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선풍기의 연서
가는 곳
가을
가을, 네거리
가을비, 흰, 어느 날 오전 11시
가을의 서(書)
가을의 시
가을 저녁
가천혜씨 고향
갈대를 위하여
감자
거기
거기 가면
거리 시(詩)
거미
건너편 섬에
겨울밤 하늘의 달에게
겨자씨의 노래
고독
골목
구걸하는 한 여자를 위한 노래
구름의 뿌리
국화꽃 한 송이
그 꽃의 기도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그날 아침 우리 둘이는
그 담쟁이가 말했다
그대
그대의 들
그대 하늘이 되었구나
그러면 가자 아이야
그림자 물풀
그림자 스위치
그림자와 별
그 여자
그 여자의 입술에 앉았던 흰 구름의 꿈
그 자주빛 꽃의 기도
그 집
그 피리에게
기다려야 하네
기적
기차
길이 우두커니
김수영을 추억함
꽃
꽃잎
꽃잎 한 장
꿈속에
나무가 말하였네
낙동강의 바람
낙엽 몇이 – 너무 짧은 이미지
낮에는 깊이 깊이
내 만일
너는 던져졌다, 거기
너를 사랑한다
너무 멀리
너무 짧은 사랑 이미지
너에게
눈(眼)
눈 녹다 눈 녹다
눈물 하나가
눈발
눈을 맞으며
님을 찾아서
단가
당신 앞에
도장 파는 남자
돌멩이 서넛
돌아
동백
등불과 바람
따뜻함
마음
모래가 바위에게
모래밭 – 너무 짧은 이미지
모르는 산으로의 행진
무명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무엇이라고 쓸까
물길의 소리
물방울의 시
물에 뜨는 법
민들레
바다
바다가 보이는 길 위에서
바다는 가끔
바리데기의 여행(旅行) 노래
바리연가
바지락 줍는 이들에게 고동빛 게 한 마리가
반디
배추들에게
백조 커피숍 - L.J.N.에게
버릇
벽 속의 편지
번개
벽과 그림자의 사랑 이야기
별
별똥별
별의 어깨에 앉아
별 한 개 머리에 인 구름, 섬 사이로 걸어오네
보십시오
봄
봄 기차
봄날의 끈
봄 무사(無事)
봄바람
봄에는 언제나
봄에 대한 추억 하나
봄이 오고 있다
분리수거
분홍. 노랑 꽃망울 - 너무 짧은 사랑 이미지
불멸
붉은 강
붉은 저녁 너의 무덤가
붉은 해
비
비가(悲歌)
비닐봉지의 추억
빈자 일기 - 구걸하는 한 여자를 위한 노래
빗방울 셋이
빗방울 하나가
빨래 너는 여자
사과 껍질
사랑법
산길
살그머니
삼촌
상처
상처를 눈부시게 켜들고
새
새벽바람
생자매장(生者埋葬)
서시
섬 – 어떤 사랑의 비밀 노래
섬의 발
소리
수평선
순례자(巡禮者)의 잠
숲
스스로를 기억하는 노래
시
시든 양파를 위한 찬미가
시월, 궁남지
시의 방문(訪問)
시인 일기
십일월
아궁이에 대해서
아날로그적 이데올로기
아름다운 시간
아름다운 하루
아리랑
아무도 몰래
아, 별은
아, 소서로
아아아, 오늘도 나에게 시를 쓰게 하는 것들
아, 이걸 어째?
아주 오래된 이야기
아침
아침에 관하여
안개 속에는
야밤
어느 날
어두워지면
어둠 속에는
어둠 속에서 벌린 입
어둠이 한 손을 내밀 때
어떤 미류나무의 새벽 노래
어떤 비닐 봉지에게
어떤 흐린 날
어허, 도미
엄마의 마지막 말씀
얼른 그림자 위에
얼음 폭포 앞에서의 편지
여긴 내 땅이로구나
여름 저녁 오후 여섯 시
연애
엽서 한 장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 경련(痙攣)에게
오래된 이야기
오이샐러드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의 적은
유성에서의 하루
유화(柳花)
은대구 조림
은빛 빗자루의 추억
이 동네
이름 모르는 꽃
이사
이 세상의 시간은
이유
이제 스미리
일몰의 노래
일어서라 풀아
잎 둘이 또는 셋이 – 향가 풍으로
잎의 꿈
자유를 꿈꾸고 사랑한다
자전(自轉)
작은 것들을 기림 또는 '배고프지 나의 사랑아'
장날
저녁 바람
저녁이 슬슬...
저녁 하늘 아래
저렇게 눈떠야 한다
저문 날 허공에
저물 무렵
저쪽
전화
진눈깨비
진달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지렁이에 대해 생각한다
차표 한 장
천 개의 혀를 위하여
천 개의 혀들을 위한 노래
첫눈
첫사랑 메일이 열리는 소리
첫사랑을 보러 가네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초록 거미의 사랑
초원의 풀잎들이 보낸 편지
춘향이의 꿈 노래
타일 바닥에 엎드려 있는 호랑나비
파도
풀잎
풍경제(風景祭)
하늘다람쥐
한 어둠은
한 여자가 있는 풍경
한 조각의 노래
할머니
해 좋은 날
햇빛 소리
허공 하나를
허총가(虛塚歌)
헤매는 발들을 위한 노래
현을 위한 파르티타 16
혜화동
황혼곡조
황홀
횃불
후포의 가자미
흐린 날은
흩날리고 있네
희망
희명
흰 눈 속으로
4월
4월에 던진 돌
11월
12월의 시
23층의 햇빛
가난한 선풍기의 연서
강은교
내 가슴은 오늘도 들판처럼 열린다오.
L. J. N.
당신은 저 수평선 너머 서 있으니
내 그대에게 갈 방법은
내 가슴의 바람 전부 불러내어
어서어서 그 바람 위로 달려가보는 것뿐
당신의 그림자에 몸을 씻고
당신의 웃음소리에 고통의 옷을 빠는 것뿐.
그러나 바람보다 빨리 달려오는 눈물
새벽처럼 말없이 오는, 오고야 마는 슬픔
끝없이 잡아당기리, 당신의 심장의 대문을
이쪽에서 저쪽
저쪽에서 이쪽
오늘도 지평선은 끝없이 별들을 잡아당기는데
내 가슴은 들판처럼 열린다오
당신에게 가기 위해
내 가슴의 바람 전부 불러내어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나뭇잎 한 장
허공에 띄운다오.
도착하리, 당신이 서 있는 그곳
L. J. N.
지평선이 별들을 잡아당기는 그곳
하루 종일 가슴 열어 바람 불러낸 보람 있으리니.
가는 곳
강은교
달이 뜬다,
산 너머 칡 밭에는
떨어진 눈썹 몇 개
살 몇 점
홀로 채비를 서둔다.
가다가 더러 귀신 만나면
가는 곳 잊지 말고 물어두게.
가을
강은교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 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 보게, 그대의 집으로
가을, 네거리
강은교
네거리였다. 낙엽 한 닢이 온몸을 웅크린 채 바람에 떠밀려오고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의 문들이 닫히는 소리-
모래 몇이 훌쩍 일어서고 있었다.
가을비, 흰, 어느 날 오전 11시
강은교
내 심장 소리 말없이 듣곤 하는 호박빛 짜집기 광목 이불, 아무리 내 발에 밟혀도 찍소리 한번 없는 낡은 카펫, 내 상어빛 만년필로 콩콩 살이 찍혀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는 호둣빛 식탁, 또는 저 혼자 너무 빨리 달려가 버리곤 하는 달리기 선수 내 오래된 탁상시계
또는 늘 컵이며 오미자 찌꺼기며 주전자며 커피며 볼이 빨간 당근이며 비닐에 갇힌 고등어 납작 엎드린 냄비 뚜껑 여드름처럼 이마에 얹고 있는 선반, 지원이나 와야 신나는 소리 한 번 낼까 말까, 사십 년도 더 된 낡은 검은색 호루겔 피아노, 할부금도 미쳐 다 못낸 채 칠 벗겨져 버린 그것, 닫힌 건반 같은 그
그 한편 구석에 몽당 의자 놓고 베르곤지의 아리아를 듣는다, 지원이의 앙증맞은 손가락 아래서 울리는 사형수의 리릭테너를, 구겨진 종이컵을, 구겨진 선반을, 구겨진 신발을
먼 데 벼랑에서 오는
가을의 서(書)
강은교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여자를
보아라
종이처럼 그 여자 오늘 구겨짐을
보아라
구겨지며 늘 비 흐름을
비 흐르며 그 여자 길 밖으로 떠나감을
보아라
모든 길밖에 흐르는 길동무들을
보아라
언제나 싸우고 있는 길의 밤꿈을
보아라
정오엔 많은 바람으로 펄럭이다가
사라지는 그 여자의 꿈속
모든 가을 길은 멀어서
마지막엔 그대도 보이지 않는걸
가을의 시
강은교
나뭇가지 사이로
잎들이 떠나가네
그림자 하나 눕네
길은 멀어
그대에게 가는 길은 너무 멀어
정거장에는 꽃 그림자 하나
네가 나를 지우는 소리
내가 나를 지우는 소리
구름이 따라나서네
구름의 팔에 안겨 웃는
소리 하나
소리 둘
소리 셋
무한(無限)
길은 멀어
그대에게 가는 길은 너무 멀어
가을 저녁
강은교
어제 그대의 편지를 받았네
그대의 편지에 들어 있는 톱밥 같은 빛들을 받았네
바람에 어린 풀들이 끌려가듯이
우수수수 우리 모두
끌려가고 있는 저녁에
그대의 글자들 속에서
수군대는 모래바람
주워내고 주워내도
자꾸 일어서는 모래바람
그대의 편지를 읽고 또 읽네
짧은 흐느낌 같은 가을 저녁
가천혜씨 고향
강은교
떠났네
안개 가득 누운 벌판
흔들리는 풀잎 새
타는 목
마른 냇물에 축이며
어른어른 저쪽
별빛 네 얼굴
찾아 떠났네
내 고향은
자주 바람 부는 곳
바람에 꽃잎들 흩날리고
흩날리다 에헤야
뿌리 뽑히는 곳
내 고향은
자주 번개 치는 곳
번개에 집들 담들
가벼이 무너지고
허리 다친 연기들
구슬피 헤어지는 곳
상채기
빨간 상채기에선
고름 같은 강물
출렁이는 소리
저녁이면 지는 해
한숨 터지는 붉은 빛
누가 우느냐
누가 울어 자꾸
가는 길 덮느냐
떠났네
안개 가득 누운 벌판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네 얼굴 별빛 따라
흔들리는 풀잎 새
이 강물 끌어 끌어
떠났네, 나
새벽에
갈대를 위하여
강은교
아마 네가 흔들리는 건 하늘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키 큰 바람이 저쪽에서 걸어올 때
있는 힘 다해 흔들리는 너
연분홍 살껍질을 터뜨린 사랑 하나
주홍빛 손을 내밀고
뛰어오는구나
흔들리면서
그러나 결코 쓰러지지는 않으면서
흔들리면서
그러나 결코 끝나지는 않으면서
아, 가장 아름다운 수풀을
살 밑, 피 밑으로 들고 오는 너
아마 네가 흔들리는 건
흔들리며 출렁이는 건
지금 마악 사랑이
분홍빛 손을 내밀었기 때문일 것이다
감자
강은교
감자여
거기 검은 비닐의 홑이불을 제치고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공중을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온몸을 쭈글쭈글하게 하면서
금빛 욕망을 지구에 접속시키고 있는 너
네 눈물의 소금기가
베란다를 적시고
엘리베이터를 적시고
아파트 정문으로 흘러내린다
모든 향수와
모든 부재와
모든 유토피아
어쩔 수 없구나
일으켜 세우라
눈물이여,
거기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지구를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거기
강은교
거기 뜬구름들 아래에서
뜬구름들, 뜬구름들끼리
풀풀 살 흩날리는 아래에서
진흙이며 돌멩이
붙안고 뒤척이는 사이
바람과 바람 사이
한 명의 도적과
또 한 명의 도적 사이
잠들었나이다. 우리는,
피 흐르는 노을
사방 천지 물들이며 갈 때
노을에 묻어 뻘건 어둠
가슴이란 가슴마다
흘러 넘치고 넘칠 때
눈 뜨지 못하는 별은 별에게
뼈만 남아 억새는 억새에게
잠들었나이다. 우리는,
차마 제 말 던지고 있을 때
거기 드디어 달려오던 장대비
번개 업고 우뢰 안아
거기 드디어 한데 뫼던 새벽
끝에 춤추는 맑음
끝에 춤추는 빛남
그리하여 언덕 곳곳
일어서는 뿌리들
살내 풍기는 날개들
거기 가면
강은교
거기 가면
반쯤 가슴이 파먹힌 산이 있지요
그 산 옆구리엔
작은 무덤 서넛이 매달려 있고요
그 무덤 뒷켠엔
조금 큰 무덤들도 서넛 있어요
작은 무덤 곁엔 작은 풀 서넛
큰 무덤 곁엔 키 큰 갈대 한 무리
철없이 가끔 바람이
저혼자 놀다 가지요
그대와 내가 만났던
만나서 어찌 어찌 좋아했던
그 산 옆구리
거기 가면
반쯤 가슴이 파먹힌
동네 하나 있지요
그 동네 옆구리엔
항상 노을이 물들어
두 갈래 강물이 나눠 흐르고요
그 강물 양켠으로
다 닳아서 터진 길 두가닥
손짓도 없이 마주 보고 있어요
그대와 내가 터잡았던
그래서 어찌 어찌 일어섰던
그 동네 옆구리
거기 가면 거기 가면
우린 만날 수 있어요
반쯤 가슴이 파먹힌 산과
반쯤 가슴이 파먹힌 동네와
반쯤 가슴이 파먹힌 사람들 곁
그대와 내가 만났던
그래서 어찌 어찌 좋아했던
바로 거기로 가면.
거리 시(詩)
강은교
컴컴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를 보십시오.
쉴 새 없이 외치는 그 여자의 붉은 칠한 입술을 보십시오.
그 여자의 입술이 흔들릴 때마다
몸 흔들며 달리는 찬바람을 보십시오.
번쩍이는 불빛들을 지나서
바람에 문들이 가득 덜컹거리는
골목과 골목을 탐욕스럽게 핥으며
천지에 누운 먼지들
낮은 리어카 위에 쌓는 것을 보십시오.
ꡒ오리지날 골덴니트가 싸요, 싸―.
붉은 칠한 입술 속으로
세계의 흙들이 흐르고 있음을 보십시오.
아직도 어둠은 빛의 어머니임을 보십시오.
길을 삼키는 끝없는 길을 보십시오.
꿈을 삼키는 끝없는 꿈을 보십시오.
찬바람에 떠는 그 여자의 두 손이
무덤의 풀처럼 파아랗게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는 것을 보십시오.
흐르는 무덤들이 이 저녁 거리
흔들림도 없이 지구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십시오.
캄캄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
어둠이 빛인 그 여자.
거미
강은교
내가 세상에 줄 하나 던지는 것은
은빛, 얇은 줄 하나 던지는 것은
줄 하나 던지고 보이지 않는 한 켠에
응큼하게 웅크리고 있는 것은,
모든 날개들은
키 큰 나무 곁에서
펄럭이기 때문이다.
펄럭이고 또 펄럭이면서
그림자 하나에 얹혀 올
너의 살( 肉 ) 한 점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
우리는 모두
따뜻한 살 한 점
또는 그림자 하나
그립디그립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건너편 섬에
강은교
건너편 섬에
등불 하나가 켜졌습니다.
서 있는 몇 척의 배에도
배고픈 자의 눈처럼
등불이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어둠이
먼 어둠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슬픔이
먼 슬픔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은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한데
또 하나 켜진
건너편 섬의 등불
혼자 빛납니다.
서 있는 몇 척의 배
혼자 등불이 됩니다.
나도 천천히
등불의 잔을 듭니다.
가까운 먹구름이
먼 먹구름을 마시기 시작할 때.
겨울밤 하늘의 달에게
강은교
혼자 오지 않는구나, 너는
오늘도 캄캄한 시간 아래
빛나는 고개 슬피 숙이고
탐스런 눈썹에는 찬 바람 둘러앉혔구나
노을 밴 그늘마다
슬몃 내려앉아서는
앙상한 뼈마디 넘나드는
흉한 꿈들 이으며
굶주림들 이으며
침묵들 이으며
복종들 이으며......
삶은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것
혼자 오지 않는구나, 너는
어제도 오늘도 이 후미진 곳
반짝이는 슬픔으로 오는구나
저리 먼 하늘 곳곳
양털 구름 떼같이
양털 구름 떼같이
한숨 던지며 오는구나
수정별같이
수정별같이
눈물 심으며 오는구나.
겨자씨의 노래
강은교
그렇게 크지 않아도
돼.
그렇게 뜨겁지 않아도
돼.
겨자씨만하면
돼.
겨자씨에 부는 바람이면
돼.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가장 작은 것에
가장 큰 것이 눕는다.
고독
강은교
잠자리 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두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구름 곁 바람이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네
잠자리 두 마리도 울기 시작했네
놀란 웅덩이도 잠자리를 안고 울기 시작했네
눈물은 흐르고 흘러
너의 웅덩이 속으로 흐르고 흘러
너를 사랑한다.
골목
강은교
이 골목 흐린 하늘엔
찾아오는 사람도 참 많다
새벽녘, 자전거 밀고 오는 우유 배달부
어둠인 채 달려드는
생굴장수 아줌마 함지박 목청.
깨어진 병이나 못 쓰는 시계 팔아요----
고물장수 할아버지, 어제 내린 빗물 웅덩이
허위허위 밟고 올 때면
어디서 들려오는 대포소리
금간 담벼락을 넘어오고
생선장수 부부의 우렁찬 마이크가
바다를 끌고 온다
구름 터진 사이로
햇빛 멈칫거리는 하오
할일 없는 젊은 녀석들
골목 빈터에 가득 쏟아져 나오면
이리저리 차대는 축구볼 피해
칼 가는 사람 지나간다
그 사람 흔들어대는 칼날에
보이지 않게 피 흘리는 허공
그 허공으로 땀 씻으며 오는
열쇠장수, 고구마장수......
이 골목 흐린 하늘엔
찾아오는 사람도 참 많다
그러나 아무도 대문을 열지 않는
고래고래 아이들만 대답하는,
지금은 석양
구걸하는 한 여자를 위한 노래
강은교
우리는 언제나 거기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혀와 혀를 불붙게 하며 눈물로 빛과 빛을 싸우게 하며 다정한 고름 고름 속에 오래 서 있은 허리를 무너지게 하며, 황사(黃沙) 날아가는 무덤 가장자리에서.
그곳 천정은 불붙은 태양이었고 바닥은 썩은 이빨의 늪이었다. 싸우는 이마 갈피로 등뼈 갈피 갈피로 언제나 종이 울렸다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이. 언제나 종이 울렸다 황혼을 알리는 종이. 언제나 종이 울렸다 임종을 알리는 종이.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그보다 먼저 흘러갔다. 늦은 손목 눈짓 사이에서, 번쩍이는 번쩍이는 허리띠, 황금 돛대들 사이에서 흘러가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 굳은 피 한 점 던질 때까지, 누군가 쓸데없는 제 죽음 하나 내버릴 때까지, 우리가 헌 그 죽음 입고 검은 종소리 한 겹 듣지 않을 때까지.
아아 돌아오지 말라 사랑하라, 그대 아버지가 그대에게 앵기는 독(毒), 그대 나라가 그대에게 먹이는 독(毒), 물의 독(毒), 공기(空氣)의 독(毒), 흙의 독(毒).
다만 우리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여기서. 한 고름에 다른 고름을 접붙이며 즐겁게 즐겁게, 할 일은 그뿐, 구걸하고 시들어 구걸하는 일뿐, 그러므로 결코 일어서지 않았다, 잠들지도 않은 채.
구름의 뿌리
강은교
모든 구름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정오가 되면 구름의 뿌리들은 늘어져 땅을 쓰다듬습니다.
땅은 구름의 뿌리를 모르고 걸어갑니다. 구름의 팔이 그 보송보송한 솜털들을 꺼내 나뭇잎들을 쓰다듬는 줄도,
구름의 손이 그 긴 손톱을 꺼내 꽃잎들을 쓰다듬는 줄도,
뿌리에 매달린 뿌리들이 우리의 짐을, 그림자를 흔드는 줄도,
국화꽃 한 송이
강은교
국화꽃 한송이
날아간다
날아가는
국화꽃 꽃잎 한 장
별이 붙든다
별은 젖어
가장 먼 곳에서
가장 가까이 달려오는
그대의 꽃잎 젖은
한 장.
그 꽃의 기도
강은교
오늘 아침 마악 피어났어요.
내가 일어선 땅은 아주 조그만 땅
당신이 버리시고 버리신 땅
나에게 지평선을 주세요
나에게 산들바람을 주세요
나에게 눈 감은 별을 주세요
그믐 속 같은 지평선을
그믐 속 같은 산들바람을
그믐 속 같은 별을
내가 피어 있을 만큼만
내가 일어서 있을 만큼만
내가 눈 열어 부실 만큼만
내가 꿈꿀 만큼만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강은교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서서
찬 비 내리면 찬 비
큰 바람 불면 큰 바람
그리 맞고 있을까
맞다가 제일 떨어내고 있을까
저녁이 어두워진다 문득 길이 켜진다
그날 아침 우리 둘이는
강은교
그날 아침 우리 둘이는 헤매고 있었다. 흐린 하늘 아래 몹시 부는 바람 속으로, 지난 밤 번개에 얻어맞고 얻어맞아 퉁퉁 부은 산허리, 냇물이 고름 된 들판으로, 어디다 집을 지을까, 어디다 집을 지을까, 우리의 얇은 날개 쉼 없이, 뼈뿐인 마른 나무들 어루만졌다.
어느새 한낮, 들판 끝 혼자 서 있는 바위 위에서, 이슬 맺힌 우리 눈 문득 키 큰 햇살을 보았다. 구겨진 낙엽마다 오래 전 잃어 버린 노래 한 자락. 소리치며 웃으며 우리 둘이는 달려갔다. 있는 힘 다해 얇은 날개 마주 잡아, 사랑이여 사랑이여, 햇살 위에 걸터앉았다. 노랫자락 허리 깊이 쓰다듬으며, 흐르고 흐르는 그 속 천만 숨소리에 귀기울이며.
그러나 그날 저녁 노랫소리는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큰걸음으로 햇살도 어둠 따라 가버렸다. 등 뒤에서 울려오는 긴 긴 흐느낌, 바람은 날개 사이로 불며, 어디서 나타난 천둥 무서운 고함, 가거라 가거라 사랑이여, 서둘러 우리 둘이는 날개를 거두었다. 흐린 하늘 아래 뼈뿐인 마른 나무들 사이로 얻어맞고 얻어맞아 퉁퉁 부은 산허리, 냇물이 고름 된 들판으로, 쫓겨난 채 우리 들이는, 다시 헤매며 우리 둘이는.
그 담쟁이가 말했다
강은교
나는 담쟁이입니다.
기어오르는 것이 나의 일이지요.
나의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길며
튼튼한 담쟁이 줄기를 이루는 것입니다.
옆 벽에도 담쟁이 동무 잎들이 기어오르고 있었지만
내가 더 길고 아름답습니다.
내 잎들은 부챗살 모양입니다.
오늘도 그 사람이 보러 왔습니다.
나는 힘차게 벽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나를 바라보다가
벽의 어깨를 한 번 쓰다듬고는 떠나갔습니다.
나는 부챗살로 벽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주홍빛 아침 해가 내 꿈밭 위에서 허리를 펼 때까지.
아아,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담쟁이줄기가 될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그대
강은교
종로를 걸어가려니
그대가 보인다.
후줄근한 허리춤엔
잿빛 구름 한 겹 넣고
가슴팍에선 여직
핏물 출렁이는
그대가 보인다.
그저께는 이땅
바람으로 휘휘 불어가시더니,
오늘은 흰 눈에
살점 뚝뚝 떨구시는 이.
그때 長沙 모랫벌엔
거품 문 밤들 시끄러웠다,
머리칼 날리며 시시각각
달려드는 수평선하며
속병 들어 뒤채는,
뒤채는 하늘.
오랜만에 한강을 건너려니
그대 또 거기 보인다.
내 밟는 물결마다
눈물 한 줌씩 던지며
낙엽 매달린 두 주먹엔
햇빛 움켜들고 서 있는
그대가 보인다.
그대의 들
강은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 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 있기를!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 있기를!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대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얼마나 작으냐, 라고.
그대 하늘이 되었구나
강은교
그대 드디어 하늘이 되었구나
그대 신신한 바람 날리는 구름이 되었구나
아름다운 6월의 젊은이인 그대
어제 오늘도 내일도 젊은이인 그대
그대 드디어 이 땅에 길 만들었구나
어둠이 어둠을 거두며 가는 길
피톨들 함께 안으며 가는 길
억울한 왼 죽음들 솟구치는 길
그날, 천구백팔십칠년 유월구일
최루탄 직격탄에 꽂힌 그대의 피 우는 부르짖음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그대의 부르짖음이 신촌을 흘러
그대의 꿈이 반도에 흘러 넘치는 것을
반도에 누워 이리도 빛나는 것을.
그대, 아름다운 유월의 젊은이인 그대
이제 별이 되러 갔구나
우리가 마시고 있는 이 어둠의 연기
우리가 뿌리고 있는 이 거짓의 악취들
우리가 던지고 있는 이 탐욕의 살기들에
그대의 찬 빛을 뿌리시라.
우리 모두 똑바로 걸어가도록
우리 서 있는 이 벼랑
꼼꼼히 꼼꼼히 내려다 보시라.
이 싸움 무성한 '순간'의 행진에
이 울음 무성한 '여기'의 진흙꽃밭에
모오든 허약과 비겁과
모오든 가식(假飾)과 기회주의 위에
모오든 눈치와 눈치 위에
그대여, 화살되어 언제나 내려오시라.
아름다운 유월의 젊은이,
이한열 열사여
붉은 민주주의여
그러면 가자 아이야
강은교
그러면 가자
아이야.
고개 숙인 풀들 낮게 우는
산 밑을 돌아
마디마디 어둔 살 박힌
들녘, 긴 밤을 지나
비 오는 날이면 천지에
빗방울로 달려서
바람 부는 날이면 천지에
바람으로 날아서.
이 길은 꽃길
수만 눈물
한 얼음이불 아래 누워
젖은 뺨 젖은 입술로
아아
몸살하는 길.
보아라
눈부신 저 햇빛의 손
죽은 뼈, 실뿌리
허공중에 떠돌다가
마지막엔 안개로
숨 내쉬는 것.
그러면 가자
아이야.
맨발에 맨손
꽃내만 사뿐 쥐고
진달래 피는 골이면
진달래 내음으로
산나리 피는 골이면
산나리 내음으로
아이야.
그림자 물풀
강은교
눈물을 등불처럼 창밖에 걸어놓은 날
아주 긴 바람 소리
너를 찾아서 헤매고 있었어, 냉장고를 열어보고, 그릇 사이를 들여다보고, 벽 틈을 헤쳤지만 지나가는 구름까지도 들춰 보았지만, 너는 없었어,
그때 나는 보았어, 무엇인가가 문을 나서는 것을,
바로 너였어, 지느러미를 훨훨 날리며, 문밖으로 유유히 나가는 것을, 없는 파도 속으로 깊이 깊이 몸을 감추는 것을,
물풀이 허리를 흔들며 너를 맞고 있었어, 퉁퉁 불은 너의 몸을, 열에 뜬 너의 몸을,
아, 글쎄 물풀이
그림자 물풀이,
그림자 스위치
강은교
내 이름은 그림자 스위치
스위치를 올리지 않아도 스르르 켜지는 그림자 스위치
스위치를 내리지 않아도 스르르 꺼지는 그림자 스위치
당신의 발소리에 늘 두 귀 바짝 세우고 있는 그림자 스위치
어두운 복도 어디엔가
또는 빛 안 드는 현관 어디
고개 깊이 숙이고 서 있다가
당신이 다가오면 반가워
번쩍 빛이 되어 일어서다가도,
당신이 지나가면, 지나가기만 하면
맥없이 빛을 놓는다
아, 당신 앞에서
'내 스위치는 저기 있어요", 한번도 당당히 말해본 일 없는 그림자 스위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켜지 않아도 그만, 끄지 않아도 그만
그러나 당신에게 반짝거리는 신발 찾아 신게 하며
덜렁거리는 단추 쓰다듬게 하지
캄캄한 계단 환히 웃게 하지
오늘은 당신의 옷깃, 꼭 부여잡으리.
출렁이는 머리카락
꺼지지 않는 빛으로 씻어드리리.
그림자 스위치
강은교
내 이름은 그림자 스위치
스위치를 올리지 않아도
스르르 켜지는 그림자 스위치
스위치를 내리지 않아도
스르르 꺼지는 그림자 스위치
당신의 발소리에
늘 두 귀 바짝 세우고 있는 그림자 스위치
어두운 복도 어디엔가
또는 빛 안 드는 현관 어디
고개 깊이 숙이고 서 있다가
당신이 다가오면 반가워
번쩍 빛이 되어 일어서다가도,
당신이 지나가면, 지나가기만 하면
맥없이 빛을 놓는다
아, 당신 앞에서
“내 스위치는 저기 있어요”
한 번도 당당히 말해본 일 없는 그림자 스위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켜지 않아도 그만, 끄지 않아도 그만
그러나 당신에게 반짝거리는 신발 찾아 신게 하며
덜렁거리는 단추 쓰다듬게 하지
캄캄한 계단 환히 웃게 하지
오늘은 당신의 옷깃, 꼭 부여잡으리.
출렁이는 머리카락
꺼지지 않는 빛으로 씻어드리리.
그림자와 별
강은교
빨간색의 벽돌과 회색의 시멘트로 나의 뼈는 발려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몹시 바람 불던 날 내 몸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몇 사람이 와서 망치로 나를 마구 두들겨 팼던 것입니다.
나는 부서졌습니다. 부서진 뼈 사이로 바람이 불어갔습니다.
그런 뒤 누구인가가 오더니 내 살에 유리를 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것을 창이라고 불렀습니다.
햇빛이 황금빛으로 물드니 창은 황금빛으로 빛나며 주섬주섬 그림자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 몸속에 이런 것이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밤이 되니 창으로 별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오 아름다운 별빛, 별의 입술이 파르르르 떨렸습니다.
나는 별의 입술을 안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천 개의 별이 자라났습니다.
별은 당신입니다.
은하의 길을 들고 오는 당신.
그 여자
강은교
1
아침이면 머리에
바다를 이고 오는 그 여자.
생굴이요 생굴!
햇빛처럼 외치는 그 여자.
손등엔 가득
먹구름 울고 우는 그 여자.
비 언제 올지 몰라
비 언제 올지 몰라
늘 파도치는 든든한
엉덩이 그 여자.
어둠보다 빨리
새보다 가벼이
해님하고 같이 걷는
예쁜 예쁜 그 여자.
2
올해 마흔두 살의 그 여자는
십년을 하루같이
홍은동 언덕받이
철거 동네에 삽니다.
겨울에 일거리가 없어 빈둥대는
페인트장이 남편은
물 탄 휘발유에 진종일
안개나 버무리고
사다리에서 떨어진 허리에
홧술만 퍼붓죠.
파출부로 다니는 그 여자
다리는 병신
어느 술 취한 자가용
리어카 밟고 가던 날 밤
배 터진 홍시 옆에
멀거니 나자빠져
붉디붉은 머리 속으로
먼 고향의 바람 소리 한참 들었답니다.
하루 삼천 원짜리 서울 살림
글쎄 만 리나 끌다가
어기적어기적 돌아가는
다섯 식구의 단간방
흔들리는 천정 아랜
새까맣게 자란 세 아이가
주워 온 깡통에 풀꽃을 꼽고
달력 종이를 접어
비행기를 날리네요.
겁도 없어 천리공중
구름 뚫고 날리네요.
올해 마흔두 살의 그 여자는
홍은동 언덕받이
철거 동네에 삽니다.
열두 번도 더 옮긴 방에서 삽니다.
3
김양 손톱은 원래 철쭉 꽃빛이었죠.
그 흔한 매니큐어 칠 한번 해본 적 없었지만
날 흐리면 더욱 눈부신 분홍.
두 뺨엔 언제나 사과 냄새 흐르고
가진 건 오직
헌 스웨터에 헌 치마
누군가 연습 삼아 짠 핸드백이 고작이었어도
잘도 웃었죠
이른 새벽 제과 공장 갈 때면,
온 얼굴 가득
패랭이꽃 피었죠.
그러나 그녀가 지금 시들어 가는 건
아무도 몰라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저
잘 있다니 다행이다 몸 성해라---답장뿐
끓어대는 사탕물 흠뻑 적신 이마엔
벌써부터 울긋불긋 낙엽이 딩구는데
오늘 김영 손등에선 김이 펄펄 오릅니다
청포도 내음 초코 내음
이리 섞이고 저리 섞여
새끼손톱에선 슬슬 쉰 김치 냄새로 변하며
뜨겁디뜨거운 사탕 알 한밤내 손으로 식힌 사랑
피맺힌 손끝으로 바쳐 듭니다
오, 질기기도 해라 사탕봉지들이여
사탕 봉지 같은 목숨이여
그래도 눈물 한점 흔들지 않는 김양
교대 시간이면 활짝
바람벽에 안겨 웃는 김양.
그 자주빛 꽃의 기도
강은교
오늘 아침 나는 피어났어요.
내가 일어선 땅은 아주 조그만 땅
당신이 버리시고 버리신 땅
나에게 이슬을 주세요.
나에게 미풍을 주세요.
나에게 눈 감은 별을 주세요.
그믐 속 같은 이슬을
그믐 속 같은 바람을
그믐 속 같은 별을
내가 피어 있을 만큼만
내가 일어서 향기로울 만큼만
내가 문 열어 눈부실 만큼만
내가 꿈꿀 만큼만
그 집
강은교
그 집은 아마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신혼 시절 제일 처음 얻었던 언덕빼기 집
빛을 찾아 우리는 기어오르곤 했어
손에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나는 두드렸어
그러면 문은 대답하곤 했지
삐꺽 삐꺽 삐꺽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빛이 거기서 솟아나고 있었어
싱크대 위엔 미처 씻어주지 못한 그릇들이 쌓여 있었지만
그 창문도 아마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싸구려 커튼이 밤낮 출렁거리던 그 집
자기들이 얼마나 멀리 아랫동네를 바라보았는지를
그 자물쇠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자기들이 얼마나 단단히 사랑을 잠글 수 있었는가를
그 못자국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자기들이 얼마나 무거운 삶의 옷가지들을 거기 걸었었는지를
어느 날 못의 팔은 부러지고 말았었지
새벽은 천천히 오곤 했어
그러나 가장 따뜻한 등불을 들고
그대를 기다리곤 하던 그 나무계단을 잊을 순 없어
가장 깊이 숨어 빛을 뿜던 그 어둠을 잊을 순 없어
어두울수록 등불의 살은 은빛으로 빛나더니
아, 그 벽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저녁이면 기대앉아 커피를 들던
그 따스한 벽
순간도 영원인 환상의 거미 날아오르던 곳
자기가 얼마나 튼튼했는지를
사랑의 잠 같았는지를
그 피리에게
강은교
비가 비 곁에 눕는다
진흙 수천덩이 한데 엎뎌
서른 피 쏟아대는 밤
바람이며 그리메며 모두 젖어서
젖은 채 뚝뚝
몸서리로 흘러서
오도 가도 못해 어둠 혼자
모래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내 피리 한 곡조 불어
저 하늘로 떠나 보내면
벌건 노을 엉켜들던 구름 밑
길길이 뛰는 파도에 얹으면,
온다, 손톱 발톱 나딩구는 길
첨 보는 낙엽 하나 엎으러져
달려온다
살은 없이 뼈만 남아
뼈도 없이 내음만 남아
울음은 부스러져 갈기갈기
온 땅에 스며
온다, 아는 비 곁에 모르는 비
그 뒤 새벽도 아니고
핏내도 아니고
그러나 그러나 이 모두
담뿍 껴안은.
그 여자의 입술에 앉았던 흰 구름의 꿈
강은교
입술을 새빨갛게 칠한 그 여자를 기억하지.
그 여자가 숯덤불 같은 노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온몸의 기관을 다 움직이면서 웃는 것을 기억하지
그 여자의 통통한 손가락이 가리키던 마루를 기억하지.
마루의 흠집을 기억하지.
허리를 흔들며 문을 밀치고 나가던 그 여자
아침이면 이슬이라도 묻힌 듯 푸른 바람을 일으키며 오던 그 여자
그 여자가 웃을 때면 이상한 듯 흰 구름이 들여다보던 것을 기억하지
그 여자가 웃을 때면 지나가던 바람도 잠시 멈추던 것을 기억하지
그렇게 입술이 새빨갈 수가
그렇게 숯이 많을 수가
그렇게 진한 웃음으로 바람을 껴안을 수가
느리게 걸을 때도 가슴이 흔들리던 그 여자의 풍만함
우리 모두 기억하지 그 여자.
그 여자의 빨간 입술,입술의 꿈을 기억하지
입술에 어느 날 앉았던 흰 구름을 기억하지
우리 모두 그리워할 수 있을까.
다시 서로 그리워,
저기 밤하늘 깊숙 깊숙 금빛 환한 불
저 혼자 켤 수 있을까.
기다려야 하네
강은교
기다려야 하네
그대가 몰래 새벽 마을을 밀고 나와
새벽 하늘에 박힌 별을 밀고 나와
달랑 차표 한장을 사들고
낯선 어둠 두런거리는 여관방
혹은 임진강 찬물을 기다렸듯이
기다려 기어코
금곡 동두천 건너왔듯이
맨발 맨손 구슬퍼 그슬피 부르텄듯이
따스하게 해야 하네
처음 만난 서울 장안
군고구마 서너 개로 허겁지겁 뎁혔듯이
그대의 피로 낯선 남한땅 뎁히고 뎁혔듯이
따스하게 불지펴야 하네
불지펴 허공의 찬 바람떼
쓰러지게 해야 하네
뎁히고 뎁혀서 세상 살 밑
흐르게 해야 하네
허물어야 하네
저리도 높이 솟은 벽들
밤이면 밤마다
찬 별 하나 허공에서 끌어내려
그대의 창틀에 앉혔?蔓?
가득 채워야 하네
그대의 기다림 바구니
새벽 마을과
마을에 앉았던 서리들과
별들, 별들로.
기적
강은교
그건 참 기적이야
산에게 기슭이 있다는 건
기슭에 오솔길이 있다는 건
전쟁통에도 나의 집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건
중병에도 나의 피는 결코 마르지 않았으며
햇빛은 나의 창을 끝내 떠나지 않았다는 건
내가 사랑하니
당신의 입술이 봄날처럼 열린다는 건
오늘 아침에도 나는 일어났다, 기적처럼
기차
강은교
봄이 오면 기차를 탈 것이다
꽃 그림이 그려진 분홍색 나무 의자에 앉을 것이다
워워워, 바람을 몰 것이다
메화나무 연분홍 꽃이 핀 마을에 닿으면
기차에서 내려
산수유 노란꽃잎 하늘을 받쳐 들고 있는 마을에 닿으면
또 기차에서 내려
진달래 빛 바람이 불면
또또 기차에서 내려
봄이 오면 오랜 당신과 함께 기차를 탈 것이다
들불 비치는 책 한 권 들고
내가 화안히 비치는 연못 한 페이지 열어 제치며
봄이 오면 요기 여기 봄이 오면
당신의 온기도 따뜻한 무릎에 나를 맞대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여행을 떠날 것이다
은난초 흰 꽃 커튼이 나풀대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광야로 광야로
떠날 것이다. 푸른 목덜미 극락조처럼 빛내며
길이 우두커니
강은교
고개를 드니 새들이 줄을 지어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구름이 떨어뜨리는, 허공의 눈썹 같은 새들
순간 발꿈치를 들고 서 있던 벽이 잔기침을 하였습니다.
모든 벽은 외롭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벽과 만나고 있는 한
김수영을 추억함
강은교
어둠이 온 뒤에도 또 오네
어둡다 말한 뒤에도 또 오네
등불 하나를 켜도 또 오네
등불 둘을 켜면서 또 오네
한 집 건너 또 오네
두 집 건너 또 올까
한 걸음 지나 또 오네
두 걸음 지나 또 올까
문 닫아도 문 닫아도 또 올까
꽃
강은교
지상의 모든
피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지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보이는 길과
지상의 모든
보이지 않는
길들에게
말해다오
나, 아직 별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꽃잎
강은교
너의 좁은 아파트 한구석
시든 꽃잎 하나 헉! 소리를 내며
우글쭈글해진 모노륨 마루 위에 눕는 소리 들린다.
땅에 내려가고 싶다
네가 흑흑 흐느끼기 시작한다.
꽃잎 한 장 - 운조의, 현(絃)을 위한 바르…아홉째 가락
강은교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고서야 꽃을 보았습니다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고서야 꽃을 창가로 끌고 왔습니다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고서야 꽃을 마음 끝에 매달았습니다
꽃잎 한 장 창가에 여직 남아 있는 것은 내가 저 꽃을 마음 따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이 창가에 여직 남아 있는 것은 당신이 나를 마음 따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흰 구름이 여직 창틀에 남아 흩날리는 것은 우리 서로 마음의 심연에 심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람 몹시 부는 날에도
꿈속에
강은교
그 집은 꿈 속에 있네
그리고 가는 길을 잊어버렸네
붉은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흰 구름 무성하던 작은 뜰
너무 어려서 비를 뿌릴 줄도 모르던 작은 구름
길고 흰 부리에 주홍 바람을 몰고 있던
살찐 거위 두 마리
그대가 꿈에 젖어 떨고 있는 사이
무성한 흰 구름은 가버리고,
붉은 파초 잎에 드러눕던 작은 빗방울
너무 작아서
세상을 적실 줄도 모르던 작은 빗방울
그 집은 꿈속에 있네
그리고 가는 길을 잊어버렸네
길고 흰 부리에 주홍 바람을 물고 있던
날 줄 모르는 새, 살찐 거위 두 마리
그대 이제 집으로 가려는가....
나무가 말하였네
강은교
나무가 말하였네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하늘의
푸르고 늘씬한 허리를 위해서.
낙동강의 바람
강은교
그대 있는 곳을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정신없이
몸 흔드는 게 아닌가.
그대 잠들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한많은 소리로
뼈 부서지는 게 아닌가.
살이 살을 뜯는 거리에서
울음 떼 무성한 언덕쯤에서
출렁임이 또 한 출렁임 낳아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이여.
오늘은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끼리
저무는 해를 만지고 있는데
그대 가는 곳을
나는 아네.
얼었다 녹으며
녹았다 얼며
이 구름 밑
살지 못해 죽는 그대
오, 죽지 못해 사는 그대.
낙엽 몇이 - 너무 짧은 사랑 이미지
강은교
낙엽 몇이 골목 한 켠에 몰려 앉아 소근거리고 있습니다.
은빛별 앞, 어둠 옆구리께.
얼굴 빨개진 기다림들이 이마 맞대고 아까부터 소곤소곤거리고 있습니다.
낮에는 깊이 깊이
강은교
낮에는 깊이 깊이 잠들었으면 그래서 바닷물 산바람 속을 벌레처럼 떠돌았으면 낮에는 갈대와 일년초 사이에서 결코 눈뜨는 법 없이 화내는 법 없이 공기와 구름 구름과 침, 수증기 사이에서.
눈은 안 떠도 다아 보고 있었으면 그래서 떠내려가고 사라질 건 사라져 가고 떠날 건 떠나 보냈으면, 그래서 한 천년이나 또 한 천년이 마지막 한 사람의 몸 속을 떠돎으로 해서 자네와 나 자네와 우리 우리 함께 오동나무 실뿌리에나 갈래갈래 묶였으면.
내 만일
강은교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너머로
한번 보란듯 불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번쩍이는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벽돌 위에 꽂혀 있는 쇠막대기쯤
눈 깜짝할 새 밀쳐내고
그래서 그대 가슴 깊숙이
내 숨결 불어넣을 텐데...
내 만일 안개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슬금슬금 슬금슬금
기어들어
대들보건 휘장이건
한번 맘껏 녹여볼 텐데...
그래서 그대 피에 내 피
맞대어볼 텐데...
내 만일 종소리라면
어디든 스며드는
봄날 햇빛이라면
저 벽 너머
때없이 빛소식 봄소식 건네주고
우리 하느님네 말씀도 전해줄 텐데...
그래서 그대 웃음 기어코 만나볼 텐데...
너는 던져졌다, 거기
강은교
아니 여기 말고, 거기.
아니 거기 말고, 여기.
아니 여기 말고, 저 가운데쯤에.
아니 거기 말고, 저 가운데의 가운데쯤에.
아니 거기 말고, 그 구석에.
아니 거기 말고, 그 구석의 가장자리쯤에.
떠나면서, 떠나지 않으면서,
가장자리의 중심에.
중심의 가장자리에.
중심에.
너는 던져졌다, 거기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너무 멀리 - 바리떼기, 가장 일찍 버려진 자이며 가장 깊이 잊혀진 자의 노래-
강은교
그리움을 놓치고 집으로 돌아오네
열려 있는 창은
지나가는 늙은 바람에게 시간을 묻고 있는데
오, 그림자 없는 가슴이여, 기억의 창고여
누구인가 지난 밤 꿈의 사슬을 풀어
저기 창밖에 걸고 있구나
꿈속에서 만난 이와
꿈속에서 만난 거리와
아무리 해도 보이지 않던 한 사람의 얼굴과
그 얼굴의 미세한 떨림과
크고 깊던 언덕들과
깊고 넓던 어둠의 바다를,
어디선가 몰려오는 먹구름 사이로.
너무 멀리 왔는가.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그리움이 저 길 밖에 서 있는 한.
너무 짧은 사랑 이미지
강은교
1 – ㄱ - 길
길이 있었다. 길 위로 벚나무 한 그루 곶을 등에 진 채 달려오고 있었다
2 – ㄴ - 날개
밀물이었다. 춤추는 파도, 게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고 있었다
3 – ㄷ – 너
햇빛 한 올을 집어 들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거기 네가 있다
4 – ㄹ – 종소리
저물녘,
달려오는 어둠 속에 무릎을 꿇고 있는 종소리
5 – ㅅ - 손들
지상의 모든 닫힌 문 안에서 스위치를 올리고 있는
손들, 푸른 정맥이 돋은 손들.
너에게
강은교
너에게 밥을 먹이고 싶네
내 뜨끈뜨끈한 혈관으로 덥힌 밥 한 그릇
눈(眼)
강은교
보이네
창밖에선 비 죽죽
내리는데
비 따라 바람이란 친구
무섭게 달려드는데
별일이야
네 눈 속으로는
우유빛 달이 떠오르고
그 옆엔 반짝이는 반짝이는
별 삼형제
잘 보이데
눈 감아도 잘 보이데
들리데
서리 잔뜩 내린 새벽에도
온 들판 벌벌 떠는
동지섣달 살얼음 냇가에서도
별일이야
네 눈 속으로는
사과꽃 살며시 일어서는
잘 들리데
귀 막고도 잘 들리데
눈 녹다 눈 녹다
강은교
세상엔 눈 녹는 소리 가득하다
녹지 않겠다고 야단, 야단, 사라지고 싶지 않아요, 고함, 고함들
세상엔 눈 녹는 소리 가득하다
아야아
눈물 하나가
강은교
눈물 하나가 집을 나섭니다
해 다 진 길 위에
눈물 하나가 뛰어갑니다
뛰어가도 뛰어가도 잡을 수 없는
별빛따라 뛰어갑니다
가까운 곳에서
풀 하나가 일어섭니다
눈물처럼 부서집니다
심심한 개가 컹컹 짓습니다
한 마리의 개도 집을 나섭니다
눈물처럼 풀처럼
별빛따라 뛰어 갑니다
마지막엔 길도 달려갑니다
마을을 떠나서 모르는 곳으로
꿈꾸러 갑니다
무색(無色)의 공기가 결국
무색인 채로 빛나는 밤
세계의 모든 그 밤이 모여서
캄캄한 무덤의 지붕이 될 때까지
그래서 깊이깊이
무너질 때까지......
대륙붕(大陸棚) 속이나 석기시대(石器時代)쯤
눈발
강은교
외롭지 않아요. 우린
함께 함께 내려가요. 우린
머리칼 죄 뜯긴 나무 위에 풀 위에
몸살 앓는 잔돌 위에 산등성이 위에
쇠꼬챙이 담벼락 위에
비둘기 날개 위에
안녕 안녕, 돌아서는 사람들 솟은 어깨 위에
납작 누운 불경기 지붕 위에
호텔 보드라운 창틀 위에
취기 오른 불빛 위에
그리고 미사 위에
언제나 언제나 홀로 서 있는 십자가 위에
끝내는 눈물이 되어
눈물이 되어 온 땅
질퍽질퍽 흐느끼게 해요
함께 함께 흐느끼게 해요.
눈을 맞으며
강은교
눈을 맞으며 비로서
눈을 생각 하듯이
눈을 밟으며 비로소
길을 생각 하듯이
그대를 자나서 비로소
그대를 생각하듯이
님을 찾아서
강은교
나는 꽃밭에 서 있었어.
장미가 닻을 내렸지,
누가 신호를 보내왔어,
주머니를 뒤졌어,
가방을 뒤졌어, 누구야, 누구,
뒤졌어, 뒤졌어........장미도 뒤졌어,
아, 님이 색칠하고 계시는 진홍빛 장미 속살
님이 올라앉으신 한 잔 이슬비
한 모퉁이를 도니
님이 한껏 불며오시는 푸른 하늬바람
나는 꽃밭에 서 있었어,
장미가 닻을 내렸지,
한 꽃밭에서 다른 꽃밭으로,
고름들이 풀메뚜기처럼 뛰어다니는 흙 속으로,
님을 찾아서
단가
강은교
1 - 붉은 해
여기서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붉은 해 등진 큰 벌에서
바리바리 피를 모으던 어머니
좋은 날 좋은 시를 가렸지만
부끄러워라 우리 살은
한 대접 냉수에도 쉬이 풀리는
소금이라 하더이다.
2 - 늪
옥황상제가 온다.
옥황상제가 온다.
엄마 등에는
4천 년 묵은 늪이
황톳물이
묻혔다 다시 묻히는
아아 4천 사내의
떼죽음.
3 - 가는 곳
달이 뜬다,
산너머 칡밭에는
떨어진 눈썹 몇 개
살 몇 점
홀로 채비를 서둔다.
가다가 더러 귀신 만나면
가는 곳 잊지 말고 물어두게.
당신 앞에 – 향가 풍으로
강은교
('나는 불어대는 천 개의 바람입니다.
나는 휜눈 위의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의 빛입니다
나는 익은 곡식 위를 내려 쪼이는 태양 볕입니다
나는 당신께서 고요한 아침에 깨어나실 때에 내리는 속삭이는 가을비입니다
나는 원을 돌며 나는 새들을 받쳐주는 하늘의 날쌘 바람 자락입니다
나는 밤에 빛나는 부드러운 별빛입니다')
어느 인디언의 노래를 듣고 있네
나도 당신 앞에 천 개의 바람이 되네.
다이아몬드의 빛이 되네.
태양 볕이 되네.
속삭이는 가을비가 되네.
바람 자락이 되네.
아야아, 별빛이 되네......되네......네
도장 파는 남자
강은교
비가 오고 있었다, 그 비의 끝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백화점 옆 약국 귀퉁이, 누군가 내버린 간판이 문이 되어 있었다, 밧데리에서부터 도장 지갑, 스카치테이프, 아 복권, 이 시대의 복권, 볼펜, 라디오, 열쇠고리,........... 도장 파는 기계 등등,
비의 바깥, 길의 안쪽, 모든 죽은 이들은 나의 도장 속에 있어요, 비바람이 분다, 그는 도장 속에 숨는다, 자기가 만든 도장 속에, 그이 머리는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다, 검은 개량 한복을 입고 있다, 그러나 단추는 시뻘겋다, 가슴을 도려낸 것처럼 시뻘겋다, 그는 다 된 도장에 그 가슴을 묻힌다, 시뻘건 피가 묻는다, 그것이 그의 인주이다.
돌멩이 서넛
강은교
돌멩이 서넛 딩굴어요
방울방울 빗방울
온몸에 얻어맞으며
딩굴다 부서져 딩굴다
허물어진 담 밑
진흙구렁에 누워요
아침이면 이슬
대낮이면 햇볕
불어대는 바람에
어쩔 줄 몰라 어쩔 줄 몰라
절룩이는 길 위론
번개가 내리는데
가자 가자
천둥이 때리는데
몸져누운 돌멩이 서넛
피를 흘려요
억만길 땅 속까지
강물까지
피를 흘려요
그 돌멩이 서넛 울어요
개나리꽃이 피네요
그 돌멩이 서넛 잠들어요
진달래꽃이 피네요
절룩이는 길 위로
천둥 달리는 길 위로
돌아
강은교
돌아
너 아직 거기 있느냐
사월에 던진 돌아,
꽃샘바람 몹시도 불어가는
길모퉁이
연탄재며 밥찌꺼기
혹은 목 떨어진 개나리꽃 새
꾸부정하게 끼어 앉아
깨진 머리로 빛나는 돌아
으스름 무렵이면
한 잎 가득 피 베어문 하늘이
네 얼굴처럼 달려온다.
날이라도 궂어
출출출 비 내리쏟는 날에는
험집투성이 우리 가슴 결엔
화들짝 살아오는 숨소리, 고함소리
난장판으로 강물이 흐르고
뒷산 허리에선
우르르 우르르
우뢰 몸서리 요란했다.
아직 거기 있느냐 너
사월에 던진 돌아,
개나리 활활 일어설 때를 기다려
아, 그 꽃잎 꽃잎에 상채기 흠씬
문댈 때를 기다려
일 년이고 십 년이고
수유리 한구석
차마 못 떠나는 돌아
네가 못 떠나는 이 땅에
올해도 사월은 가지만
우리는 영영 남아 있다 그 사월에.
동백
강은교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등불과 바람
강은교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등불 하나는 내 속으로 걸어들어와
환한 산 하나가 되네
등불 둘이 걸어오네
등불 둘은 내 속으로 걸어들어와
환한 바다가 되네
모든 그림자를 쓰러뜨리고 가는 바람 한 줄기
따뜻함
강은교
웅덩이 건너편 모래가 웅덩이 쪽 모래를 손짓하는 사이
아침별이 저녁별을 손짓하는 사이
햇빛 한 올이 제 동무 햇빛들을 부르러 간 사이
키 큰 그림자가 키 작은 그림자를 쓰다듬고 있는 사이
9시의 슬픔이 11시의 슬픔을 부르러 간 사이
한 상처가 두 상처를 부르러 간 사이
껍질과 살 사이
멈춤과 멈춤의 사이
젖음과 젖음의 사이
마음
강은교
물고기에게는 물이 길이리라
나무에게는 나무가 길이리라
모래에게는 수만 리 모래 키스가
문없는 문을 가는 마음
보이는 것에겐 보이지 않는 것이 길이리라
모래가 바위에게
강은교
우리는 언제나 젖어 있다네.
어둠과 거품과 슬픔으로
하염없는 빛 하염없는 기쁨으로
모든 세포와 세포의 사잇길을 지나
폭풍의 날개 속으로 스며든다네.
한낮에도 가만가만 스며든다네.
길 막히면 길 만든다네.
바람 막히면 바람 부른다네.
세계의 수억 싸움 속에
세계의 수억 죽음 속에
낮은 지붕 위란 지붕 위
썩은 살이란 살 위
넘치고 넘쳐서
우리는 꿈을 꾼다네.
금빛 바위가 되는 꿈을 꾼다네.
모래밭 - 너무 짧은 사랑 이미지
강은교
그림자들도 밤이면 귓속말하며 둘러앉는구나.
(질펀하게 둘러앉아서)
쓰다듬는구나, 땅을.
모르는 산으로의 행진
강은교
그날 우리는 산으로 가고 있었어요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풀이파리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차디찬 바람들의 이마
우리들의 등을 밀어댔어요
이슬 밑에서 제 뼈를 핥고 있는 달팽이들
그때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사랑해야 하네, 작은 것들을
귀 기울여야 하네, 가난한 것들에
쓰다듬어야 하네, 외로운 것들을
우리는 모르는 산으로 가고 있었어요
어둠 속에서 어둠의 옷 벗었다 입으며
수천 길 감춘 산
그곳으로
그러나 이제 해가 뜨는 그곳
붉은 해 바람 미는 그곳으로
무명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강은교
1 - 나의 나에게 보내는
그 샛길의 끝에 그 병원이 있었다.
그 병원으로 들어가면 누런색 계단 위에는 환자복을 입고 링겔병을 들거나 기브스를 한 사람들 혹은 얼굴빛이 노란 사람들이 한적하게 나와서 서성이고 있거나 먼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그곳엘 갈 때마다 자기는 건강하다는 것에 안도하곤 한다. 그래서 스르르 열리는 자동문을 지나 그들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 곁을 유난히 어깨를 흔들며 걸어 들어가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너무 늦어서인지,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그 여자는 휑뎅그레하게 빈 병원 로비 안으로 들어가 빈 의자들을 둘러본다,
그 여자가 찾는 손님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 같다.(아차, 나는 아직 그 고등학교 선생이라는, 여자의 얼굴을 모르잖아....) 그 여자는 입구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골라 바로 이 지점이야, 라고 생각되는 자리에 앉는다. 그런데 앉고 보니 병원의 입구는 東(동) ․ 南(남), 두 군데에 있다. 아니다, 세 군데이다. 그 여자의 등 뒤인, 북쪽으로 향한 문도 있다. 그러니까 병원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감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 여자는 다른 자리로 가 앉는다. 거기는 동 ․ 남 양쪽 입구와 북쪽 문까지 보이기는 했으나, 기둥 뒤에 있었으므로 얼굴을 항상 내밀고 있어야 했다. 얼굴을 내밀고 있는 행위가 어렵기도 했으나, 그렇게 하면 자신도 들어오는 사람들의 눈에 지나치게 띄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벌써 그런 조짐이 나타났다. 마침 의사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바쁘게 팔을 흔들며 지나가다가 그 여자를 보고 멈추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 여자가 늘 다니는 신경과 의사이다. 물론 별 병은 아니고, 신경안정제 처방을 받으러 다닌다.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한다고 하는 그 신경안정제, 그러니까, 그 여자는 어느 때 그 여자의 뇌핏줄의 내부에 있는, 말하자면, ‘화산’이 터질지 모른다. 신경안정제를 먹으면 그 핏줄 속의 활화산이 사화산이 되어 잔잔하게 피가 흐르는 것이다. 그러나, 베스비오스 화산처럼 어느 때 그것이 솟아 나올지 모른다. 아마 그 여자의 핏줄 속으로는 지금 부지런히 피톨들이 떠다니며 끓고 있으리라.
어느 때 핏줄을 뚫고 솟아 나올 수 있을까, 그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보며. 그 여자는 갑자기 죽은 남편을 생각한다. “당신은 사화산이야, 어느 때 터질지 모르는.....”이라고 말하며 웃곤하던 그..... “ 그런 화산은 휴화산이라고 말하는 거얘요,” 그럴 때마다 그 여자는 자기는 휴화산이라고 주장하면서 웃었다. 그러면 남편도 손을 내저으며, “그럼, 수정하지, 당신은 시한폭탄이야” 하면서 웃었다.
마르고 까무잡잡한, 새처럼 뾰족하게 생긴 의사가 “여길 왜?” 하고 묻는다. 그 여자는 손을 저으며, “누굴 좀 만나려구요...”.하고 말한다. 의사는 오던 걸음으로 부지런히 그 여자를 떠나간다.
그 여자는 다시 다른 자리를 찾는다. 동 ․ 남 ․ 북문 출입자들까지 다 보이나, 그 여자는 결코 눈에 띄지 않는 자리.........
그 여자는 병원 로비의 그 넓은 공간을 거의 휘저어 다니듯 하면서 자리를 찾는다. 하긴 버릇이다. 그 여자는 늘 그런다. 집을 구할 때도 그런 곳을 구한다. 그 시간은 퇴근 시간 후여서 병원 접수창구엔 아무도 없었으며 에스칼레이터도 정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불까지 꺼버려 그 안은 어둑어둑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 여자는 포기한다.
처음의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 동쪽 문이 넓게 보이는 자리이다. 기둥 뒤로 얼굴을 내밀어 보면 남쪽 문도 보이니, 들어오는 사람을 가끔 확인할 수 있으리라. 그 여자는 이제 적당한 거리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고 생각한다. 적당히 자기를 감추고, 그러나 가끔 드러낼 수 있는 그 거리. 그 거리의 적정치 앞에서 더욱 출렁출렁, 반짝이며 어른거리는 어스름.
그렇다, 이미지는 거리(距離)다. 저 반짝이는 어스름의 거리이다.
그 여자는 그 중환자실을 생각한다. 거기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었다. 두꺼운 유리문이었다. 게다가 그 문은 잘 열리지도 않았다.
밖에선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안의 풍경은 아주 잘 보였다. 안에서 열어주길 기다리며 잠시 서 있을 때면 그 안의 풍경은 여기,
내가 속한 도시의 풍경이 아니라, 어딘가 먼 다른 어떤 곳의 풍경같이 익숙치가 않게 들여다 보였다. 뽀얀 김이 서리고 있었으며(들어가보니, 가습기에서 내 뿜는 수증기 때문이었다.) 그 수증기 속에 형편없이 마른 팔다리가 가득했다.
계단에서는 환자의 가족인 듯, 벽으로 돌아서서 어떤 여자가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환자의 다른 가족인 듯 젊은 남자며 한복을 입은 여인네 등이 계단 한구석에 모여 서서 웅웅대고 있었다.
간호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면회 시간인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의외로 그 속은 조용하였다. 수증기가 꿈처럼 너울대는 속으로 그 여자는 그 여자의 남편을, 아니 전(前) 남편의 침대를 찾았다. 그러나 얼른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 그 여자가 찾는 남편은 없었다. 늘 귤 한 주머니를 검은 비닐봉지에 싸들고 밤 12시도 넘어, 잠과 잠 사이에서 실눈을 겨우 열며 현관으로 걸어가던 그 여자 앞에 나타나곤 하던____ 그 여자가 결코 걸어 볼 엄두를 못내는 어둠을 잔뜩 데리고 그 여자의 앞에 서곤 하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침대 사이에서 한참 허우적이던 그 여자는 겨우, ‘연락을 한 젊은 남자’를 그 수증기 가득 오르는 강물 속에서 찾아냈다. 그‘젊은 남자’가 들여다보고 있는 침대에는 이마가 M자로 훌렁 벗겨진 한 남자가 환자복을 입은 채 멍하니 공중을 보고 누워있었다. 이상한 정적이 흐른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정적이 흐르다니.....
침대들은 빼꼭히 차 있었다. 이상한 정적, 그 여자는 몇 침대를 지나가면서 그 정적이 죽음의 정적임을 느낀다. 그리고 그 정적에선 이상한 냄새도 풍김을 느낀다. 그 여자는 괜히 코를 막는다.
그 여자는 그 침대 쪽으로 코를 막고 걸어간다.
“여기에요, 여기,”
하는 듯이 그 여자에게 연락을 했던 건강한 ‘젊은 남자’가 그 여자에게 손짓을 했다.
환자의 팔다리는 형편없이 가늘었다. 간병인(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였다)이 마치 어린애 다루듯, 귀엽지만-그럴 수록 단호하게 해야 돼, 하는 듯이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K엄마 왔어, 보여?____보이면 눈 깜박해 봐.....”하고 말했다. 그 여자는 갑자기 허연 수증기를 뚫고 나타난 사태에 어쩔 줄을 몰랐다. 수증기가 그 여자를 가려주었으면 하고 순간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환자는....아니 그 여자의 전(前) 남편은....그러나 눈을 깜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을 보았는지, 눈물이 주르르 양 눈가로 흘렀다.
간병인은 아주 익숙하게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 울었어요. 반가운가 봐요. ............이런 일은 없었는데.....”
그 여자는 참을 수가 없었다. 가는 발목, 아니, 남편의 발목이 그렇게 가늘다니.......오랫동안 못 보던 발목에 감겨있던 공기가 그 여자에게 달려드는 것 같다. 그 가는 손목..........남편의 손목이 그렇게 가늘었다니, 그렇게 노랬다니.....
“자, 일어나야지↗” 간병인 아줌마는 어린애를 달래듯 코막힌 소리로 말하면서 환자의 등을 뒤채어 주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욕창이 걸려 야단이얘요.....”
그러나 환자는 멍하니 앞만 쳐다 보았다. 눈동자는 물론 움직이지 않았다.
입은 굳세게 앙다물고 있었다.
이미지가 점점 팽창하고 있었다.
그 여자 앞에서 이미지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미지는 침대를 떠나 공중을 점령하더니.....그 여자의 눈앞의 공중을 전부 점령해 버렸다.
그 움직이지 않는 눈이 한없이 커졌다. 그 눈 뒤에서 커피를 마시던 그 남자의 눈이 일어났다. 가는 팔다리 뒤에서 검은 두루마리 자락을 흩날리며, ‘오늘 주례하러 가.......’하고 말하던 입이 떠돌았다. 거기 그 남자는 없었다. 이미지가 존재가 되었다. 그 이미지는 팽창하였다. 그 여자는 기둥 뒤에서 이미지를 만진다. 그 남자의 이미지를 만진다. 환자복을 떠나 공중에 큰 얼굴로 떠돌던 그 남자의 입의 이미지를 만진다. 유난히 붉은 입술이었지. 마치 립스틱 솔로 그린 듯이 선명하던 입술 선. 그 위로 검버섯이 둥둥 떠다닌다.
검버섯의 이미지가 가득 떠다닌다. 검버섯이 그 여자에게로 달려온다. 검버섯에 앉아 자판기 커피의 종이컵을 입에 대며 장난스레 웃던 눈도 달려온다. 잔뜩 웃음을 머금고 달려온다.
그 여자는 이미지의 팽창을 넋을 놓고 바라본다. 그 이미지를, 그 이미지를............어떤 대학 운동장에 서 있던, 하얀 장갑을 낀 그 남자의 손의 이미지도 달려온다.
사진을 가득 펴놓고 “이거 좀 봐, 멋있지? ” 사진에는 가슴에 플랑카드 띠를 한 남자들이 아스팔트 길 한쪽으로 가득 걷고 있다.
그들은 무엇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외침이 사진 속의 입을 떠나 그 여자에게로 달려온다. 그 입은 소리도 싣고 있다.
빗자루도 떠다닌다. 어떤 초등학교 운동장 연단 위에서 그가 들고 연설하던 빗자루이다. 그는 빗자루로 연단 위를 마구 쓸었다.
그렇게 부정 ․ 부패를 말끔히 쓸어보겠다고 외치면서.....
사람들이 마구 박수를 쳤다.
어떤 방에서 보던 붉은 네온사인의 십자가 불빛도 보인다. 그 여자가 젊은 시절 뇌수술을 기다리며 중환자실에서 쳐다보던 불빛이다. 아기의 장례식이 달려온다. 작은 관도, 관을 실은 버스의 털털거림이 관을 더욱 털털 거리게 하며 그 여자에게로 달려온다.
솔방울도 하나 털털거리며 달려온다. 솔방울은 그 아기의 무덤 위에 있던 것이다. 남편이 마비가 되어 꼼짝 못 하던 그 여자에게 무덤에 분명히 갔다 왔음을 증거하며 가져옸던 것이다. 그 여자는 그 솔방울을 오랫동안 그 여자에게 단 하나 있던 흐린 감청색, 도자기에 담아 두었었다. 솔방울의 갈색은 털털거린다. 그 버스처럼 털털거린다.
그 여자가 젊은 시절 한때 입원하여 있었던 병원 계단에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이 넋이 나간 채 주저앉아 있었다는 그의 모습도 달려온다. 그 모습은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가 뇌 수술 후 중환자 실에 누워 온 몸의 마비가 풀리길 기다리던 그 여자를 들여다보며 열심히 묘사해 준 것이다. 어머니의 남편, 그러니까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입도 달려왔다.
그 공간은 갑자기 죽은 사람들로 차기 시작했다.
죽은 아이가 데리고 온 어머니, 어머니가 데리고 오는 아버지.......아버지의 구두.....
이미지는 이미지를 증식한다.
아, 그의 구두, 황급히 베란다로 달려가던 그의 손에 들려있던 구두. 그 여자는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다. 튼튼한, 낯선 두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들은 그 여자를 밀치며 집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구두도 벗지 않고 마루로 올라왔다. 그 여자는 엉겹결에 비켜섰다. 그들은 아직 베란다로 미처 가지 못한 남편을 붙들었다. “어딜 가실려고요! 저희와 함께 가시죠!” 그 낯선 남자들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그 순간의, 그늘지던 그의 눈빛의 이미지가 팽창한다. 그는 구두를 현관에 갖다가 얌전히 놓고 그 남자들을 따라나갈려고 한다. 그 여자는 순간 방으로 뛰어가 장롱 속에서 바바리코트를 꺼내었다. 그가 바라리 코트를 입었다. “갔다가 올게. 얼마 안 걸릴 거야.......”그 낯선 남자들은 “사모님, 죄송합니다.”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남편을 가운데 세운 채 현관으로 나갔다. 두 남자 사이에 끼어 나가고 있는 그의 바바리코트의 안감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여자는 버릇처럼, ‘저걸 꿰매 주어야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도대체 만날 수가 있어야지, 오랜만에 집에 들어왔는데, 또 이게 뭐람........”하고 생각한다. 곧 조용해졌다. 그 여자는 현관문의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구두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구두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간병인이 무어라고 쉴새 없이 지껄이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정적이 지배하고 있는 거기, 그 무력한 침대 위, 움직이지 않는 그의 눈길에 온갖 팽창한 이미지들이 떠다닌다.
그렇다. 팽창된 이미지는, 팽창하여 증식된 이미지는 추 이미지이다.
팽창하고 증식한 추 이미지는 물론 본래의 이미지보다 훨씬 크고 선명하다.
그 이미지들은 상상력 속으로 들어간다. 상상력의 텐트 속으로.
그 남자가 그런 추 이미지를 가졌음을 그 여자는 모르고 있었다. 그 정적의 침대 위로 움직이지 못하는 등뼈 사이에서 기어 나와 가득 공중에 떠다닐 줄은.
상상력의 텐트 속의 이미지와 그 여자는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북을 친다. 무대 위에서 북을 치며 시를 읽는다. 마치 중환자 실에 마비되어 허공을 보며 누워있는 그의 심장에 북을 치듯이.
소리길이 열린다. 소리길에서 이미지들은 서로의 살을 교환한다.
교환이다. 순간 교환이 일어난다.
소리길이 된 그의 심장 길에서의 북소리........
오기로 한 그 손님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그 여자는 일어선다. 가득 떠도는 이미지들을 만지며 기둥 앞으로 나선다.
이제 바깥은 아주 캄캄해졋다.
그 여자는 그 샛길을 돌아온다.
오다가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혓다.
그 사람은 아주 견고한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여자는 이미지들이 이미지들과 어깨를 부딪는 것을 본다.
교환이다. 교환이 일어난다. 소리길에서의 교환.
그 여자는 시를 쓴다. 가장 적당한 거리에 있는 이미지들을 들고.
달려오지도, 달려가지도 않는, 거기 있는 존재들. 적당히 팽창했으며 적당히 증식하는 존재들을 들고.
그 추 이미지들, 산다는 것은 그 추 이미지들을 점검하며, 시찰하며 보행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그 적당한 거리에 있는 팽창된 추 이미지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는 행복한 경우가 교환으로 일어나는 것인가.
그 추 이미지들, 그 적당한 거리에 있는 팽창된 추 이미지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는 행복한 교환, 시적 리얼리티는 그 순간 맞은편에서 오는 그 사람과 교환되어 저장되는 것이다. 언어가 될 날을 그 저장고 속에서 눈이 빨갛게 되어 기다리며.
그 여자는 얻는다. 시적 리얼리티를.
사물의 현재성이며 사물의 존재성인 시적 이미지, 시적 이미지들이 합장하며 들어올리는 시적 리얼리티.
그 샛길에서 시적 리얼리티는 마주오는 사람과 항상 어깨를 부딪는다. 그리고 교환된다. 순간 출렁거리며 길 저쪽에서 오는 시.
아, 그 샛길로 가자. 소리길인 그 샛길로. 거기서 시적 리얼리티는 추 이미지를 얻고 교환의 행복을 얻을 것이다.
추상과 구상의 통일이다. 시적 상상력의 텐트 속에서.
2 - 이미지와 소리의 교환적 고찰
그 여자는 문을 연다. 어둠의 넓적한 등을 더듬더듬 만지며 그 여자는 마루 위로 올라선다. 그 여자를 감지한 ‘그림자 스위치’가 작동한다. 현관이 갑자기 밝아진다. 아, ‘그림자 스위치’, 어디 있는지 모르게 벽에 붙어 있다가, 소리 없이 벽에 앉아 있다가 스르르 소리도 없이 켜지는, 안 켜지려고 해도 켜져 버리는 ‘그림자 스위치’.
그러다 그 여자가 마루 위로 올라서자, 감지할 어둠 덩어리를 잃고 소리도 없이 꺼져 버린다. 다시 어둠. 그 여자는 단단한 어둠의 등을 만지며 거기 잠시 선다. 그 여자의 귀에는 어둠을 뚫고 무수한 소리가 들리고 있다.
소리들은 그 어둠 밑으로 잠행하고 있다. 어둠인 그 여자의 혈관 밑으로. 마치 얼음장 밑으로 살살 물이 흐르듯, 모든 물길의 원천은 빙하의 얼음장 밑에 있듯……. 전차가 달리는 소리, 가재가 엎드려 있는 소리, 플라타너스 그늘이 희게 흔들리는 소리. 트럭이 달리는 소리, 우체국 문이 열리는 소리, 언덕길로 올라가던 연애. 소리들은 잠행하고 있다. 소리들은 잠행하다가 서서히 이미지와 꿰매진다.
아직 소리의 홀몸만으로 잠행하는 것:
① 그 전차는 소리의 소용돌이 속으로 달리고 있다. 아직 잘 보이지 않는 이미지 하나가 그 전차의 딱딱한 의자 위에 앉으려 하고 있다가 앉지 못한다. 의자에서 굴러떨어진다. 전차의 소리는 그 여자가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달리고 있다.
② 그 소리 위로 플라타너스 가지의 그늘이 희게 춤춘다.
③ 트럭이 지나간다. 트럭 가득 탄 남자들이 핏물이 튀긴 깃발을 흔들며 뭐라고 소리 지른다.
④ 트럭에 앉은 한 작은 여자아이가 그 털털거림 위에 앉아서 지나가는 시골 풍경을 바라본다. 뒤에 따라오고 있는 또 하나의 트럭에 가득 타고 앉아 있는 이국 병사들. 그들은 뭐라고 떠들며 그 무엇인가를 휘익 집어 던진다. 초콜릿이다. 초콜릿은 희미한 하늘 속에서 갈색으로 반짝인다.
⑤ 그 여자는 또 끊임없이 재봉질을 하는 여자들의 하품하는 둥근 입속을 바라본다. 거기가 어디일까, 하품하는 여자들은 빠른 손길로 재봉틀의 바늘 밑에 아직 덜 된 재킷을 밀어 넣는다.
한 정거장 갔다. 전차의 문이 열린다. 소용돌이 속에서 막 소리와 꿰매지려고 하는 이미지 하나가 일어선다.
그러나 아직 소리와 꿰매 지지 못한 이미지 하나는 소용돌이를 밀고 전차 밖 어둠 속으로 내린다. 그 여자도 따라 내린다. 그 이미지를 따라간다. 그 이미지가 들어서는 어떤 문 안으로 들어간다. 트럭과 초콜릿도 덜덜거림 소리판을 내려와 문 안으로 들어간다. 재봉질을 하는 손톱의 이미지의 몸도 재봉틀 소리판을 내려와 문 속으로 들어간다. 이미지들은 잠행하기 시작한다. 이미지들은 이미지들이 떨어뜨리는 이미지들의 껍질 속으로 들어간다.
아니다. 그 이미지들은 이미지들이 떨어뜨린 이미지들의 껍질만을 손에 들었다. 그 이미지들은 마치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처럼 길고 긴 다리로 어떤 문을 열고 또 들어선다. 이미지들은 이미지들의 문을 열고 또 문 속의 문으로 들어간다. 또 문 속의 문으로. 또 문 속의 문으로.
⑥ 그 문소리가 자꾸 들린다. 어떤 우체국이다. 그 여자는 어떤 남자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도시락에 빨간 산딸기를 모아든 어떤 남자와. 빨간 산딸기의 얼굴이 묻어 닫기는 소리와 합쳐진다. 이미지는 소리와 꿰매진다.
그 이미지는 또 문과 꿰매진다.
그 이미지는 서서히 색깔과 소리와 공간이 있는 이미지의 몸으로 완성되어 간다.
⑦ 그 언덕길의 소리-밑소리도 들린다. 그 언덕길의 소리-밑소리는 플라타너스 그늘이 흔들리는 흰 부스럭임으로 자꾸 커진다. 어둠 속에서 자꾸 커진다. 아, 그 언덕길 플라타너스 흰 그늘. 그 그늘 끝에 서 있던 진한 붉은 색 장미 꽃다발.
⑧ 흰 그늘 밑으로 가득 늘어선 사람들. 고무신을 신고 발뒤꿈치를 가득 치켜들고 있는 그 여자. 휘익 지나가는 자동차, 마치 초콜릿처럼 공중 속으로 사라지는 자동차의 뒷모습. 고개 숙이고 울고 있는 군중들.
플라타너스 흰 그늘이 그 여자의 가슴 속으로 들어온다. 그 그늘을 밟고 그 그늘의 궤도 속으로 그 여자는 들어간다.
그늘의 잎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커다란 흰 그늘의 색깔과 공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거기서 더 크게 되어 일어선다.
이미지의 몸이 되어 일어선다. 소리는 서서히 이미지가 된다.
아직 이미지의 홀몸만이 잠행하는 것:
① 그 전차는 소리와 별개의 이미지가 되어 어둠 속으로 달리고 있다.
② 그 트럭은, 그 피 묻은 트럭은 깃발의 이미지가 되어 그 여자의 어둠 밑으로 펄럭인다. 그 초콜릿의 갈색은 어둠을 갈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③ 그 재봉질을 하는 여자들을 보라. 이미지의 홀몸으로 실밥을 날리는 걸 보라.
유난히 마른 이미지의 돌발적 끼어듦:
④ 그 우체국은 빨간 난로가 타는 공간이 되어 불의 색깔과 연애의 따뜻한 열 빛깔을 띠고, 산딸기 빛깔도 띠고 그 여자가 그때 매었던 스카프의 비둘기 빛깔이 되어 일어선다. 소리는 이미지가 된다. 빛깔이 소리의 몸이 된다.
이미지의 입은 소리의 입과 합치된다. 이미지의 머리카락은 소리의 머리카락과 한 몸이 된다.
소리와 한 몸이 된 이미지의 잠행:
① 그 미로 같은 골목들이 보인다. 그 미로 같은 골목에 냄새를 풍기며 서 있는 이끼 낀 시멘트의 작은 벽들. 작은 문들. 그 작은 문이 열리며 아주 연약한 꼬마가 달려 나온다. “여기 있기 싫어. 집에 가고 싶어” 외치면서 뛰어나온다. 드디어 모든 문들이 제대로 된 맛과 빛깔과 소리를 내며 열린다. 닫힌다. 그 여자의 앞에 지금 있는 어둠의 등이 알맞은 빛깔과 넓이와 소리를 가지고 그 여자에게 쓰다듬기운다. 그 여자는 장대한 어둠의 몸을 만진다.
소리와 한 몸이 된 이미지의 돌발적 끼어듦:
② 그 어둠 속으로 느닷없이 가재 한 마리가 달려온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할 듯이 수족관 속에 포개져 엎어져 있던 가재이다. 그 가재가 수족관을 떠나, 그 여자가 서 있는 어둠 속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달려온다.
두 가닥의 긴 수염이 그 여자의 앞에 있는 공간에 출렁인다. 두 가닥의 그 긴 수염, 안테나이다. 소리를 잡아채려는 안테나. 이미지를 몸에 걸치려는 안테나. 소리와 이미지를 한데 재봉틀질 하는 안테나.
그 늙수그레한 남자는 가재를 잡수시라고 말했다. 아주 힘없이. 그러나 확고히 믿고 있었다. 그 가재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신선한 바다의 이미지를. 물의 이미지를 빙하의 이미지를 모든 소리를 그 껍질 밑으로 흐르게 하는 그 잠행의 이미지를. 그 신선함의 이미지를.
이미지들은 어둠의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③ 그 여자는 어둠의 등을 쓰다듬으며 베란다로 간다. 창문을 연다. 어두운 하늘에는 은빛 초생달이 빛을 흘리며 서 있다. 초생달은 아주 걸터앉기 좋은 형상으로 되어 있다. 그 여자는 누구인가 거기 걸터앉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러다 보니 그달의 의자에는 무수한 혼들이 걸터앉아 있다. 혹은 앉아 있고, 혹은 매달려 있고, 혹은 매달린 허리를 붙들고 매달려 있고, 소용돌이이다. 회반죽이다. 그렇구나. 혼은 이미지구나. 소리를 꿰맨 이미지구나. 그러고 보니 이곳의 천정들도 그렇다. 이미지와 소리를 한데 꿰맨 혼들이 가득하다. 어떤 때는 칼바람 소리로 어떤 때는 은빛 바람의 몸을 공중에 흔드는 그것들.
소리와 이미지의 꿰맴-이미지 트레이닝이란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이미지는 이미지들의 잠행 속에서 완성된다. 사람들은 그 이미지의 껍질을 들고 있어도 이미지의 몸을 들여다보려 하지는 않는다. 이미지와 이미지를 꿰매주는 것이 이 거대한 시간판 위에서 소리들이 하는 일임을 모른다. 모든 사람은 이미지의 시간판 위에서 앞으로 가고 있다. 그 껍질들을 흘리며. 그 껍질들을 다음 시간판 위에 흘리며.
잠행하려는 이미지의 껍질들을 흘리며.
시를 쓰고 있는 이들이여, 나의 나여, 너의 너여, 네가 시를 쓰고 있다면 그것을 소리와 이미지가 하나 된, 접시 위에 놓아라. 그곳 수족관의 가재와 같이 두 개의 안테나를 언어의 물속에 끊임없이 흔들어라.
언어의 몸이 변모하는 순간 우리의 정신은 맑게 된다. 드넓은 이 어둠의 등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모든 소리들에게 이미지를 복구시키기도 하면서. 소리와 이미지의 꿰맴, 이미지와 소리의 교환이다. 결국 이미지 트레이닝은 우리에게 치유의 효과를 줄 것이다. 시의 손을 잡을 때 그 치유는 당신에게로 건너올 것이다.
시를 쓰는 이들은 모름지기 그 안테나를 잡아야 할 일이다. 안테나가 있는 가재를 요리해야 할 일이다. 가장 맛있게.
그 공간을 접시 위에 얹을 수 있어야 할 일이다. 소리의 홀몸과 이미지의 뼈를 꿰매어라. 그렇게 시의 혼이 되어라.
시를 살아라. 그 여자는 이제 완전히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지와 소리를 꿰맬 수 있으며 그래서 늘 하루 동안 시간판 위를 잠행하던 이미지와 소리를 집으로, 그 여자의 방안으로 데려왔다. 그 여자의 시적 자아는 그 최후의 도착지 방 밖에서는 늘 죽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일터의 문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집으로 오는 신호등들이 늘어선 그 길 위에서부터, 그 여자의 혼은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 여자는 그 여자의 주인공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 여자는 주인공들에게 신호등 앞에서는 어떻게 멈추는지, 또 신호등이 어떤 색깔로 변하면 그 길은 건너갈 수 있는 길이 되는지를 가르쳐준다.
주인공들은 피가 흐르며 서로 부르기 시작한다.
주인공들이 걷기 시작하는 그 거리는 이전의 그 거리는 아니다. 시간판 위의 무대이다. 소리와 이미지가 따로따로 들끓던 속에서 이미지와 소리의 옷을 주웠다 놓으며, 그 속으로 이미지의 어깨를 흔들며 걸어가는 주인공들, 또는 소리의 눈초리만을 팔락이며 걸어가는 주인공들, 그 여자의 혼 밖의 사회는, 시간 판 위의 벽들은 저물녘 차려지는 그 여자의 시간판 위에서 이미지와 소리가 따로따로 잠행하는, 그러나 그 여자의 시선이 투과될 수 있는 상황으로 변모한다.
그 여자의 집에는 흰 그늘이 있다. 플라타너스 흰 그늘도 있고, 달리는 트럭 위의 하늘의 구름 흰 그늘, 그리로 달려 지나가던 바람의 흰 그늘, 아버지의 흰 그늘, 어머니의 흰 그늘, 늘 그 여자의 아버지의 등 뒤에 달려있던 허공의 흰 그늘도 있다. 트럭 위의 흰 그늘의 상황이 언어의 몸으로 변모하는 무대, 그러니까 그 여자의 방 속에 차려지는 무대,
거기선 끊임없이 결혼식이 열린다. 소리와 이미지가 주례인 언어 선생님을 가운데 모시고 결혼한다. 결혼식의 끝에는 늘 합방의 상황이 벌어진다.
이미지와 소리는 한 몸으로 꿰매진다. 이미지와 소리는 피를 건너 교환된다. 이미지는 소리로, 소리는 이미지로 교환된다. 나의 무대는 너의 무대로, 교환된다. 나의 시적 자아는 너의 시적 자아로 교환된다. 시간판 위의 우리는 모두 서로서로 교환된다. 아직 무명의 시인들이여, 나의 나여, 너의 너여, 나의 너여, 너의 나여, 이미지와 소리를 함께 꿰맬 언어 앞의 결혼식을 열어라.
이미지와 소리가 언어 앞에서 한 몸이 될 합방의 상황들판을 만들어라.
그 여자는 창문을 닫는다. 어둠의 입을 닦아준다. 이미지와 소리를 거기 단단히 가두기나 하려는 듯이. 현관문의 잠금 상태도 다시 한번 살펴본다. 모든 문을 꼭꼭 잠근다. 이미지와 소리여, 언어 위에서만 흘러나오라, 그 언어 위에서의 소리길 위에서만 교환되어라, 너와 나, 트럭 위에 앉아 있는 이와 재봉질하는 이와, 시장판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고사리를 들고 있는 이와, 모든 나/들과 모든 너/들, 교환되어라, 끊임없이 중얼대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소리치며.
3 - 이미지의 광합성에 대하여
死角地帶(사각지대)를 써라. 피의 깃털 소리를 날려라.
사각지대에서 무엇인가, 너만이 본 것을 끄집어내라
사각지대에서부터 너의 흐르는 ‘비밀통신’을 시작하라.
타자의 비밀 회로에 들어가라.
그것은 아마도 <너 혼자-너만이> 보고 난 후의 그 무엇, 타자의 회로 속의 그 무엇일 것이다.
너만이 아마도 그 가재의 귀, 그 호랑이의 등, 그 보행등 속에 숨어 있는 사람, 그 풀에 묻어 흰 피를 흔들고 있는 이, 피의 깃털 날리는 소리...그 아스팔트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아야아__’의 비명소리...
그런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끄집어내는 것’, 손 비집어 끄집어내는 그것만이 비밀통신을 하는 길일 것이다. 교환하는 길일 것이다. 연결되는 길일 것이다, 피의 저 깊은 방, 피의 깃털 흩날리는 곳. 끄집어내는 것만이 變態(변태)하는 길일 것이다. 모래 위에 그린 물고기 두 마리가 나비가 되는 변태,
모래를 잔뜩 먹은 새 한 마리가 물고기가 되는 변태........살의 지층 속으로, 피톨들의 붉은 주단 깔린 계단을 걷고 걸어.
물속을 그 길고 너울거리는 수염으로 찔러보는 너, 물속에 엎드려 물속을 찔러보고 있는 너의 눈에는 아마 물의 속살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물속을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고, 그러나, 네 수염은 너무 가늘어, 물의 피를 내기에는, 물의 살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가늘어, 어둠이 되기에는 너무 길어, 너무 부드럽게 거려..........<가재>
그래, 너는 너무 부드럽게 너울거리는구나. 그래 가지고서야 ‘사각지대’가 너의 눈에 잡힐 수 있겠느냐.
너의 핏줄로 비밀통신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그 가재는 그곳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면 수족관에 엎드려 있다가 그 여자를 가장 먼저 쳐다보는 것이다.
하긴 가재가 가장 처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의 눈에 가장 처음 만져지는 것이 가재이리라.
그 여자는 한 달에 한 번쯤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고 그 가재 앞으로 간다. 그때마다 깜짝 놀란다. 저렇게 웅크리고 물을 찌르고 있다니, 수족관은 순간 사각지대이다. 아무도 그 가재를 쳐다보지 않는다. 혹 쳐다본다 하더라도 그 가재의 그 수염이 찌르고 있는 물의 단단함을 쳐다보지는 않는다.
어느 날 가재는 상당히 여유로와 보인다.
가재 가재
물속에 수염 뻗치고 안테나처럼 물에 비친 구름에 꽂고
구름에 빨대를 꽂고 그걸 빨아대고 있는 가재
구름 한켠에 웅크리고 앉아 그걸 빨아대고 있네
길 한켠에 웅크리고 서서 그걸 빨아대고 있네.......
<가재>
가재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수족관의 벽을 건너 그 여자에게로 건너온다. 그러다가 한달 후 어느 날인가,
가재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그것의 수염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너무 부드럽게 물의 단단함에 도전하고 있는 가재의 수염
가재는 수염을 딛고 그 여자에게 건너온다. 너울거리는 수염 속에서 가재의 한숨 소리가 그 여자에게 들린다.
‘아, 이렇게 물이 단단하다니.......’그것은 끝없이 너울거린다. 그것은 안테나처럼 물속을 헤집었지만, 그 어떤 통신도 잡히지 않는 모양이다. 절망적인 안테나..... 수족관의 벽이 무너지면서, 물이 그 여자에게 쏟아지더니...가재가 절망적인 그 안테나를 너울거리며 그 여자에게로 건너온다. 이미지의 광합성이 일어난다.
이미지의 광합성은 ‘흐르는 비밀통신’이다. 가재는 그 여자가 되고 수염은 그 여자의 살에 꽂혀 너울거리기 시작한다. 물이 넘친다. 수족관의 물은 넘쳐 그 여자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기 시작한다.
‘저쪽’이 보인다. ‘저쪽’.......그 여자가 가야 하는 ‘저쪽’, 그 무엇이 있는 ‘저쪽’.......
사각지대가 있는 ‘저쪽’......사각지대가 그 무엇엔가 살짝 가려지며 숨어 있는, 그래서 그것이 사각지대임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러나 자유가 있는 ‘저쪽’....... ‘저쪽’은 그 여자에게 그 사각지대의 속살을, 살짝 내비치는 곳이다. 그 속살이 아주 희고 부드럽게, 가볍게 그 여자를 유혹하는 곳이다. 그 여자는 기표의 문턱을 넘기 시작한다.
어릴 때 그 여자는 일년에 네 번 방을 바꾸곤 햇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그 여자네 집엔 빈방이 많았다. 그 중엔 잡풀이 가득 솟아 있는 빈 사랑채도 있었다. 그 여자는 어느 여름 용기를 내어 책상이며 책꽂이며 스탠드며...말하자면 삶의 소도구들을 그리로 옮겼다. 거기엔 그 여자의 키보다 큰 잡풀이 가득 솟아 있는 자그만 뜰과 그런 풀 몇이 하늘에 솟아 있는 기왓장들..........아무도 연 일이 없는 작은 대문이 있었다.
그 여자는 거기 한 방에 책상이며 책꽂이며 스탠드며......차려놓고 앉아, 안마당의 글라디오라스를 쳐다보았다. 그 사랑채 황폐한 마당의 키 큰 풀들을 쳐다보았다. 안 마당의 글라디오라스의 붉은 입술과 그 키 큰 풀들은 어울려 하나의 ‘저 쪽’을 잠시 형성햇다. 이미지의 광합성이 순간 일어났다. 그 여자는 밤새껏 세 개의 이미지 위를, 방과 안마당과 사랑채 뜰 위를 왔다 갔다 했다.
그 여자는 오늘 밤에도 ‘저쪽’을 꿈꾼다.
그 ‘저쪽’엔 무언가 있으리라.
그 ‘저쪽’엔 나 만의 사각지대가 있으리라.
그 ‘저쪽’엔 가벼움이 있으리라.
그 가벼움은 존재에 닿는 것이리라. 가볍게 가볍게 날아오르는 것이리라.
그 ‘저쪽’엔 물이 있으리라. 존재와 존재의 속살을 적셔주는, 子宮(자궁)의 羊水(양수)와도 같은 물. 부드러운 존재의 다리, 타자의 회로. 결코 교각 같은 것은 필요 없는, 주체와 주체를 건너다니는. 세상의 바다와 강물의 자물쇠를 함께 열게 하는 것, 온갖 플랑크톤을 일어서게 하는 것, 그러나 멍하니 벌려진 동공들 앞에선 블랙홀을 이루는 것, 그 누구도 그 속에서 그것의 속살에 쉽게 가까이 갈 수 없는 것, 가까이 갔으면서도 가까이 간 줄을 모르게 하는 것, 존재인 것, 네 리듬의 고막, 그 ‘저쪽’엔 불이 있으리라. 존재를 활 활 태우는 것, 존재의 없는 다리, 귀신에게 가는 것, 너를 그 무엇도 기생할 수 없이 깨끗하게 하는 것. 그러나 너의 슬픔, 너의 기쁨, 너의 겹- 눈물, 너의 겹-피. 기의와 기표가 손잡고 있는 둥근 계단. 그 ‘저쪽’엔 어둠-어둠의 劾(핵)이 있으리라. 깊이 닿으면 닿을수록 환한 그것, 가상이에 있을 때는 우리를 장님이게 하는 것. 우리의 꿈. 모든 꿈의 울타리. 모든 별의 인도자. 모든 빛의 인도자. 모든 빛의 질료. 그 ‘저쪽’엔 호랑이가 있으리라. 그 호랑이는 유리창 저쪽을 그 두꺼운 다리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위 뒤에 숨었다.
그 바위 뒤 유리창 안쪽에 우리가 있는지도 모르고 숨어 있었다. 그리고 잠들었다. 그 큰 엉덩이 밑에 콘크리트의 땅을 눕히고. 그 ‘저 쪽’엔 가나안의 땅이 있으리라. 자유의 손이 있으리라.
그 ‘저쪽’엔 킹코브라가 있으리라.
그 파충류 다큐 사진작가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독사, 사람 하나 너끈히 죽일 수 있는 킹코브라를 만나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다.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보는 것이. 그래서 독사 킹코브라가 가장 있음 직한 인도의 한 정글에 간다. 킹코브라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포기하고 돌아오려는 순간,
짝짓기 하고 있는 킹코브라가 숨어 있는 대나무 둥지를 발견한다. 거기서 드디어 그 독사를 만난다. 그 독사의 눈을 보면서 전율한다. 하긴 그 독사는, 오스틴 월레븐스, 그를 보지 못하는 눈이다. 열로 변한 이미지만이 감지되는 눈이다. 그는 손을 얹는다. 그리고 일생의 꿈을 성취했다고 외친다. 아, 그런 인도의 정글, 독사의 눈이 전율하는 곳,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 거기가 ‘저쪽’이다. 자유가 있는 곳이다. 결코 들키지 않는 곳이다. 이 시대의 숱한 핸드폰 따위로 결코 통신해볼 수 없는 곳이다. 그런 곳으로 숨어라. 거기서 이미지 광합성을 하여라.
그 ‘저쪽’엔 기차가 있으리라. 자유의 빈 손의 날개가 있으리라.
그리로 가는 기차는 거기서만 떠난다. 그런 정거장을 만들어라. 누구나 차표를 살 수는 있지만, 떠나는 곳은 그리로 와야 하는 그곳. 그 ‘저쪽’엔 사진기가 있으리라.
킹코브라를 찍는 그 사진기, 아름다운 독니가 독액을 흘리며 이미지를 기다리는 곳.
그 ‘저쪽’엔 계단이 있으리라.
그 계단 너머엔 대나무 숲이 있다. 킹 코브라 둥지가 놓여 있을 대나무 둥지........
그 ‘저쪽’엔 ‘아야아___’가 있으리라. 피의 지층 위를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결핍인, 자유의 빈손.
‘아야아___’는 절망의 비명이기도 하나, 찬탄의 탄성이기도 하며 기쁨의 환호성이기도 하다. 전율이 들어 있는. 번개의 빛이다. 벌린 눈으로는 결코 잡을 수 없는 번개의 빛, 閃光(섬광) 그것을 잡아라.
그러고 나면 그 ‘저쪽’에선 항아리 하나를 돌아 나온 맑은소리 하나가 일어서 오리라.
그 종각 밑엔 항아리가 숨어 있었다. 그래서 종소리는 항아리를 돌아 나오며 맑은 소리를 내곤 하였다.
아니다. 그 그 ‘저쪽’엔 놋그릇 하나에서 울리는 소리가 있으리라.
그 서예가는 놋그릇 대접이며 놋종지를 방 한가득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수시로 막대기로 핥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위_잉 소리만 났으나, 조금 더 지나니, 그 소리는 좁은 천정에 울렸고, 조금 더 있자니, 아주 맑은소리로 방안을 맴돌다가 나에게로 건너왔다. 소리에서는 향내가 났다. 그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향내.
아, 내 언어가 그런 향내의 항아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깊은 향내의 놋그릇 대접 하나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심연 같은 향내의 종지 하나를 가지고 있다면........그 여자는 중얼거린다.
항아리가 있는 ‘저쪽’은 탈주의 그곳이다.
놋그릇 대접이 있는 ‘저쪽’은 탈주의 그곳이다.
놋종지 하나 있는 ‘저쪽’은 탈주의 그곳이다.
모든 예술이 꿈꾸는 곳, 중심이 아닌 변방, 그러나 중심. 변방인 중심, 그곳.
그곳이 일으키는 교환, 교환 끝의 연결.
ㄱ씨의 낡은 가방이 언덕을 올라온다. 그는 ○○, 의 17대 후손이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낡고 낡은 가방을 든 당신/시간의 때가 전 어두운 이마/ 이가 빠져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계속 떠드는 당신/ ○○, ○○○의 사당 관리인, 자랑스런 조상의 17대손 당신/아들놈 같은 판사, 계속 조용히 하라고 하네.........,
할아버지는 약방이라도 하였지, 그러나 당신 대에 와서 쫄딱 망한 당신/이름도 변변치 않은 당신, 아무개인 아무개 당신, ○○, ○○○ 사당 영정의 먼지나 쓰는 당신,..............<아무개 씨>
그 여자는 오늘도 그를 만나러 간다. 가재가 있는 거기로.
거기, 가재는 물과 세상과의 경계를 흩뜨리며 수족관의 벽을 건너 밖으로 나온다.
가재의 붉은 꼬리 뒤에는 한 웅큼의 물이 끌리고 있다.
가재는 물로 세상을 쓴다.
이미지의 광합성이 일어난다.
그가 오지 않는다. 그 여자는 기다린다. 하디스 사막에 사는, 물 안 먹고도 살 수 있는 바리나무 뿌리로 시간에 엉켜 기다린다. 그곳 모래에 알을 낳는다는 새우처럼 꼬부라져 기다린다, 10년을. 10년의 사막,
허리가 꼬부라진 모래더미 위로 회색 새우 세 마리가 걸어온다.
회색 새우 세 마리는 프라이팬이 끓자, 그 속에 던져진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프라이팬의 국물 속에서 빨갛게 변하는 회색 새우 세 마리. 순간 눈부심, 전율이 온다, 그 변태를.
사막에 一陣狂風(일진광풍)이 일었다. 일진광풍이 일자, 다리를 오므리고 있던 붉은 신호등 속의 그 남자는 다리를 벌이고 걷기 시작했다. 가나안의 땅을 향하여, 꿀이 흐르는 산야를 향하여. 보이지 않는 자물쇠로 존재를 가두고 있던 그 남자는. 아스팔트 속에서 들려 오는 흐느낌 소리를 들으며 그 남자는 길을 건넌다. 일진광풍을 건넌다.
집으로 가고 싶어요. 집으로 가고 싶어요.
아스팔트 틈에 핀 작은 풀꽃 한 송이가 그 남자의 발길에 채여 허리를 흔든다.
아, 작고 사소한 것들의 결코 쓰러지지 않음이여.
작고 사소한 것들의 역사 세움이여.
그 여자는 사막을 건너온 가재의 수염을 만지기 시작한다. 그 너울거리는 안테나를. 통신하기 시작한다.
비밀통신이다. 교환과 연결이 있는, 광합성이 있는 통신. 살의 문턱을 넘어선다.
이제 어둠에 눈이 익었다. 기다림의 그 긴 어둠에도 눈이 익었다. 어둠 속에서, 어둠의 핵 정거장으로 간다. 가재의 수염이 환히 보이기 시작한다. 따꼼, 따꼼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것이구나, 언어여. 소리와 형상을 함께 가지고 있는 언어 그것이여. 변태→포용→커다란 존재의→환희의 수평선을 향하여 달리는 언어, 언제나 탈코드의 생산인 시의 언어들이여.
그 언어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라, 머리 위의 섬광들을 광합성 하라.
4 – 초극사시(超極私詩), 그리고 연애
몇 가지 질문하기로부터 이 글을 시작하기로 하자.
첫째 질문은 그대는 그대의 ‘혼천의 渾天儀’가 그대의 서랍 속에 있는가, 이다.
혼천의는 퇴계 이황의, 우주의 혼천설渾天說에 근거한 우주 모형이다. 대나무로 둥글게 말아, 거기 한지를 입힌, 그래서 비스듬한 그 한지의 구球는 대나무 살이 몇 개 부서진 채로, 누렇게 변색한 한지는 찢어진 채로 매달려 있다.
혼천의는 안동의 한 박물관에 잘 모셔져 있다. 그런데, 정작 그 귀중한 ‘혼천의’를 만든 퇴계의 공부방은 마치 토굴같다. 서너평 남짓한, 창도 없는 방에 아마도 이불을 얹는 듯한 용도로 쓰였을 시렁이 있었을 법한 구석이 한 쪽 귀퉁이에 길게 구분되어 있을 뿐이다. 우선 어두 컴컴하다. 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그렇게 눈부신 혼천의를 만들었다니............
그러나 그걸 보다가 나는 무릎을 친다. 그렇구나. 그렇게 어두 컴컴했으니, 현란한 별자리를 그리도 잘 보았으며, 우주의 모습도 보아냈구나, 라고 자그만 소리로 중얼댄다. 그러고 보니 나의 방은 너무 좋구나. 바깥 풍경이 전부 담겨 들어온다. 그러니....우주가 보이지 않는구나. 별자리도 보이지 않는구나.......,라고
퇴계의 방에는 물론 좋은 책상도 없다. 퇴계 박물관에는 낮고 작은 앉은뱅이책상이 퇴계가 공부하던 책상으로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의자는 상당히 아름답다. 청자로 아름다운 무늬를 새겨넣었다. 그러나 등받이가 없다........
보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등불___‘스탠드’ 같은 것이었을 것이라고 오해한다. 왜 저런 비싼 의자를, 그것도 등받이도 없는 걸, 높이도 맞지 않는 걸 만들었을까. 생각던 끝에 아아~, 그렇구나, 하고 또 무릎을 친다. 등받이가 없으니 조금 잠이 들려고 하면 뒤로 자빠질 것이다. 뒤로 자빠지려는 순간 놀라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잠들려는 자아를 깨우는, 경각의자(警覺倚子), 또는 잠듬을 경계하는 그런 경계의자(警戒倚子).
그러고 보니, 나의 책상은, 아, 나의 의자는 너무 좋다. 나의 그것들은 작가의 흉내를 최대한도로 내어, 크기도 아주 크고 나무 재질도 좋을 뿐 아니라, 색깔도 아름다운 자주빛이다. 긴 직사각형의 책상이 굽어지는 부분에는 작은 책상을 끼어 놓아, 아주 편리할 뿐 아니라, 온갖 책들이 책상 위로 올라와 담길 수도 있다. 거기에 컴퓨터도 놓여 있고, 어떤 서예가가 선물한 만년필 꽂이까지 있다. 그 만년필 꽂이는 오리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그런 형태며 그 오리의 잔등에는 전각을 꽂을 수 있는 네모난 구멍, 만년필을 몇 개나 꽂을 수 있게 동그란 구멍도 뚫려 있다. 의자도 아주 좋은 것이다. 특히 내 의자는 박람회에서 상을 탄 그런 발명품이다. 나는 그 의자를 꿈에 차서 내 방으로 주문, 배달시켰다. 나는 지금 거기 앉아서 아주 편안하게 잔다. 내 아픈 허리에 충분한 휴식을 주며,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아마도 잠에서 깨면 나는 맛있는 커피를 마시리라.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시를 못 쓴다고 엄살을 떨면서 말이다.
또 하나의 질문은 그대의 여름엔 한 철밖에 모르는 매미가 과연 울고 있는가, 이다. 장마가 끝나자, 7년을 땅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매미는 지상으로 나와 열렬하게 울기 시작한다. 해가 뜨는 것과 함께 운다. 겨우 3주 동안 쓰다듬을 연인을 찾기 위해서........그러니까, 저 극성스러운 매미의 울음은 지상에서 매일 던지는 매미의 사랑의 유언이다.
아, 저런 사랑의 유언 같은 노래를 그대는 부르고 있는가. 매미의 땅 밑 방, 퇴계의 토굴 같은 방, 경각의자에 앉아서.
그대에겐 ‘거기’가 있는가. 매미의 그리움. ‘거기’에의 그리움은 그 무엇인가의 속뼈를, 속살을 보이게 한다.
그리움이 보는 속살은, 속뼈는, 속얼굴은 진짜보다 더 크고 선명하다.
초극사시(超極私詩)는 ‘거기’에서 출발한다. 거기엔 잠행(潛行) 이미지가 있다.
그 남자는 연기가 되었는지 오래인데, 그 남자의 이미지는 나를 줄곧 따라다닌다. 그 남자, 팥죽색 바지를 입고 무슨 깃발인가 깃발을 들고 있는 그 남자. 그 남자는 대학 앞의 로타리에서 데모대의 맨 앞에 서서 아직도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개인의 극점에 있는 ‘거기’, 아무도 도달하지 못할,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거기’의 추억’으로부터.
‘거기’의 절망의 희망’으로부터. ‘거기’는 토굴 속에만 들어있는 그 ‘어떤 곳이다. 매미의 큰 나무줄기, 또는 그대의 ‘추억 서랍’ 속에만 들어있는 그 ‘어떤 곳’이다.
시인은 거기서 늘 변추(變追)하라. 변추는 변주(變奏)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곳’의 ‘추억풀기’, ‘꿈풀기’ 변태(變態)를 말하는 동사이다. 시인이여, 거기서 그대의 꿈, 또는 추억을 간절하게 변태시켜라.
그대가 지닌 간절성은 아마도 사시(私詩)의 극점에 서는 극사시(極私詩)를 쓰게 할 것이다.
‘거기’엔 큰 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큰 잎이 출렁이고 있었다. ‘거기’엔 하루가 끝날 즈음이면, 황혼의 그림자 속으로 한 남자가 나타나곤 했다. 그 남자는 나무의 줄기가 둘로 갈라지는 그 지점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기대 서 있곤 하였다. 아니다. 팔을 벌려 나뭇잎을 잡아당기고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내 의자에서 보면, 그 남자의 그림자는 황혼 속에서 나뭇잎과 함께 출렁이고 있었다. 가방도 출렁이고 있었으며, 거기 드리우고 있는 다른 나무의 그림자들도 거뭇거뭇한 빛의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 나무 뒤로 보이는 건물들의 지붕들도 출렁이고 있었으며, 거뭇거뭇한 빛의 웅덩이 속에서 출렁이면서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나의 의자도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그 나뭇잎 속으로, 나뭇잎의 빛 웅덩이 속으로 유리창을 넘어 조금씩 끌려가고 있었다.
더 이상 나뭇잎의 출렁임이 보이지 않을 즈음 우리는 만나곤 하였다.
어둠 속에서 그 남자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곤 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들처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손을 잡곤 하였다. 차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길을 우리는 걸어갔다. 바람이 우리 뒤로 휙 휙 불었다. 길 위에는 자동차라든가 또는 다른 불빛들의 웅덩이에 누운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많았다. 그 그림자들을 지나서 우리는 걸어갔다. 그 그림자들은 황혼 녘의 그림자처럼 그리 순결한 살결들이 아니었으며 여기저기 진창의 점들이 짙게 깔린 그런 창녀의 얼굴 같은 그림자들이었다. 지붕들은 흔들거렸다. 계단들도 흔들거렸다. 걸어가는 내 옆에서 자물쇠 소리들이 철컥거렸다. 온갖 흔들거림 사이로 고단하게 흔들거리는 우리 그림자는 끌려갔다.
나와 그 남자는 또 한 그루의 큰 나무에 몸을 기대곤 했다. 그림자도 흔들림도 없는 그런 나무였다. 허리가 무척 튼실한 그런 나무였다. 어둠 속에서 잎이 무성했다. 어둠의 잎이 밤의 허공에 그림자 지곤 했다.
그 남자는 ‘거기’에서 깃발을 들고 있고 잠들고 있다. 유난히 잘 자던 그 남자, 그 남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의 생전의 이미지보다 더 생생하게 되었다.
현대의 많은 상황시들은 결국 극사시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극사시는 순간적으로 그것을 넘어서서 초극사시超極私詩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극사시가 초극사시가 되는 과정에 변추와 변태는 작용한다. 변추 변태에 의해서 그대의 거기, 꿈 서랍, 추억 서랍 속에 들어 있는 별, 꿈, 추억들은 깊고 특별한 것으로 된다.
객관화된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별, 꿈, 추억이라 할지라도 그대의 그것들은 유난히 특별하다. 왜? 변추 변태의 과정에서 그대만의 은유와 상징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변추 ․ 변태를 위해서는 아마도 사랑이 가장 넓고 깊은 길을 제공하리라. 사랑, 그중에서도 짝사랑의 연애가 그대의 길 위에 있다면 그 은유와 상징의 옷의 빛깔은 더 깊고 눈부시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이는 하루에도 몇 번 씩 아무도 모르는 ‘거기’____ ‘큰나무가 있는 거기’로 잠수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잠수 후 수면으로 떠올라 깊은숨을 별을 향하여 쏘아 올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보자.
시인은 잠수부이며, 늘 잠행潛行 이미지의 더듬이를 가지고 있으며 마치 커다란 고래처럼 밤이면 깊이 깊이 잠수했다가도 아침이면 수면으로 떠 올라 깊은숨을 쉰다. 그 순간, 참았던 숨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순간 그대의 시는 세상으로 언어의 옷을 입고 솟아 나온다. 고래의 숨솟음 그것은, 그대의 은유의 솟음이다. 그대가 유능한 잠수부일수록 그대 숨의 폭발은 클 것이며 그대는 그 큰 숨의 언어 덩어리를 세상에, 저 수면 밖에 쏟아놓을 것이다. 극사시는 순간 초극사시가 된다. 그리고 순간 그대의 주변 하늘에서 떠돌던 숨방울 들은 서로 부딪치며 강렬한 폭발음을 내며 깨어진다. 혹성들이다. 그대의 발이 딛고 있는 역사의 혹성 들이며, 그대의 손이 움켜쥐고 있는 계층의 혹성 들이며, 그대의 속눈썹이 매달려 있는 사회의 혹성 들이다. 그것들은 그대의 잠행 이미지와 부디쳐 깨어진다. 그 폭발력에 사람들은 움찔 움찔 놀란다.
순간 공감(共感)이 일어난다, 울림이 달려온다. 그대의 은유가 읽는 이의 가슴 윗층으로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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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행 이미지→→ 그대 주변 물의 혹성들과 부딪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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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
↓
↓
시와 혹성의 부딪힘 →→울림, 공감↓
극사시 →→ →→ 초극사시
이것은 말하자면 현실과 꿈의 혼융이다.
내용과 형식의 연결합일이다.
정신주의와 육체주의의 사이, 벼랑에 뚫린 큰 길이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혼혈이다.
전체의 판 위에 우뚝 선 개인이다.
1920년대에 이미 누군가(아마 김기림 같은 사람이) 꿈꾼 전체시와 비슷한 그 ‘어떤 것’이다. 1960년대엔 김수영같은 시인이 꿈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합해진 그 어떤 시들, 연극시와도 같은 그 어떤 것.
그것들의 밑바닥엔 사실 ‘극도의 사시’가 놓여 있다. 특히 김수영의 난해하고 실패한, 시들은 바로 그러한 초극사시에 이르지 못한 것들이다.
그 운동 속에서 시인이란 사람은 끊임없이 되새김질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거기’로 내려가 추억과 꿈과 별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라. 추억 서랍 ․ 꿈 서랍은 깊은 곳에 있을수록 좋다. 큰 고래의 폭발적인 숨결일수록 그 시는 최대의 사시가 되어, 그 숨 솟음은 읽는 이에게로 넘어오리라. 그 솟는 숨결은 언어의 척추를 달리는 언어의 순환질(質)을 보여주리라. 언어가 본래 적으로 지닌 순환적인 질료(質料)로서의 성질, 그것은 순간 그것을 읽는 이에게로 넘어와 상상의 성(城)을 쌓으리라. 교환이다.
그러므로 초극사시는 교환이며, 그 최고의 교환은 연시(戀詩)에서 일어나는 교환이다.
거기엔 모든 답이 있다.
꿈이 있으며 ‘꿈 이후’가 있다.
별이 있으며 ‘별 저 너머’가 있다.
그림자가 있으며 본질이 있다.
전쟁과 자비가 있다.
나와 너가 있다.
우리는 존재한다.
연애 속에서, 연애의 완성이 아닌, 그 끊임없는 지속 속에서
이때 발성되는 그대의 노래는 ‘리얼-모더니즘’이 되리라. 혼자 말하는 시는 둘이 말하는 시가 되리라.
시인이여 아직 말이 되지 않은, 그 말을 찾아라. 아직 향기가 되지 않은 그, 향기 찾기. 아직 추억이 못된 그 추억 찾기. 미처 꿈이 못된 꿈 찾기, 꿈속의 별 찾기. 그러나 결코 작위하지 말라. ‘폭발적인 숨 솟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순환과 교환이 이루어지게 하라.
그러니, 다시 말하자. 시인들이여 아직 향기 없는, 아직 형체 없는 연애를 하라. 형체 없는 연애가 초극사를 실현하게 하라. 거기 꽃의 뿌리가 있으며 개화가 함께 있게 하라. 황혼 녘의 그림자와 아침의 빛이 함께 있게 하라. 오전과 오후가 함께 있게 하라. 자정과 정오가 함께 있게 하라. 물과 불이 함께 있게 하라.
그건 결국 모든 시의 이상(理想)이 분명한 정신의 ‘치료’에 도달하게 하리라. 시라는 존재는 늘 ‘전쟁’ 옆에서도 ‘거기’를 만들고 기다리리라.
그러기에 치유의 시는 모든 쫒겨난 자들의 노래가 된다.
치유의 시인 초극사시는 쫒겨난 자들의 집의 시가 된다.
치유의 시인 초극사시는 집이 들고 있는 창문의 시가 된다.
치유의 시인 초극사시는 모든 창문이 높이 치켜들고 있는 등불의 시가 된다.
등불을 켜고 ‘거기’를 늘 되새김질하라.
그리하여 가능한 한 모든 어머니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라. 가능한 한 모든 아버지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라.
가능한 한 모든 어머니가 되어라. 가능한 한 모든 아버지가 되어라.
가능한 한 모든 어머니의 아들이 되어라.
가능한 한 모든 아버지의 딸이 되어라.
시가 역사이게 하여라. 별이 누운 강이며 노래이게, 소리이게 하여라.
5 -흰 낙타의 날개를 향하여, 그리고 연가를 향하여 쓴다는 것은 끊임없는 절단이다. 사유의 절단, 시간의 절단, 또는 사유의 절단과 그 변주, 시간의 절단과 그 변주. 쓰는 시간, 그것은 끊임없는 절단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절단한 다음 통합하는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절단의 시간은 아름답다. 절단의 시간은 눈부시다. 통합을 꿈꾸는 절단의 시간은 찬란하다.
사유의 절단을 꿈꾸며, 시간의 절단을 꿈꾸며 안과 밖의 절단을 꿈꾸는 그 시간은. 밖의 그림자들을 안으로 가지고 오는 그 시간은.
거기선 실은 시계 속의 시간은 가지 않는다. 희망 끝의 절망도 없으며 절망 끝의 희망도 없다.
절단이 있는 그 시간은 완전히 격리된 시간이며, 소외된 시간이다. 꿈만이 있는 시간이다.
꿈이 변주되는 시간이다. 꿈에 의한 소외는 절단을 품고 끝없이 변주를 시험한다. 끊임없이 시도하라. 시간의 절단과 그 변주를. 절단의 맨 앞에는 경험의 절단과 그 변주가 놓인다.
그것은 수천인인 <그대>와 수천인인 <내>가 시도하는 것이다. 지층의 절단이며 역사의 절단이다. 그 절단면에는 늘 피가 흥건하다. 그 피는 흰색이다. 거기 부는 바람도 흰 바람.
아직 온전한 몸뚱이가 못된 수천의 이미지가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목, 그림자, 또는 팔이 잘린 이미지들. 다리가 잘린 이미지들. 이미지의 절단면들은 마치 잘라진 통나무들처럼 현실과 꿈의 밭을 돌아다닌다. 돌아다니며 샘을 솟아나게 한다. 이미지의 원 샘(泉)이다.
시인에게 포획되기 위하여, 시인에게 포획되어 통합될 꿈을 기다리면서.
거기서 언어의 물길을 솟아나게 하라. 그 물길이 소리길이 되어 달리는 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라.
온밤을 기다려라. 온 해를 기다려라. 일생을 기다려라. 가난한 우리가 가진 것은 저 밤과 아침
뿐이다. 일 년의 첫 아침과 끝 밤뿐이다. 임종의 한마디를 기다리는 일생뿐이다.
그대의 한 편의 시는 그날 그 방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것들의 절단과 격리와 소외가 있는, 그러나 그것들로부터 흰 피가 솟구치며 언어의 원 샘이 솟아나는 그곳에서, 절단된 이미지들과 절단된 추억들과 절단된 경험의 그림자들이 있는 그 곳, 흰 바람이 부는 그곳, 통합의 그 방에서.
1900년대의 시인이 되어버린 엘리옷의 ‘프루푸록의 연가’ 속에는 수많은 여자들의 팔이, 한 잔의 커피잔 속에 굴러다닌다.
자 우리 가볼까, 당신과 나와
수술대 위에 누운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을 배경으로 사지를 뻗고 있는 지금;
우리 가볼까, 한산한 어느 거리,
.............(중략).............................
방 안에는 여인들이 오고 간다.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면서.
정말이지 시간은 있으리라
“한번 해볼까?”“한번 해볼까?”하고 생각할.
..............(중략)..........................
왜냐면 나는 그들을 알고 있기에, 그녀들을 다 알고 있기에........
저녁과 아침과 오후를 알고 있기에,
나는 커피스푼으로 내 생애를 되질해 버렸네:
T.S. 엘리어트: ‘J.앨프리드 프루푸록의 戀歌(연가)’ 중에서
키 낮은 풀들이 발꿈치를 들고 서 있는 그곳의 들판에서 엘리어트의 ‘커피 스푼’은 흰 바람이
부는 엘리옷의 방으로 들어와 “인생을 되질하는” 커피 스푼이 된다.
김수영의 절단 속에도 그 ‘커피잔’은 들어있다. 아침의 이슬과 저녁의 그림자와 함께 그의 커피잔, 낡은 런닝샤쓰는 꽃으로 변형되어 들어 있다.
꽃을 주세요. 우리의 苦惱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 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 가는 소란을
............(중략).............................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偶然우연을 위해서
김수영 : ‘꽃잎 (二)’ 중에서
들판을 지난 거기엔 ‘그곳’이 들어있다. 절단된, 눈부신 김수영의 들판이. ‘거룩한 偶然(우연)’인.
어둠 속이기에, 은빛 등불이 있는 김수영의 방 창틀이. 쇠창살이 있고 그 쇠창살에 김수영의 이미지들이 ‘偶然’처럼 갇혀 있는 곳. 그 이미지들이 흘러나와 흰 바람을 비추는, 눈부신 은빛 등불이 있는 ‘그곳’. 거기서 시인인 그대는 절단된 면들을 끊임없이 접속하라. 그대의 포획망
속에 그 절단된 면들을 모아 통합을 이루라. 절단은 통합된다. 절단되어야 통합된다.
그리하여 거기 견고한 한 채의 집을 지어라. 통합의 등불을 켜라. 아주 아름다운 통합의 등불.
그러면서 끊임없이 저항하라, 시간의 바람, 시간의 물결에. 저항과 통합의 등불은 흰 바람을 만지며 쇠창살같은 등불의 갓을 새어나와 피흘리며 한 구석에 떨고 있는 이미지들을 통합하리라.
등불은 숨어 있어야 그 빛이 더욱 빛나는 법. 등불 갓이 없는 不具의 등불은 슬프다. 그런 등불은 통합의 방 창밖으로 과감히 버리라. 알몸으로 비추려 드는 알전구는 더욱 슬프다. 빛은 알몸이 아니어야 한다. 빛은 많은 덮개를 거느려야 한다. 덮개를 많이 거느릴수록, 깊이깊이 숨어 있을 수 있을수록, 그래서 그 덮개의 어둠을 뚫고 빛의 살(肉)이 삐져나올 수 있을수록 거기 지어진 집은 너의 눈을 간절함으로 가득 차게 할 것이다. 은빛 등불이 켜지는 순간 그대의 가슴뼈는 행복의 눈물이 가득 드리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덧문을 닫는 순간, 무지개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드리워졌다가 소리도 없이 사라지듯이 그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질 수 있을수록, 사라졌으나 모든 마음에 희뿌연 빛의 베일을 던지며 남아 있을 수 있을수록 그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눈부시리라.
그 계단을 우리는 보편의 계단이라고 부른다. 이미지들이 새옷을 입고, 절단된 다리들을 언어의 몸에 붙이고 흰 바람을 맞으며 걷는 계단, 네가 올라가고 내가 내려가는 계단, 어깨를 스치며 오르고 내리며, 은빛 등불을 바라보는 계단.
거기, 그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일어서는 그 보편화의 눈을 만져라. 자주 쓰다듬어라.
마스카라의 속눈썹이 너무 긴가. 앞을 바라보아야 하는 그대의 눈이 그런 화장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돗수가 잘 맞지 않는 안경이, 혹은 검은 썬그라스가 그대의 눈을 가려 계단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뱀처럼 속눈썹이 없는 편이 낫다.
속눈썹이 없는 뱀은 시력도 없다. 뱀은 숲바닥 또는 모래밭을 빠른 속도로 기며, 단지 사냥감의 전자파를 감지할 뿐이다. 우리 모두 그 뱀처럼 아무것도 못 보면서 그냥, 가끔 감지할 뿐이면서, 감히 본다고 말하는 것인가.
타조 한 마리가 껑충거리며 그 보편화의 들판을 뛰어오른다.
타조의 시력은 5km 반경이 넘는다.
그것들은 긴 속눈썹으로 늘 모래를 만진다. 키 큰 하늘을 쓰다듬는다. 키 큰 하늘과 수천 번 눈길을 교환한다. 타조 곁에서 역시 속눈썹이 긴, 흰 낙타도 둥근 무릎을 꿇고, 그 질긴 입술로 가시투성이 나뭇잎과 긴 바람 둘러쓴 모래를 핥는다. 그렇게 공손히 무릎을 꿇고 모래를 쓰다듬으며 보편의 계단을 오르라. 키 큰 하늘을 쓰다듬으라. 하늘과 끊임없이 눈길을 교환하며 지평선 따위는 훌쩍훌쩍 넘어버리는 날개의 꿈을 꾸라.
아니다. 차라리 타조가 되어라. 눈이 뇌의 크기만 한, 그래서 그렇게 멀리서도 은빛 등불을 볼 수 있는, 은빛 등불 앞을 헤매는 모든 이미지의 피 흐르는 몸들을 찾을 수 있는 타조가 되어라.
사막의 끝에는 바다가 있다. 거기서 흰 낙타들은 날개를 펴고 달린다. 단봉의 흰 낙타들은 원래 유목민들이 타고 지평선을 훌쩍 넘으며 달렸던 것이었다.
사막의 끝 바다 위 물결도 은빛이다. 그 은빛 흔들리는 물결 속에서 시인인 <그대>와 언제나 시인 지망생인 <나>는 아마도 날개를 숨기고 수천 번 만났으리라. 그대와 나는 수천 번 한 구름을 열었으리라. 그대와 나는 수천 번 한 바람을 열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둘의 개체이나, 처음엔 하나였으리라. 그대는 나의 손이었으며 그대는 나의 심장이었으리라. 그대는 나의 속눈썹이었으리라.
그렇게 그대는 나의 이미지였으리라. 나의 절단이었으리라. 그대는 나의 양수였으며, 그대는 나의 자궁이었으며, 한 풀이었으리라. 거기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하나였으리라. 한 풀이었으리라.
뿌리는 흙을 헤치며 나아가고, 잎은 바람에 날렸으리라.
그러다 그대가 나와 헤어지던 날, 우리가 접속을 끊어버리고 절단되던 날, 그날 그대의 포획망 속에서 그대의 이미지는 하나로 모여 등불을 켜며 시는 시작되었으리라. 거기서 시는 보편의 속눈썹이 되었으리라. 보편의 속눈썹이 되어 나의 눈동자를 만지고 그리고 그대의 눈동자를 만졌으리라, 다시 말하자, 우리는 원래 하나였으리라.
시인들이여, 그대의 그림자를 거기 그 방 보편의 계단 끝 창틀에 놓아라. 그 방 창틀에서 통합을 바라보아라.
그것이 모든 시간의 시작이다. 우선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 무엇이 그대의 품으로 들어오겠는가.
저 흰 바람이 어찌 그대의 A4용지 위에 앉겠는가. 시간의 첫마디엔 모든 것을 시간이란 친구가 바라보았었다.
일단 닫힌 그대의 창 그 속 틀에 앉아서 은빛 등불의 심지를 세우며 바라보아라. 소처럼 본 것들을 우물우물 씹어라. 한 밤내 우물우물 씹어라. 일 년 내 우물우물 씹어라. 일생을 우물우물 씹어라.
우물거리며 되새김질을 하여라. 아, 낙타도 늘 그 질긴 입술의 입을 우물거린다. 그대의 되새김질 위에서 그대가 쓴 이미지는 살아나리니.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랑이 ‘바라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랑은 바라보는 짝사랑이다. 진실한 사랑의 속모습은, 무릎 꿇은 낙타의 분홍 무릎이다.
그런 겸손함이다. 그런 침묵의 사막이다. 사막의 지평선이다.
그 소쩍새를 기억하여라. 그 동물원에 갔을 때 소쩍새라는 표지판만 보이고 새는 보이지 않았다. 겨우겨우 찾아냈을 때 그것은 우리 맨 끝 추녀 밑 같은 곳에 눈을 크게 뜨고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거기서 보고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가는 모습을, 시간이 땅을 핥고 지나가는 모습을.
흰 바람이 사랑을 만지고 지나가는 모습을.
그렇게 바라보아라. 리얼리즘도 거기 있다. 행동만 하는 곳에 시의 리얼리즘이 살 수는 없다. 거기 이미지는 가지고 솟아오를 새가 없다. 행동을 절단하고 통합을 꿈꾸는 곳에, 통합이 사랑이 되는 곳에,
사랑이 짝사랑인 곳에, 그리하여 사랑이 연애인 곳에 그대의 리얼리즘은 있다. 연애는 그대의 사랑을 침묵 속으로 끌고 가 소리길이며 이미지의 물길인 언어에의 사랑으로 만들리라. 아, 사랑이 없는 리얼리즘을 기억할 수 있는가. 연애가 없는 리얼리즘을 기억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사랑 속에서 모든 리얼리즘은 모더니즘이다. 모던-리얼리즘, 리얼-모더니즘이다.
절단의 통합이 시작되면 시의 꿈의 들판은 키 낮은 풀들로 가득차 저쪽 편의 하늘을 보여준다.
무지개가 그 하늘에서 팔처럼 드리우기도 한다.
지난여름 몽고에 갔을 때 나는 그 하늘의 팔을 보았다.
누구인가 심장을 던지듯이 던져 놓은 돌무더기가 가득 쌓여 있는 ‘어워’를 세 바퀴 돌며 소원을 빈 다음 절하고 마악 그곳을 떠나려는 참이었다.
하늘의 팔이 나타났다. 하늘의 팔이 하늘과 키 낮은 풀들의 땅을 통합하고 있었다. 하늘의 팔이 사랑처럼 솟아오르던 모습을, 나는 한참동안 등 뒤를 돌아보고 돌아보고 하였다.
그 하늘의 팔, 통합의 팔은 한참이나 나를 따라왔다.
죽도록 고독하여라. 고독이 너의 밥이 되게 하고, 고독이 너의 살이 되게 하여라. 너의 주머니엔 고독이 가득 차게 하여라. 너는 고독하다고 외치지만, 들여다보면 죽도록 고독하지 않다. 너에게는 너의 책상이 아마도 있을 것이고, 너의 연필이 있을 것이고...............
아침이면 쳐다보는 너의 하늘도 있을 것이다.
고독은 시간처럼 또는 역사처럼 하나가 둘이 되는 것이다. 또는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한 편의 시는 그 둘이 쓰는 것이다. 결코 혼자 쓰는 게 아니다. 절단된 둘이, 절단된 두 사랑이 쓰는 것이다.
시는 戀歌(연가)이다. 절단된 둘을 기다리는 하나의 연가이다. 하나를 기다리는 절단된 둘의 연가이다.
어떤 화가의 말을 조금 차용하자. 여기 찢어지게 가난한 한 화가가 있다. 그 화가는 소리친다.
그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그림의 욕구가 일어날 때에 진짜 화가가 되리라, 하고. 그는 그 순간, 이미지들이 전부 사라지는 그 순간, 그리고 싶은 것이다. 참을 수 없이 그 절단된 부분들을 이어 붙이고 싶은 것이다.
이 절단된 삶의 쓰레기들을 전부 비워내고 그런 다음에도 쓰고 싶은 것, 그것이 있다면........
이미지의 팔다리들이 돌아다니고 사방에 수북할 때 그대여 그때 시인이 되어라. 통합의 시인이 되어라. 두 개의 사랑을 하나의 계단 위에서 불켜게 하는 그런 시인이 되어라
과나코가 되어라. 태평양 연안가, 보이지 않는 안데스산맥 끝자락 안개 모래바람 속에서 서 있는 키 큰 선인장 심장 가에 맺힌 흰 물만 먹고 생존하는 과나코가 되어라. 언제나 선량한 눈의 과나코가 되어라. 언제나 먼 태평양 바닷물 소리가 들리는 과나코의 귀가 되어라.
시인들이여, 거기 그대의 그림자를 놓아라. 거기서 통합을 바라보아라.
우리의 일상성 속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다니던 수많은 이미지의 절단면들이 그 들판에 와서 순간 앉으리라.
절단은 통합된다. 꼭 기억하여라. 절단되어야 통합됨을. 절단에는 절단의 사랑이 있음을. 절단의 연애가 있음을. 짝사랑의 통곡이 있음을. 그것이 보편의 계단을 걸으며 그대에게 시를 주어, 그대의 시는 완성되리라.
사물이 절단된 이미지 뒤로 은둔하는 순간, 그 등불을 향하여 오르라. 거기 이미지는 보편의 눈을 켜고 또는 보편의 팔을 계단 밑으로 드리우고, 거기 서 있으리라. 그대의 쓰는 곳에서 그 등불을 향하여 계단을 만들라. 은둔과 포기가 한 편의 시가 됨을 이해하여라.
그대가 시인이려면 그 집에서 통곡하여라. 어둠이 없으면 안 되는 은빛 등불 앞에서 은빛 사랑의 등불 앞에서.
실패하는 연애를 하여라. 실패하는 짝사랑이면 더욱 괜찮다.____하긴 역설이다. 그것이 생명
출렁이는, 생명에 얹혀 은빛 언어 출렁이는 은해가 되게 하여라.
역사의 피눈물이 되어라. 시간의 오줌이 되어도 좋다. 아무튼 첫마디가 되어라, 첫마디의 외마디가 되어라. 그리고, 그것들을 그대의 쓰는 시간 속에서 조용히 한 곳에 앉게 하여라.
무지개의 팔이 드리워지게 하여라. 흰 낙타의 날개가 거기 펄럭이게 하여라. 흰 낙타의 날개가 켠 등불, 거기 출렁이게 하여라.
출렁이는 바다 위 거기, 시인인 그대는 매일 알바트로스가 되어라. 보편성의 눈을 찾는 알바트로스, 알바트로스의 지나치게 커다란, 그래서 지상에선 불편한 날개가 되어라. 늘 저항하여라.
연가를 향하여
6 - 어둠의 유혹
(1)
새벽에 일어난다. 아직 캄캄하다. 더듬더듬 마루로 나간다. 무엇인가, 발에 채인다.
어둠 속에 똑바로 놓는다. 무엇이 무릎을 건들이며 넘어질려고 한다.
아, 키큰 난 화분을 등받이 없는 의자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아유, 큰일 날 뻔했군, 놀라 똑바로 세운다. 무엇인가 넘어진다.
어제밤에 마시다 만 채로 둔 커피잔이다.
쌓아놓은 것, 무엇인가 또 넘어지려고.......아, 참, 손으로 더듬더듬 일으킨다.
심호흡을 하고 조금 가만히 있는다. 점점 어둠이 밝아져 온다. 스위치가 보인다.
그 앞에 놓아두었던 책무더기도 어슴프레 보이기 시작한다.
아까 발에 차인 것이 그것이었구나, 어둠의 척추가 만져지는 것 같다.
어둠의 척추는 내 앞에 우뚝 서서 뵈지 않는 공중을 휘감고 있다.
궁륭이다. 어둠 속에선 의외로 많은 것이 보인다. 거기 가끔 별이 있을 것 같은.
궁륭의 별은 의외로 많은 것을 내 앞으로 데리고 온다. 어둠은 밝다.
어둠의 연장성(延長性)이며, 선명성이다.
모든 어둠은 연장되려는, 선명해지려는, 그래서 확장되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아니다.
그 어둠을 보는 시선(視線)이 연장성이며 선명성, 확장성을 지닌 것이다.
그러니까 위의 어구는 이렇게 수정되어 말해져야 한다.
모든 시선은 연장성, 선명성, 확장성을 지니고 있다,고. 왜 이런 퀴즈놀이가 있지 않은가.
어떤 장면을 순간적으로 보여주고 나서,그 장면에 있던 사물을 가능한 한 많이 맞추는 것이다.
그런 퀴즈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우리의 시선의 연장성 때문이며 선명성, 확장성 때문이다.
모든 시선은 긴 빛의 꼬리를 끌고 있다고나 할까. 혜성의 빛꼬리 같은 빛의 꼬리를.
모든 시선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의 저변엔 이 연장성, 선명성, 확장성이 있는 것이며 이미지의 증식이 일어남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연장성은 선명성, 확장성과 함께 연장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한 공격성도 지니고 있다. 시선의 공격성은 시선이 원치 않는 영상은 지워버린다.
어둠 속에선 잘 분별할 수 없는 소리도 들려 온다. 슬슬 밝는 어둠 속으로 무엇인가,
오는 듯한 저 소리. 저건 살이 스치는 소리인가. 어둠의 살이 스치는 소리?
무엇인가 저 밖의 어둠 앞으로 오고 있는 듯한 소리, '지나온 미래’의 꿈틀거리는 소리?
그러고 보니 너구나. 지금 네가 오고 있구나. 네가 지금 문밖에 있구나.
너는 지금 태아가 되어 옹크리고 있구나.
너는 지금 손을 내밀 준비가 다 되어 손을 가슴에 대고 있다.
저 문 안에서는___너로서는 저 문밖이겠지.____
이리 당황, 저리 당황 하며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발소리가 들린다.
너를 맞기 위해 시간의 꽃병을 장식하고, 미래의 화분에 비료를 주며 역사의 대청소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네가 오는 길을 깨끗이 넓게 하기 위함이다.
꽃도 핀다. 마른 듯이 보이던 가지에서 ‘지나온 미래‘의, 시간의 새싹이 난다.
햇빛이 정말 따스해진다.
네가 있는 곳은 정말 어둠인데, 네가 있는 문밖은 정말 추운데........
모든 계단들이 네가 있는 곳을 향하여 일제히 정렬한다. 네가 혹 여기 도달하지 못할까 봐 모든 자물쇠들은 열쇠들을 들여다본다. 아 글쎄, 새 한 마리도 만리길을 열며 달려온다,
꽃 한 송이가 천리길을 안내한다.
추억들이 일제히 부르짖으며 미래가 된다. 저 물 깊은 곳을 물고기 한 마리,
그 은빛 지느러미가 고함치며 안내하는구나,
옆
방에서
출생하려는
당신은 누군가
내 방까지 요란하게
자궁을 벌리고서 저기
굴뚝새 뼈처럼 얇은 벽 너머
암흑이 정령(精靈)하고 관계한 아들을
낳고 있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은?
시간의 연소(燃燒)와 그 회전(回傳)과 또한
남자 가슴 자국과는 무관한
탄생의 피 어린 방안에
호올로 어둠 외에는
세례로써 축복을
하는 이 없는
너 거친
아이
딜런 토오마스/ <환상(幻想)과 기도>
너는 지금 빛에 매달려 있구나, 빛이다. 그러면서 현재이다. 현재의 과거이며 미래이다.
암흑의 빛이다. 너의 출생은 암흑의 빛이다. 암흑의 빛 곁에 있는 어둠은 너의 방에서 빛난다.
어둠은 지금 빛난다.
아, 너 거친 아이여. 아직 축복을 하는 이 없는, 아직 무정형인 아이여, 무형식인, 꼼틀거리는 세포인 너. 시선의 연장성은 시선이 지닌 또 하나의 세포인 공격성으로 우리의 시야를 완성시킨다.
하나의 ‘풍경’이 완성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 완성되지 못한 시선에 형식을 주는, 어둠으로부터 태아를 모셔내고 거기에 빛을 주는, 어둠의 세포를 키우는 자궁이며, 정령과 관계하는, 그리하여 완성의 풍경 하나를 이 세상에 던지는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풍경을 A4용지 위에, 또는 원고지 위에 만든다.
그의 가슴은 성능 좋은 스크린이 된다.
첨엔 윤곽만 보이다가 스크린 위에서 환히 보이는 이미지들, 이미지들의 질서.
시선을 유예시키면서 연속적 변주를 가능하게 하는 시인의, 모든 여성(女性)을 지닌 특별한 능력.
언어의 들끓음을 만들어내면서, 이미지를 보게 하는, 태아의 어둠의 방에서 아름다운 언어 한 줌을 가지고 나오는, 어둠을 빛이게 하는, 새 한 마리가 가리키는 만리길을 떠날 수 있게 하는 시인의, 시간주(時間主)적인 능력. 삶의 길에서 우리는 가끔 시선의 유예를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한 다음, 우리는 시선의 연장과 선명과 확장의 풍경을 얻는 것이다.
(2)
묶는 자와 묶이는 자, 시인인 그대여 그대는 늘 묶는 자가 되려고만 하는가.
묶는 자여야 한다고만 생각하는가? 아니다, 시를 쓰려는 자는 가끔 묶이는 자여야 한다,
속박하는 자가 아니라, 속박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필연의 시선의 유예이다.
그것을 벗어나려고 마라. 벗어나는 자가 아니라, 벗어나지 못하는 자가 시인인 것을.
시인은 언어를 묶는 자가 아니다. 언어에 묶이는 자이다. 묶이려고 하여라.
언어에 목을 내밀어라. 언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것이 아니다.
자유자재의 언어가 들리는 자이다. 언어는 그 스크린 위에서 저희들끼리 논다.
언어들이 저희들 멋대로 놀지 않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다시 한번 외쳐보자.
시인은 결코 언어를 묶는 자가 아니라, 언어에 묶이는 자이다.
포획자이다. 포획당하는 자같이 보이는,___그것이 시인의 이상이어야 함을.
포획당하는 자가 포획한 시는 확대될 수밖에 없다. 선명할 수밖에 없다.
시는 확대의, 선명의 이미지들이 잔뜩 팽창되어 누워있는 위험한 공장들이 된다.
하긴 요즘엔 부분 확대만을 아주 잘하는 공장들도 많다. 부분 확대만을 함으로써 확대의 영상을
시선의 연장성, 선명성 속에 더 앉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연장된 영상은 많은 무정형의 시선들,
아직 태아인 시선들이 보려고 할 것이다. 공장문을 열어라,
벌써 폐업해 버렸는가. 부분확대는 단지 언어에의 꿈만으로 올 때도 있다. 그것을 이미지로,
상황을 지닌 이미지의 풍경으로 확대하라.
꿈을 인화시키는 공장을 가동시키라.
꿈을 인화시킬 줄 모르는 이들, 꿈의 인화를 부끄러워하는 이들, 불안해하는 이들, 결코 오늘의 시인이 될 수 없다.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라, 침묵하지 않으면서 침묵하기. 노래하지 않으면서 노래하기,
여성이 아니면서 여성이기, 장식 없이 장식하여라. 보지 않고 보기, 듣지 않고 듣기,
새 한 마리가 만리길을 끌고 가는 것이 보이기, 만리길이 필연이 되기.
만리 하늘이 그 벼랑 앞에서는 필연이 되기. 만리 하늘이 필연의 긍정이 되기.
시선의 연장성, 선명성들이 있는 언어는 필연성의 그 영상 앞에서만 확장될 것이다.
마치 네 앞에 꿇어 앉은 낙타 한 마리가 천천히 일어나듯이, 온 사막을 지고 일어서서 그 오아시스들이 확장되듯이.
우연이 발생한다. 김수영은 이를 ‘거룩한 우연’이라고 하였다.
니체는 ‘거룩한 긍정’이라고 하였다. ‘거룩한 우연’이 너의 손끝에서 일어설 때,
낙타가 안고 있는 구름처럼 낯익은 구름일 때 너의 상상력은 더욱 확대되리라.
너의 상상력뿐이 아니다. 그의 상상력도 확대되리라. 상상력의 확장은 시를 구하리라.
해가 보이지 않을 때 해를 보이게 하리라. 모든 결핍은 충만을 잡아당기리라. 출렁이리라.
이것이 결핍이 필연성이며 ‘우연-이즘’은 바로 이것이다.
모든 상상력의 밑힘이다.
노래가 들리지 않을 때 귀를 여는, 잘 보이지 않는 것에 현미경을 갖다 대는 밑힘이다.
시인이여, 너의 현미의 렌즈를 저 꿈틀거리는 아침 하늘, 또는 저녁 하늘에 갖다 대어라.
그 하늘들엔 모든 것이 있다. 별이 나타날 구만리도 있으며, 자궁들의 내벽의 어느 한구석도 있다.
(3)
밑힘은 다시 필연의 결핍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시가 되어 너의 원고지 위에 앉는다. 순환이다.
거룩한 우연의 순환이며, 그 필연의 언어들은 결핍이 만든, ‘객관화가 이루어진 언어들’이다.
추상만이거나, 감상만의 언어가 아니다. 관념만의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메시지이며, 의미이며 고함이다.
‘아무개 씨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걸개의 언어들이다.
개인은 우연이지만, 너의 자궁 안에서 개인은 필연의 의미가 된다.
아무리 피맺힌 얼굴을 해도 그대는 우연의 기호이지만, 그러나 한 편의 시의 언어는 필연이 된다.
필연의 추억이 되어 종내는 필연의 역사로 다른 자궁에 앉는다.
☎ 어느 날의 풍경 하나
낡고 낡은 가방을 든 당신, 시간의 때가 전 어두운 이마, 이가 빠져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계속 떠드는 당신, 고운 최치원의 사당 관리인, 자랑스런 조상의 32대손 당신~ ~ ~
이제는 보청기를 하고 세상 소리를 듣는 당신, 최치원의 얼굴도 모르는, 자랑스런 고운 최치원의 48대손 최 아무개 씨
<졸시, “아무개씨” 중에서>
☎ 어느 날의 풍경 또 하나
도시의 지하 네거리에서 <갈아타는 곳>을 물으니, 메모 쪽지 한 장을 준다.
그런데 그 쪽지에는 누구인가의 검은 굴림글씨의 메모가 한 구석에 이미 있다.
메모의 제목은 <검정색 양복>이다. 5호선→2호선→3호선이라고도, 써 있다.
김포공항→영등포구청→교대라고도 써 있다.
우연히 그 뒤를 보니 작은 인쇄체 필기체의 다른 글씨가 ‘해안 경비대와 협조 하에 마약거래를 단속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면 이 쪽지의 주인이었던 사람은 몇 명인가, 누가 검정색 양복을 입고 있었나?,
아니 누가 검정색 양복을 세탁소에서 찾는 길이었나?,
아니 누가 검정색 양복을 사야 한 길이었나?,
그 사람은 검정색 양복을 입은 그 사람은 마침 어디로 가던 길이었나?,
아니 그 사람이 의심스러운 사람이었나?,
아니 거기 살던 그 사람이 검정색 양복을 입고 있었나?,
아니 거기 살던 그 사람이 검정색 양복으로 흰 양복을 염색해 달라고 하였었나?,
아마도 내가 밥먹는 사이에, 강의하는 사이에, 꿈꾸는 사이에,
아니 아니, 그 사람은 늙은 사람이었나,
아니 그런 것은 소용없어...필요한 것은 검정색 양복, 다만 검정색,
우리를 다른 이와 변별시켜 주는 것은 색깔 오 색깔, 자꾸 오해하려고 하는군,
검정색이 아니라 흰색이라고.........,
아니 거기 검정색 양복을 입은 사람이 숨 쉬고 있었나?,
몇 사람이 숨 쉬고 있었나, 거기 쪽지가 있던 방에는. 누가, 누구인가, 그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다만 검은색 양복을 입은 누구에 불과한가, 혹은 회색 양복을 입은 누구에 불과한가.
그 우연 속으로 너는 자꾸 검정색 양복을 입고 온다.
필연의 확대경을 들고, 가끔 암호의 극사시(極私詩)를 중얼거리며,
그런데 오늘의 시인은 그 암호를 이해할 수 있는 암호로 만드는 것일 것이다.
‘이해의 암호’는 시선의 연장이며 확대이다. 필연의 확대이다.
시선은 필연이 된다. 필연의 언어의 옷을 입을 것이다.
산과 골짜기에 깔린 암흑은 어둠이라기 보다는 숫제 검은 옥 같았다.
그 속에 담긴 고요가 얼마나 클 것인가 하고 마음이 끌렸다.
거기에 안기는 안도감이 나를 유혹하는 것이었다. 달빛은 더욱 아름다웠고,
산속은 더욱 암흑이 짙은 것이었다. 암흑은 빛나고 있었다.
<김병규. 문학비___그의 수필 어둠의 유혹 중에서>
언어도 우연의 산물이다.
우연의 언어는 그러나 한 편의 시 속에서 민족이 되며, 19세기, 혹은 21세기가 되며, 그것들의 필연이 된다.
그렇게 해서 시를 읽는 이와 쓰는 이는 연장된 시선을 ‘공동소유’하게 된다.
쓰는 이와 읽는 이는 이 ‘공동소유’의 시선 속에서 연대한다. 연대의 순환이며 순환의 다시 연대이다.
한 편의 시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시는 경험의 가장 순수한 순환이 가능한, 연대의 풍경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홀로 시작되지만 함께 완성된다.
시가 시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의 순환성과 연대성, 그리고 공동소유성에 있다.
그것이 결코 어느 한 독자에의 영합의 언어가 될 수 없다.
그 순환성은 모든 좋은 시로 하여금 초극사시(超極私詩)의 치유에 도달하게 한다.
치유는 모든 시의 궁극의 목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의 처음의 시작은 자기 치유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므로.
문제는 자기 치유가 자기 치유로 끝나지 않고, 시선의 연장 또는 확장에 의해서 확대,
순환된다는 것이며 하나의 풍경,
하나의 상황을 완성시키며 존재를 연대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한번 말해보자.
어둠의 유혹을 통해서만이 밝음은 시작된다.
죽음을 통해 출생이 시작되듯이, 모든 여성적인 것이 모든 구원의 시작이듯이,
이 세상은 끊임없는 순환이듯이. 순환의 자궁들은 역사 속에 살아있다.
부정은 긍정을 위한 부정일 뿐, 어둠은 밝음을 위한 어둠이다.
따라서 어둠의 노래는 밝음의 여성성의 노래이다.
어둠의 형식은 밝음을 향한 여성성의 형식이다.
한 편의 시는 어둠 속에 있는 태아에게 문을 열어주며,
꽃다발을 바치는 언어의 제사이다.
7 – 애인
애인은 아직 오지 않았다.
어둠의 그림자들이 달려와 엎드린다. 벌판이 달려와 모로 눕는다.
저기 숨어 있는 수평선이 달려와 푸욱 고개를 숙인다.
그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목소리 하나.
사랑하라, 여기를.
아이가 빽빽 우는 여기를. 잠이 안오는 여기를.
신호등 속의 남자 하나가 붉어진 근육을 흔들며, 붉어진 눈을 부릅뜨고 길을 가려는 나를 막아서는
여기를 철컥철컥 쇗대들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는 여기를
당신의 존재가 수인번호 같은 번호의 주민등록증 한 장이 되어 누워 있는 여기를
수인 번호같은 번호 달린 문이 20층 허공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여기를
시시때때로 우드득 뼈 펴지는 소리 들리는 여기를
문제는 여기다. 여기의 상징이며 여기를 살만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적 상상력밖에 없다.
현재적 상상력은 끝없는 미래이다. 끝없는 현재의 미래이다. 또는 미래의 지연(遲延)____.
기억하라, 미래의 지연, 그 속에서 미래를 가장 미래답게 끌고 가는 것이 시라는 벽속-공간임을.
그리하여 종말의 끊임없는 지연을 보여주는 곳이 시라는 벽속-공간에서 보내는 편지임을 기억하라.
당신의 시는 그 편지여야 한다,
벽 속____
그것은 자궁이며 미래의 양수(羊水)가 있는 공간, 허무의 알맹이가 누워있는 곳이다.
다시 기억하라. 그러니 당신의 편지는 허무이며 그중에서도 알맹이 허무, 벽 속의 편지이다.
그것은 탯줄로써 끝없이 여기와 저기를 연락한다. 이 살 속과 저 살 속, 역사가 된다.
시간이 엎디어 있는 이중의 악보가 된다.
당신의 애인은 지금 거기를 출발하고 있다.
한 손에는 노래 하나를 들고, 또 한 손에는 생명의 물, 그가 들고 있는 약수가 보이지 않는가.
그가 숱 많은 머리칼에 꽂고 있는 꽃 가지 하나가 보이지 않는가. 애인은 아직 만나지 못한
어떤 이. 그러나 이제 곧 만날 이. 당신의 시는 곧 그의 약수와 꽃가지와 노래를 받아들 것이다.
나는 매일 밤 여기 앉아서 편지를 쓴다.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
그러나 아직 내 편지는 어디인가 너무 무겁다. 리듬이 당신을 맞을 만하지 않다.
언어의 말 없는 그림이 들어 있지 않다.
아직 너무 무거운 나의 편지는 당신의 희디흰 살에 닿으면 미끄러진다. 나는 여기
나의 신호등 앞에서, 또는 나의 수인번호 앞에서, 결코 도착하는 곳이 없는 계단 앞에서,
시든 꽃잎이나 치우며, 잃어버린 열쇠나 찾으며, 늘 일어서는, 일어서기만 하는 파도 앞에
온 살 떨게 하며 ‘없어, 없어‘, 또는 ’아직 오지 않은 배‘를 중얼거릴 뿐이다. 그러다 잠시
뒤에는 돛 한 폭이 펄럭이는 쪽을 바라보며 ’지금 온 배‘를 중얼거린다. 중얼중얼, 중얼중얼
내가 포구 앞 돛들이 서 있는 모래밭 방파제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할 수 있는 일은 이
중얼거림 뿐. 말하자면 옹알이뿐.
이 세상 갓난아기들의 모든 옹알이가 시 한 구절이 되어 달려와 앉는구나.
그렇다. 모든 수평선은 늘 현재의 사물 속에 숨어 있다.
그 속에서 아직도 아, 아직도 숨어 있기에 수평선인 당신. 아직 밝지 않은 어둠이기에 애인인
당신, 서른 살 때도 애인이었고, 지금 예순이 넘어서도 애인인 당신, 어느 날 손에 넣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멀리 있는 당신, 멀리 있기에 매력투성이인 당신.
아직 오지 않은 애인이여, 원(源) 시인, 당신은 연결이다.
아직 오지 않은 애인이여, 원(源) 시인, 당신은 밝는 어둠이다.
당신은 이쪽과 저쪽이다.
여러 개의 창이다.
당신은 멀리서 말한다. 들리지 않는 소리로, 들리게 말한다.
여러 개의 창을 지녀라. 남쪽의 창은 남쪽밖에 보여주지 못하리라.
북쪽의 창은 북쪽밖에 보여주지 못하듯이. 동쪽의 창은 동쪽밖에 보여주지 못하듯이.
최소한 네 개의 창은 지녀라. 남쪽과 북쪽, 동쪽과 서쪽. 동남쪽을 볼 수 있으면 더욱 좋으리라.
그쪽에서 애인이 올지도 모른다.
애인이 오는 곳을 항상 열어두라.
애인이 오는 길을 항상 잘 쓸어두라. 당신의 가장 두꺼운, 그러나 부드러운 걸레로 닦아라.
무명시인이여, 필그림케이여, 길이 긁혀서는 안된다. 길은 항상 매끄럽게 하여야 한다.
애인의 그 부드러운 발이 상처받지 않도록. 애인의 그 뜨거운 열이 방출되지 않도록.
거기 집이 있었다. 매일 거기를 지나다니면서도 거기, 벚나무 뒤에 집 한 채가 있는 줄 몰랐다.
벚나무 꽃이 필 때 그 아름다운 분홍 속살에, 그 속살에 내린 그림자에 가슴 떨면서도 거기 당신의 집이 창문을 열고 있는 줄 몰랐다.
벚나무의 화려한 꽃그림자에만 탄성을 질렀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꽃 뒤에 있는 것에,
그림자 뒤에 또는 속에 있는 것에 편지를 보낼 줄을 몰랐다.
그 벚꽃이 질 때는 눈물마저 흘렸다. 그 아름다운 꽃 그림자의 사라짐만을 속으로 통곡하고,
시든 꽃잎의 길을 쓸곤 했다. 거기서 훌쩍 떠날 줄을 몰랐다. 집착하였다.
떠나면 더 아름다운 줄을 몰랐다. 떠나면 더 그리움의 법을 몰랐다.
한 채의 집을 짓고 나면 거기서 떠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언제나 추과상(追過像)하였다.
추과상이 내 재주의 전부였다. 내 가방 속에는 수십 장의 꽃잎이 시들어 쪼그라들어 가화가
되어 가득 어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다시 말한다, 늘 떠나라, 한 채의 괜찮은 집을 지으려면.
한 채의 집을 지어놓고 거기서 표표히 떠나는 것이 괜찮은 시인이다.
그런 뒤 애인이 오는 길에는 빈집을 남겨놓아라.
그래야 애인이 마음 놓고 올 것이다. 애인이 와서 거기 빈방에 머물 것이다.
햇빛이 텅 빈 방으로 들어오듯이.
비어야 다음 꽃잎이 거기 담길 것이다.
수많은 꽃잎이 이미 거기 누워 방을 그득히 채우고 있는 곳에 귀한 손님더러 오라는 것이냐.
이 무명 시인, 필그림케이여.
____시의 빈집은 쓸쓸한 것이 아니다. 귀한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니 시든 꽃잎으로 가득한 공간은 깨끗하게 청소할 것이며,
가능한 한 빨리 집을 비어 놓고 다음 집을 지으러 떠나라.
시인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지어놓은 집에 머무는 것이다.
어서 떠나라. 거기 결코 머물 곳이 없는 곳에 애인은 오지 않으리라.
애인의 옷가지가 걸릴 못이 없는 곳에 애인이 수놓은 윗도리를 벗어 거실 리 없다.
애인을 위해 늘 새 벽지를 바른, 햇빛 잘 드는 방을 준비하여라.
거기 애인의 살이 마음껏 기지개를 켜게 하여라.
그런데 당신은 염치없이 머물고 있구나. 무명 시인이여 어서 떠나라. 그 옛집에서.
아직도 그 옛 집에 머물고 있는가. 옛집은 틀이며 진부함이며 상투성이다.
애인의 목소리 또 들려온다.
그 붕어, 잘 있는가.
붕어? 웬 붕어냐고?
어느 날, 누군가 붕어 몇 마리를 데려왔다.
얇은 유리의 벽 안에 갇혀 있는 물에서 그 녀석들은 한껏 유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춘향전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들의 이름을 갖다 붙였다.
왜냐면 그중 한 녀석이 몸뚱이는 하얀색과 황금색의 알록이로 예쁜데다가,
또 입술은 마치 립스틱이라도 칠한 것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을 춘향이라고 부른데서 그 가족의 이름은 시작되었다.
또 한 마리는 춘향과는 대조적으로 까만 입술이었다.
아가미의 선과 꼬리, 양 지느러미가 모두 까만 색이었다. 그 묘한 까만 색 때문이랄까,
그 붕어는 마치 오디라도 먹다가 들킨 것처럼 욕심쟁이로 심술궂게 보였다.
당연히 변학도가 되었다.그러다보니 나머지 붕어들,
전부 그 모양에 맞게 방자 향단 월매로 이름지어지고 말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새 물을 유리의 벽 안에 부어 주며 나는 붕어들의 안부부터 묻곤 한다.
붕어들과 차 한잔을 한다. 내가 찻잔을 어항 앞으로 가져가니 ‘변학도 붕어’가 지느러미를 펄럭이며 앞으로 다가온다. 그 녀석은 마치 물을 빠져나와 당장 손이라도 내밀 것 같다.
‘춘향 붕어’도 그 빨간 립스틱 칠한 것 같은 입을 뻐끔거리며 흰 지느러미를 펄럭이며 유난히 날씬하게 보이는 몸을 유선형으로 흔들며 앞으로 다가온다.
‘변학도 붕어’는 춘향 붕어의 빨간 입술 때문에 오늘은 더욱 꺼멓게 보인다. 그러고 보니 붕어들은 참 시인이기도 하고, 현대인이기도 하다. 현대인이며 시인인 나 같기도 하다.
1. 늘 입을 뻐끔거린다. 마치 내가 늘 혼잣말 하는 것처럼. 현대 한국 시인들이 혼잣소리 하고 있는 것처럼.
2. 이 어항이라는 좁은 공간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마치 내가 기껏해야 집, 학교, 지하철, 하는 것처럼. 많은 한국 현대 소시민 시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3. 끊임없이 이 좁은 물속을 방황한다. 마치 내가, 한국 현대 시인들이 아무 곳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채 그러나 끊임없이 여기서 헤매는 것처럼.
4. 붕어는 결코 같이 놀 줄을 모른다. 혼자 논다. 이 좁은 곳에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도, 가끔 몸을 부딪기도 하면서도 결코 같이 놀 줄 모른다........고독하다. 마치 내가, 그러는 것처럼. 아마 한국 현대의 다른 시인들도 그러겠지.
5. 어느 순간엔 어항 유리의 곡면에 비쳐 커다랗게 보인다. 마치 내가 시 한 줄 써놓고 나를 가끔 스스로 위대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또는 에쿠우스 같은 좋은 차를 탄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엔 아주 왜소한 한 할아버지인 때가 많은 현대인들처럼............. 또는 현대 한국 시인들처럼.
붕어는 갇혀 있다. 갇힌 자이다.
갇힘이 원형이다.
붕어 한 마리, 다시 풀잎 뒤로 들어갔다. 거기서 가만히 있는다. 붕어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마치 가장 큰 하늘은 그 풀 뒤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등 뒤를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만히, 가장 큰 하늘은 그대 등 뒤에 있는가.
그러니까 지상의 대주제는 기다림이다. 지상에 가득차 있는 대강(待降)들. _____
모든 땅은 바다에 갇혀 가만히 엎디어 있다. 파도들은 길길이 뛰면서 기다리는 땅들을 핥아댄다.
그 기다림과 파도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사막의 끝에 바다가 있는 아프리카일 것이다.
바다는 끊임없이 파도를 내보낸다. 파도는 가장 충실한 바다의 정찰병이기 때문이다. 그 뒤에서 풀들을 키다리로 키우며 기다리는 초원, 또는 물방울을 튕겨 올리며 기다리는 호수들,그 광대한 기다림. 대강뿐이다. 대강은 은혜이다.
이 삶이라는 파티를 위하여 나의 애인은 끝없이 오고 나는 끝없이 기다린다. 브룸 엘리아드 앞에서 기다린다. 브룸 엘리아드는 평생 한 번 피는 적도의 꽃이다. 1년 내내 시들지 않는 꽃이다.
브룸 엘리아드의 잎이 만드는 작은 물방울 연못엔 살찐 개구리들이 목젖을 잔뜩 부풀리고 뛰어오를 항상 준비를 하고 있다.
브룸 엘리아드의 그 필연의 꽃을 피워라.
호랑이를 보러 갔었다.
그 커피숍은 대형 유리창으로 가린 안뜰에 호랑이를 키우며 손님들을 끌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호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호랑이를 보러 온 사람들만 유리창에 붙어 발꿈치를 몇 번 들다가 갔다.
맨첨에 와서 호랑이를 찾아본 사람은 아이들과 그 어머니,
그다음엔 이가 빠진 듯한 여자와 남자, 몰골이 좀 흉측하다.
여행자인 듯 티셔츠 윗도리가 후줄근하다. 그들은 모두 웨이터에게 호랑이가 있는 곳을 묻고 유리창에 붙어서서 웨이터의 손이 가르치는 곳을 본다. 발뒤꿈치를 들기도 한다.
호랑이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잔다. 큰 인공적인 바위가 특히 가리고 있다.
그렇게 한 시간은 족히 되었을까. 통유리 창밖으로는 어둠이 슬슬 걸어오고 있었다.
무엇인가 바위 뒤에서 슬며시 나타났다. 호랑이다. 검은색 줄이 쳐진 갈색 뱃살이 추욱 늘어져 있다. 슬몃슬몃 걸어오는 어둠, 그 속에서 호랑이도 슬몃슬몃, 마치 걷지 않는 듯이 걷는다.
버선 신은 것 같은 두꺼운 발로, 그렇게 두껍게, 그러나 가볍게 바닥을 디딘다,
결코 소리 나지 않는다.
그렇게 디뎌라, 두꺼운 발로 확고하게, 그러나 결코 빈 소리 나지 않게, 무명 시인이여.
호랑이의 눈은 어둠 속에서 램프 같다.
나는 램프를 받아 안는다. 램프를 나의 탁자에 앉힌다. 나는 램프를 들여다본다.
나는 램프로부터 수만 마디 말보다 더 깊은, 말 하나를 듣는다.
‘반갑다, 당신 어둠이여, 당신이 있으니 내가 밝은 것을..........’
불꽃이 펄럭거린다. 그림자들이 펄럭거린다.
장자를 생각한다:
「...........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어서 그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지려고 달린 자가 있었소. 발을 들어 올리는 횟수가 잦으면 그만큼 발자국이 많아지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소. 그래서 아직 느리게 달린다고 생각하여 더욱 빨리 쉬지 않고 달리다가 힘이 빠져 죽고 말았소. 그늘에 있으면 그림자가 없어지고, 멈추어 있으면 발자국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을 몰랐던 거요.」 (莊子, 雜篇․漁父)
무명 시인들은 그림자들만 그리고 있는 것인가.
애인에게 줄 빈방 대신 방의 그림자만을 거기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인가.
붕어들처럼 끊임없이 어항 속을 헤매며, 결국 뻐끔뻐끔 혼잣말만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 혼잣말은 자기밖에 이해할 수 없다. 자기만의 난해 코드다. 그리로 들어오시라고 애인에게 감히 외치고 있는 것인가. 열쇠도 건네지 않고 자기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인가.
벌판엔 자기의 풀만 키우고 있는 것인가.
사막의 끝엔 자기의 파도만이 하늘을 향해 수증기를 날리게 하려는 것인가.
자기만의 무지개가 일어섰다가 벌판에 홀로 드러누우라는 것인가.
그리로 애인은 결코 올 수 없으리라.
일인(一人)만의 시는 곤란하다. 이인(二人)의 시를 써라. 나와 당신,
그 사이에서 무지개다리가 되는 이인의 시, 그러나 삼인(三人)의 시를 쓰지는 말라.
너무 많이 소통되는 것은 소통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의 시는 소수 문학 안에 놓이게 하라. 지배문학을 꿈꾸어서는 결코 안 되리라.
소수 시다. 다리가 되는 시다.
다리의 양쪽 끝에는 나와 당신이 있는 이인의 소수 시를 필연의 연필로 아무것도 써지지 않은 텅 빈 노트에 기록하라.
현재적 상상력의 뒤엔 후현재적 상상력이 우리를 점령하게 하라.
끊임없이 next-generation을 생각하라. 생명의 싸이클을 생각하라.
당신의 시는 그 속에서 생명의 싸이클에 복무하고 있음만을 이해하라.
그것이 허무다. 당신의 애인은 아직 거기 있다. 아직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당신의 애인이 거기서 떠나 여기 도착하면 생명의 약수 한 잔을 받아 마시라.
그리하여 이인(二人)의 당신을 치료하라.
애인이여, 끊임없이 달려오는 애인이여,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손이여.
지금 온 배를 띄우는 손바닥이여. 허무여.
8 - 여행, 한 닢에서 스물아홉 닢까지 --재질문들
[한 닢]
그래, 아직 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나는 여행한다. 그대를 찾아 그대 속으로 여행 중.
나는 그대 속에 있다.
모든 여행은 이 영원회귀의 사막에서 우연의 이 현재들을 필연화 하려는 몸부림이다, 그 몸부림의 정점에 시의 몸이 있다. 우리의 현재들, 갈수록 우연임을 깨달으면서 우연인 그대가 쓰러져 누운 시의 입술을 찾아 헤매는 것을 본다. 우연히 집어 든 언어 하나가 필연의 허리 속으로 우연의 언어 둘을 끌고 갈 때까지.
[두 닢]
여행의 선두는 신발 한 켤레, 감자 한 알이 삶의 선봉에 서듯이.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새우 한 마리가 ‘풍덩’, 끓는 기름 속으로 뛰어들듯이. 우리 삶의 모래성(性). 결국 언어의 모래성(性).
우리는 모두 선택하는 체하지만 아무도 실은 선택할 수 없다.
우연이 가장 잘 오시도록 필연의 언어 몇을 걸레와 빗자루 삼아 들고 우연의 길을 쓸고 닦을 뿐.
시의 몸을 어루만지고 어루만져 볼 뿐.
[세 닢]
긴 길을 걸었다. 애인은 아직 오지 않았다.
길은 산허리를 돌아 돌아 끝없이 계속되었다.
끝났는가 하면 돌아들고 이제 산을 다 내려왔는가, 싶으면 길은 다시 시작되었다.
애인은 시의 몸에 핏줄을 통하게 하는 이.
과거소(過去所)이며 미래소(未來所)인 그곳에서, 과거대(過去帶)이면서 미래대(未來帶)인 그곳에서만 오는 이. 거기서 과거와 미래,
말하자면 시핵(時核)을 한꺼번에 던질 수 있는 이,
그러나 한줄기 빈 바람만 휘익 지나갔다.
걸어갈 때마다 나무 그림자들이 발 아래 어른거리는 어둠을 던졌다.
그림자 어둠이 신발을 가렸다.
그렇구나. 이 길을 걷는 한 아무도 이 어둠을 빠져 나갈 수는 없구나.
[네 닢]
그런데 그대는 진정 고독한가, 시인이여, 그 중에서도 무명시인이여.
진정 고독하여 우연의 언어들을 필연의 허리 위에 얹을 수 있는가.
질문하고 또 질문하지만, 그대도, 나도 이미 무명시인이 아니구나. 명찰은 이미 닳고 닳았구나.
무명시인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매일 여행 속에 앉아 다시 여행을 떠난다.
[다섯 닢]
길은 모든 여행의 입구, 안개가 또다시 꼈다.
떠도는 존재의 잿빛 그늘, 잿빛 그늘의 순간입, 순간입, 순간입들, 어디로 갔나.
순간입 그늘에 무수한 여행의 깃발은 꽂힌다.
여행의 깃발이 발 아래 어른거리는 어둠 하나를 쓰러뜨린다.
여행의 깃발이 어둠 둘을 쓰러뜨린다.
열에 끓는 여행의 뜨거운 입술은 희망, 뜨거운 희망의 혀가 길까지 내려온 산 그림자를 핥는다.
부푼 시의 몸이 일어서기 시작한다.
[여섯 닢]
맞바람을 받으며 앞으로 달려가는, 그러나 언제나 고꾸라지기만 하는 저 긴 여행의 옷자락들,
탱자 울 같은 시계줄 끝에서 깃발을 들고 달리는 신발들, 알록달록한 약속들.
[일곱 닢]
모든 덧문들이 사막에 도착한다.
풀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구불구불한 언덕들을 지나, 울퉁불퉁한 구름 밑을 지나, 재빠른 회색 들쥐들의 새까만 눈을 지나, 갑자기 불어대는 모래바람을 지나, 아무것도 뵈지 않는 지평선을 지나, 구름의 눈물처럼 쏟아지는 소나기를 지나.
독수리 한 마리가 모래바람 속으로 날아오른다.
독수리의 검게 편 날개, 보이지 않는 그 비상을 보아라. 비상은 실은 끊임없는 정지이다.
독수리는 들쥐를 잡으려 한다.
회색 들쥐의 치켜뜬 눈을 보아라. 온몸을 속도로 적시며 달아나는 그것, 빠르기도 하구나.
그것은 이쪽 모래구멍에서 저쪽 모래구멍으로 재빨리, 들키지 않으며 사라진다.
사막이 그것들의 달리는 속도로 순간 구겨진다.
보이지 않는 그 눈을 보아라. 현재처럼 환상이다.
오늘에 서서 오늘을 잡으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어리석은 환상이다.
현재는 보이지 않으며 재빨리 사라지는 것, 들쥐보다 재빠른 것, 과거보다 미래보다 재빠른 것.
시의 몸밖에 없다. 우둔해서 그리 재빨리 사라질 수 없는 그 침묵밖에 없다.
[여덟 닢]
사막의 초입에 가난한 초원이 앉아 소나기를 기다린다. 초원은 미래소(未來所)이며 과거소(過去所)이다.
미래대(未來帶)이며 과거대(過去帶)이기도 하다. 미래소인 초원이 현재의 야생화를 던지기 시작한다.
[아홉 닢]
야생화마다 앉아 있는 햇빛 한 줌. 햇빛 한 줌마다 웃음을 던지는 양털 구름들.
그대가 거기 분홍잎 위에 앉아, 황금빛 시계줄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고 있구나.
[열 닢]
그러면 시인이여, 무명 시인이여
그대 안에서 햇빛 던지는 그 태양을 꺼내라. 그것을 그대 우연의 산기슭에 세워라.
거기 필연을 존재하게 하라.
우연투성이인 이 영원회귀의 사막 끝에 필연의 사원을 세워라.
그 사원이 비록 신기루같이 보이더라도 세워라. 자꾸 세워라.
그대가 도와줄 것이다. 금빛 시계줄을 만지작거리며 그대가 애인 노릇을 할 것이다.
그 사원이 시이게 하라. 통통한 시의 몸이게 하라. 그것이 우리를 깨우리니.
무의미를 유의미이게 하라.
필연의 부재가 필연의 존재이게 하라. 그것이 우리를 깨우리니.
소나기가 그쳤다. 다시 들쥐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사막에 무지개가 걸렸다.
재빠른 들쥐의 눈이 무지개의 허리 아래서 모래를 핥기 시작한다.
저쪽 언덕 위 하얀 천 지붕 게르 뒷편에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의 둥글고 긴 팔이 순간 하늘과 땅을 안는다.
[열한 닢]
여행은 고독이다.
붉어 오는 땅의 한 켠
여행은 존재의 권력이다. 끊임없는 출발이다.
출발은 무명 시인인 그대의 출생 증명서를 내보인다.
[열두 닢]
모래와 풀의 경계에 낙타들이 나타났다.
분홍 무릎을 자주 꿇는 저 낙타, 복종의 뜻을 너무 빨리 깨달은 저 갈색 무릎. 긴 속눈썹으로
바람을 맞받는, 우연 속의 필연처럼 솟은 낙타들의 육봉.
[열세 닢]
별이 일어선 밤이었다. 몽고 소년 데기는 온 얼굴의 근육을 씰룩이며 웃었다.
웃으며 게르 앞에 앉아 게르의 천정 같은 하늘의 천정을 가리켰다.
몽고 소녀 아기도 별 같은 웃음을 수줍게 흘렸다. 얼굴 위로 별이 흘러갔다.
[열네 닢]
별똥별이다. 침 흘리는, 하늘의 순간의 입술.
[열다섯 닢]
거기 별들이 일어선 곳에 네 시의 사원이 오게 하라. 시의 휘장이 별처럼 펄럭이게 하라.
[열여섯 닢]
시는 순례자의 노래, 순례자의 현재의 노래,
거기 사방 하늘이 무거워 별의 황금 허리띠 반짝이는 허리 휘어지니.
이제 그 별소리___ 찬 바람 부는 바이칼 호수에 도착했다.
바이칼에 가니 바이칼은 없었다. 오믈만이 있었다.
오믈은 바이칼의 신이다. 구은 오믈을 뱃전에 놓고 취한 사람들은 살을 뜯었다.
바이칼은 정말 없었다. 살점을 다 뜯기고 흔들거리는 오믈의 뼈만이 있었다.
신은 없었다. 신의 뼈만이 너울거릴 뿐.
그대가 세운 그 시의 사원의 望瓦가 새벽이면 그 호수로 달려와 얼굴을 말갛게 씻고 가게 하여라.
[열일곱 닢]
부탄을 아는가. 저 폴리요라는 외딴 섬에서 판타나 나무의 탐스런 열매를 먹으며 사는 도마뱀.
그 누군가와 눈만 부딪혀도 나타나지 않는 그것. 누구한테든 자기를 들키면 꼬박 3주간을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는 그것.
그대의 시, 그럴 수 있는가, 무명 시인이여. 부탄만큼이라도 부끄럼을 아는지, 그렇게 고독한지.
[열여덟 닢]
다시 말한다. 여행은 고독의 호수로 가는 길이다. 거기 바이칼 호수의 기차는 늘 달리고 있다.
그대 시의 고독, 바이칼 호수의 수평선처럼 길고도 넓은 품을 지녔는가.
[열아홉 닢]
시는 그런 고독의 호수이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차고 정결한 바람이다.
3백 예순 개의 강이 흘러 들어오는 평면이다.
수천, 수만의 강이 달려 들어오는 곳, 나가는 길은 단 하나이다. 읽는 이의 가슴과 만날 때뿐.
그런데, 그대는 ‘아무도 내 시를 읽지 말기를’ 하고, 한밤중 네거리에서 외칠 수 있는가.
‘그 누군가 한 사람만은 읽기를’, 하고 외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니, 후세에는 읽을 걸, 하고 스스로를 쓰다듬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 읽기를 구걸하고 있지는 않은가. 늘 베스트 셀러 란을 들여다보지 않는가. 지갑을 만지며 팔리기를 바라지 않는가.
잊지 말라. 우연이 그대의 화폭을 지나가게 하라.
시의 머리카락은 그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우연히 날릴 때 더 길고 탐스러움을.
[스무 닢]
시의 한 행, 시의 한 행은 그 호수의 잔물결이게 하여라.
시의 언어는 그 호수가의 모래이게 하여라.
끊임없이 모래는 호수의 세포 속을 드나든다.
그러면서 흐른다. 물의 변주를 노래한다.
그런데 너는 머물고 있구나. 시인이여. 어서 떠나라. 아직도 거기 머물고 있는가.
옛집은 틀이며 진부함이며 상투성임을.
정말 시인인 그대는 아무도 읽지 않기를, 하고 외쳐야 한다.
언젠가, 누군가, 만약 몇 사람이라도 읽기를, 또는 후세에는 반드시 읽을 그 누군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한다면 실은 그대는 그대를 팔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사라지기를. 먼지와 합방하기를 원하라.
그것으로 족하라. 햇살에 비치는 먼지가 되어 웃거나 어제 밤 몽고 초원의 별똥별의 ‘순간입술’로 하늘과 입 맞추어도 결코 훌쩍이지 말라.
[스물한 닢]
여행의 가시성(可視性).
여행의 가시성을 포획하라. 한 채의 집을 지으려는 자는 늘 떠난다. 머물지 않는다.
여행의 가시성과 불가시성(不可視性).
늘 떠나고 있으라, 한 채의 집을 지으려면.
그대의 여행 가방을 특수재질로 만들라. 모든 시간으로 하여금 그대의 가방 속에서 특수화되게 하라.
무의미의 특수화가 일어나게 하라.
그대, 순간일지라도 유의미해지리니. 그것이 현재이다. 살아있는 자의 현재.
[스물두 닢]
9 - 카나토의 항아리에 담긴 비가
그 항아리의 비밀______
카나토의 항아리에 담긴 먹거리는 결코 부패하지 않는다. 늘 신선하기만 한 그 무엇이 거기엔
담겨 있다. 남미의 어떤 지역에서는 그 항아리를 냉장고 대신으로 사용한다. 아마 그 항아리에 담겨 있는 생선은 결코 부패하지 않으리라. 그 생선의 비늘은 아침 떠오르는 햇빛에 찬란히 빛나리라.
당신도 그렇다.
시인인 당신에게야 말로 그런 항아리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오늘의 시인이여. 무명시인이여, 아침이면 항아리의 뚜껑을 열어 당신의 ‘언어 생선들’이 아직 신선한지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언어 생선들’이 ‘현실 언어’들과 접속 가능해야 할 것이다. 현실 언어에 접속된 언어들은 ‘아무개씨’ 만의 언어들이 될 것이며, 무한 분화의 길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 길만이 아마도 항아리 속에 누워만있기 쉬운 당신의 언어로 하여금 당신의 책상의 경계를 넘어서 신선한 공기를 쐬게 하는 일이 될 것이며, 더 운이 좋으면 수만 사람의 눈동자에 무지개의 다리를 놓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 ‘언어’를 끄집어내어주라.
항아리 속에서 창백해져 있는 그 언어의 얼굴에 신선한 바람을 씌워주라. 이 세상은 그 누워있는, 누워만 있는 언어의 원석 조각들이 떨어져 박혀 있는, 어슬렁 광산 밭, 언어라는 보석의 원석 조각들이 흩어져 떨어져 있는 곳___그 한 닢을 주워라, 한 입 삼켜라. 그 ‘잎(입)’들을 삼켜서 우리 모두 달려가고 있는 이 ‘다리’ 난간에 칼로 새기듯 피 뚝뚝 흘리며 당신의 가슴목소리 실핏줄 목소리를 새겨라. 다리 밑에는 역시 ‘저혼자 가는 물방울들’이 가득 흐르고 있다. ‘저 혼자’ 그러나 ‘함께’ 가는 그 물방울들을 집어라. 오색의 물방울에 당신의 얼굴을 씻어라.
장자의 새______
오늘 아침에도 해는 그 빨간, 신선한, 동그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안개와 구름은 이상하게도 산기슭에만 짙었다, 마치 한 쪽은 엷고, 다른 한쪽은 짙은 연필로
테라도 그린듯이. 그러나 그 위의 하늘은 파란 하늘이었다. 그 하늘 한 켠은 지금 마악 해가 올라오고 있는지 엷은 분홍색을 띄고 있었다. 하늘을 보는 사람은 아마도 짙은 배반감마저 느낄 것이다. 하긴 지난여름 이후, 그러니까 안개 너머로 처음 해가 보여진 이후, 8번째 산기슭이 되었으니 그동안 해도 참 많이 걸어온 셈이다. 이제 산기슭이 너무 높아졌는가. 그래서 걸어 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늘을 보는 사람은 해에게 큰소리로 외친다____내 헌 구두나마 잠시 빌려줄까. 하지만 잠시 뒤 산기슭을 덮은 구름들 위로 하늘은 갑자기 환해지면서 은빛 얼굴로 해가 나타났다.
하늘을 보는 사람의 방에선 박수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해의 그 노고에 있는 힘껏 쳐주는 박수 소리일 것이다. 절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해가 들고 있는 ‘오늘 표 가방’을 붙잡아 새로 복사한 열쇠를 꽂으려 한다. 기대에 차서 그 열쇠를 돌린다. 무엇인가 튀어나온다. 커단 새들. 푸드득 날개짓을 하며 날아 나오는 그 새. 장자의 새이다. 장자는 그 새에 삼천리나 되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날개를 받치고 있는 바람 한 올이 빛 속으로 뛰어든다. 순간 바람 한 올은 바람 열 올이 된다. 북녘 바다에 있던 물고기,
곤(鯤)이 변하여 된 그 새___붕(鵬). 붕은 구만리 높은 하늘을 삼천리나 되는 날개로 날아 남녘 천지(天池)로 날아간다. 지금도 계속 날아가고 있다. 그 날개 위에 당신의 상상력의 날개도 실어 수만 시간들 머리 위로, 또는 수만 사람들 머리 위로 새로운 이미지의 접속이 일어나게 하라. 이미지의 불뚝 일어선 이미지의 심줄 밑에 끊임없이 출렁이게 하라.
아, 항아리의 뚜껑을 열어 당신의 상상력이 무한 분화가 가능한 이미지가 되어 달려오게 하라.
당신의 상상력의 방법론은 오늘의 다리 위에서 ‘현실 언어’로 짜여진 이미지뿐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시 세상-다리’ 위에서는 상상력이 ‘현실 언어’와 미처 못 만난, 그래서 무한 분화가 불가능한, 그런 미숙한 변환을 너무 많이 본다. 다시 말한다. 오늘의 상상력의 바로가기는 현실 언어로 구조된 이미지이다. 현실언어 이미지로 짜여진 가방이다. 그런 가방을 들어라.
한 세기 뒤에도 당신의 시가 아무개 씨의 책상을 건너가기 위해서는. 이미지들이 당신의 항아리 속을 떠나 ‘아무개 씨’의 상상력의 가방 속으로 날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구만리 하늘이 이미지의 숙주가 되게 하기 위해선.
그 날개 뒤를 좇아 한 우물이 산기슭을 걸어 힘들게 올라오고 있다.
우물 옆으로 새벽이면 보랏빛 우주를 한껏 열기 시작하는, 그 순간만은 나팔꽃도 활짝 펴진, 나팔꽃의 성기(性器)만은 아니다.
소금에 절여진 몸이 풀기를 잃고, 짜디 짠 하늘을 울며 바라보던 그 배추의 모습도 보인다.
비 오는 일요일이면 후드득후드득 온몸을 흔들며 더듬더듬 하늘을 만지던 그 파초의 모습도 보인다.
골목을 돌아서면 늘 그 자리에 허공을 배경으로 서 있던 그 전봇대의 모습도 보인다.
항상 발뒤꿈치를 들고 서 있던 백일홍, 화려한 자주색 잎을 너울거리던 작약.........
우물가에서 배추를 힘차게 물 속에 흔드는 한 여자의 주름많은 눈꼬리가 배추의 눈물 같은 물방울을 뚝뚝 흔들며 나를 보곤 씨익 웃는다.
전봇대 옆에 허공을 배경으로 뒷짐을 지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도 보인다.
황량한 그 마당에서 정신없이 자라던 키 큰 풀들도 보인다.
나른한 오후면 입을 쩍쩍 벌리며 하품하던 대문의 커단 빗장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지며 삐이꺽 그 큰 나무 가슴이 열린다.
똑똑 거리는 노래를 가끔 부르곤 하던 아랫방 창문의 가슴, 컹컹거리며 대낮을 짖던 쉐퍼드, 자기 몸을 칭칭 감은 사슬을 끊고 산 위로 마구 달아나던 그 녀석. 날지못하는 새, 거위, 끊임없이 달려오던 번개의 허연 입술. 길고 긴 뿌리를 출렁이던 나무, 풍성한 여인의 머리칼 같던 로타리의 플라타너스....... 어디로인가로 늘 이어지던 그 둥근 언덕길. 고구마를 그리도 잘 튀겼으며, 빨래를 그리도 하얗게 빨았던 그 여자,
어느 날 흐린 창호지 창문 속에서 그림자가 되어 집나간 아들의 흐린 편지를 울며 읽고 있던 ‘그 여자의 방 창호지에는 ’색씨‘라는 문패가 달려있다.
산중턱에 지어져 있던, 햇빛 참 따스하기도 하던 무허가 판잣집 부엌문으로 빼꼼히 들 여밀리던 눈이 흔들던 새끼줄에 꿰진 생선 양미리도 보인다. 양미리의 곤색 눈동자도 보인다. 곤색으로 찌들었던, 그러나 문득문득 싸파이아처럼 파랗게 빛나던 그것의 비늘도 보인다.
이들 과거의 그림은 결코 추억이 되어 퇴행의 길을 걷지는 않는다.
한 편의 시의 이미지 속에서 ‘오늘 표’가 된다. ‘오늘 표 추억’이다.
어둠의 동굴 속에서 매운 마늘을 씹으며 향불을 켜던 그 여자도 보인다.
그 여자의 읍습한 동굴 앞에는 웅녀의 방이라는 문패가 붙어있다.
미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생아를 낳은 아름답던 그 여자,
그 여자의 방 앞에는 여류시인 김명순이라는 문패가 붙어있다.
남편의 바람기에 하얗던 살결을 꺼멓게 변색하게 했던 도자기 속 회랑을 끊임없이 걸어가고 있는 그 여자, 참 재주도 있던 그 여자 허난설헌. 약숫물 한 병을 들고 바랑을 등에 지고 꽃가지 한 가지를 들고 또박또박 걸어가는 그 여자 비리데기....................그 여자는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비리데기는 아마도 무진장 억울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니 무궁토록 제사를 받는 ‘만신’이 되는 꿈을 꿨겠지. 그 여자, 과연 누구였을까. 어느 집에서 버린 여자였을까.
불러온 배를 왕 앞에 꺼내 들고 고개를 늘이우고 있던 가야의 한 여자, 태아의 형상을 속 시원히 왕에게 보여주기 위해 번쩍이는 한 칼에 그만 울음을 삼켜버린 그 여자, 세상 다리 위에 부는 바람을 바람을 맞아보기도 전에 저승 강을 넘어 버린 거야, 미처 아기가 못된 어린 ‘아기씨’들.
‘오늘 표의 가방’, ‘나 표 가방’, ‘오늘-나 표 가방’ 속 에 그 여자의 이미지를 넣는다.
길을 가면서 끊임없이 넣는다. 역사도 질긴 시간의 심줄 위에서 ‘오늘 표’ , ‘나 표’ 이미지가 된다.
이미지들의 대탈주_______
그것들은 내가 걸어가는 길 위에 신기루처럼 나타나 길 위에 드러눕는다. 모두 변장을 했다.
그것들은 현실 언어들 속으로 마구 뛰어든다. 이미지들의 대탈주.
웅녀가 가발을 쓰고 허난설헌은 이상한 머플러를 흔들고, 새벽버스를 탄 수로부인은 신식 빌딩의 대리석 벽 위에 아스라이 핀 철쭉꽃을 바라보며 새로 산 머리핀을 흔든다.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금을 파냈던 선화공주는 오늘 백화점의 자동문을 그만 잘못 건드려 활짝 그것이 열리는 바람에 온통 반짝거리는 가짜의 금귀걸이, 가짜의 금팔찌를 보고 입을 바보처럼 벌렸다. 빛나는 별 하나 없이 모래뿐인 빈 길을 마른 달빛에 그림자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월명은 이상한 모자를 썼다..........
허공에 빛나는 은빛 빛자루, 춤을 추는 능연, 꿈꾸고 잇는 은대구의 눈.......당신의 허벅지를 온몸이 누렇게 되도록 기다리는 둥근 탁자, 속눈썹을 내리깔고 말없이 기다리는 커튼.....
변장한 그 이미지들, 추이미지들이다. 당신의 회상 속에서 끈임없이 팽창 증식된 그 추이미지들은 현실 언어 속으로 자꾸 도주하는 것이다. 보다 무수한 가방의 열쇠를 열며, 무수한 시간축 위에서 분화하기 위하여, 무한 분화하기 위하여. 그것들은 서로 몸을 맞대어 하나의 새로운 상황을 빚어낼 것이다. 그 상황은 말하자면 거미의 목걸이이다. 산길을 가다 보면 만나는 거미의 은빛 목걸이.
하늘에 쳐진 마치 그 초록 거미가 은빛 줄을 마치 목걸이처럼 펴놓고 정작 자신은 보이지 않게 한 켠에 응큼하게 엎드리고 잇듯이. 당신도 당신의 다리길 위에 그런 목걸이를 늘 펴놓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거미를 배워라. 거미의 은빛 목걸이에 걸린 풍덩이 파리 모기.............처럼 또는 비단 실에 둘둘 말린 먹이의 몸처럼 당신은 당신의 추 이미지들을 현실 언어의 비단실로 칭칭 감아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이미지에서 둘의 이미지의 비늘이 벗겨져 떨어지는 혹은 언어의 원석 조각들이 떨어져 날리는. 산기슭을 힘들게 걸어올라오는 그 언어의 원석 조각들을 홀로 주워 들어라. 그렇다.
시는 ‘홀로’이다. 마치 산기슭을 신발을 벗어들고 올라오는 저 태양을 홀로 보는 독수리처럼. 그 초원의 독수리잡이 남자는 아들에게 말한다. 아들아, 태양을 보며 눈에 화상을 입지 않는 것은 독수리뿐이다, 라고 중얼거리면서. 그 태양에게 너만의 신발을 벗어주라. 홀로가 중요하다.
시는 만인에게 쓰는 것이 아니다. 요즘 컴퓨터의 편지보내기처럼 사방에 보내는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만, 보내는 것. 당신에게만 당신만이 보내는 것. 또한 그 항아리의 비밀은 너무 빨리 빨리 쏟아놓지 않는 것일 것이다. 이미지의, 상상력으로부터의 일탈이 일어나게 하지 말라. 그러니 길 위에서 오랫동안 숙성시켜라. ‘저혼자 부는 바람’을 맞으며 홀로 풍성한 머리칼 흔들어라. 지금 현실 언어들은 너무 빨리 쏟아지고 있다. 아, 너는 홀로 보는가. 홀로 듣는가. 홀로 가난한가. 홀로 가난하여 늘 없는 그리움에 젖어 있는가. 없음에 핍진성은 생겨나는 것.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의 노래는 집중성이 많이 떨어질 것임을 명심하라.
다른 잡것들을 많이 생각하는가. 유명성이라든가 이름이라든가........시인이 되려는 자에게서 뺏기 어려운 무수한 지적 허영들. 사실은 시인의 재산같은 것들, 그러나 그것들이 항아리의 뚜껑을 누르고 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너의 시는 자본을 거부하라. 빨리빨리 쏟아놓는 속도를 자랑하는, 이 자본의 문명 속에서 시는 거부의 미학을 배울 줄 알아라. 거부가 실은 보다 큰 수용 속에 놓임을 배워라.
근대의 문예사조는 세습 귀족이 아닌 부르조아들, 상공업이라든가 기타 일들로 돈을 번 부르조아들이 천성적인 귀족처럼 보이려고 예술 타령하는 거짓 사랑을 많이 보여준다.
그런 부르조아가 되지 말라. 역사를 거스른다 할지라도 시에 관한 한 세습 귀족이 되라. 귀족의 프라이드를 가지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중성, 상업성에 자신을 팔지 말라. 귀족의 프라이드가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진정 대중성이 됨을 기억하라. 그때 대중성은 예술성이 될 것이다.
이 시대에 진정한 대중의 힘은 곧 민중의 힘이다. 그것은 예술의 힘으로 변신할 것이다.
예술의 힘을 시에 만들어라.
거미의 목걸이_____
거미의 화살이 추이미지들에 꽂힌다. 독화살인지도 모른다.
허공에 은빛 줄을 펴놓고 한 켠에 숨어 끈질기게 기다리는 거미. 그 화살의 목걸이를 걸고 그 길 위 허공에서 무엇인가 걸리기를 기다리라. 그 거미에 초록색을 입혀라. 혹은 은빛을 입히고 기다려라.
끈질기게 기다려라. 은교여, 아니 오늘의 모든 무명시인들이여 언어가 보이기를 기다리고 소리가 보이기를 기다려라. 그 비단 나방을 배워도 좋다. 있는 힘을 다해 잎들을 갉아 먹어 뚱뚱해진 몸으로 짓는 비단집, 그 속에 웅크리고 누워라. 어느 날 아름다운 날개가 되어 이 세상을 하루 정도 날아다니기 위하여. 상황이 하나의 목걸이에 꿰어질 때 소리는 슬슬 살찌리라.
인식이 보이기를 기다려라.
뱀에게는 시력이 없다. 그러나 본다. 그러니 인식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뱀처럼 초음파로 또는 박쥐가 초음파의 진동을 듣듯이 그렇게 당신 만의 감각 기관으로 보아라.
시적 인식이 상황에 모든 것을 줄 것이다. 당신이 가는 길 위에 널려 있는, 현실 언어의 바다 속에 떨어져 있는 그것을 살려라. 상황 서정으로 일어선 시는 누군가 켜주는 양초가 아니다. 해를 들여다보아도 화상에 멍들지 않는 언어의 독수리이다. 누군가 울려주기를 기다리는 피아노가 되려는 이들이여. 오늘의 시인은 누군가 울려주기를 기다리는 피아노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당신이 가는 길 위에서 끊임없이 추 이미지들을 건져 올리며, 그것들을 끊임없이 현실 언어들과 만나게 하며 울려라. 저 마루 한 켠에 있는, 저 시커멓기만 한, 녹슨 피아노는 당신이 울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피아노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 악센트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울려주지 않으면 그 피아노도 피아노가 아닌, 당신이 켜주지 않으면 그 양초도 양초가 아닌, 당신이 바라보지 않으면 해도 그 해도 이미 해가 아닌, 당신이 열어주지 않으면 그 대문도 이미 대문이 아닌, 당신이 기대지 않으면 그 벽도 이미 벽이 아니다. 벽지에서 떨어져 나와 어슬렁거리는 벽에게 당신 만의 지금의 현실 언어를 주라. 수족관에서 나와 어슬렁거리는 지상의 많은 물고기들에게 당신에게 당신 만의 지금의 현실 언어를 주라. 아스팔트에 꽁꽁 갇혀 있다가 뛰쳐나온 흙들에게 당신 만의 지금의 현실 언어를 주라. 유리 창틀에서 뛰쳐나온 유리창들에게 당신 만의 지금의 현실 언어를 주라. 컴퓨터에서 뛰어나온 자모들에게 당신 만의 지금의 현실 언어를 주라, 모든 목소리를 뛰쳐나온 음들에게 당신 만의 지금의 현실 언어를 주라.
모든 실핏줄에서 튀어나온 피들에게 당신 만의 지금의 현실 언어를 주라. ...........
상황을 만들 시적 인식의 추 이미지들이다.
그것을 일으켜라, 무명 시인들이여. 강은교들이여
그 상황 시에는 1인만을 상정하라. 너무 많은 1인들을 상정하지 말라.
당신이 감동해서 쓰지 않으면 1인의 감동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을 기억하라. 그리하여 얼어붙은 별에 당신 만의 소켓트를 꽂아라. 블랙홀이 당신의 시의 원천이 되게 하여라. 시인들은 블랙홀도 태양으로 만들 수 있다. 블랙홀이 초기 과학자들이 부른 것처럼, ‘얼어붙은 별’이라면 그것을 당신 만의 태양으로 만들어라. 그러면 이 사람 사는 우주엔 무수한 태양이 저 산기슭을 걸어 올라올 것이다.
그 태양의 뜨거운 손잡이는 아마도 시인 당신만이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당신만이 부를 수 있는 비가가 될 것이다. 카나토의 항아리에 담긴 그 비가.
무엇이라고 쓸까
강은교
무엇이라고 쓸까
이 시대 이 어둠 이 안개
줄줄 흐르는
흘러야 속이 시원한
이 불면(不眠).
무엇이라고 쓸까
자유롭기를
기쁘기를
시간은 즐거이 가기를
그리고
그대를 기다리길.
무엇이라고 쓸까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데
빛이 빛을 덮어
눈물이 눈물을 덮어
죽음이 죽음을 덮는데.
무엇이라고 쓸까
친구야 일어서라
어둠이여 밝아라
죽음이여 저리 가라.
정말 무엇이라고 쓸까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문이 열렸다 닫힌다.
물길의 소리
강은교
그는 물소리는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렇군, 물소리는 물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물이 바위를 넘어가는 소리,
물이 바람에 항거하는 소리,
물이 바삐 바삐 은빛 달을 앉히는 소리,
물이 은빛 별의 허리를 쓰다듬는 소리,
물이 소나무의 뿌리를 매만지는 소리.....
물이 햇살 을 핥는 소리, 핥아대며 반짝이는 소리,
물이 길을 찾아가 는 소리....
가만히 눈을 감고 귀에 손을 대고 있으면 들린다.
물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가.
물끼리 가슴을 흔들며 비비는 소리가.
몸이 젖는 것도 모르고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비늘 비비는 소리가......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가.
물길의 소리가.
물방울의 시
강은교
펄럭이네요.
한 빛은 어둠에 안겨
한 어둠은 빛에 안겨
지붕 위에서 지붕이
풀 아래서 풀이
일어서네요, 결코
잠들지 않네요.
달리네요.
한 물방울은 먼 강물에 누워
한 강물은 먼바다에 누워
거품으로 만나 거품으로
어울려 저흰
잊지 못하네요.
이윽고 열리는 곳
바람은 구름 사이 문 사이로 불고
말없이 한 별
허공에 일어나
부르네요.
눈뜨라 오 눈뜨라
형제여.
물에 뜨는 법
강은교
힘을 빼야 하네
어깨에서 어깨 힘을
발목에서 발목힘을
그런 다음
헐거워진 그대 온몸
곧게곧게 펴야 하네
그대 어깨에서
키 큰 수평선들 달려나오고
그대 발목에서
꽃 핀 섬들 달려 나와
황금빛 지느러미
훨 훨 훨 훨
흔들 때까지
예컨대
길이 길의 옷을 입을 때까지.
민들레
강은교
일어서네요 자꾸 일어서네요
바람 뒤에 또 바람이 밀어서
빗물 뒤에 또 빗물이 넘쳐서
눈 뜨네요 자꾸 눈 뜨네요
햇살 뒤에 또 햇살이 머물러
꽃잎 속에 또 꽃잎이 머물러
만나네요 자꾸 만나네요
쓰러게더미 위에서도
폐허에서도
빛 너머 또 빛이 찾아와
하늘 아래 우리 모두
이슬로 맺혀
바다
강은교
바다가 울어요
한 입 가득 거품 물고
저리 가까이 반짝이는 별을
만질 수 만져볼 수 없어.
바다가 섧게 울어요
바람 부는 날이면
그 울음 차마 못 들어요
달려가고 또 달려가는 바람에
파도들 몸부림 몸부림.
무수한 강물이 흘러와
바다 옆에 엎뎌요
눈물로 종일 넘실대다가
지는 해에나 몸 대려고
가는 바람에나 옷깃 스치려고.
바다가 울어요
넓고 넓은
떠돌이 바다가
자꾸 울어요.
바다가 보이는 길 위에서
강은교
바다가 신음한다
엄청나게 넓은 바다가
엄청나게 좁은 가슴에
안겨 신음한다
웃는 바다의 입에
안개가 내린다
한 올 안개가
두 올 안개가
안겨 내린다
여긴 참 커다란 감옥
없으며 있고
있으며 없는
우리는 모두 갇힌 몸
바람이 신음한다
한 줄기 바람에
두 줄기 바람이
갇히며 신음한다
폭풍이 되며 신음한다
흙들을 흔들며 신음한다
우리 이마의 주름이
시든 들에 엎딜 때까지
노을 활활 타오를 때까지
여긴 참
커다란 커다란 감옥
바다는 가끔
강은교
바다는 가끔 섬을 잊곤 한다
그래서 섬의 바위들은 저렇게 파도를 부르는 거야
목 놓아 목 놓아
우는 거야
목 놓아 목 놓아
제 살을 찢는 거야.
바리데기의 여행(旅行) 노래
강은교
저 혼자 부는 바람이
찬 머리맡에서 운다.
어디서 가던 길이 끊어졌는지
사람의 손은
빈 거문고 줄로 가득하고
창밖에는
구슬픈 승냥이 울음 소리가
또다시
만리길을 달려갈 채비를 한다.
시냇가에서 대답하려무나
워이가이너 워이가이너
다음날 더 큰 바다로 가면
청천에 빛나는 저 이슬은
누구의 옷 속에서
다시 자랄 것인가.
사라지는 별들이
찬바람 위에서 운다.
만리길 밖은
베옷 구기는 소리로 어지럽고
그러나 나는
시냇가에
끝까지 살과 뼈로 살아 있다.
바리연가
강은교
1 - 짜장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기역 자로 꿇고, 가장자리에 검붉은 피칠을 한, 널부러져 있는 짜장면 그릇들(검붉은 짜장면이 남아 있기도 하고 먹다가 만 듯 휘저어져 있어 짜장면이 부은 것 같기도 한)을 은빛 통에 담는 남자의 구부정한 모습, 그는 이 시대의 성자가 분명하다, 무릎을 어떤 수도사들보다 진지하게 꿇고 있다, 게다가 곤색 잠바를 수도복처럼 수그리고 있고, 그 위로 수도의 눈물처럼 방울방울 빗방울이 굴러 내리고 있다. 그는 기도하고 있다
기도의 소리 울리는 이곳 시멘트의 성소. 이제 그는 그리스도처럼 두 팔을 벌리고 은빛 `철가방`을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나갈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아름다운 금발, 등 뒤로 펄럭이며, 항상 뒷모습만 보여줄 것이다. 비 내리는 갈릴리호숫가에서 뇌성처럼 경적 소리도 요란한 이 시대를 먹여 살릴 것이다. 아, 하늘을 나는 짜장면 한 그릇, 부활할 것이다. 부활할 것이다. 짜장면 한 그릇
2 – 너에게 밥을
너에게 밥을 먹이고 싶네
내 뜨끈뜨끈한 혈관으로 덥힌 밥 한 그릇
너의 옷을 꿰매주고 싶네
내 조각조각 이어진 뼈로 덮인 바늘 한 땀
아, 눈부신 숨 굽이굽이 휘날리는 너의 낡은 바바리코트
3 – 막다른 골목
막다른 골목을 사랑했네, 나는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나의 애인을 지독히 사랑했네
막다른 골목에서 늘 헤어지던 인사
막다른 골목에서 만져보던 애인의 손
끝없는 미로의
미래의 단추를 사랑했네
오늘 밤은 미로에 갇힌 애인의 꿈을 불러보네
애인의 꿈속을 뛰어다니네
풀처럼 풀떡풀떡 뛰어다니네
사랑하는 나의 애인 사라진 벼랑
아, 숨 막히는 삶
4 - 너를 부른다
너를 부른다
저녁마다 어둠 가에 멈춰 서서 너를 부른다
어둠이 올 때면 지붕들은 더 파리해지지
창문들은 달달 떨며 가슴을 닫기우고
천정에 달린 알전구들은 알몸을 빛내기 시작하지
너를 부른다
어디선가 걸어오는 자정과 자정 사이에서
자정과 자정 사이, 끓는 찌개 사이에서
하루치의 여행을 끝낸 신발들, 얌전히 양말을 벗고
마루 밑에서 마루를 그립게 쳐다보고 있을 때
자물쇠들은 철컥철컥 가슴의 문을 닫고
혼자 남은 별, 문밖에서 잠기는 자물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때
너를 부른다
끓는 호박과 호박 사이, 부글부글 감자와 감자 사이
손가락 살짝 데이며 그리 그립게 기다리는 것들아.
사랑받으려 하지 말라, 사랑하라
내 잠들러 가면 거기까지 따라와 곁에 눕는 갈 곳 없는 그림자 하나
그동안 나는 너무 사랑받으려 하였다, 사랑하지 않았다
너를 부른다
순간의 요를 펴니 손 내미는 영원의 이불
영원의 이불을 덮으니 여기의 이불
살며시 다가와 다 식은 피톨 감싸안는
보라, 지금의 팔을
너를 부르고 부른다, 아직 열려 있는 길 같은 문 앞에서
바지락 줍는 이들에게 고동빛 게 한 마리가
강은교
내가 잠 깨지 않을 땐
잠들어 가만가만
꿈길로만 가고 있을 땐
흔들게, 모래의 이불을
내 잠의 한 귀퉁이 떨어져 나가
내 꿈의 한 귀퉁이 떨어져 나가
밀물 한 줌 끌어오도록
이 바다 파도들 전부 뛰어와
나의 혀 나의 눈초리
밀물의 푸른 머리카락도 빨아 모래밭에 눕히도록
내가 잠 깨지 않을 땐
잠들어 가만가만
꿈길로만 가고 있을 땐
반디
강은교
난다, 어둠 속을
온몸에 불을 켜고
온몸 타는 눈이 되어
넋들일랑
없는 잔등에 실어라
이 모래에서 저 모래로
저 풀에서 이 풀로
한 캄캄에서 더욱
캄캄함으로
너무 늦었는가
달도 꿈쩍 않는 밤
산천에 눈 뜬 그림자도 많아
난다, 어둠 속을
온몸에 불을 켜고
온몸 타는 눈이 되어
스러지며 언뜻
이슬 제치며
배추들에게
강은교
비 내리는 장터에 모여앉은
너희들을 본다.
옹기종기 쓰레기더미 위에 엎딘
너희들을 본다.
비바람에 푸른 살 찢기우고
목숨 꽂은 언 땅에서도 쫓겨나
탐욕의 비늘 낀 손 기다리는
아아 너희들
동강난 뿌리.
너희들은 울고 있다.
파도빛 이파리 허공에 악물어
펄럭펄럭 왼 동리에
눈물 섞어 휘날리며
허리춤엔 낙동강 흙내를
가슴께엔 두만강 솔바람을.
모가지여
이 비탈에도 눈이 오면
한 무더기씩 두 무더기씩
없는 피 쏟아내릴
모가지여
머리엔 흰눈이 내려
흰눈 펄펄펄 엎어져
천지에 흐느낌 괴는 지금은
어스름 저녁, 잔별도 돋지 않는.
백조 커피숍 – L.J.N.에게
강은교
저 포도주스가 강물이라면
만약에
L.J.N.
조각배 저어 그대에게로 가리
바람은 알맞게 불고
돛폭은 지난밤 꿈처럼 부풀어
그러면 노를 잠깐 놓고 포도의 맛을 보리
L.J.N.
저 낡은 휘장이
허리가 묶여 늘어진 그대의 속눈썹이라면
만약에
L.J.N.
휘장을 걷고 그대여
잠시 그대의 눈빛 보여다오
언뜻언뜻 보이는 그대의 눈빛에 쓰다듬겨
나 다시 꿈꿔보리
L.J.N.
떨고 있는 저 흐린 유리창 밑
묵묵히 서 있는 '백조' 간판, 검은 명조체 글씨가
그대의 가슴뼈라면
만약에
L.J.N.
오늘처럼 출출히 비 내리는 날에도 그대 가슴뼈 밑에
비 맞으며 서 있으리
서
기다리기만 하리
L.J.N.
버릇
강은교
아침이면 멍하니 신문의 <날씨란>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살색의 세계지도가 아주 산뜻하게 그려져 있고,
도쿄. 홍콩. 타이베이. 시드니. 카이로. 방콕. 파리. 런던.
호놀룰루. 베를린. 리우. 멕시코시티. 싱가포르. 모스크바.......
거기, 베이징의 네모 칸 안에는 노란 해가
빨간 테두리를 하고 서 있습니다.
도쿄의 네모 칸 안에는 노란 해 밑에 파아란 구름이,
싱가포르의 네모 칸 안에는 노란 해 밑에 파아란 구름,
파아란 구름 밑에는 네 개의 파아란 빗금이......
지금 베를린은 비가 오고 있겠구나,
누군가 붉은 우산을 썼겠구나,
어떤 시인은 비 오는 날의 시를 쓸데없이 쓰고 있겠구나,
그곳에서도 우산 한 개보다 필요 없는 시를 쓰고 있겠구나......
아침이면 멍하니 신문의 <날씨란>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버릇처럼...
벽 속의 편지
강은교
1 - 그대 그림자가
그대 그림자가 그림자를 끌고,
그대 그림자 끄는 그림자가
그림자를 끌고,
그대 그림자 끄는 그림자
다시 그림자를 끌고.
그런데 내 그림자는
자꾸 발을 헛짚네
결결이 눈꽃 피는 길
죽은 풀이 산 풀을 끌고 가는 길.
2 - 누군가 집 뒤에서
누군가 집 뒤에서 울고 있네
그 눈물이 현관을 두드려
문을 열어주네
눈물은 마루로 올라와
이윽고 방으로
내 이불 속에 들어와 눕네
가만가만 물어보네
눈물 한 방울은 너무 큰 것인가
아니면 너무 작은
것인가, 고.
3 - 목소리 하나가
목소리 하나가
도시의 벌판 위에서 떨고 있네
가엾게도 벌거벗었네
사람답게 살고 싶다
그 목소리를 주우러
한밤중에 달려 나갔지만
목소리는 거기 없었네
목소리의 그림자만이 남아
날선 구름 아래 떠돌고 있었네
나는 그림자만을 주워
돌아왔네
두 걸음도 가지 못하는
소리의 그림자만을.
4 - 등불들이
등불들이 켜지네
집들은 입술을 오므리고
길 끝 벼랑 위에 앉아 있네
아직 눈 못 뜨는 불들은
지상의 모든 방 천정에
숨죽여 매달려 있으리라
자기를 켜 줄 손을 기다리며
5 - 가을 저녁
어제 그대의 편지를 받았네
그대의 편지에 들어 있는 톱밥같은 빛들을 받았네
바람에 어린 풀들이 끌려가듯이
그대의 글자들 속에서
수군대는 모래바람
주워내고 주워내도
자꾸 일어나는 모래바람.
그대의 편지를 읽고 또 읽네
짧은 흐느낌 같은 가을 저녁.
6 – 바람 소리
바람 소리 두엇이 달려오기에
반갑게 맞이하네
바람 소리 두엇을 방에 들이려니
바람 소리 서넛이 따라 들어오네
바람 소리 서넛을 방에 들이려니
바람 소리 대여섯이 따라 들어오네
끝이 없네
너희들 여기 있었구나
수천 날 그리 울면서
여기.
7 – 어제 우리는
어제 우리는 가고 있었네
언제나 어제
우리는 가고 있었네
흐르는 것들은 오늘도 흘러서 넘치고
어두은 것들은 한 겹 더 어두워
돌아가지 못하는데
돌아가자
흐르는 것들 한 겹 더 흐르게 하면서
지금 어두운 것들은 한 겹 더 어두운 것들을 데리고
돌아가자 이 땅 모든 얼음 설레는 곳
출렁거리자
어제 우리는 가고 있었으니
언제나 어제
그대여
8 – 너무 큰 구름 떼 속으로
너무 큰 구름 떼 속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 들어가네
땀에 젖은 지붕이
헐떡이며
새를 쳐다보네
그대는 새인가
너무 큰 구름 떼 속으로 날아 들어가는.
9 - 그날
이 세상의 모든 눈물이
이 세상의 흐린 눈들과 헤어지는 날
이 세상의 모든 상처가
이 세상의 모든 곪는 살들과 헤어지는 날
별의 가슴이 어둠의 허리를 껴안는 날
기쁨의 손바닥이 슬픔의 손등을 어루만지는 날
그날을 사랑이라고 하자
사랑이야말로 혁명이라고 하자
그대, 아직
길 위에서 길을 버리지 못하는 이여.
10 - 목소리 하나가
목소리 하나가
도시의 벌판 위에서 떨고 있네
가엾게도 벌거벗었네
사람답게 살고 싶다
그 목소리를 주우러
한밤중에 달려 나갔지만
목소리는 거기 없었네
목소리의 그림자만이 남아
날선 구름 아래 떠돌고 있었네
나는 그림자만을 주워
돌아왔네
두 걸음도 가지 못하는
소리의 그림자만을.
11 - 시든 꽃
시든 꽃을 버리네
그대 목소리를 듣다가
앞산 허리에 걸린
그대 목소리에 이마 기대다가
시든 꽃을 버리네
어느 하루 아름다웠던 그것을
우리가 우리를
버려야 하듯이
용감히
새벽의 입 위에
버리네.
12 - 가을 저녁
어제 그대의 편지를 받았네
그대의 편지에 들어 있는 톱밥 같은 빛들을 받았네
바람에 어린 풀들이 끌려가듯이
우수수수 우리 모두
끌려가고 있는 저녁에.
그대의 글자들 속에서
수군대는 모래바람
주워내고 주워내도
자꾸 일어서는 모래바람.
그대의 편지를 읽고 또 읽네
짧은 흐느낌 같은 가을 저녁.
13 - 늦가을 빈 하늘에
늦가을 빈 하늘에
철새들이 나타났다
일렬종대의 빠른 울음.
빨리빨리 울며, 철새들이
입에 물었던 길
하나씩 던진다
떨어져 온다
그 길
낮게낮게 세상의 이마 위에
떨어져 온다.
14 - 밤길
꿈꾸는 것들만 지상에 매달려
빙빙 돌아가는
밤길
남루한 돌멩이들, 풀이파리들
서로 붙안고
별들 잡아당기고 있네.
15 – 눈을 맞으며
눈을 맞으며
비로소 눈을 생각하듯이
눈을 밟으며
비로소 길을 생각하듯이
그대를 지나서
비로소 그대를 생각하듯이
번개
강은교
어서 오세요
해일(海溢)로든지
번개로든지
이땅 쩍 갈라지도록
힘차게
사랑스럽게
넘치세요
바람 친구들처럼
캄캄한 밤에도 눈 뜨는
별 친구들처럼
시내가 바다가 되는
아으, 물 친구들처럼
오세요 어서
번개로든지
해일(海溢)로든지
황홀하게
처참하게
땅끝으로
결국 처음으로
벽과 그림자의 사랑 이야기
강은교
외로운 벽 하나가 있었다, 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한 여자가 그 벽 앞으로 왔다, 여자는 벽에 기대었다, 참말로 부드러운 어깨였다, 달이 둥실 떠올랐다, 얼마쯤 지났을까, 어깨를 펄럭이며, 뺨을 펄럭이며, 입술을 펄럭이며, 이마를 펄럭이며, 우우우 그 여자, 일어서고 있었다, 벽은 놀라 여자의 그림자를 마구 잡아당겼다, 어깨의-뺨의-입술의-이마의-...... 닥치는 대로 그림자를 몸 속에 집어넣었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벽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어둠이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별
강은교
새벽 하늘에 혼자 빛나는 별
홀로 뭍을 물고 있는 별
너의 가지들을 잘라 버려라
너의 잎을 잘라 버려라
저 섬의 등불들,
오늘도 검은 구름의 허리에
꼬옥 매달려 있구나
별 하나 지상에 내려서서
자기의 뿌리를 걷지 않는다
별똥별 - 심연 속에서 들려 오는 네 번째 노랫소리
강은교
밤하늘에 긴 금이 갔다
너 때문이다
밤새도록 꿈꾸는
너 때문이다.
별의 어깨에 앉아 - 심연 속에서 들려 오는 다섯 번째 노랫소리
강은교
너에게로 간다
나, 어둠의 뼈에 누워
거리에는
나부끼는 피의 깃털들
심장길 굽이굽이
흩날리는 눈썹들
다정한 눈물들이 빗물처럼 유리창에 흐르는구나
보아라,
어디선가
어디선가 다시 만나는
저 환한 골목들을
너에게로 간다
나, 별의 어깨에 앉아.
별 한 개 머리에 인 구름, 섬 사이로 걸어오네
강은교
구름은 어둠의 드넓은 입술
이 섬의 허리도 핥아보고
저 섬의 허리도 핥아보고
이쪽 어둠의 어깨도 쓰다듬어보고
저쪽 어둠의 어깨도 쓰다듬어보고
그러다 얼른 별 하나 꺼내 드네
가슴을 콕콕 찔러대는 별빛 하나.
보십시오
강은교
어둠의 어깨를
보십시오
어둠의 어깨에 기대어
반짝반짝
금빛 소리를 내는
달의 입술이 구름의
이마를 향하여
멈칫멈칫
다가가고 있는 것을,
아, 모든 빛나는 것들이
내는 이 소리를,
아, 모든 따뜻한 것들이
내는 이 향기를,
보십시오.
봄
강은교
노오란 아기 고무신 한 켤레
한길 가운데 떨어져 있네
참 이상도 하지
자동차 바퀴들이 떠들며 달려오다
멈칫 비켜서네
쓰레기터 옆 버스정류소에는
먼지 뽀얗게 뒤집어쓴 개나리 꽃망울
터질락 말락 하고 있는데
'그으대에여어 사아아랑의 미이로오여'
버스에서 내린 한 사람
구르는 돌 하나 냅다 차 던지니
한길 속 거기에 가 서네
참 이상도 하지
햇볕에 젖은
노오란 아기 고무신
누군가 벗어놓은 살처럼 얌전히 꼼틀대는
봄의 깊은 뼈.
봄 기차
강은교
봄이 오면 기차를 탈 것이다
꽃그림 그려진 분홍색 나무 의자에 앉을 것이다
워워워, 바람을 몰 것이다
매화나무 연분홍 꽃이 핀 마을에 닿으면
기차에서 내려
산수유 노란꽃잎 하늘을 받쳐 들고 있는 마을에 닿으면
또 기차에서 내려
진달랫빛 바람이 불면
또 또 기차에서 내려
봄이 오면 오랜 당신과 함께 기차를 탈 것이다
들불 비치는 책 한권 들고
내가 화안히 비치는 연못 한 페이지 열어젖히며
봄이 오면, 여기 여기 봄이 오면
너의 따-뜻한 무릎에 나를 맞대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여행을 떠날 것이다
은난초 흰 꽃 커튼이 나풀대는 창가에 앉아
광야로 광야로
떠날 것이다, 푸른 목덜미 극락조처럼 빛내며
봄날의 끈
강은교
어느 봄날, 책을 묶던 끈이 말했네, 나만큼 묶어보았는가, 나만큼 설레며 세상 것들의 허리들을 묶어보았는가. 이 종이들뿐이 아니야, 푸른 파의 허리며, 무의 넓적한 다리며, ......라면 상자의 그 누렇게 뜬 갈비뼈, 해태라고 쓴, 글자도 선명하던 과자 상자의 허약하던 뼈. 그대의 가슴을 덮던 이불...... 그대의 심장을 흔들던 모래도, 어느 날은 꽃뿌리도, ...... 동백 꽃뿌리도...... 나는 꿈꾸었지...... 그대를 묶는 날을...... 그대를 묶어 내 허리에 칭칭 감을 날을......
파도 묶고, 사과도 묶는, 동백 꽃뿌리도 묶는 푸른 끈...... 내가 그대에게, 시간에게 던지는 이 끈......
봄 무사(無事)
강은교
도시가 풀잎 속으로 걸어간다.
잠든 도시의 아이들이
풀잎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빨리빨리
지구로 내려간다.
가장 넓은 길은 뿌리 속
자네 뿌리 속에 있다.
봄바람
강은교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아현동 시장판
진흙 위에
봄바람이 분다
나물장수 할머니
귀떨어진 바구니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겨울 짧은 해는 멀리멀리
아라사로 북만주로
데려가시고
얼음 박힌 이 손등엔
봄볕 깊이 내려 주소서
천년만년 내려 주소서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6.25때 행방불명된
바람둥이 할아버지 죽은 넋일랑
눈 어두운 세상살일랑
달래 뿌리 쓰다듬듯 쓰다듬어
갈 데 없는 주름살 위에
사과 같은 손녀
빨간 뺨 위에
봄바람이 분다
봄에는 언제나
강은교
봄에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다녀간 이가 있다
발자국들을 보라
천천히 자라오르는
산천초목.
하늘에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쳐다본 눈동자가 있다
달려가는 달려가는
빛
별들을 보라.
그늘에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쉬어간 이가 있다
잎새들
에 살랑이는
바람.
골짜기에는 언제나
나보다 빨리 소리친 목소리가 있다
보라
메아리들이 웃음 합창한다
봄에 대한 추억 하나
강은교
내 기억에 남아 웃고 있는 당신은
일찍이 거기 놓아두었던 나비 날개 하나
일찍이 거기 놓아두었던 나비날개의 그림자 하나
일찍이 거기 놓아두었던 종소리 하나
일찍이 거기 놓아두었던 종소리의 집 하나
일찍이 거기 놓아두었던 별 하나
일찍이 거기 놓아두었던 별의 길 하나
일찍이 거기 놓아두었던 불빛 하나
일찍이 거기 놓아두었던 불빛의 마음 하나
거기서 네가 지금 일어서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
강은교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흔들리는 바람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이 밟은 아침 햇빛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반짝이는 이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분리수거
강은교
이 통은 사상의 통
이 통은 도덕의 통
이 통은 주제의 통
이 통은 신념의 통
이 통은 성찰의 통
주제가 반쯤 구겨졌네
사상의 몸을 덮친 프레미엄 쥬스
요구르트에선 신념이 흘러넘치네
성찰이 부서졌군
서성거리는군, 도덕이
분홍. 노랑 꽃망울 - 너무 짧은 사랑 이미지
강은교
다 시든, 천 원짜리 화분에 자꾸 물을 주었더니
어느 날 아침
분홍. 노랑 꽃망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만
피어버렸다.
불멸
강은교
네가 버린 담뱃갑
네가 버린 구겨진 편지지
네가 버린 일회용 종이컵
네가 버린 껌종이,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손목시계
네가 버린 거대한 기억
네가 버린 어스름
네가 버린 거울, 심연을 떠다니는,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너로 하여 빛났던 저 잡풀
너로 하여 빛났던 저 모래바람 입은 안개
너로 하여 빛났던 저 땀의 혀,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틈새
네가 버린 상징
네가 버린 고래의 날개 삼천 리, 내 살에 덮여
이리 쿵덕 저리 쿵덕
오래된 수저 끝에서, 이리 쿵덕 저리 쿵덕
흩날리는 것들 가슴에 매달려,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영원
네가 버린 어머니의 먼 목소리
네가 버린 일기의 마지막 장
네가 버린 여름날 정오,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신
네가 버린 신념들
네가 버린 그림자 흩날리는 해방
네가 버린 자유, 접시 위에 누워,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곰국
네가 버린 김 오르는 선반
네가 버린 꿈의 연기 긴 사진틀
네가 버린 불타오르는 책상, 이리 쿵덕 저리 쿵덕
흩날리는 불멸 가슴길 깊이 흐르니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나 계시는 너
이리 쿵덕 삼천 리
저리 쿵덕 삼천 리.
붉은 강
강은교
1
가서는 안 옵니다.
그대는 물이 되었는지 또는
그림자가 되었는지
흔적도 없습니다.
뵈지 않는 하늘에다 목매달아
빼곡히 골목골목 어둠이 되어
그래 여긴 사철
눈물이 모래알들을 눕히는지요?
나무란 나무 가지마다
터럭이란 터럭 끝마다
피묻은 그림자 주렁주렁 열리는지요?
그대는 깊디깊은 강
슬픔들은 저녁 되어
그 누더기옷을 벗으니
그대의 온몸은 빨갛게 물듭니다.
끝에서 다 쓰러진 꿈 하나
비틀거립니다
몰래 춤춥니다.
2
저물어 붉은 강에는
푸르게 뚫린 창이 두 개 있읍니다.
창 하나는 우리의 그리움입니다.
물은 서 있고
아무리 흘러도 꿈은 흐르지 않아
흐르지 않는 것끼리 모여서
창 둘은 우리의 사랑입니다.
바람이 부니
곁에 섰던 어둠들
우르르 흩어집니다.
어둠 속
작은 밝음들도 흩어집니다.
창 둘이 날아갑니다.
뵈지 않는 곳
결국 뵈는 곳에서
오오 붉은 강
우리를 위하여
지구의 끝에서
처음을 위하여.
붉은 저녁 너의 무덤가
강은교
귀뚜라미 한 마리 걸어오네
너풀거리는 두 개의 더듬이
등에 찰싹 붙어버린
두 개의 날개
붉은 저녁 너의 무덤가
달이 떴는데
미끄러지지 않는 그림자 하나
무릎에 앉혀
- 이제 겨우 풀 하나를 지나갔군
타박타박
붉은 저녁 너의 무덤가
-그 풀은 너무 억세었어
-서로 싸우고 있었어
-허리를 비비대며
-글쎄, 싸우고 있었다니까
내 가슴
어둠 겹겹
붙잡고 붙잡네
놓아주지 않네
사랑의 비늘 하나
붉은 해
강은교
여기서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붉은 해 등진 큰 벌에서
바리바리 피를 모으던 어머니
좋은 날 좋은 시를 가렸지만
부끄러워라 우리 살은
한 대접 냉수에도 쉬이 풀리는
소금이라 하더이다.
비
강은교
부르는 것들이 많아라
부르며 몸부림치는 것들이 많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이 오는 날
눈물 하나 떨어지니
후둑후둑 빗방울로 열 눈물 떨어져라
길 가득히 흐르는 사람들
갈대들처럼 서로서로 부르며
젖은 저희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보았느냐
아아 황홀하여라
길마다 출렁이는 잡풀들 푸른 뿌리.
비가(悲歌)
강은교
그 벽에는 못 하나가 쳐져 있고 거기 내 외투 한 자락이 걸려 있습니다.
내 외투 한 자락에 덮여 하늘이 조금 팔락거립니다.
거기 손을 내밀어 봅니다. 창틀이 긴장합니다. 창틀의 근육에 걸려 내 외투 자락이 빳빳하게 되었습니다.
그 벽에는 못 하나가 쳐져 있고 거기 내 외투 한 자락이 걸려 있습니다. 내 외투 한 자락에 덮여 하늘이 조금 더 팔락거립니다.
그 벽에는 못 하나가 쳐져 있고 거기 내 외투 한 자락이 걸려 있습니다.
그 벽에는 못 하나가
아야아, 못 하나가
비닐봉지의 추억
강은교
어느 가을날 오후,
비닐봉지 하나가 길에 떨어져 있다가 나에게로 굴러왔다
그 녀석은 헐떡헐떡거리면서
나에게 자기의 몸매를 보여주었다.
그 녀석이 한바퀴 빙 돌았다.
마치 아름다운 패션모델처럼
그러자 그 녀석의 몸에선 바람이 일었다
얄궂은 바람, 나를 한대 세게 쳤다
나는 나가떨어졌다 한참 널브러져 있다가 내가 정신을 차렸을때는
그 녀석 비닐봉지는 바람에 춤추며 가는 중이었다
나는 마구 달려갔다 바람속으로 비닐봉지는
나를 돌아보면서도 자꾸 달아났다 나는 그 녀석을 따라갔다
넘어지면서 피흘리면서
쓰레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으로
실개천이 쭈빗쭈빗 흐르고
흐늘흐늘 산소가 없어지고 있는 곳으로
우리의 꿈이 너덜너덜 옷소매를 흔들고 있는 곳으로
비닐봉지는 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나는 위대해! 나는 영원해!
나는 몸을 떨었다. 귓속으로 그 녀석의 목소리가 쳐들어왔다
나는 영원히 썩지 않는다네 썩지 않는 인간의 자식이라네
비닐봉지는 바람 속에 노오란 꽃처럼 피어났다.
빈자 일기 - 구걸하는 한 여자를 위한 노래
강은교
우리는 언제나 거기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혀와 혀를 불붙게 하며 눈물로 빛과 빛을 싸우게 하며 다정한 고름 고름 속에 오래 서 있은 허리를 무너지게 하며, 황사 날아가는 무덤 가장자리에서.
그곳 천정은 불붙은 태양이었고 바닥은 썩은 이빨의 늪이었다.
싸우는 이마 갈피로 등뼈 갈피 갈피로 언제나 종이 울렸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언제나 종이 울렸다
황혼을 알리는 종이. 언제나 종이 울렸다 임종을 알리는 종이.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그보다 먼저 흘러갔다.
늦은 손목 눈짓 사이에서, 번쩍이는 번쩍이는 허리며, 황금 돛대들 사이에서 흘러가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 굳은 피 한 점 던질 때까지, 누군가 쓸데없는 제 죽음 하나 내버릴 때까지,
우리가 헌 그 죽음 입고 검은 종소리 한 겹 듣지 않을 때까지.
아아 돌아오지 말라 사랑하라,
그대 아버지가 그대에게 앵기는 독, 그대 나라가 그대에게 먹이는 독, 물의 독, 공기의 독, 흙의 독.
다만 우리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여기서.
한 고름에 다른 고름을 접붙이며 즐겁게 즐겁게, 할 일은 그뿐, 구걸하고 시들어 구걸하는 일뿐,
그러므로 결코 일어서지 않았다, 잠들지도 않은 채.
빗방울 셋이
강은교
빗방울 셋이 만나더니, 지나온 하늘 지나온 구름 덩이들을 생각하며 분개하더니,
분개하던 빗방울 셋 서로 몸에 힘을 주더니, 스르르 깨지더니,
참 크고 아름다운 빗방울 하나가 되었다.
빗방울 하나가
강은교
1
빗방울 하나가
창틀에 터억
걸터앉는다
잠시
나의 집이
휘청-한다
2
빗방울 하나가
소나무 끝에 매달려 있다
입을 꼬옥 다물고
장수풍뎅이 한 마리
기를 쓰며
빗방울 가슴을 연다
그 속으로 포옥 빠진다
포옥 포옥 모두 빠진다
매달려, 소나무 끝
또는 바람 끝.
4
빗방울 하나여
지금 내 창으로 달려와
나를 똑똑 두드리는
빗방울 하나여
네가 들고 오는 구름의 한 켠도
알지 못하는 나
치자꽃 한 송이의 목마름도
눈치채지 못하는 나
빗방울 하나여
나는 자꾸 우산을 쓴다
어제 바람에 우산대가 부러졌음에도
찢어진 우산으로 너를 안으려 한다
세상의 모든 반짝이는 잎 뒤로
달려오는 너
세상의 모든 무덤 뒤로
꿈꾸며 달려오는 너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
희디 흰 몸 푸는
너
5
무엇인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빨래 너는 여자
강은교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고 있다,
런닝 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그 여자는 이제 아기 원피스를 넌다.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서서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 여자의 무용은 끝났다. 그 여자는 뛰어간다.
구름을 들고
사과 껍질 – 향가 풍으로
강은교
아침의 식탁 앞에서 훌훌 껍질을 벗기우는 너
순식간에 흰 살의 집을 잃어버리는 너
식탁의 의자 위로 하얀 피 철철 흘리는 너
그러나, 그러나 껍질을 벗기우고도 더 달콤한 너.
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산길
강은교
그러면 이제 오게
어디 잠 없는 꿈이 있으랴
그래 그래 괜찮다
잡풀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잡풀들이 고개를 끄덕일 땐
잡풀들의 허리도 끄덕인다
뿌리만이 진흙 속에 굳게 박힌 채
끄덕인다
반쯤 깎인 산 전체가
끄덕인다
그래 그래 기다리마
가슴 패인 산에
아무렇게나 솟은 잡풀들이
낮은 고개들을 끄덕인다
어디 꿈 없는 잠이 있으랴
그래 그래 괜찮다
그대 이 별에 있다면.
살그머니
강은교
비 한 방울 또르르르 나뭇잎의 푸른 옷 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윗도리가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브로치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도 살그머니 열리네
햇빛 한 자락 소올소올 나뭇잎의 푸른 줄기세포 속으로 살그머니 살그머니 걸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쓰다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폭풍에 펄럭펄럭 휘날리는데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로 걸어가는데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를 쓰다듬는데
나뭇잎의 푸른 윗도리, 나뭇잎의 푸른 브로치,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 나뭇잎의 푸른 피톨들을 살그머니 감싸안는데
살그머니 너의 속살을 벗기고, 가슴호주머니를 만지니, 살그머니 열리는 너의 수천 혈관의 문
시간이 한층 두꺼워지네
우리의 사랑도 살그머니 두꺼워지네.
삼촌
강은교
스물아홉에 죽은 삼촌은 유난히도 살이 하얬지.
눈처럼 흩날리기 위하여
흩날려 온 나무 실뿌리 속속 스며들기 위하여
늦가을 솔밭으로 그리도 빨리빨리 달려가 버린 삼촌.
어디서 풍겨오는 비릿한 내음일까.
날 어두워, 허리 굽은 길모퉁이 만지작이고 있으면
온통 피 칠한 노을 따라 비칠비칠 걸어오다 쓰러지는 달덩어리.
바람 펄럭이는 발 밑에선
딩구는 돌멩이며, 몸 뒤집혀 버둥대는 풍뎅이......
허리 으스러진 불개미 같은 것
소리도 없이 흐느끼는데
이제 눈이 내리는구나.
별도 뜨지 않는 하늘에 기대어
펄펄, 삼촌 같은 눈이
올겨울엔 참 많이도 내리는구나.
상처
강은교
- 모든 형식은 실험되었으며 모든 내용은 질타되었으며 모든 혁명은 후회하였네
아름다운 시 하나 찾아
테그레톨을 먹습니다.
하루에 두 번씩 살색의 알약 둘
테그레톨은 나의 피로 가는 문입니다.
피의 문이 열립니다.
피톨들이 아우성치며 달려나와
테그레톨을 받아먹습니다.
피들은 이윽고 잠잠해져
파도칠 줄도 모르며
나의 뇌에 샛강처럼 흘러듭니다.
상처 하나가
샛강 옆 갈대밭에
동그마니 앉아 있습니다.
-모든 형식은 실험되었으며
-모든 내용은 질타되었으며
-모든 혁명은 후회하였네
의사 선생님은 늘
말씀하십니다
테글레톨을 잊지 말라고
상처를 눈부시게 켜들고
강은교
적도의 꽃 브룸엘리아드 필 때 너에게 가리라
거기, 날개 푸른 새들 날고 있으리
상처를 눈부시게 켜들고 너에게 가리라
거기, 푸른 이끼들 밤이슬에 몸 씻고 있으리
네가 상처를 보듬어 주면
거기, 뺨이 분홍인 구름들 소곤대며 이끼에 찾아오리
이끼를 들추면
지상의 모든 사랑들이여, 잠시 걸음을 멈춰라
첨 보는 별 얇은 구름 속에서 긴 속눈썹 펄럭이고 있으니
뜻밖에 일어서는 저 배후(背後)들
남은 상처 모두 벗어라
내 눈까풀 속에 남은 꿈, 만지작거려라.
일생에 한 번 피는 꽃 브룸엘리아드 필 때
새
강은교
자네, 여름에
타는 모래 위에서 보았어.
자네, 가을에
흔들리는 풀섶에 서 있었어.
겨울에 자네 그림자
내리는 눈 속에 펄럭이더니
지난 봄 피는 꽃 사이로
그리운 기침소리.
우리 여기 있노라
날개 결코 사라지지 않노라.
그런데 지금 어디
어느 황혼 허리 넘으며
청태(靑苔) 꿈밭에 애써
자네 핏방울 서너 점 뿌리고 있는가.
새벽바람
강은교
이제 일어설까, 일어서 떠나볼까
새벽바람이 도착하니 어둠은 슬며시 물러가는구나
모든 잠의 옷섶에서 삐져나온 꿈들은
벚나무 흐린 그림자를 핥으며
뒤숲으로 빨리 사라진다.
이제 일어설까, 일어서 떠나볼까.
나의 허약한 아버지가 나를 부르고 있으니
가장 작은 지상의 것들이 나를 부르고 있으니
지상에서 가장 작은 불을 켤 수밖에 없는 이를 위하여,
눈물 하나가 끌고 가는 눈물을 위하여,
하루 치의 그림자밖에 없는 이를 위하여,
어디서 울고 있는 애인들을 위하여,
어디서 웃고 있는 순간의 입들을 위하여,
여기,
추억은 추억의 손을 쓰다듬으며 놓지 않는 곳
오래도록 지구를 돌아다니고 있는 구름이
어슬렁어슬렁 안개의 이불을 꿰매고 있는 곳
이제 일어설까, 일어서 떠나볼까
모든 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숨을 헐떡이고 있다.
그대여, 길이 될 수밖에 없다.
생자매장(生者埋葬)
강은교
1
오는가, 누구
저 닳은 들 밖에서
울리지 않는 종
소리 울리며
바삐바삐 다가오는 이.
뼈의 그늘을 핥고
핥아 속속들이 어둠 빛으로
타오르면서
무한궁륭(無限穹隆) 넘고 넘어
결코 멸하지 않으면서.
추어라
불의 춤을 추어라
오는 강 오는 바람
끝없이 뒤척이는
밤
떨어진다, 여자들은
구렁으로
소리친다, 산[生] 것 모두
함께 부둥켜 안아.
오라 친구
달콤한 잠
와서 가만가만 여기
살[肉]내 나는 재[灰]를 묻어라.
이슬의 대지에
다만 녹으라 녹으라
명령하며.
다음 일어서라 일어서라
구원하며.
2
죽어도 죽지 않는
피[血]의 소요를.
살아도 살지 않는
살[肉]의 평온을.
언제나 있는 슬픔의
언제나 없는 슬픔을.
보고 있었어, 난
결코 잊을 수 없었어, 한 탄생
뒤에서
달려오는 다른 탄생을.
어둠 속에서
빛나는 어둠을.
물의 죽음 뒤에
불의 태아(胎芽).
눈뜨고 이렇게
쓰러져 누운 벌레들 짐승들
은빛 비늘 반짝이는 물고기들
입술 부비며 침 흐르며
저녁 연기 사방에
쏘다니는 것들.
눈뜨고 이렇게.
흐르는 자는 복되도다.
한 번 흐르고
다시 흐르는 자는
은총받도다.
핥아라, 네 어둠이
구름을 벗기고
구름 밖 기다리는
그 사람
무릎에 재[灰]로
잠들 때까지.
3
사자(死者)는 행복하라
사자(死者)는 행복하라
어둠이 저를 이끌고
빛이 저를 묻으니
오
사자(死者)는 복되라
사자(死者)여 그리워라.
나 오래 여기 있었네.
먼지 길 바쁜 내 가슴
파도 늘 울리는 발의
바다, 아침에
나 벌써 저녁을 기다렸네.
저녁에 다음 아침
탐내 꿈꾸듯
눈물이던 한때 내 얼굴
게거품이던 한때 내 입술도
한밤중 없는 이마 헤매어 맞추던
내 잠도
여기 입다문 나팔꽃 실뿌리 되어
앉아 있네 튼튼히 살아 있네.
오라 즐거이 썩으라
엉켜 잊지 못하는 자들
이 나팔꽃 꿈속
어둠아비보다 더 넉넉히
꽃피우라 노래하라.
4
수레야 달려라, 연기가 간다
이끼 짙은 지붕마다 눈부비고 일어나
허허벌판 돌아보며 돌아보며
그리워 아주 눈감고 간다.
수레야 달려라, 구름이 간다
버릴 수 없는 사랑 빗물로
잠깐 잠깐 쏟으며
동그란 눈물산 여기저기
이루며 간다.
수레야, 아무도 뵈지 않아
수레야, 아무도 멈추지 않아
캄캄한 길을 누웠다 일어나는
누웠다 일어나는 해 얼굴 뿐.
수레야 달려라. 풀이 간다
일어서 바람에 꺾이며
엎드려 바람 피하며
괴로워 다시 제 씨앗 뿌리며
간다.
간다, 바다가 간다
물새들 날개, 새우들, 게들 비린내
심장기슭에 묻혀
굽이굽이 몸부림
사라지고자.
달려라, 황금수레야
데려가라, 이 수만 발자국
그대의 광야, 결코 돌아옴 없는
포근한
소멸의 방(房)으로.
서시
강은교
이제 눈뜨게 하십시오
눈떠 저희의 손과 발
바람 속에 흔들게 하십시오.
수천킬로미터의
들판을 지나
들판에 겹겹이 앉아 있는 노을들과
굽이치는 죽음을 지나
당신이시여
검붉은 피 여직 흐르는
슬픈 가슴이시여
여기엔 머뭇거리는 길뿐이오니
여기엔
눈먼 안개와
허우적이는 그림자들뿐이오니
아,이제 일어서게 하십시오.
일어서 당신의 깊은 가슴 속
저희가 헤엄치게 하십시오
저희의 피가 수평선을 이루고
저희의 흐느낌이
함께함께
출렁이게 하십시오
섬 – 어떤 사랑의 비밀 노래
강은교
한 섬의 보채는 아픔이
다른 섬의 보채는 아픔에게로 가네.
한 섬의 아픔이 어둠이라면
다른 섬의 아픔은 빛
어둠과 빛은 보이지 않아서
서로 어제는
가장 어여쁜
꿈이라는 집을 지었네.
지었네,
공기는 왜 사이로 흐르는가.
지었네,
바다는 왜 사이로 넘치는가.
우리여 왜,
이를 수 없는가 없는가.
한 섬이 흘리는 눈물이
다른 섬이 흘리는 눈물에게로 가네.
한 섬의 눈물이 불이라면
다른 섬의 눈물은 재(炭).
불과 재가 만나서
보이지 않게
빛나며 어제는 가장 따스한
한 바다의 하늘을 꿰매고 있었네.
섬의 발 - 심연에 비추는 풍경 일곱
강은교
참, 발이 시리겠다,
저 섬은.
가야 때부터 있었다는
저 섬은.
꼼짝않고 바닷물에 두 발을 담그고 서 있는
저 섬은.
소리
강은교
1
어서 가요, 어머니
이 햇빛 따라가요, 어머니
벌판의 풀들도 전부 일어서는데.
바라보면 동으로 동으로
힘주어 흔들리는데.
꽃이란 꽃에 다 물들고
바위란 바위에 다 물들고도 흥건히 남아 우리 얼굴 비추는
이 햇빛 따라가요.
갈 곳 몰라
헤매는 저 구름덩이들과
살 틈마다 웅크려 누운 고름들
울창한 어둠일랑
쓱쓱 베어내고
잡초 베어내듯
쓱쓱 베어내고.
바람도 우리 등 밀어 주네요
마른번개도 데려와
와르릉 쾅
앞산의 그림자들
죄 걷어가네요.
이 골 저 골 부르튼
발들이여 모여라
없는 길 만들어
씽씽 달리게
이제야 이제야
불함산(不咸山)*으로 달리게.
위의 복은 등에 지고
아래 복은 머리에 여
앞의 복은 안아들여
옆구리 복은 껴들여
아, 이제 보이네요.
벌판 따라 일어서는 길 저 끝으로
춤추며 반가운 아리라*
핏멍 맺힌 뼈
마디 마디마다
첨 보는 꽃들 웃으며 오고
한숨 수북 쌓여 있는 가슴께에선
신천지라 신천지라
잔물결 이는 소리.
하늘님이여
복 주신 우리네 하늘님이여
아리라 찬물에
지난 길 모두 씻어
흰 돌 맑은 신단(神壇) 세우리니
부디 거두어 주사이다
님의 큰 옷섶에
거두어 주사이다.
* 불함산(不咸山): 백두산(白頭山)의 고명(高名)
** 아리라: 송화강(松花江)의 고명
2 - 柳花(유화)
안개 무척 쌓이던 날
나뭇잎 무성한 머리칼 사이로
두 눈 깊이 감추며 너는
먼 산이 보이느냐고
먼 산에 남은 별 하나
그게 보이느냐고
물었었지.
날이면 날마다 취해
흐르는 물에 흰 이마 적시고야
잠이 든다던 너.
비단 커튼 펄럭이는 머리밑
험한 꿈 굽이굽이엔
언제나 신경안정제 스무 알 마련해 놓고
그 사내 바다 건너 찾아와
짐승처럼 웃는 날이면
한 알 두 알
잠결에도 문득 헤아려 본다더니.
어디로 갔느냐,
네가 남겨놓은 하얀 명함에는
유화(柳花)라는 두 글자
묘비명처럼 반짝이는데
오늘도 어두운 거리 거리
눈물 되어 떠도는,
그 옛날
부여 강가에 누워있던
유화(柳花)여.
안개 달리는 강변로
은빛 블라우스 바람에
흩날리던 네
허리 속에서 지금
한 큰 나라가 일어서고 있다.
3 - 무악재
그런데 웬일일까
오늘 내 허리에선
바람 우는 소리가 난다
탈탈탈 탈탈탈
비 내리는 무악재 고갯마루엔
지난밤 죽은 순례의 눈썹도
춤추며 흩날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허적허적 행인 두어 서넛
흐린 하늘을 점점 더
쳐다보고 있다.
(미끄러지면 끝장이야)
밤새 10년은 담뿍 늙어버린 김씨 아저씨
수숫대 머리칼 뒤로
솟아오른 힘줄 쥐어
기어를 넣는다. 그러다
급브레이크
이리저리 우리 갈대 흔들리면
잊을 수 없어라 차창 밖 빗소리
탈탈탈 탈탈탈
내 허리께에선
바람 마구 악을 써대고
악쓰다 악쓰다
저희끼리 울어댄다.
아, 울어댄다
납작하게 뻗은 앞길이.
앞길에 서 있는 잿빛 지붕의 기와들이.
하릴없이 하늘 아래 올라앉아
비 촐촐 맞고 있는
녹슨 안테나의 벌어진 팔이며
허공에 대롱대롱
서부장의소, 라고 쓴
간판 같은 것들이.
그런데 누구인가, 저들은
한짐 가득 죽음 져나르며
젖은 팔 골백번도 더 흔들어
길 건너고 건너는 이들
비가 내리고.
무악재 고갯마루
속절없이
순례의 눈썹이 내리고.
4 - 신라 처녀 薛女(설녀)를 위하여
님이여, 아 멀리 계시는 님이여
허구헌 날 불어대는 저 바람 소리처럼
형체도 없으신 님이여
지금쯤 어느 진흙 구렁을 지나시기에
어느 산 깊은 그림자에
젖은 옷깃 담그고 계시길래
지새는 밤이면 밤마다
손 닿지 않는 별빛만 보내오시고
동구 밖 시든 풀 줄거리엔
무서리 가득가득 던져 놓으시는지
아무도 뵈지 않아라.
훤히 뜬 내 두 눈엔
넘쳐나는 눈물 기어코
눈발 되어 쏟아져라.
그날 님과 잘라 가진 반쪽 거울엔
비추이느니 피울음 황혼, 황혼뿐
지는 달도 반만 번뜩이는데
어찌하리, 여기엔
돌아오지 않는 이름들 너무 많으니
그 이름들 밤이면 무서리로 내려 내려
온 땅 하얗게 우는 걸 어찌하리.
님이여, 아 행방불명하신 님이여
허지만 어딘가에서 자꾸 오고 계실 님이여
내일이면 불현듯 눈처럼 달려오셔서
이내 몸 환히 알아보시라.
밤 끝에 해는 더 높이 일어서고 있으니
튼튼한 솔잎 너머 까치 울음소리
오늘 따라 가까이 내려오고 있으니
가실(嘉實)님, 나의 님이여.
5 – 그 옛날 선화공주의 소리
새벽, 우리는 암울한 강에서 일어나
바람 소리를 마시며 움켜쥔 이마 끝 동편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자) 내 꿈은 바다가 되는 거예요
바다가 되어 온 세상
출렁이는 팔 밑에 거느리고
사철 꽃 피고 피게 하는 것
사철 꽃 지고 지게 하는 것
강바닥에는 게 한 마리 꿈틀거리지 않는데......옷 다 벗은 자갈 몇,
저희끼리 개펄 같은 피 흘리고 흘리고 있는데......
(남자) 내 꿈은 바람이 되는 것
바람이 되어 온 세상
머리카락 카락마다 휘감고
수천 년, 수천 년을 달려가는 것
눈 오면 눈꽃
비 오면 빗방울 이 큰 손에 담아
땀 가득 누운 언덕길, 솔가지에는 은빛 거미줄 구슬피 피어 있다.
(허공에 나는 집을 짖지요
내 몸에 고인 피란 피 다 뽑아내어
내 몸에 고인 이슬이란 이슬 다 게워내어
눈물이란 눈물 한숨이란 한숨
한데 한데 모아
칡덩굴보다도 서리서리
은실 이엉 올리지요
보세요
하마 솔개도 눈부셔 피해 가는
무지개빛 내 단단한 등어리
여덟 개의 길고 긴 발)
정오, 우리는 무릎을 걷어 올리고 기다렸다. 햇빛에 속속 씻기우며.
말했다, 말없이, 노래했다, 노래 없이. 그림자도 없는 우리 키 만지며,
서로 서로.
(남자 ·여자) 자,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걸어가면서도 눕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눈썹이며 머리털
천지에 흩날리는 법
어둠이 빛이 되는 법
그대는 바다가 되기 위하여
그대는 바람이 되기 위하여
등 뒤에선 잎새 같은 별이 떠오르고 우리는 다시 걸어갔다.
빗방울이 달려오고 있었다.
6
누가 오고 있을까.
잡풀들 몸서리치는 길 위엔
흐르느니 얼굴 반쪽 된
달빛뿐인데
자정도 어언 으슥한
어둠 저편으로
흐드득 흐드득
바람 쓸리는 소리.
무에 이 문 흔들고 있을까.
흔들고 또 흔들어
어둠으로 꽁꽁 결박당한
내 온몸
드디어 새벽 앞에 일어서도록.
강물이지, 그건 아마도
뵈지 않는 곳에서
뵈지 않는 곳으로 흐르는
아, 넘져나는 게 일이고 일인
사랑이지.
저것 좀 봐
눈물 자욱한 하늘 가득
출렁이는 내 머리칼,
몇 년을 울며 있었는지
헌데투성이 발자국 발자국들
하나씩 자갈밭에
캄캄한 제 그림자 흩날리며
눈을 뜬다.
눈을 뜬다, 그래
우리 강물에 앉아 있으면,
나는 달빛 당신은 젖은 바람 되어
땅 끝에서 끝으로 두둥실
떠다니고 있으면,
가문 들판엔 신신한 빗방울
궂은 날엔 빛그리메
한데 한데 날고 있으면.
7
그때 노인은 바람 소리에 기대어 있었다.
풍선 서넛 목매단 차양 아래
햇살은 진창길 할퀴며 달려나오고
우리는 잠시 등 뒤를 손가락으로 털었다.
목마는 얼씬대는 구름 그림자 하나 없이
쇠기둥에 매달려 안간힘 안간힘인데
개펄 노인의 뺨에선 땀방울이 헐레벌떡 모래 누운 길을 가리켰다.
저길 좀 봐요, 길 한복판
버얼건 입김 허공에 펄럭대며
구겨져 누운 저 남자
가슴에서 다리에서 허리에서
너울져 내리는 피의 폭포
휩뜬 눈 서리서리
감기는 해덩이
저길 좀 봐요, 바람 굽이굽이
시퍼런 시퍼런 하늘 건너
눈물들 한바탕 우짖는 길 건너
한 입 피 베어문 달 어느새
산그림자 위에 앉았네요
날개 펴고 활활
나네요.
저길 좀 봐요,
몰매 맞은 나무와 풀들
퍼덕퍼덕 온 들판에 까무라쳐
허공 향해 뿔뿔이 드러눕는 것을.
사색이 된 강물
한 큰 바위 아래 가까스로 멈추며
휘날리는 꽃잎 꽃잎 가슴결 틈틈이 동여매는 것을.
그날 우리는 보았지.
살빛도 못 가리는 우리네 옷섶마다
막무가내로 쏟아지던 빗방울이며
그리 사랑하던 이
황산벌 풍경마다 볼 비비며
볼 비비며 끌려가던 것을.
어디로 가시나이까, 왕(王)이시여
바라보면 얼기설기 구름뿐
헌데투성이 백강(白江)의 하늘
젖은 모래밭엔 매달리느니 길길이 뛰는 어둠인데
바위여, 천공에 늘어선 꿈이여
물결에 얹혀 우리 영영 출렁이게 하라.
목메이게 세상 가득
꽃내 흐드러지게 하라.
그때 노인은 우뢰소리에 기대어 있었다.
골목 밖마다 튀어나올 별빛 아이들 목늘여 기다리며
이제나 저제나 목마를, 간밤 꿈자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온 산마루 훨훨 타오르는 꿈, 우리는 마른 번개에 이마 흠씬 베고 바람벽에 뒤뚱거렸다.
넘치는 백강(白江)의 우뢰는 끝없어
흐려지는 눈시울 우리는 캄캄한 소맷자락으로 닦았다.
닦았다, 노인의 어깨 너머 넘실대는 거품이며
얼떨결에 개켜 놓은 살점들이며
아직 흐르지 않은 한숨들, 이슥토록 눈물들……
별빛 아이들은 끝내 오지 않아
거품 곤두박질치던 길 어언 간 곳도 없어.
8
밤이 오네요, 또다시
퍼덕퍼덕 발치 가득 드러눕는
이 그림자들 보세요,
굼자리란 꿈자리마다 헤집어
뛰어오르는 핏물들
싸락눈처럼 흩날려 아아아
외로운 살덩이들
그래, 우린 강물을 건너왔단다. 비릿한 눈물 거품 섞어
마시며, 일분은 몸서리하는 가랑잎으로,일분은 다 해어진
물살로, 그믐달빛은 숨죽인 우리 등어리에 매달려, 그래,
칠흑 어둠에 스며왔단다.모개신은 그때 불던 바람이 움켜
가 버리고, 버리고.
부쩍 오래 주무시네요, 요즘은
굽이굽이 꿈길
처녀적 마을숲이나 헤매시며
모래 웅덩이 혹은 밭고랑
엎뎌 있는 모개신이나 속속 찾아내시며
그래, 우린 장돌뱅이 안개였단다, 주렁주렁 발바닥에 껴
앉은 물집들 별 없는 하늘에 꽃불로 터뜨리며, 눈 뜨면 뵈
지 않는 길 눈 감아 허덕허덕 좇아, 저물녘이면 맨발에 덮
이는 노을, 때없이 찬비에 속살 적시는 번개
허지만 어디 그 모개신에 비할 수야
한가으로 달려와 껴안기는 임진강 모랫벌
한뭉텅이로 우는 바람 언저리
그 안개에 비할 수야
이제 나 눈 감아 볼께요,
눈감아 후려치는 물살 데불고
어머니의 강 흔들어 볼께요,
세상 어두워
해 다 져 버렸는데,
울어서 퉁퉁 부은 눈시울
밤바람에 비비며 잔별 서넛
슬몃 저 길로 일어서 오는데.
9
눈떠야 하리
시든 꽃대궁에 누운 별빛을 지나서
몸살하듯 내리는 한밤 무서리를 지나서
서슬 푸른 바람 끝
새벽과 새벽이 맞닿은 곳
거시 맨몸으로
일어서야 하리
녹두꽃은 녹두꽃 마른 허리를 비벼라
담장이는 흰 눈에 풀풀
감긴 머리칼을 풀어라
등에 진 땅이 무거워
엎드려 흐느끼는 돌멩이여
씻어라 진흙구덩이 너의 눈물로
별보다 눈부시게 너의 속살로
강물이 넘어지고 있었네
부서진 모래벌
곁에서
바위들이 피 흘리고 있었네
하늘가로는
소리 없는 소리들
그림자 없는 그림자들
강물이 자꾸 넘어지고 있었네
우린 빈주머니를 휘저으며 얘기한다 어젯밤 바람벽을 뛰넘은 도둑에 대해서 치통과 자유에 대해서 인터페론과 양도소득세와 자본주의와 영아원과 또는 한숨을 또는 오늘의 시장경기를 또는 흐린 날씨를 또는 어두워만 가는 숲그늘을 방안에는 듬뿍 드볼작의 심포니 흐르는데 저 피는 얼마짜리죠? 창문의 열쇠를 확인하고 나면 꽃밭에 드러눕는 피 흐르는 눈부신 눈두덩
눈떠야 하리
한밤중에 부시시 잠 깨는 길처럼
솟구치는 풍랑 위 연꽃처럼
저 혼자 흐르는 건 달빛만이 아닌 것을
달빛에 묻은 어둠만이 아닌 것을
우린 누워 있어요 가만히
가슴 속엔 결코 냄새나지 않는 흙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기도할 새도 없었다니까요
용서하소서 죄인들을 용서하소서
길 하나가 일어서고 있었어요
치마폭 한 아름
널부러진 기침 소리들 보채고 있었어요
강 자꾸 넘어져 보이지 않는 땅
안개에 덮여 귓가엔
산발한 구름 치달리는 소리
요리조리 우린 바람떼를 피하며 걸어간다 아침엔 숭늉에 허기진 배 다스리고 흩날리는 먼지는 싸구려 총채로 잠재워 버렸다 언제나 부지런한 시계는 벽장 깊이 감추어 버리고 걸어간다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간다 죽음과 죽음 사이로 아아 밤과 밤 사이로 아아 땅과 땅 사이로 별일없이 별일없이
눈떠야 하리
무서리 너부죽한 길이면 길마다
그을음투성이 바람벽이면 바람벽마다
거친 태양 이젠 힘주어 안아야 하리
오랜만에 오랜만에
총총한 빗소리도 데불고
오랜만에 오랜만에
무지개도 어여삐 데불고
10
달려왔네 허덕허덕
길이 길을 가리기에
뜬구름이 뜬구름 위에 눕기에
눈물에 눈물 매달고
그림자에 그림자 매달아
이윽고 이른 곳
강물 혼자 시퍼런 한숨 던지며
앉아 있는 곳
헝클어진 머리칼 위에는
겨우 누운 달빛 한 조각
천지에 얼굴 문대며 흐느끼는데,
흐느끼는데 피 흐르는 돌 곁에서
피 흐르는 맨발이
맨발에 걸려 엉겅퀴 뿌리들이
노을도 죽었네
논두렁 밖 엎드린 산마루에선
못 보던 연기 오르네
빛나는 모래알들의 외침
위에 내리는 밤
위에 눈먼
별 뒤척이는 잡풀들
서걱임
바람이나 될까
바람 되어 그대 눈 언저리
실한 풀물 나르고 나를까
겨울이면 눈보라나 꿈꾸면서
눈보라 되어 그대 가슴 바닥
신신한 눈물로 녹아나면서
달려왔네 허덕허덕
어둠에 어둠 풀어
죽음에 죽음 풀어
고꾸라지며
나아가며
11
여기 내리는 비에선
참 이상한 냄새가 난다.
엎드려 누운 풀과 풀 사이
날개 수그린 새들은 그걸 안다.
빗방울들은 왜 저리 몸부림하는지
빗방울 겹겹 바람들
왜 저리 울어 대는지
서두르지 않아도 들려오는 종소리
끝에 목매단 어두움
자갈들은 그걸 안다.
삼천의 노을이 삼천의 구름
잡아당기는 저물녘
가슴에 박힌 땅 우르르르
핏물로 범벅되어 일어서면
어화넘차 구름떼 달려오는데
숨살이는 숨에 넣어
뼈살이는 뼈엔 넣어*
오 진흙 위에 내리는
이 포도주
진흙 위에 내리는
이 살
정말 이상한 냄새가 난다.
여기 내리는 비에선
비와 비 사이
넝쿨과 넝쿨 사이
잠든 별 아직 일어나지 않아도
시커머니 한 귀퉁이 벌건 하늘
뼈 없는 손에 쓰러진다.
12 - 메주
풀어질래, 거기
그득그득 풀어질래
한 쉰 날 아니 쉰 해쯤
햇빛 섞어 바람 섞어
바람 속속 누워 있는 강물도 섞어
풀어질래, 거기
풀어져 방방곡곡
소금기로 누울래
바라보면 언제나
버얼건 노을
핏물 흐득이며 선
구름 두셋
산그리메들 휘 휘 올라가
별빛 준비하고 있는데,
보이며 또는 보이지 않으며
이제 갑시다, 내달리는
길이 될래
방방곡곡 꽃 피는
길이 될래
수평선
강은교
이제는 돌아갑시다
돌아가 깊이깊이
어둠에 얼굴을 담급시다
수만 주름살 가만가만
몸 흔드는 바닷가
철없이 나와 앉은 피안의 등불들
거품으로 거두고
큰 소리 한 번 외쳐 봅시다
부서지는 것은
파도만은 아니리
부서지면서 온전한 것
또한 바다만은
아니리
순례자(巡禮者)의 잠
강은교
바람은 늘 떠나고 있네.
잘 빗질된 무기(無機)의 구름떼를 이끌면서
남은 살결은 꽃물든 마차에 싣고
집 앞 벌판에 무성한
내 그림자도 거두며 가네.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은 아침
싸움이 끝난 사람들의 어깨 위로
하루낮만 내리는 비
낙과(落果)처럼 지구는 숲 너머 출렁이고
오래 닦인 초침 하나가
궁륭(穹隆) 밖으로
장미가시를 끌고 떨어진다.
들여다보면 안개 속을
문은 어디서 열리고 있는가.
생전에 박아두었던
곤한 하늘 뿌리를 뽑아 들고
폐허의 햇빛 아래 전신을 말리고 있는
눈먼 얼굴들이여
떨어지는 것들이 쌓여서 잠이 들면
이제 알았으리, 바람 속에서
사람의 손톱은 낡고
집은 자주 가벼워지는 것을
위대한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가는 아침
돌아옴이 없이 늘 날으는
바람에 실려
내 밟던 흙은 저기 지중해쯤에서
또 어떤 꽃의 목숨을 빚고 있네.
숲
강은교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스스로를 기억하는 노래
강은교
내 살[肉]은 한때
허공이었네.
부는 바람
기다리는 문 밖
수억 별의
꿈이었네.
내 잠은 은모래 사이로
언제나 가만가만
실가지 무너지듯 무너지듯
눈물 버리며 흘러갔네.
내 피[血]는 한때
강물이었네.
밤이 내 두 팔에 와
잠들 때마다
물의 입술과 피의 내 입술은
오래오래 껴안아
결코 헤어지지 않았네.
마른번개가 달려와 때로
큰 목소리로 우릴
두드려도
대답하지 않아,
뱃전에 흐르는 머리 기울이고
다만 다정히 거품 되고 있을 뿐
아아, 한때
캄캄하던 나
아아, 한때
텅 비어 있던 그대들
죽은 꽃처럼 눈 안 뜨는
바다로
나아가라 빛 속에 빛
열어라 암흑 밤 뿌리.
시
강은교
모기 소리보다도 작게
십이월 햇빛 내리는 소리보다도 작게
낮달 뜨는 소리보다도 작게
노을 지는 소리보다도 작게
그렇게 그렇게
바람 소리보다도 크게
바다 우는 소리보다도 크게
벼락 소리보다도 크게
눈물 출렁이는 소리보다도 크게
공기의 소리이게
떠돌 곳도 없이 가득 떠도는
별의 소리이게
눈뜨지 않고는 하늘 한가운데 눈뜨는
소리 없는 소리이게
그렇게 그렇게
나를 엎드리게 해다오
구름 흙 속속
시여
캄캄한 밝음이여
시든 양파를 위한 찬미가
강은교
저녁에 양파는 자라납니다
푸른 세포들이 이슥히 등불을 익히고 있습니다
여행에 둘러싸인 창틀들, 웅얼대는 벽들
어둠을 횡단하며 양파는 자라납니다
그리운 지층을 향하여 움칫움칫
사랑하는 고생대를 향하여 갈색 순모 외투를 흔듭니다
저녁에 양파는 자라납니다
움칫움칫 걸어 나오는 싹
시들며 아기를 낳는
달빛 아래 그리운 사랑들
애인들이 푸른 까치발로 별을 따는
한 사내가 이슬진 길을 떠메고 푸른 골목 속으로 사라지는
푸른 눈꺼풀들이 창문마다 돛을 서걱이고 있는, 또는 닻을 펄럭이고 있는
시월, 궁남지
강은교
시월, 궁남지에 가면 보아 두게
시드는 것의 위대함을
지는 것의 황홀함을
저무는 것의 눈부심을
푸르르 푸르르 어둠이 오는 소리 들어 두게
보아 두게, 애인은 찬란하다
순간은 찬란하다
절망도 찬란하다
궁남지에 가면 보아두게
구불거리는 길로 가는 한 사람, 저물녘에 열린다
시의 방문(訪問)
강은교
햇빛이 바람 사이로 떨어지던 날, 절룩거리며 그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내 얼굴을 그려보게.」 나는 지울 수 없는 잉크의 만년필과 깊숙이 감춰 둔 백지를 꺼내 조심조심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햇빛과 바람 냄새와 별빛‥‥‥묻어 있는 동그라미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버렸다. 한없이 안개가 일어서고 일어서고 하였다.
우릉우릉 마른번개가 오고 있던 날, 목쉰 소리로 그가 내게 다시 와 말했다. 「내 얼굴을 그려 보게.」나는 서랍에서 지우개와 연필을 꺼내 누런 연습지 위에 그의 머리카락을 그리기 시작했다. 폭풍과 분노와 역사와 시대의‥‥‥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그는 등나무 같은 두 팔로 내가 그린 머리카락을 흔들며 가버렸다. 뼈 속으로 한없이 찬비가 흘렀다. 안개가 일어서고 일어서고 하였다.
어둠이 그 입을 크게 벌리며 오던 날, 그가 내게 다시 와 말했다. 「내 얼굴을 그려보게.」 나는 붉은 색연필을 꺼내 원고지 위에 그의 눈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래와 돌과 눈물과 시간‥‥‥알 수 없이 깊은 푸른 그의 눈을. 「아니야, 아니야.」그는 폭풍의 입을 벌리며 소리쳤다. 그리고 가버렸다. 뼈 속으로 한없이 찬비가, 찬 바람이 흘렀다. 안개가, 무덤들이 일어서고 일어서고 하였다.
그의 얼굴도 아닌 것이, 내 얼굴도 아닌 것이 어둠 속에 떨어져 누운 날.
영원한 우리의 배반의 날.
시인 일기
강은교
스스로 욕구에 차 있거나
기다리고 있지 않을 때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안주한다는 것은 결국 성취를 포기하는 것이며
사소해지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 어떻게 부딪쳤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만날 수 있고 그저 지나칠 수도 있다.
십일월
강은교
담 너머 한 사람이 웃고 있다.
지붕 끝에서 펄럭이던
필생의 바람도 그치고
수레 밖에는
아직 시작되지 않는 싸움
동백 서너 송이가
먼저 시냇믈을 건너간다.
너무 늦게 왔는가.
그 사람 눈썹에는
마른 풀잎이 가득하고
일 년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은 여름
입은 옷이 무거워
지하의 저 길도 무너지려 한다.
마지막 수레도 보내고 나면
긴 뜰에는 빈집이 혼자
바람을 기다리고
나의 죽음을 기다리고
아,
사방 일천 리의 하늘을
나보다 큰 인류가 걸어가고 있다.
아궁이에 대해서
강은교
요즘 들어 부쩍 나는 아궁이를 그리워하고 있다.
실연하던 날 사진을 한 장씩 찢어 던져넣던 아궁이
사진 속 그의 입에서 불꽃이 오르고 가슴에서 뭉클
연기가 솟던 아궁이
얼음덩어리도 활활 타올라
잠이란 잠마다, 꿈이란 꿈마다 일으켜 세우던 아궁이
꽃불 속에서 요정들이 춤추며 나오던 아궁이
황야를 들끓게 하던 아궁이
기쁨이 기쁨을 업고
슬픔이 슬픔을 업고 달리던 아궁이
아니지, 기쁨이 슬픔을 안고
아니야, 슬픔이 기쁨을 안고 달리던 아궁이
바람 부는 살과 살 사이로
유난히 짙은 눈썹 깜박여대던 아궁이
상처란 상처마다 한줌씩 희망의 재 발라주던 아궁이.
아날로그적 이데올로기
강은교
다시 해가 떠오른다. 주홍빛 공같은 해가 능선들 사이로 오늘 또 새로워진 얼굴을 내민다.
‘살아야겠구나’, 공손히 절하고 또 절한다.
장자의 우화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장자: 「.........옛날 송나라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손 안 트는 약’을 아주 잘 만든다는 소문이 난 사람이 있었소. 그는 그 재주로 먹고 살았는데, 하루는 ‘백금을 주겠으니 그 약을 만드는 방법을 내게 파시오,’ 하는 사람이 나타났소. 그는 친척들과 의논을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대대로 손 안 트는 약을 만드는 일을 가업(家業)으로 삼아 그 약을 팔아왔으나, 수입은 불과 몇 푼 안 되었소. 그런데 지금 이 기술을 팔면 단박에 백금이란 큰돈을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팔도록 합시다.’ 하였다오. 그 방법을 사게 된 나그네는 월나라의 침략을 받게 된 오나라의 왕을 찾아가 설득했고, 그 사람은 곧 장군이 되었소. 왜냐하면, 오나라는 겨울에 월군과 수전(水戰)을 하였는데, 이겼기 때문이었소. 월나라 병사들은 추위에 손이 트는 고통으로 잘 싸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소. 그는 왕으로부터 땅을 하사받고, 영주가 되었소. 그 약이 손을 트지 않게 하기는 마찬가지이나 한쪽은 영주가 되고, 한쪽은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오. .........」
장자의 어법은 또 계속된다.
「지금 선생에게는 커다란 박이 있다고 하면서, 그 박의 속을 파내 큰 배를 만들 생각을 왜 하질 않습니까? 납작하여 아무것도 담을 수 없어 쓸모없다는 걱정만 하고.......... 선생 마음은 정말 꽉 막혀있군요.」
‘아침형 인간은 가라’, 라는 컬럼을 읽은 일이 있는데, 이도 오늘의 사회를 말함에 있어 잊을 수 없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그 컬럼의 필자는 ‘아침형 인간이 되라,’는 우리 사회의 주문들은 <현대사회는 디지털의 지식체계사회인데 아날로그 스타일로 살아가라는 이야기>이므로 버려야 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하긴 이와 더불어 우리 사회의 또 하나의 수사인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도 요즘의 사회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콩 심은 데 팥이 나는 일이 너무 많은 게 오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식인의 말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성실하게 아침 일찍 일어나 일한 사람이 대접받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또한 ‘콩 심은데 콩 나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전 세계가 디지털 시대의 저녁형 인간을 선호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디지털 세계를 끌고
가는 것은 결국 아날로그들인 인간들이 아니겠는가.
다시 한번 말하자. 새날엔 ‘아침형 인간은 가라’라는 이데올로기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아날로그적 이데올로기를 모두들 가질 수 있기를...........
어떤 갈매기는 먹이를 새끼의 입에 넣어주는 대신 새끼 앞에, 될수록 멀리 던져준다고 한다.
그 갈매기는 열악한 조건의 갯펄가 모래언덕에서 살고 있으므로 조수가 밀려 들어와 둥지를 덮어버릴 때 얼른 모래언덕으로 피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 우리의 아이들도 그렇게 스스로 밀려오는 물결을 피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되기를 ..........
갈매기보다는 분명 똑똑할 이 사회의 어른들은 그런 교육을 하기를...........
‘○×식의 객관식 시험’에만 능숙한, 그래서 외우지 않은 문제가 출제되면 정신을 못 차리며 당황하는 그런 후세를 이 디지털 시대에 기르지 말기를 ................ .
중국의 황사 지역의 한 농부는 이런 말을 던진다. 어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멘트이다.
“솔직히 모래는 무섭지 않아요. 무서운 건 인간이죠. 가질수록 더 원하니까요.”
가질수록 더 원하지 않는, 아니 그럴 수는 없을 테니까 조금 수정하자. 가질수록 더 원하지
않으려 하는 그런 사람이 새날엔 많이 있을 수 있게 하기를. 그런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의
가능성을, 그렇게 해도 이 사회에선 잘 산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주기를.......
목소리가 커야 잘 살 수 있다는 이 시대의 신념을 부셔뜨려 주기를.........
그런 것들을 새 대통령은 보여주기를..........
아니. 대통령이 이 모든 것을 해주었으면 하는, 나의 사고방식부터 제발 바꾸게 해주기를.....
아름다운 시간
강은교
밥알에 푸른 그늘이 내려앉을 때
푸른 들이 장미의 팔을 잡아당길 때
햇빛 소리가 댓잎에 출렁출렁 서걱일 때
너의 힘줄이 지층에 부딪쳐 까마득히 쨍그랑거릴 때
까마득한 심연 가 철길에서
모든 추락이 비상(飛翔)일 때
집으로 돌아가는 새의 두 발이 화살처럼 맹렬히 달려갈 때
모든 구석에서 나비들의 일곱 빛 더듬이가 흩날릴 때
고모여/고모여/당고마기고모여
사랑이 종소리와 함께
또는, 또는
연잎 발에 묻은 진흙 사이를 지나갈 때
당신과 당신이 모르는 어깨를 겹쳐
죽음 사이를 지나가며 소리 지르는 아야아,
참, 아름다운 시간
아름다운 하루
강은교
그 여인은 갑자기 노래하기 시작했네
터키의 돌무덤 사이,한 원형극장,
뜨거운 햇볕 아래 눈을 내리뜨고 있는 풀잎들.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아름다운 목소리가 흰 구름 사이로 퍼져갔네
우리는 풀잎의 팔을 잡고 일어섰네
그 여인은 노래하면서 풀잎의 허리에 자기의 머리카락을
기대었네
다아 어디로 갔을까---아름다운 하루였네
지던 해 어느새 뜨고 있었네
아리랑 - 거기 가면
강은교
거기 가면
반쯤 가슴이 파먹힌 산이 있지요
그 산 옆구리엔
작은 무덤 서넛이 매달려 있고요
그 무덤 뒤켠엔
조금 큰 무덤들도 서넛 있어요
작은 무덤 곁엔 키 큰 갈대 한 무리
철없이 가끔 바람이
저 혼자 놀다 가지요
그대와 내가 만났던
만나서 어찌어찌 좋아했던
그 산 옆구리
거기 가면
반쯤 가슴이 파먹힌
동네 하나 있지요
그 동네 옆구리엔
항상 노을이 물들어
두 갈래 강물이 나눠 흐르고요
그 강물이 나눠 흐르고요
그 강물 양켠으로
다 닳아서 터진 길 두 가닥
손짓도 없이 마주 보고 있어요
그대와 내가 터 잡았던
그래서 어찌어찌 일어섰던
그 동네 옆구리
거기 가면 거기 가면
우리 만날 수 있어요
반쯤 가슴이 파먹힌 산과
반쯤 가슴이 파먹힌 동네와
반쯤 가슴이 파먹힌 사람들끼리
그대와 내가 만났던
그래서 어찌어찌 좋아했던
바로 거기로 가면.
아무도 몰래
강은교
이런 날에는 아무도 몰래 그 떨림을 만지고 싶네
빛을 향하여 오르는 따뜻한 그 상승의 감촉
이런 날에는 아무도 몰래 그 떨림의 문을 열어보고 싶네
문안에 피어 있을 붉은 볼 파르르 떠는 파초의 떨림
이런 날에는 아무도 몰래 그 떨림에 별똥별 하나 던져 넣고 싶네.
닿을 듯 닿지 않는 그 추락의 별똥별을, 추락의 상승이라든가 추락의 불멸을
이런 날에는 아무도 몰래 떨리는 추락의 눈썹에 빗방울 하나 매달고 싶네
그 빗방울 스러질 무렵이면
돌아오는 귀이고 싶네
아, 별은
강은교
바람이 바람을 때리며 지나가네
바람 속의 얼음 한 조각이 얼음 두 조각을 베어물며 지나가네
얼음 속에 갇힌 물고기 한 마리
펄럭이는 물풀에게 사랑의 신호를 던지며 지나가네
얼음 속에 갇힌 물고기 두 마리
자기들의 사랑의 신호를 헐떡헐떡
구름에게 던지며 지나가네
구름 하나가 구름 둘을 쓰다듬으며 지나가네
어디서 달려나온 모래 하나
구름의 무릎에 앉은 꿈을
벼랑에 냅다 던지며 지나가네
아, 별은 벼랑
한 별이 두 별을 덮으며 지나가네
지나가네.
아, 소서로
강은교
저녁 여섯 시,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스물네 층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 올라가는데, 누가 등뒤에서 나를 툭 치네, 아, 소서로, 이천 년 전에 살던 한 여자, 주몽이라는 사내를 미치게 사랑한 여자(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이리로 걸어와 보라고 계단을 매만져주네, 모든 계단이 달려와 붙어서네,
나란히 나란히, 가슴을 화알짝 펴는 지평선, 불현듯 길이 짧아지네.
어여쁜 참 어여쁘기도 한 과부(寡婦) 소서로.
아아아, 오늘도 나에게 시를 쓰게 하는 것들
강은교
쌍ㅅ이 영 쳐지지 않는 무딘 나의 손가락
아직도 이유와 때를 모르는 나의 경련
그리고 경련을 잠재워주는 내 평생의 연인들-딜란틴과 바리움, 테그레톨, 라미탈, 그 동그란 흰 속살들
어느 아픈 시인이 선물한 상앗빛 만년필
무수히 버림받은 나의 수첩들, 다이어리들, 책들
오후 네 시 반에 방문하는 우체국 창, 부치지 않은 초록빛 엽서들, 사인을 요청하는 레이건 닮은 소포계 우람한 청년
어느 날 무사히 지나온 모퉁이들, 신호등도 없는 건널목들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만난 입이 뾰족이 나온 화살표들
살아남은 슬픔을 깨무는 듯, 2년이나 남은 할부 개월을 깨물고 있는 나의 스마트폰 메모장
숫처녀 같은, 서러운 음악들
은빛 사진틀의 폐쇄회로
은밀한 성소, 학교로 가는 지하철
아무에게나 열리는 자동문들
아름다운 창녀, 자유, 민주
잔등에 업혀 칭얼대는 미래
잠재적 감기
네가 둘러쓴 빛나는 모자들, 또는 그 후광, 또는 그 추상적 지연
멜로드라마들의 진정성, 브로치들의 영원성
아이섀도 짙은 나의 추억, 희망
그리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만난, 아아아 그
아, 이걸 어째?
강은교
화분에 물을 주다가 구석에 삐쭉 솟아 있는 잡초를 뽑았습니다.
안 뽑히는 것을 억지로 비틀어 뽑았습니다.
순간, 아야야 - 하는 잡초의 비명이 들려왔습니다.
아, 이걸 어째?
내 손에 피가 묻었습니다.
아, 이걸 어째?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강은교
무엇인가
창문을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아침
강은교
이제 내려놓아라
어둠은 어둠과 놀게 하여라
한 물결이 또 한 물결을 내려놓듯이
한 슬픔은 어느날
또 한 슬픔을 내려놓듯이
그대는 추억의 낡은 집
흩어지는 눈썹들
지평선에는 가득하구나
어느날의 내 젊은 눈썹도 흩어지는구나.
그대, 지금 들고 있는 것 너무 많으니
길이 길 위에 얹혀 자꾸 펄럭이니
내려놓고, 그대여
텅 비어라
길이 길과 껴안게 하여라
저 꽃망울 드디어 꽃으로 피었다.
아침에 관하여
강은교
그 여자는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꺼낸다.
그 여자는 낮게 중얼거린다.
나에게 달려온 이 사과
그 여자는 계란 하나도 꺼내어 프라이팬에 지진다.
나에게 달려온 이 계란.
멀고도 먼 길을 달려
빛과 그늘을 지나 달려
소리와 소리를 넘어 달려
그 여자는 버섯 몇 개도 꺼내어 프라이팬에 넣는다
지글지글지글
버섯들이 프라이팬 안에서 고개를 맞대고 수군거린다
나에게 달려온 이 기름
구름이 힘들게 빛의 날개를 들고 있는
아침.
안개 속에는
강은교
안개 속에는
기다리는 남녀와
기다림을 그친 남녀들이 있습니다
안개 속에는
눈떠가는 남녀와
방금
잠들어가는 남녀들이 있습니다.
이윽고
천천히 섬이 되는 남녀와
이윽고
천천히 물이 되어 춤추는 남녀.
아아
안개 속에는
아직 만나지 않은 남녀와
벌써 이별해버린 남녀들이
실비아꽃처럼 흐득흐득
대지에 저희
꿈의 씨를 뿌립니다.
야밤
강은교
달이 흐느낍니다
먹구름에 제 얼굴 깊이 덮여 씌운 채
죽은 미류나무 맨머리 위로
지팡이도 없이 휘청휘청
앞 못 보는 달이 떼밀려 갑니다
앞 못 보는 달이 떼밀려 갑니다
먼 데서 천둥 뜀박질 소리 들려옵니다
어둠은 누구보다 빨리 달의 발에,
허리에 가시를 꽂습니다
입에도, 눈물 출렁이는 눈에도
세상보다 넓은 자물쇠를 채웁니다
누구세요, 당신은?
갓 만든 무덤가에 쫓겨난 아이처럼
달은 잠시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뵈지 않는 눈 애써 헤집으며
기진한 풀잎들, 벌레들 더듬더듬 만지며
그러다 갑갑한 달은 무덤 옆구리로 흐르는 개천
검은 물에 눈물을 씻어봅니다
개천가에는 나자빠져 있는 여름 바람
삐죽삐죽 뼈 다 드러난 마른 자갈들
짖지 않는 개 한 마리 멀거니 사슬에 누워
창백한 달 쳐다보고 있습니다
달이 흐느낍니다
죽은 미류나무 맨머리 위에서 오늘 밤
앞 못 보는 달이 흐느끼며 떼밀려 갑니다
가까이 가까이
천둥 뜀박질 소리 들려옵니다
어느 날
강은교
흰 붕대를 싸맨 듯 여윈 축대가 싸매고 있는
산 한 모퉁이
돌밭에 무더기 무더기 모여 있는
잡풀들을 본다.
오늘은 바람이 부는가
길이 구겨진다
잡풀들이 있는 힘껏 몸을 비튼다.
그래 그래 그래,
그때 산 너머에서
한 아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래,
거 봐
낮게 날던 새 몇 마리 비스듬히 웃으며
이 쪽 돌밭에서 저 쪽 잡목가지에 올라앉았다.
나는 구겨진 길들을 받아 안는다
오늘은 마침 바람이 분다.
어두워지면
강은교
아마
저녁의 햇살에
창백해지며
거기, 너는
오늘도
발발 떨며
서 있으리라
누군가
영혼을 적은 편지 한 통
넣어주기를 기다리며
어두워지면 새들도 몰래 돌아오리니
먼지와 먼지 사이
빌딩과 빌딩
사이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
어둠 속에는
강은교
어둠 속에는
내가 처음 보는 게 있어요
흑보석처럼 반짝이는
빛
새벽 종소리
누가 웃는지 그 뒤켠에서
자꾸 웃어요
어둠 속에는
내가 기다리는 이가 있어요
춘향이 한숨도
심청이 눈물도
그네들이 마지막엔 웃던 웃음도
함께 기다려요
이제 일어설까
일어서 활짝
나팔꽃 피울까
어둠은 참
커다란 우물이에요
두레박 줄을 푸니
한없이 한없이
풀려 들어가요
두레박을 꺼내요
아, 아침이 담겨 오네요
대낮도 담겨 오네요
그들 따라 천천히
그대
자유도 오시네요
평화도 오시네요
어둠 속에서 벌린 입
강은교
어둠은 하늘의 입이다.
먼 별들과 더 먼 별들의.
어둠은 폭풍의 입이다.
미친 바람과 더 미친 비바람의.
어둠은 세계의 입이다.
허기진 胃와 더 허기진 위의.
어둠은 투쟁의 입이다.
눌린 백성과 더 눌린 백성의.
어둠은,
그러나 그러나
갇힌 빛의 입이다.
일제히 솟아오르는
그대의
혁명의 입이다.
어둠이 한 손을 내밀 때
강은교
어둠이 한 손을 내밀 때
내 한 손도 따뜻이
그를 잡는다.
어둠이 한 눈을 찡긋할 때
내 한 눈도 기뻐서
찡긋거린다.
사방 문을 쾅쾅 닫고
서랍을 열면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이는
내 보석들.
아버지 ---
하고 부르면
그래 ---
곧 달려오는 목소리
어둠이 천천히 창가에 설 때
천천히 그 막막한 손 들이밀 때
그이와 나 빛과 함께
이 세상에 또 한 치 두께로
가라앉을 때
어떤 미류나무의 새벽 노래
강은교
바람이 오네
간밤에 별들 만진 손으로
진구렁 수천 지나다닌 발로
얼른얼른 말없이
종탑 쪽에서 오네
햇빛 뿌리며 오네
바람이 오네 자꾸
예서는 뵈지도 않는 산맥의
강물의
또는 무덤의 푸른 향기도 데리고
누워 있는 지붕에서 지붕으로
때 잔뜩 낀 벽에서 벽으로
오, 쉬지도 않네 바람은
이제 눈 떠라 눈 떠라
비로소 숨소리 가늘게 일어서는
꺼먼 재의
속 빈 내 허리
죽은 뼈뿐인
내 팔
바람이 웃으며 오고가네
세상 어디나 가득 차서
결코 비임 없이
형제들,
황량한 내 머리 위에 팔 위에
피 이어 이어 나르네
사라지지 않네
어떤 비닐봉지에게
강은교
어느 가을날 오후, 비닐봉지 하나가 길에 떨어져 있다가
나에게로 굴러왔다.
그 녀석은 헐떡헐떡거리면서 나에게 자기의 몸매을 보여주었다.
그 녀석이 한 바퀴 빙 돌았다, 마치 아름다운 패션모델처럼
그러자 그 녀석의 몸에선 바람이 일었다.
얄궂은 바람, 나를 한 대 세게 쳤다.
나는 나가떨어졌다. 한참 널브러져 있다가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녀석, 비닐봉지는 바람에 춤추며 가는 중이었다.
나는 마구 달려갔다, 바람 속으로
비닐 봉지는 나를 돌아보면서도 자꾸 달아났다. 나는 그 녀석을 따라갔다,
넘어지면서, 피 흘리면서
쓰레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으로,
실개천이 쭈빗쭈빗 흐르고,
흐늘흐늘 산소가 없어지고 있는 곳으로,
우리의 꿈이 너덜너덜 옷소매를 흔들고 있는 곳으로,
비닐봉지는 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나는 위대해! 나는 영원해!
나는 몸을 떨었다, 귓속으로 그 녀석의 목소리가 쳐들어왔다.
- 나는 영원히 썩지 않는다네, 썩지 않는 인간의 자식이라네.
비닐봉지는 바람 속에 노오란 꽃처럼 피어났다.
어떤 흐린 날
강은교
바람이 얼룩진 접시 위, 물고기 한 마리 누워 있다, 그것의 살은 다 파헤쳐져 있었으며 잘게 잘게 저며져 있었다, 이런 시간이 오기를 기다려온 그것의 눈은 한껏 크게 벌리고 창 밖의 어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따뜻하죠? 라든가……라든가……들을 알고 있다는 듯이 가끔씩 푸들푸들 경련하며, 어느 한 때 분명 바다 밑을 헤엄쳤을 그것, 어느 한 때 분명 모래 속을 파보았을 그것, 어느 한 때 분명 물풀에게 사랑을 속삭였을 그것의 푸른, 시간이 얼마쯤 지나자 주방 아주머니가 들어와 그것의 너덜거리는 뼈를 꺼내어 흔들며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세상에 그림자 없는 것들은 없어, `이 물고기는 매운탕을 끓여야 합니다……' 아무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푸들거린담, 아주머니는 긴 뼈를 귀찮게 흔든다, `대가리는 매운탕에 넣어', 고동색의 점잖은 빛, 바람소리에나 귀 기울일 것을, 우리의 다리는 이제 너무 힘이 없어, 갑자기 접시 위에 눈물이 흐른다
아주머니의 손에 떠메어 나가는 물고기의 뼈와 둥글고 울퉁불퉁한 대가리에 쓰러져 누워 질질 끌려 나가는 지느러미, 물고기의 눈이 뒤를 돌아본다. 바람벽같은 상 위에 지느러미가 검은 돛폭처럼 휘돈다. 놀란 이들이 뼈만 남은 팔목의 시계를 바라본다.
삶은 얼마나 가혹한가
햇빛은 얼마나 뜻 없는가
어허, 도미
강은교
네 얼굴에선 뚝뚝 바닷물이 떨어진다.
동해나 서해 혹은 남해
어느 날의 검푸른 파도며
끝없이 일어서는
일어서기만 하는 수평선,
번뜩이는 비늘에선
춤추며 불어가는 바람 소리도 들린다.
어쩌다 끌려왔는지,
넘실대는 핏물이야
가까이 누운 저 노을 속에 던져넣고
아마도 누군가의 밥상 위에서
찌개로 보글보글 끓기를 기다리는 너,
펼친 양 지느러미엔
파리 떼들 오 파리 떼들만 잔뜩 매달려.
말해다오
이제 보는 세상은 어떤가온
거기 좌판 위에 걸려 있는 하늘에도
춤추며 바람은 불어가는가
허옇게 뒤집어진 눈
해안선 같은 입이여
그리하여
두 토막 세 토막으로 잘디잘게
이 하늘 아주 떠날 때면, 너
남겨다오
모래밭에 밤낮 풀리던 소금기와
물풀들의 자유
빛나는 아침 햇살을
동해나 서해 혹은 남해의.
네 남긴 냄새 드디어
땅에 스민다.
어지러운 길목마다 일어서는
비릿한 저 흙내 풀내를 보아!
하늘은 아직 시뻘건 황혼인데
등 뒤에선 자꾸 일렁이며 오는
바다.
엄마의 마지막 발씀
강은교
엄마의 마지막 말씀은 물이었어. 그 전날 말씀은 물을 주어야지 였고 그 전전날 말씀은 물을 주고 있어 였어. 엄마 위에서 물길이 걸었을까 물길 위에서 멈마가 걸었을까
물길이 떠다닌다. 물길 아래 수평선도 떠다닌다. 날개가 산맥같이 우주에 펼쳐진 파랑새도 떠다닌다. 파랑새 날개 속에 들어 있던 은하 저 너머로 떠다닌다
얼른 그림자 위에 – 향가 풍으로
강은교
황폐한 빰이 허공처럼 나타난다.
구름의 살을 흔드는 바람
산 것들은 서로 울음으로 화답하나니
아야아 -
벚나무 가지 하나
없는 제 그림자와 입맞추고 있다가
얼른
그림자 위에 올라앉는다.
얼음 폭포 앞에서의 편지 – 향가 풍으로
강은교
제 피를 조금씩 얼음 밑으로 흘리면서
산이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바람 하나 헐레벌떡 달려오다가
노을에 발목을 삐끗합니다,
풀잎 위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아야아-
보일 듯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들릴 듯이 들리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여긴 내 땅이로구나
강은교
백골들이 여기저기 누웠으니,
꽃으로 풀로 바위로 나무로
편안히 바람까지 동무삼고 있으니,
여긴 분명 내 땅이로구나
저 꽃 백골들을 보니
어지러운 색깔, 향내를 맡으니,
저 풀 백골들을 보니
단단히 박혀 있는 푸른 모양들을 보니,
저 바위 백골들을 보니
희뜩희뜩 수염난 든든한 몸매를 보니,
아, 여긴 내 땅이로구나
내가 죽어도 좋은
죽어서도 골백번 다시 앉을
다정한 내 땅
기다려라
내 여기 진달래 심으려 하니
기다려라 내 여기 하늘에
됫박새 울음 가꾸려 하니
기다려라
내 여기 물가에
으악새 서걱이게 하려니
연애
강은교
그대가 밖으로 나가네
등불 하나를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를 따라 깊어진 어둠도 밖으로 나가네
문에는 든든한 네 개의 열쇠를 채우고
늙어오는 길과
늙어 있는 길을 지나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둘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이 다정한 뭍의 사자(死者)들
자정엔 헛소리를 꺼내 드는
아, 이 바닥없는 뭇 잠의 추억들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셋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가 돌아오지 않네
여름 저녁 오후 여섯 시 - 너무 짧은 사랑 이미지
강은교
시간이 느릿느릿 걸어오며 끙끙거리는 나무의 팔이며 뺨을 쓰다듬는다,
우리가 기다리는 건 우리를 결코 기다리지 않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
엽서 한 장
강은교
오래 못 본 친구에게서 항공엽서 한 장이 왔다. 낯 모르는 항구의 잿빛--푸른 하늘이 찍혀 있었다.
<틈틈이 부탁하신 종(鍾)을 보러 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어떤 녀석은 너무 커서 (집채만큼)--메고 가기 힘들고, 어떤 녀석은 너무 작아서 소리도 안 날 것 같고.....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그때였다. 옆에 있던 바람 한 올이 불쑥 일어서며 제 가슴을 쳤다. 뎅--.
종소리가 울었다.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 경련(痙攣)에게
강은교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불쑥 나타날 너의 힘을 기다린다
너희 힘이 심줄들을 부드럽게 하고
너의 힘이 핏대들을 쓰다듬으며
너희 힘이 튀는 침들을 길 밖에 멈추게 할 때
너희 힘이 눈부신 햇살처럼
민들레 노란 꽃잎 속으로 나를 끌고 갈 때
내가 노란 민들레 속살로 물들고 말 때
얼음의 혓바닥이 흔들거리며
얼음의 왼발이 사라지고
얼음의 왼다리가 사라지고
이윽고
얼음의 오른발이 사라지고
얼음의 오른 다리가 사라지고
낮게 낮게 흐르는 눈물이 시간이 될 때
그때를 기다린다
아무도 몰래 너를
이 바람 찬 세상에서.
오래된 이야기
강은교
그 무덤에 핀 할미꽃은
어느 날 더 많은 할미꽃을 피우다가
그 무덤이 쓰러져
아주 지하로 가버렸을 때
혼자 남아 무덤의 흙을 만지더니.
만지다가 저도 어느 날
모진 비 끝에 따라가더니
세상이 끝났다고 따라가더니.
그 무덤이 세상엔 또 있어
제 할미꽃 동무들이 살아 있을 줄야
그때 죽은 할미꽃은 알 리 없지.
그 무덤도 알 리 없지.
오이샐러드
강은교
오이의 말소리가 들려왔네
이렇게 살려고 하진 않았어,
마요네즈에 범벅이 되어 감자 조각 옆에 나뒹굴어지리라곤.
눈도 입도 가면처럼 흰 칠을 하고 잘디잘게 잘려지리라곤.
아, 이렇게 살려고 하진 않았던 것이라니까.
접시 위에 보이지도 않게 나자빠져 있다가 검은 입속으로 사라지리라곤.
오이의 말소리가 자꾸 들려왔네
아,저기
접시 밖으로 출렁출렁 가는 시계 소리.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우리의 적은
강은교
우리의 적은
일 센티미터의 먼지와
스무 시간의 소음과
그리고 다시 밝는 하늘이다.
몇 번이라도 되아무는 상처와
서른 번의 숨소리와
뜨거운 손톱.
우리의 적은
전쟁이 아니다
부자유가 아니다
어둠 속에서도 너무 깊이 보이는
그대와 나의 눈.
십리 밖에 온 가을도
우리의 눈을 벗을 수는 없다
가을이 일으키는 혁명도
아아, 실오라기 연기 하나도.
어젯밤은 좋은 꿈을 꾸고
오늘 길을 떠난 아버지여,
그대 없이도 꿈 이야기는 살아서
즐겁게 저문 하늘을 날아다니다.
그렇다, 우리의 적은
저 끊어지지 않는 희망과
매일밤 고쳐 꾸는 꿈과
不死의 길.
그리고 아직 살아 있음.
유성에서의 하루
강은교
물을 마시고
또 물을 마신다.
아침에 마시고
저녁에도 마신다.
내가 마시는 물의 끝으로
낄낄대며 들어오는 바다
낄낄대며 들어왔다가
다음 날 인사도 없이 돌아가는
큰 바다
물이 엉겅퀴의 뿌리를 흔든다.
엉겅퀴 뿌리 밑에서
우리 집이 위험하게 흔들린다.
어지럽구나
오늘은 어디서
개와 사람이 함께 죽고 있는지,
반짝이며 이층에서 떨어지는
저 발톱은 누구의 것인가.
물을 마시고
또 물을 마신다.
엉겅퀴 곁에서
엉겅퀴와 함께 마신다.
낄낄대며 들어오는 바다
용서해다오
벌써 수천 번이나
나는 바다와 화해하는 것을.
유화(柳花)
강은교
이제 흐르자.
날이면 날마다 해 저무는 여기
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동트고 트는 여기
바람과 바람을 지나서
한숨 넘쳐나는 길
그 한숨 가닿아 유난히도 반짝이는
별빛 별빛들 넘어
비되어 여름날이면
아니 안개되어 봄밤이면
아니 저 눈발 속에 희끗희끗 눈송이로
이 길 막아 흐르자
흙 속에 흙으로
일어나자.
오늘은 강바람이 너무 차네요.
배터진 홍시들처럼
하늘 아래 자빠져 누운 지붕들
하루도 편할 날 없어
하루도 피 흐르지 않는 날 없어
비틀대며 걸어가는 길 한 켠
시뻘겋게 물들었네요
저 소리가 무슨 소리죠?
아, 누가 또 떠나고 있는지
헛짚은 발들 헤매대는
동서남북 사방팔방이
눈을 그치지 않네요
어이 가리 어이 가리
오늘 가다 어이 자고
내일 가다 어이 잘꼬
앞이 안보여요.
흩어진 내 머리칼 두 눈을 가려
다가오는 어둠들
슬몃슬몃 강둑에 묏봉우리로 앉아.
그 옛날 내 이름은
유화(柳花)라 불렸었네.
실바람 부는 아리라 흰 모랫벌
잔물결 거품에 두 눈 깊이 젖어
어딜까 예 어딜까
집 가는 길 헤매고 있을 때
불현듯 나타난 사랑 하나
눈 먼 나 이끌어 이끌어 갔었네.
맨 먼저 사랑은 바람결로 오시더니
벼랑으로 휘휘 불어
가로막는 낙엽이며 돌덩이 같은 것
죄 쓸어버리시고
이윽고는 내 눈에 매달린 잔 거품도 죄 말리셔서
환히 밝은 세상
가락지로 끼어 주시더니
그 옛날 내 이름은
유화라 불렸었네.
그럼 말하겠어요.
요즘은 꿈자리가 늘 사나와요.
이리 가도 험한 산
저리 가도 깊은 바다
내 가는 곳 굽이굽이
길은 막혀서
아, 답답해 답답해
아무도 없어요.
캄캄한 벼랑 네 귀퉁이에선
들리느니 풀꽃 떨어지는 소리뿐
혹은 우리 다가오는 아득한 기척
어기적 어기적 그 사내
바다 건너오는 밤이면
가슴팍엔 식은땀
더욱 내리흘러 내리흘러
정말이지 말하겠어요
내가 왜 수면제 열 알
자정엔 머리맡에 마련하는지를,
숨 헉헉 막히는 채 밤새도록 밤새도록
잠들지 않으면서 잠드는지를.
강물이여
내 어둔 살 깊이깊이 씻어
햇빛 드나들게 하던 이여
아버지는 날 버리셨지만
거품 속에 거품이 되라고
모랫벌에 던지셨지만
내 피 이미 사랑에 물든 피
그대는 훌쩍 받아 안으셔서
건너편 새 땅으로 흐르게 하던 이여
주사이다.
이 세상 거친 물결이란 물결
험상궂은 돌덩이란 돌덩이들
사랑 품은 내 허리에 둘둘 감아버리게,
참 거룩한 거품
주사이다.
그런데 눈이 내리네요
내리는 족족 녹으면서
기척도 없이 내리네요.
여직 누가 우나요?
동서남북 사방팔방
허둥대며 땅에 땅에 곤두박질치는
눈물들, 보세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집으로는
기다리느니 가고 가는 시간뿐인
아, 기다리느니 수면제 열 알 누워있을
내 방으로는 정말이지,
차라리 타는 불꽃마다 날아들어
제풀에 바스라져 흩어지는 하루살이나 되었더면.
결국 사랑이 날 일으켰었네.
실바람 부는 아리라 흰 모랫벌
온몸 젖은 거품 속에
한 큰 나라 세웠었네.
내 이름은 유화
맨 먼저 사랑 만났던 여자
흐르자, 이제
날이면 날마다 해 저무는 여기
날이면 날마다 동트고 트는 여기
비되어 여름날이면
아니 안개되어 봄밤이면
아니 저 눈발 속에 희끗희끗 눈송이로,
그려면 보아라.
큰 바람 속에선 무수히 작은 바람
겹겹 불고 있음을
하나의 빛 속에선 수천개의 빛
또한 바람에 아롱져 반짝이고!
은대구 조림
강은교
너, 은대구
나와 만날 때는 늘 '조림'이 되어
간장이며 파, 다진 마늘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는 너
말랑말랑해진 무 곁
온몸에 잔칼질한 채 누워
오늘 저녁도
황홀한 바닷속 꿈꾸고 있는 너.
은빛 빗자루의 추억
강은교
어둠이 찐득찐득 벽아래
누워 있던 그 복도,
청소 도구함에 꽂혀서 천정을 보고 있던 빗자루 하나
공중을 향하여 자랑스레 고개를 쳐들고 있던 은빛 빗자루 하나
찢어진 먼지 알 하나도 가슴에 깊이 품은 빗자루 하나
그 먼지 알 종일토록
껴안고 핥아대는 빗자루 하나
빗자루 하나의 통통한 가슴이 허공에 빛난다
누가 자꾸 여는가, 그 문
모래 투성이,
여는가,
오늘 참 눈부시게 빛나는, 빛나는 빗자루 하나
은하의 별처럼 빛나는, 빛나는 빗자루 하나
우리 모두 끌고 가는 은빛 빗자루 하나
이 동네
강은교
이 동네엔 참
우는 아이들도 많네.
아깐 동쪽서
해 뜰 때처럼 울려오더니
슬슬 눈 내리기 시작,
이젠 또 누구 서쪽서
해 지는 소리로
울어쌓네.
바람막이 벽도 소용없는 날
흰 눈에 발목 칭칭 감은 길 한복판에서
애고 애고 엄마--
지붕마다 엎딘 어둠은 끝없어,
드디어 내 누운 자리 남쪽서도
눈물 떼밀려 오네.
울음도 저물어 흐득흐득
아아, 동서남북 사방이
몸서리 강물 되어.
이름 모르는 꽃
강은교
이름 모르는 꽃이 저 뒤 들판에 앉아 있네
앉아서 향기론 바람 부르네
이름 모르는 꽃은 이름 모르는 풀과 함께
이름 모르는 풀은 이름 모르는 새와 함께
알몸의 돌과 함께 흙과 함께
이름 모르는 꽃은 그리로 가는 모든 길들의
그림자를 쓰다듬어주네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악수하게 하네
별에게 제 살에서 쉬라고 하네
그 들판이 어디?
그 별 쉬는 곳이 어디?
사람은 들판으로 가는 길 찾아
먼 눈을 씻고 또 씻네
이름 모르는 꽃이 저 뒤 들판에 앉아 있네
향기론 뿌리 깊이 누운 곳
알몸의 흙들 평화로이 사는 곳
이름 모르는 꽃은 이제 길이네
이제 바다네
바람이네
수천 년의 햇빛이네.
이사
강은교
그 사람이 아마도
못을 박고 있네
아마도 5층에서
못을 박고 있네
아마도 3층에서
못을 박고 있네
벽이 흔들리네
흔들리는 벽에
흔들리며 나도 못을 박네
흔들리는 벽에
흔들리며 우리가 못을 박네
벽에서 피가 흐르네
5층에서 흐르는 피가 천정을 타고
4층으로 흐르네
4층에서 흐르는 피가 천정을 타고
3층으로 흐르네
3층에서 흐르는 피가 천정을 타고
2층으로 흐르네
2층에서 흐르는 피가 천정을 타고
1층으로 흐르네
그 사람이 아마도
못을 박고 있네
탕 탕 탕 탕
자기를 지나서
탕 탕 탕 탕
우리를 지나서
탕 탕 탕 탕
지구의 뿌리 속으로.
이 세상의 시간은
강은교
이 세상의 시간은 당신이 설거지를 하는 시간과 당신이 비질을 하는 시간과 당신이 라면을 먹는 시간과 당신이 단추를 만지작거리는 시간과 당신이 신발 끈을 매는 시간과 당신이 달빛을 바라보는 시간과 당신이 노동하는 시간과 감자가 익어가는 시간과 당신이 복종하는 시간과 꿈꾸는 시간과,
당신이 현관문을 여는 시간과 신문을 집어 드는 시간의, 당신의 불화의 시간과 화해의 시간의, 당신의 우연에 업히는 시간과 필연에 접속하는 시간의, 당신이 피자를 배달하는 시간과 세무회계 사무실의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의, 당신이 엘리베이터 혹은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시간과 스르르 자동문을 지나가는 시간의,
당신이 똑각똑각 편지를 쓰는 시간과 울며불며 일기를 쓰는 시간과 헐레벌떡 성명서를 쓰는 시간과의, 혹은, 당신이 바느질을 하는 시간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과 이메일을 확인하는 시간과의, 당신의 이별의 시간과 만남의 시간과의, 당신의 출발의 시간과 도착의 시간과의,
사랑하올 당신의 눈물을 껴안고 껴안는 시간과의 합
이유
강은교
오늘 아침 그 간판이 떠지지 않는 눈 비비며 미소하는 이유는
그래서 거기 내리는 안개가 세상을 허옇게 칠하며 일어서는 이유는
그래서 바람 한 줌이 바위들의 어깨 위에 냉큼 올라앉는 이유는
그래서 이슬 한 방울이 부지런히 산을 오르는 이유는
부지런히 산을 오르며 모든 풀잎의 뺨을 쓰다듬는 이유는
모든 풀잎의 뺨 위에서 또로로록 빗방울과 손을 잡는 이유는
조만간 황금빛 햇님이 긴 치마를 펄럭이며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스미리
강은교
이제 스미리,
언제나 핏물 넘치고 넘쳐
저물녘이면 시뻘겋게 시뻘겋게 해 져가는
이 땅에 스미리.
안개 밟고 가는 이들이여
발걸음들은 가볍고 가벼워
한 올 실바람에도 자주 흩어져 버리는 이들이여.
그 안개 실은 우리가 남겨놓은 것
우리 크나크던 한숨 어둠에 끌려가다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 허공에 부서진 것들,
그 바람도 실은 우리 가슴에서 불어가는 것
서리 맺힌 우리 마음들
날이면 날마다 일어나
어이 하리, 세상 지붕에 몸 비비는 것
어젯밤엔 눈이 되어 내렸었네,
우리 채 녹지 못한 눈물 긴 눈발로
창밖 담벼락에 닿아 울었었네.
아, 이제 스미리
가슴마다 맺힌 한 전부 풀어 풀어
떠오르는 해에 정성 바쳐 드리고
스미리, 산야에 산야에 가득 풀포기로
실은 우리 울음인 까치 소리로
일몰의 노래
강은교
사라져라,
살 있는 것은 모두,
핏줄 있는 것, 마음 있는 것도 모두,
제 피의 껍질 껍질 속까지
그리로 사라져라,
바람처럼 갈 곳 없는 자 모두,
대낮처럼 사랑할 이 없는 자 모두,
사라져라, 결코
꿈 없이 사라져라,
가라, 가라, 가라,
한 뼘 바위 그늘에 차린
이 붉은 식탁
삭은 베보자기를 걷고,
어서,
그리로 가라, 가라,
모래 위나 걸어가는
진종일 그대들 헌 발이여,
망가진 발톱은 이른 물살에 묻어,
가라, 없는 날개로,
삭혀라, 어여쁜 거품,
곧 별이 뜬다,
늙은 아버지인
우리 별.
일어서라 풀아
강은교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땅 위 거름이란 거름 다 모아
구름송이 하늘 구름송이들 다 끌어들여
끈질긴 뿌리로 긁힌 얼굴로
빛나라 너희 터진 얼굴로
빛나라 너희 터지는
목청 어영차
천지에 뿌려라
이제 부는 바람들
전부 너희 숨소리 지나온 것
이제 꾸는 꿈들
전부 너희 몸에 맺혀 있던 것
저 바다 집채 파도도
너희 잎파리 스쳐왔다
너희 그림자 만지며 왔다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이 세상 숨소리 빗물로 쏟아지면
빗물 마시고
흰 눈으로 펑펑 퍼부으면
가슴 한 아름
쓰러지는 풀아
영차 어영차
빛나라 너희
죽은 듯 엎드려
실눈 뜨고 있는 것들
잎 둘이 또는 셋이 – 향가 풍으로
강은교
잎 둘이 손을 꼬옥 잡고 산을 넘는다
한 모퉁이 도라가니
옹달샘이 누워있고
두 모퉁이 도라가니
꽃 세송이 피어있네*
산 하나 또 아물었다
아야아--
잎 셋이 손을 꼬옥 꼬옥 잡고 산을 넘는다
* 황천무가 <바리공주>에서 인용
잎의 꿈
강은교
이제 오는 봄이야 정말 즐겁겠지요.
왁자지껄 바람들 온 세상 몰아오고
아, 그 새벽이면 황금 햇살
우리 손목 번쩍번쩍 들어올리겠지요.
이봐요, 흐르는 물에 누워 있는 이
겨우내 망가진 땅 파도 묻혀
출렁출렁 일으키고
밤이면 밤마다
어둠에 혹 몸이라도 다칠라
우리 어깨에 이슬옷 입혀 줄 이.
벌써 들리네요 벌써
저 멀리 땅끝에서
신명나게 쏟아지는 빗소리
오래 쑤셔온 허리도
가슴 속 껴입은 먼지들도
한바탕 번개빛으로 불태우는 소리
기다려요,
우리 곧 일어설 테니
마련한 색깔 전부 꺼내
뚝뚝 황금 햇살 벌판에 던지며
이봐요, 흐르는 물에 귀 맘껏
적시고 있는 이.
자유를 꿈꾸고 사랑한다
강은교
엘리베이터를 타니 어디서 묻어온 것인지 꽃잎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잔뜩 가슴을 오므리고 파리한 주홍색 얼굴로 떨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단추를 눌렀다.
투덜대는 구름의 낮은 기침 소리. 우리는 상승했다.
상승, 상승.......................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바람이 휙 - 하고 불어 들어오면서
꽃잎 한 장을 싣고 갔다.
나는 거기 놔둔 채,
닳고 닳은 내 마음자리 거기 벽 속에 가둬둔 채.
자전(自轉)
강은교
1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無限天空)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 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침상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
저 캄캄한 수세기(數世紀)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일평생이 낙과(落果)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소리를 걸어 놓으며
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2
밤마다 새로운 바다로 나간다
바람과 햇빛의
싸움울 겨우 끝내고
항구 밖에 매어놓은 배 위에는
색가에 잠겨
비스듬히 웃고 있는 지구
누가 낯익은 곡조의
기타아를 튕긴다.
그렇다 바다는
모든 여자의 자궁 속에서 회전한다.
밤새도록 맨발로 달려가는
그 소리의 무서움을 들었느냐
눈치채지 않게 뒷길로 사라지며
나는 늘
떠나간 뜰의 낙화가 되고
울타리 밖에는 낮게 낮게
바람과 이야기 하는 사내들
어디서 닺혔던 문이 열리고
못보던 아이 하나가
길가에 흐린 얼굴로 서있다
3
문을 열면 모든 길이 일어선다
새벽에 높이 쌓인 집들은 흔들리고
문득 달려나와 빈 가지에 걸리는
수세기 낡은 햇빛들
사람들은 굴뚝마다 연기를 갈아 꽂는다
길이 많아서 길을 잃어버리고
늦게 깬 바람이 서둘고 있구나
작은 새들은
신경의 담너머 기웃거리거나
마을의 반대쪽으로 사라지고
핏줄 속에는 어제 마신 비
출렁이는 살의
흐린 신발소리
풀잎이 제가 입은 옷을 전부 벗어
맑은 하늘을 향해 던진다
문을 열면 모든 길을 달려가는
한 사람의 시야
허공에 투신하는 외로운 연기들
길은 일어서서 진종일 나부끼고
꽃밭을 나온 사과 몇 알이
폐허로 가는 길을 묻고 있다
4
골목 끝에서 헤어지는 하늘을
하늘의 뒷모습을
나부끼는 구름 저쪽
사라지는 당신의 과거
부끄러운 모래의 죽음을
불의(不意)의 비가 내리고
마을에 헛되이 헛되이 내리고
등뒤에는 때아니게
강물로 거슬러오는 바다
동양식의 흰 바다
싸우고 난 이의
고단한 옷자락과 함께 펄럭이고
너의 발 아래서 아 다만 펄럭이고
돌아가는 사람은
돌아가게 내버려두라
헤매는 마을의 저 불빛도
깊은 밤 부끄러운 내 기침 소리도
용서하라 다시 용서하라
바람은 가벼이 살 속을 달려가고
일생의 가벼움으로 달려가고
뜰에는 아직
멈추지 않는 하늘의
하루뿐인 짧은 내 뒷모습
반짝이는 반짝이는 잠을
작은 것들을 기림 또는 '배고프지 나의 사랑아'
강은교
등 뒤에는 장대하게 하늘이 펼쳐져 있고
배들은 떠나려고 긴 마스트들을 허공에 내밀고 있을 때
그가 내게 주춤주춤 손을 내밀었다.
태양은 닿을 수 없이 멀었으나
기다림에 지친 모래들,방파제 밑에서 주욱주욱 울고 있었으나
바닷가 얇은 길 속에서
두런두런 사람들은
잘 떨어지지 않는 비닐 방바닥의 머리카락처럼
달아난 시간의 속살들을 엎드려 줍고 있었으나
힐끗힐끗 물을 들여다보며 나는[飛]새들
그가 내민 손을 나는 잡았다.
등 뒤에는 장대한 하늘을 꼬옥 물고 있는 구름
눈물을 참고 참고 잔뜩 부은
바람 서넛
'배고프지 나의 사랑아/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 이용악의 시<장마 개인 날>에서 인용. '나의 사랑아'가 이용악의 시에서는 '나의 사람아'로 되어 있음.
장날
강은교
장날이었다,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했다, 알사탕이 오색의 무지개를 뻗치고 있는 리어카 옆에는, 빛나는 무우 눈부신 시금치, 한 곳에 가니 물고기들이 펄떡펄떡하고 있었다, 거기 돛폭 같은 지느러미 윤기 일어서는 살에선 바다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허연 눈동자가 잔뜩 기대에 차서 장날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녁은 가깝고
아침은 머네
어기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어야디
우리는 그 앞에 섰다, 두 마리를 2000원에 샀다, 그것을 검은 비닐봉지에 넣었다, 튀어오르지 않도록 입구를 단단히 묶어 가방 속에 넣었다. 아마 그 녀석은 바다 속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바다 속의 정적과 자유이리라고.
우리는 저물녘에 거기를 떠났다, 한밤 중 가방을 열고 봉지를 풀었을 때 너는 거기에 없었다, 얌전한 죽음 두 개가 비닐의 이불을 덮고 고요히, 누워 있었다.
아침은 멀고
저녁은 가까우네
어기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어야디
저녁 바람
강은교
성냥을 켜고 또 켜도
어둠은 물러가지 않는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죽음은 가까이 오지 않는다
아, 불타고 불타
재가 된 숲속을
그러나 지나가기만 하는
저녁 바람
저녁이 슬슬……
강은교
저녁이 슬슬 걸어오네요.
그 커단 키로
그 기단 팔로
단내 아직 그득한 땅 위
비켜라 비켜라
소리 없는 소리로 오네요
어둠 앞장 세우고 오네요.
저 하늘 한 귀퉁이
흐르는 피를 보세요.
산 너머 산 너머로 달아나며
쏟아놓는 햇빛의
시뻘건 눈물
말없이 큰 산 몸 흔드네요.
큰 산 몸 흔드니
그 옆 작은 산
따라 몸 흔드네요.
큰 산의 큰 나무도
큰 나무 옆 작은 나무도
아, 풀들이 흐느끼네요.
바람 따라 이리저리 몸 흔들며
숨죽인 뿌리들
온 땅에 서걱이네요.
저녁이 슬슬 걸어오네요.
싸움 아직 그득한 길 위로
죽은 잎들 넘치는 들판으로
어둠 앞장 별은 맨 뒤에.
저녁 하늘 아래
강은교
어린 게 한 마리, 물의 모자를 덮어쓴 채
방파제 위로 달려나가고 있다
키 큰 파도가 훌쩍, 들여다보고 있는
거기
웅덩이에 빠지지 않으려고 갈색의 얇은 발
기를 쓰고 흔든다
살찐 빗물이 그 위로 떨어져 내린다
사랑해야지
(웅덩이와 빗물 합창)
창백한 저녁 하늘 아래.
저렇게 눈떠야 한다
강은교
저렇게 눈떠야 한다
지난 겨울 바람은 매서웠으나
꿈도 얼어 흐르기를 멈추었으나
칼잠 든 곳곳의 피
들판마다 그림자로 떠돌았으나
싹아 싹아 어린 싹아
뿌리인
내 너에게 이르노니
저렇게 웃어야 한다
웃음으로 울음을 부축해야 한다
지나가는 얼음이 얼음이라고 자지러지리 게 아니라
죽음이 끝이라 끝이라 소스라칠 게 아니라
사랑이 땅에 하늘을 이어준다고
하늘에 땅이 닿는다고
소리쳐야 한다
소리쳐야 한다
저문 날 허공에
강은교
밝은 달이 걸어와
누구의 잠 끝엔지
얇은 시냇물 소리 하나
내려놓고
시냇물 소리는
제 속에서 불불 일어나는
바닷소리 두울
내려놓고
벼랑으로 가는 소리와
벼랑에서 떨어지는 소리와
벼랑 아래 제 무덤을 짓는 소리와
함께 소리 다섯을 내려놓고
저문 날 허공에
혼자 밝은 목 꺾어 걸리도다.
저물 무렵
강은교
저물 무렵 내가 돌아왔다
서쪽 하늘이 열리고
큰 무덤이 보이고
떠나가는 몇 마리의 새
식구들은 다시 안심한다
곧 이불을 펴리라
지난해를 다 바쳐 마련한
삼베 이불이
곳곳에서 펴지리라
나는 헌 옷을 벗고
낡은 피는 수챗구멍에 버린다
곁눈질로 우는 피의 기쁨
뒤뜰에서 오랜만에
꽃잎 떨어지는 소리
마지막 꽃잎도 떨어지고 나면
더 무엇이 살아서 떨어지겠는가
서쪽 하늘이 열리고
네가 돌아왔다
살아 있는 것 모두
물이 되도록
물 끝에 거품으로 일 때까지
상실한 너는 또다시 오라.
저쪽
강은교
허공에서 허공으로 달리며 그는 말했네
1천 광년이나 1억 광년 저 쪽에서 보면
이 부르튼 지구도 아름다운 별이라고
아무도 감동하지 않았지만
나는 감동했네
- 뿌연 광대뼈와 흐린 눈의 우리도 뽀얀 살빛의 천사들처럼 저 쪽에서 보면 아름다운 빛 속에 잠겨 있을 것이네
- 이 모오든 시끄러움, 이 모오든 피튀김, 이 모오든 욕망의 찌꺼기들, 눈물 널름대는 싸움들, 검은 웅덩이들, 넘치는 오염들,……몰려다니는 쥐떼들에도 불구하고
허공에서 허공으로 달리며
우리는 아름다운 별의
한 알의
빛
이라고
전화
강은교
아마,
다이얼을 돌려본 이들은 알 거예요.
그것이 어떻게 닿지 않는 것을
닿게 하는지를.
뛰뛰거리는 신호음이 들릴 때면,
아 반가움, 그 사람이 뛰어오고 있군요 ……
가슴을 벌리고,
혀를 움칫거리며,
온몸의 동맥과 정맥 들을 펄럭펄럭,
허파에 산소를 불러들이며 ……
그러나 오늘은 부재,
저 공중을 건너 저 바람을 건너
저 안개를 건너 건너 아라비아 숫자
여섯 싸늘하게 앉아 있을 뿐,
진눈깨비
강은교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 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 시원히 눈도 못 된 것
부서지며 맴돌며
휘휘 돌아 허공에
자취도 없이 내리네
내 이제껏 뛰어다닌 길들이
서성대는 마음이란 마음들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천국은 없어
몸살치는 혼령들이
안개 속에서 안개가 흩날리네
어둠 앞에서 어둠이 흩날리네
그 어둠 허공에서
떠도는 허공에서
떠도는 피 한 점 떠도는 살 한 점
주워 던지는 여기
한 떠남이 또 한 떠남을
흐느끼는 여기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그대여
어두운 세상 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풀꽃인 그대여.
진달래
강은교
나는 한 방울 눈물
그대 몰래 쏟아 버린 눈물 중의
가장 진홍빛 슬픔
땅속 깊이깊이 스몄다가
사월에 다시 일어섰네.
나는 누구신가 버린 피 한 점
이 강물 저 강물 바닥에 누워
바람에 사철 씻기고 씻기다
그 옛적 하늘 냄새
햇빛 냄새에 눈떴네.
달래 달래 진달래
온 산천에 활짝 진달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지렁이에 대해 생각한다
강은교
찬란한 대낮, 계단을 올라가는데 무엇인가 굵은 실 같은 것, 아니 고무줄 같은 것이 반쯤 잘린 채 햇빛을 맞고 있었다, 뭘까, 고개를 수그리고 바라보니 지렁이였다, 누가 밟고 지나갔는지 반 토막만 남은 것이었다. 아하, 어제 온 비에 길로 나온 것이었군, 가엾게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 어버렸군, 그냥 지나치려는데 무엇인가가 길을 막았다, 그 림자였다, 내 그림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내 그림자.
차표 한 장
강은교
바람이 그냥 지나가는 오후, 버스를 기다리고 있네, 여자애들 셋이 호호호- 입을 가리며 웃고 지나가고, 헌 잠바를 입은 늙은 아저씨, 혼잡한 길을 정리하느라, 바삐 왔다갔다하는 오후, 차표 한 장 달랑 들고 서 있는 봄날 오후, 아직 버스는 오지 않네
아직 기다리는 이도 오지 않고, 양털 구름도 오지 않고, 긴 전율 오지 않고, 긴 눈물 오지 않고, 공기들의 탄식 소리만 가득 찬 길 위, 오지 않는 것투성이
바람이 귀를 닫으며 그냥 지나가는 오후, 일찍 온 눈물 하나만 왔다갔다하는 오후
존재도 오지 않고, 존재의 추억도 오지 않네
차표 한 장 들여다보네, 종착역이 진한 글씨로 누워 있는 차표 한 장.
아, 모든 차표에는 종착역이 누워 있네.
천 개의 혀를 위하여
강은교
눈부신 아침
FM 가정음악실의 여자 아나운서가 속삭였다.
그는 평생 동안 5296개의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동안 9777m의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동안 5010개의 밥그릇을 비웠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동안 322개의 단추를 달았으며
그는 평생 동안 10010번의 세수를 하였으며
그는 평생 동안 2090번의 전화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동안 2411kg의 쇠고기를 씹었으며
그는 평생 동안 8515mg의 아황산가스와
그는 평생 동안 15632mg의 먼지와
그는 평생 동안 1210mg의 산소와......
그런데
그는 평생 동안
7791번 골목을 잘못 들어갔으며
그는 평생 동안 4521번 낭떠러지에 섰었으며
그는 평생 동안 39333번 넘어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발디가 흘러나왔다. 비발디의 천 개의 혀를 위하여.
천 개의 혀들을 위한 노래.
강은교
제1곡 - 희망에 대하여
지상에서
가장
큰
유혹
너의 입을 찾아서
너의 눈썹이 흔드는
공허를 찾아서
일어서게 해다오,
소리치는
천 개의 혀들의 뿌리 누운
여기.
제3곡 - 어머니 곁으로
저물녘에 우리는 가장 다정해진다.
저물녘에 나뭇잎들은 가장 따뜻해지고
저물녘에 물 위의 집들은 가장 따뜻한 불을 켜기 시작한다.
저물녘을 걷고 있는 이들이여
저물녘에는 그대의 어머니가 그대를 기다리리라.
저물녘에 그대는 가장 따뜻한 편지 한 장 들고
저물녘에 그대는 그 편지를 물의 우체국에서 부치리라.
저물녘에는 그림자를 접고
가장 따뜻한 물의 이불을 펴리라.
모든 밤을 끌고
어머니 곁에서.
첫눈
강은교
첫눈이 내린다
흙에 닿으면 흙으로
눈물에 닿으면 눈물로
내리는 족족 녹으며
자꾸 내린다
웬 슬픔들 여기엔 이리도 많은지
동구 밖 넓은 길 훠이훠이 떠돌다가
더는 몸비빌 곳 없어
찾아오신 넋들
구름 위에서 구름이 부서진다
바람 앞에서 바람이 부서진다
어이 하리 못다한 우리네 사랑
내려 쌓이지 않으면 어이 하리
첫눈을 맞는다
흙이 되어 흙을
눈물이 되어 눈물을 맞는다
살아서 형체도 없이 살아서
파란만장 골목마다
흩어지는 아우성들
어디 한번 당신 옷깃에
녹는 살 대어보리라며
가슴팍이란 가슴팍
끓는 김 되어 용솟음치리라며
혹은 당신 이마 밑
얼음으로 깊이 깊이
합치리라며
첫사랑 메일이 열리는 소리
강은교
언제부턴가 이메일 하나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로 들여다보지도 않고 삭제해 버리곤 했지만,
언제부턴가 그 메일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벌써 10년도 더 전, 1990년대의 어느 날이던가,
학교로 책 한 권이 부쳐져 왔다.
어느 고등학교의 교지.
첫 페이지에 어느 선생님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누가 무엇 때문에 책을 보냈나, 하고
들여다보다가 한 사진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랬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름.
그 뒤 몇 번인가 그 이름의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오기도 하다가
정년퇴임 소식 뒤에는 이메일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날 버스는 유난히 주춤거리며 떠났었다.
버스가 떠날려는 찰라,
버스 밖에는 어머니가 나에게 어서 내리라고 손짓하며 서 계셨고,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물론 그 때 나는 고무신 차림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 있는 옷을 갈아입은 그 차림 그대로였다.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고 있는데 ,
버스 문이 닫히려는 찰라,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뛰어내렸다.
어머니의 승리였다.
어머니는 내 손을 개선장군처럼 잡아끌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거의 뛰듯 앞장서서 걸어가셨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버스를 자꾸 뒤돌아보며 어머니에게 끌려갔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참 순진하기도 했었지.
그때 우리는 "사랑 기념"으로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고,
나는 그 사진관을 배경으로 지금까지 유일한 한 편이 되어버린 희곡 하나를 썼었다.
이름하여 <노예의 사랑>, 제목만 생각난다.
손은 잡았었던가?
아무튼 그를 볼 때마다 영화배우 그레고리 팩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온 이메일의 JPG 사진은 아주 큰 것이다.
자신만만한, 그레고리 팩의 미소를 띤 한 할아버지의 얼굴.
그 사진을 들여다보며 문득, 만약 그때 그 버스를 같이 타고 갔었더라면
나의, 우리의 인생 행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한다.
첫사랑, 덕분에 컴퓨터에서 메일이 열리는 소리.
가끔은 아주 아름답게 들린다.
나에게 힘을 주는 아름다운 소음!
첫사랑을 보러가네
강은교
비 오는 날이면, 허공을 걸어
첫사랑을 보러 가네
첫사랑은 향기로운 웃음을 흔들며
안개 뒤에 서 있네
내 온몸의 피는
첫사랑의 허파 속으로 달려가네
구름의 등과
안개의 무릎에 앉은 이끼들 사이로
벽을 향하여
벽 속에 걸린 등불을 향하여
꿈의 지느러미를 향하여
침묵의 중얼거림을 향하여
비 오는 날이면, 허공을 걸어
첫사랑을 보러 가네
첫사랑은 향기로운 웃음을 흔들며
빗방울 뒤에 서 있네
꽃들의 심장을 두드리네
처녀들과 함께
오,
시간의 처녀들과 함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강은교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나부끼는 바람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 위의 아침 햇빛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 위의 반짝이는 소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초록 거미의 사랑
강은교
초록 거미 한 마리, 지나가는, 강가의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어. 예쁜, 예쁜, 초록의 배, 허공에 엎드려…… 초록 거미 한 마리, 눈물 글썽이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어, 저 잠자리를 보아, 비단 흰 실로 뭉게뭉게 감긴 저 잠자리 한 마리를 보아, 잠자리를 그만 죽여버렸네,
초록 거미 한 마리, 지나가는, 강가의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어. 잠자리를 그렇게도 사랑했던 초록 거미 한 마리…… 예쁜, 예쁜, 초록의 배, 허공에 엎드려……
이제 합치리, 없는 날개로 저 거대한 하늘가, 또는 강물 속 어디.
초원의 풀잎들이 보낸 편지
강은교
지난여름 나는 몽고에 갔다.
그곳에서 이런 글을 썼다.
그래, 아직 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나는 여행한다.
그대를 찾아 그대 속으로 여행 중.
나는 그대 속에 있다. 이 영원회귀의 사막에서
여행은 존재의 권력. 끊임없는 출발.
여행의 선두는 신발 한 켤레,
우리 삶의 모래性.
모든 덧문들이 사막에 도착한다.
풀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구불구불한 언덕들을 지나,
울퉁불퉁한 구름 밑을 지나,
재빠른 회색 들쥐들의 새까만 눈을 지나,
갑자기 불어대는 모래바람을 지나,
아무것도 뵈지 않는 지평선을 지나,
구름의 눈물처럼 쏟아지는 소나기를 지나.
회색 들쥐의 치켜뜬 눈을 보아라.
온몸을 속도로 적시며 달아나는 그것,
빠르기도 하구나.
그것은 이쪽 모래구멍에서 저쪽 모래구멍으로 재빨리,
들키지 않으며 사라진다.
사막이 그것들의 달리는 속도로 순간 구겨진다.
보이지 않는 그 눈을 보아라.
현재처럼 환상이다.
오늘에 서서 오늘을 잡으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어리석은 환상이다.
현재는 보이지 않으며 재빨리 사라지는 것.
하늘의 출렁이는 은빛 허리띠 별-떼처럼.
여행은 고독이다.
붉어 오는 땅의 한켠,
여행은 존재의 권력이다. 끊임없는 출발이다.
춘향이의 꿈 노래
강은교
아주 기인 어둠이 날 손짓하고 있네
아주 검은 날개가 시방 날 부르네
등덜미에선 자꾸
부끄런 피(血)들이 멈칫대구
내 가락지 황홀한 가락지
심장을 조이네
아주 큰 손이 나를 껴안고 있네
아주 큰 눈이 내 간장 쓸개 숨구멍을 들여다보네
가슴에선 때 없이 슬픈 웃음이
슬픈 기쁨들이 새나구
그렇지 내 꿈 사랑하는 꿈
벌(罰)이 되어 벌써 떠나구
어쩔꺼나 어쩔꺼나
네 울음 어쩔꺼나
(날개 없는 새들 지저귐)
아 오늘 밤은
피는 꽃 지는 잎이 한데 몸섞고 있네
아 오늘 밤 꿈은
지는 잎 피는 뿌리 한데 입맞추는 꿈
님은 뵈지 않아
내 거울 조각 거울 혼자 흐느끼며
큰 칼 제 얼굴에 세상 빛 주워 담아
목숨은 하나 죽음은 열
죽음이 열이면
죽음의 집은 스물 마흔 무한(無限)
아주 먼 눈물이 날 출렁이고 있네
아주 오랜 배가 날 자꾸 실어가네
어쩔꺼나 어쩔꺼나
새벽은 멀구
내 고름 한 자락 땅 위에 놓치이니
눈물 자국 자국마다 일어서는 누구 발자국 소리
타일 바닥에 엎드려 있는 호랑나비
강은교
그리로 들어갔을 때 그 녀석이 보였네,호랑나비, 날개에 검은 줄무늬 번쩍거리는 그것, 어쩌다 거기로....그것은 타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어둠의 이마를 빨고 있었네, 그러다 갑자기 일어서서는 뱅글뱅글 돌았네.
타일들이 전부 잎사귀가 되었네, 타일들은 잎사귀 되어 공중에 펄럭거렸네, 나도 잎사귀 되어 공중에 펄럭거렸네, 우리 모두 잎사귀 되어 펄럭거렸네,
모든 잎사귀는 모든 나무의 깃발,
모든 잎사귀는 펄럭이는 모든 공중의 꿈,
호랑나비는, 눈감은 호랑나비는 흔드네,그 초록 깃발을.
파도
강은교
1
떠도는구나 오늘도
동편에서 서편으로
서편에서 동편으로
물이 되어 물로 눕지 못하는구나.
꿈꿀 건
온몸에 솟아나는 허연 거품뿐
거품 되어 시시때때 모래땅 물어뜯으며
입맞추며 길길이
수평선 되러 가는구나.
떠돌며 한 바다
막으러 가는구나.
누가 알리
엎드려야만 기껏 품에 안아 보는 세상
날선 바람떼 굽은 잔등 훑고 가면
쓰러져 내리는 길, 길 따라
사랑이 얼마만 하더냐, 묻는 먼지알 신음소리
목숨의 길이 얼마만 하더냐, 묻는 먼지알 신음소리
등덜미에 철썩철썩 부서져
떠도는구나 오늘도
동편에서 서편으로
서편에서 동편으로
물이 되어 물로 눕지 못하는구나.
아, 이 벽에서 저 벽
저 벽에서 이 벽
끝내 거품 되어 피 넘쳐 넘쳐
수평선이 흐느끼는구나
흐느끼며 한 세상
거품 속에 세우는구나.
2
모래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바닷가
나는 보았습니다.
파도들이 달려올 때는 옆 파도와 단단히
어깨동무한다는 것을
손에 쥔 하얀 거품이
모래밭을 덮는다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온몸을 하얀 거품 손에 감춘다는 것을
파도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풀잎
강은교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들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풍경제(風景祭) - 서(西)쪽 하늘
강은교
우리가 바람 속으로 가서
한 바람으로 흐르는 동안
바람 속에 다른 바람을 부르며
빈 들 모래집을
사라지지 않는 동안
서쪽 하늘이여
수 만번 사라지면서
더욱 정다운 이여
나팔꽃 아래서
들리지 않는 귀는 언제나
들리는 귀가 되고 싶다.
밤이 오고
한 채의 모래집 그림자를 지우면서
밟고 또 밟아
다시 더 밟을 수 없는 땅 위
사랑하는 자들은 서로
젖은 잎으로 끝없다.
하늘다람쥐
강은교
하늘다람쥐
하늘다람쥐
하늘을 닮아서 하늘다람쥐
하늘처럼 넓어서 하늘다람쥐
하늘처럼 빨라서 하늘다람쥐
우리 모두 신호등 빨간 불에 걸려 넘어질 때도
우리 모두 황금빛 노을에 옷자락 스칠 때에도
흰 구름 어깨 위에
달랑 올라앉는 하늘다람쥐
예쁘고 예쁜 하늘다람쥐
몰운대 바람 속 하늘다람쥐
몰운대 흰 구름 속 하늘다람쥐
한 어둠은
강은교
한 어둠은 엎드려 있고
한 어둠은 그 옆에 엉거주춤 서 있다
언제 두 어둠이 한데 마주 보며 앉을까
또는 한데 허리를 얹을까
한 여자가 있는 풍경
강은교
벚나무 밑에서
한 젊은 여자가 울부짖고 있다.
제 가슴을 쥐어뜯는다.
얇은 나일론 블라우스가
몰려 서 있는 은빛 안개를 흔든다.
아침이 그치고
여기저기 젖은 창마다
푸시시한 얼굴들이 내걸린다.
기웃거리는 은빛 안개.
젊은 여자가 길고 높은 목소리
벚나무 굽은 가지를 흔들며
젖은 창마다 급히 달려가다가
오만하게 솟은 벽에 부딪혀
부스스 부서져 내린다.
피가 흐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젖은 창들이 스르르 닫히고
여자의 옆에 팽개쳐진 잡동사니 그릇들에
이제 일어선 햇빛
핏빛으로 반짝이며 고여 들 뿐,
우리들의 벽은 튼튼하고 튼튼하다.
한 조각의 노래
강은교
한 조각 구름 속에서
온 구름이 웃어요.
한 방울 빗속에
온 비 방울방울 울며 내려요.
한 줌 안개 속에서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목놓아 해매는 온 안개.
길이 없어도
쾅쾅 온 데서 문이 닫혀도
흘러요, 한 줄 내 눈물에
네 온 눈물 강물이.
누워있어요,
초롱꽃 한 실뿌리에
온 산 아픈 뿌리가.
할머니
강은교
저물녘 깻잎들이 흐느끼고 있습니다
노을 자빠져 넘실대는
시장길 모퉁이
한 평 나이롱 보자기 위에서
먼 들판의 흙들
숨죽여 울고 있습니다
어디서 오나 이 바람소리는
어디서 오나 이 물 흐르는 소리는
먹구름들 잔뜩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습니다
일어서야지 일어서야지
할머니 눈 뒤집어 털면
주섬주섬 달려와 박히는 허허벌판
허허벌판 핏물 든 수만 지붕들
비틀비틀 별들이 걸어옵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어디서 우뢰 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왜 이리 더딘지, 밤은
새까맣게 새까맣게 살아날
해 숨은 밤은
우리는 각기 제 갈길로 떠났습니다
식은땀 흐르는 깻잎
막막히 막막히 길 위에 깔아 버린 채
해 좋은 날
강은교
해 좋은 날
골목 한 귀퉁이에
밥풀튀기 아저시가 왔네.
찌그러진 양동이
구멍난 냄비
줄줄이 튀어나와 서는 비탈길
허연 쌀알들 한 되씩
기계 속에 들어가 누우면
헌 잠바 그 아저씨
재주도 좋아
설탕 치고 손잡이를 돌리네.
한 바퀴 돌아가고
두 바퀴 돌아가고
열두 바퀴 세상처럼
빙빙 돌아가네.
떨어질라 떨어질라
허리 입술 꼭 대고 돌아가네.
흥부네 박처럼
대포소리 펑,
황토 언덕을 흔들 때까지
뽀얀 연기 속
쬐끄만 쌀알들의 몸
밥풀 되어 훌훌 일어설 때까지
아저씨여, 재주도 좋은 아저씨여
흙 한줌 뿌려
실빗살 내 꿈도 튀겨 주소.
손톱만한 사랑 담은
뼈들 피들
햇빛 섞어 부풀려 주소.
해 좋은 날
골목 한 귀퉁이
바람막이 잡풀도 죄 죽어버린
우리 동네.
햇빛 소리 – 향가 풍으로
강은교
햇빛 소리가 들렸다
폐허 한 구석, 어여쁜 햇빛 한 올이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있었다
게 누가 날 찾는가, 날 찾이리 없건마는
어느 누가 날 찾는가*
아야아-
고개 빼고 바라보는
보라 제비꽃 한 송이
* 황천무가 <바리공주>에서 인용.
허공 하나를
강은교
어제
허공 하나를 얻어왔네
벽에 걸었네
밤새도록 닦았네
별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나왔네
----이제 누워보게나,
부시게 속삭임.
허총가(虛塚歌)
강은교
한밤중에 붉은
햇덩이 뜬다.
하늘로 가자
하늘로 가자.
풀 눕고 모래 눕고
새들도 누운 다음
돌아온 강물 끝에 뻘바람에
지붕을 거두어
지붕을 거두어.
우훠넘차 슬프다
어허영차 슬프다.
네 살은 내가 안고
내 살은 네가 업고
청천하늘 밝은 밤
없는 곳 없는 곳으로.
길은 동서남북
길은 동남서북
그림자 되어 너
한 꿈 그림자 되어 우리 함께
오늘도 수만 잠
헛되고 헛되었으니.
헤매는 발들을 위한 노래
강은교
지나간다
집들이.
꽁꽁 언 아이들이.
생각에 잠겨
겨울 바람이.
어릴 때 나는 흐르는 물가에 살았다. 아침이면 웃으며 물이 나를 씻었고 밤이면 지는 해가 내 발을 따스히 덮어 주었다. 나는 걷지 않았다. 달리지도 않았다. 그저 웃음. 그러면 내 발이 나를 똑바로 세워 주었다.
지나간다
자전거 한 대가.
자전거에 실려
목없는 닭들이.
눈물마른 눈물
숨죽인 숨들이.
조금 컸을 때 나는 내 집을 떠났다. 아무것도 나를 씻어 주지 않아서 점점 나는 더러워졌다. 나는 걷는 법을 배웠다. 누가 내 발에 끊임없이 채찍질해서, 나는 달렸다.
지나간다
길들이.
헤매는 눈먼 창들이.
허리 꺾인 꽃들이.
넘어지며 처녀들이.
어느 날 나는 별을 바라보면서 울기 시작했다. 내 발은 쉴 곳이 없었다. 걷고 걸어도, 뛰고 뛰어도 아침에 지은 집은 황혼이면 무너졌다. 아직 멀었습니까! 나는 외쳤다.
지나간다
서 있는 울음소리와
앉아 있는 울음소리와
이제 그만 누운 울음소리와.
오르기 위하여
오르기 위하여
현을 위한 파르티타 16
강은교
이제 쓸쓸함을 아는 이는
용서해다오, 나는 어느 날의 먼지
이제 홀로임을 아는 이는
용서해다오, 나는 풀잎 한 장 앉았다 가는 서러운 창틀
이제 울음을 아는 이는
용서해다오, 나는 너무 넓은 우산을 폈었었음을
이제 늙음을 아는 이는
용서해다오, 나는 너무 긴 황금빛 햇살을 앉히려 했었음을
혜화동
강은교
가을이 오는데
누가 기타를 켜네
그 우체국은 거기 그대로 있군요. 훨씬 단장이 달 되어서 골목길도 잘 있군요. 빵집은 24시간 편의점이 되어 있구요. 로터리에는 살찐 물줄기가 뻗어 오르고 있습니다.
가을이 오는데
누가 기타를 켜네
아무도 없이
기타를 켜네
자장면 집이 하나 새로 생겼군요. ‥‥‥ 그 산은 길이 되었군요. 내가 살던 집은 헐리고 새 이층집이 들어앉았군요. 5층 건물도 하나‥‥‥학원이군요. 단과반. LG 대리점도 한 개.
가을이 오는데
누가 기타를 켜네
아무도 없네
아무도 없이
기타를 켜네
꽃집도 한 개. 그 초등학교 자리엔 10층 빌딩‥‥‥ 그런데 찻집이 그대로 있군요.‥‥‥삐걱거리는 계단도 그대로, 베토벤도 그대로‥‥‥모차르트도 그대로‥‥‥비발ㄷ가 흰 구름을 끄집어내던 의자도, 브람스의 탁자도‥‥‥흠집투성이가 되어 앉아 있군요‥‥‥아니, 바람투성이가 되어.
가을이 오는데
누가 기타를 켜네
아무도 없네
아무도 없이
기타를 켜네
거기엔 플라타너스 그늘이 있었는데, 그 그늘을 만지곤 했엇는데‥‥‥푸른 녹들이 점령해 지붕들‥‥‥아, 한 번 만져봅시다.
그런데 지금, 우체국 문은 닫혀 있다.
시간 애인의 팔에 매달려
보이지 않는 글자의 편지나 쓰면서‥‥‥
나는 플라타너스 잎을, 잎의 그림자를 질겅질겅 씹는다
가을이 오는데
누가 기타를 켜네‥‥‥
시간은 모든 잎 속에서 익어간다.
황혼곡조
강은교
1
저문 날은 네가
빈 산 위에 눕는다.
뜰 앞 솔나무에는 아직 하느님의 흰 눈이 쌓이고
1년이나 먼저 새는 새벽
널 기다려
대문 밖에 서성인다.
애인아
천지에 날 어둡는 소리가 들린다.
큰 길이 빨리
빈 산으로 들어간다.
너와 함께
하늘과 땅이 생긴 이야기나 하면서
나도 나라 하나를 떠메고 갈까?
오늘밤은 이른 잠이
벗어논 살 위에 든다.
이제 내가
마신 물 값을 치르고
죽어서 낯 모르는 여자의
무명치마를 입을 차례다.
2
잠들면서
참으로
잠들지는 못하면서
쓰던 뼈는 다시
불후의 살로 덮고
제 아이는
등 뒤에
이슬 묻혀 남겨놓지
그래도 흐린 날은
귀신이 되어 울지
잊지도 않고
잊을 수도 없이
3
내가 마시는 물의 무게를,
내가 지고 가는 하늘의
일천만 개의 별빛을,
내가 씹는 살[肉]의
피의 이 좋은 맛,
무너지지 않으면
벽은 이미 벽이 아니다.
무너져 태양의 언저리에서
천만번 돌다가 돌아다니다가
어디서든 부딪쳐 깨어짐의 희망을,
세상 한쪽은 늘 피로 물드는
희망의 끝 간 데를,
거기서 일어서는 한 사람
내 그리운 아버지를 본다.
황홀
강은교
이제 오는 저 새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문을 두드리는 저 사람은 얼마나 눈부신가
창틀에 누워 창을 두드리는 저 꽃잎은 얼마나 찬란한가
창틀에 누워 안개빛 유리창에 몸부비는 저 빗방울은 얼마나 항홀한가
지층을 가진 것들은 얼마나 얼마나 가벼운 두꺼움인가
횃불
강은교
산에 어둠이 내렸다
신문지를 길게 말아 횃불을 만들었다
손에 손잡고 미끄러져 내려오며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밝혀질수록 어둠은 더 어두운 것을
돌들이 길게 누운 밤 산에는 허리 굵은 나무들이 우뚝우뚝 서서
우리를 막았다
횃불은 어둠을 모르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어둠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
산을 내려왔을 때 산에는 어둠이 가득하였다
나는 이런 시 하나를 생각했다
마음 한구석에 어둠이 살고 있었네
그 어둠 속에 한 사람이 빠졌네
사람들이 달려와 그 어둠을 펐네
밤새도록 펐네
드디어 그 어둠은 없어져
우리는 그 사람을 건져 내었네
기쁜 우리는 어둠을 다아 퍼낸 줄 알았네
그다음 날 또 사고가 났네
우리는 몰려가 그 어둠을 펐네
밤새도록 펐네
드디어 그 어둠은 사라져
그 사람이 후들후들 심연에서 기어나왔네
우리는 이번에야말로 어둠이 다아아 물러간 줄 알았네
기뻐 날뛰었네
하루 낮을
또 하루 낮을
집에 도착하니 누가 피곤한 내 등을 두드렸다
한 사람은 높게 울고 한 사람은 낮게 우는 바람 소리였다
어둠이 그것의 허리를 꼬옥 붙안고 있었다
후포의 가자미
강은교
참, 날씨가 좋군
바다가 길어지고 있어
적당한 파도
적당한 바람
나는 잘 말라가고 있어
뼈도 내장도 없이
이제 떠나게
길은 열어 두었으니
눈앞에서 길어지고 있는 바다
적당한 거품
적당한 안개............
( 머리칼로 새로 기어드는 바람 지껄이네 )
나는 잘 얼어 있다구
그대의 가슴 앉은 냉동실에서.
흐린 날은
강은교
흐린 날은 수평선 위에 누워있는 허공을 바라보며 산다.
FM에서 부드러운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이 되면
새파란 불빛들이 그 허공 밑 바다 위에 켜지기 시작한다.
새파란 불빛들이 켜지는 배들은 곧,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불의 성(城)이 된다.
허공은 깜깜함으로 변하며 거기 불빛들은 별처럼 박힌다.
나는 어디인가로 통신을 하고 싶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신호를 던지며....
그래서 그 배들의 잔치에 참여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어디엔가 참여하고 싶은 것이다.
흩날리고 있네
강은교
사랑이 사랑으로 흩날리고 있네
빗방울들이 자기의 가슴을 돌아보는
사이
심연(深淵)에서 심연(深淵)으로 달리는
사이
번개와 번개
곁
우레와 우레
곁
구만리
잠과 잠
곁
사랑이 사랑으로 흩날리고 있네
시간에서 시간으로 건너뛰는 건널목
언뜻 일어서는 어둠의 머리칼처럼
별의 은빛 기침 소리처럼.
희망
강은교
희망이 팔을 쭈욱 내밀고 있어.
희망의 눈초리는 낙타처럼 길군.
희망의 입술은 꽃살처럼 부드러워
희망의 어깨는 분홍이군.
그럼 이제 희망의 손을 붙잡게
그럼 이제 주머니 깊숙이 희망을 넣게
아,
달큼쌉쌀한 당신, 희망의 혀
희명
강은교
희명아, 오늘 저녁엔 우리 함께 기도하자
너는 다섯 살 아들을 위해
아들의 감은 눈을 위해
나는 보지 않기 위해
산 넘어 멀어져 간 이의 등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기 위해
워어이 워어이
나뭇잎마다 기도문을 써 붙이고
희명아 저 노을 앞에서 우리 함께 기도하자
종잇장 같아지는 흰 별들이 떴다
우리의 기도문을 실어 갈 바람도 부는구나
세월의 눈썹처럼 서걱서걱 흩날리는 그 마당의 나뭇잎 소리
희명아, 오늘 밤엔 우리 함께 기도하자
나뭇잎마다 기도문을 써 붙이자
워어이 워어이
서걱서걱 흩날리는 그 마당의 나뭇잎 소리
흰 눈 속으로
강은교
여보게, 껴안아야 하네
한 송이 눈이 두 송이 눈을 껴안듯이
한데 안은 눈송이들 펄럭펄럭 허공을 채우듯이
여보게, 껴안아야 하네
한 조각 얼음이 두 조각 얼음을 껴안듯이
한데 안은 얼음들 땅 위에 칭칭 감기듯이
함께 녹아 흐르기 위하여 감기듯이
그리하여 입 맞춰야 하네
한 올 별빛이 두 올 별빛에 입 맞추듯이
별빛들 밤새도록 쓸쓸한 땅에 입 맞추듯이
눈이 쌓이는구나
흰 눈 속으로
한 사람이 길을 만들고 있구나
눈길 하나가 눈길 둘과 입맞추고 있구나
여보게, 오늘은 자네도
눈길 얼음길을 만들어야 하네
쓸쓸한 땅 위에 길을 일으켜야 하네.
4월
강은교。
1
구름 끝에 한 사람이 매달려 있구나
2
안개의 뗏목을 타고 가는구나, 그 사람
바람 사이로 가는구나, 그 사람
3
엎드려 신발끈을 매는
그 사람
가득한 모래를 덜고 있는
그 사람
4
하늘에는 일어서는 깃발이 가득하다
4월에 던진 돌
강은교
너 아직 거기 있느냐
4월에 던진 돌아.
꽃샘바람 몹시도 불어가는
길모퉁이
연탄재며 밥 찌꺼기
혹은 목 떨어진 개나리 꽃 새
꾸부정하게 끼어 앉아
깨진 머리로 빛 나는
돌아
으스름 무렵이면 무렵마다
한 입 가득 피 베어 문 하늘이
네 얼굴처럼 달려온다.
날이라도 궂어
출출출 비 내리 쏟는 날에는
험집 투성이 우리 가슴 결엔
화들짝 살아오는 숨소리, 고함소리
난장판으로 강물이 흐르고
뒷산 허리에서
우르르 우르르
우회 몸서리 요란했다.
아직 거기 있느냐 너
4월에 던진 돌아,
개나리 활활 일어설 때를 기다려
아, 그 꽃잎 꽃잎에 상채기 흠씬
물댈 때를 기다려
일년이고 십 년이고
수유리 한 구석을
차마 못 떠나는 돌아
네가 못 떠나는 이 땅에
올해도 4월은 가지만
우리는 영영 그 4월에 남아 있다.
11월
강은교
수많은 눈썹들이
도시의 하늘에 떠다니네
그 사내 오늘도
허리 굽혀 신발들을 깁고 있네
이 세상 눈썹들을
다 셀 수 없듯이
이 세상 눈들의 깊이
다 잴 수 없듯이
그 계집 오늘도
진흙 흐린 천막 밑에 서서
시드는 배추들을 들여다보고 있네
11월.
12월의 시
강은교
잔별 서넛 데리고
누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처마끝마다 매달린
천근의 어둠을 보라
어둠이 길을 무너뜨린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일년의 그림자도 지워버리고
그림자 슬피 우는 마을마저 덮어 버린다
거기엔
아직 어린 새벽이 있으리라
어둠의 딸인 새벽과
그것의 젊은 어머니인
아침이
거기엔
아직 눈매 날카로운
한때의 바람도 있으리라
얼음 서걱이는 가슴 깊이
감춰둔 깃폭을 수없이 펼치고 있는
바람의 형제들
떠날 때를 기다려
달빛 푸른 옷를 갈아 입으며
맨몸들 부딪고 있으리라
그대의 두 손을 펴라
싸움은 끝났으니, 이제 그대의 핏발선 눈
어둠에 누워 보이지 않으니
흐르는 강물소리로
어둠의 노래로
그대의 귀를 적시라
마지막 촛불을 켜듯
잔별 서넛 밝히며
누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그림자를 거두며 가고 있다.
23층의 햇빛
강은교
지금 막 심장에 도착했어
뼈 하나를 지났다구
간을 지나
콩팥을 지나
갈 거야, 너의 피로
그림자가 오면 그림자를 기대게 하면서
눈물이 오면 눈물을 기대게 하면서
바람이 오면 바람을 기대게 하면서
햇빛의 금빛 손가락 끝에서 그림자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새까만 그림자의 손톱들이 차가운 벽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갈 거야, 너의 핏속으로
별이 오면 별을 기대게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