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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의 사랑(South seas affair)

남태평양의 사랑(South seas affair)

Kay Thorpe

1

그 남자와는 싱가포르에서 같은 비행기에 올라탔었다. 배네사는 비행기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그를 창 너머로 까닭없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1시간 동안, 그는 펼쳐든 서류를 보느라고 열중하고 있었다.

그가 다른 승객과 함께 통로를 걸어왔을 때, 배네사는 그가 2등실 승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1등실 승객이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옷차림이나 들고 있는 짐이나 고개를 세운 오만한 태도 등으로 보아 그는 돈깨나 가진 자산가임에는 틀림없을 성싶었다.

그가 정중한 인사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옆 좌석에 앉았을 때, 한순간 생기가 넘쳐흐르는 파란 눈과 마주치자 배네사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야릇한 전율을 느꼈다. 이런 일은 배네사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금 그가 옆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퉁당거리며 진정되지 않았다.

배네사는 이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히스로 공항에서 방금 헤어진 마이클의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마이클이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고 있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무언가 한구석이 빈 듯한 허전함을 메꿀 수가 없다.

마이클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를 나는 어디에서 찾고자 하는 걸까? 그건 그녀 자신으로서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마이클에게 미진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둘 사이는 서로가 냉정하게 뒤를 돌아다보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를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한 것도 이번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배네사의 아버지가 1년 전에는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1년 전에 아버지로부터 온 마지막 편지를 소중히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그녀는 이번 여행을 떠나왔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편지를 부쳐온 우체국의 주소로 배네사가 알려 준 것은 작년 9월의 일이었으나, 아버지한테서는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았다.

여행을 그만두게 하려고 마이클은 아버지가 이미 뉴칼레도니아 섬에는 있지 않을는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배네사는 단념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찾아낼 때까지, 혹은 돈이 떨어질 때까지 섬 안을 찾아 돌아다닐 작정이었다. 그 중의 어느 일이 먼저 닥쳐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력만은 해볼 작정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것은 배네사가 7살 때였다.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에도 아버지는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집에는 거의 있지도 않았다.

"발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뎠던 게지."

하고 어머니가 언젠가 공허한 얼굴로 쓸쓸히 뇌까린 적이 있다.

"시집온 지 얼마 안 돼서 그걸 알았지."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12살 아래인데, 결혼했을 때는 이미 임신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틀림없이 노력은 했을 것이다. 그건 배네사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혼한 뒤 약 8년간 그는 아내와 딸 옆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42살이 되어 세월이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는 더 이상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을까?

아버지는 적어도 아내와 딸이 사치스런 생활만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을 남겨 두고 훌훌 털고 떠났던 것이다. 그것만이 오직 자신의 남은 양심이고 위로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아버지는 떠났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지금 배네사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녀는 다만 아버지를 만나서 아무 이야기나 그 동안 살아왔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지난날 무슨 사연이 있어 엄마와 나를 두고 떠난 아버지일지라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그건 배네사에게 어떤 큰 의미를 주는 사실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마이클은 어머니와 배네사가 함께 살던 집을 파는 데 대해 적극 반대했으나,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밀고나갔다. 언젠가는 마이클하고 결혼한다고 할지라도 그 집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거기서 살아온 나날이 불행했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배네사와 어머니와는 왜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오붓한 가족으로서의 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정녕 어머니의 마음속 한쪽 구석에는 아버지의 결혼이 실패로 끝난 것은 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딸이 없었더라면 처음부터 이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집을 판 돈은 여행 비용을 대더라도 아직 충분히 남아 있고,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유산과 합치면 장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풍족하다.

다만 직장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휴직상태로 그냥 둘 수도 없었고, 돌아와서 마이클과 결혼한다면 어떻든 직장은 그만둬야 할 처지다.

그는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으면, 아내가 직장에 나가는 데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마음에 걸리는 일 중의 한 가지라고 배네사는 이제와서야 깨달았다. 자기가 아내의 자리에만 만족해하고 앉아 있을는지 그것도 섣불리 확신을 내리지 못하는 일이다.

보르네오를 지날 무렵에 배네사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전날, 파리에서부터 비행기를 타고 온 피로가 아직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그녀는 누가 가볍게 팔을 건드리는 바람에 퍼뜩 잠을 깼다. 돌아다보니 유혹하는 듯한 그 파란 눈의 남자가 똑바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곧 저녁식사를 할 시간입니다. 주무시다가 식사를 못하게 되면 곤란할 것 같아서제가 너무 무례했던 것은 아니겠죠?"

배네사는 몸을 일으키면서 머리를 매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참고서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지금은 별로 배가 고프진 않아도 다음 식사가 올 무렵에는 시장기가 돌 것 같아요. 저녁 메뉴는 뭔지 알고 계세요?"

그 남자의 입 언저리에 상큼한 미소가 돌면서,

"치킨 탄두리나 스테이크 중 어느 한 가지를 고르나 봅니다. 스테이크를 드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배네사는 다시 한번 그 남자를 돌아다보고 윤곽이 또렷한 얼굴이며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나이는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모든 일에 자신있고 언제나 확실하게 살아간다는 자만감으로 뭉쳐진 빈틈없는 남자의 얼굴이다. 목덜미가 다시금 스멀스멀 오싹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은 배네사는 얼른 말을 이었다.

"이 비행기편은 자주 이용하세요, 무슈?"

"제 말투에 사투리가 그렇게 심합니까?"

그의 미소는 얼굴 전체의 인상을 싹 달라지게 했다.

"아뇨, 전혀 못 느끼겠어요. 하지만 이 비행기의 목적지는 프랑스 령()이에요. 그럴 가능성은 충분해요. 선생님은 프랑스 태생이시죠?"

"프랑스에는 산 적이 없는 그리고 좀처럼 가보지도 않은 프랑스 인이죠. 우리 뒤탕플 일족은 19세기 말 파리 코뮌이 무너졌을 때 뉴칼레도니아에 이주했었지요. 그 무렵에 3천 명이나 되는 프랑스 인이 추방당했어요. 1879년 특별 사면령이 내려졌을 때 그 대부분이 돌아가긴 했습니다만"

"하지만 뒤탕플 가문은 그대로 남아 있었군요?"

"그렇지요."

그는 이제는 노골적으로 배네사의 요모조모를 뜯어보는 표정이다. 불그스름한 갈색을 띠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곱슬곱슬한 배네사의 머리카락에 감싸인 얼굴 전체를 비롯해서 입술의 윤곽과 고집스럽게 보이는 턱, 바다와 같이 초록빛을 띤 눈을 고루고루 관찰했다. 얼굴 중 초록빛 바다와 같은 그 눈만이 배네사가 가장 자신을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부분이었다.

"나는 라울이라고 합니다. 아가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의 이름을 캐묻는 말솜씨를 보고, 배네사는 이 남자는 여자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미소 앞에서 가슴이 설레는 여성들이 있겠지. 전형적인 프랑스 남성이야. 하지만 프랑스 인과 직접 얘기해 보는 건 이것이 처음이지만.

"배네사배네사 그랜섬이에요."

사나이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그랜섬? 그건 영국에선 흔히 있는 이름입니까?"

"별로 많지는 않아요. 왜 물으세요?"

"아가씨는 무슨 일로 뉴칼레도니아에 가십니까?"

그가 거듭 물었다.

배네사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 남자는 그랜섬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틀림없어.

"아버질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 닐 그랜섬이라고 해요. 아버질 아세요?"

그의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가씨가 찾아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아뇨, 갑자기 찾아가서 놀라시게 할 작정이에요."

그가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있었으므로 배네사는 더욱더 어리둥절해졌다.

"선생님은 제 질문에 아직 대답을 안 하셨어요."

"나는 그분을 알고 있어요. 너무 잘 알지요."

라울의 말투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직도 뉴칼레도니아에 계신 거다. 안도감이 온몸에 쫙 퍼져나갔다. 1년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긴 세월이니까 어떤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각오하고 있었던 배네사였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가 갑자기 서먹서먹한 태도를 취하고는 이젠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배네사로서는 그냥 호락호락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고 다부지게 마음먹었다.

"아버지에 대해서 별로 좋게 생각지 않나 보군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실 수 없을까요? 아버지하곤 벌써 13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거든요."

까만 머리의 이 남자는 앞을 바라본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랬군요. 그래서 아무도 그분에게 아가씨 같은 따님이 있는 걸 몰랐군요. 먼저 편지를 띄워 보고, 아버지가 아가씨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어떤지를 확인한 다음에 찾아가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배네사는 마이클에게 이야기해 주고 온 것과 같은 대답을 했다.

"아버지한테 거절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하긴 그렇군. 이미 있는 사실을 들이대고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거로군요. 별로 현명한 방법은 아닌 것 같군요."

"알고 있어요. 저에게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다면 정처도 없이 이렇게 먼 곳에까진 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말은 여러 사람한테서 이미 여러 번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분이 제 아버지라는 사실과 제가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질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점이에요. 그런 저에게 아버지가 어떠한 태도를 취하시느냐 하는 건 별로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사실이지요."

라울 뒤탕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행운을 빕니다."

스튜어디스가 저녁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 와서 라울에게 프랑스 어로 뭐라고 말했다. 1등실의 자리를 잡을 수 없었던 점을 사과하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는 배네사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늦게 온 내가 잘못이지요."

라고 라울은 대답하고 있었다. 그는 단골 승객인 모양이었다.

그런 뒤로 라울은 배네사에 대해서 더 이상 말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 대화 없는 시간이 많이 지났다. 배네사는 졸다 깨다 하다가 또다시 잠이 들었다. 무심코 잠이 깼을 때, 하늘은 차차 밝아지기 시작하고 옆자리는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배네사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뒤쪽에 있는 세면장으로 갔다.

그녀가 되돌아왔을 때, 라울 뒤탕플도 마침 앞쪽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키가 훨씬 더 크고 다부진 근육의 호리호리한 몸매였다. 어제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와는 달리 간편한 셔츠와 헐렁한 바지 차림이었다. 이상한 매력을 풍기는 사람이라고 배네사는 새삼스러이 생각했다.

"좌석은 없어도 1등실의 시설은 이용할 수 있나 보죠. 선생님은 틀림없이 대단한 단골 승객이신 모양이죠, 무슈?"

배네사는 자리에 앉으면서 약간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라울은 그녀의 그런 말투를 무시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는 프랑스 어를 아시는군요. 회화도 할 수 있습니까?"

"최소한의 필요한 정도는. 뉴칼레도니아에선 영어가 통한다고 하던데요?"

"관광객이 몰려들게 되면서부터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하게 됐지요. 하지만 역시 공용어는 프랑스 어죠."

라울은 창밖으로 보이는 흰 구름과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앞으로 2시간쯤 지나면 도착합니다. 구름도 이제 곧 개겠지요. 만일 오스트레일리아에 가본 적이 없다면, 돌아오는 길에 들러보는 것도 좋습니다. 한번 구경할 만한 가치는 있으니까요."

배네사는 조용히 말했다.

"제가 돌아올 거라고 단정하고 계시는군요."

라울은 그녀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뉴칼레도니아에는 아가씨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건 곧 알게 되겠죠. 아버지 문제에 대해서는"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가씨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겠지만"

배네사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해서 좀 더 캐물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라울은 분명히 아버지를 싫어하고 있으니까, 아버지에 대한 그의 의견이 호의적일 리는 없다.

"아버지가 어디 계신다는 것만은 가르쳐 주실 수 없을까요?"

잠시 후에 배네사는 말했다.

"내가 부두까지 안내해 드리죠."

"부두?"

"그분은 배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배네사는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부로 계시나요?"

"아닙니다. 줄리아 호는 낚싯꾼들의 용선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아주 근사한 배지요."

그의 말투에는 빈정거리는 기가 있었다.

 

아버지는 야금학과 광물학의 학위를 가진 엔지니어였다. 배네사는 당연히 아버지가 뉴칼레도니아 수출 물량의 90%를 차지한다는 니켈 광산의 일에 종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16년이나 지난 지금, 그녀가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이젠 50대 하고도 후반을 지나고 있는 나이인 것이다. 낚싯배라는 건 은퇴 후에 하는 일 중에서는 가장 알맞은 것일지도 모른다.

라울이 말한 바와 같이 1시간쯤 지나자 가렸던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 보이기 시작한 섬의 모습은 웅대한 것이었다. 섬의 등뼈를 이루는 산맥의 꼭대기와 이상야릇한 색깔의 광상(鑛床)이 칠이 벗겨진 두 가닥의 선처럼 보였다.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산기슭 부분은 그대로 바다 속으로 팔을 뻗치고 있었다. 투명한 바닷물속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온 진초록과 청록빛 산호초가 몇 km 떨어져서 섬을 빙 둘러싸고 있다.

비행기가 고도를 떨어뜨림에 따라 코코넛 야자나무에 에워싸인 새하얀 모래톱이 보이기 시작했다. 빛의 섬- 프랑스 인들은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남쪽 바다에 떠 있는 파라다이스 같았다.

섬의 주민이 얼마나 각양각색의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공항에 내리면서 배네사는 알 수 있었다. 흰 피부, 갈색 피부, 검은 피부, 그리고 그 중간의 온갖 색깔의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여성의 복장도 가장 첨단 유행을 치닫는 것에서부터 인도네시아의 사롱(허리 두르개)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이었다.

라울은 공항에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냉방장치가 잘된 차 안의 호화로운 좌석에 나란히 앉으면서 이 남자는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 하고 배네사는 생각해 보았다.

니켈에 관해서는 소시에테르 니켈 회사가 시장을 독차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섬에는 몇 사람의 독립한 사업주가 있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대부호라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라울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앞으로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유칼리나무에 뒤덮여 있고 완만한 기복으로 이어지는 누메아를 향해서 달리는 도로 옆에는 바나나 나무와 빵나무가 떼 지어 우거져 있다. 주도(主都) 누메아 주변의 길다랗고 나지막하게 지은 방갈로의 뜨락에는 여러 가지 색채가 어우러져 있었다. 새빨간 포인세티아에 짙은 핑크색의 하이비스커스,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노란 알러맨다 등이 온갖 색채를 자랑하고 있었다.

도로는 혼잡했다. 라울은 큰길을 피해서 부겐빌리아며 인동덩굴 등이 뒤얽혀 있는 높다란 석벽이 죽 이어진 뒷골목의 좁은 길로 들어섰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길모퉁이를 돌아 떠들썩하게 흥청거리는 해변에 나섰을 때에는 이미 11시 가까이 되어 있었다. 라울은 부두 옆에 차를 세우더니 배네사의 슈트케이스를 트렁크에서 꺼냈다.

"줄리아 호는 요 앞에 정박해 있어요. 나는 이만 실례합니다. 아버지는 나를 만나도 별로 반가와하진 않으실 테니까. 호텔에 묵으셔야 한다면 르 벨브데르를 권합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어요. 덕분에 많은 신세를 졌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뿐입니다."

라고 하면서 라울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보고는 차가 있는 데로 돌아갔다.

배네사는 한 손으로 얇고 밝은 갈색 린네르 스커트를 매만져 내리면서 나란히 정박해 있는 배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았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낯설고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어야 하는지 배네사로서는 잘 알 수 없었다.

지난 16년은 기나긴 세월이었다. 너무나 긴 시간들이었는데, 라울의 말처럼 미리 아버지에게 편지라도 띄우고 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잠시 후회스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 이곳에 내가 찾아온 것이 잘한 짓인지 잘못한 짓인지는 스스로 만나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다.

줄리아 호는 부두의 맨 끝에 희고 매끄러운 선체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뒤쪽 갑판의 회전의자에 쇼트팬츠를 입은 밝은 색깔의 머리의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그는 아주 푹 쉬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깍지를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있었다.

"저어여보세요, 그랜섬 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서투른 프랑스 어로 말하니, 젊은이는 발딱 고개를 쳐들었다.

", 영국 사람이군요. 말투로 당장에 알 수 있어요!"

젊은이의 흥분하는 태도가 이쪽에까지 전해져서 배네사는 생긋 웃어 보였다. 그레이하운드 개처럼 호리호리한 몸매인데다 노르스름하게 구워진 토스트 같은 피부 색깔을 한 그 젊은이는 23세인 배네사보다 두세 살 아래로 보였다.

"오늘 아침 공항에 도착해서 곧장 이리로 왔어요. 이게 닐 그랜섬 씨의 배지요?"

"그런데요. 그 사람을 아세요?"

"우리 아버지예요."

젊은이는 충격을 받았는지 얼마 동안 할 말을 잃고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분에게 따님이 있다니, 정말 놀랐는데요."

배네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버지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분명할 테니까. 지금 계세요?"

"계세요."

그는 선실 쪽을 흘끗 보고 나서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는 만날 수 없어요. 그분은주무시고 계시니까."

"정오가 다 된 이런 시간에? 설마 병환이 나신 건 아니겠죠?"

"그렇지는 않아요."

젊은이는 체념한 듯이 말했다.

"어쨌든 안으로 들어와요."

갑판에서 짧은 층계를 내려가니 조그만 거실이 있는데, 양쪽 벽을 따라 쿠션 달린 벤치가 붙박이로 되어 있었다. 반대쪽은 작은 조리장과 식당이 되어 있었다.

"그랜섬 씨는 방에 계세요."

젊은이는 맨 끝에 있는 도어를 가리켰다.

"다만 한 말씀드리겠는데지금은 좀"

그는 말을 끊더니 한숨을 쉬었다.

"에이, 뭐 상관없어요. 어차피 알게 될 텐데요. 저분은 어젯밤 위스키 한 병을 다 마시고 코가 삐뚤어지게 취하셨어요. 처음부터 침대 위에서 마신 게 다행이지, 나 혼자서는 도저히 몸을 옮겨 놓지 못했을 테니까."

"그런 일이 자주 있어요?"

"한 달에 두 번아니, 서너 번이나 될까? 하지만 한 병을 다 마신 건 이번이 처음이오."

"언제든지 그전에 고주망태가 됐었단 말이죠?"

배네사는 씁쓸한 투로 말했다.

"당신은 이 배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어요?"

"선원이죠. 청소도 하고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을 하고 있어요."

"배 안에서 생활하나요?"

", 이름은 브렌든 하틀리예요."

"나는 배네사. 잘 부탁해요. 잠깐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올게요.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죠."

붙박이 2층 침대에 누워 있는 사나이는 꾸깃꾸깃한 바지와 셔츠를 그냥 입고 있었는데, 신은 벗겨져 있었다. 표정은 거칠게 비뚤어지고, 턱 밑의 텁수룩한 수염과 숱이 적어지기 시작한 머리는 희끗희끗했다. 그 모습은 배네사가 여러 해 동안 마음속에 간직해 온 아버지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꿈지럭꿈지럭 몸을 움직이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배네사는 가까이 다가가서 마룻바닥에서 텅 빈 술병을 주워들었다. 알콜 냄새가 코를 콕 쏘았다. 배네사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진한 블랙커피를 드려 보면 어떨까요? 어디, 내가 한번 해볼게요."

배네사는 브렌든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가, 그가 주전자를 불 위에 얹어 놓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상상하고 있었던 것과는 전연 다르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볼 수밖에 없다.

"여기 온 지 오래 됐어요?"

배네사가 물었다.

"6개월 됐어요. 내가 왔을 때는 마침 전에 있던 선원이 그만둔 직후였지요. 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 이런 일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해서 고용된 거요."

"그럼, 뉴칼레도니아에서 죽 살고 있었던 게 아니군요."

브랜든은 웃었다.

"그렇게 보여요? 내가 하는 프랑스 어는 당신 정도의 수준밖에는 안 될 텐데요. 대학입시에서 떨어진 후, 세계를 일주하며 구경 다니기로 작정했어요. 영국을 떠난 지는 벌써 5년이나 되지요."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아요?"

"나는 4형제 중 유일한 패배자지요. 보다시피 야심은 없고, 사무실에 얽매여 지내기에는 인생이 너무나 짧다고 생각했죠. 처음에는 할머니가 물려준 몇백 파운드의 돈을 가지고 자전거로 유럽여행을 했어요. 돈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2주일쯤 앙카라에서 노동도 했어요. 물론 위법이지만. 그런 식으로 1주일간 일하고 1주일간 여행을 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오게 됐죠. 자전거는 파키스탄에서 그만 부서지고 말았지요. 그 후로는 히치하이커 신세로 전락했지요."

배네사는 웃었다.

"뉴칼레도니아에는 왜 왔어요?"

"피지에 갈 작정이었지만 자금이 떨어져서요."

"아버지는 급료를 안 주시나요?"

"아뇨, 저분은 돈을 꽤 많이 벌었으니까. 하지만"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의 얘기겠죠?"

배네사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이 사업을 시작했는지 알아요? 난 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런 배는 굉장히 비싸겠죠?"

"특히 줄리아 호 같은 배는 굉장히 비싸요. 큰 어장을 발견하기 위한 최신 전자설비가 전부 갖춰져 있으니까요. 손님에겐 부족한 게 없어요."

브렌든이 먼저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것을 배네사는 깨달았다.

"아버지는 기사였어요. 나는 아버지가 당연히 니켈 사업을 하실 걸로 생각했었는데"

"이전엔 하고 계셨죠. 잘은 모르지만 소문에 의하면"

브렌든은 입을 다물더니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

"말해 봐요. 무슨 일이 있었다면 꼭 좀 듣고 싶어요."

"정말 곤란하게 됐군.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에요. 2년 전에 줄 뒤탕플이 줄리아 호를 산 돈을 당신 아버지한테 주었다는 소문이에요. 어째서 줄리아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우리 어머니의 이름이에요. 아버지가 붙였겠죠."

", 그렇다면 역시 단순한 소문이었군요. 이 근방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사람이 많고, 그 중에서도 줄리아 호는 제일 훌륭한 설비를 갖춘 배니까 질투하는 놈들이 많아요."

그 말은 이해할 수 있을 듯하면서도 이해가 안 되는 설명이었다.

브렌든은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잠시 동안 잠자코 있다가 이윽고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닐이 한 짓은 사나이답지 못한 졸렬한 짓이었죠. 하지만 난 그분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남자들 중에는 구속당하는 걸 죽기보다 더 고통스럽게 여기는 사람도 있거든요. 특히 그게 완전한 구속일 경우에는요. 그런 점에서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았으면 해요."

"원망했다면 여기까지 찾아오진 않았죠. 모두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뭐."

"그리고 지금, 아버지를 다시 발견했다고 생각해요?"

그건 좋은 질문이었으나 배네사는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모르겠어요."

그녀는 찻잔을 놓고 일어섰다.

"자아, 시작해 볼까?"

30분 남짓 지나서야 겨우 닐 그랜섬은 혼자 힘으로 침대에 걸터앉을 수 있게 되었다. 욱신욱신 쑤시는지 머리를 양손 사이에 끼고서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 처녀를 밖으로 끌어내라, 브렌든. 여자가 커피를 마시게 해주는 건 딱 질색이다!"

"예사 여자가 아니에요. 저는 당신의 딸이에요."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든 아버지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핏발 선 게슴츠레한 눈이 배네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영문인지 알아차리게 됨에 따라 당혹스러운 표정이 아버지의 얼굴에 고통스럽게 겹쳐지는 것을 보고, 배네사는 이렇게 당돌하게 나온 자신의 태도를 후회하기 시작했다.

"저는 거실에 있겠어요.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해요."

브렌든도 그녀를 따라 나왔다.

"그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준 건 잘한 일이에요. 찬물로 샤워라도 하고 나면 정신이 돌아오겠죠."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서 고주망태가 되어본 적이 있는 모양이군요."
"딱 한 번 있었어요. 그 이상은 위장이 견디질 못해요."

브렌든이 언제 어떻게 술에 취했었는지,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배네사는 생각했다. 아버지의 가슴 밑바닥에 울적하게 쌓여 응어리진 것이 대관절 무엇일까?

"위장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데, 점심 아직 안 먹었죠? 난 오믈렛을 아주 잘 만들어요. 치즈하고 양송이를 넣은 건 어때요?"

"말만 들어도 근사한데요."

배네사는 갑자기 시장기를 느꼈다.

"뭐 거들어 줄 거 없어요?"

"아뇨, 난 요리에 익숙해졌으니까. 하지만 노상 여기서 해먹지는 않아요. 요 근처에 잘 아는 선술집이 두어 군데 있죠."

"언제나 같은 배 안에서 둘이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 싫증나지 않아요?"

"우린 따로따로 자니까요."

브렌든은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한순간 지나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배네사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의심하고 억측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어요. 요즘에는 단순한 직업상의 관계로만 맺어지는 경우는 드문 모양이에요. 요 근방에선 노동력을 얻기가 여간 어렵지 않아요. 모두들 제각기 두목이 되고 싶어 하니까, 큰 부호의 마나님들도 역시 큰 저택을 하인들로 꽉 채우려면 딴 지방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죠."

"뒤탕플 집안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 집에 부인은 없어요. 적어도 뉴칼레도니아에는 줄의 두 번째 부인은 작년에 그가 죽자 곧 미국으로 떠나 버렸지요. 아들인 라울은 아직 독신인데, 이상이 높은 모양이에요. 그의 저택은 여기 누메아에 있지만, 개인 소유의 로얄 섬에도 근사한 별장이 있나 봐요."

"그 집안 일을 잘 아는 모양이군요."

"필요하다면 좀 더 조사해 드리죠."

브렌든은 뜻밖에도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배네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단순한 호기심이에요. 싱가포르를 떠난 비행기에서 라울 뒤탕플하고 서로 옆자리에 앉았었죠. 1등실 자리를 잡아 주지 못한 데 대해서 스튜어디스가 몹시 사과하던데요."

"사과도 할 만하죠. 다음부터는 딴 회사의 비행기를 이용하겠다고 하면 큰일이니까요."

브렌든은 부드럽게 부풀어 오른 오믈렛을 접시에 담았다.

"자아, 뜨거울 때 잡수세요. 나이프하고 포크는 서랍 속에 있어요."

"아주 맛있는데!"

브렌든이 자기의 접시를 들고 맞은쪽에 앉았을 때 배네사가 말했다.

"아버지도 뭘 잡수실 수 있을까요?"

"한두 시간 안에는 아무 것도 안 드실 거예요. 우선 취기가 빠져야 하니까."

배네사는 눈을 감고, 목구멍에서 북받쳐 오르는 뜨거운 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이런 일에 아주 이골이 난 모양이군요. 아버진 당신이 오기 전부터 알콜중독이었어요?"

"그는 알코올중독자가 아니에요. 평소에는 술에 손을 안 대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술에 빠지고 싶을 때가 오는 모양이오. 술 속에 도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는 무엇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버지하고 뒤탕플 가문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아버지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일 듯싶었다.

 

2

식당의 문이 열리면서 아버지가 들어올 때까지 두 사람은 아직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깨끗이 수염을 밀고 새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아버지는 처음 봤을 때의 후줄근한 인상보다 훨씬 더 산뜻해지기는 했으나, 야위어 초라해진 몰골은 완전하게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커피, 또 있나? 골치가 부서질 것처럼 아프구나."

아버지는 나직하고 쉰 목소리로 말하면서 가까이 있는 의자에 앉고는 어색하고 거북한 듯이 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꼴을 보여 줘서 미안하구나.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자신도 역시 그런 심정이라는 말을 배네사는 꿀꺽 삼켜 버렸다. 예고도 없이 뛰어든 것은 나의 잘못이니까.

"9월에 편지는 올렸습니다만"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좋을지 망설이면서 그녀는 어눌한 목소리로 처음 만나는 인사를 대신했다.

", 받았다."

아버지의 얼굴에 미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히 떠올랐다.

"나 같은 사람은 잊어버리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답장을 안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니 경제적으로는 곤란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돈만 있으면 사람은 행복해지는 줄 아세요?"

배네사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아버지는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이 움찔했다.

"도움은 되지. 돈이 없었더라면 줄리아 호는 못 샀을 게다. 줄리아 호는 나에게 다시 한번 자유를 주었다."

"그래서 배에다 어머니 이름을 붙였던가요?"

", 그렇지. 네 엄마는 좋은 여자였다."

아버지의 표정이 부드럽게 누그러져갔다.

"하지만 아버지를 붙잡아 둘 정도는 못됐던가 보죠."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도저히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일 그냥 집안에 남아 있었더라면 한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을 게다. 변명을 하는 건 아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신이 돌아 버렸을 게야."

"저는 아버지를 비난하러 여기까지 온 게 아녜요. 단지 무슨 일이든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있고 싶지 않았을 뿐예요. 사실은 여기 오기 위해 집을 처분했어요. 물론 그 돈을 전부 써버릴 마음은 없지만."

"그럼, 여기서 오래 있을 작정이냐?"

"귀찮으세요?"

"그런 뜻은 아니다. 다만배에는 네가 묵을 만한 곳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 문제라면 상관없어요. 이곳에는 호텔도 많이 있으니까요."

배네사는 아버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덧붙였다.

"라울 뒤탕플이 벨브데르 호텔에 묵는 것이 좋을 거라고 하던데요."

아버지의 입 언저리가 한순간 실룩거렸다.

"대관절"

"싱가포르에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답니다."

브렌든이 새로 끓인 커피를 들고 와 앉으며 말했다.

"뭘 좀 잡수시겠어요, ?"

"아니, 아직은 괜찮다."

아버지는 이내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있는 듯했다.

"벨브데르는 좋은 호텔이긴 하지만 방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뉴칼레도니아에는 일 년 내내 관광객이 찾아오지만, 특히 지금부터 12월까지의 건기(乾期)는 몹시 붐비는 시기다. 우리도 손님을 골라잡을 수 있지."

"먹을 게 떨어져서 사가지고 오겠습니다."

티셔츠에 샌들을 신은 브렌든이 일어서며 말하였다.

"l시간 후에 돌아오겠어요."

"좋은 녀석이지."

브렌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자식처럼 내 시중을 들어 주고 있다."

"저 사람에게 또다시 방랑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 훌쩍 떠나 버리면 어떡하죠?"

"그렇게 되면 딴 놈을 대신 들이지."

"그렇게 쉽게 될까요?"

"저놈처럼 서비스를 잘해 달라고 요구하는 건 무리겠지. 하지만 앞으로 일을 가지고 끙끙 앓아 봤자 별 뾰족한 수가 없지."

아버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말투를 바꿔 물었다.

"뒤탕플은 그밖에 또 무슨 말을 하던?"

"별로우리는 거의 얘길 안했거든요. 저는 줄곧 잠을 잤구요."

"하지만 그놈은 무슨 말을 했겠지. 그놈의 이름을 꺼냈을 때의 네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어."

"글쎄요."

배네사는 이 이상 시치미를 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두 분 사이에 뭔가 언짢은 일이 있는 듯한 말투였어요. 왜 그렇게 됐는지는 한마디도 안했지만요."

"그래서 너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로구나."

배네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에요."

"그건 그렇다만, 얼마 안 가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서 듣게 될 테니까 미리 설명해 주겠다. 내가 2년 전 광산회사를 그만두고 젊은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했을 때, 줄 뒤탕플이 퇴직금이라는 명목으로 줄리아 호를 살 돈을 주었다. 나는 10년간 블루 광산의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었지."

"그의 아들은 어째서 그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거죠?"

"라울은 내가 자기 아버지한테 어떤 압력을 넣은 줄로 생각하나 봐."

"그건 결국협박했다는 뜻인가요?"

"그런 뜻이 되겠지. 그가 그런 말을 한 건 작년에 자기 아버지가 죽은 뒤부터지만."

"그럼, 그 돈은 회사에서 지불해 준 게 아니고, 줄이 개인적으로 내준 건가요?"

"그랬던 모양이다. 줄은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었으니까. 10년간 회사를 위해서 헌신 노력한 사람을 돈 한푼 없이 내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거다."

아버지의 얘기는 어쨌든 이해가 가는 것이었지만, 배네사에게는 말하지 않은 뭔가가 거기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좀 더 여러 가지를 질문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아버지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셈이 되고 만다.

그녀는 도저히 아버지가 남을 협박하고 돈을 긁어내는 인간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라울이 그러한 의혹을 품게 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뒤탕플의 집안에는 남에게 알려지는 게 두려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산회사에서 낚싯배 주인이 되신 건 180도의 전환이시네요. 어째서 그렇게 되셨어요?"

배네사는 화제를 바꾸었다.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낚시는 원래부터 좋아했지. 한평생 이걸 계속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손님이 오는 한 그들을 안내하며 살려고 마음먹고 있지. 한 달에 두 번만 배를 대절해 주면 모든 경비를 마련할 수 있고, 그 나머지는 몽땅 이익이 된다. 작년엔 네 엄마한테 수표를 부쳤었지. 금년에도 부칠 작정이었다만."

"어머니가 그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쓰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세요?"

아버지의 누런 얼굴에 발그레한 빛이 돌았다.

"너무 늦었다는 건 알고 있다. 그전에는 송금하고 싶어도 여유가 없었지."

"16년 전에 아버님이 남겨 두고 가신 걸로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었나 봐요."

어머니가 생활비를 보충하기 위해서 직장에 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배네사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해봤자 이제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배네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저축한 돈은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돈 달라고 조르러 왔다고는 생각지 마세요."

"그렇게는 생각지 않는다. 넌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아버지는 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빙긋 미소를 띠었다.

"넌 엄마의 젊은 시절하고 똑같구나. 엄마처럼 남자를 선택하는 데 실수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미 누가 있느냐?"

"네에."

배네사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 사람은 너하고 결혼하고 싶어 하던?"

""

"하지만 네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는지 어떤지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구나."

아버지는 목소리에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면 그만두는 게 좋다. 완전히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일은 하지 마라. 후회하면서 살아가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란다."

그 말은 반드시 결혼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닌 성싶었다.

"영국을 떠나 곧장 뉴칼레도니아에 오셨어요? 그 광산 회사에는 10년간 계셨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결국 12년 가까이 있었던 셈이지. 처음에는 상담역이었고, 그후에는 관리인으로 승진됐지. 그때 라울은 그 자리에 자기 친구인 프랑스 인을 추천했지만, 아직은 20대여서 강력한 발언권이 없었단다. 내가 그 후보자를 제치고 승진한 것을 그놈은 끝까지 용서하려고 하지 않았다."

배네사가 누구인지를 알았을 때의 라울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확실히 쉽게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을 인간일 거라고 생각하자 갑자기 전율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언제나

"내 무덤 위를 거위가 밟고 지나갔구나."

하고 말했었다. 이것이 무슨 좋지 못한 징조가 아니었으면 좋을 텐데.

아버지는 영국을 떠난 후 처음 2년 동안 몇 주일간은 여기, 다음 몇 주일간은 저기 하는 식으로 떠돌아다녔던 모양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는 10개월쯤 머물면서 칼굴리 근처에 있는 광산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거기서 처음으로 줄 뒤탕플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된 그의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한 시간쯤 지나자 브렌든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벨브데르에 방을 예약하고 왔어요. 이젠 밤중까지 푹 쉴 수 있을 거예요. 뭘 좀 드시겠어요, ? 비프스테이크를 사왔으니까 이걸 굽고 샐러드를 만들겠어요."

"토끼밥은 싫다. 스테이크만 다오."

"나도 거들게요."

배네사가 일어났다.

"샐러드쯤은 만들 수 있어요."

닐도 일어났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바깥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오겠다. 다 되거든 불러라."

브렌든이 3인분의 스테이크를 그릴 석쇠에 얹어 놓고 소금이며 후춧가루를 뿌려 양념을 치면서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일자리를 뺏지 말라구요. 아직은 딴 데로 갈 예정은 없으니까."

배네사도 양상치를 뜯으면서 가벼운 어조로 대꾸했다.

"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별로 오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아버지가 원하시지 않거든요. 이런 곳까지 온 내가 바보였는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만일 오지 않았다면 한평생 후회했을걸. 그리고 사실은 닐이 뭘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그 양반에겐 누군가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죠. 이전부터 죽 필요했었는데, 그분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에요. 닐이 무슨 말을 하든간에 당신이 온 건 그분에게 큰 의미가 있음에 틀림없어요."

브렌든은 나보다 더 큰 확신을 갖고 있구나. 배네사는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는 나 이상으로 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다. 돌아가야 할 시한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 당분간은 돼가는 형편을 살펴봐도 좋지 않을까.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첫 번째 장애에 부닥쳤다고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는 건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다.

1주일 동안 머물면서 배네사는 배나 낚시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딸을 손님과 함께 배에 태우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처음에는 극구 말렸던 아버지도, 그녀가 정말로 흥미를 느끼고 있음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아무 말도 않게 되었다.

줄리아 호를 세내서 쓰는 사람은 대개 숙련된 낚시광들뿐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작년에 4백 파운드의 황새치를 낚아올려 섬의 기록을 갱신했다고 한다. 그가 이번에 잡은 고기 중 가장 큰 것은 2백 파운드쯤 되는 청새치였지만, 그래도 끌어올리는 데 5시간이나 걸렸다. 얼굴에서는 땀이 줄줄 흐르고, 양다리를 벌려 힘껏 버티며, 어깨를 치켜올려 격투하고 있는 그를 보고 배네사는 물고기가 가엾게 여겨졌다. 마지막에 그가 잡은 고기를 놓아 주겠다고 말했을 때는 놀랍기도 하고 안심도 되었다.

"중요한 건 싸움에 이기는 거라구요."

브렌든이 나중에 설명해 주었다.

"진짜 낚시꾼은 잡아 놓은 증거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요. 게다가 작년부터 그 사람은 3백 파운드 이하짜리는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기록을 가지고 있으면 그래서 곤란한 거죠. 사람들이 그 이상의 고기를 잡아오기를 원하고 있으니까."

세 사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부두 가까이 있는 잘 아는 작은 술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손님들의 대부분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어서 흉허물 없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중에서 아버지만은 간단히 인사를 하는 정도에 그치고 그들의 얘기에는 끼어들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에겐 공통의 화제 같은 게 없어."

아버지가 설명했다.

"저치들은 죽 이 짓을 하며 밥 먹고 살아온 놈들뿐일 게야. 풋내기인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저치들보다 수익을 많이 올리고 있으니까 당연히 못마땅하겠지."

그건 그렇겠지만 2년이란 세월이 지났으면 처음에 가졌던 적대의식은 사라질 텐데, 그것이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 점과 라울 뒤탕플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배네사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정도였다. 브렌든은 닐이 이렇게 긴장을 완전히 풀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며 이상한 일도 다 있다고 말했을 정도다.

"다음주 중간까지는 예약이 없는데, 셋이서 좀 멀리 나가 보지 않겠니?"

아버지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파인스 섬 근방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에는 터틀 클럽에 들러도 좋겠지. 잘 궁리해 보면 배에서 우리 셋이 못 잘 것도 없겠지. 너희들 의견은 어떠냐?"

배네사는 브렌든의 시선을 살피고는 그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일은 토요일이다. 지난주의 오늘, 아버지는 위스키 한 병을 마시고는 취해서 녹초가 되어 있었다. 여행으로 그 같은 사태를 막을 수 있다면 대환영이다.

"좋은 생각이네요!"

배네사는 얼른 대답했다.

"좋아, 결정되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한다."

소금 그릇을 집으려고 팔을 뻗친 아버지가 느닷없이 얼굴을 찡그렸다.

"근육에 쥐가 난 모양이군. 팔이 지독하게 아프구나."

"배에 돌아가면 바르는 약이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시면 내일은 제가 대신 조종을 하지요."

"네가 키를 잡았다간 하루종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똑같은 곳을 돌게 될 거다. 내일쯤은 나을 거야."

두 사람은 여느 때와 같이 호텔까지 배네사를 바래다 주었다. 로비를 가로지를 때 레스토랑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 라울을 본 것 같으나 확실하지는 않았다. 호리호리하고 검은 머리를 한 남자는 이 근방에서는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울인 듯한 사람을 목격한 사실은 배네사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을 수 없게 했다. 아버지가 언젠가는 딸을 신뢰하여 라울과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모조리 털어놓으려 한다 해도, 그녀로서는 가능하면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편이 좋을 경우도 세상에는 있는 법이다.

그후 며칠간은 배네사에게는 추억 속에 오래 남는 날들이 되었다. 세 사람은 아름다운 파인스 섬에서 이틀을 보냈는데, 푸른 호수에서 수영을 하기도 하고, 작은 외딴 섬에 건너가 보기도 하고, 해 지는 바닷가에서 낚시를 해서 고기를 구워 먹기도 했다.

브렌든은 스쿠버다이빙 도구를 빌어다가 다이빙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투명한 바닷속을 물고기처럼 헤엄쳐다니고 있으니까,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과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영국이나 마이클은 마음속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마이클에게는 무사히 도착했다는 엽서를 띄워 놓았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까지의 생활 같은 건 몇백만 년이나 멀리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누메아에 돌아가기로 된 날. 아침에 일어나 나왔을 때 아버지는 왠지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술 색깔도 파랗게 질려 있었다. 소화불량인 모양이다. 염려할 것 없다고 아버지는 말했으나 누메아 섬까지 돌아오는 도중에 대신해서 조종을 하겠다고 하는 브렌든에게 순순히 키를 맡기셨다.

아버지는 오전 내내 선실에 틀어박힌 채 점심도 들지 않았다. 오후에는 많은 양의 땀을 흘리고 구역질을 하더니 가슴이 답답해서 호흡하기가 곤란하다고 했다. 가장 가까운 병원이 목적지인 누메아에밖에 없기 때문에 이대로 전속력으로 항해를 계속해 나가는 수밖엔 방법이 없었다.

배네사는 아버지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조금이라도 편안해지길 빌면서 얼굴이며 머리의 땀을 찬 수건으로 계속 닦아내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배에 산소 탱크만 실어 놓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날씨도 한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점심때부터 태양은 서쪽 하늘에 모여든 불길한 먹구름 속으로 숨어 버리고, 바다는 거칠어지지 시작했다.

"누메아에 도착하기 전에 폭풍우가 불어 닥칠 거야."

날씨 상태를 보러 올라간 배네사에게 브렌든이 말했다.

"이렇게 된 바에는 로얄 섬에 가는 수밖에 없어."

브렌든이 조종석에서 파도나 바람소리에 지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크게 질러댔다.

"여기서 5km 거리야. 거기 가면 산소 탱크가 있을 테니까."

로얄 섬- 라울 뒤탕플이 소유하고 있는 섬이다. 아버지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라면, 배네사는 악마의 소굴이라도 애원하러 갈 작정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죠."

그녀도 외쳐댔다.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입술은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배네사는 차디찬 손을 잡고 열심히 문질렀다. 아버지는 지금 내 눈빛에서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아 하느님, 제발 시간에 늦지 않도록 해주옵소서!

섬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아직도 버텨나가고 있었다. 위쪽에서 사람들의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헤치가 열리고 브렌든이 내려왔다.

"방금 산소 탱크를 가지러 갔어요. 집에까지 운반하기 전에 우선 여기서 흡입시켜야겠어요."

아버지가 가늘게 눈을 떴다.

"어디냐집이냐? 여기는 어디"

"! 아무 말 마세요."

배네사는 핏기가 가신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말을 했다가 남아 있는 약간의 기력 다 써버리면 큰일이다.

위의 갑판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더니, 선실은 갑자기 사람들로 꽉 차게 되었다. 아버지의 얼굴에 산소 마스크가 씌워지고 밸브가 열렸다. 얼마 동안이 지나도 아버지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있자 굳어져 있던 손발이 서서히 풀리고 창백하던 얼굴에 발그레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우선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아직 위기를 벗어난 상태는 아니었다.

"의사를 부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배네사는 탱크를 떠받치고 있는 흰옷 입은 동양인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영어를 모르는 모양인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짓고만 있었다.

배네사는 더듬거리는 프랑스 어로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날씨가 좋으면 2시간입니다. 무전은 있습니까?"

"부서졌어요."

브렌든은 변명할 면목이 없는 듯이 배네사 쪽을 돌아봤다.

"어제 오후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돌아가면 고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배네사는 소리지를 뻔했으나 그만두었다. 브렌든도 역시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예상도 못했으리라. 이렇게 산소흡입을 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 만일 누메아를 향해서 계속 갔더라면 이것마저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저택에 전화가 있습니다. 제가 걸겠어요."

또 한 남자가 말했다.

그는 10분도 채 되기 전에 라울 뒤탕플과 함께 돌아왔다. 라울은 쓸데없는 질문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재빨리 남자들에게 지시하여 아버지를 운반해 나가도록 했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게 불어오고, 바닷가의 야자나무는 마치 빨대처럼 휘어져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지쳐 있었던지 나무로 된 선창까지 왔을 때, 배네사는 다리가 휘청거려 넘어질 것만 같았다. 라울이 얼른 손을 내밀어 몸을 부축해 주었다. 그녀는 라울의 다부진 몸 곁으로 끌어당겨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숨결과 강한 체취가 느껴졌다. 한순간 몸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배네사는 쿡 찔리기라도 한 듯이 물러서서 붙잡힌 손을 뿌리쳤다.

"괜찮아요. 걸어갈 수 있으니까요!"

"아가씨는 여기에 구원을 청하러 왔잖아. 그렇다면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게 어때."

라울이 그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로 내뱉었다.

배네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밖엔 올 곳이 없었어요. 산소가 없어 어쩔 도리가 없었던 거예요."

"그랬었군. 하지만 스쿠버 탱크 하나로는 부족할 거야. 에트왈 호에 또 있으니까 가지고 오지. 여기서 기다려요."

앞서 간 사람들은 이미 숲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라울은 부두 맞은쪽에 정박시켜 놓은 모터보트에서 산소 탱크 2개를 안고 왔다.

"이건 오늘 아침에 새로 넣은 거야. 떨어지면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지."

이번에 팔을 잡혔을 때에는 배네사는 저항하지 않았다. 바람을 받아 사납게 일어나는 파도가 밀어닥치는 바람에 그녀의 발은 무릎 언저리까지 흠씬 젖어 버리고 말았다. 모래가 물에 젖은 진바지와 머리에 들러붙고 입 안에서까지 서걱거리고 있다. 간신히 숲 속에 들어갔을 때 배네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폭풍이 몰아치는데, 어떻게 의사가 누메아에서 옵니까?"

배네사는 큰소리로 말해 보았지만, 앞장서 걸어가고 있는 라울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다보고서야 배네사는 스스로 그 대답을 찾아냈다.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이 사납게 날뛰는 바다를 건너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용태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택에 도착했을 때에도 그것이 크고 웅장하다는 정도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타일을 깐 널찍한 홀을 지나 철제 나선형 층계를 올라가니, 화랑이 붙어 있는 2층이 나왔다. 브렌든이 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의 입구에 서 있었다.

"정신이 좀 드시나 봐."

그가 말했다.

배네사는 아직도 산소마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폭풍이 심한데 의사가 와 줄까?"

그녀는 조금 전에 하던 걱정을 입 밖으로 냈다.

"피에르 르노 의사는 이보다 더 지독한 날씨에도 배를 타고 온 일이 있지."

라울이 대답하고는 브렌든 쪽을 보았다.

"이런 날에 출항하는 건 현명한 짓이 못 돼."

"라디오가 고장나서 어젯밤과 오늘 아침의 일기예보를 듣지 못했어요."

브렌든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기압계는 안 가지고 있었나?"

"물론 있지요. 하지만 폭풍이 본격적으로 몰아치기 전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요.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지요."

배네사는 옥신각신하고 있는 두 남자를 놔두고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아버지는 눈을 뜨고 계셨고, 안색은 아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좋아지셨다. 그는 뜻밖에도 딸의 손을 힘있게 꽉 움켜쥐었다.

"이젠 괜찮아요."

배네사는 자기자신에게 타이르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곧 의사가 올 거예요. 그때까지 가만히 누워 계세요. 지금도 고통스러우세요?"

아버지가 고개를 약간 가로젓는 걸 보고는 배네사는 마음이 놓였다. 고통스럽지 않다니 다행이다. 아버지 곁에 줄곧 붙어 있자. 이제까지 어찌되었든 지금은 아버지가 나를 필요로 하시니까.

아버지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배네사는 아버지하고 단둘이만 있게 해달라고 브렌든과 라울에게 부탁했다. 침대 한쪽에 앉아 있기가 좀 거북살스러웠지만, 꼭 잡고 있는 아버지의 손에서 자연히 힘이 빠질 때까지 놓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는 게 어때?"

잠시 후에 라울이 돌아왔다.

"아가씨 방에 내 누이동생의 옷을 몇 벌 가져다 놓았어. 아마 크기가 엇비슷할 거야."

그는 배네사가 아버지의 침대로 시선을 돌리는 걸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를 혼자 계시게 하진 않겠어. 티센더러 앉아 있도록 하지.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물에 젖어 진흙투성이가 된 진바지를 내려다보고, 배네사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미 지쳐 있었고,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지난 몇 시간 동안의 긴장과 피로와 위기의식이 갑자기 엄습해왔다.

라울이 배네사를 방까지 안내해 주었다.

"로얄에 있는 동안은 여기가 아가씨의 방이야. 눈을 좀 붙이는 게 좋을 거야."

"그건 안 돼요. 아버님이저를 부르실지 모르니까요."

"그럴 때엔 부르러 오지. 아가씨가 과로 때문에 쓰러지거나 하면 도리어 아버지에게 짐이 돼. 더운물로 샤워를 하고 잠시 누워 있으라구."

방은 창문이 모조리 닫혀 있고 기분이 괜찮을 정도로 어둑신했다. 두툼한 카펫은 발이 빠져들 만큼 푹신푹신했다.

그 이상은 가구를 살펴볼 기력이 없어서 배네사는 욕실로 가서 더러워진 옷을 벗었다. 뜨끈한 목욕물도 그녀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무겁게 덮쳐누르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버지의 병을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그런 식으로 갑자기 딸이 나타난 데서 받은 충격이 이번에 일어난 발작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만일 아버지가 무사히 회복하신다면 다시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여기서 직장을 찾아 여기서 사는 것이다. 마이클은 이해해 주겠지. 이해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어쨌든 나는 그의 좋은 아내는 될 수 없으니까.


3

배네사가 잠이 깼을 때에는 잠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분간을 못했다. 낯선 실내의 가구들이며 몸에 걸치고 있는 비단 실내복을 한참 동안 멍한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나서 한꺼번에 기억이 되돌아오자 배네사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닫아 놓은 셔터 너머로 줄기찬 빗소리가 들려오고, 틈새로 번갯불이 번쩍번쩍 빛나는 게 보였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알아보려고 베갯머리에 있는 스탠드를 켰다. 6! 벌써? 잠시 쉬려고 눈을 감았을 뿐이었는데.

아버지의 병상은 별다른 일 없겠지. 무슨 일이 있었으면 알려 주러 왔을 테니까. 배네사는 몇 번이고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면서 의자에 걸쳐 놓았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늘색 셔츠와 바지는 아주 멋있었고, 실크의 감촉도 부드러워 기분이 좋았다.

라울이 예상했던 대로 그의 누이동생과 나는 키나 체격이 똑같은 모양이었다. 라울과 아버지 두 사람이 서로 적대시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라울의 도움에 대해서 이중으로 감사해야 한다.

배네사가 도어를 열었을 때, 브렌든이 마침 노크를 하려던 참이었다.

"배에서 옷을 가져왔어요. 남의 옷을 빌어 입느니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해서."

"고마워요."

배네사는 짐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미 갈아입었으니까 그냥 이대로 있겠어요. 아버지는 좀 어떠세요?"

"직접 의사한테 가서 물어봐요."

"의사라니? 와주었군요! 언제?"

"30분쯤 전에. 비가 막 쏟아지기 직전이죠. 이런 상태 같아서는 당분간은 여기에 갇혀 있게 될 것 같은데"

"줄리아 호는 아무 이상 없나요?"

"상당히 흔들리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무사해요. 흔들리고 있는 것은 에트왈 호도 마찬가지지만, 이 집 주인어른은 전혀 걱정을 않는 것 같소. 배 한두 척쯤 부서져 봤자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요."

배네사는 옷보따리를 의자 위에 올려놓고 브렌든과 함께 복도로 나갔다.

"그 사람이 당신을 화나게 만든 모양이군요. 하지만 그 사람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요."

"알고 있소. 다만 그 고자세인 태도가 못마땅한 거지. 되도록이면 빨리 이 섬에서 빠져나갑시다."

"그건 아버지가 움직여도 좋다는 의사의 허락이 언제 나오느냐에 달렸어요. 여기까지 온 이상 라울이 폭풍우가 그치자마자 우릴 내쫓지는 않을 테니까."

"이젠 라울이라고 부르는 거요?"

그 말에 가시가 돋쳐 있음을 느끼고 배네사는 흘끗 브렌든을 훔쳐보았다.

"그렇게 부르는 건 버릇없는 짓이란 말이죠?"

브렌든은 얼굴이 빨개졌다.

"당신이 그 사람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걸 닐은 좋아하지 않을 거요."

"어쨌든 아버지는 불평을 할 입장이 아녜요."

베네사는 말을 하다가 말고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요 브렌, 당신하고 싸우고 싶진 않아요. 아버지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라울 뒤탕플하고 너무 사이좋게 지내는 일에 대해서는그런 일은 거의 있을 수가 없잖아요? 당신이 빨리 나가고 싶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도 역시 우릴 빨리 내쫓고 싶을 거야."

두 사람이 아버지의 방에 들어서자 청진기를 목에 건 몸집이 작은 사나이가 돌아다보고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아버지는 베개를 높이 베고 잠들어 있다. 입술에 혈색이 돌고 있는 것을 보고 배네사는 고맙게 생각하였다.

"방금 수면제를 드시고 잠드셨습니다. 앞으로 몇 시간은 깨시지 않겠지요."

르노 의사는 그녀를 한쪽 옆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때요? 회복될 가망은 있어요?"

"지금 같아서는 병세는 가라앉았습니다. 한동안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게 좋겠군요. 1주일쯤 지나서 별일이 없으면 누메아에 옮겨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모든 언행을 삼가고 평온한 생활을 하시면 완전히 회복될 수도 있습니다. 배를 팔아 육지에서 생활하시도록 아버지를 설득하시길 권합니다. 아가씨는 앞으로 줄곧 뉴칼레보니아에 머무르실 작정입니까?"

배네사는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을 했다. 배를 팔아치운 돈에다 내가 저축한 돈을 보태면 조그만 집을 사고 필요한 것을 갖출 수는 있겠지. 비서라는 자격을 활용하면 여기서 직장을 발견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프랑스 어는 좀 더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노동 허가증을 내야 하는 문제도 있다. 허가증을 내기는 어렵겠지. 누구에겐가 원조를 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지금 형편으로는 그런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 쾌히 떠맡아 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부탁할 바에는 되도록 빨리 하는 편이 낫다.

", 쭉 있을 작정이에요."

배네사는 대답했다.

"무슈 뒤탕플이 어디 계신지 아세요?"

"도서실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거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안내해 드리죠."

르노 의사는 브렌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요기를 하고 올 테니까, 그 사이 환자 좀 봐주시겠습니까? 아무튼 아침 10시경에 한술 떴을 뿐이니까요."

그때까지 배네사는 브렌든이 거기에 있는 걸 깜박 잊고 있었다. 줄리아 호를 팔게 되면 그는 딴 일자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지금 그의 문제까지 걱정할 여유는 없다.

르노 의사는 도서실의 마호가니 문을 가리켜 보이고는 그대로 떠나가 버렸다. 노크를 하고 도어를 열자, 라울은 천장까지 닿는 책장 앞에 서서 책을 펴놓고 읽고 있는 중이었다. 하얀 면 팬츠가 다부진 허리에 딱 들어맞고, 검정 셔츠의 앞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가슴털과 금빛 목걸이가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들어와요."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배네사에게 말하더니, 라울은 책을 책장에 꽂아 넣었다.

"아버님의 용태를 보고 왔어요?"

"네에, 르노 의사 선생님도 만났어요. 이런 날씨인데도 와주신 의사 선생님께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를 지경이에요. 그리고 저희들을 쾌히 떠맡아 주신 선생님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당신들을 내쫓을 줄 알았소?"

초록빛 눈이 까딱도 하지 않고 라울의 파란 눈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저희 아버님에 대해 호의를 갖고 있지 않으시니까요."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에 그런 건 문제가 안 돼요."

"덕택에 우선 당장의 위기는 벗어난 듯해요."

배네사는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저는 선생님이 왜 아버님을 싫어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요. 지금 그런 얘길 해도 괜찮을까요?"

"하필이면 지금 말이오?"

"다음날로 미뤄도 소용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딴은 그렇기도 하군."

라울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느슨하게 가죽을 댄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요. 그리고 아가씨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얘기해 주시오."

배네사는 의자에 얕게 걸터앉아서 무릎 위에 손을 놓았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한담?

"저희 아버님이 선생님의 아버님을 협박했다는 식으로 선생님은 생각하고 계시나 보더군요."

망설인 끝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라울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고 말했다.

배네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선생님의 아버님 같은 지위에 계시는 분에게 저희 아버님이 무슨 압력을 가할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아버님이 후진에게 길을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선생님의 아버님께서는 뉴칼레도니아에 데리고 온 사람은 당신 자신이라는 책임을 느끼시고, 보상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신 게 아니었을까요? 50세가 지나서 새로운 직장을 찾는다는 건 손쉬운 일이 아니에요."

"이 근방에선 그런 가능성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

라울의 말투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가씨의 아버지는 자기가 결백하다는 것을 아가씨로 하여금 믿게 했구먼. 16년 만에 만나서 1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오. 나는 아버지하고 사별한 지 얼마 안 되어 아가씨의 아버지가 평소에 내가 믿고 있었던 것과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요."

배네사는 고개를 쳐들었다.

"저희 아버님에게 뭔가 일이 있었다는 말씀이세요?"

"그게 없었더라면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지. 우리 회사는 외국과는 거래를 많이 하고 있어서 우리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출장을 나가셨소. 칼굴리 근처의 광산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던 아가씨의 아버지하고 우리 아버지는 어떤 회의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만나 서로 소개를 받게 되었던 모양이오. 그 뒤 1년이 지났을까. 아가씨의 아버지는 실직을 해서 뉴칼레도니아에 찾아왔소.

운명의 장난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지, 아가씨의 아버지는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서 아내를 동반하고 있는 우리 아버님의 사진을 보았던 게요. 그 아내라는 사람은 나의 두 번째 어머니지만아가씨의 아버지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생각했던 거요."

"이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자신을 고용해 달라고 강요했다는 말씀이세요? 도대체 어떻게?"

"칼굴리에서 우리 아버님은 딴 이름을 쓰고 계셨고, 아내도 딴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우리 아버님은 15년간이나 제2의 가족이 있다는 걸 계속 숨겨왔던 거요. 그 여자와의 사이에 두 아들까지 태어났지."

잠시 동안 배네사는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그런 것을 전부 아셨을까요?"

하고 그녀는 간신히 되물었다.

"우리 아버님은 유언장과 함께 나에게 편지를 남겨 주셨지. 그 속에서 우리 아버님은 모든 사실을 고백하셨어요."

"그래서 우리 아버님을 비난하시는 거예요?"

"그렇소. 여러 해 동안 미심쩍게 생각하고 있던 많은 사실에 대한 설명이 그것으로 겨우 가능했던 거요. 모든 사실을 공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소할 수도 없었지. 아가씨의 아버지는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게야. 아마도 처음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죄의식 때문이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을 만류하며 붙잡지는 않았어.

아가씨의 아버지가 불루 광산의 관리인으로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중역들을 설득하는 일은 우리 아버님에겐 너무나도 부담스런 일이었던 모양이오. 그 대신 줄리아 호를- 줄리아 호 같은 배가 한 척 있으면 충분히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지. 아가씨의 아버지는 약속을 지켜, 그 뒤로는 무엇을 청구해 오는 일은 없었소. 하지만 그때에는 이미 아가씨의 아버지는 건강을 해치고 있었어."

"선생님의 아버님 쪽에도 잘못은 있었잖아요? 선생님의 아버님이 하신 행실은 결코 칭찬받을 일은 못돼요."

라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떤 상황 아래서 사나이가 애인을 만드는 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자식까지 낳았다는 사실이오."

그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아가씨는 어떻게 할 작정이오?"

"아버님 곁에 있겠어요. 지금 아버님에겐 제가 필요하니까요."

"아가씨는 아가씨의 아버님이 하신 일이 걱정되지 않소?"

"걱정되긴 해요.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 아버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요."

라울은 잠시 동안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배네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결정하는 건 아가씨요."

잠시 후에 그는 말했다.

"아버님이 움직일 수 있게 되기까지는 여러 날이 걸린다는 걸 알고는 있소?"

"르노 의사 선생님한테서 들었어요."

배네사는 말을 우물거렸다.

"그래서 이제부턴"

"이제부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다 덮어 두기로 해요. 아가씨의 생각은 정당해요. 다 지나간 일들이오. 언제까지나 거기에 질질 끌려다닐 생각은 내게도 없어요."

나는 정말로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버지가 한 일을 그렇게 간단히 잊어버려도 좋은 걸까? 생각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보상은 줄리아 호를 처분한 대금을 라울에게 되돌려 주는 일이다. 라울에겐 그런 돈 따위는 문제가 안 되겠지만, 본심만은 이해해 줄 것이다. 영국에 두고 온 저축금을 이곳으로 옮겨 오면, 그 다음에는 그 돈으로 뭔가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시장하지 않소? 저녁식사 시간은 9시지만, 조금 일찍 하라고 일러야겠군."

라울이 벽에 붙은 벨을 누르면서 말했다.

"저 때문이라면 염려하지 마세요. 정말로 먹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으니까요."

"그럼 따끈한 홍차는 어때?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 집 일꾼들은 홍차를 끔찍이도 귀하게 생각하지."

"그 사람들은 모두 아시아 인이에요?"

", 베트남 사람들이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한 가족이 로얄에 눌러 살았는데, 그 후에도 몇몇 가족이 들어왔지요. 이 근처에 조그만 부락을 이루고 있지. 거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영주할 생각들이오. 그들은 자기들이 행운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렇겠군요. 베트남 본국은 살기가 어렵거든요. 영국에도 보트피플이 있어요."

"그들이 영국 기후에 익숙해지기는 어려울 거요."

라울은 도어에서 얼굴을 내민 젊은 여자 쪽을 돌아다보고 프랑스 어로 말했다.

"홍차 한 잔만 가져다 줘, ."

여자는 길다란 검은 머리채를 흔들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배네사는 라울이 이제 방금 얘기한 아버지와의 관계를 자기들 외에 몇 사람이나 더 알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라울 자신이 퍼뜨리고 다니진 않았겠지만, 이 같은 이야기는 자연히 퍼져나가는 법이다. 브렌든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되도록이면 빨리 이 섬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여러 사람을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 같았다. 나는 이미 라울을 남자로서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만일 상황만 달랐다면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한들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그와 나와는 살아가는 세계가 전연 다르지 않은가.

"여동생에게 옷을 빌려준 데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겠어요. 지금 있을까요?"

배네사는 현실의 세계로 되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지금은 어머니를 찾아 뉴욕에 가 있어."

"그럼 여동생과는 피가 절반밖에 섞여 있지 않겠군요."

"절반도 섞여 있지 않아. 우리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후 곧 돌아가셨거든. 아버지는 15년간 독신으로 살다가 아이가 딸린 미망인과 재혼했지. 그 아이가 크리스탈인데, 지금 25세요."

"보기 드문 이름이네요."

"그애한테 어울리는 이름이지."

라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아, 느긋하게 앉아 있으라구. 이제부터 며칠 동안은 같은 집에서 지내는 이상 되도록이면 편안히 지내고 싶으니까."

"되도록이면 얼굴을 마주치지 않도록 하겠어요. 선생님이 저를 얼마나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는 알고 있으니까요."

"내가 느끼고 있는 건, 우리가 서로 원수가 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오. 아가씨가 뉴칼레도니아에서 쭉 살고 싶다면 나도 필요한 원조는 해줄 수 있지."

"왜 저에게 그런 호의를?"

"그건 말이오. 난 원래 큼직한 초록빛 눈에는 마음이 약해지기 때문일 거요."

배네사의 표정에서 당혹해하는 것을 보고 라울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가씨가 아버님을 변호하러 왔을 때 아가씨 자신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의식하지 않았던 건 아니겠지?"

"변호하러 온 게 아녜요. 다만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 하지만 진실을 알고 난 지금으로서는 무리한 부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과거의 일은 일단 접어 놓기로 하지 않았소."

"하지만 잊지는 못할 거예요."

"잊는 데엔 시간이 필요하지. 그 동안에도 우리는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

문이 열리더니 랜이 들어왔다. 홍차 접시가 테이블 위에 놓이기를 기다렸다가 라울이 조용히 말했다.

"볼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소. 천천히 차를 들고 있어요. 저녁식사 때 또 만나지."

라울이 나가자 배네사는 방안에 혼자 남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라울에 대해서 품기 시작한 이 감정은 너무나도 명확한 모습을 띠고 있어서 이젠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

 

폭풍우는 새벽녘에 이르러서야 겨우 그쳤다. 해가 돋을 무렵의 하늘에서는 구름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바다는 여느 때와 같은 평정을 되찾았다. 르노 의사는 환자의 증상이 안정되어 있음을 확인하더니, 아침식사 전에 본섬(누메아)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를 푹 쉬게 하시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제일 나빠요. 이틀 후에 다시 상태를 보러 오지요."

"아버지에게 심려를 끼치지 않으려면 지금은 배의 매각 얘기를 꺼내지 않는 편이 좋겠소."

함께 의사를 전송하고 나서 브렌든이 말했다.

"어제도 말한 바와 같이 당분간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나갈 테니 말이오. 닐이 건강을 회복하면 팔 필요도 없어지지. 당신하고 닐은 육지에 집을 사서 같이 살면 돼요."

배를 팔아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고 털어놓지 못하는 배네사의 마음은 괴로왔다. 하지만 브렌든의 말도 옳았다.

모든 것은 아버지가 건강해진 후에 시작하면 된다.

본섬으로 돌아가는 브렌든을 떠나보내고 나서 집으로 돌아올 때 숲 속에서 라울이 나타났다.

"안 오기에 아가씨도 함께 본섬으로 돌아간 줄 알았지. 아버님이 잠을 깨어 아가씨를 찾으시는 모양이오."

청바지에 딱 들어맞는 티셔츠를 입은 라울의 모습은 몹시도 사나이다왔다. 배네사는 눈길을 돌리면서 그가 아버지를 만났는지 물었다.

"아냐, 건강해질 때까지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해서 말야. 우리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걸 아버님은 별로 좋게 생각지 않으실 테니까."

그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배네사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까.

"선생님은 어째서 줄곧 여기서 살고 계시죠? 본섬이 여러 가지로 더 편리하잖아요?"

화제를 바꾸고 싶어서 배네사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도 집은 있지. 주로 비즈니스와 손님 접대가 목적이긴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으면 이곳에 오곤 하지 하지만, 앞으로 한 이틀 사이에 본섬에 돌아가야 하오."

"정말예요?"

너무나도 유감스러운 듯한 목소리를 낸 자신이 부끄러워서 배네사는 얼른 덧불였다.

"어쩐지 저희들이 선생님을 쫓아내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그렇지 않아요. 사업관계로 가는 거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가씨네는 여기 있겠지?"

약속해 달라는 듯한 말투였다. 그가 진정으로 그렇게 말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도대체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려고 하는 걸까? 아버지와의 관계는 일시적인 것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없었더라면 라울은 지난주 비행기에서 내려 몇 분이 지난 후에는 나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아침에는 라울의 저택을 천천히 둘러볼 여유가 있었다. 희고 커다란 집인데, 지붕은 해묵은 붉은 기와지붕이고, 발코니 기둥에는 초록빛 담쟁이덩굴이 기어올라 칭칭 휘감겨 있다. 널찍한 잔디밭인 앞마당은 손질이 잘돼 있다. 어젯밤의 폭풍우가 몰고온 온갖 부스러기들은 이미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어제 저녁 줄리아 호를 맞으러 나와 주었던 두 사나이가 피해를 입은 화단을 열심히 고치고 있다.

"선생님이 되도록이면 여기 계시려고 하는 이유를 알았어요.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할아버지가 80년 전에 지으신 집이지. 돈은 전부 배로 운반해야만 했으니까 시일이 많이 걸렸던 모양이야."

"하지만 그 보람은 있었군요."

"그렇게 생각지 않는 사람도 있지. 나의 두 번째 어머니 같은 사람은 이곳에 아무런 애착도 느끼지 못했어. 뉴칼레도니아 자체에도 말야. 그 어머니가 애착을 가졌던 것은 아버지의 재산뿐이었지. 아버지는 그걸 느끼고 토지는 전부 나에게 남겨 주게 했어. 계모는 물론 충분한 유산을 받아 가지고 마냥 좋아하면서 미국으로 돌아갔고"

"하지만 여동생은 남아 있었군요."

라울의 말투가 약간 달라졌다.

"크리스탈은 이미 자기 일은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있었으니까."

두 사람은 도서실 문 앞에 와 있었다. 라울은 파란 눈으로 뚫어지게 배네사를 응시했다.

"아버님의 용태가 좋아지면 나중에 수영하러 갈까? 만의 입구에 상어를 막는 망을 쳐놓으니까 거기서 수영하면 괜찮아. 뒤쪽 테라스에서 떠나면 몇 분 만에 도착하니까 그렇게 힘들지도 않을 거구."

처음에는 그도 같이 가는 줄로 알았던 배네사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는 안심해야 하는 건지 실망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 옆에는 할멈이 있어 주었다. 배네사는 공손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잠시 동안 자기가 있겠다면서 그녀를 돌려보냈다.

"하루종일 누가 붙어 있을 필요는 없다. 여기에 초인종이 있으니까."

아버지는 가냘픈 소리로 말하더니, 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사람한테서 얘길 들었겠지?"

"네에."

배네사는 솔직히 시인했다.

"제가 얘기해 달라고 했으니까요."

"역시 너는 맨 처음에 내가 해준 설명을 믿지 않았었구나. 그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배네사는 침대 옆에 앉아 아버지의 야윈 손을 잡았다.

"지금 그런 게 무슨 소용이에요? 이젠 다 지나간 일인걸요. 라울은 잊어버리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도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모로 저었다.

"설사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손 치더라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순 없지. 1년 전에 모든 사실이 드러났을 때, 그 사람은 나한테 와서 복수하겠다고 맹세했었지. 무슨 방법으로든 반드시 앙갚음을 하겠다고 말이다."

"그건 벌써 1년 전의 일이에요. 무슨 행동을 하려고 했다면 이미 오래 전에 했을 거예요. 게다가 도대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한다는 거예요?"

"모르지. 알고 있는 건 그 사람이 하고 간 말뿐이다. 그 친구는 내가 어째서 그런 상태가 되었는지 설명하려고 해도 귀담아 들으려고도 안 해."

"어째서 그런 상태가 되었는데요?"

배네사가 조용히 물었다.

"나는 아무런 계획도 세우고 있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절망적인 눈으로 딸을 올려다봤다.

"처음에 줄 뒤탕플을 만나러 갔었을 때, 나는 고용해 달라고 강요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만일 줄이 안 된다고 한다면 그냥 돌아올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줄은 거의 아무런 말도 안했어. 단지 그날부터 나는 그의 회사의 사원이라는 말을 했을 뿐이야. 만일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다면 줄이 저 혼자서 지레짐작으로 속단하는 걸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둔 일이겠지."

아버지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배네사는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약간은 혼란이 왔다. 언뜻 봐서는 있을 수 없는 얘기지만, 그 자리에 같이 있질 않았으니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버지의 변명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일은 이젠 잊어버리세요."

배네사는 부드럽게 말했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저는 인제 영국에는 안 가겠어요. 뉴칼레도니아에서 둘이서 같이 살아요. 줄리아 호는 당분간 브렌든이 맡아서 일해 주겠대요. 혼자서도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어요."

아버지는 미소를 지었다.

"기대할 순 없다만도아니 뭐, 2주일쯤 지나면 내가 키를 잡을 수 있게 될 게다."

배네사는 힘을 북돋아 주듯이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배를 팔자는 얘기를 꺼내는 건 먼 훗날에 가서 해도 된다.

"물론이죠. 아직 은퇴하시기에는 너무 일러요."

 

4

아버지는 그러고 나서 이내 잠이 들었다. 그 초췌해진 얼굴을 바라보면서 배네사는 어느 때나 가야 아버지하고 정말로 친숙해질까 하고 생각한다. 내가 앞으로 계속해서 뉴칼레도니아에 머물러 있겠다고 말해도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딸이 있어 주기를 원하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다. 결심을 하기 전에 좀 더 차분히 생각을 해보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느끼면서 배네사는 기분이 우울해졌다.

블라인드에서 새어나오는 햇빛이 더없이 영롱하다.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그저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혼자 놓아 두고 나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또다시 발작이 일어나는 바람에 초인종을 울리지도 못한다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런 생각이 전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도어가 열리더니 아까 아버지를 간호했던 그 할멈이 들어왔다. 그녀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더니 환자를 물끄러미 지켜보기 시작했다.

정녕 라울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여 아버지를 간병하고자 하는 태도였다. 그녀가 와서 아버지를 돌보는 이상에는 내가 여기 있을 필요는 없다. 나중에 또다시 용태를 살피러 오기로 하자.

방에 돌아가 배네사는 면으로 된 청록색 비키니로 갈아입고 타월 천으로 된 재킷을 걸쳤다. 바깥 공기는 폭풍우가 지나간 후여서 아직은 써늘하다. 배네사는 테라스에 서서 널찍한 잔디 정원으로부터 그 낮은 쪽에 있는 야자나무 숲에로 눈길을 옮겨갔다.

섬의 한가운데는 산뜻한 초록색을 띤 높직한 동산이 솟아 있고, 그 위에 맑게 갠 푸른 하늘이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

라울이 일러 준 좁은 길은 금세 발견했다. 나무들 사이를 요리조리 누비고 가니까 이윽고 작은 만이 나왔다. 그 너무나도 아름다운 경치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탄성을 질렀다. 아주 완벽하게 방어가 돼 있기 때문에 그 후에는 폭풍우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 은빛 모래사장에 밀어닥치는 파도 소리와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외에는 바닷가는 더없이 고요하다.

불쑥불쑥 튀어나온 바위들이 팔처럼 만을 에워싸고 있는데, 그 바위와 바위 사이에 구명 부대가 둘러쳐져 있어서 아름다운 경관을 망치고 있다. 상어의 침범을 막기 위한 망이기는 하지만 파라다이스에도 한 가지쯤은 결점이 있나 보다.

재킷을 벗어 놓고 배네사는 바다를 향해서 달려나갔다. 태양열로 적당히 뜨뜻해진 물이 아주 기분이 좋았다. 바닷가에서 별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모래바닥이 갑자기 깊어졌다. 배네사는 해안선과 나란히 하여 헤엄쳐 갔다. 물은 한없이 맑고 깨끗하다. 형형색색의 물고기가 눈앞으로 헤엄쳐 간다. 어느 놈이나 몇 센티도 안 되는 작은 물고기들뿐이다. 마치 커다란 수족관 속을 헤엄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상어 방어망은 강철로 되어 있었다. 배네사는 망을 붙잡고 저쪽의 좀 더 깊은 바닷속을 들여다보았다. 그쪽에서 헤엄쳐 다니고 있는 물고기는 이쪽 것보다 크긴 하지만 종류는 적었다. 하지만 먼 쪽에 있는 바다는 색깔도 점점 더 짙어져서 잘 들여다뵈지 않았다. 다시 한번 자맥질을 하려고 했을 때, 인기척을 느껴 흘끗 뒤를 돌아보았으나 배네사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철망으로 가려진 이쪽에는 위험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물결이 출렁거리는 바람에 그녀는 철망을 붙잡은 채 뒤를 돌아다보았다. 라울이 물거품에 휩싸인 채 질풍처럼 헤엄쳐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물을 헤치면서 수면에 얼굴을 내놓고 바로 가까이서 마주 바라보았다.

"철망을 붙잡고 있는 것이 보이기에 어디 다치지 않았나 걱정했지. 물에 뛰어들기 전에 내가 큰소리로 불렀는데 들리지 않았어?"

"전혀. 선생님이 여기 오시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뭘 찾고 있었지?"

"상어요."

배네사가 대답하자 라울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렇다면 하루종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돼. 철망은 경계를 위해서 친 것이지 실제로 상어가 있는 건 아니야."

라울은 조금 떨어져 있는 바위를 가리켰다.

"바닷가에 돌아가기 전에 저기서 잠시 쉬어 가지 않겠어?"

배네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벌써 30분 이상이나 물속에 있는 터이다. 바위는 마치 층층대처럼 되어 있어서 기어오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라울은 그녀 옆에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바싹 다가앉았다. 몸을 억지로 떼어 놓으면 도리어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므로 그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다고 배네사는 생각했다.

라울은 몸을 앞으로 수그려 붙이고는 바위에 스친 장딴지를 문지르고 있었다. 넓적한 어깨가 눈앞에 다가왔다. 그의 피부는 매끄럽고 팔의 근육이 억세 보인다. 배네사는 문득 손을 뻗쳐 등줄기를 가만히 어루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라울이 이곳에 온 것은 단순히 수영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만큼 그녀는 순진한 바보는 아니었다. 오늘 아침 이곳을 가르쳐 준 것도 목적이 있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아가씨, 떨고 있구먼."

라울이 앞을 향한 채 말했다.

"추위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물론 그런 건 아녜요."

배네사도 될 수 있는 대로 냉랭한 소리를 냈다.

"선생님의 손아귀 밑에서 여성이 떠는 데 대해서는 익숙해져 있을 텐데요"

라울은 몸을 일으켜 배네사를 쏘아보았다.

"나를 놀리고 있는 거야, 아니면 본능적인 자기방어 행위야?"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하긴 그래."

라울은 손을 뻗쳐 그녀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게 매력을 느꼈어. 아가씨가 누구인지를 알고는 상황이 좀 변하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들은 다시 만날 운명에 있었던 거야."

"아버님이"

"아버지 일은 별문제야. 나는 환자에 대해서 복수를 꾀하거나 하진 않아."

"정말예요?"

"사실이야."

라울은 미소를 지으면서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아가씨는 내가 알고 있는 그 누구와도 달라. 아버지가 어떤 인간인지를 안다면 영국에 돌아가 버려도 이상할 것은 없겠지만, 아가씨는 그분 곁에 머물러 있겠다고 했어. 아버지가 한 행위를 변호하려고까지 했어."

"변호한 게 아니에요. 다만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뿐이에요. 그건 처음부터 계획했던 건 아니었어요. 라울 선생님의 아버님을 협박할 의사는 없었다고 아버님은 말씀하시던데요. 당신은 그저 취직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대요."

라울의 눈 속에서 뭔가가 불꽃을 튀겼으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 문제는 다시 거론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이것은 우리들 두 사람 사이의 일이야. 딴사람과는 관계가 없어."

그리고 겹쳐진 라울의 입술은 차갑고 짠맛이 돌았다. 그의 혀가 질문을 하듯이 살짝 스쳤을 때 몸의 깊숙한 내면이 뒤흔들리고, 그 떨림이 점점 더 퍼져나간다고 느꼈을 때, 키스가 좀 더 깊고 격렬해짐에 따라 배네사도 손을 그의 목 뒤로 돌려 감고는 마찬가지로 뜨겁게 호응해 갔다.

이런 식으로 키스를 당한 건 처음이 아니지만, 이렇게 마음이 충동을 받고 욕망이 솟구친 것은 처음이었다. 배네사는 그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무슨 일이 너무 이르면 머릿속 어디선가 이성의 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아무래도 이건 너무 성급하다. 배네사는 몸을 빼내어 머리를 바위에 기대고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라울도 이젠 그녀를 포옹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라울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다정해서 그 자체가 애무처럼 느껴졌다.

"바닷가로 가자구. 아무도 안 오니까."

미리 장소를 확인해 둔 모양이라고 배네사는 퍼뜩 생각했다. 그녀는 이젠 겁을 내지 않고 라울의 파란 눈을 응시했다.

"아버지한테 돌아가 봐야겠어요."

"아버님에겐 돌봐 줄 사람이 옆에 있잖아. 아가씨는 조금 전에 자기의 내면에 있었던 것을 부정할 작정이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스럽다.

"선생님은 목적을 가지고 여기까지 저를 쫓아오신 걸 부정할 셈예요?"

"난 거짓말은 안해. 우리가 서로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아가씨와 마찬가지로 나도 역시 알고 있어."

배네사는 그 말을 떨쳐 버리고 싶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선생님이 좋아하실 타입이 아녜요."

"그렇다면 어떤 여자가 나의 타입이라고 생각하지?"

"아름답고 세련되어 있어서 선생님과 같은 부류에 속해 있는 여자. 저는 그중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아요."

"옛날에는 그랬었지."

하고 라울은 동감을 표시했다.

"아가씨가 방금 한 말이 옳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어. 하지만 나는 이젠 겉치레와 형식에 얽매여 지낼 그런 나이는 아니야. 아가씨가 말한 것과 같은 여자는 이 근방에도 얼마든지 있지. 아가씨는 신선하고 개성적이야. 배네사, 자기의 감정을 솔직히 나타내는 점이"

"좀 더 제 자신을 억제하는 법을 배워야겠어요."

하고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라울은 물에 젖은 수영복이 착 달라붙어 뚜렷이 윤곽을 그리고 있는 배네사의 가슴 선에 시선을 떨구었다.

"옷을 별로 입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감추기가 어려운 수도 있어. 우리는- 남자나 여자나- 특정한 자극에 대해서 다 같이 똑같은 반응을 나타내거든. 대중요법으로는 찬물로 샤워를 하거나 마음껏 수영을 하는 게 좋아."

라울은 배네사를 조롱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불친절한 말투는 아니었다. 배네사는 물속에 뛰어들어 해변을 향해서 헤엄치기 시작했다. 스피드를 내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억제했다. 그가 그것을 도발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라울이 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알 수 없는 것은 그 동기다. 나는 그가 복수를 하겠노라고 한 사람의 딸이다. 그 점을 라울이 잊을 리는 만무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관계가 아버지를 괴롭히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아버지 앞에서 그가 그런 사실을 폭로하면 또 모르지만, 설마 거기까지 냉혹한 계산을 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배네사가 물속에서 일어서자 라울이 바로 뒤에 와 있다가 그녀를 팔 안에 끌어당겼다. 라울의 단단한 육체가 뜨거운 떨림을 불러일으킨다. 이젠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 배네사는 체념과도 같은 기분으로 황홀한 세계에 몰입해 들어갔다.

등 한가운데 근처를 만지는 그의 손이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비키니 상의가 벗겨질 때까지 그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건강하고 잘생긴 가슴에 보들보들한 곱슬머리가 스치자 감전과도 같은 전율을 느끼게 했다.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배네사는 몸을 빼어냈다. 그것이 그의 손에 가슴을 애무할 공간을 주었다. 긴 손가락이 휘감김에 따라 입술에서 가느다란 희열이 흘러나왔다. 물러서야 할 시간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가 버렸다. 이젠 물러서고 싶은 생각도 사라지고 말았다.

라울은 몸을 구부려 배네사의 몸을 물속에서 끌어올렸다. 열에 들뜬 듯한 뜨거운 입술이 가슴을 덮었다. 그의 입술은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주어, 배네사의 모든 성감대로 퍼져나가게 했다. 그러고 나서 라울은 머리를 들어 불타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여긴 안 돼. 좀 더 좋은 데를 알고 있어."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배네사는 그저 라울의 몸에 꼭 달라붙어 있었다. 숲 속의 나무들 사이에 섞여 종려나무 잎으로 지붕을 인 조그만 오두막이 있었다. 단 한 장의 유리도 끼우지 않은 창에서 햇빛이 쫙 비쳐들었다. 라울은 배네사를 거적이 깔려 있는 바닥에 내려놓고 키스를 하면서 비키니 옆구리를 풀었다.

그의 눈빛에 온몸을 드러내놓는 데 대한 당혹감마저 배네사에게는 없었다. 자기가 그에게 이 정도의 정열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데 대한 기쁨이 오히려 더 컸다. 마이클과 서로 포옹하는 것은 즐거웠었고,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이런 식의 감동을 느껴보지 못했다. 지금은 마이클 생각 같은 건 하고 싶지가 않다. 지금 이 순간과 이 사람에 대한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의심을 품기에는 이미 너무나 늦은 것이다. 너무나, 너무나도 때가 늦었다.

라울은 배네사의 턱에서 귀에 이르는 선을 따라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 자기가 이제부터 무엇을 하려 하고 있는지, 그녀한테서 무엇을 찾으려 하고 있는지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는 행동이 아주 새로운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 꼭 끌어안고 황홀한 순간에로 치달아갔다.

딱 감고 있는 눈꺼풀에 라울이 살짝 키스해 주자 배네사는 비로소 눈을 떴다.

그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보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아?"

배네사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런 짓이 또다시 그의 눈을 불타오르게 한다.

"그런 건 묻지 않는 거예요. 대답을 잘 아실 텐데요"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시군요, 하는 말이 그 다음에 떠올랐다.

그게 얼굴에 나타났는지 라울이 물었다.

"뭐야? 뭘 생각하고 있어?"

"별거 아녜요."

"지금의 표정으로 봐서는 별것이 아닌 것도 아닌 듯한데, 말해 봐."

"좋아요. 지금까지 여자들이 몇 명이나 당신하고 이렇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했을 뿐예요. 시시한 호기심이죠."

"시시한 게 아니야."

라울의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여성이 나에게 하는 질문이야. 아가씨도 예외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말야."

"대답해 주시길 바라는 건 아녜요."

배네사는 급히 말했다.

"진정으로 알고 싶은 것도 아니구."

"그거 참 잘됐군. 나 역시 대답하고 싶지 않으니까."

라울은 수영 팬츠를 입고 일어났다.

"아가씨의 비키니 톱을 가지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줘."

라울이 되돌아왔을 때 배네사는 옆구리 끈을 매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비키니 톱을 받아들고 라울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면서 몸에 걸쳤다.

"저는 모든 걸 파괴해 버린 듯한 기분이군요. 그런 얘길 안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배네사가 이렇게 말하자 라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묻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누구에게나 생각을 할 자유는 있으니까."

그는 손을 뻗쳐 배네사의 뺨을 만졌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과거는 과거야. 중요한 건 현재뿐이야."

그리고 장래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배네사는 생각했으나 이번에는 그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라울은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간다면 보상없는 사랑에 몸을 불태우게 되겠지. 아버지 문제도 있고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얘긴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인제 그와의 정사에 등을 돌릴 수는 없으니까. 그와는 몇 번이든지 포옹하고 싶다. 지금 당장이라도 좋다.

배네사의 눈 속에 어떤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라울은 조용히 웃고는 입술에다 짧게 키스했다.

"점심을 안 먹으면 곤란하잖아? 우리에겐 밤이라는 시간이 잔뜩 있거든."

그녀의 몸에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

"물론이지. 이렇게 된 이상에는 설마 혼자서 밤을 지낼 작정은 아니겠지? 우리는 이제야 겨우 서로에 대해서 알기 시작했으니까."

"아버지나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은 자기가 보거나 듣거나 한 것을 남에게 퍼뜨리진 않아."

라울은 배네사의 어깨에 손을 얹어 놓고서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배네사는 이제 한 사람의 어른이야. 무슨 일을 할때 하나하나 아버지의 허가를 얻을 필요는 없어.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살면 되는 거야."

배네사는 망설였다.

"하지만1주일 지나면 아버지하고 저는 이곳을 떠나요."

"1주일 정도면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며 살아가는 거야. 그게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야."

라울은 짐짓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마음속으로는 그런 요구를 거부할지라도 몸이 듣지를 않을 것이다. 그건 알고 있다. 지금 현재를 최대한으로 산다- 아주 좋은 인생훈(人生訓)이다. 그렇게 산다면 적어도 과거를 회상하기 위한 추억만은 만들 수 있겠지.

그렇지만 점심을 먹은 후에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데에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였다. 아버지는 아까보다도 상태가 좋아 보이긴 했지만, 오랫동안 얘기하면 역시 피곤해지는 모양이다.

"나를 놓아 두고 본섬으로 돌아가진 않겠지? 여기 혼자 남아 있기는 싫다."

아버지는 불안한 듯이 말했다.

"그런 염려는 마세요. 그리구 라울에 대해서 신경 쓰시지 마세요. 그분은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버지는 베개 위에서 고개를 저었다.

"넌 그놈을 잘 모른다."

"그분에 대해서 정말로 잘 아는 사람이 있겠어요?"

배네사가 조용히 되물었다.

"라울을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보시겠어요?"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졌다.

"만나고 싶지 않다. 이렇게 그놈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침대서 거동을 할 수 있게 되거든 즉시 브렌든더러 배를 보내라고 말해 둬라."

"1주일 동안은 움직이면 안 된다고 르노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하시지 않으면 안 돼요."

"나에 대해선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아버지는 배네사의 눈을 응시했다.

"그놈을 조심해야 해, 배네사. 너에 대해서는 설마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만"

아버지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죄의식 때문에 얼굴이 빨개지는 걸 아버지가 눈치채지 말았으면 좋으련만.

"저는 그런 바보가 아녜요."

하고 그녀는 말했지만, 아무래도 표정이 굳어지고 만다.

"아무튼 빨리 회복되실 생각만 하세요, 아버지."

아버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런 식으로 불러 준 건 처음이구나."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얘기를 딴 데로 돌릴 수 있어서 배네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이제부터는 줄곧 그렇게 부를 텐데요 뭐."

"아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안뿐이다. 나를 돌보느라고 네 인생을 망쳐선 안 된다. 나는 그런 희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너는 영국으로 돌아가거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요?"

"그 사람 말고도 남자는 얼마든지 있겠지."

배네사는 가슴이 꽉 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남자는 따로 있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은 잃지도 않는다고들 말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오늘 아침 나는 나 자신 속에 숨겨진 부분을 발견했다. 마이클과 포옹을 하더라도 별로 황홀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이 자신에게 어딘지 모르게 결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다. 필요한 것은 나에게 맞는 남성이다. 약간의 죄의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에게 등을 돌려댈 수는 없다. 적어도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 동안에는.

그날 오후 배네사는 마이클에게 편지를 썼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솔직하게 모든 걸 고백할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편지를 쓰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결국 그녀는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 곁에 있어야 되니까 영국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쓰기로 작정했다. 그것은 대부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이클은 감정이 상하겠지만, 언젠가는 그걸 극복할 것이다- 내가 라울을 단념해 버리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런 때가 올 것임에 틀림없다.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라울과 나와는 사는 세계가 전연 다르니까. 허용되어 있는 시간이 1주일이라면 나는 그 1주일 동안만 라울을 사랑하다 죽어 버린다고 해도 후회는 그 다음에 해도 된다.

브렌든이 6시에 누메아에서 전화를 걸어 주었다. 내일 아침부터 즉시 줄리아 호로 손님을 안내하기로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안내하고 가는 길에 배네사의 소지품을 갖다 주고 싶은데, 저택에까지 갈 시간이 없으니까 아침 7시 반 경에 부두까지 사람을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거긴 별일 없소? 라울은 본섬으로 떠났소?"

브렌든이 물었다.

그때까지 라울의 출발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배네사는 갑자기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아뇨, 아직 안 떠났어요. 그런데 라울이 간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매월 광산을 둘러보러 온다는 건 이 근방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지. 그가 하루나 이틀쯤 집에 없으면 닐도 편안히 쉴 수가 있을 거요."

"여기는 그 사람의 섬이에요. 그 사람 멋대로 하겠죠. 게다가 어차피 라울은 아버지를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아요. 아버지도 마찬가지구요."

"무리도 아니겠지. 이런 상황은 건강한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데 더구나 병이 나 있으니까!"

브렌든은 생각했던 것보다 사정을 더 잘 아는 모양이라고 배네사는 수화기를 놓으면서 생각했다. 라울과 그렇게 되어 버린 이상, 배의 대금을 돌려주어 보상을 하려는 방법은 쓸 수가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라울은 결코 돈을 받지 않을 것이다. 애당초 금전이 문제였던 건 아니었다.

자기의 옷 중에는 입을 만한 것이 한 벌도 없었기 때문에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 옷을 갈아입을 때 그녀는 방안 옷장에 걸려 있는 옷을 또 한 번 빌려 입기로 했다. 골라낸 것은 어깨의 선에서 가느다란 주름이 잡혀 흘러내리고 있는 검정과 흰 실크였다. 드레스에 맞춘 샌들도 딱 맞는 크기였다.

몸거울에 온몸을 비추어 보면서 옷이 날개라는 말은 누가 처음 사용했는지 너무 잘된 표현이라고 배네사는 생각했다. 금방 감은 머리는 부드럽게 곱슬거리며 꼭두서니 빛으로 자르르 윤기가 돌고 있었다.

이젠 얼굴의 생김새만 이렇게 평범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넓은 이마, 작으면서도 오똑한 코, 고집스럽게 보이는 입가. 아주 약간의 엇갈림도 이렇게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되니까 화가 난다. 아름다운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라울은 도대체 나한테서 뭘 보고 있는 걸까? 그의 말을 믿는다면,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의 눈을 끌었다는 것은 나의 어떤 장점일까?

자기를 낮추어 보는 짓은 하지 말자고 배네사는 고쳐 생각했다. 자만심과는 또 다른 문제가 되는 것이지만, 이것도 역시 별로 칭찬받을 짓은 못된다. 라울이 나를 마음에 들어한다면- 그건 틀림없는 일이다-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는 짓은 삼가자. 우리 둘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그 상황만을 즐기는 것이 좋아.

8시 반에 내려가니까 라울은 바깥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그는 배네사를 손짓해 불러다가 편안한 접의자에 앉히더니, 뭘 마시겠느냐 묻고는 마르티니 두 잔을 만들었다

"오늘밤은 밖에서 먹을까 하는데"

그는 정원에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단둘이의 만찬이야. 분위기가 아주 좋겠지?"

다가오는 밤의 전주곡이라고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오늘밤은 옅은 크림 빛 재킷에다 짙은 빛의 슬랙스, 앞이 터진 목 언저리에서는 예의 황금 목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배네사는 바로 몇 시간 전에 바닷가의 오두막에서 자기 앞에 가로막고 서 있었을 때의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한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절망적일 정도로 라울의 팔에 안기고 싶었다. 그의 존재를 바로 옆에서 느끼고, 아까와 같이 그의 육체가 자기에게 응해 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오늘 오후 아버지한테 가봤나?"

라울이 물었다.

"네에, 같이 차를 마셨어요. 식욕은 좋으시더군요."

"발작을 일으킨 것은 위장이 아니니까. 앞으로 하루 이틀이면 짧은 시간 동안은 일어나 있을 수가 있을 거야."

"아버지는 내일은 일어나실 거라고 생각하고 계세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로얄 섬을 떠나고 싶으시대요. 그런 말씀일랑 마시라고 설득했지만 들으려고 하시질 않아요. 무리한 청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만약 선생님이 아버지한테 얘길 해주신다면"

"그런 건 아버님도 바라시지 않을 거야. 르노 선생한테 부탁하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

"정말 그렇군요."

그렇게밖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라울의 말은 옳긴 하지만 그것이 거부하는 말임에는 틀림없다. 배네사는 향기로운 듯한 신선한 밤 공기를 가슴에 가득 들이마시고 나서 말했다.

"24시간 전에는 폭풍우의 한복판에 있었다곤 믿어지지 않아요. 그렇게 바다가 거칠어지는 일이 자주 있나요?"

"그렇게 늘 있는 일은 아니야."

라울은 잔을 기울여 그 속을 들여다보면서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가씨네 나라의 속담에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바람은 어쩌고 하는 말이 있지? 그건 무슨 뜻이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바람은 불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배네사는 라울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그 폭풍우도 그런 것이었다는 말씀인가요?"

"그건 사람이 그 기회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어. 아가씬 오늘 아침 일을 후회하고 있어?"

"아아뇨."

"나도 역시 그래. 결국 그건 도움이 되지 않은 바람은 아니었던 것 같애."

식사 시중을 들어 준 사람은 그 무뚝뚝한 랜이었다.

"저런 성격은 그들 특유의 성격이야. 그들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커피를 앞에 놓고 두 사람만 있게 되었을 때 라울이 말했다.

"그러면 곤란하지 않으세요?"

"아니, 조금도. 그들에게는 그들의 생활이 있고, 나에는 나의 생활이 있지. 랜은 다음달에 결혼하면 본섬으로 가게 돼. 그 대신 티센이 와 있지."

"한 가정의 세대주야. 배네사의 아버님을 봐주고 있는 사람이야. 그녀 자신이 희망해서 데려왔지."

"대단히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요. 몇 살이나 됐어요?"

"60세쯤 됐겠지. 베트남 사람치고는 장수하는 편인가 봐."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 돌아갈 수 없다는 건 틀림없이 괴로운 일이겠죠."

"나오지 못한 것보다는 낫지. 아가씬 아버지처럼 태어난 나라를 저버릴 수가 있겠어?"

"저버렸다고 하시는 건 지나친 말씀이에요. 아버진 아직도 영국 국민이세요."

"몇 년 전 프랑스로 국적을 옮긴 일을 모르고 있구먼."

그 충격에서 회복되는 데엔 한참 걸렸다.

"그러시는 편이 나았던 게지요. 여기서 눌러살기로 작정하셨다면 말예요."

그녀는 이성을 되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저도 여기서 살기로 작정한다면 그렇게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잖아요?"

라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아가씨가 여기서 얼마나 오래 살려고 생각하고 있느냐에 달렸지. 어머니는 생각지 않아도 되나?"

"어머닌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그건 몰랐는데"

라울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나?"

"없어요."

마이클에게 쓴 편지는 아직 우체통에 넣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을 꺼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집은 여기 오기 몇 주일 전에 팔려서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돈은 언제든지 이곳으로 옮겨 올 수 있게 되어 있구요. 누메아에 작은 집을 사거나 얻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다음엔 어떻게 하려구?"

"가능하면 취직을 하겠어요."

"아주 계산을 단단히 세우고 있구먼. 아버님이 동의하시던가?"

배네사는 좀 망설였다.

"아버지는 제게 짐이 될까 염려하고 계세요. 하지만 그렇진 않아요. 아버지가 곁에 있다고 해서 제게 문제될 건 없으니까요."

"아버님은 배네사가 이곳에 계속 머무는 것을 바라시지 않을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하면 되는 거예요."

라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꾸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생기에 차 있는 눈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배네사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약간 형태를 바꾸는 것을 느꼈다. 손과 발에서 갑자기 힘이 쑥 빠져나갔다.

"가까운 시일 안에 본섬의 광산에 가시겠다고 하셨는데, 얼마 동안이나 계시겠어요?"

되도록 가벼운 어조로 물어보았다.

"그건 며칠 연기해도 상관없어."

배네사의 얼굴에 언뜻 떠오른 표정을 살피고는 라울은 미소를 지었다.

"방문 자체를 그만둬도 상관없지. 우리 회사의 사업내용을 항상 파악하고 싶어 가보는 것이니까."

그는 손을 뻗쳐 배네사의 손을 잡고 키스를 했다.

"이젠 슬슬 침실로 들 시간이라고 생각하는데, 배네사는 어때?"

"저두요?"

배네사는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물론이지. 내가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하나?"

"제가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라울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아이구, 실례했구먼. 마음이 변하는 건 여자의 특권이지."

배네사는 자기가 한 말을 벌써 후회하기 시작했다.

"제가 마음이 변했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나?"

라울은 입을 삐쭉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난 그런 게임은 하고 싶진 않아. 같은 기분이 되든가, 아니면 오늘 아침 일은 잊어버리든가 하는 수밖에 없어."

속이 홱 토라져서 배네사는 신랄히 쏘아붙였다.

"선생님에겐 아침에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는 건 꽤 간단한 일이겠죠!"

"아냐, 아마도 간단하진 않겠지. 나는 다만 그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라울은 뭘 탐색하듯이 배네사를 응시했다.

"아가씬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무 것도 없어요."

그녀는 즉시 대답했다.

"제가 어린애 같은 짓을 했나 봐요."

잠시 동안 라울은 그녀가 좀 더 무슨 말을 하지 않을까 하고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이윽고 아주 쌀쌀하게 물었다.

"자기 전에 아버지한테 가봐야지?"

", 그럴 거예요."

배네사도 같은 어조로 대답했다.

"저는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군요."

"전부는 아니야. 극히 일부분일 뿐이야. 아마도 나는 여러 가지를 너무나 지나치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생각했나 봐."

라울은 일어나서 테이블을 돌아 의례적으로 그녀의 의자를 잡아당겼다.

"아버지한테 갔다와. 그 동안 내가 기다려 주지."

언제까지요? 배네사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그것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라울의 태도는 완전히 쌀쌀해지고 말았다. 그가 나에게 흥미를 잃어버렸다면 변덕스런 태도를 취한 내 잘못일 것이다.

아버지는 잠들어 있었지만 숨결은 불규칙했다. 르노 의사는 모레 와주기로 되어 있다. 르노 의사가 아버지에게 설득을 당하여 본섬에 이동하는 것을 허락해 준다면 그것도 좋을는지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이 이상의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을 테니까.

자기의 방에 돌아왔을 때는 11시가 되어서였다. 배네사는 천천히 몸치장을 하고서 썰렁한 시트 사이로 들어가 눈을 감고 어서 잠이 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고분고분했더라면 라울은 지금 내 곁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됐어도 상관없다고 배네사는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육체 전체가 라울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밤은 무정하게 깊어 있었다. 지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가고 있는 것일까?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깜박 잠이 들었을 무렵에 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라울이 들어왔다. 그는 얇은 실내복을 입고 있었는데, 앞가슴이 벌어진 곳으로 가슴이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달빛이 얼굴의 아래쪽 절반을 비치고 있었으나 눈의 표정은 어둠에 가려져 있어 알 수가 없었다.

"난 배네사를 원해."

그는 한마디로 잘라 뜨겁게 말했다.

"너를 가지고 싶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어!"

그는 실내복을 벗어서 그걸 발밑에 떨어뜨렸다.

"거절하지 못하게 할 거야, 배네사."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지고, 심장이 귓속에서 커다란 소리를 내고 있는 이런 순간에!

라울이 침대 속으로 몸을 들이밀고 올라왔을 때 배네사는 둥지로 돌아가는 비둘기처럼 그 팔 안으로 얼른 안겨 들어갔다. 라울의 실팍하고 따뜻한 몸이 배네사를 완전히 감싸주었다.

 

5

목요일에 르노 의사가 왔을 때 닐 그랜섬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있었다. 쇠약해진 것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행동이었지만, 쇠약해진 것은 누구의 눈에나 분명했다. 설득을 당한 끝에, 그는 마침내 본섬으로 출발하는 것을 내주 초까지 미루자는 데에 동의했다.

"2, 3일 동안은 너무 무리한 운동은 하지 못하게 하시오. 본섬으로 돌아가거든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찾아오시도록 아버지를 설득해 주시오."

르노 의사가 말했다.

"무슨 염려스러운 점이라도 있나요?"

"심장병은 아주 까다로운 병이니까요. 우선 병상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드시 아버지를 모시고 가겠어요. 억지로라도 꼭 모시고 가겠어요."

르노 의사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염려해 주는 딸이 있어서 아버님은 행복하시겠군요. 상태가 좋으면 월요일에는 돌아갈 수 있으니까 화요일에는 병원에 와주어요. 그 동안에는 부디 무리하지 않도록 해야 해요."

말하기는 쉽지만 그걸 실행에 옮기기는 어렵다. 아버지하고는 실제로는 아직 타인과 같은 처지다. 브렌든이 오히려 아버지와는 훨씬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방에 돌아가 보니, 아버지는 활짝 열어놓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쉬고 있는 중이다. 기분이 퍽 상쾌하구나. 의사는 돌아갔느냐?"

"돌아가기 전에 라울을 만나고 가겠대요. 상태는 좀 어떠세요?"

"이곳을 빠져나가면 좀 더 좋아질 게다."

아버지는 손을 들어 딸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말렸다.

"알고 있다. 다시 시비를 가리고 싶지는 않다. 나 자신을 위해서니까 승낙하겠다. 다만 월요일에는 반드시 떠나겠다."

이 정도만 말을 해도 아머지는 숨이 찬 모양이었다. 배네사는 달래듯이 말했다.

"그래요, 월요일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브렌든더러 마중 나오라고 하시죠. 다만 일거리가 생기지만 말았으면 좋겠는데브렌든은 혼자서도 그럭저럭 잘해 나가는가 봐요."

"의사가 그런 말을 넌지시 비쳤다 하더라도 내 대답은 싫다는 것이다. 술은 끊겠다만 배는 남에게 맡기진 않을 테야. 그게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니까."

"제가 있잖아요."

배네사는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가 정말로 제가 있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가겠어요. 그러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씀하세요."

아버지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천천히 모로 저었다.

"넌 여기서 뭘 하겠다는 말이냐? 저기 있는 친구나전에 얘기한 그 사람은 어쩔 셈이지?"

"가족이 더 소중해요."

배네사는 충동적으로 의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손을 뺨에 가져다 댔다.

"전 여기 있고 싶어요. 정말로 있고 싶어요! 줄리아 호에서는 손 떼시지 않으셔도 좋아요. 다만 배에서가 아니라 육지에서 생활하세요. 무리한 요구인가요?"

"글쎄, 모르겠구나."

아버지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이제까지 나는 나 자신밖에는 생각지 않았으니까. 넌 네 엄마하고 똑같구나, 배네사. 머리 색깔마저 똑같애. 다만 엄마는 길게 기르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입술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아버지하고 같이 있었을 때만 그랬었지. 네 엄마를엄마하고 너를 그런 식으로 내버려 두고 떠나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저희들이 지금 같이 있는 걸 엄마는 틀림없이 기뻐하실 거예요. 과거의 일은 이젠 생각하지 말기로 해요. 지금부터 새출발하는 거예요."

그것이 라울이 한 말과 똑같다는 것을 배네사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녀는 지난 이틀 동안 꿈결 같은 세계에서 살아왔다.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라울은 완벽했다. 그의 팔 안에서 배네사는 딴사람이 된다. 이 섬을 떠나간 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인생을 이전과 똑같이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그날 오후, 후미에 있는 그 조그만 오두막 속에서 친밀한 시간을 보냈다. 사랑을 서로 주고받은 뒤의 그 은사시나무 잎처럼 반짝이는 한때, 배네사는 라울의 건장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면서 이런 일이 언제까지나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또 무슨 생각에 잠겨 있군.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

라울이 고개를 들고 다정하게 물었다.

"수영을 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엉뚱한 말로 받았다.

"하지만 수영복을 안 가져왔지 뭐예요."

그는 웃었다.

"어째서 그런 게 필요하지?"

"누군가 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여기엔 아무도 안 와. , 아주 재미있는 생각을 했군. 발가벗은 몸으로 수영해 본 지도 꽤 오래 되었군."

"저도 16살 때 딱 한 번 경험이 있어요."

"그렇게 어린 시절에 그런 대담한 짓을! 남녀가 뒤섞여서?"

"그래요. 하지만 성적인 행동은 아무 것도 안했어요. 정말이지 부끄러워서 거의 다

서로를 바라보지 못했어요. 허세를 부려보고 싶었을 뿐예요."

"지금도 그런 부끄럼이 남아 있어?"

"조금은."

파란 눈이 젖가슴에 와 멈추었다.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데"

"하지만 이건 달라요."

"어두컴컴해서 그런가?"

"그런 것도 아니지만설명할 수 없어요."

배네사는 당황하여 어깨를 움츠렸다.

라울은 웃으면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 같이 가지!"

물가까지는 얼마 안 되었다. 갑작스런 충동에 사로잡혀 배네사는 라울보다도 먼저 달려나가 바닷속에 들어갔다. 상어 방어망까지의 절반도 채 못 가서 라울이 뒤따라왔다. 라울은 입을 틀어막으면서 억센 다리로 배네사의 몸을 감고서는 쑥쑥 수면 밑으로 잡아당겨갔다. 잠시 후 물속에서 얼굴을 내놓은 그녀는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당신 어떻게 된 게 아니에요! 하마터면 두 사람 다 물귀신이 될 뻔했잖아요!"

"네가 먼저 장난을 걸어왔기 때문이야. 나는 16살이 아니니까 말야!"

나도 역시 그때처럼 맹추는 아니라고 배네사는 생각했다. 마이클은 이러한 나를 모른다. 오히려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아닐까. 라울은 내 마음을 열어 주고, 인식을 새로이 하게 해주었다. 그것이 나를 위해서 도움이 되었는지 어떤지는 아직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두 사람은 오두막에 돌아가서 다시 한번 포옹했다. 햇볕을 받아 몸은 완전히 말라 있다.

맨 처음 움직인 것은 라울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배네사를 내려다보았다.

"내일 아침엔 떠나야 해."

유감스러운 듯한 말투였다.

목소리가 나오기까지는 몇 초 걸렸다. 배네사는 되도록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며칠이나 걸려요?"

"3, 어쩌면 좀 더 걸릴지도 몰라."

"광산에요?"

"아니야, 칼굴리야. 오늘 아침 전화가 왔어."

"서로 연락을 하고 계신 줄은 몰랐어요, 아버님의그녀와."

"엘리스라고 하지. 아버지는 그 여자하고 자식들에게 충분한 유산을 남겨 주었지만, 관리자처럼 나는 그들의 재산을 보살펴 주지 않으면 안 돼. 엘리스는 병들어 있는데, 어쩌면 위태로울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자식들을 위해서 똑바로 계획을 세워 주어야만 돼."

"자식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시나요?"

뭔가가 라울의 내면에서 타올랐다.

"그것만은 안 돼. 적어도 내 눈에 흙을 덮기 전에는."

"죄송해요.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라울은 입을 다물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도저히 냉정해질 수가 없어. 그 아이들은 뒤탕플의 이름조차 이어받고 있지 않는데도 언젠가는 모든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거야."

라울 자신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달라진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이 돌아오시기 전에 우리들은 이미 출발하고 있겠지요."

배네사는 냉정히 들리도록 계산하면서 말했다.

", 그렇구나. 이런 식으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지만, 별수 없지. 그 점은 이해해 줘."

"그럼은요."

언젠가 끝장이 오리라는 것을 몰랐던 건 아니다.

"잘 알고 있어요, 라울."

"돌아오거든 연락하지. 전에 있던 곳에 머물겠지?"

"아마 그럴 거예요."

배네사는 그의 말을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강조할 필요도 없다.

"당신의 모든 일이 잘되길 바라겠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배네사가 옷을 입기 시작하는 걸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라울이 조용히 말했다.

"아직도 오늘밤이 있어."

"정말 그렇군요. 있는 것은 최대한으로 이용해야죠."

지금 라울에게 등을 돌리는 건 너무나도 무기력한 짓일 것이다. 최후까지 이 괴로운 역할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날이 샐 무렵, 라울이 침대에서 빠져나가는 기미를 알아채고 배네사는 잠을 깼다. 그가 짤막한 실크 실내복을 입는 모습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지켜보았다.

"란치는 7시에 오기로 되어 있어."

라울이 그녀의 시선을 알아채고 조용히 말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정말로 헤어지기가 섭섭한 듯이 오랫동안 키스를 했다.

"이렇게 너하고 헤어지는 건 유감이야. 거처를 꼭 알려 주겠지?"

"이렇게 서로가 편하게 헤어지기로 해요. 그렇게 하는 편이 좋지 않아요?"

배네사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라울의 표정이 싹 변했다.

"배네사는 그렇게 하는 게 좋아?"

"그게 좋다는 건 아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수밖엔 별수가 없잖아요. 당신에겐 당신의 생활이 있고, 저에겐 저의 생활이 있어요."

라울은 입을 약간 일그러뜨렸다.

"하긴 그렇군. 유감스럽지만 물론 배네사 말이 옳아. 이걸 시작했을 때 우리는 어느 쪽이나 환상을 품고 있지는 않았지. 그러니까 작별을 질질 끌지는 말자구."

나는 뭘 기대하고 있었지? 문을 향해서 걸어가는 라울을 불러 세우고 싶은 욕망과 절망적으로 싸우면서 배네사는 처참한 기분으로 자신에게 질문했다. 이렇게 헤어지리라는 건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 아닌가.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적어도 그릇된 희망을 품지 않아도 좋다.

라울에겐 미련이 남아 있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나갔다. 그가 칼굴리에서 돌아올 무렵에는 나라고 하는 존재는 그의 생활뿐만 아니라 머릿속에서도 자취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나도 역시 그를 잊어버리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주말은 그럭저럭 지나갔다. 배네사는 대부분의 시간을 어슬렁어슬렁 섬을 산책하면서 보냈다. 산등성이의 느슨한 비탈면에는 깔끔하게 생긴 하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베트남 인들은 자기네들의 배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이 내킬 때는 언제든지 본섬을 다녀오곤 한다. 그것은 제법 편안하고 한가로운 생활처럼 보였다.

일요일 아침, 아버지는 처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자기 발로 걸어다닐 수 있게 되어 매우 기뻐하는 눈치였다.

"내일은 좀 더 건강한 모습으로 거닐 수 있을 거야. 그건 그렇고, 주인이 집에 없다고 하니까 마음이 편안하구나."

그는 테라스에서 가벼운 점심을 들면서 말했다. 하지만 시선이 딸의 얼굴에 옮겨졌을 때, 그의 웃는 얼굴이 약간 흐려졌다.

"지난 이틀간은 어쩐지 기운이 없나 보구나. 정말로 별일 없는 거냐?"

"따분해서 그럴 뿐이에요."

배네사는 명랑하게 대답했다.

"저도 아버님과 마찬가지로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어요. 내일 10시 경에 브렌든이 오기로 되어 있어요. 브렌든은 우릴 위해서 부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플랫(각층에 한 가구가 살게 만든 아파트)을 얻어 놨대요."

"그런 건 다 알고 있다, 배네사. 너는 이젠 어린애가 아니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만, 너하고 라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녀의 심장은 발칵 뒤집혀질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라뇨, 어떤 일 말예요?"

"네가 내 딸이라는 점을 이용하려고 하는 짓 말이다. 그건 한 남성에 대한 강력한 무기가 되니까 말이다."

그것과 똑같은 생각을 배네사도 첫날에는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확신이 서 있었다.

"그런 일은 전연 없어요. 아버님은 라울이 복수하지나 않을까 하는 강박관념을 너무 지나치게 지니고 계시진 않나요?"

"그럴지도 모르지."

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납득하지는 못했을 망정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묻진 않았다.

그날 오후 배네사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그 후미에 가 보았다. 오두막은 어두컴컴한데다 썰렁하긴 했지만, 추억이 가득차 있었다. 그곳에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서 세세한 기억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으려니까 차츰 가슴이 애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정말이지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라울이 육체적인 욕구로밖엔 움직이지 않았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그 이상의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한들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그가 만일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그 결혼상대는 그의 세계에 속한 여성 중에서 선택하게 될 것이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아직도 테라스의 접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자기의 방을 향해 걸어갔을 때, 배네사는 도서실 앞에서 깜짝 놀랄 만한 금발 미인과 딱 마주쳤다.

"당신이 산책하러 나갔다는 말을 랜한테서 들었어요. 라울은 꽤 급하게 출발한 모양이군요."

"네에 당신은라울의 친구신가요?"

금발의 여성은 갑자기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여동생이에요. 하지만 오해하진 말아요. 피는 섞여 있지 않으니까요. 당신은 내일까지 여기에 있을 거라면서요?"

"네에, 여기 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대개 들었어요. 심장발작이라면서요? 라울은 틀림없이 딜레머에 빠졌겠군요."

"우리 아버지를 아시나요?"

"뵌 적은 없지만 얘기는 들었어요."

노란 옥빛 눈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가족이 있는 줄은 몰랐지만"

"2주일 전에 뉴칼레도니아에 도착했어요. 모처럼 돌아오셨는데 어수선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내일 마중을 나올 때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어서"

"별로 상관없어요. 저녁식사는 아래층에서 하시나요?"

"노상 그래 왔죠. 원하신다면 쟁반을 들고 올라와도 좋은데요"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우아한 손을 좌우로 내저었다.

"접대하는 게 서툴다고 라울한테 혼났어요. 잠깐 확인해 본 것뿐이에요. 주방에 가서 대접을 잘해 드리라고 지시해 둬야겠군요."

틀림없이 자기가 이 집안의 여주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말일 것이다. 크리스탈은 돌아오기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럴 예정이 있었다면 라울이 미리 무슨 말을 했을 게다. 크리스탈도 역시 집에 돌아와 보니, 라울은 집에 없고 그랜섬 부녀(父女)가 들어와 있으니까 필시 깜짝 놀랐을 게다.

"나는 방에서 옷 좀 갈아입고 나서 아버지를 2층으로 모시고 오겠어요. 아버님은 오늘 처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가신 거예요."

"회복이 꽤 빠르시군요."

크리스탈은 이미 도서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럼 나중에 또 봐요."

배네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라울의 의붓누이동생과 함께 하루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생각하니 기분이 우울해졌다. 이유는 분명하다. 간단히 말하면 알고 싶지 않는 걸 알게 될까 봐 겁이 나는 것이다. 크리스탈 자신도 그들 사이에는 혈연관계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두 사람이 오빠와 누이동생 이상의 관계가 되어 있다 해도 곤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크리스탈은 배네사가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아름답고 침착하며, 모든 일은 냉정하게 처리하는 능력이 있는 듯이 보였다. 라울에 어울리는 여성을 묘사하려고 한다면 크리스탈을 그대로 그리면 된다.

나는 좀 이상해졌나 봐. 그런 것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 않은가. 라울과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테니까.

아버지는 크리스탈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내일은 정든 곳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기쁘다고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그만 방으로 들어가서 같이 차나 마실까?"

"그래요, 아버지."

배네사는 일어선 아버지의 손을 붙잡으면서 말했다.

"방으로 차를 가져오라고 랜한테 부탁하고 오겠어요."

널찍하고 반들반들한 주방으로 들어가니까 랜은 티센하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어에 배네사가 나타난 순간, 두 사람이 하던 얘기를 뚝 그친 걸 보면 그 화제는 그녀에 관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신경과민이 되어 있는 것일까?

하늘을 발갛게 물들이면서 해가 지자 밤이 왔다. 배네사가 마음에 드는 청색 면 드레스로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크리스탈은 벌써 글라스를 들고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크림 빛의 단순한 실크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아무렇게나 모아 올려 매놓았다. 저 머리 빛깔은 진짜일까 하고 배네사는 언뜻 생각했다.

식전에 마시는 술을 거절하고 의자에 앉아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할 말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크리스탈이 그 역할을 맡아서 해주었다.

"라울이 없다는 걸 알았으면 일부러 돌아오진 않았을 텐데어제 전화했을 때 그런 얘기는 나오지 않았거든요."

"라울과 얘길 했나요?"

"아아뇨, 했다면 라울이 얘길 했을 거예요. 나는 라울이 본섬에 있는 줄로만 알았지 뭐예요. 그런데 아직도 여기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느닷없이 돌아와서 깜짝 놀라게 하려고 했던 거예요. 어디 갔는지 알아요?"

크리스탈은 약간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칼굴리에."

하고 배네사가 말하자마자 크리스탈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절대로 거긴 안 가겠다고 했는데"

크리스탈은 그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조금 후에 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당신은 얘길 충분히 들으셨겠죠. 라울한테서, 아니면 아버님한테서?"

"두 분으로부터무슨 얘기에나 양면이 있겠지요."

"그런 얘길 라울한테 해보는 게 어때요?"

"이미 했어요."

"그래요? 그런데 아버님이 하고 싶은 말씀은 어떤 거예요?"

초록빛 눈이 노란 옥빛 눈을 겁내는 기색도 없이 빤히 바라보았다.

"라울은 그걸 모두 다 끝난 일로 덮어 두자는 거예요. 나도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빨간 입술이 약간 다부지게 다물어졌다.

"이 얘기가 전부 연극이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아버지가 심장발작을 일으킨 것이 거짓이란 말인가요? 그렇다면 르노 선생님한테 여쭤 보면 알 수 있겠죠."

"하지만 로얄 섬에 상륙하다니, 너무나도 우연이 지나치잖아요?"

"아버님에겐 산소호흡이 필요했고, 그 당시에는 본섬보다는 이쪽이 더 가까왔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요? 그렇다면 그런 줄로 알고 있겠어요. 다음에는 라울의 얘길 하기로 해요.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데, 당신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거의 알지도 못하는 남자하고 같이 잠을 자나요?"

배네사의 얼굴이 빨개지는 걸 크리스탈은 심술궂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그렇군요. 나는 언제든지 라울이 같이 잠을 잔 여성을 알아맞힐 수가 있어요. 그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라울의 소유자라는 표정을 짓는 거예요."

"당신처럼 말인가요?"

배네사가 쏘아붙이자 크리스탈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에게는 그렇게 해도 좋은 이유가 있어요. 아시겠죠, 라울은 나하고 결혼할 거예요."


6

매장하는 데 입회한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돌아갈 때쯤 되어서야 비로소 배네사는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사나이를 알아차렸다.

"일부러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녀는 뜻밖이라는 기분을 숨기고 말했다.

"좀 늦어지고 말았어요. 신문을 본 것은 정말 우연이었지요."

피에르 르노가 대답했다.

"광고를 낼 필요는 없을 거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어요. 아버지에겐 친구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아가씨가 마지막까지 곁을 지켜 주셨군요. 아버님은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셨을까요."

배네사는 풀기 없는 미소를 지었다.

"별로 길지는 않았어요."

"저는 배로 돌아가겠습니다."

브렌든이 말했다. 그의 얼굴도 슬픔으로 가득차 있었다.

"반나절 임대하겠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하고 그는 르노 의사에게 설명했다.

"생활은 계속해 나가야 하니까요."

르노 의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차편은 있소?"

", 부두에서 내려 줄까, 배네사?"

"아뇨, 차는 당신이 쓰세요. 나는 버스를 타고 가겠어요. 집 근처로 지나가는 차가 있어요."

"하지만 버스는 언제 올지 알 수 없어요. 시간표 같은 건 상관하지 않으니까요.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이니까 내가 댁까지 태워다 드리죠."

배네사는 헛구역질이 계속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 참으며 곤혹스러움을 숨기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르노 의사 앞에서 기분이 나빠지기라도 하면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처럼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파트까지는 차로 겨우 10분밖에 안 걸린다. 그 정도라면 참을 수 있겠지.

호화로운 차의 조수석에 앉아 배네사는 골똘히 딴 일을 생각하려고 했다- 차의 진동으로부터 정신을 딴 데로 돌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좋다. 앞으로 10분이면 된다. 그러면 집에 돌아갈 수 있다.

? 하지만 그건 집이라고 할 것도 없다. 앞으로 1주일만 있으면 임대계약이 끝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 나는 어떤 결단을 내리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줄리아 호만 하더라도 하나의 큰 문제다. 절반만이 아니라 전부를 브렌든에게 물려 주면 일은 간단히 끝난다. 배네사의 몫도 받아 달라고 설득했지만, 브렌든은 막무가내로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대로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필요한 비자가 나오면 오스트레일리아 본섬이라도 좋겠지만, 그나마 한정된 기한 이내에만 허용될 것이다.

영국으로 돌아가면 좀 더 간단할는지도 모른다. 영국은 땅이 많으니까 몸을 숨기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다. 줄리아 호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겠지만.

"곧 이곳을 떠날 작정인가요?"

배네사의 생각이 전해지기라도 한 듯이 르노가 물었다.

", 될 수 있는 대로 빨리요. 처리해야 할 일이 좀 남았어요."

그녀는 말을 중단하고 숨을 죽였다. 이마에서 갑자기 땀이 난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차 좀 세워 주시겠어요? 기분이 좋지 않아서요."

르노 의사는 즉시 길 옆에 차를 세워 주었다. 간신히 추태를 드러내진 않게 되었지만, 그 뒤 잠시 동안은 차문에 기대어 호흡을 가다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젠 괜찮아요. 감사해요."

죄송한 듯이 말하고는 차로 되돌아왔다.

르노 의사는 차를 즉시 달리지 않고 배네사의 창백한 얼굴을 엿보았다.

"차멀미를 잘하는 모양이군요?"

"그렇지는 않아요.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애요. 아버님 하고는 짧은 기간밖엔 같이 있지 않았지만요. 그래도 역시 이번 일은 쇼크였어요."

"물론이지요. 이젠 떠나도 될까요?"

"괜찮아요. 금새 도착할 거니까요."

배네사는 자신을 안심시키는 듯이 말했다.

나머지 길을 올 때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 안도의 한숨을 쉰 배네사는 르노 의사가 집 안에까지 바래다주겠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당황했다.

"진정제를 먹으면 괜찮아요."

그는 가방 속에서 작은 곽을 꺼냈다.

"의사의 진찰을 받아보았는지요?"

"의사는 저에겐 필요 없어요."

재빨리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얼른 다시 고쳐서 말을 했다.

"병은 좀처럼 나지 않으니까요. 들어가셔서 커피라도 한잔 드시겠어요?"

", 들구말구요."

르노 의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르노 의사가 거실을 왔다갔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오래 머물러 있지만 말았으면 좋겠는데 하고 배네사는 생각했다. 의사이기 때문에 사정을 금새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거실에 돌아오자 르노 의사는 안마당에 있었다. 상복 윗저고리가 아무렇게나 의자 위에 놓여 있다. 배네사는 아버지의 소망대로 상복은 입지 않았지만, 르노 의사가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주는 데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가 왜 장례식에 나왔는지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사망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고 해도 좋을 텐데. 사망진단서도 집 근처에 있는 의사가 써주었던 것이다.

"아주 튼튼한 집이군요. 이건 아가씨의 소유인가요?"

마주 앉았을 때 르노 의사가 물었다.

"전세예요. 계약은 내주까지예요."

"그럼, 그때까지는 이 집에서 사시겠군요."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그 후에는?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셨나요?"

"네에."

배네사는 침을 삼켰다. 얼른 커피를 마시고 돌아가 주면 좋을 텐데. 처음에 들어와서 커피를 들고 가라고 한 자기가 잘못이지만, 그때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복표를 아직 가지고 있어요. 아버지가 되돌려 주지 못하게 하셨으니까요."

"그건 잘하신 일이군요. 편도의 티켓은 꽤 비싸니까요."

르노는 배네사의 긴장한 표정을 지켜보았다.

"커피를 아직 안 마셨군요. 지금도 기분이 안 좋으신가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지만, 이젠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급히 일어나서

"실례하겠어요."

하고 중얼거리고는 방에서 뛰쳐나갔다.

간신히 되돌아왔을 때 르노는 같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는 배네사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나의 아내도 임신했을 때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똑같은 경우를 당했지요. 하지만 그 증상은 가볍게 줄일 수가 있어요. 되도록이면 빨리 산부인과에 가봐야죠. 제가 마땅한 의사를 소개해 드리죠."

이제와서 새삼스레 임신 사실을 숨겨 봤자 소용없는 짓일 뿐이라고 생각한 배네사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그럴 작정이에요. 하지만 여기서는 진찰을 받지 않겠어요. 앞으로 1주일간 연기해도 별일은 없을 테니까요."

"이제 얼마나 되셨는가요?"

배네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대수롭잖다는 듯한 태도를 가장했다.

"두 번쯤 걸렀으니까 7주나 8주쯤 되었으리라고 생각해요."

"유산시킬 작정인가요?"

"천만에요."

그녀는 얼굴을 쳐들었다.

르노 의사는 찬성하는 것인지 반대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를 타실 계획이면 우선 의사한테 가보시는 게 좋아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배네사는 이상하게도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알았어요."

하고 그녀는 가냘프게 말했다.

"그리고 아가씨는 내가 이젠 돌아가 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당연한 일이지요."

르노 의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거든 연락해 주시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나와 주신 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배네사는 잠깐 망설였다가 이렇게 물었다.

"왜 나와 주셨어요?"

르노 의사는 천천히 웃옷을 입고 나서 대답했다.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누구한테서요?"

"라울 뒤탕플이에요."

르노 의사는 반응을 확인하는 듯이 배네사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자기가 직접 가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의 생각이 옳았을까요?"

"아마 그렇겠지요. 아버지하고는 좋은 친구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심려를 끼쳐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주세요."

의사가 나간 뒤에도 한참 동안 배네사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렇다면 라울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린 건 아니었구나.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닌가. 만일 피에르 르노 의사가 오늘 일어난 일을 얘기한다면 라울은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 날짜를 계산한다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는 금세 알 수 있다.

책임은 있다. 하지만 비난을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잘못은 나에게 있으니까. 요즘 시대에 특별히 말하지 않는 한 예방을 해야 하는지 안해야 하는지를 일부러 물어보는 남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일깨워 준 열정은 너무나도 성급하고 농밀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2개월이 지난 지금, 내가 라울에 대해서 어떤 심정을 지니고 있는지를 잘 모른다. 연료를 대주지 않으면 어떠한 불도 계속해서 타지는 않는다. 뒤탕플의 저택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고, 어쩌다가 그 앞을 차를 타고 지나가는 일도 있었지만, 라울의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 후의 일은 알 수 없지만, 결혼식을 아직 올리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로얄 섬에서의 마지막날 밤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그 괴로움은 진실한 것이었다. 그 건 틀림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를 돌아다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장래의 일이다. 한쪽 부모만 있는 가정이라는 것이 근래에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다행히도 당분간은 경제적으로 곤란할 것은 없을 듯하다. 배의 상속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해결되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것이다.

그날 밤 브렌든이 저녁식사를 하러 왔을 때 배네사는 그 얘길 꺼내보았다. 그는 배의 절반을 증여받길 여전히 완강하게 거부했다.

"돈이 있으면 내가 사줄 수가 있는데 말야. 따지고 보면 그건 전부가 배네사 거야."

"아버지는 당신을 끔찍이 생각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뉴칼레도니아에 남아 있으면 문제는 없는데닐도 여기에 묻혀 있고 말야."

"나 대신 당신이 성묘를 해주리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배네사는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그에게 얘기할 생각은 없었다.

"금전적인 문제는 은행에 부탁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럴 거야외로워지겠지, 닐이 배네사를 떠나버리고 말다니!"

브렌든이 돌아간 뒤, 당장에는 테이블을 정리할 생각도 나지 않아서 배네사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브렌든은 틀림없이 모든 일을 잘해 나가겠지. 그는 지금 승무원을 찾고 있다. 방랑자는 많지만 기술 있는 승무원은 구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도어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배네사는 퍼뜩 제정신이 돌아왔다. 브렌든이 무슨 물건이라도 잊어버리고 간 것이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문을 연 그녀는 거기 서 있는 사나이를 보고 순간 숨을 죽였다. 그녀는 말도 없이 다만 찾아온 사람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을 라울이었다. 그 음성은 냉정하고 침착하다.

"안에 들어가도 괜찮을까, 아니면 현관에 서서 얘기할까?"

말없이 배네사는 라울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문을 잠갔다.

"거실은 저쪽이에요. 커피 드시겠어요?"

라울은 대꾸도 하지 않고 거실로 들어가더니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눈에 경멸의 빛이 떠오르는 걸 보고 자존심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였다. 한번은 그도 역시 나를 좋게 여긴 적이 있을 것이다.

"배네사가 임신하고 있다는 말을 피에르가 하던데, 그게 사실이야?"

라울은 거침없이 말을 했다.

"그분에게 그런 얘기를 할 권리는 없을 텐데요. 의사라는 건 환자의 비밀을 지켜 줄 의무가"

"배네사는 그의 환자가 아니야."

라울이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건 대답이 못돼."

"사실이에요."

그녀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나서 대답했다.

"그런데 배네사는 그게 내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건가?"

"나는 당신의 이름 같은 건 대지 않았어요!"

"7, 8주째라고 배네사는 피에르한테 말했어. 직접적인 비난보다는 덜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건 똑같은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 7주 전에 배네사는 로얄에서 나하고 같이 있었어. 그건 어느 누구보다도 그 사람이 잘 알고 있지."

라울은 입을 다물고 매서운 눈으로 배네사를 바라봤다.

"바다에서 포옹했던 그때까지 남자를 몇 명인가 알고 있었을 거 아냐."

"한 사람이에요. 당신을 만나기 이전에 사귀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어요. 우린 결혼할 예정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단 말인가?"

"그래요. 아버지 곁에 있고 싶다는 뜻을 적어 편지를 부쳤어요. 답장은 안 왔지만"

"그건 로얄에 오기 전인가 훈가, 어느 쪽이야?"

배네사는 잠시 망설였다.

"거기 있을 때에요. 하지만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잖아요. 나는 당신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니까요. 르노 선생님이 묘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를 태워다 주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이런 사실을 알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르노 선생님더러 가보라고 부탁한 사람은 당신이죠?"

"우리가 만났을 때, 배네사는 뉴칼레도니아에 온 지 1주일밖에 안 됐었지. 영국에 있는 동안에 임신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지?"

배네사는 이제부터 말하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후에 계속될 문제 때문에 얼굴을 붉혔다.

"영국에 있었을 때엔 필(피임약)을 먹었으니까요."

까만 눈썹이 빈정거리는 듯이 치켜 올라갔다.

"그 후에는 먹지 않았나?"

"여기 있는 동안에 누구하고 같은 침대에 들어간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당신은그 일을 할 땐 어찌나 성급하게 서둘던지"

"너무나 급했기 때문에 예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조차 할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군?"

"네에."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생각조차 못했어요. 당신은 내가 계획적으로 임신한 줄로 생각하세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나? 이런 종류의 덫에 걸린 것은 내가 처음 당하는 남자가 아니야."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배네사는 도어를 가리켰다.

"나가세요!"

"나가지, 볼일이 끝나면 말야. 그전에 우선 의논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

"무슨 의논예요? 난 아이는 낳을 작정이에요. 의논이란 게 그런 문제라면!"

"물론 그건 문제 밖이야. 내일 배네사는 병원에 가야 해."

"내가 거절한다면?"

"거절할 순 없어. 나는 그런 짓은 시키지 않아. 식은 되도록 빨리 올리자구."

"?"

배네사는 충격을 받고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내 아들이 이름도 없이 태어나는 건 용납 못해."

"조금 전까지 당신은 자기의 아이인지 아닌지 모른다고 했잖아요."

"의심스러운 점이 있나?"

"그렇진 않아요. 당신의 아이인 것만은 확실해요. 그렇다고 해서 당신하고 결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배네사는 의자의 등을 붙잡고서 곁으로 다가오려고 하는 라울을 제지하려는 듯이 손을 쳐들었다.

"내버려 둬요!"

"또 기분이 나빠졌나?"

"아녜요, 오후가 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요."

쉰 웃음소리가 나왔다.

"매장을 오전이 아니라 오후에 했더라면 문제는 없었을 거예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떠날 작정이었나?"

"그래요, 어디로 갈 것인지는 결정하지 못했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혼자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어요. 영국에선 임신기간 중에 드는 비용은 무료예요."

"배네사는 영국에 가면 안 돼, 내 아들하고 같이는."

그는 몹시 거칠게 말했다.

"어떻게 아들인 줄 아세요?"

"우리 집안에서는 지난 2백년간 딸은 두 명밖에 태어나지 않았어."

"하지만 억지로 나를 이곳에 붙들어 놓을 순 없어요."

라울은 자기가 들은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배네사를 바라봤다.

"배네사는 어린아이의 장래를 빼앗을 작정이야?"

"장래는 있어요. 물론 형태는 달라지겠죠. 하지만 적어도 잘못 태어났다는 느낌을 안 가지게 될 거예요."

"아이게게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말도 안 돼."

"하지만 당신은 아버님의 아들 두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게 해왔잖아요."

하고 배네사가 대꾸하자 라울의 표정은 한층 더 험악해졌다.

"그 문제에 대해서 나 자신을 정당화할 생각은 없어. 법적인 수단에 호소해서 배네사를 붙잡아 둬도 되는 거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증인으로 쓸 수는 없어요. 당신에겐 아무 권리도 없어요, 라울."

"여긴 프랑스의 영지이지 영국이 아니야. 배네사는 이곳 법률을 알고 있나?"

물론 나는 그걸 모른다. 하지만 사랑도 없는 결혼이 아이에게 어떤 장래를 약속한다는 말인가? 그래도 역시 내가 준비하는 것보다는 나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배네사는 기세가 꺾였다. 아이에겐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 점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라울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아이보다도 나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짓이다. 그런 생각을 품고서 앞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크리스탈에 대해선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어떻게 해서든 뚫고나갈 길을 찾으려고 배네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그 여자하고 결혼할 작정이었죠적어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요."

라울은 오랫동안 배네사를 응시하고 있다가 이윽고 말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아이를 돌려 줄 거야?"

"당신하고 그 여자에게? 당치도 않은 말씀!"

"그렇다면 달리 방법은 없어. 식은 아주 조용히 2, 3일 이내에 올려. 그 동안 당신의 패스포트를 나한테 맡겨 둬."

"난 도망치진 않아요."

"수속을 밟기 위해서야. , 이리 줘."

마구 우격다짐으로 다짜고짜 조르는 말투로 보아서 배네사는 이젠 더 이상 물러날 수가 없다는 심정으로 패스포트를 건네주었다. 라울에게 접근하자 잊어버린 줄 알았던 추억이 되살아나서 마음이 아팠다.

"틀림없이 순조롭게 되진 않을 거예요, 라울. 잘될 리가 없어요. 우리에겐 미래를 구축할 기반이 없거든요."

"그렇다면 만들면 되지."

"뭘 가지고?"

"우리가 함께 가지고 있는 과거를 가지고."

"그건 당신이 섬을 떠나던 날 끝났어요."

"끝나진 않았어.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야."

그는 힘찬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

"병원은 내일 오후로 예약해 두겠어. 물론 나도 같이 가지. 2시면 되겠나?"

배네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을 올리기 전에 먼저 임신 여부를 확인해 두고 싶을 것이다. 내 뱃속에서 숨쉬기 시작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의 자유를 포기하려 하고 있으니까.

그가 돌아간 뒤 배네사의 기분은 차츰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우리들 사이에 어떤 감정이 남아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가슴이 설레는 감동이 다시금 찾아오는 일이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몇 년이고 계속될 수가 있을까? 하지만 때와 기회가 주어진 두 사람이 사랑을 북돋아 키워나갈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는 뜨거운 사랑은 아닐지 모르지.

도대체 그런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할까? 우리는 태어나는 아이를 중심으로 해서 생활을 이끌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변천해 가는 자연스런 흐름에 몸을 내맡겨 보기로 하자. 이랬었을지도 모른다는 어떤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들은 예식장에서 두 사람만의 간단한 식을 올렸다. 배네사는 우윳빛 실크 슈트에다 같은 색깔의 모자를 쓰고, 꽃은 들지 않았다. 예물이라고 해야 라울이 억지로 받게 한 진주 목걸이와 네모난 에머랄드 약혼반지뿐이었다.

예식이 끝난 후, 아직은 겉모습밖에 본 일 없는 뒤탕플 가의 저택을 향해서 달리고 있는 차속에서 배네사는 분주했던 지난 2, 3일간의 일을 조용히 회상해 보았다. 의사는 틀림없이 임신했다고 말했고, 건강상태는 양호하며, 태아도 순조로이 자라고 있다고 했다. 출산 예정일은 2월 말이었다.

앞으로 2개월쯤 지나면 배도 두드러지게 부르게 될 것이다. 그때 라울은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 지금은 나에 대해서 약간은 매력을 느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몸의 모습이 변함에 따라서 그런 감정은 허물어지듯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들 두 사람이 어린아이 문제로 기쁨을 나누어 갖는 일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단지 형편 닿는 대로 결혼했을 뿐이니까.

"괜찮나? 차를 한번 세울까?"

라울의 목소리가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괜찮아요. 약간 불안할 뿐예요."

"나에 대해서 말인가?"

그가 흘끗 시선을 던졌다.

"모든 게집에서는 오늘 당신이 나를 데리고 간다는 걸 알고 있어요?"

"물론이지. 준비들 하고 있어. 침실 문도 따놓게 했어. 의붓어머니가 나간 후에는 쓰지 않았지만 실내장식을 바꾸면 써도 상관없어."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배네사는 망설인 후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누가 또 있어요?"

"크리스탈을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인데, 그애는 어제 떠났어."

라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배네사는 그때까지 자기가 크리스탈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걸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해 왔으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안도감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거기에는 죄의식도 약간 섞여 있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나를 미워하고 있겠지요."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잊어버릴 거야."

라울은? 그도 잊어버릴까?

"나 때문에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나 봐요."

라울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당신만의 탓이 아니야. 결혼 동기로써 이건 이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서로 노력하면 그런 대로 가치 있는 것을 낳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마음의 문제는 어떻게 될까? 라울이 이 결혼에 대해서 마음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것도.


7

뒤탕플 가의 저택은 시내에서 5k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철제 대문에서부터 집까지 폭 넓은 반듯한 차도가 lkm 가까이 계속되고, 너른 잔디밭에는 형형색색의 꽃을 피운 아름다운 화단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로얄하고 똑같네요!"

오후의 햇빛에 하얗게 빛나는 저택 앞의 광경을 내다보며 배네사는 소리쳤다.

"물론 이쪽이 훨씬 더 넓지만."

"할아버지는 상상력이 풍부한 편은 아니었던가 봐. 이 이상의 것을 착상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곳의 디자인을 그대로 몽땅 저쪽으로 옮긴 거야. 적어도 집을 잘못 찾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셨지. 내장도 똑같은 패턴으로 되어 있어."

라울은 당당한 구조로 된 정면 현관에 차를 옆으로 갖다 대고서 엔진을 끄더니, 잠시 핸들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배네사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도 불안해?"

", 하지만 할 수 없어요. 당신은 이런 생활에 익숙해졌지만, 나는 프랑스 어조차 제대로 못해요."

"필요한 건 습관과 시간이야. 2, 3개월만 지나면 처음에는 어째서 그렇게도 난감하게 느껴졌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게 돼."

흰 웃옷을 입은 건장한 체격을 한 폴리네시아 인이 나와서 차의 문을 연 후 트렁크에서 배네사의 짐을 꺼냈다.

"이 사람은 케헤이야. 이 사람하고 이 사람의 부인인 칼라니는 집안 하인들을 맡아서 감독해 주고 있어."

하고 라울이 소개했다.

말을 우물거리면서 인사를 하더니, 케헤이는 허연 이를 드러내고 웃어 주었기 때문에 배네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부인도 이 사람만큼이나 친근해지기 쉬운 사람이라면 이곳에서의 생활도 그다지 나쁘진 않겠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그 부인이 아름답게 꾸며진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라드(요리에 쓰이는 돼지기름) 통처럼 뚱뚱하게 살이 찐 여자인데, 하인 같은 비굴한 태도가 전혀 없다.

"언제든지 차를 드실 수 있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영국인의 습관을 존중한 거지."

라울이 층계를 올라가면서 말했다.

"칼라니한테 모든 걸 일임해 버리면 틀림없어. 그녀에게도 세 자녀가 있는데, 지금은 모두들 독립해 있지."

"뱃속에 든 아기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요?"

"물론이지. 굉장히 기뻐하고 있어. 벌써 몇 년 전부터 대를 이을 아들을 가져야 한다고 말해 왔으니까. 타히티 사람은 모두들 아이들을 좋아하지."

"아들이 아니면 어떡하죠? 그럴 가능성도 있거든요."

"그러면 다시 한번 낳으면 되지.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번들번들 윤기가 나는 침실의 마호가니 문을 열자, 연한 녹색과 하얀색으로 된 넓고 아늑한 분위기의 거실이 나왔다. 초록빛 카펫은 폭신폭신해서 발이 푹푹 파묻힐 것만 같았다. 널찍한 발코니를 향해서 난 프랑스식 창에서 내다보이는 바다의 전망은 아름다웠다. 발코니를 따라가면 침실이 나오는데, 그 안쪽에는 사방이 거울로 에워싸인 아름다운 특실이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작은 집 한 채쯤의 넓이는 될 듯싶었다.

케헤이가 가지고 온 슈트케이스를 열고 그 안에 든 옷을 꺼내고 있으려니까 라울이 곁으로 다가왔다. 예복 웃도리를 벗고 셔츠의 단추를 풀어 놓고 있었다.

"나중에 칼라니가 정리해 줄 거야. 지금 당장 필요한 것만 꺼내 두면 돼."

"제가 하는 게 좋아요. 그런 식으로 시중을 받는 데엔 익숙해 있지 않으니까요."

배네사는 고개를 숙인 채 손을 계속 움직이면서 말했다.

"시중을 들어 주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 의붓어머니하고는 정반대로구먼."

라울은 잠시 동안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이렇게 물었다.

"이게 당신이 갖고 있는 물건 전부야? 아니면 나중에 또 오나?"

"이게 이곳에 가지고 온 물건 전부예요. 영국에 맡겨 둔 것도 있지만, 집은 가구까지 몽땅 팔아 버렸으니까 추억이 담긴 약간의 물건들뿐이에요. 겨울옷도 맡겨 두었는데, 여기선 필요없을 거예요."

"필요없어. 누메아에는 좋은 양장점이 몇 군데 있으니까 새옷을 사들이면 되는 거야."

"당신 아내로서의 지위에 걸맞는 걸로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거든 마음대로 생각하라구."

라울은 입을 다물더니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이어서 입을 열었을 때에는 좀 더 정다운 말투로 변했다.

"배네사, 이리 와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며 긴장됐다.

"왜요?"

라울은 스스로 다가와서 배네사를 자기 쪽으로 돌려 세웠다. 단추를 풀어 놓은 하얀 실크 셔츠 안으로 널찍한 앞가슴이 들여다보였다. 배네사는 갑자기 곱슬곱슬한 가슴털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지난 몇 달 동안의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그것이 완전히 기억 속에서 자취를 감춘 적은 없었다. 나는 지금도 라울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그걸 지금에사 분명히 알았다.

배네사가 물기 어린 눈을 쳐들었을 때 라울의 말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든- 입 안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입술을 겹쳐왔다. 배네사도 일종의 절망감을 지니고 거기서 호응하여 그의 사나이다운 육체의 감촉을 음미했다. 그밖에 아무 것도 없더라도 우리들에게는 이것이 있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충분할 것이다.

라울의 손이 슈트의 웃옷과 그 안의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를 잡았을 때 배네사의 몸은 바르르 떨렸다. 그녀의 가슴은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라울의 발작적인 손 안에 쏙 들어가 쥐어졌다. 그 가슴은 몇 달 전보다 더 풍만해져 있다. 그걸 보았을 때 라울은 숨을 죽이며 은근한 눈으로 한참 동안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는 머리를 수그리고는 입술로 그녀의 모든 것에 하나하나 애무를 하여 잠자고 있던 몸을 깨워나갔다.

"임신한 여자를 안아본 적은 한번도 없었어. 만일 고통스럽거든 말해 줘."

그는 배네사의 몸을 부드럽게 포옹하면서 속삭였다.

침대는 보드라왔고, 새틴(공단) 커버는 차고도 매끄러웠다. 라울은 그녀의 옷을 천천히 벗기더니, 아직은 거의 두드러지지 않은 배를 손으로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지금 그 속에서 숨쉬고 있는 생명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남성으로서의 능력의 증거다. 라울이 나를 사랑하는 일은 영원히 없다 할지라도 자식만은 사랑할 것이다.

"나는 얼마 안 가서 보기 흉한 꼴이 돼요."

배네사는 마음속의 두려움과 의혹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나를 보고 싶지도 않게 될 거예요."

"그런 일은 없어. 내 자식의 어머니를 보기 흉하다고 생각할 리가 있나."

피부에 닿는 그의 입술 감촉이 따스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기의 자식에 대해서 질투하는 일도 있을 수 있을까?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아, 시간을 되잡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렇게 돼봤자 무슨 소용인가? 나는 틀림없이 또다시 똑같은 과오를 범할 것이다. 한번 라울이 만지기만 해도 내 육체는 녹아 버린다. 거기에는 나의 의사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거센 욕망의 물결이 있을 뿐이다

 

계속되는 3, 4일 동안에 생활의 패턴이 정해지기 시작했다. 아침 나절에는 발코니 밑에 있는 풀에서 수영을 하고, 커피를 가져다 줄 때까지 1시간쯤 일광욕을 한다. 그 후 해안을 따라 드라이버를 하고, 야자나무 숲 사이에 있는 작은 호텔에서 점심을 먹거나, 창으로 보이는 이 한가롭고 사랑스러운 프랑스의 풍경을 즐기거나 한다. 배네사는 장래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지 않고 현재만을 즐기기로 했다. 일단 저질러진 일은 어찌할 수가 없다.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1주일이 끝날 무렵,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라울이 말했다.

"내일은 회의에 참석해야겠군. 이 이상 미룰 수가 없어."

그 후회하는 듯한 말투에 배네사는 약간 위로를 받았다.

"오랫동안 나하고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워요."

"이런 상황 아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야. 생각 같아서는 당신과 함께 어디든지 가고 싶은데신혼여행 말야."

"신혼여행을요? 이런 상황 아래서는 무리예요."

", 그렇군. 아들놈이 태어난 후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지."

"아들이라고 아주 딱 정해 놓고 있군요. 딸이 태어나면 틀림없이 실망하시겠군요."

"실망은 하겠지만 회복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닐 테지. 다음번에는 확률이 더 많아질 테니까."

"다음번이 있으면 좋겠지만"

"한 번 있었던 일은 두 번 다시 있는 거야- 당신이 아내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한에서는."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까요?"

"그렇지는 않겠지. 내 관심이 당신에겐 조금도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이 되어 버렸다고 납득하지 않는 한에서는 지금 형편으로는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되진 않겠지. 우린 여러 가지 점에서 취미가 일치해, 배네사. 로얄에서는 포옹하는 데만 열중하느라고 서로를 이해하는 데까진 이르지 못했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겠어?"

"네에."

배네사는 그가 들고 있는 브랜디 글라스를 바라본 채 말했다.

잠시 입을 다물더니 이윽고 라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사람들을 만날 생각을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디너파티를 열면 어떨까? 어때, 해낼 수 있겠어?"

"네에, 해낼 수는 있겠죠. 아무래도 해야만 한다면, 아직 드레스를 입을 수 있을 때 하는 편이 좋겠어요."

"아 참. 당신은 새옷을 장만해야겠어. 시몬 르노가 옷을 사는 데 같이 따라가 줄 거야. 당신을 소개시켜 달라고 전부터 말해왔지. 그녀하고라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르노 의사 선생님의 부인? 그분 얘긴 처음 듣는군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지. 내일 케헤이가 당신과 시몬을 시내에 데리고 갈 테니까, 물건을 사고 나면 같이 점심을 먹기로 해. 그래도 괜찮겠지?"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라울의 말마따나 나는 내 껍데기 속에 줄곧 갇혀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피에르 르노 의사의 부인이라면 틀림없이 좋은 사람일 테고, 어머니로서 선배니까 무슨 좋은 도움말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몬 르노는 60을 갓 넘었으리라고 여겨지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l살 반짜리 쌍동이 딸과 4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할 수만 있다면 더 낳고 싶다고 했다.

"우리 형제는 6남매예요. 피에르는 놀라겠지만, 그저 놀라는 체할 뿐이에요. 남자들이란 누구나 다 자기 자식이 태어나는 걸 좋아하는 법이거든요."

"우연히 생겨난 아이도요?"

무심코 나와 버린 말이어서 배네사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이, 죄송해요. 방금 한 말은 잊어 주세요."

"마음속에 꼭 넣어 두고 있느니보다는 말해 버리는 편이 좋아요."

시몬은 다정하게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 만하지만, 배네사, 결점은 있을망정 라울은 좋은 분이에요. 당신을 배신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안할 거예요."

"그건 염려하지 않지만하지만 그이가 나하고 결혼한 것은 아이가 생겼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그 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군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시몬은 여전히 조용한 어조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그분을 사랑하고 있어요?"

"나는 그이를 거의 알지 못해요."

하고 배네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 것은 자기방위 본능에서였다.

"알지 못해도 사랑할 수는 있어요. 우리들 여자는 머리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니까요. 결혼을 한 건 그분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졌다는 거겠죠."

"아이가 생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지금 세상은 말예요, 그것만이 문제라면 아기를 어떻게 처리해 버리는 편이 간단했겠죠."

"유산시키고 싶진 않았어요. 그리고 나 혼자선 라울이 제시해 주는 것과 같은 장래를 아이에게 약속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인생에는 돈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있어요. 물론 가능한 한 아이에게는 양친 부모가 다 있는 편이 좋을 것임엔 틀림없지만 말예요. 이것은 친구로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라울은 행운아예요. 아이만이 아니라 이렇게 좋은 부인을 얻었으니까요. 난 이래봬도 사람을 보는 눈은 가지고 있어요.

크리스탈은 그분을 행복하게 해주진 못해요. 이름처럼 아름답긴 하지만, 의지가 물러서 무너지기 쉬운 여자예요. 그녀는 오로지 라울만 결혼상대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라울에게 확실한 마음만 있었더라면 두 사람은 이미 오리 전에 결혼했을 거예요. 라울의 아버지도 그렇게 되길 바랬지요. 크리스탈의 어머니하고의 결혼생활은 성공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말예요."

아버지가 바라고 있었는데도 라울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배네사는 그 사실을 붙들고 늘어졌다.

차는 커다란 프레임 트리가 그늘을 만들고 있는 플라스 데 코코티에르에 도착했다. 빛바랜 핑크색 옛 석조건물이 현대적인 유리와 콘크리트의 빌딩과 서로 이웃해서 서 있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메이커에서 직송되어 온 프레타포 르테(여성용의 고급 기성복)가 죽 걸려 있는 멋있고 화려한 부티크 가에서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앞으로 세 시간 남았구먼. 시간이 빠듯한데"

시착실에 연달아 가져오는 옷을 차례차례 입어보게 되어서야 비로소 배네사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본격적인 임신복은 아직 빠르고, 지금은 약간 두툼하게 만들어진, 웨이스트라인을 두드러지지 않게 한 디자인을 택하자는 게 시몬의 의견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코튼슈트의 허리 둘레가 째기 시작했기 때문에 배네사는 옅은 호박색 드레스를 그대로 입기로 하고, 나머지는 집까지 배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은 르댕, 마르댕, 주르당 등의 백과 구두인데, 두 벌의 롱드레스에 맞춘 은빛과 금빛의 야회복도 갖추게 되었다. 시몬의 기세에 제동을 걸려고 한 배네사는 구두 같은 건 몇 켤레가 있어도 좋다고 설득당했다. 라울이 예산을 세우고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이상하게 검약하는 편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다. 배네사는 섬에서도 몇 명 안 되는 엘리트와 결혼했으니까 그와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의문이지만, 해보고 싶은 마음은 많이 있었다. 요구받고 있는 것은 고행이니 인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좀 머니까- 배네사는 남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라울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어두운 청색의 얇은 우스팃(소모사 직물) 슈트를 입고 있다. 그는 배네사의 새 드레스를 보고 눈을 크게 뜨고 반짝였다.

"색채 감각이 좋구먼. 머리하고 눈의 색깔해 썩 잘 어울려"

그리고 그의 아내로서의 지위에도 어울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주위 사람들이 흘끗흘끗 이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게 느껴진다.

요리는 근사하고 맛이 있었다. 배네사는 파이에 싸인 생선 요리를 한입 한입 맛있게 먹었다.

"아이구, 많이도 먹었네. 너무너무 맛있어요."

그녀는 포크를 놓으며 말했다.

"2인분은 먹어야 해요, 당연히."

하고 시몬이 말했다.

"크리스천을 뱄을 때 너무나 체중이 불어서 걱정했었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는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갔어요. 당신은 모유로 키울 셈인가요?"

배네사는 라울의 시선을 피하고,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하고 대답했다.

"꼭 그렇게 해야 해요. 몸의 선이 무너진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만일 그렇다면 피에르가 맨 먼저 불평을 했을 거예요."

시몬이 멋 적게 말하고 웃었다.

"허허, 그럼 언제부터 피에르가 불평을 하게 됐나요?"

라울이 짓궂게 묻자 시몬이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그럼 마치 내가 사나운 아내인 것처럼 들리잖아요. 라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마세요, 배네사."

"어차피 진정으로 듣고 있진 않아요. 피에르가 공처가로는 보이진 않으니까요."

배네사는 이번에는 라울을 보았다.

"디너파티 말인데요. 누구누구를 초청하실 거예요?"

"파티라니? 그건 누구의 의견이었어요?"

시몬이 관심을 나타냈다.

"내 생각이오. 물론 당신과 피에르는 제일 먼저 초청받을 손님이오."

"그야 물론이죠. 당신은 괜찮아요, 배네사?"

"날짜가 지나면 지날수록 힘들어지겠죠. 일찌감치 여러 사람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편이 좋겠어요."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 아니야. 전에 말했지?"

라울이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나는 하겠다고 대답했어요. 초대하는 손님들의 이름을 미리 알아 두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건 내가 거들어 줄 수 있어요. 같이 손님 명단을 만들어요. 당신네들 부부까지 넣어 10명 정도면 될까요?"

"당신은 그 방면에 노련하니까."

라울은 몇 명이든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배네사는 기꺼이 당신에게 거들어 달라고 부탁할 거요. 디저트는 뭘로들 하실까?"

돌아오는 길에 시몬은 자기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보고 가라고 배네사를 끌어들였다. 세 아이들은 정말로 귀여웠는데, 4살짜리 크리스천은 아버지하고 똑같았다. 배네사의 프랑스 어는 상당히 숙달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아이들의 제멋대로 지껄이는 소리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이 도리어 크리스천을 아주 재미있게 해주었다. 배네사는 나중에 홍차를 마시면서 얼마나 되어야 마음대로 얘기할 수 있게 될까 하는 걱정을 늘어놓았다.

"염려 말아요, 곧 능숙해질 테니까. 프랑스 어권에서 살고 있으면 자연히 귀에 들어오거든요. 라울하고 같이 있을 때에는 되도록이면 프랑스 어로 얘기하기로 하면 어때요? 처음에는 좀 안타깝겠지만,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에요."

배네사는 르노 의사한테서는 그런 말을 들은 것이 생각났다. 그것이 꽤 오래 전 일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갑자기 저 섬에-모든 일이 시작된 저 로얄 섬에 다시 한번 가고 싶은 생각이 났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우리는 이제 두번 다시는 그때와 같은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말하고 나서 배네사는 자기의 생각을 입 밖에 낸 것을 깨달았다. 시몬의 표정이 금세 달라졌다.

"지금은 아기에게 정을 못 느끼지만, 한번 품에 안으면 귀여워서 못 견디게 돼요. 고민할 건 없어요. 이 결혼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도록 노력해요."

르노의 집을 떠난 것은 4시 반이 지나서였다. 라울은 벌써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배달되어 온 의상 상자를 차례차례 열어보고 있으려니까, 타월을 허리에 두른 라울이 머리를 닦으면서 들어왔다.

"필요한 건 다 샀어?"

"충분할 만큼 샀어요. 시몬이 가격표를 보여 주지 않았으니까, 얼마나 지불해야 하는지 짐작도 못하겠어요."

배네사는 면목이 없다는 듯이 남편을 쳐다보았다.

라울의 짙은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그런 걸 걱정하는 여자는 또 처음이로군."

"나 같은 타입의 여자도 처음이시죠."

", 당신은 내게 있어선 끊임없는 경이의 원천이야."

라울이 머리를 닦고 있던 타월을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젖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올리는 걸 보고 배네사의 가슴은 까닭없이 설레었다.

보기좋게 쭉 빠진 몸은 남성다움의 극치라 해도 좋았다. 저 팔에 꽉 안겼을 때의 기분과 미칠 정도의 기쁨을 나는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알고 있고, 원하기도 한다. 이것은 맨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맹목적인 본능이다. 이것과 사랑과는 혼동하면 안 된다. 그러한 배네사의 심리의 흐름을 라울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을 때 배네사는 뒤로 물러서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다.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울이 키스했을 때 허리에 두른 타월이 흘러내렸다. 그는 배네사를 옷장 문에 붙어 있는 긴 거울 쪽으로 돌아서게 하고는 호박색 드레스의 지퍼를 조용히 내렸다. 그의 입술이 나비의 날개처럼 부드럽게 목덜미를 애무했다. 딴 남성이라면 이것은 정다움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라울의 경우에는 단순한 테크닉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여성의 육체에 불을 댕기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입술은 천천히 움직이며 여기저기 몸 곳곳을 지나고 손가락은 베네사의 몽실몽실한 가슴을 더듬기에 열중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귓속에서 고동치는 소리가 커져간다. 그리고 배네사는 이미 자기가 누구인지도,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도록 되어갔다.

 

라울이 몸을 일으켜 시계를 본 것은 창밖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였다.

"저녁식사를 하려면 옷을 갈아입어야지. 아니면 이리로 가지고 오라고 할까?"

배네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충족되고 평온한 기분이었다.

"그건 퍽 어려운 일이겠죠?"

라울이 웃었다.

"아니, 조금도. 우리에게나 칼라니에게나 조금도 곤란할 것은 없어. 그녀는 당신을 아주 좋아해 배네사. 이건 아무나 받는 명예가 아니야. 나의 두 번째 어머니는 최후까지 칼라니하고 다투다가 떠났지."

"당신도 어머니는 별로 좋아하시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배네사가 조용히 물었다.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라울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자기중심적인 여자였어. 어째서 아버지가 그녀와 같은 사람하고 결혼을 했는지 줄곧 이해할 수가 없었어.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에겐 그녀의 딸에게도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은 심정이 강했을 거라고 생각해. 아버지는 크리스탈을 상당히 귀여워하고 있었으니까 말야."

"당신은 시기하지 않았어요?"

"5살 된 계집애한테? 설마 그랬을라구. 내가 아버지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잠시 망설인 끝에 배네사는 슬슬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리스는 죽었어요?"

이번의 침묵은 조금 전의 침묵보다 더 길었다.

", 죽었어. 아이들은 버젓한 가정에 맡기고,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도록 해주고 있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야."

"이해해요, 정말로."

"아아, 나도 당신만은 이해해 주리라고 믿어."

그는 한쪽 팔꿈치를 잡고서 배네사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에겐 감사해야지."

"나야말로 그래야지요."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의 그녀는 거의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라울은 웃으면서 약간 불러오기 시작한 배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배네사는 가슴 속의 작은 고통이 사라질 날이 결코 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라울은 지금 그의 손밑에 있는 것 때문에 나를 필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것이 없으면 나의 존재 따위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8

 

배네사가 간신히 틈을 내어 브렌든을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은 결혼하고도 한참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그는 새까맣게 햇볕에 그을은 얼굴을 하고서 아랫자락을 잘라낸 청바지와 조끼 차림으로 갑판을 닦고 있었다.

"이젠 못 만날 줄 알았지. 그 메모를 받았을 때는 정말 충격을 받았어."

선실에서 커피 잔을 앞에 놓고 마주앉을 때 브렌든이 말했다.

"직접 얘기할 용기가 없었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직후였거든. 나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브렌."

"나쁘게 생각진 않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중요한 것은 배네사가 지금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렸지."

그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배네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때?"

"물론 행복해요. 익숙해지는 데엔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나 같은 행운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여자라면 누구나 다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기를 꿈꾸잖아요."

"배네사는 그러한 여자 중의 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브렌든이 날카롭게 꼬집었다.

"배네사하고 결혼할 수 있어서 그 사람이야말로 행운이라고 생각해. 라울이 그것을 알고 있으면 좋겠는데."

"불평은 안하고 있어."

배네사는 얘기를 딴 데로 돌렸다.

"브렌이 하는 일은 잘돼 가나요?"

"잘되고 있지. 일거리는 쉴새없이 들어와."

"조수는 구했어요?"

"오래 있을 놈은 아직 못 구했어. 그럴 필요도 없구. 지금 계산서를 보여 주지."

브렌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요, 보고 싶지 않아요.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니까."

"배의 절반은 배네사 거야."

브렌든은 노트를 펴들고 억지로 배네사 쪽에 내밀었다.

"흥미를 가져 주지 않으면 곤란해. 닐도 그렇게 하길 바랐을 테고 말야. 배네사의 몫을 불입하려고 구좌 하나를 만들었어. 배네사가 그걸 쓰고 안 쓰든간에 돈은 불입되어 갈 거야."

"알았어요. 고마워."

사실을 말한다면, 우리들은 어느 쪽이나 이 배에 대해서 권리가 없는 처지이다. 하지만 이제와서 이걸 라울에게 돌려 줘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초호(礁湖)를 한 바퀴 돌아보지 않겠어? 오늘 오후는 예약이 들어와 있지 않아."

브렌든이 말을 꺼냈다.

배네사는 유감스러운 듯이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없어요. 4시에 마중을 나오기로 돼 있어요. 초호 구경은 다음 기회에 하죠."

"날짜를 잡아 두자구. 나는 금요일을 비워 두겠어. 바닷바람을 쐬는 것도 나쁘진 않아. 앞으로는 그럴 기회도 별로 없겠지?"

좀 더 배가 부르면 못할 거라는 의미일까? 하지만 브렌든의 선의로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도 역시 셋이 배를 타던 그 무렵이 그립다.

"간다고 하더라도 아침 나절에야 갈 수 있어요. 금요일 밤에는 디너 파티가 있거든."

"그런 상태로?"

하고 말하고는 브렌든은 얼굴이 빨개졌다.

"몸에 지장은 없을까 하고 생각한 거야."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같아요. 아직 10주도 안 됐거든."

"하지만 배네사의 뱃속에 아기가 들어 있는 건 다들 알고 있겠지?"

배네사는 그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렇겠죠 뭐. 누메아처럼 작은 곳에서는 비밀을 지니기는 불가능해. 내가 용케도 라울을 낚았다고들 생각하겠지."

"이 근방에선 모두들 배네사하고 결혼하게 되어 라울이 이제야 비로소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들 말하고 있어. 배네사는 한동안 우리들과 한패였잖아. 우리 편이 많이 있어."

"정말? 그건 기분좋은 말인데."

배네사는 꽤나 위안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금요일에는 오겠지?"

"될 수 있는 대로 그렇게 하겠어. 하지만 약속만은 할 수 없어. 만일 일거리가 들어오거든 맡아서 해."

케헤이는 할 일이 없어 심심한 듯이 차의 도어에 기대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할 일이 잔뜩 쌓여 있어요. 나는 운전사가 아니거든요."

나에게도 차가 있으면 편리할 텐데 하고 배네사는 생각했다. 라울에게 얘기해 보자. 자기 혼자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 독립한 인간이 되기 위한 첫째 조건이다.

저녁식사 후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라울 자신이 그 화제를 꺼냈다.

"당신에게도 차가 있는 게 좋겠어. 하지만 줄리아 호에 자주 다니라는 건 아니야. 거기엔 되도록이면 가지 말았으면 좋겠어, 배네사."

"하지만 브렌든을 전혀 안 만날 수도 없어요. 그는 아버지한테 아주 잘해 주었는걸요. 게다가아버지는 나하고 브렌든에게 절반씩 배를 남겨 주셨어요. 원래 아버님에겐 그런 권리는 없겠지만, 형편상 그렇게 돼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 나로서는 브렌든에게 전부를 줘버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받으려고 하질 않아요. 당신에게 무슨 해결책은 없을까요?"

"그건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야. 손에 넣은 방법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든지, 그 배는 어디까지나 아버님의 소유니까 말야.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거든 그에게 증정하는 법률상의 수속을 밟는 게 어떻겠어? 기정사실을 만들어 버리면 그도 더 이상 거부할 순 없을 거야."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과거와의 관계를 모조리 끊어 버리는 결과가 되고 만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집을 판 돈은 영국에 아직도 그냥 남아 있어요. 이자까지 합쳐 8만 파운드 정도는 되었을 거예요."

"회사의 변호사에게 부탁하면 이쪽으로 옮겨 당신 명의로 저축해 줄 거야."

"내 명의로요?"

"물론이지. 여성의 지참금이 자동적으로 남편의 소유가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어."

"그렇게 되면 당신이 주시는 그달 그달의 용돈은 필요가 없게 돼요."

"내가 아내에게 자기 돈으로 옷을 사 입게 할 줄 알았어?"

라울은 기분이 상한 듯한 눈치였다.

"아아뇨,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녜요. 요컨대 나는 그렇게 많은 돈을 가져본 일이 없었으니까요."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라울이 천천히 말을 했다.

"당신이 영국에 남겨 두고 온 남자하고 결혼했다면 어떤 식으로 살고 있을까?"

배네사는 흘끗 그를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겠지요. 그 사람은 평범한 샐러리맨이니까요."

"당신은 그 사람을 사랑했었나?"

그녀는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잘 모르겠어요. 그것도 내가 여기까지 아버지를 찾으러 온 이유 중의 하나예요. 잠시 냉각기간을 두고 생각해 볼 작정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서 엉뚱한 문제가 일어난 거로구먼. 결심을 하기가 어려웠었나?"

"여기에 머물 결심 말예요? 아아뇨,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쉬웠어요. 나는 다만 핑계를 찾고 있었을 뿐예요."

"하지만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상황이 달랐더라면 그 사람한테 돌아갔겠지."

"그렇진 않아요."

배네사는 용기를 내어 라울의 파란 눈을 쳐다보았다.

"나하고 그 사람하고의 관계에는 부족한 것이 많이 있다는 걸 깨달았던 거예요. 그걸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당신이에요."

라울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요컨대 그 사람은 나만큼 당신을 불타오르게 해주지 못했던 거야. 아마도 그 사람에게 테크닉이 부족했겠지."

"그랬을 거예요 그 사람은 당신만큼 경험이 많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배네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상관없어, 당신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나도 지나간 과거에 몇 명의 여자를 알고 있었지. 장래에도 그렇게 될지 어떨지는 당신이 하기에 달려 있는 일이지만"

"내가 계속해서 당신을 만족시켜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씀인가요?"

"상당히 뜻밖이란 말투로구먼."

"지금은 그렇다 치고, 얼마 안 가서당신은 배가 부른 여성을 매혹적이라고 느껴본 적이 있어요?"

"아니, 없는데. 하지만 이제까지 나는 그런 여성과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어본 일이 없었으니까."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배네사를 차분한 태도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아이를 정말로 가지고 싶은 거야?"

"물론 가지고 싶어요."

그 대답은 너무 지나치게 성급하고 단호한 것이었다. 그녀는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아이가 생겼더라면 더욱 좋았으리라고 생각 할 뿐예요."

희미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 감돌았다.

"아이를 만드는 데 그렇게도 많은 종류가 있나?"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 못하시는 건가요?"

"아냐, 알고말고."

라울은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지. 난 당신하고 결혼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하지만 그건 크리스탈과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런 상태에서 당신하고 그렇게 된 건 옳지 않았지만, 그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었지.

당신이 로얄을 떠난 뒤 몇 주일 동안에 당신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지. 특히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말야. 그래서 나 대신 피에르를 보냈던 것이지만, 그로부터 당신이 임신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놀랐지. 내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어. 하지만 일단 그렇다고 확신을 한 뒤, 취해야 할 길은- 내가 취하고 싶었던 길은- 한 가지밖에 없었어."

라울은 손을 들어 배네사의 뺨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무렵의 기분을 잊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해. 시간을 들여 그걸 발전시켜 나가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다. 그건 지금 이 순간에도 배네사의 마음속에 있으니까. 다만 말로는 아직 표현할 수가 없었다. 라울이 또한 진심으로 같은 말을 해주기까지는.

"그래요, 어렵지는 않아요."

미소를 짓는 배네사의 입술이 약간 떨렸다.

"당신은 특별한 분이니까요, 라울."

"그래? 그럼 이리 와서 어떻게 특별한지 가르쳐 줘."

두 사람은 소리를 합쳐 크게 웃고는 배네사는 그의 팔에 끌려들어 품안에 안겼다. 그의 키스는 매우 정다운 것이었다. 그의 품에 안겨 머리를 가슴에 대고 있으면 돌아올 곳에 돌아온 듯한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젠 후회는 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그만 바라보고 사는 거다. 내 뱃속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은 라울의 아이- 지금 나는 진심으로 이 아이의 탄생을 원하고 있다. 이렇게 진정으로 소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차를 선택하는 건 뜻밖에도 어려운 문제였다. 배네사는 스포츠카를 원했으나, 몇 주일도 못 가서 낮은 문으로 드나들기가 어려워지리라는 건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결국은 좀 더 수수하긴 하지만 값이 비싸다는 점 외는 변함이 없는 반덴 플라스 살롱을 사기로 결정되었다.

"꿈 같은 차네요. 지금까지는 미니밖엔 운전해 본 경험이 없었어요. 그나마 별로 새 차도 아닌 걸 말예요."

"포르셰는 이젠 미련이 없나?"

라울은 배네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글쎄요? 어차피 나는 백 킬로 이상은 속도를 안 낼 테니까, 내게는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썩이는 셈이에요."

오후에는 시몬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지금 형편으로는 시몬과 피에르만이 유일할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다.

배네사는 아직도 금요일의 디너파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울은 어떤 상황에도 능히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아내를 필요하게 여기고 있으니까, 나도 역시 그를 위해서 분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점심식사 자리에서 마주앉아 있는 라울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니까, 따뜻한 정감이 가슴속에 가득히 퍼져나가고 있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자기 사람이라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어젯밤 침대 속에서 그는 대단히 정답게 해주었다. 우리들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이젠 뒤로 물러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밤은 밖에서 식사를 하지. 때늦은 감은 있지만 축하연회는 열어야지. 결혼한 지 꼭 10일이 되는 날이니까."

라울이 말했다.

20년이 지나면 어떻게 변해 있을까 하고 배네사는 문득 생각했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결국 시간이 대답해 줄 것이다.

시몬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배네사를 환영해 주었다. 그녀는 널찍한 시골풍의 주방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은 미라가 쉬는 날이에요. 피에르가 밤에 나가기 때문에 일찌감치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당신은 요리하길 좋아해요, 배네사?"

"네에, 하지만 칼라니가 부엌에 들어서게 할지 어떨지가 문제예요. 그녀가 하루 꼬박 쉬는 일은 없으니까요."

"당신이 말하면 되는 거예요. 뒤탕플 가의 여주인은 칼라니가 아니고 당신이니까요."

배네사는 웃었다.

"그런 말을 그녀에게 해볼까! 어쨌든 금요일까지는 칼라니하고 싸우고 싶진 않아요. 10명분의 디너를 내팽개쳐 둔 채 나가 버리면 곤란하니까요."

"당신 같으면 해낼 수 있어요. 오늘 당신을 보니까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새 차를 샀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건 라울과 관계있는 일이야?"

"우린 어젯밤 오랫동안 얘길 나누었어요."

배네사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저어 시몬, 크리스천을 임신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어요?"

"입덧이 나서 구역질이 심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어요. 아기가 뱃속을 툭툭 차기 시작하게 되면서부터 간신히 기쁨이라는 게 실감있게 우러나더구먼. 배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걸 피에르도 기쁜 듯이 바라보고 있더군요. 남자들이란, 자기가 해낸 일에 대해서 긍지를 느끼는 법이에요."

그건, 당연한 일이다. 라울도 좋은 아버지가 되겠지. 우리들은 한가족이 되는 거다.

돌아오려고 할 때 시몬도 밖으로 나와서 차를 칭찬해 주었다.

"현명한 선택을 하셨군요. 크리스탈이 가지고 있는 포르셰는 다른 드라이버에게는 위협이 되었지요. 떠나갈 때 뱃짐으로 꾸려서 갖고 갔겠지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어리석은 생각일랑 하지 말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배네사는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라울은 나하고 크리스탈을 비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떨쳐 버리려고 해도 라울이 크리스탈과 나란히 포르셰를 타고 있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크리스탈은 여유만만하게 핸들을 잡고, 그 눈은 미소를 지으면서 도전하듯이 그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라울 자신도 스피드를 내는 편이니까 역시 여자에 대해서도 같은 능력을 요구하는 게 아닐까.

오늘 아침 느릿느릿 운전을 하는 내 차의 뒤를 따라 운전하면서 집으로 돌아올 때 라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크리스탈이 아니라 나를 선택함으로써 라울의 인생은 좀 더 따분한 것이 되어 버린 게 아닐까.

하지만 크리스탈은 이젠 없어졌다. 얼마 안 가서 라울도 그녀를 잊어버리겠지.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을 나는 믿어야 한다.

라울은 목요일에 광산을 둘러보러 나갔다. 하룻밤 묵은 다음 금요일 오후의 디너파티에 맞추어 돌아오겠다고 했다. 배네사가 금요일 아침 9시에 부두에 나가 보니까 브렌든이 준비를 다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와줘서 고마워. 라울이 반대하지 않았어?"

"그이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배 문제로 의논하러 왔어요. 라울은 내가 배를 브렌든에게 증여해서 그걸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나와의 관계를 끊으라는 거군. , 알 것도 같구먼. 나에게 권리가 없는 점 외는 변함이 없지만, 그게 배네사의 생활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거라면 반대할 이유는 조금도 없어."

줄리아 호는 초호(礁湖)를 향해서 미끄러져 나갔다. 배네사는 바람에 머리를 나풀거리면서 셋이서 배를 타고 있었던 무렵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2주일 하고 조금밖에 더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브렌든은 앞으로도 쭉 뉴칼레도니아에 있을 예정이에요? 줄리아 호는 먼 바다로 항해할 수 있겠죠?"

하고 배네사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언젠가 한번은 피지 제도나 통가 제도에 가보고 싶어. 기회가 있으면 말야."

브렌든이 대답했다.

해가 높이 솟아오름을 따라 기온은 자꾸자꾸 올라가지만, 바다 위에 있는 건 유쾌한 일이었다. 배네사가 청바지 자락을 걷어 올리고 있으려니까, 브렌든이 선실에 놓아 두고 온 그녀의 수영복을 가지고 왔다.

"이걸 갈아입는 게 어때? 청바지보다는 편할 거야."

수영복은 허리 부분을 편안히 해줄 수 있겠지. 별로 상관이 없지 않을까. 아주 약간 허리둘레가 굵어진 정도여서, 아직은 두드러진 변화는 없으니까. 수영을 해도 괜찮아. 수영은 임신부에게는 가장 알맞은 운동이고

수영복을 입고 나왔을 때에는 약간 부끄러웠지만, 금세 그런 건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되었다. 브렌든은 해안선에서 1km쯤 떨어진 얕은 여울에 닻을 내렸다. 여기서 수영을 하는 게 안전하다는 건 과거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여느 때와 같이 뱃전에서 뛰어드는 데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않았다. 배네사는 멋지게 수면을 가르며 수 m 앞에서 얼굴을 내놓았다. 물은 생각했던 것보다 차가왔는데, 아마도 그건 몸이 뜨거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원을 그리기도 하고, 이따금 세차게 물을 헤치기도 했다.

"브렌도 들어와요. 기분이 아주 좋은데"

"아냐, 난 여기서 보고 있을 거야."

브렌든은 잠시 망설였다가 물었다.

"정말로 괜찮겠어, 수영을 해서?"

배네사는 웃으면서 고개를 내젓고는 머리에서 물방울을 떨구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바다에서 헤엄치는 건 오랜 만이야. 앞으로도 그런 기회는 별로 없을 테니까 마음껏 즐길 작정이야."

배네사는 그 뒤 20분쯤 바닷속에 있었다.

"역시 예전과는 다르군요."

브렌든이 잡아당겨 주고 있을 때 그녀는 불평을 했다.

"전에는 해안까지 헤엄쳐 갔다가 돌아와도 전혀 피로하지 않았는데"

"그건 무리도 아니지."

그는 타월을 내주고는 커피를 끓여 오겠다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배네사는 재빨리 물을 닦고 나더니 햇볕 아래서 몸을 쭉 뻗었다. 등과 다리의 뻐근한 통증이 몸 전체에 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소한 근육통이겠지. 걱정할 건 없다.

브렌든이 돌아왔을 때, 배네사는 무릎을 안고 앉아서 딱 붙은 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늦어져서 미안해. 실린더를 갈아야만 했기 때문이야."

그는 잔을 건네주고 자기도 한 모금 마셨다.

", 내가 끓였지만 잘도 끓였군."

찻잔을 입에 대려고 한 순간 날카로운 고통이 일어나는 바람에 배네사는 자신도 오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금세 사라지고 조금 전까지와 같은 둔한 통증으로 변했지만, 그 통증이 또다시 일어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되었다.

"왜 그래?"

브렌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냉정한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지만, 누메아로 돌아가 줘요!"

"아기가?"

"그런가 봐."

배네사의 어두운 눈은 이미 내면의 비극을 반영해 주고 있었다.

"빨리, 브렌. 부탁이에요!"

아무리 속도를 내더라도 누메아까지는 25분 걸렸다. 브렌든이 무전으로 연락해 놓았기 때문에 부두에는 구급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 하얀 복도, 사람들의 얼굴, 연거푸 몰아닥치는 통증, 그러한 상황 속에서 배네사는 이것은 모두 자기가 저질러 놓은 일이라는 의식과 무서울 정도의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배네사는 낯선 침대에서 눈을 떴다. 잠시 동안 허연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기억이 서서히 되돌아오고 이윽고 한 장의 슬픈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악몽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후회하기는 너무 늦었다. 하지만 슬픔에는 너무 늦는 일이 없다. 슬픔은 무거운 추처럼 배네사의 가슴을 압박하고 있었다.

옆에서 사람의 움직이는 기척이 있더니, 의자를 끌어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뒤를 돌아다본 배네사는 잠시 동안 라울의 눈을 쳐다보고는 이내 눈을 감았다.

"죄송해요, 당신을 실망시켜 드려서."

"지금은 그런 생각은 안해도 돼. 이미 끝난 일이야."

"그렇게 간단히 잊을 수는 없어요. 당신이 나와 결혼한 유일한 이유였으니까요."

그 말에 대해서 라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기대를 걸면 되는 거야. 당신은 젊고 건강해. 금세 회복된다고 의사도 말했어."

몸은 회복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확실히 아기를 갖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1주일 동안은 그렇지 않았다. 아기는 나의 일부가 되고,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그 아기를 죽여 버린 것이다. 고의는 아니지만, 부주의라는 것도 같은 정도로 죄가 깊다.

다음번의 아이 같은 것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꺼내는 걸로 봐서 라울은 상당히 냉혹하고 무정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닌 것이다. 그는 내가 어떻게 견뎌왔는지에 대해서는 눈꼽만큼의 동정조차 나타내지 않는다.

"여기엔 얼마나 있어야 해요?"

"하룻밤이야. 내일 진찰이 끝나면 집에 돌아갈 수 있어."

- 이렇게 된 이상 그건 라울의 집이지 나의 집은 아니다. 이제까지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눈물로 눈꺼풀이 부풀어지자 배네사는 얼른 눈을 감았다. 손을 뻗쳐 라울의 따뜻한 손에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대신 이렇게 말했다.

"피곤해요. 얘긴 나중에 하지 않겠어요? 잠을 좀 자고 싶어요."

라울이 움직이기까지의 얼마 동안의 시간에도 그는 배네사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나가 버렸다. 배네사는 외면했던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었다. 이토록 고독한 감정을 느껴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튿날 아침 진찰하러 온 의사는, 당신은 젊고 건강하니까- 어제 라울이 한 말과 똑같군- 원한다면 금세 임신을 해도 괜찮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함으로써 위안을 얻기 때문에 의사는 그런 말로 위로하는 것이리라.

라울은 10시에 배네사가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왔다.

산뜻한 기분이 드는 하얀 코튼드레스를 입고 빛을 잃은 눈으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배네사는 라울이 어젯밤 무슨 생각을 하면서 밤을 지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런 경우 거의 대부분의 부부는 공동의 아픔을 딛고서 한층 더 마음을 결합하게 될 것이다.

만일 라울이 지금 여기서 나를 힘껏 포옹해 준다면 모든 것은 변할 텐데.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의 감정은 단지 내가 자식의 어머니라는 점에만 쏠려 있었으니까. 나는 아직도 그의 아내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명분은 얼마나 나를 공허하게 만드는 것인가.

마중나온 라울의 태도에서도 아무런 위안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예의바르고 인정 있고 그리고 남처럼 데면데면했다. 차 안에 나란히 앉아 집으로 가는 도중에 자연히 말이 입을 뚫고 나왔다.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침의 교통체증을 뚫고 나가는 데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지 라울은 좀처럼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되다니, 뭘 말야?"

그는 겨우 대답했다.

배네사는 짧고도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냈다.

"결혼의 무효를 주장하는 건 무리이니까, 그 다음에는 이혼밖에 없어요. 얼마나 어려워요, 여기선?"

"문제가 안 돼, 그런 건. 아이는 또 가질 수 있잖아."

"이젠 갖고 싶지 않아요."

배네사는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 번으로 충분해요."

"곧 기운이 날 거야. 다음번에는 10개월은 버텨나갈 수 있겠지. 내가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을 테니까."

"내가 일부러 이렇게 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렇지 않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지? 당신은 아이를 낳는 데 별로 열성을 기울이지 않았잖아?"

"그건 아녜요."

"그래? 그런데 왜 나는 그런 인상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군."

"덫에 걸린 듯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에요."

"우린 두 사람 다 덫에 걸린 거야.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을 나는 요전날 밤에 가졌었지. 그건 지금도 가지고 있어."

"또 아이를 배게 되면 그렇다는 말씀이죠?"

"얼마 안 가서 그렇게 되겠지."

"만일 임신하지 못하면 어떡하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첫 번째에 그렇게 쉽게 임신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런 얘길 하고 있을 시기가 아니야. l, 2주일만 지나면 우린 다 같이 좀 더 나은 상태가 될 수 있을 거야."

라울의 말이 옳았다. 지금 이런 걸 가지고 다퉈 봤자 뾰족한 방법이 없는걸. 하지만 나중에 차분히 생각해 본다면 그도 역시 이혼 이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는 결혼 따위를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예정대로 내가 여행을 떠났더라면 지금 이 시점에 아기는 아직도 뱃속에 있을 텐데.

칼라니는 동정을 나타내며 배네사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오후가 되어 문병하러 온 시몬도 결코 비난하는 듯한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여러 가지 일을 저지르는 거예요. 열 번 중 아홉 번은 다행히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되지만 말예요. 뛰어들 때 어딘가 뒤틀렸었죠? 다음번에는"

"다들 다음번 얘길 하는군요. 마치 그것이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듯이, 고양이 새끼를 강아지로 갈아치우듯이 말예요!"

하고 배네사는 몹시 거칠게 말했다.

시몬은 별로 기분을 상한 기색도 없이 미소를 지었다.

"나도 첫애를 유산했으니까 당신의 심정을 알 만해요."

"정말예요? 나는 나 혼자서만 지독한 경우를 당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군요! 원인은 무엇이었어요?"

"특별한 이유도 없었지 뭐. 그러니까 크리스천은 나에게는 이중의 의미로 소중했던 거야. 내 몸도 아기를 10개월을 충분히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증명을 해주었으니까요. 물론 단단히 조심하긴 했지만."

배네사는 창밖의 바다를 내다보았다.

"당신의 경우는 나하고는 달라요. 라울은 대를 이을 자식을 얻고 싶어서 나하고 결혼했을 뿐이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라울이 원하는 건 애정이에요. 요전 날 당신들 두 사람을 보았을 때 대단히 좋은 느낌을 받았는걸요. 당신만 그런 마음을 먹는다면 틀림없이 또다시 잘돼 나갈 거예요. 좋은 결혼생활을 지속해 나가는 데는 애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말예요. 서로들 상대방을 대하는 호의와 존경이 가장 중요한 거예요."

그 세 가지가 다 우리에게는 부족하다고 배네사는 생각했다. 나는 아기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로 부주의하게도 우리들 사이에 어렵사리 태어나고 있었던 것을 죽여 버린 것이다.

 

9

"3, 4일 도쿄에 갔다 와야겠는데."

저녁식사 자리에서 라울이 갑자기 말했다.

"흥미가 있으면 같이 가자고 권하고 싶은데 말야."

배네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거기 가서 뭘 하실 건데요?"

"여기서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일이겠지 뭐. 문제는 바로 그 점이야."

라울은 힘을 주어 말했다.

"벌써 2주일이 됐어. 도막도막 끊어진 실을 잇는 작업에 착수해도 좋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3, 4일간 혼자 있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과연 그럴까 하고 배네사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우리들과 같은 문제는 혼자서 생각해야만 좋은 건 아니다. 실제로 지난 2주일 동안 나는 라울과 따로따로 지낸 것이나 다름없다. 확실히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같은 침대에 들어가 잠을 자고는 있지만, 감정소통은 둘 사이에 서로 멈추어져 있었다. 도쿄에의 여행 역시 아무 것도 변화시키진 못할 것이다.

"언제 떠나세요?"

"내일 아침 일찍. 당신이 깨어나기 전에 떠날 거야."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라울이 조금만 꼼지락거려도 나는 잠을 깬다. 그가 손을 뻗쳐 오지 않을까 하고 움찔움찔 놀라고 있는 터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지만, 만일 있을 경우에는 나는 어떻게 반응을 나타내야 할지 모른다. 몸의 접촉이라는 걸 생각하기만 해도 온몸이 얼어붙고 만다.

"좋은 여행이 되길 빌겠어요. 사업도 잘돼 나가길 빌고요."

배네사는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말했다.

"사업상의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의 입술이 빈정거리듯이 삐쭉거렸다.

"그 외에 또 뭐가 있어요?"

배네사의 말투는 달라지지 않았다.

"게이샤(藝者일본 기생)와의 밀회인가요?"

"게이샤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서비스는 안해.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그런 여자를 찾기는 간단하겠지만 말야."

"돈만 있으면 뭐든지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그렇다는 말이죠?"

하고 배네사는 자신도 모르게 발칵 화를 내면서 말했다.

라울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겨우 반응이 좀 있는 모양이군. 너무 깊은 뜻으로 해석하지 않는 게 좋아. 만일 돈이 전부라고 한다면 오히려 문제는 간단해."

"내가 너무 깊이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무리도 아니에요. 당신은 언젠가 내게 돈 계산을 한다고 나무라신 일이 있으니까요."

"과거에 범한 몇 가지의 과오에 대해선 한마디도 않겠어. 어쨌든 기회가 있으면 당신은 내일이라도 뛰쳐나갈 것만 같으니까. 이렇게 패스포트를 맡아 놓고 있는 거야. 아들을 낳아 준다는 그날 바로 패스포트를 돌려 주지. 물론 당신이 있어 주길 바라지만 말야. 아이에겐 어머니가 필요하거든."

"당신에게 아내가 필요한 이상으로 말이죠?"

"그건 당신이 생각하기에 달려 있어. 일단 잃어버린 것은 두번 다시는 돌이킬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역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좋은 결혼을 지속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야."

배네사는 잠시 동안 라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산들바람이 테라스의 난간을 휘감고 올라간 인동덩굴의 향기를 풍겨 준다. 5개월 전에 로얄에서 같이 지낸 저녁때의 일이 생각났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나는 라울을 접근하지 못하게 했을까? 예스라고 대답하기는 쉽다. 나중에 생각하면 뭐든지 쉽게 생각되는 법이다.

"당신이 나를 건드리는 건 참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아요. 그렇게 되면 상황은 어려워지지 않겠어요?"

배네사는 쌀쌀맞게 말하고는 일어났다.

"서늘해졌으니까 커피는 안에서 들겠어요."

라울은 따라오지 않았다. 10시가 되어 배네사가 잘 준비를 시작했을 때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라울이 들어오기 전에 침대에 들어가 잠든 체하자.

그가 속고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사태를 간단하게 해결해 줄 것이다.

라울이 들어온 것은 12시 가까이였다. 배네사는 얼굴을 창 쪽으로 돌리고 가만히 드러누워 샤워 소리를 들으면서 라울의 쭉 빠진 늠름한 몸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우리는 몇 번이고 같이 샤워를 했었다. 웃고 떠들면서 비누로 서로 씻어 주는 사이에 욕망이 한층 더 강렬해졌었다. 그 기억이 지금 배네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있다.

물소리가 그치더니 이윽고 문이 열리고 이쪽으로 향해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시트가 쳐들리고 매트리스가 삐걱거리는데도 배네사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힘찬 팔이 등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얼어붙는 듯한 그 순간, 라울이 발가벗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녀의 육체는 화끈하게 뜨거워졌다.

"이러지 말아요!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라울."

"그렇지 않아. 이것이 우리들 사이의 울타리를 없애 버리는 유일한 방법이야."

라울은 울타리를 때려 부수는 것과 같은 난폭한 수단은 쓰지 않았다. 시간을 들인 그의 능숙한 애무에 배네사의 몸은 서서히 눈뜨기 시작했다. 저항은 욕망에로 모습을 바꾸어 갔다. 입술은 미친 듯이 서로를 요구하고 몸과 몸은 엉켜갔다. 이유는 필요없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머리가 맑아졌을 때 생각하자.

그의 육체의 감촉은 친숙하고 그리고 더할나위없이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이 사람과 헤어져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라울은 나의 전부다. 이제까지도 줄곧 그랬었다. 몸을 합쳤을 때 배네사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비할 바 없는 리듬으로 다 같이 움직이며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는 넓고 푸른 공간에로 날아서 올라갔다.

잠이 깼을 때는 8시였다. 라울은 이미 공항으로 달려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배네사는 다시 한번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역시 그이하고 같이 가는 게 좋았을걸. 이렇게 혼자 남아 있게 되니 이전부터의 의심이나 두려움이 또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의 일이 아무리 멋있게 잘됐다고 할지라도 라울의 의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나는 하나의 도구인 것이다. 한번 주는 데 실패한 것을 또다시 그이에게 전해 주기 위한.

그렇다면 그것으로 무방하지 않은가. 결혼이란 자녀를 중심으로 하여 토대를 굳혀가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라울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내가 그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절반일지라도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다.

배네사는 그날 아침, 유산한 후 처음으로 수영을 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뒤를 돌아다보진 말자. 칼라니는 그녀의 변한 표정을 보고 기뻐하면서 그 점을 강조해 말했다. 그녀가 어느 정도까지 사정을 이해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테라스에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를 통해서 브렌든은 기가 죽은 듯이 매우 조심스럽게 그녀의 건강상태에 대해서 물었다.

"여기까지 나와 주지 않겠어?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점심을 준비해 놓을 테니까."

그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말하기 거북한 듯이 계속했다.

"그 일 때문에 나를 원망하진 않겠지, ?"

"물론이에요. 배에서 뛰어내린 내가 어리석었죠."

"그럼 나와 주는 거지?"

거절하면 브렌든은 감정이 상하겠지. 줄리아 호의 소유권은 이미 그에게 전적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는 그 점에 대한 사례를 하려는 것이겠지. 그리고 만일 그가 가까운 시일 안에 피지 제도에 간다면 우리는 당분간 만나지 못하게 된다.

"30분쯤 후에 갈 거야."

배네사는 말했다.

한낮이 되기 전이어서 거리는 붐비고 있었다. 지금부터 2시까지 낮 휴식 시간이어서 거리는 모든 활동을 정지한다. 나무 그늘에 차를 세워 두고 배네사는 부두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 길을 걷는 것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지난 3개월 동안에 꽤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다음 3개월은 좀 더 행복한 것이 되기를!

브렌든이 갑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건강해 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젠 정말로 괜찮은 거야?"

"곧 회복되었어요. 아직 10주밖에 안 되었으니까."

배네사는 명랑하게 대답했다.

"너무 오래 있을 순 없어, 브렌. 돌아가는 길에 시몬한테 들르기로 약속을 했거든."

"오래 걸리진 않아. 자아, 타라구."

좁은 층계를 따라 선실로 내려가니까, 붙박이 벤치에서 일어나는 사나이가 있었다. 잠시 동안 배네사는 그저 멍한 눈으로 탐스럽고 밝은 색깔을 한 머리털이며 네모진 얼굴이며 뭔가 물어보려는 듯한 갈색 눈을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의 침묵에 이어,

"야아 배네사, 변하지 않았군."

하고 사나이가 말했다.

"변하지 않았다구?"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히스로 공항에서 헤어졌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일까?

"어째서 지금 나타났지? 벌써 3개월이나 지났어. 마이클."

"장기휴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기다려야 했어."

마이클은 말문이 콱 막혔다. 몹시 속이 상한 듯한 눈을 하고 있다.

"사정을 알려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내가 아는 한에서는 배네사가 여기 있는 것은 오직 아버지 때문이었어. 와서 보니, 아버지는 세상을 뜨시고 배네사는 결혼했다더군.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니었어."

"그렇겠지."

배네사는 뭐라고 해야 좋을지 말을 못 찾고 어눌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변명할 여지가 없어. 마이클이 답장을 해주지 않아서 양해해 준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 거야."

"편지만 가지고는 배네사의 결심을 번복시킬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우선 내 눈으로 확인하고서 좋은 해결책을 강구할 작정이었어. 아버지를 배네사와 같이 영국으로 모시고 돌아가도 좋으리라고까지 생각했던 거야."

"아아! 용서해 줘, 마이클. 정말 용서해 줘."

마이클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끝난 일인걸 뭐. 앉아서 잠깐 얘기 좀 하지 않겠어.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까."

배네사는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으로 권하는 대로 벤치에 걸터앉았다. 마이클이 받은 타격을 생각하면 변명 같은 건 조금도 위안이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설명을 할 의무는 있다고 생각했다.

"브렌든한테서 얘기는 대강 들었을 거야. 이해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결국은사정이 그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어."

"그 친구가 배네사를 유혹한 거지?"

"으음, 반드시 그런 건나도 역시 그의 마음을 꺾을 만한 짓은 안했어."

"배네사를 침대로 끌고가는 데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들였는지를 생각하면 그치는 상당히 수단이 좋은 놈인가 보군. 나하고 잘 때보다 훨씬 더 좋았나?"

배네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이상 마이클의 한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순 없는 일이다.

"마이클이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나에게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뭐라고 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니야. 나이로 따져보더라도 그놈이 배네사보다 훨씬 더 위일 테니까 말야. 어째서 그놈은 피임이란 걸 생각지 않았을까?"

"마이클과 똑같은 이유 때문이야. 내가 틀림없이 예방하고 있을 줄 알았던 거야."

"우린 서로 의논을 하고서 그렇게 했잖아."

"하긴 그래."

배네사는 가냘프게 손을 폈다.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를 이제와서 따져봤자 별수 없어. 어쨌든 그렇게 돼버린 이상 그이하고 결혼하는 길 외에는 딴 방법이 없었던 거야."

"나한테 돌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마이클이 조용히 뇌까렸다.

"딴 남자의 아이가 뱃속에 있는데도?"

"내 아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 뭐. 누구의 자식인지 어떻게 알아. , 이제와서 말해 봤자 그야말로 쓸데없는 얘기야. 아이는 유산됐다는 말을 브렌든한테서 들었지."

"그건 사실이야그리고 나는 아직도 라울과는 부부 사이라구."

"그럴 필요는 없는데"

"내가 그렇게 되길 원해도?"

마이클은 오랫동안 배네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봤다. 입술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물론 그렇겠지. 그렇게 많은 재산을 포기하진 못할 테니까."

"돈과는 관계가 없어. 라울은 아들을 바라고 있어."

"그래서 배네사는 아들을 낳아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구."

마이클은 갑자기 배네사의 손을 잡았다.

"이건 네 자신의 인생이야! 그놈은 너를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잖아?"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지?"

배네사는 괴로운 듯이 말했다.

"배네사가 병석에 누운 아버지 곁에 있었던 몇 주일 동안 그놈은 낯짝도 안 보였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 아이를 배지 않았더라면 그것으로 끝장이 났을 거라구. 물론 책임을 지려고 한 그 태도는 훌륭하지만, 죄의식을 이용하여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건 용서할 수 없어. 그렇게 아들을 갖고 싶다면 기꺼이 그 뜻에 따르려는 여자는 얼마든지 있을 거야."

"하지만 그이의 성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 말고는 없어. 어쨌든 내가 그이하고 이혼하는 일은 있을 수 없어. 마이클이 여기까지 오는 데 들어간 비용은 내가 전부 물어 주겠어. 모두가 내 책임이니까."

"돈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마이클은 잡은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나는 배네사가 걱정이야. 배네사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하지만 배네사가 이런 식으로 이용당하는 데는 참을 수가 없어."

"하지만 그렇게 해줘야겠어."

배네사는 얼굴이 창백해졌으나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 가지로 걱정을 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이젠 이미 때가 늦었어, 마이클."

"때가 늦고 이르고 할 건 없다구. 내 휴가는 앞으로 3주일이나 남아 있어. 브렌든이 이 배에 숙박시켜 주겠다고 말했어. 만일 무슨 일이 있어서 배네사의 마음이 변하거든 이곳에 돌아와 주겠다고 약속해 주겠어? 속박은 안해. 다만 내가 여기 있다는 걸 기억해 줘."

마이클의 말은 배네사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눈물이 눈 안에 가득 괴기 시작한다. 라울이 일찍이 내게 이 같은 뜨거운 사랑을 나타내 준 일이 있었던가? 마이클은 단지 나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서 왔다. 그의 요청을 어떻게 딱 잘라 거절할 수 있겠는가?

"약속하겠어."

배네사는 말했다.

갑판에 돌아가 보니 데크체어(갑판의 의자)에 앉아 있던 브렌든이 거북하고 어색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배네사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어. 저 사람이 배네사네 집까지 찾아갈 기세였으니까 말야."

"오히려 잘된 일이에요. 마이클은 언젠가 만나야만 했으니까."

"저 사람이라면 배네사를 쫓아 세계의 끝까지라도 갈 거야. 정말 대단한 사람이더군."

"그건 그래요. 나에겐 과분할 정도죠. 문제는 저 사람이 나의 유일무이한 남성은 아니라는 점이죠."

"나 같으면 사랑하는 것보다는 사랑받는 쪽을 택하겠는데. 그쪽이 훨씬 더 고통이 적으니까 말야."

브렌든은 여느 때와는 달리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그의 말이 옳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나에겐 아직도 희망이 남아 있다.

"이젠 여긴 안 오겠어요. 마이클에게도 내 심정을 얘기했어요."

"그래 저 사람도 그걸 받아들였나?"

"아직은만일 브렌이 저 사람을 여기서 나가라고 한다면 저 사람은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저 사람은 호텔이라도 찾아가겠지. 저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이상 더 돈을 쓰지 못하게 하려거든 이대로 내버려 둬. 마이클은 배에 대해서 조금은 아는 것 같으니까 일을 거들어 달라고 하지. 자기의 식비쯤은 벌 수 있겠지."

"하지만 브렌은 피지 제도에 갈 예정이었잖아요."

"그건 언제 가든 상관없는 일이야. 다행히도 나는 아무 것에도 속박당하고 있지 않으니까 말야."

정말로 그건 다행한 일이라고 배네사는 생각했다. 나도 역시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말을 들으면 그 대신에 뭣이든지 바칠 것이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간다. 뭣이나 다-영국 특유의 이슬비까지도 그립다.

마이클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와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생각난 것이다. 호화로이 사는 것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것은 아무런 고통도 없이 당장이라도 버리고 떠날 수 있다. 나를 여기에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은 라울의 존재일 뿐이다. 보상 없는 사랑을 위해서 이렇게 정처없이 떠도는 나의 마음이 많은 것을 희생한다는 건 얼마나 의미가 있는 일일까?

 

그로부터 2, 3일간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라울한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으며, 베네사도 처음부터 그런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로서는 그날 밤 일을 치름으로써 장래의 방침이 선 셈이다. 어쩌면 나는 또다시 임신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돌아오기로 된 날 아침, 그렇지는 않다는 증거를 보고 배네사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래서 라울에게는 또다시 나하고 잠자리를 같이할 이유가 생긴 셈이다.

문제는 나에게- 내가 결국은 도구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는 나에게 있다. 일단 자기가 바라는 것을 가지게 되면 라울은 얼마 안 가서 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녀는 마이클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는 라울의 품안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가슴 설레는 감동을 결코 주지는 않겠지만, 인생에는 그와 같은 잠깐 동안의 만족 이외에도 많은 것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마이클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다. 그리고 아직도 나를 기다려 주고 있다. 나만 분명하게 결심을 하면 라울도 역시 무리하게 붙잡지는 않을 것이다.

라울이 돌아온 것은 밤이 되어서였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마주앉았을 때, 그의 모습이 약간 변한 것을 배네사는 눈치 챘다. 평소에는 가벼운 잡담을 안하는 날이 없었는데, 오늘의 라울은 줄곧 입을 다물고는 뭔가에 정신이 홀려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당신은 틀림없이 지쳐 있어요. 1주일 동안에 두 번이나 적도(赤道)를 넘었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큰일이에요. 그 동안에 일어난 일은 제외하더라도 말예요."

파란 눈에 한순간 뭔가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바쁘긴 했지만 생각할 시간이 없을 정도는 아니었어, 배네사. 내가 당신에게 다음 아이를 낳으라고 강제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어. 그보다는 우선 우리들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이 선결문제야. 이미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너무 늦진 않았어요."

따뜻한 것이 천천히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아이는 생기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그러는 편이 더 좋지. 어때, 1, 2주일 동안 단둘이서 로얄에 가지 않겠어? 거기 가면 조금은 숨 좀 돌리면서 푹 쉴 수 있을지도 모르지."

로얄. 모든 일이 시작된 곳. 배네사의 눈이 빛났다.

"가고 싶어요. 언제요?"

"2, 3일 안에 전화도 연결하지 못하게 해놓고, 아무한테도 방해를 받지 않고 단둘이서 지내는 거야."

배네사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서 라울의 얼굴을 엿보았다.

"어째서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시죠? 무슨 일이 있었어요, 라울?"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되었어. 우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배네사. 맨 처음부터 말야.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실수를 하지 말자구."

그는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그 말을 듣게 될 것이라고 배네사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건 조금도 괴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침식사 후에 시몬이 전화를 걸어 두 사람을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었다.

"라울더러 기모노(일본 옷)를 선물로 가져다주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주어요. 이번에 도쿄에 가면 사다 주겠다고 약속했었으니까요."

"깜박 잊었는데"

전해 주는 말을 듣더니 라울이 말했다.

"내 아내에게 선물을 사다 주는 것조차 잊어버렸어!"

배네사는 웃었다.

"그렇게 되길 잘했어요. 뭔가 꺼림칙한 일이 있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요."

"뭐에 대해서?"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게이샤가 있는 곳엘 가겠다고 당신이 위협했잖아요. 그런데 정말로 가봤어요?"

", 두 번 갔지.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흥분시키는 건 아니야.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은 없고, 비즈니스맨의 연회석에 불려올 따름이야. 게이샤는 노래와 춤과 회화 훈련을 받은 파티의 컴패니언(내빈의 접대 역) 같은 거야."

라울은 가벼운 어조로 설명했다.

그날은 줄곧 그런 식으로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친구 사이 같은 홀가분한 분위기 속에서. 하지만 두 사람은 전에 없이 친밀했다. 르노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 배네사는 라일락 빛 실크저지로 된 팬츠슈트를 선택했다.

라일락 빛은 그녀의 머리 색깔을 아주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 머리는 지금은 길어진데다가 누메아에서도 일류 미장원에서 손질을 한 덕분에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데, 보기 좋게 어깨에 흘러내리고 있다. 거울에 비친 지금의 자기와 3개월 전의 이미지와를 비교해 보고, 배네사는 돈이 지닌 위력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섬의 사교장에 나가도 좋으리라는 생각까지 들곤 했다.

라울은 크림 빛 슈트에 검정 셔츠를 입고 항상 걸고 다니는 금목걸이를 목 언저리에 걸고 있었다. 머리끝에서부터 구두 끝에 이르기까지 눈곱만한 빈틈도 없는 프랑스 남성 바로 그것이었다. 늘씬하고 자신에 넘쳐 있으며 매력적이었다. 그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동작 하나하나가 지금도 배네사의 가슴을 들뜨게 하는 것이다.

그날 밤의 시몬은 표정이 유달리 환해 보였다. 나중에 단둘이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그녀는 배네사에게 그 이유를 털어놓았다.

"당신이 사고를 당한 바로 그날 확실히 알았어요.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만"

"축하해요. 얘기해 주셔서 기뻐요."

배네사는 진심으로 말했다.

"언제부터예요?"

"3개월이야. 만일 이번에도 쌍동이를 낳는다면 피에르는 이제 그만 낳으라고 할 거예요. 하지만 나는 쌍둥이를 원해요. 크리스천을 위해서 아들 쌍동이를 말예요."

"피에르가 라울에게 얘기할까요?"

"으응, 당신이 해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돌아오는 길에 차 속에서 그 얘기를 하니까 라울은 씁쓸하게 웃었다.

"시몬이 너무 신경을 쓰는구먼. 요전번에는 내가 맨 먼저 들었었지. 나는 크리스천의 대부(代父)."

"나더러도 다음에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지어 주는 대모가 되어 달라더군요. 아직은 좀 빠르지만 물론 그러마고 대답했죠."

배네사는 라울의 옆얼굴을 쳐다보면서 망설이면서 물었다.

"당신은 아직도 내가 일부러 유산시켰다고 생각하세요?"

"아냐, 어린애를 특히 원하지 않았다 해도 당신이 그런 계산을 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그때는 나도 놀란 나머지 어떻게 할 바를 몰랐어.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아이를 갖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그렇지도 않았지만, 우리들의 관계는 변해가고 있어요. 다음번에는 좀 더 조심을 하겠어요."

"다음번에는 우리 둘이 다 같이 단단히 조심하자구, 귀여운 꼬마 사모님."

라울은 안심시키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식으로 불러 준 것은 잠자리를 같이할 때 이외에서는 처음이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말로써 애무할 속셈으로.

"이젠 슬슬 본격적으로 프랑스 어를 공부해야겠어요."

배네사는 프랑스 어로 말해 보았다.

"당신이 원한다면 해보라구."

하고 라울은 한쪽 손으로 가볍게 아내의 볼을 쓰다듬었다.

"뭐든지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집에 도착했을 때는 12시가 다 되어서였다.

"자기 전에 한잔하고 싶은데, 같이 할까?"

오늘밤은 뭐든지 같이 하고 싶은 심정이다. 배네사는 따스한 행복감에 감싸여 있었다. 배네사는 서재 안에 있는 팔걸이의자에 느긋하게 앉아서 남편이 설치한 바에서 술잔을 꺼내어 술을 따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의 정확한 동작은 반할 정도였다. 그 손가락이 몸에 닿을 때의 감촉을 그녀는 생각해 보고 있었다.

지금은 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지만 로얄에 갈 때에는 모든 것이 완벽할 것이다. 우리는 후미진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그 작은 오두막에서 발가벗고 포옹하는 거다. 지난 3개월 동안에 일어났던 갖가지 사건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는 없지만, 그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로 먼 옛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술은 3인분 준비하세요."

문 밖에서 크리스탈의 목소리가 났다. 베네사의 꿈은 유리처럼 산산이 깨져 버린 느낌이었다. 배네사는 뒤를 돌아다보고 적개심으로 가득 찬 노란 옥빛 눈으로 마주 쳐다보고 나서 눈길을 남편 쪽으로 돌렸다. 그는 디캔터(마개 있는 유리병)을 든 채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렇게 쉽게는 해결이 안 돼요. 저 여자에겐 진실을 가르쳐 줘야 해요."

하고 크리스탈은 금속처럼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진실이라니! 무슨 소리예요?"

자기의 목소리가 아닌 듯한 음성이 배네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뻔하잖아요."

크리스탈의 시선이 라울을 붙잡았다.

"라울과 나는 이틀 전에 함께 도쿄에 있었어요."


10

맨 먼저 움직인 것은 라울이었다. 그는 위스키를 따르고 나더니,

"뭘 들 거야?"

하고 물었다.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걸 알고 있죠? 알고 있을 거예요."

크리스탈도 냉정히 대꾸했다.

라울은 딴 술잔에 얼음과 진을 넣고 탄산수를 따랐다.

"올 테면 온다고 미리 알려 줬더라면 좋았을 걸, 정말"

"당신이 나빠요.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기나 하세요?"

"내가 한 말을 이해해 준 줄로만 알았지."

"이해는 했어요.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나는 시간을 들여 생각해 봤어요. 당신은 나를 이용한 거예요, 라울. 당신은"

"그만둬요!"

배네사가 나직한 소리로 가로막았다.

"내가 알 수 있도록 설명해요!"

그녀는 혐오감을 숨기려고도 않고 라울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한 가지만 대답해요. 왜 그래요?"

라울은 그 의미를 이해한 듯했다. 그는 억양이 없는 소리로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당신과 단둘이서 얘기하고 싶어. 그전에 먼저 브랜디를 들라구."

"아무 것도 필요없어요, 당신이 주는 것 따위는! 지금이나 앞으로도 말예요! 얘기는 둘이서나 해요. 나는 짐을 꾸릴 테니까."

"지금 당장 꾸리지 않아도 되잖나. 먼저 얘길 듣고 나서 해도"

"얘기 같은 거 들어봤자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요."

그녀는 몹시 불쾌하게 내뱉었다.

"당신들은 잘도 어울려요!"

문으로 돌진해 나가는 배네사를 위해서 크리스탈은 몸을 비켜 길을 내주었다. 그 얼굴에는 미안해하는 감정 같은 건 눈곱만큼도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은 내 것을 새치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도 역시 그렇게 한 거예요. 이젠 서로 비겼어요."

배네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는 것이다. 바로 10분 전만 해도 나는 구름이라도 타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이 방에 들어왔었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소리를 내면서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지 알 수 없다. 지금은 다만 이 집에서, 라울로부터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할 뿐이다.

오늘밤은 시내 호텔에서 묵자. 침실에서 전화로 택시를 부르면 될 거야. 짐은 당장 필요한 것만 가지고 가고, 나머지는 나중에 가지러 오자. 라울이 사준 것은 한 가지도 가져가지 않겠어.

슬랙스와 면 셔츠로 갈아입고 작은 백의 파스너를 잠갔을 때, 라울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멈춰 서서 굳어진 표정으로 배네사가 백을 방바닥에 놓는 걸 보고 있었다.

"얘기를 들어봐. 이대로 내보내지 않을 거야, 배네사."

"시간이 없어요. 이미 택시를 불렀어요."

"택시라면 기다리라고 하면 돼."

라울은 문을 잠갔다.

"어쨌든 앉으라구."

"서 있는 편이 나아요. 그래 뭐예요, 얘기라는 건?"

라울은 한숨을 내쉬고 양손을 폈다.

"도쿄에서 크리스탈을 만날 의도는 없었어, 간다는 얘긴 했지만. 그것뿐이었어."

"결혼한 후에도 크리스탈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나요?"

"경우에 따라서는 그랬지. 이제까지의 세월을 생각하면 깨끗이 인연을 끊어 버릴 순 없었지."

"그건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는 뜻이겠죠?"

배네사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당신을 원망하진 않아요, 라울. 임신만 하지 않았더라면 난 그저 당신 곁을 스쳐 지나는 여자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내가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왜 돌려보내지 않았어요? 크리스탈도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아들을 낳을 수 있을 텐데"

"내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라울은 갑자기 모든 일에 권태를 느끼고 지쳐 버린 듯이 도어에 기대섰다.

"나는 언젠가 마음이 약해졌을 때 크리스탈에게 구혼을 했었지. 그녀가 승낙한 이상 그 신청을 취소할 수는 없었던 거야. 난 저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잘못이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어."

"만일 내가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당신은 크리스탈과 결혼했겠죠?"

"그 당시로서는 아마도 그랬겠지. 저애가 얼마나 제 어머니를 닮았는지를 아직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어쨌다는 거예요? 당신이 도쿄에서 저 여자하고 같이 있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어째서 나에 관한 생각을 바꾸었느냐 하는 거예요."

"내가 당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안 떠오르나? 내가 어리석었던 거야. 눈앞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않다니."

배네사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럼 깨달은 것은 크리스탈과 침대로 들어가기 전이에요, 아니면 그 후예요?"

"크리스탈과 밤을 같이 지내진 않았어."

"그 여자는 그랬다는 말투였잖아요."

"당신에게 그렇게 믿게 하려고 했을 뿐이야. 자기의 뜻대로 안 된 일에 대한 보복을 할 생각이었던 게지. 간신히 내 눈을 뜨게 해준 데 대해서는 저애한테 감사하지 않으면 안 돼. 저애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기가 뭘 하고 싶은가 하는 것뿐이야. 전부터 줄곧 그래 왔어."

"당신은 몇 년 동안이나 저 여자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었었다는 거로군요?"

배네사는 냉소적인 말투를 바꾸지 않았다.

"나는 확실히 바보였어요. 하지만 이 정도는 알아요. 당신은 우리 두 사람을 다 같이 당신 곁에 두려고 했던 거예요. 나는 얌전하고 정숙한 아내, 크리스탈은 애인으로서 말예요. 아버지나 자식이나 다 똑같은 족속이군요! 다만 공교롭게도 크리스탈은 그러한 결정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던 거예요. 당연한 일이죠."

라울은 입술을 꼭 다물고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고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할 말이 없어."

"그렇지 않단 말예요?"

배네사는 백을 집어 들었다.

"비켜 주지 않겠어요?"

한순간 망설인 다음, 라울은 몸을 비켜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말리진 않겠어."

배네사는 라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앞을 지나서 긴 나선형 층계를 내려가 홀로 나섰다. 크리스탈이 글라스를 한쪽 손에 들고 미소를 지으면서 서 있었다.

"벌써 가시나요? 섭섭해서 어떡하죠!"

택시 운전사는 행선지를 묻고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일이 되면 뒤탕플의 부인이 호텔에서 묵은 사실을 섬 안에 있는 주민들이 알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는 내일 가서 생각하기로 하자. 오늘밤만은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튿날 아침 호텔의 메이드가 소제를 하고 있는 동안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배네사에게 마이클이 찾아왔다. 며칠간의 바다 생활을 하느라고 새까맣게 햇볕에 그을어 있었다.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과 피부가 그에게 잘 어울리고 있었다.

"브렌든이 선원들한테서 소문을 들은 거야. 무슨 일이 있었나, 베네사?"

"헤어지게 됐어."

배네사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아직 얘기하고 싶지 않아 마이클, 미안하지만."

"이젠 어쩔 도리가 없는 거야?"

"별수가 없어. 여기 있을 이유도 없으니까 얼마 안 있어 영국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라울이 여기서 이혼수속을 밟든가, 내가 저기 가서 하든가, 어느 쪽이든 빠른 쪽을 택할 거야."

"이혼은 확실히 3년이 지나지 않으면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법률이 개정되지 않았다면."

3? 겨우 6주일밖에 안 된 결혼을 해소하는 데 3년이나 기다려야 해?

"할 수 없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패스포트와 소지품을 그냥 집에 두고 왔는데"

"내가 가져다 줄까?"

"정말?"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누가 가든 가야 할 게 아냐. 간 김에 라울이라는 남자에게 지옥이나 가라고 저주의 말을 퍼붓고 올 테야."

"그이는 마이클에 대해서 몰라. 적어도 마이클이 여기 와 있는 사실은."

"그렇다면 이제 슬슬 알려 줄 때도 됐지 뭐. 짐은 많이 있나?"

"아니, 슈트케이스로 두 개 정도일 거야. 칼라니에게 전해 줄 메모를 쓰겠어. 하지만정말 괜찮아?"

"괜찮고말고. 나 말고 누구한테 부탁하려고 그래?"

사실 마이클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라울을 만나지 않고 이곳을 떠날 수 있다면 물론 그러는 게 좋을 것이다. 어젯밤 고민할 만큼 고민했기 때문에 다행히도 오늘 아침에는 이젠 무감각 상태가 되어 있다. 마이클이 용케 패스포트를 찾아다 준다면 2, 3일 안에 출발할 수가 있을 것이다.

다행히 저축한 돈은 아직 영국에 그대로 놓아 두었다. 서서히 시간을 들여 직장을 찾으면 된다. 프랑스의 법률에서는 이혼을 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알 수 없지만. 가령 오래 걸린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유로운 몸이 될 날이 온다. 배네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 다음의 일은 아직 계산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같이 줄리아 호에 가자구. 하루종일 여기서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도 없겠지. 브렌든도 걱정하고 있어."

마이클이 말했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호텔에는 이전의 성을 써서 체크 인해 놓았지만, 여기서는 그녀가 누구인지 다들 알고 있었다. 벌써부터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그녀에게 눈총을 보내기 시작하고 있다.

브렌든은 짤막한 말로 동정을 나타냈을 뿐이었다. 그는 3인분의 점심을 만들고, 솜씨 있게 맛있는 커피를 끓여 주었다. 그것이 끝나자 마이클에게 빌려 주기 위해서 차의 트렁크를 소제하기 시작한다.

"정말로 괜찮겠어? 오늘 안 가도 되는데"

"빠른 편이 좋겠지. 배네사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그에게 분명히 알려 주기 위해서."

"하긴 그렇군집은 알고 있어?"

"그럼, 브렌든이 가르쳐 주었어. 굉장한 대저택이더군."

", 그래."

"섭섭해?"

"조금은."

배네사는 솔직히 대답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 사람은 금세 그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거야. 하지만 곧 익숙해지지.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거야."

"나도 같이 가겠어. 아니, 하고 싶은 말은 알고 있어. 하지만 상관없어. 배네사가 나를 필요하다고 여길 때, 거기에 있어 주고 싶으니까."

"고마워. 하지만 나에겐 그런 가치는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마이클은 명랑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가치가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마이클을 떠나보내면서 배네사는 그를 마지막의 생명선으로 이용하는 것을 너무나도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깊은 감정을 품는 일은 이젠 없을 테니까. 나는 앞으로 누구든지 그런 식으로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브렌든이 수리할 필요가 있는 낚싯대를 들고 갑판으로 나왔다.

"요전번에도 4백 파운드의 대어를 낚은 손님이 있어서 줄리아 호의 평판은 점점 더 올라갔어."

"그렇다면 꼭 여기 있으면 되잖아요? 여기라면 친구도 있고"

"진짜 친구는 다들 가버리는군. 당신들이 영국으로 떠날 때 나도 출발할 거야. 서류고 뭐고 전부 준비해 놓았어."

브렌든은 잠시 수리하기에 열중하고 있다가 문득 손을 멈추고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들도 같이 갈까? 마이클과 배네사 말야. 이번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마이클은 진정으로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지."

"마이클이?"

"그래, 마이클의 얘기로는 반드시 영국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없는 모양이야. 게다가 마이클도 역시 방랑벽이 상당히 많은 것 같아. 줄리아라면 셋이 지낼 수 있어. 어떻게 생각해, ?"

배네사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이해하겠지?"

"하고말고. 하지만 실제로 돌아가 보면 의외로 실망하지나 않을까? 배네사는 아마도 직장과 그리고 아파트를 얻게 되겠지. 그런 다음에는 또다시 한없이 옛날과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야. 지금은 저 영국 특유의 기후조차도 그립겠지만- 나도 이상하게도 이따금 그런 감정에 사로잡히지- 여기서의 생활에 익숙해진 몸에는 그런 날씨는 좀 심한 것 같아."

"참고 견디겠어. 마이클은 가고 싶으면 가면 되잖아?"

"그렇게는 안 돼. 배네사가 돌아가면 마이클도 돌아갈 거야. 배네사에 대해서는 가망성이 없다는 걸 마이클에게 확실히 말해 주는 게 어때? 그러면 그도 역시 자기의 생활태도를 바꾸게 될 거야."

과연 옳은 말이었다. 나도 역시 마이클에게 의지하지 말고, 내 자신의 힘으로 독립할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그를 설득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다.

마이클은 3시 전에 두 개의 슈트케이스에 가득히 짐을 넣어 가지고 돌아왔으나 패스포트만은 못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본인이 찾으러 오지 않으면 안 줄 모양이야."

"마이클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그이한테 얘기했어?"

", 분명히 말해 줬지. 하지만 그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어. 그의 유일한 관심거리는 배네사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뿐이었어."

"정말로 알고 싶으면 조사해 보면 되는 거야. 금세 알 수 있을걸 뭐."

"배네사가 투숙한 호텔은 알고 있더군. 배네사가 거기에 없다는 것도 말야."

마이클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투를 바꾸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내가 예상했던 사나이와는 전연 달랐어. 배네사는 정말로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알고 있어."

"그이 곁으로 되돌아가야 한단 말야?"

"성급한 짓을 한 것 같아. 그는 진심으로 배네사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 것 같던데"

배네사는 가슴이 설렘을 느끼면서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이 곁에 금발 여자는 없었어? 25세쯤 되는?"

"못 보았는데. 그게 원인이었나?"

배네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라울의 이복여동생인데, 그이하고 결혼하기로 된 여자였어."

"어쨌든 못 보았어. 짐을 챙기고 있는 사이에 우린 서재에서 얘길 했지. 상당히 예의가 바르더군."

햇빛이 반짝거리는 해변을 바라보면서 배네사는 말했다.

"패스포트는 관계 당국에 고발해도 괜찮아. 빼앗아 둘 권리는 라울에겐 없을 거야."

"그는 권리니 뭐니 하는 데에는 흥미가 없는 모양이야. 다만 배네사가 멀리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패스포트를 잡고 있는 거야. 그거야 나도 이해할 수 있지."

배네사는 마이클의 마음을 살피기라도 하듯이 쳐다보았다.

"며칠 전 마이클은 나더러 헤어지라고 말했잖아."

"며칠 전에는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 뒤 약간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았지."

"어떤 결론이 나왔지?"

마이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나는 배네사가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어. 나에게 배네사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다면 하늘이든 땅이든 움직일 거야. 하지만 그는 나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돈이 전부는 아니야."

배네사는 다소 거칠게 대꾸했다.

"돈만이 아니야. 생활방식 전반에 걸쳐서야. 여기 올 때까지 나는 내 생활태도가 좁은 범위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깨닫지 못했어."

마이클은 약간 망설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떠날 바에는 단계적으로 그걸 시행해 보지 않겠어? 여기서나 피지 제도에서나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 정도로 간단해."

배네사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지간히 이곳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남쪽 바다가 마이클에게 마법을 건 거야."

"아마 그런 것 같아. 모처럼 여기까지 왔다가 여러 가지를 구경하고 다니지 않는 건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해."

"직장은 어떻게 할 거야?"

"또 딴 델 찾으면 되지. 한 군데에 너무 오래 있었다고 생각한 정도이니까. 어때, 배네사도 같이 가지 않겠어?"

마이클은 열심히 유혹했다.

확실히 그 이야기는 흥미있는 얘기이긴 하다. 3개월이나 반년쯤 늦어진다고 해서 영국이 어디론지 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만일 내가 거부한다면 마이클도 또한 피지 제도에 갈 예정을 단념할 것이라는 점이다. 모처럼의 기회를 그로부터 빼앗는 짓을 해도 좋은 걸까?

마이클의 전송을 받은 후 1시간쯤 배네사는 슈트케이스 속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가려내고 있었다. 이전부터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 아닌 것은 전부 따로 제쳐 놓았다. 나중에 소포를 만들어 라울에게 부치기 위해서였다.

7시 반이 되어서 그녀는 식사하러 밖으로 나갔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 아니라 따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뒷골목에 있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벌써 9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문을 닫고 커튼을 당기자 마치 바깥 세계로부터 격리당한 듯한 고독감이 엄습했다. 브렌든이나 마이클과 피지 제도에 가면 적어도 고독감 때문에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만 하더라도 대단한 것이다.

잠옷으로 갈아입으려 했을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하녀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도어를 연 배네사는 그곳에 나타난 라울의 모습을 보고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조금 전에 왔는데, 당신은 없더군. 줄리아 호에도 가보았지."

라울은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식사하러 나갔다 왔어요. 뭘 하러 오셨어요?"

"얘길 하려고."

라울은 방안을 둘러보더니 경멸의 표정을 나타냈다.

"좀 더 나은 방이 없었나?"

"이 방만으로도 충분해요. 얘기란 무슨 얘긴가요?"

"집에 돌아가자는 얘기야. 크리스탈은 오늘 아침 떠났어. 이젠 두번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그걸로 모든 게 해결되었다는 건가요?"

"도움은 되지."

"충분하지는 않아요. 당신과 그 여자가 도쿄에서 같이 있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

"도쿄에서 있었던 일은 얘길 했을 텐데"

"네에, 확실히 들었어요."

배네사는 턱을 쑥 쳐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지금도 믿지 않아요."

분노가 한순간 라울의 눈 속에서 타올랐다.

"억지로 끌고 돌아갈 수도 있어!"

"경찰 소동이 벌어지게요? 가문의 이름에 틀림없이 손상을 입게 되겠지요."

그녀는 떨리는 걸 감추기 위해서 손을 플레어스커트의 주머니 속에 찔러넣었다.

"당신은 언제나 승리자가 될 수는 없어요, 라울. 갖고 싶은 걸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딴 여성을 찾으면 되잖아요. 어려운 일은 아닐 거예요. 당신은 여성에게 줄 수 있는 걸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요."

"나를 너무 화나게 하지 말라구."

라울은 턱을 바짝 당겼다.

"그래,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야?"

"마이클과 브렌든이랑 함께 피지 제도에 갈 거예요. 아마도 통가 제도에도 갈 거고요."

"하루 동안에 모든 걸 결정해 버렸군."

"그래요,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그 기회를 놓치는 건 억울한 일이에요. 그렇죠?"

"그렇게 하고 싶거든 한번 해보지."

라울은 웃옷 안주머니에서 낯익은 검정 수첩을 꺼냈다.

"이게 필요하겠지."

배네사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그걸 받아들었다.

"내가 스스로 찾으러 가지 않으면 안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짓을 해서 무슨 소용이야? 당신은 내가 알고 싶은 걸 전부 얘기했어. 당신 말이 옳아. 붙잡아 두려고 했던 내가 어리석었어. 언제 출발하는 거야?"

"아직은 몰라요. 2, 3일 안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너무 쉽게 물러섰기 때문에 배네사는 허탈한 심정으로 힘없이 자신 없는 말투로 말했다.

"돈은 있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당장의 비용을 대기 위해서 환전해 둔 게 있어요. 부족하게 되면 영국의 은행에 연락하여 송금해 달라고 하면 되니까요."

"저금을 영국에 그냥 놔둔 것이 결국은 잘한 일이었군."

"그래요."

두 사람은 마치 타인처럼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빨리 나가 주어 이 견디기 어려운 긴장감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으면. 그는 가까이 있다- 너무 가까이 있다. 그의 사나이다운 냄새도, 열린 목 언저리로 보이는 갈색 피부나 곱슬곱슬한 가슴털은 너무나 자극적이다. 나는 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배네사는 그와의 사이에 울타리를 만들기라도 하듯이 손을 쳐들었다.

"이젠 끝났어요."

라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것 같군. 2, 3일 안에 마음이 변하거든내가 있는 곳은 알고 있겠지?"

배네사는 소리내어 웃었다.

"이상하네요. 그건 마이클이 한 말과 똑같네요. 하지만 나는 생각을 바꾸진 않아요, 이번만큼은."

파란 눈이 번쩍 빛났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작별인사를 해두는 게 좋겠군."

배네사는 뒤로 물러섰으나 때가 늦어 그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키스는 불같이 뜨거워졌지만 거칠지는 않았다. 그녀의 감각은 눈을 뜨고, 육체는 자연히 반응을 나타냈다. 줄곧 그의 곁에 있으면서 모든 걸 잊어버릴 수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포옹으로부터 몸을 빼내는 데는 대단한 의지의 힘이 필요했다. 목소리의 떨림을 조절할 만한 힘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나가요, 라울. 제발 부탁이에요!"

라울은 거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그 말에 따랐다. 배네사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겁고, 몸은 떨리고 있었다. 라울은 이젠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최후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2, 3일간은 우물쭈물 고민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바쁜 것이 배네사에겐 커다란 다행이었다. 저장고의 정리며 식료품의 저장 등, 할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마이클이 이렇게 생기있게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는 마치 사람이 변하기라도 한 듯이 보였다.

"여기까지 배네사를 쫓아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인생에 무엇이 빠져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말았을 거야. 이건 정말이지 완전히 딴 세계야."

마이클이 출발하기 전날 밤에 말했다.

"남쪽 바다를 아무런 목적도 없이 표류하기만 하는 생활을 언제까지 계속해 나갈 수 있느냐가 문제야."

"그건 알고 있어.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고. 하지만 아무도 나한테서 추억을 빼앗을 수는 없어. 영국의 어두운 겨울 저녁 같은 때에 그걸 꺼내 바라보기 위해서야. 나는 지도를 보면서 찾아간 곳들을 마음속에 떠올리겠지. 다시 한번 찾아갈 기회나 있을지 모르지.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야. 남자는 책임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아버님도 그렇게 하셨어."

배네사는 조용히 말했다.

"애당초부터 결혼 자체가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었던 게야. 아버지는 타고난 방랑자야. 이곳에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던 것은 단지 늙어서 더 이상 떠돌아다니가 싫어졌다는 이유 때문이었어."

아마도 그의 말이 옳을는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지 않고 할지라도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이 되었든 상관없는 일이다. 과거는 아버지와 함께 땅에 묻혀 버렸으니까.

세 사람은 금요일 아침 일찍 출발했다. 어쩌면 두번 다시는 못 볼 섬을 배네사는 돌아다보지 않았다. 지금은 눈앞에 전개되는 새로운 풍경만을 바라볼 뿐이다. 명랑하게 지내기로 결심하고 있던 그녀는 10시 반이 되자 커피를 끓여 찻잔 3개를 갑판으로 들고 갔다.

바다는 잔잔하고 수면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주 멋진 출항이군요."

배네사는 향기가 짙게 풍기는 커피에 입을 댔다.

"내가 말하기는 뭣하지만, 정말 맛있는 커피야."

"조금만 더 연습을 하면 나와 마찬가지로 맛있게 끓일 수 있어."

브렌든이 말했다.

"샴페인을 가지고 올걸 그랬군."

"럼주도 가져올걸."

마이클의 얼굴은 모험에의 기대로 가득차 있다.

배네사는 즐거워하는 마이클의 모습이 재미있어서 그에게 웃음을 던져 주었다.

"앵무새와 의족이 없는 게 유감이군!"

"해적 얘긴가?"

브렌든이 이상한 말투로 말했다.

"우릴 쫓아오는 배가 있다. 연안 경비정은 아닌 듯한데속도를 늦출까, 아니면 이대로 달아날까?"

두 사람은 일제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선체가 낮은 새하얀 배가 스피드를 내어 다가오고 있다.

"에트왈 호야."

배네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밀어닥치는 감정의 파도에 압도되어 잠시 동안은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저걸 떼어 놓아, 브렌! 얼른!"

"우리 쪽이 먼저 연료가 떨어지고 말 거야. 미안하지만 배를 세우겠어. 일부러 추격해 왔으니까 상당히 중대한 일이 있는 모양이지."

배네사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시도라면 이번에도 뜻대로 안 된다는 걸 알려 줄 수밖에 없다.

에트왈 호는 금세 따라붙었다. 흰 셔츠와 쇼트팬츠 차림으로 경쾌하게 갑판에 올라온 라울은 브렌든을 향해서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덕분에 서로들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지 않게 됐어."

그는 배네사 쪽으로 돌아섰다.

"나와 같이 돌아가."

"잠깐 기다려. 배네사는 이미"

말을 하기 시작한 마이클의 목소리가 사라져 갔다. 잠시 동안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뚫어지게 라울을 쳐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그 긴장을 풀었다.

"알았어, 그 다음은 배네사에게 일임하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는 배네사에게 마이클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배네사는 사실은 피지 제도에 가고 싶은 건 아니지? 나 때문에 가겠다고 한 거지? 이젠 고집을 부리지 말아. 도대체 무엇 때문에 뻗대는 거야?"

"자존심이에요. 감자 부대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물건이 아니에요!"

"당신은 내 아내야. 내 거란 말야. 당신이 같이 가지 않는 한 나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어."

"브렌든! 말 좀 해줘!"

"나도 마이클과 같은 의견이야. 이젠 배네사의 사정을 잘 알았으니까, 배네사가 본심으로는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어. 저 사람하고 같이 가라구. 사실은 그렇게 하고 싶다는 걸 배네사도 알잖아."

배네사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세 남자한테 내 장래를 결정해 달라고 말할 의도는 없어!"

"두 사람의 친구와 남편이야."

라울이 정정한다. 그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눈에는 굳은 결의가 나타나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한 걸음만 나오면 되는 거야. 할 수 있지?"

"안 돼요."

양보하고 싶은 심정은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응어러져 있는 완고한 고집이 도저히 그걸 허락치 않았다.

"날 내버려 둬요!"

"아냐, 그렇게 할 순 없어.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해, 배네사."

그 말에 그녀의 투쟁심은 순식간에 봄눈 녹듯 사라졌다. 그녀는 흐릿한 눈빛으로 라울을 쳐다봤다. 필요? 사랑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정도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두 사람 다 서로를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다.

마이클이 침묵을 깼다.

"이젠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알게 됐지?"

작별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다음엔 언제 또다시 만날지 알 수 없다. 배의 뒤쪽 끝에 우두커니 서서 줄리아 호가 떠나 버리는 것을 바라다보고 나서 배네사는 키를 잡고 있는 라울 쪽을 천천히 돌아다보았다.

"우리가 오늘 출발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어떤 문제든 전심전력을 기울이면 다 알 수 있게 되는 거야. 무슨 일이 있든지 당신을 저 배에서 데리고 나오기로 결심했었으니까."

"당신과는 다시는 못 만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배네사의 목소리가 쉰 것처럼 들렸다.

"요전날 밤부터 이렇게 하실 작정이었어요?"

"아암 그렇지. 다만 어떻게 해서 데려오느냐가 문제라고 생각했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는 걸 알았지."

그는 나직이 덧붙였다.

"이제부터 로얄에 간다."

휴식을 취하는 곳이라고 라울은 이전에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서로 상대방을 조금씩 알게 된다면 좀 더 깊은 관계로 맺어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우선 상대방을 믿어야 한다.

"물어선 안 되는 말일지는 모르지만, 크리스탈은 정말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요?"

"이번에야말로 진짜야. 그애는 무엇이고 다 가져갔어."

"하지만 20년이라는 건 기나긴 세월이에요."

"마지막 그 애는 모든 걸 때려 부쉈어. 지금은 그애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아. 도쿄에 갔던 일, 당신은 아직도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아뇨, 지금은 그렇진 않아요. 만일 그랬었다면 크리스탈은 당신에게 그렇게 화를 내진 않았을 거예요."

"그건 빈정거리는 말인가?"

"단순한 관찰이에요."

로얄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섬을 바라다보면서 배네사는 그리운 곳의 하나하나를 확인해 갔다. 선창으로 들어갈 때 두 개의 바위가 쑥 내밀어 있는 부분에 에워싸여 있는 그 후미가 언뜻 보였다.

저택 쪽으로 걸어가려고 하는 배네사를 라울이 멈추게 했다.

"그쪽이 아니야, 이쪽이야. 우리에겐 아직도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게 있어. 그것에 알맞은 곳은 한 군데밖에 없어."

오두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모래 바닥은 사각거려서 발에 닿는 감촉이 좋았다. 처음에는 망설이고 있던 배네사도 옷을 한장 한장 벗어던짐과 함께 마음속에 맺혀 있는 집착과 구속를 벗어던지고 있었다. 나는 하마터면 이 사람을 잃을 뻔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기만 해도 견딜 수가 없다.

황홀한 한때가 지난 뒤 라울은 그녀의 몸에 손을 얹은 채 그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랑해.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지난 며칠 동안 자나깨나 당신 생각만을 하고 있었어."

배네사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좀 더 빨리 왔을 텐데언제 그걸 알았어요?"

"도쿄에서 내 마음이 분명해진 거야. 당신도 같은 심정이 되는 데는 이미 너무 늦은 게 아닐까 해서 불안했지."

"사랑에 빠진 건 내가 먼저였어요. 3개월 전에 이 오두막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상처받을까 봐서 나 자신으로서도 그걸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거예요. 오늘 아침 출항했을 때 나는 이미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어요. 요전날 밤 고집을 부려 당신을 내쫓은 내가 잘못이었다고 생각하니까 더욱더 가슴이 아팠어요."

"하지만 모든 게 너무 늦지는 않았어. 그것이 중요한 거야."

라울은 고개를 쳐들어 가슴에 대고 키스를 하고, 그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는 걸 보고 미소를 지었다.

"영국 여자는 불감증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필요한 건 프랑스 남자와의 결합이에요!"

배네사는 그의 파란 눈을 들여다보았다.

"사랑해요, 라울. 발음에 자신이 있으면 프랑스 어로 말해야겠지만!"

"이제 곧 잘하게 될 거야. 그때까지는 영어로 하는 걸 참아 주지."

두 사람 사이의 정열이 또다시 고조되어 갔다.

그는 열에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방을 해야겠어. 아이는 좀 더 나중에 낳기로 했으니까."

"아아니, 괜찮아요. 이젠 연기하지 않아도 좋아요."

배네사는 미친 듯이 그를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하얀 해안선에 평행으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서쪽을 향해서 줄달음쳐 간다. 발코니에서 그것을 바라다보면서 배네사는 말했다.

"여보, 저 배가 줄리아 호 같잖아요?"

라울이 등 뒤에 와서 고개를 저었다.

"너무 작은데. 무엇보다도 첫째로, 브렌든이 타히티 섬에서 편지를 띄운 지가 1주일도 안 되잖아. 날개가 돋치기라도 하지 않은 이상 벌써 여기까지 오기는 불가능해."

"그렇군요. 언제든 우리들이 또 브렌든을 만났으면 좋겠는데"

"지금으로서는 옛날의 보이프렌드로 만족하라구. 다만 오늘밤 그를 환영할 때에는 주의해야 해. 프랑스 여성은 유별나게 질투가 강하니까 말야."

배네사는 웃었다.

"마이클이 통가에서 신붓감을 발견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게다가 직장까지도 말예요."

그녀는 옆에 앉은 검은 머리를 가진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그가 주는 영향은 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당신 덕분이에요."

"나는 소개해 주었을 뿐이야. 애인을 발견하는 데에는 조금도 힘이 되어 주지 못했어."

"세상에는 짝을 맞춰 줘도 성사가 안 되는 수도 있군요."

그녀는 남편의 허리를 팔로 끼고서 머리를 어깨에 기대고는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마이클과 그녀도 우리들만큼이나 행운을 만났으면 좋겠는데!"

"운보다 이끌어나가는 방법의 좋고 나쁨에 달려 있는 거야. 원래 소질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 당신은 누메아에서도 가장 사교적이라는 평을 듣는 여주인공이야."

"나의 또 하나의 공로도 잊지 마세요."

배네사는 잔디밭에서 유모와 즐겁게 놀고 있는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만들어낸 솜씨에 불만이 있다고는 못하시겠죠?"

라울은 웃었다.

"저놈은 겉보기로는 프랑스 인이지만, 제 엄마한테서 물려받은 영국 정신을 지니고 있어. 여간한 일에는 기가 꺾이지 않으니까 말야."

"당신은 하마터면 나를 잃어버릴 뻔했어요. 2년 전에는 이런 행복은 상상도 못했죠."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여보, 이젠 슬슬 릴한테 남동생이나 여동생을 만들어 줘도 괜찮은 때가 되잖았어요?"

라울은 아내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거 좋은 생각이야."

침실 쪽으로 가자고 재촉하는 남편에게 배네사는 웃으면서 저항했다.

"지금 당장 그러자는 게 아녜요! 점심식사를 하려면 옷도 갈아입지 않으면 안 되는데!"

라울은 아내를 안아 올리더니,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 장난을 하듯이 말했다.

"점심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이건 그저 리허설일 뿐이야. 밤에 제대로 하기 위한 연습일 뿐이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