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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1

도가니

공지영

 

 

강인호가 간단한 이삿짐을 자신의 승용차에 싣고 서울을 출발할 때쯤 무진(霧津)시에는 해무(海霧)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바닷속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흰 짐승이 축축하고 미세한 털로 뒤덮인 발을 내어 딛듯이 안개는 그렇게 육지로 진군해왔다.

안개의 품에 빨려 들어간 사물들은 이미 패색을 감지한 병사들처럼 미세한 수증기 알갱이에 윤곽을 내어주며 스스로를 흐리멍덩하게 만들어버렸다.

바닷가 절벽 위에 선 4층짜리 석조건물 자애(慈愛) 학원도 그렇게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층 식당쯤에 켜진 노란 불빛이 마요네즈 빛깔로 희미해질 때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일요일, 아마도 아침 예배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였을 것이다. 종소리는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안개를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소리뿐이니까.

그때 한 소년이 철길 위를 걷고 있었다. 이른 아침 안개는 아직 남쪽 바다 연안으로부터 육지 깊숙이 다가오지 않았다.

일찍 피어난 코스모스 꽃무리가 철길 옆에서 창백하고 불안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소년은 열두어 살쯤 되어 보였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세워놓는다면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작은 키였고 몸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소년의 연한 하늘색 줄무늬 티셔츠는 이미 안개의 기미를 감지한 습기 찬 대기에 젖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철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몸 어딘가가 불편한 듯 소년은 다리를 절룩이고 있었는데 이미 바다 쪽에서부터 엷게 스며들기 시작한 안개로 인해 그 표정은 지워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소년은 그렇게 안개 속으로 휩싸여 들어갔다.

소년의 발길이 닿는 철길 위로 규칙적이고 작은 진동들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소년은 그것을 느꼈다.

무진시 한복판에 있는 영광제일교회의 주일예배는 오전 10시에 시작되었다.

이미 교회 안뜰은 발 하나 디딜 틈 없이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늦장을 부리다가 뒤늦게 교회에 도착한 이들의 자동차가 주차장에서 가벼운 접촉사고를 일으키느라 여기저기서 작은 파찰음이 들려왔다. 하이빔을 켜도 소용이 없었다.

안개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어둠이 한 번도 빛을 이긴 적이 없다,는 성서 말씀이 봉독되는 중에도 안개는 발광한 헤드라이트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잡무를 보는 경비원은 실수로 열쇠 꾸러미를 땅에 떨어뜨렸는데 그것을 찾는 데 한참이 걸렸다.

겨우 열쇠를 집어든 그는 안개 속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예배당 안에서 들리는 찬송가 소리를 듣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안개야…… 지독하군."

그의 말소리는 파이프 오르간에 맞추어 부르는 성가대의 노랫소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철길 위를 뒤흔드는 진동은 이제 소리로 바뀌어 철로는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뒤돌아보았다.

커다랗게 휘어진 선로를 돌아 기차가 오고 있었다. 소년은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힘껏 두 팔을 벌렸다.

얼핏 그의 얼굴에 미소가 이는 듯 보였으나 그것은 곧 울부짖음으로 바뀌었다.

소리는 모음과 자음을 감지할 수 없이 기괴했다. 기적이 울었다.

소년의 몸은 기차에 부딪혀 팝콘처럼 가벼이 튕겨나갔고 안개 속에서 붉은 피들이 천천히 젖은 땅 위로 흘러내렸다.

 

강인호가 휴게실에 도착해서 차를 세울 무렵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아직 출발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무진으로 그를 보낸 것도, 자신과 아이는 서울 집에 그대로 남고 강인호 혼자 무진으로 가라고 결정한 것도 아내였지만 아내의 목소리는 서운함에 좀 젖어 있었다.

"운전 중이야?"

"아니야, 잠깐 차 세웠어. 휴게소야."

딱히 할 말이 있어서 전화를 건 것 같지는 않았다.

아내는 막상 그가 작은 이삿짐을 싣고 그녀를 떠나자 새삼 그 빈자리를 확인한 것 같았다.

강인호는 잠시 아내가 딱하게 생각되었고 이렇게 떠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졌다.

"당신 또 담배 피고 있어? 이제 내가 없으니 잔소리할 사람도 없겠네."

"너무 걱정하지 마. 봐서 내년 봄쯤 새미하고 무진으로 내려와. 여기서 유치원 입학시키면 되잖아."

아내가 웃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래, 정식교사 발령받으면 말이야."

강인호는 기간제교사로 임시발령을 받아 무진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것 또한 아내가 힘써주지 않았다면 어림없는 일이긴 했다. 우연히 만난 아내의 여고 동창이 마침 무진에 있는 자애학원의 일가였고 붙임성이 좋은 아내가 그 친구에게 강인호의 일을 부탁한 모양이었다.

한때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교직에 몸담았으나 그는 곧 그 일을 그만두고 친구와 함께 작은 의류업을 시작했다.

지난해 지구촌을 뒤덮은 불경기의 여파만 아니었다면 그는 오늘 같은 일요일 중국 현지 공장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교직을 다시 떠올린 것은 아내였다.

6개월을 실업자로 지내고 난 후였고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다행히 사업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그는 공장 문을 닫긴 했었다.

서울 외곽에 있는 아파트를 날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부었던 적금은 이미 해약한 지 오래였고 남은 보험들마저 깨진 상태였다

"교사? 특수학교 교사라구? 게다가 청각장애인 애들이라니……"

아내가 동창을 만나고 온 자리에서 그에게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는 어리둥절했다.

"난 대학 때 받은 일반 교사자격증 뿐이야. 그게 언제 얘긴데 내가 가르칠 수가 있겠어?"

아내는 전리품을 가져온 사람처럼 그를 보며 웃었다.

"당신 그렇게 고지식하니까……"

아내는, 그러니까 사업을 망해 먹지, 하는 뒷말을 우물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무렵 몹시 의기소침해진 그를 의식한 듯 아내는 애써 부드러운 말투로 다시 말했다.

"사립학교잖아. 이사장 집안하고 연줄만 있으면 그건 괜찮대. 다들 그렇게 취직을 하고 야간대학원에 다니면서 특수교육을 잠깐 전공하면 된대.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했다니까. 페이도 좋고 근무시간도 널널하고, 이보다 더 좋은 직장 없을 거라나. 어쨌든 열심히 해서 정식교사 발령을 받아요. 그러고 나면 또 어떻게 서울로 자리를 옮겨볼 수도 있는 거잖아."

마지막 말을 마치고 아내는 그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강인호의 차는 다시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무진을 삼키고 있는 안개에 대해 전혀 실감하는 바가 없었다.

그로 말하자면 서울에서 태어나 반도의 중심을 벗어난 본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한때, 젊음이 가져다주는 가지가지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면의 밤을 지내던 시절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통해 무진의 안개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을 뿐이다.

그가 태어나기 10년도 더 전에 작가 김승옥은 무진에 대해 이런 묘사를 한 일이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뺑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무진이라는 지명과 안개라는 이미지와 김승옥의 짧은 소설은 그러나 그에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의 그림자를 데리고 왔다.

아내가 무진,이라는 도시의 지명을 꺼냈을 때부터 기억은 안개의 바다 속에서 항구로 다가와

윤곽을 드러낸 배처럼 그에게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무진기행말이에요…… 나는 선생님이 처음 부임해서 그 소설을 소개해주었을 때 꼭 오늘이 올 줄 알았어요."

난데없이 부대로 면회를 와서 자고 가겠다고 우기던 명희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곤 이불 속에서 망설이던 그의 몸을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그녀가 물었다.

"하인숙이라는 여자 말이에요. 주인공이 약속을 어기고 떠난 후 무진에 홀로 남아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요?"

명희의 몸에서는 희미한 복숭아 냄새가 났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영장이 늦어지는 바람에 잠시 근무했던 여학교의 제자였다.

그리고 부대 앞으로 찾아온 그녀는 갓 스물의 나이를 숨기지 못하고 서투른 화장을 하고 있었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나 처음........ 아니에요."

오히려 떨고 있던 것은 그였다. 주저하는 그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벗은 가슴에 대며 명희는 까르르 웃었던 것 같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것을 포기한 어린아이의 서늘한 기운 같은 것이 서려 있었지만 그건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명희를 보내고 부대 근처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낮술을 퍼먹고 다시 귀대했을 때

그는 날파리처럼 달려드는 간지러운 죄책감들을 떼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가끔씩 찾아오는 명희와 나눈 살의에 가까운 정사가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도 총부리를 살아 있는 누군가에게 겨누었을 것이 틀림없다. 설사 그 누군가가 자기 자신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제대할 무렵, 명희의 소식은 끊겼다. 그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그녀가 그가 제대하기 몇달 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명희의 말이 떠올랐다.

"하인숙이라는 여자 말이에요. 그 주인공이 약속을 어기고 떠난 후 무진에 홀로 남아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요?"

 

무진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그는 갈림길에서 핸들을 꺾었다. 고개를 넘으면 무진시였다.

그런데 그 고개 정상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흰 덩어리같이 고여 있는 거대한 구름의 바다, 무진을 뒤덮은 안개였다.

그것은 희고 고운 해조류의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의 차는 흰 안개의 터널로 들어섰다.

백발마녀의 머리카락같이 가느다란 안개의 결이 촘촘히 그의 차를 감싸기 시작했다.

왜였을까, 그는 오래 전 여름 낚시터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기억을 떠올렸다.

떠내려간 낚싯대를 건지러 저수지에 뛰어들었을 때 그의 맨다리에 감겨오던 민물 해조류의, 미끈거리고 동시에 끈적거리던 감촉을... 그때 그는 수영하기를 포기하고 함께 낚시하던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엉겨드는 해조류의 감촉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온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수영에 익숙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저 안개를 보며 문득 떠올라오는 이런 기억 때문에 그는 문득 불길했다.

어쨌든 조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날 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공포 때문에 잠시 뒷덜미가 뻣뻣해졌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비상등을 켰다. 비상등이 점멸하는 소리가 그의 귀에 째깍거렸다.

차에 켜둔 네비게이션이 안개 속에서 그에게 명령했다.

"전방에 안개 주의지역입니다. 일 킬로미터 앞에서 우회전 하십시오."

그는 우회전을 했다.

자애학원은 안개 속에 서 있었다.

교문을 지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려고 하는데 청색의 고급승용차가 그의 옆에서 시동을 거는 것이 보였다.

그는 창문을 열고 청색 차의 운전자를 향해 무슨 말인가 건네려고 했으나 청색 차의 운전자는 안개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차를 출발시켰고 이어 무서운 속도로 흰 안개의 벽 너머로 사라졌다.

청색의 차창 안으로 벗겨진 머리가 얼핏 보였던 것이 그가 파악한 인상착의의 전부였다.

그는 조심스레 안개로 가득 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바닷가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 자애학원의 거대한 석조 건물이 얼핏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다시 흰 안개자락에 덮였다.

그는 차에서 내렸다. 무진시까지 차를 몰고 온 4시간보다 무진에 들어선 이후 20분 남짓의 드라이브가 그의 어깨에 뻐근한 통증을 몰고 왔다.

그는 오른 팔을 들어 가볍게 몇 번 돌리고 나서 담배를 물었다.

그때 어디선가 가벼운 것들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파사삭, 파사삭거리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작은 여자아이의 형체가 보였다. 아이의 입속에서 부서지는 스낵과자의 소리였다.

단발머리의 아이는 키가 작고 마른 체구를 하고 있었다.

아이는 한 손에 커다란 과자봉지를 들고 그 속의 것을 꺼내먹으며 안개 속에서 이리로 오고 있었다.

"저기 얘! 말 좀……"

그가 말을 꺼냈다. 그러나 아이는 과자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순간 이곳이 청각장애인들의 학교와 기숙사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말을 붙이려고 했던 자신이 우스워서 그는 잠시 웃을 뻔했다.

그가 그렇게 혼자 생각하는 동안 아이도 그를 발견한 것 같았다.

아이의 입속에서 파삭거리던 과자소리가 천천히 멈추었다.

강인호는 이 학교에 오기 전에 간단히 익힌 수화를 해보려고 했다.

"안녕, 반가워."

그러나 그가 손을 내밀어 수화를 하기도 전에 아이의 눈에 비현실적인 공포의 빛이 떠올랐고 아이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뒤돌아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우우……"

그는 그렇게 멀어져가는 아이를 눈으로 쫓다가 망연해져버렸다.

안개는 아이를 삼켰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자음과 모음으로 표기되지 않는 그 비명소리가 그의 귀에 남았다.

 

"안개 때문인 것 같습니다."

김순경의 보고를 받는 동안 장경사의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장경사는 건성으로 김순경의 보고를 들으며 눈을 아래로 내려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빠 진짜 나 화났다. 오늘까지라고 했잖아!’

장경사는 아직도 제 손끝에 남아 있는 카페 <야화> 미숙이의 흰 허벅지를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소리를 못 들으니까 기차가 오는 게 들리지 않았고, 또 기차를 미처 보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안개가 지독했으니까."

장경사는 김순경에게 대꾸하며 꾸욱꾸욱 자판을 누르고 있었다.

글쎄 며칠만 참아봐... 참을성 없는 그게 네 매력이긴 하지만... 오늘 저녁에 일 끝나고 산낙지 사줄까?’

그가 문자메시지의 전송버튼을 누를 때 김순경의 입가로 얼핏 조소의 그림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장경사는 천천히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고 김순경의 눈길을 의식하며 약간 고민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감싸 안았다.

"뭐 다른 특이사항은 없고?"

"뭐 사고니까요. 그런데 아이 바지 호주머니에서 좀 이상한 게 나왔습니다."

김순경은 비닐 팩 속에 든 것을 장경사의 책상 위에 꺼내놓았다. 작은 수첩을 찢은 듯한 종이는 피에 젖어 있었다.

"이강석, 박보현이라는 이름이 써 있어요. 그 위로 마구 X자를 쳐놓은 거예요……"

순간 <야화> 미숙이를 떠올리고 있던 장경사의 눈이 샐쭉 위로 치켜졌다. 그는 어쨌든 베테랑 수사관이었다.

이제는 반쯤은 본능이 되어버린 그의 수사경력이 김순경의 말 속에서 무슨 냄새인가를 감지한 듯했다.

장경사는 비닐 팩에 담긴 피에 젖은 쪽지를 바라보았다. 이강석은 자애학원 교장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박보현 또한, 아마도 그의 기억이 맞다면 그 학교 기숙사의 생활지도교사였다.

언젠가 이강석과의 회식자리에 따라왔던 눈매가 얍삽하고 얼굴이 침침하던 사람이었다.

이강석의 노골적인 하대에도 끝까지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며 장경사는 참으로 비루한 놈이라고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그의 이름이 박보현이었다.

"그래 가봐. 자애학원에는 내가 연락을 하지 뭐."

그는 돌아서는 김순경을 바라보며 다시 휴대폰의 자판을 눌렀다.

오빠가 해결해줄게 까짓 삼백만원 쯤이야.’

장경사는 갑자기 느긋해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아내가 말한 대로 그는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무언가가 필요하면 꼭 무슨 일인가 일어나 그에게 유리한 대로 전개되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지난달 안개가 지독하던 날 자애학원 학교 운동장 끝 절벽에서 떨어져 사망한 한 여학생의 시신이 떠올랐다.

기차와 절벽…… 두 달 사이에 벌써 두 명이었다. 그건 우연한 사고로 처리되었고 이번 건 역시 그렇게 될 것이었다.

모든 것은 이 지독한 무진의 안개 탓일 테니까. 그는 무진경찰서 창밖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안개는 이제 서서히 걷혀가고 있어서 파출소 창밖의 자동차들이 차츰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이 안개가 요긴한 때도 있었다. 그렇다, 조심스레 살다 보면 뭐든 요긴할 때가 있는 것이다.

 

짐은 얼마 없었지만 그래도 이사는 이사였다. 제자리에 들어가 있으면 꼭 그렇지도 않은데 꺼내놓으면 남루한 것이 살림살이들이었다.

강인호는 무진에서 새로 구한 15평 주공아파트 부엌에서 그 살림살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냄비와 커피잔, 물컵, 그리고 작은 접시 몇 개뿐이었지만 그것들을 가지런히 찬장에 놓고 노트북까지 부엌에 딸린 식탁에 놓아두자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집을 떠나 새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 좀 실감이 나기도 했고, 대학시절 친구의 자취방으로 놀러온 듯 신선한 기분도 들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예상대로 서유진이 서 있었다.

"정말 왔구나. 이런 곳에서 널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네…… 반갑다."

서유진은 들고 온 샴푸며 세제 등의 선물꾸러미를 내려놓으며 강인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둘은 잠시 손을 잡고 웃었다. 서유진은 강인호의 대학 한해 선배였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에 동창으로부터 유진이 무진에 정착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소문 끝에 메일이 오가고 문자메시지가 오간 후 이 아파트도 서유진이 주선해 얻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보기로는 오늘이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거의 십오년 만의 재회였다.

그는 유진의 얼굴에서 그가 기억하고 있는 가녀린 단발머리 여학생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신산辛酸에 담갔다 꺼내놓은 듯, 지금 그의 앞에 선 중년 문턱의 그녀의 얼굴에는 그런 빛은 사라지고 없는듯했다.

"서 선배 이혼했어. 애 둘을 혼자 키우며 사나봐. 아이가 어디가 많이 아프다던데. 사는 것도 힘이 드나봐……"

유진의 소식을 전해준 동기는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참 이상해. 예쁘고 똑똑하고 괜찮은 여자들은 꼭 이상한 놈 만나서 고생들을 해."

한때 서유진을 두고 다다를 수 없는 연정에 훌쩍거렸던 동기는 술에 취해 그렇게 말했다.

"네 마누라가 그 대표선수다, 쨔샤!"

강인호는 그렇게 무마하고 말았지만 학교를 졸업한 이후 들려오는 유진의 소식은 동기들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이긴 했다.

잇따른 남편의 정치 입문 실패, 정상적이지 않은 아이의 출산, 그러므로 필연처럼 뒤따라오는 가난까지...

그녀가 어떻게 이 무진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이 낯선 도시의 새 집에서 그녀와 마주 서게 되자 그녀의 섬세하고 반듯한 얼굴의 윤곽 속에서 새삼 젊은 그가 보았던 유진의 풋풋한 실루엣이 가만히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그녀의 존재로 인해 무진이 좀 친근해졌고 안개 속에서 그를 경직시켰던 긴장이 슬그머니 풀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안개 때문에 걱정했는데 오느라 고생했지? 하지만 무진에서는 무엇보다 이 안개에 익숙해져야 해. 이제야 좀 걷힌다."

유진은 어느새 창가에 가서 밖을 기웃거리더니 인호에게 말했다.

팔짱을 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강인호는 처음으로 유진이 참 작은 여자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 집 저기야. 불 켜진 맨 꼭대기 집."

앞 동의 아파트를 가리키며 유진이 말했다.

안개가 다 걷히지 않아 선명하진 않았지만 가리키는 집의 위치는 알 수 있었다.

강인호는 저도 모르게 집의 창문 수를 세어보았다.

한때는 화사했을 흰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창이 달랑 두 개뿐이었다.

"친정어머니하고 애들 둘하고 네 식구 살아. 올케 친정이 여긴데 오빠가 처가 근처로 와서 새로 사업을 시작하는 바람에 나도 따라오게 됐지 뭐. 어머니 모실 사람도 필요했구. 서울을 떠나고 싶은 마음도 컸고."

마지막 말을 하면서 유진은 꾸민 듯이 쾌활한 분위기를 지어냈다.

그 마지막 말투 때문에 강인호는 나 불행하지 않아하는 그녀의 뉘앙스를 믿어주어야 하는 것이 지금 이 재회에서 그가 지켜야 할 예의라는 것을 느꼈다.

"저녁 먹어야지? 우리 집에 갈래? 아니면 어디 가서……"

오랜만에 이곳까지 온 후배를 집에 데리고 가긴 해야겠지만 자신없다는 듯이 말끝을 흐리며 유진이 물었다.

"어디 가서 먹지 뭐. 무진 시내 구경도 좀 하고."

강인호의 말에 유진은 그제서야 안도하듯이 활짝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한 볼에만 패던 보조개의 기억이 강인호에게 살아났다.

강인호는 그 보조개를 바라보며 순간이지만 유진이 스무살 자신의 자취방에 놀러온 여자친구처럼 생각되었고, 앞으로 무진에서의 생활이 그리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괜찮은 기분을 느꼈다.

거기에는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 같은 것도 끼어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이 가볍고 감미로운 감정을 놓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은 거리로 나섰다.

서너 걸음 거리를 두고 걷는 그들의 틈새로 꺼져버린 불의 잔해에서 피어오르는 듯 안개가 엷게 몰려왔다.

이른 저녁 시간이어서 그런지 번화가는 막 잠에서 깨어나는 듯이 보였다.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는 거리는 그러나 화사하지는 않았다.

오래된 퇴락의 냄새가 났고 지구촌을 뒤덮은 불경기의 파도에 제일 먼저 쓰러지는 해안가 가건물의 절박함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짧은 치마에 철 이른 긴 부츠를 신고 가슴이 많이 패인 옷을 입은 십대 후반의 여자애들이 재잘거리며 단란주점이라고 쓰인 팻말을 향해 지하로 걸어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골목길에 내어놓은 쓰레기봉투의 비닐을 찢던 길고양이가 강인호의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 곁에서 일찍 술에 취한 젊은이가 벽을 붙들고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그때 여자 하나가 다가와 강인호의 팔을 잡았다. 여자는 긴 퍼머 머리에 가슴이 깊게 패인 옷을 입었는데 키가 많이 작았다.

"오빠 잠깐 쉬었다 가."

말없이 팔을 떼어놓으려는 순간 강인호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십대 중반의 어린아이임을 알았다.

앞서가다가 멈추어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유진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가 돌아서는데 여자가 다시 강인호의 앞을 막아섰다

 

무심하게 그녀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의 눈은 아주 검고 약간 사시였고 이상한 광채로 빛나고 있어서 묘하게 육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화장이 짙었지만 얼굴도 밉상은 아니었다. 강인호는 여자를 비켜 앞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는 난데없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들이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강인호가 그녀를 밀쳐내려고 하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 오빠한테서 서울 냄새가 나네. 희고 좋은 냄새 말이야."

말을 마치고 나서 여자는 까르르 웃었다. 굳은 얼굴로 다가온 유진이 강인호의 옷자락을 잡아채 큰 거리 쪽으로 끌었다.

"미안해…… 배고플 거 같아서 지름길로 가려고 이리로 들어선 건데."

유진은 입술을 물며 말했다. 제 집안의 오래된 치부를 보여준 사람처럼 유진은 얼핏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것은 소심한 모범생 출신들이 흔히 가진 모든 것은 결국 내 책임이다라는 순진함의 한 종류라고 강인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순진함이 오늘날 그녀가 불행해지는 데 한몫했을 것이라고 느꼈다.

"서 선배가 왜 미안해? 세상 유흥가라는 곳이 다 선배 거야?"

그가 유진을 놀리자 그녀는 그제서야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며 그를 따라 웃었다.

"이 도시, 뭘 만들어내는 게 없어. 말이 좋아 유서 깊은 무진이지. 한때 민주화의 메카면 뭐하겠어? 이젠 그저 가난하고 퇴락한 도시일 뿐이라니까. 젊은애들한테는 이제 와서 옛날이 다 무슨 소용이겠니? 졸업하고 갈 데가 없는걸."

삼겹살집에 마주 앉았을 때 강인호는 유진이 이곳에 정착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갈 곳 없는 곳까지 자신 또한 흘러와 있는 것이다. 강인호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유진은 그런 강인호 앞에 명함을 내놓았다.

서유진이라는 이름 앞에는 <무진 인권운동센터 상근 간사>라는 직함이 씌어 있었다.

"왜 웃어?"

유진이 명함을 들여다보고 있는 강인호에게 물었다.

"운동하고 센터라는 이름…… 오랜만이어서."

강인호는 피곤한 표정이 되었다.

이런 것도 직업이라고 할 수 있나 싶고 아까 올려다본 유진의 남루하고 좁은 창이 떠올랐다.

그러자 좀전의 첫 대면에서 그녀를 두고 가벼이 설레던 느낌은 사라져버리고 피곤이 몰려왔다.

그래서 유진이 "그래, 어쩌다가 농아학교선생이 될 생각을 다 했어?"라고 물었을 때 "세상에 좋은 일도 좀 하면서 살려구요" 하는 대답을 신경질적으로 하고 말았다.

그러나 유진은 그것이 그의 비꼬인 대꾸인 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대견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누이처럼 웃었다.

"좋은 생각했네…… 참 말이야, 아까 그 애가 서울 냄새 난다고 했나? 창피하지만 나도 아까 너 처음 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무진에 내려온 지 삼년 만에 촌년이 다 됐다니까……"

유진은 소주를 따르며 촌부처럼 샐쭉 웃었다.

강인호는 문득 그녀와 같은 아파트단지 지척에 살게 된 것이 과연 좋은 결정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교장실로 가는 복도에서 강인호는 막 거기서 나오는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마주친 순간 강인호의 행색을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강인호를 안내하던 서무실장이 그 갈색 점퍼를 향해 반색을 했다.

"아이구, 이거 장경사님 아니십니까? 안 그래도 아침에 교장선생님께 제가 보고를 했어요. 애들이 말입니다. 그렇게 일요일날 함부로 외출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말을 안 들어요. 그러더니 기어이…… 참 이거, 저희로서는 아이들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워낙……"

서무실장의 말투는 오래된 신파극 배우처럼 좀 과장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강인호가 듣기에 설사 내 책임이라고 해도 어쨌든 이건 내 책임 아니오하는 심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듯했던 것이다.

"뭐라 말하시면 뭐합니까? 듣지를 못하는데요."

두 사람은 너무나 기발한 농담을 했다는 듯이 커다랗게 웃었다. 역시 과장된 웃음이었다. 강인호는 잠자코 그들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의 말이 청각장애인 아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설마,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애들이라는 단어와 들리지 않는다는 단어를 합치면 그것은 이곳의 학생들을 지칭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장애인 복지시설과 학원을 경영하는 일이 어제 서유진과의 대화에서 그랬듯 "세상에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까지는 아니라 해도 기분이 좋은 대화는 아니었다.

"내 그렇지 않아도 교장선생님이 얼마나 맘 상하실까 싶어 댓바람에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별일은 없겠죠? 뭐 골치가 좀 아프다던가……"

서무실장은 벗겨진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루하게 지켜보던 강인호는 문득 어제 안개 속에서 청색 세단을 출발시킨 그 벗어진 머리의 주인공이 이 서무실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 그럼 잘 처리해주십시오. 안 그래도 저희가 요즘 감사니 뭐니 골치 아픈 일이 많아서요."

"처리할 게 뭐 있습니까? 사고인데요. 안개가 워낙 짙어서 기관사도 전혀 눈치를 못 챘다고 하더군요. 가까이 있는 기관사도 눈치 못 채는 걸 선생님들이 무슨 수로 막을 수가 있겠냐, 저희는 뭐 이런 판단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지난달에도 제가 잘 처리해드리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말을 하면서 장경사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서무실장의 얼굴이 약간 해쓱해진다 싶었지만 이어 "하하, 저희는 그저 장경사님 덕분에 편안히 지냅니다"라는 다소 엉뚱한 말을 뱉었을 뿐이었다.

강인호는 교장 이강석이라는 팻말 앞으로 다가갔다. 교장은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인지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교장의 머리도 벗어져 있었다.

그 순간 강인호는 자신도 모르게 서무실장을 돌아보았다.

다른 역할을 하는 한 배우처럼 두 사람의 얼굴은 놀랍게 닮아 있었다.

교장 이강석, 서무실장 이강복, 두 사람은 쌍둥이였다.

 

마주 앉은 교장 이강석의 뒷자리에는 금박을 입힌 커다란 액자 속에서 한 남자가 15도 각도로 몸을 비틀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액자 아래에는 <이 학원의 설립자 배산 이준범 선생>이라는 글씨가 친절하게 써 있었다.

그러니까 설립자 이사장이 이준범이고 아마도 그 쌍둥이 아들들이 이강석과 이강복인 모양이었다.

얼굴 생김새가 같다고 해도 교장과 서무실장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교장이 조끼까지 갖춘 진갈색 양복차림이라면 서무실장 이강복은 쥐색의 캐주얼한 니트 차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지위가 주는 아우라가 사람의 피부 속에 스며들기 마련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강인호는 두 사람이 비로소 두 사람으로 보였다.

"서울 사는 조카애가 안사람하고 절친한 친구라고 들었네."

교장의 말투는 느렸고 예상했던 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권위적이었다.

교장은 강인호를 거의 바라보지 않은 채, 탁자 위에 놓인 신문을 이리저리 펴며 말했다.

반말이었고 듣기에 따라서는 일견 모멸적일 수 있는 말투였다.

마누라 연줄이나 잡고 온 놈이라는 소리로 들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강인호는 아침에 면도를 하면서 했던 자신의 결심을 생각했다.

예정된 월급을 꼬박고박 받아서 사는 계획적이고 소시민적인 기쁨을 누리자는 결심이었다.

종업원들의 월급날이 다가올 때마다 피가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던 고통을 생각하면 마누라 덕이 아니라 딸 덕을 보았다 해도 감사할 일이었다.

강인호는 그 기쁨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는 생각에 애매하게 웃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새 정부 들어 복지예산은 자꾸 줄고 애들한테 들어가야 할 것은 많고, 이 짓도 힘들어서……"

교장은 딱히 보고 있지도 않던 신문을 접어 탁탁 쳤다. 그러자 서무실장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러고는 강인호를 향해 눈짓을 했다. 강인호는 얼결에 서무실장의 눈짓에 따라 일어섰다.

최소한 이름은 물어보고 악수라도 할 것을 기대했기에 그는 약간은 모욕당한 기분이 되었다.

교장은 시계를 올려다보더니 비서실로 통하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전산실 박 선생보고 내가 부탁한 거 빨리 가져오라고 해. 나 점심 전에는 나가야 하니까. 빨리!"

무슨 긴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강인호는 교장의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이는 무슨 일이 있나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복도로 나오자 서무실장이 창가로 다가가더니 돌아섰다. 강인호는 그에게 다가갔다.

서무실장은 그에게 엄지를 세워 보였다. 강인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서무실장은 다시 손바닥을 쫙 펴 보였다.

순간 강인호는 이게 혹시 그의 수화능력을 시험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꼭 수화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셔서…… 하지만 열심히 배워보겠습니다. 우선은 필담으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요."

강인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서무실장의 입이 일그러졌다.

"이 사람 참 말 길게 해야 알아듣는구만. 원래는 큰 거 한 장인데 안사람이 서울 조카애의 친구라서 작은 거 다섯 장으로 하겠다는 거예요. 이달 안으로 서무실에 제출하세요. 수표는 안 됩니다."

서른넷, 젊은 강인호의 얼굴로 붉은 피가 순식간에 확 몰려들었다.

 

모욕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생이 시작된다는 것쯤은 강인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강석, 이강복 두 사람과의 대면을 끝내고 나자 그는 사람들 많은 길거리에서 혼자만 벌거벗고 길을 걸어가는 악몽 속의 한 장면같이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워졌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마주 서 있는 이강복에게서 희미한 악취가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땀에 젖은 짐승에게서 맡아지는 누린내 같기도 하고 깊은 바다에 오래도록 가라앉았다 건져낸 폐선에서 풍기는 녹슨 쇠비린내 같기도 했다.

그는 새 생활을 시작하는 이 아침 온몸으로 달려드는 이 야만의 예감이 두려웠다.

", 그럼 이제 반으로 가지. 갑시다."

서무실장 이강복이 앞장서 걸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사립학교에 취직한 동기들이 낮은 목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하던 것이 떠올랐다. ‘학원 발전기금이라는 고상한 이름이었던가.

그는 문득 아내를 생각했다.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게요. 당신은 그저 정교사 발령 받을 궁리나 하라구요."

처리라는 것 속에 이런 대가성 뇌물도 포함되는지 아내는 알고 있을까?

긴 복도를 걸으며 강인호는 과연 이곳이 그가 있을 곳인지를 자신에게 물었다.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고 젊은 강인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미 무진에 아파트를 얻느라 큰 돈을 지출했고 여기서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일은 작은 것 다섯 장을 내는 것만큼이나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늙은 강인호가 중얼거렸다.

성급한 결정이 아니라 외길이었다고, 젊지도 늙지도 않은 강인호가 말했다.

계승할 왕관과 물려받을 영토가 없는 한, 모두들 이렇게 그러려니, 하며 먹고 살고 있는 것이라고 늙은 강인호가 단정을 지었다.

그는 문득 복도를 울리는 제 발소리가 너무 크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학교가 너무 고요한 것이었다. 그랬다. 이곳에는 소리가 없다.

강인호는 깊은 물속으로 잠수하고 있는 듯한 긴장을 느꼈다.

"중학교 2학년이지만 아는 게 없어. 가르치는 것은 둘째고 말썽이나 안 부리게 하세요."

서무실장은 2’라는 팻말이 걸린 문 앞에서 그에게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부터 그는 반말과 존댓말을 교묘하게 섞고 있었는데 그것은 무례함에서 기인하기보다는 일종의 화법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 같았다.

이제 막 이 학교에 부임한 선생에게 가르치는 일보다 말썽이나 부리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니……

교장과의 대면에서부터 시작된 일련의 이 상황이 강인호에게는 당황스러웠다.

그는 교실 앞에서 크게 한번 숨을 들이켰다.

서무실장이 문을 열었다. 둥그렇게 모여 열심히 수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아이들은 전혀 그를 의식하지 못했다.

유심히 보니 아이들은 한 소년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소년은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서무실장이 칠판 옆에 달린 긴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교실 천장에서 붉은 전등이 마치 사이키 조명처럼 돌아가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붉은 조명 탓이었을까. 그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은 충혈되어 있는 듯이 보였다.

순식간이었지만 강인호는 그들의 얼굴에서 부풀어오르는 노기(怒氣)를 감지했고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서무실장이 칠판에 커다란 글씨로 강인호,라고 썼다.

담임, 국어,라고도 썼다. 그를 바라보는 아이들은 무표정했다. 그것은 백색의 가면들 같았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강인호입니다."

서무실장이 나가고 강인호는 서툰 수화로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학교에서 처음 마주쳤다가 그를 보고 도망가버렸던 과자를 먹던 아이도 보였다.

그가 서툴게나마 수화를 하는 모습을 보자 아이들의 흰 가면 같은 얼굴들 위로 작은 파문이 일었다. 좋은 시작이었다.

그는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러자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그는 칠판에 시를 적었다.

 

어둠 속에서 세 개비의 성냥에 불을 붙인다.

첫 번째 성냥은 너의 얼굴을 보려고

두 번째 성냥은 너의 두 눈을 보려고

마지막 성냥은 너의 입을 보려고

그리고 오는 송두리째 어둠을

너를 내 품에 안고 그 모두를 기억하기 위해서

-자크 프레베르 밤의 파리

 

그는 준비해온 성냥갑을 꺼내서 성냥개비 세 개에 한 번씩 불을 붙이면서 수화로 다시 시를 읊었다.

그가 성냥을 하나씩 켜면서 손짓으로 학생들의 얼굴과 눈과 입을 가리키자 무표정하던 아이들의 얼굴은 불투명한 유리가 씻기는 것처럼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했고 이어 흑백영화에서 컬러영화로 화면이 바뀐 것처럼 핏기가 돌았다.

혹시나 해서 준비해온 이 작은 퍼포먼스가 아이들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성큼 좁혀주는 것 같았다.

왠지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오르면서 아침부터 달려들었던 모든 불길함을 조금 덜어주었다.

그는 아까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던 소년의 표정을 살폈다. 소년의 눈동자는 늪처럼 검었다.

강인호는 소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년은 여전히 검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홀린 듯 수화로 무슨 말인가 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시작된 수화는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고 이어 소년의 입에서 흐응, 흐응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높고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년의 창백한 얼굴은 붉어지기 시작했고 표정은 절박해져갔다.

하지만 강인호의 짧은 수화 지식으로는 절박하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강인호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소년은 그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듯 빠르게 움직이던 손을 허공에서 멈추었다.

소년의 눈동자에 잠깐 일었던 절박한 희망이 늪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강인호는 자신도 모르게 소년에게 다가갔다.

땟국물이 흐르는 야윈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 소년에게 그는 손수건을 내밀었다.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강인호는 소년의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넘치는 눈물 속에서 소년의 눈이 강인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늪 속으로 가라앉은 절박함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강인호는 교단으로 나가 칠판을 향해 섰다. 신기한 일이었다.

뜻밖에도 자신의 등 뒤에서 아이들이 수화로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도 일종의 들림[]이었다. 강인호는 이렇게 썼다.

"미안하다. 지금은 서툴지만 약속할게. 겨울방학이 되기 전에 수화로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그가 아이들을 향해 돌아서자, 한 여학생이 흰 종이를 들었다. 커다란 글씨가 보였다.

"어제 얘 동생 죽었어요."

여학생의 얼굴에는 이게 잘하는 짓일까 하는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강인호가 무어라 대답할 겨를도 없이 다른 남학생이 또 종이를 들었다.

"우리는 누가 그 애를 죽였는지 알고 있어요."

 

"열차사고예요. 안개가 지독한 날이면 더러 그런 일이 있죠."

교무실 옆자리에 앉은 박선생은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학교가, 아이가 죽었는데 너무……"

조용하다,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는 입을 다물었다.

조용하다는 단어가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잠시 무엇이라고 이 느낌을 표현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았다.

너무 태연하다, 너무 기괴하다그는 기괴하다,라는 단어를 생각해내면서

그것이 실은 이 자애학원의 인상이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자신에게 인정했다.

"아이들이 이상한 말을 하더군요. 어제 죽은 아이가 그러니까, 사고로 죽은 게 아니고……"

"이런 학교에는 처음이시라구 했죠?"

박선생은 대번 그의 말을 끊었다.

말투는 심드렁했으나 바라보는 시선에는 노골적인 경멸과 함께 연민의 빛이 어려 있었다.

아니다, 그는 어제 무진에 도착한 이래 자신이 너무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긍정의 힘! 그는 아내가 좋아하는 그 주문을 외웠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박선생에게 가장 무난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여기 계시면 알게 되시겠지만 모든 장애인들 중에서 제일 피해의식이 심한 것이 농아들이에요. 자기네들 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못하는 것도 특징이구요. 같은 언어를 쓰는 것을 민족이라고 하면 그들은 수화를 쓰는 이방인, 얼굴 생김새는 같지만 다른 민족이죠. 아시겠어요? 다른 민족이라구요.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거짓말도 그들의 풍습 중의 하나지요."

박선생의 말투에는 악수를 하려고 다가가는 그를 확 밀어내는 듯 차가운 악의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어제 난데없이 안개의 터널 속으로 들어섰을 때처럼 등줄기로 작은 소름이 지나갔다.

박선생의 얼굴 위로 그를 바라보던 소년의 늪 같던 눈동자가 겹쳐졌다.

잠시였지만 그를 향해 내뿜던 어떤 간절함도 떠올랐다.

"서울분이라고 들었는데, 기간제 교사시니까 말 그대로 일정기간만 마치고 웬만하면 여길 떠나십시오. 왠지 여기 계실 분이 아닌 것 같아요."

켜놓은 인터넷을 이리저리 클릭하면서 모니터를 응시하다가 박선생은 말끝에 잠깐 강인호를 돌아보았는데, 그때 그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다.

당황스러워서 그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니까……"

박선생은 그런 강인호의 대답에 딱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강인호는 전화를 받으면서 교무실을 나왔다.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에 들렀던 아이들이 간편한 복장으로 운동장 구석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강인호는 교사를 나와 운동장 끝으로 걸어갔다.

"어때? 수업 잘했어? 연습해간 수화가 쓸모가 좀 있어?"

아내는 명랑했다. 그는 응, 하고 짧게 대꾸하면서 지난 6개월간 콩나물만 사서 한번은 콩나물국을 끓이고 한번은 콩나물밥을 하고 그리고 다음 날은 다시 콩나물국을 끓이던 아내에게 작은 것 다섯 장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말을 꺼낸 것은 아내였다.

"학교 발전기금에 대해서 이야기 들었지? 친정에 부탁해서 오늘 당신 통장으로 부쳤어."

강인호는 그때 운동장 끝에 다다라 있었다.

천연요새처럼 솟아 있는 절벽 끝에 맞닿은 운동장 아래는 광활한 갯벌이었다.

그 너머에는 바다가 있을 것이다. 썰물이 모두 빠져나간 지금 그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는 아내에게 무어라 대꾸하기 전에 숨을 가다듬으며 그 갯벌을 바라보았다.

갯벌은 거대한 파충류의 껍질처럼 매끈거렸고 미처 다 빠져나가지 못한 바닷물이 고인 웅덩이들은 은박지처럼 반짝였다.

"당신, 그 돈 내야 한다는 거…… 언제 알았어?"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러는 바람에 그의 목소리는 너무 낮아져서 그가 듣기에도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신이 떠나기 전에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아내의 목소리는 약간 울먹이고 있었지만 그는 아침부터 스스로에게 달려드는 자괴감과 싸우느라고 몹시 피곤해 있었고 그래서 아내의 울먹임을 알아채고 싶지 않았다.

"왜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그런 조건을 알았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야."

아내는 잠시 침묵했다. 가슴 한켠이 독한 파스를 붙인 것처럼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와 통화하면서 어떻게든 하늘 아래까지 뻗은 갯벌과 남은 물기 위에서만 반짝이는 은빛 햇살과 갈대 군락지에 반쯤은 마음을 두어보려고 애썼다.

그는 굵은 침을 삼켰다.

"거기 안 가면 어떻게 했을 건데?"

아내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침착했다. 아내가 울기라도 했다면, 여자들이 싸우자고 덤빌 때면 잘도 그렇듯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면, 그 역시 아침에 교장실에서 느꼈던 그 모멸감을 아내와의 다툼으로 다 폭발시켜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내의 냉정한 말을 듣고 나자, 그는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 당신에게 불만 없어. 6개월 직업이 없었다 해도 당신 훌륭한 남편이었어. 좋은 아빠였고. 다만, 나는 당신이 가끔 세상일에 대해 도덕선생처럼 까탈스럽게 구는 거, 그건 좀 힘들었어. 학교 발전기금 내는 거, 그게 뭐가 나빠? 만일 우리에게 처음부터 돈이 많았다면 일부러라도 장애인학교에 돈을 냈을지 몰라. 그걸 낸다고 해서 뭐가 나쁘지? 그리고 눈 한번 감고 그 돈을 내면 선물은 너무 많아. 요즘 같은 세상에 교사가 된다는 일이 그렇게 쉬울 줄 알았어, 당신?"

눈으로 뜨거운 기가 확 몰려들었다.

그는 갯벌을 향해 서서 햇살이 부신 것처럼 얼굴을 한껏 찡그리며 아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여기서 그가 혹은 그녀가 더이상 입을 벌리면 아마도 구차하고 치졸한 말들이 서로를 할퀼 것이 너무도 뻔했다.

그래서 그는 막다른 절벽 끝에 서서 천천히 말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어."

그러자 아내가 너무 일찍 항복하는 그의 반응에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고, 잠시의 침묵 후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날 더 이상 자존심 상하게 하지 마……"

아내는 훌쩍이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내일부터 새미 어린이집 보내기로 했어. 나 취직했어. 무슨 일할 거냐고 묻지 마. 당신 듣고 나면 왜 그런 일 하느냐고 말할 게 뻔하니까. 몸 파는 거 아니고, 나쁜 짓 아니야."

강인호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죽기에 참 좋은 장소라는 생각을 했다.

 

선생들이 모두 퇴근할 때까지 강인호는 교무실에 앉아 있었다.

새로 자신이 담임을 맡은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를 펼쳐 보고 있었던 것이다.

통학생이 둘, 그리고 나머지 열 명은 모두 기숙생들이었다.

농아들은 대개 부모중의 한쪽이 농아인 경우와 부모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농아가 되는 경우, 둘로 나누어진다.

전자의 경우는 유전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출생 후의 여러가지 질병으로 인해 청신경이나 내이(內耳)가 파괴되어 일어난다. 강인호는 오늘 울고 있던 소년의 신상명세서를 살펴보았다.

 

이름: 전민수 청각장애 2

가족사항: 부 정신지체 1/ 모 청각장애 2, 정신지체 2

동생 전영수 청각장애 2, 정신지체 3

집은 외딴 섬. 방학 때도 거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음. 별도의 특별지도가 필요함.

 

그제서야 그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아이가 죽고 난 후 이렇게 조용할수가 있었던 이유를 말이다.

새삼 아까 자신을 바라보던 민수의 절박하고 간절한 눈빛을 떠올렸다.

그는 혹시나 하고 옆자리의 박선생에게 그 아이가 자신에게 수화로 하려던 말을 통역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려 했던 것이었다.

설사 아이의 죽음이 그냥 사고였대도, 그걸 살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아이들의 터무니없는 공포는 막아야 했다.

그러나 그가 안 사실은 이 학교 선생 35명중에 수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강인호는 하마터면 그러면 대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느냐라는 질문을 할 뻔했다.

그러나 이 학교가 주는 어떤 분위기, 혹은 어떤 냄새, 혹은 어떤 고요가 그로 하여금 입을 열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감정은 계속되었다.

강인호는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어제 과자를 파삭거리던 여자아이의 이름은 유리였다.

 

이름 : 진유리 청각장애 2, 정신지체 3급의 중복장애

가족사항: 부 청각장애 2급 정신지체 3.

모 행불. 할머니가 실질적 보호자.

방학 때 가끔 산골에 있는 집으로 가나 사흘도 못 되어 돌아옴. 사람을 보면 무조건 따르고 식탐이 있음. 기숙사 생활에 특별지도 필요.

 

강인호는 안개 속에서 과자를 파삭거리며 나타났던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르고 키가 작던 소녀. 그가 말을 걸자마자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던, 그로 하여금 안개속의 자애학원을 그 비명소리로 기억하게 한 소녀.

그는 다음 장을 펼쳤다. 오늘 그의 반에서 어제 얘 동생 죽었어요라는 종이를 써 보여준 아이의 이름은 김연두였다.

 

이름: 김연두.

가족사항: 부모 모두 정상인.

비교적 윤택하게 살았으나 최근 사업실패와 부의 숙환으로 중1 때부터 기숙사 입소. 비교적 영특함. 동정심이 많아 동급생들을 잘 돌보아줌. 특히 가장 지진아인 진유리와 친하게 지냄.

 

아이들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열악했다. 그저 장애가 있군, 하고 짐작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들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결핍된 채 세상에 던져졌고 게다가 대개 가정적 불우마저 겹쳐 있었다.

발톱 없이 태어난 사자, 다리 없이 태어난 사슴, 귀 멀어 태어난 토끼, 팔 잘린 원숭이……

강인호는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운이 좋거나 행복하다거나 많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이곳에 부임해 아이들의 처지를 곰곰 들여다보고 있으려니까 가슴속으로 평생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방금 아내와 작은 것 다섯 장을 두고 절벽처럼 막막했던 직후라 감사하고 행복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이상은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지는 말아야겠다는 각오 같은 것이 생겼다고나 할까.

그는 휴대폰을 꺼내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새미랑 저녁 맛있는 거 먹어. 늘 미안하고 또 사랑해.’

그는 책상을 대충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해의 문자를 보내길 잘한 것 같았다.

아까 그와의 통화로 마음을 끓이고 있을 아내가 딸 새미와 정말 맛있고 따뜻한 저녁을 먹기를 바라는 심정이 되었다.

이제 월말이면 꼬박꼬박 월급을 모아 적금을 붓고 어서 세 식구가 따스한 식탁등 아래 모여 식사를 하고 싶었다.

복도는 벌써 어둑했다. 해가 많이 짧아져 있었다. 그런데 그 긴 복도로 나섰을 때 괴성이 들려왔다.

실은 아까 아내에게 문자를 보낼 때부터 그의 귓가에 희미하게 들려오던 소리였는데 막상 고요한 복도로 나오자 소리가 그의 귓가로 와락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는 현관으로 나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소리는 화장실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주 순간적이었지만 그는 커다란 빙하 두 개가 충돌하듯 격렬한 갈등을 느꼈다.

이 비명소리에 개입하는 순간 그의 생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섬광 같은 예감이었다.

째깍 째깍 째깍, 그의 마음속에서 우주가 이리, 저리, 다시 이리,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린 것은 그의 몸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멈추어선 곳은 여자화장실 앞이었다. 쇳소리 같은 비명이 와악! 와악!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여자화장실이라는 것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곧 문을 밀었다. 문은 잠겨있었다. 그는 문을 두들겼다.

"안에 누구 있어요? 무슨 일이죠?" 그가 문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외치면서 순간 그는 다시 한번 이곳이 청각장애인 학교이고 그리고 화장실 안에 있는 사람이 정상인인 교사가 아니라면 이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아닌게 아니라 역시 청각장애인인 기숙사의 생활지도 교사가 전산실에서 나와 복도 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그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계단에서 기숙생 아이들이 걸어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듣는다는 것이 이렇게 엄청난 일인 줄 그는 미처 몰랐었다.

청각장애인들은 겉으로만 봐서는 전혀 장애인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조차도 그들이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 순간, 이 커다란 교사(校舍) 전체에서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혼자만 영계(靈界)를 보고 있는 것처럼 그는 다시 한번 섬뜩해졌다.

비명소리는 멎었다. 강인호는 그 옆의 남자화장실 문을 밀어보았다.

혹시 방과후에 모든 화장실의 문을 잠그는 것이 이 학교의 규칙인가 싶어서였다.

문은 쉽게 열렸다. 그렇다면 여자화장실의 문을 누가 잠근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두어 번 크게 숨을 내쉴 만큼의 시간을 더 기다려보다가 더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현관 밖으로 나섰다.

여학생 하나가 잠시 배가 아파 그랬을 수도 있겠지. 그는 찜찜한 느낌을 떨치며 자신을 달랬다.

여기 아이들은 제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터무니없이 큰 소리를 질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명이 아니라 말이다.

그의 얼굴로 습한 공기가 부딪혀왔다. 바닷가여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해가 지고 난 서늘하고 어둑한 바다 위에서 다시 안개가 밀려오고 있었다.

어제처럼 지독하지는 않았지만 안개는 안개였다.

그는 주차장까지 걸어가며 담배를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라이터를 켠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의혹은 밀려왔다. ? 대체 누가? 잠긴 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담배연기를 엷은 안개 속으로 내뿜으며 가슴 한 켠을 눌렀다.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 남아 있지 않았다. 어제 그가 보았던 청색 세단이 보였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서무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전산실과 교무실의 불도 켜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거는데 키가 작은 곱슬머리의 남자가 긴 생머리의 여자를 데리고 학교 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그가 아침에 소개받은 바에 의하면 박보현이라는 기숙사 지도교사였다. 그 역시 청각장애인이었다.

곱슬머리에 두툼한 눈두덩과 쥐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몹시 불쾌한 인상을 주는 자여서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학교로 걸어가는 여자 역시 청각장애인이었는지 수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수위실 쪽으로 내려가다가 차를 멈추었다.

그의 차가 다가와 서는 것을 보자 수위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수고하십니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평상심을 유지하며 인사를 건넸다.

", 강선생님."

수위는 곰보자국이 엷은, 얼굴이 넓적한 사내였다.

"저기, 일층 화장실에서 누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던데, 혹시나 해서요. 한번 봐주시면 어떨까 하고."

그가 운전석 창을 내린 채로 말했다.

그러자 수위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빙그레 웃었다. 생각 탓이었을까, 비웃음 같았다.

수위실의 불빛을 등지고 선 그의 검은 실루엣 위로 엷은 안개가 내리고 있었다.

"아하, 애들이 그냥 심심하면 비명을 지르고 놉니다. 지네들 귀에는 그 소리가 안 들리니까요. 선생님은 아무 걱정 마시고 운전이나 조심하십시오. 안개가 내리네요. 초저녁부터 이러면 지독해집니다."

말끝에 수위는 빙그레 웃었다.

말투 자체는 공손했으나 강인호의 귀에는 신경쓰지 말고 어서 꺼져, 인마처럼 들려왔다.

그는 어제 무진에 도착한 이래로 밀려드는 이 비이성적인 불쾌감의 정체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막상 운전을 하고 나오면서 살펴보자 학교와 마을은 꽤 많이 떨어져 있었다.

자동차로 5분 정도의 거리를 두고 학교와 마을 사이에는 야생갈대 군락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백미러를 통해 안개와 어둠 속에서 제 윤곽을 지우고 있는 자애학원을 더듬었다.

군데군데 밝혀진 기숙사 창의 불빛이 안개 속에서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자애학원은 고립된 하나의 거대한 성채 같았다.

그리고 무진의 명물인 안개는 두꺼운 셔터처럼 모든 시선으로부터 학교를 차단할 것이었다.

이렇게 안개가 내리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한들 외부에서는 전혀 알 길이 없을 터였다.

안개 속에서 희미한 헤드라이트 빛 속으로 누군가의 형체가 들어섰다. 그는 속도를 줄였다.

진유리였다. 유리는 그의 차를 보자 걸음을 멈추었는데 손에는 여전히 과자가 들려 있었다.

그가 창을 열자 유리가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때 그애의 입에 남은 마지막 과자가 파삭, 하고 부서졌다.

아이들이 이렇게 어둑한 때에, 더구나 안개까지 내리는데 마음대로 기숙사 밖을 나다니는 것은 위험해 보였다.

게다가 그 아이는 정신지체 3, 유치원생 정도의 인지능력을 지닌 중복장애아였다.

그 또래의 다른 소녀들에 비하면 체구가 작은 편인데도 새삼 그애의 성숙한 가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자 유리는 이제 그를 알아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제 그를 보고 공포를 느끼며 비명을 지르던 것과는 달리 유리의 눈빛은 맑고 천진했다.

그는 유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어서 들어가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유리는 부끄러운 듯 몸을 외로 꼬더니 학교를 향해 뛰어갔다.

여느 수줍은 소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차를 멈춰선 채로 유리가 학교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길에 있었다.

어차피 마을 입구에서 자애학원을 향해 난 길이었으므로 오가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그는 유리가 안개 너머 희미한 교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서야 차를 출발시켰다.

그 사이 아내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우리 열심히 살자. 나도 잘 참을게. 나도 미안하고 사랑해.’

아내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자 그는 갑자기 신실한 교도라도 된 것처럼 누군가를 향해 기도를 드리고 싶어졌다.

지켜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를, 아내를, 그의 하나뿐인 딸 새미를, 동생을 잃은 민수를, 저기 부서질 듯 위태롭게 달려가는 천진한 유리를, 그리고 무진에서의 이 체류를.

그날 밤 그 안개 속에서 수위는 가요 프로를 틀어놓은 채로 졸고 있었다.

단발머리의 소녀가 안개 속을 더듬어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맨손인 채였고 실내복 차림이었다.

교문을 통과하자 소녀는 뛰기 시작했다.

습한 안개 때문에 소녀의 호흡은 힘겨웠고 그래서 교문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소녀는 허리를 구부리고 가쁜 숨을 뱉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말쑥한 감색 양복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소녀를 자신의 차에 태웠다.

차가 무진 시내 쪽으로 출발했다. 연극의 한 막이 끝나고 커튼이 쳐지는 것처럼 안개가 그들의 모습을 가렸다.

 

다음날 아침, 강인호는 두툼한 봉투를 들고 서무실 문을 노크하면서

김승옥의 무진기행말미에 씌어 있는 구절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배반을’, 타협을, 무책임을 긍정하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서른네 해를 살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었다고 생각하는 뻔뻔함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아내 몰래 술집 여자와 잠자리도 몇 번 가졌고 사업하는 동안 소득도 조금 누락시켰다.

출세해서 벤츠를 타고 거들먹거리며 나타난 동창놈이 빠른 시일 내에 폭삭 망하기를 바라기도 했고 의외로 미인인 친구의 아내에게 이상한 욕정을 느껴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노골적인 협잡에 응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이렇게 구차하게 자신을 달래가며 출근을 해본 적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아내의 말을 떠올렸다.

그가 부자였다면, 부모를 잘 만나 땅이라도 물려받았더라면 청각장애아들을 위해 이 액수의 열배쯤을 기부했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가 문을 열자 뜻밖에도 어제 그와 교장실에서 마주쳤던 무진경찰서의 장경사가 와 있었다.

서무실장과 장경사는 무슨 심각한 이야기중이었는지 얼른 헛웃음을 지으면서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별로 시원해 보이지도 않는 기침까지 해댔다.

얼굴을 편 장경사와는 달리 긴장으로 팍팍해져 있던 서무실장 이강복의 시선이 빠르게 강인호의 봉투를 훑어내렸다.

", 강선생…… 그거 거기 놓고 나가지."

그때 왜였을까, 장경사와 강인호의 눈이 마주쳤다. 눈길은 허공에서 강렬하게 부딪혔다.

강인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습적인 공격성을 그 눈길에서 감지했다. 장경사는 노련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자주 뵙습니다. 안개가 많이 걷혔죠. 어젯밤 같아서는 겁이 나더니 말입니다. 서울서 새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안개 때문에 당황스러우셨겠어요.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요즘 들어 더 지독해지는군요. 안개가 말입니다."

필요 이상의 관심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아마도 그가 들고 온 은행 로고가 선명한 봉투에 든 것이 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

강인호는 그들이 마주 앉은 곁으로 걸어가 서무실장 이강복의 책상 위에 돈봉투를 내려놓았다.

명색이 경찰이라는 사람 앞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 같은 불쾌한 긴장이 강인호의 동작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서울분이라 잘 모르시겠습니다만, 무진은 좀, 뭐랄까 특별한 데가 있습니다. 서울 사람들을 좋아는 하지만, 뭐랄까요…… 서울이라는 곳에 대해 좀 그런 마음이 있죠. 서울로 간 놈들은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오면 그저 불만투성이거든요. 여긴 왜 그러냐? 이건 또 왜 이러냐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세금은 서울에 내고 집도 서울에 사고, 기껏해야 와서 땅투기를 하는 게 전부지요. 물론 이게 강선생 이야기는 절대 아니지만 말이지요."

장경사의 말이 길어지는 바람에 강인호는 그들 앞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앉으라는 말도 없어서 그가 적당히 웃으며 나가려고 하는데 장경사가 다시 말을 뱉었다.

"언제 한잔합시다. 여기 무진은 먹고 마시고 생각 없이 놀기에는 아주 그만인 도시니까요."

 

반에 들어가 인원을 점검하는데 연두가 보이지 않았다.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의 경우 몸이 아플 때는 미리 통지를 해주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침에 기숙사 지도교사들과의 조회에서도 아무 말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연두의 자리로 가서 아이들에게 연두는 어디에 갔는지 물었다.

모두들 모른다는 손짓을 하며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그는 칠판에 아침조례 사항에 대해 간단히 필기를 해주고 나서 교무실로 돌아왔다.

옆자리의 박선생이 중3 남자아이 하나를 세워놓고 뺨을 때리고 있었다.

손길은 무지막지 했고 강인호 외에는 교무실에 앉은 누구도 그 광경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아이는 이미 많이 맞은 후였는지 뺨이 멍게처럼 벌겋게 되어 있었다.

강인호가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아이가 휘청하며 강인호와 부딪혔다.

강인호는 그 아이를 잡아채는 척하면서 슬쩍 아이를 자신의 옆으로 세웠다 .

박선생의 손길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자리였다. 박선생이 강인호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두 손을 탁탁 털었다.

"어디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학교 내에서 지랄이야. 너 한 번만 더 걸리면 죽여버린다."

아이는 청각장애인이었다. 대체 저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지적받고 있는 줄 알까?

3인데도 아이의 키는 작았다. 그 또래들이 흔히 가질 법한 반항적인 느낌도 없었다.

벌겋게 부풀어 오른 얼굴을 숙이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서 꺼져!" 박선생이 아이를 발길로 찼다. 아이는 휘청거리며 교무실을 나갔다.

어색한 침묵이 박과 강인호 사이에 드리워졌다.

아무리 동료지만 왜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아이를 때리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강인호는 교무처장에게 가서 연두의 결석 이유를 물었다. 교무처장은 깜빡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어젯밤에 기숙사를 무단이탈했다가 돌아왔어요. 지금 학생처장님이 면담 중인 걸로 알고 있어요. 면담 끝나고 이따가 교실로 갈 거예요, 아마."

", 지금 어디 있는지요? 제가 혹시 도움이 될만한 일이라도……"

교무처장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전산실에 있을 거예요."

면담실도 학생지도실도 아니고 전산실이라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는 일교시 수업이 없었으므로 전산실을 찾아 이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 이층 모퉁이를 돌아가려는데 전산실에서 장경사가 서무실장과 함께 나오고 있었다.

볼 일이 더 있는 듯 장경사를 배웅한 서무실장은 전산실 안으로 사라졌다.

왜였을까, 그 순간 강인호는 계단 아래로 일단 몸을 숨겼다.

아까 서무실에서 장경사가 그를 지나치게 의식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계단참으로 내려와 얼른 휴대폰을 빼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처럼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나야. , 그래. 나 무진에 왔어. . 여기 학교? 그렇지 뭐."

그의 등 뒤로 장경사가 지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발걸음은 잠시 그의 뒤에서 멈추었다가 이내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영특한 연두, 기숙사 무단이탈 그리고 장경사와 서무실장.

왜 아이를 담임인 자신도 빼놓은 채로 하필이면 전산실로 데려갔는지도 이상했다.

이층 복도는 조용했다. 강인호는 전산실 가까이 다가갔다. 교실과 좀 떨어진 전산실 안에서 고함소리가 새어나왔다.

"누가 시켰어? ?"

침묵.

"누가 너한테 그런 짓 하라고 했어? 누가 차 태워줬어? 누구야?"

침묵.

"빨리 이야기하지 않으면 경찰서에 잡혀갈 거라고 해!"

그리고 이어 소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강인호는 손잡이를 잡았다.

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손에서 등골로 전해졌다.

어제 여자 화장실의 손잡이처럼 그것이 단단히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인지 공포인지 모를 것이 그를 휩쌌다. 뜻밖에도 손잡이는 매끄럽게 돌아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매끄럽게 돌아가는 손잡이가 그는 두려웠다.

우연히 내딛은 발자국이 늪 속으로 주르륵 빠지는 것을 두 눈 뜨고 바라보아야 하는 듯 비현실적인 공포였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문을 열려고 노력했다.

전산실 안은 각 컴퓨터들이 놓인 책상마다 높은 칸막이가 쳐져 있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는 지나치게 조용했고 그래서 문고리 돌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는지 누군가의 새된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야!"

", , 저희 아이가 여기……"

강인호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하면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짐작대로 거기에 연두가 있었다.

그리고 연두 옆에는 교무처장이 아니라 서무실장과 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여자기숙사 지도교사인 것 같았다.

그녀는 서무실장의 말을 연두에게 수화로 통역하고 있었다.

"저기, 저희 아이가 결석을 했는데, 여기 있다고…… 교무처장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시기에……"

어디까지나 아직은 상황을 잘 몰라서 섣불리 이렇게 끼어드는 것을 양해해달라는 듯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어눌하게 말했다.

교무처장이 가르쳐주었다는 말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당연한 개입에 이렇듯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상황이 어이가 없었지만 그는 충분히 비굴함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어쨌든 서무실장은 이 학교 교장의 동생이고 설립자의 아들이며 실세였다.

그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일이란 없을 것이었다.

이 학교에 부임한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그는 자동적으로 그렇게 반응하고 있었다.

"저희 아이? 당신 뭐야! 여기서 나가 당장!"

순간 연두가 강인호를 올려다보았다.

머리를 얻어맞았는지 헝클어진 머리칼이 흘러내린 연두의 얼굴은 해쓱했고 공포에 질린 듯했다.

강인호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잠시였지만 공포에 젖어 있던 연두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검은 바다 위에서 일순간 솟아오른 푸른 빛 구조신호 같았다.

그러나 그 빛은 서무실장의 호통 앞에서 그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자 희미하게 꺼져갔다.

"저희 아이가 무얼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제가 담임으로서……"

그는 연두의 눈에서 사라진 푸른 구조신호를 의식하며 의도적으로 천천히 말했다.

"허락 없이 기숙사를, 그것도 밤에 이탈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에요. 더구나 다 큰 여자아이가 말이지요."

여자 지도교사가 싸늘한 눈빛으로 강인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늘씬한 체구의 여자는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있었는데, 말투에 금속성의 차가운 느낌이 배어 있었다.

쌍꺼풀수술 자국이 선명한 눈은 진한 화장 탓인지 몹시 사나워 보였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우선 아이를 수업에 참석하게 하고 이따가 방과 후에 혼을 내셔도……"

"참 나, 어디서 이런 씹새가 굴러왔어. 당신 지금 누구 훈계하냐? 경찰서에서까지 나온 거 못 봤어? 너 말고도 줄 서 있는 선생들 많아!"

서무실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까지 띠며 말했다.

아무리 듣지 못하는 아이 앞에서라고 해도 여긴 학교였다.

기간제교사라고 해도 선생은 선생이었다. 하지만 서무실장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강인호는 어제 아침 그에게서 느껴지던 야만의 예감을 떠올렸고 이어 갯가의 날비린내 같은 것이 훅, 하고 그를 덮쳤다. 심장에 총알이라도 명중한 것처럼 그는 잠시 휘청했다.

 

그날 오후가 지나고 수업이 다 끝나도록 연두는 반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의 얼굴 위로 다시 딱딱한 가면의 표정이 어렸다.

어제 첫 부임한 날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면 오늘은 오물 가득한 욕탕에 들어와 머리끝까지 푹 잠긴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런 대우가 있을 수 있는지, 어떻게 이런 말투와 이런 행위들이 일어나는지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총알에 맞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물 젖은 휴지조각처럼 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은 불안은 계속되고 있었다.

방과 후에 그는 먼저 자애학원 홈페이지로 들어가 연두의 기숙사 지도교사를 검색했다.

포니테일의 여성은 25, 이름은 윤자애였다.

자애학원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자애라는 이름 때문에 그는 그녀의 프로필을 한 번 더 눈여겨보았다.

교실 청소도 끝나 아이들이 돌아간 후, 그는 기숙사로 연두를 찾아나섰다.

여자아이들의 기숙사는 자애원 3층에 있었다.

그는 자애학원과 자애원이 연결된 긴 복도를 지나 연두의 방을 찾았다.

중학교 1,2,3학년 여자아이들 여섯 명이 쓰는 방이었다.

이층침대가 세 개, 창가에는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창밖으로는 멀리 검은 갯벌이 거대한 파충류의 등처럼 구부정하니 펼쳐져 있었고 창가의 흰 레이스 커튼이 열린 창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나부끼고 있었다.

청소상태는 비교적 양호했고 가구도 그리 낡은 것들이 아니었다.

그가 여기 오기 전에 들은 대로 도 교육청의 표창을 여러 해 받은 훌륭한 장애인 복지시설이라는 말이 무색지 않았다.

만일 그가 이 모든 불안을 모른 채로 이곳을 방문했다면 새삼 이 아이들에 대한 도와 교육청의 배려에 감탄하는 보고서라도 제출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들어서는 것을 보자 네 명의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얼굴이었다. 유리만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정신지체 3, 작은 곰인형을 안고 있는 유리의 얼굴에는 날 것의 공포가 어려 있었다.

"연두는 어디 있니?" 강인호는 수화로 다른 네 명의 여자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른다, 라기보다 우리는 말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유리야, 너는 연두와 친구지? 연두는 어디 있니?"

유리는 시선을 내리깐 채 곰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낡은 곰인형이었다.

조금만 더 쓰다듬으면 삭은 실밥이 터져 허연 솜 내장이 다 드러나 버릴 듯했다.

유리는 완강하게 강인호의 시선을 피했다.

자음과 모음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내용의 30%도 안된다는 기초적 상식이 떠올랐다.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언어는 그 말을 할 때의 뉘앙스와 앞뒤 맥락과 화자(話者)의 태도로 그 의미를 온전히 채운다.

처음 메신저를 시작했을 때, 그래서 그는 가끔 온라인상에서 아내와 다툴 뻔하기도 했다.

그것은 사이버 공간이 몸의 언어와 뉘앙스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니, 비단 메신저로 대화할 때뿐이 아니었다. 그는 문득 딸 새미를 떠올렸다.

야단을 맞고 난 다음이던가, 다섯살 된 딸은 말했다.

"아빠 미워!" 그러나 그 앞뒤의 맥락과 정황과 새미의 몸은 "아빠 미워"라는 뜻을 전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빠가 나를 못마땅해 하니까 나는 슬퍼. 나는 아빠가 나를 더 예뻐했으면 좋겠어. 나는 아빠에게 사랑받고 싶어"라고 그의 마음속에서 번역되었다.

그것은 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딸 새미를 사랑했고 그래서 딸아이의 언어외적 의미를 금세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새미의 얼굴 위로 그를 바라보던 연두의 눈빛에서 잠시 명멸했던 푸른빛이 겹쳐졌다.

서툰 수화로라도 그의 마음을 전달하려고 애쓰면서 그는 다시 말했다.

"나는 정말 연두가 걱정이 된다."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작은 손짓을 했다.

소리의 언어로 치자면 수군거림 같은 것이었고 강인호로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수화였다.

"말해주렴, 나는 정말 연두를 돕고 싶어. 너희를 위해 뭐든 하고 싶어."

대체, 선생이 되어서 학생들에게 이런 단어를 쓰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너 지금 여기서 쇼하냐? 너 지금 119 구조대원으로 거기 간 거 아니야, 인마."

무진까지 내려가 특수학교의 선생이 되는 것을 말리던 전 동업자 녀석은 아마도 그렇게 말할지 몰랐다.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말이야, 누가 누굴 도울 수 있지? 돕는다는 건 결국 돕는 자의 자만심을 채우는 일일 뿐이야. 냅 둬, 도와달라고 먼저 말하면 그때 해도 늦지 않아."

불행해진 서유진을 돕고 싶다는 친구 앞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자신이었다.

"당신 왜 그래? 날 더이상 자존심 상하게 하지 마." 아내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아내의 말 앞에 언제나 고개를 숙이던 착하고 늙은 강인호가 마음속에서 말했다.

"솔직히 말해. 너는 서유진에게 말했듯 세상에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여기 온 게 아니야. 너는 월급을 받기 위해 왔을 뿐이야. 물론, 월급 받으면서 좋은 일 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 오케이! 하지만 거기까지라구. 서른네 해를 살고도, 그렇게 수없이 패배하고도 아직도 그걸 모른다면 너 역시 정신지체 3급 판정을 받을 거야. 그러면 동회에서 기본연금은 나오려나…… , 농담이었어. 그러니 이제 적당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물어보고 그리고 돌아서서 적당히 모른척하며 여길 빠져나가. 그만하면 넌 너의 할 바를 다 했어. 대답하지 않은 건 아이들이라구. 어차피 넌 어제 여기 왔고, 아무것도 몰라."

그리하여 퇴근길에 서유진을 불러내서 소주라도 한잔 마시며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선배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린 그저 이 거대한 사회의 부품이야. 우리 둘쯤 빠져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갈 거야. 그러니 우리 노래방이라도 가서 다 그런 거지, 뭐 그런 거야, 이따위 노래나 부르자."

그리고 취한 채로 길을 걸을 것이다.

어쩌면 노래방에서 나와 유진을 먼저 집으로 보내고 그 사창가 앞을 지나며 사팔뜨기 어린 창녀를 슬며시 찾아볼지도 모른다.

운이 나쁘거나 혹은 좋아서 그 아이가 다시 자신을 잡고 "서울 냄새 나는 아저씨" 하고 까르르 웃으면 못이기는 척 그녀를 따라갈지도 모른다.

그런데 슬며시 일어선 유리는 뜻밖에도 그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나머지 네 명 소녀들의 얼굴에 어둠속에서 성냥불이 확 켜지는 것처럼 동시에 공포의 빛이 어렸다.

그래서 강인호는 알게 되었다.

유리가, 정신지체 3급인 유리가 그를 정확한 그 공포의 진원지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그가 바라는 바였지만 또한 전혀 바라지 않는 바이기도 했다.

곰인형을 옆구리에 낀 채로 유리는 어둑해지는 복도를 그보다 서너 발자국 앞서 걸었다.

그가 다가서면 빠르게 달아나다가 그가 멀어지면 뒤돌아서서 기다렸다.

서너 발자국을 사이에 두고 그녀를 따라오라는 이야기 같았다.

바람이 거세지는지 기숙사 창밖 ㄱ자로 마주 보이는 자애학원의 교무실 불빛이 푸르스름한 저녁빛 속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창밖의 나무들이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검게 나부끼고 있었다. 그는 홀린 듯 유리를 따라 걸었다.

앞서가는 유리의 발걸음은 놀랍게도 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유리는 작은 천사처럼 가벼이 복도 위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어둑한 복도, 강인호는 자신의 발소리를 들으며 유리를 따라 한 층을 올랐다.

유리가 멈춰서기 전 강인호의 귀에 들려온 것은 뜻밖에도 거칠게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였다.

어두운 복도 끝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세탁실을 강인호가 알아차리는 것을 보고 유리는 가볍게 몸을 돌려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유리가 입은 감색 실내복이 복도를 돌아 사라지는 순간, 세탁실 문 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강인호는 세탁실 문을 열었다.

기숙사 아이들이 스스로 세탁을 하는 넓은 작업실 안, 커다란 세탁기 앞에 덩치 큰 상급생 여자아이들 세 명이 우르르 몰려서 있었다.

강인호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여자아이 두 명이 양쪽에서 연두의 어깨를 붙잡고 한 명이 세탁기통 속에 연두의 손을 억지로 집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안전장치가 되어 있는 세탁기의 탈수기능은 정지되는 중이었지만 분명 아직도 통은 빠른 속도로 돌고 있고 연두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강인호는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치고 말았다. 돌아본 사람은 단 하나, 윤자애뿐이었다.

윤 자애의 찢어진 눈이 강인호와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뜻밖에도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고 얼핏 청승스러워도 보였다.

강인호가 다가가 연두의 어깨를 잡아채려는 순간 다른 세 명의 아이들과 연두가 동시에 강인호를 돌아보았다.

강인호는 자신도 모르게 연두를 끌어내 가슴에 안았다.

연두는 뜻밖에도 강인호의 포옹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강인호의 등 뒤로 자신의 몸을 숨겼다.

뚜껑을 열면 자동으로 기능이 정지하는 탈수기 소리가 드르르륵 강인호의 귓바퀴를 할퀴며 지나갔다.

"대체 아이에게 무얼 하고 있는 겁니까?"

강인호는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윤자애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까 프로필에서 확인한 스물다섯이라는 그녀의 나이가 그의 목소리를 더욱 노기 띠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들을 둘러싼 세 여자아이들의 얼굴이 형광등빛 아래서 푸르스름해졌다.

"교육중입니다."

윤자애는 또박또박한 말투로 대답했다.

지나칠 정도로 또박거리는 말투 때문에 아까부터 쿵쾅대던 강인호의 가슴이 약간 진정되었다.

강인호는 등 뒤의 연두를 돌아보며 그녀의 팔을 살폈다.

연두의 팔은 탈수기 속에 들어갔다 나온 상흔으로 벌겋게 변해 있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다친 데는 없니? 괜찮은 거야?"

연두는 아직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무언가를 탐색하는 눈으로 강인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건 린치예요! 학생에게 이런 짓을…… 더구나 당신은 지도교사 아닙니까? 대한민국에서 이런 걸 교육이라고 하지는 않지요."

강인호는 일단 연두가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자 화를 억누르며 윤자애에게 말했다.

"! 선생이 온 줄 알았는데 변호사가 오셨군."

윤자애가 콧방귀를 끼며 높은 소리로 웃었다.

그녀가 웃자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다른 세 여학생들이 그녀를 따라서 엉거주춤하게 웃었다.

"그래요? 어디, 임시교사로 변장한 변호사한테 고소 한번 당해볼래요?"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교장 서무실장 동료 교사를 거쳐 이제 이런 스물다섯 살짜리 피라미에게까지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의 어깨는 분노로 인해 부풀듯이 치켜올라갔다.

그러자 뜻밖에도 윤자애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이건 자애원, 우리 기숙사의 소관입니다. 선생님이 관여하실 일이 아니에요."

윤자애의 말투는 여전히 또박또박했지만 한풀 꺾여 있었다.

그건 그의 합리적 권위에 대한 항복이라기보다 그가 남자이고 또 완력을 쓸 수도 있다는 데 대한 약간의 공포에서 기인한 것 같았다.

강인호는 입술을 앙다물고 윤자애를 노려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정말 그녀를 후려치고 싶었다.

여태까지 그가 이곳에 와서 받은 모욕을 다 갚아주듯 실컷 두들겨팰 수도 있었다.

윤자애도 강인호의 동요를 눈치챈 것 같았다.

일단 여기서는 그 공포를 이용해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눈빛에 더욱 힘을 주며 거칠게 내뱉었다.

"아이를 데리고 가겠어. 아무리 당신이 기숙사 선생이라 하더라도 이건 폭력배들이나 할 짓이니까. 내 반 아이들에게 한 번만 더 이런 짓 했다가는 그땐 정말 가만두지 않겠어!"

강인호는 연두의 손을 잡아끌었다.

연두의 손은 얼음장처럼 빳빳해서 그에게조차 저항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도 연두는 강인호에게 잡힌 손이 몹시 불편한 듯했다.

강인호는 복도로 나와 잠시 연두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서툰 수화로 연두에게 말했다.

"규칙 어기지 마. 나는 너를 돕고 싶어. 그러니 너는 너를 지켜! 너를 지키라구!"

강인호는 마지막 말은 수화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서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 대신하고 말았다.

연두의 검은 눈이 더욱 커졌다.

그는 오늘 하루 종일 닦달을 받고 방금 고문을 당한 아이에게 소리를 치고 있는 자신이 문득 싫어졌다.

만일 말로 할 수 있다면 연두에게 다른 말을 할 것 같았다.

긴 얘기도 할 수 있고 뭔가 애정을 담아 조곤조곤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수화였다. 강인호는 다시 연두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걸었다.

뒤에서 그들을 따라오는 윤자애와 여학생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태어나 이 모든 소리를 이토록 예민하게 의식하며 지낸 시간들이 또 있을까.

겨우 이틀, 그는 피곤했다.

"젠장, 젠장, 듣지 못한다는 게,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게, 젠장!"

그는 자신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시 그에게 손이 잡힌 연두는 불편한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강인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는 이제 수화를 하는 것도 포기한 채 혼잣말을 했다.

"어렵게 여기 왔어. 자존심 다 접고 시작한 거야. 내 처지도 별로 좋지도 않다구! 그래도 이건 아니야! 그러니 제발 날 좀 믿고, 제발 그냥 순순히 하자는 대로 좀 따라와라, 제발!"

그는 연두가 손을 빼내려고 하는 것이 불쾌했다.

꼼지락거리는 연두의 손을 그는 더 꽉 그러쥐려 했다.

그런데 연두의 손은 무언가 형상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그의 손이 종이라도 되는 듯 연두는 무언가를 그의 손바닥에 쓰려고 하는 것이었다.

뒤에서 그와 연두를 따라오는 여자들의 발소리는 들리는데, 그는 갑자기 머리카락이 삐죽 솟는 것 같았다.

〇|〇

‘010’

연두의 손가락을 감지하는 그의 손바닥은 그런 암호를 읽어내고 있었다.

숫자 ‘010’인지 한글의 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온몸의 신경을 손바닥에 집중했다.

그의 손에 긴장이 전달되는 것을 느꼈는지 연두는 천천히, 또박또박 그의 손바닥에 형상을 그렸다.

그러기를 여러 번, 그는 드디어 연두의 손가락을 읽어낼 수 있었다.

010-9987-**** 엄마 전화 면회 부탁

그는 뒤에서 여전히 그들을 따라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연두를 바라보았다.

연두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뒤에서 따라오는 자들의 눈길을 따돌리는 데 익숙한 표정이었다.

연두는 다시 한번 같은 숫자와 같은 한글을 썼다.

그는 바삐 움직이는 연두의 손가락을 멈추게 하고 그녀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썼다.

o

애써 앞만 보며 걷고 있는 연두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그제서야 투두둑, 흘러내렸다.

연두가 가르쳐준 번호를 외우기 위해 그는 말을 할 수도,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 숨을 크게 쉬지도 못했다. 연두는 영특한 아이였다. 그 영특한 아이가 자신을 믿어주었다는 것이, 제자가 선생을 믿는다는 당연한 일이 이렇게 기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술과 담배와 체념에 젖어버린 그의 머리는 가까운 친구들의 전화번호와 아내의 생일과 결혼기념일과 딸아이의 생일까지도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

겨우 연두를 기숙사로 데려다준 그는 숨이 턱에 차도록 복도를 달려 교무실로 들어갔고, 엎어지듯 펜을 들어 그 번호를 책상 위의 종이 한 귀퉁이에 적었다.

만일 그가 좀 더 젊고, 그의 머리가 좀더 술과 담배와 세상의 타락에 지쳐 있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어떤 젊은 날처럼, 아마도 명희의 집 전화번호를 듣는 순간 외워버리던 그날처럼 기억력이 좋았더라면 그에게 아마도 망설일 시간이 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망설일 수가 없었다. 그는 메모를 찢어가지고 차에 올랐다. 담배 한 대 피지 않은 채였다.

창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그는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아주 여러 번 울린 뒤에 지친 중년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연두 어머니 되십니까? 저는 자애학교, 연두의 새로운 담임 강인호입니다."

그것이 이 기나긴 사건의 시작이었다.

"아 선생님, 지가 그러잖아도 찾아봬야 허는데, 죄송합니다. 아이 아빠가 모레가 수술이라 지가 서울의 큰 병원에 와 있어서…… 죄송합니다."

연두 어머니는 선하게 살아온 사람이 그렇듯 세상에 늘 죄송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 …… 모레가 수술이시라구요?"

운전대를 만지작거리던 강인호의 손가락에서 힘이 탁, 빠져나갔다.

"암이라는데, 일단 개복을 해봐야 안다구 해서 거기 무진의 가게도 다 닫고…… 지가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연두는 잘 있지요?"

"아 그럼요, 잘 있습니다.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아이만 맡겨놓고 해드리는 것도 없어서 죄송해요. 갸가 여섯살에 귀가 먹었는데 돈이 없어서 고쳐보지도 못하고, 저희는 하늘이 무너져갖고 있는데 어찌나 나라하고 학교에서 잘해주시는지. 돈 한 푼도 안 받고 애들 그렇게 맡아주시고 가르쳐주시고, 그러니 저희는 고마울밖에요. 재작년에 애 아빠가 성할 때만 해도 돼지를 두 마리 잡아서 선생님들 잡숫게 해드렸는데. 올해는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강인호는 연두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어두워진 교정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더욱 거세져서 중앙현관 앞의 동백나무 가지까지 후들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바람이 불면 적어도 안개는 없다.

오히려 바람 때문인지 대기는 투명하고 하늘엔 별들이 오소소 돋아나기 시작했다.

옛 시의 인간도처 유청산(人間到處 有靑山)이라는 구절을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학교 앞 길거리에서 술집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인간도처 유청주(有淸酒) 인간도처 유소주(有燒酒)라고 바꾸어 부르며 말장난하던 친구들도 있었다.

그때 젊은 강인호의 눈에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불우하고 불의했지만 그 불우와 불의는 적어도 그를 비참하게 만드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액자 속의 그림처럼 선명하고 추상적이었으며 고전의 문구들처럼 논란적이었다.

적어도 강 이쪽에 서서 에잇, 퉤 하고 침을 뱉을 수 있는 거리가 허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제 밥그릇이 걸려 있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제 이 무진에서, 체류 겨우 사흘 만에, 그는 인간도처 유청승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 인간도처 유비참(悲慘)으로 바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인간도처 유짐승이든가.

"연두가 말입니다, 어머니.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합니다. 저보고 전화를 좀 해달라고 하더군요. 뭐 다른 일은 아니구요. 아무래도 사춘기니까요. 예민하니까요. 그맘때는 누구나 다……" 그는 말을 다 마칠 수가 없었다.

끝내 그를 바라보지 않고 애써 앞만 보던 연두의 눈에서 떨어지던 굵은 눈물이 떠올랐다.

예민한 아이들, 들을 수 없는 아이들을, 사춘기 소녀를 가두고 때리고 고문한다……

갑자기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길을 가다가 난데없이 연거푸 따귀를 맞고 내가 잘못한 이유를 조목조목 들은 후, 어찌 됐든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 사과를 하고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니 처음부터 모든 것이 터무니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때 그의 차 뒤에서 푸른색 벤츠가 후진을 시작했다.

같은 청색 벤츠였지만 서무실장 것과는 약간 형태가 달랐다.

강인호는 룸미러를 통해 교장의 차를 주시했다.

교장은 손수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그 옆자리에 탄 사람은 뜻밖에도 윤자애였다.

그녀는 운전석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교장에게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강인호는 그녀의 몸짓에서 아까는 볼 수 없던 교태를 느꼈다.

강인호는 시동을 걸지 않고 교장의 차가 완전히 시야를 벗어날 때까지 거기 어둠 속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연두의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 조회가 시작되기 전 학교에 나타났다.

수위실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연두에게 어머니가 오실 수 없다는 걸 어떻게 전하나 싶어 마음이 좋지 않던 강인호는 수위에게서 전화를 받고는 잠시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서서 교사 밖으로 나갔다.

왠지 교무실 안으로 연두 어머니를 들이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멀리서 한 여인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강인호는 성큼성큼 걸어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인은 대한민국 중년의 여인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표징을 모아놓은 모습이었다.

키가 좀 작고 뚱뚱하고 낯빛은 칙칙하고 삶에게 여러 번 따귀를 맞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약간 두툼한 눈두덩 아래의 맑은 눈동자와 야무진 입매는 얼핏 연두의 귀염성 있는 얼굴을 상기시켰다.

"연두 어머니 되시죠? 제가 전화 드렸던 연두의 담임 강인호입니다."

생각에 잠긴 듯 부지런히 걸어오던 연두 어머니는 깜짝 놀라 강인호를 바라보았다.

"아유 선생님께서 어떻게 여기까지 나오시나요?"

"어떻게, 아버님 수술은요?"

"그게, 날짜를 다 받아놨는데, 마지막 검사에서 간 수친가 뭔가가 떨어지지를 않는다고 어젯밤에 최종적으로 연기되었어요. 한달 있다가 다시 입원하라고 해서 제가 여기서 연두를 보고 다시 올라가서 낼이나 모레 퇴원을 해야 해요. 안 그래도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더구나 연두가 몸은 저리 성하지 않아도 엄마를 정말 깊이 생각해주는 아인데, 아버지 수술 앞둔 거 뻔히 알면서 한번 와달라고 했다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 게 왠지 맘이 불안하고……선생님 연두가 어디 아픈가요? 그애를 지금 잠깐이라도 볼 수 있나요?"

강인호는 연두 어머니를 데리고 동백나무 뒤로 돌아갔다.

교무실이나 서무실에서 봤을때 그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장소였다.

그는 일단 그들이 자신을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연두 어머니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면회 신청을 하시고 필요하면 외박 신청도 하십시오. 제가 전화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시고 집안에 일이 있다고 하세요. 아니면 아버님 수술 핑계를 대셔도 됩니다. 그리고 연두를 안심시키고 왜 그런지를 물어보십시오. 연두와 대화는……"

"제가 수화를 해요. 그 애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배웠거든요."

연두 어머니는 그 애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을 마치고 한참을 망설이다 덧붙였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부모가 겪는 첫번째이자 가장 어려운 시련이 바로 그 장애를 인정하는 것이라는데 그녀 역시 그 기억이 힘겨웠나 보았다.

"저도 이곳에 전근을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잘 모르긴 하지만 연두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란 게……" 연두 어머니의 얼굴에 두려움이 덜컥 어렸다.

이 신산한 삶 위에 종잇장 같은 근심 하나라도 더 얹히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지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지친 표정 아래서 천연의 모성 같은 것이 한 줄기 맑은 빛으로 솟아올랐다.

삶이 힘겨운 이 여인이 아이를 위해 아이 나라의 언어인 수화를 배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새로운 외국어로 아이와 이야기하는 것만큼 힘든 일일 테니까.

보통 청각장애 청소년들이 아이들의 언어인 수화를 배우지 않는 가족들 때문에 심한 단절을 겪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강인호는 이 어머니의 얼굴에서 비치는 모성의 맑은 빛줄기를 믿어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가을다운 가을 날씨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청명했다.

며칠 지독한 안개가 무진을 뒤덮더니 이제 날씨도 좀 염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서유진은 사무실에 앉아 퇴근을 준비하면서 마지막으로 그날 처리해야 할 이메일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노크소리가 났다. 네에, 하고 그녀가 대답하고 조금 지난 후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문으로 다가가는데 키가 작고 뚱뚱한 여인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오셨는지요?"

여인의 눈두덩은 오래도록 울었던 것처럼 붓고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었다.

"여기가 무진 인……"

여인은 태어나서 인권이라는 말을 한 번도 써보지 않았는지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인권운동센터입니다. 어떻게 오셨는지요?"

여인은 망설이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곧 터질 듯한 울음이 그녀의 목 위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무언가 사연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았다.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시죠."

유진은 여인을 데리고 상담실로 들어갔다.

여인은 계속 망설이는 듯하더니 자리에 앉아 유진을 바라보았다.

"여자분이 기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남자분들만 기시면 어떻게 하나, 오면서 내내 걱정했거든요."

유진은 여인의 말을 들으며 이 여인의 방문이 성()에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유진은 차분한 표정으로 여인의 말을 기다렸다.

여인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유진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이 말을 해야 하는지…… 누구한테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유진은 펴놓은 일지를 덮었다.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은 도와드릴 테니 편안히 말씀하세요."

그러자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눈물은 쉴새 없이 흘러내렸다.

유진은 크리넥스 통을 가져다 여인 앞에 놓아주었다.

여인은 불안스레 상담실을 두리번거리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문을 좀 닫아주시겠어요?"

그리고 두 시간 후, 여인이 돌아간 후, 유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의 어깨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날씨 죽인다. 바닷가 가서 전어에 소주 한잔하면 죽음이겠다. 서 선배, 불도 안 켜고 여기서 뭐해?"

외근을 나갔던 남자 간사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간사가 불을 켜자 유진이 딱딱한 얼굴을 보였다.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왜 그래요, 둘째가 또 아파?"

유진이 남자 간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에게서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나간 것처럼 유진은 창백했고 멍했다.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유진이 말했다.

"정간사, 내일 아침 일찍 우리 간사들, 자문님들 되는 대로 다 소집해줘요. 그리고 자기는 지금부터 자애학원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사를 해줘. 오늘 누가 다녀갔는데 심상한 일이 아닌 것 같아. 자애학원 이사장 아들들이 연관된 일이야. 반대쪽은 장애인 아이들이고."

 

늦은 밤 강인호는 라면을 끓여먹으며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먹는다는 행위가 이렇게 번잡스러운 것인지 새삼 실감하는 나날이었다.

그는 군대에 있었던 이래 어머니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새삼 여자라는 사람들에 대해 제법 진지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고맙다는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생각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하루에 세 번씩 꼬박꼬박 식구들의 끼니를 챙겨 먹일 수 있는지 말이다.

그로서는 그나마 낮에는 자애학원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서유진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이 무진에서 그에게 가장 가까운 지인이었고 가끔씩 전화해서 안부를 묻고 김치나 밑반찬 같은 것들을 챙겨주곤 했었다.

그것이 고맙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약간 귀찮은 것도 사실이었다.

남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서유진은 말이 좀 많은 편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별로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여자들이란 원래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지나보다,

그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처음 그녀의 다변을 보았을 때 든, 오래 외로웠구나 하는 느낌 같은 것은 지금 와서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생각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말이 많아진 서유진은 명랑해서 좋기는 한데 이쪽이 피곤한 상황일 때는 그것도 괴로워지고 마는 것이어서 강인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들었다.

"전화 받기 괜찮아?"

유진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에 하듯 손위 누이처럼 밥은 먹었어? 김치 더 가져다줄까, 하는 그런 억양이 아니었다.

"늦게 미안한데, 좀 중요한 일이 생겼어. 괜찮으면 내가 좀 들를까? 아니면 나올래?"

강인호는 습관적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벗어놓은 와이셔츠에 양말 짝들, 다 마치지 못한 설거지거리들이 쌓여 있었다.

"집은 좀 그렇고……" 그는 먹던 라면 냄비를 개수대에 대충 내놓고 집을 나섰다.

유진은 아파트 입구에서 팔짱을 낀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녀의 실루엣은 소녀처럼 가녀렸다.

강인호가 다가가자 그녀는 나는 밥을 안 먹었거든, 어디 요기할 수 있는 데로 가자, 하더니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감자탕집에 마주 앉았을 때, 유진은 소주를 시켜 연거푸 세 잔을 들이켜더니 그제야 큰 숨을 내쉬고 강인호를 바라보았다.

"중요한 일이라는 게?"

강인호가 묻자 유진이 불쑥 말했다.

"연두, 김연두."

유진의 입에서 연두라는 이름이 나오자 강인호는 젓가락으로 감자를 집으려다 말고 유진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에 그 애 엄마가 센터로 찾아왔어. 어렵게 입을 여는데, 그게 말이야."

강인호의 머릿속으로 순간 빠르게 이 무진에서의 체류가 스쳐 지나갔다.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인호는 잠자코 감자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교장한테 학교에서 성추행을 당했대."

강인호가 유진을 바라보았다. 이건 너무 뜻밖의 말이었다.

"학교 화장실로 끌려 들어가서……

거의 성폭행 직전까지 간 모양인데…… 내 생각에는 ……"

유진은 상대가 남자라는 것이 그제야 마음에 걸린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실패한 모양이야. 애가 너무 어려서."

마지막 말을 마치면서 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살면서 몇번 머릿속으로 번갯불이 내리치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군대에서 처음 이유도 없이 날아드는 상관의 주먹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여야 했을 때, 그리고 명희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가 그랬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누구나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겪는 일, 그랬거든, 하고 친구에게 말하면 그렇겠다, 하면서 소주라도 한잔 부딪힐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서유진의 입에서 나오는 저 말들은 이 지상의 일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것은 번개보다 더 강렬하게 그의 뒤통수를 계속 때리는 것 같아서 그는 잠시 강한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전율을 느꼈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뭐라구?"

서유진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감자탕 국물을 휘젓고 있다가 강인호의 충격에 휩싸인 표정을 보자 뜻밖에도 조금 웃었다.

"믿어지지 않지? 나도 그랬어. 그런데 아이가 진술했다는 내용이 너무 일관되고 구체적이야. 끔찍할 정도로……"

강인호의 표정을 보고 잠시 웃던 유진의 표정은 다시 굳어졌다. 강인호는 교장과의 대면을 떠올렸다.

오만한 어깨, 경멸 어린 시선, 벗어진 머리 아래의 갸름한 흰 얼굴은 너무도 얇은 입술 때문에 잔인해 보였다.

그러나 어찌 됐든 예순이 다 돼가는 교장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중학교 2학년의 말 못 하는 소녀를 성폭행하려고 할 수 있는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애학원 설립자의 아들인 교장은 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여자를 살 능력이 얼마든지 있는 사람이었다.

거리에 널린 것이 매춘부들이었다. 룸살롱 카페 단란주점 안마시술소 전화방……

자신의 성기를 팔아 돈을 벌고 싶은 젊고 싱싱한 여자들이 좌판에 누운 젖은 생선들처럼 퇴락한 거리마다 널려 있었다.

장경사의 말대로 무진은 먹고 마시고 생각없이 놀기 좋은 곳인 것이다.

아니, 막말로 교장은 요즘 말하는 젊은 애인도 여럿 가질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섹스의 양과 질조차 소유에 비례하니까 말이다.

"근데 너무 후지지 않아? 어떻게 예순이 다된 교장이라는 인간이 학교에서 애를! 그것도 화장실에서!"

유진이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그제야 강인호의 머릿속으로 그날 저녁 여자 화장실의 잠긴 문 안에서 들려오던 비명소리와 유진의 설명이 쭉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날, 여자 화장실에서 들리던 그 비명은 연두의 것이었고 그가 문을 두드리자 교장이 연두의 입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연두는 새로 부임한 제 담임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들을 수가 없었기에 필사의 저항도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리고 그가 돌아가자 교장은 연두에게 성추행을 계속하면서 성폭행까지 하려고 했다.

만일 강인호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그 잠긴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 보았다면, 아니 누군가를 불러 문을 열게 했다면…… 그는 유진에게서 얼른 시선을 피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무진시에 도착하던 날, 자신을 잡아끄는 창녀를 보고 유진의 얼굴에 어리던 수치심이 이제 그의 얼굴에도 어리고 있었다.

그날 서유진에게 농담을 건넨 대로, 세상 유흥가가 다 그녀 책임이 아니듯 부임한 학교 교장의 인격이 절대 그의 책임은 아니지만, 그는 다시 한번 치욕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현장에 있던 증인으로서, 선생으로서 쓰라림을 느꼈다.

그런 곳까지 흘러왔다는 수치심 때문이었을까.

그는 유진에게 그날 자신이 화장실 밖에서 그 비명을 들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연두라는 애가 그날 밤 학교를 몰래 빠져나와서 자애원 생활지도교사의 도움으로 성폭력센터에 신고를 한 거야. 진술서를 쓰고 경찰에 신고 접수를 부탁하고 돌아갔는데, 이 성폭력센터라는 곳에서 아이를 즉시 병원에 보내거나 격리조치도 하지 않았고……"

유진이 시선을 피하는 강인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당하게도 아이를 성추행한 자가 있는 학교로 다시 돌려보낸 거야. 연두 어머니도 어쩔 줄 몰랐고. 연두 어머니야 모른다 쳐도 말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는지. 어쨌든 그게 경찰서에 접수되어 조사가 시작되면 되는데, 우리가 알아보니까 벌써 그다음 날 오전, 고소가 취하되었어. 미성년자 성추행은 13세 미만만 가능하고 그 이상은 친고죄이기 때문에 고소가 취하되면 끝이거든. 왜 고소가 취하되었는지, 그건 강선생도 알 거야. 연두가 학교 내에서 린치를 당한 거잖아. 게다가 자기가 거짓 진술을 했다는 자술서를 다시 썼어. 그리고 연두의 부탁으로 강선생이 어머니에게 연락을 한 거고."

유진은 연두 어머니를 통해 이 사건에 이미 강인호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는 듯 말했다.

강인호는 자신이 이미 이 사건에 중요한 등장인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요청받는다면 어쩔 수 없이 증인으로 서야 할지도 모른다. 교장을 고발하는 입장에서 말이다.

강인호는 얼결에 유진의 눈과 마주치면서 난데없이 아내와 딸 새미를 떠올렸다.

몸 파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도 아닌 일을 시작했다는 아내와 그러고 보니 요 며칠 통화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마지막 통화에서 아내는 말했었다.

"새미?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 아침마다 노란 가방을 메고 열심히 어린이집에 가. 어린이집 선생님이 그러는데 저번에는 새미가 웃으며 나랑 빠이빠이 하고 나서 창가로 가서 몰래 흐느껴 울더래. 엄마랑 안 떨어진다고 우는 애도 많다는데, 그것이 그래도 내 앞에서는 울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 여보, 그게 기특한 건지 어린 게 벌써 청승을 알아버린 건지……"

강인호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문제는 고소가 된 걸 어떻게 학교에서 먼저 알았냐는 거야. 강선생 도움이 필요해. 우리가 어머니 통해서 다시 신고를 했는데 이틀이 지나도록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지 않고 있어. 담당이 장경사라고 하는데, 원래 우리 센터하고 마찰이 좀 있는 인물이야. 그리고 더 조사를 하려고 해도 우리는 자애원에 출입을 할 수가 없어. 부모가 동반해야 애를 학교 밖으로 데리고 나올 수가 있다는 거야. 면회도 마찬가지고. 알다시피 연두 아버지 때문에 연두 엄마는 다시 서울 갔잖아. 지금 이 순간 그애가 또 린치를 당하고 있다 해도 우린 속수무책인 거야."

유진은 차근차근 설명을 해나가면서 강인호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자신이 연두 어머니의 진술을 들을 때 그랬듯이 왜 강인호가 여기서 분개하면서 기꺼이 협조하겠다는 표정을 짓지 않는지 의아한 듯했다.

강인호는 자신에게 묘한 관심과 함께 지나친 적의를 보이던 장경사를 다시 떠올렸다.

그러니까 장경사는 혹시 두 사람이 대결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느끼고 미리 한번 빈주먹을 날려본 것일까?

장경사는 이미 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또 어쩌면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그날 그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동물적 감각으로 서울에서 내려온 강인호가 가장 걸림돌이 될 거라 느낀 것인지도.

그날 장경사는 그에게 서울식으로 무진을 평가하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강인호는 순간 오싹했다.

누구를 향해선지 아니요, 아니거든요, 이런 말을 중얼거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만일 이 순간 연두가 또 린치를 당하고 있다 해도, 라는 유진의 말이 아니요, 아니거든요, 라고 말하고 싶은 그의 충동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날 화장실 안에서 들리던 비명소리가 연두가 세탁기 안에서 팔을 집어넣는 린치를 당하던 장면과 겹쳐졌다.

강인호의 그런 마음과는 상관없이 유진은 말을 이어갔다.

"근데 말이야, 이건 순전히 내 직감인데, 보통 사건이 아닌 거 같아. 교장한테 당한 아이는 김연두고, 우리가 신고한 것도 일단 그 사건인데…… 그런데 강선생 반에 왜 그 정신지체와 중복장애아 있다면서? 유리, 진유리던가? 그 애는 서무실장한테 여러 번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네. 초등학교 때부터 말이야."

연두가 성추행을 당했다는 말이 번개였다면 이건 땅이 갈라지고 해일이 이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연두는 귀염성 있는 아이고, 어쩌면 변태적 성욕을 가진 성인에게 충분히 롤리타 콤플렉스를 자극할 수도 있다고 스스로, 아주 희미하게나마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인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말하자면 교장이 15세의 제자를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만, 그리고 그것은 가장 추한 범죄임이 틀림없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어떤 인간적 약점을 헤아릴 여지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그렇게라도 생각하고 싶었다.

그런데 서무실장이 정신지체아를, 그것도 초등학교 때부터라면, 그 이하의 말이 혹여라도 사실이거나 사실에 가까운 것이라면, 그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된다.

강인호는 코앞에서 자신에게 설명하는 유진의 음성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놀랍지? 우리도 아직은 이걸 다 믿지는 못해, 그런데 연두가 이번에 울면서 어머니한테 그런 말을 하더래. 오래전부터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고. 애들이 선생들에게 몇 번 이야기를 했는데 모든 것이 묵살되었고 그리고 침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고. 연두 어머니도 믿을 수가 없었나 봐.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그래서 일단 그것두 우리 센터에서 조사를 해서 신고를 하든지 해야 하는데…… 근데 왜 그래?"

설명을 이어가던 유진이 말을 끊고 물었다.

강인호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던 것이다.

그랬다는 사실도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유진이 말을 끊자 그제야 당황하며 젓가락을 집어 올렸다.

그는 무안수세를 하듯 반찬으로 나온 시금치를 한 젓가락 집어 우적우적 씹었다.

그리고 얼른 담배를 물었는데, 라이터를 켜서 겨우 불을 붙이고 나자 입안에 아직도 시금치 조각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유진에게 들키는 게 겸연쩍었지만 다행히 유진은 그런 강인호에게는 큰 관심이 없는 듯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감자탕 냄비 안의 돼지등뼈가 허연 기름을 드러내며 굳어가고 있었다.

그 허옇게 굳어가는 기름 위로 둔중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진유리는, 정신지체야. 겨우 여섯 살 정도의 지능을 가진 아이라고. 게다가 과자만 사주면 모든 게 오케이인 아이야. 그런 아이 말만 믿고 학교 전체를 문제 삼는다는 것은 지나친 게 아닐까? 게다가, 서 선배가 직감이라고 표현했지만, 만일 그런 말이 무책임하게 퍼져나가면 어떻게 다 책임을 지려고 그래? 그리고 무엇보다 상식적으로……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잖아."

어떻게든 이성을 찾으려고 애쓰면서 강인호는 상식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유진은 미간을 좀 찌푸리더니 볼에 잔뜩 바람을 넣고 골똘한 표정을 짓다가 대꾸했다.

"여기 일하다 보면 말야, 어떻게 설명해야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그 상식이 말야……"

유진은 자꾸 시선을 피하려는 강인호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괴롭게 말을 이었다.

"그게…… 없어."

"지금이 21세기인데, 어떤 세상인데, 경찰이 수사를 하겠지."

강인호는 그만 이런 대화를 피하고 싶다는 듯 말을 돌렸다.

생각에 잠겨 있던 유진은 그런 강인호를 바라보며 미간을 더 찌푸리더니 "21세기에 경찰이 수사를 안 한다니까!" 하고 발끈했다.

"좀 기다려봐.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잖아."

강인호는 겨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유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내 말 들어봐. 이사장 말이야, 설립자 이준범. 그 사람이 이 학원을 설립한 게 64,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대통령에 오른 직후였지. 이 사람은 원래 시청 복지과에 근무하다가 무진 농아원이라는 걸 차리게 되는데, 이미 그때 시청 복지과에 근무하면서 장애인을 위한 복지예산이 은근히 많다는 것을 안 게 아닌가 싶어. 확인할 수 없지만 혹자에 따르면 이 사람이 농아를 택한 건 다른 장애인들에 비해서 농아들은 육체노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래. 웃기는 말이지만, 말도 없고…… 그래서 무진시 변두리에 땅을 사서 가건물을 세운 다음 수용된 농아들을 동원해 집을 지어. 그때부터 많은 예산을 타가지. 그러다가 무진시가 커지고 그때는 변두리이던 땅이 시내로 바뀌면서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거야. 운영예산은 시에서 받으면서 묘하게도 땅은 법인 소유. 그러니까 시내가 되어버린 땅을 팔고 다시 변두리로 가는데, 그게 지금 그 바닷가야. 어마어마한 땅값의 차액은 고스란히 법인의 재산이 되고 말이야. 말이 법인 재산이라지만 이사장이 아직 이준범이고 아들 둘이 교장과 돈줄을 쥔 서무실장을 하고 있으니 안 봐도 비디오잖아. 실제로 쌍둥이 아들 둘은 학력이 별 볼 일 없지만 딸들은 일찍이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왔고 사위들이 다 빵빵해,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중엔 검사도 있어. 그런데 말이야.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전 자애학원 터가 지금의 무진 경찰서 터라는 거야. 말하자면 국가에 이 땅을 팔고 간 건데…… 경찰과 자애학원의 유착관계는 밝혀진 것은 없어. 다만 독재 시절 시위대를 잡아 오면 무진경 찰서가 꽉 차고 그러면 가끔 자애원 기숙사 한 층을 고스란히 경찰에 빌려주기도 했다는 거야. 거기에는 시위대를 불법감금하고 고문해도 들을 사람이 없으니까. 이 정도 되면 경찰이 왜 수사를 미루고 미적거리는지 좀 냄새가 나지 않아?"

강인호는 순간 유진이 거대한 빙하 앞에 조그만 망치 하나를 들고 서 있는 듯한 환영을 보았다.

그리고 나쁜 사람은 세상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라는, 달관한 듯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그런 그의 표정 위로 유진의 말이 찬물처럼 확 끼얹혔다.

"강선생,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정말 이상한 점 못 느꼈어? 교장이 학교 화장실에서 추행을 하는데, 아이는 분명 비명을 질렀을 텐데, 선생들이, 들을 수 있는 선생들이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다음 날 아침 강인호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교장실 앞 복도에서 소란이 일고 있었다.

못 보던 사람이 약간 이상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서무실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었다.

검은색 양복 차림의 낯선 남자는 수위와 기숙사 생활지도 교사 박보현에게 양팔을 잡힌 채였다.

그 곁에는 윤자애도 서 있었다.

윤자애는 팔짱을 끼고 찌푸린 얼굴로 서 있다가 강인호를 발견하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외면했다.

박보현은 쥐같이 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굴리며 윤자애가 강인호를 어떻게 대하나 살피는 듯하다가 윤자애의 싸늘한 표정을 보더니 얼른 강인호에게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주어야지요.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해고라니요?"

검은 양복은 소리치고 있었다. 강인호는 농인이 지르는 말소리를 처음 들었다.

말소리의 톤은 보통 사람의 것보다 불안했지만 발음은 정확했다.

"이 사람이 어디서 행패야, 행패가! 우리가 고용했으니 우리가 해고하지, 그럼 당신이 날 해고할 거야?"

서무실장이 고함을 질렀다.

분명 검은색 양복은 농인인 것 같은데 그에게 말하는 서무실장은 수화는커녕 조금의 몸짓도 없었다.

강인호는 상식으로 농인들에게 가장 큰 모욕이 바로 이런 장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화를 못 하더라도 조금의 몸짓이라도 해서 의사소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 것은 마치 미국인이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팔짱을 낀 채로 끝없이 영어로만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는 것을 말이다.

서무실장의 입을 바라보던 검은색 양복은 무슨 이야긴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윤자애를 보았다.

윤자애는 쌍꺼풀수술 자국이 선명한 눈으로 검은 양복을 경멸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적대감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검은 양복은 이제는 약간 애타는 표정으로 윤자애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서 농인과 정상인을 이어줄 사람은 그녀뿐이었던 것이다.

강인호는 그 순간, 잠시였지만 청각장애인들이 느껴야 하는 비애를 함께 체험한 기분이었고

 

가슴 한켠에 약간의 통증을 느꼈다.

"제게 말을 해주셔야 할 거 아닙니까? 이유라도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서무실장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윤자애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윤자애가 그녀 특유의 싸늘한 표정으로 검은색 양복에게 수화를 했다.

양팔을 잡힌 채로 윤자애의 수화를 보고 있던 검은 양복은 말이 끝나는 순간 괴성을 지르며 붙잡고 있는 두 사람의 팔을 뿌리치고 교장실을 향해 돌진했다.

교장실은 잠겨 있었다. 검은 양복은 온몸으로 교장실 문에 제 몸을 부딪고 발로 차며 외쳤다.

"교장 나와. 당신들 이렇게 날 해고할 순 없어! 난 그럴 만한 일을 한 게 없다구!!"

출근길의 선생들이 잠시 멈춰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건너편 차도에 교통사고가 났을 때 달리던 자동차들이 잠시 속도를 늦추어서 바라보고 다시 속도를 내는 것처럼 무심한 표정과 속도였다.

밖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더 뛰어 들어왔다.

검정 양복은 뛰어든 사람들에 의해 사지를 하나씩 잡혀 들려 나가고 있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수는 없어!!"

그는 그렇게 그들에 의해 학교 밖으로 들려 나가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밖의 저 사람 누굽니까? 왜 그러는 거죠?"

교무실에 들어선 강인호는 구두를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고 있는 옆자리의 박선생에게 물었다.

박선생은 구두가 좀 작은지 두 손으로 구두를 벗겨내다가 강인호를 올려다보았다.

"강선생도 참 고집 세네."

박선생은 구두를 다 벗어서 한켠에 놓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슬리퍼를 발에 꿰었다.

그리고 천천히 컴퓨터를 부팅하며 말했다.

"내가 전에 충고하지 않았나요? 그거 알아서 뭐하시려고요?"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선생들이 불안한 낯빛으로 각기 교무실을 나서고 있었다.

강인호도 출석부를 들고 일어났다. 교실까지 이어진 복도는 조용했다.

"모두들 농아들을 닮아 가는 건가? 도무지 말들이 없으니. 기가 차네, 기가 차. 어이가 완존 실종이군."

그는 자신도 정말 귀를 먹어버릴 것 같은 과장된 공포를 느끼며 혼잣말을 했다.

"아주 저 사람이 누구고 이 자애학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서 선배에게 가서 물어봐야 할 판이군. 말도 안 돼."

그러면서 제 귀에 들리는 이 중얼거림이 정말 들리고 있는 건지 누가 증명해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무진에 와서 느낀 막연한 공포가 다시 떠올랐다.

고요가 이토록 사람을 짓누를 수 있는 것인지 이곳에 오기 전엔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반으로 들어가자 민수가 또 울고 있었고 아이들이 그 주위에 서서 수어(手語)로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인호는 교탁에 출석부를 놓고 이번에는 민수에게 바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그는 수화로 묻다 말고 두 손을 떨어뜨렸다.

민수의 눈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었다.

목 주변에도 멍이 들어 있었다. 그는 민수의 팔을 걷어 올렸다. 팔 여기저기 비틀린 듯한 멍이 보였다.

-누구와 싸웠니?

민수는 고개를 떨군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름: 전민수 청각장애 2

가족사항: 부 정신지체 1/ 모 청각장애 2, 정신지체 2

동생 전영수 청각장애 2, 정신지체 3

주소지: 외소도 (外小島.) 너무 외딴 섬이라 방학 때도 거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음. 별도의 특별지도가 필요함.

 

민수의 생활기록부가 떠올랐다.

이제 거기에 하나의 기록이 추가될 것이다.

 

동생 열차사고로 사망. 정신지체 부모들은 섬에서 아무도 오지 않았음. 철도청에서 부모에게 위로금 전달.

 

강인호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아이의 존재가 그들 부모가 산다는 외소도, 그 외딴 섬보다 더 외딴 섬이었다.

-그럼 누구에게 맞은 거냐?

어이가 없어진 강인호는 겨우 말을 꺼냈지만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인호는 한숨을 내쉬면서 가만히 아이의 셔츠를 들췄다.

여기저기 시퍼런 멍자국보다 먼저 그의 눈을 찌른 것은 앙상한 갈비뼈였다.

그리고 그 앙상한 갈비뼈 위로 푸른 멍들이 점점이 있었다.

강인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아이의 셔츠를 내리고 다시 물었다.

-약은 발랐니?

-아니요.

-누가 그랬는지 말할 수 있니?

-………

-그래, 좋다. 일단 양호실로 가자.

강인호는 아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이는 겁먹은 얼굴로 완강하게 손을 잡아뺐다.

-왜 그래? 약 바르자니까.

아이는 순간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더니 그의 손을 뿌리치고 교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 듯 몸짓은 격렬했다.

쫓아 나가야 하나 망설이는 그를 아이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표정은 차가웠고 다시금 그를 경계하는 빛이었다.

-자리에 앉아 교과서 펴라.

그는 겨우 진정한 채로 아이들에게 말했다.

-오늘 배울 거 읽고 있어.

그는 교탁 옆의 책상에 앉아 연두를 불렀다.

어머니를 만나고 와서인지 연두의 얼굴은 좀 진정되어 있었다.

그는 연두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것조차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냥 침착한 선생의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그는 연두에게 물었다.

-민수가 왜 저렇게 되었는지 아니?

연두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누가 저렇게 한 거니?

연두는 잠시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강인호를 올려다보더니 입술을 한번 물고 수어로 대답했다.

-가끔 저렇게 시퍼렇게 돼서 와요. 밤새 자애원에서 맞는대요. 박보현 선생님이 당직인 날은 민수가 끌려 나가는데, 나가면 저렇게 되어서 오나 봐요. 동생이 죽기 전에는 형제가 밤에 가끔 저렇게 끌려 나갔대요. 맞아도 저 애들을 위해 항의할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박보현?

-. 저번에는 그렇게 형제가 맞은 다음 날 민수 동생 영수가 죽었구요.

연두는 빤히 강인호를 바라보았다.

 

밤은 어둡고 거리는 초라했다. 환하지도 않던 불빛들마저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후덥지근한 소금기를 머금고 있었다.

강인호는 풀리는 눈을 자꾸 다시 떴지만 여기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퇴근을 하고 차를 집 앞에 세우고 그리고 걸었다.

그렇게 지칠 때까지 걷다가 술을 마셨다.

마시고 나와 다시 걷다가 또 들어가 마시고, 그렇게 세 집쯤을 전전했던 것까지가 기억의 끝이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냐?"

그는 다시 눈을 떴다. 눈앞에서 돌아가고 있는 입간판에는 이런 글자들이 씌어 있었다.

서울 북창동식 서비스 완비, 화끈한 무진의 미희들 총출동!

강인호는 글자들을 들여다보며 서 있었다.

이발소의 그것처럼 번쩍거리며 돌아가는 조명 입간판은 오래도록 닦지 않아 더러웠고 귀퉁이는 조금씩 깨져 있었다.

강인호는 멍청하게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었다.

그때 뒤에서 한 줄기 빛이 비추는 것 같았다.

같았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그의 뒤통수를 쳤고 그는 그 자리에서 짚단처럼 쓰러졌다.

본능적으로 움켜쥐려 했으나 오토바이는 이미 그가 벗어 어깨에 한 손으로 걸치고 있던 양복 윗도리를 낚아채 간 후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오토바이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오토바이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버렸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갔을 때, 오토바이가 사라진 골목길 안에는 환한 불빛들이 켜져 있었다.

붉고 노란 간판들 앞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이 오가고 있었다.

어렸을 때 읽은 동화에서처럼 맨홀 속에 빠지자마자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로 들어선 것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곳은 동화와 환상의 세계였고 여기는 아니라는 것 정도일 것이다.

진한 화장의 여자들이 골목길에 의자를 내놓고 앉거나 서서 남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오토바이 위에 두 놈이 앉았던 것을 언뜻 본 것 같았는데 골목길에는 이미 아무 자취도 없었다.

강인호는 알콜 때문에 초점을 잃어가는 눈을 여러 번 깜박이며 거기서 애타게 오토바이의 행방을 좇으려고 해보았다.

그때 강인호에게 한 여자가 다가왔다.

여자는 흰 머리칼이 지저분하게 섞인 머리를 흔들며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얼굴은 늙고 시궁창처럼 피부색이 탁했으며 양손에 보따리 같은 것을 쥐고 있었다.

인간과 귀신의 혼혈아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댄 채로 여자가 물었다.

"당신 김인식이지?"

시궁창 냄새와 누린내가 합쳐진 입 냄새가 훅 끼쳤다.

"아니에요, 그런 사람 아니에요."

강인호는 뒷걸음질 치며 날파리처럼 달려드는 여자를 떼어내려고 했다.

"당신 김인식이야."

여자는 다시 다가왔다

강인호는 여자를 피해 다시 큰길로 나와 어두운 거리를 걸었다.

여자는 빠른 속도로 강인호를 따라오고 있었다.

"당신 김인식 맞아. 당신이 그 김인식이야, 나쁜 자식. 내 돈 내 놔! 나쁜 자식, 내 돈 내놔!"

그는 빨리 걸었다. 여자도 빠르게 쫓아오고 있었다.

그는 뛰었다. 여자도 뛰어오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뛰다가 돌아보니 여자가 저쪽에 멈춰서서 그를 가리키며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휑뎅그렁한 가로등 아래서 커다랗게 두 팔을 휘젓고 있는 여자의 실루엣은 악몽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강인호는 숨을 고르며 걷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려는지 공기가 끈적끈적해지면서 손으로 뜨면 손바닥 위에 소복하게 얹힐 정도로 밀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 두터운 습도를 가로지르며 택시들이 휘잉 하고 지나갔다.

뒷덜미가 약간 간지러운 느낌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통수에 손을 가져갔다.

끈적한 액체가 만져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바닥을 보니 피가 묻어 있었다.

그는 택시를 잡으려 손을 치켜들다 말고 전봇대를 붙들고 잠시 휘청거렸다.

아까 그 양복 윗도리 속에 지갑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지갑과 신용카드와 양복이 한순간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 속에 전화기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는 전봇대를 부여잡고 조금 토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드니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는 비는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캄캄했고 거리는 젖어가고 있었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날을 위해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서유진의 휴대폰에서는 그런 컬러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순이가 부른 거위의 꿈이던가.

꿈이라는 단어는 아까 악몽 속의 한 장면 같은 더럽고 늙은 여자보다 더 멀었다.

꿈이라니, 꿈이라니…… 서유진한테 전화를 건 것도 잊고 그는 멍하게 노래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불쑥 노래가 멈추고 서유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좀 놀랐다.

"인호니? 아니 강선생?"

유진은 자다가 깨어난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늦은 시간에?"

"……미안해."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수화기를 들고 선 강인호의 손등이 내리는 비에 젖어가기 시작했다.

강인호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이를 여러 번 악물다가 말했다.

"난 강인호고 여기는 무진이고 지갑은 언놈들이 가져가 버렸고 세상은 캄캄하고 비는 내리는데 나, 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어."

강인호는 그렇게 말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서유진은 무진경찰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거칠게 문을 닫았다.

"차 문 좀 살살 닫아요. 가뜩이나 큰 차 뒤집어지겠어요."

그녀와 함께 근무하는 남자 간사가 옆에 있었다면

그녀가 빨간 티코의 문을 닫는 것을 보고 언제나처럼 또 그렇게 놀렸을 것이었다.

"장경사, 장하문. 북어 대가리같이 생긴 놈…… 내 이 인간하고 이렇게 드럽게 마주칠 줄 진즉에 알았어."

서유진은 링에 오르는 복서처럼 마르고 가는 팔을 휘저으며 씩씩하게 걸어가다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핸드백을 놓고 내린 것이 떠올라서였다.

그러고 보니 차 열쇠를 뽑아 핸드백에 넣어두고는 그만 기세 좋게 차 문을 잠그고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그녀는 아까부터 장경사와 대면하여 어떻게 대결할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또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혹시나 하고 재킷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역시 그곳에도 열쇠는 없었다.

이런 건망증이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스스로 생각해봐도 이럴 때가 아닌데 싶어서 서유진은 새삼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잠을 못 잔 탓인지도 몰랐다.

어젯밤 귀신 같은 몰골로 무진 버스터미널 부근에 서 있던 강인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택시도 없다고 그는 울먹이고 있었다.

"아니 논 한가운데 서 있는 것도 아니고 갯벌도 아닌데 택시가 왜 없니? 이궁, 알았다. 주변에 있는 상점 간판 이름을 대봐. 아니면 전화번호를 불러보든지."

그러고는 114에 전화를 걸어 그 상점의 주소를 알아내고 차를 몰고 나가 그를 찾아냈을 때, 그는 저승에서 막 돌아온 것처럼 퀭한 눈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일주일 뿐인데 그사이 그는 몹시 늙고 초라해져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거리의 전봇대 앞에 차를 세우면서 유진은 좀 화가 났었다.

아무 택시나 타고 와서 아파트단지 앞에서 돈을 좀 빌려달라고 하면 될 일이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차에서 내려 피 때문에 엉망이 된 와이셔츠 바람의 그를 보자 유진은 그가 왜 굳이 그녀를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충혈된 눈은 두려움과 슬픔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유진은 순간 그에게서 고아(孤兒)를 느꼈다.

"난 강인호고 여기는 무진이고 지갑은 언놈들이 가져가버렸고 세상은 캄캄하고 비는 내리는데 나, 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어."

그가 전화 속에서 울먹이며 하던 말이 떠오르자 더욱 그랬다.

몸도 가누지 못하는 그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그를 데려다주고 나서 하는 수 없이 그의 집, 지저분한 식탁에 앉아 소주 반병을 더 먹느라 거의 새벽에야 눈을 붙였던 것이다.

"선배, 가고 싶어…… 나 서울 가고 싶어."

술잔을 잡고 반쯤 졸다가 강인호는 그렇게 말하고 식탁에 엎어졌다.

"아이고 그래, 집 떠난 지가 벌써 일주일이나 됐으니 집에 가고 싶겠지, 엄마도 보고 싶겠지, 가엾어서 어쩌니."

억지로 그를 안다시피 방으로 데려가 눕혀주면서 서유진은 혀를 찼다.

학교 다닐 때는 후배들 중에서도 똘똘하고 제법 어른스러워서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그가 많이 변해 있는 것 같았다.

하기는 이곳 무진에 내려와 정착할 무렵, 그녀 역시 빠른 속도로 시들어갔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확실히 다른 박자로 흐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해보았으니까 말이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 친구들을 만났는데 자신만 흠뻑 늙어버리고 친구들은 청춘으로 남아 있는 악몽을 꾼 것도 떠올랐다.

서유진은 잠시 그렇게 잠긴 차 안에 있는 열쇠 때문에 망설이느라 느리게 걷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경찰서 주차장에 서서 고민한다고 갑자기 재킷 주머니에서 자동차 열쇠가 나타날 것도 아니고 또 누군가 나타나서 문을 열어줄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열쇠를 잊고 장경사와의 대결만 생각하자고 그녀는 다짐했다.

그래서 서유진은 경찰서 정문을 힘차게 밀었다.

강인호가 그런 그녀를 보았다면 또, 이젠 망치 하나도 없이 거대한 빙하를 향해 그저 맨손으로 돌진하는 것 같다고 말했을, 그런 자세였다.

장경사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웃던 그는 서유진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순간 긴장하는 낯빛으로 바뀌었는데, 두리번거리던 서유진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얼른 다시 낄낄거리며 웃었다.

서유진은 장경사 앞에 가서 섰다. 장경사는 서유진에게 목례를 하고 여전히 낄낄거리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커다란 소리로 크르릉 하더니 가래를 뱉었다.

"대체 왜 수사를 시작하지 않는 겁니까?"

서유진은 팔짱을 낀 채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곳에 와서 장경사에게 항의를 한 게 이번 건으로만 벌써 오늘이 세번째였다.

장경사는 느긋하고 노련한 눈빛으로 서유진을 흝어보았다.

서유진은 장경사의 그런 시선을 가끔 다른 간사들에게 느끼하고 재수없으며 뻔뻔한시선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서간사님 좀 앉으세요. 거기…… 뭐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아이가 성추행을, 그것도 학교에서, 그것도 교장한테 당했다고 신고를 했으면 당연히 아이에게 피해자 진술서를 받아내고 교장을 수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장경사는 느긋하게 웃으며 턱수염을 매만졌다.

서유진은 오늘은 지난번처럼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하리라 마음먹었지만, 언제나 한수 위인 장경사의 느글거리는 모습을 보다 다시 목줄기가 뻣뻣해지면서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안 하시냐구요? 애가 성추행을 당한 거기 그대로 방치되어 있잖아요."

"글쎄, 우리가 조사를 하려고 하니까, 자애학원에서는 부모가 아니면 애를 함부로 데리고 나올 수 없게 되어 있던데…… 그게 규칙이라는 걸 어쩌냐고요? 전에도 이 말을 했잖아요. 그래서 못 데리고 나온다고, 그러니 조사를 어떻게 하나……"

"말씀드렸다시피 어머니가 서울로 가셨는데 예정과는 달리 못 내려오고 계세요. 연두 아버지가 다시 수술 날짜를 받으셨다니까요. 어쨌든 부모가 신고를 했으니까 조사를 해야지요. 게다가 그 교장은 왜 조사를 하지 않는 겁니까?"

장경사는 얼핏 웃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아주 낮추어 말했다.

"교장 선생님은, 서간사도 아시다시피 이 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점잖고 훌륭한 분인데, 어떻게 벙어리 애 말 하나만 믿고 그분에게 경찰서로 갑시다, 합니까, 하길…… 요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저희도 해먹기 힘들어요. 인권이네 뭐네 해서 함부로 연행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연두를 불러내서 저희와 함께 진술서를 받으시면 되잖아요? 그러면 피의자 신분으로 교장을 연행할 수 있잖아요."

"글쎄 그러고 싶은데 부모가 없으면 자애원에서 애를 못 내보낸다니까."

장경사는 손깍지를 껴서 뒤통수에 대고 의자를 쭈욱 뒤로 젖혔다.

"그러니까! 수사를 시작하고 피해자 신분, 피의자 신분으로 아이하고 교장을 조사하면 될 거 아니에요?"

서유진의 음성은 높았다. 주변에 있던 경찰들이 일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서유진은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서유진을 장경사가 빙그레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두 손은 여전히 깍지 끼어 뒤통수에 댄 채였다.

"글쎄 그게, 별 뾰족한 증거도 없이 어떻게 그 훌륭하신 분더러 경찰로 가자고 하느냐고요. 게다가 성추행이라니…… 우리끼리 까놓고 이야기해서 뇌물 수수나 배임이나 업무상과실도 아니고 성추행이라니, 원 참. 그분 앞에서 내 입으로 입 밖에 내기도 쫌 그렇지 않겠어요, 엊그제 도지사 표창까지 받으신 분한테? 서간사 같으면 안 그렇겠어요?"

서유진은 굵은 침을 한번 삼켰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언제나 모호한 말로 상대를 유인하고 다중(多重)의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을 흘림으로써 순진한 상대의 해석을 오류로 몰아붙이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서유진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특유의 직감으로 지금 여기서 더 말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감정적으로 하자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그녀는 말소리를 낮추었다.

"그럼, 우리가 자애원에 이야기해서 피해 학생을 데려오면, 그러면 진술서를 받으시겠어요?"

"아니 이보세요, 우리가 뭐 수사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처럼 그러시는데, 그건 오해셔. 검찰도 수사 지휘를 안 내리고 있어요. 젤 큰 이유는 실은 그거야."

장경사는 부르르 떨며 서 있는 서유진이 자못 귀엽기도 하다는 듯 약간의 반말투를 섞어 덧붙였다.

"아시죠? 검찰이 수사지휘권을 가지는 거. 우리 경찰이 그렇게 수사권 독립시켜 달라고 해도 안 주잖아. 그러니 검사님께서 지휘명령을 내리시기까지 우리도 어쩔 수가 없어요."

장경사는 깍지를 풀고 두 손을 책상에 내려놓은 다음, 그러니 이제 그만 가달라는 듯 서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장경사와 미묘한 문제로 여러 번 부딪힌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단순한 고발사안 앞에서 이렇게 뻔뻔하게 직무를 회피하리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수사를 좀 게을리하거나 편파적으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짐작했지만, 그리고 이제까지 그런 사건들은 대개 정치적이라면 정치적일 수 있는 문제들이었지만, 이렇게 어린아이를, 학교에서, 교장이 성추행했다는 명명백백한 고발 앞에서 그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자 할 말이 없었다. 너무 상식에서 벗어나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검찰이건 경찰이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다른 식으로 사건을 알리는 수밖에…… 당신 오늘 한 말에 대해서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서유진은 장경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얼핏 그녀의 눈에 푸른 빛이 번득였다.

그리고 모든 진실한 것들이 그러하듯 그것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당신이라니, 이 아줌마가 어디서 당신이야? 우리가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장경사는 서유진의 푸릇한 눈길을 슬쩍 피했다.

"그럼 당신이지 너라고 해요? 뭐라구요, 아줌마? 왜 그러는데 아저씨? 내가 당신이라고 하니까 카페 <야화>에서 온 줄 아나 보지?"

순간, 고개를 숙이거나 다른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척하며 두 사람의 말싸움을 듣고 있던 몇몇 순경들이 킥킥 웃었다.

"알았어요, 맘대로 해봐요. 그럼 우리 독자적으로라도 일을 진행하는 수밖에!"

호기롭게 내뱉고 경찰서 마당으로 내려섰지만 서유진의 머리는 아득했다. ‘

다른 식으로 사건을 알리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늦기는 해도 당연히 수사를 할 거라고 기대한 자신이 너무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경사 앞에서 큰소리를 쳤지만, 그리고 지금 같아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경사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돌진하듯 그대로 차까지 걸어갔고 습관처럼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물론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차 안을 들여다보니 좌석에 놓인 휴대폰에서 벨이 울리고 있었다.

무진 인권운동센터의 남자 간사일 것이다.

연두 어머니에게 연락을 취하라고 일러두고 나왔는데 아마 그 사이 연락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유진은 마음이 바빠졌다.

이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보조 열쇠 하나를 지갑 속에 넣어두는데, 대개는 차 문을 잠글 때 지갑마저도 차 안에 두는 일이 많아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보험사에서 제공하는 무료 서비스도 이미 이용 한도가 차버렸다.

염치없지만 무진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는 오빠에게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빠에게 전화를 걸려던 그녀는 새삼 자신이 휴대폰조차 차 안에 두고 내린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며 다시 경찰서를 향했다.

마침 장경사가 현관 모퉁이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또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

장경사는 자신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서유진을 보고 언뜻 경계하며 물었다.

"죄송한데…… 휴대폰 좀 빌려주세요."

하는 수 없이 서유진은 공손해했다. 장경사는 이게 무슨 꿍꿍이일까 잠시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요즘 흔히 번호를 따기 위해 휴대폰을 빌린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휴대폰이라…… 글쎄 무슨 일이신지?"

"시내에 거는 거예요. 국제전화 아니고 시외전화도 아니라구요. 사사건건, ."

유진이 발끈하며 돌아서려고 하자 장경사는 자신도 모르게 유진을 불러세웠다.

"나 원, 그렇게 날 나쁜 사람으로 몰고 싶으신가? 국제전화만 아니라면 쓰슈."

장경사는 유진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녀는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직원을 한 사람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왜냐고 묻는 오빠의 질문에 그녀는 곁에 있는 장경사를 의식하고는 망설이다가 "저번에 그 일 땜에"라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오빠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열쇠를 차에 두고 문을 잠갔다고 말했고, 그것은 장경사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수사 빨리하세요."

무안한 마음에 유진은 장경사에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

"댁이 검사라면 나도 그러고 싶지."

유진은 돌아서서 차 곁으로 가서 카센터 직원을 기다렸다.

담배를 피우러 곁으로 온 김순경에게 유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장경사가 불쑥 물었다.

"김순경, 저 여자 어떻게 생각해?"

김순경은 오래도록 장경사를 보아온 사람답게 그저 애매하게 웃었다.

"저 여자 남편도 없이 혼자 산다면서? 참 나, 저런 여자들 말이야, 민중 어쩌구 하는 여자들, 참 맛없게 생기지 않았어? 그런 콤플렉스 때문에 더 지랄들인 거 같아, 안 그런가?"

장경사는 담배를 깊이 빨았다.

 

녹화를 할 비디오카메라도 준비되었고 장애인 성폭력상담소 소장도 와 있었다.

구청에서 일하는 수화 통역사도 곧 도착할 것이었다.

회의실 분위기를 크게 바꾸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아이들이 좀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유진은 오는 길에 작은 베고니아 화분도 하나 샀다.

이제 연두 어머니가 연두를 데리고 오고 그리고 조금 있다가 강인호가 유리를 데려오면 진술이 시작될 것이었다.

서유진은 아침에 일단 인권운동센터 간사 두 사람과 회의를 하면서 이 모든 것의 뚜껑을 자신들이 먼저 열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의 증언을 녹화해 신문방송 등 언론매체와 서울의 인권위원회에 알리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침에 무진 지방노동위원회가 자애원의 농인 생활지도교사 송하섭이 부당해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려오기도 했다.

재단 측에서 내세우는 이유는 교장에 대한 폭언과 교사로서의 품위 상실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그날 밤 연두를 성폭력상담소로 데리고 나온 데 있는 것 같았다.

유진은 자신의 예감대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어둠 속에 몸을 도사리고 있음을 느꼈고, 장경사와 씨름할 시간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먼저 도착한 것은 연두의 어머니였다.

연두 아버지가 수술이 끝나고 며칠 지나자 그녀는 새벽에 다시 무진으로 내려와 연두를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연두 어머니의 얼굴빛은 더 어두워져 있었다.

연두 아버지의 수술경과는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고 했다.

인생의 한 국면에서 삶이 이렇듯 사정없이 한 인간을 몰아칠 때,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을 거라고 유진은 오래전부터 생각하곤 했다.

열에 들떠 흰자위를 드러내며 경기를 하는 돌배기 아이를 들쳐업고 네살짜리 큰 아이를 잠에서 깨워 억지로 손을 붙들고 추운 새벽 길거리에 서서 미친듯이 택시를 불러세우던 자신의 모습이 연두 어머니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눈을 들어 바라본 하늘이 연푸른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져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것 같던 환각도 기억났다.

연두는 긴장한 낯빛이었다.

-어서 와. 반가워.

서유진은 강인호에게 배운 간단한 수화로 연두에게 인사했다.

긴장했던 연두의 낯빛이 금세 밝아지며 무언가를 물었는데 당신도 농인이냐는 뜻인 것 같았다.

서유진은 더이상은 아는 수화가 없어서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연두의 얼굴로 살짝 실망감이 지나갔다.

서유진은 아이들에게 주려고 준비한 빵과 우유를 내밀었다.

연두는 잠시 망설이다가 구석 자리에 앉아 그것을 먹었다.

오래도록 그런 간식을 못 먹어본 아이처럼 한입 가득 팥빵을 베어물고 삼키는 연두를 서유진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두의 통통한 뺨이 빵을 먹을 때마다 볼록거렸다.

뺨은 복숭아빛이고 검은 머리는 윤이 나고 숱이 많았다.

눈동자는 맑고 키는 다른 또래들보다 약간 컸다.

교복 치마 아래로 뻗은 두 다리는 고무인형의 것처럼 탱탱하게 뻗어나와 있었다.

열다섯 살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많은 것들이 서유진의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살구의 솜털, 연초록, 봄날의 장미 꽃잎, 아침 이슬, 보슬비, 초봄의 나비 날개 그리고 엷은 홍차 향기 같은 것……

그런 싱그러운 소녀에게 일어난 일들을 잠시 상상하자 그녀는 순간 아찔해졌는데 그때 연두와 눈이 마주쳤다.

쌍꺼풀 없는 도톰한 눈에 살짝 부끄러운 기색이 지나가더니 연두는 망설이다가 조금 웃었다.

그때 서유진은 생각했다.

어떤 일이 있다 해도, 자신의 두 딸 바다와 하늘이의 이름을 걸고 이 아이들을 지켜주자고.

그래서 서유진은 그녀가 힘들 때면 언제나 그러하듯이 씩씩한 웃음을 연두에게 지어 보였다.

무진 인권운동센터 회의실 가운데 앉은 연두는 나란히 앉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무진 성폭력상담소 소장이 그 앞자리에 앉았다.

유진은 카메라를 켰다. VCR이 돌아가는 소리가 그토록 크게 들린 이유는 그 방안에 들어선 열몇 명의 사람들 중 누구도 소리를 낼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유진은 성폭력상담소장을 향해 시작해도 좋다는 신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무엇이죠?

성폭력상담소장이 묻고 인권운동센터 간사의 고교 동창인 수화 통역사가 그것을 통역하기 시작했다.

-김연두입니다.

-자애학교 중2 맞습니까?

-.

-이 과정은 어떤 강압이나 협박 없이 진행되며 본인이 원하지 않으며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

-학생은 지난 월요일 자애학원 교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했는데 그 과정을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

-그럼 말씀해주십시오.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요?

-저는 그날 방과 후에 저희 기숙사인 자애원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놀러 나왔습니다. 함께 놀던 유리가 잠깐 화장실에 간다고 갔는데 오지 않아 다시 학교로 들어왔습니다. 중앙현관을 지나 교무실 쪽으로 가는데 교장 선생님이 교장실을 나오다가 저를 발견하셨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저를 손짓으로 부르셨습니다. 제가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가니까 잠깐 들어오라고 하시는 것 같았어요. 교장 선생님도 역시 수화를 못 하시니까요. 들어가니까 저를 데리고 책상 앞으로 가셨어요. 책상에는 컴퓨터가 켜져 있었는데 거기서 이상한 화면이 보였어요. 여자와 남자가 벌거벗고

연두는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허공에 멈추고 제 어머니를 바라보며 입술을 물었다.

젊은 남자 통역사가 연두의 손을 바라보며 말을 옮기다가 멈추었다.

영문을 모르고 자원봉사를 하러 온 그는 이 곤혹스러운 통역에 벌써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두와 통역사를 번갈아 바라보던 서유진과 강인호 그리고 간사와 성폭력상담소장의 시선은 연두에게 얼어붙은 듯 붙박였다.

찍어누르는 듯한 침묵이 그 자리를 덮치고 있었다.

연두의 어머니는 천천히 연두를 향해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얼굴은 얼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눈을 깜박여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는 일조차 온 생의 힘을 걸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눈빛은 딸을 향해 거의 터지기 직전의 슬픔과 분노와 연민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퉁퉁한 손에서 배어 나온 땀이 그녀가 쥔 손수건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연두는 엄마의 표정에서 많은 것을 확인한 듯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런 연두의 얼굴에는 이미 소녀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어떤 위엄 같은 것이 아른거렸다.

그것은 오랫동안 진정한 사랑을 받았고 또 받고 있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자존감 같은 것이었다.

-벌거벗고 있는 영화같았어요. 실제로 남자와 여자의 성기가 나오는 그런저는 두려운 마음에 도망치려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저를 잡아끌어다가 그 화면 앞에 세우셨고, 저는 뿌리치고 교장실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복도에 아무도 없었어요. 마침 여자 화장실이 보이기에 그리로 들어갔습니다. 여자 화장실이니까요. 그런데 바로 교장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그리고 문을 잠그셨습니다.

연두는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의 손짓이 통역사의 입을 통해 자음과 모음으로 변하고 그것이 언어라는 몸뚱이를 획득해나가자 서유진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은 연두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연두 어머니가 온몸으로, 아마도 불운한 온 생의 힘을 다해 침착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틀어 막힌 소리는 서유진의 몸뚱이 안을 여기저기 부딪다가 눈으로 천천히 고여 왔다.

-그리고 저를 화장실 벽에 밀어붙이신 다음, 제 실내복 바지를 벗기……

젊은 통역사의 목소리는 이제 떨리고 있었다.

가끔씩 자음과 자음 사이, 혹은 모음과 모음 사이를 끊고 수화로 연두에게 무언가를 다시 물었다.

연두 어머니는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딸이 말을 하는 도중 문득문득 어머니의 표정을 살피기 때문인 것 같았다.

가끔씩 꿀꺽거리며 목줄기로 침 넘기는 소리만이 그녀가 딸에게 의식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연두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 어려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연두 때문에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있었다.

통역을 듣던 인권센터의 젊은 여자 간사가 짧은 신음을 내뱉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너무 힘든 부분은 다 말하지 않아도 돼요.

성폭력상담소장이 천천히 말했다.

연두가 겁먹은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연두 어머니가 떨리는 손을 들어 연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두의 얼굴이 그제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가, 그만 할래?

연두 어머니가 수화로 연두에게 물었다.

연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 품에 안겼다.

침묵이 계속되었고 아직 꺼지지 않은 VCR이 그 침묵을 녹음하고 있었다.

연두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던 연두의 어머니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두의 머리칼을 하염없이 쓸어내렸다.

잠깐을 그렇게 울던 연두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격렬한 몸짓을 시작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갑자기 교장 선생님이 내 입을 틀어막고 날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끌고 들어갔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숨이 막힌 채로……

통역사의 말을 듣고 있던 강인호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의 겨드랑이로 쉼 없이 식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가 창피해서 바지를 올리려고 했더니 제 뺨을 때리고 바지를 벗긴 다음 변기에 저를 돌려세웠어요. 그리고 저를 엎드리게 하고…… 제 뒤에다……

연두 어머니가 허공을 가르고 있던 연두의 손을 붙들었다.

통역사의 입술이 멈춰졌고 강인호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선생님 이 정도면,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어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정적을 깬 것은 처음부터 내내 지켜보고 있던 유리였다.

유리는 이상한 목소리를 내며 연두에게 달려들었고 그리고 격렬하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얼결에 당한 상황이라 연두는 거의 십오도 정도 뒤로 등을 젖힌 채 유리의 수화를 보고 있었다.

당황한 통역사가 그 둘의 말을 통역하려 했으나 역부족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수화에도 속어와 유행어와 또래 집단의 은어가 있기 때문이다.

유리는 연두에게 수화를 계속하며 이상한 비명 같은 것을 내지르고 있었다.

아이는 몹시 흥분 상태였고 연두는 거의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래요? 유리가 왜 그래요?"

서유진이 물었고 강인호가 유리에게 다가가 유리를 뒤에서 안았다.

순간 유리의 입에서 격렬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이가 날뛰는 바람에 탁자가 흔들리면서 베고니아 화분이 떨어져 깨져버렸다.

붉은 꽃잎들이 차가운 바닥에 내팽개쳐지며 베고니아의 거무튀튀한 뿌리가 드러났다.

강인호는 처음 유리를 만나던 순간을 기억했다.

안개 속에서 파삭거리며 과자를 먹던 아이.

그때 안개 속에서 나타난 그를 보고 지른 소리가 바로 이런 소리인 것 같았다. 날것의 공포로만 이루어진 소리……

하지만 잠시 그에게도 마음을 열었던 아이,

곰인형을 안고 연두가 린치를 당하고 있는 세탁실까지 그를 안내해주던 아이.

강인호는 문득 그때 복도에 발이 닿지 않는 것처럼, 마치 날아가는 것처럼 가벼이 뛰어가던 유리를 천사 같다고 생각한 것을 떠올렸다.

강인호는 흰자위가 보이도록 눈을 뒤집으며 절규하는 유리의 두 손을 잡았다.

유리는 갓 그물에 잡힌 맹금류처럼 버둥거렸다.

강인호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유리의 두 손을 붙들고 아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유리야, 무섭지 않아. 선생님이야. 선생님이 널 도와주고 싶어. 유리야, 괜찮아. 여기 널 괴롭힐 사람은 아무도 없어. , 선생님 봐. 선생님 따라 숨을 쉬어봐. 하나, 두울, 세엣, 그렇지 잘한다. 우리 유리 잘한다."

유리가 소리를 알아듣든 아니든 그건 그에게 아무 상관없었다.

가끔 제 성질에 못 이겨 장난감을 집어 던지던 어린 딸 새미에게 그는 가끔 이런 방식을 취하곤 했다.

너무 어려서 말을 못 알아듣는 아이는 그러나 신기하게도 아빠의 말을 따라 했고, 그때 강인호는 어렴풋하게 인간의 소통이 꼭 언어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집요하게 유리를 바라보는 강인호를 보며 몸뚱이만 큰 유리는, 여섯 살 정도의 지능을 가졌다는 유리는 어느덧 그를 따라 호흡을 하고 있었고 눈빛은 잦아들었다.

그때 강인호는 유리의 눈 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짧은 평생을 얼음처럼 차가운 고치 속에서 얼어붙어 성장이 멈춰버린 애벌레 같은 영혼을 언뜻 보았다.

강인호의 가슴속에서 거대한 얼음장이 갈라지는 것처럼 쩡! 소리가 났다.

"유리야,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 이제부터 우리가 모두 널 도울 거고 널…… 지켜줄 거야."

지켜준다,는 말을 하면서 강인호는 이제 자신이 결국 어떤 모퉁이를 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리는 어린아이처럼 강인호의 품에 힘없이 얼굴을 묻었다.

발작 끝에 유리는 힘이 다 빠져버린 것 같았다. 아이는 열다섯 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갓 고치에서 나온 여린 나비 같았다. 아니, 누가 지었는지 그 이름 그대로 곧 깨어져 버릴 유리인 것만 같았다.

그때 연두가 통역사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수어를 시작했다.

-유리가 할 말이 있대요. 다 말하고 싶대요.

그러자 유리가 연두에게 손짓을 했다. 통역사의 입이 열렸다.

-유리가 콜라가 마시고 싶대요. 차가운 걸로 한 병 다 마시고 싶대요. 그리고 초코파이도 먹고 싶다고 하네요.

얼굴이 백짓장처럼 굳어 있던 남자 간사가 "유리야 기다려. 오빠가 얼른 사올게, 많이 사올게" 하고 근처 슈퍼마켓으로 뛰어나가는 동안 회의실에는 침묵만 가득했다.

그동안 유리는 정말 다섯 살짜리 딸처럼 강인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연두가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을 꺼냈다.

-저저번 주에도 유리는 교장 선생님께…… 유리가 그 말을 하고 싶대요. 그걸 우리 모두 보았어요.

통역사는 도저히 자신이 통역하고 있는 언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그의 말은 이제 문법도 맞지 않았다.

성폭력상담소장이 나섰다.

-교장 선생님한테 뭘요? 뭘 보았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라니, 그게 누구누구야?

연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엄마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에게 더는 추궁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잠시 쉬기로 했다.

남자 간사가 봉투 가득히 콜라와 과자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연두와 유리의 입이 함박 벌어졌다.

어른들은 모두 콜라만 마셔댔는데 유리 혼자 파삭거리며 과자를 먹었다.

"너무 늦으면 애들이 피곤할 테니까 시작할까요?"

서유진이 껐던 VCR을 다시 켰다. 강인호가 유리의 손에서 과자를 살살 빼앗아 탁자에 놓았다.

유리는 실컷 단것을 먹었는지 손가락에 남은 설탕을 빨며 얌전히 앉아 있었다.

-말 다 하고 나면 이거 다 줄게. 지금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유리는 콜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상에 대한 물음에 대답이 이어지고 나서 본격적으로 질문이 시작되었다.

-저번 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유리는 이제 침착한 표정이었다.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언제 울었냐는 듯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연두랑 학교 앞 가게에 컵라면을 사러 가려고 했어요. 원래는 6시쯤 저녁식사가 나오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는 그걸 먹는 아이들은 거의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학교 앞의 작은 구멍가게에서 빵이나 라면을 사서 저녁을 때우곤 했어요. 그날도 8시쯤 되자 배가 고팠어요. 그래서 연두랑 가게에 가려고 현관을 나가는데 제가 이상하게도 약간 배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연두에게 제 것도 사다 달라고 부탁하고 현관에 앉아 있었지요. 그때 교장 선생님이 퇴근을 하시는지 나가려다가 저를 보고는 웃으면서 제 손을 잡아끌었어요. 저는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과자를 준다고 했어요. 그러고는 저를 데리고 교장실로 들어가 과자를 주고는 제가 과자를 먹는 사이에 소파 앞 탁자에 저를 눕히고 제 체육복 바지를 무릎까지 내렸어요. 그리고 교장 선생님도 바지와 팬티를 무릎까지 내렸어요.

젊은 여자 간사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유리는 들을 수 없었고 서유진이 무서운 표정을 여간사에게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은 서유진 자신이 그녀보다 더한 비명을 아까부터 지르고 싶었다.

통역사의 이마에는 쉴새 없이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태연해 보이는 것은 유리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이었을까,

모두의 이마에 진득한 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러고는 자기도 바지를 벗고 고추를 꺼내 제 속에…… 넣었어요.

서유진의 얼굴이 점점 더 마분지처럼 희고 빳빳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고 연두가 들어왔어요.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앞뒤로 엉덩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연두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어요. 연두가 달아나버리자 교장 선생님은 휴지를 찢어 고추를 닦고 다시 옷을 입었는데, 그때 창밖에 누가 있었는지 뭐라 삿대질을 하면서 커튼을 내렸어요. 그리고 복도로 나가서 연두를 데리고 들어왔어요.

"아아!"

참았던 비명이 서유진의 앙다문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그때를 맞춘 듯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참았던 숨이 토해졌다.

통역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잠시 자리를 떴다.

강인호가 담배를 피우러 복도로 나가서 얼핏 보니 그는 화장실로 가서 수돗물을 틀어놓고 찬물에 제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역시나 이런 상황을 많이 접한 성폭력상담소장은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나름의 평온을 유지하며 진술을 이끌어나갔다.

"통역사님, 이제 준비되셨으면 연두에게 물어주세요. 그 정황을 연두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진술해달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그날을 연두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연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또렷하고 영롱한 눈매로 통역사를 바라보며 수화를 시작했다.

-저 혼자 나가서 컵라면을 사 가지고 들어오니까 유리가 없었어요. 저는 유리가 기숙사로 돌아갔나 하고 현관 입구로 들어서는데 어두운 복도 저편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자세히 보니 교장실이었어요. 다가가서 보니까 희미한 음악 소리까지 들려서 사람이 있는 줄 알았지요. 그래서 문을 열어보니까……

연두는 고개를 숙였다. 그애의 귓불까지 붉게 물들어갔다.

-하기 싫은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

성폭력상담소장이 말을 꺼내자 연두는 참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유리의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도망쳤지요. 그런데 현관 앞으로 가다 보니까 우리 반 남자애들 둘이서 제 쪽으로 도망쳐오고 있었어요. 방금 교장실에서 교장 선생님이 바지를 내리고 유리를 눕힌 채로 고추를 덜렁이는 것을 봤다면서 우리가 본 걸 알면 선생님들께 혼이 날 테니까 저 보고도 얼른 방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남자 애들 둘이 도망치고 난 후, 저는 망설였어요.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유리가 걱정되어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때 교장 선생님이 제 뒷덜미를 잡아챘어요. 저 역시 교장실로 끌려갔지요. 저를 앉혀놓고 만일 여기서 본 걸 말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수화로 말했어요. 저는 무서워서 그러겠다고 했고 유리와 함께 교장실을 나와 기숙사로 와서 잤어요.

-교장이 수화를 하니? 전번에 교장이 수화를 하지 못한다고 했잖아?

유심히 통역의 말을 듣고 있던 강인호가 물었다. 통역사가 그것을 통역했다.

그러자 연두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그러네요. 글쎄, 저는 그날 교장 선생님을 가까이서 처음 뵈었어요. 분명 그 말을 수화로 하셨어요. 아아, 그러고 보니 지난주 저를 화장실로 끌고 가셨을 때도 나중에 저를 놓아주면서 그 말을 수화로 하셨던 것 같아요.

-다른 말은?

강인호가 다시 물었다. 연두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말을 수화로 하는 건 보지 못한 것 같아요. 그 말만 수화로 하셨어요. 여기서 본 걸 다른 데서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구요.

-왜 그때 바로 선생님들께 말하지 않았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말했지만……

"뭐라구?!"

서유진이 외쳤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 왜 따라갔느냐,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 같은 질문은 폭력의 희생자들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될 질문 제일 순위라는 것도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 세월이 너무 길었다.

분명 그 대상이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녀는 유리에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서유진은 이제 약간씩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아까 서유진에게 주의를 받은 젊은 여자 간사가 서 선배도 저럴 때가 있구나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초등학교 3학년?

연두와 유리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서유진이 성폭력상담소장에게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성폭력상담소장은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대답했다.

"서 간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일을 하다 보니까 세상에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고 있어요. 특히나 장애인 여성들은 말하자면, 완전 무방비로…… 짓밟히고 있어요. 죄송하지만 끝까지 진행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서유진이 입을 다물었다.

성폭력상담소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을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해주겠어요?

유리는 잠시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쓰더니 담담히 수화를 시작했다.

-3학년 겨울방학이 지난 다음 담임선생님께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자 담임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박보현 선생님께 물어보았는데 대체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냐고 했다면서 나보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다음에도 어떤 일이 있었나요?

-저는 그때도 자애학교에 다니면서 자애원에서 살고 있었어요. 방학이 되면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데 저는 집에서 할머니가 데리러 오지 않으면 갈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그렇게 집에서 데리러 오지 않는 애들 몇몇과 방에서 놀고 있는데 박보현 생활지도 선생님이 들어왔어요. 저희는 우리와 놀아주려는 줄 알고 좋아했지요. 선생님들은 방학 때면 우리보고 대충 알아서 하라고 하고는 하루에 한 번 정도만 얼굴을 보여주었거든요. 그런데 그날 선생님이 저녁이 다 되어서 오시더니 저를 껴안았어요. 선생님에게서는 술 냄새가 좀 났지만 저는 기분이 좋았지요. 선생님이 저를 예뻐해 주시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러더니 남자아이들 다 있는 데서 제 바지를 내리고 제 성기에 입을 맞추고 제 실내복 윗도리를 들추고 젖꼭지를 빨았어요.

이번에는 성폭력상담소장의 얼굴도 해쓱해졌다.

다음 질문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래서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남자애들마저 집으로 가고 저 혼자 기숙사에 남아 있었어요. 엄마도 보고 싶고 아빠도 보고 싶고 넓은 기숙사에 저 혼자 있는 것 같아 너무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었지요. 그런데 누군가 들어와 제 곁에 누웠어요. 박보현 선생님이셨어요. 선생님은 울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일 과자를 사줄 테니까 오늘은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러겠다고 했지요. 선생님은 제 옷을 다 벗기고 자기도 옷을 다 벗은 다음 선생님의 고추를 제 안에 넣으려고 했어요.

이제 서유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연두 어머니는 먼 산을 보며 손수건으로 연신 눈을 훔쳤다.

-저는 몹시 아파서 울었어요. 선생님은 제 손에 자신의 성기를 쥐여주면서 계속 문지르라고 했어요. 그렇게 했어요. 선생님은 잠시 후에 눈을 뒤집더니 흘러나온 하얀 액체를 휴지로 닦았어요. 다음날 박보현 선생님 제게 정말로 과자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저는 하루종일 식당 아주머니 외에는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 심심했고 그래서 어제 선생님이 저를 아프게 한 것도 잊고 반가워했지요. 선생님은 밤도 아닌데 저를 침대에 들어가게 하더니 말을 들으면 매일 과자를 사가지고 찾아오겠지만 만일 말을 듣지 않으면 지금 가버리고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때 우리 기숙사에는 기숙사에서 자살한 선배가 밤마다 귀신이 되어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소문이 있어서 저는 제발 가시지 말라고, 무슨 일이라도 다 하겠다고 약속했지요.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무슨 투명한 연고 같은 것을 꺼내서 제 성기에 바른 다음……

강인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이건 빙산이 아니라 해일이었다.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리는 것 같았다.

유리는 청각장애에 지적장애까지 겹친 아이였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그는 앞이 캄캄해왔고 담배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노란 구름 같은 것들이 아른거렸다.

박보현, 그 쥐새끼 같은 눈을 가진 생활지도교사. 해고당한 송하섭 선생을 끌어낸 것도 그였다.

어떻게 집에도 못 가는 가여운 어린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일까.

교장은? 학교는? 세상은? 지금이 21세기이고 여기가 한국이고 그리고 지금 내가 강인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자꾸, 들었다.

-그러고도 얼마나 더 그런 일을 당했나요?

성폭력상담소장의 질문에 유리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많이요.

좀 엉뚱한 대답이었다. 다시 한번 질문이 되풀이되었다.

-몇번이죠?

-많이요. 저 콜라 먹고 싶어요. 졸려요.

남자 간사가 유리에게 과자와 콜라를 건넸다.

유리는 탐욕스럽게 과자를 먹었다.

연두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유리는, 그후로 서무실장님과 박보현 선생님, 교장선생님에게 돌아가면서 당했어요. 서무실장님은 유리에게 한번 할 때마다 천원씩 주었대요.

이제 어른들은 진이 빠진 채로 통역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얼마나 더 끔찍한 것이 진실 혹은 사실 혹은 실재라는 이름으로 드러날 것인지,

강인호는 이제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아 있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인권운동센터 회의실 낡은 형광등 아래 모여앉은 사람들의 얼굴은 파리하게 깜박이는 듯했다.

푸른 귀기가 이 사무실을, 자애학원을 그리고 무진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유리는 연두의 수화를 빤히 바라보며 과자를 파삭파삭 먹고 있었다.

강인호의 머릿속으로 안개 자욱한 그 학교의 첫 풍경이 지나갔다.

유리가 과자를 사 먹으며 들어오고 청색의 세단이 떠나고……

그 살육보다 잔인한 현장이 자신이 마주친 첫 장면이었던 것이었다.

생각하는 강인호의 귓가로 유리가 과자를 씹는 소리가 다시 파삭, 하고 들려왔다.

이제 성폭력상담소장의 얼굴도 해쓱했다.

-천원이라니 무슨 소리죠?

통역사가 이건 마치 자신이 성추행이라도 당하고 있다는 듯 질린 표정으로 유리에게 물었다.

유리는 이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무실로 데리고 가서 바지를 벗기고 천 원씩 주었어요. 그걸로 저녁에 컵라면이나 빵을 사 먹어야 하니까요. 제가 싫다고 하면 가끔은 천원을 더 주기도 했어요.

이제 묻는 사람들도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유리는 집중이 잘 되지 않는지 바닥에 떨어진 베고니아 꽃잎을 발로 짓이겼다.

-처음 서무실장에게 끌려간 게 언제죠?

-생각이 잘 나지 않아요. 기숙사에서 박보현 선생님이 그러고 난 조금 후 같아요.

그러니까 4학년 초. 저는 박보현 선생님 때문에 너무 아팠기 때문에 울면서 싫다고 도망쳤어요. 그런데 서무실장님이 저를 응접실 탁자에 눕히고 두 팔하고 두 다리를……

통역사가 거기서 말을 멈추었다. 유리는 다시 과자를 파삭, 하고 씹었다. 모두 통역사를 바라보았다.

통역사는 자신의 동창인 인권센터 남자 간사를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는 원망과 경악이 버무려져 있었고 차마 더 이상은 이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의 두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 그 담에 뭐라는 거야?"

통역사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유리를 바라보고 있던 강인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묶었어요. 탁자에 묶었어요. 맞지요?"

통역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여자 간사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번에는 서유진은 그녀에게 아무런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젊은 통역사는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유리를 성폭행한 범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수치심에 떨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남자로서, 아니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아직 여자를 모르는 총각으로서, 이 장애인 여자아이 앞에서 더는 고개를 들고 입을 열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로 양옆으로 흔들었다.

한손으로 들어도 들릴 만큼 작은, 새처럼 가벼운 이 여자아이를 짓밟는 그들과 같은 세상에서 함께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는지도 모른다.

유리가 눈치도 없이 다시 수화를 시작했다.

지친 통역사를 대신한 것은 연두 어머니였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또 묶어버린다고, 여기서 내쫓아버린다고, 우리 집이 있는 섬까지 갈 차비도 주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저는 교장선생님도 서무실장님도 박보현 선생님도 모두 미워요. 그 사람들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유리는 하품을 했다.

이제 그 정도의 기억은 아이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성폭력상담소장에게 설명을 들은 바로는 폭력의 가장 나쁜 결과인 길들여진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강인호는 문득 팔레스타인과 아프리카 아이들의 무표정한 눈동자를 떠올렸다.

고통의 가장 극한의 형태, 무감각. 그는 하는 수 없이 딸 새미를 떠올렸다.

새미가 아들이었다면 가슴이 조금은 덜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녹화를 마치고 유리를 쉼터로 피신시키는 게 좋겠어요. 가해자들이 있는 그곳으로 다시 들여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연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두 어머니, 연두를 그리로 보내시죠. 집이 힘드시다면요. 그리고 저희는 유리의 보호자께도 내일 연락을 할 거고요. 경찰에도 유리의 사건을 신고할 겁니다."

성폭력상담소장이 말했다.

그때 연두 어머니가 조심스레 나섰다.

"선생님, 힘이 들어도 연두는 제가 집으로 데리고 가겠어요. 학교를 그만두는 것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겠어요. 그리고…… 죄송하지만 유리, 우리 연두의 친구도 오늘 밤만 제가 데리고 가면 안 될까요?"

서유진이 무언가 질문을 하려고 하자 연두 어머니가 더 이상은 참기 힘들다는 듯 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저 아이의 엄마가 가난하고 힘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아이가 귀를 먹은 것만도 가슴이 찢어졌을 텐데 저런 일까지 당하고 있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저 어린것이 엄마를 부르며 얼마나 울었을까요. 그 깜깜한 기숙사에서, 그 넓은 데서 어린게 혼자 남아서 얼마나 울었을까요. 벌판에 떨어진 새 새끼한테도 그럴 수는 없는데, 어떻게 이 작은 어린것한테 그런 짓을 하는 모지락스러운 놈들이 있을 수가 있을까요. 선생님들, 제가 친엄마는 아니지만 하루만이라도 따뜻하게 보듬어 품어서 재워주고 따뜻한 밥이라도 지어먹여서 보내고 싶어요. 제가 모자라서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선생님들, 그 사람들 꼭 처벌받게 해주시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저희는 아는 게 없으니까, 힘도 없으니까…… 선생님들이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꼭 벌을 받게 해주십시오. ……"

연두 어머니는 울었다.

서유진과 소장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어든, 아니 제 뼈가 가루가 나더라도 아이들을 지키겠습니다."

연두 어머니는 눈물을 닦았다.

서유진이 입술을 물다가 말했다.

"그러세요. 성폭력상담소장님이 내일 아침 유리를 데리러 가실 거니까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연두 어머니, 잘 각오하셔야 합니다. 경찰이 움직이지 않아 저희는 이 녹화 파일을 내일부터 전국의 모든 방송국과 서울 인권위, 무진 교육청과 시청 그리고 알릴 수 있는 모든 곳에 보낼 겁니다. 취재가 시작될 테고 증언이 필요할 겁니다. 도와주셔야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서유진이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마지막으로 통역사를 바라보았다.

젊은 통역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제 동창인 인권센터 남자 간사를 바라보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사실 가벼운 마음으로 왔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수화를 배운 걸 오늘처럼 후회해본 일은 없지만…… 저도 돕겠습니다."

강인호는 묵묵히 사무실 한구석으로 가서 거의 잠에 빠져있는 유리를 업었다.

유리는 새처럼 가벼웠다.

이 가벼운 아이를 묶고 벗기고 때리며 가장 여린 살을 찢고 폭행한 그들은 누구인가.

강인호가 유리를 업고 내려선 무진의 거리, 엷게 안개가 깔리고 있었다.

저녁 무렵부터 내리던 안개는 새벽 무렵에는 무진시 전체를 우유통 속에 빠뜨려놓은 듯 짙어졌다.

바닷가에 있는 외딴 자애학원까지 딱히 다른 교통수단이 없는 터라 강인호는 하는 수 없이 차를 가지고 길을 더듬어 출근을 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차는 아주 조금씩 전진할 뿐이었다.

그렇게 더듬거리며 달리던 차가 교문에 가까워졌을 때 한 형체가 안개 속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형체는 흰 액체 속에서 방금 솟아오른 듯이 나타났다.

강인호는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다. 교문 앞길 한가운데였다.

좁은 길이었기 때문에 그가 가로막으면 차는 통과할 수 없었다.

강인호는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다가갔다.

검은 양복을 말끔히 입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커다란 글자가 적힌 종이를 들고 차를 향해 서 있었다.

강인호는 반사적으로 클랙슨을 짧게 울리려다가 말았다.

며칠 전 교장실 앞에서 끌려나가던 생활지도교사, 이름이 아마 송하섭이었던 것 같다.

강인호는 일단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그가 들고 서 있는 종이 속에서 "저는 부당하게 해고당했습니다"라는, 정성스레 손으로 쓴 글자들이 안개 위의 자막처럼 떠올랐고, 흰 안개 속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흰 컴퓨터 화면 위에 뜬 게임 캐릭터 같았다.

게임을 중단하시겠습니까?’라는 창이 뜨고 누군가 예, 하고 클릭하면 그대로 사라져버릴 존재처럼 그는 생뚱맞고 불안해 보였다.

송하섭의 입매는 나는 각오를 했어, 나는 죽으면 죽었지 물러나지 않을 거야라는 듯 굳게 다물어져 있었으나 가끔씩 숨이 가쁜 듯 앙다문 입술을 풀어야 할 때는 가을 들판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얼굴 전체가 두려움으로 출렁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는 지난번에도 저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오늘 아침 그가 정성스레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안개를 뚫고 여기까지 왔을 것을 강인호는 잠시 상상했다.

그러자 어쩐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강인호는 잠깐 운전대 아래로 시선을 내려뜨렸다.

그때 바로 뒤에서 찢어질 것 같은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돌아보니 청색 세단이 위아래로 전조등을 비추며 클랙슨을 울려대고 있었다.

안개 때문이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교장인지 그의 쌍둥이 동생 서무실장인지 잘 파악되지 않았다.

하이빔을 번쩍이는 것이 안개 속에서 전혀 먹히지 않자 그는 이번에는 더 크고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울렸다.

송하섭이 서 있는 흰 화면 뒤에서 검은 옷의 수위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청색 세단의 클랙슨은 더 크게 울었다.

수위가 한편으로 송하섭을 붙들면서 한편으로 강인호에게 인상을 써댔다.

강인호는 하는 수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안개 너머로 사라지는 송하섭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농인이지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해고는 부당합니다. 저는 그럴 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제 이곳에서 유리를 데리고 퇴근할 때까지만 해도 강인호는 자신이 이 아침을 이런 심정으로 맞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하루 사이에 자신의 내부에서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안개 속에 희미하게 솟아 있는 자애학원의 고풍스러운 건물은 온 세상을 점령한 안개를 등에 얹고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뒷덜미를 낚아채듯 욕설이 들려왔다.

"씨버럴 놈이 아침부터 재수없게 왜 귀머거리 앞에서 밍기적거리게 만들고 지랄이야 지랄이!"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여기가 어딘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흰 컴퓨터 화면 속에 붕 뜬 기분이 되어 강인호는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이 신삥 새끼구나. 가뜩이나 요새 골치 아픈 일도 많아 죽겠는데. 뭘 쳐다봐, 이 씹새야!"

강인호는 그 자리에서 잠시 눈을 깜빡였다.

처음 든 생각은 설마, 서무실장이 자신을 농인교사로 착각한 거겠지 하는 것이었다.

강인호는 숨이 가빠왔다.

무심히 전철 정거장으로 내려갔는데 난데없이 밀림의 하이에나 떼를 본 듯, 공포도 분노도 실감도 없었고 생각은 뒤죽박죽 엉켰다.

그러나 차츰 선명하게 이것이 아이들이 말한 그 엽기적 진술과 결국 동일한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강인호는 입술을 잠시 앙다물고 서무실장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급하시다 해도 어떻게 그렇게 욕을 하십니까? 그 사람이 앞에 있었잖아요. 제가 비키라고 해도 그 사람이 들을 수도 없는 처지고."

"비켜! 너도 귀머거리 새끼처럼 되고 싶냐, 재수 없게!"

그는 거의 강인호를 밀치다시피 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천원을 주었어요 두 팔하고 두 다리를 탁자에 말을 듣지 않으면 집에 갈 차비도 주지 않는다고……

유리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다. 무표정하지 않았다.

이제야 생각해보니 그 아이의 벌린 입술과 검은 눈동자로 어떤 열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직 잠에서 채 깨어나지 않은 휴화산처럼 그것은 희미했으나 분명,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이 아침 그 열기가 희미하게 자신의 코에서도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강인호는 교사 안으로 들어섰다.

불현듯 복도 전체에서 야만의 피비린내 같은 것이 진동하는 듯했다.

쓰고 신 침이 목구멍 뒤로 힘겹게 넘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토할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새삼 어제 진술을 마친 유리를 꼭 안아주지 못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경악을 추스르느라 아이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연두 어머니가 그 아이를 품고 하루를 재워준다고 한 것이 강인호는 정말 고마웠다.

이 세상 모든 부모의 이름으로, 그제서야 그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 줄 알았던 것이다.

송하섭은 이제 교문 안쪽을 향해 서 있었다.

종이에 쓴 글자는 구겨지고 안개에 젖어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강인호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수위를 의식하며 소리죽여 몇 번 기침을 했다.

그리고 송하섭에게 다가갔다. 송하섭의 눈에 더럭 공포가 어렸다.

강인호가 다가가 송하섭에게 서유진의 명함을 내밀었다.

송하섭은 명함과 강인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와줄 사람입니다. 여기로 가십시오.

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송하섭은 이 학교의 누구도 믿지 않겠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으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만큼 그의 형체가 흐려졌다. 안개의 커다란 입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강인호는 다시 학교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그가 들어서자마자 교무부장이 그를 불렀다.

어제 그가 자애원에서 외출 허락을 맡아 데리고 나간 진유리의 외박을 문제 삼는 것이었다.

"실은 보호자이신 할머니께서 올라오셨습니다. 아아, 제가 말씀을 안 드렸던가요? 잠깐 집에 데리고 가신다고 해서 어제 제가 인도해드렸는데요."

강인호는 서유진과 말을 맞춘 대로 대답했다.

교무부장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러면 진작 외박허가서를 받아놓으셨어야죠" 하며 이야기를 그쳤다.

오늘 인권센터 간사 중 한 명이 유리의 산골 집으로 가서 할머니를 모셔오거나 사정이 되지 않을 경우 상황을 설명하고 적어도 유리의 전학동의서를 받아올 것이다. 연두의 경우와 다르다고 하지만 이번 유리 건도 경찰이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을 것이 뻔하니 이런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때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아내의 문자메시지였다.

 

당신 언제 서울 와?

월급날쯤 오려구 그러지?

나랑 새미랑 뭐 사줄 거야?^^

우린 요새 아빠 오면 뭐할까,

그 생각 하면서 재미나게 지내고 있어.

 

"그런 일이 있었다고…… 누가 그래요?"

마주앉은 교육청 최수희 장학관은 서유진에게 물었다.

마르고 목이 길어서 전체적으로 약간 억센 인상을 주는 장학관은 찻잔 속의 녹차 티백을 꺼내놓으며 탁자 위의 티슈를 뽑아 책상 위의 녹차 방울을 닦고 그것을 잘 접어 휴지통에 버렸다.

그러고도 서유진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마치 주름을 펴려는 듯 타이트스커트 자락을 긴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탁 쳤다.

그녀가 이렇게 딴짓을 하는 이유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2년제 교대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해서 여자의 몸으로 여기까지 오르기까지 그녀는 누구보다 단정하고 신중하며 치우치지 않게 처신해왔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왜소한 단발머리 여자가 들고 온 사안은 자신의 일평생을 다 뒤흔들 만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다음 달엔 딸아이 약혼식이 있었다. 우선 침착해야 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늘 하던 대로 주문을 외웠다.

원하는 대로 이루리라. 소망하는 대로 가지리라.’

그녀는 등을 곧게 펴고 다리를 조신하게 뻗으며 서유진이 탁자에 내려놓는 물건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진술을 담은 동영상 CD, 그리고 여기 그것을 풀어쓴 진술서입니다. 저희는 정식으로 자애학원 이사장을 해임하고 이사진을 관선이사로 교체하며 당사자들을 징계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벌써 사흘이나 면담 요청을 해왔는데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던 장학관은 그러나 시작부터 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어차피 기대를 가지고 온 것은 아니지만 서유진은 침착하게 다시 말을 꺼냈다.

"원래는 중학교 2학년 아이에 대한 자애학원 교장의 성추행 한 건만 경찰에 신고했습니다만, 저희가 알아보니 교장뿐 아니라 그 동생 서무실장, 생활지도교사 등이 거기 정신지체 여자아이, 그러니까 복합장애자죠, 그 아이에 대한 성폭행도 지속적으로 저질러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조사를 더 하면 다른 피해자가 더 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 이 건도 경찰에 이미 신고는 해놓은 상태이구요. 너무 엄청난 일이라서 믿으실 수 없겠지만 이 CD를 보시고 아이들의 진술을 들으신다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아시게 될 겁니다."

최수희 장학관은 성폭행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약간 찌푸린 것도 매력적이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는지 자신감이 있는 찌푸림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오십 대 초반의 나이치고는 예쁜 얼굴이고 날씬했으며 그것을 대단한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이는 갈등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일단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강석 교장은 그녀의 남편과 함께 무진 영광제일교회 장로였고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무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무사모의 멤버였다.

그녀는 오늘 밤 베갯머리에서 이 말을 전하면 남편이 무어라고 할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점잖은 사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일까?

골프장에서 사람 좋게 웃던 말 없는 이강석의 얼굴을 떠올리면 믿을 수 없긴 했다.

그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워도 그녀에게는 한 번도 그런 망측한 시선을 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장학관은 여자로서 자신의 직감을 믿고 있었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 말이지요. 잠깐만요, 그러니까 그폭행이 수업중에 일어난 건가요? 제 말은, 학과시간 중에 일어난 것이냐는 거지요."

서유진은 그녀의 이 말뜻이 무엇일까,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이 동영상을 보시면 알겠지만요, 설명을 드리자면, 아이들이 방과 후에 저녁을 먹고 학교 쪽으로 오는데……"

", 방과 후면 우리 소관 아니네요."

최수희 장학관은 말을 자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웃다가 서유진이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발끈 들자 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을 눌렀다

잠시 후 남자직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김과장, 자애원에서 사고가 나면 그게 우리 소관인가?"

"아닙니다. 그건 시청 소관이죠."

이제 일은 규명되었으니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장학관은 서유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고 구질구질하니까 그만 나가달라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서유진이 잠시 기가 막힌 얼굴로 큰 숨을 한번 내쉬고 말을 이었다.

"저기 이게, 교장선생과 서무실장 그리고 생활지도교사가 학교 내에서 아이들을 성추행하고 성폭행한 게 교육청 소관이 아니면 대체어디 소관이란 말입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게 말입니다, 그게, 자애학원은 저희 소관이 맞지만 자애원, 즉 생활기숙사는 시청 사회복지과 관할입니다. 거기 가셔서 말씀하시면 되겠네요. 거기 자애학원 아이들은 방과후에는 기숙사로 가고, 방과후에 벌어진 일이면 그게 자애원 일이지요. 허허, 그건 시청 관할이에요."

김과장이 잠시 장학관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 세상에 이런 명쾌한 진리가 또 어디 있겠냐는 듯 자신 있는 어투로 말했다.

"아니, 자애원 원장도 이강석이잖아요. 그 동생이 서무실장 이강복이구요. 게다가 아이들은 그 학교의 학생이에요. 학생들이 교장, 서무실장, 선생들한테 성폭행을 당했는데, 것두 학교 내에서 당했는데, 어떻게 교육청에서 소관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세요?"

서유진이 언성을 약간 높였다.

최수희 장학관은 어느새 자기 자리로 가서 다른 서류를 뒤지고 있었고, 김과장이 아무것도 모르고 우기기만 하는 아줌마를 인내심 있게 대하는 것처럼 사람 좋은 웃음을 웃었다.

"허허, 그게 얼핏 생각하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마는, 행정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허허허. 시청으로 가십시오."

김과장은 잠시 웃다가 더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이 일어섰다.

서유진은 순간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가지고 온 CD 복사본과 진술을 정리한 서류봉투는 탁자 위에 놓인 채였다.

서유진은 그것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조아리듯 두 손을 모으고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장학관님, , 잘 알겠습니다. 제가 시청으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학교에서 교장과 그의 동생 서무실장, 생활지도교사 등등이 일으킨 범죄입니다. 피해자들은 정말 힘 없고 불쌍한 아이들입니다. 그 아이들은 배움을 얻어야 할 학교에서 자신들을 가르쳐야 할 선생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적어도 학교 책임자들이 연루되었다는 혐의가 있으니 교육청에서 우선 감사라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는데요."

김과장은 최장학관의 눈치를 살피며 서 있었다.

장학관은 서류에 무언가를 휘갈겨쓰다가 잠시 고개를 들더니 뭐, 원한다면 그 정도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거야 저희가 늘 하고 있는 일입니다. 또 저희가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구요. 김과장! 나가서 자애학원 한번 체크하세요."

", 알겠습니다." 김과장이 대답했다.

장학관이 체크하라고 하고 실무자가 그러겠다고 하니, 서유진은 더 할말이 없었다.

문을 밀고 나오다가 그녀는 문득 멈추어 섰다. 벽에 걸린 표창장이 보였다.

거기에는 "무진여고를 빛낸 사람, 최수희"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최수희 장학관은 끝내 책상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쪽을 의식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많이 의식하고 있어서라는 것을 유진은 느꼈다.

교육청을 나서는 유진의 발 아래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올가을 첫 낙엽이었다.

 

시청 사회복지과 장과장은 종이컵을 들고 먼 곳을 바라보며 후루룩 소리를 내어 커피를 마셨다.

중키에 약간 마른 듯한 체구, 그리고 잔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서유진의 말을 들으며 머리를 긁고 나서 몹시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학교 일인데 교육청으로 가셔야지, 여긴 아이들 생활복지 담당하는 데니까요."

만일 교육청보다 이곳에 먼저 왔다면 좀 화가 덜 났을까?

서유진은 장과장에게 바싹 다가갔다.

그리고 어떻게든 발끈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육청에 갔더니 학교가 끝난 후에 기숙사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시청 사회복지과로 가라고 해서 왔는데요."

장과장은 여전히 서유진을 바라보지 않은 채,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커피를 후루룩거리며 마셨다.

대체 이야기할 때 상대방을 바라보지 않는 저 고약한 버릇은 어디서 배워먹은 것일까.

그러나 서유진은 어쨌든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니까 애들이 그 사건을 자애원에서 당한 거예요?"

장과장이 비로소 곁눈으로 서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여기 피해자의 진술을 담은 동영상하고 진술서를 가지고 왔어요. 이걸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게 그러니까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서유진은 잠깐 한숨을 쉬었다. 벌써 세 번째 설명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기숙사에서 나오다가……"

"그러니까 이보세요, 서간사님. 다른 건 내가 수사할 일도 아니고, 내가 알 일도 아니니 됐구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 일을 당한 게 기숙사 안이냐구요?"

"장소는 학교였죠. 우선 일층 화장실, 그리고 교장실 그리고 서무실……"

서유진은 유리의 진술이 떠올라 잠시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장과장은 남은 커피를 다시 후루루룩 소리가 크게 울리도록 마시더니 대답했다.

"그러면 교육청으로 가셔야 돼. 여긴 자애원 아이들 생활만 담당하는 거고 예산배정 그런 거 하는 데니까요. 교육청으로 가세요."

장과장은 다시 종이컵을 들어 후룩 커피를 마셨다.

회전의자를 뱅그르르 돌리자 그의 등이 보였다.

서유진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저 돌린 등을 갈겨줄 수 있다면 폭력이 언제나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인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갑자기 내가 지금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 있나, 잠시 웃음이 나올 것도 같았다.

"교육청은 방과후의 일이라 자기네 관할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아이가 기숙사 내에서 성폭행을 당했어요. 그게 어떻게 여기 관할이 아니라고 하시는 거예요?"

옆자리에 있던 공무원 하나가 몹시 시끄럽다는 듯 끙, 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슬리퍼를 끌며 창가로 다가갔다. 서유진은 자신이 마치 잡상인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이보세요, 장과장님. 자애학원하고 자애원이 일년에 정부에서 받아가는 돈이 40억이에요. 그거 다 우리 세금이잖아요. 그러니까 장애인 아이들 데리고 가서 잘 키우는지 어떤지 당신들이 감시해야 하는 거 맞잖아요. 아이가 기숙사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구요. 아이가, 그것두 기숙사 생활을 지도해야 할 교사에게 당했다구요!"

장과장은 언성을 높이는 서유진의 말투가 거슬린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대꾸했다.

"그러니까 선생이 폭행한 거는 교육청 소관이라니까요. 선생 감시까지 사회복지과에서 하느냐고요. 그리고 예산이 잘 쓰이는지 아닌지는 시의원님들이 판단하는 거니까 시의회로 가보시든가."

옆자리에 앉은 중년 남자가 자리로 돌아오며 낮게 말했다.

"참 아침부터 성폭행, 성폭행 하는 말 들으니까 좀 거시기하네. 것두 젊은 여자분 입으로. 허허허."

"당신들도 자식이 있을 텐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어쨌든 당신들은 자애원을 감독하라고 월급 받는 거 아니에요?"

서유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따졌다.

"글쎄 교육청으로 가세요. 아침부터 아줌마가 와서 목소리만 높인다고 우리 관할 아닌 게 우리 관할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사정은 딱한데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니까요."

그들은 돌아앉았다.

장과장이 마지막 남은 커피를 마시는 후루루룩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시청 사회복지과 문을 밀고 나오는데 다리가 휘청했다.

서유진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천천히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는 잠시 후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차에 탔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강인호였다.

"송하섭 선생이라고, 농인인데 말은 할 수 있어. 내가 전에 말했었지, 유리를 신고하게 해준 그 지도교사. 혼자서 교문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길래, 내가 일단 서 선배 명함을 줬어…… 듣고 있는 거야?"

"……."

"가면 잘 좀 안내해줘. 그리고 연두랑 유리는 학교 측에 대충 둘러댔는데 아마 조만간 난리를 칠 거 같아. 왜 그래 서 선배? 혹시 울어?"

"인호야……"

유진은 낮게 그 이름을 불렀다.

강인호가 수화기 저쪽에서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우리나라 그렇게 좋은 나라 아닌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그지 같을 줄은 몰랐어. 우리 많이 힘든 싸움을 해야 할 거 같아. 교육청, 시청, 다 얽혔어. 무진여고 무진고, 아니면 초등학교 아니면 처조카 아니면 무사모, 아니면 영광제일교회…… 인호야, 글쎄 40억이야 40! 그 인간들이 우리 세금 일년에 40억 가져다가 그런 짓을 한 거야. 예산 감시하는 시의회에 진정하러 가려고 했더니 시의원들 몇 명이 성폭행으로 성추행으로 입건된 상황이래. 것두 한 놈은 엘리베이터 걸을 추행한 혐의야, 엘리베이터 안에서…… 너무 코미디 아니니? 인호야, 우리 여기서 딸 키우고 살아야 하는 거지? 이 발정 난 나라에서, ?"

강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차를 몰고 길을 달렸다.

안개가 걷혔지만 거리는 아직도 뿌연 빛이었다.

여러 번 눈을 떠도 또 하나의 눈꺼풀을 더 떠야 할 것같이 거리는 불투명했다.

무진기행의 표현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그 무진의 안개였다.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면서도 외롭다는 생각을 그녀는 하지 않았다.

오늘 밤 아이가 아프지 않기를 기도했고, 내일 아파트 관리비를 밀리지 않게 되기를 빌었고, 한 달에 한 번은 돼지갈빗집에서 외식을 하면서 사는 것이 기뻤다.

아이들이 일 인분을 더 먹자고 할 때 두렵지 않으면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외롭다는 생각…… 같은 건 아이들이 크면 하자고, 선천성 심장기형으로 태어난 둘째가 건강해지면 하자고 그녀는 오래전부터 결심했었다.

그런데 이 순간, 그녀는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습기 찬 바람의 알갱이가 무수한 가시돌기처럼 느껴졌다.

뺨이 따갑도록 외로웠다.

그래도 유진은 아직은 큰 소리로 울지는 않았다.

-유리 데리고 산부인과 다녀왔어요. 산부인과 진료 받게 하구 진단서 뗐구. 처녀막 파열에 외음부 찰과상과 열상이 심했던 모양인지 상처가 덧나서 아이가 밤에 잠을 못자……서간사 말야, 어떻게 보면 유리가 지능이 좀 떨어지지 않았다면 이 아이가 어떻게 그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을까 싶어. 그렇지? 서간사 차라리 그게 나은 거지……

어젯밤 성폭력상담소장이 훌쩍이며 전화로 전한 말이 떠올랐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액셀러레이터를 더 세게 밟았다.

바다까지 이어진 만에 서 있는 갈대들이 퇴각하는 안개의 이빨에 물린 채로 파랗게 질려 있는 것 같았다.

파랗게 열린 하늘 아래 출렁이는 바다를 본 것이 아주 오래전의 일인 것 같았다.

큰아이 바다가 아직 어린데 작은아이 하늘이를 가진 것을 안 것은 이미 남편과 별거가 시작된 다음이었다.

작은 체구에 배만 커다랗게 부른 그녀의 얼굴에는 기미가 까맣게 덮였고 낯빛은 누르죽죽했다.

예민해진 마음은 하루에도 몇번씩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자주 낮은 곳으로 엎어졌다.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대형서점에 들러 책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누군가 자신의 배를 톡, 하고 건드렸다.

자신이 잘못해서 책장을 건드렸나 싶어 살펴보았는데 아니었다.

아직 태동을 느낄 개월 수가 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그 감촉을 무심히 지나쳤고, 다시 책을 찾으러 여기저기를 걷고 있었다. 그때 다시 누군가 배를 톡, 하고 찼다.

그녀는 멈추어 서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아직 바람이 매운 봄날에 언 땅을 뚫고 솟아나는 싹처럼 그렇게 하늘이는 작은 감촉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그때 대형서점 한 모퉁이에 서서 서유진은 조금 울었다. 그건 슬픔은 아니었다. 절망도 아니었다.

오만한 인간이 스스로의 작음을 깨닫는 순간, 더 거대하고 장엄한 것 앞에서 누구라도 가질 그런 경의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서 아이를 낳았다.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산파를 자신의 작은 아파트로 불렀다.

자신의 불행보다 더 끔찍했던 것은 그로 인해 닥쳐온 불행이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일이었다.

아마 갓난아이를 데리고 무진으로 내려온 것도 그런 이유가 더 컸을 것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너무 작았다. 입술이 파란 것도 맘에 걸렸다.

이 모든 것이 임신기간 동안 제대로 태교도 못한 엄마의 죄인 것 같아 그날 밤 서유진은 아이를 옆에 누인 채로 결심했었다.

엄마가 네게 공주 같은 옷은 입히지 못할지도 몰라. 레이스가 늘어진 침대도 사주지 못할지 몰라. 은식기에 차려진 캐비어도 네게 주지 못할 거야. 아빠랑 놀이공원에 가서 온 가족이 사진을 찍지 못할지도 몰라.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엄마가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어. 우리 바다하고 하늘이가 컸을 때 지금보다 더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여자인 너희들이 더 씩씩하게 거리를 걸어다니게 해주겠다고. 아주 조금이라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어쨌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엄마는 볼이 빨갛도록 뛰어다닐 거라고.’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사무실이었다.

유진은 아직도 유리창에 달려드는 안개 때문에 와이퍼를 작동시키고는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남자 간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좋은 소식이야. 서울에서 연락이 왔어. 우리 문제를 집중 보도한대. 지금 피디들이 출발한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 빨리 들어와요. 자료 정리랑 해야지. 손이 모자라는데 응? 서 선배 그리고 서울 국가인권위에서도 연락이 왔어. 우리 문제를 조사하겠다고 자료를 더 보내달라고 하네……"

유진은 그 자리에서 급하게 유턴을 했다. 노란 선이 그어진 도로였으니 명백한 위법이었다.

그러나 유진은 망설이지 않았고 무진 인권운동센터 사무실로 더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성추행뿐만 아니라 남자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 문제, 아이들의 열악한 식생활 문제도 이 기회에 폭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전화했어…… 강선생 반에 그 기숙사에서 맞은 아이가 있다는 말했었지? 그 아이를 오늘이라도 좀 외출시킬 수 있을까?”

서유진은 강인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인호는 아까 울먹이던 서유진 때문에 맘이 좋지 않아 운동장을 돌며 담배를 피우던 참이었다.

유진은 빠르고 다급한 말씨였다. 바람 불고 구름 끼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무진의 안개 끼고 축축하고 어두운 날씨보다는 그게 더 나을 듯하다고 강인호는 생각했다.

성추행하고 성폭력 부분은 우리가 녹화해놓은 동영상을 주면 되는데 폭행 문제는 우리가 좀 미리 알아야 브리핑이라도 하지. 하루라도 방송이 빨리 나와야 하루라도 더 문제가 빨리 해결될 거 아니야.”

알았어…… 근데 울더니…… 이제 괜찮은 거야?”

무심히 넘어가려다가 강인호가 물었다. 저쪽에서 수줍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울 시간은 많아. 그건 시간 많을 때 해도 되니까. 우선은 일이 더 급하잖아.”

강인호는 잠시 웃었다. 그러고는 문득 서유진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듯 돌연한 감정이었다.

물론 아내와 아이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주제에,라는 생각이 따라오지 않았다면 서유진을 생각하며 잠시 마음이 흔들렸을 것도 같았다.

그날 오후 그는 전민수를 데리고 나왔다.

민수는 자장면을 사준다는 말에 순순히 강인호를 따라나섰다.

민수 얼굴의 흉터는 이제 좀 나아가는 듯이 보였다.

아이에게 약속대로 자장면을 사 먹이고 무진 인권운동센터에 도착했을 때, 사무실 안은 이상한 활기로 북적이고 있었다.

여러 대의 카메라와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민수는 사람들을 보자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문밖으로 나갔다.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리고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때 송하섭 선생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민수는 그 자리에서 또 어딘가로 도망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송하섭 선생은 유진의 연락을 받고 막 센터로 들어서는 길인가 보았다.

송하섭 선생을 보자 민수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어색할 수도 있는 강인호와 송하섭의 개인적인 대면은 민수 덕분에 훨씬 부드러워질 수 있었다.

송하섭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민수를 불러 말했다.

일부러 강인호도 들으라는 듯 수화를 하는 동시에 소리내어 말했다.

민수야 괜찮아. 우리를 도와주시려는 사람들이야.”

송하섭의 수화를 바라보던 민수가 빤히 송선생을 올려다보았다.

송하섭이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수화로 다시 말했다.

-네게 나쁘게 했던 사람들을 말하려고 널 데리고 온 거야. 무슨 짓을 했는지 이야기하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민수가 다시 강인호를 바라보았다. 강인호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민수의 입가에 묻은 자장면 자국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불현듯 부임한 첫날 울고 있던 민수의 눈물을 닦기 위해 손수건을 꺼냈던 장면이 떠올라왔다.

그 전날 그 아이의 동생이 철길에서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그때 강인호가 못 알아듣는지도 모르고 격렬한 수화로 이야기하던 민수.

강인호가 민수의 입가를 닦아주는 동안 민수는 아기처럼 가만히 있었다.

강인호가 민수의 두 어깨를 잡았다. 어깨는 앙상했다. 그 앙상한 어깨의 감촉이 강인호에게 사무쳐왔다.

대체 이 아이들을 어떻게 먹이고 어떻게 재웠기에 하나같이 이렇게 작고 앙상한 것인지 말이다.

강인호는 민수의 어깨를 놓고 수화로 다시 말했다.

-여기는 안전한 곳이야. 여기는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때리는 사람들을 벌주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곳이야.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해야 한다. 네가 하는 말이 전국에 텔레비전으로 나갈지도 몰라. 전민수! 말하자면 너는 농인 대표선수로 여기 와 있는 거야. 알았어? 잘해야 돼.

텔레비전이라는 말에 민수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금세 어두워졌다.

송하섭이 그런 민수를 데리고 센터 안으로 들어섰다.

녹화가 시작되었다. 하는 수 없이 이 대열에 동참한 수화통역사도 와 있었다.

-자애원의 밥을 못 먹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점심은 맛있습니다. 점심에는 학교 선생님들과 모두 다 같이 식사를 하니까요. 그런데 저녁식사는 점심에 남긴 밥을 대충 섞어 볶거나 끓여서 나옵니다. 어떤 때는 탕 안에서 나무젓가락이 나오기도 하고, 우리 기숙사생들은 그걸 돼지밥이라고 부릅니다. 그걸 먹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간식을 사 먹을 수는 있나요?

-부모님이 오시거나 돈이 생겼을 경우 나가서 사 먹을 수는 있지만 부모님이 가지고 오신 케이크나 과자 등은 생활지도사 선생님들이 모두 압수해 갑니다.

-때리기도 합니까?

민수의 얼굴이 수그려졌다.

-동생이 사고로 죽었다고 들었는데 왜 기찻길까지 갔습니까?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혼자 외출하는 건 위험했을 텐데요. 왜 동생은 거기까지 갔습니까?

민수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입을 다물었다.

강인호가 민수의 손을 잡으려는 것을 송하섭이 가볍게 제지했다.

그리고 송하섭이 민수에게 무슨 말인가를 수화로 했다.

말을 할 수는 있는 그가 말을 하지 않은 것을 보아서는 둘만이 주고받을 말인 것 같았다.

민수의 마르고 긴 얼굴이 씰룩이기 시작했다.

조명이 비추는 그 아이의 이마에 진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동생이 죽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동생도 많이 맞았습니까?

민수는 수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로 딱딱한 긴장이 어렸다. 실내는 숨이 멎을 듯이 고요했다.

-누구에게 맞았나요?

민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송하섭과 강인호의 애타는 눈길이 민수에게 가서 머물렀다.

민수는 그들을 의식한 듯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아이의 앙상한 등과 가슴 언저리에 땀이 배어 티셔츠가 젖어가고 있었다. 식은땀이었다.

-박보현 생활지도교사에게도 맞고 선배들에게도 맞았습니다.

-주로 어떤 때에 맞았나요? 규칙을 자주 어겼습니까?

무슨 말인가 하려던 민수가 갑자기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다.

돌연한 사태였다. 강인호가 다가가 민수를 붙들었다.

그리고 민수는 통역사가 아닌, 송하섭 선생을 향해 격렬한 수화를 시작했다.

민수의 수화를 보던 송하섭의 두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곁에서 바라보는 통역사의 얼굴도 순간 몹시 창백해졌다.

무슨 일이죠? 뭐라고 하는 거예요?”

서유진이 말했다.

그냥 두십시오. 일단 녹화를 떠두면 나중에 저희가 서울에서 다른 통역사를 불러 통역해도 됩니다. 일단은 아이의 감정을 자극하거나 거스르지 마세요.”

서울에서 온 피디가 낮은 목소리로 서유진에게 말했다.

송하섭이 아이의 수화를 듣다 말고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그의 눈은 멍했고 어떤 곳을 쳐다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수화통역사가 어이없다는 듯 굵은 침을 삼켰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송하섭은 이제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수화통역사에게 쏠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민수에게 다시 수화를 했다.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그날, 동생이 왜 시내로 나간 거죠?

민수는 발작이 지나간 듯 고개를 다시 들더니 수화를 시작했다.

-박보현 선생님이 아침에 기숙사에서 퇴근을 하시면서 생활지도교사들은 밤새워 근무를 하고 아침에 퇴근하시거든요 저하고 동생에게 집에 가서 컴퓨터게임을 더 하게 해주겠다고 해서 동생과 저는 따라갔어요.

-그래서요?

-집에 도착하니 박선생님이 컴퓨터가 있는 방을 하나 보여주시면서 저보고 거기서 게임을 하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동생을 데리고 나가셨어요.

-어디로 데리고 갔나요?

-옆방으로요.

갑자기 서유진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침묵은 계속되었다.

센터 회의실 전체를 거대한 롤러로 찍어내리는 듯했다.

-그러고는요?

-그러고는 한참 게임을 했어요……보통 때 같으면 한두 시간 지나서 그만하라고 하실 텐데 시간을 보니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나 있었어요. 거실로 나가보니 박보현 선생이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어요. 제가 제 동생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혼자 기숙사로 가버렸다고 했어요.

민수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동생은 기숙사로 가는 길을 몰라요. 돈도 없고, 그럴 리가 없었지요. 밖으로 나갔는데 안개가 너무 심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저는 박보현 선생님 집 근처에 기차가 지나다닌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죠. 저는 그 이후로 동생을 영영 보지 못했어요.

-동생이 왜 나갔다고 하던가요?

-박보현 선생은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러더니 저보고 제 동생 영수처럼 이 안개 속에서 고생하다가 잘못하면 나쁜 놈들에게 끌려갈 거라고…… 했어요. 금 있다가 라면을 끓여먹고 학교로 데려다준다고 했어요. 저는 동생이 걱정되어서 견딜 수가 없고 미칠 것만 같았어요. 그 애는 글씨도 제대로 모르고 전화번호도 외우지 못해요. 그런데 박보현 선생은 저를 소파에 쓰러뜨렸어요. 그리고 제 바지를 벗겼어요.

듣고 있던 서유진이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민수는 그걸 듣지 못했고 수화는 계속되었다.

 

그런 일이 있다. 그는 무심히 아이의 가느다란 팔뚝 위에 꼬물거리는 작은 벌레 같은 것을 발견한다.

초여름 나무 위에서 떨어진 애벌레인 줄 알고 무심히 손가락으로 그것을 떼어내려고 집어든다.

마치 작은 밥풀을 떼어내듯 말이다.

그는 그것을 가볍게 집어내는데 그것은 아이의 피부 위 미세하고 작은 숨구멍으로부터 쭈욱 뽑아져 나온다.

가슴이 철렁한다. 애써 철렁한 가슴을 무마하려고 눈꺼풀을 두어 번 깜박이며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본다.

하나가 사라진 자리에 다른 애벌레만 한 것이 고개를 내밀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꼬물거리고 있다.

설마 하면서도 다시 그것을 떼어내려고 한다.

손가락으로 집는다. 월남 쌀국수 가닥보다 가느다랗고, 희고, 긴 벌레가 죽 당겨져 나온다.

그리곤 이내 다른 것이 바로 그 자리에서 나와 꼬물거리고 있다.

아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의 온 땀구멍마다 그런 벌레들이 나와 꼬물거리고 있다.

강인호는 차마 그 광경을 다 지켜볼 수 없다. 아이에 대한 연민보다 그 광경에 대한 혐오가 더 커진다.

혐오, 신이 기괴하거나 비뚤어진 것으로부터 연약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주었던 제일 감각.

강인호는 고개를 돌린다. 도망치고 싶지만 차마 그 아이를 버리고 갈 수가 없다.

벌레들은 조금씩 아이의 땀구멍에서 더 길게 뻗어나와 온몸을 흔들어댄다.

아이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아이는 과자를 먹고 있다.

가느다란 벌레들이 춤을 추는 손을 뻗어 무심히 과자를 잡는다.

아이는 민수고 아이는 유리고 아이는 연두고 아이는 딸 새미다. 다가가 새미의 팔뚝을 잡는다.

안돼,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자신의 팔 위로도 그 벌레들이 길게 나와 춤을 추고 있다.

아아아---”

그렇게 비명은 그날 이후 강인호의 새벽잠을 덮쳤다.

베갯머리에 젖은 땀과 꿈에서 깬 후온 피부 위로 그물을 씌운 듯한 스멀거림.

그것은 찬물을 마셔도 가셔지지 않았다.

오늘은 그날 다녀간 그들이 자애학원 사건을 방송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새벽이 오긴 왔는지 창문은 푸르스름했다.

시간을 확인하려고 머리맡의 핸드폰을 들어보니 역시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서유진의 문자가 와 있었다.

너무 잠이 안와 바닷가로 나왔어. 갯벌 너머로 푸르스름하게 새벽이 오네.

세계가 거짓말을 하는 날들이 있고 세계가 진실을 말하는 날들이 있지. 잔인하고 집요한 진실.

강인호는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리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멀리서 청소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길게 끌리듯 들려오고 있다.


생각보다, 많이 충격적이네요. 힘내십시오,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가면서 피디가 문자를 보냈다.

경찰은 아직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강인호는 세수를 하고 여기저기 흩어진 옷가지와 물컵 그리고 수건들을 정리했다.

왠지 오늘 이후 세상은 오늘 이전의 세상과 아주 다를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강인호는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시간을 맞추어 무진 인권운동센터 사무실로 길을 나섰다.

거리는 여전히 북적이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한 날 그를 잡았던 어린 창녀는 아직도 그 거리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강인호와 눈이 마주쳤으나 전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그도 무진의 안개에 젖어 퇴락의 냄새가 배어버렸을 것이고

이 거리의 누구라도 그녀에게 그렇듯 그저 흘러 다니는 지폐로만 보일 테니까.

사람들은 식당 문을 열고 나와 걸어갔다.

차들이 빵빵거렸고 헤드라이트가 번쩍거렸다.

스스로는 한 번도 원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그 또한 이제 그렇게 그 거리에서는 군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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