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한 프로포즈(A Daring Proposition)
Miranda Lee
1
사만사는 커다란 검은 책상 앞에 서서 긴장으로 속을 끊이고 있었다. 그녀의 커다랗고 엷은 갈색 눈동자는 책상 너머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꽂혀 꼼짝하지 않았다. 방금 그녀가 건넨 편지를 읽느라고 앞으로 숙이고 있는 그의 검고 우아한 머리에.
그가 그녀의 사직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가이 에이우드를 상관으로 모신지 5년째인지라 그가 이 문제를 가볍게 넘기지는 않을 거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그가 사직서를 되풀이해 읽는 동안 그의 오른손 검지가 무심하게 책상을 톡톡 치고 있다.
이제 곧 터지지. 사만사는 커져 가는 불안을 안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 이제 곧.....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검게 그은 핸섬한 얼굴이 그녀를 바라본다. "이걸 농담이라고 하고 있는 거요, 샘?" 윤택하고 남자다운 목소리였다. 목소리뿐만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만우절은 벌써 몇 달 전에 지난 간 걸 상기시켜 줘도 될까?"
"농담이 아니에요, 가이" 그녀는 긴장을 감추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럼, 정말 그만두고 싶단 말인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어조다.
맙소사! 그녀는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떠나고 싶지 않아요. 난 당신을 사랑하니까, 이 멍청한 양반아. 그걸 몰라요? 눈치도 못 챘단 말이에요?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물론 눈치 챌 리 없다. 눈치 챌 이유가 없다. 그녀 자신도 그의 밑에서 일한 지 1년 뒤에나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에게 추파를 던지기엔 늦은 때였다. 던져 봐야 소용도 없었겠지만.
당시 사만사는 인기 있는 플레이보이 독신남성인 자기 상관이 어떤 종류의 여자들에게 이끌리는지 이미 파악을 끝내고 있었다. 금발에다 몸집이 작으면 더 좋고, 날씬하다 못해 꼬챙이처럼 마른 몸매여야 한다. 두뇌가 있는 여자일 경우 그는 자기와 같이 있을 때 여자가 두뇌를 너무 과시하는 것을 못마땅해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자가 그와의 관계가 임시적이며 순전히 육체적인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결혼이나 가족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은 가이 헤이우드의 인생 청사진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키가 큰 갈색 머리인데다, 머리가 빈 여자 흉내도 낼 수 없고, 또 언젠가는 결혼해 아이들을 가질 꿈을 지닌 사만사는 자신이 가이가 좋아하는 여자들의 요건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은 즉시 곧장 떠났어야 옳다. 하지만 사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법. 그녀는 그 후로도 미적거리면서 혹시나 가이가 연애행각 중간 잠깐 숨돌리는 동안에 등잔 밑이 어두웠다는 것을 깨닫지나 않을까 기대했다. 그가 인생에서 원하는 것에 대한 소신이 바뀌지나 않을까 해서.
그렇게 4년이 흘렀다. 4년. 그리고 여러 명의 금발 머리 아가씨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앞으로도 변하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등을 똑바로 폈다. "네"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정말 떠나고 싶어요"
가이 헤이우드는 검은 가죽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팔꿈치를 팔걸이에 대고 가슴깨에서 손을 깍지 꼈다. 눈은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푸르고 청명한 두 눈의 표정은 매력적인가 하면 오싹해질 때도 있을 만큼 다양했다.
"왜지" 그가 초인적으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나 화가 나 있지만 억누르려고 애쓸 때 내는 목소리다. 가이는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능력을 최고로 쳤다.
그가 처음에 그녀를 채용한 이유도 그것이다. 약간 촌스럽긴 하지만 현실적이고 허튼 짓 않을 듯한 분위기가 좋다면서. 사무실에서 여자가 신경질을 부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현실적인 여자가 너무나도 감정적인 짓을 저지르지 않았겠어요? 그녀는 그를 향해 쏘아 붙치고 싶었다. 상관인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신경질이 날 정도로 우습지 않으세요?
"고향에 돌아가 살기로 했어요"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가이의 얼굴 표정은 말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패디스 플레인스로 돌아간다고? 당신이 나 살려라 탈출한 인구 113명의 촌구석으로?"
사만사는 그와 함께 커피를 들면서 그에게 자신의 배경을 들려주었던 휴식시간들이 후회스러웠다. 패디스 플레인스는 그의 말처럼 작지는 않다. 그렇다고 많이 더 큰 것도 아니지만. 십대 시절 그녀는 고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가까운 마을까지 30km를 등교해야 했다. 가이가 고향에 가고 싶다는 그녀의 말을 의심하는 것도 당연 한다. 그 마을은 너무 작고, 부모님의 잡화상에서 경리를 보는 것 말고는 일자리를 얻을 기회도 없다고 그녀 입으로 밝혔었으니까. 하지만 생각나는 핑계가 그것뿐이다.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좀 쉬어야겠어요. 쳇바퀴 도는 생활에 지쳤어요. 이 시드니에도"
"그럼 1주일 휴가를 가져요"
가이는 날 그만두게 하지 않을 작정이야. 그녀의 마음에 불안과 기쁨이 미친 듯이 교차했다.
약해지지 마. 마음속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후회하게 돼. 어제 본 귀여운 데브라를 기억하라고. 긴 금발머리, 호수 같은 눈동자, 갈대처럼 호리호리한 몸매. 가이는 오늘밤 그녀와 식사를 하고 쇼를 보러 갈 예정이다. 두 남녀는 바로 이 사무실에서 계획을 세웠다고. 네가 보는 앞에서. 가이가 새로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그러했듯이 또 담배를 끊는 꼴을 보며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넌 너무 오래 견뎠어. 매번 가슴속의 자신이 죽어 가는 것 느끼면서. 진짜로 죽는 것도 시간 문제야!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1주일 가지고는 안돼요. 그리고 난...."
"돈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봉급을 인상해 주겠소" 그가 차갑게 말을 잘랐다.
"돈 때문이 아니에요"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오, 당신은 왜 내가 마지막 남은 위엄이라도 챙기면서 그만두게 해주지 않나요.
가이는 의자에서 앞으로 몸을 내밀어다. 그러고는 짙은 갈색 머리칼이 이마에 흘러내리자 화난 손길로 쓸어 올리고는 그녀를 쏘아보았다. "젠장, 샘!" 본격적으로 화난 기색이다. "내게 그렇듯이 당신에겐 이 일이 생명 같은 거라는 걸 우린 피차 알고 있소. 그 조그만 촌마을로 돌아가고 싶을 리가 없어. 당신은 이젠 도시 여자라고. 직업여성이고. 그 촌구석에 묻히다간 당신은 미치고 말 거야. 며칠 되기도 전에 지루해 죽을 거야!"
그가 일어나 책상을 돌아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그녀는 그의 손이 닿을 때면 으레 그랬듯 온몸이 굳었다.
"샘" 뜻밖에도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원한다면 휴가를 가져요. 하지만 제발..." 그는 입술 끝을 치켜올리며 어떤 여자라도 녹일 듯한 미소를 지었다. "배를 아예 버리지는 말아요. 당신은 내 1등 항해사고, 이 선장은 당신이 필요해"
그 말에 사만사는 녹아 버릴 뻔했다. 여자에게 당신이 필요하다는 말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만큼이나 설득력이 강하다. 하지만 그걸로 다는 아니다.
"아뇨" 사만사는 턱을 치켰다. "앞으로 두 달간 여유를 드렸잖아요. 그거면 후임자를 뽑기에 충분해요. 당신만 좋다면 월턴 부인에게 일해 주겠느냐고 물어 볼게요. 그녀는 전업직장을 갖고 싶어 해요. 그리고 이곳이 처음도 아니고요."
가이는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더니 코웃음을 쳤다.
"전화 하나 제대로 받을 줄 모르던데 뭘. 그녀는 영 쑥맥이었소"
"그렇지 않아요" 사만사는 월턴 부인의 변호에 나섰다. "아주 영리한 부인이에요. 동정심을 가져 봐요, 가이. 월턴 부인은 여러 해 직업전선하곤 거리가 멀다가 겨우 몇 주 재훈련을 받고 여기 임시직으로 왔던 거예요. 첫 일거리가 밑에 있는 사람이나 쥐어짜는 당신 같은 상관을 모시는 일이었으니, 가엾지 뭐예요. 내가 그 주에 오빠 결혼식에 가지만 않았던들..."
"정말 유감이었지" 가이는 투덜댔다. "당신이 돌아왔을 때, 여긴 난장판이었다고. 그 부인은 절대 당신 후임이 될 수 없어. 망할, 당신은 지금 내게 비서 이상이란 말이오. 내 개인 보좌역이자 오른팔에다가 그리고...젠장, 새 난 당신 없이는 안 된다고!"
"없어서 안되는 사람은 없어요" 사만사는 조용히 대꾸했다.
그는 그녀의 차분한 얼굴을 노려보다가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그렇게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다. 하지만 난생 처음 그의 평정을 깨뜨렸다고 만족할 것도 없다. 그는 잠시 화가 난 것뿐이니까. 잘 나가던 배가 잠시 풍랑을 만나 초조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극복하고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헤쳐나갈 것이다.
고통이 그녀의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이쪽의 사랑을 되갚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게다가 이쪽을 이성으로도 인식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고문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 사직을 하다니" 가이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방금 난 내년 댐버스터스 그룹의 호주공연을 예약시켰단 말이오. 그런 인기 절정 록밴드의 순회공연을 하려면 얼마나 준비를 많이 해야 하는지 알잖소. 그들은 호주에 와 있는 동안 뮤직 비디오도 만들 예정이오. 나중에 당신하고 의논할 작정이었는데...."
그는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사만사는 마음이 약해질 뻔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직 두 달 시간이 있어요. 공연에 필요한 예약을 해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월턴 부인을 고려하지 않겠다니, 인력 스카우트 전문가들에게 당신이 새 비서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려 놓을게요"
"난 새 비서 필요업소" 그는 투덜댔다. 볼멘 소년 같은 어조와 표정이다.
사만사는 그의 아랫입술이 나온 것을 보고 웃을 뻔했다. 무척이나 섹시한 입술이다. 종종 그가 36살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눈가나 입가에 주름살이 없어서 무척 젊어 보인다. 하긴 그녀의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말하셨듯이 남자란 아버지가 될 때까지는 어린애라니까. 이 남자가 심혈을 기울여 피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라는 이름이고. 그녀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가이는 그녀의 조소를 눈치 챘다. 그러자 소년 같은 기색이 즉시 자취를 감추고 엄격한 사업가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가 성공한 연예인 대행업자이자 흥행주가 된 것은 부드러움을 장기로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녀의 사직서를 집어 들고 갈기갈기 찢어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이런 말도 안돼는 얘기는 더 이상 듣지 않기로 하지, 샘. 당신 요지는 알았어. 당신을 너무 혹사시켰어. 다음주 월요일부터 14일간 휴가를 가지도록 해요. 그리고 오늘부터 당신 연금을 5천 달러 인상할거요"
사만사는 등을 곧추세우고 그를 노려보았다. "요지를 분명히 하지 못한 것 같군요. 당신은 내 요지를 못 알아들었어요. 앞으로 두 달이에요, 가이" 그녀는 쏘아붙였다. "그리고 또다시 그렇게 사직서를 찢어 버려 봐요. 두 달이 아니라 2분 만에 관두고 말 테니까. 망할 순회공연을 하든 말든!"
그녀는 가이가 숨을 훅 들이쉬는 것을 보고 짜릿한 즐거움을 맛보았다. 단정하고 엄숙한 사만사 양이 욕을? 냉정하고 차분한 비서가 이성을 잃다니!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면 그녀는 머리채를 홱 돌리며 드라마틱하게 문을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긴 갈색 머리를 늘 하듯이 뒤로 묶고 있었기 때문에 구두 굽을 홱 돌리고 그의 사무실에서 성큼성큼 나오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그의 사무실 문을 탕 닫으면서.
가이는 그녀를 따라오려고도, 불러 세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화난 비서를 쫓아오는 것은 그답지 않은 짓이니까.
마침내 책상 앞에 앉은 사만사는 분노로 몸이 떨려옴을 어쩔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와들와들 떨렸다.
넌 옳은 일을 한 거야. 그녀는 속으로 자꾸 되뇌었다. 그리고 유일한 길이었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그의 곁에 있다는 애매한 기쁨에 만족한 채 감정을 감추고 그의 고문 같은 무심함을 견딜 수 없어. 그건 나 자신을 타락시키고 파멸시키는 짓이야. 그리고 소득도 없다.
그녀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래, 넌 옳은 일을 한 거야.
잠시 후, 사만사는 자신의 화장실에서 눈물을 쥐어짜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은 교통지옥이었다. 사만사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지각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그녀는 체념한 듯 고개를 돌려 버스 창 아래로 시드니 항구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그림 같은 풍경이라고 못하겠네. 그녀는 속으로 투덜댔다. 비가 마구 내리고 있다. 젠장, 이놈의 비는 그칠 줄도 모르나?
날씨마저 춥다. 4월치고는 너무하다고 할만큼.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겨울 같다. 그녀는 창을 문질러 유리의 김을 지웠다. 멀리 있는 오페라 하우스가 간신히 보인다. 새날개처럼 뻗은 지붕이 평소 같지 않게 우중충해 보인다. 가까운 부두에서는 연락선이 멈춰 서서 레인코트를 입은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다.
사만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맥 빠지는 풍경이다. 오늘 아침부터 이래선 안 되는데. 가이와 또 하루를 견뎌야 하는 현실에서 유일한 위안이라면,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이다. 그와 이틀만이라도 떨어져 있고 싶다.
어제는 정말 괴로운 긴장의 연속이었다. 결국 가이가 그녀를 그의 사무실로 불러들이긴 했지만, 사직을 만류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사과를 하고는 같이 서류를 검토하자고 했다. 그가 관리를 맡고 있는 연예인과 그룹이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 무슨 일을 주선해 주어야 하는지 검토했다. 그의 태도는 사무적이었다. 아마 상황을 방아들이기로 하고 1등 항해사가 떠나기 전에 배를 점검해 보자는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그가 그녀의 사직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사만사는 화가 났다. 자꾸만 서류를 훑어야 하는 것도 그랬다. 서류 한 장마다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미음을 괴롭히는 즐거움을 안고.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온갖 자극적이고 보람있는 사건들로 가득했던 지난 5년간의 생활을. 가이가 관리를 맡은 가수와 연주인들이 출연한 공연을 구경하던 일들을. 영화 시사회와 그것이 끝난 두의 파티들은 또 어떻고. 그녀가 만났던 스타들, 그리고 도전해야 했던 그 많은 일들은 어떻고. 그녀가 기획한 행사가 실수 없이 성공했을 때 느낀 만족감은 또 어땠던가.
헤이우드 프로모션사를 떠나는 것은 가이의 곁을 떠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여태까지 생활방식도 뒤로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물론 시드니에서 다른 직업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한 남자. 그러면서도 그의 일부분이 되지 못한 남자와 같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일을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가이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TV와 신문, 잡지에 끊임없이 얼굴이 나올 것이다. 눈부신 금발 머리 여자를 옆에 거느리고.
사만사는 간밤에 그가 데브라와 데이트한 일을 기억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데브라는 클럽가에서 비교적 성공한 여가수로서 새 매니저가 되어 달라고 가이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곧 그의 다음 애인 물망에 올랐다.
데브라가 가이와의 첫 데이트에서 곧장 침대로 향했을까? 사만사는 신랄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이지. 그보다 확실한 일이 어디 있겠어. 잔인한 대답이 돌아왔다.
"실례합니다만, 안 내리세요?"
사만사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옆에 앉은 여자는 이 버스를 고정적으로 타는 동승객이다.
얼른 창밖을 보니, 버스는 다리를 건너 킹 가에 서 있다. 다행히 빨간 불이라 버스가 멈춰서 있다.
"어머, 이런 내려야죠" 사만사는 우산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정말 고마워요"
"뭘요. 하지만 서둘러야 해요. 신호가 금방 바뀔 거예요."
그 여자의 말대로 사만사가 정거장에 내려서는 순간 버스가 앞으로 출발했다. 그 바람에 그녀는 구르다시피 내려 진흙탕에 빠지고 말았다.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잡았지만 흙탕물은 그녀의 발목 주위로 튀어 올라 다리를 적시고 밑단까지 적셨다. 그녀는 신음소리를 냈다. 우산을 쓰고 고개를 숙인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멈춰 서서 도와주지 않았다. 남의 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인정머리 없는 도시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나와 보라고 그래"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진흙탕에서 빠져나와 거칠게 우산을 폈다.
바로 너잖아. 괴로운 대답이 들려왔다.
그녀는 비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채 인파에 휩싸여 길을 걸었다. 엘리자베스가를 지나 가이의 사무실이 들어 있는 건물 앞으로 왔다. 그녀가 회전문을 들어서려니 빗줄기가 약해졌다. 그녀는 속으로 하늘을 향해 험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하긴 그런다고 위에 계신 분이 알아주나. 그녀는 뾰로통해졌다. 내가 기도 드린 다른 일만 해도 그래. 복권이 당첨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어도 그보다는 차라리 나았겠다.
그녀는 온몸이 젖고 화가 잔뜩 난 채 흑백 타일이 깔린 복도를 걸어 사람이 가득 찬 승강기에 올라탔다. 우산 끝으로 14층 버튼을 눌렀다. 도시에 살다 보니 내 얌전한 본성은 말라 버린 모양이야.
하긴, 솔직히 생각하니 난 원해 얌전한 애가 아니었는지 몰라.....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밀려왔다. 더불어 사춘기 때의 괴로움도. 그녀는 겉으로는 엄마의 엄격한 시골식 교육 덕분에 조용하고 얌전한 숙녀 행세를 했다. 하지만 그 외양 밑에는 뭔가 폭발하길 바라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잔인하게도 그녀에게 아마존 샘이라는 별명을 붙여 준 반 아이들에게 마구 소리치고 싶었다. 선천적인 몸매에 항거하고 싶었다. 그녀와 비쩍 여위고 여드름투성이인 노먼이 서로 이끌린 것도 당연했다. 두 사람은 반의 외톨이들이었으니까. 못생긴 외톨이들.
사만사는 졸업기념 댄스 파티를 떠올리며 승강기 구석에서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날 밤 그녀는 최대한 멋을 부렸다. 머리를 손질하고 몸매의 결점을 감춰 주는 엷은 자주색 드레스를 입었다. 노먼도 평소와 다르게 썩 괜찮았다. 재단이 잘된 슈트로 어깨가 벌어져 보였고, 조명으로 혈색도 좋아 보였다.
그날 밤늦게 그녀가 그렇게 무모한 행동을 벌인 것은 모처럼 멋을 낸 탓이었을까, 아니면 졸업 후 약속된 자유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해지자고, 우리. 네가 노먼이 갈 데까지 가게 한 것은 그가 네게 아름답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야.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해준 남자애는 여태까지 한 명도 없었다. 175cm의 꺽다리인데다 통통하기까지 한 그녀였으니 인기가 있었을 리 없다. 그런데 노먼이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해, 그녀는 마음의 빗장을 스르르 풀고 만 것이다.
얼마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처럼 무모하게 순결을 내던지다니. 더구나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맹세했다. 다시는!
하지만 자신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노먼에게 설득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그 해 여름이 지날 무렵 멀리 뉴캐슬에 있는 미망인인 보니 이모에게로 가 지내면서 비서수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구원이었다.
보니 이모가 떠오르자 그녀는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녀를 제대로 된 식사 습관으로 인도해 준 사람이 바로 보니 이모였다. 그 덕에 그녀의 몸매는 우아하게 균형이 잡혔다. 그녀가 예절학교에 다닐 수 있게 비용을 대준 것도 이모였고, 그녀가 시드니에서 일자리를 얻으려 할 때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눌러 준 것도 이모였다.
당시 사만사는 이모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그렇게 무작정 감사를 할 수만은 없었다. 그 때 시드니에 오지 않았던들 광고를 보고 래나라는 매력적인 금발 아가씨하고 같이 전셋집을 쓰지 않았던들....
"안 내리세요" 오늘 아침 들어 두 번째로 듣는 말이다.
사만사는 승강기 문을 열고 있던 남자에게 입속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중얼거렸다. 소용없어. 그녀는 녹색 양탄자가 깔린 복도를 걸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옛날 일을 따진들 무슨 소용이고, 시드니에 온 경유를 따진들 무슨 소용인가. 문제는 당장 오늘을 견디는 것이다. 가이가 들뜬 모습으로 발걸음 가볍게 돌아다니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담배를 들지 않은 모습으로.
그녀는 복도 맨 끝 왼쪽 문에 멈춰 서서 핸드백을 뒤져 사무실 열쇠를 찾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문득 문 위의 금속 간판을 바라보았다. 맨 위에 헤이우드 프로모션이라고 적혀 있고, 그 밑에는 가이 헤이우드-전문이사라고 적혀 있다.
이 사무실로 이전하던 날이 생생히 떠오른다. 패링턴에 있던 테라스 딸린 집에서 점점 늘어가는 사업을 처리하느라 애쓰는 가이를 도우며 힘든 여러 달을 보낸 끝에 마침내 정식 사무실을 갖게 되어 굉장히 흥분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가 늦게까지 일한 그녀에게 저녁을 사준 일이 있었다. 그녀는 피곤하고 허기가 져서 다음 일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를 따라갔다. 그렇다고 가이가 신사답게 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아니, 그는 완벽한 신사였다. 하지만 저녁을 들면서 그녀는 낮 동안에 보여 준 그의 정력적인 사업가 모습 대신에 느긋하고 사교성 많은 그의 면모를 접하게 되었다.
늘 그가 매력적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그의 늘씬하고 탄탄한 체격이며 검게 그은 우아한 외모에 찬탄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성적 매력까지는 미처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함께 저녁을 먹노라니 그의 데이트 상대 녹이는 기술에 실려 성적 매력이 풀풀 풍겨 나옴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끼치는 영향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저녁이 끝날 무렵 그녀의 감정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에 대한 존경심이 어린 찬탄이 사랑으로 바뀌어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던 것이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며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선 그녀는 문에 잠시 기대섰다. 문득 벽시계를 바라보니 아홉시 5분이었다. 많이 늦지는 않았다. 가이는 늘 아홉시 30분에서 열시 사이에 출근하니, 그전에 자신을 수습할 시간은 충분한 셈이다.
그녀는 서둘러 뺨 위의 눈물을 닦았다. 가이가 왔을 때 평소처럼 냉정해 보이고 싶었다. 그나마 건길 것은 자존심뿐이니깐. 자존심만은 상처받지 않고 떠날 결심이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경쾌하게 걸어 응접실로 향했다. 핸드백을 책상에 던지고 간이 주방이자 다용도실로 쓰고 있는 옆방으로 걸어갔다. 우산을 구석에 세우고 레인코트를 벗고, 젖은 스타킹과 구두도 예비로 갖다 둔 스타킹과 구두로 갈아 신었다.
커피 주전자를 올려놓은 뒤에는 머리와 얼굴을 손질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결코 미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보기 괴로울 정도는 아니다. 피부가 깨끗하고 균형 잡힌 윤곽을 지니고 있다. 맑은 암갈색 눈동자, 쪽 곧은 코, 모양 좋은 입술, 그리고 머리를 올리고 있기 때문에 우아한 목이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웨이브 진 갈색 머리를 어깨 위로 길게 늘어뜨린다면, 그리고 자연스럽고 가벼운 화장 대신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양복 스타일의 정장 대신 몸에 꼭 맞는 여자다운 옷을 걸친다면 보다 눈에 뜨이는 모습이 될 거라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발에 외출을 할 경우에도 섹시한 이브닝 드레스 대신 바지를 입고-늘 검정색이었다- 중간색의 실크 셔츠를 입었다. 지금 이대로의 자신의 모습이 편하다. 만일 다른 모양새를 낸다면 바보가 된 기분이고 어색할 것이다.
자기가 화려한 색깔의 야한 스타일 드레스를 입고 사무실에 나타난다면 가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하자 그녀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나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설마 가이가 이렇게 일찍 출근할 리는 없을 텐데.
얼른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가이가 주방 입구에 기대서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그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그녀의 놀란 눈이 그의 헝클어진 매무새를 훑었다. 면도도 하지 않았고, 머리에도 빗이 지나간 자국은 없었다. 게다가 잿빛 슈트는 벗지 않고 그대로 입고 잔 듯했다.
"맙소사! 가이, 무슨 일이에요?"
2
가이는 침울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문틀에서 몸을 떼더니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사만사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담배를 피우려는 것은 아니겠지? 섹시한 데브라와의 데이트가 순조롭게 결론이 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침대에서의 결론으로
그녀는 그가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무는 것을 놀라 바라보았다. 그는 빈 곽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곽은 완벽하게 휴지통에 골인했다. 그녀는 그가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라이터를 끄고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자 가슴이 뛰었다. 안도감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버지가 입원하셨소"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심장마비로, 중환자실에 있소"
사만사는 실망과 죄책감으로 가슴이 죄어 왔다. 난 가이의 데이트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는 임종으로 이어질지 모를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니.
"저런 끔찍할 데가 "그녀는 신음했다.
그녀는 그가 아버지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잘 알고 있다. 헤이우드 시니어씨는 종종 아들의 사무실에 들러 잡담을 하고 했으며, 가이도 주말에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가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다면 가이는 절망에 빠질 것이다. 벌써 그렇게 보인다.
사만사는 그를 포옹하고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는 위로의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곧 괜찮아 지실 거예요. 어느 병원이죠?"
"성 빈센트 병원이오"
"아. 최고의 병원이죠" 그녀는 그를 안심시켰다. "의사들은 뭐래요? 가능성이 얼마나 된 대요?"
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머리 위로 담배 연기가 맴돌았다. "조심스럽게 낙관론을 펼치더군. 처음 발작 후 몇 시간 동안을 견뎌냈으니 완전히 회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이론은 적어도 그렇지" 그는 신랄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죽음을 연습하신 모양이야"
"당신도 더 나을 것 없어 보여요" 사만사는 주방 조리대에가 물이 끊고 있는 커피 주전자를 내렸다. "커피 좀 드릴게요"
그는 고맙다는 시선을 보냈다. "고맙소. 긴 하룻밤이었소. 자정이 넘었는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소. 데브라하고 난 공연이 끝나고 우리 집에 돌아온 참이었소. 둘이 곧장 병원에 달려갔지. 그 후로 쭉 병원에 있었소. 의사는 나더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빈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빈집이오?" 그녀는 커피를 젓다가 얼굴을 들었다. "왜 빈집이에요?"
가이는 몇 년 전에 패딩턴의 집을 팔고 부둣가의 아파트를 샀다. 많은 손님 접대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아이가 없는 부부를 들여 집안 일을 시켰다. 50대인 레온과 바바라 파커 부부는 헌신적인 일꾼들이었다.
"바바라하고 레온은 어디 가고요?"
"조카 결혼식을 보러 갔지" 가이의 핸섬한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결혼이란 인류의 재앙이라고! 당신이 결혼식에 갔을 때 이 사무실이 꼴이 어땠는지만 봐도 그래. 결혼식이란 사람들을 억지로 모이게 하고는, 몇 년 뒤에는 그나마도 헛것으로 만든다니까. 넋 나간 얼간이들이 그제야 정신이 들어 이혼을 해대니까 말이야!"
사만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가이의 냉소적인 결혼관에 대해서는 결코 찬성할 수 없다. 호주의 이혼율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그의 아버지가 지난 25년간 세 번 결혼하고 이혼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이의 어머니와 한 첫 번째 결혼만은 그런 식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이의 말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인 헤이우드 부인은 그가 열 살 때 신부전증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결혼이 다 이혼으로 끝나는 건 아니에요." 사만사는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섹스 때문에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요"
"대부분 남자들은 그것 때문에 하지" 가이는 코웃음을 날렸다. "그런데 그 뒤에 어떻게 하지. 6개월에서 기껏해야 18개월이 되면 정열은 사라지고 결혼생활도 사라지는 거요. 그 이상 버티는 부부가 있다면 그건 아마 아이들 때문일 거요. 정말이라고."
"섹스 때문에 결혼하는 남자들도 있죠" 사만사는 차분히 그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남자들도 있어요. 이런, 지금은 결혼에 대한 심오한 토론을 벌일 시간이 아니군요. 보아하니 녹초가 된 모양인데, 사무실 소파에서 눈이나 좀 붙이는 게 어때요?? 내 캐비닛에 베개하고 담요가 있어요"
가이는 건조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캐비닛에 없는 게 있소?" 그는 설탕을 타지 않은 커피 잔을 들고 돌아섰다. "베개하고 담요를 가져와요. 우선 전화 좀 몇 통 하고"
그가 돌아서려다가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위험할 만큼 찬탄에 가까웠다. 사만사는 충격을 느꼈다.
"당신이라면 병원 냄새 같은 것에 기절하거나 하지 않을 테지?"
그녀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그럼요. 왜요?"
"귀여운 데브라 양께서는 성 빈센트 병원에서 15분을 채 견디지 못하더군. 기절한 것 같다나" 그의 어조는 사무 경멸조다. "솔직히 샘, 어떤 여자들은 인생이 현실에 부딪치면 형편이 없어지지. 내 비서가 그런 여자가 아닌 게 다행이야." 그는 싱긋 웃었다. 지치기는 했지만 장난스럽고 섹시한 미소다. "그런데 그 비서라는 사람이 남자라는 족속의 꿍꿍이를 제대로 몰라서 탈이지만. 내가 형편이 좋아지면 내 인생 경험과 지혜를 전수해서 당신의 장래 고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하지. 남자에 대해 알려 준다는 말이오." 별안간 그의 얼굴에 구름이 끼었다. "아 참, 깜빡했군. 당신은 그만두기로 했지"
"두 달 뒤의 일이에요" 그녀는 간신히 대꾸했다.
맙소사 왜 저런 미소를 짓는 걸까? 저 미소에 내 뱃속이 흐물흐물해지는 건 또 왜지?
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틀림없이 마음을 바꿀 줄 알았는데"
내 사의는 건재해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이 고집스럽게 굳어졌다. "두고 보지, 사만사 피터스 두고 보자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화가 났다. 날 설득해서 그만두지 못하게 할 작정이라면, 보통 잘못 생각한 게 아닐 거예요. 그녀는 화가 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이는 나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으로 신경 쓰는 게 아니야. 자기 배를 탈없이 나가게 하려는 데에만 염두를 두고 있을 뿐.
하지만 대개는 그의 뜻대로 되고 만다는 사실이 잠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이번만은 아니야.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절대 안돼.
10분 후, 그녀는 베개와 담요를 가지고 가이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 나 역시 유감이오, 데브라" 그는 지루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만사는 기운이 솟았다. 간밤에 도망친 것이 데브라에게 치명타인 모양이다. 가이의 비위를 거슬리면 그걸로 끝장이다. 그는 용서하고 잊는 데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니까.
"아니, 당분간은 밤마다 시간이 없을 것 같소"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뵈러 가야 하니까. 그리고 걸리적거리는 일도 좀 있고" 그 말을 하면서 그는 사만사를 노려보았다.
사만사는 싱긋 밝게 웃었다.
"뭐? 아... 조금 전에 전화했더니 의사가 낙관적이라더군. 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오셨기 때문에 오늘은 몇 가지 테스트를 한다는 거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그래, 언제 한 번 전화를 하지.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는 매니저를 바꾸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소. 내 보기에 알렉스도 잘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지금 난 고객을 더 받아들일 형편도 아니고... 그렇게 해요. 안녕"
가이가 전화기를 내려놓았을 때는 이미 데브라의 존재가 그의 뇌리에서 잊혀진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인생이란 그런 거지. 사만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짓궂은 쾌감이 없다고는 못했다. 자신 역시 가이의 인생에서 실패한 것을 보고 여자다운 은근한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란 법은 없다.
가이가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켰다. "당신 아버님도 애연가셨죠. 당신도 흡연이 심장질환에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을 잘 알텐데요."
가이는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차가운 푸른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가 여자에게서 절대 바라지 않는 게 바로 엄마처럼 구는 거요"
"좋아요" 그녀는 대꾸하고 베개와 담요를 소파에 던졌다. "그럼 당신이 직접 잠자리를 만들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커피는 당신이 끓여 먹으라고 말하려다가 그녀는 그만뒀다. 솔직히 가이는 자기 커피를 손수 끓일 때가 있다. 그는 비서를 수족처럼 부리는 그런 상관은 아니다.
"제발, 샘, 날 긁지 말아요" 가이가 쏘아붙였다. "긁힐 기분이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오? 두 달 뒤에 안 보게 될 텐데"
그가 일어나 소파 겉에 서 있는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매무새가 엉망인데도 저처럼 괴로울 정도로 매력적일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알려 줄까"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정말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때가 되어도 당신은 떠나지 못할걸"
"정말인가요?" 그녀는 팔짱을 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녀는 속으로 떨었다. 마음속 일부분은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말이지, 친애하는 샘...." 그는 그녀 앞에 바싹 다가섰다. 그의 자신 있는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어제 우리가 같이 서류를 훑어볼 때, 난 당신의 얼굴을 보았지. 그리고 순회공연을 의논할 때의 당신 표정도. 이 일은 당신 인생의 주축이야. 없으면 못 산다고. 아니라고 해보시지. 당신은 출발 직후부터 나와 함께 일했어.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은 헤이우드 프로모션의 핵심이라고. 우린 한 팀이야. 당신과 나. 떨어질 수 없는 팀."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녀는 달아나고 싶었다. 그의 직감에서, 그의 혜안에서, 그리고 그에게서!
"이러면 어떻겠소?" 그는 최대한 설득조로 말했다. "당신에게 내 비서와는 아주 다른 위치를 제공하면?"
그녀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맙소사, 설마 내가 희망하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니겠지?
"예를 들어서요?" 그녀는 간신히 대꾸했다.
"제2선의 동업자로서 회사의 지분을 같이 소유하는 거지"
심장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한순간이나마 그가 뭔가 다른 의미로 말했으리라고 꿈을 꾸다니. 이성이 외출을 했던 모양이다.
어디로 외출했는지 알아? 잔인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네 어리석은 여성 호르몬 속이지 어디겠어. 이 남자가 가까이 오기만 하면 넌 이성을 잃고 삶은 호박이 되잖아.
"난..."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안 된다고 해야 해요"
"해야 해" 그는 놀라 되물었다. 그러고는 잠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가이는 초조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뭔가 내가 알 수 없는 일이 있군"
그는 투덜대며 돌아서서 구겨진 상의를 벗어 의자 뒤에 던져 놓고는 넥타이를 풀었다. 이어 셔츠 소매 단추를 풀고 앞판의 단추에 손을 대려는 참이다.
사만사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그의 맨 가슴이 조금씩 드러날 때마다 심장박동이 거칠어진다. 처음에는 햇살에 그은 V자형 살갗만이 드러나더니 이어서 곱실거리는 가슴털이 드러났다. 그리고 울퉁불퉁한 근육이.
체육관에서 다듬은 덕에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근육이다. 마지막 단추마저 끌러지자 그녀는 억지로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겁내지는 말라고" 그는 그녀의 등뒤에 대고 소리쳤다. "내가 알아낼 테니까. 당신이 왜 나를 떠나려고 하는지 끝내 알아내고 말겠어. 쉬고 싶다고 한 것하고는 관계없을 거야...오, 맙소사"
사만사는 그의 충격 어린 어조에 돌아섰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의 놀란 얼굴뿐이 아니라 완전히 벗은 상체가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눈길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시야에는 그의 남자다운 알몸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그녀는 겁에 질렸다. 내 얼굴이나 눈에 감정이 드러난 거야. 분명해.
"설마 임신한 것은 아니겠지? 그가 다그쳤다.
그녀는 마구 웃어젖히고 싶었지만 눌러 참았다. "아뇨, 가이 임신하지 않았어요"
그는 안심하는 얼굴이더니 자신에게 화가 난 표정이다.
"그렇겠지. 내가 어리석긴. 그럴 리가 없는데, 당신이라면 말이야. 미안하오" 그는 하품을 하고는 담요를 폈다. "오늘 아침은 내 머리가 정상이 아니야. 내일 다시 이야기하지. 당신이 이성을 찾도록."
"내일은 토요일이에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 그렇지" 그는 담요 밑으로 기어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월요일에 하지. 두 시경에 깨워 줘요. 착하지?"
그녀가 그를 깨운 것은 한 시였다. 병원에서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가이의 아버지가 받은 테스트 결과가 나왔다. 동맥에 커다란 장애가 있어서 바이패스(혈관 수술의 일종)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두 번째 심장마비를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사만사는 가이에게 병원에 같이 가겠다고 제안했다. 실은 그녀도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없는 동안 그에 대한 전열을 가다듬을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전열은 갈수록 흐트러지고 있다. 그에 대한 사랑이 이다지 노골적인 욕망으로 타오른 적은 전에는 없었다. 그와 사랑을 나누는 것을 꿈꾼 적은 있지만, 밤에 잘 때나 그랬지 이렇게 사무실에서 그런 적은 없었다. 그 상상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섹시해진 적도 전에는 없었다. 언제나 로맨틱하고 달콤하고 부드러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가이의 벗은 상체를 보았을 때 그녀가 느낀 갈망에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다. 욕망은 아주 줄여 말해도 원초적이었다. 그리고 쉽게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온몸에 초조한 기색을 느꼈다. 불안하고 화가 났다.
가이가 나간 뒤 그녀는 계속 사무실을 서성이며 커피를 타기도 하고 비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기도 했다. 이런 성적 흥분은 생전 처음이다. 책에서만 읽었지 직접 경험해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다. 강렬하며 압도적이고, 묘하게도.... 아무 죄의식이 없었다.
욕망은 그녀더러 지금의 일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서 피해 달아나지 말라고 채근하고 있었다. 자존심이나 긍지 같은 것은 상관하지 말라고. 넌 그를 원하잖아. 짓궂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의 사랑을 얻지 못하거들랑 잠자리를 얻는 걸로 만족하라고. 고향에 내려가면 그나마의 기회도 없어. 떠나는 대로 그는 금방 너를 잊을 거야. 데브라를 잊은 것처럼. 원하는 것이 있으면 돌진해서 쟁취해야지. 안 그래, 아가씨? 그녀는 잠시 낙관적인 생각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하지만 현실을 깨닫자 금방 풀이 죽었다. 나에게 성적으로 끌린 징조를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남자를 무슨 수로 유혹하단 말인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날 그런 식으로 봐주지 않은들 어때? 속으로 질문을 거듭하던 그녀는 마침내 결심했다. 너도 알고 보면 그럭저럭 매력적인 여자라고, 안 그래? 그리고 가이는 무척이나 정력적인 남자이고. 그런데 지금 그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걸 네가 해결해 주면 되잖아. 널 연인으로 삼으면 얼마나 편리할지 그에게 설득시키기만 하면 되는 거야. 비서랑 바람을 피우는 남자들도 많잖아. 듣자니 그런 관계는 모두 사랑하고는 관계없이 편의로 이루어진 관계라던데.
편의라는 말이 그녀의 가슴을 후볐다. 그거야말로 가이의 입맛을 당기게 할 미끼다.
그녀는 대담한 제안 한 가지를 떠올렸다. 날 그의 애인으로 삼는 조건이라면 비서로 계속 있겠다고 제의하면 가이는 뭐라고 할까?
지금이라도 대답을 알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놀랐다가 곰곰 생각해 본 뒤 그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은 생각이군, 샘"
그때 전화벨이 울려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엉뚱한 생각을 한 죄책감 때문일 거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면 수화기를 들었다.
"헤이우드 프로모션입니다."
"나요, 샘"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가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그가 상상 속에서 마음대로 되는 사람이 아니라, 피와 살로 된 진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호주에서 가장 핸섬하고 영리하며 성공한 정력적인 남자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어떤 여자라도 차지할 수 있는 남자. 멍청한 비서의 전략에 떨어질 남자가 아니다. 괜스레 바보 같은 제안을 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다. 종내는 그가 껄껄 웃을 테고....
그리고 만에 하나 그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쳐도 그는 우선 그 이유를 알려고 할 것이다. 요즘 여자들은 원한다면 자유로이 상대를 구할 수 있다. 굳이 상관을 위협할 것까지도 없이.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그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쉽게 캐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그의 앞에서 사라져 주어야 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가이는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를 같은 사무실에 두는 것에는 취미가 없는 남자다. 모르긴 몰라도 그를 사랑했다가 해고당한 비서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녀의 대담한 프로포즈에 대한 열의는 공상 속에서 꺼지고 말았다. 잘됐지 뭐.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그럴 배짱도 없을 테니까.
"네, 가이. 왜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말투가 심상치 않군. 이봐요, 샘, 무슨 일일지 말해 봐요. 신경 쓰여서 월요일까지 기다릴 수 없소. 내가 나 모르는 새에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요? 제발 말해 봐요"
잘못을 안 해서 탈이죠. 그녀는 내심으로 비참하게 중얼거렸다. 왜 당신은 보통 상관들처럼 비서한테 집적거리지 않는 거죠? 왜 날 저녁 먹자고 꼬여서 어디론가 데리고 가지 않는 거죠? 난 주저하지 않고 따라갈 텐데. 정말 주저하지 않고.
"무슨 잘못은요? 당신은 상관으로 모시기엔 완벽한 신사였는데"
"그럼 대체 뭐 때문이오, 젠장!"
"말했잖아요. 내 인생의 변화를 갖고 싶다고. 그리고 시드니를 떠나고 싶어요"
"아, 알았어. 남자 때문이군, 그렇지?"
그녀는 망설였지만 솔직한 것이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요, 가이. 남자 때문이에요."
"문제가 뭔데? 그 남자는 당신을 바라는데 당신은 아니다. 그런 거요, 아니면 그 반대요?"
"그 반대예요"
가이는 잠시 그녀의 말을 새겨 보았다. "그렇군. 당신은 사생활을 이야기하는 법이 없으니 내가 모를 수밖에. 그래, 그 남자하고는 ,,,, 그게.... 가까운 관계였소?"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왜 노골적으로 그 남자하고 같이 자는 사이냐고 물어 보지 않고.
하지만 가이가 그렇게 물어주는 바람에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도 발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네, 아주 가까운 사이에요."
"망할, 샘. 설마 결혼한 남자하고 사귄 것은 아니겠지?"
"아뇨, 가이" 그녀는 잘라 대꾸했다. "결혼한 남자가 아니에요. 할 것 같지도 않고"
"아, 그거군. 그 악당 녀석이 당신하고 결혼하려 하지 않는 거야"
"죽었다 깨나면 모를까요"
"그렇다고 완벽하게 좋은 일자리와 시드니를 떠날 이유는 되지 않소"
"아니, 돼요"
"당신을 설득할 거야"
"해보세요. 그동안 난 새 비서 후보들을 면접할 약속을 해놓을 테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마시지" 가이는 으르렁거렸다. "정 새로 써야 한다면 월턴 부인을 쓸 테니까. 적어도 그녀는 내가 이미 아는 사람이니까. 상관은 물론이고 모든 걸 쥐고 흔들려는 비서는 질색이야"
"부인이 좋아할 거예요. 당장 전화를 걸죠"
"그러지" 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맙소사, 샘. 병원이란 정말 사람 기죽이는 곳이야"
"아버지는 어떠세요?" 그녀는 진정 걱정이 되었다.
"별로 좋지 않아. 내일 아침으로 수술 시간을 잡았어. 토요일인데 이례적이지. 생사가 걸린 문제가 아니면 토요일에는 수술을 하지 않잖소. 희망적인지 않아."
"최상의 치료를 받으실 거예요" "그렇겠지. 하지만 낙관할 수는 없소"
"그럴 만큼 노령도 아니 시잖아요. 50대 후반이시던가요?"
"57세요. 하지만 오랫동안 몸을 함부로 굴리셔서. 운동도 안 하시고... 술에 여자에..."
사만사는 지금은 담배 이야기를 말자고 생각했다. 가이부터가 지금쯤 수화기 저편에서 너구리를 잡듯 연기를 내뿜고 있을 테니까. 긴장하거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 그의 버릇이다.
"임종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는 게 지금의 내 생각이오. 맘에 안 들어, 정말 안 든다고"
그는 너무나 풀죽은 음성이다. 사만사는 죄책감이 들었다. 하필 이런 때에 사표를 내밀다니. 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오늘 아침 일이 있은 뒤니까 더욱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겠지. 이렇게 도망가는 게 비겁하면 비겁하래지. 할 수 없다.
"내가 도울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보통 비서 같으면 그에게 가정부도 없는 이 마당에 요리라도 해주겠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오늘만 해도 가이에 대한 감정이 위험 수위를 넘었다. 언제까지고 감정을 누를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하다. 사무실에서도 제정신 차리기 힘든 판에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려 재앙을 부를 수는 없다.
"없소. 내 비서로 계속 있는 것밖에는"
"제발, 가이, 그건 포기해요"
"알았소"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하지. 그럼... 월요일 아침에 봐요" 그는 전화를 끓었다.
월요일 아침이라.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사흘 시간이 있다. 그 동안 다시금 단단히 감정을 다스려 놓아야 한다.
3
월요일 아침에도 그녀는 가이를 만날 수 없었다. 화요일에도. 가이의 아버지가 받은 수술이 기술적으로는 성공했지만, 회복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의식 없는 상태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가이는 사무실에 전화걸 때만 빼고 병실을 떠나지 못했다.
"아버지의 전 부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군" 화요일에 가이는 전화로 투덜댔다. 오후 네 시 15분이었다.
"피곤한 목소리군요, 가이" 사만사는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 "집에 가서 하룻밤 푹 자지 그래요?"
"안돼요"
"왜요"
"아버지가 날 필요로 하시니까"
"하지만 의식이 없으시잖아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왜 없소. 말을 걸어 드릴 수 있지. 아버지가 회복되시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 드릴 수 있고. 의식이 없는 환자들이라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다고 책에서 읽었소"
"나도 읽었어요"
사만사는 다 큰 남자가 자기 아버지를 그처럼 사랑하다니 감동적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가이의 옆에 있어 주고 싶다. 어려운 시기에 그에게 좀 더 개인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 하지만 비서란 그런 역까지는 맡지 않은 것이 통상이다. 대신 그녀는 그가 없는 동안 사무실에서 일을 함으로써 그를 돕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순회공연에 필요한 예약을 해뒀어요"
"벌써"
"월턴 부인이 도와주었어요. 물론 시민회관은 못 빌렸지만. 벌써 1년 예약이 찼다잖아요. 경마장에서 해야 할 것 같아요. 야외라 비 올 때에 대비해야겠지만. 아, 그리고 TV에서 프랭키를 고정적으로 출연시키고 싶어 해요. 지난 주에 게스트로 출연한 게 히트했나 봐요"
프랭키 마이어스는 가이가 매니저를 맡고 있는 유일한 코미디언이다. 가이는 록 가수나 그룹을 주로 맡아 관리해 주고 있으니, 프랭키는 특별한 경우인 셈이다. 월남 참전용사였던 그는 클럽에서 1인 개그를 했었지만 알코올 중독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었다. 가이는 우연한 기회에 술을 끓고 새사람이 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그를 설득했다.
프랭키는 가이의 말대로 술을 끓었고, 가이는 그의 매니저 역을 맡아 그의 코미디 재료를 개발해 주었다. 이제 인기 있는 주간 쇼 프로그램에 고정적으로 출연하게 되었으니 프랭키는 앞날이 열린 셈이다.
"그거 근사하군" 가이의 목소리에 미소가 배었다. "그에겐 기회를 주어야 해. 가없은 프랭키"
"당신이 돕지 않았다면 못 해냈을 거예요"
"그렇지" 가이는 겸손하고는 거리가 멀다. "또 보고할 것 없소? 언제 사무실에 돌아갈지 모르겠지만..."
"걱정 말아요. 월턴 부인하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정말 귀한 여자야, 샘. 나중에 봐요."
사만사는 전화를 끊으며 가슴이 철렁했다. 오, 가이..., 당신은 날 좋아하죠. 좋아하는 것 알아요. 좋아하다는 것은 기회만 닿으면 사랑으로 변할 수 있다는 의미고.
망할! 그녀는 분노가 밀려왔다. 왜 난 자그마한 몸집에 금발로 태어나지 못한 걸까?
얼마 후 그녀가 퇴근하려는데 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또 나요, 샘. 무슨 일인지 맞혀 볼 테요? 아버지가 의식을 찾으셨어. 회복되실 것 같아!"
그녀는 떨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잘됐군요, 가이. 정말 기뻐요"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하겠소. 아니, 일찍은 아니지. 열한 시경에. 잠을 좀 자둬야겠소."
전화를 끊은 그녀는 얼굴에 바보 같은 미소를 피어올렸다. 가이의 행복이 그녀의 행복이었으니까.
잠시 후, 아직도 축축한 시드니 거리로 나서며 그녀는 불안스레 중얼거렸다. 가이를 못 보는 날이 오면 난 무슨 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대답이 없었다.
사무실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가이의 아버지도 빠른 차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의식이 돌아온 지 2주만에 퇴원해, 가이의 집에 가는 것을 거절하고 가정부 겸 간호사를 고용해 자신의 옥상 아파트로 돌아갔다. 마틴 헤이우드는 건축공법의 혁신적인 발명으로 재산을 모아 돈이 아쉬운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만사는 아버지가 회복된 이 마당에도 가이가 뭔가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 곁을 떠나지 말라고 계속 설득했던들 그녀는 자신이 그의 고민거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곧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거의 잊은 듯했다. 종종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 보면 가이는 창가에 서서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걸면 그제서야 돌아섰지만, 그녀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는 데에 또 시간이 걸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사업에도 관심이 없어진 듯했다. 그가 관리하던 사람들을 불러 다른 매내저를 찾아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사만사는 그 역시 몸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묻기가 망설여졌다. 그는 괜한 수선을 싫어하니까. 그녀는 그의 문제가 신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물론 그것이 섹스에 대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가 특히 멍하게 보이던 어느 날 오후,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섹스의 결핍 때문이라고 해도 좋고. 그는 어느 때보다 담배를 많이 피우고 있다. 새로운 금발 머리 여자를 사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사귀고 있다면 그녀가 모를 리 없다. 여자들은 그에게 전화하고, 점심 데이트를 핑계로 회사에 들르고, 자그마한 선물을 보내곤 했으니깐. 희한하게도 그가 사귀는 여자들은 그에게 선물 주기를 좋아했다. 그 반대의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이가 여자에게 꽃을 보내는 것은 보지 못했다.
분명 요즈음 그에게는 밤을 달래 줄 여자가 없다.
잠을 못 자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가이의 고민이 뭔지 알아낸 것은 그녀가 사직서를 낸 지 4주일째 되는 목요일이었다. 월턴 부인이 견습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고 난 뒤 사만사는 예약 확인 서한을 읽던 참이었다.
"커피 좀 들겠소?" 가이가 자기 사무실에서 나오더니 그녀의 책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네, 고마워요"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오늘 그가 얼마나 핸섬해 보이는지 깜빡 잊었었다. 감색 슈트에 엷은 푸른색 셔츠 차림으로 푸른색 때문인지 그의 눈동자가 더욱 푸르게 보인다.
그가 주방으로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녀는 문득 그가 양복 말고는 다른 것을 입은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시대 조류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관습적인 행동이다. 더구나 그의 배경을 생각하면.
한때 그는 록 밴드의 드러머로 활동했다. 그의 아버지는 대단히 못마땅해 했다. 가이는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하면서 밴드를 조직했는데, 밴드가 성공적이라 학위는 따지 못하고 말았다. 10년 후 밴드가 깨지자 그는 자신의 재능과 영리함을 살려 연예업 경영을 택했고 아버지의 찬성을 얻었다.
사만사는 그가 늘 양복을 입는 것은 그의 고객들에게 자신의 록 연주인 시절은 과거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유야 어쨌든 사만사에게는 늘 황홀한 모습이었다.
가이는 머그 잔 두 개 중 하나를 그녀에게 건넨 뒤 그녀의 책상 끝에 걸터앉았다.
"고마와요" 사만사는 인사를 차렸다. 이렇게 가까지 있으면 그에 대한 촉각이 날을 세운다. 하지만 한 달만 더 버티면 이런 종류의 고문도 끝이다. 그녀는 커피를 마사며 속으로 중얼겨렸다.
"알려 줄까, 샘?"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인생이란 망할 물건이오?"
"그래요" 그녀는 그의 말에 놀랐다. 비관적이거나 염세적인 것은 가이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는 늘 오만하다고 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원 뒤로 평소의 그가 아니다. "왜 그런 말을 해요?"
그는 커피 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또다시 창가에 가서 등을 돌리고 섰다. "고민이 있소" 낮고 주저하는 기색마저 보이는 어조다. "경치게도 어려운 고민" 그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자조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당신에게 하는지 모르겠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소. 얼빠진 고민이고, 말도 안되는 거요. 해결책도 없지. 문제는 그 고민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거요"
"뭔지 말해 봐요" 그녀는 채근했다. "그럼 마음이라도 홀가분해지잖아요. 당신이 뭔가로 고민하고 있는 것을 내가 눈치챈 거 몰라요?"
그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그런 말 안했잖소?"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그만두는 일 때문인가 했죠" 그녀는 다른 이유를 짐직한 것은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육체적으로 외로워서 그러는 것 아니냐는 이유.
그는 초조하게 자신의 이마를 문질렀다. "그게 아니오. 당신이 그만둔다면 그만두는 거겠지. 나로서는 못마땅하지만 그렇다고 벽에 머리를 부딪히며 고민할 생각은 없소. 그리고 당신은 뭔가를 결심하면 그대로 철벽이 되고 마니까."
그녀는 그의 말이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뭐예요?"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은... 아이를 갖고 싶소"
사만사는 자신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에 하늘에 대고 감사했다. 뜨거운 커피를 입에 대는 중이 아니었다는 것도. 잔을 떨어뜨릴 뻔했으니까. 간신히 손가락에 힘을 주고. 잔을 잡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아이를 원한다고요" 그녀는 실제보다 덜 놀란 얼굴을 하려 애쓰며 그의 말을 되뇌었다.
"그래요, 아이. 아들이건 딸이건. 아버지가 돌아가실 뻔했을 때 난 깨달았소. 아버지가 없는 내 인생이 그 얼마나 공허할 것인가를. 하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오. 아버지가 가시고 나면 내가 죽든 말든 상관할 사람은 이 천지에 하나도 없게 되오" 그는 그녀는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눈에 눈물이 어린 것을 그가 보리라 확신했다. 가슴속에서만 간직하던 그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자기 얼굴에 씌어 있으리라고.
하지만 그는 보지 못한 초조한 어조로 말했다. "미친 생각인거 알아요. 하지만..." 그의 눈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 보고 겁에 질린 양.
그녀는 몰래 전화기의 코드를 뺐다. 그 무엇도 지금 이 대화를 방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이가 갑자기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가 미친 것 같소?"
"아뇨" 그녀는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했다. "자손을 남기려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에요. 아주 정상적인"
그의 얼굴이 놀람으로 빛났다. "그래, 그렇지. 정말 그래, 안 그렇소?" 그는 그녀의 말에 흥분한 모양이다. "음식이나 섹스를 원하는 것만큼이나 근본적이지" 그는 웃었다. "하긴 섹스의 근본 동기가 생산에 있으니까"
사만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야기의 방향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숨가쁜 기대로 그녀는 의자 끝에 떨어질 듯 걸터앉아 있었다.
가이는 창가에 버티고 서더니 다시 홱 돌아섰다. 그의 표정은 낙담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당신도 내 고민을 알겠지? 내가 어떤 남자인지 알잖소, 샘. 결혼은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 난 평생 한 여자하고 잘 생각이 없단 말이오. 6개월말 버티면 아마 지루해 미칠 거요. 그렇다고 아이만을 이유로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소. 이혼으로 끝날 것 빤히 알면서"
사만사는 쉽사리 그의 말을 인정했다. 지금까지 그의 생활이 그랬다. 그가 사랑이 없는 섹스란 결국에는 싫증 난다는 것만 알아줘도 좋으련만. 하지만 그 말을 입에 올리지는 않앗다. 그의 다음 말에만 정신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안하고 소위 사생아를 만드는 것도 그래" 그는 손을 내저었다. 그 부모 되는 사람들의 사랑이 깨지면서 어떻게 되지? 아이한테는 이혼이나 마찬가지로 타격이오, 그리고....' 그의 어조는 신랄했다. "난 평생 사랑을 해본 적이 없소. 솔직히 그게 다행이고. 사랑이란 현명한 남자들마저 멍청이로 만든다니까"
여자는 어떻고요. 사만사는 속으로 신음했다.
"그래서 결혼이나 사생아 계획은 몇 주 전에 집어지웠소. 그랬더니 두 가지 방법이 남더군" 그는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우선 대리모를 사서 인공수정으로 아기를 낳게 해서 넘겨받는 방법이오.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해요. 여자가 마음을 바꾸어서 아기를 빼앗아갈 수도 있잖소. 난 내 아이를 감정의 희생물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의 이를 가는 한 어조에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이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거리낌없는 것이었으므로 그를 이렇게 분노에 차게 한 책임은 그의 어머니 탓일 거라고 짐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난 인공수정이라는 것이 역겨워요. 낭만적이랄지 모르지만, 난 정상적인 방법으로 내 아이를 갖고 싶소, 실험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남자가 맡을 수 잇는 가장 중요한 책임, 즉 아버지라는 책임을 맡을 거라면 처음부터 인간적으로 개입하고 싶소. 그애는 내 아이니까!"
사만사는 놀라 가이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입에서 책임이라는 말이, 다구나 그렇게 열정적이고 애정에 찬 어조로 나왔다는 자체가 놀라웠다. 누가 될지는 몰라도 그의 아이는 운이 좋은 아이다. 가이가 애정을 바쳐 사랑해 줄 게 틀림없이 보이니까.
한순간 그녀는 불가능한 상상을 머릿속에서 즐겼다. 어찌하다 가이가 자신이 내내 그녀를 사랑해 왔다는 것을 깨닫고 결혼을 신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애타게 바라던 아이를 얻는다. 그녀는 한숨을 누르고 다시 가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은 것은 두 번째 방법밖에 없지. 내 고민의 마지막이자 확실한 해결책" 그의 어조는 다시 냉소적이 되었다. "내 아이를 낳아 줄 친절하고 협조적인 독신녀를 찾는 거요. 내가 아이를 기르는 데에 협력하게 해주고 경제적인 것말고는 다른 요구를 하지 않을 여자를. 동화 같은 이야기지?" 그는 절망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런 여자를 찾아봐 줘요, 샘. 그러기만 하면 내 전재산을 당신에게 줄 테니까"
사만사의 심장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반대였다. 미친 듯이 움직였다. 방금 그 말 들었어? 이건 기회야. 네 무모한 꿈이 현실로 나타난 거라고.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아. 현실이 생각을 가로막았다. 가이는 지금 사랑과 결혼을 제의하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그의 육체 일부분과 아기를 제공하는 거잖아! 그건 그와 너를 평생 묶어 둘 끈이라고.
지금까지 희망해 온 이상의 것이다. 훨씬 이상이다. 그렇게만 되면 자존심도 긍지도 고스란히 지킬 수 있다.
이제 용감히 제의하기만 하면 돼....
하지만 그런 대담한 제의를 성공시키려면 우선 아주 차분해야 한다. 초인적으로 차분하게. 조금이라도 감정적인 틈새를 보였다간 가이는 널 산 채로 매장하고 말 거야.
"그 진철하고 협조적인 독신 여자가...." 그녀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가슴이 요란하게 뛰어 그의 귀에 들릴 거만 같다. "꼭 금발이어야 하나요?"
그의 날카로운 푸른 눈이 그녀의 눈과 얽히더니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날 잘 아는군, 그렇지? 하지만 그건 너무 큰 희망사항이겠지. 그런 천사 같은 여자가 내 기호에까지 맞는 것을 바라다면. 안 그렇소?"
"그렇다면..., 난 어때요?" 그녀는 마침내 말했다. 초인간적인 정도로 차분한 어조에 스스로도 놀라면서. "나도 될까요?"
가이는 그녀의 말에 경악한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어 그는 그녀의 최악의 우려를 적중시켰다.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이 나타났는지 그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이맛살을 찡그렸다. "맙소사, 샘. 당신 진심이군?"
그녀는 제정신을 차리고 무심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진심이죠. 난 맘에 없는 말을 안해요. 당신은 맘에 없는 말도 하는 것도 같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내 제의가 그렇게 우스울 리 없죠. 당신은 지금 당신의 그 너무나... 비정상적인 제의를 받아 둘 여자가 나타났다는 데에 하늘에 대고 고마워해야 한다고요"
그는 다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잘 아는 사람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짓을 했을 때처럼. "하지만 당신이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그가 다그쳤다. "납득이 가지 않아.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것 뭐지?"
그녀는 일어나서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것은 그녀의 유일한 기회다. 양손으로 꽉 잡아야 한다.
"난 늘 아이들을 갖고 싶었어요" 그녀는 솔직히 말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결혼할 생각도 없으니, 내가 아이를 가질 기회는 희박하잖아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하고 결혼할 생각도 전혀 없어요. 그런 확실해요"
"말도 안되는 소리!" 가이는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젊어. 이제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될 거야"
"아뇨" 그녀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당신 말대로 난 철벽이잖아요.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거예요. 적어도 오랫동안은. 그리고 난 그렇게 젊지도 않아요. 난 스물다섯살이고 곧 스물여섯 살이라고요. 아이를 가질 거라면 얼른 가져야 해요. 나 역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는 것 인정하죠. 그리고 작은 시골 마을이라면 감히 생각도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런 대도시에서는 다르죠."
그는 말 그대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놀랐군요. 나 역시도 놀랐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 둘을 위해 그게 완벽한 해결책일 거예요. 우리는 이미 서로를 좋아하고 존중해요. 친구로서. 그리고 난 당신이 어떤 남자인지 알아요. 내가 아기를 가지고 나면 당신은 전의 자유로운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질 거예요. 물론 그때까지는 다른 여자가 있어서 안되다고 요구해야겠지만..."
그의 푸른 눈이 충격으로 커지기만 했다. 하지만 사만사는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냉정을 잃으면 가이는 틀림없이 뭔가 수상하다고 눈치 챌 것이다. 맙소사, 내가 정말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일까?
원하는 것을 추구할 뿐이야. 사랑에 병든 그녀의 심장이 속삭였다. 이 기회를 놓치면 넌 평생 후회할 거라고. 그녀는 등을 꼿꼿이 폈다.
"물론 당신도 이미 말했지만, 경젝적인 면에서는 당신이 내 장래를 보살펴 줄 거라고 믿어요. 그렇게 되면 당분간은 시드니에 계속 있을 작정이고요. 적어도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는. 그 후에는... 그거야 누가 알겠어요. 한 번에 한 가지씩 해나가는 거죠" 그녀는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가이? 당신 의견은요? 좋은 생각이에요, 아니면 별로예요?"
사만사는 마음속에서 일고 있는 긴장과 기대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이런 일은 이례적인데다가 추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저앉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가이를 사랑하니만큼 하회적인 관습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가이는 눈을 깜빡였다. 다시 한번. 그러곤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하게 말하지. 정말 놀랐소. 뻗을 지경이야."
"그런 것 같군요." 그녀는 조금 냉소를 달아 대꾸했다.
"하루 생각해 볼 시간에 필요해요? 아니면 한 달? 내가 그만두기 전까지는 한 달 여유가 있어요?"
"맙소사, 꼭 그렇게 냉정하게 말해야 하나? 우린 지금 사업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거요. 아이를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같이 자야 한다는 것 상기시켜도 되겠소? 한두 번, 아니면 더 여러 번 일수도 있소."
그녀는 온몸이 떨렸지면, 그는 눈치 채지 못한 듯싶었다. "알아요. 시골에서 자랐으니 아이 낳는 과정을 모르진 않아요."
그의 눈에 비난의 빛이 떠올랐다. "맙소사, 우린 울타리 옆에서 새끼를 만드는 양들이 아니오. 인간이라고. 감정도 감각도 있는. 여자하고 사랑을 나누려면 난 그럴 마음이 있어야 하오. 기계처럼 되는게 아니라고. 시늉으로 되는 게 아니란 말이오, 망할!"
사만사의 온몸에 한기가 흘렸다, 본론은 이거였다. 결국 거절이다. "내가 그렇게 매력 없어요?" 그녀는 상한 마음을 감추지도 않고 물었다. "나하고 사랑을 나누는 게 불가능할 만큼?"
그는 불편한 얼굴이었다. 당혹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의 눈이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그러더니 그녀의 어깨 아래로 눈길이 내려갔다.
재킷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그의 눈이 훑는 데 따라 불편하게 따끔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용감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 숨을 토해냈다. "내 말은 말이오, 샘, 난 당신을 그런 성적인 의미로 바라본 적이 없다는 거요. 그렇다고 당신이 매력적인 여자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오. 물론 당신은 매력적이야. 나도 장님은 아니니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쉽사리 당신을 침대로 끌고 갈 수 있소. 하지만..."
"됐어요, 그럼" 그녀는 얼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당신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원한다면 그래야죠. 당신의 다른 조건을 채워 줄 매혹적인 금발 여자를 찾을 가능성은 별로 없으니까"
그는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철저히 생각해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당신은 그 남자가 당신하고 결혼하지 않는다니까 보복으로 이러는 것뿐이야. 진심으로 당신의 제의에 고맙고, 당신이 좋은 어머니가 될 테니까. 더 이상 적합한 여자는 바랄 수도 없어. 하지만 당신은 후회할 거야. 당신 같은 여자는 정상적인 결혼을 하고,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할 남편을 가져야 해."
맙소사.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계속 이러면 난 울어 버리고 말 거야. 정말.
"후회 안 해요." 그녀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정말 바라는 일이에요. 당신이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게 유감이군요."
그녀의 잠긴 목소리에 그가 날카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침을 삼키고 차분한 얼굴을 해보았다.
그녀는 가이가 망설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심스러워하는 것도. 그는 예리한 남자다. 때문에 그는 뭔가 자기가 모르는 배경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나도 유감이오, 샘. 하지만 당신이 성급하게 제의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이봐요..., 아무래도 오늘밤 생각을 좀 해봐야 하겠소" 그는 주저하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그녀의 온몸에 실망이 퍼졌다. 가이는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고, 그 자리에서 결정을 하는 남자다. 생각해 보겠다는 말은 부드럽게 거절한다는 뜻이다.
"좋아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가이는 돌아서서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사만사는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천천히, 너무나 천천히 뺨 위로 흘러내렸다.
4
다음날 아침 그녀는 긴장 속에 잠이 깼다. 잠을 설쳤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이옷 저옷 입어 보느라 꼬박 한 시간을 보낸 끝에 그나마 섹시해 보이는 옷을 골랐다. 아무것도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화가 나 아무거나 손에 닿는 것을 골랐다. 검은 샤넬 스타일의 슈트로, 검은 줄무늬가 있는 흰 블라우스의 목에는 리본이 달려 있었다. 머리를 평소처럼 뒤로 넘기고, 화장도 두드러지게 하지는 않았다. 향수는 원래 직장에 갈 때는 하지 않는다.
아침식사와 집안일도 생략한 채 출발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여덟 시 30분이었다. 너무나 이른 시간이다. 따스한 햇살이 창으로 들어왔다. 불길한 징조 같았다. 이런 화창한 날씨에 허튼 짓을 할 마음을 먹는 사람이 있을까. 인생이란 그렇게 인심이 후한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드니 냉소적인 되나 봐"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고 커피를 준비했다.
아홉시 30분이 되자 그녀는 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지만 눈은 연신 벽시계와 문을 바라보며 가이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열 시에 그의 회계사인 롤프 웨더링턴과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수단을 부리는지는 몰라도 가이는 만날 사람을 꼭 이쪽으로 오게 하지. 자신이 가지는 않는다.
자기의 소신을 밀고 나가는 그의 능력에 그의 사업동료들은 경외감을 갖는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사만사는 더욱 초조했다.
사람이란 모두 한두 번 실패를 겪어서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가이를 상대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그것을 해주지 않는다. 가이가 치밀하게 짜인 그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세계에 안주할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아울러 그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리라 믿는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이다. 그가 아버지가 되기를 바라는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테니까. 지금쯤 그는 충분히 깨달았을 것이다. 일단 자기 아이의 엄마가 된 여자라면 다른 여자친구를 차버리듯 쉽게 차버릴 수는 없으리란 것을.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없는 여자와 얽히는 것은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리모 쪽이 그에게는 더 어울리는 방법이다. 그가 그 방법에 신뢰를 갖기만 하다면.
그가 자신의 제의를 거절하리란 생각에 그녀는 안심하는 기분도 일부 있었다. 가이와 사랑을 나누고 싶고 그의 아기를 갖고 싶지만 공상이 현실로 되었을 때는 실망스러운 경우가 종종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가이 역시 형편없는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
어리석은 소리. 냉소가 돌아왔다. 자기 아버지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라고. 가이의 인생에서 꾸준하고 안정하고 강한 그 무엇이 있다면, 그거 바로 아버지와의 관계다. 때문에 그는 자기 아이에게 역시 똑같은 헌신으로 대할 것이다.
알고 보면 그가 침대에서는 형편없을 수도 있어. 그녀는 그의 거절에 실망하지 않을 근거를 찾으려고 애썼다.
하늘이 뒤집히면 그럴 수 있지. 냉소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사귄 여자들이 그를 잠시도 가만 놔두지 않는 것을 보고서도 그래?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곤 했잖아.
여자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사준 선물들은 또 어떻고.
모두 너 같지는 않아. 이 멍청한 아가씨야. 넌 만족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잖아. 아니, 애초에 섹스에 대해서는 변변히 아는 것이 없잖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옛날 노먼과의 에피소드는 예외로 하고라도 그녀의 경험은 꼽을 만한 것이 없다.
보니 이모의 도움으로 용모에 자신감을 찾은 그녀가 시드니에 온 것은 열 아홉 살 때 였다. 시드니에서 그녀가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첫 번째 데이트에서 갈 데까지 가려고 안달을 부렸다. 하지만 그녀가 받은 가정교육은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사랑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들은 사랑 비슷한 것조차 없이도 육체관계가 가능했다. 그것을 배우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정중하고 단호하게 하룻밤 상대는 싫다고 말하는 그녀를 못마땅해했다.
결국 그녀는 드물게 한 번씩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이 사람이다 하는 소리가 들리는 상대가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그 동안 따분한 접수계원 겸 비서로서의 일자리를 떠나 가이의 보좌역으로 자리를 옮겼고 가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그나마 몇 명 있던 남자친구들도 주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동안은 막연한 희망을 품는 것으로만 만족했다. 하지만 속절없는 희망에 지친 끝에 어느 해 여름 휴가여행을 떠난 그녀는 다른 남자와 정열을 불태워 보았다. 순전히 가이를 잊으려
는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남자를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도 잘생긴 남자로. 하지만 막상 본론에 들어가려 하면 도저히 해낼 수가 없었다. 남자의 손이 닿으면 그게 가이의 손이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눈물을 터뜨리고 방을 뛰쳐나왔다. 다음날 자존심 상한 남자가 다른 여자를 골라 새로운 여행 파트너로 삼은 것을 보고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결국 맥만 빠진 채 시드니로 돌아왔었다.
하지만 그 경험으로 그녀는 자신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정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사랑이 있어야 가능했다. 진실하고 깊은 사랑이.
그후로 그녀는 데이트를 포기하고 일에만 몰두했다. 가이를 향한 자신의 희망이 번번이 깨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오늘 그의 거절은 마지막으로 희망을 끓어 버릴 것이다.
전화벨이 울렸다. 사만사는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가이가 사무실에 들어설 때 다른 사람과 통화하고 있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 빨리 거절의 말을 듣고 싶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잖은가.
그녀는 초조하게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헤이우드 프로모션입니다."
"안녕, 사만사. 나야, 리사"
그녀는 속으로 신음했다. 리사는 그녀의 아래층에 사는 친구인데 못 말리는 수다쟁이다. 20대 후반으로 아직 미혼인 그녀는 관공서에서 일하는데, 심심하면 사만사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하지만 아침 아홉 시 35분은 제아무리 리사라 해도 심심하기엔 적당치 않은 시간이다. 무슨 부탁이 있어서 건 것이 분명하다.
"안녕. 무슨 부탁 있어?"
"어떻게 알았지?" 리사가 놀라 물었다.
"그냥 짐작에. 부탁 있는 거 맞지?"
"응, 그래. 실은..."
그때 문이 열리는 바람에 사만사는 온몸이 굳었다. 가이가 들어왔다. 연한 잿빛 슈트에 눈부시게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짙은 갈색 머리는 뒤로 빗겨져 있는데 촉촉해 보이는 것이 샤워를 한 지 얼마 안된 듯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가이의 집은 시내에서 몇 분 거리니까.
그의 투명한 푸른 눈이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하지만 표정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수화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본 그는 그녀 옆을 지나쳐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렇게 좀 해달라고. 괜찮아?"
그제서야 사만사는 리사가 하는 말을 놓쳤다는 것을 알았다. "아.. 저, 전화선이 좋지 않아서 말이야, 리사. 다시 한번 말해 줄래?"
"오늘 퇴근한 뒤에 내 세탁물을 좀 찾아다 주겠느냐고. 퇴근 후 곧장 친구들하고 한잔하러 갈 약속이거든"
사만사는 가이가 움직이는 기척에 신경을 쏟으며 리사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했다. 가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무슨 말을 할 작정일까? 정중히 핑계를 댈까, 아니면 딱 잘라서 거절을 할까?
"아, 참" 리사가 소리쳤다. "요즘 톰을 본 적 없지? 걱정이 돼서 말이야"
톰은 그들이 사는 셋집 건물에서 기르는 집 잃은 고양이다. 수단이 좋아 사람들의 애정을 사는 녀석이다. 음식이나 잠자리가 필요하면 사람들에게 아양을 떨며 몸을 문지르고 마구 야옹거린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콧대를 세우고 가버린다.
"그 악당 녀석 말이지" 사만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바람에 가이의 일이 잠시 잊혀졌다. "걱정할 게 뭐 있어. 공짜 음식 생각나고 밤에 같이 누워 줄 사람이 그리우면 돌아올 텐데. 난 사람이 원래 그렇게 생겨 먹어서 그런지 그 녀석이 와서 아양을 떨면 그만 달라는 대로 주고 말아."
"나도 그래. 우리 둘 다 고양이라면 마음이 약해지지."
"맞아" 사만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이 나를 이용하는 것을 알면서고 그러니까 더 우습지. 하지만 집에 들여놓고 먹여 주고 나면 쫓을 수가 없어. 제 집인 양 침실로 들어가서 척 드러눕거든. 하지만 다음날 아침을 먹고 나면 달아나기가 바쁘지. 톰은 원래 그런 녀석인 걸 어쩌겠어. 싫으면 관둬라 그거잖아."
그때 사만사는 등을 찌르는 눈길을 느꼈다. 의자에서 몸을 돌리니 가이가 주방 입구에 서서 흉악범을 보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저, 리사" 사만사는 얼른 속삭였다. "이만 끊어야겠어. 윗사람이 찾아."
"날 찾아 주지" 리사가 대꾸했다. "그 남자 정말 근사하더라. 요전날 뮤직 비디오 시상식에 나온 걸 TV로 보았거든. 디너 재킷 입은 모습이 끝내 주더라."
"안녕, 리사" "내 빨래 잊지 마" 사만사는 전화를 끊고 돌아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가이?"
가이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내가 이 귀로 듣지 않았던들 도저히 믿지 못했을 거요?"
그녀는 눈을 깜박거렸다. "믿다뇨?"
그는 양손을 홰홰 저었다. "맙소사, 샘, 난 당신이 내가 만난 중에서 제일 지각이 있는 여자인 줄 알았소. 그런데 맙소사, 톰이라는 그런 건달 녀석하고 어울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단 말이오? 듣자니 건달도 그런 날 건달이 없더군!"
"톰이오?" 그녀는 그제서야 비로소 알아들었다.
"그래, 톰" 가이의 말투에서는 냉소가 뚝뚝 떨어졌다.
"당신을 후려서 정기적으로 당신 침대에 드나든다는 녀석 말이야."
사만사는 가이가 리사와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것을 알자 웃지 않으려 기를 썼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구 웃음이 터졌다.
가이는 경악한 얼굴이다. "미칠 노릇이군. 당신이 위험 천만한 사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을 안 것만 해도 기막힌데, 웃을 때조차 모르는 여자라는 것까지 알게 되다니. 그러고도 당신을 안다고 생각했으니..."
"톰은..." 그녀는 그에게서 더 이상 신경질이 나오기 전에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고양이에요."
가이의 입이 딱 벌어지더니 곧 닫혔다. "고...고양이라고?"
"그래요, 고양이" 그녀는 싱긋 웃었다.
가이의 입이 미소 지으려는 듯 찡긋거리더니 사과의 뜻이 가득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런, 바보같이!"
"누구라도 오해 할 수 있죠" 그녀는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아니야" 가이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당신이라는 사람을 더 잘 알았어야 하는데. 그럴 여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만큼 같이 오래 일했잖소"
사만사는 장난기가 피식 꺼지고 말았다. 그의 말을 들으면, 자신은 구제할 길이 없이 지루하고 따분한 여자 아닌가.
"그럼 난 어떤 여자인데요?" 그녀는 쏘아붙이듯 물었다.
그는 놀란 얼굴이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그녀는 다그쳤다. 화가 나려 했다.
"알고 싶군요. 당신이 왜 어제 내가 한 제의를 거절하려 하는지 그 이유가 설명될지도 모르니까요"
그의 시선에 놀라움이 담기더니 생각에 잠긴 눈길로 바뀌었다. "사실대로?"
"그래요, 사실대로" 그녀의 어조는 팽팽했다.
가이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당신은 뭐라 규정짓기 대단히 어려운 여자요, 샘. 솔직히 밤새 당신 생각을 했지. 내가 당신에게서 제일 찬탄하는 것은 강한 개성이오. 그래, 당신은 개성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당신 말은 틀렸소."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으니까."
흔히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는 표현을 쓴다. 사만사는 그것이 과장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녀는 숨을 쉬려 애를 썼다. 꿈일 거야. 현실일 리 없어. 오, 하느님, 내가 무슨 일을 벌인 거죠?
그녀가 말을 더듬자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설마 마음이 바뀐 건 아니겠지? 안 바뀐다고 철썩 같이 맹세했잖소"
"네...그게" 정신 좀 차려, 이 멍청아. "물론 안 변했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확신 없는 목소리인걸"
"그건..." 그녀는 망설였다.
자신의 기분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다. 통째로 넋이 나갔다는 말을. 온몸이 녹도록 황홀하다는 말을. 너무나 겁이 난다는 말을.
"당신이 거절하리라 확신하고 있었거든요." 그녀는 간신히 다시 말했다. "실감이 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것 같아요"
"정말이오"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우리가 같이 잠자리에 드는 문제에 이르면 너무나 실감이 날 거요. 하지만 어제 당신은 그 점에 대해서는 아주 자신 있는 듯했소. 아니면 밝은 날에 생각하니 나하고의 잠자리가 갑자기 벅차졌나?" 가이는 말하는 동안 그녀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이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분명했다. 일종의 테스트처럼.
그녀는 정색한 얼굴로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기가 꺽인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법 아니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내가 당신에게서 좋아하는 점이 바로 그거지. 허튼 것은 용납 못하는 점. 당신은 현실을 현실 그대로 봐. 자, 그럼 재정적인 면을 토론해 볼까?"
"재정이라뇨?"
"그렇소. 우선 변호사를 불러 당신과의 임시 파트너로서의 계약 서류를 작성하게 하겠소. 헤이우드 프로모션의 세 번째 지분이면 내 아이의 어머니 몫으로는 공평할 것 같은데. 안 그렇소? 즉, 당신에게 매년 여섯 자리 숫자의 수입이 들어온다는 뜻이오. 물론 내게 불행한 사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내 생명보험 수혜자를 당신 앞으로 해놓겠소.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집도 한 채 사주겠소. 내 집에서 멀지 않을 거요. 가능한 자주 아이를 보고 싶으니까. 하지만 집은 당신이 완전히 임신이 된 뒤에 사겠소. 아, 그리고 당신이 원하면 유모건 가정부건 모든 비용을 대겠소. 아기가 태어난 뒤에도 당신이 일을 하고 싶을 거라는 전제에서. 일을 하고 싶을 것 같소?"
사만사는 머릿속이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감정도 소용돌이 쳤다. 일이 정말로 실현되려고 하는 것이다. 아기. 정말로 가이의 아기를 가지게 된다.
"네"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대답했다. "다시 직장으로 돌아오고 싶어요"
"그럴 거라 생각했소" 그는 만사 흡족한 모양이다. "종종 아이를 사무실로 데려와도 좋소. 내가 기꺼이 봐줄 테니까"
사만사는 놀란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가이가 무릎에 아이를 앉히거나 책상 위에서 기저귀를 가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웃음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충격 받은 얼굴 할 필요 없소. 난 좋은 아버지가 될 테니까. 당신이 좋은 엄마가 될 거나 마찬가지로. 공개로 뽑아도 당신보다 좋은 사람은 뽑지 못했을 거요. 자, 이제 좀 더 미묘한 문제인데.... 불가피하게 거론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야. 당신, 피임약을 먹고 있소?"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가이가 그녀에게 오랜 애인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뇨" 그녀는 솔직히 말했다.
그는 놀란 얼굴이다가 흐뭇해했다. "저런, 그거 의외의 선물이로군. 그럼, 뭐 미적거릴 것 없군. 생리는 규칙적이요? 마지막이 언제였지?"
"그게.. 2주일 전이에요"
그는 초조한 얼굴을 했다. "구체적으로 알 수 없나? 임신이란 대충 맞춰서 되는 일이 아니오. 그건 정확한 과학이지."
사만사는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러고는 책상 위의 달력을 뒤적거리는 척하며 냉정을 되찾았다.
"2주 전 일요일이군요"
가이는 아주 흡족한 모양이었다. "타이밍도 기막히군! 그렇다면 다음달까지 시간을 낭비할 것도 없소. 오늘밤에 바로 시작하면 돼"
그녀는 뱃가죽이 조여 왔다. "오늘밤이라고요? 안돼요! 그러니까 내 말은.."
그의 얼굴이 굳어지고 눈빛이 딱딱해졌다. 맙소사,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가이는 일단 마음먹으면 곧바로 해치우고 싶어 하는 성미다.
"무슨 말이오, 안되다니?" 그가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당신하고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그 건달 녀석하고 데이트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있다면 취소해요. 그 녀석과는 장래가 보이지 않으니까. 그리고 규칙을 정한 것은 당신이잖소. 다른 애인은 두지 않기로."
"네, 그래요"
"그럼 된 거 아니오? 그리고 무슨 병이라도 옮을까 걱정할까 봐서 말하지만, 걱정 말아요. 난, 아주 조심스러운 남자니까" 그러면서 그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물론 당신도 그렇겠지만, 그래도 물어는 봐야겠지."
"그런 위험에 처했던 일은 없어요" 그녀는 대답했다. 사실이다. 노먼과의 그 일이 있었을 때도 둘 다 처음이었으니까.
"정말이오?" 그가 다그쳤다. "당신이 사귀고 있는 남자는...."
그녀는 간신히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난... 그 남자와 잠자리를 한 적이 없어요"
그는 놀란 얼굴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잖소"
"아뇨, 가까운 사이라고만 했죠"
가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설마 처녀는 아니겠지, 당신?"
"네, 아니에요"
"다행이군"
사만사는 그의 얼굴이라도 후려치고 싶었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들 그랬을 것이다.
가이가 시계를 보았다. "롤프일 거야. 운이 나쁘지만 방금 기억났는데 오늘 저녁에는 빠질 수 없는 사업상 저녁약속이 있군. 하지만 그후에 만날 수 있소. 아홉 시 30분에는 빠져나올 수 있을 거요. 롤프가 간 뒤에 시내에서 만날 장소를 정합시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경쾌하게 걸어가 문을 열었다. "들어오게, 롤프" 명랑한 어조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해를 보니 좋군, 안 그런가?" 커피 좀 가져다주겠어요, 샘? 비스킷도. 오늘은 할 일이 많아서 힘낼 게 필요하거든"
그녀는 두 남자가 안쪽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가이가 힘낼 게 필요하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것이다. 감정도 마음도 없는 기계 같은 남자가.
왜 자신이 저런 남자를 사랑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사랑한다. 미친 듯이 필사적으로. 그리고 오늘밤에 그녀는 그 사랑을 가장 은밀한 방법으로 보여 줄 것이다.
오늘밤....
그녀는 벽시계를 보고 신음했다. 오늘 하루는 아주 길고 긴 하루가 될 것 같다.
5
그날 저녁 아홉 시 25분에 사만사는 세일러스 샌티라는 레스토랑에 앉아서 가이의 도착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온 것은 10분 전이었지만 가이가 늦은 것은 아니다. 아홉시 30분이라고 했으니까. 그녀도 미리 나올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탄 택시가 쏜살같이 달리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그녀는 레스토랑 안과 옆의 칵테일 바를 둘러 보았다. 가이가 잘 오는 곳이라는 짐작이 갔다. 길목 뒤에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명이 어둑한 곳이라 여자하고 만나기에 좋은 아늑하고 은밀한 분위기였다. 장식도 레스토랑 이름처럼 선원풍이다. 목재 테이블에는 체크 무늬 식탁보가 깔려 있고 여지저기 로프며 그물이며 닻이 걸려 있다. 웨이터들은 모두 선원 복장을 했고, 수석 웨이터는 흰 선장 복장에 모자를 쓰고 있다.
댄스 플로어에서는 피아노를 치는 고혹적인 가수의 노래에 맞추어 한쌍이 붉은 조명 아래서 춤을 추고 있다. 그 몸짓들은 춤이라기보다는 애무 같았다.
특히 착 달라붙어 있는 남녀 한 쌍을 바라보고 있는 사만사는 입안이 말라 왔다. 그들을 보자 자신이 이곳에 와 있는 이유가 새삼 상기되었다. 그처럼 열심히 매무새를 가꾼 이유도. 앞에 놓인 밤에 대한 기대로 온몸이 떨리는 이유도.
하지만 그녀가 하려는 일의 불가피한 결과도 함께 떠올랐다. 가이는 좋은 아버지가 되겠노라고 말했지만, 사만사도 이런 일의 결과가 자신의 장래에 대단한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가이와 사랑을 나누고 난 뒤 그가 다른 여자에게 옮겨가는 것을 보며 견딜 수 있을까?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를 자신의 인생에 들이는 일을 견뎌낼 수 있을까?
웨이터가 옆에 서더니 뭘 마시겠냐고 다시 물었다. 그녀는 재차 거절했다. 너무 초조해 잔을 들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목안에서 뭔가 치밀어 올라오는 듯했다.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오, 가이...가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알고 있어요?
감정이 북받쳐 오는 바람에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얼굴을 숙여야 했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수습했다. 몸을 펴는데 가이가 연기 자욱한 식당 안을 걸어 다가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려니 목이 메었다. 도망갈까 하고 최후까지 망설이던 마음이 사라졌다. 도망갈 수 없었다. 너무나도 그를 원한다. 그를 안아야 한다. 몇 날 몇밤에 불과하더라도. 그러고 나면 그 대신 사랑해 줄 아기가 생기지 않는가.
그녀는 가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지 않으려 했다. 멋진 검정 슈트에 상아색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너무나 핸섬하다. 도시적인 세련됨의 극치를 달리는 그의 모습에서 이마에 흘러내리는 머리칼만이 이미지를 거스리고 있다.
사만사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해 하고 있었다. 만족 이상이었다. 집을 떠나기 직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흥분했었다. 그런데도 가이가 다가와 그녀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하자 사춘기 때처럼 자신이 없어졌다.
"저런 저런" 그는 빈정거리듯 눈썹을 치켜올리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동안 일부러 본색을 감추고 있었군, 피터스 양"
그의 푸른 눈이 평소에는 뒤로 빗어 묶었던 머리를 우아한 웨이브로 늘어뜨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훑었다. 재미있다는 듯이 눈이 빛났다.
사만사는 가이가 재미있어 하리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때문에 기가 꺾였다. 그가 그녀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고 심지어는 흥분해 주길 바랬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시간 준비를 하고 애쓰더니만, 이 멍청아. 그녀는 속으로 자신을 비웃었다.
가이는 전혀 흥분하지 않은 모습이다. 조금 재미있어하는 표정일 뿐이다. 그녀는 실망과 자신에 대한 분노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녀는 간신히 화를 참은 후 그와 장단을 맞추듯 무심한 태도로 어깨를 들썩해 보였다. "그런 TV광고도 있잖아요? 엄숙하고 단정한 비서가 퇴근을 해서는 머리를 풀어내리고 안경과 양복은 벗어던지고 블라우스 단추를 몇 개 끌른 뒤에 향수를 뿌리죠. 순식간에 요부가 탄생하는 거예요"
가이가 쿡쿡 웃었다. "이건 다르지. 우선 당신은 안경을 안 썼고, 머리를 내리기는 했지만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고 있잖아" 그는 몸을 굽히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하지만 향수는 역시 요부 분위기로군. 그래, 아주 좋아"
사만사에게 그 향수병이 있었다면 그녀는 그의 둔한 머리통에 그것을 부어 버렸을 것이다. 아주 좋다고? 그게 칭찬이야, 뭐야? 찬사를 원하는 내 바람을 그렇게 모르나? 난 숨막히게 아름답다고, 그래서 당장 침대로 끌고 갈 생각밖에 없다고 얘기해 주실 바라는걸.
"유혹이라는 이름의 향수예요" 그녀는 괴로운 아이러니 속에 대답했다. 오늘 오후 퇴근길에 그걸 사면서 품었던 희망이 떠올랐다.
희망이라고! 그녀는 체념하고 가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열심히 담배를 빨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 그가 겉보기에는 냉정한 것 같지만 그녀만큼이나 긴장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징조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복수하듯 자존심이 밀려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결심했다. 가이가 편히 처신하도록 돕는 일은 절대 안하겠다고. 아이를 원한건 가이 쪽이다. 그리고 그는 남자고 사냥꾼이고 바람둥이다. 사냥도 바람을 잡는 것도 그의 몫이다.
이기적이고 둔한 사내를 도와 편하게 해주다니, 그런 짓은 안해! 이성이 제대로 박혀 있는 남자라면 벌써 몇 년 전에 날 사랑했을 것 아닌가. 그랬다면 이렇게 말도 안되는 짓을 하지 않아도 되고.
사만사는 복수처럼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무안하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화장실에 가서 머리를 틀어올리고 화장을 지우고 싶다. 그리고 향수는.... 갑자기 그 사향내가 참을 수 없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길어졌다. 어색할 정도였다.
결국 사만사가 먼저 침묵을 깨고 말았다. "저녁식사는 어땠었요? 원하는 계약을 얻어냈나요?" 오늘 저녁식사는 새로 생기는 레코드 회사의 이사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문제없었소."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그녀는 쓰게 중얼거렸다. 가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때가 있었던가.
"오늘밤은 사업 얘기는 하지 맙시다, 샘" 그가 갑자기 말하며 그녀를 힐끗 보았다.
이런 행운을 보았나. 그녀는 놀라 생각했다. 가이 역시 그녀만큼이나 어색해 하고 있다. 기분이 좋았다.
"그럼 무슨 얘기를 할까요?" 그녀는 짓궂은 기분으로 물었다. "날씨 얘기를 할까요, 아니면 경제 얘기를 할까요?"
가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가벼운 농조가 못마땅한 모양이다.
"당면한 문제 이야기를 하지"
이번에는 사만사가 그의 어조에 신경이 거슬릴 차례였다. 사무실에서는 가이가 상관일지 모르지만 오늘밤 두 사람은 평등한 관계다. 파트너로서. 그에게서 명령받지 않을 테다.
"그래요? 당면한 문제는 아닐 텐데요" 그녀는 내쏘았다. "당신이 댄스플로어에서 당장 사랑을 나눌 작정이 아니라면요. 저기 저 커플처럼"
가이는 다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런 장난조는 당신답지 않소. 함께 아기를 가진다는 건 너무나 진지한 문제요"
"나도 잘 알아요"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그 말을 하니까 생각나는데, 흡연은 남자의 생식능력을 저하시킨다는 것 알아요?
입술에 담배를 문 그의 손이 얼어붙었다.
"일을 어렵게 만들거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서로 피하는 바이잖아요?" 그녀는 짓궂게 덧붙였다.
가이는 잡아먹을 듯한 눈길을 보냈지만 이윽고 그 눈에 마지못해 찬탄하는 빛이 스며들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유리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꼈다. 입가에 천천히 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지"
빈정거리는 건지 아닌지 알아내기도 전에 그는 손을 흔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의논도 않고 적포도주와 치즈를 주문했다. 그는 그녀가 적포도주를 좋아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작년에 그가 이탈리아에서 포도주를 선물로 가져왔을 때 그녀가 말했으니까.
웨이터가 가자 가이는 다시 의자에 물러앉아 푸른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우리 집에서 자도 되겠소?" 낮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뜻밖에도 유혹적인 그의 목소리에 뱃가죽이 조여왔다. 하지만 눈을 차분히 내리깔았다. 그리고 낮게 쿡쿡웃어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었다. "잠옷 가방을 챙겨 왔냐는 뜻이라면, 안 가져왔어요"
"없어도 상관없을 텐데. 안 그렇소?" 그가 대꾸했다. 그의 입술에 맴도는 미소는 분명 장난기 어린 섹시한 미소였다.
맙소사, 정말 존경해 줘야겠군. 딱딱거리는 상관에서 순식간에 자신감 넘치고 어지럽게 유혹적인 바람둥이로 변신하다니. 그녀는 그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지면서 뱃속이 요동을 쳤다.
분명 계획이 있을 테지. 확실하다. 언제나 계획 속에 사는 남자니까. 우연으로 일을 처리하지는 않는다. 지금 같은 바람둥이 연기는 분명 그 첫 단계일 것이다. 오늘밤을 스무스하게 보낼 전략의 첫 단계.
적포도주가 도착하자 그녀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하, 이 포도주가 첫 단계이군. 포도주를 먹여 여자의 긴장을 풀어 주고 자제심을 둔하게 한단 말이지. 아니면 은밀한 분위기의 식당을 택한 것부터가 벌써 첫 단계였을까?
그래. 그녀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가이는 오후에 이미 사무실에서 전력을 짜고 있었던 것야. 교활하고 타산적인 악당 같으니. 그러면서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이 식당을 제안하다니.
그녀는 그가 자기 잔에 술을 채우는 동안 테이블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를 향한 분노를 억누르려 애썼다. 가이에게 화를 낼 권리가 어디 있어. 그녀는 속으로 자신을 타일렀다. 넌 두 눈 똑바로 뜨고 가이의 제의를 받아들였잖아.
아니, 처음 이야기를 꺼낸 게 바로 너잖아. 그러니 유치하게 굴지 말라고. 이것이 네 꿈의 완벽한 실현이 아니라는 것은 너도 알잖아. 가이가 로맨틱한 분위기로 만들려 애쓰는 것만도 고마워하라고.
"마침 생각이 간절하던 참인데" 그녀는 잔을 들었다.
"오늘 저녁 당신의 성공에 건배할까요?"
그녀는 사업 이야기를 한 건데, 가이는 짓궂게 눈을 빛냈다. "미리 좋아는 말아요. 아직 침대에 가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이래서는 안된다. 감정 없고 현실적인 사만사 피터스가 얼굴을 붉혀선 안된다. 다행히 조명이 어둑하고 그녀의 화장이 짙어 가이는 보지 못한 모양이다.
"저런, 난 그 걱정은 안해요." 그녀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당신이 어련히 잘 알아서 하려고요. 다녀간 실습을 했을 텐데요 뭘"
그는 그녀의 조롱투를 감지 못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이오. 하지만 오늘밤 같은 일은 처음이오"
"끌리지 않는 여자하고 침대에 가는 게 처음이란 말이겠죠?"
이번에는 그도 그녀의 빈정거리는 어조를 놓치지 않았다. 날카롭게 그녀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가 다시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오, 여자를 임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처음이란 말이오"
그녀는 눈을 피하고 포도주를 들이켰다. 가이의 눈이 자신에게 못박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봐요, 샘"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정 벅찬 것 같으면 그렇다고 말해요. 마음이 바뀐 거라면 그렇게 말하라고, 내일 아침에는 늦어요. 내 아이에 관한 한 수술을 받아 지운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 정말이오"
그녀의 눈과 그의 눈이 맞추쳤다.
그녀의 표정에는 당당한 자존심이 넘쳤다. "내 아이도 마찬가지예요."
두 사람은 서로 한동안 노려보았다.
이윽고 그가 싱긋 웃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니까. 당신은 용기와 기백이 있소. 우리 아이는 괜찮을 거야. 안 그렇소?" 그는 잔을 들었다.
그녀는 목에 뭔가 치밀어 올라왔지만 꾹 눌렀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우리아이라는 그의 말에 소용돌이 치는 감정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기쁨을, 사랑을, 큰 절망을.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끌리지 않는다는 당신 말은 틀렸소"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밤 당신처럼 사랑스러운 모습이라면 어떤 남자도 끌리고 말 거요"
사만사는 턱을 올리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의 말에서는 아무 기쁨도 신뢰도 찾을 수 없었다. 너무 매끄럽고 입에 발린 말이다. 찬사가 너무 늦기도 했고. 그가 그처럼 쉽게 자신을 구슬릴 수 있다고 생각한 데에 실망만 느껴질 따름이다.
"좋아요"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당신이 할 일은 내가 당신에게 끌리도록 하는 것뿐이군요"
작정도 하지 않았는데 그 말이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되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의 놀란 얼굴을 보니 상처입은 자존심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그는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못한 듯했다. 가이 헤이우드. 그는 최고의 연인 아닌가. 시드니 여자들에게 내린 하늘의 선물이고. 열여섯 살부터 예순 살 사이의 여자 중 그의 앞에 무릎을 끓지 않는 여자가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그녀는 그의 놀란 얼굴을 보며 진한 만족감을 느꼈다.
"아, 참 깜박했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석기도 하지. 난 흥분할 필요가 없죠. 그냥 누워서 참고만 있으면 되는걸"
가이는 정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턱이 올라가고 눈이 번들거렸다. 여자가 그를 상대로 가만히 참고 있는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비위가 거슬리는 듯했다.
"나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그렇게도 구미 당기지 않는 일이오?" 그는 퉁명스레 물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기색으로.
"글쎄요, 그보다는 전에는 당신을 성적인 면에서 바라보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두죠"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이젠 그가 괴로워하는 것이 즐거웠다. "난 일과 즐거움을 혼동해 본 적이 없거든요. 당신은 내 상관이지 남자친구가 아니니까요. 당신의 그.. 육체적인 매력은 부인할 수 없지만, 상관을 애인으로 바꾸어 생각하기가 힘들어요" 그녀는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여자란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잠자리에 든다 해도 거기에 감정과 로맨스가 개입되게 하고 싶어 하거든요. 안 그러면 견디기가 좀 힘드니까"
"견디기가 어렵다고!" 가이가 새된 목소리를 냈다
"저런, 가이. 사람들이 보잖아요"그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물론 해야 한다면 억지로라도 좋은 척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척하기가 힘들겠죠. 그래도 걱정은 말아요" 그녀는 활짝 웃으면 잔을 들었다. "기적을 바라고 있지는 않으니까"
그의 노려보는 눈길은 그녀가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입증했다. 가이를 상대로 그런 도전을 하고 무사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잔을 내려놓는 그의 눈빛은 냉정을 찾고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입술에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가 어른거렸다.
"잘됐군" 그가 맞장구를 쳤다. "나 역시 기적 같은 것은 믿지 않으니까. 춤이나 추겠소?"
사만사의 뱃속이 요동을 쳤다. 그녀의 유치한 도전도 이젠 끝이다. 가이가 도전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가이는 절대 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바람둥이로서의 모든 기술과 솜씨를 동원해 {참고 견디다}는 따위의 말은 얼씨도 못하게 하고 말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생각은 아니다. 그는 마음 따위에는 관심 없으니까. 단지 그녀의 육체를 사로잡으려는 생각이다. 철두철미 완벽하게.
그 생각에 그녀는 흥분했다. 그의 승리는 그녀의 승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심장이 뛰고 피가 끓었다. 그거야말로 그녀가 무의식적으로나마 원하던 것이다.
그가 일어서는 것을 보자 그녀는 목안이 말라 왔다. 그의 눈이 섹시하게 가늘어지고 입술에는 유혹하는 미소가 어렸다.
"자" 그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춤을 추자는 그의 제의가 의미심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팔안에 안기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지배력 안에 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가이를 원한다. 그의 육체도 그의 아이도. 하지만 그가 성적으로나 다른 면으로나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욕망의 힘은 너무나 강해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걱정 마. 욕망의 소리가 속삭였다. 생각은 집어치우라고. 네 손은 맡기고 그냥 즐기는 거야.
안돼. 그녀의 손이 그의 손에 놓이는 순간 이성의 소리가 신음했다. 내일을 생각해 봐. 미래를. 일단 그의 아이를 가지고 나면 더 이상 도망갈 길은 없어. 뒤로 물러날 수도 없어. 넌 영원히 그의 것이 되고 말아. 제발 이런 짓을 하지 마. 제발!
그의 단단한 손가락에 맡겨진 그녀의 손이 마지막으로 떨렸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너무 늦었어.... 너무....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온몸을 훑었다. 그녀는 그에게 넋이 팔려 있어서 그의 찬탄하는 시선이 일부러 만든 것인지 의심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만 해도 바람둥이다운 짓이라고 코웃음을 쳤을 그녀였지만 지금 그녀는 가엾은 여자의 심정으로 그의 찬탄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가이는 일어서고 나서야 그녀의 흰 시폰 블라우스를 입은 섹시한 자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된 모양이다. 소매는 넓고 하늘거리다가 손목 부분에서 가늘어지고, 손목과 앞판에는 크리스털 단추가 달려 있다. 지금 가이는 검은 실크 치마바지가 그녀의 늘씬한 몸매와 가는 발목을 완벽히 살려 주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허리에 맨 붉은 실크 스카프에도 넋이 나갔을 거고.
"여자 해적 시절에 입던 옷인가?"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간신히 미소만 짓고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에게 어울리는군" 가이는 그녀를 자신의 팔안에 끌어들였다.
이제 와서 온몸이 얼어붙고 갖가지 불안에 횝싸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불안했다.
가이는 이맛살을 살짝 찡그리고는 그녀의 딱딱한 몸을 댄스 플로어로 이끌었다. 플로어에서 그는 잠시 노력을 해보다가 초조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에는 약간의 협조가 필요한 법이오, 샘" 그는 낫게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의 등에 손을 댔다.
그녀를 끌어당기는 그의 손이 그녀의 차가운 살갗에 화인처럼 뜨거웠다.
"내 목에 팔을 둘러요"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정 그래야 한다면... , 날 당신이 사랑한다는 그 남자로 상상해 봐요"
"난 연기에 능숙하지 못해요" 그녀가 대꾸했다.
"해보라니까"
그녀는 체념조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가 말한 대로 팔을 그의 목에 둘렀다. 손가락 끝이 그의 목덜미 위 따스한 살결에 닿자 온몸으로 전율이 흐르는 바람에 스스로도 놀랐다. 그녀의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긴장을 풀어요" 가이는 낮게 속삭였다. "고삐를 풀고"
그녀는 눈을 감고 노력했다.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 드러날까 걱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가이가 하라는 대로 해. 그녀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렸다. 상상을 해보라고. 가이가 널 사랑하는 척, 널 원하는 척. 이 춤을 앞으로 있을 미친 정열의 밤, 네 모든 꿈의 실현을 향한 서곡인 척해 보라고.
일단 현실을 잊고 공상의 세계로 들어가자 너무 쉬웠다. 그 속에서는 가이가 그녀를 사랑하고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이와 더불어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행동은 자동적이고 자연스럽게 나왔다. 우선 한손을 그의 목덜미에 대고 다른 손가락은 그의 머리칼 속에 찔러넣었다. 손끝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얼굴을 그의 턱 밑에 두고 따스한 입술로 그의 살갗에 부드럽고 축축한 키스를 보냈다. 온몸이 그의 몸에 녹아들었다. 마침내 그녀의 입술이 그의 귀불에 애무했다.
"맙소사" 그는 신음을 하더니 뒤로 몸을 뺐다.
하지만 이미 그녀가 그의 흥분한 육체를 느낀 뒤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만사의 눈동자는 아직도 욕망으로 얼룩져 있었고, 가이의 눈에는 놀람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 남자... 정말 어리석은 작자로군. 그리고 당신도. 그 정열을 그런 남자에게 허비하다니"
"난... 그저..."
"걱정 말아요" 그가 초조하게 대꾸했다. "이젠 당신을 어떻게 해야 흥분시키는지 알았으니까. 나한테도 마찬가지고. 자, 여기서 나갑시다."
6
잠시 후 사만사는 레스토랑 밖에서 택시에 몸을 싣고 있었다. 가이는 스포츠카를 가지고 있었지만 시내에서는 택시를 즐겨 이용했다.
그녀는 좌석에 몸을 묻으면 조금 떨었다.
"춥소?" 차가 출발하자 가이가 물었다.
"조금요."
"자..." 그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끌어당겼다.
사만사는 다시 몸을 떨었다. 이번에는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당신처럼 지각 있는 여자라면 코트를 가져올 줄 알았는데"
"사람이란 누구나 실수를 하게 마련 아니겠어요."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원래의 차갑고 냉정한 그녀의 가면으로 돌아왔다.
사춘기 시절에도 그녀는 아이들의 조롱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괴로웠지만 겉으로는 냉정했다. 어른이 되어서 비록 상관을 사랑하는 실수를 하진 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냉정한 가면을 유지했다. 때문에 그녀의 고민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댄스 플로어에서 가이가 그녀의 벽을 잠시 허물었다. 그 순간 그녀는 겉과는 다른 정열적이고 격정적인 자신의 모습을 찾았다.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진 원래의 그녀의 모습을. 이제 정말 그와 잠자리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 마음속 비밀을 드러내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가이의 은밀한 손길 하나만으로 너무나 쉽게 벗겨지는 가면인 것을.
유일한 희망은 가이와 일을 치를 때 무감각하게 버티자는 생각이다. 냉정하고 차갑게. 그러고는 고맙게도 그가 대준 핑계를 대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와 있는 척하다 보니 그렇다고. 자신의 정열은 가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비밀 속의 애인을 위한 것이라고.
"금방 도착할 거요." 가이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곧 따스한 침실에 갈 수 있소."
그녀의 귀에는 침실이라는 말만 들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야릇한 상상이 제멋대로 펼쳐졌다. 온몸으로 가만히 열기가 펴지기 시작했다.
택시가 가이의 집 앞에 둘러쳐진 높은 담 앞에 멈춰 섰다. 사만사는 상상에서 깨어나 평소처럼 여유 있는 태도로 운전사에게 돈을 주고 있는 가이를 초조하게 노려보았다. 이젠 긴장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지? 내가 당신 대신 분위기 맞추는 일을 해주었으니까. 댄스 플로어에서부터.
"자, 손을 잡아요" 그가 택시에서 내리는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손을 뺐다. 가이는 눈썹을 치키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대신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른 뒤 정문으로 걸어갔다. 열쇠가 이미 손안에 쥐어져 있었다.
사만사는 가이의 집을 여러 번 와보았다. 때문에 우아하고 초현대적인 장식을 보고도 겁먹지 않았다. 가이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이끌고 정문을 통과해 자갈 깔린 길을 걸어 커다란 이중 현관문으로 들어섰다. 이어 윤이 나는 바닥의 홀을 지나고 금속 난간이 달린 계단을 올라가 곧장 그의 방으로 갔다. 그녀가 익히 아는 집안 내부는 이곳까지였다. 침실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까.
그는 방문을 열고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띠고 그녀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고 들어서자 등뒤에서 부드럽게 문이 닫혔다. 한눈에도 그녀는 침실이라는 말이 이 공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크고 화려하고 손님 접대 시설이 완벽한 방을 그저 침실이라고 부르긴 아까웠다. 우선 앞에는 커다란 응접실이 있었다. 은은한 램프며 홈바, 오디오 대형 TV, 비디오 등이 구색을 갖추고 있고, 그 뒤에는 푹신한 소파가 있어 속셈이 들여다보였다. 그 뒤에 이중문이 열려 있고, 문 너머에는 조금 높은 턱 위로 대단한 크기의 침대가 보였다. 침대 너머로는 유리문이 발코니로 통하게 되어 있는데, 발코니에서는 밤하늘과 별이 보였다.
또 다른 열린 문 뒤는 욕실이었는데 보나마나 거품욕조 등 현대적인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번지르르한 침실을 보고 느낀 기분을 감추느라 애를 썼다.
역겨운 마음을 무심한 얼굴 뒤로 감추었다.
하긴 가이가 자기 집을 어떻게 꾸미고 살던 놀라거나 초소를 보낼 권리는 내게 없어. 그녀는 속으로 허심탄회하게 중얼거렸다. 일류 바람둥이에게 이 정도 침실은 당연하지. 연애행각을 즐기려면 이 정도의 우아하고 기능적인 침실은 기본일 테니까.
그 생각에 몸을 떨다가 가이가 바 뒤에서 그녀를 향해 이맛살을 찡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내면의 소리가 들려 왔다. 이봐, 너무 젠체하는 거 아냐? 이런 남자인 줄은 진작부터 알았잖아. 가이가 강제로 다그쳐서 이 자리에 온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가이는 네게 수없이 내뺄 기회를 주었어.
그런데도 넌 여기 와 있잖아. 어찌 보면 이 침실로 그 이유 중 하나고. 여자를 즐기는 능력도 그의 매력의 일부니까. 안 그래? 이 남자의 성격 중 중요한 일부분을 거부할 이유가 뭐야? 위선자처럼 굴지 말고 얼른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가이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알고 마음을 바꾸기 전에.
"당신이 푸른색을 이렇게 좋아하는지 몰랐어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엷은 하늘색 카페트로부터 짙은 침대보에 이르기까지 온통 푸른색이다. "다른 곳은 모두 은은한데"
가이는 샴페인 병을 따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기억날지 모르지만 내가 샀을 때 이 집은 이미 실내장식이 다 되어 있었잖소. 하지만 침실만은 푸른색으로 바꿨지. 휴식을 주는 색이니까."
"이 방에서 얼마나 휴식이 될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은근히 쏘아붙였다.
"무슨 뜻이지?"
"아뇨, 내 생각에도 푸른색이 휴식을 준다고요" 그녀는 소파 뒤로 걸어가 침실 문 앞으로 갔다. 거기서 어색하게 선 채 손가락을 꼬았다 풀었다 했다.
가이는 그녀를 힐끗 보고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괜스레 불안해졌다. 화장 밑의 내 얼굴이 너무 평범하다는 생각? 키가 너무 크다는 생각? 태도가 서툴다고? 데브라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고? 그럴지 모른다. 맙소사. 상상보다 더욱 최악이다. 레스토랑에서 여기까지 시간을 두지 않았으면 차라리 좋았을 뻔했다. 가이가 곧장 본론에 들어가 주면 좋으련만. 마실 것 따위는 생각 없다. 날 안고 키스하고는 거짓말을 해주었으면. 내가 절대 그의 애인 감이 못된다는 것을 잊게 해주었으면.
가이가 샴페인을 따른 잔을 갖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게 있어야 할 듯싶군.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폼이"
"그럼 어떨 줄 알았어요?" 그녀는 그의 둔한 신경에 화가 나 소리를 쳤다. "내가 금요일 밤마다 이러고 다니는 건 아니잖아요"
그는 문득 멈춰 섰다. 눈빛이 딱딱해졌다.
"미안해요" 그녀는 신음하듯 말했다. "바보 같죠. 하지만 당신이 빨리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해요. 기다리는 걸 견딜 수 없어요. 미칠 것 같아요"
가이는 건조한 웃음을 터뜨리면 다가와 그녀에게 잔을 쥐여 주었다. "당신이 내 육체에 안달이 나 있어서 그러는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게 아니라는 예감이 드는군. 당신은 마치 수술대 위에 누운 환자 같아. 빨리빨리 끝내고 싶은 기색이 역력해. 기분 좋은 태도라고는 못하겠군, 샘" 실망스러운 어조였다. "아까 나와 같이 춤추던 여자는 어디로 갔지? 내 목에 키스하고 내 머리칼을 희롱해서 날 핑 돌게 하던 따스하고 육감적인 여자는?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나 줄 것 같아?"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떨리는 손에서 잔을 빼앗아 탁자에 놓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치켰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키스는 없었다. 마침내 눈을 뜨자 가이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더러 오만한 얼간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번만은 내가 다른 사람인 척 상상하지 않고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눈을 뜨고 있어요, 샘" 그는 숨가쁘게 속삭였다. "누구와 키스하고 있는지 보라고. 누가 알겠소? 당신도 좋아하게 될지"
그녀의 턱을 쥔 그의 손가락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멍들 정도로 꽉 쥐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주 단호해서 반대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왔다. 눈길은 그녀의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더니 그녀를 안타깝게 하고 떨어졌다. 그의 뺨이 붉어졌다. 사만사도 냉정을 잃었다. 숨결이 어지럽고 귓속이 윙윙거렸다.
"봤지? 그렇게 나쁘던가?"
그는 고개를 숙여 다시 키스했다. 그의 입술에 좀 더 힘이 더해졌다. 이윽고 그녀는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순간 온몸으로 전류가 흘러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망할!" 가이는 신음하더니 홱 돌아섰다.
등을 돌린 채 서서 무겁고 성난 한숨을 내쉬었다. 샴페인 잔을 든 그는 꿀꺽 마시고 내려놓은 뒤 다시 천천히 돌아섰다.
"좋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화가 났던 기색은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 "당신은 역시 척하는 연기가 필요해. 받아들여야지 별 수 있나. 하지만 눈을 감는 것은 역시 모욕이야. 꼭 상상이 필요하다면 우리 둘 다 흡족스러운 방향으로 해 봅시다. 좋소, 샘?"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멍하니 고개를 끄떡였다. 이 욕망에서 풀려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생각이다. 맙소사, 그의 키스가 깊어졌을 때 그 전율은 온몸이 저릿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나중에 정작 그와 사랑을 나눌 때는 어떻겠는가.
그가 하자는 대로 하자고 마음먹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그가 그녀의 허리에 두른 붉은 띠를 끌러 그것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을 때는 충격이었다.
"뭘...뭘 하는 거예요?" 그녀는 가로막듯 양손을 위로 올렸다.
하지만 그는 양손을 잡아 그녀의 등뒤로 돌렸다. "날 믿어요, 샘"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겁내지 말고"
"하지만 겁나요" 그녀는 속삭였다.
눈앞이 캄캄하고 그의 손이 꼼짝 못하게 붙들고 있자 온몸이 두려움으로 후끈해졌다. 이런 게임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여자가 포로인 양 연기하는 게임. 하지만 자신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아니, 좋아하게 되리라고는. 흥분해 있는 것은 분명했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놓고 양손에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날 믿어요" 그는 그녀의 떨리는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좋... 좋아요"
그의 손이 떨어지자 그녀는 어색하게 서 있었다.
"당신... 뭘 해요?"
"재킷하고 셔츠를 벗고 있소. 더워서"
"오.." 지난번 그가 사무실에서 위통을 벗었던 일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지금 그가 그러고 있는 것을 알자 후끈 살갗이 달아올랐다. 뺨이 타는 듯했다.
옷을 벗는 사르륵 소리가 났다. 설마 몽땅 벗고 있는 것은 아닐 테지? 벗었어도 가운만은 입고 있겠지.....
안 보인다는 것이 갑자기 참을 수 없어졌다. 그가 뭘 하고 있는지 보아야 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매듭을 잡았다.
"안돼!" 그가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안돼" 그는 다시 거칠게 속삭이고는 그녀의 손을 자기 맨가슴에 댔다.
그녀는 감전된 듯 손을 떼었다. "당신 벌거벗었잖아요!"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오" 그가 달래며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둘러 끌어당겼다. "바지는 입고 있어. 보이지?"
"안 보여요" 그녀는 야릇한 흥분 속에 속삭였다.
"좋아요" 그녀는 신음을 토했다. 맙소사, 이거야말로 그녀가 늘 바라던 것이었다. 마음대로 그를 어루만지고 느끼고, 양손으로 사람을 전하는 일.
그녀의 손이 그의 살갗에 닿았다. 어깨의 따스하고 단단한 살갗에. 앞뒤로 어루만지고 그를 느끼고 원했다. 이윽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그의 가슴에 입 맞췄다.
가이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치켜 올렸다. "입술을 줘, 샘" 신음 같은 소리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물러서지 말아요"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몸이 떨리지도 않았고 오직 즐거움과 정열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키스에 열렬히 응했다. 그의 입술이 뜨거워지자 머릿속은 장작불이 지펴지는 듯했다. 그래 ...바로 이거야. 그녀는 속으로 신음했다. 가이와 함께라면 이럴 줄 늘 알고 있었어.
마침내 가이가 그녀에게서 몸을 떼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에게 매달려 더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단호히 떼어놓았다.
"더 이상은 안돼" 그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차분했다.
한시라도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그의 능력에 그녀는 경악했다. 순간 기억했다. 그는 사랑에 이성을 잃고 있지 않다. 그에게 이건 단지 섹스일 뿐이다. 목적 있는 섹스. 적당히 흥분해서 잠자리를 같이 하고는 아기를 갖게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진도를 나갈 때요"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블라우스 단추에 닿는 순간 그녀는 그의 말뜻을 알았다. 불켜진 방안 한복판에서 그녀의 옷을 벗기려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자꾸 자신은 그가 평소 좋아하던 타입의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그는 이런 에로틱한 게임이라도 해야 흥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감이 없어져 항의했다. "안돼요... 우선 불을 꺼요"
"안돼"
그의 손가락이 블라우스 앞판을 차근하게 만지며 내려가자 그녀는 스카프를 덮고 있으면서도 눈을 질끈 감았다. 장방형의 유리 단추라 끄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가이는 쉽게 끌러 내렸다. 그의 손이 블라우스를 벌려 어깨 위로 벗겨내자 그녀는 온몸이 굳었다. 그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비위가 거슬려서 그러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자신의 풍만한 가슴이 별로 자랑스럽지 않았다. 더구나 레이스 달린 속옷 때문에 더욱 풍만해 보이리라.
그녀는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지만 가이가 손을 치웠다.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당신 가슴은 아름다워, 샘"
그의 손이 가슴에 닿자 그녀는 몸이 떨렸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아찔했다.
"너무나 섬세해"
그의 목소리 같지 않았다. 그는 평정을 잃고 있다. 자신의 모습에 그가 그 대단했던 이성을 잃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흡족한 동시에 자신감이 생겼다. 비서로서 말고는 오랫동안 무시당해 왔던 사만사 피터스가 그의 목소리와 손길을 떨리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가 사귄 금발머리 여자들 못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하는 만큼 그를 사랑할 수만 있다면. 감정은 없고 섹스만 있던 그의 생활에서 꿈꾸지 못했던 정열을 보여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여자에게서 원하는 것을 모두 줄 작정이다. 완벽한 복종을. 완전한 항복을.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래선 안돼. 그는 직감이 너무 날카롭다. 진상을 파악할지도 모른다. 때문에 이성을 잃는 행동은 해선 안 된다. 안돼...안돼...
하지만 그가 그녀의 가슴에 입 맞추는 순간 그녀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쉬며 몸을 떨었다. 그녀는 핑핑 도는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중얼거렸다.
"달링..." 그녀는 자신이 그 말을 입에 올렸다는 것조차 의식에 없었다.
문득 그가 손과 입술을 치우자 그녀는 영문을 몰랐다.
"그만두지 말아요" 그녀는 목 쉰 소리로 애원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잔인하게 자기 가슴에 대고 눌렀다.
"가이 아파요!"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누가 아프게 하는지 그건 알고 있군. 당신의 그 망할 달링은 아니라는 것 말이야"
"달링?" 그녀는 한순간 멍하다가 기억해 냈다. "미.. 미안해요... 난 그냥"
"좋아 됐소" 그는 그녀의 손을 밀쳐 버렸다. "하지만 남자로서는 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야. 사랑을 나누는 상대가 다른 애인의 이름을 신음으로 부르다니"
"그 남자는 내 애인이 아니에요" 그녀는 신음처럼 대답했다. 적어도 아직은.
"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잖소. 당신은 내가 본 어느 여자보다도 강력하게 그를 원하고 있어"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렇게 강력한 욕망과 사랑을 끌어내는 그자가 대체 누구요? 아는 사람이요? 말해 봐!"
사만사는 이를 가는 듯한 그의 어조에 경악했다. 질투하는 목소리였다. 그것도 미친 듯이. 남자로서의 자존심 때문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흡족스러웠다. 그의 분노가 오직 그녀 때문인 척 상상하기로 했다.
"묻지 말아요, 가이"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끌어당겼다. "그냥 키스해 줘요. 그가 바라지 않는 것을 가져가요"
그는 신음소리를 냈지만 그녀의 말대로 키스했다. 그녀의 몸이 욕망으로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그만 하라고 애원할 때까지.
그가 그녀의 스카프를 벗겼다. 그녀의 눈에 전에는 보지 못했던 가이의 얼굴이 보였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눈빛은 거칠었다. 그녀는 충격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이 얼굴이 여자들을 사로잡은 남자의 얼굴이야. 격정적이고 야수 같은 얼굴. 낮 동안의 냉정한 모습하고는 딴판인.
우리 두 사람 연분은 연분이군. 그녀는 속으로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유는 다르지만 각지 가면을 쓰고 있으니까. 그녀는 허약한 자기감정을 감추려고 애쓰고 있고, 그는 그냥 놔둔다면 그의 인생을 태워 버릴 정열을 감추려고 가면을 쓰고 있군.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두 사람의 가면이 산산조각 났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그의 눈빛이 당혹스러워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당혹과 더불어 화가 난 눈빛. 그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는 것이 싫은 것이다. 절대로.
마침내 그는 천천히 냉정을 되찾았다. 그의 숨소리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가볍게 조소를 띠기까지 했다.
"당신도 대단한 정열파로군. 일단 고삐만 풀리면" 그는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녀가 신음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손이 허리로 내려가 그녀의 바지 단추를 끌렀다. 그녀가 숨을 멈춘 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유연하게 지퍼를 내렸다.
"말해 봐요" 그는 그녀의 옷을 벗기며 중얼거렸다. "그 멍청한 작자와 어디까지 갔는지. 키스해 봤소? 방금 내가 한 것처럼 당신을 즐거움에 떨게 했소?"
무슨 수로 대답하랴. 눈앞이 온통 빙빙 돌고 있는데. 사랑하는 남자가 내 옷을 벗기고 있는데.
그녀는 고개만 가로 저은 채 눈을 감았다.
"그러지 마!" 가이가 명령했다. "날 보라고"
그의 강한 어조에 눌려 그녀는 눈을 떴다.
"이젠 연극은 안돼" 그가 쏘아붙였다. "이젠 진짜라고. 난 우리 침대에 다른 남자의 그림자가 들어서는 건 용납 못해. 이번만은 안돼. 오늘밤 당신은 내 여자야. 내 아이의 엄마로 선택한 여자. 당신을 다른 남자와 나눠 가지진 않겠어"
그녀의 바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가 입은 섹시한 속옷을 보자 그는 잠시 놀랐다가 싱긋 웃었다.
"일러줄까, 샘?" 그는 그녀가 검은 실크 바지에 걸어 나오도록 손을 잡고 말했다. "날 위해 이런 것을 입었겠지? 오늘밤 당신을 볼 남자는 나 말고는 없으니까. 재미있지 않소?"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즐겁게 벗기기로 하지" 그는 그녀를 팔 안에 안아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짙은 푸른색 침대 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마침내 스타킹을 벗기고 마지막 속옷까지 벗긴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나타난 숨김없는 찬탄의 표정에 그녀는 놀랐다.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야, 샘" 그는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어디...어디 가는 거예요?"
그가 어깨 너머로 안심하라는 미소를 보냈다. "욕실. 금방 돌아올 거요. 눕고 싶으면 먼저 누워요."
그녀는 그의 말대로 했다. 시트 밑으로 들어간 그녀는 다시 긴장으로 몸을 떨었다. 가이가 내 무경험을 눈치 채는 게 아닐까? 그래서 따분해 하는 게 아닐까? 그의 자극적이고 세련된 여자들하고 비교해 여자로서 형편없는 점수를 받는 것은 아닐까?
욕실 문이 열리고 가이가 들어왔다. 사만사는 훅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노먼과의 단 한번 경험이 있었지만, 가이를 보았을 때 그 충격은 예상도 못한 것이었다. 그는 완벽하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즐기는 얼굴로 침대에 올라왔다.
"생각해 봤는데" 그는 그녀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내 생각보다 우린 아주 잘될 것 같소" 그러고는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도 없지만"
그의 키스와 손길에 그녀는 다시 불타올랐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신음소리가 나왔다.
"자, 지금이야" 그가 중얼거리며 그녀의 몸 안으로 파고 들었다.
그녀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그녀의 눈물을 볼까 겁이 났다. 무슨 영문인지 알아낼까 봐. 하지만 그의 율동에 그녀는 모든 것을 잊고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곧이어 찾아든 절정에 그녀의 등이 휘고 양손은 그를 필사적으로 잡아당겼다. 눈물이 그녀의 눈을 덮쳤다. 기쁨의 눈물, 그리고 달콤한 행복의 눈물이었다.
"오, 가이" 그녀는 흐느끼면서 그에게 매달렸다.
그는 몸이 굳어지더니 고개를 들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속절없이 눈물이 흐르게 두었다.
"악당 같은 녀석. 망할 자식." 그는 중얼거리고는 그녀를 안고 토닥였다.
그러고는 그녀가 아름다우며 멋진 여자라고 속삭였다. 이제 곧 그 어리석은 작자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영원히 그를 머릿속에서 몰아낼 거라고 속삭였다. 그자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그녀는 더욱 눈물이 났다. 마침내 그녀는 울다 잠이 들었다. 때문에 격정을 맛본 것이 자신만은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가이는 오랫동안 깨어서 그녀를 안고 있었다. 방금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서. 그녀가 몸을 뒤채면 그는 그녀를 토닥여 다시 잠들게 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이마에는 갚은 주름이 생겼다. 자신의 목덜미에 닿은 그녀의 입술이 고문과도 같았다. 그리고 자신을 덮치는 다른 감정들도.
"말도 안돼" 마침내 중얼거린 그는 눈빛이 딱딱해졌다.
그러고는 그것으로 결론지은 양 돌아누워 잠을 청했다.
7
사만사는 천천히 잠에서 깨었다. 눈을 떴다가 불빛에 물든 침대 발치를 보자 눈이 커졌다.
간밤에 있었던 일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머리 위 유리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처럼 환하게.
조심스럽게 몸을 굴리던 그녀의 눈에 가이의 자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등을 돌리고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다. 시트를 아무렇게나 허리에 감고.
그의 상체로 시선을 올리던 그녀는 숨이 가빠졌다. 홀쭉한 허리. 넓은 가슴, 그리고 단단한 어깨와 목 근육. 그리고 평소 뒤로 빗어 넘겼을 때보다 길어 보이는 헝클어진 갈색 머리.
저 모습을 앞으로도 영영 기억하게 될까? 황량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의 믿지 못할 격정과 뜻밖의 부드러움을 꿈속에서나 되살리게 될까?
"너무 일찍 아기를 갖게 해주지 마세요, 하느님" 그녀는 나직이 빌었다. "내게 행복한 몇 달을 베풀어 주세요. 속속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이 느낌을 계속 느끼게 해 주세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만족스럽게 머리 위로 팔을 뻗었다. 하지만 만족도 잠깐이었다. 간밤의 일이 자세히 떠오르자 다시 욕망의 파도가 덮쳐 왔다. 맙소사! 그녀는 절망적인 신음소리를 냈다. 점입가경이잖아. 오히려 전보다 더욱 그를 원하고 있어!
그녀는 신음소리를 누르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샤워를 하자. 그녀는 가이의 푹 잠든 모습을 다행스런 눈으로 돌아본 뒤 천천히 욕실로 갔다.
뜨거운 물줄기 아래 서 있다가 문득 머리를 감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러자면 밖으로 나가 가이의 얼굴을 마주할 일밖에 남아 있지 않다. 물소리에 지금쯤 그도 잠이 깨었을 텐데.
욕실에서 나가 이제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아는 그의 시선과 마주칠 생각을 하니 불안과 수줍음이 온몸을 휩쌌다.
그가 그녀가 주말 내내 이 집에 있어 주길 바라는지, 혹은 앞으로 얼마나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깊이 생각지 않기로 했다. 그 생각만 해도 비누가 손에서 미끄러지고 그나마 찾으려 애쓰던 냉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냉정해야 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감정적으로 얽힌 기색을 조금만 내보여도 그는 불같이 화를 낼 테니까. 하지만 다른 애인이 있는 척하는 연기를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 까?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새삼 간밤에 가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의 충고가 옳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바보라는 말. 어느 면으로는 사실이니까. 그런 남자에게는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말도 맞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밤을 베풀어 주었는데 그런 후회를 하기란 힘들다. 그는 그녀의 꿈을 실현시켜 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고 사려 깊은 면을 보여 주지 않았던가.
노골적이고 거칠기는커녕 그는 상상력 있고 자극적이고 근사한 애인 역할을 해주었다. 찬사도 곁들여서 그녀에게 특별한 여자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었는데도.
사랑하는 남자가 생각보다 부드럽고 연민에 찬 태도를 지녔다는 사실이 사만사는 기뻤다. 그가 좋은 아버지가 되리라는 것처럼 역시 정 많고 사려 깊은 아버지가 되리라. 그가 못하는 것은 여자와의 깊은 관계뿐이다.
그녀는 물줄기 아래서 절망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가이가 그렇게 된 데에 책임이 있는 여자들이 있다. 우선 그의 어머니. 그리고 어린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간 무정한 의붓 어머니들. 그들이 그의 젊은 사고력을 삐뚤어지게 하고, 남녀관계에서 그를 감정적인 불구로 만들어 버린 여자들이다.
샤워를 마친 그녀는 타월로 몸을 닦았다. 그녀의 생각대로 욕실에는 사우나 욕조를 갖추고 있었다. 벽에는 머리를 말리는 건조기도 부착되어 있다.
타월로 몸을 감싼 그녀는 장식장을 뒤져 머리빗을 찾았다. 빗으로 숱 많은 갈색 머리를 빗어 내렸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니 평소의 단정하고 엄숙한 비서하고는 거리가 한참 먼 모습이 담겨 있었다. 마스카라를 하고 잤기 때문에 눈 밑에는 얼룩이 져 있었고, 입술은 살짝 부풀어오른 것이 애인의 침대에서 방금 빠져 나온 여자의 모습이다.
그 생각에 흥분과 만족감이 그녀의 온몸에 흘렀다. 가이는 이제 더 이상 상관이 아니라, 애인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어? 잔인하도록 솔직한 내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이처럼 정력적인 남자라면 임신이라는 목적 달성은 순식간일 것이고, 그후에는 내 곁에 얼씬도 안 할 것이다.
"그만!" 그녀는 신음했다. "그만"
그녀는 홱 돌아서서 주먹을 쥔 채 문으로 걸어갔다. 손잡이를 돌리려고 손을 드는데 손이 떨린다. 중심 잡아, 이 아가씨야.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거칠게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가다가 흠칫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침대뿐 아니라 침실마저 텅 비어 있었다.
놀란 그녀는 응접실로 통하는 이중문으로 갔다. 응접실 역시 비어 있었다.
얼른 방안을 둘러본 그녀는 방안을 어지럽히는 것이 자신이 벗었던 옷가지뿐이라는 것을 알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블라우스가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고, 허리에 맸던 스카프는 매듭이 풀리지도 않은 채 벽 쪽에 내던져져 있다.
자신이 한 짓을 보자 충격과 당혹감이 밀려왔다. 맙소사, 이제 어떻게 냉정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마주한담. 저런 짓을 허락해 놓고.
그녀는 얼른 옷가지를 주워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가이가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 같아 두려워 욕실로 들어가 기록적인 시간에 옷을 챙겨 입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떨려서 스카프가 잘 매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 스카프를 구석의 휴지통에 쑤셔 넣고 말았다.
그녀가 가까스로 옷 입는 일을 끝내고 침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고는 토요일 오전에 하는 뮤직 비디오 쇼를 보고 있자니 문이 열리고 가이가 들어왔다.
그녀가 처음 눈치챈 것은 가이 역시 그녀처럼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었다는 사실이다. 캐주얼한 감색 바지에 목께가 열린 연한 푸른색 셔츠 차림이었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그가 눈에 띄게 긴장해 있다는 것이다.
딱딱한 푸른 눈이 긴장해서 앉아 있는 그녀를 훑었다. "옷을 입은 것을 보니 다행이군"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아침을 들겠소, 아니면 집에 가서 들겠소?"
사만사는 그가 바의 재떨이에서 차 열쇠를 집어드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을 때는 이미 충격을 삼키고 그의 시선처럼 무심하게 그를 마주보았다.
"집에 가야죠" 그녀는 숙련된 무심한 어조로 말하고 일어섰다. "당신이 어떤 생각인 줄 몰라서요. 난 당신이 주말 내내 있으라고 할 줄 알았어요"
그의 눈 속에 나타난 차가운 결의는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족했다. 집으로 가라고... 가이는 날 집으로 데려다 주려는 거야.... 다시 나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차마 생각하기도 힘든 거야.
"그러려고 했지" 뜻밖에도 그가 인정했다. "하지만 간밤에 있은 일은 내 생각 밖이었소. 난 좀 더... 단순할 줄 알았지. 하지만 이 상황에선... 집으로 데려다 주는 게 최선일 것 같소. 그리고 이 시점에서 우리가 아기를 같이 갖자는 이야기는 잊는 게 좋을 듯 싶소"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당신은 그 남자에게 넋이 나간 게 너무나 분명해. 당신의 결정에도 그 영향이 컸을 거요. 난 내 아이의 엄마가 보답 받지 못한 사랑으로 신경쇠약에 걸리는 건 반갑지 않소"
그녀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하긴요. 하지만....이미 임신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럴 것 같진 않소. 그렇게 운이 좋을 리 없지. 하지만 그런 일이 닥치면 그때 가서 생각하지. 어쨌든 난 이번 일을 전혀 없었던 것으로 끝내는 바요"
사만사의 실망이 이번에는 분노의 불길로 바뀌었다. 자기가 뭐길래 이렇게 제멋대로 마음을 바꾸는 거지? 무슨 권리로 내게 잠깐 천국을 들여다보게 한 뒤 지옥에 내팽개치는 거야!
"나한테는 발언권이 없나요?"
그녀의 차가운 분노에 그는 놀라는 듯했지만 곧 정신을 수습했다. "없소"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이걸로 끝이란 말이죠! 파트너라고 해놓고는! 당신 말을 들으니까 파트너가 아니군요. 자기밖에 모르는 전형적인 상관이 자기 밑의 여자 직원에게는 권리도 생각할 머리도 없는 것처럼 명령하는 것밖에 더 돼요?"
그녀는 턱을 치켰다. 머릿속에는 그럴 듯한 주장으로 그를 설득할 길을 찾았다.
"당신의 결정이 모욕이란 것 알아요?" 그녀는 냉정하게 따지는 인상을 주며 말을 계속했다. "그건 날 유약한 변덕쟁이로 밖에 보지 않는 거란 말이에요. 당신은 내 현실적인 태도와 상식이 좋다고 늘 말하지 않았나요? 가이, 난 당신이 여자다운 눈물로 날 판단하기보다는 나라는 사람을 좀 더 잘 알 줄 알았어요. 우린 계약을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충분한 이유도 없이 그 계약을 깨뜨리려 하고 있어요"
"충분한 이유가 있소" 그는 낮지만 분명 성난 어조로 말했다.
"물론 있겠죠!" 그녀는 쏘아붙였다. "내가 신경쇠약에 걸릴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지레짐작이 말이죠. 맙소사, 신경쇠약에 걸릴 것 같았으면 지난 5년간 당신처럼 참을성 없고 사람 몰아댈 줄밖에 모르는 악당 밑에서 일하는 동안 벌써 걸리고도 남았어요!"
그의 눈이 충격으로 번뜩였다.
사만사는 돌아서서 핸드백을 집어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앞에서 멈춰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앞뒤 못가리는 분노에 조심성이 없어졌다.
"이런 생각 해본 적 있어요, 가이, 간밤에 당신이 몇 가지 착각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
그의 눈빛이 당혹스러워졌다. "어떤 착각이지?"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정도 핑계는 생각해 낼 수 있다.
"난 남자를 좋아해요." 그녀는 노골적으로 말했다. "아주 많이. 하지만 내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 때문에 오랫동안 남자를 상대해 보지 못했어요. 간밤에 난 내가 아직도 남자를 사랑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안도감에 눈물을 흘린 거예요. 비참해서 흘린 것이 아니라. 난 공상 따위를 즐긴 것이 아니라, 진짜 남자를 즐겼어요. 가이, 당신을. 당신도 날 즐겼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 물론 당신이 사귀는 애교 있고 귀여운 금발 머리들보다 못하다는 것은 알아요. 그리고 간밤 일이 당신 생애 최고였다고도 말 못하죠. 하지만 분명 좋았잖아요. 안 그래요?"
그는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짓궂은 조소가 피어올랐다.
"그렇소"
"그런데 왜 이러는 거예요?" 그녀는 다시 격정적으로 쏘아붙였다. "이해할 수 없군요. 우린 서로 계약을 해잖아요. 난...아이를 원해요. 가이 당신 아기를 원한다고요" 흐느낌이 터질 것만 갔다. "제발... 난..."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다니 최악의 실수다. 가이는 겁에 질린 눈으로 그녀는 내려다보며 움찔했다. 그러나 곧 그는 딱딱한 가면을 되찾아 쓰고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집으로 데려다 주겠어, 샘. 더 이상 입씨름 말아요. 이미 임신을 했다면 내가... 아니, 그럴 리 없소. 내가 계산해 보았소. 당신의 가능 일은 다음주 월요일이나 화요일이야. 간밤은 워밍업이었을 뿐이지. 서로간의 얼음벽을 깨보자는 식의" 그는 건조하게 웃었다. "우습지. 그런데도 알고 보니 냉정하고 보수적이던 내 비서가 얼음은커녕 화염 덩어리였다니"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난 불덩이 같은 비서는 필요 없소. 그런 엄마도!"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
다행히 차고로 가는 도중에 바바라와 레온 부부하고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마주쳤더라면 그들이 뭐라고 생각했겠는가. 하긴 그들도 이젠 집주인이 아침에 여자를 데리고 나오는 것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을지 모르지만.
하지만 이젠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머릿속은 오직 가이만이 자리잡고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는 엄한 표정의 얼굴로 더 이상 그녀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결심을 안고 집에 데려다 주고 있는 중이다. 물론 앞으로 남은 4주일 동안 일하게는 해줄 것이다. 당장에 그녀를 해고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니까.
그 4주일이 얼마나 긴장의 연속일지는 안 보아도 뻔한 일이다. 더구나 그녀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질 때까지의 2주일이 겹쳐 있는 마당이니까.
그의 계산이 맞는다. 그녀 자신이 어제 책을 뒤진 결과 자신의 가능일은 아직 이틀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은 임신하지 않았을 거야. 그녀는 가이에게 끌려 차안에 앉으면서 속으로 황량하게 중얼거렸다. 이젠 그럴 가능성도 영영 없어졌고.
차고 문이 열리고 이어 집 정문도 스위치로 열렸다. 계기판의 시계는 아홉 시 8분이었다.
가이의 은청색 스포츠카가 레인 코브에 있는 그녀의 셋집 앞길에 도착한 것은 정확히 열시 14분이었다.
오는 길에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가이는 연달아 담배를 피웠다. 그것을 보고 사만사는 간밤 자신과의 잠자리가 말과는 달리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씁쓸하게 생각했다. 금발 머리와 밤을 보낸 뒤엔 그는 영낙없이 한동안 담배를 끊었으니까.
"당신은 올라오지 마세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차문을 열고는 안전 벨트를 풀었다.
가이도 고집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운전석에서 꼼짝도 안 했으니까.
"월요일 아침에 만나요" 그녀는 어깨 너머로 인사를 던지고는 당당히 고개를 들고 걸어갔다.
등뒤에서 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차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사만사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대신 어깨를 펴고 계속 걸었다.
집을 향해 걸어가는데 머리 위에서 뭔가 움직이는 기척이 주의를 끌었다. 올려다보니 고양이 톰이 벽 위의 담쟁이덩굴을 기어올라 2층에 있는 리사의 발코니로 향하고 있다. 운 나쁘게 마침 리사가 발코니 난간에서 톰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으로 보아 사만사와 가이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 분명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군. 사만사는 신음했다. 이제 곧 리사가 달려 내려오겠지. 빨래를 찾으러 내려온 척하면서. 실은 가십거리가 궁금해서일 테지만.
예상대로였다. 사만사가 계단을 올라 집안으로 들어가 주방 레인지에 찻주전자를 올려놓기가 무섭게 문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그녀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러 나갔다.
리사가 문가에 서서 미소 지으며 편지 몇 통을 흔들었다. "어제 우편물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 잊었더군"
사만사는 우편물을 대충 훑어보았다. 하나는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고 보니 이모에게서 온 편지도 있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들어와서 차 한 잔 들겠어?"
"좋지" 리사는 거실로 들어왔다. 청바지와 밝은 녹색 점퍼를 입은 매력적인 붉은 머리 아가씨였다. 그녀는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 "아까 내 빨래를 찾으러 왔더니 없더라. 그리고 내 우편함에 편지를 찾으러 갔더니 네 우편함에도 편지가 그대로 있고.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네가 우편물 챙기는 것도 잊고 밤새 들어오지 않다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잖아. 그런데 네가 바로 상사의 차를 타고 돌아오는 게 아니겠어? 난 정말 놀랐다고. 무슨 일인지 말해 줄래? 그 사람하고 뭔가 벌어지고 있는 거지?"
다른 때 같으면 적당히 둘러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 사만사는 거짓말이나 핑계를 대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녀는 느닷없이 주방 조리대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리사도 놀랐지만 그녀 자신도 놀랐다.
리사는 의자에서 얼른 일어났다. 리사는 그녀를 껴안고 위로하면서 어깨를 끌어안아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휴지를 갖다 주면서 손등을 토닥여 주는가 하면 차를 끓여와 설탕을 넣어 주었다.
사만사는 그녀가 보여 주는 걱정에서 우러나오는 근심과 따스함 그리고 연민에 놀랐다. 그녀를 평소 성가시게 생각한데 죄책감이 들었다.
"충격에 이게 좋아" 리사가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사만사는 평소에는 설탕을 넣지 않고 차를 마셨지만 리사의 친절에 기가 죽어 말없이 마셨다. 친구를 깊이 사귀지 못했지 때문에 그녀는 여자들이 같은 여자를 위로하는데는 익숙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정의 새로운 지평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그후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신상이며 가이와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상관을 몇 년 동안 사랑해 왔다는 이야기, 사직서를 내기는 했지만 간밤에 마침내 그와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같이 아기를 갖기로 했었던, 그러나 이제는 소용없게 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역시 입에 담기에는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니까. 때문에 리사에게는 자신이 우는 이유가 둘이 멋진 밤을 지냈는데도 가이가 하룻밤의 일로 끝내고 싶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놔두었다.
"저런 악당을 보았나!" 리사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네가 사직한다니까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널 사랑하다고도 하지 않았지?"
"물론이야" 사만사는 힘없이 대꾸했다. 리사의 눈에 가이가 형편없이 비춰지는 것이 양심에 꺼려지기는 했지만, 하지만 가이도 아주 결백한 남자라고는 못한다.
"잘생기고 성공했다는 독신 남자들은 다 그래" 리사가 코웃음을 쳤다. "자기가 손짓만 하면 여자들이 줄줄이 따른다고 생각하거든" 그녀는 쿡쿡 웃었다. "문제는 그게 사실이란 거지만"
사만사는 자기도 모르게 같이 웃었다. "맞아" 그녀는 다시 씩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리사는 정색을 했다. "그래, 어떻게 할거야? 당장 그만둘 거야., 아니면 4주일 더 버틸 거야?"
사만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둘 수는 없어. 가이가 정말 실망할 거야. 그리고 그도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야. 간밤에도 그가 정직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어.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 모르거든"
"흥! 그래도 맛 좀 봐야 해" 리사는 투덜댔다. "하지만 눌러 앉아 있다 보면 보복의 기회가 오겠지"
"보복?" 사만사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이봐, 그러지 말라고. 여자들도 반격할 줄 알아야 해. 그 남자도 너한테 조금도 좋아하는 감정이 없었다면 하룻밤이나마 잠자리를 같이했을 리가 없어. 장담하지만, 맘만 먹으면 널 훨씬 더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다고. 네가 할 일은 그 따분한 숙녀다운 옷을 벗어 던지고 섹시한 옷을 입는 거야. 화장도 환하게 하고, 진한 향수도 뿌리고. 한 번 해보라고."
사만사는 분명 마음이 흔들렸다. 리사의 말이 옳다. 정말 옳다! 왜 겁쟁이처럼 물러나야 한단 말인가. 왜 그냥 앉아서 거절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앞으로 4주일 동안 가이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해줄 테다. 한 달이 끝날 때쯤엔 가이가 초조해 담배 연기로 너구리를 잡을 정도로.
사만사의 눈에 반항적인 표정이 번뜩이자 리사는 기뻐 소리쳤다. "해볼 작정이군, 사만사? 잘됐어!" 그녀는 손뼉을 쳤다. "자,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섹시한 옷을 연출해 보자고. 옷은 많으니까. 꼭 맞는 드레스가 하나 있는데....,네 몸매에다 그 드레스를 입으면 아마 그 남자 눈 좀 튀어나올 걸!"
8
가이의 눈이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말 그대로를 따지자면.
하지만 월요일 아침에 그가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사만사가 일어나 커피를 건네자,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녀가 서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붉은 울 크레이프 드레스가 몸에 달라붙어 잘록한 실루엣을 연출하고 있는 모습을 속속들이 볼 수 있었다. 허리는 넓은 띠로 졸라매었고, 그 때문에 가슴과 엉덩이가 더욱 강조되었다.
리사는 빈약한 몸매의 자기가 입어도 남자들 시선을 끄는 데는 보증수표 같은 드레스라고 했다.
과연 가이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아니면 그는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칼이나 짙은 화장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지금 사업가다운 무심한 표정으로 육체적인 관심을 최대한 누르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가짜였다. 사만사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본 가이의 눈에서 잠깐이나마 분명하게 번뜩이는 욕망을 보았다. 지금 걸음을 계속하면서도 그는 턱 근육을 씰룩거리고 있다.
"커피는 사양하오" 그가 속셈이 보이는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내 커피는 내가 타지"
그가 불편해 하는 것을 보자 그녀의 온몸은 승리감으로 가득 찼다. 리사 말이 옳았다. 가이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 주말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가이는 여자를 좋아한다. 때문에 한 번 어떤 여자를 성적으로 의식하고 나면 - 이번에는 좀 특이한 상황에서였지만 - 쉽사리 그 관심을 꺼버리지 못한다.
그는 자기 사무실에 걸어 들어가 서류가방을 내려놓더니 다시 입구로 나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젠 욕망의 표정은 사라지고 희미한 조소가 묻어 있다.
"퇴근 뒤에 파티에라도 가나?"
사만사는 그가 이런 질문을 할 줄 알고 미리 대답을 생각해 놓았던 것이 다행스러웠다. 거짓말도 아니었다. 옷을 입어 보는 동안 리사는 그녀 앞으로 온 편지를 읽어 주었다. 어머니의 편지에 의하면 그녀의 옛친구 노먼이 시드니에 오는데 그녀를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어머니가 그녀의 집 주소를 일러주지 않은 것이 천행이었다. 대신 어머니는 <헤이우드 프로모션>의 전화번호와 사무실 주소를 일러주었다. 노먼은 시내 호텔에 묵기 때문에 오늘이나 내일쯤 이곳에 들를 확률이 높다.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만사는 움찔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뻤다. 가이의 면전에서 그녀에 대한 다른 남자의 관심을 보여 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가?" 가이가 이번에는 좀 더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퇴근 후에 외출하나, 안하나? 이러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그는 무시하듯 그녀의 드레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만사는 대담하게 그의 시선을 받았다. 그러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뇨, 친구가 점심 초대를 할지 몰라서요"
"그래? 내가 아는 사람?"
사만사는 그의 긴장한 목소리에 놀랐다.
"아뇨, 모르실 거예요" 그녀는 대답하고는 주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드레스 뒤가 터진 것을 깜빡했다가 차가운 공기가 목덜미에서 허리로 흐르는 것을 느끼고 그제서야 기억했다.
"그 옷을 입고 춥지 않겠소?" 가이가 따라오면서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만사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누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요즘은 거의 난방시설이 되어 있잖아요. 그리고 재킷도 있어요" 그녀는 옷걸이에 걸린 검정 크레이프 상의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그가 등뒤에 서서 그녀의 맨살의 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 친구라는 사람, 당신이 사랑한다는 그 남자요?" 그가 낮고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돌아서다가 그의 눈에 번뜩이는 분노를 보고 놀랐다. "아뇨, 하지만 그렇다 한들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한순간 그녀는 가이가 자신의 뺨이라도 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손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거친 눈빛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 그녀는 몸을 움찔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냥 확인해 본 것뿐이오." 그가 차갑게 내쏘았다. "임신 여부를 알 때까지 당신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지 않아야 하니까. 난 다른 남자의 아이에게 경제적 지원을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 거였군. 그녀는 쓴 실망을 안고 중얼거렸다. 질투 때문이 아니었어. 독점욕 때문도 아니고. 남자로서의 자존심과 은행 구좌를 지키기 위해서였어. 오, 리사. 넌 이 남자를 몰라. 네가 아는 그런 바보가 아니란 말이야. 그렇게 쉽게 조종될 사람이 아니야. 여자라면 원하는 대로, 그리고 나보다 훨씬 맘에 드는 여자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빨간 드레스 차림이 바보 같고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자존심상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난 이 남자 저 남자 상대하는 여자가 아니에요. 당신 말이 그거라면. 그런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정말이오? 그럼 대답해 보시지, 갑자기 섹시해진 내 비서 아가씨. 당신 친구라는 그 남자, 그 남자하고는 같이 잤나?"
그녀의 얼굴이 죄책감이 물들자 가이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 역시 검붉어지더니 뺨 위가 붉게 물들었다. 이제는 정말 그가 질투를 하고 있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 질투와 분노에 차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마 그녀가 본성을 숨긴 데 대한 분노일 거라고 사만사는 한발 양보했다.
그는 말없이 홱 돌아서서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문을 탕 닫았다.
그녀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혼란스럽고 너무나 비참했다. 확실한 것은 4주만 있으면 고개를 당당히 들고 사무실을 나갈 거라는 것뿐이다. 앞으로는 빨간 드레스도, 유혹하려는 애처로운 노력도, 수치스러운 장면도 절대 없을 테니까. 남은 것은 오직 자존심뿐이다.
오전 시간은 시시각각 괴로웠다. 하필 월요일일 가이의 손님들이 몰려드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은 그녀의 드레스도 유심히 살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썹만 치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점심시간 바로 전에 온 프랭키는 달랐다. 그는 최근에 거둔 성공으로 흥분한 얼굴이었다.
"안녕, 귀염둥이, 보스 계신가?" 그는 문을 닫고 들어오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앞으로도 이러면 내 손이 가만있지 않으려 하겠는걸. 차라리 날 어디다 묶어 줘요"
"과장이 심한걸, 프랭키" 가이가 들어오며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고는 프랭키와 악수했다.
"과장이라니!" 프랭키가 신음소리를 냈다. "자네는 어떻게 견디나, 이 아름다운 모습을 지척에 두고서"
"대단히 힘들게 버티고 있지" 가이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사만사를 험하게 노려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움찔했다. 다행히 가이가 프랭키를 자기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안심했다.
그때 마침 리사가 전화를 했다.
"어때?" 리사는 다짜고짜 물었다. "어색해 하던?"
"어색해 하는 건 나야" 사만사는 비참하게 중얼거렸다. "솔직히 리사, 드레스 빌려준 거며 모두 고마워. 하지만 난 도저히 못하겠어. 모두들 날 외계인 보듯 한단 말이야. 가이는, 이제 보니 거리에 나서는 여자였군. 하는 얼굴이야"
"그렇겠지! 하지만 그건 연기야. 속으로는 지옥 같을 걸"
"지옥 같으면 뭘 해? 나가서 다른 여자를 얻으면 될 텐데"
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겠지. 쳇, 일 안되네. 당장 꼭지가 돌아서 사무실에서 널 덮칠 줄 알았는데"
"리사!"
"아, 말이 그렇다는 것뿐이지 뭐. 물론 처음에는 적당히 거부하는 척해야지. 안 그래?"
"그럼 정말... 내가 근사해 보인다는 거야?" 사만사는 주저하며 물었다.
리사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널 어떡하면 좋겠니? 물론 근사하고 말고. 피가 있는 남자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걸. 아, 알아, 상관이 좋아한다는 그 귀여운 금발 머리 여자들. 하지만 그건 네 탓이 아니야. 그 남자는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감정적인 성숙을 하는 게 두려운 건지도 모르지. 책임지고 싶은 여자를 가지는 게 두려운지도 몰라. 진짜 아름답고 두뇌가 있는 여자를"
"그렇게 생각해?"
"내 월급을 걸지"
사만사는 입을 다물었다. 가이가 감정적인 성숙을 거부한다는 리사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맞아, 그럴지 모르지. 그런 그가 이제까지 본받고 싶은 대상을 못 만나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녀 자신도 그의 어머니나 의붓어머니들에게서만 책임을 찾았지 그의 아버지를 살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마틴 헤이우드. 결혼과 수없이 많은 여자관계에서 실패만 거듭한 매력적인 악당. 그의 실패는 여자 운이 나빠서였을까? 아니면 일부러 그런 여자들만 골랐기 때문일까? 침대에서는 좋지만 머리 있는 남자라면 사랑하기 힘든 여자들만.
여러 가지 가능성과 추측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난무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가이의 정신을 분석해 본들 무엇이 입증될 것인가. 그가 일그러진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런 그와 얽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결론만 날 따름이다. 그리고 설사 그를 다시 침대로 끌어들여 아기를 낳는다고 한들 결국에 가서는 그에게서 상처를 받을 거라는 결론뿐.
그래. 그녀는 황량하게 중얼거렸다. 아기를 낳는 일은 이미 물 건너 간 일이야. 가이는 절대 다시 돌아설 사람이 아니다. 내가 사랑할 아이가 세상에 존재할 길은 없다. 영원히 그를 묶어 둘 끈도.
"사만사?" 친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그녀는 목에 뭔가가 치밀어 올라왔다. "괜찮아"
"저녁에 내가 내려가 볼게"
"그래... 친절하구나" 그녀는 간신히 말하고는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얼른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누군가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사만사는 문을 열지도 전에 이번에 온 사람은 노먼이라는 것을 알았다. 조심스럽고 수줍은 노먼. 하지만 지금은 재회를 할 기분이 아니다.
그녀는 체념하듯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녀의 얼굴이 절로 위로 향하고 입술은 놀라 딱 벌어졌다. 분명 노먼이었다. 그런데 그가 언제 이렇게 키가 커지고 언제 이렇게 체격이 벌어졌단 말인가? 그리고... 그 여드름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다행히 노먼도 놀라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서 그녀의 놀란 기색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의 갈색 눈이 찬탄의 빛을 띠고 그녀의 몸을 훑었다.
"분명 당신이군. 샘. 머리칼과 눈은 여전히 아름다워. 하지만 다른 데는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할 소리? 오, 노먼,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갑자기 진심으로 그 말이 나왔다.
"나도. 그래. 옛 동창에게 키스해 줄 거야?"
옛날의 노먼이라면 그녀의 허락을 기다리면서 떨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노먼은 곰처럼 그녀를 껴안더니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노골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순진한 키스도 아니었다. 그에게서 풀려나자 그녀는 불도저에 깔렸다가 나온 기분이었다.
"당신의 점심 테이트 상대인가?" 등뒤에서 가이가 차갑게 물었다.
노먼은 그녀의 몸을 옆으로 안아 돌리고 가이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사만사의 상관이시군요. 드릴 청이 있어요. 제가 시내에 며칠 있지 못합니다. 내일부터는 친척들을 만나야 하고. 그러니 오후에 이 아가씨에게 시간을 좀 주시겠어요? 만난 지가 하도 오래다 보니 이야기할 것이 많아서. 그렇지?" 그는 사만사를 향해 활짝 웃었다.
"미안하지만..." 가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후에 사만사가 필요해서요. 때문에..."
"흥 깨지 말라고, 가이" 프랭키가 미소를 띠고 들어왔다. "한나절쯤 샘이 없다고 죽지는 않잖아"
가이의 차가운 푸른 눈이 사만사에게 꽂혔다. "그럴까?"
"그럼, 자, 가요, 귀염둥이 아가씨. 가서 데이트하는 동안 난 당신의 보스를 기둥에다 묶어 두지" 프랭키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 내일은 밤까지 일해서 오늘 보충을 해야겠지. 그렇지, 가이?" 그는 가이의 가슴을 쿡 찔렀다.
"물론"
"재킷을 가져올께요" 사만사는 말하면서 프랭키와 가이를 노려보았다. 노먼이 아직 순박해서 프랭키와 가이의 은밀한 농담을 알아채지 못했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기대에 어긋나게도 노먼은 그녀를 데리고 승강기로 가면서 곰곰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래, 사만사, 당신 상관하고 깊은 관계가 된 게 언제부터지?"
9
사만사는 노먼과 함께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한 시간 동안이나 자신의 연기력을 총동원해서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설득했다. 프랭키와 가이의 농담은 사무실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농담이라는 것도.
물론 노먼의 말은 근본적으로 틀렸다. 깊은 관계라 했지만 얼마나 된 것은 아니고, 단 한 번뿐이었으니까. 다시 있을 법하지도 않을 일이고.
그녀는 그의 말을 농담으로 넘기면서 노먼이 예전 같은 순진한 남자가 아니라는 데 놀라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가 이제 곧 고향에 있는 얌전한 아가씨와 약혼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자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가 시드니에 온 것은 옛날 일을 되살리려는 게 아니라 추억으로 묻기 위해서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두 사람은 긴장을 풀고 편하게 시간을 보냈다. 사만사는 노먼에게 시내의 관광명소를 구경시켜 주었다. 빅토리아 여왕 빌딩, 달링 항구, 오폐라 하우스, 식물원 등등.
그가 저녁식사를 위해 그가 묶고 있는 호텔로 그녀를 데리고 왔을 즈음엔 두 사람은 다 발이 부르틀 지경이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그런데 노먼이 호텔 앞에서 그녀에게 택시를 잡아 줄 때였다. 문득 발걸음을 멈춘 그는 그녀의 팔에 다정히 손을 얹었다.
"조심해, 사만사" 부드러운 경고조였다. "상관하고의 관계를 듣기는 했지만, 난 아무래도 당신하고 그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것만 같아. 뭔가...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분위가 말이야. 하지만 당신은 그의 부류가 아니야. 외양은 어떨지 모르지만 당신은 여전히 시골 소녀야. 그는 도시 사람이고. 내 알기론 도시 남자들은 여자 관계가 비정하고 쾌속적이라던데, 내가 당신이라면 멀찍이 떨어지겠어"
사만사는 그의 손을 잡고 싱긋 웃었다. "내 걱정은 안해도 돼요, 노먼. 몇 주 후면 그 일도 그만둘 작정이니까. 한동안 고향에 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녀의 말을 들은 노먼의 눈빛이 겁에 질렸다. "맙소사, 그러지 마! 레일린은 당신을 보면 뒤로 넘어질 거야. 안 그래도 당신에 대한 질투가 대단한데"
사만사는 깜짝 놀랐다. "아니..., 무슨 이유로?"
노먼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녀하고 처음 데이트했을 때 실수로 당신 이야기를 했지 뭐야. 그래서 그녀는 당신을 궁금해 한다고... 내가 당신에 대해 좀 과찬했거든. 종종 내게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비난하거든. 그래서 내가 질투를 재우려고 달랬지. 당신을 그냥... 평범하고 통통하다고"
"아, 알겠어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노먼, 내가 늘 이러고 다니는 건 아니니까. 아주 평범하게 보일 수 있다고요. 믿어 봐요"
그의 얼굴은 회의적이었다.
사만사는 미소 지었다. "걱정 말라니까. 고향에 간다 해도 잠깐일 거예요. 그 뒤에는 브리즈번에 갈 예정이고 레일린에게 말하지 않으면 내가 왔다는 것도 모를 거라고요. 당신 목장엔 얼씬도 안 할 테니까"
노먼은 여전히 근심 어린 얼굴로 그녀를 택시에 태웠다.
"만나서 반가왔어요, 노먼" 사만사는 그에게 작별의 키스를 했다.
노먼이 레일린에게 들킬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짧게 키스를 하고 마는 것을 보자 그녀는 재미있었다.
질투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곧 가이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다른 남자와 외출하는 것을 보고 질투했을까? 노먼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 가이가 그렇게 보인 것은 단지 내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서도 자기에게 덮어씌울까 봐 걱정이 돼서가 아닐까? 그래, 그 해석이 더 그럴 듯해.
가이가 자신을 그렇게 모른다는 사실이 그녀를 슬프게 만들었다. 이번 일로 그가 자신에게 왜곡된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도리가 없다.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잖은가. 두 사람 다 어색해지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그건 안 된다. 앞으로 몇 주일만 탈없이 버텨 보는 수밖에. 브리즈번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집에 돌아오자 리사의 방에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그녀는 올라가 문을 노크했다. 리사가 문을 열었다. 얼굴에는 팩을 하고 머리에는 샤워캡을 쓴 모습이 볼 만했다.
"맙소사, 우리 볼 만하구나" 사만사는 쿡쿡 웃었다.
리사는 재빨리 그녀를 집안으로 끌었다. "이 늦은 시간에 들어오고 기분도 좋은 걸 보니 늦게나마 성공했나 보지? 드디어 가이가 덮쳤어? 그 다음에 저녁식사라도?"
사만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그 방면으로는 성공 못했어. 하지만 동창하고 즐거운 저녁을 보냈지. 휴가로 시내에 온 친구야. 실은 내 첫..."
"설마! 고향 촌뜨기가 네 첫 상대란 말이야?" 리사는 귀를 세웠다. "얘기해 줘. 자세히!"
사만사는 마지못해 대충 들려주고는 일어섰다. "자러 가야겠어. 내일은 가이가 아침 굶은 시어머니처럼 날 들볶아댈 것 같은 예감이 드니까" 그녀는 쿡쿡 웃었다. 리사 덕분에 그녀도 많이 느긋해진 기분이다.
그녀의 생각은 적중했다. 다음날 가이의 행동은 아침 굶은 시어머니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가 전처럼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왔어도 소용없었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아홉 시 조금 지나자마자 나타나더니, 머리를 올리고 검은 슈트에 흰 블라우스 차림을 한 그녀를 보고 쓴 얼굴을 했다.
"오늘은 점심 데이트가 없는 모양이지?" 그는 신랄하게 내쏘더니 그녀의 책상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
"내가 아는 한 없어요." 그녀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 말에 그는 그녀를 날카롭게 바라보더니 사무실로 들어가 반 시간 가량 이곳저곳 전화를 하고는 다시 나와 여러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 중에는 제임스 스미스라는 흔한 이름의 어떤 작곡가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찾아내라는 명령도 있었다.
그녀는 짐짓 웃어 보이고는 그의 지시를 하나씩 처리했다. 하지만 마지막 지시에 따라 시드니에 있는 제임스 스미스라는 이름마다 전화를 하게 되자 괴로운 한숨이 나왔다. 다행히 작곡가 제임스 스미스는 전화번호에 나온 같은 이름들 중 초반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짓궂은 쾌감을 느끼면서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 그에게 가져온 서류들을 내밀었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 서랍에는 요술쟁이라도 있나?"
"아뇨, 책상 위에 컴퓨터가 있을 뿐이죠" 그녀는 차분히 대꾸하고는 돌아섰다.
"샘!"
그녀가 문에 이르렀을 때 그가 불렀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섰다. "왜요?"
그는 묘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눈빛이 이상하게 황량하다. "사직서는 이직 유효하겠지?"
그녀는 입술을 떨지 않으려고 꽉 깨물었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실망을 감추려고 하니까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내 생각은...."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무도 당신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없을 거야"
사만사는 그 순간 그가 미웠다. 감정적인 위협으로 그녀를 어지럽히는 그의 행동이.
"글쎄요" 그녀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없어선 안될 사람은 없어요. 특히 당신 인생에서는. 이만 실례해요. 월턴 부인이 방금 들어온 것 같아요"
다행히도 월턴 부인이 몇 시간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부인이 퇴근하자 시간은 두 시가 넘어 있었다. 하지만 사만사는 아직 점심 전이었다. 가이는 한 시에 사무실을 나서면서 그녀가 타이핑할 것을 산더미처럼 놔두고 갔다. 여러 가지 책에서 뽑은 코미디 소재였다. 프랭키를 위해서 마련한 것이 분명하다. 아주 우스운 것도 있었지만 그녀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웃기는커녕 울고 싶었다.
간신히 타이핑을 끝마친 직후인 두 시 25분에 가이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아까보다는 좀 풀린 얼굴이다, 배를 채워서였는지 모른다. 아니면 또 다른 손쉬운 금발 머리여자하고 점심시간을 즐겼는지도. 그녀는 속을 신랄하게 중얼거렸다.
"월턴 부인은 갔나?"
"네, 타이핑한 것 여기 있어요"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지도 않고 타이핑한 종이를 내밀었다. "나도 점심을 먹으러 가야겠어요. 그럼, 이만 실례..." 그녀는 일어서서 화장실로 갔다.
대충 매무새를 고치고 나와서 핸드백을 집어드는데 가이가 그의 사무실로 불렀다.
"왜요?" 그녀는 그의 사무실 입구에서 물었다.
가이가 책상에서 눈을 들었다. 푸른 눈이 날카로웠다.
그 눈이 그녀의 몸매를 훑었다. 그녀는 지금 그가 뭔가를 얻어내긴 해야겠는데 직접 대고 청하기는 싫은 사업 상대를 만났을 대처럼 머릿속을 굴리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는 재떨이에 아직 꽁초가 타고 있는데도 새 담배에 손을 뻗었다. 그것을 보니 조금 전 풀린 듯한 얼굴은 연극이었나 보다. 그의 눈이 연기 너머로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그 눈에 나타난 결연한 표정에 그녀는 불안해졌다.
"오늘밤 나하고 저녁을 같이 합시다."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만사는 너무 놀라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알았다. 가이는 아직도 그녀의 사직을 말리려는 것이다. 둘 사이에 일어난 일에도 불구하고. 아니고서야 저런 제의를 할 리 없다.
"시간 낭비예요, 가이"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난 분명히 그만둘 거니까. 그리고 오늘밤은 다른 계획이 있어요" 매주 해 왔듯이 부모님에게 편지를 쓸 계획이다. 무척 근사한 계획 아닌가.
가이는 화난 듯 눈을 번뜩이더니 참았다. 차근하게 설득해야 바라는 대로 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또 옛날 애인과 데이트인가?"
"아뇨"
"설마 새 애인은 아니겠지? 실연했다는 여자치곤 아주 기운 있어 보이니 말이야"
사만사는 화를 눌렀다. 저런 착각을 하는 것이 가이의 탓은 아니잖아. 내가 잘못된 생각을 심어 준 탓이야. 지금 그 보복을 받고 있는 중이고.
"데이트는 없어요. 그냥 할 일이 좀 있어서.<헤이우드 프로모션>에 내 모든 인생이 걸린 건 아니잖아요" 그녀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리고 내 기분이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역시 차갑게 말을 이었다. "실연으로 산산조각 난 건 사실이에요. 단지 얼굴에 드러내고 다니고 싶지 않다 뿐이지"
그의 푸른 눈이 딱딱해졌다. 울화를 억누르느라 턱 근육이 뒤틀리는 것도 보였다.
"다행이군, 샘. 하지만 당신의 행동에 대한 내 염려도 이해해야 돼요. 임신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때까지는. 그런 척하지만, 당신은 절대 남자한테 인기가 없는 여자가 아니니까."
"놀라워요" 그녀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사람들이 늘 자신의 도덕 기준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것을 보면. 믿든지 말든지 상관없지만, 난 남자하고 외출한다고 언제나 침대로 함께 가지는 않아요. 이성에게서 육체만을 보는 게 아니니까. 침대에서 뒤척거릴 때마다 새 남자 얼굴이 필요한 여자가 아니라고요"
그녀가 노려보자 그도 마주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공격에 놀란 모양이다.
"당신 보기엔 내가 그런가? 비열한 한량?"
"아닌가요?"
그는 이맛살을 찡그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떤 사람들 눈에는" 그의 주름이 접혔던 이마가 펴지고 조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한숨소리에는 기묘한 만족이 어려 있었다. "그럼 그 촌뜨기 애인이 당신을 호텔로 꼬인 건 아니군"
"물론이에요! 그리고 알려 주지만, 노먼은 내 애인이 아니었어요. 그와는 난 한 번뿐이었어요. 8년 전 졸업 파티에서. 멍청한 사춘기 때요. 노먼은 사춘기 소년들이 그렇듯 굶주려 있었고, 난 그가 날 필요로 하는 것 같아서였죠. 하지만 즐겁지 않았어요. 난 그런 멍청한 짓을 곧잘 해요. 뭔가 필요해 아쉬워하는 사람들 형편이나 봐주는"
"잘됐군, 그럼" 가이는 일어섰다.
사만사는 그가 다가오자 가슴이 죄어들었다. 그의 눈에 분명 격한 감정이 번뜩이고 있었다.
"나도 지금 뭔가 필요하니까, 샘" 그의 음성은 낮고 유혹적이다. "너무나 필요해..."
그녀는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그는 다가오더니 놀랍도록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 벽에 밀어붙였다.
처음 키스는 부드럽고 참을성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입술을 희롱하여 입술을 열게 한 다음 그녀의 목에서 신음소리가 나오길 기다렸다. 이어 그의 양손이 그녀의 얼굴을 쥐더니 거친 키스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귀를 거쳐 맥박이 뛰는 목줄기로 내려오자 그녀는 숨을 할딱였다. 그의 격정적인 속삭임이 그녀의 온몸에 욕망의 전류를 흘려보냈다.
"달콤해... 섹시하고... 내가 정말 당신을 알았던가? 아니야... 하지만 당신을 원해... 맙소사, 정말 원해... 거부하지 말아요"
그의 떨리는 손이 그녀의 재킷 속으로 들어와 블라우스를 밀어 올렸다. 이어 그 손이 그녀의 맨살 등뒤로 돌아가자 그녀는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찬 공기가 다리에 닿고서야 그녀는 그가 손을 내려 치마를 위로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 안돼요..." 그녀는 소리쳤다. "여기선 안돼,..., 누가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그는 한쪽 발을 뻗어 문을 차서 닫고는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잠갔다.
그가 뭘 하려는지 깨닫자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리사의 말이 되살아났다. 흥분해서 책상 위에서 널 덮칠지도 몰라...
그 말에 놀랐었고, 지금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에게 더 놀라고 있었다. 자신의 온몸을 감싸는 달콤한 항복의 유혹에 놀랐다. 벽이건 책상이건 이젠 상관없었다. 절대 가이를 말릴 수 없다. 절대.
"좋아요..." 그녀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녀의 완전한 항복에 놀랐는지 그는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수치도 잊었다. "당신을 원해요" 그녀는 목 쉰 소리로 속삭였다. "몰라요? 지난 금요일 밤 이후로 원했어요"
그의 손길이 딱 멎었다. "그럼, 어제 그 드레스를 입고 일부러 날 놀린 건가?" 그는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화난 눈을 빛냈다. "그렇지?"
"그래요"
"이 망할 여자" 그는 신음소리를 내고는 그녀를 들어 안고 소파로 가 그 위에 그녀를 뉘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옷을 벗겼다.
그녀도 그의 옷을 마주 벗겼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을 걸, 사만사 피터슨" 그는 신음소리는 내면서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난 언제라도 원하면 당신을 가질 거니까" 격정적인 속삭임이 뒤따랐다. "어디서든...얼마든지...가질 거야... 내 몸안의 악마를 물리칠 때까지.... 그래서..."
하다가 그는 절정에 몸을 떨고 엎드렸다. 세찬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만사는 그를 끌어안고 땀에 젖은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그의 어깨에 키스했다. "난 당신 거예요. 당신이 나를 원하는 한...."
자기 말을 음미하는 그녀의 가슴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그 말은 가이가 다른 여자들하고 갖는 관계를 그대로 표현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모두 일시적인 애인 관계의 여자들이다. 가이가 조만간 정열이 식고 육체적으로 지루함을 느끼면, 그녀 역시 그의 다른 여자들처럼 휴지조각처럼 버려지고 말 것이다. 앞으로 석 달이 될 수도 있고, 넉 달, 잘 해야 여섯 달이될 수도 있다. 여섯 달이 그의 한계였으니까.
그런 황량한 생각을 곱씹고 있다가 그녀는 문득 기억해냈다.
"오, 맙소사!" 그녀는 그를 밀치고 일어나 앉았다.
"무슨..." 그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화요일이에요!"
그의 눈에 떠오른 공포를 그녀는 분명하게 읽었다. 그 역시 까맣게 잊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그는 더 이상 그녀가 그의 아기를 갖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만사는 감정이 두 갈래로 흘렀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나를 얻고-그녀에 대한 가이의 욕망. 하나를 잃었다. 자기 아이의 엄마로서 그녀를 원하는 그의 마음을 잃었다.
"그렇군" 그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그는 소파에서 내려가 절망적인 손길로 이마의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가이" 그녀는 불안으로 뛰는 가슴을 달랬다. "화낼 필요 없어요. 원래 계획이 그랬잖아요"
그는 딱딱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의 원래 계획에는 몇 가지 선제 조건이 있었소. 그런데 그 후 상황이 달라졌어."
"어떻게요...?" 우리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말일까? 나에 대한 느닷없는 욕망이 생겼기 때문에?
그는 일어나서 그의 옷을 집어들었다. 사만사는 잠시 그를 지켜보다가 갑자기 쑥스러워서 자신도 옷을 집었다.
"난 우리가 이렇게... 육체적으로 잘 어울리라곤 기대 못했소." 그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때문에 문제가 생겼소."
"왜요"
그는 화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샘. 남자와 여자가 서로 육체적으로 끌리면 이어서 감정적으로 깊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둘 중 하나는 자신들이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단 말이오. 그렇게 되면 비싼 대기를 치러야지. 맙소사" 그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당신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으니 걷잡을 수 없는 일은 없을지 모르지. 그리고 난 정말 아이를 원한다고. 비록..."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사만사는 그의 처음 말만 귀에 들어왔다. "정말 육체적으로 내게 반했나요, 가이?" 그녀는 숨가쁘게 물었다.
그의 입에 조소가 떠올랐다. "더 증거가 필요한가?"
그녀는 블라우스를 입던 손길을 멈추었다. 처음 본능적으로 떠오른 것은 얌전하게 눈을 내리깔고 아니라고 대답하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가이의 느닷없는 원시적인 격정을 맛보고 그녀는 수줍음을 벗었다. 그녀는 솔직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요"
그는 숨이 막힌 듯했다. 하지만 곧 싱긋 웃었다.
그의 손이 다가와 그녀의 부푼 입술을 매만졌다. 그 손이 옷 위로 그녀의 가슴까지 내려왔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이런 면을 숨겨 왔지?" 잠긴 목소리였다. 욕망으로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목이 말라 고개만 내저었다.
그가 나직하게 웃으며 그녀는 끌어당겼다. "오늘도 잠옷 가방을 가져오지 않았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실망한 척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오늘밤은 옷 없이 내 침대에서 자야겠군?"
그녀의 몸이 사르르 떨렸다.
"하지만 우선 할 일을 해야지" 입술에 쓴 미소를 떠올리며 그는 다시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남자가 아이를 가지려면 별 수 있나...."
10
다음날 아침 사만사는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선 뒤였다. 그녀를 원하는 가이의 욕망은 그를 원하는 그녀의 욕망에 못지않았다. 그리고 상식은 언제가 그녀의 이 행복도 끝이라고 속삭이고 있었지만 희망이라는 못 말릴 낙천주의자는 가이가 이번에는 바뀔지 모른다고 속삭여 왔다. 그의 아이를 가지면 이번만은 가이도 그녀에게 마음이 얽매이고 그녀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가능한 일이다. 지금 상황을 보면 가능하지 못할 것도 없다.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이 가이의 애인이 되리라고는, 가이가 그처럼 격정과 욕망을 담고 그녀를 바라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간밤에 그는 지칠 줄 모르고 그녀를 원했다. 유혹적인 말을 속삭이면서. 남자가 당신이야말로 세상 제일의 섹시하고 매력적인 여자라고 속삭이는데 어떤 여자가 녹지 않겠는가.
그후 2주일은 황홀하게 지나갔다. 가이는 때를 가리지 않고 그녀를 원했다. 장소도 시간도 개의치 않았다.
한번은 월턴 부인이 보통 때보다 오래 사무실에 남아 있자 가이가 그녀를 시내 반대편에 심부름을 보냈다. 그런데 그녀가 돌아왔을 때, 가이와 사만사는 간신히 옷만 걸친 뒤였다. 그리고 그날 밤 둘이 가이의 침대에 누웠을 때, 가이는 사만사에게 앞으로는 사무실에 벗기 편한 치마를 입고 오라고 주문했다.
몇 주일 전의 사만사라면 그런 대담한 짓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수줍음도 수치도 없이 그의 말에 따랐다. 그를 기쁘게 하는 데만 몰두했다.
가이의 태도도 달라졌다. 격정적인 행위가 끝나고 나면 늘 그녀를 안고 귀중한 것을 대하듯 속삭이며 토닥였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을 대하듯.
그가 사귄 여자들이 그에게 정신을 못 차리는 것도 당연해. 그녀는 종종 씁쓸한 질투를 안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 그런 생각도 밀쳐 버리고 그와의 황홀한 매일매일을 즐기려 노력했다.
그녀가 그의 집에서 머물고 간다는 사실을 가이가 굳이 감추지 않는 것도 그녀는 기뻤다. 가이는 그녀가 머문 다음날 아침에는 당당히 그녀를 데리고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바바라와 레온 부부는 곧 사만사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심지어 바바라는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몇 년씩 걸려서야 겨우 여자 고르는 수준이 높아지는 남자들도 있어요. 하지만 일단 높아졌다 하면 자기보다 훨씬 나은 여자들을 고르기도 하지."
하지만 월턴 부인만은 다행히 아직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워낙 고지식한 사람이니까. 리사는 물론 친구를 위해 기뻐해 주었다. 하지만 사만사와 커피를 마시며 수다 떨 시간이 없는 것은 불만이었다.
"운이 좋구나, 널 만나게 돼서" 리사는 어느 일요일 공동 세탁장에서 투덜거렸다.
사만사의 생리일이 3주 지난 날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주말에 가이는 의사에게 확인을 해보아야 한다고 고집했고, 사만사는 월요일 아침에 의사와 약속을 해두었다.
"빨래를 해야 해서" 사만사는 웃으며 설명했다.
"아직 행복한 모양이구나" 리사가 윙크했다. "결혼 말은 나왔니?"
사만사는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아니, 그는 결혼할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아"
리사가 어깨를 들썩했다. "남자들은 언제나 결혼할 타입이 아니지. 천생연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가이는 아니야" 사만사는 대꾸했다. "확실한 독신 타입이라고"
"그럼 뭣 때문에 그 남자한테 마음을 태우는 거야? 넌 정사만으로 만족하는 여자는 아닌 것 같은데"
사만사는 정신이 들었다. 리사 같은 사람한테 어떻게 아기 이야기를 설명할 수 있을까? 실수로 보이게 하는 것 말고는. 하지만 문득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절대 싫었다.
"실은..."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내가 가이하고 지내는 두 번째 이유가 있어 그 사람이 그랬거든. 결혼은 하고 싶지 않지만 사랑할 아기는 갖고 싶다고. 그래서...."
"그래서 네가 서비스하겠다고 나섰단 말이야?" 리사가 딱딱하게 말했다.
"응, 그래..."
리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 맙소사! 고귀한 희생이란 알고 보면 큰 실수일 때가 많다고. 하지만 네 고민은 알겠어. 그 남자의 분신이나마 지니겠단 말이지. 좋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출산일은 언제야? 남자아이 옷을 짤까, 아니면 여자아이 옷을 짤까?"
사만사는 겸연쩍게 웃었다. "내가 임신한 건 어떻게 알아?"
"저런 쑥맥.... 벌써 몇 주째 네가 몰래 몰래 밤에 들어오는 걸 보면 뻔하지?
사만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밤 그녀는 침대에 들면서 내일 아침 약속으로 신경이 곤두섰다. 만일 임신이 아니라면? 생리가 늦는 것뿐이라면?
다음날 아침 열 시. 사무실 복도를 서둘러 걸어가는 그녀의 귓가에 의사의 말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네, 양성입니다. 피터슨 양. 날짜로 보아서 출산 예정일은 2월 중순이군요"
그녀는 더없이 흥분해 있었다. 정말로 아기를 갖게 된다. 진짜 아기를. 바로 지금도 작은 생명이 그녀의 몸 안에서 자라고 있다.
맙소사. 그녀의 얼굴이 행복으로 빛났다. 내가 엄마가 되는 거야! 그녀는 사무실 문 앞에 멈춰 서서 떨리는 손으로 배를 쓸어 보았다.
"들리니, 아가야? 내가 네 엄마란다. 날 엄마라고 부를래, 아니면 마마라고 할래? 네 아버지처럼 푸른 눈일까, 아니면 나처럼 개암빛일까? 내가 널 사랑할 것처럼 날 사랑해 주겠니?"
그녀는 행복한 한숨을 내쉬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바보 같은 미소를 띠고서. 그런데 그녀의 사무실에 손님이 와 있었다. 그녀의 의자 끝에 가이의 아버지가 앉고, 가이는 책상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다 침울한 얼굴이다.
"어머나!" 그녀는 놀라 외쳤다. 가이에게 직접 아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녀는 그의 묻는 듯한 눈길에 고개를 약간 끄떡거려 대답을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르리라 기대했던 기쁨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충격과 실망이 그녀를 강타했다. 물론 처음에 그녀가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자 그는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그후부터는 적응해 나가는 듯했다. 토요일 밤에는 아기 이야기를 하면서 극히 행복해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버지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길래 저렇게 기분이 나빠 있는 걸까?
그녀는 마틴 헤이우드를 바라보면서 실망을 감추려 애섰다. 왜 저분은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을 골라 들른 걸까? 그제서야 그녀는 그의 얼굴이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체중이 줄었을 뿐더러 수술한 뒤로 급격히 늙어 보였다. 40대로 보이던 얼굴이 이제는 어느 모로 보나 57살 그대로 보였다.
그가 일어서서 그녀의 얼굴이 바라보자 그녀의 화났던 가슴에 연민이 스며들었다.
"아주 좋아 보이는군, 사만사" 그가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 "가이 말이, 의사한테 갔다더군. 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가이를 바라보았다. 가이가 얼른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분간 임신 소식은 비밀로 해야 할 모양이다. 그 또한 실망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보일 반응이 떠올랐다. 부모님들이 보일 반응은 분명 리사 같은 현대적인 아가씨의 반응하고는 다를 것이다."
"먹던 약을 새로 탈 일이 있어서요" 그녀는 대답하고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주 능률적인 아가씨야" 마틴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코트를 벗고 나서야 그녀는 자기가 입고 있는 것이 가이가 지난 토요일 아침에 사준 드레스라는 것을 알았다. 벗기 편하다는 이유를 들면서. "월요일에 입어요" 점원이 포장을 하는 동안 가이가 속삭였었다. 무척 여성스러운 페이즐리 무늬 드레스로, 목선이 낮고 치마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마틴 헤이우드 전에 보았던 그녀의 옷들하고 달랐다. 그나마 머리를 위로 올린 것이 다행이었다. 마틴이 뭔가 눈치를 챈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절대 달갑지 않으니까.
"그럼, 아버지..." 그녀가 다시 사무실에 들어서자 가이가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가정부가 필요하시잖아요. 집안 일을 혼자서 하실 수는 없고. 그런 큰 수술 뒤인데. 대체 왜 해고하셨어요?"
마틴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여자가 너무 잔소리를 해대잖아. 이걸 먹어라, 이걸 마셔라 하고. 남자가 종종 시가하고 포도주를 즐기지 못하면 대체 무슨 낙으로 산단 말이냐? 가뜩이나 다른 낙도 없는 요즘에"
"좋은 가정부가 어디 널려 있는 줄 아세요?" 가이가 딱딱하게 쏘아붙였다.
"그럼 좋지 않은 가정부를 구해 주려무나" 마틴이 씁쓸하게 웃었다.
사만사에게 좋은 영감이 떠올랐다. 마틴을 동정해서가 아니라, 이기적인 목적에서였다. 가이의 아버지를 가이에게서 떼어놓고 싶었다. 그것도 멀리.
"제가 주제넘지만 제의해도 될까요?"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제 이모 중에 과부이신 분이 있는데 큰집에서 사시고 종종 하숙도 치세요. 전에는 군 간호사셨고요. 회복기의 환자를 돌보는 데는 훤하시죠. 뉴캐슬에 사시긴 하지만 새로 생긴 고속도로로 가면 두 시간밖에 안 걸려요. 그리고 헤이우드씨에게는 딱 좋은 분이에요"
그녀는 잘 생기고 엄한 괴짜 이모를 떠올리며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고모는 사람이 먹어야 할 것과 아닌 것에 대해 흔들이지 않는 고집을 지닌 분이다. 담배를 못마땅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가 전화를 넣을까요? 당분간 하숙인이 와 있어도 되냐고요. 해변에서 멀지 않답니다. 그리고 요리도 잘하시고 이야기 상대로도 훌륭한데다 포도주 팬이시죠" 그 뿐인가, 위스키, 진, 보드카 가리지 않는다.
"글쎄" 마틴이 함정을 눈치챈 양 망설였다.
"그렇게 하세요, 아버지" 가이가 초조하게 말했다. "손해 날 건 없잖아요"
마틴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없지. 그런, 그 이모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지, 아가씨. 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지, 여자들한테 맡기지 않아"
보니 이모에게 걸리면 뜨거운 맛 좀 보시게 될걸요. 사만사는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틴이 전화하기 전에 이모에게 전화해 놓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마틴을 고집쟁이에다 녹녹치 않은 사람으로 묘사해 두면 이모도 도전을 물리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요즘 이모의 편지를 보면 외로우신 것 같다. 외아들이 보르네오인가 어딘가에 광산 일을 하러 갔으니까. 분명 소일거리가 필요하실 것이다.
마틴 헤이우드가 사무실에서 나가자 사만사는 가이를 바라보았다. 커지는 의심을 잠재우고 싶었다.
"아이를 원하지 않아요, 가이?"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물론 원하오" 하지만 그의 이마에는 주름이 생겨 있다. "그저 단지..."
"단지 뭐죠?"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요즘 내가 건망증이 심해서 그렇다고 해두지. 그것도 중요한 것들을 곧잘 잊거든. 당신은 아직 그 남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쉽게 변할 수 있지. 상처 난 가슴은 회복될 수 있소" 그의 입가에 냉소가 흐르더니 그는 그녀의 드레스를 눈으로 훑었다.
"여자들은 흔히 나하고 사랑에 빠지더군. 그런데 내가 보기엔 당신은 어느 모로 보나 여자요. 난..." 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난 여전히 똑같은 남자일 뿐인데. 이렇게 늦게 내가 바뀔 리 없소. 그러니 내가 이쯤에서 그만두지 않으면 당신에게 상처를 주게 될 거야. 그런데 이제 와서 상처 주기엔 난 당신을 너무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어"
"비서로서 말이죠?"
그녀의 날카로운 어조에 그도 날카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곧 체념으로 부드러워졌다.
"그것도 그렇지. 난 이기적인 남자니까. 하지만 일부러 여자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소. 이제 와서 그런 짓을 시작하고 싶지도 않고. 난 늘 솔직하게 기본 원칙을 세워 왔소. 아기에 대한 일로 당신에게 그런 것처럼. 그런데 도중에 삐끗해 버렸지" 그는 어깨를 폈다. 긴장이 서려 있다. "원래 우리 계획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일 것 같소. 일단 임신하면 우리의 관계도 끝이라는 것으로"
그녀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심은.... 아니겠죠?"
"진심이오"
"하지만 나하고의 잠자리를 좋아했잖아요?"
그의 얼굴이 굳었다. "많은 여자들하고도 그랬지" 그녀의 얼굴에 심상치 않은 기색이 나타났는지 가이는 곧 초조하게 말했다. "제발, 샘, 날 그렇게 보지 마. 피할 수 없는 일을 꺼내고 있는 것뿐이오. 설마 여자들이 흔히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당신에게 결혼을 청하고 안정을 찾을 거라든지, 당신을 영원히 원할 거라든지?" 그는 딱딱하게 웃었다. "맙소사, 그건 헛된 공상이야. 당신도 내심 알고 있잖아. 나 같은 악당을 좋아하기엔 당신이 보다 상식이 있는 줄 알았는데. 자존심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의 뺨에 붉은 자국이 났다. 두 사람 다 충격이었다. 사만사는 겁에 질리고 수치스러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이는 빰을 문질렀다. 목소리가 피곤했다. "그래, 난 이런 일을 당해 마땅하지. 하지만 당신 행동은 내 말을 입증한 거요. 이미 당신은 어느 정도 내게 감정적으로 빠져들었소. 그러니 원점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원래 지녔던 서로에 대한 존경과 우정을 되살리는 것이 최선이요. 유일한 길이지. 당신도 결국엔 깨달을 거요"
정말 그럴까? 지금 그녀로서는 앞날 따위는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렇게 비참하고 불행한 심정을.
가이는 한숨을 내쉬고 돌아서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만사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30분 후, 배달원이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카다란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을 때도 사만사는 여전히 그렇게 앉아 있었다.
"피터스 양?"
"그런데요?"
"꽃 배달입니다." 배달원은 싱긋 웃으며 책상에 꽃을 놓고 나갔다.
그녀는 멍하니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가이한테서? 생전 여자에게 꽃이라고는 보낸 적이 없었는데. 그때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 노먼이야! 상냥하고 샌스있는 노먼. 그녀는 미소를 띠고 꽃다발에 달린 카드를 펼쳤다. 하지만 카드를 읽자 손이 떨렸다.
아이에 대한 소감을 제대로 말하는 것을 잊었소. 이 꽃이 보상이 되길 바라오. 아기 소식에 흥분한, 그러나 이기적인 아빠로부터.
가이의 사무실 문이 열리고 그가 나왔다. 꽃을 보자 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반시간 내로 안 가져오면 가만 안 두겠다고 꽃집에 위협했지"
그는 다가와 커다란 분홍 꽃송이를 어루만졌다. 사만사는 목에 뭔가 치밀어 올라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고맙다고 하고 싶었지만 혀가 얼어붙었다. 꽃을 어루만지는 저 손가락이 다시는 자신을 어루만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아름답지 않소?" 가이가 눈길을 떨구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가이는 분명 눈물을 보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리고 있으니까.
"제발 그러지 말아요, 샘" 가이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실망 어린 목소리에 그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의 입장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아이를 원했을 뿐이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그녀를 아이의 어머니로 결정을 내렸다. 그랬는데 절반밖에 영문을 알 수 없는 괴로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지금 그녀에게 좋은 친구가 되려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상처 입을지 몰라 보호해 가면서. 그녀가 너무 깊이 빠질까 봐 보호하는 것이다. 휴지를 찾는 그녀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가이는 모르지만 난 이미 그에게 깊이 빠질 대로 빠져 있지 않은가.
그녀는 코를 풀고 나서 미안한 듯 웃었다. "괜찮아요, 난. 임신 때문에 호르몬 이상이 생겼나 봐요. 남자가 꽃을 보낸 게 처음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나 역시 꽃을 보낸 것은 처음이오"
"알아요" 그녀는 놀란 그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있나, 샘?"
"아직 많죠. 하지만 최근에 아는 게 많아진 것도 사실이죠" 그녀는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맘속으로 쓰디쓴 결심을 다져먹었다. 자, 이젠 강해질 때야, 셈.
"그건 그렇고 가이, 우리 아이 이름을 생각해 뒀어요?"
가이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남자냐, 여자냐만 나타내면 된다는 것 말고는 아직 정해 둔 것 없소. 남자인지 여자인지 헛갈리는 것은 싫거든"
"가이, 내일 내가 여러 가지 이름을 생각해 올 테니까 고르세요"
"그렇게 해줘요"
"적당한 산부안과 의사도 알아두어야 해요. 당신, 아는 사람 있어요?"
그는 싱긋 웃었다. "직접 아는 사람은 없소"
그녀도 마주 웃었다.
"당신도 아이 때문에 흥분해 있군? 아까 들어올 때 바로 알았소"
"구제할 길 없이 흥분했었죠"
그의 눈빛은 따스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슬펐다. 그가 몸을 굽혀 그녀의 입술에 입맞추자 그녀는 움찔했다. "상냥한, 샘" 그는 속삭이고 홱 돌아서서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의아하게 생각한 채 퇴근한 그녀는 그녀의 텅빈 집으로 돌아왔다.
전화벨이 울려댔다. 그 소리 때문에 그녀의 생각이 방해를 받았다. 거실로 달려간 그녀는 수화기를 잡아챘다.
"여보세요?"
"집에 와 있어서 다행이다. 너랑 얘기를 좀 하고 싶구나"
사만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 맙소사. 헤이우드씨 건으로 고모에게 전화하는 것을 깜빡했다. 그런데 이모 목소리가 무척 화나 있다.
"안녕하세요, 이모" 사만사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헤이우드씨가 전화하셨군요?"
"영리하게도 금방 아는구나"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하긴 내가 너무 과한 욕심이겠지. 네 상관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 느닷없이 전화해서 같이 살자는 이야기를 하리라고 미리 알려 주었어야 하잖냐고 말하면"
"네, 전화 드리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만. 죄송해요"
"흥" 이모는 직접적으로 사과하면 마음이 풀린다.
"그리고 지난번 편지에서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이게 무슨 소리냐. 난 자선을 베푸는 쪽은 내 쪽인 줄 알았는데. 네 말을 들으니 내가 오히려 환자 같구나"
사만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거나 헤이우드씨를 하숙인으로 들이게 되면 일석이조잖아요"
"글쎄.... 마틴은 재미있는 사람 같긴 하더구나"
"마틴?" 사만사는 이모와 마틴이 벌써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 것에 기절초풍했다.
"그럼 뭐라고 부르란 거니?" 이모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헤이우드씨? 피차 50줄에 들어선 늙은이들이? 맙소사, 관둬라"
"그럼 헤이우드씨는요?"
"날 베로니카라고 부르지. 보니보다는 어울리는 이름이라더라"
사만사는 이모의 수줍은 음성에 기가 찼다. "맙소사, 그 악당께서 벌써 이모를 홀려 놨군요?"
"그 아들이 널 홀린 것만큼은 아닐 거다. 내가 몇 년간 뒷사정을 모르리라 생각했니? 너처럼 매력적인 애가 남자 친구 하나 없는 사정을? 솔직히 털어봐. 네 한량 같은 사장을 사랑하고 있지? 그렇지?
사만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모를 사랑하긴 하지만 아직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이와 그녀의 임신 이야기를 하면 이모는 분명 눈 깜빡할 사이에 이 집 현관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아직 몇 달 있다가 사람들에게 알려도 된다. 여섯 달이 지나기 전까지는 가이와의 관계에 대한 양상도 정확히 파악될 것이다. 가이가 그렇게 오래 여자와 접촉을 안 할 리 없다. 그녀에게 돌아오거나, 아니면 다른 연애를 시작할 것이다. 전자라면 오늘 그녀에게 떠올랐던 어떤 생각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후자라면.....
사만사는 그가 다른 금발 머리 아가씨와 어울리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다. 하지만 싫다고 안 일어날 일은 아니다. 가이가 담배를 끊느냐 그러지 않는냐를 보면 알 수 있을 테지.
"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셨어요, 이모? 내가 가이를 사랑하면 얘기했지, 안 했겠어요? 이모한테는 늘 뭐든지 얘기하잖아요"
"그랬지"
사만사는 웃었다. "가이하고는 좋은 친구일 뿐이에요" 지금으로서는 옳은 소리다.
"헛소리"
"헛소리라고요?"
"그래, 하지만 이야기 못하겠다면 억지로 쥐어짤 수는 없지. 오래 전에 내가 해준 유익한 충고를 네가 잊지 말기만 바랄 뿐이다"
"충고요?" 그녀는 반문하다가 자신이 시드니에 처음 올라올 때 이모가 그녀의 가방에 피임약 상자를 넣어 주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내가 아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날이 오면 이모는 아마 뒤로 벌렁 넘어지겠지. "네, 걱정 마세요, 이모" 그녀는 짐짓 이모를 안심시켜 드렸다.
"그렇다면야..."
"헤이우드씨가 저녁식사 뒤에 적포도주 한잔하길 좋아한단 말하시던가요?" 사만사는 말을 돌렸다.
"아니, 말 안 했어"
"그리고 종종 시가도 피워요"
"지금도?"
"그 분은 아주 중병을 앓았었어요. 보살펴 주어야 해요. 그리고 보살피는 데는 이모를 따라갈 사람이 없잖아요" 이모가 싱긋 웃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넌 언제나 맘이 고왔지, 사만사"
"내가 좋아하는 이모를 닮은 거죠."
"그리고 아첨꾼에다 거짓말쟁이고"
"절대 아니에요!"
"아, 뭐, 좋아. 하지만 명심해라. 언젠가 죄 값을 받을 거다"
벌써 받았는걸요.
"잘 있거라. 몸조심하고"
사만사는 전화를 끓으며 가슴이 벅차 옴을 느꼈다. 사랑 받는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이다. 사랑받는다.
불현듯 아까 가이가 몸을 굽혀 너무나도 부드럽게 키스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그녀는 깜짝 놀랄 만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생각이 옳을까? 심장 고동이 빨라졌다. 혹시 가이는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럴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키가 크고 체격 좋은 갈색 머리 여자에게 욕망을 갖는 것 역시 그답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꽃을 보내는 것은 특히나 그답지 않고.
그녀는 솟는 희망을 누르지 못했다. 가이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 감정이 지속되리라 믿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여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싫증이 날지 모른다고. 하지만 그는 이번에는 육체관계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직 모른다. 두 사람은 이미 함께 아기를 만든다는, 남녀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은밀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모른다. 이제 때가 되면 그는 나에 대한 자신의 집착의 강도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할 일은 기다리며 희망을 품어 보는 일뿐이다.
다음날 아침 사만사는 가이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손에는 아이의 이름들이 나온 책이 들려 있었다. 출근하는 길에 사서 쭉 들여다보았다.
"아들일 경우, 마크 어때요?" 가이가 책상 뒤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자 그녀는 열심히 물었다. "스코트는? 제임스는?"
"좋소" 그는 첫 모금을 깊이 빨고 대답했다.
"좋다뇨? 무슨 뜻이에요? 어떤 것이?"
"셋 다 하면 어떻소? 마크 스코트 제임스"
"아, 좋아요"
"딸이면?" 그가 다그쳤다.
"딸이라도 괜찮아요?" 그녀는 그를 떠보았다.
"괜잖지 않을 이유가 뭐요? 딸애한테도 낚시를 가르칠 수는 있다고"
"그럴 거예요. 나도 오빠하고 고향 강둑에서 몇 시간이고 낚시를 하곤 했어요. 두꺼비밖에 못 낚긴 했지만" 그녀는 싱긋 웃었다.
"낚시를 좋아하나?" 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럼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늘 날 놀래는군"
그녀는 기뻐 가슴이 부풀었다. "자, 딸 이름으로 들어가요. 난 나탈리를 골랐는데, 바이올렛은 어떨까요?"
"나탈리" 가이가 결정했다. "나탈리 린 바이올렛"
"그거 사랑스럽네요." 사만사는 활짝 웃었다.
가이는 이맛살을 살짝 찡그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아침은 명랑하군."
"그런가요?"
"그렇소" 그의 눈이 뭔가 의심하듯 좁아졌다. "노먼이 돌아왔나?"
그의 목소리에는 분명 질투가 담겨 있었다. 분명했다.
"전혀요" 그녀는 대답했지만 그의 말뜻을 알자 화가 났다. 대체 날 뭘로 알고? 남자에 미친 여자인 줄 아나?
"정말 내가 당신 아기를 품고 있으면서도 다른 남자와 침대에 가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는 담배를 내려놓으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다시 올려다보는 표정은 읽을 수가 없다. "당신은 그럴 권리가 있지?" 매우 속 보이는 대답이다. "그리고 내겐 반대할 권리가 없고"
그녀는 충격에 몸을 떨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자기 아기의 엄마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에 대해 저렇게 이성적일 수 있을까? 절대 그러지 못한다. 그녀는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가 그런다면 옳은 기분이 아닐 거예요." 그녀는 간신히 대답했다. "다시 일이나 해야겠어요"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책상에 돌아와 앉았다. 가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절대.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라는 것을 어찌 잊었단 말인가. 나를 좋아하고 내가 상처받지 않는 것을 원치는 않는다. 그것이 그가 두 사람 사이를 끝낸 유일한 이유다.
그 날로 사만사의 속절없는 희망은 아주 꺼지고 말았다. 그리고 가이가 계속 담배를 피우는 것에 목을 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가이는 아마 이런 시기에는 다른 여자와의 관계로 일을 복잡하게 하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아이 생각만 하기로 했는지 모른다. 그녀도 그가 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아이를 갖는 일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이 필요한 일이니까.
우선 좋은 산부인과 의사가 필요하다. 그런데 뜻밖의 인물에게서 정보를 얻었다. 월턴 부인이었다. 월턴 부인에게 언제까지 임신을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속일 생각도 없었다. 가이도 진심으로 동의한 일이다. 사실을 밝히던 순간은 그녀의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다.
"헤이우드씨의 아기를 갖고 있다고요?" 부인은 입이 딱 벌어졌다. "저 헤이우드씨 말인가요?"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안쪽 사무실을 가리켰다.
사만사는 엄숙한 얼굴을 꾸몄다. 부인의 놀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핸섬하기는 해도 가이는 사무실에서는 권위 있는 상사다. 그는 비서 사이에 일 말고 다른 기색을 보인 적이 없다. 더구나 짧았던 밀회 기간 동안에도 그런 눈치를 보인 적이 없으니 더욱 놀랐을 것이다.
"우린 좋은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캐럴. 둘 다 결혼을 바라진 않지만 아이를 원해서요"
그 말에 부인은 더욱 기절할 듯 놀랐다. "하지만..."
"흔치 않은 일인 줄은 알아요" 사만사는 인정했다. "하지만 우린 그걸로 만족해요. 당신이 어색하다면 사무실 일을 도울 다른 사람을 구하죠"
부인은 그 말에 정신이 들었다. "아니, 안돼요. 난 여기 일이 좋아요. 단지 당신이 떠나고 내가 과외의 일을 맡아야 하리라고 생각해서...."
"그렇지 않아요. 영 일을 떠나는 건 아니에요. 가이는 내게 작은 집을 사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아기를 볼 사람을 구해주기로. 내가 매일 몇 시간이나마 출근할 수 있도록. 하지만 부인의 근무시간이 는 것은 사실이에요. 괜찮을까요?"
월턴 부인은 곧 얼굴이 환해져서 사만사와 아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믿을 만한 의사를 추천해 주었다. 그녀의 여동생을 맡았던 의사라고 했다.
사만사는 여자들 사이에 가능한 우정에 다시 한번 놀랐다. 전에는 캐럴 월턴을 1주일에 하루 같이 일하는 것뿐인 희미한 존재로만 인식했는데, 금방 좋은 친구가 되어 버렸다. 리사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가이와의 짧았던 관계 전모는 밝히지 않았다.
그 일은 입에 올려선 안 되는 금기 사항이었다. 리사에게도, 가이와의 관계는 끝났고 그들은 단지 친구 사이일 뿐이라고 해두었다. 이젠 가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까지 했다.
"그렇겠지, 그럼" 리사는 평소처럼 냉소를 보냈지만 고맙게도 더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임신기간은 사만사에게 지루하기도 하고 화살처럼 빠르기도 했다. 기분 여하에 따라서 달라졌다. 처음에는 순조로웠지만 두 달 가량 되자 입덧이 시작되었다. 그 후 한 달은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녹초였다. 가이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집에 있으라는 그의 말도 소용없었다. 그의 말대로 하루 집에 있어 봤지만 점심때가 되자 좀이 쑤셨다. 자기는 바빠야 더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넉 달째가 되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가뜩이나 풍만한 가슴이 더 커지고 맞는 곳이 없어져도 기분이 좋을 여자가 있다면 말이지만. 그렇다고 풍선처럼 부푼 것은 아니다. 허리선이 없어졌을 뿐이다.
가이는 그녀를 데리고 쇼핑에 나가서 임신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임신복으로 통용될 만 허리선 낮은 드레스와 헐렁한 재킷 등을 사주었다. 사만사는 그에게 귀중한 취급을 받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사랑 받는다는 기분은 아니었다.
다음 월요일 아침, 가이가 손에 담배를 들지 않고 출근해 하루 종일 한 개피도 피우지 않았을 때는 더욱더.
그렇게 우울한 날은 그녀의 생전에 없었다. 결국 그녀는 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일찍 퇴근해 여러 시간을 울었다. 가이는 비밀로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가이의 습관을 잘 아는 그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후 몇 주일간 그녀는 그를 지켜보면서 그가 다시 담배를 피우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피우지 않았다. 결국 마음의 상처도 줄었다. 귀여운 금발 여자가 사무실로 들어와서 그의 품안에 안기는 모습만은 아직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리고 누구와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잠을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10월이 되자, 그녀는 임신 소식을 가족에게 전하는 문제로 관심을 돌렸다. 벌써 여러 주 동안 망설였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꼭 고백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고향에 돌아가 휴가를 보내고 새해에는 보니 이모와 함께 지내곤 했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임신 7개월째이니 제아무리 교묘한 옷차림을 한들 부른 배를 감출 수는 없다. 풍선 꼴을 하고 불쑥 나타나기 전에 미리 알려야 한다.
가이 역시 아버지에게 아직 알리지 않았다. 보니 이모의 편지가 믿을 만하다면, 마틴 헤이우드씨는 벌써 넉 달째 평온하게 지내고 있으며 두 사람 사이도 좋다고 했다. 사만사는 두 사람 사이에 우정 이상의 것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누구를 흉볼 처지인가.
솔직히 불평할 수도 없었다. 이모와 마틴이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진 덕분에 두 사람 다 시드니에는 얼씬도 안 한지 몇 달째이니까. 그녀의 임신을 아는 날에는 두 사람 다 기절초풍할 테니, 차라리 잘된 일이다.
"험상궂은 얼굴이군, 샘" 10월 어느 금요일 아침, 출근하던 가이가 말했다.
"당신 아버님하고 이모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사만사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사실을 알면 두 분이 무슨 말을 할까 하고요"
가이는 그녀의 책상 앞에 서더니 표정을 알 수 없는 눈길을 던졌다. 요즘 흔히 그런다. 문득 깨닫고 보면 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표정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화가 났다. 쳐다보려면 요즘 사귀는 금발 머리 여자나 쳐다보시지 왜.
"내가 전화해서 알려 드릴까?" 가이가 제안했다.
"아뇨,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려서 뭘 하게요"
가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당신 생각이지. 난 벌써 오래 전에 알리고 싶었소. 기억하는지 모르지만"
"곧 하죠 뭐" 그녀는 일하던 것으로 눈길을 내리깔았다. 정말이지 이 남자는 무슨 권리로 저렇게 매력적인 것일까.
그가 책상 앞에서 물러서는 기미가 없자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의 방향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옷이 찢어져라 커져 가는 그녀의 가슴이었다. 하지만 욕망을 품고 바라보는 것은 아니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마 내 모습이 차마 보기 괴롭다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 어떻게 참고 이 여자를 안았을까 하고.
비참한 생각에 그녀는 화가 났다. "임신한 여자란 너무 매력적이죠?" 그녀는 조소를 날렸다.
그의 눈에 묘한 빛이 반짝였다. 그러고는 싱긋 웃었다. 둔한 사내도 다 있지! 그녀는 이를 갈았다.
"찬사를 기대하는 거라면 다른 방법을 써보도록 하지" 그는 낮게 말하고는 자기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만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찬사를 기대했다고요?" 그녀는 그의 등뒤에 대고 소리쳤다. "누가 당신한테 찬사를 기대해요, 이..."
가이가 사무실 입구에 다시 나타났다. 미소는 더욱 커졌다. "커피 들겠소?, 내 사랑스러운 아기 엄마? 아니면 뚱뚱이라고 불러 드릴까?"
그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좋아요. 최소한 솔직하기 하군요"
그는 다가와 그녀의 토라진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믿을 수 없어"
"뭘 못 믿어요?"
"자, 자, 샘..." 가이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서 당신이 요즘 붙어사는 라운지에서 커피나 합시다. 치즈 케이크하고"
그녀는 신음소리를 냈다. "유혹아, 물러가라"
"그건 내가 할 소리지, 달링"
"달링?" 그녀는 씁쓸한 얼굴을 했다. "오늘 아침에 뭐 잘못 먹었어요?"
"한참 잘못 먹었지. 자, 갈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정말 나하고 함께 가는 것 보여도 돼요?"
가이는 그녀를 책망조로 바라보더니, 곧 주방으로 가 그녀의 헐렁한 흰 재킷을 가져왔다. 둥글게 부푼 그녀의 배를 완벽하게 가려 주는 옷이었다. "자, 이걸 입고 우는 소리는 그만 해요. 핸드백도 가져오고. 드라이브를 할 테니"
"드라이브요? 어디로?"
"놀래 줄 것이 있소"
"난 놀라는 것 좋아하지 않아요"
"자, 얼른 자동응답기를 켜놓고 따라와요. 안 그러면 다음 행동은 나도 책임 못 지니까"
"좋아요, 좋아. 가요" 그녀는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에게서 설명을 기대하는 것은 헛일인 듯했다. "치즈 케이크라" 그녀는 그에게 손을 붙잡힌 채 복도를 걸어가 승강기로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난 필요 없는데..."
가이는 초조한 얼굴을 했다. "그만 입 좀 다물겠소?"
"아뇨" 그녀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내고 그를 노려보았다. "난 엉망이 된 기분이란 말이에요. 내가 혼자 이 일을 겪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당신도 이 배에 책임이 있잖아요. 그러니 당신도 겪어야 한다고요"
하지만 가이의 얼굴에 스친 숨김없는 괴로운 표정에 그녀는 배가 조여 왔다.
"내가 괴롭지 않다고 생각해?"
사만사는 그의 뜻밖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아뇨, ...아니, 그래요. 아니, 저..."
가이의 얼굴이 분노에서 결연한 의지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안돼. 이젠 충분하다고"
그때 승강기 문이 열리고 그들이 내리기도 전에 사람들이 밀려들어왔다.
"비켜 줘요!" 가이가 소리쳤다. "이 숙녀분하고 내가 내려야 해요. 그리고 이 숙녀분은 보다시피 곤란한 형편이니 나갈 틈이 넉넉해야 해요."
가이는 기사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는 재빠르게 비켜선 사람들 사이로 용감하게 걸어나갔다.
11
"내가 임신한 걸 꼭 광고해야 했어요?" 사만사는 커피 라운지로 가이를 따라가면 투덜거렸다.
"안될 게 뭐지?" 가이는 빈 구석 자리로 그녀를 이끌며 대꾸했다. "난 창피하지 않소. 당신은 창피한가?"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물론 아니에요. 그저...."
"주문한 뒤 이야기합시다"
사만사는 가이가 카운터로 가서 주문을 하고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뭐 잘못된 일이라도 있어요, 가이?"
그의 눈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 일은 없어야지"
하지만 그는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살폈다.
"내가 몇 가지 묻겠소" 이윽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대답해 주면 대단히 고맙겠소"
사만사는 몸이 굳었다. "난 거짓말 같은 것 안 해요"
"알아요 그래서 좀 이상하다는 거요"
그녀는 불안이 커졌다. 가이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당신 아직도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소? 당신하고 결혼하지 않으려 한다는 남자"
사만사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질 뻔했다. 언젠가는 이런 질문이 나오리라 예상했어야 하는데.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하지? 그렇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니라고? 가이가 이걸 묻는 이유는 또 뭘까?
"그게 중요한가요?" 그녀는 대답을 회피했다.
"약간은. 그렇다고 내 행동이 변경되지는 않소만"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모를 소리만 하는군요"
"내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소"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그의 결연한 눈빛 아래서 몸을 떨었다.
"당신이 아직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그 남자와는 잔 적이 없다고 했지. 그리고 노먼과의 하룻밤은 곧 잊혀졌다고. 그렇소?"
"그래요..." 그녀는 천천히 대답했다. 대화의 방향이 불안했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물어도 괜찮다면, 혹시 다른 애인들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니오?"
"다른 애인들이라고요?"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그럼 다른 애인들도 없었단 말인가?"
그녀의 새빨개진 얼굴이 그대로 대답이었다.
"그렇군..." 그는 한순간 적이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다시 이맛살을 찡그렸다. "아냐, 모르겠어. 전혀. 당신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소. 그런데도 지금 당신 말은 내 이전의 남자는 노먼 하나뿐이라는 뜻이오.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당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 알지?"
사만사는 속으로 신음했다. 거짓말은 할수록 복잡해진다니까!
"하지만...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아내는 데 굳이 사방으로 경험해 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녀는 마구 둘러댔다. "남자친구는 많았어요. 손만 잡은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왜 새삼 내 애정생활을 묻는지 모르겠군요. 과거든 현재든 간에. 당신이 알 바 아니라고 당신 입으로 그랬잖아요"
"하지만 내 알 바가 되고 있소" 그는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내 아기의 엄마라는 사람의 성격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거든"
몇몇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보고 귀를 쫑깃 세웠다.
"그 아버지 성격은 어떻고요?" 그녀는 쏘아붙였다. "요즘 당신 침대에 기어드는 싸구려 금발머리 여자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요? 당신이 담배를 끊은 걸 내가 모를 줄 알아요? 그 뜻을 알고 있어요. 그러는 걸 여러 해 실컷 보았으니까!"
한순간 숨을 죽이고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이어 그의 얼굴에 만족감이 번졌다. "질투인가, 샘"
"천만에요!"
"아냐, 질투야" 그는 싱긋 웃었다. "분명해, 자, 여기서 나갑시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려니 웨이트리스가 커피와 치즈 케이크를 가져왔다. 가이는 웨이트리스의 제복 주머니에 10달러짜리 지폐를 넣고는 사만사의 항의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이 실망 어린 한숨소리가 들렸다. 드라마보다 재미있는 장면이었을 테니까.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사만사는 가이가 승강기에 올라 지하 주차장에 이르는 버튼을 누르자 다그쳤다.
"드라이브하러 간다고 했잖소. 내 차를 가져왔지"
"모닝 커피 한 잔 하게 둘 수도 있었잖아요"
"온 시드니에 소문이 퍼지도록? 조금 전 라운지에서 엿듣던 귀들 보았잖소? 더 말이 나오기 전에 단둘이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소. 걱정 말아요. 가는 길에 먹을 것을 사줄 테니까"
"어디로 가는 길요?"
"와라감바 댐이오"
"어디라고요?"
"시드니에 상수를 공급하는 와라감바 저수지 말이오. 남서쪽으로 블루마운틴 산맥 조금 못 미친 곳에 있소. 한 시간 반되는 거리지. 댐버스터스 그룹이 호주에서 뮤직 비디오를 찍을 곳으로 고려 중이오. 말하지 않았던가?"
"아뇨"
"지금 말했으니까 됐지? 난 그곳에 가봤지만 당신 의견을 듣고 싶소. 가는 길에 당신의 과거 남자행각에 대한 흥미진진한 대화를 계속하고 싶고. 당신이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그 남자에 대해서 모두 듣고 싶소. 당신의 매력에 굴하지 않는다는 유일한 남자"
"왜 자꾸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는 표현을 쓰죠? 난 정말 사랑하고 있다고요!"
차는 주차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가이가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몸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정말이오?" 분명 충격을 받은 얼굴이다.
"괴롭게도 그래요"
"대체 그 악당이 누구요?" 그가 다그쳤다. 푸른 눈이 빛났다. "말해 봐요!"
그녀는 턱을 치켰다. "내 죄상이 드러날까 봐 대답은 거부하겠어요"
가이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못마땅한 듯 입술이 가늘어졌다. "최근에 그를 만났소,샘?"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다.
"대답을 거부..."
가이의 손이 뻗쳐와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사실을 원해, 샘" 그는 으르렁거렸다. "만났소? 잤소? 나한테 거짓말한 건가?"
그녀는 그의 격한 어조에 놀랐다. "당신이 이렇게 심문할 권리는 없어요. 당신은..." 하지만 그녀의 용기는 그의 눈에 두렵도록 격한 분노가 떠오르자 사그라들었다.
"망할, 말장난 말아요. 사실만 말하라고! 중요한 일이야!"
"당신하고 처음 밤을 지낸 다음부터는 아무하고도 밤을 보낸 일없어요. 아무도..."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놀라 그에게 끌려갔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가 거칠게 말하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잠시... 내 직감을 믿었어야 하는데. 당신이 그 남자를 아직 사랑한다 해도, 그러리라 믿지도 않지만, 당신이 날 사랑하는 것만큼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니까!"
그녀는 고개를 홱 젖혔다. 항의의 외침이 터졌다. 하지만 그가 재빨리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리고 그녀는 곧 그의 말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목안에서 울려 나오는 낮은 신음으로.
"나를 더 사랑해" 그는 뒤로 약간 물러나서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지더니 다시 키스했다.
사만사는 그의 팔 안에서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문득 경적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탄 차가 길을 막고 있었다. 그 소리에 그녀는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그의 팔과 유혹의 입술에서 도망가려 기를 섰다. 하지만 가이는 개의치 않았다. 뒤차가 지나가게 길을 비킬 동안만 그녀는 놓았다가 다시 키스했다.
"어리석은 항의는 듣지 않을 테요" 그가 다시 키스하면서 계속 속삭였다. "부인도, 고백도 필요 없소. 생각해 보면 당신도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알 거요. 어쨌거나 댐에서 오늘을 보내고 그런 다음에 당신 집으로 데려다 주지. 그리고 거기서 난 당신하고 느긋하게 멋진 사랑을 할거요"
사만사는 충격과 불안으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충격은 이런 일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가이가 나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한다. 불안한 것은 그가 옷을 입지 않은 그녀의 몸을 보게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안돼요" 그녀는 소리쳤다. "난 뚱뚱하고 보기 싫어요. 당신이 그러고 싶을 리가 없어요"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그의 가슴에 댔다. "그런다고 내가 원치 않을 것 같나, 귀여운 샘? 난 당신을 오래 원해 왔어. 너무 오래. 그리고 뚱뚱하고 보기 싫다니..., 지금 당신처럼 숨막히게 아름다운 여자는 보지 못했어"
사만사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의 믿어지지 않는 말 뒤에 숨은 진실을 간파하려고 머리가 팽팽 돌았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 말은.... 날 사랑한다는 거예요?"
그의 푸른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그렇다면 믿겠소?"
"글, 글쎄요..."
그의 미소는 따스하고 친절했다. "그럴 줄 알았지. 내 말을 믿으려면 당신은 아직도 더 많이 사랑을 받아야 해. 아주 많이..."
그는 고개를 숙여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하지만 곧 입술이 결해지고, 마침내 그는 억지로 몸을 떼었다.
"맙소사, 샘. 당신을 너무나 원해. 하지만 참을성 있게 굴어야겠지? 당신은 너무 놀라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래요, 전혀 몰랐어요..."
그건 사실이 아니야. 솔직한 대답이 들려 왔다. 넌 한번 짐작을 했었어. 하지만 가이가 담배를 끊는 바람에 그만.....
"하지만 당신은 그 동안....?" 사만사는 혀를 깨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마. 그녀는 속으로 자신에게 타일렀다. 네 꿈이 바로 눈앞에서 실현되려 하고 있는데 그걸 망치지마.
"그 동안?" 가이가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하기가 어려워요"
그는 이해하겠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생각하지 말고 내게 맡겨요. 날 바닷바람이라고 생각하고 편히 배를 띄우라고. 암초는 없을 테니까. 날 믿어요..."
그녀는 싱긋 웃었다. "그래, 그럼 배의 선장은 누구죠? 키를 잡은 사람은?"
"사랑이지" 가이가 마주 속삭였다.
오, 하느님...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빨리 그리고 순진하게 믿어 버리고 싶진 않다. 하지만 말릴 도리가 없다. 그가 날 사랑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조그만 징조라도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비록 잠시에 그치고 만다 해도 믿고 싶다.
"샘, 괜찮소?"
그녀는 빛나는 눈을 떴다. "네,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댐은 장관이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 아래로 넓은 배수로가 경사져 있고, 그 위로 폭포가 쏟아져 계곡으로 흘렀다. 댐버스터라는 이름의 그룹이 비디오를 찍기에는 완벽한 배경이었다.
사만사는 일 따위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가이를 따라다니며 그의 장황한 설명을 들었다. 그의 움직이는 입매에만 시선을 둔 채. 자신이 얼마나 이 남자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것밖에 의식이 없었다.
그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물론, 지금 이 꼴인 자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게 모두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그녀를 다정히 어루만지고 욕망에 찬 눈길을 보내고 굶주린 키스를 보내서 그녀를 확신시켰다.
네 시 조금 지나서 그녀의 집 앞에 차를 세웠을 때, 그녀는 흥분과 긴장으로 온몸이 굳었다. 아직도 주위가 환한 것이 걱정이다. 몸매를 가리려고 불을 끌 수도 없는 상황이다.
가이는 두 사람의 친구인 래나가 결혼해서 이 집을 떠난 뒤 몇 년 동안 사만사의 집에 들어온 적이 없기 때문에 사만사는 집을 고쳐 놓은 것을 보고 감탄을 연발했다. 가구는 비싼 것들은 아니었지만 잘 쓸고 닦은 덕에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기적을 만들었군" 가이가 찬사를 보냈다.
"맘에 드는 가구들을 살 수 있었던 덕이죠"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상관이 아주 후한 사람이라서요"
"그런가? 그도 마주 웃었다. "그 남자가 그걸 이용해 먹는 남자가 아니었으면 좋겠군"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후한 보수의 대가를 요구하는 자가 아니었으면 좋겠고"
그녀는 웃었지만 그가 농담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자신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보통 남자 같으면 지금쯤 결혼 이야기를 할 것이다. 특히나 아기가 태어날 마당에는. 하지만 가이의 의중에는 아직 결혼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사만사의 머리에 문득 그가 최근 상대하고 있음이 분명한 여자가 떠올랐다. 질투로 가슴이 뒤틀렸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 그 여자가 그에게 어떤 비중인지 알지 않고서는 도저히 가이와 함께 침대에 드는 일은 할 수 없다.
"가이, 그 동안 묻고 싶었는데..., 그 여자에 대해서요. 당신이 데이트해 온 여자..." 그녀는 가슴이 뛰었다.
그는 잠시 이맛살을 찡그리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몸이 굳었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아니, 그렇지 않아, 샘" 그는 그녀의 턱을 손으로 치켰다. "다른 여자는 없소. 내가 담배를 끊은 것은 간접흡연이라도 태아에게 안 좋다는 글을 읽었기 때문이오. 사실 나도 놀랐소. 내가 그렇게 쉽게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것에. 이기적이지 않은 동기만 있으면 되는 거였소"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것들도 그렇게 쉽게 포기했다는 건 아니오. 매일 사무실에서 당신을 보고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 하다니, 지옥이었소. 내가 체육관에서 얼마나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모를 거요"
사만사는 기쁨으로 가슴이 조여 왔다. 가이는 여자 없이 버틴 것이다. 그것도 몇 달 동안.
"커피 한잔 하겠어요?" 그녀는 그의 팔에서 빠져 나오려 애쓰며 물었다.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 살갗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저런, 샘... 우리 둘 다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은 건 당신도 알잖아. 자, 가서 샤워를 하고 침대로 갑시다."
그녀의 눈에 불안이 떠올랐다. 자신의 몸을 보았을 때 그가 역겨워할 것이 두려웠다.
"당신은 아름다워" 그는 속삭이며 그녀의 재킷을 벗기고 둥근 배를 쓰다듬었다. "너무나"
그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단단한 몸을 쓰다듬자 그의 푸른 눈이 빛났다.
"정말 운동을 했군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는 웃으며 그녀를 이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녀가 옷 벗는 것을 도와주며 그녀의 몸에 키스해서 그녀의 남은 불안을 씻어 주었다.
샤워 자체만도 대단한 즐거움이었다. 가이는 비누를 묻힌 손으로 그녀의 배와 가슴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자기에게도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그가 샤워를 끝낼 즈음엔 그녀는 욕망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욕실 문에 걸린 녹색 실크 가운으로 그녀를 감싸고 침실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가만히 침대에 눕혔다. "이건 안 돼, 샘" 그가 놀리듯 말하며 싱글베드를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내일 우리 집으로 들어와요"
"좋아요" 그녀는 숨가쁘게 말했다.
"그 동안은 참아야지 할 수 있나" 그가 입술을 그녀의 몸에 댔다.
"그래요" 그녀는 그의 손길에 신음했다. "그래요..."
"커피 마시겠소?" 가이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직은요. 너무 편안해"
"정말 남자를 좋아하는군. 그렇지?"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즐거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말로 인한 충격 때문이었다. 이젠 그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생각을 잘못된 채 그대로 놓아 둘 수는 없다. 그녀는 돌아누우면서 입술로 그의 가슴을 눌렀다.
"당신만이에요, 가이. 당신만..."
"하지만..."
"거짓말이었어요" 그녀는 그의 말을 잘랐다. "당신이 계속 날 원하길 바라서 거짓말을 했어요. 난 다른 남자하고는 즐겨본 적이 없어요. 전혀"
그의 침묵에 그녀는 그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철렁했다. 이제 그에게서 사실을 말할 순간이 왔다는 생각에 그녀의 온몸이 긴장으로 터질 것 같았다.
"달링"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내가 사랑하는 남자하고가 아니면 절대 좋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의 팔이 굳었다.
그녀는 그의 가늘어진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이 그 남자예요, 가이. 내가 사랑한다고 했던 남자. 난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해 왔어요. 그래서 사직서를 낸 거예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어요. 당신 아기를 가질 기회에 달려든 것도 역시 그래서고요. 당신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했을 거예요. 무슨 짓이라도. 당신을 너무나 원했으니까"
사만사가 직접 보지 않았던들 믿지 못했을 것이다. 가이의 푸른 눈에 눈물이 반짝였다. 곧 눈을 깜빡여 지우기는 했지만 그녀는 분명히 보았다.
입을 열어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격정으로 탁했다. "날 너무나 자랑스럽게 하는군, 샘. 그런 헌신과 사랑을 내게 일깨우다니. 하지만 내가 너무나 얼간이라는 기분도 들어. 당신의 가치를 진작에 깨닫지 못했다니. 당신의 아름다움을. 당신 같은 여자들을 멀리하려고 나 스스로를 조종해온 거라고 말할 도리밖에 없어. 그리고 쉽게 사는 여자들을 사귀면서 즐거움을 누렸지. 내가 지속할 수 없는 애정과 책임을 원치 않는 그런 여자들과"
"이해해요, 가이" 그녀는 마틴 헤이우드가 그런 본보기를 보였다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어떻게 이해하지? 당신을 역겹게 만든 때가 많았을 텐데"
"당신이 좋은 남자란 걸 알고 있었거든요. 당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날 아주 깊이 파본 모양이군. 아주 깊이. 하지만 그래 준 것이 다행이지" 그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맹세하지만, 내 온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을 사랑한 지 여러 달 되오."
그녀는 뒤로 물러나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러 달?"
"우리가 같이 보낸 첫날 당신에게 빠진 것 같소. 하지만 마음은 그 사실을 보려 하지 않았지. 우리 계획을 취소한 건 당신이 감정적으로 깊이 빠지는 것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내 스스로에게 일렀지. 실은 내 가정이 커지는 것이 두려웠으면서도 말이오. 그런데..."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어떤 몹쓸 여자가 내 잠자는 욕망을 그냥 두지 않더란 말이오. 맙소사, 당신이 그 빨간 드레스를 입은 것을 본 순간 난 옷을 찢어 버리고 그 자리에서 당장 당신을 가지고 싶었소. 그리고 당신이 노먼과 외출했을 때는....맙소사, 그날 밤 내 방 카펫에 발자국 꽤나 났을 거요. 그 다음날 내가 당신이 임신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잊어버린 게 당연하지. 다시 당신을 가질 길을 찾겠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나도 그랬을 거예요" 그녀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가이는 딱딱하게 웃었다. 시간이 지나면 증세도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심각해지기만 했소. 결국 난 내가 정말로 사랑에 빠진 거라고 믿기 시작했지. 그러던 중 그날 아버지가 내 사무실에 왔고, 난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 그리고 내가 어떤 천성을 물려받았는지 기억이 났소. 당신이 사랑스럽고 천진한 모습으로 들어오자 난 겁이 났지. 저 여자에게 상처를 준다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까 싶더군. 질에게 겪게 했던 그 지옥을 겪게 한다면"
사만사를 놀라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질이 누구예요?"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스물 한 살 때 내가 사랑했다고 생각한 여자요. 난 당시 대학생이었지. 그녀는 연상의 의학도였소. 난 처음에 그녀에게 홀딱 반했지. 하지만 약혼한 지 몇 주일이 안돼 내 정열은 식기 시작했소. 마침내는 그녀에게 손도 대기 싫었지. 약혼을 깰 수밖에 없었소. 질은 절망했지. 심지어는 목숨을 끊으려고 했으니까"
"맙소사!"
"다행히 실패했지. 하지만 내 죄책감이 어땠겠소. 그리고 나에 대한 회의도. 질은 남자가 원하는 것을 모두 갖춘 여자였지. 사랑스럽고 섹시하고 영리한. 그런데 왜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난 그 대답으로 아버지를 살폈지. 아버지도 처음에는 우리 어머니를 사랑했던 것 같소. 하지만 내 기억에 남은 것은 두 사람의 격한 싸움. 그리고 나 때문에 참고 산다고 서로 소리치는 장면뿐이었소. 하긴 어머니는 애정을 보여줄 줄 모르는 차가운 여자였소. 그렇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사랑에 빠졌다 식었다 하는 식의 연속이었소. 깊은 감정이나 욕망을 지속할 줄 몰랐지. 질과의 일이 있은 뒤 난 나도 아버지하고 똑같은 남자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결혼은 절대 하지 말자고 생각한 거요. 여자와의 관계는 순전히 육체적인 것으로 하자고"
"하지만 왜 늘 금발이었죠, 가이?"
가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연이오, 정말. 금발 머리 여자들이 대개 내 조건에 맞았거든. 특히 자기 몸매에 집착이 강한 여자들이. 그들은 그런 걸 훈장 같은 것으로 여기더군. <자, 날 봐요. 내가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고 만만해 보이지만 속은 강하다고. 난 헤어진다고 자살이나 하는 타입은 아니야> 그런 식이지. 물론 난 신중하게 강한 부류들만 선택했지. 가망성을 보여 주고 그대로 이행하는 여자들을. 괜히 겉으로만 유혹하는 여자들은 참을 수 없었소. 내 어머니도 그런 여자였지"
그가 신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종종 우리 아버지를 희롱했소. 육체를 무기로. 맙소사, 그 때문에 벌어진 싸움들이라니. 그 싸움을 보면서 난 불행했소. 그때 아버지가 없었던들..." 그의 눈이 따스해졌다.
"아버지는 내게 사랑을 베풀고 인정해 주었지. 우린 늘 좋은 친구였소. 아버지의 결혼이 실패할 때마다 난 늘 너무나 괴로웠소. 아버지는 결혼할 때마다 그 결혼이 성공할 거라고 진심으로 믿었거든. 물론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선택을 잘못했소. 젊고 겉치레 강하고 섹시한 여자들하고만 했으니까. 아버지보다 돈을 더 원 여자들 말이야"
그는 사랑스럽게 사만사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당신 같은 여자하고 결혼했던들. 강하고 애정 넘치면서도 너무나 섹시한 여자와..."
이어 그의 굶주린 듯한 키스가 이어졌고, 그녀는 열렬히 응했다.
"정말이지 경탄스러워" 그는 신음했다. "나로 인해 당신이 겪었을 괴로움을 생각해 보면 끔찍해. 당신의 임신이 확인이 되던 날 난 당신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는 잔인해야 한다고 결정했지. 하지만 당신 눈빛에 견딜 수 없었소. 꽃으로 보상하려 했지만 당신이 여전히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그래도 난 혼란을 감추려면 물러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가끔 당신에게 옷을 사주는 것으로 표 나지 않게 내 감정을 보이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내내 당신을 원했소. 하지만 과거의 쓴 경험이 당신에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원하는지 알리지 못하게 했소. 이제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면 당신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 날이 올 거라고 스스로에게 타일렀지."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지만 오늘 출근하자 더 이상 내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소. 당신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자 당신을 안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더군. 당신이 한동안은 겉보기보다 날 더 생각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결정했지.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필요하다면 당신이 날 사랑하게 만들자고까지 맹세했소. 그런데 당신이 내가 그 동안 여자를 사귄 것으로 알고 질투를 하자 난 당신이 이미 날 사랑하는 것을 알았지"
그녀는 눈물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이 너무 많군요" 그러고는 그의 얼굴을 당겨 자기의 입술에 댔다.
다음날 아침에는 비가 내렸다. 두 사람은 아침 내내 침대에서 지냈다. 서로의 팔 안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욕실 창문에서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사만사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시트를 젖히고 가운을 입었다.
"톰이에요, 고양이. 기억하죠?"
"하고 말고" 가이가 대꾸했다. "그게 수상한 첫 징조였는데, 난 바보같이 놓치고 말았지. 당신이 전화로 톰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그 톰이라는 녀석을 죽이고 싶더란 말이오. 당신의 목을 조르고 싶고"
"아, 질투로군요" 그녀는 톰을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이 쓰다듬는 건 나뿐이어야지" 가이가 쏘아붙였다. 사만사는 놀리듯 가이를 바라보았다.
"설마, 당신 질투심만 센 애인이 되는 건 아니겠죠?"
"애인이라고!" 가이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알려 주지만, 난..."
그 때 초인종이 울렸다.
"리사일 거예요" 사만사는 이맛살을 찡그리고 있는 가이에게 말했다. "위층에 사는 친구예요. 나가서 톰을 넘겨주고 보내야겠어요. 일어나서 샤워나 하지 그래요? 난 아침을 만들게요"
그의 눈이 빛났다. "베이컨하고 달걀로?"
"호밀빵하고 야채예요"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심장마비를 바라는 건 아니죠.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당신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들어야 한다고요" 그녀는 섹시한 웃음을 지으면서 고양이를 안고 현관으로 나갔다.
사만사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 거기 서 있는 사람은 리사가 아니라, 보니 이모와 마틴 헤이우드였다. 두 사람의 미소는 사만사의 둥근 배에 동시에 눈길이 가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가운이 얇아 부른 배가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하필 그때 톰이 그녀의 품을 벗어나 리사의 집으로 가는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오, 사만사!" 보니 이모가 신음했다. "왜 얘기하지 않았니?, 마틴..." 그녀는 마틴 헤이우드에게 돌아섰다. "들어가서 나 혼자 조카하고 얘기를 해야겠어요. 이 애는...."
또 하필 그때 가이가 거실로 나왔다. 허리에 느슨히 타월을 걸치고 있었다. 더구나 간밤에 별로 눈을 붙이지 못한 것이 역력한 모습으로.
"샘, 달링, 면도기가 있어야겠는데... 어디...?" 문 앞에 선 손님들을 보자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보니 이모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맹렬한 비난조다. "그럴 줄 알았어"
"나도 알았으면 좋았을 걸" 마틴이 험상궂게 중얼거렸다.
다행히 가이만이 이 상황에 당황해 하지 않았다. "장승처럼 서 계시지 말고 들어오시지들 그래요? 무적의 보니 이모님 맞죠?" 그는 당황한 보니 이모의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아버지도요. 그리고 그렇게 놀라실 필요 없어요. 네, 제 아이 맞습니다. 그리고 네, 우린 서로 사랑하고요. 그리고 네, 가능한 한 빨리 결혼할 겁니다."
이젠 사만사가 장승이 될 차례였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가이를 바라보았다.
그가 싱긋 웃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청혼할 예정이었는데 , 좀 앞당겼소. 괜찮겠지?"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모으고 가이에게 다가갔다. 눈물로 눈이 빛났다. "괜찮고 말고요" 그의 허리를 껴안는 그녀의 가슴에 만감이 스쳤다. 사랑하는 남자..., 그녀 아기의 아버지...,애인..., 그리고 이젠 그녀의 남편이다.
"이게 다 무슨 일이죠?" 홀에서 여자 목소리가 났다. "초상이라도 났나요?"
마틴과 보니 이모는 리사의 몸에 딱 달라붙은 청바지와 요란한 자주색 점퍼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야, 리사" 사만사는 웃으며 말했다. "들어와. 약혼 기념 아침을 들려던 참이었어"
"설마!" 리사는 가이를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맙소사, 마침내 낚았구나! 올라가서 저번 난장판 때 우리가 남긴 샴페인을 가져와야겠어"
가이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냥 말버릇이 그래요" 사만사는 리사를 옹호하고 나섰다. "리사는 내 신부 들러리가 될 테니까, 당신이 익숙해져야지 별 수 없어요."
"저런" 가이가 씁쓸하게 말했다. "게다가 신랑 들러리는 프랭키가 될 텐데. 더구나 그 때쯤엔 당신 배가 얼마나 불러 있을지 모르니 대단한 결혼식이 되겠군!"
"우리도 털어놓을 건 털어놓아야지" 마틴이 끼어 들었다. "네 결혼식이 합동결혼식이 될 거다"
사만사와 가이는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마틴이 보니 이모의 손을 잡았다. "베로니카가 마침내 내 신부가 되기로 했다.
"설마!"
"설마가 아니다. 정말 힘들었어. 베로니카 말이 내 결혼 전적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거야. 헤이우드 집안 남자들은 모두 건달들이라고. 일리는 있지. 하지만..."
"그건 아버지나 변명하실 말이죠" 가이가 아버지 말을 잘랐다. "지금부터 내게 오직 한 여자뿐이니까요. 바로 내 옆에 서 있는"
그의 팔이 사만사를 끌어안았다. 사만사는 가슴이 뭉클했다.
"아직도 문 앞에서 이러고 있어요?" 샴페인을 가지고 온 리사가 말했다. "맙소사, 정리할 사람이 있어야겠네. 이보세요들, 내가 아니었으면 이 약혼은 아예 없었다고요"
모두들 놀란 눈으로 리사를 바라보았다.
리사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내 빨간 드레스 덕이잖아요, 안 그래요?"
가이가 꾸짖듯 사만사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사만사는 싱긋 미소 지었다. "사랑해요"
그녀의 속삭임에 가이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담아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