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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The Captain’s Daughter)

대위의 딸(The Captain’s Daughter)

Aleksandr (Sergeyevich) Pushkin

 

1장 근위대의 중사

내일이라도 근위대 대위가 될 수 있을 텐데.”

그건 안 돼. 보병대에 집아넣어 둬.”

그 말 잘 하셨쇼. 따끔한 맛을 좀 보여줘야 돼요.”

그런데 그놈 아비는 어떤 작자요?”

-크냐지닌 Княжнин [타라카노바 황녀 Princess Knyazhnin]

(야코프 보리소비치 크냐지닌(Yakov Borisovich Knyazhnin, 1740-1791)은 러시아 극작가)

 

내 아버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그리뇨프(Andrey Petrovitch Grineff)는 청년시절 미니프(Munich) 백작 휘하에서 장교로 근무하다가 17xx년에 중령으로 퇴역했다. 그리고 신비르스크(Simbirsk)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난한 귀족인, U의 딸 아브도차 바실리예브나(Avdotia Vassilievna)와 결혼했다. 애는 아홉 명이나 태어났는데 나만 살아남고 여덟 명은 모두 어릴 때 죽었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아버지는 나를 아들이라고 확신했는지 가까운 친척뻘이 되는 근위대소령 B공작의 도움을 얻어 태어나지도 않은 나를 세묘노프(Semionoff) 근위대에 중사로 등록했다. 만약 예상을 뒤엎고 기대에 어긋나게 어머니가 딸을 낳았더라면 아버지는 사망 신고를 해서 이 중사의 등록을 취소했을 것이다. 학업을 마칠 때까지는 휴가 중이라는 형식이 취해졌는데, 당시 우리가 받은 교육은 요즘 것과는 그 방법이 달랐다. 다섯 살 때부터 나는 우리 집 하인 사베리치(Savelitch)의 손에 맡겨졌다. 이 사나이는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나를 가르치고 키우는 일체의 양육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지도를 받아 여러가지 공부를 했다. 열두 살 때는 러시아 어로된 책을 읽고 러시아 어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좀 더 자라자, 아버지는 보플레(Beaupre)라는 프랑스 인을 가정교사롤 고용했는데 이 선생은 모스크바에 주문했던 1년분의 포도주와 올리브유와 함께 도착했다. 사베리치는 가정교사 채용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도련님께서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목욕도 자주 시키고 머리도 빗겨주고, 먹고 싶어 하는 건 무엇이든 즉시 갖다 바치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프랑스 건달을 가정교사로 끌어들이는지 모르겠네. 돈이 아까워, 돈이. 그런 것한테 헛돈을 쓰다니. 우리 하인들만으로는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지, !”

그는 화난 얼굴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보플레 선생은 고국에서 이발사로 일하다가 프로이센(Preußen [Prussia])에 가서 군대생활을 조금하고는, pour etre Outchitel(선생 노릇을 하기 위해) 러시아로 건너왔지만, 가정교사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바탕은 무골호인이었으나 결박하고 몸가짐이 좋지 않은 점에 있어서 결코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위인이었다. 그의 가장 큰 결점은 여자를 보면 분별없이 정열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이 고약한 버릇 때문에 그는 며칠씩이나 밤낮으로 끙끙 앓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술하고는 애초에 원수라도 진 일이 있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마셔댔다. 러시아식으로 말하면 한 잔 쭉 들이켜 뱃속을 후끈후끈하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저녁 식사 때만 포도주가 나오고, 그것도 작은 컵으로 한 잔씩만 마시는데 그나마 무슨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함부로 포도주 잔을 꺼내지 않는 것이 통례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플레 선생은 러시아 토산의 과실주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보다 위장에 더 좋은 약은 없다면서 프랑스의 포도주보다 이 과실주를 즐겨마시게 되었다.

보플레 선생과 나는 얼마 안가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애초의 계약대로 한다면 그는 프랑스 어와 독일어, 그리고 그 밖의 필요한 여러 가지 학문을 내게 가르칠 의무가 있지만 그보다 먼저 러시아어를 나한테 배우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결국 입장이 거꾸로 되고 말았다. 내 덕분으로 서투르게나마 러시아어를 한두 마디 지껄이게 되자 나에 대한 그의 태도는 더없이 부드럽고 친절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서로 상대방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고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나는 점차 보플레 선생이 좋아지기 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우리 사이를 운명의 장난이 갈라놓고 말았다. 다음과 같은 소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세탁 일을 맡아 하는 뚱뚱한 곰보 하녀 파라시카(Palashka)와 외양간 일을 하는 애꾸눈 하녀 아클리카(Akoulka)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숫처녀인 자기들을 유혹해서 мусье[mus’ye 선생]이 몸을 더럽혔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했다. 용한 성격의 어머니도 이런 일만은 덮어둘 수 없었는지 즉시 아버지에게 알렸다. 아버지의 처벌은 가차 없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하인을 불러 프랑스인 악당을 끌어오라고 호령했다. 가정교사를 부르러 갔던 하인이 돌아와서 무슈 선생은 지금 도련님께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고 보고하자 아버지는 직접 내방으로 행차했다. 그 때 보플레 선생은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었으므로 나는 혼자서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 마디 말해둘 게 있다. 아버지는 내 지리 학습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해서 일부러 모스크바에 사람을 보내 큰 지도를 한 장 구해왔는데 그것이 제 구실을 못하고 한쪽 벽에 장식처럼 걸려 있었다. 나는 벌써부터 이 지도를, 바라기보다는 두껍고 질겨 보이는 종이를, 탐내고 있었다. 그 종이로 연을 만들 작정이었다. 보플레 선생이 자고 있어 마침 좋은 기회를 얻은 나는 작업에 착수해 케이프타운 희망봉을 오려서 길게 꼬리를 달고 있을 때 아버지가 들어온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지리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내 귀를 한 번 잡아당기더니 보플레 선생이 잠자고 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거칠게 그를 흔들어 깨우더니 소리치기 시작했다. 보플레 선생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허사였다. 팔과 다리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가엾은 프랑스인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의 멱살을 잡아 침대에서 끌어내리더니 욕설을 퍼부으면서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그리고 그날 중으로 그는 아주 해고돼 버렸다. 보플레 선생을 쫓아낸 날 사베리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내 교육은 이것으로 끝장이 나고 말았다.

그 후 나는 마당에서 모이를 쪼는 비둘기를 쫓아 날리기도 하고 농노의 아들놈들과 개구리 뛰기나 말타기 같은 놀이를 하면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내 앞에 운명의 갈림길이 당도한 것은 만 16살 때였다. 가을의 어느 날 어머니는 응접실에서 벌꿀로 만든 잼을 찌고 있었고 나는 곁에서 침을 삼키며 그 냄새를 맡고 있었다. 아버지는 창문 옆에서 해마다 집으로 송달되는 <волнение желчи [volneniye zhelchi] (궁중(宮中) 연감(年鑑))>을 읽고 있었는데 이 책은 아버지에게 강렬한 영향과 감흥을 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 책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고, 읽고 나면 반드시 이상하리큼 마음이 들뜬 표정을 드러내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태도는 보기에 안 좋았던 듯 그것을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치워두곤 했다. 그 대신 한번 손에 잡혔다 하면 아버지는 좀처럼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날도 아버지는 어깨를 움츠리기도 하고 중얼중얼 소리를 내리도 하면서 감흥어린 눈으로 이 <궁중(宮中) 연감(年鑑)>을 읽고 있었다.

육군 중장이라, 그놈은 내가 지휘하던 중대에서 중사로 근무했는데러시의 최고 훈장을 2개나 받았구먼. 그놈이 이렇게 되다니.”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다가 아버지는 연감을 곁의 소파에 올려놓고 깊은 생에 잠겼는데, 이것은 무슨 좋지 못한 말을 끄집어내는 아버지의 버릇이었다. 갑자기 침묵을 깨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돌아다니며 물었다.

아브도차 바실리예브나, 페트루샤(Petrousha)가 지금 몇 살이지?”

16살의 생일이 지났어요. 페트루샤가 태어나던 해에 나스타샤 게르시모브나(Nastasia Gherassimovna) 백모님의 한쪽 눈이 짓물러서 멀어졌고 또.”

됐군!”

아버지는 말을 가로막았다.

군대에 보내도 좋을 때가 됐어. 16이면 하녀들 방에서 달음박질치고 비둘기 집에 기어 올라갈 나이는 아니야.”

눈앞에 닥쳐온 아들과의 이별을 생각하고 어머니는 가슴이 쓰라려 자신도 모르게 냄비 속에 손가락을 빠뜨렸다. 그러고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어머니의 슬픔과는 정반대로 내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상상하던 군대 생활은, 자유롭고 즐거운 것으로만 생각되는 페체르부르그의 생활에 대한 상상과 일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근위장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 보며 인간으로 태어나 그 이상의 행복은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일단 마음먹으면 그 뜻을 변경하거나 실행을 연기하는 법이 없는 아주 완고한 사람이었다. 마침내 출발 날짜가 결정되고 그 전날 아버지는 미래의 내 상관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며 펜과 종이를 가져오게 했다. 그 때 어머니가 말했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B공작에게 제 안부도 전해주세요. 그리고 페르투샤를 잘 돌봐주십사 하고 부탁 말씀드린다고 적어주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어째서 내가 B공작한테 편지를 써야 한단 말이오?”

아니, 금방 페트루샤의 상관에게 편지를 쓰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어요?”

, 그랬어. 그게 어떻다는 거요?”

페트루샤의 상관은 B공작이 아녜요? 저 애는 세묘노프 근위 연대에 등록되어있으니 말예요.”

등록 따윈 소용없다오. 페트루샤는 페체르부르그에 안 보내. 그런데 가서 뭘 배우겠어? 안 돼. 근위 연대는 안 돼. 이놈은 보병부대로 보내야 해요. 무거운 탄약 상자도 나르고 화약 냄도 맡으면서 고생을 해야 훌륭한 군인이 돼요. 페체르부르그에 가면 낭비와 도락에 물들 위험이 많아. 근위대에 등록은 했지만 근무까지 시킬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소. 이놈을 놈팽이로 만들고 싶진 않으니까, 이 아이의 거주증(пашпорт [pashport])은 어디 있소? 이리 갖고 와요.”

어머니는 내가 세례를 받을 때 입었던 옷과 함께 보관해 두었던 거주증을 갖고 와서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에게 주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받아 찬찬히 훑어보더니 책상 위에 놓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페체르부르그가 아니라니. 나는 순간 두려움과 호기심에 잔뜩 긴장했다. 내 눈은 천천히 움직이는 아버지의 펜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아버지는 편지를 다 쓰자 거주증과 함께 봉투에 넣고는 안경을 벗어 놓고 내게 말했다.

이 편지는 안드레이 카를로비치 P.(Andrey Karlovitch P.)에게 보내는 거다. 갖고 가라. 안드레이는 옛날의 내 동료다. 퍽 친숙하게 지냈다. 너는 올렌부르크(Orenburg)에 가서 이 사람이 지휘하는 부대에 근무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내 꿈은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페체르부르그의 즐거운 생활 대신 쓸쓸한 변경의 지루한 생활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가슴을 부풀어 오르게 했던 군대 생활이 이제 와서는 견딜 수 없는 불행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튿날 아침 하인들은 кибитка [kibitka](여행용 썰매)를 현관 앞에서 매고 트렁크며 다기와 그 밖의 자질구레한 일용품이 담긴 궤짝이며 귀염둥이 아이에게 주는 마지막 기념물이 될 흰 빵과 고기만두를 넣은 작은 상자 등속을 실었다. 양친은 나를 축복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표트르(Piotr), 가서 충실히 근무해야 한다. 일단 충성을 맹세하면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돼. 알겠나? 상관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것도 좋지 않아. 쓸데없는 일에 함부로 나서는 경박한 태도도 취하지 말아라. 근무를 태만히 하는 건 더욱 나쁘다. ‘옷은 처음부터 아껴 입고 이름은 젊을 때부터 아껴라라는 속담을 항상 명심해라.”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몸을 조심하라고 거듭 말하고는 사베리치에게는 나를 잘 돌봐 주라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일렀다. 나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토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그 위에 역시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걸쳤다. 그리고 사베리치는 함께 포장을 둘러 씌운 썰매를 타고 집을 떠났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 날 저녁 우리는 신비르스크(Simbirsk)에 도착했는데 필요한 물건을 사 모으기 위해 거기서 하루를 머물러야 했다. 물건을 사는 것은 사베리치가 할 일이었다. 우리는 음식점을 겸하고 있는 여관에 묵었다. 이튿날 아침 사베리치는 물건을 사러 나가고 나는 연관에 남아 창문 너머로 지저분한 길거리를 바보고 있었는데 얼마 안가서 싫증을 느껴 여관 안을 이리저리 어슬렁거렸다. 당구장에 들어가 보니, 서른대여섯 살쯤 되는 키가 크고 콧수염을 기른 신사가 잠옷 바람으로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의 상대는 보드카 한 잔 얻어 마시고 지면 당구대 밑을 엉금엉금 기어다니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가 매번 그 짓을 하는 거였다. 나는 한참 동안 그들의 게임을 구경하고 있었다. 승부가 거듭됨에 따라 상대는 4발 산책을 부지런히 하다가 나중에는 당구대 밑에서 뻗어버리고 말았다. 신사는 마치 조사를 외는 것 같은 말투로 그를 놀려주고는 내게 한 판하자고 말했다. 나는 당구를 칠 줄 모르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러자 신사는 딱하게 여기는 듯한 시선을 내게 던졌다. 그러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신사는 제XX기병연대에 근무하는 대위로 신비르스크에 와서 이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이름은 이반 이바노비치 주린(Ivan Ivanovitch Zourine)이었다. 주린은 함께 군대식으로 식사를 하자고 나를 초대했다. 나는 기꺼이 이 초대에 응했다. 우리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주린은 몇 잔의 술을 연거푸 들이켜고 나서 군대생활의 요령을 빨리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내게도 술을 권하고는 군생활의 갖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에피소드의 내용이나 말하는 투가 아주 재미있고 유쾌했다. 우리는 친숙한 사이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린은 그 때 당구를 내게 가르쳐주겠다고 말했다.

이건 군대 생활에서는 절대로 필요해. 그러니까 배워둬야지. 가령 행군 도중에 벽지의 어떤 도시에 들어갔다고 해보자. 유태인을 때려눕히는 것만으로는 심심풀이가 되지 않아. 싫든 좋든 술집에 들어가게 되고 한 잔 한 다음에는 당구라도 칠까 하면서 큐를 잡게 마련이야. 그러니까 배워둬야 하지 않게나.”

나는 이 말을 옳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당구를 배웠다. 주린은 내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뜻밖에 숙달이 빠른 데에 탄복했다. 그는 대여섯 번 연습상대가 되어 주더니 한 2코페이카(копейка [copeck]) 씩 걸고 치자고 말했다. 돈을 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아무것도 걸지 않고 그냥 게임을 하면 싱겁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말에 동의하자 주린은 폰스[punch]를 주문하더니 폰스 없는 군대 생활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자꾸만 내 잔에 그것을 따랐다. 나는 그가 권하는 대로 술을 마셨다. 그러는 동안에도 우리의 게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술잔을 기울이는 횟수가 잦아짐에 따라 대담해져서 내가 치는 공은 당구대 밖으로 날아가기가 일쑤였다. 나는 술김에 후끈 달아 아리숭하게 채점하는 카운터에게 똑똑히 셈을 하라고 호통을 치고는 2코페이카씩으로 했다.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된 풋내기의 만용을 과시한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밤이 꽤 깊어졌다. 주린은 시계를 보더니 큐를 놓고 내가 내야할 돈이 1백 루블이라고 말했다.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내 돈은 사베리치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린은 내 말을 가로막았다.

괜찮다. 염려 마라. 나중에 내도 좋아. 그건 그렇고이제부터 우리 알리뉘시카(Arinoushka)한테 가보세.”

나는 이 말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날이 끝날 때까지는 나는 하루 종일 건달 짓을 한 셈이었다. 우리는 알리뉘시카 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주린은 군대 생활이 요령을 빨리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되풀이하서 연거푸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주린이 나를 여관까지 바래다준 것은 한밤중이었다. 사베리치가 현관 계단 밑에서 우리를 맞았다. 군대 생활에 대한 내 열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는 것으로 보고 사베리치는 안절부절 못했다.

도련님,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어디서 그렇게 곤드레가 됐습니까! 아아, 이 일을 어쩐다지?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웬 잔소리야, 영감! 쓸데없는 말 마라, 가서 자자. 나를 침대에 눕혀줘.”

이튿날 아침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쑤시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을 어렴풋이 기억에 떠올렸는데 이 상념을 차를 갖고 들어온 사베리치 때문에 지워지고 말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표트르 도련님, 술은 아직 이릅니다. 대체 누구를 닮으셨을까. 분명히 도련님의 아버님과 할아버님께서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또 어머님께서는 크바스(kvas) 밖에는 입에 대지 않으셨는데, 도련님이 그릇된 길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건 누구 탓일까요그렇지, 그 못된 가정교사 때문입니다. 그놈은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언제나 치피에나 집에 가서 “Madame, je vous prie, vodka(아주머니, 보드카를 한 잔 줘요)”고 했으니까. 도련님은 그놈한테서 물이 들어 ‘je vous prie’가 되고 말았어요빌어먹을 놈, 좋은 걸 가르쳐줬다. 그런 사교도를 가정교사로 고용했으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지. 그놈이 아니라도 우리 손으로 충분히 도련님을 돌보고 가르치고 할 수 있었는데.”

나는 기가 막혀서 얼굴을 돌린 채 그에게 말했다.

알았어. 저리 가, 사베리치, 차는 나중에 마시겠어.”

그러나 사베리치는 입을 다물려고 하지 않았다. 한번 설교를 시작했단 하면 성이 찰 때까지 떠들어 해대는 것이 그의 성미였다.

그것 보십시오, 표트르 도련님. 취하면 그렇게 됩니다. 머리가 무겁고 입맛이 떨어져요. 도련님이 벌써부터 술꾼이 되다니 정말 큰일이군요. 오이를 절인 소금물에 꿀을 타서 드시겠습니까?”

그때 어떤 소년이 들어와서 주인이 보낸 쪽지를 내게 주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친애하는 표트르 안드레비치, 어제 게임에서 자네가 지불하게 된 1백 루블을 이 소년 편에 보내주기 바라오. 지금 급히 돈을 쓸 일이 생겼소. 이만 줄이오.

이반 주린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짓고 돈이면 속옷이며 일체의 내 뒤치다꺼리를 는 사베리치를 돌아보며 이 소년에게 1백 루블을 주라고 명령했다.

“1백 루블을요? 그건 무슨 돈인데요?”

사베리치는 어리둥절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 사람한테서 꾸어 쓴 둔이야.”

나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사베리치는 물러서지 않고 꼬치코치 캐묻기 시작했다.

꾸어 쓴 돈이라구요? 아니 도련님, 언제 그렇게 많은 빚을 만들었습니까? 말씀하시는 게 이상한데요. 난 모르겠습니다. 돈을 꾸어 쓰시는 건 도련님 자유지만 난 그 빚을 갚아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이 결정적인 순간에 완고한 이 노인의 기를 꺾어놓지 않으면 앞으로 새로운 속박에 얽매여 곤란을 격을 때가 많으리라고 생각한 나는 위압적인 시선을 던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베리치. 나는 네 주인이고 너는 내 종이란 걸 모르니? 돈은 내 것이다. 내 돈 내 마음대로 쓰는 무슨 참견이냐? 1백 루블은 당구 게임에서 잃은 돈이다. 잔소리 말고 내가 하라대로 해!”

도련님, 표트르 도련님.”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를 너무 슬프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소중한 도련님, 이 늙은 것의 말을 듣고 그 도둑놈에게 그건 장난이다. 나한테는 그렇게 큰돈이 없다고 쪽지에 적어 보내십시오. 1백 루블이라니, 그렇게 큰돈을 빼앗기다니, 말도 안 되지. 호두 이외엔 어떤 것에도 안 된다고 부모님께서 엄하게 이르셨다고 그 도둑놈한테 써 보내십시오. 그리고.”

나는 눈을 부라리면서 그의 말을 막았다.

듣기 싫다! 잔소리 말고 빨리 돈을 갖고 와! 내 말을 안 들으면 당장에 해고하겠어!”

사베리치는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돈을 가지러 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정든 이 노인이 가엾게 생각되었지만 속박의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몸이 되기 위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나는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도 싶었다. 돈은 주린에게 전달되었다. 사베리치는 저주스러운 이 여관에서 한시 바삐 나가려고 했다. 얼마 후 나는 출발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러 왔다. 나는 내게 필요한 여러 가지를 가르친 주린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또 언제 그를 다시 만나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신비르스크를 떠나게 되었다.

 

 

2장 길잡이

엉망진창 인생, 내 조국 러시아[сторонушка(storonushka)],

낯설기만 한 땅,

오려고 한 적 없었고

무모하게 내 말이 데려온 것도 아니지만

신께서 어쨌든 오게 했지 :

신께서 그랬고, 욱하는 젊음이었고,

우유부담함[Прытость (Prytost)]였고, 성급한 치기였으며

그리고 휑한 선술집[кабацкая(kabatskaya)]이었다

-옛 민요-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당구 게임에서 잃은 돈 1백 루블은 그 당시로서는 쾌 큰돈이었다. 신비르스크의 여관에서 취한 내 행동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나 자신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베리치에게도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괴로움으로 가득 찬 머리를 가눌 수조차 없게 되었다. 선량하고 충실한 이 노인과 화해하고 싶었으나 적당한 구실을 찾을 수가 없어 나는 이런 두려움으로 말을 건넸다.

사베리치,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고 뉘우치고 있으니 이젠 마음을 돌려줘. 어제는 어쩌다 그만 그렇게 돼 버리고 말았어. 정말 미안해. 이제부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그러니까 사베리치, 화를 내지 말아줘.”

그러자 사베리치는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

표트르 안드레비치(Piotr Andrevitch) 도련님, 나는 나 자신에게 화를 낸 겁니다. 내가 잘못했어요. 도련님을 혼자 여관에 남겨두고 나 혼자서 물건을 사러 나간 게 잘못이었어요. 어제는 아무래도 귀신한테 홀렸던가 봅니다. 그곳 성당의 일을 보는 영감의 마누라가 내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라 인사라도 하고 간다고 잠깐 들렀는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그땐 도련님 생각을 미처 못했습니다. 아아, 주인어른과 마님을 무슨 낯으로 대할꼬. 도련님이 술을 마시고 노름을 했다는 걸 두 분께서 아시면 내 입장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엾은 사베리치는 슬픔에 잠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앞으로 그의 승낙 없이는 단돈 1코페이카도 쓰지 않겠다고 나는 약속했다. 노인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 같기는 했으나, 여전히 이따금 고개를 저으면서 ‘1백 루블! 적은 돈이 아니야!’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임지는 차츰 가까워졌다. 내 주위에는 언덕과 골짜기로 주름진 광막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이 눈에 덮여 있었고 해는 기울어지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말은 좁다란 길을 미끄러져 갔다. 이 길이란 것은 정확히 말하면 농부들의 썰매가 지나간 자국이었다. 갑자기 여행 마차의 마부(ямщик [yemstchick])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모자를 벗고 내게 얼굴을 돌렸다.

도련님, 되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 그래?”

날씨가 말썽을 부릴 것 같습니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어요. 저기 보십시오. 눈발이 흩날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러나, 괜찮아.”

아니, 저쪽을. 저쪽 하늘을 보십시오. 저건 구름입니다.”

흰 지평선과 맞닿은 동쪽 하늘 끝에 잿빛 구름이 보였다. 나는 처음에 그것을 언덕인 줄 잘못 보고 있었다.

도련님, 저 구름은 큰 눈보라가 불어 닥칠 조짐입니다.”

사베리치가 염려스러운 듯이 말했다.

이 지방의 눈보라는 아주 지독해서 농작물을 나르는 썰매의 행렬이 눈 속에 파묻혀 버리는 일도 가끔 있다는 말을 나도 들은 적이 있었다. 사베리치는 자기 의견에 따라줄 것을 바랐으나 내가 보기에는 바람은 별로 세게 부는 편이 아니었다. 나는 눈보라가 닥치기 전에 다음 숙박지에 도착할 생각으로 썰매를 더 빨리 몰라고 명령했다. 사베리치는 연방 채찍을 휘둘렀다. 그의 눈은 줄곧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차츰 거세게 불기 시작했고 구름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 하늘을 잿빛으로 뒤덮었다. 싸라기눈이 내리는가 했더니 갑자기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하늘과 들판의 눈바다가 한데 뒤엉켜 암흑의 천지를 만들고 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련님! 큰일입니다! 굉장한 눈보랍니다!”

나는 포장 안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주위는 온통 암흑과 눈보라에 뒤덮여 있었다. 회오리치는 바람은 마법사의 마술처럼 엄청난 힘을 보이면서 사납게 울부짖고 있었다. 마부석의 사베리치도 포장 안의 나도 눈사람처럼 되었다. 힘겹게 썰매를 끌던 말은 얼마 못 가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왜 안 가는 거야?”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러자 사베리치는 내려서면서 대답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도련님. 말한테는 죄가 없습니다.남의 의견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지 않는 게 도련님 취민가 봅니다.”

그는 화가 난다는 듯이 언성을 약간 높였다.

신비르스크로 되돌아가 여관에서 따끈한 차라도 마시고 아침까지 푹 쉬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빨리 썰매를 몰라 하시니 어디로 몰고 가란 말입니까? 도시 방향을 분간할 수 없는데.”

사베리치 말대로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눈보라는 점점 세게 몰아닥쳐 썰매 주위에 눈 언덕을 쌓아 올렸다. 말은 고개를 떨구고 이따금 몸을 부르르 떨면서 서 있었고 노인은 말의 갈기에서 눈을 털어 내기도 하고 마구를 고치기도 하면서 썰매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을이나 길의 흔적이라도 보였으면 하고 나는 사방팔방으로 눈을 돌렸으나 회오리치면서 불어닥치는 눈보라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검은 물체 같은 것이 문득 내 시야에 들어왔다.

사베리치! 저기 뭐가 보이지?”

나는 그곳을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노인은 내가 가리키는 곳을 응시하다가 마부석에 앉으면서 말했다.

보이긴 하지만 뭔지 모르겠어요. 썰매 같기도 하고 나무 같기도 하고움직이고 있구나. 늑대가 아니면 사람이 틀림없어요.”

나는 정체불명의 그 물체를 향해 썰매를 몰고 가라고 사베리치에게 명령했다. 그쪽에서도 우리 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분 뒤 우리 눈앞에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여보시오, 좀 물읍시다. 우린 길을 잃었소.”

사베리치가 큰 소리로 그 사나이에게 말을 건넸다.

이게 길이오

하고 사나이가 대답했다.

당신들이 서 있는 길 말고 어떤 길을 말하는 거요?”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말했다.

자네는 이 근처 지리를 잘 아나? 우리를 하룻밤 묵을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 수 없겠나?”

물론 그럴 수 있지요. 이 고장이라면 내 발길 안 닿은 곳이 없지요. 말을 끌고도 다녔고 썰매를 타고도 다녔고, 구석구석 안 가 본데가 없어요. 하지만 날씨가 이 모양이니 길을 잘못 들기 쉬워요. 여기서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습니다. 눈보라가가 그치고 하늘이 맑아지면 별빛으로 길을 찾을 수 있어요.”

농부의 말을 듣고 나는 기운을 냈다.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들판의 한복판서 밤을 새우려고 결심했을 때 그 사나이가 재빨리 마부석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사베리치에게 말했다.

저쪽으로, 오른쪽으로 갑시다. 마을이 가까이 있는 것 같으니까.”

뭐 마을이 가깝다고? 그래 당신 눈에 길이 보인단 말이오? 죽어도 제 말이 아니고 부서져도 제 썰매가 아니라 아무 데든지 마구 달려보라 이 말이로군!”

사베리치의 말이 옳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지?”

나는 사나이에게 물었다.

저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연기가 섞여 있어요. 연기 냄새가 납니다. 그건 마을이 가깝다는 말이지요.”

나는 그 사나이의 영리한 머리와 날카로운 후각에 탄복하면서 사베리치에게 말을 몰라고 말했다. 말은 무거운 걸음으로 눈을 헤치면서 썰매를 끌었다. 썰매는 골짜기로 미끄러져 내려가기도 하고 눈더미 속에 박히기도 하면서 굼벵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폭풍우 속을 항해하는 배와도 같았다. 사베리치는 연방 내 옆구리에 부딪히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갈대로 엮은 발(циновку [tzynovka])을 내리고 털가죽 외투를 뒤집어쓰고 눈보라치는 소리를 들으며 흔들리는 썰매에 몸을 맡기고 있다가 어느 새 잠이 들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꿈은 앞으로 내 생애에 일어날 여러 가지 기막힌 사건과 맞추어 생각하면 하나의 예언과도 같은 암시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독자들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은 선입감을 몹시 경멸하면서도 미신에 의존하려는 선천적인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잠이 들자 나는 현실 본연의 모습이 몽상 속으로 밀려들어와 그 환상과 한데 어울릴 때 맛볼 수 있는 감각과 감정에 휩싸였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우리는 황야를 헤매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대문을 보았다. 그리고 썰매를 탄 채 안으로 들어갔다. 맨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내가 집에 돌아온 것을 보고 아버지가 화를 내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과 그것을 계획적인 반항 행위로 간주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었다. 이러한 심정으로 썰매에서 내리자 어머니가 슬픔에 잠긴 얼굴로 나를 맞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조용히 해라. 아버님께서 병환 중이신데 위독하다. 너를 마지막으로 만나보고 싶어 하시니 가서 뵈어라.”

나는 공포에 싸여 어머니의 뒤를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방 안은 희미한 불빛으로 밝혀져 있고 침대 곁에는 사람들이 슬픈 얼굴로 서 있었다. 내가 침대 곁으로 조용히 다가가자 어머니는 휘장을 조금 걷어 올리고 말했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페트루샤가 돌아왔어요. 당신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왔어요. 축복해주세요.”

나는 무릎을 꿇고 침대 위로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고 구레나룻이 시커먼 농부였다. 그는 유쾌한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대체 어찌된 영문입니까. 이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잖아요? 왜 내가 이런 농부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 거지요?”

그러자 어머니는

마찬가지란다. 페트루샤. 이 어른은 네가 결혼할 때 양아버지가 되실 분이야. 어서 이분 손에 키스하고 축복을 받아라.”

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 말을 듣고 농부는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뛰어내리더니 도끼를 마구 휘두르면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나는 달아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방 안은 시체로 가득 찼다. 나는 시체에 발이 걸려 엎어지기도 하고 방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에 미끄러져 자빠지기도 하면서 갈팡질팡했다. 그 때 험상궂게 생긴 그 농부가 말했다.

겁낼 것 없다. 내 축복을 받아라.”

공포와 의혹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순간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사베리치가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도련님, 내리십시오. 도착했습니다.”

여긴 어디야? 어디에 도착했다는 거야?”

나는 눈을 비비면서 물었다.

주막집입니다. 하나님이 우릴 도우셨어요. 도련님, 빨리 내려서 몸을 녹이십시오.”

나는 썰매에서 내렸다. 눈보라는 조금 누그러졌지만 계속되고 있었다. 코를 베어 가도 모를 만큼 주위는 캄캄했다. 주막주인이 램프를 들고 옷소매로 바람을 막으면서 문 앞까지 나와서 우리를 맞았다. 나는 좁기는 해도 꽤 정돈이 잘 된 깨끗한 방으로 안내받았는데 관솔불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벽에는 소총과 통이 높은 카자흐 모자가 걸려 있었다. 주인은 우랄 강 유역의 카자흐 부락에서 태어난 예순 안팎의 농부였는데 노인답지 않게 기운이 왕성해보였다. 사베리치가 다기를 넣은 상자를 들고 들어와 차를 끊일 테니 불을 좀 갖다 달라고 했다. 나는 그 때만큼 차를 마시고 싶은 적이 없었다. 주인은 차 끊일 준비를 하러 나갔다.

그 길잡이는 어디 있지?”

나는 사베리치에게 물었다.

여기 있습니다, 나리.”

대답하는 소리가 천장 쪽에서 들려왔다. 거의 천장에 가깝게 높이 만들어진 침대로 시선을 보내자 시커먼 구레나룻과 번쩍이는 두 눈이 보였다.

왜 그러나? 몸이 동태가 되었나?”

몸이 얼지 않을 수 있습니까? 걸친 건 헤진 외투 하나뿐인데요. 털가죽 옷이 있었지만 어제 저녁 술값으로 저당 잡혔어요. 추위쯤이야 별 게 아니겠지 하고 말입니다.”

그때 주인이 펄펄 끊는 사모바르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는 그 길잡이에게 차를 한 잔 권했다. 농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의 풍채가 주는 인상은 꽤 좋은 편이었다. 나이는 마흔 살 가량이고 키는 보통이었으며 어깨가 딱 벌어진데다 얼굴에 궁상이 조금도 없어 몸 전체가 아주 야무져 보였다. 시커먼 구레나룻에는 한 올 두 올 흰 터럭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빛을 내뿜듯 생기가 넘치는 두 눈은 잠시도 쉬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제법 호인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만만찮은 투지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머리는 가장자리를 짧게 깎아 올려 둥그렇게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은 누더기가 된 외투와 타타르 식 누비바[армяк (armyak)]였다. 차를 따라주자 그는 한 모금 마시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나리. 이왕이면 술을 한 잔 주십시오.술을 가져오라고 하십시오. 우리 카자흐들은 이런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서슴지 않고 농부의 청을 들어주었다. 주인은 나무상자에서 술병과 잔을 꺼내 들고 농부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자네 또 나타났군. 어디를 돌아다니다가 이 고장으로 굴러 들었나.”

길잡이는 의미 있는 듯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 비유(比喩)하는 투로 대답했다.

채소밭에 날아가서 삼씨를 쪼아 먹고 있으니까 할망구가 돌을 던집디다. 맞진 않았죠. 이쪽 패들은 어떻게 됐어요? 뭘 하고 있지요?”

여전해. 밤의 기도에 집합시킬 작정으로 종을 치려 하니까 신부의 여편네가 훼방을 놓더군. 종을 치면 안 된다는 거야. 신부가 외출 중이었으니 무덤 속에 마귀가 들어갔던 것이지.”

주인의 대답도 알쏭달쏭한 것이었다.

말 마시오. 비가 오면 버섯이 돋아나고 버섯이 돋아나면 바구니도 생겨요. 도끼는 꺼내지 말고.”

길잡이는 여기서 말을 끊고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숨겨 두시오. 산지기가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나리, 나리의 앞날을 축복하며!”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들고 성호를 긋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내게 인사를 하더니 다시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나는 그때 수수께끼 같은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가서 것이 1772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곧 진압된 우랄 카자흐 군의 정세를 이야기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베리치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길잡이와 주막 주인을 번갈아보면서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지방 말로 우묘트(умет [oumet])라고 불리우는 이 주막은 부락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도둑놈들 소굴처럼 보였다. 기분이 몹시 불쾌했으나 날씨가 날씨인 만큼 어쩔 수가 없었다. 어두운 눈보라 속으로 썰매를 몰고 나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베리치의 불안해하는 얼굴이 무척 재미있게 보였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시간이 흘러 나는 한잠 잘 생각으로 벽에 갖다 붙인 벤치에 누웠다. 사베리치는 페치카 위에 자리를 잡았고 주인은 방바닥에 누웠다. 이윽고 사람들은 모두 코를 골기 시작했고 나도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느즈막하게 눈을 떠보니 바람은 가라앉고 햇빛이 온 벌판에 가득했다. 끝없는 광야는 눈이 부시도록 흰 천으로 덮여있는 것 같았다. 사베리치는 출발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주인을 불러 숙박 요금을 치렀다. 요금이 쌌기 때문에 사베리치는 여느 때의 버릇처럼 말다툼을 하지 않았고 값을 깎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젯밤의 의혹도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져 버렸는지 얼굴 표정이 아주 담담했다. 나는 길잡이를 불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사베리치에게 사례금으로 50코페이카를 주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50코페이카요? 무슨 사례금이 그렇게도 많습니까, 도련님. 눈 속에서 헤매는 걸 썰매를 태워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그 사례금인가요? 도련님 좋은 대로 하십시오. 난 모르겠습니다. 우리한테는 여분의 돈이 없어요. 돈을 헛되게 없애면 나중에 그만큼 고생하게 된다는 것도 좀 생각하셔야지요.”

돈 문제에 대해서는 사베리치와 다투어도 소용 없었다. 그의 허락없이는 단돈 1코페이카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부터 돈지갑을 그가 꽉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난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불안한 상태에서 우리를 구해준 사람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 그대로 넘겨버릴 수는 없었다.

좋아.”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50코페이카가 아까우면 내 옷가지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 꺼내줘. 이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 너무 얇으니까 토끼가죽으로 만든 덧옷(тулуп [touloup])을 줘!”

천만의 말씀입니다. 도련님. 어째서 이 사람한테 표트르 도련님의 토끼 가죽옷을 줘야 합니까? 안 됩니다. 안 돼요. 이런 놈에게는 줄 필요가 없어요. 술집이 눈에 띄기가 바쁘게 잡혀 먹어요.”

이 말을 듣고 길잡이가 입을 열었다.

이봐 영감,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내가 술집에 잡혀 먹건 어떻게 하건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란 말이야. 나리가 자기 옷을 주시겠다는데 왜 영감쟁이가 주책없이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는지 모르겠네. 제 신분이 뭔지 잊어버렸나? 영감은 그 입 덮어두고 나리가 하라는 대로 하면 돼.”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 이 도둑놈아!”

사베리치는 화를 냈다.

도련님은 아직 분별이 모자라신다. 분별없는 인정을 쓰시는 그 틈을 타서는 값진 토끼 가죽 덧옷을 빼앗을 작정이지? 어림없는 수작. 도련님이 입는 옷을 네놈 몸에 걸쳐보겠다고? 안 돼!”

, 이젠 그만 하고 빨리 토끼 가죽 옷을 이리 갖고 와.”

하고 내가 말하자 사베리치는 풀 죽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아, 한심한 일이다. 새것이나 다름없는 토끼가죽 옷을 주다니! 은혜를 베풀어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떠돌이 주정뱅이에게 주다니!”

사베리치는 할 수 없이 토끼가죽 옷을 꺼내 왔다. 사나이는 그것을 몸에 대보면서 좋아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입었다. 옷이 너무 작아 여기저기서 실밥 터지는 소리가 났다. 사실 이 옷은 내 몸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실밥 터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사베리치는 험악한 얼굴로 눈을 부라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길잡이는 내 선물에 대만족이었다. 그는 썰매 있는 데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고맙습니다, 나리. 나리의 인정에 하나님의 보답이 있기를 빕니다. 고맙습니다. 나리의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제 갈 곳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꿈에도 생각 못한 길잡이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주막을 떠난 지 얼마 안 가서 나는 어젯밤의 눈보라도, 그 길잡이도 그리고 토끼 가죽 덧옷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올렌부르크(Orenburg)에 도착하자 나는 곧장 장군을 찾아갔다. 그는 늙어서 허리가 구부러진 백발노인이었다. 낡고 색이 바랜 군복은 안나 요아노브나(Anna Ivanovna) 여왕시대의 군인을 연상케 했다. 편지를 주자 그는 겉봉의 아버지 이름을 보더니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Mein Gott(세월은 정말 빠르구나)! 안드레이 페트로비치가 자네 나이만 할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훌륭한 아들이 있으니, 세월은 정말 빨라!”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 서평을 가하면서 낮은 소리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의 말투에는 독일 사투리가 많이 섞여 있었다.

안드레이 카를로비치 각하. 각하께옵서, 이거 무슨 글투가 이런가. 예의도 좋고 군대 규율도 좋지만 옛날 동료한테 각하께옵서 라니! ‘각하께옵서도 기억하고 계실! ‘그리고 고인이 되신 미니프(Munich) 원수행군할 때의그리고 또 칼로 링카(Каролинка [Karolinka : Carolina])으흠, 옛날 장난했던 일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구나! ‘다름 아니오라 머리가 돈 아이를 보내오니, ‘고슴도치 장갑을 끼시고 잡들이 하셔서고슴도치 장갑이라? ‘고슴도치 장갑을 끼시고 다스리시와이건 러시아의 옛날속담을 인용한 말 같은데 무슨 뜻일까? 자네 아나?”

그는 편지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순진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그건 너무 엄격하게 다루지 말고 위로와 친절을 많이 베풀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라는 뜻입니다.”

, 알겠어조금도 자유를 주지 마시고 규율을 어기면 가차 없이아니, 그런 뜻이 아닌 것 같다돈아이의 거주증을 동봉하오니어디 있나, 아 이거로구나. ‘세묘노프 연대에 연락하시어, 좋아모든 걸 소원대로 처리하지. ‘실례인 줄은 아오나 옛정을 생각해 각하를 포옹하오니 혜량하기 바라옵니다.’여차 여차라 이제 알았다.”

그는 편지를 다 일고 나서 내 거주증을 책상 한쪽에 놓고 말했다.

자네를 장교로 임관해서 XX연대에 배속하니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내일 곧 베로고르스크(Byĕlogorsk) 요새로 출발하게. 거기서 자넨 미로노프(Mironoff) 대위의 지휘 하에 들어간다. 미로노프 대위는 정직하고 친절한 사람이야. 가서 군기를 잘 지키고 열심히 근무하게. 이곳 올렌부르크에는 자네한테 맡길 만한 일이 없네. 군인이란 자고로 바빠야 한단 말일세. 오늘은 손님이니 내 숙소에 가서 함께 식사를 하세.”

일이 점점 우습게 돼 가는구나.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근위대 중사로 등록된 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야.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야. 근위대 아닌 XX연대에 들어가 키르키즈 카사크(Khirghis-Kasak) 초원의 요새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니. 이게 군대 생활의 운명이었던가!’

나는 안드레이 카를로비치(Andrey Karlovitch)의 숙소에서 늙은 부관과 함께 셋이 식사를 했다. 노장군의 엄격하고 검소한 생활이 기풍이 그 식탁을 지배하고 있었다. 홀아비 생활을 하는 노장군의 심사가 나를 멀리 떨어진 변경의 요새 수비대로 보내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튿날 나는 장군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3장 요새

우리는 변경의 요새 수비대.

빵과 물로 사는 중

영창이 정황 모르고

적의 무리가 고기만두 달라고 밀어닥치며

대포에 유산탄 재어 손님을 접대 하리,

유산탄의 향연

- 병상의 노래

자네, 그것은 구식 사람들이네 - <미완성 인간>

Денис Иванович Фонвизин(Denis Ivanovich Fonvizin, 1744-1792)의 작품 <Недоросль [Nedorosl] (미완성 인간 The Minor)>을 말한다.

 

베르고르스크 요새는 올렌부르크에서 40km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길은 야이크(Yaik) 강의 험한 강둑을 따라 이어져 있었는데, 아직 얼지 않은 강물은 양쪽 둑이 흰 눈에 덮여 있기 때문인지 검푸른 빛이 한층 짙어 보였다. 강 건너편에는 키르키즈(Khirghis)의 황야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흔들리는 썰매에 몸을 맡긴 채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앞으로의 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수비대 생활은 내게 아무런 흥미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내 상관이 될 미로노프 대위에 대해 여러모로 상상해 보았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부하가 사소한 과오를 범해도 빵과 물만 먹고 살아야 하는 영창에 처박아 넣는, 엄격하고 화 잘내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놀이 깔리기 시작했다. 썰매는 제법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요새는 아직 멀었나?”

나는 사베리치에게 물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도련님. , 이제 보이는군요.”

나는 견고한 성벽과 위압적인 망루를 상상하면서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눈에 띄는 것은 조그마한 촌락뿐이었다. 마을 한쪽에는 건초더미가 서넛, 반쯤 눈 속에 파묻혀 있고 또 한쪽에는 기울어져 가는 풍차가 보리수나무 판자로 만든 날개를 힘에 겨운 듯이 달고 있었다.

요새가 어디 있다는 거야. 아무데도 안 보이잖아.”

나는 마부에게 물었다.

저기 보이는 것, 저겁니다.”

마부는 눈앞의 마을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얼마 후 우리는 그 마을에 당했다. 마을 어귀에는 무쇠로 만든 구식 대포가 놓여 있었다. 길은 좁고 구불구불했으며 집들은 대개 처마가 낮고 지붕은 모두 짚으로 엮어서 덮은 것이었다. 나는 사령관의 숙소 앞에 썰매를 갖다 대라고 마부에게 명령했다. 얼마 후 마부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목조 건물 앞에 썰매를 세웠다. 그 집 옆에는 교회당이 서 있었다. 나를 맞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현관으로 들어가 거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늙은 상이군인 한 사람이 탁자에 걸터앉아 초록색 군복 상의의 팔꿈치에 헝겊을 대어 깁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안내를 청했다.

들어가십시오. 모두들 계십니다.”

상이군인이 대답했다. 나는 옛날식으로 장식된 아담한 방으로 들어갔다. 한쪽 구석에는 찬장이 놓여 있고 벽에는 액자에 넣은 장교 임명장이 걸려 있었다. 또 그 옆으로 키스트린(Kystrin)과 오티아코프(Otchakoff) 요새의 점령이라든가, 색시를 선보는 장면이라든가, 죽은 고양이를 묻는 장면 같은 그린 값싼 판화들이 울긋불긋 걸려 있었다. 창문가에는 소매가 없는 덧저고리를 입고 머릿수건을 쓴 뚱뚱한 부인이 앉아서 장교복을 걸친 애꾸눈 노인이 두 손으로 받쳐들고 있는 실을 감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부인은 일을 계속 실을 감으며 물었다. 나는 이곳에 배속된 사람인데 의무상 대위님께 신고를 하러 왔다고 대답하며 애꾸눈 노인이 사령관인 줄 알고 그에게로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러자 부인이 내 말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쿠즈미치(Ivan Kouzmitch)는 지금 안계세요. 게라심(Gherassim) 신부 댁에 가셨지요. 하지만 마찬가지예요. 내가 이 집 안주인이니까요. 거기 앉으세요.”

부인은 큰 소리로 하녀를 불러 카자흐의 하사관을 찾아오라고 일렀다.

실례의 말씀이지만 어느 연대에서 근무하셨지요?”

근위대에서 어떻게 이런 변경지대의 요새 수비대로 전속되었느냐는 질문이다. 나는 이유는 어떻든 상부에서 그렇게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왔을 뿐이라고 답했다.

그럼 필시 근위대 장교로서 불미스러운 사고라도 냈던 모양이군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요.”

대위 부인은 주책없이 말을 걸고 있는 애꾸눈을 핀잔했다.

이 젊은 분은 먼 길을 오셔서 몹시 피로해요. 여행하면 피로하다는 것쯤은 알아야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 손이나 좀 똑바로 들어요그런데.”

부인은 다시 내게로 얼굴을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

이런 외진 곳으로 쫓겨 왔다고 해서 뭐 그리 비관할 건 없어요. 당신이 처음이 아니고 또 마지막도 아닐 테니까요. 참고 지내다 보면 정도 들게 될 거예요. 시바블린(Shvabrine), 그 알렉세이 이바니치 시바블린(Aleksey Ivanovitch Shvabrine)은 사람을 해친 죗값으로 이곳으로 전속된 지 벌써 5년이나 돼요. 대체 무슨 악마한테 홀려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어떤 중위와 교외로 나가 서로 칼을 빼들고 찌르기 시합을 하다가 푹 쑤셔 버렸지요. 알렉세이 이바니치가 그 중위를 찔러 죽인 거예요. 입회인은 두 사람이나 있었다지 뭡니까. 그렇게 된 이상 별 수 없지요. 무사히 넘기지는 못해요. 아무튼 사람은 실수를 저지르도록 돼 있어요.”

그 때 하사가 들어왔다. 체격이 단단해 보이는 젊은 카자흐였다.

막시미치(Maksymitch)! 이 장교님을 깨끗한 숙소로 모셔다 드려.”

하고 대위 부인은 그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Vassilissa Yegorovna). 장교님을 이반 포레자예프(Ivan Polejaeff)의 집으로 모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거긴 안 돼, 막시미치. 포레자예프네 집은 비좁아서 안 돼. 그리고 그분은 우리 아이의 대부님이만 그래도 우리를 웃사람으로 대하고 있으니 난처해. 가만있자 이 장교님은이름이 뭐라고 하셨더라? 아아 참, 표트르 안드레비치라 하셨지요? 표트르 안드레비치를 세무 쿠조프(Semion Kouzoff)네 집으로 모셔. 그 망할 녀석이 글쎄 자기네 말을 우리 채소밭에 놓아두었다니까! 그건 그렇고 막시미치, 뭐 별다른 일은 없자?”

네 덕분에 아무런 일도 없습니다. 다만 푸로홀로프 하사(Corporal Prohoroff)가 목욕탕에서 물 한 바가지 때문에 우스치니야 제그리나(Oustynya Negulina)와 맞붙어 싸운 것밖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하고 카자흐 인이 대답했다.

푸로홀로프와 우스치니야를 불러서 싸운 까닭을 알아보고 두 사람에게 단단히 훈계를 해줘요. 그럼 막시미치, 자넨 표트르 안드레비치를 숙소로 안내해드려.”

나는 인사를 하고 물러나왔다. 하사는 요새 끝 쪽의 높은 강둑 위에 있는 조그마한 오두막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집의 반은 세묜 쿠조프네 식구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나머지 반을 사용하게 되었다. 방은 한 칸 뿐이었지만 비교적 깨끗했고 칸막이를 해서 가운데가 막혀 있었다. 사베리치는 곧 방안을 정돈하기 시작했고 나는 작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앞에는 황량한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창문 가까이 엇비슷하게 오두막집 몇 채가 보였고 한길에서는 너댓 마리의 닭이 한가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무통을 든 노파가 문 앞 층계에서 돼지를 부르는지 돼지들이 꿀꿀대며 그쪽으로 몰려갔다. 말하자면 이와 같은 한산한 풍경들이 내 청춘을 보내도록 결정된 고장이었다. 나는 서글프기만 했다. 나는 창가에서 물러나 사베리치의 잔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저녁밥도 먹지 않고 잠자리에 들어가 버렸다. 사베리치는 근심스러운 목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참 큰일이로군!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겠다니. 그러다가 도련님이 병이라도 나면 마님께선 뭐라고 하실까?”

이튿날 아침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키가 작달막한 젊은 장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가무잡한 얼굴이 어지간히 못생긴 사나이였지만 무척 활발하게 보였다.

실례합니다. 이렇게 허물없이 인사드리러 온 걸 용서하십시오. 나는 어제 당신이 도착한 걸 알았습니다. 이제야 인간다운 사람을 볼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도 앞으로 얼마 동안만 여기 있어 보면 이러한 심정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는 프랑스 어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친구가 바로 근위대에서 결투를 하다가 쫓겨온 장교임을 알았다.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시바블린은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가 하는 말은 재치에 넘쳤고 또 흥미가 있었다. 그는 내게 사령관의 집안 사정과 그가 사귀고 있는 친구들이며,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경위까지 스스로 상상해내며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정신없이 웃고 있을 때 어제 사령관 집 문간방에서 군복을 꿰매고 던 상이군인이 들어왔다. 바실리사 예고르브나가 나를 점심에 초대한다는 것이다. 시바블린도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사령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광장에는 세모진 모자를 쓰고 머리를 길게 땋아 늘인 늙은 재향군인들이 20명 정도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횡대로 정렬하고 있었다. 그 앞에 둥그런 실내모를 쓰고 중국옷 비슷한 실내복을 입은 사령관이 서 있었는데, 그는 키가 크고 아직도 기력이 정정한 노인이었다. 우리를 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나에게 몇 마디 다정스럽게 인사의 말을 하고는 다시 병정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대로 서서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려고 했더니, 그는 자기도 곧 뒤따라갈 테니 바실리사 예고로브나한테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

여기 있어 봐야 자네들이 구경할 만한 게 있어야지.”

하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허물없는 태도로 우리를 맞아주었고, 마치 오랜 친지에게 하듯 나를 대하는 것이었다. 상이 군인과 하녀인 파라시카(Palashka)가 점심 상을 차리고 있었다.

우리 이반 쿠즈미치는 왜 오늘 같은 날 훈련을 시킨다구 야단인지. 내 참! , 팔리샤야, 가서 점심 잡수시러 오라고 해라. 마샤(Masha)는 또 어디 갔어?”

하고 사령관 부인이 말했다. 이 때 얼굴이 둥글고 불그스레한 18살쯤 되어 보이는 처녀가 들어왔다. 연한 블론드 머리를 양쪽 귀 뒤로 빗어 넘겼는데 작고 귀여운 귀는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나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기는 내가 선입관을 가지고 그녀를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바블린으로부터 대위의 딸 마샤가 아주 멍텅구리나 다름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Maria Ivanovna)는 한쪽 구석에 앉아 수를 놓기 시작했다. 바실리사는 남편이 오자 않자 다시 파라시카를 보냈다.

손님이 기다리시니 어서 오시란다고 해라.”

잠시 후, 대위는 애꾸눈 노인과 함께 들어왔다.

무슨 일이 그리도 바빠요?”

병정들을 훈련시키고 있었어. 바실리사 예고로브나.”

그까짓 훈련은 해서 뭘 해요. 가르쳐봤자 제대로 근무할 만한 위인들도 아닌데. 게다가 당신도 근무가 어떤 건지 통 모르고요. 그것보다는 집에서 기도나 올리는 편이 나아요. , 손님들... 어서 앉으세요.”

우리는 식탁에 앉았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한시도 입을 다물지 않고 양친은 어떤 분이며 지금 두 분 다 생존하고 계시는지 어디서 살며 재산은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다. 아버지가 농노 3백 명을 데리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입을 딱 벌렸다.

어머나, 세상엔 그런 부자도 다 있군요! 우리 집엔 종이라곤 파라시카라는 계집애 하나뿐이에요. 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지요. 그런데 한 가지 마샤를 시집보내는 일이 걱정거리예요. 과년한 처녀인데 혼수감을 장만해 놓은 게 하나도 없어서요. 머리빗 한 개와 부엌 비 한 자루, 그리고 목욕탕에 갈 돈으로 3코페이카짜리 은전 한 닢뿐이라니까요. 어떻게 좋은 사람이 나타나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저 애는 한 평생 처녀로 늙어야 할 거예요.”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나는 보기에 민망스러워서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바시키르(Bashkir) 인들이 이 요새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자네,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었나?”

이반 쿠즈미치가 물었다.

오랜부르크(Orenburg)에서 그런 말을 하더군요

하고 내가 대답했다.

괜히 하는 소리겠지, 여기선 한 번도 그런 소리를 못들었네. 바시키르 놈들의 기를 아주 죽여버렸고 키르키즈(Khirghis)놈들도 단단히 맛을 보여주었거든. 절대로 우리한테 덤벼들지 못할 걸세. 만일 덤벼든다면 그 때는 내가 한 10년 동안 꼼짝 못하게 혼내줄 생각일세.”

그럼 부인께서는 어떻습니까?”

나는 대위 부인을 향해 말을 이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런 위험한 요새에 있으면서 왜 무서운 생각이 안들겠어요? 하지만 이젠 습관이 돼서 아무렇지도 않아요. 20년 전에 연대에서 처음으로 여기로 왔을 때는 그 저주할 이교도 놈들이 어찌나 무서웠던지 지금 생각해도 지긋지긋할 정도였지요. 그 너구리 가죽으로 만든 모자가 눈에 띈다든가, 그 놈들의 고함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금방 가슴이 뛰곤 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예사가 되어 악당들이 요새 근방에서 말을 몰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귀찮을 따름이지요.”

바실리아 예고로브나는 무척 대담한 부인입니다. 그건 누구보다 이반 쿠즈미치가 알고 계시지요.”

시바블린이 점잔을 빼고 한 마디 했다.

사실이라네. 우리 마누라는 겁쟁이가 아니야.”

하고 이반 쿠즈미치가 입을 열었다.

그럼 마리아 이바노브나도 역시 부인처럼 용감하십니까?”

마샤가 용감하냐고요? 천만에요. 저 애는 아주 겁쟁이지요. 총소리만 나면 부들부들 떤다니까요. 2년쯤 되었을까, 한번은 내 세례명 축일에 이반 쿠즈미치가 축하 포탄을 쏘려고 했더니 글쎄 저 애가 어떻게 겁을 내던지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니까요. 그 후부터 대포는 절대 쏘지 않고 있지요.”

하고 부인이 말했다. 우리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대위와 부인은 침실로 들어가고 나와 시바블린은 숙소로 가서 그와 함께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다.

 

 

4장 결투

그래 좋아, 맞서 봐

그 몸뚱이에 구멍을 뚫어주마

칼 맛을 톡톡히

보여주마.

- 크냐지닌

 

몇 주일이 지났다. 베로고르스크 요새에서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사령관 집에서는 나를 한식구나 다름없이 대해주었고 특히 그들 부부가 존경할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나를 기쁘게 했다. 일개 병졸로부터 장교로 승진해 온 이반 쿠즈미치는 교육을 받지 못해 무식하고 단순한 인간이었지만 그 대신 매우 착실하고 선량했다. 그래서 보통 부인의 손에 쥐어살기는 해도 오히려 그것이 그의 낙천적인 성격과 잘 조화되는 것이었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군대 일도 집안일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고 따라서 요새 전체를 마치 자기 집안처럼 다스리고 있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와도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롭게 가까워졌다. 나는 그녀가 성실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처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덧 나는 이 선량한 가족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고 또 경비대 중위인 애꾸눈 이반 이그나츠이치(Ivan Ignatitch)에게까지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시바블린은 마치 애꾸눈 영감이 바실리사 예고로브나와 심상치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지껄인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말은 아무도 곧이 들을 사람이 없는 허튼 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바블린은 그런 소리를 태연히 입 밖으로 내는 것이었다. 나는 장교로 승진됐다. 군대 생활은 조금도 괴로울 것이 없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이 요새에는 검열도 없었고 훈련이나 훈련시키기도 했지만 그들은 여지껏 좌우를 분간할 만큼도 훈련도 되어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병정들이 방향을 틀리지 않으려고 가슴에 성호를 그어 보곤 했으나 그것도 별 효과가 없었다. 시바블린은 몇 권의 프랑스 서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학에 대한 취미가 다시 되살아나 오전 중에는 대개 독서와 번역 연습으로 시간을 보냈고 때로는 시를 써 보기도 했다. 저녁이면 가끔 게라심(Gherassim) 신부가 부인인 아쿨리나 판필로브나(Akoulina Pamphylovna)와 함께 사령관 집에 나타나곤 했는데, 신부의 부인은 이 고장에서 수다스럽기로 이름난 여자였다. 알렉세이 이바니치 시바블린(Aleksey Ivanovitch Shvabrine)과는 거의 매일 같이 만났지만 날이 갈수록 나는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사령관 집 식구들에 대한 변함없는 험담, 특히 마리아 이바노브나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방은 더없는 불쾌감을 주는 것이었다. 시바블린 이외에는 요새 안에서 사귈 만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내게는 없었다.

바시카르 인들이 요새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우리 요새 주변에는 언제나 평온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 집안싸움이 평화를 깨뜨린 것이다. 내가 문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다. 내 습작은 그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에 달하는 것이어서 몇 해 후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스마코프(Alexander Petrovitch Soumarokoff)로부터 격찬을 받은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며칠 간의 손질을 거쳐 시를 한 편 완성했다. 문학을 창작하는 사람들이 조언을 요청한다는 구실 아래 자기에게 호의를 가진 독자를 찾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창작한 시를 베껴가지고 요새 안에서 시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시바블린을 찾아갔다. 나는 기분 좋게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어 다음과 같은 시를 낭송했다.

사랑의 불씨를 꺼 버리려고 아름다운 그대를 지워버리려고

아아, 비통한 마음으로 그대를 피하며 자유의 빛을 찾아 나 돌아서네

 

그러나 나를 사로잡는 그대 눈동자 끊임없이 내 고달픈 머릿속에 어른거리고

사나이 가슴 속에 아픈 못을 박네, 내 휴식을 무참히 깨뜨려 버리네

 

그대 나의 이 쓰라림을 안다면 내게 온정을 베풀어다오, 마샤여.

규율 엄한 부대에서 그대에게 사로잡힌 나를 본다면

이 시를 어떻게 생각하나?”

틀림없이 찬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나는 시바블린에게 물었다. 그러나 여느 때는 관대하던 그가 천만 뜻밖에도 대뜸 유치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분한 마음을 꾹 누르고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냐고? 그런 종류의 시는 내 선생인 바실리 키릴루이치 트레자코프스키(Vassily Kyrylitch Trediakovsky)가 도맡다시피 쓰고 있는데 자네의 시는 그 선생의 삼류 연애시와 비슷하기 때문이지.”

이렇게 말하고는 그는 내 수첩을 빼앗아 들더니 어디까지나 신랄한 말투로 빈정거리며 한 구절 한 구절 단어마다 꼬집기 시작했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수첩을 낚아챈 후 앞으로는 절대로 내 작품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쏘아붙였다. 시바블린은 내 위협적인 태도를 일소에 붙이고 이렇게 했다.

두고 보세, 자네가 지금 한 말을 지킬 수 있는지. 시인에게는 자기 작품을 평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야. 그건 마치 이반 쿠즈미치에게 식전에 보드카 한 잔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야. 그건 그렇고, 자네가 달콤한 불씨니 온정이니 하며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그 마샤라는 상대방은 누구인가? 설마 마리아 이노브나를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

여기 이 마샤가 누구를 가리키든 자네에게 무슨 상관이야?”

하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흐흠! 자존심이 대단한 시인이며 동시에 침착성 있는 애인이시로군. 하지만 친구의 충고도 들어두는 편이 좋을 걸. 만일 자네가 연애에 성공하고 싶다면 그 따위 시를 쓸게 아니라 직접 행동을 취해야 할 거야.”

시바블린은 한층 더 비위에 거슬리는 말만 했다.

그건 무슨 뜻인가. 한번 고견을 들을 수 있는 영광을 갖고 싶군.”

좋아, 설명하지. 그건 무슨 뜻인가 하니,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어두운 밤에라도 자네를 찾아다니게 하려면 그 정도의 미지근한 연애시는 집어치우고 귀걸이라도 1개 선사하란 말이네.”

나는 온 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네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그녀에게 그 따위 허튼 소리를 하는가.”

나는 분통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근거라고? 그것은 내 경험을 통해서 그 여자의 성격과 습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는 얼굴에 조소를 띠며 대답했다.

거짓말 마, 이 비열한 놈아. 그런 파렴치한 수작을 어디다 감히 하는 거야.”

나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시바블린의 얼굴이 금방 변해 버렸다.

지금 그 말은 들어 넘길 수 없어. 자네는 내 결투 신청에 응해야 하네.”

그는 내 손을 덥석 움켜쥐며 말했다.

좋아, 언제든지.”

나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 순간 나는 그 놈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즉시 이반 이그나츠이치를 찾아갔다. 마침 그는 사령관 부인의 부탁을 받고 겨울에 먹을 마른 버섯을 실에 꿰고 있는 중이었다.

, 이거 표트르 안드레비치가 아닙니까. 어서 오시오. 그런데 별안간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왔는지. 실례의 말입니다만 무슨 급한 용무라도 있습니까?”

그는 나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알렉세이 이바니치와 다툰 이야기를 간단히 한 후 이반 이그나츠이치게 결투의 입회인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러 왔다고 말했다.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한 쪽밖에 없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알렉세이 이바니치를 한 칼에 찔러버리고 싶으니 나 보고 그 입회인이 되어 달라 이 말씀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 바로 그렇습니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표트르 안드레비치!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려는 겁니까? 당신은 알렉세이 이바니치와 다투셨다고요? 그게 뭣이 대단한 일입니까. 욕지거리 같은 건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게 상책지요. 저쪽에서 욕설을 퍼부으면 이쪽에서도 한 마디 해주면 그만이고, 저쪽이 콧등을 갈기면 이쪽은 한 대 쥐어박고, 이렇게 하면 저렇게, 저렇게 하면 이렇게, 그러다가 헤어지면 그만 아닙니까. 그 다음은 우리가 화해를 붙이지요. 그렇지 않고 친한 사이에 칼부림을 한다는 게, 실례의 말씀입니다만 과연 옳은 일이라 할 수 있을까요? 사실은 나도 그 친구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당신이 저쪽의 배를 푹 찔러 버린다면 나로서도 서러울 건 없지요. 그 때는 가슴에 성호를 그으면 그만일 테니까. 하지만 만일 저쪽에서 당신의 몸에 구멍을 뚫어 놓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무엇이 시원하겠습니까. 실례의 말씀입니다만 손해를 보는 건 누구지요?”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할 줄 아는 중위의 말도 내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결심한 바를 고집했다.

그렇다면 마음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한데어째서 내가 입회인 노릇을 해야 합니까. 그럴 필요가 어디 있어요. 사람들이 결투를 한다실례의 말씀인데요, 그게 무슨 구경거리가 됩니까. 나는 스웨덴 전쟁과 터키 전쟁에 종군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런 구경은 실컷 했어요.”

나는 입회인의 역할에 대해 분명치는 못하나마 대략 설명해 보았으나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끝내 내 말을 알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투를 하건 말건 그건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만일 내가 이 일에 끼어들게 된다면 내 의무상 사전에 이반 쿠즈미츠에게 보고해야 합니다. 상부로부터 금지되어 있는 일이기도 하고, 불상사가 우리 요새 안에서 일어날 것 같으니 사령관님께서는 적당한 조치를 취하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보겠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사령관에게 아무 말도 말아 달라고 빌다시피 애원해 겨우 그를 설복하고, 그로부터 다짐까지 받았다. 결국 나는 그의 입회를 단념하기로 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나는 사령관 집에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시침을 떼고 명랑한 태도를 보이려고 애썼다. 털끝만큼도 의심을 사지 않음으로써 귀찮은 질문을 받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나와 같은 입장에 서게 되면 누구나 일부러 시위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러한 침착성을 가질 수 없었다. 그 날 저녁 내 마음은 자꾸만 감상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려 했다. 그래서인지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여느 때보다 유달리 예쁘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를 보는 것도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 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모습을 어떤 감동적인 상상과 함께 내 눈에 비치게 됐던 것이다. 그 자리에 시바블린이 나타났다. 나는 그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이반 이그나츠이치와의 교섭 결과를 말했다.

반드시 입회인이 있어야 할 필요가 어디 있어? 없으면 없는 대로 해치우면 되지.”

우리는 요새 근처에 있는 건초더미 위에서 결투를 하자는 것과 내일 아침 6시에 그곳으로 나가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남이 보기에는 우리들이 아주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으므로 이반 이그츠이치는 반가운 나머지 그만 쓸데없는 말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진작 그랬어야지. 아무리 착한 싸움이라도 악한 평화만은 못한 법이고, 승리도 좋긴 하지만 자기 목숨만큼이나 소중할라고요.”

만족한 표정으로 그는 내게 말했다.

이반 이그나츠이치, 지금 뭐라고 했지요? 무슨 말인가요?”

구석에서 트럼프 점을 치고 있던 대위 부인이 끼어들었다.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내 얼굴에 나타난 불만의 빛을 보고 낮에 한 약속을 생각했던지 대답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시바블린이 구원이 손길을 뻗쳤다.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우리들이 화해해서 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누구하고 다투었군요?”

표트르 안드레비치와 대판 싸움이 벌어졌었지요.”

아니, 그런 또 왜?”

뭐 대수롭지 않은 일 때문이었어요. 실은 노래 때문에 싸웠습니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

노래 때문이라니, 참 별일 다 가지고 싸우는군. 그래 어떻게 되었길래 그런 걸 가지고 다투었지요?”

,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에 표트르 안드레비치가 노래를 한 수 지었는데 오늘 내 앞에서 그걸 부르더군요. 그래서 나도 내가 좋아하는 대위의 딸이여, 한밤중의 산책은 그만두세요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표트르 안드레비치는 불끈 화를 냈지만 나중에 그것이 쑥스러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부르고 싶을 때 노래를 부르는 건 누구에게나 자유니까요. 그래서 싸움은 원만히 해결되었습니다.”

시바블린의 뻔뻔스러운 수작에 나는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으나 나를 빼놓고는 누구도 그의 추잡한 비유를 알아듣지 못했고 또한 그 말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조차 없었다. 노래로부터 화제는 시인에게로 옮겨졌다. 사령관은 시인이란 모두 난봉꾼이며 주정뱅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시를 쓴다는 것은 군대 생활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니 집어치우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나에게 친절히 충고하는 것이었다. 나는 시바블린과 도저히 한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 잠시 후 사령관을 피하여 그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숙소로 돌아와 사베리치에게 아침 6시에 깨워달라고 부탁한 후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약속 시간이 되자 나는 이미 건초더미 뒤에서 시바블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그가 나타났다.

아무래도 들킬 것 같네. 빨리 결판을 내세.”

우리는 군복을 벗어 던지고 조끼 바람으로 장검을 뽑아 들었다. 바로 그 때 건초더미 뒤에서 이반 이그나츠이치와 대여섯 명의 병정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그는 우리들에게 사령관 앞으로 연행하겠다고 말했다. 분하기 짝이 없었지만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정들이 우리를 둘러쌌다. 우리는 이반 이그나츠이치의 뒤를 따라 요새로 들어갔다. 그는 몹시 우쭐거리며 의기양양하게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연행해 왔습니다.”

우리들 앞에 나선 것은 바실리사 예고로브나였다.

세상에! 이게 무슨 짓들이에요? ? 우리 요새에서 살인을 하려 들다니. 이반 쿠즈미치, 당장 이 두 사람을 영창에 집어넣어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알렉세이 이바니치, 대검을 이리 내놔요. 빨리 내놓으라니까. 파라시카야, 이 칼을 창고 속에 갖다 둬라. 표트르 안드레비치, 난 당신이 이런 짓을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그래, 부끄러운 생각도 없어요? 알렉세이 이바니치야 별문제 없지요. 원래가 살인을 하고, 근위대에서 쫓겨 왔고, 하나님도 믿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다르지 않아요? 글쎄 무슨 생각으로 그 따위 결투를 하려고 했어요?”

이반 쿠즈미치도 부인의 말에 이어 끼어들었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의 말이 옳아. 결투라는 건 군인복무규정에 의해 절대로 금지되어 있다는 걸 충분히 알 만한 사람들이 어째서 결투를 했지?”

한편 파라시카는 우리에게서 장검을 받아들고 창고 쪽으로 가 버렸다. 나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시바블린은 여전히 점잔을 빼고 있었다.

나는 모든 점에서 부인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인께서 우리에게 징계하는 것은 공연한 참견입니다. 이런 일은 이반 쿠즈미치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사령관의 임무입니다.”

내 반항에 사령관 부인은 냉정한 어조로 맞섰다.

, 이 양반이 나중에 못하는 말이 없군. 부부는 일심동체란 말을 모르는가봐. 여보, 이반 쿠즈미치! 뭘 우물쭈물하고 있어요? 이 사람들을 당장 빵과 물만 주는 영창에 따로따로 어서 넣지 못하겠어요? 단단히 정신을 차리게 해야지. 그리고 게리심 신부님을 모셔다가 속죄를 시켜야 해요.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빌고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의 죄를 뉘우치게 해야지요.”

이반 쿠즈미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츰 격했던 음성이 가라앉더니 사령관 부인은 마음을 진정하고 우리들에게 키스를 했다. 파라시카가 우리들의 장검을 다시 가져왔다. 시바블린과 일단 화해의 형식을 취하고 사령관 집에서 나왔다. 이반 이그나츠이치도 함께 따라 나왔다.

그렇게 약속을 해 놓고서 사령관에게 고자질을 해야만 속이 편하시오?”

나는 성난 음성으로 그에게 말했다. 예고로브나가 나를 붙잡고 꼬치꼬치 캐내서 알았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부인이 사령관에게 알리지도 않고 직접 지시했어요. 그렇지만 무사히 끝나서 다행입니다.”

말을 끝내기 바쁘게 그는 자기 집 쪽으로 발길을 돌려버렸기 때문에 나와 시바블린만이 남게 되었다.

이 문제는 끝장이 났다고 할 수 없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이지.”

시바블린도 내 말에 동의했다.

자네는 내게 준 모욕에 대해 피를 가지고 보상해야 하네. 그러나 우리는 감시를 받고 있으니까 당분간은 얌전히 있어야 할 거야. 그럼 또 보세.”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헤어졌다. 사령관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마리아 이바노브나 곁에 앉았다. 이반 쿠즈미치는 집에 없었고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집안일로 분주했다. 우리들은 소리를 죽여 가며 이야기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내가 시바블린과 싸우는 바람에 모두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고 나를 가볍게 나무라는 것이었다.

두 분이 칼을 빼들고 결투하신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정말 기절한 뻔했어요. 남자들이란 참 이상해요. 1주일만 지나면 잊어버릴 그런 대수롭잖은 말 한 마디 때문에 칼부림까지 해가며 목숨뿐만 아니라 양심까지 그리고 또그 어떤 사람의 행복까지 희생시키려 하니까요. 그러나 저는 당신 편에서 싸움을 먼저 걸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어요. 알렉세이 이바니치가 나쁘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요.”

마리아 이바노브나,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은 아주 못된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지요. 저는 알렉세이 이바니치 같은 사람은 정말 싫어요. 징그러울 지경이에요. 그런데 참 이상해요. 저는 그 사람을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미움을 받기 싫으니까요. 왠지 그러면 제게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예요.”

그럼 마리아 이바노브나, 당신은 정말 어떻게 생각하지요? 시바블린이 당신을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던가요?”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대답을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한참 만에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하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할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저한테 청혼한 적이 있었어요.”

청혼이라니! 그 녀석이 당신한테 청혼을 했어요? 그건 언제 일입니까?”

작년에그러니까 당신이 오시기 두어 달 전이지요.”

그래서 당신이 거절했다는 말이군요.”

알다시피알렉세이 이바니치는 물론 똑똑한 사람이고 집안도 훌륭하고 또 재산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결혼식 때 여러 사람 앞에서 키스해야 할 생각을 하니정말 싫었어요. 저는 어떤 행복이 온대도 그런 사람하고는 싫어요.”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말은 나를 눈뜨게 했고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 이제야 나는 그녀에 대해 시바블린이 악의에 찬 험담을 끊임없이 늘어놓은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우리들이 서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두 사람 사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떼어 놓으려고 했음이 분명했다. 싸움의 동기가 된, 그가 함부로 뇌까린 말들이 단순한 악담이 아니라 사실은 계획적인 중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그 심보가 한층 더 추악하게 생각되었다. 그 비겁한 놈을 한칼에 찔러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갈수록 깊어져 가기만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나는 기회가 다시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이튿날 비가(悲歌 элегией [elegiyey])를 지으려고 책상 앞에 앉아 펜대를 깨물며 시상이 머리에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시바블린이 창문을 두드렸다. 나는 펜을 놓고 장검을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시바블린이 말했다.

승부는 빠를수록 좋지. 감시가 없는 것 같으니 강으로 가세. 그리고 가면 우리를 방해하는 놈은 없겠지.”

우리는 말없이 강가로 나갔다. 그리고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가 강기슭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시바블린은 나보다 검술이 훌륭했으나 나는 힘과 용기에 있어서 그보다 월등했다. 군대 생활을 한 무슈 보플레가 검술을 가르쳐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서 배운 수를 써 보았다. 시바블린은 내가 그처럼 만만찮은 적수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참 동안 우리들은 서로 털끝만한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드디어 시바블린에게 피로한 기색이 엿보이자 나는 맹렬히 공격을 가하여 그를 강 언저리까지 바짝 몰고 나갔다. 순간 누군가 목청이 터지도록 내 이름을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높은 비탈길을 사베리치가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나는 오른편 어깨 조금 아래쪽 가슴팍을 찔려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5장 사랑

색시야 색시야, 인물 잘난 색시야

철없는 몸으로 시집일랑 가지 마라

부모님한테서, 친척들한테서

배워서 쌓아라, 지혜와 분별

지혜와 분별이 더없는 혼수감

- 민요 Песня народная [Pesnya narodnaya] -

나보다 잘난 여자 눈에 뜨이면

나를 잊어 주어요

나보다 못난 여자 눈에 뜨이면

나를 생각해 주어요

-민요 Песня народная [Pesnya narodnaya] -

 

의식이 깨어난 뒤에도 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낯선 방의 침대에 누워 심한 허탈감을 맛보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침대 곁에서 사베리치가 촛불을 두 손으로 들고 서 있었고 누군가 내 어깨와 가슴팍에 감겨 있는 붕대를 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랜 잠에서 깨어나 차츰 정신이 맑아져 왔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여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요, 좀 나으셨어요?”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벌써 닷새째가 됩니다.”

사베리치가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나는 그쪽으로 얼굴을 천천히 돌렸다.

여긴 어디지? 거기 누가 있는 거요?”

나는 겨우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침대 곁으로 다가와서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어떠세요? 좀 나으셨어요?”

덕분에당신은 마리아 이바노브나군요, 마샤.”

나는 힘없이 소리로 대답하고는 말을 이을 기력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사베리치가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소리쳤다.

도련님! 깨어나셨군요!”

그는 되풀이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도련님!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난 얼마나 걱정했는지, 정말 간이 콩알만큼 오므라 들었습니다. 아아, 이젠 살았다! 벌써 닷새째예요, 닷새째!”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너무 얘기를 시키면 안 돼요, 사베리치. 아직 회복이 덜 됐으니까요.”

이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내 가슴 속에서 여러 가지 상념이 걷잡을 수 없이 맴돌았다. 나는 지금 사령관 집에 있다. 그렇다면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때때로 문병하러 와서 내 용태를 살펴본 것이 틀림없다.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사베리치에게 물어보았으나 노인은 고개를 저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사베리치를 불만스럽게 생각하다가 다시 잠에 빠졌다.

얼마 후 잠에서 깨어나 사베리치를 불렀는데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그가 아니라 마리아 이바노브나였다. 그녀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음성으로 내게 인사를 했다. 그 순간에 나를 사로잡았던 감미롭고도 황홀한 감정은 도저히 말로는 표현한 길이 없었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손을 내 가슴에 갖다 대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마샤는 손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문득 나는 그녀의 입술이 내 볼에 닿는 것을 느꼈다. 뜨겁고도 상쾌하고 달콤한 입술이었다. 순간 불같은 정열이 내 몸 속을 맹렬히 휘저었다.

사랑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 소중한 마리아 이바노브나, 내 아내가 되어주오. 나와 결혼해줘요.”

나는 마샤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 가슴에서 손을 떼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에 정신을 쓰시면 상처가 빨리 아물지 않아요. 저를 생각하셔서라도 몸을 소중히 해주세요.”

그녀는 나를 기쁨과 감동의 황홀경 속에 잠기게 해 놓고 방에서 나갔다. 사랑이 나를 살려냈다. 마샤는 내 여자, 내 아내가 된다. 마샤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그 순간의 내 전 존재에 보람을 갖다 주었다. 이때부터 건강이 회복되는 속도가 빨라졌다. 내 상처를 치료해 준 사람은 연대에 소속되어 있는 젊은 이발사였다. 요새에는 의사가 한 사람도 없어 이 이발사가 의사 역할까지 했는데 그는 젊은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세심하며 말수도 적었다. 사령관 집 사람들은 나를 극진히 돌봐주었다. 특히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내 머리맡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첫 번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마 전에 절반쯤 이야기하다 만 사랑의 고백을 다시 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내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리고 조금도 꾸밈새가 없는 진실한 얼굴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는 양친도 자기의 행복을 축복해줄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혹시 당신 부모님께서 반대하시지는 않을는지요.”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의 부드럽고 인자한 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아버지의 완고한 성격과 사고방식의 문제였다. 아버지는 내 사랑에 대해 별로 감동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철부지의 분별없는 장난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이 점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움직일 수 있는 그럴 듯한 편지를 보내 양친의 축복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편지를 써서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보였더니 그녀는 이만큼 설득력이 있는 감동적인 편지라면 반드시 허락을 하실 것이라고 탄복하면서 젊음과 사랑에는 반드시 따르게 마련인 맹목적인 신뢰감으로 황홀한 꿈속에 잠겼다. 시바블린과는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 며칠 후에 화해했다. 이반 쿠즈미치는 내가 결투한 것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들어 봐, 표트르 안드레비치, 나는 자네를 영창에 집어넣으려고 했었지만 그게 아니라도 자네는 이미 벌을 받은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마음을 바꿨네. 그렇지만 알렉세이 이바니치는 그렇지 않아. 그자는 지금 식량창고에 갇혀 있고 그자의 칼은 바실리사 예고로브나가 보관하고 있어. 그 녀석한테는 반성할 시간을 충분히 줘서 자기 죄를 뉘우치게 해야 되니까.”

이반 쿠즈미치가 이토록 온정을 기울여주는가 생각하니 너무나 기쁘고 고마워 내 가슴은 행복으로 가득 찼다. 나는 시바블린에 대해, 선량한 사령관은 부인의 동의를 얻어 시바블린을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시바블린은 영창에서 풀려나자 나를 찾아와서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을 진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나서 모든 불행은 자기가 나빴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점을 인정한다며 과거는 일체 잊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천성이 질투나 증오심을 오래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 말을 쾌히 받아들여 그를 용서해주었다. 그가 험담을 늘어놓아 나를 중상한 것은 구애를 거절당한데 대한 단순한 화풀이지 그밖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불행한 사랑의 경쟁자를 용서한 것이었다.

며칠 후에는 상처가 완전히 아물어 내 숙소로 옮겨갈 수 있었다. 나는 집으로 보낸 편지가 나에게 희소식을 안겨주리라는 기대를 갖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우울한 예감을 털어버리려고 노력하면서, 하루가 천 년처럼 지겹게 여겨지는 초조한 마음으로 회답을 기다렸다. 그 때까지 바실리사 예고노브나와 그녀의 남편에게는 아직 그런 뜻을 비치지 않고 있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결혼할 뜻을 밝힌다 해도 그들은 놀라거나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과 자신감을 나는 가질 수 있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나는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입에서 일단 그 말이 나오기만 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승낙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어느 날 사베리치가 한 통의 편지를 두 손으로 들고 내 방에 들어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회답이 온 것이다. 나는 세차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면서 낚아채듯 그 편지를 받아 들었다. 겉봉의 주소와 이름은 아버지의 자필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어떤 중대한 운명에 부딪힐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내게 편지는 어머니가 썼고 아버지는 그 끝에다 짤막하게 몇 줄 덧붙여서 적어 놓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참 동안 겉봉은 뜯지 않고,

올렌부르크 주 베로고르스크 요새 내

표트르 안드레비치 그리뇨프 앞

이라고 적힌 위엄 있는 글자를 바라보며 그 필적으로 아버지의 의중을 헤아려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마침내 겉봉을 뜯고 읽어 보았다. 그리고 모든 일이 틀어져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내 아들 표트르에게

이반의 딸 마리아 미로노바와의 결혼에 대해 우리들 부모의 허락과 축복을 요구하는 너의 편지를 이 달 15일에 받았다. 그러나 너의 요구에는 응할 수 없다. 허락이니 축복이니 하는 기대는 아예 버려라. 축복이 다 뭐냐. 철없이 날뛴 네게는 벌을 내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너는 장교의 신분을 가진 군인이 아니라 말썽만 일으키는 개구쟁이와 다름이 없다. 너는 허리에 칼을 찰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네 스스로 증명했다. 칼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차고 다니는 것이지 너처럼 결투를 하기 위해 차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말할 수 없이 실망했다. 당장 안드레이 카를로비치에게 편지를 써서 너를 베로고르스크 요새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전속시키도록 할 작정이다. 너의 어머니는 네가 결투를 해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속을 태운 나머지 병석에 누워 앓고 있다. 너는 어떤 인간이 되려고 그런 짓을 했느냐. 하나님의 각별한 은혜를 바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네가 올바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그 나쁜 버릇만이라도 고쳐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

아버지 씀.

이 편지는 내 감정을 무척 자극했다. 아버지가 거리낌 없이 써 보낸 지나치게 가혹한 표현에서 나는 극도의 모욕을 느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이름을 모멸적인 대명사로 바꿔 부른 아버지의 태도가 내게는 옳지 못한 것으로 생각 되었다. 베로고르스크 요새에서 더 먼 곳으로 전임되는가 생각하니 가슴이 섬뜩했으나 무엇보다도 나를 슬프게 한 것은 어머니가 나 때문에 몸져 누우셨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결투한 사실을 양친에게 알린 사람은 사베리치가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몹시 분개했다. 좁은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 노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내가 영감 때문에 근 한 달 동안이나 생사지경을 헤맸는데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이젠 내 어머니까지 몸져 눕게 만들다니.”

사베리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깜짝 놀랐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도련님.”

노인은 금시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변명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도련님이 나 때문에 몸을 다치셨다니! 나는 그 때 도련님을 구하려고 알렉세이 이바니치의 칼을 내 가슴으로 막으려고 달려갔던 겁니다. 이건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 한데 늙은 몸이라 발이 말을 들어주지 않아 때를 놓쳤지요. 내가 한 건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내가 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구요? 아니, 내가 마님을 몸져 눕게 만들었다구요? 이거 원통해서 어디 살겠나!”

시치미 떼지 마라. 누가 부추겨서 고자질을 했나. 바른 대로 말해 봐. 영감은 그따위 짓이나 하려고 나를 따라다니나?”

내가요? 내가 고해 바쳤다고요? 아아, 하나님! 도련님, 그럼 주인어른께서 보내신 편지를 읽어 보십시오. 그걸 읽어 보면 내가 어떤 고자질을 했는지 아실 겁니다. .”

사베리치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고는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나는 그 편지를 받아 읽었다.

수치를 모르느냐. 늙은 수캐놈아, 네가 내 명령을 무시하고 내 아들 표트르 안드레비치가 저지른 과오를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다 못해 내게 알려주었다. 그게 의무를 수행하는 방법이냐. 너는 주인의 명령을 어기고 내 아들의 못된 장난을 숨긴 죄에 대한 벌로 돼지우리 당번을 시키겠다. 그 사람의 편지로 표트르 상처가 다 나았다는 것을 알았다만, 여하튼 이 편지를 받는 즉시 표트르의 건강 상태를 상세히 보고하라. 상처는 어느 부분에 입었는지, 치료는 충분히 받았는지도 알려라.

사베리치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히 증명되었다. 나는 그에게 까닭 없이 의심하고 꾸짖어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노인의 비탄에 잠긴 마음은 돌이켜지지 않았다.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잘못이지. 나 같은 건 빨리 죽어야 돼.”

사베리치는 한숨 섞인 소리로 투덜거렸다.

지금껏 주인댁 양반들을 성실히 모셔온 대가로 늙은 수캐 놈이란 말을 들었고 돼지우리 당번 노릇을 하게 됐으니 정말 기가 막히는구나! 도련님이 몸을 다친 게 나 때문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내가 아니라 무슈인가 뭔가 하는 그 프랑스인 가정교사 탓입니다. 책임은 모두 그놈한테 있어요. 쇠꼬챙이로 사람을 푹푹 찌르는 연습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 놈을 가정교사로 고용해서 아까운 돈을 낭비했으니 내참.”

사베리치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내 행동을 아버지에게 알렸을까. 장군이 그랬을까? 아니야, 장군은 내게 그리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아. 물론 이반 쿠즈미치도 아니다. 그는 내가 결투한 것을 상관에게 보고할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나는 시바블린을 의심했다. 결투사건을 밀고한 결과 내가 베로고르스크 요새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전속되고, 따라서 사령관의 가족들과 헤어지게 되면 득을 보는 것은 시바블린 한 사람뿐이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려고 사령관 집으로 갔다. 그녀는 현관 밖의 계단까지 나와서 나를 맞아 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얼굴빛이 아주 창백해요.”

나는 흥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고 호주머니에서 아버지의 편지를 꺼내 주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편지를 읽고 나자 그녀의 떨리는 손으로 내게 되돌려주고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되다니! 당신 부모님은 저를 가정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이건 하나님이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세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부디 당신만이라도 행복하게 살아주세요.”

그게 무슨 말이오, 마리아 이바노브나!”

나는 그녀의 손을 힘 있게 쥐고 말했다.

내 마음은 결정돼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어떤 장애물이라도 헤치고 나갈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자 갑시다. 가서 당신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 분들은 이해심을 갖고 있어요. 냉정하지도 않고 오만하지도 않은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우리를 축복해주실 겁니다그러면 곧 결혼식을 올립시다. 우리 집에서 반대한다고 비관할 건 없습니다. 어머니를 설복해서 우리 편을 들어주게 하면 아버지도 고집을 꺾고 용서해줄 테니까. 나는 꼭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있어요.”

그건 안 돼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저는 당신 부모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한 결혼할 수 없어요. 당신 부모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결혼하면 저는 불행해져요. 행복하게 살 수가 없어요. 그러지 말고 우리 하나님의 뜻에 따르도록 해요. 앞으로 좋은 사람을 만나면결혼 상대가 나타나면 저를 잊어주세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저는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 오직.”

그녀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울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뒤를 쫓아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격렬한 감정을 누를 수가 없을 것 같아 내 숙소로 돌아왔다. 착잡한 심정으로 깊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사베리치가 들어와서 내 머리 속을 헝클어 놓았다. 그는 깨알 같은 글을 빽빽이 써 넣은 쪽지를 내밀면서 말했다.

, 도련님. 내가 도련님께 해가 되는 짓을 했는지, 고자질이나 하는 주책없는 인간인지, 내가 주인어른과 도련님 사이에 풍파를 일으켰는지 어쨌는지 이걸 좀 보십시오.”

나는 사베리치가 두 손으로 내민 쪽지를 받아 읽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편지에 대한 사베리치의 회답이었다.

자비로우신 저희들의 어버이,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님, 주인어른께서 보내신 편지는 잘 받아 보았습니다. 제게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몹시 화를 내시고 수치를 모르냐면서 저를 꾸짖으셨습니다만 저는 어디까지나 주인어른을 충실히 모시는 종이지 늙은 수캐는 아닙니다. 이렇게 얼굴이 주름지고 백발이 되도록 저는 한결같이 성의를 다해서 주인어른을 모셔왔습니다. 도련님이 결투를 하다가 부상당한 데 대해서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인어른을 놀라시게 하지 않으려는 뜻에서 그랬을 뿐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소문을 들으니 저희들의 어머님이신 아브도차 바실리예브나 마님께서는 상심한 나머지 병상에 누워 계시다고 하는데 하루 속히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도련님은 오른쪽 어깨뼈 바로 아래 상처를 입었으며 깊이는 6센티 가량입니다. 강둑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을 사령관님 댁으로 옮겼습니다. 치료는 이곳 이발사인 스텐판 파라마노프(Степан Парамонов [Stepan Paramonoff])가 맡아서 했는데 지금은 완쾌되어서 기쁜 소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해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도련님은 상관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는 모양인데 특히 사령관님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여하튼 도련님의 일상생활에는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불상사를 일으켰는가고 의심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네 발을 가진 말도 때로는 넘어지는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 아시고 아무쪼록 양해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주인어른께서는 제게 돼지우리 당번을 시키겠다고 하셨는데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그럼 이상으로 실례하겠습니다.

주인 어른의 충실한 종

알르히프 사베리치(Архип Савельев)

나는 이 선량한 노인의 구구하게 변명을 늘어놓은 편지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웃음을 흘렸다. 아버지에게는 회답을 쓰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데는 사베리치의 편지로 충분하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내 입장은 아주 달라지고 말았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의식적으로 나를 피했고 어쩌다가 만나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방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습관이 붙기 시작했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그러한 나를 나무랐으나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았다. 이반 쿠즈미치와 만나는 것은 근무상의 공적 용건이 있을 때뿐이었다. 시바블린과는 가끔가다 마지못해 얼굴을 대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내게 대한 반감이 그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것 같아 그를 만나는 것이 점점 싫어졌다.

이와 같이 불쾌감을 주는 일이 쌓이고 쌓여 내 생활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내 마음은 고독과 무위에서 생기는 어둡고 침울한 상념에 잠겼고 내 사랑은 쓸쓸한 외톨박이 생활 속에서 외롭게 불타올랐다. 나는 시를 짓는 일도 그만두었다. 모든 일에 의욕이 나지를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리가 돌아버리지 않으면 방탕한 생활이라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이 때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내 전 생애를 통해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6장 푸가초프의 반란(Пугачевщина [Pugachevshchina])

 

 

 

?

 

젊은이들아, 들어 보아라

우리들 늙은이의 옛이야기를

 

Вы, молодые ребята, послушайте,

Что мы, старые старики, будем

 

- 목가(牧歌 сказывати [skazyvati])-

 

 

 

?

 

내가 직접 체험한 갖가지 기괴한 사건을 기술하기 전에 올렌부르크(Оренбург [Orenburg])1773년 말에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를 몇 마디 설명해둘 필요가 있다.

드넓고 기름진 이 지방에는 얼마 전에는 러시아 제국 황제의 통치권을 인정한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미개인인 그들은 자주 반란을 일으켰고 또 법률이나 공동 생활 규범에 어두운데다 무분별하고 잔인했기 때문에 정부는 그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엄격히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이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고 옛날 우랄 강 유역에 살고 있던 카자흐를 이주시켜 요새 수비 임무를 부여했다. 그러나 변경이 안전을 지키고 평화를 유지하는 의무를 지닌 이 우랄 카자흐가 어느 새 불순한 반정부 집단으로 변모해 버리고 1772년에는 주요 도시에서 반란까지 일으켰다. 트라우벤베르크(Траубенберг [Traubenberg]) 소장이 자기 휘하의 군대를 복종시켜기 위해 엄격한 수단을 취한 것이 발단의 동기가 됐던 것이다. 그 결과 트라우벤베르크 소장은 처형되고, 사령부가 전면적으로 개편되었으나, 종국에 반란은 유산탄(榴散彈 картечью [kartech'yu] grape-shot)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주모자들은 가혹하게 처형되었다.

이것은 내가 베로고르스크 요새에 배속되기 얼마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 지방 일대가 평화로웠다. 아니 겉으로는 평화로운 것처럼 보였다. 당국은 음흉하고 간악한 폭도들의 위장 전술에 넘어가 그들이 뉘우치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폭도들은 가슴 깊이 원한을 품고 복수심을 불태우면서 다시 폭동을 일으킬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폭동 이야기는 이쯤 해 두고 여기서부터 화제를 본론으로 돌린다. 177310월 상순의 어느 날 밤, 나는 혼자서 방에 틀어박혀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달을 스치고 흘러가는 구름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사령관이 보낸 병사가 나를 부르러 왔다. 나는 곧 숙소로 나섰다. 사령관집에는 시바블린과 이반 이그나츠이치, 그리고 카자흐의 하사관이 있었다. 그런데 바실리아 예고로브나와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령관은 침울한 빛을 띤 얼굴로 내 인사를 받았다. 그러고는 방문을 잠그고 문 곁에 서 있는 하사관을 제외한 사람들을 모두 자리에 앉게 한 다음 호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내 들고 이렇게 말했다.

장교 제군, 중대한 연락이 왔다. 장군께서 보낸 명령서를 읽을테니 잘 들어라.”

그러고는 안경을 끼고 명령서를 읽었다.

베로고르스크 요새 사령관 미로노프 대위 앞

극비

다음 사항을 지시한다.

감옥에서 탈출한 돈 카자흐(Donk Cossack, донкой казак [donkoy kazak])의 분리파(учиня [uchinya]) 교도인 에벨리얀 푸가초프(Емельян Пугачев [Emelyan Pugachev])라는 자가 불경부도하게도 고 표트르 3(Петра III [Petra III])의 어명을 사칭, 불순분자들을 규합하여 도당을 만들고 우랄 강 유역의 여러 촌락에서 난동을 일으켰으며 이미 몇 개소의 요새를 점거 파괴하고, 도처에서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고 있으니 이 명령서를 수령하는 즉시 베로고르스크 요새 사령관 미로노프 대위는 전술한 바의 반란자를 격퇴하고 또 그 자가 귀관이 수비하고 있는 요새를 습격할 경우에는 이를 전멸시킬 수 있는 방법을 속히 찾아내라.

방법이라.”

사령관은 안경을 벗고 쪽지를 접으면서 말했다.

입으로 한다면 쉬운 일이지만 실제 행동은 용이하지 않아. 흉악한 이 역적은 보통놈이 아닌 것 같은데 이쪽 병력은 130명밖에 안 되니 말이야. 물론 카자흐들은 계산에 넣지 않은 병력이지. 그놈들은 믿을 수가 없어. 너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야. 막시미치(이 말을 듣고 카자흐 하사관은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야. 장교 제군! 힘을 다해서 잘해 보세. 부탁하네. 적이 습격해 올 경우에는 요새의 출입문을 닫고 병사들을 집합시켜야 돼. 막시미치, 너는 네 동료 카자흐들을 빈틈없이 감시해라. 대포를 검사하고 충분히 손질해두지 않으면 안 돼. 이것은 모두 비밀이니 절대 사전에 누설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게.”

이상과 같이 지시를 내리고 이반 쿠즈미치는 우리를 해산시켰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과연 반란이라도 일어날까?”

나는 시바블린에게 물었다.

그야 모르지. 하지만 모든 것은 예상을 뒤엎을 경우가 많거든.”

이렇게 말한 시바블린마저 새어나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다했다. 그럼에도 푸가초프 출현의 소문은 온 요새에 퍼져 갔다. 이반 쿠즈미치는 자기 아내를 무척 소중히 여기고 또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지만 직무 수행상 필여하다고 인정되는 군사 비밀은 결코 이야기하지 않은 엄격한 군인이었다. 장군의 편지를 받았을때 그는 교묘한 수법으로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를 밖으로 내보냈다. 게라심 신부가 올렌부르크에서 무엇인가 굉장한 소식을 듣고 왔는데 그걸 털어놓기가 아까운지 입을 다물고 있다고 그녀에게 말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호기심이 생겨 신부 부인한테 가서 물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샤가 혼자 집에 있으면 심심할테니 함께 가보라는 이반 쿠즈미치의 권유에 따라 딸을 데리고 갔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가 딸을 데리고 나가자 절대적 권위를 장악한 이반 쿠즈미치는 즉시 사람들을 보내 우리들 불러오게 하고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엿듣지 못하도록 파라시카를 곳간에 가둬 버렸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신부 부인을 찾아갔으나 무엇 하나 캐내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자기 집을 비운 사이에 이반 쿠즈미치가 회의를 열었고 파라시카가 곳간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남편한테 속았다고 생각하고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아내의 공격에 대한 방어 태세가 준비되어 있는 이반 쿠즈미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집요한 아내의 질문공세를 침착하게 받아넘겼다.

글쎄 내 얘길 들어 보라니까. 병사의 아낙네들이 페치카에 밀짚을 때기 시작하기에, 그런 걸 때면 액운이 닥쳐 재난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앞으로는 밀짚을 때지 말고 가랑잎이나 마른 나뭇가지를 때라고 엄하게 주의를 준 것뿐이야.”

그럼 왜 파라시카를 곳간에 가뒀어요? 그럴 필요가 있었나요? 내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그 애는 가엾게도 곳간에 갇혀 있었어요. 왜 가둬 놓았지요?”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날카롭게 질문의 화살을 던졌다.

이반 쿠즈미치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우물쭈물 얼버무려 넘겼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남편의 엉큼한 뱃속을 눈치챘지만 그 흑막의 내면을 실토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질문을 중지했다. 그리고 화제를 돌려 아클리나 판필로브나가 종래와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오이를 소금에 절인 이야기를 했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그 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남편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비밀의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머리를 짜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튿 날 미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이반 이그나츠이치가 대포의 포신 속에서 아이들이 집어넣은 나무토막과 돌멩이, 헝겊조각, 고기 뼈다귀 등 잡동사니 쓰레기를 꺼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건 분명히 전쟁 준비를 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웬일일까. 키르키즈 인들의 습격에 대비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이반 쿠즈미치가 그런 사소한 일을 내게 숨길 리는 없는데정말 이상하구나.’ 하고 바실리아 예고로브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여성 특유의 호기심을 누를 수가 없어 이 비밀을 탐지해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이반 이그나츠이치를 불렀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피고인의 경계심을 무디게 하기 위해 일부러 관련성이 희박한 문제부터 심문하기 시작하는 재판관처럼 집안일에 대해 몇 가지 주의를 주었다. 그러고는 한참 있다가 깊은 한숨을 쉬고 나서 고개를 저으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아, 이런 일이 생기다니, 무서운 일이에요. 이런 소식을 들을 줄을 꿈에도 물랐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말 큰 걱정이에요.”

무슨 말씀입니까, 마님.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고 우리에겐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니 걱정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요새에는 병사들도 많이 있고 화약도 넉넉히 있어요. 대포 손질을 제가 했지요. 푸가초프가 습격해와도 문제 없어요. 충분히 반격을 가할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는 이상 싸워서 지진 않습니다.”

푸가초프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사령관 부인은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상대방이 넘겨짚은 데 걸려들어 함부로 지껄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내세워 끝내 모든 것을 털어놓게 하고 말았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그 약속을 지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부의 아내는 예외였다. 신부 집에서는 소를 들판에 놓아 기르고 있었는데 그것을 악당들에게 약탈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만 귀띔해 주었던 것이다.

얼마 안 가서 사람들은 몇몇이 모이기만 하면 푸가초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소문은 제각각이었다. 사령관은 근처의 여러 마을과 요새의 상황을 면밀히 정찰 파악하는 임무를 카자흐 하사관에게 부여했다. 하사관은 이틀 후에 돌아와서 보고했다.

이 요새에서 약 65km 떨어진 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장집단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으며 봉화도 여러 군데서 올랐다는 말을 바슈키르(башкирский [bashkirskiy] [Bashkir]) 인들에게서 들었습니다.”

이 하사관이 수집한 정보는 이것뿐이었다. 그는 겁이 나서 그 이상 앞으로 나갈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적정(敵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고하지 못했다.

요새 안에 카자흐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 모여 수군수군 말을 주고받다가 순찰병의 모습이 눈에 띄면 흩어져버리곤 했다. 카자흐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사령관은 몇 사람의 첩자를 동원했다. 며칠 후 러시아 정교의 세례를 받은 유라이(Youlai)라는 카르미크(калмык [Kalmuck])인이 사령관에게 중대한 보고를 했다. 내용인즉 하사관이 보고한 것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고 실상은 적과 내통하고 돌아와 동료 카자흐들에게 자기 폭도의 진영으로 가서 수령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령관은 즉시 교활한 그 하사관을 감금하고 유라이를 후임자로 결정했다. 이 소문을 들은 카자흐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의 빛을 나타냈다. 사령관의 명령을 집행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카자흐들이 두고보자 수비대의 쥐새끼놈이라고 독기서린 말을 내뱉는 것을 들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대담하게도 큰 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떠들어댔다. 사령관은 그 날 중으로 배신자를 심문하려고 했으나 약삭빠른 그의 카자흐 하사관은 어느새 도망쳐 버리고 없었다. 동료 카자흐들이 그의 탈출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사태가 발생하여 사령관의 불안을 더욱 크게 했다. 비밀리에 선동인물을 돕던 바슈키르가 붙잡힌 것이었다. 그래서 사령관은 다시 장교들을 소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번데도 적당한 구실을 붙여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를 멀리 따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반 쿠즈미치는 원래 정직한 사람이어서 한 번 써먹은 수법 이외의 것을 고안해 내지 못했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 소문을 들으니 게라심 신부한테.”

이반 쿠즈미치는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그러나 사령관 부인은 톡 쏘아 그 말을 가로막았다.

거짓말 말아요. 이반 쿠즈미치. 당신은 나를 내보내 놓고, 내가 없는 자리에서 장교들과 회의를 열고 에멜리얀 푸가초프에 관해 의논하려는 거지요? 다 알고 있어요. 이젠 안 속아요!”

이 말에 이반 쿠즈미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건 어떻게 알았지? 그럼 여기 있어요. 당신이 있는 데서 얘기하도록 할 테니까.”

진작 그러실 일이지. 당신 답지 않게 잔꾀를 부리려 들다니,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요. , 그럼 장교들을 부르세요.”

우리는 다시 모였다. 이반 쿠즈미치는 아내가 있는 자리에서 푸가초프의 격문을 읽었다. 그것은 글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하는 카자흐가 작성한 것인데, 약탈자는 곧 베로고르스크 요새로 쳐들어갈 작정이라고 선언한 다음 카자흐와 병사들에게는 자기네 도당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지휘관에게는 반항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만일 여기에 거역하면 목숨을 빼앗아 버리겠다고 협박한 것이었다. 이 격문은 난폭하고 무지한 것이지만 박력 있는 문체로 씌어져 있어 단순한 두뇌를 가진 인간에게는 틀림없이 위험을 느끼게 할 것이었다.

정말 지독한 악당이네요!”

사령관의 아내가 입을 열었다.

뻔뻔스럽게도 우리에게 요구 조건을 내세우다니!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라니! 40년 동안이나 군대생활을 하면서 쓴맛 단맛 다 체험한 사령관이라는 걸 그 짐승놈은 모르고 있을까요? 이 세상에 도둑놈이 하라는 대로 하는 사령관이 어디 있다구.”

그녀의 말이 끝나자 이반 쿠즈미치가 대답했다.

그런 사령관은 있을 리가 없지. 그런데 그 역적놈은 만만치가 않은 모양이오. 벌써 다른 곳의 요새를 점령했다는 소문이 있으니까.”

정말 큰일이군요!”

사령관의 말을 받아 시바블린이 한 마디 했다.

그놈이 강한 지 약한 지 이제 곧 진짜 힘을 알게 될 거야. 바실리사 예고로브나, 곳간 열쇠를 줘요. 이반 이그나츠이치, 그 바슈키르 놈을 데려오게. 그리고 유라이더러 채찍을 갖고 오라고 하게.”

그러자 사령관의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 줘요. 이반 쿠즈미치. 마샤를 우선 다른 곳으로 데리고 나가야겠어요. 그런 걸 보면 겁을 집어먹고 비명를 지를테니까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을 고문하는 건 못 봐요. 그럼 여러분, 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고문은 옛날부터 죄인을 취조하는 수단으로 습관화되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폐지하라는 칙령이 내렸어도 여전히 존속되었다. 당시에는 범죄의 증거로써 범인의 자백이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론적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법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만일 피고의 범죄 부정이 무죄의 증거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 자백도 유죄의 증거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 야만적인 고문의 폐지를 애석하게 여기는 재판관이 더러 있다. 우리가 살던 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문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사령관의 고문 명령을 듣자 우리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사령관 아내한테 열쇠를 받아 곳간에 갇혀 있는 바슈키르 인을 데리러 갔다. 얼마 후 죄인이 현관 옆방으로 끌려 왔다. 사령관은 그 죄인을 자기 앞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바슈키르 인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간신히 무턱을 넘어섰다. 그의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통이 높은 모자가 벗어 들고 문 곁에 섰다. 나는 그 사나이를 보고 온 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내 평생 그 사나이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이는 일흔이 넘어 보였는데 얼굴에는 코도 없고 귀도 없었다. 머리는 중대가리처럼 깎았고 턱에는 흰 터럭이 몇 올 붙어 있었다. 작은 키에 몸은 비쩍 마르고 허리가 활처럼 구부정했지만 눈은 불꽃이 튀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사령관은 무섭고도 징그러운 그의 인상을 본 순간 1741년의 반란사건에 가담했다가 형벌을 받은 폭도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 그렇지. 네놈은 우리 올가미에 걸려든 적이 있는 늙은 여우로구나. 틀림없다. 네놈이 폭동에 가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맨들맨들한 중대가리가 증거다. 좀더 가까이 와. 누가 시켜서 이곳에 침입했나 말해봐!”

늙은 바슈키르 인은 입을 다문 채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말은 안 하나! 러시아 어를 몰라서 벙어리 짓을 하는 거냐? 유라이, 통역 좀 해. 누가 시켜서 이 요새에 침입했느냐? 배후 조종자는 누구냐?”

유라이는 타타르 어로 이반 쿠즈미치의 심문을 통역했다. 그러나 늙은 바슈키르 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을 뿐 대답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약한 놈! 내가 입을 열게 해주마. 이봐, 이 놈의 옷을 벗기고 등가죽이 터지도록 후려쳐라. 알겠나, 유라이, 사정없이 후려치는 거다.”

노병사 두 사람이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바슈키르 인의 줄 무늬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죄인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떠올랐다. 개구쟁이들에게 붙잡힌 작은 짐승처럼 그는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사 한 사람이 그의 두 팔을 움켜쥐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유라이가 채찍을 휘두르려고 하자 늙은 바슈키르 인은 힘없는 소리로 애원하듯 신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벌렸다. 입 속에는 혓바닥 대신 얇은 나무조각이 있었는데 그것이 혓바닥처럼 나불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알렉산드르 황제의 온화한 태평성대와 견주어 생각할 때마다 나는 계몽사상의 급속적인 성과와 박애주의의 보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청년들이여! 만일 내 수기가 그대들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면 최선의 항구적 사회개혁은 일체의 강제적 대 변동을 수반하지 않는 습관의 개선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입 속이 저 모양이니 아예 들을 수도 없겠군. 유라이, 이놈을 다시 곳간에 가둬라. 그럼 장교제군, 회의를 계속하세.”

사령관이 말했다. 우리는 현재의 정세에 대해 토의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 때 바실리사 예고로브나가 몹시 당황한 얼굴로 헐레벌떡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어찌 된 일이오?”

사령관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여러분, 큰일났어요!”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성급하게 말했다.

니지네오조르나야(Нижнеозерная [Nizhneozernaya] Nijne?zero) 요새가 오늘 아침에 함락됐어요. 폭도들 손에 넘어갔어요. 게라심 신부 댁의 하인이 지금 거기서 돌아왔어요. 점령당할 때의 광경을 목격하고 온 거예요. 그 요새 사령관과 장교 전원이 학살되고 병정들은 모두 포로가 됐다는군요. 폭도들이 언제 우리 요새를 습격할는지 몰라요. 지금 쳐들어오고 있는지도 몰라요.”

이 소식은 우리 모두를 전율시켰다. 니지네오조르나야 요새는 이곳에서 약 27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그곳 사령관은 매우 침착하고 겸손한 청년 장교로 나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두어 달 가량 전에 젊은 아내를 데리고 임지로 가던 도중 이 요새에 들러 이반 쿠즈미치의 집에서 묵은 적이 있었다. 우리는 푸가초프의 습격을 결정적인 사실로 보고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가슴이 메어 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사령관에게 말했다.

제 의견을 들어 주십시오. 이반 쿠즈미치.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는 목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요새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고의 여지도, 의심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비전투원인 부녀자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길이 막히기 전에 부녀자들을 올렌부르크로 피난시키는게 어떻겠습니까? 어쨌든 악당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안전지대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겁쟁이처럼 그러지 마세요! 총알이 날아오지 않는 요새가 어디 있어요? 어째서 베로고르스크 요새를 못비더워하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 온 지 벌써 22년째가 되는데 그 동안 우리는 바슈키르 인과 키르기스 인들의 난동을 여러번 겪으며 경험을 쌓았어요. 푸가초프의 습격도 틀림없이 막아낼 수 있을 거예요.”

바실리사 예고로브나, 이 요새를 신뢰한다면 당신은 여기 남아도 좋아요. 문제는 마샤란 말이오. 우리가 이긴다든지 증원군이라도 많이 온다면 별 문제겠지만, 만약 우리가 패배한다면.”

그렇게 되면.”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사령관의 말에 말끝을 맺지 못하고 심한 동요의 빛을 드러낸 채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사령관은 자기 말의 효과를 자인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말 한 마디로 아내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는 효과를 거둔 것은 어쩌면 결혼 이후 처음인지도 모른다.

마샤가 여기 남아 있는 건 좋지 않아. 그 애는 올렌부르크의 고모네 집으로 보냅시다. 거기라면 군대도 많고 대포도 충분하니까 걱정없어. 성벽도 돌로 쌓아서 아주 튼튼해. 그렇지, 당신도 함께 가는 게 좋을 거요. 늙은 여자인데 어떠랴 하는 생각은 버려야 돼. 만일 적이 이 요새를 습격해서 함락시킨다면 어떻게 되겠나 생각해봐요.”

알겠어요.”

사령관의 아내가 대답했다.

그렇게 해요. 마샤는 보냅시다. 하지만 난 안 가겠어요. 나더러 함께 가라는 말씀은 아예 하지 마세요. 난 어떤 일이 생겨도 안 가겠어요. 앞으로 여생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당신과 헤어져 낯선 곳에 가서 나 혼자 묻힐 무덤을 찾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지금까지 당신과 같이 살아 왔으니 죽을 때도 같이 죽어야지요.”

당신 마음이 정말 그렇다면 좋을 대로 해요. 그럼 곧 가서 마샤의 여행 준비를 해요. 우물쭈물 시간을 보내지 말고. 내일 새벽에 출발시켜야 할테니까. 인원 부족이지만 호위병도 한 사람 딸려 보내야겠어. 한데 마샤는 어디 있지?”

아쿨리나 판필로브나(Akoulina Pamphylovna) 집에 있어요. 니지네오조르나야 요새가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쇼크를 받은 거예요. 저러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쩌죠? 아아, 하나님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악당들을 무리쳐주십시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는 딸의 출발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사령관방에서는 대책을 강구하는 토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마샤에 대한 걱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해질 무렵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창백한 얼굴이 되어 돌아왔다.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우리는 묵묵히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작별 인사를 하고 우리는 각자 자기 집으로 향했다. 나는 일부러 칼을 놔두고 왔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러 가는 척하고 발길을 돌렸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단둘이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현관 앞에 당도했다. 그녀는 현관 층계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안녕히 계세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난 올렌부르크로 가게 됐어요. 부디 몸조심하세요. 하나님의 은헤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몰라요. 부디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아니기를.”

그녀는 칼을 건네주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잘 가요, 나의 천사! 나의 사랑스러운 천사, 나의 귀여운 사람! 내 몸에 어떤 재난이 닥치더라도 나는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리겠습니다.”

마샤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나는 그녀에게 뜨거운 키스를 하고 방에서 나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7장 습격

용감한 사람아, 정직한 사람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성실하게 일한 사람아

꼬박 삼십삼 년 동안이나

충실히 근무했다. 성실한 사람아

아아, 그래도 상을 못 타고

돈도 기쁘도 정다운 음서도 지위도 없다

용감하고 성실한 사람이 받을 것은

길고 굵은 기둥 두개

그 위에 가로놓인 단풍나무 들보

게다가 명주실로 꼬아 만든 올가미 밧줄

-민요-

그 날 밤 나는 잠을 자지 못했다. 옷도 벗지 않았다. 새벽이 되면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지나가게 될 요새의 문까지 나가 그녀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려고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나는 기분은 얼마 전까지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침울한 기분과는 비교도 않을 만큼 밝은 것이었다. 이별의 슬픔이 내 마음 속에서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숭고한 공명심 등과 한데 뒤섞여 있었다.

어느 새 날이 새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나가려고 할 때 하사가 들어와서 우리 요새의 카자흐들이 밤중에 탈출했는데 그 때 유라이를 강제로 끌고 갔고 요새 주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말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요새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근심부터 앞섰다. 나는 하사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는 곧장 사령관 집으로 달려갔다.

동쪽 하늘이 훤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전속력으로 달리는데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이반 이그나츠이치가 뒤쫓아 와서 숨가쁜 소리로 말했다.

"어디 가요? 이반 쿠즈미치는 보루에 계시는데 당신을 찾아요. 푸가치(푸가초프의 별명. 올빼미라는 뜻)가 나타났어요."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출발했습니까?"

심장의 고동 소리가 갑자기 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다급히 물었다.

"떠나지 못했어요. 요새 밖에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으니까요. 이 요새는 포위되고 올렌부르크로 가는 길도 막혔어요. 정말 안됐어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우리 두 사람은 보루로 갔다. 보루라고는 해도 자연의 힘으로 쌓아 올려진 고지에 통나무로 목책을 둘러친 것뿐이었다. 거기에는 요새의 전 인원이 모여 있었다. 수비대 병사들은 총을 들고 정렬해 있었고 대포도 운반되어져 있었다. 사령관은 정렬한 소수의 수비대 병사들 앞을 침착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절박한 위험이 이 늙은 군인에게 이상한 기운을 불어 넣어 주었던 것이다. 요새에서 그리 멀지 않은 들판에서 20명가량의 폭도들이 말을 몰고 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 무리는 카자흐들이었고 그 속에 파시키르 인도 보였다. 파시키르 인은 삵괭이 가죽 모자와 독특한 화살통으로 쉽게 판별해 낼 수 있었다. 사령관은 정렬한 병사들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최선을 다해서 여왕 폐하의 권위를 수호하고, 우리의 용기와 충성심을 전 세계에 보여 줄 때가 왔다!"

병사들은 환성을 올려 최선을 다해 싸울 의사를 표현했다. 시바블린은 내 곁에 서서 적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들판을 돌아다니던 자들이 요새의 동태를 알아차리고 한군데 보여 무엇인가 의논하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이반 이그나츠이치에게 대포를 그쪽으로 돌리라고 명령했다. 그러고는 자기가 직접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포탄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면서 그들이 머리 위를 날아가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그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때 바실리사 에고로브나가 자기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 마샤를 데리고 보루로 왔다.

"싸움은 어떻게 돼 가요? 적은 어디 있어요?"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령관에게 물었다.

"바로 저기 있소. 하지만 두려울 건 없소. 하나님이 지켜 주셔서 만사가 잘 될 테니까. 마샤, 너 무섭니?"

"아녜요. 아버지. 집에 혼자 있는 게 더 무서워요."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게 시선을 돌리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어제 저녁 그녀를 통해서 칼을 받은 것을 상기했다. 그리고 흉악한 적으로부터 내 연인을 지키기라도 할 것처럼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내 가슴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끝까지 지킬 테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사랑과 신뢰를 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는 사나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가슴이 가득 차는 것을 느끼면서 결전의 순간을 기쁘게 기다렸다. 그 때 요새에서 5백 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언덕 모퉁이에서 말을 탄 폭도들의 집단이 나타났다. 잠시 후 들판을 창과 활로 무장한 폭도의 무리로 꽈 메워졌다. 그들 가운데 붉은 망토를 입고 백마를 탄 사나이가 장검을 뽑아 들고 다리고 있었다. 그 자가 바로 푸가초프였다. 푸가초프가 말에서 내리자 부하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호위했다. 이윽고 두목이 명령을 받았는지 네 사나이가 전속력으로 말을 몰고 요새의 목책 바로 아래까지 왔다. 우리는 이 네 사나이가 요새에서 탈출해 나간 배신자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중 한 사나이의 높이 쳐든 손에는 한 장의 종이쪽지가 쥐어져 있었고 또 한 사나이가 들고 있는 창끝에는 유라이의 목이 꽂혀 있었는데 그 사나이는 창을 마구 휘둘러 그 목을 목책 너머 우리들 앞으로 던졌다. 가엾은 카르미크 인의 목이 사령관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 때 배신자들이 소리쳤다.

"쏘지 마라! 총을 버리고 황제 폐하의 어전으로 나오라! 폐하께서 행차하시어 지금 여기 계신다!"

"천하에 무도한 역적 놈! 사격 개시!"

사령관이 사격 명령을 했다. 우리 수비대 병사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종이쪽지를 들고 있던 카바흐가 팍 고꾸라지는가 했더니 이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다른 카자흐들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돌아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유라이의 목을 보고 겁을 집어먹은 데다 일제사격의 총소리에 놀라 그녀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반 쿠즈미치는 하사관을 불러 사살된 카자흐가 쥐고 있는 종이쪽지를 갖고 오라고 명령했다. 요새의 목책 밖으로 나간 하사관은 죽은 카자흐가 타고 온 말을 끌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쪽지를 사령관에게 주었다. 이반 쿠즈미치는 그것을 읽어 보더니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폭도들은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 후 총탄이 빗발처럼 날아오고 화살이 우리 주위에 땅바닥과 목책에 꽂히기 시작했다. 사령관이 곁에 있는 아내에게 말했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 당신은 여기 있을 필요가 없으니 빨리 마샤를 데리고 가요! 애 얼굴을 좀 봐, 곧 기절하겠어! 빨리 가요!"

그녀는 폭도들이 쏘아 대는 총소리에 기가 질렸는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겼다는 듯한 얼굴로 적의 무리가 밀려오는 들판을 보고 있다가 남편에게 눈을 돌리면서 대답했다.

"이반 쿠즈미치,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에요. 마샤를 축복해 주세요. 마샤, 아버지 앞으로 가거라."

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마샤는 아버지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노 사령관은 마샤에게 세 번 성호를 긋고는 그녀를 일으켜 볼에 키스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마샤, 부디 행복하거라.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라. 하나님은 결코 너를 저버리지 않으실 거야.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기 바란다.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지혜가 베풀어지기를 빌겠다. 너희들도 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았던 것처럼 행복하게 살아라. 그럼 가보라, 마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 이 애를 빨리 데리고 가요."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아버지의 목을 껴안고 흐느껴 울었다. 딸이 우는 것을 보고 바실리나 에고로브나도 울면서 말했다.

"이반 쿠즈미치, 우리도 키스해요... 부디 안녕히, 이반 쿠즈미치. 지금까지 내가 당신께 잘못한 일이 있었다면 용서해 주세요."

사령관은 아내를 껴안았다.

"그럼 가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마샤에게 사라판(경사 때 입는 소매가 없는 옷)을 입혀요."

사령관 부인은 딸과 함께 발길을 돌려 집을 향했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도 나를 돌아보더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슬픈 눈빛을 남기고 돌아섰다. 아내와 딸을 바라보던 이반 쿠즈미치는 우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모든 주의는 적에 집중되었다. 두목 주위에 모여 있던 폭도들이 갑자기 말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사령관이 말했다.

"저놈들이 공격할 모양이다.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자."

이 때 함성이 들판을 흔들었다. 폭도들이 요새를 향해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우리 대포에 유탄이 장전되었다. 사령관은 폭도들이 유효 사격거리 안에 들어왔을 때 발포를 명령했다. 유탄은 적의 무리 한복판에 떨어져 폭발했다. 폭도들은 양쪽으로 흩어져서 후퇴했다. 그러나 빨간 망토를 입은 두목은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칼을 휘두르며 달아나는 부하들을 불러 모으려고 했다. 잠시 후 조용했던 들판에 다시 함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사령관이 명령했다.

"문을 열어라! 북을 울려라! 이제부터 기습출격. 반격을 가한다! 나를 따르라! 전진!"

사령관과 이반 이그나츠이치와 나는 보루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겁을 먹고 사기를 잃은 수비대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너희들은 어째서 서 있나! 죽을 때는 깨끗하게 죽는 게 군인이다! 빨리 나를 따르라!"

사령관이 소리쳤다. 이 틈을 타서 폭도들은 물밀듯이 요새 안으로 밀어닥쳤다. 북소리는 그치고 수비대는 총을 내던졌다. 나는 폭도들 사이에 끼어 요새 안으로 달려갔다. 카자흐들이 머리에 상처를 입은 사령관을 에워싸고 요새의 명도를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사령관을 구출하려고 그쪽으로 뛰어가다가 수명의 건장한 카자흐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가죽 허리띠로 내 손을 묶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 항거하는 놈의 말로가 어떤 건지 보여 주마!"

나는 두 손을 묶인 채 그들에게 끄려갔다. 길가에는 주민들이 빵과 소금(러시아의 관습으로 환영의 뜻을 나타낸다)을 갖고 나와 있었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때 군중 속에서

"황제 폐하가 광장에서 포로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공순의 서양을 받고 계신다.“

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광장으로 몰려갔다. 우리들도 그쪽으로 끌려갔다. 푸가초프가 사령관의 집 현관 층계 위에 있는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가장자리에 황금빛 레이스가 달린 카자흐 식 붉은 망토에 담비 털가죽으로 만든 통이 높은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눈은 이글거리는 불길처럼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어딘가 낯익은 데가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카자흐의 대장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게라심 신부가 창백한 얼굴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두 손으로 십자가를 들고 현관 층계 옆에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을 처형될 포로들의 구명을 무언으로 푸가초프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광장에는 교수대가 서둘러 세워졌다. 우리가 다가가자 파시키르 인들이 군중을 헤치고 우리를 푸가초프 앞으로 끌어냈다. 종소리가 그치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사령관은 누구냐?"

푸가초프가 물었다. 우리 요새에 있던 한 하사관이 군중 속에서 나와 이반 쿠즈미치를 가리켰다. 푸가초프는 무서운 눈으로 노인을 노려보고 말했다.

"이놈, 너는 황제도 몰라보느냐? 황제인 내게 항거하다니!"

사령관은 두려움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네 놈은 우리 황제가 아니다. 네놈은 반역자다. 황제를 사칭하는 역적이다! 알겠나."

이 말을 듣자 푸가초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휜 손수건을 흔들었다. 수명의 카자흐가 노 사령관을 교수대쪽으로 끌고 갔다. 교수대 들보 위에는 어제 우리에게 심문을 받았던 그 불구의 파시키르 인이 말을 탄 것처럼 걸터앉아 한 쪽 손에 밧줄을 쥐고 있었다. 얼마 후 나는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는 이반 쿠즈미치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 그 다음에는 이반 이그나츠이치가 푸라초프 앞으로 끌려 나왔다.

"여기 있는 이 표트르 표트르비치 황제 폐하에게 순종과 충성을 맹해하라!"

푸라초프가 말하자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노 사령관이 한 말을 되풀이했다.

"너는 황제가 아니다. 너는 반역자다. 황제 폐하를 사칭하는 역적이다."

푸가초프는 눈을 부라리며 아까처럼 흰 손수건을 흔들었다. 선량한 중위는 노 사령관 옆에서 축 늘어졌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나는 지조 있는 상관들이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할 작정으로 각오를 굳히고 푸가초프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폭도 대장들 가운데 머리를 카자흐 식으로 깎고 카자흐의 복장을 하고 있는 시바블린의 모습을 보고 말할 수 없이 놀랐다. 시바블린이 푸가초프에게 다가가서 귀엣말을 보냈다.

"저놈을 매달아라!"

하고 푸라초프는 나를 보지도 않고 명령했다. 이윽고 내 목에 밧줄이 걸렸다. 나는 속으로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모든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고 내 동료들의 운명에 하나님의 은혜와 가호가 있기를 빌었던 것이다. 나는 교수대 아래로 끌려갔다.

", , 너무 무서워 말라구!"

살인자들이 내게 말했다. 마지막 기운을 북돋우어 주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 운명이 이 세상의 모든 미련과 작별하려고 할 때 갑자기 노인의 목 쉰 호리가 내 귀청을 올렸다.

"잠깐만 내 말을 좀 들어 보시오!"

사형 집행인들은 손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베리치가 푸라초프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생각 좀 해 보십시오. 귀족의 아들 하나 죽여 뭘 하겠습니까. 소용없는 일입니다. 풀어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본보기로 죽여야 하는 것이라면 이 늙은 몸을 매달아 주십시오. 제발 그렇게 해 주십시오!"

사베리치의 말이 끝나자 푸가초프는 사형 집행인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하자 내 목에 걸었던 밧줄이 벗겨졌다.

"너그러우신 황제 폐하께서 너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이런 말이 내 귀에 들려왔다. 그 때의 내 기분은 한 마디로 형언하기 어렵다. 목숨을 건진 것을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그 순간의 내 감정은 흩어져 있었다. 나는 다시 황제를 사칭하고 있는 자의 앞으로 끌려가 무릎을 꿇었다. 푸라초프는 억세게 생긴 손을 내밀었다.

"키스하라! 폐하의 손에 키스하라!"

주위에 둘러서 있던 자들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내 마음은 돌처럼 굳어졌다. 그런 짓을 하느니 나는 차라리 잔인한 사형을 받고 죽어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내 뒤에 서 있던 사베리치가 나를 앞으로 밀면서 나직이 말했다.

"도련님,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고집은 그만 부리시고 어서 키스하십시오. 키스하는 것쯤 아무것도 아닙니다. 침을 뱉어 버리시는 기분으로 어서 키스하십시오. 어서요."

그러나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푸라초프는 내밀었던 손을 내리고 차가운 웃음을 얼굴에 띠면서 말했다.

"이 소위님은 너무 기뻐서 머리가 돌아 버린 모양이다. 일으켜 줘라!"

내 곁에 서 있던 카자흐가 나를 일으켰다. 나는 자유의 몸이 되어 무서운 희극이 연출되는 것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순종과 충성과 선서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십자가에 키스를 하고 푸라초프에게 머리를 숙였다. 수비대 병사들도 한쪽에 정렬해 있었다. 요새의 재봉사가 날이 무디어 잘 들지 않은 가위로 병사들의 긴 머리를 잘랐다. 카자흐 식으로 머리를 잘린 병사들은 머리카락을 털면서 푸가초프 앞으로 나가 그의 손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러면 푸가초프는 사면을 선언하고 자기 도당에 가입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진기한 희극이 세 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푸라초프는 팔걸이의자에서 일어나 부하 대장들을 거느리고 충계를 내려왔다. 화사한 마구로 장식도니 백마가 그의 곁으로 끌려왔다. 두 사람의 카자흐가 양쪽에서 그를 부축하여 안장 위에 올려 태웠다. 푸가초프는 게라심 신부를 내려다보며 그의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할 작정이니 준비하라고 말했다. 그 때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대여섯 명의 악당들이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를 현관 앞 층계로 끌고 왔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모습이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헝겊 조각 하나 붙어 있지 않은 알몸이었다. 악당중의 한 사나이는 그녀가 입고 있던 솜옷을 빼앗아 자기 몸에 걸치고 있었고, 다른 패들은 새털 이불이며 속옷이며 옥함이며 다기 등속을 들고 나왔다. 가엾은 부인은 악당들에게 애원했다. 그러다가 문득 교수대로 눈을 돌려 들보에 늘어진 남편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눈이 뒤집혀서 소리쳤다.

"악마 놈들아! 이 악마 놈들아! 저게 무슨 짓이니! 왜 저 사람을 죽였느냐! 아아, 하나님... 아아, 내 소중한 이반 쿠즈미치, 당신은 용감한 군인이었어요. 훌륭한 군인이었어요. 프러시아 군의 총검도 터키 군의 총탄도 당신 몸을 건드리지 못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게 아니라 탈옥수의 손에 걸려 무참히 목숨을 잃다니! 아아! 여보!"

"저 늙은 암귀신이 떠들지 못하도록 해라!"

젊은 카자흐가 그녀의 어깨를 칼로 내리치자 가엾은 여인은 층계 위에 쓰러져 곧 숨을 거두었다. 푸가초프가 그곳을 떠나자 군중은 그의 뒤를 다라 우르르 몰려갔다.

 

 

8장 불청객

불청객은 타타르 인보다 더욱 난처한 것(Незваный гость хуже татарина)

-속담 Пословица(Poslovitsa) -

드디어 광장은 텅 비었다. 나는 말뚝처럼 한 자리에 선 채 너무나 끔찍했던 방금 전의 기억으로 인해 혼란된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것이 무엇보다도 안타까웠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을까. 안전하게 몸을 피할 수 있었을까말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인 채 나는 사령관의 집으로 들어갔다. 가재도구는 성한 것이 없었다. 의자도 책장도 궤짝도 모두 부서져 있었고 식기 등속은 모두 박살이 나서 산산이 흩어져 있었으며 그 밖의 물건은 말끔히 약탈되어 흔적도 없었다. 나는 안쪽 방에 들어가 보았다. 거기서 나는 폭도들 손에 의해 엉망이 된 그녀의 침대를 발견했다. 옷장은 형편없이 부서지고 옷가지는 모두 도둑맞아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성상을 넣어두는 궤짝 앞에 놓인 등불만이 꺼지지 않고 있었으며 창문 사이의 벽에 걸린 조그마한 거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늑한 방의 주인은 어디 갔을까,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폭도들 소굴로 끌려간 그녀를 상상했다. 그래서 가슴이 쥐어뜯기듯 아팠다. 나는 비통한 마음을 안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때 인기척이 나더니 부서진 옷장 뒤에서 새파랗게 질린 파라시카가 몸을 떨면서 나타났다.

아아, 표트르 안드레비치! 오늘 같은 날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보다 무서운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어떻게 됐어?”

나는 성급히 물었다.

아가씨는 무사해요. 지금 아클리나 판필로브나의 집에 숨어 계십니다.”

, 신부의 집에?”

나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큰일 났다. 푸가초프가 그리로 갔는데.”

나는 방에서 뛰쳐나와 한길로 나가서 신부의 집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신부의 집은 환성과 웃음소리와 노랫소리로 떠들썩했다. 푸가초프가 일당과 함께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파라시카도 내 뒤를 쫓아왔다. 나는 그녀를 몰래 안으로 들여보내 아클리나 판필로브나를 불러오게 했다. 잠시 후 신부의 부인이 빈 술항아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어디 있습니까? 가르쳐주십시오!”

나는 흥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 순간은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 애는 내 침실에서 누워 있어요.”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 그런데 표트르 안드레비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저 악당 놈이 식탁에 앉아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애가 정신이 들어 끙끙 앓는 소리를 냈어요. 난 놀라서 그만 까무러칠 뻔했어요. 그 애의 앓는 소리를 듣고 지금 이 집에서 앓고 있는 사람은 누구야, 하고 묻지 않겠어요. 그래서 나는 악당 놈한테 굽실거리며 폐하, 제 조카딸이옵니다. 앓아 누운 지 벌써 보름 가까이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니까, 조카딸은 젊은 앤가 하고 물으며 히죽거리기에 네, 젊사옵니다 했더니, 할멈 그 조카딸을 내가 좀 볼 수 없을까 했을 때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하지만 어쩔 수 있어야죠. 나는 엉겹결에 그렇게 하시옵소서, 폐하, 하오나 그 애는 제 발로 어전에 나와 뵐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 하니까, 괜찮아, 내가 직접 가서 보겠어, 이렇게 말하며 그 마귀 같은 놈은 장지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겠어요. 그래 어떻게 되었겠어요! 침대에 드리운 휘장을 휙 걷고는 독수리 같은 눈으로 들여다봤으니 말예요.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요하나님께서 도와주셨어요. 정말 그 때는 나도 우리 주인 양반도 그 애를 대신해 죽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애가 그놈을 알아보지 못한 게 참 다행이었어요. 아아, 하나님, 이런 변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불쌍한 이반 쿠즈미치! 이렇게 될 줄을 누가 꿈엔들 생각했겠어요. 그리고 바실리나 예고로브나, 그리고 이반 이그나츠이치, 그분한테 대체 무슨 죄가 있겠어요그래도 당신은 용케 벗어났군요. 그런데 저 시바블린-알렉세이 이바니치는 머리를 둥글게 깎아 올리고 우리 집에서 그 악당들과 어울려 술에 취해 고주망태가 되어 있으니 한심한 인간이지 뭐예요. 정말 그렇게 번개 알 구워 먹듯이 옮겨 앉는 놈은 처음 봤어요. 내가 조카딸이 앓고 있다는 말을 하니까, , 글쎄 그 놈이 칼날처럼 시퍼런 눈초리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겠어요. 하지만 옆에서 고자질을 하지 않았으니 이것만은 고맙게 여겨도 될 것 같아요.”

이 때 악당 놈들의 술 취한 고함소리와 함께 신부의 부인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이 술을 더 가져오라는 모양이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난 지금 당신과 이러고 있을 수가 없어요. 저놈들의 술심부름을 해야 되니까, 속히 떠나세요. 주정뱅이한테 걸려들면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모든 일을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주님께서 반드시 당신을 돌봐주십니다. 그럼 몸조심 하세요.”

신부 부인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숙소를 향해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광장을 지날 때 나는 수 명의 바슈키르 인들이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 축 늘어진 사람들의 장화를 벗기느라 난장판을 이루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나는 분노가 불길처럼 치밀어 올랐으나 공연히 나설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간신히 그것을 억제했다. 요새 안에서는 폭도들이 사방으로 돌아치면서 장교들의 집을 털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술 취한 폭도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집에 돌아오니 사베리치는 문간에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초췌한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참 고마워.”

그는 잠시 침묵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도련님이 그놈들한테 다시 붙잡혀 곤욕을 치르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천하에 몹쓸 악당 놈들이 우리 살림살이를 몽땅 훔쳐 가버렸어요. 의복이니 가구니 접시니 할 것 없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털어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까짓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련님께서 이렇게 무사하신 것만이 눈물 나도록 고마울 뿐입니다. 참 그런데 도련님, 그 악당 두목 녀석을 알아보셨습니까?”

아니, 난 모르고 있어. 그놈이 대체 누군데.”

원 그놈을 못 알아보시다니. 그 때 주막집에서 도련님의 털옷을 강제로 빼앗은 길잡이 주정뱅이를 잊으셨습니까. 토끼 가죽으로 만든 덧저고리는 아주 새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놈이 억지로 껴입자 꿰맨 실이 툭툭 터져 실밥이 튀어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길잡이와 푸가초프의 모습은 정말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나는 푸가초프와 그 길잡이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게 특사를 베푼 이유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나와 그와의 기이한 인연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부랑자에게 주었던 어릴 적 털옷이 교수대의 올가미에서 나를 구해주었고, 주막집을 찾아 돌아다니던 보잘 것 없는 주정뱅이가 지금은 곳곳의 요새들을 함락시키고 온 나라를 뒤흔들게 된 것이다. 착잡한 상념에 잠긴 내게 사베리치는 언제나 하던 버릇대로 이렇게 물었다.

뭘 좀 드셔야지요. 집엔 아무것도 없으나 밖에 나가서 무엇이든지 좀 마련해보겠습니다.”

방 안에 혼자 남게 되자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폭도들 손에 들어간 요새에 마냥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들에게 항복하는 것은 장교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군인으로서의 의무감은 이 어려운 정세 하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유익하게 복무할 수 있는 것으로 내가 떠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의 나는 사랑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있는 곳에 남아서 그녀를 지키고 보호할 것을 강경히 요구했다. 나는 가까운 장래에 틀림없이 정세가 호전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입장이 위험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서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은 듯이 조용한 집 안에 인기척이 들려 나는 혹시나 밖에 나갔던 하인이 돌아오는가 했는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 사람의 카자흐 인이 방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얼굴이 무척 험상궂게 생긴 놈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나를 데려오라고 해서 달려왔다는 것이다.

어디서 부르고 있나?”

사령관 집에 계십니다.”

나를 부를 만한 이유가 있다던가?”

별다른 말씀은 없었고 속히 모셔 오라는 명령만 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저녁 식사를 마치신 후에 목욕을 끝내고 쉬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무엇을 보더라도 보통 어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식사 때에는 돼지새끼를 통째로 두 마리나 거뜬히 잡수셨고 또 그 다음엔 굉장히 뜨거운 증기 목욕탕에 들어가셨는데 함께 들어갔던 타라스 크로치킨(Тарас Курочкин [Taras Kurochkin] Tarass Kourotchkine)은 어떻게 뜨거웠던지 견딜 수 없어 목욕 솔을 포므카 비크바예프(Фомке Бикбаеву [Fomke Bikbayevu] Tomka Bichbayeff)한테 주고는 냉수를 몸에 끼얹고 말았습니다. 하시는 일마다 모두 비범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목욕탕에서 가슴에 박혀 있는 황제의 표식을 보여주셨다는데 한쪽에는 5코페이카짜리 은전(пятак [pyatack])만한 쌍 독수리 머리(углавый орел [uglavyy orel] two-headed eagle)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황제 자신의 얼굴이 새겨져 있더랍니다.”

나는 카자흐 인의 말에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를 따라 사령관 집으로 가면서 나는 푸가초프와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며 그것이 어떠한 결과로 끝을 맺게 될 것인가를 예측해 보려고 애썼다. 그 당시 내가 완전히 냉정을 회복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독자들도 능히 짐작할 것이다.

사령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황혼이 깃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교수대는 희생자들을 매단 채 서 있어서 으시시한 기분이 들었다. 두 명의 카자흐 인은 보고하러 안으로 들어갔다가 금방 돌아와서, 지난 밤 내가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정겨운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던 그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어수선한 방 안에서 이상한 광경이 눈앞에 벌어졌다. 술병과 잔들을 늘어놓은 식탁에는 푸가초프를 위시해서 10명가량의 카자흐 인 대장들이 울긋불긋한 루바시카를 입고 모자를 쓴 채 술이 취해 시뻘개진 얼굴로 눈알을 번들거리며 둘러앉아 있었다. 다행히 그들 중에 시바블린도, 내 부대의 하사로 있었던 자도, 그 밖의 새로운 변절자들의 얼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어, 친구, 어서 오게. , 앉아야지.”

푸가초프는 나를 보자 말했다. 대장들이 좌석을 좁혀 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탁 끝머리에 앉았다. 내 옆에 자리 잡은 미남형의 젊은 카자흐 인이 익숙한 솜씨로 포도주를 따라 주었지만 나는 술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호기심을 가지고 나는 좌중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푸가초프는 상좌에 앉아서 식탁에 팔굽을 올려놓고 커다란 주먹으로 수염투성이의 턱을 받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상당히 호감을 주는 편이었으나 흉악하게 생긴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는 쉰 살가량 되어 보이는 사람에게 자주 말을 걸곤 했는데 백작이라 부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티모페이치(Tymofeitch), 또 어떤 때는 아저씨라고 존대하기도 했다. 좌중에서는 모두들 서로 친구지간으로 대하고 있었는데 두목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인정하는 눈치가 조금도 없는 것이 놀랄 만했다. 주고받는 대화는 오늘 아침의 돌격으로부터 반란의 성공과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것이 주류였는데, 제각기 자기의 공훈을 자랑하고 의견을 제출했으며 푸가초프의 말에도 서슴치 않고 자유롭게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무분별한 군사 회의에서 올렌부르크(Orenburg)의 진격이 결정되었다.

자 형제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그 노래를 불러 보자. 추마코프(Tchoumakoff), 시작해 봐.”

푸가초프가 명령하자 내 옆에 앉았던 사나이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애조를 띤 뱃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모두들 그를 따라 합창했다.

조용히 해다오

어머니의 품인 대지의 푸른 숲이여

헝클지 말아다오

희망의 터를 닦는 나의 머릿속을

내일은 내가

심판대에 서는 날

준엄한 사직을 홀로 맡아보는 황제 앞에서

심판자 황제는 나에게 물으리라

말하라, 바른 대로 말하라

거기 있는 젊은 놈, 농부의 아들놈아

도둑질 강도질은 누구와 했느냐

너의 패거리는 몇 놈이나 되느냐

말씀드립니다, 폐하

러시아 정교의 덕망 높은 황제 폐하

숨김없이 거짓없이

사실대로 말씀드립니다

저의 공범은 모두 해서 넷

하나는 밤의 암흑

하나는 단검

하나는 준마

하나는 활

달리는 사자(使者)는 날카로운 화살

러시아 정교의 덕망 높은 황제는 말씀하시리

장하다, 훌륭하다

거기 있는 젊은 놈, 농부의 아들놈아

도둑질도 대답도

천하일품이로다, 잘났다 잘났어

상을 내릴지니 들판 가운데

두 개의 기둥 세워 들보를 질러서

너에게 주리라

언제인가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을 지닌 폭도들이 소리 높여 부른이 교수대의 민요가 내게 얼마나 깊은 감명을 주었는지 그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험상궂은 얼굴과 잘 맞아 들어가는 목소리, 마디마디 이어진 애절한 곡조, 그리고 곡조를 붙이지 않아도 넉넉히 인상적이었던 가사, 이러한 모든 것은 그 어떤 시적인 영감이 되어 내 가슴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난 후에 그들은 다시 한 잔씩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나를 푸가초프가 제지했다.

자 앉지. 나는 자네하고 할 말이 있네.”

나는 그와 마주앉았다. 서로 입을 떼지 않은 채 몇 분이 지나갔다. 푸가초프는 눈을 모아 나를 바라보며 이따금 교활하고도 조소어린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왼쪽 눈을 지그시 감곤 하는 것이었다. 드리어 그는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웃음이 하도 꾸밈새 없이 명랑해서, 나도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함께 따라 웃었다. 그는 웃는 것을 멈추고 말을 했다.

그래 어떤가? 솔직히 말을 해봐. 내 부하 녀석들이 자네 목에 올가미를 씌웠을 땐 겁이 났겠지. 아마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을 테지. 그 때 자네의 종놈이 나서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교수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거야. 난 첫눈에 그 늙은이를 알아봤네. 그런데 여보게, 자네를 주막집에 안내한 사람이 마주 앉은 황제 자신이었으리라곤 설마 생각도 못했겠지.”

여기서 그는 엄숙하고 신비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자네는 나한테 큰 죄인이야. 하지만 나는 자네의 선행을 참작하여 관대하게 용서한 것이네. 내가 한때 적에게 쫓겨 몸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에 자네가 베풀어준 친절을 생각해서 용서했을 뿐이야. 앞으로도 두고 봐. 나의 왕국을 만드는 날 나는 자네에게 정식으로 사례할 작정이야. 어때, 내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겠나?”

이 사기꾼의 질문과 뻔뻔스러운 배짱이 하도 우스꽝스러워서 나는 그만 픽 하고 웃어 버렸다.

무엇이 우스워. 그럼 자네는 나를 황제라고 믿지 않는단 말인가. 어디 바른대로 대답을 해봐.”

나는 당황했다. 한낱 부랑인에 지나지 않는 자를 황제라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비열한 짓이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맞대놓고 그를 사기꾼이라고 한다면 나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게 할 것이 뻔했다. 아까 전 주민이 보고 있는 교수대 밑에서 분노의 불길이 솟구쳐 오를 때 내가 하려고 준비했던 대답은, 지금 생각해 보면 부질없는 장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푸가초프는 초조하게 내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나의 의무감은 인간적인 약한 마음을 꺾고 승리했다. 나는 푸가초프에게 대답했다.

그럼 바른대로 말하겠습니다. 우선 당신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과연 내가 당신을 황제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지.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니까 내가 속에 없는 말을 꾸며서 대답을 해도 다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럼 좋아. 자네 생각으로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인단 말인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어떤 인물이든 간에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푸가초프는 재빨리 나를 훑어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표트르 표트르비치 황제임을 잘 믿지 못하겠단 말이지. 좋아, 그러나 대담무쌍한 자에게 성공이 과연 없단 말인가. 옛날에 그리시카 오트레비에프(Гришка Отрепьев [Grishka Otrep'yev] Grishka Otrepieff)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단 말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자네의 자유지만 내 곁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남이야 진짜든 가짜든 자네가 그걸 따져서 무엇을 하겠나. 결국 노새냐 당나귀냐 하는 걸 따지는 것과 같은 일이야. 나를 충성스럽게 섬기기만 하면 자네한테 사령관도 줄 수 있으며 공작의 지위도 줄 수도 있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귀족 가문에서 여왕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한 몸이기 때문에 당신을 섬길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나를 진실로 생각해준다면 나를 올렌부르크로 보내주십시오.”

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푸가초프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만일 내가 자네를 놓아준다면, 적어도 내게 총을 겨누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함부로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과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신은 부하를 거느린 상관이요, 부하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만일 내가 군대 생활에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임무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건 당신도 이해할 것입니다. 지금 내 목숨은 당신의 수중에 있습니다. 나를 놓아준다면 감사하게 생각할 것은 물론이지만, 만일 죽인다면 그 때 하나님은 당신의 옳고 그른 것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지금,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 성실한 태도가 푸가초프를 감동시켰는지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의 말이 옳아. 죽일 놈은 죽이고 일단 용서하면 깨끗이 용서해주어야지. 어디로든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럼 내일 다시 만나서 이별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도록 하지. 나도 이젠 졸려서 자리에 들겠네.”

나는 푸가초프와 작별하고 거리로 나왔다. 쌀쌀한 밤이었다. 엷은 흰구름 사이로 달빛이 광장의 교수대를 비추고 있었다. 요새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하고 어둠침침했다. 다만 선술집에서 등불이 보이고 늦도록 술에 취한 주정꾼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나는 신부의 집을 바라보았다. 덧문과 대문이 모두 닫혀져 있었다. 집 안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왔다. 내가 없는 새 사베리치는 무척 걱정을 하며 속을 태운 모양이었다. 내가 푸가초프에게서 완전히 석방되었다는 말을 듣자 그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는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날이 밝으면 여기를 떠나 어디로든지 갑시다. 제가 저녁상을 차려놓았으니 좀 드십시오. 그리고 아침까지 푹 주무십시오. 예수님 품 안에 안긴 마음으로.”

나는 그가 권하는 대로 맛있게 저녁을 먹고 나서 몸이 몹시 피곤한 것을 느끼며 아무것도 깔아 놓지 않은 방바닥에서 그냥 잠들어 버렸다.

 

 

9장 이별

 

?

 

내 가슴에 단꿈 심은 아름다운 그대여

즐거웠던 이 가슴

이별의 슬픔으로 한숨 짓는다

내 영혼과 이별할 때처럼

- 헤라스코프 (Михаил Матвеевич Херасков (1733-1807)

 

Kheraskov, Mikhail Matvi?eevich : 시인, 극작가, 소설가.

푸쉬킨은 이 소설을 위해 앞에서도 직접 시인과 극작가들로부터

 

이런 에피그라프(epigraph) 용 글을 받았던 듯 하다고 했듯이,

 

이 내용도 그에게서 직접 받아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자전적 서사시(егоэпической [egoepicheskoy])<Rossiyada (Song XI)>에 나온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Сладко было спознаваться

Мне, прекрасная, с тобой;

Грустно, грустно расставаться,

Грустно, будто бы с душой.

-

 

 

 

?

 

아침 일찍 북치는 소리에 잠을 깼다. 나는 집합 장소로 나가 보았다. 푸가초프의 무리들은 어제의 희생자들이 아직까지 그대로 매달려 있는 교수대 근처에 이미 정렬해 있었다. 깃발들은 바람에 나부끼고 몇 문의 대포가 행군용 포가에 얹혀 있었는데 그 중에는 우리들이 빼앗긴 대포도 끼어 있었다. 전 주민이 그곳에서 푸가초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령관 집 층계 아래는 한 놈이 카자흐가 키르키즈 산의 아름다운 백마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사령관 부인의 시체를 찾아보았다. 개보다 못한놈들은 어제 그 자리에 시체를 돗자리로 덮어 두었다. 드디어 푸가초프가 현관에 나와 얼굴을 보였다. 군중은 모자를 벗었다. 푸가초프는 층계 위에서 발을 멈추고 군중의 인사에 답례했다. 대장 가운데 한 놈이 동전이 든 주머니를 그에게 내주자 그는 돈을 꺼내어 던지기 시작했다. 군중은 앞을 다투어 돈을 줍느라고 아우성을 치며 달려들었고 그래서 결국 부상자까지 생기는 소동이 벌어졌다. 일당의 부두목격인 대장들이 푸가초프를 들러싸고 있었는데 그 속에 시바블린도 끼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내 눈에서 경멸의 빛을 발견했는데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증오와 어색한 조소를 띠며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푸가초프는 군중 속에서 나를 발견하자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손짓으로 나를 가까이 불렀다.

그는 내게 말했다.

그럼 자네는 지금 곧 올렌부르크로 떠나도록 해. 거기에 도착하면 그곳 지사와 장군들에게 1주일 후에 내가 간다고 말해줘. 그리고 만일 황제에 대한 예의바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극형을 면치 못할 거라고 말해. 그럼 소위, 잘 가게!”

이렇게 뇌까리고 그는 군중을 향하더니 시바블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서 있는 사람은 너희들의 새로운 사령관이다. 앞으로는 만사에 있어서 이 사람 말에 절대 복종하라. 이 사람은 나를 대신해서 너희들과 이 요새의 책임을 맡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자 등골에 오싹하니 소름이 끼쳤다. 시바블린이 이 요새를 지배하게 된다면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아, 그녀는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될까, 푸가초프는 층계를 내려왔다. 그는 받들어 올리려는 카자흐 인들을 기다리지 않고 날쌔게 몸을 날려 말 위에 올라앉았다. 이 때 군중 속에 있던 사베리치가 튀어나와 푸가초프에게 가까이 가더니 그에게 종이 쪽지를 내밀었다. 나는 깜짝 놀라 사베리치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냐?”

푸가초프는 위엄 있는 말투로 물었다.

읽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푸가초프는 종이쪽지를 받아 들고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 들여다보고 나서 말했다.

무슨 글씨가 이렇게 괴상하지? 내 밝은 눈으로도 무슨 수작인지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서기장은 어디 있는냐?”

하사 계급을 단 젊은 놈이 재빨리 푸가초프 앞으로 나섰다.

어디 한 번 읽어 봐라.”

자칭 황제인 푸가초프는 종이조각을 내주며 말했다. 나는 늙은 종이 도대체 무엇을 푸가초프에게 써주었는지 무척 궁금했다. 서기장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떼어가며 커다랗게 읽기 시작했다.

옥양목 자리옷 및 비단 줄무늬 자리옷 두 벌에 6루블.”

그게 무슨 뜻이지?”

푸가초프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물었다.

다음을 계속해서 읽으라고 하십시오.”

사베리치는 시침을 떼고 대답했다.

서기장이 다시 계속해서 읽고 있었다.

녹색 사지 군복에 7루블. 백색 세루 바지에 5루블. 네덜란드 제 모시 커프스 와이셔츠 12벌에 10루블 찻잔이 든 휴대용 상자에 2루블 30.”

듣고 있던 푸가초프는 답답했던지 말을 가로챘다.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야? 휴대용 상자니 커프스 와이셔츠니 하는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냐.”

사베리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건 말씀입죠. 아시다시피 악당들이 빼앗아간 우리 도련님의 물품 목록입니다.”

악당이라니, 그건 누굴 가리키는 말이냐?”

하고 푸가초프가 화를 내며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말이 좀 헛나갔습니다. , 악당이라는 게 따로 있겠습니까. 당신 부하들이 집을 뒤져서 훔쳐갔지요. 성을 내시면 곤란합니다. 말은 네 발을 가지고도 걸려넘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보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사베리치는 두려움없이 말했다.

서기장이 계속했다.

갱사이불 한 채, 호박단이불 한 채에 4루블. 붉은 나사로 씌운 여우 가죽 외투에 15루블. 그 밖에 주막집에서 선사한 토끼 가죽 덧저고리가 15루블.”

무엇이 어쩌고 어째!”

푸가초프는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 나는 가엾은 노인이 신상을 생각하자 가슴이 서늘했다. 그는 다시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했으나 푸가초프가 말문을 가로막았다.

그 따의 허튼 수작을 하겠다고 감히 네놈이 내 앞에 기어나왔단 말이냐!”

이렇게 고함을 지르며 그는 서기장의 손에서 종이조각을 낚아채어 사베리치의 얼굴에 홱 집어던졌다.

, 속 편할 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저는 종의 신분으로 주인의 물건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바보 같은 늙은 놈아, 물건 좀 빼앗겼다고 해서 그게 무슨 큰일이냐. 네놈은 저기 있는 주인과 함께 저 역적놈들처럼 교수대에 매달리지 않은 것을 감사하여, 나와 내 부하들을 위해 한평생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도 시원치 않을텐데. 뭐 토끼가죽! 오냐, 네놈한테 토끼가죽을 주마. 네놈의 생가죽을 벗겨서 그걸로 가죽옷을 만들어줄테니 그런 줄 알아라.”

그러나 푸가초프는 무슨 관대한 마음이 들었는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시바블린과 대장들이 그 뒤를 따랐다. 폭도들은 대오를 지어 요새에서 나갔다. 군중들은 푸가초프를 배웅하러 따라 나섰다. 나와 사베리치만이 광장에 남게 되었다. 내 늙은 종은 물품 목록을 손에 들고 매우 섭섭한 얼굴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푸가초프와 나와의 사이가 원만한 것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려 한 것이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나는 그의 엉뚱한 열성을 꾸짖어줄까 했으나 웃음이 먼저 터져나오고 말았다.

얼마든지 웃으셔도 좋습니다. 도련님, 어서 실컷 웃으십시오. 그렇지만 이제 다시 살림을 차리게 될 때는 이것이 웃을 일인지 아닌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베리치는 중얼거렸다. 나는 그를 숙소로 가도록 이르고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만나러 신부의 집으로 달려갔다. 신부 부인은 슬픈 얼굴을 하고 나를 맞았다. 간밤부터 마리아 아비노브나가 열이 심해서 지금은 정신없이 헛소리를 하며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신부 부인은 나를 그녀의 방으로 안내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침대로 다가서서 핼쓱해진 얼굴을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게라심 신부와 그의 착한 부인은 여러 가지로 나를 위로해준 것 같았지만 내 귀에는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암담한 생각만이 겹치고 겹칠뿐이었다. 사고무친의 고아가 되어 흉악한 폭도들 속에 남게 될 그녀의 신세와 나 자신의 무력함을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엇보다도 시바블린의 존재가 돌덩이처럼 가슴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자칭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그가, 전날의 애매한 원한이 남아 있는 불행한 처녀가 있는 이 요새를 지배하게 된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짓이든지 그녀에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그녀를 악당의 손에서 빼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의 방법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베로고르스크 요새의 탈환을 서두르도록 재촉하기 위해, 나 자신도 있는 힘을 다해 싸우기 위해서 한시 바삐 올렌부르크로 출발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아쿨리나 판필로브나에게 이별을 고하고, 신부 부인에게는 이미 나의 아내나 다름없는 마샤를 거듭 부탁했다. 나는 가엾은 처녀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마주댔다.

잘 가세요. 부디 안녕히, 표트르 안드레비치. 반드시 좋은 시절이 와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을 잊지 마시고 자주 소식 전해주세요. 불쌍한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이젠 당신밖에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신부 부인은 대문 밖까지 나를 따라나오며 말했다. 광장으로 나와서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교수대를 향하여 머리를 숙인 후 정들었던 요새를 뒤로 하고 올렌부르크로 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 곁에서 떠나지 않는 사베리치가 나를 뒤따랐다.

깊은 상념에 잠겨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요새 쪽에서 한 사람의 카자흐가 말을 타고 달려오며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그는 또 한필의 바슈키르 산 말의 고삐를 잡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달려와 말에서 내리더니 끌고 온 말의 고삐를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소위님, 폐하께서 당신에게 이 말과 입고 계시던 외투를 손수 벗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반 루블의 돈을 주셨습니다만 오는 도중에 그걸 잃어버렸습니다. 관대하게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잃어버렸다는 반 루블의 돈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우선 말 안장에 묶여 있는 양털가죽 외투를 바라보았다. 그 때 사베리치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 카자흐에게 중얼거렸다.

, 도중에 잃어버렸다고? 그럼 네 호주머니에 짤랑거리는 건 뭐냐. 뻔뻔스러운 녀석 같으니.”

이놈의 영감쟁이야, 주머니에서 나는 소리는 돈이 아니라 단추 소리다.” 하사는 조금도 당황한 빛을 보이지 않고 딱 잡아떼었다.

어떻든 좋아. 자네를 보낸 두목한테 고맙다고 말해줘. 잃어버린 반 루블은 돌아가는 길에 찾아봐서 혹시 찾거든 그걸로 술값이나 해.”

하고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소위님, 감사합니다.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 두고두고 기도하겠습니다.”

그는 말고삐를 돌리더니 한 손으로 호주머니를 꼭 잡은 채 요새쪽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몇 분 후에는 이미 시야에서 사려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털옷을 입고 말에 올라탔다. 사베리치도 등 뒤에 함께 타게 했다. 노인은 등 뒤에서 내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

그것 보십시오, 도련님. 제가 그 악당놈한테 요구한 보람이 있지 않습니까. 도둑놈도 양심은 있어서 마음이 거리끼는 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기는 이따위 말라빠진 바슈키르 산 말 한 필과 양가죽 외투만 가지고는 놈들이 훔쳐간 물건과 도련님 선사한 옷의 반 값도 안되지만 어쨌든 요긴하게 쓸 수 있게 됐습니다. 미친 개한테는 하다 못해 털이라도 한 줌 뽑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10장 포위된 거리

... 들판과 언덕에 진지를 구축하고 고지에서 그는 독수리 같은 눈초리로 거리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진지 뒤쪽에 포대를 만들고는 소리를 내지 않게 대포를 감추고 밤이 되면 성벽 가까이 옮기라 명령했다.

-헤라스코프-

올렌보르크가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나는 머리를 박박 깎고 형무소의 낙인이 얼굴에 흉하게 찍힌 죄수들의 무리를 보았다. 그들은 경비대 병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보루 근처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떤 자는 참호를 베운 쓰레기를 수레에 담아내고 어떤 자는 삽으로 땅을 파고, 또 보루 위에서는 석공들이 벽돌을 날라다가 성벽을 수리하고 있었다. 위병들이 성문에서 우리를 제지하며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는데, 위병 중사는 내가 베로고르스크 요새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 곧 장군 댁으로 안내했다. 나는 뜰 안에서 장군을 만났다. 마침 그는 가을바람에 잎사귀가 떨어진 사과나무를 살펴보며 늙은 정원사의 도움을 받아 짚으로 나무줄기를 정성스럽게 싸 주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기품 있는 성격이 엿보였다. 그는 나를 진심으로 반겨 주었고 내가 직접 목격한 무서운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묻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상세하게 전달했다. 늙은 장군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마른 나뭇가지를 잘라내고 있었다. 내 비참한 목격담이 끝나자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르노프가 죽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정말 훌륭한 장교였는데, 미로노프이 부인은 지혜로운 여자였어. 버섯을 소금에 절이는 솜씨가 그만이었는데. 그럼 대위의 딸 마샤는 어떻게 됐나?"

나는 그녀가 신부 부인과 함께 요새에 남아 있다고 대답했다. 장군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쯧쯧! 그건 좋지 않네. 불행한 일이야! 폭도들의 군기 같은 건 믿을 것이 못 되지. 그 가엾은 애는 어떻게 될까."

나는 여기서 베로고르스크 요새는 이곳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각하께서는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예하부대를 파견하는데 주저하지 않으실 줄 믿는다는 의견을 말해 보았다. 그러나 장군은 자신 없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였다.

"좀 더 두고 보세. 그건 좀 더 검토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야. 조금 있다가 자네도 차를 마시러 이리로 오게. 오늘 여기서 군사회의가 있을 예정이니까. 자네는 우리에게 그 푸라초프라는 악당과 그의 군대에 대해 확실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하네. 그럼 그 때까지 숙소에 가서 좀 쉬도록 하지."

나는 배정된 숙소에 가서 초조한 마음으로 회의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사베리치는 벌써 이것저것 집 안을 손질하기에 바빴다. 나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그 회의 시간을 내가 얼마나 정확히 지켰을 것인지는 독자들도 쉽사리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정해진 회의 시간에 나는 이미 장군 댁에 가 있었다. 나는 장군 댁에서 이 고장 관리의 한 사람인 뚱뚱한 몸집에 얼굴이 볼그스름한데다 금실을 섞어 짠 비단옷을 입은 노인과 만났다. 그는 이반 쿠즈미치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문제에 대해서까지 부수적인 말을 하기도 하고 교훈 비슷한 의견을 내놓기도 하면서 자주 내 말을 중단시키는 것이었는데, 그의 말하는 품이 비록 전술에 밝지는 못할망정, 천성이 총명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참석자들도 하나 둘 들어왔다. 그들 가운데 군인은 장군 한 사람뿐이었다. 일동이 자리에 앉고 차가 각자에게 돌아가자 장군은 당면한 문제에 대해 극히 명쾌한 태도로 빈틈없는 설명을 했다.

"그러면 여러분. 지금 우리는 이 폭도들에게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것인가, 즉 공격이냐 그렇지 않으면 방어냐 하는 문제를 결정할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양쪽 다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격은 적을 신속히 소탕하는 데 보다 적합하며 방어는 보다 확실성이 있고 안전합니다. 그럼 회의 규정에 따라 관등이 아래인 사람의 의견부터 듣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소위인 자네의 의견부터 말해 보게."

그는 나를 불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푸가초프와 그 무리들의 상황을 설명한 후, 현재의 폭도들은 우리 정규군에 대항할 만한 역량이 없다고 단언했다. 내 의견은 참석한 관리들에게 노골적으로 푸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내가 한 말이 무모하고 경솔한 장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누구의 말인지는 몰라도 입속말로 젖비린내가 난다고 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지만, 회의 진행을 위해서 꾹 참았다. 장군은 나를 바라보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귀관, 군사회의에서는 어디서나 처음엔 공세 지지론이 나오는 법이야. , 말하자면 그건 철칙처럼 되어 있네. , 여러분 그럼 계속해서 의견을 듣기로 하겠습니다. 6등관, 이번엔 당신의 의견을 들어 보겠소."

금실 섞인 비단옷을 입은 6등관이라는 아까 그 노인은 꽤 많은 양의 럼주를 탄 세 벌째 찻잔을 급히 들이키고 나서 장군에게 대답했다.

"각하, 저는 공격도 방어도 우리가 취할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또 무슨 뜻인가, 6등관. 전술에는 방어냐 그렇지 않으면 공격이냐 하는 두 가지 원칙밖엔 없을 텐데?"

장군은 의아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각하, 이번에는 매수 작전이라는 것을 한번 써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하, 그 의견도 그럴 듯하군. 하긴 매수 작전이라도 것도 한 가지 전술로써 통할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의 의견도 참작해 보기로 합시다. 그 망나니 놈의 모가지에 20루블... 아니, 100루블까지라도 현상금을 걸 수 있어. 기밀비가 있으니까 말이야...."

세관장이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말씀입니다. 만일 그 도둑놈들이 자기들의 두목의 손발을 꽁꽁 묶어서 우리한테 넘겨주지 않는다면 그 때 나는 6등관이 아니라 키르키즈키바란(키르키즈의 양)이라 불러 주셔도 무방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차차 생각하면서 의논해 보기로 합시다. 그러나 어쨌든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여러분, 규칙에 따라 순서대로 의견을 말하시오."

그러나 다른 관리들의 의견을 우리 군대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한결같이 공격보다는 방어를 주장했다. 그들은 적에게 노출된 들판에서 모험을 하기 보다는 둘로 쌓은 견고한 방패로 대포의 엄호를 받으며 싸우는 편이 보다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참석자 전원의 의견을 청취하고 나서 장군은 파이프의 재를 툭툭 털고 다음과 같이 자기 견해를 피력했다.

"여러분, 본관의 입장에서는 소위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전술이란 어떠한 경우에는 방어보다는 공격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군은 말을 멈추고 파이프에 담배를 담기 시작했다. 나의 자존심은 다시 불쑥 고개를 쳐들어 나는 퍽 오만한 눈초리로 관리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은 불평불만에 찬 얼굴로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장군은 진한 담배 연기를 깊은 함숨와 함께 내뿜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여러분, 황송하옵게도 자비하신 여왕 폐하께서 본관에게 위임한 이 지방의 안전에 관계되는 문제인 이상, 본관은 그처럼 위험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관은 성 안에서 적의 기습을 대비했다가 적이 공격해 오면 포병의 화력으로 대항하다가 가능한 시기에 성 밖으로 출격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안전한 방책이라고 말한 대다수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이번에는 관리들이 나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회의는 끝났다. 나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무지하고 경험도 없는 자들이 의견을 따르기로 결심한 늙은 군인의 심약한 결정에 적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주목할 만한 회의가 개최된 며칠 후에 나는 푸라초프가 자기의 약속을 충실히 지켜 올렌보르트로 접근해 온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성벽 높은 곳에 올라가 폭도들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병력은 내가 직접 목격한 지난번 습격 때에 비해 십 배나 증강된 것같이 보였다. 적군에게는 푸가초프가 여러 곳의 작은 요새에서 노획한 대포들로 편성된 포병대도 있었다. 군사회의의 경위를 상시하며 앞으로 올렌보르크 성내에서의 농성이 장기간 계속되리라는 것을 예견할 때 나는 너무 안타까워 울고 싶을 심정이었다.

나는 올렌부르크 농성에 대해서는 여기에 기술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기에 기록될 성질의 것이며, 나의 개인적인 수기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간단히 몇 마디 한다면 이 농성 작전을 지방 당국의 무주의로 말미암아 굶주림 속에서 온갖 고생을 겪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들에게 실로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던 것을 사실이었다. 올렌부르크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처참했던가는 상상하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누구나가 다 암담한 마음으로 자기 운명의 종말을 기다렸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폭등하는 물가고에 신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뜰 안에 날아 들어오는 포탄에도 별로 놀라지 않게 되었으며 이따금 덤벼드는 푸라초프의 습격에도 궁금한 마음조차 가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는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실로 짜증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으며 베로고르스크 요새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도로라는 도로는 모두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멀리 떨어져서는 정말 한시도 살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이러한 나에게 유일한 위안은 출격이었다. 푸가초프의 호의 덕분에 나는 훌륭한 말을 가지고 있었고, 그 말에게 넉넉치 못한 나의 식량을 반씩 나누어 주며 매일같이 성 밖으로 출격하여 푸가초프의 유격병들과 교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전에서는 보통의 경우 배불리 처먹고 얼큰히 취한 데다가 좋은 말까지 가지고 있는 폭도들 편이 우세한 법이었다. 먹지 못해 말라빠진 성 안의 기병대는 도저히 그들과 맞설 수 없었다. 가끔 우리 보병들의 굶주린 배를 안고 들판으로 출격하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깊이 쌓인 눈은 분산되어있는 적의 기병대에 대한 그들의 효과적인 활동을 방해했다. 포병대는 보루 위에서 공연히 포성을 울릴 뿐이었고, 일단 들판에 나서기만 하면 포를 끄는 말들이 힘을 쓰지 못해 진흙탕에 빠져 꼼짝하지 못했다. 우리들의 군사 행동이란 대체로 이런 꼴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올렌보르크이 관리들이 주장한 신중하고 현명한 방책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출격에서 우리는 꽤 많은 적의 밀집부대를 분산시키고 추격할 수 있었는데 그 때 나는 미처 도망치지 못한 카자흐에게 덤벼들었다. 내가 장검을 휘둘러 내펼치려 하자 그는 별안간 모자를 벗고 소리쳤다.

"안녕하십니까. 표트르 안드레비치, 그 후 별고 없으셨지요?"

웬놈일까 하고 얼굴을 쳐다보았더니 그는 우리 하사로 있었던 자였다. 나는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 자네는 박시미치로군. 베로고르스트에서 언제 나왔는가?"

"바로 어제 그것에 다녀왔습니다. 표트르 안드레비치, 당신에게 전할 편지가 있습니다."

"편지라니? 어디 빨리 읽어 보자."

나는 온 몸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외쳤다. 막시미치는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대답했다.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꼭 당신한테 전하겠다고 파라시카에게 약속하고 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차곡차곡 접은 종이조각을 나에게 내주고는 곧 발을 몰고 달려가 버렸다. 나는 편지를 펼쳐들고 울렁거리는 가슴으로 편지를 읽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저는 한꺼번에 부모님을 잃고 이제는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식구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언제나 저의 행복을 빌어 주시고 또 누구에게나 도움을 주시려는 착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오직 당신에게 의지하고 매달리려 합니다. 그리고 이 편지가 부디 당신 손에 들어가도록 기도합니다. 막시미치가 꼭 당신에게 전해 주마고 약속했습니다만, 파라시카가 막시미치로부터 들었다는 말에 의하면 출격할 때마다 자주 당신을 멀리서 본다고 하며, 당신께서는 조금도 몸을 돌보시지 않는 것 같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에 대해선 아무 생각도 하시지 않는다는 것 같다는 얘기였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다가 겨우 일어날 만하니까 푸라초프의 명령이라는 핑계로 시바블린은 게라심 신부님을 위협하여 강제로 저를 그 집에서 빼앗아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우리가 살던 집에 돌아와서 감시를 받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알렉세이 이바니치는 저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제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플리나 판필로부나가 폭도들에게 저를 자기 조카라고 거짓말을 했을 때 모르는 체하고 덮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알렉세이 이바니치와 같은 사람의 아내가 될 바에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는 저에게 몹시 잔인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만일 제가 마음을 돌려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악당의 병사들에게 끌고 가서 리자베타하를로바처럼 만들겠다고 위협합니다. 저는 알렉세이 이바니치에게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사흘만 기다리겠다고 승낙했습니다만 만일 사흘이 지난 후에도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절대로 그냥 놔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아, 표트르 안드레비치! 믿고 의지할 사람은 오직 당신밖에 없습니다. 이 불쌍한 몸을 구해 주십시오. 장군님과 여러 지휘관들께서는 한시 바삐 이곳으로 구원군을 보내도록 간청해 주십시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당신께서 직접 와 주실 것은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불쌍한 고아

편지를 읽고 난 다음 나는 곧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애꿎은 말 잔등에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며 성 안으로 달렸다. 말을 달리면서도 한시라도 빨리 불행한 그녀를 구출해 낼 수 있는 묘안을 궁리해 보았지만 이렇다 할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성 안에 들어서자 나는 장군 댁을 향해 달음질 쳤다. 장군은 해포석 파이프를 입에 물고 이리저리 방 안을 거닐고 있다가 나를 보자 발을 딱 멈추었다. 아마도 내 태도가 그를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그는 근심스러운 어조로 내게 허겁지겁 달려온 이유를 물었다. 나는 말을 꺼냈다.

"각하, 저는 각하를 친아버지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부탁을 드리러 달려왔습니다. 저의 청원을 꼭 들어 주십시오. 이것은 제 일생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노장군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부탁이라니 대체 무슨 일인가? 자네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서 말을 해 보게."

"각하. 제게 1개 중대의 병력과 카자흐 인 50명을 주십시오. 그리고 베로고르스크 요새의 소탕을 명령해 주십시오."

장군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내 정신이 나가지 않았나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을 오히려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뭐라고? 베로고르스크 요새를 소탕하겠다고?"

한참 만에 그는 이렇게 반문했던 것이다.

"성공을 맹세하겠습니다. 부디 보내 주십시오."

하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절대로 그럴순 없네. 그만큼 거리가 멀면 멀수록 적이 자네들과 전략기지인 이곳과의 연락을 끊는 건 극히 용이한 일일세. 따라서 자네들은 전멸시키는 것도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연락이 두절된다는 것은 즉...."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나는 그가 전술론에 열을 내려고 하는 것을 듣고 답답해서 급히 그의 말을 막았다.

"실은 미로노프 대위의 딸이 제게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시바블린이란 놈이 지금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인가? , 그 시바블린은 정말 고약한 악당 놈이군. 만일 내 손에 걸려 드는 날이면 이십사 시간 이내에 판결을 내려 보루 위에서 총살해 버리겠다. 하지만 지금은 기다려 보는 게 상책이야."

"기다린다구요?"

하고 나는 무의식중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간 그놈이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강제로 결혼해 버릴 것입니다."

"할 수 없지. 그런 것쯤은 별로 큰 일이 아니야. 그 애는 시바블린의 아내가 되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 지금 같은 시국에서 그 애를 보호하기에는 그놈 이상으로 적합한 자는 없네. 그리고 나중에 그놈이 총살되면 그 때 또 그때대로 하나님께서 적당한 남편감을 찾아 주시겠지. 귀엽게 생긴 젊은 과부가 숫처녀보다 빨리 남편을 얻는다는 뜻일세. 알아듣겠나?"

하고 장군이 말을 받았다.

"그 사람을 시바블린 따위한테 빼앗긴다면 저는 차라리 죽음 택하겠습니다."

"허허! 이제 알만하군. 그러고 보니 자네는 마리아 이바노브나한테 홀딱 반한 모양이군. , 그렇다면 문제가 다르지. 나도 자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나로서는 자네에게 1개 중대의 병력과 카자흐 인50명을 줄 수가 없어. 자네가 하겠다는 원정은 무모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야. 나로서는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에 거절하겠네."

나는 절망에 빠져 맥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때 문득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것이 어떤 생각인지 옛날 소설가들이 흔히 말하듯 독자는 다음 장에서 알게 될 것이다.

 

 

11장 폭도들의 소굴

태어날 때부터 잔인한 사자(lion),

그러나 그 때만은 배가 불렀던지

어째서 나를 찾아왔지?”

사자는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 수마로코프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ича Сумарокова, 1717~1777)-

(수마로코프(Alexander Petrovich Sumarokov)는 극작가이며, 이 에피그라프도 푸쉬킨이 수마로코프에게서 직접 받아낸 글)

 

나는 급히 장군 댁을 물러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사베리치는 나를 보기가 무섭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도련님 쓸데없는 수고를 하십니다. 그따위 도둑놈들과 날마다 맞설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어디 귀족이 할 일인가요. 언제 무슨 일이 있을 지 누가 알아요? 그러다가 목숨이라도 잃게 되면 어떡합니까. 그것도 상대가 터키나 스페인이라면 또 모르지만 그 악당들과는 치사스러워서라도 맞서지 않는 게 좋습니다.”

나는 그의 충고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지금 남아 있는 돈이 얼마나 되지?”

넉넉히 가지고 있습니다. 악당 놈들이 눈을 번뜩거리며 뒤졌지만 제가 감쪽같이 감춰놓아서 한 푼도 뺐기지 않았습니다.”

하고 그는 자랑스런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은전이 가득 들어 있는 길쭉한 지갑을 꺼냈다.

그럼 사베리치, 그 돈의 반만 갖고 와. 그리고 나머지 돈은 자네가 가지고 있어. 난 베로고르스크 요새로 가야겠어.”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하고 착하기만 한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하나님을 좀 두려워하십시오. 악당들이 길목마다 지키고 있는 이때에 길을 떠나다니 될 일입니까? 자기 목숨이 아깝지 않더라도 부모님에게 불효하고 있다는 생각쯤은 하셔야지요. 지금 가셔야 한다니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요? 조금만 더 참고 계십시오. 군대가 가서 반란군들을 모조리 잡아버리면, 그 때 어디를 가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나의 결심이 동요될 리는 만무했다.

긴 얘기를 할 시간이 없어. 나는 반드시 가야하고 또 가지 않을 수 없는 곳이야. 그러나 사베리치, 걱정하지 마. 하나님께선 자비로우시니까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줄 거야! 그리고 미안하게 생각하거나 인색을 떨지 말고 자네한테 필요한 것이면 뭐든지 사 갖도록 해. 값이 세 갑절이면 어때. 나머지 돈은 자네에게 주는 것이니까 마음대로 써도 좋아. 만일 사흘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사베리치는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도련님을 혼자 가시도록 할 줄 아십니까. 꿈에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떠나셔야만 하겠다면 저는 걸어서 쫓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도련님 곁에서는 절대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도련님을 보내고 나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을 성미 같은가요. 정신이 나가기 전엔 그럴 수 없습니다. 떠나시든지 말든지 도련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렇지만 저는 도련님 곁에서 떨어져 있진 않을 테니까요.”

나는 사베리치와 다투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도 떠날 준비를 시켰다. 30분 후에 나는 준마에 올라타고 사베리치는 말라빠진 절름발이 말에 탔다. 그것은 사료가 없어서 성 안의 주민이 그에게 거저 준 말이었다. 성문에서는 보초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를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우리는 올렌부르크를 뒤로 하고 말을 몰았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뻗은 도로는 바람에 날려온 눈에 덮여 있었지만 들판에는 날마다 새로 찍힌 말발굽 자국이 낭자했다. 나는 말이 빨리 달리도록 채찍질을 했다. 사베리치는 멀리 뒤떨어져서 간신히 쫓아오며 연방 소리를 질러 애원하는 것이었다.

도련님! 제발 좀 천천히 달리십시오. 이 말라빠진 병신 말로 도련님을 쫓아갈 수 있습니까? 그렇게 서둘러 가셔야만 됩니까? 잔칫집에라도 간다면 몰라도 자칫 잘못하면 시퍼런 칼이 머리 위에서 번쩍할 판인데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아아, 저러다간 귀한 집 도련님 한 분 망치고 말겠군.”

얼마 후에 베르다(Берд [Berd]) 마을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마을의 자연적인 방벽을 이루고 있는 골짜기로 돌아섰다. 사베리치는 쉴 새 없이 우는 소리를 하며 그래도 용케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마을을 무사히 우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바로 눈앞의 어둠 속에서 방망이를 든 너댓 병의 농부가 나타났다. 그들은 푸가초프의 전초병이었다. 우리는 정지 명령을 받았다. 그들의 암호를 몰랐기 때문이 잠자코 그 옆을 지나치려 했더니 그들은 잠깐 새에 나를 에워싸고 그 중 한 놈이 말의 재갈을 붙잡았다. 나는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농부의 머리를 내리쳤다. 모자를 쓰고 있어서 목숨은 건졌지만 그는 비틀거리며 쥐고 있던 재갈을 놓아버렸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쏜살같이 말을 달렸다. 점점 짙어지는 밤의 어둠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나를 구출해주는 것인 줄 알고 뒤를 돌아보니 사베리치가 보이지 않았다. 절름발이 말에 탄 그는 가엾게도 도둑놈들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한참을 기다리다가 그가 붙잡힌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여 말을 돌려 그를 구출하기 위해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골짜기가 가까워지자 떠들썩한 고함소리와 사베리치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나는 말에 채찍질을 하며 달려가 조금 전에 나를 정지시켰던 보초들 가운데로 뚫고 들어갔다. 사베리치는 그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놈들은 말라빠진 말에서 그를 끌어내려 포승을 감으려는 참이었다. 내가 되돌아 온 것을 보자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멋대로 덤벼들어 나를 말에서 끌어내렸다. 그 중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이 나를 즉시 폐하의 어전으로 끌고 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반항하지 않았다. 사베리치도 내가 하는 대로 했다. 보초병들은 의기양양해져서 나를 끌고 갔다. 골짜기를 건너 마을로 들어갔다. 오막살이집마다 불빛이 흘러나왔고 도처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행길에서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지만 어둡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를 유심히 보지 않았고, 또 내가 올렌부르크에서 근무하는 장교라는 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네거리 한쪽 모퉁이에 자리 잡은 농부의 집으로 끌려갔다. 대문 앞에는 술통 몇 개와 대포 2문이 놓여 있었다. 농부들 중의 한 놈이 말했다.

여기가 궁전이다. 너희들을 잡아왔다고 보고하고 나오겠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사베리치를 돌아보았다. 늙은이는 기도문을 외면서 성호를 긋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후에야 들어갔던 농부가 나오더니 내게 말했다.

들어와, 폐하께서 장교를 데리고 들어오라는 분부시다.”

나는 농부의 집, 아니 농부의 말을 빈다면 궁전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2대의 촛불이 밝혀져 있고 벽에는 금박 칠을 한 도배지가 사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자, 탁자, 굵은 노끈으로 매달아 놓은 조그마한 세숫대야, 못에 걸려 있는 수건, 구석에 놓인 부젓가락, 그리고 단지 등속을 올려놓은 페치카의 선반, 이런 것들은 모두 흔히 볼 수 있는 농부의 집과 다름이 없었다. 푸가초프는 붉은 겉옷에 높다란 모자를 쓰고 위엄 있게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성상 아래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좌우에는 그의 참모격인 인물들 몇 놈이 자못 황송하다는 표정을 꾸미고 있었다. 올렌부르크에서 장교가 왔다는 말은 폭도들에게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또 그들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내 말을 들으려 했음이 명백했다. 푸가초프는 첫눈에 나를 알아보았다. 일부러 꾸미던 그의 위엄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는 활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아, 누군가 했더니 자네로군. 그래, 그 후 어떻게 지냈는가. 이번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 나타났지?”

나는 개인적인 용무로 이곳을 지나다가 당신의 부하에게 붙들리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개인적인 용무라니?”

그가 물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푸가초프는 내가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기를 꺼려함을 눈치 채었던지 부하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모두들 명령에 복종했지만 그 중 2놈만은 꼼짝하지 않고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 사람들은 상관없으니 어서 말해. 나도 이 친구들에겐 비밀이 없으니까.”

나는 곁눈으로 자칭 황제의 측근자들을 훑어보았다. 그 중 하나는 수염이 희고 허리가 꼬부라져서 기력이 없어 보이는 늙은이였는데, 회색 외투를 입고 그 위에 어깨로부터 푸른 수를 드리운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 놈은 평생을 두고도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뚱뚱한 몸집에 어깨가 딱 벌어진 45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붉고 짙은 구레나릇이며 번들거니는 잿빛 눈, 구멍이 아주 없어져 버린 코며 이마와 볼에 박힌 불그죽죽한 얼굴 점 같은 것이 그의 넓은 곰보 얼굴에 붙어 있어 이상야릇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는 붉은 루바시카에 가랑이가 넓은 카자흐 바지를 입고 키르기스(Khirghis) 식 자리옷을 걸치고 있었다. 첫 번째 사내는 정부군에서 탈출한 베로바로도프(Белобородов [By?lobarodoff])라는 자였고, 다음 아파나시 소코로프(Афанасий Соколов [Aphanasy Sakaloff])라 불리우는 사내는 시베리아 광산에서 3번이나 탈주한 유형수였다. 그 때 내 마음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어쩌다 발을 들여놓게 된 그들의 사회는 나의 상상력을 몹시 자극하였다. 그러나 푸가초프의 질문에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럼 말해 봐. 자네는 무슨 용무로 올렌부르크에서 빠져 나왔는가?”

내 머릿속에 기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다시금 나를 푸가초프 앞으로 끌고 온 운명은 어쩌면 내 계획이 실현될 기회를 주는 것이나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결심하자 그 결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푸가초프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는 심한 학대를 받고 있는 어떤 고아를 구출하기 위하여 베로고르스크 요새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푸가초프의 눈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떤 놈이야, 내 부하로서 고아를 못살게 구는 놈은? 그따위 놈은 제아무리 똑똑해도 내 처단을 면치 못해. 어서 말해 봐, 못된 짓을 하는 놈이 대체 누구인가?”

시바블린입니다. 당신이 게라심 신부의 집에서 보신 그 병든 처녀를 감금해 놓고 강제로 결혼하려고 하는 천하에 못된 놈입니다.”

푸가초프는 살기가 등등해서 말했다.

좋아, 내 시바블린이란 놈을 콱 죽여주지. 내 밑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든가 백성을 괴롭히면 어떻게 되는지 본때를 보여주겠네. 그놈의 모가지를 매달아 죽일 거야.”

홀로프샤(Хлопуша [Khlopusha]))가 목쉰 소리로 끼어들었다.

제가 한 마디 하지요. 요새 사령관으로 임명한 시바블린은 요새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도 너무 경솔했지만, 지금 그자의 목을 달아맨다는 것도 역시 경솔한 일입니다. 당신이 귀족 출신인 그자를 윗자리에 앉혀 카자흐 인들의 비위를 거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행에 대한 고발이 한 번 들어왔다고 해서 그를 처형하면 귀족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주기 때문에 현명한 방법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귀족 따위를 불쌍하게 여긴다든가 두둔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이번에는 어깨에 푸른 수를 드리운 늙은이가 입을 열었다.

시바블린을 처형하는 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지만 이 장교 양반이 무엇 때문에 여길 왔는지 한번 정식으로 심문해 보는 것도 결코 헛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사람이, 당신을 황제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처치는 간단하지만 그렇지 않고 인정한다면 어째서 오늘까지 역적 놈들과 함께 올렌부르크에 붙어 있었느냐 하는 게 문제입니다. 이 사람을 재판소로 끌고 가서 심문을 시작하면 어떻겠습니까. 내 생각 같아서는 아무래도 올렌부르크의 우두머리가 이 사람을 이곳에 잠입시킨 것만 같습니다.”

늙은 악당 놈의 이론은 사실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누구의 수중에 들어 있는가를 생각할 때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이었다. 푸가초프는 내가 곤경에 빠진 것을 알아챘다. 그는 내게 눈짓을 해 보이며 말했다.

어떤가, 자네 생각은? 우리 원수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푸가초프의 냉소는 내게 다시 용기를 찾게 했다. 나는 태연한 어조로 내 목숨은 그의 손 안에 있으니 좋을 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좋아.”

하고 푸가초프가 말했다.

그럼 내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지금 성내의 사태는 어떤가?”

덕분에 만사태평입니다.”

만사태평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지 않아.”

자칭 황제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나는 선서한 대제국의 군인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해 그것은 허튼 소문에 지나지 않으며 올렌부르크에는 모든 물자가 충분히 저장되어 있다고 역설했다. 늙은이가 말을 가로막았다.

어떻습니까. 이 친구는 당신에게 맞대 놓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탈주병들은 모두 올렌부르크에서는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으며 염병이 돌고 송장까지도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라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데 이 자는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떠벌이고 있으니 말이 됩니까. 시바블린을 교수대에 매달 생각이시면 이 애송이놈도 목을 매달아야 합니다. 한쪽만 매달면 아마 다른 한쪽이 섭섭해 할 겁니다.”

이 저주받을 늙은이의 말이 푸가초프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홀로프샤가 그 말에 반대하고 나섰다.

뭐 그럴 것까지 있나, 나우미치(Наумыч [Naumych]). 자넨 덮어 놓고 목을 옭아야 한다느니 잘라버려야 한다느니 하는 개수작 같은 소리만 뇌까리고 있으니 대단한 호걸이란 말이야. 겉보기에는 용케도 목숨이 붙어 있구나 할 지경인 형편없는 늙은이가 제 자신은 무덤 속에 한 발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매일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야. 자네는 양심도 없나?”

그래서 자네는 성인군자란 말이군. 언제부터 그 따위 선심을 주어 왔지?”

베로바로도프가 대꾸했다.

그야 물론 나도 죄 많은 놈이긴 하지. 이 손으로 말하더라도 기독교도들의 피에 젖은 죄는 있지. 하지만 난 어디까지나 역적 놈들을 죽였지 제 집에 찾아 들어온 손님을 죽인 일은 없네. 널따란 네거리에서나 어두운 숲 속에서 죽인 일은 있지만 집 안에서 난롯불을 쬐며 죽인 일은 없단 말씀이네.”

홀로프샤는 울퉁불퉁한 주먹을 불끈 쥐고 소매를 걷어 올려 털이 부수수한 팔뚝을 내보이면서 말했다. 늙은이는 외면을 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콧구멍 없는 녀석이 지랄이야.”

홀로프샤는 말을 알아듣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뭘 씨부렁거리고 있어, 이 늙어빠진 무지렁이가. 왜 네 놈도 콧구멍이 막히고 싶으냐. 오냐, 두고 봐라. 이제 네 차례가 올 테니. 널 만두 냄새도 못 맡게 해주마우선 그 수염부터 몽땅 뽑아 버릴 테니 그런 줄이나 알고 있어라.”

푸가초프가 부하들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위엄 있게 입을 열었다.

이거 봐, 장군들. 싸움은 그만들 둬. 올렌부르크의 개새끼들이 같은 들보에 매달려 발을 버둥댄다면 몰라도 우리 집 수캐들이 서로 물어뜯는 건 볼 수 없어. 그만 화해를 하도록 해.”

홀로프샤와 베로볼로도프는 입을 봉하고 서로 노려보고만 있었다. 나는 내게 매우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는지 모르는 이 화제를 딴 데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푸가초프를 향해 명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정말! 당신이 말과 가죽옷을 준 데 대하여 감사하다는 말을 잊을 뻔했군요. 당신이 그 때 친절을 베풀어주시지 않았던들 성 안까지 가지도 못하고 도중에서 얼어 죽었을 것입니다.”

내 계교는 완전히 성공했다. 이 말을 듣고 푸가초프는 기분이 좋아서 가늘게 뜬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빌려 쓴 돈은 깨끗이 갚으란 말이 있네. 그건 그렇고, 시바블린한테 학대를 받고 있다는 처녀가 자네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말할 수 없겠나? 젊은 총각의 연애라는 것이겠지, ?”

나는 분위기가 호전되는 것을 보자 사실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솔직히 푸가초프에게 대답했다.

그 처녀는 내 약혼녀입니다.”

, 자네 약혼녀야? 왜 진작 그렇게 말하지 못했어? 그렇다면 내가 결혼식을 올려 주고 잔치도 벌여 줄 텐데?”

하고 그는 베로볼로도프를 향해

이거 봐, 원수! 난 이 사람하고 오랜 친구 지간일세. 함께 저녁이라도 먹기로 하세. 아침엔 저녁보다 좋은 지혜가 생긴다지 않았나. 이 사람의 문제는 내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지.”

나는 바라지도 않았던 이 호의를 거절하면 마음이 편했겠지만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이 집 주인의 딸인 두 카자흐 처녀가 식탁에 빵과 생선국, 그리고 포도주와 맥주병을 차려 놓았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푸가초프를 위시해서 그의 험상궂은 일당들과 더불어 같은 식탁에 앉게 된 것이다. 내가 부득이 한몫 낀 향연은 밤이 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침내 좌중은 모두 술에 취하기 시작했다. 푸가초프가 의자에 앉은 채 껌벅껌벅 졸기 시작하자, 부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도 밖으로 나가자고 눈짓을 했다. 나는 그들과 밖으로 나왔다. 홀로프샤의 지시를 받고 보초병이 재판소로 쓰이고 있는 오두막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사베리치는 일이 되어 나가는 꼴을 보고 놀란 나머지 얼빠진 사람이 되어 내게 한 마디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한숨을 쉬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더니 이윽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밤이 새도록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잡념 때문에 끝내 한잠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푸가초프의 호출을 받고 나는 그에게 갔다. 문 앞에는 타타르산 말 3마리가 이끄는 썰매가 서 있었고 한길에는 군중이 모여 있었다. 현관에서 푸가초프와 만났는데 그는 털가죽 외투에 키르키즈 보자를 쓰고 길 떠날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만났던 패거리들이 그를 둘러싸고 굽실거리고 있었지만, 어제 저녁에 보았을 때에 비하면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푸가초프는 명랑한 얼굴로 내게 아침 인사를 하고 자기와 함께 썰매를 타자고 말했다. 나는 그와 함께 나란히 포장 속에 들어가 앉았다.

베로고르스크 요새로 말을 몰아라.”

하고 푸가초프는 말고삐를 쥐고 있는 어깨가 떡 벌어진 타타르 인에게 명령했다. 짤랑짤랑 방울소리를 내며 썰매를 미끄러져 나갔다.

기다려요! 기다려요!”

몹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와서 돌아보니 사베리치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푸가초프는 말을 멈추게 했다.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그래 이 늙은 놈을 팽개치고 혼자 가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 영감이로군! 또 만나게 됐군. 마부 옆에 올라타도록 해.”

푸가초프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이 늙은 놈을 살펴주시어 마음을 놓게 한 보답으로 백 살까지 장수하시도록 평생을 두고 빌겠습니다. 그리고 그 토끼가죽 얘기도 이제는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사베리치는 자리에 올라타며 연방 입을 놀렸다. 토끼가죽을 들먹거리는 소리를 듣고 이번에야말로 푸가초프가 노발대발 하지나 않을까 근심했으나 다행히 자칭 황제는 그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체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때에 맞지 않은 유치한 풍자라고 묵살해 버린 것 같았다.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고 군중은 길가에 죽 늘어서서 허리를 깊이 구부려 경의를 표했다. 푸가초프는 양쪽으로 번갈아 가며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우리는 곧 마을 밖으로 나와 평탄한 대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 때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추측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몇 시간 후면 나는 이미 잃어버렸다고 단념했던 그 여인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만나는 순간을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나는 또한 나의 운명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기이한 인연으로 나와 신비로운 관계를 맺게 된 사나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내 애인의 해방을 위한 역할을 스스로 맡고 나서 이 사나이의 성급한 잔인성과 피에 굶주린 습성이 내 머릿속에 되살아났던 것이다. 푸가초프는 그녀가 미로노프 대위의 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약이 바싹 오른 시바블린이 그에게 내막을 폭로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푸가초프 자신이 딴 방면에서 진상을 알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어찌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고 머리털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그 때 갑자기 푸가초프가 말을 걸어 내 상념을 깨뜨렸다.

자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나?”

생각이 없을 수 있습니까? 나는 귀족 출신의 장교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신과 맞서서 싸웠는데 오늘은 이렇게 한 트로이카에 타고 있습니다. 더구나 내 일생의 행복은 당신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자네는 겁이 나는가?”

푸가초프가 물었다. 나는 이미 그에게 관대한 용서를 받은 이상 그의 동정뿐만 아니라 원조까지도 기대하고 있다는 대답을 했다.

그렇지, 자네 말이 지당하단 말이야. 자네도 눈치를 챘겠지만 내 부하 녀석들은 자네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특히 그 늙은이는 오늘도 자네가 틀림없이 간첩이니까 고문을 해서 목을 옭아버리자고 주장했지만 내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지.”

자칭 황제는 말했다. 그리고 잠깐 생각을 하다가 사베리치와 타타르 인이 듣지 못하게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때 자네가 준 한 잔 술과 토끼가죽 덧저고리를 내가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야. 어떤가, 내가 자네 동료들이 말하는 것처럼 잔인무도한 인간이 아니란 것을 알겠지? 올렌부르크에선 내 얘기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결코 얕잡아볼 수 없는 상대라 말하고들 있습니다. 당신은 충분히 실력을 발휘한 사람이니까요.”

나는 베로고르스크 요새가 점령되었을 때의 참혹한 광경을 생각하면, 그와 다툴 만한 이유가 충분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한 마디로 대꾸했다. 내 말에 자칭 황제는 흡족한 모양이었다. 그는 사뭇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그야 그렇지! 내가 향하는 곳엔 덤벼들 놈이 없으니까. 올렌부르크에선 저 유제바(Юзеевой [Yuzeevoy])의 전투를 알고 있는가? 그 때 40명의 장군이 전사하고 4개의 군단이 몽땅 포로로 잡혔지. 자넨 어떻게 생각하는가, 프러시아 왕은 나와 견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비적 두목의 자만심이 하도 재미있어서 물었다.

당신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프리드리히 왕과 싸워서 이길 것 같습니까?”

표트르 표드로비치 말인가. 나는 이미 자네 편의 군들에게 이겼는데, 그 장군들이 쳐부순 그를 내가 어째서 이기지 못하겠나? 지금까지 나는 운이 좋았네. 내가 모스크바로 진격할 때도 역시 운이 좋을지는 모르지만.”

그럼, 당신은 모스크바까지 진격할 작정입니까?”

자칭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야. 사실 나는 활개 칠 수 없는 형편이네. 부하 놈들은 각기 아는 체하고 잔소리가 너무 많아 탈이야. 모두 형편없는 자들이지. 그래서 나는 놈들의 기미를 살펴보고 있지 않을 수 없다네. 한번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기만 하면 그들은 자기들 모가지 대신 내 목을 가차 없이 잘라다 바칠 놈들이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당신이 결단을 내려 여왕 폐하의 자비심에 호소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 될 말이야. 이제 후회를 한대도 때는 이미 늦었어. 나 같은 놈이 용서받을 리는 없고 어쨌든 끝까지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네. 하지만 누가 아나?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르지! 그리시카 오트레비에프는 모스크바를 통치하지 않았는가 말이네.”

당신은 그자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들창 밖으로 내동댕이친 후 갈기갈기 사지를 찢어서 불에 태우고 그 재는 대포에 재어 쏘아 버리지 않았습니까.”

푸가초프가 그 어떤 살벌한 흥분을 느끼는 듯 입을 열었다.

이봐, 내 얘길 좀 들어 봐. 자네에게 옛날이야길 하나 하지. 이건 내가 어릴 때 카르미크(калмычк [Kalmyk]) 칼미키야(калмычка) 공화국에 거주하는 몽골족 노파에게 들었는데, 하루는 독수리가 까마귀에게 이렇게 물었다네. 까마귀야 너는 이 세상에서 3백 년이나 살 수 있는데 어째서 나는 겨우 33년밖에 못 살지. 하니까 까마귀가 대답하는 것이 걸작이었네. 당신은 생피를 빨아먹고 나는 송장을 먹으니까 그렇지요, 라는 말을 듣고 독수리가 생각하기를 음, 그렇다면 나도 어디 송장을 먹어볼까 해서 독수리와 까마귀는 하늘을 날아가다가 죽어 넘어진 말을 발견하고 내려와서 말 위에 앉았지. 까마귀는 맛있게 쪼아 먹기 시작했지만, 독수리는 한두 번 쪼아 보더니 날개를 치며 까마귀에게 말했다네. 역시 안 되겠다, 까마귀야. 3백 년 동안 썩은 고기만 먹는 것보다는 단 한 번이라도 생피를 배불리 먹는 편이 낫겠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지, 라고 하던 독수리의 말에 대해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거 참 재미있군요. 하지만 살인이나 강도질을 하며 사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송장을 쪼아 먹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 같습니다.”

푸가초프는 뜻밖이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아무 대꾸도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제각기 자기 생각에 잠겨서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타타르 인은 구슬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사베리치는 마부석에서 몸을 흔들면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트로이카는 평탄한 길을 쏜살같이 달라고 있었다. 잠시 후에 우랄 강의 험한 기슭이 언뜻 보였다. 그러고 나서 15분쯤 뒤에 우리들은 베로고르스크 요새에 도착했다.

 

 

12장 고아

 

앞뜰에 한 그루 외로운 사과나무

가지도 잎도 꽃도 없어요

우리들의 사랑스런 신부

아버님도 어머님도 안 계셔요

들러리도 없고 축복하는 사람도 없어요

-혼례의 노래-

 

?

 

Как у нашей яблоньки

Ни верхушки нет, ни отросточек;

Как у нашей у княгинюшки

Ни отца нету, ни матери.

Снарядить-то ее некому,

Благословить-то ее некому.

 

 

 

우리를 닮은 사과나무

꼭대기도 가지도 없네

우릴 닮은 공주님

아빠도 엄마도 없지

들러리는 없다 해도

축복하는 사람마저 없다니

 

Свадебная песня 혼례의 노래 [아젤 역].

 

 

썰매는 방울소리를 내며 사령관 집 층계 앞에서 멎었다. 주민들이 몰려들어 자칭 황제 주위에서 연실 굽실거렸다. 시바블린은 현관 층계에서 푸가초프를 정중히 영업했는데 그는 카자흐 인들이 입는 옷을 걸치고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변절자는 비열한 말투로 충성을 표시하며 자칭 황제가 썰매에서 내리는 것을 부축했다. 그는 나를 보자 당황한 빛을 보였으나 곧 태연스럽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네도 우리 편으로 넘어왔나? 진작 그럴 것이지.”

나는 외면한 채 아무 대꾸도 하지를 않았다. 오래 전부터 낯익은 방 안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파왔다. 벽에는 폭도들에게 죽음을 당한 사령관의 임관 사령장이 지난 날을 말하는 슬픈 묘비명처럼 그대로 걸려 있었다. 푸가초프는 이전에 이반 쿠즈미치가 부인의 다분한 잔소리를 귓전에 흘려 버리며 곧잘 졸고 앉았던 그 의자에 걸터앉았다. 시바블린은 푸가초프에게 손수 보드카를 가져다 바쳤다. 그는 한 모금 마시더니 나를 가리키며 시바블린에게 말했다.

이 친구에게도 한 잔 부어 줘.”

시바블린이 쟁반을 들고 내 옆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다시 외면을 하고 말았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원래 눈치가 빠른 그는 푸가초프가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푸가초프는 요새의 상황과 적군의 동정에 대해 여러 가지를 질문하다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불쑥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자네가 감금하고 있는 처녀를 어디 한번 보세.”

시바블린은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폐하, 감금한 게 아닙니다. 몸이 편치 않아서지금 안방에 누워 있습니다.”

그럼 나를 그곳으로 안내하도록 해.”

자칭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핑계가 있을 수 없었다. 시바블린은 푸가초프를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방으로 안내했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시바블린은 발을 멈추고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는 제게 무엇이든지 요구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아내의 침실에 들어가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나는 온 몸이 후들후들 떨려 왔다.

그럼, 결혼했단 말인가?”

나는 그에게 금방 덤벼들 기세로 외쳤다.

가만 있어!”

푸가초프가 나를 제지했다. 그리고 시바블린에게 언성을 높여 말했다.

너 말이야, 공연히 똑똑한 체하고 건방진 수작 따위는 하지 말아. 그 여자가 네 아내든지 아내가 아니든지 간에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갈 뿐이야.”

안방 문 앞에 와서 시바블린은 다시 발을 멈추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폐하, 아내는 열이 높아서 벌써 사흘째 줄곧 헛소리만 하고 있다는 걸 미리 말씀드립니다.”

어서 문이나 열어!”

푸가초프가 말했다. 시바블린은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하더니 열쇠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푸가초프가 발길로 걷어차자 자물쇠가 벗겨지며 문이 열렸다. 우리들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광경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방바닥에는 창백하게 여윈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헝클어진 머리에 갈기갈기 찢어진 농부의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앞에는 빵조각을 올려 놓고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몸을 보를 떨며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그 순간에 무엇을 어떻게 했었는지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푸가초프는 시바블린을 바라보고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자네 집 병실은 이렇게 훌륭하군!”

그리고 그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이거 봐요, 색시는 남편에게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벌을 받고 있나?”

그녀가 대답했다.

남편이라구요? 저 사람은 제 남편이 아니에요. 저는 죽어도 저 사람의 아내가 되지 않겠어요. 만일 아무도 저를 구해주지 않는다면 죽어버리기로 결심했어요. 저는 정말 죽어 버릴테예요.”

푸가초프는 눈을 부릅뜨고 시바블린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감히 나를 속여? 이 개자식아, 네 죄가 어떤 벌을 받아야 마땅한지 알고 있느냐?”

그 말에 시바블린은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순간 모멸이 증오와 분노의 감정을 물리치고 내 가슴 속을 차지했다. 나는 탈옥한 카자흐의 발밑에 엎드려 있는 이 귀족을 혐오에 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푸가초프는 좀 누그러진 어조로 시바블린에게 말했다.

딱 한 번만 용서해주지. 하지만, 한 번 더 죄를 저지르면 그땐 이번 것도 합쳐서 벌을 줄테니 그리 알아.”

그러고 나서 그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귀여운 아가씨, 여기서 나가라. 내가 자유를 주겠다. 나는 황제야.”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재빨리 그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가 바로 부모의 원수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나는 그녀에게 달려들었으나 그때 낯익은 하녀 파라시카가 재빨리 방 안으로 뛰어들어와서 주인 아가씨를 간호하기 시작했다. 푸가초프가 안방에서 나왔으므로 우리 세 사람은 응접실로 돌아왔다.

소감이 어떤가, 친구. 귀여운 처녀를 구출해냈으니 말이야. 곧 신부한테 사람을 보내서 조카딸의 결혼식을 올리도록 하면 어떨까? 내가 대신 아버지 노릇을 하고 시바블린에게 들러리를 부탁하면 될 걸세. 그리고 실컷 마셔보세.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잔치를 벌이세.”

푸가초프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일이 기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푸가초프의 제의가 시바블린의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폐하, 제가 폐하께 거짓말을 한 것을 분명히 잘못입니다. 하지만 그리뇨프(Grineff)도 폐하를 속이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이곳 신부의 조카가 아니라 이 요새가 점령될 때 처형된 이반 쿠즈미치의 딸입니다.”

시바블린은 미친 듯이 외쳤다. 푸가초프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인가?”

시바블린의 말이 옳습니다.”

나는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자넨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지?”

푸가초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건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의 부하들이 있는 앞에서 어떻게 미로노프의 딸이 살아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랬다간 그들이 가만 놔두질 않았을 겁니다. 어차피 목숨을 건지진 못했겠지요.”

자네 말이 옳아. 그 주정뱅이 녀석들이 불쌍한 처녀를 용서해주었을 리가 만무하지. 하긴 신부의 마누라가 그들을 속여 넘기길 잘 했다고 할 수 있네.”

나는 그의 기분이 좋은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내 말을 들어 주십시요.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게 베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목숨이라도 기쁘게 바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다만 나의 명예와 기독교도로서 양심에 위반되는 일만은 요구하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은 나의 은인입니다. 이왕 도와주시는 김에 끝까지 봐주십시오. 나와 저 가련한 여자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떠나게 해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어느 곳에 계시더라도 그리고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죄 많은 당신의 영혼을 구해달라고 매일 같이 하나님께 빌겠습니다.”

푸가초프의 거친 성품도 이 말에는 다소 동정심이 생긴 것 같았다.

좋아, 자네 마음대로 해! 죽이기로 한 놈은 죽이고 용서하기로 한 놈은 깨끗이 용서하는 게 언제나 내 주의니까. 자네가 그 미인을 데려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해주겠어. 나는 하나님께서 사랑과 충고를 주시기를 바랄 뿐일세!”

시바블린은 얼이 빠진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푸가초프는 요새를 순시하러 나섰다. 시바블린은 그를 따갔지만 나는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는 구실로 뒤에 남았다.

나는 안방으로 달려갔다. 문이 닫혀 있어서 노크를 했다.

누구세요?” 하고 파라시카가 물었다. 내가 왔다고 대답하자 이번에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애처로운 음성이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전 지금 옷을 갈아입고 있어요. 아클리나 판필로브나네 집에 먼저가 계세요. 저도 곧 그리 가겠어요.”

나는 그녀의 말대로 게라심 신부 집으로 갔다. 신부도 부인도 나를 맞으러 달려나왔다. 사베리치가 미리 알렸던 것이다.

오오! 표트르 안드레비치. 하나님께서 당신을 돌봐주셨군요. 그 후 어떻게 지내셨어요? 여기선 날마다 당신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가엾게도 당신이 없는 사이에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답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과 푸가초프는 어떤 사인가요? 어째서 그가 당신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잘 됐어요.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 악당들을 고맙게 생각해요.”

여보, 이젠 그만 해두오.”

게라심 신부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함부로 지껄여대는 게 아니야. 말이 많으면 구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아. , 표트르 안드레비치,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정말 오래간만이군요.”

부인은 집에 있는 음식으로 나를 대접했다. 그러면서도 한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녀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자기 집에서 빼앗아 간 것은 시바블린의 엉큼한 수작이며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울면서 그들과 헤어지기 싫어하던 모습이며 그 후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파라시카를 통해 자기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는 얘기며, 그리고 자기가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나한테 편지를 쓰라고 권했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도 그동안 지내 온 얘기를 간단히 했다. 그들이 거짓말을 꾸며댄 것을 푸가초프가 알게 되었다는 말을 듣자 신부와 부인은 성호를 그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거예요. 하나님, 어두운 구름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하시옵소서. 그건 그렇고, 그 알렉세이 이바니치는 정말 못된 녀석이에요.” 하고 아클리나 판필로브나가 말했다.

바로 이때 문이 열리고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핼쑥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누추한 농부의 옷을 벗어 버리고 전처럼 깨끗하고 예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한참 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우리는 양쪽이 다 가슴이 벅차올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인 부부는 자기들이 끼어들 때가 아님을 눈치채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우리는 단둘이 남게 되었다. 일체의 잡념은 사라졌다. 우리는 서로 얘기를 주고받고 했으나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스럽던 지나간 날을 회상했다. 그녀와 나는 함께 울었다. 이윽고 나는 나의 계획을 그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푸가초프의 세력 하에서 시바블린이 지배하고 있는 이 요새에 그녀가 이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적의 포위 하에서 갖은 곤궁을 다 겪고 있는 올렌부르크로 갈 수도 없는 문제였다. 또한 그녀에게 가까운 친척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부모가 계시는 고향으로 가자고 제의했다. 그녀는 내 아버지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꺼림칙하게 여겨 처음에는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타일러 그녀를 안심시켰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공훈 있는 군인의 딸을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것을 아버지는 기쁘게 여길 것이며, 또 그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하리라고 나는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여운 마리아 이바노브나! 나는 당신을 아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명이 우리를 떨어질 수 없게 결합시켰습니다! 이젠 어느 무엇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는 없어요.”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어색한 수줍음이라든가 일부러 사양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솔직하게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도 자기의 운명이 나의 운명과 결부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 양친의 승낙을 받을 때까지는 나의 아내가 될 수 없다고 거듭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반박하려고 들지 않았다. 우리들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키스를 주고받았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모든 일에 대해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한 시간 가량 지난 후 하사가 푸가초프의 서투른 글씨로 서명한 통행증을 가지고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푸가초프에게 갔더니 그는 이미 길 떠날 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는 폭군이며 악당인 무서운 사내와 이별하며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그것을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째서 진실을 그대로 말할 수 없단 말인가? 그 순간 내 마음 속에는 그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연민이 솟구쳐 일어났다. 그가 이끌고 있는 폭도들 사이에서 그를 떼내어 때를 놓치기 전에 그의 목숨을 건져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바블린과 주위에 몰려든 군중 때문에 나는 끝내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나의 뜨거운 염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들은 다정한 친구들처럼 헤어졌다. 푸가초프는 군중 속에서 아클리나 판필로브나를 발견하자 손가락을 들어 위협을 주는 시늉을 하며 의미심장하게 눈을 깜박거려 보이고 나서 썰매에 올라타더니 베르다(Берд [Berd])로 출발하자고 명령했다. 그리고 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는 다시 한 번 포장 속에서 몸을 내밀고 내게 소리쳤다.

그럼 잘 가! 언제든지 다시 한 번 만날 날이 있을 거야.”

사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어떤 환경이었던가푸가초프는 떠났다. 나는 오랫동안 그의 썰매가 달려가는 흰 설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였던 사람들은 흩어져 갔다. 시바블린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신부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들은 떠날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었고 나도 그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들의 짐은 전부 사령관이 사용하던 낡은 마차에 실려 있었다. 마부는 재빨리 말잔등에 멍에를 씌웠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교회당 뒤에 있는 양친의 무덤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갔다. 나도 함께 가려 했으나 그녀는 혼자 가기를 원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나와 파라시카, 이렇게 세 사람이 포장 속 좌석에 타고 사베리치는 마부가 앉는 앞자리에 올라탔다.

잘 가요, 착한 마리아 이바노브나! 잘 가요, 우리들이 좋아하는 표트르 안드레베치, 부디 몸 조심하고 그리고 두 분이 행복하게 지내세요.”

선량한 신부 부인의 키스를 받고 우리들은 출발했다. 나는 사령관 집 들창가에 시바블린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에는 원한의 그림자가 덮여 있었다. 나는 이미 패배해 버린 적에게 자랑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드리어 우리는 요새의 성문을 나와 영원히 베로고르스크를 멀리 했다.

 

13장 체포

분노하지 말라, 내 직책의 임무에 따라 그대를 체포하겠다.

반항하지 않겠다, 나 바라노니 지난 사건을 해명할 시간을 주기 바란다.

-크냐지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나를 그토록 안타깝게 만들었던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쉽게 만날 수 있게 된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으며 방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달콤한 꿈인 것만 같았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기도 하고, 혹은 길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아직도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잠자코 있었다. 왜냐 하면 너무나 지쳐 있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새 2시간가량이 지나서 우리는 푸가초프의 수중에 있는 다음 요새에 도착했다. 거기서 말을 갈아 채웠다. 말을 교대하는 속도가 빠른 것이라든지 푸가초프로부터 사령관으로 임명된 텁석부리 카자흐[bearded Cossack бородатого казака(borodatogo kazaka)]가 분주하게 도와주고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우리를 태우고 온 마부가 허풍을 떤 덕택에, 그들이 나를 자칭 황제의 총애를 받는 측근자로 대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길을 재촉했다. 황혼이 깃들기 시작하면서 조그마한 도읍에 가까워졌을 때 텁석부리 카자흐는 그곳에도 자칭 황제와 합류하기 위해 이동 중인 강력한 부대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보초로부터 정지 명령을 받았다.

누구냐?”

그러자 마부는 커다란 소리로 대답했다.

황제 폐하의 친구 되시는 분과 그 부인이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패의 기병대 병사들이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험악한 얼굴을 하고 우리를 에워쌌다.

오냐, 잘 만났다. 악마의 친구 놈아! 너희들에게 좋은 맛을 보여주마.”

콧수염을 기른 상사가 말했다. 나는 포장 속에서 나와 그들의 대장한테 안내하라고 명령했다. 내가 장교라는 것을 알자 병사들은 욕지거리를 그만두었다. 상사가 나를 소령에게 안내했다. 사베리치는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친구라니. 그게 어디 될 뻔한 소립니까. 뜨거운 자리를 피하다 보니 불 속으로 들어간 격이 되었군요. 아아, 하나님! 저희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차는 우리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왔다. 5분 후에 우리들은 불을 밝게 켜 놓은 자그마한 집에 도착했다. 상사는 나를 보초병에게 인계하고 보고를 하러 갔다. 그는 곧 돌아와서 말하기를, 소령님께서 나를 만날 시간이 없으니 영창에 집어넣고 부인만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건 무슨 뜻인가? 소령님은 머리가 돌아 버린 게 아냐?”

나는 버럭 고함을 쳤다.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소위님. 저는 다만 소위님을 영창에 넣고, 부인을 소령님한테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나는 현관 층계를 달려 올라갔다. 보초병들이 나를 제지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장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는 대여섯 명 가량의 기병 장교들이 노름을 하고 있었는데 소령이 물주였다. 그는 이반 이바노비치 주린(Ивана Ивановича Зурина [Ivan Ivanovitch Zourine])이었다. 언젠가 신비르스크의 여관에서 내 돈을 딴 바로 그 친구라는 것을 첫눈에 알아보았을 때 나의 놀라움은 어떠했을까!

이게 어찌된 일이야? 이반 이바노비치! 당신이었군요.”

야아, 자네 표트르 안드레비치가 아닌가. 어떻게 된 일이야? 어디서 오는 길인가? 그래 그 동안 잘 있었나. 어때, 자네도 판에 끼어들어 보는 게.”

고맙소. 그러나 우선 숙소를 하나 구해주십시오.”

숙소를 구하다니? 여기 나 있는 데 머물지 그래.”

그럼 그 친구도 이리 데려오지.”

친구가 아니라, 나는 부인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부인을 동반했다고? 대체 어디서 낚아 왔나, 이 친구야!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숙소를 마련해 주지. 그러나 유감스러운걸옛날식으로 주연이라도 베풀었으면 좋을 텐데이봐, 거기 사병 그 푸가초프의 마누라라는 건 왜 안 데려오는 거야? 안 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나? 우리나라는 훌륭한 신사가 돼서 절대로 야비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조금도 겁낼 건 없다고 타일러서 슬쩍 목덜미를 붙잡아 가지고 오란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오. 푸가초프의 마누라가 어디 있어요? 그 여자는 죽은 미로노프 대위의 따님입니다. 포로가 돼 있는 걸 내가 구출해서 지금 우리 아버지가 계시는 시골에 맡겨둘 생각으로 데려가는 중입니다.”

뭐라고! 그럼 방금 보고가 들어온 건 자네 얘기인가? 제기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지요. 그러나 우선 가련한 그 처녀를 안심시켜주시오. 당신의 부하들한테 여간 혼나지 않았어요.”

주린은 즉시 적당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자기가 직접 한길로 나와서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본의 아닌 푸대접을 사과하고, 거리에서 제일 좋은 여관으로 그녀를 안내하라고 부하에게 명령했다. 나는 일행과 떨어져 주린의 숙소에서 묵기로 했다. 저녁 식사를 끝마친 후 둘이만 남게 되자 나는 주린에게 그 동안 내가 겪은 사건들을 얘기했다. 그는 귀를 기울이고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얘기가 끝나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잘 알겠네. 고생이 많았겠군. 그런데 자네는 왜 결혼을 하려는 거지? 나는 명예를 존중하는 장교야. 자네에게 괜한 소릴 하려는 생각은 추호는 없지만, 내 말을 믿어, 결혼이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마누라의 시중을 들고 어린애들의 어리광을 받고 있어야 하나? 집어치우지 그래. 그리고 내 말대로 하란 말이야. 대위의 딸과는 헤어지게. 신비르스크로 가는 길은 내가 깨끗이 소탕해 놨으니까 안전하네. 내일이라도 그 처녀를 자네 양친께 혼자 보내고 우리 부대에 남는 것이 좋겠네. 올렌부르크로 돌아갈 필요는 없을 거야. 공연히 폭도들에게 다시 붙잡혀 봐, 이번에도 그들 손에서 쉽사리 빠져나올 수 있다고 어떻게 장담하느냔 말이야.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하면 여자에게 빠졌던 마음도 저절로 가라앉고 만사가 잘 될 것으로 믿네.”

나는 그의 말을 전적으로 찬성할 수는 없었지만, 한편 내 마음 속의 군인으로서의 의무감은 여왕 폐하의 군대에 그대로 남아서 종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주린이 충고에 따라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고향으로 보내고 나 자신은 그의 부대에 남아 있기로 결심했다. 마침 사베리치가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왔다. 나는 그에게 내일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혼자서 모시고 떠나도록 하라고 했다. 그는 순순히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떻게 도련님을 혼자 두고 갈 수 있겠어요? 그럼 앞으로 누가 도련님의 시중을 들겠어요? 그리고 양친께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나는 노인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타일러 그를 설득하기로 했다.

알르히프 사베리치(Arhipp Savelitch),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내 부탁을 잘 들어서 내 은인이 되어줘. 이젠 시중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도 불편할 건 없을 거야. 만일 자네를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딸려 보내지 않으면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어. 그 사람을 돌봐주는 건 내 시중을 드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사정만 허락한다면 나는 곧 그 사람과 결혼할 것이야.”

그러자 사베리치는 사뭇 놀란 표정으로 손뼉을 탁 치며 내 말을 받았다.

결혼이라구요? 도련님이요? 그 말을 들으면 아버님께선 뭐라고 하실까요. 그리고 어머님께선 기뻐하실까요?”

허락해주실 거야.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어떤 처녀라는 것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허락해주실 거야. 나는 결혼 문제에 대해서 자네의 도움을 바라고 있네. 자네가 우리들을 위해 좋도록 말씀드리면 아버지나 어머님은 자네 말을 믿을 거야. 그렇지 않나?”

노인은 내 말에 감동되었다.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장가를 드시는 건 아직 빠르지만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흠잡을 데 없는 아가씨니까 이 기회를 놓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요. 그러면 도련님 생각대로 하십시오. 저는 천사와 같은 아가씨를 모시고 가서 힘자라는 데까지 부모님께 잘 말씀드리지요. 이렇게 훌륭한 색시라면 친정에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할지라도 탓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사베리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주린과 한 방에 잠자리에 들어갔다. 나는 몹시 들떠 있었기 때문에 되는대로 지껄여댔다. 주린도 처음에는 달갑게 상대해주었으나 점점 대꾸가 적어지며 동문서답격인 말을 하더니 마침내 대답을 그만두고 코를 드르렁 골기 시작했다. 나도 곧 입을 다물고 그의 뒤를 따라 꿈속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찾아가서 나의 계획을 얘기했다. 그녀는 나의 의견이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군말 없이 찬성했다. 주린의 부대는 그 날 중으로 출동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시간을 지체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사베리치에게 부탁하고 양친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곧 떠나보내기로 했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다시 만나게 될는지 어떨는지, 그런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언제까지나 당신을 잊지 않겠어요. 제 목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제 마음 속에 있는 건 당신뿐일 거예요.”

그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서 가슴속에서 들끓는 감격을 나타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녀는 떠나 가버렸다. 나는 슬픔에 잠겨 말없이 주린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내 기분을 전환시켜주려고 했고, 나도 역시 시름에 젖어 있고 싶지 않았으므로 온종일 난장판이 되도록 놀았다. 저녁녘에 우리는 출동했다.

2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군사 행동을 방해하고 있던 겨울이 지나가자, 우리 장군들을 합동작전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푸가초프는 여전히 올렌부르크를 포위하고 있었지만, 한편 정부군 부대들은 그의 주위에서 상호 연결을 유지하며 사면팔방에서 반란군의 거점을 육박하고 있었다. 폭동에 가담했던 마을들은 우리 군대를 보기가 무섭게 항복했고 폭도의 무리들은 도처에서 패주를 계속해, 모든 전세는 신속하고도 순조로운 결말을 예고하고 있었다.

얼마 후 고르츠 공작(Prince Galitzin)이 타치시체프(Tatishscheff) 요새 근처에서 푸가초프를 격파하고 폭도들을 분산시켜 올렌부르크를 해방시킴으로써 반란군에게 최후의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주린은 그때 폭동에 가담했던 바슈키르(Bashkir) 족들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폭도들은 우리가 나타나기도 전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봄이 되자 우리는 어느 타타르 마을에 갇히고 말았다. 홍수가 나서 통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비적이나 야만인들을 상대로 하는 따분하고 시시한 전쟁도 이제 곧 끝날 것이라는 생각으로 권태를 잊으려 했다. 그러나 푸가초프는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시베리아 공장 지대에 나타나서 새로운 폭도를 규합해가지고 또다시 잔악한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시베리아의 여러 요새가 함락된 것을 알게 되었다. 푸가초프가 승전했다는 소문이 다시 떠돌게 되었다. 얼마 안 가서 그가 카잔(Kazan)을 점령하고 모스크바로 진격했다는 소식이, 폭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태평하게 잠자고 있던 사령관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주린은 볼가(Volga) 강을 건너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들의 진격과 전투의 종결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다만 전쟁으로 인해 민중의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만은 간단히 기술해둔다. 우리는 폭도들에게 파괴되고 약탈당한 마을을 지나며 주민들이 숨겨 두었던 식량을 부득이 징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는 곳마다 행정은 무질서한 상태에 있었고, 따라서 지주들은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비적 떼들은 도처에서 못된 짓을 하고 돌아다녔으며 정부군의 지휘관들은 제멋대로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하고 또 용서해주기도 했다. 전쟁의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광대한 지방의 형편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이처럼 어리석고 무자비한 러시아의 폭동을, 신이여, 다시는 우리들에게 보여주지 마소서.

푸가초프는 이반 이바노비치 주린의 추격을 받으며 도주하고 있었다. 얼마 후 우리는 그가 완전히 패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주린은 자칭 황제가 체포되었다는 통지와 함께 군사 행동 정지 명령을 받았다.

전쟁은 끝났다. 이제는 나도 부모에게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양친을 포옹하게 되고, 그 후 소식이 묘연한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환희의 절정에 올려놓았다. 나는 어린애처럼 깡충깡충 뛰었다. 주린은 나를 보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안 돼지, 그러다간 따끔한 맛을 보고야 말 걸. 결혼해 보라니까, 절대로 신통한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상한 감정이 나의 기쁨에 검은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그처럼 무고한 희생자들의 엄청난 피를 뒤집어 쓴 악한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극형에 대한 생각이 내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것이었다.

에멜리얀! (Емеля, Емеля! [Emelya, Emelya!]) 어째서 너는 총검 앞에 가슴을 드러내지 못했느냐! 어째서 포탄 앞에 몸을 내던지지 못했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보다 더 좋은 길을 너는 발견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탓할 것인가. 나는 그가 자기 생애에서 가장 살기가 등등하던 그 순간에 내 목숨을 살려주었고, 비열한 시바블린의 손에서 내 약혼녀를 구출해 준 사실을 떼어 버리고 그를 생각할 수는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주린은 내게 휴가를 주었다. 며칠만 지나면 나는 집안 식구들과 다시 한자리에 어울리게 될 것이며, 나의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그러나 그때,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출발이 허가된 날, 내가 막 길을 떠나려는 순간에 주린이 종이쪽지를 쥐고 매우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내 방에 들어왔다. 나는 그 어떤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뜨끔했다. 왜 그랬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내 당번병을 내보내고 나서 볼 일이 있어서 왔다는 말을 했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다.

약간 복잡한 문제가 생겼어.”

그는 종이쪽지를 내주며 대답했다. 나는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를 발견하는 대로 체포하여, 푸가초프의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카잔에 설립된 사문위원회로 즉시 호송하라는 각 부대장 앞으로 보낸 비밀 명령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종이쪽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미안하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내 의무니까. 아마 자네가 푸가초프와 다정하게 동행했다는 소문이 어떻게 돼서 정부에 알려진 모양이야. 그러나 자네가 위원회에서 진상을 밝히면 무사히 해결되리라 생각되네. 머 크게 상심할 것까지는 없어. 그럼 준비하도록 하지.”

나는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사문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샤와는 즐거운 상봉이 어쩌면 수개월 늦어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렸다. 마차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주린은 나와 우정어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마차에 올랐다. 장검을 빼어든 2명의 기병에게 호위 되어 카잔을 향해 떠났다.

 

 

14장 사문(査問 JUDGMENT)

세상에 떠도는 풍문은 천 리를 달리는 바다의 물결

-속담-

나는 올렌부르크에서 무단이탈한 것밖에는 죄가 될 만한 것이 없다고 믿었다. 개별적인 출격을 금지한다는 법 규정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 장려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간단히 해명할 수 있었다. 혹시 지나치게 행동을 했다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명령 위반이라는 추궁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푸가초프와의 우정 관계에 대해서는 수많은 목격자들의 증언이 있을지도 모르며, 그렇게 되면 혐의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카잔으로 가는 도중 나는 내내 내가 받게 될 심문 내용과 거기에 대한 답변을 검토한 결과 법정에서는 어쨌든 사실 그대로를 진술하기로 했다. 그것이 가장 솔직하고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화(戰禍)로 인해 허허벌판이 된 카잔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건물 대신에 숯이 되어 버린 나무 조각이 쌓여 있고, 불에 그을린 벽이 지붕도 들창도 없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이것이 푸가초프가 남겨 놓고 간 발자취였던 것이다. 나는 불타버린 도시 한복판에서 그나마 무사히 남아 있는 요새로 연행되었다. 기병들은 나를 일직 장교에게 인계했다. 대장장이를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나의 발에 굵다란 족쇄가 채워져 감옥으로 끌려가서, 조그만 철창과 거무죽죽한 벽만으로 된 좁고 침침한 감방에 혼자 갇혀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시작은 결코 좋은 일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용기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모든 고난자들을 생각함으로써 거기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공허하면서도 아픈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의 감미로움을 처음으로 맛보면서 앞으로의 운명에 대해 두려워함이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

이튿날 간수는 위원회에 출두하라는 통보를 가지고 와서 나를 깨웠다. 2사람의 병사가 안뜰 건너편에 있는 사령관 숙소로 나를 연행하여, 자기들은 문 앞에 남고 나만을 들여보냈다. 나는 꽤 널찍한 홀에 들어섰다. 서류가 가득 쌓여 있는 책상에는 2사람이 앉아 있었다. 엄격하고도 냉정하게 보이는 나이 지긋한 장군과, 인상이 좋은 용모에 민첩하고 시원시원한 태도를 가진 27, 8세의 젊은 근위대였다. 창문 가까이 놓인 다른 책상에는 귀에 펜대를 꽂은 서기 한 삶이 내 진술을 기록하려고 서류를 바싹 앞에 당겨놓고 앉아 있었다. 심문이 시작되었다. 성명과 신분을 묻더니 장군은, 혹시 내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그리뇨프의 아들이 아니냐고 물었다. 내 대답에 그는 냉엄한 어조로 내뱉듯 말했다.

그렇게 존경할 만한 사람에게 이따위 아들이 있었다니, 실로 애석한 일이로군.”

나는, 내가 비록 어떤 혐의를 받고 있다 할지라도 진상을 솔직히 해명함으로써 그 혐의는 없어질 줄 믿는다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허어, 대단한 친구로군 그래. 그러나 그따위 소리에 우리가 넘어갈 줄 알아?”

그는 펜대를 책상 위에 던지듯 놓고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젊은 쪽에서, 언제 어떠한 동기로 푸가초프의 부하가 되었으며 거기서 임무를 받아 수행했는지 말하라고 할 때 나는 분개한 어조로, 장교이며 귀족인 내가 푸가초프의 부하가 될 수도 없는 일이며, 그로부터 어떠한 임무도 받은 적이 없다고 잘라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장교이며 귀족인 자가, 자기 동료들이 모두 학살될 때 혼자서만 자칭 황제로부터 특사를 받았는가? 또한 어찌하여 장교이며 귀족인 자가 폭도들이 베푼 주연에 참석했으며, 그로부터 모피 외투라든가 반 루블의 돈을 선사받았는가, 이처럼 괴상한 우정이 과연 변절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추악하고 범죄적인 비겁한 행동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연유에서 생긴 것인가?”

나는 근위장교의 질문에 깊은 모욕을 느끼고 흥분한 어조로 그 연유를 해명하기 시작했다. 푸가초프와의 관계가 눈보라치는 설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베로고르스크 요새 점령 시에는 그가 나를 알아보고 용서해주었다는 것을 얘기했다. 또 하나는 자칭 황제로부터 모피외투와 말을 받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베로고르스크 요새에서는 폭도들에 대항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사수했다고 말했다. 끝으로 나는 올렌부르크의 비참한 포위전에서의 내 충성을 증언할 수 있는 인물로서 직속상관이었던 장군의 이름을 들었다. 그러나 냉엄한 장군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개봉되어 있는 편지를 집어 들고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군기를 위반하고 군인 선서의 의무를 망각함으로써 금번 반란에 가담하여 그 괴수와 친밀한 관계를 맺은 죄목의 혐의자인 소위 그리뇨프에 관한 각하의 조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신함. 상기 소위 그리뇨프는 지난 177310월 초순경부터 금년 224일까지 올렌부르크에서 복무했으나, 224일 당 시()를 이탈함으로써 그리뇨프는 푸가초프의 복거지로 가서, 얼마 뒤 괴수와 더불어 전에 근무했던 베로고르스크 요새로 향했다 하며 따라서 그의 행동에 관하여 본관은 오직

여기서 읽던 것을 멈추고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 이래도 변명할 말이 있는가?”

나는 이미 시작한 진상의 해명을 계속해 솔직한 태도로 마리아 이바노브나와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문득 그 어떤 억제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만일 여기에서 그녀의 이름을 끄집어낸다면 위원회는 필경 그녀를 증인으로 불러들이리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악당들의 추악한 고발 속에 그녀의 이름이 오를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을 그들과 함께 법정에 내세워야 한다는 무서운 생각이 내게 강한 충격을 주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심문관들은 그 때까지 나의 답변을 어느 정도 호의를 가지고 듣고 있는 것 같았으나 나의 주저하는 태도를 보자 또다시 불리한 선입감을 갖게 되었다. 근위 장교는 나와 고발인과의 대심을 요구했다. 장군은 어제의 역적을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나는 방문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나를 고발한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족쇄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열리며 들어온 사람은 시바블린이었다. 나는 그의 모습이 아주 변해 버린 데에 놀랐다. 그는 형편없이 여위었고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까맣게 윤이 나던 머리털은 아주 백발이 되어 버렸고 자랄 대로 자란 턱수염을 흉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그는 맥 빠진, 그러나 거리낌 없는 어조로 나에 대한 고발을 되풀이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나는 간첩 임무를 띠고 푸가초프로부터 올렌부르크에 파견된 자로서, 매일 같이 성 밖으로 출격한 것은 성내의 모든 상황을 기록한 밀서를 전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며, 나중에는 공공연하게 자칭 황제 편으로 넘어와서 괴수와 함께 각처의 요새를 돌아다니며 갖은 술책을 써서 동네의 변절자들을 없애 버리려고 모함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지위를 빼앗고 자칭 황제가 나누어 준 상을 독차지하려는 야심에서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끝까지 그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리고 다만 한 가지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이름이 역적의 입에 오르지 않은 것을 만족하게 생각했다. 아마도 그의 자존심이 자기를 경멸로써 끝까지 거부한 그녀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마음속에도 나의 입을 다물게 한 것과 같은 그런 감정의 불꽃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베로고로스크 요새 사령관의 딸 이름은 위원회의 사건 심의에서 누구의 입에도 오르지 않았다. 나는 더욱 결심을 굳게 하고 심문관들이 무엇으로 시바블린의 진술을 반박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에도, 아까 내가 해명한 사실 이외의 다른 변명은 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장군은 나를 물러나게 하라고 명령했다. 시바블린과 나는 함께 밖으로 나왔다. 나는 예사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비수를 품은 웃음을 입가에 띠더니 발에 달린 족쇄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나를 앞질러 갔다. 나는 다시 감방으로 끌려가서 그 후부터는 심문을 위한 호출도 받지 않았다.

아직도 독자들에게 전해야 할 내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것은 내가 직접 목격한 사실은 아니지만 하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마치 내가 현장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만큼 극히 상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내 기억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나의 양친은 노인들만이 가지는 진정한 친절로써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맞아들였다. 그들은 이 불행한 고아를 자기 집에 있게 하여 돌보아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얼마 안 가서 그들은 그녀가 어떤 처녀라는 것을 알고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우리들의 관계가 부질없는 풋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어머니는 어서 빨리 페트루샤가 귀여운 대위의 딸과 결혼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집안 식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래서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양친에게 나와 푸가초프와의 기묘한 교제에 대해 얘기했는데, 그녀의 말이 조금 미심쩍은 데가 없어서 두 분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몇 번이나 배를 움켜쥐고 웃게 했다. 아버지는 왕실의 전복과 귀족의 전멸을 목적으로 하는 추악한 폭동에 내가 가담할 수 있으리라고는 처음부터 문제시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사베리치를 엄격하게 심문해 보았다. 그는 내가 에밀리얀 푸가초프에게 갔었다는 것과, 그가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으나, 변절했다는 말은 도대체 들은 일도 없다고 맹세했다. 그 말을 들은 부모님은 마음을 놓고 좋은 소식이 오기만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도 몹시 불안한 상태에 있었지만 원래가 매우 겸손하고 조심성 있는 성격이었으므로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있었다.

몇 주일이 지나갔다. 하루는 페체르부르그(Petersburgh)에 사는 친척인 공작으로부터 아버지에게 편지가 왔다. 공작은 나에 대한 소식을 써 보낸 것이었다. 편지에는 틀에 박힌 안부 말에 이어, 내가 폭도들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는 불행하게도 너무나 확정적인 것이어서 세상의 본보기가 되도록 마땅히 극형에 처할 것이었으나, 여왕 폐하께서 아버지의 공적과 높은 연세를 참작하시어 죄를 지은 자식의 감형을 결정, 수치스러운 사형을 면하고 다만 시베리아 벽지로 유형을 보낸다는 특사를 내리셨다고 적혀 있었다.

이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아버지는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그는 평소에 가졌던 의연한 태도를 잃어버렸고, 그 마음의 아픔은 보통 입 밖에 내는 법이 없었지만 폐부를 찌르는 비통한 탄식이 둑을 깨고 쏟아져 나왔다. 그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울분을 터뜨렸다.

이럴 수가 있나! 내 자식이 푸가초프의 음모에 가담하다니, 진작 죽기나 했더라면 이런 꼴을 보지 않았을 것인데, 여왕 폐하에서 그놈한테 사형을 면해 주셨다고? 그것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다. 나는 내 아들의 사형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내 조상 가운데는 양심에 따라 신성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끝까지 고수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분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선친께서는 볼루인스키(Volinsky)라든가 후르시초프(Aroushtcheff)와 같은 정의의 투사들과 정의를 위해 운명을 함께 하셨다. 그런데 귀족으로서 자기의 선서를 저버리고 살인강도나 도망친 노예 등속과 공모를 하다니. 가문에 이런 수치와 불명예가 어디 있느냔 말이다!”

아버지가 너무 원통해 하는 것을 보고 놀란 어머니는 아버지 앞에서는 눈물조차 보이지 못하고 세상에 떠도는 풍문을 믿을 수 없다는 것, 사람들의 말이란 변하기 쉽다는 것을 누누이 말하며 아버지의 원기를 회복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드릴 수는 없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내가 자기의 이름을 입 밖에 내려고 생각했다면 얼마든지 결백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사건 심의의 진상을 짐작하고 내 불행의 원인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눈물을 보이지 않고 자기의 고민을 숨기고 있었지만, 한편 어떻게 하면 나를 구해낼 수 있을까 하는 방법만을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궁중연감을 뒤지고 있었으나, 생각은 먼 곳에 가 있었기 때문에 이 책도 그에게 여느 때와 같은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옛날 행진곡을 휘파람으로 불고 있었다. 어머니는 묵묵히 털실로 스웨터를 뜨고 있었는데, 이따금 눈물이 일감에 떨어지곤 했다. 그때 역시 바느질을 하고 있던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갑자기, 자기는 암만해도 페체르부르그에 가 봐야겠는데 길을 떠날 수 있게 주선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갑자기 페체르부르그엔 왜 가겠다는 거냐? 마리아 이바노브나, 설마 너까지 우리를 저버리겠다는 건 아니겠니.”

하고 어머니는 몹시 섭섭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자기의 장래 운명이 이번 여행에 달려 있다는 것과 자기가 가려는 목적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의 딸로서 유력한 인사들의 보호와 주력을 구해보려는 데 있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머리를 숙였다. 아들의 죄를 상기시키는 모든 일은 그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마음을 찌르는 꾸지람으로 들리는 것이었다.

그럼 갔다 오려무나!”

하고 그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네 행복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런 역적의 누명을 쓰지 않은 훌륭한 신랑감이 너에게 나타나주기만 빌 뿐이다.”

아버지는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어머니와 둘이 남게 되자 자기 계획의 일부를 털어놓았다.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포옹하고 계획한 일이 뜻대로 이루어져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하나님께 빌었다. 집안 식구들은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여행 준비를 해주었고, 그리하여 며칠 후 그녀는 충실한 파라시카와 충직한 사베리치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부득이 내 곁에서 떨어져 있던 사베리치에게는 하다못해 내 약혼녀의 시중을 들 수 있다는 것으로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무사히 소피아(Sofia)에 도착했는데 그때 여왕께서 차르스코예 셀로(Tzarskoe-Selo)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머물기로 했다. 그녀는 칸막이 저쪽의 구석방으로 안내되었다. 역장 부인은 그녀와 곧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자기는 궁중의 페치카 불을 때는 사람의 조카딸이라고 하며 남이 모르는 궁중생활의 세세한 내막을 털어놓았다. 여왕께서 몇 시에 일어나시며, 몇 시에 커피를 드시며, 몇 시에 산책을 하시며, 또 어떠한 귀족들이 여왕의 측근에 있으며, 어제 수라 시간에는 무슨 얘기를 하셨으며, 저녁에는 누구를 접견했다는 것까지 늘어놓았다. 말하자면 역장 부인 안나 블라시예브나(Anna Vlassievna)의 이야기는 역사적 기력의 몇 페이지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후세를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그녀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 다음 그들은 공원을 찾아갔다. 안나 블라시예브나는 공원이 오솔길이라든가, 여기저기 걸려 있는 다리를 지날 때마다 그 내력을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산책에 지친 2사람은 서로 흡족한 기분으로 여관에 들어왔다.

이튿날 아침,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일찍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혼자서 살짝 공원으로 빠져나왔다.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태양은 싸늘한 가을의 입김을 받고 이미 노랗게 단풍이 든 보리수 꼭대기에 비치고 있었다. 넓고 넓은 호수는 잔잔히 빛나고 있었다. 잠을 깬 백조들이 의젓한 모습으로 호숫가에 그늘을 이루고 있는 관목 덤불 밑으로부터 미끄러져 나왔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바로 얼마 전에는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루미안체프 백작(Count Piotr Alexandrovitch Roumiantzoff)의 전승 기념비가 세워진 아름다운 잔디밭 근처 거닐고 있었다. 별안간 영국 종의 흰 개 1마리가 그녀를 보고 짖어대며 달려왔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겁을 먹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바로 그때 상냥한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그 개는 물지 않으니까.”

마리아 이바노브나느 어떤 귀부인이 기념비 맞은 편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그 벤치 한쪽 끝으로 가서 앉았다. 부인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고 마리아 이바노브나도 몇 번인가 곁눈질을 하며 부인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훑어보았다. 부인은 새하얀 아침 복장에 실내모를 쓰고 두터운 덧저고리를 껴입고 있었다. 나이는 마흔 안팎으로 보였는데 알맞게 살찐 불그레한 얼굴에는 위엄과 평온이 깃들어 있었고 푸른 눈과 가벼운 미소는 말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게 했다.

아가씨는 이 지방사람 같진 않은데?”

, 그렇습니다. 전 어제 시골에서 올라왔어요.”

어른과 함께 왔나요?”

아뇨, 전 고아라 혼자 왔습니다.”

혼자서? 아직도 나이 어린 처녀가 어떻게.”

저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 계십니다.”

그럼 이곳에 무슨 볼 일이라도 있어서 왔나요?”

, 다름 아니라 여왕 폐하께 진정서를 올리려고 왔어요.”

고아라고 했으니, 그럼 무슨 억울한 일이라도 호소하려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폐하께서 자비를 베풀어 줍시사 하고 왔습니다.”

실례지만 당신은 어떤 분이시지?”

저는 미로노프라는 대위의 딸입니다.”

미르노프 대위라니! 그럼 베로고르스크 요새 사령관으로 있던 바로 그분 말인가요?”

, 그렇습니다.”

남의 일에 끼어들어 실례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궁중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니까 당신이 무엇을 진정하려는 건지, 혹시 도와드릴 수 있을는지도 몰라요.”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일어나서 공손히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처음 만나는 이 귀부인에게 어쩐지 그녀는 마음이 끌리고 신뢰의 정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호주머니에서 차곡차곡 접은 종이를 꺼내어 그것을 초면의 귀부인에게 주었다. 부인은 말없이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의 깊게 동정어린 표정으로 읽어 내려가던 부인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부인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상냥하고 다정스럽던 얼굴이 아주 엄한 표정으로 굳어 버린 것을 보고 놀랐다.

당신은 그리뇨프의 일을 탄원하려는 것인가요?”

하고 부인은 쌀쌀하게 말하면서 다시,

여왕께서는 그 사람만은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 사람이 역적 편에 붙은 것은 무식하다거나 경솔하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원래가 양심이 없는 악질적인 인간이기 때문이에요.”

아니에요. 그건 잘못 아신 거예요. 정말 잘못 아셨어요. 제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막을 말씀드리지요. 그분이 지금 그렇게 된 것은 모두 저 한 사람 때문입니다. 만일 그분이 재판을 받을 때 자기의 결백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직 저를 사건에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흥분해서 언성을 높여 말했다.

무엇이 아니란 말이지요?”

부인은 거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여기서 그녀는 이미 독자들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열심히 설명했다. 부인은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물었다.

지금 어느 곳에 유숙하고 있지요?”

안나 블라시예브나 집에서 묵고 있다는 대답을 듣더니 웃음을 띠며 말했다.

, 알겠어요. 그럼 안녕히. 여기서 우리가 만난 얘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말아요. 당신의 진정서에 대한 회답은 아마 곧 받게 될 겁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부인은 나뭇가지에 덮인 호젓한 공원길로 걸어 들어갔다. 마리아 이바노브는 기쁜 기대를 가슴 가득히 안고 안나 블라시예브나의 집으로 돌아갔다. 주인마누라는 그녀에게 몇 마디 나무라는 말을 했다. 쌀쌀한 가을날의 아침 산책은 처녀의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모바르를 가져왔다. 차를 한 잔 마시는 동안에도 그녀는 무진장한 궁중비화를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마침 그 때 왕실 마차가 집 앞에서 멎더니 시종이 들어와 여왕 폐하께서 미로노프 양을 부르신다는 분부를 전했다. 안나 블라시예브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수선을 떨기 시작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여왕 폐하께서 당신을 부르신대요. 어떻게 당신 얘기를 아셨을까요? 그런데 어떻게 여왕님께 나선담! 양은 궁중의 걸음걸이가 어떤 지도 모르잖아요? 내가 함께 가면 어떨까? 그래도 내가 옆에 있으면 이것저것 눈치 있게 귀뜀을 해줄 수도 있을 거야. 그리고 그렇게 여행 복장으로 들어갈 수야 있겠어! 산파네 집에 가서 노랑 빛 로브론(роброном [roboron])이라도 가져오게 할까?”

시종은, 폐하께서는 마리아 이바노브나 혼자서, 입고 있는 복장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고 분부를 전했다. 그렇다면 주저할 필요는 없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마차에 올라타고 안나 블라시예브나의 충고와 축복을 받으며 궁중으로 향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우리 2사람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가슴이 두근거려 금방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몇 분 후에 마차는 궁전 앞에 멈추어 섰다. 그녀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층계를 올라갔다. 커다란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그녀는 시종의 안내로 비어 있는 웅장한 방을 몇 개나 지나 들어갔다. 드디어 묵직하게 닫혀진 문 앞에 다다르자 시종은 안에 들어가서 아뢰고 나오겠다고 말하며,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들어가 버렸다. 이제 곧 여왕 폐하를 만나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서 있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시종에게 안내되어 여왕의 거실로 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여왕은 경대 앞에 앉아 계셨다. 몇 사람의 시종들이 멀찍이 여왕을 둘러싸고 있다가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공손히 길을 열어주었다. 여왕은 부드러운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그 얼굴을 보자 아까 자기가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은 바로 그 귀부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왕은 그녀를 가까이 불러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는 약속대로 그대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대의 볼 일은 다 끝났습니다. 나는 그대의 약혼자가 결백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여기 이 편지는 앞으로 시아버님이 되실 분에게 직접 전해주시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받고는 흐느껴 울며 여왕의 발밑에 엎드렸다. 여왕은 그녀를 일으켜 세워 키스를 해준 다음 그녀를 상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대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미로노프 대위의 딸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앞으로의 일은 하나도 염려하지 마시오. 필요한 것은 내가 모두 마련해줄 테니까.”

여왕은 불행한 고아에게 위로의 말을 한 다음, 그녀를 물러가게 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궁전으로 갈 때와 같이 마차로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안나 블라시브예브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무섭게 질문을 퍼부었으나, 그녀는 아무렇게나 몇 마디 대꾸해 주고 말았다. 안나 블라시예브나는 그렇게 기억력이 나쁘냐고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그것도 어수룩한 시골뜨기 처녀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너그럽게 용서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페체르부르그를 구경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날로 다시 시골을 향해 떠났다.

 

표트르 안드레비치 그리뇨프의 수기는 여기서 끝을 맺고 있다. 그의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는 1774년 말에 칙령으로 석방되어 푸가초프를 처형하는 형장에 나갔는데 푸가초프도 군중 속에서 그를 알아보고 1분 후면 숨이 끊어져 피투성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전시될 그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고 한다. 그 후 표트르 안드레비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의 자손은 지금도 신비르스크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XXX로부터 30킬로 가량 떨어진 곳에 10사람의 지주들이 소유하는 마을이 있다. 그곳 지주들의 저택 별채 가운데 한 채에는 에카테리나 2세의 친필로 된 편지를 넣은 유리액자가 벽에 걸려 있다. 그것을 표트르 안드레비치의 아버지에게 보낸 것으로 편지에는 그의 아들이 결백과 미로노프 대위의 딸의 총명과 착한 마음씨에 대한 칭찬의 말이 적혀 있다. 또한 표트르 안드레비치 그리뇨프의 수기는 그의 손자들 중의 한 사람이 우리가 자기 조부의 수기가 씌어진 시대에 관한 저술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제공해 준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일가 친척들의 양해를 얻어 각 장의 첫머리에 적당한 제사를 붙이고 약간의 고유명사를 임의로 변경해서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로 한 것이다.

18361019일 간행자

 

 

13장에서 생략된 부분

우리들은 볼가 강변에 접근해 가고 있었다. 우리 연대는 XX마을로 들어가 거기서 야영하려고 행군을 정지했다. 이장이 내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건너편 마을은 모두 폭동에 가담한 푸가초프의 무리들이 설치고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이 정보는 내 마음을 몹시 혼란케 했다. 우리는 내일 아침에 강을 건너게 되어 있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고향의 마을이 강 건너 30베르스타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뱃사공을 찾았다. 이 고장 백성들은 모두 어부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그마한 어선은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주린(원문에는 그리뇨프로 되어 있으나 편의상 바꾸어 놓았음. 역자 주)에게 가서 내 마음을 밝혔다. 그는 말했다.

경솔한 짓은 그만두는 게 좋아. 혼자서 가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으니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내일 강을 건너면 제일 먼저 자네 집을 방문하세.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경기병을 50명쯤 데리고 말이야.”

나는 끝내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나룻배가 준비되었다. 나는 2사람의 뱃사공과 함께 배에 올라탔다. 그들은 닻줄을 걷어 올리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달빛으로 인해 하늘은 맑게 빛났다. 바람은 잔잔하여 볼가 강은 물결도 없이 묵묵히 흐르고 있었다. 배가 가볍게 흔들리며 어두운 강물을 헤치고 미끄러져 나갔다. 나는 여러 가지 공상에 빠져 들어갔다. 반 시간 가량이 지나갔다. 우리들은 강 복판에 나와 있었는데 갑자기 뱃사공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가?”

나는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이상한 물체가 떠내려 오고 있습니다.”

하고 사공들은 한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오는 어떤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낯선 물체는 차츰 가까워졌다. 나는 사공에게 배를 멈추고 이쪽으로 떠내려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달이 구름에 가리워졌다. 떠내려 오는 물체는 더욱 검게 보였다. 이미 눈앞에까지 왔는데도 나는 여전히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일까?”

사공들이 말했다.

돛이라 보면 돛도 아니고, 돛대라고 보면 돛대도 아닌데.”

순간 달이 구름 속에서 빠져나와 무시무시한 구경거리를 비추었다. 이쪽으로 떠내려 오는 것은 뗏목 위에 단단히 세워 놓은 교수대였던 것이다. 3사람의 시체가 줄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병적인 호기심에 사로잡혀 처형된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명령에 따라 사공들이 갈고리를 뗏목에 걸었기 때문에 배는 떠 있는 교수대에 부딪혔다. 나는 뗏목으로 뛰어올라 2기둥 사이에 섰다. 밝은 달이 이 불행한 인간들의 흉한 얼굴을 비춰주고 있었다. 한 사람은 늙은 추바시 인이었고, 다음은 몸집이 탄탄한 20살가량의 젊은 러시아 농부였다. 3번째 시체에 시선을 옮긴 순간 나는 너무나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바니카였다. 천성이 우둔했기 때문에 푸가초프에게 가담했던 그 불쌍한 바니카였던 것이다. 그들의 머리 위에 박혀 있는 검은 판자에는 흰 글씨로 커다랗게 도적과 폭도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배 위로 옮겨 탔다. 뗏목은 점차 하류로 흘러갔고 교수대는 어둠 속에서 검게 보였다. 이윽고 그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배는 높고 험한 강변에 닿았다.

나는 사공들에게 배 삯을 넉넉히 주었다. 그랬더니 그 중 하나가 나를 나루터 근처에 있는 마을 이장네 집으로 안내해주겠다고 나섰다. 나는 그와 함께 어떤 농부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장은 내가 말을 구한다는 말을 하자 무척 무뚝뚝한 태도를 보였으나, 나의 길잡이가 몇 마디 귀에 대고 소곤거리자 그 인정머리 없는 태도가 돌변하더니 급히 서둘러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차가 준비되어 나는 마차에 올라타며 고향 마을로 가자고 했다. 나는 큰길을 따라 잠든 마을들을 스치며 마차를 몰았다. 도중에 혹시 정지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한 가지만이 염려되었다. 볼가 강 위에서 만난 교수대는 폭도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정부군의 강력한 대항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나는 푸가초프가 내준 통행증과 주린 대령의 명령서를 주머니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와도 만나지 않았고 날이 샐 무렵에는 고향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과 전나무 숲을 멀리 바라보게 되었다. 마부가 채찍을 휘둘러서 15분 후에는 마을에 들어섰다. 지주의 저택은 마을 저쪽 끝에 있었다. 말들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갑자기 한길 가운데서 마부는 말고삐를 당기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 거야?”

나는 초조하게 물었다.

나리님, 검문입니다.”

마부는 설치는 말을 겨우 세우며 대답했다. 정말 그곳에는 통나무로 길을 막아 놓고 나무 작대기를 손에 든 보초가 서 있었다. 보초를 서고 있던 농부는 내게로 다가오더니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며 모자를 벗었다.

뭐야? 왜 이런 곳에 통나무로 길을 막아 놨어? 자네는 누구를 지키고 있는 거야?”

나리님, 실은 저희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그럼 너희 주인어른은 어디 계시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우리 주인 말인가요? 우리 주인 양반은 곳간에 들어가 있습니다.”

농부는 마을 쪽을 향해 손짓했다.

뭐라고! 길을 비켜, 망할 자식아. 뭘 우물쭈물하고 있어.”

보초는 움찔하고 물러섰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그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통나무를 치웠다. 농부는 쩔쩔매며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다시 마차에 올라타고 지주의 저택으로 달리라고 명령했다. 곳간은 저택 안에 있었다. 마차는 곧바로 그들의 코앞에 가서 멎었다. 나는 마차에서 뛰어내리기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문을 열어!”

나는 고함을 쳤다. 아마도 내 호통이 무시무시했던지 그들은 장대를 던지고 도망쳐 버렸다. 나는 자물쇠를 열어보려다가 여의치 않아서 문짝을 부셔 보려고 했으나 튼튼한 참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꼼짝하지 않았다. 그 때 머슴 집에서 젊은 농부가 나오더니 몹시 건방진 태도로 어째서 야단이냐고 꾸짖었다.

마을 서기 안드류시카는 어디 있어? 그놈을 빨리 이리로 불러와.”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때 안에서 불쑥 나서는 놈이 있었다.

내가 바로 안드레이 아파타시에비치야. 안드류시카가 아니란 말이야.”

그는 거만하게 두 손을 허리에 얹으며 말했다.

그래, 왜 찾나?”

대답 대신 나는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곳간 문으로 끌고 가서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서기는 말을 듣지 않으려 했으나, 내 아버지 식의 주먹다짐은 이놈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그는 열쇠를 꺼내 곳간 문을 열었다. 나는 단숨에 달려 들어갔다. 지붕에 뚫린 조그만 구멍에서 흘러들어온 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한쪽 구석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두 분은 모두 손을 묶였고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나는 두 분을 끌어안았으나 한 마디도 말을 못했다. 두 분은 눈이 둥그레져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군대 생활 3년은 나를 부모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모시켜 놓은 것이다.

표트르 안드레비치! 당신이 오셨군요.”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저쪽 구석에 역시 손발이 묶였던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말뚝처럼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아버지는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에는 곧 희색이 넘쳤다. 나는 칼을 뽑아 포승을 끊었다.

아아, 페트루샤로구나!”

아버지는 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죽기 전에 너를 만나다니 이렇게 감사할 데가 어디 있겠니.”

하시며 내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페트루샤, 내 소중한 페트루샤! 어떻게 이렇게 돌아왔니? 몸은 성하냐?”

나는 세 사람을 밖으로 끌어내려 했으나 곳간 문에 가 보니 그것은 밖으로 잠겨 있었다.

안드류시카, 문을 열어.”

, 제기랄. 너도 가만히 앉아 있어. 공연히 날뛰거나 폐하의 관리의 목덜미를 붙잡고 끌고 다니면 어떤 보답을 받는지 이제 맛을 보여 줄테다.”

문 밖에서 서기가 말했다.

문을 열지 않으면 좋지 않을 것이다.” 밖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도둑놈처럼 남몰래 자기 곳간에 드나들 그 따위 주인은 아니야.”

나의 출현에 기뻐한 것도 순식간의 일이고 이제는 나까지 집안 식구들의 비극에 끼어든 것을 보자 모두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과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만나게 되면서부터는 전보다 오히려 침착해졌다. 내게는 장검과 권총 두 자루가 있다. 얼마 동안은 감금을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면 주린이 와서 우리를 구출할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얘기를 부모에게 하고 어머니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재회의 기쁨에 젖어들었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표트르야, 네가 여러 가지 못된 짓을 해서 실은 나도 꽤 화가 났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을 들출 필요는 없다. 이제는 너도 정신을 차리고 착실한 사람이 된 줄 믿는다. 네가 명예로운 장교로서 훌륭히 근무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고맙다. 너는 이 늙은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다. 만일 너에게 구출된다면 내 여생은 갑절이나 즐거울 거야.”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손에 입을 맞춘 후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무척 기뻤는지 완전히 행복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정오경에 우리는 심상치 않은 소음과 고함소리를 들었다.

저건 뭘까? 네가 말한 대령이 벌써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럴 리는 없는데요. 저녁때가 되기 전에는 오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대답했다. 소음은 더욱 커졌다. 경종이 울렸다. 말을 탄 사람들이 뜰 안으로 들어왔다. 그 때 벽 틈으로 사베리치의 흰 머리가 보이더니 가엾은 늙은이의 비통한 소리가 들여왔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마리아 이바노브나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악당 놈들이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표트르 도련님, 누가 그놈들을 끌고 왔는지 아십니까? 시바블린입니다. 그 알렉세이 이바니치예요. 그 망할 놈의 자식이!”

이 저주스러운 이름을 듣자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두 손을 합장한 채 못 박힌 듯 한자리에 서 버렸다. 나는 사베리치에게 말했다.

이것 봐, 누구든지 말을 태워 나루터로 보내서 빨리 기병대 연대를 데려오란 말이야. 대령님께 우리들의 위급하다고 전해.”

그러나 도련님, 누굴 보냅니까. 머슴 놈들은 모두 악당들 편이고, 말은 다 빼앗겨서 한 마리도 없어요. 아아! 벌써 안에 들어왔습니다. 곳간으로 옵니다.”

그러자 곳간 문 밖에서 몇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머니와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한쪽 구석으로 물러가 있으라고 손짓하고는 장검을 빼 들고 문 옆에 붙어 섰다. 자물쇠가 찰칵 소리를 내고 문을 열리더니 서기의 머리통이 나타났다. 그와 때를 같이해 아버지는 문 밖으로 권총을 쏘았다. 우리들을 포위하고 있던 무리들은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달아났다. 나는 부상자를 문턱에서 끌어내고 문을 닫았다.

무서워할 건 없어요.”

하고 나는 어머니와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아직 살아날 방법은 있습니다. 아버지, 이젠 쏘지 마십시오. 마지막 총알을 아낍시다.”

어머니는 잠자코 기도만 올리고 있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천사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자기 운명을 기다리며 그 옆에 서 있었다. 문 밖에서는 공갈과 욕설과 저주의 소리가 들여왔다. 나는 다시 문 옆에 붙어 서서 제일 먼저 덤벼드는 놈의 머리를 내리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갑자기 밖이 잠잠해졌다. 내 이름을 부르는 시바블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다. 왜 그러느냐?”

항복하라, 그리뇨프, 반항해도 소용없다. 늙은이들을 좀 생각해 봐라. 고집 부려 봐야 죽음뿐이다. 그러다간 따끔한 맛을 볼 것이다.”

어서 덤벼라, 이 역적 놈아.”

내가 어리석게 그곳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았느냐. 나는 부하의 목숨도 아낄 줄 아는 인간이다. 곳간에 불이나 질러 놓고 베로고르스크의 돈키혼테인 네놈이 어떻게 하는지 멀찍이 구경이나 하겠다. 마리아 이바노브나, 당신에겐 조금도 안됐다는 생각이 없소. 어두컴컴한 곳에서 기사와 함께 있으니 적적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리뇨프, 마침 점심시간이니까 그 동안 잘 생각해 봐라. 그럼 이따가 오마.”

시바블린은 곳간에 감시병을 남겨 놓고 가버렸다. 우리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누구나 자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고 또 그것을 말할 기력도 없었다. 나는 원한에 불타는 시바블린이 취할 온갖 보복 행위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나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한다면 부모님이 운명조차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운명에 대한 것만큼 나를 전율케 하지는 못했다. 나는 어머니가 마을의 농부들이나 집안의 하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아버지도 엄격하긴 하지만 원래가 공평하고 자기에게 예속되어 있는 마을 사람들의 곤란한 점을 잘 알아주었기 때문에 역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폭동은 단지 부화뇌동에서 온 것이며 결코 분노의 표출은 아니었다. 따라서 아버지나 어머니는 용서를 받고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어떤가? 음탕하고 파렴치한 시바블린은 그녀를 어떻게 할까? 나는 이 무서운 생각에 오래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또다시 그녀가 흉악한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눈 딱 감고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것을 각오했다. 다시 1시간가량이 지났다. 마을에서는 주정꾼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자들은 그것이 부러웠던지 공연히 우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고문을 하겠다느니 죽여 버리겠다느니 하고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시바블린의 공갈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날 것인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뜰 안이 왁자지껄하더니 다시 시바블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결심했느냐? 자진해서 내 앞에 굴복하겠느냐?”

아무도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기다려 보고 나서 시바블린은 짚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몇 분 후에 불길이 일어나며 화광이 어두운 곳간을 밝게 비추었다. 연기가 문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그 옆으로 다가와서 손을 잡으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젠 안 되겠어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저 때문에 당신과 양친을 희생시킬 수는 없어요. 저를 밖으로 내보내 주세요. 시바블린이 제 말은 들어줄 거예요.”

나는 불끈 화를 내며 외쳤다.

뭐라고요?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그런 말을 합니까?”

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욕을 보게 될 때까지 살아 있지는 않겠어요. 그 대신 저는 생명의 은인인 당신과 가련한 이 고아를 친절히 돌봐주신 부모님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안녕히 계세요, 아브도차 바실리예브나. 두 분께서는 저에게 은인 이상의 분이었어요. 저를 축복해 주세요. 그럼 표트르 안드레비치, 당신도 안녕히! 그리고 이것만은 믿어 주세요. 저는저는.”

여기서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나는 미친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가 흐느껴 울며 말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 이제 그런 소리는 그만둬라. 누가 너만을 저 비적 놈들에게 내줄 줄 알았느냐? 자 아무 말 말고 여기 앉아 있거라. 죽으려면 함께 죽어야지. 밖에서 또 뭐라고 지껄이는데 들어봐라.”

끝내 항복하지 않겠느냐? 불이 안 보이느냐? 5분도 안 가서 너희들은 까맣게 타 버릴 것이다.”

사고 시바블린이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악당 놈아, 개수작 마라.”

아버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주름투성이의 아버지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생기가 돌았고 두 눈이 흰 눈썹 밑에서 광채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 이젠 밖으로 나가자, 내 뒤를 따라라!”

아버지는 문을 열었다. 불길이 확 몰려 들어와서 마른 이끼로 틈새를 막은 통나무 벽을 핥으며 타올라갔다. 아버지는 권총을 발사하고 문턱을 넘어갔다. 나는 어머니와 마리아 이바노브나이 손을 잡고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곳간 문 앞에는 시바블린이 쓰러져 있었다. 아버지의 늙은 손으로 사격한 탄환이 명중한 것이었다. 우리들의 불의의 출격에 놀라 도망치던 폭도들은 즉시 기세를 회복하여 우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몇 놈을 칼로 내리쳤으나 놈들이 던진 벽돌이 가슴 한가운데 명중했다. 나는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정신이 들어 보니 피투성이가 된 풀 위에 시바블린이 앉아 있었고, 그 앞에 우리 집안 식구가 끌려와 있었다. 나는 양손이 결박되어 있었다. 농부와 카자흐 인들, 그리고 바슈키르 인들이 떼를 지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시바블린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그는 한 손을 겨드랑 밑 상체에 갖다 대고 있었다. 얼굴에는 고통과 증오가 뒤섞여 나타났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들고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숨이 끊어지는 것같이 똑똑치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저놈을 목 매달아라 처녀만 빼놓고 모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악당들은 우리에게 덤벼들어 마구 고함을 치며 대문 쪽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그들은 갑자기 우리를 팽개쳐 두고 앞을 다투어 도망쳐 버렸다. 때마침 주린이 칼을 빼든 기병 중대를 이끌고 안으로 달려 들어왔던 것이다. 폭도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저리로 도망쳤다. 기병들은 뒤를 쫓아가며 칼로 찌르고 사로잡고 했다. 주린이 말에서 내려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내 손을 굳게 잡았다.

큰일 날 뻔했군! , 자네 약혼녀도 여기 있었나?”

그는 우리들에게 말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귀까지 새빨개졌다. 아버지는 주린에게 가까이 가서 감격어린, 그러나 침착한 태도로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어머니는 그를 구원의 천사라고 부르며 포옹했다.

, 어서 집으로 들어갑시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 그를 집으로 안내했다. 시바블린의 곁을 지나칠 때 주린은 발은 멈추었다.

이건 누굽니까?”

그는 부상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고약한 놈이 바로 폭도의 대장격인 인물이지요. 하나님이 내 늙은 손을 도와주셔서 이 젊은 악당 놈에게 벌을 주고, 또 아들이 흘린 피의 복수까지 겸해서 하게 하신 겁니다.”

아버지는 늙은 군인 특유의 어떤 자랑을 가지고 대답했다.

이놈이 시바블린입니다.”

나는 주린에게 말했다.

시바블린이라구? 그것 참 명도 긴 놈이군. , 기병들, 이놈을 데려가거라! 군의관에게 상처를 치료하라고 해라. 시바블린은 카잔의 비밀 위원회에 보내야겠다. 이놈은 우두머리 축에 낄 놈이고 따라서 그 진술은 매우 중요할 테니까.”

시바블린은 흐리멍텅한 눈을 떴다. 그 얼굴에는 육체의 고통 이외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병들은 그를 들것에 싣고 갔다.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설레는 가슴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안은 무엇 하나 달라진 곳이 없고, 모든 것은 옛날처럼 간직되어 있었다. 시바블린은 자신이 타락은 했어도 치사스러운 탐욕을 미워하는 마음만은 그래도 잃지 않았던지 가재도구의 약탈은 허락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인들은 문간방에서 나왔다. 그들은 폭동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구출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사베리치는 몹시 우쭐거렸다. 하기는 그것도 당연하다. 폭도들이 습격해 와서 참한 소란을 피울 때 말안장을 올려놓고 슬쩍 끌어내어, 때마침 혼란한 틈을 타서 나루터로부터 주린에게 달려갔던 것이다. 그는 이미 볼가 강을 건너 와서 휴식하고 있는 연대를 만났고, 주린은 우리의 위급함을 알고 즉각 승마를 명하여 위기일발의 순간에 달려온 것이다.

주린은 서기의 모가지를 선술집 옆에 있는 장대에 몇 시간 동안 매달아 놓게 했다. 기병들은 몇 놈의 포로를 끌고 추격에서 돌아왔다. 포로들은 우리가 뜻깊은 포위를 끝까지 견디어 낸 바로 그 곳간에 갇혔다. 우리는 제각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노인들에게는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간밤에 한잠도 자지 못한 나는 침대에 몸을 던지자 깊이 잠들어 버렸다. 주린은 부하들에게 지시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그 날 저녁 우리들은 응접실에서 사모바르를 가운데 놓고 모여 앉아서 지나가 버린 위험과 고난을 얘기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차를 따랐다. 나는 그 옆에 나란히 앉아 오직 그녀에게만 마음을 쏟고 있었다. 양친은 우리들의 다정한 모습을 흡족한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 날 저녁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시간이었다. 힘 없는 인간의 생애에 이와 같은 순간이 과연 몇 번이나 있겠는가? 이튿날 아버지는 마을의 농부들이 용서를 빌러 뜰 안에 와 있다는 연락을 받고 현관 층계로 나갔다. 아버지가 나타나자 농부들은 무릎을 꿇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나리님.”

그들은 입을 모아 잘못을 빌었다.

용서를 구하겠다고? 그래, 그런 끔찍한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는 모두 알고 있겠지.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 아들 표트르 안드레비치를 만나게 해주신 기쁨으로 이번만은 용서한다. , 좋아, 뉘우친 모가지엔 칼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으니까.”

잘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요즈음은 날씨가 좋아서 건초를 베어들이기 알맞은 시기인데 너희들은 사흘 동안이나 무슨 짓을 했느냔 말이야. 반장! 한 놈도 빼놓지 말고 풀베기에 내보내도록 해. 그리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서 이반의 축제일(624)까지는 우리 집 건초를 완전히 쌓아 올리도록. 이제는 돌아들 가라!”

농부들은 허리를 굽신거리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을 하러 나갔다.

시바블린의 부상은 치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카잔으로 호송되어 갔다. 나는 창문으로 그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우리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얼굴을 돌려 버렸고 나는 흠칫하여 창에서 물러섰다. 적의 굴욕과 불행에 대해 자랑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린은 다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며칠 동안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역시 그를 따라 출발하기로 결심했다. 떠나기 전날 밤 나는 양친한테 가서 그 당시의 관습에 따라 무릎을 꿇고 엎드려 마리아 이바노브나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노인들은 나를 안아 일으키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동의했다. 나는 파랗게 질려 몸을 떨고 있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양친 앞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축복을 받았다.

부모의 축복을 받던 그 순간의 내 기쁨에 대해서는 표현하지는 않겠다. 내가 처했던 것과 같은 입장에 서본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그때의 내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미안한 마음과 함께, 시기를 놓치기 전에 사랑을 해서 양친의 축복을 받도록 충고하는 수밖에 없다.

이튿날 연대는 집결했다. 주린은 우리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우리는 모두 토벌 작전이 곧 끝날 것으로 믿고 있었고 나도 한 달 후에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결혼식을 올리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작별할 때 여러 사람들 앞에서 키스를 해주었다. 나는 말을 탔다. 사베리치는 다시 내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연대는 출발했다. 그리고 연대는 출발했다.

나는 한동안 다시금 떠나게 된 내 집을 멀리서 바라보며 어두운 예감과 동요하는 마음을 느꼈다. 너의 불행은 아직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라고 누구인가 내 귀에 대고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은 내 앞길에 일어날 새로운 폭동을 예감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행군과 푸가초프 반란의 종식에 대해서는 상세히 기술하지 않겠다. 우리는 푸가초프에게 짓밟힌 여러 마을을 지나면서 가난한 주민들로부터 폭도들이 미처 약탈하지 못한 식량을 징발했다. 이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 주민들은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행정은 완전한 정지 상태에 있었고, 지주들은 숲 속에 숨어 있었다. 폭도의 잔당은 도처에서 잔인무도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 무렵 푸가초프는 아스트라한으로 달아나고 있었는데, 이들을 추격하던 부대의 지휘관들은 폭도들에 가담했건 하지 않았건 일부 주민들을 단독적으로 처벌하고 있었다. 화염에 휩싸인 이 지방 일대의 참상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었다. 신이여, 다시는 러시아에 이러한 무의미하고 무자비한 반란을 일으키지 말아 주소서.

불가능한 변혁을 우리 나라에서 시도하는 자들은 우리 국민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분별한 젊은 패들이 아니면, 목숨의 값어치를 1코페이카짜리로 알고 남의 목숨은 4분의 1코페이카밖에느 생각하지 않는 잔인한 패들이다.

푸가초프는 이반 이바노치지 미헬리손의 추격을 받고 도주하고 있었는데, 얼마 못 가서 완전히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주린은 자기 상관으로부터 자칭 황제의 체포 통지와 함께 작전중지 명령을 받았다. 이제 나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내 가슴은 희망과 기쁨으로 부풀어 올랐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파고드는 쓰디 쓴 감정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