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유혹
Chalotte Lamb
1장
미소 짓기가 이렇게 힘든 것은 난생 처음이다. 소피는 얼굴이 자꾸 굳어졌고 턱이 쑤셨다. 자신이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가 누군지 몰랐다. 모두 <센티널> 지 사람들이라는 것, 그리고 대부분 편집 파트 사람들이라는 것밖에는. 그녀는 고개를 끄떡이고 미소를 지으며 가끔 입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지금 한시바삐 구실을 만들어 아무의 의심도 사지 않고 파티 장을 떠나고 싶을 마음뿐이다.
"즐거워요, 소피?" 누군가 등 뒤에서 물었다.
그녀가 호박색 눈동자를 크게 뜨고 돌아보자 톰 버니가 서 있었다. 쉰 목소리의 어깨가 넓은 사회면 범죄 담담 기자로 회사에서 보는 남자다. 그녀는 다시 뜻 없는 미소를 보냈다. "안녕, 톰! 네, 즐거워요." 거짓말이다. "당신은?"
"당신이 나와 춤을 춰주면 더 즐거울 거예요." 그는 싱긋 웃었다. 그때 홀 저쪽에서 누가 부르자 그는 신음소리를 냈다. "날 봤군! 가야겠어요! 기브한테 장난을 거는데 같이 하기로 짰거든. 나중에 한 곡 같이 출 거죠?"
그는 그녀가 대답도 하기 전에 가버렸다. 톰은 전에도 몇 번인가 그녀에게 데이트를 청했지만 그녀는 기브 콜링 우드밖에는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으므로 거절해 왔다.
기브가 밸러리 나이트와 약혼한 것을 그녀가 처음 안 것은 그들의 약혼 파티 초대장이 왔을 때였다. 그녀는 초대장을 구겨 쥐고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누구한테도 그녀의 마음을 내보일 수 없었다. 특히 기브한테는. 그래서 이 자리에 왔고 태연한 척해야 했다.
홀 저쪽에서 기브와 밸러리가 춤추고 있다. 밸러리의 금발 머리가 기브의 어깨에 놓여 잇다. 두 사람이 저렇게 행복해 보이지만 않아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밸러리느 꼭 저렇게 기브에게 매달려야만 하나? 그리고 기브는 저렇게 그녀를 끌어안고 있어야 하나? 서로한테 정신 없이 빠져 있다는 것을 꼭 저렇게 티를 내야 하느냔 말이다.
갑자기 밸러리는 머리 위로 기브와 눈이 마주치자 괴로움이 그녀의 몸 속 곳곳에 스며들었다. 기브는 싱긋 웃었다. 따스하고 은밀한 미소,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듯의 미소이길 바랐던 바로 그 미소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미소는 기브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고 그가 친절한 남자라는 뜻의 미소일 뿐이었다.
그녀는 간신히 미소를 되돌리고는 얼른 돌아섰다. 그런데 상관인 가이 포크너와 부딪치고 말았다.
"벌써 취했나?" 가이는 농담을 던지다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미소가 사라졌다. "소피! 이런 맙소사!" 소피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몰이 떨렸다. "두통이 있어서요."
하지만 가이는 그 말을 믿지 않는 듯하다. 그는 키가 크고 검은 머리에 영리한 얼굴을 갖춘 변호사로, 사람들의 거짓말을 간파하는 훈련이 되어 있는 남자다. 딱딱한 푸른 눈동자는 찌를 듯했다.
"여기서 데리고 나가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소피는 그가 자기를 양팔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이게 뭐하는....?"
그녀의 말엔 대꾸도 없이 그의 손이 그녀의 황갈색 머리를 눌러 얼굴을 그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러고는 그녀가 반항할 새도 없이 춤 스텝을 밟으며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 출구로 향한다. 그가 그렇게 힘이 센 줄은 몰랐다.
지금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그녀는 그의 팔 안에서 속절없이 중얼거렸다. 그녀와 가이가 애인 사이처럼 춤추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눈을 치켜 뜰 것이다. 소문이 날 텐데, 소피는 남들의 소문에 오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뭐, 어때! 그녀의 머릿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동정을 받는 것보다는 낫다. 자신이 기브를 사랑했던 것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는 것은 정말 싫다. 다른 여자들이 가브가 밸러리와 심각한 사이가 되기 전에 기브와 데이트했던 일을 아쉽게 회상하는 것을 들어준 것만 해도 고역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소피에게 캐묻지 않았다.
그녀와 기브는 그냥 친구 사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소피 역시 속마음을 내보이는 타입이 아니었고, 그럴 만한 가까운 친구도 회사 안에 없었다.
가이는 그녀를 데리고 홀을 나섰다. 시끄러운 음악과 디스코 조명을 뒤로하고서야 스텝을 그만두고 그녀를 놓아주더니,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이 가빴다.
"가서 코트를 찾아와요. 5분 있다가 여기서 봅시다. 내가 집까지 태워다 주기." 가이가 명령을 내리더니 남자용 휴대품 보관소로 들어갔다.
소피는 이를 악물었다. 바래다주는 일 따윈 달갑지 않았다. 분명히 이것저것을 패물을 테지. 묻는 것에는 이력이 난 사람이니까. 그건 <센티널>에서 그가 하는 일의 일부다. 기사를 모든 각도에서 살펴보고 혹시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려드는 일이 없도록 살피는 것이다. 진실을 냄새맡는 그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소피는 그 능력이 자신에게 발휘되는 것은 딱 질색이다.
어쨌든 코드를 찾아와야 한다. 집에 가려면 코트를 입어야 하니까. 12월 초지만 매섭게 추었고 오후 내내 눈이 내렸다. 그녀는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이번 겨울 은 여러 가지로 힘든 겨울이 되리란 생각에.....
숙녀용 화장실에 들어가니 몇몇 여자들이 머리를 빗거나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파티 즐거워, 소피?" 푸른 눈동자에 검은 머리 아가씨가 손에 립스틱을 든 채 물었다.
"아, 안녕, 로즈." 소피는 간신히 미소로 답했다. "그래 멋진 파티야. 드레스 멋지네! 근사하다!"
"고마워. 이 드레스는 늘 마음에 들어." 로즈 아메리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년 같은 늘씬한 몸매여서 1920년대 스타일의 드레스가 완벽하게 어울린다. 구슬 장식이 달린 빨간 드레스 자락이 무릎에서 끊어져 날씬한 다리를 더욱 우아하게 보이게 한다. "너도 멋진데." 그녀는 거울 속에서 소피를 살폈다. "무척 우아해. 햄넷 디자인?"
"맞아." 그녀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오늘 아침 본드가서 산 캐서린 햄넷 디자인의 드레스다. 엷은 모직 실크로, 이 약혼 파티에서 최대한 멋지게 보일 결심으로 산 옷이다. 로즈가 입은 것 같은 드라마틱한 옷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늘 품격 있고 우아하고 침착한 색조의 옷만을 고른다. 값이 비싸긴 하지만 잘만 손질하면 오래도록 입을 수 있는 옷들이다.
"밸러리하고 기브가 이젠 서로한테 정말 안주하게 될지 모르겠어." 로즈가 중얼거렸다. "두 사람 다 경력이 화려하니까 말야. 난 홀 안을 둘러보면서 그들이 전에 사귀었던 상대들 수를 세어 보다가 지쳤지 뭐야. 두 사람. 끝까지 갈까?"
"글쎄!" 소피는 매끈하게 뒤로 넘긴 머리를 다듬으며 대꾸했다. 두 사람의 약혼이 깨질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적은 없다. 기브가 밸러리를 안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이제야 원하던 상대를 만났으니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어쨌거나 근사한 한 쌍이 될 거야 ." 로즈가 말했다.
"그럴 거야." 소피는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살폈다. 속 마음을 드러낼 만한 구석은 아무 데도 없다. 다시 완벽하게 가면을 쓴 셈이다.
다른 여자들이 나가고 그녀와 로즈만이 남자, 소피는 화제를 바꾸었다. "파리 근무 제의를 받았다는 것이 사실이야?" 그녀가 묻자 로즈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누가 그래?"
"파티에서 그 이야기들을 하던걸."
"어떻게 이런 일들이 새나가는 거지?" 로즈가 투덜거렸다. "닉 캐스피언이 날 보자고 한 게 겨우 오늘 아침이었는데!"
"바버리 워프에서는 벽에도 귀가 있다구." 소피가 가볍게 대꾸했다.
"귀뿐이야? 혀도 있지." 로즈가 내쏘았다. "저, 이건 우리 사이니까 말이지만, 제발 어디 가서 이 얘기는 하지 말아 줘. 아직 그 제의를 승낙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사실이야. 닉이 제의했어."
로즈는 <센티널>의 유능한 해외 취재기자로 모두들 장난스레 그녀를 주요 사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센티널>의 주재원이 가 있지 않은 나라는 어디에건 그녀를 보내 사건 취재를 하게 한다.
소피는 연민의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해외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게 소원이었잖아, 안 그래? 하지만 이번 일자리를 받아들이면 대니얼하고 같이 있을 수 없는 게 문제구나. 런던과 파리에 떨어져 살면서 연락만 주고받는 것은 쉽지 않을 테니까."
로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테지. 남편하고 다른 나라에 떨어져 사는 일이 어떤가는 헤이즐 반 레이든한테 물어보자구!"
"더구나 임신한 몸일 때." 소피가 맞장구쳤다. "아기를 낳으면 그녀는 어떻게 할까? 남편이 여기 와서 같이 살까? 아니면 그녀가 네덜란드로 갈까?"
"모르겠어. 그녀도 아직 정하지 못했을 거야. 사는 게 왜 이리 복잡한지." 로즈가 문을 향했다. "난 대니얼한테 가봐야겠어."
그녀가 나가지 소피는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 길고 지루한 하루는 난생 처음이다. 그녀는 소피를 향해 인사를 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소피는 얼른 코트를 찾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가이 포크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이 자신을 훑어보자 그녀는 화가 나 몸이 굳어졌다.
"바래다주실 것 없어요. 택시를 탈 테니까."
"바래다주겠소." 가이가 힘주어 말했다.
가이의 입술이 가늘어졌다. 그는 그녀의 팔을 접고 승강기로 끌었다. 소피는 저항할까 했지만 그럴 기운이 있으면 눈물을 참는 데 써야 할 것 같아 포기하고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승강기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파티는 새로 지은 바버리 워프 호텔 1층의 접객실에서 열리는 중이었다. 그곳은 템스 강 쪽에 부지의 부속 건물로, <센티널> 지의 사무실과 인쇄 작업장이 들어차 있다. 이 호텔은 지난 가을에 문을 열었는데 <센티널>의 전 소유주 조지 타이렐 경이 시작했던 회사 건물 개축사업 중 가장 최근에 완성된 건물이다. 조지 타이렐 경은 지금 <센티널>을 장악하고 있는, 유럽 신물업계의 거물 닉 캐스피언과 세력 다툼을 벌이던 중 1년 전에 사망했다.
어쨌든 조지 타이렐 경의 건축계획의 결실로 한때는 템스 강변의 칙칙한 건물 단지였던 곳이 이제는 활력이 넘치는 런던이라는 시 속의 또 하나 시를 이루었다.
바버리 워프는 모든 것을 자급자족할 수 있다. 자체 내의 우체국, 은행, 여행사, 상점, 미용실, 식당, 술집이 있고, 이제는 작은 호텔까지 갖추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센티널>사가 런던의 언론가를 플리트 가에서 사회적 편의시설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승강기 문이 열리자 가이는 소피가 내리도록 재촉했다. 그의 푸른색 볼보 승용차가 근처에 서 있었다. 그는 차문을 열고 그녀에게 조수석에 앉도록 한 뒤 차에 올라타 노스 스트리트로 향했다. 그곳은 바버리 워프 호텔에서 강과 가장 먼 쪽 측면이다.
구름 한점 없는 밤이었지만 매섭게 춥다. 길에는 살얼음이 덮여 있으며, 인적도 드물었다. 가이는 언젠가 둘이 함께 늦게까지 일한 저녁에 그녀의 집까지 태워다 준 적이 있다. 때문에 지금 길을 묻지 않고 런던 브리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소피가 살고 있는 곳은 주택 지역인 첼시에 있는 빅토리아 풍 가옥의 지하실로, 그 집은 외삼촌의 소유였다.
외삼촌은 BBC 방송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헝가리 작가로 몇 년간 헝가리 현대사를 써오고 있다. 데오 외삼촌은 그녀의 어머니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망명하면서 갖고 온 보석으로 그 집을 싸게 사들였다. 귀족 집안인 외삼촌 가문은 한때 화려한 부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첼시의 집이 외삼촌의 주된 수입원이다. 작가 수입이 신통치 않아서이다.
가이가 집 앞길로 들어서며 속력을 낮춘다. "몇 번지였지?" 그녀가 일러주자 그는 집 밖에 차를 세우고 높은 집을 올려다보았다. "당신 사는 데는 몇 층이오?"
"지하예요."
그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좀 나쁘지 않소? 햇빛도 많이 들어오지 않을 테고 전망도 좋지 않을 텐데."
"난 그 방이 좋아요." 그녀는 톡 내쏘았다. "하긴 창문이 작긴 하지만 흰 페인트로 칠하고 커튼, 방석을 원색으로 해서 지중해 식으로 꾸몄어요. 인상파 그림도 몇 점 복사해 걸고. 괜찮다구요."
"구경하고 싶군." 그의 말에 그녀는 몸이 굳었다.
"오늘밤에는 안 돼요, 미안하지만." 소피가 대꾸하자 가이의 눈썹이 치켜졌다.
"초대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니오. 오늘밤 당신의 기분이 까다롭군."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평소 그녀는 자신이 냉정하고 침착한 비서라 자부해 왔는데 오늘은 정반대로 굴고 있다.
"미안해요, 좀 피곤해서."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태워다 주신 것 고마워요."
막 차에서 내리려는데 가이가 그녀의 어깨를 잡더니 돌려세웠다. "당신, 기브 콜링우드를 사랑하고 있나?"
따귀를 한대 맞은 충격이다. 그녀는 하얗게 질렸다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에서 분노가 폭발해 가이의 빰을 후려치게 만들었다. 가이가 뒤로 물로 물러앉으며 그녀를 놔주었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지도 않고 차에서 뛰쳐나왔다. 그때 막 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브레이크의 요란한 비명소리와 더불어 뭔가 그녀의 어깨를 탁 치는 바람에 그녀는 뒤로 떨어져, 가이의 차 트렁크를 넘어서 길 위에 쓰러졌다. 차는 잠깐 속력을 줄이더니 더욱 쏜살같이 속력을 내 모퉁이로 사라진다. 가이가 달려와 그녀 옆에 무릎을 꿇었다. 가로등에 비친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소피? 괜찮소?"
그녀는 충격으로 얼떨떨해 간신이 중얼거렸다. "그런 것 같아요."
"어떻게 된 거지?" 가이가 소리쳤다. "그 작자 차가 쏜살같이 지나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소. 당신을 치었소? 악당 같으니! 차를 세우지 않았어. 불빛이 희미해 번호판도 보지 못했소. 많이 다쳤소?"
"어깨만요." 그녀는 어깨를 주무르며 이마를 찌푸렸다.
가이는 부드럽게 손끝으로 어깨를 살피고 팔을 들었다 내리면서 얼굴 표정을 보았다. "아픈가, 이러면?" 그러다가 마침내 단정 지었다. "뼈는 부러지지 않고 심한 타박상뿐인 것 같군. 그래도 제일 가까운 응접실로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야겠소. 이런 것은 확실히 해둬야 좋거든."
그녀는 부축을 받아 일어섰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늘밤은 너무 피곤해요. 지금은 별로 아프지 않구요. 통증이 가시고 있어요. 문제가 있으면 내일 병원에 가면 돼요."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소피!" 가이가 다그쳤다. "당장 가는 게 현명해요. 뇌진탕이 있을 수도 있소. 땅에 크게 부딪혔을 텐데."
"뇌진탕은 없어요. 옆구리로 쓰러졌으니까. 그리고 어깨가 쑤시는 것과 두통 말고는 별다른 증세도 없어요. 두통은 차에 치기 전부터 있었던 거고." 그녀가 가이를 향해 정중한 미소를 보냈다. "안녕히 가세요, 가이. 그리고 고마워요. 너무 주워서 빨리 안으로 들어가야겠어요."
그녀가 지하로 이르는 계단으로 재빨리 발을 내디뎠다. 가로등 불빛은 계단까지 비치지 않는다. 때문에 계단은 어두컴컴했고 살얼음과 눈으로 미끌거렸다.
등 뒤에서 가이의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서두르려고 했고, 그것이 실수였다. 발이 미끌리는 바람에 그녀는 계단 난간을 잡아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그러느라고 핸드백이 떨어져 지하실 입구에 쌓인 눈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그 소리가 마지막 결정타였는지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고, 그녀는 마구 흐느껴 울었다. "오, 이런 망할!"
"오늘밤은 정말 운이 나쁘군." 가이가 딱딱하게 말했다.
다행히 그 말에 분노가 살아나 그녀는 손으로 눈물을 씻고 내쏘았다. "재미있다니 다행이군요! 내 방 열쇠가 저 백 안에 있단 말이에요. 이번엔 백을 찾느라 손이 얼어붙을 차례예요."
가이는 그녀 옆을 지나 눈을 걷어찼다. 눈이 분가루처럼 사방으로 날렸다. 가이가 허리를 굽히더니 그녀의 백을 손에 쥐고 몸을 폈다. 그런데 그것을 건네주는 대신 백을 열어 안을 살펴보는 바람에 그녀는 화가 났다.
"뭘 하는 거예요! 당장 주고 가요."
가이가 쏘아보는 바람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늦게나마 겨우 그가 자기 상관이란 걸 기억해 낸 것이다. 그가 자기물건을 뒤질 권리는 없지만 그래도 혀를 주의해야 한다.
"내 백 주세요." 그녀는 조심스레 말했다. "도움은 고맙지만 이젠 나 혼자 해나갈 수 있어요."
"저런, 아주 잘하더군 그래." 그가 빈정거렸다. "처음에는 차에 깔리 뻔하고 이번에는 계단에서 미끄러지다니! 당신이란 사람을 잘 몰랐다면 취한 줄 알았을 거요. ."
"백이나 줘요!" 소피가 잇새로 내쏘았다. 이제 가이가 자신을 해고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심정이다.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백에서 열쇠를 찾았다. 열쇠를 찾자 돌아서서 현관을 열어 문 안으로 그녀를 들이밀었다. 소피는 절뚝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쑤시고 휑한 느낌이다. 넘어졌을 때 심각한 부상을 입었나?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 기막힌 하루에 결말이 되겠군.
그녀는 가이의 앞을 가로막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러고는 백과 열쇠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가이는 백가 열쇠를 든 채 들어와 물을 닫는다.
"보세요, 난 지금 피곤해요." 그녀는 경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도와주신 것은 정말 고맙지만......."
"당신한텐 독한 브랜디가 있어야 할 것 같소."
"난 브랜디 싫어요."
"충격에 효과가 있소."
"아니, 오히려 나빠요." 그녀는 분명 들은 기억이 났다.
"뜨거운 초콜릿이나 한잔 마실 거예요. 그리고 쉬어야겠어요. 당신이 가고 나면...."
등으로 경고하는 듯한 전율이 흘렀다. 이 남자를 어떻게 떼어 버리지? 이 남자는 왜 무슨 생각으로 굳세게 버티고 있는 걸까?
가이와 이런 실랑이는 처음이다. 그는 늘 완벽한 상관이었다.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으며 추근대지도 않았고 정중했다. 그와 같이 있어서 긴장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그의 딱딱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묘한 불안감이 느껴진다. 그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가이 포크너란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더구나 이 늦은 밤에 추근대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이 차에서 내리기 전에 내가 물었지." 가이가 조용하게 말했다. "당신은 대답하지 않았고, 대답은 그걸로 충분해. 안 그런가? 당신은 기브 콜링우드를 사랑하지?"
그녀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타는 것 같았다. "정신이 나갔군요. 난..., 내 감정은 당신이 알 바 아니에요!"
"틀렸소. 나하고 상관있지. 우린 같은 배를 탄 운명이거든."
그녀가 멍하니 바라보자 가이는 한숨을 쉬었다. "밸러리가 기브 때문에 나를 차버릴 때까지 나와 데이트해 온 걸 당신도 알 테지?"
그녀는 놀라 입술이 벌어졌다. 가이가 밸러리와 한동안 데이트했던 것일 깜빡 잊었다. 그가 밸러리에게 심각한 감정을 느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가이 포크너는 원래 뭐든 내색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닌가.
"당신도 그녀를 사랑하나요? 미안해요, 몰랐어요." 그녀는 연민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어깨를 들썩했다. "그 말을 들으니 다행이군. 난 내 기분을 드러내 놓고 다니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나도예요."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누가 알까 봐 싫었어요. 당신하고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예요."
"알고 있었소." 가이는 엄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우리는 공통점이 많군. 속마음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것도. 다른 사람하고라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을 테지만. 당신과 난 서로를 도울 수 있소."
"어떻게요?"
"우선 그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거지."
"그들 두 사람 이야기를 한달 말인가요?" 그녀가 쏘아 붙였다. "아뇨, 가이. 난 하기 싫어요. 쓸데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난 그를 만남 일조차 잊고 싶은데 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도움이 안 돼요. 기브 같은 남자한테 빠졌다니 어리석었어요. 빨리 잊을수록 좋아요. 그러니 나더러 그 남자 이야기를 하자는 말은 말아요." 그녀는 가이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당신은 기브의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밸러리 이야기를 하자는 거겠죠? 어쩌죠, 난 그녀의 이름은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데. 다시는. 알겠어요?"
"그만!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군." 가이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재발 넘어지기 전에 앉아요. 나뭇잎처럼 떨고 있잖소."
그녀는 웃음을 멈추었다. 가이의 말 대로였다. 온몸이 떨리고 이가 마주치고 있다. 추위 때문인지 차에 칠 뻔한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하루 긴장 때문인지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쏟아지고 그녀는 손으로 젖은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오, 제발 가줘요... 날 혼자 내버려둬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요....더 이상...."
가이는 그녀의 몸에 팔을 둘러 아이처럼 안아들고 가 침대 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소피는 속절없이 흐느꼈다. 세찬 흐느낌이 그녀의 온몸을 쥐어짰다. 그녀는 가이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가이는 그녀의 머리를 토닥이며 뭐라고 중얼거리며 달랬다. 그녀의 흐느낌이 차츰 잦아들었다. 그녀는 실컷 울고 났다. 가이의 손이 그녀의 긴 황금빛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다. 조금 전에 그녀의 머리를 묶은 핀을 푼 모양이었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빗어내리고 있다. 손길이 따스하고 부드럽다. 소피는 최면에 걸린 기분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그의 육감적인 위안의 손길에 몸을 맞긴 채 흐뭇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이 내려와 멍이 든 어깨를 만지려 하자 그녀는 흠칫 물러났다. 하기만 그의 손길은 멍든 곳을 피해 부드럽게 닿았다.
"병원에 가지 않을 거라면 상처라도 보여 줘요. 심각한지 아닌지 확인하게." 그는 속삭이더니 침대 밑에 있는 등을 켰다.
소피는 갑작스러운 불빛에 눈을 깜빡였다. "아뇨, 괜찮아요." 그녀가 항의했지만 가이는 이미 노란 드레스의 지퍼를 내렸다.
"안 돼요, 가이!"
가이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오래 안 걸릴 거요. 그리고 당신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해야 내 마음의 부담이 덜어지겠소. 살펴볼 동안 가만히 있기나 해요.."
그녀는 반항적으로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가이는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총천연색이 될 모양이군." 씁쓸한 어조다. "심하게 멍이 들었소. 의사에게 보이고 약을 발라야겠소." 그는 멍 자국 주위를 살피며 가만히 눌러 보았다. " 그래도 다행히 심각한 부상은 피했소.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의 짙은 푸른 눈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렇소?"
"아뇨, 멍든 것뿐이에요." 그녀는 드레스가 반쯤 벗겨진 채 앉아있자니 불편했다. "다시 지퍼를 올려도 될까요? 이젠 가줘요, 가이! 난 좀 자야 해요."
그는 그녀의 턱을 잡아 그를 향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소피는 그의 얼굴을 보자 한순간 숨이 막혔다. 가이는 몸을 숙여 키스했다. 그녀는 그를 밀어낼 작정이었지만 입술이 저절로 열렸다. 미처 몰랐지만 마음속에서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루 종일 품고 다닌 괴로움을 쓰다듬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녀의 손이 올라가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가이가 그녀의 입술에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한테는 이게 필요해." 그가 속삭였다. "우리 둘 다. 이열치열로 모두 태워 버리는 거요, 내가 잊게 도와줘요. 나도 당신을 돕지, 소피...."
미친 소리지만 그럴 듯하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욕망의 그늘이 드리우는 것을 느꼈다. 그가 말하는 망각 상태를 맛보고 싶었다.
가이는 그녀의 항복 기미를 알아채고는 손을 뻗어 침대 맡의 등을 껐다. 어둠 속에서 그의 입술이 격해진다. 뜨겁고 강렬했다. 그녀는 마주 키스하며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녀의 늘씬한 몸이 그의 몸에 얽혔다.
그녀의 드레스가 미끄러져 내려가고 가이는 양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쥐고는 차가운 가슴에 키스했다. 부드럽고 따스한 골짜기에 입술을 파묻고 신음소리를 냈다. 느닷없이 소피의 머릿속이 맑아졌다.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서늘하게 떠올랐다. 너무 늦기 전에 그를 제지해야 한다.
유혹에 말려든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자체만으로도 쇼크였다. 자신이 이런 식의 유혹에 넘어갈 여자라고는 생각해 복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한 심정을 안고 얻지 못하는 것을 갈망하느라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 육감적인 만족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이의 애무하는 손길과 입술은 그녀의 온몸에 쾌락의 떨림을 전해주었다. 살갗이 너무 뜨거워져 그대로 녹는 것이 아니가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의 차가운 이성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너 미쳤니? 그 소리가 외쳤다. 설마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잘 알지도 못하고, 더구나 좋아한다고도 확신할 수 없는 남자와...
그를 원해. 그녀가 대꾸했다. 아니, 그를 원한다기보다는 내 머리를 핑 돌게 하는 이 기막힌 기분을 원해. 누가 사랑 타령을 하자는 거야? 여지껏 이런 짓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건 알아. 언제나 몸을 사리며 사랑하는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 하지만 그 결과가 뭐야? 기브를 사랑했고 내가 기다리던 연인이라고 확신했어. 그런데 지금 그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 한다구. 내가 평생 사귄 남자친구보다 더 많은 남자친구를 한 달 만에 사귀는 여자하고. 내가 얌전하게 꿈속의 이상형을 기다리는 동안에 밸러리 나이트는 맘에 드는 남자마다 실컷 즐기고도 이제는 기브까지 손에 넣었잖아!
이제부터는 나도 그런 식으로 할 테야. 앞으로는 나도 즐기며 살 거라구. 당장 오늘밤부터.
가이는 셔츠를 벗고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와 실크 속옷을 이미 벗긴 뒤였다. 그는 옷을 벗으면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시선을 받고 있자니 온몸이 떨렸다. 흥분이 되고 겁도 났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긴 머리칼로 덮었다.
가이는 그 손짓에 즐거운 양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그녀의 몸 위로 덮쳐왔다. 그의 따스한 몸이 무거웠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헤치더니 어둠 속에서 눈을 빛냈다.
"아름다워."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소피는 그의 키스를 맞으려고 가슴을 앞으로 밀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두 사람은 얼어붙은 채 누워 있었다. "무시해요." 가이가 말했다. 하지만 전화 벨 소리는 소피의 한순간의 광증을 깨버렸다. 그녀의 몸은 뜨겁게 타올랐던 만큼 차디차게 식었다.
"안 돼요!" 소피가 외쳤다. 이 시간에 그녀의 수화기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상대방은 무척 흥미로워할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데오 외삼촌이라면? 당장 계단을 내려와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것이다. 외삼촌은 그녀가 6살 때부터 그녀를 세파에서 보호해 왔다. 남자한테서는 더욱더.
"여보세요?" 가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그가 내쏘았다. "아뇨, 그녀는 바빠서 전화를 받을 수 없소."
"누구예요!" 소피가 쏘아붙이는데 가이의 표정과 목소리가 바뀌었다.
"뭐라고? 왜? 누구요? 아, 파비엔, 당신이군."
소피는 공포로 신음했다. "파비엔?" <센티널> 지 편집장?
"그래요." 가이가 차갑게 말하고 있었다. "나요. 내 목소리를 알아듣다니 똑똑하군요. 난 당신 목소리를 몰랐는데. 무슨 용무로 나를 찾았소?"
소피는 방바닥에서 누비이불을 집어 몸을 감싼 채 전화대화를 듣고 있었다. 가이는 침대맡의 불을 겼다. 그러자 그의 딱딱한 얼굴이 똑똑히 보이고 그녀는 충격으 느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을 나누려 했을 때의 낮선 사람 같더니 이제는 원래의 눈에 익은 그로 돌아왔다.
"알겠소."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래, 그거 문제군. 당장 바버리 워프로 가서 자세히 듣겠소." 다시 침묵이 흐르더니 그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괜찮소. 소피는 이해할 거요. 밤은 앞으로도 있을 테니까."
소피는 흠칫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앞으로도라구? 만일 그렇게 생각했다면 놀라셔야겠군 그래. 오늘밤은 미친 여자 같이 굴었지만 미친 짓은 이제 끝났어!
"20분쯤 후에 가겠소." 가이가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옷을 집어 들고 서둘러 입으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다 들었겠지. 가야겠소. 미안하오, 소피. 그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 줄은 몰랐소."
"애초에 왜 수화기를 빼앗은 거예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 때문에 당신이 여기 있었다는 것을 알고 말았잖아요... 더구나 당신은 우리가 뭘 하고 있었는지 말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금방 바버리 워프에 소문이 날 거예요."
"파비엔은 소문내지 않소. 수다쟁이 티아피스트가 아니고 신문 편집자란 말이오!" 가이는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거울 속의 그의 얼굴은 딱딱하고 성난 표정이었다. "소피, 미안하오. 이럴 작정이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지. 느닷없이 놀라서 그런 거요. 파비엔은 나를 찾으려다 못 찾자 당신한테 연락한 거요. 당신은 내가 어디 있는지 알 거라고 생각해서."
"누군가 우리가 같이 파티장을 떠나는 것을 보고 알려준 모양이죠!"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럴 거요." 그는 퉁명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파비엔은 1면 톱으로 나갈 기사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대요.."
"헨리는 2시간 전에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거요."
소피는 충격을 받았다. "설마! 가엾은 헨리...심각한 것은 아니겠죠}
"파비엔은 위퀘양 때문이 거라더군, 오늘밤에 수술할 모양이야. 내일이면 알게 되게지." 가이는 시계를 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가야겠군, 소피. 마감시간이 새벽 1시인데 자정이 넘었잖소. 내일 봅시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가 및 피하지 못한 사이에 키스를 하고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누비이불로 몸을 감싸고 앉은 채 그의 발소리가 사라져 가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조용하게 닫혔다. 가이는 사려 깊었다. 이웃 사람들의 귀를 생각한 것이다. 차도 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는 조용히 몰았다.
소피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따스한 누비이불을 두르고 있었는데도 온몸에 한기가 느껴진다.
가이의 말은 파비엔은 소문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지만 그녀는 바버리 워프에서 소문이 어떻게 나도는지 알고 있다. 파비엔은 사무실에서 전화를 걸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혼자 있었을 리 만무하다. 야간 근무조 전원이 말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었을 것이다. 인쇄공, 기자들, 비서들, 전화 교환수는 물론이고, 전화교환수들이란 신문사에서 가장 골치아픈 소문메이커가 아닌가. 소피와 그녀와 상관이 함께 잤다는 소문은 24시간도 못 되어 <센티널>사에 퍼질 것이다.
회사를 그만둬야겠어.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문거리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어. 사람들이 쳐다보고 쿡쿡 웃어대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설사 파비엔말고 아무도 모른다 해도 가이의 얼굴을 다시 볼 수는 없어. 오늘 밤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의 밑에서 더 이상 일할 수는 없다.
2장
그날 밤 소피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회사에는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출근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책상에 휘갈겨 쓴 메모가 있었다. 가이는 새벽 1시 반에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에는 늦게 나올 것이다.
덕분에 그녀는 숨통이 트였다. 우선 진한 커피를 마시고 짤막하게 사직서를 타이프 쳐서 가이의 책상 위에 놓았다. <센티널>을 떠나는 것은 서운하지만 지난밤의 일을 생각하면 어떻게 가이의 얼굴을 봐야 될지 막막할 따름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하루 일을 시작했다. 우선 가이의 일정표를 보고 그가 필요로 할 서류를 준비했다. 우편물도 긴급한 순서대로 정리했다.
10시 15분 전 전화가 울렸다. 헤이즐 반 레이튼 가이를 찾는 전화다. "아직 안 오셨어요. 지난밤에 늦게까지 일하셨거든요." 소피는 긴장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눈치 채이지 않길 바라며 말했다.
"참, 그랬지. 저, 소피, 캐머런 소송 건 서류를 찾아서 가져다주지 않겠어요? 캐스피언 씨가 서류를 다시 보고 싶으시다는 데요."
"네, 그럴게요."
소피는 서류를 들고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가이가 들어오는 바람에 두 사람은 얼어붙은 듯 걸음을 멈추었다. 소피는 얼굴이 달아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가이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싱긋 웃었다.
"안녕, 소피? 잘 잤소? 난 잘 못 잤는데."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실망 때문에 잠을 못 이루었지."
그녀는 괴로운 비명을 삼켰지만 가이는 그 소리를 눈치 챈 모양이다. 그래도 내색은 않고 돌아서서 두꺼운 오버코드와 진한 붉은 색 목도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캐스피언 씨에게 캐머런 소송서류를 갖고 올라가야 해요." 소피가 중얼거렸다.
"잠깐!" 가이가 말하는 바람에 그녀는 신경이 바싹 곤두선 채 걸음을 멈추었다. "캐스피언 씨에게 그 서류, 점심 전에 돌려달라고 해요. 오후에 찰스 루더 경을 만나기 전에 읽어 둬야 하니까. 그 양반, 정확한 데는 귀신이거든."
"네." 소피는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이가 사직서를 읽을 때 한 방에 있지 않게 된다는 안도감이다.
헤이즐의 사무실에서 지나 타이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들어가자 두 여자들은 입을 다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안녕, 소피." 둘은 합창을 했다.
소피는 얼굴이 붉어졌다. 두 사람이 벌서 나와 가이의 이야기를 들은 걸까? 그 이야기로 웃고 있었던 걸까?
"캐머런 소송서류예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12시 전에 되돌려 받을 수 있을까요? 포크너 씨가 오후에 상대 변호사를 만나기 전에 읽으셔야 한 대요."
그녀는 서류를 책상에 놓고 말없이 사무실에서 나갔지만 등 뒤로 두 여자가 눈썹을 치켜뜨고 바라보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문이 닫히자 헤이즐이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엔 왜 저러지?"
"머리가 아픈가? 지난밤에 밸러리 나이트의 약혼 파티에 갔을 텐데. 내가 알기론 소피는 기브 콜링우드한테 빠져 있었거든. 그녀로서는 기브를 빼앗긴 것이 견디기 어려웠을 거야."
지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겨울 햇살 속에 그녀의 생생한 적갈색 머리칼이 빛났다. 비취색 모직 드레스는 그녀를 유난히 사랑스럽게 보이게 한다. 헤이즐은 질투로 신음하며 그녀를 보았다.
"지나, 너무나 날씬해! 나도 6개월 저에는 그만큼 날씬했던 것을 생각하면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아!" 그녀는 두꺼워진 허리선을 내려다보며 신음했다.
지나는 헤이즐과는 다른 질투의 미소를 보냈다. 제일스 타이렐과의 짧은 결혼생활에서 아이가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하지만 제임스도 그녀도 아이 낳는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너무 젊었고 행복했으니까. 그녀가 미래를 예견했더라면... 하지만 제임스가 속절없이 사고로 목숨을 잃을 줄을 그녀가 무슨 수로 예견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이를 낳으려면 몸매 망치는 거야 어쩔 수 없지." 그녀는 헤이즐에게 타일렀다. "걱정 말아요. 앞으로 4달 만 참으면 되는걸."
헤이즐이 한숨을 쉬었다. "알아요, 하지만 기분에는 평생 이렇게 배가 불러 있을 것 같아."
"예정일이 4월 말이지?"
헤이즐이 고개를 끄떡였다. "달력만 보면 금방일 것 같지만 지루해. 퇴근할 때면 발목이 쑥쑥 부어올라 있어. 이제는 버스를 타려고 뛰어가는 짓도 못 하고, 천막 같은 옷말고는 우아한 옷도 못 입어요!"
그때 인터폰이 울려 닉 캐스피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캐머런 사건 서류 어디 있소?"
"가져가려는 참이에요." 지나가 말했다.
"서둘러요." 그가 내쏘았다.
지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오늘 아침엔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이 또 있군." 그녀는 화가 나서 서류를 갖고 서둘러 들어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기다리라지! 그녀는 헤이즐에게 말했다. "지난밤에 1면 톱기사 때문에 문제가 있었는데 파비엔이 닉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군."
"놀랍군." 헤이즐은 서류함을 정리하며 말했다. "보고를 해야지. 의심스러운 부분은 뭐든 닉에게 먼저 보고를 해야잖아요. 소송에 걸리는 일이 생기지 않게."
"그런데 파비엔은 기사란 어디까지나 편집장 소관이라는 낡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거든."
지나의 퉁명스러운 말에 헤이즐은 싱긋 웃었다. "어련할까. 당신은 닉 캐스피언 맞서느라 파비엔 편이잖아."
"난 <센티널> 편일 뿐이야. 난 신문이란 양심을 지녀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어. 소송이 두려워 낼 것을 못 내지 말아야 한다고 봐. 사실 타이렐 부자가 경영했을 때는 건드리지도 않았을 그런 기사들을 쓰라고 닉이 기자들을 부추기지 않았던들 소송도 없었을 거고, 닉도 기사마다 자기가 검사해야겠다고 할 일이 없었을 것 아니야!" 그녀의 녹색 눈이 분노로 빛났다. "그래, 맞아, 난 파비엔 편이야. 경영주가 편집장의 권리를 넘보는 것을 싫어하는 그의 태도는 당연해. 닉이 회사를 맡은 때 말로는 편집부의 특권을 존중한다고 하고선 그것은 말뿐이었어!"
헤이즐은 지나와 마찬가지로 타이렐 가가 내세운 신문철학을 존경했다. 하지만 닉 캐스피언의 캐스피언의 인터내셔널사가 <센티널>을 맡은 후 <센티널>에 생긴 변화를 보는 지나의 의견에는 동감하지 않았다. 헤이즐로서는 지금의 <센티널>지가 더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더 화려해지고 사진도 많으며, 재미있는 기사와 밸러리 나이트 같은 위트있고 신랄한 필체의 칼럼도 있다.
지나는 책상으로 돌아가 앉으며 화재를 바꾸었다. "피에트는 아기가 생긴다는 사실에 적응하고 있어?"
"그럼! 내가 아기 이야기를 남편한테 했을 때 얼마나 걱정했는지 기억나? 물론 처음에는 화를 내더군. 우리의 독자적인 디자인 회사를 이루자는 꿈이 깨졌다고 생각한 거야. 아기를 낳고도 할 수 있다고 설득하느라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몰라. 아기 보는 사람을 두든지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는 거지. 누가 뭐래, 우리가 회사 주인인데! 피에트는 일단 적응하고 나자 무척 흥분했어. 이제야 정말 임신한 증거가 눈에 보이니까 그런가 봐."
"누구 눈에는 안 보일까?" 지나와 헤이즐은 쿡쿡 웃었다. 지나는 웃으면서 닉의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닉이 뭐 때문에 꾸물거리느냐고 문을 박차고 나올 것 같았는데 그러지 않는 게 이상했다. 헤이즐은 그녀의 눈길을 간파했다.
"닉이 처들어올 것을 기다리는 거야? 화나게 하는 게 정말 즐거운 모양이군. 종종 난 닉이 가엾어진다니까."
"가여울 것도 많네!" 지나가 쏘았다. "그 남자는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해. 하지만 이 서류는 얼른 갖다 바치는 게 신상에 좋겠지."
닉의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지나는 닉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15분 전만 해도 닉은 지난밤에 기사에 대한 보고를 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눈을 재미있게 빛내고 늘씬한 몸을 의자에 묻고 있다. 숱 많은 검은머리에 은발이 약간 섞여 있다.
기분이 저렇게 느닷없이 바뀌다니 그다운 일이다. 정말 변덕스러운 남자야.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또 느닷없이 새로운 면을 보여 주곤 한다.
그는 웃고 있는 채로 그녀에게 서류를 받으러 손을 내밀었다. "시간이 꽤 걸렸군. 또 헤이즐하고 소문을 주고받느라 바빴나? 두 사람 일을 하긴 하는 거요?"
"당신과 파비엔도 웃고 노닥거렸잖아요." 지나가 쏘아붙였다.
닉의 잿빛 눈동자가 빛났다. "그랬지. 지난밤에 헨리가 병원에 가는 바람에 파비엔이 가이 포크너에게 연락했던 것 알지? 가이의 집에서 전화를 안 받길래 파비엔이 호텔에다 가이가 누구하고 파티 장을 떠났느냐고 알아본 모양이오. 그런데... 그가 누구하고 떠났겠소?"
지나가 이마를 찌푸렸다. "설마...., 밸러리하고는 아니겠죠?"
닉의 눈썹이 올라갔다. "저런, 그녀와 가이는 밸러리가 기브를 만나기 전 사이지, 안 그렇소?"
지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닉은 물러나 앉아 그녀의 표정을 흥미롭게 살폈다. "바버리 워프는 재미있는 곳이란 말이야. 안 그렇소? 내가 출장차 런던을 자주 떠나니 놓치는 일이 많지. 하지만 기브가 한때 가이의 쌀쌀맞은 비서하고 데이트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가이가 같이 나간 상대가 바로 그 여자 소피 왓슨! 아마 울면서 서로의 슬픔을 함께 삭이고 있었겠지. 파비엔이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아 가지고 전화를 했더니 자정이 넘은 시각에 가이가 전화를 받더라는 거요. 파비엔 말이 무척 정신 없는 목소리였다는군."
"정신없는 소리는 어떤 거예요?" 닉이 재미있어 하는 모습에 지나는 화가 났다. 소피가 오늘 아침에 우울해 보인 것도 당연해. 모두들 자신의 사생활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녀는 소피에게 동정이 갔다.
파비엔이 대꾸했다. "하지만 뻔하게 눈에 보였소! 너무 숨가쁜 목소리가 그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 낮고 쉰 목소리였소. 전화를 걸었을 때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상상하기란 누워 떡먹기지."
파비엔은 스위스 출신이지만 프랑스 어권 출신이라 남녀 관계에 대한 사고방식도 세련된 편이다. 그와 닉은 잘 어울렸다. 하긴 지나 생각에는 파비엔이 되도록 닉하고 충돌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기 때문인 듯하지만. 능숙하고 영리한 파비엔을 보면 참새가 연상된다. 갈색 머리와 눈동자, 잽싼 발걸음으로 모이를 주워 먹으며 생존경쟁을 헤쳐 나가는 참새. 지금까지 닉과 파비엔 사이에는 깊은 신념에서 나오는 격돌사태는 없었다. 하지만 지나는 희망을 품고 살았다. 파비엔의 내면에 성실한 편집장으로서의 뭔가가 있을 거라고. 하지만 지금은 영 그가 맘에 들지 않는다.
"뻔한 사실은 한 가지뿐이에요. 당신들 두 사람 다 머릿속이 비열하다는 거죠!" 그녀가 내쏘며 닉을 혐오스런 눈빛으로 그의 쏘아보자 미소가 걷혔다.
"저런, 지나! 그럼 두 사람이 그 시간에 뭘 하고 있었을 것 같소? 카드놀이라도 했을 것 같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죠. 누가 알아요, 무슨 상관이고?" 지나가 쏘아붙였다. "섹스가 모든 일에 해답인가요? 남자하고 여자가 순수한 관계를 갖는 것은 상상이 안 가요?
닉이 퉁명스럽게 웃었다. "안 가오! 두 남녀가 60살 미만인 한은, 만일 60살이라 해도 난 의심할 거요. 매력적인 남자가 매력적인 여자와 단둘이 있을 때는 이야기에만 정신이 가 있지 못하오."
지나의 녹색 눈동자가 번쩍였다. "당신 말은 여자와 관계되는 한 당신이야말로 한 가지밖에 염두에 없다는 뜻이겠죠. 당신이 여자한테 관심 가지는 것은 한 가지 이유뿐이니까!" 닉의 양미간이 좁아지는 것을 보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쏘아댔다. "남자들이 모두 당신 같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 가이가 비서인 소피를 집에 데려다 준 것은 밤에 혼자서 택시를 타지 않게 하려고 사려 깊은 배려였어요. 꼭 그 이상의 의미일 것은 없다구요."
"좋소." 닉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1시간 뒤에도 그가 여전히 그 집에 있었던 것은 왜지?"
"커피 한잔 하자고 초대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게 뭐 잘못이죠?" 그녀는 파비엔을 돌아보았다. "소피 왓슨은 얌전한 아가씨예요. 당신이 이 소문을 퍼뜨리면 당신은 그 아가씨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 거예요. 그러고 싶어요?"
"물론 아니오." 파비엔은 얼른 대꾸했지만, 그 표정이 죄책감인지 당혹감인지 알 수 없었다. 지나는 그가 벌써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묻기도 전에 파비엔은 시계를 보더니 서둘렀다. "이런, 가야겠네! 오늘 아침 편집회의 전에 할 일이 많아서."
그가 나가지 닉은 지나를 노려보았다. "뻐기기 좋아하는 여자로군, 안 그렇소? 파비엔은 별로 해될 소리를 할 뜻이 아니었소. 가이와 소피 왓슨을 재판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은 자유로운 성인이오. 두 사람이 정사를 가졌다 해도 아무도 놀라지 않소. 그러니 그 고상한 태도를 버리고 현실의 세계에 끼어 보는 것이 어떨까?"
"당신의 현실 세계겠죠!" 그녀가 성난 얼굴로 대꾸했다. "아뇨, 그러느니 차라리 저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겠어요."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냐의 늘씬한 몸이 화가 나서 양옆으로 흔들리는 것을 닉은 욕망을 담은 눈길로 거칠게 지켜보았다.
"언젠가는 지나, 말을 너무 지나치게 한 걸 후회하는 날이 올 거요."
"당신한테서는 아무튼 멀리 내뺄수록 신상에 좋겠죠." 그녀는 쏘아붙이고 등 뒤로 탕 문을 닫았다.
헤이즐이 통화를 하고 있다가 돌아앉아 수화기를 막고 말했다. "필립 슬레이드야! 통화할래요?"
지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수화기를 받았다. 필립과는 몇 달간 데이트를 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피하려 애썼다. 친구로서 그를 좋아하지만 필립은 그녀가 줄 수 없는 우정 이상의 것을 원했다.
"안녕, 필립? 바하마 제도에 가 있는 줄 알았는데."
"맞아요! 지금 나소에서 전화하는 거예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운도 좋지! 날씨 근사하겠죠? 푸른 하늘, 햇살....그런데 여기는 눈이 내리고 매섭게 춥다구요. 나라면 서둘러 돌아오지 않겠네."
필립이 웃었다. "갈 생각도 없어요!"
그녀는 전화 속에서 누군가의 높은 목소리를 들었다. 필립이 뭐라고 대꾸를 했다. "그래, 그래...." 그러고는 다시 지나에게 말머리를 돌렸다. "지나, 전화한 이유는......" 목소리가 긴장이 되어 있었다. "그게 저..., 나 결혼할 거예요!"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필립!"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랐다.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축하해요!" 그녀는 언짢아한다고 필립이 생각하기 전에 얼른 말했다. "누구예요? 아는 여자?"
"아니, 여기서 만났어요. 3주 전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3주 전이라구요!"
"그래요. 갑작스런 돌풍 같은 로맨스였지. 방금 <센티널>사에 알리긴 했지만 당신이 신문에서 읽기 전에 내 스스로 먼저 알리고 싶어서...."
"정말 친절하군요. 두 사람 다 행복하길 빌어요. 그 여자 이야기를 해줘요. 이름이 뭐죠? 출신지는?"
"미국인인데 캘리포니아 출신이에요. 일본계 미국인인데, 본명은 수키 타마키예요. 아름답고 나보다 영리하다구요! 변호사인대 자기 가족 회사에서 일한다는군요. 그런데 그 집안도 신문업계에 종사한대요. 정말 우연의 일치죠? 당신도 그녀를 좋아할 거예요. 당신 이야기를 하고 친구 사이라고 했더니 당신을 만나고 싶어 안달이에요."
지나는 눈썹을 치켜 켰다. 그 말을 필립이 믿었다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여자 말은, 그리고 그 말이 자기 마음에 흡족하기만 하면 덮어놓고 밑는 사람이니까. "나 역시 만나고 싶어요." 그녀가 대꾸했다.
"고마워요, 지나!" 그는 안심한 목소리였다. 몇 달 전부터 만나지 않은 사이지만 필립의 자만심은 다른 여자와의 결혼 소식에 그녀가 질투하고 화를 내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자, 끊어야겠어요. 수키하고 런던에 가면 만나요. 크리스마스에 갈 거예요."
"안녕....." 그녀는 전화를 끊고, 싱긋 웃고 있는 헤이즐을 돌아보았다.
"필립이 다른 여자를 만난 거야?"
"만나기만 해? 약혼했다는 거야! 수키라는 일본계 미국인인데 집안이 캘리포니아에서 신문업을 한 대. 어딘가에서 그런 기사 읽은 생각이 나. 닉에게 물어 봐야겠어. 그는 알 테니까."
헤이즐은 이마를 찌푸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언짢아? 내 말은..., 필립하고 만나던 사이였잖아."
"언짢긴. 우리는 친구 사이였을 뿐인걸!" 지나는 싱긋 웃었다. "어쨌든 그 스피드에 놀랐어. 11월 중순에 바하마로 갔는데 벌써라니!"
"사랑이란 종종 그렇게 벌어지지." 헤이즐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피에트를 처음 만난 순가 내가 원하던 남자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첫눈에 빠진 사랑이야. 하지만 난 즉시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지. 피에트가 내가 아니고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어서 너무 화가 났거든. 그가 날 사랑하기까지는 아주 오래 걸렸다구!"
"피에트 말은, 당신이 넘어져서 흰 페인트와 진흙을 뒤집어쓴 모양을 보았을 때부터 당신과 사랑에 빠졌다던데." 지나가 쿡쿡 웃었다.
헤이즐도 웃었다. "그래, 피에트는 내가 너무 완벽해서 사람 같지 않았다나 봐. 그런데 넘어진 내 얼굴을 보니 그제야 사람 같았다나."
"남자들은 묘해, 안 그래?" 지나는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필립이 결혼하면 나를 지원하던 일에 변화가 올까? 편을 바꾸어 닉을 지지하거나 그의 주식을 닉에게 팔거나 하면 난 앞으로 닉의 방법에 불안이 있을 때도 반대하지 못하게 돼. 닉은 이 회사를 맘대로 주무르게 될 거고. 여태까지는 필립의 주식과 내 주식을 합치면 발언권이 세니까 닉하고 싸울 수 있었는데."
그녀와 닉은 오랫동안 다퉈 왔던 터라 그녀에게 이제 그와의 싸움은 끊지 못할 중독처럼 되어 버렸다. 자칫하면 끝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러시안 룰렛 게임 같았다.
자신이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닉은 이회사의 나머지 임원들에게 세력이 막강했고, 그가 싫긴 하지만 그의 사업수완만은 그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닉이 모든 것을 완전히 장악하게 놔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그가 <센티널>에 어떤 짓을 할지 두려웠다. 그가 벌써부터 시작한 개혁이 그때 가면 더 빠르게 진행될 테고, 그렇게 되면 <센티널> 지는 무게 있는 신문으로서의 모든 명성을 실추당하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못마땅한 것은 닉과 다툴 때의 그 희열을 맛보지 못하리란 것이다.
헤이즐이 이마를 찌푸렸다. "난 그것까지는 생각 안 했는데. 그래도 필립이 결혼한다고 자기 주식을 팔 이유는 없을 거야. 편을 바꿔서 닉을 지지할 이유도 없고. 걱정 말아요."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거나 이 <센티널>사에서 지루한 시간의 없다니까! 매시간 마다 새로운 위기의 출현이니. 이곳을 떠나면 정말 그리울 거야."
"나도 당신이 그리울 거야." 지나가 말했다. 헤이즐은 아기를 낳기 한 달 전에 <센티널>을 그만둘 생각이고, 피에트도 캐스피언 인터내셔널을 떠나 유럽에서 디자인 상담회사를 차릴 작정이다. 닉의 밑에서 일하면서 안면을 넓히고 또 건축사로서 재능이 있는 터라 지나는 피에트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영국 밖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아쉬웠다. 그 때문에 헤이즐하고 만날 일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소피는 긴장 속에 사무실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가이는 그의 사무실에서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멍하니 창 너머를 보았다. 계약상 사직하려면 1달 여유는 두어야 하다. 지난밤의 기억을 안은 채고. 그 고문을 어떻게 견딜까?
"무슨 생각?" 옆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지만 가이가 아니고 톰 버니다. 크림 색 모직 스웨터에 낡은 청바지 차림이다.
"아, 미안해요." 그녀는 그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무슨 일이에요, 톰?"
"기사 하나를 넘기기 전에 가이가 살펴봐 줬으면 해서 ." 톰이 말했다. 그녀는 늘 그렇듯 그의 체격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럭비 선수처럼 우람하다. 하지만 성격은 딴판으로 강아지 같다.
가이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들렸다.
"가이는 지금 통화중인데요. 앉으세요. 곧 나올 테니까." 그녀가 말하자 톰은 기다란 몸을 옆의자에 앉혔다.
"지난밤 파티, 근사했지 않소?" 톰이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가이와 일찍 떠나더군. 당신이 그와 데이트하는 줄은 몰랐소." 그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데이트 신청을 하고 싶었는데."
"난 가이와 데이트하지 않아요!" 그녀는 화가 났다.
"그렇소?" 톰이 의심스레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가 집에 데려다 준 것뿐이에요." 톰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아! 그럼 오늘밤 시간은 있소?" 배리 이글이 나이트클럽을 개장하는데... 배리 알지?"
"팝가수 아니에요?"
"그래요. 독수리 분장으로 무대에 섰다가 더워지면 벗는 그 가수 말이오. 그가 독수리 깃털을 벗어던질 때마다 여자들이 소리 지르는 것을 당신도 들어봐야 하는데!" 톰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그는 가수로서 실력을 신통찮지. 처음에는 주목을 끌다가 차트에서 인기가 미끄러지자 자기 레코드사를 차렸소. 신인 발굴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지. 그가 나이트클럽을 개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오. 신인에게 기회를 열어 주려고."
"위험한 사업이군요. 돈을 날릴 수도 있잖아요."
"배리는 자기 돈은 한 푼도 안 쓸걸. 수상쩍은 친구들이 있어서 돈을 대신 대주는 것 같아. 세탁해야 할 돈이라고나 할까. 배리는 그런 돈을 울궈내는 데 비상하지."
"무척 영리하군요."
톰이 싱긋 웃었다. "괜찮은 친구야. 나하고는 소꿉친구지. 내 직업상 만나는 치들에 비하면 배리는 그래도 퍽 괜찮은 친구라구."
소피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톰을 바라보았다. 톰은 겉보기만큼 단순한 남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범죄 담당 기자라면 위험할 때도 있겠네요. 어떤 이유로 그 일을 하게 되었죠?"
"원래는 스포츠 기자가 되고 싶었소. 그런데 내가 처음 취직한 신문사에 이민 훌륭한 스포츠 기자가 있는 바람에 범죄 담당 기자 일을 맡았지. 나중에 바꾸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만 이 일을 매력에 걸려들고 말았지. 한 1주일은 미치게 지루하다가도 큰 사건이 펑 터지면 후끈 단다구. 그렇게 되면 다른 직업 따위는 염두에도 없지." 그러다가 그는 이마를 찌푸렸다. "저런, 내 얘기가 지루했겠군."
"아뇨, 재미있어요. 난 다른 사람들이 자기 직업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재미있어요."
"당신이야말로 기자가 될 사람인데." 톰이 순진해 보이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기자직으로 전업할 생각은 안 해봤소?"
그녀는 놀랐다. "해보긴 했어요." 톰이 어떻게 눈치를 챘을까 의아했다. 가이와 일하면서 그녀는 직업을 바꾸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교훈을 배웠다. 그녀는 평생 비서로 지내고 싶진 않았다.
"당연하지. 영리한 아가씨니까." 톰이 싱긋 웃었다. "오늘밤 나하고 외출해서 당신의 야망 이야기를 해줘요."
"외출요? 어디로?"
"배리의 나이트클럽 말이오. 블루 펭귄이라지. 멋진 개업식이 될 거요. 유명한 스타들도 많이 오고. 자, 소피, 가면 즐거울 거예요. 그리고 걱정 말아요, 나하고 가면 절대 안전하니까."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미있겠군요, 하지만....." 사실 그녀는 나이트클럽에 드나드는 데는 취미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기분은 지난밤보다 더 우울해서 차라리 무슨 사건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싫다고 하지 말아 줘요!" 톰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 그녀는 싱긋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톰이 활짝 웃었다.
그때 가이가 사무실의 문이 열리는 바람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손을 빼냈다. 가이의 딱딱한 눈동자가 두 사람을 노려보는 것을 느끼자 신경이 곤두섰다. 톰이 손을 잡고 있는 것을 가이가 보았을까?
톰은 분위기 파악을 못 한 채 돌아서서 가이에게 미소를 보냈다. "성가시게 해서 미안해요, 가이. 내일 기사를 점검할 것이 있어서."
"바쁘지만 5분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소." 가이가 차갑게 말했다.
콤이 가이의 사무실로 들어가자 가이는 소피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나중에 얘기 좀 하지." 그의 말에 그녀가 가슴이 덜컹했다. 두려워하던 말이다.
문이 닫히자 그녀는 의자에 앉아 일에 몰두하려 했으나 자꾸 몸이 떨려 실수만 했다. 톰은 10분 후에 나왔다. 그리고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거기서 저녁을 먹을 거예요. 그런데 이브닝드레스를 입어야 해요. 화려한 파티라서. 주소가 어디죠?"
그녀는 쪽지에 주소를 갈겨써서 건넸다. 문가에 서 있는 가이가 의식되어 손이 떨렸다.
"그럼 그때 봐요." 톰이 즐겁게 휘파람을 불며 나갔다.
"톰 버니와 데이트할 작정인가?" 가이가 낮게 물었다. "왜 새삼스레? 전에는 안 했잖소."
"전에는 데이트를 신청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듣기로는 그렇지 않던데. 여러 달 당신을 쫓아다닌 모양이던데."
"어쨌거나 난 그와 데이트하기로 했어요.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죠!"
"누군가랑 데이트하고 싶다 해도 왜 하필 톰 버니 같은 머저리지? 머리가 텅빈 녀석을."
"그래도 당신보다는 매너가 나아요!" 소피가 내쏘았다. "성격도 좋고요. 어쨌든 난 그가 좋으니까 내가 있을 때 그에게 무례하게 굴지는 말아요."
"그 말을 하니까 당신 사직서 이야기를 해야겠군." 가이가 퉁명스럽게 쏘았다.
소피는 긴장하여 턱을 치켜들었다. 가이는 그의 상의 주머니에서 사직서를 꺼내 천천히 찢기 시작했다. 그녀는 질색을 했다.
"난 받아들일 수 없소!" 그가 차갑게 말하며 종잇조각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다시 타이프 칠 거예요!" 소피는 몸을 떨며 휴지통을 집어 들고 종이조각을 모으기 시작했다.
"난 또 찢어 버릴 거요!" 가이가 위협했다.
소피는 분노 속에 그를 노려보다가 미친 충동에 밀려 휴지통을 거꾸로 집어 들어 그의 머리통위에 내리쳤다. 가이는 뒷걸음질 치다가 서류 캐비닛에 부딪혔다. 휴지통 속에서 그가 머라고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들리더니 휴지통을 벗겨내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화가 나서 얼굴이 어두웠다.
소피는 겁이 나 뒤로 물러서며 흐느끼듯 말했다. "나한테 손대지 말아요!"
가이는 걸음을 멈추더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요?"
그녀는 대답도 못 하고 벽에 기댄 몸을 떨 뿐이었다. 가이의 딱딱한 분노가 사라졌다. "앉아요."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리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괜찮소. 앉아요. 앉아서 이성적으로 이야기를 해봅시다.."
소피는 의자에 무너지듯 앉았다. 가이는 창문으로 가 무겁게 내려앉은 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우아한 정장 속의 길고 늘씬한 몸매, 빳빳한 흰 목 깃 위에서 구부러진 검은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지난밤 이후로 자꾸만 가이를 육체적으로 의식하게 된다.
그때 가이가 돌아서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자, 무슨 일이지? 지난밤 일 때문인가? 그렇다면 사직서를 내던지고 도망가지 말고 차분히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떻소?"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할 수 없어요, 너무...."
"너무 뭐지? 창피하다는 건가?"
"그래요."
"당신이 어젯밤 후로 마음을 바꾼 줄 내가 모르는 줄 아나? 출근해서 당신 얼굴을 보았을 때 벌써 알았지. 지난밤에 당신은 비참했는데 내가 마침 옆에 있어서 뭔가를 시작했고, 그게 아침이 되자 걱정이 된 거야. 안 그런가?"
그녀는 몸을 떨었다. 가이가 돌아섰다.
"알겠소? 난 이해한단 말이오. 당신이 아무하고나 자고 다니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소. 나 역시 그렇다는 것을 알면 놀라겠지. 지난밤에 우리는 둘 다 기분이 좋지 않았고, 술도 들어간 터라 위안을 찾은 것뿐이오. 그렇다고 세상이 끝장난 것은 아니오."
소피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표정을 알 수 없었다. 가이는 변호사라 남을 설득하는 데는 이력이 나 있다.
"지난밤 일은 그냥 덮어두고 잊읍시다. 실수였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요. 난 가장 훌륭한 비서를 잃고 싶지 않고, 당신도 특별히 다른 일자리가 있지 않는 이상 이곳을 그만두기 싫을 거요. 그렇지?"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좋아요."
"그럼 사직서는 철회하는 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썬티널> 지도 법제실도 그만 두고 싶지 않았다. 가이가 약속대로 지난밤 일을 잊어 준다면 에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그 일을 잊는 것이 가능할까?
3장
소피와 톰이 택시로 나이트클럽에 도착하자 이미 사람들이 긴 줄을 서고 있었다. 차들이 연달아 서서 사람들을 토해 냈다. 남자들은 이브닝 정장을 하고, 여자들은 등이 팬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눈 날리는 밤 공기를 피해 서둘러 클럽으로 들어갔다. 머리 위에 커다란 펭귄 모양의 네온사인이 빛나고 멀리서도 클럽 안의 밴드 소리가 들렸다.
택시에서 기다리는 동안 소피가 갑자기 외쳤다. "저기, 지나 타이렐이에요!"
"어디? 클럽 안에 들어가고 있소?" 톰도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방금 들어갔어요. 그리고 동행이 누군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걸요?"
"필립 슬레이드인가?" 톰은 회사 안의 소문에 무심해서 지나가 필립 슬레이드와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소피는 고개를 저었다.
"맥 캐머런이에요!"
"농담이겠지!"
두 사람이 탄 택시가 앞으로 나가 클럽 입구에 섰다. 클럽의 수위가 문을 열어 주고 소피가 내리도록 손을 내밀었다. 소피는 클럽 안가지 펼쳐져 있는 길고 붉은 양탄자를 보고 쿡쿡 웃었다. "왕족이 된 기분이 어떤지 알겠군요!"
톰이 팔을 내밀었다. "자, 갑시다. 공주님 , 고관대작들하고 어울려 봅시다.."
초대장을 내밀고 클럽 안으로 들어가자 배리 이글이 흰 이브닝 정장 차림으로 그들을 맞았다. 독수리 차림이 아닌 게 다행이지. 소피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안녕, 톰!" 배리가 친근하게 톰을 쳤다. "요즘 어때?"
"괜찮아. 자네도 근사한걸? 클럽도 멋져." 톰이 대꾸했다. "성공하겠어."
"그럼! 여러 달 계획한 사업인데. 유명한 얼굴들은 다 모였다구. 이번 주 매스컴의 초점일 거야. 신문사마다 기자들을 보냈다구."
하지만 모두 범죄 담당 기자들이 아닐까? 소피가 짓궂게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을 눈치 챈 양 배리 이글이 그녀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염색한 금발 머리를 뒤로 넘기고, 딴에 매력적인 미소라고 생각하는 미소를 보냈다. "그동안 어디에 숨었다가 이제야 나타났소?"
소피는 톰을 위해서 신랄한 대꾸를 참았다. 대신 톰과 팔짱을 끼며 쿡쿡 웃었다. 톰이 소개했다. "여긴 소피."
배리 이글은 자신의 매력을 확신하는 태도로 그녀의 손을 잡고 키스했다. "안녕, 아름다운 아가씨! 이 톰이라는 친구한테 싫증나면 아무 때고 알려 줘요."
소피는 차갑게 웃었다. 그의 흰 재킷 한쪽이 불룩한 것이 총일까 궁금했다. 아니면 배리 이글한테 범죄자 친구들이 많다는 말에 지나친 상상력이 발동한 것일까? 지금도 험상궂게 생긴 사내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범죄자 타입이라면 바로 그런 사내를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배리의 눈이 그녀의 눈길을 따랐다.
"아, 베인스, 모든 게 만사 잘되고 있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샴페인에 문제가 좀...." 사내가 존경스럽게 말하자 소피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술 담당 웨이터를 가지고!
"그래서 내가 진작 모자란다고 하잖아여!" 배리는 톰과 소피에게 얼굴을 찡그렀다. "미안해서 어쩌나. 실례해도 되겠죠?"
"배리는 괜찮은 친구요. 허세가 좀 있어서 그렇지." 톰은 그녀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소피는 홀 안을 둘러보았다. 크지는 않지만 천장과 벽이 온통 거울이라 무척 커 보인다. 거울마다 비친 사람들 모습에 넋이 빠지기 십상이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디스코 등 아래서 사람들이 춤을 추었다.
지나 타이렐은 당연한 일이지만 플로어 가까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테이블에는 사람이 몇 명 더 있다. 몇 명은 소피도 아는 얼굴인데 <센티널>의 이사도 한 명 끼어 있었다.
톰이 속삭였다. "저것 봐요! 정말 맥 캐머린이 지나하고 있네!"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 무슨 속셈으로 맥 캐머런을 상대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여름 밸러리 나이트는 몰리 그린이라는 아가씨의 인터뷰 기사를 <센티널>에 실었다. 인터뷰에서 몰리 그린은, 유명한 배우 맥 캐머런이 자신의 애인이었으며 그녀가 가진 아기의 아버지라고 했다. 화가 난 맥은 기사를 부인하고 <센티널>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소피는 <센티널>측 변호사를 위해 사건 개요서를 타이프 친 적이 있다. 서류에는 기사가 어디까지나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몰리 그린 역시 9월에 태어난 여자아기의 아버지가 맥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아기의 혈액 검사를 위해 혈액이 채취되었지만 맥 자신은 아직 혈액을 내놓지 않았다고 했다.
소피는 지나가 맥과 데이트한다는 소문이 떠돈 것을 기억했다. 소문에 따르면 닉 캐스피언이 지나에게 맥을 만나지 말라고 했다는데, 오늘밤 두 사람에 대한 기사라도 나가는 날에는 닉이 노발대발할 것이 분명하다.
그녀 눈에 한 사진기자가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유명 인사들의 사진을 찍는 것이 보였다. 그가 지나의 사진은 찍지 않길 빌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가 앉은 테이블 옆에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올려다보니, 흠 한점 없는 이브닝 정장을 입은, 올리브 빛깔로 그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톰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안녕, 버니. 근무인가, 아니면 사교중인가?"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톰은 묘하게 몸이 굳어지며 열의 없는 대꾸를 했다. 소피는 톰이 그 사내를 좋아하지 않는 걸 감지하고 그를 자세히 살폈다. 사내 역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길이 무척이나 사람을 긴장시키게 한다. 조각한 것같이 핸섬하고 검은 머리는 뒤로 말끔히 빗겨져 있다.
"소개해 주게, 버니."
그의 말에 톰이 중얼거렸다. "소피, 여기는 안드레아스 커크."
사내는 갑자기 싱긋 웃었다. 그 미소는 그처럼 차가운 윤곽의 얼굴한테서는 기대도 못 한 매력을 담고 있다.
"소피... 사랑스러운 이름입니다. 꼭 어울리고."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 손을 우하하게 자기 입술에 갖다 댔다. 그 입술 감촉에 그녀는 등에 전율이 흘렀다. 얼른 손을 떼자 그의 눈 속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나타난다. "모델이신가요, 배우이신간요, 소피?" 그가 말했다. "그 얼굴과 옷 입은 솜씨를 보면 둘 중 하나시겠죠...." 그는 시뇽으로 묶은 그녀의 머리며 타원형 얼굴, 모에 꼭 끼는 청록색 드레스를 훑어보았다.."
"전 비서예요. 소피는 사내의 육감적인 탐색 알래 얼굴이 붉어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소피는 <센티널>의 법제실에서 일하고 있소." 톰이 말했다.
안드레아스의 검은 눈썹이 올라갔다. "정말인가?" 그는 더욱 뚫어지게 그녀를 보았다. "일이 마음에 드시나요? 법률 일이 따분하지 않아요?"
"아뇨, 흥미진진한걸요." 그녀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럼 내 밑에서 일하실걸. 톰이 말하지 않았지만 나 역시 변호사거든요."
소피는 놀랐다. 배리 이글의 부자이며 수상쩍은 친구들 중 한 명인 줄 알았는데!
"법정 변호사죠." 안드레아스가 말했다. "그런데 법에 흥미 있는 훌륭한 여비서가 나한테는 영 얻어걸리질 않아요. 당신이 직장을 바꿔 보고 싶으면 언제든 전화해 줘요." 그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명함을 꺼냈다.
소피가 마지못해 그것을 받아드는데 가까이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안드레아스가 홱 돌아서며 험상궂게 이마를 찌푸렸다. 하지만 사진기자는 이미 등을 돌리고 다른 테이블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저자가 우리 사진을 찍었을까?" 안드레아스가 톰에게 물었다.
"글세, 난 몰랐소. 그런데 저기 테이블에서 누가 당신한테 손짓을 하는걸."
안드레아스는 그쪽 방향을 보더니 빨간 드레스의 여자를 향해 손을 저었다. "일행한테 돌아가야겠군요." 그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나중에 나하고 한 곡 추시겠죠, 소피?"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그가 가자 톰이 신음소리를 냈다. "영 안 가나 했네. 언짢지 않았길 빌어요, 소피. 도리가 없었어요."
소피는 톰을 바라보았다. "겁나는 남자군요! 변호사라고 했을 때 난 기절해 넘어질 뻔했어요!"
톰은 놀란 얼굴이었다. "그럼 저 사내가 누군지 몰랐단 말이에요? 유명한 인물이에요. 런던에서 제일 힘 좋은 악당들 여럿의 변호를 맡아 유명해졌죠. 나도 저 남자가 참가한 재판에 가보았는데, 확고한 증거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더군요. 무서운 남자예요."
소피는 안드레아스가 댄스 플로어 가까이 있는 대이블에 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빨간 드레스의 여자가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톰 역시 그것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가엽은 배리는 저 사내를 무서워해요. 여기선 좌석 배치를 보면 그 사람이 배리의 인명록에서 어떤 우치인지 알 수 있죠. 맥 캐머런의 테이블 바로 옆이네!" 그는 질투어린 눈길로 유명한 배우 맥을 바라보았다. "여자들은 대체 저 남자의 어디를 좋아하는 거지? 저 남자 섹시해요? 난 모르겠는데."
"당신은 여자가 아니잖아요. 정말 섹시하다구요."
지나 타이렐 역시 맥 캐머런이 유명한 배우의 흉내를 내며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드는 것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몸매가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자니 압박감이 느껴진다. 눈썹으로 그늘진 푸른 눈동자, 생생한 미소에 그녀는 성적인 흡인력을 느끼고 몸 속에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정말 섹시해! 여러 달 못 보는 사이에 그가 얼마나 섹시한지 잊을 뻔했다. 그런데 오늘밤 그는 지금까지 그녀를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데모트 경과 같이 있는 것을 보고 화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놀란 것이 분명하다. 그가 오늘밤 테이블의 일행 중 한 명이란 걸 알고 그녀가 놀랐듯이.
데모트 경, 또 짓궂은 장난이군! 나중에 이야기 좀 해야겠어. 이런 식으로 동석자를 짜놓다니 대체 무슨 속셈이람! 그녀는 테이블 맞은편 데모트 경과 눈이 마주치자 차가운 눈가리을 보냈다. 그는 무사태평한 눈길로 답했다. 조지 타이렐 경을 대부로 섬긴 데모트 경은 아직도 타이렐 경의 추억에 충실했다. 그는 닉이 회사를 맡자 사임했는데 최근 이사회에 돌아오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닉이 데모트 경이 돌아오게 하겠다고 했을 때 지나는 그것이 현명한 처사인지 의문을 제기했지만, 닉은 그런 그녀에게 데모트 경은 이사회에 친구가 많으며 그 친구들 중 한 명이 경과 닉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상기시켜 주었다. 닉은 데모트 경이 자기를 용서하고 화해를 청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되고 보니 지나는 혹시 평생 단 한 번일 실수를 해서 적을 제 편에 끌어넣은 것이 아닌가 의아해졌다.
"즐거운가, 지나?" 데모트 경이 그녀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푸른 눈동자가 짓궂게 빛난다.
50대인 그는 키가 크고 여윈 몸집에 숱 많은 잿빛 머리칼이었지만 머릿속은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향해 열어놓고 살기 때문에 젊어 보였다. 그의 취미 중 하나가 극장 무대에 투자하는 것이라 배우들을 많이 알고 지내다.
"무슨 속셈이죠, 데모트?" 그녀가 속삭이자 그는 싱긋 웃었다.
"속셈이라니?"
"오늘밤 맥이 이 자리에 온다는 이야기는 안 하셨잖아요!"
"그랬나?"
"물론이죠. 당신이 <센티널> 지 이사회에 복귀했다는 것 잊지 마세요. 당신은 우리 신문에 충성할 의무가....."
"지나, 너는 네가 충성할 데를 잊었으면서?" 데모트의 발에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물론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다구. 넌 닉 캐스피언의 편을 들거나 아니면 타이렐 편에 서서 닉과 싸워야 한다구."
"싸우고 있어요." 그녀는 말하면서도 죄책감에 마음이 약해졌다. 여러 달에 걸쳐 자신이 조금씩 닉과의 싸움에 지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닉이 타이렐 가의 신조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고 판단될 때는 닉은 늘 승자였다.
그가 런던에 있을 때는 늘 회사에서 그를 만난다. 때때로 그는 그녀를 설득해 국제회의에 같이 참석하기도 했다. 룩셈부르크에서 열리는 신문인 단체의 회의였다. 또 그가 그녀의 아파트 건물 펜트하우스 바로 옆칸을 샀기 때문에 그가 집에 와 있는 모습도 종종 본다. 두 사람은 <센티널>의 대표로서 점심과 저녁을 함께 드는데 물론 늘 동행이 있었다. 그러므로 데이크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닉은 점점 버릇처럼 친밀함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예전처럼 신랄하게 대항하고 있지 않다.
"그 말 진심이길 빌어, 지나. 언젠가는 그 말을 증명해야 할 테니까." 테모트 경의 말에 그녀는 이마를 찌푸렸다.
"무슨 말씀이시죠?"
데모트 경이 대답하려는데 드럼이 요란하게 울리고 불이 꺼지더니 흥분한 속삭임이 일었다. 무대등이 켜지고 푸른 불빛 속에 배리 이글이 서 있었다. 그는 얼큰히 취한 채 횡설수설하며 손님들에게 환영인사를 했다. 이어 자신의 새 사업을 도운 유명인사 친구들의 이름을 읊자 조명이 테이블 위로 날아다니며 그가 말하는 유명인사의 얼굴을 비추고, 그 뒤로 박수갈채가 따랐다.
마침내 배리가 처음 등장한 연예인을 소개했다. 그의 레코드 사 소속 그룹으로 그들의 최신 히트곡을 연주했다.
"저 그룹은 돈도 못 받고 출연하고 있을 거야. 하만 저들도 불평은 못 하지. 오늘밤 청중은 온통 매스컴의 인사들뿐이니 공짜로 새 레코드 선전을 하는 것 아니겠소?" 맥 캐머린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했다.
"신랄하지만 정확한 평가요!" 데모트 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뒤로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서 아무도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지나는 맥이 줄곳 자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를 쳐다보면 그의 눈은 무대 위의 연주에 꽂혀 있었다.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에게서 화난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오늘밤에 여기 온 것이 못 마땅한 것이 분명하다. 훌륭한 배우이긴 하지만, 그의 화가 난 표정마저 연기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가 데모트 경과 짜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은 분명 아닌 듯하다.
연주 순서가 끝나자 모두들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부는 가운데 이번에는 배리 이글이 직접 디스크 자미로 나섰다. 지나는 맥이 일어나 그녀에게 춤을 청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댄스 신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그를 따라 플로어로 나갔다.
춤이 시작되자 맥이 낮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지나?"
그녀는 시치미를 떼지 않았다. "나도 모르겠어요. 데모트 경이 전화하더니 오늘밤에 초대를 하더군요. 하지만 당신도 나온다는 말은 안 했어요."
맥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이오?"
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모트 경이 무슨 일을 구미고 있나 봐요. 당신을 보는 순간 알았죠. 하지만 무슨 계획인지 몰라도 난 가담하고 있지 않아요."
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반갑군."
두 사람은 춤을 더 추다가 지나가 물었다. "신작 영화를 찍는다면서요. 잘돼 가요?"
맥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지. 하지만 다 만들기 전까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법 아니오. 당신은? 닉 캐스피언하고는 이제는 잘 지내고 있소?"
"차라리 저승사자하고 일하는 게 낫죠!" 지나가 대꾸하자 맥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가까이서 플래시가 터지는 바람에 두 사람 다 놀라 바라보았다. 지나는 사진기자 한 사람이 싱긋 웃는 것을 보자 신음했다. "감사합니다, 캐머런 씨, 타이렐 양!" 기자는 말하고는 다른 쌍을 찍으러 갔다.
"오, 제발 두 번 다시는 말아 줘요!" 지나가 투덜거렸다. 다음 날 어떤 지면에서건 닉이 사진을 볼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그러려고 한 일인데 뭘." 맥이 딱딱하게 말했다. "데모트 경이 바란 일일 거요."
"그럴 거예요. 하지만 왜? 무슨 꿍꿍이속이죠?"
지나는 정말 데모트 경의 속셈을 알고 싶었다. 나와 맥이 다시 같이 있는 모습을 알려서 무슨 득이 있다고. 닉을 성나게 하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이상의 동기가 숨어 있는 게 틀림없다. 언젠가는 타이렐 가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해야 할 날이 있으리란 말을 하지 않았던가.
뭔가 음모가 있어. 데모트 경이 날 옭아매려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맥 캐머런이 무슨 관계가 있길래? 그 역시 나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분명한데.
"무슨 일을 꾸미는지는 하늘만이 아시겠지." 맥은 그녀의 몸을 돌리며 출구로 향했다. "어쨌거나 난 지금 가야겠소. 당신은?"
지나는 생각할 새도 없이 충동적으로 가기로 했다. 말없이 데모트 경 옆을 뜨는 거야. 그는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해. 사정을 말하지도 않고 닉과의 개인적인 싸움에 끌어들이다니.
그녀가 탕의실에서 코트를 찾아 돌아오니 맥이 멋진 검은색 모직 코트를 입고 클럽의 전화기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밖에 나가면 내 차가 기다릴 거요." 그는 수화기를 놓으며 말했다. "카폰으로 방금 운전사하고 이야기했지."
"하지만 당신은 우리와 동행이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11시에 날 데리러 오라고 운전사한테 말해 뒀소. 새벽에 스튜디오에 가야 하기 때문에 늦게까지 있을 수 없소."
그의 말대로 밖으로 나오자 리무진이 다가오더니, 운전사가 튀어나와 문을 열었다.
"타이렐 부인을 먼저 댁으로 모시지." 맥이 말했다. "주소가 어디요?"
"정말 바래다주려고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면서요. 난 택시 타도 되는데."
"당신 집이 바버리 워프 근처 강변이잖소. 우리 집에서 다른 방향도 아닌데 뭘. 난 친구한테서 런던탑 근처에 있는 집을 잠시 빌려 살고 있소."
"그렇다면 고마워요." 지나가 주소를 알려주자 차는 유연하게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강변에 사는 것 괜찮아요?"
"이른 아친 안개가 끼거나 하면 근사하죠. 아침 커피를 마시며 강물을 바라보곤 해요."
"나도 발코니에서 강을 내려다보며 아침 식사하는 것을 좋아해요." 지나가 말했다.
"다도 그렇지만 아침은 먹지 않소. 커피랑 주스 정도지. 스튜디오에 가기 전에 잠깐."
"어느 일이 더 쉬워요? 영화 아니면 연극?"
"영화죠, 물론!" 맥이 대답했다. "영화는 장면을 쪼개어 찰영하는데다 전작의 대사를 모두 암기할 필요도 없고 매일 밤 전편을 다 공연할 필요도 없으니까. 연극 무대에서 내려오다 보면 온몸이 땀에 젖어서 집에 가면 골아떨어지기 일쑤죠."
"나도 기억나요." 지나의 말에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데모트 경이 그녀와 맥을 처음 소개시킨 것도 어느 연극 무대가 끝난 뒤였다. 맥은 그녀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맥은 그날 밤 그녀가 누구인지다 그리고 그녀가 <센티널> 지와 관계있는 여자인 것도 몰랐다. 다음 날 그녀에 대해 알고 난 그는 화를 내며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때 그런 행동을 해서 미안해요, 지나." 맥이 이마를 찡그렸다. "그렇게 화를 내다니 어린애 같은 짓이었소만, 그때 내 기분은...."
"내가 음흉한 속셈을 갖고 접근했다고 생각했겠죠." 지나가 얼른 말했다. "그럴 뜻은 없었어요. 단지 호기심이 있었을 뿐인데, 당신이 내 정체를 모르는 것을 알자 분위기가 깨질까 봐 밝히지 못했어요."
그때 사진기자 한 사람이 그들의 사진을 찍어 경쟁 신문사의 조간에 실었다. 그것을 보고 닉은 불같이 화를 냈고, 맥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데모트 경의 음모였소!" 맥이 물었다.
지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어떤 음모든지 간에 목표는 닉이에요. 데모트 경은 그에게 한방 먹일 틈만 노리고 있거든요."
"그래서 <센티널>을 상대로 소송중인 날 이용하는 거군."
"더구나 당신은 닉에게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힐 수 있으니까." 지나가 덧붙였다.
"그래야지!" 맥이 이를 갈았다.
지나는 맥의 적대감을 새삼스레 일깨우기는 싫었지만 저녁 내내 입에 감돌던 질문을 하기로 결심했다.. "당신, 몇 주일 전 우리 신문에 난 아기 사진을 보았어요?"
맥은 몸이 굳었다. 무슨 말인지 대번에 알아듣고 대답 없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 일이라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분명하지만 지나는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아기가 너무 작아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던 것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잘 자라요. 엄마처럼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아주 예쁜 애예요. 몰리는 데어드르라고 이름을 붙였더구요. 좀 특이한 이름이죠?"
"우리 어머니 이름이오!" 맥이 분노를 터뜨렸다. "그 여자가 무슨 권리로....."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저런, 미안해요, 맥.... 난 몰랐어요. 하지만... 저, 당신이 이런 말을 묻는 내 속셈을 의심할 것을 알겠지만....정말 확신해요, 당신이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란 것 말이오? 백 퍼센트 확신하오!"
지나는 한숨을 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 저런. 하지만 이해가 안가요. 몰리는 얌전한 아가씨 같고 당신만큼이나 이 일로 비참해하고 있어요. 난 그녀를 여러 번 만났는데, 그녀는 자신의 말이 사실이란 걸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다고 했어요."
"나도 그녀를 정직하다고 생각했었소, 한때는!" 맥의 통열한 어조도 몰리의 슬픈 눈빛처럼 진심인 듯 보인다.
지나는 완전히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대체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한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그녀와 잔 적이 없어요?" 그녀가 묻자 맥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닉 캐스피언을 대신해 심문하는 거요?"
"아니에요! 난 그저 몰리 그린이라는 아가씨가...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곤 믿어지지 않아서요...."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군!"
"아니, 맥,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지나는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내 말은 그저 당신이 그 여자와 애인 사이가 아니었다면...."
"그렇게는 말 안 했소."
지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구요?"
맥은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내 말은 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것뿐이오.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을 아니까."
"그럼...몰리하고 같이 자긴 했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맥, 피임 방법이 뭐였는지는 몰라도 실패했을 수도....."
"그게 아니오!" 맥은 심호흡을 하고 내뱉었다. "난...., 난 아이를 낳게 할 수 없는 몸이오!"
지나는 너무 놀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이젠 만족하오?" 맥이 성난 얼굴로 다그쳤다. "절대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사람들이 알면 내 인생은 끝이니까. 난 이제 40줄에 가깝소. 섹스 심볼로서의 내 전성기도 거의 끝나가고 있는데 이 일까지 밝혀지면 아예 끝장일거요. 사실은 닉 캐스피언이 법정 밖엣 타협하고자 나오길 바랐는데...."
"그렇다면 애초에 소송을 건 이유는 뭐죠?"
맥이 씁쓸한 얼굴을 했다. "몰리가 거짓말로 기사를 쓰게 놔둘 수 없었소! 꼭 해야 한다면 내 말을 증명할 수도 있소. 닉한테 말해요. 전문가들을 불러 테스트라도 해보겠다고. 하긴 전에 벌써 다 했지만." 그는 거칠게 웃었다.
"맙소사, 테스트란 테스트는 다 했었소!"
지나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게 언제였죠? 내 말은 왜 그런 테스트를 받았느냐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의심이 들어서....."
"어떤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아기를 갖고 싶어 했소. 우리는 몇 년간 노력해 보았지 하지만 결실이 없길래 둘 다 테스트를 해보았소. 그랬더니 내 쪽에 문제가 있다는 거요...."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 "그녀는 날 버리고 가버렸소. 결혼할 사이였지만 그녀는 내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몸인 것을 알자 그 다음 날로 날 버리고 떠나 버렸소. 자기는 아기를 안겨 줄 진짜 남자가 필요하다는 거였지."
지나는 몸을 떨었다. "맙소사! 어찌 그렇게 잔인할 수가!"
"그래도 그녀는 정직하긴 했지." 맥이 이를 갈았다. "몰리도 처음에는 천사 같았소. 그래서 난 미친 듯이 사랑에 빠졌지....."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최대의 거짓말쟁이였던 거요! 이젠 당신도 아기 아버지가 나라는 말을 듣고 화가났던 내 심정을 이해하겠지. 그게 사실이길 바라는 마음은 나도 간절하오. 사실이기만 하다면 뭐든 아깝지 않겠지...."
그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아기가 내 아기일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때문에 내게 그토록 중요한 일을 갖고 그녀가 거짓말을 하게 놔둘 수는 없었소."
지나는 그날 밤, 오랫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맥의 얼굴과 목소리에 깃든 고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몰리 그린 역시 진심이었다. 두 사람 말이 똑같이 진실일 리는 없을 텐데.
새벽 1시경 겨우 잠이 든 그녀는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는 요란한 소리에 기겁을 해 잠이 깼다. 누가 누르고 있는 지는 안 봐도 뻔하다. 이곳으로 올라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펜트하우스 전용 비밀 코드를 입력시켜야만 승강기를 타고 전용 올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진이 실린 조간신문 초판을 본 모양이다.
닉이 불같이 화를 낼 것은 뻔하다. 그렇다고 그를 탓할 수도 없다. 그 사진을 보면 그녀가 이번 소송에서 맥의 편을 들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해 싸울 기력조차 없다. 닉이 가버릴 때까지 초인종 소리를 무시할까 생각했지만 닉은 끈질겼다. 손가락이 아예 초인종 단추에 딱 붙이고 있다. 초인종 소리에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나와 실크 가운을 입고 문을 열러 갔다.
닉은 북풍처럼 요란히 문을 밀고 들어왔다. 한 손에 신문을 움켜쥐고 있다. 지나는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밤은 안 돼요, 닉! 너무 피곤해요...."
"캐머린이 그렇게 늦게까지 있었소?" 닉이 잇새로 쏘아붙였다.
"날 데려다 주었어요. 하지만 집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어요!"
닉의 입가가 차가운 미소로 일그러졌다. "오늘밤에는 들어오지 않았단 말이지? 다른 날 밤에는?"
"다른 날 밤이란 것은 있지도 않아요!"
닉이 신문을 코앞에서 휘둘러댔다. 그녀와 맥이 커다란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여기 기사를 보면 그게 아니던데! 얼마나 오랫동안 내 등 뒤에서 몰래 그자를 만나고 다녔소? 지난여름 뒤로 쭉? 내가 그자를 만나지 말라고 했는데도! 당신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라구!"
4장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닉, 당신은 신문기사 같은 것은 그대로 믿진 않을 텐데요!" 지나는 차라리 문을 열지 말 걸 하는 심정이었다.
"그럼 이 사진은, 이 사짖도 거짓말이오?" 닉이 이를 갈며 등 뒤로 문을 닫고는 신문을 다시 그녀의 코앞에 내밀었다. "보라구! 봐요!"
지나는 사진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얼굴을 불혔다. 그녀와 맥 캐머런이 바싹 끌어안은 모습의 사진이다. 그녀는 꿈꾸는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닉이 엉뚱한 결론을 내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사진을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닉을 보자 그는 매서운 눈길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조지 경한테 신문업계의 오래된 지침쯤은 배웠겠지. 1장의 사진이 천 마디 기사보다 나은 법이라고. 분명 그렇지 않소?"
지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닉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닉이 이처럼 앞 뒤 안 가리고 화를 낼 때는 속수무책이다.
"우린 춤만 추었어요....." 그녀가 입을 여는데 닉이 잘랐다.
"진하게 췄단 말이지, 아주 진하게!" 그의 입가가 조롱으로 일그러졌다. "이 사진을 보면 당신과 이자가 단둘이 있을 때는 어떤 모습일지 크게 머리 굴리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어!"
"말했잖아요, 아무 일도 없었다구. 맥은 우리 집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우리는 애인 사이가 아니에요. 그런 적도 없고!" 그녀의 입술이 마구 떨렸다.
닉이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 거짓말 집어치워! 이 사진만 봐도 거짓말인 줄 알겠는데! 날 바보로 아는 거야? 또 거짓말할 생각은 마시지, 그때는 정말 가만 안 둘 테니. 내가 온 것은 진실만을 듣기 위해서야. 진실만 말하라구!"
"사실이에요!" 지나도 화가 났다. 녹색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당신이 안 믿기로 작정했다면 억지로 믿게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맹세코 맥과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리고 당신이 뭔데 한밤중에 쳐들어와서 날 다그치는 거죠? 난 피곤해요. 잠이 필요하다구요!"
"내겐 뭐가 필요한지 굳이 말 안 해도 되겠지?"
닉의 어조에 충격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그만해요, 닉!"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만이라니, 시작도 안 했는데!"
"그렇다면 시작도 말아요, 안 그러면......"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안 그러면 뭐지?" 닉이 차갑게 빈정거렸다.
지나는 그의 가무잡잡한 얼굴d" 눈을 꽂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다. 그는 눈치를 채고 싱긋 웃으며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난 1년이나 기다리는 게임을 해왔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지, 안 그래?" 그의 묘한 어조에 그녀는 미칠 듯한 긴장을 느꼈다. "이젠 내 인내심도 바닥이 났소. 오늘밤 이 사진을 보았을 때 명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지. 당신이 나한테 거짓말을 하면서 다른 남자와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언젠가는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 날이 오겠지, 그때는 당신이 내게 안겨 오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동안 당신은 내 등 뒤에서 몰래 맥 캐머런과 데이트를 했단 말이지? 당신이 날 바보로 만들었다는 걸 깨닫고 미칠 것 같았소!"
"아뇨, 닉, 오해예요." 그녀는 항의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닉은 l 년간 조금씩 그녀에게 접근해 왔다. 직장이건 아파트건 늘 같이 있어야 하는 사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 팽팽히 맞선 채 암투를 벌였다. 지금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라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든 한마디도 듣지 않을 것 같았다. 너무나 화가 나 있다.
그래도 다시 달래 보았다. "난 맥하고 데이트하지 않았어요. 오늘밤도 그가 느닷없이 데모트 경의 차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구요."
"개스켈이!" 닉이 코웃음을 쳤다. "그 양반이 있었단 말이지?"
"새 클럽 개장 파티에 날 초대했어요. 데모트 경이 어떻게 초대장을 얻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연극 무대의 후원자니까 배리 이글의 후원자이기도 한 모양이에요. 어쨌든 그가 전화를 걸어 초대하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어요. 당신이 그를 이사회에 붙들어 두기로 한 게 분명한 터에 기분나쁘게 대할 수는 없었죠." 그녀는 새삼 화가 나 쏘아붙였다. "그리고 어쨌거나 난 그분이 좋아요.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그는...."
"조지 경의 충실한 지지자란 말이지! 내가 그걸 잊을 아나?" 닉이 쏘아붙였다. "그럴 줄 알았지. 무슨 일이건 조지 경이 꼭 배후에 있다니까. 그가 죽은 지 1 년인데 그는 여전히 당신의 말과 행동을 하나부터 열까지 좌지우지 하고 있어. 안 그런가?"
"그분이 돌아가셨다고 내가 그분을 사랑하지 말란 법은 없어요! 당신 아버지도 돌아가셨지만 그분 뜻은 여전히 당신 생활에 중요하지 않은가요?"
닉이 눈썹을 모았다. "우리 아버지를 이 일에 끌어들이지 말라구! 당신은 그분에 대한 내 마음 몰라. 하긴....나도 몰랐지만." 그의 목소리가 변했다. "난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도 몰랐지. 어렸을 때 난 기숙사 학교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보는 일이 드물었어. 어쩌다 집에 와 있을 때면 아버지는 날 하인들한테 맡겨 놓았지. 같이 살던 초기에 아버지와 난 매우 소원한 사이였소. 난 아버지가 날 어머니한테서 떼어 놓았기 때문에 미워했지. 아버지는 양육권을 얻고도 내겐 아무 관심이 없었소."
지나는 그의 어머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기억났다. 그녀의 눈빛은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닉은 그녀를 보지 않고 벽을 바라보고 있다. 얼굴 표정이 황량했다. 그녀는 그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성난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는 다시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쨌거나 조지 경은 당신 아버지가 아니었소. 혈연관계도 없잖소."
"하지만 내겐 아버지 같은 분이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남편인 제임스마저 죽자 조지 경하고 나뿐이었어요. 우리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의지한 것은 당연하죠." 그녀는 눈썹 밑으로 닉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왜 걸핏하면 그분 문제를 걸고넘어지는 거죠? 내가 조지 경을 사랑했다는 것이 왜 그리 신경쓰이죠?"
닉이 얼굴에 검붉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는 불편한 듯 눈길을 돌렸다. "내가 질투하고 있다, 그 말 아니오? 그래, 맞소. 난 질투하고 있소, 이 말할 여자야!"
"노인을 두고? 더구나 돌아가신 분을?" 지나는 기가 막혔다.
"우리 사이에 끼어드는 누구건 질투하오!"
지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의 질투와 분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의미기만 한다면....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자신이 만일 1년 전 닉과 잠자리를 같이했다면 그는 지금쯤이면 그녀를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또 시작인가요?" 그녀가 거칠게 내쏘았다. 닉에 대해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데에 끈질기다는 사실이다. 성공할 때까지는 불독처럼 물고 늘어져 놓지 않는다. 지나는 그의 전리품 목록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닉의 입술이 일그러진다. "내가 모르는 줄 알고! 가장 괴로운 것이 바로 그거라구. 당신은 내 말을 아예 듣지도 않잖아."
닉도 1 년 전에 비해 그녀를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여자답고 부드러워 보여도 닉 뺨치게 고집 있는 여자다. 때문에 두 사람의 싸움은 늘 무승부지만 둘 다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어느 한쪽도 제대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얼마나 더 이런 식으로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소." 닉이 이번에는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그의 속셈을 알고 쓴 얼굴을 했다. 그러자 닉이 코웃음을 쳤다.
"대체 당신 피 속에는 뭐가 든 거요? 얼음이라도 들었나?"
차라리 그랬으면 하는 생각이 그녀도 종종 들었다. 한때 그를 깊이 사랑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대단한 배신자인지 알고 크게 상처를 입었다. 그는 그녀와 그녀를 딸처럼 사랑하는 타이렐 경을 배신해 사업상 이득을 챙겼다. 지나는 그가 한 짓을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게 느껴지는 감정까지 모두 없앨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불안하게 공존해 그녀의 생활을 좀먹고 있었다.
"날 내버려둬요, 닉!" 그녀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랫 맥 캐머런 하고 어울리라고?" 닉의 눈빛이 번뜩였다. "내가 그렇게 놔두리라 생각하나?"
"난 맥하고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말했잖아요. 지난밤 파티는 데모트 경이 주선한 거고, 난 맥이 그 자리에 올 줄 몰랐어요. 어떡해요, 무시라도 했어야 한단 말인가요? 그가 춤을 청했는데 거절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때 사진이 찍힌 거예요. 한긴 우리 모습이....."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애인 사이 같았다는 것은 인정하나 보지!" 닉이 조소를 날렸다.
"하지만 모양이야 어떻든 간에 사실이 아니에요. 맥은 친절한 남자고 난 그를 좋아하지만, 그는 내가 아니라 몰리 그린을 사랑하고 있다구요!"
닉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뭐라구?"
"지난밤에 그가 다 얘기했어요. 내가 당신한테도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는데도 그는 그러라고, 자신은 필요하면 자기 말을 증명하겠다고 했어요."
닉은 지나가 자세히 설명하는 동한 귀를 기울였다.
"그자의 말을 믿었소?" 그녀가 말을 끝맺자 닉이 물었다.
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맥은 너무 화가 나 거짓말도 못 랄 상태였어요. 그리고 남자가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더구나 사람들한테 공표해야 할 처지의 남자가. 맥 말대로 이 일이 알려지면 그의 이미지는 끝장이에요."
닉은 이마를 찌푸렸다. "하긴 내가 그의 처지라 해도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은 원치 않겠소.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지. 남자다움이란 민감한 거라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봐주느냐 하는 것에 좌우되거든. 더구나 배우라면 이미지는 전부나 마찬가지지." 그의 눈빛이 씁쓸했다. "그렇군, 캐머런이 그런 이야기를 꾸며댈 법하지는 않아."
그는 응접실을 건너 창가에 서서 달빛 고인 강물을 내다보았다. 지나는 지금 그가 무슨 생각중일까 궁금했다. 그의 은발 섞인 검은 머리칼이 반짝 빛났다. 가벼운 눈발 속을 걸어 그녀의 집으로 온 탓이다. 값비싼 검은 오버코트 위에도 넥타이는 풀고 셔츠 깃을 열어놓았다.
지나는 불현듯 그가 다우닝 가 10번지에서 저녁식사를 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매스컴 계의 유력인사들과 함께한 자리였다. 그런 사교행사는 그의 책임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매일 저녁이라도 나가 있을 수 있지만 닉은 최대한 행사를 줄였다. 그에게 사교행사란 시간낭비였기 때문이다.
아마 집으로 오는 길에도 내일 아침 조간신문을 훑었을 것이다. 퇴근길이건 잠자리건 언제나 신문을 끼고 사는 남자니까. 일 중독자인데다 모든 회사 일에 경영자의 권리를 행사하려는 그이 태도에 사내의 직원들은 늘 괴롭다.
"맙소사!" 닉이 거칠게 말했다. "엉망진창이군. 이 일이 무슨 의미인 줄 알겠소? 몰리 그린이 거짓말을 했는데 밸러리 나이트는 바보같이 그 거짓말을 샀다는 거요. 맥 캐머런에게는 막대한 손해배상을 해야겠지. 밸러리 나이트는 해고요. 내일 책상을 비우게 해야겠어."
"그건 불공평해요!" 지나는 닉에게 다가갔다.
닉이 홱 돌아섰다. "불공평? 맙소사! 그 여자 때문에 막대한 돈을 날리게 생겼는데 나더러 공평하라구?"
"밸러리한테만 책임을 지울 수는 없어요. 그녀는 몰리 그린을 믿었고 나도 그랬어요. 우리 모두." 지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도 몰리가 사랑스럽고 거짓말은 못 할 타입이라고 했잖아요. 그녀한테는 모든 사람을 믿게 만드는 데가 있어요."
닉은 조소를 날렸다. "여자들은 다 그렇지. 그 기술이 특히 남보다 뛰어난 여자들도 있지만, 대부분 여자들이 순진한 눈을 크게 뜨면 남자들은 거짓말에도 홀딱 넘어간다구."
지나는 자신을 빈정대는 말인 줄 알고 화를 누르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직도 눈이 내려 지붕들 위로 날아다녔다. 나뭇가지마다 고드름이 매달려 있다.
닉이 문득 신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 캐머런이 몰리한테 홀딱 넘어간 것도 당연하지." 그러더니 성난 짐승처럼 방 안을 서성거린다.
"왜 또 이래요?"
"문득 생각이 떠올라서 말이오! 이봐요, 캐머런은 법정 밖에서 타협하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가 요구하는 피해 보상액보다는 적게 받게 되오. 조심해야겠소.... 자칫 너무 적게 제의하면 그는 화가 나서 원래대로 재판으로 밀고 나갈 테니까. 어쨌거나 당장 협상을 시작하라고 가이한테 일러야겠소."
"하지만 밸러리 나이트는 해고하지 않는 거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달랬다.
닉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를 뚫어지게 보았다. "해고하지 않으면 당신은 대신 내게 뭘 주겠소?"
지나는 온몸이 굳었다. "협박이군요!"
닉의 잿빛 눈동자가 조롱을 날렸다. "별로 과한 것 같지는 않은데, 키스 한 번에 밸러리 나이트의 일자리라면!"
"사람들 인생을 갖고 어떻게 그런 식으로 장난을 칠 수 있죠?" 지나가 조소하자 닉의 얼굴에 검붉은 홍조가 떠올랐다.
"사람들을 갖고 장난치는 이야기를 당신이 할 자격이 있나? 한때 당신도 날 갖고 장난했으면서!"
그는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틀어 안았다. 지나는 신음소리로 항의했지만 닉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의 얼굴이 바싹 가까이에 있었다. 눈빛이 번쩍였다. 갑자기 그녀의 온몸에 열기가 일렁였다. 그의 욕망에 대항해 싸운 적이 여러 번 있지만 자신의 욕망에 대항해 싸우는 것도 역시 힘들었다. 그녀는 닉의 검게 그은 얼굴을 지우려 눈을 감았다. 그것이 또 실수였다. 닉이 재빨리 기회를 이용했다.
그의 입술이 다급하게 내려왔다. 그녀가 신음소리를 내며 입술을 열자 닉이 침범해 왔다. 그의 혀가 은밀히 움직이자 그녀의 등골 위로 쾌락의 떨림이 지나갔다.
키스 한 번뿐이야.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뿐이라구. 키스 한 번에 난 밸러리 나이트의 일자리를 구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합리적으로 여겨졌다. 밸러리의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면 죄책감 없이 키스를 허락할 수 있다.
닉이 그녀의 허리를 젖혔다. 그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한 손을 그의 머리칼에 넣고 한 손은 그의 셔츠를 잡았다. 그의 포옹 속에 뼈가 녹는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아직도 그녀의 입술 위에서 움직였다. 달래고 유혹하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세차게 다그쳤다.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어 머리를 젖혔다. 닉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칼을 잡더니 다른 손으로 그녀의 몸매를 훑어 내려갔다.
그녀는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키스 한번이 아니다. 제지하지 않으면 닉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분이 너무나 묘했다. 귓속이 멍하고 몸이 마구 떨렸다. 닉이 그녀의 가운을 어깨 위로 벗기자 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얇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섰다. 닉의 손이 얇은 천 위로 불타는 듯했다.
닉은 거칠게 숨을 쉬고는 얼굴은 그녀의 목덜미에 묻고 뜨겁게 키스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양손에 쥐고 몸을 떨었다. 너무나 그를 원하는 마음에 죽을 것만 같았다. 무릎이 풀리고 있었다.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닉의 입술이 내려와 그녀의 따스한 가슴에 닿자 그녀는 거친 신음 소리를 냈다.
어느새 그녀의 몸은 바닥에 뉘어지고 닉은 그녀 위에 몸을 누인 채 거친 키스를 했다. 그녀의 몸이 굶주린 듯 반응하며 떨었다.
그가 코트와 상의를 벗는 것은 의식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옷을 거의 벗고 알몸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은, 그의 머리칼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을 때 맨살이 만져지는 감촉으로 비로소 알았다.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고 충격 속에 눈을 떴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가 하얘졌다. 허둥지둥 일어나려 했지만 닉이 잠옷자락을 잡고 다시 눕혔다.
"안 돼요, 닉... 닉...." 그녀는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당신도 나만큼이나 나를 원하고 있어!" 그가 쏘아붙이자 그녀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 말을 부인하려고 했지만 거짓말이 목에 걸렸다. 영원처럼 생각되는 시간 동안 그를 원해 홨다. 욕망에 문을 닫으려 했지만 몸 속 깊은 곳의 욕망과 욕구는 줄곧 자라나 지금에 이르렀다. 닉의 키스가 그 욕망의 문을 열었다.
닉은 그녀의 어깨를 누른 채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나는 처음으로 그의 알몸을 보자 초록색 눈이 휘둥그레졌다. 탄탄한 어깨, 넓은 가슴, 털이 난 납작한 배, 훌쭉한 허리....
남자의 알몸은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했다. 제임스는 닉의 강인한 몸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는 자신이 제임스와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는지, 그의 몸이 어땠는지 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닉의 흥분한 몸을 보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닉이 정말 그녀를 갈구하는 것인지 의심했다면 그 증거가 지금 분명히 보인다.
닉은 그녀의 눈길을 느끼고 거칠게 신음했다. "지나, 맙소사....."
그가 다시 키스하자 그녀는 미친 듯한 쾌감의 소용돌이에 지난날을 잊었다. 그에 대한 분노도 질책도 의심도 불안도... 닉의 키스가 그녀의 피 속에 열기를 불어넣었다. 그녀는 닉을 마주 애무하며 그의 몸을 확인했다. 조금 전에 보았던 탄탄한 어깨를, 넓은 가슴을...
문득 그녀는 불안을 느꼈다. 그의 어깨를 잡고 밀어내려고 애썼다. "닉...." 바싹 마른 입술로 속삭였다. "닉, 기다려요, 난 두려워요...." 지금 자신이 처녀 같은 기분이란 걸 무슨 수로 설명하랴. 남편이 죽은 지 너무 오래 되다 보니 마치 이것이 처음 같은 기분을.....
"겁내지마, 지나." 닉은 그녀의 기분을 이해하고 그녀의 불안이 기쁜 듯 싱끗 웃었다. "다치지 않을 테니.... 긴장을 풀어요....." 그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다리를 쓸자 그녀는 숨이 더욱 가빠졌다.
닉이 그녀의 가슴에 입술을 댔다. 그녀는 억눌린 욕망의 신음소리를 내며 등을 활처럼 구부렸다. 마침내 닉의 몸을 맞자 그제야 완벽해진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의 벗은 몸이 하나로 얽히고, 세찬 움직임으로 두 사람은 쾌락의 파도를 넘었다.
"오, 닉...."
파도의 꼭대기에서 그녀의 입으로 신음이 새어나오고, 닉 역시 목구멍 깊숙히 신음소리를 냈다.
한참 후, 지나는 죽은 듯이 양탄자 위에 널부러져 있었다. 닉은 그녀의 벗은 가슴에 고개를 대고 있다. 그의 숨결은 따스했다.
지나는 차츰 정신이 들면서 닉을 의식했다. 자신을 누르고 있는 그의 몸무게도 의식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손길은 그녀를 소유한 듯한 손길이었다. 그녀는 충격을 느꼈다. 닉이 나른하게 고개를 들고 오만한 자신감을 갖고 그녀를 향해 싱긋 웃는 순간 그녀의 피는 차디차게 식었다.
조지 타이렐 경이 죽은 뒤 1 년간 그녀는 개인적으로나 공식적으로나 닉을 통제해 왔다. 개인적으로는 애인이 되길 거부했고, 회사에선 그가 하는 일이 못마땅하면 즉각 반대했다. 그런데 오늘밤, 둘 사이의 흐름이 바뀌고 말았다. 닉에게 소유를 허락했으니 개인적인 싸움은 마침내 그의 승리였다. 그의 눈동자가 승리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앞으로는 예전 같지 않으리란 걸 그녀는 알았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일의 차원에서나.
오, 내가 어쩌다 이런 일을! 그녀는 절망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람!
5장
크리스마스까지 쇼핑할 시간이 14일밖에 안 남았어. 주말에 소피는 지하철역에서 바버리 위프를 향해 올라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의 모든 선물을 샀지만 아직 데오 외삼촌에게 줄 선물을 사지 못했다. 골동품이나 고서점을 훑으려면 일부러 시간을 내야한다. 외삼촌을 위해 비싸지는 않지만 뭔가 특별한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
데오 외삼촌은 기쁜 선물을 받을 때면 어린아이처럼 놀라곤 한다. 어린 시절, 가족과 조국을 무력에 빼앗기고 조국 없는 유랑인이 되어 외롭게 떠돌게 된 비극을 경험했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천진함이 남아 잇는 게 신기할 정도다.
물론 그는 세련되고 박식하고 유능한 역사학자다. 그녀는 외삼촌의 일을 거드는 것이 즐거웠다. 집세를 싸게 내는 대신 외삼촌의 일을 도와주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본 적은 결코 없다. 그녀 역시 외삼촌만큼이나 헝가리 역사에 흥미가 깊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삼촌이 너무 날카롭지 않았으면 할 때가 있다. 기브와 밸러리의 약혼 파티 후로 그녀는 외삼촌이 종종 자기 얼굴을 조심스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외삼촌은 벌써 그녀에게 뭔가 괴로운 일이 있음을 안 것이다.
그녀는 이마를 찌푸렸다. 외삼촌의 걱정을 덜어 드려야 하지 않을까? 요새 몸이 안 좋기 때문일 뿐이라고. 그녀가 감기 체질인 것은 외삼촌도 잘 알고 있으니까.
정말 요즘의 찬 날씨는 누구라도 병에 걸리기 딱 좋았다. 오늘은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잔뜩 찌푸린 하늘을 보니 오후 늦게 내릴지도 모른다. 두꺼운 코트를 입길 잘했다. 모퉁이를 돌자 바버리 워프 호텔은 마치 중세의 성 같다. 하지만 중세의 성과는 다르게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난방 시설에 공기가 후끈하다. 소피는 얼른 들어가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건물 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중이다. 전기공들이 옵셋과 프레스로 신문을 찍어내기 위해 출근하는 중이었고, 광고국의 전화 교환수들은 일렬로 책상에 앉아 갖가지 광고를 접수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취재기자들, 사진기자들, 비서들, 짐꾼들, 따스한 옷으로 무장한 신문배달원 소년들로 득실거렸다.
바버리 워프는 수많은 사람들의 일터다. 하긴 <센티널> 지가 플리트 가에서 발행될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일했다. 닉 캐스피언이 이곳으로 회사를 옮기며 나이든 인쇄공들을 많이 해고했다. 구식 인쇄기기를 첨단의 컴퓨터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소피가 출입구로 들어가자니 저 앞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가이!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 자리에 섰다. 약혼 파티가 있던 날 밤 이후 그의 모습만 보면 가슴에 충격이 왔다.
그때 그와 잠자리를 같이할 뻔했던 사건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 그의 모습만 보아도 신경에 묘한 충격이 있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붉은 목도리를 감싸고 있으면서도 그는 서성거리는 품이 서둘러 일하러 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 이유는 같이 걷고 있는 금발머리 아가씨와의 이야기에 빠져 있기 때문이 분명하다. 여자를 알아보자 소피는 입술을 악물었다. 밸러리 나이트! 그녀는 그들 뒤를 천천히 따라가며 성난 눈초리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밸러리가 저렇게 가이를 향해 미소 짓는 것을 보면 기브가 좋아하지 않을 텐데. 오랫동안 쫓아다니다가 손에 넣었으니만큼 기브는 밸러리에 관한 한 노골적으로 소유욕을 과시했다. 특히 가이에 대해서는. 그와 가이는 마주칠 때마다 불꽃이 투였다. 소피는 밸러리가 그것을 즐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밸러리는 요부 역할을 즐기는 타입의 여자다. 두 남자가 자기를 놓고 치고받기라도 한다면 더욱 즐거울 것이다.
소피는 밸러리의 등을 향해 코웃음을 날렸다. 밸러리가 좋아 본 적은 없다. 질투 때문만은 아니다. 밸러리는 너무 세련되고 세속적이다. 지극히 여자다운 외모 뒤에 끈질긴 야망을 감추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여성적인 매력을 가차 없이 이용해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타입이다.
남자들은 그런 것을 모르는 모양이지만 여자들은 안다. 밸러리가 근사한 것은 인정한다. 사랑스러운 얼굴에 섹시한 몸매, 마치 영화배우 같은 모습에 옷은 항상 눈에 번쩍 뜨인다. 오늘은 깃과 소매에 벨벳을 댄 흰 모조 모피 코트를 입고 거기에 어울리게 러시아 스타일의 흰 털모자를 쓰고 있다.
소피는 자신도 저런 옷을 입을 만한 배짱이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자신이 고르는 것은 언제나 클래식하고 다소 가라앉은 듯한 옷뿐이다. 그것이 그녀의 스타일이고, 그녀도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자기 이미지가 크고 늘씬한 몸매에 차분한 얼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감 있고 차분한 이미지 너머로 그녀는 인생을 겁내고 뒤로 물러서는 나약함을 감추고 있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나마 강하고 차분한 이미지를 나타내려고 애쓰는 것이다.
사실 밸러리처럼 남들의 시선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들을 안전한 거리에 투고 싶었고, 그런 점에선 성공했다. 남자들이 그녀를 보는 시선은 섹시한 밸러리를 보는 시선과는 다르다.
그녀는 가이가 밸러리의 몸에 팔을 두르는 것을 보았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소피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밸러리가 다른 남자랑 약혼했는데도 가이는 그녀에게서 손은 물론이고 차마 눈을 뗄 수도 없는 모양이야!
약혼식날 밤에 가이는 자신이 밸러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피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전혀 밸러리의 타입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밸러리는 바지 입은 사내라면 가리지 않고 한 번씩 희롱할 여자지만 가이 같은 남자에게 진심으로 관심이 있을 리 없다. 가이는 그녀에게는 너무 머리 좋고 진지한 성격이니까.
뭐 나랑 상관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가이가 굳이 바보꼴이 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라지! 하지만 좀 더 분별 있는 남자인 줄 알았는데.
그는 밸러리가 기브와 싸우길 되길 바라는 것일까? 둘이 싸울 것은 분명하다. 밸러리와 기브는 똑같이 격하고 변덕 많은 사람들이니까. 그 때문에 더더욱 천생연분이긴 하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헤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가이는 자존심도 없나, 밸러리가 기브하고 헤어지면 잽싸게 낚아채기라도 하려는 듯 서성거리다니. 소피는 그를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자존심을 어디다 두었담. 그녀 역시 기브한테서 큰 상처를 입긴 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녀는 그의 곁에 얼씬거리며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짓은 도저히 할 수 없다.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행여 누가 알게 하느니, 차라리 버리는 게 날을 것이다.
두 사람을 따라 홀 안을 가로질러 승강기로 가면서 그녀는 호텔의 야외 광장인 플라자 쪽을 보았다. 그때 기브의 모습이 보이자 놀랐다. 그는 이쪽으로 등을 보이고 토렐리라는 스낵 바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그 뒤를 따르면 죄책감과 반발을 동시에 느꼈다. 안 될 것 뭐 있어? 밸러리가 가이와 노닥거린다면 나도 기브하고 노닥거리지 못할 것 있어? 그와 밸러리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낼 수도 있잖아.
그녀가 토렐리에 들어가자 기브가 돌아보며 눈에 익은 미소를 보냈다. "안녕, 소피! 묘한 일이군. 난 방금 토렐리 부인에게 당신도 반은 이탈리아 사람이고 파스타 요리를 잘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소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믿지 마세요. 신통치 않아요."
"신통치 않긴!" 기브가 말했다. "당신이 결혼한 것이 이감이지 뭐야, 로베로토! 소피가 당신한테는 딱 맞는 여자인데. 요리도 능하고 회계도 능하니까."
"로베르토 마누라보다야 잘하겠지!" 톨렐리 부인이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자기 며느리를 못마땅해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며느리인 산드라는 아직까지 그녀의 손자를 낳아 주지 않았는데, 그것이 토렐리 부인에게는 며느리의 형편없는 요리 솜씨보다 더 큰 불만이었다.
"대체 넌 걔의 뭘 보고 결혼한 거냐?" 토렐리 부인의 말에 로베르토는 얼굴을 붉히고 이탈리아 말로 쏘아댔다.
소피는 그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이탈리아인이라 그녀의 집에서는 영어와 이탈리아 얼릴 같이 썼고 헝가리 말을 비롯해 몇 가지 말을 더 썼다. 그녀의 부모님은 영국에 사는 이방인이라는 공통적 유대감이 인연이 되어 결혼했다.
어머니는 페토피 가문의 막내딸이었는데, 오빠인 데오 외삼촌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헝가리를 떠날 때 결혼한 언니와 함께 헝가리에 남았다. 그후 그녀가 대학 1년 되던 해에 헝가리의 러시아에 대한 봉기가 있었다.
1956년, 러시의 탱크는 헝가리는 봉기를 무자비하게 깔아뭉갰고, 수많은 헝가리 인들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망명했다. 소피의 어머니 미라 페토피도 손에 돈 한푼 없이 비엔나로 넘어왔다. 하지만 데오 외삼촌이 그녀를 영국 유학생으로 끌어왔다. 그후 그녀는 통역사로 일하다가 소피의 아버지인 브루노 왓슨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토렐리 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며느리를 좋아해야 한다구? 차라리 강아지를 좋아하겠다!"
"어머니!" 로베르토가 으르렁거렸다.
소피는 기브와 멋쩍은 표정을 주고받았다. 토렐리 집안사람들은 손님이 있는데도 늘 입씨름이었고, 손님들은 그것을 재미있어 했다.
"참 뭘 달라고 했죠, 기브?" 로베르토가 물었다.
"커피 한잔하고 대니시 빵 한 개를 싸달라고 했지."
"난 그애를 척 보는 순간 영 아니라고 알았다구!" 토렐리 부인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네가 저지른 일이니 네가 알아서 살아." 부인은 로베르토를 밀어내고 기브에게 웃었다. "당신이 대니시 빵을 찾을 걸 알고 오늘 제일 잘된 것으로 골라 놓았지. 데워 드릴까?"
"내가 딴 여자와 약혼한 몸만 아니라면 아줌마하고 결혼하는 건데." 기브의 농담에 토렐리 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악동! 난 당신 할머니뻘이야."
"저런, 우리 할머니는 수염이 나셨다구요."
"할머니한테 험한 소리하는 것 보라지! 당신 할머니는 당신을 사랑해. 인정 많고 웃음 귀여운 당신 같은 손자를 누군들 사랑하지 않겠나. 운좋은 엄마들도 있지. 나 같은 엄마는 멍청이 같은 아들 녀석뿐이라니!"
"소피, 당신은 뭘 드릴까요?" 로베르토가 묻자 소피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필요없고, 점심으로 샐러드 샌드위치하고 과일 샐러드 좀 꾸려 주시겠어요? 1시경에 들릴게요?"
"물론이죠."
전자 레인지가 띵 하는 신호음이 울리자 토렐리 부인은 뜨거운 대니시 빵을 내놓고 커피와 함께 싸서 기브에게 주었다. 토렐리 모자가 기브와 소피를 향해 "치아오(안녕히)!" 라고 합창했다.
스낵 바를 나서는데 눈발이 날렸다. 기브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또 눈이야!" 그는 소피를 앞세워 서둘러 홀 안으로 들어섰다. 승강기를 타자 그는 씩 웃었다.
"우리 약혼 파티 때 당신하고 이야기할 틈도 없었지. 선물 고마워요. 맬러리하고 난 무척 좋아했어."
내가 무슨 선물을 했는지 기브가 기억이나 할까? 소피는 궁금했다. 그녀의 선물은 아름다운 유리 샐러드 그릇과 최고급 수제품이었다.
"맘에 들었다니 기뻐요." 그녀는 딱딱하게 말했다.
"파티는 즐거웠소?" 기브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찾았더니 사라졌더군."
"술이 좀 과했거든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가이가 집에 바래다 줬어요."
기브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나? 하긴 가이를 탓할 것도 없지. 당신은 사랑스러우니까."
소피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자기가 사랑스러웠는지 어쨌는지 기브가 기억할 리 없다. 그는 밸러리한테만 눈길을 박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억지로 미소 짓는 척했다. "고마워요."
승강기가 서자 기브는 자기 층에서 내렸다. 소피가 사무실로 들어서니 가이가 그녀의 사무실에 있었다. 그녀의 책상 옆에 서서 우편물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는 날카롭고 차디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늦었군!"
그녀는 뺨이 달았다. "미안해요." 코트를 벗어 걸며 말을 이었다. "발이 묶여서요."
"날씨 때문에?" 가이가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또 눈이군. 올 겨울은 괴로울 거야.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좋기는 하지만. 난 시골에서 우리 식구와 보낼 것 같은데 당신도?"
"가족들 등쌀에 녹초가 되지 않으려면 그래야죠." 그녀는 커피 머신을 작동시키며 긴장한 탓에 수다를 떨었다. "우리 가족들은 크리스마스 때면 한사코 다 모이지 못해 난리예요. 외가고 친가고 한데 모여 옛날 이야기판을 벌이는 거예요. 헝가리 이야기, 이탈리아 이야기....."
"당신이 세 사는 집 외삼촌이 헝가리 인이었지? 그분은 영국에 사신지 얼마나 되었소?" 가이가 그녀의 책상 모서리에 앉았다. 그 바람에 그녀는 전에 없이 그가 의식되었다. 며칠 전만 해도 그녀는 그의 값비싼 양복 뒤에 어떤 몸매가 있는지 알 리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알몸을 본 일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그날 밤 그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번뜩거리는 바람에 그녀는 괴로웠다. 혼란을 감추려고 그녀답지 않게 자꾸 수다를 떨었다. 평소 가족이야기는 전혀 안 했는데.
가이는 주의 깊게 그녀의 말을 들었다.
"데오 외삼촌은 런던에 40년 살면서도 아직도 망명자 같은 기분이세요. 우리 어머니도 그렇고."
"어머니도 헝가리 분이오?"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1956년부터 런던에 살았어요."
"아, 헝가리 혁명 때? 얼마 전에 책에서 읽었지. 읽고 싶으며 빌려주겠소."
"우리 집에도 있을 거예요. 외삼촌은 헝가리에 관한 책은 빠뜨리지 않고 사놓으니까!"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가이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몸을 굽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환은 그녀는 귓속에서 피가 뛰노는 것 같았다.
마침 전화가 울리는 바람에 그녀는 안도하며 받았다. 가이는 조소를 띠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맥 캐머런 변호사 사무실이에요. 사무실에서 전화 받으실래요?" 그녀는 가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가이는 고개를 가로 잣고 수화기를 받았다. "식기 전에 커피나 갖다 줘요."
커피를 따르는 그녀의 등 뒤로 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가이 포크너입니다. 안녕하세요, 아티?" 그러고는 얼마동안 잠자코 듣기만 한다. "아, 그 이야길 들으니 반갑군요. 결과가 나오는 대로 알려 주십시오. 전화 감사합니다.."
가이는 전화를 끊고 흡족한 얼굴로 싱긋 웃었다. "맥 캐머런이 그의 생식능력 테스트를 새로 하겠다는 거요. 유전자 테스트도 당연히 들어가겠지. 그렇게 되면 이번 사건도 금방 풀릴 거요."
소피의 얼굴도 밝아졌다. "멋져요! 우리 신문뿐 아니라 아기와 몰리 그린을 위해서도 잘된 일이에요. 테스트로 아기와 엄마가 얼마나 기쁠지 상상해 봐요!"
가이는 딱딱하게 그녀를 살폈다.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맥 캐머런이 <센티널>에 대한 고소를 취하해도 아기의 아버지란 것은 여전히 인정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몰리에게 막대한 돈을 줘야 하니까."
너무 냉소적이군요!"
"현실적일 뿐이지. 자, 이젠 편지를 쳐야겠소." 가이가 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가자 그녀도 따라 들어갔다.
편지 구술을 막 마치자 가이는 신문사의 경영이사 신 예이츠와 편집장인 파비엔, 그밖에 고참 간부들을 만나러 가야 했다. 그들은 닉 캐스피언이 신문을 맡은 뒤의 정책 변화에 대한 토론을 가질 예정이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기사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잇단 고소 사태 등등.
"닉은 지난밤에 직접 처리할 문제가 있어서 룩셈부르크로 떠났습니다." 신 예이츠가 이사실에서 서두를 떼었다 "참석하지 못한 것 사과한다더군요. 그리고 잭 호튼의 부인이 전화했는데 그 역시 천식으로 집에서 쉬어야 한다는 군요."
"이런 날에는 집에서 쉬는 것이 최고죠." 가이의 말에 모두들 창 너머를 나라보았다.
"눈이 더 올 거라더군요." 누군가의 말에 모두들 신음소리를 냈다.
"난 크리스마스에 플로리다로 가니 천행이지!" 신이 말하며 시계를 보았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가이가 모임을 끝낸 후 사무실에 들어오자 소피는 책상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돌아보고 얼굴을 붉혔다. "저런, 미안해요.... 무슨 필요한 거라도?"
"아니, 나 때문에 식사를 방해받지 말아요."
"거의 다 먹었어요. 커피 갖다 드릴까요?"
"내가 갖다 먹지." 가이는 커피포트로 가서 블랙커피를 한잔 따르고는 그녀의 책상 모서리에 앉았다. 소피는 점심 먹은 것을 싸서 휴지통에 버렸다.
"당신이 서명해야 할 편지들이 있어요."
"서두르지 말아요. 아직 점심시간인걸. 자, 앉아요." 그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어머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헝가리를 떠날 때 몇 살이셨지?"
소피는 불편하게 자리에 앉았다. 가이와는 여러 달 같이 일했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그녀는 그편이 편했다. 가이가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것은 달갑지 않다.
"17 살이었죠."
"어떻게 망명했지?"
"걸어서요."
"국가 기밀인가?" 가이가 싱긋 웃었다.
"왜 알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군요....."
가이가 검은 눈썹을 치켰다. 소피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방중에 사람들 눈을 피해 산을 뚫고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어요."
"혼자였소?"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다른 식구들은 떠나길 바라지 않았으니까요. 영국에는 데오 외삼촌의 주선으로 오게 되었죠. 넘어와서 외삼촌이랑 같이 사셨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 집에서 안 사시나?"
"물론이죠. 둘위치에서 아버지와 두 분이 사세요."
"당신은 외삼촌이랑 사는 것이 좋고?"
"출근하기 편하고 자유로우니까요."
"외삼촌은 BBC방송에서 일하신다고?"
"파트 타임이에요. 역사가라 지금 헝가리 역사를 쓰고 있어요. 내가 타이프 쳐드리고 외삼촌의 부족한 영어를 돕죠."
"다른 책도 펴낸 것이 있소?"
"네, 1848년 역사요."
"유럽 혁명의 해로군! 그래, 당시 헝가리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 그 책이 아직 남아 있으면 사고 싶군."
"읽고 싶으면 빌려 드릴 수 있어요." 소피가 말했다.
"고맙소. 나중에 부탁하지." 가이가 커피 잔을 놓았다.
"그런데 당신 어머니와 외삼촌이 아직도 망명자의 심정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내가 그랬나요? 사실이에요. 두 분은 영국에 결코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아직도 헝가리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어요."
"하긴 망명했을 때 거의 어른이었잖소. 그러니까 당연하지. 당신은 헝가리에 가본 적 있소?"
소피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헝가리 이야기를 하도 들으니까 가본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칠면조하고 크리스마스 푸딩을 먹지 않고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비법인 매운 소스를 친 거위 요리를 먹어요.... 아마 싫으실 거예요."
"맛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놀랐다. 가이의 식성은 전형적인 영국풍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푸딩에 뭘 넣소?"
"자두 경단에다 계피를 넣은 크림을 얹죠."
"더 맛있겠군. 또 말해 봐요."
소피는 웃음을 터뜨렸다. "데오 외삼촌은 포도주를 고르죠. 외삼촌이 런던에 있는 헝가리산 술상점을 찾았거든요. 우리는 거위 요리에다 황소 피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포도주를 곁들여요. 푸딩에는 후식용의 단 포도주를 곁들이고. 아버지는 싫어하시지만."
"당신 아버지는 헝가리 분이 아니잖소. 왓슨이라는 성을 보면."
"그럼요! 하지만 이탈리아 혈통이라 역시 영국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세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끌린 것도 바로 그 점이에요, 이방인 같은 심정."
"아버지의 어머니가 이탈리아인이시군."
"그래요, 이탈리아 호수 지방에서 건너와 1910년경 이곳 이탈리아 외교관 집에서 요리사로 일하셨대요. 고향에 약혼자가 있었는데 당신 관습대로 지참금을 지불하고 결혼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았대요. 그러다가 1912년에 하이드 파크(런던이 유명한 공원)에서 할아버지를 만났고, 3주 후에 할아버지와 줄행랑을 쳤대요.."
"낭만적인 이야기군!" 가이는 재미있다는 얼굴이다.
"모두 사실이에요." 소피가 쏘았다. 그녀가 가족 내력을 이야기하면 대개들 믿지 않는 눈치라 그녀는 이야기하기가 싫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 하필 가이 포크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담!
가이는 그녀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나도 믿소."
소피는 딱딱하게 계속 말했다. "할머니의 주인집 사람들은 할머니가 고향에 애인이 있는 것을 아니까 할아버지와 결혼한다면 허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더구나 할아버지는 연주가라 가난했거든요. 일요일에 교회에서 오르간을 치고 결혼식이나 댄스파티에서 연주를 했죠. 먹고 할만은 했지만 부자가 될 희망은 없는 분이셨죠. 할머니 가족들도 결코 찬성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결국 같이 스코틀랜드로 도망쳐서 결혼했어요."
가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화려한 가족이로군! 그후에느 어떻게 되었소?"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죠."
"물론 그랬겠지." 가이의 미소가 비꼬는 듯했다.
소피가 이마를 찌푸렸다. "두 분 다 행복하게 사시다가 1주일 앞뒤로 차례로 돌아가셨다구요!"
"이탈리아에 있는 할머니 가족은? 할머니를 용서했나?"
"할머니 장남인 아버지가 태어날 때까지 용서하지 않았죠. 할머니는 증조부의 이름을 따서 아버지에게 브루노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어요. 하지만 증조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동안에는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못했죠. 슬픈 일이에요."
"하지만 도망쳐 살면서도 행복하셨을 것 같은데. 고향에 있는 약혼자하고 억지로 결혼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잖소." 가이는 소피를 힐끗 보았다. "하긴 여자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놓고는 나중에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특히나 남자를!"
"그건 나를 빗대서 하는 말인가요?" 소피가 발끈했다.
"저런 그랬나? 하기 그날 밤 당신이 날 침대로 끌어들인 일을 기억하고 있지만....."가이가 조롱했다.
"내가 뭘 어떻게 했다구요?" 소피는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러고는 다음 날 아침, 내가 당신 유혹을 받아들였다고 따귀를 때리다니!" 차가운 목소리였다.
"유혹은요! 난 괴로운 심정에 있었고 당신은 그 틈을 타 날 유혹하려 한 거예요."
"하려 했다구?" 가이는 놀리듯이 웃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거의 성공했었소. 그때 전화만 울리지 않았던들...."
"당신을 집 밖으로 내던지는 건데!" 그녀가 쏘아붙였다.
"당신은 내가 전화도 받지 못하게 했잖소."
"이유를 알잖아요. 당신이 우리 집에 있는 걸 아무한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구요!"
가이는 그 말을 무시했다. "어쨌든 난 집을 나서야 했고 당신은 생각할 시간이 주어진 거야 그렇지?" 그는 갑자기 몸을 기울여 양손으로 그녀의 의자를 잡았다. 소피가 올려다보니 그가 바싹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차가운 푸른 눈이 그녀를 살피고 있다.
"기브 콜링우드는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는 남자요. 잊어버려요, 소피!"
"당신이 밸러리 나이트를 잊는 식으로요?" 그녀는 코웃음 쳤다.
가이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무슨 뜻이오?"
"당신이 오늘 아침에 그녀와 같이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녀를 둘러안고... 그런 식으로는 그녀를 잊을 수 없을 텐데요!"
가이의 눈빛이 조롱을 띠었다. "질투 같군."
그녀는 얼굴이 달아 눈을 피했다. 한순간 놀랐지만 정신을 수습했다. 가이가 정곡을 찔렀다는 생각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질투할 리가 없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당신한테 질투를?" 그녀는 차갑게 웃었다. "자만하지 마시죠!"
"그렇다면 왜 그리 화를 내는 거요?"
그래,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지? 오늘 아침 그가 밸러리와 같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정말 그를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죽어도 그것은 인정할 수 없다.
"난 자기 자신의 처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한테서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그런 것뿐이에요!"
가이가 더 바싹 얼굴을 들이댔다. "정말 그것뿐이오? 자신해?"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가이가 눈치 채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약점을 보면 잽싸게 달려드니까. 지금처럼 영리한 변호사가 된 것도 당연하다. 법정에 서면 치명적인 무기가 될 텐데 왜 법정 변호사가 되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갑자기 지난번 나이트클럽에서 만남 남자가 생각났다. 그 역시 치명적인 무기를 가진 변호사일 것이 분명하다.
"그럼요, 자신해요." 그녀는 말을 돌렸다. "그런데 혹시 안드레아스 커크라는 변호사 이름 들어 본 적 있어요?"
가이는 푸른 눈을 가늘게 뜨고 허리를 폈다. "그 사람의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소?"
"지난번에 만났는데 호기심이 생겨서요."
"그랬소?" 가이가 딱딱하게 말했다. "하지만 안드레아스 커크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지 않는 것이 현명하오. 그는 형사법 전문인데, 그의 고객들 중에는 어두운 밤에 마주치기 싫은 자들이 꽤 있소."
"톰이 그러더군요."
가이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그럼 당신한테 안드레아스르 소개한 것이 톰이로군. 범죄 담당 기자들은 그게 문제라니까. 수상쩍은 자들하고 어울리거든. 내가 톰은 당신 타입이 아니라고 했잖소."
"당신이 내 타입이 어떤지 어떻게 알아요?" 그녀가 내쏘자 가이는 조소를 보냈다.
"모른다고 너무 단정하지 말아요. 난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중이니까."
소피는 몸이 굳었다. 가족 이야기를 물은 것도 그 때문일까? 아니면, 그날 밤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 그날 밤,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내보였어!
가이가 차갑게 말했다. "난 종종 당신이 회사에서 쓰고 있는 차분한 가면 뒤에 어떤 것이 있을지 궁금했지. 당신은 늘 차분하고 초연해 보였으니까. 의도적이었지? 진짜 소피라는 여자를 감추려고 무척 애썼을 거요."
그녀는 웃으려고 했으나 소리가 조금 떨렸다. "진짜 소피라구요? 어떤 여자인데요?"
"나도 아직은 모르겠소. 하지만 그날 밤 난 그 가면을 벗기고 그 뒤에서 매우 정열적인 여자를 찾아냈소."
"오, 그만해요!"
가이는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의자에 밀어붙이고 그녀를 살폈다. "왜 그러지, 소피? 뭐가 두렵소? 정신분석가가 아니더라도 한사코 관습적인 것을 따르려는 당신의 기질은 이방인 심정으로 살아온 가족들 탓임을 능히 분석해 낼 수 있소."
"난 우리 가족을 사랑해요!" 그녀는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가이는 싱긋 웃었다. "물론이지. 하지만 반면에 당신은 가족에 반발하며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굳히려고 애써 온거요."
그녀는 어깨를 들썩했다. "그거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물론 그렇지. 그게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이니까. 당신이 기브 콜링우드 같은 남자한테 끌린 것도 그 때문이야. 그는 인기 있는 남자니까 어디를 가든 적응을 잘하거든. 그와 같이 있을 때는 당신 역시 소속감을 느끼지 않았소?"
"정신분석은 그만해 두시죠!" 그녀는 차갑게 말하고 일어나 그를 밀었다.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발이 기웃거리며 앞으로 넘어졌다. 가이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의 고개가 다가오고 그녀의 몸 속으로 불안이 달음질쳤다.
채 몸을 피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의 입술이 닿자 전율이 밀려왔다. 묘한 충격이었다.
사무실이 뱅뱅 돌기 시작하고 머리가 아찔해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떨며 그에게 매달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고 그의 입술만이 의식에 있었다.
시간이 정지한 듯싶더니 다시 흘러가지 시작했다. 가이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싱긋 웃는 그의 미소에서 승리감을 일자 그녀는 짚더미에 불을 붙듯 분노가 타올랐다.
얼른 몸을 떼고 격하게 말을 더듬었다. "약.... 약속했잖아요....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그날 일은 실수였다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단둘이 있을 때마다 날 껴안으려 들면 앞으로 다신 당신 밑에서 일할 수 없어요!"
"내가 안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안겨온 거잖소."
"넘어졌을 뿐이에요! 그렇다고 당신 마음대로 키스하란 뜻은 아니잖아요!"
그는 눈을 크게 떴다. " 난 당신이 그걸 바라는 줄 알았지!"
"거짓말!"
가이가 조소를 날렸다. "당신도 마주 키스했잖소."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좋아." 가이가 부드럽게 달랬다. "내가 당신에게 키스하는 것이 싫다면 안 하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몸을 던져 날 헛갈리게 하지 말아요."
소피는 너무나도 화가 나서 커피 잔을 들어 던졌다. 커피 잔은 가이를 지나 그의 등 뒤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자신의 커친 행동에 스스로도 놀라 양손을 옆구리에서 틀어쥐었다.
"저런, 저런!" 가이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매일 흥미 있어지는군."
그의 조롱을 삭이고 있는데 전화가 울리는 바람에 둘 다 놀랐다. 가이가 받았다. "법제실입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피를 바라보았는데, 그 얼굴 표정이 수수께끼 같았다.
소피는 아직도 충격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전화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가이에게 온 것일 테니까. 자신이 그처럼 자제심을 잃은 것에 충격을 느꼈다. 그렇게 화를 냈던 기억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했던 기억도 없다.
가이가 수화기를 내밀었다. "당신한테 온 거요." 딱딱하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다. "안드레아스 커크요."
6장
소피는 망설이다 가이의 눈을 피하며 등을 돌렸다.
"여보세요? 소피 왓슨입니다."
곧 귀에 익은 깊은 울림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소피. 요전날 블루 펭귄에서 만난 안드레아스 커크요. 기억해요?"
"네. 물론이죠."
그녀는 등 뒤에서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는 가이를 의식하며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드레아스는 웃는 기색이었다. 그녀의 쉰 목소리를 듣고 뭔가 엉뚱한 상상을 한 모양이지만 변명할 수도 없다.
"근무시간에 전화해도 괜찮은지? 그렇지만 당신 집 전화번호가 없어서요...."
"저, 전 지금 좀 바빠서...."
"그럼 빨리 끝낼게요. 소피,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저녁식사를 같이 할 수 있을까요?"
"저런... ." 소피는 놀라 숨을 토했다. "글쎄요, 난...."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에 대한 호기심과 남자에 관한 한, 특히 그와 같은 남자들에 대한 평소의 조심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가이와 톰슨의 경고가 아니었다 해도 그녀 역시 그를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경고 벨이 울렸을 것이다.
"우린 둘 다 공통점이 많을 것 같소." 안드레아스가 달랬지만 그녀는 이마를 찌푸렸다. 안드레아스는 본능적으로 위험한 그늘을 느끼게 하는 남자다. 그와 얽혀들고 싶지 않다.
"저, 커크씨."
"안드레아스라고 불러 주겠소?"
그녀는 얼굴이 불어졌다. "그럼 안드레아스, 청해 주신 것은 고맙지만....."
그때 가이가 책상 앞으로 돌아와 그녀와 마주섰다. 그녀가 놀라 올려다보니 그는 이마를 찌푸리고 고개를 젓고 있었다.
"거절해요!"
순간 그녀는 화가 나 몸이 굳었다. 자기가 뭐길래? 어째서 자기가 나한테 아래라 저래라 할 수 있다는 거야? 아마 그날 밤에 있었던 일로 내게 무슨 소유권이라도 생긴 줄 아나 보지? 오산이야!
안드레아스가 말했다. "오늘밤은 어떻소?"
신간이 없다고 말할 뻔했지만 가이의 말에 따르고 싶진 않았다. 그의 명령 따윌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오늘밤에요?" 금요일이면 그녀는 야간학교에 가지만 크리스마스 기간 동한에는 수업이 없으니 괜찮다. 그녀는 도전적으로 가이의 성난 눈을 쏘아보았다. "좋아요, 오늘밤 식사를 같이 하겠어요, 안드레아스."
가이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말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멋지군요, 소피. 그럼 내가 데리러 갈까요? 주소가 어디죠?"
소피는 멍하니 닫힌 사무실 문을 바라보며 주소를 말했다.
"7시 30분까지 가겠어요. 그럼...."
전화를 끊었지만 손이 아직도 떨렸다. 대체 뭐에 씌웠길래 그 남자를 만나기로 한 걸까?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 눈꼽만큼도 없는데. 하지만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가이한테 대항하려고 한 일이다. 하지만 이건 미친 짓이다. 요즘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가이와의 관계가 사무적이긴 해도 차분하고 우호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존경하고 높이 평가했다. 신문방송학에서 법률로 길을 바꿔 성공한 그의 단호한 의지가 존경스러웠다. 자신이 다른 여직원들한테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런 상사 밑에서 일하다니 흥미진진해! 그런 생각이 들거든..., 그 사라이 할 수 있다면 내가 못 할 곳이 뭐람 하고."
"그럼 법률가가 되려고?" 로즈 아메리의 농담에 여직원들이 쿡쿡 웃었다.
소피는 화가 났다. 로즈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아직 뭘 하고 싶은지는 정하지 못했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의지만 확고하다면 못 할 일이 없다는 것 말이야. 가이가 증명해 주었어."
로즈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따스하게 웃었다. "절대 동감이야!"
소피는 기분이 풀렸다. "이번 가을에 야간학교에 갈까해.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엔가는 비서보다 훨씬 흥미 있는 직업으로 옮길 날이 있겠지."
"넌 여러 나라 말을 하니까 시작부터 끝내 주는 거야. 여러 가지 직업이 가능하지."
소피는 로즈를 수줍게 바라보았다. "내가 기자 일로 전업할 수 있을까? 외신 가자로?"
로즈가 웃음을 터뜨렸다. "글세, 일단은 네 배경이 딱 좋잖니. 네 말로는 불가능은 없어."
소피는 그만하면 격려는 충분했기에 야간학교 신문방송학과를 등록했다. 언젠가 가이에게 말했더니 가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별로 기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럼 언젠가는 당신이 내 사무실을 떠난다는 거요?"
"그러길 바라오. <센티널>이건 어디건 편집부 일을 얻을 수 있다면요."
가이는 이마를 찌푸렸다. "난 당신이 가자가 되고 싶은 줄은 몰랐군. 대체 어떤 계기로 그런 생각을 했소?"
"당신 때문이죠. 당신은 누구나 못 할 일이 없다는 것을 내게 보여 주었잖아요."
그녀의 말에 그는 얼굴을 붉혔다. "으쓱해지는군, 소피 하지만 낮에는 일하고 야간학교를 다녀서는 기자 자격을 딸 때까지 몇 년은 족히 걸리리란 걸 알 테지?"
그녀는 턱을 치켰다. "알아요. 나도 당신이 예전에 분명히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생각해 보았어요. 당신도 일생일대의 도박을 했겠죠. 법률공부에는 여러 해가 걸렸을 테니까. 나도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좋아, 행운을 빌어요."
그때 그녀는 둘 사이의 따스한 이해를 느꼈고, 그날 이후 둘은 더욱 분위기가 매끄러워졌다. 기브의 약혼 파티 날까지는.
그날 밤 이후 그녀의 마음속에 깃든 긴장은 나날이 더해가 악화일로에 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안드레아스 커크 같은 남자와 저녁을 같이 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지나 역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자책감으로 얼룩졌다. 요 며칠 거의 감도 이루지 못했다. 머릿속에 온통 닉에 대한 생각이 꽉 들어차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침대 속에 있던 모습이며 그가 안겨준 믿어지지 않던 쾌락의 기억이 치열했다. 하지만 수치심과 죄책감이 동시에 들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닉 캐스피언을 잘 아는 그녀이니만큼 그가 하룻밤 사랑으로 만족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접근할 테고 그런 그를 더 이상 밀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사랑을 나눈 후 그녀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고 그녀와 같이 침대에 누워 그녀를 꼭 끌어안고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당신은 너무나 사랑스러워. 당신의 육체는 내 머리를 아찔하게 해. 다시 한번 사랑을 하면 그 이상 좋을 것이 없지만 이미 녹초란 말이오." 그는 자조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내 기력을 다 쓰게 했어." 그는 그녀의 냉담한 침묵을 모르는지 하품을 했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지...." 다시 하품을 하더니 침묵이었다. 잠시 후에야 그녀는 그가 잠들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나가려고 몸을 틀었다. 하지만 잠결에도 그는 몸을 틀어 그녀에게 무겁게 팔을 올렸다. 그녀는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그는 더욱 힘을 준 채 그녀의 등에 자기 등을 밀어붙였다. 그녀는 할 수 없이 포기했다.
그날 그녀는 밤새 뜬눈으로 지새며 그의 숨소리를 들어야 했다. 바싹 맞댄 그의 따스한 알몸을 느꼈다.
마침내 닉이 잠에서 깨어 하품을 하는 것을 그녀는 생생히 알았다. 그는 그녀가 있는 것을 알고, 지난밤 일을 기억하듯 온몸이 굳어지며 그녀의 몸에 두른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잠든 척했다.
다음 순간은 고문이었다. 닉은 그녀의 벗은 어깨부터 등까지 가벼운 키스를 연달아 하고 손으로는 허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온몸에 불꽃이 튀었다. 당장이라도 돌아누워 그의 품에 안겨 키스하고 그에 못지않은 욕망으로 그를 어루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충동을 억지로 눌렀다. 생전 첨 맛보는 고문을 겪으면서도 딱딱하게 누워있기만 했다.
마침내 닉도 한숨을 내쉬고는 가만히 몸을 눕혔다. 그녀를 흥분시키기를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나가더니 말없이 방을 나갔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하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그녀는 여전히 죽은 듯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는 문가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며 그녀의 숨소리를 들었다.
"난 가겠소, 지나."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잠든 척은 그만해도 돼요. 소용없으니까. 지난밤에 난 너무 많은 걸 알았지. 앞으로는 당신도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날 원치 않는다는 말은 못 할 거요."
지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소금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울지 않으려 기를 썼다.
닉은 가만히 웃었다. "회사에서 보지." 그러고는 가버렸다.
그녀는 그가 옷을 주워들고 현관을 나서며 등 뒤로 문을 닫는 소리를 들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온몸이 떨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욕실로 가보니 그녀의 큰 가운이 없어진 것만 빼놓고는 말끔했다. 닉은 가운을 입고 옷을 든 채 자기 아파트로 건너간 모양이다. 하지만 이 위에서는 그를 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 청소부들도 아침 9시가 되어서야 나타나는데 그때는 이미 지나와 닉이 출근한 뒤였다.
지나는 오래 목욕을 하고는 크림색 블라우스에 크림색 스웨터를 걸치고 초콜릿색 스커트를 입었다. 차갑고 유능한 모습을 보이려 한 것인데 꼭 끼는 스커트 때문에 오히려 몸매가 드러났다. 하지만 갈아입을 기력이 없어서 그대로 입고 창백한 얼굴로 회사에 나갔다.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긴장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다.
헤이즐이 돌아보더니 싱긋 웃었다. "일찍도 오네! 닉은 벌써 갔어."
지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다니? 어디로?"
"웨스트민스터로. 사무실에는 서류를 가지러 잠깐 들렀다가 트렌달 경하고 아침식사를 하러 서둘러 나갔지. 정부의 언론 통제 방침을 의논하러."
"마침 제때에 하는군." 지나는 멍하니 말하고 책상에 앉았다. 닉이 그처럼 빨리 집을 나선 이유가 그거였구나. 미리 말해 줄 수도 있었는데.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긴장과 근심에 싸여 출근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전략에는 능수능란한 남자니까.
헤이즐이 쿡쿡 웃었다. "우리의 캐스피언 씨한테는 그 발언일랑 안 들어주는 것이 신상에 좋을걸!"
지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라구?"
"언론 통제를 해야 한다면서!" 헤이즐이 상기시켰다. "나도 동감이긴 해. 종종 언론이 지나칠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닉은 사주로서 당신 말에 찬성 안 할걸?"
"닉은 사주가 아니야!" 지나가 쏘았다. "대부분의 이사진을 자기편으로 두고 있긴 하지만 회사의 장악권은 없어."
그녀의 과잉반응에 헤이즐이 묘한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닉이 사주라는 말을 듣자 너무나 화가 났다.
"좋아, 내가 말을 실수했어. 하지만 당신이 언론 통제를 찬성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닉은 역시 언짢을걸." 헤이즐의 말에 지나는 진정한 미소를 보냈다.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 언론이 자체 정비를 하고 사람들의 사생활 침해를 그만두지 않으면, 피해 당사자들은 개의치 않고 싸구려 가십이나 파헤치는 짓을 그만두지 않으면 조만간 사람들일 법에 언론 통제를 요구하는 날이 올 거야."
그때 전화가 울려 헤이즐이 받았다. "네, 닉 캐스피언 사무실입니다. 아뇨, 캐스피언 씨는 안 계십니다. 네, 돌아오시는 대로 전하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인쇄계의 더기 브라운이 오늘 아침 이사회의 감원계획에 항의하는 파업 선언서를 냈어. 더기가 믿음직한 것 알지. 그런데 오늘은 정말 근심스러운 목소리더라. 옛날 폴리트 가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
지나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 사람들을 탓할 것도 없지. 크리스마스 시즌에 직업 찾기가 쉽겠어?"
"그래." 헤이즐은 눈빛이 침통했다.
"난 그 사람한테 잉여 인력이 자연적으로 해소되길 기다리자고 설득했는데 듣지도 않아. 어느 부분에서건 경비절감을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거든. 그런데 전문가들의 조언이 우리 회사 인쇄 파트 인력이 과잉이라고 하니까 닉이 당장 행동에 들어간 거지. 말썽이 있을 줄 알았어."
닉은 두 여자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돌아왔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지나를 향해 빛났다. 지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눈길을 피했다. 다행이 헤이즐은 닉이 나가 있는 동안 들어온 메시지 내용을 읽기에 바빴다.
"그리고 더기 브라운이 전화했는데.... 인쇄계에 문제가 있다구요."
닉의 얼굴이 날카로워졌다. "무슨 일이라고 합디까?"
"인쇄계 직원들이 이번에 내린 초과인원 감축령이 마음에 들지 않나 봐요." 지나가 비꼬며 말했다.
닉이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노려본 뒤 헤이즐에게 말했다. "더기를 전화로 대줘요."
그가 사무실로 들어가고 헤이즐이 전화를 누르자 잠시 후 닉의 크고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닉의 거친 욕설에 지나는 온몸이 곤두섰다. 헤이즐도 말없이 눈썹을 치켰다. 잠시 후 닉이 나오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가 찾으면 인쇄 작업장에 갔다고 해요." 그러고는 바람을 날리며 나갔다.
지나는 때마침 닉의 관심을 돌려 줄 일이 생긴 것에 안심했지만 바버리 워프의 어지러운 분위기에 근심이 되었다.
이곳으로 회사를 옮겼을 때 그녀는 인쇄계의 인원 문제는 구식 인쇄기계를 쓰던 옛날에나 있던 문제라고 생각했다. 지금 닉은 첨단 인쇄기계를 다루는 기계공들에게 높은 임금을 지불하고 있다. 인쇄계 인력이 줄었으니 고임금이 가능했다. 작업 여건도 좋아져서 고되지도 않았고 옛날처럼 기름과 인쇄 잉크로 몸을 더럽히는 일도 없다.
하지만 영국과 유럽 전반의 경기 위축으로 닉 역시 각 부서의 인원을 축소해야 했다. 인쇄계 역시 인원과잉이라는 것이 컴퓨터 조사로 드러났다. 이사진들은 인쇄계 직원들의 반응을 두려워해 더 이상의 인원 삭감에 우려를 나타냈지만, 닉은 최대한 경비가 절감되는 방향으로 <센티널>을 운영하자는 결심이 확고했다.
그는 반대에 부딪힐수록 더욱 의지가 강해진다는 것을 지나 역시 몸소 배운 터이다. 결국 그녀와 이사들은 닉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오늘 아침 과잉인력에 대한 해고 통지서가 벽보에 붙여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지나도 차후 사태를 근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밤의 일로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들을 까맣게 잊고 말았던 것이다.
닉은 1시간 후에 돌아왔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최대한 빠른 시간에 이사회를 소집해요." 그는 지나에게 딱딱하게 말했다. 개인적인 감정은 한구석도 없다. 지나는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마치 따귀를 한재 맞은 심정이다.
닉은 연이어 헤이즐에게 눈을 돌렸다. "헤이즐, 오늘 내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지금 곧 각 부서장들을 소집해요."
그들이 멍하니 바라보자 닉은 울화통을 터뜨렸다. "빨리해요! 사태가 급하단 말이오. 당신 두 사람이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소."
문이 탕 닫혔다. 헤이즐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 운수는 뻔하군!"
지나는 말없이 수화기를 잡았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나았다. 파업을 예고하는 사태가 왔으니 닉은 당분간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도 숨쉬기가 훨씬 나을 것이다.
하지만 헤이즐의 예언대로 그날 하루는 온통 정신이 없었다. 이사실에서 열린 회의는 한없이 계속되었고. 모두들 침통한 얼굴로 들락거렸다.
이사들은 길고 윤나는 탁자 주위에 둘러앉아, 닉과 입씨름을 하고 조업 연구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으며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정하려 애썼다.
이어서 닉과 지나, 전무이사인 신 예이츠가 인쇄계 직원 대표들을 만났다. 대표들은 화가 나 있었고 감축될 인원명부를 보자구 요구하더니, 바버리 워프에서 벌써 1년이나 일했는데 이제 와서 더 이상 인력이 필요 없다는 이유가 뭐냐고 다그쳤다. 닉이 해고할 인원 이름 하나하나를 들며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대표들은 조업 전문가들의 설명은 귓등으로 흘리고 때가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라는 것, 그리고 상의도 없이 해고 통지를 한 일만 들먹였다.
"위원회를 소집해서 인력 관리와 비용 절감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검토해야겠어요. 그러는 동안 결정은 미루고요." 지나가 제안했다.
닉은 그녀를 쏘아보았다. "의견이라면 전문가들 의견을 이미 충분히 들었잖소. 위원회는 내 경험상 시간낭비요."
대표들은 서로 눈길을 교환하더니 지나를 바라보았다. "타이렐 부인의 생각일 좋을 것 같은데요." 대표 중 지휘자격인 사람이 말했다. "위원회에 날갈 대표가 필요하면 우리가 의논해 정하지요."
회의가 끝나고, 대표들은 모두 나간 후 닉과 지나만이 이사실에 남았다. 닉은 성난 잿빛 눈을 돌렸다.
"대체 뭐에 씌워 그런 미친 생각을 했소? 저들이 좋아라 달려드는 것도 당연하지. 위원회를 여는 동안에는 해고를 최대한 연기할 수 있으니까. 저들 식으로 하다간 1년도 끌 수 있다. 당신을 가만 두지 않겠어. 대체 무슨 심산이었지?"
"종은 생각 같아서요." 지나가 중얼거렸다.
닉은 가까이 다가와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쥐고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보복으로 한 짓이지?"
지난는 숨을 흑 들이쉬며 고개를 저었다. 니기의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래, 그거야. 순전히 지난밤의 복수로 한 거야. 마침내 무너진 자신에 대해 나를 미워해야 할지 자신을 미워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난 파업을 막으려 했을 뿐이에요." 지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되었잖아요? 해고는 지연되었을지 몰라도 노사 관계는 치유되었죠. 그리고 파업에 들어가면 신문사가 수백만 파운드의 타격을 입을 것을 구했구요."
"내키는 대로 거짓말하시지." 닉이 차갑게 말했다. "그래 보았자 날 속이진 못해. 오늘 아침 난 당신 침실에서 당신이 잠든 척하고 있는 것을 알았어.... 그러려니 예상했지. 아침이 되면 당신은 자신을 미워할 거라고...."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당신한테 그렇게 빤히 속을 보였다니 미안하군요!" 그녀는 닉의 어깨를 밀려고 했다.
닉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선 채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그녀를 굴복시킬 약점을 찾는 것이 분명했다. "당신은 지난밤에 날 원했어." 그가 쏘아댔다. "내가 당신을 원했던 것 만큼이나. 우리 둘 사이는 근사했지. 최고의 경험이었소."
"입 닥쳐요!" 그녀는 얼굴이 타버리는 것 같았다.
닉은 초조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수치스러울지 몰라도 난 전혀 그렇지 않소. 우리 둘 다 성인이오. 그런 일에 누구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소. 당신이 나한테, 그리고 자신한테 하는 짓을 모르겠소? 당신이 원하는 복가 그런건가? 날 미치게 하는 것? 지금 당신은 아주 훌륭하게 복수를 해내고 있으니까 말이지. 하지만 그러다가 결국 나와 <센티널>을 한꺼번에 망치고 말 거요. 그 생각 해보았소? 내 머릿속의 반이 당신으로 꽉 차 있는데 노조문제에 정신을 팔기가 어려웠소. 어느 날엔가는 난 끝장 볼 실수를 하고 말 거요. 당신말고는 아무 생각도 없으니까."
"당신은 하루종일 내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 했어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닉의 손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나도 그랬으며 하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 당신은 매일 매순간마다 내 머릿속에 있다구."
"아파요! 날 죽일 셈이에요?"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이 들게 하지 말라구!" 닉은 쏘더니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취소하지. 날 유혹 해 줘." 그가 고개를 숙여 왔다. 최면을 걸 듯이 눈일 빛난다. "날 유혹해 줘, 지나....."
지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숨도 쉴 수 없었다.
닉이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녀는 몸을 떨며 그의 양손 아래 매달렸다. 그때 누군가 이사실 문을 열었다. "아, 미안해요...." 헤이즐이 웃음 반, 당황 반으로 얼버무리고 문을 닫았다.
닉이 고개를 들었다. 눈은 감은 채였고, 숨은 거칠었다.
"뭐였지?"
"헤이즐이에요."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보았으니... 대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무슨 상관이오." 닉이 코웃음을 쳤다. "하긴 지금은 때와 장소가 적당하지 않았어."
"적당한 때와 장소 같은 건 있을 수 없어요!" 지나가 쏘아붙였다. "놔요, 닉."
닉은 조소를 띄었다. "절대 놔줄 수 없지, 지나. 언제나 돼야 그것을 깨닫겠소? 당신은 내 것이야. 난 <센티널>을 포기 못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놔줄 수 없어."
어쨌든 그가 손을 놓는 바람에 그녀는 동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다음 날 다시 이사회가 열렸다. 거기에서 해고 조정위원회를 열자는 안건이 통과되었고, 지나는 직원 대표들의 요청으로 위원장을 맡았다.
"우리는 당신이 공정하고 정직하게 처리해 주시리라 믿어요, 타이렐 부인." 직원 대표들 말에 그녀는 감동했다.
그녀는 닉의 조소 어린 눈길을 의식하며 위원장직을 수락했다. 회가 끝나고 나자 닉은 그녀 옆에 서서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로 속삭였다. "권세가 더 높아지셨나, 지나? 정말로 크나큰 위협거리가 되셨군. 주의해야겠어."
그녀가 되받아치려 했지만 닉의 피곤하고 진이 빠진 얼굴이었다. 그를 바라보자니 묘한 감정이 섞였다. 그의 눈과 입가 주름이면 쑥 들어간 창백한 안색에 대해서도 걱정이 되고, 이제 닉이 한가지 문제를 미루어 놓았으니 다시 자기한테 관심을 돌릴 것도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운이 좋았다. 다음 날 닉은 룩셈부르크에 가야 할 일이 생겨 공항으로 떠났다.
지나는 눈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몸을 떨었다. 닉은 곧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두 사람의 파워 게임은 다시 시작된다. 종종 진력이 날 때면 그녀는 차라리 <센티널>을 떠나고 타이렐 부자가 그녀에게 남긴 유산을 훌훌 털어 버렸으면 했다. 그녀를 꼼짝 못 하게 묶어서 그녀가 닉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굴복하지 못하게 하는 그 모든 기억들을 털어 버리고 싶었다.
7장
안들레아스 커크가 소피를 데려간 곳은 작고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녀는 그곳 이름을 들어 본적이 없어서 택시가 어느 좁은 골목에 서자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금융 중심가인 거리는 어둡고 한산했다. 밤이라 모두들 교외 주택지구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여기 옆계단 위에 레스토랑이 있어요." 안드레아스가 바의 문을 열며 말했다.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나오기 했지만 희미했다. 소피는 이런 곳에 어떤 사람들이 모이는지 궁금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영업하는 데인가요? 문을 연 것 같지 않아요." 소피는 여차하면 도망갈 각오로 말했다.
"열려 있고말고요. 그리고 금요일 밤에 자리를 얻을 수 있어서 운이 좋았죠." 안드레아스가 싱긋 웃었다. "몇 달간 예약이 밀리기도 하는 데니까."
"와본 적 있으세요?" 소피는 아직도 계단 밑에서 망설이며 물었다.
"종종." 그가 대답하더니 스위치 하나를 올렸다. 그러자 어둡고 좁은 계단에 갑자기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소피는 위층에서 점점 크게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올라갔다. 안드레아스 말대로 안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문을 여니 다소 어두운 실내에서 촛불과 벽난로가 타고 있었다. 소피는 테이블마다 앉은 손님들이 돌아보며 말소리를 죽이는 바람에 얼어붙는 듯 제자리에 섰다.
웨이터 한 사람이 서둘러 다가오자 사람들이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커크 씨. 늘 앉으시던 자리로 했습니다. 코트를 주시겠습니까, 마담? 커크 씨도?"
두 사람은 한쪽 벽면을 거의 차지한 벽난로 옆 구석진 테이블로 갔다. 웨이터가 얼음 그릇에 담기 샴페인을 들고 코르크 마개를 따고 잔을 채웠다.
안드레아스가 소피를 향해 잔을 들었다. "우리의 보다 친숙한 만남을 위해."
소피는 싱긋 웃고 마주 건배하고는 샴페인을 마셨다. 맛이 훌륭했다.
"내가 제안하는 것이 어떨까요? 여기 요리사들은 생선 요리에 능하죠." 안드레아스가 메뉴를 살폈다.
소피는 메뉴를 덮었다. "나도 생선을 좋아해요. 당신이 고르세요. 뭐든 맛있을 것 같군요."
안드레아스가 그녀를 살폈다. "남자에게 늘 메뉴 선택을 맡기나요? 위험한 습관이군요. 마늘과 양파로 양념한 농어 요리가 어떨까요? 괜찮아요? 그럼 와인은.... ."
주문이 끝나자 안드레아스는 반쯤 감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자, 이제 당신 이야기를 해줘요, 소피."
"따분할걸요."
"그건 내가 판단하죠."
"변호사뿐 아니라 판사까지 하시는군요." 그녀가 쏘았다.
안드레아스가 나른하게 웃었다. "우선 당신 가족 이야기부터 해요. 부모님부터... ."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안드레아스에게 말려들어 많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흥미 있는 듯 그녀의 가족 이야기를 들었다. 수프가 도착했다. 풀 잎사귀가 떠 있는 뜨겁고 매운 수프였다. 맛있었다.
"이런 맛은 처음이에요." 소피가 말했다. "여기 또 와야 겠어요."
"나와 함께이길 바라오." 안드레아스의 말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또 청해 달라고 한 말은 아니에요!" 소피는 어색한 침묵이 잠깐 흐르자 입을 열었다. "당신 이야기를 해보세요."
안드레아스는 짙은 눈썹 사이로 힐끗 그녀를 보았다. "난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죠." 스스로를 조롱하는 투였다. "앞으로도 그렇게 있고 싶고."
소피가 두려워하던 말이었다. 그때 그의 수수께끼 같은 인간성을 강조라도 하듯 누군가 테이블 옆에 섰다. 찰 재단된 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체구가 큰 사내였다.
"안녕, 안드레아스, 오랜만이군."
안드레아스가 올려다보며 조금 놀라는 것을 소피는 놓치지 않았다. "안녕, 해래. 언제 돌아왔나?"
"지난주에. 자네가 우리 어머니를 위해 해준 일은 고맙네. 내가 돌아온 뒤부터 어머니는 내내 자네 칭송일세."
"뭘, 난 자네 어머니를 무척 존경하는걸." 안드레아스가 사내를 살폈다. "건강은 어때?"
"지난 일을 생각하면 불평할 건 없지." 해리는 소피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런 무례를 좀 보게. 방해해서 죄송하군요. 제가 저녁 시간 망치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언드레아스와 꼭 한마디 나누고 싶어서요. 8년 만에 보거든요.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소피는 싱긋 웃었다.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사내는 안드레아스에게 말했다. "정말 끝내 주는 아가씨군. 사랑스러운 얼굴에 성품도 좋으니. 흔치 않지."
소피는 그 사내가 체구가 크면서도 소년 같은 데가 있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안드레아스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엄하게 말했다. "나도 동감이야. 만나서 반가웠네, 해리. 몸 조심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사내는 인사말을 하고 사라졌다. 안드레아스가 쓰게 웃었다. "내 고객 중 한 사람이죠."
"그런 줄 알았어요. 하지만 괜찮아 보이는걸요."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순한 양 같죠. 그런데 술만 들어가면 문제예요. 지난번에는 경찰관을 가로등에 묶어 두었어요. 8년으로 끝난 것이 다행이지."
메인 코스가 오고 식사를 시작하자 안드레아스가 말했다. "당신 상관 이야기나 해봐요. 가이 포크너죠? 들은 적이 있소, 대단한 양반이라구. 어떤 남자요? 영리한가? 비틈없소?"
"둘 다요." 소피는 그가 신문방송학에서 법률로 전공을 바꾼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얼마나 성공하고 있는지도. "무척 유능해요. 신문 관련법이 전공이죠."
안드레아스는 흥미롭게 들었다. "성격은 어떻소?" 그가 물었다. "남자로서는 어떻소?"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밑에서 일하기에는 힘든 사람이에요. 엉터리를 못 참거든요."
"그거야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지. 야심이 많소?"
"대단하죠." 소피는 안드레아스가 관심 있는 것이 과연 자신인지 알 수 없어졌다. 가이의 이야기를 시작한 지 벌써 한참이다. 그는 소피보다 가이에게 훨씬 많은 관심을 보였다.
"고소 사건에서 당신 신문사는 어떤 법정 변호사를 쓰오?" 안드레아스의 말에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겨야..., 누가 틈이 나느냐, 그리고 가이 생각에 누가 적임자냐에 달렸죠."
"어쨌거나 그가 제일 먼저 부를 사람은?"
소피는 안드레아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그리 관심이 많죠?"
"직업적인 관심이요." 부인할 수 없는 그는 매력적인 미소를 떠올렸다. "덧붙여 말하면 아직 내가 보기에는 우리 둘 사이의 공통점은 법률에 관한 것뿐이니까."
소피가 웃자 안드레아스도 마주 웃었다.
"사실 내가 뭔가 알아내기로 맘먹을 것 같으면 기록을 살펴보면 될 것 아니오. 당신한테 굳이 캐물을 필요 없지. 당신 직장 이야기를 하는 것이 꺼림칙하다면 다른 이야기를 합시다."
"꺼림칙하긴요." 소피는 그의 말이 사실임을 깨닫고 말했다. <센티널> 사가 소송에 어떤 변호사를 쓰는가는 공식기록에 있다. 소피가 몇 명의 이름을 대자 커크가 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변호사들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웃기자 소피는 차츰 그와의 식사가 흥겨워졌다.
종종 안드레아스는 식당 안의 이 사람 저 사람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여기서는 유명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소피는 그가 인사를 보내는 사람들이 모두 해리처럼 범죄자들인지 궁금했다. 몇 명은 그렇게 보였고 그밖의 사람들은 신망 있어 보인다.
"여긴 독특한 식당이군요." 소피는 떡갈나무 벽이며 천장의 석고 장식, 창에 두른 무거운 붉은 벨벳 커튼을 둘러보았다. 벽날로에서 튀는 불꽃 소리가 자장가 같다. 소피는 졸리기 시작했다. 아니면 혹시 포도주 탓일까?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안드레아스의 어깨에서 잠들 뻔했다가 차가 덜컹하는 바람에 놀라 깼다.
"미안해요...."
"늦은 시간인데다 우리 둘 다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소." 안드레아스가 명랑하게 말했다. 택시가 그녀 집앞에 서자 안드레아스는 그녀가 내리도록 도왔다. 그녀는 그가 집에 같이 들어가겠다면 어쩌나 해서 몸이 굳었다. 하지만 안드레아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키스할 뿐이다. "오늘밤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마워요, 소피."
"즐거운 저녁이었어요."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소피는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글쎄요, 네, 있을 거예요...." 실은 안 된다고 하려 했는데 왜 그렇게 대답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소피는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다가 역시 주만 쇼핑을 하러 나온 톰 버니와 마주쳤다. 그는 군수품 재킷에 카키색 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전쟁하러 가요?" 그녀가 놀리자 톰이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장바구니를 넘겨다보았다.
"키위 좋아해요? 난 그거 먹을 때면 꼭 취를 잡아먹는 것 같더라. 털이 부숭부숭한 게 과일 껍질 같지 않아요."
"그럼 벗기면 되잖아요."
"현명하긴! 여자들은 다 그렇지. 여자들 무서운 이유가 그거예요."
"아, 당신은 여자를 무서워하는군요?"
"남자들은 다 그렇죠." 톰은 여전히 그녀의 장바구니를 보았다. "과일과 샐러드를 많이 드시는군. 그러면 설거지가 절약되죠. 난 집안일이 정말 싫다니까. 종종 우리 집에 와서 내 일 좀 해줄래요? 보답으로 내가 저녁을 사죠."
"안 돼요." 그녀는 싱글싱글 웃었다.
"그래도 저녁식사는 같이 해요." 톰이 채근했다.
소피는 그에게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그녀는 씁쓸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콤을 좋아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다. 안드레아스 커크처럼. 때문에 두 남자와의 데이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제발." 톰이 애원하자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군복을 입었지만 설거지가 싫다고 애원하는 품이 다 못 자란 철부지 소년 같아 애처로웠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톰의 얼굴이 밝아졌다. "근사해! 어디로 가고 싶어요?"
"내가 우리 둘의 요리를 할게요, 헝가리 식으로. 굴라서 요리 좋아해요?"
"먹어 본 적은 없지만 먹어 보죠."
"좋아요. 7시 30분에 우리 집으로 와요. 주소는 알죠."
톰이나 안드레아스와 사귀어 봤자 미래는 없다. 하지만 그러노라면 가이 생각을 안 하게 될 테지. 그날 오후 그녀는 굴라서 요리를 시작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칼질을 멈추었다. 가이라구? 왜 기브 대신 가이 이름이 떠오르는 거지? 내가 사랑해서 잊고 싶은 남자는 기브인데..., 가이 포크너가 아니라.
말이 헛나온 거겠지, 기브라고 하려는 거였는데.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프라이팬에서 쇠고기를 뒤적거렸다. 벌써 냄새가 근사하다. 하지만 머릿속은 딴 생각으로 가득했다. 자기 말이 거짓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머릿속이 혼란했다. 이번 주에 그녀는 기브의 생각을 거의 떠올리지 않았다. 떠올라도 이제는 마음이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팬에서 쇠고기를 꺼내 접시에 놓고 뚜껑을 닫은 다음 채소를 냄비에 넣었다. 채소가 누릇누릇해지자 쇠고기를 같이 넣고 양념을 섞었다.
요리가 익기 시작하자 그녀는 커피를 들고 앉아 멍하니 앞을 보며 달갑지 않은 진실을 직면했다.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기브와 밸러리의 약혼식 날 밤 이후로 기브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모습이 흐려졌다. 대신 가이가 중요한 존재로 떠올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다.
아니, 넌 알아. 마음속의 목소리가 외쳤다. 가이와 사랑을 하려 했을 때 자신의 마음속에 서 크나큰 감정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머리를 내저으며 벌떡 일어났다!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 내 감정이 비현실적이 헛것이 돼. 기브 때문에 그처럼 비참해한 것은 정말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야.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들 그렇게 큰 상처를 느꼈을 리 없어.
하지만 분명 가이와 침대에 들었다. 그와 자지 않은 것은 그녀의 뜻이 아니고 운명의 훼방일 뿐이었다. 그녀 자신은 그와 같이 사랑을 하고 싶었다.
좋아, 그녀는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 좋아, 그날 밤에는 그를 원했다구. 하지만 특별한 감정이 있었던 게 아니고 비참하고 외로워서 그랬을 뿐이야.
그런데 넌 그 이후로 쭉 실망을 안고 있어. 마음속의 성가신 소리가 말했다. 그날 밤 이후 넌 기브를 원했던 것보다 더 가이를 원하고 있어.
난 가이를 좋아하지도 않아!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마음속의 목소리가 외쳤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를 사랑할 수는 없잖아! 그녀가 부르짖었다. 난 기브를 무척 좋아했다구. 상냥하고 따스하고 재미있는 기브를. 가이는 상냥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어. 딱딱하기가 고무껍질 같아 무서워.
하지만 넌 나날이 그를 원해. 늘 그 남자 생각이잖아.
그 남자 때문에 화가 나.
그 남자를 보면 같이 잠자리에 들고 싶은 거지. 마음속의 목소리였다.
소피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입 닥치라구!" 그녀는 크게 소리 내어 말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더 이상 울리지 않게 청소를 시작했다. 일에 묻히다 보니 어느새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되었다.
준비가 일찍 끝나 그녀는 식탁 주변을 서성거리면 크리스탈 잔을 내온다, 촛불을 켠다... 부산을 떨었다. 식당의 조명을 끄고 CD플레이어에 프랭크 시내트라의 판을 건 뒤 흐뭇하게 물러서서 방 안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근사하다.
그때 초인종이 울리는 바람에 그녀는 놀라서 시계를 보았다. 일찍도 왔네! 그녀는 문을 열기 전에 재빨리 거울을 보았다. 실내가 따스하기 때문에 짧은 주홍색 시프트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주홍색 실크 장미꽃을 꽂았다.
미소를 띠고 문을 연 그녀는 눈앞에 가이의 얼굴이 보이자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그녀를 위아래로 살피고는 푸른 눈이 딱딱해졌다. "누구 기다리고 있었소?"
"네." 그녀의 말에 그는 그녀 너머로 촛불이 밝혀진 2인용 식탁을 보고 프랭크 시내트라의 낮은 노래를 들었다.
"멋지군." 그가 잇새로 내쏘았다. "누군 위한 거지? 커크인가?"
"콤 버니예요." 그녀는 차갑게 대답했지만 미칠 듯이 신경이 곤두섰다.
가이는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는 억지로 화를 억누르느라 얼굴 표정이 일그러졌다. 입가에는 잔인한 기운이 맴돌았다. 가이 내부 속의 뭔가가 변화를 일으켰든지 아니면 그의 본성이 이제야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두 남자를 다 만난단 말인가?" 그는 물어뜯을 듯한 어조로 물었다. "얼마나 더 많은 사내가 있는 거지? 대체 무슨 짓이오, 남자마다 데이트해서 기브 콜링우드를 잊으려는 거요? 소용없소, 소피. 그래 보았자 말썽만 자초할 뿐이고 제 정신이 들었을 때는 후회할 오명만 쓰게 되오. 기브 콜링우드는 그럴만한 가치가 없소. 당신 자존심은 어디로 갔지? 어째서 그렇게 잊을 수 없는 거요?"
그녀는 턱을 치켰다. "대체 무슨 권리로 내게 설교하는지 알고 싶군요. 솔직히 신물이 나요, 당신이 내 사생활에 참견하는 건. 찾아온 용건이나 말하고 가줘요."
그는 그녀를 노려보더니 이윽고 거칠게 말했다. "내가 온 것은 닉 캐스피언이 나더러 당장 룩셈부르크로 오라고해서 며칠 자리에 없다는 것을 아려 주려고 왔소. 다음 연락이 올 때까지 내 약속은 모두 취소해요. 돌아오는 날은 알릴 테니까."
"사무실 자동응답 전화기에 전갈을 남겨 놓으시죠."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차라리 그럴 걸 그랬소." 가이가 돌아서서 가려다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가이는 뭐라고 험한 소리를 하더니 가버렸다.
소피는 당황해서 데오 외삼촌을 바라보았다. "어머, 죄송해요... 화가 나 있는 중이라...."
"그렇더구나." 대오 외삼촌이 중얼거렸다. "무척 화가 나 있는데 무슨 짓을 한 거냐?"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소피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외삼촌이 따라 들어오더니 문을 닫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게 다 그 남자를 위해 차린 거냐?"
"아뇨. 다른 사람이에요. 금방 올 거예요."
"남자겠지 물론? 그럼 조금전 그 남자는 뭐냐? 바람맞은 애인이냐?"
"그렇지 않아요!" 소피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사람은 내 상관이 가이 포크너예요."
"그랬니? 재미있구나."
소피는 가슴이 철렁했다. 데오 외삼촌이 가이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전혀 달갑지 않다. 끈질기게 꼬치꼬치 묻기 시작할 테니까.
외삼촌은 식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대신 포도주를 맛보아도 괜찮겠니?"
그녀는 붉은 헝가리산 포도주 병을 딴 참이었다.
"한잔 하고 싶단 말씀이시죠? 좋아요."
데오 외삼촌은 촛불 아래 빛나는 포도주를 바라보다가 코에 대고는 냄새를 맡았다. "흐음..., 훌륭해." 그러고는 포도주를 입 안에서 굴리다가 삼켰다.
소피는 씁쓸하게 외삼촌을 바라보았다. 키가 크고 뚱뚱한 체격에 백발이 어린아이 같은 분홍빛 얼굴을 감싸고 있다. 하지만 눈빛은 날카롭다. 성장기에 비극을 겪은 탓이다.
"그래, 네 상사가 널 사랑하고 있단 말이지. 넌 네 상사에 대한 감정이 어떠니?" 외삼촌이 슬쩍 물었다.
소피는 숨이 가쁘고 화가 났다. "그 사람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 그냥 상관일 뿐이에요. 엉뚱한 상상은 마시라구요. 외삼촌은 지금 낯선 사내 하나 보았다고 제 생활을 캐물으시려는 거예요?"
외삼촌은 잔을 들이킨 뒤 일어섰다. "모욕이구나. 난 남을 캐는 취미는 없어."
소피가 공허가게 웃었다.
"실은 올해는 우리 친척이 이곳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게 되었다고 알리러 왔다.
"내 집에서요?" 소피는 놀라 물었다.
"천만에! 위층 내 집에서야. 꼭대기에 사는 세입자들이 이번 주에 집을 비우는데 아직 다른 세입자들을 구하지 못해서 신년까지는 비워 놓을 작정이다. 친척 모두 묵기는 충분하겠지."
"맙소사!"
외삼촌이 노려보았다. "넌 나쁜 애야. 너희 부모하고 내가 버릇을 망쳤어. 엉덩이를 실컷 때리면서 키우는 건데 네가 많이 도와주어야겠다."
"내가 겁나는 이유가 그거예요!"
외삼촌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준비하지면 며칠 걸릴 거야. 네 엄마한테 올해는 네가 거위요리를 할 거라고 말했다.."
"내가요? 난 거위요리 해본 적도 없어요!"
"네 엄마가 가루쳐 줄 거다. 그리고 네 상관 이야기도 엄마한테 해라. 넌 그 남자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지만 내겐 그렇게 보이니까. 여자애들은 엄마한테 뭐든 털어놓아야 해."
그때 초인종이 울리는 바람에 소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손님이에요. 물어 보시기 전에 말하는데 그 사람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 나도 사랑하지 않고. 그냥 친구예요. 됐죠?"
"난 네 세대를 이해할 수 없다." 외삼촌은 문으로 나오며 투덜거렸다. "희안한 생활도 있지! 친구일 뿐인 남자와 촛불을 밝힌 저녁식사라니. 무슨 낭비냐. 그보다는 네 상사라는 그 사내를 초대할 것을."
"그 이야기는 그만하세요!" 소피는 문을 열고 톰에게 환영의 미소를 보냈다. 톰은 샴페인 병을 들고 있다가 그녀에게 주었다. "안녕, 톰, 들어와요...."
데오 외삼촌이 소개를 기다리는 모양이어서 그녀는 도리가 없었다. "이분은 데오 외삼촌이세요. 외삼촌, 여기는 우리 신문사 범죄 담당 기자 톰 버니 씨."
두 남자는 악수를 나누었다. "범죄 담당? 자극적인 일이겠군." 외삼촌의 말에 톰은 얼굴을 찡그렸다.
"종종 너무 자극적일 때가 있죠."
"정말? 왜 그렇소?" 데오 외삼촌이 눌러앉을 기세였다.
소피는 잽싸게 외삼촌의 팔을 잡았다. "막 가시려던 참이죠? 내일 뵈요."
데오가 마지못해 가자 톰이 싱긋 웃었다. "좋은 분이시군. 헝가리 인이시죠? 역사학자라고 하지 않았소? 영리해 보이시는군."
너무 영리해서 탈이에요. 소피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외삼촌이 가이와 마주친 것은 정말 유감이다. 외삼촌은 어머니에게 미심쩍다고 일러바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두들 캐묻고 결혼식이니 신혼여행이니 흥분해서 공상할 것이다. 그것은 정말 견딜 수 없다.
같은 날, 지나 타이렐은 데모트 개스켈 경으로부터 저녁식사를 같이하지 않겠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너한테 제의할 것이 있어서." 그의 말에 지나의 안테나가 경고를 보냈다.
"뵙는 것은 환영이지만 캐스피언 인터네셔널에 대한 당신의 음모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아요, 테모트."
"이제 너도 그 남자 편이냐?" 데모트 경이 코웃음을 쳤다. 지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뒷 공작이 싫을 뿐이에요. 난 그와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싶어요."
"어쨌거나 네가 그 사내와 맞설 생각이라니 기쁘구나. 이사들 다수가 그의 공동 경영 방식에 불만인 것은 너도 알겠지? 예를 들어 이번 인쇄공들과의 말썽도 불필요한 일인데 처리를 잘못하고 있어. 맞대결을 피할 수도 있는데 오히려 즐기는 모양이니 원. 네가 상대한 솜씨는 훌륭해. 내 보기에 넌 이사회의 실세가 되어가는 것 같다. 조지 경이 보았으면 널 자랑스러워했을 거야...."
지나는 감동 받았다. "감사해요, 친절한 말씀이군요."
"진심이다. 네가 인쇄공들을 다루는 태도에 감명 받은 것이 나만은 아니야. 지나, 솔직히 털어놓을게, 우리 여러 명은 이미 뭉쳤어. 닉 캐스피언의 판단에 신뢰를 두지 않는다는 데에 뜻을 뭉쳤지. 그가 유럽에서 성공하는지 몰라도 영국 상황은 모르는 것 같아. 너도 동감이라니 믿는다. 어쨌든 운영자 교체를 의논하는 중에 네 이름이 거론되었다. 테이렐 집안이니까...."
"남편 이름일 뿐이죠." 그녀가 상기시켰다.
"하지만 조지 경은 세상을 뜰 때 널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린 모두 그걸 알지. 조지 경은 운영에는 판단이 좋아. 그가 널 <센티널> 운영의 적임자라고 생각했다면 그런 거야. 네가 우리하고 같이 하고 싶지 않으면 네 생각을 존중하마.... 하지만 순전히 가정인데..., 나중에 우리가 너한테 이사회의 장을 맡아 달라면 넌 승낙하겠니?"
"닉 캐스피언이 동의하지 않을 걸요!"
"너하고 필립 슬레이드가 힘을 합치면 그의 동의도 필요 없어."
"필립! 그 사람이 이 일에 끼어 있어요? 하지만 그는 미국에 있어서 다음 주에나 돌아올 텐데."
"그는 전화로 승낙했다. 그리고 점점 많은 숫자가 나와 같은 의견이야. 너와 필립 그리고 몇몇 주주가 힘을 합치고 다른 이사들이 너를 지원하면 닉은 자주 투표에 지고 결국은 물러나야 하고 말 거야. 이사회의 지지가 없는 한 경영은 불가능할 테니까. 그때 네가 넘겨받으면 돼."
지나는 이상한 충격으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것은 그녀가 바라던 바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이 현실로 돌지도 모르는 터에 왜 이렇게 기분이 묘한 걸까? "제가... 넘겨받는 다구요? 제가 할 수 있을지...."
"있고말고! 배짱은 어디다 뒀어? 요전날도 넌 이사회에서 닉에게 맞서서 이겼잖니. 그게 처음도 아니고. 지난 1년간 쭉 싸워서 나날이 솜씨도 늘고 있다구. 권력을 인수할 준비가 된 거야."
"하자만 어떤 안건을 갖고 싸우는 것하고 신문사 전체를 운영하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난 아직 배울 것이 많아요."
데모트 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 같은 아가씨, 우리 모두 도울 테니 염려 말라구.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은 네 투표권을 우리가 믿어도 되느냐 하는 가야. 지나, 이거야 말로 네가 원하던 것 아니냐. 닉이 조지 경한테 한 짓에 대한 복수. 마음이 약해진 것은 아니겟지? 조지 경이 어떻게 죽었는지 잊은 것은 아니겠지?"
"네 잊은 적은 없어요."
"그럼 우리랑 뜻을 합치는 거지?"
그녀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네."
"착한 아가씨군. 나한테 맡겨 두라구. 모두 정리되면 연락하지."
무슨 뜻일까? 그녀는 이마를 찌푸렸다. "정확히 몇 명의 이사가 한편이죠?" 주의 깊게 물었다.
데모트 경은 망설였다. "거의 다야. 하지만 1, 2명이 망설이고 있지. 지나, 이제 끊어야겠네. 나중에 연락하지. 그동안 이 일을 아무하고도 의논하지 말라는 것은 굳이 일러놓지 않아도 되겠지?"
지나는 수화기를 놓았다. 얼굴이 창백해졌다. 승리감을 느껴야 할 텐데, 닉이 <센티널>의 지배권을 잃을 판국이니까. 그런데 묘한 절망감과 혼란만 느껴졌다. 조지 경이 죽었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명확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확신이 서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뒤집히고 경계선이 애매모호해졌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닉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그녀를 약하게 만든 것이다. 이제는 자기 기분도, 뭘 원하는지 알 수 없다.
월요일 아침에는 또 다른 충격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헤이즐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지나는 코트를 벗으며 마주 싱긋 웃었다.
"어딘지 음흉해 보이는데, 무슨 꿍꿍이야?"
헤이즐은 대답 없이 봉투 한 장을 든 책 닉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온다. 그러고는 "주말 잘 지냈어?" 하고 묻는다.
지나는 어깨를 들썩했다. "조용했지." 실은 닉이 없어서 죽도록 따분했지만... "피에트를 만나러 갔었지? 그는 어때?"
"아주 좋아. 나한테 전할 소식이 있더군." 헤이즐은 다시 흥분한 얼굴이었다.
"좋은 소식, 나쁜 소식?"
"생각하기에 따라서지. 우리한테는 좋은 소식이야. 피에트가 캐스피언 인터내셔널에 사표를 내고 건물을 샀어. 우린 독립할 작정이라구!"
이미 예견했던 일이다. 헤이즐과 피에트가 독립회사를 차릴 계획을 말한 것은 벌써 여러 달 전부터니까. 그래도 충격이었다. 미소를 짓고 같이 흥분해 주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근사하네! 당신들 두 사람이 오랫동안 바라던 것 아냐! 사무실은 어디로 할 거야?"
"네델란드지 물론. 피에트 말이 실질적인 장소래. 스치풀 공항에서 전 세계 어디나 갈 수 있고 자동차 도로 사정도 좋으니까."
"그리고 그의 조국이기도 하고!" 지나가 놀렸다.
"그래." 헤이즐이 싱긋 웃었다.
지나의 이마에 문득 주름이 잡혔다.
"그렇다면 당신이 우릴 두고 떠나야 한다는 거야?"
"방금 닉한테 사표를 냈어."
지나는 신음소리를 냈다. "오, 헤이즐. 정말 그리울 거야!"
"나도야." 헤이즐이 지나를 포옹했다.
지나는 울고 싶었다. "여러 해 동안 같이 잘해 왔는데! 다른 사람하고 일하다니 쉽지 않을 거야."
"이 없으면 잇몸이지, 뭐." 헤이즐이 싱긋 웃었다. "1달 여유를 두고 떠날 거니까 후임자를 찾기에 충분해. 못 찾으면 1, 2주일 더 있을 수도 있고."
"고마워." 지나가 대답했다. "다른 사람을 찾도록 도와줘야 해. 당신 후임을 찾기가 어디 쉬워?"
"회사 안에서 찾겠어, 아니면 외부에서?" 헤이즐의 말에 지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닉한테 달렸지.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좀 쉽겠지."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소피 왓슨이 서류를 들고 왔다. "캐스피언 씨가 다 보시고 나면 돌려주시겠어요?" 그녀 특유의 차갑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돌아서서 나갔다.
헤이즐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뒷모습을 보았다. "좋은 생각이 났어!"
"뭔데?"
"소피야."
"소피?" 지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헤이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될 것 뭐 있어? 유능하고 단정한데다 옷차림도 좋잖아. 여러 나라 말도 한다구. 딱 적임자야."
"난 생각 안 해 봤어. 하지만 맞아, 그녀라면 완벽할 거야. 그녀가 이 일자리를 원한다면 말이지만." 지나가 덧붙였다. "내가 보기엔 그녀는 법제실 근무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여기 일자리라면 더 좋아할걸? 이 사무실은 이 건물 안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잖아. 더구나 월급도 훨씬 많고. 지위도 높아지는데다가 일도 다양해."
"그렇지." 지나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자기의 유능한 비서를 잃게 된다면 가이 포크너가 뭐랄까?"
8장
닉과 가이 포크너는 화요일 저녁 늦게 룩셈부르크에서 돌아왔다. 수요일 아침에 지나가 출근하자 닉이 먼저 와 있었다. 그녀가 들어가자 헤이즐이 눈짓을 했다.
"돌아온 거 알았어. 간밤에 닉의 아파트 문이 열리던걸." 지나는 차갑게 말하고 코트를 걸었다. 닉이 자택에 있는 것을 알자 간밤에는 뜬눈으로 지샜다. "닉은 당신의 사직에 대해 뭐래?"
"자존심이 흐뭇할 정도로 화를 내주더군." 헤이즐이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어제 피에트가 룩셈브크에서" 닉에게 직접 사의를 표명했나 봐. 의리상 그래야겠다고 생각했을 테지. 닉은 피에트를 설득해 결심을 철화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피에트는 변함없어. 하여튼 당신 출근하는 대로 보자더군. 조심해, 지나, 오늘 아침엔 굉장히 저기압이니까. 하긴 올해 내내 그렇긴 하지만." 헤이즐이 짓궂은 눈빛을 했다. "그 이유가 뭘까?"
지나는 그녀의 입꼬리에 걸려들지 않고 거울 속의 모습을 점검했다. "오늘은 별로 안 춥네. 눈 내릴 조짐도 없고." 그녀는 딴소리를 중얼거렸다.
지나는 바람을 맞고 오느라 볼이 달아올라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히 하고 황갈색 수트 깃을 폈다. 그녀의 머리칼에 꼭 어울리는 색깔이고 눈동자를 고양이 눈처럼 녹색으로 보이게 해주었다. 그녀의 얼굴은 홍조를 띠고 눈빛은 반짝였다. 이제 곧 닉을 만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돌아서자 헤이즐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다. 지나는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헤이즐이 윙크를 보냈다.
헤이즐은 지나가 닉의 팔에 안겨 있는 것을 목격한 이래, 닉이 근처에 있거나 지나가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면 늘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하지만 고맙게도 침묵을 지켜 주었다.
지나는 서둘러 걸어가 닉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닉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짙은 잿빛 줄무늬 상의를 벗고 실크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 불어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그녀를 돌아보더니 앉으라는 손짓을 한다.
그녀는 차분하게 보이려 애쓰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닉의 눈이 자신을 살피는 것을 괴롭게 의식했다. 닉은 퉁명스럽게 불어를 내쏘며 눈으로 그녀의 스타킹 신은 긴 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안 되겠어, 로시놀. 괜한 약속 말라구. 당장 이행하든 아니면 끝이야. 아니 그건 변명일 뿐이지! 당장 움직이라구. 나랑 입씨름으로 시간낭비 말구. 좋아, 2일간 시간을 주겠어. 그 다음에는 알아서 해!"
그는 수화기를 쾅 놓았다. 지나는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대는 것을 보고 긴장했다. 그는 양손을 머리 뒤에 깍지 낀 채 그녀의 머리끝부터 늘씬한 다리까지 찬찬히 살폈다.
"헤이즐 말이 당신이 날 보고 싶어 했다구요." 그녀는 얼른 말했다.
닉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아, 헤이즐도 내가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지 눈치 챘군?"
"말장난하려면 난 나가겠어요!" 지나가 쏘아붙였다.
닉은 조롱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는 금박 테두리의 카드를 내밀었다. "당신도 이런 것 받았겠지."
그것은 필립 슬레이드가 약혼자 수키 타마키를 소개시키기 위한 파티 초대장이었다.
"아뇨, 아직."
"하지만 곧 받겠지!"
"그렇겠죠." 그녀는 그의 어조에 화가 났다. 설마 닉은 필립이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는 것을 두고 날 재미있어하는 것은 아닐 테지? 설마 내 기분이 언짢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지? 한때는 그녀도 닉에게 자신이 필립한테 흥미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차츰 연극을 포기했다.
"왜 이러는 거죠?" 그녀가 다그쳤다.
"타마키 때문이오. 슬레이드의 약혼자가 타마키 가문의 일족이란 말이오."
그제야 그녀는 약혼자의 가문이 일본계 미국인 가문으로 신문사를 소유하고 있다던 필립의 말이 떠올랐다. "맞아요. 그 집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필립이 전화해서 그녀와 약혼 이야기를 할 때 타마키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은 듯하더군요. 하지만 깜박 잊고 당신한테 말하지 못했어요."
"아, 그랬나?" 닉이 빈정거렸다. "하긴 슬레이드가 타마키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뭐가 중요하다고 당신이 일부러 내게 일러주겠나?"
"왜 이리 잔뜩 비꼬는 거죠? 무슨 소리를 하려고?" 혹시 닉이 데모트 경의 음모를 알아차렸나. 그녀와 필립도 가담했다는 것을? 불안으로 그녀는 숨이 가빠졌다.
"정말 모르나?" 닉이 일어나 다가와서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뭘... 모른다는 거예요?" 그녀는 닉이 너무 가까이 오는 바람에 긴장했다. 누군가 그에게 일러바친 걸까? 이사회 멤버 중 그의 편 인물이 낌새를 채고 일러바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데모트 경이 닉의 친구들한테까지 접근할 정도로 미련했을까? 그런 영리한 사람이.
닉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당신은 모르는군. 그 말을 들이니 안심이긴 하지만. 당연히 알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그가 몸을 떼고 물러나길 바라며 쏘아붙였다.
"당신을 믿겠어." 닉은 갑자기 노기가 사라진 목소리다.
지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말할 거예요, 아니면 나 혼자 미치는 꼴을 볼 거예요?"
닉이 딱딱하게 웃었다. "집에서도 공부를 좀 하라고 몇 번이나 얘기해야겠소? 신문업계 상황을 살피길 게을리하지 말라구. 영국식 사고방식은 집어치워요! 우리 회사는 국제작인 회사고 앞으로 10년간 더 커질 거요. 그러니 앞으로 당신이 캐스피언 인터내셔널 미래의 일원이 되고 싶으면 우리 경쟁사들에 대해 모든 것을 배워야 해."
"나도 노력했어요!" 그녀가 항의하자 닉은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싱긋 웃었다.
"저런, 미안. 나도 당신 노력은 알지. 지난 1년 동안 당신은 투사처럼 일했으니까. 감명 받았소."
지나는 가슴이 뭉클해 얼굴이 붉어졌다. 닉은 그녀를 칭찬하는 법이 없었다. 그 때문에 그의 칭찬이 더 값지게 느껴졌다.
순간 묘한 감정이 몸속에서 일었다. 자신이 데모트 경과 한패가 되어 닉의 뒤통수를 치러 한다는 생각에 죄책감과 불안과 후회가 소용돌이쳤다. 닉이 그녀의 배신을 알았을 때 어떤 얼굴로 그녀를 볼지 생각하면 속이 뒤집혔다.
하지만 닉 자신도 조지 경을 상대로 음모를 꾸몄잖아! 그 역시 조지 경을 배신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판국에 그녀가 그의 수법을 그에게 되돌려 써먹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이유가 뭔가. 1년 전 그녀는 닉에게 고인의 복수를 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그녀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
"우리가 캘리포니아로 갔던 일 기억하나?" 닉의 말에 그녀는 놀라 눈썹을 내리깔았다. 닉의 어머니에게서 닉에 대한 많은 것을 들어 알았다.
"그때 타마키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거요." 닉이 말했다. "타마키 그룹은 미국 웨스트 코스트 지역의 신문을 장악하고 있어요. 우리 회사와 관련이 없는 것은 그들 회사는 신문 파는 것보다 신문사를 사들이는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지. 재정이 튼튼하고 앞날을 멀리 보는 그룹이오." 닉의 이마에 주름이 서렸다. "난 슬레이드가 그들 가문과 결혼하는 것이 달갑지 않소. 그의 주신은 우리 회사에 영향을 끼칠 만큼 큰데 그에게 타마키만큼 강력한 후원자가 있으면 서슴지 않고 그 주식을 써먹어 날 공략할 거요."
"하지만...." 지나는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타나키 가족이 <센티널>에 주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해를 끼치겠어요?"
"모르지." 닉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겉으로야 아무 일도 없소. 하지만 내 육감은 등 뒤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거요. 내 육감은 틀린 적이 없지. 난 늘 말썽을 앞질러 예감할 수 있소."
그는 돌아서서 창 밖을 보았다. 지나는 그의 날카로운 옆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과연 놀랄 만한 육감이다. 물론 그의 말이 옳다. 곧 말썽은 닥칠 테니까. 하지만 타마키 가문으로 인한 것은 아니다. 그의 적은 가까이에, 그의 회사 안 바로 이 사무실 안에 있다.
테모트 경은 타마키 가문이 음모의 한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생소한 외부인사와 결탁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타마키 가문이 <쎈티널>에 개입할 방법도 없다. 현재 팔려고 내 놓은 주식은 필립 슬레이드 것말고는 없으니까. 물론 지나의 몫과 합치면 닉을 견제할 만큼이 되지만 필립 슬레이드만의 몫으로는 그렇게 중대한 비중이 되지 못한다.
"당신이 너무 피곤해서 그래요." 지나가 위로했다. "유럽 전역을 날아다녔으니 안 그래요? 런던이고 어디고 노조 문제가 있지, 재정 문제도 있지, 당신이 피해망상증에 걸린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에요?"
닉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피해망상증이라고? 하긴 당신 말도 일리가 있을지 모르지. 문젯거리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헤이즐이 가버리면 난 대체 누굴 후임으로 써야 한단 말이오? 당신이 설득해 볼 수 없소? 내 말은 도무지 듣지 않아."
"닉, 어차피 그녀는 곧 그만둘 몸이었어요. 당신은 눈치 채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곧 아기를 낳아야 한다구요. 그러니 여기 눌러 있으면서 남편을 보러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무리예요. 두 사람은 같이 있고 싶어 해요."
"피에트를 설득해서 그 미친 계획을 취소시킬 생각이었는데. 난 그 친구가 필요하단 말이오. 지금 하는 인쇄기 작업이 마무리되었으니 앞으로 그가 맡아야 할 작업이 연달아 있소."
지나는 애원하는 얼굴을 했다. "닉, 그들 일에 다시 간섭하지 말아요. 당신 말이라면 피에트가 무슨 일이든지 하는 건 알아요. 당신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남을 설득할 수 있잖아요....."
"그랬나?" 닉이 말하며 그녀 앞으로 왔다. 조소를 띄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전혀 설득당하지 않던걸."
지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또 말장난하지 말아요! 심각한 이야기란 말이에요. 피에트는 자기의 독립회사를 차리는 것이 여러 해의 꿈이었어요. 그러니 그를 설득해 말릴 생각은 말고 가게 해줘요, 제발."
닉이 허리를 굽혀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을 들여다보는 바람에 그녀는 그가 키스하는 줄만 알았다. "이러지 말아요!"
닉이 성난 얼굴로 허리를 폈다. "몹쓸 여자 같으니! 어쨌든 지금 난 한시바삐 헤이즐의 후임을 찾아야 할 사정이오. 믿을 수 있는 사람하고 일하는 것이 좋으니 룩셈부르크에 있는 내 비서 한 명을 데리고 오는 것이 바람직하겠소."
지나는 이마를 찌푸렸다. "저...., 헤이즐하고 내가 생각해 보았는데..., 소피 왓슨이 완벽한 적임자를 것 같아요."
"소피 왓슨? 그게 누구지? 아, 알아, 가이 포크너의 비서." 닉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설마 벌써 그녀를 앉힌 것은 아니겠지?"
지나는 마음 상한 척 눈을 크게 떴다. "물론 아니에요. 제안한 것뿐이죠. 하지만 나도 같이 일해야 할 상대니까 내가 알고 좋아하는 사람이면 도움이 되겠죠. 하지만 당신이 캐스피언 인터내셔널에서 오고 싶다면 그건 당신 권리예요."
"고맙군."
지나는 그의 빈정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하지만 플리크 가 시절의 직원들을 캐스피언 인터내셔널 사람들로 많이 대체한 것에 대해 말들이 많아요. 너무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북적거려 말이 통하지 않을 지경이라 바벨탑이라는 별명까지 생겼어요."
"나도 들었소. 그리고 모두들 나는 야만인 캐스피언이라고 한다면서."
지나는 쿡쿡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당신도 들었어요?"
"당신은 내가 그 별명에 합당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녀는 눈썹을 내리깔았다. "글쎄요...."
"내가 그 별명에 어울리게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구, 지나." 닉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종종 당신이 날 미치게 만들 때면 정말 야만인처럼 굴고 싶은 유혹을 느끼니까."
그때 다행이 인터콤이 울렸다. 닉은 투덜대며 버튼을 눌렀다. "뭐지?"
헤이즐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예이츠 씨가 와 계신데요."
닉이 이마를 찌푸렸다. "아, 들여보내요!" 그러고는 책상으로 가며 지나에게 말했다. "최근에 발행 부수의 하락에 관해 의논하러 온다는 걸 깜빡했군. 당신도 보았겠지? 솔직히 걱정스럽소."
그때 신이 미소를 띠고 들어왔다. "안녕, 지나, 당신 옷 색깔 눈부시군."
"고마워요." 지나가 말하며 문으로 가는데 닉이 불러 세웠다.
"잠깐, 지나, 또 한 가지..., 헤이즐이 가기 전에 파티를 해줘야 하지 않겠소?"
"물론이죠. 내가 준비할게요."
"여기 호텔에서 토요일 밤으로 하는 것이 좋겠소. 피에트도 필히 참석해야지."
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 숫자는요?"
"그건 당신한테 일임하지."
"소피, 오전 중에 잠깐 나 좀 보겠어요? 중요한 의논이 있어서...."
1시간 후 소피는 지나의 맞은편에 앉아 눈을 크게 떴다. 닉 캐스피언과 매일 같이 일한다는 생각에 혼이 나간 듯하다.
"맡고 싶어요?" 지나가 물었다. "여기서 지금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흥미가 없다면 되도록 빨리 말해 주는 것이 좋아요. 그래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찾을 테니까."
"하지만... 너무 쇼크여서요!" 소피는 평소의 침착함이 간데없이 사라진 얼굴이다.
"닉은 사람을 잡아먹지 않아요." 헤이즐이 싱긋 웃었다. "물론 대하기 편한 사람은 아니죠. 까다로우니까. 하지만 가이 포크너 밑에서 일하는 것도 쉽지 않잖아요. 닉의 방식에도 금세 적을할 거예요. 당신에겐 보수도 훨씬 많아지고 지위도 높아지는 셈이죠. 일도 다양하고."
"어때요?" 지나가 묻가 소피는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할 시간이 좀 있을까요? 나도 바라긴 하지만 그래도 확답을 하기 전에 한 2일간 시간을 갖고 싶군요
"물론이죠. 그럼 금요일 퇴근시간까지 알려줘요."
소피가 사무실로 돌아가니 가이는 책꽂이에서 법률서적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소피가 시계를 보며 망설이자 가이가 돌아보았다.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오늘은 30분쯤 더 나가 있어도 될까요?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고 싶어서요. 대신 저녁에 30분 더 일하도록 하죠."
가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책을 보았다. 소피는 그의 무관심이 미웠다. 그 바람에 그에게 할 이야기가 쉬워지긴 했지만. 오히려 즐겁게 꺼낼 수 있다. 어디 이 이야기를 들어도 무관심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라지!
"그런데 헤이즐 반 레이든이 회사를 그만둔다는군요." 그녀는 코트를 입고 단추를 채우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나더러 그 자리를 맡으라는 제의를 받았어요."
그녀의 피까지 차갑게 만드는 침묵이 뒤따랐다. 그녀는 가이를 돌아보기가 주저스러웠지만 언제까지고 구석에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천천히 돌아보았다. 가이가 동상이라도 된 듯 우뚝 서 있었다. 딱딱한 얼굴에 표정 한점 없다. 하지만 그의 눈빛을 본 소피는 숨이 멎을 뻔했다.
"받아들였나?" 가이의 입술이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을 토해 냈다.
소피는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입이 바싹 말랐다. "생각해 보겠다고...."
가이가 한걸음 다가섰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며, 밸러리 나이트가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흰 옷을 입고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아, 여기 있었군요. 가이, 잘됐어요!" 그녀는 언제나처럼 소리는 안중에도 없이 말했다.
"안녕, 밸." 가이의 긴장한 얼굴이 미소로 녹아들었다.
소피는 그들을 지켜보며 이를 악 다물었다. 가이가 밸러리를 바라보고 있는 눈길만 보아도 그가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긴 그녀의 옷은 남자들이 입을 딱 벌리고 쳐다보게 하는 게 목적일 테니까.
"콜레트가 방금 좋은 생각을 했어요." 밸러리가 흥분해서 말했다. "몰리 그린과 아기를 런던으로 데려와서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게 할 거예요. 근사한 기사가 될 거예요. 하지만 그 기사가 나갈 경우 법적인 말썽이 업을까 해서 당신한테 물어 보려고요."
"있을 게 뭐겠소. 그런데 아기는 지금 몇 달 됐지?"
"3개월인데 무척 예뻐요. 엄마를 꼭 닮을 것 같아요."
가이는 배러리의 열띤 어조에 싱긋 웃었다. "당신, 그들 모녀하고 쭉 연락을 해왔군."
"내 직업상 안 어울리죠. 하지만 몰리와 아기는 내겐 정말 중요한 관심사라서."
두 사람은 소피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가 조용히 나가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건물을 나와 택시를 잡았다. 밸러리를 잠깐 본 일로 해서 모들 것이 결정 났다. 헤이즐의 일을 맡을까 말까 망설이던 참이었는데 이제는 확신이 섰다. 그 일을 받아들일 작정이다.
가이가 밸러리와 있는 것을 본 순간, 그가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는 것을 보는 순간 그녀는 벌써부터 의심했어야 할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가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기브의 약혼식날 밤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기브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그녀는 알았다. 자신은 약혼식 날까지의 여러 주 동안 기브에 대한 사랑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기브가 밸러리와 만나는 것을 보면서 그녀의 감정은 변질되어 갔다. 약혼식날밤에는 거의 그에 대한 감정을 벗어 버렸고, 그날 밤은 꺼져 가는 불꽃이 마지막으로 반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왜 진즉에 그것을 몰랐을까. 그녀는 데오 외삼촌에게 줄 고서적을 찾아 채링 크리스 로를 훑어가며 속으로 한탄했다.
자신의 변해 가는 감정을 몰랐었다. 가이가 집으로 데리고 가서 사랑을 나누려 했을 때 자신은 정열적인 반응을 보였다가 다음 날 아침, 스스로를 경멸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런던 거리는 찬바람에 옷을 감싼 쇼핑객들로 만원이었다. 트라팔가 광장에 긴 차량 행렬이 서 있었다. 소피가 탄 택시 운전사도 초조하게 운전대를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정말 못 말릴 도시라니까. 차들 때문에 목이 졸리고 있어요. 무슨 조처를 취해야지 원!"
소피는 자동적으로 중얼거렸다. "내, 맞아요...."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앞으로의 운명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괴로움. 벌써부터 가슴이 저려 왔다.
익숙한 고통이다. 기브 콜링우드로 인해 이미 한 번 겪었다. 그런데 지금 또...
왜 늘 이런 짓만 되풀이하는 걸까? 왜 자꾸 엉뚱한 남자만 사랑하는 걸까?
세실 법원 근처에서 내린 그녀는 외삼촌에게 줄 책선물을 찾아 헤매면서도 건성이었다. 결국 30분 후, 쇼핑을 그만두고 샌드위치와 포도주를 먹으러 식당에 들렀다. 카운터 근처 식탁에 앉아 붐비는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바버리 위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아는 사람을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만나고 말았다.
구석진 곳에 기브가 처음 보는 여자와 앉아 있었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에 하트 모양 얼굴의 아가씨였다. 그녀와 기브는 요란스레 웃더니 아가씨가 기브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소피는 넋이 나갔다. 기브는 여자한테 늘 인기있는 남자였지만 밸러리하고 소문이 난 뒤로는 여자하고 있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시선을 느낀 듯 기부가 돌아보았다. 소피는 너무 당혹스러워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얼른 음식을 놔둔 채 식당을 나섰다.
이번에는 어머니에게 줄 선물을 사러 갈 참이었다. 택시 행렬을 살피는데 기브가 식당에서 나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왜 그렇게 뛰쳐나갔지? 해리엇을 소개시킬 참이었는데. 잠깐 들어가서 만날 수 있겠소?"
소피는 할 말을 잊고 그를 보았다. "누군데요?"
"내 이웃에 사는 아가씨지. 아버지가 판사요. 리지웨이씨라고 들어 봤을 테지."
"물론이죠. 가이가 종종 입에 올리더군요. 가이는 그 집을 잘 아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만나 달라는 거요! 해리엇은 가이와 같이 법률 공부할 때 만난 사이요. 그녀의 아버지는 가이를 사위 삼으려 안달이지. 가이의 집은 재력이 좋거든."
"난 몰랐어요!" 소피는 입안에 깨진 유리가 가득한 기분이었다. 쓰디쓴 것이 목에 올라왔다. 가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인 모양이다.
"포크너 집안은 대단한 재력가요. 영지가 많지. 리지웨이 판사는 딸이 부유한 법률가와 결혼하길 원했던 거요. 해리엇이 만날 남자들이란 가난한 학생들뿐이었거든."
"글럼 가이는 그동안 그녀와 비밀리에 약혼한 사이였나요?" 소피는 기를 쓰고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해리엇은 아버지한테 그와 약혼한 사이처럼 생각하게 놔두고는 결혼 말이 나올 때마다 먼저 법률가로 성공하고 싶다고 미루어 왔지. 그런데 실은 그동안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왔던 거야. 그녀의 아버지가 알면 기겁할 남자를. 해리엇은 그래서 겁이 나 아버지에게 이야기도 못하고 있는 거요. 가이한테도 말 못 하고 있지. 가이가 혹시 그녀의 아버지한테 일러바칠까 봐. 가이 엮시 그 남자를 언짢게 생각하거든." 기브는 소피를 끌어안더니 싱긋 웃었다. "해리엇은 곤경에 처해 있소. 가서 만나 주지 않을래요? 그녀도 당신을 알고 있어서 꼭 만나고 싶어 해요."
소피는 긴장해서 물었다. "당신이 내 이야기를 뭐라고 했는데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해리엇의 애인이 당신 이야기를 한 거요...."
소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아는 남자란 말이에요?"
기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올 태니 기다렸다가 만나요. 그보다 우선 해리엇을 만나 줘요. 그녀는 당신의 조언을 원해." 그는 싱긋 웃었다. "그녀는 좋은 여자야. 난 그녀를 무척 좋아하지. 하지만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남의 말에 기대서 살아 버릇했거든."
소피는 웃음을 터뜨리고 그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기브는 문득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보더니 우뚝 섰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마침 왔군!"
"안드레아스!" 소피가 신음을 토했다.
"소피?" 안드레아스 역시 놀란 듯했다. 얼굴을 붉히더니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제야 진상이 명확해졌다.
소피는 안드레아스가 가이에 대해 자꾸 묻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뭔다 의심스러웠다. 그녀의 여자로서을 육감은 안드레아스가 정말 관심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런 배경이 있었을 줄 누가 알았으랴.
"당신이 해리엇의 숨겨 놓은 남자였군요?"
안드레아스가 쓰게 웃었다. "내가 바로 범인이오."
"그런데 왜 지난번에 말 안 했죠?"
"우선 당신을 알아보고 싶어서." 그가 고백했다. "해리엇은 만났나요?"
"나하고 식당에 있는 것을 보고 의심을 품고 나가더군." 기브가 말했다.
소피가 딱딱하게 말했다. "날 뒤따라와서 다행이죠. 하마터면 내가 본 것을 밸러리한테 고해바칠 뻔했으니까요. 그럼 어떡할 뻔했어요?" 기브가 말했다. "실은 가이가 시켜서 아버지한테 사정을 말해 달라고 부탁하란 것도 밸러리 생각이었소."
소피는 더욱 눈이 휘둥그레졌다. "농담 아니에요? 정말 가이한테 그런 부탁을 할 거란 말이에요?"
"가이는 해리엇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사랑한 적도 없었소." 안드레아스가 말했다. "하지만 리지웨이 씨는 진정시켜 줄 사람은 가이뿐이오. 가이 포크너가 리지웨이 씨에게 사태를 좋게 받아들이라고 충고하면 따를 거요."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리지웨이 씨가 날 싫어하는 건 알지. 그분과 나는 법에 대한 시간과 법 운용에 대한 견해가 다르니까. 그분은 날 교활하다고 하지만 내가 성공한 것은 부인 못할 거요. 그분이 내 방식을 싫어하진 해도 난 법률의 한도내에서 운용할 뿐이지 법을 어긴 적은 없소."
해리엇은 식당 구석에 불안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소피와 악수를 나누자 그녀는 따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드레아스가 당신을 품격 있는 여자라고 하더니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겠군요."
소피는 싱긋 웃었다. "실은 내가 두 사람을 위해 무슨 일을 해줄 수 있다는 건지 궁금하군요...."
해리엇은 어린애 같은 눈으로 소피를 바라본다. "저...당신이 가이한테 사정을 말해서, 우리 아버지께 우리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말해 줄 수 없을까요?"
9장
콜레트 세는 연필로 이를 톡톡 치며 책상위에 널려 있는 사진들을 내려다보았다.
"좋지 않아요?" 밸러리가 흡족하게 말했다. "난 이 사진이 특히 좋아요. 몰리가 아기와 곰인형을 무릎에 앉힌 사진. 내가 사준 거예요. 몰리와 아기는 둘 다 사진을 잘 받아요. 아기는 데어드르라는 이름인데, 귀엽지요?"
"괜찮군." 특집기사 담당인 콜레트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하지만 별로 특이할 것이 없어. 밸, 우린 귀여운 것 이상이 필요하다구. 효과가 커야잖아."
밸러리가 날카로운 눈으로 콜레트를 보았다. "무슨 소리예요. 이건 완벽한 크리스마스 특집인데. 엄마와 아기...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크리스마스를 외롭게 보내는... 게다가 몰리는 성녀 마리아랑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콜레트는 쓴 얼굴을 하고는 사진을 밀어 버렸다. "미안 하지만 쓸 수가 없어. 지면 낭비니까." 밸러리는 화가 났다. 콜레트는 그녀를 곁눈을 살폈다. 야심적인 그녀는 야심적인 부하가 있으면 곧 알아보았다. 밸러리 역시 야심적이다. 콜레트는 그녀를 두려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적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맥 캐머런까지 사진에 넣는다면 문제가 다르지."
밸러리는 화가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남자와 같이 있는 사진은 고사하고 서로 만나려 들지도 않을 거예요!"
"그래도 돌연히 달려들면...."
"모녀를 그의 집에 데리고 가서...맥이 모르는 새에 사진을 찍는단 말이죠?" 그런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몰리가 싫어할 거예요. 그녀가 날 믿는 것은 내가 그런 비열한 방법을 쓰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죠."
"당신은 기자지 사화사업가가 아니야!" 콜테트가 쏘았다. "기사를 포기하든지 더 드라마틱한 사진을 가져오라구!"
밸러리는 샌드위치를 먹으로 토렐리 식당으로 내려가며 콜레트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콜레트는 거친 여자였다. 친절이나 윤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에게 기사는 오로지 기사일 뿐이다. 그로 인해 누가 상처받든지 간에.
오늘 길에 그녀는 크리스마스 쇼핑백을 들고 오는 지나와 마주쳤다.
"바빴네요?" 밸러리의 농담에 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즐거웠어. 선물 사는 것은 즐겁거든."
그 말에 밸러리는 몰리의 아기에게 선물을 사준 것이 생각나 시무룩해졌다. "그래, 맞아요."
"왜 그러지? 지친 얼굴인데."
밸러리는 콜레트의 말을 전했다. "내가 몰리를 설득해서 맥의 집에 쳐들어가 사진을 찍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미쳤어요! 몰리는 그런 짓을 하느니 차라리 죽어 버릴 거예요. 난 때때로 콜레트라는 여자가 사람의 감정을 모르는 로봇이 아닌가 싶다니까요!"
"하긴 룩셈부르크에 있는 닉 캐스피언의 실험실에도 로봇이 여럿 있을지도 모르지." 지나의 말에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지나가 정색을 했다. "맥이 생식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위한 테스트를 한 것 알고 있겠지?"
"네, 들었어요. 하지만 결과는 아직이죠?"
"그래, 하지만 난 그 아기가 맥의 아기라고 확신해, 당신도?"
"물론이죠!" 밸러리가 한숨을 쉬었다. "부디 테스트 결과가 몰리한테 유리하게 나와야 할 텐데."
"그럴 거야. 저, 밸, 내가 맥을 우리 집으로 한잔 하러오라고 청하면 어떨까? 당신은 몰리 모녀를 데리고 오고."
밸러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당신이 그런 일을?"
지나가 그런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콜레트라면 흥미로운 기사를 위해서 자기 부모라도 팔 사람이지만 설마 지나가!
지나는 그녀의 표정을 읽고 웃었다. "아니 <센티널>에 실을 사진 때문이 아니야. 맥과 몰리를 단둘이 있게 해주려는 거지. 변호사나 기자가 없는 곳에서. 그럴 때도 되었잖아? 지겹게 오래 끌었으니."
"지겹고 오래고 말고요?"
"그럼 합의한 거지?" 지나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었다. "12월 21일이 어떨까? 난 그날 저녁 시간이 있는데."
"나도 좋아요."
"좋아. 맥 쪽은 나한테 맡기고 당신은 몰리만 데려와요. 그녀와 아기를 위한 조촐한 파티를 연다고 해. 그날 올 수 없다면 언제가 좋을지 알아봐서 나한테 곧 전화해요."
"시간은요?"
"6시 30분이 어떨까? 맥은 그 시간이면 항상 한가하거든. 두 사람이 오는 대로 우리는 몰래 사라지는 거야. 두 사람만 남기고." 지나가 설명했다. "우리집 가정부도 휴가라고 하고 당신더러 주방 일을 도와달라고 하는 거지."
밸러리가 자신 없는 얼굴을 했다. "두 사람이 믿을까요?"
지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안 믿을지 모르지만 상관있나."
"맥이 성이 나서 뛰쳐나가 버리고 당신하고 다시 말도 안 할 수 있어요."
"알아, 하지만 그런 위험부담쯤은 감수해야지."
"변호사들한테 물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밸러리가 말했다. "가이한테 물어 보죠. 가이가 몰리와 아기의 사진은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이건 다른 문제예요. 맥이 이 일을 걸고넘어져 손해보상이라도 요구하면 내 일자리는 끝장이에요."
"아니야." 지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몰리 모녀를 파티에 초대한 걸 갖고 고소할 수는 없어. 하지만 가이한테 말하면 날 말리겠지. 소송이 복잡해질까 봐. 그런데 난 꼭 하고 싶어. 난 맥이 몰리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일단 아기를 보면 자기 아이임을 알아보리라고 확신해. 그는 아이를 간절히 원해. 그런데 자신은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 테스트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래서 몰리에서 맥이 증거를 보고 나서야 자기를 믿어 주었다고 생각하게 하라구?" 지나는 대꾸했다. "아니야, 맥에게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우선 인정하게 해야 해. 테스트 결과를 그 다음이고."
그날 오후, 지나는 맥에게 전화를 걸어 자동응답기에 12월 21일 저녁 파티에 오라는 전갈을 남겼다.
닉과 헤이즐은 저쪽 사무실에서 서류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 전화를 끊노라니 문가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홱 돌아왔지만 아무도 없었다. 헛것을 본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 그녀가 각 부서장과의 회의에 가려는데 맥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 파티예요? 아니면 우리 둘만?"
"친구 몇 명이 오긴 하기만 많지는 않아요." 지나가 애매하게 말했다. "꼭 와요, 맥."
"캐스피언도 오나요?"
"닉? 아뇨, 안 와요?"
그때 그녀의 어깨 위로 손이 오더니 수화기를 낚아챘다. 놀라 올려다보니 닉의 딱딱한 얼굴이 있다. 그녀는 수화기를 빼앗으려 기를 썼다.
닉은 한 손으로 그녀를 저지하며 수화기에 대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나가 잘못 안거요. 캐머런. 나도 갈 테니까."
"전화 줘요!" 지나가 으르렁 거렸다.
닉은 그녀를 무시하고 맥의 말에 귀 기울였다. "알겠소." 그러더니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이야기를 좀 해야겠군. 파티에서 봅시다."
그가 전화를 끊자 지나는 성이 나 대들었다. "어떻게 감히 전화를 빼앗고 당신 마음대로 파티에 온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죠? 난 당신을 초대하지 않았어요, 오는 걸 바라지도 않구요! 당신 때문에 일을 망쳐 버렸다구요!"
"맥이 고소를 취하했소." 닉의 말에 지나는 눈이 둥그레졌다.
"뭐라구요?"
"좋은 소식이지." 닉이 중얼거렸다. "우리가 런던에서 제일 비산 변호사를 사느라 큰돈을 쓰기 직전 취하할 것이지."
"이유가 뭐래요?"
고개를 저었다. "사정은 파티에서 설명한다는군. 내가 파티에 오다니까 반가워하더군. 변호사들 없이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내가 이번 일로 그를 신문에서 거칠게 다룰가 봐 방지하려는 거겠지."
지나는 흥분했다. "테스트 때문인 것이 틀림없어요! 아니고서야 왜 마음을 바꾸었겠어요?"
그때 신 예이츠가 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무슨 문제라도?"
"아니, 좋은 소식이오." 닉은 이사실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가이는 어디 있지? 아, 거기 있군. 소식이 있소. 캐머런이 고소를 취하한다는군. 우리가 이겼소."
가이가 놀라 물었다. 무슨 일로 마음을 바꿨답니까?"
하지만 닉은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얼굴로 지나 쪽을 곁눈질하며 웃었다.
"오늘 저녁에 알게 될 거요."
그런데 그날 저녁, 닉은 바버리 워프를 사찰하러 온 동유럽 정치가들을 안내하는 일에 묶여 버렸다.
"그래도 나중에 꼭 가겠소." 그가 지나에게 말하자 지나는 상냥하게 비꼬았다.
"저런, 부디 파티는 잊으세요. 당신이 얼마나 바쁜지 아는 걸요."
닉의 잿빛 눈동자가 위협을 보냈다. "꼭 갈 테니 걱정 말라구."
하지만 지나는 걱정이 되었다. 닉을 말리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거기에는 데모트 경과 짜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데에 대한 죄책감 탓도 있을 것이다. 고민 때문에 요즘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몰리를 위해서라도 억지로 명랑한 척해야 한다.
밸러리한테는 맥이 올 시간 15분 전에 몰리와 아기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런데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교통이 혼잡해지는 바람이 맥이 먼저 오고 말았다.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되길, 지나. 트리에 매달린 요정 같군!" 맥이 지나에게 키스하며 말했다.
"하긴 반짝반짝하는 기분이에요!" 지나는 파티 분위기를 위해 황금빛 실크 드레스를 입었다.
"잘 어울리는 옷이요, 그리고 이것도 어울렸으면 좋겠군." 맥이 황금빛 띠가 달린 작은 상자를 꺼냈다.
"맥, 이런 거 바라지 않았는데!"
"향수뿐인데 뭘."
"하지만 난 당신 선물은 마련하지 못했어요!"
"난 벌써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았소."
지나가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맥! 테스트 결과가 나왔군요!"
맥이 상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아이를 낳을 능력이 있나 봐요."
"저런, 맥! 근사해요! 정말 잘됐어요!"
"고맙소." 맥이 말했다. "당신 덕분이지. 당신은 정말 천사요."
그녀는 웃다가 정색을 했다. "하지만 맥, 왜 전에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진단을 들었죠?"
"테스트 결과를 잘 못 읽었을 수 있다는 거요. 테스트할 때 내 신체 컨디션에 따라 정자수가 다르게 나올 수도 있고."
지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몰리한테 그 이야기를 했나요?"
맥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맙소사, 내가 무슨 얼굴로 말하겠소, 지나? 내가 그렇게 비열하게 굴었으니 그녀는 지금도 날 미워하고 있을 텐데. 미훠한다 해도 그녀 탓을 할 수는 없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만나고는 싶어요?"
맥이 신음소리를 냈다. "간절히 만나고 싶소! 하지만 어떻게?"
"아직 아기도 못 보았죠?"
맥의 눈이 젖어들었다. "그래요. 내가 사과하고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하면 혹시..., 그녀가 아기를 보여 주는 정도는 하지 않을까, 어때요, 지나?"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닉 캐스피언이겠지?" 맥이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난 꼼짝없이 엎드려 기어야겠군. 그 전에 한잔 해야겠소." 그러고는 술이 놓인 탁자로 몸을 돌렸다.
지나는 향수병을 든 채 문으로 갔다. 닉이 온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문 밖에는 밸러리가 서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묻는 얼굴을 했다. "별 이상 없어요?"
지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시켰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몰리와 아기에게 미소를 보냈다. 아기는 흰 방한복 모자에 묻혀 반쯤 잠들어 있었다.
"이 날씨에 와줘서 고마워요." 지나가 인사했다. "자, 들어와서 코트를 벗어요. 그동안 내가 아기 좀 안아 보게!"
몰리가 아기를 건네자 지나는 아기 안는 일이 익숙지 않아서 어색하게 안았다. 그녀는 홀리 듯 분홍빛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푸른 눈이 잠으로 감겨 있다. 얼굴 생김새만 보기에는 몰리도 맥도 닮지 않은 것 같았다. 문득 아기가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는 바람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귀여워!" 지나는 몸속에서 본능이 꿈틀댔다. 자신이 아이를 원한다는 것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아기를 안고 있으니 그 갈망이 되살아났다.
밸러리가 몰리의 코트 벗는 일을 도왔다.
"눈 속에서 오는 길이 힘들었죠?" 지나가 여전히 아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중에 차로 데려다 줄 테니 걱정 말아요. 아직 부모님하고 살고 있어요?"
몰리가 검은 머리를 빗어넘겼다. "네, 내가 일하는 동안 어머니가 데어드르를 보살펴 주시죠. 부모님이 정말 잘해주셨어요." 그러다가 응접실에서 맥이 나오는 것을 보자 안색이 창백해지며 떨리는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오..., 이런...." 그녀는 밸러리에게 비난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어떻게 이런 일을? 당신을 믿었는데! 이럴 권리는 없어요... 미리 말했어야죠. 말했으면 오지 않았을 거예요!"
맥은 위스키 잔을 들고 있다가 천천히 탁자에 놓았다. "당신 말을 믿어."
쉰 듯한 맥의 목소리에 몰리는 믿어지지 안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제야 뭔가 그의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다. 그는 수줍게 애원하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가요?" 그녀가 속삭였다.
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몰랐으니까. 우리 둘 다 함정에 빠졌소."
"그게 좋을 것 같았어요." 지나가 말했지만 맥과 몰리는 쳐다보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느라 바빴다.
"당신한테 만나 달라고 말할 용기를 짜내던 중이었소." 맥이 말했다.
"그랬나요? 뭣 때문에요?" 몰리의 뺨이 붉어졌다.
"난... 오, 몰리, 정말 미안해...."
"참, 우린 주방 일을 할 것이 있어서 실례할게요." 지나가 말하며 아기를 내밀자 몰리가 받았다. 아기 모자가 벗겨지면 검은 고수머리며 작은 얼굴,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맥은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아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지나와 밸러리는 주방으로 사라져 얼른 라디오의 음악방송을 틀었다. 그러고 나서 커피를 마시며 밸러리에게 맥의 이야기를 모두 전했다.
"내 일자리만은 안전하게 되었군요!" 밸러리의 말에 지나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중요한 것은 몰리와 아기 일이 잘 되었다는 거지."
밸러리가 싱긋 웃었다. "당신은 집세 걱정 안 하고 사니까 그런 소리를 하죠. 우리처럼 일하는 여자들은 현실적이어야 한다구요. 난 몰리를 위해 싸워 주었어요, 잊지 말라구요. 하지만 한편으로 내 일자리도 지키고 싶었어요."
"미안, 밸이 몰리를 좋아하는걸 알아." 지나가 사과했다. 한때 그녀는 밸러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요 몇 달간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다. 밸러리는 끝내 몰리를 옹호하고 기사를 취소하지 않았다. 취소는 곧 몰리가 거짓말을 했다는 의미이므로. 결국은 그녀가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맥이 아기를 보았을 때 어떤 표정이더라고 기브한테 말해 주소 싶어 죽을 지경이에요!" 밸러리가 흥분했다. "맥이 고소를 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밤 사보이 호텔에서 기브와 축하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거든요."
"멋지겠네!"
두 사람은 한참 주방에 있다가 지나가 우선 밖으로 나와 보았다. 맥과 모리는 긴 의자에 말없이 바싹 앉아 있었다. 몰리는 맥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고 아기는 맥의 팔에 안겨 있었다.
지나가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발끝으로 걸어 주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맥이 돌아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아, 나왔어요?"
"다 잘되었죠?" 지나가 물었다.
몰리도 돌아보았다. 그녀는 내내 운 얼굴이었고 지금도 울 듯한 표정이다. "이젠 다 잘되었어요." 쉰 목소리였다.
"두 사람을 위해 정말 기뻐요!" 지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배러리도 미소를 지으며 오르되브르 접시를 들고 나왔다. 지나가 토렐리 식당에서 주문한 것이다.
"파티 시간이에요!" 밸러리가 소리쳤다. "두 사람 다 한잔도 안 했네. 맥, 아기는 엄마한테 넘겨주고 샴페인을 따라요!"
맥과 몰리는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맥이 아기를 안은 채 일어섰다. "미안해요, 지나... 두 분께 정말 고맙지만 우리 지금 단둘이 우리 장래를 의논하고 싶어서요...지금 가도 괜잖을까요? 파티를 망치는 셈인가요? 하지만 다른 손님들이 곧 오겠죠?"
"그럼요." 지나가 말했다. "금방와요. 그러니 두 사람이 떠나도 상관없어요. 이해하니까. 안 그래, 벨? 자, 얼른가요. 차 가져왔죠, 맥?"
"아래층에 세워 두었어요. 고마워요, 지나. 당시은 정말 크리스마스 요정 역할을 해주었어요..."
몰리는 입술을 떨며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밸러리가 그녀의 코트를 입혀 주자 맥이 몰리를 감싸 안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가버리자 밸러리가 쓴 미소를 떠올리며 지나를 바라보았다. "기록적으로 짧은 파티군요! 하지만 두 사람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니 기뻐요. 몰리는 제정이 아니더라구요."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저런, 지나. 이 음식이며 샴페인을 어떻게 하죠? 내가 남아서 다 해치우고 싶지만..., 나마저 가서 어떡하죠? 눈 내리는 모양이 심상치 않아요. 기브를 만나기로 했는데 길에 눈이 쌓였으면 얼마나 걸려야 약속장소에 도착할지 몰라요."
"물론 괜찮고말고." 지나가 안심시켰다. 잠시 후 그녀는 아파트에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되었다.
시계를 보니 7시 30분이 다 되었다. 닉이 올까? 바버리 워프에 또 무슨 일이 생겼을까? 혹시 너무 늦게 나오는 바람에 이곳에서 약속을 잊고 다른 데로 저녁 먹으러 간 것은 아닐까?
그녀는 작은 접시에 오르되브르를 덜고 오렌지 주스와 함께 들고 벽난로 앞의 양탄자에 앉았다. 혼자만의 파티를 즐겨야겠다.
그때 막 초인종이 울렸다. 지나는 긴장하여 일어섰다.
"늦어서 미안하오." 닉이 말하며 잿빛 눈동자로 그녀의 황금빛 실크 드레스를 천천히 훑었다.
"너무 늦었어요, 미안하지만." 그녀는 그의 앞길을 막았다. "파티는 끝났어요. 모두들 갔으니까."
닉은 그녀의 어깨 뒤를 넘겨다보았다. "저기 보이는 것이 샴페인이오? 딱 안성맞춤이군." 그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러 옆으로 밀며 등 뒤에서 문을 닫았다.
"닉, 언제 다음 날 오면...." 지나가 말하자 닉이 싱긋 웃었다.
"그래, 지나, 언제 다음 날 뭐지?"
지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닉은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오늘 길이 쉽지 않았소. 꼭 수프 속을 헤치고 오는 것 같더군. 눈이 너무 지독해서 윈도브러시도 간신히 작동했지." 그는 얼음을 채워 둔 샴페인을 꺼내 익숙하게 마개를 땄다.
지나가 잔 2개를 내밀자 거기에 샴페인을 따라 하나를 받아들었다. "그리, 무엇을 위해 건배하지?"
"몰리, 맥, 그리고 아기를 위해서요." 지나가 제안하자 두 사람은 잔을 들어 마셨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요." 닉은 벽난로 앞 의자에 앉았다. "참, 그보다 저 음식을 좀 덜어 줘요. 캐스피언 인터내셔널의 회계장부를 보느라 점심도 걸렀소."
지나는 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었다. 닉이 접시를 보고 씩 웃었다.
"이걸 다 먹으면 저녁은 필요 없겠군?"
"배고프다면서요!"
지나가 양탄자에 앉자 닉은 잔에 다시 샴페인을 따랐다. "자, 맥 캐머런과 그 아가씨 이야기 해줘요."
지나는 입에 든 음식을 우물거리며 이야기를 했다. 둘은 샴페인을 마셨다. 창밖으로는 눈발이 날렸고, 런던은 눈더미 속에 가라앉고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겠군요." 이윽고 지나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재미있겠어요."
"당신은 크리스마스에 뭘 할 거요?" 닉이 그녀의 쭉 뻗은 몸매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나는 그의 시선을 느끼자 입 안이 말라 왔다. 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을 감추려고 얼른 말을 주워댔다.
"로즈와 대니얼과 같이 지내기로 했어요. 데스는 내일 도착하고, 아이레나와 에스테반은 23일에 온대요. 진짜 가족끼리만 크리스마스를 즐길 거예요."
그녀가 음식 남은 것을 주워 모아 주방으로 가자 닉이 일어나서 도왔다. 응접실이 정리되자 닉이 마지막 남은 샴페인을 잔에 따랐다.
"아뇨, 난 됐어요." 지나가 말했다. "당신은요? 크리마스 계획이 어떻죠?"
"우리 어머니가 날 보러 이리로 오실 예정이었지만 이 날씨에는 내가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것이 더 좋겠지." 그는 무거운 목소리였다. "유감이야, 어머니가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셨는데."
지나는 얼굴을 붉혔다. "나도 어머니를 뵙고 싶어요."
닉은 긴장한 얼굴로 벽난로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럼 나하고 같이 가요. 지나 로즈가 당신을 초대한 건 알지만 그 사람들은 가족끼리 모이는 거니까 당신이 없어도 그다지 아쉽지 않을 거요." 그는 크데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난 안 그렇소."
지나는 눈썹을 내리깔았다. 몸이 굳어졌다.
"당신이 크리스마스에 나와 함께 있기 바라, 지나."
"안 돼요.. 로즈가 벌써 준비를... ."
"왜 안 되겠소. 로즈도 이해할 거요."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독차지하고 싶으실 거예요. 당신을 별로 못 보시잖아요."
"어머니도 당신과 함께 오라고 했소. 당신을 다시 보고 싶어 하셔. 지나, 햇살 속에 며칠 지내고 싶지 않소?"
그녀는 정말 가고 싶었다. 크리스마스에 닉과 함께 있고 싶고 그의 어머니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다. 하지만 그 유혹에 져서는 안 된다. 닉이 지금처럼 웃을 때면 온 몸이 녹아 버린다. 하지만 닉이 대단한 수완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에도 속이고 거짓말을 했으니 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를 사랑하는 것은 멍청한 여자만이 할 짓이다. 그와 같은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것은 너무 위험한 모험이다.
"아뇨." 그녀는 딱딱하게 말했다. "난 갈 수 없어요, 미안하지만."
그의 얼구링 굳어지고 눈빛이 얼음장 같았다. "지옥에나 가라구!" 그가 소리치며 일어났다. 순간 그녀는 겁이 났지만 닉은 성큼성큼 나가 현관문을 꽝 닫았다.
10장
그 주일 내내 소피는 가이에게 해리엇 리지웨이 이야기를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용기가 꺾였다. 그들은 요즘 톰 버니가 이스트 엔드 가에서 벌이는 갱단의 범죄에 대해 쓴 연속기사가 소송으로 번지는 바람에 바빴다. 톰은 마약, 살인 등으로 얽힌 이들 범죄단을 다루면서 범죄 패밀리들의 족보까지 파헤쳤다.
기사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특히나 <센티널> 같은 오랜 가족용 신문에서 그런 기사를 다루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전과기록은 없으면서도 기사에 이름이 언급된 패밀리들은 <센티널>을 고소하겠다고 위협해 왔고, 가이는 이들과 법정 밖에서 타협을 보느냐 아니면 고소에 맞서느냐 결정을 내려야 했다.
크리스마스이브까지 소피는 톰이 준 기사 배경 자료를 타이프 치느라 바빴다.
"집에 갖고 가서 크리스마스에 자세히 검토해 보지." 가이는 소피가 넘겨주는 서류를 받으며 말했다.
"크리스마스를 어디서 보내실 거죠?"
"라이체스터셔에 있는 우리 식구들 하고 보낼 거요." 그는 서류를 넘기며 무심히 말했다.
소피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다. 해리엇은 가이가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게 사실일까?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녀하고 약혼한 척하고 있었을까? 해리엇은 그렇지 않지만 가이는 혹시 그녀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럼 배러리는? 소피는 기브의 약혼식날 밤, 가이가 밸러리를 사랑한다던 말을 떠올리고 눈빛이 어두워졌다. 설마 해리엇과 밸러리를 둘 다 사랑할 리는 없을 텐데.
가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 서류 정말 기막히군! 톰은 어디서 이걸 얻었을까?"
"경창 기록이 대부분이죠." 소피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알 수 없는 남자다. 얼굴은 차갑고 정돈되어 있지만 그의 감정만큼은 복잡한 수수께끼 같다.
"이건 그 정도가 아닌데!" 가이가 말했다. "직접 인용은 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그에게 털어놓은 것이 분명해."
"그 사람은 범죄자들을 많이 아는 것 같아요." 소피는 안드레아스 생각을 떠올렸다. 안드레아스 역시 직업상 범죄자들을 많이 알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녀가 보기엔 그들과 찬구 괸계로 지내는 듯싶다. 해리엇이 아버지가 그를 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이를 사위로 원한다. 가이는 부유한 가문의 신망 있는 남자니까. 소피는 자신의 묘한 이국인 가족들을 생각하며 한숨을 지었다. 물론 가족들을 사랑하긴 하지만 가이의 가문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
밸러리 역시 어울린다고는 볼 수 없다. 가이는 정말 밸러리를 사랑했을까? 소피 자신은 또 어떨까?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기브의 약혼식날 밤의 일은 떠올리기도 싫다. 하지만 의문을 풀어야 한다. 가이를 이해하고 그의 행동에 숨겨진 뜻을 알고 싶다.
머릿속에서 조소가 날아왔다. 무슨 농담이야! 그의 동기는 뻔해. 난 그날 화가 나 있었고, 가이는 그것을 이용해 날 침대로 끌어들이려 한 것뿐이야. 기회주의자, 악당 같으니?
그는 죄책감도 없는 것 같았다. 아미 그런 상황에서는 남자들은 대부분 같은 행동을 하리라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는지도 모른다. 친절하게 그녀를 위로하려 했을 뿐이라고. 고맙기도 하지! 그리고 사실 그녀 자신도 그런 그에게 저항하지 않았잖은가.
그날 밤 자신은 분명 그를 원했다. 그가 매력적이라고 평소부터 생각해 왔다. 기브 콜링우드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가이를 원했던 셈이다.
난 왜 엉뚱한 남자를 사랑하는 걸까? 그녀는 몸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무슨 수로 가이를 이해한다고.
다시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그녀는 실망했다. 호텔 앞 광장 위로 눈발이 날렸다.
가이가 다가와 창 밖을 보았다. "망할 또 눈이군! 길이 얼어붙을 거야. 오늘밤 부모님 집까지 가려면 길이 먼데."
"일찍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안 돼요. 닉 캐스피언이 떠나기 전에 의논할 일이 있거든. 그의 비행기가 4시 전에 떠나는데 지금 점심 중이니까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오."
"그분은 크리스마스에 어딜 가죠?"
"샌프란시스코요." 가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눈 때문에 공항이 모두 폐쇄되지 않는다면 말이지만. 이 눈이 계속되면 나도 내 집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엔 없소." 그는 그녀를 힐끗 보며 조소의 눈빛을 했다. "당신이 당신의 가족 파티에 초대하면 모르지만."
소피는 맥박이 빨라졌다. "편한 크리스마스는 못 될 거예요. 우리 식구는 묘한 사람들의 집합체거든요."
"당신처럼?"
"그래요!"
그녀는 그와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었다. 그 생각을 하면 기뻐서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식구들이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뻔하다. 전에는 크리스마스에 남자를 데려간 적이 없기 때문에, 식구들은 그녀가 가이를 소개하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결혼식 준비를 서두를 것이다.
그녀는 불안하게 그를 훔쳐보았다. "식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요전 날 해리엇 리지웨이를 만났어요."
가이는 놀라 몸이 굳어지는 기색이다. "해리엇을? 어디서 만났소?"
가이의 차가운 눈빛이 딱딱해졌다. "그런데 당신도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단 말인가? 아직도 그를 만나고 있소? 청하는 남자마자 데이트하면서 그를 잊으려 노력하는 줄 알았는데 소용없었나? 맙소사, 소피, 자존심은 어디로 갔소? 그는 지금 다른 여자의 남자란 말이오."
"난 데이트한 것이 아니에요!" 그녀가 쏘아댔다. "쇼핑을 하고 있다가 우연히 들른 식당에 그들이 있었어요. 기브가 소개시켰죠. 해리엇은 내가 당신 비서인 것을 알고 당신한테 말해 달라고....."
가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뭘 말해 달라는 거지?"
소피는 눈길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결혼하고 싶은데 당신이..., 그녀의 아버지는 당신과 결혼시키고 싶어 하지만 그건 가짜 약혼일 뿐이었다고...."
"그랬지." 가이가 대꾸했다. "우리는 몇 달 데이트를 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지레짐작으로 결혼이 다 된 거라고 생각한 거요. 어쩌다 보니 약혼까지 이르렀소. 하지만 반지는 사지 않았고 날짜도 잡지 않았지. 우리는 둘 다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거요. 경력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것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이오. 어쨌든 우리는 둘 다 바쁘다 보니 멀어지게 되었고 약혼도 깨진 거나 다름없지만 해리엇은 두려워서 아버지에게 말할 수가 없었소."
"지금도 두려워해요. 다른 사람하고 결혼한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어요."
"그런가? 누구?" 가이는 놀란 얼굴이었다. 상처를 입었나? 소피는 그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가이가 정말로 해리엇을 좋아한 것을 알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맙소사, 설마 해리엇도 기브한테 빠진 것은 아니겠지? 이웃지간이라 만날 일이 많다는 것은 알지만...."
"그럴 리가요!" 소피가 쏘아붙였다. "그녀는 안드레아스 커크와 결혼하려 해요."
폭풍 직전 같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가이가 화난 음성을 터뜨렸다. "농담으로 하는 소리요?"
"소리 지르지 말아요!" 소피가 더듬거렸다. 가이가 이런 모습일 때는 정말 겁이 났다. "농담이 아니에요!"
"아, 그래? 그렇다면 그자는 왜 당신하고 데이트했지?"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 사람은 당신에 대해 궁금해했어요."
가이가 요란하게 웃었다. "또 농담!"
"난 그 사람이 무슨 꿍꿍이속이 있다고 눈치 챘어요." 소피가 대꾸했다. "자꾸만 당시 s이야기를 묻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 수 없었죠. 그때는 해리엇 리지웨이라는 여자도 몰랐고, 당신하고 관련 있는 여자라는 것도 몰랐으니 당연하죠."
"헤리엇은 어떻게 그자를 만났답디까?" 가이가 이마를 찡그렸다. "그자는 그녀한테 어울리는 타입이 아닌데. 리지웨이 판사 타입도 아니고. 그는 노발대발할 거요. 해리엇이 미친 거지."
"난 그녀를 동정해요." 소피가 말했다. "왜 그녀가 아버지 맘에 드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야 하죠? 리지웨이 판사는 구식이에요."
"하긴." 가이가 맞장구쳤다. "하지만 조만간 안드레아스와의 결혼을 알려야 하잖소. 그랬다간 그는 심장마비가 올지도 몰라요."
소피는 심호흡을 했다. "헤리엇도 그걸 알고 있어서 당신에게 말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내가?"
"네. 이해할 만하잖아요. 그녀 아버지는 당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니까 대신 설득해 달라는 거예요. 당신이 그에게 해리엇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약혼은 끝났다고 말하면, 안드레아스를 받아들이기가 더 쉬우리라고 생각하나 봐요."
"리지웨이 씨는 이 세상 모든 남자의 씨가 마른다 해도 그자와는 결혼시키지 않을 거요! 그자를 미워하거든. 그자와 재판에서 맞붙으면 신문이 떠들 정도로 요란하게 싸우곤 하지. 리지웨이 씨는 그자 꼬락서니만 봐도 못 참는 성미요."
"저런!"
가이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후에 일단 이야기를 해보지. 그분이하고 많은 사람 중에 안드레아스 커크를 사위로 맞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얼굴을 할지 빨리 보리 싶은걸!"
소피가 쿡쿡 웃었다. "부디 좀 설득해 줘요. 당신은 사람들한테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하도록 설득하는 데 능하잖아요?"
"그런가?"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긴장했다. "하지만 운없게도 당신만은 내가 바라는 대로 설득하지 못했는 걸?"
소피는 시계를 보며 얼른 중얼거렸다. "자, 내 일은 끝마쳤으니 가도 될까요? 마지막으로 선물 살 일이 있고 집으로 가서 준비해야 할 것도 있거든요. 오늘밤 식구들이 들이닥칠 건데 아직 준비가 덜 되었어요. 데어 외삼촌은 미덥지가 못해서...."
"왜 그렇게 횡설수설이지, 소피?" 가이가 차분하고 위험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뭐가 불안한가?"
"당신도 몇 시간 있다 친척들이 들이닥칠 처지면 불안해할 걸요!"
"좋아. 그럼 가요." 가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고."
소피는 코트를 입고 크리스마스 선물이 가득한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당신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그녀가 머뭇거렸다. "고속도로 운전 조심하시구요."
가이가 한걸음 다가섰다. 그때 전화 벨이 울리는 바람에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수화기를 집었다.
소피는 쇼핑백에서 은색 호일로 싼 선물을 꺼내 가이의 책상 위에 놓고 그가 집어 들기 전에 얼른 도망쳐 나왔다.
그날 저녁 7시가 막 지났을 때, 그녀는 주방에서 다진 고기 파이를 손질하고 있었다. 데오 외삼촌이 계단 밑 포도주 저장고에서 나오며, 헝가리 산 포도주 병을 팔 안에 잔뜩 낀 채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 불운하게 도 외삼촌의 고용이 바이올렛이 강아지 스타니슬라우스를 뒤쫓아 주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데오 외삼촌은 강아지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소피에게 넘어졌지만, 소피는 고기 파이에 몸을 박아 파이를 망쳐 버렸다. 그래도 데오 외삼촌이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는 소피의 얼굴과 머리에 덮인 다진 고기며 밀가루 반죽을 보고 웃기 시작했다.
"아이구, 네 꼴 좀 봐라!" 하며 배꼽을 쥐다 웃음을 멈추었다. 외삼촌도 소피도 심각한 사태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방은 바닥에 깨진 병조각과 포도주로 난장판이었다. 개는 의자 밑에 숨어 낑낑거렸고, 고양이는 주방 찬장 위에 올라앉아 엉망진창인 방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소피와 외삼촌은 함께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 안 돼...."
그때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신음했다.
"모두들 왔나 봐!" 외삼촌이 외쳤다. "그런데 이 난장판을..., 어쩜 좋단 말이냐!"
초인종이 더 요란하게 울렸다.
"가요, 가!" 외삼촌이 외치며 나갔다.
소피는 머리에서 다진 고기조각들을 떼어내고 얼굴을 닦을 종이행주를 찾으러 갔다. 그때 뒤에서 가이의 목소리가 드리는 바람에 그녀는 혼비백산하며 돌아섰다.
가이가 주방으로 들어오더니 입을 딱 벌렸다.
"무슨 일로 온 거죠?" 소피는 난장판인 주방을 둘러보며 가이에게 외쳤다.
"진짜 궁금한 건 당신이야말로 이게 무슨 일이요?"
데오 외삼촌이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사고였다오. 내가 개한테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뭐, 개의치 말아요. 그건 그렇고 크리스마스이브에 포도주를 어디 가서 얻는단 말이오. 내 단골가게는 5시에 문을 닫았고. 이게 전부 5병이오. 끔찍하지 않소?"
"그렇군요." 가이가 의자 밑의 개를 보았다. "그런데 개가 술을 마신 거 알고 계셨나요?"
외삼촌이 들여다보자 개는 의자 맡으로 흘러든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만두지 못해, 이 지겨운 녀석아!" 외삼촌은 빗자루를 집어 개를 쫓아 응접실로 달려 나가게 하고 문을 닫았다.
소피는 가이에게서 들을 돌리고 종이행주로 얼른 얼굴을 닦았다. 왜 하필 이런 꼴일 때 온 걸까?
"나 때문에 닦을 것 없어요." 가이가 놀렸다. " 그 얼굴이 좋은걸 . 무척 먹음직해."
소피는 위험을 파려 대꾸했다. "왜 온 건지 아직 말 안 했어요."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되라고 인사하러 왔겠지!" 외삼촌이 말하며 소피를 책망하듯 보았다. "스크루지처럼 굴지 말아라, 소피."
가이가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답니다. 하지만 이 폭설 속에 운전하는 모험은 하지 않기로 했지요. 경찰들이 불필요한 여행은 하지 말라면서 고속도로 사고를 경고하더군요. 결국 올해는 저 혼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기로 했답니다. 내일 아침에 식구들한테 전화를 넣으면 되지요."
외삼촌의 눈동자에 금세 물기가 어렸다. "크리스마스를 혼자? 안 돼,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안 그러냐, 소피?"
가이는 소피의 반항 어린 눈동자를 읽었다.
"아, 전 괜찮습니다.." 가이가 외삼촌을 향해 말했다. "냉장고에 냉동 치킨이 있으니까요. 그럭저럭 버틸 겁니다. 일할 것도 많고."
데오 외삼촌은 여전히 시치미 떼고 있는 소피를 비난하듯 바라보았다. 가이는 자기가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녹색 리본이 묶인 네모난 선물상자였다.
"아 참, 이건 당신 거요, 소피." 그는 상자를 소피에게 내밀었다. "난 이제 가야겠소. 길이 얼어붙기 전에."
데오 외삼촌이 그의 어깨를 잽싸게 감싸 안았다. "가긴 어딜 가나. 여기 묵게. 방은 많으니까. 음식도 충분하고." 그가 돌아서서 소피를 노려보았다. "묶으시라고 어서 말해, 소피."
소피는 주저하며 말했다. "그래요, 여기 묵으세요, 가이."
가이가 활짝 웃었다. "글쎄, 당신이 장말 있으란다면...."
소피는 화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데오 외삼촌은 아무 눈치도 없었다. 그러고는 싱크대 밑에서 양동이와 빗자루를 꺼냈다.
"다른 사람들 오기 전에 빨리 치워야겠어! 아 참, 난 빨리 가서 포도주를 구해야지. 그런데 어디다 전화를 한다? 아, 그래, 페렝! 페렝한테 물어 봐야겠어! 그 친구 포도주 저장실이 근사하거든." 그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가이를 보았다. "실례하네, 전화를 해야 해."
그가 방에서 나가자, 가이는 코트와 상의를 벗고 넥타이를 끄른 뒤 셔츠 소매를 올렸다. 그러고는 소피가 놀랑 정도로 능숙하게 방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소피는 싱크대에서 얼굴을 씻고는 거울을 보며 마지막 남은 고기조각을 머리에서 떼어냈다. "일부러 온 거죠, 그렇죠?" 그녀는 가이을 향해 쏘아붙였다.
가이는 무릎을 굽히고 깨진 병조각을 조심스레 양동이에 넣고 있었다. "선물을 줘야 해서 말이오."
"나중에 줘도 되잖아요."
"날더러 무슨 말을 하나는 거지?" 가이가 물었다. "당신이 보고 싶어서 온 거라는 말? 그래, 당신이 보고 싶었소. 1주일 가까이나 못 본다는 생각에 미칠 것 같지 않았으면 그냥 위험을 무릎 쓰고 부모님 집으로 차를 달렸을 거요."
소피는 몸이 얼어붙었다. 놀라 귀가 멍멍했다. 가이는 여전히 바닥에서 깨진 유리조각을 찾고 있다.
가이가 마침내 말했어. 소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로 말하고 말았어. 하지만 진심일까?
가이는 깨진 유리를 다 치우고 포도주를 훔친 뒤 빗자루로 쓸었다.
"당신을 사랑해." 가이가 거칠게 말했다.
"진심이 아니면 말하지도 말아요!" 소피는 떨면서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 가이가 다시 말했다. 그 눈길에 그녀는 머리가 핑핑 돌았다.
빗자루가 바닥에 떨어지고 가이의 팔이 그녀를 당겨 안았다. 그가 고개를 내려오더니 그녀의 입술을 찾아 굶주린 듯 키스했다. 소피는 눈이 감기고 잠시 항복하며 그에게 키스를 보냈다.
하지만 그를 믿을 수 없다. 무슨 수로 믿을까? 그녀는 몸을 틀어 빠져나가려 했다.
"당신이 사랑이 뭔지나 알아요?" 그녀는 화가 나 소리 쳤다. "처음에 난 당신이 밸러리를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당신 입으로 그랬으니까! 그러면서도 당신은 날 침대로 끌어들이려 했어요! 그런 뒤에 또 해리엇의 일을 알았어요! 당신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가이는 여전히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야, 소피...."
그녀는 신음소리를 냈다. "거짓말 말아요!"
"진실이오. 해리엇과는 그저 장난이었소. 학생 때니까 시험 중간중간에 만나 그냥 재미있게 보냈지. 내 날이 믿어지지 않으면 그녀에게 물어 봐요. 문제"는 그녀의 아버지가 우리 집안 재산을 보고 나와 결혼시키려 한 거지. 하지만 그녀가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것 이사으로 나 역시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없었소."
그녀는 딱딱하게 물었다. "그럼 밸러리는요?"
"밸러리!"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맬러리는 데이트하기 좋은 상대요. 매우 섹시해서 같이 있으면 남자들이 모두 날 질투의 눈초리로 보지. 하지만 난 그녀 역시 사랑하지 않았소. 좋아하긴 했지. 그래, 그녀가 보기보다 훨씬 단정하고 딱딱한 여자가 아니었으면 잠자리도 같이했을 거요. 하지만 밸러리는 소문과 달리 헤픈 여자가 아니야. 아마 기브 콜링우드가 처음일 거요."
소피는 입을 벌렸다. "설마! 그녀 주위엔 남자들이 득실거리잖아요."
"그렇다고 다 꿀을 손에 넣는 것은 아니지." 가이가 딱딱하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날... 그들의 약혼식 날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건 당신 마음이 편해지라고 한 소리요."
"내가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게 아니라 당신이 편해지려고 한 소리겠죠. 날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당신을 원했지." 가이가 똑바른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난 그날 밤 당신한테 뭔가를 깨닫게 하고 싶었어. 당신은 기브 콜링우드를 사랑한 것이 아니야. 그냥 환상일 뿐이었지. 당신은 매력적인 남자를 찾는 것과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었어. 그래서 난 당신을 침대로 끌어드리려 한 거요. 당신이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당신은 기브 못지않게 날 매력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당신이 그걸 인정하게 해야 했지."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인정하긴 뭘 인정해요!"
가이가 뭐라고 신음소리를 내더니 손아귀에 힘을 주어 그녀를 바싹 끌어당겼다. 그녀는 숨도 쉴 수 없었다. 가이의 얼굴은 격한 감정으로 팽팽히 굳어 있었다.
"당신은 그냘 밤 나를 원했어!"
"아뇨, 난... ."
가이의 한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잡고 얼굴을 젖혔다. "그때도 날 원했고 지금도 원해." 가이가 잇새로 내쏘며 그녀의 혼란 가득한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원해..., 원해... ."
그녀는 눈물이 터지려는 눈을 감았다. "당신이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고작 그거죠, 원하는 거...."
가이의 입술이 불붙은 정열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녀의 입술이 열리고 몸을 떨며 항복했다. 그의 손이 목에서 가슴으로, 허리로 미끄러져 가는 것을 느꼈다. 부드러운 애무의 손길에 그녀는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다. 신음소리를 내며 항복해,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정열적으로 키스를 보냈다.
"소피...." 그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신음했다. "당신을 사랑해... 믿어야 하오. 정신없을 만큼 사랑해. 나날이 더해 가서 이제는 당신이 안 보이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눈물이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렸다. 가이가 고개를 들었다. "달링..., 제발 울지 말아요, 소피. 당신이 괴로워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
"괴로운 게 아니에요." 그녀가 흐느꼈다. "행복해서 그러는 거예요, 이 바보." 그녀는 떨리는 미소를 보냈다. "당신을 사랑해요, 가이."
가이가 숨을 죽였다. "오, 맙소사...."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마주쳤다. 그때 데오 외삼촌이 바삐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가이와 소피는 얼굴이 붉어져 얼른 몸을 떼었다. 하지만 외삼촌은 그들은 안중에도 없이 걱정스레 방바닥을 둘러보고는, 거의 깨끗하게 정상으로 돌아온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다 치웠군! 아, 여기가 아직 축축하네... 걸레는 어디 있지? 차가 도착했단다. 네 엄마하고 아버지가 왔어, 소피. 난 이 바닥을 치울 테니 가서 엄마, 아버지 짐 좀 받으렴."
"제가 하죠." 가이가 그녀를 따라 문 밖으로 따라 나왔다. 데오 외삼촌이 안 보이는 곳에 오자 가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 쥐었다. "당신 가족들이 북적대니 크리스마스 동안 단둘이 있을 틈이나 있을까? 날 사랑한다는 말, 발리 다시 해줘요, 문을 열기 전에."
"사랑해요!" 소피가 속삭였다.
"사랑해!" 가이가 말했다. 둘은 초인종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가운데 어두운 복도에서 키스를 했다. 주방에서는 데오 외삼촌이 요란하게 캐럴을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