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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2

센터 회의실에는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서유진과 센터의 직원들 통역사 그리고 송하섭 선생이 이미 와 있었다.

유리와 민수는 성폭력상담소장이 이미 다른 쉼터로 데려다 놓은 상태였다.

9시 뉴스가 끝날 무렵 인권운동센터의 전화벨이 울렸다.

젊은 남자 간사가 전화를 받고는 곧이어 스피커폰으로 그것을 돌렸다.

오늘 방송의 담당 피디였다.

방송은 예정대로 나갈 겁니다.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오늘 낮부터 자애학원 쪽에서 항의가 대단합니다. 아까는 저희 방송국의 간부에게까지 전화가 왔네요. 그분들이 아마 백이 대단들 하신가 봅니다. 저희로서는 가끔 겪는 일입니다만, 그쪽에서 많이 힘드실까 봐 알려드립니다. 경찰이 움직이지 않으니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십시오, 서울에서 도와드릴 일 있으면 도와드릴게요. 아이들 잘 있지요?”

마지막 말을 하면서 피디는 자신도 몹시 긴장했는지 애써 웃는 듯했다.

많이 겪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그 역시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쪽에서 괜찮다는 대답을 듣고 통화는 끝났다.

방송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회의실의 시계초침 소리가 벽에 부딪혀 가는 비처럼 사람들의 어깨위로 내리고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던 강인호가 복도로 나가 담배를 물었다. 그때 진동이 울리고 문자가 도착했다.

 

여보 무슨 일이야? 학교에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내였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요즈음 아내와 연락이 뜸한 것을 의식하고 천천히 자판을 눌렀다.

 

별일 없지? 나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 당신이 늘 나를 믿어주니 나는 괜찮아.

 

회의실 안에서 짧은 탄성이 들렸다. 프로그램이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담배를 끄고 얼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다시 문자가 왔다.

 

그럼. 내가 당신 안 믿으면 누가 믿어. 자기 홧팅! 우리 힘내... 아자!

 

강인호는 전화기를 들여다보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것을 껐다.

 

-박보현 선생은 저를 소파에 쓰러뜨렸어요. 그리고 제 바지를 벗겼어요. 그러고는자기도 바지를 벗고 자기 성기를 제 항문에……

-반항할 수는 없었나요? 도망간다거나……

-반항하면 밤새 맞아요

-그러면 동생 영수도 그날 그런 일을 당한 건가요?

-모르겠어요. 그날은 어떤 일을 당했는지.

-그럼 그전에는 그런 일을 당했습니까?

-

-어디서 당했습니까?

-박보현 선생님의 집에 데리고 가거나 아니면 기숙사의 목욕탕에서요.

-동생이 죽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자살이라고 생각했나요?

-동생은 자살할 아이가 아니에요. 그럴 지능이 없어요. 그런데 동생은 그런 일을 당하고 나면 아파서…… 아파서 며칠 동안 걸음도 제대로 못 걷고…… 아파서…… 동생이 아파할 생각을 하니까……

서유진과 여자 간사가 서로 두 손을 붙들고 울었다. 이제 아이들 앞이 아니니까 울어도 되는 것이다.

그때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 간사가 소리쳤다.

벌써 댓글들이 올라오고 있어요! TV 프로그램 사이트뿐 아니라 우리 센터 홈피에도 올라와요. 이제 됐어요!”

그들이 고통받았던 것은 폭행 때문만은 아니었다.

버림받고 고립되었다는 느낌, 아무도 우리를 돕지 않을 거라는 절망, 그런데 이제 그들은 혼자가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 순간 그것을 확인했고 존재의 밑바닥부터 기쁨과 감격으로 흔들렸다.

존재의 밑바닥부터 흔들린 것은 그들뿐만은 아니었다.

 

그밤 이후 온 무진시가 흔들거렸다.

과거 민주화운동의 훈장을 장롱 서랍 속에 넣어둔 원로들이 오랜만에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집을 나섰고 예산을 더 많이 타내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던 민주화운동단체들이 잠시 손을 놓고 이 작은 운동센터를 주목했다.

서울에서까지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TV 뉴스마다 자애학원의 비리가 보도되었다.

시장에서 학교에서 관공서에서 인터넷에서 온 사방에서 자애 자애 자애무진은 자애의 도가니였다.

정의는, 깊은 땅속에 묻혀 있던 부드러운 흙이 깊은 쟁기질에 얼굴을 내밀듯 솟아나서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한 것이라는 오래된 전설을 확신시켜주는 듯했다.

무진 인권운동센터는 그날 이후 당직자들이 번갈아 밤을 지새워야 했다.

응원하는 사람들의 방문과 격려에 응대하고 물품과 성금을 접수하는 데만도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방송이 나간 바로 다음 날 장경사는 제 손으로 자애학원으로 가서 이강석 교장과 이강복 서무실장, 박보현 생활지도교사를 체포하였다.

체포되는 순간 교장 이강석과 서무실장 이강복은 막 강인호에 대한 기간제교사 해임 통보를 논의하려던 참이었다.

어제 강인호는 TV 프로그램에 나와-모자이크 처리된 상태이긴 했으나 그게 강인호라는 건 아는 사람은 알아볼 수 있었다-자애학원에 대해 여러 가지 불리한 증언을 했다.

아이들에 대한 구타와 성폭행, 수화를 할 수 있는 교사의 절대부족, 그리고 린치 등에 이르기까지.

설마 긴급체포까지 당할 줄 몰랐던 그들은 일단 강인호를 부르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경사가 먼저 도착했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경찰서로 가게 되었다.

장경사로서는 사실 이들의 행보를 불안해하던 참이었다.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통보를 하고도 경찰 측에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말미를 주었을 때 회유를 하든 합의를 하든 하다못해 어디론가 쫓아 없애버리든 사안을 마무리했어야 했다.

그러나 역시 오래된 권력은 나태해진다.

그건 어쩔 수가 없는지 그들은 그저 어제처럼 오늘도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생각에 아무 대비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토록 힌트를 주었건만 이제 그로서도 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오랜 경험을 가진 그로서는 늘 하는 생각이었지만 나쁜 놈들이 아니라 어리석은 놈들이 수갑을 찬다.

맹수는 다친 사슴 한 마리를 잡을 때도 결코 방심하지 않는 법이다.

그가 수갑을 채우는 순간, 교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장경사를 바라보았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누그러지는 기색을 보이면 네가 그동안 가져간 게……

뭐 이런 계산이라도 하자고 덤빌 것처럼 교장은 아직도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런 인간에게는 어차피 강경책이 묘수여서 장경사는 무표정한 어투로 미란다 법칙을 읊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법정에서 불리한 증언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그동안 가져간 게 있으니 그래도 친절하게 한 마디 한다는 투로 덧붙였다.

봐드리는 겁니다. 방금 수업 시작해서 복도에 아무도 없을 겁니다. 도와달라고 소리쳐도 여기 아무도 들을 사람도 없으니, 가시죠!”

서무실장 이강복은 다리부터 벌벌 떨고 있었다.

순간 장경사는 이들이 농아들을 성폭행했으리라는 것을 처음으로 확신했다.

그건 그로서는 거의 동물적인 직감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을 상대해왔다는 것이 순간적이었지만 몹시 불쾌해졌다

장경사, 우린 아니오, 우린 그런 일을 맹세코 한 적이 없어. 장경사가 알잖아. , 장경사!”

서무실장 이강복이 울상을 지으며 소리를 치자 장경사는 김순경에게 턱짓을 해서 그들을 경찰차에 태웠다.

이윽고 김순경은 다른 순경과 함께 박보현을 체포해서 다른 차에 태웠다.

이건 음모야! 빨갱이들이 하는 방송 하나만 보고 이러는 법이 어딨나, ?”

장경사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았다.

이제부턴 이 인간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렇게 어리석은 인간들이 언제 어떻게 모든 일을 잘못 몰고 가서 행여나 자신에게 불똥을 튀게 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장경사는 집요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

그것이 장경사가 자신들을 정말 배신한 징조라고 여겼는지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울상을 짓고 있었다.

얼핏 천진한 얼굴이기도 했고 다시 보면 한없이 늙고 노회한 얼굴이기도 했다.

장경사, 박변에게 전화해줘. 어서, 어서 와달라고 해, ? 어서 전화하라니까 뭐하고 있는 거야?”

교장 이강석이 말했다. 장경사가 앞자리에서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이강석은 그런 장경사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얼굴이 벌게진 채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서로 그럴 사이가 아니잖나? 박변이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래 박변을 불러. 무진 최고의 변호사이고, 또 우리 자애학원의 이사 아닌가. 그래, 그러면 될 거야. 그래 맞아…… 그리고 장경사 자네, 자네 그러는 거 아니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학교에서 나한테 수갑을…… 내 정말 이 일을 두고두고 잊지 않음세.”

장경사는 그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심하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한 채로 담배를 물었다.

그가 담배연기를 내뿜자 이강석과 이강복이 동시에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들에게는 그 연기가 매워서이기도 했지만 명색이 무진 영광 제일교회 장로인 그들 앞에서 담배를 무는 데 대한 항의였다.

길게 얘기 안 합니다. 두 번도 더 안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장경사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으나 어떤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이강석 이강복 형제는 과장된 기침을 얼른 멈추며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오늘 무진 검찰청 발칵 뒤집혔어요. 잘못하면 아직도 두 분 소환하지 않은 저, 또 제 위의 검사 옷 벗을지 몰라요. 저도 지금 제 코가 석자라 이겁니다. 무진 시내 발칵 뒤집혔어요. , 잘 들으세요. 박변호사, 사람 좋죠. 무진에 그만한 인재 어딨겠으며 두 분하고 둘도 없는 사이니 좋지요. 그런데 시장 출마 준비하고 있어요. 뭐가 문제냐? 여론에 무심할 수가 없어요. ? 시장 출마해야 하니까.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제 박변호사에게 전화를 하셔서 무조건 방금 옷 벗은 사람을 찾으세요. 아직 변호사 개업 안 한 사람이면 더 좋아요. 아쉬운 게 더 많을 테니까. 검사 출신이면 더 좋구요. 억울하다, 이런 개뼉다귀 같은 소리는 나중에 교회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한테나 하시고 지금은 누가 뭐래도, 설사 나중에 이 장경사가 무서운 얼굴로, 당신들 내가 다 알고 있어! 이래도 입을 꾹 다물고 당신들이 뜯어먹던 그 아이들처럼 벙어리다! 생각하고 입 다물고 계시라 이겁니다. 두 분들이 입을 열어야 할 때는 오직 하나, 옷 벗은 사람! 옷 벗은 사람을 찾아라! 무진에서 고등학교나 대학교나 뭐 하다못해 초등학교라도 나온 사람 중에 아니면 처가붙이가 여기서 방귀라도 뀌고 있는 사람 중에 방금 옷 벗은 사람을 찾아라! 이럴 때만 여시라, 이겁니다. 자아, 저기 벌떼들 몰려옵니다. 입 다무십시오. 그리고 만에 하나 일이 잘되면 하나님 아버지께 십일조, 그리고 저 이 장아무개에게도 십의 십일조라도 생각해주십쇼

그들은 차에서 내렸다.

경찰서 앞마당에는 벌써 기자들이 몰려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틈에서 장경사는 얼핏 서유진을 보았다

넝쿨 뻗듯이 고개를 빼어들고 달려드는 기자들 사이에서 작은 서유진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장경사는 왠지 그녀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순간 장경사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신상을 조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의 전남편은 현재 정치인이었다.

원내(院內)는 아니지만 누구라고 하면 금방 알 수 있는 권력자 주변의 사람이었다. 의외였다.

그녀가 사는 집과 환경은 형편없었다. 아픈 둘째 아이에 대한 전남편의 지원도 거의 없는 듯했다.

그럼 설마 서유진이 외도를 해서? 라고 생각해보기도 했으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하기는 따지고 보면 세상에 그런 무책임한 아비들이 한둘은 아니었다. 자신의 아비 또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만하면 얼굴도 그리 밉상이 아니고 서울에서 대학교육까지 받은 여자가 왜 저리 궁상을 떨고 사는지 그는 곰곰 서유진의 신상명세를 들여다보며 의아해했었다.

장경사는 차에서 내리는 형제를 도와주는 척하며 며칠 전까지는 서로가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거만한 태도로 두 형제의 귀에다 대고 주의를 주었다.

얼굴을 숙인다거나 재킷으로 가린다거나 이런 짓은 절대 하지 마세요. 나는 몹시 억울하다, 음모가 있다, 나는 희생자다, 모든 것은 정의로운 경찰과 검찰이 밝혀줄 것이다, 이런 주문을 외면서 담담하게 고개를 들고 살짝 미소도 지으세요. 잘되지 않겠지만, 노력해보라구요. 알았어요? ?”

두 형제는 겁먹은 얼굴로 장경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장경사는 그러나 조만간 다시 이런 처지가 역전되리라는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세상은 동화처럼 그렇게 녹록지 않은 것이다.

지나온 긴 날들처럼 앞으로 많은 날들을 그들은 그 앞에서 지폐를 흔들며 거만하게 굴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번 기회에 자신이 그들의 은인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야 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인간들보다 우월할 기회는 거의 없다.

아니 동등할 기회조차 거의 없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기자들이 코앞까지 몰려들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하자 교장 형제의 얼굴은 이제 거의 백짓장처럼 빳빳해져 있었다.

설사 차 안에서 무슨 말인가 하라고 시켰어도 아무 말도 못 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평생을 소왕국의 왕자처럼 지낸 이런 종류의 인간들을 장경사는 내심 경멸하고 있었다.

무진에서도 내륙으로 한 시간 반,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 더 공부하고 싶었으나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매만 맞았던 자신 같은 사람이 인생에 대해 가지는 경의와 공포를 이 인간들은 모른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에게 인생은 농익은 수박과 같아서 건드리기만 해도 쩍 벌어져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과육을 싫도록 선사했을 것이다. 그래서 장경사는 이건 내 경험인데, 조금만 참으면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금방 잊는다. 시간을 벌자라고 충고는 하지 않았다.

이 소공자들에게 그런 말은 사태를 더 그르치게 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패는 천천히 펴도 늦지 않다. 카메라 플래시들이 펑펑 터졌다.

두 형제는 역시 장경사의 지시대로 말이 없었다. 재킷으로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다만 이강석과 달리 서무실장 이강복은 거의 쓰러질 것같이 창백한 채로 벌벌 떨고 있었다.

한 시간 후에 저희 센터로 오시죠.” 돌아보니 서유진이었다. 그로서는 기습이었다.

장경사가 이 여자의 접근이 무슨 뜻일까 잠깐 생각하느라 우물거리는데 서유진이 별렀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기자회견 있거든요. 수사할 의지도 능력도 없으신 경찰이 우리가 조사한 것을 받아 적어 가기라도 하셔야죠.”

서유진의 얼굴에서는 그녀가 등지고 선 하늘처럼 푸른빛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장경사로서는 그런 경험이 처음이어서 약간 당황해하자 서유진이 얼굴을 씰룩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당신들 경찰, 저기 저 인간들보다 더 그지 같은 놈들이야!”

 

저는 자애학교를 10년 전에 졸업한 졸업생입니다. 어제 방송을 보고 10년 동안 가슴에 파묻고 아무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말씀드립니다. 저는 자애학교 기숙사에서 살면서 수업시간에 처음으로 서무실에 불려가 이강복 서무실장에게 성폭행을 당한 이후로 수시로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이후 제가 사회에 나가 약혼할 사람이 생겼는데도 가끔 저를 불러내서 만일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남편 될 사람에게 이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해서 저와 강제로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며칠 전 방송을 보고 저 같은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남편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설사 남편이 저를 용서하지 못할지라도, 그래서 어쩌면 제가 남편에게 버림을 받더라도 저는 그 짐승 같은 서무실장을 세상에 고발하고 싶습니다. 그를 처벌해주십시오.”

저는 5년 전에 기간제교사로 처음 자애학교에 부임했습니다. 조금만 참고 있으면 정교사로 발령을 내준다는 말에, 그리고 장애인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보람에 기간제교사라는 불안한 신분도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장 이강석이 어느날 저를 부르더니 이상한 CD를 주었습니다. 그것을 복사해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산실에 들어가서 열어보니 조잡한 포르노 영상이었습니다. 저는 그후로도 계속 교장의 그 심부름을 계속해야 했고 가끔씩은 수업도 빼먹은 채로 새 포르노 CD를 복사해다가 그에게 가져다주어야 했습니다. ‘대체 먹고사는 것이 뭐길래 내가 여기서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하나?’ 스스로 자괴감에 빠진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제 모든 일이 세상에 밝혀지니 속이 시원합니다. 저와 저희 아이들을 위해 그들의 행위를 처벌해주시고 우리 학원이 진정 가엾은 아이들의 진정한 배움터가 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제 친구는 수업 시간에 자주 불려나갔고 기숙사에서도 잠을 자다가 보면 사라졌습니다. 그 아이는 늘 울고 있었는데 제가 물어보면 부끄러워 도저히 말을 못하겠다. 세상이 싫고 무섭다. 나는 왜 벙어리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우리 부모는 왜 날 이런 데 맡겨놓고 찾으러 오지도 않나. 다음 세상에서는 좋은 부모 밑에서 건강한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하고 자주 한탄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는 며칠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멍하게 창밖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서무실장님이 그 애를 오라고 불렀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제가 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 애는 가면서 그 아이가 저보고 만일 자기에게 무슨 일이 있거든 네가 좋아했던 자기 머리핀을 가지라고 이야기하고 나갔습니다. 이후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안개가 지독했는데 친구는 운동장 끝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왜 서무실장님이 불러서 나간 아이가 절벽 끝에서 떨어져 죽었을까요? 왜 경찰은 그걸 저에게 물어보지 않았을까요? 가여운 친구의 원혼을 위해 수사해주시기 바랍니다. 친구의 머리핀은 제가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방송의 파장은 생각 밖으로 컸다.

각지에서 증언들이 쏟아져나왔고 진정이 접수되었다.

언론은 연일 이 사실을 보도했고 피의자 이모 교장 형제와 박모 교사의 처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국고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복지법인과 학교법인 경영진과 이사진은 해임될 것이다.

그리고 관선이사가 파견되어 이후 정상화 절차를 밟으면 될 것이었다.

최수희 장학관은 남편과 함께 무진 영광제일교회의 10시 예배에 앉아 있었다.

담임목사가 북한선교 지원차 연변에 간 바람에 그 아들 목사가 예배를 집도하는 날이었다.

젊고 잘생긴 아들 목사는 침통한 얼굴이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어를 자주 섞어 쓰는 것이 흠 아닌 흠으로 지적되는 것 외에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목사였다.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성도 중의 두 사람이 지금 큰 고통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들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물론 그 두 사람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실은 우리까지도 고통에 휩싸여 있습니다. 오늘 큰 슬픔을 무릅쓰고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여기 나오신 가족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저 역시 방송을 본 이후 지금까지 깊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젊은 목사의 음성은 단호했다. 약 삼천 명이 들어설 수 있는 대성전은 침묵에 휩싸였다.

이 교회의 신도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어느 편이 옳든 혼란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자인 이 목사가 단도직입적으로 예배 시간에 아직 아무 결론도 나지 않은 이 문제를 꺼내는 것은 분명 하나의 강공책이었다.

자칫 이 교회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수도 있는 사안을 이렇게 용감하게 주일예배 시간에 공개적으로 꺼낸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게 어떤 전쟁이든 말이다.

일단, 방송에 따르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로서뿐만 아니라 교직자로서, 아니 그냥 한 인간으로서도 입에 담지 못할 죄를 지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니라고 생각하려면 거기 청각장애인 아이들이 완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가정을 해야 하는데--- 그 아이들은 약간의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도 합니다--- 그러니 이 엄청난 거짓말을 지어내기에는 너무, 죄송합니다만, 냉정히 말해서 그럴만 한 머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장로님들이시고 평생을 바쳐 장애자들에게 헌신해온 봉사자이시며 정말 진실한 성도이신 이강석, 이강복 성도가 그런 죄인이란 말이란 말인가? 정말 그들이 그랬단 말인가?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지요.”

장내는 더욱 조용해졌다. 누군가의 휴대폰이 잠시 울렸는데 평소 같으면 할렐루야라든가 아멘 소리에 묻혔을 그 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들려와서 그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야 했다.

최수희 장학관의 고개가 갸웃해졌다. 흥미진진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분들을 잘 압니다. 저보고 증언대에 서라고 하면 하늘에 맹세코 그분들은 절대로 그런 일을, 아니 그 비슷한 일도 하실 분들이 아니다, 차라리 여기에 선 제가! 위선자면 위선자였지! 그분들은 그럴 분들이 아니다! 맹세라도 하고 싶지만…… 경찰과 검찰이 잘 밝혀줄 것이니 우리는 그냥 기다릴 뿐입니다.”

비로소 젊은 목사의 설교의 방향을 알아차린 머리 좋은 축들이 서둘러 아멘! 하고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비로소 대성전에 약간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젊은 목사는 빙그레 웃으며 장내를 둘러보았다.

그러면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저는 어젯밤 잠을 못 이루고 주님 앞에 앉아 물었습니다. 주님! 대답해주십시오!”

그러자 군중이 소리쳤다. “아멘!!”

좋으신 하나님! 대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이런 날벼락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 겁니까? 저는 그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진정 그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렇다고 저는 그 불쌍한 어린 학생들을 결코 의심하지는 않으렵니다. 그렇다면 주님,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입니까?”

아멘!!”

주님은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저는 묻고 또 묻고 또 묻고 또 물었습니다. 땀이 밤새 비오듯 흘러내렸고 제 옷은 축축하게 젖었습니다. 저는 쉬지 않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새벽이 오고 말았죠. 주님은 이렇게 저를 모른 척하시나보다 낙담하려는 순간, 저는 답을 얻었습니다. 조간신문을 보는 순간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응답하심을 알았던 겁니다.”

할렐루야!!!” 순간, 두 손을 치켜들고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최수희 장학관은 팔짱을 낀 채로 그런 목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이 신문입니다.”

젊은 목사는 신문 하나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어제 방송이 나간 후, 그동안 자애학원 사태를 조사해왔던 무진 인권운동센터를 주축으로 해서 자애학원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그들은 무진의 오랜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며 전 무진 영광제일교회 목사였고 지금은 교회 없는 교회목사로 일하는 최요한 목사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젊은 목사가 잠시 성도들을 둘러보았다. 일순 침묵이 다시 이들을 내리눌렀다.

짧은 탄식을 애써 억누르는 사람도 있었다.

최요한 목사는 무진 영광제일교회를 지금의 담임목사인 아버지 목사와 함께 초창기부터 일군 목사로서 담임목사가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려 하자 반기를 들었고 그 불화를 견디다 못해 오 년 전 이 교회를 나갔다.

그때 그를 따르는 많은 이들이 이 교회를 떠났고 무진 영광제일교회는 아직도 그 상처를 다 치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제가 최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비방하고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개인적으로 훌륭하신 분입니다. 아버님과 함께 이 교회를 개척하시던, 제가 코 찔찔 흘리던 꼬맹이 때부터, 저는 그분의 기도를 받고 자랐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더욱더 우리 교회의 장로로 계시는 두 형제를 고발하는 위치에 서면 오해를 받으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것을 모르셨을까요? 저는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그분을 고발해야 하는 위치에 어쩔 수 없이 서야 한다면? 저는 그분을 잘 알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자리라면 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서셨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아멘, 했으나 이번에는 그 소리가 좀 약했다.

자 여러분, 이밖에도 대책위에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전교조 출신 기간제교사. 이 사람은 이 사건이 나기 겨우 한달쯤 전에 홀연히 서울에서 옵니다. 그리고 한때 전교조에서 활동했는데 그동안 이상하게도 교사일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이 사건의 대책위를 맡아 지금은 학교 내에서 가장 열렬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참 이상한 대목입니다. 누가 봐도 이상하지요? 그리고 무진 인권운동센터. 이들은 말이지요, 우리 장로님 중에 최수희 장학관님 계시지만, 이상하게도 말이지요, 이사장과 이사진을 해임하고 관선이사를 파견해줄 것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 그럼 교육청과 시청에서 그걸 들어준다고 칩시다. 그럼 누가 그 관선이사가 될까요? 지금 이 학원의 이사진들, 무진 시내에서 열 손가락에 들기도 아까운 그런 분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물론 본인도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만 저희들 돈 받은 거? 있죠. 한번 갈 때마다 차비조로 10만 원인가 받았습니다. 우리들 시간 없는 사람들, 정말, 가여운 아이들 위해서 일한다는 봉사의 마음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 이사들 다 해임하고 50년 동안 판자촌에서 시작해서 온 가족이 사생활도 희생하고 오직 장애인 아이들을 위해 일생을 일궈온 그 학원 내놓으라고 합니다. 좋습니다. 죄지었으면! 내놔야죠. 법에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아도 내놔야죠. 무진 영광제일교회 장로가 불쌍한 아이들에게 그런 짓 했다면! 저라도 다 내놓으라고 호통을 칠 겁니다!”

할렐루야! 아멘!”

젊은 목사는 이번에는 목소리를 아주 작고 부드럽고 속삭이듯 바꾸었다.

귀엣말을 하듯이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러분, 그분들이 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그 죄가 너무 지저분해. 너무 좀 추해.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 그래요. 사람이니까! 남자니까! 사춘기 가슴 빵빵한 아이들보고 마치 다윗이 유부녀 밧세바 보고 유혹에 빠지듯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이 사탄의 유혹인 줄도 모르고! 그럴 수 있는데! 그러면, 에잇 장로님, 어서 벌 받으쇼! 하겠는데…… 이건 좀 너무 많이 갔어요. 너무 싸구려 뽀르노로 가버린 거야. 가다 보니까 너무 많이 가서 마치 뱀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던 그때처럼 과장하고 거짓말이 거짓을 낳고 또 거짓을 낳아서 코미디로 변하게 해버린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상식을 가지고 이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겁니다. 적어도 상식 말입니다!!”

목사의 웅변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에너지는 폭풍우처럼 충만했고 논리는 정연했다.

이제 대성전은 거의 감동의 도가니로 변해가고 있었다.

누구라도 감동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마음을 열고 그의 말에 흠뻑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령께서, 그분께서 임하신 것만 같았다. 최수희 장학관마저도 시큰해진 눈가를 훔쳤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조카아이가 요즘 뉴라이트인가 뭔가를 참 열심히 해요. 제가 한번 그게 뭐하는 거냐? 그러니까 삼촌 그거 우리 건강한 사회 만들자는 거예요, 그럽디다. 그래서 제가 그래? 근데 는 왜 붙였냐? 하니까? 예전에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김일성 부자 찬양하던 게 부끄러워서 그래요, 하고 웃어요. 그래요, 그 아이는 저와 제 아버지이신 담임목사님의 기도 그리고 온 가족의 눈물 어린 기도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가 운동권일 당시 히틀러의 선동론이라는 것을 공부했답니다. 그게 뭔데? 내가 물으니 그 애가 그런 말을 합니다. 히틀러가 당시 국민들을 기가 막히게 속이는 걸로 유명했는데 그 방법이 이것이랍니다. 예를 들어 국민을 오른쪽으로 좀 데리고 가고 싶으면, 오른쪽으로 100미터 가면 한 사람에게 금 10톤씩 준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선동한답니다. 그걸 들은 사람들은 누구라도 생각하겠죠. 세상에 있는 금을 다 끌어모아도 한 사람에게 어떻게 10톤을 준단 말이야?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말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것도 없이 저런 말을 할까? 아마 한 100그램은 주겠지. 어쨌든 가보세나…… 즉 뻥을 치려면 세게! 쳐라. 그러면 사람들은 설마 다는 아니더라도 뭐가 좀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게 히틀러의 선동론, 공산주의자들의 선동론, 사탄의 선동론, 거짓의 아비들의 선동론! , 여러분 이제 제 말을 좀 정리해보십시다. 우리 장로님들 두 분, 그들은 우리들이 차마 하나님 아버지 모시는 이 자리에서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그런 일을 했다고 지금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을 고발한 이들은 운동권이었거나 아직도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 여러분들은 이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제 이 예배가 끝나면 여러분들은 무진 시민들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거짓으로 우물거리지 말고! 주 수난 당하던 날 밤 비겁한 베드로처럼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 하지 말고 대답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들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기에 그들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실 것입니다, 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욕하고 우리에게 돌을 던져도 우리는 절대 수난당하던 밤의 베드로처럼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일찍이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오로지 예수께 희망을 두고 살 뿐입니다. 지저스 얼리빙홉! 예수, 우리의 살아 있는 희망! 예수가 있기에 우리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사모님 두 분 힘을 내십시오. 특별헌금 주신 것, 주님께서는 그것이 두 분의 눈물, 아니 지금 차가운 감방에서 고생하시는 그분들의 눈물로 이루어진 돈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들! 상심하신 두 분을 위해 큰 박수를 부탁합니다.”

최수희 장학관은 요즘 원어민에게 영어강습을 받고 있었으므로 대성전 안에서 축복과 위로가 함성으로 터지는 중에도 유학파 목사의 본토 발음을 몰래 따라 하고 있었다.

지저스 얼리빙홉! ‘아이돈워나두우잇! , 다시 따라 해보세요. 아이돈워나두우잇! 여러분들 말이지요. 저보고도 빠다 바른 듯이 너무 느끼한 목소리라고 하시는 분이 많으신데, 그거 겁내시면 안돼요. 느끼할수록 좋은 거예요. 자아, 더욱 느끼하게 원모어타임, 아이돈워나두우잇!’

그 여자가 또 왔는데요.”

온라인 영어회화를 듣는 이어폰 너머로 김과장이 들어와 말했다.

최수희는 서유진이라는 것을 알고 여느 때처럼 약간 주름을 잡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가락을 가볍게 저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방금 배운 영어회화를 더욱 느끼하게따라 해보았다.

아이돈워나두우잇!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던 사건의 충격이 가라앉을 무렵, 영광제일교회의 젊은 목사가 말한 논리 역시 많은 힘을 얻어 퍼져나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상식적이었고 보통 사람의 사고에 잘 맞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사건이 자신의 도시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부끄럽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했다.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고치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생각해봐. 선생들 다 있는데, 애들 보는 눈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겠어, 아무리 말이야. 그리고 교직자잖아. 그냥 좀 집적거린 거겠지. 사춘기 아이들이니까 그걸 예민하게 받아들인 거고 말이야. 에잇! 사람들이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어린 것들한테……

누군가 말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강석 형제가 그렇고 그런 못난 남자들 중의 일부일 뿐이라고 얼른 판결을 내리고 싶어 했다. 그러면 도시를 뒤흔든 사나운 소동은 햇살에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면서 바다 쪽으로부터 부드러운 바람이 산들산들 밀려오는 것도 같았다.

사람들의 표정은 다시 온화해졌고 햇살은 다시 따뜻해진 것만 같아서, 다가오는 아이들의 대학입시와 김장과 물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두런거리며 할 수 있었다.

그 무렵 강인호는 서무실의 호출을 받았다.

서무실에는 오십 줄이 넘어 보이는 낯선 남자가 돈을 세고 있었고 뜻밖에도 윤자애가 팔짱을 낀 채로 그 곁에 앉아 있었다.

강인호가 문을 들어설 때부터 윤자애는 노골적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거 돈 세어보시고 거기 사인 좀 해주세요.”

낯선 남자가 말하자, 강인호는 영문을 모른 채로 그가 내미는 돈과 종이를 집어 들었다.

종이에는 이강복이 강인호에게 빌린 오백만 원을 반환함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강인호가 영문을 몰라 고개를 들자 낯선 남자가 돋보기 너머로 강인호를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우선 개인적인 모든 채무를 깨끗이 하시고 싶다고 해서 제가 대리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이 학교에 부임할 때 강제로 내게 했던 사립학교 발전기금이 졸지에 개인적 채무가 되어 이제 다시 그의 손에 쥐어지게 된 것이다.

아직 시청이나 교육청이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곧 감사가 시작될 것에 대비하는 것 같았다.

강인호는 얼핏 웃음이 나와서 일단 그 돈을 받아들고 사인을 해주었다.

윤자애의 당돌한 시선은 아직 그의 귓바퀴에 머무르고 있었다.

요즘 다시 학교로 돌아온 연두와 유리, 민수 등을 윤자애가 기숙사에서 수시로 불러 혹시라도 재판에 나가면 교장 형제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못하도록 아이들을 협박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갑자기 윤자애가 입을 열었다.

경력이 참 대단하시던데요?”

강인호가 비로소 그녀를 돌아보았다.

비합법 시절의 전교조 투사를 이런 촌구석 벙어리 학교에서 만날 줄이야, !”

전교조?”

어이가 없다는 듯 강인호가 되묻자 윤자애는 대답 대신 그를 노려보더니 다시 말했다.

당신 누구야? 누가 보냈어? 왜 온 거야 여기!”

윤자애는 악을 써댔다. 기가 막힌 강인호가 무어라 대꾸를 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강인호는 그냥 윤자애를 무시하고 복도로 걸어나와 전화를 받았다.

먼저 전화를 걸어놓고 아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방송이 나간 후 바로 전화를 할 것 같아 내심 각오를 했었는데 아내는 한동안 전화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제야 비로소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새미 아빠, 여태까지 당신 일에 반대한 적 거의 없어, 그치? 나 당신 언제나 믿었어, 그치?”

아내는 오래 생각한 듯했다.

그는 그래서 무언가 중대한 말이 나올 거라는 것을 짐작했고 그것이 그의 의지와는 다른 것일 거라는 걸 짐작했고 그래서 무겁게 응, 하고 대답했다.

짧은 이별이었지만 그 사이 그에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기에 어차피 아내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부탁해 어렵게 자리를 만든 아내의 입장이 얼마나 곤란할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아내에게 전화할 수 없고 상의할 수 없었는데 이제 아내는 너무 먼 나라의 이민자같이 그에게는 느껴졌다.

체제도 언어도 화폐도 다른 나라의 사람 같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한 생()처럼 길게 느껴지는 그런 일들이.

나 생각해봤는데, 당신 빠른 시간 내에 그냥 서울로 오면 좋겠어. 그 사람들 옳고 당신 틀려서 그런 거 아니야. 당신 거기 취직시켜준 내 친구가 나한테 전화해서 그래, 정말 지랄지랄……

아내는 여기서 잠깐 말을 끊고 침을 삼켰다. 그러자 그가 혼자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그간 아내가 혼자 당했을 모욕이 깊었을 거라는 게 비로소 느껴져 왔다.

남편 하나 잘못 만나 이렇게 목구멍으로 굵은 수모를 삼켜야 했으리라.

만일 그녀가 가까이 있었으면 그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오래 안아주었을 것이다.

그는 혼자 그것을 견디어내고 삭이고 정리한 후에야 비로소 전화를 건 아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꼈고, 고맙고 미안한 만큼 그러나 또 아내가 멀어지고 있는 것을 인정했다.

운동장 끝으로 걸어온 그의 시야 멀리 갈매기들이 낮게 날고 있었다.

먹이를 찾아서 낮게 더 낮게 날갯짓을 하며 강하하고 있었다.

그래, 그놈들 나쁜 놈들이지. 당신이 하려는 그거 옳은 일이지. 그 아이들 불쌍하지. 그런데 하지 마. 당신은 하지 마. 부탁이야, 여보. 손 떼고 돌아와. 그냥 와.”

강인호는 담배를 물었다. 맑은 가을 저녁이었다.

만 너머로 펼쳐진 젖빛 갈대들이 보이는 풍경 너머로 그는 뽀얀 담배연기를 뿜었다.

마지막 남은 햇볕은 옅은 분홍과 보랏빛으로 구름을 물들이며 기울고 있었다.

이 모든 풍경에서 사람들을 지워버린다면 여기가 천국일 것이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아름다운…… 천국.

한 번만 눈을 감아줘, 나랑 새미 위해서. 정 미안하면 방법은 많아. 당신이 갑자기 아픈 걸로 하고 나머지 짐이랑 그런 거 내가 다 싸러 내려가도 돼.”

내일…… 공판 시작이야.”

강인호는 그가 부임하기 한 달 전 이 운동장 끝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여학생을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저녁은 너무 평온한 가을 저녁이었다.

바람도 없는데 갈대들이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며 햇살을 끌어안고 있는 듯 보였다.

막 머리를 감은 듯 부풀어 오르는 갈꽃들이 소녀의 머리털처럼도 보였다.

새미 아빠 부탁이야, 한번만 눈감고……

………

당신, 나랑 새미 사랑하잖아. 그 아이들 사랑하겠지. 그렇지만 나랑 새미를 더 사랑하잖아, 그러니까……

강인호는 입술을 잠시 물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새미 엄마 잘 들어. 나 그 아이들 그렇게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런데 이건, 너무 아니야. 너무 아닌데, 그걸 그렇다고 할 수는 없어서, 그러는 거야. 그래서 가더라도 말하고 가려는 거야. 이건 아니라고, 진짜, 아니라고.”

전화를 끊고 복도로 들어서다가 강인호는 잠깐 연두와 마주쳤다. 연두는 유리의 손을 붙들고 서 있었다.

그러고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샐쭉 웃으며 강인호의 손에 조그만 리본이 달린 봉투를 올려놓았다.

편지였다. 녹두 알만한 금빛 방울이 매달린 분홍 리본으로 치장한 편지지를 내밀고 연두와 유리는 여느 사춘기 여학생들처럼 까르르 웃으며 복도 끝으로 뛰어갔다.

교무실로 들어가 강인호는 편지를 폈다. 우리 강인호 선생님께, 라고 시작되는 편지였다.

 

우리 강인호 선생님께

일반학교 말고 청각장애인 학교에 와서 선생님께 편지를 써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박보현 선생님이 경찰서로 가신 이후로 저희는 좋은 저녁 시간들을 보내고 있어요.

윤자애 선생님이 당직일 때만 빼구요. 실은 저는 이곳의 선생님들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어요.

뭐랄까요, 선생님들은 늘 한쪽 눈으로는 우리를, 그리고 다른 쪽 눈으로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계시는 것 같았어요.

제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라서 그런지 저는 이야기할 때 사람들의 눈빛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선생님께서 처음 오신 날 저희에게 보여주신 그 시를 저는 아직도 기억해요.

성냥불도 켜주셨지요. 그때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제 마음속에 빛이 환하게 당겨진 것 같았어요.

그전에는 내가 어둡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불이 켜지고 보니까 아아, 내가 어둠속에 서 있었구나, 깨닫는 거 같은 느낌…… 아세요?

그날 이상하게도 선생님의 두 눈이 우리만 바라보고 있다고 저는 느꼈어요.

민수 동생이 죽은 이야기를 그래서 아마 선뜻 꺼냈는지도 모르구요.

교장 선생님이랑 서무실장 선생님 그리고 박보현 선생님이 곧 재판정에 서신다구요.

선생님께서도 증언을 하러 나가신다고 들었어요.

서유진 간사님이 어머니께 전화를 하셔서 저희도 증언대에 서야 할지 모른다고 하셨대요.

저는 선생님께서 얼마나 우리들을 위해 잘해주실지 믿어요. 우리도 잘할 거예요.

저는 이전에는 어른들은 모두 나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서유진 간사님, 우리 강인호 선생님

그리고 저희를 위해 대책위원장을 맡아주신 최요한 목사님을 뵈면서 정말 반성을 많이 했어요.

제가 너무 세상을 나쁘게만 생각한 것 같아 죄송했어요.

선생님 오늘은 옆침대의 유리가 잠들었는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어요.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추워서 창문을 닫으려고 창가로 갔는데 멀리 달빛 아래 갈대밭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게 보였어요.

바람이 부는지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도요.

아주 어린 시절 제 귀를 스치며 들려오던 그 바람소리가 기억났어요. 소리의 기억이요……

이젠 너무 희미해져서 그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그래서 선생님께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나 봐요.

그 이야기, 제가 들을 수 없게 된 이야기말이에요.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어느 날, 저는 아주 아팠어요. 밤새 많이 아팠어요.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큰집 제사에 가시고 이웃집 할머니가 절 보고 계셨는데 혼자서 저녁때부터 막걸리에 취해 제가 아무리 울어도 깨어나지 않으셨어요.

새벽녘에 엄마가 오셔서 제 이마에 찬 물수건을 올려주고 한참을 지나서야 저는 겨우겨우 잠이 들었지요.

잠에서 깨어난 아침, 이상하게 집안이 너무 조용했어요. 너무나도요……

묘했어요. 물속 깊이 잠긴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열이 다 내리지 않아서 눈을 뜰 수가 없는데 내가 너무 늦잠을 자서 식구들이 모두 나갔나보다 생각하고 졸린 채로 엄마를 불렀지요.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엄마가 대답을 안 하는 거예요.

너무 화가 나서 엄마! 하고 고함을 치며 일어났어요. 벌떡 일어난 순간, 저는 알았어요.

식구들이 바로 제 곁 둥그런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다 말고 모두 저를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제 고함 소리에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말이지요.

그러니까 아픈 저를 아랫목에 눕혀놓고 식구들이 바로 옆에서 밥을 먹고 있었던 거지요.

그리고 무언가 말을 했어요. 아니, 한 것 같았어요. 입이 벙긋벙긋 하더군요. 아무리 제가 어렸지만 가슴이 철렁했어요.

무언가 아주 나쁜 일이,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되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일어나고 있다는 느낌만 들었어요.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얼른 다시 자리에 누웠어요.

 

식구들은 바로 지척에 있는데 돌아누우면 그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저 혼자 텅 빈 집에 있는 것 같았어요.

겁이 나서 눈을 뜨고 다시 쳐다보면 그들은 바로 옆에 있었어요.

눈을 감으면 사라지고 눈을 뜨면 바로 옆에 있는 식구들. 엄마가 저를 흔들며 무어라 말을 했어요.

밥을 먹자는 것 같았어요. 엄마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어요. 엄마의 입이 벙긋벙긋 하더군요.

그런데 엄마에게 이 사실을 들키면 나는 정말로 다시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신경질을 부리는 척했어요.

병원에 드나들고 좋다는 약을 다 먹었지만 이미 때가 늦어 있었어요.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이미 글을 쓰고 읽을 줄 알았고 노래를 아주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선생님, 저는 그때부터 물속 나라에 온 아이처럼 모든 사람이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완벽한 고독 속으로 쫓겨나 버린 거예요.

나보다 노래를 못하던 아이들이 교단에 서서 노래하는 것을 볼 때 제 가슴은 찢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죠.

어느 날부터 밥을 먹지 않고 학교도 가지 않고 저는 울기만 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죽고 싶었어요. 엄마가 저를 붙들고 글자로 말을 했어요.

조금만 기다리라고, 나이를 먹어서 어른이 되면들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밥을 먹고 얼른 키가 커야 한다고. 믿었죠. 어서 크기 위해 정말 열심히 밥을 먹었어요.

하루 이틀, 한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났는데 저는 여전히 들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저는 기다려보았어요. 세 해 네 해가 더 지나갔어요. 그래도 들리지 않았어요.

어느 날 제 방에 있는 물건을 다 집어 던지며 엄마에게 고함을 쳤지요.

! 이렇게 컸는데, 이만큼 자랐는데, 들리지 않느냐고!

저희 어머니는 미안하다면서 저를 붙들고 울기만 하셨어요.

제가 던지는 공책이랑 책이랑 다 맞으시면서……

선생님, 저 참 나쁜 아이였죠? 엄마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선생님, 그래도 저는 요즘 아주 행복해요. 기숙사 저녁식사만 좀 좋아지면 좋겠지만, 괜찮아요.

학교가 좋아지고 있어요. 아이들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것 같아요. 유리도 이젠 밤에 잠을 잘 자요.

전에는 박보현 선생님이 밤에 아이를 깨워 끌고 나갈까 두려워 깊은 잠을 잘 수 없는 날들이 많았어요.

한번은 제가 제 손목과 유리의 손목을 묶고 잔 적도 있어요.

밤에 박보현 선생님이 들어와 비명을 지르는 유리를 끌어내도 잠든 우리는 들을 수가 없으니

제 손목에 그렇게 연결하고 자자는 거였죠.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끈이 싹둑 잘려져 있었어요……

그 후로 우리는 그냥 거기에 대해 더 말을 안하게 되었어요.

몇 분의 선생님께 말했지만 우리는 무시당하고 그리고 혼나기만 했어요.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 민수 동생이 그렇게 죽기 전까지는요.

저희는 빨리 재판에 가서 저희를 괴롭히던 나쁜 사람들이 훌륭하신 검사님 판사님들께 혼이 나는 것을 보고 싶어요.

그래서 벌을 받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정말 반성하는 걸 보고 싶어요.

선생님,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요, 언젠가 유리가 고백한 거예요.

유리가 강인호 선생님 많이 좋아한다고 했어요. , 기억나세요?

전에 인권운동센터에서 유리가 당한 거 녹화하고 쓰러지듯 잠들었을 때, 선생님이 유리 업어주셨잖아요. 그때 실은 유리는 살짝 깨었었대요.

부끄러워서 그만 내려달래고 싶었는데, 선생님 등이 너무 따뜻하고 좋았대요. 그래서 자는 척했대요.

유리 말이, 자기가 뚱뚱해서(실은 그 앤 말라깽이인데요) 선생님이 힘드셨을 텐데 미안했다고……

그러면서 그때 문득 강인호 선생님이 아빠였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대요……

선생님 유리가 그 말은 절대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비밀 지켜주세요.

선생님, 우리에게 와주셔서 감사해요. 윤자애 선생님과 무서운 선배들이 돌아가는 세탁기 통에 제 손을 넣고 협박할 때 선생님 저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제가 손바닥에 쓴 말 믿고 저희 엄마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 우리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못할지 모르겠지만 꼭 스승의 날이면 선생님께 갈게요.

카네이션 달아드리러요. 선생님 이 편지 드리고 나면 부끄러워서 내일 뵐 수 있을까요.

오늘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잘래요. 우리 아빠 빨리 낫게 해주시고, 나쁜 사람들 벌 받게 해주시고

그리고 우리 강인호 선생님 서유진 간사님 최요한 목사님 모두 행복하게 해달라구요.

선생님 안녕히 주무세요.

 

첫 심리가 열리던 날 무진의 일기는 쾌청했다.

법원 앞에는 수많은 언론사의 깃발을 단 자동차가 줄을 서고 법원 앞 사거리에서는 자애학원 총동문회이름으로 기자회견도 열렸다.

지속되는 성추행을 은폐해온 자애학원을 규탄하며 피해를 입은 후배들과 양심적인 교사의 싸움을 지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법원 정문 앞에서는 찬송가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무진 영광제일교회의 일부 신도들인 것 같았다.

서유진은 이른 아침 최요한 목사와 함께 법원을 향해 길을 나섰다. 최요한 목사는 60대 중반으로 무진 토박이였다.

이 사건의 대책위원장을 맡기 전까지 실은 그는 진보 진영 내에서도 그리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무진시가 70, 80년대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할 때, 언제나 온건한 의견을 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동그란 안경을 낀 최목사는 그러나 유진을 보면 언제나 온화하게 웃었다.

좋은 꿈 꾸셨어요, 목사님?”

함께 법원으로 향하는 동안 내내 생각에 잠긴 최목사에게 서유진이 묻자 그가 입을 열었다.

……서간사, 검찰 측에서 유죄평결에 문제가 없다고 자신을 하지요?”

당연한 일을 물어서 유진은 순간적이었지만 그 의미가 무얼까 생각하느라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검사는 한 번인가 두 번 만났을 뿐이다.

무표정하고 약간 귀찮다는 기색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냉정하게 사건을 파악하고 있는 듯했고

그래서 유진은 일단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 당연히 피해자들의 피해정도가 너무 명백하고 진술도 일치하고 게다가 증인까지……

유진은 최목사를 바라보았다. 최목사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문득 유진의 마음속으로 두려움 같은 것이 휘익, 하고 지나갔다.

그것의 정체를 다 파악하기도 전에 최목사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나도 그러리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에 선임된 변호사를 보니까, 내가 잘 아는 이예요. 내 학교 두어 해 후배인데 그러니까, 무진고에서 늘 수석을 했더랬어요. 서울 법대를 차석인가로 들어갔지 아마. 무진의 수재였지. 얼마 전까지 고등법원에 판사로 있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 옷을 벗었대요. 그리고 맡은 게 이번 건인 거 같아.”

그러면 전관예우라는 게…… 그게, 죄지은 사람도 죄 없다고 하는 건 아닐 거잖아요? 설마요……

유진이 하도 심각하게 물어서일까, 최목사는 유진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웃었다.

그건 아니겠지요. 그건 전혀 아닌데…… 아마 조금은 참작이 될 거에요. 그게 법원의 관례라니까. 그래도 믿어봅시다. 그래도 많이들 배우고 양식 있는 사람들,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들인데…… 그냥 참고삼아 알아두면 좋을 거 같아서요.”

더 곰곰이 생각할 틈도 없이 법원 앞 광장으로 차가 들어서자마자 기자들이 달려들었다.

최요한 목사가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 무리에서 조금 물러서 있던 유진의 귀에

누군가가 더운 입김 같은 것을 후욱, 하고 뿜어냈다.

덥고 더럽고 소름 끼치는 열기 같은 것이었다.

놀라 돌아보니 50대 중반 정도의 진한 화장의 여자가 유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이 쌍년아, 니가 그년이구나. 어디 상판 좀 보자, 이 마귀 같은 년아! 니가 내 남편 잡아먹으려고 이런 누명을 씌운 그년이구나. 너 남편도 없이 산다더니 그 짓을 오래 못해 환장을 했구나. 그래서 너 빼고 다 그 짓만 하고 사는 줄 알았니? 이년아, 내가 우리 예수 주님 모시고 너 같은 마귀는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니 씹을 갈아 마시고야 말 테다, 이년! 이 사탄!”

화창한 봄날 휘파람 후후 불며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난데없이 온 사방에 길이 투두두둑 소리를 내며 끊겨버린대도 이런 느낌은 아닐 것이다.

예고도 없이, 징조도 없이, 전례도 없이, 아침이 오자마자 밤이 되고 오물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대도 이보다 더 더럽고 오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진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겪는, 그 벌거벗은 야만이 주는 공포에 작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서 있었다.

찬송가 소리, 구호소리, 자동차 경적과 사진기의 플래시 터지는 소리…… 들이 멀어지고, 그녀는 눈앞의 진한 화장의 여자와 단둘이 희디흰 정적의 공간 속에 서 있는 듯했다.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달은 것은 나중이었지만 바로 이 순간, 유진은 새처럼 작은 아이들이 노골적인 야만 앞에서 겪었을 얼어붙은 공포를 이해했다.

욕을 퍼부은 여자가 자리를 뜬 후에도 유진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고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친 최목사의 뒤를 따라 들어가다 돌아보니, 아까 자신에게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욕을 퍼부은 그 여자의 붉은 입술은 지금 일군의 무리와 섞여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서무실장의 부인이었다.

아까 그 여자가 유진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하더라도 잠시 동안 유진은 아마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 힘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난데없음 때문이었다. 유진은 아직도 겁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무실장 부인은 일행과 함께 두 손을 부여잡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채도가 낮은 녹색 투피스와 진주목걸이 그리고 굵은 웨이브의 머리는 우아했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만 아니었다면 유진은 그 여자를 그냥 교양있는 오십대의 평범한 사모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남편 때문에 이런 공판에 나와 있어야 하는 그녀의 처지에 대해 같은 여자로서 조금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

기도가 끝나고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부인의 어깨를 치며 무어라 격려의 말을 건네자, 부인은 심지어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살짝 외로 꼬면서 수줍게 웃기까지 했다.

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 라는 뚱딴지같은 생각이 났다. 대체 어디까지, 떨어져 내릴 수 있는 것일까?

저 부인은 정말 남편이 결백하다고 믿고 있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고발의 주체인 서유진이 미울 수도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짜고짜 욕을?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유진을 향해 뱉어내던 그 욕의 내용이 함축하는 남존여비의 봉건성이 결국은 남편의 범죄에 일조했다는 것을 유진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그렇게 분석하고 나서도 공포는 남았다.

그것은 아직 입가에 피를 묻힌 맹수에게 느끼는 근원적인 공포였다.

판사가 들어오기 전에도 유진은 여전히 멍한 채로 앉아 있었다.

재판정은 만원이었다. 카메라맨들은 들어오지 못했지만 기자들과 방청객들로 실내는 후끈거렸다.

그래도 오늘 판사가 좀 점잖은 사람이에요. 내 말은 아주 보수 꼴통은 아니라는 거죠.”

유진이 넋이 나간 이유가 아까 변호를 맡은 변호사의 이력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최요한 목사가 달래는 듯한 말투로 유진에게 귀엣말을 했다. 유진은 정말로 멍한 채로 재판부가 앉을 자리를 바라보았다.

문득 저 위에서 이곳 사람들을 내려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앉거나 서서 족히 일 미터는 높은 곳에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아니 바라보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처분만 바라고 있는, 낮은 곳의 사람들의 바라보는 재판부의 느낌은.

실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옥색 옷을 입은 피고 세 명이 법정으로 들어섰다.

한쪽에서 울음소리가, 한쪽에서는 죽여라하는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강석 이강복 형제는 정말 똑같은 옷을 입혀놓으니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쌍둥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머리가 약간 벗어진 것하며 약간 마르고 구부정한 체구하며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이게 좋은 징조일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강석과 이강복 형제는 곁눈질로 뒤를 돌아보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아는 체를 해 보였다.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박보현은 굳은 얼굴로 그 곁에 서 있었다

곱슬머리에 키가 작은 박보현은 그들 곁에 서자 더 초라해 보였다.

변호사가 왜 이렇게 많지요?”

서유진이 최요한 목사에게 물었다.

최요한 목사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아하, 저 사람이 그 유명한 황변호사이고 아마 그 옆은 보조 변호사인가 봅니다. 그리고 그 옆은 박보현의 변호사예요. 돈이 없으니까 변호사를 못 대서 국선변호사가 왔다고 하지요 아마.”

같이 잡혀와 놓고 다른 변호사를요?”

서유진이 놀라자 최요한 목사가 그런 그녀의 순진함이 딱하다는 듯이,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니 결국 옳은 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네요. 같이 잡혀와 놓고 자기네는 좋은 변호사를, 그리고 박보현은 국선변호사를 쓰게 내버려 두었군요. 참 의리도 없는 사람들이지요?”

최요한 목사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참으로 이 며칠 동안 저는 치욕 속에 떨며 왜 제게 이런 고난이 왔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조상님들 앞에서 자신의 생을 돌아보는 계기를 가졌습니다. 저희 선친, 배산 이준범 선생께서 청각장애인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자신의 사재를 몽땅 털어 자애학원을 설립하신 지 50, 저희 형제는 코흘리개 때부터 이 학원과 함께 자랐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청각장애인 아이들을 가엾이 여기라는 선친의 말씀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으며 그것은 여기 있는 제 아우인 서무실장 이강복도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좀 더 위할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좀 더 잘 먹이고 잘 가르칠까 하는 생각이 죄라면……

재판이 시작되었다. 인정신문과 검사의 공소장 낭독이 있고 나서 교장 이강석이 먼저 일어서서 말했다.

모두진술을 하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농인의 것으로 보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통역을 해주시오. 수화 통역을!”

진술을 듣고 있던 판사의 눈매에 날이 서더니 쨍한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뭡니까?”

정리들이 달려가 소리치고 있는 농인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정숙하십시오! 안 그러면 퇴장시키거나 법정 소란죄로 입건합니다.”

통역을!!!”

여기저기서 농인 방청객들이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판사님 그 말도 통역해주세요. 저 사람들 그 말을 못 알아들어요.”

누군가 말하자 방청석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멀리서도 판사의 표정이 해쓱해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앙다물며 방청석 쪽을 노려보았다. 소리치던 농인 한 명이 또 끌려 나갔다.

검사와 변호사 양쪽은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들고 온 서류 위로 고개를 숙이고 볼펜으로 뭔가 체크를 하거나 메모를 했다. 오래된 버릇들 같았다.

법정은 소란스러웠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최요한 목사가 일어섰다.

공판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저는 자애학원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최요한 목사라고 합니다. 이것이 청각장애인의 재판이니만큼 통역을 요구합니다. 어차피 박보현 피고인에 대한 통역이 와 있으니까, 수고스러우시겠지만 그분께 방청객 쪽으로도 통역을 부탁드린다면 부담도 되지 않고 좋을 듯해 건의드립니다. 재판장님께서 그렇게……

최요한 목사가 이야기하는 동안 청중은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나 이것이 판사의 심기를 몹시 건드린 것 같았다.

최요한 목사님 퇴정을 명령합니다. 여기서는 누구나 절차에 의한 발언만 가능합니다.”

최요한 목사가 잠시 판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재판장님, 청각장애인 재판에 통역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닙니까?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처럼 슬퍼하고 분노하며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판사는 대답 대신 정숙하세요!” 하고 소리를 쳤고 최요한 목사는 정리 두 명에 의해 끌려 나갔다.

서유진은 다시 한번 판사가 앉은, 저 높은 자리를 올려다보았다.

창백하고 왜소한 인상의 판사는 굳은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더니 방청석을 빙 둘러보았다.

박보현 피고인의 통역은 우리 재판부를 위해서 와 있는 것이지 방청객을 위해 있는 게 아닙니다. 통역 없이 계속하시고 지금부터 조금이라도 소란을 피우는 경우, 가차 없이 법대로 집행합니다.”

판사가 방청객을 돌아보았다.

그때 한 농인이 일어섰다. 정리들이 달려가는 사이 그가 말했다.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우리도 재판을 보고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지만 우리는 그 말을 듣지 못하고 들을 수도 없으니 당신은 나를 잡아 가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웃음소리와 함께 작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고 시작하자마자 재판은 휴정되었다.

기자들이 휴대폰과 노트북을 들고 이 소란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재판부로서도 이것이 큰 부담이 되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최요한 목사는 앞뜰 구석 벤치에 앉아 있었다.

멀리 하늘을 보고 있던 것 같은데, 서유진이 오는 기척을 느끼자 얼른 허리를 펴고 낮게 기침을 했다.

보수 꼴통 아니라면서요?”

아까 판사를 두고 한 말을 상기하며 서유진이 농담처럼 말했다.

아니지. 보수 꼴통이었으면 법정소란죄로 구속시켰을 거니까요.”

최목사는 잠시 웃다가 말을 이었다.

생각을 못했어요, 차마 통역이 없을 거라고는 말이야. 그래서 그저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건데. 초장부터 이거 미안하게 됐어요.”

서유진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그게 말예요, 목사님. 상식이 말이지요, 상식……

 

본 재판부는 일단 원활한 재판 진행을 위해 통역사를 임시 배치하기로 합니다라는 판사의 말로 재판은 속개되었다.

피고 계속하세요.”

이강석이 다시 일어났다.

참으로 이 며칠 동안 저는 치욕 속에 떨며 왜 제게 이런 고난이 왔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조상님들 앞에서 저 자신의 생을 돌아보는 계기를 가졌습니다. 저희 선친, 배산 이준범 선생께서……

그래 그분께서 설립하신 지 50년 되었고, 그다음 말부터 하세요.”

실내는 몹시 더웠고 판사는 좀 지치고 짜증이 난 듯했다.

몇몇이 키득 웃었다. 그러나 이제 전반적으로 법정은 조용했다.

호통을 들은 이강석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뒷모습으로도 보였다.

,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선친 배산 이준범 선생께서 청각장애인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자신의 사재를 몽땅 털어 자애학원을 설립하신 지 50, 저희 형제는 코흘리개 때부터 이 학원과 함께 자랐습니다.”

판사는 그를 더 바라보다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고개를 약간 숙이며 머리를 긁었다.

한번 외운 구구단을 중간서부터 끊어서 다시 할 수 없듯이 이강석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청각장애인 아이들을 가엾이 여기라는 선친의 말씀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으며 그것은 여기 있는 제 아우인 서무실장 이강복도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좀 더 위할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좀더 잘 먹이고 잘 가르칠까 하는 생각이 죄라면 죄이고, 그것이 죄라면 벌을 받겠습니다. 정에 굶주린 아이들에게 손길 한 번 더 주려고 한 것이 성추행이고, 아이들 머리 한 번 더 쓰다듬어주려고 한 것이 성폭행이라면 저와 제 아우에게 벌을 주십시오. 이건 요즘 저희 재단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일부 젊은 좌파 교사들과 저희 재단을 통째로 삼키려는 좌익운동 세력들이 가여운 장애인 아이들을 세뇌하여 자신들의 권력욕을 위해 이용하려는 파렴치한 사건입니다. 저는 거꾸로 이들을 고발하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러나 저는 이 가여운 아이들의 정신적 아비로서 그리고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제 손으로는 그들을 처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저는 이 며칠 감옥에 갇혀서 이런 시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저희 선친께서 자주 읊으시던 시입니다만, ,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하늘만은 저의 결백을 아실 것입니다!”

무진 영광제일교회 신도들이 앉은 자리에서 작게 박수 소리가 나올 뻔하다가 판사가 노려보자 얼른 멈추었다.

이강석은 스스로의 말에 도취된 듯 아주 만족한 표정이었다.

서유진은 오늘 연두와 유리와 민수가 오지 않은 것이 너무나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직접 이강석 형제나 박보현 등과 맞부딪혀보지 않은 서유진으로서는 솔직히 말해서 저 정도 수준의 인간들과 싸우는 자신이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검사나 변호사 그리고 판사도 그 정도는 알 것이다.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심리의 마지막 부분, 이강석, 이강복 그리고 박보현은 일관되게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마지막으로 판사가 서류들을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피고들, 당신들은 만일 이 혐의가 사실이라면 죄질이 아주 나쁩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교장실과 서무실장실은 일반 교무실과 서무실 직원들이 일하는 곳과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이강복 피고인 대답해보세요.”

 

이강석과 이강복의 얼굴이 동시에 변호사를 향했다.

황변호사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그를 따라온 젊은 보조 변호사는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교장실은 좀 외따로 있는데 비서실이 붙어 있고 제가 쓰는 서무실장실은 서무실 직원들이 쓰는 사무실과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 누군가 큰소리를 치면 들릴 만한 거리입니까?”

! 그렇습니다.”

판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다음 재판은 이번 주 금요일 오후에 열립니다. 검찰 측, 변호인 측, 증인 신청하세요.”

 

첫 공판이 열린 날 오후 서유진과 최요한 목사는 무진시 교육청에서 최수희 장학관과 마주 앉았다.

최수희 장학관이 최목사와 이렇게 마주 앉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만일 최목사가 세습에 반기를 들고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번 딸의 결혼식 집전을 그에게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서유진이 여러 번 면담을 요청한 것을 거부했던 그녀는 이번에 최목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예전에 비해 영향력이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무진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유지였고 최수희로서는 그에게 나쁜 인상을 보여 좋을 일은 없었다. 최수희는 녹차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조사를 해봤는데 저희로서는 뭐 딱히 자애학원의 비리 같은 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나가 조사해보니까 교사 채용공고를 인터넷에 올리지 않았기에 시정명령을 했어요.”

최수희는 애써 서유진 쪽을 바라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게 답니까?”

서유진이 물었다. 최수희는 힐끗 서유진 쪽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 여자는 왜 저렇게 늘 공격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턱대고 싸우자고 덤비는 밥맛없는 여자 축에 속했다.

혼자 산다던데 저렇게 공격적인 여자를 어떤 남자가 데리고 살고 싶어 할까 싶었다.

서유진이 물었으나 최수희는 최요한 목사를 향해 말했다.

, 뭐 지금까지 밝혀진 지적사항은 그게 다입니다.”

최장학관님, 지금 말이 됩니까? 교장과 서무실장, 이사장 아들 둘이 애들을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이 되었는데, 홈페이지요? 그걸 시정하라고 했다구요?”

최수희는 칠판에 손톱이 긁히는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이제 노골적으로 서유진을 경멸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고, 그녀를 외면했다. 최목사가 나섰다.

최장학관님, 여기 일단 무진시민 5,292명의 서명이 든 탄원서를 제출합니다. 앞으로 서명은 더 이어질 거예요.”

최수희가 최요한 목사가 건넨 서류를 힐끗 바라보았다.

우리는 시교육청에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자애법인에 대한 위탁교육을 전적으로 취소하고 공립학교 신설을 요청합니다. 이번 판결이 어떻게 나든 장애인 아이들에 대한 시설에 대한 공공기관의 감독이 전무합니다. 예산을 40억이나 타 쓰면서 감독을 하지 않는 이 구조 자체가 문제이지요. 설사 이번 건이 덮어진다 해도 이런 문제는 계속 발생할 소지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대안은 공립학교 신설 밖에는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성폭행 사실을 처음 고발한 송하섭 교사에 대한 해고를 철회하도록 해주십시오.”

최수희는 풍선껌을 씹는 것처럼 천천히 입모양을 오물거리며 느긋하게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다음 최요한 목사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목사님, 저도 딸 키우는 사람으로서 법원의 판결이 그렇다고 난다면 정말 이 일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딸 키우는 엄마이기 이전에 저는 한 사람의 국가 공무원으로서 목사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게 어렵습니다. 일단, 위탁교육을 취소하면 지금 거기에 있는 아이들 70명은 당장 어디서 교육을 받을 것이며, 사회복지법인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소관이 아니라 무진시청 복지과 소관이구요, 공립 특수학교 설립은 예산이 없으니 어렵습니다.”

서유진이 무슨 말인가 하려고 몸을 앞으로 빼는 순간 최목사가 그녀를 제지했다.

그래요, 공무원으로서 어렵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대책위와 무진시 그리고 교육청이 머리를 맞대면 사람이 하는 일인데 무슨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래보자고 우리가 이렇게 찾아온 것 아닙니까?”

최수희는 엷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아주 좋으신 말씀입니다. 저희 교육청 공무원들이 요즘 자애학원 때문에 날마다 머리를 맞대고 고심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밤에 잠을 못자요. 목사님 저 아시잖아요, 예민한 거……

최수희가 마지막 말을 하며 손을 가리고 웃자, 최목사는 사람 좋게 최수희를 따라 웃었다.

저희 믿고 돌아가 주세요. 무진시청 쪽에서 자애학원 감독을 하니까 문제 해결은 그쪽으로 가시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목사님.”

최수희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 두 손을 딱 마주 잡았다.

그만 나가달라는 표시였다.

목사님은 화가 나지도 않으세요?”

교육청 문을 밀고 나오며 서유진이 물었다.

그는 최수희 장학관 앞에서 그녀를 더 밀어붙이지 못한 최목사가 의심스러웠고 조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최요한 목사는 또 그냥 웃었다. 웃는데 그의 눈가의 주름이 가을 햇살 아래 선명했다.

그래서 웃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서글퍼 보였고 조금은 쓸쓸하고 늙어 보였다.

민주화되고 나면 더 이상 이런 일 안할 줄 알았어요. 화가 난다기보다는 뭐랄까요……? 견고한 저 성벽이 정권이 바뀐다고 변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예수가 다시 온대도 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겠구나 싶기도 하구요. 저런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또다시 예수를 죽이겠죠.”

발끈하던 유진은 뜻밖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일단 재판 결과가 나오면 좀 달라지겠죠. 그들에게 유죄가 선고되고 나면 저 최장학관이나 그런 사람들도 더 빼지는 못할 테니까.”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교사들이 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한다고 했는데 이제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카메라와 기자들이 웅성거리고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듣지 못하는 진정한 청각장애자였습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교사들은 모두 검정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해고된 송하섭 교사까지 포함해 모두 열세 명이었다.

강인호가 나와 성명서를 낭독했다. 그 곁엔 수화 통역사가 함께 있었다.

저기는 좀 상식이 통하네요 목사님.”

서유진이 최목사에게 말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은 조금 웃었다.

저희 자애학원 교사들은 오늘 사랑하는 제자들과 존경하는 학부모님들 그리고 무진시민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자 여기 모였습니다.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이 그토록 오랜 시간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음에도 저희는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교사들을 채용하면서 뇌물을 요구하고, 수업 시간에 포르노 테이프를 복사해오 라는 굴욕적인 요구를 해도 저희에게는 그것에 항의할 입이 없었습니다. 장애인은 우리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교사들이 귀를 막고 입을 닫고 있는 동안 듣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제자들은 그들에게 능욕당하고 짓밟히다가 심지어 이번 학기 들어 두 사람이 목숨을 잃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하나둘 밝혀질 때마다 저희 교사들은 괴로움에 빠져 진심으로 밤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교사로서, 아니 그 이전에 어른으로서,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해 양심의 소리를 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저희는 이런 사실에 대해 제자들과 학부모님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열세 명의 교사들은 마련된 단상에서 청중들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모여 있던 학부모들과 시민들의 박수소리가 울렸다. 울먹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인호의 낭독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당연히 들어야 할 것을 듣고 당연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할 것입니다. 저희 학원의 경영을 감독해야 할 교육청과 시청의 침묵, 자애학원 이사들의 침묵을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앞으로 모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선생이 스승이 되고 학생이 제자가 되는 날까지,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는 그 날까지, 학생들이 편안히 잠들고 일어나 열심히 배울 수 있는 안전한 학원을 만들 때까지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이 내주신 세금으로 운영되는 우리 학원이 진정한 아이들의 배움터가 되는 그날까지 사죄하는 마음으로 싸우고 가르치고 사랑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또한 이 순간에도 돈 없고 백이 없어서 걸레 조각처럼 쓰러져 신음하는 이들, 갖은 폭력과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어온 이들, 외출 한번 하지 못하고 강제적인 노동에 시달리며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인간 대접 한번 받지 못한 채 노예처럼 살아가는 모든 장애인들을 위해 궁극적으로 싸울 것도 다짐합니다.”

무진에 도착한 이래 강인호의 얼굴이 이렇게 빛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엷어지고 투명해진 가을 햇빛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검은 양복을 입은 그는 얼핏 젊은 사제처럼도 보였고 진리의 한자락을 잡은 수도승처럼도 보였다.

아니 그의 얼굴이 그토록 밝게 기억된 까닭은 아마도, 곧 그에게 닥칠 검은 그림자 때문이었는지도 또 모른다.

그래서 그날 그의 얼굴에 대한 기억이 더욱 빛으로 남았는지도 말이다.

장경사는 청중의 맨 뒷줄에 서서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이례적으로 맑은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늘처럼 맑았고 바람은 바다에서 육지로 쾌청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강인호는 무진 지방법원에 도착하면서 준비해온 과자를 유리에게 주었다.

유리는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차 뒷문을 열고 강인호는 입 속에 들어가 있는 유리의 손을 잡아 차에서 내려주며 말했다.

무서워할 것 없어. 그냥 아는 대로 사실대로만 이야기하면 돼. 선생님이 끝나고 맛있는 거 사줄게, ? 그리고 자꾸 손가락 빨면 안 돼. 벌써 여기가 빨갛게 헐었잖아.”

유리는 강인호에게 잡힌 손가락을 빼려고 하면서 수줍게 웃었다.

강인호는 앉은 자세에서 유리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유리의 가슴이 새처럼 콩닥거리며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연두가 언니처럼 어른스레 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

1차 심리 때보다 기자들의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었지만 학부형이나 시민들의 수는 더 불어나 있었다.

최요한 목사와 서유진 그리고 강인호와 연두 유리 그리고 민수는 공판석 앞자리에 앉았다.

판사는 지난번 공판 때 자신의 처사가 비판적인 논조로 언론에 보도된 탓인지 오늘은 조금 마음을 진정시킨 듯했다.

처음부터 부드러운 주문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오늘은 증인 심문이 있을 예정입니다. 증인들이 몹시 예민해 있다는 것을 참작하셔서 정숙을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안이 미묘한 만큼 그리고 사춘기의 학생들인 만큼 여러분들 질문에 유념해주시고, 그리고 증인들의 요청이 있을 시에는 언제든지 비공개로 진행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수화 통역사, 이 점 증인들에게 잘 통역해주기 바랍니다.”

판사는 지난번 재판 도중 세 명이나 퇴장시켰던 것은 어디까지나 법을 지키기 위한 자신의 노력이었지, 자신이 결코 장애인에 대해 편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이강석과 이강복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수인 차림으로 나타났을 때 연두와 민수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한 번도 저들이 저런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연두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강인호의 시선을 의식하자 연두는 그것을 닦아내며 씨익 웃었는데 눈빛은 분노와 공포의 기억에 잠겨 있었다.

강인호가 그런 연두를 향해 수화로 파이팅! 하고 말했다. 연두는 야무진 입술을 다물며 파이팅 하고 대답했다.

먼저 변호인 측의 증인들이 나섰다. 첫 번째 증인은 뜻밖에도 교무실에서 강인호의 옆자리에 앉은 박선생이었다.

그는 갈색 양복을 입고 차분한 표정으로 증인석에 섰다.

증인석에 서기 전 그는 교장 이강석과 이강복에게 가벼운 목례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설마 여기 아이들이 앉아 있는데, 싶었다. 그는 증인 선서를 하고 변호인 앞에 섰다. 황변호사가 질문을 시작했다.

박경철 교사, 증인은 자애학원에 근무한 지 얼마나 됩니까?”

“11년째 됩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교장과 서무실장에 대해 인간적으로도 많은 걸 알 수가 있었겠군요.”

wp ak“글쎄요,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전적으로 안다고는 할 수 없을 진 모르겠으나 인간적으로 두 분은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이강석과 이강복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수화 통역을 듣고 있던 연두와 유리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검사가 일어섰다.

재판장님, 변호인은 지금 사건과 아무 상관이 없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변호인에게 주의를 주었다.

인정합니다. 사건에 대해 질문하세요.”

체구가 작고 등이 약간 굽은 황변호사는 판사의 말에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변호인으로서의 첫발, 세상에 태어나 이런 지적을 받아본 일이 있었던가 싶은 표정이었고

아하, 내가 지금 변호인이 되었구나, 잠시 회한이 어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곧 냉정한 어투로 그가 물었다.

증인은 교장이나 서무실장이 아이들을 심하게 쓰다듬거나 혹은 수업 중에 교장실 혹은 서무실로 홀로 아이들을 불러가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박선생의 단호한 대답이 통역됨과 동시에 방청석 뒤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지난달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아이가 박선생 반이었다.

그 아이는 분명 수업 시간에 종종 서무실장에게 불려 나가곤 했었다.

그 아이의 친구가 방청석에 있다가 박선생의 증언을 듣고 비명을 지른 것이었다.

판사의 얼굴이 다시 무섭게 변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말했다.

수화 통역사, 분명히 통역하세요. 소란은 퇴정이라고 말이지요.”

판사가 말하는 동안 박선생은 얼어붙은 듯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가 보고 있던 것은 진정 이었을까, 강인호는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생각하곤 했다

황변호사는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헛기침을 하더니 냉랭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그럼, 만일 누군가가 교장실이나 서무실로 끌려가 비명을 질렀다면 그걸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많겠군요?”

물론입니다.”

검찰 측에서 이의를 제기하려고 했으나 변호인은 재빨리 이상입니다하며 심문을 마쳤다.

연두의 얼굴은 빳빳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재판정에 오면 모두가 증인 선서를 한 대로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사실만을 확인하여 진실이라는 것이 비로소 우리가 원하던 바로 그 자리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 연두를 바라보면서 강인호는 연두뿐 아니라 자신 역시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박보현 피고인 변호인, 증인 심문하시겠습니까?”

판사가 묻자 연한 갈색의 양복을 입은 박보현의 국선변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 질문은 앞의 변호인께서 거의 다 하셨습니다. 추가 질문 없습니다.”

강인호는 그 국선변호인이 아까 법원 복도 한구석에서 싸구려 주간지를 손에 들고 졸고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검사가 일어나 박선생 앞으로 갔다.

이곳에 부임한 지 11년이라고 하셨는데, 사범대 출신도 아니고 일반 대학 일반 학부를 나오신 분이 어떻게 여기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검사의 질문에 변호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지금 검찰 측은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검사가 맞받아쳤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학교의 교사들은 모두가 일종의 약점을 지녔기에 이런 불상사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침묵 속에 은폐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건 어쩌면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

차고 무뚝뚝해 보였던 40대 초반의 검사는 은테 안경 너머로 판사를 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그의 눈에서 뜨거운 열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강인호와 서유진 그리고 최목사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빛이 어렸다.

그랬다. 침묵의 카르텔, 그것이 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판사는 잠시 재판정을 둘러보더니 인정합니다. 계속하세요하고 짧게 말했다.

박선생의 얼굴은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노련하고 느끼한 표정으로 구두를 갈아 신으며 강선생도 참 고집 세네. 내가 전에 충고하지 않았나요? 그거 알아서 뭐하시려고요?”라고 묻던 그는 사라지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아야 할 자신의 밥줄과 인간적 모멸감 사이에서 겁먹은 한 가여운 월급쟁이가 증인석 위에서 자신의 월급봉투를 쥐고 있는 인간들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일반학과를 나왔지만…… 나중에 특수교육 대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러면 그 경력으로 여기 말고 다른 학교에 취직하시기는 조금 애로가 있었겠네요,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말입니다.”

…… 모르겠습니다.”

더듬거리는 박선생의 말을 자르며 검사가 물었다.

수화할 줄 아십니까? 간단한 인사 말고 아이들과 이야기할 만큼이요?”

순간 박선생의 얼굴이 참담하게 굳어졌다

이상입니다.”

검사가 질문을 마쳤다.

수화로 이 심문을 듣고 있던 연두가 기쁜 얼굴로 강인호를 바라보았다. 강인호도 연두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변호인 측이 신청한 다음 증인은 뜻밖에도 산부인과 여의사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산부인과 여의사라면 지난번 성폭력상담소장이 유리를 데리고 가 검진을 받은 사람이었고 아무래도 피고들 측에 불리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변호인은 판사석에 서류를 하나 전달했다.

이게 뭡니까?”

, 피고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는 진유리 양에 대한 산부인과 의사의 소견서입니다.”

그리고 변호인 측이 질문을 시작했다.

산부인과 의사는 뚱뚱한 몸 때문인지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훔치고 있었다.

그녀의 금테 안경 아래로도 송송 땀이 맺혀 있었다.

증인은 무진 성폭력상담소 소장이 데리고 온 진유리 양을 진찰한 적이 있지요?”

, 그렇습니다.”

진찰 결과 어떤 소견을 가지셨습니까?”

, 소견서에 쓴 그대로입니다. 외음부 염증이 있었고 처녀막이 손상된 상태였습니다. 5시 방향으로 3센티 정도의 열상이 발견되었는데, 성행위와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있으며 최근 성관계도 아니고 오래된 열상인 것으로 사료되니 관찰을 요한다고 했습니다.”

증인, 증인은 오랜 시간 산부인과 의사로 일해왔고 무진시에서는 거의 산부인과계의 대모 같은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소녀들의 처녀막은 단지 성관계에 의해서만 파괴됩니까?”

굳어 있던 산부인과 여의사는 산부인과계의 대모라는 말에 땀을 닦다 말고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녀의 대답은 훨씬 더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경우의 수가 적기는 하지만 자전거를 타거나 심한 자위행위를 해도 처녀막은 손상됩니다.”

방청석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강인호는 약간은 겁먹고 멍한 눈길로 산부인과 의사를 바라보고 있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다면 저 말을 통역하는 걸 보는 유리의 눈을 가리고도 싶었다.

증인, 증인은 무진 산부인과계의 대모로서 성폭행 당하고 온 환자도 여럿 보았을 것으로 압니다. 그 환자들은 대개 어떤 상태입니까?”

이제 무진 산부인과계의 대모는 위엄을 갖춘 자세로 어깨를 쭉 폈다.

대개는 외음부의 열상이 심하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몹시 고통스러워합니다. 무엇보다 수치심 때문에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지요. 그리고 성폭행의 경우에는 외음부 외에도 다른 신체의 멍이나 상처가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아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그렇다면 진유리 양은 몹시 고통스러워하거나 신체에 다른 멍자국이나 상처를 가지고 왔습니까?”

산부인과 의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서 저도 의아했습니다. 과자를 먹고 있더군요. 저도 의사이기 이전에 한 여자로서 성폭행을 당하고도 저럴 수 있나…… 그래서 기억이 납니다. 다른 멍자국이나 신체의 상처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상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아 무진여고!”

서유진이 고개를 숙이고 한 자리 건너 앉은 강인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저 의사 무진여고 동창회 총무야. 교육청 최수희가 회장이고. 그걸 생각 못했어! 어떻게 하니?”

서유진이 낮게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강인호가 길게 숨을 한번 내뱉고 딱하다는 표정으로 서유진을 바라보았다.

무진여고 나오지 않은 의사가 이 무진에 몇 명이나 되는데,?”

서유진이 잠시 생각하더니 피식 웃었다.

없어. 있다면 무진고 출신이겠지.

문제는 동창회 간부였다는 걸 몰랐다는 거야. 그지같이.”

다음, 박보현 피고 측 변호인 심문하세요?”

아닙니다. 제 질문은 앞의 변호인께서 거의 다 하셨습니다. 추가 질문 없습니다.”

국선변호인이 일어나 똑같은 말로 간단히 대꾸했다.

박보현의 고개가 힘없이 푹 수그려졌다.

판사는 경멸스러운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국선변호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검찰 측 심문하세요.”

검사는 서류를 뒤지더니 판사에게 또 한 서류를 전달했다.

서류를 받아든 판사가 물었다.

이건 또 뭡니까?”

역시 진유리 양에 대한 소견서입니다. 제가 제출한 것이 처음 작성한 것이지요?.”

검사가 묻자 산부인과 의사는 다시 땀을 닦기 시작했다.

판사가 직접 산부인과 의사에게 물었다.

증인, 소견서를 두 장이나 쓰신 게 맞습니까?”

어깨를 움찔하던 산부인과 의사가 다시 땀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게……

, 아니오로 대답하세요. 소견서를 두 장이나 쓰셨네요…… 내용은 좀 다르군요. 첫 번째 것은 에, 그러니까, 처녀막이 파열되어 있고, 최근 성관계는 없었던 것으로 사료되며 외음부 진료를 요함…… 변호인 측이 제출한 것이 두 번째 것이고…… , 검찰 측 심문하세요.”

판사는 산부인과 여의사를 빤히 바라보더니 검사에게 말했다

산부인과 여의사는 변호사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변호사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소견서를 다시 쓰신 이유가 뭡니까?”

산부인과 의사가 다시 변호인 측을 바라보다가 잠시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몰랐어요. 이게 그렇게 큰 사건인 줄……

검사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몰아쳤다.

의사의 소견은 사건의 크기에 따라 달라집니까?”

그게……

처음 소견서에 최근의 성관계는 없음으로 사료됨, 이라고 썼으면 그 전의 성관계는 있었다는 걸 전제로 한 거지요?”

……

존경하는 재판장님, 제 검사 생활 15년에 어떤 것이 원인이라고 사료된다는 소견서는 수없이 보았지만 어떤 것이 원인은 아님이라고 적는 소견서는 솔직히 처음 목격합니다. 이상입니다.”

판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

저도……

판사는 검사처럼 몇년 만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검사보다 연차가 낮은 모양이었다.

처음 보긴 처음 봅니다. 증인, 그런데 정말 사건이 커서 말을 바꾸신 겁니까?”

판사가 부드럽게 묻자 산부인과 의사는 그제야 울 듯한 표정으로 말을 바꾸었다.

아닙니다. 판사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 소견서 하나로 한 사람과 그 가정이 평생 파괴될 수도 있다는 것의 막중한 의미를 생각한 것입니다. 의사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그런 고뇌가 있었습니다. 처녀막이 파열되었을 때 바로 왔다면 저도 좀 식별이 쉬웠을 텐데 진유리의 경우는 너무 오래된 상처 같았습니다. 처녀막이 파열된 지 너무 오래인데, 지금도 어린 학생이 그때는 너무 어려서 성관계로 인한 파열의 가능성이 너무 적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지금 15살인데 어떻게 5년 전에 성관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물리적으로도……

알겠습니다, 증인.”

그때 황변호사가 다시 일어섰다.

증인, 증인은 아까 성폭력을 당한 여자들은 통상 수치심 때문에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인데 여기 와 있는 피해자는 심지어 과자를 먹고 있어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피해자가 정신지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나요?”

산부인과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 나중에 성폭력상담소 소장이 말해주더군요.”

한 가지 더 대답해주십시오. 의사의 신분으로 말입니다. 그런 아이들이 통상 수치심이 있습니까?”

방청석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욕설이 튀어나왔다.

강인호는 자신도 모르게 유리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끌어당겼다. 수화를 보지 못하게 하려고 말이다.

그러나 유리는 강인호의 얼굴에 고개를 묻고 들지 않았다. 유리가 울기 시작한 것이다.

정숙하세요, 정숙하세요!”

방청석의 갑작스러운 소란에 산부인과 의사는 겁먹은 얼굴이 되어 다시 땀을 닦고는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산부인과에 관련된 진단만을 하는 것이니까요.”

그럼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대답하시기 힘들더라도 진실을 위해 증언해주시기 바랍니다. 증인은 아까 아이가 어리다고 했는데 대체 이렇게 어린아이와 성인 남성의 성관계가 가능합니까? 설사 가능하다 해도 여성의 자발적 동의 없이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검사의 문제 제기에 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입니다. 변호인은 다른 질문을 하세요.”

황변호사는 기분이 몹시 언짢다는 듯 후배 판사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이상입니다하고 자리에 앉았다. 강인호는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유리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유리는 이제 수화 통역도 보지 않고 그냥 강인호에게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검찰 측에서 다음 증인으로 유리와 연두를 호명할 텐데 싶어 강인호는 걱정이 되었다.

유리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유리가 좀 진정되기만을 기다렸다.

다음 증인 나오세요.”

판사가 말하자 변호인이 일어섰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다음 증인은 바로 피해자 진유리와 김연두 그리고 전민수 군입니다. 그들의 수치심과 프라이버시 보호를 고려해 비공개 재판을 요구합니다.”

난데없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 제안을 변호인 측에서 한다는 것은 기습이었다.

판사는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검찰 측을 바라보았다.

검사 역시 그것을 막을 만한 명분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만일 그것을 막는다면 아까 변호인이 질문하고 방청석에 그토록 동요를 일으켰던 그 질문, “수치심이 있습니까?”라는 말에 간접적으로 동조하는 셈이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동의합니다.”

방청석 모두 퇴정해주십시오.”

정리가 외치고 있었다.

그 말이 수화로 통역된 다음에도 유리는 강인호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안돼요, 목사님. 어떻게 좀 막아보세요. 아시잖아요, 유리…… 너무 겁먹었어요.”

서유진이 최요한 목사에게 말했다. 강인호도 나섰다.

겨우 여섯 살이라고 보시면 돼요. 아니, 열다섯 살이라고 해도 이 아이들은 거의 수용소에 있다가 나온 것과 마찬가지예요.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해요. 그러니 애를 이 낯선 데, 아니 저 짐승들만 있는 곳에 놔두고 갈 순 없어요.”

최요한 목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행히 유리는 거짓말을 못하니 믿어봅시다. 강선생님, 연두에게 유리를 좀 잘 데리고 있으라고 전해주세요. 민수에게도요.”

강인호가 연두에게 최목사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그런 연두와 민수조차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이 아이들은 태어나서 거의 한 번도 이런 곳에 와본 일이 없는 것은 물론, 거의 기숙사 밖으로도 거의 나와 보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강인호가 연두와 유리 그리고 민수를 모아놓고 수화로 이야기를 했다.

무서워하지 마. 선생님이 아주 가는 게 아니야. 바로 이 문밖에 있어. 저분들은 진실을 알고 싶어하고 그게 밝혀지면 이제 아무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거야, 알았지? 너희는 지금 진실의 대표선수가 된 거야. 국가대표선수들처럼, 알았지?”

정리가 나가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강인호는 유리의 양손을 연두와 민수에게 쥐여주고 천천히 법정을 걸어 나왔다.

세 아이의 여섯 개의 눈동자가 애타게 강인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목사는 창가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도하는 듯했다. 강인호도 그를 따라 기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낮은 목소리로 기도하고 있는 최목사의 곁에 서 있다가 최목사가 아멘, 하고 말할 때 그를 따라 입속으로, 진심을 다해, 그렇게 말했다. 아멘, 아멘……

유리는 증인석으로 나갔다.

넓은 재판정 한구석에 연두와 민수가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다른 편에는 이강석과 이강복, 그리고 박보현이 앉아 있었다.

겁에 잔뜩 질린 채로 수화 통역사의 손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과, 황변호사와 무슨 이야긴가를 나누며 미소 짓고 있는 피고인들이 있었다. 판사가 물었다.

먼저 피고인들에게 묻겠습니다. 증인들에게 수치심을 주지 않으려고 모든 방청객을 내보낸 상태입니다. 이 아이를 보니 어떤 심정이 듭니까? 이 법정에 마주 서 있지만 당신들의 제자가 아닙니까? 교장 이강석 피고인부터 말해보세요.”

이강석은 벗어진 이마를 매만지며 천천히 일어서서 말했다.

이제 보니 저 아이의 얼굴이 생각나는 것도 같습니다. 제가 그런 몹쓸 짓을 했다고 말한 아이가 누군지 늘 궁금했습니다. 바로 저 아이였군요. 방학 때도 집에 가지 못한 아이라서 제가 과자 사 먹을 돈도 가끔 주고 그랬지요. 저런 가엾은 아이를 내세워 저희 형제에게 입에 담지 못할 누명을 씌우는 자들이 정말 밉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

피고인은 지금 저 아이를 기억도 못한단 말입니까?”

판사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지금 보니까 몇 번 본 기억은 있습니다만……

판사가 턱을 괴고 곰곰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증인석에 앉은 유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두가 멀리서 유리에게 조그만 손짓으로 말했다.

유리야, 괜찮아, 저 사람들 말 듣지 마.

판사가 다시 말했다.

이강복 피고인, 박보현 피고인, 차례로 한번 이야기를 해보세요.”

이강복이 일어섰다.

교장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저도 이제 저 아이가 기억납니다. 부모도 정신지체이고 불쌍한 아이이지요. 제가 현관 같은 데서 만나면 머리도 쓰다듬고 귀여워해 주었는데요.”

판사가 그런 이강복을 곰곰 바라보았다.

이강복은 정말로 애처로운 눈길로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는 이강복의 시선을 받자 고개를 숙이며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럼 박보현 피고인도 이제야 이 아이가 생각납니까?”

판사가 물었다. 통역이 끝나자 박보현이 이강석과 이강복의 눈치를 살피며 수화를 시작했다.

아닙니다. 이 아이들은 제가 사랑하고 늘 아껴주던 아이들이었습니다.

수화를 보자마자 민수가 벌떡 일어나 격렬한 수화를 시작했다.

민수의 얼굴은 분노로 붉었고 눈은 흰자위가 드러나도록 희번덕거렸다.

수화통역사는 두 농인이 동시에 수화를 하자 잠시 통역을 멈추고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유리의 얼굴은 더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통역사, 저 남자아이를 좀 진정시켜주세요.”

통역사가 민수에게 주의를 주고 나서 자리가 다시 정리되자 판사가 잠시 큰 한숨을 쉬었다.

계속합시다. 진유리 양 검찰 측 심문하세요.”

검사가 물었다.

진유리 양, 저 중에 어떤 사람이 유리 양의 옷을 벗기고 그리고 아프게 했나요?”

검사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신중하게 물었다.

유리가 손으로 교장 이강석과 그의 동생 서무실장 이강복 그리고 박보현을 차례로 가리켰다.

판사는 이 상황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 사람이 일제히 유리를 무서운 기세로 노려보고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가뜩이나 창백한 유리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가기 시작했다.

검사가 교장 이강석을 지명하며 물었다.

몇 번이나 그렇게 했나요?”

이제 거의 겁에 질린 유리는 수화를 알아듣기 힘든지 자꾸 되물었고 겨우, “많이요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서무실장 이강복을 지명하며 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아주 많이요.

검사가 흠, 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박보현이었다. 유리가 대답했다.

아주, 아주 많이요.

검사가 판사를 보고 말했다.

이상입니다.”

이번에는 황변호사가 나섰다.

유리는 이제 수화통역사가 아니라 연두의 얼굴만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안돼요, 목사님. 어떻게 아이들을 가해자와 대면시켜놓고 우리를 내쫓을 수 있는 거죠? 검사는 대체 뭐하는 사람인 거죠? 이제 알겠어요. 검사도 남자네요. 설사 저처럼 다 큰 성인이라 해도 자기를 성폭행한 사람을 대면시키는 것은 지옥 같은 일인데…… 만일 검사가 여자였다면 이렇게는 하지 못하도록 막았을 거예요.”

서유진은 무진 지방법원 로비에서 최목사와 강인호를 앞에 놓고 분통을 터뜨리다가 말을 멈추었다.

어쩌면 이것이 여자와 남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그녀는 최수희 생각을 했다. 그 도도한 철면피에 비하면 차라리 저 남성 검사가 최수희보다는 나을지도 몰랐다.

그때 정리가 로비로 오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진유리 증인 보호자! 어디 계세요?”

세 사람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정리의 손짓에 따라 강인호가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진유리 양이 약간 발작을 일으켰어요. 잠시 휴정인데, 어떻게 구조대를 부를까요?”

강인호가 먼저, 이어 서유진이 아이에게 뛰어갔다.

유리는 실수로 창문 안으로 날아든 작은 새처럼 연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강인호가 아무리 달래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연두가 강인호를 바라보았다. 연두의 눈도 눈물에 젖어 있었다.

선생님, 변호사가 유리를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붙였어요. 누가 우리에게 이런 거짓말을 하라고 시켰냐고 했어요. 선생님 우리 그냥 기숙사로 가고 싶어요…… 여기서 진실을 말하면 들어준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아니잖아요…… 저 선생님들이 거짓말을 하는데 아무도 막아주지 않잖아요.

강인호는 우선 아이들을 자리에 앉히고 연두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유리를 안았다.

유리는 잠시 반항했지만 곧 강인호의 품에 안겼다.

안긴 아이에게 수화를 할 순 없었지만 강인호는 유리의 등을 토닥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괜찮아, 힘들었지? 잘했어. 이제, 이제 다시는 그렇게 놔두지 않을게. 유리야! 우리 유리……

강인호는 그렇게 유리의 등을 두드리다가 연두의 편지를 떠올렸다.

유리가요, 선생님이 아빠였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대요……

순간 강인호의 목이 꽉 메어왔다. 그로서는 아주 생소한 지명이 적힌 유리의 주소지를 생각했다.

한 번도 아이에게 와보지 않았다는 그 부모와, 방학이면 다른 아이들이 다 집으로 가버린 후 넓고 추운 기숙사에서 혼자 앉아 있었을 아이를 생각했다.

사람이 그리워서 창문을 내다보는 유리를 생각했다.

그에게 다가온 교사가 이렇게 그녀를 안아주었을 것도 생각했다.

그 첫 순간, 아직 털북숭이의 짐승 같은 손이 그 애의 속옷을 벗기기 전인, 그 짧은 순간, 유리는 또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다……

20분 후 개정한다는 정리의 말에 따라 기자들과 학부모들과 무진 영광제일교회 신도들이 느리게 재판정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강인호는 순간 어떤 뜨거운 것이 끝없이 자신의 내부로부터 올라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분노이지만 그것만은 아니었고, 이번 재판에서 꼭 이겨야겠다는 결심이지만 꼭 그것만도 아니었으며, 이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운명에 대한 연민이었지만 역시 또 그것만도 아니었다.

이 아이들의 고통과 슬픔 뒤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숨겨져 있다.

어둠의 세계, 공포의 세계, 위선과 가증과 폭력의 세계.

그는 자신이 그 아이들과 이미 하나가 되었으며 이들과 운명을 함께 하는 일이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버렸다.

먹이를 찾아 무진으로 쫓기듯 왔던 그는 이제 스스로의 내부로부터 어떤 빛이 비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따스했고 밝았다. 그리고 그 빛은 그의 존재를 존엄하게 비추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너는 먹이를 찾는 한낱 짐승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는 유리를 안은 채로 연두의 손을 잡아당겨 그녀의 두 눈을 보며 말했다.

연두야, 이제 네 차례야. 그래, 선생님이 솔직히 말할게. 이거 어려운 싸움이야. 진실은 말이야, 그걸 지키려고 누군가 제 몸을 던질 때 비로소 일어나 제 힘을 내는 거야. 우리가 그걸 하찮게 여기고 힘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힘을 잃어. 연두야, 네가 용기를 주어야 해. 진실에게 그리고 유리에게…… 넌 할 수 있어.

연두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자신 없는 듯 떨구었다

 

검사를 만나러 갔던 최목사가 다가왔다.

아이들, 우리들이 지켜보는 데서 증언하기로 했어요. 유리는 이제 그만 하구요. 잘 되었어요.”

최요한 목사는 기쁜 낯으로 말했다. 순간 연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연두의 시선이 머무는 곳으로 강인호가 돌아보자 곧 쓰러질 듯 얼굴이 누렇게 변한 남자가 연두의 어머니와 함께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수술 날짜를 받았기 때문에 어제 올라갔어야 하는데 애 아빠가 연두를 보고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워서 이렇게 되었어요, 선생님.”

연두 어머니가 말했다. 연두의 아버지는 강인호와 최목사에게 목례를 가볍게 하고 연두를 안았다.

연두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로 잠시 그렇게 떨고 있었다.

강인호는 새미를 떠올렸다.

새미가 연두와 같은 위치에 있다면, 자신이 죽음을 암 선고를 받고 병에 걸리고 직업을 잃고 아내가 배춧빛 얼굴로 시들어간다면, 그렇다면 그도 마지막 숨을 다해서 이리로 올 것 같았다.

와서 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무한한 사랑과 응원을 보여줄 것 같았다.

그러자 강인호는 순간 처음 만난 연두의 아버지가 남같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가 겪고 있는 아픔을 느꼈고 세상 모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연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최목사와 서유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교장이 그녀를 화장실로 끌고 들어가 추행한 것과 유리를 성폭행하던 걸

목격한 정황에 대해 묻는 검사에게 수화로 조리 있게,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 증언이 있는 동안 자애학원을 졸업한 농아 두 명이 소리를 질렀고 그리고 법정 밖으로 쫓겨났다.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올 비명소리를 막으려고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연두의 증언을 듣던 판사의 얼굴이 점점 더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검찰 측의 심문이 끝나고 황변호사가 일어섰다.

그는 연두의 얼굴을 노려보며 다가왔다.

연두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로 가서 꽂혔다.

연두 아버지가 퀭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러자 연두의 입매가 야무지게 다물어졌다.

그래서 황변호사가 다가왔을 때 연두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연두의 두 눈은 별처럼 빛나는 듯했다.

황변호사의 현란한 말솜씨를 이미 겪은 방청석이 고요해졌다.

김연두 양…… 교장선생님이 연두 양을 화장실로 끌고 갔다고 했는데, 맞나요?”

, 맞습니다.

증인은 평소에 교장선생님과 잘 알고 지낸 사이였나요?”

아닙니다. 교장선생님은 가끔 학부모들이 오실 때나 저희 반에 들어오셨고 저는 멀리서 가끔 뵈었을 뿐입니다.

황변호사의 무표정한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감돌았다.

그렇군요. 그러면 그분이 교장선생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죠?”

의아한 표정으로 연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후 연두가 대답했다.

그분이 교장실에서 나오다가 저를 발견하셨고 그리고 저를 교장실로 데리고 들어가셨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연두 양, 그 사람이 지금 여기 있습니까?”

수화통역사가 황변호사의 말을 통역하자 연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연두 양, 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저 둘 중에 누구입니까?”

연두가 두 피고인 이강석 이강복 형제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 역시 그들에게 향했다.

그때 모두가 깨달은 것은 그들이 쌍둥이이고 구치소의 피고인으로서 똑같은 관복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옷차림으로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했으나 여기서는 불가능했다. 연두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이미 기소된 저들의 신원을 증인에게 확인하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검사가 나서자 황변호사가 언성을 높혔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증인의 진술에 따르면 피고인이 교장이라고 하는 정황은 오직 그가 교장실에서 나왔고 다시 교장실로 증인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기 교장과 똑같은 얼굴의 이강복 피고인이 동일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둘 중 한 사람은 무고할 수도 있습니다.”

방청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기습이었고, 한때 무진의 최고 수재가 아니면 생각지 못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받아들입니다. 변호인 계속하세요.”

황변호사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연두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너무 바싹 다가섰기에 수화통역사도 하는 수 없이 연두에게 더 가까이 갔고, 그래서 두 사람이 연두를 둘러싼 형국이 되어 방청석에서 연두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황변호사가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 둘 중에 누가 그 사람입니까?”

침묵은 길었다. 중요한 증언이었다.

게다가 나중에 연두가 증언할 유리의 성폭행 장면도 그 가해자가 이 둘 중의 누구인지 구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강석 이강복 형제 중 한 사람만 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기로 할 수도 있었다.

저기, 판사님, 연두가 직접 그 증인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고 합니다.”

연두를 보고 있던 수화통역사가 돌아서서 판사를 향해 말했다.

방청석이 술렁거렸다.

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용합니다.”

연두가 증인석을 내려와 천천히 피고들 앞으로 다가갔다.

이강석 이강복 두 형제가 눈꼬리가 긴 눈으로 연두를 쏘아보고 있었다.

연두는 조금 떨고 있었다.

걸어가던 연두가 다시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빠르게 두 피고인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의 손짓은 격해졌고 얼굴은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강인호가 앉은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손짓이었다.

연두가 그렇게 격한 수화를 몇 번 반복한 후, 손가락을 뻗었다.

그리고 똑같이 머리가 벗어지고 똑같이 흰 얼굴에 눈매가 길고 찢어졌으며

똑같이 관복을 입은 사람 둘 중 하나를 가리켰다. 일부 방청객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판사가 서류와 피고인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변호사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증인은 일단 증인석으로 가세요. 맞습니다. 정확히 맞추었습니다. 이 사안이 중요한 만큼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이강석 피고인에게 무슨 신체적 특징이 있습니까? 증인이 확신하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연두가 수화를 시작했다. 통역사가 판사를 향해 돌아섰다.

저는 솔직히 누가 교장선생님이고 누가 서무실장이신지 몰라요. 다만 저를 끌고 갔던 사람, 유리를 끌고 가 몹쓸 짓을 했던 그 사람은 간단한 수화를 알고 있었어요. 제가 가서 그 수화를 하니까 한 사람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어요.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방청석에서 작은 탄성이 일었다.

판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수화지요, 증인?”

그 사람은 저를 끌고 간 후에나 유리를 끌고 간 후에 와서 저보고 지금 본 걸 다른 곳에 가서 말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수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그 두 사람에게, 바로 그 수화,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수화를 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알아들었어요. 그 사람입니다.

방청석에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번에는 판사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 얼굴에는 약간의 미소마저 어리고 있었다.

변호인, 앞으로는 피고 두 사람이 쌍둥이라는 이유로 시간을 끌지 않도록 하세요.”

연두가 제 부모를 바라보자 연두의 아버지가 두 주먹을 불끈 위로 쥐었다.

연두가 환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지체되는데요, 저기 유리 양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까 연두 양에게 그 증언을 듣도록 해주세요. 연두 양 괜찮겠어요?”

판사가 부드럽게 물었다.

통역을 본 연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판사가 검사에게 심문을 부탁했다.

검사가 일어섰다.

증인, 증인은 지난달 저녁에 학교 근처에서 컵라면을 사고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어야 할 친구 유리양이 없어진 것을 알고 찾던 중 교장실 앞으로 우연히 다가가서, 유리양이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했는데, 사실입니까?”

검사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방청석에서 거짓말!” “집어치워!”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판사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정리가 고함을 치는 사람들 쪽으로 다가갔다. 무진 영광제일 교회에서 나온 신도들이었다.

.

정황은 공소장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미성년자 학생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공소장으로 대신합니다.”

좋습니다.”

판사가 대답하자 황변호사가 일어섰다.

그는 잠시 연두를 노려보더니 한 장의 종이를 들고 연두 앞으로 갔다. 통역이 그 옆에 섰다.

그러자 변호인이 자세를 가다듬고 말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이 사건이 참으로 해괴하고 이상한 일이라는 것에 늘 주목해왔습니다. 어떻게 이 학원 설립자의 가족이며 오랜 시간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한 이 명문가의 자제분들에게 이런 누명, 누명치고도 너무 저질적인 누명이 씌워질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연두 양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이 선량한 노블리스들의 누명을 벗기고자 합니다. 이제 연두 양의 심문이 끝나면 그 검은 세력이 누군지 알게 되겠지요.”

황변호사의 서론은 길었다.

판사가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그만두는 것 같았다.

강인호와 서유진 그리고 최목사의 얼굴에 긴장이 어리기 시작했다.

연두 양, 공소장에 의하면 증인은 그날 컵라면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유리 양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숙사로 갔나 하고 생각했다고 했죠? 그런데 기숙사가 아니라 교장실로 간 이유가 뭡니까? 잘 통역하세요. 공소장에 의하면 연두 양은 기숙사로 가려다 말고 희미한 음악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했지요?”

연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하던 황변호사의 얼굴에 처음으로 어떤 표정이 어렸다. 그는 언성을 약간 더 높였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바로 이 부분입니다.

희미한 음악 소리! 연두 양은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런데 희미한 음악 소리를 듣다니요?”

그때 검사가 일어섰다.

재판장님, 변호인은 지금 사건의 큰 구도와 별 상관없는 일로 증인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판사가 대답했다.

기각합니다. 통상 성에 관련된 사건들은 당사자와 피의자만이 있기 때문에 정황이 아주 중요합니다. 변호인, 일리 있으니 계속하세요.”

방청석 뒤쪽에서 할렐루야!”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진술이 있었어?”

서유진이 낮은 소리로 강인호에게 물었다. 강인호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아이들이 진술한 사건의 충격이 너무 커서 자세한 정황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런 진술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중에 서유진과 더불어 공소장을 한번 읽을 때 뭔가 걸렸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버렸던 것이다.

뭐 하러 그런 말을 써서 일을 힘들게 만들었지? 그 말 없으면 뭐가 어떻다고?”

서유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통역사가 연두에게 통역을 하고 있는 동안 변호인이 다시 말했다.

귀머거리가 음악을 듣는다고 하고! 훌륭한 교육자가 쓰레기 같은 성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고! 정말이지 대한민국 법의 이름으로 이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이들을 음해하는 세력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우리나라는 너무 부끄러운 나라일 것입니다.” 황변호사는 격앙된 듯했다.

진실의 사도가 되어 정의의 언덕에 힘겨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자의 자부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변호인, 증인 심문만 하세요.”

판사가 그런 변호인을 제지했다. 그때 통역사가 입을 열었다.

음악 소리를 들었습니다. 조성모의 노래였습니다.”

황변호사의 얼굴에도 검사의 얼굴과 판사의 얼굴에도 그리고 방청석에도, 커다란 파도라도 치고 간 듯 공간 안이 일순 고요해졌다.

뭐라구요?”

변호인이 다시 묻자 통역사가 다시 연두에게 물었고 이윽고 연두가 대답했다.

희미한 음악소리를 들었습니다. 조성모의 노래였습니다.

방청석이 술렁거렸다.

강인호가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연두 어머니가 눈물 고인 눈으로 강인호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간 강인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가 안심하는 것을 보니 안심해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숙하세요!”

판사가 골치가 너무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러고는 직접 물었다.

증인, 잘 생각하고 대답하세요. 증인은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런데도 노래를 들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연두의 눈이 침착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황변호사가 데리고 온 젊은 변호사와 무언가 의논을 하더니 판사 앞으로 나섰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 무진 시민들과 기자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그럼 저희는 연두 양과 하나의 실험을 하려고 합니다. 연두 양에게 조성모의 노래를 틀어주고 정말 들을 수 있는지 알아보는 일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한 30분 정도의 휴정을 요청합니다.”

잠시 망설이던 판사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재판은 30분 후인 오후 230분에 속개합니다. 증인들은 모두 대기해주세요.”

연두는 증인석에서 내려와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서유진과 최목사 그리고 강인호가 연두에게 다가갔다.

연두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조금 울고 있었다.

잘했어 연두야. 너보다 더 잘할 수는 없어…… 힘들었구나.”

강인호가 말하자 연두가 비실 웃었다. 최목사가 나섰다.

그런데 아버님, 연두가 음악을……

연두의 아버지가 연두를 안은 채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연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딸을 믿어요. 저희도 이 아이가 언제부터인가 가끔 어떤 음악에 반응하기에 의사에게 데려간 적이 있었지요. 혹시나 다시 들을 수 있는 게 아닌가 해서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청각장애인이라 해도 각 사람이 주파수별로 반응이 다를 수 있다고 하더군요. 말하자면 저음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고음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주파수 별로 청력장애가 다 불균형하게 나타난다고요. 그런데 마침 그때 틀어놓았던 음악이 우리 연두가 들을 수 있는 주파수의 음악이었던 모양입니다. 저 사람들, 청각장애인 학교를 설립했다고 자랑하고 그토록 오랜 시간 봉사했다고 자랑하면서 아이들이 개인별로 이런 다른 청력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나쁜 사람들이네요. 아이들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까?”

연두의 아버지는 나직하게 말했다.

저는 지금 오히려 감사한 기분입니다. 그 음악이 연두가 들을 수 있는 음악이었다니, 하늘도 저들에게 벌을 주시려고 작정하신 것 같습니다.”

재판이 속개되었다. 황변호사는 판사에게 가서 무어라 복잡한 주문을 하고 있었다.

방청석에 중형 CD플레이어가 들어오고 연두는 증인석에서 판사를 향해, 방청석과 등지게 자세를 취했다.

방청석에서는 연두의 뒷모습만 보였다. 그 앞에 통역이 다시 연두와 마주보고 섰다.

연두 양, 정말 음악이 들리는지 지금부터 시험하겠습니다. 음악이 들리면 손을 들어주세요. 들리지 않으면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으면 됩니다.”

연두의 얼굴과 표정이 보이지 않았기에 강인호의 마음이 조금 떨려오기 시작했다.

설사 연두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열다섯 살 소녀가 이 엄중한 재판정에서 이 무거운 증언을 자신의 장애를 걸고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연두의 눈에는 판사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연두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은 열다섯 살 소녀가 감당할 만한 고립의 무게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강인호는 만일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나아가 연두의 손을 잡고 그 곁에 함께 서 있어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대신 자신의 옆자리에서 떨고 있는 유리의 손을 잡았다.

시작하겠습니다. 조성모의 노래가 들리면 손을 들어주세요.”

황변호사가 말하자 통역이 수화를 했다.

드디어 황변호사의 손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법정에 애절한 목소리의 조성모의 고음이 울렸다.

이 모든 범죄를 홀로 증언해야 하는 연두의 작은 어깨가 떨리는 것이 강인호에게는 느껴졌다.

잠시 후, 연두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왔다.

황변호사가 잠시 후, 정지 버튼을 눌렀다. 법정 안에 정적이 가득 찼다.

그러자 연두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낮은 탄성소리와 작은 박수소리가 울렸다.

한번만 더 하겠습니다. 통역, 한번만 더 하겠다고 통역해주세요.”

통역이 수화를 마쳤다. 그런데 황변호사는 그렇게 말을 해놓고도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트릭이라면 트릭이었다. 연두의 손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연두의 작은 어깨가 터질 듯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변호사의 얼굴에 약간의 낭패감이 어렸다.

방청석은 숨죽인 듯 고요했다.

그래도 황변호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연두의 두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

고함소리보다 더한 침묵이 법정을 쿵쿵 거리며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판사가 말했다.

인정합니다. 검찰 측은 연두 양의 이런 청각적 현상에 대한 전문가의 진단서를 재판부에 제출하세요.”

박수 소리가 작게 울렸다. 서유진이 그제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연두 양 수고 많았어요. 이제 다시 증인석으로 가세요.”

판사가 말했지만 연두는 움직이지 않았다.

증인, 이제 끝났어요. 증인석으로.”

그때 판사의 말을 통역하려던 통역사가 연두에게 달려갔다.

연두는 통역사의 팔에 젖은 빨래처럼 스러졌다.

왜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밝혀야 하는 거야? 이렇게 당연한 범죄를 왜 이렇게까지 희생자들을 더 힘들게 하면서?”

서유진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최목사가 검사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검사가 일어섰다.

재판장님, 어린 증인들이 무리하는 것 같습니다.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판사가 통역사의 팔에 안긴 채 휘청거리는 푸른 얼굴의 연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재판은 금요일입니다. 검찰과 변호인 양측은 더 신청할 증인 있으면 다시 신청하세요

연두의 부모가 증인석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강인호는 그때 주머니 속에서 전화벨이 계속 진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

아내였다. 아내는 말을 꺼내놓고 잠시 침묵했다.

무언가 아주 안 좋은 소식이라는 것을 직감한 강인호는 우선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서서 말했다.

급한 일 아니면 내가 10분 후에 전화를……

급한 건 아닌데 중요한 일이야,”

아내는 말을 끊었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당신……

강인호는 수화기 저편에서 아내가 떨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당신, 장명희라는 여제자와……

아내는 울음 때문에 더 말을 못 잇고 있었다.

그 제자 성폭행으로 자살하게 만든 사람이었어?”

눈앞에서 서유진이 강인호에게 아이들은 자신이 데리고 나가겠다는 손짓을 했다.

그러나 강인호의 눈앞은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대체 왜 지금, 명희의 이름이 아내의 전화를 통해 들려오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보, 잠깐만! 그게 무슨……

수화기 너머에서 아내가 히스테리컬하게 지르는 비명이 그의 말을 끊었다.

지금 무진 영광제일교회 게시판에 글 올라왔다고 친구가 전화를 했어. 대체 당신 어디까지 더 망가질 거야?”

여보, 내가 지금……

그래! 지금! 서유진은 또 누구야? 당신 집에서 새벽에 나오는 걸 봤다는 목격자가 있어. 같은 아파트에 산다면서? 그래서 무진 내려가자마자 집에 코빼기 한번 안 보인 거야? 어떻게 이럴 수가! 당신 정말 용서 못해. 나중에 새미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떡해! 이 일을 어떻게 하느냐고! 내가 그 일에서 손 떼라고 그렇게 애원했는데 결국, 당신 결국 이렇게!”

아내는 울음을 터뜨리며 전화를 끊었다.

강인호가 목구멍으로 열이 확 치민다고 생각하는 순간 동시에 등골로 서늘한 기운이 내려갔다.

체온이 갈피를 잃고 두 다리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무진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떠올랐던 명희의 얼굴이, 그 귀기가 등 뒤에 어리는 것 같았다.

강선생, 연두 부모님이 오늘 유리를 데리고 가시겠다는데……

서유진이 강인호에게 다가와 말을 하다 말고 놀란 눈빛을 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얼굴이 너무 하얘.”

그때 다시 벨이 울렸다.

강인호가 서유진 앞에서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서유진이 얼른 자리를 피했다.

아내는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전화를 받자마자 소리쳤다.

부끄러워서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낯을 들고 다녀! 나 새미 데리고 당분간 미국 언니네 가 있을게.”

여보, 새미 엄마야, 그게 아니라, 그게……

아내는 코를 풀더니 다시 말했다.

나한테 변명 같은 거 하지 마. 관심 없어. 문제는 이런 일이 인터넷에 한 번 올려지면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야. 정말 황당한 이야기라면 고소하면 되겠지. 말해봐, 장명희, 그리고 서유진.”

여보, 우선 장명희는 죽었어. 그러나 폭행은 아니었고 졸업 후에 나 군대 있을 때……

왜 죽었는데?”

강인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살이었다. 그리고 제자였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제자였었다.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해서 명희가 처음 찾아와 여관에 갔을 때, 여고를 졸업한 겨울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미성년자였다.

서유진은? 그 여자가 새벽에 당신 집에서 나온 적 없어?”

올가미라는 것을 느꼈지만 강인호는 대답했다.

있어. 하지만 그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전화는 끊겼다. 그가 다시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 있었다.

 

그날 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바다 쪽에서 해무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안개는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으로 파고들어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차단했다.

축축하고 음습한 기운이 거리를 덮었고 집집마다 창을 닫았다.

가게들은 서둘러 간판등을 켰지만 안개의 알갱이들이 빛을 흐트러뜨렸고 사람들은 귀가를 서둘렀다.

안개가 더 짙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려는 운전자들은 예민해져서 클랙슨을 울려댔다.

무진 인권운동센터 사무실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어깨 위로 형광등 빛이 깜박거렸다.

사무실 저쪽에서는 강인호를 비난하는 전화가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여간사와 남간사가 전화를 받아 해명을 시도했지만 어차피 전화를 건 쪽에서는 해명을 듣는 것이 목적이 아닌 것 같았다.

강인호의 얼굴은 녹슨 동빛처럼 검었다.

영광제일교회 게시판에 오른 이 글은 충격적이라는 말과 함께 무진의 여러 사이트에 퍼 날라지고 있었다.

누군가 조직적으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는 심증은 있었지만 어떻게 막을 방법도 없었다.

자애학원의 아이들이 이 글을 보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온 세상의 간판에 그의 과거 사진들이 내걸리고 온 세상의 방송이 뉴스 첫머리로 이 사실을 보도하고 있으며 세상 모든 컴퓨터에 그의 과거를 찍은 동영상이 돌아가는 듯한 환각이 들었다.

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저 안개 덮인 바다로 걸어 들어가 영원한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일인 것 같았다.

서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누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던 거지? 그래, 그날 강선생이 엉망으로 취해서 길거리에서 지갑 퍽치기 당하고 내가 새벽에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온 날, 그래, 그게 바로 사건이 우리 센터에 접수되고 얼마 안 된 때였어. 그럼 그때부터 은폐시도가 시작되었다는 말인가?”

서유진이 강인호의 눈치를 힐끗 보면서 약간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자신과 관련된 건으로 일단 화제를 집중시켜야 그가 끔찍한 기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팔짱을 끼고 있던 최목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꼭 그렇지 않고 그냥 찔러보았을 수도 있어요. 아직 서간사가 젊고 강선생도 그렇고, 게다가 두 사람은 대학동창이기도 하니까. 그 사람들 남자하고 여자는 일단 그렇고 그런 것으로 보는 인간들이잖아요. 그 건은 허위사실 유포로 일단 신고를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 일단…… 학교를 그만두고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그게 아이들과 여러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인 것 같습니다.”

강인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최목사와 서유진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최목사가 입을 열었다.

강선생 그런 마음 드는 거 너무 당연합니다. 하지만 아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장된 누명이었잖아요. 두 사람은 일단 연인 관계였고, 그때 불과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다섯 살밖에 나지 않았는데…… 마음이 그런 건 알지만 절대 여기서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에게도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지만 설명하고, 그리고 맞서야 합니다. 다음번 재판에 증인으로도 나가셔야 하잖아요.”

, 저희도 일단 모든 인터넷에 반박하는 글을 올리겠어요. 너무 걱정마세요.”

남자 간사가 최목사를 거들었다. 강인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을 들어 무심히 창밖을 보았는데 어느새 밀도 높은 안개가 창밖을 장막처럼 가리고 있었다.

갑자기 숨이 막혀오는 듯했다. 그는 숨을 쉴 수가 없는 환각에 사로잡혀 가슴을 움켜잡았다.

생이 여기서 장막을 내리기라도 하는 듯, 그의 영혼은 완벽하고 캄캄한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강인호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학교를 하루 쉬었다.

도저히 다른 선생들과 학생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옛 제자를 성폭행하고 죽게 만든 선생이라는 손가락질이 긴 밤 내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영특한 연두와 그 부모 그리고 민수의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적대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는 박선생의 눈초리는 이미 그 상상만으로도 그의 몸을 잘게 난도질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밤새 얕은 잠이 가져다주는 악몽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깨어났다.

아침까지도 안개는 무진을 자욱이 덮고 있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여전히 전원은 꺼져 있었다.

서유진의 전화가 계속 울려댔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면 더 힘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이 어둠과 칙칙함과 습기 속에 하염없이 웅크리고 있고 싶었다.

아내와 딸 새미와 서유진과 연두가 모자이크 무늬처럼 그의 의식 속에서 엉켜들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그가 문을 열자 서유진이 서 있었다. 많은 각오를 한 듯 야무진 얼굴이었다.

나갑시다. 할 말 있어.”

나 오늘은 좀 혼자 있고 싶어.”

강인호가 현관문을 열고 서서 서유진을 안으로 들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리고 여기 오지 마 이제. 선배까지 인터넷에 더 지저분하게 오르고 싶어서 그래?”

서유진은 가볍게 강인호의 팔을 밀더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강인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나가자. 생각해보니까 내가 강선생 여기 온 뒤로 갈대밭에도 한 번 안 데려가고 회도 한번 안 사줬어. 오늘은 진짜로 나랑 데이트를 하자고. 너를 괴롭히려는 그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 이렇게 죽어가는 얼굴로 있지 말고.”

서유진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강인호가 인상을 찡그리는 순간 서유진이 팔짱을 끼더니 심각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지금 자애학교에서 연락이 왔는데 윤자애하고 임시 서무실장이 유리하고 민수네 집으로 떠났대.”

우리도 가봐야 할 것 같아. 막아야 해.”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나가자고. 여기서 오래 이야기하면 정말 또 인터넷에 오른다니까.”

서유진은 그 말을 마치고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풀풀 내려갔다.

약간 망설이던 강인호가 재킷을 걸치고 내려가자 서유진은 시동을 걸고 있었다.

민수네 집은 섬이라 좀 힘들어서 지금 우리 간사들이 전화를 시도하고 있어. 유리네 집은 여기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이야. 우선 바닷가에 가서 매운탕이라도 먹고. 강선생이랑 내가 다녀와야 할 거 같아.”

강인호가 담배를 피워 물면서 말이 없자, 서유진이 다시 덧붙였다.

몰라? 이 아이들, 13세 이상의 성폭행은 당사자나 보호자가 고소를 취하하고 합의를 하면 기소 자체가 무효가 돼. 가난하고 지체장애자인 부모들을 설득해야 한다니까.”

서유진은 차를 출발시켰다.

무슨 아이들 성폭행에 합의가 있어?”

내 말이!”

유리는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어서 합의가 어떨지 모르겠는데 민수는 합의를 해주면 혐의 자체가 없어져. 지금 저쪽의 움직임으로 봐서는 유리조차도 저항할 능력이 있는--- 청각장애는 저항할 수 없는 신체장애가 아니라나? 참 기가 막혀--- 아이로 간주될 가능성도 있어. 그러면 절대로 합의해주지 않을 연두 부모님만 남게 되고 저들의 죄는 연두의 성추행 하나, 그나마 교장만 남고 서무실장과 박보현은 석방이야.”

강인호는 다시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아 창문을 내렸다.

시원한 바람 대신 안개의 습한 알갱이들이 창 안으로 자욱이 밀려들었다.

나쁜 소식 하나 더. 연두 아버지가 어젯밤 갑자기 쓰러지셨대.

강선생 지금 힘들겠지만……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야. 도와줘, ?”

서유진의 마지막 말은 간절했다.

두 사람은 방파제 입구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해가 떠오르고 그 따뜻한 빛이 안개를 조금씩 녹이는 듯했다.

백태가 허옇게 낀 듯한 태양의 눈동자가 영롱해지며 노릇해지고 있었고 안개의 잔해들이 여귀(女鬼)의 백발처럼 이리저리 길게 나부끼고 있었다.

연두 어머니가 급해서 일단 여기 병원에 입원을 시킨 모양인데 급속도로 상태가 나빠지시고 있나 봐. 어젯밤 의사가 아주 나쁜 상황도 각오를 하라고 했대.”

갈대들은 안개에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따스한 햇살에 뽀송뽀송하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갈대 군락지는 멀리 방조제까지 뻗어 있었다. 젖빛의 바다 같았다.

두 사람은 그 사이로 난 길을 걸었다.

……내가 우리 아버지 얘기 한 적 있니? 나 아주 어릴 때, 박정희 정권 말긴가, 아마 유신 때라고 들었는데, 작은 교회 목사이던 우리 아버지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시지 않았어. 수배자 학생들을 숨겨주고 평소 설교시간에 시국을 비판하는 발언을 한다는 이유로 잡혀가신 거지. 돌아온 아버지는…… 어린 내 눈에도 걸레조각처럼 갈기갈기 찢겨 있었어. 그렇게 석 달을 앓다가 돌아가셨지. 우리는 그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가난과 싸웠어…… 하지만 가끔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를 기억했어. 참 착하고 좋은 분, 훌륭한 목사이셨다고. 사춘기 무렵부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생각했어. 왜 세상에서는 착한 사람이 맞고 고문당하고 벌 받고 그리고 비참하게 죽어가나? 그럼 이 세상이 벌써 지옥이 아닐까? 대체 누가 이 질문에 대답해줄 것인가? 그래서 크면 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런데 얼마 전, 자애학원 사건을 처음 접하면서 나는 깨닫게 된 거야. 어른이 되면 이 대답을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어른이 되면 그 질문을 잊고 사는 것이라고 말이야. 이제 나는 정말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 그렇지 않다면 내 삶도 내 아버지의 삶도 연두와 연두 아버지도 너도 나도, 우리들의 삶은 정말 굳은 떡 조각처럼 무의미해질 거야. 가난한 것도 두렵지 않고 고통도 그리 무섭지 않아. 소문 같은 건 지네들끼리 실컷 지껄이라지. 하지만 의미가 사라지는 것, 뭐랄까, 우리의 삶이 그냥 먹고 싸는 것, 돈을 모으고 옷을 사고 하는 그 너머의 무엇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확인하고 싶어. 그렇지 않다면 사는 걸 견딜 수 없을 거 같아, 강선생.”

바닷가 쪽에서 다시 바람이 불어왔고 안개가 휘이휘이 걷히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헐한 식당에 들어가 매운탕을 먹었다.

유리의 주소지 근처까지 갔을 때는 짧아진 가을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다.

서유진의 차 유리창에 달아놓은 내비게이션은 비포장도로를 지나느라 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자꾸 떨어져 내리곤 했다.

겨우 집을 찾았을 때 두 사람은 망연해졌다.

오른쪽으로 5도쯤 기울어 스러져가는 슬레이트 지붕은 비닐로 덮여 있었고 그 비닐은 돌과 조잡스러운 물건들로 고정시켜놓은 채여서 조금만 바람이 불면 들썩거렸다.

조금 더 센 바람이 불면 그 비닐도 날아갈 듯 위태했다.

비쩍 마른 누런 개가 다리 사이로 마른 젖꼭지를 흔들며 마당을 가로질러 나왔다.

별로 사람을 본 일도 없는지 개는 그냥 두 사람 주위를 맴돌며 냄새를 맡더니

하품을 길게 하고 제 자리에 가서 누웠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계십니까?” 강인호가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방문을 열었다.

나쁜 냄새가 훅, 하고 끼쳐왔다.

누군가 오래도록 앓는 냄새 같았다.

그때 대문 사이로 난 골목길로 허리가 완전히 굽은 노파가 양푼에 애호박을 들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노파는 강인호와 서유진이 자신을 소개하자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때 강인호는 사실 무언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기 시작했다.

선물로 사 가지고 간 돼지고기와 과자를 내어놓고 두 사람은 유리네 집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서유진이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저희 간사가 찾아와 고소장을 받아간 거 기억하실 거예요. 유리가 그런 일을 당해서 가슴이 많이 아프셨지요.”

노파는 서유진의 말을 듣다 말고 치맛단을 들춰 담배를 찾아 물었다.

강인호가 얼른 담뱃불을 붙였다.

번데기처럼 주름이 진 손으로 담배를 물고 노파는 그것을 오래 뿜어냈다

담임선생으로서 정말 드릴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유리는 좀 나아지고 있구요…… 어쨌든 이제야 찾아뵙게 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강인호의 말을 듣던 유리의 할머니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저 모양인데, 며느리까지 또 벙어리를 낳아놓고 도망을 쳐버렸어요. 그래도 아들이 몸이 성할 때는 읍내서 같이 밥집을 해서 이리저리 먹고는 살았는데, 그도 저도 못하게 덜컥 병이 나서 누워버리자 이 산골로 들어왔지요. 살아온 날 어느 날도 편한 날 하루 없었지만, 지난번 어떤 젊은이가 찾아와서 유리가 그리 되었다고 고소장에 사인을 해달라고 하던, 바로 그 날만큼 살아 있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한 적은 없었다오……

담배를 빠는 노파의 입술이 그제야 떨리기 시작했다.

담뱃진 색깔의 눈두덩은 아래로 처져서 가뜩이나 작은 눈을 거의 다 덮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생선 비늘 같은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그 천하의 나쁜 놈들……

노파는 치맛단으로 눈물을 닦았다.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혹시 그 가해자 측에서 찾아오지 않았던가요? 그 사람들 이제 재판을 받고 있는데 만일 합의서라는 것에 혹여 사인을 해주시면 사건은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러면 유리는 자신을 그렇게 취급한 몹쓸 사람들과 또 함께 살 수밖에 없는 거구요.”

노파는 뜻밖에도 약간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서유진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 찾아와서 하는 말이, 원한다면 우리 유리 대학공부까지 시켜주고 또 유리 아버지 약값으로 좀 큰돈을 내놓겠다고 합디다.”

짐작했던 바였다. 뜻밖에도 노파는 또 웃었다.

그래 얼마나 주실 거유, 하고 내가 물었지. 그러니까 그거야 할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드려야죠, 유리네 식구 몇년은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해드릴게요, 합디다. 글쎄 그 천하의 나쁜 넘들이 말이유.”

순간 강인호의 등으로 서늘한 기운이 스쳐지나갔다.

노파의 얼굴은, 그러니까 그 나쁜 놈들이 말했다는 액수를 이야기하는 노파의 얼굴은 결코 분노에 찬 것만은 아니었다. 그 얼굴은 평생 그녀가 한 번도 손닿을 수 없는 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아련하기까지 했다.

그럼요, 그 사람들 정말 못된 사람들이에요. 절대로 응해주시면 안돼요, 절대로.”

노파의 태도가 아니라 말을 듣고 있던 서유진이 맞장구를 쳤다.

강인호는 외딴집 앞에 펼쳐진 옥수수밭으로 눈을 돌렸다.

이미 말라가고 있는 키 큰 옥수숫대들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혼이 다 빠져버린 패잔병들 같았다.

노파는 다시 치맛단을 들어 코를 휑하니 풀었다.

세상에 태어나 손이 갈퀴가 되도록 일해도 밥 한 숟갈 편히 떠보고 살기 힘들었어요. 아니 오히려 빚만 늘어갔죠. 망할 놈의 병은 꼭 가난한 종자들에게만 와…… 병원 놈들은 돈만 후려내고 고치지도 못합디다. 우리 유리…… 선생님들, 저는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도 없지만 그 어린 게 얼마나 아팠을지, 얼마나 서럽고 얼마나 무서웠을지 생각하면 내가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그놈들 부자지를 잡아서 다 찢어버려도 속이 시원치가 않을 거예요. 그래봤자 이 늙은이 죽이기밖에 더하겠느냐고요. 저도 압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못 배우고 아들로도 모자라서 손주까지 병신을 낳았대도, 저도 그건 압니다.”

강인호는 노파의 말을 들으며 슬레이트 지붕을 덮어놓은 비닐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를 들었다.

비닐이 날아가지 않게 눌러놓은 돌들과 조잡스러운 물건들이 덜컥거리는 소리도 들었다.

저주받은 가난의 깃발들처럼 그것은 희미하게 펄럭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떻게 내 손녀를 팔아 아비의 약값을 대겠습니까?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지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그렇지만 선생님, 그 사람들 말합디다. 이왕 엎어진 물, 이 기회에 애아버지 서울 병원에나 한번 보내보고 유리 대학까지 시키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선생님들, 그 자리에서 분명 안 된다고 했는데도 그 사람들 다녀간 후로 그 소리가…… 자꾸 들리더라 이 말입니다, ? 선생님들, 우리 아들하고 손주는 못 듣는 그 소리가! 이 귀에 말입니다. 자꾸 들리더라구요, ?”

돌아오는 길은 빨리 저물었다.

어둠은 독수리가 병아리를 덮치듯 산골을 덮쳤고 서유진의 작은 차는 그 길을 오래 비틀거리다가 큰길로 겨우 나설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돌아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공판날이 왔다.

그 며칠, 아침에 눈을 뜨면 강인호는 짐을 싸서 훌훌 차에 싣고 이곳을 떠나고만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꿈은 늘 악몽이었고 아내는 어떤 접속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떠나버리자, 마음먹는다 해도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무진의 사건을 가지고 아내와 논쟁을 벌여야 할 것이었다.

어차피 거기 가서도 해명을 해야 한다면 여기 남아서 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었다.

그래서 강인호는 다시 학교로 갔다. 예상대로 박선생과 학교 측의 노골적인 적의와 멸시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교실로 들어갔을 때 칠판에 색색가지 분필로 씌어진 글씨---

선생님 사랑해요. 아프지 마세요. 저희랑 함께 있어요!!”---가 그를 겨우 치욕의 도가니 속에서 잠시 건져 내주었다.

그날 검찰 측의 증인은 전민수와 강인호였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그가 교무실로 내려가자 휴대폰이 반짝였다. 서유진이었다.

오후 재판에 민수 데리고 올 필요 없어.”

강인호는 눈앞으로 다시 한번 검은 장막이 훅, 하고 내려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난하다고 그래도 되는 거니? 가난하다고 한 아이는 죽고 한 아이는 저토록 망가졌는데 가난하면, 그래! 제 아이한테 그런 짓 한 놈들한테 돈 받고 합의서를 써주는 거니? 가난하면 부모도 아니고 가난하면 다야? 강선생, 생각해봐.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으니 아이들 여태까지 그렇게 당하고도 그런가보다, 살았을 거야. 분해서, 분해서 죽을 거 같아……

서유진은 울먹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민수는 박보현과의 건만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학교 측에서 나섰을까.

역시 돈이 없어서 늘 공판 전에 복도에서 졸고 있는 국선변호사를 감수해야 하는 박보현이 돈을 마련해 민수 집으로 보냈다? 왜 하필 민수만……

서 선배, 진정해봐. 일단 말이야, 이상한데, 왜 민수를…… 그건 이강석 형제하고 아무 상관도 없잖아.”

우리도 그걸 의심하고 있어. 아마도 민수 동생 죽은 거에 구린 데가 있는 거 같아. 아니라면 서둘러 이강석 형제가 나설 리가 없잖아. 강선생, 그나저나 어떻게 하지? 유리 할머니마저 합의서 써주면 끝이야. 이럴 수가 있어?”

전화를 끊고 강인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난. 그는 아직 그런 구체적인 가난을 겪어본 일이 없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성실하셨고 어머니는 검소하셨다.

가지고 싶은 건 무엇이든 다 가져본 일도 없지만 배를 곯아보지도 특별히 멸시를 당한 적도 없었다.

가난……이 남루한 이유는 그것이 언제든 인간의 존엄을 몇 장의 돈과 몇 조각의 빵덩어리로 치환할 수 있기 때문일까.

눈을 들어보니 민수가 오고 있었다.

그 아이는 자신이 증언대에 서는 줄 알고 강인호에게 내려온 것이다.

민수는 다가오다 말고, 옆자리의 박선생을 보자 머뭇거렸다.

순간, 옆자리의 박선생을 비롯한 사람들이 그동안 이 노루 같은 아이들에게 가했을 무자비한 폭력이 새삼 진저리쳐졌다. 그리고 그 진저리를 동반한 분노가 스스로를 곱씹는 치욕에서 그를 구해주었다.

강인호는 일단 민수를 데리고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이 아이에게 말해야 했다.

네 부모가 합의서를 써주었단다. 어떤 민ㆍ형사상의 책임도 묻지 않겠습니다, 라고.

함께 나란히 걸어가는데 민수가 문득 강인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다고 생각한 순간, 민수가 활짝 웃었다.

청각장애인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요하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강인호에게 보내는 신뢰의 미소였고 의탁의 미소였다.

순간 강인호의 눈시울이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돌연한 감정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목구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더 꾸역거리며 치받쳐 오르고 있었다.

문득, 이런 아이들을 결코 배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한번 더 진저리를 쳤다.

배신…… 하고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은 배신하고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강인호는 민수의 앙상한 어깨에 팔을 올렸다.

그리고 그 어깨를 한번 더 굳게 잡은 후, 수화로 말했다.

미안하다, 민수야…… 부모님께서 박보현 선생을 용서하셨어.

믿을 수 없다는 듯 민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민수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저희 부모님은 글을 읽지 못하세요. 그러니 그럴 리가……

강인호는 민수와 마주 섰다. 물론 민수의 부모는 둘 다 청각장애에 정신지체를 지니고 있었다.

옆집에 사는 작은아버지가 그들을 돌봐준다고 들었다.

글을 읽지 못해도 합의는 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돈과 그리고 도장이 필요한 그 이상한 문서를 말이다.

그 사람들이 찾아가서 빌었다고 하더라. 싹싹 빌었대, 용서해 달라고. 민수 부모님들 착하시잖아…… 남들 미워 못하시는 분이잖아.

강인호는 어렵게 말했다. 민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들 감옥에 있잖아요. 그리고 나와 내 동생에게 빌어야지요. 잘못했다고 해야지요. 아니잖아요. 이건 용서가 아니잖아요? 동생이 죽었는데 어떻게 용서를 해요!!!!

민수의 두 눈이 날카로운 빛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강인호는 고개를 떨구었다. 용서…… 그래, 이런 건 용서가 아니었다. 결코 용서가 아니었다. 용서는 나약한 자들의 것은 아니니까. 용서란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하는 거니까. 용서란 죄악이나 부정이나 폭력이나 모욕에 눈감는 일은 결코 아니니까. 단죄를 해야 그것을 용서할 대상이 생겨나는 것이니까.

그러나 교사로서 그는 민수에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민수가 거칠게 수화를 시작했다.

있을 수 없어요. 우리 영수를 죽인 게 그놈이었는데, 이번에 나가면 누가 묻든 말든 그 말을 하려고 했는데…… 목욕탕에서! 화장실에서! 보이기만 하면 때리고 나와 내 동생의 바지를 벗겼는데…… 우우!

민수는 괴성을 지르며 팔의 셔츠를 올리고 강인호에게 아직도 멍자국이 남아 있는 자신의 팔뚝을 보여주었다.

강인호가 민수의 두 손을 꽉 붙들었다. 민수는 곧 바닷가로 달려가 절벽에 몸이라도 던질 듯 버둥거리고 있었다.

야윈 두 뺨으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우우우우!!”

강인호는 버둥거리는 민수를 꽉 안았다.

미안하다, 그는 조그맣게 우물거리며 말했다.

미안하다. 민수야 그건 절대로 네 부모님의 탓이 아니란다.

그건 절대 부모님의 탓이 아니란다. 강인호의 귓가로 유리 할머니의 음성이 웅웅거렸다.

선생님, 그 사람들 말합디다. 이왕 엎어진 물, 이 기회에 애아버지 서울 병원에나 한번 보내보고 유리 대학까지 시키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선생님들, 그 자리에서 분명 안 된다고 했는데도 그 사람들 다녀간 후로 그 소리가…… 자꾸 들리더라 이 말입니다, ? 선생님들, 우리 아들하고 손주는 못 듣는 그 소리가! 이 귀에 말입니다. 자꾸 들리더라구요, ?”

하지만 민수는 들을 수 없었고 강인호의 품에서 오래도록 흐느꼈다.

 

공판이 시작되었다.

벌써 10월이 중순을 넘어갔는데도 이상 기온으로 날씨는 몹시 더웠고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재판정은 열기로 가득했다.

강인호가 증인석으로 나가면서 보니까 얼핏 윤자애의 모습이 보였다.

윤자애는 강인호를 쏘아보며 앉아 있었다.

대체 저 여자의 저 끝도 없는 적의의 근원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강인호는 증인 선서를 했다.

강인호가 목격한 사실을 확인하는 경찰의 심문이 끝나고 이어 황변호사가 일어섰다.

황변호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자신감에 찬 걸음으로 강인호에게 다가왔다.

그동안 유리와 민수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수치심이 다시 몰려왔다.

변호인 측이 그 게시판을 보지 못했을 리 없다.

아니, 그들이 조직적으로 그것을 유포했을 확률도 높았다.

얇은 입술의 꼬리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황변호사가 강인호 앞에 섰다.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증인은 19973월부터 전교조 교사였죠?”

게시판에 오른 명희와 서유진을 생각하고 있었던 강인호에게 이것은 뜻밖의 기습이었다

강인호는 머뭇거렸다. 전교조라니, 너무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이 이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증인은 전교조가 비합법이던 19973월부터 전교조에 가입해 활동했지요?”

황변호사는 강인호를 쏘아보며 물었다.

강인호는 순간 자신이 그의 칼날 앞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는 횟감용 생선처럼 느껴졌다. 섬뜩했다.

그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식은땀이 겨드랑이로 뚝뚝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그런 기억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침착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강인호가 대답했다.

그러자 황변호사가 들고 있던 서류 하나를 흔들었다.

여기 당신이 1997년 전교조에 가입해서 교직을 그만두던 199912월까지 활동을 한……

그때 검사가 일어섰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변호인은 지금 이 사건과 아무 상관 없는 증인의 과거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황변호사가 싸늘한 눈빛으로 강인호를 한번 더 쏘아보다가 판사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증인은 자애학원에서 이 피고인들을 범죄자로 몬 주동자이며 가장 많은 것을 목격한 내부 인물입니다. 이 사람의 정직성은 목격자가 없는 이런 사건의 특성상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증인은 여기 서류에 명백히 올라 있는 자신의 이름조차 부인하고 있습니다. 여기 당시 전교조 활동자 명부를 제출합니다.”

변호사에게 명부를 넘겨받은 판사가 잠시 망설이다가 강인호에게 직접 물었다.

인정합니다. 증인, 전교조가 그때 비합법이었다고 하나, 제 기억에 이제 와서 그것이 그리 문제 될 것이 없는데 왜 굳이 부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여기 명부에 강인호 씨 이름이 있네요. 19973월 가입 맞구요.”

강인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방청석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그는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교조에 가입하거나 활동한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런 데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

그는 1997년 한해를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그해 겨울, 학기가 다 끝나기 전에 바로 군에 입대했었다.

죄송합니다. 기억이 안 납니다. 저는 그리고 바로 군대에 갔기 때문에……

판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강인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황변호사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어렸다.

다음입니다. 증인은 바로 그 근무하던 서울 성동구 소재 미화여고에서 제자를 성폭행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적이 있지요?”

아까는 난데없이 따귀를 연거푸 맞는 듯했다면 이제는 해머로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았다.

판사가 점입가경이라는 듯 강인호를 바라보았다.

검사가 다시 일어서려는 순간 판사가 말했다.

증인의 과거를 뒤지려는 것은 아니지만 사건의 성격상 도덕적으로 중요한 일이니까 변호인은 계속하세요.”

방청석은 고요했다.

갑자기 이곳은 이강석 이강복 형제 그리고 박보현의 법정이 아니라 강인호의 과거 진상 조사위원회로 변한 듯했다.

성폭행 하지 않았고, 자살한 것은 제가 제대한 후에 알았습니다.”

증인 성폭행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좋습니다. 그러나 증인이 그녀와 관계를 가질 당시 그녀는 미성년자였습니다. 가르친 적이 있는 제자였구요. 그게 자발적 성관계입니까? 그게 증인의 도덕입니까?”

법정은 고요했다. 강인호는 방청석보다 일 미터는 높은 증인석에 서서 그 고요를 느꼈다.

연두의 편지 속의 한 구절처럼 물 속처럼 고요했다. 물 속 깊은 곳에 잠긴 것처럼 고요……했다.

미성년자인 줄 몰랐습니다. 이미 여고를 졸업했고, 또 서로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았고…… 사회 통념상 여고를 졸업하면 보통……

강인호의 관자놀이에도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던 황변호사가 판사를 향해 돌아섰다.

여기 장명희 양의 부모가 저희에게 제출한 장명희 양의 유서를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장명희 양의 부모는 자애학원 사건 관련 방송을 보다가 피고인들을 고발한 사람이 자신의 딸을 죽인 그 강인호라는 것을 알아내고 벌써 10여년 전에 자살한 딸의 유서를 저희에게 보내왔습니다. 그때도 그를 처벌하려고 했으나 딸의 죽음이 자살사건이었고 워낙 증거가 없어서 처벌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전교조에 3년간이나 가입해놓고도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떼는 이 사람이, 더구나 참교육을 한답시고 비합법이던 단체 활동을 하던 사람이, 여고 교사로 재직할 당시 자신의 제자를 성폭행해서 자살에 이르게 한 이 사람이! 과연 여기 선친부터 시작해서 2대에 걸쳐 온 집안이 혼신의 힘을 다해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해온 이 피고인들을 고발할 자격이 있을까요? 그리고 전교조에 가입해 활동했다는 명백한 사실 조차 아니라고 하는 이 사람의 증언만 믿고 우리는 이 피고인들의 가정과 50년 전통의 자애학원에 오욕을 덧칠해야 할까요? 이상입니다.”

강인호는 붙박인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멍한 머릿속에서 조금씩 시간의 커튼이 나부끼고 얼핏얼핏 기억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강인호의 머릿속으로 그제야 전교조의 실체가 희미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했을 때 병무청의 행정 착오로 그는 거의 일 년을 대기상태로 지내야 했다.

입대 날자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과 선배가 자신이 재직하는 사립학교에 잠시 몸을 담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당시 그로서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어느날 그 선배가 전교조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했다.

아까 판사의 말대로 당시 아직 전교조는 비합법이었지만 곧 합법화될 것은 명백했고, 그에게는 그 권유에 열렬히 동의할 이념도 없었지만 그것을 거절할 아무 반감도 없었다.

그래서 서류에 사인을 해주었다.

그는 그때 스물네 살, 아이들의 교육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마지막 사춘기도 다 벗어나지 못한 애송이 젊은이였다.

월급을 타면 친구들을 불러 양주를 마셨고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정체 모를 여자와 원나잇 스탠드를 하기도 했다.

간밤의 과음으로 아직 술냄새를 풍기면서 수업을 들어가면 다 큰 여고생 아이들이 코를 쥐며, “아휴 선생님 술냄새 나요!” 하며 젊은 총각선생에게 적의를 가장한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그녀들의 까르르 웃던 소리들…… 그러나 그 시절 그는 적금도 붓지 않았고 자기 소유의 자동차도 사지 않았다.

말하자면 비싼 아르바이트생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일 년 후 군대를 갔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혹시 제대 후 복직할 수도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학교에서는 휴직처리를 해주었다. 그것 역시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대한 후 선배의 의류 수출회사 일을 돕기 시작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친구와 함께 작은 의류업을 시작했다.

그래서 완전히 교직을 그만둘 때까지 그의 이름은 교직원명부에 3년 정도 올라 있었고 그 기간 동안 전교조 명부에도 동시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그와 아무 상관 없이, 서류 위의 활자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제 생각났습니다. 전교조는 그러니까……강인호가 소리쳤다.

판사가 힐끗 그를 바라보더니 앞에 놓인 서류를 이리저리 뒤적이며 사무적인 어투로 싸늘하게 말했다.

증인 그만 내려가 주세요. , 다음 변호인 측 증인 나오세요.”

윤자애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강인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윤자애의 비웃는 듯한 시선이 먼저 그의 두 눈에 작은 바늘처럼 꽂혔다.

그리고 이강석과 이강복, 박보현의 시선이 그의 광대뼈와 양 볼과 머리카락 사이사이와 목덜미와 손등에 꽂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청석에서 수많은 바늘이 화살처럼 날아와 그의 온 몸에 꽂혔다.

그는 피부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방청석에 있는 자신의 자리가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강인호는 비틀거리며 뒷문을 향해 걸었다.

문까지 도달하는 그 거리가 너무도 길었다.

땅바닥은 푹푹 꺼지는 듯했고 공기는 울렁거렸다.

진땀은 이제 와이셔츠를 다 적시고 얇은 양복 윗도리로,

내상(內傷)에서 배어나오는 피처럼 번지고 있었다.

윤자애는 매서운 눈초리로 증인석에 서 있었다.

황변호사가 윤자애를 부른 이유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애학원 교직원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교장을 옹호하는 쪽에 선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애학원 설립자 이준범의 수양딸로 자애라고 이름 지어졌고, 확인 할 수는 없지만 교장 이강석의 애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연두에게 린치를 가한 윤자애의 상식 이하의 분노에는 어쩌면 그런 의미의 해괴한 질투심이 깃들어 있는지도 몰랐다.

증인은 자애원 그러니까 기숙사의 생활지도 교사로 근무하고 있지요?”

황변호사가 물었다.

, 그렇습니다.”

윤자애는 또각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경력이 얼마나 됩니까?”

“8년째입니다.”

그럼 결코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없군요. 증인은 자애학원 및 자애원의 여러 교직원 중 농인이 아니면서 가장 수화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자애학원의 설립자 배산 이준범 선생께서 어릴 때부터 수양딸 삼아 키워주셨기 때문에 자애학원 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누구보다 청각장애인들과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 증인은 청각장애인들의 속성과 다른 장애인들에 비해 색다른 점 그리고 여기 피고인들에게 당했다고 주장하는 학생들을 오랫동안 지켜보아 잘 알고 있겠군요?”

검사가 일어섰다.

재판장님, 지금 변호인은 사건과 전혀 별개인 사실을 증인에게 심문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역시 변호사가 나섰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이 피고인들을 고발한 아이들은 모두가 청각장애인으로서 이 시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거리에서 마주치는 그런 아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 격리되어 어쩌면 우리와 아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이 사건에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피고인들에게 죄가 있다고 말한 그들이 모두 이 시설의 아이들이기 때문이지요.”

일리 있습니다. 변호인 심문 계속하세요.”

최목사님, 요새 저 판사가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으세요? 변호인에게 지나치게 관대해진 거 같아요.”

서유진이 방청석에서 최목사에게 속삭였다. 최목사는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전관예우…… 괜찮을까요?”

서유진이 다시 물었다.

최목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윤자애의 말이 시작되었다.

제가 보기에 청각장애인들은 장애인들 중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남의 말 안 듣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니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길 뿐 아니라 어떤 잘못을 알아차렸다 해도 전혀 수정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수화통역사가 방청석을 향해 있다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통역이 시작되자마자 여기저기서 야유소리가 들렸다.

정리가 일어섰고 판사가 방청석을 노려보았다.

게다가 결국 언어를 같이 쓰는 자신들 족속, 즉 농인들끼리 폐쇄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위계질서가 대단하지요. 게다가 요즘 아이들은 서슴없이 육체관계를 갖습니다. 제가 기숙사에서 가장 심하게 신경을 쓰는 부분이 바로 그것인데, 자기들끼리 하는 것도 모자라 때로 남자아이들은 여선생인 제게 노골적인 표현으로 요구를 하기도 하고, 여자아이들은 남선생을 노골적으로 유혹합니다. 말하자면 속옷 차림으로……

그때 방청석에서 야유소리가 커졌고 드디어 구두 한 짝이 윤자애를 향해 날아들었다.

자애학원의 졸업생 대표였다. 정리가 달려갔고 판사가 그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법정소란죄로 입건합니다. 감치하세요.”

신발을 던진 농인이 끌려나가면서 지르는 이상한 비명소리가 법정 안을 더욱 괴괴한 침묵 속으로 빠뜨렸다.

여자 농인 몇은 눈물을 닦고 있었다. 어차피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그들이었기에 누군가가 자신들을 그렇게 폄하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것이다.

서유진 곁에 있던 최목사가 피곤한 듯 양 손으로 눈을 부볐다.

이 사건을 접한 이후 서유진은 늘 그런 생각을 했다.

거짓말.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세상이라는 호수에 검은 잉크가 떨어져내린 것처럼 그 주변이 물들어버린다.

그것이 다시 본래의 맑음을 찾을 때까지 그 거짓말의 백 배쯤의 순결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는 것이 심리학의 정설이었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짓말의 합창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맑은 하늘에 충분히 천둥과 번개를 부를 정도의 힘을 가진 것이었다.

이 일련의 사태는 서유진에게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자신의 흠집을 가리기 위해 남에게 상처를 주는 부류의 인간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남에게 그들이 가하는 폭력은 무차별적이고 잔인했다.

원칙, 도덕, 양심의 소리 같은 것은 이 무진에서는 아마 오래 전에 쓰레기통에서 분리 수거되어 변칙, 이득, 그렇고 그런 세상의 이치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생각에 잠긴 동안 윤자애의 증언은 계속되었다.

청각장애인들의 지능은 다른 장애인들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우선 사고의 원천인 언어감각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중복장애인입니다. 시각장애인이 시각 하나에만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이들은 청각과 언어, 이렇게 두 가지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화 통역사의 얼굴은 이제 아이들이 성폭행 사실을 말할 때보다 더 일그러져 있었다.

수화를 바라보고 있던 농인들의 입에서 다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판사가 소리를 쳤다.

정숙하세요.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누구든 바로 법정 구속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슬며시 서유진에게 쪽지를 전해주었다.

돌아보니 인권센터 여자 간사였다.

하늘이 아파요. 급히 무진대 부속병원 응급실로!”

분노의 비명을 지르는 농인들과 무표정한 황변호사 그리고 여전히 철갑을 두른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강석, 이강복 그리고 박보현에 대해 생각하느라 서유진은 순간이었지만 쪽지의 내용을 잘 파악할 수가 없었다.

하늘이…… 아프다. 하늘이가 아프다 .

서유진은 최목사에게 쪽지를 보여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 몇 달 동안 아프지 않고 잘 지내던 하늘이가 무진대 병원까지 갔다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선천성 심장기형으로 태어난 아이는 현대의학으로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 아이의 하루하루가 사실은 기적이었다. 그녀는 법정을 나서며 꺼놓았던 전화기를 켰다.

그녀가 법정에 앉아 있는 동안 수없이 그녀를 불렀던 호출의 잔해들이 그제야 딩동거리며 들어서기 시작했다.

친정어머니의 전화였다.

괜찮다. 지금 응급실에서 검사 들어갔다. 열이 심하게 오르고 경기를 하길래…… 천천히 와라, 됐다. 그래도 에미가 있어야 중요한 결정을 한다고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공포와 당혹을 넘어 이제 지친 늙은 어머니의 음성을 들으며 서유진은 자신의 주차장으로 달렸다.

자동차 문을 열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서유진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햇볕을 피하기 위해 손으로 이마에 가리개를 하고 들여다보니 열쇠가 차 안에 꽂혀 있었다.

서유진은 이를 악물었다가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급할 때면 늘 그렇듯이 택시는 오지 않았다.

그때 은색의 낡은 SUV 자동차가 서유진 앞에 멈추어섰다.

태워드려?” 장경사는 선팅이 짙은 유리를 내리며 물었다.

놀란 서유진을 바라보며 장경사가 턱짓을 한 번 더 했다.

서유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차에 올라탔다.

보기에는 차분한 양반이 왜 그렇게 덜렁거려요? 저번에 우리 경찰서에 왔을 때도 열쇠 잊어버렸죠? 가뜩이나 부피도 작고 중량도 작은 사람이 그렇게 덜렁거리기까지 하면서 이 무진의 실세들과 싸울 수나 있어요?”

서유진은 대답 없이 안전벨트를 하면서 무진대 병원이요, 부탁해요라고 말했다.

장경사는 베테랑 운전기사처럼 빠르고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신호에 걸리면 회전을 하는 척하면서 다시 직진을 했다.

한번은 거의 빨간불이 들어온 것을 무시하고 직진을 하다가 저쪽에서 좌회전하는 차와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이렇게 차를 몰아도 법규 위반하는 놈들은 잘 잡아내죠. 지킬 거 다 지켜가면서 지키지 않는 놈들 잡기는 불가능한 일이고……

장경사는 내내 침묵하고 있는 서유진이 좀 불편한 듯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겸연쩍게 덧붙였다.

급해 보여서 그래요. 애가 아픈 것 같아서……

서유진이 그제야 장경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죠?”

무진 바닥에서 방귀깨나 뀌는 사람들에 대해선 이 장하문이가 모르는 게 없죠.”

전 무진에서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닌데요.”

서유진은 묵묵히 앞을 바라보며 간단하게 대꾸했다.

장경사는 이리저리 핸들을 꺾으면서 서유진을 바라보았다.

지금 서간사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모른단 말예요? 당신이 지금 누구에게 싸움을 걸었는지 몰라요? 듣자니까 아버님이 유신 치하에서 그리 유명하셨던 서갑동 목사님이시라던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대해 너무 이상한 믿음을 가진 거 아니에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유명한 이유는 그게 천지창조 이래 한번 일어난 일이라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서유진은 팔짱을 낀 채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갑자기 이 차를 얻어탄 것이 후회가 되었다.

이보세요, 나는 거짓말하고 있는 사람들과 싸우고 있어요. 아이들이 다쳤고, 죄를 지은 사람을 고발했고. 그게 다예요.”

장경사가 유진의 발끈하는 대꾸에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진시민 모두와 싸워야 할 거요. 사방에서 거짓말을 하며 서로서로를 눈감아주고 있어요. 시의원과 건설업자의 처가가, 운전면허시험장 직원이 병원 사모님과, 룸살롱 마담과 경찰서장이, 밤무대 가수와 외로운 사모님이, 유부녀와 목사가, 교수와 교재 출판업자가 시 교육청과 입시학원 원장이 서로를 봐준다며 눈을 감고 거짓말을 해대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직도 정의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쩌면 그들은 더 많은 재물도 포기할 수 있어요.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거예요. 한 번만 눈감아주면 다들 행복한데, 한두 명만 양보---그들은 이걸 양보라고 부르죠---하면 세상이 다 조용한데…… 그런데 당신은 지금 그들을 흔들고 있어요.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변화를 하자고 덤빈단 말이지요.”

지금 제게 원하시는 게 뭐죠? 자꾸 이러시면 내리겠어요.”

서유진이 쏘아보자 장경사가 말했다.

서간사는 법정에서 정의 같은 게 건져질 거라고 생각해요? 전관예우가 뭔지 알아요? 황변호사, 강남의 사무실 한 채와 집기 일체를 약속받고 내려왔어요. 적은 돈은 아니죠. 그 사람 무진의 수재였고, 바보가 아닌 담에야 저 인간들이 성폭행한 거, 농아들 유린한 거 모를 것 같아요? 천만에! 황변호사도 고민했을 거고, 그 나름의 사회정의를 위해 농아들 몇을 희생하는 게 이 고장의 발전을 위해, 말하자면 대의를 위해 옳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판사? 그 사람들 서로서로 한 다리 건너 대학 동기, 선후배, 고시 동기, 선후배, 처삼촌, 고등학교 동창의 사돈, 사위의 은사예요. 그 사람들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경쟁, 경쟁, 경쟁 속에서 남을 떨어뜨리고 여기까지 왔어요. 그런데 그들이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 아이들 몇 명 때문에 처삼촌과 대학 동창 사돈과 사위의 은사와 장인의 후배와 얼굴을 붉혀가며 그 정의라는 거, 진실이라는 거 되찾아줄 것 같아요? 그렇게 세상을 몰라요? 그렇게 세상이 바뀔 거 같아요?”

서유진은 성난 표정으로 장경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육지 깊숙이 들어선 바다 물결은 갈대밭 사이로 난 수로에서 뱃전에 부딪히며 찰싹거렸다.

바다가 있다는 징표는 그것뿐이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갈대밭은 광활했다.

그 갈대밭의 끝에는 푸르고 넓은 바다가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의 곁에는 방금 그가 다 마셔버린 빈 소주병이 두 개 동그마니 놓여 있었다.

벌써 저녁 바람은 차가워져서 갈대밭을 휘휘 저으면서 다가온 바람이 그의 뒷덜미를 스칠 때 소름이 돋아났고 멍한 그의 감각들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그는 부스럭거리며 담배를 꺼냈다. 마지막 담배였다.

이곳에 앉아 벌써 한 갑을 다 피워버린 것이었다. 가끔 그런 일이 있다.

해일이 바다 밑바닥을 뒤집어놓듯이, 존재 자체를 뒤집어내는 그런 일.

잊은 줄만 알았던 과거를 혼령처럼 불러내고, 아무리 술을 마시고 취해 엎어져 있어도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집요한 질문을 던진다.

지나온 자리마다 붉은 상처가 선연하고 그리고 이제 그것은 악취를 풍기고 있다.

 

나치가 유태인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나치가 좌파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죄파가 아니었으므로.

나치가 가톨릭교도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가톨릭교도가 아니었으므로.

나치가 민주인사를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평범한 시민이니까.

나치가 나를 잡아갈 때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마지못해 참석한 전교조 집회에서였던가, 아니면 그보다 더 옛날 대학시절 누군가 낭송한 시였던가.

강인호는 담배를 길게 내뿜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소리는 먼 곳에서부터 다가오는 것만 같아서 예닐곱 번 울릴 때까지 그는 그것이 자신의 전화벨 소리인 줄 알지 못했다.

전화기를 꺼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는 것을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서유진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핸드폰의 폴더를 열었다.

인호야……

서유진은 인호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강인호는 서유진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하고 있었고, 그래서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서유진은 그의 말을 다 듣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인호야. 부탁이 있어. 나 좀 위로해줄래?”

순간, 강인호의 혼미한 감각들이 쭈뼛 섰다.

분명 서유진의 목소리는 몹시 가라앉아 있었고 분명 그녀는 그를 위로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위로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었다.

어디 있니? 집에 불 꺼져 있더라. 나 집 앞인데 와서 날 좀 데리고 가줄래?”

서유진의 목소리는 압력에 짓눌려 곧 터져버릴 유리컵처럼 위태로운 무엇을 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그를 선뜻 위로하려고 했다면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처음 듣는 유진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힘들었고 약간 취한 채로 차를 몰아 아파트 앞으로 갔다.

서유진은 아파트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버버리코트 위로 늘어진 긴 스카프가 낡은 깃발처럼 바람에 팔랑거리고 있었다.

강인호가 다가가자 그녀는 강인호의 차에 올라탔다.

……무슨 일 있어?”

그가 묻자 서유진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녀의 숙인 고개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낮에 하늘이가 아파서 응급실 갔었어.”

그래? 안 좋은 거야?”

서유진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행히 그냥 감기야. 주사 맞고 약 먹고 열이 내렸어.”

다행이네. 정말…… 근데 왜 울어?”

서유진은 피식, 하고 볼에 바람을 빼더니 말했다.

그르게……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 그제야 눈물이 나왔어.”

서유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인호야, 유리 할머니도 합의서를 내셨대.”

서유진은 이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강인호는 서유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울지 마, 하고 말하려다가 말고 강인호는 그렇게 들썩이는 서유진의 앙상한 어깨를 그저 느끼고 있었다.

서유진의 울음소리를 따라 자신의 맥박도 고통스레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의 눈앞으로 유리의 시골집이 지나갔다.

비닐로 덮인 지붕, 방 안에서 누군가 오래 앓고 있던 냄새, 유리 할머니의 갈퀴 같은 손……

강인호는 유리의 할머니를 원망할 수 없었다.

손녀의 몸을 팔아 알량한 합의금을 받아낸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 없었다.

여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 여자, 서유진도 그걸 알기에 울고 있다는 것을 강인호는 알고 있었다.

……검사가 그러더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리가 정신지체 장애자라서 그 합의서로 기소 자체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 그러나 판결에 영향을 줄 것은 각오하라고…… 하더라구.”

서유진은 맨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천천히 덧붙였다.

검사한테 어떻게 아이들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렇게 지독하게 당했는데 그깟 합의서 하나 때문에 범죄자들을 봐줘야 하냐고 따지려다가…… 말았어. 검사는 잘못이 없어…… 그렇지. 검사가 합의서를 쓰라고 한 것도 아니고, 합의서 있으면 처벌하지 않는다는 법을 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지. 그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할 뿐이니까.”

서유진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조금 웃었다.

생각해보면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이제 강인호 자신도 잘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장경사는 아주 조금 수사를 늦추었을 뿐이었다.

수사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늦게 그리고 약간 소극적으로 했을 뿐이었다.

황변호사는 평생 단 한 번 있는 전관예우의 기회를, 그의 수많은 동기와 선배 들이 그러하듯 그렇게 딱 한 번 사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훌륭한 판사였다. 청렴했기에 청렴한 만큼 모아놓은 돈이 없었고 앞으로 변호사 활동을 하려면 서울 강남의 법원 앞 빌딩에 사무실을 열어야 했고, 그 비용은 청렴한 판사 출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다.

그로서는 부귀도 마다하고 이십 년을 국가에 봉사해왔으니 이제 이 정도의 보너스는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물질적인 이유 말고도 그에게는 50여 년간 무진의 복지를 책임진 이강석 형제들을 보호하고 싶은 동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자신의 고향, 무진을 위해 할 수 있는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장애인 아이들 몇 때문에 이 오랜 봉사활동을 무위로 돌리고 그 무진의 상류층과 무진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다고 말이다.

산부인과 의사 또한 약간의 여유를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정신이 또렷하지 않은 소녀의 처녀막이 파열된 상처를 가지고 자신의 동창의 남편이자, 무진 외곽 골프장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을, 한 다리만 건너면 그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아는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오욕의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 눈으로 강간의 현장을 확인한 바도 없고 피를 철철 흘리는 아이를 데리고 급박하게 병원을 방문한 것도 아니었다.

박선생과 윤자애는 실제로 교장과 서무실장을 좋아하고 있으며 그들이 고매한 인격을 지니고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누명을 쓴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검사는 부모가 합의서를 써주면 자동으로 기소 자체가 취소되는 이런 법률을 만든 사람이 아니었고, 판사는 그런 검사가 고발하지 않는 사건을 어떻게 다룰 수도 없을 것이었다.

이강석과 이강복 형제가 더 이상 인간으로서 대접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다 해도, 그들 외에 누구에게 딱히 바로 너야! 라고 손가락을 가져다 댈 수 없었다.

진실은 과연 늘 좋은 것인가?

진실은 과연 늘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가?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다.

적나라한 수술 장면을 본인이나 가족 누구에게나 다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모르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다는 뜻이고, 덮어두고 못 본 척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는 오래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자 서유진의 실루엣 너머로 유리와 연두 그리고 민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무진의 똑똑하고 박식하고 부유하며 신앙심 깊은 그들이, 자신과 자신의 동창들을 위해 희생해도 좋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한, 그 어리고 아픈 생명들이.

강인호는 서유진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다시 말했다.

서 선배, 가보자! 끝까지 가보자구! 법정이 안 되면 거리도 있고 언론도 있어! 그렇다고 진실을 개들에게 던져줄 수는 없잖아.”

 

선고 공판 날 이른 아침 강인호는 연두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유리가 몹시 아프다는 연락이 학교에서 왔다고 했다.

연두 어머니를 태운 강인호의 차가 기숙사 앞에 다다랐을 때 유리는 절뚝이며 걸어 나왔다.

유리의 외음부는 상처가 나을 무렵 모든 상처가 그렇듯 가려워지기 시작했고, 가려움을 참지 못한 유리가 그것을 긁어서 심하게 덧나 있었다.

자애학원 양호실에서 며칠째 싸구려 연고 하나만 발라놓은 것도 상처를 키운 원인 중의 하나였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옷을 벗기고 본 유리의 외음부는 퉁퉁 부어오르고 화농이 짙어 외관으로 보기에도 끔찍했다.

크지는 않지만 수술을 요하는 상처였다. 일단 입원을 시켜야 했다.

아프다며 울던 유리는 진통제를 맞고 나자 그제야 하품을 해댔다.

며칠을 자지 못한 유리의 눈은 퀭했다.

많이 아팠지? 이제 괜찮을 거야.

강인호가 이불을 덮어주자 유리가 아직도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러나 부끄러운 듯 샐쭉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 눈매가 유리 할머니를 닮은 것도 같았다. 강인호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선생님, 그놈들 설마 오늘 엄중한 벌을 받게 되겠지요? 그렇지요, 선생님?”

연두 어머니가 병원을 나서며 물었다. 상황은 누가 봐도 불리해지고 있었다.

강인호는 그녀에게 유리 할머니와 민수의 부모가 합의서를 써주었다는 말을 아직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유리의 병원비도 누가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가 그의 가슴속에서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애써 그것을 삼켰다. 무진 법원 앞은 다시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러 대의 방송 카메라와 기자들, 시민단체들과 영광제일교회 신도들로 광장은 장터처럼 북적거렸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다.

한국의 가을이라고 누군가 말하면, , 하고 떠올릴 짙푸른 하늘과 약간 쌀쌀한 바람, 바다 쪽에서 밀려드는 산소를 한껏 머금은 신선한 공기. 고속도로 양쪽으로 펼쳐진 들판에서 벼가누렇게 익어가고 갈대는 갈대들끼리 땅속 깊이에서 뿌리들을 서로 얽으며 육지로 들어오려는 바다를 멀리서 차단하고 있었다.

판사는 이 사건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는 듯 평소보다 더 근엄해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고 그래서 더 경직되어 보였다.

판사가 판결문을 꺼내들자 법정은 고요해졌다.

피고인들은 청각장애자 교육기관의 교사로서 어린 학생들을 성폭행한 점을 미루어볼 때 죄질이 몹시 나쁘다. 더구나 장애아동들을 올바르게 지도하고 보호해야 할 사회적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을 성욕의 대상으로 삼아 강제로 추행 혹은 성폭행한 것은 엄벌에 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학생들에게 상처를 준 점은 인정하지만 그동안 지역사회에 기여한 바가 크고, 또 전과가 없는 점, 또한 이들 중 성폭행을 당한 학생의 보호자들이 그동안 피고인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잘 돌봐준 것을 감안하여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를 낸 것을 참작하고 또 피고인들 중 자애학원을 설립한 이들의 아버지의 노환이 위중하여 아들로서 임종을 지킬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탄원하였으므로 이를 감안해 다음과 같이 선고한다.

피고인 이강석 징역 26개월에 집행유예 3,

피고인 이강복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 피고인 박보현 징역 6개월!”

판사의 선고가 다 끝나고 수화통역사가 마지막 숫자와 함께 집행유예라는 것을 알리자 여기저기서 괴성이 뿜어져 나왔다.

전과가 없다니! 10여 년간 수십 명을 성폭행했는데 전과가 없다니!”

경찰이 달려가 이들을 끌어냈지만 소란은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괴성과 할렐루야! 소리가 뒤엉켜 법정은 거의 통제 불능상태에 빠지는 것 같았다.

이강석 이강복 형제는 황변호사를 붙들고 활짝 웃으며 악수를 해대고 있었다.

혼자서 실형을 살기 위해 다시 구치소로 가야 하는 박보현이 넋나간 듯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강인호는 보았다.

그의 쥐 같은 눈에 엷은 물기가 어려 있었다. 죄를 지어 벌을 받을 사람은 그 한 사람뿐이었다.

국선변호인은 아직도 잠이 다 깨지 않은 듯한 얼굴로 그런 그의 곁에서 무표정하게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서유진과 연두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강인호는 법정을 나왔다.

무진 영광제일 교회 신도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 위로 펼쳐진 하늘은 날을 벼려놓은 것처럼 몹시도 푸르렀다.

 

강인호가 해고, 정확히 말하면 기간제교사 계약해지 통지를 받은 것은 바로 다음 날 출근 전이었다.

이유는 학교법인의 명예 실추행위 및 개인적 품행 불량이었다.

강인호와 함께 학생들 편에 섰던 교사 4명도 함께 해고되었고, 나머지 소극적 동조교사들은 감봉 처분되었다.

그날 이후 자애학원의 교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학부모들의 시위가 교장과 서무실장의 출근길마다 벌어졌다.

교문 앞에는 청원경찰이 배치되었다. 해고당한 선생들은 날마다 그 교문 앞에 서 있었다.

학생들은 창틀에 매달려 그런 자신들의 선생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며칠 후, 그날 자애학교의 점심 메뉴는 미역국과 계란말이였다.

그런데 주방보조가 달걀을 가지러 급식창고로 갔을 때 그는 아침에 사 온 달걀 10판이 모두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가 이 사실을 주방장에게 보고하던 순간, 교장실이 있는 일층 복도가 쿵쾅거리는 발소리로 가득 찼다.

2교시를 마친 쉬는 시간, 학생들 30여명이 교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마침 교장실에는 윤자애도 앉아 있었다.

뭐야 니들!”

윤자애가 소리쳤다.

더러운 인간을 우리의 교장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교문 밖에 있는 선생님들을 들여보내라. 우리들을 거짓말쟁이로 몬 교장과 서무실장은 사과하라

이강석은 싸늘한 눈빛으로 전화기를 들고 수위실을 호출했다.

, 난데, 니들 뭐하냐? 여기 애새끼들이 내 방으로 몰려왔잖아! 선생들을 부르든지 고기 서 있는 경찰 오라구 해! 내가 이런 것들까지 상대해야 해? 나 없는 동안 군기가 이렇게 빠졌어?”

그러자 남학생 하나가 소파를 거칠게 밀어붙여 문 쪽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때까지는 여유가 있었던 교장의 얼굴이 일순 해쓱해졌다.

자애야, , 애들 어서 나가라고 해!”

교장의 말투에는 어느덧 겁이 배어 있었다.

윤자애가 그들에게 수화로 교장의 말을 전했다.

아이들은 그대로 교장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그새 직원들과 경찰이 왔는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교장과 윤자애에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들의 눈에는 증오와 분노가 이글거렸다.

어린 유리를 유린한 데가 바로 이 탁자입니까?

한 남학생이 수화로 윤자애에게 물었다.

이강석이 윤자애를 바라보자, 윤자애가 머뭇거리다가 통역을 했다.

우리에게 본대로 이야기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지요?

그날, 연두가 교장이 유리를 성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하던 날, 창밖에서 함께 그 광경을 목격한 남학생 중의 하나가 외쳤다.

그만해!

윤자애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 순간 남학생 하나가 윤자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당신이 우리 여자친구들을 시켜서 연두를 세탁실로 데리고 오게 했지? 그리고 거기서 연두에게 고문을 했고?

남학생의 수화는 격렬했다.

그는 윤자애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윤자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날쌔게 뛰어가 소파를 밀치고 교장실의 손잡이를 돌리려고 했다.

그것이 팽팽한 침묵의 선을 끊었다.

도망치려는 윤자애의 몸짓에 자극받은 남학생들은 그것을 공격의 신호탄으로 삼아 들고 있던 달걀과 밀가루를 윤자애에게 던졌다.

교장 이강석을 응징하려고 모였으나 그 순간 책상 밑으로 피신한 교장을 잠시 잊어버린 아이들은 엉뚱하게도 윤자애를 달걀범벅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30여 명의 아이들은 폭행죄로 고소되었다.

 

그날 달걀범벅이 된 윤자애의 사진이 무진일보에 실린 후,

아이들과 자애학원 대책위 측에 동조적이던 여론은 급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했다.

<자애학원 사태 어디까지이번엔 사태와 무관한 젊은 여교사 학생들에 폭행당해>

<시민들, 어떻게 선생을! 한탄>

긴 머리가 풀어 헤쳐지고 달걀과 밀가루를 뒤집어쓴 여선생의 사진은 선정적이고 충격적이었다.

그날 결국 경찰이 강제로 문고리를 부수고 문을 열었을 때 비명을 지르며 샤워실로 뛰어갔던 윤자애는 샤워를 한 후 무진경찰서로 가서 태연히 조서를 썼으나 어찌 된 일인지 그다음 날 무진대학병원에 입원을 했고 전치 4주의 진단을 받았다.

보수언론들은 연약한 처녀의 몸으로 자신보다 키가 큰 남학생들에게 폭력을 당한 그녀는 여기저기 타박상을 입고 눈이 찢어졌으며 대인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어 상당한 후유증이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신문들은 이어 학생들은 사건이 벌어진 후 반성문을 제출했지만 학교 측은 이들의 배후가 밝혀질 때까지 끝까지 조사할 것이며 흐트러진 자애학원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교육적인 견지에서라도 선처를 부탁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뜻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자애학원 사태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았다.

윤자애의 고소로 입건된 30여 명 학생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기숙사에서 데려간 후 등교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유가 있는 부모들은 딸이나 아들을 다른 도시로 전학시켰고, 다른 부모들도 아이들을 등교시키기를 거부했다.

해고당한 선생 4명과 이들 학부모, 학생들은 무진교육청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공립 장애인학교 설립하라>

<부당하게 해고된 교사를 복직시키라>

<성폭행 교사 복직된 학교에 돌아갈 수 없다>

교육청은 여전히 이들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아침이면 천막으로 모여들었다.

집이 먼 아이들은 임시로 최요한 목사가 마련한 교회 한쪽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천막 교실에 칠판이 걸리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첫 시간은 성교육, 두 번째 시간은 민주주의……

바람은 차가워져 갔지만 천막 안은 아기자기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은 자애원에 있을 때보다도 많이 웃었고 라면 한 그릇도 서로 나누어 먹었다.

그렇게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교육청 천막 앞으로 한 30대 여성이 아이를 데리고 찾아왔다.

여자가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고 있던 강인호의 얼굴이 해쓱해졌고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내였다.

그날 밤 기온이 크게 내려가고 산간지방에 올 들어 첫얼음이 얼겠다는 일기예보가 발표되었다.

강인호는 새미를 업고 아파트 계단을 올라갔다. 새미는 그새 무거워져 있었다.

머뭇거리던 아내가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왔다.

아파트로 들어와 마주 앉았을 때 아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야, 당신…… 집에는 자주 안 들어온 모양이네. 집이 서늘해.”

아내의 말은 사실이었다. 천막에서 숙식을 모두 해결하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밤에도 천막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혼자 사는 강인호의 차지가 되곤 했었다.

미안해, 당신에겐……

강인호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잠든 새미를 보고는 그것을 도로 안주머니에 꽂으며 말했다.

정말이야?”

아내는 다시 물었다. 강인호는 아내의 질문의 의미를 생각하며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는 그렇지. 새미에게도…… 그리고 괜한 소문 때문에 당신 힘들었잖아.”

아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오래전 이혼한 부부처럼 할 말이 없었다.

먼 친척 오빠가 있어. 육촌쯤 되나. 아무튼 우리 엄마 친척이라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지. 그 오빠 군대 마치고 바로 미국으로 갔는데 거기서 크게 성공을 했나 봐. 이번에 10년 만에 한국에 왔다기에 만났어. 중국에 가방공장을 내는데 한국 법인 명의가 필요한가 봐.”

아내는 강인호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오래 생각한 사람 특유의 조용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자면 한국 사람 경영자가 필요한 거야. 중국에 대해서도 경험이 있는…… 오빠가 당신 만나봤으면 해. 사흘 후 미국으로 가기 전에 결정을 해야 한대. 시간이 없어서 내가 내려왔어.”

 

아내와 나란히 누웠을 때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그는 누운 채로 전화기를 들었다.

서유진의 이름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 누운 아내와 직접 살이 닿아 있지 않았음에도 강인호는 아내가 그 이름을 보았고 그 이름에 긴장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래서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 아내 쪽으로 돌아누우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 또 서유진이었다.

그는 약간 짜증이 났으나 혹시나 싶어 망설이고 있는데 아내의 손길이 그의 전화기 위를 덮었다.

아내의 눈은 애절했다. 무언가를 시험하는 눈빛이었고 만일 이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둘의 사이가 더욱 어려워질 것을 경고하는 듯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진동이 더 울자 전원을 꺼버렸다.

긴장하던 아내의 어깨가 그제야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옆으로 돌아누워 아내의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뜻밖에도 아내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익숙한 아내의 몸은 따뜻했다. 그는 아내의 몸 위로 올라가면서 젊은 자신의 몸뚱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아내를 그리워했는지 깨달았고 아내 역시 그런 것 같았다.

육체란 때론 많은 말보다 더한 웅변을 뿜어내는 법이고 두 사람은 별말 없이 땀을 닦으며 이불 속에서 손을 맞잡았다.

내일 서울 가자. 당신 해고되었다는 소식 듣고 기다렸단 말이야. 어쩌면 그렇게 안 돌아올 수가 있어?”

한 번의 정사로 이내 예전의 자리로 돌아온 아내가 졸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서유진과 연두와 유리, 민수의 얼굴들이 어둠 속에서 불빛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먼 등대 불빛처럼 깜빡거렸다.

? 약속해. 우리 새미를 걸고 약속해…… 여보, 인호씨.”

아내는 콧소리를 내며 벗은 팔로 강인호의 목을 감았다.

아내의 팔에 적당히 붙은 보드라운 살들이 그의 까칠한 얼굴 위로 지나갈 때 베이비파우더의 노곤한 향기 같은 것이 났다.

그래, 우선 자고 내일, ?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싫어, 지금 약속해. 나 그럼 안 잘 테야.”

아내는 연애시절 그랬던 것처럼 어리광을 피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무진을 떠나오기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아내가 그의 목에 두른 팔을 풀더니 불현듯 웃었다.

난 당신이 운동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당신 그런 사람들 싫어했잖아.”

피곤할 텐데 먼저 자. 나 담배 피우고 올게.”

그는 아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다음, 전화기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이제 담배도 끊어. 내가 금연침 잘 놓는 한의원 알아놨어.”

베란다 문을 닫자 높은 톤의 아내의 목소리가 사라져갔다. 그는 담배를 물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서유진의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서유진의 집은 어두웠다.

그녀는 어디 있을까? 그는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휴대폰을 켰다.

휴대폰은 진저리를 치며 진동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서유진과 최요한 목사와 동료 교사들의 이름이 전화기가 진저리를 칠 때마다 떠올랐고 문자메시지도 들어오고 있었다.

내일 새벽 천막을 기습 철거한다고 합니다. 모두 모여주세요. 우리의 천막을 지킵시다. 도와주세요.”

그는 서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자 그 밤이 떠올랐다. 창녀와 광녀와 젊은 소매치기들……

응 강선생, 오랜만에 집사람하고 있는데 방해해서 미안해. 근데 내일 무진 민주화운동 28주년 기념식한다고 새벽에 천막을 철거한다나 봐. 것두 경찰이 아니라 철거 전문 용역업체가 온대. 알지, 그 인간들 얼마나 잔인한지? 집으로 갔던 사람들 다시 다 오고 있어. 선생님들이 말렸는데도 아이들까지 다 나와서 여길 지키겠대. 그런데 지금 남자들이 너무 부족해. 강선생 좀 와줘야겠어…… 솔직히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좀 무섭네.”

서유진의 목소리는 천막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서유진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떨고 있었다.

강인호는 베란다 안쪽에서 자고 있는 새미와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저쪽과 추운 이쪽, 밝은 저쪽과 어두운 이쪽이 선연하게 나뉘어 있었다.

지금 바로는 안 되고, 새벽 전에 갈게. 왜 그렇게 떨어. 무서워하지 마. 선배는…… 용감하잖아.”

그래? 그랬어? 이상하다, 난 늘 무서웠는걸.”

서유진은 조금 웃다가 덧붙였다.

근데 솔직히 오늘 밤 너무 춥다. 어쨌든 와, 꼭 와!”

갈게. 조금 늦어도 꼭 갈게. 기다려, 기다려 선배.”

 

사랑하는 당신,

연애시절에 내가 중국 출장을 갔을 때 빼놓고 편지는 처음 써보는 것 같아.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이 무진을, 안개를, 그리고 이 무진의 안개 속에서 발견한 어떤 희망 혹은 또다른 나를. 이곳에 내려올 때 나는 거대한 대도시의 자본이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해내 버린 한 마리의 패배한 짐승 같았어.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먹이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지. 그런데 내가 가르쳐야 할 아이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는 것을 느꼈어. 그건 뭐랄까, 정의(正義) 혹은 신성(神性) 혹은 보다 존귀한 것에 대한 갈망……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돈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며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한 어떤 것을 향해 노력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거야. 그 과정에서 뜻밖에도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 그것도 아주 존엄한 인간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 어떤 기쁨을 맛보았어. 그리하여 한 존엄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다른 존엄한 생명들을 짓밟는 자들과 싸우고 싶어졌던 거야. 이것은 내 인생에서 결코 하찮은 일은 아니었어. 새미 엄마, 내가 가려고 하는 이 길이 우리 가족에게도 결국은 옳은 길이라는 것을 진작 말해주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중국 공장일은 고마워. 육촌 오빠에게는 미안하다는 말 꼭 전해줘. 그러나 지금 내가 여기를 떠나면 나는 아직도 그저 제자를 성폭행했던 인간이고, 월급 몇 푼 벌려고 무진까지 흘러왔다가 기껏 부당해고나 당하고 다른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또 하나의 패배한 짐승이 될 뿐일 거야. 자본이 소화시키지 못하고 자본에 패배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야만에마저 패배당한 그런 인간이 될지도 모르지.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대로 돌아간다면 설사 수십억의 돈을 번다 해도 나는 영영 불행할지도 몰라. 사랑하는 당신, 오늘 밤 아이들이 수업을 받는 천막을 철거하러 온대. 아이들이 거기 있어. 짓밟히고 상처받았으나 이제 겨우 회복되고 있는 아이들이. 그 아이들도 내게는 결국 모두 새미와 같아. 그리고 동료들이 있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다가 고난받는 내 동료들이. 그들은 내게 결국 모두 당신과 같아. 당신이 깨어나면 나는 아마도 여기 없을 거야. 새미를 데리고 서울로 가서 조금만 기다려 줘. 그리 길진 않을 거야. 약속할게. 더 당당하고 멋있는 아빠와 남편으로 돌아가겠다고. 내 비록 깃발을 휘날리는 그런 영웅은 아니나, 어리고 힘없는 아이들이 개들에게 짓밟히는 걸 그냥 바라볼 정도로 형편없는 인간은 아니야. 무진은 내게 그걸 가르쳐주었어. 나는 당신이 나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줄 것을 믿어. 그러니 당신도 날 믿어주길.

사랑하는 당신의 남편이.

 

그는 편지를 접어 잠든 아내의 머리맡에 놓았다.

그리고 창밖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 빛에 의지해서 새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릴 때는 그를 닮은 것 같더니 이제는 확연히 어미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여섯 살이 넘어가면서 여성으로서의 성징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당신 안 자?”

아내는 깊이 잠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어서 자. 조금 할 일이 있어서.”

안아줘, 이상한 꿈을 꾸었어.”

아내는 무진에 내려오기 전처럼 말했다.

그는 아내가 딱한 생각이 들어서 이불을 들추고 아내 곁에 가서 누웠다.

아내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목덜미를 껴안았다.

그는 아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머리맡의 편지를 올려다보았다.

편지는 어둠 속에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창문을 덜컹이며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까 서유진의 전화 너머로 들리던 천막의 펄럭이는 소리가 편지 속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바람은 더 거세지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 오면서 날이 점점 더 추워지는 모양이었다.

꼭 그래야만 하나, 하고 누군가가 물었다.

꼭 그래야만 한다,고 그는 대답했다.

그래도, 정말, ? 이라고 누군가가 다시 물었다.

그래도, 정말, , 이라고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대체 어쩌면 잠도 안 자고들 그렇게 전화를 해? 누구야? 무진에서는 원래 그래?”

휴대폰의 진동소리에 내내 잠을 설쳤는지 화장실을 다녀오던 아내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는 그제야 그걸 의식한 듯 수화기를 들었다.

서유진 서유진 서유진 서유진 서유진……이라는 부재중 통화기록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 515분 이후 더는 통화의 흔적이 없었다.

515분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는 상상할 수 없었다.

창밖의 하늘은 몹시 흐리고 바람은 여전히 거세게 불고 있었다.

아직 다 물들지 않은 낙엽들까지 속절없이 떨어져 허공을 맴돌았고 바람은 조금이라도 헐거운 것들의 발목을 가차 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멀리서 간판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우당탕탕 들려왔다.

그는 아직 아내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베란다로 나갔다. 바람은 차고 거세었으며 습기마저 머금고 있어서 몹시 추웠다.

그는 담배를 물고 다시 한번 그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편지를 찢었다.

거센 바람은 가벼운 종잇조각들을 싣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천막은 찢어지고 칠판은 박살났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철거용역반의 몽둥이질 아래 쓰러졌고 5명이 연행되었다.

최수희 장학관은 출근길에 천막이 있던 터에 대형 쓰레기차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그녀는 더러운 것과 거친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무진 민주화운동 28주년 기념식은 시청 앞 광장에서 10시에 열릴 예정이었다.

장경사는 농인들과 학부모들 그리고 시민단체의 지원자들이 10시 시청 앞 광장으로 다시 집결하기로 했다는 보고를 받고 긴장하고 있었다.

TV를 비롯한 언론매체들이 집결하고 국무총리까지 내려오는 큰 행사에서 낭패를 본다면 다음 승진에서 불이익을 볼 것은 당연했고 새로 온 서장에게 찍히게 될지도 몰랐다.

새로 부임한 서장은 입만 열면 부패의 연결고리를 척결하겠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부임 후 6개월이 지나면 그 말도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그 기간 동안에는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막상 다시 짐을 싸려니 그것도 살림이라고 잡동사니들이 불어나 있었다.

자동차 트렁크에 이불과 노트북을 싣고 집안을 둘러보는데

책상과 밥상을 겸해 쓰던 탁자가 놓인 아래에 분홍리본이 떨어져 있었다.

분홍리본을 맨 연두의 편지 속에서 소녀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우리 강인호 선생님께, 라고 시작하는 편지였다.

그는 휴지통 앞으로 갔다가 그것을 안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내가 운전할까?”

아내가 물었다.

당신 안색이 아주 나빠.”

그는 말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아내가 새미를 뒷자리에 앉히고 시동을 걸었다.

잠을 영 못 자는 것 같더니……

내비게이션 따라가면 되니까 걱정 말고 좀 자. 당신 피곤해 보여.”

그는 응, 하고 대꾸하며 눈을 감았다.

다음은 국무총리께서 대통령의 기념축사를 대신 읽으시겠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려 하셨으나 어제 미국 순방길에 오르신 관계로 참석하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무진시가 지난 28년간 이 땅의 인권신장과 민주주의에 끼친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천명하신 바 있습니다. 여러분, 국무총리를 뜨거운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국무총리가 박수 속에서 단상에 오르는 동안 단상 옆에 놓인 화환 하나가 거센 바람에 넘어져 버렸다.

붉은 꽃잎들이 점점이 떨어져 내리다 바람에 날아올랐다.

곧이어 그 옆의 화환도 쓰러졌다.

장내가 어수선하다고 느끼는 순간 사람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를 들었다.

북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국무총리는 추위 때문에 소름이 오소소 돋은 얼굴로 단상에 서서 내빈들을 둘러보았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메카이며 인권신장의 발상지, 무진에 오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시위대는 북을 치며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농인들로 이루어진 시위대였으므로 어차피 누군가 외친대도 구호를 따라할 사람도 많지 않았다.

어쩌면 기괴하고 조용한 시위였다.

<우리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

<성폭력 교장에게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

멀찍이 거리가 잘 보이는 언덕 위에서 무전기를 들고 장경사가 인도에 선 경찰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행사장 쪽으로 못 오게 막아. 저쪽 사거리에서 교육청 쪽으로 몰아가. 몇 다쳐도 어쩔 수 없어, 몰아내!!”

장경사는 무전기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바람이 더 거세지고 있었다. 북소리는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들어 서유진을 찾았다.

너무 작아서 이런 데서 보면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예상대로 맨 앞줄 끄트머리에서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를 찾는지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가끔 뒤도 돌아보는 것 같았다. 설마 또 다른 시위대가 오는 것은 아니겠지,

혀를 차고 있는데 장경사의 머리와 뺨 위로 날카롭고 차가운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비라니, 하늘도 시위를 막아주시는군.

장경사는 잠깐 미소를 지었다.

서유진은 약간 휘청거리고 있었다.

멀리서도 입을 꽉 다문 야무진 이목구비가 보이는 것 같았다.

장경사는 서유진이 다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무전기를 입에 가져다 대고 말했다.

물대포 발사 준비. , , 하나, !”

 

무진시를 벗어나는 고개 입구쯤에서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정상에 오르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가 고개의 정상에 올랐을 무렵 돌아보니 구불구불한 고개 아래로 무진은 구름의 바다 속에 잠겨 있었다.

처음 이곳으로 오던 날, 그는 저렇게 뿌연 안개의 바다를 보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검은 구름의 바다였다.

엄청난 비네!”

아내가 말했다.

와이퍼가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빗물이 흐르는 창틀에 팔꿈치를 기대어보았다.

그리고 그 팔꿈치 위에 힘없이 고개를 얹었다. 뿌연 빗발 속으로 이정표가 서 있었다.

감색 바탕의 이정표에는 안개보다 더 하얀 글씨로 당신은 지금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강인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한참 동안 그 손을 떼지 않았다.

 

인호 잘 지냈어?

네가 떠나간 지도 벌써 6개월이 넘어가는구나.

아파트로 찾아가 보니까 앞집 아주머니가 네가 그날 아침 급하게 떠났다고 말해주시더라구.

그 후로도 여러 번 전화를 했는데 연결이 안 되더니 어느 날인가는 결번이라는 안내가 나오더라.

혹시 몰라 이메일을 쓰는 거야. 잘 지내지?

어제 연두 아빠의 장례식이 있었어.

연두 아빠는 연두와 그 엄마의 손을 잡고 평화롭게 돌아가셨어.

연두와 연두 엄마의 곁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걱정 없다고 오히려 우리를 달래주고 가셨어. 정말 좋은 분이었는데.

무진의 바다가 보이는 묘지에 오랜만에 참 많은 사람들이 모였단다.

장례식 끝나고 밥을 먹으면서 연두가 불현듯 네 얘길 꺼냈어.

유리는 아직도 네 이야기가 나오면 울어.

뭐 연두와 유리뿐 아니라도 실은 우리 모두 그 자리에 없는 유일한 사람, 그러니까 강선생, 네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우리는 네가 왜 그 아침 아무 말도 없이 무진을 떠났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네가 참 많이 힘들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어.

협박을 받아 그랬든 혹은 피치 못할 일이 있어 그렇게 떠나야 했든 너는 우리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거라고 말이야.

네 성격에, 오겠다고 해놓고 약속을 어겨야 했으니 얼마나 더 힘들었겠니.

우리 이야기를 좀 할게. 네가 궁금해할 거 같아서 말이야.

나는 그날 도로교통법 위반에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었어.

이번에는 보수꼴통이 아닌 좋은 판사를 만났지.

죄를 범했으나 그 뜻이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라며 벌금 150만 원으로 봐주더라구.

받아야 할 벌로 보면 내가 이강석 형제보다 더 중한 벌을 받은 건가?

아무튼 우리 무진의 판사님들이 다 그렇게 너그러운 줄 알았는데 우리 아이들의 항소는 기각되었어.

합의서가 관건이었지. 그리고 윤자애가 아이들 30명을 고소한 사건은 아직도 지지부진 진행 중이야.

절대로 용서 못한대. 절대로 말이야. 그러니 이 싸움은 기실 아직도 끝나지 않은지도 몰라.

아이들은…… 이제 그 학교에 다니지 않아. 이젠 박보현 선생까지 복직을 했거든.

학부모들과 최목사님 모두 함께 고민 끝에 연두의 집을 빌려서 연두 어머니께 아이들을 부탁드렸어.

아이들은 근처의 학교로 전학시켰고.

다행히 그 지긋지긋한 최수희가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가고 나서 새로 온 장학관이 특수학급을 허락해주었단다.

연두네 집에 여자아이들 6명의 기숙사를 꾸몄고 우리는 그것을 홀더라고 부르기로 했어.

홀더. 영어가 아니야. ‘홀로 더불어라는 우리말이야.

연두 아버지의 병으로 생계가 막막했던 연두 어머니는 딸도 키우고 불쌍한 아이들 밥도 먹이고 돈도 번다며 좋아하신단다.

그리고 남자아이들은, 그 통역사 기억나니? 그 사람이 맡았고. 독지가들이 집을 하나 얻어주었어.

거긴 그러니까 남자 홀더지. 집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거 같아.

거기에 민수랑 남자아이들 일곱 명이 산단다.

유리는 많이 건강해졌어. 심리치료도 받고 있고. 건강해진 것은 비단 유리뿐은 아니야.

민수는…… 놀라지 마. 육개월 동안 키가 15센티나 컸어. 다 이게 맛있는 저녁밥의 힘이란다.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은 놀랍도록 컸어.

그 아이들은 이제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폭력을 거부할 줄 알게 된 거야.

가끔 아이들이 대견하게 변한 것을 보면 우리가 꼭 진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드는걸.

오늘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저녁 무진에 다시 안개가 내린다.

저 지긋지긋한 안개, 또다시 모든 빛들이 희미해지고 사람들은 서둘러 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겠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으며 들어서는 저 뿌연 안개 속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안개를 통과하는 유일한 것, 소리…… 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최목사님은 언제나 아이들에게 말씀하신단다.

우리의 귀도 네 소식을 그리워하고 있어.

혹시라도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우리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네가 보여준 헌신과 사랑을 기억하고 있어.

너는 우리를 잊어도 우리는 네가 늘 그리울 거야.

건강하게 잘 지내길, 그리고 행복하길 빈다.

 

강인호는 창가로 다가갔다.

빌딩 사이의 공원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나온 직장인들로 가득했다.

햇살은 강렬하고 나뭇잎들은 있는 힘을 다해 그 햇살을 빨아들이고 분수는 통통한 물줄기를 발랄하게 뻗고 있었다.

이 도시의 강렬한 욕망처럼 햇살이 화창한 오월이었다. 벌써 그늘을 찾아 사람들이 무리지어 앉아 있었다.

홀로는 쓸쓸하고 더불어 있으면 외로운 사람들. 군중. 그래서 끝끝내 홀로이지도 더불어 함께이지도 못할 사람들.

더워진 날씨 탓에 사람들은 대부분 윗옷을 벗은 와이셔츠 바람이어서 초록빛 잔디 위는 하얀색으로 가득했다.

혹시라도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서유진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우리의 귀도 네 소식을 그리워하고 있어.

창밖을 응시하는 강인호의 눈이 어룽지면서 잔디밭에 앉은 흰 와이셔츠들이 그의 시야에서 뿌옇게 번져갔다.

그것은 안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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