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 개화
안도현 – 국화꽃 그늘과 쥐수염붓
안도현 – 꽃
안정옥 – 꽃다운
안효희 – 마른 꽃
양성우 - 꽃 꺾어 그대 앞에
엄재국 – 꽃밥
오 늘 – 무서운 꽃
오문식 – 겨울꽃
오민석 - 꽃피는 봄날에 더 참담하게 만나자
오민석 – 치자꽃 지는 저녁
오민석 – 푸른 꽃의 시간
오석만 - 꽃망울
오정방 – 당신이 꽃밭에 있을 때
용혜원 - 봄꽃 피는 날
우대식 – 꽃의 북쪽
유금옥 – 냉이꽃
유병록 – 검은 꽃
유순애 – 호박꽃 엄마
유승도 – 꽃과 바위
유안진 - 꽃으로 다시 살아
유안진 - 꽃으로 잎으로
유안진 - 멀리 있기
유종인 - 팝콘
유치환 – 꽃
유치환 – 치자꽃
유 하 – 꽃이라 불렀는데, 똥이 될 때
유한지 - 들꽃 언덕에서
유희선 – 꽃의 온도
윤금초 – 꽃의 변증법
윤보영 – 3월에는 꽃이 되고 싶다
윤보영 – 내가 꽃이라면
윤여흥 – 꽃
윤옥란 – 꽃 피는 돌
윤의섭 – 꽃의 탄생
윤제림 – 목련꽃도 잘못이다
윤중호 – 열무꽃
윤후명 – 용담꽃
윤후명 - 사스레피나무 꽃 피는 산길
윤희상 - 소를 웃긴 꽃
이가을 – 악의 꽃
이건청 – 망초꽃 하나
이규리 - 꽃
이규리 - 불안도 꽃인 것을
이남일 – 꽃향기
이덕규 – 꽃
이도윤 – 너는 꽃이다
이동식 – 봄꽃
이만섭 – 꽃들
이명수 – 꽃멜
이병국 – 꽃과 꽃게
이병률 - 꽃비
이 상 - 꽃나무
이상국 – 꽃
이상호 – 국수로 수국 꽃 피우기
이생진 - 땅속에 있는 수선화를 기다린다
이서린 – 꽃에 대한 예의
이선이 – 꽃의 다비식(茶毘式)
이성복 - 꽃 피는 시절
이성복 – 작은 꽃들아, 이상한 빛들아
이성선 – 꽃 속에 산이 잠들다
이소연 – 저 꽃은 저물 무렵
이수익 - 꽃
이수익 – 꽃나무 아래의 키스
이수풀 - 호랑이 발자국에서는 국화꽃 향기가 난다
이순현 – 꽃을 든 지구
이승은 – 저 꽃처럼
이승하 –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이 안 – 찔레꽃 식당
이 안 – 치워라, 꽃
이여진 - 꽃비
이영권 - 꽃이 모두 봄에만 피지는 않는다
이영권 - 너희들은 모두 꽃이다
이영권 - 풀들아 꽃들아
이영옥 – 꽃의 높이
이영혜 – 아까시 꽃 피면
이용임 – 말과 꽃
이운진 – 꽃을 기다리며
이원형 - 당신은 꽃을 쓰세요 나는 시를 썰 테니
이월하 – 누군가 내 마음을 적시네
이육사 – 꽃
이은봉 – 민들레꽃
이은봉 – 패랭이꽃
이인철 – 꽃의 적빈
이재무 – 음악을 먹고 마시던 꽃들
이정록 - 갈대꽃
이정하 - 꽃잎의 사랑
이정하 – 꽃잎
이정훈 – 녹꽃
이제니 – 꽃과 재
이종암 – 몸꽃
이준관 – 꽃보자기
이준관 -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이 채 - 사람의 꽃이 되고 싶다
이 채 – 중년의 꽃
이해인 - 풀꽃의 노래
이해인 - 꽃 편지
이해인 - 꽃 멀미
이해인 – 꽃밭에 서면
이해인 – 꽃샘바람
이해인 –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
이해인 - 꽃 이야기하는 동안은
이해인 - 꽃 이름 외우듯이
이형권 – 라벤더꽃이 필 때
이형기 – 낙화
이혜미 - 꽃에 묶인 왼손이 아니었다면
이혜미 – 새벽 꽃
이화은 – 첫 꽃
인도의 고시(古詩) - 그대의 눈동자는 푸른 연꽃잎
임경묵 – 꽃피는 스티로폼
임경섭 – 꽃밭에는 꽃들이
임은숙 – 봄꽃을 보며
개화
안도현
생명이 요동치는 계절이면
넌
하나씩 육신의 향기를 벗는다.
온갖 색깔을
고이 펼쳐 둔 뒤란으로
물빛 숨소리 한 자락 떨어져 내릴 때
물관부에서 차오르는 긴 몸살의 숨결
저리도 견딜 수 없이 안타까운 떨림이여.
허덕이는 목숨의 한끝에서
이웃의 웃음을 불러일으켜
줄지어 우리의 사랑이 흐르는
오선의 개울
그곳을 건너는 화음을 뿜으며
꽃잎 빗장이 하나 둘
풀리는 소리들.
햇볕은 일제히
꽃술을 밝게 흔들고
별무늬같이 어지러운 꽃이여
이웃들의 더운 영혼 위에
목청을 가꾸어
내일을 노래하는 맘을 가지렴.
내일을 노래하는 맘을 가지렴.
국화꽃 그늘과 쥐수염붓
안도현
국화꽃 그늘이 분(盆)마다 쌓여 있는 걸 내심 아까워하고 있었다
하루는 쥐수염으로 만든 붓으로 그늘을 쓸어 담다가
저녁 무렵 담 너머 지나가던 노인 두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한 사람이 국화꽃 그늘을 얼마를 주면 팔 수 있느냐고 물었다
또 한 사람은 붓을 팔 의향이 없냐고 흥정을 붙였다
나는 다만 백년을 쓸어 모아도 채 한 홉을 모을 수 없는 국화꽃 그늘과
쥐의 수염과 흰 토끼털을 섞어 만든 붓의 내력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 대신 구워서 말려놓은 박쥐 몇 마리와 박쥐의 똥 한 홉,
게으른 개의 귓속에만 숨어 사는 잘 마른 일곱 마리의 파리,
입동 무렵 해뜨기 전에 채취한 뽕잎 일백이십 장, 그리고
술에 담가 놓았다가 볶아 가루로 만든 깽깽이풀뿌리를 내어놓았다
두 노인은 그것들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자신들은 약재상(藥材商)이 아니라 했다
그리고는 바삭바삭 소리가 날 것 같은 국화꽃 그늘에 귀를 대보고
쥐수염붓을 오래 만지작거리더니 가을볕처럼 총총 사라졌다
그렇게 옛적 시인들이 나를 슬그머니 찾아온 적이 있었다
꽃
안도현
1
바깥으로 뱉어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몸속에 있기 때문에
꽃은, 핀다
솔직히 꽃나무는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게 괴로운 것이다
내가 너를 그리워하는 것,
이것은 터뜨리지 않으면 곪아 썩는 못난 상처를
바로 너에게 보내는 일이다
꽃이 허공으로 꽃대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다 꽃대는
꽃을 피우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 몸을 세차게 흔든다
사랑이여, 나는 왜 이렇게 아프지도 않는 것이냐
몸속의 아픔이 다 말라 버리고 나면
내 그리움도 향기 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살아남으려고 밤새 발버둥을 치다가
입안에 가득 고인 피,
뱉을 수도 없고 뱉지 않을 수도 없을 때
꽃은, 핀다
2
누가 나에게 꽃이 되지 않겠느냐 묻는다면
나는 선뜻 봉숭아꽃 되겠다 말하겠다
꽃이 되려면 그러나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겠지
꽃봉오리가 맺힐 때까지
처음에는 이파리부터 하나씩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밀어보는 거야
햇빛이 좋으면 햇빛을 끌어당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흔들어보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도 오겠지
그 밤에는 세상하고 꼭 어깨를 걸어야 해
사랑은
가슴이 시리도록 뜨거운 것이라고
내가 나에게 자꾸 말해주는 거야
그 어느 아침에 누군가
아, 봉숭아꽃 피었네 하고 기뻐하면
그이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내 몸뚱어리 짓이겨 불러줄 것이다
꽃다운
안정옥
오늘 문득 생각했지요
몇 년 전에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를
그때가 꽃다운 나날이었는데 혀를 차다가
몇 년 후에 혀를 차고 있을 지금을 헤아리면
지금은 분명 꽃다운 날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사는 나날이 꽃다운데 그것도 모르고
내게서 이미 가버렸다고 믿고는
어려서 누군가 꽃다웁다고 하면 흘러버리고
이제 꽃다웁다고 말해주지 않는데 불현듯 나는
꽃 지는 이 가을에
꽃같이 아름답고 꽃같은 향기에 빠져
거처가 없는 힘센 사랑 쑥쑥 자라더니
더는 들어서지 못해
제 몸을 밀치며 제 몸을 밀치며
이 떨림을 달래려
꽃 지는 가을 공원으로 갔지요
몸이 잠겨 실눈을 뜨고 햇살을 마주하니
피곤이 몰려와
몸을 뒤틀면 두두둑 타게지는 소리 그렇지요
좋을 때는 짧아서 가을 해도 짧고 공원도 텅 비고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들을 그리워하며
나날이 새로웠는데
나날이 꽃다웠는데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나는
꽃 지는 가을에 불현듯 귀를 세우고
오늘 이 쓸쓸한 사랑을
오래오래 묵혔다가 내게 어떻게 다시 찾아오는지 기다리지요
마른 꽃
안효희
빳빳하게 선 채 말라서 죽을 뿐, 꽃병의 꽃들은 함부로 시들지 않는다 식탁 위 간장도 단단하게 굳고, 먹다 남긴 토스트 조각 또한 만지자마자 부스러질 뿐, 시드는 것이 아니라 말라가는 것, 말라가며 천천히 부서져 가는 것
가습기를 튼다 하얀 수증기 곁에서 커다랗게 입을 벌린다 풀무질로 이불 홑청을 펴듯 꽈리처럼 오그려 붙은 내 몸, 몇 개의 주름이 펴진다 부스러지지 않는 진동기의 떨림, 부스러지지 않는 떨림을 생각한다
모서리마다 각이 진 목관(木棺) 하나 윗집에서 내려온다 관이 흔들릴 때마다 펄럭이는 생전의 붉은 치마, 엷은 바람에 너울너울 부스러진다 박제되는 삶, 소리도 없이 혼자 피는 마른 꽃
꽃 꺾어 그대 앞에
양성우
그대 큰 산 넘어 오랜만에
오시는 임
꽃 꺾어 그대 앞에
떨리는 손으로 받들고, 두 눈에
넘치는 눈물 애써 누르며
끝없이 그대를 바라보게 하라.
그대 큰 산 넘어 이슬 털고
오시는 임
꽃 꺾어 그대 앞에
떨리는 손으로 받들고
그대의 발, 머리 풀어 닦으며,
오히려 기쁨에 잦아드는
목소리
그대를 위하여
길고 뜨거운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라
꽃밥
엄재국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마른 나무에 목단, 작약이 핍니다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무서운 꽃
오늘
사랑하는 빨간 의자가 죽었다
휘청거리는 나무와 서서 바라만 보는 너와 너무하다고 하는 나, 접힌 페이지의 중간부터 불의 상징을 지나는 중이야 그러므로 나는 목각인형이야 한껏 줄을 비튼다고 해서그게 춤이 되겠어 슬픔에 비트가 붙으면 더 빠르게 몸을훑는데, 미는 힘이 부족해서 서로에게 갇혀 있나 봐 어쩌다 그늘을 열면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내가 보일 거야 내 낡은 손목을 기억하니? 자꾸만 엉키는 영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첫 페이지에 앉아서 빗줄기를 긋고 싶은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래 지상으로 묶인 줄이 풀리면 재빠르게 공중으로 사라지는 꽃의 사람들 어제는 목련의 줄이 풀렸고 오늘은 장미의 줄이 느슨해지고 있지 내 향을 기억하니 너의 하루에서 지우고 싶은 것이 뭐야 내 몸에 단물이 배어 있을 때 붉게 사라지고 싶어 난 사과를 먹을 거야 이제부터 짓는 모든 죄는 사과 때문이지
겨울꽃
오문식
서리로 소복 입은 꽃
인고의 세월 딛고 동토를 가른다
죽었던 생명의 소리를 들으라
창포에 새싹 돋는 봄을 보아라
정결한 침묵, 아픔 잃은 기다림으로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 줄 모를
한 치의 위선과 가식도 없는
이 숭고한 부활을 노래하리라
청춘 잃은 핏빛 황혼이 등짐이 되어
가슴에서 비등하는 피눈물의 시간
이 열망의 부르짖음이여
잡을 수 없는 혼돈, 그대 눈빛에만
춤추는 마리오네트처럼
몸부림의 비곡을 그대는 듣는가
황홀할 꽃이 되소서
짖밟혀도 피어나는 야생화
영원히 지지 않을 금단의 꽃
겨울에 피는 꽃이여
꽃피는 봄날에 더 참담하게 만나자
오민석
누구는
절반의 희망과
절반의 절망을 말하지만
지금 할 일은
참혹한 시간 속으로 더 들어가는 것
애인들은 등을 돌리고
꽃들은 마침내 졌다
지금 할 일은
믿음, 희망, 미래, 이런 단어들을
잠시 버리는 것
더 혹독하게 살의 냄새를 맡는 것
유령들과 작별하고
염통의 지도를 다시 읽는 것
아, 또다시 삶에 속은 자는
지게를 지고 다시 생계를 향해 가네
지금은 더 참혹하게 무너질 때
알몸의 비극과 결혼할 때
손쉬운 작별들과 작별할 때
그러니 벗들,
꽃피는 봄날에
더 참담하게 만나자
치자꽃 지는 저녁
오민석
치자꽃이 지는구나
치자꽃이 화장지처럼 구겨지다 마침내
비 뿌리는 저녁
어디 부를 노래도 남아 있지 않은
거리에서 당신은 당신일 뿐
이제 아무도 담배를 피우지 않고
아무도 과음하지 않는다
오직 몹쓸 詩人들만 남아
통음(痛飮)의 밤을 기다리는데
어리석은 자여, 이제 환멸도 잔치가 아니다
세상은 단정한 신사들의 것
누가 함부로 울어 이파리 하나 흔들리게 하리
희망은 버림받은 배들의 안주일 뿐
그 누가 남아 비애의 항구를 노래하리
푸르른 안개의 칼이여 길 건너
실비동태집에선 죽은 바다가 끓고 있다
당신은 이미 미아이므로
아무도 당신을 찾을 수 없다
푸른 꽃의 시간
오민석
꽃 그늘 아래 지나가니
무슨 팡파르 울린다
또 실패다
주둥이를 일제히 열고
쓰러져 봄을 보내는 어린 것들아
꽃잎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동안
나는 닿지 않는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련다
조금씩 망가지는 몸이
조금씩 우리를 떠나는 동안에도
꽃길은 지는 저녁을 향해 간다
다시 오마는 약속도 언젠가 끝날 것이다
그래도 나는 푸른 꽃의 시간을
압정으로 꾸욱 누른다
꽃 지니 잎 난다
살자
살자
꽃망울
오석만
깨어나고 살아나는 봄날
숨죽이고 기다렸다
바람과 눈보라 몰아쳐도
추위와 어둠 견뎌내며
깊은 곳
수많은 꿈들이
환한 얼굴로 미소 지을 때
드디어
하늘이 열리고
빛이 쏟아져
어느새 함성으로
무리지어 다가오는
생명의 물결
꽃들의 합창
한 마리 새가 되어
들판으로 하늘로
날아오르네
당신이 꽃밭에 있을 때
오정방
5월의
따사한 햇살이 풍성한
싱그러운 꽃밭에
이름도 다 댈 수 없는
갖가지 꽃들이
형형색색으로
다투어 피고 있다
화사한
웃음을 머금고
그 꽃밭에
당신이 있을 때
당신도
하나의 꽃이다
생각하는 꽃
말하는 꽃
움직이는 꽃
사랑을 아는 꽃
봄꽃 피는 날
용혜원
봄꽃 피는 날
난 알았습니다
내 마음에
사랑 나무 한그루 서 있다는걸
봄꽃 피는 날
난 알았습니다
내 마음에도
꽃이 활짝 피어나는걸
봄꽃 피는 날
난 알았습니다
그대가 나를 보고
활짝 피어나는걸
봄꽃 피는 날
난 알았습니다
그대가 나를 보고
활짝 웃고 있는 이유를
꽃의 북쪽
우대식
개구리도 겨울잠에 들고
싸락눈이 내리는 밤
마쓰오 바쇼,
이런 날은 늘 바람이 창호문을 두드렸지
화로에 술을 데우도록 하지
낡은 신발은 방 안 머리맡에 놓아두도록 하지
왜 마음이란
천리만리 달아나는 것인지
조금은 뜨거운 술을 천천히 내장에 붓고
매화나 동백 같은 꽃을 기다리기로 하지
아니면
꽃의 북쪽으로 달아날까
신음처럼 그대가 내게 물을 때
나는 절망의 심줄을 활시위처럼 당겨
심장 가장 먼 뒤쪽으로 모든 생각을 모으곤 하지
마쓰오 바쇼,
조금 추워도 되겠지
유여(裕餘)한 봄빛이 마루 구석 쌀통에 넘칠 즈음이면
안개와 연기는 강줄기를 따라 무진 무진 흐르겠지
그대와 나도
이쯤에서 안녕이지
연기를 좋아하는 나와 안개를 좋아하는 당신
바람이 놀 때까지만 지상에 기대기로 하지
이쯤에서 안녕이지
냉이꽃
유금옥
마당가에 냉이꽃이 피었습니다
냉이꽃 저만치 조그만 돌멩이가 있습니다
돌멩이는 담장 그늘이 외로워서
냉이꽃 곁으로 조금씩 조금씩 굴러오는 중입니다
종달새도 텅 빈 하늘이 외로워서
자꾸 땅으로 내려오는데
그것도 모르는 냉이꽃이
냉이꽃이 종달새를 던지는 봄날입니다
검은 꽃
유병록
죽은 자의 폐에서 발견되는 다량의 흙은
산 채로 매장된 흔적
산 자의 기억과 죽은 자의 꿈이 뒤섞이는 자정의 세계에서
눈 감으면
검은 공기의 구덩이에 파묻히는 느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검은 공기가
목구멍을 가로막으며 걸어들어오고
벗어나려 애쓸 때마다
숨통을 잠식하며 밀려드는
검은 모래는
쌓이고 쌓여 비탈을 만드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점점 폐활량이 줄고
기침의 순간을 지나 침묵에 다다를 때
검은 공기의 구덩이는 내가 팠다는 생각
빛이 찾아오고
소란이 나를 일으켜 구덩이 밖으로 꺼낸다면
누가 내 가슴을 열어
검은 비탈을 발견한다면
자, 받아라
검은 꽃 한 송이
호박꽃 엄마
유순예
고추밭 가상
호박꽃 엄마
환하게
웃고 있네
잔가시들 재운 몸으로
노란 꽃등 켜놓고
새끼들 앉을 자리
치우고 있네
엄마, 난 언제 커?
치마폭이 안고 있던
애동대동한
애호박이 말문을 여네
쉬잇, 도둑 들라!
호박꽃 엄마
노란 꽃등을 끄며
치마폭에
새끼들을 숨기네
꽃과 바위
유승도
도축장에서 사람을 들이받아 죽이고 탈출했다는 소의 배와 넓적다리엔 똥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자신의 똥 위에서 자고 먹으며 자라난 소였다 파란 풀도 덮이지 않고 나뭇잎도 돋아나지 않은 야산에서 소는 소방관들이 쏜 마취주사 두 발을 맞고 마비되는 몸을 겨울 지탱한 채 서있었다 불끈 솟아난 두 뿔 위에 생강나무 꽃이 노오란 빛을 뿌리며 살랑대고 있었으나 소는 꽃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박은 채 바위가 되어 있었다
꽃으로 다시 살아
유안진
지금쯤은 장년 고개 올라섰을 우리 오빠는
꽃처럼 깃발처럼 나부끼다 졌답니다만
그 이마의 푸르른 빛 불꽃 같던 눈빛은
4월 새잎으로 눈부신 꽃빛깔로
사랑하던 이 산하 언덕에도 쑥굴헝에도
해마다 꽃으로 다시 살아 오십니다
메아리 메아리로 돌아치던 그 목청도
생생한 바람 소리 물소리로 살아오십니다
꽃진 자리에 열매는 열려야 했지만
부끄럽게도 아직은 비어 있다 하여
해마다 4월이 오면 꽃으로 오십니다
눈 감고 머리 숙여 추도하는 오늘도
웃음인가요 울음인가요 저 꽃의 모습
결 고운 바람에도
우리 가슴 끝내는 울먹여집니다.
꽃으로 잎으로
유안진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며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은 아름답다고
돌아온 꽃들
낯 붉히며 소근소근
잎새들도
까닥까닥 맞장구치는 봄날
속눈썹 끄트머리
아지랑이 얼굴이며
귓바퀴에 들리는 듯
그리운 목소리며
아직도 아직도 사랑합니다.
꽃지면 잎이 돋듯
사랑진 그 자리에 우정을 키우며
이 세상 한 울타리 안에
이 하늘 한 지붕 밑에
먼 듯 가까운 듯
꽃으로 잎으로 우리는
결국 함께 살고 있습니다.
멀리 있기
유안진
멀리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리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소서.
죽어서도 나
빛나는 별이게 하소서
팝콘
유종인
손으로 집어 먹을 수 있는 꽃,
꽃은 열매 속에도 있다
단단한 씨앗들
뜨거움을 벗어버리려고
속을 밖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내 마음 진창이라 캄캄했을 때
창문 깨고 투신하듯
내 맘을 네 속으로 까뒤집어 보인 때
꽃이다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속을 뒤집었다, 밖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은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꽃은
견딜 수 없는 嘔吐다
나는 꽃을 집어먹었다
꽃
유치환
가을이 접어드니 어디선지
아이들은 꽃씨를 받아와 모우기를 하였다
봉숭아 금전화 맨드라미 나팔꽃
밤에 복습도 다 마치고
제각기 잠잘 채비를 하고 자리에 들어가서도
또 꽃씨를 두고 이야기-
우리 집에도 꽃 심을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느덧 밤도 깊어
엄마가 이불을 고쳐 덮어 줄 때에는
이 가난한 어린 꽃들은 제각기
고운 꽃밭을 안고 곤히 잠들어버리는 것이었다
치자꽃
유치환
저녁 어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아 있는 네 모습.
그리고 그 너머로
뒷산마루에 둘이 앉아 바라보던
저물어가는 고향의
슬프디슬픈 해안통(海岸通)의
곡마단의 깃발이 보이고
천막(天幕)이 보이고
그리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과 눈을
저녁 어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
꽃이라 불렀는데, 똥이 될 때
유하
이 곰은 성질이 사나워서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불곰이 갇힌 철창 으스스한 푯말 앞에서
저 곰 바보 같애
실없이 웃고 있는 구경꾼들
무엇이 성질이 불같은 정글의 왕자를
실없는 바보로 만드는가
갇혀 있기에 길들여진 것은
엉덩이에 까맣게 똥이 눌러붙은
저 꽃사슴 떼처럼
추하다
이 시는 아름답습니다
꽃향기가 납니다
나도 푯말만 내걸은 적은 없는가
동물원 꽃사슴 같은 시만
푯말 걸고 노니는 시대에
갇힌 철창 속에서도
똥을 꽃으로 만개시키는 이들이 무섭다
들꽃 언덕에서
유한지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값없는 들꽃은
하나님이 키우시는 것을
그래서 들꽃 향기는
하늘의 향기인 것을
그래서 하늘의 눈금과 땅의 눈금은
언제나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것도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꽃의 온도
유희선
그곳에 입장하려면
체온을 재야 한다
이마와 손목, 때론 귓속까지
겹겹 꽃잎 속에
은밀한 사랑이라도 감추고 있는 양,
속속들이 꽃의 온도를 잰다
꽃이 피는 온도와 꽃이 지는 온도를 생각한다
햇빛과 바람을 살갗 속에 들이는
꽃이여, 사랑이여
서서히 뜨거워지거나 서서히 차가워지는 것들
한바탕 꿈에서 깨어나듯
꽃을 버리고
이파리를 버리고
더는 양보할 수 없는 지경까지 계절은 몰아칠 것이다
투쟁처럼
투병처럼
끝내 싸워 이긴 자들, 어쩌면 모든 사랑이 지나가고
나는
나로 가득 차서, 꼼짝없이
갇혀 있다
오늘 다시, 겨드랑이와 혓바닥 아래까지 샅샅이 체온을 잰다
영원히 꽃필 것 같지 않은 이상한 시간 속으로
수없이
문이 열리고 닫힌다
꽃의 변증범 - 미선나무를 위한 판타지
윤금초
간밤 어둠 저리 내몰고
역성혁명 일으켰다
지밀나인 목 베는 검객
모반의 칼도 없이
잎 먼저 꽃등 켜들고
예고편 봄 나팔 분다.
동해 그 바닷가에서
햇미역 가사리 뜯던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닮은
꽃술, 홀연 옥좌(玉座)에 오른다.
우윳빛 살갗 비비며
어녹이치는 뜰을 지나서.
3월에는 꽃이 되고 싶다
윤보영
3월에는
꽃이 되고 싶다
마음에서
고운 향기가 나는 꽃!
나를 보고 다가오는
바람에게
미소로 안부를 전하고 싶다
안부에
향기를 나누는
여유가 담겼으면 좋겠다
여유 속에서
한 번쯤, 꽃을 심은 마음도
헤아려 보아야겠다
꽃인 나를
모두가 알아볼 수 있게
아름다운 꽃이 되고 싶다
꽃을 보는 사람마다
가슴에 행복이 담기는
행운의 꽃이었으면 좋겠다
꽃인 내가 행복한 것처럼
모두가
행복한 꽃이 되었으면 더 좋겠다
내가 꽃이라면
윤보영
내가 꽃이라면
그대 좋아하는 꽃이 되고싶네.
그대 좋아하는 꽃이라면
향이 좋은 꽃이 되고 싶네.
향이 좋은 꽃이라면
그대 곁에 머무는 꽃이 되고 싶네.
그대 곁에 머무는 꽃이라면
그대 행복에 보탬이 되는
향기 좋은 꽃이 되고 싶네.
그대 행복이
곧 내 행복이라는 것을 아는
행복한 꽃이 되고 싶네
꽃
윤여흥
꽃이 아름다워 쳐다보는 사람을
여자처럼 꽃은 의식하고 있을까
꽃이 거울을 보며 사람을 보고
사람을 위해 웃고 있는 것일까
수반 위의 꽃을 만지며 여자처럼
꽃의 은유를 만지며 생각하는
미학 또는 여자의 허구
여자의 속살처럼
훔쳐보기, 눈흘기기,여지없이
타락하기.
꽃을 주제로 한
꽃뱀의 혓바닥
클레오파트라의 사랑 또는
시법을 위하여.
꽃피는 돌
윤옥란
남해 바닷가에서 만난 여자
동글동글한 돌멩이만 보면 그림을 그린다
젖은 돌멩이를 옷에 쓱쓱 닦은 후
꽃 그림을 그려 철썩이는 파도에게 던진다
달빛이 차고 기우는 밤에도
계절이 다 지나간 꽃송이가 만발한 바다
얼마나 많은 돌에 그림을 그렸는지
이틀 만에 열두 가지의 크레파스가 다 닳았다
꽃잎과 이파리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
그녀의 꽃 그림은 익사한 남자의 이름에 향기를 피우는 일
다하지 못한 숨결을 불어 넣는 일
이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하다
바닷속의 꽃이 되어
그의 뼈에 닿고 싶어 하는 여자
비릿한 바다가 온통 꽃밭이다
한 마리 바닷새가 저물도록 여자의 손끝을 놓지 않는다
도미 한 마리도
꽃송이 하나를 물고 헤엄쳐 들어간다
꽃의 탄생
윤의섭
불면이란 밤새 벽을 쌓는 일이다
감금, 꺼지지 않는 가로등처럼 뜬 눈으로 견디는
밤과 새벽 사이의 생매장
길 잃은 바람이 어제의 그 바람이 같은 자리를 배회하고
고양이 울음은 있는 힘을 다해 어둠을 찢는다
이 터널은 출구가 없다
어떤 기다림은 질병이다
간절한 소식은 끝내 오지 않거나 이미 왔다 가버리는 것
그러니 너는 얼마나 아름답단 말인가
머리를 남쪽으로 두고서야 겨우 잠이 든다
어떤 묘혈은 땅 속을 흘러 다닌다는데
머리맡에 꽃향기가 묻어 있다
첫 매화가 피었다고 한다
목련꽃도 잘못이다
윤제림
춘계 야구대회 1차전에서 탈락한 산골 중학교 선수들이 제 몸뚱이보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지고, 목련꽃 다 떨어져 누운 여관 마당을 나서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저마다 저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는지 모두 고개를 꺾고 말이 없다. 간밤에 손톱을 깎은 일도 죄스럽고, 속옷을 갈아입은 것도 후회스러운 것이다.
여관집 개도 풀이 죽었고,
목련도 어젯밤에 꽃잎을 다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었다며 고개를 흔든다,
봄은 미신(迷信)과 가깝다.
열무꽃
윤중호
너무 게으르거나 혹은 지나치게 바빠서
주말 텃밭 구석구석 열무 씨를 뿌려놓고
전혀 왕래가 없는 텃밭마다
봄 가뭄에 바짝 비틀어진,
채 한 뼘도 자라지 못한 열무가, 어느 날 갑자기
쑤욱- 대궁을 밀어 올리더니
연보랏빛 열무꽃이 분분하다.
나풀나풀, 바람이 불면 일제히
어린 나비로 고운 날갯짓하는
연보랏빛 꽃무리들.
너무 게으르거나 혹은 지나치게 바쁜
텃밭 주인들이 본의 아니게 풀어논
난데없는 꽃잔치.
주인들은 꽃구경도 안 오는데
농사꾼 할아버지는 끌끌 혀 차고
건달 농사꾼만 새벽마다 환히 피네.
사스레피나무 꽃 피는 산길
윤후명
봄꽃 필 때면
사스레피나무도 꽃 핀다고 금강 스님은
알려주었다
이 사철나무가 무슨 나무일까
오래전부터 궁금했는데
산꼭대기 바윗길에 서 있었다
이것도 향기인 것일까
멀리 다도해가 내려다보이는 산길에서
내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오랜 궁금증의 정체를 알려주려는 듯
보일 듯 말 듯 피어나는 꽃
이 길로 오려고 걸어온 몇십 년
지나온 생이 이와 같다고 말해주는 듯해서
거북한 냄새도 향기라고
나는 나한테 말하고 있었다
용담꽃
윤후명
용담꽃 피기 시작하니
가을이 깊어가는데
남색 저고리 입고
남색 추억을 저미고
가을이 아파오는데
용의 쓸개처럼 쓰다는 그 뿌리를 혀로 녹이며
마치 마지막 밤을 밝히듯이
삶의 쓴물로
새로 태어난 배냇등불을 켜네
소를 웃긴 꽃
윤희상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 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악의 꽃
이가을
대낮에 좌우 방랑한 꽃들의 대립은 극에 달했다
터전을 지키려는 이재민들의 목숨 건 투쟁에
달도 차지 않아 나온 어린 부용꽃이 죽어갔다
어깨가 벌어진 근육질의 나무들도
입을 다물고 톱질에 스러졌다
수몰을 감추려고 보름날 달도 뜨지 않았다
모든 것들은 쉬쉬 하고 밤이 시킨 일
밤의 뒤에 숨어 너의 눈이 저지른 일
누가 꽃나무의 결을 베었나
나무의 근육에 피가 맺혔다 나무의 떨림
불면의 바닥에서 꽃잎들 악몽이다
어떤 나무들은 제 몸의 살을 벗었다
각질이 두드득 떨어졌다
감각의 감각들이 신경을 곧추세우고 세포들과 일어섰다
시간을 지우는 지우개는 없는데
들개들처럼 통증이 쏟아졌다
망초꽃 하나
이건청
정신병원(精神病院) 담장 안의 망초들이
마른 꽃을 달고
어둠에 잠긴다.
선 채로 죽어버린 일년생(一年生) 초본(草本)
망초잎에 붙은 곤충(昆蟲)의 알들이
어둠에 덮여 있다.
발을 묶인 사람들이 잠든
정신병원(精神病院) 뒤뜰엔
깃을 웅크린 새들이 깨어
소리 없이 자리를 옮겨앉는다.
윗가지로 윗가지로 옮겨가면서
날이 밝길 기다린다.
망초가 망초끼리
숲을 이룬 담장 안에 와서 울던
풀무치들이 해체된
작은 흔적이 어둠에 섞인다.
모든 문들이 밖으로 잠긴
정신병원(精神病院)에
아름답게 잠든 사람들
아, 풀무치 한 마리 죽이지 않은
그들이 누워 어둠에 잠긴
겨울, 영하의 뜨락
마른 꽃을 단 망초.
꽃 / 이규리
돌확에 띄웠다가 시든 국화 건져낸다
꽃이 꽃을 버릴 때는 한 치 가차도 없어서
그 독한 냄새란
입양 보내는 어미 정 떼는 눈길만큼 매섭다
시커멓게 상한 꽃잎은
돌아서는 어미 눈가처럼 짓물러 있지만
꽃이 떠난 돌확의 퀭한 눈도 그만큼 젖거나 어둡다
보내고 떠나는 자리는
봉합수술 한 흔적처럼 없는 듯 남아
하릴없이 옆구리가 결리기도 한다
마음 준 자리마다 피운 게 꽃이라면,
꽃!
눈에 밟히지 마라
끝없다
불안도 꽃인 것을
이규리
누가 알기나 했을까
불안이 꽃을 피운다는 것을
처음으로 붉은 피 가랑이에 흐를 때
죽고 싶다 할 때마다 조마조마 꽃이 피었던 걸
불안으로 한 아이를 낳고
불안으로 젖을 먹이고 몸을 씻기는 동안
불안 속에서 꽃이 피고 있었네
불안은 불안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속에 오래 있으면
기막히게 불안에도 쾌감이 있다는 걸
아이가 젖꼭지를 깨물었을 때라 할까
아니면 불륜, 불법, 불신, 불가능의 한 때라 할까
불안으로 시험을 치고 낙방을 하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고
그때마다 불안의 꽃이 피었던걸
그다음 시절이 일러주었네
수많은 당신이 불안이었던 걸 말해도 될까
초경 때처럼 깜빡 죽고 싶었던 걸 말해도 될까
눈부신 구름 꽃바람 꽃
비가 되었던 물의 꽃
꽃은 불안을 알지 못하지만 불안은 꽃을 알아보더군
천날 만날 내일이 불안하고 휴일이 불안하고
지나온 길
그 불안으로 꽃을 피웠으니
여기 이 꽃 무덤들, 이 불안의 무게들
꽃향기
이남일
꽃을 보고 있으면
향기는 소리 없이 다가오고
귀 기울이면
두근대는 숨소리가 들린다
누가 알까.
꽃은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꽃길을 지나거든
가까이 다가가 마주보라.
꽃향기만으로
아름다운 고백을 들을 수 있다
꽃
이덕규
한 해 동안 캄캄한 흙 속을 뒤져 찾아낸 걸
한순간 허공에 날려버렸다
해마다 똑같은 패를 쥐고 나와
일 년치 노역을 아낌없이 걸고 던지는
화투(花鬪), 향기로운 꽃놀이 끝에
집에 가는 차비나 해라
국밥이나 먹어라 개평을 뚝 떼어주는
이 아름다운 도박판의 결정(結晶)
까맣게 굳어버린
갸륵한 농부님네 마음을 다시 흙 속에 묻는다
너는 꽃이다
이도윤
나는 오늘 아침
울었습니다
세상이 너무 눈부시어
울었습니다
어디서 날아왔을까
아파트 10층 시멘트벽 물통 사이
조막손을 비틀고 붉게
온몸을 물들인 채송화 하나
그래도 나는 살아 있다
눈물인 듯 매달려 피었습니다
무릎을 꿇는 햇살 하나
그를 껴안은 채
어깨를 떨고 있었습니다
봄꽃
이동식
해마다 보는 모습이지만
볼 때마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처럼
마음이 설레어요.
아, 당신도 그래요.
꽃들
이만섭
“꽃들”이란 말,
이 아름다운 낱말 속에 숨어 있는 이름들을
낱낱이 호명하지 못하고
그냥 꽃들이라는 단음절어로 부를 때
그 지순한 꽃의 마음을 생각하면
왠지 무성의한 것은 아닌지 나는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내 먼저 친숙한 말인 듯 “꽃들”이라고 부르는
이 흔연스러운 기쁨을 어쩌랴,
우리의 일상은 나무도 돌멩이도 앞 냇가도
비로소 꽃들로부터 환해진다
그 섬약한 손길이 닿지 못할 때
햇빛은 어떻게 나무의 열매를 지을 것이며
바람은 무슨 흥으로 불어올 것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 간격이 좁혀지고
그 눈빛마다 생기가 도는 것도
꽃들이 완충지대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산자락 휘감아 아름 동인 푸름과
강물에 물줄기 건네준 골짜기의 시원에 이르기까지
꽃들의 의미는 닿아 있다
샘이 솟고 새가 노래하는 이유가
꽃들이 피고 지는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니
저 어두운 밤을 달려 다다른 아침
가슴을 깨우는 강물이여
말간 낯으로 피어난 꽃들이 눈부시다
꽃멜
이명수
해 질 녘 모슬포 부둣가 한 귀퉁이
아들이 갓 잡아온 멸치를
할머니가 손질해 말리고 있다
은빛 물결 잦아들면
멸치는 숨죽이며 몸을 뒤척이고,
노을빛에 할머니가 꽃처럼 곱다
5천 원 주고 꽃멜 한 봉지 얻어 배낭에 넣었다
몇 백 마리 멸치 온기가
한기 어린 내 등을 따뜻이 덥혀준다
갈매기들이 따라온다, 길고양이도 따라온다
‘한 마리 주면 안 잡아먹지’
절반을 주고 십리 길 절반은 왔다
그래, 내 손으로 잡은 것도 아닌데,
혼자 걷는 길에 동무 삼았으니
남는 장사다
은빛 멸치를 마당에 풀어놓았다
당선에서 멜밭을 보고
망선에서 후림을 늘여
서캐코는 서역콧으로
동캐코는 눈구문여로*
한 이틀 나도 봄볕에 몸을 말리며 함께 놀았다
몸이 고프다
물엿에 참기름 몇 방울, 고춧가루 조금 얹어
달달 볶았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절묘하다
뱃속이 조화를 부린다
바다가, 하늘이, 바람이, 불길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온다
꽃멜 하나에 이밥 두 술
공자님 말씀대로 한 끼니 공양한다
일단사일표음(一簞食一瓢飮)
꽃멜 먹고 꽃잠 잔다
이 정도면 족하다
꽃과 꽃게
이병국
채색에 주의를 두어야 합니다만,
확신이 서지 않을 땐
꽃잎을 자르는
꽃게의 선을 기억합니다.
투박하게
투명하게
간격을 벌려 갈피를 채웁니다.
마른 이파리가
집게에 물을 들이고
게 눈 감추듯
스며드는 걸 가려 봅니다.
매몰차게 대해 미안하다고
당신에게 말한 적이 있었나요.
말의 방식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꽃밥을 지어
물색 중입니다.
밀어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목이 메어 덜어냅니다.
아니요,
아무렇지 않습니다.
잘려나간 집게발이
먼저 떠나고 있습니다.
꽃비
이병률
작은 새가 와서
벚나무에 앉더니
벚꽃을 하나씩 따서
똑똑 아래로 떨어뜨리네
새가 목을 틀어가며
꽃들을 따서 떨어뜨리고
눈물 떨어지는 속도로
뚝뚝 떨어뜨리는 것은
그 나무 밑에 사랑을 잃은
누가 하염없이 앉아 있어서겠지
꽃나무
이상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近處)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熱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熱心)으로 꽃을 피워 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나는 막 달아났소. 한 꽃나무를 위(爲)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러운 흉내를 내었소
꽃
이상국
노래하면 몸이 아파
그러한 그리움으로 한 서른 해 앓다 일어
피는 꽃을 보면 눈물 나네
노래로는 노래에 이르지 못해
먼 강 푸른 기슭에서 만났다 헤어지던 바람은
흐린 날 서쪽으로만 가고
작고 작은 말을 타고 삶의 거리를 가며
아름다운 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걸 알기까진
나는 너무 많이 울었네
한 서른 해 아픔으로도
사랑 하나 깨우지 못하여
그러한 그리움으로
마당귀 피는 꽃을 보면 눈물나네
국수로 수국 꽃 피우기
이상호
가끔 자리를 바꾸어 볼 때가 있다.
네가 이를 악물고 불같이 대들 때
내 자리를 너로 옮겨볼 때가 있지
나를 우겨서 너를 얼릴 수도 있고
나를 버려 너를 녹일 수도 있으니
양쪽이 다 나다울지는 모르겠으나
수국을 뒤집어 국수로 만들기보다
국수를 뒤집어 수국 꽃을 피울 때
우리는 새 아침을 맞을 수 있으리
이런 꿈을 꿀 때가 있지 가끔가다
장미를 꿈꾸는 미장이의 마음으로
고단한 저녁일수록 꿈만 부풀리지
그러니 올 아침은 날짜만 다를 뿐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다른 꿈
국수는 국수이고 수국은 수국이다.
땅속에 있는 수선화를 기다린다
이생진
겨울에 피는 수선화가 좋아
나처럼 혼자여서 좋아
매화처럼 나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흙속에서 나왔기에 흙냄새가 나서 좋아
죽은 사람과 살다 나와서 좋아
팔월은 수선화가 흙속에 묻혀 있는 시기여서
수선화는 수평선을 땅속에서 보겠지
수평선을 보며 자란 수선화
구엄리 수선화는 유명하니까
수선화도 수평선을 잊지 못해 밤마다 꿈을 꿀거야
구엄리는 수선화도 유명하니까
수평선도 수선화를 잊지 않으려고 꿈을 꿀거야
수선화의 꿈엔 흙이 묻었고 수평선의 꿈엔 물이 묻었어
구엄리는 꿈이 아름다워
해안도로를 질주하다가도 수평선 때문에 차를 세워 놓고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또 질주하던 사람
어디선가 꿈을 꿀거야
수평선에 뜬 수선화
나는 GNP가 늘어나는 것 보다 수평선이 늘어나는 것이 좋아
수평선은 사라진 것의 소실선
하늘로 사라진 것들의 소실점
수선화는 땅으로 사라진 것들의 소실점
두 소실점을 뛰어넘으면 소실되지 않은 것이 꼬리를 잡히겠지
나는 수선화의 뿌리처럼 모질게 살다 남은 봄을 기다리고 있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다리려 하니 기가 막혀
나는 수선화 앞에 서면 어미 잃은 강아지야
꽃에 대한 예의
이서린
저녁 해가 토해 놓은
바다에 핀 저,
꽃
출렁이며 흔들리는 붉은 덩이가
선창을 물들이다
닻 내리던 어부의
굽은 등을 물들인다
섬 모퉁이 물결 따라 사라지는 노을 꽃
장엄하게 피고 지는 생에 대한 예의로
부둣가를 서성이던 늙은 개가 조문하는
꽃의 다비식(茶毘式)
이선이
아랫도리에서 불을 꺼내
사내는
아내의 자궁에 군불을 넣어주었다
여보,
불 들어가오
아궁이 속
그녀는 뼈로 꽃대를 세우고
살을 발라 여린 꽃잎을 빚는다
사내는 산(山)을 열고 들어가
돌이 되고
봄산
화장터
돌을 깨는 울음으로
꽃이
타오른다
꽃 피는 시절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 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어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 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작은 꽃들아, 이상한 빛들아
이성복
작은 꽃들아
얼굴을 돌리지 마라
나는 사람을 죽였다
죽은 꽃들아, 아무에게도
이 말을 전하지 마라
나는 너희처럼 땅에 붙어 살
자리가 없어 그 자리,
내 스스로 빼앗은 자리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작은 꽃들아, 푸른 구멍으로
솟아난 이상한 빛들아
꽃 속에 산이 잠들다
이성선
아이야
꽃 속에 산이 잠들었다
깨우지 마라
가까이 다가가지도 마라
놀라 깨어나
나비로 날아가면
어쩌겠니?
저 꽃은 저물 무렵
이소연
화장실에 꽃을 두고 왔다
모래사장에 짐을 내려놓고서야 생각났다
매리골드는 처음이잖아
이러니까 그리운 게 나쁜 감정 같네
누굴 주려던 건 아니지만
두고 온 꽃을 가지러 갈까?
이미 늦은 일이야
그냥 평생 그리워하자
꽃을 두고 왔어
내가 말했을 때
우리 중 평론가만이 그걸 가지러 갔다
나는 소리친다
지하 2층에 있어!
화장실 비밀번호는 꽃집 데스크에!
해변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등
뒤를 돌아본 것도 같고
가방 속에서 지갑을 꺼내려는데
말벌 한마리가 붕붕거린다
여기 있었네
왜 꽃을 두고 왔다고 했을까?
너무 오래 기다린다
어느 화장실을 뒤지고 있니
없으면 그냥 와도 되는데
눈앞에서 평론가가 사라졌다
지갑만 꺼내려다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커다란 가방을 둘러메고 바닷가를 걷기 시작한다
모래사장은 끝이 보이지 않아 저물 무렵 죽는다지
이제 그만 돌아와
내가 잘못했어
뭍은 뭍으로 걸어가 언덕이 되고
평론가가 온다
저 꽃은 내가 두고 온 것이 맞다
꽃
이수익
꽃은
누가 죽어가는 시간에
피어나는 것일까.
그 사람이 힘없이 손짓하던
부름을
말하지 못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여,
피어나는 것일까.
꽃이 피어나는 시간에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바람은
또
무엇일까,
꽃 가장이를
예감처럼 돌다가 사라지는 빛은…
아, 꽃은 결국 무슨 뜻으로
저리도 선명한 빛깔로 내게
다가오는가.
꽃나무 아래의 키스
이수익
더 멀리
떠나왔나 보다.
密敎의 단호한 문을 여러 겹 건너
비바람과 눈보라 사이를 숨차게 헤쳐
바위처럼 금간 상처를 내려다보며
그래도 두렵지 않다, 두렵지 않다, 서로 위로하면서
몇 백 날을 그렇게 달려왔지.
은닉한 쾌감에 메마른 주둥이를 대고 싶어
피 흐르는 육체의 윤곽을 덮어 지우면서
저 감옥 속으로
감옥 속으로.
호랑이 발자국에서는 국화꽃 향기가 난다
이수풀
동해안 지역 연해주 밀림에서 느닷없이 만난
폭설 위에 찍힌 호랑이 발자국
꽃이다
영락없는 순백의 국화꽃이다
그 꽃, 길을 가르쳐 주겠다는 건지
어디 한번 따라와 보라는 건지
볕 바른 구릉 쪽을 향하여 한 줄로
자욱 자욱 이어져 있다
싱싱하도록 박혀있는 선명한 한 송이 한 송이
―발자국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
호랑이는 필시 아름다운 짐승인 거야
노래 부르며 뒤따라가면 휙휙 산맥을 타고 넘어 내지르다
쩡쩡 금이 갈수록 얼음이 두껍게 어는
겨울 강을 건너면 백두산에 당도하면
거기 국화꽃을 뿌리고 다니는 호랑이가 사는 나라
작은 만병초가 큰이깔나무에 기대어 살 부비며 살고
그 이깔나무 아래 우는 토끼 다람쥐 멧돼지
살가운 숨결로 하나가 여럿이
여럿이 하나로 함께 벙그는 꽃의 근원지
삼천리가 평화롭게 펼쳐져 있으리라
대설주의보 눈보라 속 시린 발 구르며
나의 살던 고향이 어흥 꽃 피는 산골로
봄맞이 가고 있다
꽃을 든 지구
이순현
어느 순간 발견한다
잘 죽기 위해서라는
오래전부터 간직해오던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이 시간에도 지구는
꽃을 들고 우주 공간으로 나아간다
나아가는 그곳에는 거대한 거품이 살고 있고
실외기 위에 쌀 한 줌을 뿌려둔다
화면을 켜고 미니재봉틀과 커튼 원단을 검색한다
꽃피는 곳을
어디엔가는 늘 마련해 두고 있는 지구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건 몸의 한끝이
지구가 닿을 수 없는 너머까지 가 있다는 거지
몸의 극지에도 꽃이 피어있다는 것이지
꽃 뒤에는 노래들이 이어지고
혀 밑에는 씨방이 여물어간다
이번 구간 수십 년은 나로 사람으로
다음 생의 구간에는 아마
당신의 손에 들린 용담 꽃다발이 되겠지
꽃 피는 자리마다 꿀이 샘솟고
쇄골 밑의 뼈가 조금씩 어긋난다
내 몸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대륙이 많아서
퍼즐 조각들이 하나하나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갈 때
실내에서 자라는 다육식물잎이 떨어진다
나는 잎이 떨어진 자리를 정토라 부른다
수많은 얼굴들이 감정들이 머물다 가도
흉터 하나 남지 않는 거울
은막 뒤로 사라진 내 얼굴들은 지구를 벗어났을까
어둑해지는 시간을 난간 바깥으로 쓸어내며
없는 태양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당신이 나를 발견하기 전까지 나는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고 믿을 뻔하였다
저 꽃처럼
이승은
시들해진 감자 서너 개 새들이나 먹으라고
지난해 뒷담 밑에 아무렇게나 던졌는데
무성한 잎사귀 달고
피어 있네
연보라꽃
순간 흐려지며 눈 끝에 매달리는
일렁이는 환절기여 못 견딜 낯빛이여
그대가 날 잊으려 할 때
저리 한번
피었으면,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이승하
오죽했으면 죽음을 원했으랴
네 피고름 흘러내린 자리에서
꽃들 연이어 피어난다
네 가족 피눈물 흘러내린 자리에서
꽃들 진한 향기를 퍼뜨린다
조금만 더 아프면 오늘이 간단 말인가
조금만 더 참으면 내일이 온단 말인가
그 자리에서 네가 아픔 참고 있었기에
산 것들 저렇듯 낱낱이
진저리 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찔레꽃 식당
이 안
오월이 되자 숲속 동네에
찔레꽃 식당이
새로 문을 열었다찔레꽃 식당 / 이 안
하얀 간판이 멀리서도 눈에 띄어
손님이 많이 들게 생겼다
첫 손님 거미는
거미줄로 의자와 식탁을 짜 놓고
어서 싱싱한 밥상이 차려지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문 열 준비를 하는
찔레꽃 식당 2호점, 3호점, 4호점……이
이웃에 줄지어 많고도 많으니
5월 한 달은 찔레꽃 식당 골목에서
밥을 대어놓고 먹어도 좋겠다며
주방의 손길이 재바르지 않아
밥이 좀 늦는 게 흠이긴 하지만
하얗고 달금한 향이
이만큼 가득한 식당은
여간해서 만나기 힘들겠다며
치워라, 꽃!
이안
식전 산책 마치고 돌아오다가
칡잎과 찔레 가지에 친 거미줄을 보았는데요
그게 참 예술입디다
들고 있던 칡꽃 하나
아나 받아라, 향(香)이 죽인다
던져주었더니만
칡잎 뒤에 숨어 있던 쥔 양반
조르륵 내려와 보곤 다짜고짜
이런 시벌헐, 시벌헐
둘레를 단박에 오려내어
톡!
떨어뜨리고는 제 왔던 자리로 식식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식전 댓바람에 꽃놀음이 다 무어야?
일생일대 가장 큰 모욕을 당한 자의 표정으로
저의 얼굴을 동그랗게 오려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퉤에!
끈적한 침을 뱉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꽃비
이여진
누구십니까
깊은 봄밤
창문을 흔드는
부드러운 손길은
누구십니까
벌떡 일어서
창문을 열면
저만치서 들리는
수줍은 소리
매마른 가슴에
한 줄 꽃바람
설레게 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꽃이 모두 봄에만 피지는 않는다
이영권
꽃이라고 모두 봄에만 피어나지 않듯이
봄에 피는 꽃들도 모두 같이 피어나지 않듯이
같은 꽃들도 모두 동시에 피어나지 않듯이
꽃들은 저마다 피어나는 때가 있다
보아라 5월 장미가
6월에도 피고 7월에도 피더니
이 늦은 가을
아파트 담장을 넘어다보며
다소곳이 얼굴 붉히며
성급한 겨울눈 맞는 모습을
그러니
꽃이 봄에 피지 않는다고
그 꽃을
화단에서 캐어내지 마라
다만 아직 피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 뿐
다른 꽃들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무시하거나 질타하거나 따돌리지 마라
기억하라 오히려
제때에 피어나지 않는 꽃이 언젠가는
한 송이 꽃도 없이 황량한 가지에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꽃이 귀한 11월도 다 기우는 날까지
차가운 눈 맞으며 따스한 봄 잊지 마라는 듯
꽃이 흔한 봄보다 더 짙은 색깔로 피어나는 것을
너희들은 모두 꽃이다
이영권
너희들은 모두 꽃이다
피어나,
탐스런 열매 맺을 아름다운 꽃이다
꽃은 그저 피어나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기도 하며
폭풍우를 견뎌내기도 해야 한다
더러는 도중에 떨어지기도 하고
더러는 꺾이는 아픔도 겪어야 하지만
그것은 너희들이 자라나는 몸짓이다
너희들은 모두 꽃이다
같은 모양 하나 없이
어리고 어린 귀여운 꽃이다
미세한 터치에도 상처받고
사악한 유혹에도 쉽게 물들어
그것이 자기가 갈 길인 양 고개 떨군다
그래서 먼저 간 예쁜 꽃들의 길을 가야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존중해야 하고
그들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는 연약한 꽃이다
꽃은 그저 피어나지 않는다
흙에서 열심히 자양분을 빨아들이고
나비들 불러 모아 가을을 꿈꾸며
하늘 가득 가쁜 숨 몰아쉬어야 한다
너희들은 모두 꽃이다
피어나,
탐스런 열매를 맺어야 하는 아름다운 꽃이다
풀들아 꽃들아
이영권
미안하다
여린 풀들아 귀여운 꽃들아
언제나 살갑게
바람에 흔들리는 손짓으로
걱정 하나 없는 눈짓으로
끊임없이 보내는 신호에도 난 여태껏
너희들 이름도 잘 모른 채
또 하나의 계절을 보내고 있구나
바람처럼 왔다 가는 꽃들아
넘어지고 넘어져도 일어서는 풀들아
갈수록 서글퍼지는 간이역에서
되새기고 되새겨도
분명치 않은 너희들 얼굴에
아슴한 이름들 떠올리며
네 어린 시절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그 모습들 그려본다
멀리서만 바라보는 풀들아
뒤엉켜 엉성한 듯 피어나는 꽃들아
루뻬에 드러난 네 모습이
이렇게도 아름다울 줄이야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세월 그냥 그렇게
떠나보낸 풀꽃들이 얼마이던가
이제라도 못다 한 사랑 찾아 살아가야지
꽃의 높이
이영옥
그날 밤 마당에서 나간 것들이 너무 많았다
꽃나무는 꽃을 피워 어둠을 밝히고
꽃향기는 제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넓혔다
소리 없이 들어온 검은 사마귀가 아버지의 구두 속에서 더듬이를 내렸고
분꽃은 자정이 되기 전에 흰빛을 뿜으며 수돗가로 몸을 던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젊은 엄마는 열매가 경쾌하게 굴러가는
다른 세상의 소리를 들었고 고집스런 침묵이 또아리를 풀고
나쁜 소문처럼 담을 넘어갔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지난 꽃잎들이 어둑어둑 떨어졌다
도약과 웅크림 이전에는 똑같은 머뭇거림이 있다
벌은 달콤한 것을 끝없이 탐하며 보이지 않는 곳마다 통증을 심었고
젖 몽우리가 잡히기 시작한 풋것들은 한 집안의 일대기를 열심히 외웠다
그날 밤 완전한 낙화를 위해 어떤 동작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덜 익은 꽈리는 뒤늦게 몸을 부풀렸고
끝까지 남아있던 푸른 가시는 둥근 것들을 골라 터뜨렸다
그때 우리는 처음 손을 맞잡고 까마득한 높이를 만들었다
사방팔방 흩어져 있던 꽃잎을 상처 하나 없이 너끈하게 뛰어 넘었다
아까시 꽃 피면
이영혜
아기분 하얀 향내 밀려온다
내게서 지워진 아이들이
조막손으로 바람을 부채질하고 있는 거다
움텄던 싹들 파내고 난 후
움푹 파인 구덩이에서 피어오르던
폐사지 흙냄새처럼 싸한 마취약 냄새
크지 않는 기억 속의 아이들
흰 젖을 몽글몽글 게워내며
아까시 나무 안에서
일 년 치의 안부를 날려보낸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손사래 치며
밀어 보내는 아릿한 전언
내 빈 둥지 가득히
아기분 잊혀진 냄새 차오른다
말과 꽃
이용임
녹스는 것들은
천국의 오후를 건너고
귀신의 혀는
지붕 위에 앉아
잃어버린 꿈을 꾼다
향은 바다를 건너고
손톱에 피는 건 색
병든 그늘에 앉아
너의 입술 속 산호처럼 자란
소리가 궁금했다
서정은 늘 무겁고
추락은 익숙한
꽃의 하늘을 이고
나의 말은 자취가 없다
발 없는 것들은
거품처럼 일어나고
너를 모르는 채
오래 궁금하기만 하다
꽃을 기다리며
이운진
이사 와서 첫봄, 낯선 풍경을 이겨보자고
땅을 파고 울타리를 엮어
바람과 일몰이 있는 꽃밭을 만들었다
채송화와 샐비어 꽃씨를 묻어놓고
모두가 살아난다면 나의 비좁은 꽃밭은 얼마나 낭자해질까
하루에도 여러 번 그늘 속을 열고 드나들었다
꽃씨의 숨결에 뜨거움을 주는 것이라면
빗소리나 노을의 뒤편까지 꽃밭에 보태주었는데
꽃밭은 가파른 적막만을 지키고 있었다
때가 되면 무슨 일도 없이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순서란 종교 같은 믿음인 줄 알았으나
꽃을 보는 일은 가담하지 않아도 되는 소문 같은 것인 줄 알았으나
아름다움을 욕망하지 않는 삶도 있구나
이 별에서 봄날의 형식을 거부할 수도 있구나
땅 위로 오는 바람과 땅 밑으로 오는 일몰을 모두 품은 뒤에
스스로 선택했을 저 씨앗의 고요 앞에서
나는 더 이상 꽃 피지 않는 물큰한 몸을 안으로 닫아걸고 조용히 합장하였다
만약 후일에라도 꽃이 나와서
그 향기가 내게 도착했을 땐
마알간 물방울 같은 질문도 없이 꽃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봄 뒤의 봄날이었다
당신은 꽃을 쓰세요 나는 시를 썰테니
이원형
잊을만하면 나타나곤 한다
시의 행간에 목 빼고 앉아 먼 산 바라보는 목련
그녀 흰 목덜미에 마음이 흥하여
꽃이나 보러 갈까 하는 당신의 유혹
따라나설까 하는 이 마음의 유흥
수국나라 수문장 같은 당신
꽃보다 유창한 헛꽃의 말인 줄 알지만
내 시에 쏟아 붓는 살가운 환대로 받아
시냇물처럼 졸졸 따라나서지
이꽃 저꽃 시를 쓰는 창가
당신은 또 벌처럼 징징거리지
암술과 수술이 그러하듯이
이 생에 한 번은 해봄직한 신방을 차리고
시의 웃자란 말을 다듬어주는 동안
당신은 꽃에 물을 주고 켰다 껐다 하고
꽃의 흐린 말에도 귀가 솔깃한 당신에게
책상 모서리처럼 지루한 시를 이해시키느라 하루가 터무니없고
내 시를 오해하느라 한 시간이 하루 같은 당신
나무가 꽃을 버린 건지 꽃이 나무를 떠난 건지 분분하지만
그들이 그러하듯이
그놈의 시 때문에
우리 헤어질까 하는 말 꺼내지도 못하네
당신은 꽃을 쓰세요 나는 시를 썰테니
누군가 내 마음을 적시네
이월하
누군가 내마음을 적시네
비내리는 풀밭처럼
소리없이 온 몸을 두드리며, 전율케하며
쓰러지고 쓰러지고 또 일어서게 하네
누군가 내마음을 적시네
장미꽃 붉은 꽃잎에 구르는 이슬로
날 물들게 하네
여름이 지나고 고요한 날이 오면
나는 그대에게 가겠네.
꽃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쓴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자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라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바리지 못할 약속(約束)이며!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민들레꽃
이은봉
농협창고 뒤편 후미진 고샅, 웬 낯빛 뽀얀 계집애 쪼그려 앉아, 오줌 누고 있다
이 계집애, 더러는 샛노랗게 웃기도 한다 연초록 치맛자락 펼쳐, 아랫도리 살짝 가린 채
왼편 둔덕 위에서는 살구꽃 꽃진 자리, 열매들 파랗게 크고 있다
눈 내려뜨면 낮은 둔덕 아래, 계집애의 엄니를 닮은 깨어진 사금파리 하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고.
패랭이꽃
이은봉
앉아 있어라
쪼그려 앉아서 피워 올리는, 보랏빛 설움이여
저기 저 다스운 산빛, 너로 하여, 네 아픈 젖가슴으로 하여, 한결 같아라
하나로 빛나고 있어라
보랏빛 이슬방울이여
눈물방울이여
언젠가는 황홀한 보석이여
앉아서 크는 너로 하여, 네 가난한 마음으로 하여, 서 있는 세상, 온통 환하여라
환하게 툭, 터지고 있어라
꽃의 적빈
이인철
색맹인 사랑 앞에서
너무 많은 색으로 맹세합니다
꽃의 동사는 균열
어지럼증을 앓습니다
핀다는 것은
마음 한쪽을 함몰시키는 일
내게 꽃이 되자는 말
찢긴 가슴을 어긋나게 겹치고 사는 일입니다
혼자 피는 것은 주름진 사제복을 입는 것
저무는 하늘은
누구를 사랑하여
기우는 쪽으로 붉게 짓이겨지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찢겨진 가슴, 가슴을 겹쳐서 꽃 피우는 일입니다
음악을 먹고 마시던 꽃들
이재무
화단에 핀 봄꽃들
햇살과 비와 바람이 피우기도 했지만요
갓 부임한 선생님 방과 후 교실에 남아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치는 피아노
소리가 피우기도 한다는 것을 아셨는지요
어둑한 복도를 걸어나와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내밀어오는,
깨꽃 봉숭아 사루비아 칸나 등속의
얼굴 촉촉이 젖은 손으로
만지고 더듬고 두드리던 피아노 소나타
그렇게 한 식경쯤 낮고 높고 짧고
길게 선율의 물 뿌리고 나면
제 세상 만난 듯 생기발랄한 꽃들
깔깔깔 웃는 소리 하늘에 가 닿았지요
봄 소녀들 한 열흘 그렇게
음표 먹고 마시며 놀다
왔던 봄비 따라가고 나면 피아노 소나타
턱없이 높아지거나 낮아지기 일쑤였지요
아이들은 왜 갑자기 숙제가 많아졌는지
그 까닭을 끝내 몰랐지요
갈대꽃
이정록
하늘을 자꾸 올려다보니께
하늘 좀 그만 쳐다보라고 허리가 꼬부라지는 거여.
하느님도 주름살 보기가 민망할 거 아니냐?
요즘엔 양말이 핑핑 돌아가야.
고무줄 팽팽한 놈으로 몇 족 사와야겄다.
양말 바닥이 발등에 올라타서는
반들반들 하늘을 우러른다는 건,
세상길 그만 하직하고 하늘길 걸으란 뜻 아니겄냐?
갈 때 되면, 입 꼬리에도 발바닥에도
저승길인 양 갈대꽃이 허옇게 피야.
꽃잎의 사랑
이정하
내가 왜 몰랐던가,
당신이 다가와 터뜨려 주기 전까지는
꽃잎 하나도 열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이 가져가기 전까지는
내게 있던 건 사랑이 아니니
내 안에 있어서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니
아아 왜 몰랐던가,
당신이 와서야 비로소 만개할 수 있는 것,
주지 못해 고통스러운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꽃잎
이정하
그대를 영원히 간직하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은
어쩌면 그대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쓸데없는 집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그 마음마저 버려야
비로소 그대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음을..
사랑은 그대를 내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훌훌 털어 버리는 것임을..
오늘 아침 맑게 피어나는 채송화 꽃잎을 보고
나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꽃잎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햇살을 받치고 떠 있는 자줏빛 모양새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 씨앞을 잉태하는,
그리하여 씨앗이 영글면 훌훌 자신을 털어 버리는
그 헌신 때문이 아닐까요?
녹꽃
이정훈
내가 살았지
여덟 시간은 농부가 되고
여덟 시간은 시인이 되고 여덟 시간은 잠을 자는 나라
오늘은 삼일 치 잠을 몰아 아홉 시간어치 눈곱을 뗀다
자고 있는 동안에도 분주한 내 살 내 뼈
검붉게 부푼 프레임이 새로 반짝이는 꿈
햇살과 바람은 선동한다 오후를 어깨와 힘줄을
쇠와 쇠가 부딪힐 때 깡, 우는 건 머리와 심장
망치와 정을 움켜쥔 손바닥은 내 것인가
비린내 몰고 오는 통증이 내 것인가
모든 불온함이 주저앉고 물기는 날아가
산화하는 것들이 만발한다 봄날
철판은 버티고 정 끝은 녹을 파고든다
이놈은 더 싸워볼 생각이 없는 게로군,
실핏줄 터진 눈알은 철판 속 구멍을 짚어본다
녹으로 버티는 두께
한 번 더 내리치면 남는 것은 구멍이다
앉아서 하늘이 보이고 숙여서 땅을 보게 만드는
우린 지는 것일까 피는 것일까
결국 어느 편도 아닐 것이다
하늘은 하늘 높은 줄 몰라 꽃들은 꽃놀이 가지 않아
버티고 버티자
공단 3길 아스팔트 위 수북한 녹 꽃
꽃말을 혼자 지어 부르며
꽃과 재
이제니
여기저기에 꽃이 있었다
여기저기에 내가 있었다
너는 꽃을 뒤집어쓰고 죽어버렸다
붉고 환한 것들은 오로지 재
느리게 소용돌이치며 구름의 재
어둠 속에 어둠이 있었다
불타오른 자리는 희고 맑았다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쓸쓸한 사람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흔적은 도처에 있었다
꽃은 가지 끝에서 피어올랐다
꽃은 그림자들의 재
재는 그림자들의 꽃
감은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보이는 대로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뒤를 돌아본다 뒤를 돌아본다
꽃잎 위로 회색이 내려앉고 있었다
차가운 물에 천천히 얼굴을 묻었다
몸꽃
이종암
오어사 뒷마당 배배 뒤틀린 굵은 배롱나무
뇌성마비 1급 지체장애자
영호 형님 작은아들 차근우 같다
말도 몸도 자꾸 안으로 말려들어
겨우 한마디씩 내던지는 말과 몸짓으로
차가운 세상 길 뚫고 나가
뜨거운 꽃송이 활활 피워 올리는 나무
푸른 대나무가
온몸의 힘 끌어 모아 겨우 만든 마디
촘촘한 마디의 힘으로 태풍을 견디듯
자꾸만 뒤틀리고 꺾이는 몸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형극의 몸으로
수도 없이 들어올린 역기로 다져진
팔뚝 근육, 차근우
시꺼먼 가슴 뜯어 길을 만들었다
부족한 몸뚱어리 빚고 또 빚어
제 집 한 채 거뜬히 세운
세상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몸꽃
꽃보자기
이준관
어머니가 보자기에 나물을 싸서 보내왔다
남녘엔 봄이 왔다고.
머리를 땋아주시듯 곱게 묶은
보자기의 매듭을 풀자
아지랑이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남녘 양지바른 꽃나무에는
벌써 어머니의 젖망울처럼
꽃망울이 맺혔겠다.
바람 속에선 비릿한 소똥 냄새 풍기고
송아지는 음메 울고 있겠다.
어머니가 싸서 보낸 보자기를
가만히 어루만져 본다.
식구들의 밥이 식을까봐
밥주발을 꼭 품고 있던 밥보자기며,
빗속에서 책이 젖을까봐
책을 꼭 껴안고 있던 책보자기며,
명절날 인절미를 싸서
집집마다 돌리던 떡보자기며,
그러고 보면 봄도 어머니가
보자기에 싸서 보냈나 보다.
민들레 꽃다지 봄까치풀꽃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꽃 보자기에 싸서.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이준관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내가 송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녔을 때
푸른 들판이 내 집이었지.
내가 잠자리처럼 은빛 날개를 가졌을 때
파란 하늘이 내 집이었지.
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 준 집은 차암 많았지.
사람의 꽃이 되고 싶다
이채
그대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다 해도 서로의 꽃이 될 수 있을까
꽃집으로 들어설 때의 설레임과
한 아름 꽃을 안고 집으로 오는 동안
한 잎 한 잎 고운 향기 맡으며
상큼한 웃음 감추지 못하던 그 표정으로
나는 그대에게 어떤 꽃으로 기억되고 싶은 걸까
발을 밟은 그대라면
어깨를 부딪친 그대라면
길을 묻는 그대라면
서로의 이름은 몰라도 은은한 들꽃 같은 향기로
미소가 예쁜 친절한 꽃으로
사슴의 눈망울을 닮은 착한 꽃으로 기억되고 싶은 걸까
저마다 뜰은 있어도 가꾸지 않고
꽃병은 있어도 꽃이 없는 창가에서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본다 한들
시끄러운 귀로는 물소리를 들을 수 없고
불만의 목소리로 백조의 노래를 부를 수 없으며
비우지 못한 욕심으로 어떻게 새들의 자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부족함 속에서도 늘 감사하는 행복의 꽃
작은 것에서도 소중함을 느끼는 기쁨의 꽃
누구에게나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꽃
사막에서도 물을 길어 올리는 지혜의 꽃
사람의 뜰에는 만 가지 마음의 꽃이 있어도
어느 꽃도 피우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게
중년의 꽃
이채
나도 한때는 청춘의 장미였다
촉촉이 물오른 가지마다
여린 가시가 돋친 싱그런 빨간 장미
바람도 내 곁을 지날 때는 조심스러웠지
이제는 중년의 꽃으로 살고 싶다
아침 햇살에 감사하며
저녁 휴식에 또 감사하며
하늘 아래, 땅으로 사는 낮은 마음으로
욕심 없는 소박한 삶의 꽃을 피우고 싶다
봄이 겨울보다 짧은 이유와
꽃이 피고 지는 자연의 이치에
더욱 고요히 흐르는 물소리로
내 인생의 사계절을 걸어가야 하리
조용히 눈을 감고
내 안의 종소리에 귀 기울이며
겉보기의 화려함보다
참 고운 인연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내면의 편안함을 지닐 수 있다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그럴 수 있어' 라고 고개를 끄덕일 때
나의 다름도 이해받을 수 있으리
살아가면서
용서할 수 없는 일 또한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자신을 학대하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으며
나쁜 기억을 오래 간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는 것을
누구를 미워하기보다
아름다운 용서의 길을 선택한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가장 진실한 꽃으로 피는 것이라고
장미가 아름다운 공원을 거닐며
젊은 날의 추억에 젖어보는 것도
살아 있으므로 가능하지 않은가
바람이 흔들면 흔들려 주리라
비가 오면 젖어 주리라
바람 없고 비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풀꽃의 노래
이해인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아
바람이 날 데려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하고 싶은 모든 말들
아껴둘 때마다
씨앗으로 영그는 소리를 듣지
너무 작게 숨어 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니야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는 법을
노래하는 법을
오래전부터
바람에게 배웠기에
기쁘게 살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이기에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꽃 편지
이해인
해마다 너의 편지는
꽃으로 말을 건네는 꽃 편지
봄에는 진달래 여름엔 장미
가을엔 코스모스
철 따라 꽃잎을 붙여
내게 내온 네 편지를 읽으면
네 고운 마음과 함께 글씨도
꽃으로 피어났지
네 얼굴 네 목소리
꽃 위에서 흔들리고
네가 보고 싶은 나는
마른 꽃잎 향기에
가만히 입 맞추고
끝나는 게 싫어서
일부러 천천히 읽는
네 편지는 꽃 마음으로
사랑을 전하는 꽃 편지
꽃 멀미
이해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나는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
꽃밭에 서면
이해인
꽃밭에 서면 큰 소리로 꽈리를 불고 싶다
피리를 불 듯이
순결한 마음으로
꽈리 속의 잘디잔 씨알처럼
내 가슴에 가득 찬 근심 걱정
후련히 쏟아 내며
꽈리를 불고 싶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동그란 마음으로
꽃밭에 서면
저녁노을 바라보며
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고 싶다
남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받고 싶다
꽃샘바람
이해인
속으론 나를 좋아하면서도
만나면 짐짓 모른채하던
어느 옛친구를 닮았네
꽃을 피우기 위해선
쌀쌀한 냉랭함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며서
얄밉도록 오래 부는
눈매 고운 꽃샘바람
나는 갑자기
아프고 싶다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
이해인
내가 심은 꽃씨가
처음으로 꽃을 피우던 날의
그 고운 설레임으로
며칠을 앓고 난 후
창문을 열고
푸른하늘을 바라볼 때의
그 눈부신 감동으로
비 온 뒤의 햇빛속에
나무들이 들려주는
그 깨끗한 목소리로
별 것 아닌 일로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던
친구와 오랜만의 화해한 후의
그 티없는 웃음으로
나는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못견디게 힘든 때에도
다시 기뻐하고
다시 시작하여
끝내는 꽃씨를 닮은 마침표 찍힌
한 통의 아름다운 편지로
매일을 살고 싶다
꽃 이야기하는 동안은
이해인
꽃 이야기하는 동안은
우리 모두
꽃이 됩니다.
어려운 시절에도
꽃 이야기하는 동안은
작은 평화
작은 위로
살며시 피어납니다.
"벌써 꽃이 피고 있어요"
밝게 말하는 이의 목소리에도
꽃향기 묻어나고
"이젠 꽃이 지고 있어요"
밝게 말하는 이의 목소리에도
꽃향기 묻어나고
"이젠 꽃이 지고 있어요"
슬프게 말하는 이의 목소리에도
꽃향기 묻어나고
꽃 이야기하는 동안은
누구도 남의 흉을 보지 않네요.
죄를 짓지 않네요
꽃 이름 외우듯이
이해인
우리 산
우리 들에 피는 꽃
꽃 이름 알아가는 기쁨으로
새해, 새날을 시작하자
회리바람꽃, 초롱꽃, 돌꽃, 벌깨덩굴꽃
큰바늘꽃, 구름채꽃, 바위솔, 모싯대
족두리풀, 오이풀, 까치수염, 솔나리
외우다 보면
웃음으로 꽃물이 드는
정든 모국어
꽃 이름 외우듯이
새봄을 시작하자
꽃 이름 외우듯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 주는 즐거움으로
우리의 첫 만남을 시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먼 데서도 날아오는 꽃향기처럼
봄바람 타고
어디든지 희망을 실어 나르는
향기가 되자
라벤더꽃이 필 때
이형권
보랏빛은 슬픈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꽃밭에 가면 마음이 들뜨기 마련이지만
보랏빛 라벤더밭에 가면
발길이 멈춰지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아련한 기억 속의 바람 한 줄기가 살아나
가슴 한 곳을 스치고 간다
나의 생은 어느 길목을 지나가는 것일까
아침에 또 한 사람의 부고가 날아왔다
그의 향기는 라벤더꽃처럼 깊고 슬펐지만
소멸은 무정하고 냉정한 법
잠시 피었다 지는 꽃처럼 잊힐 것이다
2천 미터의 고봉이 펼쳐지는 설산에 가면
한 철을 짧게 살다 가는 꽃들의 나라가 있다
시린 눈송이들이 후드득 떨어지고
홍적기의 밤처럼 무거운 침묵이 흐를 때
그 시간의 파문을 견디며 살아난 꽃들이
축일을 열고 어여쁜 노래를 부른다
생은 눈부시게 피었다가 소멸하는 꽃들과 같으리라
낙화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꽃에 묶인 왼손이 아니었다면
이혜미
왜 꽃다발 속 꽃들은 서먹해 보일까
한 손에 꽃
다른 한 손엔 칼을 들고 걸었어
최소한의 날카로움으로
심장의 안팎을 알기 위해
소중하다 말하면
다가와 아름다운 자리가 될 줄 알았지
생일 초의 은박지
잘못 다린 옷의 반짝임
꿰맨 자리의
미지근한 흰빛이 되어
스미고 싶었지 비루하지만 확실한
흉의 임자로
돌아서는 순간 돌변하는 사람처럼
전화를 끊으며 차가워지는 표정처럼
낯빛부터 시드는 것들이 있어서
꽃을 든 손은 무용한 손 무력한 손
떠나간 깃털들 헛되이
손바닥에서 부스러지고
젖은 발끝이 흐릿해질 때
저물어갈 것을 몰랐지 썩은 뿌리에 마른 꽃잎을 달고
내치지도 못할 마음이 될 줄은
풀려가는 리본을 고쳐 매면
견고해지는 옥죄임의 둘레
새벽 꽃
이혜미
당신 손금 가득 꽃 피우고 왔다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나는 황망히 시들었는데, 서둘러 빠져나온 새벽 거리에 덜 풀린 멍처럼 하늘이 맺혀있었다 아직도 켜져 있는 가로등을 덥썩 베어 무는 어둠이 보여. 밤새도록 무섬증에 떨었을 불어터진 별들도 오늘만은, 매몰찬 愛人처럼 나를 황홀하게 하네
세상의 모든 골목들이 수군대며 길을 비켜주고 둘러보니 새벽의 거리에는 모두 도망치는 여자들뿐이었다 매일마다 탈옥과 투옥을 반복하는 장기수長期囚인 태양 ― 곧이어 이륙할 거대한 심장이 금 간 유리처럼 부서지기 전에 어서 돌아와, 내가 나를 이 세상에 몽땅 풀어놓기 전에, 돌아와 오래 말라붙은 새벽이 다시 우릴 찾기 전에
도망가야 할 것들은 도망가지 않고, 눈 마주치지 않으려 돌아온 길목에서 도망 중인 여자들의 아름다운 치욕과 자주 부딪혔다. 그럴 때마다 서로를 눈치 채고, 그렇게 새벽을 눈치 챈 여자들
숨죽인 하이힐 소리 따라
가도 가도 얼룩진 꽃길뿐이어서,
새벽이 시들기 전에
또각또각, 다시 꽃 피우러 간다
첫 꽃
이화은
속곳에 첫 꽃잎이 내려앉던 날
어머니의 얼굴이 왜 그리 슬펐던지
이제부터 여자다
첫 빨래 물을 골판지 위로 버리면서
부디 한 달씩 걸러라
다시 생각하면
골판지 요철처럼 한 달은 여자를 쉬고
한 달만 여자로 살라는 말씀인데
어머니의 부적은 효험이 없었는지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나는
앵두꽃을 낳았네 앵두꽃을 낳느라
아픈 배를 움켜쥐고 네 방구석을 헤매었네
몸속에서 마지막 여자가 빠져나가고
여자가 살던 빈방에 앉아
어머니의 슬픈 얼굴을 생각하네
어머니의 슬픔을 해독하느라 평생이 걸렸네
너는 딸이 없어서 외로워서 어쩌니
당신의 딸인 내가 당신 외로움의 꽃이라는 거
이미 다 아는데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데
우리는 서로 모른 척 앵두꽃 탓만 하였네
두 여자의 인질이 되어
수천 여자의 외로움이 되어 어디선가
화들짝 놀란 듯이 앵두꽃 또 피고 있겠지
그대의 눈동자는 푸른 연꽃잎화
인도의 고시(古詩)
그대의 눈동자는 푸른 연꽃잎
그대의 치아는 하얀 말리꽃
향기로운 연꽃 내음 그대에게서 난다
그 몸도 꽃잎처럼 휘날리련만
낮으로 사모하고 사모하여도
돌과 같이 단단한 그대의 마음
꽃피는 스티로폼
임경묵
봄바람은 불고
벚꽃은 흩날리고
스티로폼 조각은 골목을 굴러간다
피자 배달 오토바이가
스티로폼 조각을 툭 치고
골목 속으로 사라진다
떨어져 나간 스티로폼 한 귀퉁이가
골목을 굴러간다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스티로폼 조각도
핑그르르 돌다가
골목을 굴러간다
피자 배달을 마치고 골목을 나오던 오토바이가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스티로폼 조각을
다시 정면으로 밟고 지나간다
스티로폼이 파삭 부서진다
그 속에서
스티로폼 흰 알갱이들이 무수히 태어난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오토바이 뒤를
좋다고 따라가는
스티로폼 흰 알갱이들……
봄바람은 불고
벚꽃은 흩날리고
스티로폼 흰 알갱이들이
일제히 과속방지턱을 통통통 뛰어넘어
골목 밖으로 굴러간다.
꽃밭에는 꽃들이
임경섭
언젠가 피어 있었다
블라인드 로프를
한번씩 당길 때마다
몸을 부풀리는 볕
볕과 함께 밖은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잡초 무성한 화단
가운데 꽂혀 있는 어린 모과나무
가지가 흔들리면 거기
바람이 꼭 그만큼 지나가고 있었고
지나간 것들을 향한 손짓이
앙상하게 흔들리며 안으로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손짓은 방향을 잃고
가야 할 때와 와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했다
어린 모과나무 그림자만
방향을 잃지 않고 꼿꼿이
꽃 없는 화단 너머
공터 쪽으로 누워 있었다
공터 위로는 허공이 가득했다
블라인드 로프를
다 잡아당기자 더 이상
몸을 부풀리지 못하는 볕
볕을 따라 공터는
어느새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밖을 들여놓은 안은
밖으로 가득 찼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봄꽃을 보며
임은숙
고운 모습 보이다
금세 사라지는 봄꽃처럼
내 사랑도 피었다
바로 스러질까
못내 두렵다
가고 오는 세월
오고 가는 인연
봄꽃 같은 추억이라면
나의 봄은 마냥 슬픔이겠지
누가 떨어뜨린
눈물 한 방울
슬픈 듯 은은한 향기 속에
봄꽃을 보며
나, 봄을 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