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E. Hemingway
1
로버트는 사진으로 복사한 군사 지도를 숲의 땅바닥에 펼쳐놓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늙은이는 어깨너머로 들여다보았다. 작달막하고 당차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는 산을 올라 온 뒤여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지고 온 두 개의 묵직한 짐에 한쪽 손을 얹어놓고 쉬는 중이다.
“여기서는 다리를 볼 수가 없겠군요?”
“그렇죠, 숲이 가려 길이 잘 안 보이죠, 저 아래에는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가 있는데 그 골짜기에 다리가 하나 걸려 있지요.”
“기억이 나는군요. 놈들의 초소는 어디 있나요.”
“저기 보이는 제재소에 초소가 하나 있습니다.”
빛바랜 카키색 플란넬 셔츠 주머니에서 망원경을 꺼내 들고 접안렌즈를 이리저리 돌리자 제재소의 나무들이 뚜렷하게 보였다. 회전 톱, 산더미 같은 톱밥이 보이고 한줄기 용수로가 보였다. 망원경 속의 개울은 맑고 깨끗해 보였다.
“보초는 안 보이는데요.”
“지금 저 아래는 더울 테니까, 아마 그늘속에 들어가 있을 겁니다.”
“다음 초소는 어디지요?”
“재(높은 산의 마루를 이룬 곳) 꼭대기에서 5킬로 떨어진 지점에 있는 도로 수리반의 오두막에 있지요.”
“저 제재소에는 몇 명이나 있나요.”
“아마 네 명하고 하사가 한 명 있을 겁니다. 저 아래쪽은 더 많이 있을 겁니다. 알아보지요. 그리고 다리 쪽에는 양쪽에 한 놈씩 늘 둘이 있지요.”
“우리 병력은 얼마나 동원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원하는 대로 동원할 수 있지요. 이 산속에는 사람이 많아요, 백 명이 넘어요. 얼마나 필요하죠?”
“다리를 조사하고 나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폭약을 숨길 장소를 찾아야겠습니다. 되도록 다리에서 30분 이상 걸리지 않는 안전한 장소에 숨기고 싶군요.”
“그거야 간단하지요.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다리까지는 계속 내리받이니까요. 이제부턴 땀깨나 흘리면서 기어 올라가야 하죠.”
“영감님 이름이 뭐죠? 잊어버렸군요.”
“안셀모라 부르오. 바르코 데아빌라가 고향이오 그 짐은 내가 져드리지.”
젊은이는 키가 크고 후리후리하며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햇빛에 비쳐 줄무늬를 이루었다. 가죽 멜빵을 추슬러 올리면서 짐의 무게를 등에 고정시켰다.
“올라갑시다.” 안셀모가 말했다.
오르막은 가파르고 힘들었다. 물줄기가 흘러 떨어지는 듯한 곳에 이르렀을 때 안셀모가 먼저 가서 주의시키고 오겠다고 했다.
“당신 이름이 뭐라고 부르오?”하고 안셀모가 물었다.
“로베르토(로버트의 스페인식 발음),”젊은이가 말했다.
“이 길로 해서 다리로 내려갈 작정인가요?”
“아뇨, 다리는 다른 길로 갑니다. 좀 더 쉬운 길이죠.”
늙은이가 선반처럼 생긴 바위를 오르고 있었다. 여러 번 올랐을 텐데 주의를 했는지 오른 흔적이 없었다.
로버트 조던은 무척 배가 고프고 불안스러웠다. 이렇게 불안을 느낀 적은 없었다. 이 나라에 적의 전선 후방에서의 행동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안셀모란 사람은 훌륭한 안내자였으며 놀랄 만큼 산속을 잘 다녔다. 로버트 조던도 잘 걷는 편이지만 이 늙은이를 따라 다녀본 결과 마냥 따라다니다간 지쳐 죽겠다는 것을 알았다. 두 개의 짐 속엔 충분한 폭약과 장비가 들어 있다. 안셀모가 알려준 다리보다 두 배 이상의 크기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1933년 도보여행을 하면서 이 다리를 건넌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었다. 엊그제 밤엔 골즈 장군이 헤스코리알궁(宮) 밖의 그 집 이 층 방에서 다리에 관한 사항을 읽어주어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다리를 폭파시키는 것만으론 실패야. 다리는 결정된 공격 개시 시간에 입각해서 지정된 바로 그 시각에 폭파해야 한단 말이야. 자네도 그것은 알 만하겠지 그것은 자네의 권한이자 임무 수행의 방법이야.”
로버트 조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또 내가 해야 하는 방법이기도 해, 또한 여기서 우리가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어째서죠. 장군 동지."
“어째서냐고? 그 많은 공격을 보아 오고도 어째서냐고 물어? 내 명령이 변경되지 않는다고 무엇이 보장하나? 어떤 공격이고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있었나?”
“그렇다면 다리는 언제 폭파되어야 합니까?”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공격이 시작된 후에 해야 돼.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곧, 일러도 안돼. 그래야만 증원 부대가 그 길을 올라오지 못할 테니까.”
“그럼 공격은 언제 시작되죠?”
“나중에 알려주지. 하지만 날짜와 시간은 다만 가능성의 표시로서만 염두에 두게, 그때를 위해 준비를 해야 하네. 자넨 공격이 시작된 후에 다리를 폭파하는 거야. 알겠어?” 그는 연필로 가리켰다. “저게 놈들이 증원 부대를 투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탱크와 포를 가져오거나 트럭을 몰고 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말일세. 자네와 동행할 사람은 바로 그 지방에서 왔지. 그 사람들은 산속에 동지들이 있어. 필요한 만큼 동원하게 이런 것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겠지?”
“그런데 공격이 시작됐다는 것을 저는 무엇으로 판단하지요?”
“공격은 사단 규모로 감행돼 예비 조치로 공중포격이 있을 거야 자넨 귀머거리가 아닐 테지?”
“그럼, 비행기가 폭탄을 투하할 때 공격이 시작됐다고 생각해도 좋겠군요?”
“언제나 그렇게 생각할 수야 없지. 그러나 이번 경우는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내 공격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 다리가 폭파되면 어떻게 라그랑하로 진군하시렵니까?”
“우리는 그 재를 급습한 후에 다리를 수리할 준비를 갖추고 진군하게 돼, 그건 매우 복잡하고 멋있는 작전이지. 이 계획은 마드리드에서 세워졌지. 다리만 제거되면 작전은 성공적일 거야, 우린 세고비아를 점령할 수 있단 말이야.”
“전 항상 모르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제가 누설했다는 말은 듣지 않을 테니까요.”
“빨치산(partizan) 임무를 좋아하는 편인가?” 그것은 적 후방의 게릴라 작전을 뜻하는 러시아말이었다.
“아주 좋아합니다. 야외에서 하는 일이라 건강에도 매우 좋습니다.”
의자에 앉아 제도판 위에 지도를 펴놓고 일을 하던 그의 참모 하나가 로버트 조던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불평을 해댔다.
“닥쳐!” 골즈가 영어로 말했다. “하고 싶으면 농담도 할 수 있어. 심각하기 때문에 농담도 하는 거야. 자! 이걸 들고 가게, 알겠나. 응?”
“네. 알겠습니다.”
그들은 악수를 했다. 그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장군에게 경례를 하고 나왔다. 그것이 골즈를 보았던 최후였다. 내일 밤이면 그들은 헤스코리알궁 밖의 도로를 따라 어둠 속을 진군하리라.
로버트 조던은 늙은이가 졸면서 기다리고 있는 참모 차 쪽으로 갔다. 그들은 차를 타고 과다라마를 통과하는 길을 달렸다.
그는 늙은이가 바위를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이 지방에서는 거의 제복처럼 되어버린 검정 웃옷을 입고 카빈을 멘 한 사나이와 같이 내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산양처럼 바위를 기어 내려오고 있었다.
늙은이는 그 사나이에게 머리를 끄덕여 보이고는 미소를 지었다.
“두목이라오. 아주 힘이 센 사람이오.”
“알겠습니다.” 로버트 조던이 말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이 젊은 사나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 신분을 증명할 만한 걸 가지고 있소?” 카빈을 멘 사나이가 물었다.
로버트 조던이 웃옷 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어 그 사나이에게 건네주자. 그는 그것을 들여다보고는 뒤집어보았다.
그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여기 인장이 두 개가 있죠. 하나는 육군 정보기관인 S.I.M. 또 하나는 참모본부의 인장이오.”
“그래, 이런 인장을 본 적이 있어, 하지만 여기선 지휘관이 나밖에 없소. 저 짐 속에는 뭐가 들었소?”
“다이너마이트지요.” 늙은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젯밤에 깜깜한 속에서 전선을 횡단했고 대낮 내내 이 다이너마이트를 산으로 운반해 왔지.”
로버트 조던은 카빈을 멘 두목에게 이름을 물었다.
“내 이름이 당신한테 무슨 상관이야?”
“파블로라 하오.” 늙은이가 말했다. 카빈을 멘 사나이는 그들 두 사람을 못 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알았소. 당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소. 우수한 게릴라 지도자이며, 공화파에 충성스럽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들었소. 참모부로부터 문안을 전해 드리오.”
“저 다이너마이트로는 무엇을 하려는 거요?”
“다리를 폭파할 거요.”
“어떤 다리를?”
“이건 내 일이오. 하지만 함께 상의 할 수는 있소. 짐 운반을 좀 도와주시겠소?”
“안돼.”파블로는 머리를 흔들었다.
늙은이는 갑자기 그에게로 돌아서더니 로버트 조던이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사투리로 빠르고 격렬하게 지껄여댔다.
“난 자네 아비의 일이라면 이것저것 안 해준 게 없어, 자네의 일이라면 이것저것 안 해준 게 없단 말이야. 이 짐들 들어!” 늙은이가 말한 것은 이런 뜻이 포함되었었다.
파블로는 고개를 떨구었다.
“당신이 여길 어지럽힌다면 우린 이 산에서 도망쳐야 할 판이지. 우리가 이 산속에서 살 수 있는 길은 여길 조용히 놔두는 것뿐이야. 그게 여우의 행동 방법이란 말이오.”
“암.” 안셀모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늑대를 잡으려 할 때의 여우의 신조겠지.”
로버트 조던은 파블로가 짐을 들 생각임을 알았다.
“흥······” 안셀모가 그를 쳐다보았다. “나보다 더 사나운 늑대겠지. 내 나이 예순여덟이니.”
“그렇게 나이가 드셨소?”
그 순간의 화해 기미를 알아채고 좀 더 완화 시켜보려고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7월이면 예순여덟이 되지.”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 의문이지만······.” 파블로가 말했다. “당신 짐을 들어드리겠소.” 그가 조던에게 말했다.
“또 하나는 늙은이에게 맡기시오.” 그는 이제 거의 측은할 지경으로 말했다. “굉장히 힘이 센 늙은이라오,”
“그럼 카빈을 내게 주시오.” 파블로가 총을 건네자 그는 등에 걸머졌다.
그들은 힘겹게 바위 꼭대기를 넘어가 푸른 개간지가 보이는 숲속으로 나섰다. 그들은 조그만 목초지 가장자리를 돌아갔다. 풀밭 여기저기에 말을 매어놓았던 말뚝이 보였다. 밤에는 여물을 주기 위해서 말뚝에 매어놓고, 낮에는 숲속에 숨겨둘 것이라고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이 파블로란 자는 대체 말을 몇 마리나 가지고 있는 것일까?
소나무 사이에 줄을 둘러서 만든 말 터의 울타리를 보았다. 울타리 밖에는 안장들이 쌓인 채 방수포로 덮여 있었다.
짐을 진 두 사람은 거기까지 다가가서 멈춰 섰다. 조던은 말을 칭찬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훌륭한 말들이군.” 하고 말하며, 파블로에게 돌아섰다.
울타리 줄 안에는 밤색 말이 세 필, 적갈색과 사슴 가죽 빛의 말이 한 필씩 모두 다섯 마리가 있었다. 파블로와 안셀모는 말들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고 있었다. 파블로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말들을 바라보았다.
“이 말들은 다 노획물이지 우리는 말들이 상하지 않게 놈들을 죽일 수 있었어.”
“당신은 의용군을 많이 죽였소?”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몇 놈 되지. 한데 말을 다치지 않게 죽인 건 이 두 놈뿐이야.”
“아레발로에서 열차를 폭파시킨게 파블로라오.” 안셀모가 말했다.
“폭파 장치를 한 외국인 한 명이 우리들과 함께 있었지. 그를 아시오?” 파블로가 물었다.
“카시킨이로군,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소?”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맞아 카시킨. 지난 4월에 죽었소.”
“누구나 다 그러게 마련이야, 그게 우리의 최후란 말이야.”
파블로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놈들은 아주 강하단 말이야. 당신들은 놈들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고 있어, 그러니 내가 어떻게 앞날을 기대할 수 있겠어. 우리가 이 산을 떠난다면 어디로 간단 말이야? 대답 좀 해보시구려, 이제 어디로 간단 말이야?”
“스페인엔 산이 많아 여길 떠나면 시에라데그레도스산이 있어.” 안셀로가 말했다.
“내겐 소용없어 난 쫓겨 다니기에 지쳤어. 여기 있으면 안전해. 그런데 이제 다리를 폭파시킨다면 우린 달아나야 하겠지. 놈들이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알고 비행기로 정찰한다면 우린 발견되고 말 거야.” 그는 로버트 조던에게 돌아섰다.
“외국인인 당신이 내게로 와서 나더러 이래라저래라할 권리가 있소?”
안셀로의 말이 옳았어. 파블로는 말을 훔치고 부자가 되자마자 인생을 즐기길 원했어.
생각해보면 우수한 놈들은 모두 쾌활해 쾌활하다는 것은 더 나은 일이고. 또 무엇인가를 증명해주는 거란 말야. 자, 이젠 생각을 돌려, 넌 사색가가 아니라 다리를 폭파해야 할 사람이다. 아, 난 배가 고파 죽겠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파블로가 잘 먹고 사는 놈이면 좋겠다.
2
그들은 빽빽한 숲을 지나 조그만 골짜기 끝에 이르렀다. 그들 앞에 나무들 사이로 솟아오른 너럭 바위가 보였다. 그 아래쪽으로 틀림없이 캠프가 있을 것 같은 장소가 있었다.
캠프는 너럭바위 밑에 커다란 천연동굴이 있었다. 곰의 굴처럼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한 사나이가 칼로 막대기를 깎고 있었는데 그들이 다가가자 한 번 쳐다보고 나서 칼질을 계속했다.
“저기 오는 게 누구요?” 그가 물었다.
“폭파 기술자와 늙은이지.” 파블로가 말하며 짐을 동굴 입구 안쪽에 내려놓았다. 안셀모도 내려놓고 로버트 조던도 총을 벗어 바위에 기대 놓았다.
“이봐요.” 집시가 안셀모에게 말했다. “이 짐 두 개를 안전한 장소로 옮겨주시지 않겠소? 귀중한 거니까.”
안셀모는 툴툴거렸다. “술을 가져오겠소.” 그가 로버트 조던에게 말했다. 로버트 조던이 일어나서 짐을 들고 걸어가 동굴에서 떨어져 있는 나무 둥지 양쪽에 하나씩 세워놓았다.
“술은 있소?” 로버트 조던이 집시에게 물었다.
“술이야 많지, 가죽 부대에 가득 있지, 암만 없어도 반 부대는 있을걸.”
“그럼 먹을 건 뭐가 있소?”
“없는 게 없어, 우린 장군들처럼 호화판이지.”
“한데 집시는 전쟁에서 무얼 하오?”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그냥 집시지.”
“그거참 팔자가 좋군.”
“상팔자지. 그런데 사람들이 당신을 뭐라고 부르오?”
“로베르토. 당신은?”
“라파엘.”
빨간 포도주가 가득 들어있는 술 단지를 들고 안셀모가 동굴 입구에서 나왔다.
“봐요. 술잔이고 뭐고 없는 게 없잖소.”
파블로가 그 뒤를 따라 나왔다.
“식사는 곧 될 거요. 담배 있소?”
로버트 조던은 짐 있는 데로 가서 골즈의 사령부에서 얻은 러시아 궐련을 꺼냈다. 파블로는 여섯 개비나 뽑아 들었다. 로버트 조던은 안셀로와 집시에게도 권했다. 집시가 말했다.
“난 이 담배를 알아, 그 이름이 괴상한 사내가 가지고 있었지.”
“카시킨이로군.”
“그렇지 그건 드문 이름이었어.”
“술 드시오?” 안셀모가 단지에서 술을 떠 조던에게 건네고 자기와 집시가 마실 술을 떠냈다.
술은 훌륭했다. 독하지 않고 산뜻한 게 아주 일품이었다. 조던은 천천히 마시면서 술기운이 따뜻하게 지친 몸으로 퍼져가는 것을 느꼈다.
“식사는 곧 올 거요.” 파블로가 말했다.
“아! 식사가 오는군.”
“자넨 식사가 끝나지 않았나?” 파블로가 물었다.
“그래도 난 두 번이라도 더 먹을 수가 있는걸.”
“자, 식사를 날라 오는 사람을 좀 보시우.”
커다란 쇠 쟁반을 든 여자가 동굴 입구로부터 허리를 굽히고 나왔다. 로버트 조던은 모퉁이께서 뒤를 돌아다본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그녀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동지.”
로버트 조던도 “안녕하시오.”라고 인사한 다음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갈색 손을 바라보았다. 피부와 눈은 황금빛깔이 도는 갈색이었다. 그러나 머리는 짧게 깎아서 바다삵(비버과에 속하는 포유류)의 털 정도밖에 안 되는 길이였다.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접시가 없소.” 안셀모가 말했다. “당신 칼로 어떻게 먹어보구려.” 여자는 네 개의 포크 끝을 아래로 해서 쇠 쟁반 한쪽에 기대 놓았다.
그들은 스페인의 관습대로 말없이 쟁반에 담긴 음식을 먹었다. 양파와 풋고추로 요리한 토끼고기였는데 붉은 포도주로 만든 소스에는 이집트 콩이 섞여 있었다. 로버트 조던은 먹으면서 또 술을 한 잔 마셨다. 여자는 식사하는 동안 줄곧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름이 뭐죠?” 그가 물었다. 그의 어조가 갑자기 달라진 것을 알아챈 파블로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일어서 가 버렸다.
“마리아예요, 당신은요?”
“로베르토. 산속에 오래 있었소?”
“석 달 동안요.”
“석 달?” 그는 그녀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면도로 밀어버렸어요. 발라돌리드의 감옥에선 정기적으로 머리를 밀어버려요. 그 사람들이 나를 데리고 남쪽으로 이송 중이었지요. 열차가 폭파된 후에 많은 죄수들이 잡혔지만 난 안 잡혔어요. 난 이 사람들하고 여기로 온 거예요.”
“난 그 여자가 바위틈에 숨어 있는 걸 발견했지.” 집시가 말했다.
“우리가 떠나려 할 때였지, 이봐요, 한데 이 여잔 정말 너무 보기 흉했어. 우리는 이 여잘 데리고 왔지만 몇 번이나 내버려 두고 올 걸 그랬다고 생각했는지 몰라.”
“이 지역을 잘 아세요.” 마리아가 물었다.
“아니, 그렇게 잘은 모르오. 그러나 빨리 알게 될 거요. 내게 좋은 지도가 있고 훌륭한 안내자가 있으니까.”
“이 노인 말이군요. 그분 아주 좋은 분이에요.”
“고마운 말이군.” 안셀모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로버트 조던은 언뜻 그녀와 둘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기가 민망하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은 아주 미인이군.” 그가 마리아에게 말했다. “머리 깎기 전의 당신을 볼 수 있는 행운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소.”
“곧 자랄 거예요. 여섯 달 내에 충분히 자랄 거예요.”
“당신은 누구의 부인입니까? 파블로의 부인인가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더니 깔깔 웃고는 그의 무릎을 찰싹 때렸다.
“파블로의 부인이라구요? 당신은 파블로가 어떤 사나이인지 알고 있잖아요.”
“그럼 라파엘의 부인인가요?”
“라파엘도 아녜요.”
“누구의 것도 아니지, 이 여잔 아주 이상한 여자지,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요리는 잘하지.”
“정말 누구의 것도 아니오?”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누구의 것도 아녜요. 농담도 진담도 아녜요. 당신 것도 아니란 말예요.”
마리아는 그를 쳐다보고 깔깔 웃었다. 그리고는 빈 그릇과 쇠 쟁반을 들고 동굴로 들어갔다.
“당신들은 몇 명이나 되오?”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일곱에 여자 두 명이지. 한 여자는 파블로 마누라지.”
“그럼 그 여잔?”
“동굴에 있지, 그 처녀가 요리를 조금 할 줄 알지. 잘한다고 한 건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야. 대부분 파블로의 마누라를 돕고 있는 편이지.”
“파블로의 마누라는 어떤 여자요?”
“야만적인 구석이 있지.” 집시가 싱긋 웃었다. “아주 거칠고 용감한 여자요, 파블로 보다 백배는 더 용감할걸.”
“파블로도 처음엔 용감했지.” 안셀모가 말했다.
“그는 콜레라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집시가 말했다. “이 운동이 시작될 무렵부터 파블로는 티푸스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죽였어.”
“하지만 오래전부터 기가 죽어버렸지.” 안셀모가 말했다. “그자는 아주 무기력해져 버렸어. 그자는 죽는 걸 아주 두려워하고 있지.”
“게다가 부자가 됐거든.” 안셀모가 말했다. “또 술을 무지하게 마시고, 이젠 투우사처럼 은퇴하고 싶어 하지, 투우사 말야. 그러나 그자는 은퇴할 수 없어.”
“그자가 전선 저쪽으로 가면 놈들은 그의 말을 다 빼앗고 군대에 처넣고 말걸.” 집시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소.”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둘은 동굴에서 잠자고 둘은 총이 있는 데서 감시를 하고 있지. 하나는 저 아래서 보초를 서고 있고. 그자들은 아마 모두 자고 있을걸.”
“어떤 총이지?”
“이름은 잊어버렸어, 기관총 종류야.”
자동소총이 틀림없다고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탄환은 또아리 같은 데서 나오나? 아니면 탄창에선가?”
“총 위에 둥근 쇠깡통이 달렸더군.”
‘뭐야, 그러면 루이스 총이 아닌가.’ 하고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그러면서 로버트 조던은 또 한 잔의 술을 퍼냈다. 조던은 단숨에 들이켰다.
“자, 파블로의 마누라를 보러 갑시다.”
“난 그 여잘 건드리고 싶지 않아.” 라파엘이 말했다. “그 여자는 나를 지독하게 미워하지. 그 여자에게 집시의 피가 섞여 있어.”
“마리아하고는 사이가 좋은가?”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사이가 좋지, 그 여잔 그 처녀를 좋아해. 그래서 누구든 엉뚱한 마음을 먹고 그 처녀에게 접근했다간······.” 그는 머리를 흔들며 혀를 내둘렀다.
“우리가 열차 사건 당시 그 처녀를 데리고 왔을 땐 그 처녀 꼴이 괴상망측했지.” 라파엘이 말했다. “어쩌다 건드리기라도 하면 물에 빠진 강아지처럼 발발 떨곤 했지. 요즘에 와서야 좀 나아진 거지. 우리는 열차에 내버려 두고 올 뻔했어. 그런 추한 여자 때문에 늑장을 부릴 일이 없었거든, 동굴로 올 때 서로 둘러메고 왔지. 적들이 기병대가 없었기 때문에 다행이었지.”
“난 거기 없었거든.” 안셀모가 말했다. “파블로 부대와 귀머거리 영감 부대가 참가했지. 오늘 밤에 그자를 만나기로 했어. 그리고 이 산속의 다른 두 부대가 참가했지. 난 전선 저쪽에 가 있었고.”
“내 평생을 통해, 폭발할 때의 그런 굉장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어. 열차는 차츰차츰 다가오는데. 우리는 멀리서 그걸 봤어. 열차가 점점 크게 보이더군, 그다음 폭발 순간엔 기관차의 앞바퀴들이 튀어 오르고 연기와 폭음 속에 온 땅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어. 그러자 기관총 소리가 탓! 탓! 탓! 탓! 하고 들리기 시작했어. 그들이 반격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빠져나왔지, 머리 위로 기관총알이 날아오더군. 바로 그때 바위틈에 숨어 있는 처녀를 발견한 거야. 밤중까지 우릴 잡으러 헤맨 게 그 군대였어.”
“어지간히 힘들었겠구먼,” 안셀모가 말했다. “조마조마했을걸.”
“우리들이 한 일 중 훌륭했던 건 그것 하나뿐이야.” 굵고 나직한 목소리가 말했다. “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이 게으름뱅이. 술주정뱅이, 바람둥이, 엉뚱한 총각 놈, 집시의 음란한 사기꾼아!”
로버트 조던은 키나 몸집이 파블로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체구를 가진 50세 가량의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크지만 모양 좋은 손을 가지고 있었다. 검고 숱 많은 곱슬머리는 그녀의 머리 위에 한 다발로 말아 올려져 있었다.
“냉큼 가서 위에서 보초 서고 있는 안드레와 교대해.”
“아, 그렇군.” 집시가 말했다. “가야지, 식사 때 만납시다.” 그는 로버트 조던에게 말하고 갔다.
“농담이라도 그런 소린 말라구.” 여자가 집시에게 말했다. “넌 오늘 세 번이나 처먹었단 말야. 냉큼 가서 안드레를 내게로 보내.”
“안녕하슈? 공화국 일도 잘돼가고?” 그녀는 로버트 조던에게 인사하고 손을 내밀며 미소 지었다.
“잘 돼갑니다.” 그는 대답하면서 그녀의 힘센 손을 쥐었다.
“당신도 열차 폭파 일로 오셨수?”
“아니오.” 로버트 조던은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신뢰감을 느끼며 말했다. “이번엔 다리지요.”
“그럼 잘 됐군. 여기 있는 다리를 모조리 폭파시키고 여길 빠져나가자구 난 여기가 아주 싫증이 났어. 여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어.” 파블로의 마누라가 말했다.
“젊은 양반 당신이 와서 기쁘구려.” 그녀는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당신은 보기보단 살이 많이 붙어 있구먼, 훌륭한 체격이야 당신이 와서 매우 기쁘오.”
“나도 기쁘오.”
“그건 그렇고 내 얘기 좀 들어보우 그 처녀에게 잘 좀 대해주고 돌봐주시구려. 마리아 말예요. 그 앤 고생을 많이 했다우. 아시겠수?”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죠.”
“난 그 애가 동굴에 들어와 당신에게 눈길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아이 마음속이 어떤가를 알 수 있었지.”
“그 여자하고 농담을 좀 했지요,”
“그 애는 건강이 매우 나빠요. 지금은 좀 나아진 편이니까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그 여잔 안셀모와 같이 라면 틀림없이 전선을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다리 일이 끝나면 그녀를 데려가지요. 여긴 지금 몇 명이나 있습니까?”
“쓸 만한 건 다섯이지, 집시는 기개는 대단하지만 쓸모가 없다우, 마음은 착한데, 그리고 파블로는 이제 더이상 믿을 수가 없다우.”
“귀머거리 영감에겐 쓸 만한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여덟쯤 될 거야. 오늘 밤에 만나기로 했다우. 그 영감이 이리로 올 거요.”
“그리고 다른 부대는?”
“이번 다리 일은 돈도 안 나오고 노획물도 없지. 또 당신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상당히 위험한 것 같고, 일이 끝나면 이 산에서 어딘가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될거란 말이우. 그러니 이번 다리 일은 반대할 사람이 많을 거요.”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말은 않는 게 좋을 거요. 나는 솔직하게 말하려고 애쓴다우.”
“그럼 내 손금도 솔직히 말해주시죠.”
“안돼.” 그녀는 로버트 조던의 손금에 대하여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럼 안셀모와 내려가 보겠소.”
“안셀모.” 팔베개를 하고 자는 안셀모를 깨웠다. 늙은이가 눈을 뜨고 쳐다보았다.
“알겠습니다. 갑시다.”
3
그들은 나무 그늘 속을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조심스럽게 옮겨가며 마지막 2백 야드를 내려갔다. 이제 50야드밖에 안되는 곳에 다리가 보였다. 그것은 한 교각 사이의 강철 다리였는데 양쪽 끝에 초소가 하나씩 있었다.
햇빛이 로버트 조던의 눈을 부시게 했으므로 다리의 윤곽밖에 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다음 그는 아주 짧은 순간이기는 하지만 환한 빛을 받고 갑자기 확 밝아진 다리를 다시 바라보며 그 구조를 조사했다. 다리를 파괴하는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다리를 바라보면서 그는 윗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재빠르게 스케치했다. 폭약의 양을 계산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나중에 할 것이다. 지금은 교각을 절단하고 그 파편을 골짜기로 쏟아지게 하기에 알맞은 폭약의 장치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가 스케치하는 동안 안셀모는 도로와 다리와 초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안전 지역을 벗어나 다리에 너무 접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케치가 끝나자 상당히 마음이 놓였다.
보초는 대검을 꽂은 소총을 무릎 사이에 세우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로버트 조던은 망원경을 꺼내 들고 조심스레 초점을 맞추었다. 초소 벽에는 낡고 시커멓게 된 가죽 술 부대가 걸려 있었다. 신문지 몇 장이 놓여있고 전화는 안 보였다. 물론 전화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다. 다리가 걸린 골짜기는 거의 대협곡이라 할 만했고 거기에서 개울은 골짜기의 본류와 합류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초소는 어디 있지요?” 로버트 조던이 안셀모에게 물었다.
“저 모퉁이에서 5백 미터쯤 아래쪽에 있지요, 암벽을 뚫고 지은 도로 수선공의 오두막에 말이오.”
“거긴 몇 명이나 됩니까?”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그는 망원경을 들고 다시 초소를 바라보았다. 보초는 초소 벽에 담배를 비벼 끈 다음 주머니에서 가죽 담배쌈지를 꺼내어 꽁초의 종이를 뜯어 내고는 쌈지에다 피우다 남은 담뱃가루를 모조리 털어 넣었다. 그는 기지개를 하며 일어서더니 총을 들어 올려 어깨에다 메고 다리 위로 걸어 나왔다. 로버트 조던은 망원경을 웃옷 주머니에 넣고 소나무 뒤에 머리를 숨겼다.
“하사 하나와 병졸이 일곱 있소.” 안셀모가 그의 귀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집시에게 들어서 알고 있죠.”
“저놈이 안으로 들어가거든 돌아갑시다. 우린 너무 접근했소.”
해가 지자 갑자기 싸늘해졌고, 마지막 햇빛을 받던 저녁놀이 그들 뒤의 산머리로 사라지자 주위는 어두워졌다.
“어떻소?” 안셀모가 속삭이듯 물었다.
“아주 좋습니다.”
“나도 기쁘오. 가시겠수 이제 놈들에게 들킬 염려는 없죠.”
바로 그때 둔한 소음이 들려오자 보초가 위를 쳐다보는 게 보였다. 그들도 시선을 돌려 위를 쳐다보았다. 저녁 하늘 높이 세대의 단발비행기가 V자형의 편대를 짓고 날아가고 있었다. 아직 저녁놀이 가시지 않은 하늘에 엔진을 으르릉거리며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조그만 은빛 기체를 남기며 날아갔다.
“우리 편이오?” 안셀모가 물었다.
“그런 것 같은데요.” 로버트 조던은 이렇게 말했지만 그런 고도라면 누구도 확실히 알아볼 수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어느 쪽의 비행기든 저녁 정찰임에는 틀림없었다.
안셀모도 분명히 똑같이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우리 편이군. 알아보겠는데. 저건 모스카야.”
“맞았소, 내게도 모스카처럼 보였어요.”
이제 비행기들은 세고비아를 향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비행기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모스카라고 부르는 초록빛 몸체에 날개 끝이 빨갛고 날개가 낮은 보잉 P32의 소련형 개조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색깔이야 어떻든 그 기체 모양이 달랐던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기지로 향하는 파시스트의 정찰기임이 분명했다.
“갑시다.”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그는 적의 눈에 띄지 않을 때까지 조심조심 은폐물을 이용해 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안셀모는 백 야드의 거리를 두고 그를 뒤따라갔다. 그들이 다리에서 보이지 않는 장소에 이르렀을 때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늙은이는 뒤따라오더니 앞장을 서서 어둠에 싸인 가파른 산비탈을 열심히 올라갔다.
“우린 무서운 공군력을 보유하고 있어.” 안셀모가 즐거운 듯 말했다.
“그렇지요.”
“우린 이길 거야.”
“우린 반드시 이겨야만 합니다.”
“이 다리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 같소?”
“우연이라는 게 있지요.”
“난 전투만 벌어지면 도망쳤지.” 안셀모가 말했다. “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난 늙은이고 이것저것 많이 생각해왔소.”
“내가 도와 드리죠.” 로버트 조던이 그에게 말했다.
“그럼 전투에 많이 참가해 봤소?”
“몇 번 되지요,”
“그럼 이 다리에 대해선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소?”
“무엇보다 다리를 생각하죠. 그게 내 임무니까요. 다리를 파괴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나머지 일에 대해선 그때 처리하도록 하지요. 준비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걸 모두 적어놓지요.”
마침내 늙은이가 말했다. “자, 이 바위들 사이를 내려가면 캠프요.”
그들이 어둠 속에서 바위 사이를 걷고 있을 때, 한 사나이가 그들에게 소리쳤다. “정지, 누구야?”
“동지야.” 안셀모가 말했다.
“어느 쪽 동지야?”
“파블로의 동지. 우릴 모르겠나?”
“알아, 그러나 명령이야. 암호를 아나?”
“몰라, 우린 아래에서 오는 길이니까.”
“그건 알고 있어. 당신들은 다리에서 오는 길이지? 다 알고 있어. 하지만 암호쯤은 알아야 된단 말이야.”
“그럼 묻는 암호는 뭐요?”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음, 잊어버렸는걸,” 어둠 속에서 사나이가 말하고 껄껄 웃었다.
“저게 이른바 게릴라의 규칙이죠.” 안셀모가 말했다. “안전장치를 잠그게.”
“우라질 놈의 배가 어찌나 고픈지 암호도 잊어버렸어. 캠프에 가거든 날 누구와 교대시켜 주시오.”
“이름이 뭐요?”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아구스틴이라고 해. 이런 곳에 있으니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오.”
“전달해 주겠소.”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좋소, 암호를 아는 놈을 이리로 보내 주도록 하구려. 그리고 당신 폭약을 잘 감시하시오.” 아구스틴이 말했다.
“고맙소, 당신을 조심하라는 말이오?”
“천만에 나보다 조심해야 할 사람이 있소.” 아구스틴이 말했다.
“알겠소, 갑시다.” 로버트 조던이 안셀모에게 말했다.
“아구스틴은 아주 좋은 사내지. 말을 더럽게 하고 항상 농담이나 하는 것 같지만 아주 진지한 사람이야. 오래전부터 난 그를 대단히 신임하고 있소.”
“한데, 그 사람 말은?”
“파블로를 조심하라는 뜻이요. 파블로는 아주 나빠졌으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말이야.”
“어떻게 하는 게 제일 좋겠습니까?”
“누군가에게 언제나 감시하게 해야지.”
“누구에게 말이오?”
“당신, 나, 그의 마누라하고 아구스틴, 아구스틴도 위험을 눈치채고 있으니 말이오.”
“당신은 전에도 지금처럼 사태가 나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지. 갑작스럽게 나빠졌어. 하지만 이리로 올 수밖에 없는 거요. 여긴 파블로와 귀머거리 영감의 관할 구역이오. 그들 구역 안에선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닌 한 그들과 협력하는 수밖에 없지.”
“그렇다면 다른 다리를 폭파한다고 말해놓고 여길 떠나는 게 더 좋을 것 같군요. 그리고 다른 패들한테서 사람을 모으는 편이.”
“안될 말이오. 이 지방은 그의 관할 구역이오. 그자에게 알리지 않고는 꼼짝할 수 없다오, 아주 주의해서 행동해야 하오.”
4
그들이 동굴 입구로 내려오자 입구에 걸쳐진 담요 자락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두 개의 짐은 캔버스 천으로 덮여 있었다. 무릎을 구부리고 로버트 조던은 어둠 속에서 캔버스 천을 들치고 짐을 확인했다. 먼저 기다란 자물쇠를 열었다. 손으로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낡은 뇌관이 든 네모만 나무 상자와 조그만 통은 둘 다 두 개의 전선으로 감겨 있었다. 기관단총와 개머리판 안쪽에는 클립 다섯 개, 그리고 동선 코일과 가벼운 절연선의 뭉치가 들어 있었다. 펜치와 송곳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령부로부터 그의 몫으로 받은 커다란 러시아 궐련상자가 있었다. 궐련상자를 꺼낸 후 짐 뚜껑을 덮어놓았다. 안셀모는 동굴로 들어가고 없었다. 로버트 조던은 두 개의 짐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동굴 입구를 향해 가까스로 운반해 갔다. 그리고 양손에 하나씩 짐의 가죽 멜빵을 쥐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은 훈훈했고 연기가 자욱했다. 집시 라파엘과 안면이 없는 세 사람이 있었다.
“뭘 들고 있소?” 파블로가 물었다.
“내 짐이지.”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그리고는 입구에서 좀 떨어진 테이블 옆에다 두 개의 짐을 내려 놓았다.
“밖에다 두는 게 좋지 않겠소. 난 다이너마이트를 동굴 안에다 두고 싶지 않소.” 파블로가 말했다.
“불하고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궐련을 피워보시죠.”
로버트 조던은 다른 세 사나이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넓적한 얼굴이었다. 갈색 얼굴로서, 소련제 궐련을 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형제인듯했다. 한 사람은 스물여섯 혹은 여덟쯤 돼 보였고, 다른 쪽은 그보다 두 살쯤 더 되어 보였다.
“담배 피우겠소?”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피우지 이건 그 사람 것하고 같군, 열차 사건 때의 사나이 말이야.”
“열차 사건 때 당신도 있었소?”
“우린 모두 열차 사건에 참가했지. 늙은이만 빼놓고 모두 말이오.”
“우리가 할 일은 바고 그거야.” 파블로가 말했다.
“또 다른 열차 습격 말이야.”
“할 수 있을 거요. 다리 일이 끝난 후에.”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그는 파블로의 마누라가 이젠 불 쪽에서 얼굴을 돌리고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다리라는 말을 하자 모두들 잠잠해졌다.
“난 다리 일로는 안 가겠어.” 파블로가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내 부하도 안 가.”
로버트 조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안셀모를 바라보며 컵을 들었다. “그럼 우리 둘이 만 해야겠습니다. 노인.” 그는 말하며 미소 지었다.
“이 겁쟁이만 빼고 말이야.” 안셀모가 말했다.
“뭐라고 했소?” 파블로가 늙은이에게 말했다.
“네겐 아무 말 안 했어. 너한테 한 말이 아니야.” 안셀모가 그에게 말했다.
로버트 조던은 테이블에서 불 옆에 서 있는 파블로의 마누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돼. 이 지역의 어떤 다리건 파괴할 수 없어.” 파블로가 격렬하게 말했다.
“그럼 당신은?” 로버트 조던은 꿈쩍도 않고 버티고 선 파블로의 마누라에게 물었다.
“난 다리 일을 찬성해요. 당신 생각엔 반대야. 그 이상 말할 것도 없어.” 파블로의 마누라가 말했다.
“나도 다리 일엔 찬성이야.” 얼굴이 넓적한 사나이가 말했다.
“나도 동감이야.” 집시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당당하면서도 늠름하고 건강한 얼굴을 붉히며 충성을 나타냈다.
“나는 공화정치 편이야.” 파블로의 마누라가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네년은. 황소 머리를 한 년아, 넌 다리 일이 끝난 후에 틈이 있을 줄 알아? 네년이 그걸 무사히 넘기리라 생각하냐 말이야. 네년에게 아무 이익도 없는 이 일이 끝난 후에 짐승처럼 쫓겨 다니는 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나를 겁나게 하려고 해도 소용없어, 이 겁쟁이야.”
“겁쟁이라고?” 파블로가 비통하게 외쳤다.
“들어봐, 주정뱅이야. 여기선 누가 지휘하는지 알고 있냐 말이야?” 파블로 마누라가 물었다.
“내가 지휘한다.” 파블로가 말했다.
“아니지, 들어봐 귓속에 왁스 칠이나 좀하고 잘 들으란 말이야. 지휘는 내가 하는 거야.” 파블로 마누라가 말했다.
파블로는 아주 신중히 여자를 바라보다가는 로버트 조던을 바라보았다. 비교적 오랫동안 그를 쳐다보더니 다시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좋아, 네가 두목이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그자도 대장이 되는 것이 좋겠지. 그래서 너희들 둘 다 지옥으로 가는 것이 좋을 거야.” 그는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네가 명령하고 싶다면 하란 말이야, 너 좋을 대로 하란 말이야. 네가 지휘자라도 역시 여자인 이상 우리에게 먹을 걸 줘야 된단 말이야.”
“마리아!” 파블로의 마누라가 불렀다.
처녀가 동굴 입구에서 담요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젠 들어와서 저녁을 차려.”
처녀는 들어와서 화롯가의 낮은 테이블로 걸어가 그릇을 들어 테이블로 가져왔다.
“술은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충분해요.” 파블로의 마누라가 로버트 조던에게 말했다. “저 주정뱅이가 뭐라든 신경 쓰지 말아요.”
로버트 조던은 포도주를 받기 위해 잔을 건넸다. 처녀가 컵에 찰랑찰랑하게 채워주며 미소 지었다.
“한데 다리는 구경했소?” 집시가 물었다. 이제 모두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귀를 모으고 있었다.
“했지. 해치우기에는 문제없는 놈이더군. 얘기해줄까?”
“음, 꼭 듣고 싶어.”
로버트 조던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스케치한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다리하고 꼭 같구먼.” 프리미티보라고 부르는 얼굴이 넓적한 사나이가 말했다.
로버트 조던은 연필 끝으로 어떻게 다리를 폭파할 것인가 화약을 장치할 장소와 이유를 설명했다.
“정말 간단하구먼.” 안드레라 부르는 얼굴에 상처가 난 동생 쪽이 말했다. “그럼 어떻게 폭파시킬 거요?”
그는 그것도 설명했다. 파블로의 마누라도 역시 바라보고 있었다. 파블로만이 아무 관심도 없이 마리아가 술 부대에서 따라 채워놓은 커다란 술 단지에서 떠낸 술잔을 들고 혼자 앉아 있었다.
“자, 식사를 시작하겠어. 마리아, 냄비에 있는 걸 그릇에다 분배해.” 파블로 마누라가 말했다.
5
로버트 조던은 동굴 입구에 쳐진 안장용 담요를 젖히고 밖으로 걸어 나오며 밤의 찬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는 거기 서서 아침에는 서리가 내리리라 생각했다.
동굴 안에서는 집시의 노랫소리가 들려왔고, 기타 줄을 부드럽게 퉁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집시가 밖으로 나왔다.
“로베르토.” 집시가 나직이 불렀다.
“여기야. 라파엘.” 그가 말했다. 목소리로 보아 집시가 술에 취했음을 알 수 있었다.
“왜 파블로를 죽이지 않았소?” 집시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를 왜 죽여?”
“조만간 그자를 죽여야 할 거야, 그런데도 왜 그때를 그냥 흘려버렸소?”
“진정으로 하는 말인가?”
“모두가 무얼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하슈? 그 여자가 왜 처녀를 밖으로 내보냈다고 생각해? 그런 말다툼이 있고도 지금대로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오?”
“자네들이나 그자를 죽여보란 말이야.”
“천만에, 그건 당신 일이야 몇 번이나 우린 당신이 그자를 죽이길 기다렸어. 파블로는 친구가 없단말이야.”
그때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담요가 열리고 불빛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가 그들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다.
“아름다운 밤으로군. 날씨가 좋아지겠구먼.” 파블로였다.
“그 여편네 말에 신경 쓰지 마시오. 그 여잔 때로는 까다로워져. 우린 아무런 말썽이 없을 거요. 말다툼엔 신경 쓰지 마시오. 참 잘 오셨소.” 로버트 조던을 보면서 말했다.
“잠깐 실례 하겠소. 나는 말을 어떻게 매어놨나 가봐야겠소.” 파블로가 말하고 말 있는 곳으로 갔다.
“이제 아시겠소? 이런 식으로 해서 기회는 다 놓쳐버리고 말거든.” 집시가 말했다.
“그자가 저 아래서 말을 타고 도망칠 것 같은가?”
“글쎄.” 집시가 말하고 아구스틴이 있는 곳으로 갔다.
로버트 조던은 나무 밑으로 더듬어가면서 말이 있는 곳으로 갔다. 파블로가 거기 있었지만 말 고삐를 풀거나 말에 안장을 얹은 것은 아니었다. 말은 그냥 풀을 뜯고 있었다.
6
동굴 안에는 로버트 조던이 화로 옆의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파블로 마누라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상하군, 귀머거리 영감이 아직도 안 오다니, 한 시간 전엔 와 있어야 했을 텐데.” 파블로의 마누라가 말했다.
“내일 아침에 우리가 만나러 가야겠구먼,”
“나도 갈 수 있나요?” 마리아가 물었다.
“괜찮아, 요 예쁜아.” 마누라가 말했다. “이애 예쁘잖우?” 하고 로버트 조던에게 물었다.
“드세요. 이걸 마시면 제가 좀도 예뻐 보일 거예요. 저를 미인으로 보시려면 그걸 많이 드셔야 해요.” 마리아가 말했다.
“그럼 그만 마시는 게 좋겠는데 지금도 예뻐 보이니까.”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먼, 돈(Don 남성 귀족 이름 앞에 붙이는 경칭) 로베르토.” 마누라가 말했다.
“나를 돈 로베르토라고 부르지 말아 주시오.”
“그건 농담이야, 여기선 농으로 돈 파블로라 부르기도 한다우, 우리들이 농으로 셰뇨리타 마리아라 부르듯이 말이우.”
“이런 전쟁을 할 때는 동지라 부르는 것이 적합합니다.”
한쪽에서는 테이블에서 카드놀이들을 하고 있었다.
“술 한 잔 또 드시겠어요. 로베르토?” 마리아가 물었다.
“들지. 물론 들고말고.”
“이제 너도 나처럼 주정뱅이 남자를 갖게 되겠구나.” 파블로 마누라가 말했다.
“오늘 어디서 잘 생각이우 미국 양반?”
“밖에서 자죠. 난 침낭이 있으니까.”
“그럼 밖에서 자구려. 저 물건은 내가 가지고 자도 될 테니까.”
“그러죠.”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잠깐 아주머니께 할 말이 있어요.”
“뭔데?” 파블로의 마누라가 말했다. 처녀는 동굴 입구로 걸어가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집시 말은 내가······.”그가 말하기 시작했다.
“안될 소리야. 그 녀석 잘못 생각하고 있어.” 파블로의 마누라가 말했다.
“내가 꼭 해야 한다면······.” 로버트 조던이 난처한 듯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당신이 해치웠으리라고 난 생각해.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난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지, 당신의 판단이 옳았어.”
“이리 좀 와, 마리아 우리 얘기는 끝났어. 이제 자러 가는 게 좋겠수,” 마누라가 로버트 조던에게 말했다. “긴 여행을 했으니까.”
“그러죠,”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짐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7
그는 침낭 속에서 자고 있었다. 한참이나 잤다고 그는 생각했다. 침낭은 동굴 입구 건너편 바위 그늘 속의 솔밭 바닥에 펴 놓았었다. 플란넬 천으로 안을 댄 침낭 속에 사지를 쭉 뻗고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상쾌했다. 그만큼 그는 지쳐있었다.
그는 어깨에 손이 닿음을 느꼈다. 재빨리 돌아누우며 오른손으로 침낭 속의 권총을 쥐었다.
“아, 당신이군.” 그가 말했다. 그리고는 권총을 놓고 두 팔을 뻗쳐 그녀를 끌어당겼다.
“들어와.”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밖은 몹시 추워.”
그녀는 떨고 있었다.
그녀는 침낭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괜찮아.” 그는 말하고 웃었다. “무서워 하지마 그건 권총이야.”
그는 권총을 잡아 등 뒤로 밀어 넣었다.
“아주머니가 말한 것처럼 나는 당신하고 같이 갈 수 있죠?”
“아냐 집으로 가는 거야.”
“아니, 아녜요. 당신과 함께 가요. 난 당신의 부인이 되겠어요.”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함께 누웠다. 이제까지 그들을 가로막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바깥쪽은 몹시 춥고 안은 따뜻했다.
“지금까지 누굴 사랑해 본 적이 있어?”
“없어요, 단 한 번도, 하지만 나는 지독한 변을 당했어요.”
“누구에게?”
“여러 사람에게요.”
그녀는 말없이 누워있었다. 죽은 듯이 그에게서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이제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사랑해.” 그가 말했다.
그러자 무엇인가 그의 마음속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도 그 점을 눈치챘다.
“거짓말 예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생기가 없고 감정이 없었다.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날 집으로 데려다는 주시겠죠. 그래서 난 그리로 따라가겠어요. 그러나 당신의 아내도 아무것도 되지는 않겠어요.”
“사랑해, 마리아.”
“아녜요.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난 곳에서 난 기절할 때까지 싸웠어요. 난 싸웠어요······ 끝까지······ 끝까지······.”
“난 다 이해해. 맨발로 왔군.”
“내가 당신과 함께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아무 짓도 안 할 거예요.”
“그런 걸 스스로 생각했나?”
“아녜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필라르가 나에게 말해줬어요.”
“그 여잔 매우 현명해.”
“그리고 또 하나 가르쳐준 것이 있어요, 내가 병이 없다는 것을 당신에게 말하라고 했어요. 아줌마는 그런 일에 대해서 잘 알아요.”
“그 여자가 당신한테 말하라고 했나?”
“네, 아줌마한테 당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어요, 난 오늘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부터 당신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난 필라르에게 얘기했어요. 아주 오래전에도 나한테 말해준 적이 있어요, 열차 사건 뒤에 바로 말 예요.”
“그 여자가 무슨 얘길 했는데?”
“할 수 없이 당한 일이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그리고 만약 내가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그런 것은 모두 깨끗이 사라져버리는 거라고요. 난 죽고만 싶었어요. 아시겠죠.”
“그 여자가 한 말은 진실이야.”
“하지만 이제보니 죽지 않은 것이 행복해요, 난 내가 죽지 않은 것이 너무 행복해요, 정말 날 사랑해 주실 수 있어요?”
“사랑할 수 있고말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
“그럼 당신의 아내도 될 수 있고요?”
“난 지금 같은 일을 하는 동안은 아내를 가질 수가 없어. 그러나 이제 당신은 내 아내야.”
“난 이제 당신의 아내죠?”
“암 그렇고 말고.”
8
밤은 추웠다. 로버트 조던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잠이 깨자 그는 여자가 담요 아래쪽에서 새우등을 하고 가볍게 규칙적인 숨을 쉬고 있음을 알았다. 하늘에는 별들이 싸늘하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으며 찬 공기에 코가 시렸다. 이윽고 담요 속에서 다리를 뻗을 수 있는 데까지 쭉 뻗고 곧 잠에 빠져들었다.
동이 틀 무렵에야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가고 없었다. 그는 서리가 낀 담요가 쳐진 동굴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틈새로 잿빛의 엷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한 사나이가 숲으로부터 담요를 머리에 쓰고 있었다. 로버트 조던은 그가 파블로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해가 떠오르리라 짐작이 되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에라, 모르겠다. 조금 더 잔다고 안 될 일이 있겠는가.
그는 비행기 엔진 소리가 그를 깨울 때까지 잤다. 그는 누운 채로 파시스트의 피아트 정찰기 세 대가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안셀모와 그가 어제 왔던 그 방향으로 기수를 향하고 있었다. 그 비행기가 사라지자 다시 아홉 대의 비행기가 훨씬 더 높은 고도에서 세 대씩 삼각형의 편대를 지어 날아왔다. 1-11형 쌍발식 하인켈 폭격기였다. 요란한 폭음을 울리며 날아 멀어져 갔다.
로버트 조던은 일어나서 옷을 입기 시작하는데 또다시 비행기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에 하인켈 폭격기 아홉 대가 사다리형 편대를 짓고 날아오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들도 요란한 폭음을 남기며 사라져 갔다.
로버트 조던은 바위를 따라 동굴 입구 쪽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형제 중 한 사람과 파블로, 집시, 안셀모, 아구스틴, 그리고 파블로의 마누라가 입구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전에도 이렇게 많은 비행기들이 온 일이 있소?” 그가 물었다.
“한 번도 없어.” 파블로가 말했다. “들어오라구, 놈들이 당신을 보겠어.”
“굉장히 많구먼,” 파블로의 마누라가 말했다.
“더 올거요. 지금 지나간 놈들 뒤에는 추격기가 반드시 따를 테니까 말이오.”
바로 그때 요란스런 비행기 소리가 들렸다. 5천 피트의 고도로 날아갔다. 로버트 조던은 열다섯 대의 피아트들을 세어보았다.
“당신들은 이렇게 많은 비행기들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군.”
“세고비아에서도 이렇게 많은 비행기를 본 적은 없었어.”
좋지 않은 징조인걸, 하고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비행기들이 몰려든다는 것은 무언가 아주 나쁜 징조를 의미하는 거다, 난 놈들이 폭격하는 소리를 들어두어야만 해. 그러나 아직은 공격을 위해 병력을 투입시키지는 못했을 거야.
먼저 간 비행기들은 지금쯤은 전선을 횡단하고 있을 거다. 1-11형 하인켈 폭격기는 한 시간에 2백 50마일은 날 수 있으니까. 5분이면 거길 갈 수 있을 거다. 그들은 공군기지로 향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군의 공격을 알 길이 없을 것이라고 그는 혼잣말을 했다.
스톱워치의 단추를 누른 지 7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 폭격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시계로 뭘 하고 계시우?” 파블로의 마누라가 물었다.
“놈들이 어디까지 갔나 알아보고 있소.”
“아!” 그녀가 소리쳤다. 10분이 지나자 이제 너무 멀리 가서 들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그는 시계에서 눈을 뗐다. 소리가 되돌아올 수 있는 1분간의 여유를 주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는 안셀모에게 말했다.
“지금 식사하고 점심때 먹을 걸 준비해 두시오. 당신이 도로의 망을 좀 보러 가 주셨으면 좋겠소. 도로를 오르내리는 놈들을 전부 적어 주셔야겠소.”
“쓸 줄을 모르는데.”
“적을 필요도 없소,” 로버트 조던은 수첩에 종이 두 장을 떼어낸 후 연필을 깎아주었다.
“이걸 갖고 탱크가 오거든 이렇게 표시를 해주시오. 마크는 한 대마다 하나씩, 그리고 다섯 번째마다 네 개의 선 위에 열십자를 그려 주시오.”
“우리도 그런 식으로 수를 세고 있지.”
그리고 탱크와 트럭 대포도 큰놈과 작은놈 자동차 앰뷸런스 등을 그려 주며 숫자를 표기하도록 했다. 보병은 중대마다 표시하도록 조그만 네모꼴을 그리고 그 밑에 마크를 하도록 했다.
“기마병은 이렇게 아시겠죠? 말 모양으로 말이요.”
“알겠소 좋은 착상이로구먼.”
“집시를 데리고 가서 당신이 망볼 지점을 알려주시오. 나중에 교대할 수 있게 말이오. 안전한 장소를 택하시오. 너무 접근하지 말고 편하게 잘 볼 수 있는 장소로 교대할 때까지 거기 있어 주시오.”
“알겠소.”
“라파엘을 내게 보내 주시오.”
집시가 손으로 입을 문지르며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나왔다.
“제재소가 잘 보이는 데까지 가서 초소에 무슨 이상이 없나 살펴 봐줘.”
“이상이라니.”
“지금 몇 명이 있는지 교대하는 시간은 몇 시에 하는지 간격을 봐줘.”
“난 시계가 없는데.”
“내 걸 가져가.” 그는 시계를 풀었다.
“좀 신중 해줬으면 좋겠어. 이건 아주 진지한 문제야.”
“아까 비행기를 봤지, 나는 지금 너무 진지해 버렸을 정도야.”
“좋아. 그럼 지나치게 진지해지지는 말게 이제 아침이나 먹고 가보게.”
“당신은 뭘 하나?”
“귀머거리 영감을 만나러 가야지.”
“비행기들이 이 산속을 다 뒤져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지 못할 게 십상이야. 오늘 아침 놈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숱한 사람들이 진땀깨나 뺐을 거야.”
“하지만 놈들은 딴 임무가 있는 거야 게릴라나 소탕하라고 그 많은 비행기를 보내지는 않아.”
“놈들은 날 질겁하게 만들었어, 그런 일이 있으면 난 오싹한단 말이야.”
동굴로 들어가니 파블로 마누라가 커피를 따라주고 밀크 깡통을 넘겨주었다.
“밀크가 있나? 굉장한 사치로구먼!”
“없는 게 없다우. 비행기가 왔다 간 후엔 겁이 훨씬 많아졌어. 놈들이 어디로 간다고 했지?”
“내 생각엔 비행장을 폭격하러 가는 것 같소. 어젯밤에 도로에 무슨 움직임이 있었소?”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마리아가 그에게 다가왔으나 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페르난도, 당신 지난밤에 라그랑하에 갔다 왔지? 거기 상황이 어땠어?”
“별일 없었는데.” 작달막하고 서른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한쪽 눈이 사팔뜨기인 순하게 생긴 사내가 대답했다. “내가 거기 있을 때는 군대는 안 지나갔어.”
“매일 밤 라그랑하로 가나?”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나든가 다른 놈이든가 하여간 누군가는 꼭 가.” 페르난도가 말했다.
“뉴스를 알아보고 담배도 사고 자질구레한 물건을 구하러 가는 거지.” 파블로의 마누라가 말했다.
“거기도 우리 편이 있나?”
“있지, 없을 리 있을라구. 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야. 그 외에도 몇 사람 있구.”
“뉴스는 무엇이 있었나.”
“아무것도 없었어. 북쪽은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는 모양이더군. 아 공화파에서 공격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더구먼.”
“어디서?”
“확실치 않아, 아마 이 근처겠지.”
“그런 얘기가 어떻게 흘러나왔지.”
“아마 장교 놈들이 카페 같은 데서 지껄이는 소리를 들은 놈들이 전하는 거지. 이 지역에서 공화파가 공세로 나올 거라는 소문이 죽 나돌았었지.”
“그 밖엔 들은 거 없나?”
“아. 공화파에서 다리 폭파를 시도하고 있다는 얘기가 있더구먼, 공격이 있을 경우에 말이야, 그러나 다리는 경계가 심해서,”
“농담 아니겠지?” 로버트 조던이 커피를 마시면서 물었다.
“이 사람은 농담을 안 한다우.” 파블로의 마누라가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돌아오는 비행기의 첫 번째 소리가 들렸다.
9
그들은 동굴 입구에서 비행기를 쳐다보았다. 엔진소리로 하늘을 뒤흔들어 놓으면서 높은 고도를 취하고 쏜살같이 달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V자 모양을 이룬 하인켈 전투기 세대가 캠프가 있는 빈터 위를 저공으로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나뭇가지 위를 스칠 듯이 날아오더니 갑자기 확대되어 무시무시할 정도의 실물 크기를 드러내고는 울부짖는 듯한 폭음을 쏟아놓고 날아가 버렸다. 아주 낮게 날았기 때문에 파일럿과 정찰기 기장의 머리 위로 휘날리는 스카프를 볼 수 있었다.
파블로가 말했다. “놈들이 말을 보았겠는데.”
비행기는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소?” 마누라가 로버트 조던에게 물었다. “말을 타고 가겠소, 걸어가겠소?”
파블로가 그녀를 쳐다보고 투덜댔다.
“좋으실 대로.”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그럼 걸어서 갑시다.”
“아구스틴이 당신 물건을 감시하고 있다우, 그가 오면 갑시다.”
날씨는 맑고 따사로웠다. 로버트 조던은 그 커다란 갈색 얼굴의 여자를 쳐다보았다. 주름지고 못 생겼지만 어딘지 호감 가는 네모나고 커다란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말을 하지 않을 땐 웬지 슬퍼 보였다.
“파블로와는 어떻게 해서 같이 있게 됐소?”
“어떻게 해서 같이 살게 됐느냐 이 말이우? 이 운동초기엔 전에도 물론 그랬겠지만 그 사람은 뭔가가 있었어, 뭔가 진지한 데가. 그러나 이젠 그 사람도 다 됐어.”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소.”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그 사람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지. 무리는 아니야. 난 어젯밤에 그에게 말했지, 파블로, 당신 왜 그 외국 놈을 죽여버리지 않았수? 그러자 그 작자는 이렇게 말했다우. 그놈은 좋은 젊은이야. 그래서 이제야 내가 지휘한다는 걸 이해했구려. 나는 밤새 자지 않고 울고 있는 소릴 들었다우.”
그때 아구스틴이 올라오고 있었다.
“굉장한 비행기였어.” 아구스틴이 진지하게 말했다. “놈들이 뭔가 준비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소?”
“그래서 당신도 그걸 보고 딴 사람들처럼 무서워졌어?”
“놈들이 뭔가 준비하고 있는 것 같지 않소?”
“이봐.” 필라르가 말했다. “다리를 폭파하러 온 그 젊은이로 보아 공화파는 공격 준비를 하고 있음이 분명해. 그리고 그 비행기들로 보아 파시스트들이 이 공격에 대항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고. 한데 그 비행기들을 왜 날려보내는 거지?”
“우리가 살려면 다리 일을 해야 해 그리도 여기에서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해야 하지.” 아구스틴이 계속 말했다. “결단력에 있어선 필라르 당신이지만. 파블로에겐 행동이 있지. 퇴각에 있어선 파블로야, 이제라도 그 일을 잘 연구해보라 하시구려.”
“당신도 머리가 좋은 사람이구먼.”
“머리가 좋다고, 암.” 아구스틴이 말했다. “하지만 난 교활하진 않소. 교활한 점에 있어선 파블로야.”
“한데 다리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우?”
“아까도 말했지만, 필요가 있어. 우린 두 가지 일을 해야 해. 우린 여길 도망쳐야 하구 이겨아만 하지, 우리가 이기기 위해선 다리 일을 해야만 하구.
“파블로가 그렇게 영리하다면 왜 그 이치를 모를까?” 필라르가 말했다.
“하지만 재능이 있어, 이봐요. 필라르 전쟁을 하는 데 필요한 건 머리밖에 없단 말이야. 이기기 위해선 재능과 물자가 필요하지만.”
“잘 생각해보도록 하지.” 그녀가 말했다. “이젠 떠나야겠소. 너무 늦었는데.”
그러고 나서 목소리를 높여 “영국 양반!” 하고 불렀다. “영국 양반! 와요! 갑시다.”
10
“좀 쉬자구.” 필라르가 로버트 조던에게 말했다. “여기 앉아라, 마리아. 쉬었다 가자.”
“가서 쉽시다. 난 그 사람을 만나야 하니까요.”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만나게 될 텐데 뭘, 서두를 필요 없어요. 여기 앉아라. 마리아.”
“어서 와요, 마루턱에 가서 쉽시다.”
“난 지금 쉬어야겠어.” 마누라가 말하고 개울 옆에 앉았다. 마리아도 그 옆에 앉았다.
“이제 일어나야겠군.”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그는 해를 쳐다보았다. “정오가 다 됐군.”
그들은 계속해서 올라 갔지만 여전히 깊숙한 소나무 숲 그늘 속이었다. 높다란 목초지로부터 나무들이 들어차 계곡으로 내려가고 냇물을 따라 나란히 나 있는 오솔길을 올라간 다음 가파른 너럭바위 꼭대기로 오르려고 할 때 카빈총을 든 사내 하나가 나무 뒤로부터 걸어 나왔다.
11
“정지.” 그 사내가 말했다. 그리고는 “필라르 아니우? 당신과 함께 온 분들은 누구요?”
“영국 양반이지.” 필라르가 말했다. “세례명으로는 로베르토야. 한데 여기 올라오는 길은 왜 그렇게 육시랄 만큼 가파르지?”
“안녕하시오, 동지.” 보초가 로버트 조던에게 말하고 손을 내밀었다.
“네,”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지.” 보초병이 말했다. 그는 아주 젊은 사람이었다. 움켜잡은 손아귀는 힘 있고 정다웠다. 눈에도 정다운 빛이 감돌았다.
“안녕한가? 마리아.”하고 그녀를 보고 말했다. “고단하지 않아?”
“괜찮아요. 호아킨.”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폭파 담당자요?” 호아킨이 물었다. “당신이 여기 왔다는 얘기를 들었지요.”
“그렇소, 내가 폭파 담당자요. 어젯밤엔 파블로 캠프에서 신세를 졌소.”
“마리아가 이젠 예뻐졌군. 사람들이 예쁘다고 말하지 않던가요? 내가 당신을 어깨에 메고 데려온 거지.”
“다른 사람도 다 마찬가지지. 그 애를 데리고 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나? 늙은이는 어디 있지?””
“캠프에 있지.”
“대장에게로 데려다 드리겠소.”
“대장이라고?” 필라르가 물었다.
호아킨이 진지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난 두목이라는 말보다 그게 더 좋더군. 좀 더 군대 냄새가 나거든.”
“아주 지독하게 군대식이 돼가고 있는데.” 필라르가 말하고는 웃어젖혔다.
“호아킨은 투우사가 되고 싶어 했었다우.” 필라르가 로버트 조던에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겁이 났던 모양이오.”
“투우를 좋아하시우, 폭파 담당자 동지?” 호아킨이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아주 좋아하죠,”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이제 그들은 소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 있는 귀머거리 영감의 캠프가 보이는 곳까지 와 있었다. 골짜기의 끝머리가 보였다. 그 석회석 상층은 온통 동굴투성이리라, 머리 위에도 두 개의 동굴이 있다. 바위틈에서 자라난 잔솔들이 그것들을 아주 잘 은폐시켜주고 있었다. 이건 파플로네 못지않게 훌륭하고 더 나을 것 같은 장소로군
“귀머거리 영감은 어디 있지? 보이질 않는데.”
“여기에 있소. 아마 안에 있을 거요.”
“아 저기 있군, 잘 있었나. 산티아고! 어떻게 지내?”
필라르가 말을 건 것은 작달막한 체구에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육중한 갈색 얼굴의 사나이였다. 잿빛 머리에 미간이 넓은 황갈색의 눈, 인디언처럼 콧날이 좁은 매부리코, 길게 찢어진 윗입술, 크고 얄팍한 입, 그는 깨끗이 면도를 했는데 목동들의 바지를 입고 장화를 신은 휘어진 다리로, 동굴 입구로부터 그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필라르에게 잿빛의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시우. 아주머니,” 그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시우.” 그는 로버트 조던에게도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하면서 정면으로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아가씨도.” 그는 마리아에게 말하면서 어깨를 두드렸다.
“식사하셨소?” 그는 필라르에게 물었다.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그럼 같이합시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밑으로 하여 손으로 술 따르는 시늉을 해 보이며 물었다.
“고맙소, 마시죠.”
“좋아.” 귀머거리 영감이 말했다. “위스키로 하겠소?”
“위스키가 있소?”
귀머거리 영감이 머리를 끄덕였다. “영국분이오?” 그가 물었다.
“미국인이오.”
“북부요, 남부요?”
“북부죠.”
“그럼 영국 사람이나 마찬가지군, 다린 언제 폭파시킬 거요?”
“다리 일에 대해서 알고 계시군요.”
귀머거리 영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래 아침이오.”
“좋소.” 귀머거리 영감이 말했다.
“파블로는?” 그는 필라르에게 물었다.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귀머거리 영감이 히죽 웃었다.
“저쪽으로 좀 갔다가 말이지.” 그는 마리아에게 말하고 다시 히죽 웃었다. “돌아오라구.” 그는 시계를 끄집어내어 들여다보았다. “30분 후에”
그는 평평하게 깎은 통나무에 앉으라고 하고 호아킨을 바라보면서 오솔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호아킨하고 같이 내려갔다 오겠어요.” 마리아가 말했다.
귀머거리 영감은 위스키병을 찾아왔다. 통나무 위에 잔과 술병을 놓고 물병은 땅 위에 놓았다.
“얼음이 없어.” 그가 로버트 조던에게 말하며 술병을 건네주었다.
“난 들고 싶지 않아.” 필라르가 말했다.
“자, 드시우.” 그가 말했다. “좋은 건 아니지만. 영국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지. 늘 위스키를 들더군.”
“위스키는 어디서 구합니까?”
“뭐라고?” 그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고함을 쳐대야 한다우.” 필라르가 말했다. “저쪽 귀에다 대고.”
귀머거리 영감이 잘 들리는 쪽 귀를 가리키면서 히죽 웃었다.
“오늘 밤 정보를 가지고 가려던 참이었어.”
“어떤 정보요.”
“많은 병력이 이동하고 있지. 부대 이동. 좋지 않은 일이지.”
“적도 알고 있죠. 역시 준비할 겁니다.”
“왜 다릴 오늘 밤에 폭파시키지 않지?”
“명령이니까요.”
“폭파 시기가 중요한 거유? 필라르가 물었다.”
“가장 중요하죠.”
“하지만 적이 부대 이동을 한다면?”
“안셀모를 시켜 이동과 집결 보고서를 보낼 작정이오. 그는 도로를 감시하고 있소.”
“도로로 누군가를 내보냈단 말이오?” 귀머거리 영감이 물었다.
“그렇소.” 그는 말했다.
“내가 필요한가?” 귀머거리 영감이 물었다.
“몇 명이나 거느리고 계시오?”
“여덟 명.”
“전화선을 끊고, 도로 수리공의 집 쪽 초소를 공격하여 점령한 다음 다리 위로 퇴각하는 거요. 알겠소?”
“그건 쉬운 일이지.”
“나중에 전부 적어드리겠소.”
“그럼 그 후의 퇴각은?” 필라르가 물었다. “우린 남자 일곱에 여자 둘, 말 다섯 필이야, 당신 쪽은?”
“여덟 명에다 말 네 필이지.”하고 영감은 말했다. “말이 모자라.”
“열일곱 명에다 말 아홉 필이라.” 필라르가 말했다. “짐 운반할 건 치지 않고 말이야.”
“확실히 내가 스무 명 이상은 써야 될 것 같소.”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쓸만한 놈이 있어야지 믿을 만한 놈이 못 되는데 괜찮겠소?”
“안되죠. 쓸 만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되오?”
“네 명쯤 될까?”
“왜 그렇게 적죠?”
“믿을 수가 없는 거지.”
“안셀모는 이 산속에 백 명 이상 있다고 하던데요.”
“쓸만한 놈들이 아냐.”
“엘리아스 패는 어떻겠수?” 필라르가 귀머거리 영감에게 물었다.
“쓸만한 놈들이 아냐.”
“열 명쯤 구할 수 없겠소?”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귀머거리 영감은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보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쓸모없는 자들보다는 쓸만한 놈 네 명이 더 낫지. 이번 전쟁엔 쓸만한 놈들이 없어. 내 부하들하고 네 명쯤 더 데리고 가겠소. 열두 명을 만들어주지. 오늘 밤 모든 걸 의논하자고. 다이너마이트 예순 개가 있어 필요하오?”
“그걸로 위쪽의 조그만 다리를 폭파하도록 합시다. 오늘 밤 내려오시겠소? 그 다리에 대한 명령은 받지 않았지만 폭파시켜야겠소.”
“오늘 밤 가겠어. 그다음엔 말을 구하러 가야지.”
“말을 구할 방도가 있소.”
“있겠지, 자, 식사나 하자구.”
“그런데 이 일이 끝난 후엔 어디로 갈 작정이우?” 필라르가 귀머거리 영감에게 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일에는 문제가 없소, 하지만 일이 끝난 후 대낮에 여기를 떠나는 게 곤란한 문제거든.”
“확실히 그렇소.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소, 내게도 대낮이라는 점이 문제요.”
“당신은 홀몸이야. 하지만 우리 패엔 별 인간이 다 있거든.”
“공화국으로 가는 일이지.” 귀머거리 영감이 말했다. “어쨌든 이번 일에 승리 하자구, 그럼 천하가 공화국이 될테지.”
“좋아요.” 필라르가 말했다. “그럼 식사나 들자구요.”
12
그들은 식사를 마친 다음 귀머거리 영감네 캠프를 떠나 오솔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귀머거리 영감은 아래쪽 초소가 있는 데까지 그들을 따라 내려왔다.
“잘 가시오. 오늘 밤에 봅시다.”
“안녕히 계시오, 동지.” 로버트 조던이 그에게 말했다.
헤어질 때 필라르가 말했다.
“웬일이우, 산티아고?”
“아무것도 아니오, 아무것도 아냐 난 단지 생각하는 것이 있을 뿐이야.”
올 적에는 애를 먹어가며 기어오른 솔밭 속의 험한 길을 갈 때는 편안하고 유쾌하게 내려왔다. 그런데 필라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고 있다. 로버트 조던도 마리아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솔길이 험한 언덕길도 되고,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골짜기로 해서 숲을 지나 높은 초원지대에 이를 때까지 세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5월 말의 오후는 뜨거웠다. 마지막 험한 언덕길을 반쯤 올라갔을 때, 필라르가 멈춰 섰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구슬처럼 맺혀 있었다.
“잠깐 쉽시다.”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너무 빨리 걷는 것 같군요.”
“아니. 그냥 갑시다.”
“쉬어가요. 필라르 아주머니 안색이 아주 나빠요.”하고 마리아가 말했다.
“입 닥쳐! 쓸데없는 걱정 말라고.” 하고 필라르가 말했다.
그래도 마리아가 자꾸 앉아서 쉬었다고 가자고 조르니까 마지못해 셋은 소나무 밑에 앉아서 쉬었다. 필라르가 마리아에게 “너에게 심하게 굴어서 미안하다. 예쁜아, 난 오늘 무엇에게 홀렸는지 모르겠어. 아주 기분이 나빠.”
“몸이 편찮으시잖아요.” 마리아가 말했다.
“넌 사람을 아주 기분 좋게 만드는 귀여운 토끼야.” 필라르가 말했다.
그녀는 캠프 쪽으로 흐르는 냇물을 향해 히스가 우거진 초원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기다려 주시오. 모두 함께 가야지요.” 로버트 조던이 그녀를 불렀다.
“둘이서 같이 오시우. 이따 캠프에서 만나자고.” 필라르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말했다.
로버트 조던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괜찮을까?” 그가 마리아에게 물었다. “아깐 안색이 좋질 않던데.”
“내버려 둬요.” 마리아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가게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13
그들은 히스가 우거진 초원을 걷고 있었다. 그는 그녀 앞에서 걷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다리 문제에 골몰해 있었다.
그 일이 카메라 렌즈의 초점이 들어맞을 때처럼 선명하고, 정확하고, 뚜렷해져 왔다. 그에게는 두 개의 초소와 망보고 있는 안셀모와 집시가 보였다. 그는 텅 빈 도로를 보았고, 움직이는 것들이 있는 도로를 보았다. 자동소총 두 자루를 가장 평탄한 높이로 사격할 수 있도록 설치할 장소도 보였다. 누구에게 그걸 쏘게 할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중엔 내가 한다지만 처음엔 누굴 시키지? 폭약을 틀어박아 움직이지 않게 꼭 묶어놓고 뇌관을 장전한 다음 전선을 끌어 적당한 곳을 찾아 걸쳐놓고 오래된 폭약 상자를 놓아둔 곳으로 돌아온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일 들과 일이 잘못될 경우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파블로는 확실히 영리하다. 그는 그 일이 얼마나 불길한지를 대번에 알아챈 것이다. 그 마누라는 그 일에 열성적이다. 아직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됨으로써 그녀는 차츰 압도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건 이미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귀머거리 영감은 즉석에서 그걸 인정하고 하겠노라고 했지만, 너(로버트 조던)만큼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로버트 조던은 많은 생각을 했다.
너는 전투를 제외하고는 그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다. 명령은 너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골즈로부터 내려진 것이다. 그럼 골즈는 어떤 자인가? 훌륭한 장군이지. 네가 밑에서 일해본 자들 중 가장 우수한 장군이다. 하지만 그 명령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알면서도 불가능한 명령들을 수행해야만 한단 말인가? 명령은 당이며 동시에 군대인 골즈로부터 내려졌다 할지라도. 그렇다. 그 명령들이 불가능함을 입증할 수 있는 길은 그걸 수행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에 너는 그 명령을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해보지 않고 그 명령이 불가능함을 어떻게 알 것인가? 명령을 받았을 때 누구든 그 명령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면 너는 어찌 될 것인가? 명령이 내려졌을 때 네가 곧장 “불가”라고 말해버린다면 우리들 모두는 어찌 될 것인가?
그는 이제 이 이상 더 한가한 때가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만일 그런 여유가 있게 된다면 그녀와 함께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결혼하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결혼하자. 그러면 자기들은 아이다호주의 선밸리, 혹은 텍사스주의 코퍼스 크리스티. 혹은 모태나주의 뷰트에 사는 로버트 조던 부부가 되는 것이다.
스페인 처녀들은 훌륭한 주부 노릇을 한다. 이직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대학으로 복직하게 되면 그녀는 강사의 아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몬태나주의 미줄라 사람들은 마리아를 얼마나 사랑할까? 하기야 내가 미줄라에서 복직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지만. 나는 거기서 결국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어 다니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빨갱이 명부에 오르게 되겠지. 그 누구도 알 까닭은 없지만,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지방 사람들은 내가 무얼 하는지 아무런 증거도 안 갖고 있을뿐더러 설사 내가 그들에게 얘기 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혀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여권은 그들이 여러 가지 제한을 가하기 전에 스페인에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 발급받아두면 된다.
귀국 시기는 37년 가을 이 되기 전에는 오지 않으리라, 나는 36년 여름에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휴가는 1년간이지만 다음 해 가을학기 개강 때까지는 돌아갈 필요가 없다. 지금부터 가을학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자면 지금부터 내일모레까지의 사이에도 아직 충분한 틈은 있는 것이다. 아니다. 대학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가을에 그쪽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은 잘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돌아가도록 해보자.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네가 가지고 있는, 또는 가지게 될 전 인생이 오늘, 오늘 밤, 내일, 그리고 다시 되풀이 -나는 그러길 바란다.-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현재의 시간을 활용하고 그것에 감사하면 되는 것이다. 만약 다리 일이 잘된다면? 지금 현재로는 잘 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리아는 좋다, 참 좋다. 아, 정말 좋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인생에서 향유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내 인생이고, 내 인생은 60년에 10을 더한 것이 아니라 한낱 48시간, 아니 고작해야 60시간에 10내지 12시간을 더 보탠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가 24시간이면 72시간이니까. 70시간 동안에 70년에 뒤지지 않는 풍부한 인생을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비록 그 70시간이 시작되지 전에 그 사람의 인생이 이미 풍부했었고, 또 일정한 연령에 도달했다. 할지라도······, 무슨 쓸데없는 짓인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무슨 썩어빠진 생각을 하고 있는가 말이다. 그건 정말 쓸데없는 생각이다. 하기는 무의미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든 두고 보기로 하자.
그러는 동안 해는 구름 속으로 숨어들었고, 그가 산 쪽을 뒤돌아보니 이제 하늘에는 무거운 구름이 잿빛으로 덮여 있었다.
“틀림없이.” 필라르가 그에게 말했다. “눈이 올 모양이군.”
“지금 말이오? 6월이 다 됐는데?”
“뭐라고 하든 마찬가지야. 이 영국 양반아.”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눈이 온단 말이오.”
로버트 조던은 햇빛이 희미해져 버린 짙은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바라보는 동안에 해는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잿빛이 하늘을 온통 뒤덮어 푹신하고 무겁게 보였다 이윽고 잿빛은 산꼭대기마저 가려버리고 말았다.
14
그들이 캠프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처음에는 드문드문하게 너울너울 떨어지더니 산으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쳐 내리자 소용돌이치며 앞조차 볼 수 없게 됐다. 로버트 조던은 동굴 앞 그 광란하는 눈 속에 서서 바라보았다.
“집시 들어왔소.” 로버트 조던이 파블로에게 물었다.
“아니, 집시도 늙은이도 안 돌아왔지.”
“나하고 저 위쪽 도로의 초소에 가볼까요?” 로버트 조던이 파블로에게 말했다.
“안돼,” 파블로가 말했다. “난 이 일엔 상관하지 않겠어.”
“그럼 나 혼자 가겠소.”
“이런 눈보라 속에선 찾기 힘들걸,” 파블로가 말했다. “지금은 가고 싶질 않아.”
“늙은이는 나를 기다릴 거요.”
“아니지, 이젠 눈을 맞으며 오고 있을걸,”
파블로는 동굴 입구를 강하게 휘몰아쳐 가는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눈이 원수 같겠군, 영국 양반? 굴로 들어와, 당신 부하들은 곧 돌아올 테니.”
“이번 눈은. 많이 올 것 같소?”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많이 올 거야.” 파블로가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오늘 밤하고 내일까지는 올 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오?”
“두 종류의 눈보라가 있지.” 파블로가 묵직하고 분별 있는 소리로 말했다. “하나는 피레네 산맥 쪽에서 오는거지. 그놈은 모진 추위를 몰고 오거든 그놈이 오기엔 너무 늦었어.”
“과연.”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전혀 엉터리는 아닌 모양이로군.”
“오늘의 눈보라는 칸타브리코에서 온 거야.” 파블로가 말했다. “이놈은 바다 쪽에서 오는 거야. 바람이 이런 방향으로 불 땐 폭풍이 일고 눈이 많이 쏟아지지.”
“그런 걸 어디서 다 배웠소. 영감?”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난 여러 해 동안 화물 운송업을 했었지” 파블로가 말했다. “우린 군용트럭이 나오기 전에 커다란 짐마차로 산을 넘어 화물을 운반했었어. 그 사업을 하는 동안 날씨에 대한 걸 알게 됐지.”
바로 그때 집시가 들어왔다. 그는 눈을 뒤집어쓴 채로 카빈총을 들고 말을 굴러 눈을 털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로버트 조던이 일어나 입구로 걸어갔다. “잘 됐나?” 그가 집시에게 말했다.
“큰 다리에선 여섯 시간 교대로 망을 보고 있어. 도로 수리공 대기소엔 여덟 놈에다 하사가 한 놈 있고. 여기 당신 시계가 있소.” 집시가 말했다.
“늙은이를 맞이하러 갑시다.” 로버트 조던이 그의 가죽 외투를 입으며 말했다.
“난 안돼. 난 불 좀 쬐고 뜨끈한 수프라도 좀 먹어야겠어. 여기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영감이 어디 있나. 가르쳐주지. 그럼 당신을 안내할 수 있을 거야. 이봐 건달들.” 그는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불렀다.
“내가 가지.” 페르난도가 일어섰다. “장소를 말해봐.”
“잘 들어.” 집시가 말했다. “여긴데······.”하며 그 영감, 즉 안셀모가 감시하는 장소를 가르쳐주었다.
15
안셀모는 커다란 나무줄기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눈은 양쪽에서 휘몰아쳤다. 여기서 더 이상 있다간 얼어 죽겠는걸, 하고 그는 생각했다. 영국인은 교대할 때까지 있으라고 했지만, 그땐 이런 눈보라 따윈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 도로엔 별 이상한 움직임이 없고 길 건너 제재소에 있는 초소의 상태라든가. 보초들의 습관을 알고 있으니까. 이제 캠프로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러나 조금만 더 있어 보자. 그는 생각했다.
발을 비벼대느라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까. 길 쪽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눈 덮인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참모본부용으로 쓰기 위해 위장한 2년쯤 지난 롤스로이스였지만 안셀모는 알아보지 못했다.
자동차는 그의 바로 밑으로 해서 눈 속을 달려갔다. 안셀모는 붉은 얼굴에 강철 헬멧을 쓴 운전사를 보았다. 운전사 옆에 앉은 연락병이 들고 있는 자동소총의 총 끝이 보였다. 차는 길 위로 사라져버렸다. 안셀모는 주머니에서 로버트 조던이 수첩에서 찢어낸 종이 두 장을 꺼내서 자동차 모양을 그린 후에 표시를 했다. 그것은 그날의 열 번째 차였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길 건너편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따뜻하게 하려고 가슴을 두드려댔다. 그는 생각했다. 캠프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군. 하지만 무언가 길 위 나무 곁에 그를 붙잡아놓은 게 있었다. 눈은 더 심하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 운동의 초기부터 최선을 다해 일해왔었다. 그리고 나는 부끄러울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내가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살인이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죄악이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짊어진 것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어떤 구원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영국인과 그것에 대한 것을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그는 젊어서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교회가 있던 시절처럼 무엇인가 속죄할 방법이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그는 미소 지었다. 속죄를 위해서 교회란 편리하게 되었다. 이 생각이 그를 만족시켜 어둠 속에서 미소 짓고 있자니까 로버트 조던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말없이 다가왔기 때문에 영감은 그가 바로 옆으로 올 때까지 알아보지 못했다.
“여보, 영감.” 로버트 조던이 속삭이듯 말하며 노인의 등을 두드렸다.
“어땠소? 영감.”
“몹시 춥군.” 안셀모가 말했다. 페르난도는 좀 떨어져 휘날리는 눈을 등지고 서 있었다.
“캠프로 올라가 몸을 녹입시다. 당신을 여기 너무 오래 있게 한 게 죄였소.”
“감시하고 있었던 일을 가리켜드리겠소.” 안셀모가 말했다.
“아침에 가볼 작정이오.”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자, 이걸 한 모금 드시오.”
그는 늙은이에게 수통을 넘겨주었다. 안셀모는 그것을 기울여 마셔댔다.
“아아! 불 같구먼.” 그가 말했다.
“자, 갑시다.” 어둠 속에서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페르난도는 약간 언덕 위쪽에 서 있었다. 그에게도 한 모금 마시게 해줘야겠군.
“이봐, 페르난도.” 그가 그에게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한 모금 마시지?”
“아냐. 고맙지만.” 페르난도가 말했다.
고마운 건 나야, 하고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담배 장수 인디언 놈이 마시지 않아 다행이야. 많이 남지도 않았으니까. 아아. 늙은이를 만나서 반갑군,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그는 안셀모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당신을 만나서 기쁩니다. 영감.” 그가 안셀모에게 말했다. “내가 우울할 때 당신을 보면 즐거워져요, 자아, 올라가요.”
그들은 눈을 맞으며 언덕을 올라갔다.
“나도 당신을 만나서 기쁘오.” 안셀모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 막 떠나려던 참이었지.”
“만일 떠났더라면 큰일 날 뻔했소.” 로버트 조던이 즐거운 듯이 말했다. “영감이 제일 먼저 얼어 죽었을 거요.”
안셀모는 이제 기분이 좋았다. 그 감시 장소에 머물러 있던 게 무척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그들 셋은 눈 속을 터벅터벅 걸어 산을 올라갔다.
16
“귀머거리 영감이 왔었지.” 필라르가 로버트 조던에게 말했다. 그들은 눈보라 속에서 연기가 가득하고 따뜻한 동굴 속으로 들어왔다. “말을 구하러 간다고 합디다.”
“좋아요. 내게 남기고 간 말은 없소?”
“몰라,” 그녀가 말했다. “저 사람 좀 보시우.”
로버트 조던이 들어올 때 파블로를 봤었다. 파블로는 그를 보고 히죽 웃었었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재킷을 벗으세요.” 마리아가 말했다. “그 위에서 눈이 녹아버리겠어요.”
불에서 연기가 났기 때문에 필라르가 마리아를 불렀다. “불을 피워, 이 쓸모없는 것아. 여기가 연기집인 줄 알아.”
“아주머니가 좀 피우세요.” 마리아가 말했다. “전 귀머거리 영감이 두고 간 병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그건 그 사람 짐 뒤에 있어.” 필라르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 사람을 젖먹이처럼 돌봐줘야만 한단 말이야?
마리아가 귀머거리 영감이 두고 간 위스키를 찾아가지고 왔다. ”
“안셀모에게 한 잔 드려요.” 로버트 조던이 마리아에게 말했다. “추운 건 그분이니까.”
“술맛이 어떻소?” 그가 안셀모에게 물었다.
“어린애가 물을 탄 모양이군.” 안셀모가 말했다.
“로베르토가 마시는 것과 똑같이 했는데요. 뭐.” 마리아가 말했다.
“그걸 이리 줘.” 로버트 조던이 마리아에게 말했다. “그리고 영감에게 타는 듯한 것을 부어드려.”
그는 컵 속에 든 것을 자기 잔에 비우고, 빈 컵을 마리아에게 돌려주었다.
마리아는 병 속에 든 것을 조심스럽게 따랐다.
“바로 이거야. 이걸로 뱃속에 있는 벌레가 모두 죽을 거야.”
그리고 세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서 저녁 식사를 했다.
“여보.” 로버트 조던이 파블로에게 말했다. “이 눈이 그칠 것 같지 않소?”
“딴 사람에게 물어. 난 당신 정보계는 아니야. 당신 정보계한테서 들었을 거 아냐. 그 여자에게 물어. 그 여자가 대장이니까.”
“난 당신에게 묻고 있단 말이야.”
“이 사나이는 취해 있소.” 프리미티보가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시오, 영국 양반.”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취한 것 같지는 않군.”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난 취했어.” 파블로가 위엄 있게 말했다. “마시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취한다는 것이 중요해. 어, 너무 취했는걸.”
“난 의심스러워.” 로버트 조던이 그에게 말했다. “그래, 비겁하게 취했어.”
난 저놈을 죽이고 일을 끝장내고 싶다고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난 저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좋지 않을 게 뻔하다. 내일모레는 다리를 폭파한다. 한데 이 자는 좋지 못하다. 그 사업을 모두 성공적으로 끝내는 데 있어서 그는 위험한 존재다. 그를 처치해 버리자.
파블로는 그를 보고 히죽 웃고는 손가락 하나를 쳐들어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아니야, 영국 양반.” 그가 말했다. “나를 자극하지 마.” 그는 필라르를 쳐다보며 그녀에게 발했다. “날 이런 식으로 처치해 버리려 들지 말란 말이야.”
“더러운 자.” 로버트 조던이 그에게 말했다. 이제 결심을 행동으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겁한 자.”
“그럴 만도 하겠지.” 파블로가 말했다. “하지만 나를 화나게 하지는 못할걸. 술을 좀 드시지, 영국 양반. 그리고 그 술 때문에 실패했다고 여편네에게 신호나 하란 말이야.”
“입 닥쳐.”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나는 내 생각으로 당신에게 도전하고 있는 거야.
“난 여길 나가겠어.” 아구스틴이 말했다.
“무슨 일이야, 깜둥이? 돈 로베르토와 나 사이의 우정을 보고 싶지 않단 말이야?” 파블로가 그에게 말했다.
“깜둥이라니 입조심 해.” 아구스틴이 그에게 다가가 손은 내리고 파블로 앞에 섰다.
“그럼 자넨 뭐야. 빨갱이?”
“그래, 빨갱이다. 군대의 붉은 별과 한패로 공화국 편이지. 그리고 내 이름은 아구스틴이야.”
아구스틴이 왼손을 곧장 내뻗쳐 손등으로 세차게 그의 입매를 찰싹 후려갈겼다. 파블로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로버트 조던은 그의 눈이, 고양이의 눈동자처럼 일직선으로 덮이듯이 가늘어진 것을 보았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파블로가 말했다. “이런 건 문제가 안돼. 이 여편네야.”
아구스틴이 다시 그를 때렸다. 이번에는 꼭 쥔 주먹으로 그의 입을 쳤다. 로버트 조던은 테이블 밑의 손에 권총을 쥐고 있었다. 그는 안전장치를 풀고 왼손으로 마리아를 멀리 밀었다.
“아직 멀었어.” 그가 말했다. “난 바보가 아니야 난 아무렇지도 않아.”
“비겁한 놈.” 아구스틴이 말했다.
“자넨 알고 있을 테지.” 파블로가 말했다. “자넨 저 여잘 잘 알고 있을 거야.”
아구스틴이 다시 그의 입을 세게 후려쳤다. 파블로는 빨개진 입을 벌려 누렇고 보기 흉하게 부러진 이빨을 드러내면서 웃어댔다.
“비겁한 놈.” 아구스틴이 말했다. 아구스틴은 그를 내려다보면 천천히, 명확하게, 가혹하고 경멸하듯이 욕설을 퍼부었다.
파블로는 또 한 잔의 술을 떠서 로버트 조던 앞에 쳐들어 보였다. “교수님을 위하여.” 그리고 필라르에게로 돌아섰다. “대장 여사를 위해서.” 그리고 모두에게 축배를 올렸다. “망상에 사로 잡힌 분들을 위하여.”
아구스틴이 걸어가 손으로 재빠르게 쳐서 그의 손에 들린 컵을 떨어뜨렸다.
“이건 낭비야.” 파블로가 말했다.
“난 당신의 비겁함을 너무나도 잘 안단 말이야.” 필라르가 말했다.
“이 마누라 말버릇 좀 봐라.” 파블로가 말했다. “나는 말을 보러 가겠어.”
“그렇지. 그래야 해!” 아구스틴이 경탄하듯 말했지만, 정신은 딴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근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가겠어.” 파블로가 말했다. “하지만 곧 돌아올 거야.” 그는 동굴 입구에 쳐놓은 담요를 들어 올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소리쳤다.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군, 영국 양반.”
17
동굴 속에서는 이제 화덕에서 나는 식식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필라르.” 페르난도가 말했다. “고깃국 좀 더 있소.”
“아니, 입 닥치지 못해.” 마누라가 말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페르난도의 그릇을 집어 들고 불가에 놓인 냄비로 가져가 국자로 퍼 담았다.
아구스틴은 불 곁에 서 있었다. 필라르는 로버트 조던의 반대쪽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이보우, 영국 양반.” 그녀가 말했다. “그이가 어떤가 봤지.”
“그 사나이는 무슨 짓을 할 생각일까?”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무슨 짓이든 하지.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야.” 그녀가 테이블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동소총은 어디 있소?”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저 구석에 담요로 싸놨소. 필요하오.” 프리미티보가 말했다. “탄창은 저 가방 속에 있소.”
“난 그게 어디 있는가만 알아두고 싶었어.”
“그런 짓은 안 할걸. 그는 그런 기계를 쓸 줄 몰라, 폭탄은 덜질 줄 알지만. 그게 더 어울리지.”
“어젯밤 로베르토가 그잘 죽이는 건데 그랬어.” 집시가 말했다.
“그일 죽여줘,” 필라르가 말했다. 그녀의 커다란 얼굴은 어둡고 지친 듯이 보였다. “이젠 나도 찬성이니까.”
“난 지금까지 반대했었지.” 아구스틴이 말했다. 그는 두 팔을 양 옆구리께로 축 늘어뜨리고 불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도 찬성이야.”하고 그는 말했다. “그자는 이제는 해로워, 그리고 놈은 우리 모두가 파멸당하는 꼴을 보고 싶어해.”
“다들 의견을 얘기해줘.” 필라르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지쳐있는 것 같았다.
안드레, 엘라디오, 프리미티보는 죽이는 데 찬성하고, 페르난도는 그잘 죄수처럼 가둬둘 수는 없을까? 하고 물었다.
“그럼 모두 다 됐군, 영감과 영국 양반만 빼고 말이야.” 아구스틴이 말했다.
“그 사람들은 포함이 안 돼.” 필라르가 말했다. “그인 그 사람들의 대장이 아니니까.”
“빨리 해치웁시다.”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난 언제든지 해치우겠소. 당신들이 해야 한다고 결정한 이상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나의 의무니까.”
“안 돼요.” 마리아가 말했다. “안 돼요.”
“이건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필라르가 그녀에게 말했다. “입 다물고 있어.”
“난 오늘 밤에 해치우겠소.”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그는 입술에다 손가락을 대고 필라르를 보았다. 그녀는 입구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굴 입구에 쳐놓은 담요를 쳐들고 파블로가 머리를 안으로 쑥 들이밀었다. 그는 모두에게 히죽 웃어 보이며 담요 아랫자락을 밀고 들어온 다음 돌아서서 다시 담요를 꼭 닫아놓았다.
“내 얘길 하고 있었나?” 그가 모두에게 물었다. “내가 방해를 했나?”
“말들은 어떻소?” 아구스틴이 말했다.
“아주 원기 왕성해.” 파블로가 말했다. “눈도 덜 내리고.”
“그칠 것 같소?”
“음 이젠 뜸해졌지, 싸락눈으로 변했어. 풍향이 바뀌어서 내일은 쌀쌀하지만 갤 거라구 생각하지.”
저자 좀 봐라,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이제 다정히 구는군, 그는 바람처럼 변했어. 돼지 같은 인간이 돼지는 역시 영리한 동물이다.
“우린 그 일을 하기 딱 좋은 날씨를 맞게 될 거야. 영국 양반.” 파블로가 로버트 조던에게 말했다.
“우리라니.” 필라르가 말했다. “우리라고?”
“그래, 우리야 난 밖에 있는 동안 그걸 심사숙고했지, 우리가 일치되어 협력을 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잖은가?”
“무엇을 말이우? 이제 와서 무엇을 말이우? 입구에서 엿듣고 있었군?” 그녀가 말했다.
“그래, 하지만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어.”
“우리가 죽일까봐 두러워졌겠지.”
“믿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하지만 나를 빼놓고서는 너희들을 보기좋게 그레도스로 데려갈 수 있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어.”
“그레도스라고?”
“거기가 다리 일이 끝난 후에 갈 단 하나의 장소지.”
로버트 조던은 필라르를 보면서 파블로가 볼 수 없는 쪽의 손으로 의심스럽다는 신호를 보냈다.
마누라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가 마리아에게 무엇인가 말하자 마리아가 로버트 조던에게 다가와서 “아주머니가 ‘물론 그는 들었다’고 말해요.” 하고 귀에다 대고 말했다.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페르난도가 물었다. “이젠 믿고 있소?”
“왜 안 믿어?” 파블로가 말했다. “자넨 안 믿나?”
“난 항상 믿고 있지만 말이오.” 페르난도가 말했다.
“난 여길 나가겠어.” 아구스틴이 말했다. “더 이상 이런 정신병원엔 머물 수가 없어. 나까지 미치기 전에 나가겠어.”
18
동굴 안은 따뜻했고 밖에는 바람이 그쳐 있었다. 그는 앞에다 수첩을 꺼내놓고 다리 폭파의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계산을 하면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세 개의 약도를 그리고, 공식을 계산하고, 폭파 방법을 유치원 아이들까지 알아볼 만큼 분명하게 두 개의 도면으로 나타내어, 만일 그 파괴 작업 도중에 자기에게 만약의 일이 생겨도 안셀모가 뒤를 맡아 완수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이제 그는 폭파 계획을 다 끝내고 수첩의 페이지를 넘기며 작전상의 명령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명령을 분명하고 멋있게 생각하며 써나갔으므로 써놓은 뒤에 그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다 된 것 같군,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두 개의 초소는 파괴될 것이며, 다리는 골즈의 명령대로 폭파시킬 수 있다. 파블로에 관한 모든 일은 내가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파블로가 참가할 수도 있고 참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염려할 것은 없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들이 움직이는 바퀴에 올라 타지는 않을 작정이다. 나는 두 번이나 그들의 바퀴에 올라탔다. 그 바퀴는 두 번이나 돌아서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왔고 나는 더 이상 그들과의 관계는 맺고 싶지않다. 나는 다리만 폭파하면 그들과의 모든 관계는 끝나는 것이다.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바퀴에 올라탈 일도 없겠지만 올라타도 안된다.
모두 카드놀이를 하고 있고 파블로는 술단지를 끼고 앉아 있으며, 필라르는 불 곁에 앉아 카드놀이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무얼 하고 있었나, 영국 양반?” 파블로가 테이블 건너편에서 물었다. 그의 눈은 다시 흐려져 있었다.
로버트 조던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바퀴를 움직이게 하지 마, 하고 그가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 바퀴에 발을 올려놓지 마. 다시 돌기 시작할 것 같군.
“다리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지.”
그가 공손하게 말했다.
“잘 됐나?” 파블로가 물었다.
“아주 잘 됐지.”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모든 게 아주 잘 됐지.”
“난 퇴각 문제에 대한 걸 생각했수다.” 파블로가 말했다. 로버트 조던은 그의 술 취한 돼지 같은 눈을 쳐다보고, 술 단지를 바라보았다. 술 단지는 거의 비어 있었다.
바퀴에 타지 마. 하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놈은 다시 마시기 시작했구나. 그렇다 하지만 이제 난 그 바퀴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랜트 장군도 남북전쟁 때 거의 언제나 취해 있었다고 하잖는가? 확실히 그랬을 게다. 그랜트는 또 시가를 좋아하기도 했었다. 그래, 파블로에게 시가를 구해다 주어야겠다. 저 얼굴에 그렇게 해주어야만 제격이 된다. 반쯤은 쭈글쭈글해진 시가를, 어디서 파블로에게 시가를 얻어다 주지?
“그건 어떻게 돼가오?”
“아주 잘 됐어.” 파블로가 묵직하게 그리고 엄숙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 이상한 노릇은 이제 험악한 분위기로부터 정상적인 가정생활로 돌아와 있는 그 변화이다. 라고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그것이 너를 태우려 할 때는 그 저주받을 바퀴가 내려와 있을 때다. 하지만 난 그놈의 바퀴는 타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19
“거기 앉아서 무얼 하고 계세요?” 마리아가 그에게 물었다. 그녀는 그의 바로 옆에 바싹 붙어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말했다. “생각을 하고 있었어.”
“무엇에 대해서요? 다리 일이에요?”
“다리 일은 다 끝냈어. 당신과 마드리드에 있는 호텔을 생각했지 거기 내가 아는 몇 사람의 러시아인들이 있어. 그리고 어느 땐가 내가 쓰게 될 책에 대해서도 말이야.”
“마드리드엔 러시아 사람들이 많아요?”
“아냐, 아주 드물어.”
“러시아 사람들을 좋아하세요? 여기 있던 분도 러시아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을 좋아했나.”
“네, 난 그때 앓고 있었지만, 그분은 매우 아름답고 용감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무슨 말이야 아름답다니.” 필라르가 말했다. “코는 내 손바닥처럼 납작하고 광대뼈는 양의 엉덩판처럼 넓었는데.”
“그 사람은 나의 좋은 친구였고 동지였지.” 로버트 조던이 마리아에게 말했다. “난 그를 아주 좋아했어.”
“그럴 테지.” 필라르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자를 쏘아 죽였단 말이야.”
그녀가 이 말을 하자 카드놀이를 하던 사람들이 테이블 쪽에서 쳐다보았다. 파블로는 로버트 조던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집시 라파엘이 물었다. “그게 사실이우, 로베르토?”
“사실이지.”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그는 필라르가 이 문제를 끄집어내지 않기를 바랐었다. 그리고 귀머거리 영감네 캠프에서 그 얘기를 하지 말걸, 하고 생각했다. “그의 요청에 의해서지, 그 사람은 부상이 심했거든.”
“참 이상한 일이군.” 집시가 말했다. “우리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 사람은 내내 그런 일이 있을 거라는 얘기를 해댔지. 난 얼마나 여러 번 그 사람에게 그렇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는지 몰라. 참 이상한 일도 있지.” 그는 다시 되풀이해서 말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 사람은 아주 기묘한 사람이었어.” 프리미티보가 말했다. “아주 이상야릇했어.”
로버트 조던은 동굴 입구로 걸어가서 담요를 들치고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맑고 싸늘한 밤이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그는 눈이 하얗게 덮인 나무줄기 쪽을 쳐다보고, 나무들 사이로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싸늘한 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귀머거리 영감이 오늘 밤 말을 훔치러 갔다면 발자국을 많이 남기겠는걸.’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담요를 놓고 연기 낀 동굴 안으로 되돌아왔다. “맑게 개었어.” 그가 말했다. “눈보라도 멎고.”
20
이제 그는 어둠 속에 누워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미 바람은 멎었고 소나무 숲은 어둠 속에 잠잠히 서 있었다.
그는 이른 저녁 나절에 도끼를 들고 동굴을 나가. 가문비나무를 베어 쓰러뜨렸다. 가문비나무가 산만큼이나 쌓이자. 가지를 쳐내고 밑에 깔고 동굴에 세워두었던 한 장의 판자를 가지고 나왔다. 그 판자로 바위 아래의 눈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가지의 눈을 완전히 털어낸 다음 겹친 깃털처럼 쌓아서 침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판자와 도끼를 들고 동굴로 되돌아가 입구에 본래대로 세워놓았다.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수?” 필라르가 물었다.
“침상을 만들었소. 고향의 것과 똑같이 만들었소.”
“그럼 푹 주무시우.”
“보초는 세우지 않소?” 하고 그는 물었다.
“페르난도가 갈 거요.” 하고 필라르가 대답했다.
마리아는 동굴 안쪽에 있었기 때문에 로버트 조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모두 잘 자슈.” 그는 말했다. “나도 자겠소.”
안셀모는 구석 쪽에서 모포와 망토를 머리까지 덮어쓰고 이미 잠에 푹 빠져 있었다. 파블로도 의자에 기댄 채 잠자고 있었다.
페르난도가 함께 나왔는데 조던이 펼쳐놓은 침낭이 있는 곳까지 오자 잠깐 멈춰 섰다.
“밖에서 자다니 재미있는 것을 생각해냈군, 돈 로베르토.” 그는 카빈을 어깨에 멘 채 어둠 속에 서서 말했다.
“아주 길이 들었어. 그럼 안녕.”
“길이 들었으면 걱정이 없겠지만.”
“몇 시에 교대하나?”
“4시지.”
“가끔씩 갑자기 추위가 밀어닥치거든. 조심하지 않으면 안돼.”
“뭐 익숙해져 있으니까.”
“그렇다면 걱정이 없겠지만.” 하고 로버트 조던은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암 걱정없구말구.”하고 페르난도는 대답했다. “이젠 가야지. 그럼 잘자우. 돈 로베르토.”
“안녕 페르난도.”
마리아가 보따리를 건네주며, “이걸로 함께 베개를 해요.” 그녀가 말했다.
“눈 위를 맨발로 걸어왔군?”
“이제 잘까요?” 그녀가 말했다. “난 쉽게 잠들 수 있어요.”
“나도 자겠어.” 그가 말했다. “잘 자 마리아.”
그리고 그는 잠들었다. 잠속에서 그는 행복했다.
21
날이 새자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나무 위의 눈이 녹아 무겁게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눈을 뜨는 순간 어젯밤 눈이 산악지방 특유의 일시적인 눈보라였으며, 정오까지는 다 녹아버리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젖은 눈이 뒤범벅이 된 말굽으로 쿵쿵거리는 둔한 소리를 내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카빈총 집이 철컥철컥 천천히 부딪치는 소리와 가죽이 삐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마리아.” 그가 불렀다. 그리고 그녀를 깨우려고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침낭 속에 숨어.” 그리고 자동권총을 쥔 후, 엄지손가락으로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는 그녀의 밤송이 머리가 침낭 속으로 재빨리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때 한 사람의 기병이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침낭 속에서 팔꿈치를 고정시킨 채 두 손으로 권총을 쥐고 다가오는 사나이를 겨냥했다. 전에 본 적이 없는 사나이였다.
기병은 그의 정면으로 말을 몰고 왔다. 젊고 억세 보이는 얼굴이었다. 순간 사나이는 로버트 조던을 발견했다.
사나이가 총집으로 손을 뻗치고 몸을 낮추면서 홱 몸을 돌리는 순간, 로버트 조던은 사나이의 오른쪽 가슴에 새빨간 휘장이 달려 있는 것을 흘긋 보았다.
로버트 조던은 그 휘장 조금 아래쪽인 가슴 중앙부를 겨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가 눈 쌓인 숲을 뒤흔들었다.
말은 박차에 걷어차였을 때처럼 펄쩍 뛰어올랐고. 계속 총집을 끌어당기던 젊은이는 오른쪽 발을 등자(鐙子)에 건 채 땅 위로 굴러떨어졌다. 말은 얼굴이 거꾸로 매달린 젊은이의 몸을 땅에다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젊은이를 질질 끌면서 나무 사이를 달려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말에 끌려가는 젊은이의 몸으로 인해 넓고 검은 흙길이 생겨났고, 그 길 한쪽에는 새빨간 핏줄기가 그어졌다. 사람들이 동굴 입구로 나왔다. 로버트 조던은 베개로 삼고 있던 바지를 풀어 입었다.
머리 위로 아주 높게 비행기가 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들 사이로 그는 잿빛 말이 서 있는 걸 보았다.
“가서 저 말을 끌고 와.” 그는 뛰어나오는 프리미티보에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꼭대기에는 누가 보초를 서고 있나?”하고 외쳤다.
“라파엘이야.” 필라르가 동굴에서 말했다.
“기병대가 나타났소.”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그곳에다 총을 장치하시오.”
두 사나이가 자동소총과 탄알 통을 들고나왔다.
“그걸 가지고 저리로 가.” 로버트 조던이 안셀모에게 말했다. “총 옆에 엎드려 있어.”
그들은 숲 사이로 뚫린 오솔길을 뛰어 올라갔다.
해는 아직 산봉우리 위로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로버트 조던은 권총집에 권총을 꽂았다.
언젠가는 주군가가 이 총에 맞아 죽을 게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권총을 빼내 탄창을 뽑아 버리고 탄띠에서 탄창을 하나 꺼내 장전했다.
그는 프리미티보가 말의 고삐를 잡고 등자에 걸린 기수의 발목을 빼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바라보자니까. 프리미티보가 시체의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말을 끌고 이리 와요.” 그가 불렀다.
그 기병은 아무것도 예기치 못했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동료들로부터 낙오되어 당황한 나머지 말 발자국을 더듬어 뒤쫓는 것조차도 잊어버리고 제대로 경계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반드시 이 부근까지 온 척후대의 일원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척후대에서 그가 사라진 것을 깨닫는다면 반드시 그의 발자국을 더듬어 이곳으로 올 것임에 틀림없다. 눈이 빨리 녹아버리지 않는 한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당신은 아래를 감시하고 있어.” 하고 그가 파블로에게 말했다.
그는 두 개의 배낭 가운데 기관총이 든 쪽의 배낭을 풀고 그 속에서 총신과 받침대를 꺼내 조립한 후 탄창을 주머니에 넣고 배낭을 자물쇠로 채우고 나서 입구로 향해 달려갔다.
“나는 위로 가겠어. 아구스틴은 쏠 줄 아나?”
“알지.” 파블로가 말했다. 그는 프리미티보가 말을 끌고 올라오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정말 훌륭한 말이로군,”
“이놈을 다른 말들 틈에 끼워줘야겠군.” 파블로가 말했다.
“안돼. 이놈은 여기까지 들어올 때 발자국을 내놨으니 밖으로 나간 발자국도 만들어놔야 되오.”
“정말 그래.” 파블로가 동의했다. “그럼 내가 그놈을 타고 나가 어딘가에 숨겨뒀다가 눈이 녹거든 다시 끌고 오기로 하지, 오늘은 머리 깨나 쓰는군, 영국 양반.”
“그럼 누군가를 저 아래로 좀 보내주시오.”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우린 저 위로 올라가 봐야 할 테니.”
“그럴 필요 없어.” 파블로가 말했다. “기병들은 그 길로는 오지 못할 거야.”
그는 팔을 들어 고삐를 잡더니 안장 위로 뛰어올랐다. 그는 히죽 웃으며 신경질이 난 말의 목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로버트 조던은 그가 다리로 말의 옆구리를 다정스레 비벼대는 것을 보았다.
“정말 훌륭한 말이야.” 하면서 다시 한번 그 커다란 잿빛 말을 두드려주었다. “정말 훌륭한 말이야 가자, 여길 빨리 빠져나갈수록 더 좋을 거야.”
그리고 눈 속에 엎어져 있는 젊은이 쪽으로 턱을 가리키면서 필라르에게 말했다.
“포켓을 뒤져서 무엇이든지 깡그리 갖다주었으면 좋겠소. 편지도 글씨를 쓴 것도 전부 말이오. 그리고 나의 배낭 바깥쪽 포켓에 넣어두시오. 알겠소?”
“알았수.”
“자아 갑시다.” 하고 그는 말했다.
파블로가 앞장서서 전진하자 사나이 두 명이 눈 위에 말 발자국을 남기지 않도록 한 줄로 서서 따라갔다.
로버트 조던은 총구를 아래쪽으로 두고 손잡이 앞쪽을 쥔 채. 경기관 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태양은 막 산마루 위로 솟아오르려 하고 있었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눈이 녹기 시작하는 기분 좋은 늦봄의 아침이었다.
22
“소나무 가지를 꺾어 가지고 와.” 로버트 조던이 프리미티보에게 말했다. “어서 속히.” 그러고 나서······. “총을 거기다 세워선 안되겠는데.” 하고 아구스틴에게 말해다.
“왜?”
“저 너머에다 세워.” 로버트 조던은 손가락으로 그 장소를 가리켰다.
“이유는 나중에 말할 테니까.”
“여기다 이렇게 도와 드리지. 여기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는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바위 양쪽의 높이를 재면서 길쭉한 장방형의 골짜기를 둘러보았다.
“좀 더 멀리 놔야겠어.” 그가 말했다. “좀 더 멀리 좋아. 거기야 나중에 고정 시킬 때까지 그곳에 놓아두면 되겠지. 저기, 저기다 돌을 갖다 놔. 여기 하나 있군. 또 하나 그 옆에다 나란히 놔. 총구를 움직일 수 있는 여유를 남겨놓아야 돼. 그 돌은 이쪽으로 좀 ㄱ더 떨어지게 놓아야겠군, 안셀모, 동굴로 내려가서 도끼 좀 갖다 주시오. 빨리.”
파블로는 다져진 길을 가로지르자 한 번 뒤돌아보고서는, 자동소총의 사격 범위가 되어 있는 마루턱의 평탄한 곳을 한 바퀴 돌아 저쪽으로 넘어가 아까 젊은이가 남겨 놓고 간 발자국을 따라서 비탈길을 내려갔다. 그리고 이윽고 왼쪽으로 꺾어서, 숲속으로 그 모습을 숨겨버렸다. 파블로가 기병대와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하고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놈들이 우리들의 무릎 사이로 굴러 들어오면 야단인데.
프리미티보가 소나무 가지를 가져왔기 때문에 로버트 조던은 그것을 눈 위로부터 흙 속에다 꽂고 총이 완전히 가려지도록 양쪽에서 구부려 덮었다.
“좀 더 꺾어다 줘.” 그가 말했다. “여기에서 총을 쏠 두 사람을 은폐시켜야 하니까. 안셀모가 도끼를 가져오면 더 보충을 하도록 하지.” 그가 말했다.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어디든 좋으니까. 바위 그늘로 가서 납작 엎드려야 해. 난 총을 가지고 여기 있을 테니까.”
만약 기병대들이 말 발자국을 따라온다면 오늘 귀머거리 영감은 어찌 될까? 신만이 알 뿐이다. 좋지 않은 일인데. 눈이 그렇게 그쳐 버리다니 하지만 오늘 안으로 눈이 녹아버린다면 괜찮을지도 몰라, 그러나 귀머거리 영감에겐 때가 늦을지도 몰라,
오늘은 아주 재미있는 날이거나 아주 형편없는 날이 되리라. 기병대가 이곳으로 오지 않고 가버린 걸 신께 감사드리자. 그들이 이곳까지 말을 타고 올라온다 하더라도 지금 여기 있는 발자국이 난 이 길 쪽으로는 오지 않으리라, 그들은 그가 일단 멈추었다가 돌아갔으리라 생각하고 파블로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가리라.
마침 그때, 집시가 바위 사이를 뛰어왔는데, 두 손에는 커다란 토끼를 한 마리씩 붙들고 왔다.
“야아. 로베르토.” 하고 그는 아주 기쁜 듯이 외쳤다.
조던이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보이자. 집시는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를 쏘다니다 이제 왔나?”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놈들을 뒤쫓고 있었지.” 하고 집시는 말했다. “자, 두 마리 모두 잡아 왔어.”
“그래, 당신의 소임인 감시는 어떻게 했지?”
“그렇게 텅텅 자리를 비워두진 않았어.” 하고 집시는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무엇이 지나가기라도 했나?”
“적의 척후병이 나타났어.”
“제기랄! 그래, 당신은 그놈을 봤소.”
“한 놈은 지금 저쪽에서 쭉 뻗어 있어.”
“어쩐지 총소리가 들린 것 같더라니. 쳇! 무슨 꼴이야. 그런 때 놀고 있다니! 그래, 그놈이 이 방향으로 나타났나?”
“이쪽이야, 당신이 담당하고 있는 곳이란 말이야. 당신이 집시가 아니라면 쏴 죽였을 거야.”
“아아, 로베르토, 그런 말 하지 말아줘, 미안하지 짝이 없어, 토끼 탓이야. 그래 기병은 죽었나?”
“죽였어.”
“당신이?”
“그렇지.”
“그래······ 당신이 말이지!” 집시는 노골적으로 추종하는 기색을 띠고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틀림없이 비범한 사람이야.”
“토끼나 동굴로 갖다주고 와. 그리고 무엇이든지 아침을 좀 가지고 와, 그리고 서류를 가지고 와 필라르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어.”
“화나지 않았지. 로베르토!”
집시는 두 마리의 토끼를 집어 들고 바위틈 사이로 빠져나갔다.
집시 놈, 하고 그는 생각했다. 정말 쓸데없는 놈이다 그놈은 정치적으로 진보되어 있지 않고 훈련도 제로라 무엇하나 시킬 수가 없다. 그러나 내일은 놈도 필요하다. 내일은 놈이 쓸모가 있다. 전쟁에서 집시를 만나다니 이상한 일이군. 까마귀 한 마리가 머리 위에서 빙빙 돌다가 소나무 위에 내려앉았다. 또 한 마리의 까마귀가 합세했다. 저놈들은 내 보초병이군, 저놈들이 얌전히 있는 한, 숲으로는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단 말이야.
아구스틴과 프리미티보가 나뭇가지를 가지고 왔다. 조던은 그것으로 자동소총의 위를 덮고, 공중에서 보아도 전혀 총으로 보이지 않도록, 숲에서 보아도 부자연스럽지 않도록 위장했다. 그리고 수비에 임할 장소를 두 사람에게 지시했다.
“적군이 눈에 띄어도 쏘면 안 돼.” 하고 조던은 말했다. “우선 돌멩이를 굴려 알려야 해.”
“만약 놈들이 말에서 내리면 총 끝으로 땅을 찔러 보이란 말이야. 이렇게.” 하고 땅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이 기관총을 쏠 때까지는 어떠한 공격도 안 돼, 놈들이 동료를 찾으러 오더라도 여기까지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또 파블로의 발자국을 따라갈지도 모르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어, 되도록 충돌하고 싶지 않아. 아니, 피할 수 있는 한 피해야 해. 자아, 가라구.”
안셀모가 도끼를 들고 왔다.
“가지가 좀 더 필요한가?” 하고 그가 물었다. “나는 아주 잘 은폐되었다고 생각되는데······.”
“가지가 아니고 여기에 나무를 세워서 자연스럽게 보이고 싶어. 진짜로 보이기에는 나무의 수가 적어.”
“그럼 저것을 베어오겠어.”
“아주 위쪽으로 쑥 올라가서 베어오시오. 그루터기가 보이지 않도록 말이오.”
한 마리의 까마귀는 아직 그곳에 있었다. 그때 높은 하늘에서 은은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비행기는 아주 높고 조그맣게 햇빛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저놈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래도 엎드리는 것이 좋을 거야. 오늘은 정찰기가 두 번째로군.” 조던은 아구스틴에게 말했다.
로버트 조던이 보고 있으려니, 그 까마귀는 날아올랐다. 그리고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숲 위를 직선으로 날아 사라져버렸다.
23
“엎드려!” 조던이 날카롭게 아구스틴에게 속삭였다. 그는 머리를 돌려 엎드려, 엎드려, 하는 시늉으로 크리스마스트리와 같은 소나무를 어깨에 메고 골짜기를 올라오고 있는 안셀모에게 손을 흔들었다. 늙은이가 소나무를 내려놓고 바위틈으로 숨는 것이 보였다.
“기병이다!” 하고 프리미티보는 조그만 소리로 아구스틴에게 속삭였다. 로버트 조던은 팔을 뻗어 아구스틴의 어깨 위에 놓았다. 그 손을 떼기도 전에 네 명의 기병이 숲속에서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고, 아구스틴의 등 근육이 그의 손 아래에서 파르르 경련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병 하나가 앞장을 서고 세 사람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앞장선 사나이는 끊임없이 아래를 보면서 말 발자국을 따르고 있었고, 뒤의 세 사람은 뒤를 따르고 있었다. 로버트 조던은 엎드린 채 양 팔꿈치를 넓게 벌리고 자동소총의 가늠자 너머로 네 사람을 쏘아보았다.
앞장선 사나이는 파블로가 돌아선 데까지 말 발자국을 따라 올라와서 멈춰 섰다. 나머지 세 놈도 그곳까지 따라와서 멈추었다. 앞장선 사나이는 말의 가슴을 로버트 조던 쪽으로 향하게 하고 자동소총의 개머리판을 안장 오른쪽에 매단 가죽집 밖으로 삐죽 나오게 한 채 조던이 있는 쪽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세 사나이는 자동소총을 꺼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적을 보다니,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경기관총의 총신과 일직선이 되는 곳에서 이렇듯 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자동소총으로부터 요란스럽고 가슴이 철렁할 만큼 퉁겨지듯이 탄환이 쏟아져 나갈 그 장소를 누른 채, 그는 생각했다. ‘너는 그렇게 젊은데, 지금 죽는 것이다.’하고 생각했다.
그는 바로 곁에 있는 아구스틴이 기침을 할 것 같은 기척을 느꼈고, 그것을 기를 쓰고 참으며 겨우 억눌러 씹어 삼키는 것 같음을 느꼈다. 그러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삐죽 나온 기름칠한 푸른빛이 도는 총신을 따라서 손가락을 계속 안전장치에 대고 앞쪽으로 밀어낸 채 가만히 눈길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자니, 앞장선 사나이가 말을 빙그르르 돌려 파블로가 들어간 숲속을 손가락질했다. 네 사람이 숲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자 아구스틴이 “숫 산양 같은 놈들!”하고 중얼거렸다.
로버트 조던은 등 뒤쪽, 안셀모가 나무를 내던진 바위 쪽을 뒤돌아보았다.
집시 라파엘이 천으로 만든 한 쌍의 안장 부대를 안은 채, 총을 등 쪽으로 걸쳐 메고 오고 있다. 조던이 손을 흔들어 몸을 엎드리라고 신호를 하자. 집시는 바위 그늘로 기어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네 놈 다 몰살시킬 수 있었는데.” 하고 아구스틴이 조용히 말했다.
“음. 그러나 발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어.”
마침 그때, 그는 다시 돌멩이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재빨리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집시의 모습도 안셀모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프리미티보의 총이 언제 멈출지 모를 만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다. 파블로가 떠난 지 45분이 된다고 조던은 생각했다. 그러자 한 무리의 기병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 그는 아구스틴에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아까처럼 지나가 버릴 테니까.”
앞서의 무리들과 똑같이 무장을 한 기병이 20기, 2열 종대로 숲가를 달려오는 것이 보였고, 이윽고 그들도 앞서와 같이 숲속으로 사라져 갔다.
“봤나?” 조던이 아구스틴에게 말했다. “보았어?”
“많군.” 하고 아구스틴이 말했다.
“앞서의 놈들을 해치웠더라면 이놈들도 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야.” 조던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버트 조던은 프리미티보가 감시하고 있는 곳을 쳐다보고 그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열십자를 만들어 ‘이상 없다’고 신호하는 것을 보았다.
안셀모의 머리가 바위 위로 나타났기 때문에 조던은 올라오라고 신호를 했다. 노인은 기관총 곁에까지 기어 올라와서,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많더군,” 그는 말했다. “많더군!”
“이 이상 더 위장을 숲처럼 훌륭하게 할 필요는 없어.” 조던이 말했다. 안셀모도 아구스틴도 싱글싱글 웃기 시작했다.
“지금 나무를 새로 세우면 이번에 돌아왔을 때는 오히려 수상하게 보여 시끄러워져.”
그는 지껄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었는데,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큰 위험이 사라져버렸다는 증거였다. 언제나 그는 위험이 있은 뒤에 솟아오르는 이 강한 욕망으로 인해서 어느 정도 위험했던가를 알 수 있었다.
“집시가 식사를 가져오는지 한번 보시오.” 그는 안셀모에게 말했다. “놈을 여기까지 올라오게 하면 안 되오. 놈은 바보니까. 영감이 손수 가지고 오시오. 그리고 놈이 아무리 많이 가지고 오더라도 좀 더 가지고 오라고 해서 돌려보내시오. 아아. 허기가 지는걸.”
24
5월 말경의 아침이었으므로 하늘은 높게 개고. 바람은 따뜻하게 로버트 조던의 어깨를 스치고 갔다. 그들은 아침 식사를 했다. 산양고기와 치즈를 끼운 두 개의 커다란 샌드위치로, 로버트 조던은 휴대용 칼로 양파를 두껍게 썰어 고기와 치즈 사이에 그것을 끼워 넣었다.
“술 단지를 이리 좀 줘, 입가심을 해야겠어.” 하고 고기와 치즈와 양파를 흐물흐물하게 씹은 빵을 가득 입안에 문 채 로버트 조던은 말했다. 그리고 취기가 은은히 풍기는 술을 입안으로 가득히 머금고 꿀꺽 삼켰다.
“영국 양반, 당신과 요전번에 온 폭파 기술자와는 이만저만 다르지 않아.” 아구스틴이 말했다.
“다른 점이 있지.”
“그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시오.”
“나는 살아 있지만, 놈은 죽어버렸어.” 조던이 이어서 말했다. “그 사나이는 몹시 고생을 한 인간이었어. 나는 그다지 고생을 하지 않은 축에 끼는 인간이야.”
“나도 그래.” 아구스틴이 말했다. “나는 조금도 고생을 하지 않은 편이야.”
“정말로 이상야릇한 일도 있어.” 아구스틴은 말했다. “마리아를 데려온 후, 필라르 할멈은 마치 마리아를 카르멜파(1156년 이탈리아의 카르멜산에 창설된 수도회의 수녀원)에 넣기라도 할 것 처럼 아주 엄격하게 감시를 해 아무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해왔단 말이야. 그 할멈이 엄중하게 처녀를 지킨 그 대단한 보살핌을, 당신 같은 사람은 상상도 못 할 거야. 당신이 나타나니까 할멈은 마치 선물이라도 하듯이 당신에게 주어버렸단 말이야.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
“필라르는 그 아가씨를 이번 폭파일이 끝난 후에는 내가 데려가셔 보살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야.”
“그렇게 보살피는 방법도 있군.” 아구스틴이 말했다.
“이제 그런 얘기라면 그만두자구.” 조던은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있는 거야.”
“그래 앞으로 다리 일이 끝난 후에는?”
“함께 데리고 가지.”
“그렇다면 더이상 군소리는 하지 않기로 하고 당신들 두 사람의 행복을 빌겠어.”
그는 가죽 술 부대를 집어 들어 천천히 마시고 나서 조던에게 넘겨주었다.
“한 가지 얘기할 것이 있어. 영국 양반. 나도 그 처녀를 무척 생각하고 있었어. 무척 말이야. 그 누구도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나는 상상할 수 있어.”
“당신을 위해서나 그 까까머리를 위해서거나. 무엇이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괜찮아.”
“당신과 마리아 두 사람을 위해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어, 이번 다리 일도 무조건 당신의 명령대로 하겠어. 내일 일을 위해서 죽을 필요가 있다면 나는 기꺼이 가벼운 마음으로 죽겠어.”
“나도 그런 마음이야.”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그런데 당신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참으로 기분이 좋군.”
“그리고 조금만 더 말하겠어.” 아구스틴이 말했다. “위에 있는 저 사나이 프리미티보는 신뢰할 수 있어. 필라르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여자야. 안셀모라는 영감도 그렇지, 안드레도 엘라디오도 그렇지. 아주 얌전한 놈이지만 믿음직스러운 놈이지. 그리고 페르난도도 둔한 놈이지만, 명령받은 일을 해내는 데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 훌륭한 놈이야. 이제 당신도 곧 알게 될 거야.”
“우리들은 운이 좋았어.”
“아니, 우리들에게는 두 가지 약점이 있어, 집시와 파블로야. 귀머거리 영감네 패는 우리들과 차이가 많아. 우리들보다는 상수야.”
그렇게 말하는 사이 그는 무슨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아주 멀리서 나무 위를 우수수 스치고 지나는 따뜻한 바람소리보다 더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이제 로버트 조던은 전신을 긴장시키고 귀를 곤두세웠다. 이윽고 은은히 바람 속에서 그 소리가 들려왔다.
“잠자코 있어.” 아구스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는 이렇게 말한 후, 그의 쪽과 반대편으로 향하게 했다. 아구스틴이 갑자기 그의 쪽을 보았다.
“무슨 일이지?”하고 그는 물었다.
로버트 조던은 입에다 손을 대고, 더욱 열심히 귀를 곤두세웠다.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미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것은 자동소총의 정확한, 튀는 듯하고 뒹굴어대는 듯한 총소리였다. 마치 조그만 폭죽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먼 곳에서 잇따라 폭발하고 있는 듯한 소리였다. 로버트 조던은 그때, 이미 고개를 들어 얼굴은 이쪽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귀에 손을 대고 있는 프리미티보를 쳐다보았다. 프리미티보는 저쪽 산의 가장 높은 대지 쪽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귀머거리 영감이 있는 쪽에서 벌어지고 있군.” 하고 로버트 조던은 말했다.
“그럼 도와주러 가야지.” 아구스틴이 말했다. “전원 집합시켜! 가야 해!”
“아니.”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우리들은 여기 있어야 해.”
25
로버트 조던이 프리미티보가 있는 쪽을 쳐다보니, 그는 이미 감시 장소에서 일어나 총을 쳐들고 소리나는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는 이 총 곁에 있어.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확실해질 때까지는 쏘면 안돼. 적이 저 관목(灌木)께에 이를 때까지는 말이야.” 로버트 조던이 손가락질해 보였다. “알겠지?”
“응 그런데······.”
“그런 데고 뭐고 없어. 나중에 설명하겠어. 나는 프리미티보가 있는 곳으로 가겠어.”
안셀모가 옆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노인에게 말했다.
“영감, 당신은 아구스틴과 함께 그 총 곁에 있어 줘.”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기병이 정말, 이곳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못 쏘게 해줘. 단지 저곳에 모습만 나타낸다면 아까처럼 가만히 내버려 두란 말이오. 그러나 아구스틴이 쏘아야만 할 경우가 되면, 당신은 총 다리를 단단히 눌러주고 탄창이 비면 새로 넘겨주란 말이오.”
“알았어. 그런데 라그랑하 행은 어떻게 하지?”
“그것은 나중 일이야.”
조던은 바위산을 기어 올라갔다. 태양은 바위 위의 눈을 빠른 속도로 녹이고 있었다. 둥근 바위 위에는 이미 말라가고 있었고. 올라가면서 휘둘러보니 소나무 숲과 길쭉하게 텅 빈 빈터와 저쪽 산 앞의 저지대가 보였다. 이윽고 그가 두 개의 둥근 바위 뒤의 움푹 팬 곳에 있는 프리미티보 곁에 서자. 햇빛에 그을은 조그만 사나이가 말했다.
“귀머거리 영감이 당하고 있어. 어떻게 하겠어?”
“어쩔 수가 없어.” 로버트 조던이 대답했다.
그곳에서는 총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아득한 골짜기 저쪽에 기병대의 한 무리가 숲속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 눈에 덮인 사면을, 총성이 나는 방향을 향해서 달려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두 줄로 가늘고 길쭉하게 늘어선 사람과 말이 일정한 각도를 잡고 언덕을 올라가는 모습이 눈 위에 까맣게 보였다. 그는 그 두 줄이 언덕의 마루턱에 이르러 다시 저쪽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구원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될 거야.” 프리미티보가 말했다. 목소리가 메말라 억양이 없었다.
“그럴 수는 없어.” 로버트 조던이 그에게 말했다. “아침부터 나는 이렇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어.”
“무엇을 보고 말이야?”
“귀머거리 영감네 패에서는 어젯밤 말을 훔치러 갔거든. 눈이 멎어 발자국이 남아 뒤를 밟힌 거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구원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될 거야.” 프리미티보는 말했다. “이렇게 되었는데 모른 척할 수도 없거든 동지니까.”
“저 소리를 들어봐······.”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총소리는 잇따라서 겹쳐졌다가는 부서지는 파도 소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메마른 자동소총의 굉음에 수류탄이 작렬하는 둔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당해버리고 말 거야.”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눈이 멎었을 때. 이미 당해 버린 거야. 만약 우리들이 그곳으로 간다면 역시 당하게 돼. 지금 우리들이 갖고 있는 힘을 얼마간 분산시켜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저 소리를 들어 봐.” 그는 말했다. “몰살당해.”
“소굴을 포위당해 버렸다면 그렇게 되겠지.” 로버트 조던은 말했다. “말을 타고 우리넷이 가게 해줘.”
“그곳에서 죽기 위해서? 태양을 보라고, 아직 저물려면 멀었어.”
하늘은 높고 구름 한 점 없었으며, 태양은 두 사람의 등에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아래 빈터의 남쪽 비탈은, 이미 눈이 녹아 진창의 땅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고. 소나무 가지에 쌓인 눈도 완전히 떨어져 버렸다.
“바로 이런 때 꾹 참고 견뎌야 해.” 로버트 조던은 말했다. “지금이 참고 견뎌야 할 때야. 전쟁에서는 이런 일이 가끔 있어.”
마침 그때 총소리가 갑자기 더 요란해지고 그에 섞여서 수류탄이 작렬하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둥근 바위 사이로 힘든 듯이 몸을 끌면서 여자가 두 사람 쪽으로 기어 올라왔다. 로버트 조던은 내려가서 필라르를 끌어올려 주었다.
“자, 당신의 쌍안경이야.”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목에 건 가죽끈을 벗겼다.
“역시 귀머거리 영감네 있는 곳이우?”
“그렇소.”
“불쌍하게도.” 동정에 겨운 듯이 그녀는 말했다. “가엾군, 그 영감. 포위 당했수?”
“아마 그런 모양이오.”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프리미티보는 구하러 가고 싶어 하오.
”당신 돌았어? 필라르는 사나이를 향해서 말했다. “어떤 미친 소동을 이 부근에서 일으키려고 하는 거야?”
“나는 도와주러 가고 싶어.”
“안돼, 안돼.” 필라르는 말했다. “여기에도 꿈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자가 있군, 그런 쓸데없는 여행을 하지 않아도, 이제 곧 죽게 된다는 것을 몰라? 당신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된 주제에.”
“비웃지 마.” 프리미티보는 불쾌한 듯이 말했다.
“당신도 곧 우리들과 함께 죽는 거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으려고 할 것까진 없어.”
마침 그때 머리 위 높은 곳에서 나는 폭음을 들었다. 그것은 정찰기 같아 보였다. 전선에서 돌아오는 길인 듯 귀머거리 영감이 공격을 받고 있는 고지 방향을 향해서 날아가고 있었다.
“또 불길한 까마귀 녀석이 왔군.” 필라르가 말했다. “저쪽 싸움을 알아챌까?”
저쪽 골짜기의 상공을 향해 날아갔다. 유유히 예정 코스를 날아 크게 경사진 원을 그리며 되돌아오는 것이 보였고. 다시 두 번 가량 그 고지의 상공을 선회하고서 세고비아 방향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젊은이가 가지고 있는 서류는 가져왔소?” 로버트 조던이 필라르에게 물었다.
“어쩌면 내가 이리 멍청할까.” 그녀는 말했다. “깜빡 잊어버렸어. 마리아에게 보내겠어.”
26
비행기가 나타난 것은 오후 3시가 지나서였다. 눈은 정오 때까지 완전히 녹아버려 지금은 바위가 햇볕을 받아 뜨거웠다. 하늘에는 한 조각의 구름도 없었다. 로버트 조던은 바위 사이에서 셔츠를 벗어 던진 채 등을 햇볕에 태우면서 죽은 기마병의 포켓 속에 들어있던 서류를 읽었다. 서류를 읽다 말고 확 트인 비탈 저쪽 숲까지 휙 둘러보았고, 위쪽의 고지를 바라보다가는 다시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기병대는 그 후론 통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씩 사이를 두고 귀머거리 영감네의 진지 쪽에서 총소리가 한 방씩 들려왔다. 그러나 총소리는 산발적으로 났다.
군대 수첩을 조사해 보니 젊은이의 출생지, 가족, 소속 부대 등의 기록이 있었다.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전쟁 때는 그 누구든 절대로 죽이고 싶은 놈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 외에는 가족과 약혼녀에게서 온 편지였다. 다른 편지는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다.
오늘 같은 경우. 나는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모든 것이 잘되어간다. 잊어버려라, 하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는 살해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타일렀다. 너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할 경우엔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지만 그것이 올바르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모든 것이 빗나가 버리리라.
이미 3시가 다 돼가니까 슬슬 음식을 갖다 줄 것이다. 위에 있는 귀머거리 영감네 진지에서. 적은 아직 사격을 계속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 그것은 놈들이 영감을 포위하고, 원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하기는 해가 지기 전에 원군이 오지 않으면 놈들은 난처하겠지만.
위의 귀머거리 영감네 쪽은 어떤 상황일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언젠가 우리들 일동에게도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지 않으면 안된다. 사살당하기 전에 지독한 변을 당하지 않고 넘길 수 있다면 운이 좋은 편이다. 귀머거리 영감도 그러한 행운의 혜택을 입을 것 같지는 않다. 하기는 언젠가 때가 오면 놈들도 똑같은 운명이겠지만.
3시가 되었다. 그때 멀리서 아득히 하늘을 뒤흔드는 폭음을 그는 들었다. 쳐다보니 몇 대의 비행기가 보였다.
27
귀머거리 영감은 언덕의 마루턱에서 싸우고 있었다. 영감은 본래 그 언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언덕 외에는 선택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그 언덕으로 도피했던 것이다. 영감은 무거운 자동소총은 짊어졌고. 다른 쪽에는 수류탄 부대와 자동소총의 탄창이 있었다. 호아킨과 이그나치오는 대장이 자동소총을 설치할 때까지 시간을 얻으려고, 멈춰서서 쏘고, 또 멈춰서서 쏘면서 그곳까지 온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직 언덕에 눈이 있었다. 그들 일당의 파멸의 원인이 된 눈이었다. 영감의 말은 탄환을 맞아 슬픈 듯이 헐떡이면서, 천천히 무릎을 꺾고 비틀거리며 겨우 마루턱까지 이르렀으나. 더이상 살 희망이 없는 것을 알고 있는 영감은 필요한 장소에서 한 방 쏘았다. 말은 튀어 올랐다가 두 개의 바위 사이를 막듯이 쓰러졌다. 그 말의 등 위로 쏠 수 있도록 자동소총을 걸고서 그는 두 개의 탄창이 비도록 쏘아댔다. 뜨겁게 단 총구를 놓은 말 등에서 생가죽과 털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언덕으로 부하가 다 올라오자 남은 탄창은 언젠가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절약하도록 했다.
언덕 꼭대기에까지 이르는 다섯 사람의 사나이 가운데 세 사람은 상처를 입었다. 귀머거리 영감은 오금과 왼팔 두 곳에 총상을 입고 있었다. 상처는 응어리졌으며. 왼팔의 상처 한 곳이 몹시 쑤시고 두통도 심했다.
다섯 사람의 형태는 다섯 개의 뾰족한 뿔이 솟아난 별의 형태로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땅을 파고, 흙과 돌멩이로 엄폐물을 만들었다. 열여덟 살짜리 호아킨은 철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흙을 파서 나르곤 했다.
그는 철모를 열차 폭파 때 손에 넣었다.
“드디어 너의 철모가 도움이 되었구나.” 하고 귀머거리 영감이 굵은 목소리로 호아킨에게 말했다. 호아킨은 한순간도 흙을 파는 손을 멈추지 않고 소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꼭 우리들의 현재에 알맞은 놈이 하나 있어.” 마지막 부적이라도 꺼내 보이듯 호아킨은 그 말을 꺼냈다. “파시오나리아의 문구야. 무릎을 꿇고 산다는 것은 서서 죽느니만 못하다.”
“똥이나 처먹어라.” 하고 한 사나이가 쏘아붙이자 다른 한사람이 어깨너머로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우리는 지금 엎드려 배를 붙이고 있어, 무릎 정도가 아니야.”
영감이 죽은 말의 어깨 사이로 바라보고 있으려니 아래쪽 비탈의 둥근 바위 뒤에서 세차게 망치로 두드리는 것 같은 총성이 일어나고, 경기관총의 탄환이 말의 몸뚱이에 푹푹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놈들이 지금은 분별이 생겨 비행기가 올 때까지는 공격을 해오지 않을 작정인 모양이다. 물론 박격포를 가지고 올 작정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럴 때 박격포를 쏘아댄다면 당연히 우리들은 다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비행기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영감은 피부까지 벗겨진 벌거숭이로 언덕 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하 한 명이 발포했다. 그리고 노리쇠를 잡아당겼다가 다시 또 한방 발포했다.
“탄환을 아껴!” 영감이 소리쳤다.
“그 필라르년은 우리가 여기서 죽어가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구하러 오지도 않냐고.”
“그 여자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영감이 대답했다. “그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등 뒤에서 저놈들을 해치우면 되지.” 사나이가 화가 나서 말했다.
“뭐라구?” 영감은 말했다. “놈들은 이 작은 산 둘레에 쫙 퍼져있단 말이야. 그 여자가 무슨 수로 놈들을 대항할 수가 있겠어? 모두 합쳐 백오십 명이나 된단 말이야. 지금은 더 많을지도 몰라.”
“그나저나 캄캄해질 때까지 견뎌낼 수만 있다면.” 하고 호아킨이 말했다.
“암, 그럴 수만 있다면 크리스마스와 부활제가 한꺼번에 닥쳐오는 것과 다름없지.” 턱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는 사나이가 말했다.
영감은 머리의 상처는 더해가고 팔은 완전히 굳어버려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견딜 수 없이 쑤셨다. 놀릴 수 있는 팔을 뻗쳐서 가죽 술 부대를 집어 들면서, 맑고 높고 푸르게 갠 초여름 하늘을 쳐다보았다. 쉰두 살인 그는 저 하늘도 이것이 마지막 보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죽을 장소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이러한 언덕으로 몰려버린 것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언덕을 나가서 뿔뿔이 흩어질 수만 있으면 만사가 잘 되었을 텐데.
마침 그때 누군가가 비탈 쪽에서 외쳤다.
“듣거라, 강도놈들아.” 그 소리는 가장 가까운 자동소총을 설치해 놓은 바위 뒤쪽에서 들려왔다. “비행기로 가루가 되어 흩날려버리기 전에 항복해라!”
목소리는 다시 그치고, 3분 동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저격병이 발포했다. 탄환은 바위에 부딪쳐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고는 퉁겨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장교가 저격병에게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함정 같습니다.”
“함정이 아니라면? 여기에서 멍청하게 죽어 자빠진 놈들을 포위하고 있다니, 이만저만 얼간이 같은 짓이 아니야.”
그들은 정상이 가까운, 시체가 흩어져 있는 비탈 쪽을 쳐다보았다.
“박격포는 어찌 되었을까?” 하고 두 번째 장교가 물었다.
“한 놈도 살아 있는 놈은 없어.” 하고 대위는 말했다.
“아닙니다. 저것은 함정입니다.”
그는 일어서서 두 손을 둥근 바위 위에 얹고 어색하게 바위 위에 무릎을 대고 일어섰다.
“쏴라.” 그는 바위 위에 올라서서 두 팔을 휘두르며 외쳤다.
언덕 위에서는 귀머거리 영감이 죽은 말의 뒤에 누워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놈들이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웃으니까 몸이 흔들려서 팔의 상처가 당겨서 아팠다.
“빨갱이들!” 아래쪽에서 외치고 있었다. “나를 쏴 보아라.”
귀머거리 영감은 말의 엉덩이 쪽에서 살그머니 바라보았다. 둥근 바위 위에서 대위가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영감은 그곳에서 유쾌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대위는 권총을 들고 침착하게 비탈을 올라오고 있었다.
귀머거리 영감은 바위 옆의 말 뒤에 엎드려서 성큼성큼 언덕을 올라오는 대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놈은 거물이다. 소매를 보니까 대위다. 나는 저놈을 황천길에 길동무로 삼아주겠다. 어서 오라 가까이 잘 와주었다. 귀머거리 영감은 자동소총의 방아쇠를 조용히 끌어당기자. 대위는 언덕 중턱에 얼굴을 틀어박고 엎어졌다. 비탈 이곳저곳에서 적은 다시금 정상을 향해서 총화를 퍼부어댔다.
그때 적기가 습격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귀머거리 영감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때 호아킨은 영감을 부르고 손가락질을 하며 하늘을 가르켰다.
“자빠져서 쏘아라.” 하고 귀머거리 영감은 말했다. “날아오는 앞쪽을 겨냥해.”
그때 총알이 작렬하는 소리를 뚫고 마치 허공을 가르는 것 같은 휘파람 비슷한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대지가 뭉클뭉클 요동쳤다. 적기는 세 번 돌아서 언덕에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그것을 아는 자가 없었다.
대위가 죽은 후로 지휘자는 베르렌도 중위였다. 그는 군이 지금까지 치러온 모든 작전의 흔적을 한눈으로 휘둘러보고 난 다음에, 자기 편 전사자들이 타고 있던 말들 끌고 오게 하여 시체를 라그랑하까지 운반할 수 있도록 안장에 잡아매라고 명령했다.
“그놈도 가지고 가.”하고 그는 말했다. “자동소총에 손을 얹고 있는 놈 말이다. 그놈이 틀림없이 귀머거리 영감일 것이다. 가장 나이가 많이 들었고 총을 다루고 있던 놈이니까. 아니 기다려. 모가지만 잘라서 판초에 싸라.” 그는 잠깐 동안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이놈들 전부의 모가지를 가지고 가자. 소총과 권총을 모아라 그 자동소총은 말에 매달고,”
28
적기가 날아가버린 뒤 로버트 조던은 프리미티보와 함께 사격이 시작되는 소리를 들었고, 그와 함께 그의 심장도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처음으로 총소리가 멎었을 때는 별로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조용함이 계속되는 동안 텅 빈 듯한 느낌이 가슴속에 솟아났다. 이어서 수류탄이 작렬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의 가슴은 한참 동안 뛰었다. 다음에는 다시 조용해졌으며 그 조용함이 한없이 계속되자. 그는 겨우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리아가 토끼고기와 버섯스튜를 양동이에 넣어 들고서 빵과 술부대를 가지고 올라왔다. 그녀는 아구스틴과 안셀모 대신 자동소총 총좌에 앉아 있는 엘라디오를 위해 음식과 빵을 나눠주고 포도주를 따라주고 올라왔다. 로버트 조던은 그녀를 도와 양동이를 받아들고 둥근 바위 위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아까 그 비행기는 어떻게 되었어요?”
그녀는 겁먹은 듯한 눈으로 물었다.
“귀머거리 영감네를 폭격했어.” 얼른 양동이를 열고 스튜를 접시에 담으면서 로버트 조던은 대답했다.
“아직 싸움을 하고 있나요?”
“아니, 이미 끝났어.”
“난 먹고 싶지 않아. 프리미티보가 말했다.”
“억지로라도 먹어두는 편이 좋아.” 로버트 조던은 그에게 권했다.
“이것을 한잔 마셔.” 조던은 말하고 나서 그에게 술부대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먹으면 돼.”
“영감네 소동 때문에 식욕이 완전히 다라나 버렸어.” 프리미티보는 말했다. “당신이나 어서 먹어. 나는 먹고 싶지 않아.”
마리아는 그의 곁으로 가서 팔을 목에 감고는 키스했다.
“그래도 드셔야 해요, 아저씨.”하고 그녀는 말했다. “모두들, 자기의 몸을 소중히 아끼지 않으면 안돼요.”
프리미티보는 그녀를 외면하고 술부대를 들고 쏟아져나오는 술을 입안으로 흘려 넣으면서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 나서 양동이의 요리를 접시에 산더미처럼 담아놓고 먹기 시작했다.
“있고 싶으면 여기 있어도 좋아.” 조던이 마리아에게 말했다.
“안돼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필라르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돼요.”
그녀는 뒤돌아보며 미소 짓고 나서 프리미티보에게 말했다.
“아저씨, 뭐 아래에서 갖다주었으면 하는 것 없어요?”
“없어, 아가씨.”하고 그는 대답했다. 아직 기분이 회복되지 않았구나, 하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난 죽는 건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지만 이렇게 영감네를 못 본 척 버려둘 수는······.” 프리미티보의 목소리가 쉰 듯 했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어.” 로버트 조던이 그를 달랬다.
“알고 있어, 그러나 알아보았자. 똑같아, 달리 도리가 없었어.” 하고 조던은 되풀이했다.
“하지만 저쪽에서는 우리들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버림받아······.”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로버트 조던은 가로막았다.
그는 내려가는 그녀를 배웅하고 오랫동안 고지 쪽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한 시간이 지나서 해가 훨씬 위쪽으로 기울었을 무렵, 문득 그는 적이 비탈 마루턱을 넘어 진군해오는 것을 보고서 쌍안경을 집어 들었다.
언덕 비탈에 최초의 기마병 두 명이 나타났을 때에는 말이 아주 조그맣게 보였다. 그러나, 다시 네 명의 기병이 내려오고, 이윽고 두 줄로 늘어선 한 부대의 인마(人馬)가 들어왔다. 종대의 선두에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이어서 다시 기병이 왔다. 다음에 안장 위에 짐을 싣고 기병이 타지 않은 말이 따라왔다. 다음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선 기병, 그 뒤로 말에 실린 부상병이 도보로 걷는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후미 부대로서 종대를 지은 기병들.
로버트 조던은 그들이 비탈을 내려와서 숲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기병들은 숲속을 뚫고 나가자 라그랑하로 통하는 노란 도로로 접어 들어갔다. 말발굽 때문에 피어오른 뽀얀 먼지가 말을 탄 그들 위로 온통 덮어 내렸다.
먼지투성이가 되어 말을 타고 지나가는 적의 기병을 안셀모가 본 것은 그때였다.
그는 시체와 부상병의 수를 헤아리고 있는 동안에 귀머거리 영감의 자동소총을 알아보았다. 등자의 가죽이 흔들거릴 때마다 말의 옆구리에 부딪치고 있는 판초에 쌓인 짐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노인은 몰랐으나. 돌아가는 길에 어둠 속을 뚫고 귀머거리 영감이 싸웠던 언덕으로 올라갔을 때, 이내 그 긴 판초 보따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알았다. 어둠 속인지라 언덕 위에 있는 것이 누구의 시체인지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쓰러져 있는 인원수를 세고 나서 언덕을 넘어 파블로의 캠프로 향했다.
어둠 속을 혼자 걷고 있노라니까 아까 본 폭격 후의 몸서리치는 참상과 시체의 광경에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며, 한시바삐 이 일을 알리려고 있는 힘을 다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재촉하면서 귀머거리 영감과 그 동료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렸다.
초소에 가까이 오자 페르난도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야.” 하고 그는 대답했다. “안셀모야.”
“좋소.” 페르난도가 말했다.
“자네, 알고 있나 귀머거리 영감의 일을 말이야?” 안셀모가 페르난도에게 물었다.
“알다마다요.” 하고 페르난도가 말했다. “파블로로부터 들었소.”
“파블로가 위쪽에 올라가 있었나?”
“놈은 기병이 철수하자 곧 그 언덕으로 갔었어요.”
“그러면 너희들은······.”
“전부 들었죠,”하고 페르난도는 말했다. “파시스트 놈들! 정말 야만인들이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야만인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스페인에서 쫓아 내버리겠어.”
“그렇고말고.” 그는 페르난도에게 말했다. “우리들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돼.”
“정말이오.”하고 페르난도는 말했다. “영감이 찬성해줘서 난 아주 기뻐요.”
안셀모는 그곳에 스스로의 위엄을 지니고 혼자 서 있는 페르난도를 남기고 동굴 쪽으로 내려갔다.
29
안셀모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로버트 조던은 판자로 만든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파블로와 마주 앉아 있었다.
로버트 조던은 입구의 모포를 들치고 안셀모가 들어오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위쪽으로 올라갔다 왔어.”하고 안셀모는 로버트 조던에게 말했다.
“파블로에게 얘기 들었어.”하고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언덕 위에는 시체가 여섯 구 있고 모가지는 놈들이 가지고 갔어.”하고 안셀모가 말했다. “내가 간 것은 캄캄해진 다음이지만.”
로버트 조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파블로는 술 단지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앉지 않겠소?” 조던이 안셀모에게 말했다.
조던은 노인에게 귀머거리 영감이 가져온 위스키를 두 잔이나 따라 주었다.
노인은 다시 병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나머지는 내일 몫이야.”하고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거리는 어떻던가요, 영감.”
“큰 움직임이 있었어. 당신이 가르쳐준 대로 모조리 종이에 써가지고 왔어. 한 사람이 계속 적고 있으니까, 나중에 가지러 갔다 오겠어.”
“대 전차포를 보았소? 포신이 길고 고무 타이어가 붙은 놈이오.”
“보았어. 트럭도 네 대 지나갔어, 모두들 소나무로 가린 그런 대포를 싣고 있었어. 트럭에는 대포 한 문마다 군인 여섯 명씩 타고 있었어.”
“대포가 네 문이라고?”
“네 문이야.” 하고 안셀모는 말했다. 노인은 쓴 것을 보지 않았다. 노인은 처음부터 순서를 따라서 읽고 쓰지 못하는 자 특유의 놀랄만한 기억력으로 얘기했고, 그 얘기를 하는 틈틈이 파블로는 두 번 술 단지에 손을 뻗쳐서 술을 따랐다.
“귀머거리 영감이 싸웠던 고지에서 라그랑하로 가는 기병들도 지나갔어.” 안셀모는 계속했다.
다음에 그는 그가 목격한 부상병의 수와 안장에 실은 시체 수를 보고했다.
“안장 옆에 실은 보따리가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어.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모가지였을 것임에 틀림없어. 기병은 1개 중대가 있었어. 살아남은 장교는 단 한 사람이더군, 귀머거리 영감의 마키나(기관총)도 묶여 있었는데 총신이 휘어져 있었어. 이것이 전부요.” 노인은 얘기를 끝마쳤다.
“좋소.”하고 로버트 조던은 자기 술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당신 이외에 전선을 뚫고 공화국 쪽으로 간 일이 있는 사람은 누구요?”
“안드레와 엘라디오지.”
“두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낫소?”
“안드레지.”
“안드레가 영감처럼 시간 내에 도착 할 수 있을까?”
“젊으니까 내 이상이지. 조심해서 가더라도 3시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요.”
“이 보고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저쪽에 닿아야만 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안드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지. 만일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누가 가도 마찬가지야.”
“안드레를 데려오시오.”
로버트 조던은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오늘 당신의 판단이 매우 정확한 데에 완전히 감탄해버렸어, 영국 양반.”하고 파블로가 말했다. “확실히 당신은 훌륭한 지휘관이야. 나보다 영리해. 나는 당신을 믿기로 했어.”
조던은 골즈 장군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나는 공격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폭파하지 않는다. 내가 받은 명령은 분명하다. 공격이 중지되면 내가 폭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계속해서 보고서를 썼다.
30
그날 밤, 해 두어야 할 일은 이미 완전히 끝나 있었다. 필요한 명령은 전부 전달해버렸다. 각자 각자가 그다음 날의 임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안드레가 출발한 후 이미 세 시간이 지났다 ‘그는 날이 새자마자 돌아오든가. 아니면 돌아오지 않든가 그 어느 쪽이다. 나는 오리라고 믿고 있다.’ 로버트 조던은 위의 감시소에 있는 프리미티보를 만나러 갔다가 동굴을 향해 비탈길을 되돌아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골즈에게는 공격할 권한만 있고 공격을 중지할 권한은 없다. 중지의 허가는 마드리드에서 오지 않으면 안 되리라.
너는 다리 폭파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리라. 그는 그것을 뚜렷이 깨달았다. 안드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머지 네 시간,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냈다는 시원스러운 마음과 사고(思考)를 구체적인 사항으로 되돌려보낸 데서 일어나는 확신을 안고 어두운 산길을 혼자서 내려오는 동안, 확실하게 다리의 폭파를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가 자연히 우러났다.
안드레에게 골즈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주어 보낸 이래, 반신반의의 불안한 마음이 시시각각 퍼져갔다. 마치 그것은 약속한 날을 착각하여, 만찬회에 초대한 손님이 도착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불안과 비슷했지만, 그러한 마음도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는 이미 연회가 중단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확신을 갖는 편이 훨씬 좋다고 그는 생각했다. 확신을 갖는 편이 언제든지 훨씬 좋은 것이다.
31
그래서 이제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침낭 속에 있었고. 지금은 마지막 날의 한밤중이었다. 마리아는 그를 “로페르토” 하고 부르고는 “내일의 일 그리고 당신의 일에 대해서 얘기를 할까요? 나는 당신의 일을 알고 싶어요.”
“그건 안돼. 내일의 일이라든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 편이 영리해. 이 싸움을 우리들은, 이해타산을 빼놓고서 하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내일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어차피 해야 하니까. 당신은 두렵지 않아?”
“두렵지는 않아요. 필라르가 얘기해 준 적이 있긴 하지만요······.”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말해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필라르는 말이죠. 우리들은 모두 내일 죽을 것이고 필라르처럼 당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태연스럽게 계신다는 거예요. 그 여잔 비난할 작정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감탄해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그 여자가 그런 말을 했어? 미친 사람이로군, 엉터리 얘기야. 그 여자는 미신쟁이야. 그런 똥 같은 얘기는 집어치우고, 우리가 마드리드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나 말하지.”
그러나 마드리드의 얘기를 시작했어도 이번에는 다시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어 갈 수가 없었다. 지금 그는 싸움이 있기 전날 밤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았어. 마드리드로 가면 먼저 이발소를 찾아가 꼭 나처럼 뒷머리를 위쪽으로 치 깎으면 자랄 때까진 거리를 걸어도 오히려 낫게 보일지 몰라.”
“당신과 비슷하게 깎고 싶어요.”라고 그녀는 말하고 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해두고 싶어요.”
“그건 안 돼. 머리칼은 계속 자라니까. 길게 자랄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아주 길게 말이에요? 영화에 나오는 그레타 가르보처럼?”
“그렇지.” 하고 그는 흐린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봐,”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알겠어? 이제 자지 않으면 안돼. 나는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야 하니까.”
“그러면 자겠어요. 편히 주무세요. 나의 서방님.”
“잘 자.”하고 그도 말했다.
그는 그녀의 호흡이 안정되고 규칙적으로 되었기 때문에 잠이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32
같은 날 밤, 마드리드에서는 게일로드 호텔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현관문 안쪽 양편에는 각각 한 사람씩, 두 사람의 보초가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조그만 사나이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져도 그저 힐끗 그쪽을 보았을 뿐이었다.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그 사람의 옆구리와 겨드랑이 밑, 엉덩이의 포켓을 뒤져 권총을 지니고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한 후, 가지고 있으면 수위와 협력하여 압수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그들은 승마화를 신은 사나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지나가도 얼굴조차 제대로 들지 않았던 것이다.
조그만 사나이가 살고 있는 게일로드의 한 방에는 그가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사나이들 가운데 네 명은 군복 차림이었다. 네 여자 중 세 사람은 보통 외출복을 입었는데, 한 여자는 초췌하고 살갗이 검고 여윈 모습으로, 부인 의용군 제복에 스커트를 입고 그 아래에 목이 긴 장화를 신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카르코프는 곧바로 제복의 여인 앞으로 걸어가서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나누었다. 이 여자가 조그만 사나이의 부인이었는데. 그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러시아말로 무엇이라고 속삭였다. 그 후 한참 동안, 이 방안에 들어왔을 때 지녔던 그의 거만스러움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의 부인은 방을 가로질러 가는 남편의 모습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키가 크고 미남인 스페인 장교와 함께 서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 마주 서서 러시아말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카르코프는 사십 대 중후반에 군복을 입고 있는 사나이에게 갔다 그는 사단장으로 헝가리 사람이었다.
“돌로레스가 얘기를 했을 때 여기에 계셨습니까?” 하고 카르코프가 사단장에게 물었다.
“응 있었지.”
“어떤 얘기였었나요?”
“파시스트가 저희 편끼리 싸웠다든가 하는 얘기였었지. 정말이라면 반가운 얘기지.”
“내일 아침 일인데, 무척 화제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언어도단이야. 신문기자고, 이 방 안에 있는 무리들이고 모두 총살시켜버리지 않으면 안돼. 그 일요일 날의 여단 명령을 내린 놈이 누군지 모르지만 사살해야만 해. 필경 자네도 나도 사살당해야만 하겠지. 그리되지 말란 법도 없어.” 장군은 웃었다. “그러나 이런 얘기를 남에게는 하지 마라.”
“그런 얘기는 아주 싫어하는 편이라서요.” 하고 카르코프는 말했다.
“가끔 이곳을 방문해오는 아메리카 사람이 그쪽에 가 있어요, 빨치산과 함께 활약하는 조던이라는 사나이, 장군께서도 아시죠? 그자가 지금 아까 말이 나왔던 방면으로 가 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오늘 밤 그 사나이가 보고를 해오지 않으면 안될 텐데.” 하고 장군은 말했다. “모두들 내가 그쪽으로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않으면 내가 가서 자네를 위해 사정을 조사해다 줄 텐데, 그 사나이는 분명히 골즈와 함께 이번 일에 활약하고 있겠지? 자네 내일 골즈를 만날 건가?”
“아침 일찍 만납니다.”
“잘 돼 돌아갈 때까지 놈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둘 일이야.”라고 장군은 말했다.
“하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
“다분히 파시스트들이 무슨 책략이 있어서 한 짓이겠지.” 하고 장군은 웃었다. “하여간 골즈가 놈들을 계략 속으로 얼마간 얽어 넣는가, 어떤가 머지않아 알게 되겠지. 골즈의 생각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좋아. 우리들은 과달라하라에서는 잘 얽어 넣었었지.”
그는 이 연기가 자욱하고 수다스러운 방을 나서서 안쪽 침실로 가, 침대에 걸터앉아 장화를 벗었다. 2시에는 출발하여 콜메나르 · 세르세다 · 나바세라를 거쳐 아침이 되면 골즈가 공격을 개시할 예정인 전선까지 가게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33
필라르가 흔들어 깨운 것은 새벽 2시였다. 처음 그녀의 손이 닿았을 때 그는 마리아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필라르의 커다란 손이 어깨를 흔들었기 때문에 그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손은 이내 권총 자루를 잡았다.
어둠 속에서 필라르라는 것을 깨닫고 손목시계를 보니 아직 2시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블로가 사라져버렸어.” 몸집이 큰 여자가 말했다.
“언제?” 하고 그는 물었다.
“틀림없이 한 시간가량 전일 거야.”
“그래서?”
“무엇인지 당신의 물건을 가지고 갔어.” 여자는 무정한 듯이 말했다.
어둠 속을 더듬어 두 사람은 동굴 입구까지 가서 모포를 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셀모가 눈을 뜨고 “벌써 시간이 됐나?”하고 물었다.
“아직 안됐소. 주무시오 영감.”
짐은 두 개 다 위에서 아래까지 길쭉하게 칼자국이 나 있었다. 왼손에 전등을 들고 오른손으로 한쪽을 어루만져보았다. 그것은 침구를 넣어가지고 다니는 쪽이니까 가득 들어차 있을 리가 없었다. 전선은 없어지지 않았으나 폭약을 넣은 네모진 나무상자가 없었다. 소중하게 뇌관을 싸서 넣어둔 여송연 상자도 없어졌다. 퓨즈와 캡을 넣어둔 납통도 없었다.
“남의 짐을 지켜주겠다고 아주머니가 말한 것이 바로 이런 거였소?” 하고 그가 말했다.
“밤중에 놈이 일어났기 때문에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소변보러 간다고 하기에 나는 다시 잠들었지, 그리고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는데 다시 눈을 떠보니 놈이 없지 않겠어. 그래서 걱정스러워 짐을 확인해 보니 찢어진 흔적이 있잖겠어. 그래서 당신한테로 달려간 거라우.”
“감시소 곁을 지나지 않고 말을 이끌고 도망갈 길이 있소?”
“두 길이 있지.”
“마루턱에는 누가 있소?”
“엘라디오지.”
로버트 조던은 말을 말뚝에 매어 풀을 먹이고 있는 초원지대에 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풀밭에서는 세 마리의 말이 풀을 뜯고 있었다. 커다란 밤색 말과 잿빛 말이 없었다.
“그럼, 그건 그렇고. 나는 짐 속에 남아 있는 것을 갖다 놓고 다시 한잠 자겠소.” 조던이 말했다.
“내가 지키겠어.”
“무슨 말이오. 당신이 지키다니? 당신은 이미 한번 지켜보지 않았소?”
“영국 양반.”하고 여자는 말했다. “나는 이번 일에 대해서는 당신과 똑같은 마음이라우. 당신의 짐을 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어. 나를 빈정댈 건 없잖우. 파블로에게 배신당한 것은 우리 두 사람이니깐.”
로버트 조던은 이 여자와 다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두 시간이나 경과 해 버린 오늘의 일에, 그는 이 여자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무것도 아냐. 필라르.”하고 그는 여자를 달랬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갔수?”
“아무것도 아니오. 필라르. 그쯤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여 여분으로 가지고 온 거요.”
“폭파를 위한 장치의 일부가 아니우?”
“그렇기는 하지만, 폭파하려면 다른 방법도 있소. 그런데 파블로놈은 뇌관과 퓨즈를 가지고 있지 않았소? 분명히 군에서 공급해 주었을 텐데.”
“가지고 가버렸어.” 비참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나는 곧 찾아보았지. 그러나 역시 없었어.”
두 사람은 동굴 입구까지 돌아왔다.
“좀 주무시오.” 하고 그는 말했다. “파블로가 없어져버려 오히려 잘 됐어.”
그는 여자와 함께 동굴로 들어가 두 개의 짐을 양팔로 안고서, 찢어져 쩍 벌어진 곳으로부터 아무것도 흘러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밖으로 운반했다.
“내가 기워주겠어.”
“출발하기 전에 부탁합시다.”하고 그는 다정스럽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자는 것이 좋아요.
“안돼.”하고 여자는 말했다. “나는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고, 공화국을 난처하게 만들었다오.”
34
파시스트군은 이 지방의 언덕 마루턱마다 제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간에, 별채와 창고가 달린 한 채의 농가에 파시스트군의 보초병 주둔소가 한 곳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골짜기가 있었다.
로버트 조던의 편지를 지니고 골즈에게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던 안드레는, 그 주둔소를 멀리 우회하여 캄캄한 밤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고정시켜 놓은 총을 발포시키는 장치인 줄이 쳐져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그것을 발견하고 뛰어넘어 밤바람을 받아 잎을 나부끼는 포플러 나무들이 늘어선 실개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에는 귀머거리 영감의 복수를 해주겠다. 놈들은 얼마나 야만적이던가! 아침이 되면 다리가 폭파되고, 길거리에 흙먼지를 일으켜줄 테다.
그는 사자(使者)의 소임을 다한 뒤 초소 습격에 참가할 수 있도록 아침까지 되돌아가리라고 생각했다. 정말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그는 스스로 생각해봤다. 편지를 가져가라는 영국 양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을 때, 구원을 받은 듯한 안도의 기분을 느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우연히 편지를 전달하는 사자로 떠나오게 된 것을 구실로 이 일에서 도망치다니, 그런 일을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 편지를 빨리, 그리고 무사히 전해주고 초소의 습격에 늦지 않도록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고개 마루턱에는 정부군의 보초병 주둔소가 있으므로, 그곳에서 그는 불심검문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35
네놈은, 하고 그는 자기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그렇다, 네놈은 처음으로 그 사나이를 보았을 때, 이놈은 친근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가 바로 배반할 때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얼마나 멍청이냐. 저주받은 지옥에 떨어져 버릴 멍청한 놈아, 집어치워라! 지금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놈이 그것을 어디다 숨겨두든가 버리든가 할 경우를 생각할 수는 없을까? 우선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이렇게 캄캄하다. 찾아낼 수 있을 턱이 없다. 놈은 자기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이너마이트까지 가지고 가버렸다. 제기랄! 더럽고 비천한 배반자의 흙덩이 놈아! 더럽게 썩어빠진 똥덩어리 같은 놈! 왜 놈은 폭약이나 뇌관 등에 손대지 않고 그냥 도망치지 않았을까? 왜 나는 물건을 그 잔학한 여자에게 맡겨두는 따위의 큰 멍청이, 바보 녀석이었을까?
그만둬라, 너무 걱정 마라, 하고 그는 자기에게 말했다. 없어져 버린 거다, 제기랄! 이미 없어져 버린 거다. 야비한 돼지 놈, 지옥에나 떨어져라.
앞으로도 비슷한 곤경에 빠졌을 때는 이렇게 하는 인간들이 항상 있으리라, 우리들이 다리를 폭파하기에는 인원이 너무 모자란다. 그러나 그것을 비관해보았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한도의 힘으로 다리를 해치우겠다. 좋아, 기쁘다. 나는 이미 화를 극복했다. 그것은 폭풍 속에서 호흡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네가 화를 낸다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 건방진 사치의 하나다.
36
안드레는 정부군의 보초병 주둔소에서 검문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은 세 겹으로 둘러쳐진 철조망이 있는 곳에서 갑자기 내리받이 언덕으로 되어 있는 땅에 엎드려, 바위와 흙으로 된 흉벽(胸壁)을 향해 이쪽에서 말을 건 것이다. 이곳으로 통과하는 것이 안전하고 간단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안녕하슈.” 그는 외첬다. “안녕하슈 민병대 여러분.”
그러자 노리쇠를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안드레는 노리쇠를 잡아당기는 소리를 듣는 것과 동시에 머리를 땅에다 찰싹 붙이고 엎드렸다.
“쏘지 마라, 동지.” 안드레는 외쳤다. “쏘지 마라! 나는 그곳으로 가고 싶단 말이야.”
“몇 사람이냐?” 누군가가 흉벽 뒤에서 외쳤다.
“혼자야, 나 혼자야.”
“너는 누구냐?”
“안드레 로페즈, 빌라코네호스 사람이다. 파블로 부대에서 왔어. 편지를 가지고 말이지.”
“총과 탄환을 가지고 있나?”
“가지고 있어.”
“혼자야, 나 혼자라니까. 하느님께 맹세코 혼자란 말이야.”
흉벽 저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잘 들어라, 파시스트.”
“나는 파시스트가 아니야.” 안드레는 외쳤다. “나는 파블로부대 게릴라야. 사령부에 바칠 편지를 가지고 왔단 말이야.”
“총을 위로 들고 철조망을 넘어와.”
“철조망에 걸려서 움직일 수가 없어.”하고 안드레가 외쳤다.
“총을 어깨너머로 내던지고 손을 이용해서 철조망을 타 넘어와.”
“자네들 그다지 친절하지 못하군.” 안드레가 말했다.
그는 철조망을 헤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저놈은 우리 동지다. 그런데 나는 하마터면 이것으로 해치워버릴 뻔했어.” 하며 수류탄을 들어 보였다.
“자네들 지휘자는 어디 있나?” 하고 안드레가 물었다.
“내가 지휘자야.” 한 장교가 말했다. “자네의 서류를 보여라.”
그는 서류를 받아들고 참호로 들어가 촛불 빛으로 그것을 보았다. 중앙에 찍은 도장을 보고, 골즈에게 보내는 급신(急信) 넉 장이 접혀진 채, 둘레를 끈으로 묶고 초로 붙여서 S.I.M의 금속 봉인이 찍혀 있었다.
“이것은 본 일이 있다. ” 주둔소의 지휘자가 이렇게 말하더니 비단천을 돌려주었다.
자네는 어디 태생이야.
“빌라코네호스요.” 안드레가 말했다.
“그곳의 누구를 자네는 알고 있나?”
“누구라도 좋으니 물어보시오.”
“호세 린콘은 어떠한 사나이인가 말해봐.”
“그 술집 주인 말이오?”
“그렇다면 이놈은 유효(有效)다.” 사나이는 말하고 서류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지휘관이 있는 곳까지 내가 같이 가겠다.” 하고 장교가 말했다.
“좋소. 그러나 급히 서둘러 주시오.”
“어이, 산체스, 네가 내대신 지휘를 해라.”하고 장교는 말했다.
두 사람은 언덕 마루턱을 내려갔다.
앞서 가던 장교가 갑자기 멈춰 섰다.
“자네 아직도 총을 가지고 있군. 그놈을 이리 줘. 그놈으로 뒤에서 나를 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왜 그렇단 말이오.? 왜 내가 당신을 쏜단 말이오?”
안드레는 어깨에서 총을 벗겨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는 편이 좋아.” 장교는 말했다. “그러는 편이 안전해.”
그들은 캄캄한 언덕을 내려갔다.
37
지금, 로버트 조던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자 마리아가 말했다. “우리들 아주 행복했죠?”
“응.” 그는 말했다. “두 사람 다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이야.”
“이제 잘 시간은 없겠죠?”
“응, 이제 곧 시작돼.”
“그럼, 일어나야만 하니까 무엇인가 음식을 가지러 가야겠군요. 네?”
“좋겠지.”
“로베르토, 무슨 걱정 있어요?”
“없어.”
“정말?”
“응, 지금은 없어.”
“전에는 있었나요?”
“아주 잠깐 동안.”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인가요?”
“아니, 당신은 이미 충분히 도와주었어.”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될 일을 우리는 얼마나 모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오늘 죽으려고 하지만, 그렇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냐하면 인생에 대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노인이 되어서 진실을 알고 싶다. 인간이라는 것은 언제까지나 배워갈 수 있는 것일까? 나는 훨씬 많은 일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좀 더 시간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이곳으로 온 후에 줄곧 이 산속에만 있었다. 안셀모는 가장 잘 아는 옛 친구다. 나는 찰스보다도, 처브보다도, 가이보다도, 마이크보다도 그의 일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외설적인 말을 잘 쓰는 아구스틴은 나의 형제다. 나에게는 형제 따위는 없다. 마리아는 진실한 연인이며 아내다. 나는 지금까지 진실한 애인을 가진 적이 없었다. 아내도 없었다. 이렇게 좋은 것들과 헤어지기는 싫다. 그는 구두끈을 다 매었다.
“인생이란 참으로 재미있다는 것을 나는 겨우 깨달았어.” 하고 그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동굴 입구의 모포를 누군가가 건드렸는지 불빛이 보였다. 아직 밤은 이슥한 터라 눈길을 들어보니 별이 지평선 가까이 바싹 떨어져 있는 이외에 새벽이 찾아오는 기척조차 없었다. 이 달에는 순식간에 새벽이 찾아온다.
두 개의 찢어진 곳으로부터 아무것도 새지 않도록 조심해서 들고 동굴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입구의 모포를 팔꿈치로 들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간 것은, 로베르토의 시계가 3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을 때였다.
38
모두들 동굴 안에 있었고, 사나이들은 마리아가 부채질하고 있는 화덕 앞에 서 있었다. 필라르는 주전자에 커피를 끓여놓고 있었다. 그녀는 로버트 조던을 깨운 후 잠자리에 들어가지 않았고. 지금은 연기가 자욱한 동굴 안 의자에 걸터앉아서 조던의 배낭 찢어진 곳을 깁고 있었다.
“스튜를 좀 먹어.” 그녀는 페르난도에게 말했다.
아구스틴은 수류탄을 포켓에 불룩하게 많이 넣고, 한쪽 어깨에는 탄창의 자루를 다른 쪽 어깨에는 탄약이 가득 든 탄약대를 건 채 자동소총에 기대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꼭 철물 행상인 같은 꼴이군, 그렇게 짊어지고서는 백 야드도 못 가.” 필라르가 말했다.
“산양처럼 올라가겠어.” 아구스틴이 말했다. “그런데 자네 형제는 어떻게 됐나?” 하고 그는 엘라디오에게 물었다.
엘라디오는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그는 신경질이 나 있었는데, 모두들 그것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도 잘 알았다. 그는 항상 전투가 있기 전에는 안절부절못했다.
로버트 조던은 배낭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배낭 속에 손을 넣어 수류탄 네 개를 꺼냈다.
“이거 어디에서 가져온 거지?” 그는 엘라디오에게 물었다.
“그건 공화국에서 영감이 가지고 왔지.”
“성능은 어떤가?”
“고생하는 정도의 값어치는 있지. 한 개가 한 몫의 재산만한 값어치는 있어.” 엘라디오가 말했다.
“내가 가져왔지.” 안셀모가 말했다.
“불발하는 일은 없나?”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틀림없어, 우리들이 사용한 놈 중에는 불발탄 따위는 없었어.”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결려서 터지지?”
“힘껏 던지면 꼭 알맞을 정도지. 바로야, 순식간이야.”
두 뭉치의 폭약에 한 종류씩의 수류탄을 쓰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톱니형의 것이 더 잘 터지리라, 하고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필라르가 자루를 가지고 그에게로 왔다.
“이제 튼튼해졌어.”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 수류탄은 아주 좋아, 영국 양반. 신용할 수 있어.”
“기분이 어떻소?”
“염려 없어.”하고 그녀는 말했다. “절박한 사태의 한복판에 있지만 말이야. 드디어 정말 시작된다면 당신이 보는 전망은 어떻소.”
“인원이 부족하오.”하고 로버트 조던은 재빨리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주 인원이 부족해.” 그러고 나서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만 얼굴을 향한 채 말했다. “마리아 혼자서 말을 지킬 수 있어. 그러니까 나는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 나는 아래 초소로 가서 파블로의 임무였던 일을 하기로 하지, 그러면 한 사람, 손이 늘어나는 셈이 되니까.”
“좋지요. 당신이 그렇게 말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소.”
“언제 떠나우?” 하고 필라르가 물었다.
“언제든지 좋지.”
그는 배낭 한 개를 안셀모에게 넘겨주었다.
“염려 없겠소, 영감?”하고 그는 물었다.
“염려 없지. 지금까지로 봐선 아무 염려 없어.”
“쉿 영국 양반······.” 필라르가 말했다. 로버트 조던이 그쪽을 보니 텁석부리 수염의 파블로가 서 있었다.
“당신······, 당신이었군 그래.”
“여어, 영국 양반, 저 위 엘리아스와 알레한드로의 부대에서 말과 함께 다섯 사람을 데려왔어.”
“그런데 폭파 장치와 뇌관은?” 하고 로버트 조던은 말했다. “그리고 다른 재료는?”
“골짜기에서 냇물 속으로 던져 버렸어. 하지만 수류탄을 사용하여 폭파시키는 방법을 나는 생각해냈단 말이야.”
“나도 생각해냈지.”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뭐 마실 것 좀 없나.” 파블로는 지친 듯이 말했다.
“당신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필라르가 물었다.
“잠깐 마음이 약해졌을 뿐이야. 그래서 나갔다가 사람을 더 데리고 다시 돌아온 거야.”
“엘리아스와 알레한드로에게서는 다섯 사람이 고작이었어.” 필라르가 말했다.
“돌아오길 잘했어.” 로버트 조던은 말했다.
“천만에. 나는 당신을 위해서 하는 건 아냐. 당신은 정말 악운의 사나이야. 만사가 다 당신에게서 일어났단 말이야. 귀머거리 영감의 일만 하더라도 그렇지. 그러나 나는 당신이 재료를 내던져버린 후에 마음이 아주 쓸쓸해지더군. 그래서 나는 이번 일을 멋지게 해내기 위해서 다른 인간을 찾으러 갔었다 이 말이야. 그리고 내가 데려올 수 있는 자들 중에서 가장 나은 자들을 데려왔지. 당신에게 미리 말해두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되어 마루턱에 기다리게 했어. 놈들은 나를 대장으로 여기고 있어.”
“커피를 줘, 마리아.”하고 파블로는 말했다. “어때, 넌?” 하면서 그녀 쪽은 보지 않았다.
“괜찮아요.”하고 그녀는 커피를 갖다주었다.
“여보, 사람이 한 번이라도 몸에 지니고 있었던 버릇은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거라고 난 생각해요.”
“염려 없어.”하고 파블로는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든 나에게는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돼 있어.”
39
그들은 어둠 속을 뚫고 숲을 지나 꼭대기의 좁은 샛길을 향하여 언덕을 올라갔다. 모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걸음은 느렸다. 말도 등에 가득 짐을 싣고 있었다.
“여차하면 말을 놓아주면 돼.”하고 필라르는 전부터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놓아주지 않게 되면 또 야영지를 만들 수 있겠는데.”
“영국 양반, 내가 데리고 온 녀석들은 제 발로 왔기 때문에 이 일이 잘될 줄로만 알고 있어. 놈들을 낙담시킬 말을 해서는 안돼.”
“좋소 하루 안에 성공시키도록 합시다.”
“놈들은 말 다섯 필을 갖고 있어. 알고 있나?”하고 파블로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좋아, 말은 모두 한군데 두도록 하지.”
로버트 조던은 분명히 실패할 것이라고 낙담하고 있었는데, 파블로가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사태가 모두 호전되고 지금은 전연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천천히 불어넣어지는 펌프의 공기로 타이어가 부풀기 시작한 듯 확신이 내부에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발소리도 분명히 확신이 솟아 올라와서, 마침내 전투를 앞두고 흔히 참다운 행복감으로 바뀌어가는 저 불안과 부정의 첫 단계를 그는 느끼게까지 되었다.
어둠 속에 다른 말의 윤곽이 보였다. 그는 걸음을 재촉하여 파블로와 함께 그 말 쪽으로 다가갔다. 말 옆에 파블로가 말한 패들이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하고 로버트 조던은 말했다.
“안녕하십니까?”하고 그들 역시 어둠 속에서 대답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쪽이 우리들과 함께 갈 영국 사람이야.”하고 파블로가 말했다. “폭파 담당이야.”
그 말에 아무도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거렸으리라.
“오 필라르.” 하고 그녀가 다가오자 한 사람이 말을 걸었다.
파블로는 커다린 밤색 말을 탔다.
“잠자코 내 뒤를 따라와요.”하고 그는 말했다. “말을 놓아둘 장소로 안내할 테니까.”
40
로버트 조던이 잠들어 있는 동안, 다리의 폭파 계획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안드레는 활발하게 앞으로 전진을 못 하고 있었다. 공화국 측의 전선에 도달할 때까지는 어둠 속이라도 걸어서 갈 수가 있었다. 지리에 밝은 시골 사람처럼 산과 들을 성큼 넘어 파시스트 측의 전선을 빠져나갔었는데 일단 공화국 측의 전선 안에 들어가자 좀처럼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S.I.M.의 봉함을 한 긴급 보고서를 보이기만 하면 곧바로 목적지로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초로 전선에서 소대장과 부딪치고, 이 소대장이 그의 사명을 터무니없게도 의심의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소대장을 따라서 대대 사령부로 갔었는데. 전쟁 전까지는 이발사였던 이 대대장이란 인물은 그의 사명에 대해 설명을 듣더니 몹시 감격하고 흥분했다. 고메스라는 이 부대장은 소대장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안드레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리고 싸구려 브랜디를 잔뜩 먹이며 이발사 출신인 그 자신도 유격대가 되고 싶어 했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관에게 대대를 맡기고 오토바이를 타고 사령부로 출발했다. 요란한 폭음으로 오토바이 경주 선수처럼 달려서 어느 집 담벼락에 기대 세워놓았다. 잠이 덜 깬 보초를 지나 큰방으로 들어갔다.
큰 방에 있던 몹시 졸린 듯한 장교는 고메스를 보고 “어째서 자네는 여기 왔지. 전화를 못 받았나?”
“중령님을 만날 일이 생겼어. 중령을 깨워주게.”
장교와 한참을 옥신각신하는 도중에 작달막한 키에 미란다 중령이 들어왔다.
“무슨 용건이지 고메스?”하고 묻고 난 다음 이번에는 그의 참모장인 책상 앞의 장교를 향해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담배를 갖다주게. 페페.”
고메스는 안드레의 서류와 급보를 그에게 보였다. 중령은 잽싸게 통행증을 훑어보더니 안드레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산속의 생활은 몹시 고생스러운가?”하고 그는 물었다.
“아뇨, 중령님.”하고 안드레는 대답했다.
“골즈 장군의 사령부를 찾자면 어디가 제일 가까운지 알아 가지고 왔나?”
“나바세라다라면서요. 중령님.”하고 안드레는 말했다. “영국인이 전선 후방인 나바세라다 부근의 오른쪽 어딜 거라고 했습니다.”
“고메스, 자네가 오토바이로 이 사나이를 데려다 주게.”하고 중령은 말했다. “골즈 장군의 참모본부 앞으로 강력한 통행증을 써주게. 내가 싸인 하겠다.”
“그리고 봉인을 두 개 찍어주게.” 하고 중령은 지시했다.
“자네가 지나올 때 정면의 적에게서 이동의 낌새라든가. 활기를 띠고 있는 상태라든가 그런 걸 보지 못했나?”하고 중령은 정중하게 안드레에게 물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었습니다. 중령님. 이상 없음이었죠.”
“석 달 전쯤 내가 자네하고 세르세다에서 만난 일이 없었나?”하고 중령이 물었다.
“있었습니다. 중령님.”
“그렇게 생각되었어. 자네는 안셀모 영감과 함께였지. 그 영감은 잘 있나.”
“잘 있습니다. 중령님.”하고 안드레는 말했다.
장교는 서류에 서명을 한 후, “자, 빨리 가게.”하고 고메스와 안드레에게 말했다.
안드레는 고메스가 운전하는 오토바이의 뒷자리에 꼭 붙들고 앉아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커다란 폭음과 함께 바람을 가르며 달려갔다. 이윽고 산에서 내려오는 빈 트럭의 잿빛 차체가 보였다.
41
파블로는 어둠 속에서 멈추고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파블로는 말들의 다리를 붙들어 매었다.
“아구스틴.”하고 로버트 조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하고 안셀모는 나와 함께 다리로 가는 거야. 기관단총의 폭약 보퉁이는 갖고 있어?”
“갖고 있어.”하고 아구스틴이 말했다.
로버트 조던은 필라르에게 다가가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초소를 공격하지 않기로 한 계획을 알고 있소?”
“몇 번 말해야 속이 시원해.”하고 필라르는 말했다. “당신은 점점 늙은 할망구처럼 되어가는 군.”
“다시 확인하는 거죠. 그리고 초소를 해치웠다면 아주머니는 다리까지 물러나서 도로 위쪽과 내 왼쪽부터 지켜주시오.”
“폭발소리가 들릴 때까지는 한 사람도 움직이지 말고 총도 쏘지 말고 폭탄도 던지지 않도록 해주시오.”하고 로버트 조던은 속삭였다.
“이 이상 초조해하지 말라니까.”하고 필라르는 낮은 목소리로 짜증 내듯 말했다.
로버트 조던은 파블로가 말을 붙들어 매고 있는 곳으로 갔다. “놀랄 만한 놈만 묶었어.”하고 파블로가 말했다. “밧줄을 조금만 당겨도 곧 풀리도록 매어놓았어. 자, 이렇듯.”
새로 참가한 패들은 그들끼리 한 덩어리가 되어 소총에 기대서 있었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하고 파블로는 말했다. “초소를 해치운다. 전화선을 끊는다. 다리 위까지 후퇴한다. 당신이 폭파할 때까지 다리를 지킨다.”
“그리고 폭격이 시작될 때까지는 아무런 행동도 해선 안된다.”
“알고 있어.”
“그럼 됐어, 잘 부탁해.”
파블로는 무언가 입속으로 툴툴거리다가 이윽고 말했다. “우리들이 후퇴할 때는 당신이 중기관총과 경기관총으로 우리들을 엄호해줄 테지. 그렇지, 영국 양반.”
“자, 그만 가자.”하고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저쪽에 빨리 도착해서 잘들 숨어야 해.”
“자, 모두들 가자.” 하고 파블로가 말했다. “잘 부탁하네, 영국 양반.”
“그럼 조심하게 파블로.” 하고 그는 그 이상하고 딱딱하고 의미심장한 손을 꼭 쥐었다. “당신 쪽은 내 편에서 잘 엄호해줄 테니 걱정마.”
“당신 물건을 가져가서 미안해.”하고 파블로는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들이 필요한 것을 가져왔잖소.”
“잘 있어. 마리아.” 로버트 조던은 가면서 말했다.
“조심해요. 로베르토.”하고 그녀도 말했다.
그는 안셀모와 아구스틴이 있는 곳으로 가서 말했다. “갑시다.”
세 사람은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줄이 되어 나무 사이를 지나며 앞을 지나치자 페르난도가 말을 걸었다. “조심하시우. 돈 로베르토.”
“자네도 조심하게 페르난도.”하고 로버트 조던은 말했다.
“드디어 시작하니 난 기분이 좋아.” 아구스틴이 말했다.
“작은 소리로 말해.”하고 안셀모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말을 않도록 해 하더라도 작은 소리로 해.”
“봐요, 저걸, 놈들의 화롯불이 보입니다. 여기는 우리가 망을 보던 곳이죠.”하고 안셀모가 말했다.
“당신이 기관총을 장치하자고 말했던 곳이라오.”
“좋소, 여기다 장치하기로 합시다.”
아구스틴은 잠자코 있었다.
“너는 우리들이 폭파 준비를 하는 동안 여기에 엎드려 있고, 위에서건 밑에서건 닥치는 대로 총알을 갈겨.”
“저 불은 어디지?”하고 아구스틴이 물었다.
“다리 이쪽에 있는 보초의 초소야.”하고 로버트 조던은 속삭였다.
“보초는 누가 해치우지?”
“전에도 말한 것처럼 영감하고 내가 맡는다. 만일 우리들이 해치우지 못한다면, 네가 초소 안에 탄환을 퍼붓고 적의 모습이 보이거든 그 놈들을 모두 쏘아버려야 해.”
“응, 그것도 당신에게서 들었어.”
“여기는 가깝기 때문에 움직이지 말고 잘 숨어 있어야 해.” 로버트 조던이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아주 가깝다. 너무 가까울 정도다.”하고 그는 속삭였다. “그러나 해를 등지고 있어, 여기라면 문제없어.”
“틀림없이 하려고 하니 다시 한번 간단히 말해주지 않겠소?” 안셀모가 말했다.
“내가 쏘면 영감이 쏜다. 영감이 상대방을 해치웠다면, 다리를 건너서 나한테로 온다. 나는 짐을 거기로 가져갈 테니까, 영감은 화약을 장치할 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자세한 것은 그때 말하겠어. 나에게 만일의 일이 일어나면, 가르쳐 준대로 영감이 직접 하는 거야. 나무쐐기를 써서 빠지지 않도록 끼우고 수류탄을 단단히 매고서 침착하게 하는 거야.” 로버트 조던은 다시 한번 설명해 주었다.
“쏠 때는 서두르지 말고, 단단히 잘 겨냥 해야돼, 상대를 인간이라 생각하지 말고 과녁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영감은 사냥꾼이었으니까, 문제없어.”
“자, 가시오.”
“안녕.” 안셀모는 말하고 갔다. “또 만날 때까지 말이야. 영국 양반.”
“응, 다시 곧 만납시다.”
42
골즈 사령부로 가는 길에 검문소가 있었다. 고메스는 중령이 발행한 통행증을 보여주었다.
“좋습니다. 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불은 켜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오토바이는 또다시 폭음을 내기 시작했고 안드레는 자리에 단단히 매달렸다. 언덕을 올라가는 짐 실은 트럭들도 있었다. 계속해서 가는 트럭의 뒤를 따르다가 몇 대를 추월해서 갔으나 앞에서 접속사고가 있어서 트럭들이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고메스와 안드레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드디어 초소에 도착을 하여 골즈 장군을 만나겠다고 통행증을 보여주니 보초는 위병 하사를 불렀다. 그때 프랑스 보병이 쓰는 카키색 베레모를 쓴 체격이 큰 노인이 자동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의 장교를 거느리고 현관을 들어설 때 고메스는 그 노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이 노인은 정치 집회에서 본 일이 있는 마르티라는 사람이었다. 고메스는 이 사람을 통하면 골즈를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실의(失意)와 가정적, 정치적인 괴로움과 좌절된 야심에 의해서 이 노인이 어떤 인간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에게 말을 묻는 일이 여간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한 것을 고메스는 몰랐다.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동지?” 마르티가 고메스에게 물었다.
“사령부로 가져가는 골즈 장군 앞의 급보입니다. 마르티 동지.”
“어디에서 온 급보인가?”
“적의 배후에서입니다.” 고메스는 말했다.
마르티는 손을 뻗쳐 그 급보와 다른 서류를 받았다. 그리고 힐끗 그것을 보고 나더니 포켓에 넣었다.
“이 두 사람을 체포하라.” 그는 위병 하사에게 말했다. “신체검사하고 나중에 부르거든 데리고 와.”
급한 서신을 포켓에 넣은 채, 노인은 큰 석조 건물로 들어갔다.
“저 영감은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야?” 고메스는 위병 하사에게 물었다.
“돌았어.” 위병 하사가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는 아주 훌륭한 정치적 인물이야.”하고 고메스는 말했다. “국제 혼성 여단의 최고 위원장이지.”
고메스는 그가 변했다는 것을 몰랐다.
마르티가 집무실에서 지도를 펴놓고 보고 있을 때 로버트 조던과 친분이 있었던 러시아 신문기자 카르코프가 들어왔다.
카르코프가 들어올 때 위병 하사로부터 고메스와 안드레의 얘기를 듣고 그들의 로버트 조던으로부터 골즈에게 보내는 급보를 마르티가 가져갔다는 것을 알았다.
카르코프는 위병 대기실에서 골즈에게 보내는 급보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을 말하고 마르티에게 급보와 통행증을 받아냈다.
“마르티 동지, 저 위병 하사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말아 주게, 나는 위병 대기실에 있는 그 두 사람으로부터 직접들은 얘기라네.”
카르코프는 위병 하사를 불러서 “이걸 위병 대기실에 있는 두 사람에게 내주고 골즈 장군의 사령부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게.”하고 카르코프는 말했다. “이미 꽤 나 늦어졌어.”
골즈가 있는 사령부에 도착하여 오토바이를 기둥에 세워두고 자동차 앞에 앉아 있는 운전사에게 용건을 말했다. 운전사는 자기가 전해주겠다고 했다. 잠시 후 운전사가 나와서, “장군은 공격 준비 때문에 군대가 있는 저 산 위에 올라가 계시네. 그래서 참모장에게 주고 왔지. 받았다는 서명을 해주더군. 이것 봐.”
“서명을 해준 사람 이름은 뭐지?” 안드레가 물었다,
“뒤발이라고 하는 사람이야.”하고 운전사가 말했다.
“그럼 됐어.” 하고 안드레는 말했다. “그 사람은 편지를 줘도 괜찮다는 세 사람 중의 하나야.”
“기다렸다가 회답을 받아 가지고 갈까?” 고메스가 안드레에게 물었다.
“그게 좋을지 모르겠군, 하기야 다리 일이 끝난 후, 그 영국 사람도 또 다른 사람들도 어디에 가서 만날지 모를 판이지만.”
참호 속에서는 뒤발이 로버트 조던이 보낸 봉인을 뜯은 급보를 왼손에 들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네 번이나 그 급보를 읽었다. 읽을 때마다 겨드랑이 밑에서 땀이 옆구리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전화통에다 대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럼 세고비아 쪽 진지를 대줘, 뭐, 벌써 떠났다고? 그럼 아빌라 쪽 진지를 대줘.”
그는 연달아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양쪽 부대에 이야기했다.
골즈는 배치 검열을 하기 위해 산에 올라 있었고, 관측소로 가는 도중이었을 것이다. 관측소를 불러냈으나 골즈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제1비행대대를 대줘.”
“제1비행대대 호출은 취소야.” 그는 통신병에게 명령했다.
“제69여단 관측소를 대줘.”
그가 아직 그쪽을 부르고 있을 때 비행기의 최초의 폭음이 울려오기 시작했다.
감시소에 전화가 통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야.” 하고 골즈는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이 뒤발인 것을 알자 프랑스말로 말했다.
“실패했어. 그래, 언제나 마찬가지야, 음, 음, 그래. 큰 손해야. 이젠 와도 소용없어. 쳇. 이게 다 무슨 꼴이야,”
비행기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있는 그의 눈은 아주 득의만만하게 보였다. 날개의 붉은 표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비행기가 위풍당당하고 요란한 폭음을 내며 날아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행기가 머리 위를 통과해버리기만 하면, 폭탄이 하늘의 돌고래처럼 떨어질 것을 골즈는 알고 있었다. 다음엔 탱크가 이 두 비탈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올라가고, 그 뒤를 따라 2개 여단이 진격한다. 탱크는 왔다 갔다 하면서 사격을 하고 다른 탱크부대는 아군을 인도하며, 그리고 다시 산을 넘어 숲을 빠져 진격을 계속하는 것이다.
능선은 두 개 있었는데. 선두엔 탱크가 있고. 숲속에는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우수한 2개 여단이 있다. 그리고 이제 비행기까지 온 것이다. 그가 할 일들은 모두 예정대로 완료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명치끝이 뜨끔한 것을 느꼈다. 그 까닭은 전화로 조던의 급보를 받고 이 두 개의 능선 저쪽에는 적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적은 조금 아래쪽 좁은 참호 속으로 퇴각하여 파편을 피하고 숲속에 숨어 있다가. 폭격 부대가 지나간 뒤에 조던이 도로를 올라갔다고 보고해온 기관총이나 자동화기, 대전차포를 가지고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그때 다시금 격전이 벌어질 것이다. 귀를 찢는 듯한 폭음을 울리는 비행기는 그야말로 다시없는 좋은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43
로버트 조던은 도로와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비탈진 소나무 그늘에 누워서, 주위가 밝아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며 안드레가 무사히 골즈에게 갔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또 그 자리에 누워서 도로와 초소에서 눈을 떼어 저 먼 산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마라. 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타이르고 가만히 누운 채 아침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초여름 아침이었다. 5월 말은 아침이 오는 것이 빠르다. 한번은 가죽 외투를 입고, 가죽 헬멧을 쓰고, 왼쪽 다리 옆에다 자동소총을 집어넣고 오토바이를 탄 사나이가 다리를 건너서 도로를 올라갔다. 한번은 앰블런스 한 대가 다리를 건너, 그의 눈 아래를 지나 도로를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다리는 벌써 아침 햇빛을 받고 뚜렷이 아름답게 드러나 보였다.
아름다운 5월 아침엔 아무 일도 일어날 리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요란한 폭격 소리가 들려왔다.
최초의 폭음소리를 듣자, 그 울림이 우레와 같이 산에서 되울려오기 전에, 로버트 조던은 심호흡을 하고는 팔 위에 얹어놓았던 경기관총을 집어 들었다. 그 무게로 팔이 쩌릿쩌릿 저렸고,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그런지 손가락의 움직임이 무거웠다.
폭격 소리를 듣고 초소의 사나이가 일어섰다. 로버트 조던은 사나이가 총을 손에 잡고 귀를 기울이면서 초소 밖으로 뛰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하늘을 쳐다보며 도로에 서 있는 사나이의 모습이 로버트 조던에게 명료하고 뚜렷이 보였다.
로버트 조던은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고, 그 사나이의 가슴 한복판에 겨누고는 조용히 방아쇠를 당겼다.
급격히 흐르는 듯한 경련 적인 기관총의 반동을 그는 어깨에 느꼈다. 사나이는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총에 맞고는 고꾸라지며 길 위에다 얼굴을 처박았다. 그것을 신호로 안셀모의 총소리가 들렸다. 수류탄 터지는 소리에 이어 계속해서 도로 위쪽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아래쪽으로부터는 파블로가 지휘하는 기마대의 자동소총에 이어 수류탄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안셀모가 다리 저쪽을 향하여 험준한 샛길을 기어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로버트 조던도 경기관총을 어깨에 돌려 걸치고 소나무 밑동께에서 무거운 짐 두 개를 집어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는 험한 비탈길을 구르듯이 한달음에 도로 쪽으로 쏜살같이 내려갔다.
뛰면서 그는 아구스틴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기가 막힌 사냥이군, 영국 양반, 참 재미있는 사냥이야!”하고 외쳤다.
노인은 카빈총을 한쪽 손에 들고 그에게로 달려왔다. “별다른 일은 없어!” 하고 그는 소리쳤다. “나는 놈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어.” 로버트 조던은 다리 한복판에 꿇어앉아 짐을 풀면서 안셀모의 희고 짧은 턱수염이 난 양쪽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로버트 조던은 다리의 철골 속으로 기어 내려갔다. 손 밑의 철판은 싸늘하게 이슬에 젖어 있었다. 그는 요란한 총소리를 들으면서 조심조심 기어 내려갔다.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다리 밑은 싸늘했다.
“한 번에 하나씩 내게 짐을 내려주시오.”하고 그는 위에 있는 안셀모에게 소리쳤다. 노인은 장방형의 폭약 덩어리를 몸을 숙이고 다리 가장자리에서 몸을 쑥 내밀며 내려주었다. 로버트 조던은 그것을 손을 뻗쳐 받아가지고, 자기가 생각한 장소에다 밀어 넣어 꼭 비끄러매고는 “쐐기야, 영감, 쐐기를 주시오!”하고 외쳤다.
이제 그는 폭약의 위치를 정하고, 단단히 고정시켜 쐐기를 박고 철사로 단단히 묶은 후 폭파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외과 의사가 수술을 하는 것처럼 재빨리 교묘하게 일을 하면서 도로 저 아래쪽에서 따다닥거리는 총소리를 들었다. 수류탄 터지는 소리도 계속 들려왔다. 왼쪽 초소에선 아직도 총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총소리가 유난히 많은데, 하고 생각하면서 그는 수류탄 두 개를 묶어놓은 폭약 덩어리 위에다 나란히 비끄러맸다. 철사로 그 덩어리의 꾸불꾸불 파진 곳을 둘둘 감고, 철사를 비비 꼬아서는 꽁꽁 비끄러맸다. 그리고 전체를 손으로 만져보고, 더한층 탄탄하게 하기 위하여 수류탄 위에다 쐐기를 박아서, 폭약 전체가 강철판 속에 끼어 있도록 만들었다.
“자, 다음에는 저쪽이오. 영감.”
그는 위에 있는 안셀모에게 소리를 지르고는 교각 사이를 뚫고 기어나갔다. 이건 마치 강철 숲을 뚫고 나가는 타잔과 같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소용돌이치는 계곡을 내려다보면서 어둠 속을 뚫고 저쪽으로 나오니, 폭약 덩어리를 그에게 내려주고 있는 안셀모의 얼굴이 보였다. 얼마나 멋진 얼굴인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만사가 잘돼간다. 한쪽은 끝났다. 이쪽만 해치우면 전부 끝난다. 이렇게만 하면 다리건 뭐건 떨어지리라. 자, 해라. 흥분하지 마라. 하면 되는 것이다. 마지막이니까 빨리 솜씨 있게 해버리는 거다. 실패해선 안돼.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 해, 자기 힘 이상으로 빨리하려고 서둘러 선 안돼. 위쪽 사격이 빨리 끝나면 좋겠는데.
“영감 쐐기를 주시오.”
역시 그쪽 사격 일이 마음에 걸린다. 거기서는 필라르가 난처한 지경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초소에서 몇 놈이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뒤쪽에서 일까. 그렇지 않으면 제재소 안에서 일까? 아직 쏘고 있다, 그건 제재소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증거다. 그놈의 톱밥, 그것이 문제다. 그 커다란 톱밥의 산(山) 말이다. 오래된 톱밥은 굳어서 그 뒤에서 싸우기는 든든한 방패다. 적은 아직도 몇 놈이 더 있음에 틀림없다. 저 아래 파블로 쪽은 유난히 조용하군, 두 번째 총소리,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탄 녀석임에 틀림 없으리라. 제발 적의 장갑차가 올라오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안셀모, 그놈을 좀더 주시오.”하고 그가 소리를 질렀다.
노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거의 끝났소.” 조던이 말하자 안셀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 커다란 철사 뭉치를 내려주시오.”
노인은 시키는 대로 내려주었다.
이 철사가 벗겨지면 큰일이다. 이 철사로 잡아당겨야 한다. 잡아당기는데 모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철사를 다 비끄러맨 다음 다발에서 다시 얼마쯤 철사를 늦추어 가지고, 다시 철판 사이로 해서 그 철사 다발을 위에 있는 영감에게 올려주었다.
“조심해서 잡고 있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는 다리 위로 기어올라가 노인에게서 철사 다발을 건네받자. 재빨리 철사를 풀어나가면서 보초가 쓰러져 있는 길 쪽으로 걸어갔다. 몸을 굽히고 다리 옆을 보면서 철사를 풀어나갔다.
“부대를 갖다주시오.”
그는 뒷걸음칠 치면서 안셀모에게 소리쳤다.
바로 그때, 철사를 풀면서 눈을 들고 보니까 저 멀리 도로 위에서 위쪽 초소로 갔던 패들이 돌아오는 곳이 보였다.
네 명이다. 하지만 그때 그는 철사를 조심해서 다리 바깥쪽 철근에 닿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엘라디오는 그들과 함께 없었다.
다리 있는 데서 그는 철사를 똑바로 수류탄 고리까지 아무것에도 닿지 않게 뻗어 있도록 하여 그 철사를 안셀모에게 주었다.
“이걸 저 높은 돌 있는 데까지 쭉 가져가요.” 하고 그는 말했다. “편하게 쥐어요. 그러나 꼭 쥐고 있어요. 힘을 주면 안되니까. 세게 당기다간 다리가 날아가 버릴 테니까. 알겠소?”
“알겠소.”
“정말 당겨야 할 땐 힘껏 당기는 거요. 살며시 가 아니라 힘껏 말이오.”
로버트 조던은 이야기를 하면서 도로 쪽으로 눈을 들어 필라르 부대의 생존자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벌써 거기까지 와 있었는데, 프리미티보와 라파엘이 페르난도를 부축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사타구니를 쥐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프리미티보가 소리쳤다.
“잘됐어. 곧 끝날 거야.” 로버트 조던은 큰소리로 대답했다.
“내게 총을 줘.”
“안돼, 말 있는 데까지 데려다줄 테야.”
“날 더러 말을 어떻게 타란 말이야?” 페르난도는 말했다. “난 여기면 충분해.”
“만약 탱크가 오거든 폭파하시오.” 하고 그는 안셀모에게 말했다.
“아니 당신이 다리 아래 있는데 폭파할 순 없어.”
“내 걱정은 마시오. 필요하면 해치우는 거요. 난 철사 하나만 더 매고 곧 돌아오리다. 돌아오면 나도 함께 하겠소.”
그는 다리 복판을 향해서 달려갔다. 그는 다리 난간 아래로 기어내려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안셀모는 철사를 의식하면서 페르난도가 프리미티보와 집시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 여기다 남겨두고 어서 가줘.” 하고 페르난도는 말했다. “너무 지독하게 당했고 내출혈도 아주 심해, 안 되겠어. 움직이면 그것을 잘 알 수가 있어.”
“하지만 우리가 도망갈 때는······.”하고 프리미티보가 말했다.
“남겨두고 가면 되잖아. 이런 부상을 입고 여길 떠나다니, 그게 될 말인가. 이러고 있으면 말 한 마리가 더 생기는 폭이지. 난 여기 있는 게 좋아. 틀림없이 적이 곧 올 테니까. 엘라디오는 어떻게 됐어.”
라파엘은 머리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상처 자국을 가리켰다.
“여기를 맞았어.”하고 그는 말했다.
“부탁이야, 제발 부탁이니 날 여기다 남겨두고 가줘.”하고 그는 말했다. 고통 때문에 눈이 감기고, 입술 양끝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럼, 여기다 총과 탄알을 두고 가겠어.”하고 프리미티보가 말했다.
“페르난도!” 안셀모가 철사를 손에 쥔 채 소리를 질렀다.
페르난도는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어떻게 됐어?” 페르난도가 물었다.
“잘 되어가고 있어.” 하고 안셀모가 말했다.
“그럼 안심했어. 뭐든지 내가 필요한 게 있거든 일러줘.” 페르난도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고통이 몰려온 것이다.
로버트 조던은 아직 다리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안셀모는 페르난도를 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죽을 땐 빨리 숨을 거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오늘 쓸모 있었다는 것만 안다면 그 밖의 일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내가 바라고 있는 것만 달라, 나머지 일은 될 대로 되라지.
“영국 양반은 대관절 어떻게 된 거야? 제기랄! 다리 밑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다리를 만들고 있는 거야. 폭파를 할 거야?” 필라르가 말했다.
“영감 영국 녀석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굉장히 과학적인 일이라서.” 안셀모가 대답했다. “이건 과학적인 일이야.”
바로 그때 모든 사람의 귀에, 도로 저 아래쪽의 파블로가 점령하고 있는 초소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는지 총소리가 들려왔다. 필라르는 욕설을 그치고는 귀를 기울였다.
로버트 조던은 철사 다발을 다리 위로 던져올리고, 이어 다리 위로 기어오르는 순간 총소리를 들었다. 그는 몸을 굽혀 철사를 다시 철판에 닿지 않도록 솜씨 있게 풀면서 뒷걸음질로 다리 가장자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가 도로 끝까지 왔을 때에도 아직 도로 저 아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셀모가 있는 표석 반대편 근처에까지 이르렀을 때 도로를 내려오는 트럭 소리를 들었고 비탈길로 내려오는 차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철사를 손목에 감고, 안셀모를 향해 소리쳤다. “폭파시켜!” 그리고 발뒤꿈치에 힘을 주어 철사를 힘껏 잡아당겼다. 바로 그때, 온 천지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더불어 다리 한복판이 커다란 파도처럼 솟구쳐 올라왔다. 두 손으로 잔뜩 머리를 싸안고 자갈이 깔린 도랑에 얼굴을 처박았다. 마치 폭풍이 몰아쳐 오는 것 같았다. 이어서 강철 파편의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다리 한복판이 온데간데 없었고, 다리 위와 도로에는 강철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페르난도는 아직도 둑에 등을 기대고 누워 숨을 쉬고 있었다. 안셀모는 흰 표석 그늘에 엎어져 있었다. 철사가 아직도 오른손 손목에 감겨 있었다. 로버트 조던은 일어나 도로를 건너 그의 옆에 꿇어앉아서 노인이 죽은 것을 확인했다. 무슨 파편에 얻어맞고 이 꼴이 되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노인의 몸을 쳐들어 보지는 않았다. 죽었으니까 죽은 것이다. 그것뿐이다.
시체가 된 이 노인은 왜 이렇게 조그맣게 보이는 것일까. 하고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노인의 총과 이제 거의 텅 비다시피 된 두 개의 배낭을 집어 들고, 다시 페르난도 옆으로 가서 그의 총을 집어 들었다. 그런 다음 총 두 자루를 어깨에 걸치고 숲속을 향하여 산비탈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았으며, 다리 저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질 저쪽 모퉁이에선 아직도 총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그는 이제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영감은?” 하고 필라르가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죽었소.”
그는 애처로운 듯이 기침을 하고는 땅에 침을 뱉었다.
“다리는 날아갔어. 영국 양반.” 필라르는 그를 보며 말했다. “그걸 잊어선 안 되오.”
“당신은 말 있는 데로 가는 것이 좋겠어.” 하고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내가 당신보다 여길 더 잘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아니. 당신은 파블로를 응원하러 간다면서.”
“파블로 따위가 알게 뭐야. 그까짓 놈 제멋대로 자기 몸을 지키라지.”
“그건 안돼, 영국 양반. 파블로는 돌아왔어. 저 아래에서 아주 잘 싸웠단 말이야. 당신은 그걸 못 들었수? 지금도 싸우고 있잖아.”
“응원은 하지, 하지만 당신들은 싫어, 당신도 파블로도. 만일 뇌관만 있었다면 영감은 죽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폭파시킬 수 있었을 테니까.”
다리를 폭파한 뒤 안셀모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실망과 동시에 솟구쳐오르는 분노와 공허감과 증오심이 아직도 그의 전신을 달리고 있었다.
마침 그때 아구스틴은 골짜기 낭떠러지 한쪽 끝에서 기어오르는 파블로를 발견했다. 손과 무릎으로 몸을 끌어올리고 있는 그 텁석부리 얼굴에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기 개새끼가 오는군,” 하고 그가 말했다.
“누가?”
“파블로.”
로버트 조던은 파블로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보호색으로 칠한 경 탱크의 포탑에 설치해 놓은 기관총의 균열로 생각되는 부근을 사격하기 시작했다. 경 탱크는 후퇴하며 허겁지겁 자취를 감추었다.
로버트 조던은 경기관총을 가지고 뛰었다. 아구스틴과 파블로가 그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전속력으로 급경사면을 올라갔다. 경사가 너무도 급해 이젠 뛸 수가 없었다.
“당신 부하는 어떻게 됐어?” 이구스틴이 바싹 마른 입으로 파블로에게 물었다.
“모두 죽었어.”
그는 거의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구스틴은 그를 뒤돌아보았다.
“영국 양반 이젠 말이 남아돌 지경이야.”
“필라르 편은 어떻게 됐지?”
“그편에서 페르난도와 그리고 엘라디오야.”
“자네 편에선?” 하고 파블로가 물었다.
“안셀모가 죽었어.”
아래에서는 나무 그늘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탱크가 또다시 도로와 다리를 사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그들은 말고삐를 풀고 출발을 했다. 로버트 조던은 엊그제 아침 눈 속에서 처음 보았던 그 커다란 잿빛 말에 올라탔다.
그들은 도로를 향해 숲속을 내려갔다. 로버트 조던은 마리아의 바로 뒤를 따랐다. 나무에 걸려 나란히 갈 수가 없었다. 그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당신은 길을 건널 때는 두 번째로 가는 게 좋아, 첫 번째는 그리 나쁜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도 두 번째가 좋아. 적이 알아채는 건 훨씬 나중이니까.”
“하지만 당신은······.”
“난 틈을 보아 단숨에 건널 테니까. 아무 걱정 없어, 위험한 건 줄을 지어 갈 때의 순번이야.”
“어서 가, 라파엘. 뛰어, 자, 어서!”하고 조던은 말했다.
집시는 자꾸만 머리를 뒤로 돌리려고 하는 짐 실은 말의 고삐를 잡고 있었다.
“그 말은 그냥 두고 달려!” 하고 로버트 조던이 소리 질렀다.
쉬잇, 쾅! 탄도가 수평으로 나는 포탄 소리와 더불어 저 앞 땅 위에 검은 잿빛 연기가 치솟아오르는데도 그 사이를 집시가 질주하는 산돼지처럼 교묘하게 몸을 피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길고 푸른 산비탈을 천천히 달려 올라가. 탄환이 그의 앞뒤로 마구 떨어지는데도 얼마 후엔 움푹 꺼진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는 것을 보았다.
이따위 짐말을 끌고 갈 순 없겠군, 하고 로버트 조던은 생각했다. 하기야 이 짐승을 내 오른쪽에 끌고 가면 좋긴 하겠지만, 이놈을 나와 저 47밀리 포 사이에 두고 가고 싶다. 어쨌든 이놈을 저쪽까지 끌고 가보자. 그는 짐말을 옆으로 가까이 가서 고삐를 잡고 그대로 고삐를 쥔 채 나무 사리로 50야드쯤 위로 올라갔다. 로버트 조던은 나뭇가지를 꺾어 짐말의 엉덩이를 힘껏 후려갈겼다. “가라. 이놈아!” 하고 그는 짐말이 도로를 건너 산비탈을 올라가기 시작하자 뒤에서 쫓아갔다.
로버트 조던은 30야드쯤 올라갔다. 거기서부터 위는 비탈이 너무 험했다. 포탄은 로켓처럼 쉿쉿거리며 여기저기에서 굉장한 흙먼지를 날리며 터졌다.
모두가 앞서 숲 한쪽 끝에 도착하여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 어서 달려라!”
그러자 커다란 말의 앞가슴이 험한 산비탈 때문에 파도치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다리 쪽을 돌아다 보니 길에 서 있는 육중한 탱크에서 섬광이 번쩍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쉬잇!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보일러가 터질 때처럼 찝찔한 냄새를 풍기는 쾅! 하는 소리뿐이었다. 다음 순간 그는 잿빛 말 밑에 깔려 있었다. 말은 발버둥질 치고 있었고, 그는 말의 무게에서 몸을 빼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몸을 오른쪽으로 움직일 수 있었으나 왼쪽 다리는 납작하게 짓눌려 말 밑에 깔려 있었다. 잿빛 말은 무릎을 꿇고 일어섰으므로 로버트 조던의 왼쪽 다리는 동자에서 벗겨지고 안장을 넘어 자유롭게 되었다. 그는 땅 위에 납작하게 누워 있는 왼쪽 다리의 넓적다리뼈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피부밑으로 뼈가 날카롭게 뻗쳐나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후, 프리미티보와 아구스틴이 그의 겨드랑이를 껴안고 나머지 경사면을 끌고 올라갔다. 왼쪽 다리의 새로운 관절은 땅이 기울어진 대로 어느 쪽으로든 자유로이 움직였다. 그들은 말들이 있는 숲속의 긴 도랑 속으로 그를 끌고 갔다. 마리아와 필라르가 위에서 내려왔다.
“알겠지만 나는 같이 갈 수가 없게 되었어.”
“잘 들어 이제는 마드리드에 못가게 되었으니.”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마리아 당신은 가야 해 하지만 나는 당신 곁을 떠나는 건 아냐. 두 사람 중 하나가 있는 한 우리는 함께 있는 거야 알겠어?”
“싫어요, 당신 곁에 남겠어요.”
“안 돼.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나 혼자서만 해야 하는 거야. 당신이 있으면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야. 당신이 떠나주면 그때에는 나도 가는 거야.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어? ”
“당신 곁에 남겠어요.”
“안된다니까. 마리아 잘 들어, 이것만큼은 남과 같이할 수는 없는 거야. 당신은 친절하니까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당신은 가야 해.”
“하지만 여기 남을 수 있다면 난 그편이 더 행복할 것 같아요. 나는 가는 것이 괴로워요.”
“알고 있어.” 하고 그는 말했다. “그야 당신에겐 괴로울 테지, 하지만 이제 나는 곧 당신이기도 하니까. 자,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당신은 가야 해 고집을 부려선 안돼. 지금은 당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돼.”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어서. 시간이 없어. 어서 일어서 돌아보지 말고 가.”
“자, 가자.” 필라르가 말했다. “뭐 필요한 건 없소 영국 양반.”
“없어.”
“로베르토! 나도 남게 해 줘요!” 마리아가 소리쳤다.
아구스틴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영국 양반 쏴 줄까?”
“그럴 필요 없어, 어서 가.”
“아아, 이 무슨 변이야. 제기랄!” 아구스틴은 이렇게 말하며 울고 있었기 때문에 로버트 조던의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잘 있어, 영국 양반,”
“안녕, 형제. 그 까까중머리를 잘 돌봐주겠지?”
“그야 두말할 필요 없지.” 아구스틴은 말했다. “뭐든지 원하는 건 없나?”
“이 기관총 탄알은 이젠 얼마 남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겠어.”하고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아구스틴은 말 위에 올라탔으나 차마 떠나지 못했다.
“어서 가줘. 아구스틴, 전쟁 중에는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어.”
“그럼 잘 있어.”
아구스틴은 말머리를 돌려 갔다.
수색병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로버트 조던은 엎드려 있는 곳에서 20야드 아래쪽을 지나가리라고 생각했다.
귀머거리 영감 때 있던 장교로 베르렌도 중위였다. 그의 경기관총은 안장 위에 가로놓여 왼팔을 구부린 곳에 안겨 있었다. 로버트 조던은 나무 그늘에 엎드려 주의 깊고 세심하게 정신을 바싹 차리고 두 팔을 단단히 끼었다. 그는 장교가 소나무 숲의 나무들과 초원지대의 푸른 비탈과의 경계가 되는 부근, 햇빛이 내리쬐고 있는 곳까지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솔가리가 깔린 지면에 바싹 붙이고 있는 자신의 심장이 몹시 고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