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위한 건배
Sara Craven
"저 사람, 여긴 무슨 일로 왔다니?"
앨리슨 모티머는 오르간소리에 어머니의 화난 목소리가 지워져서, 작은 교회에 모인 장례식 참석자들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속으로 빌었다. 그것도 무엇보다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는 그 당사자의 귀에 들리지 않기를 말이다. 물론 앨리슨은 그 사람이 이곳에 왔을 때부터 알아차리고 있었다. 니콜라스 브리스토의 풍채는 금방 눈에 띌 만큼 훤칠했고, 앨리슨은 그 모습만 보아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감을 느꼈다. 장례식은 친척들만 모여서 치른다고 분명히 신문지상에 발표한 바 있다. 그처럼 분명한 암시를 무시할 만큼, 니콜라스 브리스토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친했었다는 사실이, 앨리슨으로서는 예상 밖이었다. 휴 큰아버지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볍게 토닥거리며 무슨 말인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다. 앨리슨은 고맙다고 생각했지만, 그와 동시에 큰아버지가 베스 큰어머니와 걱정스러운 눈길을 주고받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앨리슨은 침착성을 잃고 어깨를 자주 움직였다. 또 시작이구나...확신에 가까운 이 느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불과 2, 3일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발병과 죽음이라는 무서운 현실 이상의 무엇인가가. 집안 일, 장례식 준비, 게다가 남편을 잃은 충격과 슬픔으로 히스테리가 된 어머니를 진정시키고, 학교 기숙사에서 돌아온 멜라니를 위로하고...그토록 바쁘지만 않았더라면 진작 휴 큰아버지에게 무슨 일인지 여쭙고, 어째서 눈길을 피하려고만 하는지 따져 봤을 것이다. 어쨌든 시련과 같은 이 장례식이 무사히 끝나고, 레이디미드에서 가질 뷔페 형식의 점식 식사를 마치면 대강 뭔가를 알 수 있겠지. 그리고, 나로서도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여유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앨리슨의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어머니를 바라다본 앨리슨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상복을 입었는데도 아름답게 보이는 어머니는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손수건을 만지작거린다. 어머니 캐더린 모티머는 몸도 마음도 강한 사람이 못 된다. 결혼한 이후 오로지 남편에게만 의지해 왔고, 요즈음에는 장녀인 앨리슨에게 까지 의지하려고 한다. 장례식이 끝나고 추도식이 끝나면...미망인으로서의 나날을 어떻게 보낼지 앨리슨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모티머 부인은 그 지방의 일류실업가 부인으로서의 지위를 향유해 왔었다.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단체에서 간부직을 맡고 있었고, 늘 디너파티에서는 주인 역을 해냈으며, 주말에는 많은 친구들을 초청하여 접대하기를 좋아했었다. 그럴 때마다 뒷일을 도맡아 하는 것은 언제나 앨리슨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많은 것이 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돈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아버지 앤소니 모티머는 가족들이 곤궁한 생활을 하지 않도록, 그의 할아버지가 기술을 개발한 공학관계의 공장주식을 남겨 주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지방의 퍼스트레이디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진 몰라도, 도자기 수집이나 친구들과 브리지 게임을 하는 등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이디미드의 관리에도 조금쯤은 흥미를 나타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에 대하여 앨리슨은 그다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집안일 등 자질구레한 일들이 어머니의 마음을 끌지 못한다는 것은 앨리슨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집안 살림은 나이가 지긋하고 능력 있는 가정부 와톤 부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이 집에 있었던 그 가정부가 세상을 떠나자, 이번에는 모든 일을 앨리슨에게 떠맡겼다. 그리하여 앨리슨은 이러한 일들을 마치 시계바늘처럼 정확하게 처리해 나갔다. 고용인을 고용하거나 청구서를 지급하는 등 가사의 일체를 앨리슨이 도맡아서 해왔다.
"네 가정을 갖게 되면...유용할 미리 연습 삼아 해보라고."
늘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앨리슨은 결코 속지 않았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 눈이 부실 만큼 미인이었으며, 여동생 멜라니도 피어나는 꽃처럼 날로 예뻐져 갔다. 그런데 앨리슨은 태어 날부터 후하게 생긴, 미운 오리새끼였었다. 몸이 작고 가늘었으며 머리는 밝은 갈색, 눈은 맑은 개암나무 색깔이다. 새하얀 얼굴은 조금만 동요되거나 당황하면 금방 새빨갛게 상기되었다. 더구나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라 얼굴이 빨갛게 될 정도가 되면 몸 둘 바를 모르고 쩔쩔 매곤 했다. 왜 그런지 앨리슨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한 일이다. 그러나 그녀와는 다르게 어머니와 여동생은 놀랄 만큼 냉정하고 발랄한 성격을 가졌다. 그리고 아버지는 명랑하면서도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 였다.
"너는 어디서 주워온 아이 같구나."
어머니는 이따금 그녀에게 쌀쌀 맞게 대했다. 학교 성적이, 촉망 받고 있는 멜라니 정도로 발군의 실력이었다면 대학에 진학하여 좀 더 꿈을 키워 보았을 테지만,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조차 분명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그녀로서는 집에 남아서 어머니 대신 레이디미드를 관리하라는 가족의 압력에 거역하질 못했다. 그러나 어떻게 든 독립할 수단을 강구해야겠다고 생각한 앨리슨은 부동산 회사에 파트타임의 일자리를 찾아냈다. 여성 어시스던트 란 막연한 직함으로 고용되었다. 그것을 앨리슨은 말단직원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한번은 부동산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재능을 발휘한 것에 사장은 물론 본인도 깜짝 놀랐다. 성격이 내성적이라는 것 뿐, 앨리슨은 매입자의 생활 정도와 부합되는 물건을 알선하는 데 상당한 재질을 발휘했다. 흔히 있는 억지 형식의 비즈니스보다 손님들은 앨리슨의 자상하고 차분한 주선을 좋아했다. 사장인 사이몬 드웨이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앨리슨에게 급료를 올려 주었으며 풀 타임으로 일해 줄 수 없겠느냐고 교섭해 왔다. 그러나 앨리슨은 아쉬웠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유혹을 받았고,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은 몇 번인가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이몬과는 그 정도의 관계로 끝내야 한다는 것을 앨리슨은 잘 알고 있었다. 사이몬 이든 다른 남성이든 간에 깊은 사이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언제나 독신녀로 살아가리라 생각해 왔던 것이다. 장례식이 끝난 뒤 레이디미드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직도 참아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아요."
모티머 부인은 시아주버니의 팔에 기대어 호소했다.
"그런데도 짜증스러운 점식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할 것이고..."
부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화난 표정으로 목소리의 톤을 높여 말했다.
"저 브리스토 란 사람 틀림없이 점심식사까지도 하러 올 거예요! 아주버님, 이번 장례식은 친척만의 행사로 끝내고 싶다는 것과, 남들이 우리의 슬픔 곳에 끼어 드는 것은 사양한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세요."
휴는 난처하다는 듯 헛기침을 해댔다.
"미리 짐작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그 사람과 앤소니는 여러 가지로 밀접한 거래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요?"
모티머 부인은 손수건으로 눈두덩을 찍어냈다.
"바깥양반은 일에 대한 얘기를 전혀 해주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리델 씨가 왜 바깥양반의 유서를 같이 고쳐서 읽자고 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이미 내용을 환히 알고 있는데...작성했을 때 바깥양반은 나와 앨리슨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거든요."
부인은 또다시 훌쩍였다.
"설마 했었어요...내가 먼저 갈 줄 알았는데..."
큰아버지는 엄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분명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얼굴이다. 앨리슨은 이유 없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 집에 돌아오자 앨리슨은 점심식사 준비가 평소처럼 빠짐없이 잘 되었는지 어쩐지를 점검했다. 그리고 간소한 회색 상의를 벗고 머리를 매만진 다음, 이층으로 올라갔다. 어깨에까지 흘러내린 머리에 빗질을 하고 있을 때, 최초의 자동차가 도착했고 현관 앞에서 손님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앨리슨은 예정된 손님들을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와 특히 친했던 사람들 외에, 공장에서 간부들이 올 것이다. 앨리슨은 가냘픈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앤소니 모티머는 회사의 중심인물 이었고, 그들은 아버지를 믿고 끝까지 남아서 일을 처리했었다. 아버지가 하던 일을 누가 대신할는지 앨리슨으로서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앨리슨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니콜라스 브리스토가 제일 뒤 차에서 내리더니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앨리슨은 마음속으로 신음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브리스토의 대해서 어머니가 나타낸 반응은 좀 과장되긴 했으나 어느 정도 변명의 여지는 있었다. 아버지와 어느 만큼이나 친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앨리슨의 가족들과는 반면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레이디미드에는 단 한번 왔을 뿐이었고, 그때 식사가 끝난 후 앨리슨은 어머니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곁눈질로 느꼈지만 그는 아무 눈치 없이 아버지와 함께 서재로 들어갔었다.
"어지간히 생각이 없는 사람이로구나!"
어머니는 화를 내며 앨리슨에게 불평을 털어놓았었다.
"저녁식사의 모임은 사교장이야. 아빠는 내가 사업 일을 즐거운 식사 시간에 꺼내는 것을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계실 텐데..."
앨리슨은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브리스토의 상대역을 해주었는데, 거만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여성이 매력을 느낄 타입이라는 것은 앨리슨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귀와 권력이 엿보이는 분위기가 고급 복장과 어울릴 만큼 풍겼고 거기에다가 사람을 끄는 오만스러운 용모를 갖추고 있었다. 처음 인사를 나눌 때, 이 집 딸이라는 소개에도 별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를 솔직히 나타내 보였지만,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는 겨울 하늘처럼 차가운 푸른 눈으로 앨리슨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앨리슨으로서는 브리스토가, 온화하고 사교적인 아버지와 어떤 면에서 친할 수 있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첫째, 그는 아버지보다 적어도 25년은 젊었다. 그에 관해서 <놀라운 시티보이>라고 씌어있는 글을 어디선 가 본 기억이 났다. 돈 버는 비결을 터득한 젊은 금융업자. 물론 이젠 30대이니까 돈을 인쇄해내듯이 벌겠지만...초대 받지 않은 장례식에 참석할 만큼 아버지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니 믿음 직도 했지만, 앨리슨은 덮어놓고 그것을 믿지 만은 않았다. 가십난의 기사에 의하면 그는 돈 버는 일에만 가치를 두고 있는 것 같다. 결혼은 아직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없는 것은 아니고, 고급 양복을 갈아입듯 늘 상대를 바꾸는 듯 했다. 그러한 생활방식을 경멸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찾아온 사람을 화나게 해서 좋을 것도 없을 것 같고 해서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응대하는 것이 좋겠다고 앨리슨은 생각했다. 현관으로 내려가자 브리스토는 안내역을 맡은 호너 부인에게 코트를 벗어서 건네주고 있었다. 앨리슨은 마음과는 달리 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호너 부인, 제가 받아 걸게요."
그 목소리에 브리스토는 돌아서서 앨리슨을 보며 인사라도 하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브리스토의 매력이 앨리슨에게 일격을 가했다.
"안녕하세요? 브리스토 씨. 내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시죠?"
"기억하고 있죠, 미스 모티머."
여학생처럼 얼굴을 붉히거나 어색한 분위기가 되지 않게 해야겠다고 앨리슨은 속으로 다짐하면서 표면상으로는 조용히 말했다.
"일이 난처하게 됐군요, 브리스토 씨.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해주신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점심식사에는 친척들끼리만 모일 예정이어서...공교롭게도...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공교롭다고요? 글쎄요..."
브리스토는 아주 침착하게 그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오해하는 쪽은 그 쪽인 것 같군요. 나는 에릭 리델과 그리고 아가씨의 백부이신 보스워드 대령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는데요."
앨리슨의 입술이 자신도 모르게 벌어지면서 놀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머, 그분들이 그러셨어요? 왜죠?"
"그 두 분에게 물어보시죠. 그 동안 나는 어머님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럼 큰아버지와 얘기하고 올 테니 서재에서 기다려 주세요."
앨리슨은 현관을 지나서 서재의 문을 열었다. 떡갈나무로 벽을 장식한 짜임새 있는 방에는 묵직한 커튼이 때가 때이니 만큼 아직도 드리워져 있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이방에 들어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아직도 아버지를 기억나게 하는 분위기가 진하게 남아 있어서 앨리슨은 몸을 긴장시키며 문 앞에서 우뚝 섰다. 옆에 서있던 브리스토가 날카로운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는 것은 미처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햇빛을 들어오게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라는 소리가 났고 커튼을 끌어올리는 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봄철의 햇빛이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앨리슨은 제정신으로 돌아왔고,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저어...저쪽 찬장 속에 위스키가 있으니 생각이 있으시면 드세요."
"매우 친절하군 요."
무미건조한 말투가 앨리슨의 가슴을 때렸다. 브리스토는 다가와서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앨리슨을 내려다 보았다.
"아버님께서는 아직 돌아가실 나이가 아니셨는데..."
브리스토는 말을 잠시 끊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분이셨죠."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다부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실례하겠어요, 다른 손님도 맞아야 하니까요."
앨리슨은 방을 나와 문을 닫고 잠시동안 그곳에 서있었다. 악몽 같은 하루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한층 언짢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지금은 불안 정도가 아니라 공포감까지 느껴졌다. 지난 2주일 동안의 혼란스러웠던 일들을 볼 때 뭔가 불길한 일이 불쑥 나타날 징조가 엿보인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앨리슨은 어딘 가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응접실의 공기는 무척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앨리슨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조문에 답례를 하는 동안, 애도의 말과 분위기가 필요 이상으로 침체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내가 신경과민 인지도 모르지...그런 생각을 하면서 앨리슨은 큰아버지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앨리슨이 큰아버지에게로 가기 전에 멜라니가 가로막았다.
"그 멋쟁이는 누구야? 어디다가 감춰뒀지? 키 크고 머리가 검은 폴 뉴먼 같은 눈을 가진 사람 말야. 오는 것을 봤는데."
앨리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니콜라스 브리스토 씨야. 비즈니스 관계로 온 것 같아."
멜라니는 일부러 그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하고 교섭을 하면 좋으련만..."
그때 멜라니는 앨리슨의 눈빛을 보고 움찔했다.
"미안해. 이런 때 농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기분 나쁜 일만 일어나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앨리슨은 여동생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가볍게 껴안았다.
"그래, 농담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큰아버지와 얘기 좀 해야겠어."
"오, 너였구나. 음료수 좀 마실래?"
휴 큰아버지의 말투가 어색했다. 앨리슨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목 마르지 않아요. 다만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해서 왔어요. 니콜라스 브리스토 씨는 큰아버지의 초대를 받고 왔다던 데요?"
"응, 사실은 리델의 아이디어였어."
큰아버지는 일부러 앨리슨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게 일하기에 좋겠다고 하더군."
"일 이라뇨? 그렇게 우물쭈물하시지만 말고 분명한 얘기를 해주세요."
큰아버지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말을 꺼냈다.
"아마 너도 들을 권리가 있겠지.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어머니의 쇼크를 어느 정도 진정시켜 줄 수도 있겠고..."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에게서 돈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니?"
앨리슨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따금 제가 여쭤보기는 했지만, 특히 공장 일에 대해서...불경기를 타고 계신지 어쩐지...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만 하셨어요."
휴는 앨리슨을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게 그렇지가 않았어. 사실은 더 이상 악화될 수 없을 만큼 경영난에 빠져 있었다고. 한 2년 동안 아버지는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돈을 모두 회사에 투자했었지만 그런데도 모자란 모양이야. 회사 규모를 축소했으면 됐을 텐데 말이야. 그러나 종업원의 일시해고는 어떻게 든 피하려고 했던 거야."
앨리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 거에요. 아빠는 해고를 제일 싫어하셨으니까요. 신뢰해주는 사람들을 배신하는 기분이셨겠죠."
앨리슨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띄웠다.
"종업원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아빠 자신은 그 가장이라고 생각하셨을 테니까요."
"이런 경제정세에서는 풋내기와 같은 짓을 한 거야."
앨리슨은 팔짱을 끼면서 큰아버지를 노려봤다.
"그럼 우리 아빠가 파산이라도 했단 말인가요?"
휴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의 연금은 무사하지만, 그 외에는..."
"맙소사!"
앨리슨은 현기증이 났다.
"하지만 아버지의 주식이 있잖아요? 그것이 꽤 될 텐데요."
휴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회사에 다소 값이 나가는 것이 있다면...그리고 지금쯤은 아마 재산관리인이 개입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앨리슨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이 집이 있잖아요. 너무 커서 불편하긴 해도 아빠가 얼마 전에 감정가를 내본 일이 있어요. 이 집을 팔고 좀 작은 집으로..."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이야. 앤소니는 이 집을 담보로 하고 상당한 빚을 얻었던 거야. 중국으로부터 가 주문이 있었기 때문에 새 기계가 필요했던 거지. 그것만 해결되면 회사가 다시 일어서게 된다고 생각했을 테고, 네 아버지는 주문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을 밖에..."
큰아버지의 얼굴이 별안간 늙게 보였다.
"그런데 그 주문을 받지 못하게 됐어. 그 통지를 받자마자...금방..."
"발작이 일어났던 거죠."
앨리슨은 아무리 참으려고 애써도 몸이 떨려왔다.
"그렇다면 이 레이디미드는 이제 우리 것이 아니란 말씀이로군요...믿어지지 않아요."
앨리슨은 한순간 눈을 감았다.
"가엾은 엄마는 어디로 가야 하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상의를 해야겠어. 그러나 일을 서둘러서 결정할 필요는 없어. 어머니에게는 충분한 배려를 해줄 테니까. 그 새 집주인이..."
"새 집주인이요?"
앨리슨은 멍청한 표정으로 큰아버지의 안색을 살폈다.
"그렇지만 이 집은 담보로 들어갔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렇다면 은행 것이지 개인 것은 아닐 텐데요?"
"그렇지가 않아."
큰아버지는 점점 이해하기 어려운 말만 했다.
"앤소니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을 했어. 은행에서는 네 아버지의 제안을 좀 위험하게 생각해서 거절한 거야. 결국 개인에게서 빌기로 했던 거지. 물론 완전히 합법적으로 말야."
"그럼 그 사람이 니콜라스 브리스토 겠네요?"
휴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그래서..."
앨리슨은 그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돌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셰익스피어의 한 구절이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슬픔이 꼬리를 물고 자꾸 달려듭니다. 라는 구절처럼 결국 그 작품의 오필리어는 물에 빠져 죽었다. 그와 같이 앨리슨도 분노와 곤혹 속으로 점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앨리슨은 겨우 띄엄띄엄 말했다.
"아빠는 어쩌다가...아빠는...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을 남에게 저당을 잡혔을까요?"
"도박을 했기 때문이야. 물론 경마나 카드를 가지고 하는 도박은 아니었지만, 그 쪽이 오히려 쉬웠을지도 모르지. 네 아버지는 사업상의 도박을 좋아했었단다...중국으로부터 아무런 보장도 받지 않은 채로 새 기계에 투자하는 그런 무모한 도박을 했던 거야. 그 도박에서 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겠지. 아버지 편이 돼서 얘기한다면, 그 계약이 성립되었을 경우 공장으로서는 큰 활력소가 되었을 거고, 빚 갚을 정도가 아니라 막대한 이익도 얻을 수 있을 만큼..."
"그런데 그게 안됐군요."
앨리슨은 우울한 얼굴로 미소를 살짝 지어 보였다.
"문제는...엄마에게 이 얘기를 어떻게 알려드리느냐 예요. 그건 그렇고 브리스토 씨는 우리에게 집을 비워 달라는 말을 하려고 온 건가요?"
"천만에."
큰아버지는 자신이 모욕을 받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 그 사람도 이 집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단다."
"친절한 사람이 군 요!"
앨리슨은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렇다고 사태가 조금이라도 나아지진 않아요. 어쨌든 집은 내놓아야 될 테니까요."
"앨리,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야 해. 채무자가 누구든 간에 그처럼 많은 빚을 탕감해 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니까. 네 아버진 틀림없이 회사 일이 성사되리라 믿고 완벽한 계약을 해주었을 거야. 리델 변호사의 반대를 뿌리치고서 말야."
"에릭 리델 씨요? 그 분은 반대했었나 요? 고마운 분이 군 요. 그분도 곧 올 테죠?"
"30분쯤 후에는 오겠지. 그 무렵에는 다른 손님들도 돌아갈 테고 그때 모두들 모여서 얘기를 해보는 거야. 친족회의를 열어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봐야지."
"니콜라스 브리스토 씨도 친척으로 보시는 거군 요?"
앨리슨의 말씨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큰아버지는 비난하듯 미간을 찡그리면서 대답하였다.
"그게 아냐. 그러나 가급적 우호적으로 일을 풀어 나가는 편이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좋을 것으로 생각해. 브리스토는 네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으니, 집을 곧 인수하는 일은 없을 것이란 말을 할 거야."
"그만두세요!"
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미안하다, 얘야. 그렇지만 너도 알 것은 알아둬야 하니까 얘기하는 거란다. 여하간 레이디미드는 이제 니콜라스 브리스토의 소유야."
앨리슨은 낮은 목소리로 내동댕이치듯 말했다.
"내가 눈을 뜨고 있을 동안에는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어요."
서재의 문을 열려는 데 안에서 멜라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앨리슨은 혀를 차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손잡이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멜라니는 상기된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큰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있었다. 멜라니가 브리스토에게 무엇인가 얘기를 하고 있었던 듯, 상대방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앨리슨은 차갑게 말했다.
"멜라니, 네 방으로 돌아가. 브리스토 씨와 할 얘기가 있으니까."
앨리슨의 분노에 찬 눈과 파랗게 질린 얼굴의 두 볼이 불타는 것마냥 빨개지는 것을 보고, 멜라니는 군말 없이 서재에서 나갔다. 앨리슨은 멜라니를 내보내자 문을 닫고 심호흡을 한 다음 브리스토를 향해 돌아섰다. 브리스토는 글라스를 들고 아버지가 쓰던 책상에 걸터앉아서 한쪽 발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넥타이까지 느슨하게 풀어놓은 모습이 몹시 거슬렸다. 그러한 사소한 일들까지 앨리슨의 분노와 적의를 불러 일으켰다.
"우리 아버지 책상에서 내려오세요. 아버지 물건엔 손도 대지 마세요. 아직은 당신 것이 아니잖아요?"
브리스토는 글라스를 비우고 책상 위에 내려놓은 다음 유유히 일어섰다.
"큰아버지에게서 들었군?"
"네, 들었어요."
앨리슨은 도전적으로 머리를 들면서 적의에 찬 눈빛으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금융업자일 것으로 생각해요. 천한 고리대금업자는 아니시겠지요?"
"그래, 맞았소. 천하지는 않지."
조용하게 웃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어서 계속해요. 미망인과 고아들을 괴롭히는 나에게 썩 잘 어울리는 호칭이 있음 직도 한데...사양하지 말고 말해 보시지."
"놀리지 말아요!"
브리스토는 마땅치 못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다지 독창적인 사람이 아니로군. 좀 더 생각해 봐요."
앨리슨은 두 팔로 팔짱을 끼면서 몸을 떨었다.
"비겁해요!"
잠시 입을 다물었던 앨리슨은 말을 이었다.
"우리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그리고 사람을 조롱까지 하다니..."
파란 눈이 북극에서 몰아치는 찬바람과 같은 냉혹성을 띠고 앨리슨을 훑어 내려갔다.
"이제 알만 하군. 자신이 없는 말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게 좋지. 그런데 방금 모든 것을 빼앗는다고 말했나? 그건 남을 중상하는 말이야. 나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당신 아버지에게 설득을 많이 했었어. 그러나 그 양반은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았어. 계산을 다해 보고 나서 하는 일이라며...내가 볼 적에는 좀 비정상적이었다고 나 할까."
"그러나 저러나 돈은 꾸어 주셨잖아요?"
"그랬지. 잘 풀려 나갈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나도 여러 사람과 의논을 해 보았는데, 당신 아버지는 모티머 공장을 꼭 일으키려는 열의가 있었고, 중국과의 거래가 성공되기만 하면 이자를 듬뿍 얹어서 갚을 수 있다는 것을 믿었었지. 그런데 어떻게 돈을 안 꾸어 드린단 말이야?"
"그렇지만 이런 집, 탐이 나는 건 아니겠지요? 몇 대에 걸쳐 우리 집안의 소유였어요. 그리고 구식인데다가 난방 장치에...고용인 문제, 청소문제가 보통 일이 아니 예요. 도깨비가 나올지도 모르고요."
"그런 일은 없을걸. 수리와 개축은 어느 정도 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몰라도. 그러나 기초는 아주 튼튼해. 아버지가 최근에 검사와 감정을 시켰었거든. 내가 권하기는 했지만."
"그럼 처음부터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아버지가 빚을 못 갚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오? 물론 그런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했지."
브리스토는 어깨를 조금 으쓱해 보였다.
"지금과 같은 불행한 상황까지는 예측 못했지만..."
"그랬을 테죠. 그럼 당신이 이 레이디미드를 팔아서 손실을 메울 때까지 어느 정도의 유예기간이 있을까요?"
"아니, 팔지는 않을 거요. 내가 이곳에서 살 생각이지."
"이 곳에서 산다고요?"
앨리슨은 머리가 혼란해졌다. 그녀는 앵무새처럼 반문했다.
"설마 정말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겠죠?"
"정말이요, 아주 멋진 집이니까...이 집이 좋은 집이란 걸 아가씨 가족들만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소?"
"아뇨,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앨리슨은 어색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고급 주택가도 아니고, 런던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고, 더구나 당신의 평소 생활권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브리스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 올랐다.
"내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가씨가 어떻게 알지?"
앨리슨의 얼굴이 빨개졌다.
"사생활을 비밀로 하지는 않는 것 같던데요. 출입하는 장소라든가...동행하는 여성이라든가...뭐 그런 거 신문 가십난에 간혹 나오니까요."
"맙소사!"
브리스토는 앨리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시시한 삼류신문의 독자일 줄이야...그건 그렇다 치고, 아가씨가 알고 싶다면 내가 이곳에 살고 싶은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를 가르쳐 드리지."
브리스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내게는 런던에 쾌적한 주택이 있는데, 그런 것을 가정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소. 그런데 요즘엔 어디에든 뿌리를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아주 먼 곳에서 런던에 드나드는 사람도 있고, 나 같은 경우 바쁠 때는 헬리콥터를 이용할 수도 있지. 이곳이라면 헬리콥터가 뜨고 내릴 수도 있을 테니까. 어때요? 이것으로 호기심이 좀 풀어졌소?"
"호기심만으로 물었던 것은 아니 예요. 당신이 이 집을 다시 팔 생각이라면 어떻게 흥정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브리스토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요? 참고적으로 더 말해 드릴까?"
앨리슨은 당황한 듯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지금 직장에 나가고 있으니까 좀 기다려 주기만 한다면 아버지가 지신 빚을 갚을 것이란 생각을 했었어요."
"우리 두 사람이 그런 다행스러운 날이 오기까지, 오래 살 수 있을까?"
브리스토는 비웃듯이 대답했다.
"대체 급료가 얼마요?"
앨리슨이 대답하자 브리스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지금 동화세계에서 사는 게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사는 거요. 아가씨의 급료로는 턱도 없고, 또 생활비는 어떻게 할 셈이오? 아무리 좋은 집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희생을 치를 가치는 없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멜라니와 내 경우라면 상관없어요. 다만 우리 어머니는 자기 집에서 쫓겨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괴롭겠어요. 워낙 의지가 약한 분이라서 걱정이에요."
"그러신 것 같더군. 어머니에 대해선 놀라는 일이 없도록 충분히 배려하겠소. 설마 내가 인정머리 없이 어머니를 가혹하게 괴롭힐 것으로 생각했었소?"
"무슨 배려를 하신다는 건가요?"
앨리슨은 힘없이 물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무슨 배려를 하든 간에, 어머니가 받을 타격을 엄청날 거에요. 더군다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사건에 이어지는 일이니까요"
"아버지가 살아계셨다 하더라도 파산은 면할 길이 없었을 거 아니오?"
니콜라스 브리스토는 신랄하게 말했다.
"그렇게 됐다면 어머니는 더 곤경에 처하실지도 모를 일이지. 지금 상황에서는 체면에 큰 손상 없이 레이디미드에서 나갈 수가 있고,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한 수입은 있잖소."
"솔직히 말해서 이 집이 탐이 났던 거죠? 그래서 다른 방도는 제쳐 두고 이 집을 담보로 잡으신 거겠죠?"
"여하간 달리 방도가 있을 수 없잖소. 그러나 남들에게는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거래는 비밀로 해두겠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으니까 지금 남은 아가씨 가족들에게는 이 집이 너무 커서 판 것으로 해둡시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해두자는 말이오."
"그런 말을 듣고 감사할 내가 아님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앨리슨은 도전적으로 턱을 치켜 올렸다.
"물론 아가씨가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그럴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소."
브리스토는 기분이 상했다는 투로 대답했다.
"앞으로 남에게 무엇이든 부탁을 할 때는 좀 더 부드러운 말씨로 교섭하는 게 좋을 거요."
"두 번 다시 당신과 교섭할 생각은 없어요."
앨리슨은 내뱉듯이 말했다.
"실례하겠어요, 브리스토 씨."
앨리슨은 그 길로 자기 방에 돌아가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절규하며 울고 싶었다. 주먹으로 매트를 치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앨리슨은 일어서서 어렸을 때부터 정이 담뿍 들었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처럼 갑작스럽게 우리 가족의 인생이 변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곧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선고가 전해질 때, 그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새로운 생활을 해나갈 적극적인 방침을 세워두려면...그리고 정직하게 말해서, 니콜라스 브리스토와 다시 대결하기 전에 한숨 돌려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이방도 이미 피난처가 될 수는 없다. 브리스토의 그림자가 이제 집안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는 듯했다. 아버지의 책상 끝에 걸터앉아 있던 브리스토의 생각이 나자 앨리슨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간 집을 다시 되찾겠다고 한말은 분명 바보스러운 말이었다. 그것은 자포자기에 가까운 말이었고 발악에 불과한 것이다. 앨리슨은 베개에 몸을 기대고 웅크려 앉았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레이디미드의 집안 일을 돌볼 필요가 없게 된다면, 풀 타임의 정 사원으로 일하도록 권유하던 부동산 회사 사장인 사이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급료도 인상될 테고, 어머니의 연금을 합친다면 지금보단 못하겠지만 세 식구가 살아가기엔 가능하다. 단, 앨리슨의 어머니 캐더린 모티머가 그런 생활에 적응하게 될 지가 걱정이 된다. 결혼 이후 줄곧 사치스러운 상류 취향의 생활만 해왔기 때문에 지출을 조금이라도 억제한다는 것은 심히 불만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큰 문제는 멜라니의 학비였다. 옥스포드 대학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이 있다고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멜라니는 학업성적이 뛰어났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학교는 계속해야만 한다. 그러나 대학의 학비는 지금 사정으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가 없지 않은가. 만약 사이몬 드웨이트 사장의 제의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것은 학비의 일부밖에 충당할 수 없을 것이다. 몸을 쭉 뻗으면서 앨리슨은 서서히 일어섰다. 이 괴로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든 빠져나가려 애썼지만, 그것을 피할 수도 없으려니와 미루어 나갈 수도 없었다. 앨리슨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레이디미드에서 나가는 일은 빠를수록 좋을 것 같아요."
앨리슨이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좋단 말이냐?"
모티머 부인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본 앨리슨은 어머니가 가엾게 느껴졌다. 그러나 서재에서 긴 시간 괴로운 대결을 하는 동안, 부인은 놀랄 만큼 스스로를 자제했고 당당했다. 리델이 당황해 하면서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었다. 니콜라스 브리스토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약간 거무튀튀한 얼굴은 도리어 우울하게 보였다. 조금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것일까?
"월요일에 직장에 나가서 적당한 집이 없는지 사이몬에게 물어 봐야겠어요."
앨리슨이 말했다.
"당분간 어느 집이든 세 들어 있으라고 말할 것 같아요. 지금 나와 있는 집 중에는 적당한 집이 없는 걸 제가 잘 알고 있어요."
"셋집이라니?"
비록 앨리슨이 밭에다가 천막을 치고 살자는 말을 했더라도 이 이상의 비통한 목소리를 어머니는 내지 않았으리라. 앨리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떡해야 좋단 말이 예요? 니콜라스 브리스토 씨의 동정을 받으며 이 집에 계속 살기는 싫지요?"
"그 사람 이런 집을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독신이라면 혼자 살기에 집이 너무 클 텐데."
"독신 생활을 그만두려는 것인지도 모르죠."
근심스러운 눈으로 난로 불을 바라보던 멜라니가 기분 전환이 된 듯 말했다.
"지난번 신문에 헤스터 몬클레이와의 소문이 실려 있더라고 요. 그녀의 이혼이 성립되면 결혼할 것 같다고요. 헤스터가 그 남편을 상대로 이혼 신청을 했다 나요. 궤도를 벗어났다는 행동을 이유로 말이 예요. 그 남편은 니콜라스 브리스토를 법정에 불러내서 불의를 이유로 역 고소를 하겠다고 벼른대요."
멜라니는 피식 웃었다.
"온 시내가 그 소문 때문에 시끄러워요."
"멜라니! 그런 지저분한 얘기를 어디서 듣고 왔니?"
어머니는 그 순간 자신의 걱정거리도 잊은 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꾸짖었다.
"기숙사의 청소 아주머니가 받아 보는 일요 신문을 갖다 주어서 알았어요. 세상의 부도덕을 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면서..."
"알겠다. 네가 학교로 돌아간 연후에 그 미스 레슬리에게 엄마가 편지하겠다."
"집에 돌아온 다음에 편지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신가요?"
멜라니는 중얼거렸지만 목소리가 작아서 부인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앨리슨은 경고하는 시선을 멜라니에게 보냈다.
"브리스토 씨의 연애 얘기는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어요."
앨리슨은 말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시 바삐 우리가 살 새로운 곳을 찾아내는 일이에요."
"하지만 집을 어디 가서 찾아낸단 말이냐? 그랜드피아노가 들어갈 장소도 고려해야 할 것이고..."
앨리슨은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꿀꺽 삼켰다.
"피아노는 아무도 안 치잖아요. 경매에 부쳐버리는 것이 좋겠어요."
부인은 화를 내며 등을 꼿꼿이 세웠다.
"얘, 앨리슨, 너는 나에게 일부러 창피스러운 생활을 하란 말이니?"
"일부러 라니 요?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앞으로는 사정이 달라요. 현실에 적응을 하셔 야 해요."
부인의 눈에 눈물이 괴었다.
"앨리슨? 그렇게 일일이 말해주지 않아도 다 알고 있어."
부인은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그 사이에 두 딸은 절망적인 시선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부인이 말을 계속 이었다.
"앞일에 대해서 생각할 동안, 자기 집에 와있지 않겠느냐고 큰 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말씀하시더라. 그곳에 가있는 것이 나을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기운을 좀 차리려면 잠시 누워 있어야 겠어. 저녁식사는 아직도 이 집에서 먹을 수 있겠지, 앨리슨?"
그렇게 말하고 나서 어머니는 고고한 기품을 갖추며 당당하게 방을 나섰다.
"남에게 괴로움을 주는 엄마의 연극도 이제 관록이 붙었다니까. 그러니까 아빠는 곤경에 빠져 있으면서도 엄마와 상의를 하지 않았던 거야. 엄마는 그런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니까 말이야."
둘이만 남게 되자 멜라니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그런 말하는 게 아냐, 멜라니! 엄마에게는 일생에 가장 슬픈 날이야. 아빠를 좀 사랑하셨니?"
"그래, 하지만 한번도 아빠를 도와 드린 일은 없었다고. 절약이란 말 자체가 무엇인지를 몰랐잖아. 몇 달씩이나 아빠가 고민하고 계셨을 텐데 그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 엄마는."
"그래, 하지만 나도 모르고 있었어."
"언니는 그런 일 말고도 바쁘잖아. 아빠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거라고."
멜라니는 벽난로의 부젓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갑자기 말했다.
"이번이 고등학교의 마지막 학기야."
"그렇겠구나."
멜라니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교과과정은 좀 다르지만 학비가 싼 지방학교에 찾아가 보려고 해. 아니면 일자리를 찾든지..."
앨리슨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냐, 넌 옥스퍼드든 케임브리지 든 가야 해. 앞길을 포기하면 절대 안돼, 멜라니."
"나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학비를 어떻게 조달해?"
"장학금이라든가 무슨 다른 제도가 있을 것 같은데..."
"글세..."
멜라니는 떫은 표정을 지었다.
"남에게 머리를 숙이기는 싫어. 그 정도까지 된다면 학교를 그만 둘 거야."
"성급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리델 씨가 몇 가지 할 얘기가 있다고 내일 오기로 했어."
한숨을 쉬고 나서 앨리슨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장 오늘 듣고 싶었지만, 브리스토 씨 앞에서 집안 얘기하기가 싫었어."
"언니는 그 사람이 정말 싫어?"
멜라니는 살며시 한숨을 내뱉었다.
"멋진 사람이던데...헤스터 몬클레이가 되고 싶을 정도라니까. 복 많은 암캐야. 물론 예쁘게 생겼고 세련됐으니까...침대 속에서 그 사람을 멋지게 조종하는 방법도 알겠지..."
앨리슨은 자신도 모르게 그만 웃고 말았다.
"얘, 멜라니! 너도 참! 그런 얘기 엄마가 들으시면..."
"걱정 마, 그런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멜라니는 고개를 그녀에게 기울이며 덧붙였다.
"하지만 언니, 솔직히 말해서 그 사람이 조금쯤은 마음에 들지? 사이몬 씨처럼 나이 많고 따분한 사람이 좋을 리는 만무하고."
"사이몬은 노인도 아니고 따분한 사람도 아니야. 학교에서 남성 학이라는 교과과정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는데 어디서 그런 것 듣고 다니니? 너는 영문학에만 전념해. 그 쪽이 안전하다고."
"뭐가 안전해? 우리는 이제 위험한 생활을 할 판인데."
자신의 세계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 상황 속에도 회사만은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앨리슨은 그나마 안심했다. 사이몬도 변한 것이 없었다. 장례식 이후로 온 동네가 자기 집 일로 화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앨리슨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이몬은 따뜻하게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었고 레이디미드의 처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작고 편리한 집을 찾아야 한다는 말만 했을 뿐이고, 그는 적당한 집이 매물로 나오는지 주의해 보겠다고 약속을 해 주었다. 일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어서 앨리슨은 기뻤다. 멜라니는 기숙학교로 돌아갔지만 그곳에 언제까지 있게 될는지 아무도 모른다. 에릭 리델은 학비문제에 대해서 참으로 안됐다는 귀띔만 했을 뿐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앨리슨은 어머니와 상의하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눈물부터 흘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의논 대상이 안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방갈로 형식의 주택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실린 책자를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태도가 커다란 걱정거리였다. 식사도 하지 않았고 방에서 나오는 일도 드물었다. 앨리슨은 어쩔 수 없이 큰어머니가 귀찮을는지 몰라도 어머니에게 말했다.
"큰아버지 댁에 가시는 게 좋겠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일단 이곳 레이디미드를 떠나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의사도 어머니의 정신상태를 걱정하는 듯, 엉뚱한 방향부터 치료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신중한 말투로 권해 왔다.
"그럼 정신과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앨리슨은 물었다.
"불안상태에 있는 것은 확실해요. 주인양반과 사별한 쇼크만 해도 보통 사람은 견디기가 어려울 텐 테, 어머님의 경우는 생활의 기반까지도 잃으셨으니까요..."
의사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사실 어머니보다 몇 배나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도 정서불안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다가 모티머 부인은 이 집에 대한 집착이 남다르게 강했지요. 아마 아가씨나 멜라니 보다 훨씬 말입니다."
이 집은 내 집이라고 어머니는 계속 말하고 있다. 그것을 내게서 빼앗아 가다니...안될 일이지.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집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완전히 잊고 있는 것 같아 앨리슨은 허탈한 생각까지 들었다. 다행히 몰두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는 것이 고마웠다. 사이몬은 이미 정 사원으로 일할 경우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다.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의 급료는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앨리슨은 한숨들 돌렸지만 멜라니의 문제해결은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오늘 아침에 받은 편지에서도 그것은 분명했다. 멜라니는 까다로운 여교장, 미스 레슬리의 예비면접을 받았던 것이다. 면접은 아주 정중했었는데 다음학기의 학비를 어떻게 조달하겠느냐는 문제가 당연히 대두됐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날 밤, 낡은 경 자동차를 타고 귀가하던 도중, 앨리슨의 머릿속은 온통 그 문제로 꽉 차 있었다. 마지막 커브 길에서 차를 돌렸을 때 현관 앞에 웬 차가 서있는 것을 본 앨리슨은 깜짝 놀랐다. 엔진을 끄고 차 밖으로 나오면서 앨리슨은 미간을 찡그렸다. 번호판을 본 기억이 나질 않는다. 손님이 올 예정이 없는데...현관에 들어서자 호너 부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 브리스토 씨예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한시간 이상이나 기다렸답니다. 부인이 아니라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면서요. 커피를 끓여내기는 했습니다만...괜찮으시겠어요?"
"상관없어요."
즉석에서 대답하기는 했지만 앨리슨의 마음은 무거웠다.
"응접실에 있나요?"
"네, 부인은 몸이 편치 않으시고 아가씨는 직장에 나갔다고 했더니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그래요?"
재킷 단추를 풀면서 앨리슨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브리스토는 난로 옆에 있는 찬장에 팔꿈치를 대고 서서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앨리슨이 응접실로 들어와 문을 닫는 소리에 그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귀가시간이 꽤 늦었군. 잔업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소."
"보통 날은 없지만..."
단순한 감색 드레스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상대방을 의식하면서 앨리슨은 재킷을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막 퇴근하려는 데 사장이 불렀어요. 우리에게 알맞은 작은 집이 나왔다고요."
"아, 그래?"
이 소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눈썹을 약간 찡그려 보였다. "어딘데?"
"당신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지 않을 만큼 떨어져 있어요."
브리스토는 입가를 찡그렸다.
"그걸 사기로 했나?"
"아뇨, 우선 엄마와 내가 가서 봐야겠지요."
앨리슨은 커피포트에 손을 대보더니 말했다.
"식었군요, 다시 데워 오겠어요."
"아니, 괜찮소, 그러나 스카치 한잔이라면 사양하지 않겠어...아주 바쁜 하루였거든."
음료수를 가지러 가려던 앨리슨은 깜짝 놀라며 브리스토를 훔쳐보았다. 다분히 쓸데없는 걱정이겠지만, 불안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아가씨도 한잔하는 게 좋겠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앨리슨은 위스키를 글라스에 알맞게 따른 다음 브리스토에게 건네주었다.
"난 안 마시겠어요. 여태 알코올 없이도 살아왔었으니까요."
"그건 축하해 줘야 할 일인데."
브리스토는 건배하는 시늉을 내며 글라스를 치켜들었다.
"보기보다 정말로 의자가 강한 아가씨로군. 당신보다 강하지 못한 인간의 약점을 너그럽게 봐주기를 바라겠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가요? 당신답지 않은 말이 군 요!"
"비웃고 싶으면 비웃어도 좋아."
브리스토는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말했다. 약간의 간격을 둔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사전에 에릭 리델을 통해서 말하려고 했었는데..."
앨리슨은 갑자기 입안이 타는 것을 느꼈다.
"나가 달라는 말인가요?"
"그게 아니라 오히려..."
"그럼 우리가 이곳에 있어도 좋다는 말인가요?"
반신반의 하면서도 너무 기쁜 나머지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고동쳤다. 브리스토는 미간을 찡그렸다.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며칠 전 리델을 통해서 이 집 고용인들에게 그들이 좋다면 계속 이곳에서 일해도 좋다고 말했었지. 그 건으로 가옥관리인과 사전에 만나고 싶었어."
거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
"솔직히 말해서 리델의 대답에 깜작 놀랐지."
앨리슨은 천천히 소파에 가 앉았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리델 씨는 내가 그 관리인이라고 했겠죠?"
앨리슨은 어깨를 움츠렸다.
"상관없어요. 나를 해고시키고 다른 사람을 고용한다 해도 당신을 법정에 고발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브리스토 씨."
"그건 너무 딱딱한 얘기야."
브리스토가 갑자기 내뱉었다.
"내 이름은 닉 이야. 그렇게 불러줘."
"당신 친구들 사이에서 부르는 이름이겠지요? 그러나 그 배타적인 작은 그룹 속에 나를 끌어넣으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내가 딱딱하다는 말을 들어도 좋으니까요."
"좋을 대로."
브리스토가 냉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가씨에게 하려던 내 제안을 점점 하기 어렵겠는걸."
앨리슨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에게 그 관리인 자리를 제의하시는 건 아니겠죠?"
"실은 바로 그것이오. 거절하기 전에 계약조건을 일단 들어보시오."
"조건 여하에 따라서는 내가 당신의 고용인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뻔뻔하시군요."
"내 말을 들어봐요. 내 제의에 응하기만 하면 당신 한 테는 여러 가지로 이로울 거야. 이 집도 그리고 어머니를 위한 아파트도...무엇이든 갖고 싶은 것을 모두 가질 수 있어."
브리스토는 잠시 망설이다가 분명한 말투로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리델에게서 들은 말인데 멜라니의 학비가 문제라며? 그것도 내가 맡겠어. 또 원하는 어느 대학에도 보내 주겠어."
앨리슨은 일어서서 비꼬는 투로 말했다.
"나라면 스카치를 더 이상 마시지 않겠네요. 틀림없이 어딘가가 편찮으신가 봐요."
브리스토는 차갑게 짧은 웃음을 웃었다.
"말하자면 내가 취했거나 미쳤다는 얘긴가? 그렇지 않아. 신중히 생각한 연후에 하는 말이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여러 문제의 이상적 해결 방법일 것으로 생각해."
"신용할 만한 관리인 소개소를 찾아보는 것이 훨씬 좋은 해결 방법일 것 같아요. 잘 알아보면 값싸게 사람도 구할 수 있을 텐데요."
앨리슨이 문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브리스토가 다가와서 팔을 잡았다.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소. 자 앉지, 앨리슨."
"시간 낭비일 뿐 이에요. 당신에게 고용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앨리슨은 적의와 도전의 눈초리로 브리스토를 노려보았다.
"고용인이 되어 달라는 것이 아니야. 사실은 아내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소."
한참 동안 두 사람 사이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앨리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머리가...어떻게 된 게 아닌가요?"
"천만에, 진정으로 하는 말이야."
브리스토는 앨리슨을 소파에 앉혔다.
"2분 동안이면 돼. 내 말을 좀 들어 봐.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집을 온전하게 그리고 능률적으로 관리해 달라는 거요. 이곳에 올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왔었어. 그러나 그것 뿐만이 아니라 여주인도 필요하거든...사람을 응대하는 데 익숙한 여인...즉 아내가 있어야겠다는 말이오."
"당신과 동반하고 싶어하는 여인은 거추장스러울 만큼 많을 텐데 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거죠?"
"로맨스라든가 정열이라든가 그 따위 흔해빠진 것을 찾는다면 많지. 그 점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겠지?"
조롱하는 말투가 역력했다.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아. 감정적인 교제 없이, 결혼의 실제적인 이익만을 요구하는 거요. 당신이 결혼에 동의해 준다면 그러한 계약조건이 될 거요."
앨리슨이 살며시 한숨을 내쉬자 브리스토는 양미간을 찡그렸다.
"혹 내가 당신에게 사랑의 정열이라도 올리는 것으로 생각했었나?"
"아뇨."
"그렇다면 적어도 한가지 점은 이해를 받아낸 셈이 군."
브리스토가 비웃듯이 말했다.
"생각해 보자고, 앨리슨. 가족들을 위한 쾌적한 분위기와 안전의 보장과 이 집, 그것과 맞바꿔서 계속 이 집을 관리해 주고 사람들 앞에서는 충실한 내 아내의 역할을 연출해 줄 것을..."
"아무리 완벽한 조건을 내세운다고 해도 당신과의 결혼의 보상으로는 부족해요."
"하지만 아까부터 분명히 해둔 것처럼, 이것은 진짜 결혼은 아니니까."
브리스토가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어요."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앨리슨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나 그처럼 냉혹한 협정에 진실로 당신은 한평생 만족할 수 있겠어요?"
"부모님께서 맛보았던 것 같은 진짜 행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단 한 순간이라도 한다면, 그 해답은 아마 노 일거야."
브리스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을 거야. 영원한 정열이란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는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으니까...적어도 여성의 경우에는 말야."
"남성은 다른가요?"
앨리슨은 덧붙였다.
"당신이 운이 나빴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그럴지도 모르지. 나로서는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내 친구들 중에도 결혼에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쳤는데도 그의 정숙한 아내가 이미 대타자를 물색하면서 부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데 그것조차 모르고 있던 녀석이 있었거든."
브리스토는 입술을 약간 찡그렸다.
"나는 그런 일이라면 아주 질색이야.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그런 일 없이 협정을 맺고 지켜나갈 수 있지 않겠어?"
그는 여기서 입을 다물더니 앨리슨을 뚫어지라고 바라보았다.
"또 한 가지, 만약을 위해서 말해두겠는데, 내가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 아버지 회사를 그대로 인수하겠다며 흥미를 보이고 있어. 그렇게 되면 회사를 채권자에게 넘기지 않아도 되지 않겠어?"
"그렇게 되도록 영향력을 구사해 준다면 참 좋겠네요. 나는 앞으로 그런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마음 편할 날이 없을 테니까요."
약간 거무튀튀한 그의 얼굴에 초조한 빛이 떠올랐다.
"어떤 보증을 하면 좋겠어? 계약서가 좋겠다 면 만들어 주지. 당신 생각대로 효과적인 예방조치를 나에게 요구해. 서로가 상대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상호 보증이라든가...뭐든지 좋아."
"다시 말하면 당신이 어디에 가든, 그리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 간에 상관하지 말라는 거군 요?"
"협정범위 밖의 일이라면 상관없는 일이지 않겠어?"
브리스토는 또 비웃음이 담긴 대답을 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당신 쪽에서 열을 올린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천만에요."
"그럴 테지. 그렇다면 이 순수한 사무적 협정에 감정적으로 나올리는 없겠군."
일종의 냉혹한 진실이 그곳에 있음을 앨리슨으로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일이 있는데요..."
잠시 망설이던 앨리슨은 말했다.
"결혼하기로 한 여자가 있는 걸로 들었는데요? 그 사람과는..."
"그 여자의 남편과 이혼이 성립된다면 어떻게 할 거냐...이 말이로군?"
앨리슨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브리스토는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 그녀 역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해명을 해주었지. 그녀는 지금의 남편과 같이 사는 편이 훨씬 나을 거야. 재미는 없는 사나이긴 하지만 어쨌든 준 남작의 작위를 계승할 사람이거든."
앨리슨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은 좀 냉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럴지도 모르지. 내각 선수를 쳐서 결혼생활을 깨놓았다고 한다면...그러나 가십난의 기자들에게 수다를 떨고 손을 쓰고 하면서 내 이름을 들먹인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굳게 다문 입술이 무자비하게 무서워진다. 앨리슨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나는 몬클레이 부부의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 생각은 없어. 내가 어서 대신 신붓감을 찾아내면 그 이상의 억측을 없앨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 일거양득이라는 거지."
앨리슨은 바싹 마른 입술에 혀끝으로 침을 발랐다.
"그럼 약혼만 해두면...일시적으로...그렇게 하면 다분히..."
"그렇지가 않아. 내 조건은 이미 말했을 텐데. 진짜 약혼을 한 다음에 각본에 따른 결혼식을 하는 거야. 다만 지금은 아버지 상중이니까, 친척끼리 모여서 조용한 결혼식을 하면 돼. 그러면 세상 사람들도 이해해 줄 거라고."
얘기가 너무 바르게 진척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앨리슨은 한쪽 손을 번쩍 들었다.
"지금...지금 바로 대답할 순 없어요. 좀 더 생각해 본 다음에..."
"그건 상관없는데 늦어도 주말까지는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어."
브리스토는 명함을 꺼내어 앨리슨에게 건네주었다.
"사무실과 집 전화번호야.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어."
앨리슨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는지 알 수가 없었다. 브리스토가 문으로 향했을 때에야 겨우.
"안녕히 가세요."
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만나자는 말을 왜 하지 않지?"
목소리에 희미하게나마 웃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또 올 생각인데..."
그것이 약소인지 협박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이에 멀 리서 현관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지루하고 괴로운 밤이 지났다. 앨리슨은 저녁식사에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생각이 나질 않을 정도로,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오직 니콜라스 브리스토가 던진 놀라운 믿어지지 않는 제안뿐이다. 앨리슨은 문득 악몽을 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브리스토의 전화번호가 인쇄된 딱딱한 명함은 악몽의 한 부분일 수가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앨리슨은 브리스토가 말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냉정하게 그 제안을 생각해 보려 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브리스토가 약속한 대로 이쪽에서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이 집이기는 하지만 앞길은 험난할 것이고 거기에는 빠지지 말아야 할 함정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가엾은 어머니와 멜라니에게 안전을 확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치기란 더욱 어렵다. 앨리슨은 난롯불을 멍청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팔아야 하는가...? 레이디미드를 떠나야 하는가...? 손에 들어오기 직전의 행운을 과연 떨쳐 버려야 옳은가...?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은 니콜라스의 비인간적인 의사표시 방법이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던 그 차가운 파란 눈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그를 좋아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브리스토가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인정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따분한 성격의 순종 파, 가정적이며 남에게 모멸 당해도 아무 소리 하지 않는 인간,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고, 온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결혼이더라도 찾아온 기회를 놓칠세라 필사적으로 붙잡으려고 하는 올드미스...거절한다면 그는 어떤 쇼크를 받을까?
"찾으시는데요."
호너 부인인 문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부인께서 깨셔서 아가씨를 찾으십니다."
모티머 부인은 표정을 흐린 채 베개에 기대고 있었다. 앨리슨이 들어오자마자 묻는다.
"그 사람이 왔었지? 무슨 용건이었어?"
"잠시 할 얘기가 있어서요."
앨리슨은 침대 끝에 걸터앉으면서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오늘 밤에는 컨디션이 좀 어때요? 아까 와봤더니 주무시던데..."
부인은 그 말엔 대답을 하지 않고 안달이 나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무슨 얘기야? 우리들에게 이 집에서 나가 달라던?"
앨리슨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좋아, 이 집을 나가기 전에 죽어 줄 테니까. 이곳은 내 집이야. 그런 식으로 내쫓으려고 하다니..."
부인은 몸을 뒤척이며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엄마, 그러지 말아요. 그 사람은 그런 일로 온 게 아니 예요. 실은..."
"뭐냐? 그렇다면 왜 왔대?"
부인의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듯 앨리슨의 손가락을 꼭 쥔다.
"어떻게 한다 던? 결국 자기가 여기서 살겠다고 마음을 굳혔다던?"
"아뇨."
앨리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어...그렇지가 않아요. 이 집에서...함께 살자는 거였어요. 몇 가지 조건하에요."
"함께? 이 레이디미드에서? 우리 집에서?"
앨리슨은 엄마의 허황된 생각에 이젠 진절머리가 났다.
"이제 우리 집이 아니잖아요. 이 집은 기둥 한 개까지도 니콜라스 브리스토의 거에요. 그건 엄연한 사실인데 사실대로 받아들이셔 야죠. 그러니까 여기를 떠나서 첫걸음부터 다시 내딛는 편이 좋다니까요."
"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어머니는 귀에 거슬릴 만큼 비난조로 말했다.
"이곳은 네가 태어난 집이다. 정말로 냉정한 아이로구나. 나는 이따금 네가 내 자식인지 의심될 때가 있어."
"이제 그 말은 귀에 못이 박혔어요."
앨리슨은 일어섰다.
"그만하고 쉬세요. 내일 얘기할게요."
부인의 손가락이 앨리슨의 손목을 꼭 잡는다.
"안돼, 브리스토가 내놓았다는 조건을 말해 봐. 정말로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도 되는 거냐? 조건이란 대체 뭐야?"
"나보고 그 사람 밑에서 일을 해달라는 거예요...어떤 자격을 가지고."
앨리슨은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일을 해달라고? 그 정도의 사람이라면 필요한 사람 모두를 거느리고 있을 텐데...더구나 너는 아무 자격증도 없고 훈련도 받지 않았잖니?"
"정식 훈련 같은 것은 그 일에 필요치 않아요. 레이디미드를 관리할 사람을 구하고 있어요."
"뭐라고? 요리사도 호너 부인도...모두 그대로 고용하겠다고...저 에릭 리델이 얘기하던 데...아니면 그 사람들마저 쫓아낼 생각인가?"
"그렇지 않아요. 고용인들은 지금 그대로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앨리슨은 어깨를 한번 으쓱한 다음 가급적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말하려고 애썼다.
"이 집일은 졸업한 뒤로는 엄마 대신 제가 해왔잖아요. 그 말을 리델 씨에게서 듣고는, 그 일을 그대로 내가 계속 해달라는 거였어요."
"그럼 너더러 집안일을 봐달라고 했단 말이니?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는 우리 보고 이곳에 눌러 살라는 거냐?"
"네."
앨리슨은 카펫을 내려다보았다.
"어이없는 일이죠?"
"어이없는 일이라니?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원하는 바는 이루어지는데..."
흥분한 얼굴이 상기되고, 몇 주간 보지 못했던 생기가 감돈다. 앨리슨은 따가운 통증을 느꼈다.
"그래 뭐라고 대답했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겠지?"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저어 엄마...조건은 그것뿐이 아니었거든요."
앨리슨은 망설이다가 큰 마음먹고 솔직히 털어 놓았다.
"결혼을 하자는 거예요."
"너하고?"
부인은 정말로 놀란 듯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니콜라스 브리스토가 너에게?"
부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농담일 테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어."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앨리슨은 동의하며 어머니의 순간적 판단이 그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티머 부인은 니콜라스 브리스토 같이 매력적인 남성이 자기 딸에게 마음이 끌렸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말까지 대답을 기다리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진심인가 봐요."
"놀라운 일이야."
부인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윽고 캐묻듯이 물었다.
"그래 뭐라고 대답할 작정이냐?"
"물론 거절할거예요. 엄마라면 제가 이런 어이없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어요?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 예요. 그저 편의상의 결혼인데...어떻게..."
"얘, 상대는 니콜라스 브리스토 야! 넌 돈 게 아니니?"
부인은 딸의 손을 잡았다.
"집을 도로 돌려받는 거야. 아빠가 남긴 집을...그걸 생각해야지. 그리고 멜라니 문제도 있잖니?"
"알고 있어요. 멜라니의 대한 문제도 포함되어 있어요. 조건은 모두가 돈으로 도금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고 우리 가족의 마음을 끌도록 되어 있어요. 아주 훌륭한 조건을 제시했어요. 그가 런던에서 성공한 것도 모두 이런 식이었을 게 틀림없어요."
"도대체 거절하는 이유가 뭐냐?"
앨리슨은 턱을 내밀며 말했다.
"아빠는 브리스토에게 몸을 파신 거예요. 엄마는 나보고도 똑같은 짓을 하라는 건가요?"
"하지만 그 사람은 이렇게라도 해서 보상을 하려는 것인지도 모르잖니? 내 부탁하겠으니 잘 생각해 보렴."
앨리슨은 그런 어머니 말이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듯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정말이세요?"
"물론이지."
부인은 주먹으로 시트를 두드렸다.
"제발 분별력을 가져라 얘야. 잃었던 것들을 모두 찾게 되는 좋은 기회야. 더구나 여자라면 앞 다투어 쟁탈전을 벌일 정도의 신랑감도 구하게 되는 판인데..."
"그 점이 곤란한 점 이에요. 제게는 그저 수수한 남성이 어울려요."
"바보 같은 말만 하는구나."
부인은 딸의 손을 놓고 또 다시 베개에 기댔다.
"앨리슨, 우리들에게 그런 처세는 맞지 않는다! 굴러 들어온 복을 뿌리치고 무일푼이 되기를 원하다니 그건 대체 무슨 고집이냐? 잘만하면 정반대의 생활을 하게 될 텐데...그것도 쓸데없는 일에 구애를 받다니...이처럼 중대한 상황에서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훌륭하게 처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어떻든 타협 정도는 해줘야지."
"어떻든 이라뇨?"
울어야 될지 웃어야 될 지 알 수가 없다.
"타협을 위해서 몸을 팔란 말인가요? 자신의 인생을...캐리어 우먼이 될지도 모르는데 포기하란 말인가요?"
"캐리어 우먼!"
부인은 콧방귀를 뀔 뿐이다.
"그 부동산회사의 싸구려 급료를 받고 일하는 것이 캐리어 우먼 이냐? 그리고 레이디미드를 잃게 된 너에게 사이몬 드웨이트가 관심을 가질 것 같으냐? 그까짓 것은 단념해라. 드웨이트 집안은 옛날부터 부잣집하고만 혼인을 해왔어."
"어머니의 솔직한 의견에 감사해요. 하지만 드웨이트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로군요."
"드웨이트를 사랑하고 있다면 나도 무리한 말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사정이 사정이니 만큼 잘 생각해봐라."
부인은 가장자리에 레이스가 달린 손수건을 꺼내 입에 댔다.
"앨리슨, 아빠와 나처럼 열렬한 연애를 하는 사람은 흔치 않은 법이란다. 아주 하찮은 동기가 인연이 돼서, 잘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법이고..."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곳에다가 어떻게 사랑을 구축해 나간단 말이 예요?"
앨리슨은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아빠는 투기를 좋아했다고 휴 큰아버지께서 말씀하셨는데, 뜻밖에도 나 역시 아빠를 닮았나 봐요."
앨리슨은 허리를 굽혀 어머니의 머리에 키스를 했다.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지 마세요. 레이디미드는 우리들의 것이 될 거예요. 지금 곧 브리스토 씨에게 전화를 걸 게요. 용기가 식어버리면 안될 테니까요."
앨리슨은 침을 꼴깍 삼키고, 아플 정도로 타버린 입술을 혀로 적셨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어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묘하게도 타이밍이 맞아 떨어져서, 주인이 집에 없어 자동응답전화기가 전화를 받았다. 녹음을 해두기 위해 앨리슨은 어름어름 말했다.
"브리스토 씨, 앨리슨 모티머 예요. 당신의 제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답은...예, 그럼 안녕."
앨리슨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마치 마라톤 레이스에 참가한 사람처럼 숨이 가쁘다. 앨리슨은 소리 내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어...이제는 번복할 수 없게 되었어...이젠 오로지 최선을 다할 뿐이야. 힘내. 앨리슨!"
단편만이 기억나는 어지러운 꿈을 꾸다가 한밤중에 잠을 깼다. 몸이 뜨겁고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욕실로 가서 컵에 물을 따라 가지고 왔다. 침대에 앉아 물을 조금씩 마셔 가며,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브리스토는 내가 전한 말은 응답기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을까? 저도 모르게 앨리슨은 입술을 깨물었다. 브리스토가 이 집에서 밤을 보내리라는 생각이 불현듯 났던 것이다. 아마도 여자 친구와 어울릴 테지. 헤스터 몬클레이 든 가 아니면 다른 여자 친구와...앨리슨은 불쾌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녀는 자신을 꾸짖었다. 브리스토의 여성관계를 억측해야 할 이유가 없진 않은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브리스토는 그 점을 분명히 밝혀 두었다. 그는 그의 생활을 하는 것이고 앨리슨은 앨리슨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또 두 사람의 생활이 얽히는 경우에는 서로의 입장에 지장이 없도록 하자는 말도 했었다. 결국 그것이 가족의 안전과 레이디미드를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의 일부인 것이다. 앨리슨은 깊은 숨을 내쉬고 나서 물컵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잠을 청해 보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니콜라스 브리스토의 모습이 어둠 속이건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 무슨...어리석은 짓이람!"
앨리슨은 화가 나서 뒤척이다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피로와 불안으로 머리가 혼란해졌다. 심신이 이렇게 고단한 탓에 갑자기 소녀처럼 그런 환상을 보는 것이리라. 차디찬 웃음 때문에 잔혹하게까지 보이는 그의 입술이 키스를 해온다면...앨리슨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죄없는 베개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 비열한 사나이 때문에 신경이 팽창할 대로 팽창해 있지만, 불과 몇 시간 전에 스스로 승낙한 일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저러나 브리스토의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것도 하필 그의 몸에 닿는 상상만을 하게 되는 것일까? 나답지 못하게...사이몬이 키스해 준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나깨나 그 일을 생각한다거나 꿈속에 보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 기묘한 결혼이 기정 사실화되면 사정이 어떻게 달라질까? 앨리슨의 역할은 레이디미드를 예나 다름없이 관리하는 일꾼으로 일할 것이고, 니콜라스 브리스토는 앨리슨의 생활을 침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두 사람 다의 바람이며,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과연 그럴까? 다음날 아침 앨리슨은 늦잠을 잤다. 시계를 보아 가며 바쁘게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앨리슨은 백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엄마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누가 찾아왔든 간에 호너 부인은 적당히 대답해서 보낼 것임에 틀림없다. 식당 문까지 왔을 때 느닷없이 문이 열렸다. 앨리슨은 깜짝 놀라서 바싹 긴장한 채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니콜라스 브리스토였다. 지금까지는 정장을 한 브리스토 만을 보아 왔지만, 오늘 아침 그는 꼭 끼는 검정 데님 바지에 역시 검정 색 캐시미어 스웨터를 캐주얼하게 입고 스웨이드 재킷을 어깨에 걸쳤다. 그는 당돌하게 말을 꺼냈다.
"당신이 녹음한 말은 들었어. 최종적으로 할 얘기가 있는데...그 얘기를 해두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요? 그렇지만 오늘은 다른 예정도 있고 하니..."
앨리슨은 상대방에게 증오심을 느끼며 노려보았다. 심장의 고동이 쉽사리 진정될 것 같지가 않다. 어째서 마치 악마처럼 불쑥 나타나야 한담?
"그렇다면 그건 취소해요. 직장에 나가는 길이라면 하루 쉬겠다면 되지 않겠어? 아프다고 말이야. 우리의 약혼을 당분간 비밀로 해두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앨리슨은 이를 악물었다.
"직장에 나가는 길이에요. 오늘 아침에는 특별히 더 바쁜 일이 있어서..."
"나도 오늘의 예정을 바꿨어. 어머니를 만나러 가야겠거든. 이 멋진 뉴스를 알려 드려야 하니까 말야."
앨리슨은 어이가 없어서 그저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멋진 뉴스? 진짜 약혼이나 하는 것처럼 말하는 군 요?"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도록 해야지. 당신 어머니에게는 진상을 밝혀 드려야겠지만 말야. 한 지붕 밑에서 살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일반적인 보통 부부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결국은 알게 되실 테니까. 그러나 우리 어머니에게는 적당히 숨겨서, 그분의 환상을 그대로 간직해 드리고 싶어. 우리 어머니는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진 점에 만족하고 이것저것 캐묻지는 않을 것이고 무조건 앨리슨을 환영하실 거야."
앨리슨은 입을 비죽거렸다.
"글쎄요, 신붓감으로 당신이 나 같은 여자를 데리고 오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으시겠지요?"
"이 판 사판 이니까 한번 시도해 보는 거야."
니콜라스는 간단하게 말했다.
"자아,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요. 그리고 출발하는 거야."
앨리슨은 사이몬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버지의 토지정리 일 관계로 회사를 쉬겠다고 해두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검은색 포르셰가 현관 앞에 서있었다. 앨리슨은 미간을 찡그렸다.
"오늘은 운전사가 없는 것 같군요?"
"둘이서만 있고 싶어서."
브리스토는 앨리슨을 위해 차문을 열어 주었다.
"당신은 내가 다정하다는 것을 믿게 될 거야."
잘도 그렇겠군! 앨리슨은 안전벨트를 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말이 없는 편이 군?"
잠자코 몇 ㎞를 달린 다음 니콜라스가 말했다.
"그렇지 만도 않지만...그러나 오늘은 나하고 함께 즐길 생각은 아니 시겠죠?"
앨리슨은 차갑게 대답했다.
"맞았어."
브리스토의 입가가 약간 일그러졌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다 시 피 아내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계약조건의 하나란 말야. 행복한 약혼자 역을 리얼하게 해야 하는 거야. 굳어진 얼굴이라든가 퉁명스러운 대답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렇게 되면 아무도 우리가 사랑에 빠진 애인 사이론 보지 않을 테니까."
"그런 인상까지 주어야 된다는 것은 미처 몰랐어요. 그런 일이라면 좀 더 연기력이 좋은 사람을 고용하시지 그랬어요?"
"그것보다도 당신이 조금만 더 노력해 주면 돼. 부탁이야, 앨리슨. 나도 좋아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아냐."
앨리슨의 얼굴이 빨갛게 홍조를 띠었다.
"미안해요. 내 역할이 관리인의 일만이라면 좀 더 간단하고 좋을 텐데."
"당신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지."
브리스토는 조소하듯 말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관리인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는 거야. 분명히 말해 두었을 텐데...그것을 승낙하고 엊저녁에 전화를 해놓고서 왜 지금은 딴 말을 하는 거지?"
"한낮의 햇볕이 내려 쪼이기 때문인가 보죠. 내각 무슨 일을 시작하려는 것인지 잘 모르다가 이제서야 조금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신이 그런 태도로 나오니 순순히 내 운명에 타협할 수도 없을 것 같군요."
"미안해."
닉은 앨리슨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노골적인 데몬스트레이션이 나올 줄 알았어. 진짜로 사랑 받고 싶은 거지?"
"천만에요. 비록 당신이 이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남성이라 하더라도 사양할 거예요. 그런 의미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나에게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지만 당신도 상냥한 편이라고는 생각 지 마세요."
니콜라스는 백미러를 기웃거리다가 갑자기 핸들을 꺾어서 차를 길가에 세웠다.
"또 사과해야겠네. 이번에는 진짜야."
브리스토는 조용히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예상한 것 이상의 양보가 필요할 것 같아. 그야 어쨌든 우리의 관계가 처음 생각했던 것 같은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잘 안될 리는 없을 거야."
앨리슨은 자신의 무릎 위에서 자기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글쎄요? 신중히 생각해 보고 나서 하는 말인가요? 갖가지 요인까지도요? 예를 들면 아기 문제라든가?"
브리스토는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어. 그래서 그런지 아기를 갖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미간을 더욱 찡그린 브리스토는 앨리슨을 바라보았다.
"그 문제를 앨리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야. 일이 잘 되면 2, 3년 후에 양자를 맞아들이는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럴 수도 있겠죠."
앨리슨은 그렇게 대답했으나 자꾸만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것을 억제하면서 앨리슨은 일부러 쌀쌀 맞게 말했다.
"또 한 가지 분명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어요. 결혼 후의 사생활에 대한 건데, 당신이 어떤 생활을 할 것인지는 말해서 알고 있지만, 나 역시 똑같은 행동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시겠지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는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텐데요. 그러면 내가 수녀 같은 생활을 하리라 생각하셨나 요?"
"아냐, 물론 아니라고. 다만, 설마..."
"설마 나 같은 여자가 멋들어진 연애를 할 것으론 생각하지 않았단 말인가요?"
"남의 말을 그렇게 가로채는 게 아냐."
니콜라스는 귀에 거슬린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이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야. 그 점에 대해서는 아준 순진할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었으니까..."
"지난 일이 아니라 앞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요. 경험 부족이라는 것은 그런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경험을 원한다면 내가 기꺼이 상대해 주지."
찰칵! 시트 벨트가 풀어지는 소리가 났다. 니콜라스가 난폭하게 갑자기 껴안았기 때문에 그녀의 항의와 분노가 섞인 절규는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막히고 말았다. 닉의 거무스름한 얼굴이 눈앞에서 헤엄치듯 한다. 앨리슨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아 버렸고, 그것이 도리어 그의 첫 키스를 허용하는 결과가 되었다. 니콜라스는 앨리슨의 목덜미에 팔을 감아 그녀의 반항을 막고 강제로 키스해 왔다. 앨리슨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였지만, 입술을 꼭 다물고 니콜라스의 침입을 막으며 무언의 싸움을 했다. 잠시 후, 그가 팔을 풀자 앨리슨은 몇 번이고 숨을 가다듬으며 자기의 시트에서 몸을 움츠렸다. 그의 몸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사이에 블라우스 단추가 두 개나 빠져 있었다. 그 경황에도 니콜라스의 상기된 감정이 진정되기 전에 단추를 다시 끼는 것은 오히려 그를 자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도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입술 연지도 모두 지워졌으리라.
"실망했나, 앨리슨? 섹스의 전초전이라는 얘기를 못 들어 봤어?"
"이게 그것인가요?"
앨리슨의 목소리만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이 전에도 키스는 해봤어요. 그렇지만 아주 부드럽게 요."
"그렇다면 당신도 부드럽게 응했겠군. 세상 사에 통달한 여성이 되려면 당신은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은 것 같아."
"그럴 테지요. 그러나 운이 좋으면 좀 더 마음씨 착한 선생님을 만나게 될 테죠."
"글세, 그렇게 될까? 그러나저러나 미리 말해 두겠는데 결혼한 다음에는 결혼한 여자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해."
"소위 이중생활이라는 거죠?"
"그건 좋을 대로 불러도 돼. 즐기는 것은 앨리슨의 자유지만, 내 눈앞에서는 안돼. 그건 용서 못해!"
니콜라스는 무슨 대답이 나오지나 않을까 기다리며 입을 다물고 있었고 뜻밖에 앨리슨이 잠자코 있자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드라이브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앨리슨은 가까스로 평소의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키스가 아니라며 앨리슨은 분개했다. 니콜라스의 어머니는 검은 머리에 흰 머리가 나기 시작한, 늘씬한 여성으로 맑고 파란 눈은 아들과 꼭 같았고, 다만 닮은 곳은 눈뿐이었다. 그녀의 눈은 기쁨으로 빛나고 두 사람을 맞이하는 미소는 더없이 부드러웠다.
"오, 멋지구나!"
부인은 앨리슨을 아플 정도로 포옹했다.
"새벽녘에 닉으로부터 놀라게 해줄 일이 생겼다는 전화가 있었지. 무슨 영문인지 몰랐는데, 나쁜 것들 같으니라고! 힌트라도 좀 줄 일이지. 건배할 샴페인도 준비하지 못했잖아."
"좋아하시다가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랬죠. 내가 거절 당하면 말입니다."
그는 조롱하는 듯한 시선을 앨리슨에게 던졌다. 그리고 앨리슨이 얼굴을 붉히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보셨죠? 앨리슨은 저렇게 금방 빨개진다니까요. 이렇게 순진한 여자가 있다는 것을 난 까맣게 몰랐어요."
"네가 사귀던 여자들이 다 시원찮아서 그렇지."
부인은 부드럽게, 그러나 위엄을 갖추면서 미소를 띄웠다.
"뒤늦게나마 분별력이 생긴 모양이로구나. 이제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아 참!"
브리스토가 어머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시시한 옛날 얘기를 또 꺼내시려면, 그 대신 셰리주나 주세요."
"앨리슨은 너에게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다. 여성이란 대개가 그런 법이거든. 그리고 마음을 잡은 방탕자에 대한 얘기를 좀 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고. 돌아가신 네 아버지가 좋은 예이지."
부인의 미소가 사라졌는가 했더니 금방 또 밝은 웃음을 띄웠다.
"자아...샴페인 대신 셰리 주를 마시자꾸나."
옛날 닉의 유모였다고 하는 뚱뚱한 노부인이 준비한 점심식사는 맛이 있었다. 약혼이 사실이라면 정말 행복스러운 가족들의 축하 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앨리슨은 벼랑에 선 것처럼 줄곧 불안하기만 했다. 브리스토 부인이 차라리 신붓감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다는 점을 자신에게 지적해 주었더라면 오히려 즐거웠을 것을...이처럼 크게 환영해 주니 오히려 앉아 있기가 거북스러웠다. 점심식사가 끝난 다음 부인이 뜰을 산책하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앨리슨은 즉석에서 동의했다. 화제를 꽃밭으로 옮기는 편이 개인적인 질문을 받는 것보다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마 그가 따라올 줄은...더구나 팔을 돌려서 허리를 감아 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것은 둘이서 연출해야 하는 제스처라는 것을 앨리슨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체온이 옮겨오자 자기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잠시 후 닉이 시계를 보았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어요. 며칠 안으로 또 앨리슨을 데리고 올 테니 결혼식 준비를 해주세요. 시일도 촉박하니 친척들만 모여서 식을 올리고 싶습니다."
"왜? 여유 있게 날을 잡아 성대하게 식을 올리지 않고?"
그는 고개를 크게 가로 저었다.
"요즈음 앨리슨에게는 여러 가지 안 좋은 일이 있어서요. 가급적 빨리 돌봐주고 싶습니다."
"물론 그야 그렇겠지."
부인은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차를 마시고 갈 시간은 있겠지? 준비를 시키겠다."
부인은 종종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는데 앨리슨은 그것을 깰 필요가 있었다.
"참으로 멋진 정원 이에요. 어머님 혼자서 관리하시는 건 아니겠죠?"
"남의 손을 빌지 않으려고 애쓰시지. 전속 정원사는 고용하고 있지만."
앨리슨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자 닉이 설명했다.
"심장이 썩 좋지가 않으셔. 나 하나를 낳기에도 위험했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형제도 없어."
"안됐군요."
"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없어. 이젠 혼자 살아가는 데도 익숙해지셨고, 그럭저럭 충실한 생활을 하고 계시니까."
앨리슨은 자기 어머니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얘기를 하기에는 아직 이를지 몰라...닉의 어머니는 기운을 되찾고 생활을 다시 컨트롤해 나갈 시간이 있었을 테니까. 무엇보다도 두 여성은 전연 다른 타입이야...앨리슨의 공상을 닉의 목소리가 깼다.
"거실에서 내다보고 계시는군.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해줘."
앨리슨이 쭈뼛쭈뼛 망설였으나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앨리슨을 포옹했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말아야 해."
닉이 속삭였다. 위로 치켜 올린 얼굴에 햇볕이 따갑게 내려 쪼이고, 가까운 곳에서는 새들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앨리슨은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고, 아예 움직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주 부드러운 키스를 했고 입술을 살짝 스쳐갈 정도였다. 스스로도 놀랍게 앨리슨은 갑자기 욕구불만 같은 것을 느꼈다. 닉에게 좀 더 바싹 몸을 기대고, 얼굴도 맞대고 깊은 키스를 받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처럼 형식적인 포옹이 아니라 욕망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키스를...앨리슨은 주먹을 꼭 쥐면서 참았다. 갑자기 앨리슨의 몸이 굳어졌다. 그것을 알아차린 듯 그가 얼굴을 들었다.
"침착하라고."
신랄한 말투였다.
"시련은 일단 끝났어."
다음 기회가 있을 때까지...나란히 걸어가면서 앨리슨은 생각했다. 놀란 새가 깃털을 파딱이듯이 심장이 고동친다. 다음 기회가 있을 때까지...앨리슨이 생각하기에는 아주 심플한 드레스였다. 회색도 아니고 라벤더 색도 아닌 중간색의 크레이프로 만든 것으로 디자인이 우아하고, 손목에 꼭 끼는 소매라든가 희고 넓은 깃 등 세세한 점에도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웨딩드레스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앨리슨도 신부 기분이 나지 않았다. 앨리슨은 귀밑머리를 쓸어 올렸고, 멜라니는 그 머리를 보기 좋게 매만져 주었다. 부풀린 부드러운 갈색 머리는 우아한 나비 리본으로 매고, 작은 꽃 가지를 꽂아 주었다. 드레스와 함께 보내온 그 꽃가지를 앨리슨은 어디에 사용하는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멜라니는 알고 있었다. 멜라니가 여동생이 아니라 언니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입장이 반대였다면 멜라니는 모든 일에 정열적으로 대처했을 텐데...더구나 닉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도 결합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단지 장래의 형부로 보고, 적절하게 행동을 자제하면서 대처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물론 닉 역시 그러했다. 멜라니와 함께 있을 때의 닉은 앨리슨이 지금까지 본 일조차 없을 만큼 인간적인 사람이 된다. 놀리기도 하고 상냥하게 대해 주면서도 응석을 부리는 듯한...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 두 사람 사이의 계약은 이루어졌다. 어이없어 하는 에릭 리델의 입회 아래 법적 서명도 끝이 났다. 그리고 닉은 약혼녀에게 선심도 썼다. 자유로이 쓰라고 준 큰 액수의 돈을 보고 앨리슨은 정신이 아찔했다. 그뿐이 아니라 은행에 구좌를 터주고, 생활비에 충당하라는 거였다. 자질구레한 집안일들은 모두 앨리슨에게 맡기고는 단지 닉이 몰두하는 일은 집을 개축하는 일뿐이었다. 앨리슨은 매일 밤 여러 개의 서류철에 끼어 있는 투시도와 설계도, 그리고 벽지와 직물 등의 견본을 검토해야 했다. 자기네들 소유였던 집을 그가 완전히 개조하려 드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화도 났었다. 그러나 몇 해씩 방치해 두었던 집이니 수리하고 개조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자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쉽게 납득하시질 않았고, 닉과 몇 차례 충돌할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적절한 방법을 강구해냈다. 장미꽃밭이 내려다보이는 방, 그렇지만 거의 사용치 않았던 응접실을 어머니의 독립된 플랫으로 개조하되 그 방의 설계와 내장은 모두 어머니에게 일임하기로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 일로 금방 화가 풀어졌고 생기가 돌았다. 자신의 방을 호화롭게 꾸미는 일에 신명이 나서 열중했다. 앨리슨은 닉의 의견이나 취향에 반대할 일이 거의 없었고,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엔 전혀 갈등이 없었다. 그런데 단 한번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은 일이 생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앨리슨은 자신의 침실 옆에 또 다른 침실을 만드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바로 옆방에 닉의 침실을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앨리슨은 반사적으로 대들었다. 그는 앨리슨을 보고 냉소하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당신은 나를 이 집의 구석진 곳이나 별채로 쫓아내고 싶겠지만 그럴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이 이웃 방에서 지내야만 돼. 몇 번씩이나 말했잖아. 제삼자에게는 보통 사람들의 결혼인 양 보여야 한다고."
앨리슨은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말로 응수했다.
"하지만 두 방 사이에는 문이 나 있어서..."
그러나 닉은 경멸하듯 앨리슨을 바라보았다.
"은근한 암시를 보내는 것 같군. 그럼 그 문을 떼내고 벽돌로 막으란 말인가? 당신 방 쪽에서 문을 잠가버리면 되는데 뭘 그래."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힌 앨리슨은 입속말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요, 잠그면 돼요."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는, 모티머 부인은 앨리슨의 큰아버지 집에서 묵기로 했고, 닉과 앨리슨이 신혼여행을 떠나있는 동안에 실내장식 업자가 손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앨리슨은 닉의 어머니가 신혼여행 얘기까지 들고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막상 그의 어머니가 신혼여행 얘기를 끄집어 냈을 때, 앨리슨은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앨리슨을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냐? 신나고 근사한 곳이냐 아니면 조용한 데냐?"
브리스토 부인은 대견하다는 듯 흐뭇한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양쪽 다 갈 거예요. 그레그 파슨의 요트를 대절했어요. 그리스의 섬들을 두루 돌아 볼 생각입니다."
깜작 놀란 앨리슨은 나지막하게 절규했다. 닉이 걱정스럽다는 듯 돌아보았다.
"왜 그래? 뱃멀미라도 하나?"
놀라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그래요, 뱃멀미를 심하게 해요라고 둘러댔을 것이다. 그렇게 말했더라면 요트를 타지 않아도 될 텐데,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그런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자동차를 타고 레이디미드로 돌아오던 도중, 앨리슨은 화가 나서 닉에게 대들었다.
"신혼여행 따위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요. 연극도 좀 도가 지나친 것 같아요."
"천만에, 이건 아주 평범한 일이야. 벌써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얘기했지만 표면상으로 평범한 결혼으로 해두자고 했을 텐데...신혼여행이 끝나거든 당신의 세계를 침해하지 않도록 노력할게. 그땐 아마 존재조차 잊게 될 거야."
그 말을 믿을 수만 있다면...앨리슨은 레이디미드의 계단에 서서 그의 자동차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어수선한 약혼으로 인하여 귀찮은 일이 여러 가지 생겼지만, 그 중의 한가지는 니콜라스 브리스토의 존재가 앨리슨의 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한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앨리슨은 생각했다. 결정해야 할 일도 많았고 자질구레한 일이기는 하지만 서로 의논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법적으로 니콜라스 브리스토의 아내가 되어 버리면 사정이 정말로 변해질까? 그리고 조용히 지내던 생활이 결정적으로 뒤집어진 지금, 레이디미드에서 그를 기다리기나 하는 생활에 만족할 수 있을까? 앨리슨은 초조한 마음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제 이방에서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묘한 기분이 든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새 침실을 써야 한다. 잠을 그 큰 침대에서, 고비사막처럼 넓고 메마른 그 침대에서 자야 하는 것이다...어떻게 하다가 이런 지경에 빠져들고 만 것일까? 어디론 가 자취를 감춰 버리고 싶을 뿐이다. 자동차를 타고 큰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가는 길로 니콜라스 브리스토의 가짜 신부가 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슨 핑계든 대고 싶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났고, 큰아버지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는 다 됐니? 슬슬 출발해야겠다."
"네, 곧 갈게요."
앨리슨은 무거운 마음으로 대답하며, 기도서를 들고 문으로 향했다.
"예쁘구나, 앨리슨."
큰아버지는 앨리슨을 보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였다. 앨리슨은 큰아버지를 보고 빵끗 웃었었다. 큰아버지와 베스 큰어머니는 이번에 취한 앨리슨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처음으로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두 분은 깜짝 놀랐고, 두 번째로 들었을 때는 반대했었으나 그 후로는 단념해 버렸다. 이제 두 분은 태도를 누그러뜨려서 정식으로 결혼을 축하해 주었고, 조지 왕조양식의 멋진 데스크를 선물로 주셨다. 또 큰어머니는 따로 선물을 해주셨다. 큰어머니의 선물 상자에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앨리슨은 은백색 줄무늬 모양이 있는 상자의 끈을 풀고 안에 든 것을 확인하는 순간 울어야 좋을지 웃어야 좋을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 일이 없는 값비싼 여러 벌의 수제품 란제리였다. 아이보리, 오이스터 화이트, 그리고 커피 색깔의 레이스로 가장자리를 두른 새틴과 크레이프로 만든 것이었다. 이 선물은 큰어머니의 암시적 고백을 앨리슨에게 전해 주었다. 앨리슨이 남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이러한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큰어머니가 모르고 있는 일, 아니 알 까닭이 없는 일은, 결코 두 사람 사이에 이러한 물건이 필요할 리 만무하다는 점이다. 앨리슨은 고운 속옷들을 꺼내지도 않은 채 상자를 장롱 속에 집어 넣었다. 오르간 반주에 맞춰서 통로를 지나가며 앨리슨은 교회에 많은 손님들이 모였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사람들의 입 방아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고 결혼발표도 금방 잊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고맙게도 모티머 회사의 낯익은 얼굴도 많이 보였다. 공장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분명치가 않았으나 살릴 수 있을 것 같기는 했다. 닉의 대답으로 미루어 보아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닉의 개입이 성공을 거둘 것이리라...사이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니콜라스 브리스토와 결혼한다는 말을 전했을 대, 사이몬은 분명히 쇼크를 받은 것 같았다. 앨리슨의 심경은 복잡했다. 자신을 진심으로 원하는 남성이 있었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 사람을 따를 수 없는 처지가 슬펐다. 결혼식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어가고, 앨리슨이 얼굴을 들자 제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닉의 차가운 눈과 마주쳤다. 얼굴은 가면처럼 무표정하지만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앨리슨은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것일까? 흰 드레스와 베일을 쓰지 않아서 기분을 잡친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동의하고 있었던 일이 아닌가...그저 형식적으로 친척들만이 모여서 식을 올린 다음, 큰아버지 집에 가서 조촐한 피로연을 열기로 하자고 했던 것이다. 내가 예쁘지 않아서 그런가? 하지만 그것도 처음부터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나를 원망한다는 것은 신사답지가 않아...겉으로라도 웃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앨리슨은 손을 들어서 닉의 얼굴에 대고 그 입가에 잡힌 험상궂은 주름살을 펴주고 싶었다. 앨리슨은 언짢은 기분을 억제하면서 낯익은 목사님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위안을 찾았고, 목사님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묻는 말에 얼른얼른 대답하고, 그가 끼워 주는 반지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짧은 시간에 식은 끝났고, 어느 사이에 앨리슨은 통로를 돌아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큰아버지 대신 입을 다물고 있는 닉의 팔을 낀 채...입을 다문 채 말이 없기는 차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큰아버지 집까지 몇 마일 을 드라이브하는 동안에도 두 사람 사이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닉은 그 침묵을 깰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앨리슨은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부턴 줄곧 말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베스 큰 어머니가 뷔페 스타일로 점심식사를 준비해 둔 것은 정말로 고마웠다. 그녀는 전혀 식욕이 나지 않아서, 뷔페 식이라면 먹는 척하면서도 안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리셉션에는 나오지 않았던 부부가 한 쌍 눈에 띄었다. 닉의 사촌 주디스와 그녀의 남편 앨런이었다.
"브리스토 집안 식구가 되었네요."
주디스는 스스럼없이 말하며 악수를 청했다.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앨런이 말했다.
"그랬더라면 결혼을 못하도록 말리는 건데...당신처럼 좋은 사람은 그 엉큼한 악당에게는 어울리지 않거든요."
앨리슨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같이 웃었다. 두 사람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만 어쩐지 놀라웠다. 돈도 있고 매력도 있는 니콜라스 브리스토가 왜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써보아도 두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적당한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까지도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새 생활에 순응하고 말았다. 약혼을 하던 그날부터 닉을 그 사람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짝 맞춰 준 연애 결혼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앨리슨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는 니콜라스와의 사이에 마찰 따위는 없었던 일로 덮어두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사정이 나빠질 때마다 현실을 무시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현실이 바로 나타났다. 멜라니가 와서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라며 이층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머리는 그대로 하고 갈 거야?"
멜라니가 물었다. 앨리슨은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벗고 신혼여행용으로 골라 두었던 연한 산호 색 비단 슈트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거 입지마, 언니. 식을 올릴 때라면 그런대로 어울리겠지만 이제 평소의 언니로 돌아가야지. 배를 타자면 캐주얼한 복장이 좋아."
멜라니는 황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스와 지중해의 환상적인 섬들...부러워 죽겠네! 요즘이 절정기일거야...야생화들이 만발할 테고."
"응, 그래 멋질 거야."
자기감정을 감추며 앨리슨은 동의했다. 멜라니는 뭔가 깊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있다가 앨리슨의 드레스를 줍더니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당돌하게 말했다.
"언니...행복하지? 형부가 갑자기 끼어 들어서 우리들 전부의 생활을 떠맡아 주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야. 그것이 바로 언니가 바라던 바라는 생각도 들고...안 그래?"
"물론, 그래."
앨리슨은 부드럽고 경쾌하게 빗질을 하여 평소의 머리처럼 말끔하게 매만졌다.
"정말 잘된 일이야!"
멜라니는 드레스를 옷장 속에 걸고 스커트의 주름을 몇 번씩이나 펴보다가 갑자기 말했다.
"전에 형부 일로 좀 지나친 말을 해서 미안해...신문에 났던 일을 가지고 쓸데없는 말을 했었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일요 신문에 또 몬클레이 부인이 남편에게로 돌아갔고 완전히 화해가 성립되었다는 기사가 났었어. 그것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 아니겠어?"
앨리슨은 멜라니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물론이야. 그리고 난 소문따윈 하나도 믿지 않았어."
"그랬었다면 다행이 군."
멜라니는 환한 얼굴로 웃었다.
"형부에게 열을 올리고 있지? 그럴 거야. 그런데 어쩐지 동화 같기만 해."
앨리슨은 스타 사파이어 반지를 왼손에 끼었다. 들떠 있는 멜라니의 질문에 더 이상 대답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멜라니에게는 동화 속의 로맨스를 즐기도록 해주자. 앨리슨은 환멸이 빨리 오지 않기 만을 마음속으로 빌 뿐이었다. 닉의 말로는 아리아드느 호는 로즈 항구에 정박 중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그날 밤 공항 가까이에 있는 호텔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미행기를 타고 가야 한다고 했다. 호텔로 오는 차 안에서 여전히 닉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앨리슨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심취했다. 닉이 호텔 프런트에서 등록부를 보는 동안 앨리슨은 호화로운 로비에서 기다리며 이것이 최초의 난관이라는 생각을 했다. 프런트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있다가 돌아온 닉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예약해 놓은 스위트룸을 그만 못쓰게 되었다는 군. 어떤 멍청이가 쓰레기통에 불을 집어 던져서 내부를 전부 고치는 중이래. 다른 호텔을 찾아볼까, 아니면 이 호텔의 다른 방을 쓰라는 데 그 방을 쓸까?"
앨리슨은 어깨를 가볍게 움츠렸다.
"무슨 방인가요?"
닉의 입이 쓴 웃음을 띠며 일그러졌다.
"신혼부부 용 스위트 지 뭐."
앨리슨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과 함께 얼굴을 붉히자 그것을 본 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럼 딴 호텔을 찾아보자고."
몸을 돌리려는 닉의 팔을 앨리슨이 잡았다.
"괜찮아요, 너무 늦었고 또 피곤해요."
이번에는 닉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 그럼 방을 보도록 할까?"
방으로 안내되었을 때 앨리슨은 다른 곳을 알아 볼 걸 하고 후회했다. 누군가가 돈과 시간을 듬뿍 들여서 이 방을 완벽한 사랑의 보금자리로 만든 것만 같았다. 침실에 딸린 작은 거실에는 얼음으로 차게 해놓은 축하용 샴페인과 함께 빨간 장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서곡에 불과했다. 대형침대엔 화사한 장식이 달려있고, 살구 색깔의 새틴으로 덮여 있었다. 같은 색조의 투명할 정도의 얇은 커튼은 방안 분위기를 더욱 화사하게 만들고 있었다. 욕실의 터키 대리석 바닥보다 낮게 설치해 놓은 욕조는 분명 2인용 이었다. 거실에는 카우치가 놓여있었다. 저기에서 자면 오늘 하룻밤쯤은 어떻게 든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앨리슨은 생각했다. 닉도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 같았다.
"좋은 방이로군."
닉은 필요 이상으로 상냥하게 말하며 보이에게 팁을 건네주었다.
"짐을 곧 가져오도록!"
보이는 문을 닫고 나갔다.
"어떻게든 잠은 잘 수 있겠네요."
앨리슨이 말했다.
"그럴 것 같군."
닉이 비꼬는 말투로 응수했다.
"샴페인이라도 마시면서 축하하는 기분을 내볼까?"
"좋아요."
앨리슨은 창가에 가서 기댔다.
"전망은 별로 좋지 않군요."
"그런데 신경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창 밖을 내다보는 틈에 조금이라도 실속 있는 일을 해야지. 자, 샴페인이야."
"고마워요."
앨리슨은 냉정하게 한마디 하고 글라스를 받아 들었다.
"무엇을 위해 건배한다? 결혼을 축하하며 라고 하기에는 좀 지나친 것 같고...좀 더 친해지기 위해서는 어쩐지 모자라는 것 같고...그러니 그냥 건배라고 할까?"
"모두 그만둬요."
앨리슨은 우울한 기분으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닉이 한숨을 내쉰다.
"미안해, 앨리슨. 내가 당신 기분이 상할 말을 하고 말았군. 오늘은 내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긴장하고 있었거든. 그 점은 이해해줘."
앨리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에요."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나더니 보이가 두 사람의 짐을 들고 나타났다. 앨리슨은 창 밑에 앉아서 샴페인에 입을 대면서, 닉이 신문과 모닝 콜, 그리고 아침식사에 대해 대충 부탁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저녁식사는 호텔에서 할까?"
닉이 시계를 힐금 보면서 물었다.
"아니면 강가에 좋은 레스토랑이 있는데 거기로 갈까? 멀지도 않고 내가 전화하면 언제든지 예약을 할 수 있어."
앨리슨은 그가 돈으로 행세께나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불쾌감을 강하게 느꼈다.
"고맙지만 호텔 쪽이 나을 것 같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몹시 피로해요."
샴페인을 비우면서 앨리슨은 일어섰다.
"목욕을 해야겠어요."
"그 괴상한 욕탕에 빠져 죽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내가 사용법을 가르쳐 줄까?"
"그만두세요, 빠져 죽지는 않을 테니까요."
파란 눈이 앨리슨을 조롱하고 있었다.
"하지만...자극이 될지도 모를걸. 앨리슨도 인생의 즐거움을 배울 때가 됐잖아. 그리고 사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지 함께 사용하자는 말은 안 했다고."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요. 그러나 목욕하는 방법엔 관심이 없어요."
가까스로 냉정한 목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뱃속이 따끔거렸다. 내가 남자와 욕실에 같이 들어간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짓궂게 저런 말을 하다니...그 밖의 여러 가지 일도 경험한 일이 없을 것으로 단정하고, 마치 나를 중세기의 유물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목욕을 끝내고 나왔을 때 그녀는 방안에 자기 혼자만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앨리슨은 놀라지 않았다. 이 방의 분위기를 닉은 시큰둥하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진짜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이곳에서라도 좀 더 즐길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앨리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매가 없는 회색 드레스를 입고 앉아서 앨리슨은 닉을 기다렸다. 닉이 돌아왔을 때는 다행스럽게도 더 이상 앨리슨을 짓궂게 놀리려 들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앉아서 고급으로 요리한 저녁식사를 들고, 늦봄의 쾌적한 공기를 만끽하며 호텔의 정원을 산책했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앨리슨은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침실의 붙박이로 된 장롱 속에 여분의 모포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앨리슨은 그것을 들고 나와서 베개와 함께 카우치 위에 놓아 두었다. 이렇게 해두면 나이트캡을 마시러 간 닉이 돌아와서 보고는 그 의도를 알아차릴 것이다. 그녀는 침실로 돌아와서 얇은 무명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가방 속에서 추리소설 한 권을 꺼냈다. 그 중 1장만 읽은 다음 스탠드를 끄고 살구 색 시트 속으로 들어갔다. 닉이 살며시 들어와서 욕실 쪽으로 가는 소리를 옅은 잠결에 들었다. 번쩍 정신을 차린 그녀는 시트를 머리 위에까지 뒤집어썼다. 그리고 목욕을 끝낸 닉이 침실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방을 나갈 기색이 없이 계속 어두운 방안을 돌아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닉이 침대에 들어왔고 매트리스가 기우뚱했다. 그녀는 몸을 발딱 일으켰다.
"왜 이래요!"
"자려고 그래. 내가 첫날밤을 저 카우치에서 새우잠으로 샐 줄 알았나?"
"하지만 당신은 말했잖아요...약속 했잖아요."
숨이 차서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를 않았다.
"그래 약속을 지킨다고. 섹스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잠을 자려는 거야. 침대를 놓아두고 딴 곳에서 잘 수야 없지. 이 침대라면 비상시에는 12명까지도 잘 수가 있겠군 그래. 그러니까 서로 몸이 닿을 위험성은 조금도 없어. 당신이 나한테 다가올지는 몰라도...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해."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앨리슨은 자기가 해야 할 말에 자신이 없었다.
"나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아요."
앨리슨이 대답하자 닉이 덧붙여 말했다.
"또 한가지...말해 두는 게 좋을 것 같군. 난 잠잘 때 아무것도 입지 않아. 어릴 때부터의 버릇이야. 그러나 당신은 두 벌씩이나 껴입은 것 같으니 안심해도 될 거야, 브리스토 부인."
닉은 등을 돌리고 베개를 두드려서 평평하게 고르더니, 앨리슨 따위는 금방 잊어버린 것같이 잠을 청했다. 앨리슨은 잠이 도망가서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그리고 불안감과 곤혹감으로 몸을 긴장시킨 채, 닉의 저 침착성이 오히려 샘이 날 정도였다. 그녀는 어둠 속을 응시하며 조용히 규칙적으로 내쉬는 그의 숨소리를 한참 동안 듣고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몸을 움직여 닉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침대 끝으로 갔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람. 닉에게는 아무런 기척도 없다. 그러나 잠결에라도 혹시 닉의 몸에 닿을 경우를 생각하니 가급적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몸이 서로 닿고 닉이 눈을 뜨고...내가...내가 그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앨리슨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것이 첫날밤이라고 생각하니 앨리슨은 슬펐다. 그렇다고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일이다. 닉이 침대를 나누어서 쓰는 데 익숙한 사람이란 생각을 하니 앨리슨은 정나미가 떨어졌다. 닉은 금방 잠이 들었건만 이쪽은 밤새 눈을 그저 감고만 지새워야 하다니...그러나 앨리슨은 이윽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친 탓인지 동이 틀 무렵 깊은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얇은 커튼 너머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앨리슨은 한순간 혼란을 일으켰고,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분명치가 않았다. 웅크렸던 팔다리를 펴며 기지개를 켜자, 닉이 한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그 순간 앨리슨은 현실로 돌아왔다.
"아아!"
앨리슨은 나지막하게 신음하며 시트를 끌어당겼다. 닉의 얼굴에 차가운 웃음이 떠오른다.
"안녕, 당신은 등산을 좋아하는 모양이 군, 어때? 그런가?"
앨리슨은 잠시 당황했으나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았다.
"아직 바위 산 한번 오른 적 없어요."
"뜻밖의 얘긴데...침대 끝에 그처럼 바싹 가서 있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이니...아이고 북 벽 근처의 좁은 암벽이라도 탈 만하겠어."
앨리슨은 닉을 노려보았다.
"착각하셨네요."
그녀는 일부러 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언제 공항에 나가야 해요?"
"시간은 아직 충분해."
"하지만 어서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요."
"왜 그러는 거야? 남자는 아침이 제일 위험하다는 말이라도 어머니에게서 들었나?"
"아뇨."
닉은 웃었다.
"그렇다면 사전에 말해 두겠는데."
도망칠 틈도 없이 닉의 팔이 앨리슨의 몸에 휘감겼고, 어깨를 누르는 힘 때문에 앨리슨은 침대에 누워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뜨거운 입술로 키스하기 시작했다. 닉의 맨 살에서 전해오는 온기가 얇은 무명 파자마를 통하여 스며온다. 앨리슨은 자신의 무력함과 의지의 박약함을 느꼈다. 입술은 이미 닉의 집요한 키스를 거역하질 못하고 열려 있었다. 지금 그는 강제적으로 키스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연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너무나 부드럽게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입술을 앨리슨의 입술에 가볍게 대고 손은 앨리슨의 가는 목을 애무하다가 V라인의 옷깃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손가락 끝이 가슴의 커브를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마치 따귀를 얻어맞은 것처럼 크게 들려왔다. 앨리슨은 자신을 감싸고 있던 관능적인 꿈의 세계 속에서 눈을 떴다. 닉은 무어라고 중얼거리면서 앨리슨의 몸에서 떨어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무심한 말투다. 그의 목소리는 금방 효과를 발휘하여 로켓 포탄마냥 앨리슨을 현실로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파자마 단추가 반 이상이나 벗겨져 있었다. 앨리슨은 시트를 되는 대로 밀어붙이고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모닝 콜이야."
닉은 수화기를 놓자 그렇게 말했다. 파란 눈이 앨리슨의 빨개진 얼굴과 움츠린 몸을 노려보았고 입술이 약간 일그러졌다.
"약속을 어겼어요. 아무 짓도 안 한다고 약속하고서."
자신의 침착한 목소리에 앨리슨은 자신도 놀랐다.
"알고있어. 그러나 당신을 조금...그런 기분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에..."
"그래요? 마침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겠지요? 일종의 조건반사로 군 요."
닉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시는 그런 짓은 안하겠어. 보증한다고."
"믿을 수가 없어요."
닉의 입가에 잡힌 주름살이 불쾌하다는 듯 깊이 팬다.
"앨리슨 미안해. 그건 충동적이었어. 그 점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어. 당신은 내가 욕망에 사로잡혀서 계획적으로 그런 것으로 생각하나?"
닉은 내뱉듯이 덧붙였다.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군. 당신도 좋아했으면서..."
"그렇지 않아요."
닉의 말은 채찍처럼 날카로웠다. 그러나 앨리슨은 기죽지 않고 견뎌냈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랬다.
"나는 그렇지가 않았으니 잘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에요."
"알겠어."
닉은 기세 좋게 벌떡 일어나 시트를 걷어찬 다음 로브에 손을 뻗었다. 앨리슨은 당황하여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아리아드느 호에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큰 배니까. 우리는 아마 식사시간에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거야. 그야 어쨌든 욕실은 먼저 사용할 건가? 아니면 동전을 던져서 추첨할까?"
"내가 먼저 사용할 거예요."
앨리슨은 넓은 침대를 사이에 두고 닉과 마주앉아 있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위험이 가득한 지뢰 부설 장소를 사이에 두고 적끼리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욕실에 들어가자 갑자기 몸이 떨렸다. 앨리슨은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욕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닉의 날카로운 눈이 이곳까지 따라오지는 못할 것이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내가 항복 직전에 있었음을 그는 눈치 챘을까? 앨리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예상을 뒤엎고 전개되어 간다. 특히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어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앨리슨은 손바닥에 선 오일을 떨어뜨려 목과 어깨에 바르기 시작했다. 요 몇 주 동안 그녀의 몸은 벌 꿀 색으로 알맞게 탔다. 너무 지나치게 태워 보기 싫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특히 내일이면 이제 로즈로 향해 귀국 길에 올라야 한다. 그처럼 겁을 먹고 있던 4주간이 놀랄 만큼 빨리, 그리고 즐겁게 지나가고 말았다. 첫날 아침 호텔에서 옥신각신했던 일 이후로, 닉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앨리슨은 불안했었다. 보복이나 원한을 사게 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기우였다. 닉은 아리아드느 호에 타자마자 앨리슨의 눈앞에서 바다에 의한 변모를 나타냈던 것이다. 로즈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닉은 혼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앨리슨 쪽으로 얼굴을 돌리지도 않았거니와 입도 떼지 않았다. 그녀는 공연히 초조했었다. 그런 사나이와 앞으로 1개월 동안 에게 해 위의 배에 갇혀서 어떻게 생활할 수 있을까...그런데 모든 일이 뜻밖에도 변하였다. 아리아드느 호의 선실에 들어갔을 때, 가시 돋친 듯이 행동하던 닉은 그 다음날 아침부터 부드럽고 친절한 친구로 그 모습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처럼 상냥하고 친밀해진 닉에게 앨리슨은 오히려 경계심을 품었다. 날짜가 지나감에 따라 경계심은 차츰 풀리게 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크노소스의 폐허에 올라가 보기도 했고, 신성한 델로스 섬에서는 돌 사자 밑을 기묘한 경외심을 느끼며 걸어보기도 했다. 표백 된 것처럼 새하얀 히드라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기도 했고, 미코노스 섬의 잘난체하는 펠리컨 새를 보고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었다. 앨리슨은 헤엄을 쳤고, 일광욕도 했다. 닉의 코치를 받으면서 수상스키도 배웠다. 살갗은 적당히 탔고 몸에 살도 붙었다. 이제 비키니를 입어도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난처할 뻔했었다. 처음에 그녀가 준비해 가지고 온 원피스 수영복을 보고 닉은 화를 내면서 빼앗아 버렸던 것이다.
"가급적 골고루 햇볕을 쪼여야 한다고. 영국으로 돌아가면 장마철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는 명령하듯이 말했다. 앨리슨은 선 오일의 뚜껑을 덮고 엎드려서 팔을 머리위로 힘껏 뻗었다. 살이 찌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맛있는 식사에 편안한 생활, 알맞은 운동에 깊은 잠...아리아드느 호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유람선은 아니었지만 승객들의 쾌적한 만족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상냥한 승무원들 가운데에는 일류 요리사도 있었다. 그러나 식사를 언제나 배 안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이상야릇한 신혼여행을 하는 동안, 기항지에 있는 술집에서 보낸 시간들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조개요리에 그 지방 특유의 와인, 그런 장소에 어울리는 춤까지 곁들였고...앨리슨의 내성적인 성격은 아직도 남아있었지만, 조금씩 고쳐져 간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기뻤다. 닉의 도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몇 주동안 앨리슨은 이처럼 섬을 순회하는 여행이 영구한 것이어서 끝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해보았다. 영국으로 돌아가면 갖가지 문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첫째로 어머니가 당당한 여주인의 위치에서 하숙생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된 자신의 처지를 감내할 것인지? 레이디미드에 새 주인이 나타나면 틀림없이 한바탕 화풀이가 벌어질 것이다. 새 주인의 태도 역시 문제였다. 닉이 지난 한달 동안처럼만 대해 준다면 모든 문제는 간단했으나 그 전의 냉소적이고 쌀쌀 맞은 인간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감이 앨리슨의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앨리슨은 눈을 들었다. 닉이 갑판 위를 걸어오고 있다. 허리에 타월을 걸쳤는데, 피부는 마치 손질을 잘 한 티크 재목과 같았다. 그 범상한 매력에 압도당하여 입이 마르고, 아무리 참으려 애써도 몸이 떨려왔다. 눈에 나타났을 이 미묘한 표정을 선글라스가 감춰주는 것은 실로 고마웠다. 그리고 또 한가지, 닉이 일광욕을 앨리슨의 곁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 하는 것도 고마웠다. 닉은 잠잘 때와 마찬가지로 나체가 되어 일광욕하기를 좋아했는데, 앨리슨이 갑판 위의 자기 공간에 있기만 하면, 그가 일광욕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앨리슨은 이따금, 그런 기묘한 행동을 하는 신혼부부를 승무원들이 어떤 눈으로 볼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눈으로 보든, 훈련이 잘되어 있어서 그런지 그 반응을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닉은 모로 누워서 뭔가 찾기라도 하려는 듯 앨리슨의 어깨에 손을 문질러댔다.
"하루 분의 햇볕은 이제 충분히 쪼였다고 생각하지 않아? 샤워를 한 다음 얀니의 가게에 가자고. 여행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그곳에서 하지."
"멋져요."
닉은 무심코 손을 대어 문지르고 있는데, 앨리슨은 어깨를 더듬는 그의 손이 감촉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알겠어요. 하지만 5분만 더 있다가 가요. 그건 그렇고 조지가 가져온 신문을 보니 영국에는 일주일 동안 비가 계속 내린대요."
"엄연한 현실에 대한 얘기로군!"
닉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지, 이 즐거운 신비의 세계를 떠나서 현실에 직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유감스럽네."
닉도 자기와 같은 기분임을 알고 앨리슨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아까까지 그냥 뒤적이고 있던 책에 손을 뻗어서 읽는 척했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요, 좋은 일에는 언제나 끝이 있게 마련이니까요."
"그렇다면 앨리슨은 여기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나?"
"물론이죠. 지중해는 처음 와봤으니까요. 우리는 휴가철을 대개 스코틀랜드에서 보냈어요...엄마가 더운 것을 싫어하시거든요."
어머니는 항구의 먼지투성이 거리도, 그리고 두 사람이 자주 찾은 술집처럼 시설이 나쁜 곳도 싫어했다. 비닐로 만든 테이블클로스라든가 엉성한 배관시설은 어머니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앨리슨도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었다.
"꼭 한번 기회를 내서 다시 와보고 싶어요."
닉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금년에는 어려울 거야. 휴가 따위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바쁠 테니까."
"그건 그렇겠네요."
또 얼굴이 빨개진 것 같아서 앨리슨은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그가 이런 사치스러운 여행을 또 한번 하고 싶다는 암시를 한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꼭 그럴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남은 시간을 실컷 즐기려고 해요."
"나도 동감이야."
닉은 일어섰다.
"그럼 이따가..."
닉이 그 자리를 뜨자 읽는 척하던 책을 덮었다. 앨리슨은 자신이 나타낸 반응이 부끄러웠다. 니콜라스 브리스토의 대해서는 아무런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건만 그가 조금만 상냥하게 대해 주고 마음을 끌려고 하면 금방 방어벽을 허물어 버리려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닉이 아예 그전처럼 오만하고 차갑게 구는 편이 오히려 견디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방어라도 튼튼히 했을 테니까...앨리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국할 시간이 임박해진 것이 다행인지 아닌지...얀니는 언제나 그랬듯이 두 사람을 상냥하게 맞아 주었고 공손히 특별석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이미 촛불이 켜져 있었고 우조 술이 따라져 있었다. 오늘 밤의 특별요리는 바다가재 라고 얀니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그것을 그릴에 구워 먹으면서 허브와 올리브 오일을 친 토마토, 오이, 피망과 페타 치즈의 샐러드를 곁들였다. 게다가 플럼 만큼이나 큰 자주색 포도가 잎사귀 채 놓여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두 사람은 쌉쌀한 이 지방의 특산 와인을 조금씩 마셨다.
"그럼 이제 떠나시게 되는 겁니까?"
얀니가 말했다.
"그래요."
앨리슨은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또 찾아주시겠지요?"
얀니는 닉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또 오실 때까지 우리는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을 테니까요. 아기를 데리고 오셔서 우리집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게 했으면 좋겠네요."
닉은 싱글벙글하며 악의 없는 대답을 했지만, 앨리슨은 또 얼굴이 빨개졌고 몸을 움츠렸다. 아기가 화제로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 파티 석상에서도 닉의 어머니가 어서 할머니 소리를 듣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다행히도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앨리슨 한 사람 뿐이었지만...닉이 얀니에게 식대를 지불하고 있는 사이에 앨리슨은 먼저 나가겠다고 말했고, 그는 다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얀니의 가게에서 항구까지는 경사진 자갈길이고 길 양쪽으로는 띄엄띄엄 술집과 카페, 그리고 상점들이 있어서 길은 어둡지 않았으나 그래도 앨리슨은 조심조심 걸어갔다. 아직 관광 철 이라 기엔 일렀지만 거리는 활기에 차 있었다. 앨리슨은 걸음을 멈추고 선물가게의 진열대를 바라보았다. 가족에게 선물할 것들은 이미 사 놓았다. 어머니에게는 크레타 섬에서 생산된 정교한 자수세공을 상자째 샀고 멜라니에게는 부드러운 대형 가죽 가방, 그리고 호너 부인과 그 밖의 고용인들에게는 도자기류를 선물로 샀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산 것이 없었다. 앨리슨은 은으로 만든 이어링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여기서 보낸 한달 동안의 추억을 위해서 라면 형태가 있는 물건은 필요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 이곳에. 마음속에 영원히 새겨져 있을 테니 말이다.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난 한달 동안의 모든 것이, 닉이 했던 말들과 그의 행동 모두가 마치 영화처럼 차례로 떠올랐다. 그 한가지 한가지가 가지는 의미에 가슴을 태우면서 앨리슨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자신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닉은...친절했다...그리고 상냥했다. 그것뿐이었던 거야. 구태여 지적하자면 약간의 자극을 받았을 뿐이랄까...그 이상의 것은 없다...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지금 닉이 그 긴 다리로 이 언덕을 내려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돌부처마냥 서있는 꼴을 보인다는 것은 볼썽 사나운 일이다. 바로 옆에 있는 교회의 문이 어서 오라는 듯 조금 열려있었다. 앨리슨은 숨을 곳을 찾는 죄인처럼 그곳으로 향했다. 이곳은 풍요로운 마을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선명한 색깔로 칠해져 있었고 금색장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우주의 지배자이신 그리스도의 화상을 수많은 촛불이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향긋한 냄새가 목구멍까지 간질인다. 앨리슨은 본능적으로 반쯤 드러난 어깨에 숄을 끌어올려 가리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앨리슨 혼자만이 아니었다. 관습에 따라 검정 옷을 입고,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두 명의 여성이 나란히 봉헌 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소원의 기도일까, 아니면 감사의 기도일까...앨리슨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앨리슨이 움직이자 힐이 나무 바닥에 닿으면서 삐걱 소리를 냈다. 두 명의 여성이 뒤돌아보았다. 그곳에 앨리슨이 있음을 알아차리자, 비로소 미소를 띠며 손짓했다. 앨리슨이 가까이 가자 그 중 한 여인이 불이 켜져 있는 초를 내밀었다. 아마 자기네들과 같은 용건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 사람들에게 찾아온 용건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설명을 하기보다는 그들이 내미는 초에 불을 붙인 다음, 그들처럼 소원을 비는 편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앨리슨은 얼른 촛불을 받아 들고 다른 초에 불을 붙여 연철로 만들어진 촛대에 꽂았다. 여성들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앨리슨은 여성들이 계속해서 십자가를 그으며, 스카프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입을 움직여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무엇이든 빌어야지...하지만 무슨 기도를 한다? 춤추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앨리슨은 멍청히 서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그 사람이 저를 사랑하도록 해주소서. 하나님,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는 여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순간 앨리슨은 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앞에서 기도하는 두 여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앨리슨은 얼른 몸을 돌려서 교회 밖으로 나와 밤공기를 깊숙이 들이 마셨다. 그 순간 어깨에 와 닿는 손이 있었다. 바로 닉 이었다. 앨리슨은 등줄기를 곧게 펴고 평소의 냉정함을 가장하며, 그의 이글거리는 눈초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라톤 레이스를 막 끝낸 사람처럼 심장은 방망이질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기분이 언짢은가?"
닉이 날카로운 말투로 책망하듯 물었다. 앨리슨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닉에게서 떨어졌다. "저어...가슴속이...답답해서 그래요. 그것뿐 이에요."
"교회에는 왜 들어갔었지? 유명한 곳인가?"
"그렇지 않아요, 그저...호기심에서."
"어디 갔나 했었지. 항구에 갔더니 조지가 보트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더군. 그런데 당신을 못 봤다고 하잖아. 길을 잃은 줄로 생각했는데...설마 교회 안에서 나올 줄이야..."
닉은 잠시 간격을 두고 말했다.
"교회에 가서 진짜 결혼서약을 다시 하기에는 아직 좀 이르겠지?"
분명히 조롱하는 말투다. 앨리슨은 긴장했다. 마치 신혼여행은 끝이 났다고 선고하는 것 같았다.
"흥미가 있었어요. 몇 번이나 그 앞을 지나다녔으니까요. 그래서 좀 기웃거렸을 뿐 이에요."
"그런데..."
그의 목소리는 초조한 느낌이엇다.
"그런데 왜 미친 사람처럼 뛰어나오는 거지?"
닉은 빈정대듯이 말을 계속했다.
"보트라도 놓칠 까봐 그랬나?"
입술을 깨물면서 앨리슨은 일부러 걸음을 늦추었다. 그 작은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아마 와인을 과음했기 때문이든가 그 바다가재 요리 탓일 거야. 앨리슨은 자신이 왜 그토록 감상적이고 또 그토록 진지하게 기도를 했는지 그 이유를 찾아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과장된 반응을 일으켰던 것이라고 앨리슨은 자신에게 애써 다짐했다. 그래 맞아...그것이 이유였어... 달빛과 촛불 아래서 든 지중해 여행의 마지막 식사...그리고 닉의 카리스마적인 매력 때문이었을 거야...닉의 매력쯤은 방어할 수 있다는 마음은 자신을 속이는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는 주의해야지...레이디미드로 돌아가는 편이 그의 매력에서 벗어나기엔 더 쉬울지도 모른다. 그곳에서는 별거 생활을 하는 거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앨리슨은 몸을 약간 떨면서 숄을 다시 걸쳤다. 조지는 급경사의 계단 아래에 보트를 대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끄러지기 쉬운 좁은 계단이지만 지금까지 몇 번이고 아무 일없이 오르내리던 계단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앨리슨은 보트로 오르려는 순간 그만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바로 그 순간 닉이 강철 같은 팔로 낚아채듯 그녀를 잡아주었기 때문에 앨리슨은 허공에 떴고, 어느새 그녀의 얼굴은 숨을 쉴 수조차 없을 만큼 닉의 가슴팍에 파묻혀 있었다. 힘이 빠진 앨리슨은 한참동안 닉의 팔 안에 안겨 있었다. 닉의 그 단단한 근육에 앨리슨의 작은 가슴이 밀착되어 그의 따뜻한 체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놀라는 바람에 그녀의 손가락은 고양이 발톱처럼 발작적으로 닉의 근육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가까이에 서 느끼며 그를 요구했던, 그러나 오랫동안 억제해 왔던 감정의 전율이 몸 속을 치닫는다. 허벅지에 닉의 몸이 와 닿는 것을 느낀 앨리슨은 좀 더 몸을 닉에게 밀착시키고 싶어졌다. 고뇌에 찬 이 욕구를 닉도 느끼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그러나 닉은 앨리슨을 아주 사뿐히 내려놓았다. 조지의 호들갑스러운 말과는 반대로 닉은 나직하게.
"괜찮겠어?"
라고 물어 볼 뿐이다.
"네, 고마워요."
앨리슨은 한 손을 들어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제치면서 일부러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얀니의 가게에서 우조 술을 너무 마셨나 봐요."
"그래 맞아, 술이 독했어."
무관심에 가까운 말투로 동의한 다음, 닉은 앨리슨의 몸 방향을 바꿔 주었다. 앨리슨은 비로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닉이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천만 다행이다....그처럼 갑자기 발동한, 부끄러운 감정을 말이다. 앨리슨은 잠자코 뱃머리에 앉아서, 아리아드느 호의 거대한 몸체가 어둠 속에 그 모습을 나타내기만을 기다렸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식당에는 커피와 작은 글라스에 든 밀감 맛의 리큐르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몇 주일동안 앨리슨은 그 리큐르를 즐겨 마셨는데 오늘 밤은 모두 사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닉과 단둘이 있는 것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앨리슨은 핑계를 만들어 혼자 있을 선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문에 자물쇠를 걸었다. 자물쇠를 걸 때 그녀의 손이 약간 떨렸다. 어이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줄곧 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한 일조차 없었는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것일까?
"예방 조치지 뭐."
앨리슨은 혼자 중얼거렸다.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다. 앨리슨은 재빨리 옷을 벗고 샤워를 한 다음 널찍하고 감촉 좋은 침대로 파고들었다. 잠을 청하기 위하여 평소엔 책을 읽었지만 오늘 밤은 신경이 집중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앨리슨은 책을 덮어놓고 스탠드 불을 껐다. 그러나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주변의 어둠도 그리고 창문으로 스며드는 별빛도 가볍게 흔들려서 평소에 마음을 진정하던 그 효과를 내지 못했다. 앨리슨은 가만히 누워서 살그머니 눈을 감아 보았다. 머릿속을 비우면 다소나마 안정된 기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신 닉의 환영이 떠올랐다. 기억들이 앨리슨을 지배하고, 1개월 동안 닉과 같이 생활한 지난날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되살아났다. 앨리슨의 머릿속에선 닉이 한 말들이 들려왔고 그의 표정과 행동이 떠올랐다. 아주 사소한 일까지도...선실 안이 갑자기 숨이 막히도록 좁게 느껴지고 얇은 시트건만 몸이 불타는 듯 뜨거워졌다. 바싹 마른 입술이 움직이더니 닉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으나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앨리슨, 자?"
라고 물어 오는 닉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자신의 흥분으로 인한 환청이라고 생각했으나,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노크 소리는 바로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튕기듯 몸을 일으키고는 본능적으로 시트를 잡아 끌어 몸을 감싸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또 한 번 노크 소리가 났고 이번에는 좀 초조해 하는 듯한 닉의 목소리가 앨리슨을 불렀다. 앨리슨은 문의 손잡이가 조용히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당연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시 뒤 손잡이는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숨을 죽이면서 귀를 곤두세우고 있자니, 닉이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돌아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앨리슨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며 엎드려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문을 잠가놓은 것은 충동적으로 한 짓이기는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충분한 근거가 있었던 일 같이 생각되었다. 닉이 나를 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낙천적인 생각이었다. 경험이 풍부하고 성적으로 직감력이 민감한 닉이 앨리슨에게 욕구를 일으키지 않을 리 없다. 닉이 그 동안 앨리슨의 선실에 가까이 오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오늘 밤은 앨리슨의 어떤 암시에 욕구를 느꼈던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예방조치를 취했던 일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선견지명에 서글픔과 안도감을 느끼고 있는 중에, 문 쪽에서 덜거덕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하고 문 쪽을 보며 팔베개를 배고 모로 누워 있는데, 문이 확 열리면서 닉이 들어왔다.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은 다음 닉은 침대 옆으로 다가와서 앨리슨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썹 꼬리가 냉소적으로 치켜 올려졌다.
"내 짐작이 맞았어."
닉은 비웃었다.
"일부러 대답은 안 했을 거고, 잠들었던 건 아니었지?"
앨리슨은 겨우 입을 열 수가 있었다.
"어떻게 들어왔죠?"
"마스터키로 열었지.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못했나? 자존심 상했어?"
"그래요, 지금까지는 피차 자존심을 지켜왔잖아요. 나가 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요."
"할 얘기가 끝나면 나가지 말라고 해도 나갈 거야."
"할 얘기가 있으면 아침에 하세요, 피곤해요."
닉은 빙긋이 웃었다.
"벌써 아침이야."
"그런 말장난을 하려면 한낮에 얘기해 달라고 정정할게요."
앨리슨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억지로 지으며 몸을 감싸고 있던 시트를 손가락으로 끌어 당겼다.
"말장난이 아니야."
닉은 침대 끝에 털썩 걸터앉았다.
"진지한 얘기를 하러 왔어...거래 관계로."
앨리슨은 신경질적으로 타는 입술을 축였다.
"나중에 하면 안 되나요? 너무 피곤해서 그래요. 새벽녘까지 잠을 못자서 머릿속이 맑지 않아요. 지금은 진지한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뭐 그다지 깊이 생각할 일은 아니야."
침착하고 담담한 말투였다.
"묻고 싶은 말은...우리의 계약조건을 변경할 생각은 없는가 하고 말이야..."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닉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앨리슨은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시선을 떨구어 시트의 가장자리 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모를 것 없어. 처음 협정을 맺었을 때는 서로가 서로를 몰랐어.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달라. 상황을...다시 한번 고쳐 생각해서 안될 일도 없겠고..."
"우린 약속을..."
"그래, 했었지. 그러나...사정이 바뀌는 수도 있는 거지. 마음도 바뀌는 수도 있고. 말하자면 우리 사이의 관계에 제한을 둘 필요가 없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계약을 바꾸자는 말인가요?"
앨리슨은 당황해 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아요. 날 이대로 가만 내버려 둬 달라고 말하고 싶을 뿐 이에요...그렇게 약속했잖아요."
닉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도 교회의 증인들 앞에서 서약을 했었어. 기억 나지 않아? 그 서약은 모두가 사랑과 존경과 복종에 관한 것이었어."
"그걸 원하는 건가요? 내가 복종할 것을?"
"꼭 그런 말은 아니야."
닉의 말투에는 초조함이 역력했다. 닉은 한 손을 뻗어서 앨리슨의 가냘픈 몸을 감싸고 있는 시트를 젖히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앨리슨, 내게 허락해 준다면 틀림없이 앨리슨을 행복하게 해줄 거야."
앨리슨은 입술을 깨물었다.
"덕분에 지금도 행복해요.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있고요...집도 있고 가족의 안전도...그밖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닉이 입을 열었다.
"당신의 입장만 생각하면 된다는 식인가?"
"그게 무슨 뜻이에요? 1개월간의 금욕생활이 견딜 수 없단 말인가요?"
앨리슨은 그렇게 비웃어 주었지만, 말한 순간 후회했다. 애무하던 손가락이 갑자기 멎더니 어둠침침한 불빛 속에서도 닉의 얼굴이 굳어지고 굳게 다문 입가가 찡그려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용케 도 알아맞추는군! 그렇다면 충실한 아내들이 하는 것처럼 내 욕망을 가라앉혀 주겠지?"
앨리슨은 이를 악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싫어요!"
닉의 웃음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도 웃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말이 지나치지 않아? 그럼 내 말을 취소할까?"
닉은 한 손으로 앨리슨의 목덜미를 잡고 상체를 굽히면서 앨리슨을 끌어안았다.
"제발 이러 지 말아요, 닉."
그 다음 말은 앨리슨의 입술에 덮쳐온 닉의 입술이 막아 들리지 않았다. 닉을 화나게 만들고 만 것이다. 그것은 앨리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닉이 폭발한 분노 때문에 난폭한 행동으로 나오더라도 그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역시 부드럽게 대해주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마음이 아팠다. 닉은 앨리슨의 머리를 다시 베개 위에 눕히고 자신도 그녀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쉰 목소리고 빠르게 뭔가 중얼거렸다. 앨리슨은 복종한다는 신호라도 보내듯, 닉의 팔 속에서 굳었던 몸의 힘을 빼버렸다. 닉은 얼굴을 들고 그 파란 눈으로 앨리슨을 응시했다.
"왜 날 화나게 만드는 거야?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겠어, 달링."
앨리슨은 조용히 누운 채, 닉의 뜨거운 얼굴에 시선을 맞추고 부푼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띠웠다. 그녀는 두 손을 닉의 로브 깃에 밀어 넣고 망설이며 가슴을 더듬었다. 닉이 바짝 긴장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극히 한순간 이긴 했지만 앨리슨은 손가락을 통해서 닉을 알 수 있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몸을 긴장시키면서 날카로운 손톱으로 닉의 가슴을 할퀴었다. 그는 갑자기 광폭하게 된 앨리슨을 떠밀었다. 그리고 불을 켰다. 앨리슨은 어쩔 줄 몰라 눈을 감았다. 갑자기 눈이 부셔서라기보다 닉의 살갗에 난 상처를 보기가 싫어서 였다. 피가 날 정도로 심하게 할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앨리슨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보복을 해올까 무섭기도 했다.
"지독하군!"
닉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앨리슨은 하는 수 없이 눈을 뜨고 닉의 분노에 가득 찬 쌀쌀 맞은 시선을 받았다. 앨리슨은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미안해요, 저기 비품 상자 속에..."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그리고 내가 패혈병으로 죽을 것을 기대했다면 큰 착각이라고. 우리 집안은 질병의 치유가 빠른 사람들이니까 말이야. 비록 자존심은 상했지만..."
닉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을 계속했다.
"얌전한 척하지만 당신은 다만 길들지 않은 난폭한 암고양이일 뿐이야. 브리스토 부인."
앨리슨은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냉담하게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여튼 계약은 바꾸지 않아요."
닉의 경멸하는 듯한 미소가 앨리슨의 마음을 애타게 만들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당신의 확고한 생각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이런 요구는 할 생각이 없어."
닉은 그렇게 내뱉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은 앨리슨의 창백한 얼굴을 한번 뒤 돌아 보았다.
"마음 놓고 자라고! 그 시시한 계약서의 꿈이나 꾸고. 그것이 당신을 매일밤 따뜻하게 해줄 테니까."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앨리슨은 손을 뻗어 전등을 끄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누워서 어둠 속을 응시했다. 내가 이겼어...이번에도 이겨냈어...그러나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서글픔과 패배감에 어느덧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수예점을 나섰을 때, 처음으로 천둥소리가 났다. 앨리슨은 빠르게 몰려오는 검은 구름을 올려다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오후에 쇼핑을 하러 나올 때는 맑게 개어 있었는데, 미용실과 그 밖의 여러 곳에 용무가 있어 뜻밖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무래도 도중에 비를 만날 것만 같다. 우산은커녕 스카프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으니...앨리슨은 오도 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 순간 앨리슨은 이대로 차를 세워놓은 곳까지 뛰어갈까도 생각해 보았다. 고속도로 건너편에 잇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았던 것이다. 남은 일은 어머니의 책을 바꾸는 일뿐인데 그것은 내일 해도 된다. 그렇다면 비가 쏟아질 때까지는 아마 그곳까지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말한 한두 가지만 더 부탁하겠다는 주문으로 실재로는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우선 천식을 일으킬 것 같다고 해서 깃털 베개 대신에 쓸 폼 러버 베개를 샀고, 오랫동안 중단해 오던 자수에 쓸 여러 가지 색깔의 실을 샀다. 또 약국에 들러서 아스피린과 목 아픈 데에 먹는 알약들을 사야 했다. 이제 남은 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반납하고 어머니가 부탁한 책을 고르는 일인데, 이 일은 지금까지 걸렸던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될 듯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부탁은 빼먹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앨리슨은 나지막하게 신음소리를 내면서 하는 수 없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결국 시간을 둘러맞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앨리슨은 도서관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밤에 대규모의 디너 파티가 열리는 날 오후에 이처럼 잡다한 일을 시키는 사람은 어머니뿐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 밤에는 결혼한 후 레이디미드에서 열리는 최초의 파티가 있다.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앨리슨은 닉의 아내로서 표면에 나서고, 모티머 회사의 새 사장을 비롯한 이사진들과, 닉의 회사 이사 세 명, 그리고 그 부인들과 여자친구들 앞에 레이디미드의 여 주인으로서 선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파티가 열리면 처음에는 참석자 전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될 것이다. 미용실에 들렀던 것은 그 이유이기도 했다. 참신하고 세련된 스타일의 머리 모양으로 바꾸기 위해서다. 솜씨 좋은 미용사는 가위와 무스와 드라이어로 앨리슨을 변신시켜 놓고는 몹시 흥분했다. 그녀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는 만족했다. 매니큐어도 칠했다. 부드러운 광택의 루비 색깔은 레이디미드의 침실에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새 태피터 드레스와 비슷한 색깔이었다. 앨리슨은 적어도 외관만은 준비가 다 되었다는 안도감을 가지고 도서관 책꽂이 사이를 돌면서, 어머니가 부탁하던 추리소설을 찾았다. 이제 남은 일은 브리스토 부인다운 마음가짐을 갖는 일인데 그것은 말이 쉽지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3주일이 되었지만, 닉과 만난 일을 단지 몇 번에 불과했다. 레이디미드에 까지 앨리슨을 데려다 준 닉은 주택의 개축과 내장공사가 지시했던 대로 진행되어 감을 확인하고는 만족해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두 번쯤 찾아온 일이 있지만 하룻밤만 묵고는 되돌아갔으며 그때도 앨리슨과의 접촉은 그다지 없었다. 남들 앞에서는 부부다운 처신을 해보였지만 그 이상의 친절은 보여 주지 않았다. 단둘이 만나는 몇 분 동안의 시간에도 닉은 두 사람 사이가 고용인과 피고용자의 관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독재적인 방법으로 집을 관리한다는 기본원칙을 정해 놓고 있는 그는 비록 앨리슨에게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의견을 제시할 여지를 주지 않았고, 앨리슨은 앨리슨 대로 그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어떤 의미에서는 무감각하게 따랐었다. 오늘 밤에 열릴 파티의 초대 손님 리스트도, 실은 메뉴의 지시서와 함께 메모해서 닉의 사무실에서 보내온 것이다. 비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별로 신경을 쓰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오랫동안 닉 밑에서 일해 온 여성이라면 그의 갑작스러운 이 결혼이 형식적인 것이라는 것쯤은 벌써부터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로즈로부터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을 때, 그날 밤만이라도 런던에 있는 닉의 집에서 묵게 될 것이라는 약간의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닉은 그런 말을 전혀 꺼내지도 않았다. 런던에 있는 닉의 집은 앨리슨에게는 절대적인 금지구역이며, 닉이 비밀의 베일로 가려놓은 그만의 생활공간 인 것이다. 신문에서 닉의 사생활을 탐지해내기까지는...이런 생각을 하면서 앨리슨은 도서관 대출실의 스윙 문을 밀었다. 이미 타블로이드 신문에는 닉의 새 연인에 관한 기사가 실려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자신을 불쌍한 여인이라고 보게 된 때쯤이야 자신도 그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로즈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앨리슨은 영자신문을 보고 있었는데, 마치 불길한 징조처럼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헤스터 몬크레어의 기사였다. 앨리슨이 신혼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헤스터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이 준 남작을 계승했기 때문에 레이디 몬크레어가 되었다는 기사였다. 닉도 그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 기사를 놓칠 리 없다고 생각하며 앨리슨은 곁눈질로 살폈으나 그의 표정은 엄격하기만 해서, 그의 마음 속 반응은 상상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가볍게 화제로 꺼낼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앨리슨은 도서관의 계단을 내려오다가 그 자리에 멈칫 서고 말았다. 도서관 안에 있는 동안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현관에서 비를 피하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지금쯤 이미 레이디미드에 도착해 있어야 했다. 고용인들이 지시한 대로 일을 하지 않을 리는 없지만, 닉은 실수를 용서하는 일이 없다. 그것이 바로 가족들의 안전과 바꾸기로 하고, 닉이 요구한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새로이 떠맡게 된 책임을 대 해내고, 또 어머니의 비위에 맞도록 시중을 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더러 시내에 나가서 쇼핑도 했고, 다방에 들러서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기도 하셨다. 그런 때는 한결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간혹 어머니는 모욕을 느끼는 듯 슬픈 표정으로 앨리슨을 노려보곤 했다.
"아직은 아무도 안 만나련다. 너도 결혼한 후로 많이 변했어, 앨리슨, 전에는 내게도 곧잘 신경을 써주었었는데..."
앨리슨은 다시 한번 시계를 들여다보며 마음속으로 신음했다. 빗줄기가 가늘어질 때까지 어물어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차를 세워둔 곳까지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굽 낮은 구두에 감사하면서 앨리슨은 물바다가 된 보도 위을 달리기 시작했다. 자동차에 도달했을 때는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키를 꽂고 시동을 걸어 봤지만 엔진은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멎어 버렸다.
"야단났네!"
앨리슨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다시 한번 시도했다. 평소에는 속을 썩이는 차가 아닌데, 자동차는 빗물 때문인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던 앨리슨은 계기판을 두드려 보았다. 그때 그 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듯 창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앨리슨은 놀라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돌아다보니 사이몬 드웨이트가 기웃거리고 있었다.
"고장인가?"
앨리슨이 창을 열자 사이몬이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그렇잖아도 시간이 급하게 됐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때에 사용할 스프레이가 있으면 좋을 텐데...혹시 갖고 있어요?"
"나도 없어. 집에까지 데려다 줄 수는 있는데 그래도 괜찮을까?"
앨리슨은 그 방법이 제일 낫다고 생각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앨리슨의 차는 어떡하지?"
사이몬은 옆에 세워져 있는 자신의 차 족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앨리슨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주차장에 있으니까 괜찮겠죠. 내일 전화를 해서 손봐 달라고 하겠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집에 빨리 가봐야 할 일이 있어요."
"그래?"
사이몬은 차창 너머로 앞을 바라보았다.
"신혼의 달콤한 꿈에 빠져 있을 테니 다른 문제는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있었다. 두 사람은 앨리슨이 결혼한 뒤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그가 앨리슨의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어 쨌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적어도 닉과의 결혼 선언이 사이몬에게 깊은 상처를 준 것만은 확실했다. 앨리슨은 가볍게 흘려버리기로 했다.
"손님이 여러 명 오기로 되어 있는데 내가 이렇게 늦어버렸어요. 그게 문제라는 거에요. 요즘 회사 경기는 어때요?"
"음, 좋아졌어."
잠시동안 사이를 두었다가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앨리슨 대신 사람을 써야겠는데 아직 안 쓰고 있어. 앨리슨 만한 사람이 어디 있어야지, 다시 올 생각 없어?"
앨리슨은 깜짝 놀랐다. 뜻밖의 제안이었던 것이다.
"생각해 볼게요. 남편과 의논도 해봐야겠고."
"시간은 충분히 줄께. 남편은 몹시 바쁜 사람 같던데...그러니까 앨리슨 한 텐 오히려 시간이 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의 말로 미루어 보아 닉이 이따금씩 만 집에 들른다는 소문이 나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이렇게 작은 마을이니까 그런 소문인들 안 날 리가 없다. 앨리슨은 마음의 동요를 감추기 위해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당분간은 닉이 손님들을 자주 초대할 계획인가 봐요. 그래서 틈이 없을 거예요."
"그래? 어쨌든 잘 생각해봐."
그 다음은 대수롭지 않은 얘기들을 두서없이 나누었다. 흔해빠진 화제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상한 것은...사이몬과는 한자리에 앉아 얘기를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은 없었다. 닉의 경우는 전화 소리만 들어도 안절부절못하는데 말이다. 사이몬 같은 사람과 결혼하는 편이 어쩌면 훨씬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열을 올릴 만큼 아기자기하지는 못할지라도 가슴을 에어내는 듯한 고민은 없을 것이니 말이다. 레이디미드에 도착하자 앨리슨은 사이몬에게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차후에 연락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이몬이 떠날 때 앨리슨은 현관에 서서 손을 흔들며 웃는 얼굴로 전송했다. 그녀는 한시름 놓았다는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고 나서 등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
"어디 갔다가 지금 오는 거야?"
닉의 거친 목소리가 채찍처럼 날아와서 앨리슨은 깜짝 놀랐다.
"어머, 벌써 돌아 왔군요?"
"당연한 일이지. 오늘 밤에 손님들이 온다는 걸 잊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이에요. 준비는 모두 됐을 거에요."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앨리슨은 포켓 속에서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그었다. 닉의 입이 실룩거렸다.
"그 준비란 말에는 당신이 해야 할 준비도 포함되어 있겠지?"
비를 맞아 헝클어진 머리를 깜박 잊고 있었다. 앨리슨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머리에 손을 얹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비를 만나서..."
"일기예보는 듣지 않나? 아니면 비를 맞고 라도 해야 할 중요한 용무가 있었나?"
이런 몰골로는 미용실에 갔었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쇼핑도 해야 했고, 그 밖의 볼일도 있어서 꼭 나가야 했거든요."
"그 볼일 중에는 자동차를 팔아치우는 일도 포함되어 있어? 차를 타고 온 사람 같지 않으니 말야."
앨리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속도로 옆의 주차장에 세워놓았어요. 비가 전기회로에 스며들었는지 차가 움직이질 않았어요. 전에도 그런 일이 있기는 했지만...오늘따라..."
"그래? 그럼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조처를 해야 겠군."
닉은 현관에서 식당으로 향했다. 앨리슨은 쇼핑백을 놓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닉은 식탁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와인은...저어 당신이 고르겠다고 했죠!"
"응, 내가 고를 거야. 다른 것은 완벽한 것 같군. 호너 부인에게 음식 나르는 일을 부탁해도 문제는 없겠지?"
"네, 그 사람은 그 일에 아주 익숙하니까요."
닉은 문 쪽으로 갔다.
"거실은 체크 했어?"
"아직 요, 지금 막 돌아왔잖아요."
"그렇겠군."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것만은 꼭 알아 둬, 앨리슨. 동네 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보다 이 집의 가사를 먼저 돌봐야 한다는 것을."
"친구를 만나러 간게 아니 예요!"
닉은 미간을 모았다.
"택시를 타고 온 건 아니 잖아?"
닉의 방에는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있다. 사이몬과 함께 돌아온 것을 그는 본 것이다.
"우연이었어요. 차가 움직이지 않아 주차장에서 애태우고 있는데 마침 사이몬이 왔어요."
"운이 꽤 나 좋았군 그래. 그러나저러나 좀 더 믿을만한 차를 사줘야겠어. 아내에게 주차장에서 서성거리게 하고, 지나가던 기사의 도움을 받게 해서야 쓰겠어?"
닉은 이죽거렸다.
"어서 단장을 하고 와. 물론 아래층에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끝났거든 말이야."
앨리슨이 이 믿어지지 않은 말에 거수경례하는 시늉을 내고 손을 번쩍 들었다.
"알아 모시겠습니다, 각하. 그것으로 설교는 끝나셨나요?"
닉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시 한번 나를 화나게 해봐. 이 정도의 설교로 끝내지 않을 테니...당신은 내 아내가 되어줄 마음가짐은 없다 하더라도 관리인이 되는 데는 전념해 주기를 바란다고. 알겠어?"
"알겠어요. 앞으로는 그 엄격한 기준에 맞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앨리슨은 거실을 그저 형식적으로 점검한 다음 어머니의 방으로 올라갔다. 모티머 부인은 기분이 언짢다는 표정으로 앨리슨을 맞았다.
"뭘 그렇게 꾸물거리고 있었니? 차 소리가 난 지 벌써 오래됐어. 털실은 사왔겠지? 널 기다리다가 눈이 빠지겠다."
앨리슨은 말대꾸를 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수를 놓는 것은 그저 마음이 내킬 때만 조금씩 놓는데 때로는 몇 주일씩이나 팽개쳐 두기 일쑤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앨리슨은 감정을 억제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서두르기는 했지만..."
"그건 그렇고 메리 코넬의 신간은 갖고 왔겠지?"
"그게 없었어요. 그래서 서적대출 대기 리스트에 엄마 이름을 써놓고 왔어요. 순번이 돌아오면 연락을 해준다고 했어요."
어머니는 입술을 찡그렸다.
"대출 대기 리스트라니? 세상 많이 변했구나. 해리스 씨가 있을 때는 새 책만 나오면 언제나 갖다 주었는데."
"그건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불공평한 일이에요. 대신 이 책을 빌어 왔어요."
부인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는 수 없지."
그녀는 책을 받아서 옆에 놓았다.
"페퍼민트 크림은 잊지 않았겠지?"
앨리슨은 기가 찼다.
"페퍼민트 크림? 그런 부탁은 안하셨잖아요."
"주말에는 언제나 내가 하그레이브의 특제를 먹는다는 것쯤 알고 있잖니? 요즘엔 네가 내 생각을 조금도 해주질 않는구나. 설마 이제는 네 멋대로 살 생각은 아니겠지?"
"그렇게 사는 편이 좀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하면 이곳에서 내 일을 하는 데도 시간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내일을 좀 거들어 주는 것쯤 일도 아닐 텐데...새삼스럽게 하는 일도 아니고 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잘해 주었지 않니?"
"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요."
"하긴 그런 것 같더라."
어머니는 손을 들어 진주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닉이 아까 온 것 같던데."
"그 사람에게 할 얘기라도 있으세요?"
"아니다."
부인은 얼른 취소했다.
"그 사람 요즘에는 자주 볼 수가 없어서 그런다. 너를 못 본 척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예요, 엄마."
앨리슨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친절히 돌봐 주고 있어요."
앨리슨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결혼의 진짜 이유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 주지 않는 것을 눈치 채고, 놀라고 한편 화도 났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놓인다만...하지만 닉이 너무 많이 집을 비우기 때문에 좀 걱정이 되는구나. 그리고 너 요즘 거울은 들여다보니? 고양이에게 끌려 다니는 생쥐 꼴이다. 오늘 밤 파티를 위해서 미장원에라도 간 줄 알았는데..."
"깜박 잊었어요."
"어쨌든 닉과 같은 매력적인 남편에게 관심을 끌려면 그래 가지고는 안되겠다."
"관심을 끌 생각은 없으니까 오히려 잘됐죠, 뭐."
앨리슨은 너무 지나친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갔다. 앨리슨은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오늘 밤 파티 일로 신경이 좀 날카로워져서 그랬어요. 7시 반쯤 해서 내려오시겠어요?"
"알겠다."
부인은 다소 쌀쌀 맞게 대답했다.
"결혼한 후 네 그 내성적인 성격이 좀 나아지나 했는데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구나. 볼 연지라도 좀 칠하는 게 어떻겠니? 유령 같아 보인다."
고양이에게 끌려 다니는 생쥐라고 했다가 이번에는 유령 같다고...앨리슨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면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피식 웃고 싶기도 하고, 와 아! 소리를 지르며 울고 싶기도 했다. 쇼핑하러 나가기 전 장롱 앞에다가 새 드레스를 내걸어 놓았었는데, 지금 그것을 보니 마음이 썩 내키지를 않는다. 오히려 폭발 직전의 분노에 기름을 쏟아 붓는 것만 같았다. 관리인일 뿐인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섹시하다는 생각을 자학적으로 하면서 앨리슨은 장롱 속에 도로 쑤셔넣었다. 자신의 처지에 좀 더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옷걸이를 훑어보니 어느 것을 입어야 할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여성의 옷장에는 반드시 한 벌은 있는 법이라고 어머니가 늘 말하던 검정 색 드레스였다. 심플한 라인은 앨리슨의 날씬한 몸에 역효과를 일으켜 이것만 입으면 언제나 우스워 보였었다. 옷을 옷걸이에서 뗐을 때 무엇인가 그 아래에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상자였다. 베스 큰어머니가 결혼선물로 준 고급 란제리 상자였다. 앨리슨은 뚜껑을 열고 미간을 찡그리며 속을 살폈다. 입지 않고 그냥 담아 두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속옷이었다. 환히 비치는 아이보리 실크의 캐미솔과 그것에 매치되는 가터를 끄집어내어 욕실로 가져갔다. 샤워를 마친 뒤 시험 삼아 입어 보려고 했던 것인데 비단결이 살갗에 닿자 아련한 흥분 같은 것을 느꼈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젖은 머리에 드라이어를 대고 있던 앨리슨은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의 아름다움을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마르자 뒤로 빗어 넘기고 핀을 꽂으니 목덜미가 보기 좋게 드러났다. 고상한 머리 모양과 관능적인 속옷의 대비는 이 이상 없을 만큼 완벽했다. 에로틱하다는 말이 어울리겠네...앨리슨은 입을 실룩거렸다. 그러나 검은 드레스를 입는 순간 그러한 느낌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퍼를 올리는 몇 초 사이에 유혹적인 모습이 평범하지도 못한 여성으로 변했던 것이다. 앨리슨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입기로 결정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거실에서 방울을 흔들어대는 듯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앨리슨은 거실을 피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모든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
요리사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아가씨는 이런 곳에 들어오실 게 아니라 거실로 가셔야지요. 드레스에 뭐가 묻을 지도 모르니까요."
검은 드레스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말아요."
앨리슨은 살짝 눈을 흘기면서 대답했다.
"전쟁을 하기 전에 좀 쉴 생각으로 들른 것뿐이라고요."
"그렇지만 이곳에 계시면 방해가 됩니다. 주인양반께서도 아가씨를 찾고 계실 텐데요. 카나페는 건드리지 않도록 하세요. 어엿한 어른이시고 또 귀부인이시니까요. 아가씨는 이따금 개구쟁이 아기 짓을 하신단 말씀이야. 제 말이 틀린 말은 아니죠? 하하."
"하지만 옛날부터 내가 정어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앨리슨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거실로 빨리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혹시 검정 드레스에 대해서 혹평을 하더라도, 그것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을 만큼 촉박하게 돼서 거실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다 좋아하지요.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초인종이 울렸잖아요? 손님들이 오신 모양인데 아가씨가 거기 계셔야지요."
거실로 나가자 처음으로 도착한 손님이 코트와 숄을 벗고 있은 중이었다. 닉은 몹시 초조한 표정으로 앨리슨을 노려보다가 그 차림새를 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본 앨리슨은 웃음이 나오려 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턱을 치켜 올리며 닉의 매서운 눈초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닉이 미간을 찡그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을 때, 부드럽게 미소를 띠우다가, 호너 부인이 안내해 온 모티머의 새 사장 부부를 맞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어지는 몇분 동안은 손님들을 맞으랴, 소개하랴, 음료수를 권하랴, 카나페를 권하랴 몹시 바빠서 닉이 앨리슨에게 말을 꺼낼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이따금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비난의 시선을 볼 때 닉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보석으로 감싸다시피 한 멋진 부인들과 악수를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틀에 박힌 인사말을 나누며 그들과 어울려서 행동했던 것을 앨리슨은 후회했다. 모두들 상냥하게 대하며 함부로 감정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처음 소개 받는 사람마다 모두 쇼크를 받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앨리슨은 느낄 수 있었다. 섹시하고 정력적인 닉이 어째서 이처럼 볼품없고 세련되지 못한 여성을 아내로 맞았느냐며 모두들 의아해 하고 있는 것이다. 앨리슨은 그 사람들만 나쁘다고 할 수 없었다. 닉을 화나게 하려던 계획은 일단 성공했지만, 자기 자신도 부끄러움을 자초했다는 것을 후회했다. 오늘은 종일 악몽 속에 사는 것 같다. 그러므로 호너 부인이 저녁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전해 왔을 때, 어쩌면 주방이 폭발하고 요리가 모두 날아가 버렸다손 치더라도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냉동한 아보카도 스프가 크림과 함께 나왔을 때 손님들은 입을 모아 칭찬했다. 식사가 시작될 테니 이제 당분간은 편안해 질 것이다. 시선이 테이블 건너 맞은편에 있는 닉의 눈길과 마주쳤다. 새파란 눈이 북극의 바람처럼 몸에 와 닿자 앨리슨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식사가 제아무리 맛있고, 분위기가 아무리 따뜻하더라도, 그리고 나누는 대화가 아무리 즐겁더라도 손님들은 모두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빠르건 늦건 간에 앨리슨은 닉과 단둘이서 대결을 벌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멋진 파티였어요! 감사했습니다."
침실로 돌아와서 문을 닫은 앨리슨의 머릿속에서는 손님들의 감사와 작별인사의 말들이 아직도 맴돌고 있었다. 오늘 밤의 파티는 표면상으로는 대성공이었다. 음식도 맛이 있었고, 식사가 끝난 후에는 거실해서 대화를 즐겼고, 손님들이 돌아가지 않았으면 할 정도로 아쉬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은 앨리슨에게는 악몽이었다. 어떤 악마가 끼어 들어서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했담? 물론 닉을 곯려 주려던 것은 처음부터 시도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말았다. 앨리슨은 자신의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닫자 기가 죽었다. 여러 사람들의 눈에 의상조차 제대로 고를 줄 모르고, 세련된 말을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는 촌뜨기로 비쳤을 테니 말이다. 닉이 자기 회사의 부사장 아이언 파냄을 차가 주차 되어 있는 곳까지 배웅하는 동안, 그 기회를 타서 앨리슨은 얼른 자기 방으로 도망쳤다. 어머니에게는 두통이 있다고 핑계 댔다. 하긴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여태까지 머리를 뒤로 꼭 매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의 살갗이 몹시 아팠다. 앨리슨은 핀을 신중하게 빼면서 경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실로 꼴불견이었다. 화장이라고는 립스틱을 약간 칠했을 뿐이어서 안색은 더욱 지치게 보였고 몸은 마치 예의 검정 드레스 속에 파묻힌 것 같았다. 앨리슨은 신음을 하며 머리를 평소의 머리 모양으로 풀어 브러시로 빗었다. 영원히 대결하지 않을 순 없겠지만 당분간이라도 닉과의 대결을 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녀는 해본다. 그러나 그런 안이한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침실 문이 꽝하고 열리더니 닉이 뚜벅뚜벅 들어왔다. 그는 허리에 두 손을 짚고 앨리슨을 내려다 보았다. 앨리슨은 침을 삼키며 일부러 침착을 가장했다. 그리고 서서히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아무 말씀 안하시던가요?"
앨리슨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머리가 아프다는 말 말이 예요."
"들었어. 그래서 온 거야. 오늘 밤처럼 남의 속을 뒤집어 놓으면 또 몸이 아플 거야."
"무슨 말이죠? 오늘 밤 파티는 성공리에 끝났다고 생각되는데..."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리고 그 드레스는 어디서 났어? 자선 바자에서 샀나?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지, 그게 뭐야?"
앨리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이 빨개졌지만 그런 일에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내 옷 입는 취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니 유감이네요."
닉의 입 언저리가 일그러졌다.
"그것이 정말 당신의 옷 입는 취미라면 말 그대로 유감스러웠을 거야.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어. 당신은 일부러 삼류 유랑배우 흉내를 내면서 손님들을 맞았던 거야. 당신이나 나나 그것을 잘 알고있어."
"난 모르는 일이에요."
"알고 있어."
닉은 조롱하듯이 말했다.
"그것만이 아니야. 내가 준 보석들은 어디에다 처박아 놓았지? 당신의 기분은 나도 잘 알아. 그러나 혹사당하고 있는 사람의 이미지를 일부러 연출할 필요까지 있었나? 약혼 반지쯤은 끼어도 됐을 거 아냐? 그것도 어디다 두고 왔나, 자동차처럼?"
앨리슨은 가쁜 숨을 억제했다. 사파이어 약혼반지는 깜박 잊고 끼지 않았던 것이지, 일부러 닉을 골탕 먹이려고 안 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변명한들 뭣할 것인가.
"반지를 반드시 끼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앨리슨은 경멸하듯 말했다.
"나는 이 집의 관리인에 불과해요. 그건 나도 알고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제발 나 혼자 있게 해주세요."
"이 방은 내방이야. 그리고 이 집 모두가 내 집이란 말야...당신도 포함해서...만약 당신이 자신의 역할에 혐오감을 느낀다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당신의 선택에 달렸어."
닉이 가까이 오자 앨리슨은 허둥대며 몸을 피했다. 그 바람에 화장대 의자가 넘어졌다.
"나가 달라고 부탁했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난 안 나가. 적어도 그 괴상망측한 드레스를 두 번 다시 걸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내기까지는."
앨리슨은 아직도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부탁이에요...나 혼자 있게 해줘요. 그 드레스는 당신이 싫다면 버리겠어요. 약속할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닉은 다시 다가섰다. 앨리슨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러 지 말아요!"
앨리슨은 그를 물리치기 위해 양손을 내밀었지만 오히려 그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게 끌려갔다.
"어는 정도 후회는 하고 있어?"
닉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래, 맞았어. 이건 당신이 시작한 게임이야. 잘 기억해두라고."
앨리슨의 몸은 180도로 돌려졌고, 닉의 손이 그녀의 등에 닿았다.
"그만둬요! 내가 벗을 테니! 정말 이에요."
"그렇게 해서 내 즐거움을 뺏으려는 건가?"
닉은 지퍼를 무시해 버렸다. 억센 손길이 천을 휘어잡고 비틀었다.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앨리슨의 귀에는 절규처럼 들렸다. 어깨로부터 옷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것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닉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찢어진 옷을 닉이 끌어내렸다. 옷은 앨리슨의 발밑에 한 덩어리로 떨어지고 말았다. 닉의 팔이 허리에 감기더니 앨리슨의 몸을 번쩍 들어올려 다리에 감겨있던 드레스를 밀어냈다.
"놓아요!"
부끄러움에 발버둥치면서 앨리슨은 닉을 힘껏 걷어찼다. 닉은 갑작스러운 일격을 당하여 저도 모르게 그녀를 내려 놓는 바람에 앨리슨은 보기 흉하게 나동그라졌다. 앨리슨은 닉을 홱 돌아보았다. 의미가 없는 분노의 말이 떨리는 입술을 통해 튀어 나왔지만, 목소리가 되지는 못했다. 닉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뒤늦기는 했지만, 보기 어색한 겉옷 속에 자기가 무엇을 입고 있었는지를 앨리슨은 깨달았다. 닉은 의외라는 시선으로 앨리슨의 작은 젖무덤을 감싸고 있는 띠 모양의 레이스로부터 스타킹을 졸라매고 있는 화사한 가터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를 도발적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밤 당신은 정말로 나를 놀라게 만드는군. 숨기고 있는 비밀 생활이라도 있나?"
앨리슨은 기분이 뒤틀려 입을 열지도 않았고, 몸은 부끄러움에 뜨거워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허리를 굽혀 필사적으로 몸을 감추려고 애썼다. 닉은 앨리슨에게 시선을 준 채, 발길에 채여 넘어진 화장대 의자를 일으켜 세우고, 벗어 던진 디너재킷을 거기에 걸쳤다. 검정 넥타이도 풀어버리고, 입을 다문 채 셔츠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앨리슨은 가까스로 입을 열 수 있었다.
"어서 나가 달란 말이 예요! 어서 요!"
닉은 일그러진 입술에 희미한 웃음을 띄었다.
"무얼 하면 좋을 지 당신은 모르고 있군. 당신은 두 얼굴의 여자야. 알겠어? 외모로는 진실하고 사무적이며, 자제심이 강하지만, 한 꺼풀 벗겨내면..."
기분 나쁠 만큼 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닉은 와이셔츠를 집어 던졌다.
"섹시한 작은 악마 같다는 그 말이야. 나는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을 철두철미하게 찾아낼 생각이라고."
"그런...그런 짓을 하면 안돼요. 허락할 수 없어요."
닉은 비웃듯이 말했다.
"나는 당신의 허락을 기다리는 게 아니야."
"약속을 지키세요!"
턱을 치켜 올리면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앨리슨은 말했다.
"다시는 그런 요구를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당신에게 요구하는 게 아냐. 이번에는 뺏는 거야."
"당신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 군 요."
앨리슨은 몸을 조금씩 옆으로 움직여 볼까 하고 생각했다.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넓은 침대를 넘기만 하면 욕실 문에까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다음에는 욕실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글 수 있다. 견고한 피난처는 아닐지라도 집안을 온통 뒤집어엎는다든가 문을 때려 부수고 그 안에까지 들어 올 그가 아닐 것이다. 앨리슨은 입술을 적시면서 그 피난처까지의 거리를 재어보았다. 닉은 웃으면서 조롱했다.
"그건 당신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앨리슨은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몸을 옆으로 날려서, 주름이 하나도 잡히지 않은 침대에 뛰어 올랐다. 그리고 침대를 넘어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닉이 한 수 빨랐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앨리슨의 몸을 낚아채어 그녀를 부드러운 매트리스 위에 뉘어 그의 몸으로 덮어버렸다.
"대단한 기세야!"
그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내가 침대 위에 안아다 눕혀 주려고 했는데..."
그는 앨리슨의 양쪽 손목을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또 고양이처럼 할퀴면 안되니까..."
엷은 웃음을 띠우면서 닉은 그녀의 눈동자를 살피고 있었다.
"할퀸 상처가 아물 사이 없이 또 생긴다는 것은 곤란해..."
"놓아요, 이 손!"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사정해 보았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번에는 속지 않아. 그리고 전에도 말했지만 난 여자 없이 사는 건 좀 불편해."
닉은 손가락으로 앨리슨의 어깨 끈을 밀어 내렸다. 가슴을 가리고 있던 레이스가 벗겨지면서 부드러운 젖무덤이 닉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것을 입술로 부드럽게 애무했다.
"그리고 당신도 독신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는 속삭였다.
"다른 여자와 실컷 즐기는 바람둥이가..."
자기가 한 말이지만 자기 귀에는 확실하게 들려오지 않았다. 닉의 유혹에 질세라 되는대로 지껄여 보았지만, 이제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얼굴을 들어 앨리슨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홍조를 띠고 있었어.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마음대로 생각해!"
그가 몸을 일으키자 앨리슨은 그 순간 자신의 말이 효과를 거두어 위기를 넘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닉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몸에 걸친 마지막 보루를 허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앨리슨은 그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그의 강제적인 행위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애태우고 있었다. 명목상의 아내가 되는 것만 하더라도, 가족의 안전과 레이디미드에서 사는 것에 대한, 값비싼 대가라고 앨리슨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야 자신은 그 대가의 한쪽 면밖에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일단 닉에게 몸을 맡기게 되면, 변명의 여지도 없고 자존심까지도 남아 나지 않을 것이다. 아내가 되든 안 되든 간에 닉에게는 단지 정복한 한 명의 여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의 입술이 앨리슨의 입술에 살며시 와 닿았다.
"자, 이번에는 당신이 할 차례야."
닉은 가터를 풀고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스타킹을 벗기더니 늘씬하게 뻗은 하얀 다리를 입술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는 앨리슨의 머릿속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충족을 갈구하며 몸부림을 칠뿐이었다.
"긴장을 풀어, 앨리슨."
닉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짙은 입맞춤에 앨리슨은 잠시 수동자세로 견디어 냈으나, 이윽고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그 쾌감의 전율에 떨면서 그의 키스에 응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떠나 이마로부터 볼로 가볍게 움직였고, 그 다음은 부드러운 귓불로 옮겨갔다. 이윽고 닉은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나서, 눈에 불꽃을 튀기며 앨리슨의 몸을 구석구석 음미했다. 그리고 완벽한 정복자의 행동처럼 어깨로부터 발끝가지 두 손으로 더듬어 내려갔다. 앨리슨의 눈은 닉을 갈구했고, 열기 띤 입술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닉은 쉰 듯한 소리를 내면서 깊은 호흡을 했다. 앨리슨은 두 손을 그의 등에 돌렸다. 그것은 그의 침략에 대한 무언의 항복이었다.
"아아, 앨리슨, 당신은 멋져!"
목구멍 깊은 곳에서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닉은 여전히 그 악마 같은 애무를 계속하였다. 앨리슨은 꿈속에서처럼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목소리임을 짐작할 수 있는 목소리를 들었다.
"닉...아....닉."
닉이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녀의 몸을 힘껏 껴안았다. 닉은 잠시 가만히 있더니 입술로 부드럽게 앨리슨의 이마에서 땀을 닦아내 주고 눈에다 키스한 다음, 다시 입술로 돌아오는 도중에 오똑한 콧날에 키스했다. 살갗에 닿는 닉의 체온이 앨리슨의 몸속으로 스며들어와 앨리슨은 다시 격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제 두 사람은 세상의 모든 잡념을 잊어버린 채, 오직 서로를 깊이 탐할 뿐이었다. 이윽고 깊은 신음소리를 지르고 앨리슨은 감미로운 감각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평안함이 찾아왔다. 앨리슨은 닉에게 안긴 채 꿈속 같은 충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닉이 그녀를 자기 가슴에 끌어안았다. 앨리슨은 엎드린 채 얼굴을 그의 가슴에 파묻고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면서 무엇인가 종알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앨리슨은 시계가 시끄럽게 울려대기 몇 분 전에 눈을 떴다. 스위치를 누르려고 팔을 뻗은 그녀는 문득 행동을 멈추었다. 어딘가 멀지 않은 곳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팔꿈치를 짚으면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미간을 모으며 귀를 곤두세웠다. 틀림없이 욕실의 샤워 소리다. 앨리슨은 머리를 흔들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제쳤다. 그때 방바닥에 벗어 던져져 있는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앨리슨은 베개위로 쓰러졌다. 마구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서로가 사랑을 확인하던 동작 하나하나가 차례로 떠올랐다. 오, 하나님!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볼에 손을 갖다 대면서 앨리슨은 신음했다. 꿈이었으면 좋으련만...기억 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잠들기 전에 닉에게 안겨 있었던 순간이라든가, 닉의 피부에 입을 대고 사랑해요라고 종알거렸던 일도 생각나지 않을 텐데...어쩌자고 그토록 감상적이고 굴욕적인 고백까지 하다니...앨리슨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전쟁에서 패했을 뿐 아니라, 전면 항복을 했고, 거기에다 자신이 그에 대해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 까지 보여 주고 말았다. 자신의 육체적인 비밀이 모두 노출되었고, 마음과 감정까지 포로로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앨리슨은 자신이 노출된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위협 받고 있음을 느꼈다. 잊고 있던 자명종이 시끄럽게 울려대는 바람에 앨리슨은 깜짝 놀라서 일어섰다. 이제 곧 호너 부인이 차를 가지고 올 것이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한 증거를 보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앨리슨은 돌연 미친 사람처럼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언제나 입었던 실용적인 파자마를 서랍에서 꺼내어 입었다. 화려한 천과 레이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체인스토어에선 산 싸구려 속옷을 입고 있었더라면 오늘 아침 이런 후회는 하지 않았을 것을...그녀는 방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다가 옷장 속에 집어넣었다.
"방을 치우는 건가?"
두터운 카펫 때문에 닉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가 어느새 뒤에 와서 앨리슨을 껴안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닉의 젖은 몸이 향기를 내뿜는다. 안긴 채 이대로 몸을 맡기고 싶다는 새로운 충동을 느끼자 앨리슨은 감정과는 반대로 몸을 긴장시키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왜 그러는 거야?"
그가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호너 부인이 차를 가져올 시간이에요."
"상관없어. 차를 한잔 더 가져오라고 하면 돼."
"하지만 당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몸을 감았던 닉의 필이 긴장되었다. 앨리슨은 당황하며 덧붙여 말했다.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해요."
"아냐, 상관없어. 난 남편이야. 이곳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호너 부인도 결혼한 지 이미 30년 이상이나 되었어. 우리가 침대를 같이 썼다고 해서 쇼크를 받을 리 없어."
앨리슨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래도..."
어름어름 변명을 했는데 닉은 앨리슨을 자기쪽으로 돌려세우며 그녀의 열린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그런 생각 말고 나와 함께 침대로 가자고. 할 얘기가 있어."
"할 애기라면 여기서 해도 되잖아요."
"당신은 상관없겠지, 그 기묘한 옷으로 목까지 감고 있으니까. 그러나 난 젖은 수건 한 장 밖에 걸치고 있지 않단 말이야."
닉은 그녀를 번쩍 안고 침대로 가서 눕혔다. 그리고 젖은 수건을 허리에서 떼어내고 앨리슨과 나란히 누웠다. 앨리슨은 시선은 천장에 못박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선을 돌리자 그의 몸이 시야에 들어왔고, 그녀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침묵이 흘렀고 닉이 차갑게 말했다.
"후회 때문에 고뇌하는 부인의 표정이로군."
"할 얘기가 있다고 했잖아요?"
"응, 참 그랬었지."
그는 아까부터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지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난 오늘 런던에 가야 돼. 그래서 당신도 함께 갔으면 하는데..."
깜짝 놀란 앨리슨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하다가 이윽고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저어...당신의 옷을 새로 사야겠어. 옷을 살 때, 내가 봐줘야겠으니까."
"이곳에 사는 내 입장으로는 지금 가지고 있는 옷으로도 충분해요."
"그럴 테지."
놀리는 말투였다. 이때 앨리슨은 닉의 손이 시트 밑에서 허리의 곡선을 애무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입장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새 옷을 사주고 싶다면?"
앨리슨은 몸을 긴장시켰다.
"그만둬요."
"놀리는 거야? 아니면 농담을 하는 거야?"
"아무렇게나 생각하세요."
앨리슨은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제발 이젠 나가주세요."
"나가야 할 때가 되면 어련히 나가려고."
그는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억지로라도 나를 쫓아내고 싶은 모양이 군. 엊저녁에는..."
"어제 저녁은 동물처럼 행동하고 말았어요."
앨리슨은 얼른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일은 더 이상 기억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동물이라니? 당신은 가장 여자답게 행동했어."
차디찬 침묵이 흐른 다음, 닉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자랑할 일이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야. 점잔만 빼서 뭐할 거야? 정말 당신...놀랍더라고."
"그건 나를 추켜세우려는 말인가요? 글쎄요, 나는 감사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앨리슨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이유 때문에 런던에 같이 가자는 거군 요? 섹스의 곡예사 노릇을 더 하고 싶어서인가요?"
닉의 표정이 굳어졌다.
"좋을 대로 해석하라고. 당신은 분명히 섹스에 재능이 있는 학생이었어. 그러니까 레슨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해도 내가 잘못이란 생각은 하지 마."
"그렇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이곳의 생활을 포기하지는 않겠어요. 나는 이곳에서 생활하기 위해 결혼을 한 것이니까요. 침대에서의 당신의 묘기가 아무리 유명한 것이라 해도 그것을 위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한참만에야 부드럽게 말했다.
"모든 것을 다 거절할 정도로 이곳에 있어야 한다니...그렇게도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뭐야?"
"이곳은 우리 집이니까요. 어제 당신이 지적해 주었듯이, 이 집에 대해서 나는 의무와 책임이 있어요. 그리고 어머니에 대해서도."
"아 참, 어머니의 건강의 좋지 않던데...그러나 어머니가 당신을 무료 심부름꾼으로 부리고 있는 줄은 몰랐어. 어젯밤 어머니의 말을 듣자니, 당신이 어저께 쇼핑하러 간 것도 어머니 심부름 이었다지?"
"그랬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죠?"
앨리슨은 상대방의 시선을 피했다.
"어머니는...건강하지 못하세요. 그리고 어머니의 심부름을 해드리는 것은 내 즐거움이기도 하니까요."
"그밖에도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 그 쪽이 어머니를 돌봐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를 텐데."
대수롭지 않게 말을 했지만 저변에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같이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 제의는 고려해 볼 가치조차 없다는 말인가?"
앨리슨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내용은 계약에 없었잖아요. 그리고 이곳에 남아 있어야 겠다는 데는 또 한 가지의 이유가 있어요. 전에 나가던 직장에서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느냐고 교섭이 들어왔거든요."
"그까짓 것 거절했겠지?"
이번에는 분명히 화가 난 말투였다.
"아뇨,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요."
"그 따위 일은 생각해 볼 것도 없어. 일자리가 필요하다면 이곳에서도 할 일이 있으니까."
"전에도 두 군데서 일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못할 것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다가 당신은 이곳에 오는 일이 드무니까, 두 가지 일을 해도 그다지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외간 남자에게 자기 아내를 맡기기는 싫다고. 그리고 부동산 회사에 다시 돌아간다 해도 오래 근무하지 못할지도 몰라. 어제 저녁 당신이 예방조치를 했는지 의심스러우니 말야. 나는 물론 그런 건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임신을 할지도 모르잖아."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말은 앨리슨의 가슴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앨리슨은 또 한 번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렇겠네요. 하지만 임신한 채로 가만있을 내가 아니 예요."
"정말 지독한 여자로군."
천천히 말하는 그의 파란 눈이 경멸하는 표정을 띠고 앨리슨을 노려보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임신 중에는 수갑을 채워서 내 손목에 묶어 놓을 거야!"
"굉장한 부성애로군요. 당신 성격으로 본다면 그다지 신기한 일도 아니지만요."
"진기한 경우라고 한다면 앨리슨을 안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 바로 그것뿐이야. 그 유혹에 지기 전에 어서 이 방을 나가는 것이 좋겠군."
닉은 화를 내며 시트를 걷어 제치더니 팽개쳤던 수건을 발길로 걷어차고 방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앨리슨을 노려보고 나서 뚜벅뚜벅 걸어 옆 방의 문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쾅 하고 앨리슨의 머릿속에서 메아리 쳤다. 앨리슨은 주먹을 입에 대고 침대에서 몸을 웅크리며 누웠다. 닉이 방안을 돌아다니면서 옷장을 여닫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는 그의 방 문이 세차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가 앨리슨의 방 앞을 지나 복도로 멀어져 갔다. 런던을 향해서...그는 앨리슨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문이 열렸다. 앨리슨은 몸을 일으켰다. 어리석게도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호너 부인 이었다.
"주인양반께서는 서둘러 출발하셨어요."
가정부는 쟁반을 놓고 커튼을 제쳤다.
"파티가 끝나자마자 하루도 쉬시지 않고 직장에 가셔야 하다니 피곤하시겠어요."
그리고 앨리슨을 보고 입을 열었다.
"피곤하신가요? 안색이 좋지 않은데요. 잠을 편히 못 주무셨어요?"
"네, 악몽에 시달렸어요."
앨리슨은 컵의 물을 마시고는 말했다. 호너 부인은 혀를 찼다.
"그랬군요? 하지만 곧 잊게 될 거에요."
천만에...이 꿈은 잊게 될 꿈이 아니라고요. 앨리슨은 혼자 남은 후에 그런 생각을 했다. 악몽과 같은 이 정적 감과 가슴의 통증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앨리슨은 수화기를 놓고 데스크에서 일하고 있는 사이몬을 돌아보았다.
"그레샴 씨였어요. 결국 심프슨 씨의 제의를 받아들이겠대요."
"기적은 아직도 우리와 함께 있단 말인가!"
사이몬은 빙그레 웃었다.
"부동산의 실질적 가치와 시장에 대한 앨리슨의 열변에도 힘입은 바 크지만..."
"심프슨 씨가 현금거래를 하겠다니 그것도 다행한 일이고, 그레샴 씨가 전화를 해주신 것도 기쁜 일이에요. 거래가 잘 성립되었으니 지금 조퇴를 해도 눈감아 주겠죠?"
"그렇고말고, 앨리슨은 휴가라도 갈 자격이 있지. 복직을 한 후엔 황소처럼 일을 했었으니 말이야."
사이몬은 눈썹을 모으면서 앨리슨을 바라보았다.
"앨리슨,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해. 요즈음 안색이 아주 나빠졌어. 몹시 피로해보이고..."
"멜라니가 방학을 하고 돌아와서 집안일을 도와주면 안색도 좋아지겠죠."
"그렇겠군, 멜라니는 기운이 좋으니까. 집안 일을 잘 돌봐주겠지. 그러고 보니 멜라니를 만난 것도 꽤 오래 됐어."
"2주일전 주말에는 외박이 가능했을 텐데 집에 오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번..."
"그럼 지금 멜라니에게 가보려는 건가?"
"잠깐 어디 좀 들렀다가 갈 거에요."
앨리슨은 우물쭈물 하다가 덧붙여 말했다.
"시어머니와 점심을 함께 들기로 했거든요."
"안됐군."
사이몬은 웃었다.
"안색이 나쁜걸 보니 시어머니에게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 군."
"그렇지 않아요, 아주 좋은 분이세요. 자주 만나고 싶을 정도인걸요."
사이몬은 조롱하는 듯한 눈초리를 앨리슨 쪽으로 힐금 돌리면서 물었다.
"그분의 아들에게도 같은 생각인가?"
앨리슨이 화난 얼굴을 홱 돌려 그를 쳐다보자 달래듯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미안, 미안...금지구역이란 것을 깜박 잊었어. 미안해."
"왜 그런 말을 묻는 거죠?"
"앨리슨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앨리슨이 그 사람으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이 보기 딱해서 그래. 좀 더 사이가 좋아졌으면 얼마나 좋겠어."
"글쎄요, 그건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앨리슨은 괴롭다는 말투로 말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럼 월요일에 다시..."
사이몬은 접수계를 지나 밖에까지 따라 나와서 앨리슨이 백 속의 열쇠를 찾는 동안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바라보았다. 자동차는 최신형의 알파로메오 였다. 닉이 런던에 간 뒤 며칠 만에 보내 준 것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위해 전화를 했었지만 비서가 받았었다. 닉이 회의 중이라고 해서 통화를 못했지만 그 후로는 다시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3주일이 지나도록 닉이 레이디미드에 돌아오지 않아서 인사를 못한 채 차를 이용하고 있었다. 직장에 다시 나오게 해준 사이몬에게 앨리슨은 감사하고 있었다. 덕택에 온종일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고도 지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역시 고독을 씹으며 널따란 침대에서 몸을 뒤치락거렸다. 안색이 나빠지는 것도 당연하다고 느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것이 수면부족의 이유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몬은 초조하다는 듯이 물었다.
"월요일에는 나올 거지? 앨리슨의 사생활을 간섭할 생각은 아니었어. 내가 좀 간섭을 해야 회사를 그만두지 않을 것 같아서..."
"알고 있어요."
앨리슨은 부드럽게 말했다.
"화를 냈던 내가 나빴어요. 그처럼 친절히 대해 주는데..."
앨리슨은 뒤꿈치를 들면서 사이몬의 뺨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사이몬이 손을 뻗어 껴안으려고 했지만 그보다 빨리 앨리슨은 몸을 빼어 자동차에 올라탔다.
"걱정 말아요."
차를 출발시키면서 앨리슨이 소리쳤다.
"돌아올 테니까!"
햇빛도 따뜻했고 브리스토 부인의 집까지 달려온 드라이브는 즐거웠는데, 이제부터 닉의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앨리슨의 마음은 무거웠다. 이번에도 거절하면 부인은 화를 낼 것이다. 닉의 대해서 무엇인가 질문을 해오면 적당히 좋게 대답하기로 하자. 아들과 며느리 사이가 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상냥하게 맞아주는 그녀의 태도에는 아무것도 숨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아서 점심식사를 저 뜰에서 할까 하는데...파이와 니스 샐러드 뿐인 가벼운 식사야."
"좋아요."
앨리슨은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
부인은 앨리슨의 모습을 은근히 예리한 눈으로 살펴보았다.
"푸딩이라든가 그 밖의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만들 걸 그랬지...좀 여윈 것 같군."
"모두들 그런 말씀을 하세요."
"몸을 조심해야지..."
부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음 말을 이었다.
"직장에 나가는 게 부담스럽지 않니?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을 텐데..."
"괜찮아요, 집안일은 그런대로 해나가고 있으니까요."
"어머니가 좀 돌봐 주시겠지?"
"가능한 일은 돌봐 주신 답니다."
앨리슨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 몇 주일 동안 어머니가 자신에게 한 비난과 잔소리는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애썼다. 앨리슨이 직장에 다시 나가려고 하자 어머니는 자신이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한사코 반대했고, 직장에 나가기 시작하자 이전보다 갑절 이상이나 까다로운 요구를 해왔던 것이다.
"어머니는 운전을 하시겠지?"
앨리슨은 깜짝 놀라며 브리스토 부인을 힐금 바라보았다.
"면허증은 있지만 운전하시는 걸 본 일이 없어요."
"그것 참 안됐군."
부인은 글라스에 셰리주를 따라 앨리슨에게 건네주었다.
"그분도 자립할 기회가 많이 있을 텐데...외출은 하시지?"
앨리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도 않으세요. 집에 계시는 편이 좋으신가 봐요. 물론 손님이 오시면 거절하시지는 않지만..."
"그 정도라도 어는 정도 마음은 놓이겠네."
부인은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으면서 셰리주를 입에 댔다.
"그러나 저러나 앨리슨도 고생이 많겠군."
앨리슨은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즐거운 때도 있어요. 동생 멜라니가 오늘 돌아와요. 동생이 옆에 있으면 어머니는 언제나 기운이 나시거든요."
"그래?"
부인은 빙그레 웃었다.
"시험 때문에 긴장되어 그 발랄한 성격에 영향을 주지나 않을까 걱정되더군. 오 참! 멜라니가 스카프를 이곳에 두고 갔어. 학교로 보내 줄까 했지만 틈이 없었어. 네가 갖다 주려무나. 내가 안부전하 더 란 말도 하고."
"네, 그렇게 하지요."
앨리슨은 기계적으로 대답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동생이 여기를 방문했던가요?"
"야냐, 잠시 들렀을 뿐이야. 닉이 학교에 데려다 주기 전에 내가 차 한잔 하자고 불러들였지."
닉이 멜라니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고? 앨리슨은 현기증이 났다. 언제였을까? 앨리슨이 아는 한, 레이디미드를 비운 이 몇 주일 동안 닉은 런던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을 텐데...그런데 이곳에 왔었다는 것을, 지금 시어머니의 말 한마디로 우연히 알게 되었다. 틀림없이 학교에까지 멜라니를 찾아가서 여기로 멜라니를 데리고 온 것이다. 몇 주 전에 멜라니가 집에 못 온다고 우물쭈물 말하던 일이 생각나서 앨리슨은 마음이 상했다. 그 일 때문에 그랬었을까...? 그렇다면 닉과 함께 있고 싶어서 였을까?
"동생은 닉을 좋아해요."
앨리슨은 마음의 동요를 감추려고 적당이 얼버무렸다.
"닉도 그런가 보더라."
부인은 앨리슨의 혼란되어 있는 감정에 불을 붙이는 줄도 모르고 상냥하게 말했다.
"너도 종종 함께 오지 그랬어. 요즘 바쁜 일이 있다고 닉이 말하더라 만...자아, 점심식사를 들까?"
식욕을 자극할 만큼 맛있는 요리였지만 앨리슨은 목이 메어서 한 입 한 입 억지로 우겨 넣듯이 먹어야만 했다. 그러나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평소 이상으로 행동은 조심했다. 브리스토 부인은 자신이 무심코 던진 말이 앨리슨에게 얼마나 큰 쇼크를 주었는지를 알 리가 없었다.
"얘야, 와주어서 정말 고맙다."
부인은 앨리슨을 힘껏 껴안으며 말했다.
"저어, 멜라니가 방학을 하거든 멜라니를 데리고 와줘. 정원 가꾸는 법을 가르쳐 주기로 약속을 했으니 기대가 클 거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앨리슨은 그저 멍청히 고개를 끄덕이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차에 올라탔다. 동네를 벗어나자 앨리슨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엔진을 껐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멜라니가 닉을 만나고 있다니...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더구나 멜라니는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따돌려 놓고 두 사람이 몰래 만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앨리슨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은 망상인지도 모른다. 멜라니는 아직 나이가 어리다...아냐, 그것은 언니로서 동생을 보는 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 급성장하고 있는 동생을 언제나 어리다고 만 보고 있는 내 눈이 어린지도 모른다. 멜라니는 예쁘고 발랄하고 지적이고...닉이 반할 만도 하지. 그런 점을 이용할 만큼 그는 비열한 사람이 아니라고 앨리슨은 고쳐 생각해 보았다. 그저 누이동생처럼 귀여워하고 있을 뿐 일거야. 그 이상의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러 멜라니를 데리러 갔던 사실은 변함이 없다. 어쩌면 멜라니가 만나러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멜라니가 앨리슨의 입장이라면 닉과의 결혼생활은 틀림없이 행복할 것이다. 멜라니 라면 하룻밤 사랑을 나눈 채 닉을 자신에게서 떠나가게 할 리 만무하다. 또 잠자리를 함께 한 상대가 멜라니 였다면 그도 런던으로 갈 생각은 안 했을 텐데. 멜라니는 남성들이 찾는 이상형의 여성이니까 말이다. 더구나 멜라니 라면 앨리슨처럼 자신감을 상실하고 고민 따위를 할 리도 없다. 그 자신, 인생에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해야 손에 넣을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멜라니는 자신이 찾고 있는 남성은 바로 형부라는 마음을 굳혔는지도 모른다. 가슴이 아프도록 저려서 앨리슨은 얼굴을 찡그렸다. 바보스러운 생각을 했던 자신을 꾸짖어 보기도 했지만 그러한 상념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15세의 나이 차이는 넘지 못할 갭이 아니다. 멜라니도 이제 18살 자기 운명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다. 아마도 닉의 대한 마음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생기는 어떠한 장해물이라도 제거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을 것이다. 언니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쯤은...혹시 닉이 멜라니에게, 이 결혼은 갑자기 이루어진 계약결혼이라는 사실과 계약한 뒤 곧 후회하게 되었다는 등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계약결혼을 파기하더라도 쌍방간에 상처 입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앨리슨은 울고 싶었다.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처지를 절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만도 없었다. 자신이 억울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직은 없지 않은가. 오 하나님, 제발 그런 일이 없도록 보살펴 주소서! 앨리슨은 다시 시동을 걸었다. 멜라니의 학교가 있는 마스콤파크까지 의 길은 주말에는 언제나 붐볐다. 테니스코트 옆에 차를 세워놓고 본관으로 향하면서 앨리슨은 자기 혼자서 멜라니를 데리러 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닫자 마음이 아팠다. 전에는 아버지를 따라오곤 했기 때문이다. 돌아갈 때는 언제나 주말의 들뜬 분위기를 만끽하며 길을 멀리 우회한다거나 때로는 아버지가 두 딸을 위해 한턱내기도 했다. 오늘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귀가 길이 침울해질 것이다. 정면 현관에서 미스 레슬리와 만났다.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역시 가까이 하기가 어려운 사람이다.
"어서 오세요, 브리스토 부인, 만나서 반가워요. 늦었지만 결혼 축하 드려요."
"감사합니다."
미스 레슬리의 단단한 손을 잡으며 앨리슨은 중얼거렸다.
"부인께는 부친을 여의신 슬픈 시기이겠습니다만, 그래도 멜라니는 위기를 용케 넘겼습니다. 성적도 떨어지지를 않았고요. 주인양반의 배려가 컸던 것 같아요. 아주 매력적인 분이시고,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셨어요. 우리 학교에 건축기금을 선뜻 기부해 주셔서 과학관을 세울 수 있게 됐답니다. 또 도서관에는 기증품까지 보내 주셨고요. 너무 감사하고 있어요."
노처녀 교장선생님은 여기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여러 번 이곳을 방문해 주셨는데 그 점이 멜라니에게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아버지를 여읜다는 것은 그 나이의 소녀로서는 쇼크가 크거든요. 보통 때는 주말이라도 개인적인 외출은 허락하지 않습니다만 멜라니의 경우는 예외로 인정해도 좋겠기에 내보내기도 했죠."
"네, 그러셨어요? 감사합니다."
앨리슨은 억지로 대답했다. 미스 레슬리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모두 송곳같이 가슴을 찔렀다.
"멜라니에게 쓸쓸한 주말을 보내지 않도록 배려했을 뿐이죠."
미스 레슬리는 웃었으나 관심은 이미 옆으로 다가오는 몇몇 학부형들에게 쏠리고 있었다. 앨리슨은 해방되었다. 멜라니는 세 사람이 함께 쓰는 방에서 혼자 남아서 가방에 소지품을 담고 있었다. 앨리슨을 보자 깜짝 놀라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맞아들였다. 뭔가 켕기는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억측으로 남을 의심하지 말자고 앨리슨은 자신을 달랬다.
"없어진 게 있어, 언니. 틀림없이 제인과 헬렌이 집어갔나 봐."
멜라니는 무릎을 구부리며 침대 밑을 샅샅이 찾아보았다.
"무엇을 찾는데?"
앨리슨이 물었다.
"아빠가 파리에서 사다 준 스카프..."
멜라니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건 소중한 건데..."
그 스카프는 앨리슨의 백 속에 있었다. 꺼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앨리슨은 서둘지 않았다.
"어디다 놓아둔 채 잊고 왔겠지."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멜라니가 말했다.
"놓고 올 만한 곳이 어디 있어, 아무데도 간 일이 없는 걸...아 참, 집에다 놓고 왔을까? 중간 휴가 때."
"그럴 거야."
명치 끝이 텅 비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가방들 모두 네거니?"
"응, 트렁크는 오늘 아침 역에서 부쳤어."
서먹서먹해 하는 멜라니를 보자 앨리슨은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장벽이 높이 쌓인 듯한 생각이 들었다. 지나친 생각은 아니다. 멜라니는 앨리슨이 방에 들어온 후, 단 한 번도 눈길을 앨리슨에게 마주한 일이 없다. 두 사람은 잠자코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엄만 좀 어때?"
멜라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늘 그러시지 뭐."
"그럼 또 저기압이겠군."
멜라니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있었다.
"레이디미드에 계속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어머니에게 좋은 것이지 나쁜 것인지 잘 모르겠어. 깨끗이 나가서 사는 편이 긴 안목으로 볼 때는 낫지 않을까?"
"글쎄."
앨리슨은 자동차의 트렁크에 멜라니의 가방들을 넣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언니도 생각해 보라고. 결국 엄마를 위해서 좋을 것도 없어. 남들을 손가락 하나로 혹사 시키면서 날이면 날마다 하는 일 없이 지내고 있잖아."
"어쨌든 여러모로 생각해 보자."
앨리슨은 단호하게 말하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잠자코 있어. 네가 세상 사를 바꿀 수 있다면 집에 도착한 다음에 하라고."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멜라니는 당황해 하며 말했다.
"언니를 위해서 한 말이야."
"걱정해 줘서 고맙다. 너라면 이런 식으로 해결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당연하지."
멜라니가 응수했다.
"나라면 엄마도 언니에게 하는 것처럼 혹사하지 못하게 했을 거야."
여기서 갑자기 얘기가 끊어졌다.
"언쟁은 그만두기로 하지."
"옳은 말이야. 화제를 바꾸는 편이 낫겠다. 학교는 어떠니?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어?"
"케케묵은 마스콤파크에서?"
멜라니는 자조하듯이 물었다.
"지붕 위에 비둘기만 앉아도 그것이 큰 사건이 될 정도야."
"하지만 2주일 전에는 뭔가 있었던 게 아니야?"
앨리슨은 핸들을 너무 꽉 쥐고 있음을 깨닫고 손에서 힘을 뺐다.
"집에 오지 않았을 때 말야...기숙사에서 드라마 콘테스트라도 있었니?"
침묵이 다시 흘렀다. 그리고 멜라니가 대답했다.
"응, 정말 재미있었어. 기숙사 청 팀이 우승했어."
"그랬어?"
마음속으로 앨리슨은 기도하고 있었다. 닉이 데리러 와서 나갔었다고 말하기를...이 언니의 상상이 지나쳤다고 차라리 꾸짖어 줘...동생을 의심하고 질투하다니...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말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나왔다.
"주말의 귀가를 희생하다니...그만한 가치가 있던 일 이었니?"
곁눈질로 살펴보자 멜라니는 입을 약간 찡그리면서 미소 짓고 있었다.
"응, 모처럼 아주 재미있게 보냈어."
갑자기 토하고 싶었다. 앨리슨은 차를 길가에 세우고 도어를 밀치면서 굴러 떨어지듯이 뛰어내렸다. 그리고 풀밭에 토했다.
"언니!"
멜라니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앨리슨 옆에 와서 무릎을 꿇고 손수건을 내밀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디 아파?"
몸을 일으킨 앨리슨은 현기증이 났다.
"아냐, 좀 더워서 그런 가봐."
멜라니는 눈을 치켜뜨면서 앨리슨을 응시했다.
"그냥 덥기만 한 거야? 혹시 나 이모가 되는 거 아냐?"
매월 있어야 할 것이 늦어지고, 이번 주에 접어 들어서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토기가 있었다. 앨리슨은 사실대로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기가 태어날 것임을 알게 된다면 그 가능성만으로도 멜라니는 닉과의 관계를 정리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닉은 의무감으로 앨리슨에게 묶인 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웬 지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앨리슨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자, 빨리 가자, 엄마가 걱정하시겠다."
자동차가 저택 문을 들어서면서 앨리슨은 현관 앞에 차가 서있는 것을 보았다. 멜라니가 기뻐서 소리쳤다.
"형부의 차야! 형부가 오셨나 봐!"
"기적이로구나."
앨리슨은 주의력을 집중시키고자 안간힘을 쓰면서 차를 나란히 주차 시켰다. 멜라니가 먼저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 현관에 홀로 남은 앨리슨은 잠시 우두커니 서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기 방으로 향했다. 앨리슨은 허둥지둥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갔다. 차가운 물을 흠뻑 맞고 정성껏 이를 닦았다. 그것만으로도 한결 기분전환이 되었고 몸의 컨디션도 회복되었다. 침실로 돌아오니 닉이 창문을 등에 지고 서있었다. 창 밖의 햇볕을 배경으로 서있는 검은 윤곽이 어쩐지 음침해 보였다. 앨리슨은 벗어 놓은 옷을 반사적으로 집어 들고 몸을 지키기라도 하듯 가슴에 댔다. 그는 입을 찡그리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빅토리아 시대가 아니니까 협박을 받은 처녀처럼 굴지 않아도 돼. 기분이 괜찮아졌는지 물으러 왔을 뿐이니까."
앨리슨은 겨우 목소리를 냈다.
"뉴스가 빠르네요."
"알리기가 싫었나? 아니면 걱정시켜 주기가 싫었나? 나는 걱정하지 않아."
내뱉듯이 말했다.
"무슨 얘기죠? 속이 거북했을 뿐인데?"
앨리슨은 시치미를 뗐다.
"정말?"
그는 의심스럽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 채 앨리슨의 몸을 응시하였다.
"안색이 나쁜데?"
"괜찮다니까요, 나가 주시지 않을래요? 옷을 갈아입어야겠어요."
"어서 사양말고 갈아입어."
닉은 상냥하게 말했다.
"잊고 있는지 모르지만 옷을 걸치지 않은 몸은 지난번에 이미 보았어...그땐 매혹적이었어."
"매혹적이라고요? 흥."
앨리슨은 옷으로 몸을 가리고 서있는 자신이 우스워 보였다. 그녀는 옷을 침대 위에 놓고 옷장 쪽으로 걸어갔다. 앨리슨은 옷걸이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한 벌을 꺼내서 머리에 뒤집어 쓴 다음 몸으로 내리고 지퍼를 올리려고 하였다.
"내가 도와주지."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닉의 손가락이 몸에 와 닿은 순간, 앨리슨은 몸을 떨었다.
"손대지 말아요!"
몸을 제치면서 앨리슨은 거칠게 말했다. 닉이 바짝 긴장했다.
"바보짓 작작하라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앨리슨은 그의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고 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도 들었다.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참 동안을 그러고 있다가 그녀는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에서 마치 딴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가 한 말처럼 창백한 얼굴에 뼈까지도 가늘어 진 것 같았고, 광대뼈 아래 있는 보조개는 평소보다 더 옴폭 패였다. 앨리슨은 머리에 빗질을 하고 굳어진 입술에 립스틱을 발랐다. 잠시 후 앨리슨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거실에 다가가다가 어머니가 떠들어대는 목소리를 들었다. 앨리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실에 들어섰더니 어머니는 마치 순교자와 같은 모습으로 난로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고, 멜라니는 상기되어 반항적인 얼굴로 창가에 서있었다.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내가 얼마나 쇼크를 받고 있는지를 너희 둘이서 그래도 좀 알아 줄줄 믿었다."
이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앨리슨은 폭발하려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제했다.
"엄마의 기분을 살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앨리슨은 부드러운 말투로 사과했다.
"셰리 주 한잔 드시겠어요?"
"그래, 자극제가 필요하겠다. 몇 주일씩이나 못 만났던 딸이 돌아오자마자 어미에게 설교를 하다니...세상에 이런 고약한 버릇이 어디 있어!"
"설교가 아니 예요."
멜라니가 반발했다.
"지난번에 제가 집에 들른 이후, 한번이라도 외출을 하셨는지 여쭤보았을 뿐 이에요. 그리고 언니는 집안일을 돌보랴, 회사에 나가랴, 바쁜데 엄마의 잔심부름까지 해야 하니까..."
"네 말투가 마음에 안 들어! 이따금 내 심부름 좀 해주기로서니 앨리슨에게 큰 부담이 되지는 않을 거다. 앨리슨 조차도 요즈음에는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사이몬에게 시간을 너무 빼앗기고 있는 게 아닌지 원! 꼭 직장에 나가야 할 만큼 돈에 옹색하지는 않을 텐데..."
"그건 사실입니다."
닉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들어오는 발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앨리슨은 깜작 놀라서 들고 있던 포도주병을 떨어뜨릴 뻔하다가 옷에 셰리 주를 흘리고 말았다. 닉은 냉소하는 듯한 눈으로 앨리슨을 노려보며 덧붙였다.
"틀림없이 돈 말고도 다른 동기가 있겠지요."
앨리슨은 포도주병을 쟁반에 다시 놓으며 쌀쌀 맞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 동기 중에는 자립하려는 의지도 들어있어요."
어머니가 혀를 찼다.
"그것이 오늘날 여자들의 사고방식이라니까...남편이 있는 몸으로 그런 것을 생각하다니...정말로 엉뚱해서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결혼한 이후 너의 아빠만 의지하고 살아왔어도 잘 살아왔다."
앨리슨은 어머니에게 글라스를 건네주었다. 다행히도 손은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요즈음처럼 세상이 불안정할 때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이 제일 중요해요. 가령 결혼을 했다고 해도 옛날처럼 오래가지 못하는 수가 흔하니까요."
"앨리슨!"
어머니가 성이 나서 소리쳤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미안해, 닉. 두 딸아이가 오늘은 어떻게 된 것만 같군 그래. 원 세상에..."
닉은 자신의 위스키를 따르더니 소다수를 섞었다.
"멜라니의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앨리슨은 좀 토했다나 봐요. 그러니까 그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요."
"아니, 정말이냐? 그런 얘기를 못 들었는데...앨리슨은 책임이 무거운데 풀타임으로 직장에 나간다는 것은 무리야. 자네가 단호한 태도로 말려야지, 닉."
"예,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차갑도록 파란 눈이 앨리슨의 창백한 안색과 눈 밑의 검은 기미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심플한 녹색 드레스에 싸인 날씬한 몸을 위에서 아래까지 훑어보았다.
"과로한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앨리슨은 글라스를 팽개치듯 내려 놓았다.
"마치 내가 이곳에 없는 것처럼 말하는데...삼가주세요."
"하지만 앨리슨..."
닉은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당신은 집에 없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까 하는 말이 잖아."
앨리슨의 눈썹이 도전하듯 치켜 올라갔다.
"정말로 그것 때문인가요? 아니면 아내를 직장에 내보내는 것이 창피해서 그러는 건가요? 계약조항은 하나도 위반하지 않았어요."
그는 조롱하듯 앨리슨을 바라보며 위스키를 모두 마셨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지...단둘이 있을 때에. 그럼 저녁식사를 할까?"
식사시간은 분위기가 무거웠다. 제일 말수가 적은 사람은 멜라니였다. 앨리슨은 그것을 알아차리자 가슴이 아팠다. 멜라니는 얼굴을 들지도 않은 채 식사만 계속했다. 남의 남편을, 그 당사자의 집에서 사랑하는 괴로움, 그 괴로움을 이제서야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앨리슨을 괴롭히고 있는 것과 똑같은 질투의 고통을 맛보고 있는 것이리라. 식사가 끝나자 앨리슨은 일어섰다.
"오늘 밤은 일찍 쉬어야겠어요. 일찍 자면 피로도 풀릴 테니까요."
"그래 잘 생각했어."
닉이 부드럽게 말했다.
"나도 곧 갈게."
한마디 쏘아 붙이고 싶었으나 앨리슨은 참았다. 계단을 올라갈 때 식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벌써 닉이 따라오는 줄 알고 앨리슨은 걸음을 재촉했다. 하이힐이 계단 끝에 걸려서 한쪽이 벗겨질 뻔했다. 넘어지려는 순간 가까스로 몸의 중심을 잡았다. 그때 아래층 현관에서 멜라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부, 모든 것이 빗나갔어요. 앞으로 어떡하면 좋지요?"
현관 쪽에서 발소리가 났고 두 사람이 들어간 서재의 문이 조용히 닫혔다. 앨리슨은 계단 난간에 기대어 서서 어두운 현관을 멍청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처럼 값비싼 희생을 지불하고 얻은 가족들의 안전도 이제는 끝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해왔다. 앨리슨은 계단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처럼 고독하고 불안했던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앨리슨은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도망치려고 해도 갈 장소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굴욕을 이곳에 있으면서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닉과 멜라니가 부둥켜안고 속삭이는 모습...껴안고 키스하는 모습...온갖 잡스러운 환상이 마치 고문을 하듯 앨리슨의 머리에 떠올랐다. 두 사람의 관계가 폭로될 위험 따위는 염두에도 없을 만큼 열애에 빠진 걸까? 서로에 대한 애정에 자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할 생각이 아닌가 보다. 좋다.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지는 말자. 방해하려고 해 보았자 방해할 수도 없을 것이고...또 괄시 받는 아내가 바보스러울 정도로 그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 하더라도 당사자인 닉이 모르고 있으니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죽는 날까지 가슴속에 파묻어 두자. 앨리슨은 두 손을 배에 갖다 댔다. 마치 모호라도 하듯이 가볍게. 이 비밀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 일이 밝혀지게 되면, 수많은 문제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될 것이 틀림없다. 닉은, 아기는 자기 계획 속에 들어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었다.
"역시 이곳에서 나가야 해."
앨리슨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야만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피해가 없을 것이다. 자신도 닉이 멜라니와 함께 있는 것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앨리슨은 상념에 잠겨 침실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발이 저려왔고 추위를 느꼈다. 진저리를 치며 생각해 보니 그렇게 앉아 있은 지가 벌써 한 시간이나 되었다. 굳어진 몸을 일으키고 주름진 옷을 펴려고 하다가 깜짝 놀라 손이 멎었다. 문이 열리면서 닉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렇게 놀란 시늉을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오기를 당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나가요, 방해 받고 싶지 않아요."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는데, 남이 안 듣는 곳은 이곳밖에 없어."
"지금...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럼 구토 증세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일시적인 것이 아닌 거로군...의사를 부를까?"
"아니 요! 의사는 필요 없어요. 조금만 쉬면 될 것 같아요."
"그렇담 좀 자지 그랬어. 할말을 간단히 하고 나갈게.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귀찮다면."
"그래요, 귀찮아요. 그대로 나가 주었으면 좋겠어요."
앨리슨은 닉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도전을 심하게 해오는군. 얼마나 굳은 결의인지 시험해 봐야겠어. 달링."
앨리슨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제발 날 괴롭히지 말아요. 내가 도전할 일이 뭐 있겠어요. 당신이 대결하기를 바라는 거지."
"그 말이 맞아. 당신이 나와 함께 있기를 싫어하니까 하는 수 없이 이러는 거야."
"당신이야 상대방이 싫어하건 좋아하건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일에 부자유를 느끼지 않을 텐데..."
닉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일을 추궁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람? 하긴 오늘 내가 하려는 얘기와 그 얘기는 부합될 것도 같군."
닉은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지금 이대로의 상태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다 잘 알고 있어. 이제 각자 결혼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해. 그래서..."
"그래서 이혼하자는 말이 군 요?"
앨리슨은 상대방의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덧붙였다.
"네, 좋아요. 그렇게 하려면 가급적 빠른 게 좋겠어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닉이 입을 열었다.
"그럴까?"
"어떤 희생을 치르고 라도 내가 붙들고 늘어질 줄 생각했었나 요?"
앨리슨은 비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하지는 않아요. 자유를 누리고 싶은 것은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깨끗이 헤어지는 것이 제일 좋겠어요.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원조도 청하지 않을 거니까 염려 마세요."
"원조해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당신이 갑자기 자유에 매력을 느끼게 된 이유는 알 것 같지만 구체적으로 좀 더 얘기할 필요가 있겠어. 어쨌든 형식적으로나마 나와 결혼한 이상 딴 남자와 공공연하게 놀아나는 일은 용서치 못해."
앨리슨은 미간을 찌푸리고 닉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오늘 이곳에 온다는 말을 사전에 연락했더라면 좋았겠지? 그랬더라면 두 사람이 좀 더 신중을 기했을 테니까 말이야. 가관이더군. 행 길에서도 환히 보이는 곳에서 당신과 사이몬이 달콤한 이별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오해도 이만저만...."
앨리슨의 말을 닉의 화난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오해라고 말할 셈인가? 당신이 사내에게 키스하는 것을 보았어. 그 친구가 당신을 보는 눈, 그 눈은 보통이 아니었어. 열을 잔뜩 올리고 있는 것이 환히 보였어."
"오해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이 애인끼리의 키스라는 건가요?"
"나에게 변명할 생각은 말아. 이왕이면 당신도 좀 더 멋진 애인을 발견했더라면 좋았을 걸."
닉이 다가오자 앨리슨은 또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사이몬과 정보를 교환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예를 들면, 사이몬은 당신이 섹스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개암나무 눈 색깔이 반짝이는 초록색으로 변하는 것을 알고 있나? 아기 고양인 눈처럼...?"
앨리슨은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만!"
그녀는 두 손을 들어서 귀를 막고 소리를 질렀다.
"사이몬의 대한 일은 오해예요...맹세코 정말 이에요. 비록..."
앨리슨은 말이 막혔다.
"뭐야? 무슨 말을 할 생각이었어?"
"비록 사실이라 하더라고 당신이 비난할 성질은 아니 예요. 당신이 몰래 멜라니와 만나고 있는 것을 난 알고 있어요."
닉의 표정이 흐려졌다.
"멜라니를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 예요. 그 애는 아직 어리고...그래서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에요. 당신에게 그 애가 열을 올린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어요. 하긴 당신에게 어울리는 아내는 어쩌면 그 애 일지도 몰라요."
침묵이 흘렀다. 한참 있다가 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꽤 복잡하군. 나에게는 멜라니, 당신에게는 사이몬 이라...네 사람이 사각관계 란 말인가?"
닉이 또 한 발짝 다가섰다. 침대 가장자리가 다리에 닿아서 앨리슨은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부탁이에요. 나도 당신만큼이나 이 결혼 계약을 취소시키고 싶어요. 그리고 이 일 때문에 내 자존심이 몹시 상했어요."
"조금쯤 콧대가 꺾였는지는 몰라도 아직 당신의 자존심은 건재한 것 같은데. 당신을 내계 붙들어 매서 비참한 꼴로 만들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하면 두 사람 모두에게 이로운 게 아니겠어요? 이제...필요한 말은 끝난 것 같으니 나가줘요. 제발 날 혼자 가만히 있게 해줘요."
"혼자 가만히 있게?"
거칠게 말했다.
"이제 이혼 소송만 끝나면 당신은 앞으로 실컷 혼자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직 당신은 나의 법적인 아내야. 그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생각이야."
닉의 팔이 앨리슨의 허리를 감으면서 끌어안았다. 그리고 뜨거운 키스로 입이 가려지자 앨리슨은 숨이 막혔다. 몸을 비틀면서 밀어내려고 했으나 그의 힘이 더 세게 앨리슨을 껴안고 있었기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닉은 앨리슨을 번쩍 안아 다가 침대에 내려놓았다. 계속되는 짙은 키스에 앨리슨은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입을 열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갑자기 맥이 빠지면서 저항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라면 매 순간순간마다 소중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닉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이번에는 반대로 앨리슨이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아 몸을 밀착시켰다. 흐트러진 호흡을 깊이 쉬면서 다시 닉이 애무하기 시작했고, 얇은 드레스로 가려진 가냘픈 곡선을 부드럽게 더듬어 나갔다. 마치 이 세상에 둘도 없는 것...그처럼 귀중한 것이 깨질세라 조심조심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앨리슨은 이미 깨지고 말았다. 자제심도 자존심도 닉을 갈망하는 욕구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있었던 것이다. 닉은 앨리슨을 안은 채 몸을 일으켜서 얼굴에 소나기처럼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살짝 뒤로 돌려 앉혔다. 그의 손가락의 앨리슨의 뒤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제치더니, 그의 입술이 목덜미로 미끄러졌다. 닉의 입술이 드레스의 깃에까지 내려가자 지퍼를 물고 끌어내린 다음, 드레스를 어깨부터 벗기기 시작했다. 브래지어의 어깨 끈도 가슴으로까지 내렸다. 앨리슨은 돌아 앉아 이글거리는 눈으로 닉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벗겨진 옷을 옆으로 밀어붙였다. 어느새 앨리슨은 그의 널찍한 어깨와 가슴에 자신의 손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다. 닉의 눈동자가 불타올랐고, 앨리슨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앨리슨이 먼저 그의 입술을 찾아 키스했다. 현실이 멀어져 갔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는 이 방도, 이 침대도, 닉도, 부드러운 매트리스에 앨리슨을 밀어붙이고 있는 그의 체중도...아니었다. 무방비 상태로 드러내 놓은 그녀의 가슴과 어깨를 더듬고 있는 그의 입술뿐이었다. 이제 앨리슨은 결합을 갈망했다. 그녀는 그에게 그것을 애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에 서로의 갈망이 부딪치며 황홀한 용광로 속으로 빠져 들었기 때문이다. 맥이 풀린 채 앨리슨은 아직도 그의 팔속에 있었다. 목이 타서 앨리슨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닉이 얼굴을 조금 치켜들고 미소 지었다. 그 파란 눈을 보는 순간 앨리슨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기다려."
닉이 부드럽게 말했다. 앨리슨은 두 손을 들어서 그의 어깨를 밀었다.
"나가 주세요."
닉은 다시 한번 앨리슨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상냥하지도 않고, 또한 온유함을 가장하려고 조차도 하질 않았다.
"한 번 더 말해봐."
"나가 달라고 했어요. 혼자 있고 싶단 말이 예요. 당신이 원하는 건 모두 이루었으니까..."
닉은 앨리슨의 턱을 잡았다. 그것도 아주 난폭하게...
"이 위선자야! 당신도 원했던 거야."
"그런 것 생각나게 해주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요. 난 부끄럽다는 생각을 할 만큼 했으니까요."
"흥, 그래? 그러나 부끄러워할 건 없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차피 다른 욕망과 마찬가지인 것이야. 일단 자극을 받게 되면 만족해야만 되거든. 당신은 비정상이 아니라고."
앨리슨은 몸을 움츠렸다. 함께 즐긴 기쁨인데 그토록 경멸당하고 보니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한 대 얻어맞은들 쇼크가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안심시켜 줘서 고마워요. 그러나 나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 예요."
"알고 있어. 다른 때라면 비뚤어진 당신의 머리가 무슨 변명의 말을 하려는 지 짐작이 가고 또 기꺼이 들어주겠지만...이번만은 안 되겠어. 지금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앨리슨, 당신은 그 매혹적인 몸을 함부로 보여서는 안 돼."
앨리슨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부끄러움도 몰라요?"
"응, 앨리슨의 대해서만은...그뿐만 아니라 나는 내 집 뒤뜰에서 엄청난 보물을 발견한 사람 같은 기분이라고."
"멜라니 라고 하는 덤 때문인가요? 전혀 가책을 받지 않는 것 같군요?"
"전혀."
"그래요, 당신 나름대로 윤리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멜라니가 당신의 윤리관에 순순히 응할 것으로는 생각 지 마세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 처음부터 당신과 멜라니는 전혀 다른 타입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어. 멜라니는 지금 내가 하자는 대로 하고는 있지만...이 이상적인 상태가 오래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 애에게는 상냥하게 대해 주고 있겠죠?"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두말할 것 없지. 멜라니에게 상냥하게 대해 주는 것은 내 말을 잘 들으니까 그래. 당신하고 함께 있다가, 곧 나를 멋지다고 생각하는 여성과 같이 있을 생각을 하니 즐거워지는걸. 무슨 말인가 하면 멜라니와 난 싸움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말야. 그건 그렇고 이 얘기는 이 정도로 끝내지."
닉은 숙련된 솜씨로 앨리슨의 몸을 더듬었다.
"남은 시간은 되도록 즐겁게 보내는 것이 중요해."
앨리슨은 갑자기 머리가 뜨거워졌다.
"잔인하군요. 당신이 어디에 갔는지 몰라 멜라니가 속을 끓이고 있을 텐데...당신은 아무렇지도 않나요?"
"내가 어디엘 갔는지 멜라니는 잘 알고 있을 걸."
닉은 몸을 굽혀서 앨리슨의 가슴에 입술을 댔다. 피부에 와 닿는 그의 손과, 입술이 뜨거운 쾌감으로 벌써 필연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앨리슨은 괴로운 감정의 조류에 휩쓸려서 어디론 가 떠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말할 기력이 남아 있을 동안에 중얼거렸다.
"안돼요...이러 지 말아요."
"안될 게 뭐 있어. 당신이 막지는 못할 걸. 당신의 인생으로부터 완전히 내쫓기기 전에 이 야릇한 결혼에서 무언가 추억거리를 가지고 갈 생각이라고."
"정말 지독하군 요!"
앨리슨은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도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등을 활처럼 휘었다. 모든 것이 끝나자 앨리슨은 지쳐서 닉의 옆에 누워 있었다. 눈물이 괼 사이도 없이 뺨으로 흘러 내렸다. 침대를 누르던 그의 무게가 이동하기 시작했고 침대에서 내려선 닉의 옷 입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들렸다.
"이혼을 해도 좋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깊은 침묵이 찾아왔다.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으나 어느 새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호너 부인이 차를 가지고 왔을 때에는 이미 잠에서 깬 후였다.
"날씨가 아주 좋아요."
호너 부인은 커튼을 제치면서 말했다.
"이런 때는 런던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 푹 쉬면 좋으시련만...주인 양반도 정말 딱하셔."
앨리슨은 몸을 일으켜 베개에 기댔다.
"그분 벌써 나갔나요?"
"요리사가 그러는데 새벽같이 나가셨대요."
책망이 담긴 부드러운 눈길을 앨리슨에게 보냈다.
"앞으로는 주인 어른을 좀 쉬시도록 권하세요. 그러다가 건강을 해치기라도 하시면 어떡하시려고..."
호너 부인은 문 쪽으로 가면서 말했다.
"아, 잊을 뻔했네요. 마님께서 찾으셨어요.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던데..."
앨리슨은 마음속으로 신음했다.
"알았어요, 옷 갈아입고 곧 갈게요."
어머니 방에 들어서자, 모티머 부인은 화가 나서 양 볼이 상기된 채, 언제나처럼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부인은 종이쪽지를 앨리슨에게 내밀었다. 앨리슨은 미간을 찡그렸다. 발신인의 주소는 이 지방의 자동차 학원이고 수취인은 어머니로 되어있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예약된 재이수 코스 레슨이 오늘 2시에 시작되며, 담당교관 하그리브스 로버트 씨가 이곳에 온다는 내용이었다. 앨리슨은 내용을 훑어본 다음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글쎄요, 무슨 착오가 생긴 거겠죠. 이 근처에 또 다른 모티머 부인이 사는 게 아닐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는 소린 들은 적이 없다. 틀림없이 자동차 학원의 억지 권유인 것 같은데, 사람 모욕하지 말라고 전화해 줘라. 난 새삼스럽게 핸들을 잡을 생각도 없거니와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네가 데려다 주면 되니까."
앨리슨이 상냥하게 말했다.
"손수 운전을 하시면 그만큼 자립하기도 쉽고 편리하시잖아요. 나도 언제까지나 여기에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여기에 없다니?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냐? 이제 어쩌다가 한번씩 차 태워 주는 것조차도 귀찮단 말이냐? 그 정도의 호의도 보여 줄 수 없단 말이지?"
매일 인내력을 요구당하고 있건만, 어쩌다가 한번씩 이라니...앨리슨은 섭섭했다. 그러나 반발을 했다가는 어머니의 눈물과 호소로 언제나 지는 쪽은 앨리슨 이다. 괴로운 경험을 통하여 그것을 잘 알고 잇는 앨리슨은 그저.
"어머, 제가 언제 귀찮다고 말했어요? 엄마를 생각해서 한 말인데요. 손수 운전을 한다면 가고 싶은 곳에 언제든지 마음 편하게 가실 수 있을 게 아니 예요. 친구 집에도 갈 수 있고, 베스 큰어머니도 만나러 갈 수 있고요. 제 시어머님께서도 어머니가 놀러 오시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말씀 하셨어요."
부인은 바위가 굴러오는 한이 있어도 꿈쩍하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대편에서 찾아오는 편이 훨씬 나을 거다. 몸의 컨디션이 정말 나쁘다니까. 먼 곳에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나질 않는구나. 내가 금년에 얼마나 쓰라린 일을 당했는지 모두들 잊어버린 것 같아. 이따금이라도 좀 생각을 해줘야지...엊저녁에는 멜라니 까지도 나를 화나게 만들었어. 나를 심문하는 거야. 어디에 갔었느냐, 무엇을 했었느냐며..."
"심문이라니요? 멜라니가 남인가요. 엄마 딸이에요. 엄마가 행복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을 거예요."
"그렇담, 내 처지를 좀 이해해 줘야지. 나는 그저 그리운 추억에 젖어서 홀로 편안히 있고 싶단 말이다."
부인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집은 지금도 추억거리로 가득해. 네 남편이 마음대로 뜯어 고치기는 했어도..."
부인은 갑자기 신랄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닉 말이다. 웬 지 덤벙대는 것 같더라. 또 나갔다며? 호너 부인이 그러더라. 어젯밤 식사 때만 해도 아무 말 없었잖니?"
"무슨 문제가 있는가 보죠 뭐."
이혼한다는 것을 알면 어머니는 어떤 반응을 나타낼 것인가? 앨리슨은 기분이 착잡해졌다.
부인은 혀를 찼다.
"니콜라스가 집에 없는 편이 훨씬 편안하기는 하다만..."
그리고 의자에 몸을 기대면서 눈을 감았다.
"어서 자동차학원에 전화를 걸 거라. 레슨을 사양한다고..."
계단을 내려가니 멜라니가 현관 앞에 서서 어정거리고 있었다.
"우편물이 왔는지 모르겠네?"
"응, 왔어."
앨리슨은 멜라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편지를 기다리니?"
"아니, 그렇지는 않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멜라니는 앨리슨이 들고 있는 종이 쪽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앨리슨은 그것을 내밀었다.
"이거,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니?"
"엄마의 자동차 레슨? 응, 알고 있어. 멋진 착상 아냐?"
"이론적으로는 멋지다. 그러나 실제 문제는 불가능하다고, 취소하라고 하셨어."
"어머, 그렇게 할 순 없어! 상대방에서 승낙하지 않을 걸. 형부가 그렇게 연극을 꾸며 놓았다고. 엄마는 레슨을 받지 않으려고 할 거니까. 학원 측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강행해 달라고 했단 말야."
앨리슨은 깜짝 놀라며 미간을 모았다.
"닉이 그랬단 말이니?"
"응, 그렇다니까."
멜라니는 호소하는 듯한 표정으로 앨리슨을 바라보았다.
"형부를 화나게 해서는 안돼. 엄마가 언제나 언니에게 잔심부름을 시킨다며 마다치 않게 생각하더라고.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겠어? 그리고 엄마가 그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좋지 못해. 자신을 순교자처럼 생각하고 있단 말야. 사실은 그게 아닌데도..."
"네 생각에 반대하지는 않아."
앨리슨은 멜라니를 안심시켰다.
"그런 생활이 건강상 나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엄마를 움직이게 할 구실을 찾지 못했어. 그러나 저러나 자동차 학원의 차가 온다 하더라도 어떻게 어머니를 방에서 나와 차에 타도록 설득하지?"
"걱정 마. 형부가 해줄 거야. 엄마도 형부의 말이라면 매정하게 거절하진 않으실 거고...형부가 강력하게 나가면 잘 될 거야."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렇겠구나."
앨리슨은 겨우 한마디 내뱉은 다음 거실로 갔다. 커피포트를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뒤따라 온 멜라니가 눈치 챌까 봐 엉뚱한 말을 꺼냈다.
"멜을 눌러 새 커피와 바꿔달라고 해."
"형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람."
"집에는 없단다."
앨리슨은 마치 생사가 걸려있기라도 한 것처럼 설탕 포트를 밀크 병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럼 벌써 나갔다는 말이야? 아니면..."
"모르니?"
앨리슨은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런던에 간다고 너에게 말하지 않든?"
"뭐라고?"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멜라니는 비명을 질렀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내겐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이제 어떡하면 좋지?"
앨리슨은 자신의 괴로움도 잊어버리고 동생이 가엾어 보였다. 닉과 같은 남자에게 열을 올리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리고, 또 너무나도 무방비 상태다. 닉이 지금은 멜라니를 사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른다. 앨리슨이 달래듯이 조용히 말했다.
"틀림없이 네게 연락이 올 거야."
"연락?"
멜라니는 앵무새처럼 말했다.
"그게 무슨 소용이야! 형부는 지금 당장 여기에 있어야 하는데."
멜라니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괴롭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형부가 언니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어. 그 얘기가 어쩌면 언니는 듣기 싫을는지 모르지만, 언니...긴 안목으로 보면 그렇게 하는 편이 제일 좋을 거야. 지금 이 상태로 계속 지낼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언니는 안색이 몹시 나쁘고 피로한 것 같아. 행복하지도 못하지?"
"그래."
앨리슨은 방긋 웃어보였다.
"행복하지는 못했어. 그러나 너는 나와 같은 과오를 범하지는 말아라."
"응, 처음부터 언니가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지? 그러나 그 당시에는 우선 가족의 안전문제가 해결되니까 안심한 것도 사실일거야. 문제가 잘 풀려 나가지 않는 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게 돼서 다행스럽기는 하지만..."
"그렇구나."
앨리슨은 마른침을 삼켰다.
"멜라니, 지금은 그 얘기 하고 싶지 않아. 닉 하고는 물론 얘기했었어. 나는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고 있어. 그래서 평지풍파를 일으키지는 않겠다고 말했지. 너에게도 똑같은 약속을 할게...단, 지금은 더 이상 그 화제를 꺼내지 않기로 하자."
멜라니는 얼굴을 찡그렸다.
"글세, 그렇게는 안 될지도 모르겠어."
그녀는 당혹한 모습으로 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그런데 언니! 형부와 모든 얘기를 다했다면서 엄마의 자동차 레슨에 대해서 못 들었다는 게 이상한데...형부도 참! 이럴 때 하필이면 런던으로 떠날 게 뭐람? 우리에게 그 어려운 일을 떠맡기고...엄마가 알면 난리가 날 텐데..."
"괜찮아. 엄마가 너나 닉에게 화내시지 않도록 해볼게."
"하지만..."
멜라니는 또 얼굴을 찡그렸다.
"언니라고 해서 무사하겠어! 엄마는 아마...언니가 엄마를 배신했다고 말할 게 뻔하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한 짓이 틀린 건 아니 잖아?"
"부탁이야!"
앨리슨은 자신이 생각해도 놀랄 만큼 갑자기 말투가 거칠어졌다.
"내가 말했잖니...지금은 닉의 대한 얘기는 하지 말자고...나에게는 감정도 없는 줄 아니?"
멜라니는 갑자기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야? 이 레이디미드는 언니에게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난 알고 있어."
"레이디미드?"
앨리슨은 쉰 듯한 목소리로 웃었다.
"이따위 집은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어."
멜라니는 찡그렸던 미간을 조금 폈다.
"그래, 형부에게 그런 말을 나도 했었어. 이 판 사판이 되면 언니는 틀림없이 그런 생각을 할거라고...그런데 형부는..."
"형부...형부...형부."
앨리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사람 좀 그만 들먹일 수 없니? 그 사람 얘기는 그만하자고 말했잖아..."
"언니!"
멜라니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떻게 된 거야? 언니도 찬성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말이 끊어졌다. 현관의 벨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야단났네. 램버트 부인이 벌써 온 모양이야. 내가 나갈게...아니면 언니가 나갈 거야?"
"램버트 부인? 램버트 부인이 누구니?"
"그것도 형부가 말하지 않았어?"
멜라니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입에 손을 댔다. 벨이 또 한번 울렸다.
"내가 가볼게."
앨리슨은 멜라니를 따라 현관으로 갔다. 키가 크고 후덕하게 생긴 부인이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멜라니의 긴장된 모습과 앨리슨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 눈썹꼬리를 치켜 올렸다.
"안녕하세요? 프레다 램버트 입니다. 약속을 분명히 했습니다만...그런데 시간을 잘못 맞춰서 온 것 같군요."
"약속이라고요?"
"부인이시군요?"
램버트 부인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따뜻한 악수였다.
"브리스토 씨는 사전에 부인에게도 말해 두겠다고 하셨는데...아마 용기가 나지 않았던가 보죠. 어머님에게 얘기 상대를 고용해야겠는데, 부인이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냥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군요."
"저어, 램버트 부인이라고 하셨죠? 거실로 가시죠. 차라도 나누면서 얘기하죠."
"뜨겁고 단 차를 부탁합니다."
램버트 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쇼크에는 그것이 최고의 치료약이랍니다. 내가 찾아온 일로 부인을 몹시 불쾌하게 한 것 같은데, 미안합니다. 주인께서는 부인을 깜짝 놀라게 해주고, 그렇게 해서 기쁘게 해주려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브리스토 씨는 지금 안계신가요?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셨는데..."
"미안합니다. 그분은 갑자기 일이 있어서 나가셨어요."
"그래요? 내가 여기에 온 것도, 결국은 내외분을 좀 더 자유롭게 해드리고 함께 있는 시간을 늘려 드리기 위함이랍니다."
램버트 부인은 한숨 돌린 다음에 말했다.
"우리 차를 들기 전에, 나 혼자서 어머님을 뵙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머님은 처음에야 화도 내시고 반발도 하시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잘될 거에요."
"좋은 생각이에요."
멜라니가 얼른 입을 열었다.
"제가 어머니에게 안내해 드릴게요."
멜라니는 다시 앨리슨을 향하여 속삭였다.
"언니는 쓰러지기 전에 앉아 있는 게 좋겠어.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야."
"그렇게 보이니?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모르겠군."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램버트 부인이 달래듯 말했다.
"나는 어머니의 말벗이 되어 드리기로 하고, 주인 양반과 1개월간의 계약을 했어요. 미망인이 되신 후로 어머님은 아마 부인에게 큰 부담이 되신 것 같더군요. 본인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고, 따님은 어머니에게 그런 불평을 털어놓을 수 없는, 그런 관계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내가 할 일은 우선 일시적이나마 어머니에게 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지 않겠어요?"
"아마 어머니는 거절하실 거에요."
램버트 부인의 눈이 반짝였다.
"세상일이란 어떻게 바뀔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부인이 그런 일을 나에게 시키고 싶지 않다든가, 어서 돌아가 달라고 한다면...그냥 가겠습니다. 하지만 한번 믿고 시켜보세요."
앨리슨은 소파에 가서 앉았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해보시죠."
혼자 앉아서 허공을 쳐다보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완전히 국외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때 멜라니가 돌아왔다. 앨리슨은 대들 듯이 멜라니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네가 나처럼 엄마를 돌봐 드리고 싶지 않아서...그 준비를 하는 거야?"
멜라니는 앨리슨을 바라보았다.
"그 일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나는 어차피 이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는데...문제는 언니란 말야...그리고 물론 형부의 문제이기도 하고. 난 언니와 형부가 충분히 얘기한 줄로 알았는데."
"하지 않았어."
앨리슨은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네가 말하는 의미를...우리는 착각 속에서...엉뚱한 얘기만 한 것 같다. 너는 짐작하겠지만..."
멜라니는 어깨를 움츠렸다.
"글세...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야. 형부는 이번 주말에 언니에게 모든 것을 분명히 해두겠다고 말했었는데..."
거기까지 말한 멜라니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다는 듯이 말을 끊었다.
"언니, 형부가 자기 소망을 털어놓았을 때 혹시 싸운 거 아냐?"
앨리슨은 무릎 위에서 두 손을 힘껏 잡았다.
"그래, 싸웠어."
"그러니까 형부는 새벽같이 나간 거야. 언니, 형부를 화나게 하면 안돼! 형부는 언니만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리고 조심성 있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언니 자신의 일도 생각하고..."
멜라니는 잠시 숨을 돌린 다음 입을 열었다.
"사실 형부도 이런 생활이 재미없었을 거야. 집에 돌아올 때마다 엄마는 한 지붕 밑에 있으면서 장모 노릇이나 톡톡히 하려 들고...하기야 우리 엄마는 자신만이 남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어하니까...무엇보다도 형부는 언니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데 그렇지 못해 속상한 가봐. 엄마가 램버트 부인을 좋아하게 되었으면 좋으련만...그리고 형부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이 집이야. 이 집은 언니에게 아주 중요한 곳이고, 어릴 때부터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니까 팔기 싫어할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어. 형부는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숨이 막힌다지 뭐야. 피차간에 추억의 대상이 없는 새로운 곳을 찾으려는 형부를 나쁘다고 만 말할 수는 없어. 엄마도 자립해야 할 필요가 있을 거고. 사실 램버트 부인은 그 일 때문에 여기 온 거야. 형부의 뜻은 엄마를 다시 현실세계로 유도해내자는 것이었어."
앨리슨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뭐가 뭔지 모르겠구나. 닉은 자기가 나가고 싶으면 간단히 나갈 수 있는 처지인데...그건 나도 마찬가지이고...그 사람이 이곳에 눌러 있을 줄은 생각지도 않았어. 너도 마찬가지고..."
"나도? 그 얘기에 왜 내가 끼어 들어야 하는 거지?"
"이제 게임은 그만두자. 네가 닉과...만나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네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네가 처음부터 닉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네가 나보다 그 사람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었어. 하지만 너는 아직 너무 어리단 말야. 자신의 감정을 정말로 알고 있니? 혼자서 열을 올리고 있는 것만은 아니지?"
이번에는 멜라니가 나설 차례였다.
"알고 있었다고?"
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더구나 나하고...형부가...? 언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형부를 만났던 것은 사실이야. 형부는 얘기 상대가 없어서 아주 불행해 보였었다고...언니와의 사이를 잘 풀어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상담할 상대가 필요했던 거야. 나중에는 형부의 어머님까지도 끌어들여서 우리 세 사람이 계획을 세웠었어. 자동차 연습도 그 중의 한가지야. 램버트 부인을 채용한 것도 물론 그 중의 한가지야...이 레이디미드를 처분하겠다는 것도...언니와 형부 두 사람이 완전하게 새로이 출발할 계획을 세웠던 거라고. 그것을 형부는 이번 주말, 언니에게 얘기해서 동의를 얻겠다고 했었어. 설마 언니...지레 짐작으로 형부에게 엉뚱한 말을 한 건 아니겠지?"
앨리슨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얘기했어."
앨리슨은 대답했다.
"어머 큰일 났네!"
멜라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형부가 진심으로 말할 때, 언니는 싸움을 걸었었다는 거야?"
"닉은 모두를 부정하지 않았어. 내가...이혼하자고 했더니...좋다고 하더라."
멜라니는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언니! 너무 했잖아! 형부에게 그런 말까지 하다니...물론 나는 형부를 존경하고 있어. 아마 누구든 그럴 거야. 설사 내가 형부를 마음속으로라도 사랑했었더라면 지금쯤 난 진절머리를 내고 있을 거야. 형부는 늘 언니 생각만하고 언니에 대한 얘기만 했으니까 말이야. 형부는 언니에게 푹 빠져있어. 언니도 알고 있겠지만."
"아냐, 난 모든 것을 오해만 하고 있었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앨리슨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해였어."
앨리슨은 다시 잠깐 입을 다물고 있다가 멜라니를 돌아보고 물었다.
"이곳 일은 네가 잘 해낼 수 있겠지, 당분간? 너하고 램버트 부인하고 둘이서."
"물론이야, 한데 어딜 가려고?"
앨리슨은 일어났다.
"닉을 찾으러 가야겠어."
앨리슨은 문 쪽을 향해 걸어가면서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소리 없는 기도를 드렸다. 거의 절망적이기는 했지만...
"하나님, 아직 늦지 않았기 빕니다."
우아한 집 앞에서 택시를 내렸을 때 앨리슨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신선한 색채와 고급 유기 빛으로 반짝이는 건물을 보면서 그녀는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인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레이디미드를 나올 때만 해도 무척 힘들었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끈질기게 반대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니? 런던에는 안 간다고 했지 않아?"
어머니는 눈에도 불만스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런던은 싫다고 말하더니..."
"하지만 닉이 그곳에 있잖아요. 우리는 부부에요."
부인은 토라지며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가는 대신 닉이 이곳에 올 수도 있는 일이 아니냐? 그 사람 어딘가 안정하지 못하는 것만 같더라. 그리고 남의 생활을 휘저어 놓는 게 취미인가 봐. 이번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이런 식으로 남을 나에게 떼어 맡기다니...그 부인은 돌려보내야겠다."
"하지만 그분은 내보내지 않는 게 좋겠어요. 나도 언제 돌아오게 될는지 모르는데, 잔심부름도 해드리고 얘기 상대도 해드릴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 부인은 교양도 있고 사람도 좋아 보이던데요."
"그리고 진보적 마이카 협회의 회원이란 말은 왜 안하니? 나를 이런 식으로 다루다니 용서할 수 없어. 왜 아무 말도 없어?"
앨리슨은 얼굴을 찡그리며 살짝 웃었다.
"저는 우선 제 자신의 생활이라도 제대로 해내야겠어요."
복도에 나오자 멜라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가봐, 언니. 엄마는 나에게 맡겨두고. 엄마 기분은 내가 바꿔 놓을 테니...엄마도 평생 저 방에 틀어박혀 추억이나 먹고 살지는 않을 테니까."
멜라니는 앨리슨을 껴안았다.
"행복해야 해, 언니. 짐을 모두 꾸려놓았어."
"내게 뭐가 필요한지도 모르면서 짐을 꾸렸어?"
멜라니는 씽긋 웃었다.
"대충은 알아. 어서 떠나, 언니."
작은 슈트케이스 였지만 납 덩어리처럼 무거웠다. 앨리슨은 현관문 쪽으로 다가가 벨을 눌렀다. 금방 중년 부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검은 옷 위에 깨끗한 오버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는데 앨리슨의 발 옆에 놓인 슈트케이스를 보자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오셨죠?"
앨리슨은 입술을 적셨다.
"저어...브리스토 씨 댁이죠?"
"그렇습니다만, 누구신가요? 손님이 오신다는 말은 듣지를 못했습니다만."
앨리슨은 턱을 쳐들며 말했다.
"난, 브리스토 씨의 아내예요."
"어머!"
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반색을 했다.
"어서, 어서 들어오세요, 부인. 여기에 오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주인어른께서도 그런 말을 하신 적이 없었고요...지금은 나가고 안 계세요."
"갑자기 오게 됐으니까요."
앨리슨은 두꺼운 융단이 깔려 있는 좁은 현관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와서 미안해요."
"아이고 무슨 말씀을...이 집 주인 마님이신데...주인어른께 부인을 언제 모셔올 거냐고 늘 물었습니다만 전원생활을 좋아하신다는 말만 하셨어요. 오셔서 정말로 기뻐요."
그 중년 부인은 앨리슨의 슈트케이스를 들고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갔다.
"전 도리스 고던 이라고 해요."
그녀가 어깨너머로 말했다.
"주인어른이 이곳에 오시면서부터 줄곧 여기서 일했어요. 좋은 집이기는 하지만 좀 좁은 편이지요. 가족이 있으신 분에게는 말이 예요."
그 부인은 앨리슨을 위아래로 날카롭게 바라보며 덧붙였다. 앨리슨은 얼굴이 빨개졌다.
"어서 들어오세요, 이곳이 침실입니다."
쾌적한 방이었다. 인테리어도 가구도 모두가 철두철미할 정도로 남성적이었다. 앨리슨이 상상하고 있던, 닉과 그 연인들이 쓰는 사랑의 보금자리라는 인상은 전혀 없었다.
"짐을 풀까요?"
그 말을 듣고서야 앨리슨은 현실로 돌아왔다.
"됐어요...그냥 두세요."
멜라니의 웃음을 기억해내면서 앨리슨은 얼른 대답했다.
"내가 풀겠어요."
"그럼 차를 끓일게요. 거실에 준비해 두겠으니 이따가 그리로 오세요."
앨리슨은 슈트케이스를 열었다. 직감은 들어맞았다. 쓴웃음을 입가에 띠면서 앨리슨은 베스 큰어머니가 선물로 주었던 부드러운 란제리와, 파티용으로 샀다가 한 번도 입어 본 일이 없는 드레스를 끄집어냈다. 모두가 아름다운 것들이었고, 매혹적인 것들이었다. 거실은 이층에 있었다. 널찍한 거실 뒤쪽으로는 담을 친 안뜰이 내려다 보였다. 차와 함께 고던 부인은 얇은 오이 샌드위치와 스폰지케이크를 준비해 두었다.
"영양분을 듬뿍 섭취해야 합니다."
고던 부인이 말했다.
"시골에 사시면서도 안색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요."
불안한 마음이었으나 앨리슨은 차를 한잔 마신 다음 샌드위치와 스폰지케이크를 두 조각이나 먹었다. 다시 돌아온 고던 부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브리스토 씨에게 오늘 밤엔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씀 드렸는데, 어떻게 할까요? 남아서 도와 드릴 일이라도?"
"아니 예요, 예정이 있을 텐데, 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
"부인께서 좋으시다면..."
고던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보통 때는 이 시간이 되면 저는 집으로 돌아가요. 디너파티를 할 때는 사정이 달라지겠지만...그 동안 혼자 사셨으니 파티 같은 건 한 번도 치르지 않았어요."
"그랬겠지요."
앨리슨은 머리를 숙인 채 순순히 인정해 주었다. 자신의 오해가 많았던 것 같았다. 이 집만 해도 그 중의 하나였다. 고던 부인이 말한 것처럼 아주 좋은 집이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생활의 냄새가 결여되었다고 할까? 이곳 역시 닉이 저녁때가 되면 돌아오는 장소이긴 했지만 레이디미드와 마찬가지로 가정은 아니라는 사실을 앨리슨은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닉이 얼마나 쓸쓸해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죄책감을 느꼈다. 앨리슨은 자신과 가족의 안정만을 위해 결혼을 했었다. 물론 계약결혼이긴 해도 닉이 무엇을 바라는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닉은 부유한데다가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감도 강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했었다. 레이디미드에서 살림을 규모 있게 처리해 나가면서도, 하루 빨리 그 살림 속에서 헤어나가 닉을 위해 평안한 장소를 찾아보려는 노력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 앨리슨은 집안을 두루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닉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그가 돌아오는 순간이 두려웠다. 주방에 있는 냉장고를 열어 보니 샐러드 재료와 스테이크가 눈에 띠었다. 그것을 곁들여서 일품요리 인 도피네 식 그라 탕을 만들기로 했다. 요리를 만드는 데에 열중하여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한 줄도 몰랐다. 요리가 끝난 다음에도 시간이 꽤 지났다. 닉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한담? 어쩌면 즐겁지도 않았던 짧은 결혼 생활은 이미 끝이 났다고 생각한 그가 옛날의 연인 중 누군가와 다시 가까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앨리슨은 팔걸이의자에 몸을 파묻고 하이파이에서 나오는 델리우스의 브리그패어에 귀를 기울이면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데, 자물쇠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앨리슨은 등을 세우면서 의자의 팔걸이를 힘껏 잡았다. 계단에서 닉의 발자국 소리가 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결렸던 것처럼 생각됐다. 이윽고 거실의 문이 열리고 닉이 들어섰다. 앨리슨은 그가 몹시 지쳐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고, 그가 초조해 하는 표정도 읽을 수가 있었다. 그의 입 언저리에는 앨리슨이 싫어하던 냉소하는 듯한 주름살이 잡혀 있었다.
"가정부는 이곳에도 있어."
닉이 쌀쌀하게 말했다.
"만났어요. 그 사람의 일거리를 뺏으러 온 게 아니 예요."
"그럼, 뭘 하러 왔어?"
"저어, 당신과...같이 있고 싶어서..."
"그것 괜찮겠군."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남편의 자격으로 가 아니라 전속적인 침대 속의 파트너로는 내가 쓸만하다...이말 인가?"
"닉, 부탁해요. 그만 빈정대고 내 설명을 들어줘요."
"무얼 설명하겠다는 거야?"
"당신을 너무 오해하고 있었어요. 내가 나빴어요, 미안해요."
닉의 입 가장자리가 일그러졌다.
"사실인가? 당신이 나를 굉장히 오해하고 있다는 건 나도 알았지만...설마 멜라니와 같은 아이를 내가 유혹했다고 비난할 줄이야..."
앨리슨은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해요. 그렇지만 나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둘이서만 만나고 있었으니...게다가 당신은 내 오해를 부정하지도 않았고..."
"왜 내가 부정을 해야 하지? 내게는 당신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보였었어. 무슨 짓을 해서든지 나를 내쫓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멜라니를 처제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당신이 어찌 한 순간인들 할 수 있겠어."
"내가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나 봐요."
"질투?"
닉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질투란 말의 의미도 잘 몰라. 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당신의 마음을 내게로 돌리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던 거야. 당신의 침실에서 처음으로 침대를 같이 썼던 날, 나는 일이 썩 잘됐다고 생각했었지. 당신은 잠들기 전에 나를 사랑한다고 분명히 속삭였어. 그때 나는 온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어. 그래서 나는 몇 시간 동안이나 누운 채 생각하고 있었어. 당신을 데리고 어디든 가서 모든 방법으로 행복하게 해줘야겠다고 말야. 그런데 이튿날 우리는 전과같이 거리가 먼 존재로 되돌아가고 말았어."
닉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레이디미드와 당신 가족뿐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 나 자신은 당신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도..."
"아니 예요, 그건 당신의 오해예요!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훨씬 전부터 깨닫고 있었어요. 신혼여행을 갔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런 감정을 알리는 것이 두려웠어요...거절당할 것만 같아서."
앨리슨의 얼굴이 빨개졌다.
"당신과 염문이 있던 여인들의 사진을 신문에서 본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은 나 같은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닉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내가 다른 여인을 들먹인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내가 원했던 건 당신이 단 한번이라도 나를 따뜻한 눈길로 보아 주는 일이었어."
"당신은 말했잖아요?"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앨리슨은 중얼거렸다.
"얽매이는 것은 싫다고...사랑 따위는 믿지도 않는다는 말을 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은 재앙의 원인이라고 했던가. 변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때는 정신이 아주 어지러울 때였어. 당신 아버지와 그 융자 건으로 상담할 때 실패할 가능성이 있음을 난 알고 있었어. 그래서 주위를 환기시켜 드렸고, 그 마음을 돌려 보려고 애쓰기도 했었지만 아버지는 막무가내로 고집하셨어. 결과적으로 아버지 사업은 실패를 했고, 나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어. 더구나 당신이 나를 경멸하는 것 같아서 몹시 괴로웠어. 그러나 솔직히 말해 흥미도 생기더라고. 그때의 당신의 모습은 디너에서 내 옆 자리에 앉아 있을 때의 지루해 하던 당신과는 대조적이었으니까..."
"디너 자리에서는 당신도 결코 매력적이라고 할 수 없었어요."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아버지와 거래하던 마지막 날의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
닉은 잠시 말을 끊었다.
"나는 나도 알 수 없는 충동으로 당신에게 결혼을 신청했었지.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었던 것이 분명해, 그땐 몰랐지만."
"그럼 언제 그것을 확인하게 됐어요?"
"어머니 집에 갔을 때였어. 거기서 당신은 내 옆에 서있었지?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어. 그때 영원히 당신은 내 옆에 있어야 하고, 그것이 내가 원하는 인생이라는 강력한 계시 같은 것이 있었어. 그러나 난 두려웠어. 계약이라든가 거래라는 말, 그것들이 모든 것을 가로막을 것만 같았어. 그래서 불쑥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지. 신혼여행은 정말 지옥이었다고.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당신은 도전해 왔어. 기억 나지? 마지막 날은 예외였지만."
"기억하고 있어요."
앨리슨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난 기억해. 그날 밤 처음으로 당신은 내 품에서 고분고분히 있었지. 나는 혼자 있기가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선실로 올라갔는데 영 잠이 오지 않았어."
닉은 앨리슨을 보았다.
"이상한 얘기지만 당신이 부르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어. 당신이 나를 갈망하고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잔뜩 기대를 하고 갔는데 당신은 야속하게 나를 쫓아냈어."
"당신 생각이 바로 내 생각이었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당신을 얼마나 불렀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두려웠어요. 당신은 나를 이용할 뿐이라는 생각이...내가 마침 그 자리에 있고 당신은 여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대 그렇지 않았어, 달링. 바로 당신이 필요했던 거야. 당신만이...난 그때부터 당신에게 열을 올리기 시작한 거야. 그래서 레이디미드를 일부러 피했던 건데...당신을 안보면 그 고통도 참기가 쉬울 줄 알았더니 그 생각도 잘못이었어. 그래서 당신이 주장한대로, 정말 당신이 우리의 별난 거래에 만족하고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고 싶었지. 또 우리 사이에 장애가 되는 건 바로 그 집이란 결론도 나왔고...또 한 가지는 쉴 새 없이 잔심부름을 시켜대는 장모님이 있다는 것도 방해 요소이고...그래서 멜라니와 상의한 다음 당신을 완전한 나만의 아내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에서 당신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거야."
파란 눈이 앨리슨의 눈길을 빨아들이듯이 정면으로 응시했다.
"레이디미드를 팔고 싶어, 앨리슨. 처음엔 그 집을 인수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을 생각했지만 엉뚱한 문제만 생길 뿐이야. 장모님은 노인도 아니고 병약한 것도 아니야. 추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자신의 집을 혼자서 소유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정신 건강상으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레이디미드의 집이라든가 그 집에 얽힌 추억이 과연 당신에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고 눌러 있어야 할 만큼 중요한 건 아니 잖아?"
앨리슨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게 있어야 하는 것은 당신뿐 이에요. 닉, 당신 말고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이 있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든지 따라가겠어요."
긴 침묵이 흘렀고, 두 사람은 마주보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고 있어, 앨리슨. 결혼해줘. 내 아내가 되어줘."
그가 두 팔을 내밀었다. 앨리슨은 둥지에 돌아온 새 마냥 그곳에 몸을 기댔다. 닉이 끌어안았을 때 앨리슨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 되어 풍선처럼 떠가는 것 같았다.
"영원히..."
앨리슨은 대답했다. 그 역시 같은 말을 되 뇌였다.
"슬슬 허니문을 시작해 볼까, 달링?"
"하지만 식사준비가 다 됐는데요, 저녁식사는?"
"나중에 하지."
닉은 앨리슨을 가볍게 안아올리고는 연신 키스를 퍼부으며 침실로 걸어갔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정열의 달콤한 회오리바람이 불어간 다음, 두 사람은 조용히 껴안은 채 누워 있었다. 지금까지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말들과 용기가 없어서 미뤄왔던 말들을 서로 묻고 대답했다.
"이제 사이몬의 회사는 그만 두는 거지?"
닉이 몸을 일으키며 팔베개를 베었다.
"안 그러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는 나도 모른다고."
앨리슨은 놀리듯 미소 지었다.
"사이몬이 불쌍하게 됐네요. 그 사람을 팽개치다니...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나를 놀리는 거야?"
그는 앨리슨의 콧등에 키스를 했다.
"방법은 간단해. 남의 아내에게 손을 뻗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거야!"
"당신도 질투하고 있었나요?"
앨리슨은 놀라서 물었다.
"질투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의 입가가 잠시 일그러지더니 부드럽게 바뀌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인간은 반드시 이성을 잃게 되는 법이야.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 겪어 봤으니까 말이야. 난 이번에 그걸 알았어. 어찌할 도리가 없는...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 당신의 관심을 끄는 상대는 그것이 인간이든 물건이든 간에 질투가 났어.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당신도 자만할 처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앨리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직 털어놓지 않은 기쁜 비밀을 생각하며 빙긋이 웃었다. 만족의 한숨을 내쉬면서 닉은 앨리슨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길이 반드시 밝은 달빛이 비치고 장미꽃이 만발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이 알아주기만 한다면야..."
"화려하고 예쁜 장미에는 언제나 가시가 있는 법이잖아요."
앨리슨은 속삭였다. 앞길에 어떤 어려움이 가로놓여 있다 하더라도, 이제 그의 진정한 아내가 된 이 행복감에 비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이 값싼 희생이라고 앨리슨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