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잎새는 떨어진다
게 그리쉰 / 아 노르멜
작품 배경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3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의해 강제로 공산국가가 되었다. 국토도 소련에 편입되어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 국가의 많은 국민들은 국외인 스웨덴에 망명정부를 세워 투쟁을 하였다. 그중에서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활동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본부를 두고 첩보 활동을 하는 등 반소련 전선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반소련 정탐기관들의 활동을 그린 이야기이다. 물론 소련의 작가들에 의해 쓰여진 오체르크(체험담)이지만 상대적으로 이들 애국자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들과 적대적인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간첩인 이들이 제대로 활동을 못 하고 결국 소탕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작품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는 간첩들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임을 느낄 수 있다.
비록 간첩의 이야기를 다룬 첩보물이지만 게 그리쉰과 아 노르멜의 훌륭한 묘사는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아 오히려 중립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등장인물
수지: 사실상의 주인공으로 에스토니아에 파견된 핵심간첩. 요나쓰, 윌리 등과 함께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교육을 받고 침투하였는데 그의 임무는 에스토니아에 공작기지 설치와 스웨덴 정탐기관에서 보내는 새로운 간첩을 받아들이기 위한 새로운 비밀연락장소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나쓰나 윌리가 체포되자, 그는 에스토니아 국가 안전기관의 추적을 받고 있었는데...
월리: 수지의 동료로 역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복무하였다. 후에 수지와 함께 간첩 교육을 받고, 에스토니아에 침투하였으나 먼저 체포되는데...
요나쓰: 32세. 수지의 동료로 구레싸라르에서 체신부 일을 봄. 그는 에스토니아에서 싸알리스테를 찾아나서다 체포를 당한다.
아르까지 왈리진: 몸이 불구자인 그는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났다. 스톡홀름에서는 프라데르나타쓰 에스티카라는 협동 조합원으로 활동하였다. "앗트쯔"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으며, 그의 동생 에드문드는 스톡홀름에서 법률가로 있음.
리알데 싸알리스테 중위: 옛날 히이우마 섬에 있던 군사단체인 오마카잇쎄 대대장을 역임하고, 스웨덴에서 파견되어 얀센과 같이 에스토니아에서 반소전선을 형성하며, 에스토니아 국가 안전기관에 대항하고 있었다. 얀센의 실질적인 상관이다.
알베르트 얀센: 큐티 마을에 사는 산림 감시원. 역시 오마카잇쎄 단체의 단원으로 이 단체의 하사관으로 일을 했다. 에스토니아 국가 안전기관에서는 그를 스웨덴에서 밀파된 간첩의 방조자로 파악하고 있다.
쿨트 안드레아쏜: 여위고 후리후리한 모습의 스웨덴 특무대위로 아르까지 왈리진의 감독관이며, 그의 부친은 간첩 교육을 위해 장소까지 제공한다.
쑤넬손: 스웨덴 교관.
닐리손: 스웨덴 교관.
요한손: 스웨덴 교관.
오쎄뜨로브 대좌: 에스토니아 국가 안전기관의 방첩 책임자.
헤아나스테 소좌: 여위고 키가 큰 에스토니아 국가 안전기관원.
윌레르 대위: 에스토니아의 국가 안전기관에 소속된 실질적인 책임자.
끼비 중위: 국가 안전기관원.
씰비 람믹: 우편 통신원으로 일하는 처녀임. 그녀는 큐티 마을에 사는 얀센의 집에 우편물 배달을 갔다가 얀센의 집에서 나오는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고 국가 안전기관에 신고하였다. 그녀는 또한 얀센의 동태를 파악하고 보고하기도 한다.
알베르트 릴레베르그: '카루'라는 별명의 발동선 선장으로 스웨덴의 첩보 간첩 요원들을 소련 땅인 에스토니아로 잠입시키는 임무를 맡은 공작원.
까우벨: 발동선의 기관사로 에스토니아에 가족이 있으나 스웨덴에서 애인인 린드스트렘이라는 여자와 살고 있다.
유하니엘 일랄레: 요나쓰의 약혼녀로 고향인 무후 섬에서 요나쓰를 기다리고 있음.
윌레말 레인푸우: 살해당한 구역 소비에트 대의원.
알베르트 린데만: 살해당한 꼴호즈의 부위원장.
요하네스 쌀루쏘오: 신지 정거장에서 직일을 서고 있던 국가 안전기관 주재부의 소위로 그는 산림 감시원 엣쓰의 제보를 받고 윌리를 주점에서 체포하는 공을 세운다.
와씰리: 라아아쓰마에 살고 있는 요나쓰의 사촌동생. 어머니 마리아와 부인인 알리데와 같이 살고 있다.
이완 말리찌스: 요나쓰의 아버지.
쿡크: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에스토니아에 낙하산으로 침입한 첩보 요원.
토오믈라: 쿡크와 같이 교육을 받고 에스토니아에 낙하산으로 침입한 첩보 요원.
힐다 야르빙그: 수지의 여자 동창. 오랜만에 만난 수지를 반갑게 맞이하지만, 국가 안전기관의 요청에 의해 수지를 체포하는데 협조한다.
네리쓰: 마지막으로 침투하다가 사살당한 정탐요원.
하베: 에로모와 같이 침투한 정탐요원.
에로모: 수지를 지원하기 위해서 발리진이 파견한 정탐요원이나, 도중에 모든 것을 잃어버려 오히려 수지에게 부담만 된 인물.
닉씨: 사건의 최후에 잡힌 정탐요원으로 본명은 엘렌 몽.
줄거리
스웨덴의 첩보 기관에 종사하는 에스토니아 사람들인 수지와 윌리 그리고 요나쓰는 스웨덴의 첩보 기관에서 교육을 받아 공산국가로 변한 자신들의 조국인 에스토니아에 잠입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윌리와 수지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딸린에서 배신자의 암살을 명받고, 요나쓰는 싸알리스테라는 사람과의 연락을 명받는다.
스웨덴의 기멜스타베겐에서 첩보교육을 받은 이들 수지와 요나쓰, 윌리 3인은 배를 타고 오쓰무싸알 섬의 등대에 도착하기로 했으나 선장의 실수로 르후쌀루 근처에 착륙을 했다. 모래강변에 도착한 이들은 재빨리 숲속에 숨은 뒤 각자 임무를 위해 헤어져, 윌리와 수지는 딸린으로 가고 요나쓰는 남쪽을 향해 간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소비에트 대의원 윌레말 레인푸우와 꼴호즈 부위원장 알베르트 린데만이 살해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에스토니아 첩보당국은 이를 스웨덴으로부터 온 간첩의 소행으로 여기고 대책을 강구했다.
한편 오쎄뜨로브 대좌는 윌레르 대위와 함께 첩보 요원 3명의 잠입을 보고받고 체포작전을 수행한다. 그리하여 윌레르 대위의 명을 받은 끼미중위는 엣스라는 이름으로 숲속에서 변장하여 활동하며 끼미중위는 얀센을 속이고 접근하였고 그 뒤에 렢쓰와 짜고 리할데 싸알리스테와 그 일당을 체포한다. 그런 것도 모르고 윌리와 수지는 요나쓰와 헤어져 다니다가 결국 헤어진다. 수지는 자신의 비밀장소로 가고, 윌리는 윌리대로 자신의 비밀장소로 갔다. 그러나 윌리는 산림 감시원 렢쓰에게 체포당한다.
요나쓰는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사촌 동생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무후섬으로 가는 데 실패한다. 그러다가 사촌동생의 처 와씰리가 말한 딸린 교외의 메딸리 거리에 사는 꾸이위이기 부부의 집에 갔다가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다가 칼나마야 거리에서 내무서원 야스까에게 체포된다.
닉씨와 연락을 하려고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토오믈라와 쿡크는 에스토니아에 낙하산으로 침투하여 토오믈라의 어머니 리자의 집에서 머물렀다. 쿡크는 그곳에서 토오믈라의 누이 노오르마 헬리기를 포섭하여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무전을 키카쓰 대위가 지휘하는 루낀 대위에게 체포된다.
한편 마지막으로 남은 수지는 딸린의 화물역에서 그의 중학교 동창인 힐다 야르빙그를 찾았다. 그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에른스트라는 약혼자가 있었는데, 수지는 그를 포섭하려고 노력하였고 결국 포섭에 성공했다. 그 이후 에르모와 하베라는 사람이 스웨덴에서 에스토니아로 왔다. 수지는 이들과 활동을 하다가 밀고로 발각된다. 그 밀고의 주인공은 바로 국가 안전기관의 에른스트 보스텔 대위였다. 이로써 수지는 허무하게 체포되고 만다. 수지가 체포된 이후 닉씨마저 1956년 12월에 붙잡히게 된다.
스톡홀름 기멜스타베겐 24호
물굽이로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온다. 거품을 들쓴 하얀 물결이 솨솨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스톡홀름 부두의 화강암 기슭을 차고는 물러난다. 보도의 판석들 우로 갈매기들이 오고 간다. 하늘을 날아돌 적에는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들이건만, 기슭에 내릴 때면 여간 만보기 흉하지 않다. 고요하다. 이따금 지나가는 행인들이 갈매기들에게 빵조각을 던져준다.
그러면 금시로 이 날짐승들은 야단이 나서 싸워 댄다.
부두로 한 사나이가 가고 있다. 그의 기형 교정용 장화가 묵직하니 보도를 스치며 간다. 이 사람이 걸음 발을 재게 놀릴 때면, 그 절름거리는 모양이 한결 더 뚜렷하니 눈에 띄운다. 거먼 외투 깃을 세우고 모자는 눈썹까지 푹 눌러 썼다. 목은 흰 목도리로 뒤쌌다.
조그만 공원에 놓인 긴 걸상들에도 사람은 없었다. 반 남아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바람이 흔들어댄다. 나무 잎새들이 떨어진다. 스톡홀름에는 이미 가을이 왔다.
이 사람은 영화 극장의 광고들과 요리점 스트란드 호텔의 창문에 비치는 그 고혹적인 불빛에도 아무런 주의를 돌리지 아니한다. 그로 말하면 레겐보겐이나 아니면 카페 메트쌀 리가 더 마음에 있었다. 게서 술잔을 놓고 앉으면 그가 배꼽 떨어진 나라에 대한 생각, 딸린에 있는 트레프네롭쓰끄 중학 동창생들에 대한 생각이 버릇처럼 그를 찾아오는 것이다. 그뿐인가 오마카잇쎄(민족주의적 파쇼 단체, 특히 히틀러 도당 강점 하의 에스토니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함)의 전우들이 빨치산에 대한 불의 습격이, 독일 경비 사령부에서의 활동 등이 머리에 떠올랐다. 모든 것은 순풍에 돛을 달은 셈이었다. 독일 열십자 훈장, 존경, 황금, 보장된 사회적 출세는 그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44년에 가서는 스웨덴(스웨덴...편집자 주)으로 도망을 하여야 하였다. 괴로운 돈벌이의 탐색과 브로카의 소용돌이 속에 뛰여들 기도도 있었으나, 아다시피 사라들은 이미 많은 사려를 돌려 돈을 모을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다 차지하였었다.
그 사나이는 스톡홀름을 헤매 돈다. 쉴류쎈에서 그는 전차를 탄다. 20분의 전찻길-그러자 엘리브쇼의 교외다. 기멜스타베겐에서는 가까운 친척들처럼 서로 어슷비슷한, 별 밝고 회칠한 집들 속에, 그것도 바로 24번지에 그 알만한 집이 서 있다. 세 쪽의 창문이 달린 1층 안은 어두웠다. 숙처로 들어가려면 아스팔트로 된 막다른 골목 쪽으로부터 집을 에돌아 가야 하였다. 사나이는 문을 연다. 집으로 오자 등불을 켜고 외투와 모자를 벗었다. 그의 눈길은 모자전에 협동조합 띠를 두른 학생모 우로 떨어졌다. 그가 딸린에서 프라데르니타쓰 에스티카라는 협동조합원이 되였던 때로부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던가!
그리고 스톡홀름에서는 망명인 단체들과 관계를 가지게 되였었는데 이것은 그럭저럭 유리한 사업이였다. 이 일에 대해서는 돈을 지불하여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스웨덴 경찰의 체포가, 그리고 감옥이 있었다. 자유로 거리에 나간다는 것은 오직 스웨덴 밀정을 통해서야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아르까지 왈리진이란 에스토니아 사람은 앗트쓰라는 이름으로 스웨덴 간첩이 되고 말았다. 그의 감독관은 노련한 정탐배이며 스웨덴 특무 대위인 쿨트 안드레아쏜이었다. 퇴역 대위인 쿨트의 아버지는 미래의 간첩들을 상대로 하는 사업을 위하여 자기의 별장을 제공하였다.
쿨트의 여위고 후리후리한 모습을 머릿속에 돌이켜 보는 왈리진은 한 순간, 스웨덴 사람들이 최근에 와서는 자기의 존재를 씻어 버리고 그들 자신이 에스토니아에서 활약하는 앞잡이들과 직접 연계를 유지하게 된 일을 두고 생각하여 본다. 그들이 에스토니아로부터 받은 정보를 그에게 죄다 전달하지 않는 것이 내심 얼마간 불쾌하였다. 그런 가운데 또 스웨덴 사람들 외에 그들보다 지위가 더 높은 주인들이 나타났다. 참으로 이런 인색한 자들과 더불어 일하기보다는 미국 사람들과 일을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였다. 아이적에 왈리진은 뼈에 사무치도록 들은 말이 있었다. 그것은 '착실한 상관에게서 입신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었다.
성글은 머리털에 빗질을 하며 왈리진은 방에 눈길을 던져 본다. 모든 것이 다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는 담벽에 걸린 라뜨비야, 리뜨바 그리고 에스토니아의 지형도들이 있었다. 이 지도들에서는 비행장들이 모두 둥그러미로 표가 되어 있었다. 카드 목록이 들은 금고, 소비에트 각 기관의 인감들과 서식 용지들이 들은 함석 상자들도 있었다. 왈리진은 덤비는 기색도 없이 술잔에 꼬냐끄를 붓는다. 그리고는 단숨에 쭉 들이마신다. 그리고 나서는 오랫동안 담배를 피운다. 방안은 궐련 체스터필드의 연기로 가득 찼다.
서탁 우에는 라디오 부속품들이 되는 대로 널려 있다. 수신기가 놓여 있다. 왈리진은 무전기 곁으로 다가간다. 손끝으로 스위치를 튀긴다. 스톡홀름이 나온다. 그러나 방송 내용은 재미가 없다. 런던으로 스위치를 돌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하고 보면 게서도 그 무슨 무료한 것이 가슴을 답답하게만 한다. 백림(베를린...편집자주)으로? 게서는 아나운서가 민간 기업소에서 새로운 선반기들이 생산된다는 것을 재치 있게 지껄인다. 그러자 이번에는 귀에 익은 러시아 말이 나온다. 모스크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어쩌면 그리도 은은할까!... 왈리진은 한 말도 놓칠세라 애를 쓰며 그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이번에는 딸린이 나온다. 에스토니아 아나운서의 말도 역시 은은히, 그리고 재치 있게 흐른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왈리진의 친척들도 지금 그와 다름없이 이 방송을 듣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는 여기 낯선 사람들 속에 홀로 있는 신세다. 집에는 그의 동생으로 법률가인 애드문드가 있다. 그러나 형제지간들에도 그들은 남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또 한잔 마신다. 딸린에게는 음악이 나온다. 그가 아이적부터 늘 들어온 귀에 익은 음악이다. 합창이 울려 온다. 선율은 결혼식 모습이며 마을 명절날 모습들이 떠오르게 한다. 마치도 누가 그의 팔소매를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듯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어 수신기를 꺼 버린다. 그는 쇠로 만든 침대 곁으로 다가간다. 잠을 자야 할 때다. 조그만 람프가 부드러운 불빛으로 방안을 비친다. 이때 책상 위에 푸르고 검고 흰 부르죠아 에스토니아의 조그만 깃발이 또렷하게 나타난다.
아침이 되자 왈리진은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 하고 서탁 앞에 앉았다. 그 앞에는 무전 발신기, 수신기, 무전 전신 용지, 레시버 같은 교편물들이 놓여 있다. 그의 왼편 손가락에는 푸른 에나멜 바탕에 금사자 세 마리를 아로새긴 반지가 번쩍거린다. 왈리진의 맞은편에는 세 학생이 앉았다.
그들이 1분 동안에 기껏해야 기호 스물밖에는 못 받던 때는 지나가고 이제는 일백 개를 받게 되었다.
"찌-찌-찌, 붕-붕-붕."
하고 벌소리(봉명) 신호 장치가 찌르륵거린다. 상륙까지는 손으로 꼽을 만큼밖에 날짜가 남지 않은 지금 왈리진은 자기에서와 또 스웨덴 교관들인 쑤넬손, 닐리손, 요한손 같은 사람들에게서 이 세 사람이 그동안 배워온 모든 것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눈길은 수지에게 머문다. 이 사람에게는 목 왼편에 기다란 흠집이 있고, 그 목 바른편에도 흠집이 있는데 그것은 조금 작다. 어쩌면 이리도 총알이 묘하게 스쳐 지나갔을까! 이것은 수지가 독일군의 편에 들어 싸우던 때 받은 상처들이다. 43년도에 그는 까렐리야 전선에서 로씨야군을 상대로 싸웠던 것이다. 그 뒤로는 브레슬라우에 있는 병원에 들어갔고, 그리고는 또 다시 독일로, 분란으로 두루 돌았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스톡홀름으로 와서 망명인 수용소에 들어가 있었다. 흔히 있는 내력이다.
왈리진은 물끄러미 수지를 바라다본다. '그리 나쁘지 않은 자를 마찌에젠이 내게로 보내주었군.' 하고 그는 생각한다.
'내가 수지에게 그의 친척들을 이리로 데려오마고 약속한 것은 잘한 일이야. 어디 어떻게 사업을 하나 두고 봐야지. 영리한 놈이야. 그러니 만약 소련 반탐정기관의 손에 떨어지는 경우에라도 용하게 삐여져 나올 것은 물론이렸다.'
왈리진은 궐련을 한 대 또 한 대 연거푸 빤다.
"찌-붕, 찌, 붕, 찌-붕."
하고 벌소리 신호 장치는 찌르륵거린다.
'그럼 이 자는 어떤가?'
하고 왈리진은 수지의 동년배인 월리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뺘르누에게 온 판매원인 이 자는 자포자기에 빠진 난봉 녀석이거든. 소련 것이라면 모두 원수같이 여기는 지가 오래됐어. 그것은 이 자가 독일 군대에 복무하던 43년도부터이다. 세상에서 뭐라고들 해도 게서는 사람의 머리에 무엇을 넣어줄 줄 알거든. 그런데 술이 과하고 계집을 좋아해. 이건 이 자가 함대에 있을 때 얻은 버릇들인 데야. 그 함대에서는 유곽과 항구의 수상한 술집에 하루같이 나타나는 단골로 이 자를 모두 알고 있었다니까. 이 자를 밀정으로 끌어넣은 것은 바로 모험을 좋아하는 그 취미야. 월리는 위험한 것에는 익숙해져서 벌벌 떨거나 하는 일은 없어.'
왈리진은 이번에는 셋째 번으로 요나스 쪽으로 몸뚱이를 내밀었다.
'좀 봐! 이 자는 긴장에서 이마에 땀이 다 났어. 겨우 서른두 살밖에 안 났건만 늙은이인 체 내기를 좋아하거든. 전에 이 자는 구레싸아르에서 체신부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 자에게 종지부와 찌레를 바로 적도록 하기는 힘이 들어. 좀 겁쟁이지! 그러나 누가 아나, 이게 오히려 좋을지. 이 자는 자백하기를 두려워 할테니까. 무서워하면서 할 일은 하겠지. 이 자는 거기, 그 에스토니아에 친척들이 얼마든지 있어. 물론 일은 할 게야.'
"한 번 더 되풀이합시다."
왈리진은 세계 비행기들에 관한 소개가 들어 있는 영문으로 된 책 한 권을 손에 든다.
그는 사진을 몇 장 들어 보인다. 학생들은 비행기 종류의 이름을 부른다. 기멜스타베겐 거리의 그 어느 한 방에서는 번갈아 야크, 라, 뚜, 미그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드디어 바로 그날이 이르렀다.
새벽녘 사람 없는 스톡홀름의 거리로 자동차 두 대가 쏜살같이 달린다. 겉으로 보기에 왈리진은 태연하다. 그는 말끔히 만또의 견장에서 먼지를 털어버린다. 세 사람을 보내는 이 스웨덴 탐정기관의 대표는 덤덤하니 말이 없다. 왈리진은 에스토니아 망명인들의 추천장을 어떻게 이용할 것이며, 믿을만한 사람들의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하여 목소리를 죽여 그 제자들에게 마지막 훈시를 준다. 자동차들은 문을 열어놓은 가게들 옆을 지나, 보도에 넘치는 직장으로 가는 사람들 옆을 지나 책가방을 흔드는 소학교 아이들 옆을 지나 내달린다.
"한 주일가량, 더 놀았으면 좋겠네. 응?"
하고 윌리는 수지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그렇지만, 이건?"
수지는 항용 돈을 셀 때 하듯이 그럴듯하게 손가락을 비벼 보였다.
"그저 돌아만 오세나. 그땐..."
수지는 말끝을 채 못 맺고 뒤를 돌아본다. 요나쓰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한 눈길로 동무들을 바라본다.
방향-오쓰무싸알 섬의 등대
아침이 되자 안개가 걷히였다. 그리 크지 않은 골짜기진 물굽이에서는 큰 발동선 한 척이 벼랑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갑판에서는 흔히 다른 배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깨끗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산화하여 초록빛을 띤 지남침 뚜껑, 더러운 갑판실...
이 발동선의 선장은 알베르트 릴레베르그라고 하는 자인데 그는 에스토니아 말로 곰이라는 뜻인 '카루'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카루가 남보다 먼저 자동차들이 가까워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곧바로 수지에게로 다가가더니,
"이번엔 틀림없이 우리 딸애를 데려 오셔야지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믄요."
"이것 보시오. 그 애를 잘 타일러 주시오. 그 애 보구 내가 아주 잘 지낸다고 일러 주시오."
카루는 이런 말을 하고는 얼른 그 해여진 소맷자락을 속으로 집어넣었다. 선장의 조수인 루빈(그의 별명은 '얀'이었다)은 배에 짐을 싣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옆에는 기관사 까우벨이 무슨 생각에 잠기여 우두커니 서 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다 귀찮았다. 제 나라 에스토니아에서라면 이럴 수야 있을까! 그는 전처럼 히이우마 섬에서 버스를 운전하며 다니고 싶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조용히 살고 싶었다. 하기는 머지않아 아내를 데려다 준다고 여기 사람들이 약속은 하였다. 그때만 되면 그 분란(지금의 핀란드... 편집자 주) 계집인 린드스트렘과 작별할 수 있지 않은가!
갑판 승강구로부터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기관사 조수인 따보또는 떠나가는 세 사람에게 왈리진이 무슨 조그마한 병들을 하나씩 나누어 주는 것을 얼핏 보았다. 선생은 되도록 제자들의 낯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힐끗 윌리에게 눈길을 던졌을 뿐이다. 이때 윌리는 그 조그마한 병을 제루바쉬까 깃속에 꽂아 넣는 것이었다.
왈리진의 손을 쥐며 요나쓰는 그의 낯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몇 번째인지 모르나 이 사람의 귓모양이 참으로 이상한 것을 두고 또 놀랐다. 스웨덴 사람은 손을 흔들었다. 엔진이 돌기 시작하였다. 스웨덴의 바다 기슭은 연기 속에 사라졌다. 발동선은 에스토니아쪽으로 향작을 놓았다. 엔진들은 씩씩거리고, 물결은 뱃전 너머로 한가로이 출렁댔다.
에스토니아의 바다 기슭까지 다해서 여섯 마일밖에 남지 않았을 때에는 이미 날이 어두웠다. 이때 갑자기 멀리로부터 탐조등의 불빛이 환하니 비치였다. 그 차가운 광선은 사정없이 바다를 이리저리 쓸었다. 이 광선을 피하여 발동선은 급히 방향을 돌려 맹렬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하얀 이 바늘 같은 불빛은 발동선에 들어박힐 것만 같았다. 발동선은 하는 수 없이 스웨덴 바다 기슭을 향하여 완전히 돌아서고 말았다.
소비에트 에스토니아의 바다 기슭에 상륙하려던 첫번 시도는 깨지고 말았다. 그러자 또 한 번 발동선은 그곳으로 왔으나 이번에도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기를 몇 번이고 거듭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시월 어느 날 밤, 스웨덴 탐정기관이 가지고 있는 별장에서 쉬고 있던 요나쓰, 월리 그리고 수지는 또다시 배에 짐을 싣기 시작하였다. 배는 스웨덴 기슭을 떠나 에스토니아로 방향을 놓았다.
"돌아올 때에도 이 길을 잡자."
하고 윌리는 맥빠진 생각을 하였다.
"천우신조해서 돌아만 왔으면 좋겠다."
하고 수지는 생각하였다.
"그렇게 떡 먹듯이 돌아올 수 있는 줄 아나."
하고 요나쓰는 제 신세를 생각하여 보았다.
찬바람은 갑판 우에 물보라를 끼얹었다. 윌리는 이 사나운 날씨를 좋아라하고 또다시 바다에 나선 것이다. 다만 항로가 마르세이유나 싱가포르가 아닐 뿐이다.
수지는 뱃간에서 딩굴면서 잠이 든 채 하였다. 아무리 눈을 한 반쯤 감아본다기로 아예 잠이 오지 않을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다는 우둔한 생각에 그는 사로잡혀 있었다. 앞서 항해에서 실패한 때에도 그는 태연하게 스웨덴 바다 기슭으로 돌아가 자동차에 올라타고 거리로 들어간 것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또한 마치 안개 속에 들어간 사람같이 알지 못할 운명을 향하여 떠나가는 것이었다.
요나쓰는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지갑에서 약혼반지 둘을 끄집어 내였다. 반지 하나에는 유하니엘 일랄레라고, 또 하나에는 일랄레라고 각자가 되어있었다. 요나쓰와 약혼한 여자의 이름은 일라 테에야엘이라고 하는데 그는 요나쓰를 무후 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 기슭에서 죽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발동선이 물속에 빠지거나 않으면 좋으련만...
이번 상륙 지점은 케이부 근처로 정해졌다. 만약 그곳에서 실패하는 경우에는 비호텔판루에 상륙하기로 되었다. 방향은 오쓰무싸알 섬의 등대였다. 그러나 선장의 흥분된 신경과 좋지 못한 나침반으로 하여 발동선은 그만 르후쌀루 코숭이로 가 닿았다.
앞에는 알 수 없는 것만이 놓여 있었다. 어두운 기슭에는 무엇이 숨어 있나? 국경 경비대원들이 매복하고 있나? 조명 지뢰인가, 기관총화인가, 또 수색견의 추격인가?
사람에게 있어서 고향 땅이란 그 얼마나 정다운 것인가? 그렇건만 간첩들에게는 안개의 장막 속에 숨은 이 고향 땅, 바다 기슭이란 얼마나 쌀쌀한 것인가!
시월이란 에스토니아의 물가에는 캄캄 어두운 밤이 깃든다. 이끼로 덮인 어마어마하니 큰 수마석들을 소낙비가 후려 때린다. 세찬 폭풍우, 성나 일떠서는 바람.
기슭에서 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발동선은 소음기를 물속에 박고 멎어 있었다. 세 사람은 눈 깜짝할 동안에 고무 보트로 옮겨 타고 기슭을 향하여 노를 젓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뒤로는 보트에 매여 놓은 가느다란 밧줄이 늘어져 있었다. 윌리는 키를 잡고 요나쓰는 노를 젓고 그리고 수지는 배고물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배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물을 걸어서 건넜다. 발밑에는 자갈이 밟혔다.
발동선에서는 밧줄을 헹기여 고무보트를 도로 끌어당겼다. 아무런 것도, 아무런 흔적도 뒤에 남겨서는 안 되었다. 허리춤에서는 찬물이 조용히 출렁거린다. 세 사람은 기슭을 향해 간다. 물은 무릎에 치더니 또 복사뼈에 친다. 소리없이 간다. 다만 들리는 것은 휙휙하는 바람소리와 돌에 부딪쳐 부서지는 요란한 물결 소리뿐이다.
드디어 기슭이다! 앞은 모래강변이었다. 모래 우에는 발자국들이 남을 수 있다. 만약 이때 번개가 번쩍하고 비치였더라면 거기에는 한 폭의 환상적인 그림이 드러났을 것이다. 커다란 흰 목도리를 머리에 쓴 세 사람이 모래강변으로 닁큼닁큼 거인 같은 뛰엄질을 하며 가고 있었다. 고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가벼운 가스로 하여 공중에 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애 나무숲에 다다르자 그들은 겨드랑이 밑으로 지나간 가죽띠를 끌렀다. 그러자 쉬익 쉬-하고 가스공으로부터 공기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고무 주머니를 제각기 호주머니 속에 감추었다.
숲은 바로 바다 기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무 사이에 고기잡이 매상이 들이 놓였고, 그물을 말리우는 울장들이 우뚝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어서어서 하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여름 유치원이 있던 지대는 호젓도 하였다. 세 사람 가운데 그 어느 한 사람의 투박한 장화를 신은 발길이 어느 아이가 잊어버리고 간 장난감을 짓밟아 모래 속에 묻히게 하였다. 어서 숲속으로 들어가야만 하였다.
그들은 길로 나섰다. 그들은 가만가만 발소리를 죽이고 한옆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오는 요나쓰는 연송 발자국들에 DDT를 뿌렸다. 이 약의 지독한 냄새는 민감한 개들의 코를 찔러서 개들은 발자국을 잃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요나쓰는 시시각각으로 윌리와 자리를 바꾼다. 발밑에서 진탕이 질적질적하는 소리를 들으며 요나쓰는 이렇게 생각한다.
'윌리나 수지가 한 일은 간단하지. 딸린으로 가서 왈리진이 말한 사람들을 죽이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가? 말이야 쉽지, 싸알리스테와 연락을 가지라고, 그러나 어떻게 그 사람을 찾는단 말인가? 퍄르누스크 숲과 랴야네스크 숲은 크기도 크다. 거기 그 어느 곳에 그 싸알리스테가 숨어 있을 줄 알고 찾겠는가?'
요나쓰는 나무 그루터기 우에 앉아서 왈리진에게 편지를 쓴다. 주소는 따로 외워 가지고 있다. 편지 사연은 아무래도 좋았다. 요긴한 것은 '요나쓰'라는 서명이다. 모든 일이 순조로이 되어 간다는 것을 왈리진이 알기에는 이것으로 넉넉한 것이다.
"이쪽에서 인사를 드립니다."
하고 요나쓰는 쓴다.
"오랫동안 당신께서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도 분명 제게 대한 일을 모르실 것입니다. 저는 몸 성히 잘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의 살림이란 전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제 아는 이들한테 다들 안부 전하여 주십시오."
그는 잠깐동안 무엇을 생각하더니 요나쓰라고 서명을 한다. 봉투를 봉하고 나서 그 위에 '스웨덴 헤게네쓰 트리아닐리가탄 거리, 6, 아르니유르겐손'이라고 쓴다. 봉함한 봉투를 그는 수지에게 건넨다.
무전기와 장비의 일부분을 땅에 파묻고는 앞으로 만날 것을 같이 의논하고 나서 세 사람은 서로 헤어졌다. 윌리와 수지는 딸린으로 갔다. 요나쓰는 남쪽을 향하여 갔다.
'글쎄, 어떻게 그를 찾나. 그 싸알리스테를?‘
윌레르 대위의 계획
회의는 오후 4시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쎄뜨로브 대좌네 사무실에서는 전등을 켜야 하였다. 벌써 몇 날 몇 밤을 끊임없이 비가 내려서 딸린의 좁다란 거리들은 어두컴컴하였다. 찻잔의 차를 숟가락으로 저으면서 대좌는 멀리 초록빛 탁자 한끝에 사복을 입고 앉아 있는 한 파리한 사람에게 눈길을 멈추고 있었다.
"그럼 저, 윌레르 대위, 시작하오. 보고하오."
사복을 입은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군대에 있는 사람들이 항용 군복 웃저고리를 잡아당기듯이 사복 웃옷의 뒷자락을 잡아당겼다. 오쎄뜨로브는 분명히 대위가 절대로 이 버릇을 버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윌레르는 서류철을 펴더니 찬찬히 이렇게 시작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얼마 전에 정체가 불명한 사람들의 한패가 전후하여 두 번 살인 행위를 감행하였습니다. 구역 소비에트 2대 의원 윌레말 레인푸우와 꼴호즈 부위원장 알베르트 린데만이 살해를 당한 것입니다. 첫째 경우나 둘째 경우나 마찬가지로 흉한들은 그 사람들을 죽이고 증명서를 모조리 약취하였습니다. 거의 그 시기에, 그리고 그 구역에서 얼마 멀지 않은 어떤 구분대의 한 무전사는 귀에 설은 타신 기호를 가진 어떤 무전사의 송신을 청취하였습니다. 이 군대의 무전사는 인접 구분대에 무전사가 새로 임명되여 온 것으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추측은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일을 지휘부에 보고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전 감시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자 얼마 지나 우리는 랴야네쓰크 수림 지구에서 무전대의 방향을 측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속 시간이 극히 짧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계속된 무전 감시는 아무런 성과도 없었습니다. 그 후에 무전대는 활동을 재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윌레르는 보고서를 한 장 넘기더니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세 주일 전에 처녀 우편 통신원인 씰비 람믹은 큐티 마을에 사는 산림 감시원 얀센에게 신문을 배달하러 가던 길에 어떤 사람 하나가 얀센네 집에서 도망쳐 나오더니 잣나무 숲속으로 쑥 들어가 숨는 것을 보았더랍니다. 그 처녀에게는 이것이 수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더욱이 처녀는 얀센이 '오는 길에서 어떤 사람 하나를 보지 못하였느냐?'고 몇 번이나 묻는 데서 더욱 수상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날 즉시 씰비 람믹은 이런 의심스럽게 생각되던 일을 국가 안전기관에 보고하였습니다. 우리는 얀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얀센에 관한 첫 정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며 윌리는 다른 서류철을 제 앞으로 잡아당겼다.
"알베르트 얀센은 몇 달 전에 히이우마 섬으로부터 와서 홀로 사는 한 여인에게서 농가를 샀습니다. 흥정도 없이 달라는 대로, 상당히 거액에 달하는 금액을 지불하였습니다. 얀센과 같이 늙은 어머니가 왔습니다. 히이우마 섬에서 그는 산림 감시원 노릇을 하였는데, 그는 이곳에 와서도 굳이 애를 써서 앞서와 같은 직업을 얻었습니다. 그것도 다른 데는 아니 되고, 꼭 이 지구에서 산림 감시원으로 일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얀센은 마을 소비조합 상점에서 두 사람의 수요량보다 분명히 많은 양의 식료품을 사들였습니다. 이때 그는 그런 양의 식료품이 방역상 관계로 그 지방에서 벌목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판매원에게 말하였습니다. 조사하여 본 결과 이 지방에서는 벌목을 한 일이 전혀 없었고, 또 현재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 오래지 않아서 씰비 람믹을 만난 얀센은 라디오의 축전지를 수리할만한 전기 기술자가 전신국에 없는가고 물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산림 감시원은 그 부탁을 설명하면서 하는 말이 며칠 전에 이 지방에서 라디오를 한 대 구입하였는데 거기 달린 축전지가 고장이 났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상점에는 축전지가 하나도 없소.' 하고 그는 그때 말하였습니다. 그 처녀에게는 이 부탁이 또한 수상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한 번도 얀센이 이런 것을 사들인 데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었고, 또 안테나니 라디오니 하는 것들을 그들의 집에서 한 번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처녀는 얀센에게 알아보자고 약속을 하고는 얀센과의 이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조사해 본 결과 구역 소재지 상점들이 최근 두 주일 동안에 라디오를 네 대 팔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네 대는 벌써 체신부에 등록이 되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소유한 사람들 가운데는 얀센이란 성명과 또 그의 주소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탁에 의해서 씰비 람믹은 산림 감시원을 만나서 자기와 아는 전기 기술자 한 사람이 축전지를 고쳐 주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얀센이 이 처녀에게 내어준 축전지는 미국제라는 것이 확증되었습니다. 상표는 칼로 말끔히 지워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축전지를 돌려주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이틀 후에 씰비는 깨진 다른 축전지를 얀센에게 가져다주면서 그만 도중에서 자전거 채 넘어지면서 돌에 부딪혀 축전지가 깨졌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처녀의 말에 의하면 산림 감시원은 얼굴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지더니 나중에는 이 처녀에게 더러운 욕설을 퍼붓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윌레르는 이것으로 보고를 끝내고 두 서류철을 접었다.
"대위에게 무슨 질문이 있습니까?"
하고 차가 다 식은 찻잔을 한옆으로 밀어 놓으며 오쎄뜨로브는 물었다.
윌레르는 대답할 준비를 하며 또다시 군복 아닌 웃저고리를 잡아당겼다.
"대위 동무, 라야네스끄 산림 지구에서 활동하는 간첩들이 당장은 무전 연락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알아차린 그 두 번째 무전 발송이 있은 뒤로는 여하간 무전 결속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축전지가 못 쓰게 된 것입니다. 얀센은 분명 수리를 확보하여야 할 것이었으나 실패를 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침묵의 원인으로서는 다른 또 한 가지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밀정이 딴 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다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겨울을 앞두고 설마 밀정이 근거지를 이동하였겠습니까? 그 밖에도 얀센은 제 하는 일을 벌이려고 시도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또 그가 사들인 식료품의 양도 줄어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신의 의견 같아서는 얀센이 간첩의 유일한 방조자입니까?"
"그렇지요. 그렇지 않다면 무엇하러 그 멀고 먼 히이우마 섬으로부터 이 지방으로 이주를 했겠습니까? 간첩 자신은 아마 레인푸우와 린데만 두 동지를 살해한 그 악당들과 한패일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 괴수인지도 모릅니다. 법의학상 감정은 이 살해 행위에 세 사람 내지 네 사람으로 되는 한 패가 가담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당신은 이 두 살인 사건을 간첩의 행위와 결부시키고 있습니까?"
"두 경우,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살인자들은 자기네의 희생자들에게서 많은 액수의 돈을 얻으리라고 타산할 수는 없었습니다. 살해당한 사람들의 소지품은 모두 그대로 있습니다. 심지어 시계 같은 것들까지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증명서란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아주 깡그리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밖에도 살해당한 사람들의 사회적 처지, 그리고 주민 사이에서 그들이 가진 권위 - 이와 같은 것들을 미루어 생각할 때, 이 살인 행위는 정치적 동기에서 수행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우에 또 이미 내가 보고에서 말씀드린 대로 간첩과 살인자들의 행동 범위가 거의 일치됩니다. 말하자면 간첩은 그가 흡수한 악당의 두목일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그 악당의 일개 성원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은신 준동하고 있는 지대의 지형지물 형편은 어떠합니까?"
"면적이 수백 평방미터나 되는 밀림지대인데 그 한가운데는 큰 못이 있습니다. 거기는 사냥꾼들까지도 별로 드나들지 않는 곳입니다."
"그 뒤로도 얀센네 농가를 감시했을 텐데 그 결과 무엇을 알았습니까?"
"감시한다는 것이 퍽 어려웠습니다. 그 농가라는 것이 마을에서 뚝 떨어져 있었으니까요. 산림 감시원 얀센이 숲속에서 산보할 때 그의 의심을 받지 않고, 그자를 추적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질문은 끝났다. 대좌는 의견들을 말해 줄 것을 바랐다.
"끼비 동무, 동무로부터 시작합시다."
하며 대좌는 젊고, 자세 바른 중위 한 사람을 돌아보았다.
"제 생각 같아서는 이렇습니다."
하고 중위는 말을 시작하였다.
"윌레르 대위 동지가 수집한 자료들로 해서 정황이 선명해집니다. 그러니까 지체 말고 산림 감시원 얀센을 체포하는 동시에 신속히 온 숲을 훑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간첩과 그 도당은 미처 숨을 짬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중위는 자리에 앉았다.
"제가 한마디 말을 하겠습니다."
하고 이번에는 여위고 키가 후리후리하고 어깨가 버그러진 헤아나스테 소좌가 말을 받았다.
"현재 조건하에서는 군사 행동이 절대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첫째로 숲속에서 간첩과 그 도당이 숨어 있는 곳을 들추어낸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둘째로 만약 우리가 간첩을 수색해 낸다고 하면 그때엔 전투가 벌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분명 밀정으로 하여금 우리의 가장 큰 사업상 이익을 제공해 주는 서류들을 소멸시키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그가 자살해 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에는 이 회의에 참가한 또 다른 한 사람의 발언이 있었는데, 그는 윌레르의 바로 옆에 앉은 사람이었다.
"저는 두 가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간첩이 악당에 끼여 행동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악당과 간첩이 각각 별개로 행동을 하고 있거나 한다는 그것입니다. 제가 알건대 숲속에서 얀센의 뒤를 밟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얀센을 체포한다는 것은 간첩을 위협하여 쫓아 버리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이 밖에 또 우리는 그자의 범죄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혐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네 사람들을 사냥꾼 모양으로 차리게 한 뒤 전체 산림 지대를 몇 구역으로 나누어 가지고, 그 구역들에 우리 동지들을 쌍쌍이 파견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의견을 내놓고 싶습니다. 며칠 뒤면 정황은 더욱 명료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과업의 첫 부분인 정찰적 과업을 해결한다고 합시다."
하고 끼비 중위는 대꾸를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사업인 체포는 그대로 해결을 못 본 채 남을 것입니다. 제게는 맨 시초에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 축전지를 우리가 빼앗지 않았어야 할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간첩에게 무전 교신을 시켜야 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했더라면 우리는 무전대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아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가능성을 잃어버린 바에는 우리는 결정적인 작전 행동으로 나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죽여버려도 좋다고 생각됩니다."
윌레르가 발언권을 구하였다.
"축전지에 대한 끼비 동지의 의견은 다만 부분적으로 정당합니다. 간첩에게 교신할 가능성을 줌으로써 우리가 간첩의 거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체포에 대한 문제는 그것으로써도 역시 해결을 보지는 못합니다. 그밖에 또 생각할 것은 그렇게 했다면 간첩이 그 동안 몇 차례 본부와 연락을 가졌을 것이고, 아마 중요한 정보를 전달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라고 용허할 수는 없었습니다. 군사 행동에 관해서는 헤이나스테 소좌 동지와 동감입니다. 즉, 당면한 조건하에서 그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사냥꾼의 방법을 써서 간첩을 수색하는 것도 또한 소득이 적을 것입니다. 그것은 간첩의 의심을 자아낼 수 있어서 그들이 놀라 달아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투로 끝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간첩이 악당 속에 끼어있는 경우라면 그때엔 둘씩 갈라진 우리네 사냥꾼들이 불리한 입장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의견이오?"
하고 오쎄뜨로브가 물었다.
"저는 아래와 같은 안을 내놓겠습니다."
반 시간이 지난 뒤에 오쎄뜨로브는 토론을 총화짓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런 말을 하였다.
"그러면 나의 수정을 거친 윌레르 대위의 안이 채택되었습니다. 대위 동무, 그럼 이 수사대책의 조직과 수행에 대한 책임을 동무가 집니다. 동무를 방조해 줄 인원은 동무 자신이 선발하시오, 내가 권고하고 싶은 것은..."
하고 대좌의 눈앞에는 꽤 많은 한 인물이 어른거렸다.
"끼비 중위도 뽑으시오."
싸알리스테는 방조자들을 구한다
얀센은 천천히 걸어갔다. 걸음을 내디디기 위해서 그는 한 다리로 몸의 균형을 잡아가며 다른 한 다리로는 발 짚을 자리를 단단히 보아야만 하였다. 목 높은 고무장화는 계속 진창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갔다. 때때로 얀센은 한 손으로 딱딱한 젓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번갈아 장화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장화에서 더러운 진창물을 주루루 쏟곤 하였다. 그는 되도록 애써 나무 밑으로 가면서 낮은 나뭇가지들을 땅에까지 닿도록 구부려 놓고 그 우에 발을 놓았다. 나무 웃가지들로부터는 물이 시냇물처럼 떨어져서 얀센의 옷깃으로 흘러 들어갔다. 얀센은 자기의 등골로 산뜻하고 매끄러운 뱀들이 기여 지나가는 듯한 감촉을 면할 수가 없었다.
비와 숲과 싸알리스테와 그의 동료들과 그리고 겸하여 자기 자신을 저주해가며 얀센은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에로 맥없이 다리를 질질 끌고 갔다. 버릇은 할 수가 없어 그는 때때로 발길을 멈추고 서서 유심히 사방을 둘러보곤 하였다. 하긴 이 지옥 같은 곳에, 그나마 이 같은 못된 날씨에 목숨을 가진 것 치고 몰래 기어들 리가 없을 것은 뻔한 일이었지만, 실상 그는 아주 쓸데없이 비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글쎄 세상에 저 혼자밖에 모르는 어느 한 장소로 남몰래 가고 있는 사람에게야 비에서 더 좋은 무엇을 또 바랄 수 있으랴. 그런데 그는 꼭 오늘 안으로 이 고장을 몰래 빠져나가야만 하였다. 얀센에게는 싸알리스테에게 전할 지극히 중요한 소식이 있었다. 이 소식은 더할 나위 없이 싸알리스테의 소원을 풀어 줄 것이었다.
지극히 자세한 사정에 이르기까지 얀센은 그날 아침 일을 잊지 않고 있다. 그날 아침 늘 하는 대로 순회를 하던 얀센은 농가에서 두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왔을 때, 그는 입에 자갈이 물려 꽁꽁 묶인 채 진창에 뒹굴고 있는 사람 하나와 마주쳤다. 묶이운 사람은 나무 밑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었다. 얀센은 조심조심 그 사람의 입에서 자갈을 꺼냈다. 그러면서도 묶이운 것을 풀어 놓지는 않고 이렇게 된 곡절을 캐묻기 시작하였다. 그 사람은 여간해서 놀라지 않은지라. 이 산림 감시원의 물음에 조리 없는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얀센은 그 사람이 운전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전날 저녁에 이 운전수는 뽀베다를 타고 구역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도중에서 혼자 길을 가던 사람 하나가 손을 들어 그를 멈추었다. 바로 이때 나무들 뒤에서 사람 셋이 더 뛰어나오더니 이 운전수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그를 묶어 놓고는 입에 자갈을 물리워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이었다.
얀센은 놀란 이 운전수를 풀어 놓았다. 운전수는 비틀비틀 구역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그 이튿날 아침 마을 상점의 판매원은 이곳저곳 구역의 소식을 얀센의 어머니에게 전하는 가운데 뽀베다를 탄 흉한 몇 놈이 지난밤 구역에 있는 식료품 상점을 털어 갔다는 소식도 말하였다. 자동차는 나중에 찾았으나 강도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얀센은 그 뒤에 싸알리스테를 만나서 이런 소식들을 죄다 이야기하였다. 이것은 강도들이 겨울을 나기 위한 식료품 저축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얀센은 이 악당들이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라는 자기의 추측까지도 다 말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 숲속의 인적이 닿지 않는 구석까지도 다 꿰차고 있는 터였다. 싸알리스테는 유의해서 다 듣고 나서 잠간 무엇을 생각하더니 얀센더러 그 악당을 찾아내라고 분부를 하였다. 얀센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면서 그는 천천히 중간중간 말을 끊어 가며 이런 말을 하였다.
"이번 일마저 망쳐 놓는 날이면 자네 대가리를 따바리 총탁으로 내려 찧을 줄 알게!"
하고 이번 일은 축전지보다 중하다는 것을 알렸다.
축전지가 말썽이 되어 미친 듯이 노한 싸알리스테가 그 남은 축전지 조각으로 산림 감시원 얀센의 대가리를 짓 조져주고, 그리고 나서 하마터면 이 자를 쏘아 죽일 뻔하고 난 뒤로 싸알리스테 자신이나 얀센이나 자기들의 죄를 하느님에게서 용서받을 기회를 찾아왔다. 싸알리스테는 자기 자신과 또 자기의 동료 셋에게 공산당원들이나 소비에트 일꾼들을 더는 계속하여 쏘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렇게 하다가는 주되는 과업이 위협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새 사람들을 흡수하여야만 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범인들 가운데서 흡수하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중대한 일에 대처하기 위하여 몇 사람을 '끈 매여 기르고' 싶었다.
두목의 이 위협을 회상할 때면 얀센은 지금도 몸서리를 쳤다. 그는 자기의 경험으로 미루어, 전날 히이우마 섬에 있던 군사 파쇼 단체 오마카잇쎄 대대의 대대장이었던 리할데 싸알리스테 중위는 허수로운 말을 하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줄을 잘 알고 있었다. 몇 달 전 이 중위가 바람처럼 또다시 히이우마 섬에 나타나서 얀센에서 라야네스크 숲으로 이주해 갈 것을 명령하던 그 날과 그 시각은 그로서는 저주할 만한 것이었다. 얀센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이 명령을 모면하여 보려고 하였으나 싸알리스테는 이렇게 협박을 한 것이었다. 산림 감시원 얀센이, 히틀러 도배의 점령 때에 얼마나 그 히틀러 도배와 협력을 하였으며 또 그들에게 사람을 몇 명이나 밀고하였는지, 이런 사실이 모두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안전기관에 알려질 것이라고, 얀센은 다시 반대할 마음을 먹지 못하였다.
숲속에 나타난 일이 있는 그 악당을 찾기 위하여 얀센은, 그에게 이 악당의 피신처가 있으리라고 추측되는 지점들을 뒤타기 시작하였다. 그는 강도들과 연계 있는 사람을 찾아내기 위하여서는 어떠한 위험에 부닥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숲속의 형제들'은 그들의 거처를 들추어낸 사람들을 살려서 돌려보내지는 않는 법이다. 그러나 얀센에서는 이것보다도 싸알리스테의 협박이 더 무서웠다.
한 번은 늘 하는 대로의 순회에 나섰을 때인데 나무들 뒤로부터 얀센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였다. 그러자 그다음 순간 그는 각오를 하고 손을 위로 쳐들었다. 더럽고 수염이 자랄 대로 자란, 그리고 너슬너슬 해진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숲속 나무가 헌칠하니 빈 곳으로 쑥 나왔다. 그들은 저마다 손에 권총을 한 자루씩 쥐였고, 가슴에는 따발총들을 걸어 메였다.
'독일사람들이로군.' 하고 곧 얀센은 마음으로 정해 버렸다. 그들은 얀센의 눈을 가리더니 어디로인지 오랫동안 끌고 가는 것이었다. 눈 가렸던 것을 벗겨 주었을 때, 얀센은 자기를 인도하여 온 사람들 외에 사람 셋이 또 있는 것을 보았다. 이들도 역시 되는 대로들 차렸고, 가진 무기들도 또한 오가잡탕이였다. 그런데 그중에서 키가 중키나 되고 캄캄한 밤색 머리를 다 깎은 사람 하나가 얀센과 이야기를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렢쓰'라고 불렀다.
렢쓰는 유심히 얀센을 바라보면서 한동안 잠자코 말이 없더니 드디어 입을 열어 얀센더러 그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 때문에 이런 곳을 헤매고 있느냐고 물었다.
산림 감시원 얀센은 너무도 떨려서 이빨과 이빨이 맞닿지를 않았다. 그는 더듬거리면서 그가 산림 감시원 노릇을 한다는 것과 오랫동안 이 구역으로 와보지 못한 까닭에 이리로 오게 된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다. 렢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포로를 헛간으로 데려가라는 시늉을 하였다.
숲속 패당은 얀센을 오랫동안 지하실에 붙들어 두었다. 산림 감시원이 이 사람들을 배반하지 않겠노라고 여러 번 맹세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맹세들은 '숲속의 형제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였다. 나중에 가서야 렢쓰는 얀센이 이 도당 가운데 한 사람을 제집에까지 데리고 가는 데 찬동하였다. 제집에 돌아온 이 산림 감시원은 1944년부터 보존하여 내려오는 정성 들여 셀로판에 싼 신분증명서 한 장을 땅에서 파내었다. 신분증명서는 알베르트 얀센이 오마카잇쎄 단체의 단원이라는 것과 군사 파쑈단체 대대의 하사관으로 일을 본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증명서는 과연 효력을 발휘하였다. 렢쓰는 얀센에게서 때때로 식료품과 모든 생활필수품들을 공급해 준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놓아 주었다.
얀센은 자기가 당한 모든 일을 싸알리스테에게 보고하였다. 싸알리스테는 우선 그 부하를 칭찬하고 나서 다음번에 렢쓰와 만나거든 조심하여 극히 모호하게 '이 숲속에 그들과 만났으면 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는 것을 비치여 보라고 명령을 하였다. 이때 싸알리스테는 렢쓰와 이야기를 할 때에 이 작자가 당치 않은 것을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 퍽도 능란하게 굴어야 된다는 것을 얀센에게 오랫동안 일러 주었다.
'술 속의 형제들'의 두목은 얀센이 비치는 말을 처음 음울한 침묵으로써 대답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교섭과 상호검토가 있은 뒤에 렢쓰는 드디어 만나는 데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바로 시방 이 산림 감시원은 궂은 비와 늪판의 진창길을 저주하면서 회담의 결과를 싸알리스테에게 고하려고 급한 길을 가는 판이다.
진창판도 끝이 났다. 얀센은 굳은 땅으로 나섰다. 광활한 산림 지대에 놓인 어마어마하니 큰 못 속에 직경이 한 킬로미터 반이나 되는 이 조그마한 색다른 섬이 있다는 것은 별로 아는 사람이 없다. 얀센은 마지막으로 장화를 벗어 그 속에 들은 물을 쏟고 나서는 웃옷 호주머니에서 고동색 액체가 들은 조그마한 병을 하나 끄집어내는 것이었다(이것은 테페핀유와 석유와의 혼합물이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구두 뒤축에 발랐다. 수색견이 올 경우를 생각하여 하는 이러한 경계를 얀센은 여기 이런 넓은 숲속 한복판에서는 아주 쓸데없는 일로 여겼다. 그러나 그렇게 하라는 것이 싸알리스테의 명령이었다. 이 병을 감추고 난 얀센은 이번에는 아랫바지 뒷호주머니에서 납작한 금속 수통을 끄집어내더니 그 마개를 빙빙 돌려 뽑았다. 그리고는 급히 몇 모금 들이켰다. 얼어붙은 몸뚱이는 마치 혀끝 같은 불길로 찔리는 듯 갑자기 훈훈해졌다.
"하늘이 물크러 빠지려구 이런 날씨람."
하고 얀센은 웅얼거렸다. 그리고는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고는 또 앞으로 나아갔다. 싸알리스테가 있는 땅굴까지는 한 5백미터가 남았다. 여기서부터 이 얀센은 허리를 구부리고 매 걸음, 풀을 짓밟지 않으려고 풀들을 하나하나 헤쳐 가며 거의 네발로 기다시피 하고 나아갔다. 이렇게 불편한 조건에서 몸을 움직이다 보니 아직도 30분 더 걸어야 했다. 외따로 서 있는 커다란 물오리나무 옆에서 얀센은 허리를 펴고 다시 한번 사방을 자세히 둘러 보았다.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 어깨 위에 그 무슨 누런 것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얀센은 소스라치며 나지막한 소리로 욕을 하였다. 그것은 커다란 물오리나무에서 떨어지려는 잎새였다.
'잎새들이 떨어진다. 올해엔 가을이 이르구나'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산림 감시원 얀센은 입가에 손을 포개어 댔다. 그러자 숲속으로는 부엉이 우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이 소리에 맞받아 바로 옆에서 까마귀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것은 그 땅굴 둘레에 '공기가 맑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얀센은 물오리나무께까지 다가갔다. 그리고는 게서 나직이 몸을 구부려, 마들거리는 키 높은 나무들 사이로, 팽팽 헹겨진 겨우 보일 듯 말 듯한 초록빛 실 밑을 기여 빠져나갔다. 한 50미터쯤 더 지나간 그는 이번에는 총총히 들어선 젓나무 숲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그 젓나무들 속에서 틀림없이 한 나무를 골라잡더니 제 켠으로 잡아당겼다. 나무는 한옆으로 눕고 그 밑등 쪽으로 네모 방정한 구멍이 하나 떼꾼 뚫어졌다. 그는 한숨을 쉬며 육중한 몸집을 이 구멍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휘청휘청하는 봇나무 사다리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숲속에서 만나다
사다리를 따라 아래로 내려온 얀센은 제 뒤로 틀림없이 그 구멍을 닫았다. 그는 얼굴에 떨어진 젖은 흙 부스러기들을 털어버리고는 어둠에 익어지려고 애를 쓰며 눈을 껌벅거렸다. 사람의 땀, 습기, 그리고 음식 같은 데서 나는 이미 습관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냄새는 이 움집에 사는 사람들의 몸에 꽉 배여 버려서 그들은 감히 사람들 속에 나타날 염을 내지 못하였다. 다만 이따금 그것도 여간만 경계를 하지 않으면서 번차례로 얀센네 농가로 가서 그 집 목욕간에서 몸을 씻을 뿐이었다.
기름이 가득 찬, 이 빠진 접시에서 너훌너훌 춤을 추는 심짓불의 약한 빛에 의하여 드디어 얀센은 누가 평상 우에 누덕누덕 해진 모포를 머리채 들쓰고 누워 있는 것과 그밖에 또 두 사람이 그 옆에 앉아서 주패를 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얀센은 기침을 하였다. 그러나 누웠던 사람이 평상에 일어나 앉으며 단 한 마디,
"그래."
하는 말을 입밖에 내는 것이었다.
"싸알리스테씨, 그 사람이 만나도 좋다고 합니다."
하고 얀센은 숨을 후 내쉬었다.
얀센은 또 렢쓰가 자기 쪽 조건을 내놓더라고 하면서 그것은 아무도 인도하는 사람을 데리고 오지 말자는 것과 무기는 오직 권총에 한하자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분명 신중하구 노련해."
하며 싸알리스테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그럼 어때, 그런 작자하고 오히려 일하기가 더 쉽지."
이틀을 지난날 토굴에서 나온 싸알리스테는 약조한 대로 바로 저녁 여섯 시에 사방 빽빽한 젓나무 숲으로 둘리운 조그만 숲속 공지를 향해 갔다. 바로 같은 시각에 숲속 공지 맞은쪽으로부터 키가 중키나 되고 몸집은 여윈 편인데 분명 이발사의 손으로 깎았다고는 할 수 없는 까만 밤빛 머리를 한 사나이 하나가 오고 있었다. 그는 고동색 털 스웨터를 입었는데 그것은 여기저기 흰 실이나 꺼먼 실로 마구 더덕더덕 볼을 대여 기운 것이었고, 그 위에 투박한 범포지로 만든 짧은 웃저고리를 또 입고 있었다. 장화 속으로 틀어박은 아랫바지도 역시 이 범포지로 만든 것이었다. 웃저고리 아래로 왼편 옆구리에는 권총갑이 알만하게 드러났다. 렢쓰는 의심하지 않고 싸알리스테를 향하여 마주 왔다. 그러나 그와 한 너덧 발걸음 사이를 남기고 발길을 멈추어 우뚝 써버렸다. '신중하거든' 하고 싸알리스테는 또다시 감탄하는 마음으로 생각하였다.
몇 분 동안 두 사람은 서로서로 눈길로 무엇을 유심히 알아내려고 하며 덤덤히 말이 없었다. 그런 뒤에 싸알리스테는 미리 얀센을 통하여 정해 놓은 암호를 말하였다.
"요기서 멧돼지 발자국 못 보았소?"
렢쓰는 천천히 대꾸하였다.
"멧돼지들은 다들 숨고 산양들만 남았소."
이런 말을 주고받고 나자 그들은 서로 같이 가까이 왔다. 그리고는 땅 위에 쓰러진 나무의 한 반쯤 썩은 줄기에 걸터앉았다.
싸알리스테는 호주머니에서 궐련 두 대를 끄집어 내였다. 그러자 렢쓰는 가죽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궐련 안 피시오."
하고 싸알리스테가 물었다.
"글세 저, 당신은 숲에 들어온 게 오늘이 처음이요?"
하고 렢쓰가 트집을 잡았다.
'확실하게 믿지를 않는군' 하고 싸알리스테는 속으로 웃었다.
이야기는 두 시간 남아 계속되었다. 이 동안에 싸알리스테는 새로 안 사람에게 자기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감옥에 갇혔다가 게서 도망해 나온 사람으로 지금엔 숲속에서 믿을 만한 사람 셋을 데리고 숨어 있다는 말도 또 먹을 것은 없고 겨울은 멀지 않아 닥쳐올 것이므로 살아나가기가 차츰 더 어려워진다는 말도 다 하였다. 네 사람, 이것은 퍽 작은 힘이었다. 그러므로 이 숲속에 렢쓰가 그 부하들을 데리고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얀센을 통하여 알게 된 싸알리스테 도당은 그들과 사귀기로 결정을 하였던 것이다.
싸알리스테는 자기의 말동무 렢쓰로부터 렢쓰 그 자신과 또 그 일당이 전과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구역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그곳에 새로 군대가 오게 된 탓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는 사연도 알았다.
이런 이야기들이 있은 뒤로 싸알리스테는 세심한 주의 밑에 이야기의 둘째 부분으로 넘어갔다. 즉, 그는 두 패당 쌍방을 위해서 합동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겨울을 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는 것도 말하였다. 간첩은 이때 저쪽에서 온 사람 하나를 잘 안다고 하면서 이 '저쪽'이라는 말과 함께 그는 손으로 서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인제 곧 미국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때가 되면 붉은 군대 후방에 일정한 병력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과 미국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감사를 표시하리라는 말도 하였다. 그러나 싸알리스테는 자기가 스웨덴에서 왔다는 데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렢쓰는 한 번도 남의 말을 가로채거나 무엇을 물어보는 일이 없이 주의 깊이 귀를 기울여 들을 뿐으로 그저 이따금씩 그 말이 확실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들의 회담은 겨울 전으로 두 편이 합동할 것과 그러기 위하여 새로운 움집을 만들자고 한데서 그치고 말았다(싸알리스테는 자기의 거처에 대해서는 종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 소굴은 네 사람이 맡아서 지어야 하는데 한쪽에서 두 사람씩 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일에는 한두 주일쯤 걸릴 것으로 타산하였는데 말하자면 9월 그믐과 10월 초순에 걸치는 것으로 되었다. 이 기간에는 그 어떤 활동도 하지 않기로 서로 말이 맞았다.
작별하면서 렢쓰는 싸알리스테에게 궐련을 청했고 싸알리스테는 렢쓰의 잎담배로 마라초를 한 대 말았다. 서로 신뢰가 된 것이었다.
10월이 되었다. 움집이 다 되었다. 네 사람이 열닷새 동안에 그것을 만들었다. 그들은 꼭 밤에만 공사를 하면서 멀리서 저절로 넘어진 나무들을 가져 왔고, 그런가 하면 파낸 흙을 자루에 넣어 몇 킬로씩 끌고 가서는 무성한 풀로 덮인 그리 크지 않은 못에 쏟아 버리곤 하였다. 이 두 주일 동안에 공사에 나온 사람은 이미 약속된 대로 누구나 한 번씩 자기네 지휘자한테로 가서 진행 정형을 보고하고, 자기 대신에 새 사람을 보내곤 했다.
싸알리스테는 자기네 땅 구멍에 무료하니 앉아 지내면서 합동한 도당의 앞으로의 행동 계획을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의 기분은 참 좋았다. 그는 가까운 장래에 본부에 사업보고를 하기 위하여 이곳을 떠나 스웨덴으로 갈 심산이였다. 사업은 그만하면 잘 되여 갔다. 첫째로 그 둘을 즉, 꼴호즈 지도자와 소비에트 대의원을 요절낸 일이였다. 이 일은 힘을 안들였다고는 할 수 없다. 오랫동안 그들은 사람 사냥을 한 것이었다. 그 대신에 일은 깨끗이 해치운 것이었다. 미상불 일이 너무 과도했을지도 모른다. 즉, 코와 귀를 어이고 눈알을 뽑고 하였으니까.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증명서들은 죄다 여기 이 땅굴 안에 있다. 하기는 그것들에 피가 묻어 좀 더럽혀졌으나 스웨덴 사람들에게 보고하는데는 이렇게 된 것이 좋기까지 하다. 공산주의자들이 이 세상에서 적어졌다. 둘째로, 몇 번 약탈행동이 있었고, 셋째로, 군사적 성격을 띤 정보들이 있다. 그리고 다섯 사람 한 패당을 흡수하였다. 사실 일은 괜찮게 되었다! 여간해서는 괜찮은 게 아니다.
평상 위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며 싸알리스테는 조그마한 금속으로 된 거울을 하나 끄집어내었다.
"자, 그래 싸알리스테 중위."
하고 그는 거울에 비친 자기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변함없이 스웨덴 사람들로부터도, 미국 사람들로부터서도 상당한 돈을 받고 있구려. 아닌 게 아니라 당신의 상관인 아르까지 왈리진은 아주 재치있게 두 주인을 섬기고 있거든요. 미국 사람들의 지갑이 두껍기야 더 두껍지요. 하- 하- 한데 친구, 당신은 왈리진네 방에서 쿨트 안드레아쏜 대위와 그 사복 입은 미국 사람이 당신에게 주던 그 교훈을 잊지나 않았소? 이야기는 자초지종 미국 사람이 맡아 놓고 하고 스웨덴 사람은 그저 맞장구만 쳤지요. 자, 그럼 결론을 지읍시다. 멎엇!"
하고 싸알리스테는 손가락으로 거울을 위협하였다.
"중위 나리, 당신은 아직 어린 사람이요. 결론을 짓는다는 것은 당신에게 위험한 일이요. 당신이 할 일은, 돈을 받는 일이요. 그게 크론이라도 좋고 그게 달러라도 좋지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요."
그는 평상 위에서 몸에 힘을 주며 그 가시 같은 턱밑 수염을 손으로 쓸어본다.
그때에 가선 이 빳빳한 수염도 깎아 버리고 옷도 갈아입자, 그리고 어떻게 되면(귀신이 장난을 아니 치면 좋으련만!) 이 더러운 벌이도 집어치우게 될지도 몰라. 그리고 나는 아메리카로 훌쩍 들구 빼서 게서 자그마한 술집이나 하나 내자 응? 춤도 추게 하고! 까놓고 말한다면 싸알리스테 중위는 에스토니아에 옛제도가 다시 돌아오리라고 믿는 그런 천치는 아니거든. 하기는 실상 그 왈리진까지도 이것을 믿지 않는 것은 분명해. 요긴한 것은 돈이야.
싸알리스테는 거울을 집어넣는다. 오늘 저녁에는 새 움집에서 만나기로 되어있다.
'그래, 그놈은 괜찮아. 그 렢쓰로 말하면 말이지, 그저 좀 둔한 편인데 그래도 퍽 조심성이 많아. 지난날엔 상당히 나쁜 짓을 한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더욱 좋지.'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싸알리스테는 정신을 차려 제 권총 '콜트'를 살펴보고 나서 그것을 웃저고리 호주머니에 쑥 쓸어 넣고는 땅굴을 기여 나왔다. 부하 두 사람은 이미 만나게 된 곳에 있었고, 한 사람만을 데리고 싸알리스테는 새 땅굴을 향해 갔다. 그들은 날이 아주 어두워서야 올 곳에 왔다. 싸알리스테를 안내하여 가는 사람은 몇 번이고 오리처럼 빡빡하는 소리를 내였다. 이 소리에 화답하여 멧돼지의 콧구르를 박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약속이 되어있는 대로 렢쓰의 부하 한 사람이 싸알리스테가 있는 데로 와서 새 땅굴로 인도하였다. 싸알리스테는 안내자와 같이 땅밑으로 내려갔다. 렢쓰의 부하는 땅 위에 남아서 파수를 섰다.
워드까 두 잔을 마신 후 싸알리스테는 축축한 나무 담벽에 넌지시 몸을 기대었다. 등이 담벽에 닿자 그는 시원한 감을 느끼였다. 움집은 담배 연기로 가득 차서 석유램프의 희미한 불빛이 겨우 장막 같은 연기가 짬으로 새여 나왔다. 평상 우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도 연기로 하여 뿌옇게 보였다. 싸알리스테는 빙그레 웃으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눈길을 옮기었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하였다. '젊은 축들이 다 그렇듯이 제법이거든. 저들은 인제 나 없이 여기 남아 있게 되렸다. 그때엔 렢쓰가 지휘를 하게 될 게야. 이 사람이 오랜 자리를 지켜나갈 테지, 사람이 신중하니까... 그리고 술도 잘 마셔. 그가 내사람 셋을 잘 다룰 수 있을까? 그래 보여도 다들 한때는 장교들이었는데... 그러나 일이 어떻게 되든 실상 이 리할데 싸알리스테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간첩은 갑자기 즐거워졌다. '이제 이삼일 지나면 리할데 싸알리스테는 이 저주로운 숲을 무사히 떠나 소비에트-노르웨이 국경으로 몰래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게서는...' 싸알리스테는 워드까를 또 몇 잔 더 들이켰다. '그러나 싸알리스테, 당신은 교양 있는 사람이니 조심은 해야지. 렢쓰가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는군. 그자가 저기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걸. 그자가 권총을 뽑지 않나?'
싸알리스테는 웃저고리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제 권총을 얼른 쥐었다. 다들 웃는다.
'아하, 이게 뭐야. 글쎄 렢쓰가, 신중한 렢쓰가 완전한 신뢰의 표로 서로 무기를 교환하자는 것이 아닌가. 완전한 신뢰의 표로 말이지! 글세 이렇게 하는 것이 사업상 유리하니까!'하고 싸알리스테는 마음을 먹는다. '나를 잊지 말게 하자, 그는 여기 남게 될테니까.'
싸알리스테 중위는 렢쓰에게 '콜트'를 내밀고 그 대신에 묵직한 '빠라벨룸'을 받는다. 렢쓰는 허리를 굽혀 그를 끌어안는다. '내가 잔뜩 취하였군! 그래, 그래, 끌어안아라! 이 사람아, 전 같으면 이랬다가는 네 빰을 갈길 게다'
렢쓰는 있는 힘을 다 내여 싸알리스테를 포옹한다. 싸알리스테는 옷깃에는 그 무슨 액체가 내밴다. '에잇, 망할 것 같으니! 이 천치는 독약병을 눌러 깨쳤구나!'
낯빛이 몹시 해쓱하게 되어 곧 술이 깬 싸알리스테는 평상에서 칼을 집더니 축축하니 젖은 옷깃을 자른다. 아닌 게 아니라 한 방울만 삼키면 그만이다. 만사가 다 끝난다! 잘라낸 옷깃은 칼과 함께 땅굴 한구석으로 멀찍이 날아간다. 싸알리스테는 가까스로 숨을 돌리며 렢쓰에게로 몸을 돌려 욕을 하려고 한다. 그러자 눈앞에 자기를 겨누는 권총이 보인다. 또 총구멍 셋이 그의 친구들 쪽을 바라보고 있다. 찰깍하고 무엇을 튕기는 소리가 난다. 이것은 싸알리스테의 부하들 가운데서 그 누가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또 한 번 찰깍하는 소리가 난다. 다른 사람 하나가 총을 쏘려고 한 것이다.
"감쪽같이 바꾸어 놓았구나!"
하고 쥐죽은 듯 고요한 속에서 휘파람 소리 같은 속삭임 소리가 난다.
"총알을 몰래 바꾸어 넣었어!"
싸알리스테는 반항을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눌려서 깨진 독약병과 바꾸어 가진 권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옛 움집에 살던 사람 넷은 손들을 쳐든다. 렢쓰는 천장을 향해 총을 놓는다. 휑하니 열린 문으로는 따발총을 무장한 사람들이 연달아 뛰여 내린다. 맨 마지막에는 외투를 입은 단단하게 생긴 사람이 내려온다. 렢쓰는 이 사람에게로 다가가더니, 늘 하는 버릇대로 마치 군복 웃저고리이기나 한 듯 그 범포지 짧은 웃옷을 뒤로 잡아당긴다. 외투를 입은 사람은 렢쓰를 껴안는다.
그다음 날 윌레르 대위의 방으로 끼비 중위가 들어왔다.
"자, 끼비 축하하오! 진심으로."
"감기 안 걸렸소?"
하고 윌레르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밤이 찼으니까! 맨땅 우에서 며칠 동안이나 누워 있어야 했던가?"
"그 녀석의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감기 들릴 뻔했어요. 그러나 그 얀센이 옆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어떻게나 초조했던지 진짜로 꿍꿍 앓는 소리를 쳤습지요. 그래 그자의 귀에 들렸지요."
이렇게 하여 윌레르 대위의 제안이 완전히 수행되었다. 스웨덴-미국 간첩인 리할데 싸알리스테를 괴수로 하는 살인자들의 일당은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산국의 국가 안전기관에 의하여 구금되었다. 이 일은 윌리, 요나쓰 그리고 수지로 구성된 새 간첩 도당이 에스토니아 해안에 상륙하기 두 주일 전에 일어났던 것이다.
산림 감시원 렢쓰는 병원에 누워 있는 데 찬성하다.
철도 정거장 매표구 옆에서 윌리는 발길을 멈추었다. 그는 '기차표값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모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눈으로 담벽을 보았으나 열차 운임표는 보이지 않았다.
윌리의 지갑에는 25루블리짜리 지폐 몇 장이 있었다. '얼마나 낼까'하며 그는 망설였다. '25루블리로는 분명 적을 게야!' 그는 매표구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지폐 두 장을 내밀며,
"또리까지 표 한 장 주시오."
하고 그는 자기도 뜻 아니한 채 높다란 말을 하였다. 매표원 여자는 놀란듯이 그를 바라보더니 25루블리 짜리 지폐를 하나를 도로 돌려주었다. 매표원 여자는 차표에 펀치를 넣고 거스름돈을 계산하고 나서 차표를 내주었다.
'하여간 일이 잘되지 않았구나.'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나무랐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그는 술 취한 사람 모양을 할 양으로 얼마큼 비틀거리면서 플랫폼으로 나왔다. 'MIIC'라는 제명이 있는 커다란 종 옆을 지나면서 그는 이 'MIIC란 건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였다. '하지 않을 일로 해서 큰 낭패를 당할 수 있겠는걸.'
몇 분 지나 교외 기차가 들어왔다. 윌리는 찻간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가 있어도 하고 찻간 데크에 남아 있었다. 그는 퍽도 자리에 앉고 싶었다. 딸린의 화물역 난방실에서 밤을 난 뒤로 등이 쿡쿡 쑤시는 듯 아팠다. 거기서 그는 수지와 헤어졌다. 수지는 자기의 비밀 연락 장소로 가고 윌리는 윌리대로 자기 비밀 연락 장소로 갔다. 그때로부터 지나간 세 주일 동안에 윌리는 이미 약속한 비밀장소를 경유하여 스웨덴 간첩은 릴렐레흐트와 편지를 교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딸린의 퍄르누만테 거리에 비밀 연락 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한 광신적인 세례교 신자(왈리진은 이렇게 불렀다)로서 얀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에게로 출두하는 것이었다. 어제저녁 그는 거기로 가서 에스토니아 세례교도들을 통괄하는 미국 사람 리할드 카웊쓰의 편지를 전하였다. 왈리진의 말에 의하면 신자들이 자기네 영혼의 아버지라고 믿는 이 정탐배의 편지는 파르누만테에 있는 그 집의 문을 열게 하는데 아주 충분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 광신적인 세례교도가 절대로 종교적 사업이 아닌 그 무슨 용무로 출장을 가고 없고 그의 가족들은 윌리를 어떻게나 의심쩍어 하는 눈길로 바라보던지 그는 그만 얼른 그 집에서 물러 나오고 말았다.
이제 그는 '또리'라는 곳에 가 닿아야만 하였다. 윌리는 딸린에서 차를 타는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몇 킬로를 걸어서 바로 차표를 사느라고 실수한 그 조그만 정거장에 와 닿았던 것이다.
등이 얼마나 쑤시나! 감기가 아닌가? 그랬다가는 야단일 것이다. 윌리는 '스웨덴 사람들이 준 그 약품들 중에서 어느 것을 먹어야 나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물약, 알약, 고약 같은 것이 들은 도합 여덟 개의 병은 게일이라는 정거장 근처의 땅구멍 속에 남아 있었다.
기관차는 새되게 기적을 울리며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자 에스토니아 글자와 로씨야 글자로 '또리'라고 씌여 있는 정거장의 고동색 건물이 보이였다.
윌리는 승객들이 모두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승강대에서 뛰여내렸다. 그는 누가 자기 뒤를 따라 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없나 하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가 맨 마지막 사람이었다.
윌리는 대합실로 들어갔다. 바로 거기에 그 열차 운임 일람표가 붙여 있었다. 윌리는 유심히 그것을 죄다 읽어 내려갔다.
정거장 건물을 나온 윌리는 얼마큼 천천히 걸어 가다가 행길을 따라 바른편으로 돌아섰다. 그는 나지막한 양목장의 건물 옆도 지나갔다. 그 언젠가 소학교 시절에 그는 여기서 유명한 또리의 경중량 말들을 사육한다는 것을 배운 일이 있다. '그래 양목장은 지금도 운영되는 모양이지?' 행길을 따라 예닐곱 킬로를 걸어간 그는 딸린의 마을에까지 가지 않고 왼쪽으로 꺾어 들었다. 그러자 윌리는 어느덧 마을 사이로 뚫린 좁다란 길을 따라갔다. 곧 수림이 시작되었다. 스톡홀름에서 왈리진이 준 계획대로 산림 감시원 네 오막살이까지 가자면 아직도 일곱 킬로나 남아 있었다. 한 시간 반 길이다. 윌리는 시계를 보았다. 정오다.
왈리진은 산림 감시원 렢쓰에 대해서 마치 자기와 오랜 우정으로 서로 얽혀진, 아주 믿을 만한 사람에 대해서나처럼 이야기하였다. 이 사람네 집에서는 장비를 감추어 둘 수도 있을 것이고, 무전기를 설치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렢쓰는 숲속에 움집을 파는 것을 도와줄 것이며, 적당한 사람들과 연결을 지어도 줄 것이다. 왈리진은 렢쓰에게 줄 암호로서 그가 에스토니아 부르조아 군대의 중위복 색을 하고 찍은 사진 한 장을 내주었다. 왈리진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렢쓰와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왈리진의 말대로 하면 이 늙은 산림 감시원은 소비에트 정권을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제일 미워하며 되도록 자기의 직업에 남아 있어서 신호를 기다리겠다고 언약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때에 암호가 작성되었었다. 사진 외에 또 '아르까지 왈리진이 당신에게 인사를 보냅디다.'라는 말을 하여야만 하였다. 왈리진은 오랫동안 이 앞잡이를 소중히 간직하여 오던 터로 이제야 그의 때가 이르렀다는 말까지 덧붙여 하였다. 렢쓰는 그 어떤 일로써도 자기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할 만큼 가장 믿을 만한 비밀 연락처라는 것이다.
고동색 페인트칠을 하고 지붕에 기와를 올린 이 농가는 빽빽한 소나무숲 뒤에 감추어져 있어서 윌리는 자기로서도 뜻밖에 그 집과 마주쳤던 것이다. 그것은 산림 도로로부터 한 십 미터 떨어져 있었다. 윌리는 이 집 옆문을 열었다. 아무도 그를 맞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윌리는 문을 두드리었다.
"들어오시오."
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현관을 지나자 윌리는 넓다란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머리가 세고 쇠약해진 늙은이 하나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때 윌리는 왈리진이 말하던 인상과 또 스톡홀름에서 그가 보여준 사진으로써 이 늙은이를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마음이 턱 놓였다. 등이 쏘듯이 아픈 것도 멎고 피곤도 다 사라진 듯하였다. 늙은이밖에도 아무도 방에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윌리는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아르까지 왈리진이 당신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늙은이는 우뚝 멈춰 서더니 이 찾아온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까닭으로인지 한두 걸음 옆으로 비켜서기까지 하며 얼마 후에야,
"안녕하시오."
하고 대답을 하였다.
윌리는 안쪽 호주머니에서 왈리진의 사진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산림 감시원에게 보였다. 산림 감시원은 천천히 서탁으로 가서 안경을 집더니 별로 덤비지도 않고 그것을 낀 다음에야 비로소 윌리의 손에서 사진을 받아 들었다. 눈에서 멀직이 사진을 가져다 대인 뒤에(분명 안경 도수가 이미 약해진 듯하였다) 렢쓰는 오랫동안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러는 동안에 윌리는 유심히 방안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방안에는 별로 주의를 끌 만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벽에서 단정하니 나무틀에 넣고 유리를 대인, 화려하게 책 색을 한 종잇장 셋을 볼 수가 있었다. '상장'이라고 쓰인 것을 읽는 윌리는 빙그레 웃음을 띄우며 '늙은이가 흉칙하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이 사람이."
하고 산림 감시원 늙은이는 말하였다.
"왈리진... 아르까지 같기는 한데..."
"원, 그야 물론 그 사람입지요. 또 누가 되겠지요!"
하고 윌리는 다짐을 두었다.
"오랫동안 그에게서 아무런 소식도 없었으니까. 그래 난 필시 그 사람이 죽은 게라고 생각했소."
"별 말씀두! 바로 한 달 전에 제가 만났는걸요. 그저 노인을 퍽 소중히 생각하고 있답니다. 우리에게 여간 소중한 분이 아니라고 하면서."
늙은이는 다시 한번 손님을 안경 너머로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말은 하지 않았다. 윌리는 옷을 벗으려 들었다.
"당신이 늦게 오셨소이다."
렢쓰는 드디어 이런 말을 하였다.
"무슨 말씀입니까? 노인께서는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윌리는 정신을 차리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글쎄 나는 그런 말이 아니구."
하고 렢쓰는 부정하였다.
"저는 노인의 말씀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글쎄 그저 농담으로 그런 것이구."
하고 렢쓰는 빙그레 웃었다.
"어서 옷을 벗으시오. 그리고 그쪽 사업 형편이나 좀 말씀하시오."
"여기는 노인장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까?"
안심이 되는 대답을 들을 윌리는 솔직하니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스웨덴에서 왔다. 그의 과업은 이러저러한 정보를 수집하여 이것들을 무전으로 본부에 전달함으로써 렢쓰가 그리도 미워하는 볼세비키들을 되도록 빨리 섬멸하도록 방조를 주고 그리하여 에스토니아를 소비에트 정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스웨덴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은 로씨야 사람들이 모든 기관들에게 에스토니아 사람들을 추방하고는 그들에게 휴일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모든 것에 이제 머지않아 종말이 올 것이다. 렢쓰가 의심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거룩한 사업에 방조를 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
윌리는 이러한 구변을 벌써 이리로 오는 도중에서 준비하였던 것이다. 그에게는 산림 감시원 렢쓰가 자기에게 경의를 가지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날 밤을 렢쓰네 집에서 묵어야 될 것과 이튿날에는 무전기와 장비를 가지러 갔다가 그것들을 이곳으로 날라와야만 하리라는 것을 말하였다. 장비를 날라오는 데는 날짜가 며칠 걸릴 것이었다. 그동안에 렢쓰는 숲속에 모든 장비품을 감추어 둘 수 있고 또 윌리가 조그마한 움집을 지을만한 장소 한 곳을 골라잡아야만 하였다.
"노인께선 지방 주권 기관들과 사이가 좋으시오?"
"뭐요?"
늙은이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다른 말씀이 아니라 당신이 감시를 받으시지나 않는지요? 무슨 수상한 것을 놈들이 눈치채지나 않았나 말입니다."
렢쓰는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내가 별걸 다 묻는군요! 하, 하!"
윌리는 큰 웃음을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배워야 좋을 것입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벽에 걸린 상장 앞으로 다가갔다.
"이런 물건은 웬만해서는 벌 수 없지 않습니까!"
"아무렴."
하고 늙은이도 맞장구를 쳤다.
"멀지 않아 당신께서는 이런 걸 다 면하시게 되겠지요!"
윌리는 비호하듯이 이런 말을 뇌이며 벽에서 상장 하나를 떼였다.
"그건 왜 그러우."
하며 렢쓰는 윌리에게로 눈을 들었다.
"왜라니요."
"글쎄 무슨 까닭에 면한다는 거냐 말이요."
"글쎄 좋습니다. 알았습니다."
하고 윌리는 명랑하게 눈을 조푸리었다.
"그게 박물관의 골동품이요, 그렇지요?"
"아니오, 그렇지 않소."
늙은이는 입안 소리로 웅얼거리고 나서 윌리의 낯을 사납게 바라보았다.
윌리의 손에는 땀이 괴였다.
"당신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윌리는 이때까지와는 달리 속삭이는 말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요?"
늙은이는 윌리의 손에서 상장을 잡아채더니 도로 그 자리에 깎듯이 걸어 놓았다. 그리고 나서 윌리 쪽으로 낯을 돌렸다.
"별일 없소."
하고 그는 조용히 대답을 하였다.
"나는 당신네 편이 아니오. 더 할 말 없소. 당신네 편은 아니오."
윌리의 눈에서는 장막이 내릴 것만 같았다. 그래, 물론 우리 편이 아니지! 어떻게 그런 걸 진작 몰랐을까! 담벽에 걸린 그 허술개며, 또 늦게 왔다는 이야기며 아, 바보 같으니! 그런데 그야말로 윌리에게는 일이 다 된 것이 아닌가!
"매수되었소?"
윌리는 괘씸한 듯이 물었다.
"그림장에 팔렸구나! 소비에트 정권에, 로씨야 사람들에게..."
"어리석군!"
하고 늙은이는 조용히 반박을 하였다.
"어리석어, 나두 한때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였소. 자수해요. 그들은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용서할 테니까. 아직 늦지 않았으니 어서 그렇게 하시오. 여기서 살기 시작하시오. 당신은 눈으로 모든 것을 다 보게 되리라. 놈들은 나를 홀리려고 한 것처럼 당신을 홀려 놓았소. 팔려? 누구에게? 자기 자신에게 말이요?"
"거짓말이야!"
윌리는 급히 웃저고리를 걸치며 목 갈린 소리로 말을 하였다.
"거짓말이야, 악한 같으니! 나더러 항복하라구 권고하는 게야! 어리석은 놈두 다 있지. 제가 원해서 교수대루 가거든. 아니 혹시 나도 자수할지 모르지. 허나 우선 너와 좀 이야기해야겠다."
창문 밖에서는 발동기의 부르렁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그 뒤로 클락숀이 삥삥 울렸다. 윌리는 권총을 내들었다.
"덫이로군? 모략을 했군. 그래?"
"댁두 겁쟁이로군."
하고 늙은이는 쓴웃음을 웃었다.
"구역에서 의사가 온 게요. 내가 앓으니까 그러우. 벌써 두 주일째요."
"만약 거짓말을 했다간 첫 총알은 네게 들어간다."
윌리는 이런 말을 던지고는 얼른 창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넘었다.
잠깐 지난 뒤에 망토를 입은 사람이 문으로 들어섰다. 만또 밑으로는 하얀 위생복이 보였다.
"오늘은 왜 이렇게 얼굴빛이 창백하십니까?"
의사는 걸상 위에 가방을 세워 놓으며 말을 하였다.
"좋지 않습니다. 선생, 좋질 않아요."
하고 늙은이는 급히 중얼거렸다.
"글쎄, 병원에 입원하라는 대로 할까 봅니다."
"글쎄, 종내 그러시는 걸 가지고,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억지로라도 모셔가려고 생각했던 참이외다. 늑막염과 장난을 한다는 건 좋지 않습니다. 내일 아침에 위생차를 보냅지요."
"아닙니다. 지금 갑시다."
의사는 놀란 눈으로 늙은 산림 감시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만 계시오. 우선 한번 진찰을 하십시오."
"아니오, 병원에 가면 좋아질걸요."
하고 늙은이는 굳이 고집을 하며 문을 향하여 성큼성큼 발길을 옮기였다.
의사는 어이가 없어서 두 팔을 쩍 벌려 보였다.
"그럼 '모스코위치'에 앉으세요. 저는 왕진도 다 끝냈으니까 곧바로 시내로 들어 가십시다."
도중에 의사는 렢쓰에게 자기의 의료 사업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이야기하였다. 늙은 산림 감시원은 정중하니 맞장구를 치면서도 거의 한 마디도 귀에 들어 오지는 않았다.
'늙은 바보야!' 하고 늙은이는 속으로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늙어 죽게 되기까지 이상주의자밖에는 못 되었으니. 그런 인물을 훈계하자고 달라붙었거든. 이제 어디루 달아나 버릴 게야, 꼭 어디루 달아나 버릴 게야. 그런데 그런 모양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나 말이지. 격했었어, 늙은 귀신 같은 것이 참지를 못했어. 글쎄 그때 어떻게 격하지 않을까? 그런 더러운 놈 같으니! 박물관의 골동품이라구. 그래 문제가 그런데 있는가? 게서 그자들은 알 수가 없거든. '해방'시키려구 하니까! 그자들의 해방을 위해서 이 늙어 빠진 것이 그들에게 요구된다고...
한 반 시간 후에 자동차는 거리로 들어왔다. 국가 안전기관의 주재부가 들어 있는 건물 옆에 오자 렢쓰는 차를 멈추어 달라고 하였다.
"아직 다 오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놀라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병원이 어디 있는지도 잊어버리셨어요? 이것으로두 알 수 있군요. 일생에 한 번도 병을 앓지 않으신 분이라는걸!"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바로 여기 볼 일이 있으니까요.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외다."
하고 렢쓰는 자동차에서 내려 버렸다.
"그럼 병원에는요!"
의사는 어리둥절하였다.
"어떻게 이다음에나..."
소위 쌀루쏘오의 직일
저녁부터 유하네스 쌀루쏘오 소위는 신지 정거장 플랫폼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리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저녁 열 시가 가까워오자 가는 비가 내릴 차비를 하였다. 사방은 컴컴한 장막으로 덮이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플랫폼에 나타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보려면 눈을 한껏 똑똑히 뜨지 않아서는 안 되었다. 산림 감시원 렢쓰가 알려 준 외국 간첩에 대한 자세한 구두 초상을 받고 이 소위가 초소를 지키고 섰는지 벌써 여섯 시간이 지나갔다. 여섯 시간, 그러나 아무런 결과도 없었다. 언제나 유하네쓰 쌀루쏘오는 일이 있을 만하지 않은 곳으로만 파견되곤 했다. 그 간첩이라는 자가 지금쯤 산림 도로를 슬그머니 빠져나와 으례히 우리네 초소들과 맞닥뜨릴 것이다. 그러나 그이, 즉 유하네쓰 쌀루쏘오의 초소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소위는 여기 이 플랫폼에서 기다리는 그 작자를 한 번도 본 일은 없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아주 뚜렷한 형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큰 키에 가죽자켓을 입고 꺼먼 아래 바지는 장화 속으로 몰아넣었으며, 얼굴은 여위고 좁은데 턱은 네모지고 머리털은 검고 웃턱은 앞으로 내밀고 그리고 양미간은 좁으며 입아귀는 축 늘어진 사나이였다.
쌀루쏘오는 천 사람 가운데서도 이 사람을 알아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 기차를 타지 않았다는 것, 이것은 확실하였다. 그렇다. 기차에 타지는 않았다. 정거장 시계는 열한 시를 가리켰다. 교대할 시간이다. 소위는 플랫폼에서 잘 아는 동료의 모양을 보았다. 그는 쌀루쏘오가 앉아 있는 긴 걸상 옆으로 지나갔다. 그리고는 성냥을 그어 궐련에 불을 붙였다. 이것은 이미 정해 놓은 신호였다. 자리를 떠나도 좋다는 것이다.
쌀루쏘오는 역사를 지나 아래층에 식당이 있는 한 2층 건물을 향하여 갔다. 아내가 아침에 부탁한 대로 저녁 찬감인 소시지를 사야만 하였다.
돌계단 둘을 올라가서 쌀루쏘오 소위는 주점으로 들어섰다. 소위는 주점에 눈길을 던지자 곧 그리도 오래 기다리던 그 사나이를 보았다. 거리 한복판, 그도 또, 정거장에 붙은 식당에서가 아닌가! 이것은 무엇인가. 총알맛에 익숙해져 버린 승냥이의 뻔뻔스러움인가, 아니면 풋내기의 조심성 없는 소행인가?
흥분을 진정하면서 소위는 주점 매대로 갔다. 성냥 한 갑을 사 들은 그는 바로 그 가죽 쟈켓을 입은 사람이 마주하고 앉아 있는 맨 끝쪽 조그마한 식탁을 향해 걸어갔다.
쌀루쏘오는 그 옆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간첩이 국그릇에 머리를 숙이기를 기다려 쌀루쏘오는 그자에게로 다가가서 나지막한 소리로,
"신분증을 좀 봅시다."
쟈케트를 입은 사람은 한 반쯤 몸을 일으키더니 바른편 손으로 가죽옷 안쪽 호주머니를 뒤지는 것이었다. 바로 이 순간에 쌀루쏘오는 있는 힘을 다 내어 이 수상한 사람의 팔목을 비틀었다. 호주머니에서 떨어져 나오는 권총은 마루바닥을 쳤다.
"손들엇!"
하고 쌀루쏘오는 소리를 질렀다.
간첩은 명령대로 하였으나 어느 사이엔지 그의 바른편 손은 목 옆에서 어물거렸다. 그는 루바쉬까 깃을 입에 물었다. 쌀루쏘오는 바른 손으로 권총을 놓지 않은 채 왼손으로 윌리의 목을 꽉 쥐었다.
"침을 뱉아, 어서! 침을 뱉으라니까, 그러지 않다가는 총을 쏠 테다!"
쌀루쏘오는 제 명령의 논리를 별로 염두에 두지도 않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독약병을 물어 깨치면서 윌리는 입속에 그 어떤 맛을 깨달았다.
'나는 죽는다.' 진저리를 치며 그는 이런 것을 생각하였다. 그는 몇 번이고 마루 위에 침을 뱉았다. 그의 몸뚱이는 천천히 아래로 수그러지기 시작하였다.
"우유 가져와요!"
하고 쌀루쏘오는 소리를 쳤다.
"얼른 우유요!"
깜짝 놀란 접대원은 우유병을 가져왔다. 소위는 병마개를 빼서 우유를 윌리의 입에 부어 넣었다.
몇 분 지나자 정보 일꾼들 한 패가 자동차를 타고 왔다. 사람들은 윌리를 주점 밖으로 들어내 갔다.
맨 마지막으로 쌀루쏘오 소위가 거기서 나왔다. '허, 아내가 소시지를 사 오라고 부탁했었는데!' 하며 그는 얼빠진 듯 잠간 무슨 생각을 하더니 자동차에 올라앉았다.
요나쓰, 발소리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온다
요나쓰는 나무 그루터기 우에 앉았다. 그는 두 다리가 웅웅 우는 것 같음을 느꼈다. 사흘째 숲속을 헤매다니나 싸알리스테가 있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흔적이라고는 없었다. 도저히 그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지금 수지와 윌리는 어디 있을까?' 하고 요나쓰는 생각하여 보았다. 셋이 있을 때는 그래도 한층 마음이 놓였었다. 그는 자기의 근육 하나하나가 긴장된 것과 자기 귀가 지극히 작은 바스락 소리 하나까지라도 놓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요나쓰의 등 뒤에서는 그 무엇이 바스락거렸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개구리 한 마리가 풀 속으로부터 뛰여 나와서는 그 움직거리는 볼따구니를 붕굿하니 벌리며 요나쓰를 뚫어져라고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요나쓰는 뛰여 일어나 한 옆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이게 무엇인가? 사람의 목소리 같기도, 부러지는 나뭇가지들의 오작오작하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요나쓰는 무릎을 꿇고 앉더니 얼른 손으로 풀숲 밑에 구멍을 파고 그 속에 난수책과 전신 약호를 쓸어 넣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또다시 소리가 들린다. 얼른 맞은편 쪽으로 갔다. 드디여 청각에 소리도 붙잡히지 않고 심장은 고르게 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 요나쓰는 문서 봉지를 감추어 둔 장소를 표해 두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왈리진이 이야기한 대로 산림 감시원 얀센이 살고 있던 큐티 마을에 간첩이 다다랐을 때는 아주 캄캄하게 어두웠었다. 요나쓰에게는 집에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창문에는 불빛이라고는 없고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갈 마음이 나지 않아서 요나쓰는 그곳을 지나 소 외양간 쪽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얀센을 기다리려 하였다.
요나쓰가 잠을 깨였을 때는 자그마한 창으로 차거운 아침별이 새여 들어왔다. 아래쪽으로부터는 율동 있는 음향이 들려 왔다. 누가 소젖을 짜는 것이었다. 함석통 손잡이가 쩔렁하고 소리를 내었다.
"자, 가만 서 있어, 가만 있으래두!"
하고 말하는 그리 높지 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가만 들창 쪽으로 기어가서 아래쪽으로 눈길을 던진 요나쓰는 자기에게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노파 하나를 보았다. 주저주저하다가 그는 가만히 이 여인을 불렀다.
노파는 젖을 짜다 말았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아니, 분명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러자 또다시 우유 줄기는 장단을 맞추어 우유통에 흘러들었다. 사다리가 찌궁찌궁 소리를 냈다. 노파는 얼굴을 돌리더니 높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쉿!"
요나쓰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고 나직이 말했다.
"예가 얀센네 집이요?"
"그렇소."
"주인은 어디 갔소?"
"당신은 누구요?"
"난 숲에서 왔소."
"글쎄 당신네 동무들 때문에 그것이 잡혀가서 지금 감옥살이를 한다우."
하는 노파는 앞치마에 대고 물코를 풀었다. 그리고는 원한에 찬 눈길로 요나쓰를 훑어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래 왜 내 아들을 긴히 보자는 게요?"
요나쓰는 대답이 없었다. 헛간에서 얼른 나오며 그는 이곳저곳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다. 잠시 후에 그는 숲속으로 들어가 자태를 감추어 버렸다.
'얀센이 잡혔다. 그러나 싸알리스테도 같은 신세로 된 게 분명하지.'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리에 얼른얼른 떠올랐다. '어떻게 할까?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라아아쓰마로 가야만 할 것이다. 그리로 가서 동생네 집에 있으면서 형편을 살피자. 그저 무후 섬 부모네게로 가게만 된다면 좋으련만. 그 섬에서 활동하는 것이 왈리진이 준 주되는 임무니까. 그러나 지금엔 사촌 동생 와씰리에게로 가자.'
새벽녘, 코오라 마을에서는 개들이 짖어 댔다. 거리는 아직 어두워서 사람들은 누구나 라아아쓰마 마을로 남몰래 가고 있는 한 사나이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누가 문을 이렇게 두드릴까?' 하고 와씰리는 침상에서 일어나며 생각하였다. '작업반장은 이렇게 가만히 두드리지는 않는데, 이런 꼭두새벽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료해서 할 일도 아니고.' 속옷에 껄껄한 털양말 바람으로 그는 출입문께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문은 열지도 않고,
"그게 누구요?"
하고 물었다.
"와씰리! 와씰리야?"
길거리로부터는 귀에 설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연 와씰리는 여윈 얼굴에 뾰족하고 기다란 콧마루가 오똑한 낯 모를 사람 하나를 보았다. 와씰리의 눈길은 이 낯모를 사람의 부유스럼하고 초록빛 나는 외투를 아래 우로 뜯어보고 그러다가 잿빛 캡 우로 미끄러지더니 밤색 눈에 와서 멎어 버렸다. 그는 잠깐동안 잠잠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 눈이 생각나서
"요나쓰! 당신 요나쓰 아니요?"
하고 외쳤다.
"나야."
하고 요나쓰는 대답하였다.
"난 형님이 죽은 줄로만 생각하였는데?"
"천만에."
하고 요나쓰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대답하였다.
"들어오시오. 알리데, 어머니! 좀 보세요. 누가 왔나! 이건 뜻밖이외다! 이런 신기한 일두 다 있으니! 참 반가운 일이로군요!"
집 안은 훈훈하였다. 짐부대를 한 구석에 놓고 요나쓰는 외투를 벗었다. 세수를 하며 그는 두 마디로 친척들이 그리워서 큰 보트를 타고 스웨덴서 오는 길이라고 말하였다.
와씰리의 어머니 마리야, 그의 아내 알리데, 그리고 와씰리 이렇게 모두 식탁에 둘러앉아서 돼지고기 조각을 게걸스럽게 삼키는 요나쓰를 유심히 바라보고들 있었다. 양배추 김치 조각이 숟가락에서 떨어지자 요나쓰는 구부정한 커다란 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어서 입 안으로 가져다 넣는 것이었다.
"그래, 그쪽 스웨덴에서는 다들 어떻게 살아요?"
하고 와씰리가 물었다.
"좋지."
하고 요나쓰는 떠듬떠듬 대답을 하며 숟가락을 부지런히 놀렸다.
와씰리는 요나쓰가 먹던 음식을 다 먹기를 기다려서 별로 관심하지도 않는 듯한 어조로 이런 말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로 오셨소?"
요나쓰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나서 이번에는 마리야와 알리데를 빙 둘러보면서 이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할 것인가 어쩔 것인가 고려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잠깐동안 덤덤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런 말을 하였다.
"여기서는 다들 어떻게 사는지 좀 보고 싶었어. 제 육친들이 그래도 늘 그리웁거든. 알라와 결혼을 하구 스웨덴으로 데려가려고 하네. 스웨덴서 배가 나를 데리러 올 테니까."
하고 말을 보태기도 하였다.
"배를 어떻게 불러와요?"
하고 와씰리가 물었다.
"불러오지."
요나쓰는 눈을 깜박거리며 대답하였다.
"자, 어머니."
하고 와씰리가 말하였다.
"어머지는 가셔서 소한테 꼴을 좀 주시지요. 그리구, 알리데, 당신은 침실루 가서 요나쓰 형님 누우실 자리 좀 펴놓아요. 먼길 오시느라구 곤하실 텐데."
침실로 가서 앉으며 요나쓰는 부대를 열고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와씰리에게 내보였다. 권총, 탄약, 칼, 지남침, 약품들이었다. 요나쓰가 무슨 선물이나 끄집어낼까 하고 기다리면서 와씰리는 헛되이 부대 속만 들여다보았다.
요나쓰는 자기가 무후 섬에서 군대 주둔 위치, 해안 방어시설, 고사포 진지 같은 것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동생에게 숨기지 않고 다 이야기하였다.
"지금 내가 할 주요한 일은 섬에 잠입하는 것이네."
하고 그는 말하였다.
"무후 섬에 들어간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걸요."
와씰리는 실없이 이런 말을 하였다.
"자네, 고기잡이하지."
"글쎄, 그래도 배가 내 소유물이 아니라 공동용이니 그걸 내가 어떻게 쓰겠어요? 무후 섬에는 국경 경비대원들이 있어서 섬에 얼씬하지 못하지요. 눈 깜박할 동안에 붙들리거든요. 형님은 증명서를 한 번 더 봅시다."
와씰리는 스웨덴에서 요나쓰에게 내준 여권과 군사증을 들여다보았다.
"코펠 아우구스트."
하고 그는 목소리를 높여 읽었다.
"뭐, 이만하면 됐구먼요, 어차피 통행권은 기다려야만 하니까요."
"되긴 뭣이 돼!"
하고 요나쓰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가짜야. 그자들이 게서 조사를 하기 시작할 테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말야. 그렇게 되면 영락없이 붙들릴 판이야. 그러니까 말이지, 나를 아버지와 좀 만나게 주선해 주게. 아버지는 도와주실 테지."
"글세 뭐, 그것쯤이야 내가 하지요. 내 잘 아는 사람으로 그 섬에 자주 가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아버지께 이리루 오시라고 한다구 전하게 하지요. 그러나 제 권하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다름 아니구 그 사람들에게 모든 걸 다 말씀하는 것이 좋을 거야요. 그들이 형님께 무슨 일 있도록은 하지 않을 게니까요."
요나쓰는 깜짝 놀라서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갔다. 아버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요나쓰는 인제는 식사 때에 자기 앞에 더는 맛있는 음식을 내놓지 않는 줄을 눈치채였다. 그가 다락방(와씰리의 아내가 의아쩍어하게 요나쓰는 깨끗한 침상보다 이 다락방에서 자는 것을 좋아하였다)으로부터 내려왔을 때에는 이 집 가족들은 벌써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에게 음식 그릇을 내밀어 주는 것이었다. 한번은 알리데가 와씰리를 보고,
"어서 저이가 우리 집에서 나갔으면 좋겠어요. 화단을 겪고야 말지."
하고 말하는 소리를 요나쓰는 들은 일도 있었다.
"당신 알 일 아니오."
하고 와씰리는 대답하였다.
늙은 이완 말리찌스가 라아아쓰마 마을로 왔다. 그는 오랫동안 아들의 낯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들과 만나게 되는 기쁨도 그 아들이 왔다는 수수께끼 같은 알지 못할 사정을 생각할 때 그만 흐려지고 마는 것이었다.
'만약 요나쓰가 여기 와 있다면 어찌해서 그가 몸소 집으로 오지 않았을까?'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병을 앓는 것도 아니였다. '어찌된 까닭으로 하여 늙은 애비가 라아아쓰마 마을까지 다리를 끌고 와야 하나? 사람이 제 고향으로 돌아올 때면 우선 제집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늙은 말리찌스가 아들을 보고 속으로 생각한 것은 그의 머리가 벌써 세기 시작하였구나 하는 것이었다. 요나쓰는 여위고 핏기가 없었다. 아버지를 침실로 이끌고 간 요나쓰는 어찌된 까닭으로인지 그와 거의 속삭이다시피 이야기하였다.
비록 집에는 부엌에서 단지들을 쩡가당거리는 와씰리의 아내밖에 아무도 없었지만,
"집안은 어떻게 지냅니까?"
하고 요나쓰는 물었다.
"어머닌 안녕하세요?"
"진작 알 수 있는 일이지. 편지 한 장 쓰면 되는걸. 집에서는 회답하지 않았겠니. 어디 남이냐."
아버지는 한숨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 혼자로선 힘이 차다. 세간살이는 크지, 너의 어미는 골골 앓지."
"저는 집이 그리워졌습니다."
하고 요나쓰는 말하였다.
"왜 진작 오지 않았니?"
"그럴 기회가 어디 있었어야지요. 무후로 건너가려구 하는데 아버지 힘 좀 써주시오."
"신고를 하려무나, 네가 배를 타구 이리 왔다는 것과 집으로 돌아가 살련다구 말이다. 그러면 사는 게지. 누가 너를 뭐라구 하진 않을 게니까."
"제 생각엔."
하고 요나쓰는 심란해서 입안엣 소리로 중얼거렸다.
와씰리가 소들을 먹이고 있는 방목지까지는 먼길이였다. 그러므로 늙은 말리찌스가 그곳으로부터 돌아오기까지에 그는 무엇을 생각할 시간이 없지 않아 있었다. 와씰리가 그에게 한 말은 그의 가슴을 찔렀다. 그의 아들이 간첩이라니! 바로 그 까닭으로 해서 그는 내무기관에 출두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런 때문에 그는 이 아버지더러 남 모르게 섬으로 건네 놓아 달라고 하는 것이다.
늙은이는 라아아쓰마 마을에 들리기조차 아니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기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가 하룻밤을 묵어가려고 하는 옛 친지는 집에 있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늙은 말리찌스는 또 다시 와씰리에게로 가게 될 밖에 없었다.
그는 침상에 눕기는 하였으나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방안은 덥기도 하고 또 그를 사로잡은 생각들로 하여 그는 마음이 불안하였다. '누구를 위해 일을 했으며 허리가 굽었나? 머지않아 죽을 것이니 모든 것이 누구에게 남게 되나?' 하고 늙은이는 생각하였다. '일생을, 조상들 때로부터 고생들만 했지. 한데 이것은?'
다락방에서는 요나쓰가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고 있었다. 그도 잠을 들지 못하였다. 그것은 마른 풀이 바늘처럼 옆구리를 찌르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저녁내 그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다만 한번 그를 뚫어져라 하고 바라보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을 뿐이었다.
아침에 요나쓰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옷을 다 입고 있었다.
"아버지 일라에게 편지 전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하고 요나쓰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마룻바닥에는 학습장이 뒹굴고 있었다. 그것을 한 장 찢어 든 요나쓰는 급히 "진정으로 인사드립니다. 가까이 뵈옵게 되기 바랍니다"라고 썼다.
아버지는 벌써 웃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요나쓰는 그에게로 가까이 가더니 봉투를 내밀었다. 늙은이는 살가죽이 툭툭 튼, 북두갈구리 같은 손에 잠시 봉투를 쥐고 있더니 그것을 호주머니 속에 쓸어 넣었다.
요나쓰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층층대까지 나왔다. 늙은 아버지의 꾸부정한 형자가 차츰 멀어지자, 그는 그 뒤에 대고
"어머님께 인사 전해 주시오."
하고 외쳤다.
늙은이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요나쓰는 아버지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생활과 연결된 것이 모두 그 아버지로부터 멀어지는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참으로 다름 아닌 그의 그 꾸꾸부정한 등에는 그리도 많은 귀한 추억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갈대 피리며, 장날의 꿀과자며, 마루 우에서의 장난이며...
이웃 사람들의 눈에 띄우리란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요나쓰는 얼른 집안으로 쑥 뛰어 들어갔다.
증명서 없는 사람
요나쓰는 아무리 무후 섬으로 건너가 보려고 애를 써보아도, 개인 소유의 배를 가지고 있는 고기잡이꾼 알프레드에게 자기를 도와 달라고 아무리 권해 보아도 그의 모든 시도는 한결같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바다 기슭으로부터 제 고향 섬으로부터 차츰 더 멀리멀리 떨어져 또다시 숲속을 헤매 돌게 되었다. 그는 꿈 속에서처럼 어느 수풀 뒤에서나 그 누구의 뚫어져라 하고 바라보는 눈길이 자기에게로 쏠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 세 사람이 에스토니아 해안에 상륙하던 그날 밤으로부터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딸린의 발찍 정거장에서 검토를 목적하고 서로 만나게 될 날까지도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요나쓰는 딸린까지 다 가지 않고 싸쿠 정거장에서 기차를 내려서는 수풀 속을 지나 거리로 들어갔다. 그와 마주 오는 사람 셋을 만났을 때, 그는 땅에 엎드려 몸을 감추었다. 그는 청산이 들어 있는 조그만 병을 입속으로 쑥 넣었다. 조그만 그 병은 입안에서 구을렀다. '이제, 사람들이 다 오면 이빨을 감물어 버리자. 그러면 만사가 끝이다.'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사람들의 그의 옆으로 지나갔다. 그래도 요나쓰는 미친 듯 뛰노는 심장의 고동을 들으며 오랫동안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얼마 뒤에 일어난 그는 병을 뱉아 버렸다. 그리고는 발꿈치로 그것을 짓밟아 부셔 버리였다. 손으로 호주머니를 쓸어 보았다. 약혼반지는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스웨덴놈들, 저이들이나 독약을 마시라지.'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왜 내가 죽어야만 하나?'
딸린은 아침부터 햇볕이 쨍쨍하게 내려 비치였다. 발찍 정거장에서 상면이 있을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서 요나쓰는 거리를 이리저리 걸어보기로 하였다.
인제 구금이 된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는 무서웠다. 그러나 자수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더욱 무서웠다. 그는 내무서가 자리 잡고 있는 집 창문들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또다시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이나 되듯이 그는 거리를 좀 더 거닐어 보고 싶어졌다.
공원으로 들어간 그는 지치운듯 그 낮고 긴 걸상에 걸터앉았다. 햇볕이 따사로왔다. 그의 맞은편 걸상에서는 한 사람이 신문을 읽고 있었다.
'저것은' 하고 그의 의식 속에는 얼른 이런 것이 떠올랐다. '저자는 그저 신문을 읽은 체할 뿐이야.' 요나쓰는 얼른 공원을 나가 버렸다.
한 반쯤 빈 영화관 홀의 멀직한 한구석으로부터 그는 영사막에 얼른얼른 비치군하는 콤바인들이며 마르팅 용광로들을 호기심에 찬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 결혼식 광경이 나오기 시작하며 높다랗게 결혼 선고를 알리는 소리 속에 신랑이 신부의 입을 맞추는 장면이 보이자 요나쓰는 더 참지 못하고 슬근슬근 출구로 빠져 나와버렸다.
영화관 옆에서 나이 오십 되어 보이는 사람 하나가 그에게 담뱃불을 붙이자고 청하였다.
'이게로구나! 인제 나를 데려가렸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나쓰의 손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보자 그 사람은 빙그레 웃었다. '술을 많이 마시는군.' 하고 생각하며 그는 제 갈 길을 갔다.
'무사했구나!' 하고 요나쓰는 숨을 돌렸다. '이것이 오래 갈까?'
'메딸리 거리 11번지, 5호실' 이렇게 와씰리의 아내는 요나쓰가 라아아쓰마 마을을 나올 때 말하였던 것이다. '거기에 꾸이위이기 늙은 부부가 살고 있는데 아주버니께서 무후로부터 왔다고만 하면 받아들일 것입니다.'
소목 노릇하는 꾸이위이기는 딸린 교외로 살고 있었다. 조그마한 방은 깨끗하고 아늑하였다. 벽들에는 친척들의 사진들, 그리고 이 집 주인의 부지런한 손길에서 이루어진 조각한 선반 같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유리 어항 속의 고동색 물속에서는 버젓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늙은 마리아는 지짐이 남비들을 절거덩거리며 화롯가에서 부산을 피우고 있었다. 얼마 아니하여 남편이 일터에서 돌아올 것이었다.
출입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낯선 사람 하나가 들어와서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얼빠진 듯 바라보더니 닁큼 뛰어 뒤로 물러섰다. 깜짝 놀란 마리야는 층층대로 나왔다. 이 늙은 여인은 또다시 부엌으로 들어온 낯선 사람과 부닥쳤다.
뾰뜰 구이위이기는 별로 다급해 하지도 않고 층층대로 올라왔다. 방으로 들어서는 길로 낯선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는 이 새로 찾아온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묻는 듯한 눈길을 멈추었다.
"바로 무후 토백이 분으로 알리데네께서 오신 이유."
하고 마리야는 말하였다.
"그래요, 잘 오셨소이다. 그런데 왜 손님이 외투는 아니 벗으시오?"
"아니올시다. 고맙습니다. 저는 길이 좀 급해서."
하고 요나쓰는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급히 갈 데가 어딘가?' 하고 그는 제 신세를 생각하였다.
"계셔서 저녁이나 잡수시면 좋을걸요!"
요나쓰는 출입문께로 성큼성큼 가더니 문을 열고 승강대를 내다보았다. 문밖에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저는 댁에 이것을 좀 두고 갔으면 합니다."
하며 요나쓰는 부엌 선반에 꾸러미 한 개를 내려놓더니 그것을 풀어 펼쳤다.
이때 두 늙은이는 팔목시계 여섯 개, 오십 루블리짜리 지폐 두 장, 약혼반지 두 개를 보았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요? 어디루 가시우?"
"묻지 말아 주시오."
"글쎄 어떻게 돼서 이것들을 우리네게 두고 가시는 게요?"
요나쓰는 잠깐동안 무슨 생각을 하였다.
"제게는 이것들이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올시다."
이런 말을 하고는 문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리벙벙해진 두 늙은이가 자기네게 두고 간 시계들을 미처 잘 보기도 전에 요나쓰가 또다시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제 팔목 시곗줄을 끄르더니 제 시계를 또 탁자 우에 툭 던지는 것이었다.
"이것까지도! 이따위 것이 내게 무슨 소용 있겠소!"
늙은이들이 식탁 옆에서 어쩔 줄을 몰라 망설이면서 서로 쳐다만 보았다.
요나쓰는 이미 만나기로 약속된 지점에 나타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지 못하고 역사에서 한 2백미터 떨어진 광장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휙 돌아서서 천천히 한옆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나는 그들에게로 가서는 안 돼!' 하고 그의 사고는 힘없이 움직였다.
'내 뒤에는 미행이 따르고 있다. 내가 갔다가는 그 사람들마저 망치게 하는 게야.'
어리석게도 그는 더 거리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스톡홀름에서처럼 버릇없는 비둘기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밑에서 늘정늘정 거니는 라루쉬나야 광장으로 가고 싶었다. 그는 흙 동둑을 지나 룸페아로 향하여 올라갔다. 좁다란 거리들에게 오고 가는 행인들 무리에 들어 섞였다.
앞에서는 여자 하나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들고 가는 가방으로부터는 고무로 만든 초록빛 악어가 비죽이 내보였다. 그녀와 나란히 걸어가는 남자는 꾸러미를 들고 갔다.
'인제 그들은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내는 음식을 차릴 것이다. 남편은 술잔을 내놓으리라, 그리고 나서는 야간용 슬리퍼를 신고 텔레비죤 옆에 앉을 것이다.' 요나쓰는 자기가 얼마나 배를 곯았으며 또 사시나무 떨듯 얼마나 몸을 떨고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어찌하여 저런 사람은 훈훈한 자기 집에 앉아 있을 수가 있는데 어째 요나쓰는 개처럼 축축한 거리를 헤매 돌아야만 하는 것인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거리의 매점으로 가까이 갔다. 한잔의 워드까는 불처럼 그의 몸을 화끈 달게 하였다. 안주는 부렐부로드로 하였다. 치즈는 말라서 가장자리가 우로 말려 올린 것이었다. 다 먹지도 못하고 그는 어두운 거리를 앞으로 앞으로 헤매어 갔다.
'앞에 저 주정뱅이가 간다. 만약 내무서에서 그를 붙들어간다 해도 그는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을 것이다.'
유보도를 따라가던 요나쓰는 갑자기 휘꺽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마치도 전류에 부딪힌 것 같았다. 다름 아니라 양몰이 하는 개 한 마리가 그의 뒤를 밟아오는 것이었다. 개는 고삐를 빠장빠장 헹기며 땅 위에서 무슨 냄새를 맡아내는 것이다. 그 옆에서 걸어가는 사나이는 가까스로 개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것이로구나'하고 요나쓰는 생각하였다. '이것이야. 이번에는 틀림없구나.'
그는 고개를 어깨에 푹 묻고 기다렸다. 이때 생각에는 그로 하여금 다시 또 뒤를 돌아보게 할 그런 힘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홱 돌아섰다. 그러자 한 그루 나무 곁으로 주인을 끌어당겨 놓고 소변을 보고 난 개는 되돌아서서 갔다. 요나쓰는 등에 속옷이 찰싹 들어 붙는 것을 깨달았다.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 하고 그는 마음을 먹었다. '될 대로 되어라!'
얼른 철도 횡단도를 건너선 그는 자기가 와나 칼나마야 거리로 온 것을 깨달았다.
내무원 야스까는 마치도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내무서 창문만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에게 주의를 돌리였다. 그는 이 낯선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증명서 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 야스까는 물었다.
"증명서 없습니다!"
하며 낯선 사람은 야스까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이 망해 빠질 것들이! 당신에게서 제일 소중한 것은 증명서요. 그러나 내게는 그런 게 없소! 그런 것들이 내게도 있었소. 그러나 그것들은 쓰지 못한 것이였소. 가짜였소, 스웨덴에서 낸 것이었소. 나는 그것들을 다 불살라 버렸소. 알겠소!"
몇 분 지나자 특무 상사는 당직관에게 이렇게 보고를 하였다.
"당직관 동무, 유치해 둔 사람의 인상이 수배받은 그 인상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증명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스웨덴서 발행한 것이 있었다는데 태워버렸다구 말합니다."
얼마 뒤에 요나쓰는 에스토니아 국가안전위원회 일꾼네 사무실로 인도를 받아 들어갔다. 안전 위원회 일꾼은 아무 말이 없이 요나쓰를 바라보았다.
"자, 제가 왔습니다."
요나쓰는 가까스로 이렇게 말하였다.
예심원은 그대로 잠잠하니 말이 없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처럼 요나쓰에게는 보였다. 그리고 나더니 그는 조용히
"우리는 어제부터 당신을 기다렸소!"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오쎄뜨로브의 사무실에서는 사업 토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며칠 전에 모스크바로부터 온 올레곱 장군이 회의를 집행하였다.
예심 과장이 보고를 하였다.
"요한 말찌스 요나쓰의 진술에 의하면 시월 십칠일 에스토니아 해안에 세 사람이 상륙하였습니다. 요한과 하리 위임(윌리)과 셋째 번으로는 '수지'라는 별명을 가진 간첩입니다. 말찌스가 얀센 마을에 체재한 때로부터 우리가 계속하여 온 그에 대한 감시는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진술에서 명백하여진 대로 그는 의례히 검토를 위하여 만나게 된 자리에 갔었을 것이나, 그는 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발찍 정거장에서 분명 기다리고 있었을 수지는 그곳에서 자기의 동료들과 만나지 못하게 되자, 그는 곧 그들이 실패한 것으로 추측하고 급히 종적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헤이나스테 동무."
하고 올레곱 장군은 보고자의 바로 옆에 앉은 소좌를 보고 말하였다.
"말찌스가 알려 준 그 비밀 연락 장소들을 감시한 결과 무엇을 얻었소?"
"아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비밀 연락소에도 수지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밖에 수지가 혹시 나타날 수도 있을 그런 비밀 연락소라고는 말찌스가 하나도 모릅니다."
하고 예심 과장은 말을 계속하였다.
"그는 수지가 딸린 지구 그 어디서 활동하고 있으리라는 것밖에 아무것도 모릅니다. 말찌스가 알려 준 그 비밀 연락소들에게 수지를 기다린다는 것은 별로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윌리' 즉, 하리 위임은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의사들의 통지에 의하면 이 간첩은 생명은 유지하고 있으나 아직 얼마 동안은 완전한 안정이 필요하므로 당분간 심문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윌리가 연결을 맺었던 범인 릴렐레흐트는 체포되었으나 그는 수지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렇소, 잘 알았소. 그런데 비밀장소를 수색한 결과는 어떠하였소?"
하고 장군은 물었다.
"이 면에서는 아무런 성과가 없습니다. 무전기 두 대와 보통 간첩용 장비 외에 또 수십 개의 시계가 나왔습니다. 잘 아는 사실이지만, 간첩들에게는 소비에트 지폐가 부족합니다. 그래 그들은 시계를 받는데 이것들을 그들은 후에 팔아서 씁니다. 수지가 이용하던 비밀장소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 간첩은 기회 좋게 무전기와 장비품들을 다른 장소로 옮긴 것입니다. 말찌스도 이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개도 자국을 따르지 못합니다. 그 자국들이 너무 오랬고 또 특별한 가루약을 뿌린 때문입니다."
"그럼 총화를 지어 봅시다."
하고 올레곱 장군이 말을 내었다. 에스토니아 영토 안에는 스웨덴 정탐기관의 간첩이 행동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전기를 휴대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말찌스의 진술로써도 잘 알고 있는 대로 수지는 그 도당의 괴수로서 아마 다른 두 간첩들이 잘 알 수 없는 보충적 임무를 맡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참으로 많은 것이 윌리의 진술에 달려 있소. 여하간 수사는 계속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하기 위하여 인상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요. 무전 감시를 폐지하여서는 안 됩니다. 동무들, 비밀 연락장소를 잃어버린 간첩들은 의례히 새로 사람들과 기지를 찾는 법이라는 것을 고려하시오.
회의가 끝나게 될 때 올레곱은 윌레르를 보고,
"대위 동무, 나는 동무가 사알리스테 일파를 체포하는 특별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한 데 대하여 소련 국가 안전 위원회 지도부로부터 감사를 표하라는 위임을 맡았습니다."
"소비에트 동맹을 위해 복무합니다!"
윌레르의 대답 소리는 쩌룽쩌룽 울리였다. 오쎄뜨로브를 향하여 장군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 사업에 참가한 다른 사람들을 표창할 데 대한 제안을 준비하여 두시오, 쌀루쏘오를 잊지 마시오.“
위르기니야 주의 기숙사
뜨거운 아프리카의 태양은 어떻게나 갑판에 내려쪼이는지 그것은 마치도 번철을 밟고 가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항구의 기중기는 마치도 하기 싫은 일이나 하는 듯 가까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스웨덴 기선의 짐을 부리는 기중기 운전수는 별로 서두르지도 않았다. 카사블랑카에서는 조급해 말아야 한다. 그러자 사람 하나가 기선 우에서 덤벼대더니 선창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금시로 그를 위생 자동차로 실어 간다.
"저자가 병원에서 나와서 어떻게 본국으로 가게 될까?"
하고 갑판 우에 선 기중기 운전수는 스웨덴 선원을 보고 말한다.
"저자두 작별이유."
하고 선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저자는 에스토니아 사람이요."
병원을 나오는 문간에서 에스토니아 사람 쿡크는 알렉쓰라고 부르는 다른 에스토니아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이것은 별명이었다. 알렉쓰는 쿡크에게 해상 근무를 걷어치워 버리라고 타일렀다. 그는 쿡크에게 그 어떤 다른 직업을 청하였다.
며칠을 지나 미국 정탐배 죤은 뮨헨 정거장에서 '알렉쓰에게서 오는 사람'을 만났다. 이온다는 사람은 의례히 바른편 손에 서류 가방이 들리였을 것이요, 왼편 손에는 잡지 '제에'를 쥐고 있어야만 하였다. 이것이 죤이 이 사람에 대해서 아는 전부였다. 카이젤가스트 42호에 있는 비밀 연락장소에서 죤은 쿡크를 다른 미국 사람들에게 소개한다.
"상금은 7천 달러, 과업은 4~5개월 동안이면 되오! 물어볼 말이 있소?"
"있습니다. 내게는 스톡홀름에 딸이 있습니다."
하고 쿡크가 말하였다.
"걱정말고 하시오. 당신이 과업을 수행하는 동안 매달 3백 50달러씩 당신께 지불할 게요. 그리고 또 출장비로 1주일에 5달러 15센트를 낼 테요. 그런데 아직은..."
쿡크는 안락의자에 몸을 뉘었다. 마치 학자의 실험실에 있는 시험용 개나 마찬가지로 그를 네 가지 기구에 도선으로 연결시켰다. 폐활량계는 숨결의 변함을 표하고, 혈압계는 혈압을 보여주고, 심동 묘사기는 심장의 활동을 적고, 전기 체온계는 땀나는 양을 측정한다. 바른팔은 고무줄로 감기였다. 가슴에는 마치도 방독면같이 고무줄이 달렸다. 소금이 녹아서 축축하니 젖은 바른편 손바닥에는 구멍이 숭숭난 고무 베개가 대여 있었다.
미군의 야전 무전기와 비슷한 커다란 상자 속에는 넓직한 종이 테프가 감긴 조그만 원통이 하나 돌아간다. 모세관 현상 유리관들은 빨간 잉크로 가득차 있다. 만약 쿡크가 그 무슨 거짓말을 하는 경우에는 이 붉은 선에 명확한 굴곡이 나타난다. 이렇게 그들은 그에게 설명을 하여 주었다. 도선들이 쿡크로부터 이 상자에 연결되었다. 바른 팔에 있는 고무줄에 흰 위생복을 입은 사람이 공기를 채운다.
"그저 '네' 아니면 '아니'로만 대답해."
하고 그는 말한다.
여나문 가지 질문에서 첫 번으로 일련의 질문이 나왔다.
"23년 출생이지? 독일군의 지원병이었지? 로씨야 빨치산들을 총살했지?"
쉭하고 고무줄로부터 공기가 빠져나왔다. 또 몇 가지를 쭉 물어본다. 또다시 공기를 채운다. 등 뒤에 서 있는 흰 위생복 입은 사람이 거의 말을 삼키다시피 하며 얼른얼른 묻는다.
"로씨야 탐정기관을 위해 일한다지? 딸이 하나 있다지? 자동차를 가졌나?"
그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묻는 말들은 마치 기관총 사격처럼 쏟아진다.
쿡크는 용지 한 장을 받는다. 의사는 쿡크에게 하나에서 열둘까지 임의의 숫자를 적으라고 한다.
"내가 만일 당신이 생각한 그 숫자를 부른다고 해도 그것은 아랑곳할 것 없이 '아니' 하고 말해요."
하고 나서 의사는 수를 센다.
"하나, 둘, 셋... 여섯을 생각하지?"
하고 그는 소리를 지른다.
"아니요."
하고 쿡크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럴 수는 없소"
하고 의사는 용지장을 들여다본다.
"이 허위 검파기는 꼭꼭 맞히는 법이요."
쿡크를 동반하여 온 미국 정탐기관 장교는 남모르게 넌지시 웃었다. 의사는 당황하여졌다. 그는 숫자 놀음을 계속한다. 또 다시 불발이다.
"인젠 그만두는 게 어떻소?"
하고 장교는 말한다.
"때때로 당신이 범인을 잡는 것은 분명하오. 해도 밀정을 잡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요."
"오늘 술 먹었지?"
하고 의사가 묻는다.
"오늘은 안 먹었습니다. 어제 먹었습니다."
하고 쿡크가 대답한다.
"내가 부탁하지 않습니까?"
하고 의사는 화를 낸다.
"술 취한 사람, 알콜 중독자, 아편 중독자 그리고 정신병자들 같은 것은 보내지 말라구 말이오! 그런 것들에게는 이 기계가 잘 작용하지 않거든요."
쿡크는 이번에 또 다른 의사를 만난다. 여기서는 일련의 다른 질문들로 하여 그의 반응의 신속성과 정확성이 해명된다.
"영화가 상영될 때, 영화관에서 화재가 일어나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자기 어머니를 만나면 어떻게 행동하겠소? 여성 앞에서 부끄러워하오? 만약 당신의 상관이 당신의 부하로 된다면 어떻게 하겠소? 다른 부하들께 대하는 것보다 그에게 더 좋지 않게 대하겠소?"
쿡크는 이런 것을 모른다. 그는 아직도 누가 그의 새 상관인지 모른다. 그는 아직도 이런 미국 사람들과 잘 알지 못한다.
20분 동안에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을 죄다 적는다. 그는 하라는 대로 자기의 모든 결함들에 대해서 쓴다. 그가 이 일을 다 끝내자마자 다른 방에서는 그에게 그림장들을 보여 준다.
하나 또 하나 쿡크 앞에는 마분지 조각에 마구 그린 그림장들이 얼핏얼핏 지나간다.
셔츠도 입지 않은 농부가 밭을 간다. 그 옆에 아내가 있다. 아내는 남편이 일하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작은딸, 큰딸이 있다.
음침한 방 안, 침상 우에 창백한 나이 어린 방랑아가 두 팔을 쩍 벌리고 있다. 한 반쯤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가 있다. 머리가 희끗희끗 세고, 손에 주름살이 잡힌, 나이 지긋한 여인이 청년을 제 가슴에 끌어안는다.
쿡크는 그림에 무엇이 그려졌으며,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무슨 일이 있을 수 있었으며, 또 이렇게 된 뒤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여야 한다.
어제 술을 마시었던 때문에 머리가 쿵쿵거린다. 그림도 숫자도 뒤범벅이 되었다. 며칠이 지나간다.
쿡크는 미국으로 왔다. 뉴욕에서는 벡데일이 그를 맞아 주었다. 워싱턴에서는 포울손이 그렇게 하였다. 쿡크는 자기와 같이 모집되어 온 사람들과 함께 하밀톤 호텔에 밑을 붙였다. 창문들로는 거리의 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자동차가 가로를 쏜살처럼 내달린다. 광고판들에는 자동차 타이야, 소시지, 코카콜라 병들이 얼른얼른 보인다. 목이 마르다.
"잠깐 멎어서 물 좀 마실 수 없을까?"
"후에, 후에, 인제 곧 닿을 테니까!"
북캐롤리나 주다. 낙하산 부대 기지인 '풀부레이크'다. 차는 멎었다! 쿡크와 그의 새로 사귄 친구 토오믈라가 차에서 내린다. 기지 둘레에는 키 낮은 소나무가 빙 둘러 나 있다. 숲속을 거닐고 싶다.
"후에, 후에."
한다.
높은 데서 시험 삼아 내려 뛸 때면 다리가 식어 들고 숨이 콱콱 막힌다. 이 새로운 작자들을 미국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낙하산병인 톰이 맡아 가르친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는 것을 열두 번. 그만하면 넉넉하다! 이번에는 비행기에서... 날은 자꾸만 간다. 아직도 열 번을 더 비행기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그만하면 됐어. 낙하산 운동가라면 그야 물론 이것으론 안 되지만, 간첩으론 됐어!"
또다시 워싱톤으로 간다. 하밀톤호텔 창문 너머로 거리 어디선가 왁자지껄 떠들어댄다.
"산보나 하며 거리 구경을 했으면요?"
"후에, 후에."
한다.
워싱턴으로부터 40킬로, 메릴랜드주. 조그마한 도회인 포울쓰 윌에게 3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간첩 학교다. 조용한 농촌 풍경이다. 2층 집이다. 그 밑층에는 부엌, 식당, 휴게실이 있다. 여기에는 요리사로 일하는 흑인 여자 아일리가 사는 방이 있다. 저녁이면 그의 남편인 정원사 로겐(그야 물론 같은 흑인이다)이 하모니카를 불기도 한다. 2층에는 침실이 둘, 교사들의 방 그리고 교실이다. 이 집 뒤로는 테니스 코트와 배구장이 있다. 여기 교실에는 수화기, 방송기, 암호와 전신 약호가 적힌 용지들이 보인다. 칼리유 쿡크(이제부터는 '카알')와 한츠 토오믈라(이제부터는 '알투르')는 간첩 학교의 과정을 배우기 시작한다.
위르기니야 주. 쿡크와 토오믈라는 파이팎쓰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국 정탐기관의 별장에 있다. 이 집은 오래된 나무들 속에 들어 창문으로는 이 나무들이 바라보였다. 나가서는 안 된다. 꼬박 하룻밤, 하룻낮 동안 그들은 호위 속에 있다. 밤색 머리털이 고불고불한 미군 중위 베른이 왔다갔다 한다.
죠르쥐가 그와 교대한다. 그는 백로씨야인이며 짜리 군대 장군의 아들이다. 지금 그는 해군 장교로 있다. 쿡크와 토오믈라에게 사격을 가르친다. 그들을 감시하는 것은 미국 해군의 키잡이인 독일사람 데일이다. 폭발물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외에 데일은 경리 부문도 맡아본다. 그는 체중이 1백 10킬로나 나가는 키 크고 몸집 튼튼하고 살빛도 머리빛도 눈빛도 밤색을 띤 사람이다.
자주 새까만 '포드'(자동차 이름)를 타고 파울 포울손이 오군 한다. 그도 키가 크고 몸집이 튼튼하나 그는 금빛 머리에 눈은 파랗고 머리털은 성글다. 뚝 구부러진 매부리코 밑에 난 수염 끝을 어루만지며 그는 학생들의 성과에 대해서 묻는다. 입에 궐련을 물은 채로 그는 기숙사에 있는 매 학생들에 대하여 하나 하나 자세히 묻는 것이다. 그가 돈을 지불한다. 이 학생들이 앞으로 소련으로 갈 때, 그때에도 그가 돈을 지불할 것이다. 출장 여비는 하루에 5달러이다.
두 달이 지나 그들은 또다시 '풀부레이크' 군영으로 왔다. 여기서 배우는 일은 독도학, 방위 나침반에 의한 원거리 행군, 폭발물, 변신법, 자동차 조종법들이다. 교수들의 강의로는 에스토니아 경제, 소비에트 반탐정 기관의 활동 방법들이다. 하루에 네 시간은 무전 훈련이다. 쿡크와 토오믈라는 매일 열 시간씩 공부를 한다.
절제 있게 행동할 것, 요리집으로 술을 마시러 돌아다니지 말 것, 여자들과 관계하지 말 것, 돈을 낭비하지 말 것이라는 지시가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런 문서도 작성하지 말 것이라는 것이다.
오락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대전 시기 불란서와 서반아에서의 영국 간첩들의 활동에 대한 영화들이다.
한번은 레겐다(주-밀정이 위장할 가상적인 '제2의 생애'에 대한 기록)를 가져온 일이 있다.
그것은 어느 것이나 각각 30페이지에 걸쳐 타자된 것이다.
쿡크는 앞으로 소지하게 될 위조 증명서들에 씌어 있는 일마르 딸루웃쓰로 변하게 되었다. 따흐꾸란나 태생인 빈농의 아들로 말이다.
"41년도에 소비에트 군대의 부대들과 함께 레닌그라드까지 후퇴하였습니다." 하며 쿡크는 단조롭게 지껄였다.
"소비에트 군대가 아니라 붉은 군대요."
하고 토오믈라가 그의 잘못을 고쳐 준다.
"첼랴빈쓰크의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그 뒤로 까잔으로 옮겼고 또다시 전선으로 나갔다가 어깨에 부상당했습니다."
하고 쿡크는 연송 장님 파랑경 외우듯 외여 간다.
"그래 후방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어깨에는 실상 상처 자리가 있다. 그러나 이 상처는 독일 군대에 복무할 때 받은 것이다.
"울라지미르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위생 병원에 남아 일을 보았습니다."
쿡크는 잠깐 동안 무슨 생각을 한다.
"이것 봐요, 알투르."
하고 그는 물어본다.
"자네 한 번도 레닌그라드에 가본 일 없지?"
"없어."
"그럼 까잔에는, 울라지미르에는?"
"첼랴빈쓰크에도 글쎄 못 가 봤네. 건드리지 말게! 나는 자기 것을 외우는 것만 해도 힘드네!"
"어떻게 할 것인가?"
"44년도에 전선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르바 부근에서 전투했습니다."
하고 쿡크는 말을 이어 나간다. 방 안에서는 그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와 종잇장 번지는 바스락 소리만이 들려온다.
"나르바 부근에서 왼팔에 부상을 당했습니다."
상처 자리가 있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술집에서 칼부림을 하다가 다친 자리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날이 가고 또 간다. 하루하루가 서로 비슷들하다.
"푸시킨에 있는 벽돌 공장... 그리고는 무엇인가? 아, 그렇지! 딸린의 어류 꼼비나트."
혹시 구류를 당하면 제시할 확인서가 있다. 거기에는 그가 휴가 중이라는 것이 확증되어 있다.
또 넉 달이 지났다. 학습 과정도 끝났다. 이제는 과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내린다. 비행기에서 투하된 뒤로 그들은 '닉씨'라는 별명을 가진 스웨덴 간첩을 찾아야만 하였다. 스웨덴 사람들이 준 과업에 따라 닉씨는 간첩 행동을 확대하는 목적에 이용하기 위하여 근거점을 몇 곳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닉씨와의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서는 스웨덴으로 보내온 일련의 주소들과 암호들이 있다. 포울손은 쿡크에게 종이 베는 칼을 하나 전한다. 이 물건은 한때 닉씨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서 그는 이것을 곧 알아차릴 것이었다.
토오믈라의 호주머니 속에는 닉씨에게 전하는 또 다른 암호가 들어 있었다. 즉, 들쑹날쑹하게 자른 자리가 나 있는 사진 반장이 그것이었다. 닉씨는 다른 반장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은 앞서 것에 꼭 들어가 맞게 될 것이다.
졸업생들은 모두들 자기들의 사사 물건들을 남기고 간다. 쿡크는 은으로 만든 조그만 칼, 딸의 초상이 그려진 금속판 달린 반지, 'KK'라는 머리글자만 모아서 새긴 만년필을 내주었다.
토오믈라도 제 호주머니를 다 털었다.
그들은 다시 한번 과업을 되풀이한다. 포울손이 눈을 한 반쯤 감고 앉아 듣고 있다.
"군대와 비행장의 배치 상황을 정찰하며, 새로운 무장 종류 및 항만 구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것, 미국 낙하산병들을 하륙시킬 수 있는 광활한 지대를 탐색할 것, 닉씨와 연락을 취할 것."
"닉씨가 잘 활약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오."
하고 포울손은 말을 보탰다.
"그는 귀한 정보를 많이 전해 주고 있다. 그가 어떻게 지구 도로국의 운전수로 처신할 수 있었는가 하는 데 대해서 그와 의논해 보시오. 만약 닉씨가 기지에 없으면 함부르크를 통해서 그를 찾아보시오."
"잠깐만."
하고 포울손은 이 간첩들이 의례히 찾아내야 할 그 닉씨에게 전하는 왈라진의 자필로 된 편지 한 장을 끄집어내었다. 그것은 토오믈라의 손에 들려 있다. 쿡크는 어깨너머로 그것을 읽는다.
"경애하는 닉씨! 오래 소식 끊겼던 중, 이 편지를 당신께 전하게 되며 또 그 자신이 당신과 만나고 싶어 하는 동무 한 사람을 통하여 인사를 전합니다. 만약 이 편지를 전하는 동무가 당신의 도움을 받고자 할 때에는 힘껏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를 끝맺으면서 당신의 다복하심을 비옵니다. 앗쓰."
이 편지는 닉씨와의 연락을 위한 암호들과 더불어 스웨덴에서 미국까지의 기나긴 노정을 뚫고 왔다.
그러면서도 불쾌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만약 파국이 되는 경우에는 미리 신호를 정해 두는 것이다. 그리고 또 더욱 살아서는 항복하지 말아야 한다니 어찌하랴!
간첩들의 호주머니 속에는 소비에트의 증명서들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서부 독일로 비행하는 데 대한 미국의 공식 신임장이 또한 있었다. 이것은 만일의 경우에 도중에서 불시착이라도 하게 됨을 염려하여서였다.
갔다가 돌아온다는 것은 반드시 본부의 허락을 맡아야만 한다. 즉, 쿡크는 무로만스끄와 소비에트 노르웨이의 국경을 거쳐서, 토오믈라는 분란을 거쳐서 제마끔 돌아오게 된다. 본부의 허락 없이 소련 영토를 떠나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여 이들 두 사람은 벌써 서부 독일로 오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다. 포울손, 빱, 테일이 낙하산 관계 전문가들과 함께 뮨헨에 있는 군용 훈련 비행장으로 떠났다. 여기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길이 나선다.
프랑크푸르트 비행장에서는 비에 젖은 콘크리트가 번쩍거린다. 여름 들판 구석구석에는 미국 표식을 단 비행기들이 놓여 있다. 자동차들은 네발 비행기 있는 데로 가까이 간다. 이 비행기에는 표식이 보이지 않았다. 기실로 들어가는 간첩들의 뒤로 문이 쾅하고 닫긴다. 발동기들이 요란하니 부르렁거린다. 쿡크는 포울손에게 또 쓸데없이 한번 그 어린 딸아이를 잊지 않게 하느라고 기실의 채광창에 대고 손 시늉으로 어린아이의 모양을 그려 보인다. 그는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키며 끊길락 이을락 '딸... 스톡크-홀-름' 하고 입술을 놀린다.
포울손은 알아차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쿡크는 미국 사람의 입술이 '후에, 후에' 하고 노는 것을 분명히 눈으로 붙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비행기는 이미 출발하려고 땅 위로 활주한다.
여섯 시간 비행기는 끝났다. 사위는 캄캄한 납같이 무거운 밤이다. 광대한 어두운 밤하늘에 다만 하나 움직이는 점이 있다. 비행기다. 계기들에는 희미한 불꽃이 비친다.
"뛰어내릴 채비를 하라. 에스토니아 상공, 윌리얀디 지구에 왔다."
간첩들에게 이런 말이 전하여 온다.
밤 한 시, 비행기 동체의 옆문이 열린다. 먼저 토오믈라가 뛰어내린다. 그 뒤로 쿡크가 달린다. 두 개의 조그만 점들이 아래로 아래로, 에스토니아의 땅을 향하여 내려간다.
토올믈라는 얼른 제 낙하산을 파묻고 쿡크를 찾아간다. 그는 신호 소리인 찍찍하는 두더지 소리가 들릴 때까지 휘파람을 불었다 말았다 하며 숲속을 헤매어 돈다. 숲속을 들여다보다가 주저앉는다. 두더지 소리는 바로 곁에서 나나 토오믈라의 눈에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갑자기 공중으로부터 소리가 들려 온다.
"글쎄 내가 여기 있는데, 자네는 주저앉기는!"
하고 쿡크가 성이 나서 말한다. 소나무 꼭대기에 마치 커다란 천막인 듯 둥그런 낙하산이 쭉 펼쳐져 있지 않는가. 낙하산, 그 줄에 얽히여 쿡크가 드렁드렁 매달려 있다.
'소나무들두 원, 이런!' 하는 생각이 토오믈라의 머리에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이것들은 우리들이 훈련을 받은 그 풀부레이크 부근의 난쟁이 같은 것들과는 달라.
"글쎄 왜 서 있나? 좀 도와줘."
하고 쿡크가 나무 우에서 목갈린 소리를 지른다.
토올믈라는 생각한다. '소나무에 오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무 꼭대기에 붙어 돌며 둥그런 천장 같은 낙하산을 다 벗겨 놓자면 이것은 밤새도록 해야 될 일이 아닌가'고.
"천치 같으니라구! 낙하산 줄들을 끊지도 못해?"
하고 토오믈라는 말한다.
"칼이 떨어졌어. 자네 것 좀 던져 주게!"
토오믈라는 접힌 칼을 펴더니 그것을 위로 튀친다. 칼날이 쿡크의 얼굴 가까이에서 번뜻하고 빛난다. 그가 겨우 몸을 기울이자 칼자루가 간첩의 머리에 놓인 철모에 쩡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부딪쳤다.
"어디다가 던지는 겐가?"
하고 쿡크는 한숨을 쉬였다. 매우 등달아하는 기미였다. 설레는 것이 있었다.
"글세 입으로 잡지 말고 손으로 잡아야지!"
토오믈라는 몇 번이나 칼을 올려 던졌다. 드디어 쿡크는 칼을 잡아서 그것으로 낙하산 줄 한 가닥을 툭 끊었다.
"인제는 뒤집히지 말게. 그랬다는 머리를 아래로 박고 달아나네."
"자네 아니라도 알고 있네."
드디어 그는 땅 우에 쿵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리고는 높다란 목소리로 욕을 하였다.
"왜 온 숲속이 다 울리게 떠드나!"
"난 다리를 다친 모양이야. 그리구 손도 어쩐지 아파... 붕대로 동여매야만 할까봐."
"그럴 틈이 없네."
하고 토오믈라는 화가 나서 투덜댄다.
"그럭저럭 거의 한 시간이나 우물거리거든."
낙하산을 벗길 수는 도저히 없었다. 간첩들은 얼른 아욱싸아르를 떠나 멀찍이 삼십육계를 놓았다.
닉씨를 찾아서
벌써 닷새째나 쿡크와 토오믈라는 숲속을 헤매돈다. 이 동안에 그들은 죽을 고생을 다해 가며 겨우 45킬로를 지나갔을 뿐이다. 그 뮐디마라바라의 무시무시한 물구덩이는 하마터면 그들을 통째로 삼켜 버릴 뻔하였다. 그들은 통조림을 먹으면 그 빈 통들을 치밀하게도 일일이 물 웅덩이 속에 묻으며 걸었다. 드디어 그들은 파르누까지 와 닿았다. 거리로 지나가며 토오믈라는 중얼거린다.
"바보들이여! 에스토니아를 두구 그렇게도 지껄이기에 우리들의 그걸 정말로 믿으려 하지 않았겠나!"
"자네 무슨 소리가?"
하고 쿡크가 물었다.
"글쎄 그것들이 우리들을 거지루 차려 놓았으니 이게 될 말인가! 이런 꼴을 하구서야 정말 내무서로 붙들려 가기 꼭 알맞거든."
그들은 상점에서 장비를 하여야만 하였다. 그들은 한꺼번에 자전거 두 대를 샀다. 이것으로 하여 그들은 보다 기동적으로 될 수가 있었다. 한동안 자전거를 감추어 놓고 그들은 딸린으로 잠입할 방도들을 생각했다. 게서는 함부르크를 통하여 닉씨와 연락을 취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약속된 장소에 닉씨는 보이지 않았다.
콜라네 거리, 5번지. 토오믈라는 보도를 오고가고 한다. 쿡크는 어쩐지 집안에 푹 박혀 있었다. 드디어 곰팡이가 낀, 다 낡은 문이 열리며 쿡크가 나온다.
"그래, 어떻게 됐나? 일이 잘 됐나?"
"다 틀렸네. 닉씨가 한 달 전에 그 집에 왔었다는군. 그 뒤로는 한 번두 안 온다는데."
"그래, 그리고는?"
"난 그에게 자동차 한 대 값으루 1만 5천 달러 치르고 왔네. 무전기의 전력은 자동차 축전지를 쓰기루 하세. 얼마나 민첩한가 말이지!"
저녁 늦게 쿡크와 토오믈라는 공동 묘지에로 가까이 갔다. 울타리를 훌쩍 넘어 달빛 비치인 소로를 따라 걸어 갔다. 무덤 옆에는 조그만 걸상이 놓였고 바늘 같은 젓나무가지 잎새는 은빛으로 빛났다. 그런가 하면 반들반들하니 같은 대리석 묘비가 또한 번쩍거렸다.
"여기루 할까, 응?"
하고 쿡크가 물었다.
"여기루 하세. 예만하면 길에서 꽤 머니까."
"이 무덤이 괜찮네, 꽃들도 있구."
하구 쿡크가 말하였다.
"난 저기 누울가베."
"머리에 벨 것이 아무것두 없어서 안 됐네."
하고 토오믈라가 말하였다.
"글쎄 자네 저쪽 무덤에서 화환을 가져다가 웃옷삼아 덮게. 자네 먼저 자지, 내 파수 볼게."
토오믈라는 오랫동안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그 어디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늘어지게 들려왔다.
"그런데 함부르크가 우리를 배반하지 않을까?"
하고 토오믈라가 물었다.
"걱정 말어, 떠나기 전에 내가 잘 일러 주었거든, 글쎄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소비에트 안전기관에서는 그가 강점 시기에 한 일에 대해서 말이지."
토오믈라는 잠깐 말이 없었다.
"이것 봐, 그런데 그에게서 영수증을 받았나?"
하고 쿡크는 그에게 물었다.
"아냐, 그저 돈만 주었지! 받았으면 그만이지. 어서 가게. 내일 아침 일찍 우리 여기서 떠나세. 본부에 뭐라고 무전을 쳐야지. 그런데 대체 어디 그 망할 닉씨라는 것이 있을까?"
둘째 번 주일을 간첩들은 토오믈라의 어머니, 리자가 사는 마을에서 지냈다. 토오믈라의 누이 헬리기는 곧 그들을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그는 복사하라고 전 번호부를 가져다주었고, 케루구 마을에서 생긴 모든 일을 간첩들에게 죄다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외국으로 편지를 보낼 줄도 알고 있었다. 그로서는 이런 것을 한다는 것이 그리 난처한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케루구 마을에서 그는 우편 통신원 노릇을 하고 있었던 때문이다.
그 대신 늙은 리자는 그 아들의 새로운 직업을 알고 괴롭게 지냈다. 처음에 그는 토오믈라와 그 친구가 정말로 수용소로부터 탈주하여 온 줄로 믿었으나, 그 이튿날이 되자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이 어머니는 잠도 마음의 안정도 한 가지로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를 더욱 성가시게 한 것은 헬리기였다. 늙은이는 딸이 그 쿡크와 같이 숲속으로 들어가군 하는 것이며 낡은 담장 틈새기에 무엇을 감추는 사실들을 눈치채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또 다른 그 어떤 눈꼴 사나운 행실을 보게도 되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헬리기가 조금도 수줍어하는 일 업이 쿡크와 한 침상에 드러눕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에 술 때문에 퉁퉁 부은 헬리기의 낯을 바라보며 그 어머니는 딸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네가 나 같은 것은 엽전 한 푼어치 값도 없는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러나 네 오라비는 좀 어려워해야지!"
"시끄러워요!"
하고 헬리기는 쫑알거렸다. 그는 팔에 찬, 문자판이 꺼먼, 외국제 금시곗줄을 바로 하고는 그 늙은 어미에게 술 냄새를 콱콱 끼얹으며 집을 나서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이나 좀 보살펴 줬으면 좋으련만, 몹쓸 년 같으니라구!"
어머니는 딸의 뒤에 대고 이런 말을 던지곤 했다.
저녁녘이 되어 마을로 헬리기의 남편인 노오르마가 왔다. 그는 벌써 이태째나 이 집 가정에서 뛰쳐나, 옆 마을 어떤 계집한테로 가서 붙어 사는 터이나, 보름에 한 번씩은 토오믈라네에 들려서 제 전날 여편네에게 주먹다짐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여겨 오는 작자이다. 그래 지금도 그는 별로 길게 말한 것도 없이 또 그 노릇에 달라붙는 판인데 마침내 쿡크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아!"
하고 노으르마는 소리를 쳤다.
"알고 보니 네년이 서방질을 하는구나. 그럼 좀더 맞아 봐라!"
"그만 둬!"
하고 쿡크는 헬리기의 앞에 막아 나서며 위협 절반 말하였다.
"저리 가! 내가 너를 무서워할 줄 아니!"
노오르마는 물러가며 쿡크를 향해 이렇게 떠들어댔다.
그는 마을을 나서며 오랫동안 또 욕지거리를 하였다. 통나무에 걸터앉은 쿡크와 헬리기에게는 술 취한 작자가 지껄인 가지가지 형용이 죄다 귀에 들어왔다.
"걱정 말어."
쿡크는 센 털이 더러 섞인 헬리기의 머리털을 쓰다듬어 가며 이런 말을 하였다. 그리고는 제 손바닥을 아랫바지에 대고 문지른 뒤에 또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다 잘 될 게야. 내일 2백 루블리 줄테니 옷 해 입어..."
헬리기는 눈물을 머금고 입안엣 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 하나만이 나를 알아줘요. 다들 마음보들이 사나워서, 다들 나를 미워해요. 얼른 결혼하게 될까요?"
헬리기는 쿡크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후에, 후에."
쿡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대꾸를 하였다.
며칠 뒤에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안전위원회에 정보가 들어왔다. 일련의 도시들에 있는 무전 방향 탐지기들이 정체 미지의 무전대를 포착하였다는 것이다. 방위선들의 교차는 에스토니아 영토 내에 3각형을 형성하였다. 그 다음날 이 교차점을 향하여 무전 방향 탐지기가 설치되어 있는 자동차 세 대가 떠나갔다. 두 주일이 지난 뒤에 앞서 것과 동일한 필체로 된 무전수의 교신 방위를 측정하였다. 이제는 3각형이 축소되여 그 변들이 몇 킬로미터에 맞먹게 되었다. 3각의 북쪽 부분에는 울창한 밀림 지대가 들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수사대는 이동 무전 방향 탐지기를 가지고 구역 일대를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간첩들은 교신하지 않았다.
키카쓰 대좌의 사무실로 들어간 루낀 대위를 대좌가 서류를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위는 문가에 우뚝 선 채로 대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중년 고개를 넘은 대좌가 그 무슨 증서를 골똘히 연구하고 있었다. 대위는 학습장을 검사하는 소학교 교사가 자기 앞에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무슨 일이오?"
하며 키카쓰는 코끝에서 안경을 벗기며 대위에게 물었다.
"앉으시오! 보고하오!"
"아욱싸아르 마을 부근 숲속의 나무 우에서 낙하산이 발견되었습니다."
하고 대위는 보고를 시작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어느 표식 불명한 비행기 한 대가 국경을 침범하고 들어와 이 지구를 통과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밖에 또 무전 방향 탐지소의 자료가 있고."
하고 키카쓰가 말하였다.
"대좌 동지, 옳습니다! 저는 수색 방침을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내게도 여기 관해서 몇 가지 제의할 말이 있소. 우리 상부에 보고합시다. 모스크바로 전화를 걸어야만 하오."
이른 아침 쿡크와 토오믈라는 자전거들을 타고 술 속 좁은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제가끔 허리에 권총을 한 자루씩 차고 있었고, 웃저고리에 또 한 자루씩 가지고 있었다. 어깨에는 무전 장치 부속품들이 들은 배낭들을 짊어졌다. 부슬부슬 가는 비가 내렸다. 쿡크와 토오믈라는 숲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들은 자전거들을 숲속 덤불 속에 감추어 놓았다. 젓나무 꼭대기로 돌이 하나 뒤에 끄나불을 끌며 날아올라 갔다. 그 끄나불에는 안테나가 달려 있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젓나무 꼭대기로 그 끄나불의 다른 한 끝을 던지여야만 하였다. 높이는 적당하였다. 10미터였다. 토오믈라는 누가 오지나 않나 하고 덤불 속을 들여다도 보고 귀를 기울이고 듣기도 하면서 멀직이 왔다갔다 하였다. 그들은 안테나를 프랑크푸르트-나-마이네 쪽으로 세워 놓았는데, 거기서는 정탐기관 본부의 무전 기사들이 수신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땅에 닿은 줄은 안테나와 평행하여 풀 우에 놓였고 지시반이 번쩍였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송신이 시작되기까지에는 아직도 2분이 남았다.
3분 동안 쿡크는 호출 신호를 보낸다. 중앙의 청취 감도는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본문을 보낼 수 있다. 무전문에 나오는 암호 그루빠의 수량을 우선 알려 놓았다. 그는 본문의 첫 부분을 송신하였다. 그것은 노오르마 헬리기를 흡수하였다는 정보였다. 쿡크는 송신을 일단 끊고 수신의 정확성을 물었다.
바로 이때 숲속으로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매 그루빠 마다에 무선 전신수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한창 활약하는 쿡크의 무전 송신기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바로 여기, 어디 아주 옆에서 났다.
"당신네 그루빠는 북쪽으로 가오."
하고 키카쓰는 자기네 무전사에게 분부를 한다.
"당신네들은 조금 서쪽 방향을 취하오."
키카쓰는 또 다른 그루빠의 지휘자에게 지시한다.
"간첩은 벌써 5분 반 동안 송신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무전사는 말한다.
"대좌 동지! 자동차들이 준비되었습니다."
루낀이 보고를 한다.
"좋소, 아직 이르오. 그리구 체포하는 것은 포위망이 종국적으로 좁아든 때에 가서 합시다."
"닉씨를 찾지 못함. 그는 접선 장소에 나오지 않았음."
하고 쿡크는 송신한다.
쿡크의 손에 들린 전건이 빨리 뛴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무전사가 지금 녹음 등록된 것에 비추어 나의 무전 필적을 검사하고 있겠구나.' 하고 그는 생각한다.
"당신네 구루빠는 예전 방향으로 계속 전지하오."
하고 키카쓰는 분부한다.
"혹시 놈들이 당신네게로 마주 나올지도 모르오. 산 채로 잡도록 노력하오."
"비행장에서 로켓식 추격기 9대를 발견. 공작이 잘 되어감."
하고 쿡크는 두드린다.
"비행장을 에돌아서 가오."
하고 키카쓰는 구르빠에게 명령을 한다.
"좀더 동쪽으로 행진하오."
"대좌 동지."
하고 무전 전신주가 보고를 한다.
"간첩이 송신을 끝냈습니다."
"자동차에들 올라타시오!"
하고 키카쓰가 지휘한다.
"루낀, 내 차에 타오."
쿡크는 안테나를 당겨 떼여 놓는다. 그는 명랑하니 휘파람을 분다. '토오믈라가 오늘 일 잘한다고 치하받은 줄 알게 되면 좋아하겠다' 하고 그는 생각한다. 무전 장치는 복잡하다. 쿡크는 풀숲속에서 자전거를 끌어낸다. 이 때 마침 와닿은 토오믈라가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후에, 후에."
하고 쿡크가 말한다.
"집에 가서 이야기하지, 좀 기분 좋은 일이 있네."
토오믈라는 자전거에 올라앉더니 가버린다. 얼마 동안 기다리고 나서 쿡크도 움직이는데 이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대략 25미터밖에 안 되었다. 토오믈라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귀에 들려온다. 그는 수사 그루빠 중의 한 그루빠가 벌써 간첩을 눈치채고 무전으로 그의 인상을 전하고 난 것을 깨달을 리가 없었다. 말로 인상을 그려 준 외에 또 복장에 대한 자료 즉, 웃자켓에 단추 하나가 모자란다는 자료도 알려 주었다.
토오믈라를 마주 향하여 자동차가 움직인다. 운전사와 나란히 키카쓰 대좌가 앉아 있다. 빽빽한 숲속을 들여다보며 그는 후하고 한숨을 내쉰다.
"뭐 그렇게 괴로워하세요?"
하고 뒤에 앉은 사람 하나가 묻는다.
"저기 산닭이 끔찍이 많은데... 하긴 루낀, 동무는 사냥꾼이 아니니, 내 심정을 어떻게 알 수가 있나!"
"대좌 동지, 저는 지금 딴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대 동무는 그렇게 짐작하오? 내가 산닭을 생각한다고? 멎엇! 여기요!"
하고 키카쓰는 갑자기 말을 중동무이하고 만다.
"자동차를 저 젓나무 숲속에 위장해 두오. 루낀 나하구 같이 가오. 그 나머지 사람들은 길 딴 쪽 풀 숲속에 들어가 있으시오."
"자전거 자리 보이지?"
하고 키카쓰가 물었다.
"분명합니다. 저기는 둘씩 나 있습니다."
루낀은 이렇게 말을 받았다.
"감시 그루빠는 놈들이 우리 쪽으로 마주 온다고 전합니다."
하고 무전사가 키카쓰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토오믈라는 좁다란 숲속 길로 자전거를 타고 간다. 그는 이렇게 하여 키카쓰와 루낀이 매복하고 있는 곳 옆으로 오게 되었다. 풀숲이 설렁대었다.
"멎엇! 손들어!"
토오믈라는 '콜트'를 뽑아든다. 그는 포위권의 아무데나 대고 사격을 한다. 사격을 한다. 한 번 더 방아쇠를 누르려고 한다. 그러나 풀숲으로부터는 키카쓰의 사격 소리가 요란하니 들린다. 그러자 토오믈라는 길라 도랑으로 굴러 떨어진다.
권총을 뽑아 든 쿡크는 강철 압착기가 손목을 눌러 조이는 것 같은 것을 느끼였다. 다시 한순간이 지났을 때에는 쿡크의 입은 죽 같은 진창으로 가득찼다. 그는 찬 진창에 누웠는데 그 등을 그 무슨 무거운 것이 내려 누른다. 쿡크를 일어나도록 두어 둔다. 그는 눈앞에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고 토오믈라를 굽어보는 광경을 보았다. 키카쓰 대좌는 그의 맥을 짚어 본다.
"살았군. 어서 자동차를 가져오오!"
하고 키카쓰는 명령을 한다.
"루낀 동무, 어떻게 됐소?"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대위는 자동차 안에 앉았다.
"좀 다쳤는가 봅니다."
하고 그는 대답한다.
쿡크의 신문도 끝나갔다. 키카쓰 대좌는 이렇게 되물었다.
"당신은 닉씨와 연락을 취하려 가던 것이라고 진술하는 게지? 그럼 토오믈라는?"
"그도 마찬가집니다."
"그 닉씨라는 건 누구요?"
"아무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암호만 있습니다. 로버트 함부르그가 연락을 취해 주게 되어있습니다."
"새로운 사건이로군."
하고 대좌는 혼자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아무도 모르는 닉씨라는 사람이 있군.'
그 날 저녁 그는 이 일을 오쎄뜨로브에게 보고하였다.
"아마 닉씨와 수지라는 것이 같은 한 사람일지도 모르오."
하고 오쎄뜨로브는 말했다.
수지는 '고기 새끼'를 잡는다
수지는 무전 장치를 접어서 유지로 싸고 그것을 또 다시 고무천으로 쌌다. 그리고는 이것을 검은 쎄로판 카바 속에 넣고 쟈크를 채웠다. 난수책에서 다 쓴 용지를 뜯어내서는 망토 자락으로 불을 가리우며 그것을 불살라 버렸다. 용지는 아랫바지 뒷호주머니 속에 감추었다. 그리고는 나무에 던졌던 줄을 거두어서 둥그렇게 사리였다. 무전 장치와 같이 이것을 그는 미리 파놓았던 구멍에 넣고 흙과 주름 잡힌 고동색 나무 잎새들로 말짱하니 덮었다.
황혼도 짙어서 수지는 사람의 눈에 띠일 염려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길에까지 달려간 그는 길섶에 쭈그리고 앉아서 자동차의 발동기 소리가 들려오지나 않나 하고 귀를 기울였다. 지금 그는 여기를 떠나서 열 킬로 내지 열다섯 킬로쯤 딸린 쪽을 향하여, 같은 방향으로 가는 자동차에 올라 뺑소니를 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지는 여기에서 자기의 뒤를 따르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경계하는 마음이 전혀 없지도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스톡홀름에서 왈리진은 로씨야 사람들의 무전 감시 설비가 그렇게 녹녹하지는 않다고 경고를 준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수지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촌길과 평행으로, 그곳으로부터 몇 미터 상거를 두고 커다란 젓나무들 뒤에 푹 감추어져 있어서 눈에 띄일락 말락한 오솔길을 잡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는 때때로 발길을 멈추고 서서 귀를 기울여 무슨 소리가 나나 들어보기도 하면서 한두 시간 걸어갔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 그는 그가 무전을 치던 그 장소에서 어지간히 멀리 떠나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수지는 지쳤다. 그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서 궐련을 한 대 또 한 대 거푸 두 대나 피웠다. 얼마큼 몸이 거뜬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 석 달 반 동안에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쳤다.
상륙한 뒤로 수지는 10월 스무 날 경에 윌리와 헤어졌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비밀 연락소로 가지 않았다. 그는 차로, 도보로 에스토니아를 두루 돌아다니며 물정을 구경할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한 달이 지난 11월 20일, 그는 딸린의 발찍 정거장에서 윌리와 요나쓰와 셋이 만나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있었다. 수지는 셋이 만나고 난 뒤에야 자기의 비밀 연락소를 찾아가서 일을 시작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조심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세 사람에게는 각각 자기들의 비밀 연락장소가 있고, 각자의 비밀 연락장소는 다른 두 사람이 다 알게 되여 있었다. 그런 까닭에 만약 윌리와 요나쓰가 붙들리는 때에는...
윌리도, 요나쓰도 11월 20일에 발찍 정거장에 오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두 달 반이 지나갔다. 그동안 수지는 윌리와 요나쓰가 붙들려 자기들의 비밀 연락장소가 판출이 난 것이라고 믿게 되자 숲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몇 번이나 그는 안드레아쏜을 저주하였던가! 세 사람에게 모두 그들의 비밀 연락장소를 알리다니! 이것은 용서 못 할 어리석은 짓이었다!
수지는 세 번 본부에 무전을 보냈다. 두 달 반 동안이니 그만하면 괜찮았지 않았다. 그는 두 번 본부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스웨덴 사람들은 윌리와 요나쓰에게서 아무런 정보도 들어오지 않아 불안해하였다. 분명 그들은 수지를 두고도 불안해하는 모양이었다. 마지막 번에는 그들이 '보충 자금이 필요한가?' 하는 검토 질문까지 하였다. 오늘 그는 본부와 자기만이 아는 '나무 잎새가 떨어진다'라는 미리 정해진 어구로써 대답을 하였다. 이것은 그가 독자적으로 행동을 하며 국가 안전기관 일꾼들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상, 그는 자기가 이런 지배 아래 있다고는 생각하기가 싫었다.
수지는 스스로 제 생각에 빙그레 웃음지으며 담배꽁초를 결패있게 발로 꽉 짓밟아 버렸다.
그만이다. 휴식도 끝이 났다. 가야 할 때다. 수지는 나무 잎새를 쥐어 구두의 진창을 닦고, 옷매무새를 될 수 있는 대로 단정히 하고 나서 촌길이 딸린으로 가는 큰 행길과 합치는 곳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었다. 여기로는 버스가 지나가는 것이다. 20분이 지나가 수지는 정거장으로 와서 서 있었다.
거기서 수지는 가로등 밑에 돈 가방을 든, 나이 지숙한 여인 하나를 보았을 뿐이다. 이 여인에게는 아무런 의심도 가지 않았다. 그렇건만 수지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한 10분 기다렸다. 버스가 왔다. 버스는 뒷문이 열렸다가 닫히며 이 여인을 안으로 들여놓았다. 이때에 가서야 수지는 이미 떠나가는 자동차를 향하여 쏜살같이 내달렸다. 달려오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본 운전사는 차를 멈추었다. 그러자 수지는 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뒷자리에, 그것도 출입문 가까이에 앉았다. 그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본다. 정류장에는 등불 아래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나, 모서리를 돌자 갑자기 밝은 불빛이 환히 비춰졌다. 수지는 정신을 차렸다. 커다란 화물차 '모스끄위치'가 버스를 쫓으며 달려왔다. 간첩은 창문에 몸을 바싹 가져다 대었다. 두 자동차가 가지런히 서게 되었을 때 간첩 수지는 이 화물차 벽에 '아이스크림'이라고 쓴 것을 보았다. 운전 칸에는 운전사 외에 사나이 하나가 앉았는데 그는 분명 깊은 잠이 들어 있는 모양으로 그 머리는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흔들리는 것이었다. '모스끄위치'는 버스를 따라잡더니, 뒤에 달린 붉은 불을 껌벅거리며 그만 앞으로 사라져 버렸다.
수지는 한숨이 나가며 자리에 몸을 내던졌다.
그다음 정류장에서는 사람 둘이 버스에 올라탔는데, 그들은 스포츠식 모자를 쓴 젊은이와 예쁘장한 처녀였다. 수지는 또다시 주의를 하였다. 그러나 두 젊은 사람들은 자기네의 이야기에 골몰하였다.
그는 딸린의 화물역에서 밤을 나고 아침이 되자, 자기 얼굴에 있는 상처가 사람들에게 보일까 봐, 콧수건으로 얼굴을 동이고 힐다 야르빙그(여자)를 찾아서 떠났다. 그들은 꾸스따보왕 명칭의 중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처지였다. 그후 그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자기 친구 헬베르트란 사람을 통하여 이 여자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수지는 그때 힐다네 집에 자주 가곤 하였다. 그러다가 전쟁 때에 헬베르트는 죽었다. 이 사람은 수지와 함께 독일 군대에서 복무하였다. 이때 힐다는 어느 카페에서 접객원 노릇을 하고 있던 것을 수지는 알았다. 이 힐다에게로 간다는 것이 얼마큼 위험하기는 하나 그러나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실상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오직 하나인 출구였다. 비밀 연락장소로 갈 수는 없었다. 만약 윌리와 요나쓰가 붙들렸다고 하면, 입초 내무원들이 누구나 다 자기의 인상을 적은 것을 가지고 있을 테니 내놓고 밖으로 나다닌다는 것은 지각없는 일로 될 것이었다. 숲속으로 들어가 비어있는 농가에 숨어 있을까? 아니다, 이것도 될 수 없는 일이다. 추위와 주림을 어떻게 하며, 또 일은 일대로 망쳐 버릴 것이다. 실상 그가 보낸 세 건의 무전은 스웨덴을 떠나 나오지 않고서도 만들 수 있었던 그런 것들이 아닌가! 숲속에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있게 되면 값 가는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게 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정상적인 활동 기지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필요하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힐다에게로 갈 마음을 먹었다. 이 밖에 딸린에는 그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이런 것들이 아니고라도 이 힐다에 대해서는 윌리도 요나쓰도 알지 못한다. 실상 한번은 스톡홀름에서 그가 윌리에게 이 여자의 이름을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소를 말한 것도 아니고 성이 무엇이라는 것을 말한 것도 아니었다. 정녕코 윌리는 이 여자의 이름까지도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때 그는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었으니까.
힐다와의 상봉은 유래가 드물게 원만히 되었다. 수지는 심지어 스스로 자기를 축하하면서 그가 행복된 운명을 타고 났다고 좋아하였다. 힐다는 아직 시집을 가지 않고 있었다(실상 그는 힐다가 출가하였을까 봐 무엇보다도 두려워하였다). 그는 예전 살던 곳인, 이만타에서 그리 크지 않은 방 둘이 있는 집을 쓰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성 기관에 다니고 있다.
수지는 이 여자에게 자기가 딸린에 그리 오랫동안 있지 않으련다고 기껏해야 며칠 동안밖에 아니 있으련다고 말하였다. 그는 공민 전쟁 때에 에스토니아를 떠나서 지금까지 까브까즈에서 산다고, 거기 소비조합에서 일을 본다고, 그리고 여러 해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얻어 휴양하러 고향 땅으로 왔노라고 말하였다. 물론 여관에 묵어도 좋을 것이나, 폐만 아니 끼친다면 옛 친구들을 찾을 마음을 먹었노라고, 트렁크는 정거장 보관실에 맡기고 왔노라고도 말하였다.
힐다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상냥스럽고 인품이 좋았다. 그는 수지를 자기네 한 방에 머물게 하고 안락의자를 내주었다. 허물없는 터이라 그들은 힐다의 어머니와 다 함께 한 방에서 자면 어떤가! 참말 오랜만에 만난 것이 아닌가! 내일은 숙박계를 내자고 하였다.
"뭐, 주택 관리인을 불안케 할 게야 뭐, 있어."
수지는 태연스레 이런 말을 하였다.
"다해서 며칠밖에 아니 있을 것을..."
"아, 힐다, 힐다!"
하고 그날 저녁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사탕 안 둔 커피를 끌어당기며 수지는 자못 흐뭇한 마음으로 지껄여댔다.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할게야. 고향 거리로 돌아와서 친구들을 만나 보고, 지난 일들을 회상하고 그리고 이렇게 커피를 마신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된 일인가 말이요! 나는 자주 딸린의 그 어느 선량하고 점잖은 가정에서 이렇게 커피를 한잔 마시면 하는 생각을 혼자 했었소. 자, 좀 더 부어 줘요. 고맙군요! 그래, 딸린이 딸린이로군. 딸린이 전쟁 뒤에 과연 변하긴 변했어. 나는 내 옛 딸린을 한번 보았으면 좋겠어. 저녁이면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안개나 끼고, 연기 냄새나고, 바다 냄새나고... 글쎄 말이요. 나는 처음 얼마 동안 낮에는 거리로 나다니지 않을테요. 글쎄 그러다가 내 딸린의 인상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겠소! 그저 저녁에만, 그것도 안개 속에서 나가보고 싶소!"
수지는 웃었다.
"난 낭만주의자가 되는 모양이요! 내가 이렇게 당신 댁에 앉아 있으면 무엇하나 달라진 것이 없이, 그저 그전 때 그대로 남아 있는 것같이 생각되는군요."
이렇게 한두 주일 동안은 피난처가 보장된 셈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자연 알 길이 있을 것이 아닌가!
수지는 고요하고 안온한 기분에 취하여 하루종일 집에 앉아 있군 하였다. 그러나 저녁 때가 되어서야만 잠깐동안 산보를 나갔다 오곤 한다.
수지는 이 집 안주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히 퍽도 유행을 좋아하여서 양재사들과 밤새 찌릉찌릉 전화를 걸었다. 힐다의 수입은 그리 많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유행을 따르기 위하여서는 적지 않게 창의적 재간을 보여야만 하였다. 이것이 수지의 마음을 든든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수지가 알아차린 대로, 힐다는 제 하는 일을 사랑하고 또 그의 일터에서들도 그를 소중히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 예로, 지난해 그의 직장에서는 그에게 아무 비용도 물리지 않고 그를 흑해가에 있는 요양소로 보낸 것이다. 이 사실은 수지를 퍽도 불쾌하게 하였다. 이러고 보니 힐다와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다른 방도를 써 보려고 하였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에게 사랑을 구하려고 한 것이다. 결혼, 이것은 가장 좋은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 힐다는 화장대에 세워 놓은, 금빛 머리에 눈은 파랗고 체격이 결곡한 한 사나이의 사진을 그에게 보이며
"이것이 나의 약혼한 남자, 에른스트 볼스텔리야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에잇 망할 것, 사람들이란 변하기도 하누나!' 하고 수지는 생각하였다.
"하기는 그 언제만 해도 그저 경박한 계집애에 불과했는데! 지금 그것은 한다는 말이 '이것은 내 약혼한 남자야!', '나는 내 일을 사랑해요!'거든. 이런 계집에게 가까이 달라붙어 보란 말이지. 그래도 안드레아쏜은 마치 에스토니아 사람은 그 누구나 다 외국 간첩들이 도와달라면 곧 응하기는 하는 듯이 말한단 말야. 그래,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만사가 참 복잡하거든!"
힐다는 자기와 약혼한 남자에 대해서 이렇고 저렇고 이야기하는 것을 그리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지는 그에게서 이것저것 캐내었다. 그는 금년 서른 살로, 몇 해 전에 건축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학교 당국과의 사이에 무슨 사건(힐다는 그 내막까지는 몰랐다)이 있어서 그만 그는 학교를 떠나고 말았다. 그래 지금은 이렇다 할 일정한 직업이 없이 지내면서 수입이라고는 때때로 자동차 구락부에서 조종교사 노릇을 하여 받는 것뿐으로,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기사로서 코흐를라-야르바에 있는 판암 채취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말 가운데서도 그 마지막 형편은 수지의 관심을 여간 끌은 것이 아니였다. 수지는 본부로부터 받은 과업 가운데서 코흐를라-야르바의 판암 채취는 각별한 조항인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에 에른스트가 힐다에게로 온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 수지는 이 힐다의 약혼자의 정황을 꿰들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그들은 셋이 식탁에 둘러앉아서 커피를 마시였다. 에른스트는 그리 새것은 못 되나 사치한 옷을 입었고 수지를 대하는 데 퍽도 조심을 하는 태도였다. 두어 번 수지는 이 삶의 호의를 못가진 눈총을 받았는데 그때 수지는 '이 자가 힐다 때문에 질투를 하누나' 하고 생각한 것이었다.
"글쎄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어떤 선물을 가져가야 할지 모르겠소."
수지는 마치 이말 저말 하는 가운데 슬쩍 이렇게 말을 하였다.
"까브까즈에서는 나를 퍽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런 말을 듣고 나자 그 금빛 머리에 눈알 파란 사람은 금시로 명랑해지며 수지에게도 마음을 놓는 태도로 나왔다. 그리고 식탁을 둘러싸고 하는 이야기도 한결 편해졌다. 수지는 가게로 가서 리큐르 한 병을 사 들고 오기까지 하였다.
에른스트는 그 뒤로 또 몇 번 힐다를 찾아왔다. 그럴 적마다 수지는 그를 대접하군 하였다. 이 약혼한 남자는 한잔 잘하는 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수지는 중요치 않다고는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정을 밝힐 수 있었다. 즉 에른스트는 독신으로 지낸다는 것이며, 그의 아버지는 두 주일에 한 번에서는 더 딸린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며, 에른스트가 가정부를 해고하였다는 것 같은 사실들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오토바이에 미친 사람으로서, 비록 그리 많은 편은 못 되는 돈이라도, 그 돈을 온통 이 오토바이에 먹혀 버린다는 것이었다.
며칠을 지나서 에른스트는 힐다와 수지를 자기 집에 초대하였다. 그러나 힐다는 뜻밖에도 일에 상치가 되여 가지 못하고 수지만은 자기의 운명에 감사를 드리며 혼자서 가게 되었다.
그들은 둘이서 오전 중 내내 앉아 있었다. 술에 취한 에른스트는 제 팔자를 생각하며 울었다. 그는 풍청풍청하니 살고 싶었으나 그 망할 돈이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돈을 많이 주지 않고 또 자동차 구락부에서 들어오는 돈이래야 몇 푼 안 되고, 그리고 대학에서는 계집아이들 문제로, 즉 두 계집아이에게 다 같이 결혼할 것을 약속한 죄로 쫓겨나고 말았었다.
글쎄 이런 사람이 또 있다니! 저주할 생활이 아닌가! 새 오토바이를 사려고 해도 돈이 없고 낡은 것은 언제나 수리에 들어가군 하여 돈이란 돈은 모조리 먹어 내는 판이다. 그런데 지금 중대가 부러졌는데 상점에는 부속품도 없고 브로커들을 통해서 사자면 세 곱절이나 비싸구... 이게 과연 사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요리집 출입도 자주 하지 못하는 판이니...
그들은 종일토록 잠만 잤다. 그날 저녁 힐다네게로 찾아갔을 때(힐다는 집에 없었다) 수지는 지나가는 말로 에른스트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 새 중대가 얼마나 먹소?"
"8백 루블리요!"
에른스트는 바랄 것이 못 된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수지는 제 방으로 가더니 돈 뭉치를 들고 돌아왔다. 에른스트는 너무도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좋은 사람 위해서라면 무엇이 아까울 게 있겠소!"
하고 수지는 웃으며 8백 루블리를 척척 세었다.
"돈이 생기면 곧 갚겠소이다!"
하며 에른스트는 손을 제 가슴에 얹었다.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그저 당신이 그 중대를 1급품으로 사게 되기만 바라오."
에른스트는 돈을 얼른 제 호주머니에 쓸어 넣었다.
"그런데 영수증을 좀 써주시오."
수지는 경멸할 만한 찌푸린 낯을 지어 보였다.
"글쎄 이것은 공금이요. 우리네 까브까즈에서는 이렇게 하는 법이니까..."
에른스트는 탁자에 붙어 앉더니 수지가 하라는 대로 종잇장에 얼른
"...사용으로 8백 루블리 정히 영수함. 볼스텔 에른스트."
라고 썼다.
"그런데 '기필코 반환함'이라고 써야지요?"
하고 에른스트가 물었다.
"그만두오, 돌려줄 것은 뻔한 일인데."
에른스트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수지는 탁자로 가까이 오더니 영수증을 집어 들고 그것을 유심히 읽었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으며 그것을 누런 가죽으로 된 돈지갑 속에 꼭 감추었다.
한 번은 수지가 에른스트를 보고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여보 글쎄 내가 당신께 청할 것이 하나 있소. 나는 딸린에 몇 주일 더 지체하고 싶소. 힐다가 비록 옛 친구라구는 하지만 더 있기가 어렵소. 그런데 당신 있는데 방이 비였으니..."
그러자 에른스트는 기다리기라고 하였다는 듯이 수지의 말을 좋다고 하였다. 에른스트네 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방이 두 간에, 조그마한 부엌, 현관, 목욕실도 되어있다. 집은 라뛰쉬나 광장 옆에 있는, 홍성거리는 좁다란 거리로 향하여 창문들이 나 있었다. 에른스트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수지는 몸이 아프다는 말을 하고 날마다 온종일 침대에서 뒹굴었다.
수지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였다. 이에 세 주일만 지나면 딸린의 중심 지대에 굉장한 근거지를 하나 얻게 된다. 이것이 그래 언짢단 말인가? 왈리진과 안드레아쏜이 가르친 말이 있다. 즉 적과 더불어 일을 할 때면 징글스럽게 능청맞게 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들의 말은, 가장 위험하지 않은 곳은 바로 국가 안전기관의 코밑이라고 하였다. 누구나 여기서 나를 찾으려는 생각은 염두도 아니 낼 그런 곳이다. 분명 나를 찾는 녀석들은 지금쯤은 에스토니아를 뒤타며 숲이란 숲을 다 빗질하듯 헤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 이 딸린의 중심지에, 큰 기사네 집에서 살고 있지 않는가! 수지는 스스로 마음이 흐뭇하여 소 웃듯 씩 웃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거리로 나가 다닌다는 것은 위험하다. 이러고 보니 이제는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고 위임 맡은 과업을 완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수지는 이 집주인을 끊임없이 바라보았다. 지갑 속에는 돈을 받았다는 이 사람의 영수증이 두 장씩이나 들어 있다. 이것은 '고기 새끼'를 잡는 데는 '고기 새끼'가 번들어지면 일은 망치고 말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은 정확하니 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수지는 더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 번은 밤늦게 수지와 에른스트가 자고 있는데 문 뚜드리는 소리가 났다. 수지는 베개 밑에서 권총을 끄집어 내여 들고 소리 없이 창문으로 가 붙었다. 만일의 경우에 내려 뛰게라도 되면 하고 그는 문 빗장을 젖혀 놓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른스트가 자는 바로 옆방에서 맨발로 걷는 소리가 자박자박 났다. 에른스트는 출입문을 열러 가는 것이었다.
"자넨가?"
하는 에른스트의 놀라는, 그리고 두려워하는 소리가 들이였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수지는 권총의 쥘 손을 꽉 부르쥐고 안전장치를 내려놓았다.
"그것도 모르나"
하는 술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더러운 욕지거리가 따랐다.
"여기 숨어 있었군, 이 더러운 작자야."
방으로 들어오는 자는 커다란 소리로 그냥 떠든다.
"친구들은 교화소 밥을 먹고 지내는데!"
"쉬! 조용해!"
에른스트의 비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가 조용히 군데! 내가 잠자코 있을 줄 알아!"
쾅 하는 의자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심문에서 나는 약속대로 말 한마디 안 했어. 모든 죄를 다 내가 뒤집어 쓰면서두. 그런데 너는 그동안 몇 해가 지났는데, 한 번이나 어디 차입을 들여보낸 일이 있나 말야? 이 불한당 같은 녀석아! 지금 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는..."
"글쎄 좀 조용히 굴어, 나 혼자만 아니니까!"
에른스트는 여전히 중얼거리였다.
수지는 얼른 침대에 눕더니 이불을 푹 당겨 썼다.
문이 열리였다. 소리 없이 발꿈치를 들고 에른스트가 들어왔다. 그는 침대 위에 잠깐동안 허리를 굽히고 수지의 코 고는 소리를 듣더니 그만 나가 버렸다.
옆방에서는 수군수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수지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그는 알게 되었다. 잠깐 후에 출입문이 덜컹하더니 찾아왔던 사람이 가버렸다. 금방 겪고 난 공포로 하여 가슴은 울렁울렁 뛰였으나 머리는 명석하게 돌았다.
지금도 '고기 새끼'는 튀지 않았다! 에른스트는 수지가 자나 어쩌나 알아보려고 또 한 번 수지에게로 와 보았다. 그러나 수지는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며칠 동안 에른스트는 어쩔 줄을 모르고 왔다 갔다 하면서도 아무런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간첩 수지도 또한 기회를 두고 보았다. 그러더니 에른스트가 종내,
"여보 수지! 내가 당신께 큰 부탁이 하나 있소. 내가 돈이 좀 소용되요. 허나 이러는 것도 마지막 번이요."
하고 말을 내었다.
"또 뭐 오토바이에 쓰려구요?"
수지는 이렇듯 허물없이 물었다.
"그-래요..."
하고 에른스트는 거북하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소용되오?"
수지는 사무적으로 물었다.
"5백 루블리만 주시오."
"그래요, 그런 것쯤!"
하고 수지는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그런데 나두 당신께 한 가지 신세를 지자구 부탁해야겠소. 글쎄 말이요. 공민증이 있어야겠단 말이오."
에른스트는 놀라며 눈길을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하고 수지는 대단치 않게 설명을 하였다.
"나는 까브까즈가 딱 싫증이 났소. 표범, 땅곰, 범 그리고 또 그밖에도 사나운 짐승들이 득실거리니, 이게 어디 내게 맞소. 나는 평화적인 환경이 필요하오. 나는 여기 이 딸린에서 생활을 시작하고 싶소. 그러나 저쪽에서 나를 놓아주어야지요. 글쎄 나는 귀중한 일꾼이 아니겠소. 거기서 제시하는 지수를 나는 초과 완수하니까. 그런데 우리에게서는 별 법이 다 있겠지요. 한번 공민증을 떼우면 그만 다요. 직업을 선택할 가능성이 없어진단 말요."
"가만."
하고 에른스트가 말을 막으며,
"그러나 글쎄 누구나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서 일할 수 있지 않아요! 절대로 남의 공민증을 빼앗는 일은 없지요."
"망해 빠질 안드레아쏜 같으니라구! 또 다시 그 뒤헝클어진 반소 선전이지!"
하고 수지는 생각하였다.
"나는 몇 번이나 그 작자의 소련 생활에 대한 무지로 해서 난처한 경우에 빠질 뻔했던가!"
"글쎄 당신도 알지 않소. 법은 법이지만 그래두 그것에 걸리지 않게 하는 법도 있거든."
"그렇지요. 그러나 내가 무얼 가지고 그렇게 하겠소?"
하고 에른스트는 팔을 쩍 벌려 딱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아무런 친지도 없으니까."
"그런 건 다 소용없소. 아무 술집으로나 가서 아무 술 취한 사람 보거나 그의 공민증을 3백 루블리에 사자고 해 보시오. 분실한 데 대한 벌금이라야 1백 루블리거든요. 아무나 다 좋다고 할걸요."
"아니요, 나는 그런 일은 하지 못하겠소."
에른스트는 주저주저하며 이렇게 반대를 하였다.
"아무거나 다해두 그 짓만은 못하겠소."
"당신 소청대루 하우."
하고 수지는 탁자 우에서 돈을 걷어치우면서 냉담하게 말을 딱 잘랐다.
"글쎄 아마 당신껜 기명하지 않은 깨끗한 것이 필요하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게야 깨끗한 것에서 더 좋을게야 없겠지요. 그러나 아직은 기명한 것이라두 좋아요. 사진을 갈지요, 그러면 제대루니까. 일자리에나 붙구, 게서 무엇을 생각하지요."
사흘을 지나자 수지의 손에는 가지가지 도장들과 서명들과 그리고 확인까지도 들어 있는 얼마큼 해진 공민증이 들어 왔다. 그것은 스웨덴서 발행한 가짜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짜 공민증이었다.
수지는 지금 낚시가 꽤 단단히 물리여서 낚싯대를 세게 낚우어 채여도 좋다고 단정하였다.
에른스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고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수지는 그 두레로 왔다 갔다 하면서 침착하고 위신 있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되뇌이거니와 이제는 뒤로 물러설 길은 없이 되었소. 안전기관으로 보면 당신은 벌써 외국 정탐기관의 앞잡이인 것이요. 당신은 영수증을 써놓고 정탐기관으로부터 규칙적으로 돈을 받았는가? 받았소. 당신은 그 정탐기관의 앞잡이 하나에게 피신처를 제공하였는가? 두말할 것도 없지요. 당신은 그에게 공민증을 얻어 주었는가? 얻어 주었소. 그리고 이와 같은 모든 것 외에 당신은 몇 해 전에 저지른 죄를 소비에트 법정 앞에 내놓지 않고 감추고 있는 것이요. 그러나 당신은 앞으로 어떠한 행운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것이요. 내가 당신께 설명을 하리다. 1년만 지나면 우리는 같이 스웨덴으로 가게 될게요. 당신은 돈을 한 더미 받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오토바이가 아니라 최신 자호의 굉장한 미국제 자동차를 한 대 가지게 될 게요. 당신은 별장을 살 수도 있는 터이라 아름다운 여인들이 당신의 시중을 들게 될게요. 당신은 여기 아버지 한 분밖에는 별로 친척도 없지 않소! 그런데 당신 아버지는 건드리지 않을게요. 왜냐하면 그이야 유소문하고 존경받는 이니까. 그러다가 볼셰비키들이 망하는 날에는 당신은 또다시 이리로 돌아오게 될게요. 그것도 그때엔 이미 주인으로서 오는 것이고 식객의 신세로서가 아닐 게요. 스웨덴 정탐기관은 자기네 사업상 동료들에게 감사할 줄 알지요. 미국 사람들은 그보다 더하고, 이러구 저러구 할 것 없이 미국 사람들은 이 사업을 위하여 1억 달러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굉장한 돈이지요."
수지는 식기장으로 가더니 잔 둘에 꼬냑을 가득 부은 뒤에 잔 하나를 에른스트 앞에 가져다 놓았다.
"자, 그리 떨지 마시오. 새로운 생활을 위하여 쭉 마십시다!"
에른스트는 몸을 까딱도 아니하였다.
"글쎄 당신은 안전기관 사람들이 체포할까 봐 무서워할 수도 있지요."
하며 수지는 명랑하게 웃었다.
"나를 봐요. 내가 에스토니아로 온 뒤 벌써 몇 달이 되었는데 한 달 반은 딸린에게 두문불출로 지나가거든요. 드디어 나는 공화국 수도 한복판인 당신네게서 거의 한 달이나 살아가는 판 아니요! 당신네 집에서 국가안전위원회까지 얼마나 가면 되나 말해 봐요! 5분이면 가 닿거든요. 단 5분 동안이요! 그래도 그들은 내가 자기네 코밑에 있으리라고는 의심조차도 아니하거든요."
에른스트는 고개를 들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래요, 그래요, 그것들이 얼마나 멍텅구리요!"
하고 수지는 더욱 조였다.
"그들은 일을 할 줄 몰라! 우리는 그까짓 것들을 무서워할 것이 없소."
에른스트는 일어나서 잔을 잡더니 단숨에 꿀꺽 마셨다.
"좋아요."
하고 그는 지친 듯이 말을 하였다.
"내가 뭘 해야만 할까요?"
"글쎄 이게 얼마나 훌륭한 일이요! 나는 진작부터 위협과 불쾌한 일없이 될 줄 알고 있었소. 자리에 앉으오. 그리구 유의해서 내 하는 말을 들어보오."
스톡홀름에서 온 '손님들'
리뜨바의 바다 기슭에 있는 그 어느 한 경비소에서는 비상사건이 하나 생겼다. 한 경비조는 아침 순찰을 하다가 바다 기슭의 모래 장변에서 사람들의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그 발자국들은 바다로부터 수림 있는 방향으로 들어가 버렸다. 발자국들은 군데군데 비에 씻겨버리었으나 어쨌든 사람 셋이 이리로 지나간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개는 자신 있게 발자국을 따라갔다. 그러자 저녁때가 되어 한 경비조는 이 국경 침범자 중의 하나를 찾아냈다. 여러 번 거듭되는 부름에 대해서도, 공중에 대고 하는 발사에 대해서도 이 침범자는 아무런 응수도 없이 그냥 도망만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땅에 엎드려 따바리총으로 불질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맞불질에서 이 침범자는 그만 총알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에게서는 항용 간첩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장비품들이 나왔다. 즉, 휴대용 무전기, 시계 몇십 개, 귀중품 그리고 발라깬츠끼 겐나디야 와씰리예츠의 이름으로 발행된 증명서들이 나왔다. 이밖에도 그에게서는 동일한 한 사람의 영상만이 보이는 조그만 판형의 사진이 몇 장 나오기도 하였다. 이 사진들의 뒷등에는 어느 것에나 연필 글씨로 '페쌰츠카쓰 알게르다쓰'라고 씌여져 있었다.
다른 두 침범자들의 발자국은 없어지고 말았다.
수지가 에른스트와 그 무슨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난 뒤로 몇 달이 지나갔다.
수지는 한없이 만족하였다. 에른스트는 솔갑고 재빠른 사람임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육중한 몸집으로 볼 때 저으기 놀랍기도 하였다. 간첩 수지는 집에 내내 앉아 있었으나 모든 필요한 정보는 에른스트가 그에게 제공하였다. 에른스트는 이 사람 저 사람 아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그 아버지의 친구들도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하여 수지는 흥미 있는 정보를 많이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무전 장치가 늘 말썽을 부리여서 그는 본부에 제 신변에 관한 짧은 소식밖에 더 송신하지 못하였다. 모든 자료는 다 적어서 비밀장소에 보관하여 두었다. 그러나 수지는 에른스트 볼스텔을 흡수하였다는 것과 또 자기가 아주 귀중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들은 그들에게서 커다란 흥미를 자아낼 것이라는 사연을 본부에 송신할 수가 있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만족하였다. 몇 번에 걸쳐 수지는 감사하다는 말과 또 자기의 은행 구좌에 새로운 금액이 저금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러는 가운데 한 번은 본부로부터 에른스트 볼스텔도 정원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며, 그리하여 이제로부터는 그에게도 봉급과 일당금을 지불한다고 하는 소식이 왔다.
"자, 여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수지는 자기의 조수를 달래듯이 그 등을 툭툭 치는 것이었다.
"최신형 '까질락'이 당신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왔다구 해두 좋을게요."
에른스트는 이때 으근히 빙그레 웃었다. 이날 저녁 수지는 에른스트 볼스텔을 위하여 마지막 시계를 판 돈으로 한 상 굉장히 차리기까지 하였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힐다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 가오?"
하고 수지는 한 잔 마시고 났을 때 궁금해하는 말을 하였다.
"어쩐지 그 여자가 도무지 보이지 않거든."
"퇴짜를 놓았는걸요!"
하는 에른스트는 멋없는 웃음을 웃었다.
"지금 와서 그가 내게 무슨 소용이야요?"
수지는 이 대답이 만족하였다.
무전 장치와 암호는 딸린 부근 삐리따에 있는 에른스트네 별장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다. 에른스트의 아버지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는 사업이 퍽 나쁜 탓이였다. 수지는 무전 방향 탐지기가 무서워서 에스토니아의 여러 곳에서 송신을 하였다. 즉, 어떤 때는 북쪽에서, 어떤 때는 파르누 부근에서 그리고 또 어떤 때는 바로 딸린의 집에서, 이렇게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한 번도 장소를 되풀이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하는 데는 에른스트의 오토바이가 퍽 편리하였다. 다만 이 낡은 드란둘레트는 쩍하면 망그러지곤 하여서 수리에 돈이 들곤 하였다.
그런데 남은 돈이 얼마 되지 않았다. 이것이 수지를 퍽 불안하게 하였다. 마지막 암호 난수표도 다 써버렸다. 저장했던 것 두 장은 비밀실 속에서 물에 젖어 아주 찢어진 탓에 소용이 되지 못하였다. 수지는 여러차례 본부에 이런 사정을 알리었다. 그럴 때마다 스웨덴 사람들은 조력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수지는 스톡홀름에 자기의 거처 즉, 삐리따에 있는 별장의 소재처를 전달하였다. 그한테로 올 사람에 대한 암호, 말로 또는 물건으로 된 암호는 일찍이 스웨덴에서 미리 작성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본부에서 사람이 떠났다는 신호는 도무지 없었다. 수지는 안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일이 있는 우에 또 한 가지 불쾌한 일이 생기였다. 마지막 송신이 있고 난 뒤에 말썽을 부리던 무전기가 아주 못 쓰게 되고 말았다. 진공관 하나가 타버린 것이었다. 에른스트가 아무리 딸린에 있는 상점들이며 라디오 수리방을 찾아다녀도 타버린 진공관을 대용해 꽂을 만한 것을 얻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쪽으로부터' 사람이 왔다.
한번은 수지와 에른스트가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들로 하여 사람들의 눈에 띄우지 않게 감추어 선 조그마한 별장의 뜰 안에서 오토바이를 손질하고 있을 때 나무 쪽문이 찌궁하고 열리더니 뜰 안으로 다 해진 회색 웃저고리와 같은 색의 아랫바지를 입은 사람 하나가 들어섰다.
"무슨 일로 왔소?"
하고 사뭇 뚝뚝하니 에른스트가 물었다.
찾아온 사람은 힐끔 수지를 바라보더니 푸른 선장 모자를 얼마큼 들어 올리며 이렇게 중얼대었다.
"다우가바로 가려면 어떻게 가는지 모르십니까?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니외다. 까브까즈에서 왔소이다."
"달에서 왔다구 하지!"
하고 에른스트는 참지 못하고 말을 탁 끊었다.
"예가 안내소인가 어디!"
"그런데 왜 이리 뚝뚝스럽게 구오?"
땜질을 한 다이야쥬브가 떠 있는 물대야에서 몰을 일으키며 수지가 말을 내었다.
"나도 까브까즈에서 왔소."
하며 그는 그 회색옷 입은 사람을 돌아보았다.
"고향 사람 만나니 반갑소이다. 여기서 다우가바까지는 쏘치에서 쑤후미로 가는 거나 마찬가지요."
이 낯선 사람은 유의해서 이 대답을 들었다. 에른스트는 놀라서 눈썹을 쳐들었다. 수지는 에른스트의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다.
"에른스트, 일이 잘됐어. 다 잘 됐어. 오토바이 주무르는 것 그만 두구 저 가게로 가서 술 좀 사 오우. 우리 그동안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할 것이니."
에른스트는 자리를 떠나갔다.
"까브까즈엔 별다른 일이나 있소?"
수지는 그 새로 온 사람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갈 때 웃어가며 이렇게 물었다.
"다른 사람 없소?"
하고 이번에는 그 손님이 물었다.
"아무도 없을 겁니다."
수지는 등으로 걸은 팔걸이 의자에 앉으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 이름은 에르모요."
하고 낯선 사람은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였다.
"퍽 반갑소이다."
하고 수지는 냉랭하게 대꾸를 하였다.
다우가바로 가는 길을 묻는 이 구두 암호의 뒤에 수지가 기다린 것은 물적 암호 즉, 왈리진의 편지였다. 그러나 이 낯선 사람은 그것을 얼른 보이려고 하지 않고 방 한가운데 그대로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수지는 바른편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때 에르모는 얼른 이렇게 입을 열었다.
"수지, 나는 당신께 물적 암호인 앗쓰(왈리진)의 편지를 전하지 않은 것을 알아요. 그러나 내게는 지금 그것이 없소이다. 그 편지를 감추느라고 연필 속에 넣었는데 암호 난수표를 싼 꾸러미 속에 그것이 들어가 있지요. 헌데 나는 내 뒤로 국경 경비대원들이 추적을 하는 통에 그 꾸러미를 배낭과 같이 호수에 던져 버렸구려."
수지는 온몸의 신경이 죄다 일어섰다. 여러 가지 상념이 번개처럼 내달리었다. 덫인가? 함정인가? 스웨덴 사람들한테서는 에르모에 대한 아무런 신호도 받지 못한 그였다. 그러나 혹시 무전기가 파손된 뒤에 그들이 이에 대한 신호를 보냈는지도 몰라. 그런데 어디에 물적 암호가 있나? 추적을 받을 때 던졌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일 때에는? 국가 안전기관 일꾼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가면을 쓰게 될까? 내 냄새를 맡았다면 그들은 퍽 더 간단히 나를 잡아갈 수도 있다. 떠들지 않고 하려고 그러나? 그러나, 뭐, 만약 금방이라도, 총자루로 대가리를 내려 족치면! 그럼 만사는 다 되는 게다!
수지는 여전히 호주머니 속의 권총을 꽉 부르쥔 채 우뚝 서 있다. 자기의 이름이 에르모라고 하는 사람은 다급하게 말을 잇는다.
"당신이 나를 시험해도 좋아요. 나는 당신께 스톡홀름에 대한 것을 죄다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런 거나 물으세요. 다 대답할 것이다."
수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당신이 그러했듯이 니멜스타베겐 24호, 아르까지 왈리진, 즉 앗쓰네게서 교육을 받았소이다. 그 집으로 들어가면 왼쪽에 옷걸개가 있지요. 문 둘은 바른편에 있구, 하나는 정면으로 나 있구요. 그는 시방 혼자 지내지요. 동생은 아내와 같이 미국으로 가버린 모양이더군요. 이 집에서 나는 독도학, 무전학, 군사학, 항해학 같은 것을 배웠소이다. 무전 기술은 두 스웨덴 교사들에게서 배웠지요."
수지는 그 내심을 헤아려 볼 수 없는 낯을 하고 서 있었다. 에르모는 또다시 말을 꺼냈다.
"왈리진은 자주 당신에 대한 말을 했답니다. 당신은 여기 와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사람의 하나라구 하지요. 당신이 몇 번 긍정적인 격려도 받았다구요. 여기서 법적으로도 떳떳해지고 2천 루블리는 주고 공민증도 샀다구요. 귀중한 사람 하나를 흡수하기도 하구요."
수지는 권총 자루를 잡고있는 손을 조금 허순하니 놓았다. 그렇다. 상금을 준 데 대해서는 안전기관에서 알 도리가 없을 것이다. 공민증 사는 값으로 2천 루블리라고 한 것은 그가 본부로 송신할 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것은 각별히 불구어 부른 값인데 그것도 다름 아니라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다 비싸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일반적인 지시는 안드레아쏜 대위와 요한손 대위에게서 받았소이다. 요한손 대위의 말이 당신네 세 사람이 상륙했는데 윌리와 요나쓰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없다구 합디다. 그들 둘이 어쩌면 죽었을 것이라고 당신이 보고했다지요."
에르모는 더욱더 빠르게 말을 하였다.
"왈리진의 말이 당신의 성공은 자기의 조언을 따라 한 때문이라구 하지요. 탐정가가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것은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그 사람은 말하더군요. 가장 안전한 곳은 다름 아닌 국가 안전기관의 코 밑이라는 게이죠."
수지는 한결 더 마음이 놓였다. 이 작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은 왈리진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그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이런 말을 기억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안전기관 일꾼들이야 어떻게 이런 것을 알 수 있을까.
"스톡홀름의 중심 지대로부터 기멜스타베겐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오?"
수지는 별안간 이런 것을 물었다.
에르모는 얼른 정확하니 대답하였다.
"요한손의 외모가 어떻소?"
"키는 크고 여위었는데 그 얼굴도 또한 여윈 편이지요. 턱은 조그마한데 아래쪽으로 잘라버린 것 같구, 눈은 개구리 눈알처럼 툭 불거져 나왔지요. 왈리진은 이 대위가 46년도부터 스웨덴에서 정탐 사업을 한다고 그러겠지요. 그때까지는 군대에 있었지요. 39년도에는 분란에서 로씨야를 반대해 싸웠습니다."
"스톡홀름에서는 위스키 한 병에 얼마나 하오?"
수지는 계속하여 물어보았다.
"30 크론이지요."
수지는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에르모는 이것을 눈치채고 안심이 된다는 듯이 한숨을 쉬였다.
"당신께서 나를 시험하실 길이 또 하나 있어요."
하고 이 낯선 사람은 말을 이었다.
"그것은 내가 만약 에스토니아에서 그 누구든지 긴요한 사람에게 내가 누구라는 것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를 생각하여 본부에서 미리 예견한 방법이지요. 스톡홀름 방송에서는 매일 오후 여섯 시로부터 45분 동안 음악과 노래를 보내 주거든요. 당신은 아무 노래나 마음대로 하나 이름을 불러 보시오. 나는 그것을 글로 적어서 본부에 알릴 수 있거든요. 본부에서는 방송국에 명령을 내리지요. 당신은 가장 가까운 방송처에서 당신이 주문한 곡목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적을까요?"
수지는 먼지가 앉은 에르모의 붉은빛 머리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천천히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적어요."
에르모는 종이 한 장을 달라고 하더니 얼른 스웨덴 말로 몇 마디 적어 놓는다. 수지는 그 글발에서,
"친애하는 안나, 나는 네게 따사로운 인사를 보내며 네친구들이 다들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린다. 어머니는 앓지 않으시고 동생은 일자리에 들어갔다. 우리들의 일로 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 종형 알프레드."
라고 쓴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수지가 편지를 읽고 있을 동안에 에르모는 웃저고리의 불룩 한 호주머니로부터 뿌연 알약이 가득 들은 조그마한 유리병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는 다섯 숟가락이 되리만큼 물병의 물을 고뿌에 붓고 몇 분 동안 그 알약 한 알이 다 녹을 때까지 물을 잘 저어 놓았다. 물빛은 거의 변하지 아니하였다. 호주머니로부터 에르모는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펜을 끄집어내었다. 그 펜을 손톱에 대고 만만한가 어쩐가를 시험한 뒤에 그것을 그 용액이 들은 고뿌에 담구더니 바로 그 편지 쓴 종이 우에 글자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 글줄들을 가로질러 쓰는 것이었다. '라디오는'하고 그는 두를 내였다. 그리고는 무엇을 묻듯이 수지를 바라보았다.
바로 이때에 문이 열리며 방으로 에른스트가 들어왔다. 그는 워드까 병들을 호주머니에 넣고 손에는 꾸러미 하나를 들고 왔다. 에르모는 얼른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잇장으로 편지를 덮었다.
"감추지 않아도 좋소!"
하며 수지는 웃고 나서 에른스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 에른스트, 알고 지내요. 이 양반은 스웨덴 방송국을 통하여 우리의 음악 교양 제고에 방조를 주게 될 것이요."
에른스트는 탁자로 가까이 가더니 이제는 거의 다 마른 물로 쓴 글자들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수지는 이런 말을 하였다.
"자, 그럼 '윌리얀디 파디메쓰'를 하게 하오. 그게 좋은 것이오!"
에르모는 그것을 더 붙여 썼다. 그리고 '에르모' 라고 서명을 하였다. 그 뒤로 그는 그 종잇장을 봉투에 넣고, 그 위에 보통 잉크로 '스웨덴 흄딩게 스클베겐 24호, 안나 이싹손'이라 썼다. 수지는 에른스트에게 편지를 내밀며 내일 딸린에서 발송하라고 분부하였다.
세 사람은 비록 황혼이 되였으나 불도 켜지 않고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에른스트와 수지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에르모는 마치 포도주나 마시듯 워드까를 천천히 잔에서 조금씩 빨아들이며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물론 우리는 왈리진네 집에서만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지요. 말리메에서 70킬로 떨어진 숲속 별장에도 우리는 가 있곤 하였거든요. 그것은 스웨덴 정탐기관의 별장이었답니다. 아마 당신께서도 그것을 잘 알고 계실 테지요?"
수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를 데리고 간 것은 안드레아쏜 대위였답니다. 거기서도 우리의 책임자는 역시 스웨덴 사람으로 해군 정찰 장교였죠. 그는 대위였어요. 키는 그리 크지 않고 몸이 뚱뚱하고 나이는 한 50되였었지요. 자기의 이름을 알려 주지는 않더군요."
"그게 스웨덴 사람들인 줄 아는가!"
하고 수지는 의미 있게 빙그레 웃었다.
"그자들은 실패할 경우를 염려하여 발자국들을 지워버리는 위인들이야. 그자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걸 어디 우리들이 했소. 그야 에스토니아 사람들 자신이 하였지요.' 하기 마련이다."
"그이는 우리를 큰 발동선 있는 데까지 데려다주더군요."
하며 에르모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만약 말리메를 지나서 돌아오는 경우에는 어느 경찰관에게나 가서 대위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라구 하겠지요. 그들은 다 그와 연락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라구?"
"그리구 발동선에는 혼자 타고 왔소?"
하고 수지가 물었다.
"아니지요. 안드레아쏜이 한 반쯤 데려다줍디다. 그 뒤로 우리는 다른 발동선에 옮겨 탔지요. 그 배에서 우리는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안드레아쏜은 바다에서 우리에게 조그만 약병과 무기와 또 이 사진들을 줍디다."
에르모는 옆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판형이 작은 사진 몇 장을 끄집어내는데 그것들에서는 같은 한 사람의 영상만이 보였다. 수지는 손에 사진을 돌려쥐고 잉크로 쓴 글씨를 읽었다. 그것은 '페쌰츠카쓰 알게르다쓰'라고 되어있었다.
"리뜨바 사람이로군. 이건 무슨 때문일까?"
에르모는 이 말에 이렇게 설명을 하였다.
"안드레아쏜은 이 작자를 없애 버리라고 명령을 하겠지요. 반역자라고 말하더군요. 그는 이 사진들을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이 페쌰츠카쓰를 유의했다가 적당한 기회가 오는 대로 요절을 내버리라구 명령했거든요. 이 과업은 기본적으로 나와 같이 상륙한 리뜨바 사람 네리쓰가 맡았습지요. 그러나 나는 내 짝패와 같이 이 과업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지요."
"누가 짝패요?"
"에스토니아 사람으로 별명을 '하베'라구 하는 사람이지요. 그는 닉씨와 연락을 취하러 갈 겝니다."
"닉씨란 누구요?"
하는 수지는 호기심이 일어났다.
"딱히는 나도 모릅니다. 왈리진의 말에 의하면 그이는 퍽 귀중한 앞 일꾼으로서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여 왔으나 어떤 까닭으로인지 이 몇 달째 소식이 잠잠하다는 게지요. 분명 무전 장치에 무엇이 잘못된 모양이지요. 하베는 그에게 주려구 예비 부속품들과 진공관들을 가지구 왔답니다. 나는 한 달 후에 딸린의 루스끼 연극 극장에서 하베와 만나기로 미리 작정이 되어있지요. 이때까지 그 사람이 어디에 있을지 나도 모르지요."
며칠이 지나갔다. 그동안 에르모는 수지와 에른스트와 함께 별장에서 지냈다. 수지의 명령대로 에른스트는 이 새로 온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하였다. 밤에는 스톡홀름 방송을 들었다. 드디여 주문한 음악이 방송되었다. 수지는 에르모의 어깨를 치면서
"자, 편지가 가 닿았으니 당신이 참 복이 좋소. 당신도 아다시피 우리는 모험을 해서는 안 되오, 에른스트, 옳지요?"
"옳구 말구요."
하고 별장 주인인 에른스트는 수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좀 생각합시다."
하고 수지는 말을 이었다.
"당신한테서는 원조라고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소. 무전기와 암호 난수표는 추적당할 때 배낭과 함께 내던져 버렸지요. 돈은 조금밖에 안 가져 왔구."
"대부분이 배낭에 있었으니까요."
하고 에르모는 제 말을 내세웠다.
"시계는 남았으나..."
"시계는 우리에게 소용이 없소."
하고 수지가 말을 계속하였다.
"그것 아니구라두 우리는 이미 많은 시계를 팔았소. 더 팔다가는 의심을 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당신은 우리에게 소용이 없단 말이요. 당신이 자기 꼬리에 안전기관 일꾼들을 달구 아니 온 것만 하늘에게 감사해야겠소. 당신이 우리와 같이 있을 수는 없소. 위험하거든."
"그러나 당신은 내가 합법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만 하지요!"
하고 에르모는 수지의 말을 거슬렸다.
"왈리진과 요한손이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아, 왈리진, 요한손?"
하고 수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그들 자신이 이리로 오라구 하구려."
"그러나 나는 '하베'와 만날 때까지는 어디나 좀 있어야겠소!"
하고 에르모는 자기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그 근거를 밝혔다.
"그와 닉씨와의 관계에서 일이 잘되면 나는 그에게로 가 붙으렵니다."
"여보, 에른스트."
하고 수지는 말을 늦추었다.
"글쎄 이 사람에게 무엇 좀 실지로 해줄 수가 있을까요? 당장은 이 사람을 감추어 주어야겠소. 그러지 않고 만약 그가 온 에스토니아로 돌아다니며 머리 빨간 에스토니아 사람들과 할 말, 아니할 말 다 한다면 결국 이 사람의 정체가 눈에 띄울 것이오. 그렇게 되면 우리도 멸망이요."
에른스트는 적의에 차서 에르모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스웨덴으로 돌아가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소이다."
하고 에른스트는 침울하니 말하였다.
"좋은 생각이요!"
하고 수지가 그 말에 덩달았다.
"돌아갈 때 어떤 길로 가라고 지시받았소?"
하고 그는 에르모에게로 낯을 돌렸다.
"스웨덴으로 가는 데 찬성하는 에스토니아 사람 둘을 흡수하고 딸린-레닌그라드 사이의 비행기표 셋을 사게 되었지요. 그래 도중에서 무기로 비행기 승무원들을 협박하고 항로를 변하게 하여 스웨덴으로 가게 되어있지요."
"그-으래!..."
하고 수지는 말을 끌었다.
"그렇게 하자면 흡수한 그 두 사람을 가지곤 부족하오. 그 절구통 같은 것들이 본부에서 뭘 생각하고 있을까? 그들의 지도라는 것은 아무데도 쓸데없거든! 그것들은 여기엔 가짜 시계들만 가졌으면 매수할 수 있는 허깨비들만 있는 줄 알거든."
"둘째 번 길도 있습지요."
하고 에르모는 말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실상 하베를 위해서 예견된 길이지요. 그러나 극단의 경우에는 나로서도 택할 수 있는 것인데 소비에트-분란 국경을 지나서 분란으로 들어가는 길이 그것입니다. 헬싱키까지 가서 전화로 48-44-87번을 부르고 킨드베르그 씨를 찾는 것입지요. 암호는 셀씽프론 큘렌베르그지요. 그의 도움으로 스웨덴으로 가게 될 겝니다."
"그러다가 만약 분란 국경 경비대에게 붙들리면 어떻게 하오?"
"스웨덴 대사관과 연락을 취하지요."
"분란 것들이 무엇 하나 도와줄 줄 알고!"
수지는 의아하다는 듯이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그것들이 로씨야와 친군데. 아니야. 그런 경우에는 노르웨이 국경을 통과하는 것이 더 낮지. 좀 멀지만 그러나 그 대신 안전하거든. 에른스트, 그래 어떻소? 우리 이 사람을 그 짝패 만날 때까지 숨겨둘 수 있겠소?"
"모-르겠소! 곤란하지요."
하고 에른스트는 짜내듯 말을 뱉았다.
"자, 자, 에른스트. 세상에 청하는 것두 있구 또 명령하는 것도 있는 법이요."
"좋소이다."
낯을 찌푸리며 별장 주인 에른스트는 동의를 하였다.
"이 사람을 파르누 부근 마을에 있는 내 숙모 댁에 있게 해두 좋을게요. 내 숙모가 바로 집에 같이 거처할 사람 하나 구해 달라구 부탁도 있었으니까요. 내는 것도 그리 많지 않지요. 레닌그라드에서 휴양하러 왔다고 말하지요. 그 집에는 숙모와 그 남편과 그리고 스물다섯 살 나는 그 아들이 살고있지요. 그들이 조금도 수상하니 생각할 건 없어요."
"그러나 다만 조건이 있소."
하고 수지는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그 마을에서 한 걸음도 딴 데로 나가서는 안 되는 것이오. 알았소? 감기가 들었다거나 또 무엇 어떻게 해서든지 않는 체하시오. 세 주일 동안 그곳에 쭉 있도록 하란 말이요!"
바로 그날 에른스트는 오토바이로 파르누 부근 마을로 에르모를 데리고 갔다. 아침이 되자 그는 돌아와서 수지에게 일이 잘되었다고 보고를 하였다.
수지는 침울하여졌다. 원조가 있으리란 헛된 것으로 되고 말았다. 돈은 없다. 무전 장치는 활동을 못 한다. 그런 우에 이 에르모라는 천치가 또 등에 업혔다. 본부에서는 어디에서 이런 모자라는 작자들만 들추어 내는 것인가? 그런데 국가 안전기관은 녹녹하지 않다! 그저 에른스트 앞에서만은 허장성세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마음속에는 언제나 조그마하고 냉정한 짐승이 하나 들어앉아 있어서 자꾸만 할퀴고 또 할퀸다. 무섭다! 오, 얼마나 때로는 제정신을 못 차릴 때가 있군 하는가! 윌리와 요나쓰는 붙잡힌다. 그리고 또 그 무슨 미국 녀석들(쿡크와 토오믈라라는 것들)도 또한 붙잡혔다. 이 일에 대해서는 로씨야 신문에서 이미 보도까지 되었다. 혹시 그의 뒤를 그 누구들이 따르고 있으며, 그 어디서 그의 주위에 빙빙 돌고 있는지 누가 알 것인가! 만약 이런 사람이 다름 아닌 에르모라면 어떻게 되나?
수지는 그의 이성으로서 이렇게 에르모가 자기를 속이고 들어올 수는 없다고 인식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제아무리 명철한 안전기관 일꾼이라도 수지가 에르모에게 물어본 것과 같은 그런 모든 질문을 어떻게 미리 예견할 수가 있었을 것인가! 그런 것을 제외하고라도 그 작자가 만약 실상 안전기관 일꾼이라고 친다면 그는 모든 암호를 다 늘여 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으로 가장 확신할 만한 것으로는 무전방송 검증이다. 오직 스웨덴 밀정단에서라야만 스톡홀름 방송국과 그런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아니다. 지금 모든 일은 대낮같이 명백하다.
그러면서도 수지는 늘 에르모가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적이 많았다. 그렇지 않다면 혹시 이것은 한갖 신경의 과민인가? 확실히 신경은 피로하였다.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휴식이 필요하다. 무전 장치만 고쳐 놓고 나면 그때엔 곧 귀환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에른스트는 결국 운이 좋았다. 그는 필요한 무전용 진공관을 구할 수 있었다. 일이 참 잘 되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날은 바로 수신하는 날이였다. 수지는 곧 별장에서 필요한 전파를 잡아 놓고 스톡홀름에서 오는 무선 전보를 받았다. 그것은 불안에 차 있었다. 본부로부터는 무슨 일이 있었나, 왜 수지가 잠자코 있나 하는 것을 묻고 에르모가 가 닿았는가를 확증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리고 나서는 또 '보충 자금 필요한가?' 하고 검토 질문이 있었다. 암호로 된 원문을 해석하고 난 수지는 욕을 하였다. '그렇다. 자금이 필요하다. 아직도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그자들은 밤낮 '나무 잎새가 떨어진다'만 하고 있으면 되나. 나는 돈이, 돈이 필요하다! 공기만 먹고 내가 살 수는 없지 않는가?'
한 주일이 지나서 정례대로 무전 송신이 있는 날 수지는 에른스트와 함께 피리타에서 수십 킬로 떨어진 곳으로 '사냥'을 나갔다. 그는 거기서 미친 듯 노하여 송신하는 전보의 암호 원문을 두들겨 쳤다. 미상불 본부에서는 아직 한 번도 이런 전문을 받아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모든 장비품을 다 잃어버렸다. 돈 없이 앉아 있다. 암호 난수표도 다 전하였다. 무전 장비는 밤낮 말썽이다. 즉시 원조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겠다. 나무 잎새가 떨어진다. 대책 취하지 않으면 당신들을 저주할 테다! 수지.'
또 한 주일이 지나자 회답이 왔다. 본부에서는 가까운 앞날에 대책을 취할 것을 약속하였다.
에르모와 하베가 만나게 된 그 전날밤 에른스트는 에르모를 딸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에르모는 눈에 띄도록 흥분하였다. 수지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하베가 실패한 날이면'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것은 만사가 다 끝나는 것이다. 여기 이대로 앉았다가는 남이 저지른 과오에 빠지기나 꼭 좋을 것이다!'
아침이 되자 에르모는 표를 사러 극장으로 갔다. 그와는 연극 상연이 다 끝난 다음 하베와 만났던 결과를 알기 위하여 정거장에 달린 광장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다. 에르모가 나가며 문이 닫기자 곧 수지는 에른스트를 불렀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저자의 뒤를 바래다보오. 만약 그 무슨 의심스러운 것이 눈에 띄면 곧 자동 전화기에서 전화를 거시오. 그렇다면 우리 '낚싯줄'을 도로 거두어 감아야 할 테니."
에른스트는 알아차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리고는 잠깐 동안 있다가 방을 나갔다. 저녁 늦게 에른스트는 수지에게 이런 보고를 하였다.
"에르모는 아침에 극장 매표구에서 표 두 장을 사더군요. 두 회 상연하는 동안 앉아 있습니다. 다방에 들렀고 거리 공원에서 신문을 읽고 하는데 누구 만난 사람이라구는 아무도 없었소이다. 일곱시 십오 분에 그는 극장 현관으로 왔지요. 한동안 아무도 그에게로 가까이 오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는 전람관에 걸린 배우들의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습지요. 조금 있노라니까 그 어떤 사람 하나가 그에게로 가까이 오는데 그 낯을 나는 알아볼 수가 없었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니까요. 에르모는 그에게 표를 팔았지요. 그리고 나서 그들은 저만큼 따로 떨어져서 극장으로 들어갑디다."
"주위에서 무슨 의심스러운 것에 눈에 띄우지 않았소?"
"없었어요."
하고 에른스트가 대답하였다.
"하나 물을 것이 있는데 저녁때 그 극장 근처에는 당신이 아침에 본 사람 가운데서 누구 하나 와 있지 않습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하고 에른스트는 대답하였다.
"있다면 얼음과자 파는 여자뿐이었어요."
"얼음과자 파는 여자가 어떤 여자였소?"
하고 수지는 정신이 벌컥 들었다.
"흔히 있는 그런 여자입지요."
하며 에른스트는 빙그레 웃었다.
"거기 일은 불안해 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그 여자의 얼굴까지도 잘 아는데."
"글쎄 주의해야지."
밤도 깊어 정거장에 달린 광장에서 결국 마음이 상한 에르모는 에른스트(수지는 조심하느라고 그 자리에 없었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하베는 닉씨를 찾지 못하였답니다. 비밀장소에는 편지가 손길도 가지 않은 채 놓여 있더랍니다. 물속으로 잠겨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지요. 하베도 그때 국경에서 추적을 받을 때 배낭을 내던졌지요. 그 장소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무선 장치도 없이, 돈도 없이 남은 신세입지요. 도움을 청하더군요."
"도움을?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청해?"
하며 에른스트는 빙그레 웃었다.
"그가 지금 어디 있소?"
"화물역에 있지요."
바로 그날 밤에 에른스트는 수지의 명령을 받고 두 스톡홀름 '손님들'을 마을에 있는 그의 숙모네 집으로 데려다 주려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벗어나갔다. 그 이튿날 그는 돌아와서 그 숙모가 이 여름이 다 갈 때까지 둘째 번 사람을 받아 주겠노라고 동의하더라는 말을 알려 바쳤다. 또 며칠이 지나서 수지는 본부에 절망적인 전보를 치면서 그에게 약속한 원조를 보내 주든가,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든가 해달라고 하였다.
미리 정해 놓은 날에 회답이 왔다. 그 회답에는,
"가까운 장래에 모든 중요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준비된 우리 사람 하나가 에스토니아로 갈 것이다. 당신의 사정과 또 이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고려하여 우리는 계획한 과업수행을 연기하면서 그 사람을 특별히 당신에게 보낸다. 찾아갈 손님을 기다리며 일을 계속하라. 앗쓰."
경비소에서
작은 돛배로나 아니면 발동선으로 우리나라 땅을 향하고 몰래 기어드는 자들은 경비선 '바다 사냥꾼'을 무서워한다. 그것은 그 뾰족한 뱃머리로 얼음같이 찬물을 가르며 또 고물 뒤로는 하얀 거품 낀 자국을 남기면서 물을 헤치고 나아간다. 발동기들은 한결같은 소리로 부르릉거리면서 이 '바다 사냥꾼'의 무섭게 빠른 몸뚱이를 앞으로 앞으로 떠밀어댄다.
선교 우에는 지휘관과 나란히 하여 신호수가 있었다. 그는 눈에 망원경을 대고 어두운 밤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것도 수상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러자 갑판실에 있는 전파 탐지기의 초록빛 영사막 우에는 맑은 얼룩 하나가 나타나 보였다.
"목표가 보입니다."
하고 이때 방사기 담당자가 보고를 하다.
그는 적측 돛배의 소재지, 행로 그리고 그 항행 속도를 확정한다. 화기의 준비를 한다. '바다 사냥꾼'은 등화 신호로써 돛배를 향하여 국적을 밝히라는 요구를 하며 차츰차츰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나 적측 돛배에도 또한 우리 쪽 국경 경비선의 접근을 반사하는 반사경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돛배는 공해를 향하여 내빼고 만다.
'당신네 경비소 구역에는 국경이 침범될 가능성이 있다. 감시를 강화하라.'
경비선의 지휘관에게서 무전 보고를 받은 국경 경비대로부터는 경비소의 당직관에게 이러한 전달이 간다. 사냥꾼은 그냥 물 위에 이랑을 지으며 나간다. 갑자기 일떠서는 물결이 전파 탐지기에 비치는 고무 매상이의 윤곽을 감추어 버린다. 고무 매상이(거룻배)에는 사람 넷이 타고 있었으며 기슭을 향하여 노를 저어간다.
경비소장인 상위 미하일 꼬즐로브는 잠깐 동안 집에 들리러 달려갔다. 아내는 난 지 두 달 되는 어린 아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꼬즐로브 상위는 어린 것을 들여다보며 자애에 넘쳐 그 어린 것의 머리털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내가 이렇게 물었다.
"오래되겠어요?"
"곧 돌아오우."
꼬즐로브는 문을 홱 열고 쑥 나가 버렸다.
험한 기슭, 마들가리와 젓나무가지들 사이에서 국경 경비대원들이 경비 근무를 하고 있었다. 야간 망원경이 수면을 더듬고 있다. 구름이 갈라지는 틈으로 달이 나타났다. 상등병 월꼬브와 전사 바르다노브가 먼저 적의 매상이를 발견하였다.
경비소 직일관의 전화를 받으러 꼬즐로브 상위는 다가갔다.
"잘 알았소."
하고 그는 수화기에 대고 대답을 하였다.
"감시를 계속하오. 내가 이제 그리로 가겠소!"
가지가지 신호와 전화가 활약을 시작하였다. 기슭에서는 '손님들'을 맞을 차비가 되었다.
월꼬브와 바르다노브 옆에 꼬즐로브가 전사 세 사람과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나타났다. 개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들어, 발동이 소리야. 들어"
하고 개를 끌고 가는 사람이 개를 보고 나직이 말하였다.
매상이는 어느덧 기슭에 가까이 왔다. 거기 앉아 있는 사람 넷의 윤곽이 똑똑히 들여다보였다. 그러자 그자들은 급히 기슭으로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허리들을 굽히고 따바리총을 받들어 들고 좁다란 모래밭 코숭이를 따라 수풀을 향해 걸음들을 옮기였다. 간첩들을 보면 이렇게 하는 것이 구출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였다. 그러나 국경 경비대원들은 그자들을 숲속으로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
"멎엇! 손들엇!"
호령 소리가 난다. 이것에 대한 대답으로 따바리총들에서는 뚜루룩 뚜루룩 하는 사격 소리가 났다. 총알들은 머리 위에서 휙휙 소리를 내며 나무줄기들에 들어가 박히기도, 모래에 들어가 묻히기도 한다.
"꼬줄로브는 인원들을 산개시켰다. 측면 사격으로써 간첩들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길을 중단하여야만 하는 때문이였다. 한놈은 견디지 못하여 고무 매상이 뒤에 몸을 감추고 기슭을 떠나 물 위에 떠버리었다.
경비소에서는 꼬즐로브의 아내가 사격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놈이 매상이를 끌고 달아나지 못하게 하오."
하고 꼬즐로브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동강동강 끊히군 하였다.
"상위 동무, 어디 상하였소?"
"어서 사격을 계속하오."
바다 쪽으로부터의 사격은 잠잠하여졌다. 국경 경비대원들의 따발총들에서도 뚜루룩 소리가 멎었다.
전사들은 부상한 경비소장을 쳐들었다.
"놈들은 놓치지나 않았소?"
하고 그는 나직한 소리로 말한다.
"아닙니다."
하고 국경 경비대원 한 사람이 대답을 한다.
"네 놈들 다 기슭에 붙들여 놓았습니다."
꼬즐로브의 아내에게는 그의 남편이 부상당한 국경 경비대원 한 사람을 병원에까지 데리고 갔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꼬즐로브의 집에는 국경 경비대에서 내려온 군관들이 들어섰다. 그들의 얼굴에서 경비소장의 아내는 모든 것을 다 알아차렸다.
국경을 돌파한 간첩이 가지고 있던 몇몇 중의 증명서들과 장비품들은 이 간첩이 수지라고
부르는 간첩과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가던 중이라는 것을 말하여 주었다.
스톡홀름으로 갈 차비를 하는 수지
수지는 아랫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깊숙이 찌르고 창문가에 서 있었다. 낯을 찡그리고 그는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도, 집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든 것이 창문의 유리로 흘러내리는 빗물에 괴상하게 뒤틀어져 보였다. 엄청나게 부풀은 몸집이 되는가 하면 또 마치 바늘구멍으로 뽑아내기나 한 듯 홀쪽하니 되여 '뽀베다'가 내달렸다. 그 바퀴 밑에서는 그리 높지 않은 분수를 이루어 물보라가 일었다.
수지는 픽 돌아섰다. 에른스트는 고무판 같은 줄이 간 얼룩덜룩한 요포를 머리까지 뒤집어 쓰고 안락의자에 누워 있었다. 분명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들은 무전기가 있는 데서 일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느라고 밤새 찬비를 맞고 난 터였다. 그것은 마지막 교신이었다. 수지는 약속한 사람이 이르지 않았다는 것과 고립 무원한 처지에 놓였다는 것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 한 번 모든 사람들을 두고 욕을 하였고 자기는 돌아가련다고 경고를 놓았다.
모든 차비가 다 되었다. 서둘러야만 한다. 만약 본부에서 보낸 사람이 붙잡히기라도 하였다면 이것은 한분 한분 안전기관 사람들의 도착을 기다리는 것으로 될 것이다. 모든 자료는 다 자기가 가지고 있고 무전기는 적당한 곳에 감추어 놓았다. 레닌그라드로 가는 기차는 두 시간 지나면 떠난다. 차표는 사 놓았다. 우선 그들은 노루웨이 국경으로 잠입하고 게서 그곳을 통과하려고 시도한다. 만약 이렇게 할 수가 없을 때에는 분란을 거쳐 에르모와 하베에게 지시한 길을 밟아 갈 것이다. 헬씽키에서 48-44-87에 전화를 걸고 킨드베르그씨를 찾자. 그가 수화기를 쥘 때면 '헬씽프론 큘렌베르그' 라고 암호를 부르자. 그러면 킨드베르그는 무엇을 할 것과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 것을 말할 것이다.
이 두 천치인 에르모와 하베는 수지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지조차도 못할 것이다. 그것들을 거기, 그 마을에 앉아 있으라고, 앉아서 날씨나 기다리라고 내버려 두자. 에른스트는 참말 오늘 그것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고 묻지 않았는가. 풋내기거든! 밀정의 사업을 그가 뭘 안다는 것인가? 문제가 개인의 생명에 미칠 때 얌전하다는 것 같은 것은 아무 모에도 쓸 데가 없다. 만약 이 두 사람도 도망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은 잠시도 주저함이 없이 그렇게 하였을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수지를 감쪽같이 속였을 것이었다. 이제 안전기관 사람들이 그들을 붙든다고 하면 그들은 오로지 자기들이 받을 형벌이 헐하게 되기를 바라서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죄다 불어댈 것이고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을 배반하고 나설 것이다. 그러면 수지 그 자신은 과연 바로 이 같은 아니할 것인가? 그도 의례히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법이다. 에른스트는 얼마큼 설명을 듣고 난 뒤로는 이러한 사정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에른스트!"
수지는 자기의 조수의 어깨를 힘을 주어 흔들었다.
"자, 어서 일어나!"
에른스트는 안락의자에 일어나 앉더니 눈을 비비었다.
'이 팔삭둥이는 아주 천하태평이로구나!' 하고 수지는 생각하였다. '마치 어디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느냐는 듯하거든, 마치 생전 처음으로 국경을 불법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딸린의 거리로 산보나 하러 가면 되는 듯한 처지 같거든. 그렇게 하다가는 나중에 저것이 훌륭한 밀정이 될게야. 웃양반들도 욕일랑 하지 않을 게야.'
"벌써요?"
하고 에른스트는 묻고 나서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그들은 얼른 옷들을 주워 입었다. 수지는 양복 웃저고리 안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끄집어내서는 만또 호주머니에 옮겨 넣었다. 모든 필요한 증서와 자료들을 비단 허리띠 속에 감추었다.
수지는 술잔 둘에 꼬냑을 따랐다. 그들은 서로 잔을 맞대고 나서 쭉 들이켰다.
몇 분 후의 일이다. 수지와 에른스트는 정거장으로 가는 길을 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만트의 거리를 지나갔다. 에른스트는 힐다 야르빙그에게 잠깐 뛰어들어 작별을 고하려고 이렇게 얼마큼 길을 돌아가자고 수지에게 미리 앞서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수지는 그때 낯을 찌푸렸으나,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사이가 틀려 버릴 멋도 없었던 것이다. 힐다가 살고 있는 그 좁고, 조용하고, 고불고불한 이만트의 거리에 오자 그들을 낯익은 조그마한 잿빛 집 옆에서 발걸음들을 멈추었다. 수지는 몇 번이나 이리로 왔던가! 전쟁 전에도 그리고 딸린에 독일 사람들이 있던 때에도, 또 그리고 끝으로는 바로 얼마 전에도 그는 이리로 왔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마지막으로 이 옛 풍모를 띤 작달막한 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에른스트는 잠깐 기다리라는 부탁을 하고 나서 현관을 들어섰다.
몇 분이 지나갔다. 거리는 휑 비였었다. 수지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보도를 왔다 갔다 하고있었다. 발밑으로는 어디로부터 날아오는지도 모를 우그러들고 누렇게 된 나무 잎새 하나가 떨어졌다. '나무 잎새들이 떨어지는군' 하고 수지는 빙그레 웃음을 머금으며 생각하였다. '나무 잎새들이 떨어져, 이것도 또한 마지막이렸다.'
그는 또다시 집 모서리와 가지런히 되고, 또 다시 그 옆을 지나갔다. 바로 이 순간에 사람 둘이 뒤로부터 그의 팔을 꽉 붙들었다.
"에른스트는?"
수지는 돌아다 보았다.
"조용히 굴어, 떠들지 말구."
그의 왼쪽 팔을 붙드는 사람이 이렇게 일렀다.
둘째 번 사람이 바른쪽으로부터 망토 호주머니에 든 권총을 끄집어내는 것을 간첩은 깨달았다.
수지는 있는 힘을 다 내어 몸을 빼치려고 애를 썼으나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선 자리에서 끄떡도 하지 않았다.
'뽀베다'의 제동기에서는 새된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수지를 뒷자리에 앉히고 말았다.
"빼뜨로, 인젠 얼른 가세."
수지 옆에 앉은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운전사를 향하고 이런 말을 하였다. 자동차는 문쩍하고 자리를 떠나 달렸다.
수지는 다리를 포개어 놓고 예심원 앞에 앉아 있었다.
"당신은 무슨 권리로 나를 심문하는 게요? 당신은 대체 무슨 권리로 나를 구류하는 게요?
나는 신소를 할테요. 그때엔 당신이 책임져야 할게요!"
"그래, 당신이 까브까즈로부터 딸린에 왔다고 주장하오?"
"그렇소, 지금 나는 레닌드라드를 거쳐 돌아가는 길이요."
"당신의 말을 확증할 수 있는 그런 친지가 여기 있소?"
"있소이다. 말하자면 힐다 야르빙그 같은 사람이오."
"그밖엔 또 누가 있소."
"누구누구 많지만 당장 잘 생각이 나질 않소."
"에른스트 볼스텔은?"
수지는 유심히 예심원을 바라다 보았다.
이 사람들이 에른스트를 붙잡았나 하는 것을 알고 싶었다. 붙잡은 것이 분명하였다.
"볼스텔이요? 그 기사 아들 말이요? 나는 힐다를 통해서 그와 알게 되었소. 그자는 아주 좋지 못한 자요. 그자는 범죄적인 패당들과 접촉이 있소. 나를 자기의 투기 행동에 끌어넣으려고 한 일이 있소."
"그래 당신은?"
"뭐, 나요?"
"당신은 그런데로 나가지 않았소?"
"물론, 그렇지 않지요. 나는 정직한 사람이오. 나는 까브까즈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소. 당신들은 내 차표 값을 물어내야 하오. 차표는 못 쓰게 되고 말았으니까."
"그건 인제 딱히 알아보지요."
하고 말하는 예심원은 전화기를 집어 들더니 누구더러 자기 있는데로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잠깐 뒤에 수지는 자기 등 뒤에서 문이 열리며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위 동지."
하고 예심원은 금방 방으로 들어온 사람을 향하여 말하였다.
"자, 이 사람에게 인젠 장난은 그만하면 어떠냐고 좀 말해 주시오."
간첩은 몸을 돌리더니 대뜸 앉았던 걸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지의 입술은 떨렸다. 그는 뜻 아니한 채 걸상 슭(모서리)을 손으로 짚었다. 그 앞에는 국가 안전기관의 대위 정복을 입은 에른스트 볼스텔이 우뚝 서서 조용히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고뇨크' 기자들과 유, 웨, 우굴로브 소좌와의 담화에서
"어떤 목적에서 국가 안전기관들은 간첩 수지를 자체의 감시하에 둔 채로 체포하지 않았습니까?"
"그자와 같이 상륙한 간첩인 요나쓰와 윌리의 진술에서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수지가 이 도당의 두목으로서, 그들의 공작 기지를 창설할 것과 또 봄이 되면 상륙시키기로 되었던 스웨덴 정탐기관의 새 간첩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비밀 연락 장소를 준비하는 과업이 그의 책임으로 되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때문에 우리의 과업은 복잡해졌던 것입니다. 즉, 수지를 찾아낼 뿐만 아니라(실상 그는 오랫동안 은신하여 자기 본부와 무전으로 연락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미 채택된 결정에 의하여 그를 체포하지 않고 이 간첩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인상을 가지게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스웨덴 정탐기관이 그에게로 보내려고 한 간첩들을 일망타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수지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은 것은 그가 힐다에게로 오기 바로 전날 밤의 일이었습니다. 그가 버스를 타고 딸린으로 갈 때 우리는 이미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기 퍽 오래전에 우리는 힐다 야르빙그를 찾아 내여 이 여자에게 우리 일에 협력해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당신들은 힐다라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까?"
"그것은 이러합니다. 수지는 윌리와 요나쓰가 체포되었을 수 있다고 의심하게 된 뒤로 자기가 비밀 연락의 지시를 받은 그 지점에 우리 쪽에 드러날 것을 알고 이 자는 그 비밀 연락소로 가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당연히 그 누구와 연계를 가지려고 시도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전제하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당신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요나쓰는 소련 국토 안에 있는 자로 수지의 지인을 하나도 지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힐다에 대한 말을 우리는 윌리에게서 처음으로 들었는데 그것은 이 간첩이 독약을 먹고 죽으려고 하다가 다 나아서 진술을 할 수 있게 된 때의 일이었습니다. 윌리는 힐다에 대한 것을 극히 조금밖에 몰랐습니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어느 때 스톡홀름에서 수지와 술을 마실 때 수지가 딸린에 있는 자기의 아는 여자라고 하며 힐다의 이름을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때 또 수지에게서 들어 알은 것은 힐다가 딸린에 있는 그 어떤 중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는 것, 그리고 전쟁 시기에는 다방에서 접객원 노릇을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애인이며 바로 수지의 친구인 헤르베르트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전쟁 중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대체 어떻게 힐다를 찾아 내였습니까?"
"우선 국가 안전기관 일꾼들은 전쟁 시기에 힐다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어느 다방에서 일을 하였는가 하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이런 힐다는 일곱 사람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들 각각 다른 다방에서 일들을 했습니다. 그래 우리는 그들 중에서 두 사람이 전쟁 전에 딸린에 있는 중학교에서 공부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그중에서 누가 헤르베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애인이었던가 하는 것을 밝히기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힐다 야르빙그였습니다."
"힐다 야르빙그는 그 에른스트 볼스텔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야 물론입니다. 힐다 야르빙그로 말하면 일꾼으로서나 사람됨으로써나 직장 사람들의 평이 아주 좋았습니다. 우리는 힐다 야르빙그에게, 얼마 지나면, 헤르베르트의 친구로서, 오래전에 그가 사귀인 사람 하나가 그에게로 옴즉한데 이 사람은 죄를 진 사람으로 소비에트 기관에서 수사하는 자라는 것을 잘 말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젊은 여자에게 우리는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하고 앞으로 우리네 동료들과 같이 그를 찾아오게 될 사람 하나를 그자에게 소개시켜 줄 것도 부탁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우리 말에 찬성을 하고 그 자신이 퍽 좋은 안을 제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안대로 하면 에른스트 볼스텔은 임시로 이 여자의 약혼녀로 자처하게 되는 것이었는데 아시는 대로 이 두 사람은 이 역을 퍽도 잘 해내었습니다."
"그러면 수지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계속 자기 본부에 '잎새들은 떨어진다'라는 암호 문구를 전하고 있었습니다만 실상은 우리네 감시하에 있었던 것입니다. 수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짧은 소식밖에는 아무것도 본부에 알리지 못하였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에른스트는 수시로 무전기를 고장 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는 한편 우리는 이 자가 전하고 받고 하는 모든 전보를 손금을 보듯 환히 꿰들고 있었습니다. 볼스텔은 암호문을 사진으로 복사하였던 것입니다. 스웨덴 정탐기관에 의하면 간첩 에르모라는 자가 수지에게로 파견되여 온 뒤에 우리는 닉씨라는 간첩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수지와 닉씨가 동일한 인물이리라고 하였던 우리의 추측은 맞지 않았습니다."
"왜 국가 안전기관들에서는 에르모와 하베를 즉시 체포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간첩 하베가 우리를 닉씨에게로 인도하게 될 것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베(실상은 할리스크) 자신은 닉씨를 찾다 못하여 에르모를 통하여 에른스트에게, 말하자면 우리쪽에 조력을 요구해 왔습니다. 이런 일이 있는 뒤로는 이 두 간첩이 우리에게 작전상의 관심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에른스트는 이들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그의 '아주머니'가 사는 뺘르누 가까이 있는 어느 마을로 데려간 것입니다.
이 도당의 셋째 번 간첩인 네리쓰는 당신들도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국경 경비대원들과 마주 불질을 할 때 죽었습니다. 이 간첩은 정직한 소비에트 사람인 아르겔다쓰 빼쌰츠까스를 죽이라는 특별 임무를 받고 리뜨바로 왔던 것입니다. 빼쌰츠까스는 '피난민'으로 스웨덴에서 살고 있다가 온 사람이었습니다. 스웨덴에 있을 때 스웨덴 정탐기관은 그를 흡수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자기 조국을 배반하는 역도로 되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위협 공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대사관을 찾아가서 소련으로 돌아가도록 조력해 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 대사관 관원들은 이 희망을 성취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스웨덴 정탑기관이 자기네 계획과 의도의 일단을 이 빼쌰츠까스가 알고 있을 것을 겁내어 그에게 복수할 것을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수지가 스웨덴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게 된 뒤로 우리는 그를 체포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숨어 있는 간첩-닉씨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지금은 꼬즐로브 상위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국경 경비소 지대에서 국경을 넘으려고 시도한 그 네 간첩들에게서는 닉씨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로는 어떤 활동을 하였습니까?"
"문제는 이 간첩이 살아 있다는 표적을 보여 주지 않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즉, 닉씨가 퍽도 노련한 간첩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가 죽었거나 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이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어느 말씀이 바로 맞았습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습니다. 닉씨는 미국 사람들과 스웨덴 사람들이 자기네 앞잡이들에게 분부한 그대로 실상 얼마 동안은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한동안 도로국의 운전사 노릇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몇 번 본부에 간첩으로서의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번은 그 도로국 간부와 직원 한 사람이 이 자의 경력에 흥미를 느낀 나머지 닉씨에게 몇 가지 사정을 물어보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간첩은 자기의 일이 틀어진 줄로 정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는 즉시로 무전기와 장비를 땅 속에 파묻고는 거기서 도망을 쳐서 오랫동안 숨어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닉씨는 어떻게나 혼이 났던지 스웨덴에서나 미국으로부터 응당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약속되어있는 비밀장소의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쿡크와 토오믈라도 또는 하베도 이 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대체 어떻게 해서 이 자를 붙잡을 수가 있었습니까?"
"상당한 시일이 경과하는 것을 기다려 닉씨는 드디어 위험이 지나갔다고 결단을 하고는 무전기를 파내어 본부와 연락을 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최근의 일로 1956년 12월의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스웨덴 간첩 닉씨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의 본명은 엘렌뭉이었습니다!“
작자들의 말
우리는 여기서 미국 정탐기관과의 연계 하에 스웨덴 정탐기관에 의하여 양성되여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영토로 파송된 및 사람의 간첩 도당의 활동이 소비에트 국가 안전기관에 의하여 탄로된 기본적인 사건 내용을 개략적으로 말하였다.
우리는 1957년 3월 7일부터 '쁘라우다'와 '이즈베스찌야'지에 발표된 공식 보도에서 처음으로 이 사건들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독자들의 청원을 물리치지 않기 위하여 '오고뇨크' 편집부는 스웨덴 간첩들을 폭로한 국가 안전기관들의 활동과 관련된 충분한 자료들을 보여 줄 것을 소련 국가 안전 위원회에 요청하였다.
이 사건들의 자세하고 계통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스웨덴 정탐기관의 간첩들을 적발하는 공작에 직접 참가한 유 웨 우글로브 소좌가 모스크바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여 주었다.
그 뒤로 우리는 에스토니아로 가서 이 오체르크의 작자들로서의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여러 사람들과 만났다. 게서 우리는 이 사건들에 직접 참가한 에스토니아 국가 안전기관 일꾼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또 우에서 서술한 여러 사건들의 목격자들일 뿐만 아니라 국가 안전기관들이 간첩을 폭로하는 데 협조한 사람들인 소박한 많은 소비에트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였다.
자기의 군무를 수행하다가 영웅적으로 전사한 상위 미하일 꼬즐로브의 이름을 지닌 그 경비소에도 우리는 가보았다. 경비소에는 새로운 보충병들이 와 있었다. 그러나 이 젊은 국경경비대원들은 자기 선배 동지의 기억을 가슴 깊이 신성하게 간직하고 있다. 날마다 전투 총화(이야기의 결론을 모으고) 시에는 맨 첫 번으로 미하일 꼬즐로브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나면 쥐죽은 듯 고요한가운데서 우익에 선 전사의 선명하고도 장중한 대답 소리가 들려 온다.
"상위 미하일 꼬즐로브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의 국경을 보위하는 초소에서 용감하게 전사하였습니다."
낮이거나 밤이거나, 비가 오거나 추위가 심하거나 미하일 꼬즐로브의 이름을 지닌 경비소의 전사들은 국경 경비 근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 누구나 우리나라의 신성한 국경을 지키는 일에서 목숨을 바쳐야만 할 때에는 서슴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럼으로 하여 배치를 받아 나가는 국경 경비대원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뒤이어
"옛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의 국경을 보위하러 나갈 것!"
하고 복창하는 것이다. 그 말 한마디 한마디는 선서처럼, 맹세처럼 울린다.
국가안전위원회의 허가를 받고 우리는 구금되여 있는 몇몇 간첩들과 만나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이 자들을 만나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퍽 유쾌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독자들의 관심은 이러한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국을 배반한 사람들과 이것저것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오체르크에서 우리는 그자들의 정체를 사실보다 더 나쁘게 서술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소비에트 영토로 침입하여 온 자들로서 그들이 생각하고 행동한 모든 것은 이 오체르크에서 모든 사실과의 완전한 부합 속에서 서술되었다.
간첩들 중에서 어떤 자들은 지금 자기네들의 범한 죄를 뉘우치고 있고 또 어떤 자들은 자기들의 배반을 범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근거하여 우리는 독자들에게 아르까지 왈리진, 안드레아쏜, 요한손 대위, 그리고 스톡홀름 정탐본부의 기타 직원들, 나아가서는 쿡크와 토오믈라와 같은 간첩들을 마련한 미국 정탐기관을 소개하였다. 이 오체르크에서는 말하자면 지금은 구금되어 있는 간첩들 중의 그 누구를 보고 아르까지 왈리진이 지난날에 사사로운 이야기를 할 때며 술을 마실 때를 막론하고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아니했을 그러한 사람의 생각이나 어구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전화 소리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왈리진을 두고 말해 보자. 소비에트 출판물이 스웨덴 간첩들의 폭로에 관한 보도를 공포하던 날 '오고뇨크' 편집부는 전화로 스톡홀름 47-32-12번인 왈리진의 거처를 불러 내였다. 그것은 이른 아침, 소매점들에서 신문을 팔기 시작한 직후였다. 전화로 우리는 목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이야기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누구시오?"
하고 우리는 물었다.
"누구를 찾으시오?"
"아르까지 왈리진을 찾습니다."
"내가 아르까지 왈리진입니다."
"왈리진씨, 우리는 오늘 신문에서 당신의 성함이 들어 있는 흥미 있는 보도를 읽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누구시며 또 어디서 말씀하시오?"
"모스크바입니다. 우리는 기자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모쓰카바의 여러 신문들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읽고 우리의 '동정'을 표시하고 싶어서 당신께 전화를 걸기로 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잠잠하였다. 수화기를 앞에 한 우리의 이야기 상대자의 숨결이 높아지는 것이 들려 왔다. 종래 그는 괴로운 말을 물어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신문에 뭐라고 썼습니까?"
"신문에는 당신이 스웨덴의 간첩일 뿐만 아니라 미국 간첩까지 겸했다고 썼더군요. 그러나 지금은 당신의 앞잡이들이 모두 탄로되고 난 뒤이니 이 일도 저 일도 다 실패로 돌아간 게 분하게 되었군요. 인젠 이 주인도 저 주인도 다들 당신을 문밖으로 쫓아내고 말 것이외다. 앗쓰씨, 우리는 당신께 동정합니다."
"전화가 잘못 걸렸군요."
하고 갑자기 우리의 이야기 상대자는 터져 나오는 듯한 청 높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전화가 잘못 걸렸군요. 당신네들은 번호를 잘못 불렀나보오. 나는 아르까지 왈리진이 아닙니다. 나는 아르까지 왈리진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야기의 시초에는 아르까지 왈리진이라고 수긍하지 않았습니까!"
스톡홀름에서는 수화기를 걸어 놓았다.
스웨덴 신문사들에서도 이 보도가 게재된 바로 그날 스웨덴 신문기자들이 기멜스타베겐 24호로 아르까지 왈리진을 찾아들 왔다. 얼빠진 왈리진은 그들을 만나보려고 하지 않았으며 묻는 말들에도 대답할 것을 거절하였다. 분명 그는 그때까지 상부로부터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차마 부인은 못 하였다.
얼마 뒤에 우리는 헬씽키 48-44-87번으로 전화를 걸어 분란에 있는 스웨덴 간첩 앞잡이인 악명 높은 킨드베르그씨를 찾았다. 전화에는 바로 킨드베르그씨 자신이 나왔다. 서로 인사를 교환한 뒤에 그는 우리들에게서 "헬씽프론 큘렌베르그"라는 암호를 들었다. 잠깐 동안 킨드베르그는 갈피를 못 찾더니 어디서 이야기를 하느냐고 천천히 물었다.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이야기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안드레아쏜과 왈리진으로부터 인사를 전하자 그는 알던 영어도 모르는 것 같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이 있는 뒤로 헬씽키 경무청의 묻는 말에 대답하면서 킨드베르그씨는 마치도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굴었다는 것을 말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신문 '쑤오멘 쏘시알린 데모크라티' 지의 사장과의 담화 가운데서 킨드베르그는 스웨덴 특무대위 안드레아쏜과 지면이 있다는 것과 헬씽키에서 몇 번 그와 만난 일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킨드베르그씨는 이 말로 하여 스웨덴의 국방 참모부의 성명을 뒤집어놓고 말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는데 그 성명에 의하면 스웨덴 통신사가 보도한 바와 같이 "스웨덴 국방성의 군인 명단에는 안드레아쏜이라는 스웨덴 대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었다.
스웨덴의 일정한 계층은 소련을 반대하여 진행된 정탐 활동에 스웨덴 첩보기관들이 가담하였다는 것을 부인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죄를 스웨덴에 있는 에스토니아 망명인 단체에 들씌우면서 자기 정체를 무화과 잎새로 감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들이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스웨덴 첩보기관의 제씨들이여, 당신네들의 표현을 빌어 말한다면 "나무 잎새는 떨어진다"는 무화과 잎새도 떨어진다. 스웨덴의 정탐활동과 또 대양 건너 있는 전쟁 방화자들과 결탁한 이 나라 반동단체들의 활동은 추악한 나체 그대로 드러나고야 만다. 이러한 활동은 스웨덴 인민의 이해와는 그리고 우리 두 나라 친선의 이해와는 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다.
스웨덴의 사려 있는 모든 사람들은 문제의 신중한 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 발표하는 오체르크가 이 면에서 한 도움으로 되기를 바란다.
작품 요약
스톡홀름 기멜스타베겐 24호
스웨덴의 스톡홀름 근교 엘리브쇼의 교외에는 첩보 요원(간첩)을 양성하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일명 기멜스타베겐 24번지로 책임자인 아르까지 왈리진이라는 에스토니아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원래 이 집은 왈리진의 감독관인 스웨덴 특수대위인 쿨트 안드레아쏜의 부친 소유의 집이었는데 그의 부친이 간첩을 양성하는 사업에 뛰어들어 자신의 별장을 간첩 양성소로 제공하였다.
이곳에서 왈리진은 3명의 요원을 양성하고 있었다. 수지와 윌리 그리고 요나쓰가 그들이었다.
수지는 왈리진의 친구인 마찌에겐이라는 사람의 천거로 간첩학교에 입문을 하였는데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목 주위에는 양쪽 다 상처가 있어 유별난 특징을 보이고 있는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편에 서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싸운 전력이 있다. 43년도에는 까렐리야 전선에서 부상을 입어 브레슬라우 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그 뒤로 독일과 핀란드를 거쳐 스웨덴의 망명인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의 조국은 소련에 강제로 합병이 되어 나라가 없어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련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여 간첩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적격인 인물이었다.
윌리는 역시 독일군대에 근무하다가 함대에서 유곽을 전전하면서 술과 계집을 알아 자포자기에 빠진 인물이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빠르누에서 판매원을 하다가 포섭이 되어 간첩교육을 받게 되었다.
요나쓰는 구레싸아르의 체신부에 근무하다가 간첩이 되었다.
방향-오쓰무싸알 섬의 등대
교육을 받은 3인은 새벽녘에 왈리진의 배웅을 받으며 알베르트 릴레베르그라고 하는 선장의 지도 아래 발동선을 타고 에스토니아 해안에 침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삼엄한 해안경비로 인해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그러다가 10월의 어느날 밤 드디어 요란한 탐조등의 불빛을 피해 침투에 성공을 하였으나 그곳은 예정된 곳과는 떨어진 곳이었다. 원래 그들은 오쓰무싸알 섬의 등대를 목표로 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루후쌀루 근처에 도착을 하였다. 도착 직후 그들은 무전기와 장비의 일부를 땅에 묻고는 서로의 임무를 위해 윌리와 수지는 딸린으로 요나쓰는 남쪽으로 갈 길을 재촉했다.
윌레르 대위의 계획
에스토니아 수도인 딸린의 방첩대(국가 안전기관) 대장격인 오쎄뜨로브 대좌의 사무실에서는 낮 4시부터 회의가 시작되었다. 윌레르 대위는 구역 소비에트 대의원과 골호즈 부위원장의 살해소식을 전하고 이와 아울러 새로운 무전대의 송신사건을 거론하였다. 이 무전대는 간첩의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반증하는 것이 약 3주전 처녀 우편원인 씰비 람믹이 최근에 히이우마에서 이주해 온 산림 감시원 얀센의 집에 가다가 얀센의 집에서 나오는 거동수상자를 보았다는 것을 신고했었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얀센의 당황한 모습이며 그가 라디오 축전기로 정보를 역시 씰비 람믹으로부터 입수를 하였다고 윌레르는 보고를 하였다. 결국 이 회의는 많인 토론이 있었으나 국가 안전요원들이 사냥군으로 가장을 하여 얀센과 접촉을 시도한 뒤 이들의 동태를 파악한 후 나중에 소탕을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물론 윌레르 대위의 계획이었다.
싸알리스테는 방조자들을 구한다.
한편 얀센은 옛날 히이우마 섬에 있는 군사파쇼단체인 오마카잇세의 대대장으로 있었던 자신의 상관인 싸알리스테의 명을 받들어 간첩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싸알리스테는 그 단체가 히틀러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부하인 얀센을 몰아세워 반소전선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산에서 입에 자갈을 물리고 온몸이 줄에 묶인 채 신음하는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람은 인근의 운전사였다. 얀센은 정체불명의 산사람들이 이 운전수를 감금하고 차량을 탈취하여 인근 상점의 물건을 털었다는 사실을 입수하고 싸알리스테에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한다. 싸알리스테는 이 산사람들을 반국가세력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포섭하여 방조자(협력자)로 만들기 위해 이들과 접촉을 하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얀센을 이들에 보내 만나자는 의사를 타진한다. 그러나 얀센은 이들에게 감금을 당하였다가 얀센이 독일군 편을 들었던 오마카잇세 단체의 회원이라는 것을 알고는 풀어준다. 그리고는 얀센을 믿고 그에게 식료품조달을 부탁하기도 한다.
숲속에서 만나다
얀센의 중개로 오랜만에 토굴에서 나온 싸알리스테는 숲속의 형제들이라고 자처하는 산 사람의 두목인 렢쓰라는 사람과 숲속에서 만난다. 싸알리스테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한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고 지금은 숲속에서 믿을 만한 사람 셋을 데리고 숨어 있다는 말을 하였고 렢쓰는 자신이 전과자라서 숲에 숨어 있었다고 하며 원래 다른 지역에 있다가 그곳에 군대가 주둔을 해 와서 부득이 이곳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둘은 의기투합이 되어 공동으로 움집을 짓자는 결론을 내고 공동으로 만들자는 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공동으로 이곳 에스토니아에서 소련에 대항하자는데 합의를 했다. 완성한 새 움집에서 만나기로 한 날 싸알리스테는 동료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갔으나 그곳은 이미 함정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던 싸알리스테는 그곳에서 렢쓰와 술을 마시며 안정을 취하고 있었는데 렢쓰는 사실 국가 안전기관원인 끼미중위가 변장을 한 것이었고 그 움집에는 이미 많은 국가안전원들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결국 안전원들이 싸알리스테와 그 일행을 급습하여 전원 체포하였다.
산림 감시원 렢쓰는 병원에 누워 있는 데 찬성하다
딸린의 화물역 난방실에서 밤을 지새운 수지와 윌리는 그곳에서 헤어졌다. 윌리는 그곳에서 스웨덴 고정간첩 릴렐레흐트와 편지를 교환하고 에스토니아 광신교도들에게 미국 사람 리할드 카웁쓰의 편지도 전달하였다. 그리고 윌리는 '또리'라고 하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윌리는 산림 감시원을 만나야만 하였다. 그는 왈리진이 말한 렢쓰라는 늙은이로부터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찾아가 보니 렢쓰는 이미 늦었다며, 윌리에게 비협조적이었다. 급기야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주치의인 차를 타고 병원에 가는 쇼를 하였다. 그는 실상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니고 시내의 국가 안전기관 주재소에 가서 간첩이 현재 자기 집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고발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소위 쌀루쏘오의 직일
저녁부터 신지 정거장 플랫폼에서 직일을 서고 있던 유하네쓰 쌀루쏘오 소위는 산림 감시원 렢쓰가 알려준 외국간첩에 대한 자세한 구두 초상을 받고 기다리다가 술집으로 들어가는 윌리를 발견하고 따라 들어가 윌리를 체포한다. 이 때 윌리는 자신의 옷깃에 숨겨놓은 독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쌀루쏘오의 기민한 행동에 실패하고 만다.
요나쓰, 발소리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온다
요나쓰는 왈리진이 이야기를 한 대로 산림 감시원 얀센이 살고 있는 큐티 마을에 찾아 갔다. 얀센이 잡혀간 것을 알자 요나쓰는 싸알리스테도 붙잡힌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사촌 동생이 있는 라아아쓰마로 간다. 결국 사촌 동생 와씰리를 만나고 그곳에서 여장을 푼 요나쓰는 고향인 무후섬으로 가려고 시도하나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무후 섬으로 연락을 해 그곳에서 온 아버지를 만났다. 그러나 결국 증명서를 얻는 데 실패해 무후 섬으로 가는 도움을 받지 못하고 만다.
증명서 없는 사람
에스토니아 해안에 상륙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요나쓰는 딸린의 발찍 정거장에서 수지와 윌리 그리고 자기자신까지 셋이 만나기로 하여 사흘전에 미리 와 있었다. 딸린에 와서는 와씰리의 아내가 일러준 대로 메탈리 거리 11번지에 사는 늙은 부부인 꾸이위기씨의 집을 찾았다. 소목수인 꾸이위기는 딸린 교외에 살고 있었다. 그 부부는 반가이 맞았으나 요나쓰는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신의 모든 물건을 이들 부부에게 맡긴다. 그리고는 광장으로 나가 배회한다. 그러다가 칼나마야 거리에서 내부원인 야스까에게 검문을 당하여 체포당하게 된다.
위르기니야주의 기숙사
에스토니아 사람 쿡크는 알렉스라는 에스토니아 사람의 권유에 의해서 스웨덴 기선에서 해상 근무를 걷어치우고 뮨헨 정거장에서 미국인 정탐정 죤을 만났다. 그리고는 카이젤가스트 42호에 있는 비밀 연락 장소에서 죤은 쿡크를 다른 미국 사람에게 소개한다. 쿡크는 신체실험을 거친 후에 미국으로 갔다. 뉴욕과 워싱톤을 거쳐 북캘롤리나의 낙하산 부대기지인 풀부레이크에 내렸다. 새로 사귄 친구 토오믈라도 같이 내렸다. 둘은 낙하산병인 톰에게서 낙하산 교육을 받고 다시 워싱톤으로 갔다. 워싱톤으로부터 40킬로 떨어진 메릴랜드주 포올쓰월에서 3킬로 떨어진 간첩학교에서 그들은 교육을 받는다. 또한 위니기야주의 파이팎스 마을에서 그들은 사격을 배운다. 두 달이 지나 다시 풀부레이크 군영으로 와서 독도학, 행군, 폭발물, 무전교육 등 그 밖에 많은 것을 배운다.
교육과정이 끝나고 쿡크와 토오믈라는 서부 독일로 오게 되었다. 뮌헨에서 푸랑크푸르트로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6시간 비행 후에 에스토니아 상공에서 밤 한 시에 뛰어내린다. 낙하산에서 내린 이들은 아욱싸아르를 떠나 도망을 쳤다.
닉씨를 찾아서
닷새째 쿡크와 토오믈라는 숲속을 헤매다가 겨우 파르누까지 와닿았다. 그리고는 닉씨를 만나기 위해 클라네 거리 5번지까지 왔으나 닉씨를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토오믈라의 어머니인 리자가 사는 마을에서 둘째 번 주일을 보냈다. 그곳에서 토오믈라의 누이 헬리기가 이들의 일을 도와 주었다. 그녀는 케루구 마을에서 우편 통신원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을의 소상한 일들이나 그밖에 잡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헬리기와 쿡크가 육체적으로도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때 에스토니아 국가안전위원회는 새로운 무전의 발신지를 추적하는 가운데 쿡크와 토오믈라의 무전발신을 추적하여 포위망을 좁힌다. 쿡크가 헬리기를 포섭했다는 송신을 스웨덴으로 하다가 키카스 대좌와 루낀 대위의 국가 안전요원들에 의해 체포된다.
수지는 "새끼 고기"를 잡는다.
상륙한 뒤로 수지는 10월 스무날 경에 윌리와 헤어졌다. 그리고는 한 달이 지난 11월 20일에 딸린의 발찍 정거장에서 만나기로 한 윌리와 요나쓰가 나타나지 않자 수지는 숲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그리고는 무전으로 "나무 잎새는 떨어진다"라는 문구를 스웨덴으로 보냈다. 이는 자신은 붙잡히지 않았다는 뜻인 암호였다. 숲속에 있다가 딸린의 거리로 수지는 나왔다. 그리하여 수지는 자신의 여자동창생 힐다 야르빙그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거기서 그녀의 애인 에른스트 볼스텔을 포섭하려고 노력한다.
마침 에른스트는 그가 아끼는 오토바이가 고장이 나자 이것을 수리하기 위한 수리비를 수지에게 빌린다. 두 번이나 손을 벌리자 수지는 에른스트에게 공민증을 구해 줄 것을 요구한다. 훔치든지 아니면 사가지고 오라는 부탁이었다. 에른스트는 결국 이를 수용하여 수지는 공민증을 가지게 되었다. 에른스트에게 돈을 빌려주는 등 가지고 있던 자금을 거의 다 써버린 수지는 왈리진이 있는 본부에 자금을 보내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이렇게 하겠다는 답변이 왔다.
스톡홀름에서 온 손님들
리뜨바의 바다 기슭에 또 다른 간첩의 침투가 있었다. 그러나 해안경비에 걸려 한 명만 사살당하고 둘은 도망을 쳤다.
수지는 에른스트의 도움으로 딸린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전을 하려면 딸린 부근 삐리따에 있는 에른스트의 별장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후 스웨덴으로부터 사람이 왔다. 그 사람은 에르모라고 하는데 침투하다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몸만 왔던 것이다. 이에 수지는 매우 실망을 하였다. 도움은 커녕 오히려 이 바보 같은 사내를 돌볼 처지가 되었다. 에르모는 오히려 수지로부터 의심을 받고 생활을 하였다. 에르모와 같이 온 하베도 에른스트의 친척집에 의탁하게 된다. 돈이 다 떨어진 수지는 무전을 하여 스톡홀름으로부터 지원을 재촉했다.
경비소에 수지를 지원하려고 온 간첩들은 해안 경비소에서 발각되어 전원 소탕이 된다. 이때 경보소장인 상위 미하일 꼬즐로브도 부상을 입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다.
스톡홀름으로 갈 차비를 하는 수지
해안 경비소에서 셋째 번 정탐원인 네리쓰마저 발각되어 서로 총격전이 벌어져 죽고 만다. 이에 추가적인 지원이 절망적으로 돌아가자 수지는 스톡홀름을 향하여 갈 준비를 재촉한다. 그러자 에른스트는 힐다 야르빙그를 만난다는 핑계를 대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 잠적한다. 이 때 수지는 딸린의 힐다의 집 앞에서 에른스트를 기다리다가 두 명의 안전 요원에게 체포된다.
예심원 앞에서 자신은 죄가 없다는 항변을 하는 수지는 곧이어 들어 온 국가 안전기관의 대위복을 입은 에른스트 볼스텔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수지는 에른스트에게 속은 것이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실토한다.
요고뇨크 기자들과 유글로브소좌와의 담화
수지가 잡히고 난 뒤 상당한 시일이 경과 한 후 닉씨마져 1956년 12월에 붙잡히게 된다. 닉씨의 본명은 엘렌 뭉이었다. 유글보브 소좌는 그들이 일망타진된 뒤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간첩들의 행각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그들의 동태를 꾸준히 파악한 뒤 마지막에 검거했다고 밝혔다. 특히 요나쓰로부터 수지의 여자 친구 힐다가 있다는 사실을 알은 것이 이번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고 밝혔다. 힐다를 찾기 위해 국가 안전기관은 에스토니아에 사는 모든 힐다를 추적했으며 그중에서도 전쟁 중에 다방접객원으로 일한 힐다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힐다를 찾고 난 뒤로는 그녀의 도움을 받아 에른스트 대위가 그녀의 가짜 약혼자 역할을 밝혔다. 힐다를 찾고 난 뒤로는 그녀의 도움을 받아 에른스트 대위가 그녀의 가짜 약혼자 역할을 하며 수지를 유인하여 다른 간첩들의 동향도 파악하다가 결국 일망타진하였다고 밝혔다.
작자들의 말
1957년 3월 7일부터 '뿌라우다'와 '이즈베스찌야'지에 공식 보도된 이 사건을 알게 되어 "오고뇨크" 편집부에서 스웨덴 간첩들을 폭로한 국가 안전기관들의 활동과 이에 관련된 충분한 자료를 보여줄 것을 소련 국가안전위원회에 요구하여 성사되었다. 또한 이 사건의 공작에 직접 참가한 우글로브 소좌가 사건의 전모를 상세히 전하여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의 주역들인 에스토니아 국가 안전기관 일꾼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체포된 사람들로부터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이 오체르크를 만들었다.
전화소리
사건이 일단락된 후 오고뇨크 편집부는 스웨덴 스톡홀름 47-32-12번지인 이번 사건의 총책임자인 왈리진의 거처를 알아내고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왈리진은 당황하여 이런 사실을 부인했다. 또한 헬싱키 48-44-87번으로 전화를 걸어 스웨덴 간첩 앞잡이인 킨드베르그 씨를 찾았다. 그도 역시 사건의 폭로에 당황하였으나 후에 그는 지역 신문과의 대담에서 스웨덴 특무대위 안뜨레아쏜과 지면이 있다고 고백하였고, 헬싱키에서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고 고백하였다.
이 말은 스웨덴의 국방참모부의 성명을 뒤집어 놓았다. 즉, 스웨덴 통신사가 보도한 바에 의하면 '스웨덴 국방성의 군인 명단에는 안드레아쏜이라는 스웨덴 대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설
1. 나무 잎새는 떨어진다.
'나무 잎새는 떨어진다'는 1958년에 국립 문학 예술서적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1957년도 잡지 '오고뇨크'에 5회에 걸쳐 연재된 작품을 번역하여 책으로 묶은 이 작품은 백석의 번역작품으로는 비교적 후반기의 작품에 속하는 번역물이다. 문고판 크기의 이 책은 195쪽 분량의 두께로 가로 10cm가 조금 넘고 세로 15cm가 조금 안 되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표지는 두 명의 병사가 개를 끌고 나무 밑에서 수색을 하는 장면이다. 실상 이 표지 그림은 잡지 '조쏘문화'의 다른 글 삽화로 몇번이나 등장했던 그림으로, 이 그림을 백석이 다시 선택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원래 이 작품은 단행본이 아니라 잡지 '오노뇨크'에 연재된 작품을 백석이 번역하여 임의로 한권 분량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잡지 기자들인 저자들도 서로의 공동취재이기 때문에 필진이 자연히 두 명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공동취재이자 공동집필인 셈이다.
이 작품은 원작에서도, 다른 문학적인 원작과는 성격의 차이가 뚜렷하다. 즉, 원작에서 작품의 문학성을 엿보기에는 애초부터 계도성이나 계몽성을 앞세운 원작자의 의도 때문에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다행히 '나무잎새는 떨어진다'는 전개되는 스토리에 비해서는 그나마 나름대로의 서정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노르멜이 기자이면서도 작가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작품 전편에 흐르는 서구적인 분위기와 제목이 주는 암시성이 이 오체르크(체험담)의 품격을 어느 정도 높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번의 오체르크는 백석이 책의 앞에서도 밝힌 것과 같이 구 소련의 잡지에서 번역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작품은 백석이 한때 편집에 간여를 했던 '조쏘문화'나 '문학신문'의 번역란에 실은 수준의 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또한 설명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작품의 제목이 보여주는 서정성이다. 내용은 그렇다치고라도 우선 제목이 백석의 마음에 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백석이 이전에 번역한 작품은 향토성이 집약된 서정적 작품에 초점이 맞춰있었다. 결국 많은 그의 번역작품들 중에서도 "나무 잎새는 떨어진다"는 기존의 번역작품과는 다른 성향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것은 우선 번역대상이 된 작가가 특이하게 러시아의 일류작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 노르멜은 비록 작가로 어느 정도 이름이 나있었지만 그동안 백석은 순수문학작품 번역에 많은 비중을 두어온 터였기 때문에 이번 오체르크는 성격상 기존의 작품 선택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백석은 이미 '고요한 돈',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싸웠다', '조국찬송' 등 솔로호프 같은 유명작가의 작품을 주로 많이 번역하여 왔다. 평론의 경우는 다소 덜 알려진 작품도 있었으나 장편의 경우는 대부분 러시아의 유명한 작품이었다. 둘째는 백석의 서구취향의 단면을 은연중 보여준다. 이 작품의 배경은 비교적 자유가 허용된 북구라파가 배경이 되고 있다. 평소 유럽을 동경했던 백석이 이렇게 번역을 통해서나마 제한적으로 서구라파의 풍경과 분위기를 맛보려했던 것이다. 그것은 북한의 질식할 것 같은 체제의 부적응성이 반영된 하나의 산물이다. 동토의 땅 북한을 탈출하고 싶었던 심경을 이렇게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은연중에 나타낸 것이 이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나무 잎새는 떨어진다'는 말 그대로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담긴 구절이면서도 작품 내에서는 '나는 힘겹지만 잘살고 있다'라는 뜻이다. 자유주의자 백석이 유례없는 폐쇄사회에서 그 사회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면서도 자유세계로 향한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그만큼 북한의 체제는 '나무 잎새는 떨어진다'는 암호가 대변될 정도로 암울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백석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인 간첩에 대해서 어떤 선악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은 원작자의 서술 의도와 어느 정도 결합된 것이지만, 사실상 백석의 번역 의도와 일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국가의 작가들이 서술한 이 작품이 오늘의 자유 세계에서도 충분히 읽힐 수 있는 것은 원작자와 번역가의 안목이 뒤따른 혜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셋째는 백석이 이러한 작품을 번역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번역환경이 극히 열악해져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만일 이 작품이 백석이 애초에 번역할 의도가 있었으면, 아마도 잡지 '조쏘문화'에 실렸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조쏘문화'에 실리지 않았다.
이는 이 작품이 백석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번역된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이 번역이 기획된 순서에 의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백석이 왜 이 작품을 원작대로 잡지에 번역 게재하지 않고 단행본으로 하였느냐에 의문이 남아 있다.
단지 백석이 1958년에는 '조쏘문화'에서 그만둔 것으로 추정된다. 문학신문에서도 1958년에는 백석의 글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 당시 백석은 어떤 조치에 의하여 집필 금지를 당하는 시기가 아니었나 사료된다.
2.
이 작품에서 보인 백석의 어휘는 많이 세련된 느낌을 준다. 그만쿰 사투리의 빈도수도 줄어든 것이다. 물로 이 작품의 배경이 서구라파의 도시와 산간이지마는 또한 그 내용도 서정성과는 거리가 먼 첩보물이고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백석이 번역에서 구사한 순수고유어가 현저히 눈에 줄었다. 이는 초반기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싸웠다'와 대조가 되는 면이다. 그만큼 백석의 문제는 서서히 현대어에 접근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런 이면에는 북한의 어문정책이 한몫을 하였다. 쉽고 편하게 사용하라는 압력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튀는 문체와 어휘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가 북한이었다. 그것은 백석에게는 참을 수 없는 또 다른 번역 환경이었다. 사투리를 보존하며 이를 집요하게 구사하는 백석을 북한의 모든 어용작가들이 싫어했음은 물론이다.
어용작가들의 기준은 게으른 일반대중이 작품을 쉽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백석이 번역한 '고요한 돈'도 너무 사투리가 많다고 하여 의도적으로 배척을 하였고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싸웠다'도 번역의 족보반열에 올리지도 못했다.
결국 이 두 책은 뛰어난 번역에도 불구하고 몇 년 뒤에 변문식에 의해 재번역되었다. 변문식의 번역이 백석의 번역에 못 미치는 것은 그 책을 읽어 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이처럼 북한의 문학정책은 진정한 문학의 창작을 용납하지 않고 또한 번역에서도 이를 허용치 않았다. 번역작품의 선택도 제대로 못 하는 나라에서 그나마 근근히 피해 다니면서 번역을 한 이 작품이 어떻게 튀는 것을 용납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간첩들의 일망타진을 다룬 첩보물이라 검열에 통과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백석의 마지막 작품이자 번역태도의 심경적인 변화까지 보인 그의 최후의 번역이였던 것이다. 메마를 대로 마른 번역환경 속에서 누구보다도 번역에 애착을 가진 백석이 선택한 이 작품은 가을의 조락을 느끼면서도 그 자연의 순리를 따르겠다는 처절함이 온 작품으로 느껴진다.
백석은 이 작품을 발표할 당시에 당국으로부터 집중적인 비판을 받고 있었다. 백석이 추구하는 순수문학은 오히려 사회주의 사상발전에 저해 된다는 논지가 백석을 비판하는 주된 논지였다. 나아가 백석은 당성이 약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문학인들에 대한 대숙청을 예고하는 분위기였다. 백석은 번역으로 이들과 대항했다. 공산국가인 외국의 경우도 상황이 그렇지 않은데 왜 유독 북에서만은 사이비 어용문학이 판을치는가 하는 항의성이 강한 논조의 백석의 주장은 동토의 땅인 북에서는 통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백석은 문학신문을 통하여 왕성한 문학평론을 번역하였다. 러시아의 일금 작가들이 보는 공산주의 국가의 문학평론을 북한에 소개함으로써 순수문학과 사회주의 문학의 절충형태 전형을 보이려는 백석의 의도는 나중에 북한 정권에 의해 발각이 되어 많은 주의나 경고 그리고 지적을 받았다. 순수문학을 고집하는 백석의 생각은 주체사상 교육을 문학을 통해서 하겠다는 당국의 의도와 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러시아(구 소련)는 나름대로 문학을 문학으로 견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론도 비교적 자유롭게 하였다. 그래서 더욱 여기에 자극을 받는 것이 백석이었다. 러시아어와 문학에 조예가 깊은 백석이 이를 보고 북에서도 실험을 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백석의 노력은 너무나 봉건적이고 광신적인 독재자에 대한 충성맹세 노름이나 하는 문학 환경 속에서는 도저히 역부족이었다.
3. 50년대의 백석
이태준마저 숙청을 당하고 나자 백석은 더욱더 번역일에만 몰두를 하였다. 아무도 알아주는 일이 없어도 백석은 이렇게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번역에만 충실하였다. 비교적 많은 작품을 번역하였지만, 오체르크(체험기)를 번역하여 단행본으로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는 백석이 자신의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감행한 하나의 모험적인 시도인 것이다. 북에서는 문학 작품의 번역은 성과물이나 개인업적으로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번역은 하나의 기계적인 수단에 불과하다는 관념이 지배적인 것이 북의 현실이었다. 따라서 번역가는 작가로 대우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대의 하대를 받은 백석은 오히려 이를 노렸을 것이다.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백석은 더욱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숙청의 대상에 오르지도 않았다. 이 때 백석이 주로 활동한 공간은 '조쏘문화'라는 잡지였다. 이 잡지는 해방 이후 소련군이 북에 진주하면서부터 나온 친선잡지였다. 선진화된 소련의 문학작품들은 번역하여 소개한다는 취지의 이 잡지는 당시에 북한에서는 알기 어두웠던 소련실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 잡지는 당시로서는 소련이라는 강대국의 문화적인 입김이 작용하는 치외법권지역이었다. 그많큼 자유로운 이 잡지를 백석이 주도적으로 참여를 하였다. 백석은 이 잡지의 편집기자로 있으면서 몇 년간 활동을 하였다. 특히 '오고뇨크' 잡지의 번역에 많인 시간을 할애했다. '나무 잎새는 떨어진다'도 이 '오고뇨크' 잡지에 연제된 것이었다. 이를 백석이 번역을 하였다.
사실상 백석에게는 '조쏘문화'와 '아동문학', 이 두 잡지가 마지막 탈출구였다. 특히 '조쏘문화'는 백석이 50년대 말까지 목숨을 부여하는데 일조를 했다. 철저히 친소적인 경향으로 인해 김일성 우상화 작업의 시도가 애초부터 봉쇄된 이 잡지는 점차로 북한당국의 눈엣가시로 여겨졌다. 결국은 이 잡지의 수명은 60년대를 넘기자 그 존재가치는 더 이상 없어졌다.
백석은 이 잡지에서 무수한 번역에 손을 대었다. 아동문학과 관련된 러시아 풍자문학에 관련된 부분을 집중적으로 번역한 그는 그 와중에도 러시아의 많은 시인들의 작품들도 번역을 하였다.
비록 북에서는 평가가 없었지만 백석은 누구보다도 번역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사실상 번역은 창작을 능가하는 고도의 문자행위이면서도 더 많은 문학적인 기교를 요구하는 분야였다. 북한당국이 50년대 말까지 백석을 용인한 것은 백석이 창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번역에만 주력했다는 것을 가지고 거기에만 이용가치가 있었다는 판단이 선 듯했다. 그러나 북한은 종주국인 소련을 부정하는 시기이자 개인 우상화로 들어가는 전 단계인 50년대 후반부터는 번역물의 내용에도 간여하기 시작했다. 또한 외국문학 작품의 번역에 철퇴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백석은 그나마 북에서 자유로운 문학행위인 번역을 하지 못하였고 당국은 현지 작가 체험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함경도 오지로 백석을 쫓아버린 것이다. 순수문학을 표방하는 백석을 눈엣가시로 여긴 당국의 조치였다. 당시 백석이 북한의 문학 형태를 비난한 유일한 작가로 평가를 받고 있었다. 뚜렷한 제목도 없으면서도 백석을 숙청할 수밖에 없었던 북한은 우상화 놀음에 불나비처럼 뛰어든 어용문학이 판치는 한심한 작가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시기였다.
백석의 친구 허준같은 이는 북에서는 아예 붓을 꺾은 작가이다. 그래서 그는 겨우 몇 편의 번역작품만 내었을 뿐이다. 허준은 북에서 번역 외에는 어떤 글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런 허준이 북에서도 백석과의 꾸준한 교류를 하였다고 한다. 번역만이 지상과제가 된 두 훌륭한 작가들의 비애는 말로는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허준은 후에 중국으로 탈출하였다는 미확인 소문이 들려오기도 할 정도로 힘든 생활을 했다. 백석도 마찬가지였다. 함경도 오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초야에 묻혀 살아간 그의 행적은 후에 언제 어느 때나 평가를 받아도 보석처럼 빛나는 행동을 하였다.
4. 60년 대의 백석
지방으로 쫓겨간 초쾌한 백석의 모습은 1960년 1월 19일 문학신문에 나타난다. 58년 말 겨울부터 북한당국은 당성이 약하다고 평가되는 작가들에 대해서 대대적인 문책성 추방을 단행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백석과 천청송이다. 문학성에서는 두 사람을 능가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추방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지목이 되었고 그밖에 많은 작가들이 산간오지나 광산촌 또는 공장 그리고 농촌과 어촌 등에 배치를 받았다. 그리하여 1년 뒤에 그들의 체험을 묻는다며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 자리에서 백석은 가장 큰 불만을 토로하여 현지작가 체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설령 작가적 역량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현지체험을 하면 좋은 소재가 나올 수도 있지만, 백석 같은 일제시대 최정상의 시인을 산간오지 양치기를 시키고 퇴비와 거름을 나르는 중노동을 시키는 것은 사실 숙청이나 진배없었다. 그동안 번역이나 하며 북한 정권에 비타협적인 인물인 백석은 이런 좌담회에서는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라면 와야 하는 현실에 어쩔 수 없이 좌담회에 참석을 하였다. 그런 사실을 문학신문 부주필인 이맥이 아는지 백석에게 그 소감을 제일 먼저 물어 보았다. 이때 백석은, 마음의 시련이 컸다고 북한당국으로 볼 때는 비교적 불온한 언사를 구사했다.
이맥: 제일 먼 곳에서 오신 손님을 귀중하게 맞이해야 할 것 같은데 백석 선생이 먼저 서두를 떼 주시지요. 방금 작년 이맘 때의 양강도(함경도-편집자 주)의 추위는 무던히 혹심했다는 말을 하시던데 한 해를 회고해서 첫포부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백석: (생각에 잠긴다) 추위의 시련보다 마음의 시련이 더 컸다고 하겠지요. 혁명적인 현실 속에서 벅찬 흥분을 느끼는 것이 뭣보다 중요합니다. 나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인민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는 것, 이것이 나의 과업이었습니다. 정신 생활을 위주로 하는 작가가 노동 체험을 통해 그것을 체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구 있는 일이라구 생각합니다. 1년을 회고해 볼 때 첫포부를 달성했다고는 감히 말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튼 지난 1년이 무척 귀중한 한해였다는 것만은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좌담회는 백석에게 더 이상의 지면이 제대로 할애되지 않았다. 참석자들이 대부분 현지 작가체험이 유익했고 창작활동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투로 이야기를 하였다. 또한 어느 평론가가 현지 작가체험 초기에는 좋은 작품들이 나왔는데 지금은 좋은 작품이 안 나온다는 지적과 함께 시인들의 작품 중에서 초기의 시들이 좋지 않았던 지적을 하였다. 이에 대해 백석은 "시인 개체의 체험만을 노래했다고 지금에 와서도 탓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왜 그때의 시들이 독자들에게 공감을 줄 수 없었겠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 그때의 시는 그때 나름대로 독자들의 공감을 주었다고 주장을 했다. 따라서 백석은 "때문에 지나치게 반성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문제는 시인의 개체 체험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반박을 하였다. 백석은 나아가 "시의 다양성을 위해 눈부시게 발전 변모하는 우리 현실을 서술적 형식으로 묘사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기록주의에 떨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는 말로 시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당시 백석은 사실상 창작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다. 순수문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 때문에 시작했던 아동문학에 관한 작품도 집중적인 비판을 받아 포기한 상태였다. 그나마 번역으로 생계를 이끌어가는 백석을 김일성 우상화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숙청하다시피 하여 지방으로 쫓아 보내고 그곳에서 나이 50이 다되어서 산간오지에서 중노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얼마나 작가들을 정신적으로 수탈하고 괴롭혔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작가들은 다 우상화작업대열에 뛰어들었으나 백석만은 러시아의 문인들의 예를 들면서 사회주의 국가 환경하에서도 인간의 본성을 노래하는 순수문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외국의 예를 제시하고 그 의의를 설명하고 전파에 노력하였다. 그런 환경조성으로 러시아의 훌륭한 작가들의 작품이나 평론을 번역하여 '문학신문'에 게재하였다. 그러나 문학신문 내에서도 백석의 이러한 튀는 행동에 제동을 걸었고 나중에는 배척과 소외를 당하였다. 백석은 당국의 눈으로 보면 분명히 눈엣가시였다. 또한 글을 쓴다는 동료들로부터도 질시를 받았다. 문학성을 버리고 아부와 충성의 길로 들어서 목숨을 보존하려는 글장이들 앞에 너무나 고고한 백석의 존재는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거울이었다. 이용악은 김일성 우상화로 북한에서도 일급대우를 받으며 명을 부지했다. 그러나 백석은 이를 거부하고 함경도 산간지방으로 내몰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백석의 작품은 60년대 초반부터 내부적으로 금서로 분류되어 모두 수거하여 폐기처분하였다. 이리하여 백석은 북한에서는 적어도 완전히 문학적인 생명은 끝난 것이다. 이후 백석에 대한 모든 소식은 두절되었고 생존여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에게 아부와 충성을 다했던 그리고 그동안 백석을 옹호해 주었던 한설야도 결국은 60년대 초반에 숙청을 당하였다. 이렇듯 북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이용만 당하고 결국은 대부분 숙청을 당하였다. 이것은 바로 북한의 문학 환경이 5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구풀이
ㄱ
각자가: 새기어져
감물어: 깨물어
값가는: 값나가는
거먼: 검은
거퍼: 거푸
걸상: (여러 사람이 걸터 앉을 수 있도록) 가로로 길게 만든 의자
걸음발: 발걸음
게서: 거기서
게요: 것이요
결곡한: 생김새나 마음씨가 빈틈이 없고 야무진
결은: 엮어 짠
결패있게: 성깔있게
경무청: 경찰청
고물: 배의 뒷부분(끝부분)
고뿌: 컵
고혹적인: 매우 유혹적인
곤하실: 피곤하실
곱을 만큼: 꼽을 만큼
괴였다: 고이었다
교외: 도시나 마을의 변두리로 들이나 논밭이 많은 곳
교편물: 교신할 때 쓰이는 물건
구류: 잡아서 가둠
구변: 말주변
군무: 군복무
굴고: 지내고, 굴러다니고
굴어났다: 뒹굴어 났다, 떨어졌다
궐련: 담배
그루터기: 초목을 베어내고 남은 뿌리와 그 부분
금시: 금방
깊섶: 풀이 나있는 길의 옆
까질락: 캐딜락. 고급 자동차의 대명사
꾸꾸부정한: 매우 꾸부정한
꿰들고: 꿰뚫어 알고
꿰들려고: (무엇으로 무엇을) 꿰어서 쳐들려고. 알아 내려고
ㄴ
난 뒤로: 새운 뒤로
날짐승: 날아 다니는 짐승
너슬너슬: 굵고 길게 부드렁ㄴ 털 따위가 거칠게 성긴 모양. 옷 따위가 오래되고 낡아빠진
모양을 나타내기도 한다.
뇌이며: 내뱉으며
녹녹치는: 호락호락하지는
누을가베: 누을까보아
늘정늘정: 늘쩡늘쩡. 쉬어가면서 천천히 구경하며 또한 확인하듯이 천천히 가는 모양
늪판 : 늪지
ㄷ
덱크: 기차나 전차의 바닥
동뚝: 동둑. 도랑을 크게 쌓은 둑
두레: 둘레
드렁드렁: 대롱대롱
뒤쌌다: 온통 감아 에워쌌다
뒤타며: 뒤집어 타듯 온통 실피어
들쓰고: 뒤집어 쓰고
들씌우면서: 뒤집어 씨우면서
들쓴: 뒤집어 쓴
들창: 벽의 위쪽으로 자그맣게 만든 창. 단지 겉창 한짝뿐으로 열 때에는 젖히게 되지 않
고 떠서 들게 된 까닭에 생긴 이름
등달아 하는: 일이 몹시 급하게 몰려 등이 화끈 달아 오르는
따바리총: 탄창이 둥글게 원통으로 있어 마치 또아리 처럼 있어 붙여진 이름. 총의 조준경
밑에 탄창이 있는 자동 소총의 일종
따바리총탁: 탄창이 또아리 모양을 한 총의 돌출된 부분
딱히는: 정확히는
딸린: 에스토니아공화국의 수도
ㄹ
라디오: 라디오
루바쉬까: 러시아 남자의 웃저고리. 와이셔츠와 비슷하되 옷깃을 한 쪽으로 당기어서 달았
고, 입으면 허리에 끈을 돌리어 맴.
ㅁ
마들가리: 나무의 가지가 없는 줄기
막집: 임시로 대충 지은 집
만또: 망토
매상이: 거룻배
모래장변: 모래가 운동장을 이룬 듯이 넓다랗게 물가에 펼쳐진 모래벌판
모자전: 모자를 벋어 두는 곳
무화가 잎새: 무화과 나무의 잎새. 무화과 나무는 뽕나무과의 낙옆 관목. 과실나무의 한
가지로 높이는 2-4m 정도 입은 손바닥 모양으로 길게 갈라져 있음. 봄부터 여름에 걸쳐 꽃
이 되고, 꽃턱이 자라 과실이 됨. 과실을 말려 식용을 함. 특히 나무 잎새가 크기로 유명함.
목갈린: 목이 쉰
물정: 세상물정
물코: 물처럼 나오는 콧물
물크러: 너무 물러서 본 모양이 없어 지도록 헤어
미상불: 아니게 아니라. 과연
ㅂ
방조: 무슨 일에 대하여 거들어 도와줌
방조자: 협조자
배꼽 떨어진: 태어난
백림: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을 말함
뱃간: 배의 안쪽 적당한 공간
뱃전: 배의 양쪽 가장자리 부분
버그러진: 벌어진
번들어지면: 미끄러워지면
번차례: 돌려가며 벌갈아 드는 차례
번철: 지짐질할 때 쓰는 솥뜨껑 잦힌 것처럼 생긴 쇠로 만든 그릇
범포지: 돗을 만드는 피륙종이
복창: (말로써 들은 명령이나 지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명령이나 지시
의 말을 그대로 소리내여 외는 일
볼따구니: 볼이 있는 뼘따귀
볼을 대어: 헝겊을 대어
봇나무: 백화과에 속한 낙엽활엽교목으로 높이는 30m 가량. 수피는 흰빛이며 종이처럼 엷
게 벗겨짐. 잎은 삼각형 또는 마름모꼴의 란형. 재목은 제지펄프로 쓰이고 나무 껍질은 세공
재로 애용됨
봉긋하니: (바람빠진 공기 주머니 같은 것이) 불룩하니 커지며 솟아오르니
부르쥐고: 힘을 들여 주먹을 쥐고
부유스럼하고: 빛이 진하지 않고 약간 부옇기만 하고
분란: 핀란드
불구어: 불쿠어
불질: 총질
빠장빠장: 팽팽하게
삑삑한: 빽빽한
삥삥: 빵빵
ㅅ
사려: 여러 가지로 신중하게 생각함
사리였다: 길고 잘 휘는 물건을 헝클어지지 아니하도록 둥그렇게 빙빙둘러 포개어 감았다.
사위: 사방의 주위
상거를: 서로 떨어져 있는 두 곳의 거리를
상치: 두 가지 일이 공교롭게 마주침
새되게: 소리가 높고 날카롭게
스웨덴: 스웨덴
서탁: 책상탁자
선교: 배다리 또는 배의 상갑판 앞쪽에 있어, 선장이 운항에 대한 지휘를 하는 곳.
설렁대였다: 술렁거렸다
설은: 익숙하지 않은, 잘 사용하지 않은
성글은: 드문드문 있는
세간: 집안 살림에 쓰는 온갖 제구
소목: 소목장이. 목제가구를 만드는 목수
소학교: 지금의 초등학교
솔갑고: 재치가 있고
솨솨: 쏴 쏴
수마석: 물에 씻겨 서슬이 닳아진
수집어하는: 수줍어하는
숙처: 거처하는 장소
순편해졌다: 거침새가 없고 거북하지 아니하여졌다. 일이 순하고 편해졌다
스톡크홀름: 스톡홀름
슭: 모서리
신소리: 상대의 말을 다른 말로 농쳐서 받아 넘기는 말
심동: 심장박동
ㅇ
아니웨다: 아니우에다
안온한: 아무일 없이 편안하고 조용한
애나무 숲: 어린나무 숲
악취: 빼앗아 가짐
어슷비슷: 서로 비슷
아이고: 칼따위로 금을 그어 도리어 내고
언권: 발언권
에돌아: 빙돌아
에쓰또니야: 에스토니아. 수도가 딸린인 발틱해 동쪽 기슭에 있는 작은 공화국. 제 2차 세
계대전 후 강제로 구 소련에 병합되었다가 1980년대 후 소련의 민주화로 독립함.
여간만: 여간해서는
연송: 연속. 계속해서 연달아
예만하면: 여기만 하면
예닐곱: 여섯이나 일곱
오가잡탕: 다섯 가지 정도의 종류가 뒤섞인 물건
오작오작: 바작바작. 떨어진 나무 가지가 발에 밟혀 뿌러지는 소리
요포: 요로도 쓸 수 있는 포대기
용허: 용납하여 허락함
우로: 위로
우익: 오른쪽 날개 즉 대열의 오른쪽 편
울장: 울타리. 말뚝따위를 죽 나열하여 박은 울타리
웅절거렸다: 웅얼거렸다
유소문: 소문이 자자함
움집: 움을 파고 지은 집
유지: 기름을 먹인 종이
의아쩍어하게: 의심스러워 하게
이랑을 지으며: 커다란 물결을 지으며
익어지려고: 익숙해지려고
일떠서며: 기운차게 썩
입아귀: 입의 양쪽구석
ㅈ
자못: 생각보다는 훨씬. 꽤. 퍽
재게: 빠르게
제: 자기의
제마끔: 제각각
조푸리었다: 찌푸리었다
종내: 결국에는
종시: 시종
죄다: 전부다
주패: 화투의 일종
중동무이하고: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중간에서 흐지무지 그만두고
지남침: 자장의 방향을 재기 위하여 수평으로 자유로이 회전할 수 있도록 한 소형의 영구
자석 즉 지남철로 된 침
지숙한: 지긋한
지인: 아는 사람
직일: 당직일
진창물: 진흙탕물
진창판: 진흙탕이 넓게 범위를 이루는 곳.
질적질적: 질척질척
짬: 틈. 사이
찌궁찌궁: 잘 짜여진 또는 이어진 나무끼리 부딪쳐 나는 소리
차고는: 부딪치고는
청 높은: 목청 높은
총화짓고: 이야기의 결론을 모으고
ㅋ
코숭이: 장화같은 물건에 코처럼 약간 돋아난 곳 또는 돌출된 지역
콧구르: 코구멍으로(숨을 고르는)
ㅌ
테레핀유: 송진을 수증기로 증류하여 얻은 정유. 특이한 향기를 내는 무색 또는 담황색의
끈끈한 색채로 페인트 제조에 쓰이기도 함
토백이: 토박이
투친다: 튀어오르듯 던진다
틈새기: 틈 사이
ㅍ
파리한: 몸이 매우 마르고 해쓱한
판석: 바닥에 깔린 돌
판출: 드러난 것
패당: 패거리
풍청풍청하니: 흥청망청 풍요롭게 하니
ㅎ
하마트면: 하마터면
한분 한분: 1분 1분
함석상자: 함석으로 만든 상자
항용: 항상, 언제나
항작: 방향을 잡는 것
허수로운: 쓸데없는, 공허한
허순하니: 느슨하니
허술개: 추하게 허름하거나 낡아서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
헌칠하니: 키와 몸집이 크고 미끈하니
헹겨진: 허공에 드리워진
헹기며: 드리우며
형자: 모양의 자태
화단: 재난의 조짐
흥성거리는: 흥청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