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몰래 나눈 사랑
J. Creswell
1장
리사는 슈트케이스에서 진노란빛 얇은 드레스를 꺼내들고, 구김살을 펼 셈으로 가볍게 털었다. 손 끝에 전해지는 실크의 촉감이 차가웠고, 지퍼를 내릴 때 가는 불안감이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조금 있으면 저녁시가 시간이 된다. 리사는 이제 얼마 후 1년 만에 죠엘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수놓아진 얇은 드레스는 발을 조심스럽게 감췄으나, 넓고 깊게 패인 목선은 겨우 가슴을 가릴 정도였다. 거울에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리사는 블론드의 머리를, 위로 모아서 리본으로 묶었다. 그녀는 피더그리(줄모양의 세공)의 금으로 만든 귀고리를 달았다.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어 관능적인 곡선을 그리는 귀고리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보았다. 또다시 등골이 오싹했으나, 리사는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죠엘 로버트슨과의 만남은 3개월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리사에겐 원한을 풀겠다는 마음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뉴욕에서의 항공편은 승객이 많았고 로스앤젤스에서 카사텔 솔까지의 드라이브는 지루했다. 그러나 리사는 조금도 피곤을 느끼지 않았다.
노크 소리에 리사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준비는 되었어. 리사.” 리처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둘러서 안됐지만 벌써 8시가 지났단 말야.”
리사는 문을 열고 미소를 지었다.
“벌써 준비는 다 됐어요. 점심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배가 고픈 걸요.”
“그건 너무 했더군. 스튜어디스는 일부러 맛없는 식사를 만드는 훈련을 받은 것 같더군.”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리사는 겨우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으나, 죠엘과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어려웠다.
리처드는 리사의 빰에 입을 맞추고,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드레스가 마음에 든다고.” 리처드가 말했다. “몰라볼 만큼 아름답게 보이는걸.”
“고마워요. 치켜세우기도 잘 하시는군요.”
리사는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찔리는 걸 느끼고, 리처드의 볼을 손으로 가볍게 만졌다. 리처드는 너무나 상냥했다. 그런 리처드를 배신하는 짓을 하면 안 된다. 리사는 리처드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카사 델 솔에 처음 초대받았을 때, 사실을 말해두었어야 했다.
“리처드…” 리사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왜?”
“아니, 아무것도 아녜요. 그저 불러본 것뿐이에요.”
리처드는 리사의 손을 힘주어 꼬옥 쥐었다.
“정말, 당신을 죠엘한테 소개하고 싶어. 틀림없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좋을 텐데.” 리사는 자연스럽게 얘기하려고 했으나 어쩐지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서둘러요. 유명한 죠엘 로버트슨은 기다리는 데 익숙하지 못할 거예요.”
“그토록 마음 쓸 건 없다고, 리사. 평소의 리사답지 못하군. 죠엘은 유명할지 모르지만, 테니스코트 밖에서는 정말 신사니까 말이야.”
리사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둘이는 침묵한 채로 걸어갔다. 아래층은 어두컴컴했고, 촛불처럼 보이는 벽의 램프가 비춰지고 있을 뿐이었다. 리처드가 거실의 문을 열었을 때, 리사는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석양빛에 눈이 부셨다.
차츰 눈이 익숙해지자 창가에 서서 석양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리처드만큼 키는 크지 않았으나, 우람한 체격이었다. 잘 단련된 몸이었다. 그때 그 남자가 뒤돌아보았다. 1년 이상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시 재회한 지금 이 순간, 리사는 묘하게도 가슴이 아려왔다. 리사를 보던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지고, 의자 등을 힘주어서 꽉 잡았다.
리사는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무릎에 힘이 빠졌다. 그 남자가 바로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억이 단숨에 되살아나고,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남자가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에야 리사는 겨우 가슴에 막힌 것이 진정되고 노여움이 고개를 들었다.
리사는 어느새 남자의 바로 곁에 다가가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아프게 남아있던 그의 눈이, 바로 앞에 있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리사는 차갑게 말하면서, 가슴이 터질 듯한데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할 수 있는 자신에게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리사는 한 손을 내밀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카메론 로버트슨 씨로군요. 겨우 뵙게 되어서 영광이군요.”
리사는 노여움에 불타고 있었으나 평정을 잃은 로버트슨의 모습에 통쾌함이 일었다. 로버트슨은 악수를 청하려고 햇으나, 손의 떨림을 깨닫고 황급히 뒤로 감췄다.
“친구들한테는 죠엘 로버트슨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목소리에 노여움이 담겨 있엇다. 죠엘은 리사가 내민 손을 무시하고 리처드와 악수했다.
“피앙세를 소개할 거라면, 좀더 자세히 알려주지 그랬어.”
“도대체 뭐가 알고 싶은 거야.” 리처드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의아해하며 좀 자신 없는 듯이 웃었다. “리사가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자란 것은 말했을 텐데.”
“그렇지만 자네가 말한 것은 그거뿐이었잖아.”
“그럼, 정식으로 소개할까.” 리처드가 말했다. “죠엘, 이 쪽은 메리사 에드워즈야. 코네티컷 출신으로, 지금은 뉴욕 시경에서 정신분석의로 일하고 있지. 리사, 이쪽은 카메론 로버트슨이야. 주요한 테니스 대회의 챔피언으로, US.오픈의 최대기록을 갖고 있는 사람이지.”
리사는 짐짓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버트슨 씨,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리처드가 당신 변호사란 걸 알고 나서, 이렇게 만나 뵙게 되기를 기다렸답니다. 정말 요즘 3주 동안은 매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댁으로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죠엘은 리사에게 등을 돌리고, 술을 가지러 갔다.
“로버트슨 씨라니, 그렇게 부르지 말아주시죠.” 죠엘이 말했다. “그렇게 어렵게 대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리처드는 내 친구니까요.”
리사는 가빴던 숨을 고르게 하며 죠엘한테 무관심한 척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죠엘의 시선을 줄곧 의식하며 리처드의 팔짱을 끼고 보란 듯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렇게 빨리, 당신 친구의 한 사람으로 끼어주셔서 영광이에요… 죠엘. 그렇지만 TV해설자나 저널리스트 말고, 당신을 카메론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정말 없나요?”
죠엘은 노여움을 억누르는 듯한 눈길로 리사를 지켜봤다.
“그렇다고요.” 쌀쌀하게 말했다. “카메론 로버트슨이란, 테니스 선수로서 쓰고 있는 이름이니까요. 그러나 본명이 카메론 죠엘 로버트슨이란 것은 별로 비밀은 아니죠.”
리사는 가볍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가요. 리처드와 만날 때까지 위대한 카메론 로버트슨이, 가족이나 친구들한테 죠엘이라 불리운다는 것은 전혀 몰랐는걸요. 지금까지 기사는 읽고 있었지만, US오픈에 지고 나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사가 나왔더군요.”
“스포츠 잡지를 읽는 여자는 좀처럼 없을 텐데요.” 죠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리처드에게 얼굴을 돌렸다.
리사는 말이 지나쳤나 생각했다. 그리고 죠엘이 홧김에 두 사람의 관계를 털어놓는 걸 기다렸으나, 죠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거실 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면서 말했다.
“잠깐 실례할게. 주방을 보고 올 테니까.”
죠엘이 가버린 뒤 거북스런 침묵을 깬 것은 리처드였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리사. 좀 눈치가 있어야지. 작년 US오픈에 진 것을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모르나? 패하고 난 뒤에 3개월 가까이 괴로운 나날을 보내왔다고.”
“그랬을까.” 리사는 씁쓸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이혼문제가 있었죠.”
“죠엘의 결혼이란 지독한 거였다고. 모든 것이 전의 부인이 나쁜 것에 있었다고.”
“죠엘이 성실한 남편이었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리사는 저도 모르게 내뱉고 나서, 리처드의 놀란 얼굴에 당황해서 변명했다. “미안 해요. 피로해서 그럴 거예요. 뉴욕에서의 비행기 여행은, 승객도 많아서 쉴 수 없었기 때문에.”
“좀 안색이 난 좋군. 술이라도 마시겠어?”
“그래요. 부탁할게요. 독하고 찬 거라면 아무거나요.”
리처드가 차디찬 글라스를 리사에게 건네줬다. 리사는 자기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든 평온을 찾으려 했다. 몸에 밴 자제심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자제심은 죠엘이 가르쳐 주고, 리사가 배운 것이었다. 이제는 감정이라는 것을 리사의 인생에서 조절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사는 리처드와 함께 죠엘의 집에 찾아온 것이다. 리사는 자기가 이전처럼 순진하고 어리숙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죠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죠엘이 없어도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것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리사, 정말 기분은 괜찮아?” 리처드가 물었다.
“난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말은 했으나 손엔 다시 경련이 일어 얼음이 글라스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내가 왜 이러지.' 하고 리사는 혼잣말했다. '제발 혼란해진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죠엘이 돌아오지 않게 해줘요.'
그때 거실의 문이 열렸다. 리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왜 카사 델 솔에 오는 바보짓을 해버린걸까 하고 자신을 책망했다.
“하니, 노빅 씨.”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수지.” 리사가 뒤돌아봤을 때, 리처드가 말했다.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군. 자아, 이리 와서 메리사 에드워즈와 만나주지 않겠어. 우리는 이제 두 달 뒤에는 결혼하는 거란다.”
글라스를 든 리사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수지, 죠엘의 딸. 죠엘과 리사가 만났을 때, 병원으로 실려 간 아이였다. 리사는 애써 기억을 떨쳐버리고 예의바른 미소를 띠웠다.
“처음 만나는군요. 수지.”
“처음 뵙겠어요. 에드워즈.” 싫증난 듯한 말투였다. “약혼 축하해요. 행복하세요. 네.”
그렇게 말하고 카운터에서 피너츠를 집었다. “비행기가 늦어졌죠. 저녁식사는 아직이니까요.”
“겨우 몇 분쯤 늦어졌을걸.” 리사가 말했다. “뭔가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어서 그걸 망쳐놓은 것이 아니라면 좋을 텐데.”
“농담이시겠죠. 여기선 특별한 계획 따윈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어째서 아빠가 날 여기 데려왔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요. 언제나 바쁘셔서, 전혀 상대도 안 해 주신다고요. 어째서 엄마하구 함께 있도록 해주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엄마하고 지내는 게 좋아요.”
순간, 리사의 직업적인 호기심이 번뜩였다. 1년 가까이, 가출을 한 십대들을 상대해왔기 때문에, 반항기 초기의 증후를 꿰뚫어 보는 것쯤 간단했다. 수지는 14살이나 15살쯤, 제일 예민한 시기여서 지루함과 반항심이 뒤섞인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수지네 아버님은 이곳 휴양지를 경영하시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것 같군요.” 리사가 말했다. “유명한 테니스 선수라는 것과, 스포츠센터가 잇는 휴양지를 경영하는 것과는 다른거라구. 유명하다고 해서 경영이 잘 된다는 건 아니야.”
수지는 비웃는 듯한 눈초리였다.
“알고 있어요.” 툭 던지듯 말하며 양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의자에 걸터앉아 팔걸이에 양발을 올려놓았다. 갈색머리는 윤기가 흘렀으나 옷은 퍽 더러워져 있었다. 아마 얼마동안 빨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빠는 어디 있죠?” 수지가 물었다.
알고 싶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려고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주방으로 갔지.” 리처드가 말했다. “곧 돌아올 거야. 수지. 목장에서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이지?” 수지는 따분한 듯한 얼굴을 했다.
“여기는 목장 같은 게 아닌걸요. 중년 남자들이 골프를 하러 오거나, 뚱뚱한 여자들이 살을 빼려고 오는 곳이에요.”
“꽤, 매섭구나.” 리처드가 말했다. “중년이 아닌 사람이나, 뚱뚱하지 않은 사람도 올거 아냐.”
“내가 본 사람은 모두 그런걸요.”
“오렌지 주스나 소다수라도 마실테야?”
리처드는 화제를 바꿨다.
“소다수로 할래요.”
늘 그렇다니까 하고 리사는 생각했다. 리처드는 귀찮아지는 것은 언제나 피하려고 했다. 리사는 그것을 트집잡고 있는 자신을 나무랐다. 아무튼 리처드는 원만하고 소탈한데다가 감정보다는 이성이 강한 남자여서, 그런 면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리사는 리처드와 수지가 대화를 하는 동안 생각에 잠겼다.
일이 너무 바빠서, 과거를 돌아볼 틈도 없는 뉴욕에 있었어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실내가 갑자기 답답하게 느껴져서 커다란 창문으로 다가갔다.
리처드가 리사의 뒤를 따라왔다.
“수지하고 파티오(스페인품 안마당)에 갈텐데, 함께 가겠어?”
“상관없다면 나는 여기 있을게요. 이 시간이면 모기가 많으니까.”
리처드는 리사에게 가벼운 키스를 했다.
“알겠어. 수지, 갈까.”
“응.”
리사는 눈을 감고 멀어져 가는 두 사람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실내는 곧 조용해졌다. 이윽고 등 뒤의 시선을 느꼈으나, 이를 무시하고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갖다 댔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죠엘이 말했다.
리사는 천천히 뒤돌아보고, 글라스를 들어올렸다.
“술을 마시고 있는 거예요.”
죠엘의 눈은 침울했고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죠엘이 어째서 화를 낼 권리가 있단 말인가. 리사는 노여움이 치밀어 올랐다. 리사는 죠엘한테 거짓말한 일은 없었다. 속인 일도 없었다. 리사가 한 것은 별장에서 지내자고 하는 죠엘의 말을 따른 것뿐이었다.
“내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알고 있을 테지.” 죠엘이 말했다. “어째서 여기 온 거야. 도대체 어떤 수를 써서 리처드한테, 자기 이름을 말 못하게 한 거야.” 그의 목소리는 차분한 듯이 보였으나 노여움이 곧 폭발할 듯했다.
리사는 분노에 겨운 죠엘의 얼굴을 앞에 하고, 겨우 냉정을 되찾아서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당신일을 리처드와 이야기한 일은 없어요. 리처드한테 거짓말을 해달라고 부탁한 일도 없는걸요. 당신이 리처드한테서 내 이름을 묻지 않은 것은,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요.”
“어찌된 거야. 리사. 설마 휴가를 지내려고 여기 온 건 아닐 테지.”
리사는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로버트슨 씨. 당신이 어떻게 생각한들 나한테는 아무 관심도 없어요. 말해두겠는데요. 리처드와 나는 리처드가 이 여행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당신 이름을 입에 담은 일도 없었다고요. 리처드는 훌륭한 변호사예요. 의뢰한 고객에 대해서 말할 까닭이 없잖아요.”
“왜, 리처드와 결혼하는 거야. 당신한테는 안 어울리는 인물 아닌가.”
“나한테 걸맞은 남편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말을 잘 듣는 남자란 말인가. 맹세코 말해두지만 당신은 한 달도 못 견딜 거야.”
리사는 어깨를 우쭐해 보였다.
“행복한 결혼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당신한테 있나요.”
죠엘의 안색이 달라졌다.
“당신은 리처드와 결혼하지 못해. 리처드는 내 친구니까. 당신이 리처드를 불행하게 만들 것을 나는 잘 알아.”
“그래서 어떻게 내가 리처드와 결혼하는 걸 막을 셈이죠.”
“간단하지.” 죠엘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리츠드는 꽤 보수적인 사내라구. 도덕관념이 강하다고. 우리 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알면 어떤 기분이 될까?”
“당신이야말로 최고 악질이에요.”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 아니라구. 전의 마누라한테도 몇 번인가 들은 일이 있지…”
죠엘은 그대로 마당으로 나가서 큰 소리로 말했다.
“식사준비가 다 되었다.”
수지와 리처드가 돌아왔을 때는, 그는 아무렇지 않게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변변히 먹지도 못했을 테니, 배가 고프겠지.” 리처드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리처드는 응답하며 리사를 껴안았다. “당신은 어때?”
“나두요.” 리사는 죠엘의 뜨거운 시선을 의식하며 이제까지 보다 더 죠엘을 증오했다. 똑바로 보기만 해도, 어쩔 수 없이 몸이 달아오르는 것이다.
리사는 일부러 리처드의 허리에 팔을 돌리고, 리처드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그러고나서야 비로서, 얼굴을 들고 죠엘을 바로 볼 수 있었다.
죠엘은 곧 얼굴을 돌리고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수지에게 서서, 수지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착한 아이가 되어있었니. 학교에서 돌아와서, 얼굴을 안보였잖아.”
“여태 여기 있었다고요.” 수지가 말했다. “아빠 비서가, 아빠는 바쁘시니까 방해하면 못쓴다고 했는걸요.”
“힘든 하루였다고. 클럽하우스의 에어콘이 고장 나버렸거든.” 그렇게 말하며 죠엘은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밝은 식당으로 들어가, 딸이 더러워진 진즈를 입고 있는 걸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수지, 그게 무슨 짓이야. 성형외과 의사한테 발을 검사 받지 않으면 안 되겠어.” 무뚝뚝한 표정의 수지는 갑자기 놀란 얼굴이 되었다.
“성형외과의사한테 검사를 받다니, 왜요?”
“되도록 햇볕을 쬐도록 해야지, 뼈가 뒤틀려 버리는 거야. 오늘 학교에 가기 전에, 스커트로 바꿔 입으라고 말했지.”
“발은 이제 괜찮아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어른들하구 식사할 때는 거기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해주지 않을래. 전에도 말했잖아.”
“엄마는 언제나 내가 입고 싶은 걸 입게 해줬는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어머니가 아니니까 말이야.”
모두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을 때, 리처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의 기쁨을 보여주는 것 같군. 우리들의 아이가 청소년이 될 무렵에는 사춘기란 게 없어지기를 빌겠어. 부모라는 게 때로는 즐거운 것만은 아닌 것 같으니까. 그렇지 리사.”
“아마 그럴 거예요.” 리사가 말했다. “그렇지만 딸이라는 입장도 항상 즐거운 거라고는 할 수 없다고요.”
수지가 당혹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리사는 너무 강조하지 않고 말했다. 전문직 카운슬러로서 남의 앞에서 자식을 나무라지 말도록 죠엘에게 충고하고 싶었으나, 그 충동을 겨우 참았다.
“맛있어 보이는 요리로군요.” 뚱뚱한 메이드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우요리를 들고왔을 때, 리사는 화제를 바꿀 겸 그렇게 말했다. “이 요리는 내가 제일 좋아해요. 죠엘.”
“우연치곤 행운이군. 다른 요리도 당신 입에 맞으면 좋을 텐데.”
“틀림없이 훌륭한 음식뿐일 테죠.” 리사는 굳어진 웃음을 떠올렸다. “어떤 기사에선가 손님 대접 잘하는 분이라고 쓰여있던걸요.”
“언제나 파티를 벌이고 있던 것은 헤어진 아내였지.” 죠엘은 그렇게 말하고 똑바로 리사의 얼굴을 지켜봤다. “나는 조용한 것을 좋아했었지. 코스트에 있었을 때는, 보트놀이와 버드윗칭을 즐겼었지.”
리사는 포도주가 담긴 글라스에 손을 뻗어서 리처드의 의아한 눈초리를 무시하며 단숨에 마셔버렸다.
“어떻게 두 사람은 알게 된 거야.” 죠엘이 리처드에게 물었다. “파티였나?”
“아니야. 일 때문에 알게 된 거야. 아까도 말했듯이, 리사는 뉴욕시경 전속 정신분석의사로서 카운 셀러를 하고 있는데, 때마침 리사가 맡고 있는 애가 내가 대리인을 맡고 있는 아이었다고.”
“자네 전문과는 좀 거리가 멀잖아.”
“좀이 아니라, 큰 거리가 있지. 친구 아이라서 맡은 거지. 다행히 재판으로 번지지는 않았어.”
“첫눈에 반한 건가. 자네는 그런 센티멘탈한 사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리처드는 멋쩍은 듯한 웃음을 떠올렸다.
“리사도 나도 처음부터 끌렸던 것은 인정하지. 공통된 점이 많았어. 나는 리사의 유능함에 감동했다고. 리사는 그 아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매우 냉정하게 풀어주었지. 상당히 복잡한 문제라서 말이야. 그 애는 낙태수술을 하는가 하면, 마약과 매춘 경험도 있는 상태였다고.”
“자네 말대로라면, 리사는 보통 사람이라기보다는 슈퍼우면처럼 들리는걸.” 죠엘이 말했다. “이런 아름다운 사람이 그렇게 유능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고.”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여자가 망아지처럼 보여야만 한다는 법은 없겠죠.” 리사가 화가 난 듯 말했다.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에 리처드가 말했다.
“새 학교는 어때, 수지.”
리처드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리사는 감사하는 웃음을 보낸 뒤에, 요리로 눈을 돌렸다. 대화가 오가는 속에 리사는 적당히 장단을 맞추며 먹는 데만 전념했다. 요리가 차례로 날라져 와서, 식사는 끝없이 계속되는 듯했다.
드디어 메이드가 거실에 커피가 준비되어 있다고 전했다. 리사는 빨리 이 자리를 떠나서 혼란된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리처드, 미안하지만,” 리사는 되도록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여행의 피로가 몰려오는군요. 괜찮다면 이제 쉬고 싶군요.”
리처드는 리사의 팔짱을 꼈다.
“안색이 안 좋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말하고 리사의 볼에 가볍게 입 맞췄다.
죠엘이 호주머니에 양손을 쑤셔 넣었다. “자아, 수지―” 목쉰 소리로 말했다. “거실로 가는 거야.”
“사람들이 키스하는 것은 전에도 본 일이 있어요.” 수지가 놀리듯 말했다. “약혼한 커플이 어떤 키스를 하는지도 안다고요.”
“그럴 테지.” 죠엘이 말했다. “그렇지만 아빠는 거실로 가자고 하는 거야.”
리처드는 웃으며 리사의 손을 잡았다.
“특별한 키스를 하는 게 아니란다. 수지. 나는 영화스타가 아니니까.”
죠엘이 문으로 다가갔다.
“자아, 수지. 나오거라.”
문이 닫히자 리처드는 리사를 와락 끌어안았다. 리처드가 따뜻하게 키스하자, 리사는 눈을 감고 긴장을 풀었다.
“내가 말한 대로 죠엘은 싹싹한 사람이지.”
리사는 놀라서 눈을 떴으나 리처드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지 않으려고 했다. 리처드는 다시 키스를 했으나, 리사에겐 이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죠엘이라면 조금 닿기만 해도 몸이 뜨거워져 버리고 마는데.
“미안하군.” 리처드가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피로해 있는지 미처 몰랐어.”
“사과할 건 없어요.” 이토록 따뜻하게 대해줄 땐 죄책감에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리처드, 당신한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다고요.”
“뭔데.”
리사는 의심할 줄 모르는 리처드의 표정을 살펴봤다.
“마음 쓰지 말아요. 대단한 게 아니니까요. 내일 아침에 말할게요.”
“당신 방에까지 데려다 줄게.”
둘이는 손을 꼭 잡은 채 계단을 올라갔다. 방문 앞에까지 왔을 때 리처드는 리사를 끌어안고 언제나와 다른 격렬한 키스를 했다.
“내일, 카사 델 솔을 안내해 줄게. 멋있는 곳이라고. 허니문을 여기서 보낼까 생각하고 있어.” 리처드의 말은 리사의 가슴에 칼날처럼 꽂혔다. 리사는 죠엘이 바로 여기에 있는 걸 알면서 리처드의 품에 안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리처드와 결혼할 수는 없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선 이렇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일은 내일 얘기하기로 해요.” 리사는 가볍게 키스하고는 리처드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침실로 들어갔다.
리사는 침대에 몸을 던져 한동안 천정을 쳐다보다 이윽고,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허사였다. 마음속에 새겨진 죠엘의 모습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리사는 뉘우쳤다. 어째서 여기 왔을까. 어째서 리처드와 더 빨리 결혼하지 않고 있었을까. 리처드와 결혼했다면, 정열적인 사랑으로 마음의 상처도 말끔히 잊게할 수가 있었을 텐데, 이미 때는 늦었는지도 모른다. 쓰디쓴 추억이 되살아나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2장
리사가 처음 죠엘과 만난 것은, 겨울에 버금갈 만큼 추운 9월의 밤이었다. 그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로상태는 좋지 않아 초록뱇 차가 도랑을 넘어서서 나무에 부딪쳐 있는 걸 보고서도, 리사는 놀라지 않았다. 그것은 커브 바로 앞에서, 굉장한 속력으로 리사의 차를 추월한 스포츠카였다.
리사는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워서, 운전석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자기 차의 비좁은 차안이, 스포츠카의 사고의 무서운 광경으로부터의 고마운 피난처처럼 생각되었다.
휘발유가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고, 리사는 겨우 차에서 내려섰다. 다시 폭발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리사는 질척거리는 길을 걸어서, 스포츠카의 유리창으로 들여다보았다. 타고 있는 것은 운전사 한 사람뿐, 핸들에 엎드려 있었다.
리사가 차문에 손을 대니까, 문은 손쉽게 열렸다. 다행스럽게도 운전사는 문을 잠그지 않고 운전하고 있던 것이다. 리사는 손을 뻗어서, 엔진을 껐다. 이것으로 화재가 발생할 위험은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은 살아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았으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으나, 그 사람의 몸에서 피는 흐르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리사는 그 사람을 핸들에서 안아 일으켜서, 시트에 뒤로 기대게 했다. 그 사람의 이마에는 큼직한 혹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외상이 없었다.
그 사람은 의식을 잃었지만 매력적인 얼굴 생김을 하고 있었다. 리사는 문득 황홀하게 내려다 보다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할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우람한 체격의 이 사람을 어떻게 할까를 곰곰이 내리게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리사는 다른 차가 지나가지 않을까 하고, 길 쪽으로 눈을 돌렸으나, 이쪽으로 오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이 길을 똑바로 간 곳에는 리사의 부모가 살고 있는 집이 있을 뿐이니까, 사고를 일으킨 운전자는 이 길이 막혀있다는 표지판을 못 본 것이 틀림없었다.
리사는 그 사람을 차에서 내려놓을까말까 생각했다. 이런 사고일 때, 내출혈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엔진이 폭발할 가능성도 있었다. 리사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안전한 자기차를 떠난 지 2분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죽을지도 모를 피해자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리사는 그 사람의 한 팔을 잡아올려서 자기 어깨에 올려놓은 다음, 안전벨트를 풀려고 몸을 내밀었다. 옆구리에 심장의 고동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묘하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리사는 겨우 안전벨트를 풀어냈다. 그때 그가 몸을 뒤척였다. 리사는 다급하게 얼굴을 들어, 생기없는 갈색 눈을 지켜봤다.
“여어.” 그 사람은 중단된 대화를 계속하는 것처럼 말했다. “토할 것 같으니까, 떨어져 있는 게 좋아.”
리사는 다급하게 물러났다. 그의 몸은 심하게 두 번 떨었으나,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그 사람은 기침을 한 뒤에, 시트에 힘없이 기대고 눈을 감았다.
“속이 메스꺼워서, 토할 수도 없다고.” 목소리는 쉬어있었다. “죽을지도 모르겠어. 아니, 벌써 죽었는지도 모르지.” 그는 눈을 뜨고 리사를 봤다. “아니, 죽지는 않았어.”
“당신은 천사라기보다는 인어처럼 보이는걸.”
리사는 겨우 말문을 열 수 있었다.
“당신의 지독한 운전 덕분에, 나는 흠뻑 젖어버렸다고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흙탕물 범벅이 되어버렸어요. 새로 산 부츠는 엉망이 되었고, 스웨터도 줄어든다고요. 도무지 천사 같은 마음이 아니라니까요.”
“인어도 아닌 것 같군. 그 말투로 보아서는.”
그 사람이 뜻밖에도 크게 다친 것 같진 않아 마음이 놓여서 리사는 웃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리사는 말했다. “나는 비에 젖어도 아무렇지 않아요. 어딘가 몹시 아픈 곳은 없나요. 어깨를 잡고, 내 차까지 걸어갈 수 있겠어요?”
“온몸이 아파다고.” 그 사람이 말했다. “저 부풀어오른 드럼통이 당신 차라면, 나는 여기서 기다릴 거야. 죽을지도 모르니까, 하다못해 숨이 막히는 꼴은 당하지 않고 편하게 있고 싶어.”
“몸이 아픈 것은, 충돌했을 때의 쇼크 탓일 거예요. 죽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혹시 뼈라도 부러진 게 아닐까.” 그는 조심조심 몸을 움직였다. “머리통에 금이 갔는지도 모르겠군.”
그가 머리를 앞으로 내밀었을 때, 리사의 풍만한 가슴이 닿았다. “구멍이라도 뚫어진 게 아니야.”
“아아뇨.”
리사는 그의 머리를 살짝 만져봤다. 관자놀이에 멍이 들어있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내 어깨에 팔을 돌리고, 아무튼 내 차로 가는 거예요. 우리 집에서 구급차를 부를게요. 우리 아버지는 의사지만 당신은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는 게 좋을 거예요.”
“병원에 갈 필요는 없어.”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을 분명히 하려는 듯, 자기 혼자서 차에서 내려와서 문짝에 기대섰다. “이봐, 아무렇지 않다고.”
그가 무리하고 있음을 알았으나, 리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랑을 건너는데 도와드려요?”
그는 비틀거리며 걷다가 희미한 웃음을 띠우며 멈춰 섰다.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군.”
“난 메리사 에드워즈에요.” 리사는 어깨를 내밀어 그를 부축하며 도랑을 건넌 다음에 그렇게 말했다. “당신은.”
“안녕! 메리사.” 리사가 차문을 열자 그는 무너져 내리듯 시트에 내려앉았다.
리사는 그가 겨우 시트에 자리 잡게 된 데에만 마음이 놓여서, 이름을 듣지 못한 것을 잊고 말았다. 그는 일시에 긴장이 풀렸는지 시트에 몸을 내맡기고, 파래진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리사의 부모네 집까지는, 2킬로미터도 못 되었다. 엔진 소리를 들은 어머니가 언제나처럼 현관문 앞으로 나왔다. 토실토실한 얼굴에는 웃음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리사.” 마치 오랜만에 만난 듯, 반갑게 불렀다. 오늘 아침에도 얼굴을 보았는데도. “친구를 데려왔구나.” 눈을 조그맣게 뜨고 말했다. 근시인데도, 언제나 안경을 어디다 놓아버리고 있는 것이다. 리사는 그 사람의 몸을 지탱하며, 천천히 현관으로 향했다. “둘 다 모두 흠뻑 젖고, 진흙투성이잖아.” 어머니가 말하자 리사는 어머니한테 키스했다.
“사고가 일어났어요. 아빠를 불러주세요. 이 사람 뇌진탕을 일으킨 것 같아요.”
“어머나, 큰일이군.” 에드워즈 부인은 큰소리로 말하고, 두 사람이 홀에 들어가도록, 옆으로 비켰다. “빨리 아버지를 부를께. 담요도 가져와야지. 뜨거운 차를 내오면 될까. 아무튼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면 될지 잘 아실 거다.” 그리고는 복도를 달려갔다.
에드워즈는 유능한 의사답게 침착하게 움직였다. 간단히 악수한 뒤에,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퍼시 에드워즈예요. 리사의 아버지요.”
“저는 죠엘 죠… 죠엘 로브입니다.” 그렇게 말했으나 갑자기 통증이 왔던지, 입술을 악물었다. 닥터 에드워즈는 죠엘 로브를 소파에 앉게 한 뒤에, 사고에 대해서 리사에게 사무적으로 질문했다. 리사가 간결하게 대답하니까, 아버지는 딸을 거실에서 내몰았다.
“넌 카펫을 흠뻑 적셔버리고 있지 않니. 로브 씨의 차를 끌어가도록 수리공장에 전화하고 오너라.”
리사는 얌전하게 거실을 빠져나갔다. 오빠가 셋이나 있는 때문인지 리사에게는 보이프렌드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죠엘 로브한테는 여느 보이프렌드와는 다르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뒤흔들렸다. 죠엘 로브 곁에 있으면 웬지 자신이 몹시 어리게 느껴졌고 새삼 자신이 여자란 것을 강하게 의식해 버리는 것이다.
리사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수리공장에 전화를 건 다음, 거실로 돌아왔다. 마침 아버지가 진료를 끝낸 참이었다.
“보브의 수리공장에 전화했어요.”
“고마워요, 리사. 정말 감사하고 있다고.” 죠엘 로브는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택시를 불러줄 수 없겠어.”
닥터 에드워즈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정밀검사를 받기 위해서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구급병원의 간호사에게 넘겨주는 일만은 그만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괜찮으니까요.”
“혈압도 체온도 맥박도 정상이니까 억지로 병원으로 데려갈 수는 없겠군요. 황소처럼 튼튼한 몸 같군요.”
“머리통 뼈도 두꺼운 걸요.”
“그렇군요.” 에드워즈는 웃어보였다. “오늘밤은 이집에서 쉬도록 하시오. 그러면 내가 자주 체크할 수 있으니까요. 누군지 이 근처에 살고 있는 친구라도 방문하는 것이었나요. 당신이 무사하다는 걸 그분한테 연락할까요.”
죠엘 로브는 쑥스러운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 근처 주민이라고 알아주시기 바랬는데, 이런 작은 마을이라면 그럴 수도 없겠군요.”
“꽤 오래 여기 살고 있으니까, 주민이라면 모두 잘 알죠. 어디서 오셨지요?”
“캘리포니아입니다.”
“그래, 누구한테 전화를 걸까요. 누군가 걱정하실 분이 계실 테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늘밤은 혼자서 지낼 셈이었습니다. 전화 거실 필요는 없습니다.”
에드워즈는 청진기를 가방에 담았다.
“샤워를 해도 좋아요. 다만 뜨거운 물은 안 됩니다. 현기증이 날지도 모르니까, 욕실의 문은 열어놓은 채로 하시오.” 리사는 죠엘 로브의 입술이 일그러지는 걸 보았다. “저는 현기증 같은 건 없습니다.”
“보통 상태라면 아마 그럴 테죠. 훌륭한 체격이오. 솔직히 나도 이만큼 튼튼한 환자를 진찰한 일은 없어요. 그러나 오늘밤은 조심하시오. 죽지 않은 것만도 행운이니까요.”
“예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소파에 힘없이 기대버렸다. “친절하게 해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샤워를 할 수 있는 정도라면 모텔로 옮길 수 있겠군요. 이 이상 신세 질 수는 없습니다.”
“제일 가까운 모텔도 5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걸요. 그리고 이 시간에는 택시도 잡을 수 없으니까요.”
“오빠 방이 비었어요.” 리사가 말했다.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피로에 지쳐버렸거든요.”
“파자마를 가져올게요. 샤워를 하고 나서 곧 잠자리에 드세요.”
“정말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로브씨, 나는 당신한테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거예요. 아쉽게도 통증을 덜어드릴 처치는 아무것도 못해 드리지만. 뇌진탕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진통제를 쓰지 못합니다.”
죠엘 로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온갖 통증을 즐길 수 있겠군요.”
“중상을 입지 않을 걸 감사해야 해요. 내일, 내 진료소에서 검사하기로 합시다. 리사, 네가 차를 운전해서 모셔오는 거다.”
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가 환자를 염탐하듯 보고 있는 데 놀랐다. “주치의한테 진찰 받고 싶다면, 나로서도 반대하지 않겠어요. 아마 주치의가 있는 거죠.”
리사는 죠엘 로브에게서 아버지에게 눈길을 돌렸다. 두 사람 모두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죠엘 로브가 말했다. “어떻게 감사드려야할지.”
“감사할 필요는 없어요. 그 길은 험하고, 좀더 표지를 똑바로 붙여야 하는 겁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관청에 군소리를 하고 있지만요. 그리고 아무래도 당신은 도로를 그다지 조심하지 않은 것 같군요. 오늘이란 날은 당신한테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날이었겠죠.”
리사는 죠엘의 대답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선생님은 스포츠를 좋아하십니까?”
“풋볼을 보는 걸 좋아하지요. 이따금 골프나 테니스를 치고 있어요.”
“과연.” 죠엘 로브가 말했다. “알아주시는 것 같군요.”
3장
다음날 아침 리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어젯밤의 비가 거짓말처럼 밝은 태양의 푸른 하늘에 빛나고 있었다. 리사는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나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하고는 크림빛 코튼의 슬랙스와 셔츠를 입었다. 그녀답지 않게 이옷 저옷 고른 끝에 입었다. 이런 좋은 날씨에 머리를 쓰는 일을 한들 의미가 없다.
리사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굿모닝, 엄마.” 리사는 어머니한테 키스하고 커피를 따랐다. “로브 씨의 식사를 갖고 갈게요.”
오늘 아침 에드워즈 부인은, 줄이 달린 안경을 목에서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안경을 쓰고 냉장고 문에 붙여둔 메모를 읽었다.
“아버지 메모에는 죠엘은 삶은 계란 두 개와 버터가 없는 토스트 두 개를 먹을 수 있다는 거야. 나는 심장병이라서 버터는 안 좋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계란을 삶을게요.” 리사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좀 마당에 나가 있을게.” 어머니는 개를 데리고 부엌문으로 빠져나갔다.
리사는 시간을 재서 계란을 삶은 다음, 식기를 트레이에 늘어놓았다. 냅킨과 오렌지주스가 든 글라스를 올려놨을 때 어머니가 장미꽃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벌써 삶은 계란이 다 되었어.” 트레이를 보고 말했다.
“오렌지주스를 마셔도 된다고, 아버지 메모에 적혀있었니. 남자들도 마실 것이 필요할 테지만 차는 마시고 싶지 않을 테지. 젊은 사람은 모두 그러니까. 커피는 안 되고. 임산부는 커피는 안 된다는 거야. 아버지가 기사를 보여주셨지.”
“엄마, 죠엘 로브는 임산부가 아니라고요.” 리사는 그렇게 말하고 쟁반을 들고 부엌을 나갔다. 죠엘 로브의 방문을 그녀는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녀는 또 한번 이번에는 크게 노크했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리사는 안에 들어갔다. 죠엘 로브는 침대에 누운 채 한 손을 멍이 든 관자놀이에 갖다 대고 있었다. 밤사이에 내출혈된 자리가 넓어져 있었다. 위엄 있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부상을 당한 탓으로, 좀 힘이 없어보였다. 리사는 찬찬히 죠엘 로브의 얼굴을 살피는 동안에, 어쩐지 묘한 감동에 젖어들었다.
리사는 얼마동안이나 그 자이에 서서 죠엘 로브를 응시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 쟁반을 내 머리 위에 떨어뜨릴 셈이야? 나는 리사의 지난밤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으니까.” 죠엘 로브가 말했다.
“흙탕길을 걷는 것은 싫어하지 않아요, 로브씨. 어릴 때는 곧잘 그랬으니까요.”
“죠엘리라고 부르면 돼.” 그렇게 말하고 잠시 리사를 지켜보았다. “리사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군.” 리사는 뜨끔했으나, 어쩐지 차분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도 몰라볼 만큼.”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파자마를 안 입었군요.”
죠엘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고 빙긋 웃었다.
“좀 거북했기 때문에 벗은 거야.” 리사는 그의 벗은 가슴을 보지 않도록 하면서 죠엘의 무릎께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파자마 바지는 입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식사가 식어버린다고요.”
죠엘은 쟁반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배가 고프다고. 이 간단한 메뉴는 에드워즈 선생님의 지시야?”
“그래요,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나갈까요.”
“아니, 이야기하면서 식사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이렇게 말하고 침대 한편을 가리켰다. “여기 앉아서 당신에 대한 것을 이야기해 주지 않겠어. 당신은 어디 근무하고 있나. 그보다는 아직 공부하고 있는 거야?”
“대학 4학년이에요. 그렇지만 보육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어요.”
“교사가 될 셈이야?”
“아아뇨, 심리학 학위를 따려고 해요. 졸업하면 도시의 경찰에서 일하려고요.”
“그 두 가지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도시 경찰에서는 가출을 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한 아이들을 다루기 위해서 전문 카운슬러를 쓰고 있어요. 나는 따뜻한 가정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요.”
죠엘의 얼굴이 잠시 흐려지는 듯했다.
“아, 좋은 거지. 가정이란 것은.”
목소리에 담긴 조소를 깨닫고 리사는 죠엘 로브를 바라보았다.
“예,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로브씨. 행복한 가정에 자라나서,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죠엘 로브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죠엘이라고. 나한테 화를 낼 때라도 로브씨란 말을 쓰지 말아줘.” 그렇게 말하고 쟁반을 밀쳤다. “맛있었지만, 만족되지는 않는군. 어제의…” 갑자기 말을 끊었다.
“어제는 별로 먹지 않았어. 커피는 있나. 그보다는 우유로 참아야만 한단 말인가?”
“커피는 얼마든지 있지만, 어머니가 마시라고 하실지. 어머니는 커피가 임산부한테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죠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이 지금 내 상태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조금도. 그러나 어머니가 납득하실지 그건 모르겠어요.”
“내가 면도를 하고 있는 동안에 내가 커피를 마실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는 것에 대해 어머니를 설득해 주지 않겠어. 내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얼굴이 장밋빛이 되어 가지고 내려가면 어머니도 틀림없이 납득하실 거야.”
“그럼 면도기를 찾아다가 욕실에 놔둘게요. 아버지가 낮에 진료소에서 검사하고 싶어 하셔요. 그 도중에 수리공장에 들릴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앞이 완전히 찌그러졌으니까 수리하지 못하겠죠.” 죠엘은 어깨를 움츠렸다.
“렌트카인데다 보험에 들어있으니까 상관없어. 그렇지만 차에는 짐이 있고 보험관계 서류도 있으니까 수리공장에 가야겠군.” 죠엘은 잠시 리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리사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지.”
리사는 죠엘이 똑바로 보는 바람에 좀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말씀 마세요. 유능한 마을 처녀가 어려움을 당한 기사를 도왔다고 생각하면 돼요.”
죠엘의 눈이 반짝였다.
“리사는 마을 처녀일지 모르지만, 나는 번쩍거리는 투구를 갖춰 입은 기사가 아니라구. 그것은 알고 있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리사는 죠엘이 아버지의 진료소에서 나왔을 때, 자신이 얼마나 죠엘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시더군.” 한결 가벼운 투로 말했다. “마시고 싶으면 몇 잔이든 폿트째로 커피를 마셔도 좋다고 말이야.”
“잘 됐군요.”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제부턴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거죠.” 리사는 죠엘이 가버린다고 생각하자 쓸쓸해졌지만 그것을 애써 떨쳐버리듯 말했다. “어디로 데려다 드리면 되겠어요. 다른 차를 빌리는 거죠?”
“나를 몰아내기로 했나?” 죠엘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럴 리가.” 리사는 어깨를 움츠렸다. “당신은 한적한 뉴잉글랜드의 마을에서 얌전하게 지낼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걸요. 그것뿐이에요.”
리사로서도, 죠엘이 이제까지 만난 남자들과 다른 것을 아는 데는 정신 분석의라는 전공 같은 건 필요치 않았다.
죠엘은 생각에 잠긴 듯한 눈으로 리사를 지켜보았다.
“친구의 별장으로 갈 셈이라고.”
그는 돌연 그렇게 말을 꺼냈다.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해변에 있지. 어젯밤에 길을 잘못 들었을 때도, 거기로 가는 도중이었어. 리사도 함께 가겠어?”
리사는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했으나, 선뜻 그 마음을 내비치지 않았다.
“하루종일 말이에요?”
“나는 주말 내내 거기 있을 셈이라고. 함께 가주지 않겠어. 아름다운 곳이지.”
리사는 또다시 심장의 박동이 격렬해졌다.
“그렇지만 친구 분이 싫어할지도 모르잖아요.”
“프랭크는 없다고. 우리 둘뿐이야.”
“그래요.”
리사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리사는 같은 또래의 여자들에 비해서 순진했으나 바보는 아니었다. 리사가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남자와 단 둘이서, 주말을 지낸다는 걸 알면 부모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리사는 정중하게 거절할 셈이었으나, 묘하게 가슴이 뛰어서 거절할 말이 얼핏 떠오르지 않았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부모한테 거짓말을 하더라도 죠엘과 함께 주말을 지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이 있기 때문에 월요일 아침 일찍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요.” 리사는 겨우 밝은 웃음을 지었다. “보육원이 새로 한 살 이하의 유아도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람 손이 달리니까요.”
동의한 데에 죠엘이 놀랐는지 어떤지, 그의 반응을 리사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리사 이상으로 본심을 감추는 데 능수였다.
“괜찮아. 월요일 아침 일찍 돌아가도록 해줄 테니까.”
“즐겁겠죠.” 리사는 죠엘의 초청을 되도록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집에 돌아가서 갈아입을 걸 가져와야지. 슬랙스하고 진즈면 되겠죠.”
“이상한 짓을 할 생각은 없어.” 그렇게 말하고, 죠엘은 리사의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내렷다. “리사는 고운 머릿결을 지녔군. 리사를 보고 있으면 나이를 들었다는 생각이 드는걸.”
리사는 죠엘을 쳐다보았다.
“왜 그러죠. 난 이제 22살로, 한 사람 몫의 여자인걸요.”
“22살이야.” 죠엘은 리사의 턱에 손을 갖다 댔다. “리사를 충동질하려고 말한 게 아니야. 아마 나 자신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어색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사고 때문에 지금은 몸이 안 좋아서 누군가 좋은 말상대가 필요해. 리사가 함께 와주었으면 하는 거야. 리사하고 함께 있으면 마음 편해질 것 같애.”
“비행기 태우는 거군요.”
죠엘은 웃으며, 리사의 입술에 손가락을 스쳤다.
“리사 나이때는 더 로맨틱한 말을 했었는데.”
“나는 당신을 할아버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요.”
“나는 32살이야. 리사보다는 한 단 높은 셈이지.”
리사는 약삭빠르게 죠엘한테서 떨어졌다.
“햇볕에 잘 그을려서, 그렇게 나이가 많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죠엘은 웃음을 터뜨렸다.
“리사한테는 손 들었어. 그러나 이제 잘 알고 있을 테지.”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얼굴을 돌렸다. 리사는 갑작스런 그의 태도의 변화를 잘 알 수 없었다. “이 초대는 아무런 속셈도 없는 거야, 리사. 나는 이제부터 이틀 동안 친구의 별장에서 지내려고 함께 와주도록 바래는 거야. 부모님께서 용서해 주실까.” 리사는 부모님이 극구 반대하실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이번 주말을 오빠네 집에서 지낼 셈으로 오후에 출발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모님은 알 까닭이 없다.
“자기 일은 자신이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다고요.” 리사는 되도록 자신만만하게 들리도록 말했다. “부모님은 날 완전히 신뢰하고 계시니까요.”
“그건 좋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죠엘이 말했다. “리사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도 안 물었잖아. 내가 칼질하는 잭크가 다시 태어났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어.”
“그랬나요.”
“물론 다르지.”
“그 말을 듣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 알게 된 사람한테 묻는 유익한 질문이 아닐까요. 실례지만 당신은 칼질하는 잭크가 다시 태어난 게 아닌가요. 이런 질문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에 틀림없군요.”
“리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냉혹한지 모르는 거 아냐? 도시의 위험이란 걸 알고 있나?”
“태어나서 줄곧 수도원에서 살아온 건 아니라고요. 오빠가 셋이나 있어요. 여기 코네티컷의 시골에도 텔레비전은 있어요. 위험한 것이나 냉혹한 건 잘 알아요. 밤마다 텔레비전 뉴스는 보고 있으니까요.”
“전쟁에 나가거나, 혁명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위험한 일을 당하는 일은 있는 거야. 자기 방에서 상처를 입거나, 살해되는 일도 있어.” 씁쓸한 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텔레비젼 뉴스로 봤겠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죠.”
죠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그래, 리사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기에 남을 너무 믿는 게 아닐까. 그 때문에 혼이 나는 수도 있다는 거야.”
“나는 당신의 말을 너무 믿고 있는 건가요. 혹시 당신이 초대해 준 것을 말하는 거라면, 안심해도 된다고 말하셨잖아요. 아무런 속셈도 없다, 그렇게 말했죠?”
“아아, 말했지.” 죠엘은 다시 마음을 돌려 차 문을 열었다. “자아, 좋은 랜트카를 빌릴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지 않겠어. 이 양철 장난감으론 견딜 수가 없겠는걸. 턱이 무릎에 부딪친단 말이야.”
“똑바로 앉으면 된다고요.” 리사는 그렇게 말하고 엔진을 걸었다.
두 사람은 오후 늦게 별장에 도착했다. 리사의 집에서 50킬로미터 밖에 안 떨어진 한적한 마을이었다. 별장은 작았으나, 해변과 전용 보트 계류장까지 이어지는 마당은 꽤 넓었다.
“친구 분의 보트는 쓸 수 있어요?” 리사가 해변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전장 6미터의 모터보트를 운전할 수 있어?”
“물론이죠. 바다에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걸요. 그쯤이야 문제없어요. 저녁은 밖에서 먹기로 해요.”
“나를 한가하게 해주지는 않을 셈이군.”
리사는 차에서 조그만 슈트케이스를 꺼내다 말고 손을 멈췄다.
“미안 해요… 아직 몸이 안 좋으세요.”
“아니.” 죠엘은 자신을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다친 것은 지금 신경 쓰고 있지도 않아.”
죠엘은 짐을 내리고, 후주머니에서 키를 꺼냈다.
“여기에는 몇 번인가 온 일이 있지.” 돌연 화제를 바꾸고 말했다. “틀림없이 리사도 맘에 들 거라고 생각해.”
현관문을 열자, 바로 좁은 거실로 되어있었다. 원래의 어부움막의 벽을 그대로 살렸는데 다만 하얀 페인트칠이 되어있었다. 한쪽 벽에는 돌로 된 난로가 있었다. 키가 큰 죠엘은 머리가 닿을 듯 천정은 낮았다. 가구는 오래된 것뿐이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만은 19세기 것이 아니었다.
“석장쯤 겹쳐 깐 게 아닐까요.” 리사가 카펫을 손가락으로 눌러보며 말했다. “그리고 흰 털가죽 융단, 멋있어요.”
죠엘은 방 안쪽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주방은 저쪽이야. 내가 차에서 식료품을 갖고 오는 동안에 침실을 고르라구. 난로 곁의 문을 열면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으니까, 침실은 2층이야.”
리사는 웬지 마음이 헝클어지는 것 같아 죠엘한테서 떨어지는 것으로 마음이 놓였다. 죠엘한테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것도 싫었으나 여자로 상대해 달래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외동딸로 귀염 받고 자라왔기 때문에, 어떤 나이의 어떤 남자가 곁에 있어도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사실상 오빠가 셋이나 되는 덕분에, 남자친구를 특히 이성이라고 의식한 일은 없었다. 대학에서는 인기 있는 여학생이었지만, 아직 진짜 연애를 한 일은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의 남자와 마주친 일도 없었다.
죠엘과 만나기까지는….
문이 세 개가 있었는데 모두가 활짝 열려있었다. 침실은 둘이 있고, 어느 쪽도 거실과 같은 고풍스런 장식이 되어있었다. 또 하나는 현대적인 욕실로, 타일이 번쩍거리고 바닥에서 천정까지 닿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아마도 이 별장 주인인 프랭크는 여자 친구가 전신을 거울에 잘 비춰보고 나서 자기한테 오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죠엘이 돌아오는 소리에 리사는 적당히 침실을 고르고 침대 위에 슈트케이스를 올려놨다.
“침실은 맘에 들었어?” 죠엘이 계단 밑에서 말했다.
“욕실에 깜짝 놀랐어요” 리사가 말했다.
“주방도 볼 만하지. 프랭크도, 아무래도 전부를 예스럽게 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야.”
리사도 내려가니까, 죠엘이 계단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보트를 탈 수 있게, 식사를 만드는 걸 도와줄 테야.”
“샌드위치라면 금방 만들 수 있어요.” 리사가 말했다.
“이 근처에 온 일이 있어서, 해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섬을 알고 있어요. 바위가 많아서 보트는 댈수 없지만, 좀 떨어진 곳에 닻을 내리면 좋은 경치를 볼 수 있어요. 섬은 새들의 둥지로 되어있어요.”
“가을의 저녁시간을 보내는 데는 새를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을 테지.”
리사는 미소를 떠올렸다.
“그거 비아냥인가요.”
“아아니, 비꼬는 게 아니야.”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어보였다. “뇌진탕을 일으킨 뒤니까. 새를 바라보는 것은 내게는 겨우 견딜 수 있는 자극이지.” 그리고는 방긋 웃었다.
“그렇지만 영양이 충분한 식사를 만들어 준다면, 때때로는 갈매기한테서 눈을 뗄 수도 있을 거야.”
리사는 웃으면서 주방으로 갔다. 죠엘과 말을 나누고 있으면, 지금까지 알지 못하는 새로운 흥분으로 가슴이 뛰는 것이었다. 리사는 이제까지 어떤 남자를 상대하더라도 자신이 있었다. 데이트를 하더라도, 상대방을 친구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리사는 죠엘을 친구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고가 있었다는 것과 훌륭한 체격을 지녔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런데 왜 무릎이 떨리고 심장이 격렬하게 고동치는 것일까… 리사는 더 이상 생각하는 걸 그만 두기로 했다.
4장
두 사람이 보트에 올랐을 때는 해든 벌써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리사는 죠엘의 상태가 안 좋은 걸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쉬고 싶으면, 내가 운전할게요. 바람도 없고, 파도도 잔잔하니까 괜찮아요.”
“나는 불구자는 아니라구.” 죠엘이 말했다. “좀 머리가 아플 뿐이야.”
“알겠어요. 당신한테 그토록 중요한 일이라면, 제발 선장이 되어주시죠. 남성우월주의자의 프라이드를 상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당신은 컨디션이 안 좋은 것이나, 통증이 있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죠.”
“아니야.” 죠엘이 되받았다. “장래의 정신분석의가 입을 열 때마다, 강의를 시작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사람이야. 자아,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느 쪽으로 가면 되는지 말해주지 않겠어.”
“여기서 북동 방향이에요.” 리사가 지도를 펼치고, 작은 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마워.” 죠엘은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리사는 죠엘과 몸이 가까워지면 웬일인지 긴장되고 호흡마저 흐트러지기 때문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도 저도 모르게 가까이 가고 싶어지는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리사는 죠엘에게 등을 돌린 채 앉아 바다를 주시했다. 침몰해 가는 태양이 구름을 핑크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 3시간도 못 되어서 밤이 찾아올 것이다. 싸늘한 바람이 그녀의 뺨을 때렸다. 리사는 윈드부레커의 옷깃을 여몄다.
“춥나.”
“조금.” 리사는 죠엘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뜨끔했다. “스웨터를 따로 갖고 왔으니까 필요하면 그것을 입을 거예요.”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미안하군.” 죠엘이 말했다. “나는 이상한 짓만 하고 있군. 머리가 몹시 아파.”
“잠시 운전을 교대할까요. 석양이 정말 고우니까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머리 아픈 것도 가라앉을 거예요.”
“리사는 괜찮나?”
“뉴잉글랜드의 석양은 여태껏 싫증날 만큼 보아온걸요. 언젠가 유명한 정신분석의가 되어서 캘리포니아에 가게되면, 캘리포니아의 기암절벽이나 집채만 한 파도나, 황금빛 해변을 보고 싶어요. 오늘밤은 이곳 석양을 마음껏 즐기도록 하시죠.”
죠엘은 순순히 핸들에서 떠나서 쿠션에 주저앉았다. 리사는 죠엘의 우람한 체격을 훔쳐보다 다급하게 앞쪽으로 눈을 돌렸다.
죠엘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리사는 왜 애인을 갖지 않았지.”
“어떻게 아시죠.”
“확실하다고.” 죠엘이 말했다. “리사는… 아직 남자 손이 가지 않은 것 같으니까 말이야.”
“나는 수정의 탑 안에 살고 있는 눈의 여왕이 아니라고요.” 리사는 화가 나서 그렇게 말했다. “보이프렌드도 있고, 확실히 언젠가는 결혼하니까요.”
“그러나 아직은?”
“지금은 공부하고 있어요. 대학에는 남편감을 찾아내려고 가는 게 아니에요.”
“결혼해서 가정에 들어앉는 것은 그다지 흥미가 없는 모양이군. 좋은 사람과 만나서 둘이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그 같은 꿈은 없단 말이야?”
리사는 죠엘의 조소 어린 말을 무시했다.
“그거야, 나도 결혼할 꿈을 갖고 있어요. 언젠가 부모님처럼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러나 지금은 우선 정신분석의가 되는 꿈을 실현시키고 싶은 거예요.”
“리사는 지금 어디 살고 있는 거야. 요정의 나라야, 그보다는 현실의 세계야.”
“코네티컷의 현실의 세계예요.” 리사는 갑자기 밝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세상에서 먼 것은 캘리포니아 쪽 아니었던가요.”
죠엘은 따라 웃었다. “또 리사한테 한 대 얻어맞았군.” 죠엘의 목소리에는 다시 따뜻한 감정이 돌아왔기 때문에 리사의 마음도 푸근해졌다.
“저거요.” 리사가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이 섬이에요. 아름답죠.”
“참 아름답군. 정말.”
리사는 목덜미에 따뜻한 입김을 느끼고 죠엘한테서 좀 떨어졌다. 죠엘이 섬을 가리키고 말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죠엘의 목쉰 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리사의 목덜미에 내려앉아 그녀를 떨리게 한 것이다. 죠엘한테 안긴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제는 식사를 하는 게 좋겠군요.” 리사는 되도록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했다. 고맙게도 죠엘은 어째서 식사를 해야 하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뉴잉글랜드의 가을은 좀 쌀쌀하군.”
리사는 닻을 내리고 나서 대답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감사해야 하는걸요.”
“요즘 1주일 동안 영원히 비가 내리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 이러다간 몸에 곰팡이가 슬지 않을까 했지.”
“올해는 이상해요.” 리사가 말했다. “이 근처에서는 가을에는 좀처럼 비가 오지 않으니까요. 큰 오빠가 지난 주에 왔는데, 비 때문에 스포츠의 이벤트가 많이 중지되어 버렸다고 투덜대고 있었어요.”
“리사 오빠는 스포츠맨인가?”
리사는 웃었다.
“전형적인 '소파에 앉은 쿼터백'이라고요. 오빠는 셋 다 모두 텔레비전 앞에 앉아 풋볼을 관전하면서, 코치가 된 기분으로 이래라 저래라 떠드는 거예요.”
“리사 아버지는 뉴잉글랜드의 오픈경기를 보셨을까.”
“글쎄요. 아버지와 오빠들은 지난 주 테니스 시합을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남자들이 텔레비전 스포츠 프로를 보고 있는 동안은, 저는 자리를 피하거든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오빠도 아버지도 US오픈의 우승자가 맘에 들지 않은 것 같았어요.”
죠엘은 순간 들고 있던 플라스틱 컵을 떨어뜨려 커피를 쏟았다.
“실례.” 다급하게 종이냅킨으로 닦았다. “누가 우승했는지 기억하고 있나. 리사.”
“아아뇨. 틀림없이 체코 사람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리사는 테니스엔 흥미가 없는 것 같군.”
“그래요. 당신은요.”
“이따금 라켓을 손에 쥔다고.”
“나는 라켓볼을 해요. 시합을 할까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죠엘이 웃었다.
“아니, 리사가 나를 이긴다고는 생각할 수 없군.”
“그럴 테죠. 당신은 남성우월주의자니까요. 코트에서 여자한테 지는 것이 두려운 거죠.”
리사는 놀리는 듯한 눈으로 죠엘을 보았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대등하게 상대하는 걸로 생각했는데요.”
“그렇게 세뇌 당히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당신과 결혼하는 사람이 불쌍하군요. 당신을 재교육시키는 건 큰일이니까요.”
죠엘은 커피를 따랐다. “적어도 나는, 리사의 장래 남편한테 동정할 필요는 없지. 리사의 요리는 최고니까. 맛있었어.”
“고마워요.” 리사는 먹고 남은 것을 바구니에 담다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저기.”하며 죠엘의 팔을 잡고 바다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갈매기가 저기, 이 근처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거예요.”
“내가 갈매기와 비둘기도 구별하지 못한다면, 리사는 나를 보트에서 밀어 떨어뜨릴 거야?”
“아아뇨. 그렇지만 당신의 무지를 바로잡아 주겠어요.”
“손 들었군. 그런 일은 당하고 싶지 않은걸. 이리 오라구.” 죠엘은 리사의 손목을 잡고, 곁으로 끌어당겼다. “자아, 여기 앉지. 내가 최근 몇 년 동안 만난 가운데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 왜 키스도 해본 일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지 말해주지 않을 테야.”
리사는 죠엘이 본심으로 말하는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말하지 않으면 안 될만큼, 내가 함께 있어서 따분한가요.”
“따분한 게 아니야. 아무튼 리사는 내 질문에 대답을 안했다고.”
“당신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잖아요. 물론 키스한 일은 있어요.” 리사는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설마하니 나를 유혹하는 것은 아닐 테지. 리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달라는 거야.”
리사는 돌연 죠엘과 키스하면 어떤 느낌일지 못 견디게 호기심이 일었다. 죠엘의 좋은 모양의 입술을 지켜보는 동안에 어느새 유혹하듯 입술을 조금 벌리고 있었다.
죠엘은 잠시 그런 리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리사가 마음을 바꾸려고 한 바로 그때, 몸을 앞으로 내밀고 리사의 볼에 키스했다. 잠시 망설이듯 턱으로 기어 내려간 뒤에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리사는 전신에 전기가 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리사는 죠엘이 키스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거라고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다―마치 온몸이 녹아내릴 듯 하고, 몸이 묘하게 움찔거렸다. 죠엘의 혀가 입술을 더듬고, 그의 한 순이 등을 쓸어내리고 있는 것을 의식했으나, 그밖에는 이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죠엘은 리사의 목덜미에 손을 대고, 엄지와 검지를 기어 보내서 블라우스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따뜻한 애무에 리사의 유두는 단단해졌다. 죠엘의 키스가 리사를 황홀하게 해주고 있었다. 어느새 리사는 그의 입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리사는 언제 어떻게 윈드부레커가 벗겨졌는지, 전혀 알수 없었다. 좀 추웠기 때문에 떨면서 말했다.
“죠엘.”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낮았다.
죠엘이 갑자기 리사를 놔버리는 바람에 리사는 쓰러질 뻔했다. 죠엘은 리사를 받쳐주고 옆에 앉혀주었다. 그리고 보트에 기대어 찬찬히 바다를 지켜볼 뿐이었다.
“이런 짓은 그만두는 거야.” 죠엘의 쌀쌀한 말투에 리사는 움찔 놀랐다. “나는 스릴을 맛보려고 숫처녀를 유혹하는 사내가 아니니까 말이야.”
“어째서 내가 숫처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리사의 목소리는 떨렸다. 애무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알아버린 것에 그녀는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죠엘은 하품을 하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남자를 유혹하려면 같은 또래의 남자를 선택해. 리사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누군가한테.”
“당신을 시험하고 싶다면요.”
죠엘은 닻을 올리기 위해 일어섰다.
“자아, 리사.” 그는 리사의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이젠 돌아갈 시간이라고.” 그는 리사의 붉어진 얼굴을 보고 피로한 듯 손을 머리로 가져갔다.
“리사, 리사는 아름다운 몸매의 미녀라구. 내 마음의 평온을 뒤흔들 만큼 멋진 몸이란 말이야. 그것을 확인하고 싶다면, 기쁜 마음으로 확인하도록 해줄게. 그렇지만 리사는 때마침 나를 어려운 고비에서 구해준 사람이니까, 리사의 호의에 대해서 하룻밤의 섹스로 보답하는 것은, 나한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거야. 리사는 반드시 나중에 후회하게 될 테니까. 혹시 22살이란 것이, 숫처녀로 있을 수 없을 만큼의 나이라고 생각한다면, 같은 또래의 애인을 고르란 말이야. 잘 알고 있는 좋은 남자를 고르는 거야. 리사한테 상처를 주지 않는 남자 말이야. 그리고 제발 임신하는 어리석은 짓은 말라구.”
리사는 일어나서 아무래도 죠엘의 뒤를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죠엘의 곁에 다가갔을 때, 리사의 눈은 아직 젖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같은 또래의 사내아이는 필요 없어요. 어른이 된 남자가 필요해요. 당신이 필요해요.”
리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런 말을 하다니, 퇴짜 맞을 것이 두려워서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죠엘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만둬, 리사. 지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 보트를 뒤집어버릴 셈이야.”
죠엘한테 거부당한 것이 생각보다 더 리사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나는 보트를 다룰 줄 알아요. 당신은 석양을 바라보기만 하면 돼요. 내가 해변까지 조종할게요.”
“아아, 그래. 리사는 정말 놀랄 만큼 유능한 것 같애.”
“대학생치고는 말이죠.” 어쩐지 씁쓸함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죠엘은 그것을 무시했다.
“특히 대학생치고는 말이야.” 그렇게 말한 뒤, 일부러 화제를 바꿨다. “내일은 어떻게 할 셈이지. 나를 침대에서 끌어내려서, 새벽 산책을 할 셈이야. 아무래도 리사의 매끈한 몸 어딘가에는 강철로 된 근육이 감춰져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리사는 대꾸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날씨가 좋으면 헤엄치려고 생각했어요.” 겨우 그렇게 말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동굴이 있어서, 9월에도 물이 따뜻해요.”
“그건 좋겠군.” 죠엘은 머리 뒤로 양팔을 깍지 끼우고 하늘을 우러러 봤다. 그리고는 하품을 했다. “피곤하군. 빨리 눕고 싶어졌는걸.”
“혼자서 말이에요.” 죠엘이 편하게 있는 바람에 리사가 놀리듯 말했다.
“아아, 혼자서 말이야. 너무 피로해 있어서 오늘밤은 좋은 애인이 되지 못하겠어.”
그리고는 발그레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리사의 머리를 가볍게 매만졌다. “리사는 아직 새끼 고양이라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자란 호랑이인 체하는 것은 그만두라구.”
리사는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보호자 같은 태도는 이제 그만 해둬요. 자, 거의 다 왔군요.”
해변에 닿았을 때 리사는 눈물이 고인 눈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별장으로 돌아왔다.
죠엘은 다만 굿나잇만 말하고, 2층 침실로 들어가더니 문을 쾅하고 닫았다.
5장
리사는 주방 선반에서, 야한 표지의 소설책을 찾아내서 침실로 가져갔으나, 스파이 소설에 조금도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불편한 밤이 계속되고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리사는 샤워를 한 다음에, 수영복을 입고 그 위에다 숏팬티와 티셔츠를 입었다. 아래로 내려가니,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죠엘과 얼굴을 마주치는 것이 어쩐지 쑥스러웠다. 리사는 어깨를 움찔하고는 겨우 문을 열었다. 죠엘은 커피를 끓이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하이.” 어색한 침묵 끝에 리사가 말했다.
“하이.” 죠엘은 곧 시선을 커피포트에 옮기며 말했다.
“잘 잤어.”
“예에, 당신은요.”
“부엉이가 창가에 왔었지. 그밖에는 편한 잠을 잤지.” 그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라고 손으로 가리켰다. “토스트와 버터와 벌꿀이 준비되어 있어. 커피는 금방 될 거야.”
어젯밤의 쌀쌀한 작별과 오늘 아침 어색한 만남을 죠엘은 무시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피크닉용 점심을 만들고 있는 동안 재치 있게 질문을 해서 리사에게 그녀 자신의 일을 계속 말하도록 유도했다.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면서 오래 이야기를 계속했다. 별장을 떠날 때, 죠엘은 리사가 얘기한 어머니의 에피소드에 소리 내어 웃었다. 죠엘이 차를 몰고 갔을 때 리사는 자기 일을 얘기해버린 일 때문에 당황해서 입을 다물고 말했다. 리사는 이제까지 언제나 남의 말을 듣는 편이었다. 이번처럼 자기 일을 말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신 얘기를 해줘요, 죠엘.” 이윽고 리사가 말했다. “어째서 여기 와있는 거죠. 휴가 중인가요.”
“아니, 이것은 출장이라고. 주말에도 스케줄이 꽉 차 있었지만, 모든 것을 내던지기로 한 거야. 일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거라구.”
“도대체 당신은 뭘 하는 사람이에요.”
“내 회계사와 정부를 위해서 돈을 벌고 있지.” 죠엘이 말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생각된다고. 일 얘기는 그만두기로 하지. 주말 동안은 그런 일 생각하고 싶지 않아.”
리사는 많은 것을 질문하고 싶었으나 벌써 바닷가를 가는 갈림길이 가까웠다.
“저 길을 들어가는 거예요.”
양쪽으로 밤나무가 늘어서 있는 비좁은 길이었다.
“바닷가에 사람 하나 없이도 안 놀라는군, 이건 원 지독한 길이로군.”
“좋은 길이에요.”
“헤어핀커브가 세 곳이나 있었는데 말야.” 그는 바닷가와 길 사이에 있는 풀밭에 차를 세웠다.
“여기쯤 세우면 되나.”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맘에 들면 좋을 텐데, 해수욕객이 올 곳이 아니에요. 바위가 많기 때문에.”
“꽤 괜찮은 곳이로군.” 죠엘은 뒷좌석에서 담요를 꺼냈다.
“이 근처에서 헤엄치는 건 몇 년 만이야.” 짐을 바위에 놓고, 타월을 손에 든 채 물가로 갔다. 엎드려서 물에다 손을 넣었으나 황급히 손을 들었다. “너무했어. 이런 찬물에서 헤엄칠 셈이야.”
리사는 웃었다.
“뉴잉글랜드의 주민은 용감해요. 몰랐어요. 당신은 겁쟁이군요. 차가운 대서양에서 헤엄치는 게 두렵나요.”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얼음이 갓 녹아내린 것 같은 바다에서 헤엄칠 게 뭐야.”
“기분이 참 좋은데.”
리사는 물거품을 손바닥으로 들어올리고, 방끗 웃었다. 그리고 되돌아와서 담요를 가져다가 모래밭에 펴고, 한쪽에 자기 신발을 그리고 반대쪽 구석에 바구니를 놓고, 담요가 날라기지 않게 했다. 죠엘은 리사가 정말로 헤엄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런 리사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리사는 숏팬티를 벗었다. 속에는 경기용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티셔츠를 벗을 때, 죠엘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으나 못 들은 체했다. 수영복이 몸의 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리사는 머리를 파란 리본으로 묶었다. 그리고 조롱하는 듯한 시선으로 죠엘에게 말했다.
“바다속에서 즐기고 있는 동안 당신을 생각하고 있을게요. 잡지에서 읽었지만, 캘리포니아의 다음 세대는 발 대신에 바퀴를 달고 태어난대요.”
그녀는 바다로 성큼 들어갔다. 해조가 발에 얽혀왔으나, 뭍에서 좀 멀어지니까 해초는 없었다. 바다는 숨이 멎을 만큼 차가웠다. 어제 날씨도 1주일 동안 비가 내려서 차가워진 바다를 따뜻하게 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리사는 저쪽에 돌출해 있는 바위를 목표로 헤엄쳐갔다. 죠엘을 놀려줬는데도 가만히 있을 만큼 차가워서 맹렬하게 손발을 움직여서 헤엄쳤다.
리사는 어렵지않게 바위에 기어올라, 그 위에 누워서 태양이 몸을 따뜻하게 해주기를 기다렸다. 추워서 이가 딱딱 마주쳤다. 죠엘이 비웃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더라면, 리사도 헤엄치는 것을 단념했을 것이다. 그런 눈으로 보는 바람에, 보란 듯이 헤엄쳐 버린 것이다. 죠엘은 캘리포니아의 여자들과 자주 어울려 코네티컷 마을의 순진한 아가씨한테는 그다지 흥미도 없는 것일까. 아무리 인어처럼 헤엄치는 것을 보았더라도 그는 정열적으로 불이 붙는 일은 없을 것이다.
리사는 끊임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자신을 깨닫고,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달에는 좀 신경이 과민한지도 몰랐다. 리사는 일어나서, 머리를 묶고 있는 리본을 짜증스럽게 풀었다. 그리고 금발머리를 출렁이며 털었을 때, 힘차게 헤엄쳐 오는 죠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햇볕에 잘 그을린 어깨나, 건장한 다리가, 밝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죠엘은 바위까지 헤엄쳐 와서, 리사의 옆에 앉았다. 몸이 서로 닿아서 리사는 숨을 삼켰다. 갑자기 서로 닿아 있는 곳이, 불타듯 뜨겁기 시작했다.
“환경의 변화는 자연선택에 따라서 형질유전자에 영향을 줄 뿐인 거야.” 그가 가벼운 투로 말했다. “진화에 대해서 배우지 않았어.”
“무슨 소리에요.” 리사는 죠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몸을 맞대고 있는 죠엘만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다음 세대도 발을 닳을 위험은 없다고. 리사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나.”
리사는 그제사, 헤엄치기 전에 죠엘을 놀렸던 것이 떠올라 죠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말대꾸를 잘할 수는 없었다.
“그럴듯한 대답은 못하는 거야.” 죠엘이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 너무 추워서 틀림없이 머리까지 얼어붙을 거예요.” 리사는 죠엘을 의식하고 갑자기 일어섰다. “먼저 해변으로 돌아가 있을게요.” 그녀는 바위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래, 경주하는 거다.”
바다 속으로 뛰어들기 직전, 리사는 죠엘의 말을 들었다. 리사는 힘찬 크롤을 했다. 그녀는 지고 싶지 않았다.
리사가 얕은 데서 일어섰을 때, 죠엘은 어느새 해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죠엘은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몸을 단련하는 거죠.” 리사가 물었다. “캘리포니아의 바다에서 헤엄을 자주 치나보죠. 햇볕에 잘 그을려 있는걸요.”
“그 정도라고 해두지.” 죠엘은 환한 얼굴로 말했다. “재수가 좋으면 계집애들과 어울릴 수도 있어. 해변에 있는 것만으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고.”
리사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죠엘이 놀리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없었다. 죠엘은 찬찬히 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리기를 하기로 할까. 리사가 뛰어가고 난 뒤 2분 지나서 내가 뛸테니까. 그것으로 몸이 더워질 거야.”
죵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사는 해변을 달려가고 있었다. 죠엘은 금방 따라잡고, 리사는 웃으며 모래밭에 무너져 내렸다.
“속였군요.” 죠엘이 끌어주는 데 따라 일어나면서 리사가 말했다. “2분 지난 뒤에 뛰겠다고요. 나를 따라잡을 턱이 없잖아요.”
“리사가 느림보였기 때문이야.”
리사는 장난삼아 죠엘의 머리털을 거머쥐려고 했으나, 그 바람에 가슴이 죠엘의 팔에 닿고 말았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물어버리고, 죠엘은 리사의 두 손을 쥐었다. 긴장된 듯한 눈이었다.
“리사…” 목쉰 소리로 말했다. “리사는 왜 이토록 아름다운 거야.” 그렇게 말하고 양손을 리사의 등에 두르고, 힘찬 고동 소리를 들었다. 리사의 고동 소리는 아직도 뛰어가고 있는 것처럼, 격렬했다. 이마에 따뜻한 입김이 와 닿는가 했더니, 입술이 포개져 있었다. 그리고 손을 가슴 부분으로 가져가서 부드럽게 애무했다. 얇은 수영복을 통해서 죠엘의 손의 감촉을 느끼면서 리사는 전신에 전율이 일었다.
“정말 아름다워, 리사.” 죠엘이 말했다. “이틀 동안 리사의 몸이 갖고 싶어서 혼났어.” 따뜻하게 리사를 안은 채로, 모래톱에 눕혔다.
리사는 죠엘이 키스해 준 것만으로 아무것도 모를 만큼 흥분되어 기쁜 건지 괴로운 건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그 강렬한 감정에 리사는 갑자기 겁이 나고 무서워졌다. 죠엘은 리사의 머리털을 매만졌다.
“가만히 있는 거야. 리사. 리사를 상처 입히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을 테야. 리사는 숫처녀인가?”
리사는 황홀해진 눈을 죠엘에게 보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거의 알지 못했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었지.”
죠엘은 목이 잠긴 소리로 말하고 리사의 다리에 손을 기어 보냈다.
리사가 몸을 떼려하자, 죠엘은 다시 키스를 하고 혀를 깊숙이 들여보냈다. 재빨리 수영복을 어깨에서 벗기고 가슴의 골짜기로 혀를 기어 보냈다. 리사의 가슴 속에 새롭게 욕망이 눈을 떴다.
“그만해요.” 리사는 돌연 자기자신의 반응이 무서워져서,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양손은 아직 죠엘의 등을 부여잡고 있었고 죠엘에 바짝 안기고 있었다.
죠엘은 리사에게서 손을 떼고, 모래밭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리사가 말리는 대로야.” 죠엘이 겨우 말했다. “나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거야.”
목소리는 쉬었으나, 얼굴은 무표정했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죠엘은 태연하게 시계를 보았다. “벌써 3시가 다 되었군. 점심 준비를 해주지 않겠어. 나는 또 한 번 헤엄치고 올 테니까.”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리사에게서 떨어졌다.
리사는 멍하니 바다로 들어가는 죠엘을 바라보았다. 죠엘은 얕은 데를 달려서, 밀려 온 높은 파도를 향해서 뛰어들었다. 리사는 꼼짝 않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경고해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자극적인 욕망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것이라고는 위험한 것이라고는, 아무도 경고해 주지 않았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리사는 겨우 털고 일어났다. 다리에는 힘이 없었다. 리사는 바구니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담요에 내려앉았을 때, 십대의 소년들이 바닷가에 와있다는 걸 깨달았다. 리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혹시 죠엘이 애무를 계속하고 있더라면,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리사는 양손으로 뜨거워진 뺨을 식히며 그런 식으로 끝나길 잘한 것이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6장
리사는 점심 준비를 하는 데 열중하려고 했으나 잘 안 되었다. 뭍과는 평행으로 힘찬 크롤로 헤엄치고 있는 죠엘에게, 저도 모르게 눈길이 쏠리는 것이었다. 리사는 죠엘을 바라보면서 스포츠 선수 같다고 생각했다.
죠엘은 파도를 타고 뭍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얕은 데 이르러서, 머리를 흔들어 물을 털어냈다. 리사는 죠엘한테만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 소녀가 죠엘한테 달려가고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멀리서도 두 소녀가 킥킥거리며 웃고 이쓴 걸 뒤늦게야 발견했다.
리사는 죠엘이 불쾌한 표정으로 돌변한 것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두 소녀 가운데 삐쩍 마른 쪽이 큰맘 먹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고개를 가로저으니 소녀는 실망한 듯, 힘없이 어깨를 떨어뜨렸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소녀에게서 떨어져 바닷가로 돌아왔다. 죠엘이 곁에 왔을 때, 리사는 그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굳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리사는 되도록 침착하게 물었다.
죠엘은 시선을 비켰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를 누군가와 잘못 본 거라구. 싸인 해 달라는 거야.”
리사는 주의 깊게 죠엘의 안색을 살폈다. 굳어졌던 그녀의 마음에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당신은 영화스타와 닮은 데가 있어요. 나는 미처 생각을 못 했지만요.”
리사는 죠엘의 표정에서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 영화스타가 아니에요? 혹시 스크린의 주인공과 주말을 함께 지낸 거라면 기억에 남겨두고 싶은걸요.”
“그만둬, 리사. 영화도 안 보았어. 내가 누굴 닮았단 말이야.” 죠엘은 퉁명스럽게 말하더니, 아직 젖어있는 수영복 위에 바지를 입고 티셔츠를 걸쳤다. “안됐지만 점심은 그만 두고, 별장으로 돌아갈까 하는데. 이번 주말은 킥킥거리며 웃는 십대를 상대할 기분이 아니란 말이야.”
“나는 웃는 얼굴을 해도 되나요?” 리사가 장난기 어린 말투로 말했다. “그것도 안 되나요.”
죠엘이 리사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쥐어뜯었을 때, 그의 긴장은 풀려 있었다. “물론 상관 없고말구. 아무튼 리사는 십대가 아니고, 킥킥거리지 않으니까 말야. 요즘 1주일 동안은, 여간 힘든게 아니었어. 내가 이따금 상처 난 곰처럼 굴어도 용서해 주지 않겠어.”
“그래요. 상처 입은 곰을 달래는 것은 내가 잘하죠.”
죠엘은 웃음을 띠우며 짐을 차로 날랐다. 리사가 보기에는 죠엘이 해수욕객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것 같았다. 차에 타자 그는 라디오를 켜서, 클래식 프로에 다이얼을 맞추고는 볼륨을 높였다. 그것으로 죠엘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리사도 알 수 있었다.
오후 늦게 두 사람은 별장으로 돌아갔다.
“조용하게 있어줘서 고마워.” 안으로 들어갔을 때 죠엘이 말했다. “언제 입을 다물면 되는지, 잘 아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정말 편할 것 같애.”
“그것도 당신이 잘하는 추켜세우는 말일 테죠.” 리사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켜세우는 말이라도 괜찮잖아. 내가 저녁식사를 만드는 동안에, 샤워나 하라구. 점심을 건너뛰었으니까 저녁을 빨리 먹는 게 좋겠지?”
“요리는 할 줄 알아요?”
“기대해도 괜찮을 거야.”
“위장약을 갖고 올 걸 그랬죠.” 리사는 그렇게 대꾸하고 2층으로 도망쳤다.
리사는 오랜 시간 샤워를 했다. 머리를 감고 말린 뒤에, 어깨로 내려뜨렸다. 리사는 자신의 머릿결이 곱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아직 남자한테 무기로 쓴 일은 없었다.
리사는 갈색 비로드 팬티와, 크림빛 실크 블라우스를 몸에 걸쳤다. 어느 쪽도 아직 입은 적이 없는 새것이었다. 블라우스의 목선은, 가게에서 입어볼 때보다 훨씬 크게 파져있었다. 리사는 아이새도우와 립스틱을 바르고 거실로 내려갔다. 죠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난로에는 불이 피워져 있었다.
리사는 침착하질 못했다.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어서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돌아보았으나, 손이 떨리고 있어서 황급히 뒤로 감췄다.
어슴푸레한 불빛을 받아 죠엘의 젖은 머리털이 반짝이고 있었다.
“당신도 샤워를 했군요.” 침묵을 깨기 위해 뭔가 말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순간적으로 떠오른 말을 입에 담았다.
“그랬지.” 죠엘은 글라스에 위스키를 따라 한모금 입에 털어넣으며 말했다. 그는 난로의 불꽃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주방에서 먹으려고 생각했는데, 식사를 나를 필요가 없으니까.”
“좋아요.” 리사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이 정말 매력적인걸요.”
“리사도 그래.”
죠엘은 리사의 눈망울에서, 다음엔 블라우스의 옷깃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가슴의 곡선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자, 그럼, 내가 오븐에서 캐세롤을 꺼내는 동안, 이걸 마시고 있으라구.” 그렇게 말하고 백포도주가 들어있는 글라스를 건네줬다.
리사는 자리를 잡고 포도주를 마셨다. 단맛이 혀를 톡 쏘았다. 리사는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가슴이 답답한 것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죠엘은 테이블에 캐세롤과 사라다가 담긴 접시를 놓았다. 어슴푸레한 불빛에 요리는 더욱 맛있어 보였다. 주방을 비쳐주고 있는 것은, 두 자루의 촛불뿐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요.” 죠엘이 요리를 덜기 시작했을 때 리사가 말했다.
그러나 죠엘이 곁에 있는 한 긴장으로 식욕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치킨, 멋슈륨, 크림, 그리고 백포도주야. 내가 지신 있는 요리라구.” 다소 계면쩍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이것밖에 만들지 못하지만.”
리사는 또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려고 했다. 다행히 죠엘이 잘 지껄였기 때문에 그다지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죠엘은 리사의 글라스에 포도주를 따르면서 어릴 때 일을 재미있게 이야기했다. 리사는 죠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에 마음이 포근해졌다. 함께 지낸 이틀 동안 죠엘은 가족이란 유대감과는 거리가 먼 외딴 존재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공룡의 알에서 태어난 것처럼. 리사는 그렇게 생각하고 웃음을 머금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죠엘이 다시 포도주를 마셨다.
“당신이 공룡이 아니어서 기뻐요.”
죠엘이 거의 비워진 포도주 병을 흔들어 보이고는 리사를 들여다봤다.
“리사가 알콜에 약한 것을 알아둘 걸 그랬군. 도대체 몇잔 마신 거야.”
“겨우 조금인 걸요.” 리사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좀더 마시고 싶은데.” 반쯤 감은 눈으로 죠엘을 보았다. “또 한병 있죠.”
“없어.” 죠엘은 갑자기 일어섰다.
“자아, 거실에 가 있으라구. 내가 커피를 끓일 테니까. 블랙이 좋은가.” 리사가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죠엘이 얼른 리사를 부축했다. 리사는 그가 닿는 순간 기분 좋은 취기가 깨져버리고 말았다. 포도주를 아무리 마셔도 진정한 속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죠엘에게 닿을 때마다 멋진 발견,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아찔해지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있을 때만 정말로 살아있는 듯 느껴지는 것이다.
리사는 죠엘한테 안겨서 애절한 마음을 진정시켜 달래고 싶었다. 몸의 방햐을 돌리고, 자신을 억제하지도 못하고 일부러 히프를 죠엘에게 부딪쳤다. 그의 우람한 넓적다리를 느끼고, 가슴은 두근거렸다.
“죠엘.” 리사가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키스해 줘요.”
잠시 죠엘은 리사에게서 몸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다, 이윽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입술을 겹쳤다. 순간 리사의 전신에 회오리와도 같이 거센 불길이 훑고 지나갔다. 리사의 욕망을 알아내고, 죠엘은 더욱 농도 짙은 키스를 하면서 한쪽 다리를 리사의 양 다리 사이에 넣고, 리사를 테이블에 눌러댔다.
리사는 죠엘의 키스에 탐닉하듯 정열적으로 그를 바짝 안았다.
그러나 돌연, 리사는 혼자가 되었다. 죠엘은 씽크대로 가서 리사에게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거실로 가자.” 거친 말투로 그는 말했다. “부탁이야, 리사. 가지 않을 거야.”
“왜요.” 리사는 여전히 상냥하게 말했다. “왜 당신한테서 떨어져야 하는 거죠. 나는 여기 있고 싶은걸요.”
“가는 거야.”
리사는 죠엘에게 다가가서, 길다란 머리를 그의 뺨에 비벼댔다. 죠엘은 리사의 손을 잡았다
“그만둬, 리사. 리사는 아직 처녀 아냐.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거야.”
“모른다고요?” 리사는 죠엘의 얇은 스웨터를 매만지며, 죠엘이 몸을 떨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난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있어요. 당신한테 어떻게 하면 좋은지 배울 거예요.”
“나를 유혹하는 건 그만둬. 나는 그만큼 의지가 강한 편도 못 되고, 성인군자도 아니니까 말야.”
“날 사랑해 줘요. 죠엘…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죠엘은 잠시 리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윽고 크게 한숨을 쉬더니 리사를 끌어안았다. 죠엘의 격렬한 욕망의 강도를 리사는 헤아릴 수 있었다. 리사는 몸을 바짝 그에게 파고 들었다. 죠엘은 리사의 블라우스를 걷어 올리고, 드러난 등을 어루만졌다. 리사가 눈을 감자, 그는 탐스런 가슴을 혀로 애무하며 리사를 환희의 물결에 휩쓸리게 했다. 죠엘이 얼굴을 들자 두 사람의 시선이 한데 얽혔다.
“당신을 원한다고, 리사.” 죠엘이 허스키한 소리로 말했다. “리사가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침실로 가서 자물쇠를 걸어두는 게 좋을 거야. 이대로라면 나는 이제 자신을 억제하지 못할 테니까.”
리사는 말없이 거실로 가서 쇼파에 있던 쿠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죠엘이 뒤따라 왔다. 리사는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심장이 거세게 고동치고 있었으나, 짐짓 침착한 체하며 죠엘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블라우스의 단추에 손을 가져갔다.
“리사…” 죠엘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는 리사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그만두라구.” 그의 목소리는 한층 다정했다. “이건 내가 할 일이라고.” 죠엘은 리사의 목덜미에 키스하고 작은 진주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블라우스를, 팬티를 벗겼다. 그리고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의 리사를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워. 전에도 말했지만 말이야.” 그는 머리를 숙여서 가슴 부푼 곳에 입술을 눌러댔다.
리사는 다리가 떨리고, 이제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죠엘은 리사를 난로앞의 털가죽 융단 위에 눕혔다. 그리고 손을 전신에 기어 보내서, 손끝으로 리사를 자극했다. 그녀는 황홀감에 못 이겨 눈을 감았다.
“나를 보라구.” 죠엘이 상냥하게 말했다.
리사는 눈을 뜨려고 했으나, 눈시울이 무거웠다. 죠엘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사의 눈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다고.” 그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리사를 갖고싶어 못 견디겠어. 리사를 사랑하고 싶어.”
죠엘은 재빨리 셔츠와 바지를 벗었다. 리사는 죠엘의 등의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죠엘이 돌아오자 손을 뻗어서 옆에 눕게 했다. 죠엘이 리사를 껴안았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죠엘이 어린애에게 하듯 말했다. “조심해서 할 테니까.”
“무섭지는 않다고요.”
리사는 욕망의 불꽃이 타오르는 죠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양손은 따뜻하게 리사의 온몸을 애무하며 그녀를 타오르게 했다.
리사는 전혀 새로운 감정의 격렬함에 몸을 떨면서 죠엘한테 매달렸다. 그가 손으로 쓸고 난 뒤를 입술로 더듬어 가는데 따라 리사의 몸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리사는 애절할 만큼의 몸의 요동을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몰라 죠엘의 얼굴을 끌어당기고, 몇 번이고 키스를 퍼부었다. 죠엘이 리사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무니까, 그녀의 입에선 환희의 신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리사…” 죠엘이 말했다. “이젠 참을 수 없는걸.”
뜨거워진 리사의 몸이 순간 식어버리고, 리사는 죠엘의 키스를 피했다.
“죠엘.”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역시 나는 무서워요.”
죠엘은 손가락을 리사의 입술에 갖다 댔다.
“마음을 편하게 하는 거야. 리사.”
그는 달래듯 말했다. “리사가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안 해. 약속할게.”
죠엘의 양손은 애무를 계속해 내려갔다. 차츰 리사의 욕망의 불꽃이 크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리사는 죠엘의 등에 손을 깍지 끼우고는 새로운 흥분에 몸을 맡겼다. 리사의 몸은 죠엘의 몸과 녹아들어 그녀는 죠엘의 이름을 내뱉었다. 뜨거운 환희의 불길에 휩싸여 형언할 수 없는 활화산 같은 폭발이 덮쳐왔다.
이윽고 죠엘은 몸을 일으켜서 한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리사를 들여다보았다. 그 눈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고마워. 나한테 몸을 허락해 줘서.”
리사를 지켜보는 죠엘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리사는 묘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행복감이 너무 극에 달해서 웬지 슬프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랑하고 있어요, 죠엘.”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한 리사는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거울에 비추듯 선명하게 알았다.
“안 돼.” 죠엘은 화가 난듯한 말투로 부정했다.
“리사, 그런 말을 하면 못써. 리사는 나를 거의 아무것도 모른단 말야. 우리들 둘 사이에 있는 사랑은, 아직 진짜가 아니라구.”
사랑의 행위만으로 지쳐버린 리사는 죠엘의 말의 의미를 따져들 기력이 없었다. 지금의 리사에게는, 죠엘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죠엘은 어쩐지 슬픈 표정이었다. 그는 리사의 눈가에 새털처럼 가벼운 키스를 했다.
“자아, 침실로 데려가 주지. 리사를 껴안은 채 잠들고 싶군.”
“멋져요.” 리사가 말했다. “100년이라도…”
죠엘의 얼굴엔 따뜻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2시간뿐이야. 그 뒤에는 밤을 지내는 좋은 방법을 가르쳐 줄게.”
“그래요, 죠엘.” 리사는 죠엘이 자신을 가볍게 안아 올리는 것을 느꼈으나, 눈을 감은 순간 곧 잠에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침실의 창문으로 새어드는 한줄기의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혀서 리사는 잠에서 깨어났다. 죠엘과의 사랑으로 아직도 몸이 뜨거웠다. 손을 뻗었으나 그는 없었다.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리사는, 만족스런 한숨을 쉬었다.
정열적인 행위는 리사의 몸 구석구석에 아픔을 남기고 있었다. 만족하는 것을 모르듯, 간밤에 몇 번이고 서로 사랑했던 것이다.
느닷없는 전화벨에 리사의 몽상은 깨어졌다. 리사는 주저주저하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리사가 말했다.
“난 프랭크인데, 당신은 도대체 누구야. 죠엘이 혼자서만 주말을 보내고 싶어했는데. 아무튼 좋아, 금방 불러주지 않겠어. 긴급한 일이라고.”
아직도 황홀함이 앙금처럼 남아있는 리사는 프랭크의 무례함에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전하실 말씀이라면 제게 말씀하세요. 죠엘은 지금 샤워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욕실에서 끌어다 줘.” 프랭크는 답답한 듯 말했다.
“부인이 음주운전으로 또 붙들렸어. 그렇게 말해줘. 딸도 차를 타고 있어서, 둘 다 모두 병원에 있다고. 보도진이 집에 몰려와 있다고 말해줘.”
리사는 순간 숨을 삼켰다.
“그렇게 전할게요.” 리사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렇게 의외로 잔잔한 것에 놀랐다. 그러나 충격 때문에 눈앞이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세 번 눈을 깜빡거리며 정신을 차리려 애쓸 때 죠엘이 허리에 타월을 감은 차림으로, 침실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왜 그러지.” 그의 얼굴에도 만족한 웃음이 번졌다.
“당신한테 전화예요.” 리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고, 수화기를 내밀었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부인이 음주운전을 하고 붙들렸는데, 따님이 함께 타고 있었대요. 한 가족이 한결같이 지독한 운전을 하는군요.”
“뭐라구.” 죠엘은 리사의 손에서 수화기를 뺏어들고 큰소리로 말했다.
“수지는 무사한가… 다행이군. 프랭크, 잠깐 기다려.”
죠엘은 수화기를 손으로 가렸다. “리사, 제발 부탁이니 내말을 들어줘. 이것은 리사가 생각하는 것과는―”
“그럴까요.” 리사는 죠엘의 말을 가로막고, 죠엘한테서 한 발짝 떨어졌다. 비통함에 젖은 얼굴은 창백했다. “내가 있으면 전화도 못하겠죠. 나는 옷을 입고 짐을 챙길 거예요. 집까지 안 데려다 줘도 괜찮아요. 택시를 부를 테니까.”
“리사, 기다리라구.”
“안녕. 죠엘.” 리사가 말했다. “정말 즐거웠어요. 아니 매우 도움이 되었다고 해야겠군요.”
리사는 죠엘 로브를 자기 인생에서 영원히 몰아내듯 침실을 빠져나가 문을 닫았다.
7장
아직도 생생한 기억을 겨우 뇌리에서 떨쳐버리고, 리사는 카사 델 솔의 현실로 돌아왔다.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리사는 방안을 둘러본 뒤에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맡의 베개는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리사는 볼을 타고 흘러 내리는 눈물을 화가 난 듯 거칠게 닦았다. 죠엘에 대해서 사실을 알았을 때도 울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눈물을 흘리다니. 이젠 울어도 늦은 것이다. 리사는 과거를 뒤돌아보았으나 죠엘과 함께 그 별장에 갈 만큼 자기가 순진한 여자였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1년 반의 세월이 흐른 지금 리사는 매사에 냉소적이었다.
과거의 기억에 아직도 괴로워하고 있는 자신을 리사는 부정하려고 했다. 카사 델 솔에는 잃어버린 사랑을 한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한을 풀려고 온 것이다. 죠엘을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나 단순히 원한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리처드를 위해서 리사는 죠엘과의 과거를 뿌리쳐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리사는 옷장에 달린 거울에 앉아 귀고리를 풀었다. 머리를 묶고 있던 리본을 뺀 다음에 솔질을 했다. 드레스의 지퍼를 내리고, 드레스를 마룻바닥에 벗어던졌다. 리사는 죠엘의 일을 떨쳐버리려고 거울에다 주의를 기울였다. 화장지로 메이크업을 지워내면서 사실은 어떤 기억을 잊으려 하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잊고 싶은 것은 리처드의 따뜻한 키스인가, 마음을 괴롭히는 키스인가 하고.
거울 속에 난데없는 사람의 그림자가 불쑥 비쳐 놀란 리사는 뒤돌아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죠엘이 리사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소리 지르지 마.” 근엄한 투로 말했다.
“리처드를 여기 부르고 싶어?”
“나가줘요.” 죠엘이 손을 놓는 순간 리사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죠엘의 느닷없는 출현에 리사의 몸은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죠엘은 리사의 명령을 무시했다.
“어째서 여기 온 거야.”
“아까도 그렇게 묻더군요.”
“그러나 당신은 대답하지 않았지. 그래서 또 묻고 있는 거야.”
“리처드가 가자고 해서 온 거예요. 나는 리처드의 약혼자이고, 당신은 리처드의 소중한 고객의 한사람 아니에요. 리처드는 당신을 숭배하고 있어요. 당신을 우상처럼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가엾은 리처드. 정말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
죠엘의 얼굴에선 어떤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목줄기가 꿈틀꿈틀 요동치고 있었다.
리사는 그것을 보고, 외면했다. 죠엘한테 동정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미워하는 편이 더 편했다.
“당신과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부탁이니까, 나가줘요.”
“당신은 내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을 셈이야. 내가 그토록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듣고 싶지도 않아.”
“당신은 나를 속였어요. 거짓말을 한 거예요. 나를 이용했어요. 그런 당신한테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예요.”
“아마 나는 당신을 속였을 테지. 그러나 의식적으로 그런게 아니야. 당신한테 거짓말을 한 것은 인정할게. 적어도 당신한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그러나 나는 당신을 이용하거나 한 일은 없어. 그것만은 알아줘야 해.”
“부탁이에요. 나가줘요.” 리사는 죠엘을 증오했다. 지금도 죠엘을 의식하고 가슴이 떨리는 것이다. “서로 이야기할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어째서 내가 설명하도록 기회를 주지 않는 거야. 아무것도 모른 채 맘대로 상상하고는 그것을 뒤엎을지도 모르는 것을 듣는 건 두려운 거야? 나는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 더구나 당신도 기뻐서 따라줬지 않아. 내가 당신을 원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 자신이 나를 바랬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것을 지워버리고 싶단 말인가?”
정곡을 찌르는 죠엘의 말에, 리사는 얼굴을 양손에 파묻었다.
“가줘요. 죠엘. 나를 내버려 둬요. 당신 거짓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틀림없이 나를 비웃었죠. 결혼했는지도 묻지 않은 순진한 여자라구.”
죠엘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리사의 머리를 매만졌다.
“내가 당신을 유혹한 건 아니었지. 어쩌다 그렇게 되고 만거야.”
“어쩌다라뇨. 당신은 결혼했었잖아요. 그걸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나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어. 벌써 이혼 서류에 사인하고 있었어.”
리사는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그렇지만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당신 부인과 따님이 사고를 당했다고 했잖아요.”
“말을 잘못한 거야.” 죠엘은 피로한 듯 말했다. “스잔나와 나는, 이혼하기까지 13년 동안 함께 살고 있던 거야. 모두가 스잔나를 내 아내라고 부르는 데 익숙했지. 프랭크는 한시라도 빨리 나한테 알려주려고, 황급했기에 똑바로 말을 할 수가 없었잖아.”
리사는 얼굴을 외면한 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을 감췄다.
“당신이 거짓말을 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자기가 누군가에 대해서 일부러 나를 속인 게 아닌가요. 내가 사랑을 했다―아아뇨. 내가 주말을 함께 지낸 남자는 내 사랑 속에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죠엘 로브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죠엘은 리사의 바로 뒤로 옮겨왔다. 리사는 목덜미에 따뜻한 입김이 닿았다.
“이해해 주지 않겠어, 리사. 코네티컷을 드라이브하고 있을 때, 나는 기분이 엉망이었던 상태였어. US오픈에 진 바로 뒤였으니까. 32살의 나이는 테니스계의 3관왕이 되는 기회를 영영 놓쳐버렸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의식을 되찾고 나서 당신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내 자신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차에 타고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어. 좀 머리가 맑아졌을 때는 분명히 당신한테는 사실을 말할 수도 있었지. 그러나 그때는, 2, 3일 동안 현실로부터 도망쳐 있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지.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니스 선수, 카메론 로버트슨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지금까지의 인생이나 테니스에 대한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싶었던 거야. 특히나 아내에 대한 일과 딸의 양육비를 둘러싼 말 못할 괴로움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리사는 죠엘의 호소하듯 하는 말투에 저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가는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차갑게 말했다. “주말의 심심풀이로 몸을 바치라고, 나를 충동질했다는 건가요.”
죠엘은 리사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당신은 나를 비난할 수 없다고. 당신은 정말 다정했어. 정말 상냥하고 따뜻했지… 행복해 보였다. 내가 편할 수 있고 또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신 덕분이라고. 나는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 순수하게 플라토닉 한 것이기 때문에, 당신을 초대해도 된다고 자신을 타이른 거야. 물론 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던 거지.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을 갖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분명히 나는 당신한테 거짓말을 했어. 그러나 당신을 속인거와 마찬가지로 자기자신도 속이고 있었던 거야.”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당신은 나를 무시한 게 아닌가요. 지금 말한 것은 보다 전에 말할 수 있었던 거 아닌가요. 전화를 걸어서 그럴 수도 있었을 거 아니에요. 어째서 지금 와서 말하는 거죠.”
죠엘은 리사를 자기 쪽으로 돌아보게 했다.
“당신한테 사과하려 했던 거야. 정말로. 내가 전화를 끊기 전에 당신은 별장에서 나가버렸지만, 나는 병원으로 수지를 찾아본 뒤에 당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고. 당신 아버지는 당신이 대학에 돌아갔다면서, 하숙집 전화번호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
“아버지가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했다니 무슨 뜻이죠. 왜 아버지가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내가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당신 아버지는 내가 누구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 부모는 내 인생을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으셔요. 그리고 혹시 당신이 정말로 나를 찾으려고 했다면, 아버지가 뭐라 하시든, 나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쉽게 단념해 버린건 아니야. 리사. 수지가 퇴원하고 수지의 양육권을 둘러싸고 소송이 결판났을 쯤 해서 나는 곧 코네티컷토로 갔었지. 그러나 당신 아버지는 이미 때가 늦었다고 하시더군.”
“때 늦었다니 뭐가 늦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군요.”
“당신 아버지는 당신이 고교시절부터 사귀고 있던 청년과 곧 결혼할 거라고 말씀하셨단 말이야. 당신을 정말로 생각한다면 당신한테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지. 아무리 설명해도 잘못을 빌어도 이제 늦었다고 하시더군.”
“믿을 수가 없어요. 어째서 아버지가 그런 거짓말을 하신다는 거예요. 나는 리처드와 만날 때까지 약혼한 일은 없었는걸요.”
죠엘은 어깨를 움찔했다.
“아마도 아버지는 딸을 지킬 셈이었을 테지. 당신이 다시는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게 하려고 하신 거야.”
“그렇지만 아버지는 모르셨는걸요. 나는 그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모님께 말하지 않았어요.”
“당신 아버지는 의사야, 리사. 사람을 관찰하는 훈련을 받고 있는 거야.”
“도대체 뭘 관찰한다는 거죠. 나는 당신과 관계한 것만으로 얼굴이 뻘개지거나 하지 않았어요.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처녀처럼 하염없이 울지도 않았어요. 대개의 여자는 언젠가 맨처음 애인과 만나는 거예요. 마침 당신이 내 첫 남자였다는 것뿐 아닌가요.” 리사는 냉소적인 웃음을 띠었다. “혹시 나는 당신한테 감사해야할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은 멋진 교사였고, 나는 좋은 공부를 했으니까요.”
“그만둬.” 격한 말투였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야. 우리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이. 보통의 엔조이 이상의 것이었다는 것은 당신도 알잖아.”
“내가 당신 남성의 에고이즘을 상하게 했나요. 그렇다면 사과할게요. 그렇지만 알고 계시죠. 나는 좀 경험을 쌓아가지고, 좋은 애인을 찾은 거예요.”
“리사, 당신은 나한테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면 성공한 거야.”
“어째서 그런 소릴 하는 거죠.” 리사는 자기가 한 거짓말이 죠엘을 상처 받게 한 것에 통쾌했다. “지금 당신은 자기가 만들어낸 여자를 보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만들어낸 여자가 마음에 안 드나요.”
죠엘은 격분한 나머지 리사의 목소리에 담긴 애통함을 깨닫지 못했다. 죠엘은 노여움을 폭발시키고, 눈에 욕망의 불꽃을 튀기며 느닷없이 리사를 껴안았다. 리사가 죠엘의 뜨거운 몸을 느꼈을 때, 비로서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 드레스를 벗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짓을 해도 아무런 느낌도 없어요.” 리사는 감정을 억누르고 쌀쌀한 목소리로 말했다. “놔줘요. 죠엘 당장.” 죠엘은 반항하는 리사를 힘 들이지 않고 붙들고는 얇은 슬립을 찢어버렸다. 그리고 황홀한 눈으로 리사를 똑바로 보며 침을 삼켰다. “당신은 이전보다 더 아름다워.” 그리고는 얼굴을 숙여 키스했다.
리사는 반항했으나 어떤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그 반항은 힘이 없었고,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날 밤 이래, 다시 경험하지 못했던 욕망의 물결에 지금 리사는 지배되고 있었다. 죠엘의 혀가 입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왔을 때 온몸엔 불길이 당기는 것 같았다. 죠엘의 거친 키스에 리사의 입술은 상처가 났으나, 그런 것은 깨닫지 못했다. 그만큼 죠엘한테 다시 안겨있다는 기쁨은 컸다. 순간적으로 리사는 압도적인 감정에 몸을 내맡겼으나, 이윽고 반항할 의식을 되찾았다. 또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면 도저히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리사는 격렬하게 몸을 뒤틀었다. 다시 그와 같은 짓을 반복해선 안 된다.
“얌전히 구는 거야. 리사.” 죠엘이 리사의 얼굴 가까이에서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 당신 몸을 느끼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단 말야.”
리사는 죠엘의 목소리에 담긴 격한 정열에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 두려워서 귀를 양손으로 눌렀다. 죠엘을 기억 속에서 제거하는데 1년 반의 세월이 걸렸다. 다시 그 어두운 터널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건 견딜 수 없었다. 아무리 상상만의 사랑이라 하더라도 더할 수 없이 가슴이 아팠다. 리사는 얼굴을 돌리고 몸이 굳어졌다.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리처드가 올 때까지 비명을 지를 거예요.”
“아니, 당신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걸.” 죠엘은 나지막하게 말하고 리사의 머리카락에 손을 얽히게 했다.
“당신은 나한테 사랑해 주기를 바래고 있는걸. 비명을 지를 수 있겠어.”
죠엘은 한손으로, 가슴을 따뜻하게 애무하면서, 리사의 목덜미에 깃털 같은 가벼운 키스를 하고, 재치 있게 리사를 타오르게 했다. 이윽고 리사를 안아 올려서, 살짝 침대 위에 눕혔다.
“당신은 그때 일을 잊어버렸을 테지. 다시금 생각나게 해주지.”
“죠엘… 부탁이에요. 이런 일이…”
죠엘이 덮쳐왔을 때, 리사는 몸을 뒤틀어서 의식적으로 부정하려 애썼다.
“줄곧 이렇게 하고 싶었다고.” 죠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찢겨진 슬립을 엉덩이까지 밀어 내렸다. 리사의 전신을 거칠게 애무해 내려갔을 때는 벌써 자기 몸이 잠들어 있다가, 죠엘의 요술같은 애무로 눈을 뜨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리사는 꼬옥 눈을 감고, 가슴을 덮고 있는 죠엘의 머리를 보지 않으려 했다. 자기가 리처드와 약혼해 있다는 것을 또렷이 의식하려고 애썼다. 반항하는 것마저도 불가능하게 하는, 전신에 몰려오는 환희에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죠엘.” 리사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속삭였다.
“죠엘 나는 약혼했어요. 나는 리처드와 결혼할 거예요. 부탁이에요. 그러지 말아요.”
“리처드와 결혼한다고.”
죠엘은 리사의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을 전부 벗겨버리고, 양손을 꼼짝 못하게 하고는 입술과 혀로 거침없이 공격해왔다. 죠엘의 격정적인 몸짓에 그녀도 타올라서, 리사는 심하게 몸부림쳤다. 어느 샌가 죠엘한테 매달려서 죠엘을 힘껏 껴안고 있었다.
죠엘은 끝없이 키스를 계속하고, 입술에서 가슴에 그리고 다리에 입술로 더듬었다. 리사가 무의식중에 엉덩이를 처드니까, 죠엘은 신음 소리를 내고 리사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리사는 겨우 정신을 되찾고 얼굴을 돌려 죠엘의 키스를 비켰으나, 아직도 반은 죠엘과 서로 얽혀 있었다.
“죠엘, 내가 싫어하고 있는 걸 모르겠어요?” 쌀쌀한 말투로 외치듯 말했다. “당신한테는 성실성이란 게 없어요. 리처드는 당신 친구죠. 난 리처드와 결혼하는 거라고요.”
죠엘의 몸이 천천히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그래서 우리 집에 왔어? 당신이 내 친구의 한 사람과 약혼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나를 괴롭히고 싶은 거지. 나한테 벌을 줄 셈으로.”
리사는 옷장으로 걸어가서 로브를 꺼냈다. 크림빛 벨트를 매는 손이 떨렸다.
“어떻게 내가 당신을 벌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피로한 듯 말했다. “당신 남자의 프라이드를 좀 상하게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내가 뭘 하든 당신이 상처 받을 거야 없잖아요.”
“호오, 그게 새로운 조건인가. 당신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파트너한테 불멸의 사랑을 맹세하라고 할 셈인가, 리사. 나는 기쁘게 따를 거야. 당신을 안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어.”
리사는 다가오는 죠엘의 눈을 외면했다.
“나가줘요, 죠엘.” 이외로 얼음장 같이 쌀쌀한 목소리였다. “나는 당신한테 안기고 싶지도 않고, 조건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에요.”
죠엘의 눈에 순간 노여움의 빛이 스쳐갔다. 이윽고 죠엘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마음이 변하면 알려주지 않겠어. 나는 아름다운 여자한테는 기쁜 마음으로 따를 거야.”
“그럼, 여기서 빨리 나가줘요.”
죠엘은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리사는 침통한 눈으로 죠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8장
다음날 아침 리사는 죠엘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아침을 먹지 않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벌써 10시가 가까워서 죠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리처드가 파티오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리사는 기다리게 한 것을 사과했다. 리처드는 리사의 파래진 볼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리사에게 따뜻한 키스를 했다.
“죠엘한테서 전기자동차의 키를 얻었지.” 리처드가 말했다. “이곳 휴양지를 안내할게.”
“네에.” 리사는 경쾌하게 말하려고 했다. “기대할게요.” 죠엘의 집에서 클럽하우스로 이어지는 길에는, 한쪽에 거대한 떡갈나무가 늘어서 있었고, 하이비스커스가 베코니아도 피어있었다. 또 한쪽으로는 골프코스가 펼쳐져 있었다. 잔디 내음이 일대에 가득 차 시원함을 주었고, 스프링클러가 무지개를 만들어 내며 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리사는 주위의 아름다움 정경에 감탄했다.
“오늘은 조용하게 하고 있는 것 같군.” 리처드가 전기자동차를 나무그늘에 세우고 말했다.
“멋진 경치와 햇살을 즐기고 있는 거예요.” 리사가 말했다. “뉴욕은 아직 추웠던 걸요.”
리사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는 자신을 미워했다. 어젯밤에는 겨우 리처드한테 죠엘과의 관계를 털어놓을 결심을 했었는데, 이렇게 리처드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약혼자한테, 그의 친구이기도하고, 소중한 고객이기도 한 남자가, 지난날 자기 애인이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또 마음이 끌리고 있는 것을, 어떻게 고백할 수 있을까.
“분명히 멋진 경치야.” 리처드가 말했다. “그러나 클럽하우스 안은 더 멋있지. 죠엘이 최고의 시설을 만들기 위해서 쏟은 정열을, 당신도 알게 될 거야.”
두 사람은 클럽하우스의 로비를 거닐었다. 털밭이 긴 카펫은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열대의 식물과 흐린 빛의 유리가, 외부와 내부를 칸막고 있었다. 리처드는 로비의 중앙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가데니아가 만발해 있었다.
“죠엘은 학생을 두 사람 데리고, 돌보게 하고 있는 거야. 클럽하우스의 식물을 돌보는 데만 날마다 몇 시간이나 걸리지.”
리처드는 접수하는 사람한테 고개를 끄덕이고, 실내 테니스코트로 가려고 했다. 그 여자는 직업적인 미소를 떠올렸으나, 리처드인 것을 알고는 기쁜 듯한 표정이 되었다.
“노빅 씨, 여기 오시기 잘하셨어요. 죠엘한테서 들었어요. 곧 만나고 싶다니까, 사무실로 가주시지 않겠습니까.”
“난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리사가 빠른 말로 그렇게 말했다.
“죠엘은 당신이 함께 와도 괜찮을 거야. 그도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지.”
“일 때문에 이야기하시는 데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요. 아무튼 당신은 그사람 변호사 아니에요.”
리처드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데스크 뒤에 있는 문이 열리고 죠엘이 나타났다. 그는 다정하게 리처드의 어깨를 치고, 리사에게는 쌀쌀한 미소를 보냈다.
“안녕, 잘 잤어요.”
리사는 죠엘의 눈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네에, 매우 편했어요.”
죠엘은 입가에 힘을 주고 리처드에게 얼굴을 돌렸다.
“릭크, 안됐지만 귀찮은 연락이 왔단 말이야. 자네 앞으로 텔레스가 와있어. 뉴욕에서지.”
“손 들었어. 듣고 싶잖은 심경이군.”
리처드는 신음 소리를 냈다.
죠엘은 동정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텔렉스를 찢어버릴까.”
“뉴욕의 사무실을 떠나기만 하면 언제나 문제가 일어난단 말이야. 이번에는 도대체 뭘까.”
“읽어보았는데, 쥬세프의 소송에 관계되는 것 같애, 곧 돌아오라는 거야.”
“쥬세프 건이야? 사기로 고소당한 사내지. 사정을 잘 아는 것은 나뿐이라고. 소송이 시작되려면 아직 2주일이나 남았는데, 어떻게 된 걸까. 형세가 악화됐는지도 모르겠군.”
리사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리처드가 뉴욕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자신도 함께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죠엘한테 원한을 풀겠다는 잘못된 욕망을 말끔히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뉴욕에 돌아가기만 하면, 어젯밤 죠엘한테 안겨서 어떤 기분이었는지 따위는 잊을 수가 있다.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도, 건장한 체격도 잊을 수가 있겠지.
리사는 리처드에게 얼굴을 돌리고, 그의 다정한 얼굴을 살펴보았다. 온화하고 침착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리사가 남편될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었다. 그를 잃을 위험을 저지르면 안 되는 것이다. 리사가 결혼하고 싶은 상대자는 리처드였다. 리사는 죠엘의 시선을 의식하고 리처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죠엘은 순간 화가 난 듯 입술을 꽉 다물었다.
“휴가를 도중하차 하는 것은 아쉽지만, 일을 우선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아쉬운 듯한 말투를 훙내내기란 쉽지 않았다. 리사는 죠엘한테서 떠날 수 있다는 해방감에 들뜬 기분을 모두에게 눈치 채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오후 첫편 비행기를 탈 거라면 곧 짐을 챙겨야 하겠군요. 공항까지는 시간이 걸리니까.”
리처드는 온화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당신이 휴가를 중지할 필요는 없는 거야. 당신은 여기 있으면 돼.”
“그건 안 돼요. 나는 당신과 함께 돌아가고 싶어요. 당신이 없으면 재미없다고요.”
“그렇게 말해주는 건 고맙지만, 나는 이틀 동안 길어봐야 3일 동안 뉴욕에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당신은 여기 있어주면 좋겠어. 당신 안색이 좀 안 좋은 것은 과로 탓이야. 편하게 쉬도록 하지.”
“리처드, 당신과 함께 가고 싶다고요.” 리사는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 혼자 여기 있으면, 죠엘한테 폐가 돼요.”
“그럴 리가 있겠어. 죠엘과 나는 친구 사이라고. 죠엘은 뉴욕에 오면 우리 아파트에 잘 머물고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대저해 줄 거라구. 그렇지 않나, 죠엘.”
“물론이지.” 죠엘이 말했다. “리사를 심심하지 않게 할게.”
리사는 죠엘이 뭔가 암시하고 있다는 걸 알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리처드는 여전히 그 사람좋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아, 이로써 모두 해결된 거야.”
그리고는 리사를 껴안았다.
리사는 순간 리처드의 그 둔감함에 화가 나서 사실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그러나 리처드는 감정적인 면을 싫어했기에, 지금 감정에 부추겨져서 고백하는 것은 리사한테는 불리했다.
“그럼 나한테 짐 꾸리는 걸 돕게 해 줘요.” 리처드와 둘만있기 위한 적당한 구실을 둘러대기 위해 리사는 서둘러 말했다.
리처드는 다시 리사를 끌어안고 가벼운 키스를 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당신이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일손이 더디게 되고 마니까.”
리사는 뭐라 대꾸하려고 했으나 리처드는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리사, 나는 서둘러야 해. 길이 혼잡하거나 하면 공항에 도착하는 게 늦어져서, 이용할 수 있는 편도 줄어지니까 말야. 당신은 여기 남아서 마음껏 휴양을 취하는 거야.” 그는 리사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죠엘이 보살펴줄 거야. 그렇지, 죠엘. 혹시 바쁘지 않으면 30분쯤 시간을 내서 리사를 안내해 주지 않겠나.”
죠엘은 착잡한 표정과는 달리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그럼,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지.”
리처드는 한결 가벼운 얼굴로 말했다. “주말에는 돌아올게. 약속할게. 그때까지 일광욕이라도 하고 있으라구.”
리처드는 사무실에서 나가고, 리사는 절망에 가까운 심정으로 리처드를 배웅했다. 뒤쫓아가서 리처드를 부여잡고 사실을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렇지만… 지금 설명할 수는 없었다.
리사는 혼자 있고 싶어졌다. 이 이상 죠엘과 함께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일을 하시죠.” 리사는 그렇게 말하고 걷기 시작했다.
“안녀, 죠엘.”
죠엘은 리사를 따라잡고 손을 잡았다.
“리사, 우리는 이야기해야 돼. 차의 키를 가져올 테니, 사람이 없는 데로 가는 거야. 이 로비는 금방 러쉬아워의 역처럼 될테니까.”
리사는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죠엘의 손을 뿌리쳐 버리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해요. 나를 상관하지 말아요. 당신과 함께라면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아요. 우리한테는 이야기할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게 아니라, 우리한테는 얘기할 게 몇 가지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선 리처드의 태도를 보더라도, 우리 둘 사이를 당신은 그에게 말하지 않은 거지.”
“우리 둘 사이란 뭐예요.” 리사는 돌연 화가 치밀었다.
“나는 한번 당신하고 잔 것뿐 아녜요. 당신과 잤으면 이제 다른 남자와는 결혼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당신한테 안긴 여자는 영원히 당신 것이 되어버린다는 건가요.”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는걸.” 죠엘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1년 반 동안 당신을 잊으려고 애썼지, 그런데 안 되었다고.”
“나는 당신을 잊어버렸어요.”
리사는 그녀의 말에 안색이 달라진 죠엘을 보고 한순간 복수라도 한 것 같아 기뻤다. 죠엘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으나 이윽고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에도 말했지만, 리처드는 당신한테는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라고. 당신은 지적인데다, 유능한 정신분석의야. 1년도 못 돼서 리처드하고 잘 안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리처드한테는 정열이란 게 없으니까 말야.”
리사는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나는 결혼에 정열 따위는 바라지 않아요. 성실성과 온화한 것이 필요해요. 당신과는 거리가 먼 것 말이에요. 상관 없으시다면 전 비행기를 예약하고 싶은데요.”
죠엘은 다시 리사의 손을 잡았다.
“리사.” 애절함이 깃든 목소리였다.
“부탁이니까, 가지 말아줘.”
리사는 죠엘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여긴 있을 수가 없어요.”
죠엘의 얼굴엔 경련이 일었다.
“내가 부탁하는데도 말이야. 좀더 당신하고 함께 지내고 싶은 거야.”
리사는 달콤하고 애절한 떨림으로 순간 망설였다. 캘리포니아로 오기 전에는, 죠엘을 증오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죠엘의 호소하는 듯한 이 끈질긴 태도에 그동안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에게 속이고 있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리사는 죠엘의 눈을 마주보기가 두려워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곳을 구경하고 싶군요.” 리사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말했다. “그렇지만 오늘밤 여기를 떠날 셈이에요.”
“알았어.” 죠엘이 말했다. “나는 다만 조금이라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 평생토록 곁에 있어달라고 한 게 아니야.” 죠엘의 목소리는 다시 가라앉아 있었다. “걱정 마, 당신을 안내하기만 할 뿐이니까.”
리사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죠엘은 리사의 팔을 잡고 비좁은 안마당을 가로질러 지프에 올라탔다. 죠엘이 시동을 걸었을 때 두 사람의 어깨가 서로 닿자, 리사는 움찔했다. 리사는 황급히 주먹을 꽉 쥐고, 자기 기분을 억제했다. 리처드가 상대일 때는 왜 지금처럼 가슴이 뛰거나 하지 않을까.
“요즘은 테니스 토너먼트에도 나가지 않기 때문에, 그저 보통의 실업가가 되어버렸지.”
죠엘이 말했다.
리사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테니스의 열광적인 팬인 계집애들을 못 만나니까 쓸쓸한 거죠.”
죠엘이 가늘게 웃음을 담아 보였다.
“아니, 내가 만나지 못해서 쓸쓸한 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고.”
리사는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에 숨을 삼켰다. 죠엘과 얼굴을 마주한 지 아직 30분도 안 되었는데, 다시 그때처럼 이끌리고 있는 것이다.
“놀리지 말아요, 죠엘.”
“놀리다니 무슨 소릴. 지금은 놀릴 만한 기분이 아니라구.”
리사는 머리를 쓸어 올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카사 델 솔에 대해서 얘기해 줘요. 왜 여길 사기로 했나요.”
죠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당신은 아직도 현실에서 도망치고 있군. 아무리 도망쳐도, 언젠가는 현실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을 수 없지.”
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아요.”
죠엘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럼 왜…” 그는 말을 다 맺지 못한 채 리사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리사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죠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를 산 게 아니야. 상속 받은 거지. 카사 델 솔은 우리 할아버지 것이었다고.”
“이런 아름다운 곳을 상속 받다니 당신은 행운아로군요.”
리사는 죠엘이 자기들과는 무관한 일을 언급한 것을 기회로 계속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한 다른 질문을 했다. “당신 할아버지는 어떻게 이 땅을 손에 넣으셨을까요. 농부에서 성공해서 서부로 이주하신 건가요.”
“그게 아니고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셨어. 8형제의 장남으로 말이야. 그의 아버지는 겨우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벌었지만, 어떻게든 끌어대서 아들을 엔지니어로 교육을 받게한 거야.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보일러맨으로 화물선을 타고 캘리포니아로 왔지. 할아버지는 운이 좋았어. 캘리포니아에 상륙한 지 이틀 만에 작은 비행기 회사에 설계기사로 채용된 거야. 제2차 대전 후에는 회사의 발전과 함께 할아버지도 여유가 생겼지. 그리고 베트남 전쟁 동안에 전투기를 설계하는 것이 싫어져서, 정년보다 일찍 퇴직해서 오렌지 농원에 투자한 거야. 할머니는 멕시코 출신이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아내를 기쁘게 해주려고 농원에다 카사 델 솔, 그러니까 태양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인 거야.”
“훌륭한 분 같군요.” 리사가 말했다.
“그럼,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이 자꾸만 이사했기 때문에, 할아버지 집에 신세진 일이 많았었지. 정말 존경하고 있었지.”
“그렇다면 여기를 상속 받았을 때는 실제로는 오렌지 농원이었군요.”
“아아, 그래. 그런데 할아버지는 오렌지 재배를 사업이라기보다, 취미라고 생각하셨던 거지. 할아버지는 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이곳을 스포츠 시설을 갖춘 휴양지로 꾸미는 생각에는, 동의해 주셨지. 나는 16살 때부터 테니스에만 열중해 왔기 때문에, 오렌지 농원의 경영을 아무것도 모르지. 그러나 사람들이 휴가를 즐기면서, 몸을 단련하는 것을 돕는 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구상을 갖고 있었어.”
“자기 몸이 단련되어 간다는 것은 좋은 일일 테죠. 내 동료 중의 한 사람은, 가출해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을 위해서 에어로빅댄스의 워크숍을 열고 있어요. 올해는 그 사람이 아이들을 교정하는 데 있어서 제일 좋은 성적을 올렸어요. 비행적인 과거를 갖고 있는 아이들은 몸을 단련하는 것으로 자기 몸에 보람을 갖게 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격한 스케줄과 달성해야 할 목표를 갖게 되는 거예요.”
“나는 여름 캠프에서 아이들한테 테니스를 가르친 일이 있기 때문에 당신이 하는 말을 잘 알 수 있어.” 죠엘이 말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기쁨을 느낀 일도 있었지만, 기분이 잡친 일도 있었지. 내가 지도한 아이들은 아무리 캠프하는 동안에 테니스를 잘하게 되더라도, 집에 돌아가면 연습할 곳이 없기 때문에 쉽게 실력이 늘지 않더군. 당신은 일하는 데 기분이 상하는 일은 없나.”
“자주 있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기분 상하는 일뿐이에요. 특히 최근에는 예산이 삭감되었어요. 다행히 우리의 운동자금은 경찰에서 나오지 않고, 복지단체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다지 절망적인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 상대하고 있는 아이들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주구려. 가출한 아이들뿐만 아니고, 학교에서의 문제아들은 당신들한테 보내오는 건가? 그리고 아이 때문에 속을 썩인 부모가 당신한테 의논하러 오는 일도 있나?”
“그런 일은 없어요. 내가 속해 있는 부문은 카운슬링의 범위를 넓히려고는 안 해요. 내가 상대하는 것은 무언가의 형태로든 법을 어긴 아이들뿐이에요.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아이들 가족 모두와 만나도록 하고 있어요. 그런 아이가 있는 가족은, 아이가 경찰에 보호 받기 몇 년 전부터 뭔가 문제를 안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만나는 아이들의 태반은 파괴된 가정에서 뛰쳐나오는 거구만.”
“그래요. 결손 가정이라도 훌륭하게 자라고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요.”
“그럼, 당신은 부모가 모두 있는 중류가정의 아이를 상대하는 일은 좀처럼 없단 말이지.”
“그렇지만 중류가정의 아이들도 법을 어기거나 집을 뛰쳐나오거나 해요. 다만 내가 상대하는 청소년들의 태반은 지독한 가정환경이에요. 부모가 돈 문제나 감정적인 문제로 머리를 썩히는 등 가정불화가 있을 때는, 반항적인 아이들을 잘 돌봐줄 수도 없잖아요. 아이들은 도시로 뛰쳐 나오면 문제를 일으키기 쉬워요. 도시라는 것은 아이들한테 탈선하도록 부추기고 유혹하는 거와 마찬가지니까.”
“홀아비일 경우에, 특히나 유리그릇처럼 조심조심해야 되겠군. 내가 만난 십대들의 대부분은 왜 신이 사춘기 같은 고통스런 것을 만들어냈는가 하고, 하소연하곤 하지.”
리사는 미소 지으며 평온하게 말했다.
“우리 부모님도 당신 같은 생각을 하셨을 거예요. 내가 아는 가운데 가장 참을성있는 동료가 있었는데 일하고 있는 동안 때때로 아이의 머리를 벽에 부딪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대요. 물론 그보다는 자신의 머리를 벽에 부딪치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힌다고 하더군요.”
“지금 일을 택한 걸 후회하고 있나. 리사.”
“아아뇨.” 리사는 주저 없이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분 상하는 일뿐이라면 힘들겠는걸.”
“청소년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는 그들이 무슨 짓을 했건, 어떤 짓을 당하고 있더라도, 아직 희망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혼란속에서 뭔가 구해낼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요. 너무나 심한 짓을 저지른 아이들이라도, 아마 못 믿으실테지만, 매우 상처 받기가 쉬워요. 지난달에 나한테 온 소녀는 흉기를 갖고 강도를 저지른 혐의로 고소되었는데, 체포 되었을 때는 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바지 주머니에 잭크 나이프를 꽂아갖고 있다가 경찰에게 대항했던 거예요. 내가 유치장에 면회하러 갔더니, 침대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훌쩍훌쩍 울고 있었어요. 경찰이―아마 마약을 숨기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그 아이의 곰 인형을 찢어버린 바람에 그 애는 그 곰 인형을 어떻게 고치는지 몰랐기 때문이었어요. 그 곰 인형은 그애가 얻은 꼭 하나의 장난감으로 그애는 이제까지 남의 물건을 수리하는 것을 본 일이 없었던 거예요. 내가 실과 바늘을 빌려와서 곰 인형을 꿰매줬더니, 그애는 나한테 안겨 와서 감사하는 거예요.”
죠엘은 지프를 정차하고 리사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이마를 덮은 리사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쓸어 올렸다.
“코네티컷에서 처음 당신과 만났을 때, 당신은 정말 귀여웠지.” 죠엘이 말했다. “지금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어른이 되었군. 리사.”
리사의 웃음에는 기운이 없었다.
“나는 24살이라고요.”
죠엘은 아무런 대꾸없이 지프를 후진시켰다. 그리고 기어를 바꾸고 테니스코트의 옆을 지나갔다. 코트에서는 코치가 지도하고 있었다.
“벌써 손님이 많군요.” 리사는 대화를 되돌리고 싶었다.
“언제부터 여기를 오픈했나요.”
“꼭 1년이 되지. 아무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계획은 세우고 있었지만, 테니스를 하던 마지막 2년간은 토너먼트 사이사이에 건설을 감독하고 있었지.”
“꽤 힘이 들었겠군요.”
“그 나름대로 즐거움은 있었지.”
죠엘은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풀장을 보여줄게. 당신도 오늘 오후에는 헤엄치고 싶어질걸.”
리사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지만 내심 이 휴양지가 세밀한 계획 아래 정교하게 건설된 데 감탄했다. 그리고 이 휴양지에는 몇백만 달러나 되는 자금이 투입되고서도, 당초에는 갖가지 문제가 있었다는 죠엘의 말에 적지 않은 호기심을 느끼면서 귀를 기울였다. 죠엘은 좀 씁쓸한 말투로 필요한 자금을 모을 때의 고생담을 들려주고, 리사는 조경가가 모든 화단을 테니스슈즈의 모양으로 만들고 싶어했다는 죠엘에게 동정하는 듯한 웃음을 떠올렸다. 리사는 어느새 시간이 많이 경과한 것도 잊고 있다가, 죠엘이 갑자기 손목시계를 보는 바람에 깜짝 놀라버렸다.
“벌써 2시가 다 되었군.” 그렇게 말하고 떡갈나무 옆에 지프를 주차시켰다. 그리고 차에서 뛰어내려서 리사 쪽으로 돌아와서 두 손을 내밀었다. 리사는 죠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나와 함께 점심하지 않겠어. 리사.” 하루종일 내내 죠엘과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만으로 리사의 가슴은 들떴으나 리사는 그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애써 다짐했다. 다시 1년 이상의 세월을, 가슴 아픈 추억을 씻지 못하는 일에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리사가 겨우 말했다.
“그렇지만 안 돼요, 뉴욕으로 돌아갈테니까. 이제는 돌아가야죠.”
“주방에 부탁해서 가벼운 걸로 만들어 달랠까.” 죠엘은 리사의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이전에는 당신이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리사는 입술을 깨물고 무언의 항의를 했다. 과거의 일이 생각나게 하는 죠엘의 방법은 신사답지 못했다. 잊는 데 그토록 오랜 시일이 걸렸는데… 리사는 뒤로 물러서서 죠엘한테서 떨어졌다.
떨어지는 편이 거절하기가 쉬웠다.
“현명한 일이 아니에요, 죠엘. 복잡한 일이 생기기 전에, 내가 뉴욕으로 돌아가는 게 좋아요.”
“벌써 복잡해졌다고.” 죠엘은 리사가 조심스럽게 둔 거리를 좁히며 말했다.
뒤에 떡갈나무가 있어서 리사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죠엘은 리사의 허리를 잡고, 리사를 끌어안았다.
리사는 자신의 반응이 죠엘한테 눈치 채이지 않기를 빌었다. 죠엘의 눈을 똑바로 보고, 가볍게 말했다.
“아까까지의 조심성을 잃어버린 것 같군요. 침대를 함께 할 상대가 없어졌나요? 그보다는 테니스팬의 계집애들을 못 만나서 쓸쓸한가요.”
“어느 쪽도 다 틀려.”
죠엘은 한 손으로 리사의 턱을 치켜들고 얼굴을 점차 가까이 다가왔다.
죠엘의 눈은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을 받고 반짝이고 있었다. “당신 쪽에서 키스하라구, 리사.”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한댔어요.” 리사는 그렇게 말했으나, 이제 몸부림치지 않고, 죠엘의 말에 순순히 응했다.
죠엘의 키스는 뜻밖일 만큼―견딜 수 없을 만큼―따뜻했다. 정열적이기보다 사랑과 안도감을 전해주는 키스였다. 섹시하고 격렬한 키스를 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조심스럽게 키스해 온 것에 놀라서 리사는 좀 몸을 움찔했다. 죠엘의 몸의 열기가 전해왔고, 그의 손이 코트셔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환희에 찬 신음 소리가 새어져 나왔다.
리사는 죠엘의 팔 안에서 몸을 꿈틀대고, 체념 비슷한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죠엘의 목에 팔을 감고, 머리를 더듬으면서, 힘껏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죠엘의 혀가 이에 와닿는 것을 느끼고는, 욕망과 절망이 뒤섞인 마음에 압도되어 몸을 떨었다.
죠엘은 리사의 반응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진한 키스로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리사는 이제 어쩔 수도 없었다. 죠엘의 입술과 혀는 관능적으로 꿈틀대고, 서로 사랑했던 별장에서의 밤을 생생하게 리사의 기억으로 되살아나게 하고 있었다. 리사의 마음은 죠엘의 애무를 거부하고 있었으나, 리사의 몸은 그 마음이 거짓이란 걸 알고 있었다. 리사는 무릎에서 힘이 빠지고 둘이는 몸을 맞댄 채 잔디 위에 드러누웠다. 죠엘이 눈꺼풀에 키스하면서 손으로 가슴을 감쌌을 때, 리사는 기쁜 신음소리를 냈다. 죠엘은 얇은 셔츠 위에서, 단단해진 젖꼭지를 쥐어 감고, 리사는 죠엘의 목에 팔을 걸고 죠엘의 입술을 더듬었다.
죠엘은 고개를 돌리고 리사를 애태우며, 리사의 목덜미를 가볍게 손끝으로 쓸어내리더니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리사는 욕망의 압도적인 강도를 억누를 수 없게 된 자신에 덜컥 겁이 났다.
리사는 심하게 허우적대며 죠엘의 팔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죠엘을 피하려고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렸다.
“죠엘, 안 돼요. 부탁이에요. 그만둬요.”
리사의 말은 죠엘을 거부했으나 크게 오르내리는 가슴은 전혀 다른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죠엘은 리사한테서 몸을 좀 떼어내고 리사를 지켜보면서 천천히 스커트의 훅크를 풀었다. 그리고 지퍼를 내리고, 드러난 맨살을 손으로 더듬어 갔다. 이윽고 리사가 몸을 꿈틀대기 시작하자 위로 덮쳐서 입술을 포갰다.
리사의 의식에서 현실의 세계가 지워져 버리고 있었다. 리처드와 결혼하는 것도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당장의 일만, 죠엘에게 안겨있다는 현실 외에는 알지 못했다. 사랑에 불타오르고 있는 자기 몸만이 현실이었다.
키스는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리사는 절반쯤 감은 눈으로 떡갈나무 잎사귀와 나무 사이로 흘러내리는 햇살이 리사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돌연 가까운 오솔길에 서 있는 어린애 모습이 똑바로 보였다. 리사의 몸이 갑자기 굳어지며 그녀는 얼굴을 돌렸다.
“왜 그러지.”
“수지에요.” 리사가 말했다. “수지가 저기 있어요. 관목 옆에.”
죠엘은 리사에게서 몸을 떼었다. 리사는 또 한번 눈을 돌렸으나,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잖아.” 죠엘이 말했다.
“있었다고요. 보았는걸요.”
리사는 수지가 있다는 것만이 죠엘과의 관계가 용납될 수 없는 유일한 이유가 아니란 것이 얼핏 떠올랐다. 리사는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흘러내려서 얼굴을 감추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당신한테 아니고 싶지 않아요, 죠엘. 나는 당신 친구와 약혼했다고요.”
죠엘은 어깨를 움츠리고 리사한테서 멀어졌다.
“왜, 당신은 구실만 내세우는 거야. 우리 사이에 있는 것을 어째서 인정하지 않는 거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소릴 해서 날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리사는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죠엘은 지프로 돌아가 신경질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리사는 떡갈나무 곁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서 내려주면 되겠어.”
“지프 신세 질 필요는 없어요.”
리사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잠깐 산책하고 싶군요.”
“맘대로 하라구. 산책을 즐기라구.”
죠엘은 리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남기며 지프로 질주해갔다.
9장
리사는 한 시간 가까이나 걸어서 제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서자 핸드백을 침대 위에 내던지고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 던지고는 마음이 변하기 전에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행사의 다이얼을 돌리고 뉴욕행 비행기에 대해서 문의했다. 여행사 직원은 최종편은 아직 비어있으니까, 다음날 아침 5시에는 뉴욕에 돌아 갈 수 있다고 친절하게 답해왔다. 공항까지 가는 데는 별문제 될 게 없었다. 렌트카를 빌려 타고 공항에 버려두면 되는 것이다.
리사는 최종편 좌석을 예약할까 했으나 목소리가 기어 나오지 않았다. 리사의 묵묵부답에 여행사 직원이 좌석을 잡아둘까요 하고 말했다.
“고마워요. 오늘밤 출발하게 되면 한 시간 안에 그쪽으로 갈 테니까요.”
리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아서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리처드가 말한 대로 카사 델 솔에 있는 거야 하고 자신을 타이르려고 했다. 푹 쉴 필요도 있는 거라고. 뉴욕의 겨울은 매우 춥기 때문에, 햇살을 쬐일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죠엘이 있기에 카사 델 솔에 있고 싶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 수 있었다. 죠엘과 헤어진다면 이제 영영 만날 수 없다는 것에 가슴이 터지고 말 것 같았다.
리사는 안절부절못하고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짐을 챙겨서 여길 떠나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러다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울에 비친 관능에 사로잡힌 여자가, 이틀 전에 케네디 공항을 내려섰던 쌀쌀하고 새침한 여자와 같은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리사에게 문득 자신과 죠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건, 이제 자기는 리처드와 결혼할 자격이 없다는 걸 절감했다. 다른 남자에게 이토록 괴로움을 주면서까지 리처드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
정적이 그녀의 절망감을 더한층 짙게 했다. 숨이 막혔다. 가방을 열고 수영복을 꺼내 갈아입고는 샌들을 신고 타월지로 된 로브를 걸쳤다. 방을 나와서 무언가 결심이라도 선 듯 큰 소리를 내고 문을 닫았다.
풀장은 손님용 방갈로 옆에 있었는데 죠엘의 집과는 상당한 거리였다. 리사는 마지막 100미터를 샌들을 벗고 맨발로 걸어서 잔디의 싸늘한 감촉을 느꼈다. 풀장으로 다가가니까, 밝은 햇살을 받아 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풀 사이드에는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으나, 풀 안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아늑한 코코낫 향기가 가득했다. 땀과 썬오일로 번들거리는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 곁을 조심스럽게 지나쳐 화사한 스트라이프의 벤치에 걸터앉자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추운 뉴욕에서 왔기 때문에 더위에는 아직 익숙치 못했다. 리사는 부겐빌리아의 꽃에 멍하니 시선을 주며 쉬려고 했다. 그때 그림자가 불쑥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리사는 얼굴을 들고 겨우 다정한 미소를 떠올렸다.
“안녕.”
수지는 웃지 않았다.
“안녕. 에드워즈, 피앙세는 어디 있나요.”
“리처드는 급한 일이 생겨서 뉴욕으로 돌아갔지.”
“그럼, 여기 혼자 있을 건가요… 리처드가 없으니까 심심하죠. 그렇죠.”
리사는 몸을 바로하며 말했다. “그래, 그렇지. 리처드는 좋은 사람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리사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아, 수지.”
“오늘은 안 가는 날이라고요.” 수지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는 것으로 리사는 거짓말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수지는 학교를 자주 빼먹는 것일까. 죠엘은 그걸 알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쉬는 날은 자주 있어?” 리사가 다정하게 물었다.
수지는 어깨를 움찔해 보였다.
“그래요. 심심해 죽겠어요.”
“그렇겠군.” 리사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수지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더라도 리사가 캐물을 권리는 없으니까. “오늘은 덥군. 헤엄치려고 해. 넌 벌써 헤엄쳤어.”
헤엄치고 나왔어요.” 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수영복이 젖어있잖아요.”
“알 수 없잖아, 그 수영복으론.”
수지는 계면쩍은 얼굴을 하고, 드러나 보이는 배에 손을 가져갔다. 수지의 비키니는, 4개의 줄에 아주 조그만 삼각천이 달려 있을 뿐인 것이었다.
“온몸을 골고루 태우고 싶은걸요.” 수지가 말했다.
“당신은 금방 새까맣게 될 거예요.”
“그럴 거야, 피부가 하야니까.” 리사는 모른 체했으나 수지의 적개심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10대 중반쯤의 아이들이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매우 상처 받기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수지가 문제를 일으켜서 주의를 끌려고 한다면, 수지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성공할 것이다. 터무니없는 문제를 터뜨리고 다른 주의를 끌게 될지도 모르지만, 리사는 무의식중에 카운슬러다운 직업의식을 발휘하고 있었다.
“여기는 네 친구들을 초대하기에 최고의 곳이겠어.” 리사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클라스메이트는 모두 오고 싶어 할 테지.”
“친구들은 모두 엄마가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다고요. 여기서의 친구는 마이크 헤르난데스 뿐이에요. 그렇지만 아빠는 마이크가 나보다 나이가 두 살 위라고 마이크를 안 좋아해요. 아무튼 우리 아빠가 테니스 선수니까 그래서 마이크가 나와 어울려주는 것뿐일 거예요.” 수지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갑자기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먼 곳에 시선을 던졌다. 속마음을 털어놔버린 것을 후회하는 모양이었다.
“피앙세는 언제 돌아와요?” 수지가 물었다. “그래서 어제부터 우리 아빠한테 추근대고 있는 거죠. 아까 보았다고요. 당신이 아빠한테 뭘 하고 있는지.”
뉴욕의 불량소년 소녀를 상대하는 카운슬러로서 리사는 냉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힘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지의 도전하듯 하는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마주보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참모습이 보기와는 다를 수도 있는 거야.” 리사는 감정을 억누르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눈으로 보더라도 사정을 잘 모르면 판단을 잘 못하는 일이 있는 거지.”
“당신이 무얼 말하려는지는 알아요. 당신이 아빠한테 키스하고 있던 것은 내가 상상한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리사는 자신의 직업의식을 발휘하며 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면 될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지만…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어.”
“그럴 테죠. 당신은 아빠한테 반해 있는 거예요. 아빠는 멋진 사람이니까.”
리사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대개의 여자들은 수지의 아버지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유명한 스포츠맨이고, 잘 단련된 몸이니까. 그렇지만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야. 내가 수지 아버지와 키스하던 것은 아버지와 나는 이전부터 잘 아는 사이기 때문이라고. 옛 친구 같은 거야.”
수지는 깜짝 놀라며, 화가 난 표정이었다.
“당신은 아빠를 사랑하고 있는 거군요.” 수지가 말했다.
“여자들은 모두 그러니까요. 그렇지만 헛일이라고요. 아빠가 정말로 사랑한 것은 엄마뿐인걸요. 아빠는 곧 엄마하고 함께 살게될 거예요. 틀림없어요. 그렇게 되면 엄마도 술을 안 마시고…” 수지는 말을 끊었다.
리사는 손을 뻗어 수지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이제는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수지의 부모님인 건 틀림이 없고, 두 분 모두 수지를 정말 사랑하고 계실 거야. 그렇지만 부모님을 다시 함께 지내시게 하려고는 생각하지 말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해야지.”
수지는 팔을 빼냈다.
“무얼 안다는 거예요. 당신 같은 사람은 정말 싫어요. 싫다니까요.” 수지는 풀안에 첨벙 뛰어들고는 거칠게 손발을 움직여서 헤엄쳐 갔다. 풀 반대편으로 헤엄쳐 가서 물에서 기어올라 클럽하우스 쪽으로 달려갔다.
리사는 가벼운 한숨을 쉬고 풀에 뛰어들어 되도록 빠르게 헤엄을 쳤다. 녹초가 될 만큼 헤엄을 쳤으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리사는 풀에서 올라와서 죠엘의 집으로 향했다. 만약에 양식이란 것이 있다면 공항으로 가서 최종편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리사는 저녁을 먹기 위해서 드레스를 입고 있을 때도, 반복하여 같은 것을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었다.
결국, 이것저것 고민한 끝에 리사는 혼자서 식사를 했다. 수위한테 바깥에서 식사한다고 말하고, 죠엘도 수지도 만나지 않고, 살짝 죠엘의 집을 빠져나왔다. 리사에게는 뉴욕으로 돌아갈 의지력도 없으며, 죠엘과 수지와 함께 식사를 할 용기도 없었다. 리사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뉴욕시경의 동료들은 리사가 이틀 동안 이토록 맥 빠진 여자가 되어버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리사는 풀장이 보이는 커피숍 테라스에서 식사를 했다. 햄버거를 주문했으나 좀처럼 목에 넘어가지 않고 맛도 알 수 없었다. 리사는 식욕이 없는 자신한테 실망하고 말았다. 모든 것을 끝낼 것을 예상하고 카사 델 솔에 온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비틀어진 결과였다. 리처드와 약혼한 것으로 죠엘의 압도적인 매력을 무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니 너무나도 순진했었다.
환한 표정의 웨이트레스가 두 잔째의 커피를 따라주어서 리사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으나, 이내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전화를 걸어서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할까 생각했으나, 전화로 그런 설명을 하는 것을 옳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
요즘 몇 달 동안 리처드가 잘해준 일을 생각하면 리사의 죄책감은 더욱더 커졌다.
리사는 리처드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으나 죠엘의 얼굴만이 가득했다. 리사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산뜻한 한들바람이 상쾌함마저 더해 주었다. 리사는 오랫동안 거닐면서, 헝클어진 감정을 매듭지으려고 했다.
리사가 죠엘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깊은 밤이었다. 홀은 어두웠으나 거실로 통하는 문이 열려있어서, 창가에서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죠엘의 뒷모습이 보였다. 죠엘은 뒤돌아보다 리사를 발견하고는 얼어붙은 듯 꼿꼿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 마주 보는 동안 리사는 긴장된 나머지 목이 막힐 듯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물결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 안녕, 죠엘.” 겨우 리사가 입을 열었다.
“여어, 리사.” 목소리는 잔잔했고 얼굴도 침착해 보였으나, 리사는 신경이 팽팽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죠엘은 거실 한가운데까지 와서는 스카치가 든 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당신도 마시겠어?”
“아뇨, 너무 늦었으니까. 당신 폐가 되지 않겠어요.”
“당신이 저녁식사 때 없어서 쓸쓸했지.”
리사는 목이 메었다. “수위한테 못 들었나요?”
“들었지. 그 사람은 쓸데없는 말을 전하는 데는 최고의 존재지. 식사는 즐거웠나, 리사. 카사 델 솔에는 좋은 레스토랑이 여러개 있으니까.”
“그럼요. 즐거웠어요.” 리사의 목소리는 거슬릴 정도로 들떠있었고, 죠엘의 시선에 견딜 수가 없어서 눈을 감았다.
죠엘이 글라스를 테이블에 내려놓을 때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리사는 제방으로 성큼 돌아가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프로 테니스 시합을 본 일이 있나?” 죠엘은 느닷없는 질문을 던지며 다시 창가로 돌아갔다.
“아뇨, 아직 한번도 없어요. 아버지나 오빠들은 텔레비전으로 잘 보지만.”
“부모님은 안녕하시지. 전에부터 물어보려고 했는데.”
“네, 건강하세요.” 리사는 좀 평온을 되찾고 말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마찬가지고 아버지도 변함없이 진료하시죠. 요전에 집에 전화 걸었을 때는, 어머니가 마침 바자용 첼리 파이를 구워내셨다군요. 그런데 어머니는 어떤 자선단체에 보낼 건지 잊고 계셨더라고요. 이웃 사람들한테 물어봐야겠다고 하시더군요.”
죠엘은 웃음으로 답하며 다시 거실을 가로질러 글라스에 스카치를 따른 뒤 얼음을 넣어 단숨에 들이마셨다.
“내일은 뭔가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어?” 죠엘의 이외의 질문에 리사는 놀랐다.
“별로 아무것도 없지만요.” 리사는 솔직하게 대답한 것을 금방 후회했다.
“좀 쉬면서 리처드가 돌아오는 걸 기다릴 셈이에요.”
죠엘은 눈썹을 치켜 올렸으나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글라스의 얼음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뭐 특별한 계획이 없다면, 수지와 나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가지 않겠어. 로스앤젤레스의 테니스클럽에서 시합을 하거든.”
“토너먼트 경기요? 그렇지만 은퇴하지 않았나요?”
“토너먼트 경기는 은퇴했지만, 이건 자선시합에 초대 받은 거야. 이익금은 학교에 기부하기로 했지. 운동시설을 갖출 수 있게 말이야.”
“훌륭한 생각이로군요.”
“아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죠엘의 눈빛이 갑자기 흐려졌다. “시합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최근에 나는 그다지 훈련하지 못했고, 시합하는 상대는 프랑스의 챔피언이라고. 마침 캘리포니아에 와 있어서 자선시합에 쾌히 응해준 거야. 주최자는 텔레비전 방송국에 방영권을 팔았으니까, 아무튼 기부금은 상당한 금액이 되겠지.”
리사는 꼭 하루동안을 죠엘과 함께 지내는 것이 과연 현명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가고 싶군요.” 그저 그렇게 대답했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시합은 몇시부터 시작되나요.”
“밤이야. 그러나 점심을 먹고 나서 여기서 출발할 셈이지. 시합 전에 두 시간쯤 시간을 두고, 충분히 몸을 편하게 하고 싶으니까.”
“알겠어요. 나는 언제 출발해도 상관 없어요. 그래서 여기에는 언제 돌아오는 거죠.”
“금요일 아침 일찍이야. 수지를 하루 이상 학교를 쉬게 할 수는 없거든.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해.”
“정말이에요?” 리사는 순간 말할까 망설였으나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딸이 학교에 안 나가고 있다는 걸 알려서 죠엘이 걱정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럼 내일요.”
“기다릴 테니까.”
죠엘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바람에 얼굴이 더욱 상기되었다. 두 사람 모두 잠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사에게는 만약 자기가 한 발이라도 내딛는다면, 그날밤은 죠엘의 침대에서 지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사는 휙하고 등을 돌렸다.
“편히 쉬세요.”
죠엘은 숨을 빛내며 바라볼 뿐이었다.
“잘 자요, 리사.”
리사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으나 잡지 않는 죠엘로 인해 방에 돌아왔을 때는 묘하게도 허전한 기분이었다. 적어도 바보짓은 안한 거야.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적어도 죠엘의 팔에 뛰어 들어가 안아달란 소리는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리사는 한시 반에 안마당으로 오라는 죠엘의 전갈을 수위로부터 들었다. 약속시간에 맞춰나가니까 죠엘이 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낡아빠진 캔퍼스지의 백이 죠엘의 발밑에 있었다. 빛바랜 진과 엷은 셔츠를 몸에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젊어 보였다.
죠엘은 리사를 환영하며 작은 슈트케이스를 받아서 벤츠의 트렁크에 넣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이 적힌 백을 집어 들어서 뒷좌석에 실었다.
“라켓이 들어있어. 트렁크에 넣어두면, 그 열 때문에 줄이 느슨해져 버리거든, 수지, 뒷자리에 앉아서 라켓을 잘 보아주겠니.”
“수지는 아빠 옆에 앉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요.” 리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난 뒷좌석도 상관 없어요.”
“괜찮아요.” 놀랍게도 수지는 아무렇지 않은 말투였다. 어제 일은 잊어버린 듯 했다. 수지는 아버지와 함께 갈 수 있는 것으로 흥분해 있어서 리사도 함께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부터는 어딜 가는지 아빠 설명을 들어야지. 나는 여러 번 가봤지만, 당신은 처음이잖아요.”
죠엘은 운전석에 앉고 엔진을 걸었다. 거리를 달리는 동안 죠엘은 이따금 눈에 들어오는 건물에 대해서 리사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 고장의 역사에 대해서 리사에게 들려주며 스페인의 전도자들이 17세기에 샌디에고에서 찾아와서, 배수가 잘 되는 비옥한 땅을 찾아낸 것을 설명했다. 그렇지만 죠엘은 반쯤 건성인 것이 분명했다. 분명 시합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수지는 쉴새없이 떠들어댔다. 학교를 하루 쉰 것이 기쁜 건지 그녀의 쾌활함은 어제 풀장에서 만난 무뚝뚝한 소녀와 같은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수지는 리사가 테니스 시합을 본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시합에 대한 말을 해줬다.
“오늘 시합은, 오픈경기에요. 자선을 위한 시합이니까 결과가 선수의 랭킹에 영향을 주지는 않아요.”
“수지 아버지는 아직도 공식적으로 랭킹에 올라있는 거야?”
“아뇨. 아빠는 은퇴하셨을 때, 세계랭킹 1위였지만, 큰 대회에 출전하지 않으면 금방 랭킹에서 밀려나고 말아요. 오늘 아빠가 시합하는 상대는 프랑스 오픈에서 우승한 사람이에요. 세계 랭킹 5위예요.”
“아버지가 당해내지 못할 상대 같군.”
“그런 일은 없어요. 아빠가 절대로 이기고 말거라고요.”
죠엘은 더 이상 두 사람의 대화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마치 로봇처럼 운전만 할 뿐이었다. 수지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세 사람은 로스앤젤레스의 테니스클럽에서 가까운 호텔에 도착했다. 이미 스위트룸이 예약되어 있었고, 세 사람은 보이 두 사람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리사는 호화로운 객실에 깜짝 놀랐다. 수지와 리사용으로는 침대가 둘이 있는 방, 죠엘용으로는 싱글룸이 마련되어 있었다. 두 개의 방은 넓은 거실로 이어져 있었다. 욕실이 두 개 있었는데 한편은 샤워뿐, 또 한편에는 큰 욕탕이 있었다.
“굉장하군요.” 거실의 테이블에 있는 과일이 담긴 접시를 보고 리사가 말했다.
죠엘은 멍한 얼굴이었다.
“뭐가 말인가. 방 말인가… 좋은 방이지. 안됐지만 나는 잠깐 쉬었다 올 테니까.” 그리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수지가 킥킥대며 웃었다. “당신이 와주길 잘했어요. 아빠는 시합을 앞두고는 어제나 저런다고요.”
“뭘 하실까, 잠을 자는 거야?.”
“잠을 자거나 하지는 않아요. 시합전의 컨디션을 조절하는 거예요. 잘은 모르지만 몸을 풀거나, 욕탕에 들어가거나 하실 거예요. 아마도 대부분의 시간은 꼼짝 않고 앉아서 명상할걸요.”
“이번 시합은 아버지한테 매우 중요한 것인가? 네 말을 들으니까,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닌 것으로 들리는데, 그러니까 아버지는 이기거나 지거나, 자선의 목적은 이루어지는게 아니야.”
수지는 놀랍도록 어른스럽게 웃었다.
“테니스 시합은 모두 아빠한테는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챔피언이 된 거죠. 아빠 코치가 나한테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위대한 테니스선수는 코트에 설 때마다 이기고 싶어 한다고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정상에 설 수 없다나요.”
“아버지를 응원하기로 해. 시합이 기다려지는군.”
수지는 신경질적으로 과일이 담겨진 보울의 포도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나하고 함께 밖으로 나가서, 시합이 시작되기 전에 타코스나 뭐나 먹지 않을래요. 이 호텔에 한번 머문일이 있는데 길을 건너면 맛있는 멕시코요리를 하는 레스토랑이 있어요.”
“좋아, 난 멕시코 요리를 먹은 일이 없다고. 내가 사는 곳에 있는 것이 이태리 요리를 하는 레스토랑뿐이니까.”
수지는 발끝으로 서서 빙그르르 원을 돌았다.
“아빠는 함께 오시지 않는다고요. 우리 둘뿐이에요.”
“알고 있어, 수지.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아버지한테 메모를 남겨두자.”
“그래요.” 수지는 간단하게 메모를 한 후 전화기 옆에 두었다.
“자아, 그럼 가요. 난 배가 몹시 고프다니까요.”
벽에는 투우 장면의 사진이 걸려 있는 레스토랑에는 리사는 잘 모르는 스파이스의 냄새로 차 있었다. 수지는 그 냄새에 즐거운 얼굴이 되었다.
“이 집의 고추가 든 멕시코 요리는 최고라고요.”
수지는 자신만만하게 리사 몫까지 주문하고는, 멕시코요리를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기분이 좋을 때의 수지는 쾌활한 소녀로, 리사는 지금의 이 기분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김이 피어오르는 맨 처음 요리가 날라져 와서, 리사가 조심스럽게 한입 맛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환한 얼굴이 되었다. 수지도 덩달아 웃었다.
“맛있다고 했죠.”
“네가 말하는 대로군. 뉴욕에 돌아가면 멕시코요리의 레스토랑을 찾아볼 거야.”
수지는 포크를 내려놓고, 소다수를 마셨다.
“아빠하고 나는 멕시코요리를 즐겨먹죠. 수위 아저씨는 멕시코사람이에요. 노빅 씨는 멕시코요리를 좋아하실까.”
리사는 입안에 가득한 바리트를 삼키고 나서 대답했다.
“글세, 잘 모르겠지만 리처드와 함께 멕시코요리의 레스토랑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군. 그러면 알 수 있을 거야.”
“그래요. 누군가와 결혼할 생각이라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엄마는 멕시코요리를 만드는 걸 참 좋아해요.”
“그래. 그럼 엄마를 만나러 갔을 때는 즐거웠겠네.”
“최고라고요.” 수지는 소다수를 다 마셨다.
“오늘밤 시합에 대해서 설명해 드려요.” 재빠르게 지껄였다. “오픈 시합을 본 일이 없으시다죠.”
“응, 그래. 가르쳐 줘.”
수지의 미소에 리사도 긴장이 풀어졌다.
“두 시합이 있어요. 맨 처음에는 웃음거리뿐인 시합이에요. 루크 스티븐슨과 캐시 니콜스가 시합하는데, 아마 캐시가 쉽게 이길걸요. 아무튼 그 시합은 여흥 같은 거예요.”
“어째서 시합이 여흥 같은 것일까.”
수지가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남자와 여자가 시합하기 때문이지요. 만약에 남자가 잘한다면 이기는 게 당연해요. 남자쪽이 훨씬 힘이 세니까 랭킹 100위의 남자라도 랭킹 1위의 여자한테 이길 수 있는 게 아니겠어요. 캐시 니콜스가 오늘 시합에서 이긴다는 것은 캐시가 프로인데 루크가 배우거든요.”
“테니스에서 기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군.”
“기술은 매우 중요한 거예요. 그렇지만 유명한 남자 선수는 기술과 힘 모두를 갖고 있어요. 여자는 기술에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기술도 굉장한 속력으로 공을 때리는 남자선수한테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프로선수는, 즐기려고 하는 것 말고, 혼성 복식은 안 해요. 아시겠어요. 남자선수가 여자만을 노리고 공을 친다면 시합이 안 되는걸요. 윔블던에서 혼성 더블복식의 토너먼트가 있지만, 거기서도, 진지하게 시합을 하는 일은 없어요. 작년에는 트레이시 오스틴이 동생과 짝을 짓고 우승했지만, 트레이시의 동생은 프로거든요.”
“오우! 아주 잘 알고 있군. 테니스의 프로는 혼성 복식을 진지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두겠어.” 리사는 물을 한모금 마셨다. “그럼 이번에는 아버지 시합에 대해서 말해주겠어?”
“아빠의 상대는 프랑스의 챔피언이에요. 시합은 3세트 경기예요. 지금은 그것이 주류지만, 큰 대회라면 5세트 경기를 하는 수도 있어요. 득점에 대해서는 알아요?”
“조금은 알아. 러브라던가 듀스라고 하지? 시합을 보다가 잘 모르면 가르쳐 줘.”
리사는 시합이 기다려졌다.
수지가 말한 것처럼 미국에서의 랭킹 1위의 여성선수, 캐시 니콜스와 TV탈렌트는 낭패라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 나서 캐시에게 키스한 다음 마이크를 쥐고, 키스를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시합을 한 보람은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루크와 캐시가 팔짱을 끼고 코트에서 퇴장하니까 여자 관객들이 큰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선수가 시합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즐거웠다. 그러나 리사에게는 죠엘의 시합을 바라보는 것이 그다지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밤을 보내는 즐거운 게임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고문과도 흡사했다. 죠엘이 코트에 나타났을 때부터 리사는 울컥 감정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프랑스의 챔피언인 안델 모지지에가 제 1세트를 6대4로 이기는 동안 리사는 난생 처음 누군가한테 그가 이기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두 선수는 주심의 높은 의자 앞을 지나서, 멈춰 서서 물을 마셨다. 죠엘은 종이컵을 휴지통에 던져넣고, 라켓의 그립프를 타월로 닦으면서, 천천히 서비스라인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심에게 제2세트의 서비스를 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눈으로 알린 다음 잠깐 주저하며, 관객석으로 눈길을 보냈다. 죠엘의 눈이 리사를 찾아냈다.
리사에게는 죠엘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죠엘의 얼굴에는 감정이란 것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죠엘은 잠깐 리사와 눈을 마주치고는 볼 보이한테 손을 들어서 새 공을 청했다.
죠엘은 공 두 개를 받아들고, 하나를 호주머니에 넣고 손에 든 공을 몇 번 땅에다 때린 뒤에, 위로 던져 올려서 서브했다.
죠엘이 서브한 공을 로지에의 옆으로 날아가서 코트를 에워싼 벽에 부딪쳤다. 관객 쪽에서 와하는 감탄에 코트가 들썩였다.
“아빠의 제일 빠른 서브는 시속 140킬로라고요.” 선수가 사이드를 바꿨을 때, 수지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죠엘이 다시 서브해서, 로지에의 라켓에 스치지 않고 또 서비스에이스를 따냈기 때문에 환성이 일어났다. 수지는 환호성을 질렀으나 리사는 긴장된 나머지, 박수치는 것도 잊고 있었다. 죠엘은 그 게임을 한 포인트도 잃지 않고 이기고 여세를 몰아 순식간에 다음 2게임도 연승했다. 그때야 비로소 로지에는 강적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죠엘의 힘찬 플레이로 서비스게임을 획득했다. 그 뒤에 격렬한 라리가 오래 계속되었으나, 죠엘이 모두 이겨 제2세트는 6대1로 죠엘의 승리로 끝났다.
두 사람의 선수가 코트를 떠나서 마지막 세트를 앞둔 휴식을 취할 때쯤에는 리사의 응어리진 마음도 좀 가라앉아 있었다. 죠엘은 코트에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죠엘의 셔츠는 땀으로 훔뻑 젖어있었고 대전 상대자의 셔츠도 흥건히 젖어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땀을 훔치고, 미끄러지지 않게 라켓의 그립프에 톱밥을 문질러댔다. 두 선수가 마지막 세트의 코트에 섰을 때, 프랑스 선수는 관객석으로 시선을 향했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미소와 함께 요란한 키스를 던져 보냈다.
죠엘도 얼핏 관객석으로 눈을 돌려 리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마지막 세트는 숨죽이는 격렬한 공방이 펼쳐졌다. 멋진 쇼트, 훌륭한 랠리가 계속되고 관객석에도 숨죽이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20분간에 걸친 타이브레이커가 계속된 뒤에, 죠엘이 서비스에이스를 따내고, 훌륭한 보레로 결판 내어 드디어 승리를 차지했다.
관객은 모두 일어서 환성을 질렀다.
자선이 목적인 시합을 보러왔는데 국제 대회 말고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멋진 시합을 관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도 당연했다.
로지에는 네트로 걸어가서 죠엘과 악수한 뒤에 죠엘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두 선수는 사이드라인으로 가서 주심과 악수하고, 곧 윈드부레커를 몸에 걸쳤다. 그 사이에 대회 임원이 코트에 나와 있었다. 지방신문사의 카메라맨이 사진을 찌고, 연시 플래시가 터졌다.
“자아.” 수지가 리사의 손을 잡아 끌었다. “대기실로 가서 아빠가 나오는 걸 기다리자.” 그들은 흥분에찬 얼굴로 스탠드를 뛰어 내려갔다.
둘이는 대기실로 들어가는 것을 제어받아 수지는 단념하고 라운지에서 기다리자고 말했다. 그곳은 보도진이 운집해 있는 곳이었다. 주최자측은 상당한 선전을 한 모양으로, 보도진의 수는 놀랄 만큼 많았다. 텔레비전 카메라까지 준비되어, 그 조명은 뜨거울 만큼이었다.
맨 처음 대기실에 나타난 것은 죠엘이었다. 방금 샤워를 마친 검은 머리는 아직 채 마르지 않았고, 네이비블루의 트레이닝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수지는 죠엘을 보자, 기쁜 환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굉장했어요, 아빠.” 수지가 말했다. “최고예요.”
죠엘은 수지를 껴안았다. 그리고 텔레비전 카메라에 얼굴을 돌리고 환하게 웃었다.
“딸이 아무런 편견 없이 오늘 시합의 결과를 말해준 것 같군요.”
스포츠 프로의 해설자는 연신 뭐라고 빠르게 질문을 했으나 방안이 시끄러워서 리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인터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계속되는 모양이었다. 10분쯤 지났을 때 죠엘은 질문에 농담을 섞어가며 대답을 하고, 또 질문하려는 사람들을 헤쳐 가며 걸어 나왔다. 그리고 수지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리사에게 다가왔다.
“축하해요.” 리사는 숨이 차서 말했다. “정말 흥분되는 시합이었어요.”
“고마워. 즐겨주기를 바랬지.” 죠엘의 목쉰 소리에 리사는 그가 몹시 피로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나가자구.” 죠엘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고 리사가 지나가도록 문을 손으로 잡았다. “호텔까지 데려다 줄차가 준비되어 있지.”
“아나운서가 말하는 걸 들었어요?”
밖으로 나왔을 때, 수지가 리사에게 물었다. “'스포팅 씬'이 아빠를 사상 최대의 3명의 테니스 선수 중의 한 사람으로 추천했어요.”
“'스포팅 씬'은 잘 알고 있구나.”
“그러나 아빠는 사상 최고의 선수라고요.” 수지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빠가 다시 훈련을 하면, 아무한테도 지지 않는다고요.”
죠엘은 수지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손으로 헝클어놓으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그들은 리무진에 올라타 죠엘은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대어 딸이 들떠서 얘기하는 감상에 이따금씩 웃으며 대답했다. 호텔로 돌아오자 수지는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크게 하품을 했다. “아이고, 피곤해.”
“그럴 테지. 네가 언제나 자는 시간이 지났으니까. 자아, 어서 침대에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네가 학교에 늦지 않도록 내일 아침에는 빨리 일어나야 하니까.”
수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일어나서 신발을 집어 들었다.
“정말 피곤하군요.” 하며 아버지한테 다가가서 가볍게 몸을 기댔다. “시합에 이긴 일 축하해요. 편히 쉬세요. 아빠.” 그리고 리사에게 얼굴을 돌렸다. “당신은 안 잘 거예요, 메리사.”
“곧 침실로 갈게.” 리사가 말했다.
“편히 자요, 수지.”
수지의 발소리가 사라지자 방안은 고요가 깃들었다. 리사와 죠엘은 서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죠엘은 방을 가로질러 왔으나, 피로한 것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죠엘은 눈을 빛내면서 리사의 몸에 팔을 휘감고 따뜻하게 끌어안았다. 리사는 죠엘의 허리에 팔을 돌리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떤 기분이죠. 죠엘. 당신은… 피곤한 것 같군요.”
죠엘은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34살이야, 리사. 20살의 챔피언을 상대로 시합을 하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은 거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아프니까 말야.” 죠엘은 리사한테서 눈을 돌렸다.
“사내다운 스타로서의 내 이미지를 엉망으로 해버려서 안됐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앞으로 2년 만 지나면, 공을 쫓아서 뛸 때마다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게 아닐까.”
“정말 섹시한 소리가 나는 게 아닐까요.” 리사는 농담조로 말했다. 그녀는 죠엘의 팔을 쓰다듬으려다가 죠엘이 채 감추기도 전에 손바닥의 피부가 터져있는 것을 보았다. “죠엘,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없을까요. 손에 붕대를 감아드릴까요. 그보다는 룸서비스를 전화로 불러서, 차라도 주문해요?”
“벌써 상처는 치료했다고. 붕대는 나중에 내가 감을 거야. 잠시동안만 함께 있어주지 않겠어.”
죠엘은 소파에 내려앉아서 평에 앉게 했다. 그리고 죠엘이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그에게 몸을 기대는 것이 리사에게는 매우 자연스런 일로 여겨졌다.
“이렇게 쉬고 있으니 마음이 놓이는 군.” 죠엘이 말했다.
“은퇴한 지금도 시합 전에는 신경이 팽팽해져 있거든.”
“큰 대회의 흥분이 없어서 쓸쓸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때때로 그렇지. 쓸쓸한 마음이 들면, 프로 토너먼트선수가 얼마나 힘든 것이었나를 생각해내고 하지.”
“중요한 시합에서 코트에 서서, 관객의 성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요. 대단한 경험일 테죠.”
“그렇지. 대단하단 말이 제일 어울릴 거야. 실제로 자기가 그런 자리에 서보지 않고는 많은 사람에게 주목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윔블던이나 US오픈의 결승전은 전 세계로 텔레비전 중계되기 때문에 수억의 사람이 보고 있는 셈이야. 그러나 몇 차레 결승전에 나갔더라도 2,3시간 동안 자기가 어떻게 공을 쳤는가에, 전 세계인이 주목하고 있다는 걸 아는 것은, 매번 일을 수 없는 마음이 되지.”
“나 같으면 겁을 먹고 라켓도 잡지 못할 거예요.”
죠엘은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처음 결승전에 나가면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앞도 잘 안보이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멍한 상태가 되고말지. 자신이 라켓을 손에 쥐고 코트에 서 있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야. 그렇지만 잠시 뒤에는 그 흥분이 마약처럼 되는 거야. 최고의 시합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주목을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버리지. 매스미디어의 주목이 선수를 부추겨주는 거야. 중독된 거와 마찬가지라고. 나는 토너먼트 시합을 치루는 동안, 줄곧 중독되어 있었다고 생각해. 관중의 박수소리에 취해 있었어.”
“그런데도 잘도 자신을 억제하고 계셨군요. 오늘의 시합을 하기까지 1년 반 동안 코트에 서지 않았잖아요.”
“보기 좋게 다시 일어선 셈이지. 다시 화제의 인물이 되거나 하면 유명인이란 것으로 우쭐해버릴지 모르니까. 되도록 뒤로 물러서 있는 거야. 추켜세워 주는 것은 나쁘지 않거든. 레스토랑에 가면 최고의 테이블로 안내되고, 비행기를 타면 스튜어디스가 정성껏 서비스해 준다고. 그런 대접은 에고이즘을 만족시켜 준다니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허무한 일이지.”
“은퇴하기 전에 당신 시합을 보고 싶었어요. 윔블던 같은 큰 토너먼트에서 당신이 시합하는 것을, 텔레비전이 아니라 실제로 보고 싶었어요.” 리사가 말했다.
“나도 당신이 보아주길 바랬어.”
죠엘의 얼굴에 차츰 긴장의 빛이 번졌다. “당신을 초대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당신이 안 왔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고. 질지도 몰랐고, 그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거든.” 죠엘은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자조적인 웃음을 띠웠다.
“내가 이긴 것은 당신이 보고 있어줬기 때문이야. 당신을 감격시키고 싶은 생각으로 그야말로 필사적이었으니까. 좋아하는 계집애한테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는 고교생처럼 말야.”
리사는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의 소망대로 효과를 올렸다고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감동한걸요.”
죠엘은 리사의 턱에 손을 대고 얼굴을 들게 하고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다면 온몸의 근육을 아프게한 보람은 있는 셈이군.”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괴었을 때 리사는 살짝 죠엘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곁에 있어주지 않겠어? 리사.” 죠엘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로해 있어서 지금이라도 잠이 들어버릴 것 같지만 곁에 있어주면 좋겠어.”
“그래요. 나도 당신과 함게 있고 싶어요.”
죠엘은 리사를 껴안고 리사의 이름을 불러보더니, 리사의 이마에 키스했다. 리사는 죠엘에게 몸을 기대고, 머리를 그의 가슴에 얹었다. 얼마후 죠엘의 숨결이 고르게 돼갔다.
죠엘이 잠이 든 것을 알고 나서도 리사는 오랫동안 죠엘 곁에 있었다. 한참 후에야 소파에서 일어나서 죠엘의 머리맡에 쿠숀을 받쳐주었다. 죠엘은 곤하게 잠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신발을 벗겨주고, 바지의 벨트도 느슨하게 늦춰주어줬다. 그리고 입술에 가볍게 손가락을 대어본 다음 조용히 제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닿았을 때, 어둠속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침대 곁의 스탠드가 켜지면서 방안을 비췄다.
“겨우 돌아왔군요.” 수지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10장
리사는 수지가 어떤 태도로 나올지 예측할 수 없었기에 그저 가만히 침대로 다가갔다. 수지의 마음이 변하기 쉽다는 것, 아버지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잠을 잘 것으로 생각했던 리사는 순간 당황했던 것이다.
리사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나한테 말하고 싶었니?”
“그래요. 카사 델 솔에 있지 말았으면 해요. 당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아빠한테 말할 거예요.”
“그래? 그렇지만 오늘밤에는 그런 짓하지 말라구. 아버지는 매우 피곤하니까, 벌써 잠이 들었지.”
“어떻게 알죠.”
리사는 찬찬히 수지의 얼굴을 지켜봤다.
“시합 때문에 매우 피로해서, 소파에서 잠이 들어버린 거야. 그대로 두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자기 딸인걸. 물론이지. 아버지는 널 사랑하시지. 그런 것을 의심하거나 하면 못써요.”
수지는 침대에서 뛰어 일어났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아빠가 날 사랑하고 있는 걸 당신이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당신은 아빠의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엄마와 만난 일도 없잖아요. 뭘 안다는 거예요. 엄마는 아빠와 마찬가지로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어요. 아빠와 엄마는 어느쪽이 나와 살 것인가로, 변호사한테 100달러나 지불했어요. 둘 다 모두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그렇구나.” 리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튼 수지 아버지는 변호사에게 돈을 지불하는 일 말고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너를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다고. 나는 여기 와서 아직 이틀밖에 안 됐지만 얼마큼 아버지가 수지를 걱정하고 계시는지 잘 알았는걸.”
수지는 콧방귀를 뀌었다.
“어떻게 말이에요.”
“예를 들면 수지를 보실 때는 언제나 아버지 눈빛이 따스하지. 수지한테 시합을 보여주고 싶어서, 학교를 쉬게 하면서까지, 수지를 여기에 데려왔잖아. 내일 학교에 늦지 않게, 일찍 자라고 하셨지.”
수지는 눈을 비볐다.
“학교 선생님 같은 말투로 하지 말아요. 나는 자고 싶지 않을 때는 자지 않으니까요. 나를 자게 할 수는 없을걸요.”
리사는 동시에 두 가지 감정이 일었다. 수지를 거머쥐고 뒤흔들어주고 싶은 충동과, 수지를 끌어안고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래주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가출한 아이들을 상대할 때, 곧잘 경험하는 몸에 밴 감정이었다. 리사는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나는 수지를 억지로 자게 할 수는 없지. 수지는 힘이 세어 보이는걸. 나는 힘으로는 수지를 어떻게도 하지 못해. 그렇지만 말야. 나는 피곤해서 잠을 자고 싶다고. 괜찮다면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기로 해.”
수지는 침실의 문으로 달려갔다.
“당신 같은 사람한테 아빠를 뺏기진 않을 거야.” 수지가 말했다. “당신이 카사 델 솔을 떠나지 않겠다면, 나는 집을 나가버리겠어. 엄마네 집으로 갈 거야. 그렇게 하면 아빠는 당신한테 화를 내고 말도 안할 테니까.”
리사는 당혹스런 마음을 누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수지, 네가 그런 짓을 하면 두 사람이 상처를 받게 되는 거야. 수지하고 아버지가. 수지는 사실은 그렇게하고 싶지 않으니까 상처를 받고, 아버지는 수지를 사랑하고 계셔서 상처를 받게 되는 거라구.”
“적어도 엄마네 집으로 가면 당신을 보지 않게 돼요. 어째서 아빠는 당신을 여기 데려왔을까. 왜 시합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기지.”
“수지,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아까까지는 나와 함께 즐거워했잖아. 수지 아버지는 말 상대가 있으면 수지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신 게 아닐까. 오늘은 학교 수업이 있는 날이어서, 수지를 친구를 초대할 수도 없잖아.”
“아빠가 당신을 초대한 것은 그런 까닭이 아니라고요. 아빠는 당신을 원하고 있는 거라고요. 내가 없을 때, 당신하고 아빠가 뭘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수지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손으로 닦았다. “아빠가 당신을 좋아하는 걸 바라진 않아요.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수지, 지금 몇 살이지.”
수지는 찔끔 한 듯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15살이에요.”
“그런 나이라면 장래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버지가 수지 아버지란 것은 잘 알 거야. 수지하고 아버지는 영원토록 특별한 관계라구.” 리사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두려워하는 거야, 수지. 뭘 괴로워하는 거지?”
“괴로워하지 않는다고요. 여름방학 때 엄마가 나를 불러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무것도 걱정 안한다고요.”
리사는 놀랐다. 어머니가 찾지 않는다면 수지가 필사적으로 죠엘한테 매달려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수지, 아버지를 믿도록 해. 아버지는 수지를 슬프게 하시지는 않을 거야. 절대로.”
수지의 볼에 눈물이 타고 흘러내려 카펫에 떨어졌다.
“그만둬요.” 수지는 불을 끄고는 침대로 기어들었다.
리사는 지금은 달래주려고 해도 헛일이라고 생각했다. 수지는 자신의 행복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달래주는 걸 바라지 않을 것이다. 대단한 원인도 없는데도 수지가 질투하고 있는 것은, 딱하기만 했다. 이런 행동으로 보아서 죠엘은 이혼하고 나서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허락한 일이 없는 것이 확실했다.
리사는 손으로 벽을 더듬어 가며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카운슬러를 직업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수지한테도 능숙하게 잘 다루지 못하다니, 요즘 나는 아무래도 잘못된 거야 하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리사는 좋지 않은 꿈으로 가득 찬, 편치 않은 잠에 빠져들기까지 우선 누구의 일을 걱정해야 할까를 생각했다. 수지의 일인가, 리처드의 일인가, 죠엘의 일인가.
다음날 아침, 수지를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하이스쿨 앞에서 내려줄 수 있었다. 그리고 카사 델 솔에 돌아오는 동안, 리사도 죠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죠엘은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리사의 가방을 홀에다 날랐다.
“금방 일하러 가지 않으면 안 돼.”
죠엘이 말했다. “오늘밤 함게 식사라도 해줄 테야, 리사.”
리사는 사양해야 할 이유는 많았으나 그 어느 하나도 별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예,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할게요.” 홀의 타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죠엘은 리사에게 오랫동안 긴 키스를 했다.
“그것으로 맘 놓고 일할 수 있겠어. 그럼.”
죠엘은 뒤도 안 돌아보고 문으로 나갔다.
리사는 그날 하루 분주하게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몸을 바쁘게 움직임으로써 온갖 고민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면서, 그렇지만 마음과 같지 않았다. 어느 샌가 리처드가 뉴욕에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싹트는 것이다. 죠엘과 더 함께 있고 싶었다.
리사는 오랫동안, 어떤 드레스를 입을까 하고 망설인 끝에, 수놓아진 얇은 코튼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 그녀는 머리를 한데 묶고 아이새도를 바른 다음, 빨간 귀고리를 달고, 햇볕에 탄 발을 돋보이게 하는 하얀 샌들을 신었다. 그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대감으로 가슴을 울렁이며 문을 여니까, 한 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은 죠엘이 서 있었다. 방안의 불빛이 복도로 흘러나와, 죠엘의 운곽이 뚜렷한 얼굴을 선명하게 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수간 리사는 왠지 황홀하고도 어두운 예감이 스쳐가는 듯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보았다.
죠엘은 한순간 눈을 감았으나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제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리사는 욕망이 자기몸을 움찔거리게 하는 것을 깨닫고, 숨이 막혀서 침을 삼켰다.
“안녕.” 리사가 먼저 말했다. “기분은 어때요.”
“배가 몹시 고픈걸.” 그는 보도 쪽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으로 가려고 생각했는데.”
리사는 가벼운 스웨터를 손에 들고 죠엘의 뒤를 따라서 계단을 내려갔다.
긴장감이 그들 사이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리사는 그저 식사를 하는 것뿐인데, 왜 둘 다 모두 신경이 곤두서 있을까를 생각했다.
“오늘은 뭘 하고 지냈어요.” 침묵을 참을 수가 없어서 리사가 먼저 물었다.
“내년도 계획을 짜고 있었지.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데, 문제없이 갚을 수 있을지를 말이야. 당신은 어떻게 지낸 거야.”
“아침에는 라켓볼을 했어요. 점심은 거르고, 2시간 동안이나 풀장에 있었어요. 그 뒤에는 체조 레슨을 받았어요.”
죠엘은 싱그런 웃음을 날렸다.
“할리엣트가 지도하는 거 말인가.”
“그래요.” 리사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죠엘, 어디서 그 사람을 찾아냈죠. 그 사람은 인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귀신이라고요. 스페인 이단 심문소의 고문 담당자가 틀림없어요. 레슨이 끝났을 때는 온몸이 아파서 혼이 났으니까요.”
“그렇지만 고문에도 살아났잖아.”
리사는 죠엘이 조금만 말을 걸어주어도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자신을 깨달았다. 길이 좁아져 죠엘의 팔이 리사의 어깨에 닿았다. 그녀는 죠엘의 우람한 팔을 의식하고 몸이 움찔거렸다. 이윽고 길은 꺾어지고 앞쪽에 클럽하우스가 나타났다.
급사장이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절을 하고 창가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리사는 죠엘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골프코스에 눈을 빼앗긴 체하면서 의자에 않았다. 웨이터가 메뉴를 갖고 올 때까지 리사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경치에 대한 이야기를 간간이 나누고, 메뉴를 받아들고는 한참이나 들여다보곤 했다.
웨이타의 친절한 접대를 받았고, 요리는 맛이 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리사는 마음이 놓였다. 식사 후 웨이타가 갖고 온 커피를 마시며 그녀는 어째서 이토록이나 죠엘을 의식하는 걸까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리사는 죠엘한테 손을 잡힐 때까지 스푼으로 계속 커피를 젖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리사.” 죠엘이 목에 잠긴 듯한 소리로 말했다. “이젠 못 참겠어. 여기서 나가서 당신을 안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구.”
그 말은 리사의 전신을 휘감으며 욕망을 꿈틀거리게 했으나 리사는 손을 빼내고 괴로운 듯이 말했다.
“부탁이에요, 그만둬요, 죠엘.”
죠엘의 눈이 번뜩였다.
“그만두라니, 뭘 말이야. 사실은 당신도 날 사랑하고 싶은 거라구.”
“죠엘. 안돼요… 나는 리처드와 결혼 한다고요.”
“그럼,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왜 뉴욕으로 돌아가지 않은 거지.”
“리처드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기 때문이에요.”
죠엘은 리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뿐 대답이 없었다.
리사는 거짓말임이 드러나 보일 것 같아 시선을 피했다. 죠엘이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따라오라구, 리사. 아직 해도 지지 않았고, 당신한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 어릴 때 내가 남 모르게 숨어서 놀던 곳이야.”
죠엘과의 관계를 계속한다면 아픈 기억만이 남게될 것을 알고 있었으나 리사는 2,3시간 정도라면 별로 상관없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예, 함께 가고 싶어요.”
투 사람이 로비를 통과할 때 많은 사람이 있었으나 그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팔목을 잡은 죠엘의 손의 감촉만을 의식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빠져나왔다.
“지프가 필요하겠군.” 죠엘이 말했다.
멋진 밤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의 저녁 하늘에 벌써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밤의 공기는 따뜻하면서도 상큼하고 개운했다. 죠엘은 지프를 운전해서 불빛과 소음으로 가득 찬 클럽하우스로부터 멀어져 갔다.
지프는 금방 아스팔트 도로를 떠나서 비포장의 좁은 길로 들어섰다.
말과 건초와 클로바 등의 냄새가 뒤섞여서 특유의 내음을 풍겼다.
“바로 저쪽에 마구간이 있어.” 죠엘은 펜스 저쪽에 있는 낮은 건물을 가리켰다. “수지가 맘에 들어 하는 곳이지.”
“저기도 휴양지의 일부인가요.”
“이 일대는 모두 내 사적인 소유지라구.”
지프가 비탈길을 계속 달리자 세차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죠엘이 지프를 멈추었다.
“여기를 보이고 싶었던 거야. 어릴 때부터 여기를 좋아했다고. 자주 할아버지한테 데려다 달랬지.”
리사는 지프에서 내려서, 늘어서 있는 커다란 바위로 걸어갔다. 암벽 안쪽으로 샘이라도 가려져 있는지 물이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손으로 물줄기를 부딪치자 물은 놀랄 만큼 차가왔다.
“물은 여기서 300미터쯤 땅속을 흐르고 있는 거야. 여기 휴양지 최대의 수원이지. 이 근처에서는 물은 금광보다도 가치가 있는 거지.”
달과 별들만이 어둠에서 빛나고 물이 흘러 떨어지는 소리 말고는 고요했다.
“아름답군요.” 리사가 감동에 젖은 소리로 말했다. “카사 델 솔은 무엇이든 아름다워요.”
“그럼 나와 함께 있어주지 않겠어.”
리사는 '예스'라고 말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억눌렀다.
“안 돼요.” 리사는 말했다. “우리 사이에는 많은 장애가 있어요. 모르세요, 우리는 과거부터 너무나도 감정적인 웅어리를 짊어지고 있어요. 그리고 둘 다 모두 인생에서 바라는 게 다르잖아요.”
“어째서 그런 걸 알 수 있단 말이지. 내가 앞으로의 인생에서 뭘 바라고 있는지 물어본 일도 없잖아.”
“가치관이 달라요.” 리사의 목소리는 떨렸다. “죠엘, 당신의 맨처음 부인 말인데… 당신이 부인한테 성실하지 못한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에요. 만약에 당신이 나한테 성실하지 못한다면, 나는 견딜 수가 없을 거예요.”
리사의 목소리는 괴로움에 젖어 소리가 잦아 들어갔다.
“잡지 기사가 과장된 것이라고 말하면 당신 마음이 개운해지겠어?”
“약간은요. 나는 결혼에는 성실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죠엘은 한참 후에야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와 헤어진 아내, 스잔나는 나와 결혼했을 때 임신 2개월이었지. 우리가 서로 나눈 것은 딸뿐이었어.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쁜 남편이었다는 데 변명이 안 되는 것은 알고 있어. 내가 말로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변명은, 내가 시합이라는 지독한 압력을 받고, 별난 생활을 해온 것뿐이라고.”
“대개의 결혼은 부부가 그다지 나눠가질 것이 없이 시작되지만, 그러나 시간을 두고 서로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어쩔 수도 없었던 거야. 둘 다 모두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결혼한 것은 20살 때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지. 스잔나는 두 살 위였는데 경험으로 본다면 아마 스무 살은 연상이었을걸.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나를 올가미로 씌운 거라구.”
리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당신을 이용했단 말인가요.”
달빛에 비춰진 죠엘의 얼굴은 싸늘했다.
“스잔나와 만나기까지 내가 여자를 몰랐다고 한다면 당신은 믿을 수 있겠어. 나는 철부지였어.”
리사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죠엘은 가볍게 웃었다.
“정말이라니까. 나는 주니어 하이스쿨 때부터, 열심히 테니스를 하기 시작했어. 하이스쿨 시절에는 매일 5시간씩이나 코트에 있었지. 데이트할 시간도 없었고, 연습이 끝나면 녹초가 되어버린 거야. 19살에 사우스웨스트 지구의 대회에서 우승했어. 스잔나는 그때 마침 결승전을 관전하러 왔다가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어. 그리고 식사를 함께 한 것만으로 몸을 내맡기는 매력적인 여자가 많다는 것을 가르쳐준 거야.”
“그렇지만 당신을 사랑했던 게 틀림없어요.”
“스잔나는 영화 스타가 되고 싶어서 자기를 팔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던 거야. 그래서 나와 함께 사람들 눈에 잘 뛰는 장소에 자주 나가곤 했지. 테니스계의 유망주 웨스트코스트의 젊은 사자, 그 시절의 잡지는 나를 그렇게 불렀지. 나는 VS오픈의 준결승까지 올라갔었지. 아마 스잔나는 그때 영화스타가 되기보다는 나하고 결혼하는 편이, 여러 사람의 시선을 끌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되도록 빨리 임신하려고 했어.”
죠엘은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스잔나와의 결혼은 지옥 같은 것이었지만, 수지가 태어난 것만으로도 결혼한 가치는 있었지.”
리사는 자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죠엘의 아이를 낳은 그 여자를 질투하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물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리사의 턱에 손을 가져가 죠엘은 그녀를 마주보게 했다.
“어째서 당신을 여기 데려왔는지 알겠지, 리사. 당신을 사랑하고 싶은 거야. 당신을 갖고 싶어서 가슴이 터질 것 같단 말이야.”
“안 돼요.” 리사는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내가 오는게 아니었어요. 리처드… 리처드를 생각해야 해요…”
“그만두라구.” 죠엘이 거치게 내뱉었다. “이제 그런 구실은 그만 대라구. 리처드를 끌어내서 지기 마음을 감추는 게 아니야.”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자신한테 정직해지라구.” 죠엘은 부드럽게 리사의 볼을 쓰다듬었다.
“나의 사랑을 받고 싶지 않더라도 리처드 말을 할 필요는 없잖아. 다만 노우하면 될테니까.”
리사는 그의 손길에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당신한테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요.” 꺼져 들어가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되지.” 죠엘이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럴 때는 눈을 감으면 안 돼. 나를 보고 싫다고 말하는 거야.”
리사는 눈을 부릅뜨고 단호하게 말하려고 생각했다.
“리사.” 죠엘이 낮게 불렀다.
“정말로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바라지 않을거야. 나를 보고 똑바로 말해줘.”
리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죠엘의 진지한 눈을 보았다. 둘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만을 응시하더니 이윽고 죠엘이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떠올렸다.
“자기한테 정직하라구, 리사.”
죠엘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리사는 순간 얼굴을 돌리려고 했으나 몸은 리사의 마음과 딴판이었다. 죠엘의 키스는 거칠었으나, 말할 수 없이 관능적이었다. 혀로 입술을 열고 들어왔을 때 리사는 몸을 떨었다. 죠엘은 격렬한 키스를 계속하면서 그녀를 억세게 끌어안고, 그녀를 점점 더 깊은 욕망으로 빠져들게 했다.
리사는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이제 어쩔 수 없을 만큼 죠엘의 것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지는 자신이 두려웠다.
“죠엘, 그만해요.” 헐떡이듯 말하고, 그의 팔을 뿌리치고 달려갔다.
죠엘은 어렵지 않게 그녀를 붙잡아 잔디 위에 눕혔다.
“리사, 당신을 놔줄 줄 알아.” 죠엘은 리사를 끌어안았다. “무서워할 건 없어.” 목이 잠긴 소리는 묘하게 따뜻하게 울려왔다.
“당신은 우리가 성적으로 서로 끌리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게 아니라구. 나를 믿어줘. 이것으로 잘 될테니까.”
“섹스는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않아요.”
죠엘은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거야.”
그리고는 손으로 더듬어서 그녀의 가슴을 감싸 쥐었다.
“리사, 당신을 갖고 싶어 미치겠어. 당신도 그렇잖아. 부탁이니까, 자신을 억제하는 건 그만두라구.”
가슴이 답답해지고 리사의 전신에 욕망의 물결이 밀려왔다. 죠엘의 말에 점차 이끌리고 있는 그녀는 왜 지금가지 죠엘을 거부하고 있었는지 그 까닭마저 희미해질 정도였다.
리사는 죠엘을 처음 만났을 때 사랑을 느낀 것처럼, 지금도, 죠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선명하게 알수 있엇다. 다만 그 마음이 지금까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었을 뿐이다. 그의 목소리와 손이, 그 깊은 곳의 마음을 눈 뜨게 한 것이다.
리사는 죠엘에게 얼굴을 향했다.
“나를 사랑해줘요.”
죠엘은 몸을 떨면서 키스했다.
리사는 죠엘의 따뜻한 몸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죠엘의 손에 의해 지퍼가 내려지고, 드레스가 벗겨졌을 때 그녀에겐 부끄러움도 일지 않았다. 그는 리사의 속옷도 벗긴 뒤에, 다급하게 자기도 벌거숭이가 되었다. 썰렁한 바람이 불었으나 그의 몸으로 바람을 막아주고 뜨거운 열기를 전해주었다.
“나를 안아줘, 리사.” 가슴을 입술로 더듬으며 그가 한숨처럼 말했다. “맨살의 당신을 안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리사는 손을 뻗어서 죠엘의 딱 벌어진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는 리사의 목덜미에서 가슴으로, 애를 태우듯 천천히 혀를 미끄러뜨렸다. 그 사이에도 양손을 쉴 새 없이 교묘하게 움직여서, 리사를 더욱 타오르게 했다.
“죠엘.” 리사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아아, 죠엘, 부탁이에요. 당신을 원해요.”
“알고 있어.” 죠엘이 숨이 차서 말했다.
리사는 죠엘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내가 얼마나 필요한지 그런 식으로 보여달라구.”
죠엘은 리사를 덮치고는 리사의 다리를 벌렸다. 잠시 그대로 있는 그는 아마도 자신을 억누르는 모양이었다.
죠엘은 억세게 리사를 껴안았다. 힘센 팔이 등 뒤로 돌려져서, 리사는 견딜 수가 없어서 히프를 들었다. 죠엘은 리사의 얼굴에 깃털처럼 가벼운 키스를 퍼부어댔다. 그리고 입술을 포개서 정열적일 키스를 하면서, 가슴을 애무했다. 손은 가슴에서 허리로 기어 내려가 히프를 더듬고, 자신의 몸을 더욱 가까이 밀착했다.
죠엘의 손길이 멈췄을 때, 리사는 몸을 뒤틀어 죠엘의 애무를 졸랐다. 그의 입술이 리사의 배 쪽에서 점차 허벅지 쪽으로 기어갔다. 고문과도 같은 환희가 리사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리사는 연신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죠엘, 부탁해요. 날 사랑해 줘요.”
리사는 자존심도 내던지고 부탁했다. 그 순간 리사는 지난날의 오해를 말끔히 잊어버렸다. 전신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제 준비가 다 되었나.” 죠엘이 허스키한 소리로 말했다. “당신한테도 완벽한 것으로 해주고 싶은 거야.”
리사는 아무 말 없이 몸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죠엘은 단숨에 리사의 속으로 파고들어, 단단하고 힘이 넘치는 것으로 리사를 환희의 절정으로 이르게 해갔다.
얼마쯤의 시간이 흐르고 겨우 제정신을 차렸을 때 리사는 죠엘의 눈을 보는 것이 두려워서, 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죠엘은 리사의 머리를 어깨로 받혀준 채 조금 몸을 떼었다. 리사에게는 둘 사이에 있는 공간이 빙산만큼 넓고 차가워 보였다.
리사는 찬 기운에 몸을 떨었다.
죠엘은 리사의 머리털에 키스하고, 일어서서 지프로 향했다. 그녀는 그의 건강한 뒷모습을 주시했다.
죠엘은 담요를 갖고 돌아와 잔디 위에 폈다.
“이 위에 눕는 게 좋겠군. 내 몸으로 따뜻하게 해줄게.”
리사는 담요 위에 누워서 팔베개를 했다. 죠엘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리사는 둘 다 모두 아직 정열의 불꽃이 다 타버린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리사는 눈을 감았다. 그가 똑바로 보고 있으면 속마음을 감출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리사는 눈꺼풀에 키스를 받고 또 전율하고 말았다.
“리사.” 따뜻한 입김이 리사의 볼에 닿았다.
“당신한테 꼭 물어볼 것이 있어.” 죠엘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고 리사는 눈을 떴다.
“어째서 카사 델 솔에 온 거야.”
죠엘이 물었다. “얼굴을 피하는 게 아니야. 부탁이니까 말해주지 않겠어.”
리사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죠엘은 리사의 터게 자신의 손을 괴고, 얼굴을 돌리지 못하게 했다.
“당신을 만나고 싶었던 거예요.” 겨우 리사가 대답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상처 받게 해주고 싶었어요.”
“여기 오기 전에 내가 어떤 사낸지 알고 있었나. 부탁이야, 리사. 사실을 말해달라구.”
“그래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고요.”
죠엘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언제 알게 되었지.”
리사는 자기가 미소 짓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비로서 지난날의 쓰라린 추억에, 좀 이상한 점이 있는 것을 알았다.
“당신과 만난 뒤, 몇 달 지나서 치과에 갔었죠. 대합실에는 낡은 잡지가 여러 권 놓여있었어요. 한 권을 집어 들어 보니까 US오픈 결승전 기사가 실렸더군요. 칼라 사진과 함께. 거기 당신이 나와 있더군요. 내가 처음으로 몸을 내맡겼던 사람이, 테니스공을 치고 있는 모습이. 내 이름을 불리웠을 때, 나는 멍해있었다고요. 진료실로 가는 대신에 그 잡지를 가슴에 안은 채 치과 병원을 나와 버렸죠.”
“어지간히 나한테 화를 냈을 테지.”
죠엘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았다.
리사는 잠시 생각했다.
“화를 냈던 게 아니에요.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는걸요. 당신이 나한테 거짓말만 했으니까요. 부인에 대한 일, 가족에 대한 일. 하는 일에 대해서, 이름마저도 당신은 속이고 있었다고요. 내가 몸을 허락한 상대는 환상이었던 거예요.”
리사는 상체를 일으켜 양팔로 가슴을 감쌌다. “그 뒤에 화를 냈던 거라고 생각돼요. 어쩔 수 없을만큼.”
“리사, 이제 와서 말한들 너무 늦었는지 모르지만 당신을 상처입게 한 것은 사과할게. 그 주말에 난 거짓말은 없었지. 사실을 일부러 감췄다고 하더라도, 내가 취한 행동은 성실한 것이었다고.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내가 당신한테 사실을 나타내 보이려고 했던 것을 모르겠어?”
순간, 한줄기 씁쓸함에 젖어들었다.
“성실한 마음으로 나를 침대로 데려갔다는 것인가요. 걱정하지 말아요, 죠엘. 그것만은 의심한 일 없어요.”
“그런 뜻이 아니라구. 알겠지. 그뒤로 1년 반 동안, 나는 당신이 그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다시 리사의 몸을 떨게했다. 리사는 자기 눈에 떠오르는 욕망의 빛을 죠엘이 감지했다는 걸 알았다.
죠엘은 머리를 숙여, 리사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러나 리사를 껴안은 팔은 떨리고 있어서, 키스도 거칠기만 한 것이었다.
리사가 어지러울 만큼 온몸으로 부드러운 손길이 뻗쳤다. 다시 몸속에 새로운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고, 더운 열기가 전신에 퍼졌다.
“죠엘, 이런 일이.” 리사가 속삭였다. “당신이 날 만지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돼요.”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그저 느끼면 되는 거야. 내가 얼만큼이나 당신을 갖고 싶어 하는지를 온몸으로 느끼는 거야.”
“나도 당신을 원해요.” 리사가 속삭이듯, 말했다. “여태 당신을 원하고 있었다고요.”
리사는 처음 서로 사랑했을 때보다도, 현명한 여자가 되어있었다. 그때는 죠엘한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버렸다. 지금 리사는 그 말이 입에서 새어 나오려 하는 것을 억누르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죠엘. 그 말이 머릿속에서 춤을 추며 맴돌았다. 죠엘의 입술과 손이, 리사를 환희의 절정으로 날아오르게 해서, 리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게 되었다. 죠엘과 함께 공중에 떠있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아찔한 환희가 폭발하듯 전신을 덮쳐왔다.
잠시동안 리사가 그 환희의 여운을 즐기고 있을 때 죠엘이 벌떡 일어나 셔츠를 몸에 걸쳤다.
“누가 온다.” 재빠르게 말하더니, 드레스와 속옷을 리사에게 건네주었다. “옷을 입어, 어서.”
리사는 허겁지겁 드레스를 입고는 지퍼를 더듬으며, 어지러워진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죠엘이 벨트를 매고 났을 때, 리사의 귓가에 아스라이 엔진 소리가 들렸다. 멀리로 시선을 주니 전기 자동차가 폭포 곁에 서는 것이 보였다.
키가 훤칠하게 큰 남자가 차에서 내려서 천천히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죠엘은 저주하듯 말을 내뱉고, 리사는 가슴이 터질 듯 했다.
“리처드.” 리사가 숨이 차서 말했다. “어떻게 여기에?”
11장
리처드는 멈춰 서서 리사를 보았다.
퀭한 눈에 리처드의 얼굴은 새파랬다.
“당신을 만나려고 서둘러 돌아왔는데.” 리처드가 힘없이 말했다. “그렇지만 너무 늦은 것 같군. 그래, 2시간쯤 빨랐을까.”
죠엘은 일어서서, 리사를 끌어당겼다.
“릭크, 이것은 자네가 생각한 그런 게 아니라구.”
리사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리고 다급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죠엘이 리사에게 눈을 돌렸다. 그의 눈에 깊은 연민의 기색을 엿보고 저도 모르게 도움을 청하듯, 죠엘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아, 리사.” 죠엘은 리사의 볼을 가볍게 만져주며 리처드에게 눈을 돌렸다. “릭크, 설명할게 들어주지 않겠나.”
리처드의 웃음에 찬 기운이 돌았다.
“뭘 설명할 테야. 내 약혼자도 다른 여자와 같다는 말인가. 이름난 바람둥이한테 유혹 당해서 저항도 못한 여자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리사는 리처드의 멸시가 담긴 눈을 보았다.
“리처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리처드는 그녀를 보지 않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
“나를 보지마, 지금은 당신 얼굴을 보는 것도 참을 수가 없어.”
죠엘은 불쑥 앞으로 나서서 리처드를 달래듯 한손을 치켜들었다.
“릭크. 부탁이니 들어주지 않겠나.”
리처드는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죠엘의 손을 뿌리쳐 버리고 주먹을 꽉 쥔 채 휘둘렀다. 죠엘의 턱으로 향했다. 죠엘은 비키려고 하지도 않고, 턱에 한 방 얻어맞고 쓰러졌다.
“너무하는군요.” 리사는 무릎을 꿇고, 죠엘의 얼굴을 양팔로 감싸 안았다. “죠엘, 괜찮아요?” 그리고 리처드를 올려봤다. “왜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는 거예요.”
“도대체 뭘 설명하는 거야.” 리처드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뻔하잖아. 굳이 설명 받을 필요는 없어.”
리처드는 휙하고 등을 도리고는 썰렁한 바람만 남긴 채 곧 차를 몰고 사라져 갔다.
리사는 폭포로 달려가서, 슬립을 찢어 물에 적셨다. 리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움직이고 있었다.
리사는 젖은 천으로 죠엘의 새파래진 얼굴을 닦았다. 죠엘은 몸을 움직여서 한쪽
팔꿈치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많이 아파요?”
죠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이는 그대로 있는 것 같군. 미안 해, 리사, 제일 곤란한 상태에서 리처드한테 들키고 말았으니.”
“대단할 건 없어요.”
“아니, 중요한 일이라고.” 죠엘은 눈을 비볐다. “그렇지만 어떻게 리처드가 여기로 왔을까. 40만 평방미터나 되는 대지 가운데, 어떻게 여기를 골라 왔을까.”
“지금은 그런 것 걱정하지 말고.”
리사는 그렇게 말했으나 어째서 리처드가 여기로 왔는지 짐작이 갔다. 분명히 누군가가 리처드에게 이 장소를 말해준 것이다. 그것이 누구인가를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운전 할 수 있겠어요. 당신은 집에 가서 쉬어야겠어요.”
죠엘은 일어서서 입술을 깨물고 통증을 참았다.
“아픈 것은 턱이 아니야. 얻어맞고 쓰러질 때, 머리를 다친거야. 머리가 몹시 아프다고.”
“내가 운전할게요.” 죠엘의 지시를 받으며 리사가 차를 운전했다. 현관 앞에 차를 세웠을 때는 죠엘의 이마에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을 불러야죠.”
“아니, 괜찮아. 머리가 아픈 것뿐이니까. 뇌진탕을 일으킨 게 아니야. 릭크를 만나야지, 만나서 설명해야 해.”
죠엘은 리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지프에서 내렸다. 리사는 다급하게 다가가서 어깨를 내밀었다.
죠엘은 미소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 같군.”
현관문은 다행히 잠겨있지 않아서 리사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죠엘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계단을 올라가 죠엘의 침실로 갔다.
리사는 욕실로 가서 물을 글라스에 담아서 돌아왔다. 그것을 건네줄 때 죠엘이 손목을 잡았다.
“리사, 내일 아침에 맨먼저 리처드한테 이야기할 거야. 오늘밤에는 나와 함께 있어주지 않겠어.”
“안 돼요. 그건.” 죠엘의 애타는 듯한 목소리에 약해질까봐 리사는 일부러 쌀쌀하게 말했다.
“리사, 부탁이야… 나한테는 당신이 필요해.”
그때 문이 열리고 수지가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수지가 물었다. 아직도 리사의 손목을 쥐고 있는 아버지의 손을 뚫어지도록 보면서.
“아빠, 어떻게 된 거예요? 어째서 얼굴에 상처가 난 거예요! 괜찮아요!”
“바위에서 미끄러져서 떨어진 거란다. 머리를 좀 다쳤지만, 그뿐이야. 내일이면 아무렇지 않을걸.”
“미끄러져 떨어지다니, 리사와 함께 폭포에 가서 말이죠.”
리사는 긴장했으나 죠엘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래, 내가 바보였지. 똑바로 앞을 보지 않은 거야.”
리사는 글라스를 스탠드에 내려놓고 문쪽으로 향했다.
“당신은 매우 피로한 것 같군요. 수지와 나는 나가있을게요.”
죠엘은 순간 눈빛이 흐려졌으나, 딸이 있는 데서 항의할 수는 없었다.
“아침 일찍 와주겠어, 리사. 함께 아침식사를 하기로 하지.”
“내가 이침식사를 갖고 올게요.” 수지가 끼어들었다. “괜찮다면 밤새, 여기 있어도 돼요.”
죠엘은 하품을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턱이 아프다고. 네 마음은 고맙지만, 아빠는 아무도 시중해 주지 않아도 되고, 너는 자야하잖아. 왜 이렇게 늦도록 자지 않고 있는 거지? 어서 침대로 돌아가도록 해라.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아빠는 리사한테 부탁할 테니까.”
수지의 얼굴이 굳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리사는 죠엘에게 안녕을 고하고, 침실 문을 다고 황급히 수지의 뒤를 쫒았다.
“수지.” 수지가 침실에 들어가기 전에 나직하게 불렀다.
“어떻게 아버지와 내가 폭포에 있는 걸 알고 있었지.”
수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이크…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요. 아빠하고 당신이 지프로 마구간 옆을 지나가는 걸 보았어요. 그 길은 폭포에서 길이 막히게 돼요. 어째서 아빠가 당신을 그런 곳에 데려갔는지 모르겠어요. 아빠가 당신을 폭포에 데려갈 이유가 없는걸요.”
“그럴까.” 리사는 화를 내고 있었다. “수지 아버지는 아름다운 곳을 보여주려고 하신 거야. 그런 일은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 아니야. 수지, 현실에다 눈을 돌리는 거야. 수지 아버지는 따뜻한 분이지만, 언제까지나 너만을 돌볼수는 없는 거야. 친구를 대접하는 걸 굳이 너한테 말할 필요는 없잖아.”
“당신같은 사람 싫어요.”
“지금은 나도 너를 귀엽다고 생가지 않는다고. 말해봐, 수지. 왜 리처드한테 폭포로 가라고 말해준 거야.”
수지는 리사의 눈을 피했다.
“아빠는 노빅 씨와 싸웠지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리사가 물었다.
“노빅 씨와 당신이 싸우게 하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아빠하고 싸우다니, 모두가 당신 탓이라고요. 당신이 나빠요. 노빅 씨는 뉴욕에서 돌아와서 당신이 어디 있느냐고 여러 사람한테 묻고 다녔어요. 그래서 아빠와 함께 폭포에 갔다고 가르쳐 드렸다고요. 당신도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군요. 노빅 씨와 약혼중이면서 아빠한테 사랑받고 싶은 거지요. 아빠는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않는다고요. 아빠는 아직 엄마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다시 한번 엄마하고 결혼 할 셈이에요. 틀림없어요.”
리사는 평정을 되찾기에는 너무나 피로해 있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한 지 벌써 2년이 된다고. 어째서 그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거지? 넌 이제 곧 15살이잖아. 남에게 폐를 끼치고도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잖아.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면 자기한테 제일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한테 제일 좋은 일을 하는 것 아닐까. 네 아버지한테 제일 좋은 일이 무엇인지, 요즘 생각해 본 일이 있어…”
수지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말했다. “나한테 설교는 마세요. 뭐예요, 잘난 체하고. 어째서 돌아가버리지 않는 거예요. 당신이 오기까지는 정말 즐거웠다고요.”
수지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어깨를 들먹이며 울어댔다. 리사는 간신히 노여움을 가라앉혔다. “수지, 심한 소릴 했다면 사과할게. 다만 나는 네가 잘 이해해 주기를 바랐던 거야.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더라도, 현실에다 눈을 돌려야지. 때로는 상처 받는 일도 있을 테지만 도망치거나 하지 말고, 똑바로 현실을 지켜보는 거야.”
“그만두라고요.! 내 문제는 당신뿐이에요. 당장 여기서 나가줘요.”
리사는 수지의 도전하는 듯한 눈을 마주보았다.
“너는 운이 좋았어.” 가벼운 투로 말했다. “나는 벌써 내일 뉴욕으로 돌아가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믿을 수 없어요.”
리사는 손을 내밀어서 수지의 굳어진 팔을 잡았다.
“네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고 계시는 것, 그리고 아무도 그 사랑을 뺏지 못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 사랑은 다른 사람한테 쏘리고 있는 사랑을 뺏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거야. 그걸 잘 생각해봐.”
수지는 얼굴을 외면하고 듣지도 않겠다는 태도를 취했으나, 굳어져 있는 몸은 사실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당신은 주일학교에서 설교하는 훈련을 한 거죠.” 수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리사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다급하게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런 소릴해도 아무것도 안 되잖아.” 리사는 그 말을 남긴 채 복도를 달려서 자기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에 기대서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리사는 비명소리를 막으려고 입을 손으로 가렸다. 리처드가 굳어진 얼굴로 침대 곁의 소파에 앉아있었다. 잠시 둘은 그렇게 마주볼 뿐이었다.
“리처드.”
“리사, 죠엘은 어디 있지.”
“침실에요.”
“괜찮을까.”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다시 침묵에 싸이던 끝에 리처드가 일어섰다.
“사과할게, 리사. 당신을 놔두고 가는 게 아니였어. 나는 화가 나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어.”
리사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예요. 입으로 말하는 이상으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째서?” 리처드가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한거지.”
“올바른 설명이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과 사람을 나눈게 아니에요. 사실을 말한다면 2년 전부터 죠엘과 아는 사이였어요.”
리처드는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알고 있었다고….” 그렇게 되뇌이고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지금까지 그런 일을 말하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이야. 이제까지 당신은 죠엘의 이름을 말한 일이 없잖아.”
“당신도 말을 안했잖아요.” 리사는 재빨리 덧붙였다. “당신은 고객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고요. 나는 당신한테 프러포즈를 받은 뒤에 죠엘이 당신 친구란 것을 처음 알았어요. 이건 사실이라고요.”
“그럼, 알게된 뒤에 왜 죠엘과 만난 일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지? 어째서 한 마디도 않고 나와 함께 여기 온 거야!”
리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죠엘에 대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죠엘과의 사랑을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리처드는 웃었으나 씁쓸한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랬었군. 분명히 말하기 어려울테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거야. 설명한 것으로 조금은 기분이 풀릴 거라고 생각하나. 당신이 이미 죠엘을 알고 있었다고 해서, 내가 그렇다면 좋다라고 말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신하고 죠엘이 2년 전에 서로 사랑했다는 것으로, 나한테는 화를 낼 권리가 없다고 할 셈이야!”
“아니오. 당신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해요. 그렇지만 죠엘한테는 화 내지 말아요. 내가 여기 오기까지, 죠엘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리사는 손가락에 끼어진 다이아몬드로 된 약혼반지를 뺐다.
“당신한테 이런 짓을 할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약혼반지를 내밀었다. “처음부터 이걸 받는 게 아니었어요. 당신한텐 어떻게 사과해야할지.”
“그건 가지라구.”
“그건 안 돼요.” 리사는 반지를 리처드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안녕, 리사.” 그는 쓸쓸하게 말하며 문쪽을 향하다 멈춰 서서 리사의 피로에 지친 얼굴을 보며 말했다.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 좋으련만. 당신은 위험한 사내를 골랐단 말이야.”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해요?” 리사는 절망에 싸여 말했다. “나는 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노력했어요.”
리처드는 드디어 리사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슬픈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었다. 그런 거지.”
사실을 부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리사는 꼬옥 쥔 양손에 시선을 떨구었다.
“리사, 당신이 함께 가고 싶다면 나는 내일 아침에 뉴욕으로 돌아갈 테니까.”
문이 닫혀지고 리처드는 사라졌다.
12장
다음날 아침 일찍 리사는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리사는 로브를 걸치고 문을 열었다. 리처드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양복 차림에 엄숙한 얼굴이었다.
“한 시간 안에 공항으로 가는 거야.” 리처드가 말했다.
“당신이 함께 가고 싶다면 어젯밤 일은 잊어도 돼. 물론 다시는 그런 짓을 않겠다고 약속해야 하지만.”
자기가 얼마나 관대한 사람인가를 과시하듯 하는 말투에 리사는 약간 화가 났으나, 리처드는 화를 내는 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리사는 용서해 주지 않더라도 다만 이해해 주면 된다는 마음을 전하려고 했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겨우 궁색한 대답을 한 그녀의 목소리는 좀 산란해따.
“그렇게 말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러나 나는 어젯밤 일을 잊고 싶지 않아요. 죠엘의 일은… 저… 내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랬군. 그럼 나는, 두 사람 일을 방해했으니 사과해야 되겠군.”
리처드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에 리사는 마음이 찔렸으나 위로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리처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사, 최근 1년 반 동안에 죠엘은 한 달에 한 사람 골로, 수없이 여자를 바꿔왔다고. 뉴욕의 금발머리 미인과는 1주일도 가지 못했어. 당신은 죠엘의 침대에 한 달을 머물기 위해서라면 우리 사이를 희생해도 됀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만둬요.” 리사가 말했다. “리처드, 부탁해요. 그런 투로 말하지 말아요. 우리는 좋은 친구사이였잖아요…”
리처드는 입술을 삐죽였다.
“좋은 친구사이라고?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나마저도 그렇게 생각하리라고는 말아줬으면 좋겠군.”
리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리처드는 갑자기 등을 돌렸다.
“그것뿐이야. 이제 하고 싶은 말은 아무것도 없어. 안녕, 리사.” 그는 지체없이 복도를 걸어나갔다.
리사는 문을 닫으며 자기가 미쳐버린 게 아닌가 의심했다. 리처드가 말한 것은 가슴이 아플 만큼 정확했다. 리사는 죠엘과의 위태로운 행복을 쫓기 위해서 안락한 결혼생활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내던져 버린 것이다.
리사는 고개를 떨구었을 때 접혀진 메모용지가 문 밑으로 디밀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접혀있는 메모지를 펼쳐보았다.
간단한 메모를 일고 있는 동안 리사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셔다.
모두가 나를 필요 없는 애라고 생각하니까 집을 나가겠어요. 아빠하고 아침식사 할 때 이걸 아빠한테 보여줘요.
아빠는 당신하고 둘만 있고 싶어 하니까요. 틀림없이 좋아하실 거예요.
수지
리사는 다시 한번 눈으로 읽으며 자책감에 빠져들었다. 어째서 어젯밤 수지한테 화를 내버렸을까. 수지가 극한 감정 상태에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가장 나쁜 것은 수지가 괴로워하는 것을, 어째서 죠엘한테 말해주지 않았던가 하는 것이었다. 카사 델 솔에 온 첫날밤, 리사는 수지가 불안한 상태에 있은 것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그것을 죠엘한테 말하는 것을 피했다. 죠엘이 학교성적이 안 좋다고 말했을 때에도 수지가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리사는 자기가 입을 다물었던 까닭을 새삼스럽게 되새겨야 했다. 수지의 문제로 죠엘과의 관계과 영향 받는 것에 싫었던 것이다. 리사는 줄곧 죠엘을 사랑해 왔다. 죠엘과 다시 만났을 때, 사랑이 되살아나는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장애가 있었고 수지의 적대감이 무너뜨릴 수 없는 벽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몰래 겁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지 문제를 말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해왔던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만 지금, 리사는 자신의 이기주의를 증오했다. 리사는 직업상, 가출한 소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리사는 안절부절못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면서 옷장으로 달려갔다. 맨 먼저 손에 잡힌 것―숏팬티와 티셔츠―를 걸쳐입고, 샌들을 신고 방에서 뛰어나갔다. 수지의 편지를 손에 꼬옥 쥐고, 죠엘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죠엘이 금세 문을 열었다. 면도를 막 끝낸 상쾌한 얼굴이었다. 죠엘은 리사를 보고 미소 지어 보였으나, 숏팬티와 티셔츠 차림의 리사를 보았을 때, 웃음은 사라졌다. 욕망이 뭔가 다른 감정과 뒤섞여져서 잠깐 죠엘의 눈에 떠올랐다.
“안녕.” 가볍게 리사를 포옹했다. “당신이 아름답다고 전에 말한 일이 있던가.”
리사는 죠엘의 팔안에서 몸이 굳어졌다.
“죠엘, 안 좋은 소식이에요. 수지가… 내 탓이에요… 당신한테 말을 했어야 하는 건데.”
리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죠엘한테 수지의 편지를 내밀었다. “수지가 집을 나갔다고요. 이걸 보세요.”
편지를 읽어가는 동안 죠엘의 안색이 달라졌다. 죠엘은 편지를 구겨버리고 욕설을 내뱉었다.
“도울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할게요.” 리사가 말했다. “내가 카사 델 솔을 떠나지 않으면, 엄마 집으로 가버리겠다고 수지가 말했어요. 미안해요, 죠엘. 내 주의가 모자랐던 탓이에요.”
“리사, 왜 그래. 수지가 집을 뛰쳐나갔다고 해서, 당신이 자신을 비난할 필요는 없잖아. 사랑 바도 있다는 걸 딸이 느끼도록 하는 것은 아버지가 할 일이야. 왜 당신이 사과해야 하는 거지.”
“수지는 우리 사이를 오해하고 있어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수지를 찾아내면 당신이 똑바로 설명해 줄 수 있겠죠. 수지는 자기가 없어지면 우리 둘만 있게 되니까 당신이 좋아할 거라고 썼더군요.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잘못이라고, 잘 설명해 주세요. 내가 이젠 여기서 없어질 거라고요.”
“그럼, 당신은 여기를 떠날 셈이야? 지금은 이런 일을 묻고 있을 때가 아니지만, 내겐 중요해. 언제까지나 지금까지와 같은 생활은 계속할 순 없는 거야. 우리한테는 희망은 없는 거야? 당신이 오래 여기 있을 수는 없을까?”
리사는 목이 메었다.
“나는 잘 모르겠군요. 당신이 말해주세요.”
“당신은 정말 모르는군. 나는 내 마음을 분명히 당신한테 전한 걸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신이 나를 받아들여 준다면 나는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한다고. 아직도 그걸 모른단 말이야.”
리사의 눈에 눈물이 그렁한 채, 그의 품안에 뛰어들었다.
“죠엘, 나도 당신이 필요해요. 마음속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다고요.”
죠엘은 리사의 볼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그녀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주시했다.
“사랑해, 리사. 당신이 없이는 완전한 하나가 아닌 듯 생각될 만큼.”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듣는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어요.”
리사는 죠엘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죠엘은 그녀를 한번 꼭 끌어안더니 리사를 놓아주었다.
“스잔나의 맨션으로 가버리기 전에 수지를 찾아야겠어. 새 애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있으니, 혹시 그게 사실이라면 스잔나는 수지를 맨션 안에 들여보내지 않을 거야. 수지가 간다고 스잔나가 기뻐하진 않아.”
“엄마한테 환영 받지 못하면 수지는 엉뚱한 일을 저지를 지도 몰라요.”
두 사람은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리사는 전부터 마음에 걸리던 질문을 망설이다가 했다.
“죠엘, 스잔나가 수지를 반기지 않는다면, 어째서 수지의 양육권을 갖고 당신과 다툰 거지요?”
죠엘은 한참 뒤에 대답했다. “위자료를 받아내려는 빈틈 없는 수작이지. 결군 돈으로 끝장냈어.”
“수지는 그걸 알고 있어요?”
“아니, 말하지 않기로 했어. 스잔나는 수지한테 겉으로만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수지가 머릿속에 그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것이 잘못이었는지 모르지만, 엄마가 자기한테 값을 달고 있었다는 걸 알면 수지 마음이 어땠을지, 그걸 생각하면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고.”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해요.”
죠엘은 비서에게 전화를 남겨서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고, 수지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스잔나에게 전해두라고 말했다. 죠엘이 전화하고 있는 사이에 리사는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꺼내서, 글라스에 따르고 죠엘한테 건네줬다.
죠엘은 전화를 끊고는, 주스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수지가 어떤 방법으로 로스앤젤레스로 갈 셈인지 생각해야겠어. 버스를 타고 갈까.”
“오늘은 토요일이에요. 학교는 쉬잖아요. 수지가 전에 친구 이름을 말한 일이 있어요. 수지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차를 운전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친구한테 태워다 달라고 할셈이 아닐까요.”
“마이크 헤르난데스야.” 죠엘이 그 이름을 기억해냈다.
“그럴 가능성이 크군. 마이크는 마음씨 착한 청년이니까. 수지한테 부탁 받으면 거절할 수 없을거고, 물론 수지는 가출했다고 말하지 않을 테니까요.”
“수지는 당신이 마이크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알고 있었나요?”
죠엘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을까. 마이크는 좋은 청년이야.”
“수지한테 들었는데, 마이크가 수지보다 너무 나이가 많다고 군소리를 했다면서요?”
죠엘은 어이가 없는지 허탈한 표정이었다.
“같은 또래의 친구를 더 많이 사귀라고 말했을 뿐이야. 수지가 주말동안 내내 쓸쓸하게 지내고 있을 때였지. 리사, 수지와 나는 어째서 이토록 마음이 서로 안 통하는 것일까.”
“걱정하지 말아요. 십대의 자녀를 둔 부모는 대개 그렇게 생각하지요. 작년 1년 동안 가출한 십대는 100만 명이 넘는다고요.”
“어떤 부모도 나처럼 무뚝뚝한 거로군.” 죠엘은 자조하듯 그렇게 말하고 수첩을 뒤졌다. “됐다. 마이크의 전화번호가 실려 있군.”
죠엘은 전화를 걸어서 마이크가 집에 없다는 걸 확인했다.
“친구와 놀러간다고 아침 일찍 집에서 떠났다는군.” 전화를 끊고 나서 리사에게 말했다. “집의 차를 타고 갔다는 거야. 파란색 시보레라는군.”
“그럼 틀림없이 마이크가 수지를 태우고 간 거라고요.”
“아아, 그래. 우리는 가는 것이 좋겠군. 파란색 시보레를 찾는 거야.”
“죠엘, 경찰에 연락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되도록이면 그건 피하고 싶어.”
“그렇지만 수지는 미성년이고, 돈도 얼마 안 갖고 있을 거예요. 혹시 엄마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수지가 어디 갈 셈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면…”
리사는 주저하다가 큰맘 먹고, 넉넉한 돈을 갖지 않고 가출한 여자애들이 도시에서 그날밤 숙박료를 얻기 위해서 어떤 일을 저지르는지를 이야기했다.
죠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이크와 함께 있어주기를 기도하겠어. 그렇다면 수지도 돌이키지 못할 짓은 안할 테니까 말이야. 리사, 경찰에 알린다면, 이 일은 뉴스가 되어버린다고. 수지는 보통의 가출한 계집애가 아니야. 내 딸이라고. 불행하게도 내 이름은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각 매스컴은 웬 떡이냐고 앞을 다퉈서 보도할 거야.”
“여러 사람한테 알려지는 게 그렇게 좋지 않은 일인가요. 그것으로 수지를 빨리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당신은 너무나 낙관적이라고.” 죠엘이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최악의 사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오히려 뉴스를 얻어들은 범죄자가 수지를 찾아내서 유괴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일이 없더라도 일단 보도로 나가면 언제까지나 남의 소문에 오늘 것이고, 수지와 나와의 사이를 본래대로 되돌리는 것이 어려워지고 마는 거야. 나는 좋은 아버지가 못 되었던 것 같애. 나를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수지한테 납득시키지 못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각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면 어쩔 수 없게 되어버리지 않아.”
“그렇군요.” 리사가 이에 동의를 표했다. “엄마한테 갔을 가능성이 제일 크니까, 그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는 게 좋겠어요.”
죠엘과 리사는 벤츠에 재빨리 올라탔다. 죠엘이 엔진을 걸고 엑셀레더 페달을 세게 밟았다. 안마당을 빠져나가려고 했을 때 앞쪽에 파란색 시보레가 나타나서, 죠엘은 급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안마당으로 후진시켰다.
시보레는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멎었다. 두 대의 차 문이 동시에 열렸다. 시보레에서는 얌전한 분위기의 청년이 내렸다. 둘 다 모두 진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피로에 지친 표정이었다. 죠엘이 두 사람 앞으로 달려갔다.
리사는 벤츠에서 내렸으나, 죠엘 곁으로 다가가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아서 죠엘로부터 1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수지는 도전적인 눈초리로 아저씨를, 다음에는 리사를 쏘아보았다.
“돌아왔어요.”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 머리칼을 넘기며 말했다.
“잘 돌아왔다, 수지.” 죠엘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는 걱정하고 있었단다.”
수지가 눈을 깜빡거렸다. “우리라고요?”
“그럼.” 죠엘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리사와 아빠는 정말 걱정하고 있었어. 엄마 맨션에 도착하기 전에 사고라도 나는 게 아닌가 해서 말이야.”
“어떻게 내가 가는 곳을 알았죠.”
“추측한 거지. 물론 확신은 없었지만.”
“돌아오긴 했지만, 오래 있을지 어떨지는 몰라요.”
죠엘이 리사에게 얼굴을 돌리고는 도움을 청하는 눈짓을 했다.
“여기는 덥군. 집안으로 들어가자. 마이크도 수지도 소다수를 좋아하지.”
마이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로버트슨 씨, 괜찮으시다면 나는 풀장에서 수지를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럼, 수지.”
수지는 갑자기 쓸쓸한 표정이 되어 마이크가 차를 타는 것을 지켜봤다. 그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리사가 그 뒤를 따랐다.
수지는 주방 식탁에 엎드려서, 맥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사는 글라스와 소다수 깡통을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네가 따르는 거야.” 엄마 같은 말투가 되어버려서 리사는 얼굴이 붉어졌다.
수지가 딱딱한 표정으로 소다수를 따르고 단숨에 마셨을 때, 죠엘이 벤츠를 차고에 넣어두고 돌아왔다.
“아마, 다시 집을 나갈 거예요.” 수지가 말했다.
“그런 짓은 안했으면 좋겠는걸.” 죠엘이 말했다. “네가 집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아빠는 안심된단 말이다. 왜 로스앤젤레스로 가기로 한 결심을 바꿨지.”
“결심을 바꾼 것이 아닌지도 몰라요. 다시 엄마한테 갈 작정인지도 몰라요. 내가 부탁하면 마이크는 언제라도 나를 태워다 줄 거예요. 나한테 반해 있으니까요.”
“그럴 테지.” 죠엘이 말했다. “너는 머리도 좋고 귀여우니까. 아빠의 질문을 피하려 하지 말고, 네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운가를 털어놓지 않을래.”
“아무 것도 괴로워하지 않는 걸요. 다만 엄마와 함께 살고 싶을 뿐이에요.”
“네 편지에는 그런 말은 안 써있던대.”
수지는 흘깃 아버지 얼굴을 보더니 곧 눈을 돌렸다.
“알았어요.” 큰 소리로 말했다.
“어른들은 도망치거나 하지 않고, 문제를 정면으로 부딪친다고, 어젯밤에 리사가 나한테 말했어요. 나는 그 말을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도망치기 전에 아빠하고… 그리고 리사한테 이야기해야 옳았다고 생각했는지 몰라요.”
“그렇게 생각해 준것만으로도 기쁘구나.” 죠엘이 말했다.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몰라서 잘못했다, 사과하지. 말해주지 않겠니?”
수지는 글라스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빠는 결혼할 셈인가요? 리사하고…”
“그러기를 바라고 있단다. 리사가 동의해 준다면.”
수지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알았다고요. 생각한 그대로군요. 엄마한테 전화해서 함께 살게 해 줄지 어떤지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수지는 웃으려고 했으나, 목이 메어 웃음소리가 되어나오지 않았다.
리사가 앞으로 나서서 조심스럽게 수지의 손을 잡았다.
“수지는 결론을 너무 서두른 것 같애. 아버지가 나하고 결혼하고 싶어 하신다고 해서, 왜 수지는 아버지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그런 짓 하지 않는다고요.”
“나한테는 그렇게 생각되는데.”
수지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흐르고, 볼을 적셨다.
“당신이 여기서 살게되면, 아빠는 나를 모른 체하게 될게 아녜요.”
“그런 말을 하면, 아버지도 나도 모욕하는 것이 되는 가야. 왜 물어보려고 하지 않지. 아버지는 수지가 여기 있은 걸 원하시는지 어떤지.”
수지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정말이에요, 아빠. 리사하고 결혼해도, 내가 여기 있는 걸 바라시는 거예요.”
“너는 내 딸 아니냐. 사랑하고 있단다.” 죠엘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사에 대한 마음은 너를 대하는 마음과는 다른 거야.”
수지는 코를 훌쩍였다.
“리사도 어젯밤에 그렇게 말했어요.” 힐긋 리사한테 얼굴을 돌렸다. “그렇지만 아기를 낳으면 어떻게 되죠? 혹시 사내아이나 나 같은 계집애라면.”
리사는 숨을 삼켰으나, 죠엘은 웃었다. “별걸 다 생각하고 있었군. 아버지는 아직 리사한테 프로포즈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넌 태어날 아기까지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수지는 얼굴이 붉어진 채, 눈물 젖은 눈으로 방끗 웃었다.
“그럼, 나는… 여기서 사는 거죠.”
죠엘은 수지를 껴안아 주었다.
“여기가 네집이고, 아버지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몇 번 말해야 되는 거야. 물론 너는 여기서 사는 거라구. 네가 대학에 갈 때가지 싫더라도 여기 있도록 할 테니까 말이야.”
수지는 마지못한 듯 리사의 눈을 보았다.
“리사는 어때요. 내가 있어도 괜찮은가요.”
리사는 수지의 가냘픈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물론이야.”
수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언제 결혼해요.”
“아직 아버지는 프로포즈도 안하셨는걸. 여권운동가가 아니어서 나는 프로포즈도 못한단다.”
“리사와 좀 이야기하게 해준다면, 확실한 날짜를 말해줄 수 있겠어. 저녁식사 때, 앞으로 계획을 말하면 되겠지.”
수지는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내 남동생과 여동생이 몇이 되는지도 가르쳐 줘요.”
죠엘은 리사에게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거기까지 정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는걸.”
“나 마이크 만나고 올게요. 풀사이드에서 점심을 먹을 거예요.”
“아빠 앞으로 달아둘 거예요.” 수지는 경쾌하게 말했다.
“아빠는 지금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너는 다행이라고. 지난달 묘한 청구서가 날아와서 너한테 물어보려고 했으니까 말이야.”
수지는 황급히 문으로 달려갔다.
“그럼, 마이크가 기다리니까요.” 주방에서 나갔으나, 문으로 얼굴만 내밀었다. “집을 뛰쳐나가서 미안합니다. 새엄마가 생기는 것도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집안에 또 한 사람 여자가 있으면 확실히 즐거울 테니까요.”
“찬성하니 기쁘구나.” 죠엘은 벅찬 감동에 젖어 말했다.
“그럼요.” 수지는 문을 닫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들은 감동에 젖은 상태로 얼마간 있었다.
“수영복을 잊고 갔네요.”
“그렇다면 서둘러야겠는걸, 수지가 돌아오기 전에 문을 잠그기로 해야겠어. 당신을 송두리째 내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죠엘은 리사의 손을 낚아채고 계단을 뛰어올라 침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아 걸고는 리사를 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리사를 침대에 눕혀놓고 탐닉하듯 키스를 했다. 욕망이 뜨거운 용암처럼 리사의 전신을 관통했다. 두 사람은 맨살의 몸을 맞닿으려고 금세 옷을 벗었다.
죠엘은 리사의 손을 잡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키스했다.
“약혼반지를 안 끼고 있군. 아침에 제일 먼저 눈에 띄었지.”
“리처드한테서 함께 뉴욕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들었어요. 그것은 할 수 없었어요.”
“나는 당신이 리처드와 결혼할 리가 없다고, 나 자신에게 늘 말하곤 했지. 나한테 그렇게 몸을 맡겼는데, 다른 남자와 결혼할 리는 없는 거라구.”
“당신의 매력 앞에는 어쩔 수가 없는 걸요. 나는 그래도 조심스런 여자였어요.”
“아니, 당신은 냉정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지.”
리사는 조그맣게 웃었다.
“당신과 다시 만난 순간, 나는 다시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죠엘은 리사를 마음껏 끌어안았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애인 같은 건 되고 싶지 않는걸. 알고 있을 테지.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은 거야. 오래도록 함께 지내자고. 침대를 함께 하면서 아기들 엄마, 내 마음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겠어.”
“네에, 죠엘.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할게요.”
“리사,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알아.”
“가르쳐 줘요.”
죠엘은 리사를 힘껏 껴안고, 목덜미에서 어깨로 키스 세례를 퍼부은 다음, 진한 키스를 했다.
“어디까지 해야 되는 거야.” 죠엘이 물었다.
“무슨 말이요?”
“얼마만큼 당신을 사랑하는지 해보이고 있다고. 어디까지 해줘야 되는 거지.”
리사는 가냘프게 웃었다.
“이제 그만하면 됐어요. 그렇지만 좀 더 잘할 수 있죠?”
죠엘은 사랑과 정열에 가득 찬 눈으로 리사를 지켜보았다.
“매우 중요한 것을 이야기해야겠어. 수지를 위해서.”
리사는 수지의 일을 생각하려고 했다. 죠엘이 가슴을 더듬고 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어려웠다.
“수지 말이에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함 셈이죠.”
“수지의 동생들 말이야. 수지는 형제가 몇이나 생기는지 알고 싶어 해. 바로 아래 동생이 언제 태어나는지 말해줘야 하겠는 걸”
“수지는 독재자로군요. 나는 한 번에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지금은 당신한테 사랑 받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똑바로 대답해 주지 않을 테야. 당신은 아기를 갖고 싶나? 수지 때문이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알고 싶은 거야.”
리사는 손을 뻗어 죠엘의 볼을 쓰다듬었다.
“나는 가족을 갖고 싶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래서 리처드와 결혼하기로 동의한 거에요. 좋은 아빠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해서요. 그러나 지금은 가족을 갖고 싶다는 것과 어떤 한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것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나는 당신 아기를 갖고 싶은 거예요. 죠엘. 엄마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과 함께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경험을 나누고 싶어요. 당신 아기를 갖고 싶어 죽겠어요.”
“기쁘다고.” 죠엘이 목이 잠긴 소리로 말했다. “당신 속에서 내 아기가 자란단 말이지.”
죠엘은 그녀를 품에 안으며 정열적인 키스를 했다. 이윽고 몸을 덮고는 리사의 몸안에 파고 들어왔다. 사랑의 환희가 폭발하는 동안 두 사람은 몸도 마음도 하나로 맺어졌다.
그들의 격렬한 사랑행위 뒤에 죠엘은 리사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나른한 듯 리사의 허리를 더듬었다. 리사가 잠이 들려고 했을 때 죠엘은 한쪽 팔꿈치를 짚고 몸을 일으키고, 따뜻한 눈으로 리사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사랑이 넘쳐나고 있었고, 그를 마주보는 리사의 눈에도 기쁨의 눈물이 고였다.
“사랑하고 있어요.”
리사는 자기 마음을 그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죠엘은 뜨거운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더듬어, 다시 리사를 타오르게 했다.
그녀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평생 퇴색하지 않는 진실된 그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리사는 죠엘과 함께 환희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