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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선(1941~2001)

가을 편지

강물

겨울의 노래

고요를 향하여

고요하다

고요한 밤

고향의 천정(天井)

구도(求道)

구름과 바람의 길

구름 시()

구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산길을 걸으며

귀를 씻다

그냥 둔다

깊은 강

깨끗한 영혼

꽃잎을 쓸며

꽃 한 송이

나도 그런 사람을 갖고 싶다

나무

나무 안의 절

나무에게

나무에게 주는 말

나무처럼 외로운 나무로 살고 싶다

낙산사에서

낙산사의 노래

내 몸이 다 비어지면

노래하는 장롱

노을 무덤

노천 이발소

논두렁에 서서

눈이 온 다음 날 비치는 햇살

다리

달과 산인

달 물속 빈산이 꽃 피는 소리

달빛 발자국

달을 먹은 소

달이 단신으로 뛴다

달 하나 묻고 떠나는 냇물

대작(對酌)

도반(道伴)

도피안사(到彼岸寺)

등잔의 노래

떨림으로

떨어진 꽃잎

라자스탄의 밤 사막에 누워

마루를 닦으며

만나고 싶은 사람

먼 산

몸은 지상에 묶여도

못생긴 것이 더

무릎 위의 시

무명(無明)

문답법을 버리다

물 위에 달빛 붓으로

미시령 노을

바다를 잃어버리고

바람 속에서

바람의 노래

반달

백담사

벌레

별로 떠 있는 사람들

별빛 바람 하늘소리

별을 바라보는 우물

별을 보며

별의 아픔

별의 여인숙

별이 비치는 지붕

보이지 않는 무덤

복사꽃

봄눈

봄밤

빈 배

빈산이 젖고 있다

사랑

사랑하는 별 하나

산과 연꽃

산 그림자

산길

산목련꽃

산문답(山問答)

산비

산상(山上)에서

산에 가서 시를 읽다

산을 껴안고

새로운 하늘

새를 따라

새와 풀꽃의 면회소

새해의 기도

생명

설악을 가며

소식

소포

손의 명상

쇠별꽃

숨은 산

시골길

시집을 덮고

()의 가슴 길

신화

아들에게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인가?

아름다운 저녁

얼굴

여름비

염소에게 길을 묻다

영혼의 침묵

오세암

외로운 사랑

우물을 보는 소

우파니샤드

운문사(雲門寺)

월식

위험한 사랑

이른 봄날

이탈

인도의 시()

일몰 후

입동

재산

저녁밥

저문 들판

장자(莊子) 나비

저문 하늘빛에 기대다

절정의 노래

지는 꽃잎 노래

지상의 작은 행복

()를 들며 도()를 엿본다

천수답

초암(草庵)에서

축지법(縮地法)

큰 노래

큰 산 앞에 춤을 추다

통화

티벳의 어느 스님을 생각하며

티벳에서

파도

편지 받고

풀꽃

풀잎과 앉아

피리

하늘 악기

하늘 악보

하늘의 글씨

하늘의 숨소리를 듣는

해 지는 소리

황혼 화음 노래

흔들림에 닿아

흔적

 

 

 

가을 편지

이성선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강물

이성선

 

새 학기 교실에

지난해의 아이들이 가고

지난해만 한 아이들이 새로 들어왔다

떠들고 웃고 반짝인다

이 반짝임은

지난해 그랬고 그 지난해도 그랬고

그 전 해 그리고 내년에도 그럴 것이다

이 교실은 해마다

요만한 이이들이 앉았다 간다. 웃고 떠들고 침묵하고

흘러간다

교실은 아이들이 흐르는 강이다

나는 강의 한 굽이에 서서

강물의 흐름을 지켜보며 그 소리를 듣는다

 

 

 

겨울의 노래

이성선

 

벌거숭이 몸으로 겨울을 가리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영혼

벗은 사랑의 맨발로

그대에게 이르리라.

다 떨어져 나간 빈 뜰의 등불

잠들지 못하는

얼굴은 고독하고 아름답다.

이제 나도

절망과 아픔을 벗어버리고

아직 별이 떠있는

이 겨울밤 끝으로 떠나리라.

거기 붉게 동터오는 하늘 아래 가서

순수한 두 팔의 날개로만

서 있으리.

아아

그런 알몸의 악기로 걸어가리.

나무는 벗어서

벗은 몸끼리 더욱 가까이 빛난다.

서로의 등뼈를

서리빛 하늘에 비추고 서있다.

그 곁에서 기도하며

저녁 눈시울처럼 겸허하게 떨며

그대에게 바치는 노래를 준비하리.

겨울은 순수한 맨발로 가리.

 

 

 

고요를 향하여

이성선

 

높은 산에 눈 내리고 내리고

그쳤습니다. 산이 갰습니다.

구름이 산을 떠났습니다,

그후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고요

바람도 없는 저 고절(孤絶)의 산정을

내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말씀 있을 듯 없는 산상을

내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라보다가 이대로

오래 바라보다가 이대로 이 자리에

늙어 죽어버리는 것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입니다.

 

 

 

고요하다

이성선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가

 

가지에 걸린 달도

잎으로 잘못 알고

물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고요한 밤

이성선

 

좌선하던

한 사람이 풀잎 끝으로 걸어 나가

나비가 되었다

 

하늘 속으로 나비가

날아가던 밤

 

해당화꽃 위로 지구가

달보다 더 조용히 기운다

 

 

 

고향의 천정(天井)

이성선

 

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

메밀꽃 사이사이로 할머니는 가끔

나와 바람의 장난을 살피시었습니다

 

해마다 밭둑에서 자라고

아주 커서도 덜 자란 나는

늘 그러했습니다만

 

할머니는 저승으로 가버리시고

나도 벌써 몇 년인가

그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후

 

오늘 저녁 멍석을 펴고

마당에 누우니

 

온 하늘 가득

별로 피어 있는 어릴 적 메밀꽃

 

할머니는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

날마다 저녁이면 메밀밭을 매시며

메밀밭 사이사이로 나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구도(求道)

이성선

 

세상에 대하여

할 말이 줄어들면서

그는 차츰 자신을 줄여갔다

꽃이 떨어진 후의 꽃나무처럼

침묵으로 몸을 줄였다

하나의 빈 그릇으로

 

세상을 흘러갔다

 

빈 등잔에는

하늘의 기름만 고였다

하늘에 달이 가듯

세상에 선연히 떠서

그는 홀로 걸어갔다

 

 

 

구름과 바람의 길

이성선

 

실수는 삶을 쓸쓸하게 한다.

실패는 생() 전부를 외롭게 한다.

구름은 늘 실수하고

바람은 언제나 실패한다.

나는 구름과 바람의 길을 걷는다.

물 속을 들여다보면

구름은 항상 쓸쓸히 아름답고

바람은 온 밤을 갈대와 울며 지샌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길

구름과 바람의 길이 나의 길이다

 

 

 

구름 시()

이성선

 

구름은 허공이 집이지만 허공엔 그의 집이 없고

나무는 구름이 밞아도 아파하지 않는다

 

바람에 쓸리지만 구름은 바람을 사랑하고

하늘에 살면서도 마을 샛강에 얼굴 묻고 웃는다

 

구름은 그의 말을 종이 위에 쓰지 않는다

 

꺾여 흔들리는 갈대 잎새에 볼 대어 눈물짓고

낙엽 진 가지 뒤에 기도하듯 산책하지만

 

그의 유일한 말은 침묵

몸짓은 비어 있음

 

비어서 그는 그리운 사람에게 간다

신성한 강에 쓰고 나비 등에 쓰고

아침 들꽃의 이마에 말을 새긴다

 

구름이 밟을수록 땅은 깨끗하다

 

 

 

구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산길을 걸으며

이성선

 

내 앞에 가시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들의 꽃 피고 나비가 날아가는 사이에서

당신 옷깃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당신 목소리는 거기 계셨습니다

산 안개가 나무를 밟고 계곡을 밟고 나를 밟아

가이없는그 발길로 내가슴을 스칠 때

당신의 시는 이끼처럼

내 눈동자를 닦았습니다

오래된 기와지붕에 닿은 하늘빛처럼

우물 속에 깃들인 깊은 소리처럼

저녁 들을 밟고 내려오는 산그림자의 무량한 몸빛

당신 앞에 나의 시간은 신비였습니다

돌담 샘물에 떨어진 배꽃의 얼굴을 보았습니까

새벽 산에서 옷을 벗는 새벽빛을 보셨습니까

당신은 나의 길을 이렇게 오십니다

산사로 향한 따뜻한 길처럼

하늘에 새 날려보내고 서 있는 나무처럼

내 앞에 당신은 그렇게 계십니다

 

 

 

이성선

 

내 귀를 비우고 싶네.

거리의 소리가 너무 높아서

진실도 거짓도 알기 어려워

내 귀는 쉬고 싶네.

 

내 귀를 이젠 바다를 향한

보석함으로 두고 싶네.

 

사람의 파장을 뛰어넘어서

다른 떨림의 울림 속에 들어가 살고 싶네.

풀잎 사이에 내려놓고

풀잎들의 맑은 목소리나 듣고 싶네.

 

나무들의 숲으로 가서

짐승과 별과 달과 바람이 얼굴 비비며

속삭이는 나라의 소리를 듣고 싶네.

 

내 귀를 이젠 비우고 비워서

떨리는 사랑의 소리나 가려듣고 싶네.

 

 

 

귀를 씻다

이성선

 

산이 지나가다가 잠깐

물가에 앉아 귀를 씻는다

 

그 아래 앉아 물을 마시니

입에서 산()향기가 난다.

 

 

 

그냥 둔다

이성선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산 능선도 그냥 둔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이성선

 

먼 산이 내려와 고요히 누운 연못 위로

개구리 한 마리 헤엄쳐

간다

 

세상을 물으려 찾아가고 있다

 

탁발승 하나

 

 

 

깊은 강

이성선

 

바라나시* 저녁 하늘에 붉게 해 지고

저무는 강가* 강 물결 위에 꽃등 뜨네

 

고요히 숨결 깊어진 수면 위로 슬픈

꽃등 그림자 떨어져 흔들리며 떠가네

 

눈이 맑은 소녀야

작은 손으로 꽃을 팔며

미소 띤 얼굴에 노래 부르는

 

너에게 꽃 하나 사서 불을 붙여

기도하듯 두 손으로 강물 위에 놓느니

 

달빛 젖은 강물 위로 꺼질 듯

작은 생명 하나 불꽃 시를 쓰며 가는구나

 

어둠의 강가강에 혼자 앉아 다짐한다

이제 삶이 무엇인지 더 묻지 않으리라

내가 누구인지도 다시 묻지 않으리라

 

시간의 강물인 대지 위를 흐르며

저 꽃등처럼 목숨 사르어 시를 쓰며 떠가면

되리라

 

* 바라나시 : 북인도의 힌두교 성지. 영적인 빛으로 충만된 이 도시를 성스러운 강, 강가 Ganga가 굽어 흐른다

* 강가 Ganga : 갠지스강

 

 

 

깨끗한 영혼

이성선

 

영혼이 깨끗한 사람은

눈동자가 따뜻하다

 

늦은 별이 혼자 풀밭에 자듯

그의 발은 외롭지만

가슴은 보석으로 세상을 찬란히 껴안는다

 

저녁엔 아득히 말씀에 젖고

새벽엔 동터오는 언덕에

다시 서성이는 나무

 

때로 무너지는 허공 앞에서

번뇌는 절망보다 깊지만

목소리는 숲속에 천둥처럼 맑다

 

찾으면 담 밑에 작은 꽃으로

곁에서 겸허하게 웃어주는

눈동자가 따뜻한 사람은

가장 단순한 사랑으로 깨어있다.

 

 

 

이성선

 

첫 봉오리는 붓이다

다음 봉오리는 입술이다

다음 봉오리는 자궁

그다음 봉오리는 열려서

접시다 몸이다

떠도는 바람이다

그리고 마침내 꽃은

()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고개 들고

너를 바라본다

 

 

 

꽃잎을 쓸며

이성선

 

죽음에 이른 한 스님이

제자들을 불렀다.

나 세상에 왔다

갔다는 소식

누구에게도 전하지 말라.”

그는 눈을 감았다.

꽃이 지듯 떨어져 흩어졌다.

떨어진 꽃잎 주우며

먼 산을 바라본다.

먼 산 보며

꽃잎 떨어진 자리를 쓴다.

 

 

 

꽃 한 송이

이성선

 

꽃잎 속에 감싸인 황금벌레가

몸 오그리고 예쁘게

잠들 듯이

 

동짓날 서산 위에

삐죽삐죽 솟은 설악산 위에

꼬부려 누운

 

초승달

 

산이 한 송이 꽃이로구나

 

지금 세상 전체가

아름다운 순간을 받드는

화엄의 손이로구나

 

 

 

나도 그런 사람을 갖고 싶다

이성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주는

그런 사람을 하나 갖고 싶다.

 

 

 

나무

이성선

 

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인 줄을

더욱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은 어느 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신을

 

 

 

나무 안의 절

이성선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 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 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구름꽃

별꽃 뜯어 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나무에게

이성선

 

내 귀를 네게 묻는다.

듣는 사람아

하늘을 듣는 사람아

그대 시인이여.

너의 가슴에서 플룻을 듣는다.

내 안으로 깨어오는

또 한 사람이 들린다.

진실한 언어의 발소리

나무야

이 저문 땅의 빈자여

함께 걸어가다오.

네 안의 아름다운 자가

별이 이고 춤추는 자가

나를 걸어가는 동안

나는 너의 세계를 가고 있다.

나무야

함께 걷는 시간에

나는 문득

너의 뒤에서

알 수 없는 강물을 건너고 있다.

 

 

 

나무에게 주는 말

이성선

 

나무야 너는 아프냐

너 가까이 있으면

두 팔 벌여 말없이

나를 껴안아 주는 나무야

너에게 기대면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 하늘 수많은 별들의

생각도 듣게 된다.

낙엽을 몰고 가는

바람의 바쁜 발걸음도 듣는다

너에게 기대면

갑자기 많은 사람이 되는구나

사람에게 기대기보다

때로 네게 기대고 싶다.

 

 

 

나무처럼 외로운 나무로 살고 싶다

이성선

 

바라보면 지상에서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늘 하늘빛에 젖어서

허공에 팔을 들고 촛불인 듯

지상을 밝혀준다

땅속깊이

발을 묻고 하늘구석을 쓸고 있다.

별을 이고 악기가 되어 온다.

내가 저 나무를 바라보듯

나무도 나를 보고 과연

아름답다고 생각할까

 

나이 먹도록 가슴에

깊은 영혼의 강물이 빛나

머리 숙여질까

나무처럼 늙을수록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무처럼 외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혼자 있어도 놀이 찾아와 빛내주고

새들이 품속을 드나들며 집을 짖고

영원을 길을 놓는다

바람이 와서 별이 와서 함께 밤을 지샌다.

 

 

 

낙산사에서

이성선

 

암자를 잠근 바다

문고리를

손으로 풀고 들어서다

방에 눈물 없이 앉아

()를 만지는 일이

세상을 보는 만큼이나 두렵다

한밤중

뜨거운 내 옆구리에서

빠져나온 달이

붉게 우는 바다

솔가지 끝으로

두려움 없이 일어서다.

 

 

 

낙산사의 노래

이성선

 

1

암자 안에 바다를 다 잠글 수 있다면

내 주머니 속에 바다를

감추고 떠돌 수 있다면

저 무음의 산 노래가 더 잘 들리리라

오늘 아침에 설악이 또

구름에 옷고름 풀어

내게 속가슴을 보이는구나

여기 오래 앉아 있으려 하였으나

다시 떠나야겠다

사람이 없는 곳에

사람을 찾아

소리 없는 곳에 소리를 찾아

산아, 너의 무반주 노래

너의 무반주 육체 속에

하룻밤 파계로 일박

 

 

2

현실 쪽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어릴 적

내가 자란 산골마을

한 길 넘게 쏟아지는 겨울 눈 속에

나를 찾아 온 산 염소

그게 요새 저녁마다 다시

설산에서 내려와

밖으로 드나드는 내 방문의

한지 위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구나

 

달빛 반은 문의

댓잎사귀

 

사각사각 먹고있는 염소의 입

별과 함께 살고 있는

그는

길 위에서 언제부터인가

내 앞에 있다

추녀 끝의 기와 그림자가

파도치는 물결 세상

 

 

3

밤에 바다 소리를 덮고 잠을 잔다

낮에 산의 부름에 귀를 연다

 

홍련암 앞 바다에

붉게 솟아 오르는 해 기둥

 

고요가 말을 걸어 오고 있다

하늘을 쓸며 날아가는 새 그림자

마당에 비친다

 

바다가 큰 책이다

대청봉이 산을 데리고 내려와

바다 위에 나무를 키운다

 

그 나무가 허공 거름을 먹으며

아침저녁마다 가지 가득

붉은 꽃을 피운다

 

 

4

외로움은 벼랑 끝에 화안하다

바다가 그걸 안다. 그래서

무섭게 흰 거품을 물고 올라와 의상대를 부술 듯

혀를 날름대며 저 품안으로

나를 끌어 내리려 한다

 

소나무는 가지의 층층에 바다를 앉히고

아래로 다 떨어지게 몸이 기울어져

달 뜨는 쪽으로 팔을 뻗었다

 

달 뜨는 곳에서 향기가 난다

생명이 살아 일어서는 소리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기 와서 모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몸이 늙어 아름다운 바다 고송

영혼이 치는 솔바람 거문고 소리

 

아득한 벼랑 끝으로

목매단 듯

아으,

달이 뜬다

 

달 도장 무수히 찍히는 바다

소 발자국 찍힌 하늘

 

 

5

원효는 서울을 버렸다

의상도 서울을 떠났다

세삼 복판에서 다시 파도 끝

오봉산 자락의 의상은

바다 향해 앉았다

 

개 깃털처럼 땅을 떠돌던 원효

그도 설악 기슭에 굴을 파고

산을 향해 앉았다

 

장난꾸러기 원효가 고개를 돌려

동해 의상을 향해 웃음을 흘리고

의상은 천의 팔을 바다에 집어 넣어

해와 달이 그의 몸을 밟고 올라와

원효의 산 쪽으로 가게 했다

 

가까이 보면 둘은 떨어져 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하나로 등이 맞닿아

이상하게도 무지개가

한 끝은 바다에 한 끝은 산에 내려

두 스님이 이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다

 

조그만 나의 집은

이 무지개가 지붕이다

 

수레를 타고 가고 있는 너와 나

 

의상은 죽어서 해 뜨는 불상에 앉고

원효는 함지에 누워 노래한다.

 

 

 

내 몸이 다 비어지면

이성선

내 몸이 다 비어지면

그대 곁에 가리라.

겸허한 손 깨끗한 발로

그대에게 가서 쉬리라.

잠들리라

그대 영혼의맑은 사랑을

내 빈 그릇에 담고

내 꿈을 그대 가슴에 담아서

잠속에 누부신 나비가 되리라.

금빛 침묵의 땅에

꽃처럼 떨며 열려서

사랑을 고백하리라.

티 없는 눈빛으로그대와 함께 걸어

강에 가서 엎드려 물을 마시리라.

노래를 부르리라.

다 비우고 빈 몸으로 깨어나

새 악기가 되어서.

 

 

 

노래하는 장롱

이성선

 

우리 집 장롱은 오래되어 옷을 제대로 간수 못 한다.

좀약 대신 비누 조각이나 담배 가루를 넣어두지만

아랑곳없이 좀은 그 안에 살며 내가 제일로 소중히

여기는 옷들에 구멍을 낸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그러나 이제는 거리낌 없이 나는 이 옷을 입고 다닌다.

어떤 것은 구멍이 숭숭 너무 많이 뚫리어 누더기가

되었다. 장롱 속 벌레가 새로 지어내준 옷 스님들 누더기는

얼룩천으로나 대어 깁지만 옷수선 집에서도 고칠 수

없는 옷을 나는 바람의 천으로나 달빛 천으로나 새소리의

천으로나 덧대어 기워 입고 다니기로 했다. 이곳으로

따뜻이 별이 뜨고 새벽빛이 오고 작은 풀꽃 얼굴들이

들어와 살며 나를 새로 만들어 주기를 기다리면서

장롱에서 음악 소리가 난다. 달빛 갉는 소리 세상을

새로 짓는 소리가 방안을 흐른다. 이 강을 옷자락

펄럭이며 내가 건너간다

 

 

 

노을 무덤

이성선

 

아내여 내가 죽거던

흙으로 덮지는 말아 달라

언덕 위 풀잎에 뉘여

붉게 타는 저녁놀이나 내려

이불처럼 나를 덮어다오

그리고 가끔 지나가는 사람 있으면

보게 하라

여기 쓸모없는 일에 매달린

시대와는 상관없는 사람

흙으로 묻을 가치가 없어

피 묻은 놀이나 한 장 내려

덮어 두었노라고

살아서 좋아하던 풀잎과 함께 누워

죽어서도 별이나 바라보라고

 

 

 

노천 이발소

이성선

 

파페푸르 시크리* 마을에 시장이 섰다

아름다운 색채의 사리 입은 여인들과

여러 피부색의 사내들이 한데 모여 들끓는다

물건 파는 목소리가 높게 뜨고

좌판의 음식 향기와 과일 빛깔이 타올라

마을은 꽃밭 같은 축제중이다

그 속에서 한 여인이

짜파티** 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는 소에게 보시한다

하늘 위에는 흰구름이 둥실 떠가고

땅에는 순례자의 발걸음이 느린데

백 년쯤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낯선 이 마을에서 머리를 깎으려고

시장 한켠 노천 이발소 나무의자에 앉는다

의자 하나와 가위 그리고 바리깡이 전부

나무에 걸어둔 거울도 반은 깨어졌다

거울 속 얼굴 뒤에는 검은 피부의 이발사가

둥근 달처럼 화안하게 미소한다

얼마 만에 찾은 이 평화인가

거기 기대어 지그시 눈을 감는다

이발사가 내 티끌을 잘라 쓸어내는 동안

내 몸 아득한 지평에서

신일까, 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파테푸르 시크리 : 아그라 남서쪽의 옛 무굴 도읍지

* 짜파티 : 인도 주식의 하나. 우리나라 밀전병 같다

 

 

 

논두렁에 서서

이성선

 

갈아 놓은 논고랑에 고인 물을 본다

마음이 행복해진다

나뭇가지가 꾸부정하게 비치고

햇살이 번지고

날아가는 새 그림자가 잠기고

나의 얼굴이 들어 있다

늘 홀로이던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누가 높지도 낮지도 않다

모두가 아름답다

그 안에 나는 거꾸로 서 있다

거꾸로 서 있는 모습이

본래의 내 모습인 것처럼

아프지 않다

산도 곁에 거꾸로 누워 있다

늘 떨며 우왕좌왕하던 내가

저세상에 건너가 서 있거나 한 듯

무심하고 아주 선명하다

 

 

 

눈이 온 다음 날 비치는 햇살

이성선

 

눈이 온 다음 날 솔잎에 빛나는 햇살

산협에 내려와 두근거리는 하늘

가지의 속삭이을 비추는 조용한 물빛

거울 속에 담긴 한르을 차고 날아가는 새

새소리 새소리 사이로 피어오르는 물소리

물소리 물소리 사이로 젖는 향기

 

 

 

다리

이성선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달과 산인

이성선

 

산인을 따라

달이 산에서 내렸다

산인의 얼굴이 봉우리와 나무를 스칠 때

달은 발 아래 냇물에서

돌에 부딛히고 물쌀에 미끄러져

산인 보다 빨리 내렸다

얼굴 깨지고 팔다리 다 으스러져 산에 실려

몸이 찾을 수 없는 곳에 빠져도

나비처럼 물방울 속에서

숲에서 돌 틈에서 다시 살아 나와

달은 발 아래 웃었다

산인이 걸을 때

하늘에도 땅에도 나비가 날았다

산인이 멈추어 잠시 쉴 때

물밑 가지를 부지런히 다니며 달은

수 없는 촛불을 달았다

빛에 젖은 돌들이 구름처럼 물 위에 둥둥 떴다

이 길을 밟고 산인이 내렸다

그가 집에 이르러 방에 들자 앞서 온

달은 그의 밥상 물사발에 떴다

산인이 여기에 밥을 말아 먹으니

하늘에 꽃잎 흩날려 그릇에 부딛는 소리

산인의 뱃속을 지나 달은 그의 구천에 떴다.

 

 

 

달 물속 빈산이 꽃 피는 소리

이성선

 

, 하나 등에 지고 산도 하나 지고

둥그런 어둠 속을

밤 열어 길 열어 가는 사내

길바닥 드문드문 괸 빗물에 내려 비친

하늘을 지켜 보다

하늘 안으로 사라져 들어간 물속 빈 산

꽃 피는 소리 만나러 가는 사내

산에 닿아

짐 벗어 놓고

돌아오지 않는 사내

 

 

 

달빛 발자국

이성선

 

달빛이

산길을 쓸자

냇물처럼

길이 산 위에 떴다

 

너구리 까투리 고라니 산밤 찾는 들쥐들

발가락에 달빛 묻어

 

어떤 발지국 줄은 산 위에서 별 쪽으로 사라지고

다른 줄은 마을로 내려오고

 

또 한 줄은

내 잠 속으로 숨어들어

꿈의 세상에 발자국을 찍었다

 

내 뼈골 속에 흩어져 달빛으로 찍힌

작은 하늘 흔적들

 

 

 

달을 먹은 소

이성선

 

 

저무는 들판에

소가

풀을 베어먹는다

풀잎 끝

초승달을 베어먹는다

물가에서 소는

놀란다

그가 먹은 달이

물속 그의 뿔에 걸려 있다

어둠 속에

뿔로 달을 받치고

하늘을 헤엄치고 있는 제 모습 보고

더 놀란다

 

 

 

달이 단신으로 뛴다

이성선

 

올려다보면 여름밤 하늘에

구름 깨지는 소리가 가득하다

깨진 구름 틈새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달이 건너 뛰고 있다

내려다보면 내 안에서도

흰구름 살 터지는 소리가 가득하다

거기서도 그가 화안히 열린

강물을 건너 뛰어 숨는다

달은 단신으로 뛴다

그가 누구인가

내 속의 너다

여름밤 나무 위에서 구름과 몸을 섞는

너는 나다

 

 

 

달 하나 묻고 떠나는 냇물

이성선

 

아낌 없이 버린다는 말은

아낌 없이 사랑한다는 말이리

 

너에게 멀리 있다는 말은

너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는 말이리

 

산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안 보이는 날이 많은데

 

너는 멀리 있으면서

매일 아프도록 눈에 밟혀 보이네

 

산이 물을 버리듯이 쉼없이

그대에게 그리움으로 이른다면

 

이제 사랑한다는 말은 없어도 되리

달 하나 가슴에 묻고 가는 시냇물처럼

 

 

 

대작(對酌)

이성선

 

술잔 마주 놓고 서로 건네며

산과 취하여 앉았다가

저물어 그를 껴안고 울다가

품속에서 한 송이 꽃을 꺼내 들고

바라보고 웃느니 바라보고 웃느니.

 

 

 

도반(道伴)

이성선

 

벽에 걸어 놓은 배낭을 보면

소나무위에 걸린 구름을 보는 것 같다

배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길처럼 가벼워진다

지게 지고 가는 이의 모습이 멀리

노을진 석양 하늘 속에 무거워도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혹은 걸어가는

저 삶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을까

알고도 애써 모른 척 밀어냈을까

중심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 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다니

배낭 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지금

 

 

 

도피안사(到彼岸寺)

이성선

 

허리 굽고 귀도 절벽인 노승이

누덕옷 속에

길을 모두 감추고 떠나버려서

 

그곳으로 가는 길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뜻밖에 일찍 뜬 달이

둑 위 가랑잎과 누워 섹스하는 모습만

훔쳐보고 돌아왔다

 

 

 

등잔의 노래

이성선

 

나의 그릇에 별이

내린다.

 

이 밤 나의 몸이 무한한

어디에 닿아 있다고

당신의 입은 웃는가.

 

불이 켜진 둘레로 흔들리는 바다

누가 와서 꽃향기처럼

나의 목숨을 만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의 시여, 지금 보는가.

떨리는 어느 분의 손이

내 영혼의 빈 잔에

술을 부어주고 다시 부어준다.

 

다 돌아가도

그분만은 남아

맑은 내 이마를 밟고

내 안에 조용히

얼굴 비치고 있다.

 

 

 

떨림으로

이성선

 

삶 전체가 기도이게 하소서.

기도가 떨리는 삶의 전부이게 하소서.

별빛으로 몸을 씻습니다.

바람의 말씀으로 영혼을 씻습니다.

그것만으로 이젠 가슴 찬란하여

밤이면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며

()를 쓰고 살아갑니다.

아침 연잎에 구르는 물방울 소리

황홀히 빈손으로 받고

빈 저녁 바다

그분 오시는 발소리에

문풍지처럼 가슴 떨립니다.

떨어지는 나뭇잎 두 손으로 받으며

이 큰 떨림으로

당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게 하소서

 

 

 

떨어진 꽃잎

이성선

 

떨어진 꽃잎이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잠을 자네.

아무도 쓸지 않은 지 오래

 

산그림자가 이불을 내려

그의 몸을 덮어주네.

 

비가 비를 때리는 밤에도

 

 

 

라자스탄*의 밤 사막에 누워

이성선

 

사막의 밤하늘에 가득히 반짝이는 주먹만한 별들

그 이불 덮고 누워 대지에 귀를 댄다

당신의 넓게 두근거리는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가슴에 노래로 내려박힌다

바람의 옷 입고

당신 목소리 찾아 먼 여기까지 흘러왔거니

막막한 광야 어디에 짐승 소리 울리고

숨은 성자의 목소리 들려오는가

몸 위로 하늘의 말씀이 쏟아져

기운 사경(四更)의 달빛이

대지를 쓸어 어루만지며 내 이마를 짚어준다

사랑하는 이여

나 여기 와 누워 처음으로 당신의 사람이다

지는 해의 긴 낙타 그림자에 실려

말이 그친 곳 그리움도 절한 곳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지상의 마지막에 돌아와

떨어지고 있는 별 사이로 당신의 꽃을 받느니

곁에 잠들지 않은 낙타의 방울 소리가

외로운 내 꿈을 더 먼 곳으로 이끈다

나 이 사막에 누워 비로소 당신과 하나다

 

 

 

마루를 닦으며

이성선

 

아침마다

마루를 닦는다.

 

마룻바닥에 투명히 물살짓는

나무의 무늬.

 

너의 아픔 나의 아픔

아니 세계의 아픔이

어쩔 수 없이 여기 누워

신음만 내비치는 곳.

 

마루를 닦는다.

피묻은 물살을 닦는다.

 

하늘 우러러

침묵하던 자

 

저 어둠 이 바람 속에

홀로 지키던 자

 

어느 모진 손에 잘리고 써리어

내 마루에 못박혀 누워

불꽃 신음만 내비치는 나무야

 

마루를 닦는다.

마루를 닦으며

나를 닦는다.

 

허나 닦으면 닦을수록

더욱 선명히 내비치는

네 신음의 무늬.

 

 

 

만나고 싶은 사람

이성선

 

몸에서 소리 나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매양 알 수 없는 빛에 젖어서

그의 내면으로부터 신비한 소리가 들려오는

고독한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듣고 싶습니다.

이 여름의 깊은 밤 한가운데서

그가 부는

영혼의 맑은 갈대 피리

서쪽에서 왔을까.

세상의 한 골짜기를 열고

안으로 안으로 노래하며 흘러가는

흐느낌 같은 사람

반편 같은 사람

별이 비치는 하늘 아래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비 젖은 바닷가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그의 곁에서

깨어있는 또 다른 그를 들으며

걸어가고 싶습니다.

독경 같은 그 음악으로

빈손을 적시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먼 산

이성선

서릿빛 하늘 아래로

점점이 이어져 떠가는 산을 바라보고 있다.

고요한 능선에서는 낮은

대금 소리가 흐느껴 흐른다

, 깊어라. 이 세상

삶이 갑자기 장엄해지는구나

그대 눈부셔 아득히 먼

해지면 나 돌아올 수 있는 곳

 

 

 

몸은 지상에 묶여도

이성선

 

한밤 짐승이 되어 울까

눈물 가득 꽃이 되어 울까

광야에 웅크려 하늘을 본다

몸은 지상에 묶여도

마음은 하늘에 살아야지

이 가지 저 가지를 헤매며

바람으로 울어도

영혼은 저 하늘에 별로 피어야지

절망으로 울던 마음 그 가난도

찬연한 아픔으로 천상에 빛나야지

광야에 웅크려 다시 하늘을 본다

마음 잎새에 빛나는 별빛이어

눈물 가득 꽃이 되어 울까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울까

 

 

 

못생긴 것이 더

이성선

 

잘 못 쓴 시가 더

마음에 들 때가 있다

 

아내 얼굴이

가까이 내 곁에 있듯이

 

완벽하지 못한

저 비뚜른 조선 자기

 

내 곁에서 너는

부끄러워 떠나지 못한다.

 

 

 

무릎 위의 시

이성선

 

네팔의 한 무명 시인

그는 가난하여 설산만 쳐다보았습니다

책도 경전도 가질 수 없어

[] 속에 설산을 경전으로 펼치고 살았습니다

그 빛으로 그는 결국 눈이 멀었습니다

멀리 걸을 수 없어 앉아만 있는 그를

작은 풀꽃들이 동무하여 말을 건네주고

흩어진 머리칼을 바람이 쓸어주고

세월이 와서 얼굴에 주름을 새겼습니다

그는 어느 곳도 가보지 못해

땅의 일에는 귀가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 몸 안으로 뿌리내린

설산의 말씀 하나가

광막하고 고요한 그의 내부를 가득 울렸습니다

울리는 소리마다 시로 뿌려져 그를 채웠습니다

그것을 시인은 그의 무릎 위에 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 무릎 위의 시를

달빛이 와서 읽어주었습니다

 

 

 

무명(無明)

이성선

풀잎과 풀잎 사이

절간을 짓는다.

저녁이 붉은빛으로

종을 울리고

빈 하늘이 눈물에 젖는다.

천 년쯤 후 어느 소가

이 하늘을 가로질러와서

들의 풀을

뜯어먹고 있다.

 

 

 

문답법을 버리다

이성선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 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물 위에 달빛 붓으로

이성선

 

가랑잎 종이 위에다

평생 이름을 적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슬픔이더냐

차라리 실컷

물 위에 달빛 붓으로 글을 쓰겠다

 

 

 

미시령 노을

이성선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바다를 잃어버리고

이성선

 

바다를 바라보다가

바다를 잃어버렸습니다.

바닷가를 거닐며

바다를 찾고 있습니다.

당신에 너무 가까이 있다는 것은

당신을 잃는 것입니다.

당신을 다 안다는 것은

당신에 대하여 눈을 감는 일입니다.

사랑도 그러합니다.

이 가을에 이젠 떠나야겠습니다.

멀리서 더 깊이 당신에 젖고 싶습니다.

당신의 눈동자와 흔들리는 가슴

물새들의 반짝임도 울음소리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고 들어야겠습니다.

당신이 보내신 편지를 읽듯이

멀리서 떨리는 손으로

등불 아래서 펴 보아야겠습니다.

 

 

 

바람 속에서

이성선

 

산에게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다.

바다로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다.

나무에게 가는 길이

별에게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다.

 

나의 길에 바람이 분다.

바람은 늘 산에 있고

바람은 늘 바다에 가득하고

바람은 나무 끝에 먼저 와

그곳에 서 있다.

 

나의 길은 바람 속에 있다.

잎새 끝에는 언제나

새벽 별이 차갑게 떨고

바람은 길에서 나를 울렸다.

 

 

 

바람의 노래

이성선

 

수우족은 아니지만

어릴 때 들길을 걸으면서 알았다

내 영혼은 바람이 주셨다는 것을

지금도 걸으면서 느낀다

내 눈동자 속의 눈동자에서는

그분과 하나다

나는 이것을 그치지 않고

노래하기를 열망한다.

새벽 풀잎에 별이 흐를 때

나의 귀는 듣는다

밭고랑 감자가 냇물에게 들려주는 노래

메꽃 속에 늦잠자는

벌레의 잠꼬대 소리

바람은 이들로 향기롭다

이들은 내게 와서

들판으로부터 나를 키웠다

수우족처럼은 아니지만

나는 알았다

그리고 지금도 안다

아름다운 것은 단순하고 작다

수우족이 그렇게 살고

내가 어릴 때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반달

이성선

 

반은 지상에 보이고 반은 천상에 보인다

반은 내가 보고 반은 네가 본다

둘이서 완성하는

하늘의

마음꽃 한 송이

 

 

 

백담사

이성선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절 마당을 쓴다

마당 구석에 나앉은 큰 산 작은 산이

빗자루에 쓸려 나간다

산에 걸린 달도

빗자루 끝에 쓸려 나간다

조그만 마당 하늘에 걸린 마당

정갈히 쓸어놓은 푸르른 하늘에

푸른 별이 돋기 시작한다

쓸면 쓸수록 별이 더 많이 돋고

쓸면 쓸수록 물소리가 더 많아진다

 

 

 

벌레

이성선

 

꽃에는 고요한 부분이 있다

그곳에 벌레가 앉아 있다

 

 

 

별로 떠 있는 사람들

이성선

 

눈을 뜨고 바라보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이밤에

모두 별로 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리운 시인들은

더욱 높이 별로 떠서

나를 비춘다.

역사를 말하고 조용조용 사랑을 읊조리고

혹은 기도 속에 영혼의 노래 부르며

잎새나

나뭇가지나 하늘 복판에

꽃보다 더 맑은 눈동자로 떠 있다.

가난한 누님

외로운 동생

지금은 멀어져간 이웃이나 동무들도

가까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별로 떠서

이 밤을 빛낸다.

 

 

 

별빛 바람 하늘소리

이성선

하늘 아래 첫 마을

별빛 바람소리 하늘소리가

내려와 나를 키운 곳

자라면서 사람들은 거길 떠나

도회로 가라 했습니다.

무섭고 겁나는 나에게

낮고 넓은 곳으로 가라 했습니다.

아래로 조금씩 발을 옮기며

산골놈이란 말이 죽어도 싫어

내 몸 곳곳의 별빛과 바람소리를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당당해졌습니다.

촌놈을 쉽게 비웃으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양

작은 도시 골목을

빈 깡통으로 굴러다녔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는

밤에 돌아와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워졌습니다.

마음 비면 빌수록 그리워졌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제일 먼저

나를 키우던 별빛 바람소리

지키어 빛나던 하늘의 음성

밤마다 꿈이면 그들은 웁니다.

골목을 굴러다니다 쭈그려 잠든

어두운 꿈속으로나 찾아와

슬픈 눈빛으로 나를 들여다봅니다.

 

 

 

별을 바라보는 우물

이성선

 

사막 작은 나무 곁의 별 아래서 몸을 오그리고 잠을 잤다.

옆에는 모래밭을 헤매며 풀을 뜯는 염소들을 위한

우물이 있었다. 낮에는 몰랐으나 밤에 우물은 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보며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었다. 내가

누워 눈을 감은 동안에도 우물은 혼자 눈을 뜨고 있었다.

사막이 다 잠든 뒤에도 우물은 깨어 별을 바라보았다.

잠들지 않은 내 귀가 우물 속으로 별이 퐁당퐁당 빠지는

소리를 들었다. 우물 속에 내려와 떠드는 별들의 소리도

들었다. 하늘의 염소가 물을 마시러 내려와 별 사이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다음날은 그곳을 떠났지만 나는 그 후로 내 마음의

사막 한곳에 밤이면 깨어 눈을 뜨고 별을 쳐다보는

우물 하나를 갖게 되었다

 

 

 

별을 보며

이성선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별의 아픔

이성선

 

내가 지금 아픈 것은

어느 별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밤늦게 괴로운 것은

지상의 어느 풀잎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토록 외로운 것은

이 땅의 누가 또 고독으로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하늘의 외로운 별과 나무와

이 땅의 가난한 시인과 고독한 한 사람이

 

이 밤에 보이지 않은 끈으로나

서로 통화하여 앓고 지새는

 

병으로 아름다운 시간이여.

 

 

 

별의 여인숙

이성선

 

친구하고 저녁에

술 한잔 하고 그냥

집에 돌아가기는 싫어라.

 

다른 녀석네 대문을 박차거나

낯선 여자 지저분한 분내에 안겨

아무렇게나 하룻밤 잠들고 싶네.

 

그래도 그러지 못하고

바보처럼

허청허청 돌아오는 길.

 

내 지붕 위에 나지막이 내려걸린

하늘의 북두칠성

아 저기로나 기어올라가서 하룻밤

잠들어볼까.

 

일곱 별 중 아래쪽으로 기울어진 네 별

그 오목한 구석

하느님이 들고 계시는

잠자리채 같은 저 속에 들어가

쪼그리고 잠을 잘까.

 

새벽에 깨어나

별들과 우주로 잠적해버리거나

땅바닥에 떨어져 깨질지라도.

 

 

 

별이 비치는 지붕

이성선

 

장이 나빠 소화가 안되는 날은

배를 문지르며 고향으로 갑니다.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산골길

길 끝에 변소 하나

버섯처럼 기울어져 서 있고

그 안에 앉아 있는 어릴 적 나를 봅니다.

힘들어 찡그리며 쳐다보는 내 눈에

썩은 서까래 터진 지붕 틈새로

언뜻 나를 쏘아보던 밤하늘 별빛

독 안에서도 하얗게 내리깔리던 별빛.

겁에 질린 나는 얼른 뛰쳐나오고

밤이면 다시 그 근처를 얼씬 못하였습니다만

그 일로 내 마음 지붕도 그렇게 터져서

다른 곳은 다 고쳐도

그곳만은 꿰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라고

자라서도 또 망가진 변소 하나

몸속에 몰래 지어놓고 살았던가.

쭈그려 생각에 잠기거나

번뇌에 쫓기어 깊이 헤매는 밤이면

터진 몸의 지붕 틈새로

번뜩이며 나를 쏘아보던 별빛

고향 마을 뒷산 솔바람 소리

우주 저쪽의 몸짓까지 함께 묻어와

쏴쏴 나를 쓸며 다니는 소리

 

 

 

보이지 않는 무덤

이성선

 

누가 나를 불러 냈는가

청산 가득 하얀

박꽃 피어 눈 부셔라

별들과 벌레 소리와 물 소리 이슬로 짠 옷 한 벌

내게 던져 주며 누가 이르노니

동 트는 새벽까지 기다려라

빗자루로 붉은 동녘 하늘을 쓸고 내리는

그 분을 찾아라

붕붕대는 벌의 날개짓

고요의 노래

우주는 벌집이네

그중에는 더러 땅에 떨어져 죽은 논도 자주 보이네

, 저 하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세계가 나를 맞을까

색즉시공 공즉시색

자유자재한 손을 가진

그 분이 내 곁에 계시듯

어느 별 나무 아래 계실까

만다라꽃이 뚝뚝 떨어지는 고요의 밀원

섬들이모두 떠올라 명상하네

우주가 내 눈동자 샘물 속에 빠져

몸을 씻고 있을 때

숲은 비로소 가슴을 열고

신운에 떨며 노래하노니

하늘과 땅이 한 소리에 그윽히 젖네

이 대지 위에

기다려도 박꽃 지는 시간까지

별들만 자꾸 죽어 꽃이 되어 내리고

줄을 길게 긋고 떨어저

몸을 묻는 골짜기가 환해지네

선사들은 어디서 죽었을까

무덤이 안 보이네

다른 영혼을 키우러 떠난 자는 죽어서

세상에 무덤을 두지 않네

새벽 언덕에 혼자서 서 있는 빛처럼

 

 

 

복사꽃

이성선

 

봄날 길 없이 온 너는

갈 곳 없어 더 화안하다

몸 찾은 곳이

달 뜨는 쪽 아니다

 

저 깊은 가지

허공에 피어 허공을 물들이는

너 목숨 저물면

거기 그냥 사그러져라

 

잠들 때 꽃은 가장 상기되는 시간

향기도 슬픔도 너의 것 아니다

 

무심히 내게 던진 그늘에

 

그분 피가 붉게 섞여 있다

 

 

 

봄눈

이성선

 

개구리 눈 속에

피어난 복사꽃

알을 까놓은

팔만 대장경

무논에 무수한 달이 뜬다

거기가 하늘 위 절이다.

 

 

 

봄밤

이성선

 

나귀의 귀 속에 우물이 있네

우물 안에 배꽃이 눈을 뜨네

마음에 숨은

당신 찾아가는 길

나이 먹어도 나 아직 젊어라

 

 

 

빈 배

이성선

 

마당에 가득 올라온 바닷소리를

빗자루로 쓸어내려 하니

달빛이 그 위에 더욱 눈부시다.

그냥 두고 방으로 돌아오니

한지문은 달빛을 더 잘 받아

온 방 안이

호수처럼 깊고 고요하다.

그 위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빈 배이듯

눈을 감는다.

어느새 잠이 들어 꿈속인가

어딘지 달빛 물결 위에

배는 이 기슭에 부딪히고

저 기슭에 부딪히고

밤새도록

흔들리며 떠간다.

 

 

 

빈산이 젖고 있다

이성선

 

등잔 앞에서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

누가 하늘까지

아픈 지상의 일을 시로 옮겨

새벽 눈동자를 젖게 하는가

너무나 무거운 허공

산과 신이 눈뜨는 밤

핏물처럼 젖물처럼

내 육신을 적시며 뿌려지는

별의 무리

죽음의 눈동자보다 골짜기 깊나

한 강물이 내려눕고

흔들리는 등잔 뒤에

빈 산이 젖고 있다.

 

 

 

사랑

이성선

 

더러운 내 발을 당신은

꽃잎 받듯 받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흙자국을 남기지만

당신 가슴에는 꽃이 피어납니다

 

나는 당신을 눈물과 번뇌로 지나가고

당신은 나를 사랑으로 건넙니다

 

당신을 만난 후 나는 어려지는데

나를 만난 당신은 자꾸 늙어만 갑니다

 

 

 

사랑하는 별 하나

이성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춰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 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둔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산과 연꽃

이성선

험함이 고요함 안에 다리를 뻗고 있다

고요함이 험함 안에 몸을 맡겨 두고 있다

천둥 번개가 긴 혀를 무섭게 내두르며

하늘과 땅을 불로 지지고 고문하다 간 후에

비 젖은 산 비 갠 산이 새로 태어나

연꽃 피었구나. 세상 연못 속에 산이 꽃이구나

 

 

 

산 그림자

이성선

 

산을 버리고 다시 산 따라 간다

물속을 거꾸로

황홀히

떠가는 산

저 산에 이끌리어

남은 생 전부

저 산에 이끌리어

 

 

 

산길

이성선

 

산길은 산이 가는 길이다

나의 몸은 내가 가는 길

모자 쓰고 저기 구름 앞세우고

산이 나설 때 그 모습 뒤에서

길은 우뢰를 감추고 낙엽을 떨군다

산의 가슴속으로 처럼 놓여서

바람이 걸어가도 소리가 난다

새가 날아도 자취를 숨긴다

그것은 또 소 뿔에도 걸리지 않는

달이 가는 길

바람에 씻지 않은 발은 들여놓지 않는다

귀와 눈이 허공에 뜨여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눈 오는 저녁을 간직한다

산이 나에게 걸어올 때

 

산길은 내 안에 있다

 

 

 

산목련꽃

이성선

 

산목련꽃이 벙그는 날

막 입속의 혀

붉은 꽃술이

반만 보일락 말락 할 때

그것은 순전히

아직 한 번도 세상 남자를

접해 보지 못한

, 산중 처녀의

순결한 음부

가까이 다가가면 몸 닫아 버릴 듯

그 앞에서 눈을 감으니

나직이 울리는 먼 산 향기

나는 갑지기 와락 달려들어

그의 중심에다

나의 혀를 갖다 대어 본다

한밤에 너를 몰래 폭행하겠다.

그다음 산의 큰 천둥소리에 맞아 쓰러지겠다

 

 

 

산문답(山問答)

이성선

 

새벽에 일어나 큰 산에 절하고

저녁 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산에 머리 숙인다.

말없이 이렇게 하며 산다.

이러는 것은 아무 다른 뜻이 없다.

산 곁에서 오래 산을 바라보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

무슨 소리를 들었다 할 수도 없다.

산에게 무엇 하나 묻지도 않는다.

고요히 산을 향해 있다가 홀연

자신에게 돌아서는 일

이것이 산과 나의 유일한 문답법이다

 

 

 

산비

이성선

 

산을 가다가 비를 맞았네

옷이 살에 찰싹 달라붙어

산내음이 속옷까지 스며들었네

비 맞은 산꽃의 얼굴이 너무 맑아

젖은 채로 서서 한참 보았네

비 멎자 산 아래는 갰지만

산 위는 그대로 구름이 머물러

그 쪽으로 난 작고 가파른 길을 올라서

구름 속에 들었네

둥둥 떠가는 구름 안의 찻집

권금산장에 앉아서

아내와 젖은 몸으로 차를 마셨네

하늘 위로 여행 온 사람처럼

말없이 찻잔을 비우며

아래는 내려다보지 않았네

 

 

 

산상(山上)에서

이성선

 

대청봉 위에서 맑게 솟는

물을 마시니

티벳 영산 물 한 모금이 줄었다

 

설악에 엎드린 내가

히말라야 성수를 끌어 마셨구나

 

 

 

산에 가서 시를 읽다

이성선

 

시집을 사 들고 산으로 간다

구름 아래로 간다

 

배낭에 넣고 버스를 타고

창 밖을 바라보며 가슴은 뛴다

 

오솔길에 들어서 발은 시 쓰듯 간다

나뭇잎을 밟고 샘물을 밟고 바람의 말을 밟는다

 

줄기 하얀 자작나무

아래 시집을 편다

내 눈이 읽기 전에 나무가 먼저 읽게 한다

바위틈에서 나온 다람쥐가 읽게 한다

 

날아가는 새가 읽고 나서 내가 읽는다

싸리꽃이 읽고 나서 내가 읽는다

 

그들의 눈빛이 밟고 간 시

그들의 깨끗한 발자국이 남은 시

물방울이 된 시를

 

놀빛이 밟고 나서 내가 읽는다

 

 

 

산을 껴안고

이성선

 

술에서 깨어나 보니 내가

산의 사타구니

가랑이 베고 누웠구나.

아랫도리 단추 모두 풀린 상태로

어젯밤 누구에게 유괴되어

만취로 이 모양이냐,

정신을 차리고 비척비척 일어나니

내 몸 아래 밤내 깔린

쑥대, 곰취, 미나리아제비

, 나였구나.

산목련 향기에 홀려 마시고 또 마시고

이 골짜기에 와 쓰러져

산 하나 여자로

몰래 껴안고

새벽까지 잔 남자

 

 

 

이성선

 

새는 산속을 날며

그 날개가 산에 닿지 않는다

 

미시령 노을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새로운 하늘

이성선

 

비 오시는 날 연()꽃잎 위에

빗방울이 눕고

 

빗방울 뒤에 빗방울이

꽃잎 위에 꽃잎이

몸을 눕힌다.

 

하늘이 다시 포개어 눕고

달이 옷을 벗고

따라 눕고

 

 

 

새를 따라

이성선

 

바람에 발을 씻고

오늘 저녁

어느 암자에서 묵을까

일몰 아래 붉은 노래 주으며 날아가는 새의 날개를 따라서

저 마지막

적막에나 들자

 

 

 

새와 풀꽃의 면회소

이성선

 

아버지는 비무장지대 너머에 계시다

강원도 고성 금강산 속

작은 마을

또는 원산에

아버지는 계시다

외금강과 해금강의 외로운 길

논둑의 풀대 끝이나 길가 가지 위에

구름 되어 머물고 비로 흐느끼고

이미 육신은 땅에 다 털어버린 후

바람으로 아들을 부른다

설악산 아래 찾아와 밤 지새다 떠난다

아홉 살 때 가신 아버지

돌아보고 다시 돌아보며 가신 얼굴

그때부터 비무장지대는

남북을 가르는 띠가 아니다

아버지와 내가 찾아가 꽃으로 떠서

서로를 들여다보는 강물이 되었다

비무장지대는 지금

저승의 아버지와 이승의 아들이

만나 대화하는

새와 풀꽃의 면회소가 되었다

 

 

 

새해의 기도

이성선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아아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생명

이성선

 

바닷가에서 작은 조가비로

바닷물을 뜨는 아이처럼

나는 작은 심장에 매일 하늘을 퍼뜬다

 

바다아이가 조가비에

바다의 깊은 물을

다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허파도 하늘을 다 담지 못한다

 

그러나 조개껍질에 담긴 한방울의 물이

실은 바다 전체이듯

가슴 속에 담긴 하늘 또한

우주 전체이다.

 

 

 

설악을 가며

이성선

 

수렴동 대피소 구석에 꼬부려 잠을 자다가

밤중에 깨어 보니 내가 아무것도 덮지 않았구나

걷어찬 홑이불처럼 물소리가 발치에 널려 있다

그걸 끌어당겨 덮고 자다 선잠에 일어난다

먼저 깬 산봉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쫓겨서

옷자락 하얀 안개가 나무 사이로 달아난다

그 모습이 꼭 가사자락 날리며

부지런히 산길을 가는 스님 같다

흔적 없는 삶은 저렇게 소리가 없다

산봉들은 일찍 하늘로 올라가 대화를 나누고

아직 거기 오르지 못한 길 따라 내 발이 든다

길 옆 얼굴 작은 풀꽃에 붙었던 이슬들

내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물소리가 갑자기 귀로 길을 내어 들어오고

하늘에 매달렸던 산들이

눈 안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오르지 못한 길 하나가 나를 품고 산으로 숨는다

 

 

 

소식

이성선

 

나무는 맑고 깨끗이 살아갑니다

 

그의 귀에 새벽 네 시의

달이 내려가 조용히

기댑니다

 

아무 다른 소식이 없어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소포

이성선

 

가을날 오후의 아름다운 햇살 아래

 

노란 들국화 몇 송이

한지에 정성들여 싸서

비밀히 당신에게 보내드립니다

이것이 비밀인 이유는

그 향기며 꽃을 하늘이 피우셨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바람이 와서 눈을 띄우고

차가운 새벽 입술 위에 여린 이슬의

자취없이 마른 시간들이 쌓이어

산빛이 그의 가슴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에게 드리는 정작의 이유는

당신만이 이 향기를

간직하기 가장 알맞은 까닭입니다

한지같이 맑은 당신 영혼만이

꽃을 감싸고 눈물처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추워지고 세상의 꽃이 다 지면

당신 찾아가겠습니다

 

 

 

손의 명상

이성선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의 얼굴이 보인다.

내게로 불 밝혀 가야 하는

땅이 보인다.

세상을 다 받아들고도 비어 있는 손

잠들지 못하는 나라

산맥이 일어서고 골짜기가 깊다.

강물이 꿈을 꾼다. 바다가 깨어 있다.

미래의 내 음성이 들리는 곳

손바닥 깊이 들어가면

고요하다.

이 고요한 길 속에

길이 엇갈려져 끝이 없다.

혼돈과 창조의 거센 바람소리

우주의 숨소리

밤 하늘 별의 운행이 화안히 비친다.

모두가 죽어 여기 돌아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다.

항시 침묵으로만 말하는

내 미지의 손이여.

이 깊은 신비의 기슭에서

누군가 밤마다 내 영혼을 향하여

활을 쏘고 있다.

 

 

 

쇠별꽃

이성선

 

흙길을 가다가 본다

발자국이 남아 있다

 

발자국

 

들여다보니 놀랍구나

사라진 얼굴이 그 속에

숨어 있다

 

찾았다 잃어버린 사람

쇠별꽃 내음

 

 

 

숨은 산

이성선

 

땅바닥에 떨어진

잎사귀를 주워들다가

 

그 밑에 작게

고인 물 속

산이 숨어있는 모습

보았다

낙엽 속에

숨은 산

잎사귀 하나가

우주 전체를

가렸구나

 

 

 

시골길

이성선

 

시골 길에

비 온 뒤 물이 고이고

물 속에

산이 들고

 

산 속에 꽃이

붉게 피고

꽃 속 절간에

동자승이

숨어서 웃고

 

 

 

시집을 덮고

이성선

 

시집을 덮고 하늘을 본다

쇠기러기 몇 마리

쓸쓸히 비켜 날아가는 찬 산

 

내가 누구인지

지나가는 새에게 묻지 않는다

 

너와 내가 이곳에서 그냥

서로 바라보며 사는 것이 신비다

 

저문 문에 오른

나뭇가지 그림자에게

잔을 들어 술을 권한다

 

내 너만큼 야위어지면

너의 땅으로 돌아가리라

 

 

 

()의 가슴 길

이성선

 

인도로 떠날 때는 속으로 중얼거렸네. 거기서 죽고 싶다고. 달 뜨는 갠지스강을 베고 눕거나 사막의 바람 속 모래 위에 지쳐 쓰러져 까마귀 울음소리 들으며 설산을 바라보고 눈을 감자고

짜이푸르*에서 이른 새벽길을 떠나려고 밝아오는 거리를 나섰을 때 발 앞에 여기저기 사람들이 쓰러졌네. 낡은 천 조각 하나에 몸을 가린 채로 한기 속에 웅크리고 자고 있었네

가끔 드러난 얼굴이 땅빛을 너무 닮아서 지나다 모르고 밟을 뻔했네. 올려다보는 눈빛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섬찟 숨이 막혔네. 은은히 웃고 있는 눈동자 속의 그러나 아아, 텅 비어 있었네. 얼굴도 몸도 텅 비었네

희미한 안개 속에 묻힌 그들은 벌레 같았네. 이슬 젖은 꽃 같았네. 쓰러진 주검 같고 주검처럼 아무것도 아닌 지푸라기보다 못한 무()였네

텅 빈 눈과 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두려워져서, 이 한없이 깊은 불랙홀, 무 안에 빠질 것 같아서 얼른 지나쳐 자리를 떠났네. ()에 몸 씻으러 여기 온 내가. ()의 가슴 길을 찾아온 내가. 아아

* 짜이푸르 : 아그라 서쪽에 위치한 도시. 구시가지가 모두 분홍색집들로 칠해져 있어 <핑크 시티>라고도 불린다.

 

 

 

신화

이성선

 

아이가 가재를 잡으려고

저녁 산골 개울에서 돌을 뒤집었다

 

돌 밑에서 가재가 아니라

달이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달은 아이를 삼키고

집채보다 더 크게 자라서

동구 밖에 섰다

 

달의 뱃속에 지금 아이가 산다

 

 

 

아들에게

이성선

 

가끔은 혼자서 들길을 걸어라

들길을 걸어서 하늘을 보아라

늦게 지는 해를 바라보고

더 늦게 떠오르는 별을 바라보아라

 

때로는 매운 바람에 여위어

마른 등을 허공에 대고

네 유리창을 찾아와 밤내 흔들리는

겨울 꽃대궁의 목소리도 들어라

 

너도 가끔은 가난할 대로 가난해져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산 위 구름을 보아라

소나무는 이지러져 광풍의 소리를 낸다

혼자 지는 달도 자살하듯 산을 넘어간다

 

밤을 걸어서 눈물나는

무서운 언덕길을 넘어

다시 들을 지나 네게로 돌아오는 길

그 길에서 너의 길을 보아라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인가?

이성선

 

바라보면 지상에는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늘 하늘빛에 젖어서 허공에 팔을 들고

촛불인 듯 지상을 밝혀준다

땅속 깊이 발을 묻고 하늘 구석을 쓸고 있다

머리엔 바람을 이고

별을 이고 악기가 되어 온다

내가 저 나무를 바라보듯

나무도 나를 바라보고 아름다워할까

나이 먹을수록 가슴에

깊은 영혼의 강물이 빛나

머리 숙여질까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무처럼 외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혼자 있어도 놀이 찾아와 빛내주고

새들이 품속을 드나들며 집을 짓고

영원의 길을 놓는다

바람이 와서 별이 와서

함께 밤을 지샌다.

 

 

 

아름다운 저녁

이성선

 

장마로 오랫동안 가려졌던 산이

터진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살결을 드러낸다

보아서는 안 될 속가슴과 가랭이 사이

여인의 옷 벗는 모습을 숨어서 보는

 

눈물 나게 아름다운 저녁이다

 

 

 

얼굴

이성선

 

흙길 위에 난 우차 바퀴 자국

길게 마을로 향한

두 줄기 길

그 사이 더욱 깊게 파인

발자국 소 발자국

그 속에 나의 얼굴이 소의 얼굴과

나란히 떠오르는 날이 있다

비 온 다음 날이다

가장 맑은 날이다

시멘트 포장하다 남은 길

땅바닥이 가끔 비치는

나의 얼굴과 소

 

 

 

여름비

이성선

 

대낮에 등때기를 후려치는 죽비소리

후두둑

 

문밖에 달려가는 여름 빗줄기

 

고요하다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가

가지에 걸린 달도

 

잎으로 잘못 알고

물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염소에게 길을 묻다

이성선

 

산 밑 아래 길에서

염소에게 길을 물었다.

 

오두막에 사람없고

염소가 구름을 향해 울며

길을 가르킨다.

 

여기에 너를 내려 놓고 가면

길은 어디로 가던

점등산이다.

 

 

 

영혼의 침묵

이성선

 

영혼은 내 안에서 침묵한다.

가장 고요한 시간

목숨의 심지에서 영혼이

깨어나

불꽃으로 타오르면

나의 육체는 그릇이 되어

이끼 낀 샘물로 맑게 고이 떤다.

그를 위해 조금씩 몸을 비운다.

기도 속에

촛불이 그림자 떨듯

그는 내 안에서

물을 길으며 노래한다.

내가 하나의 갈대로 서서

사색하며

별을 지키는 밤에도

바람으로 아니 눈물을 넘어서서

나를 밟고 신비한 피리 분다.

등잔이 비어 있을 때만

영혼의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들린다.

타오르는 춤이 보인다.

그 밤에만 그에 귀를 밟히고 섰거니

나의 몸은

이 영혼을 모시는 사원

그를 위해 여기 돌아와 섰다.

그가 타오르면

조금씩 나를 하늘로 길어가고

다시 우주의 침묵을 내려

내 등잔을 채우는 시간

나는 이 땅에 떠 있는 석등

조용히

그를 불 밝히는 그릇.

 

 

 

오세암

이성선

 

내설악에서 밤에

우주 전체가

계곡 물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길을 따라 들어간다

아무리 찾아도

절이 없다.

 

 

 

외로운 사랑

이성선

 

나는 다른 시인이 될 수 없음을 안다.

풀잎과 마주 앉아서 서로 마음 비추고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로

함께 꿈꾸며

별을 바라 밤을 지새는

시인이면 족하여라.

그것만으로 세상을 사랑한다.

그와 내가 둘이서

눈동자와 귀를 서로의 가슴에 묻고

사랑의 뿌리까지 영롱히 빛내며

저 하늘 우주의 울림을

들으면 된다.

세상의 신비를 들으면 된다.

그의 떨림으로 나의 존재가 떨리는

그의 눈빛 속에 내가 꽃 피어나는

그것밖에는 더 소용이 없다.

그렇게 별까지 가면 된다.

 

 

 

우물을 보는 소

이성선

동네 우물을

소가 들여다본다

 

우물 속에는 상수리나뭇잎 피고

새가 날고

하얀 구름이 흐른다

 

물속의 소는 유난히 귀가 크다

 

우두커니 올려다보는 얼굴

흔들리는 굴레

먼 옛날 어느 족장의 후예 같다

 

종처럼 일하다가

거지처럼 떠돌다

늙어서 바리때 하나 짊어지고

떠나왔다

 

우물에 나비 미끄러지고

민들레 피어

그의 얼굴을 만진다

꽃관을 썼다

 

 

 

우파니샤드

이성선

 

이 말은 스승 곁에 가까이 앉다

라는 뜻이다

 

오늘은 나의 구루*요 산야신*

산양 곁에서 하룻밤 자려고 산에 왔다

 

벼랑 끝별 아래

당신 곁에

일생을 살며 허공에 뿔을 걸면, 그렇게

 

생애에 단 한 밤이라도

당신과 별을 쳐다보며

 

아무 말은 없어도 좋다

* 구루 : 영적인 스승

* 산야신 : 구도자, 포기자

 

 

 

운문사(雲門寺)

이성선

 

소나무 더욱 몸 기울여 좋은 날

구름 속에 들어가 잠들고 싶네

비 그친 하늘 푸른 구름 열치고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운문사

이끼와 천둥이 싸우는 방에 들어

물 한잔 얻어 마시고 좌선하고 싶네

운문사 가보니 소나무들이 구불구불 서서

그 안으로 길을 열어주고 있었네

함께 쉬고 싶은 사람 만나서

차라리 혼자 들어가 문 닫아 걸고

세상 무소식으로 밥 끓여 먹으며

복사꽃빛 얼굴 둥둥 떠 지나가는

학인 비구니 스님 모습 보고 있으면 좋으리

달도 여기 와서 머리 깎고 산을 넘으며

그네들 슬쩍 훔쳐보고 웃음 흘리네

이 속에 들어 모두 늙지 않을 때

오히려 나 혼자 늙어 꽃처럼 오그라들어

세상 향해 두 발만 내보이고 잠들고 싶네

 

 

 

월식

이성선

하늘 속으로 달이

월식하러 들어간다

빤스까지 벗고 커튼 내리고

꼭 그짓하러

침실로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내가 따라 들어간다

하늘이여,

오늘 밤은 깜깜한 저 방에서

그녀와 한몸이 되어

한번 깜깜하게 지워지고 돌아와서

당신의 벼락을 맞겠습니다

 

 

 

위험한 사랑

이성선

 

멀리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위험하다

 

산은 멀리 있고

마음의 산은 더 멀리 있는데

 

그곳에 네가 있고

네가 있는 곳에

그리고 그 너머에

다시 내가 있는데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은

사랑하는 것보다 위험하다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버린 사람보다 더 위험하다

 

 

 

이른 봄날

이성선

 

작은 마당 구석

땅 밑에

몸 구부린 벌레가

막 지금 눈을 뜨고 있다.

추운 겨울 동안 그 안에서

가랑잎 하나 덮지 않고

명상에 들어 눈감고

땅의 기름 몸에 흠뻑 실어

번뜩이는 입으로

내게 말을 건네고 있다.

내가 갑자기

도인과 눈을 맞춘다.

깜깜한 땅 속에서

더 맑은 몸으로

지상의 나보다

훨씬 자재롭구나.

내일 아침 그는 날개 달고

어느 하늘 들을 날을까.

 

 

 

이탈

이성선

 

작은 내 집에 마당에 설악산에 눈이 가득 내리고 세상 분간이 어려운 날

갇힌 나를 향해 방안 동백나무가 동백꽃만 붉게 피어 주던 날

뜻 밖에 선생의 저서를 받았다

겨울을 헤메어 눈을 맞으며 찾아온 괴물

다른 것은 다 두절 되었는데 그대 어찌 왔는가

눈을 털고 봉을 뜯자 한기에 깡말라버린 고봉의 정신 하나가 갑자기 끈을 풀고

벌떡 일어나 내 무방이의 따귀를 후려친다

너 여기서 놀아라. 나갈 생각은 말 것. 그 사이 눈은 더 아득히 쌓여 세상 길은

다 지워졌는데 갑자기 문에 날개 부딛는 소리.

나가 보니 큰 새 한 마리 무리를 벗어나 거기 주저앉아 멀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땅에 없는 길 하나 나를 찾아와

문 앞에서 산 쪽으로 신발을 내려놓고 있다

 

 

 

인도의 시()

이성선

 

시간이 멈춘 땅에 강가*가 흐른다

죄수 수송차 같은 이등열차가 흐르고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

사람들이 어디서나 앉고 눕는다

맨발로 걷는 성자들의 대지에서

바람의 손이 신전을 만지고

더러운 그들의 발을 만지고

비쩍 마른 낙타의 다리와

사막 끝에 떠오른 찌그러진 달도 만진다

골목에 시체가 쓰러져 웃고

거리에는 소와 흩어진 꽃잎과 똥과 사람들

거룩함과 소음과 거지와 현자

나의 에고로는 도저히

그 복판에 들어설 수 없구나

작열하는 태양의 모래 위에 오래

벗고 앉아보아야 그대 맥박 소리가 들릴까

지평에 숨은 작은 마을에 찾아 들어야

그대 신비에 닿을 수 있을까

편견을 던져버려 영원히 늙지 않는 땅

소보다 깊은 눈을 가진 사람들의 대지

* 강가 ganga, 갠지스강

 

 

 

일몰 후

이성선

 

해 지는 시간에는 시를 쓰지 않는다

 

스러지는 빛이 쓸쓸히 내 목숨을 비치다 떠나고

나무 사이로 그분의 젖은 눈빛도

한참이나 나를 보다가 돌아서면

 

나는 혼자다. 다른 약속도 없다

내게 연결된 이름들이 모두 이렇게 제 길을 갔다

 

망가진 악기처럼 나는 버려졌다

그리운 소리는 다시

내 악기줄로 길을 물으러 오지 않는다

 

가슴의 문풍지만 고독히 운다

 

물을 긷는 자도 돌아갔다

산이 비어 더 크게 나를 안는다

 

이런 시간 나는 시를 쓰지 않는다

해지고 나서는 사람을 맞지 않는다

 

문을 열어 놓고 빈 산과 벌레 소리만

집 안 가득 맞아들인다

 

혼자 있는 악기만 운다.

 

 

 

입동

이성선

 

잎이 떨어지면 그 사람이 올까

첫눈이 내리면 그 사람이 올까

십일월 아침 하늘이 너무 맑아서

눈물 핑 돌아 하늘을 쳐다본다

수척한 얼굴로 떠돌며

이 겨울에도 또 오지 않을 사람

 

 

 

장자(莊子) 나비

이성선

 

시외 버스 터미널 옆길

방송국으로 오르는 골목에서

놀라 나는 발을 멈춘다.

꽃 앞에 앉았던 아이가

갑자기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꽃 주위를 돌며 춤을 춘다.

노란 꽃 위에

푸른 바다를 내던지고

금방 그 속에서 부화되어 기어 나온 듯

얼굴 불ㄺ히며

세계의 이쪽 저쪽

저 영원을

두 팔 날개를 펴고

팔랑팔랑 날아 다닌다.

마음을 넘어서

시간을 넘어서

꿈을 벗어버린 바다 위로

따라오라고 앞서 날며

한 마리 나비

장자(莊子)가 웃는다

 

 

 

재산

이성선

 

세상에 가장 좋은 재산은 무엇일까

무덤 속까지 가지고 들어갈

재산이 있다면 무엇일까?

일년 중 며칠은

신발까지 벗어 던지고

물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외딴 암자

선방 근처를 빈둥거리며

추녀 끝에 떨어진 파란 하늘 낯빛이나

실컷 쳐다보는 일.

잡풀 곁에 다리 뻗고 앉아

그냥 있는 것.

(선방에 앉은 놈은

하늘을 훔치는 놈이다.)

구름따라 걷다가 그만 두고

나비 쫓아가다 길을 놓치는 일.

세상을 그대로 놓아두고

나도 거기에 놓아두고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산 숲에

혼자 솟아오르는 저녁 달을

아무 생각 없이 보는 일.

 

 

 

저녁밥

이성선

 

나는 저 산을 모른다

모르는 산속에 숨어 피는 꽃

그것이 나의 저녁 밥이다.

 

 

 

저문 들판

이성선

 

황혼이 새를 데리고

저녁 산으로 갔네.

 

그 후 그는 소식이 없네.

 

저문 벌판 물 위로

별들만 첨벙첨벙 빠져 건너오네.

 

 

 

저문 하늘빛에 기대다

이성선

 

설악산 해 지는 모습이 너무 길어서

가만히 그 아래서서 올려다보다

저물어 아름다운 하늘빛에 몸을 기대다

고요의 산 그림자에 안기는 하루의 끝

작은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수척한 꽃대 하나

없는 바람에 떨며

곁에 있다.

 

 

 

절정의 노래

이성선

 

내가 최후에 닿을 곳은 외로운 설산이어야 하리.

얼음과 백색의 눈보라

험한 구름 끝을 떠돌아야 하리.

가장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

그곳에서 모두를 하늘에 되돌려주고

한 송이 꽃으로 가볍게 몸을 벌리고

우주를 호흡하리.

산이 받으려 하지 않아도

목숨을 요구하지 않아도

기꺼이 거기 몸을 묻으리.

영혼은 바람으로 떠돌며 孤絶을 노래하리.

그곳에는 죽은 나무가 살아 있는 나무보다 더 당당히

태양을 향하여 의 뼈대를 창날같이 빛낸다.

침묵의 바위가 무거운 입으로 신비를 말한다.

가장 추운 곳.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에서

최후를 마치리.

 

 

 

지는 꽃잎 노래

이성선

 

갠지스강 화장터에서 사흘 동안

장작더미 위에 타는 사람 보았네

 

장작불로 가슴을 화안히 채우고

냄새와 연기로 목욕하며

내가 본 것은 무엇일까

 

사람도 죽으면 꽃이 되고

꽃이 안개를 사랑하듯이

불은 연기와 속삭이며 입맞추는데

 

자취 없이 사라진 뒤에도

꽃은 강가에서 피고 다시 핀다

 

떨어진 꽃잎은 땅에 눕지만

누울 꽃잎이 없는 저 꽃은

강물에 떨어져 그림자로 흔들리네

 

흐르는 강은 지는 꽃잎 그림자 껴안고

세상보다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데

 

땅에서 강물은 하늘로 흘러가고

노래에서 내가 들은 것은 무엇일까

 

 

 

지상의 작은 행복

이성선

 

낮은 지붕 위에 굵은 별들이

소나기로 쏟아지고

추녀 끝으로 그 무리가

안개 꽃처럼 피어 나를 내려다 보는 밤

 

그 아래 누워 잠드는 것

이 하나로 지상에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조그만 욕심을 더 부린다면

어린 시절 저녁 논둑에 쪼그려 앉아

논물에 내려비치는 집 그림자 바라보며

 

한정도 없이 가까이 내려 풀잎에 걸린

늦달의 외롭고 지겹던 시간들

무섭게 듣던 부엉이 울음 소리

다 되돌려 받아 살고 싶지만

 

나는 달 있는 곳으로 갈 사람

벌레 우는 잡초 위에 삼경

하늘 이야기 심심해 낚시 드리우듯

내 마당 구석에 내려놓은 북두칠성을

 

내가 나를 꾀어 나가 바라보고 있는

이 하나 만으로도 나는 지상에서

마지막 행복한 사람이다

 

 

 

()를 들며 도()를 엿본다

이성선

 

꿇어앉지 않고

반가부좌로

문 밖 산을 바라본다.

무릎 앞

찬 마룻바닥에 놓인

찻잔 안에

산이 들어가 있다.

늙은 소나무가

거꾸러져 있다.

떠가는 흰구름도

잠시 몸을 적신다.

차를 들며

슬쩍

도를 엿보는 시간이다

 

 

 

천수답

이성선

 

도시의 길들은

바둑판 줄처럼 구획져 뻗고

인간들 마음도 그 길 따라 굳어지고

마침내 이 땅 들의 논들도

모두 가로세로 반듯하게 정리 되어

바람조차 조심히 비켜 간다.

그러나 기계가 들어가지 못하는 산골

하늘물만 받아서 벼를 기르는 천수답

밤에는 별빛을 기르고

개구리 소리만 가득한 골짜기

논배미가 너무 작아

사람의 손으로만 가꾼다.

쟁기와 쇠스랑이 유일한 농기구

구불구불한 논둑의 하늘물받이 논

층층으로 계단이 진 사다리 논

이곳에서만 아직

농부의 음악이 들린다.

사람과 하늘이 단독으로 만난다.

밤마다 큰 별이 내려와 잠드는 곳

하늘의 눈물이 벼를 기른다.

 

 

 

초암(草庵)에서

이성선

 

사람이 오래 가지 않은 암자가

풀잎 속에 쓰러지듯 앉아 있다

누구를 향해선지 밖으로 난 작은 길 하나

스님은 달빛 길을 쓸지 않는다

경계가 없는 경내

잎사귀들은 제 살을 먹여 벌레를 기르고

저녁이 와도 산은 스스로

문을 닫지 않는다

단지 산 안에 산의 파도가

흐린 안개 속에 잔다

 

벌레

 

꽃에는 고요한 부분이 있다

 

그곳에 벌레가 앉아 있다

 

 

 

축지법(縮地法)

이성선

 

어느 깊은 겨울이더라, 일몰(日沒) 빛나는

가지에설까. 춥게 자란 새들이 날아와

밤의 문빗장을 열고 다시 나를

얽은 겨울의 동아줄을 끊고 갑자기

매서운 부리로 내 살을 쫓기 시작하더라.

()을 파더라. 이상한 일이어라.

나도 다가서 그의 눈 속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 거긴 동북해안(東北海岸) 산악 속의

작은 마을, 눈이 내리더라.

다가선 내 어깨에도 눈발이 내리던가.

시야(視野)가 갑자기 어두워지고, ()인가.

사람인가, 아니면 저승을 나는 학()인가.

두려움에 오슬오슬 떠는 나를

등에 업고 아슬히 높은 산맥(山脈)을 뛰고.

날아 넘어, 운경(雲境)에 놓더니, 산과

바다를 합치어 구름을 만들고 별빛과

흙을 섞어 꽃을 빚는 재주와

소나무에서 이슬로 달에서 새의 잠속으로

드나드는 축지법을 가르치더라.

 

 

 

큰 노래

이성선

 

큰 산이 큰 영혼을 가른다.

우주 속에

대붕(大鵬)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설악산 나무

너는 밤마다 별 속에 떠 있다.

산정(山頂)을 바라보며

몸이 바위처럼 부드럽게 열리어

동서로 드리운 구름 가지가

바람을 실었다. 굽이굽이 긴 능선

울음을 실었다.

해지는 산 깊은 시간을 어깨에 싣고

춤 없는 춤을 추느니

말없이 말을 하느니

, 설악산 나무

나는 너를 본 일이 없다.

전신이 거문고로 통곡하는

너의 번뇌를 들은 바 없다.

밤에 길을 떠나 우주 어느 분을

만나고 돌아오는지 본 일이 없다.

그러나 파문도 없는 밤의 허공에 홀로

절정을 노래하는

너를 보았다.

다 타고 스러진 잿빛 하늘을 딛고

거인처럼 서서 우는 너를 보았다.

너는 내 안에 있다.

 

 

 

큰 산 앞에 춤을 추다

이성선

 

그는 혼자 밖에 나가

큰 산 앞에 춤을 춘다

먼 곳에 희미하게 달 뜨는 시간이나

깜깜한 그믐

별이 뚝뚝 떨어지는 자정 넘어서

모두가 잠든 후면

혼자 마당에 나가

산 앞에 춤을 춘다.

님을 향해

그 분과 마주 춤을 춘다.

하루 한 번 눈물도 없이

가장 깊고

가장 고요한 시간 위에 덩실덩실

두 팔 들고

산과 마주하여

 

 

 

통화

이성선

 

저 허공을 아주 천천히

날아가는 새의 몸짓이

저토록 아름다운 것은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이 땅에 무엇 하나 건드리지도

남겨 놓지도 않고

오직 전심 전력

자신을 밀고 나아가기 때문이다

설산에 닿을 고절의 울음

날개에 싣고

흐린 달 아래 세상을 비끼어 비끼어 날아

드디어 아무도 없는 곳에 오른

황홀한 춤

돌아가는 이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

그대 수평으로 머리 향한 곳이

죽음 쪽 어디냐

저 물결과 나 사이

오늘 저녁

, 이상한 통화

 

 

 

티벳의 어느 스님을 생각하며

이성선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 속에 조용히 앉아 있어도

그의 영혼은 길가에 핀 풀꽃처럼 눈부시다

새는 세상을 날며

그 날개가 세상에 닿지 않는다

나비는 푸른 바다에서 일어나는 해처럼 맑은 얼굴로

아침 정원을 산책하며

작은 날개로 시간을 접었다 폈다 한다

모두가 잠든 밤중에

달 피리는 혼자 숲나무 위를 걸어간다

우리가 진정으로 산다는 것은

새처럼 가난하고

나비처럼 신성할 것

잎 떨어진 나무에 귀를 대는 조각달처럼

사랑으로 침묵할 것

그렇게 서로를 들을 것

 

 

 

티벳에서

이성선

 

사람들은 히말리야를 꿈꾼다

설산

갠지스강의 발원

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생의 꽃봉우리로 오른다

그러나

그 산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많은 짐을 지고 이 고생이다

 

 

 

파도

이성선

 

한 마리 자벌레

산이었다가 들판이었다가

구부렸다 폈다

대지의 끝에서 끝으로

이 우주 안 작은 파도

 

 

 

편지 받고

이성선

 

나 세상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것

그대 너무 걱정하지 말게

 

지금은 조용히

해 지는 산 앞에 앉아 있지

 

무릎 아래의 꽃들이

마음 접는 시간 곁에 사네

 

혼자 있을 때 사람이나 짐승

풀잎까지도

전체적이 된다고 누군가 말했지

 

단순한 삶 속에

앉아 있으면

 

자주 해 지는 시간이 찾아와서

장엄한 그림 속에 나를 넣어 작곡한다네.

 

 

 

풀꽃

이성선

 

맑은 마음을 풀꽃에 기대면

향기가 트여 올 것 같아

외로운 생각을 그대에게 기대면

이슬이 엉킬 것 같아

마주 앉아 그냥 바라만 본다.

눈 맑은 사람아

마음 맑은 사람아

여기 풀꽃밭에 앉아

한나절이라도 아무 말 말고

풀꽃을 들여다보자.

우리 사랑스런 땅의 숨소릴 듣고

애인같이 작고 부드러운

저 풀꽃의 얼굴 표정

고운 눈시울을 들여다보자.

우리 가슴을 저 영혼의 눈썹에

밟히어 보자.

기뻐서 너무 기뻐

눈물이 날 것이네.

풀꽃아

너의 곁에 오랜 맨발로 살련다.

너의 맑은 얼굴에 볼 비비며

바람에 흔들리며

이들을 지키련다.

 

 

 

풀잎과 앉아

이성선

 

풀잎과 마주 앉아

우주와 앉아

마음을 모은다

산이 춤추며 온다

바다가 말하러 온다

산 노래에 몸을 싣고

꽃의 눈동자 이슬에

뼈를 씻소 바라보면

다시 깨어보면

세상 속에 세상은 없다.

거기 나는 없다

시간과 공간의 이 큰

천둥번개가 모두 나의 집

나의 몸이다

풀잎과 앉아

별 속에 나비로 날아

이 우주 이 무궁

삶은 신비다

세상 전체가 향기다 ​​

 

 

 

피리

이성선

 

그대 함부로 나를 허락하지 말라.

그대 좀체로 나를 이해하지 말라.

새벽까지 좌정하여 벽 그림자로 흔들려도

나의 숨결로 그대 뼈까지 울지 말라.

 

나를 허락하지 않는 사람 있어

전 생애가 바람인 까닭이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있어

산 하나 울며 떠도는 까닭이다

 

 

 

하늘 악기

이성선

 

높은 하늘 중턱을 길게 이어져

떠가는 태백산맥 줄기

흐르는 강

하늘에 매놓은 악기줄

신이 저녁 마다 돌아와 연주한다

일주일에 한 번 열흘에 한 번

저 높은 길에 내 발이 올라선다

내가 하늘 악기 위를 걸으며

그분 시간을 연주하는 날이다.

 

 

 

하늘 악보

이성선

 

길을 가다가 바라본다

나뭇잎이 어제는 저기 떨어지고

오늘은 여기 흩어져 앉는다

어느 것은 일찍 지고 어느 것은 늦게 진다

가을 가득한

이 삶의 소리

며칠 전까지 지상을 푸르게 채우던 생명들

오늘은 누른 빛 붉은빛으로 변해

대지에 눕고 바람에 뒹굴고 허공에 날린다

그러나, 아아

무엇이 차이랴

여기 떨어지고 저기 앉는 것

먼저 지고 오래 남는 것

그분 피리의 연주가

이 구멍은 먼저 닫히고 저 구멍은 늦게 닫히는

어떤 음은 길게 다른 음은 짧게 작곡된

생명 모두는 우주 큰 연주 속의 한가락

 

 

 

하늘의 글씨

이성선

 

밤하늘 위로 짐승 걸어가는 울음소리

그 아래 그들 똥을 받아

시를 쓰는 시인의 방

 

이런 날 밤

집 근처에 숨소리 가득 다가옴

 

하늘이 와서 몰래 글씨를 쓴다

 

풀잎을 동그랗게 먹은

벌레 입 자리가, 바로 그 상처가

하늘의 글씨다.

당신 계시는 블랙홀들

 

길 밖에 더 큰 길이 있다

 

 

 

하늘의 숨소리를 듣는

이성선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물 곁에 있다는 것

우리가 눈을 뜬다는 것은

귀가 깨어

하늘의 숨소리를 듣는 것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새벽 들판의 풀잎처럼

언덕 위 나무처럼

별 아래 함께 서 있는 것

 

 

 

해 지는 소리

이성선

 

향기 있는 사랑이 그립다

해 지는 소리 남아 있는 산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잔다

산이 저무는 시간

물 속에 들여다보고 앉아 있으면

세상은 깊어지는데

사람들만 야단이다

 

꽃이 지면 허공은 새롭다

새 그림자 지나가면 물이 더 맑다

남으려 하는 것은 욕된 것

머물려 하는 것은 아직

너를 넘어서지 못한 것

삭발한 산을 따라

기다리는 이 없는 곳으로 떠돌리라

 

물속 빈 산에서 들리는

당신의 독경 소리 찾아

 

 

 

황혼 화엄 노래

이성선

 

성자(聖者)의 모습으로 산이 저문다

아득한 회흑색 고요

조율하지 않아 구불구불 흩어져 나간

슬픈 능선들, 생각들

수많은 말들이 혼돈에서 깨어나기 전

침묵하는 입

붉은빛만이 산을 밟고

거대한 힘으로 하늘 향해 일어섰다

목숨의 불, 화엄 황혼

숨 막히게 나를 압도하는 고요여

말하는 자는 사라지고

바라보는 자만 여기 남아 있다

바라보는 자조차 떠나면

누가 남아 뼈보다 투명한 마음으로

어둠 속에 노래하리

평생 명상으로 늙어서

험상한 나무 위로

한 방울 향기보다 더 붉게 핀 적요의 꽃

그를 싣고 도도히 흐르는 산맥의 강

신은 산을 조율하지 않는다

산은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 돌아가게 하고

스스로 깊게 한다

혼자 날게 하고

누구에게도 날개를 주지 않는다

 

 

 

흔들림에 닿아

이성선

 

가지에 잎 덜어지고 나서

빈산이 보인다

 

새가 날아가고 혼자 남은 가지가

오랜 여운에 흔들리 때

이 흔들림에 닿은 내 몸에서도

잎이 떨어진다

무한 쪽으로 내가 열리고

빈곳이 더 크게 나를 껴안는다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 사이

고요한 산과 나 사이가

갑자기 깊이 빛난다

내가 우주 안에 있다

 

 

 

흔적

이성선

 

꽃이 문을 열어주기 기다렸으나

끝까지 거절당하고

새로 반달이 산봉에 오르자

벌레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잎을

반만 먹고 그 부분에 눕다

달이 지고

서릿밤 하늘이 깊었다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을 때

산이 혼자 그림자를 내려

꼬부리고 잠든 그의 등을 덮어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친 바람 한 점 없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벌레는 사라지고

그 자리 눈물 같은

이슬 두어 방울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