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ⅩⅨ. 팔렘방 전투

ⅩⅨ. 팔렘방 전투

 

권총과 수류탄만으로 무장하고 공격하는 일본 낙하산병

인도네시아 최대 유전지대인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 유전과 보르네오 섬(카리만탄 섬) 바리크파판 유전 지대는 세계 유수의 유전지대로서 그 연간 생산량이 800만 톤으로서 1939년 당시 일본의 연간 석유 소비량 500만 톤을 훨씬 상회했다. 석유 때문에 태평양 전쟁을 도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본의 입장에서 이들 유전지대는 반드시 점령하여야 했다. 싱가포르의 영국군이 항복한 1942년 2월 15일, 일본의 침공 부대는 당시 네덜란드령 수마트라 섬 팔렘방 유전지대로 공격해 들어갔다.

 

팔렘방(Palembang) 공수 작전의 배경

수마트라섬의 팔렘방 시

인구 108,200명(1941년 집계)인 팔렘방은 수마트라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서 큰 유전이 있었다. 이곳의 원유는 경질유로서 아주 품질이 좋았고 이곳에서 생산된 휘발유는 일본군이 점령 후 일본 항공 부대에서 필요로 하는 연료의 78 %를 공급했다. 현대식 정유시설까지 갖춘 팔렘방의 유전지대는 일본군의 인도네시아 침공의 최대 중요 공략 목표였다. 이 점령 작전에서 태평양 전투 최초의 공수 작전이 감행되었다.

 

일본군의 낙하산 부대 투입 결정

일본군이 공수 작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독일의 1940년 5월 벨기에 침공과 두 달 뒤 노르웨이 침공 시에 공수부대가 대활약을 한 것을 알게 된 뒤부터다. 1940년 12월 초 일본은 하마마쓰의 육군 비행 학교 내에 정진 연습부(挺進演習剖)를 설치하고 육군 제 1 정진단부터 시작해서 낙하산 부대의 조직에 들어갔다(비슷한 시기에 일본 해군 육전대에서도 요코스카 기지에서 낙하산부대의 조직에 착수한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낙하산 부대를 투입할 기회를 노리던 일본군은 드디어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에 낙하산 부대를 투입하기로 한다.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의 기습적인 맹공에 철수를 거듭하던 연합국 측은 일본이 탐내는 보물 창고들인 수마트라 유전지대 뿐만 아니라 보르네오(카리만탄)와 셀레베스(현재 술라바야시)정유 시설은 물론 유정(油井)도 파괴하고 떠났다.

일본은 보물 창고가 손에 넣기도 전에 파괴되는 것을 그냥 좌시할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야만적인 위협을 수차례 했다. 만약에 네덜란드인들이 유정에 방화하거나 정유 시설이 파괴되는 경우 지역에서 잡은 모든 유럽인들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는 경고였다. 이 협박의 경고는 일본군이 보르네오 유전지대를 공격할 때 최초로 발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네오 바리크파판 유전의 네덜란드 민간 기술자들은 정유 시설들을 폭파해버렸다.

남 수마트라를 침공한 일본이 노리던 최초 점령 목표는 팔렘방 시 외곽의 팡카란밴탕 비행장이었다(발음이 복잡해서 영국인들은 이 비행장을 P1이라는 약칭으로 불렀다). 일본군은 정유 시설뿐만 아니라 이 비행장도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비행장을 손에 넣게 되면 북부 수마트라와 자바 섬 점령 작전을 위한 보급이나 출격을 위한 중요한 기지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비행장이 있던 팔렘방에서 수마일 떨어지지 않은 프라드조에 다국적 석유 기업 로얄 더치 셀이 세운 큰 정유 시설이 있었다. 팔렘방, 프라드조에 있는 유전지대와 정유공장 시설을 연합국이 파괴하기 전에 일본군이 점령하기 위해서 낙하산 부대에 의한 기습작전이 필요했던 것이다.1)

일본군 낙하산 부대(위), 작전 출동 - 수송기에 탑승하는 일본군 낙하산 병(아래)

 

연합군의 수마트라 방어 상태

한편 팔렘방을 방어하던 네덜란드 군의 작전 관점으로 보면 팔렘방과 비행장의 성공적 방어의 키는 무시 강에서 적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해안에 상륙한 일본군은 이 강을 건너야만 일본군이 목표로 하는 유전시설이나 비행장, 팔렘방 시가지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병력과 화력이 모두 약한 네덜란드 군은 해변에서 일본군을 격멸을 시도하는 것은 헛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륙하는 일본군은 일본 해군의 강력한 포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팔렘방을 방어하는 L. N. W 보겔레상(L. N. W. Vogelesang)중령 휘하의 네덜란드군 병력은 2,000명 규모였다. 그 병력의 편성과 장비는 외견상 일본 공수 부대를 방어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P1 비행장에는 1개 대대가 주둔했었고 랜드스트롬 1개 대대와 8문의 75mm 고정포가 팔렘방 시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 병력에 더해서 두 량의 장갑차가 P1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었고 3 량의 장갑차가 팔렘방 인근의 다른 비행장인 프라보에모에리히(P2 비행장이라 불렸다)비행장을 지키고 있었다. 중요한 정유시설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중화기 중대가 진지를 만들고 경비하고 있었다.

팔렘방 지역을 방어하는 군대가 육군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지원 차 파견된 네덜란드 해군도 있었다. LF 귀토 중령이 함장인 기뢰 부설함 프로 파트리아와 P-38과 P-40 두 척의 초계정이 무시 강을 오르내리며 순찰을 하고 있었다. 팔렘방 지역에 영국 공군이 파견한 대공포 병들도 있었다. 영국 대공포 병들은 6문의 3.7인치 대공포와 6문의 40mm 보포스 대공포를 양 비행장에 배치해 놓고 있었고 4문의 3.7인치 포와 4문의 40mm 보포스 대공포들을 정유공장 주변에 배치했다. 이들 대공포에서 소용 될 여분의 대공포탄을 수송하던 선박이 팔렘방으로 오는 도중에 격침되었기 때문에 대공포들은 포탄을 극도로 아껴 써야 했다.

팔렘방을 제외한 수마트라 섬 여러 곳에는 6개의 민병대대가 있었고 다수의 랜드스트롬 중대가 있었다. 이들 부대들은 주로 중부와 북부의 수마트라 섬에 있었는데 가용 수송력이 전혀 없어서 팔렘방이나 남 수마트라 방어를 위해서 이동 집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국군 항공 방어부대

영국 허리케인기

일본군 낙하산 부대를 격퇴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은 공군력에 의한 요격이었다. 팔렘방 지역에는 네덜란드 공군이 없었다. 일본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1942년 1월, 영국은 225 폭격기 비행단을 팔렘방에 급파하였다. 이 폭격기 비행단은 영국군과 호주군의 공군기들이 혼성 편성된 것이었다. 이 비행단에 배속된 많은 항공기들이 중동과 이집트에서 이동해왔다.

장거리를 비행하는 동안 거의 모든 비행대대가 항공기들을 상실하였다. 폭격단이 장비한 항공기는 대부분 영국제 브렌하임과 미제 허드슨 폭격기들이었다.

영국은 북아프리카 전장에서 구식이 된 폭격기들을 극동으로 보냈다. 이 폭격기들은 영국이 독일과 싸우고 있던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이미 신형 독일 전투기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는 구식으로 평가받고 있던 폭격기들이었다. 원래는 싱가포르로 파견할 예정이었으나 급속히 나빠지는 말라야 전역 때문에 이 방면 투입을 포기하고 수마트라로 그 최종 목적지가 변경되었다.

영국과 호주 공군의 허드슨 폭격기

수마트라에 전개한 폭격기들은 내습하는 일본 해군 함대 정찰을 위해서 자주 출격했었다. 이런 출격에서도 항공기가 기관 고장이나 일본기에게 격추 되는 사례가 많아서 폭격 비행단의 폭격기들은 그 숫자가 많이 소모 된 상태였다. 일본이 팔렘방을 침공할 때 출격 가능한 비행단의 폭격기들은 소수였다. 침공 당일 호주 공군 비행대대와 영국 비행대대가 보유한 폭격기는 35기였었고 브렌하임 폭격기는 40기였다.

226 영국 전투 비행단은 2월 초에 추가로 팔렘방에 전개를 완료했었다. 이 비행단 역시 영국군과 호주공군, 뉴질랜드 공군기들의 혼성 편성으로서 일부는 말라야 작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살아남은 공군의 전투기들이었다. 이 허리케인 전투기들은 수마트라 근해에까지 온 영국 항모 인도미타블에서 출격하였다.

2월 중순 7기의 허리케인 전투기들이 치리리탄에서 날아왔지만 수마트라 파견 허리케인들은 계속되는 일본기 공습에 요격 출격에서 다수를 상실하여 일본군이 침공할 때는 단지 15기만이 남아 있었다.

이들 연합국 측의 공군기들은 일본군의 수송선을 격침하여 일본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었으나 2월 14일 일본 수송선단을 폭격하러 나섰던 폭격기 9기가 일본의 신형 제로 전투기에게 격추되는 참사를 입기도 하였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영국 공군이었지만 일본 낙하산 부대를 요격 섬멸하기에는 너무 소수의 부대였다.

 

일본 낙하산 부대의 투입

연합군의 대공 방어력이 취약한 상태 있을 때 일본군의 공수 공격이 감행되었다. 여기에 동원한 낙하산 부대는 일본 육군 제1 정진단(挺進團)이었다. 단장은 구메 세이치(久米精一) 대좌였다. 제1 정진단에는 정진 제 1연대와 제 2연대 두 개 부대가 있었는데 정진 제 1연대는 1월 3일 승선했던 아카미스마루(明光丸)의 적재군수품에서 자연 발화가 일어나 선박 전소로 그대로 침몰했다. 대원들은 다행히 호위하던 구축함에 구조 되었지만 병기와 군수품 등은 모두 잃어 버려 공정 강하는 남은 정진 제 2연대2)(連隊)329명이 실시하게 되었다.

 

비행장 공수 공격 - 일본군 수송기들을 오인한 연합군

일본군 공수 작전은 1942년 2월 14일에 개시되었다. 공수 기습을 당한 연합국측의 기록부터 먼저 들여다보면 영국 공군 84대대 소속 15기의 허리케인들이 수마트라에 상륙한 일본군 제 38사단을 공격하는 임무를 마치고 귀환 하던 중 P1 비행장 상공에서 아주 이상한 상황과 마주쳤다. 허리케인 조종사들이 착륙 모드에 들어가던 중 반대편 방향에서 접근해오는 34기의 미제 록히드 L-14기들 편대들과 뒤섞이며 스쳐 지나가 버렸다. 이 낯선 비행기들은 일본이 미국 록히드사의 수송기들을 라이센스 생산한 일본 육군 항공대 소속 로식(ロ式) 수송기들이었다. 이 로식 수송기의 여러 부분을 개수한 것이 1식 수송기로서 외관으로 구별하기가 힘들고 명칭은 혼동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로식(ロ式-1식)수송기(위), 록히드 엘렉트라 여객기 - 1식 수송기의 오리지널 형(아래)

착륙을 준비하던 영국 조종사들 대다수가 이들 일본 수송기가 미국제 수송기 아니면 폭격기로 착각했다. 미국 록히드사의 L-14는 엘렉트라라고 불리는 여객 또는 수송기로서 이것을 군용으로 개조한 것이 유명한 허드슨 폭격기다. 허드슨 폭격기는 태평양 전쟁 초기에 영국군이나 호주 군이 다수를 사용하였었기 때문에 영국 조종사들이 혼동한 것은 당연했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수송기들은 착륙을 준비 중인 허리케인 기들의 반대 방향에서 비행장 상공으로 들어오면서 낙하산 부대를 비행장에 강하시켰다. 일본 육군 98전대의 97식 폭격기(ki-21) 18기가 수송기들과 동반 비행하면서 공수 낙하한 낙하산병들의 보급품을 낙하산 투하했다.

일본 97식 폭격기(위), 100식 수송기(아래)

이 수송기들을 말라야 반도로부터 호위해온 편대는 유명한 격추왕인 가토(加藤建夫)중좌가 지휘하는 제 64전대와 비행 제 59전대로서 신형인 1식 하야부사 전투기들로 모두 편성되어 있었다.

다수의 1식 하야부사(ki 43) 전투기들이 일본 수송기들을 호위 비행하며 영국 전투기들과 스쳤지만 이들 일본 전투기들은 원래 수송기 호위의 기본 목표에 충실하라는 지시를 받았는지 영국 폭격대에 한 눈을 팔지 않고 수송기 편대와 같이 사라져 버렸다. 영국기들이 비행장 상공에서 조우한 일본의 낙하산 부대는 일본군이 점령한 말라야 반도의 비행장에서 이륙한 제 1정진대 제 1파를 탑승한 정진 비행전대의 100식 수송기(ki 56)들과 로(ロ)식 수송기 1.2.3 중대들이었다.

 

1. 팔렘방을 확보하라

        

수송기 탑승 직전. 위생병으로 보이는 낙하산병

 

매연이 방해한 사전 탐지

일본의 공수 침투는 완전한 기습이었다. 태평양 전쟁 이래 수마트라 북부에 배치된 영국 공군과 미 해군의 PBY카타리나 비행정이 수마트라 근해에 집중적인 초계 비행을 했었고, 해안 요소요소에 대공 감시 초소와 요원들이 배치되었는데도, 대규모 편대에다가 속도가 느리고 저공비행을 하던 일본 수송기들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은 연합국 측에 불행이었다. 이것은 북쪽 보르네오 지역과 셀레베스 지역의 각 유정 파괴를 목적으로 방화한 불길과 함락 직전의 싱가포르 유류 저장소의 화재에서 발생한 검은 연기들이 수마트라 일대의 넓은 지역을 담요처럼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공격당하고 있는 팔렘방 - 사방에 화재가 일고 있다

일본군 수송기 부대는 항로가 연기 때문에 비행 시계는 불량하였지만 예정대로 팔렘방 P1비행장 상공에 도착하여 병력을 강하시켰다. 시각은 11시 30분이었다. 일본 낙하산병이 최초 공수되고 2시간이 지나 2식 수송기들이 더 나타나 P1 비행장 서쪽 지역에 60명의 추가 낙하산병을 투하했다. 일본 낙하산병들이 이쪽 늪지대를 장악한 후 정진단장 구메(久米) 대좌가 탄 단장기가 강행 불시착하여 그와 작은 37mm 속사포 한 문을 내려놓았다.

낙하산 부대는 강하 직후 집결하는 부대 순으로 즉시 비행장을 강습하였다. 선두 낙하산 부대의 대다수 대원이 기상천외한 공격을 하였다. 비행 제98전대의 97식 중폭격기들이 별도로 투하한 무기와 탄약을 미처 회수하지 못하고 단지 휴대한 권총과 수류탄으로 전투를 벌였다. 불완전하지만 틈을 내주지 않는 기선 제압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이들 낙하산병들은 모두 94식 권총과 99식 총을 반으로 접을 수 있는 2식 소총, 그리고 일부는 일본군이 말라야 작전에서 노획했던 600정의 미국제 톰슨 기관단총 중 일부를 지급 받았다.

뜻밖의 일본 낙하산 부대 출현에 항공대 본부는 급히 비행장을 폐쇄하고 멀리 출격하였던 허리케인 전투기들을 P-1 비행장 근처로 긴급 이동하여 일본 수송기나 강하한 낙하산병들을 섬멸하도록 명령하였다(착륙한 허리케인들은 연료와 기총탄을 모두 소진한 상태였다).

2식 소총

 

연합군 항공대의 탈출

P-1 비행장에 방금 착륙한 항공기 승무원들은 일본 낙하산병들이 천천히 강하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했다. 그들은 항공기에 뛰어올라 즉각 이륙했다. 또한 지상 요원 중에 희망자가 있으면 탑승시켜 주었다.

아직 귀환하지 못한 항공기에는 일본군이 공격하고 있지 않은 P2 비행장으로 가도록 긴급 지시를 했다. 명령을 받은 P1 비행장 상공으로 달려온 허리케인 한 기는 멀어지는 일본군 수송기 편대를 추격하여 한 기를 추격해서 격추시켰다. P1 비행장으로 돌아 온 허리케인기들은 비행장 주변 지상에 강하한 일본군 낙하산병들을 기총소사 하였다.

한편 3기의 허리케인들이 무선 통신에 오류가 있어 폐쇄한 P1 비행장에 잘못 내렸다가 상황을 알아채고 급히 이륙하여 P2 비행장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이 착륙했을 때는 연료 탱크가 거의 비어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대 혼란 속에서 바타비아 기지에서 팔렘방 기지로 이동을 명령받은 488 영국 전투기 대대 소속 9기의 허리케인기들은 영문도 모르고 P1 기지에 도착했다. 이들 전투기들은 이동 목적이었기에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연료도 다 떨어진 상태였다. 가토 부대의 하야부사들이 이중 2기를 격추하였다. 4기는 P1 비행장에 강행 착륙을 하고 필사적인 속도로 재급유를 받은 뒤에 이륙하여 P2 비행장으로 도피했다. 두 기는 P2 비행장을 찾지 못해 정글에 불시착을 했다.

 

P1 비행장의 점령

강하중인 일본 낙하산병

일본 낙하산병의 낙하산과 장비 배낭

P1 비행장에서 영국, 네덜란드 연합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하며 버텨냈다. 조종사들은 낮과 밤사이에 모두 피신하고 비행장은 단 60명 정도의 무장 병력이 방어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전투가 개시되자 팔렘방 시내에서 장갑차 부대의 엄호아래 500명의 증원부대가 P1 비행장으로 달려왔다.

전투는 치열하였다. 새로 증파된 뉴질랜드 공군 조종사들 중 일부는 육상전투 훈련도 받지 못했고 제대로 무장도 못했으나 육상 전투에 휘말려야 했다. 밤이 되자 연합군은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였다. 비행장을 포기하여야 했다. 비행 불능 상태의 전투기는 모두 파괴해버리고 비행장에 보유 중이던 44갤런 드럼의 항공유는 모두 모아 불을 지르고 후퇴를 하였다. 일본 낙하산 부대는 밤 21시경 P1비행장을 확보하였다.

다음날 15일 오후 2시경 P1 비행장 상공에서 허리케인 전투기 부대가 당했던 것보다 더 황당한 일이 팔렘방의 다른 비행장인 P2 비행장 부근 상공에서 발생하였다.

P2 기지로 귀환하던 영국 공군 211 비행대대의 브렌하임 폭격기들은 기지 인근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사의 정유 공장 상공에서 강하하는 일본군 낙하산병들 사이를 뚫고 비행하여야 했다. 이날 일본군 정진단의 추가 90명이 프라드조라는 지역에 자리 잡은 정유공장 서쪽에 공수되었던 것이다. 이곳은 팔렘방 시가지 남측이었으며 습지였다.

일본 낙하산병들은 프라더조 정유 공장을 가동 가능상태로 점령하려고 시도했다. 정유공장 점령 임무를 받은 일본 낙하산 병들은 일단 점령을 해서 임무는 달성했다. 그러나 소수인 낙하산병들은 점령한 정유공장들을 장시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네덜란드 랜드스톰 부대와 P2 비행장의 대공포대 장병들로 급조한 부대가 반격하여 큰 피해를 무릅쓰고 정유공장을 되찾았다. 일본군은 정유공장 요소요소에 설치한 폭파장치는 모두 제거하였지만 네덜란드군의 반격에 밀림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화재가 여러 곳으로 번지고 있는 팔렘방

연합군 측이 계획하였던 정유 시설 완전 파괴는 일본군의 발빠른 방해로 실패했다. 그러나 연합군 측은 유정에서 퍼내어 저장하고 있던 원유들의 소각작업을 성공하여 정유 공장 일대가 검은 연기로 뒤 덮여 버렸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일본군은 P2 비행장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 비행장은 공습이나 낙하산병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일본의 공중 강습을 당해 위기에 몰린 네덜란드령 동인도(오늘의 인도네시아) 지역에 파견된 연합군의 항공 세력은 이제 좁은 P2 비행장에 모두 집결하였다. 35기의 브렌하임 폭격기, 29기의 허드슨 폭격기, 그리고 22기의 허리케인 전투기들이었다. 항공기들은 대부분 P1에서 P2로 기지 이동을 한 영국 공군 266전투 비행단 소속들이었다.

 

일본 낙하산 부대의 팔렘방 시 공격

일본 낙하산 부대의 1파와 2파는 공수 기습 목표인 P1 비행장과 정유 공장의 폭파 저지를 완료한 뒤에 합동으로 팔렘방 시가지를 공격하였다. 일본 낙하산병들은 P1 비행장과 팔렘방을 잇는 도로 중간에 도로 차단 시설을 설치하고 통제하였다. 이 차단물을 두고 영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여러 번 전투가 있으면서 주인이 바뀌었다.

일본군이 행한 도로 차단에 최초로 당한 차량은 영국군의 유류 수송차량이었다. 이 차는 매복 공격을 받고 불이 붙어서 밤까지 타올랐다. 나중에 이 지역을 통과했었던 한 영국 공군 사병은 불타버린 유조차 주변에 영국군, 네덜란드 군, 그리고 일본군의 전사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네덜란드 군

항공기들은 대부분 P1에서 P2로 기지 이동을 한 영국 공군 266전투 비행단 소속들이었다. 영국 공군 253 비행단의 한 정찰기가 팔렘방에 날아가 정찰 비행을 하였다. 팔렘방에서는 형형색색의 수많은 차량들이 P2 비행장을 쪽을 향하여 탈출하고 있었다. 팔렘방은 기름 연기가 시 전체의 상공을 덮고 있었다. 그날 밤, 몇 기의 허드슨기가 자바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비행장을 떠났다.

 

일본군의 강상(江上) 작전

다음 날 새벽 일본군의 공수 기습에 이어 아주 기발한 상륙정들의 기습이 뒤따랐다. 이들의 기습은 시내 중심을 흐르는 무시강 하류 100km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팔렘방 해안까지 다가온 수송선에서 발진한 발동정에 승선한 일본군들이 일대의 강들인 무시 강, 사랑 강, 테랑강 등을 거슬러서 공격해왔다.

팔렘방 시는 무시강 상류 100키로 지점에 있었다. 이강은 길이 750 km의 길이에 팔렘방의 석유를 수송하는 유조선이 왕래할 수 있도록 준설이 되어 있어 수심이 6.5m 정도가 되었다. 일본군은 이 지리 정보를 미리 알고 대담하게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습작전을 시도한 것이었다. 세계 전사에서 드문 상륙정들의 강상(江上) 작전이었다. 이미 승패는 결론이 나는 것 같았지만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국 공군기들이 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발동정들과 해안에 접근한 모선(母船)들인 수송선들을 폭격했다. 영국 공군의 허리케인 전투기 한 기가 일본 수송선인 오타와마루(Ottawa丸)를 공격하여 격침했다. 허리케인 전투기들은 강을 따라 수색하다가 일본군 병사들로 만재한 발동정을 발견하고 기총소사를 했다.

적 상륙 부대 공격임무를 끝낸 허리케인들은 명령대로 모두 자바 섬으로 날아갔다. P2 비행장의 비행기들 중에 전투에 투입을 할 수는 없지만 비행은 가능한 몇 기도 자바로 날아갔다. 2월 15일 P2 비행장의 모든 가동 가능 전투기들은 기지를 떠나 자바로 떠났다.

팔렘방 시를 가로 질러 흐르는 무시강

 

공수 기습으로 마비 된 연합군 지휘체계

일본군이 당시로서는 첨단 공격 전술인 공수 작전은 소수의 병력만 전개했던 터라 비행장 점령과 정유공장 폭파 저지 외에 팔렘방 지역 방어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고 평가해야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일본군의 낙하산 강습은 방어하던 연합군 측에 경악과 충격을 주어 전투 지휘 체계가 흔들리게 만들었다.

연합군의 장병들은 상황이 어떻게 될지 크게 불안해했고 지휘관들은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상황적으로 더 방어 하기는 힘들다고 판단을 내린 영국, 네덜란드, 연합국측은 1941년 2월 16일 월요일 저녁부터 남 수마트라 지역에서 철수를 개시하였고 일본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팔렘방 유전지대를 손에 넣었다.

1942년 2월 18일 일본군 제 38사단 주력이 도착하여 팔렘방 시 주변을 수색하고 팔렘방을 확고히 점령하였다. 투하한 일본군 정진단 소속 낙하산병 329명중 전사 39명 중상자 37명 경상자 11명의 손해를 기록하였다. 일본 대본영은 2월 15일 낙하산 부대가 팔렘방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낙하산 부대의 강습은 대대적으로 선전되었고 낙하산 부대원들은 ‘하늘의 신병(空の 神兵)’으로서 영화와 군가 등에서 영웅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최초와 최후의 공수작전

여기에 숨겨진 사실이 있었다. 사실 일본의 대대적인 선전 내용과는 달리 태평양 전쟁 중에 최초로 공수 작전을 감행한 작전은 이미 1달 전에 실행되었었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해군의 공수작전이었다.

앞에서 소개했지만 일본 해군에도 공정 부대가 있었다. 1942년 1월 12일 해군 공정부대인 요코스카 제 특별 육전대 소속 낙하산병 334명이 지휘관 호리우치 도요아키(堀?豊秋)중좌의 지휘로 세레베스 섬 메나도 시 근교 랑고앙 비행장에 낙하하여 점령했었던 작전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육군의 간청으로 이를 발표하지 않았었다. 서로 사이가 나빴지만 협조관계가 필요했었던 육군의 체면을 살려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팔렘방 작전 성공 뒤에 일본 낙하산 부대는 보병 대대 규모를 유지하며 이후 몇 개의 작전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다른 일본군의 부대처럼 낙하산 부대는 파국의 종점을 맞아야 했다. 1945년 5월 24일 의열 공정단원이란 호칭을 붙인 일본 공수부대 120명이 12기의 97식 폭격기에 탑승하고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군의 북 비행장을 공수했다.

오키나와 비행장을 불시착 강습한 일본 낙하산병의 97식 폭격기

오직 한 기의 97식 폭격기만이 불시착에 성공했다. 북 비행장 기습은 밤 열시에 이루어졌다. 8명의 낙하산병들이 기체에서 뛰쳐나와 기관단총과 수류탄들로 미군 2명을 사살하고 비행장에 계류 중인 각종 미군기 26기를 파괴하고 연료 저장고를 방화했지만 모두 사살되었다. 이로써 일본군의 공정부대는 세계의 전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1) 비행장을 공수 기습하기로 한 작전은 1940년 7월 독일이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시의 비행장을 공격 점령한 공수 작전을 본보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2) 여기서 말하는 연대(連隊)는 한국 육군의 연대(聯隊)와 그 규모와 성격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