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실 – 배롱나무
강우현 – 백일홍
고순옥 – 유혹하는 백일홍
고영서 – 목백일홍, 그 꽃잎을
고옥선 – 백일홍
고재종 – 백련사 백일홍나무를 대함
곽정숙 – 백일홍
곽효환 – 배롱나무 꽃그늘 아래 피다
권복례 – 배롱나무
기영석 – 배롱나무
김갑숙 – 병산 서원 배롱나무
김경숙 – 백일홍 사연
김경철 – 흰 배롱나무꽃
김경희 – 백일홍 그 여자
김국현 – 백일홍
김기덕 – 백일홍
김남열 – 백일홍
김두현 – 백일홍
김명수 – 백일홍
김민지 – 백일홍
김선균 – 백일홍꽃
김승기 – 배롱나무의 가을
김승호 – 백일홍 피어
김연순 – 백일홍
김연식 – 목백일홍
김예진 – 배롱나무
김용수 – 배롱나무꽃
김월한 – 백일홍의 순결
김이진 – 백일홍
김인숙 – 백일홍
김인숙 – 백일홍 앞에서
김정섭 – 백일홍의 그리움
김종수 – 백련사 배롱나무
김종제 – 배롱나무는 껍질이 없다
김진아 – 백일홍
김진주 – 배롱나무 아래에서
김태백 – 배롱나무꽃
김현서 – 백일홍
김혜경 – 백일홍 그녀
김희경 – 백일홍 나무에게 물어보렴
남길순 – 백일홍이 피어 있는 연못
남원자 – 백일홍
노태웅 – 백일홍
도종환 – 목백일홍
도종환 – 배롱나무
도지현 – 배롱나무의 사유(思惟)
도현영 – 백일홍
류인순 – 배롱나무꽃
목필균 – 백일홍
목필균 – 백일홍 – 꽃말은 무엇일까
문성해 – 백일홍
문재학 – 백일홍
박인걸 – 배롱나무꽃
박인걸 – 백일홍
박재영 – 백일홍
박종영 – 배롱나무 웃음
반기룡 – 배롱나무꽃
방경희 – 백일홍과 프로포즈
배애희 – 백일홍
배창호 – 배롱나무, 백일의 언약도
배창호 – 백일홍 연가
배창호 – 백일홍 필 때이면
백승운 – 백일홍 사랑
복효근 – 자비
서정주 – 백일홍 필 무렵
서지월 – 붉은 백일홍꽃나무의 노래
손병흥 – 백일홍 배롱나무
손순비 – 목백일홍
송정숙 – 백일홍
송종규 – 배롱나무 아래
송종규 – 우울한 백일홍
송찬호 – 백일홍
신성호 – 백일홍
신성호 – 백일홍꽃이 피는 날에
신순말 – 목백일홍
신후남 – 백일홍
심선애 – 배롱나무꽃
심은석 – 백일홍나무 아래에서의 고백
심재휘 – 백일홍
배롱나무
강대실
추월산 관광단지 초입 내리막길
조심조심히 따라 내려가면
우측 길턱에 교통 표지판 안고 있는
화사한 나무 한 그루,
지난 어느 여름날 정처 없는 길 가다
우연히 만나 길동무하고부터는
영락없는 성자라 생각한 배롱나무
오늘도 묵묵히 길목 지켜 서 있다
줄곧 서행을 당부하더니
어느새 앞질러 왔는지
보리암에서 뵌 적 있는 부처님같이
가부좌 틀고 앉아 간절히
미소 공양으로 무사를 빌어 주는
언제고 마음밭에 기르고 싶은 나무.
백일홍
강우현
더운 줄도 모르고 어린이집 화단에서
앞니가 벌어진 채 웃는 아이들
활짝 문 열어젖힌 교실로
땀이 송글송글 맺혀 뛰어갈 것 같은
아직 흰 런닝 같은 순수가 허기진 적 없어
너는 아빠고 나는 엄마라고
사금파리에 모래로 지은 고봉 밥 담아 낼 듯
햇님반 앞에 섰는 너희는
맞벌이하는 엄마가 몰래 떨어뜨린
눈물로 키운 희망들
유혹하는 백일홍
고순옥
애살스레 차려입은 웃음 띤 얼굴
여인이 복을 안고
간들거리며 청순한 눈빛
선율 그어 조각조각 펼쳐졌다
겹겹이 입은 옷 무겁지도 않은
줄기의 강한 당돌함마저
더위도 잊은 채
보일 듯 말 듯 정갈하게 불꽃 피운다
샛노란 꽃술 유혹하는 향기 너머
촉촉한 입술로 간질이는 나비의 그린나래
숨을 멎게 하는 꽃잎 각시가 애성다
기억 담은 싱그러운 가온 길에서
따스하게 녹여주는 꽃들의 낭만을
또다시 꺼내드는 한 해의 인연이 되어
물들어가는 홍조 띤 깃발 흔들고 있다
목백일홍, 그 꽃잎을
고영서
얼마를 견뎌야
저 타오름의 경지에 닿나
이녁 몸피는 화상투성이 맨들맨들 맨발로 올라 낙상하기 좋아라 발등에 손가락이라도 닿을라치면 간지러운 발작에 하르르 각혈하는 그대가 보인다 어느 먼 옛날 목숨 같은 사랑을 떠나보내고 이 꽃그늘 아래 목 놓아 운 적 있었나 기침의 흔적들로 낭자한 연못 바람도 뜨거운 삼복에 피고 지기를
아득해라, 한 움큼의 꽃잎을 쓸어
가슴에 한 사람을 들여앉히는 일은
백일홍
고옥선
돌담벽에 기대어
붉은 입술 그리고 또 그리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나뭇잎 사이
햇빛 한 조각 한 조각 쓰라림에도
그대 없는 외로운 별밤에도
일편단심 그 마음
한결같았다
목마름의 나날을 견디고
숙명으로 삭히며
님 향해 꽃 피운 백일동안
내 사랑이여...
소슬바람에 한 잎 한 잎 떨어집니다
백련사 백일홍나무를 대함
고재종
스님이 입고 있는 입성은
잿물빛도 서연해서 소연해서 사그러지겠더군.
스님이 바라보는 백일홍은
분홍빛도 화사해서 화사해서 자지러지겠더군.
그날사 말고 비는 내리고 내려선
구구구 멧비둘기 불러 무위적정(無爲寂靜)을 허물고
비 맞고도 환하디환한 백일홍,
나는야 차마 차 한 모금 못 넘기겠더군.
백일홍
곽정숙
그대 잊었을까 두려워
주름치마 그대로 입고 있다
그대는 말이 없고
삽십 년 세월만
홀로 왔다
창문에 턱 고이고
마주하던 그대여
그 사랑
지금도 유효한데
어디 있나요
그대가 지은 법당
목탁 소리 여전하고
연꽃이 피고 지는데
그 마당 가운데 서 있다
배롱나무 꽃그늘 아래 피다
곽효환
여름의 끝에 붉게 매달린
남도 배롱나무 꽃엔 저항이 숨어 있다
녹음 가득한 숲에서
펑ㅡ 펑ㅡ , 꽃망울 터뜨리며
피고 지고 다시 피고 지기를 일백 일
마침내
여름 숲을 빨갛게 물들이는
선홍색 꽃들의 저항
지난여름 타클라마칸 너머
오래된 황토빛 고원 마을에서 만난
목총을 든 신강-위구르 소녀의
표정 없는 얼굴
그 잔영이 오랫동안 떠 있다
지리한 혹은 잔혹한 긴긴 여름을 딛고
비바람 불어도
뻥튀기처럼 붉게 더 붉게 세 번을 터뜨리는
꽃그늘 전설 피었다
배롱나무
권복례
붉은색 배롱나무
한가득이다
봄이 지나고
나무들 초록으로 가던 날
배롱나무
꽃봉오리를 터트렸다
나무들 속에서
피어난
배롱나무 꽃 앞에서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배롱나무
기영석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입교당 뒤뜰에
화사한 선홍빛 꽃을 피웠습니다
백 일 동안 꽃송이를 피우며
길 떠난 유생이 그리운지
여린 꽃잎은 빗방울에
축 처진 채로 애처롭습니다
4백 년의 긴 세월은 짧은지
어찌 한 자리를 지키시며
수많은 선비를 길러내셨습니까
매끄러운 줄기에서 꽃을 피워
계절을 참고 기다리는
청렴과 부귀를 임께 배워 갑니다
병산서원 배롱나무
김갑숙
천년을 살아 내면
저리 고운 결 품을 수 있나
갈수록 옹이지고 거친 것이 순리일진대
그대 곁에 서면 모든 걸 비워낸 맑디 맑은
영혼만 오롯해서
멈칫 머뭇거리게 된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비웃듯 나붓이 핏빛으로 붉디붉어
의연히 건너는 백일 여정
작열하는 태양도 무색하게
문득 든 바람이 내는 길이 서늘하다
만대루를 돌아 기웃대는
세월의 발걸음도 잡아 세우는
천년을 함께할 아름다운 인연
지금 병산서원에서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늙지 않는 고운 몸매의
배롱나무가 여전히 붉디붉은 사랑을
꽃피우고 있다
백일홍 사연 - 명옥헌에서
김경숙
가늠할 수 없는 세월
굽을 대로 굽은 저 뼈마디
버팀목에 힘겹게 의지한 채
굴절된 한 생애 고고히 이어간다
무슨 사연 그리 많았는지
회자되는 갖가지 이름
그루터기에 반듯하게 새기고
연못에 드리운 오랜 그림자
늦여름 한낮의 고요 불살라
백 일 동안 치성으로 보시한다
온몸을 감싸던 오욕칠정
몇 번이고 미련 없이 벗어던져야
저리 환한 웃음 띄울 수 있을까
멈추지 않는 붉은 음계
꾸벅잠을 쫓는다
흰 배롱나무꽃
김경철
맑은 하늘을 보며
시작한 하루
멀리서 보이는
먹구름이
시간이 갈수록
맑은 하늘을 덮는다
가늘게 내리던
비는
가을을 알려주는지
오르기만 하던
여름의 열기
혼을 낸다
더운 여름에
피어나기 시작한 너
종일 내리는 비에
행여나 떨어지려는지
비가 그치면
꼬마랑 같이 갈게
널 보러
백일홍 그 여자
김경희
순수함 잊지 말아요
백일동안 변해갈 꽃
봤습니다
밤길 멈춥니다
숨은 그림 찾아가세요
행운의 클로버
무뚝뚝한 바람
몸을 채워주던 그 여자
다음날까지
꽃길로만 가보자
등잔 밑 어두운 곳에
있습니다
백일홍
김국현
집나간 서방 기다리는
여인의 한 맺힌 이야기
목놓아 들려준다.
눈보라 폭풍우
걸어온 세월 눈시울 적시며
걸어온 백 일 위한 여정을
화장산 줄기로 내려와
화려한 화장으로
입가에 한 풀잎 머금고
붉은 미소 파문이 바람에 날려
삼복 더위
햇살 마저 발길 멈춘다.
연지 찍고 분 바르고
푸른 꿈 안고
웃음 짓던 당신이
치마저고리 차려입고 시집오던 날
얼굴 붉히고 수줍어 하며
품에 안기던 고운 당신이었습니다.
백일홍
김기덕
백일홍 속삭이는
바람 속에 누군가 숨어 있습니다
이쁜 여름의 가슴을 열고
가을로 뛰여 가는 맥박
이름없는 시골의 울타리 아래서
잠자리 한 마리
나비 한 마리
저희들만 아는 내용으로
주고받고 합니다
무슨 애기를 했는지
잠자리가 처음으로 웃었고
나비도 처음으로 웃었습니다
먼 고추밭, 고추도 웃었답니다
백일홍
김남열
하루를 살아도 곳곳하게
백일과 같이 살 수 있다면
하루를 만나는 사람이라도
백일의 만남처럼 만날 수 있다면
우연히 만나서 인연이 되고
그 인연이 필연이 되게 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 속에서
참사랑을 할 수가 있다면
하지만, 인간사 모든 것이
마음 되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니
살아있는 생명은 언젠가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림을 말하는
초연(超然)한 듯 모양이 아름답고
지조(志操) 있듯 모습이 고결한 꽃이여
백일홍
김두현
태풍이 불어오는 이른 아침에
분홍 꽃잎 촉촉이 비에 적시어
머리에 샴푸하고 향기 날리며
욕실 나서는 여인 같은 꽃이여
그리 네가 예쁜 줄 알았다지만
가련한 모습마저 사랑스럽네
백일동안 정성으로 꽃을 피워
비바람 속에서도 곱디곱다네
뜨거운 여름 되면 피어나서
선선한 가을에 지는 꽃이여
한 계절 짧게 피어지더라도
예쁘게 백일을 살아가시게
백일홍
김명수
인순이와 저는요
친구였어요
난리통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리통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둘이서 고아원에 같이 살았어요
인순이와 저는요
형제였어요
파주땅 기지촌에 함께 오던 날
먹물로 점을 찍어
형제 맺었지요
월남에서 전속 온 흑인병사 따라
인순이가 미국으로 떠나던 아침
기지촌 뒷마당에 꽃이 피었지요
대마초 피우고 함께 울던 날
독한 술 퍼마시고 쓰러지던 날
포주엄마 눈을 피해 뒷마당에 가면
언제나 백일홍이 피어 있었지요
월요일 아침 죠가 가면
등치 큰 미군이 잠자고 가면
구역질나는 속 가라앉히려
뒷마당 꽃밭으로 찾아갔지요
그 아이 내 동무 나를 못잊어
미국땅 어디선가 울고 있을 때
꽃잎은 빨갛게 피어 있겠지요
우리 뺨 아직 붉어 서러울 때도
꽃잎은 빨갛게 피어 있겠지요
백일홍
김민지
해마다 7월 이때쯤
2층 주방 옆에 뚫린 창을 열면
홍조 띤 얼굴로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는 붉은 꽃이 있다
맨 가지에 푸름만 무성하여
붉은색을 내어 주기 전까지는
눈길도 채 주지 않았다가
잎사귀 사이 가지 군데군데에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하루가 멀다고
창부터 열어젖힌다
여린 꽃잎이 백일을 버틴 게 아니란다
열흘을 열 번이나 피고 지고 피고 지어
백일동안 피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란다
그저 주어진 기쁨 중에 한가지….
백일홍꽃
김선균
칠월 어느 저녁
변색한 검은 빛으로
백일홍꽃 한 송이 질 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훈풍에 눈을 뜨니
자줏빛 농염한 불꽃
어제 그 자리 옆에서 벌써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놀란 가슴 달래볼까 어루만지면
까무러칠 듯 간드러지는 교태
처음은 아닌 듯한 예민함으로
한껏 메마른 가슴에 불을 지핀다.
달뜨는 저녁 너는
분홍빛 주름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고
기다렸던 바람결에 드러난 하얀 속살
몇 날을 구워 반짝거리며 환생한
매끈한 백자의 살결
그것은 은밀한 유혹이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미(紫微),
진홍빛 꽃 덩이를 뚝뚝 떨구는
애타게 그리운 밤이 들면
댓잎 위에 하얀 모시 얇게 깔고
찬 이슬 내리는 밤이 들 때까지
너를 끌어안으련다.
배롱나무의 가을
김승기
겹겹으로 받은 사랑
하늘로 땅으로 다시 돌려줘야지
봄부터 몸치장을 빛내준 푸르른 잎이여
기쁨으로 여름을 출렁이게 해준 꽃들이여
참 행복했었네
화려했던 옷가지들 다 벗어 주고
햇살 아래 드러나는 매끄러운 백골만으로도
풍성한 가을이 될 거야
아름다웠던 시간들은
뼛속 마디마다 갈무리해 두고
꿈꾸는 잠으로 겨울을 맞이해야지
이제부터 즐기는 외로움
그 외로움 뒤에 새로운 봄이 있어서
오히려 겨울이 따뜻할 거야
배롱나무의 가을은 이렇게 행복하다
백일홍 피어
김승호
갖가지 색상의 백일홍이
미소 짓고 있어요
마치 내 찬구들의 개성 다른
모습과 같아요
그러나 서로의 특색과
조화로움이 있기에
다르다는 것이 장점이지요
오늘의 내 모습은
어떤 색깔일까요
향긋한 꽃내음으로
서로의 색에 맞게
활짝 피어 보아요
꽃다지 둥우리처럼요.
백일홍
김연순
내 뺨이 점점 붉어져요
가슴도 붉어져요
오전 10시에 이마도 붉어져요
손끝에서 바람이 빠져나가요
자꾸만 자꾸만 몽롱해져요
꽃받침도 물관도 놓쳐버렸나 봐요
한낮에도 꿈속인 듯 붉게
당신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려요
그때마다 내 몸에선 열꽃이 피어요
때로는 깊은 절, 새벽, 기도처럼 차가워져요
오월은 짧지도 길지도 않아서 시간이
꽃잎처럼 호르르호르르 자꾸만 날아다녀요
동박새도 날아다니고 무당벌레도 날아다녀요
멀리 유채밭에선 한 눈도 팔지 않고 나비들이 집을 짓고
낮은 언덕에선 날지도 못하고 나는 발목만 부은 채 속을 태워요
5월, 눈부신 햇빛 속에서
꽃잎마다 바람은 까닭도 없이 붉어져 두근거리고
나도 부은 발등을 어루만지며
접었던 꽃잎의 매듭을 풀어요
목백일홍
김연식
너의 심장 소리
그리고 떨림까지 내게
다가 옴은 아직도 너를
사랑함이다
들마루 누워 하늘 바라보며
모든 것 포기하고픈, 마음이지만
배롱나무 떨림이
너의 심장 소리 같아서
나는 주저앉는다
그대 미소 그대 향기
기껏해야 백년이겠지만
당신과 사랑
추억하려
당신 스쳐온 바람까지
맛보려 하네.
배롱나무
김예진
해를 줄줄 흘리는
불같은 날에
내 아는 꽃이 쟁강쟁강 울었다
울음을 삼키듯
몇 개의 꽃이 지워질 때까지
꽃은 무뚝뚝한 나무로 서 있다
혼자 견뎌야 하는
꽃의 그늘로 가지를 뻗는다
목이 휘어질 듯
금세 녹아내리는 바람
잊어야한다는 걸
아는 꽃은 집을 버렸다
조금은 숨듯이
바람을 돌려세운
나무가 꽃을 갈아 끼우고 있다
배롱나무꽃
김용수
소낙비처럼 퍼붓는
오뉴월 햇발에도
부처님처럼 가부좌하고
첫사랑 물 드린 듯
가녀린 웃음 머금은 채
천년 숨결 운문사 송림 길을
고이고이 산보하는
비구니 같은 청순한 꽃이여
백일홍의 순결
김월한
달빛이 고요히 땅 위에 내려앉을 때
사랑을 품고, 순결을 닮은
한 송이 붉은 꽃 백일홍이 피었다
바람은 그 꽃을 지나치며 속삭이고
시간은 백 번의 아침을 건너
그리움은 피고, 또 피어난다
그대와 마주한 그날의 따뜻한 눈빛
그 모든 순간이 꽃잎 되어
내 마음에 아직도 붉게 피어나기를
영원은 없다고 사람들은 말해도
진심은 시들지 않음을 백일홍은
잊지 못할 사랑의 기억으로 피워낸다 ..
백일홍
김이진
누구를
기다림일까
가슴을
흠뻑 적시는
비의 유혹에도
넌 흔들리지 않았지
밤새
울어대던
바람의 유혹에도
넌 흔들리지 않았지
사랑의 숨결
붉은 입술의 유혹에도
넌 흔들리지 않았지
오늘밤
향기바람과
작은 언덕에 걸터앉아
뜨거운 그리움을 토해 내겠지.
백일홍
김인숙
1
그대 내게 꽃으로 오시니
하루가 너무나 짧아
아쉬움 가득 고인
행복한 눈물이 납니다
흠뻑 내려주신 사랑을
가슴 터지도록 안으면
시간이 이대로
멈추어 주었으면 합니다
그대가 심어준
처음 백일의 사랑
마지막 사랑이 되어
백 년을 품고
이 땅에 살아갈 이유가 된
나의 임이여!
그립고 그리운 눈물
꽃잎 되어 무수히 쏟아지니
뜨거운 꽃물결 가슴속 강물 되어
흐르고 또 흐릅니다
2
고향 강가에는 꽃잎 붉은
곱디고운 당신이 피어납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기다림이
날마다 깊어가는 그리운 몸살로
넘실거리는 강물에
뜨거운 심장을 띄워 보내면
강물은 온통 꽃물로 흘러갑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뒤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포근한 웃음으로
손 흔들어 주던 당신이
풍성한 행복으로 피어나고
나는 당신이 주신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행복한 꽃이 되었습니다
백일홍 앞에서
김인숙
백일동안 피어있다는
백일홍 사랑 앞에서
나는 이 글을 쓴다
사람아
백 년 살기도 힘든 사람아
백일을 사랑하기도 힘든 사람아
함께 꺄르르 꽃피운
그 사랑은 하루아침에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풀잎에 이슬보다
짧게 왔다 사라지는 사람아
꽃도 백일은 피어있고
거북이도 백 년은 넘게 산다는데
이 땅에서 백 년도 못 살고
백일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아
보고 싶단 말도 하지 않기로 하자
애써 잊으려 힘든 술잔 기울이며
긴 밤을 비틀비틀
차디찬 이슬로 채우지 말자
지금 이대로 이 자리에서
너와 나의 길을 아끼며 걸어가자
백 년도 백일도 못 할 그 사랑에
아파하지 말자 가슴 치지 말자.
백일홍의 그리움
김정섭
보슬비 머금은 배롱나무 고개 떨구고
떨어져 누운 꽃잎 마주하며
매미 허물 벗은 슬픈 곡조가 가슴을 울린다
붉은 꽃잎 그리움 토해내고
갈색 껍질 하얀 무늬 박음질하여
잃어버린 사랑 찾아 날아본다
허리춤에 잦은 바람
낮은 곳에서 오는 부푼 꽃봉오리
임을 향한 마음은 고택 돌담을 넘고 있다
기다림의 시간 호반에 올려놓고
하염없이 내리는 빗속
그대와의 달곰한 추억 하나 그려간다.
백련사 배롱나무
김종구
매미 피울음 쏟아지는 땡볕아래
선홍빛 가슴 활짝 열어젖히고
꽃 염주 돌리고 있다
아연 화안해진 법당 안 부처님만
색즉시공 공즉시색
마음 하나 흔들리지 않고
하안거 중인 스님들의 온몸에 불이 난 땀띠인가
화두 깨우치는 밝음인가
아님 처녀 동박새 참다 참다 이제사 뱉은
처연한 목울음인가 생각하다
그냥 황홀경에 빠져 있을 때
비구니 한 분 자던 바람 일으켜놓고 지나가자
배롱나무 냄새가 난다
그때, 배롱나무에선
화엄경 소리 들리고
속살 냄새 확
시인이 뒤집어썼는데
게슴츠레하게 보고 있던 낮달
뜬금없이
바짓가랑이 내린 구강포 에
철푸덕 철푸덕
제 몸 식히고 있다
배롱나무는 껍질이 없다
김종제
고운사 절간이
무덤처럼 고요하다
배롱나무를 언제 심어놓았는지
처마끝에 매달아놓은 풍경을 닮았다
바람에 꽃끼리 부딪히며
범종처럼 댕댕, 공명을 울리고 있다
배롱나무는 껍질이 없다고
발끝으로 다가가 보니
맨몸처럼 빛난다
눈을 감고 손으로 더듬는데
상처 많은 뼈마디가 잡힌다
생에 오래 단련된 것들은
껍질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라고
오래 묵은 산사나 무덤가에
배롱나무 심어놓은 까닭을 알겠다
뼈만 남은 저 나무를
엊그제 보고 온 것 같은데
이제는 쓰러져 와불이 된 사내
몸에 좋다고 껍질은 누가 뜯어가고
살도 없이
통뼈로 누워있는 당신
배롱나무 심어놓은 사람 죽으면
붉은 꽃 대신에
삼년이나 흰꽃이 핀다고
대웅전의 누가 넌지시 일러주었으니
나도 당신 옆에서
고즈녁한 배롱나무로 서 있겠다고
옷을 벗는 것이다
백일홍
김진아
오죽헌 앞마당
곧게 피어나는 백일홍
그 앞에 서 있는 이이선생
마음은 접었다지만
어머니와 행복했던 시절 떠올리며
입지(立志)를 세운다
웬지 모를 공허한 마음
오로지 일념(一念)으로
벼슬 공부에만 전념하고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서로 뜻은 다르지만
같은 학문을 하는 벗을 만나
백일홍의 붉은 빛으로 열정을 불태운다
늘 그 자리에 피어나는 꽃잎처럼
하루를 살아왔다고
배롱나무 아래에서
김진주
성하의 계절 배롱나무
꽃이 피어 벌 나비 벙실거립니다.
긴여를 몽글몽글 꽃송이 속의 꽃
곱으로 피고 지는 화연.
하루하루 지나고 또 지나
해를 품고 미소 짖고 달을 먹고
눈물 짖는 석 달 열흘 백일홍
들숨 날숨 피고 지는
아품의 눈물을 그 누가 알리오.
백마 탄 왕자님은
세상에 있긴 하나?
실크로드에서 황금 궤짝은
나올 수 없지
신데렐라 유리구두는 절대
호박 마차로 변하지 않아요.
백마 탄 왕자. 황금 궤짝.
호박 마차도 좋지만
그러나 소박한 소원 하나 빌어봅니다.
고즈넉한 카페에
마주 앉아 커피 한잔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듯 즐거워할 수 있는 곱진 사이로.
당신의 왼손 내 오른손
깍지를 끼고 나란히 석양의
은은한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싶습니다,
배롱나무꽃
김태백
1
임 오시나 보다
수다스러운 내임
무더운 뙤약볕 속에도
우리 사랑의 인연 맺어준
자줏빛 고운 햇살 품고
임은 오시나 보다
무거운 바람 짊어지고 오는
우리임은
백 일 동안
내 영혼 속에 아름다운 꽃 심어놓고
잠시 쉬었다 가겠구나
임이 오시나 보다
수다스럽고 폭염 기승부리는 날에는
우리 고운 임은
아롱 아롱 예쁜 미소 지으며
내 곁에
백 일 동안 아름답게 피었다가
지는 저녁노을 따라
져버린다 해도
우리임은 오시나 보다
하늘이 맺어준
운명 같은 우리 인연 백 일 동안
내 곁에 쉬었다 가고 싶어
우리임은 오시는구나
2
단풍처럼 붉게 물들어 가는
배롱나무 어여쁜 꽃 속에
꿀벌 술래 잡이 놀이하듯
꽃향기에 취하여 날아들고
내 뜨거운 마음도
아름다운 배롱나무
꽃잎 속에
내 영혼까지 잠들고 싶다
오색 무늬 호랑나비
제비나비도 곱게 핀
배롱나무꽃을 떠나지 못하고
날개 춤추고 있으니
내 마음과 영혼 다 받쳐
사랑의 꽃노래 부르고 싶다
지나가던 하늬바람도
배롱나무꽃향기에 취해
머물다 가니
내 뜨거운 마음도
꽃 속에 잠들고 싶다
백일홍
김현서
나는 노란 꽃 자주 꽃 하얀 꽃
지기 위해 태어난 꽃, 아니아니
햇살을 받으면 아름다운 겹꽃으로 피어나
햇살보다 먼저 도착한 환삼덩굴이 내 발목을 잡아도
나는 노란 꽃 자주 꽃 하얀 꽃
초여름부터 피기 시작하는 꽃
꽃밭에 모여든 햇빛이 모두 돌아가고
저녁이 어두운 노래를 부르며 꿈을 접어도
나는 백 일 동안 피는 꽃
백 일이 지나면 열매로 남는 꽃
백일홍 그녀
김혜경
나는 지나치지만
너는 머물러 있다
나는 시간을 타고 다니지만
너는 시간을
꼭꼭 씹어서 소화를 시킨다
너의 그늘에 서서
너의 이력을 밑둥부터 읽어 본다
맨살의 체온은 몇 도나 될까
전화벨이 울린다
그런 것 별로 중요하지 않아
바람도
살갗이 터질 듯한 햇살도
잘 소화하면 꽃으로 피어난다는
메시지의 그녀
문득
나보다 삼 년만 더 살아 본
백일홍 닮은 언니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나란히 누워
붉은 꽃 피워낸 너의 시간을
알아내 보았으면 좋겠다.
백일홍 나무에게 물어보렴
김희경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거든
백일홍 나무에게 물어보렴
한겨울
노승의 지팡이처럼 서 있다가
봄 오는 길보다 먼저 길을 여는 나무
가지 하나하나,
이파리 하나하나에
온 마음 기울여 걸어주며
혼신 다해 생을 던져내는 나무
화무십일홍
그런 건 그의 사전엔 없어
십일이면 어떻고 백일이면 어때
백 년이면 어떻고 천년이면 어때
그를 살리고 내가 죽는다 해도 어때
살갗 다 헤지도록 해 가는 줄 모르다
꽃지고 이파리 모두 떠난 후
온전히 내어주고도 죄인인 듯이
빈 몸 홀로 속울음 삼키는 나무
관절 마디마디 바람의 얼굴
자신만 모르는 맑디 고운 빛
그 깨끗한 영혼의 침묵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거든
백일홍 나무에게 물어보렴
백일홍이 피어 있는 연못
남길순
한 여인이 물속을 걸어가고 있다
구름의 영토 끝까지 다다르고 있다
꽃무늬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뒤를 돌아보다가
반대편에 서 있는 나를 향해 사진을 찍는다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는 여인은
오백 년 전 손을 놓았던 정인
한번 문을 열고 나온 나는
연못을 돌고 돌아보았으나
그곳에
다다르지 못한다
목성의 하늘가
분홍 구름처럼 나부끼던 백일홍이
지상에서 낙화를 시작한다
세상의 안쪽에서
벌레들이 우는데
평생을 기다릴 것처럼
한 남자가 앉아 있고
오래도록 파문이 일고 있는 연못가에
여인은 오지 않는다
지평선 너머
정강이만 남은 목백일홍이 빙 둘러선다
백일홍
남원자
꽃씨 하나 심었지
사랑의 붉은 꽃씨
물주고 사랑 주고
초록색 저고리 입고
잎새에 또 그 위에 마주 보고
포개고 포개 빌딩 위에 집 짓고
잘 자라준 너를 위해
백 일 동안 기도했어
순결을 지켜달라고
어느새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여름 향기
짙어가는 계절에
빨갛게 노랗게 분홍색으로
곱게 피어나는 백일홍
너의 활짝 웃는 모습에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을 심어준 너
백일홍
노태웅
장독대 옆
빗물도 스미기 힘든
잔돌 틈새에
피어 있는 백일홍
살다가 놓쳐버린
삶의 공간 채우려
찢긴 가슴 멍울 풀고
태어나면서
떠남을 약속하고
만남부터
100일간의
찬란한 삶을 위해
붉은 욕망 가슴에 품고
계약된 삶을 살고 있다.
목백일홍
도종환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 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서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올려
목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들어 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배롱나무
도종환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루하고 먼길을 갈 때면 으레 거기 서 있었고
지치도록 걸어오고도 한 고개를 더 넘어야 할 때
고갯마루에 꽃그늘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기도 하고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길로 접어들면
건너편에서 말없이 진분홍 꽃숭어리를 떨구며
서 있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만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어
혼자 외딴섬을 찾아가던 날은
보아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듯
늘 다니던 길에 오래 전부터 피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
배롱나무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배롱나무의 사유(思惟)
도지현
부처님의 마음일까
아님, 관세음보살님의 마음일까
붉음으로 마음을 물들인 사연은
모든 중생을 사랑하겠다는
그 넓은 가슴에 포용함은 아닐까
일체 고액*을 스스로 짊어지고
반야*의 마음으로 불법을 행하고
보리심*으로
스스로를 위한 욕심이 아닌
중생들을 위해 스스로 헌신하는 마음
보리 살타*를 위해 오늘도 사유하며
사찰을 지키고 있는 붉은 배롱나무
* 일체 고액(一切 苦厄) : 모든 고뇌와 재액
* 반야(般若) : 모든 사물의 본래의 양상을 이해하고 불법의 진실된 모습을 파악하는 지성의 작용
* 보리심(菩提心) :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
* 보리 살타(菩提 薩埵) : 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사람
백일홍
도현영
여름에
잡초로 태어난
들꽃이여
한치에 밟힘도 없이
무슨 복을 타고났길래
어찌 너는
화훼가 마음을
흔들어
백일동안
고운 빛깔을 품은
공주가 된 것에
참으로 경이롭다.
배롱나무꽃
류인순
바람까지 숨죽이는
여름 숲에 들어서니
초록 세상에 저 홀로
가지마다 꽃등 매달고
수줍은 새색시 미소로
임 오실 길목에서
백일동안 피고 지고
바람결에도 간지러워
석 달 열흘
사락사락 춤사위에도
분홍빛 여린 주름
끝내 펴지 못하고
속절없이 쓰러져가는
여름날의 향기여.
백일홍
목필균
깃털 같은 씨앗 속에
진분홍 물감이 숨어 있었을까
예쁘게 꽃피우기 위한 안간힘이
얼마나 많은 숨쉬기로 걸어왔는지
줄기 끝에 머물러 오래도록 미소 짓는데
쭈글쭈글한 외할머니 가슴팍에 새겨진
엄마의 젊은 영정 사진이
저 꽃 같아서 서럽다
백일홍, 꽃말은 무엇일까
목필균
너와 나의 이야기도
아득히 돌아보니 아름다운 꽃이더라
때로는 다홍빛으로 물든 수줍음으로
때로는 진홍빛으로 손잡은 사랑으로
때로는 노란빛으로 애태운 기다림으로
전설을 낳으며 꽃은 탄생했다고
흘러간 시간을 열어보면
화석처럼 남아있는 사랑의 흔적들
지나고 보니 나였고, 너였다고
손 흔들지 않아도 가버릴 것을
손 흔들지 않아도 반겨 맞을 것을
무리 지어 피어 있는 백일홍이 있는 풍경
그리움이 물결치는 꽃향기로 다가온다
백일홍
문성해
어젯밤
어디서 잤는지
머리에
붉은 실밥이 가득하다
수박장사 리어카조차
그늘에서 쉬고 있는
한낮
지린내가 진동하는
공터에
태양을 독점한 듯
미친 여자 하나
눈부시게
서 있다
백일홍(百日紅)
문재학
염천(炎天)의 모진 시련을 극복한
열정의 화신인가.
유혹의 고운자태에
풍성한 가을향기가 녹아있네.
한 잎 한 잎 쌓아올린
심오(深奧)한 색상의 사랑 탑
단심(丹心)으로 태우는
그리움이 애달파라.
이토록 꿈으로 영글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무색케 하는
그 이름도 당당한
석 달 열흘. 백일홍
순결한 사랑 붉게 붉게
빨려드는 현란한 색상은
삶에 찌든 영혼(靈魂)을
열락(悅樂)으로 물들이네.
배롱나무꽃
박인걸
1
장맛비 쏟아지던 여름
어느 집 울타리 곁에
진분홍 곱게 핀 배롱나무 꽃
내 마음을 확 잡아끌더니
가을이 가는 아직까지
립스틱보다 짙은 빛으로
가을 남자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고 있는가.
사랑이 달아오를 때면
폭죽처럼 터져 올랐다가
기다리다 지칠 때면
시뻘겋게 멍든 가슴으로
한 조각 붉은 마음이 아니라
나머지 마음까지 다해
응당(應當)한 사람만 사랑하는
지순(至純)함이 부럽다.
예사롭게 변절되는 세상에
오로지 신의(信義)하나로
순결하고 우미(優美)한 정절에
누구나 찬사(讚辭)를 보낸다.
2
저녁노을 질 때 붉게 피어나
하늘을 물들이는 화려한 꽃이여
그 작은 꽃송이 어우러지니
형언 못 할 풍경에 마음 뺏긴다.
바람 한 점 없는 눅눅한 저녁
꽃향기 짙어 마음 흔들고
가로등보다 더 붉게 비추니
지친 하루가 되레 고맙다.
백일 핀다고 하여 백일홍이라네.
어머니 마음보다 더 끈질기게
이억이억 홍역 발진에도
한여름 딛고 일어서는 모심이여
지난해 퍼붓던 여름 장맛비에도
수줍은 입술 꽉 깨문 채
처연한 꽃잎 수줍던 모양에
내 혼을 너에게 내주었다.
뒤뜰에 핀 꽃 나만 볼 수 없어
고운 사연 적어 너에게도 보낸다.
백일홍
박인걸
1
신경에 거슬려도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시면
내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어
오래오래 앓을 거외다.
뜬소문 듣고 흔들렸나요.
못 생긴 외모에 실망했나요.
아무 변병도 듣지 않으려하니
구차한 언쟁은 피할 거외다.
한 번 피었다하면
백일을 시들지 않는 백일홍이여
실낱같은 내 희망을
네 꽃송이에 올려놓는다.
감언이설도 두렵고
싸늘한 눈빛도 이제는 역겹다.
갈 테면 얼씬도 말고 가라.
나에게는 백일홍만 있네라.
2
백일홍 곱게 핀 한여름 저녁
지나온 기억마다 네 얼굴이 떠올라
붉게 물든 꽃밭에 멈춰선 마음
사랑의 그림자 위로 조용히 발을 내디딘다.
바람에 풍겨오는 진한 꽃향기
너와 나눈 약속 아직 귓가에 맴돌고
기억의 언덕 너머로 해가 지면
그리운 얼굴이 되살아난다.
고요한 저녁 물들이는 노을
혼자 남은 마음 더욱 붉게 물들고
백일홍꽃잎마다 스며든 너의 향기
그 시절 추억이 내 마음 감싸 안는다.
눈물에 젖은 이별의 꽃밭에서
나는 여전히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하늘 가득 퍼진 노을에 젖은 그리움
사랑의 아픔은 끝끝내 지지 않는다.
백일홍이 몽땅 떨어지는 계절이 와도
너와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너의 얼굴은 영원히 피어 있으리.
3
칠월 아침은 찌푸렸어도
뜰 안의 백일홍은
환하게 웃고 서 있다.
아직도 그 먼 옛날
한 소녀를 잊지 못해
백일홍 앞에 설 때마다
나의 가슴은 붉어진다.
온종일 가슴만 조이며
고백하지 못한 사랑
한 여름 심한 가뭄처럼
가슴만 붉게 태우다
힘없이 발길을 돌렸던
애달픈 추억을 기억하는 듯
오늘은 분홍빛 입술처럼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4
정원에 노오란 백일홍 한 송이 곱다.
양궁선수 목에 걸린 금메달처럼 빛난다.
한 송이 꽃을 피우려고
작은 씨방에서부터 꿈을 키웠으리.
이른 봄 추운 하늘 아래 오돌 오돌 떨면서도
작은 이파리에 푸른 문신을 새긴
당차고 야무진 모습을 자주 보았었다.
바람이 휘몰아치던 날 몹시 흔들리고
정원사 제초기에 잡초 스러지던 날에도
잔뜩 겁을 먹고 서 있던 네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 소녀였었다.
노드리듯 퍼붓는 소나기를 흠뻑 맞고
짓궂은 들새들 잎을 쪼아댈 때도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며 꿋꿋이 서서
금 빛 꽃송이를 가슴에 품었다.
마른장마 지루했던 여름날과
바람 한 점 없는 도시 지열(地熱)에
바짝바짝 목이 타들어가도
오로지 한 마음으로 참고 견디었다.
만고(萬苦)의 시간을 등 뒤로 밀어 보내고
오늘에야 활짝 피어나니
진노랑 꽃송이에서 삶의 승리를 본다.
백일홍
박제영
당신이 들려준
우리의 후생을 기억하네
천 년을 살았다는
백일홍나무도
천 년 내내 한 꽃만
피었겠냐고
백 일 붉은 꽃 피었다
진 자리,
다른 꽃 들어서길 천 년이니
나무의 천 년이 아니라
꽃의 붉은 백 일이
아름다운 것이니
먼 훗날
당신은 배롱나무가 되어
무수히 꽃 핀들
오늘 피었던 이 붉은 꽃,
같기야 하겠냐고
백 일 붉었던 인연이
거짓말처럼 지고 말 줄은
몰랐네
그때는 정말 몰랐네
배롱나무 웃음
박종영
저토록 능숙한 흔들림으로
차진 가을바람을 불러 모은다지,
붉은 춤사위는 마냥 서툴러서
백옥의 웃음을 던지면서 치마끈 푼다지,
조상묘 다스리지 못하고 후회막급하여
무성한 벌 안 훤하게 치장한 다음,
배롱나무 두 그루 한 쌍으로 마주 보게 심고 온 지
어언 몇 세월이 지난 후에,
어엿이 자란 아들이 벌초하고 와서 전하는 말은,
"배롱나무 그것들 몸뚱어리 반질반질하게
할아버지 묘 옆에 심은 것은 하얀 꽃으로 기쁨 손짓하고,
맞은편 할머니 묘 앞에 심은 것은
붉은 입술 탐나게 새색시 웃음 짓고 있더라고"
두 쌍이 나란히 그리움 건네고 있으니
참말로 벌 안이 아담하고 좋습디다"
그 말 듣고 보니 또 한 번 늦은 성묘가 차올라
나도 붉은 꽃, 빛의 문장(文章)을 오래 기억하는 일이
조상의 은덕 기리는 일이거니,
배롱나무 꽃피워 향기 가득한 날,
초가을 선선한 바람 불면
그립도록 낯익은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터,
아버지, 어머니 묘소 찾아가서 푸른 웃음 다듬고 와야겠다.
배롱나무꽃
반기룡
개화공원에
배롱나무 꽃 흐드러지게 피어있네
화무는 십일홍이라 했거늘
무더위 속에서 석달 열흘 꽃피우는 절절함이여
처녀의 한이 서린
요염한 자태로 꽃 피우며
황홀경에 빠지게 하니
옛 혼령 뚜벅뚜벅 걸어와
한동안 유희의 시간을 내려놓을 것도 같은데
하마 후두득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세월은 어찌할 수 없나 보구려
백 일간 치성으로 만발한 꽃이여
어느덧 꽃 숭어리
툭! 떨어지며 발등을 가로지르네
* 개화공원 : 충남 보령시에 있는 공원
백일홍과 프로포즈
방경희
경주 첨성대에서
남편은 군대 가기 전
꽃보다 붉은 얼굴로
"나랑…"하며 손을 잡았지요
나는
심장이 백일홍처럼 활짝 폈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손을 뿌리쳤습니다
그 후로
남편은 백일홍만 봐도
눈동자에 그날의 내 손목 스냅이
슬로모션으로 재생된답니다
그땐 부끄러움을 밀어냈을 뿐인데
남편은 아직도
그날의 백일홍을
‘치욕의 붉은 꽃’이라 부르네요
이제 와서 말하지만,
그날 손을 뿌리친 건
갑작스러워 깜짝 놀랐였어요
하지만 지금 옆에 있잖아요
백일홍
배애희
백일을
기다리다
한 송이 꽃이 되어
절개의
곧은 정신
무덤가 피었구나
하루를
살아간대도
그대 생각 뿐이네
색색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서
오늘도
임 생각에
먼 하늘 바라보며
임 향한
애달픈 마음
꽃이 되어 피었나
배롱나무, 백일의 언약도
배창호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내는 것이란 걸,
잊은 것 같다가도 문득 예리한 통증으로
되살아난다는 걸 몰랐습니다
잊히기만 기다렸던 것은 아닌지 몰라도
바람 잔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메마른 가지의
통곡을 뒤집는 밤낮인 걸 몰랐습니다
시절을 넘나든 산화한 나날의 연속이
초하에서 시작한 입추의 그늘까지
처서에 들면서 조금은 빛바랜 꽃잎에
괜스레 눈시울을 적시게 만듭니다
마디마다 늘어놓는 서리 낀 애증은
갈래갈래 엉킨 내 안에 떨림의 뿌리로
빗금을 마구 그어 놓았으니 잘라내고 싶어도
아니 되는 고통의 슬픈 언약이 되었습니다
먹물을 가득 묻힌 겨울이 오기 전까지
허우적거리다 끝내 허공에 박힐지라도
끝없이 끝을 향해가는 그해 여름,
네 오늘처럼 선연히 피울 것입니다
백일홍 연가(戀歌)
배창호
시절을 넘나든 바람의 손짓이 오기까진
파도에 부서진 그리움의 나날이었습니다
초하에서 시작한
입추의 그렁그렁한 밀착까지
가지마다 손끝에 물들인 담채화,
반질반질한 연민을 늘어지도록 매달아
바라만 봐도 애틋한 전율이
하염없이 물안개 낀 동공에
실금을 그어 흘러내리니
억지라도 잘라내고 싶어도
아니 되는 업보의 인과가 되었습니다
지난 흑백의 그리움일랑
덤의 세월에 묻히기만 기다리라고,
이것도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첨삭의 업연(業緣)이라면
타들어 가는 심금(心琴)에도
걸림 없이 흐르는 개울물처럼
회한이 남지 않는
환한 백일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
백일홍 필 때이면
배창호
시절을 넘나든 오늘이 오기까진
산화한 나날의 연속이 삼복(三伏)의 볕에도
봉숭아 물들인 가지마다
늘어지도록 연민을 총총히도 꽃 피우니
바라만 봐도 괜스레 눈시울이 떨립니다
마디마다 늘어놓는 그렁그렁한 미소는
서리 낀 동공에 빗금을 마구 그어 놓았으니
갈래갈래 엉킨 내 안에 애증의 뿌리
억지라도 잘라내고 싶어도
아니 되는 고통의 나락이었습니다
이름 모를 흑백의 그리움일랑
세뭘에 묻히기만 기다려야 한다면
이것도 내가 품고 가져가야 할 운명이기에
타들어 가는 살갗에도 아량 곧 하지 않은
네, 여진처럼 오늘을 예지토록 피우는
그윽한 선영(線影)일 것입니다.
백일홍 사랑
백승운
당신 향한 뜨거운 사랑
잠깐만 멀어져도
보고 싶다, 그립다
백일을 하루같이
붉은 꽃잎 위에 내립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변하지 않고 영원하길
간절히 기원하는 소원
사랑 축복으로 피어나
백일이 백 년이 되고
당신만 바라보며
당신 위해 살아가는
영원히 함께하고픈
진실한 마음 위로
백일홍이 꿈을 품어
함께 손잡은 행복이
파란 하늘 위에 있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꽃길 위에 향기 가득 품어
메밀꽃 하얀 면사포처럼
하늘거립니다.
자비
복효근
큰 등 같은 연못가
배롱나무가
명부전 쪽으로도 한 가지 뻗어
저승 쪽 하늘까지 다 밝히고 나서
연못 속
잉어의 뼛속까지 염려하여
한 잎 한 잎
물 위에 뛰어드는데
그 아래 수련이 그 비밀을 다 알고는
떨어지는 배롱꽃 몇 낱을
가만 떠받쳐 주네
백일홍 필 무렵
서정주
주춧돌이 하나 녹아서
환장한 구름이 되어서
동구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지.
칠월이어서 보름남아 굶어서
백일홍이 피어서
밥상 받은 아이같이 너무 좋아서
비석 옆에 잠시 서서 웃고 있었지.
다듬잇돌도
또 하나 녹아서
동구도 떠나오는 구름이 되어서
붉은 백일홍꽃나무의 노래
서지월
저처럼 일제히 터뜨린 꽃망울도 드물라
내가 쉬지 않고 길을 걸어왔을 때
길을 돌아서 오지 않고 곧장 걸어왔을 때
스무 살의 백일홍꽃나무는 스무 살의 백일홍꽃나무로
서서 웃었고
서른 살의 백일홍꽃나무는 서른 살의 백일홍꽃나무로
앉아서 빙긋 웃었고
내 나이 마흔 살 하고도 두 살 더한 백일홍꽃나무는
마흔 살 하고도 두 살 더한 백일홍꽃나무가 되어
숨 가쁜 듯 숨 가쁜 듯 일제히 터뜨린 꽃망울이
붉은 허파꽈리 그것으로 공중에 내맡겨져
내 나이 오십에는 모자라는 표정으로 웃고 있으니
하, 이제는 붉다 못해 시퍼렇게 타들어가는 것도 같으니
아무렴, 마흔 살의 백일홍꽃나무여
그렇고 말고, 바람의 겨드랑이 간지럼 벗어난
뙤약볕에 몸 맡기고 있어라
거기 자물쇠 하나쯤 채우고 있어라
백일홍 배롱나무
손병흥
여름철에 홍색 백색 홍자색 꽃들을 매단 채
백 일 동안 핀다는 일명 백일홍 나무 배롱나무
국화과의 백일홍꽃과 혼동 피하기 위해서
목백일홍으로 불러 구분을 하는 배기롱나무
줄기가 매끄러워 원숭이미끄럼나무로 불리는
정원수 관상용 약용에 쓰이는 낙엽 활엽 소교목
꽃은 먹기도 하고 나무는 세공용 재료로도 쓰는
탕으로 하면 부인과 순환계 질환 다스린다는 효능
빨리 성장하고 양지바른 곳 좋아하는 생태처럼
원뿔 모양의 꽃대 뻗어 꽃봉오리를 피워대는 품종
목백일홍
손순미
목백일홍 긴 담벼락을 걸어가는 중이다
한여름에도 붉은 목도리 풀지 못하고 걸어오는 중이다
꽃의 생가는 담벼락이다
꽃은 백일몽(百日夢)과 백일몽(白日夢) 사이를 오가는 중이다
붉은 꽃그늘 낭자한 세월이 간다
바람 밖으로 꽃이 울고
담장 밑에 꽃이 벗어 놓은 옷이 쌓인다
제 몸 속의 것을 다 벗어놓았다
죽음이 저렇게 어두워서야
꽃이 자신의 임종을 데리고 가는 길
담벼락은 저 꽃상여를 메고 어디로 가나
꽃을 보내고 담벼락은 허전한 목덜미를 자꾸 만지게 된다
지금은 의자의 계절
죽음도 잠시 쉬어가는 계절
담벼락 아래 긴 의자 골똘히 앉아 있다
이 골목의 죽음을 관리해온 의자가 모처럼 쉬고 있다
백일홍
송정숙
1
아침 안개 사이로
그리움의 깊이로 성숙한
백일홍 붉은 빛
내 그리움을 네가 안다면
누구를 사랑해도 좋아
이슬 머금고 하던 말
지는 해도 슬픔을 위하여
더 붉게 퍼져 간다
슬픈 사랑 이야기를
누가 전하랴
그저 내 피어나는 꽃잎을
스치는 발길이 잠시 머물러
물어주길 바랄뿐
이제 어둠이
눈을 가려 보이질 않는데
몸 속에 스며드는 이 아픔
분명 나의 아픔은 아니거늘
아마도 베어나는 땀방울은
너의 눈물이겠지
2
백일기도 들여 꽃이 되니
삼베 모시 옷자락 나빌레라
따가운 햇볕 어루만져주니
색색 가지 색으로 아름다워
나, 태어나서는 이리 귀할진대
나를 버려야 할 세상은 서러움
둥근 해 떠서 산 넘고 바다 건너
지는 해도 아름다워라
백일홍 피고 지며 또 피네
여름에는 바람이 더욱 시원하나니
배롱나무 아래
송종규
전화가 안 되니까 엽서를 쓰기로 했네 우체국이 없으니까 사람을 보내기로 했네 사람들이 바쁘니까 오토바이를 보내야 겠네
사람들은 열두 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네 오토바이가 없으니까 달아나는 시간을 잡을 수가 없다네
KT와 백화점은 닫혀 있고 우체국은 허물어지고 많은 생각들이 나뭇잎처럼 흩날린다네 아무도 돌아오지 않으니까 아무도 호명할 수 없네
자 이제 KT를 세우고 우체국과 은행을 건설하자
호수의 오리는 차디 찬 수면 위에 생을 잠시 정박해 두었다네 주유소가 없으니까 달아나는 트럭을 잡을 수가 없네
약속은 파기되고 채무자는 달아나고 눈 덩이처럼 연체료가 불어날 것이네
자 이제 상수도와 정오를 옹립하고 편의점을 건설하자
망치와 드릴과 포크레인을 찾았는데 드라이버를 구할 수가 없네
부서진 글씨들이 공중으로 날아가고 한낮의 주전자는 끓고 있는데
백척간두의 고지가 지척에 있다 해도 당신은 결국 돌아오지 않을 것이네
나는 지금 천 년 전 배롱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우울한 백일홍
송종규
다녀갔다는 암호인지 몇 방울 붉은 물기가 내 창에 묻어 있다
미래를 믿지 않는 것은 백일홍의 일
너를 기억하는 대기의 머리카락, 너의 만개를 질투하던 밤 12시
네 어깨를 부풀리던 그날의 편서풍
미래는 이미 부서졌다고 믿는 것은 백일홍의 일
어느 아득한 날에 첫눈이나 나비처럼 불현듯 네가 온다면, 그 어느
아득한 날에 분홍분홍 엽서가 밤의 창문에 당도한다면
누군가 느리게 걸어가고 있고 누군가 오래 된 창문 앞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우울한 문장 아래 좀처럼 꽃 피지 않는 백일홍 그늘 아래
한 무리의 사제들과 검은 옷을 껴입은 나뭇잎들이 연애처럼
어둠 속에 파묻힌다
슬프고 아름답고 긴 문장이 강을 이루는
창밖은, 사막
백일홍
송찬호
담벼락 아래 옹기종기 모여 노는 대가리 부스럼투성이 백일홍들
공기놀이하는 백일홍 물구나무서기하는 백일홍
양식 구하러 간 엄마 언제 오나 까치발 하여 멀리 동구 밖 내다보는 백일홍
놀다 허기지면 우물가에 내려가 한 바가지씩 물배를 채우고
오뉴월 땡볕 똥글똥글 궁굴려 가는 쇠똥구리 백일홍
다섯 살 막내 졸졸 따라다니며 누런 코 핥아 먹는 강아지 백일홍
이담에 크면 우리 여기다 커다란 꽃밭을 만들자
그다음 여기 꽃밭에다 뽐뿌를 박고
촐랑촐랑 여기서 퍼올린 물로
분홍물 다홍물 장사를 하자
그때 골목을 들어오시던 어머니,
일평생 그날 단 하루 신식 여성이셨던 우리 어머니
그날 친정 갔다 얻어 입고 온 허름한 비로드 양장 치마저고리
그때 처녀 적 수줍음처럼 어머니 가슴에서 반짝이던 빠알간 백일홍 브로치!
백일홍
신성호
길고 긴 장맛비가 무던히도
귀찮게 하던 시절이
저 만큼 물러 서고
긴 세월 간직했던 예쁜 홍일꽃
땡볕 여름날을 잘도 견디더니
큰 길가에 길게서서
오가는 이들에게 손짓하며
예쁜 짓에 귀여운 짓까지 하니
나 또한 너를 만나 기쁨이 두배구나
하루만 피었다가 지는 꽃들도
아름답고 예쁘기도 하지만
석 달 열흘 싫다 않고 피어있는 너는
일색의 양귀비를 비할까 만은
너의 속 깊음에 고개 숙이며
지금의 네 모습을 고이 간직해
북풍한설 몰아치는
동지섣달 긴긴 겨울날에도
내 님인 양 곁에 두고
살고 지고 싶구나
백일홍(배롱나무) 꽃이 피는 날에
신성호
백일홍꽃이 피려고 간밤에
저리도 바람 불고 비가 내렸나
간다는 귀뜀도 하나 없이
소나기가 지나간 뒷끝에
하늘의 검은 구름 멀리 떠나고
햇살만 잠시 잠깐 내리쬐던 그 시간에
길가에 늘어 선 배롱나무꽃들이
징그렇게 선명하고 예쁘게 피어나
나의 시선에 마취 향기 쏘아 놓고
저리도 좋아하며 나를 반긴다
백일을 피었다가 진다는 너를
좋아하고 사랑함이 당연하구나
나 또한 네가 좋아 찾아왔지만
너도 나를 싫어 아니함이 너무 좋구나
목백일홍
신순말
슬픔도 지극하면 꽃이 핀다대
고된 세월 살아낸 말씀 되뇌면
세상살이꽃 슬픔 아닌 게 없다는 뜻
견디는 일은 석 달 열흘이라고
꽃 아닌 일 없는 세상이더라고
피우기 전에도 석 달 열흘
피우면서도 석 달 열흘
세상에 꽃 아닌 것 없다시니
꽃 지우고 나서도 살아가는 석 달 열흘
백일홍
신후남
붉고 화사하여
여름의 태양이
너를 닮았다
들녘, 볕에 뜨겁게
익어가는
벼 여무는 소리를 향해
웃는다
너의 예쁜 입술들이
배롱나무꽃
심선애
가을을 알리는 비가 추적이는 거리
습기 머금은 나무 사이로
연분홍 배롱나무꽃이 함초롬히 피었다
푸른 잎이 발그레하게
이별을 준비하는 계절
소담한 꽃송아리가
젖은 하늘을 밝게 비춘다
분홍 손 흔드는 고운 얼굴이
따뜻한 마음 건네주는
멋진 친구 명옥이를 만난 듯
바라만 봐도 미소가 어린다
가을이 깊어지고
소슬바람에 꽃잎이 시들해도
빛나는 명옥(明玉)처럼 밝고 따뜻한 마음
소중히 접어 간직하련다
백일홍나무 아래에서의 고백
심은섭
해당되는 것에 ○표 하시오
순종이다 흰 그림자이고 새벽에 배달된 과즙이다 흔들려야 정오를 기억하는 시계추다 수평선에 걸터앉아 인간의 비극의 기원이 어딘지를 찾는 0시의 태양이다 겨울 동안 찬바람에 살찐 얼음일 뿐이다 기침하는 사랑방으로 보낸 장문의 편지이고, 터진 슬픔을 꿰매는 상처의 비늘이다
막다른 골목의 계단을 쌓는 미장공이다 어느 날엔 살아 있는 사육신이었고, 꽃을 피우는 일이 혁명이 아니라고 귀를 잘라버린 봄이다 고독한 오후를 되새김질하는 낭만의 양 떼, 단추처럼 붙어사는 나는 백일홍나무 아래에서 하늘을 쳐다본다
어느 곳 하나 ○표 할 데 없다
백일홍
심재휘
1
병원에서 준 소염제를 열흘 먹었더니
깊은 잠을 자는 며칠이 있었다
어딘가의 염증과 부스럼을 이제는 내 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도록 창문에 비가 스미는 하오
사람들은 내 얼굴이 좋아졌다고 했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얼굴이 서로를 다독거리고
늘어진 옷에 몸을 함께 들이민 가을과 저녁이
서로를 어루만진다
창밖의 백일홍은 겨드랑이마다 새 가지를 밀어내
여름 내내 꽃을 피웠는데도
지지도 못하고 마르며
여태 피어 비를 맞고 있다
석 달 열흘은 옹이 몇 개쯤 지닐 만한 순간
그리고 다가올 폭설의 날들은
내다볼 멀리도 없이 제 몸을 핥는 꽃에게서
차례 없이 시든 잎들에게서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2
창가의 화분에 꽃을 피운
백일홍 한 송이가 저물고 있다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면
유리창에 어깨를 한없이 기댄 꽃
석 달 열흘 기한으로 붉은 꽃
가을볕에 말라가며 이제
제 빛을 물리고 있다
나는 쓰고 있던 긴 편지를 버린다
소리 없이 마르는 꽃 한 송이로
그대를 묻는 나의 안부여
오늘은 시계 소리가 창 안에서 유독 맑고
서성이는 그림자 하나 산그늘에 들듯
겹겹으로 외롭던 목숨 하나가
끝끝내 희미해지고 있다
지지도 못하고 서서 마르는 백일홍 저는
되돌려 받을 길 없는 마음들을
지금도 멀리 떠나보내고 있는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