖아."

알렉스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대답했다.

"기억이 되돌아온 건 당신 애인의 몰골을 봤기 때문이에요. 그 여자가 오늘 이곳에 오리라고는 당신도 미처 계산하지 못했었죠? 꼴 좋더군요."

알렉스는 즉시 미간을 모으며 소리쳤다.

"그 여자는 내 애인이 아니야!"

약 일 년 전, 새라가 남편의 배신을 처음으로 알았을 때 들었던 말과 꼭 같은 대사다. 비록 마들렌과의 정사현장을 들켰다 하더라도 그는 아마 같은 대사를 되풀이하며 변명했을 것이다.

새라는 의미심장한 냉소를 머금었다.

"미처 몰랐었군요, 기억상실증이 전염성 질병이라는 걸. 빨리 병원 의사한테 보고해야겠네요."

"맞아, 확실히 새라는 모르고 있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아."

알렉스의 목소리에는 분명 분노가 섞여 있었는데, 그것보다도 그의 눈에 나타난 이상한 빛이 새라의 등골에 가벼운 오한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당신이 가르쳐 줘야 할 건 단 한 가지도 없어요."

질세라 한마디 내뱉었지만 그녀는 곧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아니나다를까 알렉스의 얼굴에는 기분 나쁜 웃음이 떠올랐다.

"아니, 많이 있지, 새라."

그가 침대에서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는 새라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서며 베개에 등을 댔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만약 옆에 오면"

"옆에 오면 어쩌겠다는 거야?"

알렉스는 협박투의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곁으로 다가왔다.

"오지 말아요!"

새라는 비명을 질렀다.

"이 방에서 나가 달라구요! 나 지금부터 옷을 갈아입을 거예요. 그리고 곧 친정으로 전화를 걸어서 아버지한테 데리러 와달라고 할 거예요."

"옷을 갈아입다니 뭘로 갈아입겠다는 거야?"

"물론 내 옷"

그녀는 갑자기 말을 끊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없어어디 있어요? 내 옷을 어디다 감췄냔 말예요? 당신이 감췄죠?"

긍정하는 듯한 표정이 알렉스의 얼굴에 떠올랐다.

"옷 따위가 왜 필요해? 새라는 이 침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건데"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침대 끝에 앉았다. 몸을 움직이면 서로 닿을 만한 거리다.

"나는 새라를 적어도 이틀 동안은 절대 안정시키겠다고 병원 측과 약속을 했어. 무리하게 일어나서 걷거나 하면 당신의 머리 상처에 큰 부담이 돼. 기억상실증이 낫지 않을지도 모른다구. 그래도 괜찮아?"

"좋아요! 그러니 옷을 돌려 줘요."

알렉스는 또 기분 나쁘게 엷은 웃음을 띠며 새라의 얇은 나이트가운 가슴 부분을 의미심장하게 기웃거렸다. 병원에서 만난 이후 지금처럼 그가 얼굴과 몸매를 세밀히 뜯어볼 때마다, 또는 그의 손과 입술이 닿을 때마다 몸이 이상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을 일으키는 이유를 새라는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일 년간이나 부부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사실을 몸은 무의식중에도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서둘러 얼굴을 돌리고는 침대 위에 깔려 있던 시트를 턱까지 끌어올려 가슴과 어깨를 감쌌다.

알렉스는 재미있다는 듯 웃어댄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당신의 몸은 구석구석까지 수백 번이나 봐왔단 말야."

그가 몸을 일으키자 시트를 젖힐 거라고 새라는 생각했는데, 그는 웃음 띤 녹색 눈으로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어디 보기만 했었나? 이 손으로 더듬기도 하고 키스도 했었잖아?"

잔인할 만큼 달콤한 목소리다.

"그러니 아무리 몸을 감춘대도 소용없는 짓이야. 새라의 몸은 이제 완벽히 내 것이 돼버렸어. 나는 당신의 육체를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할 수 있고, 당신 자신도 그것을 기다리고 있단 말야. 그건 분명해."

"멋대로 지껄여 봐요."

그녀는 짐짓 여유 만만한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자신의 연기가 실패란 사실은 알렉스의 눈에 떠오른 조소만 봐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혼자 있게 하지 말아 달라고 나에게 애걸해 온 건 누구였지? 그 말을 한 지가 아직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불이 붙은 듯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것은 아직 기억이 되살아나기 전의 일이라고 설명해 봤자 옹색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머리와 마음은 모두 알렉스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데 육체만은 잠자는 욕망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 같다.

"나가 줘요, 내 방에서."

치욕감과 자기혐오에 채찍질을 당하면서 새라는 진지하게 말했다.

"여긴 우리들의 방이지."

알렉스는 재미있다는 듯 말을 받는다.

"그 증거로 어젯밤은 바로 이 침대에서 우리 둘이 함께 잤잖아. 그리고"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겠어요."

새라는 후닥닥 침대에서 내려섰다.

"우리 집 전화는 지금 불통이야."

분명하게 말하는 알렉스의 면전에서 그녀는 얼어붙은 사람처럼 우뚝 섰다.

"거짓말 말아요. 오늘 아침에 전화 벨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단 말예요."

"아침에 두 번 울렸었지?"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두 번째 통화가 있은 다음 전화국에 부탁을 했어, 이쪽에서 통지를 할 때까지 전화선을 끊어 달라구. 중환자가 자고 있는데 전화 벨 때문에 지장이 있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금방 납득을 하더군."

"거짓말! 난 믿을 수 없어요!"

새라는 자포자기하며 내뱉었으나 이미 마음속으로는 패배를 자인하고 있었다. 알렉스라면 그 정도 일은 얼마든지 꾸미고도 남을 사람이다.

"거짓말 같으면 가서 확인을 해봐."

그는 여유만만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더니 벽에 기대섰다.

새라는 넋 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렇게 얇은 가운만 걸치고 밖에 나가서 뭘 어쩌겠단 말인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을 거다. 사방 몇 킬로 안에는 집이라곤 한 채도 없으니 아무리 소리를 질러 봤자 들어 주는 건 하늘을 나는 갈매기들뿐이겠지. 지나가는 차에 도움을 청해 볼까? 하지만 주말도 아닌 평일 한낮에 일부러 먼 길인 구 도로로 돌아가는 자동차는 한 시간에 한 대가 있을 둥 말 둥이다.

새장 속에 갇혀서 외로움에 날개를 파닥이는 새그런 모습이 지금의 자기 모습과 겹쳐져서 머릿속을 맴돌자 새라는 갑자기 몸의 균형을 잃고 말았다.

 

5

알렉스가 창가에서 몸을 날려 달려와 아내의 몸을 받쳐 주려 했지만 새라는 두 손을 매몰스럽게 뿌리쳤다.

"손대지 말아요!"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빨리 침대로 돌아가."

그도 거친 목소리로 되받았다.

그의 어조에 반발해 되는 대로 소리친 게 큰 잘못이었다. 앞이 캄캄해지면서 현기증이 일어났고, 몸이 큰 원을 그리며 기우뚱하더니 순간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의 두 팔이 자기를 힘차게 껴안아 침대에 눕히는 게 느껴졌는데 새라는 이미 저항할 힘을 잃고 있었다.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눈을 감은 채 심한 구토증과 싸우는 게 고작이었다. 집 전체가 빠르게 회전하는 것 같은 무서운 감각이 점점 더 심해질 뿐이다.

"새라?"

날카로운 귀 울음에 섞여서 들려오는 알렉스의 목소리엔 꽤나 걱정이 담긴 듯하다. 하지만 정말로 아내를 염려한다면 기억상실증인 사람을 무인도 같은 장소에 가두어 둘 게 아니라 의사에게 부탁해 진찰을 받도록 했어야 하지 않을까?

"나가요."

눈을 감은 채 간신히 입을 움직여 봤지만 목소리가 남편에게 들렸는지 어쨌는지는 자신이 없다. 제트 엔진의 소음과 같은 귀 울음이 머릿속에 울려 퍼져서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갑자기 머리가 쳐들려지고 차디찬 컵이 입술에 닿았다.

"물이야, 어서 마셔."

알렉스의 말에 하는 수 없이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겨우 가라앉은 현기증이 도질까 봐 무서워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아내의 머리를 베개 위에 다시 눕히고 시트를 턱까지 끌어올렸다.

"잠시 동안 그렇게 하고 가만히 있어. 가급적이면 눈을 좀 붙이고 자는 게 좋을 거야."

귀울음이 조금 가라앉아서 목소리는 분명히 들려왔지만 새라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척하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처럼 마음이 산란해지고 기분이 나빠진 것은 과거를 기억해 낸 충격 때문일까? 아니면 두번 다시 보기 싫은 마들렌을 대하게 된 충격 때문일까? 아마도 이 두 가지를 나누어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들렌의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기억은 아직도 되돌아오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원고 심부름을 하러 온 것을 보면 마들렌은 아직도 알렉스의 비서로 근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또한 두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단적인 증거다. 만일 두 사람이 결백한 사이라면 그런 소동이 있은 후 마들렌이 지금까지 그 직장에 머물러 있을 리가 없다.

알렉스의 전 비서가 퇴직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새라는 진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포기하고 있었던 아기를 35살이 돼서야 가지게 된 로잘리가 그 일을 계기로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고 싶어 한 기분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퇴직한 후에도 맨체스터로 이사갈 때까지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 아기의 안부를 묻곤 했었다.

새라는 로잘리와 마찬가지로 후임 비서인 마들렌과도 부담 없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 기대는 마들렌에게서 걸려온 첫 번째 전화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적의와 혐오감이 쌓여 갈 뿐이었다.

마들렌에게는 여자 친구는 단 한 명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야심적이고 세찬데다가 우아하고 섹시한 마들렌은 오로지 남성취향의 여자라고밖에 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와 새라는 공통점이라곤 단 한 가지도 없어 보였다. 실제로는 알렉스를 사랑하고 있다는 치명적인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 점이 밝혀지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남편의 배신이 여지없이 드러나던 당시, 마들렌이 알렉스를 표적으로 삼은 데 대해서 새라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었다. 가슴을 에어내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 것은 알렉스도 마들렌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도 당연한 귀결처럼 생각된다. 요컨대 비슷한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다가 맺어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겉으로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은 밀림 속을 어슬렁거리는 육식동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맹수의 근성이 자신에게도 조금쯤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는지 모른다. 의심할 줄 모르는 착한 마음씨를 지니고 태어난데다가, 알렉스의 강인한 정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가 원하는 걸 그저 즐거운 기분으로 따르던 새라였다. 마들렌의 남편이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남편의 배신을 모르는 채 위장된 행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매트 벤틀리가 가지고 왔던 큰 봉투에는 그가 의뢰한 사립탐정이 작성해서 보낸 보고서류가 가득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이 밀회한 장소와 시간 일람표,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호텔에서 나오고 있는 사진, 두 사람이 한 방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호텔 종업원의 증언, 마들렌이 알렉스 앞으로 쓴 편지의 사본 등등. 마들렌은 그 편지에서 자기 남편이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고 애인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후일 벤틀리 부부의 이혼문제가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마들렌은 자신의 정사를 솔직히 시인하고 사정이 허락된다면 알렉스와 결혼하고 싶다는 공언까지 했었다. 물론 그 이혼 소송은 마들렌의 일방적인 과실이 인정되어 신속히 결말 지어졌었다.

매트가 해변에 있는 집으로 찾아온 것은 그가 이혼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가기 이전의 일이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청천벽력의 얘기를 듣는 순간 새라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가시면서 완전히 하얗게 질린 표정이 되었다.

그러한 새라를 바라보면서 그는 도전적으로 말했다.

"말해 드려야 할 의무감을 느꼈습니다. 주인양반께서 마들렌과 결혼할 것을 희망하고 있는 이상에는 빠르건 늦건간에 부인께서는 이혼을 당하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심히 안 된 일이기는 하지만."

최후의 한 마디는 새라의 눈에 나타난 고통의 빛을 보고, 그 역시 당혹해서 덧붙인 것이었다.

새라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의무감이라기보다는 알렉스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겠죠?"

핵심을 찔린 듯 매트는 얼굴이 빨개지며 본심을 털어놓았다.

"남의 아내와 불륜의 관계를 맺으면 그에 상당한 보응을 받게 되는 거고, 그게 또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어쩌연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는 알렉스가 아무 죄도 없는 순진한 마들렌을 유혹하여 부도덕한 길로 끌어들였다고 믿고 있었다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그 점만은 새라가 확신을 가지고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매트 벤틀리는 옷차림도 언행도 모두 세련된 느낌을 주는 매력적인 남자였지만, 근무하고 있는 제약회사의 제품을 팔기 위해 국내각지를 전전해야 하는 세일즈맨이었다. 한때는 마들렌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해서 결혼까지 했다고는 하지만 아내의 마음이 차츰 멀어져 가고 있음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명백하게 보일 정도였다. 상류사회의 화려한 생활을 보게 된 마들렌은 지난해의 신형차에도 싫증을 느끼는 자동차광처럼 남편을 폐기처분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매트와 마주앉아 있을 당시의 새라로서는 그처럼 조리에 맞는 추리를 할 만한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상대방이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혼자 큰소리를 내며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혼자 남게 되자 한 방울의 눈물 조각도 떨어지지 않았고, 울고 싶다는 마음마저 어느 새 사라지고 말았었다. 아마도 큰 충격이 마취제의 구실을 한 것이리라.

그 충격은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한편으로는 마치 서서히 번지는 독약처럼 새라의 마음을 조금씩 좀먹어 갔다. 사랑과 행복밖에 모르던 마음속에 의혹이 싹텄고, 그것은 절망으로, 증오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진짜 고통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의 일이다.

알렉스는 아내의 의혹 따윈 아예 무시하고 매트에게서 들은 얘기를 절반도 하기 전에 "억울한 누명이야!"라며 소리 질렀다.

"하지만 그 사람은 곧 법원에 이혼소송을 하겠대요."

새라는 억양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자신보다 훨씬 연상인 낯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소송 이유는 아내의 부정이구요, 당신과의 부정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억울하게 누명을 씌우려는 거래두!"

"상대는 남편 앞에서 솔직히 시인했다던데요."

모호한 표정을 지으면서 두어 번 눈을 깜박이는 남편을 보고는 그가 무엇인가 기묘하게 발뺌을 하려는 거라고 새라는 판단했다. 알렉스는 생활의 변화를 바라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업무에 지치면 바닷가의 조용한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충실한 아내 곁으로 돌아오고, 그 이외의 시간은 비서 겸 애인과 정사를 즐긴다어쩌면 자유롭게 살아가는 남성으로서는 이상적인 라이프 스타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렉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발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엉뚱한 말이었다만일 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나를 믿어 다오.

"만일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면?"

새라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반문했다.

"이 정도로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그래도 당신을 믿으란 말예요?"

", 그래.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믿음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달란 말이야."

"증명? 내가?"

북받쳐 오르는 분노로 새라의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지. 언제부터 주객이 전도됐죠?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 쪽은 나예요. 왜 내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억울한 누명이라는 것뿐이야."

그는 무표정하게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언하겠는데 난 그 누구하고도 그런 파렴치한 짓은 하지 않아. 믿건 안 믿건 그건 당신 자유겠지만, 만일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 이상의 질문을 해서 나를 책망하지 말아 달란 말이오."

"그게 다예요? 내게 들려 줄 수 있는 말이 그게 전부냔 말예요?"

새라는 마치 낯 모르는 타인과 얘기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부부생활의 일대위기에 직면하고 있는데, 알렉스는 다만 그 말 한 마디로 수습하려고 한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기치 못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4년 동안의 결혼생활이 이런 식의 반복이었다는 느낌도 든다. 절실한 얘기를 아무리 해도 알렉스는 상대해 주려고 하지 않았고 오로지 자기 의사만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자녀 문제만 해도 그랬다. 아기를 빨리 갖고 싶다고 몇 번씩이나 설득을 해봤지만 대답은 언제나 "안 돼"라는 한 마디뿐이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기능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의중을 떠본 결과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그는 아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아기가 없는 생활이 얼마나 쓸쓸한 건지 아내의 마음을 전연 알아주지 못하는 알렉스였다. 남편이 집을 비울 때는 고독을 씹으며 이를 악무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어차피 아기를 갖지 않을 바에는 알렉스가 장기간의 로케이션으로 집을 비우는 시간만이라도 시간제로 직장에 나가겠다는 말을 했을 때 역시 그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안 돼, 두번 다시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그런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알렉스가 이제 와서 또다른 요구를 해오고 있다. 남편의 외도에는 눈을 감고, 지금까지 해왔듯이 충실한 아내가 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야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당신의 결백을 증명해 보이라구요."

새라가 차갑게 말했다.

"마들렌과 부정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니까요."

"또 그 얘기를 문제 삼으려는 건가?"

알렉스가 소리쳤다.

"그 여자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고 당사자인 내가 얘기했잖아! 그 이상의 무슨 증거가 필요하단 말야?"

"그럼, 그 일은 벤틀리 씨가 꾸며낸 조작극이란 말인가요!"

알렉스는 검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아내를 노려보다가 돌연 홱 돌아서서는 방을 뛰쳐나갔다. 현관문이 부서지기라도 하듯 쾅 닫히는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가 알렉스의 대답이었다.

알렉스의 자동차가 맹렬한 속도를 내며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라는 멍청히 앉아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남편이 차를 타고 멀리 떠났다는 사실을 겨우 이해했을 때, 그녀는 이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리고 있는 여행가방을 모두 꺼내 놓고 옷가지를 챙긴 다음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를 가지고 와서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사정 얘기를 들은 부모는 깜짝 놀라며 한 번 더 알렉스와 얘기를 해보라는 등 필사적으로 설득해 왔지만 새라는 부모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결혼을 해서 런던에 살고 있는 학창시절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룻밤 묵게 해달라고 부탁하고는 그대로 런던 행 열차를 집어탔었다.

친구 페넬로프는 옛 친구가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는 말을 다 듣고는 이것저것 질문하는 대신 침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자. 로저가 경영하고 있는 회사에서 마침 시간제로 일할 여성을 구하는 모양이야. 적당한 주거를 찾을 때까지 우선 우리 집에 묵으면서 거기 나가면 되겠다."

그녀의 조언으로 새라는 미쳐 버리기 직전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페넬로프의 남편이 경영하는 광고대리점에서 시간제로 일을 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방 하나뿐인 아파트를 발견해 그곳으로 옮길 때쯤에는 카피라이터의 소질을 인정받게 되었다. 정식사원으로 채용된 건 그로부터 얼마 안 돼서였다.

일단 생활기반이 갖춰지자 새라는 그 즉시로 이혼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그런 법적 수속절차에라도 머리를 쓰지 않으면 업무 이외의 시간이 너무나도 괴로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려하고 활기에 찬 대도시 속에서 그녀는 항상 고독했다. 번화가에 밀려드는 인파가 싫었고, 자동차의 소음이 짜증스러웠으며, 배기가스로 오염된 공기도 싫었다. 이런 불모의 광야라고나 할 런던 거리가 다소나마 살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피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사귀게 된 계기는 회사의 홍보담당인 피터가 단기 캠페인 광고를 의뢰하기 위해 새라의 직장을 찾아온 거였다. 두 사람은 이상할이만큼 처음부터 마음이 통했다.

피터는 성격이 온후하여 착한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될 거라고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슨 일에든 새라의 의견을 요구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의견을 깨끗이 철회하며 타협할 줄도 알았다.

알렉스는 이 세상에 '타협'이라는 단어가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알렉스의 생각이 되살아날 때마다 새라는 소름끼치는 분노를 느껴야 했다. 다른 사람의 의사는 아예 처음부터 무시하고 덤벼드는 알렉스다. 그래서 그의 의견에 무조건 따라야 하고, 더구나 그것도 행복이라는 착각 속에서 굴욕적인 생활을 해야 했다. 두 번 다시 이런 생활 속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다그 해변의 집을 나설 때의 굳은 결심이었는데, 그런 마음은 피터를 두 번째 남편으로 정한 후에도 변함이 없었고, 앞으로도 지켜 나갈 생각이었다.

일 년 전의 기억과 함께 그 결심까지도 잊혀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잔혹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새라는 생각했다. 이제야 겨우 귀 울음이 사라지고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파도 사이를 날며 노는 갈매기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온다. 현기증도 진정된 것 같다. 두려움 속에서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다행히도 방안에는 알렉스가 없었다. 이 틈을 타서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다

이때 갑자기 어딘가 먼 곳에서 자동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에 용무가 있는 차일까? 다시는 현기증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새라는 살그머니 침대에서 빠져 나와 창문 아래쪽을 두리번거렸다. 구 도로를 따라 새빨간 우편물 배달차가 달려오고 있다. 저 자동차에는 오늘도 또 알렉스에게 오는 시나리오의 원고 뭉치가 실려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순간 새라는 마음을 결정했다. 주변에 신경을 쓰면서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옷장 앞으로 다가갔다. 일 년 전 이곳을 뛰쳐나갈 때 가지고 가지 못했던 옷가지들은 그후 어머니가 챙겨서 런던으로 보내 주었었다. 그러니 어젯밤 나이트가운을 갖다 달라고 했을 때 알렉스가 당황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가운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거라는 그의 말은 분명히 거짓이다. 마들렌이 묵을 때 입던 가운일까?

새라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옷장 안을 뒤적였다. 다행히 옷걸이에 운동복 한 벌이 걸려 있다. 남성용이니 몸에 큰 게 당연하지만 알몸이 환하게 내비치는 가운보다는 낫겠지.

얇은 나이트가운을 벗자마자 그녀는 힘껏 방 귀퉁이를 향해서 집어던졌다. 알렉스의 애인이 입던, 그래서 그 여자의 살갗이 닿았던 것을 지금까지 입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나고 소름이 끼친다. 생각 같아서는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갈기갈기 찢어서 내버리고 싶지만 시간이 없는 게 한스럽다.

재빨리 운동복으로 갈아입었으나 너무 크고 길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바지를 웃옷으로 가리고는 벨트를 졸라맸다. 대문 앞까지 우편물을 받으러 나간 알렉스가 배달원과 더비 경마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더비는 매년 6월 첫주 수요일에 열리는 경기니까 오늘은 그 전날아니 전전날인 월요일이다.

"그 말에는 걸지 않는 게 좋을 걸, ."

알렉스가 큰소리로 말했다.

"눈 뜨고 도둑맞는 격이야. 그 말은 6등으로 들어오기도 힘들 거라니까."

"농담하지 마세요, 스티븐슨 씨. 두고 보세요. 금년 경기에서는 내가 l등을 할 겁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다른 말들은 모두 발목이 부러졌다던가?"

알렉스가 웃으면서 하는 말을 새라는 층계 위에서 듣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려 있어서 두 사람의 대화는 놀랄 만큼 분명히 들려온다. 가급적 천천히 얘기해요, 배달부 아저씨.

마음속으로 빌면서 새라는 발꿈치를 들고 미끄러지듯 살금살금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언의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배달원이 반론을 제기했다.

"전문가들의 경마 안내책자를 한 권이라도 읽어보셨습니까? 그 어느 책에나 금년에는 제가 말씀드린"

계단을 내려간 새라는 재빨리 현관 홀을 지나 주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 뒤에서 다시 알렉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까까지와는 달리 어지간히 기분이 좋아졌나 보다. 아내를 이층에 감쪽같이 감금해 둔 자신의 수단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새라는 이를 악물면서 맨발로 뒤뜰로 나섰다. 보트같이 큰 알렉스의 운동화를 끌고 가기보다는 오히려 맨발로 가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어제까지 걸치고 있던 옷과 구두는 도대체 어디다 감추었을까?

활짝 핀 라일락과 금잔화 사이를 지나 정원 밖에 도착한 새라는 나지막한 돌담을 뛰어넘었다. 만일 여기서 발을 헛디뎌 머리를 부딪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또 현기증과 구토증이 일어날 거고, 그렇게 되면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알렉스는 아마 점심식사를 담은 쟁반을 들고 침실 문을 열 때까지는 극적인 탈출사건을 모르고 있겠지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는 편이 낫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길고 빠른 걸음에 붙잡히고 말 게 틀림없다.

그러나 넘은 돌담 옆을 떠나기에 앞서 새라는 발길을 멈추고 지난날의 '내 집'을 뒤돌아보았다. 낡고 두터운 흰 벽 위에서 햇빛을 받은 슬레이트 지붕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원래는 어부의 작업장 겸 주택으로 지어진 집인데 튼튼한 지붕과 두꺼운 벽 덕택으로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에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었다. 집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그리웠던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듯한 안타까움이 가슴을 저며 온다. 어쨌든 여기서 지낸 4년간의 하루하루가 행복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새라는 모질게 마음을 먹고 뒤돌아섰다. 이름 모를 나무의 가시에 맨발을 찔리면서 길을 따라 덤불 속을 더듬어 얼마를 달렸다. 때마침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숲속에 숨어 기웃거려 보니 달려오는 차는 아까 집에 왔던 그 빨간 우편 배달차였다. 새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도로로 뛰어나와서는 조깅을 하는 척했다. 그리고 손을 크게 흔들어 차를 세웠다. 자동차가 가까이 와서 멎었다. 운전석의 창문이 열리고 배달원이 수상쩍다는 얼굴을 내민다.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왔소?"

이 지역 담당이 된 지 얼마 안 되는 듯, 전에는 보지 못하던 얼굴이다. 새라는 서둘러 차에 다가가며 새빨간 문을 잡고 헐떡이며 말했다.

"길을 돌아가게 될지 모르지만, 화이트애버스 마을까지만 태워다 줘요."

상대방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그녀는 살짝 웃으며 눈을 예쁘게 흘겼다.

"마을 입구까지만 가면 돼요. 부탁합니다."

배달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쓰고 있던 모자챙을 추켜올렸다.

"너무 먼 곳까지 달려서 지친 모양이죠? 하는 수 없이 태워 주기는 하겠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이 차는 공무용 차거든요."

이 지방 사투리를 진하게 쓰는 마음씨 좋게 생긴 청년은 차를 몰면서도 계속 얘기를 그치지 않았다.

"아니, 그럼 캘스로프 씨 댁 아가씨란 말예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선량하고 친절하신 분들이지요."

마을 입구에서 차를 내려 잠시 걷고 있는데 앞에서 아버지 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조수석에는 어머니도 함께 타고 있다. 새라가 우뚝 서서 손을 흔들자 운전석에 앉았던 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차가 급정거했다.

먼저 어머니가 굴러 떨어지듯 차에서 내려 달려왔다.

"새라! 괜찮니? 지금 데리러 가는 길인데어머, 맨발이잖아! 그리고 너 뭘 입고 있는 거냐?"

새라의 대답이 미처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존 캘스로프가 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자아, 어서 올라타라. 집으로 가야지."

"해변의 집에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

쉰 목소리로 호소하는 딸의 얼굴을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 알고 있어."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뒷좌석에 올라탄 새라는 안도와 피로로 온몸의 힘이 쭉 빠짐을 느꼈다. 땀이 비오듯 해서 살갗에 운동복이 착 달라붙어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조수석에 올라탄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묻자 아버지는 평소와는 달리 퉁명스런 말투로 아내를 윽박질렀다.

"잠시 그대로 내버려 둬. 그애는 지금 지쳐 있어요."

"나도 알아요."

몰리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운전석의 남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할 아이가 왜 이런 곳을 헤매고 다녀야 하는 건지 원"

"얘기는 나중에 하자니까."

존은 한 마디 엄하게 내뱉고는 시동을 걸었다. 몰리는 안타까와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시트에 몸을 기댔다.

자동차가 집에 도착하자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린 새라는 급히 다가온 아버지의 튼튼한 팔에 의지해 가까스로 걸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달려가서 현관문을 열었다.

아버지가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몸 상태가 나쁜 것 갈구나."

"많이요. 마음도 그리고 몸도."

키가 큰 아버지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울음이 복받쳐 올라온다. 그러나 억지로 참았다. 데리러 온 것을 보니 부모도 알렉스의 조작극을 간파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는다. 아버지가 알렉스 편이 돼버린 느낌을 받았을 때의 충격이 조금 가시는 듯하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따랐던 새라는 지금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이해와 위로를 갈망하고 있었다.

"마을 의사에게 왕진을 부탁해야 할 것 같구나."

아버지가 독백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그보다도 윌스버러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상처를 진찰한 의사가 어떤 이상을 느끼거나 하면 곧 찾아오라고 했거든요. 어쩌면 나 뇌진탕을 일으킨 게 아닌가 싶어요."

엑스레이는 정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억상실과 구토증, 그리고 현기증 등의 증세가 나타나는 이유는 뇌진탕 외에는 없을 것 같다. 아니면 더 무거운 손상을 받은 걸까? 불안감이 가슴을 파고든다.

새라는 아버지에게 몸을 의지하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리는 순간 집 앞의 마을길을 맹속력으로 달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자동차가 집 정면에서 멈춘 순간 그녀의 몸은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알렉스예요!"

새라는 애원하는 얼굴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분노의 빛이 역력했다.

"너는 이층에 올라가 있어라. 알렉스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

 

6

갑자기 계단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한 딸을 보고 몰리는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안 돼! 새라. 천천히, 천천히 올라가라니까"

새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보다 그 뒤쪽 현관에서 달려오는 알렉스의 발소리에 더 신경이 쓰였다. 빨리 올라가서 숨지 않으면 아버지를 밀치고 계단을 올라올 알렉스에게 붙잡힐지도 모른다. 가까스로 이층에 올라왔다. 방에 들어선 새라는 얼른 문을 잠갔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에게 쫓겨서 자기 방으로 도망 오면 어머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렇게 문을 잠그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머니와 함께 들어와 남편인 알렉스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다니

"왜 그러는 거냐?"

캘스로프 부인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딸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가벼운 귀울음이 다시 시작되자 새라는 얼른 침대 끝에 가서 앉았다. 잠시 안정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지 않으면 현기증과 구토증이 다시 일어날 것만 같다. 아래층에서는 아버지와 알렉스가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무슨 말인가는 들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왜 두 사람이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니?"

어머니가 얼른 문손잡이에 손을 댔다.

"안 돼요! 열지 말아요!"

새라가 급히 손을 잡자 몰리는 울상이 되어 침대 옆으로 가며 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됐길래 왜 이 야단들이냐? 왜 나한테는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 거니?"

"그럼 엄마는?"

새라는 한숨을 쉬며 쓴웃음을 짓고는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30대가 지나면서부터는 나이를 먹을 줄 모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젊어 보이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작은 체구의 어머니다. 산들바람에도 날아갈 듯한 체구와는 달리 그 내면은 아주 현실적이고, 자기가 느낀 의문점이나 불안감은 철두철미하게 규명해내는 성격이다.

새라는 얼굴과 체격뿐만 아니라 성격까지도 어머니를 닮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라면 꿈이나 환상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인생을 보내고 있을 게 틀림없다.

"네가 그렇게 중상을 입었다는 것조차도 아버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단다."

몰리는 섭섭하다는 듯 불평을 늘어놓는다.

"런던으로 돌아가던 도중 열차사고를 당했지만 큰 부상은 아니었고, 그후 알렉스가 데려갔다고 하더라. 그래서"

어머니는 기침을 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어쨌든 하루 이틀 동안은 안정하라고 했다며? 그런데 왜 그런 옷을 걸치고 길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니? 그 꼴이라니마치 피에로 같구나."

그리고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피식피식 웃는다.

"정말 그렇군요."

새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기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멍한 귓소리는 가라앉은 것 같다. 곧 일어서서 알렉스의 운동복을 벗어던지고는 옆에 걸려 있던 핑크 색 가운을 알몸에 걸친 다음 허리띠를 힘껏 동여맸다.

"그걸 입으니까 좀 봐줄 만하구나."

침대 끝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마음이 놓인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리 와서 앉거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차근차근 말해 보려무나."

새라는 한숨을 내쉬면서 어머니 옆에 앉았다. 그리고 사정을 처음부터 설명해 나갔다.

잠시 기억을 상실했었다는 말을 듣자, 어머니는 예상했던 대로 몹시 놀라며 화를 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데려가다니, 그건 알렉스가 잘못한 거다."

어머니는 분해하며 말했지만 새라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것뿐 아니라 알렉스가 나쁜 인간이라는 건 벌써부터 알고 있는 터였다.

"곧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야겠다. 머리에 입은 부상을 가볍게 생각하다가는 큰일나는 수가 있어."

", 알고 있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새라는 아래층 쪽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큰소리는 여전히 들려오는데 어느 쪽이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네가 기억을 잃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알렉스는 의사에게 데려가지 않았었단 말이냐? 정말로 딱한 사람이군."

"그렇게 하는 편이 자기에게는 편할 테니까 그랬겠죠 뭐."

새라는 비웃듯이 말하며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너도 마찬가지다, 그런 위험한 증세를 왜 의사 앞에서는 숨겼니?"

"특별히 위험한 증세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그저 며칠 정도만 기억이 나지 않는 줄로 알았으니까요. 설마 일 년 이상의 공백이 있었을 줄이야"

낮은 목소리로 변명한 새라는 얼굴을 쳐들고 벽 위의 한 점만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다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단 말예요."

"그랬다면 너한테 가르쳐 주는 게 마땅했는데"

어머니는 곤혹스럽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이 세상에는 원래 악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믿으며 수십 년을 살아온 어머니에게 알렉스와 같은 사악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해 달라는 건 무리다.

"맞아요."

새라는 차가운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고의적으로 기피했던 거예요. 그가 얼마나 악질인지 이제 엄마도 짐작이 가시죠?"

몰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렉스는 악질이 아니야.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넌 알렉스가 불쌍하지도 않냐?"

"엄마!"

그녀는 기가 막히는 나머지 소리를 크게 질러댔다.

"내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엄마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는 사태가 얼마나 중대한지 잘 모르고 있었을 거다. 너와 마찬가지로이 기회에 너와의 사이를 좋은 방향으로 끌어가려고 했을 거야. 그 기대감에 온통 신경을 쏟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됐을 거고"

생각에 잠기면서 독백처럼 중얼대는 어머니의 얼굴을 본 새라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벌써부터 구실을 만들어 가지고 알렉스의 잘못을 용서해 주려 하고 있다니그런데 어머니는 더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했다.

"알렉스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 거란다."

"어머! 사랑의 표현방법치고는 별 희한한 방법도 다 있네요."

새라가 쌀쌀하게 내뱉었다.

"알렉스는 자기감정을 말이나 태도로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러요."

어머니는 마침내 알렉스의 변호를 하기 시작했다.

"4년 동안이나 부부생활을 해왔으면서도 그걸 몰랐니? 아이는 부모의 사랑에 싸여서 자라는 동안에 감정의 표현방법을 배우는 법이란다. 그런데 혈육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남들 틈바구니에서 거칠게 자라난 알렉스잖아. 그래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필사적으로 지키기 위해 감정을 절대로 노출시키지 않는 방법만을 배웠던 거야. 알겠니?"

"그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새라의 가슴에 이상한 통증이 지나간다. 부부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신상에 관한 얘기를 알렉스에게서는 단 한 마디도 들은 적이 없다. 물어보려고 하면 가차없이 윽박지르기만 하던 남편이었다. 그는 어느 경우에도 자신이 허약하다는 점을 아내에게는 보여 주려 하지 않았고, 오로지 강인하고 믿음직스런 남편으로 군림하려고만 했었다. 그는 아내의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자신이 아내에게 소유당하는 것은 단호히 거부했던 것이다.

"그에게서 그런 말을 직접 들었던 건 아니다. 그 사람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달라서 그 사람의 행동에서 풍겨 나오는 느낌만으로도 짐작할 수가 있단다."

새라는 살짝 웃음을 지었다.

"풍겨 나오지 않는 것까지도 어떻게 아실 수는 없나요?"

이때 쿵쿵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와 딸은 똑같이 일어섰다.

"나다, 새라야."

부드러운 아버지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어서 열어라. 알렉스는 돌아갔다."

어머니가 종종걸음으로 문을 열러 갔다.

새라는 눈을 감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안도와 기쁨이 뒤섞인 긴 호흡이었다. 엉엉 울고 싶어지는 것은 몸이 쇠약해진 탓일 거다.

아버지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어떠냐, 기분은 좀?"

", 곧 좋아질 거예요."

새라가 힘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어쩌면 자신에게 들려 주고 싶은 말인지도 모른다. 머리의 상처가 낫게 되면 자신이 무서운 덫에서 용케도 도망쳐 나온 행운을 무엇보다도 기쁘게 생각할 것이다. 마들렌의 출현으로 기억이 되돌아온 '돌발사고'가 없었더라면 알렉스는 틀림없이 아내의 몸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을 거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에 기억이 되돌아왔을 경우를 생각하니 또 구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끝까지 가지는 않았다 해도 그에게 안겨서 키스를 당하고, 몸이 닿을 때마다 용솟음치던 욕망을 생각하니 자기혐오로 가슴이 뜨끔거린다. 알렉스에 대한 욕망 따위는 다 죽은 걸로 생각했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욕망은 잠을 자고 있는 채 생명을 지속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잠자고 있던 욕망은 알렉스를 만나는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고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라는 말에 깜짝 놀라며 새라는 아버지의 얼굴에 주의를 돌렸다. 아버지의 암갈색 눈빛이 뚫어지게 자신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다.

"역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는 게 현명하겠다. 이번에는 절대 감추지 말고 의사에게 털어놓아야 한다. 알겠니?"

새라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증세를 하찮게 여겼던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이 새삼 한심하게 생각된다.

"그런데, 뭘 입고 가야 하죠?"

가운 하나만 걸친 채 차를 탈 수는 없지 않은가.

"내 여행가방과 옷은 모두 알렉스가 감췄는데 돌려 줄 기미가 없던가요?"

캘스로프 씨는 난처하다는 듯 손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거기에 대해선 아무 말도 없던걸."

"내 옷을 빌려 주랴?"

어머니가 옆에서 나섰다.

"내 방에 가서 아무 거나 마음에 드는 걸 고르렴."

어머니의 방으로 가서 옷장 안을 기웃거렸다.

이것이 어떻겠느냐며 즉각 내미는 꽃무늬 원피스를 보고 새라는 자기도 모르게 투정을 했다.

"이걸 내가?"

"그렇구나, 네게는 어울리지 않겠지."

어머니는 입을 삐죽거리며 시인했다.

"그럼 저 데님 슈츠를 입을래?"

꺼내 놓은 올리브 색깔의 상의와 바지는 새라가 권해서 어머니가 산 슈트인데 한번도 입어보지 않은 채 옷장 속 깊숙이 두었던 것 같다.

새라는 그것을 기꺼이 빌어 가지고 침실로 돌아와서는 얼른 갈아입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먼저 현관 홀로 나가서 무슨 말인가를 열심히 나누다가 이층에서 내려오는 딸의 발소리를 듣고는 하던 얘기를 딱 멈췄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한 채 부자연스럽게 웃고는 계단을 올려다본다.

"잘 어울리는구나."

아버지가 먼저 말했다.

"세련된 옷인데 왜 너의 엄마는 입지 않았을까?"

"입었어요, 딱 한 번"

어머니는 뾰로통해 가지고 대답했다.

"내가 입었더니 당신이 놀렸잖아요? '뭐야 그건그런 걸 왜 입어?' 하고요."

캘스로프 씨는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랬던가? 어쨌든 새라에게는 썩 잘 어울리는 옷이야."

그는 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현관 앞에 세워 둔 차로 데리고 가서는 뒷좌석에 태웠다.

현관 단속을 끝낸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차에 올라타려는데 집안에서 전화 벨 소리가 들려왔다.

"받을 필요 없어요. 틀림없이 알렉스일 거예요."

새라는 미간을 찡그리며 투덜댔지만 아버지는 뒤를 돌아보며 머리를 가로젓는다.

"그의 차는 아직도 롬니마시를 달리고 있을 거야. 전화를 걸 리 없어."

"그럼, 누굴까요? 내가 갔다 오죠."

어머니는 서둘러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새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시트에 몸을 기댔다. 눈부신 오후의 태양을 받아 반짝이는 정원수와 꽃이 눈에 들어온다. 정원 한구석에 서 있는 높은 나무 위에 몇 마리의 새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아다니고 있다. 그 나무 밑둥에는 어머니가 기르는 고양이가 군침을 흘리며 나뭇가지 위를 노려보고 있지만, 그 위에 올라가 봤자 언제나 그랬듯이 새들로부터 망신만 당하고 후회할 게 뻔하다. 모든 것이 가슴이 찡할 만큼 그리운 광경들이다.

어머니가 문을 다시 잠그고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뒷좌석을 향해 말했다.

"국제전화였다. 피터에게서 걸려온 거야. 네가 사고를 당했다고 말했더니 굉장히 걱정하는 눈치더라"

"그럼 왜 나를 바꿔 주지 않았어요?"

새라는 기댔던 몸을 얼른 일으키면서 불평을 했다.

"저쪽도 몹시 바쁜 것 같아서저녁때 다시 전화를 걸겠다고 했으니 그때 자세한 얘기를 하려무나."

"그러겠어요. 그때는 꼭 바꿔 줘요."

새라는 퉁명스럽게 말하고 다시 시트에 몸을 묻었다. 어머니가 하는 말은 어느 정도 그럴 듯하게 들려왔다. 별다른 뜻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딸과 피터가 통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게 분명하다. 매사에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어머니는 일단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사위가 다른 남자로 바뀌는 걸 싫어하고 있는 거다. 그만큼 알렉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피터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알려 주러 오는 수고쯤은 아끼지 않았으리라.

해변의 집을 뛰쳐나온 바로 뒤부터 새라는 온 가족들로부터 설득공작의 압력을 받았었다. 가족 모두의 눈에는 원만한 부부생활을 지속해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당사자인 새라 자신도 막연한 불만과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꼈을지언정 알렉스의 아내인 것을 불행하다거나 후회스럽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이 4년간을 지냈으니 그렇게들 상상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오빠도 언니도 모두가 똑같은 말들을 했다이 세상에 완전한 인간이란 한 사람도 없다. 누구든 결점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며 과오도 범할 수 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눈 감고 용서해 줘라. 그 정도의 관용심도 없으면 결혼생활을 원만하게 해나갈 수는 없는 법이다. 알렉스에게 돌아가서 단둘이 마주앉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나가는 거다. 먼 훗날 그렇게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할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새라의 귀에는 모두가 실없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이해해 주지 않는 가족들이 너무나 야속하고 섭섭해서 몹시 분하기도 하고 화도 났다. 가족들은 둘을 적당히 재결합시켜서 '세계적 유명인'의 장인이 되고 처남이 되고 처형이 계속 되고 싶어 하는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한 가족들로부터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결국 도망치듯 런던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그 이후 새라는 영원히 알렉스와의 인연을 끊을 생각이었는데 뻔뻔스럽게도 알렉스는 자진해서 캘스로프 집안사람들에게 사정을 그대로 털어놓았던 것 같다. 얼마나 사실과는 거리가 먼 말들을 늘어놓았던지 가족들은 모두 그를 동정하게 되었다. 단 한번의 실수를 저지르고 그토록 후회하는 남편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아내로서 좀 지나친 게 아니냐며 오히려 새라를 나무랐다. 그리고 그 음란하고 교활한 여비서의 함정에서 빨리 남편을 구해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가족들은 모든 죄를 마들렌에게 뒤집어씌웠다. 당사자인 새라보다 마들렌을 더 미워했다.

그러나 당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뭘 알아 이해한단 말인가. 가족들은 알렉스와 살아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행복을 가장하며 은근히 배신하는 자와 한 방에서 지낸 일도 없고, 불타는 질투의 괴로움을 맛보지도 않았으니까.

새라는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다. 입술을 깨물며 서둘러 창밖으로 주의를 돌렸다. 도로 양쪽의 롬니마시는 어느덧 저녁놀에 물들어 있다.

병원에 도착해 진찰을 받았다. 전에 진찰했던 바로 그 의사였다.

"아니, 어떻게 된 겁니까? 어디에 이상이 생겼나요?"

의사는 환자의 얼굴을 금방 알아보고 물었다. 새라가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그는 연필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듣고 있었다. 일 년간의 기억을 상실했었다는 말을 듣자 난색을 표명했다.

"그런 중요한 일을 왜 진작 말하지 않았나요? 그때 진찰할 때 말해 줬어야지요. 하지만 환자들은 이따금 그런 과오를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어떻습니까? 기억은 되돌아왔나요?"

새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기억이 되돌아온 직후에 일어났던 귓소리, 현기증, 구토증 등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때의 증세에 대하여 다시 한번 자세한 질문을 한 다음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엑스레이 결과에도 이상이 없었고, 방금 들은 얘기를 종합해 보면 아마도 일시적인 증상일 거로 생각됩니다만, 만일을 위해 입원을 해서 검사를 받도록 하시죠. 그저 2, 3일 정도면 다 될 것 같습니다만"

"나처럼 머리를 다친 경우에는 기억상실이 되는 게 일반적인가요?"

"일반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원래 기억상실이란 것은 정신적 요인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니까요. 당신의 경우도 머리를 다친 그 부상 자체보다 사고를 당했을 때의 공포라든가 충격에서 일어난 증세일 거로 생각됩니다. 어쨌든 자세한 것은 검사를 해보기로 합시다."

간호사를 따라 위층 병동으로 올라가기 전에 새라는 부모와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피터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의사 선생님의 말투로 보아, 아무리 길더라도 사흘 안에는 퇴원할 것 같으니까요. 그러니 출장기간을 일부러 단축해서 귀국하거나 하지 말라고요. 꼭 부탁해요."

어머니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오늘 면회시간은 끝난 것 같으니 우리는 이대로 돌아가겠다. 혹 필요한 게 있거든 말하렴. 내일 갖다 줄 테니"

"그렇군요, 아무 거나 읽을 걸 좀 가져오시겠어요? 그리고 헤드폰 라디오하고여행가방 안에 있어요. 내게서 가져간 짐을 돌려 달라고 알렉스에게 말하세요."

"돌아가는 길로 곧 전화하마."

어머니는 알렉스에 대해 또 한 번 관심을 보임으로써 새라를 화나게 만들었다.

"알렉스도 지금쯤은 어지간히 걱정하고 궁금해 할 거다."

"엄만 그 사람 얘기만 나오면 왜 그렇게 열을 올리시는 거죠?"

"너는 인정머리도 없니?"

캘스로프 부인은 성을 내며 말했다.

"병원에서 네 사고소식을 전해 왔을 때 알렉스의 마음이 어땠는지 너는 짐작도 못하니?"

"모르겠는데요. 나는 남의 기분을 판단할 때는 현실의 행동을 보고 판단해요, 엄마만큼 머리가 좋지 못하니까요."

어머니가 얼굴을 붉히며 딸의 말에 반박하려고 할 때 간호사가 대기실 문을 노크하고 병실이 정해졌다고 말했다.

새라는 부모에게 적당히 키스를 하고는 간호사를 따라 병실로 향했다.

다음날부터 이틀간에 걸쳐 새라는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외과 이외에 내과와 정신과 전문의의 진찰도 받았다. 이런 경우에 두통이라든가 시각장애 증후가 나타나면 뭔가 중대한 증세와 연관된다며 그 점에 관한 특별한 검사와 진찰이 행해졌는데, 그런 증세가 나타날 만한 조짐은 전혀 없었다.

상처도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그래서 새라는 검사받는 이외의 시간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한가하게 보냈다. 자신이 생각해도 놀랄 만큼 충분한 수면도 취했다. 일요일부터 월요일에 걸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몸도 마음도 꽤나 지쳤던 듯하다.

목요일 오전에는 퇴원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차를 타고 화이트애버스 마을로 향했다. 롬니마시는 엷은 안개에 싸여 있고, 안개 너머로 아스라이 보이는 오렌지 색 꽃 모양의 태양이 녹색 대지에 부드러운 빛을 던져 주고 있다.

머리에 감은 붕대는 퇴원하기 직전 마지막 진찰 때 풀어 버렸고, 지금은 상처를 두툼한 헤어밴드 비슷한 신축성 붕대 한 겹으로 고정시키고 있다.

"용감한 용사 같구나."

익숙한 솜씨로 핸들을 잡고 커브를 돈 아버지가 조수석을 힐끗 보며 웃었다.

"환자라기보담은 해적 같다."

"그럼 어디선가 앵무새를 빌어서 어깨 위에 올려놔야겠네요."

새라는 상냥하게 웃었다. 안개를 뚫고 도버 해협을 건너는 뱃고동 소리가 들려온다.

", 어저께 네가 부탁한 전화는 집에 오는 길로 즉시 걸었다."

"고마와요, 아버지. 직장 일을 어제서야 생각해 내다니 나도 정말 멍청인가 봐요. 조스아니, 제롬 씨가 화를 많이 내죠?"

"아냐, 걱정을 태산같이 해주더라. 네가 이유 없이 무단결근할 사람이 아니라며 아마 큰 사건이 일어났을 거라고 짐작했다는 거야. 그래서 마침 우리 집에 와보려던 참이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고 그러더라."

"다음 주 수요일에 실을 뽑은 후에라야 언제부터 출근하게 될는지 알 수 있는데, 그 말도 하셨겠죠? 런던으로 돌아간 후에도 당분간은 아파트에서 정양을 해야 될 것 같아요."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충분히 정양을 한 후에 런던으로 돌아가는 편이 좋지 않겠니?"

부드럽게 말한 캘스로프 씨는 얼른 무슨 말을 하려는 딸의 입을 막기라도 하듯 쓴웃음을 지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후유증이 생길 걱정이 전연 없다는 진단이 나올 때까지는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 그런 아파트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누가 도와주겠니?"

그는 핸들에서 한쪽 손을 떼어 딸의 손을 정답게 토닥거린다.

"자립정신도 귀중한 거지만 무슨 일이든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해요."

새라는 입술을 깨물고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가 하는 말은 당연한 말이었고 딸에 대해 걱정을 해주는 것은 고마왔지만, 역시 실을 뽑은 다음에는 빨리 런던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의 그런 결심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화이트애버스의 친정집은 바닷가에 있는 알렉스의 집에서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다. 딸이 그토록 싫어하고 있으니 부모들도 알렉스를 방에까지 들여보내는 일이야 없을 거다. 그러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는 아침 8시 반에 출근했다가 귀가하는 시간은 오후 6시나 7시경이고, 어머니도 쇼핑을 하랴 마을 사람들과 만나랴 꽤나 분주해 하루에 두어 번은 집을 비워야 한다.

그런 때 공교롭게도아니 알렉스라면 그런 우연한 기회를 노리지 않고 부모가 모두 집을 비웠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당당하게 찾아올는지도 모른다. 그는 야생조 관찰용 쌍안경을 가지고 있어서 일을 하다가 지칠 때는 아름다운 바다와 해안선, 그리고 해협 등을 왕래하는 배들을 이층에서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 그 정도로 성능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있으니 남의 집 사람들의 출입을 살피는 일쯤이야 식은죽 먹기일 거다.

피해의식이 더해져서 과대망상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새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알렉스와 같은 남자를 적으로 해서 싸우려면 그렇게 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이상하리라. 어쩌면 런던에 있는 아파트나 직장까지도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일 년 동안 알렉스가 자기를 만나려는 눈치를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어차피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러나 기억을 상실하고 있는 동안의 아내를 보고 그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생각을 가지게 한 것을 후회하며 자기혐오에 빠질 시간이 있다면, 만나러 오지 못하도록 하는 수단을 한시라도 빨리 강구해야겠는데 도대체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몇 분 후, 아버지의 자동차에서 내려 현관을 향해 걷던 새라는 문을 열고 마중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목덜미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어머니는 그녀가 예상했던 말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뱉었다.

"손님이 기다리신다."

", 만나기 싫어요!"

새라는 신음하듯 말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짝 놀라는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새라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나올 듯한 표정이다. 알렉스만은 만나지 않겠다고 몇 차례나 말했는데, 왜 그 마음을 알아 주지 않는단 말인가? 얼마나 더 있어야 딸의 마음을 액면 그대로 이해해 줄는지

"침착해요, 새라. 손님이 누구라는 말은 아직 하지 않았잖니?"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아버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새라는 아버지의 말에 어렸을 때부터 여러 차례 격려를 받은 일이 있다.

"하지만듣지 않아도 알고 있어요. 제발 부탁이니 알렉스에게 말해 주세요, 난 절대로"

"알렉스?"

어머니는 얼빠진 사람처럼 소리쳤다.

"손님은 알렉스가 아니야."

새라는 입을 다문 채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알렉스일 거라고 단정했던 것은 역시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피터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피터가 와 있다면 어머니가 저토록 흥분된 모습으로 들떠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조나스 씨다."

캘로스프 부인은 다행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친절하게도 일부러 문병을 와주셨구나. 마침 이 동네로 나오셨다가 알렉스에게서 네가 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들으셨대."

멍청하게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던 새라의 귀에는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그 인물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의 귀에는 대범하고 의젓한 성품의 주인공으로 생각하게 되는, 그 레너드 조나스의 목소리였다. 엠파이어 영화 사의 최고 권력자며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손가락 하나만을 까딱함으로써 알렉스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나이그 사람이 레너드 조나스, LJ.

성격은 무자비하고 독선적이며, 면도날 같은 머리를 갖고 있는 사람요컨대 알렉스를 한 20년쯤 늙게 만들어 놓은 자가 바로 LJ. 알렉스가 자신을 LJ와 비슷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서인지, 아니면 보다 본질적인 면에서 일치하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은 모두 강렬한 개성과 정력으로 타인을 압도할 수 있는 인간들이다.

LJ가 도대체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단 말인가

 

7

"갓 퇴원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나도 괜찮겠니?"

걱정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는 아버지의 표정은 자기가 거절해 줄 수도 있다는 것 같다. 새라의 마음은 그쪽으로 기울었다. LJ가 방문한 동기에는 알렉스의 입김이 작용한 게 틀림없을 텐데, 그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편 어머니는 아버지의 의사에 반대하고 나섰다.

"조나스 씨는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온 거예요."

알렉스를 한번 본 이후로 그에게 혹해 버린 어머니였으니 조나스까지 좋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 만나야겠군요."

내키지는 않았지만 LJ가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럼, 만나야 하고말고."

어머니는 웃음을 띠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손님은 거실에 계시다. 어서 가서 만나도록 해라. 곧 커피를 가지고 갈 테니."

"정말 괜찮겠니?"

캘스로프 씨는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 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문제없어요. 고맙습니다, 아버지."

겸연쩍어하며 시선을 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문득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지금보다도 더 솔직한 태도로 딸에게 사랑을 표현해 주었었다. 물론 새라도 아버지를 아주 좋아했고,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단순명쾌한 말과 동작으로 나타내곤 했었다.

언제부터 그런 짓을 할 수 없게 된 걸까? 11, 아니면 l2살 때던가? 아버지가 키스를 해주든가 안아 주면 어린애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공연히 화가 났었는데, 아마 그 무렵부터인가 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가 반항기였던 듯하다. 그러나 사춘기가 지난 다음에도 옛날과 같은 형태로 애정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과년한 딸자식이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응석이나 부린다면 아마 꼴불견일 것이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와 같이 서운한 일도 한 가지씩 수용해 나가는 거다. 대신 곧 은밀한 장소에서 더욱 격렬한 형태로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지만

새라는 밝은 웃음을 지어 아버지를 안심시킨 다음 거실로 향했다. LJ는 거실 저쪽에 있는 선반 앞에 서서 벽에 나란히 걸려 있는 캘스로프 집안의 기념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 앞에서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새라는 방안으로 들어서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LJ가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 새라. 아주 오래간만입니다. 이렇게 또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LJ는 밝은 회색 눈빛에 꾸밈새 없는 웃음을 띠며 다가와 새라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LJ ."

예의바르게 웃음을 띠며 말한 새라는 변함없이 젊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LJ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알렉스에게서 들은 일이 있지만, 그는 분명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조금도 변한 게 없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노인'이라고 부르는 나이가 됐다고는 전혀 믿어지지가 않는다.

"사고가 났다는 얘기를 듣고 몹시 놀랐었소. 어서 앉아요. 머리에 입은 상처는 아무래도 골치가 아프지."

새라가 가까이에 있는 팔걸이의자에 앉자, LJ는 그 건너편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그는 대단한 공식석상이 아닌 한 늘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데, 오늘도 역시 캐주얼한 회색 바지에 위에는 와이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다. 그 셔츠도 빨간색과 회색이 섞인 체크 무늬의 평범한 것이다. 어쩌다 이 노인을 만나는 사람들은 이 사람이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가졌고, 당사자조차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의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LJ가 의젓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막 퇴원해서 돌아오는 길이라고요?"

새라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완치되었소?"

새라는 미소를 지으며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잘됐군. 안심했소이다. 새라 양과 같은 사람을 잃게 된다는 건 우리에게 있어 큰 손실이니까"

LJ는 자기가 한 말 가운데 부족되는 바를 보충이라도 하듯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런 행동도 새라가 그전부터 익히 보아온 그의 버릇 중 하나다.

여러 면에서 LJ와 알렉스는 쌍둥이처럼 닮은 점이 있지만 차이점도 분명 있다. 예를 들면 LJ는 알렉스와는 달라 정치가의 자질을 타고났다고 할 만큼 교묘한 임기응변술을 터득하고 있다. 남을 노하게 만드는 것도 매혹시키는 것도 자신의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러한 LJ에게 있어 검지손가락은 중요한 소도구의 한 가지인 것이다.

"걱정을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뭔가 방문한 진의를 빨리 알고 싶은 초조감에서 새라는 다소 쌀쌀맞은 말투로 말했다.

"뭘요, 새라 양에 관한 일은 이전부터 신경을 쓰고 있었어요."

부드럽게 말한 LJ는 캘스로프 부인이 커피와 비스킷을 담은 쟁반을 들고 오는 모습을 보고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이것 참 고맙습니다. 나는 원래 커피를 아주 좋아합니다아녜요, 크림은 사양하겠습니다. 설탕도 괜찮아요. 블랙으로 들겠습니다."

"나도요."

새라는 생 크림 용기에 손을 댄 어머니에게 말했다.

"너는 안 돼, 블랙은 너무 진해."

캘스로프 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딸을 나무라기는 했지만, 마지못해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LJ에게 얘기했다.

"점심식사를 들고 가십시오, 조나스 씨."

"그러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습니다만, 볼일이 있어서 곧 가봐야겠습니다."

그는 유감스럽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면 들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얼굴을 붉히며 아쉬운 듯 방에서 나가자 새라는 살웃음을 짓고는 LJ를 놀려댔다.

"어머니는 선생님의 팬이 되셨나 봐요."

장난치던 현장을 들킨 소년처럼 LJ는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로 매력적인 부인이세요. 당신은 어머니를 쏙 빼닮았습니다."

새라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의 대화와는 전혀 맥락이 다른 질문을 당돌하게 해온 것은.

"당신은 지금드 알렉스를 사랑하고 있는 거죠?"

새라는 커피를 마시다가 갑자기 목이 막혀 잔을 내려놓고는 기침을 몹시 해댔다. 기침을 한 번 할 때마다 분노가 치솟는다. 5년 전의 첫 대면 이후 몇 차례밖에 만난 일이었는데, LJ는 무슨 권리로 그런 맹랑한 질문을 한단 말인가?

"괜찮습니까?"

성큼성큼 다가온 LJ가 새라의 등을 문지르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겨우 입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그녀는 쌀쌀맞게 종알거렸다. 그리고 LJ가 천천히 소파에 가서 앉자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알렉스의 부탁을 받고 오신 거로군요?"

"그는 내가 여기 와 있는지조차 모르오."

그가 대답했다.

"업무에 관해 할 얘기가 있어서 어제 그의 집에서 묵었는데, 그는 사고가 있었다는 얘기만 할 뿐 당신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소. 하지만 나로서는"

"실례입니다만, 조나스 씨."

새라는 성을 내며 입을 열었다.

"이 문제에 선생님은 아무 관계도"

"물론이오."

LJ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내게 있어 친아들과 같은 존재요. 알고 있겠지만 내게는 아들이 없다오. 내 아내는 자식 못 낳는 걸 미안하게 생각해 스스로 이혼을 하자고까지 한 일도 있소. 물론 난 첫마디에 거절했지. 리어를 잃는다고 생각하니, 자식이 없어 쓸쓸하게 지내는 것쯤은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습디다."

새라는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 얘기 속에 빠져들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따금 화젯거리가 될 만큼 금실이 좋은 그들 부부 사이에 그런 숨은 면이 있었다니

"알렉스 얘기가 옆길로 새고 말았군."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다음 말을 계속했다.

"사흘 전인 월요일, 내 비서가 시나리오 원고를 가지고 와서 알렉스에게 주었는데"

"선생님의 비서가?"

새라는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LJ의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맞아요, 마들렌은 내 비서로 일하고 있소, 일 년 전부터. 몰랐소?"

그는 조용히 새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맡아 달라고 알렉스가 부탁했었소. 자신은 더 이상 마들렌을 자기 사무실에 두고 싶지 않다며하지만 일하는 능력을 보니 l급 비서라며 내가 채용하면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했소."

LJ는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이다.

"그 말은 옳았소. 난 이제 아내 이외의 여성에 마음이 동할 나이는 지났고, 그러니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고 말이오."

"그럼 알렉스의 경우엔 문제가 일어났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알렉스와 마들렌은 치정 싸움 끝에 사이가 틀어진 걸까? 아니면 마들렌이 결혼을 서두르는 바람에 알렉스가 움츠러든 걸까? 그렇다면 해변가 집 앞에서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눌 때 묘하게 말다툼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마들렌은 대단한 수완가요."

그녀의 수완에 놀랐다는 듯이 LJ는 중얼거렸다. 알렉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 정도로 유능하게 일을 해내는 여성을 비서로 썩히기는 아까와서 멀지 않아 좀 더 책임 있는 자리로 옮겨 줄까 하는데, 그야 어쨌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날 회사에 돌아온 마들렌에게서 알렉스의 집에 당신이 있었단 말을 듣고 나는 환성을 지를 뻔했소. 당신들이 화해한 걸로 알았지."

"어머,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쓰셨군요."

새라는 비웃듯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남들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고 얼마나 더 설명을 해야 알아들을 것인가. 그의 얘기를 그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차리리 잔소리를 하고 싶은 만큼 하게 내버려 두고 어서 돌려보내는 게 상책이겠다.

LJ는 또 한 번 검지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머리를 크게 끄덕인다.

"이 일 년 동안 나는 알렉스의 일로 골치가 아팠소. 당신과 헤어진 후로 그는 사람이 변한 것 같아요. 손쉽게 다룰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단 말이오. 업무상 조건이 괜찮은 제안이 들어와도 이 핑계 저 핑계 몸만 사리고, 막상 일을 시작하면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잔소리만 해대서 쓸 만한 작품을 만들어내질 못해요. 영화계를 위해서도 심히 난처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

"안 됐습니다만 그건 나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입니다."

새라는 냉정하게 내뱉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당신 한 사람뿐일 거요. 당신과 결혼한 후 알렉스는 일을 더 열심히 했고, 그래서 그전보다 훨씬 세련된 작품을 만들었소. 그 시기의 작품들은 불후의 명작이라고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들이오. 그런데 이 일 년 동안 그는 일이라곤 거의"

새라는 입술을 깨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나는 선생님 회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이혼이 선생님께 폐를 끼쳤다면 죄송한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선생님 말씀에 따라야 하고 시키는 대로 생활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습니다."

LJ는 안타깝다는 듯 한 손을 크게 흔들어댔다.

"저어, 잠깐 앉으시오. 내 얘기는 끝나지 않았소이다."

"이 이상 무슨 말씀을 하셔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연 그는 소파에서 몸을 쑥 내밀며 새라를 올려다보았다.

"새라 씨도 알고 있겠죠? 알렉스는 마음속 깊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를 사랑한다면 마들렌을 애인으로 삼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LJ는 자신의 얼굴에서 노기를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댔다.

"어쨌든 거기 앉아요. 그러고 서 있으면 얘기가 안 되겠소."

새라가 그 명령에 따른 것은 그의 건강이 걱정돼서였다. 평소에는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사람만 상대해 왔던 그가 이처럼 거부당하고 있으니 그러다가는 뇌졸증이라도 일으킬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큰일이 아닌가.

LJ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 그렇다면 내 입으로 분명히 가르쳐 주겠소. 알렉스와 마들렌은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소."

"애걔걔."

그녀는 예절을 차리는 것조차 잊고 비웃었다.

"저어, 선생님, 저는 옛날얘기를 듣고 기뻐하는 어린애가 아닙니다. 그런 때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예요. 알렉스도 선생님과 똑같은 얘기를 했지만 전 그 말을 털끝만치도 믿지 않습니다."

그는 불쌍하다는 눈초리로 새라를 쏘아보았다.

"그러길래 여자는 할 수 없다는 거야. 나는 알렉스가 하는 말을 의심해 본 일도 없고, 의심하려는 생각을 해본 일도 없어요."

"그렇담 왜 마들렌이 알렉스와 관계가 있었다고 고백을 했을까요? 두 사람이 한 방 안에 있었다는 호텔 종업원의 증언이며, 사진이며, 마들렌이 쓴 러브레터를 그녀의 남편은 어떻게 수집했을까요?"

빠른 말투로 추궁하는 사이에 그녀는 일 년 전의 분노가 다시 치밀어서 몸을 떨기 시작했다.

"거짓말이었다구, 모두가"

LJ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새라는 싸늘한 웃음을 던졌다.

"벤틀리 씨가 내게 거짓말을 해서 무슨 득이 있겠어요?"

"그게 아니오. 그는 자신이 믿고 있던 걸 당신에게 털어놓았을 뿐이오."

LJ는 괴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거짓말을 한 사람은 마들렌이었소."

그는 다시 몸을 내밀면서 어안이 벙벙해 입을 다물고 있는 새라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을 잡거나 문지르고, 어깨를 껴안거나 두들기는 것도 그가 외교상 이따금 사용하는 전술이다.

"마들렌이 알렉스를 좋아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알렉스는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소. 두 사람이 묵었던 방은 틀림없이 이웃한 방이었고, 그 방 사이의 벽에는 통로가 나 있었으며, 둘이서 알렉스의 방에 앉아 글라스를 기울이면서 일에 지친 몸의 피로를 푼 일도 있었소. 그 방에서 알렉스는 로케이션 현장에서 있었던 촬영의 반성기록과 앞으로 해야 할 계획, 로케이션 진행상황에 관해 나에게 보낼 보고서 등을 매일 밤늦도록까지 비서에게 받아쓰게 했었고방이 아닌 호텔 바에서 일을 했더라면 좋을 뻔했소? 나는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외다. 분명 거실에서 작업을 했지, 침실에서는 하지 않았어요. 물론 방이야 어찌됐든 알렉스는 당신에게 꺼림칙한 짓은 단 한 번도 한 일이 없구요."

"그 러브레터 건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몹시 비웃는 말투에 LJ는 눈살을 찡그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까도 말했듯이 마들렌이 알렉스를 좋아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오. 그 편지를 받고서야 비로소 알렉스는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렸던 거고, 그래서 당장에 해고시킬 생각이었지만 내가 이전부터 마들렌의 능력에 주목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던 알렉스는 마음을 돌리고 내게 상의를 해왔던 거요."

새라는 자신이 LJ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그의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LJ가 적당히 꾸며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님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알렉스가 그에게 정사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내게는 한 마디의 설명도 하지 않은 알렉스가 선생님에게만 '진상'을 털어놓다니"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새라의 손등을 조용히 문지르며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은 좀 비뚤어진 심리의 소유자라서 나로서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이유는 당신이 자신을 믿을 만큼 사랑하는가를 재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웃기는 사랑 시험도 다 있군요."

LJ는 새라의 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중얼거렸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새라는 실망을 나타내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슬그머니 손을 뗐다. 그리고 발딱 일어섰다.

"여러 가지로 걱정을 해주시는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LJ도 일어섰다.

"오늘 여기 와보고 나는 당신이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났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소. 그와는 반대로 알렉스가 어떤 성장과정을 겪었는지 당신은 생각해 본 일이 있나요? 그 따위 옛날 일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오. 처음부터 어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는 법이고, 인격의 대부분은 l6살 때까지 대략 형성된다고 합니다. 알렉스는 자신이 어떤 부모의 아들인지조차 모르고, 자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존재요, 폐만 끼치는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자랐던 거요. 그러한 그니, 자신의 아내나 자식, 자신의 가정에 온갖 정을 쏟고, 또 정을 받으려고 한다는 걸 나는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어요."

그녀는 입을 다문 채 문 앞까지 걸어가서 LJ를 위해 문을 열었다. 그처럼 경륜이 많은 인물도 알렉스의 마음속은 잘 알지 못하는가 보다. 알렉스에게 있어 이상적인 가정은 일을 하다가 일시적으로 숨을 돌리며 쉬는 장소에 지나지 않고, 그곳에는 오로지 그를 위해 순종하고 봉사하는 아내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와 더불어 그의 가정관을 논해 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헤어지면서 LJ,

"다시 한번 부탁이니 내가 한 말을 깊이 생각해 줘요."

라고 말했을 때도 새라는 일을 다문 채 그의 볼에 살짝 키스를 했을 뿐이다.

그가 한 말이 진실이고 가령 알렉스가 마들렌과 불륜의 관계를 맺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태는 뭐 한 가지 변할 게 없다. 그가 결백했었다면 왜 정사에 관해 사실대로 설명하지 않았을까? 그 설명을 알렉스가 거부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분노가 치밀어오를 뿐이다.

아내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싶었다고? 정신적으로는 노예와 같은 생활을 4년 동안이나 강요했으면서 그래도 부족했었단 말인가? 아내가 남편의 배신을 남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되고, 죽어 버리고 싶을 만큼 괴로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고통을 반대로 이용해서 아내의 마음을 시험해 볼 수 있단 말인가? 냉혈한!

LJ의 부인인 리어 조나스라면 그런 경우에라도 남편의 말을 솔직히 받아들이고 남편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더욱 다짐할는지 모른다. 알렉스는 LJ를 존경하는 나머지 자기의 아내에게도 리어 조나스와 같은 여성이 돼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리라.

괴로운 마음을 씹어 삼키며 LJ의 차를 배웅한 다음 새라는 기지개를 한번 켜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싱크대에서 샐러드 용 야채를 씻고 있고 아버지는 그 익숙한 솜씨로 드레싱을 만들고 있다. 문 쪽에서 발소리가 나자 두 사람은 웃음 띤 얼굴로 돌아보았다.

"조나스 씨는 돌아가셨니?"

어머니가 묻는다.

"좀 더 쉬었다가 가시지 않고정말로 유감스럽구나. 그분 참 매력적인 신사분이시더라."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어요."

새라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날 오후 새라는 비키니 차림으로 정원에 나와서 장시간 일광욕을 했고, 저녁때가 되자 일찌감치 식사를 끝낸 다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특별한 육체노동을 한 일도 없는데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는 LJ와의 대화 때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이겠지. 그 증거로 침대 위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어도 영 잠이 오지 않는다. 하지가 가까와서 해는 무척이나 길다.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새들이 깃을 파닥거리는 소리가 밤 l0시경까지 들려왔다.

런던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첫 무렵에는 멀리서 들려오는 차 소리에 불면증이 걸렸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소리가 그리워지는 것 같다. 듣기에 따라서는 그 소리가 파도 소리와도 비슷했기 때문일까? 사실 해변의 집 침실에 언제나 들려오던 파도 소리처럼 부드럽게 들릴 때도 있었다.

다음날 아침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끝낸 새라는 다시 일광욕을 하러 나가기 전에 런던의 직장으로 전화를 걸어 직접 사정을 설명했다.

"서둘러서 출근할 것 없어요."

조스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하는 장사는 머리를 짜내는 일이 승패를 좌우하거든. 멍청한 머리로 나오면 오히려 방해가 돼요."

새라는 웃으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곳에 취직을 하게 된 건 실로 행운이었다. 그 직장에 시간제 일자리를 얻지 못했더라면 자신에게 카피라이터의 소질이 있다는 것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거다. 카피라이터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머리 회전과 창의력 그리고 유머감각인데, 알렉스와 같이 산 4년 동안 그런 재능이 나타날 기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l1시 반쯤 되자 새라는 오전의 일광욕을 끝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오늘 아침부터 평상시대로 약방에 나간 것 같다. 어머니는 주방에서 완두콩을 까고 있었다.

"제가 할게요."

새라는 지루함을 달랠 일거리를 찾았다고 생각하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캘스로프 부인은 기꺼이 딸에게 일거리를 넘겨주고는 주방 벽에 걸려 있는 둥근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저어, 새라야, 30분쯤 나갔다 오면 안 되겠니? 이번 주말에 마을 부인회가 교회에서 자선 바자를 열기로 돼 있는데, 그 준비를 해야겠거든. 그런데 손이 모자란다지 뭐니. 폼프렛 부인은 발목을 삐었고, 주디 킹은 아기가 감기에 걸려서 꼼짝을 못한대요"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혼자서 집을 보며 울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새라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미안하다. 점심식사 때까지는 꼭 돌아올게."

어머니는 서둘러 앞치마를 벗어던지고는 뛰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웃는 얼굴로 배웅한 다음, 새라는 콩깍지를 주무르며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런던의 슈퍼마켓에서 포장된 완두를 살 때마다 이처럼 콩꼬투리에 들어 있는 자연 그대로의 완두콩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이 집의 야채류는 거의 모두가 직접 가꾼 것들이다. 양상치, 당근, 강남콩, 완두콩, 토마토모두 어머니가 정성껏 기르고 있다. 딸기와 엘더베리도 정원에서 기르는데 그 맛은 별미고, 정원 가장자리에는 사과와 체리 나무도 있다. 한 달쯤 전에 만발했던 꽃은 모든 가족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는데, 이제 곧 나뭇가지에 작은 열매가 맺힐 것이다.

이때 갑자기 시끄럽게 들려오는 소리가 새라의 즐거운 몽상을 깨뜨렸다. 현관의 벨 소리다. 그녀는 금방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알렉스가 틀림없다. 물론 그와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새라는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알렉스가 그대로 돌아가 주기를 바랐다.

또 벨 소리가 울려온다. 아까보다도 더 길고 시끄럽게. 하는 수 없이 테이블에 손을 얹고 일어서는데 그때까지 꼭 쥐고 있던 콩꼬투리가 손아귀의 힘을 받아 터지면서 콩알이 튀어나왔다. 콩알은 주방 바닥에 뒹굴었으나 그것에는 신경조차 쓰지 못할 만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평화로운 주방 분위기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켜 주고 있는데 왜 알렉스는 날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 걸까? 마침 어머니도 외출하고 집에 없다어쩌면 어머니가 알렉스와 의논하고 일부러 집을 비운 게 아닐까?

새라는 눈을 감고 숨소리까지 죽였다. 어머니라면 족히 이런 짓을 하고도 남는다. 만일 그렇다면 나 혼자 있다는 걸 알고 왔을 테니, 알렉스는 주방으로 난 옆문으로 돌아서 들어올지도 모른다.

새라는 옆문으로 달려가서 떨리는 손으로 빗장을 걸었다. 짐작했던 대로 뒤뜰에서 발자국 소리가 난다. 창문으로 안을 기웃거릴는지도 모를 일이다. 새라는 얼른 커튼을 치려고 했지만 한발 늦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태양빛을 장신의 그림자가 막고 서 있다.

순간 새라는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며 빗장을 열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뭐야? 도대체 그 나이에 술래잡기라도 하잔 말인가?"

놀리듯이 말하며 장신의 피터가 들어서서는 가볍게 허리를 껴안으며 연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8

"말수가 아주 적어졌군, 달링. 상처가 많이 아파?"

피터가 물었을 때, 새라는 서둘러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만나고 나서 30분쯤 후, 두 사람은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아뇨, 이제 전처럼 아프지는 않아요."

그녀는 양심이 찔리는 것을 느끼며 짐짓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꼭 일 주일 전인 금요일 밤에 헤어진 이후, 피터에 대해서는 거의하루인가 이틀은 문자 그대로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입이 무거워져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실 그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피터는 눈살을 찌푸리며 잔을 내려놓는다.

"내가 출장을 걷어치우고 달려오지 않았다고 원망하는 거로군? 그렇다면 사과하겠지만, 그때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구. 찰과상을 약간 입었을 뿐이라며"

피터가 얼굴을 붉히면서 변명하는 모습을 보고, 새라는 그 역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애인의 몸을 걱정하는 마음과 멀리 네덜란드까지 온 이상 업무를 충실히 끝내고 돌아가야겠다는 의무감의 틈바구니에서 고민을 하다가 결국 후자를 택했던 것이리라.

"물론 원망은 하지 않아요. 볼일을 다 보고 돌아온 건 잘한 일이에요."

새라는 미소를 띠며 그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 미소도 그리고 목소리도 어쩐지 어색하다는 걸 자기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예측했던 대로 피터는 점점 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다른 일로 나를 원망하고 있군 그래?"

"천만에요."

원망하고 있지는 않지만 피터가 와준 걸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기억을 상실하고 남편의 집에까지 끌려가 하룻밤을 한 침대 속에서 지냈던 사실을 피터가 알게 되면 그는 즉시 질문공세를 퍼부을 게 틀림없다. 아마도 첫 번째 질문은 '그에게 안겼었느냐?'일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즉석에서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다음에 '안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느냐?'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열차가 탈선한 곳은 애슈퍼드 조금 전이었다고 했지?"

피터가 동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우선은 애인의 대답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한 표정이다.

", 아까 얘기한 것처럼 일요일에 런던으로 돌아가던 중 일어난 사고였어요."

이미 한 차례 자세히 설명했던 얘기다.

"그 다음날 지방신문에 사고의 원인과 피해내용 등이 실렸었어요.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그날 신문을 찾아볼게요."

피터는 의자 등에 기대며 눈을 감는다. 얼굴에 피로의 기색이 짙은 것은 히스로 공항에서 곧바로 차를 몰고 달려온 까닭이리라.

새라는 점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처럼 애써 달려왔건만 어쩐지 몇 백 년 동안이나 만나지 않았던 머나먼 사람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며칠 동안은 마치 조각그림 맞추기 장난감을 뒤집어 놓은 듯한 격동과 혼란 속에서 지냈다. 지금은 그 조각을 하나하나 복원시켜야 하는데, 어쩐지 이 피터라는 존재는 그림 어디에도 맞지가 않는다. 아무리 뒤집어 보고 바로놓아 보아도 다른 그림 속에서 뛰어 든 다른 조각처럼만 생각된다.

가족들의 의견 따위는 모두 무시하고 암스테르담으로 따라갔었더라면 좋았을 걸새라는 새삼스럽게 후회했다. 그랬더라면 알렉스와 재회하는 일도 없었을 거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감정이 깨어나 되살아날 리도 없었을 게 아닌가.

"그 집에는 가봤었나?"

피터가 가볍게 물어왔다.

새라는 깜짝 놀라며 움칠했다.

"? 내가 그런 곳에 뭘 하러"

"스티븐슨이 집을 팔려고 내놓았는지 여부를 확인해 보라고 했잖아?"

피터는 놀랍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살웃음을 짓는다.

"그럴 테지. 가보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을 거야. 내가 나중에 확인해 볼게."

"알아볼 것 없어요. 내놓지 않았다나 봐요."

새라는 얼른 대답했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피터가 돌연 화를 내며 일어섰다.

"괘씸하잖아! 그 자는 당신의 요구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이렇게 된 이상 내가 그 자를 만나서 담판할 수밖에 없겠어."

"그러지 말아요, 피터."

그녀는 또 허둥대며 그를 달랬다.

피터는 자신이 어떤 사람과 상대해서 싸우려는 건지 그 장본인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처럼 쉽게 말하는 것이리라.

"부탁이에요,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말아요."

피터의 얼굴을 유심히 올려다보는 동안에, 새라는 자신이 선택한 재혼상대는 하나부터 열까지 알렉스와는 정반대의 남자라는 점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 사람은 실로 온후하고 부드러운 성격이다나쁘게 평한다면 무기력하고 생기가 없다고 할 만큼 조용하다. 주위 사람과 환경에 아무런 괴로움도 주지 않고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 포용성을 갖추고 있는데 정열이라든가 욕망, 증오 등의 격렬한 감정은 자신이 표현하는 것도 싫어하지만 상대방이 표현하는 것조차 싫어한다. 피터가 즐기는 인생은 그가 정성껏 꾸며 놓은 정원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당구대처럼 평평하고 푸른 잔디. 잡초라고는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는 질서정연한 화단

"아냐, 만나서 얘기를 해야겠어."

피터가 단호히 말했다.

"그 자의 런던 주소를 가르쳐 줘요. 내일쯤 그곳에 찾아가면 만날 수 있을까?"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아직 해변의 집에 있을 것 같지만, 어제 LJ를 따라서 런던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새라는 언제쯤 런던으로 갈 거야?"

견디기 힘겨운 표정으로 피터가 물었다.

"아무리 빨리 가더라도 다음주 수요일 이후가 될 거예요. 그날 병원에 가서 실밥을 뽑기로 했거든요."

피터는 당혹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 오늘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아. 머리를 다친 이후 사람이 바뀌었나?"

새라는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일주일 전까지의 자신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당혹한 피터의 눈에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이렇게도 마음의 변화가 심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려는 게 과연 잘하는 일인지의 여부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라 자신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피터와 만날 때는 가급적 감정을 나타내기를 꺼렸고, 행동이나 말에도 신경을 써가며 무의식중에 그의 기호에 맞추려고 애쓴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행위에 특별한 위화감을 느꼈던 적은 한번도 없었으나, 앞으로 평생을 같이 살게 되면 결국 숨통이 막히지 않을까. 아니면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 사람에게는 역시 피터와 같이 정신적으로 안정된 동반자가 꼭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몇 분 후에 귀가한 캘스로프 부인은 피터의 보습을 보자, 당연한 일이지만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단순히 놀라는 얼굴일 뿐, 기쁨을 나타내는 표정은 결코 아니었다.

"어머."

그녀의 첫마디였다.

"오래간만이군, 피터. 건강은 어때요?"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건강이 좋건 나쁘건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투로 들렸다.

"보시다시피 건강은 좋습니다, 캘스로프 부인. 어머님께서도 변함없으시겠죠?"

피터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유연하게 대답했다.

새라는 그가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부모가 그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알렉스 쪽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피터의 어떤 점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도대체 어떤 점이 그렇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인가

"왜 그러니? 상처가 또 아프냐?"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는 새라를 보고 캘스로프 부인이 묻자, 피터도 걱정스럽다는 듯 표정을 흐렸다.

"큰 우환이었습니다. 지금도 말했습니다만, 사람이 변한 것 같아요. 이럴 줄 알았더라면 무리해서라도 네덜란드에 데리고 가는 건데"

새라는 어머니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며 얼굴을 붉혔다. 기억상실증이 일어났었다는 얘기와 그 일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사건에 대하여 피터에게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은 것을 어머니는 민감하게 알아차린 듯하다.

피터는 얘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듯 슬슬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아주 조용한 곳이로군요. 이렇게 조용하면 도리어 침착성을 잃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저는 도시에서 자라났기 때문인가 보죠."

그가 쾌활하게 웃으며 돌아섰기 때문에 새라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괴로울 뿐이다.

"모처럼 한 걸음이니 마을 구경이라도 하고 가지 그래요?"

어머니가 뜻밖에 부드럽게 말한 이유는 피터가 마을을 헐뜯는 것으로 생각하고 은근히 이죽거리고 있는 것이리라.

"여름철에는 관광객도 아주 많다우. 그림으로 그려서 걸어 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물도 많고구경하다 보면 틀림없이 마음에 들 거야."

", 여유를 가지고 구경하고 싶습니다만"

피터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공교롭게도 오늘밤 안으로 런던까지 돌아가야 합니다. 내일 아침에 중요한 회의가 있거든요."

"그럼, 저녁때까지라도 푹 쉬도록 해요. 난 나가서 점심식사를 준비하지"

캘스로프 부인은 그 나름대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며 친절한 맡투와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유감스럽게도 그 노력이 가식이라는 건 곧 탄로 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

다시 두 사람만 남게 되자, 피터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당신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에요."

새라로서는 그렇게 적당히 얼버무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날 오후, 화이트애버스 교회 가까이에 피터의 자동차를 세운 두 사람은 12세기에 건조된 옛 건물 안에 들어가 이 지방 출신인 십자군 용사가 가지고 돌아왔다는 마구와 워털루 전투 때 사용했었다는 색 바랜 깃발을 구경했다.

이 깃발은 웰링턴 장군을 따라 나폴레옹 군과 싸운이 지방의 젊은 영주가 쓰던 기념품으로 전해 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화이트애버스는 역사 교과서에 이름이 오를 만한 인물을 배출한 일도 없고, 눈길을 끌 만한 전쟁이나 사건의 무대도 아니다. 그저 평화로운 마을인데 피터는 그런 점을 틀림없이 좋아할 거라고 새라는 생각했다.

그러나 화이트애버스는 다른 면의 역사도 가지고 있다. 해안선으로 둘러싸인 광활한 롬니마시는 밀수업자들에게는 절호의 은신처였다. 영주가 프랑스를 상대로 싸우러 나갔을 때도 마을사람들은 바다 건너편 프랑스 사람들과 사이좋게 손을 잡고 밀수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단다. 해협을 건너서 가지고 온 브랜디는 이처럼 낡은 교회의 뒤뜰이나 농가의 창고 깊숙한 곳에 감춰졌다가 안개가 낀 들판을 지나 국내 각지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밀수라니?"

피터는 불유쾌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그런 더러운 장사에 손을 대는 사람들은 최하급 인종이야. 돈을 위해서는 사람도 태연히 죽인다니까."

그 말은 맞는 말이지만 그들의 모험담은 마을사람들의 은밀한 자랑거리로 대를 물려 전해 와 이 마을 아이들의 가슴을 동경과 스릴로 채워 주었었다.

새라는 조용히 한숨을 내뿜으며 피터의 뒤를 따라 어두컴컴한 건물 밖으로 나왔다. 피터는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마음에 드는 듯, 몇 번이고 자신의 감상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건 l9세기 빅토리아 왕조 때 다시 만든 거래요."

새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건조 당시의 것은 크롬웰의 부하에 의해 파괴됐다구요."

"크롬웰이라면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지."

"그럴 거예요, 당신이라면."

새라는 크롬웰이 이끈 청교도혁명으로 처형된 찰스 l세의 열렬한 팬이었다옛 교회의 품위에 맞지 않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끼워지게 된 게 크롬웰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피터는 관대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새라는 낭만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야."

하지만 새라의 귀에는 '가련한 단세포 인간이지만 그래도 하는 수 없지'라는 의미로 들렸다.

그는 이끼가 낀 교회 묘지 옆을 거닐면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양떼를 보고는 다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양이 묘지를 밟고 다니잖아"

"하지만 양은 잡초만 뜯을 뿐이에요. 마을에서는 교회 묘지 청소만 전담할 사람을 고용할 예산도 없고, 이게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겠어요?"

"그런 말 진심으로 하는 거요?"

피터는 아주 질렸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 물론 진심으로 하는 말이죠. 우리는 양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서로 돕고 살아가니까요. 도시 사람이 이것저것, 걱정 안 해줘도 문제없어요."

고향을 사랑하고 마을을 아끼는 새라는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묘지를 빠져 나와서 교회의 나무로 된 문을 나서려고 하는 순간 은빛 승용차 한 대가 맹속력을 내며 쏜살같이 두 사람 앞을 지나갔다.

새라는 파랗게 질려 버렸다. 은색 자동차가 알렉스의 차 하나뿐은 아니겠지만 왠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아까부터 피터와 쓸데없는 논쟁을 벌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논쟁을 벌이기는 그와 사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오늘따라 왜 피터가 하는 말이 하나하나 신경에 거슬리는 걸까? 새라는 앵돌아진 어린애처럼 고개를 숙인 채 발길에 걸리는 자갈을 걷어찼다. 물론 피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처음 둘이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매사에 냉정하고 온유하며 논리적으로 틀린 점이 없다. 그러기에 샐러리맨으로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이며 자신에게도 이상적인 남편이 돼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그의 장점 하나하나가 오늘은 왜 이렇게 마땅찮게만 느껴지는 걸까?

피터가 가볍게 웃어 보이며 연인을 껴안았다.

새라는 점점 불안을 느꼈다.

"이러지 말아요. 어쩐지 자꾸 불안해져요."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

"신경 쓰지 말라구. 부상을 당했기 때문일 거야. 당신은 아직 진짜 새라로 되돌아오지 않았거든."

피터가 그렇게 말했을 때, 비로소 새라는 커다란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즉 피터가 '진짜 새라'로 알고 있는 쪽이 자신의 거짓 모습이며, 이번 사고를 계기로 오히려 자기의 참모습을 되찾은 것이리라. 물론 자신이 지금까지 연기를 해왔다는 의식은 조금도 없고, 알렉스와의 파국을 용케 뛰어넘어 성실하게 살아온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는 게 아니야."

피터가 부드럽게 속삭이며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때다. 아까와는 반대방향에서 달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그 차를 쳐다보니 이번에도 은색 자동차다. 우연의 일치일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까 달려갔던 차가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순간 새라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하느님, 제발

달려온 자동차가 묘지 정면에서 급정거했을 때도 새라는 아직 신께 기도하는 심경이었지만, 사실을 직시하고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운전석에서 당당하게 내려와서는 자동차 문을 기세 좋게 닫고 우뚝 선 키 큰 남자는 역시 알렉스였던 것이다.

알렉스는 검정 진 바지에 검은색 스웨터를 걸친 가벼운 차림이었다. 그러나 그 진 바지가 일류 디자이너의 작품이며 스웨터도 순모인 게 분명하다. 피터는 이 소박한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도시 사람이 나타난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유유히 도로를 건너오는 남자에게 호기심 가득 찬 시선을 던지고 있다.

새라는 그의 손을 잡고 도망치고 싶었다. 물론 그런 엉뚱한 짓을 하면 피터는 어이없어할 거다. 그리고 왜 도망을 쳐야 하느냐고 물을 것이고, 자신은 대답이 궁해지겠지. 그렇게 되면 옆에서 지켜보는 알렉스의 기분만 으쓱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얼굴을 돌렸다.

"구경 나왔소?"

알렉스가 물었다.

새라는 자신도 모르게 알렉스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피터는 자기에게 말을 걸어온 줄로 착각한 것 같다.

"그렇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마을이로군요."

그는 예의바르게 웃음까지 띠며 대답했지만 낯모르는 사나이가 다짜고짜로 묻는 말에 내심 놀라고 있는 게 틀림없다.

알렉스는 비로소 피터의 존재에 신경을 쓰는 모양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천천히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샐러리맨 풍의 감색 슈트, 파랑과 흰색의 세로 줄무늬가 있는 와이셔츠, 깨끗이 빗어 넘긴 금발 머리, 그리고 약간 통통하면서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알렉스의 시선이 옮겨질 때마다 새라의 몸은 뜨거워졌다 식었다 한다.

"당신은 누구요?"

알렉스는 일부러 목소리를 깔며 물었으나, 피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새라에게 시선을 돌리며 비웃는다.

"으음? 새라의 남자친구였나?"

새라의 얼굴은 금세 새빨개졌고, 두 손은 으스러져라고 주먹을 쥐었다. 이 주먹으로 눈앞에 있는 저 오만한 콧대를 내리쳤으면 얼마나 마음이 후련할까!

"어서 가버려요! 그게 당신을 위해 좋을 거예요."

새라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위협해 봤지만 그 어조에 놀란 건 피터뿐이었다.

"그건 또 왜지?"

알렉스는 심술궂은 웃음을 띠면서 되물어왔다. 새라는 자신이 화를 내면 낼수록 그를 재미있게 해줄 뿐이라고 생각을 고치고는 일부러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앞엔 불타오르는 증오가 남아 있었다.

"소개할게요, 피터. 이 사람이"

"남편이요, 이 여자의."

알렉스가 먼저 천연덕스럽게 자기소개를 했다. 단지 이름만을 소개하려는 새라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일부러 '이 여자의'까지 지껄인 것이리라.

그러나 피터는 새라의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이미 상대방의 정체를 파악했던 것 같다. 일단은 얼굴을 붉혔지만 다시 예의바른 웃음을 띠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초면이군요. 나는 피터 맬러리입니다."

피터가 내민 손을 알렉스는 무심하게 내려다본다. 그리고는 자기의 두 손을 천천히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남을 경멸하는 데 이 이상의 방법이 또 있을까?

피터는 아까보다도 얼굴이 더 빨개졌지만 휘말려 들어서는 안 되겠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 같다. 그는 머쓱해서 손을 내리고는 또다시 웃음을 띠었다.

"마침 잘 만났습니다.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알렉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흐음, 그건 또 무슨 소리요?"

피터의 귀에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으로 들렸을지 모르지만 새라는 속지 않았다.

"모르십니까?"

피터는 약간 큰소리로 되물었다.

"당신이나 나나 야만인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니, 이 시점에서 남자끼리 냉정하게 얘기를 나누어 해결책을 강구해야 할 걸로 생각합니다. 이런 곳에 서서 얘기하기는 뭣 하니 가까운 시일 안에 점심이라도 나누면서 천천히 대화를 갖지 않으렵니까?"

알렉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씹는 듯한 표정으로 새라를 돌아보았다.

"이 사람, 언제나 말투가 이런가?"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아요!"

새라는 피터가 갑자기 몸을 경직시키는 것을 보며 알렉스를 노려보았으나 피터의 주의는 다른 방향에 쏠려 있었다. 교회 앞에서 차를 내릴 때, 두 사람은 차문을 잠그지 않았었다. 그 차에 어느 사이엔가 장난꾸러기 소년이 올라타서는 운전석에 앉아 지금 막 시동을 걸려는 참이다.

큰소리를 지르며 차를 향해 달려간 피터를 알렉스는 경멸의 웃음을 띠고 바라보고 있다.

"당신 남자친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 같군."

갑자기 돌아다보는 알렉스와 눈이 마주치자, 새라는 잠자코 얼굴을 돌렸다.

"우리가 일 년 만에 한 침대 속에서 잠을 잔 사실을 알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잠은 잤지만, 그 외에는"

"관계는 안 가졌단 말이지?"

새빨개진 얼굴로 분통을 터뜨리는 새라 대신 알렉스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그 다음 말을 잇는다.

"그건 맞는 말이지. 하지만 당신과 그는 한 침대 속에 들어간다는 건 생각조차 한 일이 없었을걸?"

"어머, 그런 걸그런 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새라가 지지 않으려고 반문하자, 알렉스는 갑자기 웃음을 거두고 음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몰라? 그날 밤 당신 태도를 보고 눈치 챘지."

새라는 얼굴이 불을 지른 것같이 달아올라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날 밤엔 알렉스의 정열을 요구하며 몸이 뜨거워졌었고, 그런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었다.

"이리 오기만 해봐라! 이번에는 단단히 혼을 내줄 거다!"

놀라서 도망치는 소년을 향해 피터가 큰소리로 윽박질렀다. 그러자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으나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어른을 보고는 얄궂은 동작으로 놀리며 다시 달아난다.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하는 피터를 곁눈질로 바라본 알렉스는 차디찬 표정을 지으며 코웃음을 쳤다.

"가련한 여인이여, 설마 저런 얼간이하고 진정으로 교제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고의적으로 내는 콧소리를 피터가 못 들을 리 없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돌아온 피터는 알렉스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 정말로 마음에 안 드는군."

"실은 나도 당신이 입고 있는 슈트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아. 더구나 그 따위 실례가 되는 말은 함부로 지껄이는 게 아닐 텐데"

알렉스는 새하얀 이를 내보이며 껄껄 웃었다. 그러자 남이 비웃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피터는 적의를 나타내며 이를 악물었다.

"뭐가 이상해? 정말 불쾌한 자군!"

알렉스는 이것 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새라에게 말했다.

"유머감각조차 없는 자에게 새라는 어떤 매력을 느꼈을까? 돌인가?"

"닥쳐! 각오는 돼 있겠지? 그 따위로 지껄이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고 있느냔 말야?"

피터가 이를 악물며 도전하자, 알렉스는 점점 재미있다는 듯 미소까지 짓는다.

"자네가 무슨 일을 당할지는 잘 알고 있지."

"돌아가요."

새라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피터의 손을 잡았으나, 그가 그 손을 너무 세게 뿌리치는 바람에 그녀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내 아내에게 손대지 마!"

알렉스가 신음하듯 소리쳤다.

"새라, 괜찮아? 당신은 저기 그늘에 가서 앉아 있는 편이 낫"

"그 따위 소리 하고 도망칠 셈이로군."

"곧 상대해 주마, 이 햇병아리야."

알렉스는 피터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한 후 새라를 번쩍 안아다가 교회 나무문 옆의 돌담 위에 앉혔다.

"여긴 시원할 거야. 움직이지 말고 가만 있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면 안 돼요. 용서치 않을 거예요!"

새라는 높직한 돌담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알렉스를 노려보았다.

"저 사나이 얼굴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야. 그 얼굴을 조금만 고쳐 줘야겠어."

"알렉스!"

그녀는 두 발을 버둥거리며 외쳤지만, 알렉스는 기지개를 펴듯 두 팔을 흔들며 유유히 피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피터가 몸을 부르르 떤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보다 호리호리해 보이는 알렉스의 체구를 보고 만만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피터는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를 지르며 알렉스에게 맹렬히 돌진해 갔다. 다음 순간, 뼈와 뼈가 맞부딪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것은 재빨리 몸을 돌린 알렉스가 피터의 턱에 날카로운 한 방을 명중시킨 소리였다. 피터가 끙끙 신음소리를 내자 새라는 자신이 맞은 느낌이었다.

알렉스는 살웃음을 지으며 자기 주먹을 문지른다.

"내 손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어."

벌떡 일어선 피터가 다시 덤벼들었다. 새라는 돌담 옆에 서 있는 떡갈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면서 두 사나이의 혈투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관객은 그녀 말고도 또 있었다. 건너편 집 문에서 나온 다갈색 새끼고양이가 두 남자를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 창문에 쳐 있던 커튼이 방금 조금씩 걷혀지는 것은 그 집주인이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리라.

새라는 신음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두 사람이 일으킨 소동은 내일 안으로 온 동네에 소문이 날 거고, 이어서 롬니마시 전체로 퍼져 나가게 될 게 틀림없다.

이때 갑자기 피터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크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금발을 흩날리며 어깨로 숨을 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새라는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이런 결과가 올 줄 알았기에 말리려고 했었는데, 피터는 나를 떠다밀고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나를 위해 싸웠다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 줬으면무슨 이유로 이렇게까지 싸워야 한담? 남자들이란 이렇듯 어리석고 바보 같은 야만인들이란 말인가?

알렉스는 소동으로 구겨진 스웨터를 매만진 다음, 되는 대로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새라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도 호흡이 거칠었다.

"당신은 이 따위 남자와 결혼하고 싶었나?"

피터에게 경멸의 시선을 던지면서 그가 물었다.

알렉스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는 사이에 새라는 몇 가지 대답할 말을 생각해 보았으나 결국에는 "그래요."라는 말만이 튀어나왔을 뿐이다. 그의 입가에 나타나 있는 웃음, 만족스러워하는 그 웃음을 없애는 데는 그 대답만이 유효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 생각이 적중했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조심조심 땅바닥으로 내려와서는 피터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어찌됐든 피터의 볼 언저리에 난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 줘야겠다고 생각한 건데, 더 이상 발을 떼놓을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소방대원에게 구출된 부상자처럼 자기가 알렉스의 그 큼직한 어깨에 메어져서 도로를 건너고 있는 게 아닌가.

정신을 가다듬고 힘껏 발버둥쳐 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새라를 자동차 조수석에 밀어넣은 것이다. 알렉스는 무슨 짓을 시작할 셈이란 말인가? 그는 피터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는 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탄다. 그의 의도를 간파한 새라가 차문을 열려고 했지만 재빨리 뻗어온 알렉스의 손이 그녀의 손등을 짓눌렀다.

"얌전하게 있어!"

새라는 억센 기세에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피터는 가까스로 일어나서 차 쪽을 바라보며 멍청하게 자기 턱을 문지르고 있다.

"아까 한 말,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알렉스는 나무라듯 한 마디 뱉고는 시동을 걸었다.

"당신하고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새라가 또다시 문의 손잡이를 잡으려 한 바로 그 순간, 소년이 탄 자전거가 커브 길에서 튀어나왔다. 때마침 휘청거리며 도로까지 나온 피터는 그 자전거와 정면충돌을 할 뻔했다.

"바보 같은 녀석, 어디다 눈을 팔고 걷는 거야? 위험하게"

알렉스는 크게 혀를 차며 새라의 손목을 힘껏 잡는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는 액셀을 밟았다.

"위험한 사람은 당신이에요! 길바닥에서 나와 함께 죽을 작정이에요?"

새라는 짜는 듯한 목소리로 쏘아붙이고는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창문 유리창에 코를 대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밖을 내다보는 옆집 여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자동차는 쏜살처럼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백미러를 올려다본 새라의 눈에 도로 한복판에 멍청히 서 있는 피터의 모습이 잡혔다. 그리고 그뒤에서 달려오는 자동차의 모습이 보인다. 무참하게 사고를 당하기 직전, 피터는 간신히 길 옆으로 비켜서서 또 멍청히 서 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그녀는 새하얗게 핏기가 가신 얼굴을 운전석으로 돌렸다.

"꼴도 보기 싫어요, 당신 따위는! , 알렉스! 듣고 있는 거야? 난 지금 꼴도 보기 싫다고 말했어!"

알렉스의 눈이 조수석을 향했다. 그의 입술에는 그 징그러운 미소가 스쳤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냐구? 나는 원래 내 것이었던 아내를 되찾았을 뿐이야."

"나는 이제 당신 게 아니란 말예요."

새라는 분노로 온몸이 마구 떨려 왔다. 그녀는 쉰 목소리로 또 한 번 외쳤다.

"이런 짓을 해봤자 아무 소용 없을 거예요. 나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혼을 할 거라구요!"

 

9

"끈질긴 녀석이군!"

알렉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새라는 움찔하며 그의 옆얼굴로 눈길을 돌렸다.

"따라오고 있어, 저 녀석이."

그는 백미러를 노려본다.

서둘러 뒤를 돌아다본 새라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따라오는 게 피터의 차라는 것은 '저 녀석이'란 말로 알 수 있었지만, 믿어지지 않는 건 그 자동차의 속력이었다. 평소에는 지루할 만큼 엄격하게 교통법규를 지키던 피터가 오늘은 핸들 위에 엎드리듯 몸을 숙이고는 제한속도를 훨씬 초과한 맹속력으로 차를 몰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봐왔던 이미지와는 아주 다른 그의 일면을 보고, 새라는 괴롭게 입술을 깨물었다. 알렉스에게 배신당한 게 괴로와서 피터의 본질을 읽지 못했던 것일까?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다.

만일 피터가 연인 앞에서 보인 것과 같은 온유하고 예의바른 성격만을 가지고 있다면 생존경쟁이 심한 비지니스 세계에서 오늘날과 같은 출세가도를 달렸을 리가 없다. 아까 알렉스에게 덤벼들었을 때와 같은 투쟁심은 처음부터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와 같은 측면을 연인에게는 계속 숨겨 왔을 뿐이다. 그랬기에 교제가 계속됐고,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해 왔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처음 그가 데이트를 신청해 왔을 때 새라는 분명히 거절했을 거다. 자신에게 있어서 피터의 매력은 결국 알렉스와 정반대의 성격을 지녔다는 바로 그 한 가지였으니까. 지금에서야 보게 된 그의 일면은 오히려 알렉스와의 공통점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따라오려면 따라오라지"

알렉스는 재미있다는 듯 말하고는 갑자기 핸들을 팍 꺾었다. 그리고는 양쪽에 큰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오솔길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자동차 경주를 하는 게 아니에요! 쓸데없는 짓은 그만둬요!"

새라는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피터의 자동차도 한쪽 바퀴를 공중에 든 채 오솔길로 접어들며 달려온다. 두 차의 간격이 서서히 좁혀지는 것 같다.

알렉스도 느꼈는지 액셀을 더 세게 밟으며 농장의 나무문 앞을 마치 탄환처럼 통과했다. 그때 마침 농장에서 나오려던 트랙터 운전수는 이 무모한 차에 간담이 서늘해진 듯, 이쪽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 보였다. 그리고는 핸들을 꺾으며 오솔길로 나아갔다. 그런데 피터의 차는!

새라는 눈을 감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피터 차의 브레이크 성능은 상당히 좋았던 것 같다. 그의 차는 도로를 벗어나 그 옆 진흙밭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트랙터와의 거리는 불과 몇십 센티도 안 됐을 거다.

"당신 미쳤군요?"

새라는 알렉스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백미러를 올려다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다.

"저 자동차 운전수에게 말하라고, 그 남자친군가 하는 녀석 말야. 이처럼 좁은 시골길에서 그렇게 위험한 운전을 하는 건 명을 재촉하는 거라구"

알렉스는 속도를 떨어뜨리며 또 다른 오솔길로 차를 몰았다.

"평소의 피터라면 그런 운전은 절대로 안해요! 모두가 당신이 시비를 건 탓이란 말예요!"

"그 정도의 시비에 화를 낸다면 아직도 수양이 모자란다는 증거지."

짐짓 점잔을 빼는 알렉스 앞에서 새라는 몸이 떨려 옴을 느꼈다.

아까 교회 앞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린 알렉스는 그때부터 피터와 싸울 걸 머릿속에 계획하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피터와 마주친 순간 불과 몇 초 만에 그의 성격을 간파했고, 즉석에서 작전을 세워 행동을 개시했던 것이리라. 그 몇 초 동안의 관찰로 반 년 이상 걸친 교제를 통해 자신이 알아낸 것보다 훨씬 많고 정확한 판단을 해내다니.

아무 이유도 모른 채 투우장 속으로 끌려들어온 황소마냥 불쌍한 피터는 알렉스가 휘둘러대는 빨간 망토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마침내는 앞뒤 분별없이 돌진해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겁한 인간!"

새라는 욕설을 퍼부었다. 그때 그녀는 자동차가 해안을 따라 구도로를 달리고 있음을 비로소 알아차리고는 웅크렸던 등을 쭉 폈다.

"당신 집에는 죽어도 안 가요! 화이트애버스로 데려다 줘요!알렉스! 내 말 안 들려요?"

알렉스는 그 물음에 대답할 의향이 없는 듯 저 멀리 수평선을 달려가는 석유 운송선의 증기를 바라보며 태연히 운전을 계속한다. 오늘 바다는 물결 하나 일지 않고 잔잔하다. 바닷가에서는 이름 모를 각종 새떼가 예쁜 발자국을 남기며 모래밭을 거닐면서 먹이를 찾고 있다.

"어서요! 돌아가잔 말예요!"

다시 날카롭게 소리쳤지만 역시 대답은 없다.

알렉스가 자기 집 현관 앞에 차를 세웠을 때, 새라는 재빨리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과는 반대방향인 바닷가를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썰물이 막 나간 모래밭에는 으스러진 해초와 조개류, 그리고 바닷물에 떠밀려온 나무토막 등이 즐비하다. 그녀는 굽 낮은 샌들 자국을 젖은 모래 위에 남기며 묵묵히 걸었다. 발자국 소리에 놀란 새들이 앞다투어 공중으로 날아올랐지만 잠시 후에는 건너편 모래 톱에 다시 사뿐히 내려앉아서 먹이를 쪼기 시작한다.

이윽고 새라는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초여름의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를 고즈너기 바라보았다. 바로 뒤에서 알렉스가 다가오고 있는 건 무거운 발소리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바로 옆에 와서 같이 바다를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도 그녀는 아는 체하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마들렌과 지저분한 짓은 하지 않았어."

알렉스가 불쑥 한 마디 내뱉는다. 일 년 전과 똑같은 완고한 말투다.

"내가 앞으로 50년 동안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 아마 당신도 믿 게 될 거야."

"지금도 믿고 있어요."

새라는 두 손을 모아 팔짱을 끼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LJ의 얘기를 들은 다음에는 싫어도 믿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스의 얼굴이 홱 이쪽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믿는다구?"

평소와는 달리 오히려 불안해하는 목소리를 듣고 새라는 지금까지 읽어내지 못했던 그의 심리를 제대로 알게 된 느낌이었다. 자신의 진실을 아내가 믿어 주게 되면 얽히고설킨 부부간의 문제도 모두 풀어질 걸로 생각하고 있겠지. 문제가 뒤엉킨 원인은 알렉스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완전한 신뢰 없는 완전한 사랑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한 마디 설명도 없이 오로지 신뢰만을 요구하는 알렉스의 태도가 어쩌면 옳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그토록 완전한 인간은 아니다.

어저께 LJ가 해준 얘기를 알렉스가 일 년 전에 본인의 입으로 말해 주었더라면 자신도 기꺼이 그의 얘기를 믿었을 거다.

'마들렌의 속셈을 알게 되자 나도 불유쾌했었다. 그녀에게 다른 일자리를 찾아 주는 중이야.'

라고 했더라면 매트 벤틀리에게서 사전에 무슨 말을 들었든간에 남편에 대한 의심 따위는 즉석에서 버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현실의 알렉스는 모든 설명은 거부한 채 자신의 말만을 믿고 얌전히 입을 다물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사랑을 증명해 보이라고 알렉스는 윽박질렀으며, 그 자신이 자기의 사랑을 증명해 보인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아내가 집을 뛰쳐나가도 붙잡으려 하지 않았고, 변호사를 개입시켜 연락을 취해도 응하지 않고 완강하게 버텼다. 자신의 노예여야 할 아내가 반항적인 태도로 나온 것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노예가 돼달라고 요구하는 그 자체가 사랑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고 뭐람?

"당신의 진실을 믿는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깊고 깊은 슬픔을 섞어 푸념하듯 중얼거린 그 순간 새라는 양팔을 잡혀 알렉스 앞으로 끌려갔다.

"그건 또 무슨 의미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구태여 말한다면사랑 얘기라고나 할까요."

알렉스의 두 팔에 힘이 가해지고 손가락 끝이 새라의 팔을 파고든다.

"방금 내게 한 대 맞고 쓰러진 그 녀석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셈인가? 그런 엉터리 얘긴 아무도 안 믿어. 그 녀석은 당신한테 어울리는 형이 아니야. 그런 남자와 결혼해 봐. 교외의 아파트 단지가 아니면 조그만 정원이 붙은 주택에서 온종일 텔레비전이나 보며 살게 될걸. 이렇게 웅대한 자연 속에서 살아온 새라가 그런 생활을 견뎌낼 수 있을까? 금방 질식해서 죽고 말 거야."

"행복하기만 하면 어디 살든 무슨 상관이에요."

새라는 알렉스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금갈색 눈에는 분명 당혹해하는 빛이 감돌고 있다. 그 역시 자신이 알고 싶어 하던 여자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 녀석은 결코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가 없어!"

"그럴 테죠."

그녀는 조용히 응수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받침목을 감고 뻗어 올라가는 나팔꽃처럼 자신은 피터를 받침목으로 이용해 자신의 참담한 현실과 투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리고 피터에게는 실로 미안한 일이지만 결과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두번 다시 남을 이용하지도 말고, 다시는 남에게 이용당하는 일도 없이 자기자신의 힘으로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야겠다.

알렉스의 얼굴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두 팔에 들어갔던 힘이 빠지고, 새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에는 한겨울과 같은 한기가 스며들 뿐이다.

이 사람은 지금에 와서도 나를 인형 취급하려나 보다. 손발의 실을 잡아당기기만 하면 자기 마음대로 연출할 수 있는 꼭두각시 인형그런 인형극을 즐기려는 생각인가 보다. 나는 애완동물도 아니려니와 조롱받는 헝겊 인형도 아니다. 이 세상에 존귀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서 일생을 살아갈 인간이요, 한 사람의 여성인 것이다.

"하지만 당신과 산다고 해도 나는 행복하게 될 수 없을 거예요."

금갈색 눈에서 발하는 예리한 빛을 보았을 때, 새라는 자기가 이미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두려워하지 않는지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알렉스가 자신의 인생 속에 등장했을 때, 자기는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였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소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높은 하늘에서 알렉스라고 하는 독수리가 날아와서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자신을 채다가 외딴 섬, 바위투성이인 보금자리로 데려갔던 것이다. 그 보금자리 속이야말로 행복이 넘치는 곳이라고 새라는 마음속으로 믿었었다. 따라서 그 보금자리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밖에 나가는 것을 무서워했고, 알렉스라는 지배자를 잃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그를 실망시키는 일이나 불쾌하게 만드는 일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스가 누구를 지배하는 지배자도 아니고, 자신이 누구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노예도 아니며, 서로 독립한 인격을 가진 한 개체란 사실을 이해한 지금, 과거의 공포에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해방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그 보금자리는 절대자인 독수리의 낙원이었던 것이다.

"엉터리 같은 소리 하지 마!"

알렉스가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그 문제로 나를 의심하게 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았었잖아!"

"그래요, 당시의 난 어리석은 자의 낙원에 살고 있었으니까요."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는 그만 해! 내가 마들렌과 부정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건 당신도 믿고 있잖아?"

"마들렌의 일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녀는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집을 뛰쳐나간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 그녀와의 사건이었지만, 나는 집을 나가서야 비로소, 그때까지 내가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왔나를 깨달았어요."

그의 검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건그때의 사건 말고도 내가 부정한 짓을 또 했다는 뜻인가?"

"아뇨, 그런 의미는 결코 아니에요."

새라는 쌀쌀맞은 한 마디로 대답을 대신했다. 설명을 해봤자 알렉스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먼 나라의 얘기로만 들릴 테지.

"그렇다면 무슨 의미지? 말해 보라구. 설명해 줘,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새라의 얼굴에 떠오른 차디찬 웃음을 노려보며 알렉스가 쓰디쓰게 말했다.

"마치 먼 옛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 같군요."

새라는 종알거렸다.

"'정말 어떤 일이 있었던 거예요? 얘기해 줘요, 설명해 줘요'라고 당신에게 애원했더랬지요. 일 년 전 그때 말예요. 그런 내 애원에 당신은 뭐라고 대답했었죠? '설명은 필요 없어. 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구. 그 이상의 질문을 해서 나를 괴롭히지 마' 당신은 그렇게 말했었죠."

해안에 접한 구도로를 달려온 자동차가 갑자기 급정거 소리를 내며 멎는다. 돌아다보니 피터가 바닷가에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며 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마침내 당신을 추격해 왔군요."

"내가 아니라 당신을 추격해 온 거겠지?"

새라는 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당신에게서 상처받은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따라온 거예요."

피터는 모래를 퍽퍽 걷어차며 달려온다. 새들은 새로운 침입자에 놀라 공중 높이 날아올랐다.

"하지만 난 당신들이 싸우는 걸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요. 저분을 데리고 가겠어요."

그녀가 걸어가려고 하자 알렉스가 재빨리 팔꿈치를 잡았다.

"안 돼, 가지 마! 저 녀석한데로 가면 안 돼!"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 새라는 야릇한 만족감을 느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금갈색 눈에 분명 불안한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 강철보다도 완강한 알렉스에게도 연약한 구석이 있다는 증거다. 지금 여기 서 있는 새라는 일 년 전 그의 둥지를 뛰쳐나갈 때의 그 새라가 아니라는 점을 그는 겨우 깨달은 것 같다.

결혼생활의 파국을 결사적으로 극복하는 동안에 새라는 많이 성장했다. 노예 같은 복종을 사랑으로 혼동하고 있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식하고는 자기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자기 머리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누구의 아내의 자리가 아닌 자기자신의 주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놔요, 알렉스!"

새라는 조용히 말했다. 단지 팔꿈치만을 놓으라는 말이 아닌 것을 알렉스도 알아차린 듯하다. 그의 핏기 잃은 얼굴이 그녀를 노려본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얼어붙은 듯이 서 있는 알렉스를 남겨 두고, 새라는 모래 위에 또렷한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 달려오는 피터 앞에 오똑 섰다. 아마 피터의 눈에는 알렉스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그녀와 충돌하기 직전에서야 걸음을 멈췄다.

"얘기는 나중에"

피터는 귀찮다는 듯 새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선 저 비겁한 자부터 처치해야 돼."

"쓸데없는 시간낭비예요, 피터. 알렉스는 '패배'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어떤 비겁한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이기고 마는 인간이라구요."

"내 사전에도 '패배'란 단어는 실려 있지 않다구."

가슴을 펴며 대답하는 피터를 보고 새라는 자신이 쓸데없이 그의 투쟁심만 부채질했음을 깨달았다.

", 그럴 거예요. 하지만 잠시 내 말을 들어 주지 않겠어요? 중요한 얘기예요."

"나중에 듣는대두."

피터는 턱을 앞으로 내밀며 말하고는 팔을 잡으려는 새라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새라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두 사람 다 보기도 싫다는 듯 홱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까 차에서 내려 묵묵히 걸어올 때 남긴 발자국이 저쪽 도로로부터 점점이 이어져 있다. 그녀는 그 발자국을 절대로 다시 밟지 않도록 신중히 발을 내디뎠다마치 먼저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한 듯이

뒤쪽에서 피터의 격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잡았다, 이 겁쟁이야! 네 녀석에게 가르쳐 줄 게 있어"

피터의 목소리는 여기서 딱 끊어졌다. 알렉스가 대답을 하는 기색도 없다. 그 대신 심한 격투를 벌이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고, 얼마 후에는 크게 물보라가 일어나는 소리도 들렸다.

새라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모래밭 위만을 내려다보며 계속해서 걸었다. 그리고 도로 위로 올라가자마자 곧바로 피터의 차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가서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얼마나 지났을까알렉스가 도로로 올라왔으나 새라가 있는 쪽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곧장 자기 차를 집어타고는 타이어의 마찰음을 내며 맹속력으로 사라졌다. 그의 차가 떠난 다음 새라는 비로소 얼굴을 천천히 들고 바닷가를 내려다보았다. 온몸이 물투성이가 된 피터가 비틀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어서 얼굴 표정까지는 읽을 수 없었지만, 그의 굴욕감과 분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막 이곳을 떠난 알렉스의 옷에는 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머리칼도 흐트러지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피터는 알렉스의 한 방에 나동그라졌는지도 모른다.

도로에 올라선 피터가 운전석에 올라타는 동안 새라는 조심스런 태도로 눈을 감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감색 슈트는 아래위 할 것 없이 구겨졌고, 구두 속에도 바닷물이 들어갔는지 그가 운전대 페달 위에 발을 올려놓자 이상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피터는 입을 디문 채 차를 출발시켰고 화이트애버스의 부모님댁에 도착할 때까지 끝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두 갈아입는 게 좋겠어요."

차에서 내리며 새라는 일부러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태연하게 말했다.

"출장 갔다가 돌아온 길이니 갈아입을 옷은 있겠죠?"

피터는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차 트렁크를 열더니 여행 가방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조그맣게 물자국을 남기면서 현관으로 향했다.

새라는 피식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 가련한 피터에게 웃음을 던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알렉스와 처음 만났을 때 입은 그의 체면 손상이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아예 짓밟혀 버린 것이다.

문을 열러 온 어머니는 입을 헤 벌린 채, 피터의 자존심을 더 긁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무슨 꼴이람?"

"바다에 빠졌어요."

새라가 옆에서 얼른 변명했다.

"피터에게 욕실을 쓰라고 해도 괜찮겠죠? 빨리 옷을 갈아입어야 하거든요."

"그래야겠구나."

캘스로프 부인은 상냥하게 말했지만, 피터의 표정을 보고는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모양이다.

그녀는 얼른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안 됐어라갈아입을 옷은 있나? 그렇다면 안심이군. 어서 이층으로 올라가요 계단을 올라가서 오른쪽 첫 번째 문이 욕실이라우."

금발에서는 아직도 바닷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면서 피터는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갔다. 젖은 바지가 다리에 착 달라붙어서 걷기가 불편한가 보다. 한 발짝 옮겨 놓을 때마다 아까의 그 기묘한 소리가 또 난다.

그의 모습이 계단 위에서 사라지자마자, 새라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웃음을 참으려고 몸을 떨었다. 뒤이어 주방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은 캘스로프 부인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니?"

새라는 깔깔거리며 웃다가 딸꾹질까지 했다.

"우연히 알렉스를 만났어요, 우리들"

캘스로프 부인은 얼른 의자에 앉으며 몸을 앞으로 내민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냐니까?"

"보고도 모르겠어요? 알렉스가 피터를 바다에 내던졌어요."

"역시그랬을 줄 알았다."

새라는 다시 입을 가리며 웃어대다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피터의 괴로운 마음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는 조금도 나쁘게 행동하지 않았는데, 알렉스가 처음부터 시비를 걸어온 거예요. 피터도 그렇지, 상대하지 않고 물러섰으면 좋았을 것을 그만 참지 못하고 응수하는 바람에"

"내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어머니를 보고 새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싸움을 말리지는 않았을 거예요. 엄마가 피터를 미워한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나는 그가 싫다는 말을 한 기억이 없다. 네가 집에 데려올 때마다 나는 그래도 정성껏 맞아 주었어"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친구 집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왔던 일 생각나세요?"

새라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날에는 친구 집에 돌려 주겠다며 하룻밤만 집에서 재우겠다고 애원했지만, 엄마는 벼룩이 생긴다는 이유로 그 강아지를 창고 속에 처넣고 잠가 버렸어요. 그래서 그 강아지는 집안에는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했었지요. 엄마의 눈에는 피터도 그 강아지처럼 보이는 거죠? '어디서 주워 온 건지는 모르지만 어서 전에 있던 곳에 갖다 줘라'는 말을 내게 못해 안타까우신 거죠?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소리 지르지 않아도 아직은 잘 들린다."

어머니는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나무랐다.

"너는 요즘 정말로 다루기 까다로운 애가 됐구나. 알렉스에게서 뛰쳐나오기 전까진 누구보다도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딸이었는데"

새라는 그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에 목이 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히고는 쌀쌀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여러 가지 일이 생각나는 날이군요. 내 결혼식 날 엄마가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나세요? '앞으로도 너는 이 엄마의 사랑스런 딸로 있어 다오'라고 말하면서 내게 부드러운 키스를 해주셨죠. 그래요, 엄마에게도 그리고 알렉스에게도 나는 '사랑스럽고 귀엽고 순진한 계집애'로 남아 있어야 했어요. 소꿉놀이로 요리를 만들고 청소를 하고, 신랑과 각시놀음을 하고 엄마를 위해 아기놀이를 하면서 착하게 놀아야 했어요. 하지만 나는 '계집애'도 아니고 소꿉놀이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나는 이제 성장한 어른이에요. 누구의 애완동물도 아니고 누구에게 예속된 노예도 아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한 인간이라구요. 언제쯤 돼야 나를 참된 나로 봐주시겠어요?"

캘스로프 부인은 어안이 벙벙한지 입을 벌린 채 딸의 얼굴을 멍청히 바라본다. 뭐라고 대답할 말도 없나 보다. 새라도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해서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20분쯤 되었을까, 위에서 아래까지 말끔하게 갈아입은 피터가 계단을 내려왔다. 구겨진 체면과 위신까지도 갈아입은 듯 아까와는 아주 딴사람처럼 자신에 찬 걸음걸이다.

"할 말이 있어요. 거실로 가지 않을래요?"

새라는 조용히 말했다.

"셰리 주라도 마시면서 얘기해요."

피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로 들어가서는 자신의 장례식에라도 참석한 듯한 일그러진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새라는 아버지가 아끼는 최고급 셰리 주를 잔에 넘실거리도록 따르고, 작은 글라스에는 자기가 마실 것도 따라 놓았다. 그리고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할 얘기란피터, 정말로 미안한데"

"그 다음 말은 하지 않아도 돼."

피터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 정도도 모를 바보는 아니라구. 이래봬도 수학은 잘했었어"

새라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수학 점수가 좋지 못했어요. 하지만 당신을 좋아했던 건 절대로 거짓이 아니었다구요. 당신하고라면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을 걸로 생각했는데"

"하지만 역시 전남편에게 돌아가기로 결정했단 말이지? 알겠어!"

새라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당분간은 독신으로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의 상냥함에 마음이 끌렸던 건 결혼파국의 반동이란 사실을 깨달았어요."

"상냥하다고? 그런 칭찬을 해주다니 고맙군."

피터는 글라스를 기울여 단숨에 반쯤 들이켰다.

"새라의 사랑을 믿었던 내가 잘못이지. 오늘 여기 올 때부터 어쩐지 이상한 예감이 들더라구"

"어쨌든 정말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 부탁이오."

그는 분노로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리 이런 말 저런 말 해봤자 어차피 당신은 그 남자에게 돌아갈 것 아니겠소? 그러지 말라고 한다면 그건 내 이기주의에 불과하겠지."

그는 남아 있는 셰리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불쑥 일어섰다.

"그럼, 여기 오래 있을 이유가 없으니 나는 그만 돌아가겠소. 어머님께 인사드리지 않고 갈 테니 당신이 잘 말씀드려 줘요."

무슨 말을 하든 그의 마음만 더 상하게 할 뿐이라고 생각한 새라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 현관 홀로 나갔다.

"세탁용 비닐백 하나를 욕실에서 가지고 나왔어."

문을 열면서 생각난다는 듯 피터가 말했다.

"젖은 옷을 담느라고 썼는데 어머님께 말씀드리지 않아도 괜찮을까?"

"물론이죠."

새라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사실은 마음속 깊이 미안해하는 심정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는데

"그 양복, 다시 입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괴로와하다가 문득 말이 나온 순간 그녀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피터는 오늘의 그 굴욕을 생각나게 하는 거라면 옷이건 속옷이건 구두건 몽땅 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런 것들과 함께 어쩌면 나를 둘러싼 생각들도 깨끗이 털어 버리고 싶을 거야. 그래, 그 편이 제일 좋을 거야

피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돌아섰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어, 새라. 당신이 후회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게."

차 쪽을 향하는 그의 입가에 한순간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마지막 대사 한 마디로 자신의 위신을 다소 만회했다고 생각하며 만족하는 것이리라. 그로 인해 그의 자존심이 다소라도 회복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피터는 돌아갔니?"

현관 홀로 돌아온 캘스로프 부인이 딸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그렇게 재미있다는 표정 좀 짓지 마세요. 그를 쫓아 버리고 고소해하다니 너무하세요, 엄마는"

"피터를 상대해 주고 또 보낸 것도 너지 내가 아니다."

어머니는 당연한 말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건 유감스럽다는 둥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은 아무리 봐도 네게 어울리는 형이 아니야."

새라는 입을 다문 채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유감스런 일이지만 어머니의 말은 맞는 말이다. 알렉스와의 파국이 없었더라면 피터 같은 남자에게 눈을 돌리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거다. 늦게나마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게 천만다행이다.

그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소와 달리 말수가 적었을 뿐 아니라 피터의 이름도 알렉스의 이름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저녁식사 후 마음에 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싶어 하는 어머니 대신 새라는 혼자 주방에 가서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부모에게 편히 주무시라는 인사말을 하고는 얼른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일찌감치 머리맡의 전등불을 끄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새라의 눈을 뜨게 만든 것은 코를 자극하는 그윽한 커피 향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떠보니 창문의 커튼이 모두 젖혀져 있고 눈부신 햇빛이 방안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이쪽을 향해 커피 잔을 내미는 알렉스의 얼굴이 보였다.

새라는 마치 쓰러졌던 오뚜기가 발딱 일어나듯이 튀어올라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어찌나 서둘렀던지 하마터면 알렉스의 손에 들려 있는 잔을 쳐서 떨어뜨릴 뻔했다.

"내 방에서 뭘 하는 거죠?"

일찍 일어난 듯 팔팔한 알렉스의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 새라는 두통이 일기 시작했다. 그와 대등하게 맞서려면 무엇보다도 기력이 필요한데 이제 막 잠이 깼으니 그런 기력이 있을 턱이 없다.

"나가요!"

새라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공격무기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자 알렉스는 재빨리 옆에 있는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는 침대 위에 두 손을 짚고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가 내쉬는 숨이 얼굴에 닿자, 새라는 몸을 빼서 베개에 등을 기댔다.

"나가라고 했잖아! 엄마! 엄마!"

어머니는 왜 알렉스를 이층까지 올려 보냈단 말인가? 딸이야 어찌되든 어머니는 아무 상관도 없단 말인가?

"어머니는 외출하셨어."

알렉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우유가 떨어졌다면서 나가시더군."

우유가 떨어졌다는 말은 조금도 믿기지 않지만 지금 이 집안에 자기와 알렉스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상대방은 셔츠와 회색 바지만 입고 서 있다. 나는 가슴이 깊이 팬 속이 비쳐 보이는 네글리제 하나만 걸치고 있고. 이럴 줄 알았으면 두꺼운 파자마라도 입고 자는 건데

"꼭 할 얘기가 있다면 내가 옷을 갈아입을 동안만이라도 밖에 나가 있어요."

"내가 나가면 이내 문을 잠가 버리려고 그러지?"

알렉스는 입을 실룩이며 능청을 떤다.

"그렇게는 안 될걸. 지금 이대로 얘기할 테니 차분히 들어 줘."

"듣기 싫어요, 당신 얘기 따위는 한 마디도 듣기 싫단 말예요!"

알렉스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고 눈동자에서는 이상한 빛이 발산된다.

"나가 달라니까요."

새라는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이제는 알렉스쯤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그의 얼굴에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뭔가가 있다. 불안과 전율로 점점 숨이 막혀 온다.

"그건 안 돼, 새라."

허스키한 목소리다.

"당신과 헤어져서 사는 생활은그런 생활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새라는 눈을 꽉 감고 베개에 등을 기댔다.

"손대지 말아요!"

알렉스가 침대로 올라오는 기색을 느끼고 눈을 감은 채 비명을 질렀다.

"그럼 억지로라도 내 말을 들어 줘."

한숨을 깊이 내쉬면서 알렉스가 말했다.

"그 정도는 양해해 줄 수 있지?"

그녀는 추운 듯이 몸을 떨며 눈을 떴다.

"좋아요. 내게 하고 싶다는 말이 대체 뭐죠?"

무슨 얘기를 듣든간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상황이 변할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의 말을 들어 주기로 하자. 그래서 알렉스의 속박으로부터 영원히 해결될 수만 있다면

 

10

알렉스는 침대 위에서 자세를 고쳐 앉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커피 잔을 들어 새라에게 내밀었다.

"식겠군, 어서 마셔."

침대 위에 있던 시트로 가슴께를 가린 다음 그녀는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 잔을 받아들었다.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는 동안 진한 커피 맛과 향기로 조금은 머리가 맑아진다.

"내 어린 시절의 얘기를 아직 들려 준 적이 없었지?"

새라의 옆얼굴을 유심히 응시하면서 그는 얘기를 꺼냈다.

새라는 고개를 반짝 들었다.

"물론 말하지 않았었죠. 그 이유는 잘 알고 있을 텐데"

아무리 듣고 싶어해도 짜증만 부리며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타인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은 어두운 과거라 할지라도 아내로서 사랑하는 남편의 모든 것을 알고 기쁨도 괴로움도 공유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심정이 아닐까.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사소한 것 하나 빼놓지 않고 알렉스에게 얘기했었다. 그를 알게 되기까지의 19년 동안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어두운 과거라고는 단 한 가지도 없었지만

"털어놓은 적이 없었지."

알렉스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말하지 않고 계속 지낼 수만 있다면 얘기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하지만 상황이 할 수 없게 됐군. 내가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얘기는 했었지?"

"."

새라는 알렉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는 나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다는 말도 했을 텐데친척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어. 어머니의 양친, 즉 외조부모는 살아 계셨지. 지금부터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외조부는 지방유지인 변호사였어. 어머니는 그 변호사의 외동딸로 자라났는데,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나를 낳았던 거야. 외조부모는 난리를 쳤었지만 어머니는 그 남자가 누구라는 사실에 대해서 끝까지 함구했다더군. 결국 외조부모는 소문날 게 두려워서 어머니를 시골로 쫓아 버렸고, 어머니는 나를 낳은 다음날로 숨을 거두었대. 외조부모는 나를 집으로 데려오지 않고 곧장 고아원에 보냈고비록 딸이 낳은 자식이기는 하지만 사생아를 자기들의 손자로 인정할 수는 없었던 거지"

새라는 알렉스가 얘기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숨까지 죽이며 듣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갔다.

"고아원 생활이 어떻다는 건 실제로 체험해 본 사람이 아니고는 짐작도 할 수 없어. 내가 있던 고아원은 다른 곳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었지. 그렇다 하더라도 먹는 거라곤 항상 차디찬 빵 조각뿐이었고, 고아끼리는 언제나 약한 녀석을 때려 주곤 했었지. 자기 개인의 소유물이라고는 단 한 가지도 없었어. 방도 옷도 학용품도 그리고 시간까지도 말야. 기상에서 취침까지 모든 일을 벨로 알리는 신호와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세계였지.

어쩌다가 친구를 사귀더라도 어떤 녀석은 부모나 친척들에게, 어떤 녀석은 수양 부모에게 가버리곤 했어. 단체로 거리에 산책을 나갔을 때 우리는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한없는 부러움을 느끼곤 했어. 고급 옷이나 구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어. 그들의 눈빛, 구김살 없는 그 눈빛이 죽고 싶을 만큼 부러웠던 거야."

커피 잔이 새라의 손 위에서 달가닥 소리를 냈다.

알렉스는 조용히 잔과 받침접시를 받아서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고 얘기를 이어나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설비와 대우는 결코 나쁘지 않았으니 고아로서는 은총을 입은 처지였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무리 시설이 좋고 넓은 뜰에 잔디와 그네가 있다 하더라도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잿빛 세계임에는 틀림없었어. 철이 들면서부터 나는 그 높은 담 밖으로 뛰쳐나갈 궁리만 했지. 12살이 됐을 때 나는 마침내 어두운 밤중을 이용해 사무실의 자물쇠를 깨고 숨어들어갔어."

한숨을 푹 내쉬는 새라에게 그는 차디찬 웃음을 던졌다.

"걱정하지 마, 뭘 훔치러 들어갔던 건 아니니까. 나는 정보가 필요했거든. 내 신분에 대해서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세상을 떠났고 친척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다는 말만 들어왔었는데, 나는 좀 더 자세한 사항을 단 한 가지라도 알고 싶었던 거지. 그렇다면 선생이든 누구에게든 물어보고 알아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 내게는 그런 지혜가 없었댔어. 찾아낸 카드를 보고 나는 처음으로 내 외조부모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아냈지. 그리고 내가 사생아라는 것도."

"그럼 그때까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군요?"

새라가 쉰 목소리로 묻자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고아원 측에서는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는 편이 당사자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끔찍이나 신경을 써준 거지."

그의 입술에 또다시 차디찬 웃음이 떠오른다.

"그런 배려를 고맙게 받아들였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 그런데 나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어. 어린 소견으로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필사적으로 내 행방을 찾고 있는데 그곳 원장이 고의적으로 알려 주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새라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외곬수로만 골똘히 고민했을 12살짜리 소년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그녀는 살그머니 알렉스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손의 냉기가 아플 만큼 살갗으로 전해 온다.

"그 다음날 나는 고아원에서 도망쳤어. 서류에 적혀 있던 주소를 물어물어 외할아버지 집을 찾아갔는데, 그때 두 분의 얼굴은 지금도 눈에 선해. 두 분 모두 공포에 질려서 기절하기 일보직전이었어. 나는 즉석에서 경찰에 넘겨져 고아원으로 다시 끌려갔어. 고아원에서는 외조부모보다 훨씬 따뜻하게 맞아 주었지만 규칙을 무시한 이상 벌을 받아야 했지. 나는 정원 청소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어. 마침 10월이어서 낙엽이 쌓인 넓은 정원은 쓸어도 쓸어도"

알렉스는 한순간 괴로움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후 가을이 오기만 하면 나는 그 계절이 공연히 싫어졌어. 그리고 그로부터 3, 4년 동안 몇 차례나 수양아들로 낯모르는 집에 입양해 갔지만 그때마다 도망을 쳐 고아원에 다시 끌려왔지. 또다시 고아원에서도 수없이 도망을 쳤고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몹시 다루기 힘든 소년이었던 것 같아. 마지막으로 도망을 쳤을 때는 고아원 측도 포기했는지 열심으로 찾지 않았던 듯해. 나는 일거리를 찾아다니며 두번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지 않았지. 그것이 내 소년 시절과의 결별이자 동시에 내 새 인생과 만나게 되는 동기가 됐어. 마침 심부름꾼으로 정착한 거리가 영화회사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월 가였으니까."

오랜 침묵이 흐른 뒤에 새라는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아버지에 대한 사실을 알리기 싫어서였어요?"

알렉스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살웃음을 지었다.

"그런 점도 있지만, 실은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도망치고 싶은 내 약한 마음 때문이었을 거야. 지금도 나는 가을이 되어 빨강 노랑으로 물든 나뭇잎을 보면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어져. 왜 그러느냐고 묻는다면 뚜렷한 이유도 없으면서 어쨌든 숨어 버리고 싶을 뿐이야. 전에 만든 영화에서 가을 숲속의 장면이 하나 필요했는데, 그때 나는 죽고 싶었어. 며칠 동안이나 잠을 못 이루었고, 촬영현장에서도 식은땀을 흘리며 구토증으로 고생을 했지. 완성된 영화를 본 평론가들은 그 장면이야말로 걸작이라며 입을 모아 칭찬했지만, 나는 사실 그 장면은 한 번도 보지 않았었어. 그 장면이 나오면 반드시 눈을 감아 버렸으니까"

그 영화는 새라도 봤는데 그 장면에서 받은 감동이 또렷하게 마음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왜 그토록 쓸쓸하고 적막하고 비통하게 가슴에 와 닿았는지 이제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아름다운 화면에는 감독 자신의 마음의 음영이 반영돼 있었던 것이다.

"고아원 밖에서 생활하게 된 이후 무엇보다도 감격스러웠던 일은 내 방을 가지고 나만이 쓰는 침대에서 잠을 자게 된 일이었어."

꼭 잡은 두 사람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알렉스는 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벨 소리에 속박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이었지. 그로부터 l0여년 동안 나는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았어."

", 알고 있어요."

독신 시절의 알렉스와 소문이 돌았던 여자들의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러한 새라의 생각을 간파한 듯 알렉스는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미소 지었다.

"새라를 만날 때까지 나 자신은 여자로 인해 마음이 동요되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자신했었어. 애써 얻은 자유를 놓치기가 죽어도 싫었기 때문에 결혼 따위는 생각해 본 일도 없었고. 그런 내 앞에 돌연 새라가 나타났던 거야. 그날 일 기억하고 있어?"

그는 추억 속을 더듬는 표정이다.

"새하얀 데님 상하의를 입고 바싹 긴장한 당신이 인터뷰 신청을 해왔을 때, 나는 자칫했으면 '그대로 돌아가라'고 말할 뻔했어. 왜냐구? 당신한테 첫눈에 반해 버렸기 때문이야. 그때 당신은 l4살쯤밖에 안 된 소녀로 보였기 때문에 나 같은 노총각의 동반자로 맞기는 애석하다고"

새라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바보였군요."

"그 정도로 새라는 앳되고 청순해 보였어."

알렉스의 표정은 진지했다.

"긴장이 풀리더니 당신은 실로 은은하고 밝은 성품을 드러내더군. 나는 새라가 부러웠어. 뭐라고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갓 피어난 꽃처럼 행복에 차 있었다고나 할까?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난 사람이라는 걸 첫눈에 알 수 있었지. 그런데다가 어른스러운 면도 있었어.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나면 흔히 응석이나 부리고 고집이 센 것이 보통인데, 당신에겐 그런 면이 조금도 없었단 말야.

나는 점점 당신에게 매혹되는 한편으로 내 내면이 발견될까 봐 두려웠지. 내가 자라난 추잡하고 차디찬 세계를 알게 되면 금방 도망칠 것 같았어. 당신에게서 사랑을 받고 싶었던 거지. 만약 당신의 사랑을 잡을 수만 있게 된다면 나도이런 말을 하면 머리가 좀 어떻게 됐다고 생각하겠지만, 내 자신의 과거를 새라와 같이 행복한 색깔로 다시 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어."

새라는 뜨거운 눈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 알겠어요. 그건 조금도 잘못된 생각이 아니에요."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눈을 감으며 그 손에 입술을 댔다.

"어제 당신이 나를 심히 비난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내 잘못을 깨달았어. 내 회색 세계를 당신이 기웃거리는 것을 경계한 나머지 숨겨서는 안 될 아주 소중한 것당신에게라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 본심까지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야."

"한 가지만 더 말해 줘요."

알렉스의 얼굴에 검은 고뇌의 빛이 감도는 걸 보고 새라는 조용히 말했다.

"왜 아이를 가지지 않으려고 했나요? 아기가 태어나야만 소년 시절 당신의 꿈이었던 진짜 가정의 터전이 마련될 텐데"

그는 빨개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을 떴다.

"누가 됐든 당신과 나 사이에 다른 인간이 끼어드는 게 싫었기 때문이야. 이렇게 말하면 아직도 자신을 숨기고 있다고 말하겠지? 좀 더 솔직히 모든 것을 다 털어놓는다면 당신의 세계에서 밀려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거야. 당신의 애정을 한 몸에 받고 행복하게 그리고 순진하게 자라나는 아이의 눈빛을 보면 소년시절의 그 추억이 다시 떠오를 것만 같았어. 나는 그걸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고"

"알렉스"

새라는 눈물에 목이 메어 알렉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그런 말을 여태 한 번도 하지 않았죠? 내가 집을 뛰쳐나갈 때 바로 뒤쫓아 와서 지금 그 얘기를 들려 주었더다면"

알렉스는 그녀의 몸을 살며시 껴안고는 갓난아기를 재울 때처럼 조용히 흔들어 주었다.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것실제로 그것이 아내로서의 불만의 씨였는데, 알렉스는 반대로 아내가 영원히 어린애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마음이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었을 줄이야

"어리석은 내 자존심 때문이야."

그는 새라의 머리에 볼을 비비면서 말했다.

"내 마음을 털어놓는 건 당신에게 내 약한 면을 들춰내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어. 당신은 나를 약한 면 따위는 없는 강한 사나이라고 봤고 나 역시 그렇게 보이고 싶었지. 그리고 처음에는 당신이 진짜로 이혼을 생각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었어. 내 진실을 솔직히 믿어 주지 않는 새라를 괘씸하게 생각했고 화도 났었어. 그 마들렌에게 그만 당했던 거야"

며칠 전 LJ가 들려 준 얘기를 알렉스가 다시 한번 되풀이하는 동안 새라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조용히 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흥미가 전혀 없다는 말을 하는 순간 그녀는 온갖 수단을 다 써가며 나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했던 거야. 나는 그래도 도량을 가지고 그녀를 LJ에게 부탁했지. 이제는 한 짐 덜었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그날이 바로 그날이었어. 그녀의 남편 벤틀리가 당신을 만나고 간 날 말야."

"자칫했으면 마들렌에게 걸려들었을 뻔했군요."

생각에 잠기면서 새라가 중얼거렸다.

"그녀에게는 마력 같은 게 있어. LJ의 말에 의하면 지금은 모 정치가 부인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더군. 그 정치가의 가정은 곧 대소동이 일어날 것 같다는 거야."

"하지만 그때는 그런 사정 얘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나보고 믿으라고만 했잖아요?"

새라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그 이유도 이제 알 만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무조건 당신을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고 싶었던 거죠?"

그때의 상황에 적절한 합리적 사고방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그 자체가 당시 알렉스의 절실한 마음의 표출이었으리라. 어머니가 아들에게 쏟는 절대불변의 확고한 사랑을 그는 필사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점을 몰랐던 자신이 후회스럽다.

하지만 사실 일 년 전의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깊은 통찰력을 요구한 것은 무리였다. 그것을 요구한 알렉스 자신은 아내의 사고력이 성장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언제까지나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앳되고 청순한 아내로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한편으로는 사려 깊은 성숙한 아내가 돼주기를 요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슬픈 모순투성이였단 말인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어두운 과거를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알렉스의 태도가 어쩌면 옳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일 년 동안의 고독과 고뇌에 의해 인간적으로 크게 성장했기 때문에 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예컨대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얘기를 들었더라면 동정은커녕 그를 멸시하고 그에게서 멀리 도망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 알렉스는 두 사람을 위한 가공의 낙원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당신 변호사에게서 이혼수속에 필요한 서류가 왔을 때도 나는 오만에 차 있었지."

알렉스는 또 말을 시작했다.

"당신을 직접 만나기만 하면 이혼 얘기 따위는 금방 없었던 걸로 만들 자신이 있었는데, 내 뜻과는 달리 당신은 내 앞에 나타나 주지를 않았어."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새라가 재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부모님에게서 들었을 때의 충격은 대단했었지. 어리석은 자만감 따위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가슴속이 텅 비는 것 같더군.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직 나는 허영을 버리지 못했었어. 당신 앞에서 땅바닥에 엎드려 사과해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 자신을 꾸짖고 있었지. 그런데 그때 마침 병원으로부터 당신의 사고소식이 날아온 거야. 새라가 내 가슴으로 달려오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지. 당신 기억에 뭔가 이상이 생겨서 이혼사건을 완 전히 잊어버린 거라고"

"그래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하려 했던 거로군요?"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는 새라를 알렉스는 후회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파렴치한 짓이란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게 최후의 기회로 생각됐던 거야. 그저 하루 이틀 동안만이라도 옛날처럼 둘이서 생활하며 당신의 본심을 확인하고 싶었어. 일 년 간의 별거로 당신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나 이외의 다른 남자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더군내 말이 틀리나?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했었어?"

부드러우면서도 냉정한 목소리에는 본심을 드러냈다는 불안한 감정이 섞여 있다. 새라는 그의 그런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피터에 대해서는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어요.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기는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슬픈 착각이었어요."

그녀는 알렉스의 얼굴에 흘러내려온 검은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어 올려 주었다.

"그가 돌아갔다는 말을 어머니가 해주시던가요?"

", 어젯밤에 전화를 받았어."

망설이며 대답한 알렉스는 새라가 화난 표정을 짓자 얼른 다음 말을 덧붙였다.

"어머니를 나쁘게 생각하지 마.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화낼 것을 각오하고 전화를 해주신 거야. 어제 당신이 어머님께 무슨 말을 했던 것 같더군. 어머니는 내게 제발 부탁이니 우리 새라를 어른으로 대해 주라고 말씀하셨어. 그렇게 대하지 않았던 게 가장 큰 문제지, 그것에 비하면 마들렌 사건 따위는 사소한 문제라는 말씀도 하셨구."

"어머"

새라는 어머니의 깊은 애정이 비로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요, 나는 당신에게 응석받이 어린애에 불과했기 때문에 당신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얘기를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던 거예요."

"알았어, 이제 그런 과오는 두번 다시 저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우리 부모님은 당신의 성장과정을 모두 알고 계시나요?"

새라는 문득 질투심이 생겨서 물어보았으나 알렉스는 분명하게 머리를 가로젓는다.

"LJ에게만 아주 일부를 털어놓았을 뿐이야. 그는 나한테는 친아버지나 같은 존재거든."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LJ도 당신을 친아들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가 나를 만나러 왔었어요. 알고 있었죠?"

알렉스는 불시에 한 대 얻어맞은 사람마냥 눈을 동그랗게 떴다.

"LJ? 언제? 당신한테 무슨 말을 했지?"

새라가 하는 얘기를 그는 잠자코 들었다.

"쓸데없는 참견도 정도가 있지. 나는 마들렌과의 사건의 진상을 내 입으로 직접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는 또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당신은 내 진실을 믿을 수 있었단 말인가?"

", 그리고 그 문제는 이제 관계없다고 말하기까지 했잖아요? 문제는 당신 자신에게 있었거든요."

"그럼, 지금은 어때?"

알렉스는 숨을 죽이며 새라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쉰 듯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사랑해, 새라. 내게로 돌아와. 어디든 당신 좋은 곳에서 살면서 두 사람의 인생을 다시 쌓아나가는 거야. 런던에서 살고 싶다면"

"사는 장소 따위는 아무 문제가 아녜요. 지난날 런던에 데려가지 않는 걸 섭섭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도시생활을 부러워해서가 아니었어요. 당신의 인생 중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내쫓기는 것 같아서였지요."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당신이야, 새라."

"내가?"

진정이기를 빌면서 새라는 정열이 용솟음치는 금갈색 눈을 응시했다. 홍조 띤 알렉스의 볼 언저리가 조금씩 떨리고 입에서는 안타까운 신음소리가 났다.

", 그래. 몰랐었어? 이전의 나는 분명히 일 속에서 살아왔어. 지금도 물론 영화제작을 사랑하고는 있지만 당신을 알고 난 후론 영화제작은 첫째 자리를 당신에게 넘겨주었다구."

그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엷은 네글리제 깃에 싸인 새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보드라운 살갗을 입술로 더듬었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욕망에 몸을 불태우며 새라는 조금씩 떨기 시작했다. 부부생활 4년 동안, 가공의 낙원을 허물어뜨리지 않겠다고 애써 온 알렉스는 침대 속에서도 늘 아내가 어리다는 것을 배려해서 자신의 욕망에 제동을 걸곤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막연한 불만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적극적인 행동을 할 만큼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있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 정신적으로 완전한 어른으로, 완전한 여성으로 성장한 새라는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더라도 자신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어떻게 행동하면 되는지를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알렉스의 목덜미에 두 손을 감아쥐고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웠다. 그리고는 초조함에 떨리는 손으로 셔츠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그 셔츠 속에서 갑자기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손으로 전해 온다.

"사랑해요."

그녀는 자진해서 남편의 입술에 키스했다.

"사랑해 줘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새라"

두 사람의 몸이 격렬하게 부딪는 그 충격으로 새라의 이가 작은 소리를 냈다.

"달링, 더 참을 수 없어. 미칠 것 같아."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면서 알렉스는 새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껍질을 완전히 벗어 버린 성숙한 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사랑하고 있어, 달링."

"나도 사랑해요."

그 말을 반복하면서 두 사람은 뜨거운 파도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일 년 동안의 깊고 긴 잠에서 눈을 뜬 욕망은 그칠 줄을 몰랐고 정열은 식을 줄을 몰랐다. 격렬한 환희 속에서 두 사람은 시간을 잊었고, 모든 생각을 잊었다. 오로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다가 마침내 낙원의 입구를 발견하고는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이제는 가공이 아닌 두 사람만의 진실한 낙원의 정상을 목표로

얼마가 지났을까. 두 사람은 나른한 몸을 침대 위에 눕힌 채 조용히 껴안고 있었다. 밀도 짙은 환희의 여운과 깊은 만족감이 두 사람의 눈꺼풀을 무겁게 했다.

이때 갑자기 아래층에서 문을 여닫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가 현관에서 주방으로 이어진다. 새라는 땀에 젖은 팔다리를 움직이며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어머니가 돌아오셨어요. 어서 일어나 옷을 입는 게 좋겠어요."

알렉스의 손이 그녀의 보드라운 살갗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꼭 일어나야 되나?"

", 유감이지만"

새라는 미소 지으며 응석받이가 된 남편의 손을 예쁘게 때려 준다.

알렉스는 투정을 부리며 일어나서 침대를 내려갔다. 그리고 방바닥에 벗어던진 자기 옷들을 주섬주섬 주워입었다.

"또 한번 허니문을 다녀올 필요가 있겠는걸."

그는 셔츠 단추를 끼면서 중얼거리다가, 남편의 동작을 침대 위에서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아내를 발견하고는 위협하듯 노려보았다.

"계속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또 옷을 벗고 그리로 갈 거야."

새라는 팔을 위로 돌려서 깍지를 끼고는 느긋하게 한쪽 무릎을 세웠다.

"올 테면 와봐요. 하지만 어머니가 계단을 올라와도 난 몰라요. 그런데 허니문은 어디로 가죠?"

"외딴 섬 별장, 마음에 드는 데가 있어. 그곳이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거고그러니 온종일 침대 속에 있을 수 있어."

"온종일? 지루하지 않을까요?"

"내 걱정은 마. 그리고 당신에게도 절대로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해줄 거야."

그는 힘차게 대답했다.

"어쨌든 한 이틀 동안은 단둘이서 앞으로의 일도 계획할 겸 얘기를 좀 해보자구."

"앞으로의 일?"

새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 어디에 살 것인가,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하는가, 가족계획은 언제부터 시작할 것인가"

어리광 대신 진지한 빛이 새라의 녹색 눈동자에 떠오르는 것을 보고 알렉스는 입을 다물었다.

"아직 일러요, 알렉스."

새라는 상냥하게 말했다.

"아기는 있으면 좋겠지만당신 마음의 준비도 있어야 하고, 아기의 탄생을 우리 둘이 모두 마음으로 기뻐하게 될 때라도 늦진 않아요. 그리고 나 자신도 당분간은 지금 일을 계속하고 싶구요. 당신이 장기간 해외 로케이션을 나가 있는 동안 당신의 일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지내고 싶진 않단 말예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결혼이란 어려운 거란 생각이 들어요.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하나하나 노력을 쌓아나갈 때, 비로소 동경도 아니고 꿈의 세계도 아닌 진짜 결혼생활을 구축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 각기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우선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며 격려해 나가기로 하자구요."

그렇게 하다가 어쩌면 알렉스는 평생을 두고 아기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하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새 생명을 이 땅에 탄생시키느냐 아니냐 하는 중요한 문제를 그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결코 없고, 또 강요해서도 안 될 일이다.

알렉스가 침대 위에 앉으며 아내의 얼굴에 그 큰 손을 얹었다.

"사랑해, 새라."

만감이 교차하는 낮게 깔린 목소리를 듣고 새라는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꽃처럼 화사하고 따사로운 얼굴로 종알거렸다.

"나도요, 알렉스. 서로 이 점만 잊지 않는다면 문제없을 거예요. 우리들의 일과 미래도 모두"

그녀의 입술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