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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1957~ )

가리봉 시장

가만히 건너간다

가만히 두 손 모아

가벼워지자

가을볕

감동을 위하여

강철 새잎

강철은 따로 없다

거룩한 사랑

거목의 최후

겨울날의 희망

겨울 더 깊어라

겨울 사랑

겨울이 꽃핀다

겨울이 온다

경계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고난은 자랑이 아니다

공은 둥글다

굽이 돌아가는 길

그 겨울의 시

그냥 그대로인 네게서

그냥 내려 오니라

그대 나 죽거든

그대 속의 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그리운 사람

그리운 컨닝

그리움

그 사람도 그랬습니다

그 산이 나를 키웠네

그 약속이 나를 지켰다

그 여자의 바구니

그해 겨울나무

긴 호흡

길이 끝나면

길 잃은 날의 지혜

김밥 싸야지요

꼬막

꽃내림

꽃씨가 난다

꽃은 달려가지 않는다

꽃 피는 말

꿈을 모두 함께 나눈다면

꿈의 진리

나눔과 성장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

나는 순수한가

나는 왜 이리 여자가 그리운가

나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젖은 나무

나는 피어나고 싶다

나 다음 생애는

나도 어머니처럼

나무가 그랬다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낙엽을 쓸며

날들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날 설명해 봐

내가 걷는 이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내 마음 그대 마음

내 삶 속의 삶

내 안의 아버지

너의 하늘을 보아

넌 나처럼 살지 말아라

노거수(老巨樹)

노동의 새벽

누구라도 그 누구라도

눈물의 김밥

다시

다 아는 이야기

닭갈비

대결

도토리 두 알

동그란 길로 가다

두 여자가 누구게요

등 뒤를 돌아보자

때늦은 나이

떠오른 별들을 보지 못하고

떨림

레닌의 발견

마지막 시

맑은 눈

맑은 눈의 메아리

머릿띠를 묶으며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은 왜 슬픈가

멈출 수 없지

모과 향기

목적지가 가까워 올수록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

몸의 진리

몸 하나의 희망

못생긴 덕분에

무지개

민들레처럼

민중의 나라

바겐세일

바그다드의 봄

바람이 돌더러

바람 잘 날 없어라

발바닥 사랑

밤나무 아래서

밥을 찾아

방 구하러 가는 길

배포자의 꿈

뱃속이 환한 사람

벌레 먹은 희망으로

별에 기대어

별은 너에게로

부모로서 해 줄 단 세 가지

붉은 스카프

비출 듯 가린다

빙산처럼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크는가

사랑

사랑은 끝이 없다네

사랑은 발바닥이다

사랑의 적

사랑의 침묵

사형집행일

산에서 나와야 산이 보인다

살구나무꽃이 필 때

살아서 돌아온 자

살아온 시간들이 떨린다

삶의 시작

삶의 신비

삶이 불타고 있다

삼청교육대

상처가 희망이다

상처의 문

새벽 강에서

새벽 별

서로가 길이 되어가는 것

서성인다

선한 영향력이 있으니

성호를 긋는다

세기말 성자의 기도

셋 나눔의 희망

소걸음의 때

소중한 일부터

손 무덤

손을 내어 뻗는다

손을 펴라

쉬는 것이 일이다

시다의 꿈

신혼일기

아름다운 고백

아름다운 등불

아름다운 사람은 이렇게 그 자체로

아름다운 성공

아빠의 향기

아직과 이미 사이

아픈 벗에게

아픔의 뿌리

어둠 깊은 눈

어디로 갈거나

어떤 밥상인가

어떻게 사느냐고 묻거든

어머니

어머니가 그랬다

어머니의 첫 승리

얼마짜리지

여행은 혼자 떠나라

연꽃 뿌리

연필로 생(生)을 쓴다

오늘은 다르게

오늘은 동지(冬至)날

오늘처럼만 사랑하자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오래된 친구

용서받지 못한 자

우리는 간다 조국의 품으로

우리 함께 걷고 있다

월요일 아침

의지하지 마라

이 닦는 일 하나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이불을 꿰매면서

이스탄불의 어린 사제

인간의 기본

입춘(立春)이면

잎으로 살리라

자꾸 만지고 싶네

작아지자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장벽

저 아이가

절정의 시

정글의 법칙

젖은 등산화

조건

죽창을 세워들고

준비 없는 희망

줄 끊어진 연

지금 할 일

지나침

지문을 부른다

진달래

진정한 강함

진짜 노동자

참혹한 사랑

천생연분

첫 마음

첫 마음을 가졌는가

첫 마음의 길

촛불의 광화문

추모시(노무현 대통령 서거)

침묵이 말을 한다

키 큰 나무 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통박

투쟁과 묵상

투혼의 기도

패배 메시지

포장마차

풍경

하늘

학자의 걸음

한강

한계선

한 밥상에

해거리

행복은 비교를 모른다

허깨비

회향

흰 모래밭

휩쓸어라

3단

300년

 

 

 

가리봉 시장

박노해

 

가리봉 시장에 밤이 깊으면

가게마다 내걸어 놓은 백열전등 불빛 아래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마다

따스한 열기가 오른다

 

긴 노동 속에 갇혀 있던

우리는 자유로운 새가 되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깔깔거리고

껀수 찾는 어깨들도 뿌리 뽑힌 전과자도

몸부벼 살아가는 술집 여자들도

눈을 빛내며 열이 오른다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가리봉 시장을 찾아

친한 친구랑 떡볶기 500원어치, 김밥 한 접시,

기분나면 살짜기 생맥주 한잔이면

스테이크 잡수시는 사장님 배만큼 든든하고

천오백 원짜리 티샤쓰 색깔만 고우면

친구들은 환한 내 얼굴이 귀티난다고 한다

 

하루 14시간

손발이 퉁퉁 붓도록

유명브랜드 비싼 옷을 만들어도

고급 오디오 조립을 해도

우리 몫은 없어,

우리 손으로 만들고도 엄두도 못 내

가리봉 시장으로 몰려와

하청공장에서 막 뽑아낸 싸구려 상품을

눈부시게 구경하며

이번 달엔 큰맘 먹고 물색 원피스나

한 벌 사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앞판 시다 명지는 이번 월급 타면

켄터키치킨 한 접시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고

마무리 때리는 정이는 2,800원짜리

이쁜 샌달 하나 보아둔 게 있다며

잔업 없는 날 시장 가자고 손을 꼽는다

 

가리봉 시장에 밤이 익으면,

피가 마르게 온 정성으로

만든 제품을

화려한 백화점으로,

물 건너 코큰 나라로 보내고 난

허기지고 지친

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

싸구려 상품을 샘나게 찍어 두며

300원어치 순대 한 접시로 허기를 달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귀가길로

발길을 돌린다

 

 

 

가만히 건너간다

박노해

 

가을볕이 좋은 공원에

휠체어를 탄 창백한 할아버지와

유모차를 탄 뽀이얀 손녀가

나란히 나란히 굴러간다

낙엽은 보도블럭 위를 굴러가고

구름은 푸른 하늘을 흘러가고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가 벙그레

유모차를 탄 손녀에게 마른 손을 내밀어

말랑한 볼을 쓰다듬는다

고사리손이 앙상한 손을 꼬옥 잡는다

한 생의 가을 햇살이

또 한 생의 봄 햇살로

가만히 건너간다

 

 

 

가만히 두 손 모아

박노해

 

집 없이 추운 이여

예수님도 집이 없었습니다

 

노동에 지친 이여

예수님도 괴로운 노동자였습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이여

예수님도 자기 땅에서 배척당했습니다

 

배신에 떠는 이여

예수님도 마지막 날 친구 하나 없었습니다

 

패배에 절망하는 이여

예수님도 영원한 현실 패배자였습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피투성이로 품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자신의 패배와 죽음까지를 끌어안고

그것을 살아냄으로써 부활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당신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 세상 힘없고 작은 사람 중의 하나인

당신 속에 하느님이 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벼워지자

박노해

 

겨우내 몸이 무거워졌나 봅니다

마음이 공부 욕심을 내다 보니 몸속에 쌓인 게 많은 거겠지요

설맞이 단식을 준비하느라 징역 보따리 풀어 정리하는데

세월과 함께 늘어나는 짐들이 말 그대로 짐스러울 뿐입니다

조금만 더 불편하고 더 춥고 손발 부지런히 놀리면 되는걸

가진 물건들이 자꾸 늘어만 갑니다

 

맨몸으로 세상에 와서 몸 하나로 사랑하고 투쟁하다

맨몸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언젠가는 맨몸으로 다시 돌아가

세상에 나 살았다는 흔적을 되도록이면 적게 남기고

바람처럼 꽃잎처럼 가뿐히 떠다는 것인데

 

갈수록 무거워집니다

너나없이 쫓기듯 뛰어들어 무섭게들 잘 살고 많이 벌고

번잡하고 사나워진 세상에서 사는 게 죄이고 짐덩이입니다

나부터 덜 가지고 덜 망치면서 짐을 줄여 짐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나이 들수록 더 작게, 더 맑게, 더 단순하게, 가벼워져야겠습니다

한 마리 학처럼 훨훨

가벼워져 떠나가야겠습니다

 

 

 

가을볕

박노해

 

흙 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며 눈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 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감동을 위하여

박노해

 

아침과 봄에 얼마나 감동하는가에 따라 당신의 건강을 체크하라

당신 속에 자연의 깨어남에 대해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른 아침 산책의 기대로 마음이 설레어 잠에서 떨쳐 일어나지 않는다면,

첫 파랑새의 지저귐이 전율을 일으키지 않는다면-눈치채라

당신의 봄과 아침은 이미 지나가버렸음을

--헨리 데이빗 소로우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오늘 떠오르는 해는 오늘의 해입니다

이 세상에 같은 것은 두번 되풀이 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은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지구는 단지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는 끊임없이 확장하며 순환하고 있습니다

태양도 지구도 이동하는 공간 속에서 운동하고 있기에 시간이 생겨나고

시간 속의 모든 사물은 날마다 변화하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은 나날이 처음 열리는 새로운 날들이고

그 자체의 새로운 생각과 말과 행동과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단지 무디고 퇴화된 사고와 감성에 안주하는 사람만이

이 새로운 하루하루를 감동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음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큰 감사와 은총인지를

나는 몇 번씩 죽음 앞에 세워지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한 밥상에서 밥 먹는다는 게 얼마나 큰 자유인지 아십니까?

마냥 걸을 수 있고, 산을 오를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알몸을 만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아십니까?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지금 자기가 얼마나 큰 보배를 갖고 있는지 모른 채,

그것을 즐기지도 못한 채,

봄을 찾는다고 천리만리 밖으로 떠도는 사람과 같습니다

봄은 이미 자기 집 울타리에 개나리꽃으로 살구꽃으로 피어 있는데

 

당신이 무감동하게 듣는 새소리를 듣고

"저 소리가 새소리라는 건가요? 참 듣기 좋으네요

저는 오늘 새소리를

처음 들어요"라고 감동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40세가 되도록 가난한 집 골방에 누워 있다가

'장애인 물놀이'에 나온 분이었어요

 

침침한 관 속 같은 좁은 제 독방을 저는

<감은암(感恩庵)>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살아 있음의 감사와 은총'이라는 뜻이지요

비록 무기징역에 침묵하며 정진하는 처절한 겨울삶이지만

살아 있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요한 기쁨인지,

얼마나 큰 감사와 은총인지 모릅니다

하루하루가 감동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나쁜 습성입니다

둔감하고 안이하게 그저 흘러가는 생활입니다

나날의 무의미하고 반복되는 일상생활만큼 인간을 무디게 하고

감각기관과 정신과 감수성을 퇴화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두려워하십시오 쓰지 않는 감각기관은 퇴화하고 맙니다

인간의 코는 수천 가지 냄새를 구분할 수 있지만

도시 문명 생활을 하면서 그 기능을 쓰지 않아

지금은 수십 가지 냄새밖에 맡지 못하도록 퇴화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얼굴 표정을 관장하는 근육은 80종류나 되고 그것이 각각

무수한 조합을 만들어 무려7천 가지 표정을 짓는답니다

지금 당신은 몇 가지 표정으로 살아가십니까?

무엇이든 쓰면 쓸수록 진화하고 쓰지 않으면 퇴화하고 맙니다

 

항상 노래를 부르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항상 춤추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항상 웃음을 띄우십시오

항상 귀를 크게 열어놓으시고

칭찬을 해드리십시오

손으로 어루만져 드리십시오

항상 새로운 것을 찾으십시오

아름다운 것을 찾아 즐기십시오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창조력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의 영적 성장이 멈춰버린 사람입니다

감동을 잃어버리고 생기와 신명이 없는 사람은 미래가 없습니다

정치적 견해나 말로는 진보라고 하더라도 감성과 도덕과 생활 문화가

봉건성에 젖어 보수화하고 퇴보하는 사람입니다

 

온몸과 마음과 정성으로 열심히 감동하십시오 감동을 나누십시오

리더십의 핵심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능력입니다

감동을 잃어버렸다면 감동도 학습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항상 감동에 젖어들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의 안테나를 예민하게 닦으십시오

 

 

 

강철 새잎

박노해

 

 

저거 봐라 새잎 돋는다

아가 손 마냥 고물고물 잼잼

봄볕에 가느란 눈 부비며

새록새록 고목에 새순 돋는다

 

하 연둣빛 새 이파리

네가 바로 강철이다

엄혹한 겨울도 두터운 껍질도

제힘으로 뚫었으니 보드라움도 이겼으니

 

썩어가는 것들 크게 썩은 위에서

분노처럼 불끈불끈 새싹 돋는구나

부드러운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하게

오 눈부신 강철 새잎

 

 

 

강철은 따로 없다

박노해

 

 

우리 모두는 무쇠 같은 존재

무르지 않고 굽지 않는

강철은 따로 없다

온몸으로 부딪히고 담금질당하면

무쇠가 빛나는 강철이 된다

강철의 모습을 보았는가

그는 적개심으로 핏발선 투사의 얼굴이 아니다

열광으로 들떠 있는 쇳소리가 아니다

투쟁의 용광로에서 다듬어지고 무르익은

부드럽고 넉넉하게 열려진 가슴

적과 철저하게 투쟁할수록

안으로 텅비어 맑고 옹혼한 종울림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강인한 포옹이다

강철은 따로 없다

작은 싸움도 온몸의 열의로 부딪혀가며

큰 싸움, 빛나는 길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무쇠 같은 존재,

강철은 따로 없다

 

 

 

거룩한 사랑

박노해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서울서 고학하던 형님이 허약해져 내려오면

어머님은 애지중지 길러온 암탉을 잡으셨다

성호를 그은 뒤 손수 닭 모가지를 비틀고

칼로 피를 묻혀가며 맛난 닭죽을 끓이셨다.

나는 칼질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떨면서 침을 꼴깍이면서 그 살생을 지켜보았다.

 

서울 달동네 단칸방 시절에

우리는 김치를 담가 먹을 여유가 없었다

막일 다녀오신 어머님은 지친 그 몸으로 시장에 나가 잠깐

야채를 다듬어 주고

시래깃감을 얻어와 김치를 담고 국을 끊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퍼런 배추 겉잎으로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 김치와 국을 맛본 적이 없다.

나는 어머님의 삶에서 눈물로 배웠다.

사랑은

자기 손으로 피을 묻혀 보살펴야 한다는 걸

사랑은

가진 것이 없다고 무능해서는 안 된다는 걸

사랑은

자신의 피와 능과 눈물만큼 거룩한 거라는 걸

 

 

 

거목의 최후

박노해

 

바람 부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고 있었다.

 

한 생의 사명을 다한 거인이

엷은 미소를 짓고 떠나가듯

천천히 대지를 향해 눕고 있었다.

 

성냥개비보다 작은 몸으로 태어나

수만배가 넘게 몸을 키워온 나무가

그보다 수만배가 넘는 푸른 숨결을

묵묵히 지상에 바쳐준 저 나무가

이제 세상쯤은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

수직에서 수평으로 쓰러지며

장엄한 한 생을 뉘이고 있었다.

 

그가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부러지고 흔들리며 서 있던 자리에는

문득 공간이 환하게 열리고

그 텅 빈 고요와 쓸쓸함 사이로

정오의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시린 하늘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겨울날의 희망

박노해

 

따듯한 사람이 좋다면

우리 겨울 마음을 가질 일이다.

 

꽃피는 얼굴이 좋다면

우리 겨울 침묵을 가질 일이다

 

빛나는 날들이 좋다면

우리 겨울 밤들을 가질 일이다

 

눈보라처럼 매섭고

겨울 나무처럼 벌거벗은

가난한 겨울 마음을 가질 일이다

 

우리 희망은, 긴 겨울 추위에 얼면서

얼어붙은 심장에 뜨거운 피가 돌고

얼어붙은 뿌리에 푸른 불길이 살아나는 것

 

우리 겨울 마음을 가질 일이다

우리 겨울 희망을 품을 일이다

 

 

 

겨울 더 깊어라

박노해

 

겨울 새벽

냉수마찰 중인

문득 만져진

내 여윈 어깨죽지

날이 갈수록

붉고 푸르다

검은 피멍이다

 

고된 벽 속의

묵언 정진 길

서둘지 말고 쉬지도 말라

쫓기는 삶 돌이켜 쫓아라

서슬 푸르게 후려치던

내 마음의 준비 자욱들

 

검게 굳어진 살 넘어

언 땅 깊이

검고 굳은 씨앗들의

뜨거운 떨림돌 떨림돌

 

겨울 더 깊어라

 

 

 

겨울 사랑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겨울이 꽃핀다

박노해

 

해 뜨는 아침 마당에

산벚나무꽃이 핀다

 

조용히 토옥 토옥 토옥

꽃망울 터뜨린다

 

눈부셔라 눈물 나라

저 꽃잎 속의 숨은 얼굴

 

그래 지난겨울이 꽃핀다

어둠 속 뿌리가 환히 꽃핀다

 

 

 

겨울이 온다

박노해

 

와수수

가랑잎 쓰는 바람에

삭발한 머리 쳐드니

하늘은 저만큼 높아져 있다.

나는 이만큼 낮아져 있는데

 

시린 하늘 흰 구름은

옥담 질러 사라지고

나는 컴컴한 독방으로 사라지고

 

맑은 가을볕도 잠깐

여위어가는 가을 설움도 잠깐

벌써 독방 마루 바닥이 찹다

의시시 몸 웅크리며

겨울 보따리 풀어 해진 옥 궤맨다

 

아 어느덧 저만큼

겨울이 온다 겨울이 온다

 

벽 속에 시퍼렇게 정좌한 채

겨울 정진 깊어 가는 날 온다

대낮에도 침침한 독거방 불빛 아래

갑자기 바느질 손 바빠진다.

 

 

 

경계

박노해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

현실이 미래를 잡아먹지 말 것

미래를 말하며 과거를 묻어버리거나

미래를 내세워 오늘 할 일을 흐리지 말 것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박노해

 

바람 찬 날이다

경주 남산

민들레 꽃씨는 바람에 흩날리고

바람 속에서

바람을 품고

천년의 긴 호흡으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바람이었나 하늘이었나

 

밤새 독거방 낡은 창은 덜컹대고

감시등 불빛 아래

유유히 떠도는 민들레 꽃씨처럼

내 영혼은

저문 들길 지나 낯선 산굽이를 돌아서는

출가승의 옷자락처럼 허허로운데

무겁구나 지나온 날

깊어 가는 상처는 그칠 줄 모르고

사흘 밤낮 몹시 아픈 날

스스로 치욕의 삭발을 하고

찬 마룻바닥에 모로 누워 회색벽에

무겁게 토해내는 신열의 부르짖음

무너졌다, 패배했다, 이렇게

흐르는 눈물 흐르는 대로 흘러

그래 지금 침묵의 무덤을 파고

나를 묻는다 나를 암장한다

 

숨죽인 호곡처럼

머리 푼 밤바람은 쓰러지는데

어둠 속으로 얼굴들이 흐르고

해가 길어지고 해가 짧아지고

서리 내리고 눈이 내리고

죄닦음이 다하고 눈 맑아진 어느 날

내 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씨앗 하나

피투성이 목숨으로 품어온 씨앗 하나

 

한순간, 싹. 이. 틀. 까

젖어드는 눈 감으면

벽 그림자 ----

상처 속에 싹트는 씨앗 하나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아아 바람이었나 하늘이었나

 

 

 

고난은 자랑이 아니다

박노해

 

고난은 싸워 이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역경은 딛고 일어서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좌절은 뛰어넘으라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맑은 눈 뜨라고!

 

고통을 피하지 말고

맞서 싸우려들거나

빨리 통과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고통의 심장을 파고들어

그 안에 묻힌 하늘의 얼굴을 찾으라고

 

고난을 살아낸 그대여

그것은 장한 인간 승리이지만

맑은 눈 뜨지 못하면

철저히 무너지고 깨어져 내려

먼지만큼 작은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면

내세운 정의와 진리 속에 숨어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면,

 

고난을 뚫고 나온 자랑스러운 그대 역시

또 하나의 덫입니다. 슬픔입니다.

고난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승화시킨 사람이 아니라면

생의 가장 깊은 절망과 허무의 바닥에서

맑은 눈으로 떠오른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 앞을 비추이는 희망의 사람이 아닙니다.

 

행여 제가 고난받았다고 얼굴을 들거든 침을 뱉어 주십시요

고난받았기에 존경받는다면 그것은 나의 치욕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고난이 나를 키웠고 고난이 나를 깨우쳤고

고난 속에서 나는 사랑을 배웠고 그대를 만났습니다.

아- 나에게 고난은 자랑이 아니라 아름다운 슬픔입니다.

 

 

 

공은 둥글다

박노해

 

배고파 우는 아이야

무서워 우는 아이야

 

그만 눈물을 닦고

우리 축구를 하자

 

우리는 이겼다, 우리는 졌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즐겁다

 

해는 저물고

돌아가는 집안에 빵은 없어도

 

공은 둥글다

지구는 둥글다

 

우리 눈물은 둥글다

우리 내일은 둥글다

 

 

 

굽이 돌아가는 길

박노해

 

올곱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어진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길 따라 물 따라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 겨울의 시

박노해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 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그냥 그대로인 네게서

박노해

 

난 너에게

색깔을 느낄 수 없어

너무 화려하고

너무 많은 색깔이

내 눈을 가려서

 

색깔을 지워줘

그냥 갓 씻은 맨얼굴로

그냥 땀 젖은 맨몸으로

내 앞에 서봐

 

색깔 없는 네게서

수많은 생명의 색깔이

 

네 안에 숨어 있던

신비한 빛들이

 

환하디환하게

내 마음까지 비춰와

 

그냥 그대로인 네게서

 

 

 

그냥 내려오니라

박노해

 

늘 웃는 얼굴의 친구야

늘 밝은 모습의 친구야

 

늘 괜찮아 보이고

좋아 보이고 강해 보이느라

얼마나 힘이 드는가

 

나는 안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고

속말하고 싶어도 말도 못 하고

 

그냥 내려오니라 친구야

 

아무도 없는 언덕에서 악 한번 써뿔고

키 큰나무에 기대서 맘껏 울어뿔고

들꽃 위에 드러누워 후련하게 쏟아뿌러라

 

옷에 흙 좀 묻으면 어떻나

얼굴 좀 타고 피부 좀 긁히면 어떻나

돈 좀 못 벌고 힘 좀 밀리면 어떻나

두 발을 흙에 푹 채우는 게 만족 아니냐

 

힘들고 아플 땐

그냥 내려오니라 친구야

 

 

 

그대 나 죽거든

박노해

 

아영아영 나 죽거든

강물 위에 뿌리지 마

하늘 바람에 보내지 말고

땅속에다 묻어주오

비 내리면 진 땅에다

눈 내리면 언 땅에다

까마귀 산 짐승도 차마 무시라

뒷걸음쳐 피해 가는 혁명가의 주검,

그대 봄빛 손길로다 다독다독 묻어주오

 

나 언 땅속에 길게 뿌리 누워

못다 한 푸른 꿈과 노래로 흐를 테요

겨울 가고 해가 가고 나 흙으로 사라지고

호올로 야위어 가는 그대.......어는 봄 새벽,

수련한 함박꽃으로 피어 날 부르시면은

나 목메인 푸르른 깃발 펄럭이면서

잠든 땅 흔들어 깨우며 살아날 테요

 

아영아영 나 죽거든

손톱 발톱 깎아주고 수염도 다듬어서

그대가 빨아 말린 흰옷 이쁘게 입혀주오

싸늘한 살과 뼈 험한 내 상처도

그대 다순 숨결로다 호야호야 어루만져

하아- 평온한 그대품에 꼬옥 보듬어 묻어주오

자지러진 통곡도 피 섞인 눈물도 모질게 거두시고

우리 맹세한 붉은 별 사랑으로, 눈부신 그 봄철로

.....슬픔 이겨야 해 아영, 강인해야 해..........

 

어느 날인가 그대 날 찾아 땅속으로 오시는 날

나 보드란 흙가슴에 영원히 그댈 껴안으리니

 

 

 

그대 속의 나

박노해

 

수많은 밤 하늘 별 중에

내 별 하나 떠 있다

시린 가슴 떨고 있는 별 하나

 

수많은 세상의 나무 중에

내 나무 하나 서 있다

묵묵히 언 겨울나무 하나

 

수많은 숲 속의 짐승 중에

나 닮은 짐승 하나 울고 있다

동굴 속에 상처 핥는 짐승 하나

 

수 많은 지상의 사람 중에

내 사람 하나 가고 있다

첫마음 밝혀 들고 길 찾는 사람 하나

 

창살 밖에 내가 산다

창살 안에 네가 산다

 

벽 속의 내 안에

'나 아닌 나'가 떨고 있다

 

넓은 세상 그대 속에

'그대 아닌 그대'가 떨고 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안데스산맥의 만년 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그리운 사람

박노해

 

그날 그 특이한 작별의 날

차창 밖엔 찬비 흩뿌리고 있었지

동지들과 비밀모임 뒤 속초를 떠나오던 날

서울 길 동해 바다는 성난 파도 치고

시퍼런 혁명의 바다에 작은 배 한 척,

나는 소리 없는 울음을 깨물고 있었네

그때 동지, 당신이 내 곁에서 울어주고 있었네

아주 절실하게 일치하며 울어주고 있었네

비 그쳐 하늘 개이고 조국의 강과 산 들이

처녀처럼 생기찬 빛으로 깨어나는 순간

아 아름다워, 똑같은 탄성을 터뜨렸었네

마주친 눈빛 학이 되어 영혼으로 날아들었네

 

                 *

 

내 육신 하루하루 무섭게 갉아내리고

홀로이 흐느낌 퍽퍽 도끼자욱처럼 패어가던 날

안간힘으로 얼음산을 타고 오르며 어느덧

사람의 온기도 흔적도 기억마저 얼어붙어 가던 날

소리 없이 전해져온 푸른 숨결 하나 눈동자 하나

아주 우연인 듯 아니 운명인 듯

나는 양지바른 흙담에 기대앉아 침묵하며 봄볕을 쪼이는

아픈 아이처럼 그렇게 스르르 당신을 기대었네

피 마르는 투쟁의 순간들마다 마치 십 년 된 친구처럼

익숙하게 나를 부척하며 어둠 헤쳐나온 당신은

현실로 열린 나의 창, 나의 생기였네

 

                 *

 

오늘같이 슬픈 날

내 목숨은 적의 손에 넘어갔고

꺼질 수 없는 이상은 몸체 스스로 무너뜨린 날

어둠 속 창살에 이마를 기대고 회한의 눈물에 떨며

참된 시작을 위하여 나의 전부인 것들을 다시

낯선 것으로, 미지의 것으로, 열려진 것으로,

그 막막한 불안과 비관 앞에 나를 세워두자고 한 날

한 순간에 조직도 사람들도 차갑게 등 돌리며 떠나간 날

이제 누가 나와 함께 절실하게 울어줄까

누가 나에게 푸른 숨결 불어 넣어 줄까

누가 이 패배자를 사람 그 자체로 품어 줄까

 

                 *

 

부드러운 황토흙처럼 말없이 상처 감싸주던 사람

내 존재의 무게를 다 받아 주면서도 표시 하나 없는 사람

어떤 불행 속에서도 스스로의 결단으로 다시 피어날 것을 믿어준 사람

아무것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서 최악의 순간까지

나를 판단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사랑해준 단 한 사람

하루에도 몇 번씩 와락 그리움 치달리는

나의 빛

나의 힘

내 마음의 봄 언덕……

 

               *

 

아 그대마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날

나는 이제 무엇으로 싸워가나 무엇으로 일어서나

끝 모를 징역 마룻바닥에 허물어져 미친 듯 나는 통곡한다

그러나 나는 나를 잘 알지 나는 나를 잘 알지

마지막 한 가닥 희망과 애착마저 툭, 끊어져

오직 홀로 남은 나 자신과 처절한 묵시의 투쟁 끝에 서면

나는 결국 죽음조차 의연하게 껴안을 수 있었지

그래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오늘은 통곡할지라도

자신을 저버리지는 말자 포기하지는 말자

시퍼런 슬픔의 심연 끝바닥에 다다르면

그래 나는 다시 서서히 솟아오를 수 있을 것이야

허허로운 눈빛으로 다시 솟아오를 수 있을 것이야

 

 

 

그리운 컨닝

박노해 

 

아이들이 시험을 치른다

책상 위에 컨닝 방지 가림판을 세우고

친구와 친구 사이에 분리장벽을 세우고

서로를 딛고 이겨 살아남겠다고

홀로 참호에서 어린 머리를 쥐어짠다

 

나 어릴 적 시험시간이면

서로 잘하는 답을 깨알같이 적은

컨닝페이퍼를 몰래몰래 돌리고

슬쩍 시험지를 바꿔 도와주면서

성적보다 우정이 더 소중함을 느끼던

그 시절이 그리워라

 

아이야 분리장벽을 치워라

인디언 아이들도

아프리카 아이들도

안디노스 아이들도

문제를 풀 때면 서로 모여 머릴 맞대고

의논하며 정답을 찾아간단다

 

삶에서 부딪치는 중요한 문제들은 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풀어가는 것

혼자 숨기며 주어진 하나의 정답을 찾아내

자신이 우월하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망쳐간단다

문제건 답이건 숨기고 독점할 때

외로와지고 괴로와지는 게 인생이란다

 

아이야 너를 경쟁으로 줄 세우고

모두를 패배자로 떨어뜨리는

세계의 분리 장벽을 무너뜨려라

 

 

 

그리움

박노해

 

공장 뜨락에

다사론 봄볕 내리면

휴일이라 생기 도는 아이들 얼굴 위로

개나리 꽃눈이 춤추며 난다

 

하늘하늘 그리움으로

노오란 작은 손

꽃바람 자락에 날려 보내도

더 그리워 그리워서

온몸 흔들다

한 방울 눈물로 떨어진다

 

바람 드세도

모락모락 아지랑이로 피어나

온 가슴을 적셔오는 그리움이여

스물다섯 청춘 위로

미싱 바늘처럼 꼭꼭 찍혀오는

가난에 울며 떠나던

아프도록 그리운 사람아

 

 

 

그 사람도 그랬습니다

박노해

 

집 없이 추운 이여

그 사람도 집이 없었습니다

 

노동에 지친 이여

그 사람도 괴로운 노동자였습니다

 

인정받지 못한 이여

그 사람도 자기 땅에서 배척당했습니다

 

배신에 떠는 이여

그 사람도 마지막 날 친구 하나 없었습니다

 

쓰러져 우는 이여

그 사람도 영원한 현실 패배자였습니다

 

그 사람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포기하지 않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피투성이로 품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자신의 패배와 죽음까지를 끌어안고

마침내 무력한 사랑으로 이루어낸 것입니다

 

그 사람도 그러했듯이

당신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 지상의 작고 힘없는 사람 중의 하나인

당신 속에 그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산이 나를 키웠네

박노해

 

많은 산을 넘어 왔네

세상의 산들을 오르며

앞서가 산이 된 사람들을 생각하네

 

많은 강을 건너왔네

세상의 강을 건너며

슬픔으로 깊은 강이 된 사람들을 생각하네

 

길에서 태어나 길을 찾아 걸어온 나

 

돌아보면 그 산들이 나를 키웠고

그 강들을 건너며 나는 깊어졌네

 

내 발자욱을 밟고 오는 벗이여

 

그대가 딛고 오를 커다란 산 하나

그대가 품고 건널 깊은 슬픔 하나

길 찿는 내 인생에 남겨줄 수 있다면

 

 

 

그 약속이 나를 지켰다

박노해

 

널 지켜줄게

그 말 한마디 지키느라

크게 다치고 말았다

비틀거리며 걸어온 내 인생

 

세월이 흐르고서 나는 안다

젊은 날의 무모한 약속,

그 순정한 사랑의 언약이

날 지켜주었음을

 

나는 끝내

너를 지켜주지도 못하고

깨어지고 쓰러지고 패배한

이 치명상의 사랑밖에 없는데

 

어둠 속을 홀로 걸을 때나

시련의 계절을 지날 때도

널 지켜줄게

붉은 목숨 바친

그 푸른 약속이

날 지켜주었음을

 

 

 

그 여자의 바구니

박노해

 

에티오피아 시미엔 산맥 장터에서

너무 멋진 바구니에 눈이 끌렸다

남루한 차림에 맨발의 여인이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그 바구니에

연노랑 커피생두를 담아 팔고 있었다

나는 커피콩을 한 봉지 사면서

바구니를 흥정하기 시작했다

 

이 멋진 바구니를 누가 만드셨나요?

제가 만들었지요

저한테 팔지 않으시겠어요?

아니요

값을 잘 쳐 드릴게요

이걸 팔면 커피콩을 담을 데가 없잖아요

그럼 커피콩까지 제가 다 살게요

그래도 안 돼요

아니 왜요?

새벽부터 먼 산길을 걸어왔는데

이 아침에 커피콩을 다 팔아버리면

전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어지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이 파할 무렵 다시 그녀는 찾아가자

불볕과 먼지 아래 종일 커피 콩을 팔던

그녀는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기분 좋게 나에게 바구니는 넘겼다

다음에 오면 더 좋은 바구니를 만들어주겠다면

그 멋진 바구니에 환한 미소를 가득 담아주었다.

 

 

 

그해 겨울나무

박노해

 

1

그해 겨울은 창백했다.

사람들은 위기의 어깨를 졸이고

혹은 죽음을 앓기도 하고

온몸 흔들며 아니라고도 하고 다시는 이제 다시는

그 푸른 꿈은 돌아오지 않는다고도 했다.

세계를 뒤흔들며 모스크바에서 몰아친 삭풍은

팔락이던 이파리도 새들도 노래소리도

순식간에 떠나보냈다

잿빛 하늘에선 까마귀가 체포조처럼 낙하하고

지친 육신에 가차없는 포승줄이 감기었다

그해 겨울,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

 

 

2

후회는 없었다 가면 갈수록 부끄러움뿐

다 떨궈주고 모두 발가벗은 채

빛남도 수치도 아닌 몰골 그대로

칼바람 앞에 세워져 있었다

언 땅에 눈이 내렸다

숨막히게 쌓이는 눈송이마저

남은 가지를 따닥따닥 분지르고

악다문 비명이 하얗게 골짜기를 울렸다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절대적이던 것은 무너져내렸고

그것은 정해진 추락이었다

몸뚱이만 깃대로 서서

처절한 눈동자로 자신을 직시하며

낡은 건 떨치고 산 것을 보듬어 살리고 있었다

땅은 그대로 모순투성이 땅

뿌리는 강인한 목숨으로 변함없는 뿌리일 뿐

여전한 것은 춥고 서러운 사람들, 아

산다는 것은 살아 움직이며 빛살 틔우는 투쟁이었다

 

 

3

이 겨울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죽음 같은 자기비판을 앓고 난 수척한 얼굴들은

아무 데도 아무 데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디를 굵히며 나이테를 늘리며

뿌리는 빨갛게 언 손을 세워 들고

촉촉한 빛을 스스로 맹글며 키우고 있었다

오직 핏속으로 뼛속으로 차오르는 푸르름만이

그 겨울의 신념이었다

한점 욕망의 벌레가 내려와

허리 묶은 동아줄에 기어들고

마침내 겨울나무는 애착의 띠를 뜯어 쿨럭이며 불태웠다

살점 에이는 밤바람이 몰아쳤고 그 겨울 내내

뼈아픈 침묵이 내면의 종울림으로 맥놀이쳐 갔다

모두들 말이 없었지만 이 긴 침묵이

새로운 탄생의 첫발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해 겨울,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긴 호흡

박노해

 

직선으로 달려가지 말아라

극단으로 달려가지 말아라

사람은 길은 좌우로 굽이치며 흘러간다

 

지금 호흡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꾼 때

머지않아 맞은 편으로 호흡이 바뀌리라

너무 불안하지도 말고 강퍅하지도 마라

 

오른쪽이건 왼쪽이건 방향을 바꿀 때

그 포용의 각도가 넓어야 하리니

힘찬 강물이 굽이쳐 방향을 바꿀 때에는

강폭도 모래사장도 넓은 품이 되느니

 

시대 흐름이 격변할 때

그대 마음의 완장을 차지 마라

더 유장하고 깊어진 품으로

새 흐름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라

 

삶도 역사도 긴 호흡이다

 

 

 

박노해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아무것도 두려워 마라

 

그대는 충분히 고통받아 왔고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자신을 잃지 마라

믿을 잃지 마라

 

걸어라

너만의 길로 걸어가라

 

길을 잃으면 길이 찾아온다.

길을 걸으면 길이 시작된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길이 끝나면

박노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봄이 걸어 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길 잃은 날의 지혜

박노해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 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 주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 주십시오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작은 것 속에 이미 큰 길로 나가는 빛이 있고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

 

현실 속에 생활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

 

 

 

김밥 싸야지요

박노해

 

어머니 뭐해요 김밥 싸야지요

오늘은 휴일인데 아침해도 밝네요

고단하신 아버진 가을볕을 먹어야 해요

쪽빛 고운 하늘물에 시린 눈동자 씻어야 해요

어머니 오늘은 김밥을 싸요

우린 너무 좁게 지냈잖아요

우린 너무 빨리 살았잖아요

텔레비전도 끄고 짜잔한 말도 끄고 오늘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고요히

자연의 숨결에 마음 살펴봐요

우린 가슴샘에서 솟아나는 참얘기를

오롯이 나눈 지가 너무 오래 되었어요

산자락을 돌아 들길을 걸으며

아버지 휘파람을 불어주세요

어머니 십팔 번을 불러보세요

철이네도 같이 가요 민이네도 불러요

우리 함께 합창하며 둥글둥글 춤추어요

어머니 뭐해요 김밥 싸야지요

오늘은 휴일날, 가을 아침해는 너무 너무 맑은데

아버진 으응 으응 피곤한 신음만 토하시고

어머닌 그으래 그으래 눈도 안 떠지시고

우린 김밥을, 김밥을 싸야 하는데……

 

 

 

꼬막

박노해

 

벌교 중학교 동창생 광식이가

꼬막 한 말을 부쳐왔다

 

꼬막을 삶는 일은 엄숙한 일

이 섬세한 남도의 살림 성사는

타지 처자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모처럼 팔을 걷고 옛 기억을 살리며

싸목싸목 참꼬막을 삶는다

 

둥근 상에 수북이 삶은 꼬막을 두고

어여 모여 꼬막을 까먹는다

 

이 또롱또롱하고 짭조름하고 졸깃거리는 맛

나가 한겨울에 이걸 못 묵으면 몸살헌다

 

친구야 고맙다

나는 겨울이면 니가 젤 좋아부러

감사전화를 했더니

찬바람 부는 갯벌 바닷가에서

광석이 목소리가 긴 뻘 그림자다

 

우리 벌교 꼬막도 예전 같지 않다야

수확량이 솔찬히 줄어부렀어야

아니 아니 갯벌이 오염돼서만이 아니고

긍께 그 머시냐 태풍 때문이 아니것냐

요 몇 년 동안 우리 여자만에 말이시

태풍이 안 오셨다는 거 아니여

 

큰 태풍이 읍써서 바다와 갯벌이

한번 시원히 뒤집히지 않응께 말이여

꼬막들이 영 시원찮다야

 

근디 자넨 좀 어쩌께 지냉가

자네가 감옥 안 가고 몸 성한께 좋긴 하네만

이 놈의 시대가 말이여, 너무 오래 태풍이 읍써어

정권 왔다니 갔다니 깔짝대는 거 말고 말여

썩은 것들 한번 깨끗이 갈아엎는 태풍이 읍써어

 

어이 친구, 자네 죽었능가 살았능가

 

 

 

꽃내림

박노해

 

오늘은 무슨 꽃이 피어나는가

오늘은 무슨 꽃이 떨어지는가

 

아침이면 가장 먼저

피고지는 꽃들을 문안한다

 

너에게 꽃은 장식이지만

나에게 꽃은 성전이다

 

꽃보다 밥이라고 말하지 마라

문제는 먹고사는 거라고 소리치지 마라

 

밥도 삶도 꽃을 타고 왔다

만약 지상에 꽃피는 속씨식물이 없다면

네가 아는 세계는 존재할 수도 없으니

 

나는 꽃을 타고 온 아이

나는 저 아득한 별에서

꽃내림으로 여기 왔다

 

꽃처럼 끈질긴 힘을 보았는가

꽃처럼 강인한 힘을 보았는가

나에겐 밥심보다 꽃심이다

 

나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작은 꽃들 앞에 무릎 꿇는 힘으로

끈질기게 다시 일어서고

끈질기게 다시 시작하고

 

꽃피는 노동으로

꽃피는 싸움으로

꽃을 타고, 꽃을 타고,

꽃내림으로

나 여기까지 와 있으니

 

 

 

꽃씨가 난다

박노해

 

가을바람이 부는 날은

고요히, 고요히,

그가 세상을 떠난다

 

지금 마악 꽃씨가 난다

 

한 줌의 영토에 뿌리를 두고

거대한 폭풍우에 흔들리면서

최선을 다해 피어난 작은 꽃

 

흐린 세상에 맑은 숨결 보내준 풀꽃들이

한 생의 몸을 말려 검은 씨앗에 담고서

흰 날개를 펴고 다음 생을 향해 떠난다

 

가을바람이 부는 날은

고요히, 고요히,

 

지금 마악 꽃씨가 난다

 

 

 

꽃은 달려가지 않는다

박노해

 

눈 녹은 해토에서

마늘 싹과 쑥잎이 돋아나면

그때부터 꽃들은 시작이다

2월과 3월 사이

복수초 생강나무 산수유

진달래 산매화가 피어나고

들바람꽃 씀바귀꽃 제비꽃

할미꽃 살구꽃이 피고 나면

3월과 4월 사이

수선화 싸리꽃 탱자꽃

산벚꽃 배꽃이 피어나고

뒤이어 꽃마리 금낭화 토끼풀꽃 모란꽃이 피어나고

4월의 끝자락에

은방울꽃 찔레꽃 애기똥풀꽃

수국이 피고 나면

5월은 꽃들이 잠깐 사라진

초록의 침묵기

바로 그때를 기다려

5월 대지의 심장을 꺼내듯

붉은 들장미가 눈부시게 피어난다

일단 여기까지, 여기까지만 하자

꽃은 자기만의 리듬에 맞춰

차례대로 피어난다

누구도 더 먼저 피겠다고

달려가지 않고

누구도 더 오래 피겠다고

집착하지 않는다

 

꽃은 남을 눌러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이겨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자신이 뿌리내린 그 자리에서

자신이 타고난 그 빛깔과 향기로

꽃은 서둘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고

자기만의 최선을 다해 피어난다

꽃은 달려가지 않는다

 

 

 

꽃피는 말

박노해

 

우리 시대에

가장 암울한 말이 있다면

 

“남 하는 대로”

“나 하나쯤이야”

“세상이 그런데”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의 말이 있다면

 

“나 하나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

 

 

 

꿈을 모두 함께 나눈다면

박노해

 

70년대에 갓 물오른 청년 노동자이던 나는

근로기준법 좀 지키는 공장에 다녀보는 것과

박정희 유신독재의 장발 단속 없는 세상에서

맘 놓고 머리 기르며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때 친구들은 제발 꿈꾸는 소리 좀 그만하라고 했다

 

80년대에는 내놓고 노조 결성도 하고 민주노총도 만들어서

공단 거리를 노동자의 환한 물결로 가득 메워보는 것과

군사독재 몰아내고 선거로 우리 대통령 뽑아 정권교체 해보는 것

독점재벌 해체와 안기부 해체 진보정당 창당이 소원이었다

그때도 사람들은 꿈꾸는 소리 좀 그만하라고 했지만

이제 그 꿈들은 하나 둘 이루어져 현실이 되고 있다

 

난 요즘 잠자리에 누워 한참씩 이런 꿈을 꾸곤 한다

우리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서 평양까지 마음껏 달리고

만주벌판으로 눈 덮인 시베리아로 유라시아 초원을 거쳐 빠리까지 가 닿아

거기서 다시 횡단 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리는 꿈을 꾸곤 한다

 

그리고 고르게 부자인 삶의 꿈을 넘어서서

덜 벌어서 덜 쓰고 나눠 쓰는 삶을 기쁘게 받아들여

더 푸르고 건강한 몸 생활과 더 많은 사랑과 친절과

더 아름답고 기품있는 문화생활과

소박하지만 더 알찬 행복감으로

노동의 보람을 누리며 살아갈 때가 되었다고

우리 노동자와 서민들이 손에 손에 꽃송이를 들고

온 지구형제들 보는 앞에서 총파업 시위에 나서는 꿈을 꾸는 것이다

 

친구들은 또다시 제발 꿈꾸는 소리 좀 그만하라고

이젠 나이도 생각하고 반 발짝만 앞서가며 고생 좀 그만하라지만

지난 25년 동안 자나깨나 사랑 하나 운동 하나에만 눈 맞추고 살아온 내가

딱 하나 온몸으로 깨쳐온 진리가 있다면

 

꿈을 혼자서 꾸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꿈을 모두 함께 나누어 꾸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

 

꿈을 머리나 입으로만 꾼다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몸으로 자기 몫의 고통을 받아나가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

 

꿈을 젊어서 한때 반짝 꾸고 말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생을 두고 끝까지 꾸어나간다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

 

 

 

꿈의 진리

박노해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좋아져도

사람은 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정보와 서비스를 먹고는 못 산다

이 몸의 진리를 건너뛰면 끝장이다

 

첨단 정보와 지식과 컴퓨터가

이 시대를 이끌어간다 해도

누군가는 비바람치고 불볕 쬐는 논밭을 기며

하루 세끼 밥을 길러 식탁에 올려야 한다

누군가는 지하 막장에서 매캐한 공장에서

쇠를 캐고 달구고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 지구 어느 구석에선가 나대신 누군가가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몸으로 때워야만 한다

 

정보다 문화다 서비스다 하면서 너나없이

논밭에서 공장에서 손 털고 일어서는

바로 그때가 인류 파멸의 시작이다

앞서간다고 착각하지 마라

 

일하는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다

 

 

 

나눔과 성장

박노해

 

언 땅이 풀리는 해토(解土)의 절기가 오면 흙 마당가에 쪼그려 앉아

얼음발 속에 뜨겁게 자라는 여린 새싹들을 지켜보느라 눈빛이 다 시립니다

언 흙을 헤치고 나온 새싹들은 떡잎이 둘로 나뉘면서 자랍니다

 

나뉘어야 자라는 새싹들

 

그렇습니다 나누어야 성장합니다

커지려면 나누어야 합니다

새싹도 나무도 나뉘어야 자라납니다

사람 몸도 세포가 나뉘어야 성장합니다

커진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본성입니다

커나가는 조직은 정보와 지식, 비전과 자유와 책임을 잘 나누어

함께 공유하는 만큼 멈춤 없는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누어야 커지고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나누어야 서로 이어지고 함께 모여들어 커질 수 있습니다

크다는 것은 하나를 이루어낸다는 것이고

큰 사람이란 나누어 쓰는 능력이 큰 사람이고

크게 나눔으로 하나를 이루어내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잘 나누어 상대를 키움으로 자기도 커나가는

지공무사(至公無私)의 사람이 아닌 지공지사(至公至私)의 사람입니다

나누지 않으면 성장이 정체됩니다

시들어가고 뒤처지고 부패하고 적대합니다

나누지 않을 때 싸움이 생기고 분열이 생깁니다

나눔만이 나뉨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누려면 나눌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늘 새롭게 나누어줄 삶의 감동과 이야기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 학습한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하고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보살펴줄 시간과 물질과 건강이 있어야 나누려는 마음도 자라납니다

함께 나눌 가치 있는 일과 희망과 능력이 생겨나야 합니다

그러러면 나눔과 동시에 자기를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크게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나눔과 함께

자기 자신이 세상과 이어지고 몸 통하여

내 몸과 내 큰 몸이 하나로 창조적 맴돌이를 이루어야 합니다

천 골짝 만 봉우리 물을 받아들여 큰 물둥지를 이루어야

너른 들녘을 푸르게 피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선 자리에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땀흘려 일하고 공부해야

자기 안으로 흘러드는 물길을 낼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맑은 눈 뜨고 자기를 불살라 가는 투혼의 불덩이어야

나눈 만큼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나눔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성공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눔은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가난을 나누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나눌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나누려는 마음'이 가난하고,

'나누는 능력'이 결핍되어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성공한 다음에 나누겠다는 굳센 다짐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를 잘 나누어 쓰는 능력입니다

두텁게 언 흙을 헤치고 나온 저 작고 여린 새싹은

여유가 있어서 떡잎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기가 바로 살기 위해서, 자기가 바로 크기 위해서,

그 작고 여린 자기를 처음부터 나누는 것입니다

나누는 능력도 생명체와 같아서 쓰지 않으면 퇴화하고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누는 삶의 외피와 삶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삶의 속살과 목적,

아니 삶 자체를 삶의 껍데기와 바꿔버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누는 능력이야말로 인간 삶의 핵심 능력이고

인간성의 본질인 사랑과 영성을 성장시키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인간으로 바로 살기 위해서는, 내가 인간으로 바로 크기 위해서는,

내 삶의 핵심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바로 나누어야 합니다

가난함 그대로를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는 능력이 커나가는 만큼 나눌거리도 커지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고 참된 성취입니다

그것만이 멀리 가고 오래 남는 창조적 맴돌이인 것입니다

 

사랑이란 지금 그대로의 자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나눔을 통해 자기 자신이 성장하고 상대를 성장시키고

모두가 진보해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나누어 자신과 상대를 함께 키워내지 못하는 것은

사랑도 정의도 진보도 아닙니다

함께 하나 되어서도 성장하지 못하고, 나누어도 성장하지 못하는 건

진보가 아닙니다

성장하지 못하는 나눔, 성장하지 못하는 성숙은 진보가 아닙니다

창조적 맴돌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눔을 통한 성장과 성숙의 긴장된 떨림,

그 살아 움직이며 이동하는 균형점이

참된 사랑의 자리이고 진정한 진보의 자리입니다

잘 나누어 보살펴야 성장함으로 성숙할 수 있고

성숙함으로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나눔의 손은 보살핌의 손이기도 합니다

 

자기를 다 나누고 마침내 고목처럼 부드럽게 쓰러지는 생이 있습니다

쓰러져 돌아감으로 다시 새싹처럼 부활하는 생,

그래서 죽음마저 최후의 나눔이고 사랑이고 희망인 생,

그런 일생이기를 기도하는 신생(新生)의 시간입니다

 

언 흙을 뚫고 치열한 숨결로 자라나는 새싹들을 바라보며,

나눔으로 빛나는 작고 여린 얼굴들을 묵묵히 들여다보며,

내 안에서, 세상에서, 나눔으로 자라나는 푸른 희망 하나하나를

뜨겁게 지켜봅니다

고개 들어 해동청(解冬靑)하늘 바라보는 눈빛 시려옵니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박노해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 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 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 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 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 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

박노해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

앙상하게 마른 여인이 쥐어짜듯 소리쳤다

20년 한 맺힌 여자의 일생으로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몰아내자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이루자고 절실하게 소리쳤다

20년 한 맺힌 노동자의 자각으로

 

짐승같은 놈들 나를 쫓고 피투성이로 탄압하고

짐승처럼 끌여다 고문하고 사형을 때리고

이제 늙어 죽어서야 감옥 담 밖으로 내보내겠다 한다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 같은 적들을 없애지도 못하였다

겨우 쥐어짜듯 노동해방 외쳐온 내가 저 짐승 같은 자본의 손에

이렇게 짐승처럼 죽어가야 하는가 죽어야만 하는가

 

 

 

나는 순수한가

박노해

 

찬 새벽

고요한 묵상의 시간

나직히 내 마음 살피니

 

나의 분노는 순수한가

나의 열정은 은은한가

나의 슬픔은 깨끗한가

나의 기쁨은 떳떳한가

오 나의 강함은 참된 강함인가

 

우주의 고른 숨

소스라쳐 이슬 털며

나팔꽃 피어나는 소리

어둠이 껍질 깨고 동터오는 소리

 

 

 

나는 왜 이리 여자가 그리운가

박노해

 

여자 없는 벽 속에서 오랜 세월 빛 바래가면

여자는 얼굴도 구별도 형체도 사라지고

오직 따뜻하고 부드러운 흰 살로, 깊고 촉촉하고 아늑한 품으로,

둥그스름한 젖가슴과 엉덩이 능선으로 안개 속 해처럼 떠오릅니다

그런 여자를 꿈꾸고 난 새벽이면 누운 채로 아득히 그리움에 출렁입니다

 

여자여 여자여 흐르는 새벽 강물이여

나는 왜 이리 여자가 그리운가

 

여자가 왜 남자보다 키가 작은지 아십니까?

여자가 왜 남자보다 힘이 약한지 아십니까?

 

자궁과 젖가슴을 집중해서 발육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다음 생명을 낳아 기르기 위해

키크는 성장도 싸우는 강함도 멈춰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미래를 낳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속이 깊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강인한 겁니다

미래를 위해 기꺼이 키 작아지고 힘 약해지는 것입니다

 

불덩이 시대의 사랑을 품고 오늘 이렇게 아프고 괴로운 사람아

자기 성장의 강한 힘을 안으로 들이부어 희망 하나 키워가는 사람아

미래를 낳고 기르기 위해 기꺼이 작아지고 낮아지는 사람아

 

여자여 여자여 내 안의 여자여

나는 왜 이리 여자가 그리운가

 

찬 벽 속에 누운 채로 가만히 흐르는 새벽 강물이여 

 

 

 

나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박노해

 

그토록 애써온 일들이 안 될 때

이렇게 의로운 일이 잘 안 될 때

나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뜻인가

길게 보면 다 하늘이 하시는 일인데

이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시키려는 건 아닌가

하늘 일을 마치 내 것인 양 나서서

내 뜻과 욕심이 참뜻을 가려서 인가

 

능(能)인가

결국은 실력만큼 준비만큼 이루어지는 것인데

현실 변화를 바로 보지 못하고 나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해

처음부터 지는 싸움을 시작한 건 아닌가

처절한 공부와 정진이 아직 모자란 건 아닌가

 

때인가

흙 속의 씨알도 싹이 트고 익어가고 지는 때가 있듯이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것인데

세상 흐름에 내 옳음을 맞추어내지 못한 건 아닌가

내가 너무 일러 더 치열하게 기다려야 할 때는 아닌가

 

쓰라린 패배 속에서 눈물 속에서

나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젖은 나무

박노해

 

난 왜 이리 재능이 없을까

난 왜 이리 더디고 안 될까

 

날마다 안간힘을 써도

잘 타오르지 않고 연기만 나는

나는 젖은 나무

 

젖은 나무는

늦게 불붙지만

오래오래 끝까지 타서

귀한 숯을 남겨준다고 했지

 

그래 사랑에 무슨 경쟁이 있냐고

진실에 무슨 빠르고 더딘 게 있냐고

앞서가고 잘 나가는 이를

부러워 말라 했지

 

젖은 나무는 센 불길로 태워야 하듯

오로지 마음을 하나로 모아

용맹스레 정진할 뿐

젖은 나무인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긴 호흡으로 치열하게 타오를 뿐

 

 

 

나는 피어나고 싶다

박노해

 

예쁜 꽃을 좋아하던 나는

마침내 작은 꽃집 주인이 되었다

꽃처럼 아름답게

꽃처럼 향기 나게 살자던 나

 

그러나 세상의 모든 꽃은 처절했다

아침부터 밤중까지 더 예쁘게

더 멋지게 더 친절하게

나의 솜씨와 화사한 미소까지가

손님 끄는 경쟁이 되어야 했다.

 

나의 친절과 꽃 같은 웃음은

이웃을 패배시키는 무기가 되고

욕심을 숨긴 내 미소와 친절

이 포장된 꽃들이 꽃들이

나는 싫다

내가 싫다

 

나는 피어나고 싶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꽃처럼 아름답게

꽃처럼 향기롭게

 

 

 

나 다음 생애는

박노해

 

저 강 언덕 너머

나 다음 생애는

가끔 술도 대취하고

아이 낳고 살림도 살아보고

바람 따라 훌쩍 떠돌기도 하고

거침없이 호연지기도 부리며

사람 좋은 얼굴로 인자하게 살고 싶어라

 

먼 길 가는 사람의 여유와 미소로

 

이번 생이 너무 처절하다

내가 몸 받은 시대가 너무 가파르고

내게 지워진 업이 너무 크고

남은 길이 너무 가파르다

돌아봐도 내다봐도 고요한 슬픔

아 난들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데

 

나 다음 생에는

풀꽃이어도 좋고

짐승 몸 받아도 좋으니

다정다감하게 살고 싶어라

 

한 생 또 한 생 몸 바꿔 이어가는

먼 길 가는 사람이 자비로운 미소로

 

 

 

나도 어머니처럼

박노해

 

왜 사느냐고 물으시면

죽지 못해 산다

나를 위해 산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누구를 위한 기도냐고 물으시면

자신이 잘되기 위해서

무엇을 바라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무엇을 위해 그리 애쓰느냐 물으시면

내 몸 편하고 빛나기 위해서

누가 알아주기 위해 땀 흘린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단 한번도

자신의 삶을 회의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 원망하지 않으며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셨다

몸져 아픈 날조차 이마 짚으며

당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한평생 어머니는 위해서 위해서만

당신의 눈물 당신의 기도

당신의 젖과 땀방울을 온전히

이 못난 자식 위해 바쳐주셨다

그런 어머니이기에 그 아들인 나 역시

위해서 위해서 살겠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어머니처럼 성실하고 치열하게

운동가로서의 의무를 단 한 순간도 포기할 수 없었다

 

당신의 삶과 정성 바쳐주신 나는

그 사랑 내 몸에 가두어둘 권리는 없었다

당신의 고통 당신의 노동

눈물 젖은 일생을 아는 나는

숨 막히는 비합법 활동의 한가운데서도

불안과 외로움과 무너짐의 시간 앞에서도

끝내 죽음 앞에서,

오 죽음만은 피해가고 싶던 그 순간에도

나도 어머니처럼 철저하게 철저하게

온몸 바쳐 투쟁할 수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나무가 그랬다

박노해

 

비바람 치는 나무 아래서

찢어진 생가지를 어루만지며

이 또한 지나갈 거야 울먹이자

 

나무가 그랬다

 

정직하게 맞아야 지나간다고

뿌리까지 흔들리며 지나간다고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고

이렇게 무언가를 데려온다고

다시 무언가를 데려온다고

 

좋을 때도 나쁠 때도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게 아니라고

뼛속까지 새기며 지나가는 거라고

 

비바람 치는 산길에서

나무가 그랬다

나무가 그랬다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박노해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인내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나보다 약한 자 앞에서는

겸손할 수 있는 여유를,

나보다 강한 자 앞에서는

당당할 수 있는 깊이를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가난하고 작아질수록

나눌 수 있는 능력을,

성취하고 커나갈수록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관계를

 

나에게 오직 한 가지만 주소서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삶에 뿌리 박은

깨끗한 이 마음 하나만을

 

 

 

낙엽을 쓸며

박노해

 

흙 마당에 떨어지는

낙엽이 하도 고와

우수수 쌓여만 가도

쓸지 않고 두고 보네

 

하늘은 높아가고

맑은 바람은 선득

문득 서울 쪽으로

고개를 돌리네

 

그대가 보고 싶어서

 

오늘은 대빗자루 들고

쌓인 낙엽을 쓸어가네

낙엽이 길을 덮어 행여

그대 오시는 길 잃을까 봐

 

 

 

날들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박노해      

 

아침이면 목마른 꽃들에게 물을 준다

저녁이면 속 타는 나무에게 물을 준다

너희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구나

서로를 경계하지도 멀어지지도 않았구나

 

벌들은 꽃과 꽃을 입맞춰 주고

바람은 서로 몸을 기울여 손잡아 주고

무더위에도 속 깊은 만남으로

살고 살게 하고 살아가는구나

 

복숭아는 대지의 단물을 빨아올리고

체리 자두 블루베리는 달콤하게 익어가고

벼 포기는 자라고 감자알은 굵어지고

사과알은 당차게 가을을 향해 걷는구나

 

코로나 뒤의 검은 그림자를 뚫어보며

먼 곳을 바라보는 내게 나무가 그랬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쉽게 달관하거나 위로받지 말라고

 

좋은 날도 나쁜 날도 그냥 가지 않는다고

날들은 알게 모르게 무언가를

내게 안겨주고 내게 남겨주고

내 안을 꿰뚫고 지나간다고

 

무력한 인간의 날들이여

불가촉 세계의 날들이여

너는 나의 무언가를 헤쳐놓고 가는구나

너는 내게 무언가를 심어놓고 가는구나

 

나는 하루하루 날을 받아 사는 생

어떤 날도 피할 수 없기에

어떤 날도 내 안에 모신다

나 또한 무언가를 심어나간다

 

하루하루가 내게는 결정적인 날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게는 귀인이시니

푸르른 걸음으로 너를 향해 가야겠다

무더위 속에서도 강인한 저 나무들처럼

 

 

 

날 설명해 봐

박노해

 

이제 넌 나를 설명하지 못해

널 가지곤 내가 이해가 안 돼

달라진 나를

넌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해

 

새로운 변화

새로운 욕구

새로운 나를

넌 이해하지도 긍정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해

 

난 네게 답까지를 요구하진 않아

네 이성과 논리로는커녕

네 감성과 상상력으로조차

새로워진 문제가 무언지를 몰라

문제가 무엇인지만이라도 알아봐

넌 문제가 되어버린 너 자신마저

이젠 파악이 안 돼

 

난 오늘의 나를 찾아갈 거야

내 안의 섬세한 욕구를 따라

흐르는 것을 따라 흐르며

복잡해진 날 찾아갈 거야

새로운 내가 피어나는

새로운 길을 찾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갈 거야

 

 

 

내가 걷는 이유

박노해

 

텅 빈 밤거리를 날이 밝을 때까지 걸어

낮 시간에 잠깐씩 공원 벤치에서 눈 붙이고

다시 밤이면 내가 걷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

 

좋았던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는 집을 나와

이렇게 홀로 떠도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

밤이면 지하철역이나 보도에 누워 잠들지 않고

따뜻한 노숙자 합숙소를 찾아가 잠들지 않고

밤이면 눈뜨고 걷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

 

나는 이대로 무너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대로 망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내 하나뿐인 육신과 정신마저

이대로 망가지게 내버려둘 순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일하고 싶다

나는 내 힘으로 일어서고 싶다

나를 망가뜨리는 모든 것들과 처절하게 싸우며

끝끝내 나는 다시 일어서고 싶다

 

밤이면 내가 걷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

눈뜨고 내가 걷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

내 안의 불덩어리를 너는 정말 모르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박노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당신의 준엄한 결정을 나는 인정한다

120억 원을 들여 휴먼 테러를 육성하고

현대 엔진을 폐쇄시켜 본때를 보여주려는

당신의 대를 이은 결사 정신을 나는 인정한다

신성하다는 이 나라 법과

정론을 펼친다는 자유언론과

여소야대 국회쯤은 느긋하게 주무르며

최루탄과 총칼 감옥 모든 공권력을

언제든지 자본수호 전선으로 총력 동원할

전지전능한 힘이 있다는 것 또한

나는 치를 떨며 인정한다

 

좋다 인정한다

피를 부르는 당신의 신념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 노동자 역시,

부릅뜬 이 두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민주노조는 결단코 포기 못 한다

우리 눈에 흙이 들어가고 백골이 진토 되어도

이 지긋지긋한 착취체제는 더 이상 용납 못한다

 

지난 40년 치욕의 긴 세월을

휴먼테크 삼성의 신화를 위해

정주영 현대공화국을 떠받치기 위해

수십만 노동자가 쓰러져갔다

오늘 하루도 수십명의 노동자가 아 어머니-

비명조차 못 지르고 처참히 죽어가고 있다

네 무식한 신념을 위하여

네 끝없는 자본증식을 위하여

아 결국 그렇다면 너와 나

둘 중 하나의 눈에 먼저 흙이 들어가야 한다

결단코 한 하늘 아래에 함께 살 수는 없다

너를 위해, 한 줌도 안 되는 부르주아지를 위해

우리가, 천만 프롤레타리아트가

날마다 피땀 빨리며 쓰러져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 우리 노동자의 성스러운 손을 들어

그대 두 눈구멍에 흙을 집어 넣어야겠다

뜨거운 연대로 거대한 삽날로

쿵 쿵 싯누런 네 공화국을 까부수며

거대한 네 무덤을 세차게 파헤쳐

깨끗이 그대를 잠재우고 말겠다

 

이 치 떨리는 착취체계를 끝장내기 위하여

노동해방의 꽃무리 물결치기 위하여

피어린 투쟁으로 죽음을 불사하며

네 무덤을 쿵 쿵 파고

또 파 들어갈 것이다

네 눈에 흙이 들어가는 순간까지

내 눈에 승리의 눈물 흐르는 그날까지

 

 

 

내 마음 그대 마음

박노해

 

노자(老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사람은 조금도 고집하는 마음이 없어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내 마음은 따로 없어

그대 마음이 내 마음

 

내 슬픔은 따로 없어

그대 슬픔이 내 슬픔

 

내 성공은 따로 없어

그대 웃음이 내 성공

 

내 변화는 따로 없어

그대 성장이 내 변화

 

내 이념은 따로 없어

그대 생각이 내 이념

 

내 갈 길은 따로 없어

그대 올 길이 내 갈 길

 

 

 

내 삶 속의 삶

박노해

 

내 이념을 보지 말고 내 시를 보아주십시오

내 시를 보지 말고 내 삶을 보아주십시오

내 삶을 밀어가는 투혼을 보아주십시오

내 투혼의 푸른 불덩이 불덩이-

여기 정직한 땀방울로 이 땅을 꽃피우는

말없이 빛나는 노동의 얼굴들을 보아주십시오

 

 

 

내 안의 아버지

박노해

 

마라톤을 그리 잘하셨다는데

40 언덕에서 쓰러져 그대로 저승길 달리셨나요

이 산하를 바람처럼 떠돌았는데

남도 산자락에 누운 채로 흰 구름이신가요

판소리 가락이 절창이셨다는데

깨어진 노래 품고 이리 단호한 침묵이신가요

못다 핀 꽃, 못다 한 정, 못다 한 노래 다 비우고

어둠 속 흰 뼈로 빛나며 이 새벽 저를 부르시나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내 아버지, 당신의 제삿날

법무부에서 지급한 볼펜으로 아버지 이름을 써서 벽에 붙입니다

사진 한 장 가진 게 없어 이름이라도 써놓고 바라보려니,

이름이 말씀을 하십니다

박정묵(朴正默)

바르게 침묵하라

정직해라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바로잡아야 한다

 

예, 아버지

 

독방 벽 속에 침묵 절필해온 당신의 아들이

찬물 한 그릇 떠놓고 당신 말씀을 듣습니다

 

목이 마르구나 목이 마르구나

 

예, 아버지

 

물 한 그릇 들어 절하고 제 안에서 목마른 당신께 드리는 물 한 그릇

제가 마십니다

 

꿈속에서 감옥문 나서자 홀로 숨어들듯 20년 만에

아버지 무덤을 찾았습니다

 

아버지, 무덤이 몹시 낮아졌네요

죄송해요 세월이 그리 험하게 흘렀어요

무덤이 이리 평평해지도록 돌비석 하나 세우지 못하고

손주 하나 안겨드리지 못하고 삭발 머리에 빈 몸으로

저 이렇게 그냥 혼자 왔어요

 

아니다

애 많이 썼다

 

땅속에서 기침하며 돌아누우시는 아버지

 

내 무덤 높이지 말고 돌 세우지 마라

흙 속에 곱게 썩어야 흙으로 돌아가지

무덤이 점점 낮아져야 평평한 땅으로 돌아가지

 

예, 아버지

 

아가, 갖지 말고 홀가분히 잘 돌아가야지

힘들어도 낮은 자리로 어서 돌아가야지

다 놓아주어야 처음 자리도 돌아가는 거지

그래야 싹이 트고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지

 

예, 아버지

 

흙으로 돌아가신 만큼 제 안에 들어와 꽃이시네요

낮아진 무덤 자리만큼 제 앞이 환해지네요

아버지, 저 다시 또 못 찾아뵐지도 몰라요

이제 오늘의 현장으로 저 먼 길 떠나려 해요

용서하셔요 아버지

 

아니다

몸조심하거라

 

내 안에서 기침하며 돌아누우시는 아버지

흰 뼈로 돌아누우시는 아버지 아버지

 

 

 

너의 하늘을 보아

박노해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이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넌 나처럼 살지 말아라

박노해

 

아버지,

술 한잔 걸치신 날이면

넌 나처럼 살지 말아라

 

어머니,

파스 냄새 물씬한 귀갓길에

넌 나처럼 살지 말아라

 

이 악물고 공부해라

좋은 사무실 취직해라

악착같이 돈 벌어라

 

악하지도 못한 당신께서

악도 남지 않은 휘청이는 몸으로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울먹이는 밤

 

내 가슴에 슬픔의 칼이 돋아날 때

나도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요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고

 

어머니, 당신의 소망은 이미 죽었어요

아버지, 이젠 대학 나와도 내 손으로

당신이 꿈꾸는 밥을 벌 수도 없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그래요,

난 절대로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자식이 부모조차 존경할 수 없는 세상을

제 새끼에게 나처럼 살지 마라고 말하는 세상을

난 결코 살아남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 당신은 나의 하늘이었어요

당신이 하루아침에 벼랑 끝에서 떠밀려

어린 내 가슴 바닥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 내가 딛고 선 발밑도 무너져 버렸어요

그날, 내 가슴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공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새겨지고 말았어요

 

세상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어디에도 기댈 곳도 없고

돈 없으면 죽는구나

그날 이후 삶이 두려워졌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알아요, 난 죽어도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제 자식 앞에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정직하게 땀 흘려온 삶을 내팽개쳐야 하는

이런 세상을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리거나 죽여 버리겠어요

돈에 미친 세상을, 돈이면 다인 세상을

 

아버지, 어머니,

돈이 없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늘입니다

당신이 잘못 산 게 아니잖아요

못 배웠어도, 힘이 없어도,

당신은 영원히 나의 하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다시 한 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나는 없이 살아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나는 대학 안 나와도 그런 짓 하지 않았다고

어떤 경우에도 아닌 건 아니다

가슴 펴고 살아가라고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누가 뭐라 해도 너답게 살아가라고

너를 망치는 것들과 당당하게 싸워가라고

너는 엄마처럼 아빠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으라고

다시 한번 하늘처럼 말해주세요

 

 

 

노거수(老巨樹)

박노해

 

나는 이제 속도 없다

빛나는 나이테도 없다

안팎을 들락이는 바람 소리뿐

어느 하루 나 쓰러진다고

기뻐하지 마라

얼마나 많은 해와 달이

여기 등 기대앉은 사람들의

한숨과 이야기들이

나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냐

어느 하루 나 쓰러진다고

슬퍼하지 마라

이 한 몸 사라진 텅 빈 자리에

시원한 하늘이 활짝 트이고

환한 여백이 열리지 않느냐

온몸으로 지켜온 내 빈자리에

이슬이 내리고 햇살이 내리고

새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이 걸어올 것이니

 

 

 

노동의 새벽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누구라도 그 누구라도

박노해

 

누구라도 그 누구라도

이 지구별에 목숨 받고 태어나던 날

자기 운명의 별 하나 품고 나왔으니

 

이번 생에 꼭 해야만 할 일이 있어

그 몫을 다 하지 못하고 휩쓸릴 때

너의 행복은 어디에도 없으리니

 

누구라도 그 누구라도

자기만의 길을 찾아 울며 나아가지 않는다면

네 영혼은 울부짖으며 유성처럼 사라지리니

 

그러나 슬퍼하지 마라

 

우리 모두는 저마다 자신의 길을 찾아

피투성이 맨발로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며

고통스런 인생길을 함께 걷고 있으니

 

 

 

눈물의 김밥

박노해

 

새벽 두 시 김밥을 먹는다

피멍 든 몸을 떨어가면서

갈라 터진 혓바닥에 침 적셔가며

안기부 지하 밀실 야식을 먹는다

방금까지 비명 터지던 고문장에서

목메인 김밥을 씹어먹는다

 

마른버짐 볼에 핀 어린 날이었던가

소풍 가서 먹었지 달디단 그 김밥

잔업 때 억지로 삼키던 팍팍한 매점 김밥

지난 여름이었지 울산 가는 기차를 타고

아영이랑 나눠 먹던 그리운 김치김밥

앞으로 아홉 밤 ---

살아 나가자 기어코 이겨서

이 참혹한 고문의 밤을 끝끝내 뚫고

떳떳한 목숨으로 살아 나가자

 

 

아 만약 나 살아 나간다면

언젠가 어느 날인가 햇살 온몸에 다시 받는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김밥을 싸 들고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 보리라

가서 들꽃처럼 정결한 웃음에 젖어

촉촉한 눈물의 김밥을 먹으리라

 

술냄새 풍기는 건장한 고문자들에 싸여

군복에 검정 고무신 신고 짐승처럼 떨며

꾸역꾸역 모멸 찬 김밥을 먹는다

안기부 지하 밀실 고문장, 잠시 후 시작될

처절한 공포의 순간들을 씹으며

피맺힌 적개심으로 씹으며

새벽 두 시 눈물의 김밥을 먹는다

 

 

 

 

다시

박노해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다 아는 이야기

박노해

 

바닷가 마을 백사장을 산책하던

젊은 사업가들이 두런거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인데

사람들이 너무 게을러 탈이죠

 

고깃배 옆에 느긋하게 누워서 담배를 물고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는 어부들에게

한심하다는 듯 사업가 한 명이 물었다

 

왜 고기를 안 잡는 거요?

"오늘 잡을 만큼은 다 잡았소"

 

날씨도 좋은데 왜 더 열심히 잡지 않나요?

"열심히 더 잡아서 뭘 하게요?"

 

돈을 벌어야지요, 그래야 모터 달린 배를 사서

더 먼 바다로 나가 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잖소

그러면 당신은 돈을 모아 큰 배를 두 척, 세 척, 열 척,

선단을 거느리는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요

 

"그런 다음엔 뭘 하죠?"

우리처럼 비행기를 타고 이렇게 멋진 곳을 찾아

인생을 즐기는 거지요

 

"지금 우리가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닭갈비

박노해

 

징역 참 좋아졌다

일요일 저녁 차림은 푸짐한 닭죽이네

소지 녀석 신경 써서 건져준 왕건이가

막상 받아보니 닭갈비 덩어리

버리자니 아깝고 뜯자니 엔간찮아

젓가락으로 뒤적뒤적 망설이다가

혹시 나,

닭갈비 같은 존재는 아닌가

 

뜻과 주장은 좋으나 나타나는 건 앙상하고

노동해방, 계급투쟁, 당파성, 혁명적 관점……

거 제껴두자니 아깝고 먹자니 뼈만 걸리는

꼭 닭갈비와 같은 존재

 

지금 우리,

마치 닭갈비 같은 처지는 아닌가

새벽을 외쳐온 양심과 도덕성은 믿어주지만

복잡한 오늘의 현실을 끌어갈 전문성과 책임성은……

몸 바쳐 투쟁해온 정의로움과 희생정신은 존경하지만

이 국가를 경영해나갈 실제 능력과 경륜은……

경악하여 눈 씻고 보니 현실은 급변하고

민중의 마음도 저만큼 달라져가고 있네

 

나, 그리고 우리,

더 늦기 전에 더 굳기 전에

실한 닭다리로 되어야겠네

허기진 우리 민중이 탐스럽게 뜯어 먹어줄

지글지글 암소 갈비 돼지갈비처럼

우리의 깃발 우리의 조직 우리의 실천은,

먼저 우리들 사람 그 자체가

경쟁력 있는 일꾼으로 다시 태어나야겠네

더 늦기 전에 더 굳기 전에

 

 

 

대결

박노해

 

아늑한 사장실에서

책상을 마구 치며

노조를 포기하라고

개새끼들, 불순분자라고

길길이 날뛰는 저들의 머리 속은

기업주와 노동자는 사슴과 돼지처럼

결코 동등할 수 없다는

계급사상으로 굳건히 무장되어 있는지 모른다

 

묵묵히 일하고 시키는 대로 따르고

주는 대로 받고 성은에 감복하는 복종과 충직만이

산업 평화와 안정된 사회를 이루는

훌륭한 노동자의 도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인간이란

동등하게 존중하며 일치할 때 안정이 있고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서로를 받쳐 줄 때

큰 힘이 나온다는 걸

우리는 체험으로 안다

 

돈과 무력과 권력을 전지전능한 하느님으로 믿는

봉건적이고 독재적인 저들과

온 세상 관계가 평등과 사랑으로 일치되어야 한다고 믿는

민주적으로 단결된 우리와의

이 팽팽한 대결

 

계급사상이 골수에 박힌 저들은

가진 자와 노동자는 사슴과 돼지처럼

별종(別種)으로 구분되기를 원할지 모르지만

그대들이 짓밟고 깨뜨릴수록

우린 더욱더 힘차게

인간으로

평등으로

민주주의로

통일로

솟구치는

갈수록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 숙명적인 대결을

어찌한단 말이냐

 

 

 

도토리 두 알

박노해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 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 헨리 데이빗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에게서 따옴

 

 

 

동그란 길로 가다

박노해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천국의 기쁨도 짧다

지옥의 고통도 짧다

 

긴 호흡으로 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어려울 때도 순간인 것을

돌아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삶은 동그란 길을 돌아나가는 것

 

그러니 담대하라.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두 여자가 누구게요

박노해

 

수녀님들이 접견 오셔서

무기 징역살이 힘들어 죽겠는데

아주 날 가지고 돌리고 논다

야 생각보다 날씬하네 참 섹시하네

아깝다 어째 종신서원 하는데 뒤가 땡기더라니

예수님한테 시집가기 전에 만났으면 내 껀데

히히히 수녀님들이 막 웃긴다

예수 부인 바람났네다

 

나도 한 마디,

요즘 문민정부 감옥에서는요

홀수 날엔 무지 잘 빠진 비키니 아가씨가 와서요

절 잡아보세요 나 잡으면 니꺼어

그래서 하루 종일 쫓아다니다 보니까

짝수 날에는요 씨름 선수 같은 아줌마가 와서요

니 잡히면 내꺼 하고 막 쫓아다녀서

하루 종일 도망치며 뛰어다니다 보니까

내가 날씬해진 건가? 섹시해진 건가?

 

수녀님 그런데요

절 날마다 못살게 하며 치열하게 정진하게 하는

그 두 여자가 누구 누구게요?

 

21세기 미래와 20세기 과거?

우리 첫 마음과 닫힌 옛 이념?

새로운 진보와 무서운 욕망?

 

이쁜 수녀님만 꼭 찝어서 맞춰보셔요

 

 

 

등 뒤를 돌아보자

박노해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동안

등 뒤의 슬픔에 등 뒤의 사랑에

무심했던 시간들을 돌아보자

 

눈 내리는 12월의 겨울나무는

벌거벗은 힘으로 깊은숨을 쉬며

숨 가쁘게 달려온 해와 달의 시간을

고개 숙여 묵묵히 돌아보고 있다

 

우리가 여기까지 달려온 것은

두고 온 것들을 돌아보기 위한 것

내 그립고 눈물 나고 사랑하는 것들은

다 등 뒤에 서성이고 있으니

 

그것들이 내 등을 밀어주며

등불 같은 첫 마음으로

다시 나아가게 함이니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

 

 

 

때늦은 나이

박노해

 

오늘로 내 나이 서른다섯인가

부러진 칠십이라 하던가

상처만큼 살았고 겪어온 나이

 

찬 마룻바닥에 짬밥을 놓고

구매한 돼지 훈제 한 봉지 사과 한 개 걸게 차려

나이만큼 절실한 생일 식사 기도를 드리니

 

강하고 깃발 날리는 것보다 부드럽고 나직한 것이

더 힘차다는 것을 아는 나이

뜨거운 열정, 철저한 헌신성, 불타는 투혼에 묻혀진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을 아는 나이

 

말 한마디 글 한 편 결정 하나에

묻고 확인하고 다시 돌아보고 또 검증하며

젖먹이 아가를 품은 듯 운동한다는 것이

두렵고 두려운 것임을 아는 나이

 

한 시절 모든 것이 선명했던 투쟁 속에서

깨질 것은 깨어지고 무너질 것은 무너져내려 이제는,

스스로 창조의 걸음 내딛는 때늦은 나이

 

서른다섯 생일날, 오 '이제와 우리 죽을 때'

맑아지고 밝아진 마지막 미소 한 떨기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남겨줄 수 있도록

뎌 겸허하고 더 성실하게 투쟁하게 하소서

더는 늦지 않게 서둘지 말고

새벽 종울림으로 울어나 흐르게 하소서

 

 

 

떠오른 별들을 보지 못하고

박노해

 

푸른 밤하늘

별빛 찬란하다

아니다

어둠이 저리 깊은 거다

 

별은 낮에도 떠 있는데

밤 깊어 세상이 어두울 때야

비로소 별빛이 보이는 거다

 

우리 앞길 이리 캄캄인데

찬란하던 별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아니다

 

닫혀 있는 내 눈이

떠 있는 별들을 보지 못할 뿐

커 나오는 샛별을 보지 못할 뿐

 

 

 

떨림

박노해

 

그에게는 아직도

수줍음이 남아 있어

 

그에게는 아직도

긴장미가 남아 있어

 

나는 그를 보면 설레는 것이다.

 

그에게는 아직도

열정이 살아 있어

 

그에게는 아직도

첫 마음이 살아 있어

  

나는 그 앞에서 떨리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마르지 않는

그 사람의 내밀한 푸르름 앞에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어

먼 저편을 바라보는 그 아득한 눈동자 앞에서

 

 

 

레닌의 발견

박노해

 

벽 속에서 레닌 저작을 다시 읽어도

오늘의 희망을 찾을 수 없다

그는 그 시대의 불꽃

그때 그 나라의 한계

거대한 동상이 노동자 손에 무너지고

찢긴 틈새로 푸른 이끼와 들꽃들이 피어나고

 

레닌이 죽기 직전에야 새로 눈뜬 진실들

사회주의는 시장경제를 건너뛸 수 없구나

인간의 본성인 욕망은 건너뛸 수 없구나

그러나 때늦은 그는 무기력하게 죽어갔고

자신을 먹고 자란 스탈린들은 철의 신념으로

그를 떠받들며 행진을 계속했다

 

오 이네스 아르망......아르망......

그가 순수한 인간으로 사랑했던 여자

부르주아 집안의 재능 있고 정열적이고

젊고 기품 있는 미모의 프랑스 여자

 

철의 이념과 윤리와 칼날을 알몸으로 넘어

몰래 피 흘리며 나눈 순수한 인간의 욕망

속 여린 한 혁명가의 절실했던 그 사랑

 

그의 어떤 저작이나 금박 입힌 전기보다

인간의 정직한 본성과 삶의 복잡성과

혁명의 다차원성을 나에게 가르치네

위대한 혁명가 레닌에게선 느낄 수 없던

인간 레닌의 감동과

길 찾는 희망의 빛 한 줄기가

그의 무너지고 찢긴 동상 틈새에서

이네스 아르망을 찾는 찢긴 영혼에서

비추네 환히 비추네 미래를 비추네

 

 

 

마지막 시

박노해

 

--여기는 안기부 지하 밀실 151호

체포된 지 열흘쯤 된 날짜조차 알 수 없는 저녁 시간

이제 나의 체력은 소진되어 자꾸만 헛소리와 환영에 시달리면서

나는 차츰 정신을 잃어 가고 있다

조직을 지키기 위하여 수백 수천 동지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

자결을 앞두고 마지막 남은 기력을 짜내어

숨죽인 흐느낌으로 이 시를 쓴다---

 

거대한 안기부 지하밀실을

이 시대의 막장이라 부른다

소리쳐도 절규해도 흡혈귀처럼

남김없이 빨아먹는 저 방음벽의 절망

24시간 눈 부릅뜬 저 쌔하얀 백열등

불어 불엇! 끝없이 이어지는 폭행과

온 신경이 끊어 터질 듯한 고문의 행진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

더이상 무너질 수는 없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아 그것은

우리들 희망의 파괴

우리 민중의 해방 출구의 붕괴,

차라리 목숨을 주자

앙상한 이 육신을 내던져

불패의 기둥으로 세워두자

 

서러운 운명

서러운 기름밥의 세월

뼛골시게 노동하고도 짓밟혀 살아온 시간들

면도날처럼 곤두선 긴장의 나날 속에

매 순간 결단이 필요했던 엄혹한 비밀활동

그 거칠은 혁명 투쟁의 고비마다

가슴 치며 피눈물로 다져온 맹세

천만 노동자와 역사 앞에 깊이 깊이 아로새긴

목숨 건 우리들의 약속 우리들의 결의

지금이 그때라면 여기서 죽자

내 생명을 기꺼이 바쳐주자

 

사랑하는 동지들

내 모든 것인 살붙이 노동자 동지들

내가 못다 한 엄중한 과제

체포로 이어진 크나큰 나의 오류도

그대들 믿기에 승리를 믿으며

나는 간다 죽음을 향해 허청허청

나는 떠나간다

 

이제 그 순간

결행의 시간이다

서른다섯의 상처투성이 내 인생

떨림으로 피어나는 한줄기 미소

한 노동자의 최후의 사랑과 적개심으로 쓴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

마지막 생의 외침

아 끝끝내 이 땅 위에 들꽃으로 피어나고야 말

내 온 목숨 바친 사랑의 슬로건,

 

'가라 자본가 세상, 쟁취하자 노동해방’

 

 

 

맑은 눈

박노해

 

맑은 눈

휘영청한 사람을 보면

앞이 환해지는 듯하다

눈 푸른 이는

푸른 잎새 성성한 나무처럼

미래 지향이라서인가

 

미래의 눈으로

오늘을 비춰보고

오늘 속에서

미래를 뚫어보는

투쟁과 묵상의 맑은 눈

 

이 세상에 가장 낮아서

가장 깊고 너른 사람들 속에서

먼 미래를 뚫어보며

오늘 어지러운 길을

착실하게 헤쳐 나가는

 

맑은 눈

휘영청한 사람을 보면

앞이 환해지는 듯

언 가슴 눈부시다

 

 

 

맑은 눈의 메아리

박노해

 

아주 낯선 소리에

짤랑짤랑 이쁜 아이들 소리에

화들짝 일어나 창살에 까지발 선다

하이고 저 뽀얀 병아리 떼

종교 집회에 위문 공연 온 유치원 아이들이

작은 손 흔들며 육중한 철문을 빠져나가는데

반짝, 한 아이와 눈 마주친다

 

아 저 맑은 눈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언 흙더미 뚫고 오른 새싹에서

첫 이슬 받은 선분홍 패랭이꽃에서

뚫린 감 잎사귀 너머로 본 가을 하늘에서

깊은 슬픔으로 자신을 비워내린 얼굴에서

내 마음 시리게 부셔오던 저 맑은 눈

 

억수로 귀엽데이

춤추는 게 이뻐 환장하겠네잉

우리 애가 어른거려 눈물이 나데그려

두런거리며 집회 다녀오는 수인들 얼굴에

하나같이 싱글벙글 복사꽃이 피었다

욕심의 눈 절망의 눈 맑게 가지고

아 이렇게 살았으면

이런 세상이었으면

 

맑은 눈의 아이들이 선물로 가져온

초코파이 한 개 사과 한 알 손에 들고

침침한 독방 벽에 기대 서서

가만히 볼에 대고 입술에도 대어본다

내 마음도 푸른 보리 밭둑에 핀 복사꽃마냥

환하디환하게 피어오른다

 

오 맑은 눈의 메아리

 

 

 

머릿띠를 묶으며

박노해

 

이제 투쟁이다

드디어 투쟁의 시간이다

이 핑계 저 이유 단체협상 질질 끌며

냉각기간 내내 갖은 협박 온갖 술책

파업 투쟁 무산시키려는 저들의 지랄발광을

피를 말리는 인내로 힘겹게 돌파해온

살얼음 준법투쟁도 오늘부로 끝이다

 

대강당이 떠나갈 듯

투쟁가도 힘차고 구호소리 드높아라

'결사투쟁' '일치단결' '승리쟁취' '노동해방'

붉은 천 위에 박혀 살아 펄펄 뛰는

선명한 머리띠를 양손에 펼쳐 잡는다

강당 안은 일시에 메인스위치 내린 듯

숙연하고 비장한 침묵이 흐르고

우리 모두 한 가슴으로 머리띠를 묶는다

 

노사는 공동운명 한 가족이라고

고향이 같고 성씨가 같고 학교 동문이라고

입사시켜준 먼 친척 간이라고

심란하게 맘 약하게 안면을 맞대던

이사 부장 과장 계장 관리자 놈들과는

노동자 편과 자본가 편으로 확연하게 갈라내며

죽었다 깨나도 하나 될 수 없는 아군 적군으로

명확한 전선으로 가차 없이 매듭지어

단호하게 머리띠를 질끈 묶는다

 

부서별로 반별로 조별로 나뉘어져

서로 경쟁하고 씹어대던 너와 나

시다라고 초짜라고 여자라고 아줌마라고

서로 무시하고 겉돌기만 하던 우리는

똑같이 몸 팔아야 먹고 사는 계급이기에

너나없이 착취당하는 노동자이기에

투쟁 전선에 함께 선 굳센 동지로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전투부대로

뜨겁게 머리띠를 함께 묶는다

 

떨리는 손길로 머리띠를 묶는다

너무도 아득히 떨어져 나가 버린

우리의 꿈과 미래를

맑은 하늘 향그러운 꽃 빛나는 햇살을

잊혀져가는 벗들과 친지와 이웃들을

사무치게 하나로 질끈 묶는다

 

아 뜨거운 열망으로 머리띠를 묶는다

제멋대로 진행되는 이 나라 역사를

두 동강 난 분단 조국 그리운 내 형제를

찢겨져 대립하는 전 세계 인류공동체를

피어린 투쟁으로 하나로 묶는다

 

머리띠를 질끈 묶으며

적과 아들 확연히 갈라내어 묶으며

전선에 선 동지들을 한 대오로 묶으며

'결사투쟁' '일치단결' '승리쟁취' '노동해방'

살아 펄펄 뛰는 구호들을 정수리에 새기며

결연한 투지로 비장한 맹세로

떨리는 손길로 머리띠를 묶는다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은 왜 슬픈가

박노해

 

먼 산이나

먼 들판이나

수평선 바다 너머

저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은

왜 그리 쓸쓸하고 슬픈가

 

사람 힘 다한 자리

자신의 때 가버린 자리

그 자리에

몸만 세워둔 채

눈빛만 빠져나와

저 아득한 곳을

한 마리 수리매로 떠도는

 

찬 벽 속에 들어앉아

묵묵히 눈감은 내 몸만 남겨두고

창살 너머 저 너머

먼 강 건너를 바라보는 사람의

쓸쓸하고 슬픈 눈빛 하나

붉은 노을 속에 떠돌고 있다

 

 

 

멈출 수 없지

박노해

 

빨리 빨리

바삐 아침을 지어 먹고

만원 버스 따라 뛰며

종종종 바쁘게 걸어

후닥닥 작업복 갈아입고

쓰왜엥 ---

열나게 하루를 돈다

 

긴 식사 대열

식반을 받쳐 들고

국에 말아 훌 마시고

화장실 가서 찌익 오줌 누고 뭐 볼 틈도 없이

뻑뻑 담배 한 대 굽고

연장 노동 들어가면

전쟁터처럼 정신없이

굉음 속에 기계는 돌아가고

스피커 악악거리는

박자 빠른 디스코를

따라잡기엔 지쳐버렸다

 

땀에 절어 맥 풀린 얼굴들로

종종걸음치며 공장문을 쏟아져나와

인사조차 못 나눈 채

검은 어둠 속으로 흩어지고

비탈진 골목길을 숨 가쁘게 오르며

나는 때리면 돌아가는 팽이라고

거대한 탈수기에 넣어져 돌리면

돌릴수록 쥐어짜지는 빨래라고

하루, 일년, 죽을 때까지

정신없이 따라 돌며

정신없이 바뀌는 세상에

눈빛도 미소도 생각조차

속도 속에 빼앗겨버렸어

 

전력을 다 짜내어 뛰어도

갈수록 멀어져만 가는

황새를 뱁새걸음으로,

공작새를 장닭으로,

승용차를 맨발로 따라 뛰며

죽기까지 손발을 멈출 수 없지

걷고 싶어도 주저앉고 싶어도

채찍보다 더 무서운

살아야 한다는 것,

노동자의 운명은

죽음이 아니라면 멈출 수 없지

 

오늘도 내일도

가면 갈수록 바쁘게 뛰어야 하는

갈수록 가진 것 없고 졸라매야 하는

고도로, 번영으로

급성장하는

우리는 복지국가 대한민국

뺑이치는

노동자

 

 

 

모과 향기

박노해

 

울퉁불퉁 참 지 맘대로 생겨뻔졌네

그래서인가 어째 이리 향기가 참한지

문풍지 우는 겨울 앞에서

그대에게 가져다줄 모과를 써네

회오리바람 머리채 끄는 위기의 시대에

서늘하게 스미어오는 향기도 슬픔이네

울퉁불퉁 참 지 맘대로 익어온 모과처럼

모순투성이 땅과 바람에 성숙해온 우리,

패인 가슴 험집마다 향즙 고여들 수 있다면

살마다 피마다 해맑은 투쟁의 향기

의연한 빛살처럼 뿜어오를 수 있다면

찬 시절도 참담함도 이리 뜨겁게 껴안는 것을

상처 위로 다시 찍혀오는 이 아픔마저도

 

 

 

목적지가 가까워 올수록

박노해

 

희박한 공기 속으로 난 고원 길을

오체투지로 순례하는 티베트인들은

목적지가 가까워져 올수록

속도를 줄여가며 숨을 고른다

 

이 길고 험한 오체투지 순례길이

무엇을 위해 왔는가를 되새기면서

다만 그곳에 가기 위해서 가는

어리석음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가다 죽어도 가다 살아도

내가 엎드려 쓰러진 그 자리가 목적지이니

지금 바로 행복하게 분투하며 걸어가는

이 순간이 이미 목적지임을 되새기면서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

박노해 

 

꽃은 단 한 번 핀다는데

꽃 시절이 험해서

다 피지 못한 꽃들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꽃잎 떨군 자리에

아프게 익어 다시 피는

목화는,

일년에 두 번 꽃이 핀다네

 

봄날 피는 꽃만이 꽃이랴

눈부신 꽃만이 꽃이랴

 

꽃시절 다 비치고 다시 한번,

앙상히 말라가는 온몸으로

최후의 생을 바쳐 피워낸 꽃

패배를 패배시킨 투혼의 꽃!

슬프도록 아름다운 흰 목화꽃이여

 

이 목숨의 꽃 바쳐

그대 따뜻하다면

그대 마음도 하얀 솜꽃처럼

깨끗하고 포근하다면

나 기꺼이 밭둑에 쓰러지겠네

앙상한 뼈대로 메말라가며

순결한 솜꽃 피워 바치겠네

 

춥고 가난한 날의

그대 따스하라

 

 

 

몸의 진리

박노해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좋아져도

사람은 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정보와 서비스를 먹고는 못 산다

이 몸의 진리를 건너뛰면 끝장이다

 

첨단 정보와 지식과 컴퓨터가

이 시대를 이끌어간다 해도

누군가는 비바람치고 불볕 쬐는 논밭을 기며

하루 세끼 밥을 길러 식탁에 올려야 한다

 

누군가는 지하 막장에서 메캐한 공장에서

쇠를 캐고 달구고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 지구 어느 구석에선가 나 대신 누군가가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몸으로 때워야만 한다

 

정보다 문화다 서비스다 하면서 너나없이

논밭에서 공장에서 손털고 일어서는

 

바로 그때가 인류 파멸의 시간이다

앞서간다고 착각하지 마라

 

일하는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다

 

 

 

몸 하나의 희망

박노해

 

희망찬 얼굴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대안이 없다, 크나큰 위기다, 전망이 안 보인다,

모두들 길을 잃고 모두들 힘 빠지고

모두들 춥고 쓸쓸한 날들입니다

우리,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길을 잃었다고 자기를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자기 선 자리에서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모색과 지난날에 대한 정리와

자신을 성찰하는 일에서 균형감각을 놓치지 마십시오

상황이 어려울수록 조용한 자신감을 잃지 마십시

 

* 때를 만나지 못하여 세상에서 뜻을 펴가기 매우 어려워질 때는 근본의 자리로 돌아가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어려움을 잘 견디어 몸을 보존하는 것이 참의 길이다

不當時命而大窮乎天下, 則深根寧極而待, 此存身之道也 <莊子繕性篇>

 

몸이라니, 구차한 이 몸을 잘 보존하라니......

아닙니다 몸을 망치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내 큰 몸'인 세상을 푸르게 살려나갈 미래의 씨알인 '내 몸'입니다

여기 검고 작은 꽃씨 하나가 그냥 씨앗이 아닙니다

지난 한 생의 비바람과 해와 달과 인연이 고스란히 응결된

미래 희망의 '꽃몸'입니다

그대 몸 속에도, 지난 시대의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다시 때를 찾아,

싹이 트고 꽃 피어날 미래가 다 들어 있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근본자리로 돌아가 뿌리를 깊숙이 내리십시오

하루하루 치열하게 '기다림'을 사십시오 멀리 내다보는 오늘을 사십시오

 

우리가 길을 잃은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

자기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를 잃은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

'몸'을 망쳐버리면 과거도 미래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긴 호흡으로, '몸 하나의 희망'입니다

 

 

 

못생긴 덕분에

박노해

 

난 어째 이리 못생겼을까

목욕탕에 가서 빡빡 밀고

미장원 가서 머리 볶고

속눈썹 달고 연지곤지 찍어 바르고

괜찮은 변두리 패션 걸쳐봐도

암만 봐도 울퉁불퉁

때 빼고 광내도 그게 그거니

으메 기죽어!

 

할 수 있나

쌍판 싹수는 텄으니 맘판이나 잘 닦아야지

 

틈만 나면 독서와 토론과 활동으로

마음 갈고 머리 닦고 관계를 터 갔지요

기숙사 동료 시다 애들까지 부담 없이 안겨 오고

내가 화가 나서 식식 눈 부라리면

'언니야 어니 뚝배기에 된장찌개 끓네'

허허, 하는 판이니 웃자 웃어 허허

 

하여간 못생긴 덕분에

나는 행복합니다

얼굴 괜찮고 몸매 잘빠진 친구들이

사내놈들 끈적한 시선만 타다가

에라 다방이나 술집으로 빠져나가

비참한 상품으로 내팔려 버려도

이 몸이야 애시당초 토대가 그러하니

오직 한길 노동자의 길을 걸어갑니다

 

남자 동료들과 사이가 좋아서

노조 활동에서도 한 몫을 하니

남자들도 나한테는 스스럼없이

'언니형아 나 고민이 있어'

징상스럽게 속마음을 털어나오니

애고 애고 이 몸이 무슨 상담소드냐

새파란 이 나이에 에미품이더란 말이냐

 

못생긴 게 꼴값한다고 이를 북북가는

자본가 놈 정보 경찰 놈 노동부 놈들만 빼고

우리 지역 동지들도 모두 날 좋아하니

옴마, 옴마 이거 참 쑥쓰럽구먼

지역 연대집회나 투쟁이 있을 때면

머리띠 묶고 앞장서 투쟁 이끄는 내 모습이

세상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답더라 카니

으메 기살어!

 

듣자하니 소문에

날 좋아하는 남성 동지들이 있다 하는데

노동 안하고 가꾼 미끈한 각선미에만

헤에~ 눈팔린 놈이나

사근 사근 배씹는 소리로 서비스 잘하는

현모양처나 찾는 한심한 놈들은

휘딱 뒤집어져 뒤로 돌아 뛰어가그라 잉

 

투쟁 전선에 우뚝 서서

엎어지고 고뇌하면서도 끝없이 솟구치는 사람

자본가 세상 찌꺼기를 불길 속에 태워 가며

진실과 평등으로 전진하는 사람

노동해방 기치를 확실하게 움켜잡은 사람,

그런 진짜 노동자를 나는 좋아해요

뜨겁게 허천나게 사랑해버릴 거예요 몰라 잉

 

못생긴 노동자인 덕분에

나는 행복합니다

잘생기고 좋은 모든 것을 강탈하고

인간과 자연과 고귀한 가치조차

상품으로 타락시키는 추악한 세상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이 선과 악이

모든 가치가 뒤바꿔진 세상에서

더러운 탐욕으로 짓이겨진 자본가 세상에서

예쁜 세상 새 세상

고운 세상 노동해방 세상

'쟁취하자 쟁취하자 꼬옥 쟁취하자'

생산하고 조직하고 투쟁하는 나는,

못생긴 노동자인 나는 행복합니다

 

오늘도 불같은 투쟁으로

아름답고 진실한 노동자의 길을 달리는 나는

못생긴 덕분에 못생긴 덕분에

으메 으메 기살어

 

 

 

무지개

박노해

 

긴 장마비 그치더니

이야! 얼마 만이냐

경주 남산에 무지개 섰네

자연의 거대한 화선지에

오색 물감 붓으로 좌악

시원스레 한번 그음!

 

흐린 세상의 흐린 마음들

비로 눈물로 씻어내리고

단 하나의 절대 진리 껍질 깨고

다섯 색깔 진리의 붓을 꺼내

직선 아니고 둥그스름하게 좌악

자연스레 한 번 그음!

 

아 우리 첫마음의 무지개

 

 

 

민들레처럼

박노해

 

일주일의 단식 끝에

덥수룩한 수엽 초췌한 몰골로 파란 수의에

검정 고무신을 끌고 어질어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잡범들 사이에서

 

"박노해씨 힘내십시요."

어느 도적놈인지 조직폭력배인지

노란 민들레 한송이 묶인 내 손에 살짝이 쥐어주며

환한 꽃인사로 스쳐 갑니다.

 

철커덩, 어둑한 감치방에 넣어져

노란 민들레꽃을 코에도 볼에도 대어보고

눈에도 입에서 줘보며 흠흠

포근한 새봄을 애무한 민들레꽃 한송이로 환하게 번져오는

생명의 향기에 취하여

아~ 산다는 것은 정년 아름다운 것이야

 

그러다가 문득

내가 무엇이길래

긴장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잡고 민들레꽃을 바로 봅니다.

어디선가 묶인 손으로 이 꽃을 꺾어

정성껏 품에 안고 내 손에까지 쥐어준

그분의 애정과 속뜻을

정신 차려 내 삶에 새깁니다.

 

민들레처럼 살아야 합니다.

차라리 발길에 짓밟힐지언정

노리개꽃으로 살지 맙시다.

흰 백합 진한 장미의 화려함보다

흔하고 너른 꽃 속에서 자연스레 빛나는

우리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조금도 쓸쓸하지 않고 봄비 뿌리면 그 비를 마시고

바람 불면 맨살 부대끼며

새 눈과 흙무더기 들풀과 어우러져 모두 다 봄의 주체로

서로를 빛나게 하는

민들레의 소박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요. 논두렁이건 무너진 뚝방이건

폐유에 절은 공장 화단 모둥이

쇠창살 너무 후미진 마당까지

그 어느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건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는

보호막 하나 없어도 좋습니다.

말하는 것 깨지는 것도 피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피어나야 할 곳에 거침없이 피어나

온몸으로 부딪치며 봄을 부르는

현장의 민들레

그 치열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에게 단 한 번 주어진 시절

자신이 아니면 꽃피울 수 없는 거칠은 그 자리에

정직하게 피어나 성심껏 피어나

기꺼이 밟히고 으깨지고 또 일어서며

피를 말리고 살을 말려 봄을 진군하다가

마침내 바람찬 허공중에 수천수백의 꽃씨로

장렬하게 산화하는 아 - 민들레 민들레

그 민들레의 투혼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고문으로 멍들은 상처투성이 가슴위에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 받아 들고

글썽이는 눈물로 결의합니다.

아- 아- 동지들, 형제들

준엄한 고난 속에서도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그렇게 저는 다시 설 것입니다.

 

 

 

민중의 나라

박노해

 

전쟁터 같은 공장에서 산업전사로 피땀을 쏟아

이 나라를 발전시켜온 노동형제여

뙤약볕 아래 논두렁을 기며

이 나라를 먹여 살려온 농민이여 근로민중형제여!

그대는 선진조국 이 나라의 주인답게

모든 결실과 권리를 향유하고 있는가

 

이제 더 이상 피땀을 빨리고

이제 더 이상 억눌리고 짓밟히는

지배자의 안정된 세상은 끝장나야 한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의 불꽃이 터져나오고

착취가 있는 곳에 파업투쟁의 불기둥이 치솟아오르고

부정과 부패가 있는 곳에 폭로의 번개가 치고

민중의 고통이 있는 곳에 소요와 혼란이 그치지 않고

분규와 투쟁의 함성이 가득 차야만 한다

 

이제 세상은 뒤바꿔야 한다

우리 민중이 주인으로 복귀되어야 한다

이제 군대도 민중에게 통제되어야 한다

이제 공무원도 민중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제 언론도 민중 속에 관장되어야 한다

이제 경찰도 민중 아래 지배되어야 한다

이제 미국도 민중의 투쟁으로 축출되어야 한다

이제 재벌도 민중 손에 몰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민중이 이 땅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신음하는 일천만 노동자여

그대 힘찬 손을 뻗어 8시간 노동제를 파업 투쟁의 자유를

노동자의 조직을 화악 움켜잡으라

농가 부채와 저곡가에 짓눌린 일천만 농민이여!

그대 억센 손을 뻗어 농민조합을, 이 땅의 농지를 쟁취하라

도시 빈민 형제여 영세소상인이여!

그대 배신당한 빈손에 주택과 일자리를

안정된 생활 터전을 확실하게 쟁취하라

민중 형제여 그대의 머리 위에 사상의 자유를!

그대의 힘찬 발길에 집회 시위의 자유를!

그대의 불타는 두 눈에 출판의 자유를!

그대의 어깨 위에 조직결성의 자유를!

아 우리 민중 손에 모든 권력을!

우리 민중이 이 국가의 지배자로 집권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광주민중을 피바다로 살육한

전두환과 노태우일당을 처단하는 민중의 사법부가 되어야 한다

보도지침을 발부하는 문공부장관에게 재갈을 물리고

민주교사를 탄압하는 문교부장관을 백령도로 추방해야 한다

우리 권인숙을 성고문한 문귀동이를

종철이를 고문해 죽인 박처원일당을

석규와 한열이를 쏘아 죽인 경찰을 구속시키는

민중의 경찰이 되어야 한다

민중을 쿠테타로 위협하고 민주화를 진압하는 반동군부와,

이 땅을 분단시켜 핵무기를 박아 점령하고 있는 미군을 제압하는

민중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

수입농축산물로 농민의 피땀을 빠는 농수산부장관을

농민의 손으로 꽁꽁 포장해서 수출해버려야 한다

 

독점재벌을 몰수하고 민중 살림을 살찌우는

민중의 재무부가 되어야 한다

전경환이의 새마을운동본부와 형제복지원을 폐쇄시키는

민중의 내무부가 되어야 한다

이제 전두환일당이 독점자본가놈들이 양키들이

우리 민중에 의해 수배되고 추적되고

민중의 감옥에 갇혀야 한다

이제 저들이 민중에 의해 감시되고 리스트에 올라야 한다

이제 민중들의 힘찬 활동상과 대의에 가득 찬 혁명가의 목소리가

눈부시게 텔레비젼화면에 올려퍼져야 한다

억압과 착취에 맞서 투쟁하지 않은 자가 바보가 되어야 한다

 

아아! 민중이 주인 되어

마침내 민중이 집권하여

억압과 착취가 있는 구석구석마다

투쟁의 불길이 타오르고 소요와 분규가 끊임없이 일고

가난과 압제의 연료가 다하도록 투쟁의 불길이 타오르고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로운 노동과 사랑이 봄날 진달래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빛나는 개성과 정열이 생동 치는 세상

온 세계가 원대한 인류공동체로 하나되는

해방된 신세계로 힘차게 딛고 일어서는 나서는

민중 손에 장악되어야 할 무기여

민중의 권력이여!

아아! 민중의 나라여 민중의 시대여!

 

 

 

바겐세일

박노해

 

오늘도 공단거리 찾아 헤맨다마는

검붉은 노을이 서울 하늘 뒤덮을 때까지

찾아 헤맨다만은

없구나 없구나

스물 일곱 이 한 목숨

밥 벌 자리 하나 없구나

 

토큰 한 개 달랑, 포장마차 막소주잔에 가슴 적시고

뿌리 없는 웃음 흐르는 아스팔트 위를

반짝이는 조명불빛 사이로

허청 허청

실업자로 걷는구나

 

10년 걸려 목메인 기름밥에

나의 노동은 일당 4,000원

오색영롱한 쇼윈도엔 온통 바겐세일 나붙고

지하도 옷장수 500원짜리 쉰 목청이 잦아들고

내 손목 이끄는 밤꽃의 하이얀 미소도

50% 바겐세일이구나

 

에라 씨팔,

나도 바겐세일이다

3,500원도 좋고 3,000원도 좋으니 팔려가라

바겐세일로 바겐세일로

다만,

내 이 슬픔도 절망도 분노까지 함께 사야 돼!

 

 

 

바그다드의 봄

박노해

 

공습 사이렌이 울리는 바그다드의 밤중에도

연인들은 몰래 만나 마지막인 듯 서로를 애무하고

무서워 우는 아이에게 엄마는 자장가를 불러준다

 

포탄이 떨어지면 아이들은 땅바닥에 납작 업드려

버섯구름이 채 흩어지기도 전에 다시 축구를 하고

아잔 소리가 울리면 다들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동생은 어제 산 운동화를 바꾸러 나가고

둘째 형은 낡은 자동차를 고친다고 기름투성이고

누이는 저녁을 준비하며 불을 피우고 차를 끓인다

 

지난밤 포격으로 무너진 건물 아래 깔려 죽은

아홉 살 아지자의 피가 말라 붙은 벽돌 틈에서

노란 밀들레는 무심히도 꽃망울을 피워 내고

포연 속에서도 새들은 알을 까고

올리브 나무가지에 꽃은 피어나고

밀밭은 푸르고 대추야자 열매는 봉긋이 오르고

골목에 널린 흰 빨래는 눈부시게 펄럭인다

 

 

 

바람이 돌더러

박노해

 

모래 위에 심은 꽃은

화창한 봄날에도 피지 않는다

대나무가 웅성대는 것은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갈대가 두 손 쳐들며 아우성치는 것도

바람이 휘몰아치는 까닭이다

돌멩이가 굴러 돌사태를 일으키는 것은

바람에 굴러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함이다

 

대나무나 갈대나 돌멩이나

바람이 불기에 소리치는 것이다

 

우리는 조용히 살고 싶다

돌아오는 건 낙인 찍힌 해고와 배고픔

몽둥이에 철창신세뿐인 줄 빤히 알면서

소리치며 나설 자 누가 있겠느냐

그대들은 우리더러

노동문제를 일으킨다 하지만

우린 돌처럼 플처럼 조용히 살고 싶다

다만 모래밭의 메마른 뿌리를

기름진 땅을 향해 뻗어가야겠다

우리도 봄날엔 소박한 꽃과 향기를 피우고 싶다

우리로 하여금 소리치게 하고

돌사태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바람이 드세게 몰아쳐

더이상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람 잘 날 없어라

박노해

 

바람 잘 날 없어라

내 생의 길에

온 둥치가 흔들리고

뿌리마다 사무치고

 

아 언제나 그치나

한 고비 넘으면 또 한 고비

너무 힘들다

너무 아프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싸워야 하나

 

바람 잘 날 없어라

울지 마, 살아 있다는 것이다

오늘 이 아픔 속에 외로움 속에

푸르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발바닥 사랑

박노해

 

사랑은 발바닥이다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다

 

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

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

 

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발바닥이 이어주는 대로 만나게 되고

그 인연에 따라 삶 또한 달라지리니

 

현장에 딛고 선 나의 발바닥

대지와 입맞춤하는 나의 발바닥

내 두 발에 찍힌 사랑의 입맞춤

그 영혼의 낙인이 바로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최후의 날

하늘은 단 한 가지만을 요구하리니

어디 너의 발바닥 사랑을 좀 보자꾸나

 

 

 

밤나무 아래서

박노해 

 

이럴 때가 있다

일도 안 풀리고 작품도 안 되고

울적한 마음으로 산길을 걸을 때

툭, 머리통에 꿀밤 한 대

아프다 나도 한 성질 있다

언제까지 내가 동네북이냐

밤나무를 발로 퍽 찼더니

후두두둑 수백 개의 밤톨에 몰매를 맞았다

울상으로 밤나무를 올려봤더니

쩍 벌어진 털복숭이들이 하하하 웃고 있다

나도 피식 하하하 따라 웃어 버렸다

매 값으로 토실한 알밤을 주머니 가득 담으며

고맙다 애썼다 장하다

나는 네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

살아나온 그 마음을 안다

시퍼런 침묵의 시간 속에 해와 달을 품고

어떻게 살아오고 무엇으로 익어온 줄 안다

이 외진 산비탈에서 최선을 다해온 네 마음을

 

 

 

밥을 찾아

박노해

 

이런 밥,

부잣집 개라면 안 먹일거야

기계라도 덜거덕 소리가 날거야

우리들은 식사를 거부하고

마지막 지점,

옥상으로 모였다

 

바람마저 자그맣게 열리어 타오르는

심장을 얼리려는 듯 차가워

기대인 어깨로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건 굶을 자유뿐이라고

낙엽 같은 웃음으로 배를 불렸다

 

거치른 얼굴들이 떨며

죽순처럼 일어설 때

구둣발 소리 당당하게

번질한 얼굴들이 무겁게 내리눌러

두려운 눈과 눈 마주하며

먹구름짱 걷어낼 햇살처럼 떳떳한

우리를 확인했다

 

바위 같은 우리를 누가 흔들까

내 손가락 잡아먹은

톱니바퀴보다 더 힘껏 얽힌

밥 찾는 우리를 누가 가를까

 

사장님은 우릴 가족처럼 대한다더니

빼빼 말릴거냐!

쟁기질하는 소도 여물을 먹여야 일하는데

이 밥을 먹고 어찌 일해요!

중도반 3년 근무에

밤마다 피 기침하는 영수가 울부짖고

당신네들 건강 과잉은 우리가 곯은 육신이고

행복 어린 웃음은 일그러진 좌절과 슬픔이라고

누군가가 외칠 때

오! 당신들,

미끈한 혓바닥에 이젠 더 안 속아

경찰을 부른다 해도 이젠 더 못 참아

무식한 공돌이 공순이 기업 망친다

구속시킨다 해도

이제 더는 더는 물러설 수 없어

 

저들의 충견들이 몽둥이를 들 때

우리의 벗들은 피투성이가 되고

피빛이 가슴가슴 저며들어 비겁을 녹이고

눈망울에 불꽃이 튀어 솟아

열여섯 난 명이는 무섭다 울며

수수깡 같은 몸매를 내 야윈 품으로 안겨오고

표창장을 태우고 모범사원을 태우고

일어섰다

우뚝우뚝 일어선 우리,

밤을 지새며 노동하고 생산하는

하늘 우러러 떳떳한 노동자의 자존으로

우리 밥 찾으러,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노동자의 걸음으로

두터운 벽을 박차고 나섰다

밥을 찾으러

우리 것 찾으러

당당하게 맞서 싸우며 울부짖는

오백의 함성이 공단하늘 메아리칠 때

양처럼 순한 표정으로 사정하는

저 숨겨진 발톱을,

저 웃음 뒤의 음모를 우리는 안다

 

마음까지 풍성한 밥을 놓고

자꾸만 흐르는 눈물

소줏잔을 돌리며

지금부터다!

굳게 잡은 손목으로

빛나는 눈동자 마주할 때

눈보라 치는

꽁꽁 얼어붙은 땅 저편으로

다사로운 봄날은

무겁게 아프게 열리고 있었다

 

 

 

방 구하러 가는 길

박노해

 

결혼하면서 400짜리 신방을 꾸려

그녀는 작은 쪽창에 고운 커텐을 달고

싱싱한 화분 몇개 걸어놓고 아침마다 물을 주며

예쁜 그릇 살림살이 사 모아가며

없지만 오손도손 즐거웠는데

처녀 때 하청공장 미싱사로

밥먹듯 해치우던 철야로 골병이 났는지

첫 유산에 앓아누워 전셋돈 날리고

100에 5만 원짜리 월세로 떨어져

아내는 반찬값 50원 100원 깎아가면서

신 귤 하나 군것질 한 푼 없이 절약을 하고

나 역시 동료들 눈치 보며 술자리를 피해 다니며

잔업 특근 늘려가며 바둥쳤는데

주인네는 월세를 2만 원은 더 올려달라 한다

 

모처럼의 휴일날 아침부터

아내와 복덕방을 찾아다니며

100에 5만 원짜리 월세를 뒤진다

허리 굽정한 복덕방 노인네 뒤를 따라가 보면

침침한 지하 방이거나 공동부엌

화장실도 없는 습습한 쪽방이 아니면

수도시설 없는 바깥 부엌

5만 원짜리 이런 방도 잘 나오지 않는다며

복덕방 영감님은 계약하라고 재촉하는데

아내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동네마다 즐비한 복덕방을 거쳐가며

골목 골목 내논 방들 다 돌아봐도

그래도 부엌에 수도 있고 창문이 있는

지금 살고 있는 방만은 한참 못해

땀 흘리며 싸다녀도 오후가 되도록

두 몸 뉘일 방 한 칸 구하질 못해

복덕방 낡은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틀째 돌아다닌다는 아주머니는 한숨지으며

집 가진 년놈들은 애새끼도 안 퍼지르나

애가 둘이라서 방 얻기가 어렵다며 마른 입술이 타고

해마다 연례행사로 싼 방 찾아 이사를 다닐 때마다

점점 작아지는 방 안에 누운 첫날 밤이면

눈물이 절로 나고 세상 살맛 안 난다는 야채장수 아저씨

올라가는 방값이 날강도라는 할머니의 한탄을 들으며

답답한 가슴으로 깊숙한 담배 연기 내어뿜는다

 

비좁은 방이라고 부엌은 있어야 하고

기름 먼지 땀투성이로 공장에서 돌아오면

부엌에 쪼그려 앉아 물은 끼얹을 수 있는 방 한 칸을 원하건만

죽어라고 진 빠져라 잔업 철야 휴일 특근

안 먹고 안 쓰고 안 놀고 정말 최대한 노력을 해도

갈수록 방은 좁아지고 씨팔, 이러다간

토굴 같은 지하실로 변두리 산동네로 밀리고 밀리다가

우리 두 몸뚱어리는 끝내 이 땅에서 추방당하는 게 아닌지 몰라

 

돈 많은 놈들이야

고층 호화아파트에 아담한 단독주택에다

콘도미니엄 별장에 빌딩에 노른자위 땅이란 땅은 다 거머쥐고

풍요에 넘쳐 무드 잡고 살아가는데

잔업에 지쳐 절뚝이며 닭장 셋방으로 기어들어 가

냄새나는 변소 앞에 종종거리며 줄을 서고

하수구도 없는 부엌에서 수건에 물 적셔 몸을 닦고

소음 매연에 콜록이고 좀도둑에 시달리며

여름이면 장마 걱정 겨울이면 연탄가스 걱정

해마다 오르는 방값에 쫓겨다니고

허허 이것도 사람 사는 거라고

인간으로 짜낼 수 있는 최선으로 노동한 대가라고

첨단 과학 문명의 시대, 선진조국의 노동자 사는 꼬라지라고

 

저 많은 고층아파트 저 좋은 주택

저 아찔하도록 으리으리한 빌딩들은 다 어느 놈들 건지

무슨 용빼는 재주로 도깨비방망이로

땀 흘리며 노동하지 않고도 신선처럼

저 좋은 집들에 들어앉아 사는지

일당 5,300원짜리 15년 기능공 내 인생은

어지러워 어지러워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

먼지 쓴 얼굴로 글썽이는 유난히 초라해 뵈는 아내에게

화풀이로 짜증내다 다시 등을 토닥이고

돌덩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비탈진 산동네 골목길을 기어오르며

찾아서 찾아서

우리 두 몸 뉘일 단칸셋방 찾아서

100에 5만 원짜리 방을 뒤진다

부릅뜬 눈동자로 숨찬 분노로

검붉은 핏빛 노을 비탈진 산동네

찾아서 찾아서

어두운 골목 골목 찾아 헤맨다

 

 

 

배포자의 꿈

박노해

 

때르르르 릉—새벽 2시

며칠째 잔업으로 무거운 몸을 깨어

졸리운 눈을 부비며 후다닥 일어나

운동화 끈을 꽉 잡아매고 새벽길 나선다

 

지정된 전봇대의 비표 스티커가 선명해

아 오늘도 우리 동지들 이상없구나

약속 자오엔 벌써 동지들이 어김없이 나와

잽싼 손매로 신문접기에 분주하다

 

나에게 할당된 500부를 챙겨들고

나지막히 굳센 소리로 투쟁! 손인사를 나누고서

어둔 골목길을 발소리 죽이며 내달려

한부 한부 정성껏 집들이를 시작한다

 

닭장집을 지나 기숙사를 거쳐

철야 중인 후문 담을 타 넘고 공단거리를 내뛰며

어둠 속에 잠들은 이 공단 거리는

이 숨 막히는 절망의 공단 거리는

더 이상 노예들의 거리일 수 없어

날만 새면 몸 팔러 끌려 들어가고

해지면 진 빨려 내팽겨쳐지는

임금 노예들의 축 늘어진 고역의 거리일 수 없어

 

비록 값싼 용지 위의 흐릿한 인쇄지만

우리의 신문은 한 점 한 점 불씨가 될 것이다

노동 형제들에게 새로운 자각과 전망을 주고

투쟁의 열정을 불러일으켜 좌절과 주저를 떨쳐내고

모두에게 해야 할 일감을 찾아 나서게 할 것이다

 

날렵한 밤고양이처럼 어둔 길만 골라 내딛으며

지난주 3공단에서 체포된 정동지는 지금쯤...

엄습하는 불안감에 콩콩 뛰는 가슴을 다잡아

두눈 부릅뜨고 사주를 경계하며

정확하게 쏜살처럼 배포선을 내달린다

 

무겁게 잠들은 이 공단 거리가

굴종과 강제 노동의 노예들의 거리가

온 귓전이 멍멍한 힘찬 함성으로 깨어나

빛나는 근육의 물결로 온 세상을 뒤흔들며

노도처럼 진군해나갈 해방투쟁의 공단거리

아아 빛나는 그날의 거리를 꿈꾸며

칼날 같은 긴장으로 좌우를 살피며

한 부 한 부 뜨거운 열망을 부어

점점이 불꽃을 지펴나간다

 

아직은 어둠 깊은 거치른 공단 거리

날쌘 제비처럼 배포선을 줄달음치는

굳건한 노동자의 팽팽한 몸짓 위로

신새벽 붉은 태양 동터 오른다

 

 

 

뱃속이 환한 사람

박노해

 

내가 널 좋아하는 까닭은

눈빛이 맑아서만은 아니야

 

네 뱃속에는 늘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는 게 보이기 때문이야

 

흰 뱃속에서 우러나온

 

네 생각이 참 맑아서

네 분노가 참 순수해서

네 생활이 참 간소해서

욕심마저 참 아름다운 욕심이어서

 

내 속에 숨은 것들이 그만 부끄러워지는

환한 뱃속이 늘 흰 구름인 사람아

 

 

 

벌레 먹은 희망으로

박노해

 

텃밭에 심은 배추를 뽑아

대충 씻어 쌈을 싸 먹는데

배추벌레 한 마리가

늘씬늘씬 기어간다

 

하 고놈 참 이쁘다

고맙다

너 아직 살아 있구나

그냥 눈물이 난다

 

흠집하나 없는 아주 매끈한 배추처럼

벌레하나 범접 못하게 혹독하게

인간의 욕망을 죽이던 시절이 있었다

 

내 언 몸 속 죽은 듯한

배추벌레들 눈뜨며 꿈틀댄다

 

아 나 살아있다

이리 푸른 속 울음으로

벌레 먹은 희망으로 나 살아있다

 

 

 

별은 너에게로

박노해

 

어두운 길을 걷다가

빛나는 별 하나 없다고

절망하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구름 때문이 아니다

불운 때문이 아니다

 

지금까지 네가 본 별들은

수억 광년 전에 출발한 빛

 

길없는 어둠을 걷다가

별의 지도마저 없다고

주저앉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지금

간절하게 길을 찾는 너에게로

빛의 속도로 달려오고 있으니

 

 

 

박노해

 

허기진 배를 쓸며

오전 내 기다린 점심시간이면

공장 뜰 귀퉁이에도 봄볕이 따사롭다

 

아직 시려운 시멘트벽에 어깨를 기대고

배불러 이야기 많은 아이들 속에서

사르르 졸리운 눈을 들면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고향 집 그리운 추억이 흔들린다

 

못 먹고 부친 돈으로 빚은 얼마나 갚았을까

주름진 어머님의 손등, 고랑 깊은 아버지의 검게 탄 얼굴

철없이 보채고 웃고 싸울 동생들의 모습이

진달래꽃처럼 선연하다

 

독한 추위도 독한 고생도 그보다 더 독하게 이 악물며

겨우내 많이도 기다린 이 봄,

거리에 나서면

봄빛 고운 새옷도 입고 싶고

싫도록 배불리 맛난 것 먹고 싶지만

착하게 성실하게 모든 것을 견뎌 보겠노라

꼬옥 입술 깨물 때

때르르르릉---

오후 작업 벨 소리에 빨려가는

숙이의 종종걸음을

봄바람이 살랑 띄우고 간다

 

 

 

부모로서 해 줄 단 세 가지

박노해

 

무기 감옥에서 살아나올 때

이번 생에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혁명가로서 철저하고 강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허약하고 결함이 많아서이다

 

하지만 기나긴 감옥 독방에서

나는 너무 아이를 갖고 싶어서

수많은 상상과 계획을 세우곤 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일체의 요구와

그 어떤 교육도 하지 않기로 했다

미래에서 온 내 아이 안에는 이미

그 모든 씨았들이 심겨져 있을 것이기에

내가 부모로서 해 줄 것은 단 세 가지였다

 

첫째는 내 아이가 자연의 대지를 딛고

동무들과 마음껏 뛰놀고 맘껏 자라고 맘껏 해 보며

그 속에서 고요한 자기 개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기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

 

둘째는 '안 되는 것은 안 된다'를 새겨 주는 것이다

살생을 해서는 안 되고

약자를 괴롭혀서는 안 되고

거짓에 침묵 동조해서는 안 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것을

뼛속 깊이 새겨 주는 일이다

 

셋째는 평생 가는 좋은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자기 앞가림은 자기 스스로 해 나가는 습관과

채식 위주로 뭐든 잘 먹고 많이 걷은 몸 생활과

늘 정돈된 몸가짐으로 예의를 지키는 습관과

아름다움을 가려보고 감동할 줄 아는 능력과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홀로 고요히 머느는 습관과

우애와 환대로 많이 웃는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그러니 내 아이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은

내가 먼저 잘 사는 것, 내 삶을 똑바로 사는 것이었다

유일한 자신의 삶조가 자기답게 살아가지 못한 자가

미래에서 온 아이의 삶을 함부로 손대려 하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될 월권행위이기에

나는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자 안달하기보다

먼저 한 사람의 좋은 벗이 되고

닮고 싶은 인생의 선배가 되고

행여 내가 후진 존재가 되지 않도록

아이에게 끊임없이 배워 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저 내 아이를

'믿음의 침묵'으로 지켜 보면서

이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하는 것이었다

 

말로 하기로 치자면야

수업이 많이 늘어 놓을 수 있다지만

 

꼭 해야 할

꼭 해 낼 수 있는 세 가지,

 

오늘 나는

그 세 가지의 말로

하늘을 본다....

 

 

 

붉은 스카프

박노해

 

소년궁전에서

긴 세월 그리움에 사무친 북녀가

상처투성이로 산 넘고 물 건너온 남남에게

뜨거운 사랑의 포옹으로

목에다 메어준 붉은 스카프를

북받치는 가슴으로 받는다

 

연인아 기막힌 연인아

기나긴 생이별이 고통이라면

날카로운 대립이 비극이라면

저 장벽이 너와 나의 절망이라면

우리 아직은 이 상봉에 웃음짓지 말자

아직은 노랑 파랑 분홍빛 스카프를

이 내 목에다 매어주지 말라

 

저 외세와 반동의 총칼이

우리의 일치를 가로막고 있다면

백지장으로 뒤덮는 하얀 스카프를

아직은 이 내 목에 매어주지 말라

 

아 이 가슴은

그대 없이는 반쪼가리인 이 가슴은

열망이고 피맺힌 동백꽃 가슴이다

묶이고 깨어질수록 붉게 타는 가슴이다

봄의 생명불을 삼천리 강산에 지르며

막힘없이 북상하는 진달래 가슴이다

피투성이 포복으로 그대를 향하여

새벽태양처럼 솟구치며 전진하는 가슴이다

통일하는 가슴은 그렇게 그렇게

붉게 타오르는 가슴이다

 

우리 막힘없이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 하나로 통일되기 위하여

우리 마침내 해방되기 위하여

지금은 연인아 지금은.

한탄의 몸을 털어 투쟁해야 할 때이다

지금은 저 분단선과 무기들과

통일을 가로막고 선 반동권력과

치떨리는 분노로 투쟁해야 할 때이다

 

투쟁으로만 사랑할 수 있는 연인아

투쟁으로만 하나될 수 있는 가슴아

투쟁으로만 껴안을 수 있는 그대여 그대여

너와 나의 고귀한 언약을

7천만 가슴 위에 함께 새긴 그 맹세를

이 내 목에 선연한 붉은 스카프를

뜨겁게 사무치게 매어주소서

통일하는 가슴으로

투쟁하는 가슴으로

사랑하는 북녀야

사랑하는 남남아

 

 

 

비출 듯 가린다

박노해

 

어두운 밤길을

작은 등불 하나 비추며 걷는다

 

흔들리는 불빛에 넘어져

그만 등불이 꺼져 버렸다

 

순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빛나는

밤하늘 별빛을 보았다

 

언제부터 내 머리 위에서

찬연히 반짝여온 저 별빛

 

작은 등불을 끄지 않고는

하늘의 별빛을 볼 수 없다

 

작은 것은 늘 크고 깊은 것을

비출 듯 가리고 서 있으니

 

 

 

빙산처럼

박노해

 

빙산은 거친 바람의 방향과는 상관없이 일정한 곳을 향하여 묵묵히 진행한다.

바다위에 떠 있는 모든 것들이 바람의 방향을 따르지만 빙산만은

엄청난 힘을 지닌 태풍의 진로마저 거스르며 제 갈 길을 꿋꿋이 간다.

빙산은 자기 몸체의 대부분을 바다속에 두고 있기에 바다 표면의 바람이 아니라

바다 깊은 곳을 흐르는 해류의 흐름만을 따른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치열하게 고뇌한다고

내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그 말 하고 싶은 거지

 

알아

힘들지

널 믿고 사랑해

하지만 빠른 변화 속에 우리 다시 물어야 해

 

내 삶의 큰 부분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내 삶의 자리가 어디쯤 흘러 와 있는가

나 무엇의 힘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진정 내 몸과 생활의 중심부를

저 깊은 심연에, 밑바닥 현장에 뿌리 박고 있는가

 

폭풍을 거슬러 바다 깊숙한 흐름만을 따르는

빙산처럼!

지금 나는 시대의 진실한 흐름만을 따라 하루하루 꿋꿋이 진보하고 있는가

 

 

 

사람만이 희망이다

박노해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크는가

박노해

 

사막에서 새 풀을 찾아

쉴 새 없이 달리는 양들은

잠잘 때와 쉴 때에만

제 뼈가 자란다

 

푸른 나무들은

겨울에만 나이테가 자라고

꽃들은 캄캄한 밤중에만

그 키가 자란다

 

사람도 바쁜 마음을 멈추고

읽고 꿈꾸고 생각하고 돌아볼 때만

그 사람이 자란다

 

그대여, 이유 없는 이유처럼

뼈아프고 슬프고 고독할 때

감사하라, 내 사람이 크는 것이니

 

힘들지 않고 어찌 힘이 생기며

겨울 없이 어찌 뜨거움이 달아오르며

캄캄한 시간들 없이 무엇으로

정신의 키가 커 나올 수 있겠는가

 

 

 

사랑

박노해

 

사랑은

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

사랑은 분노, 철저한 증오

사랑은 통곡, 피투성이의 몸부림

사랑은 갈라섬,

일치를 향한 확연한 갈라섬

사랑은 고통, 참혹한 고통

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

사랑은 노동, 지루하고 괴로운 노동자의 길

사랑은 자기를 해체하는 것,

우리가 되어 역사 속에 녹아들어 소생하는 것

사랑은 잔인한 것, 냉혹한 결단

사랑은 투쟁, 무자비한 투쟁

사랑은 회오리,

온 바다와 산과 들과 하늘이 들고 일어서

폭풍치고 번개 치며 포효하여 피빛으로 새로이 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은

고요히 빛나는 바다

햇살 쏟아지는 파아란 하늘

이슬 머금은 푸른 대지 위에

생명 있는 모든 것들 하나이 되어

춤추며 노래하는 눈부신 새날의

위대한 잉태

 

 

 

사랑은 끝이 없다네

박노해

 

사랑은 끝이 없다네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많은 시간이 흘러서도

그대가 내 마음속을 걸어 다니겠는가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많은 강을 건너서도

그대가 내 가슴에 등불로 환하겠는가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대 이름만 떠올라도

푸드득, 한순간에 날아오르겠는가

 

그 겨울 새벽길에

하얗게 쓰러진 나를 어루만지던

너의 눈물

너의 기도

너의 입맞춤

눈보라 얼음산을 함께 떨며 넘었던

뜨거운 그 숨결이 이렇게도 생생한데

어떻게 사랑에 끝이 있겠는가

 

별로 타오를 우리의 사랑을

이제 너는 잊었다 해도

이제 너는 지워버렸다 해도

내 가슴에 그대로 피어나는

눈부신 그 얼굴 그 눈물의 너까지는

어찌 지금의 네 것이겠는가

 

그 많은 세월이 흘러서도

가만히 눈감으면

상처 난 내 가슴은 따뜻해지고

지친 내 안에선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해맑은 소년의 까치걸음이 날 울리는데

어찌 사랑에 끝이 있겠는가

 

사랑은 끝이 없다네

다시 길 떠나는 이 걸음도

슬픔으로 길어 올린 이 투혼도

나이가 들고

눈물이 마르고

다시 내 앞에 죽음이 온다 해도

사랑은 끝이 없다네

 

나에게 사랑은

한계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패배도 없고

사랑은 늘 처음처럼

사랑은 언제나 시작만 있는 것

사랑은 끝이 없다네

 

 

 

사랑은 발바닥이다

박노해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다

 

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

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

 

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발바닥이 이어주는 대로 만나게 되고

그 인연에 따라 삶 또한 달라지리니

 

현장에 딛고 선 나의 발바닥

대지와 입맞춤하는 나의 발바닥

내 두 발에 찍힌 사랑의 입맞춤

그 영혼의 낙인이 바로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최후의 날

하늘은 단 한 가지만을 요구하리니

어디 너의 발바닥 사랑을 좀 보자꾸나

 

 

 

사랑의 적

박노해

 

사랑을 알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

자신을 전면적으로 내어줄 사랑 하나

키우며 살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누군가로부터 존재 깊숙한 사랑과 믿음

몸으로 확인받으며 살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사랑하면서도 사랑받으면서도 그 사랑

제 한 몸에 가두는 사람은 사랑의 배신자다

사랑 사랑을 노래하면서도

사랑 때문에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사랑의 불안과 가난과 상처에 몸부림치면서도

사랑의 적을 바로 찾지 못한 사람,

그는 진실로 진실로 불행한 사람이다

 

 

 

사랑의 침묵

박노해

 

그대에게도 세월이 지나갔구나

꽃들은 어둠 속에 소리 없이 지고

 

내 사랑하는 것들은 말이 없고

내 사랑하는 여자도 말이 없고

나는 너무 많은 사랑을 하다가 쓰러져

겨울 사내로 말이 없고

 

깊은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듯

진실로 사랑하는 가슴은

너무 많은 말과 너무 많은 사연과

너무 많은 눈물이 있어

말없이 흘러가는 것

 

그래도 꼭 한마디 품고 가야 할 말이 있어

나 이렇게 새벽 강가에서

사랑의 침묵을 듣고 있을 뿐

 

 

 

사형집행일

박노해

 

희망 없는 날들은 끝이 났다

초조하던 밤들도 멈춰 섰다

철커덩, 자 가지

몸무게만큼 철렁이는 공포도

이 아침으로 끝이났다

 

해도 뜨지 않았다

아침이면 창살 너머에서 울던

까치마저 귀신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철커덩, 한목숨

철커덩, 또 한목숨

 

무거운 침묵 깔린 긴 사동 복도

창백한 얼굴 들어 눈인사 던지며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 사형장으로

휘청 넘어질 듯 떠나는 뒷모습

희망 없는 세상도 목매었는가

 

잘 가시게 험한 길

사형수 선배라고 식사때마다

혁수정 채운 손으로 반찬 챙겨 보내던 사람

다시 착하게 태어나 민주화운동 하고 싶다며

솔아 푸르른 솔아 따라 부르던 사람

한 많고 죄 많은 사람아 먼저 가시게

 

단 한 번만 더 생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낮게 낮게 부르짖다 순명하던 날

이렇게 나는 살았고 너는 가는가

비누곽에 민들레꽃 심어준다던

봄은 아직도 아득히 멀은데

아 눈이라도 함빡 쏟아져 내렸으면

 

 

 

산에서 나와야 산이 보인다

박노해

 

달나라에 갔다 온 암스트롱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달에 가서 무얼 보고 왔는가?

 

“지구가 아름답다는 것을 보고 왔다”

 

우리가 매일 그 안에 살고 있는 지구,

그래서 그 온 모습을 바로 볼 수 없었던 지구,

지구가 아름답고 소중한 푸른 별이라는 걸 느끼기 위해서는,

지구에서 떨어져 달나라까지 가서야 확연하게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경주 남산자락 첩첩 벽 속에서 세월이 깊어갈수록

세상이 눈물 나게 아름다워 보입니다

구르는 통 속에서 나와야 통을 마음대로 굴릴 수 있다더니

이렇게 처음으로 멀리 떨어져 내가 살던 산을 바라보니

이제야 산이 바로 보입니다 숲이, 나무가 바로 보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좁고 작았는지, 닫힌 강함이었는지,

세상이 얼마나 크고 장엄한지, 우리가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 건지.....

그리고, 그만큼,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인지,

우리가 왜 미래의 희망인지,

우리가 무엇으로 다시 피어날 수 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환해집니다 눈물 나게 눈물 나게 환해집니다

 

산에서 나와야 산이 보입니다

나, 다시 첫 마음으로, 산으로 걸어갑니다

 

 

 

살구나무꽃이 필 때

박노해

 

고향집 흙담 가에 굵은 등걸로 선

늠름한 살구나무에 꽃이 피면

온 동네가 다 갑자기 환해졌습니다

 

살구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면

흰 눈송이처럼 꽃잎이 우수수 우수수 날리고

누나가 인 물동이 안으로도 사르르 들어가지만

누나는 그 꽃잎을 걷어내지 않고

후~ 입으로 분 다음 살며시 물을 떠주었습니다

 

벌컥벌컥 찬 샘물로 고픈 배를 채우고 나면

내 안에서도 살구꽃이 서럽도록 환하게 피어

꽃잎은 우수수 우수수 안에서도 밖에서도 날리고

 

나는 동무들과 기운차게 봄 언덕을 뛰어다니며

꽃잎 진 자리에 아프게 돋는 연둣빛 새잎처럼

가난함으로 더 푸르게 숨쉬는 미래를 꿈꾸곤 했습니다

 

 

 

살아서 돌아온 자

박노해

 

진실은 사과나무와 같아

진실이 무르익는 시간이 있다

 

눈보라와 불볕과 폭풍우를

다 뚫고 나온 강인한 진실만이

향기로운 사과 알로 붉게 빛나니

 

그러니 다 맞아라

눈을 뜨고 견뎌내라

고독하게 강인해라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음해와 비난은 한 철이다

절정에 달한 악은 실체를 드러낸다

 

그대 아는가

세상의 모든 거짓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자는

그 존재만으로 저들의 공포인 것을

 

​진실은 사과나무와 같아

진실한 사람의 상처 난 걸음마다

붉은 사과 알이 향기롭게 익어오느니

 

자, 이제 진실의 시간이다

 

 

 

살아온 시간들이 떨린다

박노해

 

갓 깨어난 뽀얀 병아리 걸음마 할 때

마지막으로 안아보았던 우리 민이가

거친 세월 돌아와 보니 선뜻 안기도 뭐한

젖가슴 봉긋한 어엿한 아가씨다

한참 물오른 민이 친구들 앞에서

한 말씀 하라고 해 억지로 나섰는데

 

느닷없이 내가 떨린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떨린다

내가 속해온 공동체가 떨린다

 

나는 지금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새로운 미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전혀 새로운 진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순결하고 풍부한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

작은 반짝임에도 까르르 반응하는 민감한 감성

경쾌하게 퉁겨오르는 저 기지가 빛나는 지성

미래는 지금 여기, 바로 내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연둣빛 지성이 앞으로 모든 진보를 이루어낼 것이다

 

이런 새 주인공 앞에서

떨림도 놀라움도 두려움도 없이

태연하게 낡은 지식을 씌우고 낡은 외줄을 태우고

고색 창연한 사상과 문법과 이중성으로 역겨운 도덕과

지긋지긋한 권위와 권태와 체벌로 대하고 있다니---

저 농경사회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만 같은 엄한 구식 스승처럼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낡은 시간의 흔적들

진보라는 이름 속에 도사린 낡아빠진 껍질들이

이 새로운 공동체 앞에서 투명하게 떨린다

 

물방울 튕기듯 웃는 민이 친구들과 손잡고 걸으며

불의에 분노하고 저항하고 부정하다가

그만 낡은 것들을 닮아버린 오, 우리를

너희는 너그러이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라

상쾌한 깨어짐으로 내가 막 떨린다

 

 

 

삶의 시작

박노해

 

현실은 나의 스승

 

패배는 나의 깨침

 

슬픔은 나의 정화

 

 

 

삶의 신비

박노해

 

현실은 나의 스승

패배는 나의 깨침

슬픔은 나의 정화

고통은 나의 창고

겨울은 나의 투혼

 

 

 

삶이 불타고 있다

박노해​

 

그 시대 젊은 우리는

프로메테우스가 되고자 했다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 와

춥고 가난한 지상의 인간에게 주는,

그리하여 쇠사슬에 묶여 날마다

적의 부리에 심장을 파먹혀가는,

 

어둠의 시대는 가고

불의 시대가 왔다

 

기술의 불과 권리의 불과

탐욕과 질시와 재미의 불이

인간의 감각을 불지르고

대지와 하늘을 불지르고

오래된 전승과 신성한 지혜와

자신의 영혼을 불지르고

삶 자체를 불지르도다

 

반신반인들의 불타는 지구여

더 많은 불을 바라는 시대여

어둠 속 동굴에 묶인 나는

녹슨 쇠사슬에 풀려나

불타는 세계를 걸었노라

그로부터 나는 다시

침묵의 설산으로 올라가

세계의 희망이 어떻게

살해되어 가는지를 보았노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산정에 앉아 홀로 울었노라

 

불타는 세계에는 남아 있지 않은

누가 맑은 눈물을 흘려 불을 잡겠는가

누가 영혼의 불을 밝혀 불을 잡겠는가

삶이 불타고 있다

인간의 날이 불타고 있다

영혼이 차갑게 불타고 있다

 

 

 

삼청교육대

박노해

 

서릿발 허옇게 곤두선

어둔 서울을 빠져 북방으로

완호로 씌운 군용트럭은 달리고 달려

공포에 질린 눈 숨죽인 호흡으로

앙상히 드러누운

아 3․8교!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살아 다시 3․8교를 건널 수 있을까

호령 소리 군화 발길질에 떨며

껍질을 벗기우고 머리털을 깎여

유격복과 통일화를 신고

얼어붙은 땅바닥을 좌로굴러 우로굴러

나는 삼청교육대 2기 5-134번이 된다

 

핏발 선 분노도 의리도 인정도

군홧발 개머리판에 작살나

제 한 몸 추스르지 못해 웃음 한번 없이

깎지 끼고 땅을 기다 부러진 손가락

영하 20도의 땅바닥에서 동상 걸려 진물 흐르는 발바닥

얻어터져 성한 곳 하나 없는 마디마디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벌건 피똥을 싸며

처음으로 소리죽여 흐느끼다

호루라기 집합 소리에 벌떡 일어선다

 

눈보라 치는 연병장을 포복하며

원산폭격 쪼그려뛰기 피티체조 선착순

처지면 돌리고 쓰러지면 짓밟히고

꿈틀대면 각목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내무반을 들어서면

한강철교 침상 위에 수류탄 철모깔고구르기

군홧발로 조인트 까져 나뒹굴고

뻬치카벽에 세워놓고 주먹질 발길질에

게거품 물고 침목해 가는

아 여기는 강제수용소인가 생지옥인가

그렁그렁 탱크이빨에 씹히는 꿈에 소스라치면

흥건한 식은땀에 헛소리 신음 소리

흐느끼는 소리 이를 앙가는 저주 소리

그 속에서도 아직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자

우리는 밤마다 조심스레 가슴을 연다

 

김형은 체불임금 요구하며 농성 중에

사장놈 멱살 흔들다 고발되어 잡혀 오고

열다섯 난 송군은 노가다 일 나간

어머니 마중길에 불량배로 몰려 끌려오고

딸라빚 밀려 잡혀 온 놈

시장 좌판터에서 말다툼하다 잡혀 온 놈

술 한잔하고 고함치다 잡혀 온 놈

춤추던 파트너가 고관 부인이라 잡혀 온 놈

우리는 피로와 아픔 속에서도

미칠 듯한 외로움과 공포를 휘저으며

살아야 한다고 꼭 다시

살아 나가야 한다고

얼어 터진 손과 손을 힘없이 맞잡는다

 

날이 갈수록 야수가 되어

헉헉거리다 탈진하여

마지막 벼랑 끝에 서서

차라리 포근한 죽음을 갈구하며

따스한 속살 내음을 그리며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인간이고자

일어서 울부짖던 사람들은

무자비한 구타 속에 의무실로 실려가고

장파열 뇌진탕 질식사로

하나둘 죽어 나가

뜬눈으로 가슴 타는 초췌한 여인 앞에

돈 많이 벌어올 아빠를 기다리는 초롱한 아가 앞에

360만 원짜리 재 한 상자로 던져진다

 

민주노조를 몸부림치다

개처럼 끌려온 불순분자 이군은

퉁퉁 부은 다리를 절뚝이며

아버지뻘의 노약한 문노인을 돌봐 주다

야전삽에 찍혀 나가떨어지고

너무한다며 대들던 제강공장 김형도

개머리판에 작살나 앰블런스에 실려 나간다

잔업 끝난 퇴근길에 팔뚝에 새겨진 문신 하나로 잡혀 와

가슴 조이며 기다릴 눈매 선선한

동거하던 약혼녀를 자랑하며

꼭 살아 나가야 한다고 울먹이던 심형은

끝내 차디차게 식어 버리고

일제시절 징용도 이보단 덜했다며

손주 같은 군인들에게 얻어맞던 육십 고개 송노인도

화통에 부들부들 뻗어 버리고

아주 죄도 없이 전과자라는 이유로 끌려왔다며

고래고래 악쓰던 사십 줄 최씨는

끝내 탈영하여 백골봉에 올라

포위한 군인들과 대치하다가

분노의 폭발음으로 터져 날아가 버린다

 

악몽 속에 몸부림쳐도 떨치려 해도

온몸을 뒤흔들며 묻을래야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80년의 겨울

잊을 수 없는 80년의 겨울

개처럼 죽어간 자들의

시퍼런 원혼은 지금도 이 땅의 어드메를 떠돌고 있을까

가련한 살붙이와 여인네들은

이 휘황한 거리의 어디쯤에서 노점상으로 쫓기며

네온싸인보다 섬뜩한 원한으로 서려 있을까

그 많은 동기생들은

흐린 날이면 욱신대는 뻐마디 주무르며

지금쯤 어느 일터 어느 구석에서

삭아내리고 있을까

허연 칼날을 갈고 있을까

동상에 잘려나간 발가락의 허전함보다

철야 한 번 하고 나면 온통 쥐어뜯는

폐차 직전의 내 육신보다 더 뼈저린 지난 세월 속에

진실로 진실로

순화되어야 할 자들은

우리가 아닌 바로 저들임을,

푸르게

퍼렇게

시퍼런 원한으로

깊이깊이 못 박혀

화려한 조명으로

똑똑히 밝혀 오는

피투성이 폭력의 천지

힘없는 자의 철천지 원한

되살아나

부들부들 치 떨리는

80년 그 겨울

삼청교육대

 

 

 

상처가 희망이다

박노해

 

상처 없는 사랑은 없어라

상처 없는 희망은 없어라

 

네가 가장 상처받는 지점이

네가 가정 욕망하는 지점이니

 

그대 눈물로 상처를 돌아보라

아물지 않는 그 상처에

세상의 모든 상처가 비추니

 

상처가 희망이다

 

상처받고 있다는 건 네가 살아있다는 것

상처받고 있다는 건 네가 사랑한다는 것

 

순결한 영혼의 상처를 지닌 자여

상처 난 빛의 가슴을 가진 자여

 

이 아픔이 나 하나의 상처가 아니라면

이 슬픔이 나 하나의 좌절이 아니라면

그대, 상처가 희망이다

 

 

 

상처의 문

박노해

 

내 마음 밭이 거칠었습니다

내 영혼이 낮은 포복하고 있습니다

어둔 강가에 세워진 나목처럼

겨울로 가는 찬바람을 그냥 맞습니다

 

아 지금 나의 침묵은 패배의 무게에 짓눌려

얼음 강 짜개지는 신음입니다

 

하늘은 밤을 새워 벗어 내리고

세상은 온통 순백입니다

이제는 내 거친 마음 밭 감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열어 보이게 하십시오

삽과 호미 든 사람들 불러들여

마음껏 찧고 갈아엎게 하십시오

 

아픈 내 상처의 문

눈물 훔치며 열어두었나니

힘들여 내 마음 밭도 갈아엎었나니

당신의 숨결로 부드럽게 골라주어 거기에

강인한 사랑의 싹이 움터오르게 하십시오

 

피 흐르는 나의 상처가

내 마음의 문을 닫아걸게 하지 말고

그 상처의 문을 통해 더 많은 일치와

더 굳센 연대가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찍혀진 상처만큼 뜨겁고 새푸른

순결한 나의 투혼이 살아 오르게 하십시오

 

 

 

새벽 강에서

박노해

 

이 너른 세상에

서로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가슴 떨리는 기쁨인가.

 

마주 보던 두 사람이

함께 앞을 보는 모습은

얼마나 눈물겨운 아름다움인가.

 

우리 길을 잃어버렸네.

그대와 나 사이에 강물은 말라가고

함께 바라 볼 앞이 무너져 버렸네.

 

나 이제 조용히 가슴치며

다시 사랑을 배워야 하네.

뜨거운 마주봄이 아니어도

일치된 한 길이 아니어도

 

서로 속 아픈 차이를 품고

다시 강물을 이루어야 하네.

 

건널 수 없는 산과 산이 무릎을 맞대며

빈 들판을 휘감아 흐르듯이

이 아늑한 천지간에

먼 듯 하나인 듯

 

새벽 강물로 다시 흐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큰 슬픔인가 아름다움인가.

 

 

 

새벽 별

박노해 

 

새벽 찬물로 얼굴을 씻고 나니

창살 너머 겨울나무 가지 사이에

이마를 탁 치며 웃는 환한 별 하나

 

오 새벽 별이네!

 

어둔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온다고

가장 먼저 떠올라

새벽별.

 

아니네!

 

뭇 별들이 지쳐 돌아간 뒤에도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별,

끝까지 돌아가지 않는 별이

새벽별이네

 

새벽별은

가장 먼저 뜨는 찬란한 별이 아니네

가장 나중까지 어둠 속에 남아 있는

바보 같은 바보 같은 별,

그래서 진정으로 앞서가는

희망의 별이라네

 

지금, 모든 별들이 하나둘

흩어지고 사라지고 돌아가는 때,

우리 희망의 새벽별은

기다림에 울다 지쳐 잠든 이들이

쉬었다 새벽길 나설 때까지

시대의 밤하늘을 성성하게 지키다

새벽 붉은 햇덩이에 손 건네주고

소리 없이 소리 없이 사라지느니

 

앞이 캄캄한 언 하늘에

시린 첫마음 빛내며 떨고 있는

바보 같은 바보 같은 사람아

눈물나게 아름다운 그대,

 

오 새벽 별이네!

 

 

 

서로가 길이 되어가는 것

박노해

 

올곱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바른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면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서성인다

박노해

 

가을이 오면

창밖에 누군가 서성이는 것만 같다.

문을 열고 나가 보면 아무도 없어

그만 방으로 들어와 나 홀로 서성인다.

 

산뜻한 가을바람이 서성이고

맑아진 가을볕이 서성이고

흔들리는 들국화가 서성이고

 

가을 편지와

떠나간 사랑과

상처 난 꿈들이

자꾸만 서성이는 것만 같다.

 

가을이 오면

지나쳐 온 이름들이

잊히지 않는 얼굴들이

자꾸만 내 안에서 서성이는 것만 같다.

 

 

 

선한 영향력이 있으니

박노해

 

자신 안에 자리한 악의 능력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자가 있다

 

자신 안에 커오는 선의 능력을

쉬임 없이 고무시키는 자가 있다

 

그는 어느 쪽인가

나는 어느 쪽인가

 

악은 선을 삼켜야만 연명할 수 있으니

선은 악에 맞서야만 커나갈 수 있으니

 

그러니 선한 이여

악에게 자신을 내어주지 마라

위선을 떨치고 선함을 지켜라

 

진실로 선한 사람은 나쁜 사회에서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좋은 삶을 사는 사람

 

아무리 작아도 선한 존재는

그 자체로 어두운 세상의 등불이니

아무리 무력한 듯해도 선한 사람은

선한 존재 자체로 내뿜는 영향력이 있으니

 

진실로 선하게

끝까지 선하게

 

 

 

성호를 긋는다

박노해

 

사형, 사형이다

 

이렇게 올 것이 온 것이다

호송차는 사이렌 소리를 지르며 밤길을 달리고

붉은 포승줄에 묶여 다시 돌아온 독거방

마룻바닥에 놓인 식은 짬밥 앞에서

침묵의 성호를 긋는다

떨리는 성호를 긋는다

 

아, 나는 지금 외로운 것이다

나는 지금 붙들고 싶은 것이다

이 운명을 피해 보고 싶은 것이다

밧줄에 목 매달리는 불안함도 뼈아픔도

다 마주치면 순간인데

새삼스런 이 울음은

나약한 인간의 애착인가 두려움인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보며

사라져갈 내 인생 위에 성호를 긋는다

나의 노동과 시와 투쟁의 기억 위에

서러운 애무처럼 성호를 긋는다

마지막 검은 천이

두 눈을 가리우는 최후의 순간까지

그래, 좀 더 의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좀더 순결하고 좀더 아름다운

노동자의 미소를 닦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마에서 심장으로 이어지는

침묵의 성호를 긋는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절정,

그 검은 땅 위에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리면

노랗게 피어나는 민들레처럼

끝내 부활로 이어지고야 말

나의 사랑, 나의 믿음,

아 우리들 혁명의 성호를 긋는다

 

 

 

세기말 성자의 기도

박노해

 

무너져야 할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알뜰한 것들만 겨우 살아남은 세기말의 가을날

황혼이 붉게 물든 빈 들녘에서

멀리 더엉 더엉 더엉 종소리 울리고

두 손 모아 가만히 절하는 젊은 농사꾼을 보았습니다

 

하늘이여

보잘것없는 이 몸이 올 한 해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갈 이 목숨

제 한 몸을 부지런히 써서 이 지상의 식구들

백서른 명을 먹여 살릴 쌀을 거두었습니다

푸른 벼와 보리와 우리 밀을 길러

수천 명이 마실 수 있는 맑은 산소를 생산했고

논농사로 귀한 생명의 물을 지하수로 저장시켰습니다

비바람에 휩쓸려 내려가 저 강과 바다를 메웠을

수십 트럭분의 토양 유실을 막아냈고

물질경이 벗풀 새뱅이 미꾸라지 새들까지

서로를 먹여 살리며 한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어느 작가나 예술가도 그릴 수 없는 아름다운 들 그림과

노래와 풍광을 당신의 붓이 되어 보여주셨으며

어느 학자나 종교인도 가르칠 수 없는 대자연의 진리와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삶을 제 농사를 통해 살아냈습니다

박물관이나 도서관으로도 보존할 수 없는 문화 전통과

소중한 민족의 혼을 고스란히 지켜냈습니다

제 작은 몸을 통해 이 많은 선업을 이루게 하셨으니

하늘이여 고맙습니다

 

만물은 서로 핏줄처럼 맺어져 있고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이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이 땅에 짓는 사랑은 곧 인간에 짓는 사랑의

바탕 뿌리임을 굳게 믿습니다

새봄에도 건강한 몸으로 더 많은 사랑의 노동을 지어

가게 하소서

좋은 일을 행복한 마음으로 서로 사이 좋게 해나가게 하소서

어두워 오는 세기말의 황혼을 등지고

빈 들에서 손 모아 기도하는 이 시대의 성자를

시린 눈으로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 인디언 추장의 말에서 따온 구절

 

 

 

셋 나눔의 희망

박노해

 

생명농사 지으시는 농부 김영원님은

콩을 심으 때

한 알은 하늘의 새를 위해

또 한 알은 땅속의 벌레들을 위해

나머지 한 알은 사람이 먹기위해

심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만주 들판에는 삼전(三田)이 전해오는데

일제 때 쫓겨 들어간 우리 조상님들이

눈보라 속에서 맨손으로 일궈낸 논을 3등분해

하나는 독립운동하는 데 바치는 군전(軍田)으로

또 하나는 아이들 학교 세우는 데 학전(學田)으로

나머지 하나는 굶주림을 이겨내는 생전(生田)으로

단호히 살아내신 터전이 바로 삼전인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오늘

내가 번 돈

나의 시간

나의 관심

나의 능력

어디에 나눠 쓰며 살고 있는가요

 

지금 나는 콩 세 알의 삶인가요

삼전의 뜨거움, 삼전의 푸르름,

셋 나눔의 희망을 살고 있는가요

 

 

 

소걸음의 때

박노해

 

벽 앞에 바로 앉아 고요히 숨을 고르면

어는 순간 살며시 내가 내 몸을 빠져나와

벽 속의 나를 지켜보곤 합니다

 

내가 나를 보니 울안에 갇힌 일소 한 마리입니다

움머어 움머어 봄 일 가자고 풀밭에 가자고

이 문 좀 열어줘 이 고삐 좀 풀어줘

 

일어섰다 안았다

뿔로 쿵쿵 밀어보았다

고삐 줄 당겼다 놓았다

푸르러 오는 앞산 보고

움머어 움머어

 

창살 안에 말 달리던 사내 하나

벽 앞에 눈 감고 앉아

일하러 가자고 빈 들판에 가자고

움머어 움머어

속울음 웁니다

 

해 그림자 기울어도

어둠 깔고 앉아 그대로 입니다

산에 들에 꽃피는데 꽃피는 봄날인데

아! 말 달리던 때는 저만치 흘러가고

지금은 소걸음의 때

호랑이 같은 눈으로 앞날을 뚫어보고

소걸음처럼 견고하게 나아가리*

 

산벚나무 꽃잎 하나 파르르 날아들어

여윈 어깨 위에 가만히 내려앉습니다

 

 

 

소중한 일부터

박노해

 

빠르고 복잡해지는 생활 속에서 성공하는 시간 관리의 핵심은

바쁜 일들을 우선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덜 급하나 소중한 일부터 먼저 하는 것입니다

 

빨리빨리 바쁘게 살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빠른 길은 방향을 바로잡아 가는 것입니다

 

삶은 시간이기에 한정된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부터 먼저 하는 거겠지요

여유가 생기면, 준비만 갖추면, 언젠가는, 하면서

자꾸 미루다간 영영 못하고 맙니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해가서

차츰 몸도 의지도 다 빛바래 가고 맙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게 시간입니다

 

이렇게 시간에 쫓기고 망쳐지면서 돈과 여유를 아무리 추구해봐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고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내 한 생의 겉돌기를 멈추고 곧장 삶의 핵심으로 들어걸 순 없을까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그 일을 지금 이대로 바로 시작할 순 없을까요

 

그대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곤 합니다

우린 돈도 학벌도 신분도 조건도 다 제치고

오직 사람 하나 보고 맑은 눈빛 하나 보고

곧장 서로의 존재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지요 참 맑고 뜨거웠지요

우린 세상의 가장 낮고 그늘진 현장에서 기다림 하나 키우며 살기로 했지됴

그 약속 그 사랑으로 우리 여기까지 함께 와 있지요

 

 

 

손 무덤

박노해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여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주질 못하였다

 

환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 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 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 상가처럼

외국 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흐르고

프로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

선진조국의 종로 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마간 미친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 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 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손을 내어 뻗는다

박노해

 

아 저 손

흰 파도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우렁찬 함성의 저 손들을 보아

거대한 피스톤처럼 힘차게 내뻗고 당기는

저 수만 노동자의 힘찬 손을,

일사불란하게 내뻗는 우리들의 손을 보아

 

지금까지 이 손은,

기름때 절어 거칠은 이 내 손은,

단 한 번 자신 있게 내어 뻗지도

동료들과 단단히 맞잡아보지도 못한 채

비굴하게 웅크리던 굴종의 손이었어

떳떳이 내놓지 못하고 감추기만 하던

텅 비어 축 늘어진 나약한 손이었어

 

이 빈손, 무력하던 이 손을 들어

서로가 작은 이익을 앞다퉈 잡으려 경쟁하던

참으로 한심하던 부끄러운 이 손을 들어

제각기 모래처럼 흩어져 허우적대던

우리들 공허한 손을 불끈 치켜들어

한 호흡 한 구호로 당당하게 내어뻗는다

가슴을 쫙 펴고 목청도 드높이

앞으로 앞으로 내어뻗는다

 

아 아 저 손들이

혼자서는 두렵고 힘없던 손들이

공장 안에서는 한 무리 작던 손들이

뜨거운 연대로 함께 뭉치니

찬란하구나 장대하구나

하나의 기치 아래 하나의 표적을 향해

거대하게 조직된 하나의 손이 되어

모두 함께 일치단결 손을 내어뻗으니

찬란하고 눈부신 성난 파도가 되는구나

 

타도하자! 타도하자! 타도하자!

보이지 않는 쇠사슬 감긴 노동자의 손을 들어

거절당하고 배신당한 분노의 손을 들어

불타는 적개심에 떨리는 손을 들어

전진하며 전진하며 내어뻗는다

질서정연하게 조직된 거대한 손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진격하는 거대한 무기가 되어

 

일제히 내어뻗는 우리들의 손은

꽉 쥐어 내어뻗는 노동자의 손은

분단의 장벽을 쿵 쿵 부순다

미제의 핵탄두를 반동의 총칼을

이 자본가 세상의 근본 토대를

꽝 꽝 가차 없이 파괴한다

공격의 무기가 된 강철 주먹으로

세차게 내뻗치는 강철 피스톤으로

쫘악 쫘악 타도의 손을 내어뻗는다

 

아 위대한 노동자의 손을 들어

이 민족의 희망의 손을 들어

쟁취하자! 쟁취하자! 쟁취하자!

이 세계 주인의 성스러운 손을 합쳐

뜨겁게 뜨겁게 내어 뻗는다

눈부신 파도처럼 번쩍이는 총구처럼

우리들 조직된 거대한 손을

일사불란하게 쫘악 쫘악 내어뻗는다

 

이 세계가 완전히 장악될 때까지

내 손으로 내 운명을 관장할 때까지

모든 인류가 해방된 손을 하나로 맞잡을 때까지

세차게 세차게 내어뻗는다

 

 

 

손을 펴라

박노해

 

원숭이는 영리한 동물입니다

아프리카 토인들은 이 영리한 원숭이를 생포할 때

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원숭이가 제일 좋아하는 쌀을 넣어

나뭇가지에 단단히 매달아놓습니다

가죽 자루에 입구는 좁아서

원숭이의 손이 겨우 들어갈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얼마 동안을 기다리면 원숭이가 찾아와

맛있는 쌀이 담긴 자루 속에 손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곤 쌀을 가득 움켜쥔 원숭이는 아무리 기를 써봐도

그 자루 속에서 손을 빼낼 수가 없습니다

놀란 원숭이는 몸부림치며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손을 펴고 쌀을 놓아버리기만 하면 쉽게 손을 빼내 저 푸른 숲속을

다시 자유롭게 누비며 살 수 있으련만, 슬프게도

원숭이는 한 줌의 쌀을 움켜쥔 손을 펴지 못한 채 울부짖다가

결국 토인들에게 생포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손을 펴라

놓아라 놓아버려라

움켜쥔 손을 펴라

한 번 크게 놓아버려라

 

 

 

쉬는 것이 일이다

박노해

 

잘 쉬는 사람은 매사를 '쉬움'으로 대한다

몸이 훈훈해지고 편안함이 스며들어

제왕이 된 듯 남에게 기꺼이 양보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

그리고 그의 삶은 날로 단순미를 얻는다

그런 이는 남과 더불어 있을 때 비로소 '줄 게' 있게 된다

그것은 작은 미소일 수도 있고, 속에 품은 연만일 수도 있다

'홀로' 있을 수 없는 자가 베푼다는 서비스는 기실 자신의 병을 전염시키는 것이요,

남을 식민지화하려는 계략일 뿐이다

하느님이 '홀로' 계시다는 것은 그가 그득하다는 의미요,

그 때문에 만유에게 후히 주실 수 있는 거이리라

-제가 좋아하는 곽노순님의 글에서

 

지치고 몸이 아프면 의지도 기력도 다 빠져나간 텅 빈 몸이

저 홀로 더엉더엉 울립나다

쉬어라! 몸이 하는 말에 귀 기울여 몸이 던지는 화두를 받습니다

 

쉼, 휴(休)!

푸른 나무[木]에 몸 기대인 사람[人]하나

아름드리 나무 그늘 아래 잠시 짐을 벗고 맑은 솔바람에 땀 씻으며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단전에 힘을 주며 긴 호흡으로

다시 저 먼 길을 바라보는 모습이 평화롭습니다

 

나는 나를 쉬지 못했습니다 내 슬픈 불덩어리를 쉬지 못했습니다

밤낮 일하고 달리고 싸우고 열심이 지나쳐 한순 욕심이 되어

내 속의 푸르름과 밝음을 이토록 갉아먹을 때까지

나는 진정 나를 쉬지 못했습나다

 

쉬어라!

쉰다는 것은 곧 버린다는 것

버리고 또 버려 맑은 소리 날때까지 쉼 없이 나를 돌이켜 비워 내리는 것

텅 빈 내안에서 다시 세상의 아픈 소리, 내일이 싹트는 소리,

나직한 하늘 소리가

새벽 종울림으로 울릴 때까지

 

쉬어라!

쉬는 것도 일입니다 쉬지 말고 쉬어야 합니다

밤의 시간이 있어야 내일 다시 해가 뜨고

겨울 삶이 있어야 푸른 봄이 자라나듯

쉬어야 차오르고, 쉬어야 깊어지고, 쉬어야 멀리 내다보며

끝까지 진보할 수 있습니다

쫓기는 삶을 돌이켜 쫓는 삶이 되어야 이 복잡해진 세계 속에 숨어 있는

참사람의 푸른 길을 함께 걸아갈 수 있습니다

 

지나 불의 시대가 그랬습니다 쉴 틈도 없었고 쉴 생각도 못했습니다

눈 뜨면 투쟁이었고 앉으면 논쟁이었고 사건과 역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모두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스스로 전위임을 자임했고

시대의 고통과 과제를 다 지고 쓰러지는 순간까지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고 나면 싸움이고 매일 울분에 젖고 매일 결단하고 밤을 지새고...

그때는 홀로 쉬고 자기를 돌보는 시간이 '또 하나의 생산'이 아니라

나약함과 불철저함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이제 불의 시간은 저만치 흘러가고 그 헌신, 그 열정을

그대로 내면화할 때입니다

불덩어리를 안으로 품어 내 온몸 구석구석에서 내 삶의 바창 뿌리에서

우리가 놓쳐온 작은 생활 하나하나에서 푸르게 되살려내야 할 때입니다

 

참혹하게 무너진 나는 근본 자리로 돌아가 나를 열고 나를 비움으로

천 골짝 만 봉우리 물이 흘러들어 이 물둥지가 차오르기를

가득 차오른 물이 다시 저 들녘으로 기쁘게 흘러가기를

하루하루 치열한 기다림으로 살고 있습니다

 

 

 

시다의 꿈

박노해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밋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려오는 온몸을 소름 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 바람 치는 공단 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 별 빛나다

 

 

 

신혼일기

박노해

 

길고 긴 일주일의 노동 끝에

언 가슴 웅크리며

찬 새벽길 더듬어

방안을 들어서면

아내는 벌써 공장 나가고 없다.

 

지난 일주일의 노동

긴 이별에 한숨 지며

쓴 담배 연기 어지러이 내어뿜으며

혼자서 밤들을 지낸 외로운 아내 내음에

눈물이 난다.

 

깊은 잠 속에 떨어져 주체못할 피로에 아프게 눈을 뜨면

야간 일 끝내고 온 파랗게 언 아내는

가슴 위로 엎으러져 하염없이 쓰다듬고

사랑의 입맞춤에

내 몸은 서서히 생기를 띤다.

 

밥상을 마주하고

지난 일주일의 밀린 얘기에

소곤소곤 정겨운

우리의 하룻밤이 너무도 짧다.

 

 

 

아름다운 고백

박노해 

 

사람들은 날보고 신세 조졌다고 한다

동료들은 날보고 걱정된다고 한다

 

사람들아

나는 신세 조진 것도 없네

장군이 이등병으로 강등된 것도

억대 자산 부도난 것도

관직에서 쫓겨난 것도

전무에서 과장으로 좌천된 것도 아니네

 

아무리 해봤다 12년 묵은 기술이야 몸에 살아 있고

허고많은 일자리 중에 좀 불편하면 어떤가

까짓거 애당초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 기름쟁이되어

백년가라 빡빡 기어 봤자

사장이 되겄는가

장관자리 하겄는가

사무직 출세하겄는가

한 서너달 감방 산들 살찌고 편하고 수양되데그랴

노동자가 언제는 별볼일 있었나

조질 신세도 없고 찍혀 봤자 별볼일 없네

 

벗들이여

너무 걱정 말게

이렇게 열심히 당당하게 살아가지 않는가

진실로 부끄러이 고백하건대

나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경쟁하는 인간이었네

내게 득이 되면 친구라 했고 손해 볼 듯하면 버렸네

동료를 불신하고 필요한 만큼만 알고 이용가치로만 따졌네

좌절과 허망 속에 그저 일하고 먹고 자고 취하고

산다는 의미조차 없이

겉멋과 향락만 동경하며 내 한 몸조차 보존키 어려웠네

 

노동운동을 하고부터

동료와의 깊은 신뢰와 나눔과 사랑 속에

참말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았네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신뢰와 사랑 속에

동료를 위해 사는 것처럼 큰 희열이 어디 있을까

라면 한 개 쓴 소주 한 병을 노놔 먹어도 웃음꽃이 피고

불안함과 경계가 없이 너나가 우리로 다함께

환히 열린 하나됨 속에서 해방의 기쁨을 나는 맛보네

나의 눈물이 동료들의 웃음이 되고

나의 고통이 동료들의 기쁨이 되고

나의 아픔이 우리들의 희망이 된다면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답고 뜻깊은 생인가

 

신세 조졌다 해도 좋다

이 땅의 노동형제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하는,

죽음 같은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의 형틀을 깨부수는

노동운동의 열기찬 대열 속에서

보람과 자랑스런 노동자로

오늘도 낯설은 현장에서

지루함과 수모도 차근차근 삭여 가며

지칠 줄 모르는 투쟁의 불꽃은 타네

 

 

 

아름다운 등불               

박노해

 

사람이 등불이다

아름다운 사람은

그 자체로 사람을 설레게 하고

사람을 성찰하게 하고

내 안의 아름다움을 밝히게 한다

아하 그렇구나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가려면

내가 먼저 아름다운 사람이어야겠구나

내가 있음으로 자기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

자신을 망치는 것들과 치열히 싸워가게 하는

아름다운 등불로 걸어가야겠구나

 

나이 들수록 더 푸르고 향기 나는

아름다운 사람의 등불로

 

 

 

아름다운 사람은 이렇게 그 자체로

박노해

 

아름다운 사람은 이렇게 그 자체로

사람을 설레게 하고

사람을 성찰하게 하고

내 안의 아름다움을 밝히게 하는구나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가려면

내가 먼저 아름다운 사람이어야겠구나

내가 있음으로 자신이 한 번 더

돌아봐지고 내가 있음으로 자기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 자신을 망치는

것들과 치열히 싸워가게 하는

아름다운 등불로 걸어가야겠구나

 

 

 

아름다운 성공

박노해

 

사랑의 크기를 넘어선 성공이라서

그만큼 시간 따라 무너지는 사람이 있다

 

능력을 키워가지 않는 사랑이라서

그만큼 시간 따라 앙상해지는 사람이 있다

 

우리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지만

우리의 무능은 우리의 죄일 수 있다

 

사랑은 치열한 것이다

 

사랑만큼의 실력을

사랑만큼의 투혼을

 

사랑을 하기 위한 힘

순수한 힘을!

 

 

 

아빠의 향기

박노해

 

야 아빠다

달려와 안기던 딸아이가

아유 냄새

이쁜 얼굴 찡그리며 고갤 돌린다

 

솔아 니 유아원에도 보내고

컴퓨터도 사줄라꼬

회사에서 일한 아빠 향기잖아

까끄런 내 입맞춤에 찡그리며 웃는다

 

솔아 훗날 너는 알게 되리라

온몸에 배인 이 아빠의 냄새를

이 기름 냄새의 설움과 아픔을

이 기름 향기의 깨끗한 가치를

 

 

 

아직과 이미 사이

박노해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는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미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하고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아픈 벗에게

박노해

 

착한 사람은 능력이 모자라고

유능한 사람은 사랑이 부족하다

 

뜻있는 사람들은 현실에 어둡고

현실을 알 만하면 뜻을 저버린다

 

튀는 감각이 있는 아이들은 진지함이 없고

진지한 사람들은 어느덧 낡아지고 몸 무겁다

 

한 번은 다 바치고 돌아와

상처마다 첫마음의 등불을 켜고

변해서는 안 될 것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인 자기 변화에 앞장서서

진실한 실력으로 이루어낸 친구야

 

아 그러나 너에게는 건강이 허락되질 않는구나

 

소중한 사람아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라

새로 오는 새천년의 위기 앞에

우리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너는 너 하나가 아니다

몇 겹을 뚫고서 살아나온

우리의 눈물과 피와 숨결이 빚어낸 사람

 

어서 일어나라

건강하게 살아나라

 

 

 

아픔의 뿌리

박노해 

 

내가 교사였을 때

제법 목에 힘주고 봉투도 받아 가며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스승이었다

나는 노동자입니다 하는 순간

아이들 눈앞에서 이년, 저놈, 불순분자,

줄줄이 고개 처박고 기차놀이 해야 했다

 

내가 간호사였을 때

백의의 천사님 순결한 나이팅게일

다 좋지만 우리도 먹고 사는 노동자 하는 순간

졸지에 환자 생명을 인질로 삼는

이기주의 집단으로 짓밟혀야 했다

 

내가 지식인이었을 때

빛나는 화이트 칼라 전문가 예술가로

사회여론을 주도하는 무시 못할 존재였다

내가 노동자로 나서자마자 세상에,

공익을 외면하는 무책임한 집단이라며

무차별 진압 대상으로 내몰려야 했다

 

노동자가 뭐길래

우리 노동자 되는 순간 이렇게 깨지는가

아픈 존재여, 존재의 아픔인 노동자여....

아 나의 뿌리는 숨길 수 없는 노동자,

짓밟으라 깨부수라 실없는 환상의 껍데기를

거기 그 자리에서 파릇파릇 성난 새싹

온몸으로 일어서서 거대하게 일어서서

이 땅의 불행과 슬픔 뿌리채 뽑아 버릴 테니

 

 

 

어둠 깊은 눈

박노해

 

두 눈보다 외눈이 많은 나라

두 눈 뜨고 눈먼 사람들의 나라

 

왼쪽 눈에서 오른쪽 눈으로

갑자기 '외눈 이동'하고서

세상이 다 보인다고 소리치는 시대

 

그래 이제 환히 보이니

반만 가지고 살고 싸우던

세상이 통째로 보이니

 

외눈 이동으로

중간 찾는 두 눈으로

조각난 천 개의 눈으로

 

천 개의 눈 한가운데 떠오르는 맑은 눈이여

맑은 눈 속에 살아 푸르른 천 개의 눈동자여

너무 밝아 눈먼 너의 눈을 찔러라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모든 빛을 거부하라

 

천 개의 눈 한가운데서 맑은 눈동자 하나

어둠 속 새벽처럼 떠오를 때까지

 

 

 

어디로 갈거나

박노해

 

어디로 갈꺼나

눈부시게 푸르른 오월

얼마 만에 찾아먹는 휴일인데

정순이는 오늘도 특근이란다

어디로 갈꺼나

프로야구 중계도 끝난

테레비도 싱거워

전자오락실에서 동전 몇 닢 ㄳㄳ 날리고

이 거리 저 거리 돌아다니기도 지쳐

시원한 생맥주 한잔하고

영화라도 한 편 보고

디스코장에라도 가고 싶은데

벌써 가불이 오만 원째다

무엇을 할꺼나

얼마 만의 휴일인데

자꾸만 초조해

편지도 못 쓰겠고 책도 안 잡히고

에라 장기판 두드리다

짤짤이나 하다가 그도 시진하여

쥐포에 소주잔 돌리면서도

무언가 해야 하는데,

어디론가 가야 하는데,

 

등산친목회도 축구동우회도

한자 공부도 독서 모임도

잔업에 밀려 휴일 특근에 깨져

아무것도 계획할 수 없어,

이러다간 삼 주째 못 본

사랑스런 정순이마저

날아가 버릴지 몰라

 

사장님은 교양 때마다

놀면 돈만 쓰니 젊을 때 열심히

잔업에다 휴일 특근 시키는 대로

다 여러분을 위하여 가족처럼 말씀하시고

제미랄 좇도!

안 쓰고 안 먹고

조출철야 휴일 특근 몸부림쳐도

가불액만 늘어 가고,

계획은 조각나 버려

아 그렇게도 기다리던 휴일날,

어디로 갈꺼나

갈 곳이 없다

무엇을 할꺼나

할 돈이 없구나

대책을 세울 수 없어

이 눈부신 신록의 오월에

우리는 빈속 소줏잔에 비틀거리며

슬픔을 마신다

분노를 마신다

쓰디쓴 노동자의 비애를 마신다

 

 

 

어떤 밥상인가

박노해

 

호오 호오 싫어 싫어 맵다고 도리질하는 아이에게

한사코 쌀밥 한 숟갈에 물잔에 씻은 김치를 입에 넣어주는

젊은 신세대 엄마를 바라보다가 그만 숙연해졌습니다

 

그래요 밥은 생명인데,

어떤 밥을 먹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몸과 성정(性情)과 앞날이 좌우되는데

밥은 끌어당김인데,

어디서 심어 어떻게 지은 밥을 누구와 함께 먹는가에 따라

삶의 목표와 정신과 줏대가 그리고 쏠리는 건데

 

아이야 너는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야

지구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너는 먼저

이 땅에서 살려지고 물려내려온 우리 밥맛을 알아야 해

은근한 불로 끓이고 다시 기다려 뜸이 잘 든 구수한 쌀밥과

갖은 양념에 정성껏 버무려 알맞게 익힌 김치와

오래 삭혀 깊은 맛이 우러난 된장 고추장 맛을 알아야 해

입맛은 가벼운 시류에 따라 무책인하고 짧은 거지만

몸맛은 핏줄처럼 유전자처럼 뿌리 깊고 정직한 것이야

세상에는 그저 달고 기름지고 시고 맵고 짜고 떫고 쓴맛만이 있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다 포용하여 잘 어우러지게 조화시켜

더 깊어지고 새롭고 오묘하게 승화된 맛, '삭은 맛'이 있는 거야

승화시킨 삶처럼, 창조적인 정신처럼

너는 쌀밥과 삭은 맛을 몸에 익혀 네 성정과 네 지성을 그렇게

참되고 깊이 있고 섬세하고 참을성 있게 가꾸어야 해

 

인생이란 빵이나 피자나 햄버거처럼

즉석에서 빠르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달콤하고 기름진 것만은 아니란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더 많은 시간이

쓰고 짜고 떫고 시고 매운 맛처럼 괴롭고 슬픈 것인지도 몰라

인생에서 돈마 내면 곧바로 간편하게 취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은

대개가 껍데기란다

가족에 대한 무한책임으로

정성과 사랑으로 심고 가꾸로 다듬고 익혀 차려낸

화목한 우리네 밥상처럼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이 참된 것이야

아이야 네 인생의 작은 성취 하나 작은 기쁨하나도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노력하며

정성을 다 기울여 이루어낸 것들만이 참된 것이란다

쌀밥과 김치와 장맛으로 차려진 우리네 밥상처럼

삶의 고통과 슬픔과 상처를 끌어안고 치열한 투쟁과 묵상을 통해

승화시켜낸 창조만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와 뼈로 가는 밥이 되는 거란다

 

너는 우리 선조들이 살아낸 저 깊은 정신고 삶의 유산을

날마다 이 땅에서 차려진 세 끼 밥상을 통해

몸으로, 그래 몸으로 물려받아 이어가야 하는 거야

변화 빠른 21세기 지구 시대를 살아갈

너의 아름답고 건강하고 기름지고 간편하고 짜릿한

외국 음식과 즉석 가공식품은

그저 짧게 입맛 달래는 별미나 간식으로나 하고,

네 몸과 성정과 삶을 좌우하는 세 끼 주식은

이 땅에서 기르고 익혀낸 우리 밥상으로 먹어야 하리라

 

'아무거나 잘 먹는'사람이 되어선 안 돼

그건 먹을 것이 모자라던 생존 단계의 미덕일 뿐이야

食은 命이야 밥은 목숨이야

어떤 밥을 먹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저도 모르게 달라지는 거야

밥은 생명이고 끌어당김이기에

무얼 먹느냐에 따라 그리도 몸이 이끌리고

감성과 정신까지 끌려가는 거야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살겠다는 것과 같아

잘못 길들여진 얕은 입맛을 넘어 몸맛으로,

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올바로 잘 먹어야 해

많이많이가 아니라 알맞게,아름하게,아름답게 먹어야 해

창자가 가난해야 뱃속이 환해지고 얼굴이 맑아지고 정신이 빛나는 거야

 

나는 오늘 네 밥상에서 너의 미래를, 너의 운명을 본다!

 

 

 

어떻게 사느냐고 묻거든

박노해

 

첫새벽에 일어나 무섭게 집중해 공부하고

사람 사는 데 하루 두 끼도 많아 아침밥은 굶습니다

철마다 단식하고 기름지고 독한 것은 아예 피합니다

창자가 가난하니 한결 몸 가뿐하고 정신이 맑아집니다

 

아침마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도록 좁은 운동장을 숨차게 달리고

다시 밤중까지 벽 앞에 좌정한 채 용맹정진합니다

뒤늦게 더듬더듬 영어를 익히고 록과 R&B를 따라 배우며

지구 시대의 빠른 변화를 꿰뚫고자 먼저 나를 바꾸는 중입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어 적막 옥중 몸부림이냐고

싸늘하게 보지 마십시오 의혹으로 보지 마십시오

한 번은 다 바치고 통절히 쓰러진 몸

다시 모진 겨울삶으로 나를 묻으며

나에게 허락하신 남은 날을 무장(無藏)한 삶으로

인생의 골수만을 파먹으며 진실의 속살만을 껴안으며

급변하는 흐름 속에서 변함없는 첫마음으로

오늘은 오늘의 현장 삶을 찾아가는 진리의 불덩어리로

더 깊고 더 치열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아아 가야 할 길이 멉니다

다시 한번 새벽길 떠나야 합니다

20대에 수배길 떠난 제가 어언 불혹의 나이입니다

먼 길 가는 사람의 긴 호흡으로

나이 들수록 정신과 감성과 몸과 생활을 더 새롭게

더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어머니

박노해

 

남도의 허기진 오뉴월 뙤약볕 아래

호미를 쥐고 밭고랑을 기던 당신 품에서

말라붙은 젖을 빨며

당신 몸으로 갈 고기 한 점 쌀밥 한 술

연하고 기름진 것을 받아먹으며

거미처럼 제 어미 몸을 파먹으며 자랐습니다

 

독새풀죽 쑤어 먹고 어지럼 속에 커도

못배워 한많은 노동자로 몸부림쳐도

도둑질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 안하고 놀고 먹지도 남을 괴롭히지도 않았습니다

나로 하여 이 세상에 단 하나

슬픔을 준 사람이 있다면

어머니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의 오직 하나 소원이라면

가진 것 적어도 오손도손 평온한 가정이었지요

저는 열심히 일했고 떳떳하게 요구했고

양심대로 우리들의 새날을 위해 싸웠습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우리에겐 풍파가 몰아쳤고

당신은 더 불안하고 체념 속에 주저앉아

다시 나를 붙들고 애원하며 원망합니다

어머니

환갑이 넘어서도 파출부살이를 하는

당신의 염원은 우리 모두의 꿈입니다

가난했기에 못 배웠기에

수모와 천대와 노동에 시퍼런 한 맺혔기에

오손도손 평온한 가정에의 바램은

마땅한 우리 모두의 비원입니다

 

오! 어머니

당신 속엔 우리의 적이 있습니다

어머님의 염원을

오손도손 평온한 가정에의 바램을 잔혹하게 짓밟고 선 저들은

간교하게도 당신의 비원 속에

굴종과 이기주의와 탐욕과 안일의 독사로 도사리며

간악한 적의 가장 집요하고 공고한 혓바닥으로

우리의 가장 약한 인륜을 파고들며 유혹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어머님의 간절한 소원을 위하여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비원을 위하여

짓눌리고 빼앗긴 행복을 되찾기 위해

오늘 우리는 불효자가 되어

저 참혹한 싸움터로 울며울며

당신 곁을 떠나갑니다

 

어머님의 피눈물과 원한을 품고서

기필코 사랑과 효성으로 돌려드리고야 말

우리들의 소중한 평화를 쟁취하고자

피투성이 싸움 속에서

승리의 깃발을 드높이 펄럭이며 빛나는 얼굴로 돌아와

큰절 올리는 그날까지

어머님 우리는 천하의 불효자입니다

당신 속에 도사린 적의 혓바닥을

냉혹하게 적대적으로 끊어 버리는

진실로 어머니를 사랑하옵는

천하의 몹쓸 불효자 되어

피눈물을 뿌리며 싸움터로 나아갑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가 그랬다

박노해

 

상고 야간부를 겨우 졸업하고

입사 면접에서 떨어지고 온 날

찬 셋방에서 가슴 졸이던 어머니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랬다

 

네가 네 돈 주고 사람 뽑으라면

명문대생 뽑제 널 뽑을 것이냐

그이들이 한 번에 알아볼 사람이면

흔한 회사원이지 어디 인물이것냐

 

두 번 세 번 떨어지는 게 일이 될 때쯤

아들, 그만하시제, 헛심쓰다 헐해징께

남들 다 좋아하는 일 하려 들지 마시고

남들 안 하려 해도 중헌 일 안 있것는가

 

나는 그 길로 공장 밑바닥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세상을 보는 눈도 사람을 보는 눈도

내 생의 소명도 시도 사랑도 인연도

 

 

 

어머니의 첫 승리

박노해

 

일제에서 해방되고 나라 세운 이래

이승만 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내가 찍은 사람이 당선되는 건 처음이라고

살아 생전 이런 날이 다 있느냐고

이젠 한(恨) 풀었다고

머리 흰 칠순 어머님은 접견장에서

처녀처럼 환하게 환하게 우신다

 

일평생 패배한 정의

깨어진 진실을 고이 품고

자식들 앞에서 세상 불평 한마디 내비치지 않고

일소처럼 노동으로 살아오신 어머님

통일되면 진짜 유관순 만세 한번 부르겠다고

처녀처럼 수줍게 우시는

머리 흰 어머님의 첫 승리

 

 

 

얼마짜리지

박노해

 

말더듬이 염색공 사촌 형은

10년 퇴직금을 중동 취업 브로커에게 털리고 나서

자살을 했다

 

돈 100만 원이면

아파 누우신 우리 엄마 병원을 가고

스물아홉 노처녀 누나 꽃가마 탄다

돈 천만 원이면

내가 10년을 꼬박 벌어야 한다

1억 원은 두 번 태어나 발버둥 쳐도 엄두도 나지 않는

강 건너 산 너머 무지개이다

나의 인생은 일당 4,000원짜리

그대의 인생은 얼마

우리 사장님은 하룻밤 술값이 100만 원이래는데

강아지 하루 식대가 5,000원이래는데

3천억 원을 쥐고 흔든 여장부도 있다는데

염색공 사촌 형은 120만 원에 자살을 하고

열여섯 우리 동생 공장을 가고

오 오

우리의 인생 우리의 사랑 우리의 생명은

얼마 얼마?

 

 

 

여행은 혼자 떠나라

박노해

 

여행을 떠날 땐 혼자 떠나라

사람들 속에서 문득 내가 사라질 때

난무하는 말들 속에서 말을 잃어 갈 때

달려가도 멈춰서도 앞이 안 보일 때 

그대 혼자서 여행을 떠나라

 

존재감이 사라질까 두려운가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충분한 존재감이다

 

여행을 떠날 땐 혼자 떠나라

함께 가도 혼자 떠나라

 

그러나 돌아올 땐 둘이 손잡고 오라

낯선 길에서 기다려온 또 다른 나를 만나

돌아올 땐 둘이서 손잡고 오라

 

 

 

연꽃 뿌리

박노해

 

허공 같은 흐린 물 속에

제 몸을 담그고

속됨 속의 참됨만을 파고들어

순정한 꽃을 피워 올린

연꽃 뿌리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해가고

사람도 세상도 빠른 물살로 흘러가는데

나는 영영 변함없을 듯한 절대 진리 속에다

부동의 뿌리를 박고 서 있는 건 아닌가

맑고 시린 물속에 몸을 가둔 건 아닌가

 

본디 속되고 맑음이 어디 있으랴

이 썩어 드는 듯 보이는 연못 세상에도

어디선가 쉬지 않고 맑은 물줄기는 흘러들고 있으니

아무리 못된 사람도 그 안에는

빛나고 순정한 구석도 숨어 있으니

 

 

 

연필로 생을 쓴다

박노해

 

밤중에 홀로 앉아 연필을 깎으면

숲의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다

사박사박 연필로 글을 써 내려가면

수억 년 어둠 속에 묻힌 나무의 숨결이

흰 종이 검은 글자에 자욱이 어린다

 

연필로 쓰는 글씨야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지만

내 인생의 발자국은 다시는 고쳐 쓸 수 없어라

그래도 쓰고 지우고 다시 고쳐 쓰는 건

오늘 아침만은 곧은 걸음으로 걷고 싶기 때문

검푸른 나무 향기 가득한 이 밤에

 

 

 

오늘은 다르게

박노해

 

세상의 모든 것은

어제 그대로인데

오늘은 

그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꽃도 같은 꽃이 아니다

사람도 같은 사람이 아니다

 

세계의 끝 간 데까지

한 바퀴 돌아온 자리

무너질 것 무너지고

깨어질 것 다 깨어져

처음처럼 허허로이 일어서는 사람

 

다시 시작이다.

오늘 또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다르게 시작하겠습니다

 

어제 함께 했던 사람들을

오늘은 새롭게 대하고

어제 했던 그 일을

오늘은 다르게 하겠습니다

 

다시 새벽에 길을 떠납니다

 

 

 

오늘은 동지(冬至)날

박노해

 

오늘은 동지(冬至)날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

차가운 어둠에 얼어붙은 태양이

활기를 되찾아 봄이 시작되는 날

 

나는 눈 내리는 산길을 걸어

찢겨진 설해목 가지 하나를 들고 와

방안 빈 벽에 성탄절 트리를 세운다

그 죽은 생 나뭇가지에 오늘 이 지상의

춥고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을 걸어둔다

 

해가 짧아지고, 해가 길어지고,

모든 것은 변화한다

모든 것은 순환한다

절정에 달한 음은 양을 위해 물러난다

 

오늘은 동지(冬至)날

신생의 태양이 다시 밝아오는 날

숨죽이고 억눌리고 죽어 있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살아나는 날

 

 

 

오늘처럼만 사랑하자

박노해

 

오늘은 사랑 하나로 눈부신 날

우리 오늘처럼만 사랑하자

검푸른 우주 어느 먼 곳에서

그대와 내 별의 입맞춤이 있어

떨리는 그 별빛 이제 여기 도착해

사랑의 입맞춤으로 환히 빛나니

우리 오늘처럼만 사랑하자

 

오늘은 사랑 하나로 충분한 날

우리 오늘처럼만 걸어가자

바람 부는 길 위에서 그대와 나

작은 씨알처럼 가난할지라도

가슴에 새긴 입맞춤 하나로

함께 가는 걸음마다 꽃을 피우리니

우리 오늘처럼만 사랑하자

 

오늘은 사랑 하나로 감사한 날

우리 오늘처럼만 바라보자

태양이 하루도 쉬지 않고 비추이듯

좋은 날도 힘든 날도 함께 앞을 바라보며

세상의 아프고 힘든 또 다른 나에게

이 한 생이 다하도록 끝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 오늘처럼만 사랑하자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박노해

 

시간은 모든 것을 쓸어가는 비바람

젊은 미인의 살결도 젊은 열정의 가슴도

무자비하게 쓸어내리는 심판자이지만

 

시간은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거장의 손길

하늘은 자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자를

시련의 시간을 통해 단련시키듯

시간을 견뎌낸 것들은 빛나는 얼굴이 살아난다

 

오랜 시간을 순명하며 살아나온 것

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

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저기 낡은 벽돌과 갈라진 시멘트는

어디선가 날아온 풀씨와 이끼의 집이 되고

빛바래고 삭아진 저 플라스틱마저

은은한 색감으로 깊어지고 있다

 

해와 달의 손길로 닦아지고

비바람과 눈보라가 쓸어내려준

순해지고 겸손해지고 깊어진 것들은

자기 안의 숨은 얼굴을 드러내는

치열한 묵언정진(默言精進) 중

 

자기 시대의 풍상을 온몸에 새겨가며

옳은 길을 오래오래 걸어 나가는 사람

숱한 시련과 고군분투를 통해

걷다가 쓰러져 새로운 꿈이 되는 사람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오래된 친구

박노해

 

아미쉬 공동체의 가을 성찬식에서

여든일곱 살인 대드 할아버지와

아흔 살인 요나스 할아버지는

서로 주름진 발을 씻겨주었다*

먼저 한 사람이 상대편을 씻겨준 뒤

반대로 자리를 바꿔서 또 씻겨주었다

그분들은 말없이 이런 대화를 나눈 듯하다

 

우리가 같은 마을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6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

나는 여전히 자네가 필요하네 그려

 

그분들은 봄 성찬식을 보지 못하고

그해 겨울 마을 옆 공동묘지에 함께 묻혔다

 

하나의 꿈을 갖고 희망을 키워오면서

서로 돕고 나누고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

기쁨과 슬픔, 성취와 실패, 보람과 시련을

함께 겪고 이겨내 온 오래된 친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듯이

 

* 아미쉬 공동체의 실화를 시로 씀.

 

 

 

용서받지 못한 자

박노해

 

문맹(文盲)은

동정받아 마땅하고

 

컴맹(com盲)은

도움받아 마땅하나

 

*환맹(環盲)은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인간의 미래를 파괴하는 자

아이들의 미래를 훔쳐다 쓰는 자

오늘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살기 위해

자신의 발밑을 허무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합니다.

 

* 환맹 : 환경문제에 눈먼 사람.

 

 

 

우리는 간다 조국의 품으로

박노해

 

우리는 간다 조국의 품으로

조국이 우리에게 반역의 낙인을 찍어도

우리는 간다

 

이땅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 나라의 슬픔과 기쁨 속에 자라나

푸른 하늘 맑은 강 이슬 맺힌 대지 위에

기쁜 노동과 해방의 노래를 불렀다

조국이 우리에게 쇠창살이어도

지하 밀실의 깊고 긴 비명이어도

우리는 간다 조국의 품으로

 

사랑하는 친구여

이제 더 이상 봄을 기다리지 말자

우리 함께 역사의 봄을 찾아 나서자

우리의 이마 위에 우리의 깃발 위에

반역의 낙인을 찍는 것은 조국이 아니다

 

조국을 짓밟고 선 총칼들일 뿐이다

조국이 우리에게 죽음이어도

우리는 피어난다 민들레꽃처럼

 

우리는 간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목숨 바쳐 간다 흐느낌으로 간다

사랑하는 조국의 품, 민중의 가슴팍으로

피로 쓴 '노동 해방'

아 아 생명의 깃발로 간다

 

 

 

우리 함께 걷고 있다

박노해

 

오늘도 길을 걷는 우리는

알 수 없는 먼 곳에서 와서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힘든 발자국들은

한 줌 먼지처럼 바람에 흩어지니

그러나 염려하지 마라

 

그 덧없는 길을

지금 우리 함께 걷고 있으니

 

 

 

월요일 아침

박노해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우울하다

찌부둥한 몸뚱이 무거웁고

축축한 내 영혼 몹시 아프다

산다는 것이 허망해지는 날

일터와 거리와 이 거대한 도시가

낯선 두려움으로 덮쳐누르는 날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병을 앓는다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로 나를 일으키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 엄중함

나는 무거운 몸을 어기적거리며

한 컵의 냉수를 빈속에 흘러보낸다

푸르름 녹슬어가도록 아직 맛보지 못한

상쾌한 아침, 생기 찬 의욕, 울컥이면서

우울한 월요일 아침 나는 또다시

생존 행진곡에 몸을 던져놓는다

 

 

 

의지하지 마라

박노해

 

엄마 배고프다아

신발도 떨어지고 공책도 떨어지고

외갓집에 가서, 쌀 좀 가져오자아

 

뙤약볕 아래 남의 밭 매는 엄니 곁에서

어린 나는 속도 없이 배고파 징징거렸다.

훅훅 찌는 밭고랑은 매어도 매어도 끝이 없고

흰 수건 쓰고 뚝뚝 땀방울 떨구는 엄니는

빠르게 호미손만 놀릴 뿐 말이 없었다.

 

긴 여름 해가 갯벌 바다를 붉게 물들일 때쯤

엄마는 뽕나무 아래 잠든 나를 업고 샘터로 가 씻기고

날랜 손으로 밀린 집안일을 단속하고 저녁상을 차렸다.

정신없이 밥을 먹는 나에게 엄니는 당신 밥을 덜어주며

조용조용 그러나 단단하게 말씀하셨다.

 

평아. 다시는 남의 쌀 가져오잔 말 꺼내지 말거라.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의지하면 원망이 생기고 속이 물렁해져 사람버리는 법이다.

사지육신 성하고 앞날이 창창한 사내가 자기 할 일을

버려두고 의지할 곳부터 찾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느님께만 의지하고 너 자신에게만 의지해라

 

많은 것을 겪고 많은 강을 건너고

아픈 시간 속에서 때론 섭하고 때론 노하고

나도 모르게 탓하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그날 불볕 아래 남의 밭 매던 엄니의 묵묵한

호미손과 가난한 저녁 밥상의 엄정한 목소리가

울려오곤 한다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에 의지하지 마라

오직 진리의 힘에만 의지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라.

 

 

 

이 닦는 일 하나

박노해

 

새벽에 일어나 맨 먼저 습관처럼 이를 닦다가 문득

이 닦는 일 하나가 예삿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하늘에 까마득한 별빛처럼 우리 조상님들도 언제부턴가

염전에서 지고 온 소금을 손에 묻혀가며 이를 닦아왔겠지요

그리고 나이 들면서 치통을 앓았게지요

이 단순한 치솔 하나의 발명은 얼마나 큰 건강의 진보였을까요

평등세상을 열망하듯 수평으로 치카치카 힘차고 시원스럽게 놀리던 칫솔질

그러나 삶이란,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섬세한 결인가요

천지간에 너와 내가 직립해 살듯 가지런한 이 하나하나를 정성껏

위아래도 닦아주는 치아 만족의 과학적 칫솔질을 새로이 학습했습니다

TV 광고처럼 첨단 생약 성분이 든 치약을 듬뿍 짜 가지고

상쾌하고 세련된 칫솔질을 뽀드득 하고 난 뒤에

카악 뱉어낸 독한 치약 거품 한 모금을 정화시키는 데

무려 다섯 드럼의 맑은 물이 필요하답니다

 

그러니 이젠 뒤가 문제입니다

편리한 건 언제나 뒤가 문제입니다

문제는 결과에 대한 책임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흰 독고품을 내뱉어야 하는 치약을 쓸 수 없습니다

첫새벽 몸 닦는 일부터 죄를 지을 수는 없으니까요

소금을 칫솔에 묻혀 위아래로 돌려주며

부드럽게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자연생태와 내 몸의 원리에 맞는 방식으로

이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오른손인가?

왜 첫새벽부터 쫓기듯, 빠르게, 오른손으로만 닦는가?

그래서 또 다른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빠르고 익숙한 오른손질에서 서툴고 느린 왼손질로

수십 년 된 고정관념과 굳어버린 몸 버릇을 바꾸기 위해,

퇴화해가는 왼손 기능을 되살리고 격려해가면서

소금 묻힌 칫솔을 왼손에 쥐고 천천히 위아래도 이를 닦으며

조급한 마음을 함께 닦아갑니다

왼손과 이어진 내 우뇌도 자극을 받아기뻐할 것입니다

 

애 하릴없는 작은 칫솔질 하나,

또 다른 나를 낳으리라 어리석은 공상를 해봅니다

 

의식이 곧 행동이던 시대가 지나고 이제 나는

몸이 없는 의식 몸이 없는 말들을 별로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상과 진보고 그 사람과 몸 생활과 삶으로 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하고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이념, 좋은 세상이란 좋은 삶과 좋은 몸 생활 습관을 낳기 위한 도구레

다름 아닙니다

좁은 벽 속에서 살다보니 이렇게 제가 참 쩨쩨하고 작아졌습니다

작아도 가치가 있다면, 사람을 바꿔낸다면,

때로[時中], 작은 것이 아름답습니다

 

 

 

이 땅에 살기 위하여

박노해

 

찬 시멘트 바닥에 스치로폴 깔고

가면 얼마나 가겠나 시작한 농성

삼백 일 넘어 쉬어 터진 몸부림에도

대답 하나 없는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일본 땅 미국 땅까지 원정 투쟁을 떠나간다

 

이 땅에 발 딛고 설 자유조차 빼앗겨

지상 수십 미터 아찔한 고공농성

지하 수백 미터 막장 봉쇄 농성

식수조차 못 먹고 말라 쓰러져가며

땅속에다 허공에다 울부짖는다

 

이 땅에 살기 위하여,

햇살 가득한 거리에 숨어 숨어

수배자로 쫓기고 쇠창살에 갇혀가며

우리는 절규한다 기꺼이 표적이 되어

뜨거운 피를 이 땅 위에 쏟는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온 이 땅

우리의 노동으로 일터 세운 이 땅에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

저 지하 땅끝에서 하늘 꼭대기까지

우리는 쫓기고 쓰러지고 통곡하면서

온몸으로 투쟁한다 피눈물로 투쟁한다

이 땅의 주인으로 살기 위하여

 

 

 

이불을 꿰매면서

박노해

 

이불 호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 청소에 고추장 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 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 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 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은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 호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이스탄불의 어린 사제

박노해

 

폭설이 쏟아져 내리는 이스탄불 밤거리에서

커다란 구두통을 멘 아이를 만났다

야곱은 집도 나라도 말글도 빼앗긴 채

하키리에서 강제 이주당한 쿠르드 소년이었다

 

오늘은 눈 때문에 일도 공치고 밥도 굶었다며

진눈깨비 쏟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작은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선 채로 젖은 구두를 닦은 뒤

뭐가 젤 먹고 싶으냐 물었다

야곱은 전구 알같이 커진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빅맥, 빅맥이요!

눈부신 맥도날드 유리창을 가리킨다

 

학교도 못 가고 날마다 이 거리를 헤매면서

유리창 밖에서 얼마나 빅맥이 먹고 싶었을까

나는 처음으로 맥도날드 자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야곱은 커다란 햄버거를 사자 새끼처럼

덥썩 물어 삼키다 말고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물었다

세입쯤 먹었을까

야곱은 남은 햄버거를 슬쩍 감추더니

다 먹었다며 그만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창 밖에는 흰 눈을 머리에 쓴

대여섯 살 소녀와 아이들이 유리창에 바짝 붙어

뚫어져라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곱은 앞으로 만날 때마다

아홉 번 공짜로 구두를 닦아주겠다며

까만 새끼손가락을 걸며 환하게 웃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길 건너 골목길로 뛰어 들어갔다

 

아, 나는 그만 보고 말았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몰래 남긴 햄버거를

손으로 뗴어 어린 동생들에게

한 입 한 입 넣어주는 야곱의 모습을

 

이스탄불의 풍요와 여행자들의 낭만이 흐르는

눈 내리는 카페 거리의 어둑한 뒷골목에서

나라 뺏긴 쿠르드의 눈물과 가난과

의지와 희망의 영성체처럼

한 입 한 입 떼어 지성스레 넣어주는

쿠르드의 어린 사제 야곱의 모습을

 

 

 

인간의 기본

박노해

 

성철스님이 임종을 앞두고 고통스런 숨을 내쉬고 있는데 절박한 심정의 제자 하나가

“스님, 깨달은 사람은 지금 죽음 앞에서 고통의 경계가 어떠하십니까”하고 물으니

성철이 철썩 뺨 한 대를 올려붙이더라 그래도 이 제자는 깨닫지 못하여 얼얼하기만 하더라

 

열정 어린 청년들이 먼 길 찾아와 투명창 너머로 반갑게 얘기를 나누다

선생님, 지금, 가장 절실한 게 뭐예요?

자나 깨나 혁명이란 화두이시겠지, 시대정신, 미래진보, 희망 찾기, 맞죠?

가만히 웃음 짓다가 말없이 돌아왔네

그래 맞아, 하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한 거?

끝도 없이 걷고 싶은 거,

걷다가 쓰러져 영영 잠들지라도 마냥 걷고만 싶은 거

여자의 부드러운 살 부비고 싶은 거,

찬 바닥에 누울 때마다 그리운 건 여자의 따스한 온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 밥상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얘기하며 밥 먹는 거

좋은 사람과 향기 좋은 차를 나누며

나직이 가슴을 열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거

 

아휴 요 무정한 녀석들, 영치물도 안 넣어주고 갔네

불쌍한 우리 죄수들 목 빼고 앉아 기다리는데......

다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게 사람살이의 기본인데,

운동의 기본인데,

배고픔 앞에선 자유도 민주도 인권도 다 뒤로 밀리는 건데,

철없어라 종아리 한 대씩 찰싹찰싹, 깨달았니?

 

사랑하는 친구들아 잘 들어

꽃고 열매의 기본은 흙과 씨알 뿌리야

몸 받고 태어나 몸으로 사는 인간의 기본은 먹고 사는 것이야

나라 살림의 기본은 경제와 안보야

진보 운동의 기본은 사람이고 민중 생활이고 현실 삶이야

 

기본에 철저해야 해

기본에 충실해야 해

기본을 건너뛴 자는 반드시 무너지는 거야

그러나 기본을 넘어서야 해

기본을 뚫고 나가야 해

기본에만 붙박힌 자는 반드시 쇠망하는 거야

 

이건 만고의 진리이고 역사의 교훈이야

지난 시대의 성취와 패배에서 이거 못 배우면 우린 미래가 없어

자기 먹고살 것과 사회적 힘과 성취를 이미 다 해결한 채

인간의 기본을 건너뛰고 나라 경영의 기본에는 무능한 채

절대이념에만 목청 높이는 진보 지식인을 경계해야 해

자기 먹고살 것은 물론 사회적 기득권과 특권까지 다 누리고 움켜진 채

이념이 아닌 인간, 경제와 안보, 세계가 저런데 우리나라 꼴은,

도덕과 밥 질서, 입만 열면 기본을 팔아 기본을 사는

보수 지식인들을 경계해야 해

눈 밝게 뜨고 정직하게 삶의 안팎을 뚫어보며

기본에 충실하면서 기본을 넘어서야 해

 

사랑하는 친구들아

생활 민중의 눈으로 보고 생활 민중의 몸으로 생각해야 해

 

다음에 온 친구들이

선생님, 지금 가장 절실한 게

걷는 거, 여자, 밥 먹는 거, 이야기하고 싶은 거죠, 맞죠?

아휴 요 착한 녀석들, 아직도 멀었구나

다시 종아리 걷어 찰싹찰싹, 깨달았니?

 

 

 

입춘(立春)이면

박노해

 

입춘이면 몸을 앓는다

잔설 깔린 산처럼 모로 누워

은미한 떨림을 듣는다

 

먼 데서 바람이 바뀌어 불고

눈발이 눈물로 녹아내리고

언 겨울 품에서 무언가 나오고

 

산 것과 죽은 것이

창호지처럼 얇구나

 

떨어져 자리를 지키는 씨앗처럼

아픈 몸 웅크려 햇빛 쪼이며

오늘은 가만히 숨만 쉬어도 좋았다

 

언 발로 걸어오는 봄 기척

은미한 발자국 소리 들으며

 

 

 

잎으로 살리라

박노해

 

꽃이 아니라

잎으로 돋는다

 

꽃으로 나서기보다

잎으로 받쳐 드린다

 

꽃처럼 피었다 지기 보다

언 땅에 먼저 트고 나중에 지는

나는 잎으로 살리라

 

푸른 나무 아래서

너는 말하리라

꽃이 아름다웠다고

 

떨어져 뿌리를 덮으며 나는 말하리라

눈부신 꽃들도 아름답지만

잎이어서 더 푸르른 삶이었다고

 

 

 

자꾸 만지고 싶네

박노해

 

요즘 내가 야해지나 봐

자꾸만 벗고 싶어

아침 달리기하면서도

땀 젖은 옷을 벗고 뛰고

일하면서도 산에 들에 나가서도

집에서나 어디서나 낯선 사람 없으면

자꾸만 벗고 싶어

이 남자가 야하게

자꾸만 벗는다고

눈 흘기는 아내에게

날 만지고 싶다는 걸 어떡해

 

 

 

작아지자

박노해

 

작아지자 작아지자

아주 작아지자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는 아무것도 없어지게 하자

자신을 지키려는 수고도

작아지면 아주 작아지면 텅 비어 여유로우니

내 사랑의 시작은 작아지는 것이요

나의 성숙은 더욱 작아지는 것이며

나의 완성은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

작아지자 아주 작아지자

작아져 순결한 내 영혼에 세상을 담고

세상의 슬픔과 희망을 담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는 아무것도 없어진 나--

조국의 들꽃이 되자

눈물젖은 노동의 숨결이 되자

아무것도 아닌 이 땅의 민중이

그 모오든 것이 되도록 하자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박노해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은 없으니

 

온 하늘이 새의 길이듯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발길에서 찾아졌으니

때로 잘못 들어선 어둠의 길에서

끝내 자신의 빛나는 길 하나

컴컴한 어둠만큼 밝아오는 것이니

 

 

 

장벽

박노해

 

내가 길들여진 노동자였을 때

저임금의 응달 속을 장시간 노동에 지쳐

캄캄한 장벽을 운명으로 알고 살아왔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높고 두터운 장벽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내렸다

 

내가 외쳤을 때

내 입은 봉해졌고

메아리쳐 온 허망한 상처뿐이었다

 

내가 뛰어가 부딪쳤을 때

장벽은 끄떡도 하지 않았고

동료들은 차갑게 피를 닦아 주었다

 

내가 속삭이며,

긴 세월을 절뚝이며 속삭여

동료들과 함께 얽혀들어

맨몸으로 수없이 벽을 쳤을 때

피에 젖은 장벽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마로 구멍을 뚫고

긴긴 밤을 숨죽이며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렸을 때

콰르르르 거대한 장벽은 무너지고

너와 나 사이 가슴 속의 장벽도

무너져 내렸다

 

우리가 환히 열린 언덕으로 뛰어갔을 때

캄캄한 장벽 밑마다

쿵쿵 까부수는 소리

에워싸며 구멍 뚫는 소리

참혹한 비명소리

우리들은 또다시 전열을 추스리며

수없이 불어난 동지들과

탄탄한 연대 위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우리들의 평등한 푸르른 대지를 향해

너는 함마

나는 다이나마이트

살덩이로 불꽃으로 불도쟈로

갈수록 무겁고 힘찬, 치밀하고 확실한

노동자의 전진을 내어딛는다

 

우리들의 숙명인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 사라질 때까지

억압과 착취와 분단의 장벽이

사라질 때까지

 

 

 

저 아이가

박노해

 

저 아이가 내 새끼인가

삼엄하고 신성한 법정에서

검은 법복의 하늘 같은 판검사님을

존엄한 국가권력을 뒤흔들며

신성한 말씀들을 뿜어대는 저 아이가

저 아이가 내 새끼란 말인가

 

아아 저 아이가 저 아이가

무식한 이 에미가 들어봐도

정당하고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를

당당하고 조리 있게 천둥처럼 힘있게

빛나는 말씀들을 쏟아내는 구나

단식으로 홀쪽한 몸인데도 법정이 떠나가도록

'노동자의 서러움 투쟁으로 끝장내자'

 

'사장 놈이 배짱이면 노동자님은 깡다구다'

'가라 자본가 세상, 쟁취하자 노동해방'

온몸을 쥐어짜 타오르는 분노로

뜨겁게 흐르는 눈물을 삼켜가며

불을 토하는 너의 절규가 나를,

이 부끄러운 에미를 울리며 가슴치는구나

 

아 진정 나는 몰랐구나

까마득히 몰랐구나

내 몸에서 나온 내 새끼인데도

너의 고뇌 너의 분노 네 가슴에 사무친

네 생을 걸어버린 그 대의를

이 에미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 미처 몰랐구나

그저 몸 성하게 공장 다니며 착실히 적금 부어

좋은 사람 만나서 귀여운 아들 딸 잘 낳아

살림 잘하고 사는 모습만 꿈꾸어 왔었으니,

회사 말만 깜빡 믿고서 네가

불순세력에 조종당한 줄만 알았었으니,

까마득히 무심했던 이 에미 가슴을

저 아이가 내 새끼가 진실한 말씀으로

부끄럽게 뒤흔들며 질타하는구나

 

학교 못 가 타향 객지 공장을 떠돌면서도

너는 이렇게 진달래 꽃망울처럼

찬연하게 눈부시게 피어났구나

온갖 천대와 설움조차 네겐 스승이었고

모진 고생 모진 가난 시련조차도 밑거름삼아

네 영혼은 새벽이슬 머금은 들국화처럼

정결하고 진한 향기로 빛나는구나

제 앞가림도 어려운 힘겨운 노동살이 속에서도

너는 비굴하고 이기적으로 찌들리지 않으며

동료들을 위하여 나라를 걱정하는

여장부 투사님으로 성장하였구나

 

아아 딸아 내 새끼야

당당하게 외쳐대는 너의 목소리가

무시무시한 계급투쟁, 노동해방, 혁명이란 말까지

네 입에서 나오니 소담한 쌀밥만 같구나

네가 입은 푸른 죄수복조차

봄빛 푸른 보리 물결마냥 빛나는구나

묶인 네 손목의 차가운 수갑조차

결혼식 날 네 손에 들려 있을 꽃다발보다

아름답게 보이고 눈부시구나

내가 꿈꾸던 결혼식 날의 네 모습보다

법정에 선 네 모습이 화사하고 곱구나

 

무심한 이 에미는 부끄러운 이 에미는

너의 말씀 앞에 떨며 울고 있단다

딸아 시방 내가 흘리는 눈물은

네가 불쌍해서도 내 딸년이 죄수라서도 아니다

그 큰 눈에 눈물만 줄줄 흘리던 네가

어느새 이 에미를 울리고 네 동료를 울리고

너의 노여움이 모든 노동자를 분노케 하니

감동의 큰 북이 너무도 세차게 울려서이다

 

아 아 딸아 내 딸아 우리의 딸아

너는 이 에미도 모르게 커서 노동 속에 커서

끈끈한 욕심이 주름진 좁은 내 품을 떠나

네 말대로 노동해방 투사가 되었구나

빛나는 민중의 큰딸이 되었구나

네 모습 빛나서 사무치게 빛나서

네가 외치는 구호 소리를 함께 부른다

미친년처럼 제 딸년 죄수로 세워놓고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네가 혼신으로 외치는 말씀을

울며 악을 써 함께 부르짖는다

 

'노동자의 서러움 투쟁으로 끝장내자'

'가라 자본가 세상, 쟁취하자 노동해방'

'노동자 해방투쟁 승리 만만세'를

목메이게 사무치게 울부짖는다

 

 

 

절정의 시

박노해

 

20XX년 X월 X일 오전 10시

국민 여러분

마침내 독재 정권은 타도되었다

국가권력은 노동자와 민중의 손에 장악되었다

우리 국민이 반세기에 걸쳐 피흘리며 투쟁해온

참다운 민주주의, 독점자본의 국유화와 경제 정의,

민족의 자주성이 실현된 것이다

이제 이 나라의 앞날은 권력의 주인인 당신에게 달려 있다

쾌적한 일터에서 더 높은 의욕과 보람으로 노동하는 사회,

보다 많은 시간을 맑고 푸른 자연 속에서 건강한 레포츠를

즐기는 사회, 사람다운 가치와 상식이 첫째로 통하는 사회를

우리 자신이 나서서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참다운 민주 정부 수립 만세

노동자 민중의 혁명 만세

온 생을 바쳐서 이런 시 한 편 쓰고 싶었다

역사의 원고지 위에, 내 목숨을 붓대로 세워서

순결한 피로 쓰고픈 절정의 시 한 편,

이제 나 이대로 못 쓰고 죽는다면 머언 훗날

새로운 혁명의 시인이 이어서 목숨 이어서

끝내 쓰고야 말 시, 절정의 시

 

 

 

정글의 법칙

박노해

 

1등만을 기억하는 시대

강자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에서

지금 중요한 것은 지구에서

정글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피투성이 경쟁으로 승자가 되어도

더 이상 깨먹을 지구도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미래를 갉아먹고 크는

세계를 한 바퀴 휩쓸어온 자본주의는

눈부시게 고도성장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딛고 선 발 밑을 무섭게 허물어진다

 

솔직히 우리 인간이란 동물은

석유 없이도 살 수 있고 돈 없이도 살 수 있고

컴퓨터와 서비스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뿐인 우리 삶터가 붕괴되면

어떤 정보와 지식을 다 짜내도

인간이 살아남을 도리가 없다

 

거품이 가시자 참혹하게 드러난

내 삶의 위기, 미래 생존의 위기 앞에서

나는 정글 자체가 사라지자 멸종해 가는 호랑이처럼

고독하게 빈 산천에 부르짖는다

 

이제 정글의 법칙이 아니라

나눔으로 함께 사는 인간의 법칙을

 

 

 

젖은 등산화

박노해

 

언젠가 어떤 사진 한 장을 보고

얼어붙듯 묵상에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등산화를 가슴에 꼬옥 끌어안고 얼어 죽은 등반대의

처절한 죽음을 기록한 한 장의 사진이었습니다

 

--산사람들은 얼음 산정을 향해 오르다 텐트를 치고 잠을 잘 때

젖은 등산화를 가슴에 꼬옥 품고 잠을 청합니다

그래야 다음 날 아침 뽀송뽀송한 상태로

또 걸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산사람 박인식)

 

얼음 산에서, 머리카락도 수염도 허옇게 얼어붙은 얼굴로

하나같이 등산화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나란히

얼어 죽어간 등반대원들의 모습

장엄한 순교자의 모습으로 다가온 그 현장 보도사진 한 장이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득 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지금 우리도 저마다 어딘가를 향해 오르고 있고

그 길에서 죽어갑니다

내일, 또 내일, 내일 아침이면 우리도 죽어 있을 것입니다

 

나, 무엇을 가슴에 꼬옥 끌어안고 죽어 있을 텐가!

 

 

 

조건

박노해

 

첫 마음은

성공을 통해 영글어가고

 

성공은

첫 마음을 통해 푸르게 빛난다

 

 

 

죽창을 세워들고

박노해

 

고삐를 끊는다

40 평생 순한 농사꾼으로

비탄의 한숨만 내 쉬던

내 운명의 고삐를 끊는다

짓눌리고 빼앗기면서도 말 못 하고 속만 태우던

순종과 인내의 고삐를 끊어

절망과 두려움의 고삐를 끊어

어제의 양순한 농민의 굴레를 끊어

단호히 끊어버리고 떨쳐 일어섰다

 

이제 누구도 믿지 않는다

오직 우리 농민의 단결된 힘만을 믿을 뿐이다

'농축산물 수입개방 중지하라'

'농민생존 압살하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

'못내 못내 절대 못내, 부당수세 절대 못내'

'토지반환 쟁취하자'

장터를 휩쓸며 가두를 행진하며

스크럼을 짜고 군청을 점거하며

단결과 조직과 투쟁 속에서

우리 농민은 죽죽 대나무로 자라

주장하고 쟁취하는 농민투사로 자라나

탄압을 돌파하며 전진해왔다

 

이제 우리는 어제의 농민이 아니다

보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파도처럼 밀려와 들불처럼 타올라와

산처럼 버티어선 우리 농민을

이제 우리는 바위다! 불길이다! 죽창이다!

가자 여의도로!

붉게 타오르는 썽난 고추의 함성으로

'구속농민 석방하고 고추전량 수매하라'

'수세폐지 농조해체 수리청을 신설허라'

최루탄과 백골단의 몽둥이를 두려워하랴

구속과 죽음인들 무서워하랴

동학농민군의 자랑스런 후예들이여

백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비참한

이 땅의 농민이여 천만 농민 형제여

이제 우리 농민투사가 되어

죽창을 세워들고 가자 가자

농민이 단결하면 농민이 조직되면

이 땅을 지켜온 농민이 일어서 투쟁하면

얼마나 무서운가를 똑똑히 보여주자

 

이젠 물러서지 않으리

더 이상 깨어지지 않으리

만인의 의무인 우리 농민의 피어린 주장을

기필코 쟁취해야 할 우리들의 요구를 위해

신성한 이 집회와 시위행진을

저까짓 최루탄과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빠방! 퍽퍽! 깨어져 나가게 맨손일 수는 없다

자 죽창을 들자!

죽창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기라도

우리 농민의 해방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들자!

천만 농민의 시퍼런 원한의 날을 세워

타오르는 적개심으로 치켜들자

 

 

 

준비 없는 희망

박노해

 

준비 없는 희망이 있습니다

처절한 정진으로 자기를 갈고닦아

저 거대한 세력을 기어코 뛰어넘을

진정한 자기 실력을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 없는 준비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해 가는데

세상과 자기를 머릿속에 고정시켜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줄 끊어진 연

박노해

 

한겨울 바람이 맵찬 어느 날이었어요

창살 너머 어둑한 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줄 끊어진 가오리연 하나가 뒤척이며 고행 중이더군요

 

스스로를 산 채로 파묻고 인연 줄도 다 놓아버려

깊어 가는 감옥이 조금은 적막하지만

한사코 붙잡지 않습니다

탓하지도, 의지하지도, 소망하지도 않습니다.

 

난 지금 줄 끊어진 연처럼

홀로 빈 하늘 떠도는 듯해도

하하, 나는 나대로 고독한 긴장 속에

생명줄 내건 치열한 날들입니다.

 

보이는 줄만 줄일까요

세 손으로 거두어야만 삶일까요

이헐게 날면 되는 것을

줄 없는 줄을 타고

허공 찬바람 속에 몸 던져주며

 

나는 홀로 날았습니다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내 목숨 같은 외줄을 끊고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다시 이어지는 고투의 세월을

참혹한 투쟁과 묵상의 나날이었습니다

 

아- 눈 맑게 열리고 마침내 내 인연의 때가 오는 날

 

줄 없는 줄을 통해

아직도 첫 마음 밝혀든 그대에게

나 뜨거운 떨림으로 차전할 것입니다.

 

그래요 희망의 줄은 이미

저마다의 몸 속에 내장되어 있고

좋은 세상은 이미 현실 속에 와 자라고 있고

외줄의 때가 있고 거미줄의 때가 있고

 

밤새 거미 한 마리가

제 몸속에서 투명한 줄을 뽑아

쇠창살에 잘 짜인 집을 짓더니

아침 햇살에 이른 영롱한 팽팽한 거미줄 망이 그대로 한 우주,

내 삶의 안과 밖이 이어지는 관계 그물망으로 확 비추어 오더군요.

 

 

 

지금 할 일

박노해

 

푸른 새숨

 

드나들게

 

가만히 있어 다오

 

 

 

지나침

박노해

 

열심이 지나치면 욕심

성공이 지나치면 부실

열정이 지나치면 맹목

확신이 지나치면 독선

책임이 지나치면 군림

 

 

 

지문을 부른다

박노해

 

진눈깨비 속을

웅크러 헤쳐나가며 작업시간에

가끔 이렇게 일 보러 나오면

참말 좋겠다고 웃음 나누며

우리는 동회로 들어선다

 

초라한 스물아홉 사내의

사진 껍질을 벗기며

가리봉동 공단에 묻힌 지가

어언 육년, 세월은 밤낮으로 흘러

뜻도 없이 죽음처럼 노동 속에 흘러

한 번쯤은 똑같은 국민임을 확인하며

주민등록 경신을 한다

 

평생토록 죄진 적 없이

이 손으로 우리 식구 먹여 살리고

수출품을 생산해온

검고 투박한 자랑스런 손을 들어

지문을 찍는다

 

없어, 선명하게

없어,

노동 속에 문드러져

너와 나 사람마다 다르다는

지문이 나오지를 않아

없어, 정형도 이형도 문형도

사라져버렸어

임석 경찰은 화를 내도

긴 노동 속에

물 건너간 수출품 속에 묻혀

지문도, 청춘도, 존재마저

사라져버렸나 봐

 

몇 번이고 찍어 보다

끝내 지문이 나오지 않는 화공약품 공장

아가씨들은 끝내 울음이 북받치고

줄지어 나오는, 지문이 나오지 않는 사람들끼리

우리는 존재조차 없어

강도질해도 흔적도 남지 않을 거라며

정형이 농 지껄여도

더 이상 아무도 웃지 않는다

 

지문 없는 우리들은

얼어붙은 침묵으로

똑같은 국민임을 되뇌이며

파편으로 내리꽂히는 진눈깨비 속을 헤쳐

공단 속으로 묻혀져간다

선명하게 되살아날

지문을 부르며

노동자의 푸프른 생명을 부르며

되살아날

너와 나의 존재

노동자의 새봄을

부르며 부르며

진눈깨비 속으로,

타오르는 갈망으로 간다

 

 

 

진달래

박노해

 

겨울을 뚫고 왔다

우리는 봄의 전위

꽃샘추위에 얼어 떨어져도

봄날 철쭉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외로운 겨울 산천에

봄불 내주고 시들기 위해 왔다

나 온몸으로 겨울 표적되어

오직 쓰러지기 위해 붉게 왔다

내 등 뒤에 꽃피어 오는

너를 위하여

 

 

 

진정한 강함

박노해

 

진정한 강함은

닫힌 강함이 아니다

 

단순한 강함

비판적 강함

한바탕 강함이 아니다

 

진정한 강함은 섬세함이다

철저한 자기 절제력이다

안의 깊음으로 불의에 강함이다

 

부드러운 강함이고

열린 강함이고

복잡성을 품어낸 강함이다

 

진정한 강함은 비록 작아도 여려도

생을 두고 끝까지 정진하는 것이다

흔들려도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진짜 노동자

박노해

 

한세상 살면서

뼈빠지게 노동하면서

아득바득 조출철야 매달려도

돌아오는 건 쥐씨알만 한지

 

죽어라 생산하는 놈

인간답게 좀 살라꽃 몸부림쳐도

죽어랏 쇳가루만 날아들고 콱콱 막히고

꼴프 채 비껴찬 신선놀음 허는 놈들

불도쟈처럼 정력 좋은 이윤추구에는 비까번쩍 애국갈채

제미랄 세상사가 왜 이리 불평등한지

 

이 땅에 노동자로 태어나서

생각도 못 하고 사는 놈은 죽은 송장이여

말도 못 하는 놈은 썩은 괴기여

테레비만 좋아라 믿는 놈은 얼빠진 놈

이빨만 까는 놈은 좆도 헛물

실천하는 사람,

동료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노동자만이

진실로 인간이제

진짜 노동자이제

 

비암이라고 다 비암이 아니여

독이 있어야 비암이지

쎈방이라고 다 쎈방이 아녀

바이트가 달려야 쎈방이지

노동자라고 다 노동자가 아니제

동료와 어깨를 꼭 끼고 성큼성큼 나아가

불도쟈 밀어제껴 우리 것 찾아 담는

포크레인 삽날 정도는 되아야

진짜 노동자지

 

 

 

참혹한 사랑

박노해

 

그대 소식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 못 본 지 벌써 7년인데

얼굴이 몹시 안되었더라고

그동안 크게 앓아 몹쓸 수술까지 받았다고

사람들과도 잘 만나지 않는다고

내 얘기 듣고 말없이 울기만 하더라고

 

바보같이... 바보같이...

그렇게 혹독하게 시대앓이를 하다니

그냥 좀 살지 몸이라도 챙기지

다들 돌아가 따뜻한 자리를 잡는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고 다 바친 그대가

왜 바보같이 정말 바보같이

나도 가끔은 웃으며 사는데

 

그래 내가 힘들까 봐 엽서 한 장 없었나요

혼자서 여린 몸에 그 패배를, 가혹한 상처를

그렇게 지독히 앓아야만 했나요

 

누구보다 빛나는 재능과 아름다움이 아까웠어요

맑은 열정과 가능성이 너무 아까웠어요

그래서 그 꽃피울 때까지만 좀 떨어져 하라고 했던 거에요

그런데도 울며 꽃 꺾어 던지며 현장으로 수배길로 오시더니

이렇게 쓰러지자고, 피투성이로 망가지자고

한사코 좋은 길만  골라 걸으셨나요

 

이제는 더 울지 마세요

슬픔도 착함도 버리세요

떨리는 기다림도 버리세요

남들처럼 대충 잊어버리세요

그대 안의 나도 지워버리세요

많이 늦었지만 따뜻하게 둥그렇게

이젠 부디 행복하세요.

 

바보같이... 바보같이 ...

아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꽃같이 싱싱하던 그대가 아니라

다시는 필수 없는 흘러간 꽃이라도

그대의 좌절 그대의 상처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내 남은 목숨이 다하도록

멀리서... 곁에서...

 

 

 

천생연분

박노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이뻐서가 아니다

젖은 손이 애처로와서가 아니다

이쁜 걸로야 TV 탈렌트 따를 수 없고

세련미로야 종로거리 여자들 견줄 수 없고

고상하고 귀티나는 지성미로야 여대생년들 쳐다볼 수도 없겠지

잠자리에서 끝내주는 것은 588 여성 동지 발뒤꿈치도 안차고

써비스로야 식모보단 못하지

음식솜씨 꽃꽂이야 학원 강사 따르것나

그래도 나는 당신이 오지게 좋다

살아볼수록 이 세상에서 당신이 최고이고

겁나게 겁나게 좋드라

 

내가 동료들과 술 망태가 되어 와도

며칠씩 자정 넘어 동료 집을 전전해도

건강 걱정 일 격려에 다시 기운이 솟고

결혼 후 3년 넘게 그 흔한 쎄일샤쓰 하나 못사도

짜장면 외식 한번 못하고 로션 하나로 1년 넘게 써도

항상 새순처럼 웃는 당신이 좋소

 

토요일이면 당신이 무데기로 동료들을 몰고와

피곤해 지친 나는 주방장이 되어도

요즘 들어 빨래, 연탄 갈이, 김치까지

내 몫이 되어도

나는 당신만 있으면 째지게 좋소

 

조금만 나태하거나 불성실하면

가차 없이 비판하는 진짜 겁나는 당신

죄절하고 지치면 따스한 포옹으로

생명력을 일깨 세우는 당신

나는 쬐끄만 당신 몸 어디에서

그 큰 사랑이, 끝없는 생명력이 나오는가

곤히 잠든 당신 가슴을 열어 보다 멍청하게 웃는다

 

못배우고 멍든 공순이와 공돌이로

슬픔과 절망의 밑바닥을 일어서 만난

당신과 나는 천생연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과 억압 속에 시들은

빛나는 대한민국 노동자의 숙명을

당신과 나는 사랑으로 까부수고

밤하늘 별처럼

흐르는 시내처럼

들의 꽃처럼

소곤소곤 평화롭게 살아갈 날을 위하여

우린 결말도 못 보고 눈감을지 몰라

저 거친 발굽 아래

무섭게 소용돌이쳐 오는 탁류 속에

비명조차 못 지르고 휩쓸려갈지도 몰라

그래도 우린 기쁨으로 산다 이 길을

그래도 나는 당신이 눈물나게 좋다 여보야

 

도중에 깨진다 해도

우리 속에 살아나

죽음의 역사를 넘어서서

이른 봄마다 당신은 개나리, 나는 진달래로

삼천리 방방곡곡 흐드러지게 피어나

봄바람에 입 맞추며 옛 얘기 나누며

일찍이 일 끝내고 쌍쌍이 산에 와서

진달래 개나리 꺾어 물고 푸성귀 같은 웃음 터뜨리는

젊은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며

그윽한 눈물로 지자 여보야

나는 당신이 좋다

듬직한 동지며 연인인 당신을

이 세상에서 젤 사랑한다

나는 당신이

미치게 미치게 좋다

 

 

 

첫 마음

박노해

 

한번은 다 바치고 다시

겨울나무로 서 있는 벗들에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

한번은 다 바치고 다시

겨울나무로 서 있는 벗들에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어 있다

첫 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마음으로

 

 

 

첫 마음을 가졌는가

박노해

 

첫인상을 남길 기회는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첫사랑의 떨림은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첫 마음을 새길 시기는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좌우되지 않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무력한 일상 속에서도 나 살아있게 하는

그 첫 마음을 가졌는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 때나

화려한 빛에 휘청거릴 때나

눈물과 살패로 쓰러졌을 때나

나를 다시 서게 하고 나를 다시 살게 하는 힘

 

나의 시작이자 목적지인 첫 마음의 빛

일생 동안 나를 이끌어가는 내 안의 별의 기도

떨리는 가슴에 새겨지는 그 첫 마음을 가졌는가

 

 

 

첫 마음의 길

박노해

 

첫 마음의 길을 따라

한결같이 걸어온 겨울 정오

돌아보니 고비마다 굽은 길이네

 

한결같은 마음은 없어라

 

시공을 초월한 곧은 마음은 없어라

시간과 공간 속에서 늘 달라 져온

새로와진 첫 마음이 있을 뿐

 

변화하는 세상을 거슬러 오르며

상처마다 꽃이 피고 눈물마다 별이 뜨는

굽이굽이 한결같은 첫 마음이 있을 뿐

 

 

 

촛불의 광화문

박노해

 

밤이 깊어가는 광화문에서

전투경찰 막아선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나에게 물어본다

 

'빛으로 세상을 연다'는 광화문(光化門)에서

6월 밤의 광화문 대치선에서

촛불을 들고 너에게 물어본다

 

찬란한 빛이 세상을 바꾼 적이 있던가

돈과 권력을 가진 눈부신 자들이

세상을 올바로 열어낸 적이 있던가

 

그러나 보아라

거짓 어둠을 몰아내는 건

빛이 아니라 어둠을 살아온 사람들

여기 작은 촛불의 사람들이다

 

언제나 세상을 사람답게 바꾸는 건

새벽이 올 때까지 촛불을 들고 선

우리 눈물 어린 촛불의 사람들이다

 

촛불을 들고 촛불을 들고

서로 울고 웃고 하나가 되어

허위와 어둠의 껍질을 벗어가는 사람들

다시는 어제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

스스로 내 안의 빛이 되어가는 사람들

다시 유월로 가는 촛불의 사람들이다

 

촛불아 모여라

될 때까지 모여라

우리가 빛의 사람이 될 때까지

우리가 빛의 역사가 될 때까지

 

 

 

추모시(노무현 대통령 서거)

박노해

 

오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웁니다

기댈 곳도 없이 바라볼 곳도 없이

슬픔에 무너지는 가슴으로 웁니다

당신은 시작부터 바보였습니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면서도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살 수 있다고

웅크린 아이들의 가슴에 별을 심어주던 사람

당신은 대통령 때도 바보였습니다

멸시받고 공격받고 또 당하면서도

이제 대한민국은 국민이 대통령이라고

군림하던 권력을 제자리로 돌려준 사람

당신은 마지막도 바보였습니다

백배 천배 죄 많은 자들은 웃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고, 저를 버려달라고,

깨끗하게 몸을 던져버린 바보 같은 사람

아, 당신의 몸에는 날카로운 창이 박혀 있어

저들의 창날이 수도 없이 박혀 있어

얼마나 홀로 아팠을까

얼마나 고독하고 힘들었을까

표적이 되어, 표적이 되어,

우리 서민들을 품에 안은 표적이 되어

피흘리고 쓰러지고 비틀거리던 사랑

지금 누가 방패 뒤에서 웃고 있는가

너무 두려운 정의와 양심과 진보를

두 번 세 번 죽이는 데 성공했다고

지금 누가 웃다 놀라 떨고 있는가

지금 누가 무너지듯 울고 있는가

“당신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인생을 사셨는데”

“당신이 지키려 한 우리는 당신을 지켜주지도 못했는데”

지금 누가 슬픔과 분노로 하나가 되고 있는가

바보 노무현!

당신은 우리 바보들의 ‘위대한 바보’였습니다

목숨 바쳐 부끄러움 빛낸 바보였습니다

다들 먹고사는 게 힘들고 바쁘다고

자기 하나 돌아보지 못하고 타협하며 사는데

다들 사회에 대해서는 옳은 말을 하면서도

정작 자기 삶의 부끄러움은 잃어가고 있는데

사람이 지켜가야 할 소중한 것을 위해

목숨마저 저 높은 곳으로 던져버린 사람아

당신께서 문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그리운 그 음성으로 말을 하십니다

이제 나로 인해 더는 상처받지 마라고

이제 아무도 저들 앞에 부끄럽지 마라고

아닌 건 아니다 당당하게 말하자고

우리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처럼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향해

서로 손잡고 서로 기대며

정직한 절망으로 다시 일어서자고

우리 바보들의 ‘위대한 바보’가

슬픔으로 무너지는 가슴 가슴에

피 묻은 씨알 하나로 떨어집니다

아 나는 ‘바보’와 사랑을 했네

속 깊은 슬픔과 분노로 되살아나는

우리는 ‘바보’와 사랑을 했네

 

 

 

침묵이 말을 한다

박노해

 

때로 침묵이 말을 한다

사람이 부끄러운 시대

이상이 몸을 잃은 시대에는

차라리 침묵이 주장을 한다

 

침묵으로 소리치는 말들,

말이 없어도 귓속의 귀로

마음속의 마음으로 전해지는

뜨거운 목숨의 말들

 

아 피 묻은 흰옷들 참혹하여라

아직 말을 구하지 못한 이 백치 울음

그러나 살아 있는 가슴들은 알지

삶은 불을 잉태하고 있다는걸

 

진실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침묵 속에 익어가고 침묵 속에 키워지고

마침내 긴 침묵이 빛을 터트리는 날

푸른 사람들, 소리치며 일어설 것이다

 

침묵이 말을 한다

침묵이 소리친다

 

 

 

키 큰 나무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박노해

 

 

생일날 새벽에 기도를 드린 후 긴 묵상의 시간을 가졌어요

눈을 감고 돌아보니 운동을 시작한 지 20년,

숨 가쁘게 격동하는 역사의 현장을 달려왔네요

인간 체력의 한계를 생체실험하는 듯한

끝도 없는 철야, 특근 곱빼기, 지긋지긋한 물량 밀어내기

썰렁한 기숙사에서 자취방에서

일 마치고 탈진한 몸으로 새벽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아침이면 맨날 세숫대야를 빨갛게 물들이던 어지러운 기억

수배자로 낮이면 칼처럼 긴장하다 밤이면 잠자리 걱정에 애가 타던 기억

지하 밀실의 고문과 사형, 무기징역, 무너지고 깨어짐, 침묵의 겨울삶...

나도 모르게 그만 눈물이 흐르더라구요 챙피하게

 

그래도 내 인생를 나는 참 사랑해요 너무너무 행복하고 감사해요

좋은 세상을 바라며 좋은 일 하자고 애쓰다 보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많났어요

지금도 만나고 있고 앞으로도 만날 거구요

그 힘든 세월 동안 난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운동 그만둬버릴까,

잠시 뒤로 빠졌다 할까, 나 좀 챙기고 할까, 곁눈질해본 적이 없었어요

내 곁엔 늘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좋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세상이 그리워서 시작한 운동이고

좋은 사람 만나는 게 일의 전부인 운동이니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에요

그래요 좋은 님들과 함께하다 보니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만 같아요

 

키 큰 나무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깊은 강물을 건너니 내 혼이 깊어졌다

 

마치 저를 두고 한 말 같아요

뜻이 크고 사항이 큰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니

나도 덩달아 커진 듯이 느껴져요

역사의 큰 숲을 지나고 깊은 슬픔과 함께하다 보니

나도 따라서 깊어졌나 봐요

난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가까운 성당을 찾아

한나절 동안 홀로 묵상기도를 해왔어요

너무 피곤해서 기도 중에 그대로 잠이 들기도 하고 최루탄 냄새가 배어

쫓겨나기도 하고 내내 울기만 하기도 하고 그랬지만

서울 올라와 고등학교 때부터 나도 모르게 몸에 배인 습관이지요

그러면서 한 달에 한 번씩이지만 나를 돌아보면서 놀라곤 했어요

부쩍부쩍 정신이 커지고 깊어진 나를 보며 감사 기도를 바치곤 했어요

그게 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좋은 인연 때문이었지요

 

체포되기 일 년부터 내 안이 고갈되어가는 걸 느꼈어요

몸도 영혼도 사람 관계도 처음 맞는 크나큰 위기 앞에 서게 된 것이지요

아 내가 죽어가는구나, 죽어가고 있구나,

더는 나를 쥐어짤 게 없구나 하면서도

맡은 책임 때문에 시대상황 때문에 그냥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루하루 이를 악물고 버티는 날들이었지요

그걸 누구에게 말할 수 있었겠어요

너무 착해 너무 여린 좋은 벗들은 그 중압과 무미건조함과

무서운 긴장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떠나가도 말았지

나는 겉으로야 책임감으로 밀고 나갔지만 이미 내가 먼저 죽어 있었던 거지요

그 최악의 시간 속에서도 그나마 죽지 않고 이렇게라도 나를 다시

살려낼 수 있었던 건 그 때 만난 새로운 인연들 덕이었어요

마치 나를 구원하기 위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낡은 이념 틀 속에서 기진맥진 악전고투하는 나를 보살피고

생기를 불어넣고 삶의 의욕을 불어넣으신 것이지요

그 좋은 님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내가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무서워져요

저는 아무 가진 것 없지만 좋은 님들과 함께했기에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이지요

그게 제 행복이에요

 

부처님이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셨지요

 

나를 좋은 벗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늙어야 할 몸이면서도 늙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병들어야 할 몸이면서도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죽어야 할 몸이면서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고

고뇌와 우수를 지닌 몸이면서도 고뇌와 우수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때 아난다가 이와 같이 말했지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헤아려보니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절반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절반에 해당한다고 봐야겠지요

 

부처님이 말했지요

 

아난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전부입니다

 

맞아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이 길의 절반'이 아니라

'이 길의 전부'인 게예요

좋은 님들이 있어 나는 힘을 얻고

좋은 님들이 있어 나는 날로 새로워지고

좋은 님들이 있어 내 키가 커지고 혼이 깊어지는 거예요

아무리 내 앞날이 험하다 해도 좋은 님들과 함께라면

앞으로의 내 인생도 늘 감사와 은총의 시간일 거라고 나는 믿어요

그래서 미래가 얼마나 희망차고 가슴 설레이는지 몰라요

내가 할 일은 따로 없어요

내가 좋은 친구, 좋은 동지가 되어드리는 것밖에 다른 것은 없어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서 나를 알고 나와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더 커지고 더 맑아지고 아름답고 착해지도록 하는 게 내 할 일의 전부이지요

 

지금까지 나를 키우고 나를 이끌어주신

사랑하는 나의 님들 한 분 한 분께 감사의 입맞춤을 보내요

앞으로도 변함없이 나를 키우고 나를 움직이고 이끌어주실 벗들께,

또 아직은 알지 못하지만 새로운 인연으로 다가오실 나의 님들께도

사랑의 입맞춤을 보내요

내가 살아 있음이 감사와 은총입니다

 

 

 

통박

박노해

 

어느 놈이 커피 한잔 산다 할 때는

뭔가 바라는게 있다는 걸 안다.

 

고상하신 양반이

부드러운 미소로 내 등을 두드릴 땐

내게 무얼 원하는지 안다.

 

별스런 대우와 칭찬에

허릴 굽신이며 감격해도

저들이 내게 무얼 노리는지 안다.

 

우리들이 일어설 때

노사협조를 되뇌이며 물러서는

저 인자한 웃음 뒤의 음모와 칼날을 우리는 안다.

 

유식하고 높은 양반들만이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일찌기 세상마다 뒹굴며

눈치밥을 익히며 헤아릴 수 없는 배신과 패배 속에

세상 살아가는 통박이 생기드만

 

세상엔 빡빡 기는 놈들 위해서

신선처럼 너울너울 나는 놈 따로 있어

날개 없이 기름 바닥 기는 우리야

움츠리며 통박을 굴리며 살아가지만

통박이 구르다 보면

통박끼리 구르고 합쳐지다 보면

거대한 통박이 된다고

 

좆도 배운 것 없어도

돈 날개 칼 날개 달고 설치는 놈들이 무엇인지

이놈의 세상이 어찌 된 세상인지

누구를 위한 세상인지

우리들 거대한 통박으로 안다.

 

쓰라린 눈물과 억압과 패배 속에서

거대한 통박으로 구르고 부딪치고 합치면서

우리들의 통박은

점점 날카롭고 명확하게

가다듬어지는 것이다.

우리들의 통박이 거대한 통박으로

하나의 통박으로 뭉쳐지면서

노동하는 우리들이 새날을 향하여

이놈의 세상을 굴려갈 것이다.

 

 

 

투쟁과 묵상

박노해

 

묵상 없는 투쟁은 공허하고

투쟁 없는 묵상은 허무하다

 

투쟁은 안으로 종울림 쳐

깊어가는 묵상이 되고

 

묵상은 깊은 슬픔으로 차올라

사랑의 투혼이 된다

 

연꽃 속의 불꽃이여

불꽃 속의 연꽃이여

 

 

 

투혼의 기도

박노해

 

가지런히 쌓아놓은 무 단에서

머리마다 푸른 무청이 다시 돋네

누워서도 위로 위로 피워올리는

저건 욕망이 아니다

저건 오기도 아니다

 

쓰러져도 버릴 수 없는 희망

패배해도 멈출 수 없는 걸음

최후까지 피워올리는 푸른 목숨

하늘 향한 투혼의 기도이다

 

 

 

패배 메시지

박노해

 

나는 안다

이 패배는 뭔가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는 걸

패배로 위축되거나 자포자기하길 바란 게 아니라는 걸

한쪽이 무너졌다고 반대쪽으로 외눈 이동하거나

나는 안 무너졌다고 그대로 머리 밀고 나가거나

여전히 부정과 비판만 일삼기를 바란 게 아니라는 걸

다시 생각하고 다시 돌아보고

허리 숙여 바탕 뿌리부터 하나하나 보살펴

오늘은 다르게 시작하기를 촉구한 거라는 걸

 

나는 안다

이 참혹한 패배가 무얼 말하는지

세계를 변화시키려면 먼저

자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용기를

삶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긍정을 통한 부정

오늘 다시 시작하자

 

 

 

포장마차

박노해

 

모래에 싹이 텄나

사장님이 애를 뱄나

이 좋은 토요일 잔업이 없단다

 

이태리타올로 기름낀 손을 닦고서

작업복 갈아입고 담배 한 대 붙여 물면

두둥실 풍선처럼 마음이 들떠

누구라 할 것 없이 한잔 꺾자며

공장 뒷담 포장마차 커튼을 연다

쇠주파 막걸리파 편을 가르다

다수결 두꺼비로 통일을 보고

첫딸 본 김형 추켜 꼼장어 굽고

새신랑 정형 얼러대어

정력에 좋다고 해삼 한 접시

자격증 시험 붙어 호봉 올라간

문형이 기분 조오타고 족발 두 개 사고

길게 놓인 안주발에 절로 술이 익는다

 

새벽에 안 서는 놈은 빚도 주지 말랬는데

잔업에 곯다 보니 요게 새벽까지 기척도 안해

일주일째 아내 고것 곰팡이 슬겠다고

킬킬거리고, 이제 신혼 한 달째인

정형 새신부 토실한 히프 모양이 첫아들 날 상이라며

좌우삼삼 일심구천 김형 5단계 노하우 전수에

헤 벌리는 놈, 심각한 놈, 키득대는 놈,

한 잔 두 잔 술잔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녹아들어 하나가 되어

송형은 문형에게 감정풀이 화해주를 청하고

서씨는 전기과 박형과 찜찜했던 오해를 털어놓고

노씨는 왕년에 광빨나던 시절 타령이 시작되고

장단 맞추는 김형, 만주에서 개장수하며 독립운동하던

뻥까는 야화가 기세를 올리면 부산 자갈치 공형,

야야 치라 치라 벌써 백 번째다 마

내 한 곡 뽑제, 니 박수 안 치나

 

두만강을 노저어 오륙도 돌아

개나리처녀 미워미워

울고 넘는 박달재로 발길을 돌려

젓가락 두들기며 주전자뚜껑 드럼에도

어깨 우쭐, 방뎅이 들썩,

쿵다라 닥닥 조코 좆커

영자야 안주 한 사라 더 주라 잉

 

2차 가자 집에 가자 고고장 가자는 걸

알뜰꾼 신씨가 눌러앉히고 한 병 두 병 더할수록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

좆같은 노무과장, 상무새끼, 쪽발이 사장놈,

노사협의회 놈들 때려엎자고

꼭 닫아둔 울화통들이 터져나온다

문형은 간신자식들 먼저 깨야 한다며

벌겋게 달아오르고

정형은 단계적으로 구내식당부터

시정하자고 나직히 속삭인다

상고 나와 기름쟁이 된 회계담당 김형은

외상장부 넘겨가며

계산을 한다

냉수 한 사발 돌려 마시고

자욱한 연기 속 포장마차 나서면

어깨를 끼고 비틀비틀

일렬횡대로 서 담벽에 오줌 깔기고

씨팔, 내일도 휴일특근 나온다며

리어카장수 떨이쳐 딸기 천원어치씩

옆주머니에 꿰차고

작별의 손 흔들며 잔업 없는 오늘만은

두둥실 토요일밤을 흥얼거리며

아내가 기다리는 집을 향한다

 

 

 

풍경

박노해

 

내가 지나온 풍경은

늘 초라하고 그늘지고 거칠었다.

그것이 나의 슬픔이었다.

 

더 슬픈 것은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내가 서 있는 풍경을

조금씩 닮아 가는 거였다.

 

지금 내가 서 있는 풍경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 없이

거칠고 가파르고 초라하리라.

 

그래도 내 마음속 풍경이

늘 맑고 따뜻할 수 있다면

 

밖이 험할수록 내 안이 더욱 더

환하디 환한 슬픔일 수 있다면.

 

 

 

하늘

박노해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 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넣는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흉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있는 사람, 돈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代代)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것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학자의 걸음

박노해 

 

조건 반사설을 발견한

러시아의 과학자 이반 파블로프가

체카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다

삼엄한 조사실에서 그들의 심문이 계속되었다

 

파블로프는 평소와 다름없이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여다보더니

조용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실례하겠습니다, 강의가 있어서

그리고 나가 버렸다

 

설원의 시베리아 유형지를 향해서

뚜벅 뚜벅 뚜벅

 

들리는가 

권력과 돈과 영달을 위해

카펫을 종종 걸음질 하는 자들아

 

* 체카 : 옛 소련의 반혁명운동 사보타주 및 투기 취조 비상위원회

 

 

 

한강

박노해

 

한강이 가슴을 연다

여윈 어미의 가슴처럼

주름진 江心이 소리없이 열려 흐른다

 

얼어붙은 겨울 속으로

숨죽이며 흐느낌으로 흐르던

눈물 강물

 

봄은 멀은데

멍든 가슴, 지치인 노동에

탄식하며 탄식하며 쓰러져

몰아치는 찬 바람에

다시 아귀찬 이를 물며 일어서 흐르는

사랑이여 모진 생명이여

 

강물은 흐르고

더러움과 오욕에 뒤섞여

거칠게 한강은 흐르고

살얼음을 뒹척이며

어두운 겨울 속으로

봄을 부르며

봄을 부르며

소리 없이 열려 흐르는

눈물이여 강물이여

 

 

 

한계선

박노해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더는 나아갈 수 없다 돌아서고 싶을 때

고개 들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돌아서면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너는 도망치게 되리라.

 

여기까지가 내 한계라고

스스로 그어버린 그 한계선이

평생 너의 한계가 되고 말리라.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그만 금을 긋고 돌아서고 싶을 때

묵묵히 황무지를 갈아가는 일소처럼

 

꾸역꾸역 너의 지경을 넓혀가라.

 

 

 

한 밥상에

박노해

 

또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오늘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침침한 독방에 홀로 앉아서

벽에 뚫린 식구통으로

식은 저녁밥을 받습니다

푸실한 밥 한술 입에 떠넣고

눈을 감고 꼭꼭 씹었습니다

담장 너머 경주 남산 어느 암자에선지

저녁 공양 알리는 소리인 듯 종 울림소리

더엉 더엉 더엉

문득 가슴 받히는 한 슬픔이 있어

그냥 목이, 목이 메입니다

함께 밥 먹고 싶어!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한 밥상에 둘러앉아서

사는 게 별거야

혁명이 별난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늘 땅에 떳떳이

따뜻한 저녁밥을 함께 먹는 거지

나 생을 바쳐 얼마나 열망해왔어

온 지상의 식구들이 아무나 차별 없이

한 밥상에 둘러앉은 평화로운 세상을

아 함께 밥 먹고 싶어!

 

 

 

해거리

박노해

 

그해 가을이 다습게 익어가도

우리 집 감나무는 허전했다

이웃집엔 발갛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질 듯 탐스러운데

 

학교에서 돌아온 허기진 나는

밭일하는 어머님을 찾아가 징징거렸다

왜 우리 감나무만 감이 안 열린당가

 

응 해거리하는 중이란다

감나무도 산목숨이어서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

해거리할 땐 위를 쳐다보지 말고

발 아래를 지켜봐야 하는 법이란다

 

그해 가을이 다 가도록 나는

위를 쳐다보며 더는 징징대지 않았다

땅속의 뿌리가 들으라고 나무 밑에 엎드려서

나무야 심내라 나무야 심내라

땅심아 들어라 땅심아 들어라

배고픈 만큼 소리치곤 했다

 

어머님은 가을걷이를 마치신 후

감나무 주위를 파고 퇴비를 묻어주며 성호를 그으셨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허리 굽혀 땅심과 뿌리를 보살펴야 하는 거라며

 

정직하게 해거리를 잘 사는 게

미래 희망을 키우는 유일한 길이라며

 

 

 

행복은 비교를 모른다

박노해

 

나의 행복은 비교를 모르는 것

나의 불행은 남과 비교하는 것​

 

이 광활한 우주에 하나뿐인 나는

오직 하나의 비교만이 있을 뿐​

 

어제의 나보다 더 좋아지고 있는가

어제의 나보다 내가 되고 있는가​

 

나의 불행은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울고 웃는 것​

 

나의 행복은

덧없는 비교에서 자유로와지는 것

 

 

 

허깨비

박노해

 

내일 아침 신문에

국회가 해산되었다 해도

우린 놀라지 않는다

 

노총이 없어졌다 해도

우린 더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밥 찾는 몸부림에 철퇴를 내리는

사법부의 판결에도 우린 더 이상 애통해하지 않는다

 

먹물들이 개소릴 해도

중놈, 신부, 목사란 놈들이 씨나락을 까도

언론이 물구나무 서도

우린 분노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애절한 사랑,

떨리는 소망과 비원을 배신한

저 달콤한 포장을, 허깨비를

우린 더이상 기대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그대들이 어쩔 수 없이 비춰 준 것들에

우린 만족하지 않겠다

죽음 같은 노동과 삶이,

핏발 선 싸움이 준

이 뼈저린 각성으로

마땅히 찾아야 할 우리 것을

더이상 버려 두지 않겠다

살기 좋은 이 강산은 그대들의 땅

우린 더이상,

허깨비에 홀리지 않는다

 

노동하는 우리들의 땅

         우리들의 내일

         우리들의 꿈으로

온 세상 하나되어 손에 손 잡는

벅찬 새날을 위하여

우리는 우릴 가로막는

저 달콤한 허깨비를

부수며 나갈 것이다

 

 

 

회향(廻向)

박노해

 

부처가 위대한 건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 아니다

고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다

 

부처가 부처인 것은

회향(廻向)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크게 되돌려

세상을 바꿔냈기 때문이다

 

자기 시대 자기 나라

먹고사는 민중의 생활 속으로

급변하는 인간의 마음속으로

거부할 수 없는 봄기운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욕망 뒤얽힌 이 시장 속에서

온몸으로 현실과 부딪치면서

관계마다 새롭게 피워내는

저 눈물나는 꽃들 꽃들 꽃들

 

그대

오늘은 오늘의 연꽃을 보여다오

 

 

 

휩쓸어라

박노해

 

이 민족을 먹여 살려온 생명의 손길로!

갈아엎어라

이 강산을 일궈온 혁명의 쟁기로!

우리들의 기쁜 노동과 평등한 새땅을 위하여

저 간악한 미제와 독점자본의 흡혈판을

저 생피 흐르는 반동세력의 총칼을

천만 농민의 분노에 찬 공격으로 강타하자

힘찬 손에 손마다에 죽창을 세워들고

죽창보다 더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쓸어버리자 갈아엎어버리자

향그러운 흙, 생명의 땅, 해방세상을 쟁취하자

 

우리의 자랑스런 아들딸인 노동자

그 빛나는 '노동해방' 기치를

우리 함께 걸어 드높이 치켜들고

망치와 낫을 걸어 드겁게 동맹하여

노동해방! 농민해방! 을 피로써 쟁취하자!

이 민족의 유일한 희망대인

노동자 농민 동맹군의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반동의 무리를 쓸어버리기 위하여

죽창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기라도

기꺼이 손에 들고 가자 가자

온몸을 무기로 세워 휘달려 나가자

노동해방! 농민해방! 쟁취하는 그날까지

 

 

 

흰 모래밭

박노해

 

참 곱기도 해라

이리 보드랍고

 

해와 바람과 사람이

이렇게 알몸으로 와 뒹굴게 하기까지

 

저 바윗돌

세찬 물살

 

우르르 우르르

아픈 세월 얼마였으랴

 

 

 

3단

박노해? 

 

물건을 살 때면

3단을 생각한다

 

단순한 것 단단한 것 단아한 것

 

일을 할 때면

3단을 생각한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사람을 볼 때면

3단을 생각한다

 

단순한가 단단한가 단아한가

 

 

 

300년

박노해

 

이삿짐을 꾸리다 슬퍼지는 마음

언제까지 이렇게 떠다녀야 하나

반지하 월세방에서 전셋집으로

재개발로 뉴타운으로 떠밀리며

 

짐더미에 앉아 짬뽕 국물을 마시다 보니

문득 사라져버린 고향 집 생각이 난다

 

300년생 굵은 소나무 기둥을 세워

향내 나는 새집을 짓고 난 아버지가

마을 뒷산 할머니 묘터 곁에다

어린 금강송 열두 그루를 심으며

 

평아, 이 나무 잘 봐두거라

우리 집은 튼튼히 지어서 300년은 갈 테니까

지금 심어둔 이 나무가 잘 자라 300년 후에

집을 새로 지을 때는 안성맞춤일 거다

잘 봐두어서 대를 물려 가꿔나가도록 일러야 한다

 

아, 300년이라는 시간 감각

어린 나는 아기 장수라도 되는 양

숨을 크게 쉬며 고개를 끄덕였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그 집도 팔려나가고 묘터의 소나무만

내 나이만큼 쓸쓸히 자라나고 있는지

 

이 나이가 되도록 집도 없이 떠다니는 나는

300년의 시간 감각으로, 300년의 대물림으로,

무얼 심고 기르며 살아가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