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다음날 아침, 바클리는 마르크스의 저택을 방문했다. 그는 피곤한 한숨을 쉬며, 안경을 더듬어 찾고는 가죽 가방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냈다. 바클리가 의자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동안, 마르크스는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억제하느라 애썼다.
"어떤가?"
사실은 2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루하게 긴 시간처럼 느껴진 마르크스가 물었다. 바클리는 엄숙하게 목청을 다듬고는 안경의 금테 너머로 마르크스를 쳐다보았다.
"우선 백작님, 브라이트 씨라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브라이트 부인과 한때 결혼했던 사람으로서는 말입니다."
"그 정도는 나도 이미 알고 있네."
베스타 사원에서 있었던 밀회에 대한 기억이 문득 다시 한번 떠올랐다. 이피지니아의 뜨겁고 안락한 몸 속으로 잠겨 드는 기분 좋은 그 느낌을 그는 수천 번이나 다시 상기해 보았다. 그러다 보니 흥분으로 점점 무거워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의 허벅지 안쪽의 그 부드러운 감촉을 거의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절묘한 가슴이 그의 마음속에 감질나게 어른거렸다. 그녀의 유두는 너무 신선하고 성숙했다. 아름답게 곡선진 그녀의 몸매는 그가 실험실에서 한때 키운 적이 있었던 절묘하고 이국적인 과일을 연상시켰다. 그녀의 향기는 그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바클리의 굵은 눈썹이 코 위의 딱딱한 선과 연결되게 비틀렸다.
"뭐라고요, 백작님? 만약 백작님이 브라이트 부인이, 제 말은 브라이트 양 말입니다만, 미망인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계셨다면 왜 저를 데번으로 알아보러 보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자네가 떠나기 전까지는 나도 그 사실을 몰랐다네."
"그렇다면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게 되셨죠? 런던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텐데요."
마르크스는 모호하게 대답했다.
"아주 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해서 브라이트 씨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냈지."
바클리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사용하셨다는 말씀이신가요?"
"관찰과 연역적인 추론을 사용했지."
마르크스는 앞으로 다가앉아 팔꿈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손을 마주 잡으며 기대감이 섞인 감정으로 바클리를 바라보았다.
"그밖에는 뭘 알아냈지?"
바클리는 자신의 서류를 뒤적였다.
"브라이트 양은 딥포드 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아주 작은 곳이죠. 거길 찾는데 문제가 아주 많았습니다."
"어 쨌거나."
마르크스가 말했다.
"자네가 찾지 않았나."
"네, 백작님."
만약 바클리가 사실을 알아냈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만약 협박꾼 같은 사람이 그녀의 과거를 조사하고 싶어 한다면, 이피지니아가 미망인이 아니고, 따라서 독신 여성이나 처녀에게 부과된 사교계의 규율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것이 이피지니아가 그렇게 취약하다는 사실인지, 아니면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그녀의 태도인지 알 수 없었다.
"계속하게, 바클리."
"그녀의 양친은 둘 다 다소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는 기질을 가진 것 같았는데 그녀가 십팔 세 되던 해에 바다에서 실종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때부터 여동생인 코리나의 양육을 맡았죠."
바로 내가 베넷을 양육한 것과 꼭 같네. 하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과 여동생을 어떻게 부양했지? 상당한 재산을 상속 받았나?"
"아뇨, 단지 어머니의 그림과 아버지가 썼던 한두 권의 디자인 책을 팔았습니다."
마르크스는 펜을 집어 들어 손가락으로 돌렸다.
"큰 돈은 아니었겠네, 그럼."
"네, 백작님. 하지만 브라이트 양은 다소 사업가적인 기질이 있는 것 같더군요."
마르크스는 한기를 느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자신이 부양해야 할 동생과 단둘이 세상에 남겨졌다는 충격에서 회복된 다음에 브라이트 양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머니의 그림과 아버지의 디자인 책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돈을 젊은 여성들을 위한 숙녀 학교를 여는 데 사용했죠."
마르크스는 거의 펜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바클리를 응시했다.
"브라이트 양이 젊은 여성들을 가르쳤나?"
"네, 백작님."
"품행, 매너, 적절한 태도들을 말인가? 그런 종류를 가르쳤나?"
"다른 것들도요. 브라이트 양의 숙녀 학교는 명성이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부근의 명망 있는 가정에서 젊은 딸들을 그녀에게 보냈답니다."
"세상에."
마르크스는 미친 듯이 큰 소리로 웃고 싶은 욕망을 참기 힘들었다.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무모한 이피지니아가 사교계의 엄격하고 딱딱한 규율들을 젊은 여성들에게 가르쳐서 돈을 벌었다니.
"그녀의 사촌인 페어리 양은 브라이트 양이 부모를 잃은 지 1년 뒤에 함께 살려고 왔죠. 페어리 양은 수학과 박물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 학교의 명성이 대단했다고 했나?"
"네, 백작님. 브라이트 양의 명성도 마찬가지였고요. 딥포드 같이 작은 마을에서는 어떤 잘못이나, 범죄, 예의 범절에서의 실수 같은 것들이 당연히 눈에 잘 띄고 심하게 질책 당한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단 한번의 실수도 그 여자의 인생을 망쳐 놓기에 충분하지."
"충분한 것 이상이죠. 젊은 여성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최상의 수준을 유지해야만 하죠. 그들은 부적당한 행동을 보여서는 안 되니까요."
"불쌍한 이피지니아."
"뭐라고요, 백작님?"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게. 그 외에 또 뭘 알아냈나?"
바클리는 서류를 뒤적였다.
"약 3년 전에, 브라이트 양은 비교적 상당히 큰 투자를 했었죠."
"어떤 종류의 투자였나?"
"그녀와 사촌이 투자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 회사는 미망인과 독신 여성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는데, 대부분 자신들과 사회적인 위치가 같은 여자들이죠. 그들 모두 소액의 자본을 투자했습니다. 그 돈은 건축업에 쓰여졌죠."
"부동산 투자 사업인가?"
"네, 백작님."
"어디에 있는 부동산인데?"
"모닝 로즈 거리요."
"제기랄."
마르크스는 기가 막혔다.
"큰 돈을 벌었겠네."
"네."
바클리가 건조하게 말했다.
"이익금의 일부 중 상당한 몫을 여동생에게 주었더군요."
"그 여동생은 어떤가? 어디 있지?"
"아직 딥포드에 있습니다. 작년에 리처드 햄프턴 이라는 한 귀족 가문의 외아들과 결혼했죠."
"그렇군. 이피지니아가 여기 런던에서 미망인 행세를 한다는 걸 햄프턴 가 사람들은 다행히 모르고 있겠네."
"전혀 모릅니다. 만약 사실이 밝혀지면 마을 전체가 시끄러워질 거라는 건 쉽게 상상이 가죠. 여동생을 포함해서 딥포드에 있는 사람들은 브라이트 양이 아직도 사촌과 함께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는 줄로 알거든요."
"딥포드의 그 순진한 사람들이 브라이트 양의 유럽 여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그 여행을 상당히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보셔도 될 겁니다."
"수치스럽다고 여기지는 않나?"
"아뇨. 하지만 마을 사람들 중에는 브라이트 양이 유럽으로 떠났을 때 나쁜 결과가 올 거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죠."
"그랬을 것 같네."
그는 일어나서 창문가로 갔다.
"아주 일을 잘 했네, 바클리."
"감사합니다, 백작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자네의 그 절대적인 분별력을 계속 믿어 보겠네."
마르크스가 분별에 대해 언급하자 바클리는 깊이 한숨 짓는 소리를 냈다.
"어떤 말도 입 밖에 내지 않겠습니다."
"고맙네, 바클리."
바클리는 잠시 주저했다.
"흥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사소한 사실이 또 하나 있는데요, 백작님."
"그게 뭔가?"
"브라이트 양의 여동생인 코리나가 리처드 햄프턴과 결혼했다고 말씀 드렸죠."
"그게 어 쨌다는 건가?"
"몇 년 전에 햄프턴 씨는 코리나가 아니라 언니인 브라이트 양과 결혼할 거라는 얘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는 조용했다.
"그랬나?"
"이 문제에는 약간의 혼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클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언니인 브라이트 양조차도 햄프턴이 코리나에게 관심을 나타내자 놀랐다고 하더군요."
"그랬었나?"
"햄프턴 씨가 코리나 양을 더 좋아한다는 걸 분명히 했을 때 언니인 브라이트 양이 무척 상심했었다고 하더군요."
이피지니아가 다른 남자를 사랑했었고,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마르크스에게 칼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사람 때문에 상심했소, 이피지니아? 그것이 당신이 속박을 내던지고 규율을 무시하게 된 이유요? 아직도 그를 사랑하오? 당신이 지난 밤 나를 당신 팔에 안고서 사랑한다고 속삭였을 때 당신이 생각한 사람이 혹시 리처드 햄프턴은 아니었소? 마르크스는 정원을 내다보았다. 부드러운 비가 내리고 있어서 꽃도 잠시 밝은 빛깔을 잃었고 잎의 푸릇푸릇한 초록빛도 한 풀 꺾였다. 예상치 않게 날이 쓸쓸해졌다. 그는 바클리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내가 더 알아야 할 것이 또 있나?"
"아뇨, 백작님. 이게 전부입니다."
"힘든 일을 해줘서 고맙네."
"별말씀을요, 백작님."
바클리가 일어섰다.
"좀 먼 여행이었습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벽난로 앞에서 발을 뻗고는 쉬고 싶네요."
"한 가지 더 할 일이 있네."
"네?"
"내일 자네가 딴 조사도 좀 해주면 좋겠는데."
"어떤 조사입니까?"
"최근에 누가 리딩 묘지의 엘리자베스 이튼 부인에게 훌륭한 무덤을 만들어 주었는지 알아 봤으면 좋겠네."
바클리는 그를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묘지라고요?"
"그렇네, 바클리. 일종의 작은 동굴 묘지 같은 거지."
바클리는 체념한 듯이 보였다.
"잘 알겠습니다, 백작님. 뭘 알아낼 수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뭐 또 다른 것도 있습니까?"
"아니, 바클리. 가도 좋네."
마르크스는 바클리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책상으로 돌아가 1시간 전에 한나로부터 받은 쪽지를 집어 들었다.<M. 당신을 만나야겠어요. 급해요. 저 번의 그곳에서 2시예요. 당신의 H>마르크스는 한 손으로 그 작은 종이쪽지를 구겼다. 왜 그녀가 다시 그를 만나야 할 정도로 불안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오후 2시, 마르크스는 공원의 길 위에 서있는 별로 특징 없는 전세 마차에 올라탔다. 베일을 뒤집어쓰고 눈에 띄지 않는 갈색 드레스를 입은 한나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의 커튼을 내렸다. 마차 안은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그녀는 그의 불쾌한 상상을 즉시 확인시켜 주었다.
"당신이 런던에 없는 동안 또 협박 편지를 받았어요, 마르크스. 또다시 5천 파운드를 요구해 왔어요."
한나의 목소리는 불안으로 까칠까칠하게 들렸다.
"지난 생일 때 샌즈가 내게 준 아름다운 팔찌를 저당 잡혀야 했어요. 그걸 다시 못 찾게 될까 봐 걱정이에요. 왜 내가 그 팔찌를 안 하는지 그 사람이 물어 볼까 봐 가슴 죄면서 살고 있어요."
"그 돈을 어디다 두라고 했소?"
마르크스가 물었다.
"지난 번과 똑같은 지시였어요. 폴 몰의 전세 마차에 돈을 두었어요. 마르크스, 이대로는 안돼요. 난 보석들을 계속 저당 잡힐 수가 없어요. 조만 간에 샌즈가 알게 될 거예요."
"샌즈에게 사실을 말하라고 다시 한번 당신에게 말해 봤자 아무 소용없겠지?"
"그럴 수 없다는 거 당신도 아 시잖아요."
한나는 베일을 들어 절망적인 표정을 드러냈다.
"내게 실망하고 돌아설 거예요. 그는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오. 그에게 기회를 줘 봐요, 한나."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내가 그를 너무 사랑해요. 당신이 내 두려움을 이해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아요, 마르크스. 당신은 무슨 일이나, 누구한테도 한 번도 두려움을 느껴 본적이 없죠. 그리고 내가 내 남편을 사랑하는 그런 방식으로 한 번도 여자를 사랑해 본적이 없다는 게 분명해요. 그런 깊이 있는 감정을 한번이라도 경험해 봤다면, 날 이해하실 거예요."
한나가 샌즈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격렬한 정열로 이피지니아도 리처드 햄프턴을 사랑했는지 마르크스는 궁금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내가 5천 파운드를 주겠소, 한나. 팔찌를 찾아와요."
그녀는 안도감으로 의자에 기댔다.
"고마워요, 마르크스. 당신은 좋은 친구예요. 돈은 돌려 드릴 게요, 약속해요."
"그럴 필요 없소. 내가 돈이 아쉽지 않다는 건 당신도 잘 아는 사실이잖소."
그녀는 생각에 잠기며 웃었다.
"그래요.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부유한 사람 중에도 친구를 위해 한 푼의 돈이라도 쓰는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마르크스는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망할 협박꾼은 점점 더 대담해지는데. 그를 막아야만 해."
"그의 정체를 좀 알아냈나요?"
"약간, 많이는 아니오."
마르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물어 볼 말이 있소."
"그게 뭔데요?"
"스팔딩이 죽을 무렵 당신이 젊은 여자를 하나 고용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여자를 한두 번밖에 못 봤지만, 붉은 머리를 하고 있었던 것 같소."
"캐롤라인 바일러 예요."
한나는 넌더리 난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 여자에 대해 뭘 알고 있소?"
"별로 많지 않아요. 스팔딩은 내가 혼자 어디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햄프셔의 내 가족을 만나러 갈 때 조차도요. 그는 나를 보호하는 거라고 했지만, 사실은 내가 달아날까 봐 의심했던 거예요. 그는 스캔들을 두려워했죠."
"나쁜 자식."
"내가 집안에만 갇혀 있는 걸 불평하자, 말상대해 줄 여자로 캐롤라인 바일러를 고용했어요. 난 그 여자에게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그녀는 아주 교활했죠. 이름 있는 직업 소개소에서 왔고, 여러 종류의 신원 보증서도 갖고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까 실은 스팔딩의 정부였던 것 같아요."
자신의 정부를 아내의 말상대로 두다니 전형적인 스팔딩의 수법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소?"
"그 여자는 그 다음날 아침에 사라졌어요. 내가..."
한나의 손이 손가방을 꽉 붙들었다.
"내가 스팔딩을 죽였던 그 다음날 아침에요. 하지만 그녀는 그날 밤 집에 없었어요, 마르크스. 외출했었죠. 당신도 아 시잖아요. 내가 권총을 쏜 바로 직후에 당신이 들어오셨죠. 난 스팔딩과 단둘이 있었고요."
"그 여자가 이름 있는 소개소에서 왔다고 했는데 어디였는지 기억나오?"
"위철리 소개소였어요. 런던에서 가장 좋다고 알려진 곳이죠."
"혹시 그 소개소 주인은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도 모르겠네."
한나의 눈이 커졌다.
"캐롤라인이 협박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날 밤 그녀가 어딜 갔는지 알고 있소?"
"몰라요."
한나의 입이 비죽거렸다.
"캐롤라인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타입의 고용인이 아니었어요. 그녀는 마음대로 나가고 들어오곤 했죠. 왜 갑자기 그녀를 찾는데 관심이 많은 거죠?"
많은 비밀을 숨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서 했다.
"난 그 협박꾼이 고용인일 거라는 가정을 내렸소. 한때 당신과 다른 희생자의 비밀을 모두 알 만한 위치에 있었던 누군가라고 말이오."
"그리고 자신의 전 고용주를 협박하고 있는 거네요? 세상에,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한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캐롤라인이 협박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런 짓을 하는 거죠?"
"그 여자가 이 일의 배후에 있는지 어떤지 우리도 잘 모르고 있소. 하지만 여기서 조사를 시작해 볼 수가 있지."
마르크스는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2시 반이었다. 그는 3시에 이피지니아와 만날 약속이 되어 있었다.
"지금 가 봐야 하오, 한나. 가능한 한 곧 5천 파운드를 받게 될 거요. 내 사무관이 전해 주도록 하지."
"또 이렇게 도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한나가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우린 친구요. 내게 고마워 할 필요는 없소."
마르크스는 마차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마르크스, 기다려요."
한나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이런 걸 물어 보는 거 용서하세요. 하지만 당신 브라이트 부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죠?"
마르크스는 멈칫했다.
"왜 묻는 거요?"
"당신의 친구로서 하는 말인데, 아주 이상한 소문을 들었어요. 그 소문이 사실이에요?"
"나에 대한 소문은 언제나 이상하지, 한나. 당신도 알잖소."
"네, 하지만 이번 건 달라요. 당신의 새 정부는 정말 아주 이상하다고 들었어요."
마르크스는 이피지니아는 그의 정부가 아니라, 그의 인생에서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억제했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그는 한나에게 조차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그 유명한 규칙들 중 하나로 물러섰다. 절대 설명하지 않는다.
"한나, 내가 그런 문제에 대해 절대 설명하지 않는다는 거 잘 알잖소."
그는 피식 웃었다.
"사교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한나는 장갑 낀 손을 얼른 그의 소매에서 뗐다.
"난 어떻게 적절히 포크를 사용해서 식사하는지, 왈츠를 어떻게 추는지를 당신에게 가르쳤죠. 하지만 어떻게 전설적인 인물이 되는지는 가르치지 않았어요. 당신 스스로 그 유명한 규칙들과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해냈죠."
"내 일로 너무 걱정 마시오, 한나. 내 자신은 내가 잘 돌보고 있소."
"네, 물론 그 러시겠죠. 미안해요, 캐물으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당신은 가장 좋은 친구예요, 마르크스. 어쩔 수 없이 당신이 걱정되네요."
"지금 당신의 가장 좋은 친구는 내가 아니라 당신 남편이어야 하오."
마르크스는 문을 열어 마차에서 내렸다. 아담 맨워링은 이피지니아의 서재 책상에 서류들을 내려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골똘히 아멜리아를 쳐다보았다.
"레이디 거트리의 옛 말상대 여자에 대한 조사 결과를 말씀 드리기 전에, 더그슨 씨와 얘기했다는 걸 우선 말씀 드려야겠네요."
아멜리아가 긴장했다.
"그 사람이 이 투자 회사에 합류하는 걸 환영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겠죠?"
"했어요."
아담의 표정은 놀라우리만큼 험상궂었다.
"그 이유도 말했죠."
"잘 했어요."
이피지니아가 말했다. 그녀는 아멜리아를 쳐다보았다. 사촌의 눈에 짧은 만족의 빛이 어른거린 것 같았다.
"이 투자 회사는 대부분 가정교사와 말상대 여자로 일하는 미망인과 독신 여성으로 이루어졌다고 더그슨에게 말했죠."
아담은 계속 말했다.
"그런 숙녀들이 왜 좋지 않은 명성을 가진 남자와 같이 사업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지 그가 잘 이해할 거라고 말했어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던가요?"
이피지니아가 물었다. 아담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몹시 화를 냈죠. 자신이 심하게 모욕당했다고 불평하면서, 그런 오해를 설명할 수 있게 책임자와 만나게 해 달라고 주장하더군요."
아멜리아는 무릎 위에 얌전하게 포개 올려놓은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게 뭐라고 했나요?"
"책임자는 그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간단히 말했죠."
아담이 말했다.
"그러자 그는 젊은 여성 고용인과 관련된 불쾌한 사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요?"
아멜리아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담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는 분노로 날뛰면서 자신의 명예가 손상당했다고 말했어요. 그가 말하기를 가정교사가 되려는 그런 종류의 여자들은 자신을 고용한 주인의 유혹에 쉽게 굴복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들은 믿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고도 말했어요."
아멜리아는 이피지니아와 날카로운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가 특별히 가정교사라고 말했나요?"
"네."
아담이 대답했다.
"그랬어요."
"그렇다면 그가 잘 기억하고 있는 게 틀림없는데."
아멜리아가 속삭였다.
"분명하지."
이피지니아는 서둘러 주제를 바꾸었다.
"그 문제는 이만하면 됐어요. 조 숙모님의 말상대자였던 여자 문제로 넘어갑시다."
아담은 주저하며 서류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쓸 만한 정보를 알아내지 못한 것 같아요. 토드 양은 5년 전에 죽었어요."
"그녀가 죽었다고요?"
이피지니아는 몸을 앞으로 숙여 다가앉았다. 그녀는 아담의 이야기에 너무 정신을 쏟고 있어서 거리의 마차 소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담은 알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찡그리며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그 여자는 거의 칠십 세였어요. 그 여자를 아세요?"
"아뇨. 아뇨, 몰라요."
이피지니아는 침착을 되찾았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그녀가 아직도 정정하다는 인상이 있어서요. 그 소식은 정말 놀라운 것이네요. 그 외에 뭘 또 알아냈나요?"
아담은 서류를 보았다.
"토드 양은 미혼으로 죽었어요. 그녀는 서섹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서 일생의 대부분을 가정교사나 말상대로 일했어요."
"별 쓸모 있는 내용은 아니군."
이피지니아가 중얼거렸다.
"그 사람한테 그렇게 말했었는데."
아담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하셨나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피지니아가 말했다.
"그게 전부예요?"
"네. 그 외에는 그녀가 대부분의 경력을..."
아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재 문을 활발하게 노크하는 소리가 그를 방해했다. 이피지니아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3시 1분 전이었다. 창문을 내다보았더니 그녀의 현관에 검은 마차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맥박이 빨라졌다. 기대감이 그녀의 모든 감정을 한층 고조시켰다. 이건 미친 짓이야.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마르크스가 자신에게 그렇게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적당히 무심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썼다.
"네."
서재 문이 열리고 쇼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죠, 쇼 부인?"
이피지니아가 물었다.
"백작님이 오셨어요, 마담. 계시다고 할까요?"
"물론 계시지. 어떤 바보라도 알 수 있소."
마르크스는 하녀가 자신을 적당히 소개하기도 전에 서재로 성큼 들어왔다.
"안녕 하시오, 브라이트 부인, 페어리 양."
"백작님."
이피지니아가 아주 냉정하게 말했다.
"일찍 오셨네요."
"1분 일찍 왔소. 용서해 주리라 믿소."
마르크스는 책상 쪽으로 걸어가, 그녀의 손을 잡더니 입술로 가져갔다. 이피지니아의 감정이 지금 혼란스런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눈에는 즐거움이 어려 있었다.
"제 사무관을 소개하겠어요, 맨워링 씨예요."
이피지니아가 말했다. 마르크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아담을 보았다.
"맨워링 씨."
"백작님."
아담은 정중하게 일어섰다.
"막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랬소?"
마르크스는 격려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때문에 지체하면 안 되지."
아담은 얼굴이 붉어졌다. 이피지니아는 좋지 않은 의도가 담긴 무례함에 얼굴을 찡그렸다.
"맨워링 씨는 아직 업무를 끝내지 않았어요. 안 그래요, 맨워링 씨?"
아담은 서류를 끌어 모았다.
"이미 말씀 드렸듯이, 토드 양이 직업 생활을 하던 내내 위철리 소개소와 관련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달리 덧붙일 게 없습니다."
"제기랄."
마르크스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의 반응에 놀라 이피지니아는 그를 쳐다보았다.
"뭐가 잘못됐나요, 백작님?"
"아니오."
마르크스는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방금 어떤 생각이 떠올랐소. 그것뿐이오."
이피지니아는 아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고마워요, 맨워링 씨. 언제나처럼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마르크스는 뒤로 돌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잠깐만, 맨워링 씨."
"네, 백작님?"
"토드 양에 대해서 위철리 소개소에서 조사했소?"
"네."
아담이 말했다.
"어제 위철리 부인을 만나 얘기했습니다. 그 여자는 20년 넘게 그 소개소를 운영해 오고 있는데 토드 양이 5년 전에 죽었다고 알려 준 사람이죠."
"그랬군."
이피지니아는 마르크스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아담은 자신의 사무관이지 그의 사무관이 아니었다.
"맨워링 씨를 배웅하겠니, 아멜리아?"
아멜리아가 얼른 일어났다.
"응, 물론이지."
아담은 얼굴이 빨개졌다.
"필요 없습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페어리 양."
"저도 문까지 배웅하고 싶어요, 맨워링 씨."
아멜리아가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이피지니아는 두 사람 뒤로 서재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두 사람 서로 잘 어울리죠."
"어떤 두 사람 말이오?"
"내 사촌과 맨워링 씨 말이에요. 그들이 서로 이상적인 커플이란 걸 곧 깨닫게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성격이나 지적인 면에서 서로 공통점이 많아요."
"정말 말도 안돼."
마르크스는 성급한 태도로 주위를 서성였다.
"스스로를 중매쟁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거요?"
"두고 보세요."
이피지니아는 아주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일에 난 직관이 있어요."
"말도 안돼. 당신은 문제를 일으키는데 직관이 있소."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백작님? 아직도 페티그루의 시골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마음에 담고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예요."
"아니오, 망할. 난 그때의 일을 마음에 담고 있는 게 아니오. 거기에 대해서는 더 생각할 것도 없소.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오."
"그렇다면 당신의 기분을 나쁘게 만든 게 뭐죠?"
그는 짐승의 발 모양의 다리를 한 의자 위에 앉아서, 명상에 잠긴 표정으로 이피지니아를 보았다.
"당신은 우연을 믿소?"
이피지니아는 약간 어깨를 으쓱했다.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죠. 그건 왜 물으시죠?"
"우리의 협박 문제와 관련돼서 아주 흥미로운 우연이 막 일어났기 때문이오."
"그게 어떤 우연인데요?"
"또 다른 희생자인 내 친구가 지금 협박당하고 있는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쯤에 말상대 여자를 하나 고용하고 있었소."
"그만해요."
이피지니아가 의기양양하게 손을 들었다.
"그 고용인의 이름이 토드 양이었고, 그 여자가 협박한 것 같다고 말씀하실 생각이었다면 잠자코 계시는 게 나을 거예요. 토드 양은 5년 전에 죽었어요."
"내 친구의 고용인 이름은 캐롤라인 바일러 요."
마르크스가 조용히 말했다.
"흥미로운 우연이란 바로 그 여자도 위철리 소개소와 관련 있다는 거요."
이피지니아는 그 말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았다.
"그건 정말 큰 우연이네요, 그렇죠? 어쨌든, 위철리 소개소는 몇 십년 전부터 운영되고 있었으니까 많은 최상층의 가정에 가정교사나 고용인을 보냈을 게 틀림없어요."
"그게 연결 점이오."
마르크스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3시가 조금 지났네. 오늘 오후에 위철리 부인을 만나 얘기해 볼 생각이오."
"하지만 토드 양은 죽었고 당신 친구의 고용인도 사라졌다고 했잖아요. 그 소개소 주인을 만나 뭘 알아내길 바라는 거죠?"
"아직 확실치는 않소. 하지만 토드 양과 바일러 양 두 사람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할 생각이오."
이피지니아는 호기심이 일었다.
"같이 가겠어요."
"그럴 필요 없소."
마르크스가 재빨리 말했다.
"그 여자와 만나서 알게 된 모든 정보를 당신에게 보고해 주리다."
"그렇지 않아요, 백작님."
이피지니아는 단호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린 파트너예요. 기억하고 계시겠지만요."
마르크스는 잠시 그녀를 곰곰이 쳐다보았다.
"좋소. 내가 당신을 데려가지 않으면 당신은 혼자서라도 그 여자를 찾아갈 사람이오."
"바로 그렇죠."
이피지니아는 작은 승리에 기뻐했다. 마르크스를 다루는 방법이란, 확고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고 그녀는 혼자 생각했다. 그는 원래 명령하는 입장에 있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약한 정신을 가진 여자는 그의 강력한 손 안에서 부드러운 점토처럼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럼, 당분간 위철리 부인 문제는 함께 해 나갑시다."
마르크스가 말했다.
"그런데 당신과 먼저 의논하고 싶은 것들이 몇 가지 있소."
"어떤 것들인데요?"
"죽은 브라이트 씨란 없었다는 것이 첫 번째 논의할 문제요."
막 집으려 했던 가냘픈 찻잔이 이피지니아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찻잔은 컵 받침의 모서리에서 떨어져 엎어지더니, 윤기 나는 마호가니 책상 위로 차가 쏟아졌다.
"맙소사."
이피지니아는 벌떡 일어나, 주머니에서 얇은 흰 색 레이스 손수건을 꺼내 쏟아진 차를 헛되이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그 문제는 이미 결말지었다고 생각했어요, 백작님."
"그 문제에 관련되어 어떤 점은 확실히 결말지었소. 하지만 애도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죽은 브라이트 씨 문제는 아니었소."
이피지니아는 자신의 얼굴이 분명히 밝은 핑크 색으로 변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든 자제해 보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정말, 마르크스."
"그렇소, 정말, 이피지니아."
마르크스는 크고 억센 아마포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꺼내 느긋하고 점잖게 일어섰다. 그리고는 단 한번 문질러 차를 닦아냈다.
"게다가 이 문제를 어느 정도 깊이 파고 들어가다 보니, 많은 것을 발견했소."
이피지니아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예를 들면요?"
마르크스의 호박색 눈이 반짝였다.
"예를 들면 젊은 여성을 위한 숙녀 학교라든가, 딥포드 라고 불리는 마을이라든가, 이웃의 가장 유망한 가정의 아들과 결혼한 여동생 등이오. 한마디로 말해서 이피지니아, 난 모든 걸 알고 있소."
그녀는 마치 바람이 자신을 휩쓸어 넘어뜨린 것같이 느껴졌다. 그녀는 의자 뒤로 천천히 기댔다.
"나에 관해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아내셨나요?"
"그건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건 내가 진실을 알아낼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고 결국은 밝혀질 것이 틀림없다는 거요."
이피지니아는 그의 퉁명스러운 폭로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짧은 기간에 그렇게 많이 알아낸 것이었다. 그것은 기운 빠지는 일이었다.
"백작님, 내 생각에 당신은 내게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이런 얘기를 하시는 것 같네요."
그는 이마를 찌푸렸다.
"두 가지라고?"
"그래요."
그녀는 턱을 치켜 들었다.
"누군가 사실을 알아내기 전에 내가 즉시 런던을 떠나야 한다는 것과 당신과 결혼하자는 제안을 고려해 봐야 한다는 걸 말씀하려던 거였죠?"
"틀렸소, 이피지니아. 지금 이 상황에서는, 두 가지가 아니라 단지 한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오. 그것은 바로 결혼이오."
"절대 안돼요."
이피지니아가 아주 결연하고 강력하게 말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비탄에 빠져 있는 걸 마르크스가 눈치 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절대로 불가능해요. 의심할 여지도 없어요. 그 의견은 심지어 고려해 볼 필요도 없어요."
마르크스는 험상궂게 미소 지었다.
"과학을 연구하면서 알아낸 가장 흥미로운 것 중 하나가 바로 불가능한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오."
12.
"당신과 당신의 그 지긋지긋한 규칙들."
이피지니아가 사납게 말했다. 그녀는 두 손을 책상 위에 얹고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녀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지금 그게 문제죠, 아닌가요? 당신은 그 지긋지긋한 규칙들 중 하나를 어겼고 그래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진정하시오, 이피지니아. 너무 흥분하는 것 같소."
"난 진정하지도 않을 거고 백작님의 그 규칙 때문에 결혼하지도 않을 거예요. 내 말 듣고 있나요, 백작님?"
"듣고 있소."
마르크스는 차로 얼룩진 손수건을 접으면서 턱을 세워 얼굴을 태연하게 유지했다. 이피지니아의 서재에서 몇 번인가 차를 닦아 내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당신은 이 문제에 관해 충분히 고려해 보지 않은 것 같소."
"마치 학생처럼 날 가르치려 들지 마세요, 백작님. 난 우둔한 어린애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교육 받은, 지적인 여자예요. 그 문제는 물론 충분히 고려해 보았어요."
그녀는 조금도 지지 않고 그와 싸울 것이다. 마르크스는 화가 치밀었다.
"당신은 내 정부 행세를 하고 다니는 걸 이성적이고 교육 받은, 지적인 여성의 행동이라고 부르는 거요?"
"당신은 내가 미망인이 아니라는 걸 알기 전에는 내 연극에 대해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 않았어요. 사실,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이 계획에 함께 하려고 했었죠. 새롭고도 평범하지 않은 정부를 갖는다는 생각에 오히려 좋아했잖아요, 백작님?"
"그건 우리가 페티그루의 베스타 사원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또 그곳의 유적지처럼 아직도 처녀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의 일이오."
그녀는 이제 절망한 듯이 보였다.
"마르크스, 그건 정말 사소한 문제예요. 그것이 당신 행동에 영향을 미치도록 해서는 안돼요."
"내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인지는 내가 판단하겠소."
"지긋지긋해요, 백작님.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단 말이에요."
"그건 사실이 아니오. 이 익살스러운 연극에서 한 가지는 확실히 변했소."
"이건 익살 극이 아니에요."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이건 아주 영리한 계획이었어요. 사교계는 내가 여전히 미망인이고 당신의 정부라고 믿고 있어요. 이 계획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요."
"하지만 얼마 동안 그럴 것 같소?"
"우리가 원하는 동안만큼요."
그녀가 대들었다.
"당신 외에는 누구도 내 신분을 캐내지 않았어요."
"누군가가 데번으로 가서 몇 가지 물어 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오."
"말도 안돼요. 누가 왜 그런 귀찮은 일을 하겠어요? 백작님, 좀 솔직해지기로 해요. 이 문제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진짜 이유는 당신이 자신의 규칙들 중 하나를 어겼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내 규칙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건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난 오랫동안 그 규칙들을 지키며 살아 왔고 내 편의를 위해서 그걸 어긴 일은 없소."
"마르크스, 내 말을 들어 보세요. 당신의 규칙들과 그걸 지키려는 명예심에는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당신이 규칙을 어긴 게 아니에요."
"아니라고? 이틀 전에 당신의 허벅지 사이로 몸을 눕힌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걸 아주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도 말이오? 내 말이 틀렸소?"
이피지니아의 눈이 커졌고 뺨도 불그스레하게 물들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마세요."
그녀는 아주 새침하게 말했다.
"따분한 여교사 같은 말투로군."
"난 따분한 여교사가 아니에요. 물론, 한때 그랬지만요. 다시 말씀 드리는데 백작님, 당신이 그 소중한 규칙을 어긴 게 아니에요. 내가 어긴 거예요. 그럼 얘기가 달라지죠, 이해하시겠어요?"
"아니."
마르크스가 대답했다.
"우리에게 일어난 그 일에 대해 당신은 책임이 없어요. 내 책임이에요."
"지금의 상황을 그렇게 복잡하게 꼬지 마시오. 이건 아주 간단하오."
"하지만 마르크스, 나와 결혼할 수 없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왜 못한다는 거요?"
그녀는 화가 나서 손을 치켜 들었다.
"왜냐하면 난 사교계의 눈에 런던에서 가장 악명 높은 남자의, 말하자면 당신의 정부이기 때문이에요, 백작님."
"그래서?"
"당신과 같은 지위에 있는 남자는 정부와 결혼하지 않는다는 거 당신이나 나나 잘 알고 있는 일이죠."
마르크스는 책상을 손바닥으로 짚고는 이피지니아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내 규칙은 내가 정하오. 그걸 절대 잊지 마시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몸을 일으켜 급하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분명히 이런 일에서는..."
"모든 일에서 그렇소, 이피지니아."
"난 정말 규칙을 좋아하지 않아요, 백작님."
"그건 이미 알고 있소."
다시 한발 물러서자 그녀의 몸이 의자에 닿았다.
"난 너무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규칙에 따라 살아야 했었어요. 규칙은 정신을 매우 억압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 중에서 당신만큼은 자유롭고자 하는 내 소망을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했어요."
"자유라고? 세상에, 이피지니아. 우리들 중 아무도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없소. 우리는 모두 일련의 규칙으로 살아가고 있소. 그것이 자신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오. 만약 당신이 여태 그걸 깨닫지 못했다면, 당신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순진하다고 할 수 있소."
그녀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 들었다.
"그렇다면 좋아요. 만약 규칙들을 가져야 한다면 나도 당신처럼 하겠어요, 백작님. 내 자신의 규칙을 만들겠어요."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당신의 규칙은 뭐라고 말하고 있소?"
"내 규칙들은 내가 어떤 남자하고든 결혼하지 말라고 하네요. 더 솔직하게 말씀 드린다면 백작님, 여자에게는 결혼이 조금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부부 생활도 그다지 매력 있다고 생각 지 않고요. 그날 밤 내가 느꼈던 것은, 그건 시만큼도 스릴 있지 않다는 거예요."
마르크스는 권투 선수한테 배를 한 방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 걸 느꼈다.
"그건 내 잘못이었다고 말했잖소. 내가 서툴렀고 성급했소."
"오, 마르크스."
이피지니아의 눈에서 싸움의 기세가 사라졌다. 그녀는 책상 모퉁이를 급하게 돌아 그에게 다가왔다.
"그 일 때문에 스스로를 나무라서는 안돼요.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었어요. 내 잘못이었어요."
"당신 잘못이라고?"
마르크스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녀가 그의 팔에 자신을 내맡기려고 한다는 것을 그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네, 물론이에요. 그날 밤 일은 모두 나 때문에 일어난 거예요. 내가 당신을 속였어요. 경험 없는 여자와는 관계하지 않는다는 당신의 어리석은 규칙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난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원했어요. 내가 당신을 부추겼단 말이에요, 백작님. 사실, 그렇게 해달라고 거의 구걸했었죠."
"이피지니아..."
이피지니아는 부드러운 쿵 소리가 나도록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는 그녀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꼭 껴안았다.
"내가 당신을 유혹했어요, 백작님."
그의 외투에 대고 그녀가 속삭였다.
"아니오, 당신이 아니오. 내가 당신을 유혹했소. 내가 당신을 사랑하길 원했단 말이오."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오, 하느님.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내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오. 내게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내 애무를 당신이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오."
"좋아했었어요."
그녀의 말은 그의 어깨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적어도, 그 마지막 순간 전까지는 좋았어요. 그날 밤에 말씀 드렸듯이, 그런 요인들에 대해 정확하게 계산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전적으로 내 잘못이에요."
마르크스는 괴로웠다. 믿을 수 없게도, 이피지니아는 자신의 서툰 애정 행위에 대해 비난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사건의 책임을 완전히 떠맡으려 하는 것이다. 아마도 다른 남자라면 그녀의 이런 순진함에 유쾌해졌을지도 모르지만 마르크스는 두렵기도 하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내 말 들어요, 이피지니아. 다음번에는 훨씬 더 즐거울 거요. 맹세하오."
그녀는 살피는 듯한 눈초리를 그에게 고정시켰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날 믿어야 하오."
그의 입술이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럴 게요, 마르크스. 오, 당신을 믿어요."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열광적인 기쁨으로 그에게 키스했다. 그녀의 입술은 마르크스의 입술 아래에서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흥분되어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그의 가슴에 눌렸으며 그는 자신의 다리를 눌러 오는 그녀의 허벅지의 기분 좋은 굴곡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팔 안에서 이렇게 기분 좋게 느껴진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한 그녀의 정열이 아직도 그녀 안에서 빛나는 크리스털 프리즘처럼 타오르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원했다. 그의 서툰 애정 행위가 그녀의 달콤한 향기를 누그러뜨리지 않았고 그의 애무에 대한 열망을 약화시키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잠시 후 주저하며 머리를 들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그 문제는 결정 났소, 안 그렇소?"
그녀는 그에게 떨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약 당신이 정말 다음 번에는 잘 될 거라고 하신다면, 다시 한번 사랑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겠어요."
"잘 될 거요."
그는 그녀를 위해 완벽하게 해낼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건 우리가 계속 만나도록 하겠다는 뜻인가요?"
그녀는 희망에 찬 눈길로 물었다.
"그 말은."
그는 천천히 말했다.
"가능한 한 빨리 결혼할 것이라는 뜻이오."
그녀는 굳어졌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했잖아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도 말했소."
그녀는 입을 완고하게 다물었다.
"마르크스, 당신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정직하게 대답해 주시겠어요?"
"당신에게 절대 거짓말하지 않겠소, 이피지니아."
그녀는 입을 비쭉거렸다.
"그것도 당신 규칙들 중에 하난가요?"
"그렇소."
"아주 좋아요. 그럼, 질문을 하겠어요. 만약 내가 부부 생활의 경험이 많은 진짜 미망인이었어도 당신이 오늘 여기 이렇게 서서 나와 결혼하겠다고 우기고 있었을까요?"
애초에 함정을 알아챘어야 했다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사이 그는 함정에 걸려드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제기랄, 이피지니아. 그건 전혀 상관이 없소."
"아뇨, 마르크스. 아주 상관이 있어요."
그는 발 아래에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함정을 보았다.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는 필사적으로 애썼다.
"당신이 이런 사람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소? 당신 같은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소, 이피지니아.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소."
"내가 진짜 누구이고 뭘 하려고 하는지 당신이 알았더라면, 내가 당신 정부로 계속 행세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요?"
"제발, 이피지니아.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오? 나는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오. 난 환상이나 추측 등 있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 사실을 다루는 사람이란 말이오."
"대답해 주세요, 마르크스. 이건 아주 중요해요."
"당신의 순전히 그 어림짐작에 불과한 질문에 대해 대답할 말이 없다는 것이 내 대답이오."
"글쎄, 난 알아요."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의 대답은 노라는 거죠. 그래서 당신의 청혼에 대한 내 대답도 노여야 해요."
"망할, 당신은 이 상황을 이해 못하고 있소? 당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소."
"내가 스스로를 돌볼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십팔 세라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난 스물 일곱 살이고, 경제적으로 독립적이며 사교계의 규율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이피지니아..."
그녀는 팔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난 몇 년 동안 작은 마을의 규율을 묵묵히 따르면서 지냈어요. 다시 그런 규율에 의해 지배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아직도 종종 한밤중에 깨어나서, 적절한 행동에 대해 목사가 훈계하기 위해 잠시 들렀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입술을 깨물며 참아야 했었는지 생각하곤 해요."
안됐다는 생각이 마르크스에게 스쳐 갔다.
"나도 역시 작은 마을에서 자랐소. 딥포드가 당신에게 어땠을지 알고 있소."
"끝이 없었어요."
이피지니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디에나 지켜보는 눈들이 있었죠. 아무도 엄마나 아빠 편을 드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들은 예술가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었거든요, 아시겠지만."
"알고 있소."
"부모님은 내가 다른 사람의 무례한 태도나 간섭을 잘 참는다고 언제나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로는 그걸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더군요. 그러나 난 나 자신과 동생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리고 그때 아멜리아가 한 푼도 없이 우리 집 문 앞에 나타났죠."
"그래서 돌봐야 할 사람이 셋이 되었겠네."
"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딥포드의 아주 작은 규율에도 복종해야만 했어요."
이피지니아는 창문을 통해 거리를 내다보았다.
"대지주 햄프턴과 그의 아내는 내 행동에 대해 언제나 충고했죠. 내 숙녀 학교 옆에 별장을 갖고 있던 콜더 부인은 어떻게 하면 젊은 숙녀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예의범절의 모범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끝도 없이 훈계해댔죠. 목사와 목사 부인도 언제나 내가 실수하거나 과오를 범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마르크스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등을 끌어당겼다.
"이해하오."
"어디에나 눈들이 있었죠. 난 아주 조심해야 했어요. 우리 세 사람은 숙녀 학교에서 나오는 수입에 의존했었어요. 그리고 그 숙녀 학교의 존립 여부는 햄프턴 일가와 우리에게 복종하도록 강요한 그 규율들을 만든 목사나 딥포드의 모든 사람들의 의지에 달려 있었죠."
마르크스는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아, 그녀가 머리를 감을 때 사용하는 비누의 꽃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 순간 그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서도 느껴 본적이 없는 친밀감을 그녀에게서 느끼게 되었다.
"책임감에 얽매인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알고 있소."
마르크스는 이피지니아의 머리에다 대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규율도 마찬가지고."
"1년 전에, 난 딥포드를 아주 떠나 왔죠. 이따금씩 동생을 방문할 때를 제외하고는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당신을 본받기로 결정했어요, 마르크스. 나도 규칙을 가져야 한다면, 내 자신이 그걸 만들겠어요."
마르크스는 그녀의 꼿꼿하게 긴장된 등뼈를 부드럽게 쓸어 내려왔다.
"당신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당신의 기분을 잘 이해하고 있소. 하지만 당신이 계속 내 정부로 행세하는 것을 허락할 수는 없소."
"왜 안 되나요?"
그는 냉정하고 감정적이지 않은 이유를 찾아보았다.
"그건 너무 위험하오."
"아니, 그렇지 않아요."
이피지니아는 그의 어깨에서 머리를 들었다.
"우리 둘 다 협박꾼의 정체에 관심이 많고, 이를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어요. 우리가 연극을 계속하는 것 말고 이 일을 완수할 더 좋은 방법이 있겠어요?"
그는 그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는 거의 승리가 자신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의 적이 아직까지도 이렇게 완고하게 구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계속 간과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이피지니아, 사실 그 연극이란 게, 엄격히 말해 이제 더 이상 연극이 아니라는 사실이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맙소사, 마르크스. 만약 나를 사랑하는 행위가 당신에게 그런 생각을 일깨워 준다면, 우린 이제 그런 행동을 삼가 해야 해요."
이피지니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별을 여행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경우, 정면충돌보다는 간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때때로 최선책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피지니아의 신분이 아직 까지는 드러나지 않았고 누군가가 얼마 안 가서 우연히 진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가정해 볼 이유도 없었다. 확실히 어떤 위험한 일이 곧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아직도 자신을 원하고 있으니 그녀를 더욱 조사하고 분석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그녀의 방어 태세가 사그러들도록 그녀의 약점을 이용할 방법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그때 갑자기 서재 문이 열리고는 아멜리아가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피지니아, 맨워링 씨가 하는 말이 우리가..."
마르크스의 팔에 안겨 있는 이피지니아를 보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중단했다.
"죄송해요."
"괜찮소."
마르크스가 말했다. 그는 이피지니아를 내려다보았다.
"다음 기회에 이 얘기를 끝내도록 합시다. 우리도 이제 나가야 하지 않겠소, 이피지니아?"
"네, 그렇죠."
재빨리 그녀는 그에게서 떨어져 아멜리아에게 떨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위철리 부인에게서 뭘 알아낼 수 있는지 위철리 소개소에 가볼 참이었어."
"위철리 부인에게 내 안부 좀 전해 주겠니?"
아멜리아가 중얼거렸다.
"그 여자를 한 번도 좋아해 본적은 없지만 말이야."
20분 후, 마차가 옥스퍼드 거리를 막 빠져 나가 좁은 길로 조용히 달리기 시작한 후에도 이피지니아는 아직도 그 싸움의 후유증을 느끼고 있었다. 백작의 규칙 때문에 그녀는 지독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고, 그것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 자신이 미망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알게 되면, 마르크스는 그녀와 억지로라도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걸 알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속일 수 있다고 스스로 믿고자 했다. 그녀는 사교계를 바보로 만들었던 것처럼, 마르크스도 바보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었다. 더 잘 알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엄격한 규칙 때문에 그녀와 결혼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확신 시킬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많은 점에서 그녀와 무척 비슷했다. 그는 자신에게 너무 완고하고 단호한 사람이었다.
"여기가 11번지요."
마르크스는 위철리 소개소의 어두운 창문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은 문을 닫은 것 같은데."
"정말 이상하네요."
이피지니아는 창문과 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직 오후 4시도 안 됐는데."
"위철리 부인이 개인적인 이유로 일찍 문을 닫았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사무실을 지킬 직원들은 있어야 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군."
마르크스는 문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시험 삼아 돌려 보았다.
"잠겼소."
올려다보니 소개소 위의 두 층도 모두 어두웠다.
"위철리 부인이 사무실 위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럴 것 같네."
마르크스는 위층을 살펴보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가 집에 있더라도 방문객들을 받을 것 같지는 않소."
"아마 아플지도 몰라요."
"맨워링이 어제 그녀와 만났었다고 했었지. 그 여자가 아파 보인다고 말하던가?"
"아뇨. 하지만 그 여자가 밤사이 병에 걸렸을 수도 있죠."
이피지니아가 말했다.
"시골로 누굴 방문하러 갔을지도 모르고요."
"어떤 경우든."
마르크스는 탐색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무실과 위의 방들이 모두 텅 빈 것처럼 보이는데."
이피지니아가 그에게 예리한 눈길을 던졌다.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걸 당신도 생각하고 계시죠?"
"당신은 나를 아주 잘 아는군, 이피지니아."
마르크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길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그들을 주시하지 않았다.
"이리 오시오. 뒤쪽을 한번 잽싸게 둘러보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같소."
그들은 길 끝 쪽으로 가 모퉁이를 돌았다.
"뭘 찾기를 원하는 거예요?"
"누가 알겠소? 과학적인 조사의 첫 번째 규칙 중 하나가 수없이 많은 의문을 품는 것이오."
"지금 어떤 의문을 품고 있는데요?"
"왜 성공적이고 오랫동안 잘 운영되어 오고 있던 사무실을 이렇게 이른 시간에 닫았나 하는 것이오."
이피지니아는 직감적으로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내 사무관이 옛 고객 중 한명에 관해 물어 본 그 다음 날에요."
"바로 그렇지."
마르크스는 11번 가의 뒷문 앞에 멈춰 서서 부드럽게 노크했다. 대답이 없었다. 그는 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열어 보려 했다.
"이 문도 잠겨 있소."
이피지니아는 문 옆에 달린 작은 창문을 보다가 오른쪽 창문 하나가 조금 열려 있는 걸 보았다.
"이것 봐요, 마르크스."
그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누군가가 아주 급하게 빠져 나가다가 창문을 모두 닫는 걸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군."
"네, 그래요."
마르크스는 잠기지 않은 창문을 쉽게 열고는 커튼을 한쪽으로 치우고 사무실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이피지니아가 그의 옆 가까이에 서 물었다.
"뭐가 보여요?"
"별로. 방이 너무 어두워. 커튼이 다 쳐져 있소. 잠깐만 기다려 보시오."
그는 창문을 완전히 열고 나서 한발 물러서서는 살펴보았다.
"제기랄, 내 체격으로는 저 창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이피지니아도 살펴보았다.
"난 들어갈 수 있어요."
마르크스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허락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마르크스, 좀 합리적으로 생각하세요. 난 쉽게 저 창문으로 들어가 즉시 당신에게 문을 열어 줄 거예요. 그러면 바로 나하고 집안에 있게 될 거란 말이에요."
"흠."
그는 망설였다.
"좋소.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머뭇거리지 말고 곧장 문으로 가시오."
"그럴게요."
이피지니아는 열린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들어가기에는 창문이 바닥에서 너무 높이 달려 있었다.
"좀 도와 주셔 야겠는데요."
"알겠소."
마르크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가볍게 바닥에서 들어올렸다. 이피지니아는 이틀 전 자신의 벗은 몸에 닿았던 그의 손길을 기억해 내고는 몸을 떨었다. 그는 너무 강해서 그의 품안에서 그녀는 안전함을 느꼈다.
"서둘러요, 이피지니아."
"네, 물론이죠."
그녀는 뜨거웠던 기억을 떨쳐 버리고 눈앞의 일에 집중했다. 창문을 기어오르는 일은 생각보다 끔찍했다. 이피지니아의 흰 모슬린 외출복의 길고 주름 달린 치마 자락과 그에 어울리는 짧은 재킷이 방해가 되었다.
"맙소사."
마르크스는 그녀 뒤에서 약간 떨어져서는 중얼거렸다.
"드레스 밑에 페티코트를 몇 개나 입었소? 페티코트에 묻혀 버릴 것 같소."
"오늘은 좀 추워서요."
이피지니아는 허벅지에 와 닿은 그의 손을 강하게 느꼈다. 간신히 그녀는 어두운 방에 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손을 좌우로 뻗었는데 그녀의 손가락이 근처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던 종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몇 장의 종이가 그녀의 발 근처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 세상에."
그녀가 중얼댔다.
"무슨 일이오?"
마르크스가 즉각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종이를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이피지니아는 그것을 줍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 그녀의 눈이 어둠 속에 적응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놀라서 바라보았다.
"세상에, 마르크스. 서류와 종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요. 회오리바람이 한바탕 쓸고 지나간 것처럼요."
"문을 열어요, 빨리."
이피지니아는 몸을 일으켜 뒷문으로 가서는 문을 열었다. 마르크스가 사무실로 성큼 들어와 뒤로 문을 닫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망할."
그가 낮게 말했다.
"누가 안을 뒤졌어."
이피지니아는 어지럽게 널려져 있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모르겠소."
마르크스는 사무실 위로 통하는 좁은 계단 쪽으로 갔다.
"여기서 기다려요. 난 2층을 한번 둘러보겠소."
이피지니아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녀는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 작은 손님용 응접실로 나있는 입구 앞에 그와 나란히 멈추어 섰다. 여기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가구들도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양탄자도 서류들로 어지럽혀져 있지 않았다.
"이 방은 손댄 것 같지 않은데요."
이피지니아가 말했다.
"그렇군."
마르크스는 뒤로 돌아 홀로 갔다. 이피지니아도 뒤따랐다. 그들은 함께 작고 안락하게 꾸며진 방을 차례로 들여다보다가 꼭대기 층으로 나있는 계단을 올라갔다. 마르크스가 침실 문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이피지니아는 갑자기 깊은 불안감을 느꼈다.
"마르크스?"
"내가 먼저 들어가 보겠소."
그는 침실 문을 열고는 입구에 아무 말 없이 서있었다. 이피지니아는 마르크스의 넓은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그녀는 회색 치마로 보이는 어떤 물체와 끈 달린 높은 구두 한 켤레가 바닥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 세상에. 저건...?"
"여기서 기다려요."
이번에는 이피지니아도 복종했다. 그는 마르크스가 시체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죽은 여자 옆에서 발을 멈추더니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총에 맞았네."
마르크스가 말했다. 그는 힘 빠진 손가락 하나를 건드렸다.
"그 여자는 그럼...?"
"그렇소, 죽었소."
마르크스는 일어섰다. 이피지니아는 위에 경련을 느꼈다. 그녀는 서둘러 나와 숨을 들이마셨다. 마르크스도 방을 빠져 나왔다. 그는 그녀를 걱정스럽게 보았다.
"괜찮소?"
이피지니아는 성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은 것 같아요."
"이리 오시오. 여길 나갑시다. 시체가 있는 방에서 어슬렁거리는 걸 누가 보게 되면 큰 일이오."
마르크스는 그녀의 팔을 잡아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위철리 부인이 강도를 만났다고 생각하세요?"
이피지니아가 물었다.
"아니."
마르크스가 대답했다. 그는 계단을 내려오자 멈춰 서서 손님용 응접실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그랬다면 강도가 은촛대와 다른 물건들을 가져갔을 거요."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확신할 순 없지만, 지금 우리가 본 것을 설명해 줄 가정을 하나 세워 볼 수는 있소."
"어떤 가정인데요?"
"난 위철리 부인이 협박꾼이고 당신 숙모나 내 친구들 외에도 다른 희생자들이 있었다고 생각하오. 우리만 위철리 소개소와 연결되었던 건 아니니까."
"당신은 어제 맨워링 씨가 그녀와 얘기를 나눈 후에 누군가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렇소. 위철리 부인은 자신이 협박했던 사람 중 하나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소?"
"그리고 그가 그녀를 죽이고 난 뒤에, 자신을 협박하는데 이용한 증거를 찾기 위해 그녀의 서류를 뒤졌네요?"
"그렇소."
마르크스가 말했다.
"마르크스, 정말 대단해요. 그럼 모든 게 다 설명되는군요."
이피지니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건 위기도 모두 끝났다는 뜻도 되고요."
"그렇게 되는 것 같소."
그녀는 안도감을 느끼고자 했다. 결국, 조 숙모의 비밀은 다시 한번 안전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협박 문제만 해결된 게 아니라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이 문제와 함께 자신이 마르크스의 정부 행세를 계속할 이유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13.
그날 저녁 7시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실험실 작업 테이블 앞에 앉아서 어떻게 하면 이피지니아를 정부에서 아내로 바꿀 수 있나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한 번도 직면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이것과 비교해 보면 망원경, 수압을 이용한 잉크통이 든 펜이나 태엽 장치의 원리들은 아주 간단해 보였다. 그는 의자에 기대 어지럽게 널려 있는 테이블 위에 부츠 신은 발을 올려놓았다. 그는 자신이 작년에 만든 집사 모양의 태엽 인형을 시무룩하게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나무로 만든 손에 은 쟁반을 들고서 말없이 조용하게 서있었다. 마르크스는 불현듯 그 태엽 인형에 적절한 검은 코트와 흰 셔츠를 그려 넣었다. 그는 러브레이스의 차가운 눈과 미소 없는 입에 서린 당당한 분위기도 표현하고자 노력해 보았다. 자신의 주의 깊게 통제된 세계에 이피지니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인생이 아주 간단해 보였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그녀는 어두운 밤을 반짝여 주는 별처럼, 하늘을 밝게 비추었다. 하지만 그녀를 붙들 방법을 그가 찾지 못한다면, 그녀는 별빛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실험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마르크스를 망상에서 깨어나게 했다.
"들어오시오."
"마르크스?"
베넷이 머리를 내밀었다.
"여기 있을 줄 알았지. 일하는 중이었어?"
"아니, 들어와."
베넷은 맥없는, 염세적인 걸음걸이로 들어와 문을 닫고는 작업 테이블로 다가왔다. 마르크스는 그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동생은 오늘 열정으로 가득 찬 눈을 한 시인 같은 모습이었다. 베넷의 검은 머리는 손질하지 않은 것 같은, 바람맞은 뒤엉킨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빗겨져 있었다. 그는 넥타이 나 조끼도 입지 않았다.
"외출하기 전에는 넥타이를 매도록 해."
마르크스가 중얼거렸다.
"마치 잠자리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 모습으로 나간다면 오늘 밤 어떤 무도회나 연회도 널 들여보내지 않을걸."
"아직 옷을 다 차려 입은 게 아니야."
베넷은 창가로 가서 나른한 모습으로 창틀에 몸을 기대어 침울한 표정으로 정원을 내다보았다.
"뭐 원하는 거라도 있니?"
마르크스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베넷이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결정 내렸다는 걸 형에게 말해 주러 왔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날 생각이구나?"
마르크스는 별 희망 없이 물어 보았다.
"줄리아나와 결혼하겠다고 돌체스터 씨에게 말할 거야."
"제기랄."
"마르크스, 난 당장 그렇게 해야만 하겠어. 세상에, 날 이해 못하겠어? 유럽 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돌체스터 씨는 그녀를 딴 사람에게 시집보내 버릴 거야."
"네가 그렇게까지 운이 좋다면 말이지."
"망할."
베넷은 열정적인 표정으로 주위를 돌았다.
"형이 돌체스터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하지만 왜 그의 딸까지 싫어해야 하지? 그녀는 전혀 달라."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진짜 숙녀야.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영혼을 지닌 순진한 미인으로 마치..."
"금방 내린 눈처럼 말이지?"
"경고해 두겠어. 그녀에 대해 그렇게 조롱하는 거 참지 않을 거야, 형."
베넷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난 그녀에게 청혼할 거야, 이해하겠어?"
"신이 우리를 보살피기를."
"형의 문제가 뭔지 알고 나 있어?"
"네가 말해 줄 거라고 믿고 있지."
"형은 너무 냉소적이야. 그게 바로 형이지. 형이 브라이트 부인같이 극도로 모험을 즐기는 여자에게 빠지기로 한 이상, 진짜 순진한 여자를 판단할 생각일랑 하지 마."
베넷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채 깨닫기도 전에 마르크스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을 뛰어넘어, 두 걸음 만에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는 베넷의 어깨를 붙들고 벽에다 힘껏 밀어 붙이고는 꼼짝도 못하게 했다.
"그 여자를 모험가라고 부르지 마."
마르크스가 윽박지르듯 말했다.
"도대체 왜 그래?"
베넷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 여자는 형의 정부들 중 한 사람일 뿐이야, 세상에.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잖아."
"그녀는 나의 아주 좋은 친구야."
마르크스가 말했다.
"그녀를 모욕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거야. 내 말 이해하겠어?"
"제기랄, 알았어."
베넷은 그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래, 물론 형을 이해해. 형이 이 문제에 그렇게 민감한 줄 몰랐어."
마르크스는 베넷을 잠시 벽에 붙들어 두었다가 갑자기 그를 놓아 주었다.
"나가는 게 좋겠다. 할 일이 좀 있고 너도 네 계획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베넷은 구겨진 옷섶을 똑바로 펴고자 매만졌다.
"화나게 한 거는 미안해."
"사과는 받아들였으니 이제 좀 나가 주시지."
"브라이트 부인에 대한 형의 감정이 여자 친구들에게 형이 늘 보였던 태도보다 훨씬 더 강렬한 것 같네 그래."
"내가 인내심을 모두 잃어버리기 전에 이 방을 나가는 게 좋겠다."
베넷이 턱을 치켜 들었다.
"난 꼭 줄리아나에게 청혼할 거란 말이야."
마르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네가 듣지 않을 거라는 거 분명히 했잖아."
"행운을 빌어 주겠어?"
베넷의 목소리에는 살피는 듯한 음색이 담겨 있었다.
"그럴 수 없어 유감이구나."
마르크스는 태엽 장치로 된 집사를 내려다보며 서있었다.
"줄리아나 돌체스터와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는 생각 지 않아."
"여자와 행복을 찾는 것에 대해 형이 뭘 알아?"
베넷이 쓰게 물었다.
"형은 인생에서 어떤 즐거움도 더 이상 찾지 않겠다는 빌어먹을 규칙들을 많이 갖고 있잖아."
"당장 나가, 베넷."
"그럴 거야. 그럼 형한테 어떤 축복도 바라지 않겠어."
베넷은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멈추었다.
"이거 알아, 형? 난 형이 정말 안됐다고 느끼고 있어."
"나를 동정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마. 줄리아나 돌체스터와 결혼하게 되면 네 자신을 위해 필요하게 될 테니까."
베넷은 아무 말도 없이 방을 나갔다. 그가 문을 너무 세게 닫아서 태엽 인형이 흔들거렸다. 마르크스는 몸을 숙여 인형의 스위치를 올렸다. 집사 모양의 태엽 인형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바퀴와 기어가 철거덕 소리를 내며 빙빙 돌아갔다. 그 태엽 인형은 앞쪽으로 갑자기 기울어지더니 은 쟁반이 떨어졌다. 마르크스는 그 영혼 없는 물체가 실험실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태엽으로만 움직이는 인형이란 얼마나 단순한가. 인공으로 만든 그 남자는 앞뒤에 뭐가 놓여 있는지 주위도 기울이지 않고,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그의 현재는 기계 장치 세계의 융통성 없는 규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것은 고통도 모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즐거움도 모른다.
"위철리 부인의 죽음에 관해 아침 신문에 작은 기사가 났어."
조가 말했다.
"물론, 그녀가 협박꾼이라는 말은 없어. 세상에, 누가 그걸 믿겠어?"
그녀는 로마식 붉은 벨벳 소파에 우아하게 몸을 묻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야."
"그건 단지 나와 백작님이 내린 결론일 뿐이에요."
이피지니아가 찻잔을 집어 들었다.
"난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조가 말했다.
"그건 너무 공상적이야."
오티스 경의 숱 많은 눈썹이 주의 깊게 생각을 하는 듯 모아졌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네, 있어요."
아멜리아가 말했다.
"이것으로 왜 이피지니아가 거트리 숙부의 친구 모임과 백작님의 모임 사이에 어떤 분명한 연관성도 찾아내지 못했었는지가 설명되죠. 연관성이 없었으니까요."
"우리의 옛 고용인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니 백작님은 정말로 영리해."
조는 몹시 칭찬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피지니아가 눈을 굴렸다.
"그 사람의 원래 가설이 다 맞았던 건 아니에요. 고용인이 협박꾼으로 판명된 것도 아니고요."
"그래, 하지만 그의 이론으로 진짜 협박꾼을 바로 찾아냈잖아."
오티스가 말했다.
"그 사람은 우수한 두뇌를 가졌지."
이피지니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네, 그리고 그 사람도 그걸 잘 알고 있죠."
아멜리아는 그녀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좀 질투하는 것 같은데, 이피지니아."
"글쎄, 나도 내 가설이 유달리 확실하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녀가 인정했다.
"백작님의 의견은 훌륭했어. 그리고 오티스 아저씨의 말이 맞아요. 그게 논리적이죠. 생각 좀 해 보세요. 위철리 부인은 상류 가정의 끔찍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몇몇 가정교사나 고용인을 이용했던 거죠."
"난 정말 토드 양을 좋아한 적이 없었어."
조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작은 생쥐를 생각나게 했었지. 그 여자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숙모님은 그 여자를 훨씬 더 일찍 내보냈어야 했어요."
아멜리아가 말했다.
"그녀가 분명히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마리안느가 거트리 숙부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던 거예요."
"그렇구나."
조가 머리를 흔들었다.
"또 다른 희생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궁금하구나. 런던의 모든 가정이 염탐 당했을까?"
"설마 요."
이피지니아가 입술을 꽉 다물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위철리 부인은 아주 신중하고 조심성이 많았어요. 적어도 최근까지는요. 그녀는 분명히 희생자를 신중하게 골랐을 거예요."
"아하."
오티스의 구레나룻이 실룩거렸다.
"그 여자는 조와 백작님의 가까운 친구를 희생자 목록에 넣으면서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네 그래."
"네."
이피지니아가 대답했다.
"그랬죠."
"자, 드디어 끝났어. 하늘이 도왔지."
조가 핑크 색 케이크를 접시에 덜면서 말했다.
"이젠 시즌을 즐겨도 되겠구나. 이 협박 문제가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 사실 마리안느의 결혼 준비에도 어려움이 많았거든."
오티스는 이피지니아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이 문제가 끝났다고 백작님도 분명히 하셨지?"
이피지니아는 망설였다.
"그도 이것으로 상당히 만족한 것 같았어요."
"글쎄, 그렇다면 이것으로 끝났어."
오티스가 선언했다.
"네."
이피지니아는 일어나서 흰 모자를 집어 들었다.
"아멜리아와 난 가봐야 해요. 사무관과 만날 약속이 있어서요. 아마 오늘 밤 극장에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
조가 쾌활하게 말했다.
"협박꾼의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없이 내 박스에 앉아 있을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이니."
"한가지 더 있어요."
이피지니아는 세 사람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협박 건이 해결된 것뿐이지, 그 외에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명심해 주길 바라요."
조는 어리둥절해 보였다.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니, 이피지니아?"
"사교계에 있는 동안, 난 여전히 브라이트 부인이에요."
"제기랄."
오티스가 소리 질렀다.
"그녀 말이 맞소. 이 시점에서 그녀의 정체를 바꾸면 안 되오. 그녀가 곤란해지지."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땐, 이 문제가 해결되면 이곳에서 조용히 사라지겠다고 합의를 했었죠."
이피지니아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 마음을 바꿨어요."
조는 관심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백작의 정부로 남아 있으려고?"
"네."
세 사람은 불쾌한 시선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나서 조는 이피지니아에게 물었다.
"이 계획에 백작도 동의했니?"
"그럼 요."
이피지니아가 뻐기며 말했다. 사실은 마르크스가 결혼하자고 했다는 것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모두들 백작 편이 될까 봐 두려웠다. 이피지니아는 마르크스가 그녀를 사랑하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와 결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협박 꾼의 정체를 알아낸 일은 그녀의 새로운 문제에 비하면 단순한 일이었다. 그녀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규칙을 바꾸도록 설득해야 하는 힘든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이피지니아는 그들이 조의 저택 현관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아멜리아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흰 마차에 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만해, 아멜리아."
이피지니아가 흰 벨벳 쿠션에 몸을 기대며 치마 자락을 매만졌다.
"왜 그러니?"
아멜리아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숙모님과 오티스 경에게 협박 건이 틀림없이 끝났다고 말할 때 네가 망설이는 걸 눈치 챘어. 뭔가 걱정거리가 있지?"
마차는 앞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이피지니아는 창문을 내다보았다. 거의 오후 5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거리는 공원으로 향하는 멋진 마차들로 꽉 차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어제 떠나기 전에 백작과 내가 위철리 부인의 책상을 뒤졌는데."
"그랬는데?"
"그런데 불사조가 새겨진 인장을 찾지 못했던 거야. 그녀의 밀랍 그릇에서도 검은 색 밀랍의 흔적을 못 찾은 건 물론이고."
"위철리 부인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틀림없이 바보도 아니고. 그 여자도 들킬까 봐 계속 공포 속에서 살았던 게 틀림없어. 자신의 협박을 보여 줄 명백한 증거물을 그냥 버려두지는 않았을 거야."
"마르크스도 바로 그렇게 말했어. 하지만 그녀가 정말 그렇게 영리하고 교활하다면 왜 백작님의 친구를 협박함으로써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을까. 그를 이 일에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위험을 틀림없이 알았을 텐데 말이야."
"너무 오래 협박해 와서 아마 상당히 대담해졌을지도 모르지."
아멜리아가 말했다.
"아니면 점점 욕심이 많아졌을 수도 있고. 도박에서 잃은 돈을 갚기 위해서나 뭐 그런 일들로 돈이 더 필요했을지도 모르지. 누가 알겠니?"
"그 답을 결코 알아내지 못할 것 같아."
"이것 봐, 이피지니아. 백작의 가설이 맞아서 지금 네 기분이 상해 있는 거라고 너도 이미 시인했잖아."
"내 가설도 정말 아주 괜찮았어. 너도 알잖아?"
"그래, 괜찮았어. 하지만 틀린 가설이라고 밝혀 졌잖아. 이제 이 일은 끝났어. 너의 또 다른 문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니?"
"어떤 다른 문제?"
"조 숙모의 응접실에서 한 얘기 들었어. 하지만 네가 더 이상 백작님의 정부 행세를 할 수 없다는 건 너나 나나 알고 있는 일이야."
"시즌이 끝날 때까지는 계속할 수 있어."
이피지니아는 우아하게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건 엄격히 말해, 연극이 아니란 걸 너도 알아 둬야 해."
아멜리아는 그늘진 눈으로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될까 봐 많이 걱정했었는데."
이피지니아는 흰 레이스가 달린 손가방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내 걱정하지 마, 아멜리아."
"넌 내 사촌일 뿐 아니라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기도 해. 네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어."
"브라이트 주택에 관한 재정적인 문제에나 신경 써줘. 분명히 더 이윤이 생길 거야."
"그 사람은 너에게 싫증나면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널 버릴 거야. 너도 그걸 알고 있어, 그렇지?"
"아마 내가 먼저 싫증날지도 모르지."
이피지니아가 가볍게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런 무모한 일을 더 이상 계속하지 말라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어."
"고마워. 하지만 시즌이 끝나면, 백작과의 관계도 끝날 거야."
"그리고 나면 뭘 할 거니?"
"브라이트 주택 건축을 감독해야지. 고전적인 디자인 책을 위한 계획에도 몰두하고."
이피지니아는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내 앞에는 흥미로운 일들이 많이 있어, 아멜리아. 백작과의 관계가 끝나도 완전히 의기소침 해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네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어, 이피지니아. 그래도 네가 상처 받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날 보호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어. 이 대모험을 즐기기로 벌써 결정했는걸, 아멜리아. 너도 알겠지만, 이런 일은 이제 또 없을 거야. 백작은 아주 특이해."
그날 밤 마르크스는 한나와 그녀의 남편을 극장 로비에서 마주치게 되자, 무심코 고개를 숙였다. 샌즈는 그를 노려보고, 답례로 딱딱하게 끄덕이고는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노골적으로 돌아섰다. 한나는 마르크스에게 불안한 듯한 미소를 띄웠다. 거의 절망 같은 것이 그녀의 눈에 비쳤다. 그때 화려한 복장의 멋쟁이 무리들이 들어와 그들을 가려 주는 구실을 해주었다. 몇 초간이라도 샌즈의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한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끝났소."
마르크스는 한나를 스쳐 지나가면서 속삭였다.
"협박꾼은 위철리 부인이었소. 죽었지."
한나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침 신문에서 그 소식을 읽고는 무슨 일인가 의아해 했었어요."
그녀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마르크스, 혹시 당신이..."
"아니오. 그 여자가 협박한 사람 중에 누가 일을 저지른 것 같소."
"세상에."
"이리 와요, 여보."
샌즈가 그녀의 팔을 당겼다. 마르크스가 무리 속에서 자신의 부인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에게 레모네이드 한잔 갖다 주겠소."
한나가 남편을 따라 가버리자 마르크스는 그냥 모른 척했다. 샌즈가 자신에게 느끼는 적대감이 유감스럽긴 했지만, 사실 그의 경계하는 태도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마르크스는 요즘 자신도 이피지니아에게 비슷한 소유 의식을 느끼고 있는 걸 깨달았다. 그는 로비를 지나서 빨간 양탄자가 깔린 층계를 올라갔다. 휴식 시간이었다. 박스들의 출입구들이 있는 복도는 거의 로비만큼이나 붐볐다. 신사들은 숙녀들에게 마실 것을 갖다 주면서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옆 박스의 사람들을 방문하거나 친구들과 잡담을 주고 받기 위해 홀로 나왔다. 한 무리의 젊은 청년들이 마르크스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가장 값비싼 박스에서 자신의 장식품을 자랑하고 있는 우아한 고급 매춘부들을 불러내기 위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르크스는 구부러진 복도를 따라 걸으면서 몇몇 아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맨 끝에 있는 박스에 이르자 무거운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돌체스터와 예리한 눈을 한 그의 아내 그리고 사랑스러운 줄리아나가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안녕 하시오."
마르크스가 말했다.
"공연은 재미있소?"
돌체스터의 놀라움의 표정이 아주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백작님, 당신이 오늘 밤 공연에 오신 줄은 몰랐네요."
"백작님, 뵙게 되어서 기뻐요."
돌체스터 부인은 마치 유령이 나타난 것처럼 마르크스의 출현에 몹시 놀라워했다.
"줄리아나, 백작님께 인사 드려야지."
줄리아나는 마치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백작님."
"돌체스터 부인, 줄리아나 양."
그는 두 사람을 잠시 살펴보았다.
"두 분 다 오늘 밤 아주 멋져 보이는군요."
"감사합니다, 백작님."
돌체스터 부인은 재빨리 진정을 찾고는 대답했다.
"잠시 앉지 않으시겠어요? 줄리아나 옆에 좀 앉으세요."
"고맙소, 그래야겠네요."
그는 호리호리한 작은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의자가 무거워서 휘는 듯했으나 그의 몸무게를 지탱하며 부서지지는 않았다.
"킨이 오늘 밤 아주 훌륭히 연기하는 것 같소."
"그렇죠? 그 사람은 심지어 술에 취해 있을 때도 확실히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이죠."
돌체스터는 진심으로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
"사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에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죠."
마르크스가 말했다.
"네, 배우들이 어떤지 아 시잖아요."
돌체스터가 중얼거렸다.
"아주 불안정한 녀석들이죠."
"그들만 불안정한 건 아니죠."
마르크스는 넓은 극장을 둘러 보았다. 그는 사람들로 붐 비는 극장 뒤쪽과 맨 위층 관람석은 건성으로 보고 박스들이 늘어선 곳을 지켜보았다. 금방 이피지니아가 눈에 띄었다. 고전적으로 단순하게 디자인된 흰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눈부시게 빛나 보였다. 흰 깃털이 우아하게 머리에서 흔들렸으며 머리는 한가운데에서 갈라 귀 뒤로 말쑥하게 넘겼다. 목에는 반짝이는 크리스털 목걸이가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박스에 혼자 있지 않았다. 아멜리아가 그녀의 왼편에 앉아 있었다. 그때, 두 여자 뒤로 커튼이 열렸다. 허버트 호이트가 언제나처럼 말쑥하게 푸른 코트에 줄무늬 조끼와 주름 잡힌 바지를 입고 들어왔다. 장갑 낀 양손에는 레모네이드 잔을 들고 있었다. 돌체스터 부인이 말을 걸었다.
"오늘 날씨 참 좋죠. 안 그래요, 백작님?"
"그렇소."
마르크스가 대답했다.
"줄리아나와 나는 오늘 오후에 공원을 한 바퀴 돌았어요. 그랬지, 줄리아나?"
돌체스터 부인은 고집스럽게 말을 계속 이어 갔다.
"네, 엄마."
줄리아나는 마치 마르크스가 자신의 부채를 낚아챌까 봐 겁나는 듯 부채를 꽉 쥐고 있었다.
"아주 즐거웠어요."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당신 동생을 만났어요, 백작님."
"그랬소?"
줄리아나는 마르크스의 거친 목소리에 움찔했다. 돌체스터 부인이 남편에게 다급한 눈길을 보냈다. 돌체스터는 남자답게 딸을 돕기 위해 마르크스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신가요, 백작님?"
"물론이오."
마르크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아주 좋아요, 아주."
돌체스터는 꾸민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쁘네요."
마르크스는 이피지니아가 허버트가 건네준 잔을 받아 들고는 한 모금 마시는 걸 지켜보았다.
"난 사실 결혼을 결심할 만큼 아주 건강 상태가 좋다고 느끼고 있소."
모두들 그 말에 놀라 침묵하였다. 돌체스터는 입을 딱 벌렸다. 그가 턱을 다무는 데에는 몇 초가 걸렸다.
"당신은 재혼하지 않겠다고 하신 걸로 아는데요, 백작님. 거기에 관해서 규칙도 갖고 있다고 하던 대요."
"마음을 바꿨소."
마르크스가 아주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내 친구가 어떤 규칙들은 어기게 되어 있다는 걸 확신 시켜 주었소."
"그렇군요."
돌체스터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 소식은 분명히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겠네요."
줄리아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번 보고 나서는 마르크스를 보며 떨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결혼 생활에 행복이 깃 들기를 바라요, 백작님."
마르크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 떴다.
"고맙소, 돌체스터 양."
돌체스터 부인은 흥미로 반짝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멀지 않아 약혼을 발표하실 건가요, 백작님?"
"곧 할 거요."
마르크스가 그녀에게 분명하게 대답했다. 돌체스터 씨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 운 좋은 젊은 숙녀는 누굽니까, 무례하게 물어 봐도 된다면요?"
"아직 밝힐 수는 없습니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요. 결산이나 뭐 그런 거죠. 이해하시리라 생각되는데요."
"물론이죠."
돌체스터는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산이라, 아주 중요하죠."
"네, 아주 중요하죠."
마르크스가 일어섰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네요. 요즘은 아주 바빠서. 결혼 계획은 정말 성가신 일이더군요."
"그래요?"
돌체스터 부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그렇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했다.
"예를 들면 장래의 부인과 앞으로 생길 자식을 위해 유언장을 완전히 새로 써야 하지요."
"자식이라고요?"
돌체스터 부인은 멍하니 되풀이했다.
"작위가 관계된 일이라면 의무를 다해야 하는 법이죠."
마르크스가 그녀를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다른 가족의 수입을 조정하는 문제도 있고."
"어떤 식으로 조정하는데요?"
돌체스터 부인이 빠르게 물었다.
"물론 가족의 재산을 잘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내 후계자 위주로 하는 거죠."
"당신의 동생이 후계자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백작님."
돌체스터가 말했다.
"글쎄, 이제 내가 결혼을 하려고 하니 변해야 하겠죠? 운이 좋다면 작위와 재산을 물려 줄 아들을 하나 얻을지도 모르죠."
돌체스터 부인은 충격을 받은 듯이 보였다.
"그렇군요."
"내 동생은 적당한 몫을 계속 받게 될 겁니다."
마르크스는 커튼을 옆으로 젖히고 박스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돌체스터 가의 세 사람을 뒤 돌아보았다.
"물론, 동생이 내 허락 없이 결혼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뭐라고요?"
돌체스터는 긴장되어 보였다.
"동생의 장래를 위해서 난 베넷이 상속녀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죠. 어쨌든 자신이 돌봐야 할 자식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니까요."
"자식이라고요?"
돌체스터는 놀란 게 분명했다.
"항상 그렇지 않습니까?"
마르크스는 복도로 걸어 나왔다. 무거운 커튼이 그의 뒤에서 닫혔다. 그는 이피지니아의 박스가 있는 극장 맞은편 쪽으로 구부러진 복도를 따라 걸었다. 마르크스가 커튼을 열려고 손을 뻗는 바로 그 순간, 허버트 호이트가 걸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허버트는 급하게 빠져 나왔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백작님을 밀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여기 복도는 정말 너무 붐비죠, 안 그래요?"
"그렇소."
마르크스는 박스 안으로 들어가 커튼을 내렸다.
"안녕 하시오, 이피지니아, 페어리 양."
마르크스는 앉으라는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작은 의자에 앉았다.
"백작님."
아멜리아가 공손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바로 극장 뒤쪽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것이 마르크스에게는 샌즈가 종종 사용하는 그런 미묘한 태도로 그를 못 본 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요즘 별로 인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피지니아는 환영하는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은 호기심으로 빛났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조금 전에 돌체스터 씨의 박스에 앉아 있는 걸 본 것 같은데요."
"돌체스터 씨와 얘기를 좀 나누었소."
마르크스는 다리를 펴고는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왜 도대체 난 자꾸 호이트의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하는 거지? 그 사람 여기서 상당히 오래 머물렀던 것 같은데."
이피지니아는 화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 목 둘레의 크리스털 목걸이가 화려하게 반짝였다.
"호이트 씨는 내 친구예요. 그리고 아주 좋은 사람이죠. 알고 계시죠, 백작님."
"그는 정말 귀찮은 사람이오."
이피지니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오늘 비교적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요, 백작님."
"그렇소."
마르크스는 극장 안이 어두워지자, 무대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 킨의 공연이 나를 좀 더 유쾌한 기분이 들게 해줄지도 모르겠소."
"한번 보죠."
이피지니아는 무대를 내려다보기 위해 몸을 돌리기 전에 그에게 묘한 눈길을 주었다. 킨은 맥베드 역을 훌륭히 해냈지만, 그의 황홀한 기교도 마르크스의 어두운 기분을 밝혀 주지는 못했다.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은 이피지니아와 단둘이서 얘기하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그는 그녀에게 줄리아나 돌체스터와 결혼하겠다는 베넷의 완고한 결정에 대해 의논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어두운 기분을 그녀에게 털어놓고, 그녀의 의견을 구하고, 돌체스터를 오늘 밤 기운 빠지게 하려고 했던 것이 잘한 일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능력을 그는 몇 년 전에 상실해 버렸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충고를 구한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그의 규칙은 나약함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맥베드의 마지막 장면 중간, 박스의 커튼이 갑자기 옆으로 젖혀지고는 베넷이 성큼 들어왔다. 그의 손은 옆구리에 꽉 주먹 쥐어져 있었으며 표정도 격분해 있었다.
"제기랄, 형. 난 절대 이번 일에 대해서 형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난 형이 뭘 하려고 하는지 알아. 하지만 잘 안 될걸. 줄리아나와 결혼하는 걸 절대 막을 수 없을 거야."
마르크스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피지니아와 아멜리아도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예의를 잊어버린 것 같구나."
마르크스가 온화하게 말했다.
"브라이트 부인과 페어리 양에게 널 소개하도록 하지."
베넷은 이피지니아에게로 가차없는 눈길을 던졌다.
"형이 내 장래의 부인과 그녀의 가족 앞에서 예의 있게 행동하지 않았는데 왜 내가 형의 정부 앞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하지?"
"그만해."
마르크스가 일어섰다.
"경고했어, 베넷. 이 문제는 나중에 얘기해."
"얘기할 것도 없어. 형이 내 행복을 망쳐 버리려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난 정말 형이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어."
"우리 둘이 있을 때 상의하도록 하자."
마르크스가 아주 침착하게 말했다.
"형이 내 상속권을 박탈한다고 해서 내가 꺾일 줄 알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나갈 수 있어. 줄리아나도 그걸 알아. 형과 그녀의 아버지는 날 못 믿지만, 그녀는 날 믿어."
"소란을 피우고 싶다면, 자리를 옮기자."
"그럴 필요 없어. 지금 갈 거니까."
베넷의 입은 화가 나서 일그러졌다.
"그건 그렇고 축하해, 형. 형이 곧 약혼을 발표할 거라고 들었어."
마르크스는 이피지니아의 충격을 받은 듯한 작은 한숨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온통 동생에게로 가있었다.
"맞아."
"극장 전체가 그 소식에 이미 시끄럽더군. 형의 가장 확고한 규칙을 깰 정도로 일이 진척되었으니, 결혼에 대한 내 계획을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을 테지."
"베넷, 그만하면 충분해."
"하지만 형의 계획대로 전부 잘 되지는 않을걸. 형의 그 빌어먹을 작위를 상속 받을 처지에 있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줄리아나는 나와 결혼할 거니까. 두고 봐. 그녀는 날 사랑하는 거지, 그 빌어먹을 백작 지위를 사랑하는 게 아냐. 그게 바로 형의 장래의 부인보다 더 나은 점이지. 그 여자가 누구든지 간에 말이야."
베넷은 박스에서 뛰쳐나갔다.
14.
이피지니아는 마르크스의 검정 마차의 검은 쿠션에 몸을 묻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차 안의 램프는 꺼져 있었다. 마르크스의 큰 체구가 맞은편 시트를 거의 채웠다. 그는 긴 다리 한쪽을 맞은편 시트 위로 뻗었고 한쪽은 바닥에 내려져 있었다. 그의 기분은 침울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조금 전 극장에서 나온 이래로 그는 몇 마디 말밖에 하지 않았다. 그것도 대개는 딩크스에게 한 말이었다. 이피지니아는 킨의 공연을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마르크스는 극장이 끝난 뒤의 혼잡함을 피하자는 둥 중얼거렸지만, 이피지니아는 그것이 그가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가 그녀에게 함께 나가자고 퉁명스럽게 요구했을 때, 아멜리아의 눈에 어린 의심과 반대의 뜻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피지니아는 조용히 그의 말에 따랐다. 아멜리아는 조와 오티스의 박스에 남아 있기로 했으니 그들이 그녀를 집에 데려다 줄 것이다. 이피지니아와 마르크스가 아멜리아를 자신의 박스로 데려왔을 때 조는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눈치였지만 이피지니아는 모른 척했다. 그녀의 숙모가 마르크스의 약혼에 관한 소문을 이미 들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녀에게 해줄 설명이나 대답이 없었다. 마차가 거리로 나가자, 마르크스는 드디어 무거운 침묵을 깼다.
"극장 안에서 그렇게 불쾌하게 모욕당하게 한 거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하오."
그는 어두운 밤 거리를 보고 있었다.
"내 동생이 잠깐 좀 신파적인 기분에 빠져 있었던 것 같소."
"마르크스, 내게 설명할 게 있을 것 같은데요."
"음."
이피지니아는 잠시 기다렸다. 마르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말했다.
"뭐가 그럼이오?"
마르크스는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피지니아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럼, 내 박스 안에서 있었던 그 장면에 대해 설명을 해 보시죠?"
마르크스는 불안한 듯 머뭇거렸다.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지 않겠다는 당신의 규칙은 알고 있어요."
이피지니아가 말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이런 경우에는..."
"베넷은 자기가 줄리아나 돌체스터와 정열적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리고 당신은 두 사람의 결합에 반대고요?"
마르크스가 마침내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아맞혔소?"
"어려운 일이 아니죠."
"자신의 딸을 돈을 보고 결혼시킴으로써 줄어드는 재산을 막아 보겠다는 것이 돌체스터 씨의 간절한 소망이지. 돌체스터 부인의 첫째 목표는 가문에 작위를 하나 얻는 것이고. 두 사람은 지난 두 시즌 동안 줄리아나가 이곳의 돈 많고 작위를 가지고 있는 신사들을 유혹하도록 일을 꾸몄소."
"당신도 포함되었나요?"
"지난 시즌에는 잠깐 나도 목표물이었지."
지나가는 마차에서 나오는 불빛이 잠깐 마르크스의 험상궂은 얼굴을 비추었다.
"돌체스터는 너무 지나치게 행동했소."
"어떻게 요?"
"자세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소. 그건 비열한 음모였고, 나쁜 의도였다는 것이 너무 명백했소. 그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만 말해 둡시다."
"그랬군요."
한기가 느껴졌다. 이피지니아는 하얀 레이스 숄로 노출된 어깨를 감쌌다.
"아무 탈없이 벗어났네요."
"그렇소."
"저 번에 페티그루의 베스타 사원에서 사실을 늦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네요."
짧고도 덧없는 침묵이 흘렀다. 마르크스는 더 편안한 자세를 찾는 커다란 짐승 같은 태도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침내 그는 머리를 쿠션에 기대고 눈을 가늘게 뜨고는 팔짱을 꼈다.
"난 돌체스터가 줄리아나와 내가 침대에 함께 벌거벗은 채로 발견되도록 일을 꾸민다고 하더라도 그녀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그에게 분명히 말했소."
마르크스가 천천히 말했다.
"오."
이피지니아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내 규칙을 그에게 상기시켰소. 돌체스터는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소. 어쨌든 줄리아나를 내 앞에 얼씬 거리게 하는 일을 그만뒀으니 말이오. 그런데 이번 시즌에서는 내 동생을 적당한 후보로 결정한 것 같소."
"그래서 오늘 밤 그 사람이 그런 생각을 못하도록 다시 말하러 가셨네요."
이피지니아가 결론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문제도 있죠. 당신 동생이 줄리아나와 사랑에 빠졌어요."
"내 동생은 육체적인 매력이라는 유혹과 과장된 바이런의 시에 굴복해 버린 거요. 사랑에 빠진 게 아니오."
이피지니아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혐오감에 움찔했다.
"줄리아나의 대한 동생의 감정이 참된 사랑이 아니란 걸 어떻게 확신하죠?"
"맙소사, 그는 이제 스무 살이오. 첫 번째 열정의 진통을 겪고 있는 거요. 그게 전부지. 사랑이라는 말로 자신의 본능적인 정욕을 점잖게 하려는 게 바로 전형적인 젊은이의 태도지."
"혹시 줄리아나의 대한 그의 감정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을지도 모르죠."
"절대 그럴 리 없소."
마르크스가 중얼거렸다.
"오늘 밤에 그 환상의 약혼을 발표해서 뭘 얻으려 했죠?"
"그건 환상이 아니오. 우린 결혼할 거요, 이피지니아."
"그 문제는 나중에 얘기해요."
그녀가 말했다.
"지금은 당신 동생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당신은 재혼하기로 마음을 바꿨다고 믿게끔 함으로써 돌체스터 씨의 의욕을 꺾으려 하는 거죠?"
"진짜 마음을 바꾼 거요."
그녀는 그 말을 무시했다.
"베넷이 돌체스터의 딸에게 좋은 신랑감이 아니라고 확신 시키는 일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베넷과 줄리아나는 어떻게 되는 거죠?"
"뭐가 어떻게 되오? 줄리아나의 부모는 내가 베넷의 상속권을 박탈한다는 걸 알게 되면 동생과 결혼시키지 않을 거요. 그들의 목적은 백작 재산의 일부를 그들 손에 쥐는 거니까. 베넷이 아니라, 내가 재산을 관리하오."
"마르크스, 난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늘 밤 당신 동생의 얼굴을 보았어요. 그는 자신이 줄리아나와 사랑에 빠졌다고 믿고 있어요."
"걱정할 필요 없소. 돌체스터는 내 동생에게서 줄리아나를 떼어 놓고는 그녀가 다른 표적에 정열을 쏟도록 할 테니."
"말도 안돼요. 다른 사람의 인생을 그런 식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진짜로 믿는다면 당신이나 돌체스터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죠. 줄리아나와 베넷이 젊긴 하지만 이제 어른이에요. 당신과 돌체스터가 억지로 당신들 뜻에 굴복시키려 한다면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아무도 몰라요."
마르크스는 어둠 속에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요? 함께 그레트나 그린으로 도망가기라도 한다는 말이오?"
"가능한 일이죠, 안 그래요?"
"아니오. 베넷은 지금 상태에서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할 수 있겠지만, 줄리아나는 아주 합리적인 여성이오. 그 여자는 절대 경제적인 능력이 불확실한 사람과 결혼하는 그런 소득 없는 짓을 할 사람이 아니오."
"그녀가 사랑보다는 돈을 보고 결혼할 거라는 말씀인가요?"
"바로 그렇소. 지난 시즌에 내가 그 여자의 행동을 봤다는 걸 잊지 마시오."
"당신은 그 여자 부모의 행동을 본 거겠죠. 가련한 줄리아나는 부모의 지시에 따랐던 게 틀림없어요."
"다를 바 없소."
"마르크스, 이런 말하기가 좀 망설여지긴 하지만요."
이피지니아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훌륭하게 인간 본성을 판단하지는 못해요. 적어도 그것이 애정에 관한 문제일 때는 말이에요."
"애정에 관한 일도 사업에 관한 일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해야 하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하지."
"냉소적으로 하는 말이죠, 그렇죠? 난 당신이 왜 그러는지 알아요."
이피지니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은 동생을 불행한 결혼에서 보호하고 싶은 거죠. 하지만 그 방법이 옳다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당신이 걱정할 게 아니오, 이피지니아."
"말도 안돼요. 당신이 이 일에 나를 끌어들였잖아요. 내가 이 일에 끼어 드는 걸 원치 않는다면, 약혼을 발표할 거라는 말 따위는 절대 돌체스터 씨에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젠 우리 둘이서 이 성가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해요. 모든 게 점점 더 힘들어지겠죠."
"힘든 문제는 없소. 규칙대로 개인적인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되니까."
"하지만 마르크스, 사람들은 당신이 이번 시즌에 사교계에 나온 젊은 여자들 중 한 사람과 약혼을 발표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세상에, 당신의 정부가 아니고요. 당신 동생조차도 당신이 이곳의 적당한 여성 중 하나와 약혼할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난 사교계에 처음 나온 젊은 여성과 약혼하려고 하는 거요."
마르크스가 말했다.
"바로 당신이지."
"당신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사람 중에 가장 고집이 세네요."
"바꿀 생각이 없으니까 당신도 익숙해질 거요."
이피지니아는 분노를 꾹 참았다.
"당장의 문제로 되돌아 가죠. 난 당신이 베넷과 줄리아나에게 그렇게 완고하고 융통성 없는 태도를 취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면 그들이 더욱 서로에게 매달리게 된다고 생각해요."
"이 문제에 대해 당신 충고를 구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왜 우리가 이 문제를 토론하고 있는 거죠?"
"그건 나도 알고 싶소."
그가 중얼거렸다.
"이건 당신 문제가 아니오. 베넷은 내 동생이고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겠소."
"마르크스, 당신이 뭘 하려는 지 이해해요. 동생을 보호하려는 거죠."
"그게 뭐 잘못됐소?"
"전혀요. 당신의 그 바람을 이해해요. 당신이 그를 키웠죠. 많은 점에서 당신은 그에게 형이라기보다는 아버지 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동생에게 비슷한 입장이었죠. 저도 동생에게 거의 엄마였어요."
"알고 있소."
그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나 나나 성숙한 어른이 되기도 전에 부모가 되었어요. 그리고 모든 부모가 느끼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맡은 사람에 대해 보호 의식을 느껴요.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영원히 보호할 수는 없어요."
"난 할 수 있소. 베넷을 줄리아나 나 돌체스터로부터 보호할 거요."
"당신은 잘못된 방법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마르크스가 화를 내며 말했다.
"결혼을 축복하라고?"
"네."
"절대 안 해."
"내 말 끝까지 들으세요."
이피지니아가 진지하게 몸을 앞으로 숙였다.
"만약 동생이 적당한 약혼 기간을 갖기로 합의한다면 그 결혼을 축복하겠다고 말하세요."
"적당한 게 어떤 거요?"
"런던의 많은 젊은 커플들이 1년 동안 약혼 기간을 갖죠. 당신은 베넷에게 그 정도 기간을 가지라고 설득시킬 수 있겠죠. 최소한 6개월 정도 요구할 수도 있고요."
"약혼 기간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1년은 긴 시간이에요, 마르크스. 6개월도 마찬가지고요. 만약 줄리아나가 베넷에게 적합한 여자가 아니라면, 그가 그 사실을 알아낼 충분한 시간이 있는 거죠."
"파혼하는 건 쉽지 않소."
"그래요, 하지만 할 수 있고 또 하고 들 있어요."
마르크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만약 1년이 되기도 전에 그들의 감정이 커지면 어떻게 되는 거요?"
"벌써 위험성을 알아차렸네요. 사실, 그렇게 되면 걱정이 더 커지게 되는데 그 두 사람은 더 필사적이 되겠죠. 만약 줄리아나가 정말 그를 좋아한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불행한 연인으로 보겠죠. 함께 있기 위해서 가족이나 관습을 거부하기로 작정할 수도 있고요."
"망할, 당신이 하고 있는 얘기는 줄리아나의 감정에 대한 내 생각이 틀린 경우에만 해당되는 일이오. 하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이 일은 모두 끝나는 거요. 줄리아나를 포함해서, 돌체스터 일가는 베넷이 결혼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결정하겠지."
이피지니아는 한숨을 지었다.
"백작님, 당신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당신은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아마 가장 지적인 사람일 거예요. 하지만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는 너무 어두워요. 사랑은 사람을 아주 필사적으로 만들죠."
그는 살피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전문가가 되었소?"
그녀는 자신이 바로 사랑이 사람을 필사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표본이란 걸 말하려다 참았다.
"내 동생이 사랑에 빠졌을 때 옆에서 지켜보았어요."
그 대신에 이피지니아는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의 눈이 더 격렬해졌다.
"당신을 사랑했다고 믿었던 그 남자와 사랑할 때 말이오?"
이피지니아는 움찔했다.
"리처드 햄프턴의 대해 아시는군요?"
"그렇소."
마르크스는 거리를 내다보았다.
"당신은 모든 걸 아는 것 같네요. 그렇죠, 백작님?"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다 아는 것이 좋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소."
"글쎄, 그렇다면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보이니까, 리처드의 관해 내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겠네요, 그렇죠?"
마르크스는 잠시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의 눈길은 다시 어둠이 깔린 거리로 돌아갔다.
"그를 사랑했소?"
"그에 대한 대답은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텐데요."
"질문을 피하고 있네."
"난 단지 설명하지 않는다는 당신의 규칙을 택했을 뿐이에요."
이피지니아가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당신과 거래를 하고 싶어요, 백작님."
"어떤 거래 말이오?"
"당신이 내 질문 중 하나에 답하신다면 나도 당신 질문에 대답해 드리죠."
"좋소."
그는 갑자기 달려들 듯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이 먼저 내 질문에 대답해 주시오. 그 젊은 햄프턴을 사랑했소?"
이피지니아는 정직하게 대답하려고 애썼다. 리처드가 자신에게 청혼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 동안의 자신의 감정을 회상하는 것이 이상하게도 참 힘들었다. 리처드의 대한 그녀의 감정은 마르크스에 대한 감정과 비교해 볼 때 너무 부드럽고 온화했다.
"그를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믿었죠."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를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고?"
마르크스는 비웃었다.
"정말 엉터리군."
"엉터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난 사실 학식을 소중히 하는 여자예요. 전직 학교 선생님이라고요. 난 지성의 힘을 믿어요. 적절한 요소가 존재하고 결단력과 의지, 지성이 있다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배울 수 있다고 확신해요."
"사랑에 이성을 개입시키는 당신의 말을 들으면 시인들이 웃겠소."
"당신은 시인이 아니에요, 백작님. 당신이 왜 웃으시죠?"
"이 주제 자체가 웃기는 얘기요."
마르크스는 그녀를 조롱의 눈길로 쏘아보았다.
"사람을 사랑하는 걸 배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리처드 햄프턴에게 그런 요소들이 있었소?"
"그렇다고 생각해요. 리처드는 좋은 사람이에요. 친절한 사람이죠. 강하고, 부드럽고, 변함없어요. 그래요, 그를 사랑하는 걸 배울 수 있었을 거예요."
"그 사람은 끔찍할 정도로 모범적인 것처럼 들리는군. 솔직히 그 사람과 행복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오?"
"네."
"그 사람을 신뢰했었소?"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이죠."
"결혼 후에 누군가를 만났다고 하더라도 말이오? 당신 피를 녹아내리게 하고 당신이 시를 이해하도록 만들어 주며 별을 만지는 것처럼 당신을 유혹하는 사람을 말이오?"
"당신 말은 내가 당신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란 의미인가요, 마르크스?"
그는 어둠 속에서 몹시 조용해졌다. 이피지니아는 쓰게 웃었다.
"내가 리처드 햄프턴과 결혼했더라면 우리는 한 번도 서로 못 만났을 것 같네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만났더라도, 난 그에게 신뢰를 지켰을 거예요. 난 규칙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명예심은 있거든요."
"열정은 항상 의지대로 움직여지는 게 아니오, 마담."
"난 다르게 생각해요. 그리고 당신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지적인 사람들이에요. 유혹과 열정은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 통제할 수 있는 거죠."
놀랍게도 마르크스는 그 말에 약간 미소를 지었다.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당신과 나에 대해서는 어떻소, 이피지니아? 우린 의지가 부족한가?"
"아뇨."
그녀는 부채를 들어 아주 천천히 부치더니 다시 접었다.
"우리 둘 다 열정에 탐닉할 자유가 있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어요. 만약 우리가 자유롭지 않았다면, 명예가 유혹에 굴복하지 않도록 해주었을 거예요."
"아, 그렇군. 우리는 우연히 스스로 유혹 당하려고 자유로웠고, 그래서 유혹 당했다는 거군. 재미있는 논리요."
"우리 문제보다는 당신 동생에 관한 문제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당신은 베넷의 생활을 통제할 수 없어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요? 난 동생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싶지 않소. 단지 그를 보호하고 싶은 거요."
"동생도 원하는 게 있을 거예요. 당신은 그에게 시간을 주어야 해요. 운이 좋다면 그도 줄리아나의 대한 자신의 감정이 한때의 지나가는 열정이 아니라 참된 사랑이란 걸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겠죠."
"내 방식이 더 나은 것 같소."
마르크스가 말했다.
"내 생각에는 당신의 방식은 재난을 초래할 것 같아요."
"제기랄, 난 이 따위 감정적이고 어리석은 짓거리는 질색이오."
"백작님, 당신은 과학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는 사람이네요."
"베넷이 어렸을 땐 모든 것이 훨씬 간단했었소."
마르크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땐 내 충고를 존중했지. 필요할 땐 내 도움을 청하기도 했었소. 중요한 일을 하기 전에는 항상 내 승인을 얻었지."
"이해해요."
이피지니아는 생각에 잠겨 미소 지었다.
"내 동생이 어렸을 때 우리 사이도 꼭 그랬죠. 하지만 모두들 어른이 되잖아요, 마르크스."
"그러면서 꼭 그렇게 행복의 기회를 파괴해야만 하는 거요?"
"때론 그렇죠."
"잘못되는 경우 대가가 너무 커. 난 그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소, 이피지니아."
이피지니아는 부채를 꽉 쥐었다.
"백작님, 난 학생들을 몇 년 동안 가르쳤어요. 그리고 그들은 내가 가르친 대로 항상 배우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들은 종종 아주 전적으로 다른 것들을 배우죠."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오?"
"이 상황에 대처하는 당신의 방식이 위험을 안고 있다는 내 말을 믿으셔야 해요. 베넷은 이 문제를 당신이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거예요."
"신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야지."
마르크스는 강하게 말했다.
"사실대로 말해서 백작님, 이 일이 나쁘게 끝나 버리면 동생도 당신처럼 돼버릴 가능성이 아주 많아요. 동생이 정말 그렇게 되기를 원하세요?"
마르크스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했소?"
"당신은 동생을 나중에 꼭 당신처럼 변하도록 할 만한 것들만 가르치고 있다고요."
"그게 도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이오?"
마르크스가 위태롭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랑을 위해서는 한치의 여지도 허락하지 않는 딱딱하고 굽힐 줄 모르는, 단지 규칙에 의해 사는 사람이죠."
마차 안에 소름 끼칠 정도의 침묵이 감돌았다. 마르크스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나, 이피지니아는 그의 분노로 인한 침묵 때문에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백작님, 당신의 첫 번째 결혼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척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네요."
"살아 있는 지옥이었소."
"이젠 내가 질문 할 차례예요. 당신의 결혼 생활 동안 당신이 아는 사람 중에 결혼 생활이 그렇게 되어 가는 걸 막아 줄 사람이 한명도 없었나요?"
순간 그녀는 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없었소."
그 말은 돌처럼 무겁게 들렸다.
"아무도 그럴 수도 없었소. 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안다고 생각했소.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한 거요."
그의 미소는 잔인했다.
"노라가 날 사랑한다고 믿었소."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르죠."
이피지니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오."
마르크스는 잠시 주먹을 쥐었다.
"그 여자는 자신이 밴 아이의 아버지가 필요했던 거요."
이피지니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건 몰랐어요..."
마르크스의 눈은 차가웠다.
"아무도 몰랐소. 노라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후에 내게 왔다는 걸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소."
"오, 마르크스. 정말 끔찍한 일이네요."
그는 잠시 침묵했다. 이피지니아는 그가 그런 사실을 혼자서 그렇게 오랫동안 간직해 왔다는 것이 놀라웠다.
"노라의 가족은 근처에 있는 농장에 살고 있었소."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파묻어 두었던 무덤에서 말을 파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난 그녀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소.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어렸는데 열여섯 살이 되던 때부터 그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었소."
"마르크스, 제발 내게 꼭 말할 필요는 없어요."
그는 마치 그 말을 못 들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녀는 내가 재미있다고 느낀 것 같았소. 그리고 쓸 만하기도 하고. 우린 마을 집회소에서 함께 댄스를 배웠소. 난 그녀에게 낚시도 가르쳤지.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키스했던 여자요."
이피지니아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제발..."
"하지만 난 시골 농부에 불과했소. 그 당시 작위는 먼 친척 아저씨에게 있었소. 내가 상속 받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소. 노라는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인생에서 바랐었소. 게다가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녀 자신과 부모는 시골 지주보다 더 나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소. 노라가 열여덟이 되었을 때,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런던으로 데려갔소."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죠?"
이피지니아는 대답을 두려워하며 물었다.
"그 해 유월에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모든 것은 변해 있었소. 그녀는 더 이상 떠날 때의 그녀처럼 들뜨고 매력 있는, 행복한 젊은 아가씨가 아니었소. 그녀는 내 팔에 몸을 던지고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은 바로 나라는 걸 마침내 깨달았다고 말했소."
"그랬군요."
이피지니아는 부채를 내려다보았다. 마르크스의 해묵은 분노와 고통의 물결이 가차없이 그녀를 때렸다.
"그리고 난 너무 순진하고 경험이 없어서 그녀를 믿어 버렸소."
마르크스의 시선은 어두운 밤 거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도시 생활이 싫어졌다고 말했소.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결혼하기를 원했지. 그녀의 부모도 완전히 찬성이었소. 그녀의 아버지는 나를 옆으로 데리고 가서 우리가 그레트나 그린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했소."
"약혼 기간이 짧았겠네요?"
"시간과 돈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모두 결론을 내렸지. 그리고 나도 강렬히 그녀를 원했기 때문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소. 노라와 나는 그레트나 그린으로 갔소. 우리는 여인숙에서 첫날밤을 보냈지. 그녀를 내 품안에 안는 걸 조금도 지체할 수가 없었소."
"정말 그 얘긴 이제 듣고 싶지 않아요."
"난 그녀를 너무나 원했소. 최대한 그녀를 부드럽게 대하기로 마음먹었지. 하지만 그날 밤 그녀가 울더군. 몇 시간 정도 울었던 것 같소. 내가 자신을 몹시 아프게 했다고 하더군. 내가 농부의 거칠고 못 박힌 손을 가졌다고 말했소."
마르크스는 자신의 커다란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사실이었소. 난 농부의 손을 가졌소, 농부였으니까."
이피지니아는 자신의 몸에 닿았던 그의 손에 대한 기억에 전율했다. 강하고 멋진 손. 여자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며 동시에 원하도록 만드는 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음날 아침 시트 위에는 상당한 양의 피가 묻어 있었소. 후에 난 그녀의 어머니가 우리가 그레트나로 떠나던 날 부엌에서 작은 병을 준비해서 그녀에게 준 사실을 알게 되었소. 그녀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거요."
"이해할 수가 없네요."
이피지니아가 낮게 말했다.
"피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난 노라가 다른 남자와 관계가 있었을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을 거요. 첫날밤에 난 동정이었소. 그런 문제에 대해 그녀보다 더 순진했던 거요."
"그녀에게 다른 애인이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죠?"
이피지니아가 조용히 물었다.
"우리가 결혼한 지 한달 후에 그녀는 아기를 유산했소. 난 거의 미칠 지경이었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녀가 죽는 줄로만 알았지."
"세상에."
"난 의사를 불러 왔소. 모든 조치가 끝나고 나자 의사가 말해 주더군. 그는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소. 물론 그는 내가 아기 아버지라고 생각하고는 그레트나로의 경솔한 여행이 유산의 원인이라고 말했소. 내 어깨를 두드리며 곧 다른 아기가 생길 거라고도 말했소."
"의사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나요?"
마르크스의 입이 비틀렸다.
"물론 안 했소. 누가 그런 식으로 속이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소? 그리고 그때 노라는 내 아내였소."
"그리고 당신은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고 느꼈겠죠, 안 그래요?"
이피지니아가 물었다. 마르크스는 어깨만 으쓱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오랫동안 동생을 돌보았죠. 자신보다 어리고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당신의 제2의 천성이네요. 노라는 뭐라고 말하던가요?"
"내가 그녀에게 사실을 추궁하자, 그녀는 다시 울더군. 그리고 나서 기가 죽더니 그 지저분한 얘기를 해주었소. 그녀는 런던에서 그녀를 쫓아다니던 남자 중 하나에게 유혹 당했는데, 그는 상속녀나 뒤쫓아 다니면서 결혼할 생각은 없는 젊은 방탕아였소. 그가 차지한 여자에 대한 자랑도 서슴지 않고 하고 다니는 놈이었지."
"가엾은 노라."
"그 소문이 그녀를 망쳤소. 결혼할 희망도 없었지. 그녀의 가족은 노라를 유혹한 남자에게 그녀와 결혼하도록 강요할 만한 사회적인 힘이 없었소."
"그래서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서 당신에게 결혼시켜 버릴 계획을 세웠네요?"
"어리석은 이웃의 시골 지주가 그 사실을 알아낼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 거지."
마르크스는 다시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옳았소. 만약 노라가 유산을 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과연 깨달을 수 있었을까 하고 오늘날까지도 종종 생각해 보오."
"아기가 몇 주 빨리 태어나면 당신도 분명히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요?"
"잘 모르겠소. 그런 일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했잖소. 아기를 조산했다고 말했을 테고, 난 그 말을 믿고 싶어 했겠지."
"내가 들은 소문으로는 노라가 열병으로 죽었다고 하던데요."
"그랬소. 아기를 잃고 나서 여섯 달 만이었소."
"결투."
이피지니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결투했던 이유죠, 안 그런가요? 노라가 죽고 나자 곧 당신은 런던으로 와서 그녀를 유혹했던 남자에게 복수했던 거예요."
"그는 내가 바보라고 말했고, 그건 사실이었던 것 같소. 그는 품행 나쁜 그 여자가 죽었는데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질 게 있냐고 말했소. 난 대답해 줄 말이 없었지."
"그녀가 당신을 속였더라도 당신은 아내의 명예를 지켜주었어야죠. 그녀가 이미 죽었지만 말이에요."
이피지니아는 뺨에 눈물이 흐르는 걸 느꼈다.
"마르크스, 그건 정말 당신다운 행동이에요."
마르크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제기랄, 당신 울고 있소?"
"아뇨."
그녀는 살짝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니길 바라오. 이건 눈물 흘릴 만한 이야기도 못 되오."
"눈물 나는 이야기인데요, 마르크스. 당신과 노라가 정말 안됐어요. 그녀는 자신이 망가졌고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 말 그대로 끔찍했을 거예요."
"그랬겠지."
"그녀는 젊었고 자포자기 했겠죠. 그녀는 유혹당하도록 내버려 둘 정도로 순진한 처녀였어요. 사교계의 엄격한 규율 중 하나를 어겼으니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는 걸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당신에게 돌아왔겠죠. 어린 시절의 좋은 친구에게로요."
"문제는."
마르크스가 말했다.
"어떤 조건에서도 그녀를 받아들이고 싶을 만큼 내가 그녀를 원했다는 것이오. 난 그녀에게 내 이름을 주고 그 아기를 내 아기로 인정했을 거요. 그녀가 나를 속이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건 바로 그거요."
"당신이 항상 그녀가 속인 것만 생각하니까, 자신이 바보가 되었다고 느끼는 거예요."
"난 바보가 되었소."
이피지니아는 한기가 들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그를 속였었다. 이번에도 자신이 바보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몸을 뻗어 장갑 낀 손을 그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노라는 당신을 바보로 만들지 않았어요, 마르크스.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당신은 고상하고 기사도 같은 태도로 행동했어요. 당신은 그녀의 명예를 위해 복수했고 그녀의 비밀도 지켰어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소. 나 자신을 순진하고 잘 속는 바보로 보이게 하지 않고서는 그녀의 불명예를 폭로할 수가 없었던 거요."
"과거에 대해 당신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자신이 순진하고 잘 속는 바보로 보였다는 게 아니었을 거예요."
이피지니아가 말했다.
"내 생각에 그건 당신이 그녀를 그토록 사랑했지만, 그녀는 당신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녀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당신을 이용했다고 느끼는 거죠."
"사실 그녀는 그랬소."
"당신의 그 생각과는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아요."
이피지니아가 말했다.
"노라는 거의 소녀와 다름없었고 당시에 공포로 이성을 잃었음에 틀림없어요. 그녀의 부모도 똑같이 광적이었을 테고 딸을 궁지에서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었겠죠."
"그렇소."
"당신의 결혼은 암울한 구름 속에서 시작되었어요. 당신은 첫날밤에 동정이었다고 말했는데, 난 당신이 모든 면에서 그녀보다 더 성숙했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아주 빨리 어른이 되도록 강요받았죠. 반대로, 노라는 겨우 소녀티를 벗어났었어요."
마르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이피지니아가 말했다.
"노라가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그녀는 성숙해져서 당신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을 거라는 거예요. 그녀가 당신의 섬세한 성격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성숙해지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배웠을 거예요."
마르크스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종종 지적인 여성으로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기이한 얘기를 하는군.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는 거요?"
그녀는 웃었다.
"왜냐하면 당신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알기 때문이죠, 백작님. 사실, 내가 그렇게 됐거든요."
15.
마르크스는 마치 우주가 조금 전에 있었던 곳과는 다른 장소로 자신을 데려가 그의 주변에서 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별빛이 약간 다른 각도에서 뿜어져 나오고 달도 하늘에서 위치를 바꾼 것이다. 이피지니아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아주 명백하게. 마르크스는 그녀를 가까이에 서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베스타 사원에서의 그날 밤처럼 심하게 긴장한 것 같지는 않았다.
"마르크스?"
이피지니아가 걱정스럽게 얼굴을 찡그렸다.
"괜찮으세요, 백작님?"
"아니."
하지만 그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뭐가 변했는지, 그것도 아니면 뭐가 달라졌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심지어 조리 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이피지니아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그녀를 끌어당겨 팔로 감쌌다. 그녀는 놀라움의 작고도 달콤한 한숨 소리를 내더니 그가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누르자 부채를 떨어뜨렸다. 그녀의 숄이 마차 바닥으로 펄럭거리며 떨어졌다.
"마르크스."
그녀는 팔로 그를 안고는 부드럽게 신음하며 더 바싹 그에게 붙었다.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마르크스는 마차의 커튼을 닫았다. 마차 안은 부드러운 어둠으로 가득 찼다. 그는 베스타 사원에서의 그날 밤 이후로 계속 그를 짓누르고 있던 애타는 욕망으로 이피지니아에게 깊숙이, 굶주린 듯이 키스했다. 그녀는 그의 필사적인 태도보다 더 격렬하게 그에게 매달렸다.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그를 꽉 붙들고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마르크스는 스타킹을 신은 그녀의 종아리에 손을 갖다 댔다. 손바닥으로 무릎을 쓰다듬으며, 가터를 지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곳으로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녀의 부드러운 페티코드가 그의 팔 둘레에서 물결 치며 그의 다리로 흘러내렸다. 그는 허벅지 사이의 뜨거운 곳을 찾아 더듬다가 그녀가 이미 축축이 젖어 있는 것을 깨닫고는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에게서 짙은 장미 냄새와 여성의 욕망 냄새가 났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숨막히게 하는 향기였다. 그의 몸 전체가 욕망에 사로잡혀 떨려 왔다. 손도 떨렸다. 그는 깊게 호흡을 들이마시고는 억제하려고 애썼다. 지난 번처럼 그런 식으로 실패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거칠고, 서툰 농부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위해 최대한 부드럽게 할 것이다. 그는 그녀를 기쁘게 해주려고 애썼다. 그는 그녀를 기쁘게 하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는 그녀를 기쁘게 해주어야만 했다. 그는 그녀가 허벅지를 벌릴 수 있도록 자세를 편안히 해주었다. 그녀의 흰 드레스 자락이 검은 벨벳 쿠션 위에서 출렁거렸다. 그는 바지를 풀기 위해 몸을 굽혔다. 이피지니아의 손이 그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마르크스, 뭘 하는 거예요?"
"당신을 사랑해 주려고."
그의 흥분한 남성이 자유롭게 풀려났다.
"당신 마차 안에서요?"
커튼 틈 사이로 비쳐지는 엷은 빛 줄기가 커다랗게 눈을 뜨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여기서 하거나 아니면 당신 집 문 앞에서 해야 될 것 같소. 안락한 침대를 찾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소. 나를 만져 주시오."
"오, 네."
그녀는 손을 그의 어깨에서 떼고는 장갑 낀 손가락 끝을 이로 물어서 잡아 당겼다. 그리고는 다음 손가락도 그렇게 했다. 천천히 그녀는 흰 새틴 장갑을 벗었다. 그녀가 장갑을 하나씩 벗는 모습은 마르크스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 중에서 가장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에로틱한 광경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장갑을 다 벗었다. 그녀의 이에 매달려 있는 새틴 장갑 한 짝이 엷은 빛 속에서 반짝거렸다. 그녀는 몸을 굽혀 손가락을 부드럽게 그에게 갖다 댔다.
"마르크스."
장갑이 그녀의 이에서 떨어졌다. 마르크스는 지난 번 경우처럼 망신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잘 해낼 수 있을지 고심했다.
"마르크스?"
이피지니아는 걱정스럽게 불렀다.
"당신 괜찮아요? 다시 쓰러지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 그렇죠?"
마르크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눌렀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오, 적어도 아직은 아니오. 당신 안에 들어가고 싶소, 이피지니아. 하지만 급하게 서두르는 건 원하지 않소. 이번에는 당신이 나를 이끌어야 하오."
"좋아요. 하지만 경고해 두는데, 이런 일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지난번의 경험에서 배운 거랑 라트모어의 동상이 있는 홀을 돌아보면서 관찰한 게 전부예요."
"그것이면 충분할 거요, 장담하지."
그는 손바닥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축축한 열기를 느꼈다.
"충분한 것 이상인데."
"확실해요?"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그의 남성 끝 부분에 닿았다. 마르크스는 굳어졌다.
"아주 확실하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서 움직였다. 그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세상에, 마르크스."
그는 그녀 안을 스쳐 지나가는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달콤하고 강렬한 신호였다. 강렬한 쾌감이 마르크스를 사로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발작적으로 그를 꽉 붙들었다. 마르크스는 움츠리며 숨을 죽였다.
"내가 당신을 아프게 했나요, 백작님?"
"당신은 나를 죽이는 것 같소, 이피지니아."
"오, 안돼요. 정말 미안해요, 백작님. 상처를 주려고 했던 건 아닌데."
걱정스러움이 담긴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정열의 달콤한 격렬함에 잠깐 찬물을 끼얹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고 말했잖아요."
"농담이었소."
그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는 다시 깊은 숨을 내쉬었다.
"죽다니 당치도 않지."
그의 손이 계속해서 그녀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사실은,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지금보다 더 생생하게 느낀 적이 없소."
이피지니아의 서투른 애무가 그의 감각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땀이 흘렀으며 모든 근육이 긴장되었다. 그녀는 그의 무릎 위에서 가볍게 움직이며 다리를 조였다. 그러자 그녀의 허벅지 안쪽이 그의 팽팽히 긴장된 남성에 스쳤다. 그는 몸 전체가 부르르 떨렸다. 그녀의 속삭이는 듯한 신음 소리와 빨라지는 호흡이 그녀가 점점 흥분하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다리 사이의 부드럽고 뜨거운 곳으로 그를 서투르게 이끌었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주의 깊게, 그녀는 그를 자신에게 맞추었다. 그녀는 너무 좁았다. 마르크스는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실제로 숨을 거두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늑하게 그를 감쌌다. 마르크스는 몸서리치며 스스로를 억제했다. 아득한 경고의 종소리가 그의 열로 달아오른 머릿속 어딘가에서 울려댔다. 마지막 전에 몸을 빼내야 했다. 그는 자신이 특별히 고안한 프랑스 제 양 창자로 만든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피지니아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모든 이성적인 생각이 마르크스의 달아오른 머리에서 사라졌다. 고대의 어떤 여신보다도 더 매혹적으로 그녀는 그를 꼭 붙들고서, 그의 이름을 속삭이고 호소하며 애걸하고 요구했다. 마르크스는 아주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러자 그녀는 갑작스럽게 전율하더니 그의 팔 안에서 몸부림쳤다.
"마르크스."
그녀는 놀람과 쾌락의 작은 소리를 지르면서 그에게 쓰러졌다. 경고의 종소리가 다시 어딘가에서 울렸지만, 마르크스는 반응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피지니아의 허벅지를 잡고 위쪽으로 느슨하게 했다. 그리고 목에서 터져 나오려는 의기양양한 만족의 소리를 안으로 삼켰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마차 시트의 구석 자리로 축 늘어졌다. 이피지니아도 그의 위에 기대어 쓰러졌다. 침묵이 흘렀다. 마르크스는 마차 안의 공기 속에 떠다니고 있는 만족의 독특하고도 짙은 향기를 들이마시면서 침묵에 귀 기울였다. 마차는 모퉁이를 돌아 몇 분 후에 멈춰 섰다. 마르크스는 마지못해 움직이며 마차 안의 램프 중 하나에 불을 켰다. 그는 자신에게 편안하게 기대어 있는 이피지니아의 느낌을 몇 분 동안 음미하고 있다가 갑자기 현실을 깨달았다.
"이피지니아, 당신 집에 도착했소."
그녀는 희미하게 뭐라고 중얼대다가 더 가까이 그에게 몸을 붙였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마르크스는 그녀가 얕은 잠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미소 지었다.
"일어나. 빨리, 이피지니아."
그는 그녀를 바로 앉히려고 애쓰면서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는 마부가 마차 문을 열기 위해 마부 석에서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마르크스는 걸쇠를 걸기 위해 급히 손을 뻗었다.
"이피지니아."
"왜요?"
그녀는 매혹적으로 하품하며 나른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허벅지 둘레에 구겨져 있었다. 말쑥하게 말아 올린 머리도 한 가닥 풀어져 귀 위에 삐죽 매달려 있었다. 흰 깃털도 이상한 각도로 까딱거리고 있었다.
"아침이에요?"
"아니오."
마르크스는 재빨리 몸을 가지런히 했다.
"한밤중이오. 그런데 당신은 마차 안에서 뒹군 것처럼 보이는군."
이피지니아가 낄낄 웃었다.
"그렇게 보여요, 백작님?"
마르크스는 셔츠 자락을 바지 속으로 밀어 넣다가 멈추었다. 그는 그녀의 행복감에 끌려 그녀를 보았다. 자신의 책임이라고 두려운 경이감을 가지고 생각했다. 그가 그녀를 행복하게 한 것이었다. 그것은 망원경을 통해 별들을 관찰하거나 집사 모양의 태엽 인형을 만들어 내는 일보다 분명히 더 만족스러운 업적이었다. 마부가 마차 문을 톡톡 두드렸다.
"백작님, 내리시겠습니까?"
"잠깐, 젠킨스."
마르크스는 몽상에서 깨어났다.
"한번 돌아보시오."
그는 이피지니아에게 중얼거렸다.
"당신 드레스의 보디스는 뒤틀려 있고 깃털은 머리에서 곧 떨어질 것처럼 보이는군."
"네, 백작님. 내가 이렇게 엉망이 되다니 어떻게 하죠?"
"자, 한번 봅시다."
이피지니아는 그의 말에 따라 뒤로 돌고는 그가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얌전하게 있었다. 마르크스는 한번 더 그녀를 돌게 하더니 자신의 손으로 매만진 것을 비판적인 눈으로 검토했다. 그는 이피지니아의 오른쪽 귀 위에서 여전히 춤추고 있는 풀어진 머리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핀을 줘 보시오."
그녀는 손을 올려 쪽진 머리에서 핀을 하나 뽑았다.
"여기 있어요, 백작님. 제발 당신이 꽂지는 마세요."
"그만 웃으시오. 내가 당신을 간질이고 있다고 마부가 생각하겠소."
"알았어요, 백작님."
즐거움이 다시 한번 그녀의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마르크스는 풀어진 머리를 제자리에 핀으로 꽂았다.
"운이 좋다면 당신이 들어갈 때까지 붙어 있을 거요."
"그럴 거라고 확신해요, 백작님. 당신은 기계에 대해 재능이 있잖아요."
마르크스는 마차 문의 걸쇠를 풀고는 밀었다. 바깥에서 인내 있게 기다리고 있던 젠킨스가 무감각한 표정으로 뒤로 돌더니 계단을 놓았다. 마르크스는 이피지니아가 마치 지난 30분 동안 아주 우아하게 고대의 골동품에 대해서만 얘기했다는 듯이 품위 있게 내려오는 것을 보며 미소를 감추었다. 길에 내려서자 그녀는 젠킨스를 잠시 눈 멀게 할 것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마워요."
그녀는 마부에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완벽한 백작 부인이 될 거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그는 문까지 가서 그녀가 안전하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현관 계단 앞에서 그는 그녀를 팔에 안고 침실로 올라가고 싶은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한가지에 대해서는 당신이 아주 옳았어요, 백작님."
그가 문을 닫으려 하자 이피지니아가 부드럽고 꿈꾸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계단에서 멈춰 섰다.
"그게 뭐요?"
"이번에는 훨씬 좋았어요."
그는 싱긋 웃었다.
"그래, 그랬소. 두 번째 시합에서는 살아남았네. 날 깨어나게 하려고 의사를 부를 필요도 없었고."
이피지니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당신은 아주 강한 체력을 가진 게 틀림없어요, 백작님."
"틀림없지."
마르크스는 문을 닫아 주고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부드럽게 휘파람을 불며 한밤중의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좋은 밤이죠, 백작님."
젠킨스가 마차 문을 열면서 말했다.
"정말 그렇군. 딩크스에게 집으로 가자고 말하시오."
"네, 백작님."
마르크스는 마차 안으로 뛰어올라 이피지니아와 사랑을 나누었던 시트에 자리 잡았다. 창백하게 하얀 새틴이 검은 벨벳 위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이피지니아의 장갑을 집어 들었다. 장갑은 크고 근육질로 된 그의 손바닥 위에 한 줄기 별빛처럼 부드럽게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꽉 쥐었다. 마르크스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서재로 갔다. 그는 동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결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졌다. 베넷의 마차가 현관 앞에서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낸 것은 거의 새벽 3시경이었다. 마르크스는 브랜디 잔을 이리저리 돌리며 서재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베넷이 곧 방으로 들어왔다.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러브레이스가 그러던데."
"그래."
베넷은 벽난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한 팔을 대리석으로 된 맨틀에 내던지듯 기댄 채, 기분 나쁜 반항적인 태도를 취했다.
"자, 그게 뭔데? 도대체 우리가 서로에게 뭐 더 할 말이 있는지 모르겠네, 형."
마르크스는 촛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돌체스터 양과 결혼하려는 네 계획을 방해했던 거 미안하구나."
베넷이 그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했지?"
"내 말 들었잖아."
마르크스는 브랜디를 한 모금 마셨다.
"돌체스터 일가를 놀라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상속권을 빼앗겠다고 널 위협할 권리도 내겐 없어. 그건 단지 허세일 뿐이야."
"형,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잔인한 농담 같은 거야?"
"만약 네가 줄리아나 돌체스터와 결혼하기로 한다면, 그녀가 적당한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넌 수입의 전부를 계속 받게 될 거야. 내일 사무관에게 네 상속을 보호해 줄 서류를 작성토록 하겠다."
베넷은 완전히 당황한 듯이 보였다.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 형이 줄리아나와의 약혼을 허락한다고 지금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
마르크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약혼 발표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내일 돌체스터 씨에게 분명히 말하겠어."
"하지만 아까 초저녁 때까지만 해도 형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했었잖아."
"아까 초저녁 땐 말을 많이 했지. 그러나 지금 모두 후회하고 있어. 사과할게."
"사과라고?"
베넷은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마르크스는 베넷을 쳐다보았다.
"내 유일한 변명은 네가 나와 비슷한 운명으로 고통 받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는 거야."
"줄리아나는 노라가 아니야, 제기랄."
"네 말이 맞아."
마르크스가 말했다.
"그녀는 노라가 아니지."
베넷은 머리를 흔들며 상황을 분명히 이해하려고 애썼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넌 내 동생이야. 내 유일한 가족이라고. 내 오른팔을 자를 수 없는 것처럼 네 상속권도 박탈할 수 없어. 사실, 네 애정과 신뢰를 잃느니 차라리 내 팔을 잃는 게 나아."
"형이 정말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거 알아."
마르크스는 잔을 다른 손으로 옮기고는 잔에 비쳐 너울거리는 불꽃을 지켜보았다.
"결혼 문제에 착수할 수 있도록 돌체스터 씨의 사무관과 내 사무관이 서로 연락을 취하도록 해도 좋아. 이런 일들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 일은 보통 몇 달씩 걸리게 마련이야."
"어, 형. 사실 아직 줄리아나에게 청혼한 건 아니야."
"안 했다고?"
마르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내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으니까 지금 그렇게 서둘 필요는 없을 것 같네."
"그녀에게 즉시 말해야겠어."
베넷은 정열적으로 말했다.
"분명히 그녀는 시즌이 끝나기 전에 청첩장을 보내고 싶어 할 거야."
"분명히 그렇겠지."
마르크스는 브랜디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는 한 달 반 정도가 남아 있었다.
"마르크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베넷은 헝클어뜨린 것 같은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매만졌다.
"형 마음이 바뀌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도 그랬어."
마르크스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베넷은 얼굴을 찡그렸다.
"뭐?"
"내가 성급하게 굴고 난 후에 내 행동을 살펴볼 시간을 가졌지. 네가 날 용서해 주길 바라."
"그럼, 물론이지."
베넷은 머뭇거렸다.
"고마워. 내겐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몰라. 줄리아나가 훌륭하고 우아한 숙녀라는 걸 형도 곧 알게 될 거야. 그녀는 굉장한 아내가 되어 줄 거야."
"결혼 날짜는 내년 봄쯤에 잡기를 원하겠지?"
"내년이라고?"
베넷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너무 오래 남았잖아."
"약혼 기간을 6개월 정도로 할 수도 있지만, 1년이 더 낫다고 들었어."
"글쎄, 그 문제라면 사실 난 적당한 약혼 기간을 생각해 보지 않았어. 솔직히 말해서 형, 난 마차를 하나 빌려서 줄리아나를 데리고 그레트나 그린으로 갈 생각을 했었어."
마르크스는 브랜디가 목에 걸려 거의 숨이 막힐 뻔했다.
"그랬군."
"괜찮아?"
"그래."
마르크스는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다시 브랜디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레트나는 이제 필요 없어. 돌체스터 부인이 외동딸을 위해 멋진 결혼 계획을 세울 거라고 믿어."
"그렇겠지. 그리고 줄리아나는 착실한 딸이 되려고 하겠지. 그건 그녀의 많은 장점들 중 하나야."
"그렇군."
"그렇다면."
베넷은 빙긋 웃었다. 그는 마치 끔찍했던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은 듯이 보였다.
"약혼 문제를 줄리아나와 상의해서 기간을 얼마로 정할지 알려 줄게."
"물론이지. 전적으로 네가 결정해야지. 돌체스터 씨의 사무관이 바클리와 상의할 수 있도록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만 잊지 마."
"그럴게. 형, 이 일이 이렇게 달라지게 되어서 내가 무척 놀라고 있다는 걸 형한테 꼭 말하고 싶어."
"그래?"
"마음을 바꾸는 게 형답지 않은 행동이란 거 형도 인정해야 해. 특히 이런 종류의 일에서는 더욱 그렇지. 한번 내린 결정을 바꾸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잖아."
"나도 나이가 들면서 원숙해지는 모양이지."
"사과하는 것도 형다운 일이 아닌데."
이피지니아 덕분에 또 다른 규칙을 어긴 것이다.
"잘 알고 있어."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음을 바꾼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어?"
"곰곰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졌었는데 내가 잘못했다고 느끼게 된 거야."
베넷이 그를 가까이에서 쳐다보았다.
"다른 일은 어때?"
"무슨 다른 일?"
"형의 승낙 없이 결혼할 경우 내 상속권을 박탈한다고 협박했을 뿐 아니라 형 자신도 결혼할 의사가 있다고 줄리아나가 말하던 대."
베넷이 의아한 듯이 머리를 기우뚱거렸다.
"그것도 그냥 해본 소리였어?"
"아니."
베넷이 웃었다.
"그 말 들으니 기분 좋은데."
"그래?"
"물론이지. 이젠 형이 재혼할 때가 됐다고 내가 계속 말했었잖아. 형이 계속 지금과 같은 생활을 한다면 형 자신이 곧 자신이 만든 자동 태엽 인형처럼 돼버릴 거라고 경고했었지."
"그런 결말은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
"그래?"
베넷은 그에게 탐색의 눈길을 보냈다.
"그 여자가 누구야?"
"아직 공식적인 발표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여기에는 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좀 있거든."
"그래, 알아."
베넷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내 결혼 문제에도 그렇게 힘든 일이 많으니, 형의 입장에서는 오죽할 지 상상이 돼. 어쨌든 작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생각해야 하니까."
"그래."
"하지만 난 신뢰해도 좋아, 형. 난 형의 동생이니까."
베넷은 싱글싱글 웃었다.
"첨리 양이야?"
"아니."
"혹시 엘리자베스 앤더슨인가?"
"아니."
"그럼 누굴까?"
베넷은 손가락으로 맨틀을 톡톡 쳤다.
"알겠다, 핸더슨의 딸이야. 그 여자 이름이 뭐더라, 샤롯테?"
"이피지니아 브라이트와 결혼하려는 거야."
베넷의 입이 떡 벌어졌다.
"형은 정말 악마로군."
마르크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지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마. 지금으로서는 비밀로 해야 해."
베넷은 입을 두어 번 열었다 닫았다 했다.
"제기랄, 형. 브라이트 부인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진지한 거야?"
"진지해."
"그 여자는 형의 정부야, 세상에."
"그 여자는 내가 결혼하려고 하는 숙녀야. 그런 모욕적인 말을 참지 않겠다고 말해 두었어."
"하지만 형은 백작이야."
베넷은 손으로 맨틀을 쳤다.
"브라이트 부인 같은 여자와 만나는 것하고, 그녀와 결혼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야."
"그녀와 결혼하면 안 되는 이유를 한 가지만 대봐."
마르크스가 따졌다.
"한가지라고? 수십 개도 댈 수 있어. 형 같은 위치에 있는 남자는 나이 든 여자가 아니라 젊은 숙녀와 결혼해야 해. 좋은 가문 출신으로 말이야. 금방 학교를 마친 사람이고 흠이 없어야 하지. 물론 손상되지 않아야 하고. 형의 신부는 악명 높은 미망인이 아니라 품행이 단정한 순진한 여성, 아주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처녀여야 해."
"이피지니아 브라이트의 나이는 내게 꼭 맞아."
마르크스는 팔꿈치를 의자 팔걸이에 걸치고는 손가락을 세웠다.
"그녀는 좋은 가문 출신이야. 품행도 단정하고. 내 말에 반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하고 결투할 생각을 해야 할걸."
"망할, 마르크스. 그렇게 할 수는 없어."
"내가 네 결혼을 반대했던 것처럼 내 결혼에 대한 네 반대도 마찬가지로 화나는 일이야."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다른 문제야."
"아니, 그렇지 않아."
"맙소사, 그 여자는 형을 홀렸어."
"그렇게 생각하니?"
마르크스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난 마법을 한 번도 믿어 본적이 없어."
베넷은 분노로 얼굴이 붉어졌다.
"내 두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어."
"보는 것이 믿는 것이지.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아, 그것이 과학적인 조사의 핵심이지. 이제 너도 결혼하려는 내 결심을 봤으니 믿어야 해. 그리고 당분간 이 문제는 비밀로 해줘."
"형은 미쳤어. 형은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았어. 형은 작위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지녔다고. 열정이 형의 행동을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돼."
마르크스는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 볼래? 낭만적인 시인인 내 동생이 열정에 등을 돌리라고 충고하다니."
베넷의 입이 굳어졌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잖아."
"그래, 알아. 넌 내가 감정을 무시하고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 행동하길 원하는 거지. 그 말은 바로 줄리아나 돌체스터에게 이성을 잃지 말라고 네게 한 내 말과 똑같이 들리는구나."
"줄리아나와의 관계는 완전히 다른 거야."
"아니, 그렇지 않아."
마르크스는 강하게 말했다.
"내가 공식적인 발표를 하기 전까지 이 이야기를 퍼뜨리지 않도록 명심해야 해."
"그런 문제는 신경 쓰지 마."
베넷이 사납게 말했다.
"형과 브라이트 부인과의 결혼에 대해 떠벌리고 다니면서 형과 나 자신을 모욕하고 싶지는 않아."
"고맙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남들과 상의하는 건 물론이고 생각하는 것조차 너무 끔찍한 일이야."
베넷은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형이 청첩장을 보내는 일 따위를 급하게 서두르기 전에 이성을 되찾길 바라."
"내가 너라면 잠자코 있겠어."
"망할, 지긋지긋하네."
베넷은 문을 확 잡아 당기고는 어깨 너머로 뒤돌아보았다.
"그 여자가 형의 머리를 어떻게 했나 봐. 그래서 그럴 거야. 너무 늦기 전에 이 이상한 열병에서 회복되기를 바랄 뿐이야."
"내가 곧 결혼하지 않으면 자동인형이 될 거라고 걱정해 준 사람이 바로 너야."
"브라이트 부인은 형의 아내로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절대 아니야."
베넷은 발을 세게 구르며 나가더니 문을 꽝 하고 닫았다. 마르크스는 잠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술이 있는 곳으로 가서 브랜디를 한잔 더 따르고는 창문가로 갔다. 그는 해냈다고 생각했다. 이피지니아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그러면서 자신의 몇몇 규칙들을 어겼다. 절대 설명하지 않기. 절대 과거를 말하지 않기. 결정을 바꾸거나 목표에서 물러서지 않기.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많은 규칙을 어겼다. 아마 베넷이 옳을지도 모른다. 이피지니아는 그의 머리에 일종의 열병을 불어넣은 것 같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자동인형처럼 되어 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