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국 연합군(八國聯合軍) 내의 중국군단(中國軍團)
2. 청나라 군대가 8국 연합군에 패배한 원인은?
3. 심양고궁(瀋陽故宮)의 네 번에 걸친 겁난
4. 청나라의 특수부대: 등패병(藤牌兵)
5. 청나라 말에 중국을 방문한 두 명의 미국 대통령
6. 원명원(圓明園)은 어떻게 파괴되었는가?
7.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아편전쟁 이야기
8. 아편전쟁의 또 다른 발발 원인
9. 아편은 어떻게 약품에서 마약으로 바뀌었는가?
10. 청나라 말기의 최대사건 : 무오과장안(戊午科場案)
11. 1900년 북경함락
12. 청나라 말기 북양계(北洋係)의 출현 배경
13. 정원함(定遠艦) 이야기
14. 청나라 말기의 청과 속국의 관계
15. 청나라 때 국비 외국 유학생들은 어떤 시험을 치렀는가?
16. 성선회(盛宣懷) : 청나라 말기 최고 부자의 가족, 재산과 유산분쟁
17. 1900년, 호주의 중국 정벌기
18. 오병감(伍秉鑒)과 임칙서(林則徐)의 은원
19. 임칙서(林則徐)는 역사의 공신인가, 죄인인가?
20. 청나라 최후의 과거시험 문제
21. 청나라 해군사령부의 탄생 비화
22. 토마스 스탠튼 : 중국을 향한 꿈이 깨어진 후...
23. 중국 최초의 우표는 누가 설계했는가?
24. 계유사변 : 천리교의 자금성 습격 사건
25. 예비입헌(預備立憲)은 어떻게 무산되었나?
26. 이육창(李毓昌) : 청나라 최대의 원안(寃案)
27. 용연향(龍涎香) : 중국에 아편보다 먼저 들어온 춘약
28. 소설과 회고록 : 어느 것이 진실인가?
29. 상군(湘軍)의 남경 대도살은 일본의 남경 대학살에 못지않았다
30. 동사도(東沙島) : 청나라 말기 대일외교전의 승리
31. 나가사키 사건 : 청일전쟁 승패의 근원을 찾아서
32. 청일전쟁의 패배는 당쟁 때문이다
33. 광서제(光緖帝)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
34. 영대수도(瀛臺囚徒) : 개혁황제 광서제의 비극
35.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
36. 양무운동과 변법운동 그리고 청일전쟁
37. 서태후(西太后)와 야명주(夜明珠)
38. 청나라 말기의 "부전족운동(不纏足運動)“
39. 증국번은 왜 이수성(李秀成)을 서둘러 처형했는가?
40. 증국번(曾國藩)은 왜 황제에 오르지 않았는가?
41. 동치제 : 허수아비로 산 가장 불쌍한 황제
42. 의화단의 우두머리는 사기꾼인가?
43. 의화단(義和團)의 구성 인물
44. 의화단(義和團)은 왜 화북(華北)에서 성행했는가?
45. 의화단의 난에 대한 중국 역사학자의 서술
46. 의화단(義和團) "도창불입(刀槍不入)"의 네 가지 가능성
47. 의화단(義和團)은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48. 의화단(義和團)은 중국의 치욕이다
49. 의화단의 교훈 : 약소국은 강대국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50. 의화단(義和團)사건을 되돌아본다
51. 청나라 멸망 후 기인(旗人)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1. 8국 연합군(八國聯合軍) 내의 중국군단(中國軍團)
글 : 장명 중국인민대학 정치학과 교수
북경에 진입했던 팔국연합군 중에 영국인에 고용된 중국인군대 즉, "중국군단"이 있었다. 중국인으로 하여금 중국인을 치고, 자기 국가의 수도로 진격하게 하고, 자기의 황제와 황태후를 치게 하였다.
아편전쟁의 와중에 대담하게 몰려나와서 영국 군인들을 구경하던 중국인들은, 노란머리 파란눈의 영국군대내에 대량의 잡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몸에 입은 옷은 백인들과 비슷했으나, 머리에 두건을 감고 있었다. 그래서 머리가 아주 커보았다. 중국인들은 이들에게 "대두병(大頭兵)" 또는 "대두귀(大頭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몰랐지만, 이들은 사실 영국군대 내의 인도 시크교도 사병들이었다.

인도 병사들이 가담함으로써, 전쟁 구경을 나온 중국 사람들은 안복(眼福)이 터졌다. 그들의 눈에는 서양 귀신들이 아주 다양했던 것이다. 백이(白夷), 흑이(黑夷), 홍이(紅夷), 그리고 불흑불백지이(不黑不白之夷) 등등. 아주 구경거리가 많았다. 중국인들은 이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민족적 자부심이 더 커졌다. 서양귀신들은 사람 같지가 않고 짐승 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도사병의 두건은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왜냐하면 두건의 대다수는 빨간색이었고, 높았으며 부풀어 올라 있어서, 기록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잊지 않고 한마디를 남겨두었다. 나중에 상해조계에서 영국인들이 인도인을 순포(巡捕)로 사용하였는데, 상해인들은 이들을 "홍두아삼(紅頭阿三)"이라고 불렀다. 이 희극적인 명칭은 그들의 두건과 관련이 있었다.

머리를 감싸는 두건은 인도 시크교도의 풍속이고 교규(敎規)이다. 총명한 영국인들은 식민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상하의복은 바꾸게 하면서 두건은 그대로 용인했다. 누가 알았으랴. 이런 특별한 두건은 중국에 오자 그들은 2등 양인이라는 표지가 외었고, 중국인들은 아주 싫어했다.
그러나 시대는 항상 전진하는 것이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19세기말이 되면서 중국이 '조차'해준 산동성 위해의 영국인들은 그들의 영국에서의 경험을 중국으로 옮겨왔다. 그리하여 위해에 '중국군단'을 결성하였다. 이 군대의 복장은 인도의 시크교도병사와 같았다. 머리에도 큰 두건을 씌웠다. 어떤 사람들은 두건처럼 생긴 모자였다고도 한다.
사료기재에 의하면, "중국군단"은 훈련이 잘되었고, 장비도 우수했다고 한다. 장총부대, 포병부대, 기관총부대, 기병부대 등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이 군대의 병사들은 대기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Maxim기관총을 다뤄본 사람들이다. 이 군대가 남긴 옛 사진들을 보면 산동에서 온 젊은이들은 비록 머리에 두건을 쓴 것이 좀 괴상해 보이기는 하지만, 군기가 엄정했고, 아주 생기 있어 보인다. 심지어 오만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비록 "중국군단"으로 칭해지기는 하지만 장교는 모두 영국인이다. 정렬해 있을 때 매 소대의 옆에는 모두 큰 모자를 쓴 영국 장교가 서 있다.

식민자인 백인들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 그들이 모집한 중국병들은 인도병을 모집할 때와 마찬가지로 싸움을 시키기 위한 것이다. 중국군단이 막 훈련을 마쳤을 때, 싸울 기회는 왔다. 중국에 의화단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산동은 의화단의 발원지이다. 그러나 위해부근에는 그다지 큰 활동이 없었다. 왜냐하면 "중국군단"이 진압했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위해의 "중국군단"은 북상하여, 세이무어 연합군에 가입한다. 의화단과 싸웠을 뿐 아니라, 중국의 정규부대와도 싸웠고, 천진과 북경을 점령하는 전투에도 가담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 중국인의 군대는 아주 잘 싸웠다고 한다. 천진을 진공하는 전투에서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연속하여 몇 개의 무기고를 점령했다. 전투 후에 이 군대를 표창하기 위하여 영국인들은 특별히 설계된 천진성문 문양의 휘장을 주었고, 이것으로 "중국군단"의 휘기를 삼았다. 한 "중국군단"의 영국 장교가 쓴 바에 의하면 "중국군단의 원정작전의 횟수는 다른 어느 부대보다 많았다. 위해위에서 출현한 골칫거리를 해결한 것은 계산하지 않더라도, 천진전투에서도 전공이 있었고, 북경전투에서도 전공이 있었다."고 한다.
8국 연합군에 참여한 "중국군단"은 모두 400여 명이다. 북경을 진공한 연합군의 영국군대는 모두 3,000명이었으므로, 중국인이 13%를 점했다. 연합군중 프랑스군대가 800명(월남 병사 위주), 오스트리아군 58명, 이탈리아군 53명이었다. 당시 중국군단은 인도 병사들과 옷이 같았으므로 당시에 싸웠던 중국인들은 중국군단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고, 계속 그들이 인도병인줄 알았다.
우리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는 식민자의 "이화제화(以華制華)"정책은 책략이 고명할 뿐 아니라. 다시 한번 중국인들이 반성해야할 점을 알려준다. 전통적인 충군애국의 관념은, 만청의 난세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동일한 지방에서 일부사람들은 서양인과 세불양립으로 싸우고, 서양인을 죽이자고 소리 지르고 있는데, 비록 칼은 대부분 기독교를 믿는 중국인의 머리에 떨어지기는 했지만, 서양인에 대한 적대감은 분명했다. 다른 일부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는 신도도 아니면서) 서양인들을 따라서 중국인을 죽이고, 황제와 태후를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19세기말은 정말 난세였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하면, 나중에 영국인들은 8국연합군에 참여한 중국 병사 중 사망자들을 위하여 비석을 세워주었다. 이 중국부대는 진짜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웠나보다 23명이 전사했다. 비문은 중문과 영문의 두 문자로 쓰여 있는데, 비석의 양식은 완전한 중국식이다. 중국정부가 의화단의 난 때 죽은 독일공사 크린더를 위하여 세워준 패방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중국의....치욕이다.
2. 청나라 군대가 8국 연합군에 패배한 원인은?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1900년 하반기부터 1901년 상반기까지의 1년간은 중국의 대지에 화약 냄새가 넘쳤다. 8국 연합군의 함대는 광주, 복주, 상해, 청도, 여순 등 항구를 점령하고, 장강을 타고 올라가 중경에까지 이르렀다. 북방의 직예(지금의 하북성), 산동 등의 성에서는 의화단, 청나라 관군, 8국 연합군이 서로 어울려 싸웠다. 7월에 천진이 함락되고 8월에는 북경이 함락되었으며, 조정은 관군을 이끌고 황망히 서쪽으로 도망치게 된다.
- 음력 9월 15일, 8국 연합군은 보정(保定)에서 군사법정을 조직하여 정옹 위규항, 왕점괴 등 세 사람을 참수한다.
- 9월 24일, 발더시(Waldersee)는 처음으로 혁광, 이홍장을 만나 8국 연합군이 직예에서 겨울을 날 것이라고 통보하고, 청나라 군대에게 직예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 10월 19일, 발더시의 주창에 따라 각국연합군의 지휘관으로 "북경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치안, 위생, 맨정, 재정세무 등을 담당한다.
이때 8국 연합군은 얼마의 병사를 데려 왔는데, 천진에서 8월에 병사를 이끌고 북경으로 올 때, 인원은 16000여명이었다. 그런데, 이 만 육천 명의 인원으로 10일 만인 8월 14일에 북경을 함락시키고, 청나라 황제를 쫓아낸다. 그런데, 당시 북경성을 지키는 방어군(관군. 의화단 불포함)은 3만여 명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8국 연합군의 무기가 청나라군대보다 뛰어났는가? 현재 남은 자료 중, 8국 연합군이 청나라의 무기고에서 압수한 무기 목록이 있는데, 거기에는 신식대포, 신식총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 총들은 연합군의 병사들에게 배급한 것보다 신식이었다.
병사도 많았고, 무기도 그다지 차이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쉽사리 8국 연합군에게 패퇴한 것일까? 이것은 그저 전투력이 극히 낮았다는 것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의화단은 여기서 말하지 말기로 하자. 도창불입(刀槍不入, 부적과 내공으로 칼이나 총알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믿었음)의 미신을 믿었던 오합지졸이니까.
관군만 놓고 본다면, 갑오전쟁(청일전쟁)에서 패배하여 북양수군이 전멸한 이후 청나라정부는 새로운 군대를 완전히 서양의 총과 서양의 장비로 갖추게 된다. 이 군대를 "신군(新軍)"이라고 부르는데, 공식 명칭은 "무위군(武衛軍)"이다. 무위군은 청나라 군대의 전통에 따라, 전군(前軍), 후군(後軍), 좌군(左軍), 우군(右軍), 중군(中軍)으로 나뉘었고, 매 군마다 1만여 명으로 총 5만 명이 있었다. 이 때, 이들 중 우군은 위안스카이(원세개)가 거느리고 산동에 가 있었고, 좌군은 송경(宋慶)이 거느리고 산해관에 가 있었다. 나머지, 전, 후, 중군은 북경과 천진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북경성내에는 이외에 궁정수비대와 팔기친병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경성내의 이 만여 명의 정예관군은 1000명의 수비대원도 갖추지 못한 외국대사관구역을 공격하였는데, 1달여가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외국대사관구역에는 여전히 해당국가의 국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전투력이 저하된 근원에는 부패가 있다. 청나라말기의 정치부패, 관료부패, 군기부패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역사서를 읽다보면 상층부터 하층까지 모두 서양에 잘 보이려고 했고, 암중으로 서양과 결탁했다.
첫 번째 사례로는 6월 19일 청나라 정부가 선전포고를 한 후, 대사관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7월 15일, 천진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자, 서태후는 급히 명을 내려 각국 대사관에 수박등 각종 음식을 보내도록 조치했다. 이로써 서양인들에게 잘 보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안에 독이 들었을지 몰라 감히 먹지를 못했다. 7월 25일 청나라 군대는 다시 대사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사례로는 일본인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여 계란을 사고파는 작은 시장을 열었는데, 중국 사병들은 계란을 소매에 숨겨 와서 일본인들에게 팔곤 하였다. 지휘관이 이를 금하고 심지어 몇 명을 죽이기까지 하였지만, 사병들은 계속 일본인들에게 계란을 팔았다. 그리고 어떤 사병은 서양인으로부터 250위안을 받고, 천진까지 편지 심부름을 3번이나 해주었다.
적을 앞에 두고, 국가최고지도자는 수박을 보내고, 사병은 계란을 팔고 있었으니, 전투에서 지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다.
전투력이 저하된 군사 지휘 측면을 살펴보면,
첫째, 지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청나라 조정의 내부에는 처음부터 화, 전 양파의 논쟁이 있었으므로, 전투를 개시하고도 최후까지 싸우겠다는 결심과 조치가 없었다. 6월 17일 천진의 대고구포대가 함락되기까지 계속 물러나면서 전투를 피하는 작전을 썼다. 6월 19일에 서태후가 주재한 어전회의에서 선전포고가 결정되고, 전선총지휘관 유록(裕祿)으로 하여금 서양병사를 막도록 하였다. 6월 21일에는 선전조서를 발표하고, 각성에 전투준비를 지시했다.
개전 후에 유록은 소극적인 방어 작전을 썼다. 먼저 천진의 대사관구역을 장악한 후 다시 대고구 포대를 장악하려고 하였으나, 이 때 서양의 병사는 대고구 포대를 통하여 속속 상륙했다. 그리하여 병력이 3천명에서 1만 명으로 증원되었다. 결국 무위군 전군총지휘관 직예제독 섭사성이 7월 9일 전사하고, 천진은 7월 14일에 함락된다. 이때도 청나라 군대는 계속 뒤로 물러나면서 직접 전투는 피하는 전술을 썼다.
20일이 경과한 후 8국 연합군은 군사회의를 세번 소집하고, 병력을 보충한 후, 8월 4일 1만6천명으로 늘어난 연합군은 북경으로 진격한다. 5일, 청나라군대의 방어선을 돌파한다. 6일부터는 사실상 청나라 군대는 저항을 포기하고 계속 후퇴만 하게 된다. 8국 연합군은 거의 저항 없이 12일 통주를 점령하여, 북경성을 눈앞에 둔다. 8국 연합군은 통주에서 군량미와 무기를 상당히 많이 포획한다.
북경 방어 작전 중 13일부터 전투가 개시된다. 14일 오후 2시경에 성문 하나가 함락된다. 이어서 서태후는 성을 버리고 중신들과 도망치고, 3만의 수비군은 일부가 호위하여 서쪽으로 가는 외에 나머지는 여전히 저항한다. 다른 두개의 문도 저녁에 열리고, 황궁수비군은 16일 저녁 늦게서야 황궁으로 철수한다.
둘째, 부대 간의 보조가 맞지 않았다.
이 며칠 동안의 전투에서 청나라군대는 보조가 전혀 맞지 않고, 각자 따로 싸웠다.
대고구 포대전투에 있어서, 수비군은 2,3천명이 있었고, 대포는 신식으로 구비되어 있었다. 적군은 935명의 6개국으로 조성된 군대였다. 포격전에서는 먼저 8국 연합군의 배 6척을 부수는 등 전공이 있었다. 그러나 수군에 어뢰정으로 공격해달라고 요청하고, 다른 부대의 지원을 요청했는데, 다른 부대에서는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이로써 대고구 포대는 포탄이 떨어져 결국 함락되고 만다.
양촌 방어전투에서도 청나라군대의 신임총지휘관인 이병형은 군대를 몰고 와서 막 배치를 마쳤으나, 원래의 부대들이 그의 지휘를 듣지 않고, 임의로 진지를 정하거나 옮겨갔다. 이병형이 조정에 올린 글에서, 군사 수만이 방어를 하고 있으나, 적이 왔다는 말만 들리면 도망치기 바쁘고, 지휘를 전혀 듣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이외에 북경, 천진방어전에서 청나라 총사령관 영록은 원세개가 보유한 무위우군으로 하여금 지원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원세개는 느리게 이동하여 파견한 6영부대(약7천명)이 천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연합군에 함락된 이후였다. 이후에도 북경으로 달려가지 않고, 8국 연합군과 싸우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무위군중 전, 후, 중군은 전멸하고, 좌군은 마옥곤(馬玉琨)의 부대가 겨우 살아남았으나, 우군의 원세개의 부대는 전혀 손상이 없었고, 오히려 1만 명에서 2만여 명으로 늘어난다. 이후, 8국 연합군과의 협상이 종료되고 난 다음에, 원세개의 부대는 청나라 정규부대의 주축이 되고, 원세개는 중국의 병권과 권력을 한 손에 잡게 된다.
3. 심양고궁(瀋陽故宮)의 네 번에 걸친 겁난

심양고궁은 1625년에 건축되었고, 6만여 평방미터를 점하고 있다. 자금성과 함께 중국에 현존하는 2개의 황궁건축물중의 하나이다. 사료기재에 의하면,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하고 옮아가기 전까지 황궁은 심양에 있었고, 북경으로 천도한 후에는 이 황궁은 "배도궁전(陪都宮殿)", "유도궁전(留都宮殿)"이 되었다. 나중에 심양고궁으로 칭한다. 심양고궁은 제1대 황제 누르하치가 건축을 시작하고, 누르하치 사후 청태종이 완공한다.
첫 번째 겁난 : 제정러시아군의 약탈 파괴
1900년 9월, 제정러시아의 침략군이 심양고궁에 들이닥친다. 당시 제정러시아군은 의화단의 난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우장(牛莊)과 요양(遼陽)을 점령한 후 심양(瀋陽)으로 몰려왔다. 10월 1일, 제정러시아군은 심양성에 진군하고, 심양고궁은 그들의 주둔장소가 된다. 태양이 서쪽으로 떨어질 때, 쿠사코프의 보병이 심양고궁으로 왔고, 코카서스기병이 궁전의 방어를 책임지고, 돌격대와 순라대는 성경장군(盛京將軍)의 관저를 방어했다. 성경장군 증기(曾琪)는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봉황루에 소장된 황제와 제후의 그림과 옥보를 꺼내고 선황의 고궁과 보물들은 버려둔 채 부도통인 진창(晋昌)과 심양성을 버리고 도망친다. 심양고궁의 많은 보물은 제정러시아군의 손에 들어갔다.
제정러시아군은 심양고궁을 점령한 후 갖가지 이유를 들어 떠나지 않고, 2년 반을 머문다. 1903년 3월 11일에서야 심양고궁에서 철수한다. 청나라 관리들이 심양고궁을 접수했는데, 이들이 점검해보니 소장품을 분실한 것과 손괴된 것이 만여건에 달하였다. 그중 봉상각에서 없어진 기물이 3000여건, 대소은정이 8000여개, 6000냥, 각종 금기, 금정, 금조가 만 냥이상, 동칠간루에서 없어진 자기가 6300여개, 서칠간에서 없어진 서적, 묵각이 540여건이었다.
두 번째 겁난 : 원세개의 문화재운송
심양고궁에는 원래 약 12만 건의 진보를 수장하고 있었다. 현재의 수장품들은 기본적으로 나중에 모은 것들이다. 당시에 유실된 국보는 다시는 돌려받지 못하였다.
1913년 겨울, 북양정부의 내무총장인 주계금이 글을 보낸다. 대총통 원세개의 비준을 받아 북경고궁 건청문 이남의 "외조(外朝)" 부분, 즉 태화전등에 "고물진열소(古物陳列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부의가 "내정"에 거주하고 있고, 궁내의 국보는 '개인자산"이므로 가지고 나와 진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북양정부는 내무부에 명하여 봉천고궁과 열하고궁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나라의 궁정문화재를 북경으로 옮겨와서 청궁예술품진열전람에 쓰기로 한 것이다. 1914년 1월에서 3월까지, 심양궁전에 있던 고동정이, 송원명청의 서화, 내정옥기, 어용무기장비, 명청자기 등 11만여 건을 모두 상자에 넣어 기차로 북평고물진열소로 옮겼다. 그런데, 운송되었던 대부분의 소장품들은 몇 단계를 거쳐 각지로 흩어지고, 다시는 심양고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1925년, 북경고궁박물관이 성립되고, 심양과 승덕에서 북경으로 운송해온 문화재를 모으기 시작했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후부터는 문화재를 남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진귀한 문화재는 최종적으로 대만으로 옮겨갔다. 심양고궁에서 옮겨간 절대다수의 문화재는 일부가 대만으로 간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남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세 번째 겁난 : 일본인의 소장품분산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심양고궁은 박물관이었다. 동삼성박물관(1926-1932), 봉천고궁박물관(1932-1936)이라는 이름으로..이후 만주제국수호릉묘판사처로 되었고, 많은 소장품이 외부로 유출되었다. 그 때 심양고궁은 만주 황실이 통제한 금지(禁地)였다. 원래의 고궁박물관의 각 궁전은 봉천능묘판사무처가 관리했다. 이러한 상황은 1945년 8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
1937년 4월까지, 심양고궁의 소장품은 청나라 때의 기물, 도서, 기록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만주국국립박물관, 만주국국립도서관, 만주국봉천능묘판사무처 등에 나뉘어져 세 곳에서 보관했다. 심양고궁은 다시 한번 소장물품이 다 비어버린 것이다. 동북이 함락된 후, 동삼성박물관에 소속된 소장품은 다시 한번 외부로 유출되고, 심양고궁의 원래 문화재, 내부서적, 청대자료는 모두 나뉘어져 분산되었고, 성경황궁소장품의 통일성은 없어지게 되었다.
네 번째 겁난 : 국민당의 국보비밀운송
3번의 대겁난을 거친 후에도 심양고궁에는 문화재가 여전이 약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일부분중의 절대다수가 다시 국민당이 요심전투 폭발 전에 비밀리에 운송해 가버린다. 1948년 6월, 요심전투가 폭발하자, 국민당은 철수하면서 3톤에 달하는 문화재를 두 번에 나누어 당시의 북평(북경)으로 옮긴다.
제1차 민각서는 17포, 88종, 109함, 551책이었고, 제2차는 옥보29개, 옥책 32개, 송요자기 45건이었다. 6월초에는 이미 옥보, 옥책, 민각서, 요자정품, 청실록, 만문노당 등이 다 옮겨갔다. 같은 달에 다시 문소각 사고전서를 북평으로 옮겨갔다. 이로써 해방 전까지 심양고궁은 철저하게 아무 것도 없이 비어있는 고궁으로 바뀌고 말았다.
4. 청나라의 특수부대: 등패병(藤牌兵)

중국을 침입했던 영국군들은 청나라의 재미있는 특수부대를 보았다. 이들은 다른 청나라군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호랑이 옷을 입고, 호랑이 모자를 쓰고, 이상한 방패와 긴 칼을 들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이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이들은 "등패병"이라고 불리웠던 청나라의 특수부대였다. 주로 기병(騎兵)을 상대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우선, 말들이 호랑이 옷을 입은 특수부대원들을 보고 놀라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의 등나무방패는 화살은 물론 조총정도까지는 막아낼 수 있었다. 나중에, 조총보다 강력한 서양군대의 총은 막아내지 못함에 따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등패(藤牌, 등나무방패)는 원래 복건성의 천주, 장주지구에서 민간에서 무장할 때 적으로부터 방어를 위해서 사용하던 도구였다. 이것을 정식으로 군대장비로 처음 활용한 것은 명나라때의 왜구를 무찌른 것으로 유명한 척계광(戚繼光)이었다. 복건성 복주의 평담도에는 지금까지도 민간에서 등패무(藤牌舞)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등패무의 기원은 등패조(藤牌操)인데, 이것은 척계광이 민절(복건, 절강)의 왜적을 무찌를 때 만든 '원앙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등패는 왜적과 싸울때 공헌이 컸다
1644년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한 이후 철기군이 대강남북을 횡횡했다. 정성공은 동남쪽을 방어하면서 "등패병"을 두고 전문적으로 청나라 철기군에 돌진하는 주력부대로 삼았고, 이들로 청나라의 기병에 대항했다. 등패병은 원래 정성공의 자제병으로 천주, 장주사람들이 위주였고, 사용하는 무기는 한 손에 등패를 들고 다른 한 손에 장도(長刀)를 들었다. 등패는 등나무를 기름에 담근 후 짜서 만든 것으로 둥그런 모자와 같았다. 그래서 단패(團牌) 또는 곤패(滾牌)라고도 불렀다.
정성공의 등패병이 가장 위력을 발휘한 것은 북상하여 장강지역을 점령할 때와 대만에서 네덜란드군대를 물리칠 때였다.
청나라 강희22년(1683년)에 대장군 시랑이 이끄는 청나라군대는 대만을 통일한다. 정성공의 손자 정극은 투항하였고, 복건 등패병은 북방으로 이동하여 명장 임흥주(林興珠)의 지휘 하에 수차례 전투에 참전한다.
임흥주(1628- ?)는 원명이 진주(進周)로 민간에서는 임후(林侯)로 부르고 있다. 복건 영춘현, 승평리 사람이다. 청나라 순치6년(1649년) 숙부 임일승을 따라 정성공을 따른다. 임흥주는 정성공의 부대에서 등패병의 위력을 느끼고 그 사용기교를 익힌다. 순치13년(1656년) 처아라 군대가 모정채를 격파하자, 임일승과 임흥주는 청나라에 투항한다. 임흥주는 삼번의 난 때 오삼계를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다. 강희17년(1678년) 강희제는 임흥주를 북경으로 불러 난의위난의사를 수여하고, 건의후(建義侯)에 봉하며, 팔기중 상황기에 편입시켜준다.
5. 청나라 말에 중국을 방문한 두 명의 미국 대통령
1972년 2월에 닉슨대통령이 중국을 역사적으로 방문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닉슨은 확실히 현역 대통령 재임 중에 중국을 방문한 최초의 대통령이다. 그런데, 청나라 말기에 이미 미국대통령 2명이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것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한 사람은 퇴임한 후이고, 한 사람은 당선 전이었다.
그란트 대통령

1877년 3월, 미국 제18대 대통령인 그란트는 2번에 걸쳐 대통령을 연임한 후 퇴임하였다. 퇴임 2개월 후, 그는 부인 줄리아와 함께 세계여행을 떠났다. 유럽을 여행한 후 1879년(광서5년) 4월 7일, 그란트는 배를 타고 홍콩에 도착했다. 다시 광주로 갔고, 배로 상해, 천진까지 갔다.
당시 북양대신이던 이홍장은 그에게 연회를 베풀고 후하게 대접하였으며, 두 사람은 금방 가까워 졌다. 서양인들에 의하여 동양의 비스마르크로 불리우던 이홍장은 그란트 대통령에게 아주 자부심 있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두 사람이다. 우리는 역사상 유명한 두 반군을 진압한 바 있다" 그란트는 일찍이 미국 남북전쟁 때 북부군의 사령관이었고, 이홍장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공신이다.
그란트가 북경에 왔을 때, 청나라 정부는 그에게 가장 높은 예우를 하여 8명이 메는 가마를 보냈다. 앞뒤로는 의장대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길을 열고, 뒤에는 군대병사들이 늘어섰고, 길옆에는 긴 창을 든 병사들이 호위했다. 관리들은 등급에 따라 줄을 서서 맞이했다. 청나라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공친왕 혁흔도 그란트와 한번 회담을 했다.
당시 중국은 일본과 유구문제로 분쟁이 있어, 이홍장은 그란트에게 거중조정을 해줄 것을 부탁했고, 그란트는 즉석에서 응낙했다. 중국에서 한 달여를 머문 그란트는 5월 16일, 일본으로 갔다. 일본정부는 중국과 직접 협상하기를 원했고, 제3국이 끼어드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란트의 수행비서는 편지를 이홍장에게 서신을 보내어 일본 측이 성의가 없어서 조정이 성공할 가능성이 적을 것이라는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일본의 야심은 유구에 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중국의 우환은 힘이 약한데 있으므로 중국이 하루빨리 스스로 강하게 되기를 권유했다.
증국번의 손녀사위였던 오영은 <<경자서수총당>>이라는 글에서 그란트의 중국방문 시, 다이아몬드를 박은 지팡이를 짚고 왔는데, 이홍장은 이것을 보고는 아주 좋아하고 탐을 냈다. 이 지팡이는 엄지손가락만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고, 주위에는 작은 다이아몬드를 박은 것이었다. 그란트는 이홍장이 이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통역을 통하여 "중당께서 이것을 좋아하시니 당연히 선물로 드려야겠지만, 이것은 내가 퇴임할 때, 전국 각계에서 논의하여 만들어 선물한 것이므로 국민의 뜻이어서, 내가 사사로이 드리기기 힘들다. 귀국한 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본 후 보내드리도록 하겠다." 이홍장은 즉시 사의를 표하며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그저 한번 가지고 놀아 보았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1896년 이홍장이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즉위식에 축하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미국을 들었다. 이때는 그란트가 사망한지 이미 10년이 된 때였다. 이홍장은 뉴욕의 그란트 묘원을 찾아가 조문하고, 미망인 쥴리아를 방문했다. 그란트 부인은 아주 기뻐하며, 이홍장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이 때, 그란트 부인은 "오늘 이선생께서 내방하셨는데, 여러분들이 제 남편에게 주신 지팡이를 이선생에게 드리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박수로 찬동했다. 그녀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지팡이를 이홍장에게 주었다. 이홍장은 귀국 후에 이 지팡이를 보배처럼 여기고 잠시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후버 대통령

미국 31대 대통령인 후버는 미국의 1930년대의 경제공황 때 이를 극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젊었을 때의 중국에서의 독특한 경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897년, 22세의 스탠포드대학 지질학 학사인 후버는 런던에 본부를 둔 베이비크 모린 채광회사의 엔지니어로 채용되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을 했다. 1년 후 회사는 그를 중국으로 보냈다. 이 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후버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자 친구인 스탠포드 지질학과 동창 루 헨리에게 전보를 보내어 구혼하고, 처의 신분으로 그와 함께 갈 것을 요청했다. 루는 전보를 보내어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후버는 즉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1899년 2월 10일, 캘리포니아의 집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 젊은 부부는 신혼의 허니문도 거의 보내지 못하고, 가방에 중국 역사와 문화에 관한 책을 집어넣고 1달의 긴 항해를 거쳐 천진항에 도착한다. 개평석탄광산의 총판인 장익의 독일국적 고문인 덕최림(아마도 디트리히의 중국번역어)의 지휘를 받아 후버는 장익의 기술고문이 된다. 동시에 직예열하광무국의 총공정사(수석엔지니어) 겸 청고항구 건설공사의 감독이 된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이 폭발한다. 덕최림은 장익이 상해에 피난한 기회를 이용하여, 비밀리에 베이비크 모린회사의 중국내 총대표인 후버와 협상하고, 계약을 체결하여 개평의 광업권을 모두 베이비크 모린 회사에 양도한다. 베이비크 모린은 다시 이를 영국 상인들이 만든 동방신디카 투자회사에 양도한다. 1900년 말, 베이비크 모린, 동방신디카와 벨기에상인 차이스가 만든 개평광무유한공사는 개평석탄광산을 인수하고, 후버는 회사 사장이 된다.
1901년 후버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장익과 협상을 벌여, '양도계약"을 작성한 후 장익에게 서명하게 한다. 무능한 장익은 놀라고 두려워했으나, 서양인들의 위세에 눌려 할 수없이 굴복한다. 그는 합작을 선택하면서 덕최림과 5만 파운드의 보너스를 나눠가진다.
후버의 이런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는 그의 정치 생애에서 항상 오점으로 남았다. 1928년 대통령 선거 때, 정적들은 그를 깨끗하지 못한 사람으로 공격했다. 즉, 그가 중국에서 불법적인 수단을 활용하여 큰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비록 후버부부는 천진에서 2년이 안 되는 기간을 살았지만, 그들은 중국어를 배웠다. 나중에 백악관에서 후버부부는 자주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듣게 중국어로 얘기하곤 했다. 후버는 1902년 중국을 떠났고, 26년 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6. 원명원(圓明園)은 어떻게 파괴되었는가?

원명원은 비록 1860년 영국프랑스연합군의 공격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었지만, 전체 부지에는 여전히 적지 않는 건축유적이 남아 있었다. 최소한 1870년대까지는 서양루(西洋樓)의 일부 건물은 완전하다고 할 수 있었고, 동치제는 재위기간동안 원명원내의 중국식 건축물에 대하여 중도에 그만두기는 했지만, 대규모의 수선을 한 바 있었다. 1895년에 캉유웨이(강유위, 康有爲)가 원명원을 찾았을 때 아직도, "비록 풀이 가득 자라고 부러진 돌들이 있어 황량함이 온 눈에 가득했으나, 수산복해에는 여전히 무수한 정자와 전각이 있었다. 겨우 한쪽 구석만을 둘러보았는데, 백석루 3층짜리는 문호가 영롱하고 화훼를 그렸는데 모두 유럽식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원명원을 철저히 파괴했단 말인가?
화겁(火劫) : 연합군. 토비(土匪)와 사토적(篩土賊)
영국프랑스연합군이 원명원에 대하여 미친듯이 약탈해갈 때, 적지 않은 토비들도 강탈에 참가했다. 영국프랑스연합군은 가장 귀종한 물건을 약탈했고, 토비들은 남아 있는 괜찮은 물건들을 강탈했다. 일반 백성들은 길거리에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갔다. 심지어 원명원을 수비하던 태감도 불난 틈을 타서 물건을 약탈해갔다. 가장 쉽게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은 금방 다 없어졌고, 어떤 사람은 여기저기 흩어지거나 땅에 묻힌 것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원명원의 내에서 여기저기 땅을 파헤치고 흙을 고르면서 물건을 찾았다. 이들을 수비태감과 관리들은 "사토적"이라고 불렀다. 다행히 이때만 해도 건물에까지 화가 미치지는 않았다.
목겁(木劫) : 원명원이 목탄공장으로 바뀜
1900년 8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후, 서쪽 교외의 황실정원은 다시 한번 약탈당했다. 이번에, 청나라 정부는 원명원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이 때 약탈에 참여한 사람들은 서양인들이 남긴 물건에만 만족하지 않고, 원명원내에 남아 있던 건축, 나무다리의 기둥, 난간까지 톱으로 잘라서, 밧줄로 끌고 갔다. 원명원내의 크고 작은 나무들도 모두 벌채되어 남지를 않게 되었다. 당시 청하진에는 목재가 산처럼 쌓여 있었으며 거래로 바빴다고 한다. 원명원내에는 목탄공장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서 나뭇가지, 나무뿌리등도 모두 목탄으로 바뀌었다. 몇 달이 되지 않아. 화겁 후에도 남아 있던 건축물은 오래된 나무나 잡목까지도 전혀 남지 않게 되었다. 이것을 사람들은 원명원 "화겁" 후의 "목겁"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원명원에는 그저 산, 돌, 호수와 샘만 남았다.
석겁(石劫) : 돌 판매로도 돈을 벌다.
민국초기에 주마등처럼 군벌들이 바뀌었다. 이들은 모두 원명원에서 건축 재료를 무궁무진하게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부의시대의 자료에는 이때의 기록이 남아 있다. "군인이 차를 끌고 와서 매일 10여 차량 분의 원명원의 태호석을 가져갔다" 실제로, 기록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돌을 떼어내서 파는 것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서세창은 원명원의 명춘원과 경춘원의 목재를 철거해서 가져갔고, 왕회경은 안우궁의 벽과 서양루의 석재를 가져갔다. 이로써 원명원 폐허는 그저 건축 재료를 가져가는 곳으로 되었다. 지상의 벽돌, 기와, 바닥재, 돌, 기하의 나무못, 나무목책, 동파이프 등 모두 가져갔으며, 이것은 20여 년간 계속되었다.
후인들은 이를 원명원 "화겁"후의 "석겁"이라고 부른다. 석겁 중 가장 크게 손실을 입은 것은 서양루의 유럽식 건축물이었다. 원명원의 서북쪽 귀퉁이에 있는 안우궁은 청나라 황가의 원명원내의 조상묘였고, 기세가 대단했으며 건물 앞의 두 쌍의 화표(華表)는 조각이 아주 뛰어났다. 여러 번 재난을 거쳐, 안우궁과 주위의 패방과 나무는 모두 사라졌고, 겨우 두 쌍의 화표만이 남았다.
1925년 초, 연경대학의 목사는 사사로이 화표를 철거했다. 그 이유는 "내가 원명원내의 돌기둥을 보니 옛날 물건인데, 그냥두면 다른 사람이 훼손할 것 같아서 우리 학교로 옮겨서 보관하고자 한다. 중국에서 사용한다면 다시 돌려주겠다." 현재 이 화표는 여전히 북경대학 서문내의 교학루 앞에 서 있다. 또 다른 한 쌍의 화표는 민국시대 성내에 새로 지은 옛날식 도서관의 문 앞에 장식물로 세웠다. 이를 전후하여 중앙공원(현재의 중산공원)을 만들 때, 그리고 심지어 향산 유아원을 만들 때도 '정당'한 이유를 들어서 원명원내의 진귀한 문화재들을 반출해갔다. 화표는 공개적으로 운송되었다.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원영관의 남은 돌과 부러진 기둥은 사람들이 봐주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후인들에게 교육을 시키기 위한 마지막 교재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모양이 너무 괴이하여 어디다 쓰기 힘들어 가져가지 않았을 것이다.
토겁(土劫) :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다
원명원은 아직도 마지막의 가장 철저한 '토겁'을 거쳐야 했다. 선통제 말년, 현지의 만주족들은 원명원내의 부지위에 집을 짓고 옛날의 황가원림과 마주보았다. 1940년 후에는 일본군이 점령하였으며, 북경의 식량이 부족하자, 이곳을 개간하도록 장려했다. 이때부터 농민들이 계속 원명원에 들어와서 산을 깎고 호수를 메워서 농사를 지었다. 청나라초의 성세로부터 150여 년 동안 정력을 기울여 만든 원명원이 이로써 그 면목을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7.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아편전쟁 이야기
1) 아편의 내력
아편전쟁이 중국근대사의 시작이고, 아편전쟁은 중국인들의 아픈 곳이며, 굴욕의 시대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에는 아무런 의문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편(鴉片)은 앵속(罌粟)의 초급제품이다. 앵속은 확실히 하느님이 인류에게 내려준 큰 대가족이다. 그에는 28속, 250여종이 있다. 주로 북반구의 거의 모든 온대와 아열대지구에서 생장한다. 그리고 이 지방들은 거의 전 인류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스위스에서 발굴된 기원전 4000년의 신석기시대 마을유적에서 고고학자들은 '아편앵속'의 종자와 과실유적을 발굴했다. 그리고 이것은 인공으로 교배시킨 품종이었다. 기원전 3400년에 이라크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인류는 이미 대규모로 이 작물을 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에 "쾌락식물(joyplant)"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 주었다.
적어도 기원전 2160년에, 아편은 이미 수의(獸醫)와 부인과(婦人科)의 약품으로 사용되었다. 이미 발굴된 기원전 1500년의 고 이집트 분묘에서 나온 '디비스아편'은 이미 고급품종에 속한다. 이것은 기원전 300년까지 계속된다. 고대그리스는 이미 아편을 보편적인 음료로 사용하였다. <<성경>>과 호머의 <<오딧세이>>에는 아편을 "망우약(忘憂藥, 근심을 잊어버리는 약)"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하느님도 이를 사용한다. 적어도 기원전 2세기의 고대그리스 명의인 갈렌(Galen)은 아편이 질병(두통, 어지럼증, 귀어두움, 간질, 중풍, 약시, 기관지염, 기침, 해소, 각혈, 복통, 황달, 비경화, 신결석, 비뇨기질병, 발열, 부종, 마비, 월경불순, 우울증, 항독, 독충에 물린데 등등)을 치료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번잡하게 계속 열거하지는 않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편은 인류의 역사와 같이해왔다. 17세기의 영국의사이면서 임상의학의 창시자인 Thomas Sydenham은 "나는 위대한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만물의 창조자는 인류의 고뇌를 위하여 적합한 아편을 보내주었다. 그가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의 수량을 불문하고, 그것이 질병을 없애는 효능으로 볼 때, 어떤 약물도 아편과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아편이 없으면, 의학은 절름발이가 된다." 이 의학의 대가는 이로 인하여 "아편철학자"라는 칭호를 얻는다.
중국인들도 아편을 일찌감치 알았다. 문자로 된 기록은 적으나, 적어도 기원전 139년의 장건이 서역에 사신으로 갈 때, 아편은 중국으로 전래된다. 삼국시대의 명의인 화타도 대마와 아편을 마취제로 사용한다. 당나라 건봉2년(667년)에는 아편을 수입한 기록이 있다. 당나라 때의 아랍아편은 "아부용(阿芙蓉)"이라고 불렀다. 기원973년의 북송에서 인쇄한 <<개보본초(開寶本草)>>에는 아편을 앵속속(罌粟粟)이라고 불렀다. 뒤의 "속"은 과실이라는 의미이다. 징기스칸의 철기가 유라시아대륙을 짓밟은 후, 아편은 상품 중의 중요한 품목이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약으로 좋은 것이었다. 개략 1600년대에, 네덜란드상인들이 대만을 통하여 북아메리카의 인디인들이 피우는 담뱃대를 담배와 함께 중국에 전래해준다. 중국에서는 이때부터 흡연자가 생기기 시작한다. 흡연이 번져가는 속도는 중국의 통치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숭정황제는 그리하여 흡연금지령을 내린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담배대신 아편을 담뱃대에 넣어서 피워보았다. 생각도 못한 것은 담배를 금지하는 바람에 아편을 흡입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18세기중엽의 청나라 관리 황유보는 처음으로 대만사람들이 아편을 흡입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는 아편 흡입자를 죽여 버리는 것 이외에는 이 악습을 떨쳐버리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단언한다.
2) 아편 무역이 중국에서 흥기하다.
17세기말, 강희제는 외국인들이 광주에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부가하여 8개의 가혹한 부대조건도 단다. 그 중의 하나는 반드시 호부에서 비준한 '공행(公行)"을 통해서만 대외무역에 종사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관청이 특허한 상행이 된다. 그래서 부패한 문호가 되는 것이다. 광동의 지방 관리와 관료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뇌물을 주고 특허를 획득한다. 호부관원은 뇌물을 받는다. 전체 18세기의 대외무역발전에서 영국인들이 점차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들을 대체하고, 중국무역에서의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무역의 범위도 아주 넓었다. 찻잎, 설탕, 잠사, 자기, 종이, 진주, 장뇌, 육계, 동, 명공, 금은, 사제품, 칠기, 식물유, 죽기, 대황 등의 상품으로 유럽인들의 면화, 양모, 양모제품, 철, 다이아몬드, 고추, 시계, 산호, 호박, 샥스핀, 물고기, 쌀등의 상품을 교환했다. 아편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무역의 발전으로 서방문화, 종교, 도덕관념 등이 중국에 침투하게 되었다. 조정은 이로 인하여 중국의 전통문화가 동요되고, 조정의 통치가 동요될 것을 우려하였다. 민간에서도 서방전도사들이 가져온 종교와 문화에 접촉하게 되면서, 이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부패한 황실은 서방의 물건에는 유혹이 있다고 보고, 한편으로는 외국상인들로 하여금 변방의 광동지역에만 한정하도록 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물건으로 물건을 물물 교환하는 것을 금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관리들은 마음대로 수입하는 물건을 허가하고, 수출은 반드시 금은으로 바꾸도록 한다. 중국의 시장이 유한하므로, 심각한 수출초과는 영국을 위주로 한 상인들이 무역을 도저히 계속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외에 영국 상인을 위주로 한 외국상인들은 중국내지의 광활한 시장에도 침을 흘리고 있었다.
중국의 찻잎은 영국인들이 마시면서 거의 중독이 되었다. 상인들은 반드시 금은으로 찻잎을 구입하다보니 거액의 적자를 보게 되었다. 내지시장에는 외국상인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유한한 무역액으로 이러한 적자를 메우기는 불가능했다. 이런 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상인들이 금세 발견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상품들에 대하여는 관리들이 수입을 금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는 면화이고 하나는 아편이다. 면화는 주로 이집트와 인도에서 났다. 이집트로부터의 운송원가로는 도저히 이익을 볼 수 없었다. 인도의 면화도 이익이 박했다. 그러나 인도에서 나는 아편은 폭리품목이었다. 관리들은 이를 가지고 큰돈을 벌었다. 중국은 이미 앵속을 많이 생산했지만, 아편의 품질은 인도아편과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국산아편만으로는 도저히 수요를 맞출 수 없었다.
아편으로 인한 부정적인 결과는 다음으로도 증명된다. 옹정제는 1729년 아편무역을 금지시키고, 100대의 곤장, 3개월의 칼을 찬 수감, 신강유배 및 사형까지 처벌하였다. 그러나 아편을 피우는 자에게는 벌을 면제해주었고, 아편수입을 제한하는 어떠한 규정도 두지 않았다. 아편을 심거나 생산하는 데에 대하여 엄격히 처벌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아편수입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금지령이 반포된 당해 연도에만 합법적인 아편수입이 200여 상자였다. 1767년에 이르러서는 1000상자로 늘어났고, 1790년에는 4000상자로 늘어났다. 불가사의한 조치는 그저 조정이 우매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분명한 원인은 아편수입시 정부에 관세를 내므로, 정부는 그 수입을 버리기 힘들었다. 이 세금은 1796년까지도 계속 징수되었다.
씁쓸한 한 이야기는 1793년, 영국의 첫 번째 외교공사인 McCartney가 700여명의 방대한 사절단을 이끌고 각종 선물을 가지고 북경에 도달하였는데, 사절단의 규모나 선물의 방대함은 영국국왕이 얼마나 중시하는지 충분히 알만했다. 영국왕 조지3세는 그가 준 수권서에, 스스로 양보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필요하면 동인도회사에서 아편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는데 대하여도 영국왕은 승낙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아편금수정책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영국특사는 중국의 내지시장을 원했다. 그러나 McCartney는 건륭황제에게 반드시 중국식으로 절해야 한다는 요청을 거절했고, 이것은 외국을 모두 오랑캐로 보고, 선물은 모두 조공품으로 보는 청나라조정의 입장에서는 대역무도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청나라조정은 이들에게 기한을 주고 떠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그가 보내온 선진적인 과학기기들은 모두 황궁에 설치해서 장난감으로 활용된다. 중영간의 상업관계와 외교관계를 건립하자는 요구는 토론도 하지 않고 거절해 버린다. 영국국왕은 영국과 중국 간의 정상적인 무역을 전면적으로 전개하고 싶었으나, 이 꿈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뿐만이 아니다. McCartney는 청나라 관리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이런 결론을 얻는다. 청왕조는 이미 부패하고 쇠약했다. 힘도 없다"라고 하면서 "낡아빠진 일등전투함"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영국국왕에게 청왕조가 망하는 것에 주의하고 이 때 "다른 어떤 나라보다 먼저 이익을 얻어야 할 것"이라고 보고한다. 1816년 영국국왕은 다시 아미스더 사절단을 중국으로 보낸다. McCartney가 완성하지 못한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게 한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황제에 절하는 문제로 대치하고 만다. 이번에는 대화도 하지 않고 바로 그들을 출국시켜버린다.
아편수입은 국고의 은량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1799년, 가경황제는 아편금지령을 내리고, 아편의 수입, 판매를 금지하며, 앵속의 재배도 금지한다. 이것은 원래 본국의 앵속을 재배, 가공하여 큰돈을 만지려던 관료들과 황실친척들이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그들은 겉으로는 명을 받드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비밀리에 앵속을 재배하고 가공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입 금지를 틈타 밀수를 시작한다. 밀수의 경우에는 세금도 내지 않으므로 이익이 더 커지게 되엇다. 1800년, 최소한 서남각성에서 생산하는 아편은 수입물량을 초과하게 된다. 1830년이 되어, 절강, 복건, 광동 등의 관료들과 황실에서는 모두 앵속의 재배와 가공을 눈감아준다. 그리하여 생산량이 크게 증가한다. 아편수입이 금지되면서 아편가격도 급격히 올라간다. 밀수로 인하여 황제의 금지령은 그저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게 된다. 조정이 원래 수취하던 관세수입은 그대로 관리와 밀수상인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외국 주로 영국의 아편상과 결탁하여 아편수입은 거의 무인지경으로 이루어진다.
위원(魏源)이 기술한 바에 의하면, 광동의 수군 순행함은 매월 3만6천 냥씩 받고 밀수를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수군부장 한조경은 전문적으로 밀수선을 호송해주었고, 아편밀수는 아예 수군이 운송을 담당하기도 했다. 매 만 상에서 수백 상을 수고비로 떼었다. 한조경은 이로 인하여 상까지도 받는다. 복건수군도 밀수를 도와주는 것을 주요업무로 삼는다. 심지어 "오랑캐배의 아편을 일시에 수입할 수 없으면, 왕왕 수군의 포대부근에 쌓아두었다." 절강성의 관군도 이에 못지않았다. 영국정부의 청서(Blue Book)에 의하면, '과거20년간, 중국고급관리와 정부공무원은 아편밀수를 공개적으로 묵인하였다. 전임과 현임 순무는 모두 그 가운데 이득을 취했다. 듣기로 북경의 군기처도 암중으로 허가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아편판매상들이 외국선박에서 아편을 밀수하도록 종용한다. 어떤 때는 심지어 관선으로 운송을 담당하기도 한다" 마르크스도 미국신문에 발표한 평론에서 "아편밀수를 종용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관리들의 부패행위는 점차 이 가장제의 권력을 부식시키고, 이 광대한 국가기관의 각 부문을 연결시키는 정신적인 연계를 부식시킨다."고 적었다.
아편이 이처럼 붐을 이루게 된 것에는 시장에서 거대한 수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인사인 장상남의 조사에 의하면 북경관료 중 아편을 피우는 자가 10명중 1,2명이 있었고, 막료 중에 아편을 피우는 자는 10명중에 5,6명이었고, 수행인원이나 하급관리 중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고 적었다. 임칙서의 보고에 의하면, '아문에서 아편을 피우는 자가 많다. 막우, 환친, 수행인원, 서판, 차역중 아편을 피우는 자가 10명중 8,9명이다" 1831년의 형부에서 올린 상소에 의하면, "현재 직성지방에는 모두 아편을 피우는 자가 있다. 각 아문은 더욱 심하다. 개략 살펴보면, 총독, 순무이하 문무아문의 상하자중 절대 아편을 피우지 않는 자는 그 수가 아주 적다." 황실내부에서도 아편에 중독된 사람이 많았다. 신기영의 관리대신인 계상은 바로 유명한 아편장이이다. 심지어 자희태후 본인도 아편 흡입자였다. 청나라조정의 아편 금지 조치 중에서 1품 이상 관리, 60세 이상 인사는 금지대상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도광황제의 심복대신 중에서도 군기대신, 목창아, 중신 기선, 기영, 이리포 등이 모두 아편밀수로 돈을 번 자들이었다.
청나라관청과 군인들이 참여함에 따라, 아편밀수의 수량은 심지어 금지전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영국 상인인 동인도회사는 인도아편을 독점하였는데, 그들이 주강입구의 영정도에까지 가져와서 도매하면, 중국의 관청배경이 있는 밀수상들이 이를 사갔다. 1790년에는 4000상을 수입하였는데, 금지령이후인 1810년대에는 4,494상자에 이른다. 1821-1828년에는 9,708상자에 이른다. 1828-1835년에는 18,835상자에 이르고, 1835-1839년에는 30,000여 상자 이상에 이르게 된다. 예를 들어 영국의 이화양행의 Dr. Karl Gutzlaff는 매년 흠주 관리에게 2만 달러씩을 뇌물로 주었고, 아편은 장기간 안정적으로 흠주 항구에 평안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밀수로 인하여 아편수입이 급증하자 동인도회사는 급히 인도의 앵속 재배를 늘였고, 아편 생산량을 늘였다. 그러지 않으면 수요를 공급이 따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통계에 의하면, 아편전쟁 전 40년 동안 중국이 수입한 아편은 3억 위안 이상이다.
3) 영국의 아편에 대한 논쟁
영국의 아편무역은 중국만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세계에서, 아편무역은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시장의 수요는 무역액을 엄청나게 불리었다. 1830년대, 아편은 영국의 중국에 대한 무역에서 절반을 차지했다. 이익만 있으면 손을 대는 영국정부는 대량의 수입을 얻어갔다. 아편무역은 영국본토에서도 정상무역이었다. 그저 아편을 흡입하는 시장만 있으면 공급했다. 1868년에 이르러 영국은 비로소 <<독품약점법안>>을 만든다. 이 법안은 영국본토의 아편무역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제한할 뿐이었다. 진정으로 아편을 금지한 것은 1914년이다. 영국은 심지어 상당히 많은 양의 아편제품을 제조했다. 예를 들어, 자주보는 아동아편사탕인 "Balagoli"는 1920년대에까지도 유아를 안정시키는 가정상비약품이었다. 1885년 미국에서 입법으로 미국본토의 아편무역을 금지했다. 그러나 금지령이 엄격하지는 않았다. 전형적인 사례는 저명한 코카콜라음료는 1903년까지도 미량의 카페인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이의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1780년대에 아주 강력하게 정부가 아편무역을 단속할 것을 호소한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Shaftesbury백작은 "나는 이 국가가 이런 죄악의 거래를 종용할 정도로 극악하다고 믿지 않는다. 아마도 노예무역을 종용하는 것보다 더 악랄할 것이다" T Arnold박사는 영국이 아편무역을 허용하는 것에 대하여 "이처럼 사악한 것은 최대의 민족죄악이다"라고 하였다. Gladstone은 제1차 아편전쟁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읽은 것에 의하면 이것은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다. 국가로 하여금 영원히 치욕을 느끼게 할 전쟁이다" 중국-영국관계를 처리하던 관리인 George Staunton은 국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아편밀수가 없었다면, 전쟁도 없었을 것이라고" 심지어 동인도회사의 아편대리처부장인 Sam도 이렇게 썼다. "아편제품은 인민의 건강을 망치고, 도덕을 망가뜨린다. 아편을 재배하는 곳이 있으면, 바로 아편을 피우는 사람이 있다. 더 많이 심을수록 더 많이 피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편무역에 반대하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아편에 대하여 정확하게 인식하지도 못하였다. 또 다른 일부사람은 아편이 가져다주는 거액의 이익 때문에 반대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신문은 아편무역에 반대하고 찬성하는 의견이 대체로 1:5였다. 그래서 영국의회에서는 오랫동안 아편금지 법안이 통과되지 못했던 것이다.
4) 임칙서와 Elliot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은 제1차 아편전쟁을 지휘했던 영국정부의 전권대표인 Charles Elliot는 본인이 바로 절대적인 아편무역반대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원래 영국령 기아나의 의료선 <<노예수호신>>호의 함장이었다. 전임 영국-중국연락관인 로빈슨도 아편무역의 반대자였다. 그는 영국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어떤 때근 영국정부는 영국선박이 아편불법무역에 종사하는 것을 제지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더욱 확실한 방법은 영국령인도에서 앵속 재배와 아편생산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 건의는 인도당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쳤다. 그리하여 그는 면직되었고, 임시로 Elliot가 이 일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Elliot는 취임하자마자 영국정부에 중국에 대한 아편밀수를 금지시키도록 건의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이런 무역은 죄악이라고 생각했고, 대영제국의 수치라고 생각했다. 그가 런던에 보낸 보고서에서 Elliot는 "아편무역은 천주교의 기치를 든 민족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적었다.
임칙서는 중국 측에서 아편을 금지하는 대표인물이다. 도광황제가 국고의 은이 7000만 냥에서 1000만 냥도 되지 않게 줄어든 것을 발견하였을 때, 임칙서를 아편금지흠차대신으로 임명한다. 임칙서가 아편을 수거하라고 명을 내릴 때, Elliot는 영국의 승인도 받지 않고, 아무런 협상도 없이 영국 상인들에게 모든 재고인 20,283상자의 아편을 내놓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영국국왕을 대표하여 영국 상인들에게 손실을 배상할 것을 약속한다. 이 조치는 임칙서에게 놀라움과 만족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영국의 조야는 분노로 휩싸였다. 중국은 역대이래로 Elliot 개인이 아편을 수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국도 그가 홍콩할양문제를 처리하는 데서의 역할을 눈 여겨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영국명인대사전>>에도 Elliot가 바로 먼저 홍콩할양요구를 제기하고, 점령을 실시하였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제1차 아편전쟁의 제1단계에서, Elliot는 <<천비조약(穿鼻條約)>>에서 또 다시 런던의 비준을 받지 않았다. 이 조약의 주요한 요구조건은 (1) 홍콩을 영국에 양여할 것. (2) 6백만 위안(이것은 중국 측 기선에 주장한 숫자임)을 배상할 것, (3) 영국 중국관리는 평등하게 대할 것, (4) 1841년 구정후10일내로 광주무역을 회복시킬 것. 이 조약은 기선이 그저 홍콩을 할양하는 것에 대하여만 황제의 비준을 받고 나머지는 그대로 집행되었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불만이었다. 그들은 더 중요한 것은 영국의 무역봉쇄를 푸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중국의 전 지역에서 자유무역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841년 8월, Elliot는 면직된다. Henry Pottinger가 승계한다. 빅토리아여왕은 Elliot에 대하여 "명령을 완전히 준수하지 않고, 임기를 가장 짧게 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라는 평을 한다. Elliot는 북아메리카 텍사스의 영국 관리로 전보된다. 이것은 임칙서가 신강으로 귀양 간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아편전쟁의 도화선인 아편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 자체는 괜찮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쟁의 본질을 아편이 아니었다. 아편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전제통치의 부패를 폭로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아편은 부식제였고, 이것은 원래 이미 부패했던 체제를 더욱 부패하게 하였다. 마치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천조(天朝, 중국을 가리킴)의 모든 관료계통에 침투하여 종법제도를 파괴하는 사리사욕을 챙기는 행위는 아편상자와 함께 황포에 정박한 영국선박으로부터 몰래 천조로 유입되었다" 임칙서를 대표로 하는 충용지사들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였다. 범문란은 임칙서를 세계에 눈을 뜬 첫 번째 인물이라고 하였지만, 그의 능력만으로는 되돌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임칙서는 1839년 5월 18일 아편수거를 완료한다. 6월 3일부터 소홰한다. 이때 영국은 거저 20여척의 상선을 겨우 1척의 소형호위함인 HMS Larne호가 호위하고 있었다. 임칙서는 이 아편 상인들로 하여금 아편무역을 금지하겠다는 계약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Elliot가 상인들에게 중국관청의 요구에 따라 모든 아편을 내놓으라고 하였을 때 아편수거는 완수할 수 있었다. 영국 상인인 매디슨, 찰튼등은 영국정부에 Elliot를 고발했다. 이유는 중국관리가 몰래 그들에게 "6,7천상자만 내놓으면 충분하다"고 얘기해주었기 때문이다.
아편을 소홰할 때, 임칙서는 미국상인인 C. W. King, 미국전도사인 Elijah Bridgman을 모셔 와서 보게 한다. King은 임칙서에게 영국은 이미 상인들의 요구에 따라 증기포함을 보내었으며 이미 오는 중이라고 하였다. 임칙서는 이 정보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소홰하는 것은 아편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아편시장을 없앨 수도 없고, 상인들의 폭리에 대한 기대를 없앨 수도 없다는 점은 생각지 못했다. 그는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정당한 무역을 하는 상인과 아편밀수상인을 구분해주지도 못했다. 7월 7일, 일단의 영국수군이 배를 저어 구룡의 침사초이에 있는 작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렸으며, 그 곳 주민의 신감을 훼손하여 싸움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주민 임유희가 상처를 심하게 입어 주게 되었다. 임칙서는 대청률에 따라 수군들에게 한 사람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한다. Elliot는 사망자의 유족에게 배상하고, 이 일에 관련된 수군을 모두 징벌하겠다고 동의한다. 그러나 그 중의 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청률과 영국법률은 이렇게 서로 충돌했다. 이것은 나중에 치외법권을 요구한 배경이 된다.
쌍방의 대치 하에, 임칙서는 모든 "해외오랑캐"에게 통고를 내리고, 천조에 순종하라고 명령한다. 8월 15일, 임칙서는 명령을 내려 일체의 무역을 금지시키고, 외국인의 광주에 있는 모든 기업을 폐쇄시킨다. 그리고 병사를 보내어 마카오로 진입한다. Elliot는 홍콩, 마카오의 영국 상인 및 그 가족들에게 배에 승선하도록 명령하고 해안을 떠난다. 임칙서는 더 나아가 촌민들이 영국 배에 어떤 일용품도 공급하지 말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전함을 보내어 영국 배를 봉쇄한다. 일단 해안에 상륙하는 외국인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처결했다. 9월 5일, Elliot는 영국 상인 곽사립을 특사로 파견하여, 임칙서에게 서신을 보낸다. 거기에서 첫째, 영국선박에 대한 봉쇄를 풀어줄 것과 정상적인 무역관계를 회복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촌민들이 영국선박이 가져가는 물에 오물이나 독물을 푸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임칙서는 거절한다. 오후 2시, Elliot는 최후통첩을 발한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한다. 3시, 영국군함은 봉쇄한 중국전선에 대포를 쏘기 시작하고, 포위망을 뚫기 시작한다. <<시대주간>>에서 말하는 아편전쟁의 제1단계이다. 사실 이것은 국부적인 무장충돌이었지, 전쟁이라고 할 만한 것까지는 되지 못한다.
5) 아편전쟁의 시말
충돌이 끝난 후에도, 정상무역이든 아편밀수이든 이 모든 과정에서 하루도 멈춘 적은 없다. 차이는 규모가 축소되었을 뿐이다. 아편소홰의 또 한 가지 부산물은 아편가격의 상승이었다. 그러자 위험을 안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쌍방이 수개월을 대치하였지만, 적극적인 해결방안이 나오지 않은 것은 임칙서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대치는 영국군함으로 하여금 실력을 계속 증강시키도록 하는 외에 영국에서 아편무역금지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며,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이 우세하도록 만들었다.
11월 4일, 영국군함과 중국해군은 천비, 관용해면에서 무장충돌이 시작되었다. 13일에 이르러 이러한 충돌은 모두 6차례 발생한다. 쌍방이 모두 손실을 입었다. 9월 5일의 제1차 충돌을 포함하여, 임칙서가 조정에 보고한 보고서에는 "7번 싸워 7번 승리했다"고 되어 있다. 도광황제는 매우 기뻐했고, 조정의 멍청한 관리들은 모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도광황제는 12월 명을 내려, 광동해안의 모든 대외무역을 금지한다고 명령했다. 임칙서는 1840년 초에 명을 받아 정식으로 항구를 봉쇄하고, 중국과 외국간의 일체의 무역거래를 단절시킨다.
이런 전면적인 무역금지는 4개월여 간 계속되었다. 갈등의 초점은 이미 아편이 아니었다. 이제는 봉쇄쇄국과 자유무역의 충돌이었다. 부패한 청정부와 함포정책을 시행하는 영국정부는 이제 전쟁을 하지 않고서는 이견을 해소할 수 없는 지경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임칙서와 Elliot간에는 서신왕래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Elliot는 운송, 무역 및 아편제한의 각종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임칙서는 임유희 사건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는 것 외에는 나머지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1840년 5월까지 대치는 계속되었다. 주강입구에 도착한 영국군함은 이미 48척이었고, 대포는 540문이었다. 군대는 25000명에 이르렀다. 영국군은 반대로 주강입구를 봉쇄했다. 5월 9일 저녁, 임칙서는 화주(火舟) 10척을 보내어 먼저 공격했고, 영국의 배 11척을 불태웠다. Elliot는 방비가 삼엄하지 않은 광주로 반격했고, 함선 40척을 이끌고 북상하여 하문을 공격하고, 정해를 함락시켰다. 7월 12일에는 대고구에 도착해서 청나라 조정을 위협했다. 도광황제는 영국군함이 북경부근을 위협하자, 급히 대학사겸 직예총독인 기선(琦善)을 천진 대고구로 보내어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황제는 "아편 소홰 조치는 적절하지 못했다. 대황제는 일찍이 들은 바 있는데, 반드시 상세히 조사하여 중죄로 다스리겠다. 이제 흠차대신을 파견하니 억울한 점을 얘기하면 대신 풀어줄 것이다. 그러니 배를 다시 남쪽으로 돌리고 처리결과를 기다리라"
기선은 Elliot에게 영국군함이 광주로 돌아가기만 하면, 조정은 반드시 임칙서, 등정정(鄧艇楨)등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영국군함은 그래서 남하한다. 8월에 도광제는 기선을 흠차대신으로 위임하고, 9월 28일 임칙서와 등정정을 면직한다. 11월 29일, 기선이 광주에 도착한다. Elliot는 전쟁비용 및 몰수상품(아편포함)손실에 대한 배상 및 부두를 다시 열 것, 영국 상선에 전용부두를 마련해줄 것, 세칙을 정할 것, 행상제도를 개선할 것 및 치외법권을 인정할 것 등 14개항의 요구를 하게 된다. 기선은 600만 위안을 배상할 것을 답변하고, 광주 외에 다른 한 곳도 개방할 것을 약속한다. 영국 측은 복건, 절강, 강소에 따로 2곳을 개방해달라고 한다. 기선은 도광황제에 보고하였는데, 도광제는 대노한다. 그는 원래 임칙서를 면직시키고 무역을 다시 허용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지금 영국인들이 중국의 자유무역을 요구하니 이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1841년 1월 20일, 황제는 긴급명령을 기선에 전달하여 담판을 중단하고, 상, 천, 검의 여러 성의 병력을 광주로 지원 가서 전쟁을 준비하라고 한다. 동시에 양강총독인 이리포에게 영국선박이 나타나면 포격하여 섬멸하라고 지시한다.
1월 6일, Elliot는 중국 측이 영국의 요구를 거절할 것으로 생각하고, 즉시 기선에게 공문을 보내서 전쟁을 마친 후에 다시 협상하자고 선언한다. 그리고 영국군함에 홍기를 달도록 한다. 기선은 Elliot에게 서신을 보내서, 영국이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응낙했던 것들도 무위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7일 영국군함 20척, 1500여명은 사각(沙角), 대각(大角)의 두 포대로 진공한다. 청나라군 2천명은 적수가 되지 않았고, 두 곳의 포대는 함락된다. 20일, Elliot는 작전을 중지하고 마카오당국을 통하여 기선에게 <<천비조약>>초안을 보낸다. 그리고 홍콩할양을 요구한다. 기선은 이 조약에 서명은 하지만, 위에 올려 비준을 받아야 효력이 발생한다는 꼬리표를 달아둔다. 도광황제는 이 말을 들은 후 콧방귀를 낀다. 1월 26일, 영국군은 황제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유황호>>를 보내어 홍콩에 상륙한다. 그리고 이제는 홍콩주민은 영국의 신민이라고 포고령을 내린다. 광동순무 이량은 2월 10일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사실 도광황제는 이미 1월 27일 대외에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때 다시 이 소식을 듣자, 조정에서 "기선은 임의로 홍콩을 넘겨주니 이는 은혜를 망각하고 나라를 잊은 짓이다. 바로 직위를 해제하고 체포하여 데려오며 모든 가산은 몰수하여 궁에 입고시키라"고 지시한다.
도광황제의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군사충돌에서 전쟁으로 비화된다. Elliot는 즉시 2월 26일 호문(虎門)을 공격한다. 27일에는 오용(烏湧)으로 진격하고, 3월 3일에는 영국군이 이미 광주성의 아래에 다다른다. 부패한 청나라정부는 공개적으로 선전포고한지 1달여가 지났는데도 전쟁준비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후임자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3월 5일, 기선을 교체하는 후임자인 양방이 광주에 도착한다. 18일, Elliot는 미국영사에 부탁하여 조정을 요청한다. 양방이 동의한다. 쌍방은 20일 전쟁을 끝내고 무역을 회복한다. 양방과 광동순무 이량은 상소를 올려 "호문을 이미 빼앗겼으며, 가까운 성의 대황곡등에도 난입했었습니다. 성성인 광주는 막을 곳이 없어 지키기 힘듭니다. 계속 관병을 동원하여 비록 8천이 되기는 했으나 해전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영국은 광주는 공격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통상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영국화물선 9척은 서양 쌀을 가득 싣고 와 있습니다. 광동동부는 쌀이 부족하니 영국인들이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변통방법을 써서 광주에서 영국 상인들의 무역을 허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도광황제는 "만일 무역으로 일이 끝날 것 같으면 왜 장수와 병졸을 동원했겠는가. 그리로 왜 기선을 붙잡아 문초하겠는가." 4월 18일 양방과 이량은 모두 직위 해제되고 처벌받는다. 며칠 지나지 않아 23일 다시 유임된다.
4월 14일 기선의 후임인 정역장군 혁산, 참찬대신 융문이 광주에 온다. 계획을 세워, 5월 10일부터 영국군에 진공을 시작한다. 21일 밤에, 영국 배 2척을 불태운다. 영국군은 남쪽해안으로 물러난다. 양방과 Elliot간에 이루어졌던 정전과 무역회복은 다시 물 건너갔다. 이미 멈추었던 전쟁은 다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다. 22일, 영국군이 반격을 시작한다. 청나라군대의 피해는 참혹하였다. 24일 오전, 광주성의 교외의 각 거점은 모두 영국군이 장악한다. 광주는 완전히 영국군의 화력 아래 놓이게 된다. 삼원리 등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가하기는 하였으나, 영국군 몇명을 살상했을 뿐이고 형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27일 <<광주화약(廣州和約)>>을 체결하여, 성을 풀어주는 대가로 6백만 위안을 지급하며, 영국 상인의 손실 30만 위안을 배상하며, 청나라군대는 광주에서 60여리 물러나기로 하고, 영국군도 해상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전권대표 Elliot에 대하여 불만이었다. 5월 3일, 임칙서는 광동을 떠나 신강으로 유배 간다. 이후 Elliot도 면직된다. Elliot의 뒤를 이은 Pottinger는 영국정부의 요구 하에 영국군을 이끌고 북상한다. 다시 한번 중국의 대문을 열어 제킨다. 하문, 영파, 정해, 진해, 오송, 상해, 보산, 징강 등에서 연속으로 청나라군대를 무찌른다. 1842년 8월, 영국군은 남경성 아래에 이른다. 29일, 청나라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영국과 중국근대사에서 불평등조약의 시작을 알리는 <<남경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서는 첫째, 중국은 2,100만 은원을 배상한다. 둘째, 홍콩을 할양한다. 셋째, 광주, 하문, 복주, 영파, 상해를 통상항구로 개항한다. 넷째, 관세협정을 통하여 영국에서 중국에 수출입하는 해관화물의 세율은 양국이 합의하여 정한다. 다섯째, 중국영국의 상인은 자유무역을 할 수 있고 이를 부인할 수 없다. 이 조약은 <<천비조약>>, <<광주화약>>에 비하여 훨씬 가혹했다.
<<남경조약>>은 아직 아편전쟁의 마지막을 알리는 것은 아니었다. 1843년 7월의 <<다섯항구통상장정>> 및 10월의 <<호문조약>>은 <<남경조약>>의 보충이고, 영사재판권과 일방적 최혜국 대우 조항이 들어갔다.
6) 아편의 뒷이야기
우리는 아편전쟁의 원인,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편은 전쟁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편은 영국인들이 중국에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일찌감치 중국에서 커다란 시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편으로 부패가 초래된 것이 아니라, 부패로 인하여 일찌감치 아편시장이 존재했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아편은 부패를 촉진시켰다. 만일 약간의 위로를 받자면, 청나라정부는 가장 먼저 아편의 해악을 깨달은 정부이고, 가장 먼저 아편을 금지한 정부라는 점이다.
그 시대에, 인류의 아편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는 천양지차였다. 세계 각국, 영국본토를 포함하여, 모두 아편에 대하여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었다. 문제는 중국사회에서만 아편흡입이 성행하였다는 것이고, 거대한 폭리시장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영국 상인은 사냥개처럼, 이익을 쫓아 온 것일 뿐이다. 만일 중국 관리들이 협력하지 않았다면, 영국 아편 상인들은 아편밀수의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서방은 그때부터 근 백여 년간 "황화설(중국이 전세계의 화가 된다는 설)"이 돌았는데, 이것은 현재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징기스칸의 야만적인 침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편귀"의 재해를 말하는 것이었다.
개략 1820년대에, 광동과 복건연안의 중국노동자들은 일정한 규모로 해외에 수출되기 시작했다. 속칭 매자(賣仔)이다. 그들 중 약 95%는 계약노동자였다. 대우는 비인간적이었고, 각종 착취에 시달렸다. 그들은 국내의 '사두(蛇頭, 인력송출두목)에게 돈을 갚아야 했다. 그래서 고뇌를 해소하기 위하여, 아편을 흡입하는 악습도 함께 가지고 갔다. 동남아 일대의 아편흡입은 중국인들이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량의 중국인들이 오면서 이 기호는 확대되었다. 중국인이 95%이상을 점하는 싱가포르는 1/3이상의 남자가 아편을 피웠고, 필리핀에는 190여개의 아편관이 있었는데, 중국인들에게만 서비스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국인지역에는 아편이 광범위한 놀이방식이 되었다. 백인이 중국인을 배척하고, 중국인이 백인부녀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1888년 "아프간"이라는 한 척의 배가 멜버른에 도착했다. 현지주민들은 규찰대를 조직하여 배위의 250명의 중국인들이 하선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유는 아편이 멜버른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대량의 아편으로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아편은 이미 널리 쓰였다. 중국노동자들이 오면서 이 상황은 더욱 심해졌다. 중국인사회에서는 반드시 중국인이 연 아편굴이 있었다. 이것은 중국노동자들이 수입중 절반을 아편에 쓰도록 만들었다. 1885년, 한 조사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는 26개의 아편굴이 있었다. 매 아편굴에는 동시에 24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편 흡입뿐 아니라, 도박, 매음, 고리대금업등도 모두 여기서 만연하기 시작했다. 페루에는 아편과 중국노동자들이 함께 수입되었다. 폭리에 눈이 어두운 중국 상인들은 금방 중국아편을 미국을 통하여 페루로 운송하는 루트를 개발하였다.
아편전쟁의 한 결과는 중국이 단순한 아편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변신하였다는 점이다. 중국의 쿠리(苦力, 노동자)들과 함께 수출되었다. 예를 들면, 1888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아편수입은 17,648파운드에 달하였는데, 1890년 4월에는 빅토리아 주에서만 유럽계 아편 흡입자가 700여명으로 늘어났다. 1875년, <<로스엔젤레스 포스트>>의 통계에 의하면, 전 미국에 모두 12만의 아편 흡입자가 있었다. 이 신문에서는 특히 이 수치는 중국계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라고 친절한 설명도 덧붙였다. 1885년 미국에 수입한 아편은 모두 208,152파운드에 달하였다. 미국의 배화법안은 아편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이에 대하여 미국 참의원 J. P. Newman이 1874년에 한 연설이 대표적이다. "중국인들은 집안시종, 세탁공, 체력노동자, 광산노동자등으로 대량 유입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하여 그들을 문명화 기독교화하려고 하였다(우리는 그들에게 공부할 학교와 종교의 전당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왔을 때 모두 이미 허약했었고, 아편은 그들로 하여금 온 몸에 힘이 빠지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그들을 체력노동자로 필요하고, 우리는 그들을 집안시종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그들을 시민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미주리 주에서 금문에 이르는 광활한 토지에서 겨우 100만의 백인종주민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환영한다. 그러나 그들이 아편흡입자라면 우리는 그들을 환영할 수 없다"
아마도 아편의 폐해는 바로 글로벌화의 시작이다. 마약은 전 인류가 마찬가지로 취급한다. 그것은 절대 한 민족, 한 인종만을 해하는 것이 아니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의 지배권을 빼앗는다. 그곳의 아편은 미국점령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였다. 그래서 한 위원회가 1903년 성립되었고, 아편굴을 단속하고, 아편수입을 금지하는 강제조치를 취하였다. 미국은 만일 전 세계가 공동으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아편은 금지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1906년 이 위원회의 부룬터 주교는 루스벨트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냈고, 미국은 정식으로 전 세계에 아편과 기타 마약밀수를 반대하도록 호소하기 시작했다. 1909년 2월, 인류는 처음으로 마약금지의 국제회의를 상해에서 개최했다. 13개 국가가 이번 국제아편위원회 회의에 참가했다. 아주 풍자적인 것은, 이 회의는 자희태후의 사망으로 그에 대한 존중을 표시하는 의미로 1달을 연기하여 개최하였다는 점이다. 자희태후가 바로 아편중독자였는데. 이번 회의는 비록 실질적인 어떤 제약조치를 강구하지는 못했지만, 인류가 국제적으로 마약에 대한 공동의 투쟁을 논의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국제아편위원회는 각국정부가 자기의 영토에서 조치를 취하여 마약과 기타 비슷한 결과를 초래하는 아편류의 생물의 생산, 판매를 금지하도록 할 것을 희망한다"
1924년에 출판한 영국 여자 Allen La Mott의 <<아편민족>>이라는 책에서 그녀는 강력하게 식민 국가들의 마약에 대한 태도를 비난한 후, 예언했다. "만일 아편을 동방을 위하여 생산한다면, 아마도 남은 물건은 다시 유럽과 미주로 되돌아올 것이다." 나중에 마약의 역사는 그녀의 예언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것은 이런 철학적 이치를 알려준다. 일부 인류를 향한 차별이나 상해는 결국 전 인류에 대한 상해가 된다. 혹은 더 간단한 중국의 말로 얘기하자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은 결국 자기를 해치는 것이다"(害人終害己). 이런 마약의 폐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또한 피해가 적지도 않다. 인류의 영원한 고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8. 아편전쟁의 또 다른 발발 원인
글 : 왕위(王偉)
아편전쟁이 중국에 거대한 재난을 가져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는 중국에 있어서 영원히 기억해야할 상처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임칙서(林則徐)가 광주에서 아편금지조치를 지나치게 과격하게 하여, 이 전쟁이 발발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사람의 기록을 보면, 이번 전쟁의 발발원인에 대하여 또 다른 견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나라사람의 필기인 <<청패쇄철(淸稗?綴)>>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까지 임칙서가 광주에서 서방상인들의 아편을 소훼하면서 아무런 보상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편전쟁이 발발했다고 생각해왔다. 현재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이번 전쟁의 발발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 서양인들이 광주에 와서 장사를 하던 초기에, 실제로 실행한 것은 찻잎 한 상자와 아편 한 상자를 맞바꾸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들 찻잎을 지방관아에서 일하는 일부 서리(胥吏)들이 통일적으로 구매하였다. 그리고 이들 찻잎에 모래와 돌멩이 등을 섞어 넣었다. 이들 서방상인은 이런 찻잎을 운송해갔는데, 도저히 팔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비용을 들여 중국으로 다시 운송해 와야 했다. 서양 상인들은 무고하게 많은 돈을 손해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전쟁의 화근이 심어진 것이다"
"또 한 가지 일이 있었다. 이것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임칙서가 광주에서 아편을 금지할 때, 오(伍)씨성의 상인이 서양 상인들과 밀접하게 왕래했다. 그리하여 그를 여러 번 가혹하게 처벌했다. 그로 하여금 합계 군비 수백만 냥을 부담하게 했다. 오씨가 매번 임칙서를 만나러 올 때면, 자주 아문의 각 관리들에게 돈을 뜯겼다. 은자 천 냥 정도를 찔러 넣어 주어야 비로소 의자를 내놓고 그를 앉게 했다."
"나중에 임칙서가 다시 기용되었으니, 군대에서 병으로 죽었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이것은 오씨가 임칙서의 복귀를 정말 두려워하였고, 스스로 그 압박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암중에 독을 넣어 임칙서를 해친 것이다'"
이 필기를 보면 아편전쟁이 발발한 한 가지 요소는 지금 보면 아주 슬픈 일이다. 이들 '서리'등 간사한 소인들이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망치는 더할 수 없이 엉망인 지경에 이르게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자들을 '서리'라고 부르는지 살펴보자.
'서리'는 '이서(吏胥)'라고도 한다. <<현대한어사전>>의 해석에 따르면, "구시대의 품급이 없는 하급 공무원"이라고 되어 있다. 이들 하급공무원은 관원의 개인노비 및 각 아문의 공차(公差), 아역(衙役)등등이 포함된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지위가 아주 낮았다. 어떤 신분의 사람이건 이런 일을 하게 되면 바로 "유량입천(由良入賤, 양민에서 천민으로 바뀜)"되는 것이다. 본인뿐 아니라, 그 자손들도 다시는 '선비'로 적에 올릴 수가 없게 된다. 바로 족보에서 이름을 지워버리게 되며, 죽어서도 사당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 그렇게 무시를 당하는 무리인 것이다. 다만, 이들은 전형적인 호가호위하는 자들이다. "관리의 발톱이나 이빨이 되어, 하루도 없이는 일이 되지 않고, 한 가지 일도 그들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손안에 크고 작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권력을 이용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담하게 돈을 뜯어내고 협박하며 온갖 나쁜 짓을 다했다. 이들 서리는 비록 신분은 비천하지만, 일은 콩고물이 많은 편이었다. 그들은 안과발모하고, 탐욕에 젖어서 시비곡직을 따지지 않고, 양심이라는 두 글자를 팔아먹었다. 어떤 자료를 보면 그들을 "오늘날의 서리를 보면 모두가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지 않는 자가 없다. 온 집안이 잘 먹고 처첩이 가득하며, 비단을 손에 쥐고, 세가(世家)보다 더 향유하며 살고 있다"
"오늘날 백관의 권한은 모조리 '이서'에게 귀속되었다. 소위 백관은 허명이고, 권한을 쥔 자는 '이서'들 뿐이다" 청나라초의 사상가 고염무는 이렇게 간파했다.
청나라말기의 대신 호림익도 이렇게 말했다: "육부의 서(胥)는 재상의 권한과 다를 바가 없다"
청나라의 통치에서, '서리들의 권력독단'은 이미 정치를 망치고 백성을 해롭게 하는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다. 이미 '조정과 서리가 천하를 함께 다스리는' 국면에 이르렀다. 이런 왕조가 어찌 망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서리는 아편전쟁을 유발한 원흉의 하나라고 보아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9. 아편은 어떻게 약품에서 마약으로 바뀌었는가?
글 : 주유쟁(朱維錚)
중국근대사 교과서들은 제1장에서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하였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아편이 중국에 전래된 역사에 대하여는 소개하지 않고 있다. 의분이 과학을 대체할 수는 없다. 단지 아편의 해독을 질책하는 것만으로는 아편이 어떻게 청나라의 부패과정을 가속화시킨 마약인지를 확실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명나라 만력6년(1578년)에 쓰여진 <<본초강목>>의 곡류약물(穀類藥物)부분에서 이시진은 "아부용(阿芙蓉): 이전에는 잘 모르던 것인데 최근 들어서 쓰는 것이다. 앵속화의 진액이라고 한다."라고 적었다. 사실 진통약으로서 일찍이 당문종 개성연간(836-840)에 아편(鴉片, 阿片이라고도 쓴다)은 약방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나 궁중 태의를 지낸 바 있는 이시진은 앵속화가 원래 서아시아에서 왔다는 것을 모르는 것같다. 앵속화의 부드러운 과실의 진액을 응결시킨 아부용은 개략 비잔틴을 거쳐 당나라로 무역을 통해 들어왔다. 그러나 그가 말한 '최근 들어서 쓰는 것이다'라는 것에는 최소한 1가지 사례가 있다. 즉 그가 죽을 때(1593년) 이미 뚱뚱해져서 움직이기도 힘들어진 만력황제는 아마도 병으로 인한 고통 때문이겠지만, 아편을 먹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편을 담배에 혼합시켜서 담뱃대로 흡입하는 것은 즉, 아편담배를 피우는 것은, 미주의 인디언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는 습속이 스페인사람을 거쳐 극동지역에 전해지고 난 이후이다. 위비덕(魏菲德)에 따르면, 이런 아편흡입방식은 1620년(명나라 태창원년)에 대만사람들이 발명한 것이라고 한다.
미주의 담배는 명나라중엽에 중국에 전래된다. 그 후 금방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중국에 퍼진다. 가정, 만력연간의 왕세정은 이렇게 탄식했다: "삼척동자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 자가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대만인들은 대부분이 복건성에서 이민 간 사람들이고, 청나라강희22년(1683년)에 이미 정씨정권에 의하여 정복되면서 해금이 해제되었지만, 아편을 피우는 습관은 대륙보다 늦게 전파되었다. 8년 후인 청나라 옹정7년(1729년)에 청나라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아편수입을 금지했다. 이는 아편이 이미 약재에서 마약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약으로서의 아편은 중국에서 만연했다. 이것도 만주통치자들 때문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원래 강희, 옹정부자는 모두 담배를 금지한 적이 있다. 이는 백성의 건강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담배를 심으면 양식을 심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세수에도 영향을 주고 담배를 심는 곳에서는 식량이 부족하여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명나라말기에서 청나라초기의 근 200년 동안, 비싼 담배, 담배피우는 도구를 가지고 부를 자랑하던 동남의 귀족, 부호들과 그 자제들은 돌연 대만에서 발명한 아편 흡입법을 배우게 된다. 더욱 신기하고 더욱 자극적이었으며, 합법적으로 수입하던 양약이었다. 어찌 서로 앞 다투어 피우지 않겠는가?
일찌감치 백은을 주고, 중국의 비단, 도자기, 차등의 우수한 제품을 수입해가던 구미의 상인들은 중국에서 날로 늘어나는 아편시장에 주목하게 된다. 어찌 이 기회를 놓칠 것인가? 마르크스의 <<아편무역사>>(1858년 발표)에 따르면, 영국 동인도회사의 우두머리는 터키에서 아편을 운송해서 중국에 파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시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인도 방글라데시 농민들에게 아편을 심도록 강제하고, 대중국아편무역을 독점하고자 했다고 한다. 청나라 가경원년(1796년)에는 태상황이 된 건륭제가 다시 한번 아편수입을 단속한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이후 내외관상들이 결탁하여 아편밀수는 더욱 성행한다. 특히 1834년(청도광14년)에는 영국동인도회사의 대중국무역독점권이 취소되면서, 아편무역은 사영기업의 수중에 들어간다. 미국 등의 아편밀매업자들도 경쟁에 뛰어든다. 결과적으로 3년도 되지 않아, 중국에 유입되는 아편의 양이 10배나 증가하게 된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중국은 백은이 부족한 나라이다. 명나라 영종 정통원년(1436년)부터 은을 위주로 한 화폐제도를 시행한다. 상품유통과 국고수입은 모두 백은을 사용했고, 주로 농공산품수출무역에서 얻는 역외의 백은이 사용되었다. 전한승은 이에 대하여 상세히 연구한 바 있는데, 일찍이 명나라 융경5년에서 청나라도광6년까지(1571-1821), 2세기 반 동안, 스페인사람들이 수출한 미주의 백은만 약 4억 스페인 화폐에 달했다. 그중 절반이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일찍이 명나라말기의 한 스페인 해군장교가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중국황제는 페루에서 온 은괴로 궁전도 만들 수 있겠구나."
바로 갈수록 창궐하는 아편밀수무역으로, 청나라제국을 지지하던 백은이 국내에서 국외로 유출되기 시작한다. 청도광18년(1838년)에 홍로사경 황작자는 아편을 금지하여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린다. 이는 원래부터 인색한 도광제의 마음을 움직여서 아편 수입금지 쪽으로 기울어지게 한다. 당시 상소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편이 중국에 유입된 이래로, 도광3년 이전에는 매년 빠져나가는 은이 수백만 냥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귀족자제들이 놀아나는 정도였는데, 후에는 위로는 궁중, 귀족부터 아래로는 기술자, 상인, 배우, 노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부녀 승려 비구니, 도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편을 피우게 되었다. 광동성의 간사한 상인들은 군대와 결탁하여 팔룡, 쾌해 등의 배로 은을 해외로 내보내고, 아편을 수입한다. 그리하여 도광3년에서 11년까지 연간 빠져나가는 은이 1700-1800만 냥에 이른다. 11년에서 14년까지는 매년 2천여만 냥 백은이 빠져나갔다. 14년에서 지금까지는 빠져나가는 은이 3천만 냥으로 늘어났다. 복건, 절강, 산동, 천진의 각 항구를 통해서도 합쳐서 역시 수천만 냥이 빠져나갔다. " 기록에 따르면, 도광3년(1823년)이전에 청나라의 무역흑자는 여전히 은2600만 냥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최소한 4천만 냥의 적자를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백은으로 바꾸어 온 것은 "사람의 행색을 형편없게 만들고, 사람의 심지를 미혹되게 하며, 사람과 집안을 망치게 하는" 아편이었다. 당연히 은이 부족해지다보니 세금을 더 거두지 않아도 더 힘들어지고, 가격이 오르지 않아도 더 비싸게 느껴졌다. 백성은 가난해지고 재산은 탕진했다.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키기에 좋은 조건이 모두 형성되었다.
황작자의 이 상소문은 아편의 해로운 측면을 강조하면서, 황실친인척, 팔기자제, 궁녀태감은 빠트렸다. 그렇지만 바로 이들이 돈을 마음대로 뿌리면서 아편을 피우는 주체들이었다. 그들이 앞장서서 부패하였고, 만청의 국고를 텅 비게 만들었다. 이것이 더욱 문제가 아니었을까?
10. 청나라 말기의 최대사건 : 무오과장안(戊午科場案)
글 : 후양방(侯楊方)
청나라 함풍8년(1858년)은 간지로 따지면 무오년(戊午年)이다. 이 해에는 마침 수도 순천부(順天府, 북경)의 향시(鄕試, 청나라 때 과거시험은 향시, 회시, 전시의 3단계로 진행되었고, 향시는 각 성에서 3년에 1회 진행하였으며, 향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秀才이고 합격하면 擧人이라 부른다. 거인들은 합격한 다음 해 봄에 예부에서 진행하는 會試에 참가하고 여기에도 합격하면 貢人이라 부른다. 공인들은 다시 殿試에 참가하는데 황제가 주재하는 시험이다. 여기를 통과하면 進士라고 부른다)가 거행되었다. 향시의 주고관(主考官, 주시험관)은 몽고 정남기 사람인 백준(柏葰)이었고, 부주고관(副主考官)은 호부상서인 주봉표(朱鳳標)와 좌부도어사(左副都御史)인 정정계(程庭桂)였다.
8월 초8일 향시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향시를 치는 장소인 공원대당(貢院大堂)에 대두귀(大頭鬼)가 나타났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전설에 따르면, 공원대당에 대두귀는 잘 나타나지 않는데, 한번 나타나면 큰 사건이 발생하곤 했다는 것이다. 9월 16일 방(榜)이 발표되었는데, 10등내에 기인(旗人, 기인은 팔기에 속한 사람으로 만주팔기, 몽고팔기, 한인팔기가 있음. 청나라의 핵심계층)인 평령(平齡)의 이름이 있었다. 그는 유명한 경극(京劇) 애호가였고, 자주 등단하여 경극을 연출하곤 했었다. 그리하여 여론이 급격히 일어났고, 이런 경극배우까지 향시에서 10등내를 차지한다는 것에 의문을 나타냈다.
10월 초7일, 어사(御史)인 맹전금(孟傳金)은 함풍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이번 향시에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탄핵하였으며, 특히 평령은 "주묵불부(朱墨不符, 붉은 글씨와 검은 글씨가 서로 맞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원래 과거에서는 시험관들이 참가자들의 필적을 알아보고 부정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청나라 때의 과거시험에는 시험생이 직접 쓴 답안지는 묵필(墨筆, 먹으로 쓴 글, 즉 검은 글씨)로 작성하고, 그 후에 지정한 인원으로 하여금 주필(朱筆, 붉은 글씨)로 옮겨쓰게 한 후에 시험관들이 채점하였던 것이다. "주묵불부"라는 것은 바로 평령이 쓴 답안지는 원래 자신이 쓴 답안지와 시험관에게 올린 답안지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했다. 함풍황제는 바로 이친왕 재원(載垣), 정친왕 단화(端華), 호부상서 전경(全慶), 병부상서 진부은(陳孚恩)으로 하여금 이 사건을 심리하도록 하였다. 무오과장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평령은 끌려와서 조사를 받았는데, 오래지 않아 옥중에서 사망했다. 평령의 답안지를 다시 조사해보니, 그가 쓴 묵필답안지에는 초고가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고, 주필답안지에도 7개의 잘못된 글자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고친 흔적이 있었다. 10월 24일, 이번 향시의 모든 답안지를 원명원의 구경조방(九卿朝房)으로 가져오게 하여, 다시 조사했다. 그러자, "이번 향시의 주시험과 , 부시험관들은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잘못된 답안지가 50여 본에 달하였고, 심지어 한 사람의 답안지에는 잘못 쓴 글자가 300여자에 이르는 경우까지 있었는데도 합격했다. 함풍황제는 이를 듣고 대노했다. 즉시 주시험관 백준을 삭탈관직 했고, 주봉표와 정정계도 해임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번 향시가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은 9월에 백준은 이미 정1품인 문연각대학사 겸 군기대신으로 승진해 있었다. 청나라 때는 '대학사 겸 군기대신'을 진짜 '재상'이라고 불렀으므로, 진정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사건내용을 깊게 파고들어갈 수록, 백준이 직접 부정행위에 가담했다는 증거가 수면위로 드러났다. 시험생 나홍강(羅鴻絳)은 같은 고향인 병부시랑 이학령(李鶴齡)과의 관계를 통하여, 동고관(同考官) 포안(浦安)을 알게 되고, 다시 포안은 백준의 심복인 근상(靳祥)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백준에게 나홍강의 시험지를 바꿔치기해서 합격시켜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이후 나홍강은 다시 백준, 포안에게 뇌물을 바쳤다.
함풍9년 2월 13일, 재원 등은 함풍제에게 사건상황과 처리방안을 보고한다. 백준은 "교통촉탁, 뇌매관절의 사례에 따라, 참입결(斬立決)"을 하도록 건의한다. 백준은 함풍제가 아끼는 신하이므로, 함풍제는 그를 살려줄 수 있는 방안으로 처리할 것을 얘기한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은 침묵을 지키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반대의사를 나타낸다. 게다가 호부상서인 숙순(肅順)은 그 자리에게 극력 반대하며 말한다. 과거는 국가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중요한 제도이므로 엄격하게 지행하여야 한다. 그래야 과거에 예로부터 내려온 악습을 타파할 수 있다면서 백준을 법규에 따라 참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이런 상황 하에서 함풍제도 "사정은 이해할 점이 있으나, 법으로는 관용을 베풀기 힘들구나"라고 하면서, "참입결"하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함풍제는 매우 가슴이 아팠던 것 같다. "말을 여기까지 하자,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의 공범들인 포안, 이학령, 나홍강과 백준 등 4명은 채시구(菜市口)로 끌려가 참수(斬首) 당한다. 이 일은 조야를 뒤흔들어 놓았다. 청나라 때, 정1품의 신하가 공개적으로 처단당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극악한 죄를 지은 것으로 되어 있던 화신도 자진하도록 하였을 뿐이다. 백준 본인조차도 황제가 영을 내려 신강에 유배 보내는 정도로 처리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심지어 그는 신강으로 가기 위하여 보따리까지 준비해놓았었다. 그러나 생각도 못하게 황제로부터 내려온 명령은 참수를 집행하라는 것이었다.
무오과장안은 이 4명이 죽은 것으로 종료되지 않았다. 사건은 좀 더 진행되었다. 이전에 심문하는 과정에서 포안은 그가 듣기로 부주고관인 정정계가 일찍이 청탁자들이 보내온 쪽지를 태워버렸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정정계는 이로 인하여 체포되었고, 그의 아들인 정병채(程炳采)가 몇 장의 쪽지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했는데, 모두 고관자제와의 관계를 통하여 받은 것들이었다. 그 중에는 사건조사에 참여했던 병부상서 진부은의 아들인 진경언(陳景彦)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청탁자들과 쪽지를 보낸 고관자제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함풍9년 7월에 사건을 모두 종결하였고, 재원 등은 정정계, 정병채 부자를 함께 참수하도록 주장하였는데, 함풍제는 정정계가 두 황조의 노신이고 부자를 함께 죽이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고 하여,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부친 정정계는 군대를 따라가도록 유배 보내고, 아들 정병채는 여전히 참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청탁자 7명은 가볍게 처리하여 죽음은 면하고 신강으로 유배를 갔다. 무오과장안은 이로써 종결되었다.
순치, 강희연간에도 두 번의 과장안이 발생한 바 있다. 모든 시험관들은 부정행위로 인하여 참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평용하고 쇠퇴하던 도광제연간에 들어서면서 관료사회에서는 "고개는 많이 숙이고, 말은 적게 하는" 원칙이 횡행하면서, 아무도 나서서 시정을 비판하려 하지 않았고, 관리들은 아무 일도 않고 세월을 보내고, 동시에 부패가 성행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과거는 부패를 벗어날 수 없었고, 쪽지를 보내어 뒷문으로 합격하는 것이 이미 성행하게 된 것이다. 시험관들은 쪽지를 받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쪽지를 많이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이미 이러한 행위가 엄중한 범죄라는 것도 깡그리 잊어버린 것이다. 함풍제가 즉위한 후, 관리들의 기풍을 바로잡으려 하고, 도광제때의 부패한 기풍을 일신하고자 했으며, 과장안을 법에 따라 엄격하게 처리했다. 일로서 당대의 진짜 재상까지 공개적으로 참형에 처했다. 이것은 청천벽력이었다. 이후 과거장의 분위기는 싹 달라졌다. 누구도 자기의 목을 걸고 법을 시험하려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무오과장안은 난세에 중형으로 기풍을 바로잡고자 한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점은 그것은 당시의 법이 있어도 지키지 않고, 법의 규정은 거의 아무도 지키지 않는 헛규정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엄중한 범죄에 대하여도 이미 마비되어 인심과 기풍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일을 신중하게 하고, 성의 있게 하며, 아주 주도면밀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유명하여 황제의 인정을 받고, 중용을 받던 정1품 관리인 백준은 사후에 포안으로부터 16냥의 은자를 감사인사로 받았을 뿐이다. 이로써 볼 때, 백준은 그 자잘한 16냥의 은자를 받기 위하여 과거부정행위를 해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인정과 분위기에 끌려, 시험지를 바꿔줌으로써 아는 사람을 합격하게 해준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이런 행위는 통상적으로 있는 것이므로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백준의 행위는 처벌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그도 당시의 부패분위기의 희생물이라고 볼 여지가 많다. 사회에서 위법행위를 목도하고도 마비되어 아무런 위법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이를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으로 여긴다면, 이런 위법행위는 점차 사회의 잠규칙(潛規則, 숨은 규칙)이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더 나아가서 현규칙(顯規則, 드러난 규칙)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법은 있어도 없는 것이나 같고, 흑백이 구분되지 아니하며, 공정과 공평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11. 1900년 북경함락
글 : Pierre Loti

로티의 초상화
피에르 로티(1850-1923)는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이다. 1900년, 로티는 프랑스해군장교로 중국에 왔고, 직접 8국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하고 의화단을 진압하는 것을 목격했다. 아래의 글은 로티가 1902년에 쓴 <<북경의 함락>>이라는 글이다.
자금성에 처음 들어가다
나는 프랑스공사관 사람들과 나의 집에서 오찬을 함께 했다. 1시 반에, 내가 이사용으로 빌려온 두 대의 중국대형차량이 도착했다. 그리 많지 않은 짐을 싣고, 나의 부하를 데리고, 우리는 자금성으로 향했다. 먼저 대사관구역을 지났는데, 도처가 폐허였고, 도처에 사병이 있었다. 이후 더욱 편벽하고 거의 황무지가 된 중국구역에 들어갔는데, 전부 폐허였고, 하늘에는 흰색과 검은색의 부스러기가 온데 날아다녔다. 거리지역의 주요 통로, 문, 교량에는 유럽 또는 일본의 경비들이 있었다. 실제로 전체 도시는 모두 사병들이 지키고 있었고, 때때로 근무병과 국제적십자표지를 단 구호차량이 지나가고 있었다.
자금성에 들어간 후, 나는 아주 놀랐다. 왜냐하면 안은 원래 도시가 아니었다. 수림이었다. 그늘이 져 어두운 넓은 수림이었다. 이파리사이에서는 까마귀가 깍깍 울어댔다. 이곳의 나무종류는 천단과 마찬가지였다. 설송, 측백, 버드나무, 모두 백년 이상 된 큰 나무였다. 형상은 구부러져 있었다. 먼 곳에 일부 외롭게 흩어진 오래된 왕궁이 있었다. 유리지붕이고 문 앞에는 대리석괴수의 조각상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모습은 아주 무서웠다.
"지금" 나와 함께 온 사람이 말했다, "보세요. 여기가 연꽃호수이고, 이것이 옥교입니다."
연꽃호수(荷花湖)! 나는 상상했다. 눈앞에 연꽃이 출현해서 물위에 똑바로 서 있는 모습을 중국시인이 노래한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 곳이다. 바로 이 호수이다. 그러나 이 우울한 연못위에는 바람맞아 누렇게 된 이파리만 나부끼고 있었다.
옥교. 맞다, 하얀 난간이 있는 흰색의 무지개형 다리이다. 이 우아하고 정교한 곡선, 그리고 머리에는 괴물이 조각되어 있는 둥근 기둥, 나의 상상력과 완전히 부합되었다. 아주 우아했고, 중국분위기가 났다. 그러나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은, 갈대숲 안에 두 구의 아직 썩지 않은 시신이 있었으며 위에는 낡은 옷이 떠다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기괴한 장소에 온 후의 첫 번째 만찬은 정말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우리는 거의 암흑 속에서 만찬을 마쳤다. 조상제사지내는 폐허에서 주워온 붉은 촛대는 바람에 흔들렸고, 거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궁중에서 사용하는 접시는 모두 아주 진귀한 도자기로 만들었으며, 황색을 띄었다. 위에는 제왕의 연호가 있었다. 이 황제는 루이15세와 같은 시대인물이다. 그러나 우리의 포도주와 혼탁한 물은 괴상망칙하게 생긴 병에 담겨져 있었다. 병마개는 병사들이 칼로 조각한 감자조각이었다. 병에든 물은 여러 번 끓였다. 왜냐하면 우물의 물은 시체로 오염이 되었기 때문이며, 아마도 전염병균이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긴 복도에서 식사를 했다. 복도는 아주 길었고,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제왕의 사치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3개월의 모습이었는데, 3개월 전에는 이곳에서 어떻게 노래하고 춤추었겠는가? 죽음과 같은 적막도 없었을 것이고, 곳곳이 음악과 생화로 뒤덮였을 것이며, 생명의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궁중귀족과 환관들이 비단옷을 입고 지금은 텅 비어있고, 파괴된 정원을 걸어 다녔을 것이다.
내가 쓴 황실침대는 자단으로 조각한 것이었다. 요과 베개는 모두 진귀한 비단으로 만들었다. 위에는 금실로 조각했다. 이불은 없었다. 그래서 사병용의 회색 양모담요를 덮었다.
"다음 날" 이 궁전을 담당하던 대위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황제의 창고 안에서 네가 좋아하는 바에 따라 물건을 가져라.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옷을 갈아입지 않고, 옷을 입은 채 금실로 새긴 아름다운 비단침대에 누워있었다. 그저 나의 얇은 회색담요위에 한장의 오래된 양가죽과 2,3개의 금색괴물이 새겨진 용포를 덮었다.
암흑 중에 한풍이 몰려왔고, 반쯤 잠들고 반쯤 깨어있는 사이에, 나는 검은 밤의 저 멀리에서 전해져오는 총소리와 비명소리를 들었다...
이홍장의 조견

이홍장
이홍장은 9시에 나와 만나기로 동의했다. 시간은 약간 늦었다. 나는 급히 후궁의 주소를 떠나서 반시간동안 미친듯이 간 후에야 나는 끝이 없는 하나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낡은 집 앞에서 먼지는 마침내 멈추었다.
무슨 이유인지 아주 복잡했다. 이 방의 입구에는 코사크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나를 데려간 집의 깊은 곳에 있는 방에는 아주 난잡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길 입구에서 나를 맞이했던 그 중국인은 몸에 자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이곳의 통역이었다. 프랑스어는 아주 정확하게 말했다. 그러나 단어사용이 너무 고상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이미 중당(中堂, 이홍장을 가리킴)에게 통보했습니다."
잠시, 또 다른 중국인이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한 회견실의 입구에서 이홍장이 걸어 나와 나를 영접했다. 그는 두 사람의 시종이 부축하고 있었고, 키는 그들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그는 신체가 컸고, 광대뼈에는 한 쌍의 작지만 깊고 형형한 눈이 있었다. 비록 그의 비단옷에 반점이 있고, 약간 낡았지만, 그러나 그는 여전히 생기 있었고, 큰 어른의 기품이 있었다.
그는 먼저 나의 나이와 수입을 물었다. 그날의 핫이슈를 얘기한 후, 이홍장의 북경의 폐허에 대하여 아픈 마음을 표시했다. 그는 "나는 유럽을 전부 방문한 적이 있다. 모든 나라 수도의 박물관을 참관했다. 북경에도 우리의 박물관이 있다. 황성은 그 자체가 큰 박물관이다. 수백 년의 역사가 있고, 너희들의 그 어느 박물관보다 못하지 않다....그러나 지금은 이 박물관이 파괴되었다..." 그는 우리에게 후궁에서 뭘 하는지 물어보았고, 아주 적절하게 우리가 혹시 그곳에서 파괴행위를 하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그는 우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곳곳에 첩자가 있으니까. 우리의 마부도 첩자이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궁 안에서 어떤 물건도 파괴하지 않는다고. 이 때 그는 깊이를 모를 눈에서 약간 만족한 빛이 흘러나왔다.
회견이 끝난 후,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이홍장은 그 두 명의 그보다 머리 하나만큼 적은 시종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그는 나를 집의 중앙까지 배웅했다. 내가 문 앞에서 그를 향하여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려할 때, 그는 나에게 내가 쓴 북경다큐멘터리를 한 권 보내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다시 당부했다. 이 중국의 권력자는 몸에 낡은 의복을 걸치고 있었고, 처량한 분위기에서 나를 맞이했다. 비록 그는 열정적이었지만, 나는 시시때때로 그의 감추기 힘든 불안한 눈빛을 느꼈다. 아마도 경멸하고 풍자하는 눈빛이었으리라.

서태후 초상화
서태후가 도망칠 때 떨어뜨린 비단꽃신
공사관의 한 사람이 나에게 소식을 하나 전해 주었다. 금수하 남쪽의 한 작은 섬에는 수목이 태후의 그 바람도 견디기 힘든 약한 궁전을 가리고 있다. 그녀는 그 곳에서 마지막 며칠간 놀라움에 나날을 보내었다. 그 후에 큰 마차를 타고 급히 도망쳤다. 태후는 궁전에 거주할 때 "두 번째 대원의 왼쪽 두 번째 침실"에서 지냈다. 그곳에는 조각한 침대가 있었고, 땅위에는 한 쌍의 나비와 꽃을 수놓은 빨간 색 비단신발이 있었다. 이 신발은 그녀의 것임에 분명했다.
나는 즉시 황궁으로 돌아왔다. 유리복도에서 급히 식사를 했다. 두 사람의 시종은 금방 출발했다. 2킬로미터 정도를 갔을 때, 우리는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그 작은 섬을 찾았다. 궁전은 흰색의 대리석 기초위에 있었다. 보기에 아름답고 약해보였다. 궁전의 대문은 열려 있었다. 대문으로 통하는 계단은 하얗고 아무런 흠도 없었다. 각양각색의 진귀한 물품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따.
"두 번째 대원의 왼쪽 두 번째 침실 안"..바로 이곳이다. 안에는 하나의 보좌가 있고, 몇 개의 의자가 있었다. 하나는 아주 낮았고, 위에는 손으로 귀신을 조각한 큰 침대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파괴되어 있었다. 아마도 총으로 쏜 것이리라, 유리도 모두 부서졌다. 이전에 태후는 바로 이 유리를 통해서 호수의 파도, 분홍색의 연꽃, 대리석다리, 작은 섬 그리고 모든 인조의 혹은 천연의 경치를 감상했을 것이다.
나는 신속이 그 침대의 아래를 찾아보았다. 금방 내가 찾으려던 물건을 찾았다. 먼저 한짝, 다음에 또 한 짝. 한 쌍의 붉은 신발이다. 놀랍고, 코믹했다. 이것은 한 쌍의 아주 보통의 여자의 꽃을 수놓은 신발이다. 놀라운 점은 신발의 바닥이다. 발은 3센티미터 정도 높았다. 전체 신발바닥이 모두 두꺼웠다. 조각한 바닥은 점점 커졌다. 아마도 여러 층의 흰색 가죽을 대어서 만든 것일 것이다. 이 신발바닥이 없으면 아마도 사람은 바로 쓰러질 것이다.
나는 이런 여자신발을 본 적이 없다. 지금문제는 어떻게 신발을 가져가느냐는 것이다. 길에서 만나는 초병이나 순찰대들이 우리가 물건을 약탈했다는 것을 모르게 해야 했다.
오스만은 신발을 끈으로 묶어서 르노의 허리에 묶자고 했다. 그리하여 군복을 길게 내려뜨리면 감출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에게 걸어보라고 했고, 그가 걸을 때 가능하면 자연스럽게 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볼 수 없게 하였다. 나는 조금도 미안한 생각은 없었다. 나는 심지어 이렇게 생각했다. 만일 그 예쁜 태후가 멀리서 이 모습을 보았다면, 그녀는 분명히 가장 먼저 우리를 조롱하며 웃을 사람이라고...
12. 청나라 말기 북양계(北洋係)의 출현 배경

북양함대의 함선
청나라정부는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설립했는데, 이는 중국이 유럽의 국제관계 체제를 받아들여 대외교섭사무를 처리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중국에서 채택한 대외정책인 "조공체제(朝貢體制)"에서 일대전환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총리각국사무아문은 전문적인 외교기구이지만 권한이 완전히 통일되어있지는 않았다. 많은 외교 권력이 여전히 봉강대리(封疆大吏)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소위 "북양계"도 여기서 이름이 나온다.
"북양(北洋)"이라고 얘기하면, 사람들은 자연히 북양수사(北洋水師), 북양정부(北洋政府), 북양군벌(北洋軍閥)을 떠올릴 것이며, 심지어 중국의 첫 번째 대학인 북양대학당(北洋大學堂)등 일련의 청말민초의 정치와 긴밀하게 연결된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이를 보더라도 "북양"이 중국근대정치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청나라의 멸망도 청나라에서 만들어진 "북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역사의 풍자일 것이고,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는 측면이 있다.
청나라정부는 대외교섭을 "지방"으로 한정하고자 했다.
그 연유는 중국의 전통 관념에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스스로를 천하의 중앙에 있다고 생각했고, 문화가 가잘 발달한 화하지방(華夏之邦)이라고 생각했다. 사방은 모두 문화, 제도가 중국만 못한 "남만, 북적, 동이, 서융"이라고 생각하며, 중국이 천하의 주인이며, 주변 각국은 중국의 번속국(藩屬國)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종주국"과 "번속국"의 관계에서 중국황제는 "천자"이고, "덕화만이(德化蠻夷, 오랑캐를 개화시킴)", "함양사방(涵養四方, 사방의 국가를 먹여 살릴)"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번속국은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하고, 번속국이 새로 왕을 세울 때에는 반드시 중국황제의 책봉을 받아야 한다. 아편전쟁 전에는 중국에 서방적인 의미의 외교라는 관념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대외업무를 전담하는 부서도 없었다. 전통개념으로는, 대외적인 교류는 바로 "종주국"의 "번속국"에 대한 관리이며, 그리하여 대외적인 교류를 담당하는 기관의 이름도 "이번원(理藩院)"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당시에는 "이번(理藩, 번속국을 다스림)"이 있었지, "외교"는 없었던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청정부는 부득이 영국, 프랑스등과 협상해야 했다. 비록 중국은 패전했지만, 청정부는 여전히 "천조상국(天朝上國)"의 관념과 체면을 중시했다. 여전히 이때의 서방열강을 전통적인 "적이(狄夷, 오랑캐)"로 취급했으므로 근본적으로 "외교"라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매번 외교교섭이 필요한 일이 벌어지면, 그때그때 조정에서 임의로 사람을 뽑아서 처리하게 했고, 전문적인 기구나 인원을 둔 것이 아니었다. 중국과 영국이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을 체결한 후, 중국은 어쩔 수 없이 5개의 항구를 개방하여 통상하게 허용하고, 중국과 외국의 교류가 증가했다. "5개 항구"는 외국인이 각종 활동에 종사하는 합법적인 장소가 되었고, 중외교섭의 합법적인 장소가 되었다. 청정부는 1844년 오구통상대신(五口通商大臣)을 두어, 이 지방의 중외교섭사무를 처리하게 했다.
전통적인 제도에 조그마한 틈이 생긴 것이다. 이 "5개 항구"는 모두 남방에 있었고, 광저우는 역대이래로 대외교류가 활발한 곳이었으므로, 오구통상대신은 처음에는 양광총독(兩廣總督)이 겸임했다. 그러나 상해의 항구가 개방되면서, 외국인들의 활동중심이 북으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1859년부터 강소순무(江蘇巡撫) 혹은 양강총독(兩江總督)이 겸임하게 된다. 이홍장이 강소순무를 맡았을 때 오구통상대신을 겸임했다. 오구통상대신을 둔 목적은 사실 대외교섭을 단지 '지방'에 국한시키겠다는 의미였고, 외국인을 북경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중국의 전통체제에 맞았다. 청정부의 관념속에는 중국이 여전히 "천조상국"이고, "오랑캐국가"는 그저 중국의 지방정부와 교류할 수 있을 뿐이었고, 중국의 중앙정부와는 교류를 할 수도 할 자격도 없었던 것이다.
중국의 대문을 더욱 활짝 열게 하기 위하여, 영국, 프랑스는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에서도 중국은 참패하고, 불평등조약인 북경조약을 체결하고 끝이 난다. 영국 프랑스 등은 공사를 북경에 주둔시킬 권리를 획득한다. 청나라정부에 있어서, 이것은 체제상의 일대 변혁이었다. 이런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공친왕 혁흔 등은 1861년 초에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설치해서 대외교섭사무를 책임지도록 할 것을 주청했다. 조정은 "북경에 총리각국통상사무아문"을 두는 것에 동의했다. 혁흔 등이 요청한 것에서 "통상"이라는 두 글자를 추가시켰는데, 혁흔은 다시 한번 주청을 하면서 "통상"이라는 두 글자를 빼버리도록 하고, "총리각국사무아문"으로 하였다.
이외에 열강의 압력 하에 다시 여러 개의 연해, 연강의 항구를 개방했다. 장강 이남에는 원래의 5개에서 13개로 증가했고, 장강이북에도 새로 우장(牛莊), 천진, 등주(登州)의 3곳을 개방했다. 그러자, 청나라정부는 원래의 '오구통상대신'을 "판리강절민월내강각구통상사무대신'으로 변경한다. 나중에 "남양통상대신(南洋通商大臣)" 또는 "남양대신(南洋大臣)"으로 통칭하게 된다. 한편 천진에는 "판리우장천진등주삼구통상사무대신"을 두게 되는데, 나중에 "북양통상대신(北洋通商大臣)" 또는 "북양대신(北洋大臣)"으로 통칭된다. 남북양대신은 모두 "통상"때문에 설치한 것이다. 조정의 원래 의도대로라면, 총리아문에도 앞에 "통상"을 붙였는데, 이때는 대서방외교업무를 통상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는 것 혹은 서양오랑캐와는 통상을 할 뿐 외교(정치적 관계를 맺는 행위)는 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예총독이 청정부의 외교체제에서 지위를 확립하다.
남양통상대신은 설립 초에는 강소순무 또는 양강총독이 겸임하였다. 강소순무나 양강총독은 청나라정부의 대외교류에서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북양대신은 설치초기에는 전문적으로 서양사무와 해안방어를 맡았다. 직예총독이 북양통상대신을 겸임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체제상으로 말하면, 이 시기의 직예총독은 외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북경과 지척의 거리에 있었고, 청나라정부는 가능한 한 외교사무를 중앙이 아닌 지방에 귀속시키려 하였으므로, 북양통신대신은 천진에 설립된 초기부터 국가의 외교사무에 간여하게 된다. 예를 들어, 1861년에서 1869년의 9년 동안, 청정부가 일부 국가와 10여개의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중에 북양대신인 숭후(崇厚)가 9건의 조약협상을 책임졌고, 서명 장소는 모두 천진이었지, 중국의 수도인 북경이 아니었다. 어떤 국가는 원래 대표를 북경으로 파견 보냈는데, 청정부는 다시 천진으로 가게 해서 체결하도록 고집했다.
각국의 외교인원은 그저 중국의 "지방"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주로 "지방관리"와 교섭했는데, 이것은 국제관례와는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으며, 각국의 강렬한 불만을 자아냈다. 그리하여 계속 북경에 들어오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전통 관념에 얽매여 계속하여 각국과의 교섭은 그저 국문(國門)인 천진에서 진행하고 북경에서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만일 북경에 들어와서 교섭하고 싶으면, 반드시 먼저 천진에서 기다린 후,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고하여, 비준을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북경에 들어올 수 있었다. 만일 북양대신을 거치지 않고 직접 총리아문에 접촉하면 반드시 거절당하게 된다. 이리하여 북양대신은 국가의 외교 사무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북양대신은 전직(專職)이었으므로, 직예총독과는 각자 따로 일했고, 상호 견제했으며, 서로간의 갈등이 있었다. 일찍이 천진교안을 처리하면서, 직예총독인 증국번과 북양대신인 숭후간의 갈등을 뼈저리게 느꼈던 공부상서 겸 총리아문대신인 모창희(毛昶熙)는 1870년 10월 상소를 올려 "총독, 순무에서 독립하여 전문적으로 대외교섭을 처리하는 통상대신을 두게 되니 서로 간에 협조가 힘드니, 삼구통상대신(북양대신)을 별도로 따로 둘 필요 없이, 모든 대외업무와 해상방어업무를 직예총독이 책임지고 처리하게 하여 남양대신과 마찬가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11월 12일, 청정부는 명을 내려, 전직인 북양대신의 직위를 취소하고, 남양대신의 예에 따라 북양대신도 직예총독이 겸임하기로 결정한다. 이 변화는 직예총독과 북양대신이 따로 업무 처리하던 병폐를 해소시키게 되고, 직예총독의 권한은 대폭 강화하게 된다. 그의 업무는 "성의 방위"업무에서 "해상 방위"업무, "대서양업무"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로써 직예총독은 청정부내의 외교체제에서의 확고한 지위를 가지게 된다. 직예총독부는 보정(保定)에 있고, 북양대신 아서(衙署, 관청)은 천진에 있어서,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북양대신아서를 직예총독행관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후부터 직예총독은 천진과 보정을 왔다 갔다 하며 일을 보게 된다. 다만, "천진에 상주하고" "만일 천진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보정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직예총독은 천진에 우선적으로 머물게 하게 된다. 이는 직예총독의 "해상방어"업무가 "성방어"업무보다 중요하게 처리하는데 대한 하나의 보장이 되었다.
북양대신을 맡은 이홍장은 국가외교사무의 주재자가 되다.
이러한 변화가 있기 조금 전에 이홍장이 직예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리하여 그는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을 맡은 첫 번째 사람이 된다. 이홍장이 북양대신이 된 후 얼마 되지 않아, 국가외교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체제상으로 말하자면 총리아문의 설립 후 남북양대신은 그저 지방에서 외교를 대표하는 지위이고, 총리아문의 통할을 받고, 총리아문의 명을 받아 대외적으로 중대한 교섭을 진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남북양대신 특히 북양대신은 자주 총리아문을 대체하여 국가외교의 총대표가 되었다.
이홍장의 노력과 운영 하에, 북양대신의 활동범위는 신속히 확대된다. 총리아문은 매건 업무를 처리할 때마다 북양대신에 통보하고, 그의 의견과 건의를 듣게 된다. 많은 외국주재외교관들도 자주 그에게 보고하고, 그의 지시를 듣게 된다. 이홍장은 엄연히 국가 외교 사무를 주재하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그가 천진에 머무는 관아는 점점 청정부의 실질적인 외교부공관으로 되어 버리고, 외국인들도 그와 점점 더 많이 교류하게 되어, 이는 다시 그의 지위를 높여주는 작용을 했다. 한 영국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북양대신 이홍장은 그가 사실상 중국의 외교대신이라는 것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현재와 같이 구성되고, 현재와 같이 운영되는 총리아문은 그저 이홍장 대학사의 천진에 있는 공관의 한 소속기관에 불과하다."
원래 총리아문에 소속된 북양대신이 오히려 총리아문을 넘어서게 된 것에는 이홍장의 개인적 원인도 있지만, 체제적 원인이 더욱 크다. 대외교섭을 책임진 남북양대신은 원래 병권(兵權)이 없다. 그러나 총독, 순무가 겸직하게 되면서 병권도 가지고, 지방행정권도 가지게 된 것이다. 자연히 국방과 외교에서 중요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남북양대신의 중량감으로 보면, 남양대신이 20년이나 먼저 설치되었고, 초기에는 남방이 북방보다 대외교섭사무가 많았기 때문에 "남양대신이 북양대신보다 훨씬 중요하였지만", 나중에는 외교의 중심이 북으로 옮겨가고, 북양대신은 전국적인 외교에 참여하게 되면서 점차 북양대신이 남양대신보다 훨씬 중요하게 변모해갔다.
"북양계"는 마침내 중앙정부가 통제하기 힘든 거대한 정치적 집단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청나라말기에서 민국까지 모두 깊은 영향을 끼친다. 청말 정치국면에서 하나의 특색은 지방 세력이 천천히 굴기하고, 중앙정부는 점차 권한을 상실해 갔는데, 이것이 바로 청나라멸망의 원인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현상을 조성한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그 중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청정부가 구미의 비바람에 흔들렸다는 것도 있지만, 천조상국의 개념에 얽매어서 외교라는 중요한 국가정치권한을 지방으로 하여금 행사하게 했다는 것도 있었다. 그리하여 지방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여러 해가 지나서, 북양대신의 자리에 앉아 있던 원세개는 청나라를 종결시킨 인물이 되지 않았는가. 이런 결과는 처음에 전통적인 "예제(禮制)"와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외교를 '지방'에 넘겨주었고, 남북양대신을 설치할 때까지도, 청나라정부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역사는 확실히 재미있다.
13. 정원함(定遠艦) 이야기

정원함

일본에서 회수한 정원함의 쇠닻
청일전쟁 때 북양수군의 비장한 운명은 백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그중에서 북양수군의 주력함이었던 정원호(定遠號) 철갑함(鐵甲艦)은 더욱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정원함은 1880년 독일의 Vulkan공장에서 만든 것이다. "정원"급 철갑함으로는 같은 형의 자매함정인 "진원함(鎭遠艦)"이 있는데, 이들은 중국해군 역사상 첫 번째 주력함들이며, 당시에는 "아시아 제일거함"이라는 칭호 얻었다. <<실락한 휘황 - 정원급 철갑함>>이라는 글에 따르면, 이 함선은 길이 94.5미터, 너비 18미터, 흘수 6미터, 정상배수량 7,220톤, 만선배수량 7,670톤, 동력은 2개의 복합평와식 증기기관이고, 8개의 원식 석탄보일러가 있으며 6,200마력이었고, 항속은 14.5노트였다. 항해능력은 4,500해리/10노트이며, 조도 8천의 등과 2만의 등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3대의 발전기는 70킬로와트의 전력을 제공해주었다. 장갑총량은 1461톤이고, 철갑보의 길이는 43.5미터, 철갑보해수면상 장갑 두께는 14인치(355.6밀리미터), 해수면하의 장갑 두께는 12인치(304.8밀리미터), 주포대의 구경은 304밀리미터, 포의 두께는 15밀리미터, 사령탑의 장갑두께는 205밀리미터, 석탄 적재량은 700톤, 최대적재량은 1000톤, 편재는 329명~363명이었다. <<북양해군장정>>의 규정에 따르면 총병(總兵)의 계급을 지닌 사람이 함장이다.
정원함 이후의 근 100년 동안 중국은 이 정도 급의 주력함을 지니지 못했다. 전체 청일전쟁 기간동안, 정원함은 중국해군의 핵심 전투함이었다. 대동구해전에서 처음부터 정원함의 신호 깃발 시스템이 파괴되었는데, 이것이 중국해군패전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정원함의 병사들은 해전에서 군인의 기질을 발휘했고, 제독인 정여창(丁汝昌)은 용감하게 분전했으며 병사들도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나가서 싸웠다. 청나라 측 배들이 속속 침몰되는 상황 하에서 정원함은 진원함과 함께 일본 함선의 포위공격에서 용감히 싸웠다. 200여 발의 포탄을 맞고, 상부 건축물이 완전히 파괴되고, 여러 곳에서 불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이 두 척의 큰 배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포위공격 중이던 일본함선은 정원함, 진원함의 305밀리미터 포의 공격을 받았다. 일본군의 주력함인 송도함은 포격을 받아 크게 상처를 입었다.
격렬한 전투를 거쳐, 불을 끈 정원함(靖遠艦), 내원함(來遠艦) 등과 육군의 상륙을 도우던 평원함(平遠艦)이 도우러 오자, 일본군함은 어쩔 수 없이 전장터에서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 함선을 모두 바다에 침몰시키겠다"는 목표는 이룰 수 없었다. 정원, 진원함이 휴대한 포탄이 모자라지만 않았고, 포탄 중 불발탄이 많지만 않았다면(일본군의 여러 기록에는 포탄이 폭발하지 않거나, 포탄에 폭약이 장전되지 않았다는 것이 나온다), 이번 해전에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나중에 일본군의 군가 중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것에 "정원함이 아직 침몰되지 않았는가?"라는 것이 있다.
이후, 정원함은 다시 북양수군의 최후해전인 위해위보위전에 참전한다. 이번 전투에서, 정원함의 거포는 여전이 일본군을 겁주었다. 정원함의 활동기간동안 일본군은 감히 위해위 내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지 못했다. 정원함은 여러 차례 출격하고, 육군의 저항을 지원하여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중국군함이었다. 1895년 2월 4일, 일본군은 어뢰정으로 위해위를 기습하고, 정원함은 어뢰를 맞고 가라앉는다. 이로써 북양수군의 전투력은 크게 감쇄된다.
청일전쟁은 중국의 패배로 끝난다. 2월 8일, 북양수군의 제독 정여창은 자살로 순국하고, 잔존한 위해위의 수비군은 일본에 투항한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정원함의 역사가 여기에서 끝났다고 믿는다.
그러나 일본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시 태재부(太宰府) 천만궁(天滿宮)에는 "정원관(定遠館)"이라고 부르는 건축물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정원함의 대량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의 저명한 원혼이 떠도는 장소이다. 추산홍엽(秋山紅葉, 일본선박모형학회이사)가 발표한 <<정원관시말기>>에 의하면 북양수군의 병사들의 원혼이 이곳을 계속 떠돌고 있다고 한다.
소위 "정원관"은 일본의 전직 향천현지사인 소야륭개가 만들었다. 이 사람의 신분내력은 상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그가 일본대외침략전쟁의 지지자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선박애호가라고도 한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 은퇴한 고위관리는 1896년 2만원을 주고 일본해군으로부터 전리품인 정원함의 잔해를 구매했다.
정원관을 걸어 들어가면, 거의 모든 곳에서 정원함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기둥도 정원함의 못 구멍이 드러나 있고, 선체강판으로 장식했다. 강재로 만든 벽판, 갑판재료를 가공한 지면, 욕실의 문은 정원함 탄약고의 문짝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아주 견고하다. 화장실의 변기도 원래 정원함에서 병사들이 쓰던 변기 그대로이다.
이 별장이 이렇게 특수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일본의 군인들이 방문하곤 했다. 일본해군대장인 도전번태랑 등이 이곳을 다녀가면서 기념품을 남겼는데, 정원함의 어뢰, 부포, 포탄 등이 그것이며, 모두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별장에 소야륭개가 거주한 기간은 길지 않다. 이후 그의 가족들도 이곳에 정식으로 거주하지는 않았으며, 손님들 용으로 사용했다. 나중에 태재부 천만궁(현지의 신사)에 관리를 맡겼다. 그 원인은 소문에 의하면 북양수군의 유령이 자주 이곳을 떠돌아다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1895년 2월 9일 위해위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정원함의 유보섬은 병사들에게 배를 폭파하도록 지시한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한 것이다. 그 후 그는 자결한다.
추산홍엽이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정원관에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현지 민간에서 계속 전해져 왔다. 내용은 아주 이상하고 버전도 여러 가지이다.
현지 신사의 신관은 정원관을 받은 후, 방메 정원관에 가서 물건을 꺼내다가, 중국수군복장을 한 사람과 만났는데, 깜짝 놀라서 꼼짝도 못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좀도둑이 정원관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쉐"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의 남방 사람들의 발음으로 "누구냐"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좀도둑은 깜짝 놀라 현지 관청에 자수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시고 잤는데, 깨어난 후에 자기가 별장의 철문위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 3일간 허리를 펴지 못했는데, 마치 태형을 당한 것 같았다고 한다.
정원관의 대문은 정원함의 20센티미터 두께의 선체 장갑판으로 만들었다. 위에는 여전히 당시 일본군과 전투한 탄흔이 남아 있다.
현지인에 의하면, 정원관에는 술을 마시고 들어가도 안 되고, 의관을 정제하지 않아도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정원함은 엄숙한 군함이므로 군대 규율상 술을 마셔서도 안 되고, 복장이 흐트러져도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위반하면 허리와 다리에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한다.
소야융개가 죽은 후에 그의 후손들은 이곳에 위패를 세웠다. "비록 적군이었지만, 몸을 숨기지 않고 계속 대포를 쏘아대었으며, 국가에 충성했던 용감한 병사들의 명복을 빌며 기도한다"라고 적었다.
2차 대전 후, 중국은 해군을 파견하여 일본에서 청일전쟁 때 일본에서 약탈해간 정원함의 철묘(鐵錨, 쇠닻)등을 회수했다. 정원함 안에 보관하던 어뢰, 화포 등은 모두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공출해가서 무기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정원함 꼬리대포의 포좌 등 장비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 국민당정부는 내전에 바빴으므로 다시 사람을 파견하지는 않았었고, 정원관내에 있는 정원함의 물건들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아서, 지금 정원관은 이미 일본 모회사의 창고로 바뀌어버렸다.
14. 청나라 말기의 청과 속국의 관계
1) 청나라와 조선(朝鮮)의 관계
청나라가 흥기하기 전에, 조선은 명(明)나라와 전통적인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명나라 홍무원년, 주원장은 사신을 보내여 조선에 옥새와 글을 내렸다. 이로써 양국 간에는 종번(宗藩, 종주국과 번국)관계가 성립되었다.
1636년, 홍타이시(나중의 청태종)는 친히 병사를 이끌고 조선을 정벌하러 나섰고, 조선의 수도인 한성을 점령했다. 조선국왕은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어쩔 수 없이, 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항복했다. 명나라의 연호사용을 중지하고, 명나라와의 모든 내왕을 단절했으며,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했다. 청나라가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후, 쌍방의 사절은 매년 끊이지 않았다. 조선측에서는 매년 하동지, 하정삭, 하성절, 납세폐 등 네 번의 고정적인 조공사절을 보내는 외에, 여러 유형의 부정기적 사절을 중국에 보냈다.
일본은 명치유신이후에 침략의 창끝을 조선으로 돌렸다. 1876년 1월, 일본은 원정군을 보내어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고, 조선에 통상을 요구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을 청나라에 보내어 교섭하는데, 당시 청나라의 총리아문은 이렇게 답했다: "청나라는 종래에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지 않았다" 일본은 이러한 답변을 받은 것을 기화로 청나라가 조선의 일에 대하여 관여하지 않겠다면, 소위 "속국"이라는 것도 허명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자주국"으로 조선을 대했고, 1876년 2월 26일, 조선으로 하여금 강화도조약을 맺게 한다. 강화도조약은 명백히 일본이 중국의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배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조약이다. 이후, 일본은 조선침략의 발걸음을 가속화하여, 1882년 임오군란, 1884년의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비록 청나라군대가 신속히 행동하여 두 번의 사태를 수습했지만, 일본은 이 기회를 틈타 조선과 1882년 인천조약, 1885년 한성조약을 체결한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서의 침략을 확대하는데 성공한다.
일본은 이러한 이익에 만족하지 못하고, 준비를 마친 후 조선을 침략하면서 이어 중국을 침략하는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군대는 패배하고 청나라 정부는 일본과 <<마관조약>>을 체결하게 되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며, 청나라와 조선의 종번관계는 이로써 단절된다.
2) 청나라와 유구(琉球)의 관계
유구는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이다. 명나라 초기이래로, 유구와 중국의 관계는 밀접했다. 청나라가 건립된 이후, 유구의 사절은 1646년에 중국으로 와서, 순치제를 접견한다. 이로부터 유구사절의 발길은 청나라조정에 끊기지 않는다. 1662년, 청나라정부는 병과부례관 장학례를 정사로 하는 사절단을 유구에 파견한다. 이후 매번 유구의 새 왕이 즉위할 때마다, 청나라는 사절을 보내어 책봉하고 축하했다.
1663년(강희2년)과 1756년(건륭21년), 청나라 황제는 두 번에 걸쳐 도장을 유구국왕에게 내린다. 건륭이 내린 도장에는 "유구국왕지인(琉球國王之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1860년대까지 유구는 시종 자기들이 청나라의 속국임을 인정했다.
1872년, 일본의 메이지천황이 등극하면서, 유구에 사절을 보내도록 요구한다. 유구국왕은 아들을 도쿄에 보내어 축하하고 선물을 바친다. 일본천황은 조서를 내려, 유구를 번속(藩屬)으로 삼고, 1873년 유구를 일본의 부현(府縣)으로 한다. 1875년 5월, 일본은 강제로 유구국왕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중단시키고, 군대를 보내어 유구에 주둔한다. 중국과 유구간의 "종번관계"의 흔적을 말살하기 위하여, 6월에는 유구로 하여금 일본의 연호로 바꾸게 한다.
1876년, 일본은 유구에 사법기관을 설치하여 사실상 유구를 그들의 통치하에 둔다. 유구국왕은 일본의 침략과 압박을 참다못해, 1877년 4월, 비밀리에 자건관(紫巾官)인 향덕굉(向德宏)등을 중국으로 보내어, 국왕의 밀서를 전달하고, 일본의 병합의도를 막아달라고 요청한다. 청나라조정은 하여장(何如章)을 일본에 보내어 협상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한다. 1879년 3월, 일본정부는 병력을 보내어 유구를 점령한다. 3월 30일, 정식으로 유구를 오키나와현으로 선포한다.
1879년 7월, 3일과 23일, 유구국왕은 다시 비밀리에 자건광 향덕굉을 두 번에 걸쳐 천진으로 보내어 이홍장을 만나게 한다. 그리고 청나라정부가 일본정부를 물리쳐줄 것을 요구한다. 10월 24일, 유구의 이목관(耳目官)인 모정장(毛精長)등이 북경총리아문에 와서 장시간 무릎 꿇고 애절한 목소리로 피를 뿜으며 요청한다. 청나라정부가 200년간 청나라에 충성하던 번속국가를 불쌍히 여겨 유구를 도와달라고. 청나라정부가 다시 나서 일본정부와 교섭했지만, 일본의 만횡과 청나라의 유약함으로 유구는 마침내 일본에 병합되어버리고 만다. 청나라와 유구의 종번관계도 이로써 끝이 났다.
3) 청나라와 안남(安南)의 관계
안남은 지금의 베트남이다. 명나라 건문제때 여씨(黎氏)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다. 16세기초 두개의 대립된 봉건집단으로 분할된다. 북방의 정송(鄭松) 집단이 여씨왕조의 조정을 장악하고, 남방은 완황(阮潢)집단이 장악한다. 남방의 완씨집단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씨집단은 청나라정부와 관계를 밀접하게 유지한다.
1660년(순치17년), 여씨왕조는 사절을 파견하여 청나라에 조공을 바친다. 청나라정부는 바로 동의하고 여유기(黎維琪)를 안남국왕에 책봉한다. 원래 안남의 남방에 할거하고 있던 완씨집단은 17세기말에 이르기까지 아직 완전히 점성국(占城國)을 병합하지 못했다. 1702년, 완복주(阮福周)는 사절을 중국에 파견하여, 청나라 조정의 책봉을 요청한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이를 거절한다. 그러자 완복주는 스스로 왕에 오른다. 1803년, 완복영(阮福映)은 안남을 월남국(越南國)으로 개칭한다. 청나라정부는 광서안찰사인 제포삼(齊布森)을 월남에 사신으로 보내고, 완복영을 월남국왕에 책봉한다.
1840-1850년대에 프랑스가 월남을 침략한다. 1862년 월남을 압박하여 <<사이공조약>>을 체결한다. 월남의 남부6성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874년 3월, 프랑스는 다시 월남으로 하여금 제2차 <<사이공조약>>을 체결하게 하였으며, 이 조약에서 프랑스는 월남의 "독립자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프랑스는 월남의 외교를 주재하고, 이로써 중국의 "종주권"을 부인하며, 프랑스의 월남에서의 특권적인 지위를 확립한다. 1875년 5월, 프랑스는 이 조약을 청나라정부에 통보한다. 그리고 중국으로 하여금 흑기군(黑旗軍)을 단속할 것을 요구한다. 청나라정부는 중국의 월남에 대한 "종주국"으로서의 보호책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월남군대는 월남국왕의 요청을 받아 '도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간 것이라고 한다. 1877년, 월남은 사신을 중국에 보내어 조공을 바친다. 프랑스도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1883년, 프랑스는 전면적으로 월남을 침략한다. 그리고 월남으로 하여금 <<순화조약>>을 체결하게 하고, 월남은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1884년 6월, 프랑스는 월남을 압박하여 제2차 <<순화조약>>을 체결한다. 이로써 프랑스는 월남을 식민통치하게 된다. 중국 프랑스 전쟁이 끝난 후 1885년 6월, 중국과 프랑스는 <<중국 프랑스 월남 조약>>(중프신약)을 체결하여, 청나라정부는 프랑스와 월남이 체결한 조약을 승인하고 월남의 종주권을 포기한다.
4) 청나라와 소록(蘇祿)의 관계
소록은 지금의 필리핀 술루군도이다. 1726년(옹정4년), 소록국왕은 사신을 보내어 청나라조정에 조공한다. 1754년, 소록국왕은 상소를 올려, 토지, 민호를 중국에 편입시키고자 하나, 건륭제는 완곡하게 거절한다. 1851년, 스페인이 점령하면서 청나라와 소룩국왕의 내왕은 단절된다.
5) 청나라와 면전(緬甸)의 관계
면전은 지금의 미얀마이다. 청나라는 여러 차례 미얀마에 병력을 파견하여 도와준 적이 있다. 1769년, 청나라정부는 대학사 부항(傅恒)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미얀마로 가게 한다. 면전국왕 맹박(孟駁)은 두려움에 평화적 해결을 원한다. 쌍방이 평화협상을 한 후, 면전국은 사절을 보내어 청나라에 조공을 바친다. 1790년, 청나라정부는 사신을 보내어 면전의 맹운(孟雲)을 면전국왕으로 책봉한다.
1824년부터, 영국이 미얀마를 침략하는 전쟁을 시작한다. 영국정부가 핑계거리를 잡아 미얀마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청나라정부가 나서서 협상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영국정부는 한편으로 중국의 면전에 대한 종주권을 몰랐다고 변명하면서, 중국의 면전에서의 권리에 손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면전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한다. 영국은 1885년 12월 면전의 수도인 만달레이를 점령하고, 면전국왕인 석포(錫袍)와 왕후를 포로로 잡는다. 그리고 1886년 1월 1일 면전을 영국령 인도에 편입시킨다고 공포한다. 이로써 미얀마의 절반을 집어삼켰다.
영국이 면전을 흡수한 후, 청나라정부는 항의를 제기한다. 이리하여 두 나라는 협상을 진행하고, 1886년 7월, 북경에서 <<미얀마조항>>을 체결한다. 청나라정부는 영국의 미얀마에서의 특권을 인정하고, 영국은 미얀마가 관례에 따라 매10년마다 중국에 "예물을 바치도록" 합의한다. 청나라정부는 영국정부로부터 조공을 방해하지 말라는 요구는 관철시켰지만, 실제로 청나라와 미얀마와의 종번관계는 이로써 끝이 나게 된다.
6) 청나라와 남장(南掌)의 관계
남장은 지금의 라오스이다. 18세기 초, 라오스는 분열하게 되는데, 북부에 낭발랍방(瑯勃拉邦)왕국이 건립된다. 청나라정부는 이를 여전히 "남장"이라고 부른다. 1727년(옹정7년) 낭발랍방왕국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한다. 1791년, 랑발랍방왕국은 만상왕(萬象王) 소남(昭南)의 간섭을 받고, 낭발랍방국왕인 아누루는 방콕으로 피난가게 된다. 오래지 않아, 청나라정부의 도움을 받아, 아누루는 다시 낭발랍방으로 돌아와 통치한다. 이후 그의 아들인 만탑도랍(曼塔圖臘)이 통치할 때까지도 청나라정부와 관계가 좋았다. 청나라정부는 칙인을 내리고 고명을 내렸다. 1893년, 낭발랍방은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이로써 청나라와 남장과의 종번관계도 끝이 난다.
7) 청나라와 섬라(暹羅)의 관계
섬라는 지금의 타이이다. 1652년(순치9년) 섬라는 사절을 보내어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이로써 두 나라간의 왕래가 시작된다. 1767년, 미얀마군대가 섬라를 침범하여, 섬라의 수도를 무너뜨린다. 태수였던 다신은 미얀마의 침입을 물리치고, 다시 섬라를 통일하고 왕으로 옹립된다. 1768년, 다신은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청나라에서 자신을 섬라국왕으로 봉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그가 왕권을 찬탈하였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한다. 그러나 다신은 계속하여 청나라정부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여, 청나라정부는 마침내 1777년 다신이 건립한 왕조를 인정하고, 섬라국이 청나라조정에 조공을 바치도록 허락한다. 1823년(도광3년), 청나라정부는 섬라국왕 라마2세에게 "영존해방(永尊海邦)"이라는 편액을 선물한다.
1855년, 영국대표인 홍콩총독 바오린은 섬라를 압박하여 <<영국섬라통상조약>>(바오린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등도 영국을 본받아 섬라를 압박하여 유사한 조약을 체결한다. 섬라는 이후 서방식민국가의 반식민지로 전락한다. 청나라와의 종번관계도 이로써 끝이 난다.
8) 청나라와 호한(浩罕)의 관계
호한은 18세기 우즈베키스탄족이 중앙아시아에 건립한 칸국(汗國)이다. 1759년(건륭24년)에 청나라군대는 신강의 반란군두목인 화탁(和卓)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호한의 칸인 얼더니와 직접 관계를 맺는다. 얼더니는 적극적으로 번국으로 청나라의 부속국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청나라조정에 조공을 그치지 않고 보냈다. 19세기초, 호한은 표면적으로는 청나라를 공경했지만, 실제로는 계속 중국을 침략하고 중국의 영토를 잠식했다. 1876년, 제정러시아가 호한을 병합하고, 베르간성(費爾干省)을 설치한다. 이로써 호한과 청나라의 종번관계는 끝이 난다.
9) 청나라와 아프간(阿富汗)의 관계
청나라초기, 아프간지역은 분열상태를 보인다. 1759년, 바다크산 동쪽의 보로르두는 사신을 보내어 청나라에 조공을 바친다. 1878년, 영국이 아프간을 점령하면서 청나라와 아프간의 왕래는 중단된다.
10) 청나라와 네팔(尼泊爾)의 관계
네팔은 수천 년 중화제국의 최후의 속국이었다.
중화민국이 건립된 후, 위안스카이는 일찍이 네팔을 오족공화에 가입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네팔은 당시 영국령인도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청나라왕조와 네팔의 종번관계는 아주 현실적인 국제전략 관계였다.
청나라초기 라다크, 철맹웅(哲孟雄), 부탄등 히말라야산의 여러 나라는 모두 중국의 속국이었다. 나중에 영국령인도가 이들 국가를 합병하고 침략했다. 여러 나라들은 줄줄이 중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정부에 보낸 문서에서 영국령인도를 "피릉(披楞)"이라고 칭했다. 당시 청나라조정은 "피릉"이 바로 영국이라는 것을 몰랐다. 소국정도로 생각하고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라다크, 철맹웅, 부탄 등은 차례로 영국령인도에 먹혔다. 영국은 다시 중국 티벳과 네팔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이때의 청왕조는 국제정세에 어느 정도 눈을 떴다. 그리하여 네팔과 번속관계를 강화하여 영국을 제어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네팔은 히말라야 남쪽의 여러 나라들이 차례로 멸망하는 것을 보고는 이를 귀감으로 삼아 중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강화했다.
중국과 네팔의 종번관계는 국제법상 영국령인도의 네팔에 대한 침략속도를 확실히 늦추는데 작용했다. 이는 티벳을 중국이 유지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이 청나라를 교란시킬 때, 네팔은 일찍이 청나라조정에 서신을 보내어 대포를 가지고 중국으로 지원 와서 소탕작전에 참가하겠다고 하였다. 청나라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11) 추가설명
청나라와 주변국가의 종번관계와 결말은 대체로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외에 티벳과 외몽고의 문제도 약간 언급해야 할 것이다. 모두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청나라정부는 티벳과 외몽고에서 완전한 주권을 행사했다. 당시의 영국과 러시아 등의 국가는 계속 종주권으로써 중국의 주권을 대체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영국은 계속하여 중국의 티벳에서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청나라정부는 티벳에 종주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이러한 주장은 청나라정부의 반대에 부닥쳤고, 영국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외몽고가 독립하기 이전에, 중국이 외몽고에 대하여 행사한 것은 완전한 주권이었다. 신해혁명 후, 러시아는 외몽고의 "독립"을 획책했다. 이리하여 위안스카이의 북양정부를 핍박하여 러시아는 <<중러성명문건>>을 체결한다. 이로써 중국은 외몽고의 영토, 주권을 상실했고, 그저 종주권이라는 허명만 남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주권과 종주권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청나라와 주변국가간에 존재하던 종번관계는 다툼이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종번관계는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불평등관계이고, 주변국가가 청나라에 '칭번납공(稱藩納貢)"하는 것이며, 중국의 책봉을 받고, 중국으로부터 도장과 옥새를 받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상으로 이런 종번관계는 그저 중국과 주변각국간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하나의 형식이었다. 통치와 피통치라는 실질적인 내용이 담기지는 않았다. 또한, 종주국으로서의 중국 통치자는 일종의 "왕은 오랑캐를 통치하지 않는다. 오는 자는 막지 않고, 가는 자를 붙잡지 않는다"는 불치주의(不治主義)의 태도로 외국을 대했다. 원칙적으로 속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중국 통치자는 자신이 천조상국(天朝上國)이라는 것을 자랑하고자 하여 "오는 것보다 많이 준다"는 원칙하에 조공하는 나라에 대량의 하사품을 내렸다. 그 가치는 먼 길을 와서 조공하는 나라에서 진공한 물품의 가치를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각 번속국은 기꺼이 중국으로 와서 조공을 바친 것이다. 어떤 때에는 중국통치자가 자신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각국에서 중국으로 조공을 오는 시간과 규모에 대하여 제한을 한 적도 있었다. 비록 어떤 국가는 규정을 지키기 않고 수시로 중국에 조공을 바치러 왔지만, 중국정부는 항상 기꺼이 받아주었다. 이외에 각국에서 중국으로 조공을 오는 동시에 중국과 무역거래도 하였다. 이로써 볼 때, 청나라와 주변국가의 종번관계는 근대서방국가간의 표면적으로는 평등하나, 실질적으로는 약육강식인 국제관계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서방식민국가와 식민지간의 지배와 피지배, 압박과 피압박, 착취와 피착취, 약탈과 피약탈 관계와는 천양지차가 있는 것이다.
15. 청나라 때 국비 외국 유학생들은 어떤 시험을 치렀는가?
해외유학은 일찍이 청나라말기부터 있었다. 당시에는 아주 새로운 경향이었고, 경쟁은 지금보다도 훨씬 치열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호적(胡適) 선생은 해외유학파인 선배로서 <<호명복을 추억함>>이라는 글에서 일찍이 자신이 겪었던, 국비유학생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실은 바 있다.
선통2년(1910년) 7월, 나는 북경에서 미국국비유학시험을 치렀다. 그 날,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합격자명단이 붙었다고 하였다. 나는 인력거를 타고 합격자 명단을 보러 사가후통으로 갔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다. 나는 인력거의 등잔을 들고, 합격자명단의 끝부분부터 보아 올라갔다(왜냐하면 나는 시험을 잘 치지 못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합격자명단을 다 보았는데, 나의 이름이 없어서 매우 실망했다. 그런데, 제일 앞부분에 "예비합격자"라는 말이 있었다. 나는 다시 등을 들고 "정식합격자"의 명단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끝부분부터 읽어 올라갔다. 나의 이름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호달(胡達)이었고, 호적(胡適)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위로 거슬러 보아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등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원래의 인력거를 타고 되돌아왔다.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호달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마터면 괜히 좋아할 뻔 했군!"
이 호달이 바로 호명복이다. 나중에 호적과 같은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고 함께 코넬대학에 입학하며, 호적과 좋은 친구가 된다.
"국비미국유학"은 "국가배상금 국비 미국유학"이라고도 한다. 이 "국가배상금"이 바로 "경자배상금"이다. 경자(1900년)년에 8국 연합군이 중국을 침입하고, 북경으로 쳐들어온다. 나중에 청나라정부를 핍박해서 "신축조약"을 체결하는데, "배상금"이라는 조항에서 당시 중국 인구를 1인당 백은 1냥으로 계산해서 4억5천만 냥으로 계산했다. 이자는 4리였으며, 39년에 나누어 원금과 함께 갚는 것이었다. 합계 9억8천여만 냥이 되었다. 나중에 영국, 미국 등의 국가는 이 배상금중 아직 지급되지 않은 부분을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중국에 학교, 도서관 병원을 만드는데 썼다. 그리고 각종 장학금, 유학생 파견경비로 썼다. 미국은 선통원년(1909년)부터 경자배상금을 돌려주기 시작하였으며, 그해에 제1차 미국 국비유학생을 모집했다. 호적이 시험 친 것은 제2차 미국 국비유학생이었다.
이 해에 호적은 아직 20세가 되지 않았었다. 1904년에 고향인 적계를 떠나 상해로 공부하러 갔다. 나중에 상해의 중국공학에 입학했고, 다시 신공학으로 전학했다. 나중에 학교가 해산되면서, 옛날 중국공학으로 되돌아가기 싫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싫어서 그냥 상해에 살았다. 앞날이 막막해서 고민이 많았으며, "낭만적인 친구"들과 어울려 허송세월하고 있었다.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고 도박도 했다. 나중에 술 먹고 행패를 부리다가 순사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호적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모친의 가르침을 어겼다고 생각하여 완전히 개과천선한다. 북으로 올라와서 미국유학생시험에도 붙었고, 술친구들과 멀어졌다. 이리하여 그는 "개인역사상의 암흑시대"를 종결짓는다. 당시 호적은 아주 가난했고, 부채도 있었다. 돈이 없어서 북경으로 가서 시험 칠 수가 없었다.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자기가 미국으로 가면 모친은 누가 돌볼 것인가? 나중에 그의 친구인 허이손이 호적보고 아무 걱정하지 말고 가서 시험보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경비를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의 또 다른 친구인 정락정은 호적에게 200은원을 주어 노잣돈으로 삼게 해준다. 그의 친척아저씨인 호절보는 그의 집안을 돌보아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사람들의 도움과 권유 하에서 호적은 안심하고 두 달간 책을 읽어 순조롭게 북경으로 가고, 미국유학시험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시험은 두 번으로 나누어 본다. 첫 번째는 국문과 영문이었다. 호적은 괜찮게 친 편이었다. 국문시험의 제목은 '불이규구불능성방원설(不以規矩不能成方圓說, 규-자-와 거-줄자-가 없으면 방-네모-과 원-동그라미-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논하라)'였다. 그는 아주 어지럽게 고증에 관한 글을 썼다. "구지작민, 불가고의, 규지작야, 기재주지말세호(矩之作民, 不可考矣, 規之作也, 其在周之末世乎, 구를 만든 것은 언제 인지 고증할 수 없다. 규를 만든 것은 주나라 말기 때의 일이다)"로 시작하는 글이었다. 사실 이것은 호적이 마음대로 고증했다고 적은 글이었는데, 마침 시험채점자인 선생은 고증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호적의 글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그리하여 100점을 주었다. 영문은 60점을 맞았다. 그리하여 첫 번째 시험은 평균 80점이라는 높은 점수였다. 두 번째 시험은 이과였는데, 시험을 잘 못쳤다. 그리하여 평균은 최종적으로 59점이 되었다. 겨우 합격선을 넘어섰다. 다행히 이 해에는 유학생을 많이 뽑아서 70명을 뽑는 해였고, 시험을 잘 친 사람도 적었다. 호적은 어쨌든 운이 좋아서 55등으로 합격한 것이다.
호적은 시험을 쳐서 해외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일을 매우 중시했다. 나중에 축가정으로부터 인쇄된 "제2차 경재배상금 미국유학생합격자 명단"을 보고는 복사본을 하나 얻었다. 이오의 <<호적평전>>의 첫머리에는 조원임이 소장하고 있던 합격자명단의 사진본 5장이 실려 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사진에는 호적이 1934년 3월 27일에 쓴 발문이 있다. 이렇게 시작한다.
‘민국23년2월 나는 남경의 축가정 선생의 집에서 그가 보존하고 있는 이 인쇄된 합격자명단을 보았다. 나는 그에게 부탁해서 다시 한부를 써서 붙여달라고 하였다. 붙여온 후, 나는 다시 장희여 선생에게 부탁해서 다시 한번 쓴 다음에 나의 일기 속에 보존했다. 중국정부가 최초에 미국유학생을 파견한 것은 4차에 걸쳐있고, 그 성명과 이력은 모두 서우지의 연보에 기재되어 있다. 나는 이 합격자명단이 오랫동안 보존되었으면 좋겠고, 나중에 후세인들의 교육 사료가 되었으면 좋겠다.’
호적선생이 전혀 생각지도 못하였을 것은, 청나라 궁중의 자료관에도 합격자명단이 1부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16. 성선회(盛宣懷) : 청나라 말기 최고 부자의 가족, 재산과 유산분쟁
글 : 진명원(陳明遠)

청나라 말기의 최고 부자라면 성선회를 손꼽아야 한다.
성선회(1844-1916)의 자는 행생(杏生)이고 강소성 무진 사람이다. 조상은 대대로 관리를 지냈다. 그러나 성선회는 과거출신이 아니라, 이홍장의 막료로서 인정을 받아 천진 해관도에서 점차 승진하여 우전부상서에 이르고, 궁보(宮保)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를 "성궁보(盛宮保)"라고 불렀다. 성선회는 일생동안 업적이 적지 않다. 그는 일생동안 11개의 '제일'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그가 설립한 기업은: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 천진전보국(天津電報局), 중국통상은행(中國通商銀行), 한치평매철창광공사(漢治萍煤鐵廠鑛公司)가 있고, 또한 그는 중국의 첫 번째 공업대학인 북양대학당(北洋大學堂, 지금의 천진대학)을 창건하고, 중국의 첫번째 정규사범대학인 남양공학(南洋公學, 지금의 상해교통대학 전신)을 만들었다. 성선회의 일생은 공과가 섞여있지만, 중국현대화의 역사상 공로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청나라말기(1909-1910)에 우전부상서(현재의 교통통신부장관)인 성선회는 청나라조정에 철로를 국유화하자고 건의했다. 이로 인하여 대규모의 사천보로운동(四川保路運動)이 벌어지는데, 청나라정부는 호북의 신군을 사천에 보내어 진압했다. 이로 인하여 무한이 비게 되고, 이는 간접적으로 무창기의(신해혁명)을 일으킬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선통제때의 섭정왕인 재풍은 성선회에게 화를 냈고, 그의 관직을 파면하고 처벌했다. 성선회는 할 수 없이 일본으로 도망치고, 청나라정부는 성선회의 가산을 몰수했다.
1912년, 선통제가 물러난 후, 성선회는 온갖 방법을 써서 원세개에게 잘 보였고, 손보기(孫寶琦, 그는 성선회와 원세개 모두의 친척이며, 두 번이나 국무총리를 역임했다)가 중간에 알선하여, 마침내 상해에서 대부분의 재산을 돌려받게 된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중풍을 맞아 자리에 눕게 되고, 겨우 목숨을 연명하다가, 1916년 4월 27일에 사망하니, 향년 72세이며, 고향인 상주(常州)에 묻힌다.
이후 수십 년간 성선회의 유산분할문제는 계속 발생하였고, 심지어 법정에까지 가서 사회의 관심거리중의 하나가 되었다.
성선회의 재산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당시는 "집안과 국가가 나누어지지 않았고, 공과 사가 섞여 있으며, 재산권이 확실하지 않은" 시대였으므로, 모든 관료의 가산은 거의 모두 확실히 말할 수 없었고, 계산이 분명할 수 없었다.
성선회의 거액의 가산도 원래 불분명하였는데, 청나라정부에 의하여 몰수되었다가, 중화민국초기에 반환하였다가, 다시 징발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불분명하게 되었다. 성선회가 사망할 때에는 곁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 자신조차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졌는지 알지를 못했다.
성선회의 부동산
먼저 성선회가 상해등지에 가진 대량의 부동산을 보자, 필자가 아는 한 최소한 아래의 것들이 포함된다.
(1) 사교노공관(斜橋老公館) : 이 "사교"라는 것은 지금의 남경서로, 오강로, 성도로 일대를 가리킨다. 당시 오송강(지금의 소주하)의 지류인 동로포는 북에서 남으로 구비구비 이곳을 흘러갔다. "사교"는 물이 맑고 나무가 많아, 풍경이 아주 아름다워 상해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강의 서쪽강안에는 유명한 오락화원인 장원이 있었고, 강의 동쪽에는 영국향촌구락부(상해광전대하의 현재 부지)가 있었다. 1880년을 전후하여, 성선회는 이 땅의 105무를 구매하고, 성가화원호화주택을 짓는다. 중국과 서양의 방식을 결합하여, 중국전통의 청대누각도 있고, 커다란 서양식의 화원잔디밭도 있었다.
(2) 백여 개의 주택(상해 남경로 선악사댄스홀 부근, 기차역 건너편)
(3) 신갑로 신가화원(캉유웨이에게 빌려주어 거주하게 하였다)
(4) 화원주택(지금의 회해중로 1517호로 이전에 일본주상해영사관이었음)
(5) 소주의 유명한 원림 "유원(留園)"
성선회의 거주지는 사교의 주택이었다. 상해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는 "성선회기록"에는 여러 편지가 있는데 수신인의 주소는 "상해사교성대인수(上海]斜橋盛大人收, 상해 사교의 성대인 앞)"라고 되어 있다. 성선회가 서거한 후의 부고에서도 "빈의재사교성택거행(殯儀在斜橋盛宅擧行, 장례는 사교의 성씨주택에서 거행)"이라고 되어 있었다.
1910년, 성선회는 관직을 잃고 먼저 대련으로 갔다가 곧이어 일본의 고베로 간다.
1912년 가을, 그는 상해 사교에 돌아와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성선회의 처첩과 자녀
청나라말기의 귀족집안과 마찬가지로, 성선회는 처첩을 많이 두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후처인 대부인 장씨(庄氏)와 조(刁), 유(劉), 류(柳)의 세 첩이다. 성선회는 모두 6명의 처첩을 두었으며, 자녀들의 돌림자는 "이(颐)"였다.
첫째, 동씨(董氏)
원부인인 동씨는 세 아들(장남 성창이, 차남 요절, 삼남 성동이)과 세 딸을 두었다. 동씨는 일찍 사망했다.
둘째, 조씨
동씨가 죽은 후, 성선회는 조씨를 맞이하였고, 함께 15년을 살았다. 부부간의 감정을 좋았다. 성선회는 관직에서나 사업상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조씨에게 털어놓는 경우가 많았고, 조씨는 그를 위하여 계책을 내놓으며, 함께 걱정을 해주었다. 그녀는 내외 손님접대를 잘 하였고, 내조도 잘했다. 아쉬운 점은 조씨는 딸 하나만을 낳았다는 점이다. 성우이(성치혜라고도 함)이다. 그런데, 성선회의 부친은 부인이 되려면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그리하여, 성선회는 부친의 명을 어길 수 없었고, 할 수 없이, 조씨는 현숙하고 재주가 있음에도 10여년간 아들을 낳지 못하여 할 수 없이 첩의 지위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아들을 낳기 어렵다고 생각이 들자 성선회의 부친은 스스로 나서서 성선회에게 고향으로 돌아와 첩을 들이도록 명령했고, 대신하여 여자를 물색했다. 그리하여 졸지에 두 첩인 장씨와 유씨를 들이게 된다. 조부인은 이 소식을 듣고 비분을 참지 못하였고, 자기보다 아래 배분의 여자들이 자신을 뒤에서 '이랑(姨娘, 첩이라는 의미)"이라 부르고, 같은 배분에서도 "여부인(如夫人, 역시 부인과 같다는 것으로 첩이라는 의미임)"이라고 부르자 그녀는 이러한 치욕을 참지 못하고, 화가 나서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만다. 성선회가 두 첩을 맞이하고 되돌아와서 이 소식을 듣고는 방성대곡을 한다. 그는 정실부인의 예의로 조씨의 장례식을 치러준다.
셋째, 장씨
후처인 장씨의 아들은 "성은이"(4남)이다. 그리하여 장씨는 정실부인으로 승격하고 대부인의 명분을 얻는다. 그녀는 1900년 딸 성애이를 낳는다. 그녀는 자가 근여이고 7째 딸이다.
넷째, 유씨
유씨는 아들 성중이(5남)와 딸 하나를 낳는다.
그러나, 성선회는 장씨, 유씨의 두 여인에 대하여는 그다지 감정이 깊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 소씨(蕭氏)와 류씨를 맞이한다.
다섯째, 류씨
아들을 셋 낳는다(6남, 8남은 요절, 7남 성승이), 딸은 하나를 낳는다(8녀 성방이)
여섯째, 소씨, 딸을 하나 낳는다.
이처럼, 성선회는 6명의 처첩에게서 모두 8남8녀를 낳는다. 그중 동씨가 3남3녀, 조씨가 1녀, 장씨가 1남1녀, 유씨가 1남1녀, 류씨가 3남1녀, 소씨가 1녀를 낳았다.
성선회의 재산목록
성선회는 관직도 높았고, 이홍장을 도와서 업무를 처리하면서 집안을 일으켰다. 그는 양무를 40년간 맡았다.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질 때, 이미 관직이 우전부상서에 이르고, 사업도 아주 크게 하고 있었다. 거액의 가산은 도대체 얼마인지 계산도 되지 않았다.
성씨가 서거한 다음 해(1917년 봄), 성씨집안은 이홍장의 장남인 이경방(李經方)에게 부탁하여, 성선회의 유산을 정리하는 것을 주재해달라고 부탁한다. 1917년 6월 1일, 이경방의 주재 하에, 성씨의 5처첩과 친족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우재의장(愚齋義庄)을 만든다. 2년간의 정리정돈을 거쳐 성선회의 재산은 1920년 1월까지, 총액이 백은1천349만3868냥으로 확정한다. 그 안에서 상환금 및 각종 금액 183만2450여 냥을 공제하고 실제 분배하는 재산을 1천160만6014냥으로 하였다. 은대양으로 환산하면 1624만 위안이다.
성선회가 죽은 후 5명의 아들들이 법정상속인이 되었다. 차남, 6남, 8남은 요절하여 빠지고, 장남 성창이는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인 성육상이 대습상속을 받고, 3남 성동이도 당시에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인 성욱우가 대습상속을 받으며, 4남 성은이, 5남 성중이, 7남 성승이가 법정상속인이었다.
성선회의 유언에 따라, 성씨의 다섯 아들은 상속인이 되어 유산 580만 냥을 나누어 각자 116만 냥씩을 가졌다. 이외에 50%인 580만 냥은 우재의장에 넣었다. 우재의장의 재산은 40%는 자선사업에 쓰고 60%는 성씨가족의 공동재산으로 삼았다. 사용방식에서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이자는 건드리되 원금은 건드리지 않는다." 언제든지 이자는 꺼내 쓸 수 있지만, 원금은 남겨두어야 했다.
가련한 자식들
성선회가 죽은 후에 부인인 장덕화가 전체 가업을 주재했다. 장부인은 비록 후실이지만, 그녀는 상주의 대갓집에서 태어났으며, 장원의 후예였고, 재산관리와 집안관리에 능숙했으며, 아주 똑똑했다. 그녀의 장방은 "태기장방(太記賬房)"이라고 불렀는데, 관리하는 재산이 상해, 소주, 상주로부터 남경, 구강, 무한에 까지 있었다. 그녀는 모두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혁명군이 상해를 점령했을 때, 옛집을 지키기 위하여 그녀는 머리를 써서 문 앞에 달려 있던 한치평상해판사처의 간판을 떼어내고, 모 양행(洋行)의 간판을 달아놓았고, 서양친구들을 불러서 공관에 머물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난관을 통과했다.
장부인은 집안사업을 11년간 이끌어간다. 비록 세 아들이 모두 모자랐지만, 장부인이 있을 때는 북양의 관료를 지낸 사람들이 대부분 청나라조정의 옛 신하들이어서 성씨집안과 교분이 있어서 큰 문제는 없이 지냈다. 그런데, 1927년 가을에 장부인이 돌연 사망한다. 게다가 북벌군이 승리를 거두어 북양정부도 무너진다. 그리하여 성씨집안은 졸지에 정신을 못차리고 당황하게 된다.
장부인이 죽은 후, 1927년 11월, 4남인 성은이가 우재의장의 규정을 깨트리고 이미 우재의장에 출연되고, 자선기금으로 써야할 부분을 성씨의 다섯 아들들이 나누어가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가족내부에서는 파란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1927년에서 1928년에 성씨가족은 다시 유산분배문제로 소송에 이르게까지 된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딸이 상속권을 인정받다.
1927년 3월 4일, 장개석을 우두머리로 하여 남경정부가 성립된다. 군비를 모으기 위하여, 남경정부는 상해에 머물고 있던 옛 청나라관료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성씨집안은 나무가 크면 바람 잘 날이 없는 형국이었으니, 가장 먼저 노리는 대상이 된다. 과연 강소성 정부는 통고를 보내어, 우재의장의 재산의 40%를 국고에 편입시켜 군비로 쓰게 한다. 혁명의 기치를 든 총부리 앞에서, 성씨가족은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납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1928년 2월, 성선회의 세 아들인 성은이(4남), 성중이(5남), 성승이(7남) 및 두 조카인 성육상(장남의 장남), 성육우(4남의 아들인데, 3남에게 양자로 보내어짐)은 의장의 재산의 60%를 은350만 위안으로 하여 자기들이 나누어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아직 시집가지 않은 7녀 성애이와 8녀 성방이를 제외해 버렸다.
당시 27세이던 성애이는 현대여성이었다. 모친인 장부인이 죽은 후, 성애이는 집안을 일으키기로 하고, 앞장서서 소송을 제기했고, 유산의 일부분을 나눠받겠다고 결심한다.
이 소송이 벌어지자 바로 전국에서 관심을 보인다. <<신보>>는 상세한 추적보도를 하였고, 성씨집안의 소송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성애이는 중화민국의 법률상 남녀가 평등하다는 조항과 제2차 국대 부녀운공결의안의 관련조항을 들어, 미출가한 여자는 다른 남자형제들과 동등한 상속 권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성애이 본인과 성방이도 모두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성씨의 아들들은 변호사를 선임해서 싸웠다. 변호사는 이 유산은 성선회가 남긴 것이고, 성선회가 죽은 것은 1916년이므로, 당시에는 민국의 남녀평등법률이 없었으므로, 딸들은 상속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성애이는 송씨자매(송애령, 송경령)의 지원도 받고, 육홍의, 장증홀의 두 변호사를 내세워 법정에서 격렬하게 투쟁했다.
1928년 9월 5일, 조계임시법원이 개정했을 때, 시민들뿐 아니라 법률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나타냈고, 많은 유명한 변호사들이 참석했다. 이것은 수천 년간 중국에서 딸들은 상속권을 갖지 못한다는 구전통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부녀들이 실질적인 권익을 쟁취하기 위한 소송이었기 때문이다.
법률에 따라, 법정에서 성애이는 그녀의 형제 및 조카들과 마찬가지의 권리를 가진다고 판결했다. 그리하여, 1928년 9월 하순 우재의장의 재산을 7등분하여, 성애이에게 1/7 즉 백은50만 냥을 나눠주도록 했다. 이후 8녀도 마찬가지로 1/7인 백은50만 냥을 얻었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첫 번째로 여자가 상속권을 인정받은 사건이다.
17. 1900년, 호주의 중국 정벌기
글 : 설아간사(雪兒簡思)

철도를 둘러싼 영국군과 러시아군의 대치
1900년, 호주의 식민지정부는 영국정부의 부름을 받고, 8국 연합군과 함께 중국정벌에 나섰다. 이 기간 동안 호주연방은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싸운 것은 호주식민군의 첫 번째 아시아전투일 뿐 아니라, 호주연방의 첫 번째 해외 군사 활동이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8국 연합군은 9국연합군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드니에 있는 로얄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Garden Island에 있는 조선소에는 정문에 오래된 구리대포(銅砲)를 하나 놓아두었다. 이 구리대포는 스페인인들이 1595년에 제조한 것으로 명나라황제에게 선물로 만들어지고, 머나먼 북경까지 보내어졌던 것이다.
호주, 이 젊은 식민지는 그가 성립된 연방원년(1901년)에 대포, 칼 및 군함을 배경으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북방의 이웃에게서 일찌감치 문화재로 불리던 구리대포를 빼앗아 왔던 것이다.
"영국엄마"의 긴급구원요청
1899년부터, 의화단의 난이 중국에서 일어나고 이는 각국 매체의 주요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그러나 호주대륙의 6개 식민지에게 있어서, 그들이 더욱 관심을 가지던 이슈는 거의 무르익은 연방국가의 결성이었다.
여러해 동안의 정치적인 힘겨룸을 통해서, 1900년 3월, 호주의 각 식민지대표는 런던에 모여, 연방성립을 위한 최후협상을 시작하고, 연방헌법초안이 7월에 영국의회에 제출되어 심의를 받게 된다.
이때, 북경의 정세는 신속히 악화된다. 중국과 외국의 대립국면은 갈수록 악화되고, 대규모의 유혈충돌이 곧 발생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6월 4일, 프랑스공사는 "함대를 가진 각국 공사들은 즉시 본국정부에 전통을 보내어, 각국의 해군사령관들이 북경에서 봉쇄되고 배외(排外)운동이 격심한 상황 하에서 즉시 필요한 구원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한다. 6월 16일, 군사적인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각국연합군은 대고포대(大沽砲臺)의 중국수비군에게 최후통첩을 보내고, 다음 날 새벽, 참혹한 전투를 거쳐, 대고포대를 점령한다.
열강의 큰형님으로서 영국은 이때 어려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극동의 국면이 이처럼 어지러워 졌으므로 영국의 이익과 권위를 위하여는 반드시 군대를 출동시켜야 했다. 다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던 영국은 이때 움직일 병력이 없었다. 영국군의 주력부대는 남아프리카에 붙잡혀, 네덜란드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역사상 "보어전쟁"이라고 칭하는 전쟁이다. 보어전쟁은 호주인들의 주의를 끌었다. 호주의 각 식민지는 남아프리카에 2500명의 정규군과 3500명의 민병(Citizen's Bushmen)을 파견하였으며, 남아프리카에서 오는 전사, 전상소식은 당시 신문들의 머릿기사를 장식했다.
가장 성숙한 식민지의 하나로서, 인도군대도 이미 대영제국에 의하여 세계각지로 보내어졌고, 영국주력군이 부족한 남아프리카로 보내어 후방의 방어를 담당했다. 이때 동아시아가 화급해졌으니, 영국은 할 수 없이 다른 식민지(혹은 유사식민지)에서 군사력을 빼낼 수밖에 없었다. 조직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웨이하이웨이(威海衛)의 "화용영(華勇營)"도 경진(京津, 북경천진)지구로 이동되었고, 홍콩군단, 싱가포르군단 및 약간이 인도군단이 합쳐서 영국군의 주력을 이루어, 8국 연합군에 참여하여 천진과 북경의 전투를 이끈다.
호주는 아시아태평양지구의 유일한 백인국가이며, 대영제국의 진정한 자제병이다. 영국정부는 호주 각 식민지의 의견을 물었는데, 각 식민지는 흔쾌히 '조국이 부른다면' 바로 파병하여 참전하겠다고 밝힌다.
해군부대의 조직
호주는 사실 파견할 군대가 없었다. 육군의 주력은 이미 1899년 10월에 있는 대로 모두 남아프리카로 보내어졌다. 황급히. 새로 군대를 모집해서 훈련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유일한 방법은 해군(bluejackets)을 조직하여 중국에 보내는 것이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전투력있는 해군을 가지고 있었고, 자주 해군을 동원하여 육상에서의 군사 활동도 수행했다. 1885년 호주의 각 식민지 해군들은 공동으로 "호주수단부대(Australian Sudan Force)"를 조직한 바 있었다.
육군을 조직하는 것과 비교하여 해군부대를 조직하는 것은 쉬웠다. 상당한 인적자원도 있었다. 호주는 당시 몇 갈래의 약간의 규모를 갖춘 해군부대를 만들고 있었었다.
1854년, 크리미아전쟁(Crimean War)이 발발하자, 영국과 러시아는 서로 부닥쳤다. 호주 각 식민지는 처음으로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을 느낀다. 그리고 러시아함대가 남하할 것을 우려했다. 당시 영국 로얄 해군의 호주에서의 역량은 아주 약했었다. 겨우 1척의 작은 포함과 1척의 측량함 그리고 4척의 작은 배가 있을 뿐이었다.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대영제국은 1859년부터 로얄 오스트레일리아함대를 건설하여, 호주의 해역을 방어하도록 한다. 당시 "새로운 황금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던 빅토리아식민지(수도는 멜버른)은 해군을 자체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구매한 빅토리아호 경순양함은 1865년까지 호조본토해군의 유일한 군함이었다.
1860년대, 영국군대가 점차 호주를 떠나면서, 호주본토군대를 조직하고 확대하는 것이 급선무가 된다. 1865년, <<제국식민지해역방위법안(Imperial Colonial Naval Defence Act)>>에서는 식민지에서 본토해군을 결성하도록 요구한다. 호주군의 역사상, 이는 본토해군이 대양을 방어(Blue Water Defence)하는 시작으로 본다.
빅토리아 이외에, 또 다른 두 개의 식민지 뉴사우스 웨일즈(수도는 시드니), 퀸즈랜드(수도는 브리스베인)도 해군을 만든다. 이 3개의 본토해군은 점차 경험이 풍부한 장교들을 보유하게 된다.
6월 27일, 대영제국 식민부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수도는 아들레이드) 식민지총독에게 긴급전보를 보낸다. 그리고 이를 각 식민지 총독에게 재발송하게 한다. 여기서 호주가 긴급히 3척의 중국에서 장강 등 유역을 항행할 수 있는 선박을 징집하라는 것이었다. 제국정부는 제국직할하의 로얄 해군 호주함대에서 2대를 빼내고, 호주예비역함대(Auxiliary Squadron)에서 1대를 빼내고자 했다. 후자의 경비는 호주 각 식민지와 제국정부가 공동으로 부담하는 것이었다. 법률규정에 의하면, 군함을 호주이외의 해역으로 이동하려면 반드시 식민지연합회의의 동의가 필요했다.
6월 29일, 빅토리아식민지정부는 먼저 동의한다. 그리고 자기의 200명가량의 부대를 1주일내에 군복을 갖추어 출발준비를 시키겠다고 한다. 그리고 비용은 스스로 부담하겠다고 한다. 이후 각 식민지정부도 속속 지지를 표명한다.
최대의 식민지인 뉴사우스웨일즈는 각 식민지가 자체무장 1척 혹은 여러 척의 예비역 선박으로 중국에 직접 참전하자고 제안한다. 다만, 비용은 제국정부가 부담해야 한다고 한다. 뉴사우스웨일즈정부는 심지어 제국군대의 중국에서의 행동에 대한 군사물자공급까지도 희망했다. 이를 위하여 뉴사우스웨일즈총리는 시골로 내려가서 양식상황을 조사하기도 했다. 이는 분명히 빅토리아식민지가 자체적으로 군비를 부담하겠다고 한 것과 비교하면, 뉴사우스웨일즈의 건의는 흡인력이 약했다.
여러 곡절을 거쳐, 호주 각 식민지와 대영제국정부는 최종적으로 뉴사우스웨일즈, 빅토리아의 두 식민지에서 각각 하나의 해군부대를 결성하고, 남호주식민지가 제공 군함 1척을 제공해서 중국으로 가서 직접 참전하기로 결정한다.
7월 11일, 빅토리아부대의 조직이 완료된다. 구성원은 대부분 해군이었고, 평균연령은 35세였다. 3/4은 기혼자였다. 이는 남아프리카에 파병된 부대의 평균연령이 겨우 22세이고 거의 미혼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빅토리아식민지가 사병들에게 지급한 급여는 1일 7.6실링이었는데, 이는 사우스웨일즈식민지가 1일 5실링을 주던 것에 비교하면 훨씬 많은 편이었다. 빅토리아가 금광을 가지고 있어 재정이 풍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빅토리아부대는 심지어 1인마다 카키(Khaki) 의류원단을 제공해서 홍콩에 도착한 다음 군복을 새로 해 입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호주군대에 지급한 것은 맥심45 기관총이었다.
뉴사우스웨일즈부대도 7월말에 선발을 완료한다. 해군 외에 그들은 원래 남아프리카전투에 보내려던 육군의 일부인원을 포함시킨다. 그리하여 중국파견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한다. 이들 육군사병은 비록 중국으로 가서 국가를 위해 싸우겠다고 하였지만, 해군에 편입되는 것은 반대했다. 이는 해군의 분노를 불러온다. 그들은 육군과 함께 싸우지 않겠다고 하게 된다. 결국, 이 소부대는 절충안으로 "뉴사우스웨일즈 해군육군대경보병"으로 지칭하게 된다. 육군과 해군의 특징을 모두 살리게 되는 것이다.
대영제국은 살라미스호(SS Salamis) 병력수송선을 보내어 호주군단을 운송한다. 7월 30일, 빅토리아부대는 멜버른에서 성대한 무장시위를 벌이고, 현지민중의 환호를 받고, 출발 선서를 한다.
8월 4일, 살라미스호는 시드니에 도착한다. 현지에서 음악회 등 위로행사를 벌인다. 이후 뉴사우스웨일스부대가 선박에 올라, 두 부대가 회합한다. 8월 7일, 살라미스호는 성대한 환송의식을 치른 후 시드니항을 떠난다. 등대에는 다음과 같은 구호가 내걸렸다: "일로평안(一路平安)". 그들의 배에는 다음과 같은 구호로 답변했다. "See You, 오스트레일리아"
그 후 살라미스호는 잭슨군항에 머물다가, 다음 날 중국으로 떠난다.
8월 10일, 남호주식민지가 파견한 군함인 Protector호가 잭슨 군항을 출발한다.
홍콩에서 장비를 바꿈
살라미스호는 뉴사우스웨일즈부대와 빅토리아부대를 싣고 8월 16일 적도를 넘고, 8월 26일, 홍콩에 마침내 도착한다. 홍콩의 빅토리아항구에 정박한다.
이때, 북경의 상황은 이미 많이 바뀌어 있었다. 8국 연합군은 8월 14일 북경으로 쳐들어갔고, 서태후와 광서제는 북경을 빠져나가 도망쳤다. 전체 화북지역이 일대 혼란에 빠졌다.
영국군대는 화북지역에서 주로 유색인종으로 구성된 고용군에 의존했다. 홍콩에 파견된 Royal Welsh Fusilliers(황가웨일스수발총병)과 Royal Horse Artillery(황가기마포병)이 백인부대였다. 홍콩총독은 이 두 '자제병'을 급히 홍콩으로 불러들여 중국인들의 소란과 폭동을 방어하고자 하였다. 8국 연합군 중에서, 대다수 국가가 데려온 것은 본토의 군대였다. 그러므로 실전경험이 부족했다. 호주군대의 "순영국혈통"은 영국지휘관으로 하여금 아주 흥분하게 만들었다. 호주군대를 신속히 화북에 배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홍콩기지에서는 호주군대의 낙후한 장비를 신식장비로 교체하였다. 그들에게 교부된 맥심45기관총은 임시로 빌려주는 것이었고, 임무가 끝나면 반환해야 하는 것이었다.
8월 29일, 영국사령부는 호주군대를 살라미스호로 계속 북상시켜 천진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중국 야전군 대영제국 제1군(First Brigade British Contingent, China Field Force)"에 편입시킨다. 같은 날, 호주군대는 부두에서 방대한 독일원정군의 발더시(Alfred Graf von Waldersee)의 지휘 하에 유럽에서 왔다. 독일군대의 살기등등한 모습은 호주군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8월 31일 새벽, 살라미스호는 홍콩을 떠난다. 셋째 날 오송구에 도착한다. 호주군대의 주요 장교들은 상해를 방문 중이던 영국해군사령관 Jane Seymour를 예방하고, 최신명령을 받는다. 대고로 가서 경계업무를 담당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호주군대를 실망시켰다. 대고항은 생활조건이 열악할 뿐 아니라, 전투를 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9월 4일, 오송에 주둔하던 영국해군 클라크 선장(Captain Clarke)은 호주군대에 동원령을 내린다. 그는 자세하게 호주인들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생수를 먹지 말고, 야채는 모두 주의하라. 중국은 위생조건이 열악하니, 쉽게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중국통이라고 자처하던 영국장교는 호주군대를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기억하라. 너희는 여왕과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너희를 호주군단이라고 부르겠고, 이것도 아름다운 이름이지만, 그래도 기억해라. 너희는 사실 호주에서 온 영국군단이다"
마침내 화북대지를 밟다.
9월 8일 오전, 호주군대는 대고구(大沽口, 지금의 천진부근)에 도착한다. 그리고 130여척에 이르는 각국함대의 대열에 동참한다. 그들은 항구를 관리하는 연합군장교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여러 나라의 군대가 한꺼번에 움직이므로 항구관리는 아주 어려웠기 때문이다.
호주군단은 새로운 명령을 받는다. ‘빅토리아부대는 천진에 주둔하고, 뉴사우스웨일즈부대는 계속 북경으로 진격하라.’
9월 15일, 호주군대는 화북땅을 밟는다. 그들의 일기에서, 이 비옥한 토지는 전란으로 황폐해져 한탄이 나올 정도였다. 당고에서 천진으로 가는 길은 러시아가 점령한 하동지구였다. 여기는 거의 모든 마을에 불에 탔고, 거의 모든 집에 지붕이 없었다. 러시아인들은 중국인 노동자들을 강제 노역시키고, 일이 끝나면 총살하거나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일본, 미국과 영국연합군이 점령한 하서지역의 집들은 기본적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호주 종군기자 위느(Wynne)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날 방 숙영을 하다가, 호주군대는 중국모기와 각종 작은 곤충의 맹렬한 공격을 받는다. 다음 날 오후 1시, 그들은 마침내 천진국제경마장(International Racecource) 숙영지에 도착한다.
그들에게 숙영지를 마련해준 것은 호주출신의 Keogh 대위(Captain Keogh)였다. 그는 호주군대를 위하여 천막을 쳐주어서 노숙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다. Keogh는 원래 퀸즈랜드 사람이다. 뉴사우스웨일즈부대에 지원했으나 탈락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비로 중국으로 왔고, 영국군 주천진사령관인 캠팰(Campell) 장군의 눈에 들어 그의 참모가 되었고, 인사를 담당했다. Keogh는 나중에 경찰책임자(Police Magistrate)가 되었고, 아래에 120명의 호주군, 40명의 독일군 및 일부 인도 및 중국경찰을 관할했다. 그리고 매일 3,40건의 사건을 처리했다. 사령부에서 일하고 있으므로 그는 여러 차례의 군사작전과 경찰작전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제1차 진격
9월 16일, 막 자리 잡은 호주군단은 전투명령을 받는다. 빅토리아부대와 뉴사우스웨일즈부대는 함께 300명을 파견하여 연합군에 의한 수륙요새 북당(北塘)을 공격하는 임무였다.
출발 후에 영국군은 러시아인들이 통제하는 철도에 독일인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배를 타고 수로로 갔다. 10여 시간을 간 후에 비로소 러시아군의 전투병원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철도사용을 불허했던 러시아가 이미 1시간 전에 목적지를 점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화가 났지만 영국군대는 거기에서 숙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충분한 먹거리와 마실 물을 구할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다행인 것은 중국군대의 주력이 일찌감치 북당에서 물러났지만, 저격수를 배치하여 러시아군의 전사, 전상이 아주 많았다는 점이었다.
호주군대의 첫 번째 군사행동은 연합군내부의 알력으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끝이 난다.
호주군대의 천진에서의 생활은 아주 힘들었다. 야채와 빵이 제대로 조달되지 않았다. 뉴사우스웨일즈 부대의 한 병사는 독감으로 죽어서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전체 호주군대의 약 1/4은 독감, 이질, 고열에 시달렸다.
군기위반사건도 비교적 많았다. 대다수의 군기위반은 음주소란이었다. 비교적 중대한 사건은 두 건의 중국의 빨래하는 여자를 협박한 것이었다. 이는 프랑스군에 의하여 지적되었고, 군기를 담당하던 뉴사우스웨일즈 부대의 부사령관 Conner는 이에 대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10월 상순, 뉴사우스웨일즈 부대는 명을 받들어 북경성으로 향한다. 빅토리아부대는 천진에 남는다. 헤어지기 전에, 그들은 공동으로 연합군총사령관 발더시의 열병을 받는다. 이번 열병에서, 연합군내부는 의사소통문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호주군대는 3일간이나 철도역에서 기다렸는데, 3일째 비로소 이 총사령관이 나타난 것이다. 사병들은 일기에서 원망을 많이 토로했다.
북경진입후의 살상행위
10월 10일, 뉴사우스웨일즈 부대는 북경으로 향한다. 이들은 홍콩으로 돌아가는 웨일즈부대의 무기를 물려받았다.
그들은 대량의 중국 배를 고용하여, 짐을 실었다. 북경의 연합군부대가 가져간 3만 건의 군용모포는 강가의 길로 중국인 일꾼들이 끌고 전진했다. 대위 Spain은 카메라를 가지고, 해군후보소위 Midshipman Murnin은 이번 기록에 대하여 상세한 일기를 남겼다. 뒷사람들이 이들의 행동을 알 수 있게 한 것이다.
이틀 후, 그들은 양촌에 도착한다. 거기서 미국해군육전대의 초소를 만난다. 이는 호주군대가 처음으로 전투지에서 미국군을 만난 사건이다. 호주인들은 미국군으로부터 적지 않은 좋은 물건들을 구매한다. 맣은 경우 시드니보다도 훨씬 싸게 살 수 있었다. 이는 사람들을 아주 흥분시켰다. 그들은 미국군의 풍부한 물자조달에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 그들은 낙오된 이탈리아사병을 만난다. 그는 막 중국인에게 총을 빼앗긴 상태였다. 뉴사우스웨일즈 부대와 함께 북경으로 간 사람 중에는 4명의 방글라데시병사가 있었는데, 즉시 추적해서 몇번 수색한 끝에 총을 빼앗은 중국인을 잡아냈다. 호주군대의 장교가 이 중국인에게 내린 처벌은 그들에게 무거운 맥심기관총의 다리를 들고 몇 시간동안 따라오게 한 후 풀어준 것이었다.
모닝은 일기에서 일요일에 숙영한 후, 무료하여, 마을에 가서 골동품을 구했다고 한다. 사묘에 모신 신상을 제외하고는 가치나가는 물건이 없었다. 그리하여 민가의 벽에서 서화를 떼어내서 전리품으로 삼았다고 한다.
십일 간의 행군을 거쳐, 뉴사우스웨일즈 부대는 북경의 동교민항에 있는 영국공사관에 도착한다. 부대는 3부분으로 나뉘었다. 1명의 장교와 50명의 사병은 공사관방위를 책임지고, 3명의 장교와 60명의 사병은 라마묘로 보내어져 방위를 책임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장왕부(庄王府)로 보내어지고 거기에 사령부를 차렸다.
호주를 떠난 이래, 그들은 처음으로 집안에서 잠을 잤다.
라마묘는 호주군의 지휘소였다. 비단창고가 붙어 있었는데, 하루는 지휘소와 창고사이의 민간인집에 불이 붙었다. 호주군은 불을 지른 중국인을 붙잡았더니 불탄 집의 주인이었다. 통역관을 통하여 그가 유명한 의화단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용감한 의화단원은 먼저 집안 식구를 내보내고, 자기의 집에 불을 지른 것이다. 호주군대를 화공으로 죽여 버리려 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다섯 명의 호주사병은 행형대를 조직하여, 이 의화단원을 총살한다. 이는 뉴사우스웨일즈 부대가 중국에서 행한 첫 번째 처형이었다.
뉴사우스웨일즈부대는 북경에서 여러 차례의 의화단원 총살을 집행한다. 발더시가 부임한 후, 중국인들을 겁주기 위하여, 체포한 의화단원은 일률적으로 참수방식으로 처결한다. 호주군대는 이것이 너무나 비인도적이라고 생각하여, 더 이상은 행형업무를 맡지 않는다.

장왕부의 호주군인
약탈의 광기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뉴사우스웨일스부대의 한 사병이 북경에서 보내온 서신을 실은 바 있다. 중국수도의 비참한 생활이 인간지옥과 같아도 적었다. 거리에는 수천의 주인 없는 개가 이리처럼 중국인의 썩기 시작한 시신을 먹고 있고, 밤이 되면 총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북경의 각국 군대는 군기가 대체로 엉망이었다. 약탈은 거의 모든 국가의 장교들이 묵인했다. 서방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당시 열강군대는 북경에서, "강간이 레저가 되고, 도살이 오락이 되었다"
호주군대는 명을 받아 의화단 두령이 보유한 저택이라는 곳을 습격했다. 그리고 집안의 가구는 영국군사령부로 옮겨서 쓰고, 남은 것들은 모두 약탈했다. 진귀한 가죽, 비단, 도자기는 금방 경매되었고, 금방 약 350멕시코달러를 얻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가졌다. 다만, 나누어가진 후에, 상사는 다시 명을 내려, 그들에게 물건을 원주인에게 되돌려주라고 했다. 원래 그들의 정보는 잘못된 것이었고, 목표주택의 이웃을 턴 것이었다.
호주군대로 중국인에 대한 약탈행위에 가담한다.
한번은, 라마묘에 주둔하고 있는 호주군대가 중국정보원으로부터 보고를 받는다. 북경의 북쪽 2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장신장(長辛莊)에는 의화단이 대량의 재물을 묻어두었는데, 개략 20만 냥 백은이 된다고 하였다. 영국군의 전리품관리책임자인 Tulloch대위는 아주 흥분했고, 즉시 25명의 서남아인으로 구성된 사병을 데리고 가면서 호주장교 Bertie Black에게 통보하여 같이 가도록 한다.
목적지에 도달한 후 그들은 땅을 판다. 그 중국정보원은 다음 마을인 고려영(高麗營)에 가서 더 많은 재물을 묻어두었는지 알아보겠다고 하고 간다. 그런데, 이 중국인은 고려영에서 분노한 동포들에게 맞아죽는다.
장신장에서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한 Tulloch 대위는 즉시 그의 부하를 데리고 고려영으로 가서, 어디선가 총으로 그들을 공격한다. 그들은 현지의 우두머리와 부자를 붙잡아 와서, 왜 영국군을 공격하는지 따진다. 그리고 3만5천 냥 백은의 벌금을 내도록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마을을 없애버리겠다고 하고, 두 사람을 인질로 삼는다.
고려영에서 자금을 모으고 있을 때, Tulloch대위는 대규모 의화단원들이 결집한다는 정보를 듣는다. 그리하여 부하를 끌어 모아 고려영을 공격하고, 40여명을 죽여 버린다. 마을의 거의 절반이 폐허로 된다.
소식은 북경으로 전해진다. 영국군 사령관인 가슬리는 깜짝 놀라서, Tulloch대위에게 즉시 북경으로 되돌아오도록 명령한다. 영국군은 아주 황급히 퇴각하고, 대다수의 속죄금도 챙겨가지 못한다. 가슬리는 이런 행동을 엄금한다.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으면 절대로 적대행위를 하지 말도록 엄명한다.
1901년 1월 1일후, 가슬리 장군은 친히 고려영을 토벌하고, 속죄금을 받아오려고 한다.
이 "빚 받아내는 군대"는 눈이 내리는데도 목적지까지 힘겹게 찾아간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미 모두 도망간 뒤였다. 연합군은 할 수 없이 마을의 절을 부숴서 분을 풀 수밖에 없었다. 호주의 종군기자인 웨니는 이렇게 썼다. 이런 더러운 '군사행동'의 유일한 목적은 파괴와 약탈이며, 의화단을 진압한다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 이는 '가치 있고 대등한 전투를 갈망했던' 호주군대는 점차 불만을 가지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게 된다.
1900~1901년의 화북지역은 이렇게 각종 핑계를 가진 사람들이 약탈하는 곳이 되어버린다. 먼저 의화단, 그 다음은 관군, 다시 각국 연합군.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일찍이 미국신문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북경에 진공한 것은 약탈의 축제이다" 확실히 늦게 도착한 호주군대는 성과를 올릴 좋은 기회를 놓쳤고, 약탈의 좋은 기회도 놓쳐버렸던 것이다.
"문명 신북경"의 건설
뉴사우스웨일스부대는 북경의 경찰업무도 담당했다. 그들은 중국인의 도박을 금지시키기도 했고, 여러 차례 도박장을 급습하기도 했고, 도박꾼을 체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효과는 아주 미미했다. 위생방역 측면에서, 그들은 중국인들을 모아서 거리를 청소시키고,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에게는 채찍 50대의 중벌을 과하기도 했다.
재미없는 경찰업무에 묶인 호주군인은 충분한 맥주가 없었으므로, 중국의 백주를 배우기 시작한다. 몇 잔의 백주가 뱃속에 들어가면, 호주군인은 미치기 시작한다.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결국 영국군은 백주를 마시는 것을 금지한다. 그리고 중국인에게 백주를 호주병사에게 팔게 되면 바로 채찍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치안책임을 맡은 호주군대는 몇 명의 군관을 법관으로 임명하여, 중국인간의 분쟁을 처리했다. 한번은 한 중국기독교도가 와서 다른 중국인이 권세를 이용하여 그를 공갈 협박했다고 고발했다. 후자는 일찍이 이홍장의 종복이었다. 그러나 이홍장의 종복은 거꾸로 이 기독교도가 외국세력을 이용하여 그를 협박했다고 반소를 제기했다. 호주군관은 양쪽이 모두 거짓말한다고 보고, 둘 다 채찍 50대를 맞도록 판결했다.
종군기자인 웨니는 <<데일리 텔리그라프>>에 보낸 기사를 통해서, 이홍장의 종복을 채찍으로 때린 것은 사람들에게 그의 주인이 더 이상 그를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기독교도를 채찍으로 때린 것은 신앙을 남용하여 사적인 이득을 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홍장의 종복은 채찍을 맞은 후에 호주군관에게 세번 절을 하였다. 원래 그는 서양인의 손에 들어가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보정부(保定府)로 진공 : 추악한 약탈행위
천진에 머물던 빅토리아부대는 1900년 10월의 보정부 전투에 참가한다. 이번 행동은 10월 12일에 시작하였고, 모두 25일이 걸렸다. 호주군대의 전시기록에 의하면, 마을은 기본적으로 파괴되었고, 행군은 아주 힘들었으며, 물자조달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현지의 젖소 한 마리가 잘못 호주군대로 뛰어들었는데, 이는 빅토리아부대에게 오랜만에 소고기를 포식할 기회를 부여했다.
군수물자공급은 아주 곤란했다. 호주군대는 1인당 1일 겨우 2개의 옥수수 빵을 공급받았다. 이런 곤경은 10월 20일이 되어야 완화되었다. 그날 그들은 팔십주에 도착하고, 한 민가에서 대량의 닭과 달걀을 얻는다. 이 집의 주인은 가족을 안전지대로 대피시키고, 자신은 호주군대를 위하여 음식을 해주고, 땔감을 날랐다. 호주군인 하나는 집주인이 아이들 옷을 몰래 숨기는 것을 보았다. 그는 호주군인들이 아이를 해칠까봐 두려워한 것이다.
10월 21일, 연합군이 보정에 도착한다. 그러나 중국수비군은 이미 투항했다. 빅토리아부대는 소위 전도사와 서양 상인을 학살하였다는 '죄인'들을 감독했고, 이들을 독일군에게 보내어 처결하게 하는 업무를 맡았다. 독일군은 죄수들에게 스스로 무덤을 파게하고는, 1열로 세워놓고 총살했다. 시신은 바로 자신이 판 무덤 속으로 떨어졌다. 그 후에 묻어버렸다. 살인업무를 엄격하고 정교하게 하는 것을 보고 호주군대는 깜짝 놀란다.
보정부 정벌은 사실 군사적으로 전혀 필요 없는 짓이었다. 이는 그저 중국평민에 대한 잔혹한 보복행위였다. 독일인들은 주중국공사 Klemens Freiherr von Kettler가 청나라군대에 살육 당하자, 그 보복행위를 한 것이다.
출발 일부터 11월 7일 천진으로 되돌아오기까지, 빅토리아부대는 "기본적으로 적을 만난 적도 없고, 적과 전투를 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으며, 본 것은 모두 약탈, 방화와 처결이었다."
호주군을 따라 움직인 Keogh대위는 사후에 독일인들이 계획대로 교통용구를 준비하지 않았다고 질책하고, 프랑스인들이 고의로 호주군대에게 가장 먼 길을 돌아가도록 어레인지했다고 비난했다(행동은 프랑스군이 통일적으로 지휘했다). 그리하여, 프랑스군대가 제일 먼저 약탈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에 북당전투에서 러시아군이 기차를 배정하지 않고 자기들이 먼저 공격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의 기자가 Keogh에게 물었다. 왜 연합군간의 협력이 이렇게 잘 안되느냐고. 그러자 그는 "우리 브리튼인은 규칙을 지키지만, 다른 나라는 각자 마음대로 해서 그렇다"고 답변한다.
영국인과 러시아인간에 하마터면 전투가 벌어질 날 뻔 하다.
보정부 정벌 후, 빅토리아부대의 주거환경은 많이 개선된다. 결국 천막에서 집으로 옮긴다. 그리하여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게 된다.
바이투트는 11월 14일 중국기독교도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는 다른 호주사병과 함께 300발의 총알을 가지고, 안내인과 통역인과 함께 출발한다. 도중에 두 명의 일본사병도 참가한다. 이 6명의 서로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은 저녁에 한 방에서 함께 휴식을 취했다. 이에 대하여 바이투트는 만감이 교차한다. 다음 날 저녁 그들은 의화단에 의하여 곤경에 빠진 기독교도를 찾아낸다. 55명의 부녀아동, 4명의 상인 2명의 중국 관리를 천진까지 호송한다. 위험에서 빠져나온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여러 번 감사인사를 했다.
빅토리아부대가 참가한 가장 중요한 행동은 러시아군대에 대항한 것이었다. 1901년, 연합군이 천진을 점령하고, 영국군은 엔지니어의 건의를 받아, 경진당 철로 변에 샛길을 만들고자 한다. 이는 러시아인들의 방해를 받는다. 러시아인은 샛길이 지나는 토지가 그들의 조계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쌍방은 갈수록 대치가 격화되고, 일촉즉발의 상태가 된다. 빅토리아부대는 명을 받고 증원에 나선다. 뉴사우스웨일즈 부대도 북경에서 긴급히 60명을 천진으로 보낸다. 러시아군이 배치한 6천명과 비교하면, 영국군은 겨우 1900명에 불과했다. 약세가 분명했던 것이다. 영국은 홍콩에서 황급히 대량의 지원군을 받는다. 정예 로얄웨일즈머시너리는 다시 화북으로 이동명령을 받는다. 결국 다각적인 외교적인 노력을 거쳐, 영국과 러시아는 무장충돌을 면하게 된다.
연합군이 점령한 지역의 경찰로서, 빅토리아부대는 자주 군기가 빠진 각국 군대를 만나게 된다. 일찍이 한 프랑스부대와 마찰이 발생하는데, 프랑스군은 칼을 들고 공격하여, 호주병사가 여러 명 다치기도 하였다.
남호주 군함
뉴사우스웨일즈 부대, 빅토리아 부대와는 달리 남호주식민지는 Protector호 군함을 파견한다. 홍콩에 도달한 후 정식으로 영국 로얄 해군에 편입된다. 그리고 남호주식민지군의 남색군기는 로얄 해군의 백색군기로 바꿔달게 된다. 그리고 영국해군이 사람을 보내어 함장을 맡고, 원래의 함장은 참모장으로 격하된다. Protector호군함은 산해관과 진황도를 공격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사고로 모두 취소된다. 그들은 그저 운송과 호송업무를 맡으면서 중국에서 평화로운 시절을 보낸다.
11월 2일, 영국해군은 Protector호에게 호주로 돌아가라고 명을 내린다. 그런데, 화북에서 홍콩으로 오는 도중에 태풍을 만난다. 11월 24일, 이 함대는 홍콩에서 로얄 해군을 퇴역하게 되고, 다시 호주해군의 편제에 들어가고 남호주로 되돌아간다. 12월 18일, 그들은 시드니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신년까지 그대로 머물다가 1901년 1월 1일 연방성립식을 거행할 때 참가한다.
해외에서 5개월간, Protector호는 한 번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이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호주함장 Clare는 <<아들레이드 업저버>>와의 인터뷰에서, 자기의 부대는 중국에 있던 영국군함중 가장 우수한 것의 하나였고, 질병에 걸린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다른 군함에는 대체로 15-20%의 환자가 있었다. 선박도 잘 관리되어 있었고, 수리가 전혀 필요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을 참전시키지 않은 것은 가장 큰 유감이라고 하였다.
귀국
1901년 3월부터 호주군대는 중국에서 철수하기 시작한다. 방어업무는 홍콩에서 온 로얄웨일스머시너리가 전부 승계한다. 17명으로 구성된 뉴사우스웨일스부대는 스스로 화북에 남아서 고액의 급여를 받으면서 화북지역에서 영국이 통제하는 철도를 관장한다.
귀국 전에, 뉴사우스웨일즈 부대의 1등 해병 나이트는 정신질환으로 자살한다.
3월말, 뉴사우스웨일스부대와 빅토리아부대는 방어업무를 인계하고 천진에서 만난다. 3월 29일, 영국군이 파견한 운송함을 타고 호주군대는 대고항구를 떠난다. 호주병사들은 거의 모두 크고 작은 중국의 '기념품'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 군단은 2개의 큰 기념품을 가지고 떠났는데, 하나는 본문의 처음에 언급했던 스페인구리대포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이미 3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던 동종(銅鐘, 구리시계)이었다. 이는 지금도 호주의 수도 캔버라의 전쟁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운송함은 4월 5일 홍콩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다. 20일후, 부대는 시드니에 도착한다. 거기서 엄격한 검역을 받은 후, 5월 3일, 호주정부는 시드니에서 군단을 위한 성대한 환영의식을 행한다. 두 부대는 모두 시드니의 저명한 원형부두를 통하여 상륙한다. 그리고 열병을 받고, 민중들의 환호를 받는다. 이후, 빅토리아부대는 시드니의 Redfern역에서 기차를 타고 멜버른으로 간다.
1903년, 두 부대의 모든 사병은 대영제국으로부터 '중국전쟁훈장"을 받는다.
18. 오병감(伍秉鑒)과 임칙서(林則徐)의 은원
작자 : 미상

오병감
세계최고부호 오병감의 마지막 인생
그는 일찍이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2600만 냥 백은의 가산이든, 3품 벼슬이든 모두 그로 하여금 대청왕조와 서구열강의 틈에 끼어서 편안히 살 수 없도록 하였고, 더더구나 전쟁과 청나라의 몰락을 막을 수가 없었다.
2001년,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1000년간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50명을 선정했다. 그중 중국인은 6명인데, 각각 징기스칸, 쿠빌라이, 유근(劉瑾), 화신(和?), 오병감과 송자문(宋子文)이었다. 다른 다섯 명과 비교하자면, 오병감은 유일하게 상업무역으로 세계최고부자의 반열에 오른 중국인이다.
1839년 3월 10일(음력 정월이십오일), 구정이 막 지나갔는데, 주강(珠江)의 남안 계협가(溪峽街)의 오씨화원(伍氏花園)은 예전의 평정을 되찾았다.
홍루몽의 대관원과도 비길만한 이 화원의 중앙에 있는 대청은 수십 개의 식탁을 놓고 연회를 베풀 수 있을 정도였고, 천명이 넘는 승려가 독경을 하고 예불을 할 수도 있었다. 후화원에는 수로가 주강으로 직접 연결되었다. 적막한 화원에 한 노인이 잠시 쉬고 있었다. 그는 광동십삼행(廣東十三行)의 우두머리인 오병감이었다.
이해에 그는 70세였으며, 바로 보통사람이라는 자식 손자들과 함께 어울려 만년을 즐겁게 보낼 때였다. 그러나 이날부터 그는 편안한 만년을 보낼 수는 없게 되었다.

임칙서
1839년. 금연전석(禁煙前夕)
이날 흠차대신(欽差大臣) 임칙서(林則徐)가 광주에 도착했다. 광주성의 사람들은 서로 앞다투어 이 흠차대신의 풍채를 보려고 나섰다. 오병감의 다섯째 아들인 오소영(伍紹榮)은 현재 이화행(怡和行)의 사장이자 십삼행(十三行)의 총상(總商)이었다. 그가 이 소식을 부친에게 전하자,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던 오병감은 돌연 불안해졌다.
십삼행은 하나의 단순한 무역단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세관의 책임도 맡고 있었다. 지금 광주의 아편밀수는 창궐하고 있어, 십삼행의 우두머리로서, 오병감 부자는 자연히 연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청과의 특수 관계에 의지하여, 오병감은 일찍이 임칙서가 광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임칙서가 왜 오는지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일찌감치 아들 오소영으로 하여금 외국상인들에게 경고를 주어, 칼끝을 향해 덤벼들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다만, 아편을 갖고 오는 외국상인들은 오병감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 관료에 대하여 잘 안다고 생각했고, 임칙서도 다른 관료들처럼 뇌성대우점소(雷聲大雨點小, 천둥소리는 크지만 비는 조금만 내린다)의 결과를 보이면서 지나갈 것으로 생각했고 바람을 한번 일으킨 다음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그들이 오랫동안 중국의 아편밀매업자와의 양호한 협력과 광주지방 관리와의 친밀한 관계를 믿고 있어 자신들의 판단을 더욱 확신했다. 그들은 요행심리를 가지고, 되돌아가지도 않고, 아편을 없애지도 않고, 아편을 실은 배를 대여산의 남쪽에 숨겨두었다.
이러한 사실은 금방 임칙서의 귀에 들어갔고, 이는 오병균이 아편상인과 결탁한 증거의 하나가 되었다.
이날 밤, 오병감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이때, 임칙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다음날 고시할 내용을 초안하느라 바빴던 것이다.
다음 날, 두 장의 고시가 임칙서의 관청문 앞에 내걸렸다. <<수정시고(收呈示稿)>>에서 흠차대신이 이번에 온 목적은 해구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변방시고(邊防示稿)>>에서는 흠차대신 및 따라온 업무인원은 공관 내에서 식사를 할 것이니, 지방에서 공급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 물건을 살 때는 일률적으로 시가에 따라 대금을 지불할 것이며, 외상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흠차대신이 행차할 때 지방관리가 따르지 못한다는 것; 만일 흠차대신을 대접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거두는 등 괴롭히는 일이 있으면, 즉시 엄벌하겠다는 것 등이었다.
이 두 장의 고시는 강 건너편에 있던 오병감의 우려를 더욱 가중시켰다. 그는 임칙서의 믿음과 결심이 모두 자금성안의 도광황제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눈치 챘다. 대청왕조는 이미 아편을 금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서양 상인의 요행심리와 대청왕조의 아편금지의 결심은 모두 오병감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전대미문의 위기가 다가옴을 느꼈다.
그리고 이때, 대적을 맞이한 것은 오병감만이 아니었다.
십삼행의 보순양행(寶順洋行)에는 영국상인 Lancelot Dent(한자로는 "顚地"라고 함)의 마음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영국최대의 아편무역상이었고, 중국에서는 악명이 자자했다. 1836년, 청나라대신인 허구(許球)가 일찍이 도광황제에게 그를 조사해서 체포하라고 상소를 올린 적이 있다. 나중에 등정정, 낙병장 등의 상소문에서도 그를 괴수로 지목하고 있다. 이전에 그는 광주의 지방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처벌을 벗어났었다. 그러나 임칙서가 왔다. 예전처럼 행운이 따라줄 것인가?
임칙서는 확실히 능력 있는 흠차대신이다. 광주에 오기 전에 그는 이미 사람을 보내어 아편밀수상황을 파악했다. 광주에 도착한 둘째 날에 등정정, 이량, 관천배, 예곤 등의 지방 관리와 아편금지에 대하여 논의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외국 아편 상인들의 행적을 조사했다.
며칠간의 조사연구를 거쳐, 임칙서는 "쌍관제하(雙管齊下)"의 방침을 세운다. 한편으로 아편관을 조사하여 폐쇄시키고, 아편매매를 금지하며, 불법상인을 엄벌하여, 근원적으로 아편유통을 금지시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편흡입을 엄금하고, 계연소(戒煙所)를 열며, 강제로 아편을 금지시켰다. 아편의 유통을 철저히 금지시키기 위해서는 외국 아편 상인들부터 손을 써야 했다. 다만, 어떻게 서양인들과 교섭할 것인가? 그래서 임칙서는 먼저 광주 십삼행을 생각해 냈다.
샌드위치신세의 십삼행
심삼행 상관은 광주시 교외 서남쪽에 몰려 있었다. 주강에 붙어 있는데, 그 곳은 번화한 부두였다. 1686년, 광동정부는 13개의 실력 있는 행상을 모아서, 그들을 서양 상선들과 대외무역에 종사하고 관세를 대신 징수하여 납부하도록 지정했다. 1757년, 청나라는 폐쇄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유일하게 광주 한 곳만을 대외통상항구로 남겨두었다. 십삼행은 이리하여 당시 중국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대외무역채널이 되었다.
대외무역을 독점하게 되고, 상인들의 노력을 더하여, 십삼행은 신속히 번영한다. 청나라정부는 십삼행으로부터 매년 얻는 관세수입이 처음에 수십만 냥에서 나중에는 백만 냥을 넘어간다. 십삼행은 점차 "천자남고(天子南庫)"로 불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세계 급의 대상인들이 나타난다. 그 중에는 바로 당시 세계최고부자 오병감도 있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오병감은 재부의 화신이었다. 그의 상인명 "호관(浩官)"은 갑부의 대명사였다. 미국 보스톤에 있는 한 상선은 배 이름을 "호관호"로 지은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일찍이 미국상인이 그에게 진 7.2만 냥 백은의 차용증을 찢어버린 적도 있었고, 그의 미국인 의자(義子)인 존 포브스(나중에 미국의 유명한 철도왕이 된다)에게 50만 냥을 주어 그로 하여금 기창양행(旗昌洋行)을 설립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그의 이런 행동은 외국상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의 투자는 미국, 유럽, 인도와 싱가포르에 미쳤고, 서방학자들은 그를 "천하제일의 대부호"라고 불렀다.
다만, 중국의 전통사회에서, 사회지위와 재부는 일치하지 않는다. "사농공상"의 순서에서 상인은 맨 끝자리를 차지한다. 무역을 독점하면서 돈을 번 십삼행의 상인들은 정부에 돈을 내고 아무런 권리도 없는 관직을 얻는다. 오병감도 거액을 들여 삼품벼슬을 얻는다.
그러나 행상들은 모두 허리에는 만관을 두르고, 머리에는 3품, 4품의 관모를 쓰고 있었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외국상인들이 본 오병감은 "천생 유약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평생 동안 농담은 딱 1번만 한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의 근검절약은 미국상인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삼품벼슬을 나타내는 관모는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쓰지 않았고, 그저 자기의 생일에나 가끔 쓸 뿐이었다.
사실상, 오병감과 같은 관상은 황제나 관리의 눈에는 언제든지 벗겨먹을 수 있는 상인에 불과했다. 국가에 재난이 발생하거나, 전쟁이 있으면, 황제와 귀족관리들은 돈을 받아갔고, 혹은 지방 관리들이 윗사람에 잘 보이기 위하여 그들에게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대부분은 십삼행이 주도적으로 돈을 냈다. 대만학자 진국동은 관청의 자료를 근거로 하여 1773년에서 1835년까지, 십삼행이 모두 508만5천 냥을 헌납했는데, 이는 그저 사료에 기록된 것뿐이라고 하였다.
끊임없는 부담금과 모금은 그러나 상인들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아니었다. 청나라정부는 천조대국의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십삼행으로 하여금 외국에 부채를 지지 못하도록 하였다. 일단 발생하면, 모든 행상이 연대책임을 지게 되었고, 그 채무는 십삼행의 다른 상인들이 갚아야 했다. 이외에, 청나라정부는 어떤 외국상인이든 십삼행 중 가장 부유한 상인을 담보로 내야 했고, 일단 외국상인이 청나라정부에 세금을 미납하면, 행상이 연대책임을 졌다. 이렇게 하여 십삼행의 "보상제도(保商制度)"가 형성된다.
십삼행은 정부와 관리의 착취를 당할 뿐 아니라, 그들은 외국의 대상인들에게도 잘 보여야 했다. 오씨 가족이 영국동인도회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많은 무역액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고, 세계최고부자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작은 상인들은 관리의 착취를 받은 후에 굴리는 현금이 부족하였는데, 이런 때는 외국상인으로부터 돈을 빌려 겨우겨우 유지해갔다.
이런 상황 하에서, 십삼행의 행상들은 언제든지 리스크를 안아야 했다. 대만학자 진국동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절대다수의 행상들에게 있어서 파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장사를 시작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다"
행상들은 이러한 틀을 벗어나고자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십삼행의 동문행(同文行)의 행상인 반정형(潘正亨)은 "차라리 한 마리의 개가 될지언정, 행상의 우두머리는 되지 않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오병감도 여러 번 은퇴를 신청했으나, 관청에서 허가하지 않았다. 1826년, 그는 50만 냥의 대가를 치르고, 이화행의 업무를 넷째아들 오원화(伍元華)에게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그로 하여금 모든 행상의 보증을 서게 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재산 중 80%를 정부에 무상으로 출연할 테니, 정부에서 그와 이화행의 관계를 끊도록 허가해달라고 하였다. 자신은 20%의 재산만으로 말년을 편하게 보내겠다는 것이었지만, 여전히 허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839년에 되어서도, 그가 여전히 이화행의 책임자이고 십삼행의 영수였다.
1938년 금연운동
3월 18일, 오병감의 아들인 오소영과 다른 행상이 임칙서의 부름을 받았다. 임칙서는 행상들이 무슨 변명을 하기도 전에 그들이 결탁하여 아편무역을 용인했다고 질책했다.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외국상인들에게 연락하여 3일내에 아편을 내놓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병사들을 몰래 상관에 보내어 외국 아편 상인들의 행동을 감시했다.
임칙서의 견해에 따르면, 오씨 집안과 십삼행은 아편밀수에 대하여 감찰과 저지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이는 '직무유기죄'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후세인들은 그들에게 '서양 상인과 결탁하여 아편을 밀수했다"는 매국상인의 낙인을 찍었다.
오병감 일가는 아편밀수를 했었는가?
사료 상으로 보면, 오씨 집안의 이화행은 정상적인 무역에만 종사하였다. 차(茶) 무역이 주요업무였다.
다만, 일부 오씨 집안이 담보한 외국상인은 폭리를 취하기 위하여, 왕왕 아편을 끼워 들여왔다. 그리고 서양 상인들은 불법밀매업자들과 아편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가장 큰 아편무역상인 Dent가 포함된다. 그리고 오병감의 의자로 미국 기창양행의 사장인 존 포브스가 포함된다.
당시의 '보상제도'에 따르면, 외국상인이 아편밀매를 하는 것이 밝혀지면, 담보한 행상은 전체 십삼행과 함께 모두 책임을 지게 된다. 1817년, 이화행이 담보한 미국상선 한 척이 아편무역을 하는 것이 관청에 적발되었고, 오병감은 별금 16만 냥을 납부해야 했고, 다른 행상은 5000냥의 벌을 받았다. 벌금은 당시 아편가격의 50배였다.
그리하여, 아편밀수는 폭리를 취할 수는 있었지만, 십삼행의 행상들은 모두 회피하였다. <<동인도회사의 대중국무역편년사>>의 기록에 따르면, "광주행상중에는 누구도 아편무역과 관련이 있는 자는 없다.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일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미국상인인 헌트고 그의 저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 행상도 이런 매매를 하고자 하지 않았다"
임칙서의 훈계를 다 듣고 난 후, 오소영은 양행으로 가서 서양 상인들에게 임칙서가 외국상인들에게 아편을 내놓아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을 선포했고, 그리고 중국에 오는 외국상인들에게 반드시 다음과 같이 성명하도록 하였다: "이후 오는 배에는 절대로 아편을 싣고 오지 않겠다. 만일 가져온 것이 적발되면 화물은 모두 몰수되고, 사람은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겠다."
한편은 조정관청이고, 한편은 여러 해 동안 무역거래를 해온 사업파트너이다. 양쪽 모두 다루기 어려운 상대이다. 다만, 오병감은 잘 알고 있었다. 일이 커질수록 누구에게든 좋을 일은 없다는 것을. 일단 대외무역이 중지되면, 오씨 집안과 십삼행은 모두 상상할 수 없는 손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위기를 해소시키고자 하였다.
다만, 이 며칠간 오씨 집안과 서양 상인들의 교섭은 순조롭지 못했다. 쌍방은 모두 양보를 하지 않았다. 관청에서 정한 기한이 다가오자, 오병감은 부득이 자기의 재산으로 외국상인들의 손실을 배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외국상인들에게 정부에 협조해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적은 양의 아편을 가지고 왔던 외국상인은 아편을 내놓겠다고 동의하였는데, 최대의 아편상인인 Dent는 협조를 거절했다.
Dent의 보순양행과 오씨 집안의 이화행은 아주 친밀한 관계였다. Dent의 태도는 오병감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는 5년전의 Napier(律勞卑, William John Napier)사건을 떠올렸다.
사실상, 영국인은 중국의 조공제도에 일찌감치 불만이 있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협상을 통하여 중국과 평등한 외교 및 무역관계를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1834년, 영국의 주중구강무감독인 Napier는 양광총독인 노곤(盧坤)에게 공문을 보냈다. 그는 중국정부가 관리들이 외국인과 직접 내왕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이 있는 줄 몰랐다. 노곤은 이 공문은 그의 1품 관직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Napier의 요구를 딱 잘라서 거절했고, 그에게 즉시 마카오로 되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Napier는 마카오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노곤은 무역을 중단시키고, 상관을 봉쇄하도록 명령했으며, 공급을 끊어버렸다. Napier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두 척의 군함을 이끌고 주강을 올라왔다. 그리고 군함을 인도로 보내어 병사를 데려왔다. 이와 동시에, 노곤은 주강을 봉쇄하고 68척의 전함을 모았다. 그리고 도광황제의 허가를 받아 무력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Napier는 학질로 몸이 약했는데도 봉쇄를 17일간이나 견뎌냈다. 그는 본국상인들의 지지를 잃고 나서야 할 수없이 포기하고 조용히 마카오로 돌아갔다.
"Napier사건"은 청나라관리들(임칙서 포함)에게 대담하게 상관을 봉쇄하기만 하면, 외국인들은 독안에 든 쥐이며, 치지 않더라도 굶겨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또 다른 측면으로 영국인들에게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청나라의 무역제도를 변경시킬 수 없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오병감은 민감하게 포연의 냄새를 맡았다. 다만, 그는 청나라정부의 무역정책 하에서가 아니라면, 십삼행은 존재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외국상인의 지지가 없이는 오씨 집안의 상업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이때, 그와 십삼행의 유일한 활로는 갈등을 풀고, 전쟁을 막는 것이었다.
3일후, 오소영은 외국상인들이 내놓은 1037상자의 아편을 임칙서에게 내놓고, 이것으로 끝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미리 조사해두었던 임칙서는 대노한다. 이때, 그는 광주지주, 남해지현, 번우지현이 보내온 보고서에서 "아메리카의 오랑캐들은 아편을 내놓으려는 자들이 많았으나, 홍콩에 자리 잡은 오랑캐 Dent가 방해했다. 왜냐하면 Dent가 가져온 아편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임칙서는 즉시 성명을 발표하여, 아편을 조사하여 처리하겠으며, 법에 따라 집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Dent는 죄악이 엄중하여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Dent로 하여금 와서 재판을 받으라고 하였다.
그날 오후, Dent는 소환령을 받고, 그는 임칙서에게 친필로 24시간 내에 돌려보내겠다는 보증을 발급할 것을 조건으로 요구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임칙서는 이 1037상자의 아편은 분명히 십삼행이 외국상인들과 결탁하여 관청을 기망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오병감에게 본때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한다.
3월 23일, 임칙서는 사람을 보내어 오소영을 결탁하여 흠차대신의 거주지로 끌고 와 심문한다. 오씨 집안은 다시 타협하여, 집안재산을 내놓겠다고 한다. 그러나 임칙서는 딱 잘라 거절한다. "본대신은 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네 머리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오소영의 관직을 박탈하고, 감옥에 가둔다.
같은 날, 임칙서는 오병감과 또 다른 행상인 반정위의 관직을 박탈하고, 쇠줄에 묶어서 보순양행에 가둔다. Dent에게는 빨리 나타나서 재판을 받도록 재촉한다. 그리고 만일 Dent가 오지 않으면, 오병감과 반정위를 죽이겠다고 한다. 그러나 Dent는 이 두 옛 친구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여전히 나오길 거절한다.
비록 임칙서가 오병감을 처결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소동을 겪으면서 오병감의 체면은 땅에 떨어진다. 그가 거액을 들여서 사들인 3품 관직은 그에게 권세를 가져다주지 못했고, 심지어 자신의 재산과 존엄도 지키지 못했다. 그가 생명을 담보로 보호했던 영국 상인은 그의 생명이 위협을 받을 때,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를 버렸다.
임칙서는 오소영을 석방한 후, 그에게 외국상인들로 하여금 아편 전부를 내놓게 하도록 독촉하게 하고 3일내에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오씨 집안은 다시 한번 Dent와 협상을 벌인다. 그리고 그에게 아편을 내놓고 사건을 마무리하도록 설득한다. 다만, Dent의 태도는 영국 주중국상무감독 Charles Eliot(義律)이 온 후로 더욱 강경하게 바뀐다.
3월 24일, Eliot는 마카오에서 광주로 온다. 그는 Dent를 도망치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영국 아편 상인들에게 아편을 내놓지 말도록 교사한다. Eliot의 이번 조치의 진실한 목적은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크게 확대하여 전쟁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영국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치자 임칙서는 오병감과 십삼행에 적잖이 실망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을 통하여 외국상인들과 교섭하지 않기로 한다. 노곤의 조치를 본받아 직접 상관을 봉쇄하고, 식량과 물의 공급을 끊어버린다.
외국상관에는 적지 않은 상인들이 아편무역과 관련이 없었다. 만일 인명사고라도 난다면 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인도적인 견지에서 그리고 자신의 이익측면에서, 오병감은 아들로 하여금 몰래 외국상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나중에 오씨 집안이 매판상인으로 매도되는 근거가 된다.
3월 28일, 아직 전쟁준비를 마치지 않은 Eliot는 서로 맞부닥쳐서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할 수 없이 아편을 내놓게 된다.
1839년 6월 3일, 임칙서는 세계를 놀라게 한 호문소연(虎門銷煙)을 실시한다. 이때, Dent와 Eliot는 영국외교대신 Henry John Temple Palmerston(중문으로 巴麥尊이라 함)에게 보낸 서신이 브리튼으로 향한다. 중국과의 전쟁이 무르익고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
1840년 6월, 영국원정군은 주강입구를 봉쇄하고, 아편전쟁이 발발한다. 한 미국상인의 기록에 따르면, 오병감은 당시 놀라서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아편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는데, 결국 철저한 실패로 돌아간다. 오병감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따. 그는 그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중국이 승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오병감은 잘 알고 있었다. 영국이 이번 전쟁을 일으킨 근원은 바로 십삼행의 무역독점에 대한 불만때문이고, 직접 중국과 무역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이번 전쟁은 중국정부의 조공무역제도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십삼행의 이익에 대한 전복이었다. 일단 영국이 이기면, 의심의 여지없이 십삼행의 지위는 상실되어버릴 것이다.
오씨 집안과 다른 행상은 모두 이번 전쟁에 거액의 재산을 내놓았다.
아편전쟁이 정식으로 발발하자, 영국군함이 광동의 호문밖에 왔는데, 견고한 횡당서 방어공사로 인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이 공사는 바로 2년 전에 오씨 집안 등 행상들이 10만 냥의 백은을 갹출하여 만든 것이다. 오랫동안 청나라정부의 "천자남고"였던 십삼행은 아편전쟁 기간 중에 당연히 국가를 위하여 계속 자금을 수혈해 주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오병감과 십삼행은 적극적으로 모금활동을 벌이고, 돈을 내서 보루를 쌓고, 전선을 건조하고, 대포를 만들었다. 상인으로서 오병감은 이에 대하여 좀 억울한 점이 없지는 않았다. 그가 한 미국상인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그가 거대한 압력을 받고 있다고 적었다: "나처럼 나이든 사람에게는 실제로 너무나 무거운 부담이다."
그렇지만, 청나라 군대는 완전히 궤멸했다. 이상한 것은 영국군이 그래도 광주성으로 쳐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광주성이 금성탕지처럼 단단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실제로 1841년 5월, 영국군이 광주성까지 밀고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당시 혁산(奕山)은 싸울 능력도 싸울 마음도 없었다. 그리하여 행상들을 내세워 조정을 시도한다.
광주성 밖에서, 명을 받은 오소영과 영국군의 우두머리 Eliot는 협상을 시작한다. 사실상 오소영등은 협상할 꺼리는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오씨 집안의 또 하나의 어쩔 수 없는 장사였는지 모른다. 결국 쌍방은 <<광주화약(廣州和約)>>을 체결한다. 이 화약에서는 청나라 군이 광주성바깥 60리를 물러나고, 1주일 내에 배상금 600만원을 내놓으며, 영국군은 즉시 호문포대바깥으로 물러난다는 것이었다.
600만원이라는 거액의 배상금으로 광주성의 안전을 확보했다. 이것은 물론 비애이다. 이 거액의 돈중 1/3은 십삼행의 상인들이 내놓았고, 그중 오병감이 가장 많은 돈을 내놓았다. 110만원을 내놓았다.
배상금으로 도시의 안전을 확보한 것에는 행상들의 희생이 제일 컸다. 그러나 광주성을 지킨 공로는 혁산에게 모두 돌아갔다. 그는 청나라정부에 보고하면서 상인들이 돈으로 구걸하여 강화한 진상을 숨겼다. 그저, '외국상인들과의 일은 이미 안정되었다'고만 보고했다. 도광황제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혁산이 능력 있다고 칭찬했다.
유감스러운 점은, 이번에 행상들의 노력으로도 오병감등에게는 아무런 영예가 돌아오지 않았고, 더 많은 비난만 쏟아졌다는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서양인들과 장사를 하던 행상들은 중국인들에게 '매국노'로 찍혀버렸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기부하든지간에, 이 낙인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돈을 내고 평화를 구걸하는 것도 열혈애국자들의 뜻과는 어긋났다. 이것은 치욕이고, 당연히 그 질책은 협상에 가담한 오씨 집안과 십삼행의 행상들에게 돌아갔다.
청나라정부는 전쟁에서 패한 후, 영국과 담판에 들어간다. 조정 관리의 추천 하에, 오병감의 아들인 오소용이 오랫동안 영국인들과 협상한 경험이 있다고 하여, 남경으로 불려가서 중국측대표가 되어 영국측과 협상을 벌이게 했다. 오소영은 명령을 받은 후 즉시 북상했다. 그러나, 그가 남경으로 가는 도중에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진 기영(耆英)을 대표로 하는 청나라조정은 아주 불평등한 <<남경조약>>에 서명을 마쳐버린다.
아마도 오소영을 대표로 하는 중국 측이 영국 측과 협상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결론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오씨 집안이 중국 역사를 바꿔 쓸 수 있는 이 기회는 이렇게 지나가 버렸다.
1842년, 아편전쟁은 중국의 패전으로 끝이 나고, 패전의 결과는 오병감과 십삼행이 부담했다.
<<남경조약>>의 제4조 내지 제7조는 중국이 영국에 2100만 냥의 은원을 배상하여야 하는데, 이는 1470냥 백은에 해당했다. 이때 청나라정부의 국고에 남아 있던 은은 겨우 700만 냥에 불과했다. 광동 십삼행은 청나라정부의 착취대상이 된다. 이번의 배상금에서 오씨 집안은 100만 냥, 행상공소에서 134만 냥, 다른 행상들이 66만 냥을 나누어 부담한다.
이외에 오병감이 걱정했던 대로, 영국은 이 기회에 행상제도를 없애버린다. <<남경조약>>의 규정에 따라, 광주행상은 더 이상 무역을 독점하지 못한다. 5개의 항구가 개방되었고, 십삼행의 무역특권은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하게 되었다.
1843년, 병사
심삼행은 아편전쟁의 최대피해자이다. 십삼행의 우두머리인 오씨 집안은 더욱 거대한 손실을 보았다. 오병감의 계산에 따르면, 전쟁 중에 오씨집안의 손실은 200만 냥 백은을 넘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당시 2600만 냥을 소유한 세계 최고 부자에 있어서 내상이라기보다는 외상에 불과했다. 하물며, 심모원려의 오병감은 미리 사업을 세계로 전개해놓았고, 행상사업만이 오씨 집안의 유일한 생명선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의 오병감은 만사에 의욕을 잃었다.
1842년 12월 23일, 그는 매사추세츠에 사는 미국친구 J. P. Cushing에게 편지를 썼는데, 만일 나이가 많아서 바다의 폭풍을 견디면서 건널 수 없지 않으면, 그는 미국으로 옮겨서 살고 싶다고 했다. "보기에 오호관(오병감)은 양행의 업무에 실망하였을 뿐 아니라, 전체 중국에 실망했던 것 같다." 진국동은 <<동아시아해역1천년>>에서 이렇게 말한다.
1843년 9월, 오병감은 내우외환 중에 오씨 화원에서 병사한다. 향년 74세이다.
그는 일개상인으로서 국가의 흥망에 책임을 부담했다. 이는 세계최고부자인 그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병감의 비극은 여기에 있었다.
13년 후, 다시 한번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광주 십삼행은 전쟁터가 된다. 그해 12월 15일, 170년 역사를 지닌 상관은 포화 속에서 사라진다. 십삼행은 철저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19. 임칙서(林則徐)는 역사의 공신인가, 죄인인가?
글 : 마가중국(馬可中國)
청나라의 중국에 영향력이 있는 역사인물을 고르라면 아마도 금연공신(禁煙功臣) 임칙서뿐일 것이다. 세계를 놓고 보더라도, 임칙서의 역사적 지위는 흔들릴 수가 없다.
그러나 만일 문을 닫아걸고 말해보자. 임칙서를 중국인 자신의 역사에서 도대체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이것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중국을 반봉건, 반식민지로 몰고 간 그 "아편전쟁(鴉片戰爭)"에서 임칙서는 중요한 당사자이며 참여자중 하나이다. 만일 역사의 '지엽말단(枝葉末端)'을 제거하고 본다면, 임칙서는 두 말할 나위 없는 민족영웅이다.
유감스러운 점은, 역사는 역사라는 것이다. 바로 이 주목하지 않는 '지엽말단'이 임칙서의 시비공과를 기록하고 있다.
그 영향이 컸던 전쟁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는 '아편'이라는 두 자를 덧붙여서 '아편전쟁'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자세히 사료를 살펴보면, 아편전쟁과 아편은 원래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편은 일찌감치 당나라 때, 페르시아에서 중국으로 들어왔다. 아편은 중국에서 아주 듣기 좋은 중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아부용(阿芙蓉). 지금은 아편이라는 말만 들어도 얼굴색이 변하지만, 과거에는 진귀한 약품의 하나로 여겼다. 상류귀족과 문인아사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던 것이다. 왜 아편이 다른 나라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청나라에서만 사회의 공해가 된 것일까? 이는 반드시 중국인들의 발명창조능력에 감탄해야 할 것이다.
아편은 원래 그 아편인데, 청나라인 중국에 들어오면 금방 '먹는 것'(食)에서 '들이마시는 것'(吸)으로 바뀌어 버렸다. 약품에서 사치품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바로 이러한 아편사용방식과 용도의 근본적인 변화로 인하여 아편은 중국에서 사회에 해를 가하는 마약이 된 것이다. 대다수의 할 일없는 청나라 고관귀족들은 여색, 도박에 지친 다음에 아편 속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다.
임칙서는 중국에서 아편을 금지한 첫 번째 인물이 아니다. 아편이 중국에서 수백 년간 정상적으로 유통된 후, 청나라 건륭연간부터 관청에서 금지하게 된다. 아편이 금지된 후, 아편은 각지 관리들이 돈을 버는 거리가 된다. 그들은 보호를 명목으로 고액의 뇌물을 받았다. 아편장사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커지게 된다. 영국아편판매상들은 고민에 빠졌다: 바다에서 그들과 만나는 사람들은 모조리 청나라정부와 해군의 관리들이다. 이것을 '밀수'라고 할 수 있을까?
관료사회의 부패가 극에 달하였고, 사회기풍도 문란하였다. 이것이 바로 청나라에서 아무리 금지하고자 해도 아편을 금지할 수 없었던 근본원인이다. 만일 도광연간이 아니어서, 청나라의 군대가 각지 의군들에게 궤멸당하여 '나라에 쓸 만한 병사가 없었지' 않았더라면, 임칙서는 역사무대에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고, 나타나더라도 그렇게 큰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임칙서가 처음에 광동에 왔을 때, 아무도 그가 진짜로 아편을 금지시킬 줄을 몰랐다. 현지관리들은 관례대로 돈을 집어주고, 이 흠차대신을 돌려보내려고 했다. 아편 밀매상들도 더 많은 돈을 받아가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임칙서에게는 온건책도 강경책도 모두 먹히질 않았다. 비록 중간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아편금지활동은 비교적 순조로웠고, 대량의 아편도 파기해버렸다.
그렇다면, 아편의 거액손실에 영국인들이 화가 나서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일까?
몇 년 후, 저명한 학자 반미평이 영국의 자료를 조사하다가 발견한다. 영국정부는 아편손실로 인하여 간섭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영국정부는 청나라정부가 아편무역을 제지할 권리가 있다고 보았다. 1838년 6월 15일, 영국 외무대신 Henry John Temple Palmerston이 주중국상무감독 Charles Elliot에게 보낸 훈령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편밀수무역에 관하여 영국의 신민이 다른 나라로 가서 무역국가의 법률을 파괴하는 것은 여왕폐하정부가 간섭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이 입은 손실은 반드시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편밀매꾼의 보호자'인 영국주중국상무감독관 Charles Elliot도 아편무역의 반대파이다. 그는 Palmerston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국신민이 아편밀수무역을 하는데 대하여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아편밀수는 영국이 중국에서의 합법적인 무역을 확대하는데 위해가 된다고 보았다.
바로 이 Elliot가, 영국여왕에게 요청하지도 않고, 임칙서와 협상을 하지도 않고, 아편무역상들에게 영국정부가 아편상의 손실을 물어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영국 상인들에게 모든 아편을 내놓게 한다(2만여 상자). 이 조치에 임칙서도 아주 의외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있지도 않은 국제법의 조항을 들먹여서 임칙서를 속인 것을 보면, 공과가 서로 비겼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Elliot를 아편밀매업자와 같은 반열에 두는 것은 확실히 타당하지 못하다.
원래 요란하게 시작했던 아편금지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고 끝난다. 그러나 이어진 두 개의 사건은 중국과 영국을 전쟁으로 몰고 간다. 이것은 바로 "감결(甘結)"고하 "임유희(林維禧)사건"이다.
호문에서 아편을 소훼시킨 후에, 임칙서는 아편을 근절하기 위하여, 공고를 내서, Elliot와 영국 상인들에게 "감결"을 체결하도록 요구한다.
이 "감결"은 성격이 오늘날의 보증서와 같은 것이다. 내용에 청나라의 법령을 규정하는 외에 아편무역이 발견되기만 하면, "물건은 모조리 몰수하고, 사람은 법에 따라 처벌한다"는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외상에게 대청의 율령에 따라 '연좌'로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즉, 영국 상인 1인이 위법을 저지르면, 영국의 다른 상인 및 다른 나라의 상인들도 마찬가지로 징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연좌'라는 중국고대의 율령은 중국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잡고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위법을 하면, 단위의 동료와 친구들도 무서워하게 된다. 왜 그런가? 바로 이 '연좌'가 남겨놓은 후유증인 것이다.
임칙서는 이번에 대청국의 야만적인 '연좌'법령을 문명국가의 상인들에게 강제로 요구했다. 동서방의 사고방식의 차이가 여기서 격렬하게 부딪친다.
Elliot의 신분은 영국의 주중국상무감독이다. 정부의 전권대표는 아니다. 영국여왕을 완전히 대표할 수도 없고, 영국 상인을 대표할 수도 없다. 그가 영국여왕을 대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영국여왕은 영국 상인을 대표할 수 없다. 이 말의 뜻을 임칙서는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황제와 백성을 대표할 수 있는데, 너는 왜 안 된다는 것이냐? 혹시 잔꾀를 부리는 것이 아니냐?
쌍방은 서로 다른 얘기를 했다. 전체 영국 상인은 어쩔 수 없이 광동을 떠나 마카오에서 사업을 하게 된다. 이때 임칙서는 대청국의 국위를 선양하는 큰일을 하나 벌인다. 네덜란드인이 거주하는 마카오로 가서, 대청왕조의 존엄, 주권과 영토는 침범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어서 Elliot에게 명령한다. 돌아와서 '감결'을 하거나, 아니면 중국에서 나가라. Elliot는 분명히 따를 수 없다고 밝히고, 임칙서에게 스스로가 제기한 무리한 요구를 다시 한번 돌아보라고 말한다.
"감결' 건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임유희사건' 벌어진다.
1839년 7월 7일, 한 영국해군이 구룡 침사초이에서 술을 마신 후 촌민과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촌민 임유희가 죽어버리게 된다. 사건발생 후, 영국해군은 즉시 돈을 주고 화해를 하고, 가족들에게 입을 다물도록 요구한다. 이틀 후 임칙서가 그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영국인을 대청률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요구한다. 해군 1명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Elliot는 사망자의 가족에 배상하는데 동의하였고, 사람을 때린 해군을 처벌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청의 율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내놓을 수는 없다고 우겼다. 그는 영국식의 아문을 만들어 이 사건을 심리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임칙서에게 와서 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임칙서는 거절한다. 중국에는 자고로 '사람을 죽이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가법이 있다고 요구한다. 이렇게 하여 영국의 법률과 중국의 대청률이 서로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
쌍방이 대치를 하는 동안에, 임칙서는 8월 15일 명령을 내린다. "모든 무역을 금지한다. 그리고 전선을 보내어 영국선을 봉쇄한다." Elliot는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즉시 영국 상인과 가족들에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도록 통지한다. 임칙서는 그래도 그만두지 않고 다시 명령을 내린다. "촌민들이 영국선박에 일용품을 공급하는 것을 엄금한다. 외국인이 해안에 상륙하면 일률적으로 그 자리에서 처결한다."
반달 후, 영국 상선은 물자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Elliot는 임칙서에게 봉쇄를 풀어주고, 무역을 회복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임칙서는 바로 거절한다.
영국인이 구룡에서 담수를 찾을 때, 현지 관리들은 5,6시간이나 시간을 끌면서 미루었다. 이번에는 영국인들이 화가 났다. 그리하여 최후통첩을 보낸다. 담수를 계속 주지 않으면, 눈앞에 있는 중국선박을 모조리 격침시키겠다. 아편전쟁의 단초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를 근거로, 아편전쟁은 '담수전쟁(淡水戰爭)'으로 불러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이건 복잡한 문제이니,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자.
아편금지는 아편금지이고, 임칙서의 방식은 생각해볼 점이 있다. 임칙서는 아편을 흡입하거나 아편을 매매하는 중국인을 처벌하는 외에 영국의 아편상을 주 타격 대상으로 생각했다. 아편무역을 보호해주는 관리들은 터럭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결국 그도 청나라의 관리였다. 그는 청나라관료사회의 '숨은 규칙'을 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근본을 건드리지 않는 조치였다. 임칙서가 가고난 후에 아편무역은 즉시 부활하고, 아편을 흡입하는 행위는 민국시대까지도 전혀 근절되지 않았다.
임칙서가 이렇게 한 것이 혼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국 상선을 쫓아내기 전에, 그는 영국을 '연구'해보았다. 영국인의 '기본입장'도 파악했다. 영국인은 절대로 대청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그가 얻은 정보는 모두 우매하고 편견이 있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작은 나라이고, 국왕도 여인이라는 것이다. 영국인은 날고기, 치즈 등 소화가 잘 안 되는 식품을 먹고, 중국의 차를 먹어야 비로소 소화가 되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영국과는 거리가 멀어서 물자조달이 안되므로 영국인들이 장기간 전쟁을 벌일 수 없다고 보았다. 전쟁을 하려면 차공급만 끊으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당시 영국은 이미 중국최대의 무역파트너였다. 영국의 사절단이 두 번이나 중국에 온 적이 있다. 무역관계를 개선하려고 시도했었다. 이것들을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 만일 아편금지운동을 통하여, 동서무역대화의 플랫폼을 마련했더라면, 중국의 역사는 아마도 다시 쓰여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편금지를 하는 흠차대신이었으므로,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가 아편금지와 무역금지를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중국은 평등하게 대화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중국인의 아편금지투쟁과 영국인의 무역자유보호노력은 원래 통일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 반대로 갔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오늘날 많은 중국인들은 여전히 대청 관리와 같은 머리 수준을 지니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청나라정부의 입장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임칙서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은 여전히 시기상조이다.
20. 청나라 최후의 과거시험 문제
제1장 : 사론(史論) 5편
"주(周)나라와 당(唐)나라는 외중내경(外重內輕), 진(秦)나라와 위(魏)나라는 외경내중(外輕內重)으로 각각 얻은 바가 있다"는 것을 논하라.
"가의(賈誼)의 오이삼표(五餌三表)설에 대하여 반고(班固)는 비웃었지만, 진목공(秦穆公)이 이를 써서 서융(西戎)을 제압했고, 중행열(中行說)이 선우(單于)에게 조심하라고 하였지만 그의 주장을 듣지 않았다"는 것을 논하라.
"제갈량은 신상(申商, 申不害와 商鞅)의 마음은 없었지만 그의 술(術)은 썼고, 왕안석은 신상의 실질은 썼지만 그 명분은 어긋났다"는 것을 논하라.
"배도(裴度)가 재상은 마땅히 사방의 현명한 인재와 참모를 불러 모아서 사제(私第, 개인집)에서 손님을 맞이하여야 한다고 주청"한 것을 논하라.
"북송이 금나라와 연합하여 연(燕)과 조(趙)의 땅을 도모한 것과 남송이 원나라를 도와서 채(蔡)를 공격"한 것을 논하라.
제2장 : 각국 정치, 예학책(藝學策) 5개
1. 학당(學堂)을 설치하는 것은 목적이 3가지이다: 국민양성, 인재배양, 실업진흥이다. 국민이 자립하지 못하면, 반드시 학교를 세워 그를 가르쳐야 하며, 선량한 덕과 충성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기능과 필수적인 지식을 갖도록 하는 것은 동서각국이 동일하다. 일본은 특히 상무정신을 중시한다, 이것이 국민양성의 교육이다. 정치, 법률, 이재, 외교의 각 전문분야를 중시하고 사람을 길러 쓰게 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재배양의 교육이다; 농업, 공업, 상업, 광업의 여러 학문을 두고, 부국이민(富國利民)을 도모하는 것은 바로 실업진흥의 교육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시급한 것인가?
2. 서방의 외교정책은 왕왕 영토를 보전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실제로는 이익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근백 년 동안의 역사에서 이를 증명하라.
3. 일본은 변법초기에 서양인들을 써서 나라가 날로 부강해졌다. 이집트는 외국인을 천여 명이나 썼지만, 재정재판의 권한을 상실하여 나라가 진흥하지 못했다. 그 이해득실을 상세히 말해보라.
4. 주례(周禮)는 농정(農政)을 가장 상세하게 말했고, 제자(諸子)에도 농가(農家)의 학(學)이 있다. 근래에는 각국이 농업을 연구하는데, 많은 경우는 인사에서 기후로 중점이 바뀌었으며, 토지를 말하고, 자본을 말하고, 노동력을 말한다. 그리고 이 3자를 잘 써는 자만이 지식을 풍부히 할 수 있으며 비로소 오늘날의 학문과 제도를 밝힐 수 있으며, 전문과목이 될 수 있고, 중요한 기술의 전승을 바라볼 수 있다. 농업교육의 시책을 말해보라.
5. 미국이 중국인노동자를 금지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가혹한 사례가 되었고, 이제 10년이 되었다. 공법을 통하여, 원래의 계약을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 교민을 보호할 대책을 말해보라.
제3장 : 사서오경
첫째 문제: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의 뜻.
둘째 문제: "중립이불의강재교(中立而不倚强哉矯)"의 뜻
셋째 문제: "치천하지민, 취천하지화, 교역이퇴, 각득기소(致天下之民, 聚天下之貨, 交易而退, 各得其所)"의 뜻.
21. 청나라 해군사령부의 탄생 비화
글 : 뇌이(雷頤)
"선견포리(船堅砲利, 선박은 튼튼하고 대포는 날카롭다)" 이것은 근대중국인들이 서방열강에 대한 최초의 인상이다. 그러나 청나라정부가 근대해군을 만드는 과정은 파란만장했고, 순조롭지 못했다.
제1차 아편전쟁에서 직접 영국침략군과 교전한 임칙서는 근대해군의 위력을 심각하게 느꼈다. 그래서 "사이장기이제이(師夷長技以制夷,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서 오랑캐를 제압한다)"를 주장한다. 이것은 최초의 근대해군을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다만, 당시 조야는 여전히 세계대세에 몽매했고, 중국은 세계의 중심에 있는 "천조상국(天朝上國)"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외국은 여전히 중국바깥의 "오랑캐들이 사는 나라"였다. "사이조선(師夷造船, 오랑캐에게 배워서 배를 만드는 것)"은 "천조"의 체제를 잃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현상에 만족하고, 선박을 사거나 선박을 만드는 것에 반대했다. 임칙서는 군대군함을 구매하고 모방하여 만들자는 생각은 조야상하의 격렬한 반대에 부닥치고, 도광제는 심지어 임칙서가 배를 만들자고 건의한 상소문에 답변으로: "완전히 헛소리"라고 썼다.
임칙서의 근대해군을 만들자는 주장이 부정되면서, 유명무실하고, 낙후부패하였으며, 일찌감치 한주먹감도 되지 않는 녹영수사(綠營水師)는 당시 중국의 유일한 수군이었다. 비록 나중에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상군(湘軍)이 강남에서 여러 차례 태평군과 수전을 펼치면서 부득이 수사(水師)를 둔다. 그러나 여전히 구식수군이었다. 제2차 아편전쟁 시기에 영국프랑스침입군은 해상으로 진공했고, 결국 수도로 직접 진격했다. 이는 조야를 진동시킨다. 일부 사람들은 근대해군의 무서움을 느끼게 된다. 1860년대 초 청나라조정은 서방에서 군함을 사오거나 모방하여 건조할 것을 생각한다. 이때는 임칙서가 근대해군을 설치하자고 건의한 때로부터 꼭 20년이 흘렀을 때였다. 그리고 바로 이 20년간, 서방의 해군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증기선은 이미 범선을 점진적으로 대체하여 해군의 주요한 선박이 되었다.
1874년 말, 이홍장은 만자에 이르는 <<주의해방절(籌議海防折)>>을 올린 바 있다. 청나라조정은 이전보다 해군건설을 중시하기 시작하니, 바로 북양해군의 시작이다. 그러나 중국의 기다란 해안선과 험악한 국제정세를 비교하면, 청나라조정의 해군에 대한 중시는 여전히 부족했다. 그래서 10년동안, 해군의 발전은 이상적이지 못했다. 북양해군 외에 나머지 남양, 복건, 광동의 세 수사의 발전은 아주 느렸다. 더욱 중요하고, 현재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하기 힘든 것은 바로 전국에 통일된 해군지휘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각 수사는 현지의 독무(督撫)가 관할했다. 그리하여 합동작전을 펼치기가 어려웠고, 각 독무는 수사를 자기의 사유재산으로 취급하여 이동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예를 들어, 복건은 남양관할인데, 남양대신은 명의상 복건수사에 대한 지휘권이 있었다. 그러나 1879년 5월 양강총독 겸 남양해방대신인 심보정(沈葆楨)은 남양각성의 매2달에 한 번씩 오송구로 불러 모아 훈련을 1차례씩 함으로써 서로 협력하기 좋게 하고, 긴급 상황 하에서 서로 지원 작전을 펼치게 하자고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하여 복건장군 경춘, 민절총독은 각종 이유를 들어 미루었다. 남양해방대신의 명령으로도 자기가 관할하는 수사를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면 전국해군의 전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청나라조정은 여전히 전통수사를 관리하는 방법으로 근대해군을 관리하고자 했다. 근본적으로 근대해군의 장비와 기술이 상당히 복잡하여 반드시 통일되고, 계통적으로 관리하여야 하며 그 수준은 예전의 수사와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물며, 조야의 여러 사람들은 모두 중국전통의 육부(六部)에 없으면서 겨우 '오랑캐'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기관을 만드는 것은 '오랑캐의 것으로 중화를 바꾸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서방화'라고 질책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10년 후, 1884년 8월 중국과 프랑스의 마강전투가 발생하는데, 이는 중국근대해군이 조직된 이래 첫 번째의 대외전투이다. 그러나 복건수사는 거의 전멸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얻는다. 해군의 참패는 청나라조정으로 하여금 해군건설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웠다. 1885년 6월에 반포한 상유에서, 비록 일찍이 조선공장을 건립하고, 해군을 만들었지만, "배는 견고하지 못하고, 무기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장수를 잘 뽑지 못했고, 비용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을 주요한 실패원인으로 꼽았다. 그리고 "과거를 징벌함으로써 미래의 교훈을 삼고 수사를 잘 다스리는 것을 위주로 한다"고 하였다. 또한, 연해각 독무는 "각자 견해를 밝히고, 확실하게 논의하여 신속히 상소를 올리라"고 한다. 이는 10년 전에 일찍이 '해상방어를 논의'한 이후의 두 번째 해상방어논의였다.
모든 상소문 중에서 좌종당(左宗棠)과 이홍장(李鴻章)의 상소가 가장 조정으로부터 중시 받았다.
복주선정국(福州船政局)을 자기 손으로 만든 바 있는 좌종당은 전국해군지휘가 없는 위험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번 복건수사가 전멸한 것이 바로 이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그는 즉시 조정에 상소를 올려, "해방 전권대신" 혹은 "해부대신"을 두도록 요구한다. 그리하여 "일체의 해상방어의 권한을 그 대신이 통일적으로 처리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장병선발, 물자조달, 선박건조, 대포제조의 전권을 주고, 관청은 장강에 두어, 남으로는 민월(복건, 광동)을 장악하고 북으로 수도를 보위하도록 하며, 대신은 혹은 관청에 앉아서 일을 보고 혹은 돌아다니면서 순열하며 그때그때 필요한 조치를 취하며, 머리서 통제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여 '부신(副臣)'을 한 명 두어 관청에 있을 때는 보조적인 일을 처리하며, 나갔을 때는 남아서 일을 처리하도록 한다. 이 대신은 책임이 중대하므로 반드시 인품이 훌륭하고, 서학에 정통하며, 중국과 외국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사람이 맡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 상소를 받은 후 서태후는 '의지(懿旨)'를 반포하여, "해상방어업무는 군기대신 겸 총리각국사무아문왕대신이 이홍장과 함께 논의한 후 보고하라. 순친왕 혁기와 함께 논의하고, 모든 좌종당 등의 상소를 살펴보라"
통일된 해군지휘기관이 없는 위험에 대하여 이홍장도 잘 알고 있었다. 일찍이 1884년 2월말, 즉, 중국프랑스 마강해전 반년 전에 그는 일찍이 총리아문에 "해부"를 두어 전국해군을 통할하게 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당시 총리아문은 "해방"아문을 두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연해칠성의 해군건설임무를 한 중신이 통할하도록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기구는 북경에 두지 않고 연대(煙臺)에 두려고 하였다. 이는 직급도 낮고 실권도 적은 기구로 생각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단지 지방대신일 뿐이다. 이 제안에 대하여, 이홍장은 총리아문에 "해부겸해군을 둘 것을 청하는" 서신을 보낸다. 여기서 위의 방안을 채택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땅이 넓은데. 여순, 대련에서 대만, 해남도까지 동일한 지방대신이 주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일은 한 사람의 힘이나 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특히 총리아문에 이 대신의 지위와 권한이 너무 크면, 중앙권력이 약화되므로, "외신이 강해지고 내정이 약해지는" 결과가 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의견은 직접 북경에 중앙기관인 "해부"를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 달리 지방색채를 지닌 "해방아문"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서방 각국의 "외부(外部, 외교부), 해부(해군부)는 관청을 수도에 두는데, 해부의 체제도 다른 부와 비슷하게 해야 하며,모든 병권과 군수조달권과 인사권을 주어야 하고, 다른 부의 제약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해군은 근대중국의 새로운 군대형태라는 것을 알았고, 지방성 근대해군은 이미 강대한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만일 중앙에 해부를 둔다면, 반드시 완고파의 더욱 큰 반대를 받을 것이고, '오랑캐의 제도로 중화를 바꾼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해군이 외국오랑캐로부터 전래된 것이므로 배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중국의 논의는 대부분 다른 사람의 뒤를 따르는 것을 싫어하나, 사실 완전히 초재진용(楚材晋用)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총리아문이 '해방(海防)"이라는 용어를 쓰고, "해부"라는 용어를 쓰지 않으려는 고충은 이해되고, 원래 뜻은 "남의 실질은 따르지만, 남의 이름은 피하겠다"는 것이며, 이로써 완고파의 반대를 피하고자 한다는 것도 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직접 "해부"라는 두 글자를 써야한다는 것이다. '해방'이라는 두 글자를 쓰는 것은 그저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뜻에 불과하므로, 국가의 위엄을 떨쳐서 적의 위풍을 멸하는데 부족하다는 것이다. 외환이 이처럼 엄중한데, 직접 수도에 '해부'를 설치해야지 비로소 응급조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청나라조정은 원래 '해방아문'의 설치에 소극적이었는데, 이홍장이 반대하자 이 일은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당연히, 이홍장의 "해부"를 설립하자는 더욱 급박한 건의는 더더욱 조정의 찬동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반년 후에 중국해군은 마강에서 참패한다. 조정은 다시 해방을 논의하고, 전기가 생긴 것이다. 이홍장은 자연히 10여년을 기다려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즉시 장문의 상소를 올려서, 충분히 전국적인 해군아문을 두어야 할 이유를 전개하고 논술한다. 이 장문의 상소문에서 이홍장은 개별사안별 대책을 논한 것이 아니라 상세하고 전면적으로 10년이래의 근대해군건설의 어려웠던 역정을 회고하고, 해군사업의 발전청사진을 제출한다. 그는 이 몇 해 동안의 자신의 생각을 모두 토해낸다. 글자의 행간에서는 조정의 해군사업에 대하여 충분히 중시하지 않아준데 대한 불만과 이후 조정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었다. 그는 각각 선박, 함대, 조선, 군항, 부두, 포대, 학교 등 여러 방면의 구체적인 상황을 논했다. 이홍자의 소개가 이처럼 상세한 것은 정말 놀라울 정도이고, 동시에 약20년 전에 그가 총포탄약, 증기기관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소개를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청왕조 근대화의 계몽자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해군인재를 배양하고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창설하는데 겪은 여러가지 곤란과 효과가 미진했음을 논하면서 그는 더욱 감개했다. 조정에 대한 불만이 말에서 드러난다. '조정이 이 일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 세가의 뜻있는 자들이 가서 배울 곳이 없었다.' 이홍장을 포함한 미신(微臣)들은 상소에서 조정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이렇게 공개적으로 불만의사를 드러낸 것은 그가 신식해군인재에 대한 배양이 해군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조정에서 중시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과거제"는 신식해군학교의 건설에 장애가 되는 중요요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여전히 과거를 통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이 '바른 길(正途)'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반드시 해군학교학생은 '진사와 동등하게 대우해주고, 다 배우고 나면 정도(正途)와 마찬가지로 중시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새로운 자격증'과 '옛날 자격증'간에 어떻게 서로 등급을 맞출 것인지에 대하여, 어떻게 직책을 임명하고 승진시킬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까지 논하고 있다. 만일 정말 해군사업을 펼치려면 대량의 자금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홍장은 상소에서 경비를 마련할 각종 방법도 논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확실히 전국을 통할하는 해군아문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서방국가는 수군을 두면서 해부를 두지 않는 곳이 없다. 즉 일본은 해군을 별도로 두어 이를 통할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남양, 북양으로 나누고, 각성에는 별도의 지방 신하가 있어, 서로 이동하기 힘들고, 의견도 통일되지 않는다. 많은 규장제도가 서로 다르다. "각성의 역대 지방 관리의 뜻에 따라 바뀌는 경우가 많고, 방식이나 명령이 서로 각양각색으로 다르며, 남북양대신도 통할할 권리를 갖지 못했다" 이런 혼란상황에서 어찌 전투를 할 수 있겠는가? 어찌 하나의 전국적인 지휘기관을 설립하지 않을 것인가? 그저 "육부"의 구제도를 지키기만 하고, 오랑캐로부터 왔다는 이유만으로 해군아문의 신설을 반대할 것인가?
이홍장의 상소를 받고는 청나라조정도 아주 이치에 맞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그에게 북경으로 오게 하여 중앙의 각 대신들과 함께 이 일을 논의했다. 9월 30일, 청나라조정은 군기대신, 총리아문왕 대신에게 이홍장과 함께 해상방어의 일을 논의하게 하였고, 순친왕 혁환도 함께 논의하게 하였다. 마지막에 총리아문이 다시 보고하여, 해부 혹은 해방아문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왕대신을 파견하여 그 일을 담당하게 학자 하였다. 해전에 참전할 수 있는 선박수가 많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잠시 먼저 북양의 몇 선박으로 정예해군을 양성하고, 나중에 다른 함대를 고려한다는 것이었다. 각지 독무의 상소도 대부분 통일된 해상방어를 주장하였는데, 구체적인 조치는 서로 달랐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10월 12일 의지를 반포하여, "총리해군사무아문(간칭 해군아문)"을 두는데 동의했다. 순친왕 혁환이 총리가 되고, 경친왕 혁광, 이홍장이 회판(會辦), 증기택(曾紀澤)이 방판(幇辦)이 되었다. 해군아문을 설립한 후, 북양해군을 먼저 정예화하기 위한 방침으로 북양해군은 신속히 발전한다. 1888년 10월, 청나라조정은 이홍장이 구체적으로 북양해군을 책임지는 <<북양해군장정>>을 비준한다. 이는 북양해군의 정식창설을 의미한다.
그러나 해군아문이 성립되었고, 전국의 해군사무를 통할하게 되었지만, 그 총리, 회판, 방판은 모두 겸직이었다. 아무도 해군아문의 일만을 담당하지 않았다. 이로써 볼 때, 청나라조정은 해군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부족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실, 해군아문은 더 일찍 설립되었어야 했다. 그리고 전직으로 담당해야 했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오랫동안 구식사고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럴 식견과 용기가 없었다. 현대 해군는 반드시 통일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일종의 보편적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고, 옛날 수군을 관리하던 경험을 그대로 견지하며 현대해군을 관리한다. 구기관은 없애지 못했고, 신기관은 감히 새로 만들지 못했다. 그저 거대한 실패를 거쳐, 통타를 당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설립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청나라정부는 적극적으로 변혁을 시도한 적이 없고, 대부분은 나중에 어쩔 수 없이 피동적으로 응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확실히 병이 이미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22. 토마스 스탠튼 : 중국을 향한 꿈이 깨어진 후...
글 : 이원강(李遠江)
18세기의 거의 미친듯한 중국열기로부터 19세기에 중국을 야만스럽고 낙후한 국가로 보기까지, 중국의 유럽에서의 이미지는 180도 바뀌게 된다. 만일 이 변화를 일으킨 전환점인 사건을 찾는다면, 아무런 의심 없이 전 영국 심지어 전 유럽이 크게 기대하였던 매카트니 사신단의 중국방문사건이었다. 이 사절단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구성원은 토마스 스탠튼이었다. 그는 이 전환의 과정을 몸소 겪는다. 1793년 제1차로 중국의 땅을 밟고 중국황제의 친절한 접견을 받은 때로부터 1840년 의회에서 중국에 무력을 사용하자고 극력 주장할 때까지, 토마스 스탠튼은 중국-유럽관계의 대전환의 목격자일 뿐 아니라, 더더구나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어 협상하기보다 중국과 전쟁을 하자고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동전의 한쪽 면이 다른 쪽 면으로 바뀌듯이, 유럽인들은 중국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토마스 스탠튼이 세계국면을 뒤바꾸는 전쟁을 고취함으로 인하여, 중국인의 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미친 듯한 중국 열기 속에 출발
비록 중국에 대한 의심과 비판의 목소리가 이미 점점 높아가고 있었지만, 매카트니의 사절단은 중국열기의 남은 온기를 가지고 만리 길을 지나 중국으로 갔다.
11살 된 토마스 스탠튼은 매카트니 사절단의 2인자인 조지 스탠튼의 아들이었다. 부친 때문에 그는 다행히도 방대한 사절단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구성원이 되었다. 비록 많은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부친과 사람들 간의 얘기 속에서 어린 스탠튼은 이미 머나먼 중국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그때는 중국이 인간세상의 천당으로 묘사되었다. 사실상 부친과 그 동료들도 어린 스탠튼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이전에, 유럽의 중국에 대한 인식 또는 상상은 주로 세 가지 정보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상인, 뱃사람들의 전언이었다. 둘째는 공식 사절단의 보고였다. 셋째는 전도사의 서간이었다. 상인, 백사람들의 전언은 대부분 믿기가 어려웠다. 공식 사절단의 보고서는 아주 희소할 뿐 아니라 평면적이었다. 오직 장기간 중국에서 생활한 전도사들이 중국에 대하여 가장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유럽으로 보낸 서간은 유럽이 중국을 인식하는 핵심문건이 된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중국에 대한 오해는 최초의 문자자료에서 시작된다. 비록 전도사들은 인문지식도 있고, 중국경험도 있지만, 그들의 중국에 대한 관찰과 묘사가 반드시 정확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중국에서 전도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으로 통치자에게 잘 보이고자 했다. 유럽의 동포들에게 중국을 소개할 때 가능한 한 부정적인 평가를 배제했다. 전도사들이 고르고 골라서 표현한 중국이미지는 사실과 진상과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중국에 왔던 프랑스 국적의 예수회 선교사 Nicolas Trigault(중국명 金尼閣)은 <<마테오리치중국찰기>>에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중국에 대하여 쓴 두 유형의 저자가 있다. 하나는 상상이 너무 많고, 다른 하나는 너무 많이 들어서,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출판했다.
진정으로 중국을 "신격화"시킨 것은 봉건전제통치를 전복하고자 갈망했던 유럽의 계몽 사상가들이었다. 중세기의 질곡을 하루빨리 타파하고 싶었던 그들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전도사들의 서간에 근거하여 마음대로 취사선택하거나 목적을 가진 상상력을 동원했다. 그리하여 거의 신화적인 중국이 유럽인들의 면전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도적인 신화는 반드시 이성의 비판에 부닥친다. 18세기 중엽이후, 산업혁명, 해외확장, 정치개혁과 문화계몽과 더불어, 유럽은 경제, 군사, 정치, 문화측면에서 전면적으로 중국을 추월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모든 동방의 대제국들이 쇠락에 직면한다. 먼저 오스만 투르크가 그랬고, 다음으로 이란의 사파비(Safavid)왕조가 그랬고, 그 후에 인도의 무굴왕조, 마지막으로 중국의 청나라제국이다. 해외무역과 식민약탈에서 파죽지세였던 자신감을 회복한 유럽인들은 중국문화에 대하여도 태도가 바뀌게 된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중국은 전제국가이다. 그 원칙은 공포이다"라고 비판한다. 그 후 니콜라스 블랑제(Boulanger)sms <<동방전제제도의 기원>>에서 유사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중국은 예로부터 폐쇄적인 국가이고, 자신과 세계를 격리시켰으며, 오래되고, 탄력 없고, 쇠락하고 잔혹한 전제제도를 시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콩도르세(Condorcet)는 중국문명은 유목시대이후에 흥기했으며, 시종 상당히 저급한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영국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중국은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즉, 토지가 가장 비옥하고, 경작이 가장 정교하며, 인민이 가장 많고 가장 근면한 국가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는 정지 상태에 정체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순이론적인 비판은 근본적으로 근 백년에 이르는 중국열기를 뒤집지는 못했다. 아주 믿을만한 혁명적인 글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리고 이 사명은 아주 불행하게도 매카트니와 그의 사절단이 짊어지게 된다. 그 사절단에 11살의 나이고 만리 길을 떠난 견습 시동 토마스 스탠튼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의 방대한 규모의 중국사절단은 동, 서방 양대 대국의 첫 번째 만남에 대하여 아주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들이 자신감을 가질만한 이유는 있었다. 16세기부터 18세기중후반까지, 영국은 스페인,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물리쳤고, 이미 유럽을 쟁패한 서방의 제1강대국이었다. 당시 거의 모든 영국인들은 이번에 중국시장을 여는 외교활동에 커다란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진전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11세 된 어린 스탠튼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다. 그는 그저 여행객이었고, 아무런 정치적 책임도 부담하지 않았다.
날개가 꺾여 돌아가다.
비록 자신만만했었지만, 매카트니 사절단의 실패할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자연경제를 기초로 한 농경국가는 국제무역의 중요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한나라만 강대했던 동아시아세계에서 일찌감치 상당히 안정적인 조공무역체계가 확립되어 있었고, 서방국가들처럼 평등한 외교나 자유무역의 개념은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1787년에 일찌감치, 동인도회사 주광주 대리인이 우호적으로 일깨워준 적이 있었다. "중국정부가 외국인을 모조리 멸시하는데, 그것은 외국실력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스스로가 강대하다고 믿는 과분한 자신감 때문이다. 그는 사신이 파견되어 오는 것은 그저 충성을 표시하려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경고는 그러나 매카트니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일의 진전은 그의 말대로 되었다.
1793년 9월 14일, 근 1년간의 힘든 여정 끝에, 매카트니와 그의 사절단은 마침내 열하행궁에서 건륭황제를 만나도록 허락받는다. 그러나 매카트니가 한쪽 무릎만 꿇은 예절은 삼궤구고의 중국예의에는 전혀 어긋났다. 그리고 그들이 신경 써서 고른 선물도 건륭제가 그다지 아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83세 된 노황제에게 있어서는 자잘한 손재주일 뿐이고, 사소한 기교에 불과했다. 만일 어린 스탠튼이 없었더라면, 이번 접견은 그저 우울하고, 재미없고, 역사책에 남길만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 행사에 그쳤을 것이다. 건륭황제는 12살 된 견습 시동인 어린 스탠튼에게 아주 깊은 흥미를 나타낸다. 그가 사절단에서 유일하게 중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건륭황제가 얼굴을 활짝 펴고 즐거워한다. 그에게 비취를 하나 선물로 내렸을 뿐 아니라, 자신의 허리춤을 풀어서 용무늬가 새겨진 황색사직하포(絲織荷包)를 어린 스탠튼에게 선물로 준다. 이 두 가지 어진기보는 지금까지도 빅토리아알버트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실상 이 날은 공물을 바치는 외에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주산, 영파, 천진 등지를 개방하여 무역항구로 해달라고 요구하고, 북경에서 대사를 파견하고, 고정된 관세를 받아달라는 요구는 모두 거절당한다. 중국정부의 계속된 재촉 하에, 매카트니 사절단은 유감을 가득 품고 떠나야 했다. 그들은 대학사 송균(松筠)과 양광총독 장린(長麟)등의 사람들이 호송하여 대운하, 감강, 북강을 거쳐 중국의 요지를 지났다. 70여 일간의 기나긴 여정은 영국인들에게 이 정체되고 발전이 없는 제국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긴다.
날개가 꺾여 돌아온 매카트니는 할 수 없이 이번의 참담한 실패를 가급적 감추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사신보고서를 비밀로 처리한다(1908년에 그가 사신으로 갔던 일기가 공개적으로 출판된다). 그는 부사인 스탠튼에게 상대적으로 완곡한 기록을 공개하도록 요청한다. 그것이 바로 1797년에 출판된 <<영국폐하파견사신이 중국황제를 접견한 사실기록, 주로 매카트니 훈작의 문건을 발췌함>>이라는 책이다. 이 보고서는 확실히 영국의 체면을 고려하여, 거의 모든 영국인들이 난감해했던 일들을 감춘다. 비록 그러하지만, 그것은 중국사회에 대하여 전통적인 인식을 180도 뒤집어버린다.
출판상의 집요한 요청 하에, 사절단으로 따라갔던 다른 사람들의 기록도 계속 출판된다. "사자"호의 Aeneas Anderson, 어린 스탠튼의 가정교사였던 헤테난, 사병인 홈스 등의 기록이 금방 유럽인들이 길거리에서 얘기하는 중국뉴스로 등장한다. 10년후, 사절단의 또 다른 부사인 존 바로가 자신의 사신보고서를 발표한다. 그는 중국에 대하여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 보고서는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에딘버러 리뷰>>에서는 이 글을 싣고, 반야만적 제국의 명성이 땅바닥에 떨어지게 된 것에 환호했다.
서로 다른 동기를 지니고 있던 어른들과는 달리, 천진무사한 어린 스탠튼은 충실하게 그가 목격한 일체를 기록했다. 부친과 매카트니 대사가 외교상의 원인으로 감추었던 사정까지도 포함해서. 그의 기록은 유럽인들이 중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비록 매카트니의 중국방문은 실패하였고, 중국의 이미지가 급격히 악화되었지만, 천진무사한 어린 스탠튼은 중국에 대하여 선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건륭제가 자신을 접견해준 일과 대학사 송균과 '심후한 우의'를 건립한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즐겨했다. 1800년, 어린 스탠튼은 다시 중국으로 한 번 더 가기로 결정한다.
중국통의 탄생
1800년, 어린 스탠튼은 영국동인도회사 주광주상관의 서기원으로 다시 한번 중국에 간다. 1801년, 부친이 사망한 후 스탠튼은 부친의 작위를 세습한다. 1814년, 스탠튼은 동인도회사 주광주상관의 관리기구인 특선위원회의 위원이 된다. 1815년, 그는 다시 특선위원회 주석에 선출되고, 동인도회사의 대중국 무역 업무를 전면적으로 책임진다.
십여 년의 중국경험은 스탠튼에게 중국사회를 깊이 이해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1811년, 스탠튼은 '좋은 친구'인 송균과 광주에서 다시 한번 만난다. 신임 양광총독인 송균은 스탠튼이 중국의 관료사회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다.
부지런한 스탠튼은 중국을 가장 잘 이해하는 중국인이 되었다. 중국에 있는 기간 동안, 그는 중국 역사, 정치, 경제와 사회 등 각 방면의 자료정보를 모으는데 주력했다. 심지어 10년의 시간을 들여서 <<대청율례>>를 번역한다. 바로 이 저작이 세상에 나올 때, 스탠튼은 이미 자신의 중국에 대한 시각을 정립한다. 1810년, 그는 <<에딘버러 리뷰>>에 <<대청률례평론>>을 발표한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매카트니가 중국민족에 대하여 너무 높이 평가했다고 비판하고, 자신의 부친도 우유부단했으며, 오로지 바로만이 정확하고 공정한 관점을 견지했다고 지적한다.
귀국 후, 그는 수집한 정보를 가지고, 책을 쓰고 자신의 견해를 정립한다. 자신의 중국정치, 외교와 역사문화 등 각방면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정리한다. 이들 저작은 서방인들이 중국을 이해하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것들은 영국정부가 대중국정책을 정립하는 기초로 된다.
1823년, 스탠튼은 핸리 토마스 콜부르크(Colebrook)와 함께 로얄 아시아학회를 창립한다. 그리고 아시아 각국의 정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를 추진한다. 스탠튼은 적극적으로 영국의 한학(漢學)연구를 추진한다. 그의 노력 하에, 영국 런던대학 대학원과 제국학원은 그를 교수로 초빙하여 한학과를 개설한다. 그는 거기서 한학을 강의한다. 이리하여 그는 영국한학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제2차 사신으로 떠나다
1816년, 영국은 다시 한번 사신을 중국으로 보낸다. 그들은 매카트니와 완전히 동일한 사명을 지고 간다. 신이매사는 윌리엄 피트 암허스트(William Pitt Amherst) 훈작이었다. 매카트니와 같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오는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그는 중국경험이 풍부한 영국인을 자신의 조수로 삼았다. 이미 명망을 얻고 있던 스탠튼이 뽑힌 것은 당연했다.
매카트니가 중국을 방문한지 23년 동안, 중국-영국 양국 간에는 거대한 변화가 생긴다. 중국에서 가경제는 부친인 건륭의 황제위를 이어받는다. 날로 쇠락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제국에서는 가경제가 즉위하자마자 대규모의 백련교의 난이 일어난다.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가경제는 2억여 냥 백은을 쓰는데, 이는 국가전체의 4, 5년간의 재정수입에 해당했다. 이로부터 청왕조는 재정부족의 곤경에 빠진다. 멸망할 때까지 이는 지속된다.
손안에 가진 것이 없는 가경제는 이때 영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줄도 몰랐다. 전체 서방세계에 이미 영국의 적수는 없었다. 그리고 산업혁명을 완성하여 영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되었고, 세계시장을 갈망하는 영국인들은 23년 전보다 훨씬 더 절박하게 중국의 시장이 필요했다. 비록 매카트니의 전철이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은 매카트니사절단보다 훨씬 심한 대우를 받는다. 7월 28일, 사절단이 북직예에 도착하여 고두(叩頭)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인다. 사절단의 3인자인 아리리스는 고두는 대국과 관련 없는 형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탠튼은 고두에 극력 반대한다. 그는 암허스트 훈작에게 보고하면서 이렇게 직언한다. "사명을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고두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 암허스트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1816년 8월 28일, 암허스트 사절단은 한밤중에 북경에 도착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들을 그날 밤으로 황궁에 데려간다. 예절문제를 놓고 서로 밀고 당기기를 거듭한 끝에 암허스트는 명확하게 가경제에게 고두로 절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분노한 가경제는 즉시 영국사절단을 북경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한다.
스탠튼이 보기에, 이번 굴욕은 저번보다 훨씬 심했다. 그들이 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광주로 갈 때, 따르는 관리들은 적의를 나타냈다. 음식물공급도 악독해서 참기 힘들었다. 가경황제가 영국 섭정왕에게 보낸 서신은 영국인들을 절망하게 만든다. "이후 사신을 보내어 멀리 올 필요가 없다. 먼 길을 오느라고 헛고생하는 것이다. 그저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이지, 매년 찾아와서 배알할 필요는 없다." 그 뜻은 명확했다 대청왕조는 영국인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가경제는 스탠튼을 중국에서 축출하도록 명령한다.
비록 이 사건 후 중국정부가 미안한 마음에서인지 아니면 관계를 완화시키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유럽 상인들에게 유리한 몇 가지 지방법규를 반포하기는 했지만, 스탠튼의 내심으로부터의 분노를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그는 "굴복은 그저 치욕일 뿐이고 굳건히 보위하는 입장이 합리적이며 태도를 굳건히 하는 것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내심세계에서는 건륭시대에 그에게 주었던 약간의 친절감은 가경제의 거친 태도로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주전파
1818년에서 1852년까지 스탠튼은 여러 번 영국하원의원에 당선된다. 당시 영국하원에서 중영관계에 영향력이 가장 컸던 인물중 하나이다. 바로 스탠튼이 중영관계의 곤경으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또 다른 역량이 중영양국의 관계를 바꾸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아편 밀매상이었다.
처음에, 동인도회사가 아편을 밀매한 것은 단순히 기형적인 중영무역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편밀매의 폭리는 금방 개시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밀수에 참가한 것은 동인도 회사뿐 아니었다. 아편밀매의 창궐은 중국의 대외무역에 있어서의 균형을 철저히 무너뜨린다. 중국은 흑자국에서 적자국으로 변모한다. 그리하여 대량의 백은이 외국으로 유출되고, 국내에 백은부족현상이 나타난다. 아편을 흡입하는 중국인들의 신체를 망치는 것은 제국의 무장역량을 무너뜨릴까봐 우려할 수준이었다. 그리하여, 청나라정부는 아편무역금지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간다. 결국 도광황제는 임칙서를 보내어 광주에서 아편밀매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임칙서는 호문에서 아편을 소각한다. 이는 즉시 영국하원에서 격렬한 토론을 불러온다. 의원 그레이스는 죄악의 교역을 위하여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반대한다. 중국통인 토마스 스탠튼이 일어난다. "우리는 아편무역을 진행한다.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인가 아닌가? 아니다. 양광총독이 자신의 배로 아편을 무역할 때, 아무도 외국인이 같은 일을 하는데 대하여 놀라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중국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도에서도 금방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다...만일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진행할 권리가 없다; 우리가 그들을 이긴다면, 우리는 포기할 권리가 없다." 이때 회의장은 숙연해진다. 모든 사람은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몇 분 후, 그는 마지막 결론을 얘기한다. "비록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나는 그래도 이번 전쟁이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의석에서는 장시간의 박수가 울렸다.
3일후 하원의 투표결과가 나왔다: 주전파 271표, 반대파 262표, 9표의 차이였다. 토마스 스탠튼은 아편전쟁을 폭발시켰다. 이번 전쟁의 결과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영국이 승리했다. 이때부터 동서양대치의 국면은 철저히 끝이 나고, 동방은 서방에 종속되기 시작한다.
토마스 스탠튼은 아마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중국에 대한 입장으로 아편전쟁이 발발했을 뿐아니라, 이 전쟁을 통하여 중국의 이미지를 유럽에서 180도 뒤바꿔 놓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영향을 가장 심각하게 받은 것은 중국이라는 것을. 아편전쟁 후, 중국은 두 번, 세 번 연이어 전쟁에서 패배한다. 중국인은 자신의 문화에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중국인은 계속되는 민족위기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서방의 중국에 대한 인식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기물에서 정치, 정치에서 문화의 현대화운동(서방화)가 100여 년 동안 계속된다. 오늘날에 이르러, 국력이 다시 강대해진 중국은 여전히 전통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서방을 배우는 것은 아직까지도 전체 인민의 심리적인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다.
23. 중국 최초의 우표는 누가 설계했는가?
글 : 녕박(寧博)
우표역사를 얘기하자면, 세계 최초의 우표인 블랙 페니를 설계한 로랜드 힐 경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근거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최초우표인 "대룡우표(大龍郵票)"는 누가 설계했는가? 중국의 두번째 우표인 "소룡우표(小龍郵票)"는 또 누가 설계했는가? 아마도 우표사학자들도 분명하게 말하기 힘들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국보에 출신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후세인들에게 하나의 수수께끼를 남겨두었다. 이것은 중국우표사상의 최대 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현재사회라면 "대룡"우표와 같은 유명한 우표를 설계했다면 금방 이름을 날리게 되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황영옥(黃永玉)은 80년의 원숭이우표를 설계했다는 것 때문에 일생동안 자랑할 만한 일이 되지 않았던가? 아쉽게도 대룡, 소룡우표의 설계자는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우표사학계에는 이런 견해가 있다. "대룡"은 Robert Alexis de Villard라는 독일인에 의하여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확실히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료에 기록된 우표설계사이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몇 개의 청나라우표를 설계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대룡"의 설계자는 아니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Villard는 1892년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대룡 우표는 벌써 14년 전에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때 Villard는 겨우 18살의 젊은이였다.
또 하나의 주장은 "대룡"의 설계사가 상해 세관에서 일하던 미국국적의 직원인 H. B. Morse(1855-1934)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Morst의 친구인 보커가 Morse가 1929년 7월 25일에 보낸 친필서신을 공개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처음 발행된 중국우표를 내가 만들었다는 것은 완전히 오해이다. 이 우표의 발행과 도안현황은 그러나 1905년의 중국무역보고서에서 상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는데...." Morse에 따르면, 이 보고서에는 "첫 번째 우표는 본국의 기술자가 동판으로 새겨서 만들었다"고 한다.

대룡(왼쪽)과 소룡(오른쪽)
사실, 자세히 관찰해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대룡 우표"는 중국인이 설계했다는 견해가 대룡, 소룡을 비교했을 때 확인된다. 대룡 우표에 적힌 "대(大)", "청(淸)", "우정국(郵政局)", "일분은(壹分銀)"등의 한자는 아주 깔끔하게 쓰여져 있다. 그러나 영문 "CHINA" "CANDARIN"과 아라비아숫자 "1"은 좀 엉성하다. 아마도 영문알파벳을 잘 모르는 중국인이 쓴 것같이 보인다. 이와 반대로 "소룡"우표의 중문은 좀 삐딱하고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영문과 아라비아 숫자는 아주 아름답게 쓰여져 있다. 이것은 아마도 중문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 설계한 듯하다.
이를 보면, 비록 현 단계에서 대룡, 소룡의 확실한 설계자가 누구인지를 알기는 힘들지만, 기본적으로 대룡은 중국인이 설계하고, 소룡은 외국인이 설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에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24. 계유사변 : 천리교의 자금성 습격 사건
글 : 진보기(秦寶琦)
청나라 가경18년(1813년) 구월 십오일, 북경에는 가경황제가 '한, 당, 송, 명에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고 말해지는 계유사변이 발생한다. 이는 천리교(天理敎)의 수령인 임청(林淸)이 자금성을 습격한 사건이다.
먼저 천리교와 임청에 대하여 얘기해보기로 하자.
천리교는 청나라 때 팔괘교(八卦敎)의 한 갈래이다. 경기일대의 감괘교(坎卦敎)와 홍양교(紅陽敎)가 융합되어 이루어진 종교이다. 팔괘교는 청나라 강희연간에 산동성 단현(單縣)에서 유좌신(劉佐臣)이 창립한 비밀종교이다. 팔괘의 방위에 따라 전도했기 때문에 "팔괘교"라고 불렀다. 팔괘는 각각 건(乾), 곤(坤), 진(震), 손(巽), 감(坎), 리(離), 간(艮), 태(兌)이다. 각각 서북, 서남, 정동, 동남, 정북, 정남, 동북, 정서의 8개 방위를 가리킨다. 유좌신이 산동성 단현에서 창교하였으므로, 단현을 중심으로, 경기일대는 산동단현의 북쪽이므로 감괘(坎卦)에 속한다. 경기 대흥일대에는 팔괘교의 '감괘교' 이외에 홍양교(紅陽敎)도 있었다.
임청의 조적(祖籍)은 절강성 소흥이다.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직예 대흥현(지금의 북경시 대흥현)으로 이주해서 황촌 송가장에 살았다. 임청은 소년시절에 집안이 가난해서, 17세 때, 북경 서단 패루의 한 약포에서 학도(學徒)로 들어간다. 일을 배우고 난 후에 삼리하의 한 약포에서 점원으로 일한다. 그런데, 자주 창녀와 어울리다가 성병에 걸려 약포에서 쫓겨난다. 할 수 없이 거리에서 순찰을 도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임청의 부친은 일찍이 서리(書吏)를 지낸 바 있어, 부친의 사후에 임청이 맡아서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일을 맡아서 한지 1년 만에 부정부패가 적발되어 쫓겨난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자형(姉兄)과 함께 동업으로 차관(茶館)을 차린다. 그러나 그는 매일 도박과 계집질을 하는 바람에 돈을 다 날리고, 자형에게 쫓겨난다. 그는 다시 승덕피서 산장의 소포탈라궁 공사에 노가다꾼으로 일한다. 그리하여 돈을 좀 벌었다. 황촌에 돌아온 후에 그는 매일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고 도박했다. 그리하여 돈을 다 써버린다. 다시 소주로 간다. 거기서 그는 셋째자형을 찾아가서, 그의 도움으로 단양지현의 밑에서 일한다. 그러나 다시 뇌물을 받은 것이 발각되어 도망친다. 생활할 방법이 없자 그는 조운양선에 줄을 매어 배를 끄는 일을 하면서 통주로 되돌아온다. 외조카인 동국태(董國太)의 집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다시 북경 순성문으로 간다. 작조포(雀鳥鋪)에서 메추라기를 받아다가 길거리에서 파는 일을 한다. 이때 장군을 지낸 왕노야를 알게 된다. 왕노야는 그에게 돈을 대주어 작조포를 열 수 있게 해준다. 그는 다시 본전을 다 까먹고는 쫓겨난다. 송가장에 돌아와서 누나의 집에서 얹혀살면서 집안일을 도운다.
가경 십일년 오월, 임청은 현지의 홍양교에 가입한다. 가경 십삼년, 홍양교 사건이 발각되어, 임청은 사건에 연루되어 곤장을 받고, 보정으로 끌려가서 재판을 받는다. 돌아와 보니 교내의 두령들이 모조리 붙잡혀가거나 도망쳐서, 우두머리가 없었다. 임청은 말을 잘하는 재주는 있어서 우두머리로 모셔진다. 그는 점차 경기와 직예 고안, 웅현 등지의 감괘교를 흡수하기 시작한다. 이후 임청은 다시 직노예(하북,산동,하남) 세 개 성의 팔괘교와 연락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는 홍양교 사건 때 보정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알게 된 우량신(牛亮臣)을 떠올린다.
우량신은 하남 활현 사람이며, 일찍이 활현아문 창고지기를 지냈다. 창고의 의복을 훔쳐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보정으로 도망 와 있었던 것이고, 마가점에 살면서 가게를 돌봐주고 있었다. 임청은 홍양교 사건으로 보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역시 마가점에 살았고, 우량신과 알게 된다. 우량신은 임청과 도에 대하여 논의했는데, 그의 이론이 깊이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를 스승으로 모신다. 가경 십육년 이월, 임청은 직노예 삼성의 팔괘교와 연락하려고 생각하고, 하남 활현으로 가서 우량신을 만난다. 그리고 우량신을 통하여, 현지 진괘교(震卦敎)의 풍극선(馮克善)과 이문성(李文成)을 만난다.
임청은 풍극선, 이문성과 알게 된 후, 세 사람은 생사지교를 맺는다. 가경 십육년, 임청은 세 번에 걸쳐 하남활현으로 가서 풍극선, 이문성과 현지 각 교파를 통합하는 일을 논의한다. 임청은 스스로가 팔괘교의 창시자인 유좌신이 환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미래의 일을 예지할 수 있으며, 복과 화를 알아낼 수 있고, 길과 흉을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말재주를 이용하여 이문성이 현지의 진괘교 교주가 되도록 도와준다. 그는 또한 <<역경>>의 "제출어진(帝出於震)"이라는 말을 이용하여, "진괘가 팔괘의 우두머리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머지 괘는 모두 진괘의 명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문성은 "구궁을 겸리하고, 팔괘를 통령하는" 팔괘교의 총교주가 된다. 이문성은 임청의 도움에 감사하기 위하여, 임청을 십자귀일(十字歸一)로 모신다. 이리하여, 이문성과 임청이 공동으로 두령이 되는 국면이 형성된다. 이렇게 하여 활현 일대의 팔괘교는 통일된다.
통일 후의 팔괘교는 천리교라 부르게 된다. 팔괘교와 관련된 청양, 홍양, 백양 삼겁의 설은 답습한다. 그리하여 현세는 석가모니가 교를 장악하고 있어 홍양 시기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말기에 도달했다. "인류는 거대한 겁난을 맞이할 것이다. 겁난이 지나간 후에는 광명, 행복이 충만한 백양시기가 된다. 이렇게 하여 '홍양이 끝나고 백양이 흥한다'는 구호를 내놓는다.
임청과 이문성은 의거를 일으킨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돈이나 양식을 보내주면, 일을 이룬 후에 땅과 관직을 주겠다. 그리고 조직을 발전시키고, 제자들을 통하여 세력을 각지로 확장시킨다. 직예, 산동, 하남의 많은 곳에 신도가 늘어난다. 가경십육년 구월, 이문성과 임청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날짜를 가경 십팔련 구월 십오일 오시로 결정한다. 그리고 풍극선, 우량신등과 반란의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한다. 그리고 임청을 천황(天皇), 풍국선을 지황(地皇), 이문성을 인황(人皇)으로 하며, 반란을 일으킬 때 백색깃발을 들고, 백포(白布)로 머리를 감싸고, 허리를 묶기로 한다. 그리고 구호를 확정하는데, 공개된 구호는 "봉천개도(奉天開道)"였다. 암호는 "득승(得勝)"의 두 글자였다. 누군가가 물었을 때, 그저 '득승'이라는 두 글자로 답하면 바로 한식구이다. 죽임을 면할 수 있다"
가경 십칠년 십일월, 우극경(于克敬)이 <<삼교(불)응겁총관통서>>라는 책을 임청에게 바친다. 임청은 이 경권에 들어있는 "천반삼부(天盤三副)"를 근거로 하여, 하늘을 장악한 신도 바뀌었으니, 인간세상을 주재하는 황제도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임청은 또한 이 책에 들어있는 "십팔자명도(十八子明道)"라는 말을 견강부회적으로 해석하여, "현재는 이(李)씨성이 도를 받았다. 이문성이 인간세상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신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문성은 바로 명나라의 이자성이다" 이문성도 스스로 "이자성이 환생하였다"고 말한다. 임청도 스스로 유좌신이 환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신도들은 그를 유노야라고 불렀다. 그는 교도들 사이에 노래도 퍼트렸다: 전등북수귀한제, 대지건곤지일전(專等北水歸漢帝, 大地乾坤只一傳). 한제는 바로 임청 본인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유씨성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 그는 북경남쪽 대흥, 양항 일대의 민간에 민요도 퍼트린다: "약요백면천, 제비임청좌료전(若要白面賤, 除非林淸坐了殿)" 많은 군중들은 재난을 피하기 위하여 속속 입교했고 반란의 대오에 선다. 교도들 간의 입소문으로 입교자는 갈수록 늘어났다.
반란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확정된 후, 이문성, 임청 등은 구체적인 준비작업에 착수한다.
하남방면에서, 이문성은 우량신으로 하여금 800여명을 이끌고 준산현에 군수공장을 만들게 한다. 이문성 본인은 활현 사가장에서 조직기획업무를 진행한다. 그런데, 기밀유지에 철저하지 못하여, 현지관청이 정보를 탐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내어 이문성, 우량신 등을 체포해간다. 심문을 받을 때, 이문성은 '버티며 사실대로 실토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령이 무고한 사람을 도적으로 몰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현은 그의 말을 듣고는 대노했다. 몽둥이로 이문성을 수백 대 때리고, 우량신도 수백대 때린 후, 피로 범벅이 된 상태에서 감옥에 가두어두고, 성으로 보내어 처결하게 하고자 한다.
이문성, 우량신이 체포된 후, 교내의 핵심인 황흥재, 황흥상 형제 및 이문성의 처인 장씨 등은 구월 초칠일에 활현을 공격가여, 관리를 죽이고 감옥에서 사람을 구해내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하여 이문성, 우량신등을 구하려 한 것이다. 초칠일 새벽, 풍극선, 우극경, 황흥재 형제, 장씨 및 이문성의 조카 몇몇이 수하 약 3천을 데리고, 활현 현성을 점거하여, 이문성, 우량신을 구출해낸다. 이문성은 스스로 "대명순천이진주(大明順天李眞主)"라고 주장하고, 우량신을 군사(軍師)로 삼고, 송원성에게 군사를 맡긴다.
하남활현의 의거는 주변 각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산동서남부 일대의 천리교는 속속 이에 호응한다.
천리교의 난은 청나라조정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가경제는 직예총독 온승혜를 흠차대신으로 하여, 병력을 이끌고 북에서 진군하게 하고, 산동순무 동흥은 활현의 동남쪽을 막는다. 그리고 하남순무 고기로 하여금 서남의 두 방면을 엄밀하게 막도록 지시한다. 반란군이 태행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은 것이다. 나중에 산서 대동진 총병인 장적이 요지에 주재하고, 서주진 총병도 신속히 북상한다. 이렇게 하여 합공을 당하게 된다. 또한 양강총독 백령도 서주에 주둔하면서, 반란군이 남하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청나라조정에서 병력을 움직이느라 부산해 하면서 병력을 집중하여 하남활현등지의 천리교의 난을 일거에 섬멸하고자 할 때, 경기의 천리교의 수령인 임청의 지휘, 기획 하에, 구월 십오일 원래의 계획대로, 궁중의 태감들이 도와주어, 자금성을 습격한다. 청나라의 제도상 매년 칠월에서 구월까지, 황제는 승덕 피서산장에 머문다. 그 동안에 목란위장으로 가서 사냥을 한다. 이때 조정의 정치중심은 승덕으로 옮겨간다. 황자와 일부 대신만이 북경의 자금성에 머물며, 일상업무를 처리한다. 임청 등은 바로 북경과 궁중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자금성습격계획을 행동에 옮긴 것이다.
임청은 처음에 사람을 보내어 교외의 사냥터에서 가경제를 납치하려고 했다. 나중에 청나라병사의 방비가 엄밀한 것을 우려하여, 자금성을 습격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꾼다. 임청은 "구월 십오일 북경으로 가서 일을 벌이면, 관병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할 것이며,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 우리가 북경을 점거하면, 황제가 관동으로 가도 두렵지 않다." 그래서 그는 자금성을 습격하는 일에 대하여 아주 엄밀하게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는 평일에도 무술을 익히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무술을 익히라고 하자, 그는 "나는 신이 도와준다. 검술은 도라고 할 수가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신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하늘이 바뀌는 시기이다. 미래불이 주재할 것이며, 우리의 때가 올 것이다" 경성을 혼란에 빠트리면, 황상은 관동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든 성공의 희망을 신의 도움에 걸고 있다" 어떤 사람은 사람 수가 너무 적어서 성공하기 힘들다고 걱정했다. 임청에게 하남의 병력이 도착한 후에 자금성을 습격하자고 제의했다. 임청의 대답은 이러했다. "일인일기로 유주를 격파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자금성에 들어가는 것은 수십 명이면 된다. 하남병력이 도착하면 외성이 혼란에 빠질 것이고, 내성은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임청은 궁중태감의 안내를 받아서 자금성을 습격하려고 하였다.
임청은 궁중태감과 연락하였는데, 이는 교내의 진상(陳爽)이 다리를 놔준 것이다. 처음으로 천리교에 가입한 태감은 유득재(劉得財)였다. 그는 대흥현 상벌촌 사람이다. 가경 십칠년 이월, 같은 마을의 진상이 그를 마을로 돌아오도록 요청하고, 그에게 여러 번 연회를 베풀어줄 뿐 아니라, 그에게 많은 돈도 보내준다. 그리고 그와 형제의 맹약을 맺고, 어려운 일을 함께하기로 약속한다. 유득제는 진상의 소개로 천리교에 가입한다. 유득재가 입교한 후, 태감 왕복록, 고광복, 장태, 난진희, 양진충 등이 차례로 입교한다. 가경 십팔년 삼월, 임청은 자금성 서화문밖의 음식점에서 태감 유득재, 유금, 고광복, 장태, 왕복록의 다섯 명을 만난다. 그들에게 "겁운이 곧 도래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자금성을 습격할 때 충분히 내응하도록 준비하라고 한다. 그달 이십사일, 임청은 다시 북경에 가서, 순성문밖의 채시구의 술집에서 유득재 등 4명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월십오일에 일을 벌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궁내에서 길안내를 책임지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이 성사되면 장래 유득재를 대총관으로 삼겠다고 말한다. 구월초이틀, 진상은 다시 유득재를 만난다. 그에게 백포 여러 개를 건네주고, 입궁하여 길 안내할 때 쓰도록 한다.
교도들이 자금성을 습격하는데 동원하기 위하여, 임청은 이익으로 유혹하고 협박하고 사기 치는 등의 수법을 동원한다. 교도 왕유신은 이렇게 말했다: "구월십이일, 진상이 나를 북경으로 가서 동화문에서 소란을 피우라고 했다. 일이 성공하면 공로의 크기를 봐서, 나에게 관직을 주겠다고 했다." 이득전은 이렇게 말했다: "그(임청)는 말했다. 현재 겁운이 이미 도래했다고. 구월십오일에 그가 일을 벌이는데 나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장래 성공하면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일이 성공한 후, 관직을 주겠다고 했다." 어떤 교도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과 함께 북경에 가서 일을 벌이는데, 소인에게 현관을 약속했다." 반란행동에 참가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주투아는 이렇게 말한다. "구월 초이틀, 굴사가 나에게 함께 북경으로 들어가서 소란을 부리자고 했다. 나에게 백포 두 조각과 칼 한 자루를 주었다. 그리고 만일 그를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죽이겠다고 했다. 나는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칠을 이렇게 말했다. "십오일 새벽 일찍, 내처의 친동생 굴명아가 나에게 말했다. 굴사가 오늘 반란을 일으킨다. 네가 그를 도와주어라. 난칠이 못하겠다고 하자, 굴명아는 말했다. 네가 가지 않으면 굴사가 나중에 성공했을 때, 너의 집안은 모조리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한달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래차가 이렇게 말했다. 임청은 무서운 사람이다 만일 가지 않으면, 집안에서도 죽을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이 승낙했다." 굴사는 성안에서 노래하고 연극하는 안국태도 협박으로 끌어들였다. "만일 가지 않으면 먼저 너를 죽일 것이다." 어떤 무리는 일반 군중과 같이, 상황도 잘 모르면서 자금성내로 속아서 들어갔다. 굴사가 이진방에게 성으로 들어가라고 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십오일 아침에 동화문으로 가라. 거기에 도착하면 칼을 주겠다. 너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거기에 가면 너에게 뭘 할지 말해주겠다." 굴사는 유구아에게 칼을 사라고 시킬 때도, 그에게 "가축을 잡는데 쓸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일부 사람은 진상을 잘 모르는 상황 하에 북경으로 들어가서 반란에 가담한다.
천리교가 자금성을 습격하는 행동에서, 임청 등은 대흥, 통현 및 인근의 직예 고안, 신성, 웅현 등지에서 140여명을 동원한다. 구월 십삼, 사일, 각지의 교도는 속속 대흥현 황촌 송가장에 모인다. 임청은 그 중에서 칠십여 명을 선발한다. 각각 진상, 진문괴 두 사람이 이끌도록 한다. 구월십사일 저녁, 임청은 모두에게 저녁을 같이 먹게 하고, 한 사람에게 백포 2조각, 칼 1자루를 나눠준다. 그 후에 밤을 새워 북경성으로 들어간다. 진상은 황촌, 상벌 두 곳의 이십여 명을 지휘해서, 동화문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진문괴는 송가촌, 홍가촌, 태평장 및 웅현, 고안 등지의 오십여 명을 지휘해서, 서화문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발견되지 않기 위하여, 사람들을 분산시켜 북경성으로 들여보냈다. 각각 잡상인으로 위장하여 무기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외성 채시구 등지에서 집합했다. 그 후에 내성으로 진입했다. 이란의 진술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구월 십이일에 두 광주리의 감을 샀는데, 광주리 안에는 열세 자루의 칼을 숨겨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십사일저녁에 영정문 밖에 와서 쉬고 있었다. 십오일 새벽에 감광주리를 들고 전문밖에 간다. 그 후에 서화문으로 갔다. 이육의 진술에 따르면, 십사일 저녁에 칼, 백포를 들고 웅노오의 집으로 갔다. 칼을 웅노오의 감광주리에 넣고 길을 가면서 서로 바꿔 들었다. 채시구에서 하팔 등의 사람을 만나고, 각각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에, 서화문밖으로 갔다. 감광주리에서 칼을 꺼내들고는 옷 속에 감추었다. 구월십오일 정오, 모두 약정한 시간에 각각 동화문과 서화문 부근에서 기다렸다. 진문괴는 사십여 명을 이끌고 서화문으로 들어간다. 진상 등은 몇 사람은 칼을 들고 동화문으로 들어간다. 내감 유득재, 유금 등이 인도해주어 창진문으로 곧장 달려간다. 원래 동화문으로 들어오기로 된 사람은 삼십여 명이었는데, 관병들이 대문을 닫아서 5,6명만이 들어왔다. 진상, 공서 등은 관병과 싸우다가 상처를 입고 붙잡힌다. 서화문에서 진문괴가 이끄는 사십여 명은 태감 장태, 고광복의 인도 하에, 서화문으로 자금성에 진입한다. 금방 융종문에 도달한다. 위병의 화살을 빼앗아서 무기로 삼고, 융중문을 통하여 황제, 후비들이 거주하는 '대내(大內)"로 진입하려 한다. 수비 병사들은 황급히 대문을 걸어 닫았다. 교도들은 문밖에서 들어가지 못했다. 그중 한 사람이 담을 타고 올라가서 담을 넘어가려 한다. 당시 황자 민녕, 즉 나중의 도광제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태감 상영귀가 그에게 '조총으로 마구 갈기라'고 일깨워준다. 민녕은 그리하여 양심전의 문밖에서 조총으로 서쪽 벽을 오르는 교도를 사살한다. 당시에 담 위에는 세 명이 있었는데, 그중 1명은 백기를 들고 지휘하고 있었다. 그도 민녕이 사살한다. 금방 성친왕 영리, 진국공 혁호 등이 관병 5,60명을 이끌고 융중문 앞에 도착한다. 교도들은 수령인 이오의 지휘 하에 청나라군대와 혼전을 벌인다. 화살촉 하나가 융중문의 편액을 맞추었다. 가경제는 애신각라 자손들이 이때의 교훈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을 남겨두게 했다. 지금도 볼 수가 있다.
천리교교도들은 화기, 칼, 창, 화살을 들고 있는 관병들에 대항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융중문에서 서화문 쪽으로 철수한다. 그리고 서화문 부근에서 다시 청나라군대와 격전을 벌인다. 쌍방에 모두 사상자가 나온다. 나중에 태감 고광복은 반란군을 서화문의 마도를 통해 황궁의 성벽위로 올라오게 한다. 그리고 어떤 자는 "순천보민(順天保民)"과 "대명순천(大明順天)"이라고 쓴 백포기를 내건다. 그들은 하남에서 호응하여 달려오는 구원군을 기다렸다. 소수의 천리교교도들은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알고 어하(御河)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어떤 사람은 관병에게 사살되었다. 몇몇은 성벽의 풀숲 속에 숨어 있다가 나중에 오봉루(五鳳樓, 황궁 오문의 성루)로 잠입한다. 밤이 되어, 청나라병사들이 성벽을 수색할 때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음 날, 해가 밝은 후, 교도들은 오봉루에 불을 내어 태워버리고자 한다. 그리고 어지러운 틈을 타서 도망가려고 한다. 그러나 불길이 금방 큰 비로 꺼져버린다. 잔존한 교도들도 모조리 붙잡혀 버린다.
구월십오일 천리교의 황궁습격사건은 이틀 만에 모두 칠십이 명이 죽임을 당한다. 궁중태감들 중에서, 고광복은 자금성 성벽위에서 사살 당한다. 양진충은 일이 실패한 후 도망쳤으나, 오래지 않아 체포된다. 유득재, 유금, 왕복록, 장태, 난진희 등은 모조리 체포되고 나중에 능지처사를 당한다. 태감 난진희는 조사를 받으면서, 또 다시 십여 명의 황금습격사건에는 가담하지 않은 천리교의 교도인 태감들의 이름을 불어버린다.
임청은 진상, 진문괴로 하여금 교도들을 이끌고 자금성을 습격하게 한 후에, 자신은 황촌 송가장에서 소식을 기다린다. 청나라관청에서는 체포된 교도들의 입에서 이 사건은 임청이 꾸민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황촌 송가장으로 사람을 보내어 임처을 체포한다. 임청과 동시에 체포된 것은 임청의 처자, 친척 외에 임청의 집에서 일하던 일꾼과 같은 건물에 거주하던 이웃 등 모두 20여명에 이르렀다. 구월 이십삼일 임청 등 46명은 능지처사된다. 이미 죽은 자도 육시를 당한다. 이번 사건에 참여한 자는 그 본인이 엄한 처벌을 받은 외에, 가족, 친구들까지도 연루되어 나중에 관청에서는 모두 사백 명에 가까운 사람을 체포했다. 청나라당국은 체포된 자들에게 온갖 혹형을 가해서, 최후에 능지처사를 당한 자가 73명, 육시를 당한 자가 55명, 참교(斬絞)자가 6명이었다. 친척으로 연좌되어 신강에 유배 가서 노비가 된 사람이 49명, 복건, 광동, 사천 등지로 붙잡혀가서 노비가 된 자가 88명이었다.
구월 십일, 가경제는 승덕 피서산장에서 북경으로 출발했다. 십육일 오는 도중에 천리교가 자금성을 습격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서, 연교에서 <<죄기조(罪己詔)>>를 반포한다. 거기에서 "자신이 황위를 승계한 이래로 조심스럽게 업무를 처리했으며", "비록 애민의 실정은 이루지 못했지만, 백성을 해치는 포학한 일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적었다. 이러한 "한, 당, 송, 명에도 없던 일이 벌어진 것은" 신하들이 태만한 소치라고 하였다. 제목은 <<죄기조>>이지만 실제 내용은 스스로의 변명에 불과했다.
25. 예비입헌(預備立憲)은 어떻게 무산되었나?
글 : 부국용(傅國涌)
역사에 가정은 없다. 역사는 그저 이미 발생한 사실일 뿐이다. 1906년 9월 1일 "방행헌정(倣行憲政, 헌정을 본떠서 시행한다)"의 상유(上諭)가 마치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처럼 반포되었고, 민간사회는 환호성을 질렀다. 각종 헌정단체가 연이어 생겨나고, 신문들에서의 여론은 열기를 뿜었다. 학계, 상계, 언론계 등 엘리트 계층에서는 이 상유가 그들의 가슴 속의 희망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중국의 하늘에는 서광이 보이기 시작했다. 백년 전의 그날 그들은 격동했고, 흥분했고, 밤잠을 설쳤다.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그 완고한 서태후가 어떻게 교량하고, 생각하고, 계산해서 이런 대담한 결정을 내렸는지를 알 수는 없다. 어찌되었던 지지부진하던 청나라말기의 신정(新政)은 '예비입헌'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위기와 굴욕으로 충만했던 전환기에 당시사회는 새로운 것을 원하고 변화를 원했다. 장건, 탕수잠 등을 대표로 하는 일군의 사람들은 대강남북을 돌아다니면서 여러해동안 입헌을 유세하고 추진했다. 이 사회역량도 무시할 수 없었다. 변화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청나라정부로서도 뭔가 대응을 보여야 했다. 이전에 5대신을 서양에 파견하여 고찰하게 한 바 있는데, 그 배후에도 그들의 그림자가 있다. 위로부터 아래로의 "예비입헌"은 그들이 주인공이 된 "입헌운동(立憲運動)"과 맞물리는 것이다. 후자는 바로 전자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전제황권의 고목에 어떻게 새로운 가지를 자라게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말한다. 청나라 조정은 "입헌"에 성의가 없었다고. 그저 사람을 속이는 장난에 불과했다고. 어떤 사람은 또한 청나라 조정이 그저 '입헌'을 가지고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미 고희에 접어든 서태후에 있어서 "입헌"은 그저 "예비"이므로, 예비기간을 길게 가져가기만 하면, 그녀가 죽은 후에 어찌되든 알 바 아니라는 것이다. 확실히 서태후를 포함한 통치자들이 100여년 전의 어두운 밤에 '예비입헌'을 선택한 것은 자신의 목에 황금빛 찬란한 '헌정비'를 거는 것이므로, 이는 스스로 원한 것도 아니고, 적극적이지도 않았고, 주동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피동적이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여전히 백년 전의 이 선택을 긍정적으로 본다. '방행헌정'은 더욱 진보한 정치문명을 선택한 것이다. 최소한 그들은 선진국가가 해본 적이 있는 제도모델, 치국이념을 배척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 황권과 비교하자면, 군주입헌은 어쨌든 진보된 것이다. 그것은 대의제를 인정하고, 사법의 상대적 독립성을 인정하고, 민중의 기본 권리를 인정하고, 지방자치 즉 사회의 자주성을 인정한다. 이 모든 것은 형량하기 힘들 정도의 거대한 진보이다. 멀리 신강에서도 지방의회적인 성격을 지닌 자의국(諮議局)이 등장한다. 영국의 저명한 타임즈 주 북경 기자인 모리슨이 1910년에 찍은 '신강자의국' 사진을 보면 건물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고, 그저 보통의 북방농가주택처럼 보이고, 가지에는 아무 이파리도 붙어있지 않고, 겨울의 황량함만 보여주지만, 자의국 내지 자정원(資政院)은 어쨌든 새로운 것들이다. 광서 계림에서 한 관방집회에는 "입헌만세"라는 플래카드가 높이 걸려 있었다. 회의장에서의 서로 다른 복장은 바로 신구교체의 시대풍경이었다. 한편에는 청나라관복을 입은 대소 관원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신식교복을 입은 소학교와 사범학당의 학생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중국이 고대에서 근대로 전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908년 8월 27일 반포된 <<흠정헌법대강>>에는 당연히 많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헌법의 형식으로 군상대권(君上大權)울 확립하고자 했다. "대청황제는 대청제국을 통치한다. 만세일계(萬歲一係), 영영존대(永永尊戴)한다." "군상의 신성존엄은 불가침범이다" 그러나, 거기에 붙은 <신민권리의무>에서는 처음으로 '신민은 법률 범위 내에서 언론, 저작, 출판 및 집회, 결사 등의 일을 하는데 자유를 허용한다." "신민은 법률에 정한 바에 따르지 않고서는, 체포, 감금, 처벌받지 아니한다." "신민의 재산 및 거주는 이유 없이 침해받지 아니한다." 등등. '군상대권'과 '신민권리'가 모두 법률의 틀 안에 들어왔다. 이것은 어쨌든 사상 유례 없는 일이었다.
"예비입헌"은 최종적으로 혁명의 고함 속에 매몰된다. 이것은 입헌파에게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들은 일찍이 진심으로 군주입헌을 추진했고, 입헌의 과정을 추진했다. 그들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실업가이거나, 명망 있는 지식인이었다. 그들의 본토에서의 사회영향력은 혁명파들 보다는 훨씬 컸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자신감에 넘쳤다. 청나라제국의 고목에 신헌정이라는 가지를 접목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벌레 먹고, 광풍에 시달리는 고목을 뿌리째 뽑아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온화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광풍폭우식의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최소의 대가를 치르고, 최저의 비용을 들여서 사회전환을 완성하고자 했다. 위기가 사방에 잠복해 있던 청나라말기에 그들은 사회 안정에 대한 가장 굳건한 지지자였다. 그들은 구체제를 신사회로 순조롭게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는 청나라조정과 그들 간의 양호한 상호작용, 오대신의 서양파견부터 '방행헌정'의 상유를 발표하고, <흠정헌법대강>>을 반포하기까지를 보면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그들은 "예비입헌"의 봄바람을 빌어서, 전국각지에 각양각색의 입헌단체를 조직하고자 했는데, 어느 정도 근대정당의 싹이 보였다. 새로 출판되는 신문잡지에서는 그들의 주장이 넘쳐났다. 그러나 부패가 극에 달했던 권력집단은 기득권이라는 끈에 묶여 있었고, 사사로운 욕심을 앞세우다보니, 중요한 순간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게 된다. 민간사회의 평화로운 변화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온건파들까지도 혁명파의 편에 서게 만든다.
1911년 봄은 청나라조정에게 마지막 기회였다. 제3차 국회 청원운동에서 겨우 9년 예비입헌을 6년 예비입헌으로 바꾸는 정도의 결과를 나타냈을 때, 이 왕조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1911년 10월 30일, 무창에서 총소리가 난 후, 남방각성이 속속 호응하고, 독립을 선포한다. 북경부근의 신군 제20진통제 장소(張紹)마저도 통전을 보내어, 병력을 움직이겠다는 위협을 한다. 즉, 청나라조정은 입헌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완전히 피동적인 입장에 처한다. 그제서야 입헌파의 여러 해에 걸친 요구에 응한다. 황급히 <실행헌정유>를 반포하고, 이어서 11월 3일에는 '헌정 중대 신조 19조'를 선포한다. 여기서는 "황제의 권리는 헌법에 규정한 바에 따라 제한된다"는 것도 인정하고, "헌법개정제안권은 국회에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당해 연도 예산은 국회를 거치지 않으면, 전년도의 예산에 따라 지출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늦었다. 시기를 놓친 것이다. 한 왕조를 영원히 이어지게 하려던 '예비입헌'은 이렇게 무산되었다.
26. 이육창(李毓昌) : 청나라 최대의 원안(寃案)
글 : 가운봉(賈雲峰)
즉묵(卽墨) 이가영촌(李家營村)은 아주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묘지기들이 대대로 살면서 번성한 작은 마을이다. 그들이 지키는 묘의 주인은 이육창(李毓昌)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옛날에 원안(寃案, 원통한 사건)은 아주 많지만, 그의 사건은 "양내무와 소백채"사건과 더불어 '청나라 4대 원안' 중 하나로 불리운다.
이 사건은 재난구호비용을 착복한 것과 관련이 있고, 조야를 떠들썩하게 했으며, 아주 나쁜 영향을 끼쳤다. 가경황제는 친히 <<민충시(憫忠詩)>>를 지어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육창의 억울함을 드러내고, 탐관오리를 참했으며, 소인들을 능지했다.
중국 역사상 원안은 무수히 많다. 도대체 이육창 사건은 어떤 것이기에 가경제가 대노했단 말인가? 그리고 탐관오리들에게 죽음을 내렸을까? 아래에서 자세히 얘기해보기로 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관료의 권력이 감독을 받지 않는다면, 그저 개인의 품행, 양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청렴을 보증하기는 힘들다. 가경연간에 왕신한(王伸漢)은 바로 관료로 있으면서 돈을 목숨보다 귀중히 여겼다.
산양현(山陽縣) 지현(知縣)인 왕신한은 '이익을 보면 눈이 멀고' 안과발모(雁過拔毛)하는 비열한 소인이다. 평소에도 백성의 고혈을 빨았는데, 천재지변이나 기근을 만나면 더욱 심해졌다. 아래위를 속이고, 자기 몫을 챙겼다. 한편으로 이재민의 수를 허위보고하여, 재난구호비를 많이 타내고, 다른 한편으로 실제지급금액을 줄여서, 자신이 챙겼다.
황하가 청강에서 회하로 진입하는데, 매년 여름이 되면, 큰 비가 내릴 때마다 홍수가 난다. 홍수지역의 백성들은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경13년(1808년) 가을, 황하의 제방이 다시 붕괴되었다. 산양현은 수재를 만나서 이재민들은 유리걸식해야 했다.
온통 물바다로 바뀌어 백성들의 생활이 곤란해졌을 때, 인심을 안정시키고 도탄에 빠진 생령을 구하기 위하여, 가경제는 은9만9천냥을 보내어 산양현의 백성들을 구휼하도록 했다.
이 십만 냥에 가까운 재해구호비가 내려오자, 왕신한은 굶주린 이리처럼 자기 뱃속을 채웠다. 기근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근 2만5천 냥이 왕지현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러다보니 산양의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재해구호비가 내려온 후, 관리의 부패가 이미 심각하다는 것을 예감하고, 이번 재해구호비는 이전처럼 탐관오리의 수중에 들어가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가경제는 11명의 조사반을 산양현에 보내어 처리하게 했다. 그 중에는 막 진사에 합격하여, 부임한 즉묵사람 이육창이 들어 있었다.
이육창(1771-1808)의 자는 고언(皋言)이고, 호는 영헌(榮軒)이다. 청나라 때 즉묵현 각리(지금의 이가영촌)에서 태어났다. 인품이 단정하고, 글과 행실이 모두 뛰어났다. 이육창은 아마도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진사에 합격한 바로 그 해가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해가 될 줄은.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그가 정직한 업무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되어 기율감찰업무에 종사하게 된 후, 이육창은 친히 각 지역을 순시했고, 재난상황을 살펴보고, 백성들을 돌보았다. 현으로 돌아오는 중에 이육창은 호구부를 가져다가 대조를 해보기 시작했다. 역관에서 머리를 쳐박고 5일간 대조작업을 해보니, 기본적으로 왕신한이 부패한 확실한 증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는 분노하여, 즉시 보고서를 초안해서 번사(藩司)에 올리려고 준비했다.
이 모든 것은 왕신한에게 매수된 이육창의 가복(家僕)인 이상(李祥)에 의하여 누설되었다. 관료사회의 숨은 규칙을 잘 알고 있는 왕신한은 이것을 단지 이육창이 그에게서 입막음하기 위한 돈을 받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모든 사람들은 돈 앞에서는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특히 관료들은 그랬다.
왕신한은 관료사회의 관례에 따라, 이육창에게 약속했다. 이육창이 이미 조사해낸 것들을 보지 않은 척만 해주면, 자신이 1만 냥을 이육창에게 차비(茶費)로 줄 생각이 있다고 말한다.
주성치는 그의 작품인 <<구품지마관>>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탐관은 간사하다. 청관은 탐관보다도 더 간사하다"
품행이 고결한 이육창은 이 점을 간과했다. 그는 직접 왕신한과 맞붙어서, 그와 같이 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조정의 부패를 척결하는 임무를 지닌 관리로서, 자신의 눈 아래에서 부정부패가 성행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부드러운 방법이 되지 않자, 마음이 급해진 왕신한은 살인멸구를 준비한다.
왕신한은 이육창을 연회에 모셔 내온 다음에 이육창의 가복인 이상 등 3사람을 암중으로 매수한 후, 이육창이 연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목이 마르다고 할 때, 비상을 넣은 찻물을 올리게 한다.
순식간에 이육창은 입에서 선혈을 토하며 복통을 호소한다.
이때, 방밖에서 들여다보던 3명의 가복들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상은 곁에서 냉소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겠다. 우리는 오늘이 당신을 모시는 마지막 날이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들 몇몇은 베로 이육창의 목을 조른다. 이육창은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다. 이상등은 시신을 대들보에 매어놓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것처럼 위장한다. 그리고 방문을 닫고는 떠나버렸다.
다음 날, 이상등은 놀란 척 하면서 주인이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고 말한다. 왕신한은 급히 회안부로 가서, 횡령한 돈으로 회안지부 왕곡(王穀)에서부터 오작(仵作, 검시관) 이표(李標)까지 모조리 매수한다. 그리하여 이육창은 자살했다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짓게 한다.
정직했던 한 사람이 이렇게 부패한 세상에서, 돈에 매수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야기는 당연히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육창의 숙부인 이태청(李太淸)은 산동 즉묵에서 산양으로 달려와서 후사를 처리한다. 그런데, 조카의 얼굴색이 백지와 같았다. 현령인 왕신한은 스스로 총명하게 한다고 노비(路費) 150냥을 준다. 바로 이 점이, 나중에 이 사건을 수상히 여긴 가경황제에게 의심할 빌미를 주게 된다.
이씨 집안 사람들은 유체를 고향으로 가져갔다. 이육창의 처는 남편의 의복과 물건을 정리하다가, 몸에 가지고 다니던 가죽옷에 혈흔이 묻은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급히 이태청에게 보고한다.
이태청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즉시 관을 열고 시신을 검사해보았다. 사자의 손가락이 검게 변했다. 그리고 은비녀를 인후부에 넣자 즉시 변색했다.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는 모두 중독의 증거였다. 그리하여, 그는 비용을 모은 다음 상소문을 써서 경성으로 간다. 그리고 도찰원에 억울하다고 고소한다. 도찰원은 규정에 따라 조정에 보고했다.
가경제는 풍기가 갈수록 문란해지자 관료 사회을 정돈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을 아주 중시하고,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군기처에 명을 내려 산동순무 길륜(吉綸)으로 하여금 이육창의 시신을 성성(省城)으로 옮겨와서 조사하게 시킨다. 그리고 즉시 산양지현과 관련증인을 북경으로 데려오게 한다. 군기대신이 형부와 함께 직접 심문했다.
검시보고서는 이육창이 먼저 독살된 후, 교살되었다고 확인해주었다.
가경제는 검시보고를 본 후에 대노하여, 왕신한을 즉시 처결한다. 그리고 명을 내려, 그의 가산을 몰수하게 하고, 왕신한의 아들은 이리(伊犁)로 유배 보내어 속죄하게 한다. 나머지 사람들 이상등은 이육창의 묘 앞에서 먼저 협형(夾刑)을 가하고, 다시 능지(凌遲)하도록 한다.
가경14년 8월 2일은 정의가 회복된 날이었다.
가경제는 이육창의 장례를 융중하게 치러주도록 지시한다. 이상등은 이육창의 영구 앞에서, 협형을 한번 받은 후, 다시 능치처사당한다. 그 후에 심장을 꺼내어 제사지낸다. 이육창의 충혼은 이렇게 안위를 얻었다.
1개월 후, 9월 4일, 원안을 조성한 회안지부 왕각이 교결(絞決)되고, 나머지 관련관리들은 예를 들어, 이육창과 함께 산양으로 조사를 나갔으나, 돈을 받고 왕신한의 죄행을 묵과해준 9명의 관리들은 모조리 조사받고 처벌받는다.
가경제는 친히 삼십운의 <<민충시>>를 지어서 이처럼 정직한 인사가 해를 입은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고, 그가 이익의 유혹을 물리치고, 악을 원수처럼 미워한 품성을 찬송했고, 그의 가족후인들도 그 음덕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지금도, 산동 즉묵의 이가영촌에 있는 이육창의 묘비에는 여전히 이 <<민충시>>를 볼 수가 있다.
27. 용연향(龍涎香) : 중국에 아편보다 먼저 들어온 춘약
글 : 정계진(丁啓陣)

모두 알고 있다시피, 100여년의 중국근대사는 기본적으로 중화민족의 치욕사이다. 서방열강, 동양도적이 튼튼한 배와 날카로운 대포로 중국의 대문을 열어 제낀 후에, 중국을 살찐 양, 케이크로 생각하여, 도살하고, 나눠가지고, 유린하고, 약탈하느라고 너무나 바빴다.
중화민족의 이 기간 동안의 피눈물 나는 치욕사에서, 일반인들은 그것이 아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아편무역에서 이익을 얻고자 하는데, 중국에서 제지당하자, 1840년의 중국과 영국간의 충돌, 보통 말하는 아편전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서방열강이 중국의 대문을 열기 위하여 쓴 것에는 아편 이외에 또 하나가 있다. '용연향'이라고 부르는 약물이다. 아편과 비교하면, 용연향은 서방 강도들이 더욱 먼저 사용했던 무역품이었다.
소위 용연향은 바로 향유고래의 장내분비물을 말린 것이다. 향유고래가 낙지를 삼킨 후, 위장에서 분비되는 회흑색의 밀납형의 배설물인 것이다. 용연향은 미감(味甘), 기성(氣腥), 성삽(性澁)하여, 기혈을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고 통증을 멈추어주는 등의 약효가 있다. 그리하여 약재로 사용한다. 건조한 후에 오랫동안 향기가 나기 때문에 향료로도 쓴다. 용연향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시기마다, 동서양의 각 지역마다 서로 쓰는 방법이 달랐다.
중국의 명나라 가정연간(1522~1566)에, 몇몇 방사들이 용연향을 '불사약' '만세향병'의 주요원료로 썼다. 소위 '불사약'은 실제로 춘약이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명을 내려 전국에서 이 용연향을 수집하도록 시킨다.
가정황제 명세종 주후총은 이 춘약을 중시했다. 이유는 있었다. 그가 우연히 얻게 된 황제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하루빨리 자식을 낳고 싶어했다(명무종 주후조가 31살에 급사하면서 자식을 두지 않아서, 흥헌왕의 장남인 13살의 주후총이 황제가 된다). 그러나 일은 뜻과는 달리 진행된다. 비록 그가 세 명의 황후를 두었지만, 10년 동안 여전히 자식이라곤 아들이건 딸이건 두지를 못했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한편으로 도교에 귀의하고, 다른 한편으로 각종 기이한 약물을 끌어 모아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황제가 입을 열자 당연히 수량은 엄청났다. 가정34년(1555년)에 호부에 '향 백근'을 구하도록 시킨다. 용연향은 비록 중국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었고, 발견된 시간은 은상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희귀품이었다. 국내의 수량은 제한적이었다. 시장을 다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후 용연향의 주요산지인 광동에 조달책임을 맡긴다. 비록 조정에서 용연향을 구매하라고 하였고, 근당 1200냥의 고가였다. 그래도 효과는 그다지 없었다. 이리저리 끌어 모아도 겨우 십여 냥에 불과했다. 백 근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중국에서 얻기 힘든 용연향이 포르투갈인들의 손에는 적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은 용연향에 대하여 일찌감치 인식하고 응용했다. 1265년에 이미 alambre(ambre의 정관사 형식. ambre는 용연향의 포르투갈어 명칭임)가 나타나고, 대항해 기간에, 포르투갈의 동방에 관한 서적에는 여러 곳에서 용연향이 언급되어 있다. 용연향은 포르투갈에서의 용도는 주로 두 가지였다. 향료와 약물. 포르투갈인들은 용연향을 아주 중시한다. 이것을 황금, 상아, 서각, 해마아(海馬牙) 등과 같은 귀중품으로 여겼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포르투갈인들은 한 때, 인도양과 대서양의 용연향무역을 독점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용연향의 유럽집산지가 된다.
중국황제가 대량의 용연향을 급히 구하는데, 포르투갈인들의 손에는 용연향이 많았다. 이런 수요공급관계로 인하여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를 차지하게 된다.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를 차지하게 된 원인에 대하여 뇌물설과 패점설(覇占說), 구도설(驅盜說)등이 있다. 연구가 심도를 더해가면서, 이들 이론은 모두 한계성을 드러냈다. 모두 해결되지 않는 점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용연향설'은 가장 이치에 맞았다. 가장 먼저 '용연향설'을 제기한 학자는 대만의 양가빈(梁嘉彬, 1910~1995)이었다. 일찍이 1968년에, 그는 <<명사고불랑기전고증>>에서 이런 글을 썼다:
"포르투갈인들이 처음에 중국과 통상을 할 때, 포정사 오정거는 황상에 올릴 향이 부족한 고로, 파격적으로 그들에게 시장을 열 수 있게 해주었다; 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마카오경내에 거주하도록 허용했다; 청나라 때 아편에 세금을 거두게 된 연고로 그들은 영원히 마카오를 관리하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마카오를 잃은 것은 첫째는 용연향에 잃은 것이고, 둘째는 아편에 잃은 것이다."
양가빈의 이후에 마카오 학자인 김국평, 오지량 등이 이 견해를 취한다. 그리고 여러 편의 논문을 쓴다. 그 요점은 광동의 관리들이 대담하게 마카오를 포르투갈인들에게 빌려주어 거주하게 한 것은 겉으로는 정을 대신하여 오랑캐가 바치는 2만과 땅 임차료 500냥을 받을 수 있고, 속으로는 자신들이 포르투갈인들로부터 약간의 뇌물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포르투갈인들로부터 가경제의 춘약배합재료인 용연향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광동관리인 해도부사 왕백, 포정사 오정거 등은 대담하게도 상사와 싸우면서,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거주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이렇게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용연향이 포르투갈인들을 마카오에 거주하게 한 가장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 혹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임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배후에는 제도적인 이유도 있다는 것이다.
가설은 역사에 의미가 없다. 그러나 한번 해보는 것도 무방하다. 만일 세상에 '부녀와 교합 시에 특효가 있고 뇌와 위를 건강하게 해주는'(포르투갈인들의 글에 나오는 문구임) 용연향이라는 물건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중국근대사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28. 소설과 회고록 : 어느 것이 진실인가?
글 : 장영구(張永久)
잠춘훤(岑春煊)은 말년에 상해에서 살면서, 자서전적 회고록 <<낙재만필(樂齋漫筆)>>을 썼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 해(1928년), 조강지처 유부인이 호북에서 여행도중 병사하고, 장남 덕고(德固)가 따라 죽었다. 처음에, 덕고는 기부금을 내고 주사직을 얻어, 신축년 경자과거보충선발에 거인으로 뽑힌다. 그리고 모친을 모시고 북경으로 가서 과거시험에 응시하고자 했다. 무창에 이르렀을 때, 유부인이 돌연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했다. 덕고는 모친의 병에 가슴이 아파서 몸과 마음을 상한다. 양호총독 장지동이 조정에 글을 올려 정표(旌表)를 요청하여, 은상을 받았다. 나는 이 일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다. 그리하여 병이 들고, 근력이 날로 약해지고, 나랏일로 노심초사하다보니 쉴 틈이 없었다. 나중에 나타난 여러 가지 쇠약한 현상은 모두 이때 비롯된 것이다."
만일 이 이야기의 배경을 알고 싶다면, 조금만 연구해보면, 이 말에 어떤 깊은 뜻이 담겨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잠춘훤이 상해에 거주한 시간은 바로 그의 관료생활에서 실의에 빠져있던 몇 년간이다. 조정의 거두 구홍기(瞿鴻䘛)와 결탁하여, 혁광(奕劻)과 원세개를 몰아내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기 발등을 찍게 된다. 원세개는 간단한 수법을 써서, 도태 채내황을 시켜 잠춘훤과 강유위가 같이 찍은 사진을 서태후에게 보낸다. 순식간에 잘나가던 잠춘훤은 무너져 버린다.
서태후의 신임을 읽게 되자, 괜찮은 관직은 더 이상 차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잠춘훤은 의욕을 잃고 상해로 은거한다. 남은 여생을 편안히 보낼 준비를 한다. 누가 알았으랴. 실각한 대신에게 흉사가 이어질 줄은. 연이어 두 가지 소식이 들려오는데, 바로 조강지처 유부인과 사랑하는 아들 잠덕고가 한구(漢口)에서 연이어 병사했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에 잠춘훤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 같았다. 모든 의욕을 잃었고,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나중에 나타난 여러 가지 쇠약한 현상은 모두 이때 비롯된 것이다"
이는 그냥 듣기에는 애절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잠씨 집안의 큰아들인 잠덕고가 북경으로 과거를 치러 가는데, 부친은 그에게 한가지 일을 시킨다. 즉 모친을 북경에 모셔다 놓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창에 이르렀을 때, 모친은 풍한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병사한다. 효자 잠덕고는 하루 종일 밥도 먹지 않고, 영구를 붙들고 통곡을 한다. 더더욱 의외인 것은 이 대효자는 모친의 죽음을 가슴아파하다가 자신의 몸까지 상한다는 것이다. 며칠 후 그도 모친을 따라서 죽는다. 불귀의 황천길로 간 것이다. 양호총독인 장지동은 이 소식을 듣고는 적시 조정에 보고하여 효자문을 세워달라고 청한다. 잠덕고는 모친을 따라 죽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집안의 작은 일이지만, 이 일은 백성의 기풍과 효도와 관련된 큰일이다. 효자의 사적이 그대로 묻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효자문을 세워서 백성들을 모범이 되게 하고, 그 사적을 글로 써서 책으로 만들어 영원히 잊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다보니,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뭐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느낌이 들었다.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은 효자가 모친을 그리워하고 가슴아파하는 것이 죽음에 이를 정도인가? 효도를 다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효도를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두렵기까지 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잠덕고의 죽음은 이상하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오견인(吳趼人)의 소설 <<이십년간 목도한 괴이한 현상>>을 읽고서야 수수께끼가 풀렸고, 확실히 깨닫게 된다.
오견인은 청나라말기의 유명한 견책소설 작가이며, 잠덕고가 한구에서 죽을 때, 그는 마침 한구에 있는 한 미국인이 만든 신문사에서 주필을 맡고 있었다. 이 사건의 내용을 잘 알았다. 그의 필기 <<趼廛續筆>>에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당당한 고관의 아들은 확실히 계집질하다가 죽었다. 성병으로 죽은 것이다. 그리고 큰 도시에서 모두가 보는 데서 죽었는데, 이를 모친을 따라 죽은 것이라고 조정에 보고하여 역사에 기록하도록 하고, 효자전에 넣도록 했으니,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오견인의 붓 아래에서 대효자 잠덕고의 죽음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이십년간 목도한 괴이한 현상>>의 제85회 <<꽃을 그리워하는 공자가 모친의 상을 지내다" 제86회 "효자문을 세워서 하늘을 속이고 큰 거짓말을 하다"에 쓴 내용은 바로 청나라말기 모 관료의 아들인 진치농(陳稚農)이 운남에서 모친의 영구를 호송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한구에서 상해까지 술먹고 계집질을 한다. 결국 상해에서 홍기녀 임혜경을 사랑하게 되어 원래 들었던 성병이 심해져서, 결국 황천으로 갔다는 이야기이다.
오견인은 책에서 이렇게 썼다. 진치농은 모친의 영구를 고향까지 호송하다가 가는 길에 곳곳에서 술과 계집을 즐겼다. 매일 꽃밭에서 놀면서 부화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는 몸에 양회색의 외국옷감으로 만든 겉옷과 검은색의 외국비단 마괘, 우단으로 만든 과피소모를 걸치고, 복숭아크기의 백사선모결을 걸쳤는데, 밝고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한구에 이르러, 진치농은 몸이 좋지 않다고 느껴서, 의사를 찾아가서 진맥을 받는다. 한 강호의 의사는 성병의 무서움을 몰랐고, 그에게 아주 강렬한 춘약을 만들어준다. 이리하여 진치농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계집질을 하도록 만든다. 두 번째 의사는 좀 아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말한다. "이 병은 오래되었다. 든 병은 성병이다. 그가 보통사람처럼 서고 앉고 한다. 약간 귀찮아할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병 같지 않지만, 사실 그는 보약으로 버티는 것이다. 일단 무너지면 손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석류꽃 아래에서 죽으면 죽어서도 풍류이다. 진치농은 죽기 2,3일전에 그리워하던 홍기녀 임혜경을 만나서 밤낮없이 함께 지낸다. 속담에 색(色)은 뼈를 깍는 무쇠칼(刮骨鋼刀)라고 하였던가? 병색이 완연했던 진치농이 이런 "행복"을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목숨을 잃는다. 집안의 종에 따르면, 한밤중에 진치농이 침대에서 일어나서 소변을 보고자 했는데, 제대로 서지 못하여 쓰러진다. 종이 한참 걸려서 일으켜 세웠는데, 당시에는 잘 몰라서, 생강탕과 인삼탕을 먹였다. 얼마 안 지나 그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춥다고만 한다. 이불을 하나 더 덮어주었지만, 계속하여 춥다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늘이 밝아졌을 때, 진치농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결국 숨을 거둔다.
책에 나오는 인물인 진치농은 바로 잠덕고의 화신이다.
잠춘훤이 관직에서 쫓겨나서 상해에서 우울하게 살고 있을 때, 집안에서 이런 남부끄러운 일이 일어났다. 그는 마음이 아주 급했을 것이다. 다행히 호광총독 장지동이 적시에 도움의 손길을 뻗친다. 잠춘훤은 비로소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장지동이 인심을 다독거리는 방법은 잠춘훤의 아들에게 효자라는 명분을 얻게 해주는 것이었다. 과거에 효자, 절부는 수도 없이 많았다. 한 마을 한 현에 효자, 절부가 나오면 지방관리는 층층이 위로 보고하고, 황제는 조서를 내려, 인근 현 또는 인근 성의 지방 관리에게 사실여부를 확인하게 했다. 명을 받아 조사 확인하는 지방 관리는 효자 절부가족으로부터 뇌물을 받지 않더라도 고향의 명예는 확실히 얻게 된다. 그래서 효자, 절부의 패방은 곳곳에 서있는 것이다. 사실 내막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장지동은 관직에 오랫동안 굴러먹었으니, 뺀질이라고 하기에 부끄럼이 없다. 잠덕고를 위하여 작성한 글에서 그는 여러가지 효자의 효행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과거는 중요하지 않고 부모를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 그 뜻은 모친을 모시기 위하여, 잠덕고는 심지어 과거에 응시하는 것도 포기했다는 것이다. 또한, "해를 넘겨, 북경에서 예부의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 가면서 가는 길에 <<사친시>> 80장을 지어, 일시에 도성에 유행하니, 재자라는 이름도 얻는다." 글이 내용은 전부 없는 얘기를 만들어 낸 것이고 순 헛소리이다.
장지동은 조정의 중신이므로, 그가 올린 글에 대하여 조정이 허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물며 주청대상인 대효자는 옛날 서태후가 총애하던 신하인 잠춘훤의 아들이 아닌가. 지금까지도, 광서 계림 영천현에는 여전히 효자방석비가 서 있고, 석인, 석마, 화표, 패방이 있다. 이렇게 허구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마치 소리 없이 한 황당한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패방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서림잠덕고순모사장>>. 위나라 비문체로 쓰여진 한자는 역사가 사람에 의하여 잘못 읽히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무서운 일인지 보여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잠덕고는 죽기 전에 절명사 1수를 짓고, 숙부인 잠춘명(岑春蓂)(당시 호북도대)에게 서신을 하나 보낸다. 그 서신에서는 자신의 여러 가지 불효한 행위를 고백하고, 선조를 뵐 면목이 없으니, 시신을 강에 버려 물고기 밥이 되게 해달라고 적었다고 한다.
똑같은 사건에 대하여, 두 가지 서로 다른 기록이 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웃고 나서 다시 진실과 허구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잠춘훤과 오견인은 모두 청나라말기의 유명한 인물들이다. 한 사람은 정계의 요인이고 한 사람은 문단의 거두이다. 똑같은 사건에 대하여, 전혀 다르게 적었으니, 그 중에 한 사람은 분명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상식대로라면, 회고록은 진실이고, 소설은 허구이다. 그러나 잠춘훤의 회고록과 오견인의 소설을 함께 놓고 비교해보면, 그러한 상식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허구이어야 할 소설이 진실을 얘기하고 있고, 진실이어야 할 회고록이 허구를 얘기하고 있다. 이는 정말 난감한 일이다. 만일 마음으로 역사를 읽어본다면, 우리가 읽은 역사에서는 이렇게 진실이 전도된 경우가 너무나 많다.
29. 상군(湘軍)의 남경 대도살은 일본의 남경 대학살에 못지않았다
글 : 촉인삼지안(蜀人三只眼)
1937년, 일본군이 남경 및 부근지역에서 진행한 수 개월간의 대규모 학살은 중국인이라면 아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지만, 74년 전에, 증국전(曾國荃)이 상군(湘軍)이 우화대(雨花臺)를 공격하면서 '남경대도살'의 참극을 일으킨 바 있다.
1863년, 증국전이 우화대를 함락시킬 때, 수군이 호성하로 진격했다. 천경(天京, 남경)이 포위되었다. 곧이어 1864년 6월, 홍수전이 병사한다.
홍수전이 서거한 후, 이수성(李秀成)이 유천왕(幼天王) 홍천귀복(洪天貴福)을 보좌하여, 3,4천명의 전사를 이끌고 천경을 1달 반이나 굳게 지키고 있었다. 상군은 태평문에 가까운 성벽에 몰래 지하도를 파서, 폭약을 매설했다. 폭약으로 20여 장을 무너뜨린 후, 무너진 틈으로 벌떼처럼 밀려들어 갔다. 비록 태평군이 몇 번 반격을 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상군이 천경에 밀고 들어간 후, 바로 미친 듯이 방화, 살인, 약탈, 간음의 대경연을 벌였다. "사람을 보면 바로 죽이고, 집을 보면 바로 불태우고, 자녀옥백(子女玉帛)은 모조리 상군이 차지했다." 이리하여 진회하는 시신으로 가득했다.
방화: 상군은 남경성에 들어가자마자 도처에 방화를 저질렀다.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어두워질 때쯤, 온 성은 이미 불바다가 되었다. "연기가 수십 줄기 솟아오르고, 하늘에 뭉쳐서 흩어지지 않았다. 화산과 같았고, 붉은 자주색(紫絳色)이었다." 상군은 방화를 진격수단으로 사용하는 외에, 불로 흔적을 없애는 수단으로 삼았다. 매번 왕부나 민가를 하나 약탈할 때마다, 바로 모조리 불 질러 버렸다. 이 불은 천경이 함락된 날로부터, 이곳저곳에서 연이어 일어나서 7, 8일간 계속되었다. 27일이 되어 큰 비가 내리고서야 비로소 꺼졌다. 큰 불이 지나간 후, 남경성내의 십중팔구의 가옥은 불에 타버렸다. 각종 저명한 건축물과 문화재고적은 거의 모조리 불타서 사라진다. 그리하여 남경의 적지 않은 고건축물은 그 이후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살인 : 이는 상군이 입성한 후의 '주요임무'였다. 그들이 먼저 살해한 것은 성내에서 계속 저항하는 태평군 전사였다. 다음으로는 일반백성이었다. 그러나 살해당한 태평군전사야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성이 함락될 때, 천경성내에서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태평군은 겨우 3,4천 명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 중 일부는 시가전을 벌여서 용감하게 희생당했고, 일부는 혼란 중에 천경을 빠져나갔다. 또 다른 일부분 천여 명은 이수성의 지휘 하에 유천왕을 모시고 포위망을 뚫었다. 그리하여 피살된 대부분은 일반백성이었다. 사실, 천경이 함락된 그날 저녁에 상군은 기본적으로 도시 전부를 장악한다. 비록 몇 개의 왕부에서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고, 4,5일간은 지속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전쟁상태는 끝난 것이다. 그러나 이번 대도살은 10여 일간이나 지속된다.
살인의 동기는 각각 다르다. 주요한 것은 재물약탈과 부녀자간음을 위한 것이었다. 이번 도살에 관하여 조열문(趙烈文, 증국번의 심복)은 당시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성이 함락된 5일후에도 여전히 시신이 길을 가로막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성이 함락된 후, 건장한 장모(長毛, 태평군)은 항거하다 참살된 외에 죽은 자들이 얼마 되지 않았다...길거리에 죽은 자들의 열에 아홉은 노인이었다. 어린아이로 2, 3살이 되지 않은 자들도 장난으로 죽여서 길거리에 널부러졌다. 부녀로 사십 세 이하는 하나도 없다. 노인들은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다. 혹은 십여 도, 혹은 수십 도. 슬퍼하는 소리가 사방에 들렸다. 그 어지러움이 이와 같으니,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일이다."
그렇다면, 상군이 입성한 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까? 영국인인 Augustus F Lindley가 쓴 <<태평천국혁명친력기>>를 보면 개략 3만여 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 무고한 남, 녀, 아동이었다. 증국전은 자신의 논공행상을 위하여 숫자를 허위보고하였는데, 성을 함락시킨 후에 피살된 사람은 수만이라고 하였다.
약탈 : 천경의 재물에 관하여 상군은 일찌감치 침을 흘렸다. 그들은 천경을 포위한 이래, 양식이 부족하고 한여름의 더위를 견디면서 전투를 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성을 함락시킨 후에 횡재를 노리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성에 들어가자마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재물을 약탈했따. 그들은 먼저 왕부를 털고, 다시 지하창고를 털었다. 곧이어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의 재물을 빼앗았다. 분묘도 도굴했고, 심지어 적지 않은 건축물의 목재까지도 철거해서 가져갔다. 성벽위에서 내려 보내고 배에 실어서 호남남부까지 운송했다. 재물을 약탈하기 위하여, 그들은 대거 주민들을 죽여 버린다. 약탈과정에서, 사병들 간에도 계속하여 투쟁이 발생한다. 성이 함락된 후 십여 일간, 길거리에는 상군 사병들이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공성부대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사방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심지어 성 밖에 남겨졌던 노약병들까지도 병영을 떠나 성내로 들어와서 약탈에 가담했다. 심지어 증국전의 총사령부를 경비하는 병사들과 잡역부 등 비작전 인원들까지도 모두 성으로 들어가서 재물을 긁어모았다. 어깨에 메고 손으로 들고, 집단으로 몰려다니면서 하루에도 여러 번 왕복했다. 일부 문관, 막료들은 그래도 문관이므로 약탈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병사들이 재물을 허리에 가득차고 손에 가득 든 것을 보면 눈이 벌개졌다. 그리하여 속속 저가로 사병들이 빼앗아온 장물을 매입했다.
간음 : 상군은 방화, 살인, 약탈과 동시에 부녀자들을 간음했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민가에 들어가서 부녀를 간음했다. 백주대낮에 공공연히 길거리에서 젊은 여자를 희롱하니, '통곡하는 소리가 차마 듣기 어려웠다' 40세 이하의 부녀는 거의 모조리 그들에게 간음당하고 호남남부로 끌려가서 매매되었다. 일시에 장강의 상하에는 도처에 상군들이 장물과 부녀를 가득 실은 선박이 오갔다. 경천동지할 곡소리와 욕설 속에 호남으로 향했다. 많은 노인들은 자신의 딸이나 며느리를 구하려다가, 많은 어린아이들은 곡을 하면서 모친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천경의 겁난을 만든 사람과 괴수는 증국번과 그의 동생인 증국전 그리고 그의 심복장수들이다. 그들은 전체과정에서, 부하들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적지 않은 이들은 친히 가담했다. 증국전은 그 과정에서 수천만의 재물을 얻었다. 약간을 정부에 바친 이외에 나머지는 모조리 집으로 실어갔다. 이 겁난을 거치면서, 천경은 거의 폐허로 바뀐다. 무너진 담장과 벽이 있고, 곳곳에 깨어진 기왓장과 벽돌이 있었다. 증국번 자신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계이후 생령이 도탄에 빠진 것이 오늘만한 경우가 없었다고. 이홍장은 양강총독 서리를 맡은 후, 이 파괴적인 현상을 보고, 손쓸 도리가 없다고 탄식했다. '일좌공성, 사주황전(一座空城, 四周荒田, 텅빈 도시로 사방이 황량해진 밭뿐이다)", "관리할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돈도 없다."
30. 동사도(東沙島) : 청나라 말기 대일외교전의 승리
글 : 설이(雪珥)
군대의 나팔소리가 들리면서 완전무장한 광해(廣海)함의 관병은 정렬을 했다.
선명한 황룡기(黃龍旗)가 동사도의 상공에 높이 올라갔다. 광해호에서 바람을 맞던 황룡해군기가 멀리서 호응했다. 귀를 찢을 듯한 대표소리가 광해함에서 울렸다. 이것은 21발의 예포였고, 막 하강한 일본국의 태양기와 청나라의 품에 다시 안긴 동사도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1909년 11월 19일, 선통원년, 청나라가 처음으로 열강의 수중에서 자신의 영토를 회수한 기념비적인 날이다.
광동후보지부 채강(蔡康)과 일본주광저우부영사 굴의귀(掘義貴)는 양국정부를 대표하여 이양의식에 참가했다. 겨우 1.8평방킬로미터에 불과한 남해의 문호인 작은 섬 위에 서 있던 두 사람의 심정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남해상공의 예포성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전에 1년 동안 서방의 신문은 청나라와 일본간의 Pratas라고 불리는 이 작은 섬을 둘러싼 분쟁을 대거 보도했다. 지금 톤수나 화력에서 예전의 북양함대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인 광해함이 전 세계에 북양함대에 전혀 손색없는 기개를 보이고 있다.
1909년, 재건 중이던 대청해군은 자신의 약소함에도 불구하고 황해에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도광양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깊은 바다로 나아갔다. 일찍이 7년 전에 대청해군은 남해를 순시하고, 깃발을 꽂고, 비석을 세우고, 주권을 선언했다. 해군의 남진에 관련된 정부문서에는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군함이 바다로 나가는 것은 위로는 위엄과 덕을 휘날리고, 아래로는 상인교민을 위문하기 위함이다. 군정(軍政)과 상정(商政)은 서로 보완하여 상호이익을 찾을 수 있다. 청나라는 이미 전세계를 놓고 국가이익을 추구했던 것이다.
자그마한 동사도는 1909년 외교와 군사의 초점으로 등장한다.
이 섬은 5000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역을 지배하는 전략요충지이다. 어민들의 눈에는 돈을 버는 보고이다.
이곳에 와서 물고기를 잡던 청나라의 어민들 중에는 갑부들이 적지 않게 탄생했다. 그리하여 남해일대에는 '돈을 벌려면 동사로 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보고는 당연히 대만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인들도 끌어들이게 된다.
니시자와 기치지(西澤吉次)는 일본상인이다. 1901년 상선이 폭풍을 만나 항로를 벗어나서 이곳에 표류하게 된다. 그런데, 그는 섬에 인산염 광물(새똥)이 풍부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동사도의 인산염광물은 15-20피트두께에 달하였다고 한다.
다음해(1902년), 니시자와 기치지는 다시 배를 타고 와서, 대량의 인산염광물을 캐내어 대만으로 가져가서 판매한다. 이것은 그가 동사도에서 얻은 첫 번째 큰돈이었다. 이 해에 남오총독 이준은 "복파"호, "주항"호, "광금"호의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서사, 동사군도를 순시한다. 그리고 주요한 도서(동사도 포함)에 석비를 세우고, 주권을 선언한다. 이번 순시에서 대청해군은 처음으로 일본인들이 동사도를 욕심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니시자와 기치지는 동사도를 대규모로 개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얼마 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해상운송능력이 부족하여, 그의 웅대한 계획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전후, 니시자와는 마침내 1907년 여름, 120명의 노동자를 이끌고 동사도에 상륙하여, 이 '무인도'를 '니시자와섬'으로 명명하고, 일본 국기를 올린다.
니시자와가 남긴 문헌에서, 동사도를 개발하는데 대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고의로 몇 가지를 감춘다. 이 '무인도'에서 일하던 중국어민을 그는 폭력으로 강제추방시켰고, 용왕묘, 형제소(사당)은 모조리 철거했다. 그리고 수백 개의 중국인묘도 없애버리고, 유골은 화장하여 바다에 뿌렸다.
이해 겨울, 일본군함은 동살도로 오고, 상선 "이진환(二辰丸)"호를 호송한다. 그리고 일본이민자와 군사물자를 가득 실었으며, 동사도에 장기간 주둔할 계획이었다. 당시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일본의 구축함이 동사도에 들어간 것은 아주 중요한 외교적 조치라고 보도했다.
대청정부의 반응도 상당히 신속했다. 양강총독 단방(端方)은 먼저 이 소식을 듣고, 신속히 외무부에 상황을 보고한다. 그는 전문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민월(복건, 광동)의 사람들 중에서 오래 항해한 사람들이나 지리학에 밝은 사람들은 모두 이 섬이 우리나라의 영토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동시에, 단방은 양광총독 장인준(張人俊)에게 통보하여, 이 섬은 '확실히 중국의 땅이니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치대로라면, 양강총독이 양광의 일에 간여하는 것은 관료사회의 금기에 속한다. 그러나 단방이든 장인준이든 이것을 따지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두 사람은 빈번하게 전문을 주고받으며 자원을 준비하고, 자료를 찾고, 근거를 마련했다. 그리고 1908년말, 공동으로 남양해군에 현지조사를 요구한다. 1909년 구정이 지난 후, 남양해군의 부장 오경영은 비응호를 이끌고 동사로 항해한다. 그리고 이 섬이 확실히 일본인에 점령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서 증거로 한다.
장인준은 곧 동사도에 관한 각종 문헌, 영국, 프랑스 해군의 해도, 비응호의 사진까지 포함하여 북경이 외무부로 보낸다. 공문에서 장인준은 일본인들이 '사사로이 점유하였으니, 이를 회수해오지 않으면, 여러 나라들이 서로 땅을 차지하는 선례가 될 것이니, 이를 쫓아내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외무부에서 '신속히 일본 공사와 교섭하여 일본의 상인과 백성을 모조리 철수시키고, 우리가 파견한 인원이 접수하여 관장하도록 하며, 다른 한편 조치를 통하여 주권을 널리 알리기"를 희망했다.
1909년 초여름, 비응호는 세관순시선과 함께 다시 동사도로 가서 증거를 수집한다. 그리고 가는 길에 서사군도도 순시한다. 장인준은 북경에 보낸 보고서에서 동사, 서사는 '유럽에서 중국으로 오는 요충지이고, 남양의 가장 중요한 문호이므로 이것을 버려두고 다스리지 않으면, 단순히 지리적인 이점을 포기하는 것으로 애석할 뿐 아니라, 영토를 중시하고 해상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된다." 미국의 크리스쳔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청나라의 특별파견함대의 '오사령관'(오경영)은 조정에 거주가능한 모든 남해도서에 하루빨리 이민을 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고 보도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심지어 계급이 그다지 높지 않은 오경영의 화상을 게재하기도 했다.
크리스쳔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보도와 동시에 북경정부가 광동지방당국에 이 사실을 공표하지 말도록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제불매운동을 자극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청나라 중앙정부가 동사문제에 있어서 언론을 통제했다는 여하한 사료도 찾아볼 수 없다.
동사도사건은 1909년 정치의 초점이 된다. 이때의 민의의 주류는 여전히 일제불매운동이었다.
1년 전(1908년), 동사도로 이민자와 군사물자를 운송했던 '이진환'호는 대량의 군수물자를 밀수하여 혁명당에게 제공하다가 마카오해상에서 대청해군에 저지당했고, 그 자리에서 대량의 탄약을 압수당한다. 분노한 중국해병은 선상의 일본 국기를 찢어버린다. 그러나 일본, 포르투갈의 양국의 외교압력 하에, 그해 3월 19일, 청나라정부는 이진환호를 석방하고, 21발의 예포를 발사하여 사죄를 표시한다. 월상자치회는 그날을 '국치일'로 선언하고, 일제불매운동을 호소한다. 이에 응하는 자들이 전체 광동성, 상해, 홍콩, 남양군도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일제불매운동이었다. 일본무역의 하락폭은 1907년에 비하여 6%에 이르렀다. 결국 일본은 배상금요구를 취소하였고, 마카오 포르투갈 당국은 군사물자의 밀수를 엄격히 단속하겠다고 약속하며, 중국정부와 국경선협상에 들어간다.
이진환호 사건이 막 끝나자마자 동사도사건이 터졌다. 광동의 각계와 월상자치회의 기획 하에, 연속하여 수천 명의 군중집회가 열린다. 중앙의 섭정왕 재풍에게 글을 올려, '중국어민과 섬의 재산을 보호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정부가 포기하더라도, '국민들의 능력을 모두 동원하여 이를 구해내겠다'고 선언한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보도를 통하여 이때 중앙정부가 선명한 기치를 내걸고 주권을 선언하지 않으면, 민중들이 정부를 겁쟁이이자 무능한 자로 보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최초의 외교교섭에서 일본정부는 동사도가 '무인도'라는 주장을 계속했다. 그러나 장인준 등이 충분히 준비하여, 대량의 역사자료와 증인, 물증을 제시했다. 일본인들은 결국 중국이 동사도에 대하여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일본인은 니시자와 기치지가 이미 건설한 인프라시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중국 측에서는 이에 대응하여, 일본상인은 중국정부에 납부하지 않은 어업세와 광산세를 납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일본 측은 안봉철도를 개축하여 중일 양국간에 만주에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만주와 화북에서 일제불매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일본인들은 할 수 없이 동사도에서 손을 떼어 양쪽에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피한다.
그 후 몇 번의 설전 끝에 중일쌍방은 1909년 10월 11일 동사문제조약을 체결한다. 여기에서 동사군도는 중국의 고유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일본인들은 즉시 철수한다. 중국은 광동호은16만 위안으로 섬에 이미 건설한 시설을 매입하고, 동시에 일본인은 각종 세금과 재산파괴에 대한 배상으로 광동호은 3만 위안을 납부한다.
동사도 사건에서, 청나라정부는 민의존중의 측면이나, 각 부서간의 업무협력측면에서 모두 아주 뛰어났다. 더욱 고귀한 점은 군사력이 강하지 못했던 대청정부에서, 과감히 용기를 내어 간여하고, 뛰어난 담판수단을 보였다는 점이다.
1909년, 대청의 사병이 동사도등 남해 각 섬에 무장주둔하기 시작한다. 그 효과는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치고 있다.
31. 나가사키 사건 : 청일전쟁 승패의 근원을 찾아서
글 : 김만루(金滿樓)
중국민중의 반일감정은 강렬하고,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은 100년 전에,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반중감정이 성행했다는 점이다.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아이러니의 배후에는 연유가 있는 법이다.
1886년, 북양함대의 ‘정원(定遠)’, ‘진원(鎭遠)’, ‘제원(濟遠)’, ‘위원(威遠)의 네 척의 군함이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를 방문했고, 나가사키를 뒤흔들어 놓았다. ‘정원’, ‘진원’의 두 척의 위풍당당한 거함은 일본인들이 그때까지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이었다. 마음속의 놀라움을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이 군함들을 보는 일본인들의 마음은 상당히 복잡했을 것이다.
이전 10년간 중국과 일본은 유구, 조선 및 대만문제를 놓고 대립하여 왔다. 이홍장이 이번에 ‘정원’ ‘진원’의 두 거함을 일본에 보낸 것은 일본을 겁주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원’ ‘진원’의 두 척은 동급의 자매함이다. 독일의 Vulcan이라는 조선소에서 만든 것으로, 1885년 10월에 인도되었다. 당시에는 세계최고급철갑선으로 불리었다. 철갑선의 당시 해군에서의 지위는 현재의 항공모함과 같다고 할 수 있다. 340만 냥 백은을 들여서 만든 ‘정원’ ‘진원’은 확실히 남달랐다. 두 척은 배의 길이가 94.5미터, 너비가 18미터이고, 배수량이 7200톤, 항속이 14.5노트(진원함은 15.4노트)이다 두 척이 주요무기는 4문의 Krupp305밀리 후방 장착식 주포, 2문의 Krupp150밀리 후방 장착식 보조대포, 4문의 75밀리 Krupp대포, 8문의 37밀리 5관Hotchkiss 기관포, 각 2문의 57밀리, 47밀리 Hotchikiss 기관포, 3대의 14시 어뢰 발사관이 있었다. <<북양해군장정>>의 규정에 따르면, 이 전함은 총병(總兵)이 지휘했다. 북양해군의 계급은 제독, 총병, 부장, 참장, 유격, 도사, 수비의 순이었다. 이 두 척의 주력철갑선이 무장을 갖춘 후 1988년 정식 해군으로 성장한다. 이때 중국의 해군력은 세계8위 수준이었다.
일본인의 중국에 대한 감정은 복잡했다. 원인은 바로 일본역사상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항상 학생이 스승을 대하는 심리였다. 그러나 근대이래로 일본은 ‘탈아입구’의 길로 들어섰고, 폐쇄의 길을 걸었던 대청제국과 비교하여, 그들은 심리적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양함대의 방문은 그들의 이러한 심리에 큰 타격을 주게 된다.
8월 13일, 북양함대의 수병들이 해안에 상륙한 후 일본경찰과 충돌이 발생한다. 그중 경찰 1명이 맞아서 중상을 입고, 북양수군의 수병 1명이 경상을 입는다(그 연유는 부끄럽게도 수병이 기원을 찾았다가 분쟁이 붙은 것이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원래 불만을 품고 있던 나가사키 경찰과 일본낭인은 극히 분노한다. 결국 15일에는 더욱 큰 충돌이 발생한다. 이번에는 북양수병이 아무런 준비 없이 당했다. 일본경찰과 낭인은 칼을 들고 5명을 죽이고, 4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일본경찰도 1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당한다. 혼란 중에, 일부 현지 일본인들도 건물위에서 뜨거운 물을 붓거나, 돌멩이를 던지고, 어떤 사람은 아예 칼을 들고 참전하기도 했다.
이홍장은 ‘나가사키 사건’을 보고받은 후, 분노하여 당시 일본의 주천진영사인 하타노를 불러, 거의 협박조로 얘기한다. “지금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우리 병선이 귀국에 정박해 있는데, 함체나 대포는 단단하니까, 지금이라도 바로 전투에 돌입할 수 있다.” 북양함대의 총교관인 Lang William도 즉시 선전포고하고 나가사키를 포격해서 보복할 것을 건의했다.
당시의 일본은 비록 변법유신을 시작했지만, 국가가 10년 만에 완전히 변신할 수는 없었다. 일본은 더구나 자원빈국이다. 일본인들이 비록 ‘완고하고 보수적인’ 중국을 멸시하고 있었지만, 중국은 어쨌든 오래되고 방대한 제국이다. 이런 역사의 그림자는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중국의 국력과 군사력은 모두 일본이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해군만 보더라도, 일본은 3척의 3000톤급 철갑선을 지니고 있었는데, 북양함대는 7000톤급의 철갑선만 2척이 있다. 그 외에 순양함, 포함, 운송함 등 그 양과 질에 있어서 모두 일본이 미칠 수 없었다.
각국의 조정과 외교적 절충 하에, 중국과 일본의 쌍방은 반년 후에 합의를 이룬다. ‘싸움은 원래 언어가 통하지 않고, 서로 간에 오해가 생겨서, 싸움에 이르고 사상자까지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이 체결한 천진 조약에서, “양국의 사법부문은 본국법률에 근거하여, 각자 적절히 처분하며,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마지막으로, 각자의 사상자는 서로 부담하여, 일본은 중국에 52500원을 지급하고(그중 장교1명이 6000원, 사병 7명이 31500원, 장애가 남은 6명은 15000원), 중국은 일본에 15500원(경부 1명은 6000원, 순사 1명은 4500원, 장애가 남은 2명은 500원)을 지급했다. 나가사키 병원의 치료비 2700원은 일본 측이 지급한다. 이 일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쌍방이 모두 한 걸음씩 양보하여 상호 체면은 유지한 셈이다.
이홍장이 북양해군의 군함4척을 나가사키로 보낸 것은 확실히 무력시위를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지 못했던 점은, 북양함대의 두 척의 거함이 일본인의 민족감정을 크게 자극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거쳐, 일본의 반중심리는 더욱 고조되고, 군국주의분자들로부터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북양함대를 적대시하게 된다. 그들이 보기에, 외국수병이 술에 취해서 자기나라로 와서 사건을 벌이고, 게다가 배상까지 요구하다니 이에 대한 원한과 모욕감이 아주 컸던 것이다. 자연히 선동하기 쉬워진다.(이런 일이 중국에 특유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런 분위기하에서, 해군을 대거 발전시킨다는 것이 일본 내에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반드시 ‘정원’호를 이기겠다는 것이 일본해군의 목표이자 구호가 된다. 일본의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유행하던 놀이는 바로 두 편으로 나누어 하나는 중국함대, 하나는 일본함대로 하여, ‘정원’ ‘진원’의 두 군함을 잡는 놀이였다.
일본의 반중감정은 일본정부의 고취 하에, 금방 북양함대를 추월하는 동력이 된다. 나가사키 사건이 끝난 지 1달여 후에 일본 메이지천황이 칙령을 반포한다. “나라를 세우는 임무는 바다를 지키는데 있다. 하루라도 늦춰서는 안 된다.” 그 후에 그는 몸소, 내탕금 30만 엔을 내놓고 해군의 자금으로 쓰게 한다. 그 후, 메이지천황은 다시 칙유를 발표하여, 6년간 매년 30만 엔을 내놓겠다고 하며, 문무 관리들도 봉금에서 1/10을 군함건조비로 국고에 납부하도록 한다.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도 연설을 통하여, 국민들의 기부를 호소한다. 일본에 강력한 해군을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번 헌금 열풍 속에서, 일본은 반년동안 200만여 엔을 모금한다. 천황의 모친까지도 그녀가 가진 2개의 액세서리를 내놓을 정도였다.
일본정부는 재정곤란에도 불구하고, 매년 해군경비를 증가시키고, 거액의 공채를 발행한다. 그 수량은 재정수입의 30%에 이를 정도였다. 예를 들어, 1886년, 일본정부는 1700만 엔의 해군공채를 발행하고, 1889년 이론해군의 군비는 이미 1000만 엔에 달한다. 1888년이후, 일본은 대규모로 군함을 구매하고, 군함을 건조한다. 6년 동안 군함 12척을 늘여서, 합계 18000톤이 늘어난다. 청일전쟁 전날까지, 일본해군의 주력함의 총톤수는 이미 37000톤에 이른다. 북양함대의 주력함의 총톤수인 30000톤을 이미 넘어선 것이다. 바로 이 6년 동안 북양함대는 배 한 척, 포 한 대 구매하지 않았다. ‘세계8위’의 휘황한 명성은 이미 옛 말이 되고 말았다.
더욱 중요한 점은, 당시의 세계해군의 군사기술이 날로 새로워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후발주자로 선발주자를 따라잡았다. 구입한 것이건 자체 제작한 것이든, 장비들이 모두 선진적이었다. 평군 항속은 북양함대를 훨씬 추월했다. 군함에 대규모로 장착한 속사포는 북양함대가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청일전쟁 전날까지, 북양함대는 총톤수, 항속, 화포능력에서 모두 일본함대에 뒤졌다. 이것이 아마도 북양함대가 우선 풍도에서 패하고, 다시 황해에서 패하고, 마지막으로 위해에서 패한 원인일 것이다.
32. 청일전쟁의 패배는 당쟁 때문이다
글 : 정만군(程萬軍)
붕당지쟁(朋黨之爭)은 중국 역사이래 계속 얘기되던 이슈이다. 동시에 세계역사상으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청나라말기에 중국과 일본은 마찬가지로 붕당지쟁이 있었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냈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 양국이 하나는 흥성하고 하나는 쇠망하는 표시이며, 최종적으로 청일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고대 중국에서 붕당지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노(奴)’를 중시하지 ‘재(才)’를 중시하지 않는 것이다. 부패가 극에 달한 청나라말기는 이것이 더욱 두드러졌다. 북양수군의 전멸이라는 결과는 당쟁과 관련이 있다.
청말에 가장 두드러진 붕당지쟁은 상회당쟁(湘淮黨爭)이다. 이홍장과 좌종당이 각각 우두머리인 상회양당은 외적이 위협을 가하는데도 불구하고, 내부투쟁에만 신경을 쏟았다. 그리하여 정여창, 섭지초와 같은 무능한 자들이 중요요직을 맡고 결국 본인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게 되었다.
상회당쟁은 좌종당과 이홍장은 유한한 재능을 다 쏟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들의 인재선발에서도 서로 기싸움을 벌이게 만든다. 우리 편이 아니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더라도 절대 기용하지 않는다.
세상에 백락이 있은 후에 천리마가 있는 것이다.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야생마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부적합한 인물을 부적합한 지위에 앉게 하면 이는 부하의 잘못이 아니다. 상사의 잘못이다.
청일전쟁에서, 이홍장이 중용한 2명의 장수는 해군총사령관 정여창과 육군총사령관 섭지초이다. 이들은 모두 무능한 자들이다. 정여창은 수군제독이라는 지위에 있었지만, 오로지 한 가지만을 신경 썼다. 이홍장의 뜻에 따라 처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북양수군은 ‘이가군’이 되어 버린다. 이 정여창은 이를 확실하게 해냈다. 그러나 해전을 벌이는 능력은 형편이 없었다.
정여창은 이홍장이 중용한 장군이지만, 경천위지의 인재도 아니고, 세상을 흐름을 아는 신세대의 장수도 아니다. 그저 구식 봉건관리일 뿐이다. 그는 일찍이 태평군에 참가하고, 태평군의 대세가 기울었을 때, 상군에 투항한다. 그 후에 회군으로 소속이 옮겨진다. 그리고 태평군과 전투를 하고, 관직이 제독에 오른다. 1879년(광서5년), 이홍장에 의하여 북양수군으로 옮겨진다.
해군출신도 아니어서, 정규해상훈련을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이홍장의 사람’이기 때문에, 회계(淮係)의 정여창은 육군에서 해군으로 전직한 후 해군을 이끌게 되는 것이다. 정여창은 이홍장의 말이라면 그대로 따랐다. 그 정도가 심하여 자신의 주견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해군총사령관으로서의 자신감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마치 이홍장의 집안노복과 같았다. 해군총사령관이 전투에서의 공로를 추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 인신을 의존하여 승진을 하고자 했다. 북양해군은 정여창의 지휘 하에, 사실 ‘이씨 집안 부대’로 전락하고 만다.
이홍장에게 북양해군으로 옮겨지기 전 20여 년 동안, 정여창은 장강수군에 소속된 경력은 있지만, 신식해군훈련은 전혀 알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문외한이고, 수전경험은 전무했다. 하물며 해전은 말할 것도 없다.
북양해군으로 옮겨진 후,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청나라 해군의 전선최고지휘관으로서 정여창은 어떤 일을 하였는가?
가노철학(家奴哲學)하의 북양수군의 주요목적은 대내자중이지 대외방어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정여창은 평소에 훈련하면서, 완전히 상사들이 좋아할 일만 했다. 실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과 모양에만 치중했다. 훈련장에서는 보기 좋을 수 있지만, 실전에서는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양수군의 사격훈련을 보면, 군함이 사격할 때, 목표물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결과 군함에서는 거리를 계산한 후, 이 부표를 향해 포를 쏜다. 당연히 백발백중이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이렇게 쏠 수 있는가? 그리고 진형문제도 전쟁터에서는 천변만화해야 한다. 평소에도 오늘 훈련하는 것은 어떤 진형이다 라고 하면 모두 사전에 알고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깃발로 신호를 보내면 그것이 명령이고 바로 진형을 바꾸어야 한다. 어떤 진형으로 바꿀지는 전쟁의 상황변화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평소에 전혀 그런 방식으로 훈련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여창의 해군은 실전성이 결핍되어 있었다.
문외한인 정여창이 북양수군을 지휘하니, 오히려 문외한이 전문가를 지휘하는 격이었다. 등세창등 젊은 장교들은 ‘영국에도 해전을 모르는 총사령관이 있을까?”라고 탄식하는 것이다.
이런 해군사령관이 있으면 해군을 망칠 뿐 아니라, 자신도 망치게 된다. 결국 자신이 잘하지도 못하는 일을 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이다.
무능과 기개는 별개이다. 비록 정여창은 청일전쟁의 마지막에 자살을 하였지만, 그의 ‘무능’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해군은 위기를 구할 총사령관이 필요한 것이지, 한번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무능한 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여창을 선택한 것이 해전의 패배를 가져왔다면, 섭지초를 선택한 것은 조선과 동북지방을 모두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이홍장은 육군총사령관을 놓고 고민에 빠진다. 그때 육군 장군들 중에서 전투에 능한 노장들이 있었지만, 이홍장은 최종적으로 섭지초를 선택한다.
‘말솜씨’로 승리를 얻고, 거짓말과 주인에 대한 절대복종이 섭지초의 가장 큰 재주였다. 섭지초는 관료로서 전형적인 인물이다. 담량이 작고, 돈을 목숨처럼 아끼며, 명망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는 ‘회계(淮係)’출신이다. 그래서 이홍장의 적계이다. 그러다보니, ‘작은 인물’이 ‘큰 직위’를 맡게 된 것이다.
섭지초가 육군총사령관이라는 자리에 앉았다. 무능한 자가 직급이 수직상승하더라도, 재능이 수직상승하지는 않는다. 섭지초가 데리고 다니는 부하들도 모조리 관료기질이 몸에 밴 인물들이다. 아편을 흡입하고, 전쟁 시에도 매일 술자리를 열고, 부하들을 돌보지 않고, 다가오는 대적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들은 “배가 다리에 도착하면 자연히 곧게 선다(船到橋頭自然直)”
평양전투전에 섭지초의 소첩은 섭지초에서 서신을 하나 보낸다. 그에게 집안의 처첩을 생각하라고 얘기한 것이다. 원래 인걸이 아니었던 그는 평양전투의 중요한 순간에 성을 버리고 도망친다.
정여창, 섭지초는 실로 무능하기 그지없는 자들이다. 이 점에서 이홍장의 사위인 장패륜은 일찌감치 이홍장에게 일깨워준 바 있다. 그러나 이홍장은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결국은 그들을 기용한다. 바로 그들이 ‘회계’로 자신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여창 본인은 해군의 일을 몰랐다. 그의 부하들은 대부분 좌종당, 심보정이 세운 마미선정학당의 졸업생들이었다. 일부 정여창의 말을 잘 듣는 해군장교들은 그저 줄서기를 할 줄 아는 자들이지 전투를 할 줄 아는 자들이 아니었다. 일본의 해군과 상대될 리가 없다.
당쟁, 내분, 견제, 부패로 큰돈을 주고 사온 전투함을 이들 해군장수들에게 맡기다니…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33. 광서제(光緖帝)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

짜이텐(오른쪽)과 짜이펑 형제, 짜이텐은 광서제, 짜이펑은 마지막 황제 푸이의 아버지
동치13년(1875년) 12월 5일 저녁, 동치제가 자금성의 양심전 동난각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동치제가 죽기 직전에 양심전의 서난각에서는 자안태후(동태후)와 자희태후(서태후)의 두 태후가 주재하여 긴급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의 주제는 단 하나였다. 누구로 하여금 황통을 잇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당시 청나라의 귀족, 고관들이었다. 순(恂)친왕 혁종, 공친왕 혁석, 순(醇)친왕 혁환, 부군왕 혁혜, 혜군왕 혁상, 패륵 재치, 재징, 공 혁막(황자의 등급은 친왕, 군왕, 패륵, 패자, 공의 다섯단계이다), 어전대신 보롱나모구, 이쾅, 징셔우, 군기대신 바오쥔, 콰이링, 롱루, 밍샨, 꾸이바오, 원시, 홍덕전행주 서동, 옹동서, 왕경기, 남서방행주 공각, 반고음, 손치경, 서포, 장가양 등이었다.
청나라에서 황제가 자식을 두지 않고, 죽은 것은 동치제가 처음이었다. 청나라의 '가법'에 따르면 황제 사망 후 자식이 없으면, 반드시 황족의 친지 중에서 다음 대의 사람을 선택하여 황태자의 신분으로 사망한 황제의 후사를 이어 황위에 오르는 것이었다. 동치제의 이름은 재순이었고, 아이신줴뤄 가계에서 "재"자 항렬에 속한다. 바로 다음은 "부"자 항렬이었다.
부(溥)자 항렬에서 황위를 잇기에 적합한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부륜(溥倫)이고, 다른 한 사람은 부위(溥偉)였다.
부륜은 도광제의 장남인 혁위(奕緯)의 아들인 재치(載治)의 아들이다. 부자 항렬 중 당시 연장자이고, 배분등에서도 적당했다. 그런데, 재치는 혁위의 친아들이 아니라, 혁위의 양자로 후사를 이은 경우였다. 그러다 보니, 혈연관계에로 보면 부륜은 친조부는 도광제의 아들도 아니고, 가경제의 손자도 아니었다. 부륜은 아이신줴뤄 집안에서 본다면 직계가 아니라 방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부륜은 아이신줴뤄의 직계 후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적절한 황제감이 아니었던 것이다.
부위는 공친왕 혁석의 둘째 아들인 재영(載瀯)의 아들, 즉 공친왕 혁석의 손자였다. 그리고, 공친왕의 넷째아들인 재징(載徵)이 후계가 없자 재징의 양자로 들어간다. 종친의 혈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부위가 가장 적절한 후보였다. 다만, 부위는 계부인 재징과 함께 평상시에 기원이나 술집을 드나드는 등 행실의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었다.
또 하나의 방법은 당시에 동치제의 황후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 그러므로 황후가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에게 후계를 잇게 하고, 딸을 낳는다면 다시 후계를 논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서태후가 선택한 방법은 부자항렬에서 선택하는 것도 아니었고, 황후가 동치제의 자손을 낳기까지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자희태후는 동치제와 같은 항렬인 "재(載)"자 항렬에서 선택할 것을 주장했고, 바로 순친왕 혁환의 아들인 재염(載[水+心+舌])이었다.
영국인들이 지은 <<자희외전>>에서는 광서제의 즉위에 따른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자희 : 동치제의 황후가 비록 임신을 하였으나, 언제 태어날 지 알 수가 없다. 황위를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즉시 후계를 정해 황위에 오르게 해야할 것이다.
공친왕 : 황자가 탄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잠시 황제의 사망을 비밀로 부치고 장례를 미루자. 만일 황자를 낳으면 후계로 삼고, 딸을 낳는다면 다시 새로운 황제를 세워도 늦지 않을 것이다.
(왕공대신들 중에서 공친왕의 의견이 맞다는 입장을 보이다)
자희 : 현재 남방이 아직 평정되지 못했다. 그들이 만일 황위가 빈 것을 안다면 아마도 형세가 더 악화될 것이다. 국가의 근본이 흔들릴 수도 있다.
(군기대신과 신하들 중, 특히 한족 3명은 자희의 주장에 적극 찬성하였다)
자안(동태후) : 내 생각으로는 공친왕의 아들이 대통을 이을 수 있을 것 같다.
공친왕 : 감히 그럴 수 없다. 승계의 정상적인 순서를 따른다면, 당연히 부륜이 선황의 후계를 이어야 한다.
재치(부륜의 부친) : 감히 그럴 수 없다.
자희 : 재치는 혁혜의 양자이지 않느냐. 공친왕! 예전에 이렇게 한 사례도 있느냐?
공친왕 : 명나라의 영종황제가 이렇게 계승한 적이 있다.
자희 : 그건 적당하지 않다. 영종이 계승한 것은, 손비가 속여서 한 것이지 않느냐. 그리고 영종이 재위했을 때는 국가가 안정되지도 못하였다.
자희 : 내 생각으로는 혁환의 아들인 재염을 세우면 될 것같다. 그리고, 지금 바로 결정해야지 늦춰서는 안 된다. 투표로 결정하자.
자안 : 좋다.
투표결과 순친왕등은 부륜에게 투표하였고, 세 사람이 공친왕의 아들 부위에게 투표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자희의 뜻에 따라 순친왕의 아들 재염에게 투표하였다. 이로써 황위가 결정되었다.
이 글에서 투표로 결정했다는 부분은 영국적인 사고방식이 개입된 것으로 보이고, 청나라때 투표로 결정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당시 관련자들의 입장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대체로 자희의 일파와 공친왕의 일파 간에 재염을 세울 것인지, 부위를 세울 것인지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며 결국 자희의 의사가 관철되었다는 것이다.
34. 영대수도(瀛臺囚徒) : 개혁황제 광서제의 비극
글 : 장효파(張曉波)

광서제
1908년, 무신년(戊申年), 청광서34년. 불안했던 청나라 역사에서 1908년은 아주 두드러진 해이다. 8년 전에는 전체 화북을 뒤흔들었던 의화단의 난과 8국연합군의 중국침략이 있었고, 3년 후에는 천번지복할 신해혁명이 일어난다. 반드시 언급해야할 일은 이 해의 11월 13일과 14일, 제국의 상징적인 주재자 광서제와 실질적인 지배자 서태후가 연이어 사망한 것이다. 시간은 24시간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전에 무술정변으로 광서제는 영대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군주였지만, 실제로는 죄수였다. 광서제의 죽음은 역사의 일대 의안(疑案)이다. 백 년 동안 역사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몇 년 전, 과학자들은 광서제의 두발을 연구하여 광서제가 독살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백년공안은 마침표를 찍는다. 각종 흔적을 보면, 광서제를 독살한 막후의 인물로 관계를 벗어나기 힘든 사람은 서태후일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가장 많이 의심을 받는 인물이다.
군주제 제국의 운명은 현대정치국가와는 다르다. 최고의 정치권위(군주 혹은 참주)의 신체상황, 권력승계는 심각한 관련이 있다. 1908년, 청제국의 운명은 3살짜리 어린 황제 부의와 평범한 섭정왕 재풍 그리고 구중궁궐에 깊이 틀어박혀 있던 융유황후에게 맡겨진다. 섭정왕 재풍에게 남겨진 청제국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더더구나 권위 있는 인물이 사망하면서 그는 정치적인 통합능력이 부족했다. 정치적 통합능력이 부족하여, 재풍의 인재기용이나 시정은 그저 황족들에 국한되었고 개혁은 마침내 황족소집단의 이익을 옹호하는 조치가 되어 버린다. 마침내 그 후의 3년 동안 전체 한족개혁파들을 혁명당의 편으로 몰아버리게 된다.
청제국의 말기에서 최대의 명제는 개혁이었다. 개혁은 상층의 컨센서스를 이루었다. 다만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서로 견해가 달랐다. 어떻게 개혁을 추진할 것인지의 명제를 놓고, 광서제와 서태후는 커다란 편차가 있었다. 결국 광서제가 영대에 갇히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1898년, 서태후의 의지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단어는 바로 "조종지법(祖宗之法)은 망가뜨릴 수 없다"
무엇이 '조종지법'인가? 간단히 말해서, 바로 조종(祖宗)이 정해준 법이다. 청실은 삼조일종(三祖一宗)이 있다. 청태조 누르하치가 친히 정한 정치제도는 팔왕의정(八王議政)이다; 홍타이시(청태종)에 이르러서는 남면칭고(南面稱孤)한다; 입관(入關)이후, 군주(순치제)의 나이가 어려서, 도르곤이 '황부섭정왕'이 된다; 순치제가 죽고, 4보신이 정무를 본다. 실제로, 청나라의 정치제도가 최종적으로 형태를 갖춘 것은 강희제의 손에서이다. 강희제는 오배를 주살하고, 삼번의 난을 평정한 후, 건강독단(乾綱獨斷)을 완성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조종지법"은 계속 변화했다. 강희제는 원래 적장자 계승제를 실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두 번에 걸쳐 태자를 폐위시키면서, 옹정제가 신비롭게 황제위에 오른다. 그 후에는 비밀건저제(秘密建儲制)를 취한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청나라 때의 '조정지법'은 변화무상하였다. 다만 후궁이 정사에 관여할 수 없게 하고, 태후가 임조칭제(臨朝稱制)할 수 없게 한 것은 청나라의 조훈(祖訓)으로 시종 바뀌지 않는다. 이를 보면, 바로 말끝마다 '조종지법은 망가뜨릴 수 없다'고 말하는 그 서태후가 '조종지법'을 망가뜨린 것이다.
1861년, 기상정변(祺祥政變)으로 서태후가 권력을 잡는다. 이는 황족근지(近支)가 대신세력에 대항한 결과물이다. 동시에 황족근지의 권력타협의 산물이다. 공친왕은 원래 도르곤을 본떠서 섭정왕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여론의 압력에 결국 정변 후에 총리왕대신의 직위로 물러앉는다. 양궁이 수렴청정 하는데, 이는 원래 합법성이 없다. 다만 '주소국이(主少國移)', '일후환정(日後還政)'으로서 미봉책으로 받아들인 정치적 안배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동치제가 18세 때 기녀를 찾다가 매독에 걸려 목숨을 잃는다. 친정을 하기 2년 전에 죽어버린 것이다. 이때 동태후는 이미 죽었고, 양궁 중에서 단지 일궁 즉 서태후만이 남아 있었다. 서태후의 세력이 중추를 독단한다. 4살짜리 광서제가 대통을 승계한다. 이 조치는 중국전통 참주정치의 묘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를 보면, 소위 '조종지법'은 그저 겉으로 내거는 말에 불과하다. 실질은 권력투쟁이다.
'무술변법'으로 광서제는 '조종지법'을 '근대신법'으로 바꾸고자 했다. 다만 소위 변법은 청실통치의 근본적인 문제 즉 군주전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무술변법'의 조항은 이미 모조리 교육, 공업, 우전, 철로에 집중되어 있었고, 강량(강유위,양계초)는 '군주입헌'을 할 용기와 담량이 아예 없었다. 다만 모든 개혁과 마찬가지로, 변법은 인사를 건드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사문제는 바로 중추신경을 건드리는 날카로운 칼이다. 서태후은 원래 광서제의 변법을 지지했다. 다만 일부 급진적인 조치에 대하여는 그녀는 의지를 내려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렇다고 하여 막지는 않았다. 진정 서태후가 두려움을 느낀 것은 광서제가 인사문제에서 과감한 조치를 취하여 서태후가 수십 년간 길러놓은 심복들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인사변혁은 바로 서태후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서태후가 신정을 폐할 때의 구호는 여전히 '조종지법'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무술정변의 풍운인물인 남해성인 강유위를 얘기해보자. 강유위의 호는 장소(長素, 장소라는 것은 소왕(素王) 공자보다 낫다거나, 소왕을 수정한다는 뜻이다. 이 호 자체만 보더라도 그는 유가윤리가 중심인 사회에서 참월범상의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이고 일생동안 제왕의 스승으로 자부했다. 남해성인 강유위는 평생 서태후와 혁명당을 미워했고, 해외로 망명할 때 자주 '위의대도(僞衣帶詔)'를 내세워 자긍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재물을 모았다.
대체로 말해서, 가짜성인 강유위는 무술년이후 대부분은 자아상상과 자편역사(自編歷史) 속에서 살았다. 무술년의 사실은 광서제가 근본적으로 강유위를 중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예 강량유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진정 변법을 추진한 사람은 장지동(張之洞), 진보잠(陳寶箴) 등 권력을 장악했던 봉강대리들이었다. 몇몇 새로 박탁되어 실제 실무를 담당한 군기처장경이 있고, 막후에서 이들을 받쳐준 것은 외성의 고관들이었다. 겨우 담사동(譚嗣同) 정도는 억지로 강유위당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무술변법'에서 강유위는 육품의 하급관리였고, 직접 글을 권력자에게 올릴 권한조차 없었다. 황제에게 글을 올리려면 다른 사람을 거쳐야 했는데, 무슨 변법을 주재한단 말인가? 후세의 역사학자들이 고증한 바에 따르면, 소위 '공거상서(公車上書)'도 강유위가 크게 과장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
언급할 점은 변법자의 변법이유와 서태후의 변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모두 '조종지법'이라는 것이다. 강유위의 변법은 공자개제(孔子改制)를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고문경학대사인 전목(錢穆)은 <공자개제고>는 '그저 신문지 선전 공능밖에 없었다'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보수파이건 유신파이건 '조종지법'은 모두 의지할만한 것이 아니다.
서태후가 나라를 망친 것은 맞다. 그러나 강량(강유위 양계초)의 한마디가 나라를 살릴 수 있다는 것도 진실이 될 수 없다. 청나라말기의 문제는 그 실질을 따져보면, '조종대법으로 예약이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대청제국이라는 낡은 전차가 날카로운 서양의 대포를 맞이하여 버티지 못하게 되자, 서양에서 무기를 구매하여 강해지고자 했다. 중국은 황실 개인재산을 가짜군주입헌이라는 명목으로 남겨두고자 했다. 병이 급해지자 아무 의사나 찾은 꼴이고, 결국 엉터리없는 조치만 취하다가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이다.
1908년 11월 13일과 14일, 광서제와 서태후가 선후로 사망한다. 다음 날, 뉴욕타임즈에서 이 뉴스를 평론하면서 중국인의 관념을 소개한다. "청나라의 백성들 가운데, 사람들이 지금 발생하는 일에 대하여 어떤 감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흔적은 거의 없다. 황제가 죽었다는 것과 황태후가 짧은 기간 내에 죽었다는 일은 청나라사람들에게 있어서 거의 영향이 없는 것같다." 이 평론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 갑오전쟁(청일전쟁), 무술정변, 의화단의 난, 8국 연합군의 북경점령, 황제의 죽음을 겪으면서 희한할 일이 더 없다. 암살의 스캔들도 민국연간에 야사에서 청나라조정의 부패를 조롱하던 거리였다.
그러나 당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Telegraaf> 중국주재기자인 Henri Borel은 서태후의 장례식에 참가한 후, 이렇게 평가한다. "서태후는 신성하고 오래된 이념의 마지막 대표이다...또 다른 새로운 여명이 이미 미래세계의 일부분이 된 기묘한 왕국에 강림할 때, 이상의 이념은 이미 그녀와 함께 죽어버렸다."
확실히, '조종지법'은 풍촉잔년(風燭殘年)의 서태후와 마찬가지로, 난제를 견뎌내지 못하고 신해혁명으로 죽어버린다.
35.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


부의(宣統帝)는 청나라 12명의 황제 중 마지막 황제일 뿐 아니라, 중국 역사상 최후의 황제이다.
1989년 광서제의 무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서태후는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정권을 장악한 서태후로서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공을 들여 키워왔던 광서제가 자신의 뜻에 거슬려 무술정변을 획책하자 매우 상심하여, 광서제를 폐위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서태후로서는 첫째, 누구를 새로운 황제로 세울 것인지의 문제와 둘째, 광서제를 폐위시킨 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 등 두 가지였다.
1899년 11월 28일, <<숭릉전신록>>에 따르면 자희(서태후)는 이날 조회가 끝난 후 단독으로 롱루(榮祿)를 접견하여 대화를 나누게 된다.
롱루 : 듣기로 앞으로 폐위시킬 거라는데, 사실이신지요.
자희 : 그렇지 않다. 그게 가능하겠는가
롱루 : 태후께서 하시면, 누가 감히 안된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황상(광서제)의 죄상이 명백하지 않으니, 외국공사들이 들고 일어나 간섭할 수 있으니, 이것은 조심해야할 것입니다.
자희 : 일이 누설되면 어떻게 될까
롱루 : 괜찮을 겁니다. 황상의 나이가 이미 어느 정도 되었으나, 아직 황자가 없으니, 가까운 종친에서 사람을 뽑아 대아거(大阿哥, 아거는 황제의 아들을 부르는 만주어임)로 삼아 동치와 광서의 후사를 잇게 하고, 궁중에서 기르면서, 천천히 대통을 잇게 한다면, 명분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자희 : 네 말이 옳다.
서태후와 롱루는 먼저 대아거를 둔 후에 대아거로 하여금 동치제와 광서제의 계승인이 되어 점차 광서황제를 대체하기로 하였다. 누구를 대아거로 삼을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하던 서태후는 재의(載[水+犬+奇])의 아들인 부준(溥儁)을 선택했다.
부준을 선택한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일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부준의 부친 재의이고, 재의의 부친은 혁종이다. 혁종은 도광제의 다섯째 아들이면서, 가경제의 셋째아들인 순친왕 면개가 후사가 없자, 혁종은 순친왕의 양자로 들어가 순친왕의 작위를 잇게 된다. 재의는 다시가경제의 넷째 아들인 서친왕 면석의 아들인 서군왕 혁기(원명 혁약)이 자식이 없자 그를 이어 패륵의 지위를 얻고, 후에 단군왕(端郡王)이 된다. 둘째, 부준의 모친은 서태후의 남동생인 꾸이샹(桂祥)의 딸, 즉 서태후의 조카였다. 부준의 이 때 나이가 15세였다.
1899년 12월 24일, 자희는 태후의 의지(懿旨)를 통해 부준으로 하여금 동치제의 양자로 들이면서 "대아거"라는 칭호를 내린다. 이 후 대아거는 홍덕전에서 글을 읽고, 사부는 동치제의 장인인 승은공 충치(崇綺)와 대학사 서동(徐桐)을 임명한다.
1900년 1월 1일부터 서태후는 부준으로 하여금 광서제를 대신하여 봉선전에 예를 행하도록 한다. 자희는 원래 1900년부터 광서제를 이어 년호를 "보경(保慶)"으로 바꾸고, 대아거 부준을 보경제로 등극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에 대하여 반대의견이 만만찮고, 롱루와 장친왕 혁광까지 외국공사들이 이의를 가지고 있고, 각 세력들이 반대한다는 점을 들어 보경제를 옹립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건의한다. 조금 지나서 의화단의 난(권비의 난)이 발생하는데, 총리각국사무대신이 된 부준의 부친 재의는 의화단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이었다. 이후 8국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서태후는 광서제와 부준을 데리고 서쪽으로 도망친다. 자희는 12월에 재의가 의화단의 난의 괴수라는 점을 들어 작위를 박탈하고 신강에 유배시킨다.
1901년 북경으로 돌아온 자희는 재의가 의화단의 난에 동조하여 조상에 죄를 지었으므로, 그 아들인 부준의 황태자 지위를 박탈하고, 대아거라는 명호를 폐지한다. 부준은 다시 원래의 적으로 복귀하여 재의의 아들이 된다. 후에 부준은 매우 힘든 생활을 보내고, 비참하게 죽는다. 부준은 대아거가 된 후 광서제에 대하여 매우 무례하게 대하는등 인품이나 능력등의 면에서 좋은 평판을 받지는 못하였다.
1908년 음력 12월 20일, 광서황제의 임종 하루 전에 자희는 의지를 내려 부의로 하여금 황위를 잇도록 한다. 그리고 부의의 부친인 재풍(載[水+豊])을 섭정왕에 봉한다. 자희가 왜 부의를 선택했을까? 여기에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부의의 조부인 혁환은 바로 자희의 친여동생의 남편이다. 즉, 부의의 조모가 자희의 친여동생인 것이다. 혁환은 모두 4명의 부인과의 사이에 7명의 아들을 둔다. 적푸진인 예허나라씨(자희의 여동생)과의 사이에 광서제를 비롯한 4명의 아들을 두는데, 나머지 3명은 모두 요절한다. 첫재 측푸진은 얜쟈씨인데, 자식이 없고, 둘째 측푸진은 류쟈씨(劉佳氏)인데, 세 아들을 낳는다. 다섯째 아들 재풍, 여섯째 아들 재순, 일곱째 아들 재도가 그들이다. 셋째 측푸진인 리쟈씨도 자손이 없다. 류쟈씨의 세 아들 중 재풍과 재순은 다른 집안의 양자로 가서 대를 잇고, 혁환의 왕위는 재풍이 이어받는다. 둘째는 부의의 모친이 자희의 양녀라는 점이다. 모친은 수완과얼쟈씨(蘇完瓜爾佳氏)인데, 롱루의 딸로서 자희가 매우 아껴 양녀로 삼아 궁내에서 기른다. 자희는 재풍을 매우 아껴, 롱루의 딸이자 자신의 양녀를 그에게 시집보낸다.
롱루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면, 만주정백기 출신이고, 청나라 개국 5대신의 하나인 페이잉동(費英東)의 후손이다. 동치제때 롱루는 자희의 총애를 받아 총관내무부대신이 된다. 1875년 보군통령, 공부상서에 오르고, 1894년에는 병부상서 협판대학사가 되며, 1898년에는 직예총독, 군기대신에 오른다. 무술정변때 원세개가 광서제를 배신한 후 롱루를 통해 자희와 연락하며, 보군통령으로서 소위 무술정변의 주역중 강유위와 양계초를 체포하고, 담사동등을 참한다. 후에 태자태보, 문화전대학사(즉 수석대학사)에 오른다.
재풍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면, 재풍은 두 명의 부인과 네 명의 아들을 둔다. 적푸진은 쑤완과얼쟈씨로 이름은 유란(乳蘭)이며, 위에서 샆펴본 바와 같이 군기대신 롱루의 딸이며, 자희태후의 양녀이다. 1902년에 재풍과 결혼하며, 장자 부의(1906년생), 둘째아들 부걸(溥傑, 1907년생)을 둔다. 측푸진 등쟈씨(鄧佳氏)로 1913년에 결혼하며, 두 아들을 낳는다. 셋째 아들 부기(溥[人+其])로 어릴 때 요절한다. 넷째아들은 부임(溥任, 후에 개명하여 金友之라 한다, 1918년생)이다.
여기에서 본 바와 같이 동치제 이후의 황제들은 모두 자희의 뜻에 따라 옹립되는데, 광서제는 자희의 친여동생의 아들이었고, 보경제에 오를 뻔했던 부준은 친조카의 아들이었고, 선통제(부의)는 친여동생의 손자이자, 양녀의 아들이었다. 이것으로 자희가 아이신줴뤄의 후손들 중에서 자신과 혈족인 예허나라씨나 그에 관계있는 사람으로 후계를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친왕집안은 양 대에 걸쳐, 두 명의 황제(광서제, 선통제)를 배출하였지만, 순친왕은 매우 조심스럽게 처신하였다. 부걸(부의의 동생)이 지은 <<순친왕부의 생활을 회고하며>>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자희와 광서의 여러 해에 걸친 반목 가운데에서, 두 파는 너죽고 나죽자는 식의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다툼을 복잡하고 첨예하게 벌이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한편으로는 자희쪽에 선 롱루등의 사람들과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교유하여 결국 인척관계를 맺기에 이르렀고, 다른 한편으로는 광서측의 옹동서등의 사람들과 글로써 교유하여 상당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것이 나의 조부가 일생동안 영예를 누리고 그다지 좌절을 겪지 않은 주요한 이유였다."
36. 양무운동과 변법운동 그리고 청일전쟁
태평천국의 난을 청의 군대만으로 쉽게 진압할 수 없게 되자 증국번과 이홍장을 비롯한 한인들의 지방 군대에게 진압을 위임하게 되었다.
이 진압 과정에서 한인 관료들은 외국 무기의 우수성을 직접 체험했으며, 1,2차 중,영 전쟁을 통해 외국의 힘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정들이 1860년 이후 청조로 하여금 자강운동을 시작하도록 한 계기가 되었다.
이 자강운동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는 군사과학 기술을 받아들이는 양무운동과 다른 하나는 이것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의회 개설 같은 제도개혁을 실시하여 강력한 주권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변법 운동이다.
두 운동은 모두 국가와 엘리트에 의해 권위적인 방식으로 시작되었으며 중흥의 이념은 중체서용(中體西用)에 두고 있다. 양무운동은 일차적으로 서양의 군사기술이 우수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받아들이자는 데서 출발하였다.
그 결과 상해나 복주와 같은 지역에 조선소나 병기 공장이 들어섰으며 신식의 군대가 만들어지고 유럽의 기술이 도입되어 산업화에 필요한 광물도 채굴하기 시작하였으며 아울러 상선회사, 전보총국이 설립되고 철도가 건설되었다. 양무운동의 추진결과 개항장을 중심으로 상해와 같은 근대도시가 성장하였다.
하지만 청, 불 전쟁(1884년), 청, 일 전쟁(1894년)을 통해서 양무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동학란으로 조선이 출병을 요구하자 청은 군대를 출병시켰고 일본도 이에 대응 즉각 군대를 출병시켜 두 나라 군대는 조선에서 대립하게 되고 마침내 양측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1894년)
일본은 청군을 격파하여 조선을 점령하고 이와 동시에 해군도 황해에서 북양함대를 격멸하여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전진하여 만주 여순을 점령하고 해군근거지인 위해를 점령하여 북양함대를 전멸시켰다.
그러면 왜 대국인 청국이 소국인 일본에 패배한 것일까.
첫째 일본이 산업의 근대화에 성공한 반면 청나라는 보수파의 득세와 견제로 양무운동이 지지부진했다.
둘째 청나라의 부정부패였다. 위로는 서태후부터 하급관리까지 부패되어 있었다. 서태후는 군비를 자기 개인의 향락에 낭비하였고 매관매직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홍장이 전투함대의 거포용탄환을 대량으로 구입하도록 명령하였으나 당시 군비책임자는 거액을 협잡하고 명령을 시행하지 않았으며, 또한 당시 군대의 간부조차도 능력은 무시하고 귀족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양무운동의 실패로 새로운 차원의 자강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개혁 사상가인 강유위(康有爲)와 그의 제자 양계초(梁啓超)를 비롯한 일부 급진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강력하게 제기 되었으며 광서제가 개혁에 동의하였다.
1898년 무술년에 강유위등을 등용하면서 일련의 칙령을 내려 전통적인 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는데 착수하였다. 그 내용은 유교 중심의 과거 제도를 고쳐 실용적인 학문을 시험하며 민간주도의 상공업을 진흥하고 관제와 법제를 효율적으로 개혁하였으며 의회제도를 개설하고 상주 제도와 군제를 개혁하는등 거의 모든 제도에 걸쳐있었다.
하지만 1백일동안 진행되던 무술개혁은 서태후를 중심으로한 반대파의 쿠데타로 종결되었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일부 인사는 처형되었으며 황제조차도 강제적으로 격리되었다.
변법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중국 역사상 가지는 의의는 크다.
중국을 부강케 하지는 못하였지마는 전국인민의 새로운 각성을 촉진하고 중국관료자산계급으로 하여금 봉건정권에 대한 항쟁을 표시케 하였기 때문에 객관상으로 혁명운동의 발전을 도운 셈이다. 더욱이 희생된 몇몇 지식분자들은 좋은 전통을 남겨주게 되었고 이후의 여러 혁명지사들에게 격동과 모범을 주었던 것이다
아편전쟁에서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은 열강의 이권 쟁탈장으로 변하였다. 영국의 홍콩조차, 러시아의 여순항 점령, 독일의 청도 점령, 일본의 대만 점령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만주를, 프랑스는 광동-광서-운남을, 독일은 산동을 각각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았고 영국은 양자강의 전 유역에서 권리를 확보하였다.
중국 영토를 오이 나누듯이 분할하는 위기의 시대가 온 것이다. 양무운동과 변법운동의 실패로 중국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민중에서 싹트고 있었다.
독일의 산동침략과 그에 따른 철도 개설 및 이에 필요한 토지 매입, 분묘파괴, 민가철거 등으로 인해 흉흉한 민심과 때마침 일어난 산동지역의 자연재해와 기근이 겹치면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
의화권은 권술과 이단 종파가 결합하여 민간사회에 뿌리를 내린 화북의 전통적 비밀 결사로 1898년경부터 주위의 농민, 실업자를 포섭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는 동시에 공개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 운동은 산동지방뿐만 아니라 인근의 하남과 직예에도 확산되어갔고 부청멸양(扶淸滅洋)이란 구호를 내걸고 천진과 북경으로 진출하면서(1900년) 기독교와 선교사들을 살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의화권이라는 무술로 洋人들이 사용하는 총, 포탄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서태후도 이들의 힘을 빌어 양인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들을 지원하게 되고 열강들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이에 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독일,일본,이탈리아,오스트리아 8개연합국은 자국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공동 출병하여 북경으로 들이닥치자 서태후와 광서황제는 도망을 간다.
이에 따라 의화단 운동도 종결을 맞이하였다.
연합국의 무력에 굴복한 청 정부는 열강과 신축조약(1901년)을 맺었으며, 이 조약에는 의화단 책임자 처벌, 북경과 그 주위의 외국군 주둔 인정, 원금과 이자를 포함한 30년간의 9억 8천만 량의 배상금 지불, 새로운 통상조약 체결 등이 들어있다.
비록 의화단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제국주의자들은 중국 민중의 힘에 전율하였다.
제국주의자들이 중국을 분할하지 않고 청조를 인정한 이유는 의화단 사건으로 나타난 중국 민중의 힘에 대한 두려움과 열강의 중국 분할 쟁탈전으로 인한 파국을 미연에 방지하는 안전판 구실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청조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당초 선전포고 시 각 지방 督撫에게 경내의 외국인을 사형에 처하고 군대를 북상시켜 북경을 보호하라고 지시했지만 대부분의 지방장관은 이 명령을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 전란은 북경일부 지역에 한했으며 나머지 대부분 지역은 그 영향을 받지 않았고, 중앙정부의 명령을 지방관이 불복해도 된다는 정도로 국가의 정세가 어지러웠다.
결국 중국은 열강에 의한 영토의 분할뿐만 아니라 각 지방관이 중앙통치권을 잠식하는 사태로 나아가게 된다.
비록 수많은 농민이 제국주의의 대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으나 이 전란으로 청조의 보수 세력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그 반동으로 정치적 혁신운동의 기운이 강하게 일어나게 된다.
또한 중국 인민들은 만청정부가 중국 민족을 구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만청정부 타도를 위하여 총궐기하게 되는 것이다
37. 서태후(西太后)와 야명주(夜明珠)

서태후(西太后, 慈禧太后)는 죽은 뒤에 청동릉(淸東陵)의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많은 진기한 보물들을 부장품으로 같이 묻었는데, 거기에는 유명한 야명주도 포함되어 있다. 민국 17년(서기 1928년)에 무덤은 군벌 손전영이 지휘하는 부대에 의하여 도굴되었다.
선포(善浦)의 <<손전영동릉도보기(孫殿英東陵盜寶記)>>에 의하면 : "서태후의 능묘의 건축은 호화로워, 청나라의 모든 황제후궁의 능묘를 뛰어넘었고, 특히 관에 부장한 보석은 더욱 진귀하였다. 광서34년(서기 1908년) 10월 22일 자희태후가 사망한 후, 태감 이연영은 염에 참가하였는데, 일찍이 부장한 진기한 보물을 하나하나 적어서 책으로 남겼다", "도적들은 먼저 자희태후의 시체 주위의 큰 보물들 - 비취서과, 국국백채, 옥석연화, 산호수 등등을 챙기고, 다시 자희태후 시신 아래에 있는 보석들도 하나하나 빠짐없이 챙겼다. 그 후에 자희태후의 시체를 관 뚜껑 위에 옮겨놓고, 용포를 벗겼으며, 내의를 찢어서 훼손시키고, 신발과 양말도 벗겨, 몸에 있는 보석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냈다. 자희태후의 이빨도 뿁혀졌으며, 입에 물고 있던 희세의 명주도 가져가버렸다" 또한 이 글에서는 손전영이 한 말도 인용하고 있다. "그녀(서태후)는 입에 하나의 야명주를 물고 있었다. 나누면 두 개가 되고, 합치면 둥근 구(球)가 된다. 나눠놓으면 투명하고 아무런 빛을 내지 않지만, 합쳐놓으면 녹색의 차가운 빛을 뿜으며, 밤에는 백보(百步)이내에서는 머리카락까지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듣기로 이 보배는 시체를 썩지 않게 한다고 하는데, 역시 자희태후의 관을 열었을 때, 서태후는 잠든 것과 같았었다. 그러나 바람이 불자 얼굴이 검게 변했고...나는 야명주를 우농(雨農, 戴笠의 號, 당시 특무조직인 남의사의 수령)를 시켜 장부인(송미령)에게 보냈다."
자희태후의 입에 야명주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다만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형석(螢石)일 것이라고 하지만, 실물을 보지 못했으니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다. 서기 1997년에, 필자는 타이페이에서 "해협양안토착문화교류회"에 참가하였을 때, 일찌기 이 야명주의 상황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송미령이 이미 나이가 많고, 미국에 머물고 있으므로,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에 대하여 대만 고궁박물원의 고고학 전문가인 나지량(那志良) 노선생에게 물어본 적이 있지만, 역시 고개만 흔들 뿐 상세한 사항을 알지 못하였다.
장복력(蔣卜力)의 <<자희능묘피도안(慈禧陵墓被盜案)>>이라는 책에 따르면, "제51호 야명주, 무게 4량2전7푼(오늘날로 하면 133.4375그램), 가치 1800만 냥"으로 기재하고 있다. 조여진(趙汝珍)의 <<고완지남(古玩指南)>>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결론적으로 자희태후의 부장품을 모두 회수하여 외채를 갚았다면, 그래도 천만 정도는 남았을 것이므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정도가 되었다. 열거한 가격이나 평가금액은 당시의 보석가격이었고, 이후 선통원년에 이르러 중국과 외국의 골동품 수장가와 보석 전문가의 평가에 따르면 모든 금액은 이미 10배는 올랐다. 민국후기에 다시 평가하였을 때는 다시 100배는 올랐으며, 오늘 날로 한다면 가격을 계산할 수조차 없다."
자희태후가 입에 물고 있던 야명주가 유명한 것을 제외하고도, 그녀의 봉관(鳳冠)의 9개의 야명주도 상당히 유명하다. 이영발(李映發)의 <<문사습취(文史拾趣)>>의 기재에 따르면, "서기 1900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미국,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8개국으로 구성된 침략군이 북경을 침입하였다. 자희태후는 백성들이 침략자에게 반항하는 것을 막고, 크게 매국적인 행위를 하였다. 봉관에서 4개의 야명주를 떼어내어 외국인제게 주고, 그들로 하여금 북경에서 물러나도록 요구하였다. 당시에 서태후의 일을 주로 처리하던 큰 태감 이연영이 신변에 없는 바람에 왕씨성을 가진 궁녀를 서문빈관으로 보내어 이홍장이 보낸 사람에게 건넸다. 이홍장은 바로 외국인과 군대를 철수시키는 문제를 협의하고 있었다. 당시 이 궁녀는 17살에 불과하였고, 자희태후는 그에게 가는 길에 조심할 것을 당부하였으며, 만일 잃어버리거나 하면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하였다. 이 궁녀는 보석을 품고 걸으면서 생각하기를 "이것은 우리나라의 보물인데, 어떻게 외국인에게 건네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교묘하게 호송하던 사람을 따돌렸다. 이로써 야명주는 민간에 숨겨지게 되었다. 64년후(서기 1964년) 서안시 백수림에 거주하는 한 노동자 가정에서 이 4개의 야명주가 발견되었다. 이 사람의 성은 오(吳)씨인데, 부부가 모두 화학공장의 노동자였다. 하루는 청결위생을 위하여 어린아이에게 더러워서 시커멓게 된 베개를 뜯고 씻도록 시켰는데, 안쪽에서 붉은 봉투를 발견하였고, 붉은 봉투를 뜯으니 황포(黃布)나 나왔고, 기름종이가 나왔다. 기름종이의 아래에는 면으로 만든 종이가 있고, 거기에 싸여있는 4개의 용안만큼 크고, 맑고 빛을 내는 야명주가 나왔다. 그들은 이 무가지보를 국가에 바쳤고, 고고학자의 감정을 거쳐 이것이 여러해동안 잃어버렸던 자희태후의 봉관에 있던 그 4개의 야명주임을 확인하였다. 국가는 오씨에게 10만 인민폐를 주었으나 그들은 받지 않았다. "국가의 보물은 당연히 국가에 바쳐야 한다. 조국의 문물은 모든 사람이 보호하고 아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원래 이 더러운 베개는 80세된 왕노파가 죽기 전에 그들에게 준 것이었다. 해방 후 오씨는 이 의지할 데 없는 노파를 거두어서, 친어머니와 같이 대했는데, 1963년에 죽으면서 베개를 오씨에게 넘겨주면서, 그 비밀을 미처 얘기하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왕노파가 바로 60여 년 전에 자희태후의 신변에 있던 그 궁녀였다. 1985년, 낙양의 한 친구가 북경으로 와서 2개의 야명주를 가지고 왔는데, 타원형이고, 구멍이 뚫려 있으며, 담황백색을 띄고 있었다. 보기에 야광주임이 명백하였고, 아마도 자희태후의 봉관에 있던 다른 2개의 야광주인 것으로 보인다.
38. 청나라 말기의 "부전족운동(不纏足運動)"
글 : 구양박문(歐陽博文)


전족
무술변법(戊戌變法)은 사람들에게 강유위, 양계초가 요란하게 벌인 일을 떠올린다. 여기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사람이 볼 때는 별 것이 아닌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무술변법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화 정치개혁이다. 당시 청일전쟁에서 참패한 후의 중국은 강산이 찢기고, 나라가 나라가 아니었다. 처음 정치무대에 등장한 유신파 지사들은 해야할 일이 아주 많았다. 사상계몽에서부터 제도개혁까지. 부국강병부터 과거개혁까지, 큰 일 중요한 일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아마도 여러분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 화급한 시기에 유신파 인사들이 열중한 일은 정치변법 외에 부녀의 '부전족'이었다.
'부전족운동'은 유신운동 기간 중 유일하게 활발했던 사회개량운동이다. 운동기간에, 전국에서 모두 백 개에 가까운 각양각색의 학회가 나타났지만 그 어느 것도 '부전족회'처럼 세력을 떨치고 오래가지 못했다. 강유위가 세상에 나와서 한 첫 번째 '유신사업'은 바로 '부전족회'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비록 서양의 지혜를 가져왔다고 했지만, 호응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여인의 발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알 수 있다. 양계초는 <시무보>를 주재했는데, '부전족운동'을 고취시키는데 힘썼다. <시무보>의 인기가 높아서 낙양의 종잇값을 올릴 때, 그 비싼 지면에 '부전족'에 관한 글이 자주 실렸다. 개명한 사대부들은 봉강대리(장지동)부터 수재, 동생(童生)에 이르기까지 일시에 거의 모두 '부전족'을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로 여기는 것같았다. 어떤 동생은 심지어 자신의 과거시험답안지에 '부전족회'라는 글을 붙이기도 했다. 시험 볼 때조차도 여인의 발을 잊지 않은 것이다.
'부전족운동'을 발기하고 참가한 건장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그리고 당시 중국에서 시대를 앞선 남자들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부녀해방운동'은 남성위주이다. 이들 남자들의 눈에 전족을 하지 않는 것은 "의가(宜家)", "선종(善種)" 즉, 집안일을 잘하고 농사를 잘짓게 하기 위함이다. 문제는 해야 할 일이 많고 바쁜 때에 천하를 구할 대임을 맡은 대장부들이 왜 굳이 여인의 발에 그렇게 관심을 두었느냐는 것이다.
확실히 유신의 지사들이 내세운 당시의 이유는 근거가 되기에 부족하다. 왜 전족하지 않아야 하는 것에 대하여 '직업을 가진 사람을 배가시킨다.' 그리하여 '토산물의 생산이 배로 늘고, 세금도 배로 는다."(<상보> 제53호); 전족을 하지 않으면, 국난이 닥쳤을 때 여인들이 전쟁터에 나갈 수 있다"(<상보> 제66호)는 것인데, 당시 사람들이 믿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지만, 최소한 현재의 사람이라면 그다지 믿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하층노동계층의 부녀는 비록 절대다수가 전족을 했지만, 논 적은 없고, 안팎으로 바쁘게 살았다. 심지어 남자들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근대방직업의 국내외자본가들이 고용한 여성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여전히 전족한 중국부녀들이다. 낭자군(娘子軍)이라는 말은 예로부터 있었다. 화목란(花木蘭)의 이미지는 모두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자고이래로 전쟁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다 아무리 큰 국난이 닥치더라도 여인들이 '무기를 들고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전족의 악습은 중국남자들의 기형적인 성심리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전족은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남당의 이후주로부터라고 한다. "이후주의 빈(嬪) 요낭(窅娘)은 예쁘고 춤을 잘 추었다. 비단으로 발을 감싸서 발을 작고 구부러지게 해서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를 본받았다."(송나라 때 장방기 <묵장만록>). 나중에 이학(理學)의 영향을 받아 사회의 유행이 된다. 근대에 접어든 이래로 중국인들이 중국전람을 할 때면 항상 전족과 수혜(繡鞋, 수놓은 신발)를 가장 두드러진 위치에 전시했다. 이를 보면 그 영향이 얼마나 깊은지 두려울 정도이다. 오늘날까지, 미국인들 중 중국에 오는 유학생 중에는 아직도 여자들이 전족을 하는지 묻기도 한다. 체두변발을 하는 것은 청나라의 '국체(國體)'이므로 건드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전족을 개혁하여 없앨 수 있었다. 오천 년 문명의 중국인들에 있어서 가장 참기 어려운 점은 서방인들에게 미개한 '토인'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야만적이라고 이웃나라들에게 욕을 얻어먹는"(강유위의 말) 것에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온 천지에 널려 있는 '전족'을 한 여인은 바로 이런 '서방의 말'의 살아있는 증거였다. 중국인들이 변명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고홍명과 같이 전족을 칭송한 철면피는 많지 않았던 것이다.
39. 증국번은 왜 이수성(李秀成)을 서둘러 처형했는가?
글 : 조염(趙焰)

증국번
1864년 7월 28일, 증국번(曾國藩)은 금릉(金陵, 남경, 즉, 태평천국의 천경)에 도착한다. 몇 시간 후, 증국번은 밤을 새워 이수성을 심문한다. 이수성은 며칠 전에 체포되었다. 이수성은 소천왕의 일행을 엄호하여 포위망을 뚫을 때, 다리에 부상을 입어 말에서 떨어져, 성 밖 방산 일대에 숨어 있다가, 현지의 촌민에게 붙잡힌 다음 꽁꽁 묶여 상군본영으로 압송되었다.
며칠전, 성격이 조급하고 폭력적인 증국전(曾國荃)이 이수성을 심문할 때, 옛날 원한이 생각나자, 칼로 이수성의 팔과 다리를 그어 선혈이 흘렀다. 이수성은 급히 소리쳤다:
"노구(老九, 아홉째로 증국전) 우리는 각자 모시는 주인이 있었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소."
증국전은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여 그만두었다.
증국번은 모든 승리자와 마찬가지로 높은 자리에 앉았다. 그는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감옥의 어두운 등불을 이용하여, 그의 삼각눈으로 자세히 이 군사생애상의 적수를 살펴보았다. 증국번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문화수준도 높지 않고, 태평천국의 가장 걸출한 군사천재라는 인물이 이처럼 비쩍 마르고 키도 적으며, 용모에 특이할 점도 없고, 심지어 여자처럼 유약하고 섬세할 줄은.
증국번이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깊이가 있고 느렸다. 마치 이수성을 고향으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증국번은 흥미를 가지고 이수성에게 태평천국에 관한 여러 가지 상황을 물어본다. 이수성이 일부 사람들과 사건에 대하여 하는 평가를 자세히 들어보았다. 이번 담화는 증국번으로 하여금 태평천국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을 확인하도록 해주었다. 이수성도 아주 솔직하게 문제에 대답했다.
대부분은 증국번은 듣고 있고, 이수성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번 쌍방의 면담은 이수성이 며칠 후의 자술서에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글자 행간에서 증국번에 대하여 감격한 것이 드러난다. 증국번은 그날의 일기에서 아주 가볍게 이렇게 묘사했다:
"술초(戌初), 붙잡은 태평천국 충왕을 친히 몇 마디 심문했다."
이 몇 글자에서 우리는 증국번이 이수성을 가볍게 대하고 무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증국번은 승리자였다. 당연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자격이 있다. 이외에 증국번은 문화나 사상에서도 그보다 뛰어났다. 당연히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바로 이 예전의 적수에 대하여 증국번은 크게 실망한 것이다.
그러나 이수성을 만났을 때부터, 증국번은 이미 이수성을 죽이겠다고 결정한다. 다음 날, 증국번은 안경(安慶)의 아들 증기택(曾紀澤)에게 보낸 서신에서, "태평천국 충왕을 친히 한번 심문했다. 곧 이 곳에서 처결할 것이다"
증국번이 왜 이처럼 서둘러서 이수성을 죽이려고 했을까? 이것도 수수께끼라면 수수께끼이다. 아마도, 사람을 잘 알아보는 증국번은 이수성의 관상과 언행에서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가 보기에 이 태평천국의 충왕 이수성은 아주 교활했고, 또한 태평천국에서 아주 높은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빨리 죽이는 것만이 잔여무리들에게 철저히 동산재기(東山再起)의 헛된 꿈을 품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그저 추측중 하나이다.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증국번이 이수성을 심문할 때, 이수성이 아마도 증국번에게 의거를 일으켜 청나라를 전복시키고 한족황실을 회복하라고 권했을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그가 십여만의 옛 부하들을 모아서 증국번을 도와주겠다고 했을 수 있다. 이수성의 자술서에는 아마도 이와 관련한 내용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증국번이 삭제해버린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증국번은 거리낌이 없을 수 없다. 이수성을 만일 북경으로 압송한다면, 분명히 이에 관련된 얘기를 꺼낼 것이다. 아니면 증씨 형제에 불리한 말을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증국번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이외에 증국번이 꺼리는 또 하나는 만일 이수성을 북경으로 압송하는 도중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겨 호랑이를 산 속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것은 큰 화근을 남기는 일이다. 종합하자면, 만일 이수성을 북경으로 압송하면 그 후는 그가 통제할 수 없어지니, 백해무익할 뿐이다. 그래서 아예 금릉에서 그를 속히 처결하는 것이 상책인 것이다.
당연히,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이수성이 증국번과 얘기할 때, 금릉에서 빨리 죽여달라고 했을 수도 있다. 오래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 증국번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어, 금릉에서 죽인 것이다. 최소한 이렇게 하면 시원하게 죽을 수는 있다. 북경으로 간다면, 아마도 갖은 고생을 다하게 될 것이고, 나중에는 '능지(凌遲)'을 당하게 될 것이다. 증국번의 사람됨으로 봐서, 이 정도를 들어줄 도량은 된다. 이런 추측을 방증하는 것이라면, 이수성이 증국번을 한번 만난 후에, 자기가 죽을 날이 다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는 상처뿐인 몸으로, 거의 매일 7천자의 속도로 자서전을 썼다.
1864년 8월 7일, 이수성은 오전에 막 자서전을 끝내고, 저녁에 형장으로 끌려가서 처결당한다. 조열문(趙烈文)이 나중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이수성은 죽기 전에 계속 이렇게 말했다.
"중당(증국번)의 후덕함은 각골난망이다. 이승에서는 이미 힘들어 졌으니, 내세에 갚겠다."
마치 증국번에게 크게 감사하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죽기 전에, 이수성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죽어갔다. 비록 그의 문화수준은 낮았지만, 그래도 10수의 절명사(絶命詞)를 남겼다. 증국번은 이런 명을 내렸다.
"능지를 하지 말라. 그의 수급은 각 성에 보내어 전시하고, 몸은 관에 넣어서 염해주라"
이수성이 능지를 면했다는 것만 하더라도, 증국번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조정의 관례로 보자면, 이같은 반란군의 두목에게는 항상 능지를 했었다. 증국번이 이수성을 금릉에서 죽인 것은 최소한 이수성에게 육체적인 고통은 면하게 해준 것이다.
나중에 야사의 기록에 따르면, 증국번이 이수성을 친히 심문한 다음 날, 즉, 7월 29일 밤에 증국번은 증국전과 긴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아홉째동생 증국전에 대하여 증국번은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동생은 함풍6년 "길(吉)"자영을 만들어 증국번을 따라 전투를 시작한 이래로, 성과 산채를 공격하여 점령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한번은 좌종당(左宗棠)이 증국번에게 물었다. 증국전에 대하여 형으로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고. 증국번의 대답은: "살인여마, 휘금여토(殺人如麻, 揮金如土, 사람을 무수히 죽이고, 돈은 흙처럼 마구 쓴다)"였다. 증국번이 보기에, 증국전은 군사기재였다. 다만, 나라를 다스리거나, 인간관계를 처리하는 데에는 지혜가 부족하고 성숙되지 못했다. 현재 상군(湘軍)을 감축하려면 가장 먼저 얻어야 하는 것이 증국전의 동의이다.
야사에서는 형제 두 사람의 담화내용을 이렇게 기술한다. 두 사람이 만난 후, 증국전은 형의 마음을 알고, 시원하게 털어놓고 말한다.
"동남의 반벽강산에 주인이 없는데, 형께서는 뜻이 없으신지?"
이것은 실제로 그가 증국번에게 반란을 일으킬 뜻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증국번은 얼굴을 굳히면서 말했다:
"그런 머리가 달아날 말을 네가 감히 하다니, 멍청하구나!"
증국전은 불복하듯이 해명했다:
"양강총독도 형이고, 민절총독은 좌종당이며, 사천총독은 나병상이고, 강소총독은 이홍장이다. 이외에 3명의 현임 총독, 5명의 현임 순무가 모두 상군(湘軍)의 사람들이다. 형의 수중에는 20여만의 상군 정예병이 있는데, 필요하다면, 현재 붙잡아둔 이수성을 설득하여, 그가 부른다면 10만의 태평천국에서 항복한 자들도 형을 따라서 의거에 나설 것이다. 이렇게 하면, 수중에 30여만의 정예 병사를 갖는 것이다. 이런 병마라면 북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한족강산을 회복하여, 일대제왕에 오르는 것도 가능하다. 형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증국번은 고개를 흔들면서 천천히 말했다:
"아홉째,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환난은 함께 할 수 있지만, 부귀영화를 함께 할 수는 없다. 좌종당은 일대효웅이다. 사야(師爺)로 있을 때도 남의 아래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은 나와 평기평좌(平起平坐)하고 있다. 그가 내 아래에서 신하로 있을 것 같은가? 나는 확신한다. 만일 거사한다면 제일 먼저 병사를 이끌고 토벌하러 나타날 것이 좌종당이다; 다시 이홍장을 보자. 내가 순조로울 때라면 이홍장은 항상 나의 학생일 것이다, 만일 순조롭지 않으면 이홍장은 반드시 창을 거꾸로 들고 공격해올 것이다. 이홍장이 얼마나 총명한가. 명리심도 아주 강하다. 그는 당연히 현재의 권력과 지위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상군을 보라. 여러 해 동안 전투를 하면서 정예 병사들은 일찌감치 다 죽었다. 우수한 사람들은 일찍이 희생되었고, 부대도 이미 늙었다. 다시 싸울 힘도 없다. 그리고 이수성을 보자. 그가 투항하지 않았다면 다시 떨치고 일어설 수 있고, 따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가 일단 투항하면, 바로 주구이다. 누가 그의 말을 듣겠는가?"
이 말을 듣고 증국전은 할 말이 없었다. 증국번은 덧붙여 말한다.
"병사들은 밥을 먹고, 관직을 얻고 돈을 벌기 위해서 따른다. 마치 한 무리의 개를 기르는 것과 같다. 네가 뼈다귀를 던져주면 그는 너를 따를 것이다. 다른 사람이 더 큰 뼈다귀를 던져주면 그는 당연히 너를 팔아먹을 것이다. 내가 지금 상황에서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뼈다귀를 던져줄 수 있을 것 같은가?"
증국번과 증국전의 이 대화는 당연히 야사에서 상상한 부분이다. 그러나, 증국번과 증국전의 성격과 관계로 보아서 이러한 얘기가 오갔을 것이라는 것은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증국번이 금릉에 도착한 후, 그의 많은 심복들 예를 들어, 팽옥린(彭玉麟), 조열문등의 사람들, 그리고 저명한 '제왕지학'을 연구했다는 학자 왕개운 등이 모두 증국번을 찾아와서 의도를 탐색했다. 그들은 모두 처음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숨겨서 말했다. 어떤 사람은 조정의 포상이 불공평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증국번이 억울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함풍제는 일찍이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는데, '금릉을 함락시켜 되찾아 오는 자는 왕으로 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증씨 형제가 금릉을 함락시키자, 서태후와 동치제는 인색하게도 증국번에게 "일등의용후(一等毅勇侯)"를 내렸을 뿐이다. "왕"과 "후"는 차이가 천리만리나 난다. 부하와 막료들의 탐색에도 증국번은 전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점점 더 말들이 많아지자, 증국번은 아예 대련을 하나 친필로 썼다.
"의천조해화무수, 유수고산심자지(倚天照海花無數, 流水高山心自知, 하늘에 기대고 바다에 비추어보면 꽃은 무수히 많고, 흐르는 물과 높은 산은 스스로 마음을 안다)".
그리고는 금릉의 거주지에 걸어두었다. 이렇게 하자, 증국번의 마음을 탐색하려던 사람들은 이 대련을 보고는 증국번의 결심을 분명히 알았다.
40. 증국번(曾國藩)은 왜 황제에 오르지 않았는가?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 후, 증국번은 호남에서 상군(湘軍, 상은 호남성을 의미함)을 조직하였고, 상군은 운세를 타고 급속히 세를 불려갔고, 청나라정부가 믿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군대가 되었다. 증국번도 당시 중국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인물로 등장했으며,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는 주목을 받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새로운 황제가 탄생할 것으로 보았다. 증국번의 당시의 권력, 지위 및 영향력에다가 주변에서 그에게 황제가 되라고 종용하는 부장과 정객들이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에게는 황포를 몸에 걸치고 황제에 등극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증국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부하들의 그러한 진언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저 청나라의 충신으로 남았다.
증국번에게 진언하는 사람 중에서 초지일관하고 가장 강력하게 권했던 사람은 호남의 유명한 재자 왕개운이었다. 왕개운은 경, 사, 문학에 모두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고, 그는 학문을 실제에 응용하는데 관심이 많았으며, 기회를 잡아 그의 '제왕지학'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스스로 강태공, 장량, 제갈량, 유백온과 같은 인물이 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왕개운이 여러 차례 증국번에 글을 올렸고, 증국번도 그를 중용했다. 이후 그는 세 번이나 증국번을 찾아가서 설득하였다. 증국번에게 호림익 및 태평군과 연합하여 청나라를 무너뜨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증국번은 그를 그저 광방불기한 문사로만 여겼고, 비록 예를 다하여 대하기는 했으나,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증국번이 금릉을 함락시키고,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하였다. 원래, 함풍제의 임종유언에는 금릉을 함락시키는 자는 왕으로 봉하겠다고 하였었다. 그러나 자희태후(서태후)를 대표로 하는 조정은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에게 겨우 일등후(一等候)를 봉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명을 내려 증국번과 각급장령들은 신속히 군비를 정산하라고 지시했다. 이 명이 내려오자, 증국전(曾國筌, 증국번의 동생), 팽옥린(彭玉麟), 좌종당(左宗棠), 포초(鮑超) 등 4사람은 비밀리에 증국번을 황제로 옹립하기 위하여 약30여명의 고급 장령을 모아서 밤중에 증국번에게 면담을 요청한다. 증국번은 그저 "의천조해화무수, 유수고산심자지(依天照海花無數, 流水高山心自知, 하늘을 의지하고 바다를 비추는 꽃은 그 수가 무한하고, 흐르는 물과 높은 산은 마음을 스스로 안다)"는 수수께끼와 같은 글을 그들에게 던진다. 네 사람은 증국번이 던진 글의 뜻을 풀지 못하고, 결국 증국번을 옹립하려던 일은 흐지부지 물 건너가고 만다.
사실, 일찍이 안경(安慶) 전투후에 증국번의 부장은 그에게 황제가 되라고 권한적이 있었다. 당시 호림익, 좌종당도 모두 즉위를 찬성하는 편이었다. 가장 강하게 즉위를 건의한 자는 곽송도, 이차청이었다. 이차청은 일찍이 증국번에게 "왕후장상에 종자가 없다. 진짜 제왕이 있다"는 내용을 써 올린 적도 있고, 호림익은 증국번의 생일잔치때 "번개와 같은 수단으로, 보살의 마음가짐으로"라는 글을 쓴 적도 있고, 좌종당도 "정(鼎)의 경중을 물을 만하지 않은가"라고 쓴 적이 있으며, 팽옥린은 직접 서신을 보내어 "동남의 반쪽의 땅이 주인이 없는데, 선생께서는 뜻이 없으신지?"라고 적은 적도 있었다.
이 때, 스스로 재주가 있다고 자부하던 왕개운은 다시 안경까지 와서 두 번째로 증국번에게 "종횡술"을 시행하도록 권한다. 증국번에게 두 가지 방책을 건넨다. 첫째는 병사를 이끌고 북경으로 올라가서 서태후의 수렴청정이 조상대대로의 규정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 고명대신이 되겠다고 하는 것, 둘째는 아예 동남지역에서 의거를 일으켜 만민을 위하여 군주에 오르라는 것. 그러면서 그에게 공고진주(功高震主, 공이 너무 높으면 군주가 상을 더 이상 줄 수 없어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의 사실을 기억하고 토사구팽의 전철을 밟지말 것을 권하였다.
마지막으로 증국번에게 황제에 오르라고 권한 것도 왕개운이다. 그는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이후에 증국번은 스스로 손발과 날개를 자르고, 상군을 감군한지 1년 이후였다. 왕개운은 이때 이미 이름을 천하에 떨치는 학자가 되어 있었다. 학문토론을 빌어 증국번에게 조조가 되도록 권한다. 그러나 증국번은 그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척하고 지나간다. 왕개운은 자신의 제왕지술을 더 이상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을 한탄하며 쓸쓸히 돌아갔다.
증국번이 권고를 듣지 않고 황제가 되지 않은 것은 그의 머리 속에 뿌리 깊은 유가의 충군사상도 관련이 되지만, 실제로 더 큰 것은 당시의 상황이 황제가 되기는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 증국번은 청정부가 서양인들에 대하여나 관리를 다스리는 것 및 민생을 보살피는 데 무능한 것은 알고 있지만, 대신 한족관리에 대한 방어태세는 결코 늦추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시 상군의 병력은 강남의 몇 개 성에서는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청나라의 관문이 장강상류를 점거하고 있었고, 부명아, 풍자재가 양주와 진강을 지키고 있었으며 승격임심이 광동과 안휘의 중간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것은 청정부가 일찍이 상군에 대하여 대비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둘째, 절강의 좌종당, 강서의 심보정은 증국번이 그들의 권고를 듣지 않자, 이미 증국번으로부터 마음이 떠났고, 청나라정부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상군 배후의 두개의 날카로운 검과 같았다.
셋째, 상군은 30만이라고 큰소리쳤지만, 증국번이 움직일 수 있는 군대는 10여 만에 불과했다. 그 중에 이홍장은 비록 증국번이 키운 인물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증국전, 팽옥린, 포초와 같이 생사를 걸고 그를 따를 것인지, 청나라 정부의 반대편에 설 수 있을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넷째, 상군은 이미 장기간의 전투를 거쳐 당년의 기세가 많이 꺾였다. 군기가 부패하고 심지어 부패정도가 청나라 때 녹영(綠營, 한족군대)을 능가했다. 이처럼 이미 명성이 많이 나빠진 군대를 이끌고 천하를 얻으려고 한다면 따르는 백성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증국번은 황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는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서 병권을 줄이고, 권력도 줄여서 청나라정부의 의심을 벗어났던 것이다. 당시 증국번이 권고를 들어 만청을 몰아내자는 기치를 내걸고 한족의 부흥을 외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중국근대역사는 아마도 달리 쓰여졌을 것이다.
41. 동치제 : 허수아비로 산 가장 불쌍한 황제
글 : 문재봉(文裁縫)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온 이후 제8대 황제이다. 그는 나이 겨우 19살에 병사하였으니, 단명황제이다. 역사의 긴 강물에서는 아주 짧은 일순간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동치제는 제왕의 존귀한 몸으로 주목을 받는다. 우리는 그의 인생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는 가장 운이 좋았다. 즉위하여 황제에 오르는 각도에서 보자면, 동치제는 확실히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다. 청나라 때의 황제를 따져보면 누르하치부터 동치제까디 누구하나 그처럼 쉽게 황제에 오른 경우가 없다. 청나라 궁정사상 제왕에 오르는데 일찌기 유혈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홍타이시(청태종)가 즉위할 때, 대비순장사건이 있었다. 옹정제가 즉위할 때 일찌기 '구자탈적(九子奪嫡)등 사건이 일어났다. 설사 순치제, 강희제, 건륭제, 가경제, 도광제, 함풍제가 즉위할 때는 그렇게 피비린내가 나지 않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쟁자가 존재했다.
왜냐하면 황제에게 아들이 많아서, 경쟁은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치제가 즉위할 때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없을 뿐 아니라, 경쟁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함풍제의 외동아들이기 때문이다. 황위를 계승할 사람은 그 밖에 없었다. 실로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는 또한 가장 운이 나빴다. 어려서 즉위한 후, 동치제는 태후의 보좌에 의존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호랑이가 아무리 독해도 자식을 잡아먹지는 않는다." 태후가 보좌한다는 것은 아주 행운스러운 일이어야 한다. 동치제이전의 제왕도 태후의 보좌를 받은 적이 있다. 예를 들어 효장은 순치제와 강희제를 보좌했다. 일찍이 모자, 혹은 조손간의 정이 깊다는 역사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다.
그러나 동치제는 아주 불행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모자간에 서로 원수가 되었다는 역사적 기록만 있다. 모자간에 혹은 혼인으로 불화하거나 혹은 태후가 권력을 탐하여 제왕의 친정을 늦추는 바람에 반목했다. 결국 패도적인 서태후는 아들의 행복한 생활을 빼앗아 가버렸다.
비록 그러하지만 이 불행의 모든 것이 동치제 몰락의 핑계가 될 수는 없었다. 반대로 그에 대한 역사의 시험이었다. 그의 제왕으로서의 천부를 시험하는 것이었고, 그의 정치적 자질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것이다. 그의 인상, 그의 사업은 모조리 엉망진창이다. 역사를 고증해보면 동치제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욕망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나이가 많지 않았지만, 커다란 물욕을 드러냈다. 팔대후통에 들어가서 기생들과 놀아나기도 하고, 유리창을 돌아다니면서 품평을 하기도 하고, 이원에 미련을 두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으며, 술집에서 가위 바위 보를 하기도 했다.
그는 규율이 없는 사람이었다. 동치제는 절제하지 못하는 제왕이다. 특히 공부하는 기간 동안 아무 거리낌 없이 드러났다. 그래서 사부도 어쩔 수 없었다. 여러 번 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저 탄식하고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태후가 진노하여, 가법을 동원하는 외에는 그저 눈물로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모가 없는 사람이다. 제왕이라면 지모가 있어야 한다. 계책이 없다는 것은 불행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고처불승한(高處不勝寒). 높은 곳에 있으면 추위를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8살에 즉위하고, 보정대신들과 지혜와 용기를 겨루어, 오배를 제거하고 일대명군이 된다. 그는 이때 지모로 승리를 거둔다. 동치제는 태후와의 싸움에서 졌다. 황숙과의 싸움에서도 졌다. 모든 실패는 그가 아무런 지모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다. 황제의 상태가 아니었다. 당시를 생각해보면, 효장은 나이어린 현엽(강희제)을 가르칠 때, 그가 가장 우수한 제왕이 되도록 힘을 다 했고, 그에게 서 있을 때는 제대로 서 있고, 앉아 있을 때도 제대로 앉아 있으며, 절대 곁눈질로 쳐다보지 말고, 음식을 먹는 것도 적당히 먹는 등 여러 가지 절제를 가르쳤다. 현엽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법도에 맞았고 결국 큰 인물이 된다. 양궁태후도 동치제에 대하여 망자성룡(望子成龍)을 바란 적이 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과 어긋났다. 그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동치제는 스스로 그 악과를 먹는다.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는 청나라 때 가장 젊어서 급사한 제왕이 된다.
첫째, 가장 단명한 제왕이다. 청나라황제를 돌아보면, 누르하치는 69세까지 살고, 청태종은 52세까지 살았고, 순치제는 24살까지 살았고, 강희제는 69세까지 살았고, 옹정제는 58세까지 살았고, 건륭제는 89세까지 살았고, 가경제는 62세까지 살았고, 도광제는 69세까지 살았고, 함풍제는 31살까지 살았고, 광서제는 38살까지 살았고, 선통제 부의는 62세까지 살았다. 동치제가 가장 단명하여 겨우 19살에 죽는다.
둘째, 친정기간이 가장 짧은 제왕이다. 동치제는 비록 단명했지만, 6살에 즉위하여 13년간 재위했다. 옹정제가 재위한 기간과 같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친정한 기간은 동치12년 정월부터 시작한다. 이전의 11년은 모두 태후가 수렴청정 했다. 친정기간이 시작되고 생명이 끝날 때까지 2년이 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이 동치제의 가장 불쌍한 면은 아니다. 아래의 두 가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워하고 탄식하게 만든다.
첫째, 자식이 없었다. 동치제이전의 제왕은 많거나 적거나 모두 자식이 있었다. 가장 많은 사람은 강희제로 55명의 자녀를 두었다. 가장 적은 사람은 함풍제로 3명의 자녀를 두었다. 제왕에게 3궁6원을 두는 가장 주요한 목적은 바로 자손을 많이 낳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우수한 자식을 골라서 황위를 전해주는 것이다. 소위 후계유인(後繼有人)이다. 그러나 동치제는 후궁이 많았지만 결국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아주 기괴하게도, 그부터 시작하여, 광서제, 선통제에 이르기까지 청나라의 마지막 3명의 황제는 모두 자식을 낳지 못한다. 동치제는 아주 불길한 징조를 열었다.
둘째, 태후의 수렴청정이다. 당연히 태후의 수렴청정은 동치제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저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나 동치12년 이후,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동치제에게 친정하게 한다. 동치제는 대권을 장악한다. 완전히 혼자서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기생집이나 가고 욕망을 풀며 인생을 허송했고 결국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이는 그 자신의 잘못이다. 남에게 떠넘길 수 없다. 결과적으로 권력욕이 강한 서태후의 권력 장악을 돕는다. 그녀의 욕망의 불꽃은 날로 커지고, 다시 한번 대권을 장악한다. 이는 동치제가 남겨놓은 악과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동치제이다. 정말 고개를 흔들고 탄식하게 만드는 제왕이 아닐 수 없다.
42. 의화단의 우두머리는 사기꾼인가?
글 : 역수한(易水寒)
청나라말기 의화단(義和團)의 난때, 두 명의 우두머리급 인물이 있다: 하나는 장덕성(張德成)이고, 다른 하나는 조복전(曹福田)이다. 두 사람이 어떻게 우두머리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권변여문(拳變餘聞)>>에서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덕성은 하북 백구하(白溝河) 사람이다. 작은 배를 한척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당시 의화권은 이미 정해현 독류진까지 만연되었다. 어른이건 아이건 할 것 없이 모두 권법을 익히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하루는 장덕성이 길거리에서 어린아이들이 권법을 익히는 것을 보았다. 이를 보고는 냉소를 보냈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왜 웃느냐고 힐문했다. 장덕성은 너희들에게 진짜 신권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고 하고는, 누런 종이 하나를 꺼낸 다음, 옥수수 속을 하나 쌌다. 그리고는 땅위에 던지고는, 아무나 들어보라고 했다. 몇몇 사내들이 나섰지만, 움쩍달싹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장덕성을 대사형(大師兄)으로 모시게 된다.
각지의 의화단들도 그의 명성을 흠모하여 몰려드니, 독류진은 졸지에 의화단의 중심이 된다. 직예총독 유록(裕祿)도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8명이 드는 가마를 보내어 장덕성을 모셔왔다. 그리고는 연회를 열고 잘 대접했다.
그런데, 연회 중에 장덕성은 깜빡 잠이 든다. 다른 사람들이 불러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그는 기지개를 느릿하게 켜면서, 소매 속에서 서양대포의 부품을 꺼냈다. 그리고는 말했다. 나의 원신(元神)이 금방 적진을 한번 둘러보았다. 이것은 바로 나의 원신이 훔쳐 내온 것이다. 적들의 대포는 이제 쓸모없게 되었다. 유록은 그 말을 듣고는 그를 더욱 숭배했다.
조복전은 정해현 사람이다. 퇴역한 병사였고, 아편중독자였다. 의화단의 난이 일어날 때, 조복전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토루(土樓)에 올랐다. 그리고는 돌연 조계(租界)가 어느 방향인지 물었다. 현지인들이 동남방향이라고 말해주었다. 조복전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동남쪽을 향해 몇 번 절을 했다. 그리고는 서서히 일어나서는 말했다. 서양인들의 건물을 망가뜨렸다. 말을 마치자마자, 동남쪽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그 자리에서 조복전을 우두머리로 모신다.
<<권변여문>>의 작자는 이렇게 말했다. 조복전이 절을 할 때, 마침 하동일대의 주민들 집에서 불이 났다. 사람들이 멀리서 보고는 이것을 조계에서 불이 난 것으로 생각했다. 정말 교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장덕성의 사기술에 대하여는 작자가 해석을 해놓지 않았다.
다만, 사전에 소매 속에 철관 두 개정도를 숨겨두고, 그것이 서양대포의 부속품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다지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옥수수속을 땅바닥에 던졌는데 아무도 집어 올리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사람들이 고의로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들의 우두머리를 신격화하기 위하여.
필자가 현재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사람을 속였느냐가 아니라, 사기를 친 후에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했을까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사기에 성공하면, 대체로 세 가지 반응이 나온다.
첫째는 득의만면하여, 사기당한 사람을 무시하고, 그들을 바보라고 깔보는 것이다.
둘째는 식은땀을 닦으면서 다행이라고 속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셋째는 머리를 흔들면서 비탄에 빠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는 말이 황당하므로, 사기꾼이 이런 방식이어야만 주류에 끼어들 수 있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권변여문>>에는 작자가 일부러 그들이 그저 사기를 치는 사회의 쓰레기라고 묘사했다.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첫째 반응을 보였을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후 '계급투쟁' 시대에는 의화권에 대하여 영웅적인 이미지를 부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세 번째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치우친 것이다. 장덕성, 조복전은 모두 보통사람이다. 두 번째 반응을 보였다고 보는 것이 더욱 실제에 부합할 것이다. 이것은 정상인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오늘날 TV에 나오는 일부 전문가라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나쁜 놈이라고 말한다. 일부러 사람들을 속이고, 우스개소리를 잘 해서 사기를 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들이 안으로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너무 심도 있게 말하면 일반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하니, 그저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나쁘고, 또 그렇게 좋단 말인가?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보통사알미아. TV에서 기회가 생겨서 일을 벌이는 것이고 아무렇게나 말을 지껄이는 것이다. 우연히 그들이 하는 말이 맞는 경우도 있고, 그러면 그들 자신도 깜짝 놀랄 것이다. 집에 돌아온 후에 분명히 술 한두 잔으로 경축할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장덕성, 조복전과 마찬가지로, 거울처럼 분명히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믿으면, 자아팽창하여, 자신이 정말 대단한 줄 알게 된다. 의화단의 난이 실패한 후, 장덕성은 몇 사람을 데리고 왕가구 일대로 도망쳐 온다. 그리고 현지의 염상(鹽商)인 왕모에게 접대할 것을 요구한다.
왕모는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장덕성은 불만이었다. 이게 뭐냐 먹을 게 없지 않느냐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식탁을 발로 차서 엎어버렸다. 촌민들은 화가 나서 장덕성의 부하들을 때려서 쫓아버렸다. 장덕성은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촌민들이 말했다. 너는 스스로 칼과 총도 피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한번 시험해보자. 그리고 장덕성은 촌민들의 칼에 난도질당해서 죽는다.
43. 의화단(義和團)의 구성 인물
글 : 장명(張鳴)

권민(拳民, 拳匪라고도 함. 그리하여 의화단의 난을 권비의 난이라고도 부름)는 바로 의화단의 구성원들이다. 이런 칭호는 의화단사건이 발생하던 당시에도 있었는데, 낮추는 말도 높이는 말도 아니다. 그들의 적수들은 교민(敎民)이라고 불리었다. 농민반란을 아주 높이 평가하던 시대에도 중학생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의화단은 태평군(太平軍)과 다르다는 것을. 그들은 통일된 지도자도 없고, 통일된 조직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통일된 조직이 없던 권민들은 모두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황포(黃布)로 머리를 감싸고, 붉은 배가리개, 그리고 행동방식도 아주 일치했다. 모두 같은 곳(拳壇)에 모여서 "양권(亮拳)"을 하고, 신령이 몸에 붙는 의식을 행하고, 칼과 창을 휘둘렀으며, 큰 칼로 맨살을 내놓은 배를 베는 시범도 보였고, 창끝을 인후로 버티는 시범도 보였다. 바로 "도창불입(刀槍不入)"의 재주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산동으로부터 직예(지금의 하북성)에 이르기까지, 하남에서 산서에 이르기까지, 북방의 드넓은 대지에는 수천수만의 의화단이 탄생했다. 모두 비슷했다. 마치 배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 시간동안, 의화단연구는 현학(顯學, 인기학문)이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모두 의화단의 뿌리를 이루는 "아버지"(조직원류)를 찾는데 바빴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 다투느라 엉망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의화단의 원류는 산동남부의 반토비(半土匪)적인 성격을 지닌 대도회(大刀會)라고도 했고, 어떤 사람은 역사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경력이 있던 민간종교 팔괘교(八卦敎)라고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와 충돌했던 민간 권회(拳會)인 매화권(梅花拳)이라고도 했다. 이 몇 가지 이외에도 학자들은 다른 조직원류를 찾았다. 이런 교(敎), 저런 문(門), 합쳐보면 모두 수십 종에 이른다. "아버지"를 제대로 찾을 수 없게 되자, 아들의 비밀도 자연스럽게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저서가 한 권 또 한 권 세상에 나오지만 권민이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인지는 책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여전히 미궁이었다(왜냐하면 아무도 그 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의 사료와 문헌이나 후세의 구술 자료들에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의화단은 대체로 이런 몇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 스승(老師). 사부라고도 한다. 이들은 도와 술법을 전수한다. 의화단의 행위방식은 대부분 이 스승들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스승들은 술법을 지니고 있었는데, 모두 아미산(峨嵋山)이니, 곤륜산(崑崙山)이니 하는 곳에서 왔고, 이인(異人)으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했다. 김용선생보다 훨씬 일찍 이들은 이런 산들에 기공과 무공의 신비색채를 덧칠해 두었다. 당연히 이런 스승들은 모두 시골사람들이고 원래 무슨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세상 물을 좀 더 많이 먹었고, 담량이 크고, 일을 잘 벌이는 사람들이어서, 스승이 된 것이다. 마침 가르칠 내용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반은 기공 같고 반은 기교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재주는 다른 사람들도 많이 부리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칼로 뱃가죽을 내려치는 것이라든지(주의사항 : 이 때 절대 그으면 안 된다. 그었다가는 난리난다), 창으로 인후를 찌르는 것이라든지(주의사항 : 각도를 잘 잡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들통 난다) 등등. 그리고 얼마 전에 유행했던 기공 같은 것이다. 스승이 귀신들린 것처럼 제자에게 기공을 전해주면 제자는 귀신이 붙은 것처럼 마구 날뛰는 것이다. 좀 다른 것은 권민들은 창과 봉을 들고, 기공을 받은 후에 왕왕 자신이 무슨 신선이 몸에 붙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시골의 무슨 무당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충분히 뛰고 나면, 정신이 위축되어 원래의 상태도 되돌아오고, 집에 돌아가서 원래처럼 먹을 걸 먹는 것이다.
당연히, 스승이 기공을 전수해주는 것은 나주의 기공대사들처럼 제자들에게 돈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하나의 권단에는 하나의 스승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승은 이곳저곳을 출장 다닌다. 의화단은 바로 스승들이 마을과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승들은 비록 전수하는 기공이 오묘하다고 얘기했지만, 최근에 유행했던 기공들과 마찬가지로, 문파가 서로 다르면 각각의 비법도 서로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틀은 비슷했다. 그리하여 동서남북의 권민들은 외부사람들이 보기에는 모두 비슷비슷해 보였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 지적해두어야 할 것은, 의화단운동이 일어난 여러 해 후에, 화북의 향촌에서 홍창회(紅槍會)가 흥성하기 시작했을 때, 유사한 스승, 유사한 기공전수가 다시 나타났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얼굴에 옛날 수법이다.
의화단 권단의 진정한 핵심인물은 대사형(大師兄), 이사형(二師兄)으로 불리웠던 인물이다. 이들은 기공에 대한 학습능력이 뛰어났던지, 아니면 무공의 기본이 튼튼했던지, 혹은 성격이 비교적 포악했던지, 권민들이 행동할 때, 일반적으로 이런 인물들이 제일 앞장섰다. 그리하여 교당(敎堂)을 불태우고, 교민(敎民)을 죽여 버리는 실제 행동은 모두 이런 인물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당연히, 손을 쓸 때는 원래 권단에서 배웠던 기술들은 거의 쓸모가 없었다. 상대방이 약하면, 예를 들어 부녀자들, 상대방을 절단내어버리지만, 상대방이 강하고, 끝까지 버티면, 그만두기도 하였다. 권단의 대부분은 일반적인 권민이었고, 노인과 어린아이가 다 있었다. 어린 자들은 10살 정도였는데, 이들은 의화단의 아동단에 소속되었다. 노인은 7,80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스승의 지도하에, 그리고 대사형, 이사형의 지휘 하에 권단에서 권법을 수련하였다. 조건이 좋은 곳에서는 북을 치고 음악 반주를 하기도 하였다. 이런 수련은 미국학자인 주석서(周錫瑞)가 보기에 공연적인 성격과 의식적인 성격이 강했다. 확실히 당시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권단은 자주 여러 사람들이 둘러싸고 구경하는 가운데, 극을 보는 것처럼 진행되었다. 나중에 기공이 붐을 일으킬 때 대가들이 나타나서 여러 명이 함께 기공수련을 하면 구경하는 사람이 아주 많은 것과 비슷하다. 고금의 도리는 같은가 보다.
당연히, 권민은 자기 동네서 공연하지만은 않았다. 외부로 돌아다니기도 했다(사실, 권민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겠는가. 그저 자기 동네에서 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당시 산동순무를 하던 원세개는 그들을 북상하도록 핍박했다. 북쪽에 귀자(鬼子, 서양인)가 있다고...). 바깥에 나갈 때에는 죽이기도 하고, 불태우기도 하고, 먹고 마시고 소리치는 것은 모두 이런 보통 권민이었다.
이외에 하나의 권단에는 자주 나타나지는 않지만,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있다. 그들은 권단의 후대(後臺, 배후) 혹은 은주(恩主)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이런 사람들은 거개가 향신(鄕紳)이거나 부호(富戶)였다. 무거인(武擧人, 무과2차급제자) 또는 무수재(武秀才, 무과1차급제자)가 많았다. 명청 두 시대에는 비록 문, 무에 모두 과거가 있었지만, 군대의 군관은 기본적으로 무과급제자로 구성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군인출신이었다. 무과과거는 그저 사람들이 공명을 얻는 용도로만 쓰였고, 신분을 바꾸는 것으로 활용되었다. 신사(紳士)자격을 얻는 가장 간편한 길이었다(문과 과거에 비하여는 통과하기 아주 쉬웠다). 그리하여, 무과급제자들은 향촌사회에서 저급의 지방귀족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사람들은 한가하고, 일벌이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관청이 독려하고, 권민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 그들도 그 안에 끼어서 권단을 위하여 이런 저런 일을 하는데 가담하게 된 것이다.
권민이 들고 일어난 것은 기독교가 금지에서 풀린 이후에, 특히 태평천국의 실패이후, 수십년간 이어내려오던 교민(敎民)간 충돌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민"은 교도가 아닌 일반 백성이고, "교"는 기독교(천주교, 신교와 동방정교를 포함)교회와 기독교를 믿는 신도들이다. 양자의 충돌은 어떤 경우에는 이익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한 지방에 종교집단이 나타나면 이들은 새로운 중심이 되어 새로운 권위로 등장하고, 이들은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이렇게 하면 어느 정도 원래의 권위자들은 약간 불안감을 느낀다. 최초의 문화충돌은 민간의 오락 활동에서 시작된다. 창극과 이와 관련된 사당에 제사지내고, 농가를 부르는 활동은 중국농민의 오락이다. 그런데, 이런 오락은 왕왕 신에게 제사지내고 연극을 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를 "우상숭배"라고 배척한다. 그리하여, 교화는 신도들에게 총리아문에서 얻어낸 '특권'을 들이밀면서 교도들에게 이러한 활동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요구하고, 신도들에게 극에서 분장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활동은 기우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기우활동을 한 후에 비가 오지 않으면 몰라도, 비가 내리면, 비는 기우제를 지낸 사람들에게만 내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신도들도 비의 혜택을 보게 되므로, 일반 백성들은 이들이 불로소득을 얻는 것이라고 불쾌하게 생각하는 측면이 있었다.
자주 보게 되는 문화충돌은 교회의 일상적인 의식과 관련이 있었다. 출생부터 입교할 때의 세례, 죽기 전의 종부례, 평일의 미사, 그리고 밀실참회, 이러한 것들은 모두 중국의 백성들에게 신비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느낌을 주었다. 쉽게 오인하기 좋았다. 쌍방 간에 약간의 마찰만 생기면, 쉽게 악의적인 도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중국인들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여자아이를 집안에 가둬둘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남녀가 섞여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남녀가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야외나 시장과 같은 넓고 탁 트인 공간에서였지, 밀폐된 공간에서는 아니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미사를 드릴 때에는 남녀가 밀폐된 공간에 함께 했다. 이는 손쉽게 통간, 난교, 군교를 연상하게 하였다. 밀실참회에 대하여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손쉽게 밀실음란을 연상하였다. 그리하여, 1844년 중국프랑스간의 황포조약으로 기독교에 대한 금지가 해제된 후, 중국의 도시와 농촌에서는 무수한 기독교, 교화, 교민에 대한 유언비어가 퍼져갔고, 무수한 교회를 해꼬지하는 전단과 글이 퍼져갔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모두 "음란"과 관련 있었다. 문화의 차이로 이러한 것들은 확대 재생산되어 간 것이다.
분명히 문을 부수고 들어온 서양인들은 수입한 종교 그 자체가 어떻든지 간에,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선천적인 불량아였다. 그리고 또한 악의적으로 선전된 내용 중에는 교회가 버린 영아를 맡아서 키우는 것도 들어있다. 과거에 중국농촌에서는 영아유기사건이 많았다. 특히 여자 아이같은 경우. 비록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쨌든 악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중국인들 중에서도 영아를 맡아 키우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버린 아이를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을 크게 벌인 것은 역시 교회의 육영당이다. 육영당이 맡아 키우는 버린 아이들은 원래 신체조건이 좋지 못하였다(버려진 기간의 장단과도 관계된다). 수양된 이후, 양육자들은 왕왕 영아의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 그들의 생명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욱 신경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하여, 육영당의 영아사망률은 비교적 높은 편이 되었다. 육영당이 이런 죽은 영아를 모아서 매장할 때,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 과거에는 버린 영아는 어디에서 죽건 어디에 버려지건 이리가 먹든 개가 물든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러나, 한 장소에 너무나 많이 묻히게 되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런 아이들은 모두 교회가 죽인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교회는 중국의 어린아이들을 유괴하여, 심장과 간을 꺼내서 약을 만들고, 눈을 파내서 은을 만든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어떤 육영당은 사람들에게 버린 아이를 많이 거두어오도록 하기 위하여 왕왕 아이를 보내온 사람에게 약간의 보수를 주곤 했었다. 그런데 바로 나쁜 인간들은 이런 보수를 위하여 아이를 유괴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런 나쁜 일이 폭로되자, 모든 욕은 육영당이 뒤집어썼다. 마치 그동안의 소문이 확인된 것처럼.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1870년의 천진교안(天津敎案, 천진 종교사건)은 바로 이런 원인으로 발발한 것이다. 당연히 문화차이로 인한 충돌은 기독교의 전파역사상 드문 것은 아니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문화차이는 교류가 늘어나면서 사라진다. 기독교의 일부 풍습은 괴이하긴 하지만, 중국인들에게도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어서 이상하게 더 이상 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후에는 이해하게 되고, 심지어는 화해까지 하게 된다. 그저 상호간에 오해가 대항으로까지 승화되지 않고, 피차간의 적의가 이미지로 고착화되지 않는다면, 충돌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정부의 행위는 이런 화해를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기독교는 금지에서 해제되었고, 유입되도록 허용되었지만, 청나라정부에 있어서는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미봉책이었다. 청나라정부의 관리들은 겉으로는 금지를 풀면서, 속으로는 계속 금지하는 것이었다. 혁흔의 말을 빌리자면, 바로 천주교는 이단에 속하므로, "비록 금지는 풀었지만, 여전히 암중으로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부관리들은 직접 나서서 교회인사를 제한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였으며, 일부 향신들은 조직적으로 기독교를 거부했다. 배후에는 역시 관청이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교충돌의 종교사건은 관청에 접수되기만 하면, 대부분 일이 번져버린다. 고의적으로 쌍방간의 적의를 인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나중에 종교사건에 대하여는 하나의 말이 나오게 되는데, 바로 관청은 일반적으로 서방의 압력에 굴복하여 교회의 편을 든다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절반만 얘기한 것이다. 진실한 말은 뒤의 절반에 있는데, 필자가 조사한 종교사건의 기록을 보면, 이렇다. 매번 종교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아문에 제소되기만 하면, 심리를 책임진 관리는 처음에는 모두 백성 편을 든다. 어떤 때에는 아무런 이유없이 편을 들어준다. 전체 심리는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바로 이때, 서방국가의 공사나 영사는 왕왕 직접 나타나서 간섭을 한다. 이런 간섭은 어떤 때에는 심지어 대포와 함선을 동반하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대등하지 못한 외교적 압력 하에서 총리아문이 관여하면 사건은 뒤집어진다. 바로 이때, 관청은 다시 교회와 교민의 편을 드는 것으로 변신한다. "교회 측이 항상 이기고, 백성측은 항상 억울하게 진다" 이것은 통계가 불완전한 결과일 뿐이다. 이런 결과가 나타난 과정은 사람들이 왕왕 눈여겨보지 않는다.
가장 기괴한 것은, 어떻게 심리하든지간에, 관부는 절대 백성들에게 진상을 알지 못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의 음란행위, 심장 등을 꺼낸 행위 등에 대한 고소에 대하여 소송이 끝나고 나면, 제소한 사람이 패소하게 되지만, 아무도 나서서 확실히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관청이 서방의 압력에 굴복하여, 아무렇게나 사건을 처리한 것으로 생각되고, 원래 기세 있게 제소했던 백성들은 더욱 억울하다고 소리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해는 전혀 풀리지 않고, 오히려 불공대천의 원수로 발전하게 된다. 어떤 종교사건에서는 심리과정에서 충돌이 있던 백성측이 원래 교회와 교민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것이 발견되지만, 관청은 고의로 이 일을 축소해버리고, 과도하게 "일을 벌인" 백성을 심하게 처벌한다. 이리하여 갈등을 격화시킨다. 관청은 정보통제와 통치술을 운용하여, 기본적으로 서양에 양보하면서, 백성들의 서방에 대한 분노를 점화시키는 목적을 달성했다. 관청은 나중에 서방과 투쟁하면서 백성들의 분위기를 이용하는데 복선을 깔아둔 것이다.
권민은 바로 대부분은 실제로 무술변법이 실패한 이후, 완고파관리들이 "백성을 이용"할 수 있겠다는 판단 하에, 이용당한 무장군중이다. 권민들의 가장 날카로운 무기는 그들이 떠들었던 "도창불입"의 술법과 그 배후의 신령이었다. 즉, 권민의 "도창불입"은 그들이 법술을 운용했을 때 신선이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당연히 아무도 진짜 도창불입인 경우는 없으므로 이 술법은 그들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면서, 다른 사람도 속이는 장난인 것이다(그저, 서양인들을 속일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권민이 법술을 쓸 때 나타날 확률이 비교적 높은 인물에게서 우리는 또 하나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당연히 신령이라는 것은 농민들이 잘 알고 있는 희곡의 인물이다. 예를 들면, <<삼국연의>>의 관장조마(관우, 장비, 조자룡, 마초), <<서유기>>의 저팔계, 손오공, 사오정, 그리고 공안극안의 황천패(黃天覇)등이다. 통계를 내본 적이 있는데, 이 세 유형의 사람은 권민들이 법술을 쓸 때, 출현한 빈도수가 가장 높았었다. 즉, 그들은 자신이 법술을 쓸 때, 모두 이 세 종류의 신령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삼국지 영웅이 많았는데, 권민들은 위나라 오나라 진영의 인물을 전혀 고르지 않았다. 전위, 허저, 장료, 서황, 주유, 황개, 태사자등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그저, 관우, 장비, 조운(조자룡), 마초와 황충 등이 보일 뿐이다. 보기에 서태후가 돌봐준 권민들은 자기의 "충의"와 자기의 "정통"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당승 삼장법사의 세 제자는 모두 원래 재야에 있다가 나중에 관청에 흡수되어 마침내 정통으로 된 인물들이다. 특히 손오공은 금강불괴의 몸을 지니고 있어서 아무리 일을 많이 벌여도 죽지 않는다. 그리하여 많은 권민들이 좋아했던 인물이다. 황천패의 경우, 그는 조정의 손발이고, 전문적으로 청백리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며, 도적을 섬멸하는데 앞장섰다(암중으로 음란한 서양인, 서양종교를 가르칠 가능성이 많다). 조정에서 특히 권민의 행위를 칭찬했던 대신 중에 청백리로 불리우던 강의는 어느 의화단의 대사형을 그의 황천패라고 말한 적이 있다.
권민들이 넓은 땅에서 일어나기 전날, 어떤 동기에 의해서이건 간에, 서태후의 무술정변은 청나라의 서방에서 배우겠다는 변혁의 길을 분쇄하게 된다. 그러나 당초 이런 변혁을 일으킨 외부압력은 육군자의 목이 떨어졌다고 하여 전혀 감소되지 않았고, 오히려 청나라정부가 받는 압력은 더욱 커졌다. 압력에 대응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니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백성의 여론"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에서 "도창불입"까지, 권민은 그저 완고파 관리들이 서태후에게 찾아내준 도구에 불과했었다. 도구가 되기를 자처한 권민들은 비록 일하는 것이 조금 황당하기는 했고, 함부로 죽이고 함부로 불태웠지만(북경 전문의 대책란-大柵欄-상업지역은 그들에 의하여 불타버린다. 그리고 수만의 무고한 신도와 서양물건을 쓰는 사람들이 살해당하였다), 8국 연합군이 아직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일체 서방적인 것은 깨끗치 청소하고자 했다. 사실 그들의 사상은 중앙정부와 일치했다(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누구로부터 주입을 받지 않았다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저, 그들이 도구로 삼은 자본이 너무 가련할 뿐이다. 법술이라는 것은 민간의 무술과 기공활동일 뿐이고, 그럴듯하지도 않은 무술과 기공, 혼령이 몸에 붙는 것, 그리고 잘 아는 희곡의 인물의 힘을 빌리는 것일 분이다. 복장은 비록 통일되었지만, 이것은 그저 길리(吉利)를 추구하는 것일 뿐이고(황색과 홍색은 길한 색이다), 팔괘분단(八卦分團)을 하였지만, 모두가 스스로를 건자단(乾字團)이라고 우기면서 우두머리가 되고자 했고, 다른 일곱개의 괘는 거의 아무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이 마신 부적, 외우는 주문도 도교와 거의 관계가 없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이런 권민의 비밀은 당시와 이후 한동안 사실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오랫동안, 우리가 일부러 밝히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비밀로 되었다. 이런 비밀을 분명히 밝혀두지 않는다면, 권민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날 지도 모른다.
44. 의화단(義和團)은 왜 화북(華北)에서 성행했는가?
글 : 오구(吳鉤)
1900년 8월, 경자(庚子)년, 서태후(자희태후)는 두번째로 황망하게 북경성을 도망쳐 나가서, "서수(西狩)"를 하러 갔다. 제1차 "서수"는 40년전에 일어났다. 1860년, 영불연합군이 경사로 쳐들어왔을 때이다. 이번에 다시 "사냥"의 명의로 도망친 것은 바로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기 때문이다.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공한 것은 의화단이 직예, 경성에서 교회를 불지르고, 교민과 양인을 공격하여, 열강에 군사간섭의 구실을 주었기 때문이다.
의화단의 활동은 산동에서 시작되었고, 직예(直隸), 경사(京師)에서 횡행했고, 산서, 하남, 내몽고, 동북으로 만연되었다. 동남일대는 기본적으로 대량의 권민(拳民)이 나타나지 않았다. 권민이 화북평원에 나타나고 동남연해에서는 기세를 올리지 못하였는데, 이는 당연히 하느님이 주사위를 굴린 결과는 아니다. 그리고 복잡한 정치와 사회적 요소가 있다.
의화단운동의 흥쇠사를 관찰해보면, 하나의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한인 총독순무는 대부분 권민에 대하여 강경수단을 취할 것을 주장했고, 만인 총독순무는 의화단에 대하여 명백하게 '회유'적인 태도를 보였다. 권비의 난이 발생한 직예, 산서, 하남, 내몽고, 동북은 당시에 모두 만주족이 통치했다. 이 해의 직예총독은 유록(裕祿)이고, 산서순무는 육현(毓賢)이며, 하남순무는 유록의 형이었다.
육현이 산서순무를 맡기 전에, 1899년 산동순무를 지낸 바 있다. 권민이 산동에서 흥기한 것은 많은 정도로 이 만주족 귀족이 종용하고 편을 들어준 결과이다. 19세기말, 산동은 의화단 권민과 교민간의 충돌이 계속되는 지방이었다. 근대사상 유명한 "거야교안(巨野敎案)"은 1897년 산동 거야현에서 발생했고, 독일은 이 기회를 틈타 교주만을 침입하여 점령한다.
"교안"의 발생으로 인한 심각한 결과에 비추어보면, 조정은 육현에게 "수시로 여러 측을 가르쳐서, 백성과 교민이 서로 잘 지내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육현은 조정에 보고한다.
"교민을 괴롭히는 일은 없습니다. 이는 노재(주: 노비라는 뜻으로 청나라 때, 관리들이 황제나 상사에게 했던 겸손의 말)가 산동에서 이십여 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입니다. 이를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민은 "향리를 횡행하며, 양민을 괴롭히고, 심지어 지방 관리를 협박하고 걸핏하면 사람을 괴롭혔다." 백성과 교민의 분쟁을 처리할 때, 육현은 "선입견이 들어 있어, 교민과 싸우는 자는 양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편을 들어주게 된다." 패사에서도 "권비를 신성하게 받들어서, 도적을 다스리라는 종지와 배치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육현의 정책 하에, 산동의 의화권은 '의화단'으로 명칭을 고친다.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합법적인 지위를 얻은 것이다. 심지어 권민들은 "육(毓)"자가 새겨진 깃발을 든다. 산동의 많은 지방에는 모두 의화단의 "권창(拳廠)"을 연다. 예를 들어 장평현에는 팔백여개의 촌장이 있는데 권창도 팔백여개가 있었다.
육현의 방식은 당연히 열강의 강렬한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계속 청나라조정에 압력을 가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주 북경공사는 청나라조정에 건의한다. "능력 있는 사람을 보내어 그(육현)의 직위를 대체하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육현을 대체하는 적합한 사람일까? 영국의 주 북경공사는 영국외교대신에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금후 산동북부의 국세에 관하여, 본인은 가장 희망적인 전망은 원세개를 순무로 보내는 것이다"
열강의 압력 하에, 1899년 말, 청나라조정은 육현을 불러들이고, 원세개를 서리산동순무에 임명한다. 여기의 세부적인 사항은 얘기해볼 만하다. 육현이 떠나기 전에, 저명한 의화단 수령 주홍등(朱紅燈)을 주살하게 명령한다. 확실히 육현의 의화단에 대한 '회유'는 진심에서 나온 동정이 아니었고, 정치적 목적에 기한 계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세개가 육현을 대체하여 산동순무로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산동의 국면에 우려를 지니고 있던 열강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1899년 12월 7일, 미국 주중공사는 미국국무장관에게 서신을 보낸다.
"본인은 기쁜 마음으로 보고 드립니다. 어제 무위군 원세개 장군이 대리산동순무로 명받았습니다. 그는 능력 있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외국인과의 교분도 아주 넓습니다. 황상이 적당한 유지를 내린 후, 교란은 중지되고, 질서는 회복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희망합니다."
사실상 원세개는 산동의 국면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의화단에 대하여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한 가지 에피소드에 따르면, 원세개가 부임한 후, 일부 의화단 수령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어 그들에게 아문으로 와서 "도창불입'의 법술을 보여 달라고 한다. 이 몇몇 수령이 입에 개거품을 물고, 신령이 몸에 들어왔을 때, 원세개는 권총을 꺼내어 펑펑 소리를 내며 그들을 쏴 죽인다. 이 방법은 아주 악독했다. 의화단 수령을 징벌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속임수를 까발렸다.
이 에피소드가 반드시 사실은 아닐 수 있다. 다만 원세개가 의화단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은 사실이다. 산동에 부임하자마자 즉시 <의화권비금지고시>, <권비엄금잠행장정>을 반포한다. 각 부, 주, 현에서 장병을 모집하여, 단련을 건립하고, 관부와 협력하여 의화단을 소탕하도록 명한다. 사건을 일으키는 의화단 권민은 왕왕 "즉석에서 처결"하였다. 그의 강력한 진압을 받고, 산동의 의화단운동은 금방 수그러들게 된다.
이와 동시에, 직예의 의화단운동이 기세를 발휘한다. 9할 가량의 주, 현에 만연하였고, 수십만에 이르는 민중이 참가하였다고 말해진다. 1900년 봄, 의화단의 세력은 이미 경사에 까지 들어온다. 북경, 천진일대에 대규모로 철로와 전선을 파괴하는 일이 벌어진다. 의화단세력은 직예지구에서 커지게 된 것은 직예총독 유록(그도 만주족 귀족이다)의 태도와도 큰 관계가 있다.
유록의 의화단에 대한 태도는 애매했다. '주무(主撫, 위무를 주로 했다)'라고 하기에는 그가 일찍이 무정하게 권민을 소탕한 적이 있고 '주초(主剿, 소탕을 주로 했다)'라고 하기에는 그가 일찍이 의화단에 무릎을 꿇고 그들을 위하여 군대무기고를 열어준 적이 있다. 의화단이 북경과 천진에서 철로를 파괴하고 교회를 불태울 때, 유록은 비록 보호를 요청하는 보고를 받았지만, 효과적인 조치를 늦추고 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국면은 더욱 위급해졌고, 열강이 북경으로 진격하는 구실을 주었다.
여기서 한 가지를 가정해볼 수 있다. 만일 당시에 이홍장이 여전히 직예총독으로 있었다면(이홍장은 유록의 전임이다), 아마도 역사는 달리 쓰였을 것이다. 직예의 국면이 통제 불능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록의 애매한 태도는 그가 조정의 풍향계를 관망했기 때문이다. 조정의 의화단에 대한 태도는 계속하여 불명확했다. "주무"와 "주초"의 노선사이에서 오락가락했고, 진퇴에 근거가 없었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당시의 양무파 관료는 서방열강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 것을 주자하며 양인에게 도전하는 의화단을 처벌하자고 주장한다. 수구파귀족들은 열강의 서태후 '훈정' 및 대아거로 광서제를 대체하려는 계획에 대한 간섭에 불만을 품고 '부청멸양'을 주장하는 의화단운동을 통하여 자신들을 심하게 괴롭히는 열강들을 혼내주고 싶어 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조정이 의화단운동을 처리하는 의사결정은 양무파와 수구파의 세력중 누가 우세를 점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완고한 수구세력이 새로 힘을 얻는다. 그래서 산동순무 육현이 북경으로 돌아왔을 때, 즉시 재의 등 귀족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북경에서 서동, 강의등과 합하여 여러 가지 방면에서 선동을 하고 자칭 권수라 하며, 의화단은 총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날조해서 말한다. 이런 거짓말이 바로 퍼져나간다." 그 후 육현은 산서순무에 임명된다.
위에서 언급한 강의(剛毅)는 의화단운동의 국면을 악화시키고, 청나라정부와 8국 연합군이 정면대결로 치닫게 만드는 핵심인물이다. 의화단이 대거 북경으로 들어온 것은 강의의 "초단초양(招團剿洋, 의화단을 불러들여 서양인을 소탕한다)" 주장이 받아들여진 때문이다.
그는 "양인을 원수로 여긴다고 말하고, 양무파를 모조리 매국노로 치부했다." 1900년 8월, 그는 명을 받들어 양향, 탁주일대로 가서 의화단의 허실을 탐지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서태후에 보고한다.
"권민은 충성스럽고, 신술은 쓸 만합니다."
그리하여 서태후가 열강에 '선전포고'를 하게 만들었다. 6월 21일, 청정부는 '선전포고'를 하고, 각성의 총독순무는 각처의 '의민'을 모집하여 외적에 대항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강의는 재훈과 함께 통솔의화단대신이 되어 의화단을 이끌고 8국 연합군과 전쟁을 벌인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얘기한 "한인 총독순무는 권민에 강경한 수단을 취할 것을 주장하고, 만주족 총독순무는 의화단에 명백하게 '회유'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그저 겉모습일 뿐이라는 것을. 사실은 양무파와 수구파의 두 치국방략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 것일 뿐이다. 양무파 관리들이 통제하는 동남각성은 기본적으로 평정한 국면을 유지했다.
청나라조정은 수구세력의 조종 하에 열강과 '선전포고'를 한 후에 동남지방을 통치하던 유곤일, 장지동, 이홍장 등 지방 실력파는 열강과 협의를 달성하여, 북성하여 '근왕(勤王)'하는 것을 거절한다. 역사에서는 "동남호보(東南互保)"라고 부른다. 이렇게 하여 전쟁의 불꽃이 남하하는 것을 막았다.
의화단운동은 화북평원에서 폭발한다. 이는 19세기말 중국북방의 사회기초와 관련이 있다. <의화단운동의 기원>을 쓴 주석서 선생은 이렇게 생각한다. 직예와 맞닿아 있는 산동서북부의 사신(士紳)계층은 아주 박약했다. 전통적인 사회통제 매커니즘이 해체되는 중이었다. 이는 권비의 난이 대규모로 전파되는데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직예의 의화단은 산동 서북부에서 전해들어온 것이다. 사신세력이 비교적 강대한 산동서남부의 권민세력은 지방사신에 의하여 억제된다. 원세개가 산동의 의화단 소란을 해결하겠다고 결심하자, 사신집단의 존재는 관청에 협조하여 사회질서의 매커니즘을 회복하도록 해준다. 산동순무아문의 한 표창장을 보자. 이만선은 이무선과 함께 사향으로 가서, 사술권회를 극력 금지하도록 하고, 협종을 해산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오품의 상을 내려 공을 표창한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바로 지방사신이 관청에 협조하여 의화단을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그 후에 관청에서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직예의 상황은 약간 달랐다. 의화단운동이 일어날 때, 대량의 직예사신이 의화단에 가입한다. "경성사신부호는 많은 사람들이 단을 만들고, 모두 단주라 칭했다."
이것은 어찌된 것인가?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직예사신 문화심리상태"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외래문화에 일찍이 접했던 동남의 여러 성과 비교하면, 직예일대의 사신은 보편적으로 강력한 "기독교를 미워하고 외국인을 배격하는" 문화심리를 지니고 있었다.
"민간에서는 역대이래의 국치로 여기고, 각지의 교회와 선교사의 만횡으로 외국인을 배격하는 심리가 아주 컸다. 기회만 있으면 힘을 합하여 울분을 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식인들이 이런 일을 자주 얘기했다."
이런 사신들의 기풍은 의화단의 난이 평정된 후에 비로소 변화한다.
동남의 '호보"는 양무파 관료의 주장만은 아니었다. 동남사회의 역량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양무운동이래, 동남의 각성에서는 대거 양무기업을 만든다. 전통과 서방문화의 융합으로 강대한 "사신-신상"집단이 나타난다. 이것은 사신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외래문화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엘리트집단이 바로 동남의 사회의 가장 중요한 안정요소였다.
권민과 양인이 북방에서 싸우고 있을 때, 한구, 구강등지의 신상은 양강총독 유곤일과 호광총독 장지동에게 전보를 쳐서 장강과 내하의 방위를 강화하도록 요청한다. 상해의 신상은 '동남구제선회"를 조직하여, 교회와 선교사를 보호한다. 상해의 매체는 속속 <보위동남상무>, <보전남방지법>등의 사론을 싣고 동남의 여러 성당국이 중외평화국면을 유지하고, 사회 안정을 보장해줄 것을 요청한다.
장건, 진삼립, 탕수잠, 왕강년 등 동남의 권신(權紳)들이 '호보'를 촉진시켰다. 총독순무와 양인의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중개인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장건의 친구인 유후생은 이렇게 털어놓은 바 있다.
"당초 장건과 하사곤, 진삼립, 심유경, 탕수잠, 시병섭 6인(모두 동남사회의 사신이다)은 유곤일, 장지동의 두 총독을 끌어들여 공동으로 '동남호보'의 명의로 나라씨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최대목표로 삼았다."
장건이 당시에 서태후를 몰아내려는 생각을 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동남호보'의 실현에 장건은 확실히 큰 역할을 했다. 장건과 유곤일, 장지동의 관계가 밀접하여, 6월 16일, 양국 주한구영사는 "수군을 파견하여 장강으로 들어와 토비를 탄압하는 것을 도우려 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장건은 극력 만류한다. 동시에 유곤일에게 전보를 보내어 말한다.
"영국 수군이 장강으로 들어오는데 우리가 만일 보호하지 못하면 동남의 대국은 끝장이다."
18일, 그는 유곤일로 하여금 장강하류에서 활약하던 염효(鹽梟) 서노호(徐老虎)를 초무하도록 한다. 서노호가 북방의 의화단에 호응하여 일을 벌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25일, 심유경이 성선회의 뜻을 받들어, 유곤일에게 서양인과 평화협약을 체결하도록 유세한다. 유곤일이 망설이고 있자, 장건이 한 마디 말을 한다.
"비록 서북이 없어도 동남을 보존하면 그 명목을 보존할 수 없는 것이고, 동남이 없더라도 서북을 보존하면 그 실질을 보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곤일이 결심을 한다. 장지동에 전보를 보내어 서양인과 협약을 맺기로 한다. 다음 날, <동남호보조약>이 상해에서 체결된다.
이렇게 말할 수 없다. 동남사회의 전체 "사신-신상"집단이 한마음으로 추진하지 않았다면, "동남호보"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경자년의 의화단운동은 금방 평정된다. 이번 운동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몰고 왔다. 그것의 실패는 완고한 수구파는 시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수구세력은 정리되고 축출된다. 강의는 서태후의 '서수'를 따라가던 도중에 병사한다. 육현은 난주에서 사사 당한다. 유록은 전쟁 중에 자살한다. 청나라조정은 마침내 중단되었던 유신사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경자국변"이후 다시 "신축신정"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45. 의화단의 난에 대한 중국 역사학자의 서술
글 :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 호승 저/ 인간사랑
권회에서 의화단으로
광서 25년(1898년)에 산동을 중심으로 하여 의화단이라고 부르는 자발적인 농민운동이 갑자기 폭발한 화산처럼 솟아올랐다. 의화단운동은 무술유신운동이 실패한 직후에 일어난, 중국 근대사 전기의 두 번째 혁명고조기의 중요 구성요소이다.
의화단이란 조직은 장강 이북 각 성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일종의 민간 회당인 백련교에서 시작되었다. 가경 원년(1796년)에서부터 9년 동안이나 이어지는 백련교 대봉기와 가경 18년에 백련교의 지파인 천리교가 일으킨 봉기가 실패한 후 수십 년 동안 백련교의 지파는 계속하여 직례, 산동, 하남, 산서 등에서 여러 명칭으로 암암리에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중에서 팔괘교가 가장 널리 전파되었다. 청 왕조는 팔괘교를 전파하는 자는 체포하고 우두머리가 되는 자는 극형에 처하는 법령을 시행했다.
이런 고압적인 정책 아래서 팔괘교도는 권법 전수를 표면에 내세워 자신을 은폐했다. 갑오전쟁 때에 산동의 일부 지방에서는 의화단 조직이 이미 활동하고 있었고 산동 남부에서 활동하던 대도회가 전 후 수 년 동안 의화권 조직과 관계를 맺었다. 두 조직이 관계를 맺은 후 권회(拳會), 홍권회(紅拳會), 의화권회(義和拳會) 등의 이름을 가진 단체가 생겨났다. 우리는 이러한 의화권 조직을 일률적으로 의화단(義和團)이라 부르고 있지만 이들 단체가 결성 때부터 단이라 자칭하지는 않았다. 단이란 명칭은 훗날 특수한 조건 하에서 붙여진 것이다.
장강 이남 각 성에서 유행하던 가로회(천지회, 삼합회) 계통의 회당과 마찬가지로 백련교도 통일적인 지도 조직이 없이 각지에 분산된 수많은 수평적 소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백련교의 주요 구성원은 대량의 빈농이었지만 강호의 유랑민이 항상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백련교는 강호의 유랑민과 각종 빈곤 노동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상호 부조단체였다. 백련교는 명확한 정치투쟁 강령을 갖고 있지 않아서 딴 마음을 먹고 조직 속에 섞여 들어온 지주 명사의 영향을 제어하지 못했고, 때로는 그들에 의해 조종되는 경우도 있었다. 남방의 가로회와 비교할 때 백련교는 종교 미신의 색채가 더 짙었다.
태평천국 농민혁명의 발동자들은 현지의 천지회 조직 밖에서 배상제회를 따로 설립하여 가능한 한 전통 회당이 내포하고 있던 농민혁명의 발전에 불리한 요소들을 배제했다. 그러나 태평천국 운동이 실패한 후 배상제회 조직은 후대에 이어지지 못했는데, 주된 원인은 배상제회가 차용했던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침략도구여서 갈수록 인민들로부터 배척당했기 때문이다.
70년대와 80년대에 이르자 농민혁명의 적진에는 봉건세력뿐만이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세력도 가세했고 특히 후자는 주요한 적이 되었다. 봉건세력은 제국주의에 의존하면서 일부 분야에서는 제국주의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처럼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교착된 형세는 이전의 농민혁명이 경험하지 못한 조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봉건시대 때부터 내려온 가로회와 백련교라고 하는 기성 조직의 조직형식으로는 농민혁명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90년대 말까지는 농민에게 더 나은 조직형식을 제공해줄 선진적 계급이 없었고 농민대중도 스스로 보다 나은 조직형식을 창조해내지 못했다. 반제국주의 농민 대투쟁의 각종 객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농민대중과 기타 노동인민 대중은 기존 조직형식을 이용하여 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들었던 무기가 바로 구식 칼과 창이었던 것처럼.
의화단이 흥기한 시기는 갑오전쟁 후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 분할될 위기에 처한 시기와 겹치고 의화단의 활동 지역은 봉건통치 세력의 중추신경에 해당되는 수도권에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산동성 동부 해안지역은 갑오전쟁 중에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략을 받은 곳이었고 이어서 독일과 영국이 각기 교주만과 위해위를 점령했다. 게다가 독일은 산동성 전체를 자신의 세력범위로 만들고 1899년부터 교제(청도-제남) 철도 부설을 강행하기 시작했고 철도 연변의 광산도 개발했다.
외국 선교사들은 일찍부터 산동에 들어와 활동했는데 90년대 말에 외국인이 연 기독교 교회당과 교회 기구가 산동성 전체에 널려있었고 그 중에서 천주교 세력이 가장 강했다. 다른 해안지역 성과 마찬가지로 산동에서는 서양의 면사와 면포, 그리고 서양 상품이 대량으로 수입되었고 수많은 농산품이 상품화되었다.
이 때문에 농민 수공업이 심각한 타격을 받아 농촌의 자연경제는 파괴되고 농민과 기타 노동자들의 생존이 위협을 받았다. 광대한 인민대중 사이에 쌓인 제국주의에 대한 적대적 정서가 의화단 투쟁을 통해 폭발하기 시작했다.
광서 24년에서 25년(1898~1899년) 사이에 산동성 수도 부근을 포함하여 성 전체에서 의화단이 활동했다. 산동 서북부의 운하에 면한 지역-수장, 요성, 임청, 청평, 치평, 고당, 은 등의 현-에서 의화단의 기세가 특히 높았다. 이 무렵 남북 운수의 주역은 해운으로 옮겨갔고 이 때문에 생계에 타격을 받은 운하에서 일하던 뱃사공, 짐꾼과 운하 부근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노동자들이 의화단의 주요 분자가 되었다. 운하에 면한 지역은 산동성 내에서도 외국 교회당이 가장 밀집된 곳이기도 했다. 중국인 신자 가운데는 유혹에 넘어간 빈민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악덕 지주와 불량배들도 있었다.
광대한 민중과 외국 교회 세력을 등에 업고 악행을 저지르는 중국인 신자들 사이의 갈등이 첨예해졌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권법을 연마한다는 명분으로 결집하여 교회를 적대시하면서 관부와도 대적하는 조직을 형성했다. 이런 조직이 직례성 경내로 번져나갔다. 광서 25년 가을에 산동성 인근인 위현, 청하, 고성, 경주, 동광, 교하, 부성에서도 의화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광서 25년에 산동성 평원현에서 지방관이 군대를 파견하여 의화단을 탄압한 사건이 발생했다. 고당, 치평, 장청 일대의 의화단 수령인 주홍등(朱紅燈)과 승려 본명(本明)이 2,3백 명의 무장대를 이끌고 현지의 의화단 무리와 합류하여 관병과 싸움을 벌였는데 승부가 나지 않았다. 산동순무 육현이 치평으로 군대를 보내 계략을 써서 주홍등과 본명을 체포한 후 처형했다.
북방의 백련교는 남방의 가로회와 마찬가지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반란의 구호로 내세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명 왕조를 회복한다는 구호는 갈수록 인민을 동원하는 호소력을 잃어갔다. 반양(反洋)과 멸양(滅洋)이란 구호는 제국주의와 중국 인민의 모순이 주요 모순이 된 객관적 형세를 반영하고 있었으므로 제국주의의 압박을 몸으로 느끼고 있던 대중을 자극하고 동원하는 작용을 했다.
그러나 당시 농민을 위주로 한 노동인민을 이끌어 줄 선진계급과 선진사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인민은 협소한 직접적 경험에 의존하여 외국 침략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선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중국의 봉건 통치계급이 제국주의가 중국을 압박하는 도구로 전락한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었고, 제국주의 침략자가 주요 투쟁 대상이 되었을 때 반제국주의 투쟁과 반봉건주의 투쟁의 관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나아가 그들은 소생산자의 입장에서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봉건주의 생산방식에 비해 앞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모순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은 낮은 단계의 감성적 인식 수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막연한 배외주의로 표출되었다. 그들의 주요 활동방식은 교회당을 불태우고 외국 선교사와 외국인을 배척하는 것이었으며 기독교 신자와 외국 상품이라면 무조건 적대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투쟁의 창끝은 외국 침략자에게로 향했을 뿐, “반청복명”의 깃발은 쓸모가 없었다. 그들이 이 낡은 깃발을 내려놓았을 때 보청멸양(保淸滅洋)이란 깃발을 받아들이기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의화단 활동의 내용은 문화적으로 낙후하고 폐쇄적인 농촌 고유의 미신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백련교의 전통과 관련이 있었다. 그들은 부적과 주술을 사용했고 신권(神拳)을 연마하면 총칼 앞에서도 몸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적이 무력해지도록 신령에게 빌었다.
그들이 의존했던 것은 적개심을 바탕으로 한 용기였다. 그들이 빌었던 신령은 대부분이 신화나 고사 또는 유행하는 소설에 나오는 각양각색의 잡신들- 홍균노조(洪鈞老祖: 봉신연의에 나오는 신), 여산노모(驪山老母), 관우, 장비, 황삼태, 황천패, 손오공, 저팔계 등-이었다. 이것은 통일된 조직을 갖추지 못하고 통일된 신도 없는 의화단의 분산성을 반영한다.
짧은 시간 안에 대단한 기세로 일어난 의화단운동을 직면한 당시의 청 왕조 지방관원들은 대체로 두 가지 대응책을 주장했다. 하나는 의화단은 사교(나의 주: 사이비 종교)인 백련교에서 나왔으니 박멸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주장이었다. 평원 현령 장해가 이런 주장을 내놓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다른 하나는 광서 24년에 산동 순무 장여매가 내놓은 대책으로서 의화단의 주장을 수용하자는 것이었다. 전,후임 순무가 투쟁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대중의 반침략투쟁을 지지하는 것처럼 가장했던 것이다.
두 순무는 진심으로 외국 침략자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낡은 봉건주의를 지키기 위해 자본주의와 관련이 있는 사물이라면 모조리 반대했던 것이다. 그들의 입장이 이러했기 때문에 의화단의 투쟁 방향을 절대적인 배외주의로 유도했고, 따라서 의화단의 운동은 더 많은 미신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또한 두 사람은 중국인 기독교 신자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을 적극적으로 선동하여 이른바 권민(拳民 나의 주: 의화단원들이 스스로를 부르던 말)과 교민(敎民 나의 주: 의화단원들이 기독교도들을 부르던 말)의 대립과 충돌을 심화시켰다.
산동의 전후임 순무 장여매와 육현이 기본적으로 유화책을 채택했기 때문에 의화단은 산동에서 최소한 절반은 합법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지금까지 하층 사회의 비합법적 회당은 회(會)라고 불렀고 단지 지주계급이 조직한 지방무장만 단(團)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의화단이란 명칭은 관부에서 이처럼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붙일 수 있었다. 각지의 의화단 조직이 점차로 보청멸양의 구호를 내세웠던 것도 장여매와 육현의 유화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의화단이 일종의 합법적 지위를 얻게 되자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났다. 첫째로 의화단이 급속하게 성장했다. 말단 관료인 평원 현령 장해는 의화단을 저지할 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결같이 의화단 토벌을 주장하다가 파면되었다. 둘째로 순무가 의화단을 지지한다는 인상은 자발적인 대중 혁명운동에 매우 유해한 독소가 되었다. 적지 않은 지주계급 분자가 의화단에 섞여 들어 대중 혁명조직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심하게 오염시켰다.
산동의 형세는 중국을 침략한 제국주의 열강의 심각한 우려를 자아냈다. 교주만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독일은 마침내 군대를 동원하여 교주, 고밀, 일조 등지에서 촌락을 불태우고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는 등 직접 대중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진압했다. 미국, 영국, 이탈리아도 산동성에 자국의 선교사와 기술자가 거주하는 것을 핑계로 하여 북경 주재 공사를 통해 의화단 활동을 단속하라고 청 정부를 압박했다.
광서 25년 10월 미국 공사 콘저가 총리아문에 직접적으로 육현을 파면하고 폭도를 진압할 의지가 있는 인물을 파견하라고 요구했다. 자희태후는 육현을 칭찬했으나 서양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육현은 산서 순무로 옮겨가고 무술정변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한 원세개(위안스카이)가 산동 순무에 임명되었다.
원세개는 유신파 지사들을 배신한 후에도 천진 근처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그가 지휘하던 신건육군 7천 명은 신식 무기를 갖춘 군대였다. 그는 산동 순무로 임명된 후 이 부대를 2만 명으로 확충했다. 그는 산동 순무에 취임하자 곧바로 “의화권 무리들을 금지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는 의화단의 합법성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무력으로 진압에 나섰다.
육현의 유화책과 원세개의 토벌책은 상반되는 정책이었으나 동일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했다. 육현의 유화책은 의화단을 내부에서 부식시키고 와해시키는 역할을 했다. 산동의 의화단이 견고한 조직과 강대한 기세로 원세개의 무력 진압에 대항하지 못했던 이면에는 육현의 유화책으로 의화단 내부가 분열된 사정이 있었다.
원세개의 통치 하에서 산동에서는 의화단의 대규모 활동은 없어졌으나 이미 타오른 불길을 완전히 꺼버릴 수는 없었다. 광서 26년(1900년)이 되자 의화단의 활동 중심은 점차로 산동에서 직례성으로 옮겨갔다.
의화단의 북경, 천진 진입
직례성 경내의 의화단 활동은 처음에는 산동성 인근 지역에서만 일어났으나 광서 26년 3~4월이 되자 의화단 조직은 직례성 전체에 퍼져나갔다.
외국 교회, 그 중에서도 특히 천주교회는 직례성에서 산동성보다 세력이 강했다. 각지의 의화단은 처음에는 권법을 연마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를 권창(拳廠)이라 불렀다. 그들은 외국 교회세력을 등에 업고 여러 가지 악행을 저지르는 신자들을 직접적인 투쟁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이 내건 구호는 보청멸양이었지만 구성원의 주력은 봉건적 압박에 시달리던 빈민이었기 때문에 서양인의 요구에 순응하여 외국 교회를 보호하는 봉건통치 세력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지의 의화단 설립자와 포교자들 가운데는 산동성이나 다른 성 출신들이 일부 있었지만 구성원은 주로 현지의 빈농과 빈민들이어서 현지의 자생적인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외국 교회(적지 않은 교회가 자체의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와 교회의 비호 아래 있던 지방 토호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고 진압에 나선 청의 관군에 대항하기 위해 인접한 지역의 의화단 조직이 서로 연계하기 시작하면서 분산된 조직이 점차로 집중했다.
노보 철도(노구교-보정 간의 철도노선) 연변은 천주교회당이 밀집된 지역이어서 의화단 운동의 중심 지역이었다. 의화단의 발전 형세는 태평천국 농민혁명과는 크게 달랐다. 마치 비 온 후의 죽순처럼 각지에서 의화단 조직이 일시에 생겨났다.
개별 지역의 조직을 보면 역량이 그리 크지 않았고 시작 단계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도 않았으나 지역의 조직이 집합하여 하나가 되자 큰 불길이 되었다. 산동성에서 직례성으로 달려온 각지의 권법 교사들이 의화단 조직을 전파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홍수전과 양수청이 태평군을 이끌고 호남성 등에 진입했던 것과는 달리 조직적인 의화단 세력이 산동성에서 직례성으로 진입하지는 않았다.
광서 26년 2,3월에 이르기까지 조정과 직례총독 유록(裕祿)은 의화단 조직이 강대한 정도로 발전하리라고는 예측하지 않았다. 유록은 자신의 관할 지역 내에서 등장한 의화단을 다른 성에서 온 비적무리라고 파악했다. 그는 광서 25년 11월 초에 부대를 이웃 산동성으로 파견하여 의화단을 탄압했고 26년 2월 초에는 황제의 명에 따라 의화권을 엄금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위협과 징벌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대외 사무를 책임진 총리아문은 이런 사태에 대해 특별히 염려했다. 3월 중순에 러시아 공사가 탁주와 역주에서 그 전 달부터 의화단이 활동하고 있었고 근래에는 노구교까지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총리아문에 통지해 주었다. 총리아문은 이런 정황을 유록에게 전보로 알리면서 엄밀히 조사하여 체포하라고 요구했다.
이 무렵 의화단 세력은 이미 직례성 전체로 확장되어 수도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심지어 수도와 직례총독의 임지인 천진에서도 의화권 사범을 자칭하는 인물들이 길거리에서 권법을 가르치며 도제를 모았다. 4월 11일에 황제는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근래에 듣기에 수도 인근 지역에서 의화단 권법회가 아직 해산하지 않고 있고 점차로 수도에까지 미친다고 하니” 수도 안에서는 “엄밀히 조사하여 금지할 방법을 찾으라.”
수도 인근에서 들풀처럼 무성하게 자라난 의화단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가 갈수록 통치자들의 근심거리가 되어갔다. 조정의 어떤 관원은 “권민이라고 하는 추악한 부류가 무리를 이루어 죽이려 해도 죽일 수 없고 관군의 기세를 누르고 활동 범위를 잠시 넓히고 있으니 무너뜨릴 방법을 속히 찾지 못하면 요원의 불길이 될까 심히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조정의 적지 않은 관원들은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는 위험한 방법보다는 육현이 산동성에서 사용한 적이 있는 유화책을 채택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유록과 원세개는 불법적인 권법회를 합법적인 단련으로 개편하는 방법은 쓸모가 없다고 주장했다.
4월 하순, 노보철도 북쪽 연변의 내수, 정홍, 탁주 일대에서 봉건통치자들을 크게 놀라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내수현 고락촌 주민들이 현지 교회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4월 초에 권창을 설립했다. 인근의 정흥, 신성, 탁주, 역 현의 의화단 조직이 사람을 보내 이들을 도와 교회세력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현지 교회와 일부 가옥을 불살랐다.
같은 시기에 정홍현 창거촌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북경의 천주교 주교인 프랑스인 피에르 마리 알폰스 파비에르가 청 조정에 압력을 가하자 유록이 병력을 동원해 진압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오히려 관군의 지휘관 양복동이 피살되었다. 제독 섭사성 휘하의 무위전군(武衛前軍)이 다시 진압에 나섰다. 섭사성 부대는 북양군대의 주력으로서 서양식 총포를 갖추고 있었으나 사방에서 봉기한 의화단 앞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의 부대는 청 왕조의 관군과 마찬가지로 기율이 매우 나빠서 가는 곳마다 비적 토벌이란 미명 하에 주민을 약탈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인민을 의화단의 대오에 참가하게 만들었다.
관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의화단은 철도를 파괴했다. 그들은 4월 말에서 5월 초 사이에 고비점, 탁주, 유리하, 장행점, 노구교 등의 기차역을 불살랐다. 이리하여 노보철도 북단 연변은 모두 의화단의 세상이 되었다. 의화단 무리가 탁주성에 진입했다. 그들은 성 내의 관원을 해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탁주성을 지배했다. 탁주와 탁주 이북의 철로 연변은 순천부윤의 관할 지역이었다.
반란의 불길은 이제 조정의 발밑에서 타올랐다. 노회하고 통치 경험이 풍부한 자희태후(나의 주: 서태후)는 수도 주변에서 군사를 움직이는 일이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태후는 5월 7일에 북양의 각 군을 통솔하는 영록에게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라, 군대를 움직여 토벌하면 변란이 일어날 수 있음을 명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태후는 협판대학사 강의, 형부상서 조서교, 순천부윤 하내영을 탁주로 보내 “조정의 뜻을 널리 알려” 무리를 해산시키려 했다. 강의 등은 5월 18일에 두점에서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다음과 같이 조정에 보고했다. 노구교 이남에서부터 “어디서나 권민이 삼삼오오 무리를 짓고 있고”, “마을마다 권창이 설치되어 있으며”, “유리하 왼쪽에 무리가 모여 있으며”, 탁주에 “특히 많은 무리가 모여 있다.”
그들은 이곳 일대에 모인 군중의 기시에 크게 놀랐고, 함부로 진압하려 들었다가는 무리의 북진하는 길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만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보고서에서 “만일 권민이 북으로 달려가 수도를 압박하면 대국을 그르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섭사성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권유와 설득으로 의화단을 해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의 등이 탁주에서 권유와 설득을 하고 있을 때 수도로 숨어드는 의화단은 갈수록 많아졌다. 그들은 성 안 도처에 서양인을 반대하는 격문을 붙였고 점차로 공개적으로 연단을 설치했다. 조정은 여러 차례 체포, 금지, 탄압, 해산의 명령을 내렸으나 효과가 없었다. 5월 15일 일본 공사관의 서기 한 사람이 영정문 밖에서 동복상의 부하 병사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복상의 부대는 당시 수도 일대를 방위하고 있었는데 그 중 일부 병사들이 의화단의 활동에 참가했다. 5월 17일부터 의화단 군중이 우안문(右安門), 숭문문(崇文門), 선무문(宣武門)과 정양문(正陽門) 밖에서 외국 교회의 시설을 연속적으로 방화하여 불길이 치솟았고 정양문 밖에서 발생한 화재는 3일 동안 꺼지지 않았다.
19일에 황제는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황성에서 소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엄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는 화를 불러올 것이다.” 사실상 청 왕조 당국은 점차로 수도의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잃어갔다.
같은 상황이 천진에서도 벌어졌다. 4,5월 사이에 천진 성 내의 권법을 전수하기 위해 설치한 권창이 갈수록 많아졌다. 이 무렵 천진 부근의 정해, 문안, 패 현 등 농촌지역으로부터도 의화단 군중이 지속적으로 천진으로 몰려들었다. 5월 18일, 의화단 군중이 천진의 천주교당 한 곳을 불 질렀다. 유록은 의화단에 대해 가차 없는 진압을 주장해왔었지만 날로 커져가는 천진의 의화단 세력을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 천진과 북경을 연결하는 철도는 이때 이미 의화단의 활동 때문에 통하지 않았다. 철도 연변의 각지에는 모두 의화단의 깃발이 내걸렸다.
자희태후의 전쟁 선포
제국주의 열강은 청 정부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이에 의화단 세력이 점차로 북경과 천진에 스며드는 것을 보고 병력을 동원하여 직접 중국인민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의화단의 북경점령?
자금성 전면의 세 문 안팎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수천 채의 가옥이 불탄 후 의화단의 기세가 북경 전체로 퍼져나갔다. 서양 교회당과 외국 공사관은 긴장하였고 고대광실에 살던 자들도 빈민들의 봉기를 보고 공포에 떨었다. 사방으로부터 의화단의 깃발을 들고 북경성 안으로 들어오는 자가 하루에 천 명을 헤아렸고 성 안의 빈민들도 자발적으로 의화단의 대오에 참가했다.
그들은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손에는 창칼을 쥔 채 무리를 지어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그들은 왕공귀족의 저택을 차지하고 그곳에 단(나의 주: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쌓고 거주했다. 관리가 가마나 말을 타고가다 길에서 의화단을 마주치면 강제로 내려야 했다. 수많은 고관대작들의 가마꾼과 마부가 의화단에 참여했고, 주인은 그들을 함부로 다룰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성안의 집집마다 의화단을 믿는 표시로 붉은 종이가 나붙었다. 의화단의 활동은 심지어 자금성 안에까지 미쳤으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금성을 경호하는 부대는 영록이 지휘하는 무위중군이었는데, 이 부대는 기율이 없기로 이름을 얻고 있었고 이 기회를 틈타 자금성을 약탈했다. 황족과 1품 이상의 고관 등 귀족들의 저택은 약탈당하여 씻은 듯하였다.
이런 약탈은 일부는 의화단이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저질렀고 일부는 무위중군이 저지른 짓이었다. 적지 않은 관리들이 형세가 위태로움을 보고 서둘러 북경을 빠져나와 남방으로 달아났다. 요컨대, 의화단의 활동은 북경 성내에 청 정부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혼란을 조성했다.
그러나 의화단은 진정한 의미에서 북경을 점령하여 주인이 되지는 않았다.
의화단과 봉건시대의 역대 농민혁명운동을 비교하면 의화단은 한 가지 분명한 약점을 갖고 있었다. 의화단은 정권을 세우거나 장악하려는 생각이 없었고 그럴 조직도 갖추지 않았다. 역사상 농민전쟁은 예외 없이 “내가 그를 대신하겠다”는 강령을 내세웠다. 의화단 이전에 있었던 청 왕조의 여러 차례 농민전쟁은 실패하기는 했지만 모두 북경으로 진격하여 청 왕조의 통치를 종식시키겠다는 강령을 갖고 있었다.
의화단은 마침내 북경에 진입하여 사실상 북경성을 장악했다. 동시에 천진 같은 중요 도시와 수도권 일대를 장악했다. 뿐만 아니라 의화단의 봉화는 직례와 산동 이외에 산서, 봉천, 내몽고, 하남 등에서도 올랐다. 그러나 의화단은 자신의 역량을 이용하여 부패하고 반민족적인 청 왕조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세울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의화단이 농민혁명의 전통을 벗어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의화단 운동은 이전의 어떤 농민전쟁도 마주한 적이 없는 새로운 역사조건 하에서 발생했다. 의화단이 외국 제국주의 침략자를 주요 투쟁대상으로 삼은 것은 새로운 역사조건에 적응한 결과였고, 이 때문에 수도에 가까운 지역에서 신속하게 발전하여 순조롭게 북경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화단은 반제국주의 투쟁과 반봉건주의 투쟁을 결합해야만 하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서 결국 보청멸양이란 모호한 구호에 미혹되었고, 그 결과로 정권수립이라고 하는 혁명의 근본문제에서 혼란에 빠졌다.
의화단은 북경에 진입한 후에도 여전히 통일된 조직을 갖추지 못했고 집중된 핵심 지도부도 없었다. 누구든, 어떤 동기에서건 모두가 의화단을 자칭할 수 있었다. 의화단의 기세가 높아질수록 대오는 더욱 넓어졌고, 따라서 구성원의 성분도 갈수록 복잡해지고 조직의 산만성도 더욱 심각해졌다. 의화단은 시종 통일된 조직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권수립이란 의제는 등장하지도 않았다.
자희태후(서태후)는 의화단 이외에도 영록이 지휘하는 무위중군과 동복상이 지휘하는 감군을 공사관과 북당교회 포위공격에 가담시켰다. 포위공격은 두 달 가까이 지속되었다. 동복상 부대의 병력은 2만 명, 영록의 무위중군 병력은 8천 명, 여기다 수만 명이 넘는 의화단 군중이 참가하고서도 병력이 4백여 명 밖에 안 되는 공사관 지역과 40여 명 밖에 안 되는 북당을 점령하지 못했다. 이것을 전쟁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자희태후가 유혹과 술책으로 의화단을 동원하여 일으킨 전쟁이었다.
자희태후가 전쟁을 선포한 이유는 원래는 의화단의 공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북경성 내의 의화단 군중을 유인하여 공사관과 교회당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이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되었다. 의화단 군중은 수만 명에 이르렀으나 손에 든 무기라고는 큰 칼과 긴 창뿐이었고 청 관부는 단 한 자루의 신식 소총도 북경의 의화단에게 지급하지 않았다. 좁고 수많은 가옥이 장애가 되는 전장에서 공격전을 펼치면서 대량의 의화단이 외국 병사의 총구 앞에서 쓰러졌다.
자희태후는 영록과 동복상의 부대를 참가시켜 전쟁 선포는 진심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의화단 군중이 전쟁의 광기에 빠지도록 선동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화단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도록 방치했다. 영록의 무위중군은 동교민항의 동쪽에 주둔하면서 허세만 보여주었을 뿐 진심으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 동복상의 부대도 동교민항의 서쪽과 북쪽에 주둔했으나 소수의 병사만 의화단 군중의 투쟁에 영향을 받아 비교적 진지하게 싸웠다.
6월 28일에 나온 황제의 칙어는 다음과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각국의 사신들은 케텔러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사하다. 일전에는 각 공사관에 과일과 채소 등 먹을 것을 보내 위로의 뜻을 전한 바 있다.” 한편으로는 형식적으로 의화단 군중을 동원하여 외국 공사관을 공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관원을 시켜 과일과 채소 등 먹을 것을 보내 공사관 측에 위로의 뜻을 표시한 것이다. 이것은 자희태후가 연출한 한바탕 희극에 다름 아니었으니, 그 목적은 의화단 군중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정서와 정력을 헛되게 소모시키는 것이었다.
반침략전쟁의 일선
천진에서는 의화단이 반침략전쟁의 제1선에 섰다. 의화단 군중의 투쟁에 영향을 받은 일부 하급 관병이 의화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5월이 되자 의화단 세력이 천진 전체에 퍼졌다. 의화단은 모든 천주교회를 불 질렀고 이때 저지하던 서양 군대와 최초로 충돌했다. 천진에 주재하던 직례총독 유록은 의화단 진압을 앞장서서 주장한 인물이었지만 갑자기 땅속에서 솟아나듯 끊임없이 몰려오는 의화단 앞에서 그도 의화단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의화단이 사람을 보내 자신의 관부를 지키는 일도 승인했다.
천진 부근 각 현의 의화단이 다투어 천진으로 들어왔다. 6월 초, 천진 성내의 의화단 군중은 3만을 넘어섰다. 6월 초에 조정은 마옥군이 거느린 무위좌군의 일부를 천진에 파견했다. 마옥곤은 (나의 주: 서양 군대와) 전투를 벌이면서 의화단을 선봉에 세우고 관군은 후위를 맡게 했다. 13일 밤에 조계를 공격한 한 차례 전투에서 의화단 군중은 2천여 명이 전사했으나 관군은 부상자 수도 극히 소수였다.
당시 어떤 사람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의화단은 서양 군대의 맹렬한 사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등 뒤에 있던 관군으로부터도 총격을 받았다고 한다. 조정은 다시 고위 장수인 송경을 방판북양군무대신에 임명하고 천진으로 파견하였다. 송경은 14일에 천진에 도착하고 곧바로 17일에 의화단 무리를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송경의 군대는 “의화단 무리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죽이고 16세 이하인 자에게는 여비를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반나절 만에 성 내에서 깃발을 꼽고 단을 설치한 자들이 모두 흩어졌다.”
의화단이 관부의 인정을 받게 되자 의화단이 이름으로 활동하는 자 가운데 불순한 동기를 가진 분자와 불량배가 섞여드는 일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기회를 틈타 개인적 이익을 도모하고 여러 가지 황당무계한 유언비어(도술로 서양인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등)를 만들어 퍼뜨렸다. 전근대적인 미신은 당시의 도시 주민과 관료들에게서 좋은 시장을 찾아냈다.
이 때문에 의화단을 둘러싼 신화는 갈수록 위력을 더해갔다. 의화단 활동에 참여한 부녀자가 적지 않았는데, 천진에서는 이들을 붉은 등, 푸른 등이라고 불렀다. 사회에서는 이들 부녀자가 도술을 부려 구름을 타고 먼 곳으로 날아가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이는데 그들이 움직일 때는 붉은 등과 푸른 등으로 나타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의화단은 천진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의 주력으로서 용감하게 제 1선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들은 관부의 병기고를 열고 소량의 총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구식 창칼로 무장했다.
의화단 군중은 애국심에 불탔으나 그들을 정확한 방향으로 이끌어줄 지도부가 없었고 청 관부가 진정으로 서양인들과 전쟁을 벌일 생각을 갖고 있다고 오인했기 때문에 천진을 지키려는 전투에서 맨몸으로 서양식 총포 앞에 섰다.
어떤 관원은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의화단은 용감하나 무모하다고 썼다. 관부는 바로 이 무모함을 이용하여 의화단을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무기 앞에 내세워 소멸되게 하였다.
제국주의의 출병은 의화단 진압을 통해 청 왕조 정부를 (나의 주: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이는 중국 인민들의) 포로의 신세에서 구출해내고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지배 질서를 재건하려는 것이었다.
8국 연합국의 북경 점령
자희태후의 조정은 5월 25일에 전쟁 조서를 발표한 적이 있었지만 침략군이 한 발짝씩 접근해오자 청 정부는 여러 경로를 통해 각국에게 조정의 본의는 전쟁이 아님을 양해해 달라는 뜻을 전했다. 천진 함락을 전후하여 청 정부는 다시 황제의 이름으로 러시아, 영국, 일본, 프랑스, 독일, 미국 측에 국서를 보내 조정이 의화단과 한 편이라는 오해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침략 각국도 시종일관 그런 오해를 한 적이 없었다. 각국이 공동으로 무력을 사용하여 대고 포대를 탈취하고 천진을 점령할 때 그들은 일치하여 “중국을 상대로 한 전쟁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각국 사령관이 협의하여 결정한 공식적인 입장은 “절대로 중국 정부를 상대로 군대를 보내지 않으며”, “이번 출병의 목적은 의화단이란 이름으로 중국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반도를 토벌하는데 있다.”는 것이었다.
연합군에 참가한 각국은 북경에 군대를 보내는 뜻은 포위된 공사관을 구출하고 청 정부의 의화단 토벌을 돕는데 있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8국 연합군은 도처에서 방화와 약탈을 저질렀다. 연합국의 총사령관 알프레드 그라프 폰 발더제는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천진과 북경 사이에 지나는 곳마다 파괴되지 않은 가옥을 찾기 힘들다. 대부분이 부서진 기왓장 더미로 변했다. 대고 항에서 천진을 거쳐 북경으로 이르는 노선 주변에는 최소한 50만의 인구가 기거할 가옥이 없는 상태에 놓였다.”
북경에 진입한 후 연합군은 문이 활짝 열린 보물창고를 만난 강도 무리와 같았다. 중심부인 황궁과 성 밖의 이화원을 포함하여 북경성 전체가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장교와 병사는 물론이고 선교사들까지도 약탈에 참가했다.
당시 프랑스의 한 신문은 귀국한 병사의 말을 인용하여 “군사들은 북당 교회에서 황궁으로 향했다. 선교사들도 우리와 함께 갔다. 우리는 명령에 따라 성 안에서 3일 동안 살인하고 싶으면 살인하고 갖고 가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대로 가져갔다. 사실상 약탈은 8일 동안 진행되었고 선교사들이 우리의 길잡이 노릇을 했다.”고 보도했다.
발더제도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자인했다. “연합군은 북경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공개적인 약탈을 승인했다. 그 후의 약탈은 개인적인 것이었다. 북경 주민들의 물질적인 손실은 막대했지만 상세한 숫자는 조사하기 어렵다. 현재 각국은 약탈의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고 있으나 각국이 공동으로 철저하게 약탈한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당시 북경에 주재하던 영국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독일군은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약탈에 나섰고 병사들은 “독일 황제의 칙령 가운데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어서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발더제는 중남해의 의란전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의란전은 자희태후가 거처하던 곳으로 진기한 보물이 많았는데, 발더제는 철수하면서 이곳을 불태웠다.
연합군은 가는 곳마다 의화단과 기타 군중을 학살했다. 당시 북경에 거주하던 한 중국 문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성이 무너지던 날 서양 군대가 죽인 사람 수는 셀 수가 없다. 거리에는 시체가 시체를 베고 누웠고 서양 병사가 중국인을 시켜 시체를 마주 들고 가 묻게 하였다. 가래와 삽으로 묻고 나면 시체를 들어 옮긴 사람도 남김없이 쏘아 죽이고 함께 구덩이에 묻었다.”
영국인 기자 심슨(Bertram L. Simpson)도 자신이 목격한 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프랑스 보병 선발대가 길에서 중국인 무리와 마주쳤는데 무리 가운데는 의화단, 병정, 평민이 섞여 있었다. 무리가 달아나려하자 프랑스 병사가 기관총을 겨누어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약 10분 혹은 15분 정도 기관총탄이 쏟아졌고 살아남은 자는 하나도 없었다.”
연합군은 천진과 북경을 점령한 후, 북경과 천진 부근에 활동하던 의화단을 토벌하러 주변 마을들로 쳐들어가 불태웠다. 또한 의화단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하북성 중부 지역에도 진입했다. 발더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연합군이 전진할 때는 언제나 중국 군대가 권법 수련자들(의화단)과 전투를 벌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마을에서나 마을 입구에서는 연합군의 진입을 환영하는 표시로 권법수련자 우두머리의 잘린 목이 걸려있었다.”
연합군은 윤 8월 20일 보정에 진입한 후 약탈과 방화와 살인을 자행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 관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관원들이 의화단을 부추겼다고 주장하면서 몇 명의 관원들을 총살하고 머리를 잘라 거리에 내걸었다. 중국의 관원들은 침략군을 예를 갖추어 맞아들였으나 죽음을 면할 수는 없었다. 사실을 보고받은 청 조정은 크게 놀랐다.
이홍장은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연합군이 수도에 들어온 후 강화 회담을 미루면서 사방으로 군대를 보내 멋대로 노략질할 뿐만 아니라 지방 관원을 위협하여 돈을 뜯어가고 있다.”
자희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청 조정은 윤 8월 8일에 태원에서 서안으로 옮기고 이홍장과 혁광이 북경에서 하루라도 빨리 침략군과 강화를 맺기를 기다렸다. 조정은 침략군이 계속하여 깊이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강화에 방해가 될까봐 자신의 군대가 어느 곳에서건 침략군에 대항하지 않도록 힘을 쏟았다.
조정은 이때 산서와 하남 지방의 관원들에게 거의 같은 내용의 훈령을 내렸는데, 그 주요 내용은 현재 각국과 강화를 의논하고 있으므로 절대로 회담을 결렬시켜서는 안 된다. 적군이 침범하거든 먼저 관원을 보내 설득할 것이지 “미련하게 일을 처리하여 더 깊이 들어오게 함으로써 거북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한 양보 방침이었다. 북경에 있던 이홍장도 하남순무에게 전보를 보내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서양 병사가 하남에 도착하면 소와 양고기와 예물을 충분히 준비하여 예의로써 맞이하라.”
남경조약에 서명한 기영, 이리포, 우감은 황제에게 올린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 등이 엎드려 생각하건데 이 오랑캐가 청하는 각종 요구는 욕심이 많기는 해도 그 뜻이 항구를 구해 무역 통상하는데 지나지 않을 뿐 아직 숨겨진 다른 뜻은 없는 듯합니다.” 봉건 톨치자들이 말하는 다른 뜻이란 왕조의 전복을 의미했다.
봉건 통치자들은 반란을 일으킨 농민 세력과는 타협하지 않으면서 그토록 싫어해왔던 서양인(양귀자)과는 결국 타협했다. 그 이유는 봉건 통치자들이 볼 때 전자는 다른 뜻을 갖고 있었지만 후자는 숨겨진 다른 뜻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46. 의화단(義和團) "도창불입(刀槍不入)"의 네 가지 가능성
작자 : 미상
의화단이 기세를 떨치게 된 것은 일부 정치, 사회적인 요소 이외에, 가장 주요한 것은 아마도 그들이 스스로 "도창불입(칼과 총에 다치지 않음)"이라고 부르던 신술(神術)이었을 것이다. 만일 신술을 믿지 않았다면, 당시 국가최고지도자(서태후)가 의화단을 지지할 리가 없고, 일반백성들도 함께 들고 일어났을 리가 없다. 요즘 말로 보자면, '도창불입'의 신술은 바로 의화단의 핵심 광고어였다.
이런 신술은 첫째, 현대과학상 근거가 없으므로, '봉건미신'적인 요소가 많고, 둘째, 그들은 서양인들의 총포 앞에서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셋째, 의화단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건국 이래 수많은 연구저술에서, 당시에는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신술은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다. 혹은 슬쩍 한마디하고 지나가거나, 아예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기도 한다. 역사학이라는 것이 영웅을 위하여 안좋은 일은 숨겨주는 역할도 있는데, 여기에서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의화단의 '도창불입'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분석해 보자면, 최소한 아래의 4가지 경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첫 번째 가능성은 경기공(硬氣功)의 효과이다. 중국무술 중에는 확실히 "철포삼(鐵布衫)"(만일 동자공과 함께 익히면 금종조 또는 금종구라고 한다)이라는 쿵후가 있고, 이런 쿵후는 익히기는 아주 번잡하여, 매일 무수하게 넘어지고 얻어맞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무막대기에서 모래구덩이로 떨어지고, 나무막대기와 쇠추로 온 몸을 얻어맞고, 또한 특수한 약물에 몸, 을 담그고, 운기토납을 섞어서, 밤에 잠을 잘 때도 딱딱한 나무판으로 된 침대위에서 자고, 아무 것도 깔면 안 된다. 만일 3년에서 5년을 계속 익히면 이 쿵후를 조금 익힐 수 있게 된다. 무술계의 인사들에 따르면, 이런 쿵후를 익히면, 준비만 있으면 일반적인 병장기에는 견딜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총(조총 포함)은 막아내지 못한다고 한다. 의화단은 하북 산동지역에서 일어났는데, 그곳은 전통적인 무술을 익히는 지방이다. 의화단의 대사형, 이사형들 중에 쿵푸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예를 들면 유명한 주먹의 우두머리 심성화상(心誠和尙)이 바로 자료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는 "혼신기공"을 익힌 무림고수이다. 서태후의 명을 받아 의화단의 '도창불입'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하여 나왔던 강의와 조서시는 한 대사형에게 속았는데, 아마도 그는 이런 기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총이 어떻게 그의 뱃가죽을 뚫지 못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아마도 화약에 술수를 부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 가능성은 경기공과 비슷한 간이술법일 것이다. 당시에 거의 모든 곳에서 '도창불입'의 의화단이 날뛰었는데, 진정 '철포삼'쿵후를 익힌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었겠는가? 절대다수는 그저 속성으로 익혔을 것이다. 산동 서남의 대도회와 의화단의 연원은 이미 다툼 없는 사실이 되어 있다.
의화단운동이 폭발하기 전날, 서주도의 완조당은 일찍이 사람을 파견하여 대도회를 방문한 바 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대도회는 소위 '금종조'를 익히는데, "이를 익힐 때, 가난한 자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6천을 비용으로 받는다. 한밤중에 술법을 전수하는데, 등을 켜고 향을 사르며, 새로 길어온 우물물을 바친다. 흰 베에 부적을 그리는데, 부적글자는 '주공조, 도화선, 금종철갑호금신' 등이 들어있다. 전업자는 글을 쓸 줄도 모르고, 읽을 줄도 모른다.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받아 적게 한다. 이외에 주술(呪術)도 전수한다. 주문을 읽고 부척을 태운다...주문을 읽는 밤에는 칼을 다룰 수 있다.
오래 주문을 외우면 화기가 상하게 할 수 없다. 대체로는 운기지법과 같고, 기가 미치는 곳은 칼로 맹렬하게 가격해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잘못하면 칼이 살로 파고든다." 이와 같이 한밤중에 등을 켜고, 향을 사르고, 물을 바치고, 주문을 외우고, 부적을 삼키는 등등의 번잡한 의식은 실제로 일종의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며, '신력'을 빌어 공력이 무궁무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문을 외우는 그날만 칼을 막아낼 수 있는 '신효'가 있다. 실제로 이것은 전수사부의 '장난'이다. 즉, 역학 원리를 이용하여, 수법이 적절하면, 칼에 상하지 않을 수 있다. 전부 받는 사람이 사실 진정한 쿵푸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조금만 비껴나면" 즉, 각도를 조금만 다르게 하면,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진정으로 경기공을 익힌 자들 중에서도 주문을 외우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훈련이 위주이고, 주문을 외우는 것은 주로 그 기공을 신비화하고, 전수받는 자의 신념을 강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간이술법에서는 완전히 반대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실제로는 두 번째 가능성의 연장선상이다. 의화단운동이 가장 흥성했을 때, 각지의 권비들은 의식을 대대적으로 간략화하였다. 무사신한(巫師神漢)의 강림과 결합시켜 부적을 삼키고, 주문을 외우면 즉시 신이 내리고, 칼과 총이 뱃가죽을 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의화단의 사람들은 연공을 할 때, 모종의 기공 상태에 든다고 한다. 무술의 기초가 있고, 기질과 심리상태가 비교적 잘 맞으면, 사람은 아주 쉽게 이러한 기공 상태에 접어들 수 있다. 그리고 기공 상태에 접어들면, 사람들은 왕왕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높이 뛰어오르거나, 멀리 뚫고 지나가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여기에 사부의 지도를 적절하게 받으면, 진짜 칼로도 살을 파고들게 할 수 없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관우, 장비, 조운, 마속과 손오공 저팔계 등의 영혼이 몸에 붙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지 간에, 우선 그 스스로부터 '도창불입'의 상태가 되었다고 믿는다. 당연히, 어떤 사람들은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의화단의 권비가 법술을 시행할 때, 많은 사람들은 원시민족의 무당과 마찬가지로 입에서는 거품을 물고, 정신이 어지럽게 된다고 한다. 다만, '명체자(明體者)" 즉 신이 내린 후에도 지각이 멀쩡하고 혼미상태에 빠지지 않는 경우이다.
이외에 "연체자(緣體者)도 있는데, "신과 인연이 있어, 잠시만 생각하면 신이 강림한다." 실제로 "명체자" "연체자"는 모두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이고, 제대로 익히지 않았을 뿐이다. 익혔다고 하더라도 사고가 나기 쉽다. 그리하여 당시 의화단의 권단에는 자주 "누창(총에 뚫리다), "누도(칼에 뚫리다)"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다. 스스로 연습할 때도 도창이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네 번째 가능성은 의화단의 '도창불입'은 순수하게 강호의 사기술인 경우이다. 이는 마술이나 장난으로 볼 수 있다. 의화단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섞여 있어서, 강호의 사기꾼들도 적지 않게 섞여 들어갔을 것이다. 원래 서양인들을 놀라게 하거나 막아내기 위하여 생각해낸 "도창불입"의 법술이 이들의 손에 의하여 마술공연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가능성중 첫 번째가 약간 쿵후로 볼 수 있는 것 외에 나머지는 사기술에 가깝다. 네 가지 "신술"의 어느 것도 진정으로 '도창불입'을 실현할 수 없다. 이미 총포시대에 돌입한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조그만치의 쓸모도 없는 짓이었다. 서방인들의 당시 기록을 보면, 그들에게 손실과 피해를 가한 것은 청나라의 서양총과 서양대포를 지닌 정규군이었다.
47. 의화단(義和團)은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글 : 풍학영(馮學榮)
이 세상이 문제는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절대다수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말해서 경제문제에 다름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든 아니든 간에. 의화단은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기치를 내걸고, 거기에는 아마도 서양인에 대한 원한의 감정도 들어있겠지만, 사료를 보면, 의화단이 이 운동에서 한 여러 가지 행위에서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의화단의 난의 많은 참여자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들의 강렬한 '경제적 요구사항'이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먼저 1899년 의화단 초기에 서양선교사와 싸울 때 내놓은 담화조건이 무엇인지를 보자.
1899년 겨울, 의화단은 하북성 경현 송문진 서양교회를 포위 공격한다. 청왕조의 지방관은 자신의 관할구역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자신의 오사모(烏紗帽)가 날아갈까 겁을 내어, 급히 사람을 보내어 포위망을 풀도록 권유한다. 당시의 서양신부는 Léon-Ignace Mangin이고 중문이름은 임덕분(任德芬)이다. 의화단은 임덕분에게 서양교회와 화해하는 3개 조건을 내세웠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조건: 서양선교사는 의화단에게 연회를 베풀어라.
둘째 조건: 서양선교사는 의화단에게 희극을 보여줘라.
셋째 조건: 서양선교사는 의화단의 신단에 와서 절을 하라.
이를 보면, 첫째, 둘째 조건은 모두 경제적인 요구사항이다. 밥을 먹고, 극을 본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다. 이것은 농민 청년들에게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요구사항이다.
우리는 다시 의화단의 두 수령의 출신을 보자.
수령1 : 조복전(曹福田). 청병(淸兵) 출신. 퇴역이후, 일자리를 찾지 못한 백수청년이다.
수령2 : 장덕성(張德成). 선부(船夫) 출신. 외국인의 여객운송선이 그의 일거리를 빼앗아 가자, 그는 실업자가 된다. 이것은 아마도 장덕성이 서양인을 미워하게 된 주요원인일 것이다.
이를 보면, 의화단의 두 명의 저명한 우두머리는 모두 '실업청년'이다. 우리는 다시 그 중의 장덕성이 마지막에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자. 이것은 아마도 문제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천진성이 8국 연합군의 공격에 함락된 후, 장덕성은 "왕가구(王家口)"라는 곳으로 피신한다. 현지의 왕씨 성의 한 염상(鹽商)을 공갈 협박한다. 그 왕씨 성의 염상은 공갈협박에 응하지 않고 촌민들을 불러 모아서 다 함께 손을 써서 장덕성을 체포한다. 그리고 장덕성을 죽여 버린다.
의화단의 이 중량급 우두머리는, 서양인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라, 중국의 한 부자의 손에 죽은 것이다. 그리고 살신지화를 불러온 것은 바로 장덕성의 공갈협박행위이다.
아래에 우리는 다시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의화단이 기독교의 여신도를 붙잡은 다음 무엇을 하였는지 보도록 하자.
1900년 음력 오월 초닷새. 하북성 패주현, 의화단의 공격하에, "성약슬회(聖若瑟會)"의 서양수녀는 22명의 여자고아들을 데리고, 고안현(固安縣) 경내로 피신하나, 의화단에 발견되어 붙잡힌다. 의화단은 각 농촌에 광고를 붙인다. "우리는 22명의 황화규녀(黃花閨女)를 붙잡았다. 어느 집 아들이 부인을 구하지 못했으면, 와서 향유전(香油錢)을 내면, 하나를 데리고 갈 수 있다."
답은 아주 분명하다: 의화단은 수녀를 잡은 후 그녀들을 팔아서 이익을 취한 것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의화단이 서양인을 잡아서, 많은 경우는 직접 죽였다. 돈과 재물을 약탈한 것이 아니라. 다만, 사실상, 의화단이 서양인을 죽이면 청정부가 상금을 주었다. 청 정부는 11국에 선전포고한 후, 북경의 길거리에 서양인을 죽이면 현상금을 준다는 관방 고시를 붙인 바 있다:
"양귀(洋鬼) 1명을 죽이면 은50냥을 상으로 내리고, 양부(洋婦) 1명을 죽이면 은40냥을 상으로 내리며, 양동(洋童) 1명을 죽이면 은30냥을 상으로 내린다."
이제 여러분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의화단이 왜 외국인을 죽였는지. 현상금이 있기 때문이다.
언급할 만한 점이라면 당당하게 의화단이 재물을 강탈한 각종 악행을 기록한 것은 외국인의 글이 아니라 청나라정부의 공식문건이라는 점이다. 그중, "경자국변(庚子國變)"중 서태후의 '호가(護駕)'에 공을 세운 회래현 현령 오영(吳永)은 그가 저술한 <경자서수총담(庚子西狩叢談)>에서 분명히 의화단의 성격과 출신을 적고 있다. 이렇게 정의했다: "권비(拳匪, 의화단)는 많은 경우 시정의 무뢰배, 그리고 협박받거나 돈에 유혹당한 시골 농민이다."
사료 <서순회란시말(西巡回鑾始末)에는 여러 곳에 의화단이 재물을 강탈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그 중에서 두 곳만 소개하기로 한다.
<서순회란시말. 요양권비자사기(遼陽拳匪滋事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초닷새. 부도통 진창(晋昌)이 친히 병권(兵拳)을 데리고 심양의 각 교회를 공격했고, 서양선교사 수이을 죽이고, 교민 수백 명을 죽였다. 서양 상점 십여 곳을 강탈하였고, 칼을 휘두르니 전국이 미친 것 같았다."
여기의 문자기록은 아주 명확하다. 청나라군 장군인 진창이 이끄는 이들 의화단과 청병은 서양 선교사를 죽인 후, 이어서 한 일이 바로 '서양 상점'을 강탈하는 것이다. 당시의 '서양 상점'은 누가 열었는가? 바로 중국인이 연 것이다.
아래는 두 번째 사례이다. <서순회란시말.동무원위수초비기(東撫袁慰帥剿匪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권비 두목 중에 왕옥진(王玉振)이라는 자가 있다. 청화모촌과 원한이 있어, 특별히 이번 기회에 그 일당 화상 서복, 그리고 주서공, 주사화, 진광훈, 형전오 등이 각각 수백명의 일당을 거느리고, 이월 초아흐레, 사평, 박평, 사가영 일대로 들어가고, 청평현경의 허장에 침입하여 사람을 포로로 잡고 돈을 뜯어냈다. 청평령 매여정은 병력을 이끌고 추격하여 체포하려 했다. 비적은 이미 고당의 원왕장으로 들어간다. 십일일 저녁, 다시 하진의 사제장으로 들어가고, 약탈을 계속했다.
이 사료는 아주 분명하게 기록한다. 의화단은 산동성 청평현에서 약탈과 공갈협박으로 돈을 모은다. '허장'을 약탈하고, 다시 '사제장'을 약탈한다. 결국 사방을 돌아다니며 약탈했다는 말이다.
의화단사건이 북경에서 발발한 그 해, 국자감의 관원인 나돈융(羅惇曧)은 그가 저술한 <경자국변기>에서 이런 내용을 적어놓았다:
"동군(董軍), 무위군(武衛軍)과 권비가 혼합하여 마음대로 약탈을 자행했다. 패자 부륜(溥倫), 대학사 손가내(孫家鼐), 서동(徐桐), 상서 진학도(陳學荼), 각학 이곡(貽谷), 부도어사 증광란, 태상 진방서는 모두 붙잡히나, 몸만 풀려난다. 서동, 이곡은 모두 권비에 부화했으나, 역시 피하지 못했다. 부륜, 적기는 영록을 고발했으나, 영록이 제어하지 못했다. 백성이 거주지, 시장은 수리가 모조리 약탈되고 불에 타서 폐허가 된다."
이를 보면, 중앙관원인 나돈융도 전혀 감춰주지 않고 의화단과 청병이 서로 결탁하여 '부청멸양'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실제로 한 일은 청정부고관을 공갈 협박하는 일이었다. 나돈융의 글에서 아래의 청나라조정 고위관리가 의화간에게 재산을 빼앗겼다;
1. 패자 부륜
2. 대학사 손가내
3. 대학사 서동
4. 상서 진학도
5. 각학 이곡
6. 부도어사 증광란
7. 태상 진방서
이것만이 아니다. 의화단은 몇 리나 이어진 북경의 주민들의 집을 모조리 약탈했다. 그리고 불을 질러 잡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
그중, 감군(甘軍, 청나라군의 한 갈래) 사병은 의화단과 결탁하여 대학사, 예부상서 손가내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약탈을 한다. 손가내의 아들은 짧은 소매 옷만을 남기고 모조리 벗겨서 가져간다. 병비(兵匪)들은 총으로 손가내의 허리를 찌르며, 금은보화를 내놓으라고 핍박한다. 손가내는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집안의 금은보석을 모조리 내놓는다.
그해에 형부에는 "이희성(李希聖)"이라는 관리가 있었다. 그도 같은 제목의 <경자국변기>를 쓰는데, 이 자료에서, 이희성은 청나라고관 나동(那桐), 허경징(許景澄) 등이 의화단에게 약탈당한 사실을 기록했다.
이런 류의 기록은 부지기수이다. 사료는 이미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청멸양'을 기치로 내건 의화단은 서양인을 약탈했을 뿐 아니라, 대청국의 백성을 약탈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의화단이 심지어 청정부의 고관들까지도 약탈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부청'이라는 기치 하에 벌인 일이다.
의화단운동을 친히 겪은 일본인 식송양삼(植松良三)도 같은 기록을 남긴다. "당시, 의화단의 단원은 대부분 농촌에서 왔다. 견식이 모자랐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금'과 '동'을 본 적이 없다. 당시의 천진성 내에는 영국 태고공사와 장사를 하는 상점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연무호(聯茂號)"였다. 의화단은 '서양인과 결탁'했다는 죄명으로 '연무호'를 모조리 약탈해버린다. 당시, '연무호'의 벽에는 많은 동패가 상감되어 있었는데, 구릿빛이 반짝였다. 의화단은 구리를 본 적이 없어서 이를 금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들 동패를 모조리 가져가서 자신의 것으로 한다.
애국의 기치를 내걸고 사고를 치고, 불 속에서 밤을 집어간다(火中取栗). 거기서 약탈하여 부자가 되었다. 이런 사정은 민간의 일부 깡패, 무뢰배들의 눈을 벌겋게 만들 일이었다. 의화단이 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성, 천진 일대에 우후죽순처럼, 많은 짝퉁 의화단이 나타난다. 그리고 의화단 수령중 하나인 장덕성이 조사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사료 <천진일월기>에 따르면, 의화단 수령중 하나인 장덕성은 일찍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천진에 가짜 의화단이 너무 많다. 내가 특별히 조사하여 붙잡아야겠다."
예를 들어, 당시의 하북 역주에는 "장옥산(張玉山)"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의화단의 명칭을 쓰면서 자형관의 부호 장지화(張芝華)를 강탈했다.
그 외에 많은 평민백성들은 의화단으로 가장하여, 개인적인 복수를 하기도 했다. 이런 기회를 틈타서 자신의 원수를 죽인 것이다.
심지어 청군사병도 의화단 의복을 입고, 의화간을 가장하여 백성의 재산을 강탈하는 대열에 뛰어들었다.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답안은 왕왕 구호에 있지 않고, 실제로 무엇을 하였는가에 있다.
48. 의화단(義和團)은 중국의 치욕이다
작자 : 미상
의화단 사건에서 전국각성, 주로 화북지방의 직예, 산서, 내몽고 및 동북지방에서는 외국인 심지어 중국의 기독교도에 대한 대규모 도살사건이 많이 벌어졌다.
교회측에서 제공한 사망자수와 부상자수에 대한 통계는 다음과 같다(중국은 공식적으로 사료로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모두 241명의 외국인(천주교 선교사 53명, 개신교 선교사 및 자녀 188명, 그중 아동 53명), 중국기독교도 2만여 명(천주고 18000명, 개신교 5000명)이 1900년 여름에 도살되었다.
산서성 전체에서 피살된 중국천주교도는 5700여 명이며, 개신교도는 수천 명이라고 한다. 그중 내지회(內地會)가 가장 많았고, 공리회(公理會), 영국 침례회 등도 있었다.
7월 9일, 태원순무아문의 앞에서 태원순무 육현이 천주교 각회 선교사 12명(이탈리아 국적의 艾士杰 및 富格辣의 주교 2명, 신부,수도사 3명, 수녀 7명), 개신교 선교사 및 그 가족자녀 34명(영국 침례교회 및 수양선교회에 속함, 아동 11명 포함), 합계 46명을 죽였다.
산서는 전국에서 외국인과 백성들을 가장 많이 죽인 성이다.
내몽고에서 7월 19일, 청나라군대는 몽골 서남교구 주교성당이 소재한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서 천주교도를 대거 살해했다.
벨기에국적의 한묵리(韓默理) 주교는 '손과 발을 같이 묶고, 대나무장대에 꽂았다' 그 후에 '쇠사슬을 어깨뼈에 뚫어 넣고, 철장 속에 가두었다' 그리고 사방을 끌고 다녔다. 7월 24일, 토크토성에서 피살된다. 몽골 동부교구에서는 난평현에서 신부를 생매장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몽골중부교구에서는 서만자(하북 숭례) 주교성당에서 5000명의 교도가 난을 당했는데, 절대다수(3200명)가 피살당한다.
직예(하북)는 총독 유록과 효사 정옹이 지지하여, 의화단이 전체 성에 퍼져 있었다. 이 성의 많은 천주교도(지금도 이곳은 천주교도가 가장 많은 성이다)들은 돌연 사망의 위협에 처하게 된다. 그리하여 속속 천주교도들이 마을에 모여 보루를 쌓고 항거했다. 7월 20일, 진택림이 이끄는 청나라 군이 경주 주가하촌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데, 이 마을에 모여 있던 3000여명의 천주교도와 두 명의 신부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였다. 이는 1900년에 사망자수가 가장 많았던 도살사건이다.
주가하에 있는 50575명의 신도들 중에서 5153명이 죽는다. 헌현 장장의 예수성심주교성당만 보전된다. 보정 부근의 동여촌에는 9000명의 천주교도가 집중적으로 모여 피난했다. 이들은 4만 명의 의화단의 공격을 격퇴시킨다. 그리하여 나중에 북방의 유명한 성모성지가 되고, 중국에서 천주교신도가 가장 많이 집중된 마을이 된다.
봉천(요녕)에서 피살된 천주교도는 1400여명이다 그 중에는 주교 1명, 신부 10명이 포함되어 있다. 절강의 구주(衢州), 태주(台州)에서도 집단도살사건이 벌어졌고, 호남의 형주와 섬서에서도 주교, 신부 피살사건이 벌어진다. 산동, 하남에서도 십중 칠팔의 교회성당은 파괴된다.
의화단의 행위는 무고한 외국인을 살해하는 외에, 무고한 중국인들도 많이 살해했다(수량은 서양인이나 천주교도보다 훨씬 많았다). 그 대상은 일룡(一龍, 광서제), 이호(二虎, 이홍장과 혁광), 경관대신(소위 十三羊, 혹은 三百羊, 의화단은 경관중에서 18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한다)에서부터 서양인, 신자, 보통백성(소위 十毛)에 이르렀다. 법도 하늘도 없었다.
도살뿐 아니라, 간음약탈도 행해졌다. 그 비인도적인 만행은 2차 대전의 일본군보다 훨씬 심했다. 중국의 도덕관념이나 서양의 도덕관념으로 볼 때, 의화단의 행위는 야만적이고 잔혹하며 인성을 상실한 것이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런 내용들이 있다:
"성안에 낮에는 불 지르고 약탈하며, 불길이 밤낮으로 이어졌다...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바로 신자라고 지목하며, 온 집안을 살육했다. 경사에서 죽은 자가 십수만 명이다. 그들이 사람을 죽일 때는 칼과 창을 함께 내리쳐서 사지를 절단하는데, 영아들 중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는 자도 있었다. 살인의 잔혹함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이다."
"경사가 흥성할 때는 거주하는 사람이 4백만이었는데, 권비의 난이 일어난 후 도적이 날뛰며, 약탈을 하여, 그 해를 입지 않은 자가 없다. 도시가 적막해지고, 여우 이리가 낮에도 출몰하는데, 마치 폐묘 사이를 다니는 것 같았다."
"의화단이 교민과 백성을 죽이는데, 여러 가지 잔혹한 도구를 준비했다. 절구로 찧기, 불태워서 갈기, 산채로 매장하기, 불로 지지기, 사지를 분리시키기, 허리를 자르기 등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다. 경서의 천주교 묘지에서는 묘지를 발굴하여, 마테오 리치(利瑪竇), 방적아(龐的我), 탕약망(湯若望), 남회인(南懷仁)등 여러 유명한 서양선교사들의 유골을 파내었고, 하나도 화를 입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이전 왕조와 현 왕조의 어비들도 모두 파괴되었다. 보정에 속하는 장등이라는 곳에 신도가 많았는데, 의화단은 그 부녀들을 붙잡은 후, 구덩이를 파고 거꾸로 묻어서 흙을 묻어 하체가 드러나게 하고는 이를 보고 웃고 즐겼다."
홍콩사람, 마카오사람, 타이완사람 및 해외화교들은 의화단에 대한 평가가 아주 나쁘다. 의화단은 이미 미신, 폭력, 금수의 상징이 되었다. 더더구나 사람을 욕할 때 쓰는 말이 되었다.
의화단은 거의 무고한 사람을 붙잡아서 분을 풀었다. 외국인들이 무고하게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많은 중국인들도 피해를 직접 입었다.
당덕강은 의화단을 문화대혁명때의 홍위병과 비교하는 것은 홍위병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홍위병은 최소한 온 집안을 살해하고, 시신을 파내고, 부녀를 강간하고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는 않았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2000년 바티칸에서 '성인'으로 봉한 일이 있는데(명단은 대만성당에서 추천했다), 대부분 성인으로 봉해진 사람들은 의화단의 난 때 순교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대륙에서는 여전히 이들 순교자는 제국주의의 방흉(幇凶)이라고 공식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입장은 여전히 의화단운동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중국민족의식을 각성시킨 사건으로 중국근대민족주의의 남상이라고 본다.
1949년 이후의 중국 인민공화국 역사교과서의 평가는 역겨울 정도이다.
"의화단애국운동이 제국주의침략에 항거했으나 실패했다는 것은 다음을 증명한다. 정확한 지도사상이 없으면 인민혁명의 승리가 없다는 것을. 청나라말기의 의화단운동 및 중화민국시대에 21조에 반대한 5.4운동, 5.30운동은 근대 이래 중국이 제국주의침략에 항거한 3대 군중성민족주의운동이다. 그중 5.4운동은 주로 제국주의정치침략에 반대했고, 의화단운동과 5.30운동은 제국주의 정치, 경제 및 문화침략에 반대한 운동이다. 지속한 시간이 더욱 길고, 영향도 더욱 컸다."
49. 의화단의 교훈 : 약소국은 강대국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글 : 도단방(陶短房)
100년 전에 발생한 의화단과 8국 연합군과의 전투는 백년 동안 많은 논쟁거리를 남겼다.
외국의 침략에 저항하는 자체에 대하여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저항의 전략과 방법이 타당하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의화단사건과정에서 세계전쟁사상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대사관지역을 포위 공격하였는데, 그것도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포위 공격했다는 것이다.
사실 포위공격전에,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세이무어의 부대는 당고에서 북경으로 진격하다가 낙벌에서 저지당해 물러나 있었다. 이는 8국 연합군이 먼저 전쟁을 도발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이것이 대사관구역을 포위 공격한 이유는 아니다.
대사관구역은 국제법의 보호를 받는 구역이다. 그곳을 포위 공격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국제적인 여론의 비난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침략자들에게 불필요한 구실을 준다. 군사적으로도 침략자의 전투력과 사기를 꺾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에게 모험을 시도할 용기를 북돋아주게 될 뿐이고,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는데 심리적인 저지선을 없애는 역할을 할 뿐이다. 게다가 실제 포위공격에서, 수만의 청나라병사와 의화단은 겨우 수백의 수비대원을 지닌 대사관구역을 시종 점령하지 못했다. 이는 적군에게 청나라 측 전투력이 허약하다는 것만 보여준 꼴이 되었다.
당연히, 당시의 국가는 이미 위기의 백척간두에 서 있었다. 열강들이 이미 국경 안으로 깊이 들어와 있었다. 열강들에게 힘을 보여주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절대로 이런 방법은 아니다. 힘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자체방어준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이런 조건이 되었는가? 그렇다.
1860년대 이후 소위 "동치중흥(同治中興)"으로 중국에 일정기간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이런 평화는 좌종당의 서북에서의 승리, 유명전과 유영복 등의 대만, 월남에서의 성공적인 군사행동 그리고 증기택, 설복성 등의 외교적인 성공이 가져다 준 것이다. 잠재적인 적국이 침입에는 큰 곤란이 따를 것이라고 인식해야만 비로소 적국에 위하력을 가지게 될 것이고, 영토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해상에서는 극동제일, 세계5위의 북양함대가 해양을 순시하고, 포문을 나가사키에 겨누고 있어, 일본이 등에 가시가 돋은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극동의 안전을 효과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평형은 금방 무너진다. 원인은 청나라 측의 나태함에 있었다.
해군측면에, 군비는 대량으로 유용되어, 군함이 장비를 제대로 보충할 수 없었다. 문외한인 지휘관은 낡은 훈련방법과 보수적인 전술을 썼다. 군수물자 보급의 부패는 군함 1척에 두, 세 개 국가로부터 구입한 대포가 각각 장착되어, 크루버 대포는 '유탄무약(有彈無藥)", 암스트랭 대포는 "무탄유약(無彈有藥)"의 황당한 지경에 이르렀다. 육군은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비록 서양 총과 서양 대포가 보급되었지만, 부대편제는 여전히 명나라 때의 척가군의 건제였다. 기(旗) - 영(營) - 대(隊)의 삼급편제였다. 화력배치와 대병력작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과 기본적인 참모조직, 군수조달체제도 갖추지 못했다. 심지어 서양총의 구경이 모두 10여종이어서, 유럽, 일본의 현대편제의 정규군과 싸울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청일전쟁의 패배와 청나라의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하이지만, 전략방침만 정확했더라면, 부흥의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장지동은 호북에서 자강군을 편성하고 훈련시켰다. 군수공장과 제철공장을 설립한 것은 장기적 안목이 있는 조치였다. 이 자강군은 나중에 신해혁명의 정예 제8진이다. 한양의 병기공장등은 직접적으로 나중에 항일전쟁에 거대한 공헌을 한다. 살진빙(薩鎭氷) 등은 해군을 정비하여 효과를 나타냈다. 초보적으로 원래 각자 따로 놀던 지휘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던 폐단을 시정하고, 순양, 장강의 두 함대를 결성한다. 그리하여 근해전투력은 어느 정도 회복한다.
다만, 이것이 청나라의 주류는 아니었다.
보수사상이 머리를 들고 황위를 둘러싼 내부투쟁이 첨예하게 일어나면서, 전국의 군수장비정돈은 사실상 방치되어버린다. 무위군계통의 약 5만 명이 명목상 편제되어 있을 뿐인데, 그중 우군(右軍) 원세개의 부대는 멀리 산동에 있었다. 후군(後軍) 동복상의 부대는 감숙의 지방 부대였고, 장비도 형편없었다. 진정 전투력이 있던 것은 중(中), 좌(左), 전(前)군이었다. 그런데, 중군 영록(榮祿)의 부대는 황성을 보호하는 책임도 맡고 있어서, 실제로 전투에 나선 것은 섭사성, 송경의 부대로 겨우 2만여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아직 제대로 편제되지 못한 잡군과 의화단이었으니, 한방에 무너질 수준이다.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당시의 청나라가 전혀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서태후가 열강의 의도를 잘 몰랐고, 광서에 대한 시기심과 약간의 왕공대신들이 외환을 일으켜 정적을 몰아내려는 기도도 있었고, 황위계승권을 빼앗으려고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전쟁으로 몰고 간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중국의 독립적인 지위와 완고한 보수 세력이 동귀어진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리하여 중국은 더더욱 반식민지화하며, 외국세력은 중국에서 더욱 힘을 키우고, 중국민중은 더욱 고통을 겪게 된다.
이를 보면, 외적을 막기 위하여 투기적인 방식은 안 된다. 요행히 어부지리를 바라는 것은 결국 국가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칠 뿐이다. 그저 쿠바가 미국에 대항한 것처럼, 월남이 프랑스와 싸운 것처럼, 중국이 한국전쟁 때 미국과 싸운 것처럼 자신의 실력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래야 국제적인 존중과 적국으로부터의 제대로 된 대우를 받는다. 그렇게 하여야 국가와 백성의 장기간의 평화와 안정을 얻어낼 수 있다.
50. 의화단(義和團)사건을 되돌아본다
글 : 유앙(劉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안다. 옛것은 새것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당태종은 위징이 사망하자 이렇게 탄식했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바로잡을 수 있고, 사람은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알 수 있다.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흥망성쇠를 알 수 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편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련되고, 백성의 행복과 불행에 관련된 것을 취하여, 좋으면 그것을 따르고, 나쁘면 그것을 경계하여, 해에 따라 책을 편찬하여...."
이탈리아사람인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당대사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상의 견해는 모두 과거를 대하고 역사를 대하는 하나의 태도가 된다. 당대인들의 시각으로 역사를 다시 살펴보고, 다시 해석하고 역사에서 당대에 유용한 경험과 교훈을 얻어내는 것은 중국에서 풍부하고 성숙한 실천이 있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서방에서 상세하게 역사를 기록한 기간은 길지 않다. 어떤 서방국가는 역사 자체가 짧다. '역사를 귀감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이제 막 시작한 일이다.
차고풍금(借古諷今), 이고유금(以古喩今), 영사사학(影射史學), 번안사학(飜案史學)등은 모두 '역사를 귀감으로 삼는다'는 것의 범주에 속한다. 단지 거울의 각도가 사람들에게 한 측면만을 보게 하거나, 왜곡된 모양을 보게 만들 뿐이다.
백여 년 전의 화북대지에서 발발한 의화단사건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핫이슈이다. 그 배후에는 현재중국에 대한 태도가 담겨 있다. 긍정하는 자는 애국주의에서 출발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발양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부정하는 자들은 그것을 협소한 배타적인 극단민족주의로 보고, 의화단사건의 가소로운 에피소드만을 강조하고, 그것이 일어난 진정한 원인은 경시한다.
의화단사건의 발발은 필연적인 원인이 있다. 서방제국주의의 중국에 대한 압박은 아편전쟁이후 날로 심해졌고, 청나라정부는 일련의 패전의 결과를 모조리 백성들에게 전가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하층민중의 이익은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 여기에 천재인재까지 겹쳐서 중국의 민중들은 부득이 반항하게 된다. 비록 하층민중의 반항수단이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이것 때문에 반항의 정당성이 부인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여러 방면에서 의화단운동에 대하여 관찰하고 토론해볼 수 있다.
1) 서방 열강
명나라 때부터, 서양인들은 중국으로 와서 선교를 했다. 그때, 중국민중은 강렬한 '배외'심리상태가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히 그때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 그다지 많은 수량이 들어오지도 않았다. 선교범위도 넓지 않았고, 갈등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아편전쟁 후,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중국의 하층민중과의 갈등도 날로 늘어났다. 비록 선교사의 수, 선교범위가 하나의 원인이지만, 한가지 인식해야할 것이 있다. 중국사회내부의 서방에 대한 인지와 반응은 서방의 중국에 대한 정책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서방에서 대항해시대를 연 후, 바티칸은 스페인, 포르투갈이라는 두 개의 최초의 제국에 세력범위를 나눠주었다. 아메리카주는 스페인에 속하고, 아시아는 포르투갈에 속하는 것으로. 포르투갈이 페르시아만, 인도양, 말래카 등지에서 무력으로 세력을 확장할 때, 왜 마카오에서 중국과는 규칙에 따라 장사를 했을까? 그들이 무력으로 중국을 상대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포르투갈보다 훨씬 강대했다. 포르투갈은 중국의 해양에서 한동안 해적질을 했고, 명나라를 이길 수 없겠다는 거을 알고 기본적으로 명나라의 대외무역규칙을 준수했다. 네덜란드도 중국에서 이익을 많이 가져가고 싶어 했다.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와는 무력으로 상대했다. 네덜란드는 겨우 대만을 점령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정성공의 사적 무장세력에 밀려 쫓겨나고 만다. 스페인은 필리핀을 점령한 후, 원정군을 보내어 중국을 정복할 생각도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실력이 부족하다고 보고 이 계획을 포기한다.
무력으로 중국을 점령할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서방열강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규칙을 따라 중국과 무역을 진행했다. 그 때 중국과 열강의 관계는 대체로 쌍방에 모두 이익이 있는 것이었고, 호혜호리(互惠互利)관계였다.
이런 상황은 영국이 나타나면서 철저히 바뀌게 된다. 영국은 일찍이 유럽에서 후기도전자로 나타난 후, 먼저 스페인을 격파하고, 나중에는 네덜란드를 상대했다. 네덜란드는 비교적 적어서,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을 한동안 골치 아프게 했다. 최종적으로 모든 유럽의 보수 세력을 끌어 모아 나폴레옹을 물리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은 중국을 최대의 먹잇감으로 보기 시작한다.
아편전쟁은 중국에게는 거대한 치욕이지만, 서방열강에 있어서 실제로 모든 서방열강들이 이전에 하고 싶었으나 해내지 못했던 일을 마침내 영국이 공업혁명의 위력을 빌어 성공한 것이다.
그 후, 서방열강은 중국에 대한 정책을 완전히 바꾼다. 이전의 호혜호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서방열강이 일방적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으로 바뀐다. 중국은 시종 손해보는 입장에 처한다. 중국민중의 소위 "구외배외(仇外排外)정서가 대규모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는 열강의 야만적이고 무정한 착취에 대한 중국민중의 필연적인 반응이었다고. 중국말로 하자면, 네가 불인(不仁)하면 내가 불의(不義)하다고 뭐라 하지 말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의화단운동은 두 번의 아편전쟁, 중프전쟁, 갑오청일전쟁이후 폭발했다는 것을. 서방열강의 '불인'은 중국민중에게 분명하고 확실했다. 그들의 중국에 대한 압박과 착취는 이미 모든 하층 민중에게까지 미쳤다. 민중들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과정 중에서 서방교회는 아주 특별한 역할을 했다. 당초 바티칸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전 세계 세력범위를 나눠주었는데, 실제로 서방이 '정교합일'의 낙후한 방식으로 전 세계에서 그들의 통치를 추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정복할 때, 선교는 무력과 긴밀하게 결합하여 공동으로 재물을 약탈했다.
다만 이런 방식을 포르투갈이 중국에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명나라제도는 서방보다 선진적인 '정교분리'였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중국을 정복할 수 없으니, 서방은 그저 규칙대로 장사를 해야 했고, 선교도 그저 문화, 관념을 전파하는데 그쳤다. 전쟁, 약탈과 결합할 수는 없었다. 중국은 그리하여 같은 시기의 유럽과 같이 서로 다른 종교 신앙으로 심각한 종교전쟁이 폭발하지는 않았다.
만일 나폴레옹이 패전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계몽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정부가 중국으로 왔다면 정교합일의 낙후한 방식은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보수 세력은 나폴레옹의 실패 후에 정권을 장악했고, 그들은 몰락한 스페인, 포르투갈이 일찍이 사용했던 정교합일의 수단을 사용한다.
제2차 아편 전쟁 후, 침략군의 통역을 맡은 프랑스 선교사는 의화(議和)본의 서로 다른 언어를 이용하여, 조항에서 비열한 수단을 쓴다. 중국어버전에 없는 조항을 몰래 프랑스버전에 집어넣었다. 이 조항은 선교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의 프랑스는 포르투갈이 일찌기 보유했던 중국에서의 '보교권(保敎權)' 혹은 '선교권'을 넘겨받았다. 서방의 낙후한 '정교합일' 방식은 마침내 그후 중국에서 널리 사용된다. 중국정부는 무력에서 패배했으므로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저 눈을 멀거니 뜨고 서방의 낙후한 '정교합일'이 중국의 하층사회에 파고드는 것을 보고 있어야 했다. 서방교회는 이렇게 하여, 서방열강이 중국에서 제국주의정책을 추진하는 방조범이 되고, 서방인들의 신앙자유는 그 후 중국에서는 침략과 동일어가 되어 버린다.
당연히, 각각의 서방열강은 이 문제에서 동일하지는 않았다. 영국, 미국 등은 바티칸의 명령을 듣지 않으므로 정교합일의 경향이 비교적 약했다. 특히 미국은 건국방침의 하나가 선진적인 중국문화와 마찬가지로, '정교분리'를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신교선교사들은 중국에서 대부분 학교 ,병원을 열어 중국인들을 끌어 모았다. 기본적으로 선교를 문화관념 분야에 유지했다. 선교를 제국주의정책과 결합시키지는 않았다.
비록 우리는 그것을 더욱 장기적인 문화침략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독일, 이탈리아 등 후기에 굴기한 서방열강과 비교하면 미국선교사의 '정교합일'의 색채는 확실히 약했다. 영국교회는 일찌감치 바티칸에서 독립하였고, 이는 중국이 후발주자로 따라잡을 수 있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영국은 비록 정교분리를 실행하는 나폴레옹을 격패시켰지만, 영국은 이 문제에서는 나폴레옹과 같이 중국이 장기간 시행해온 '정교분리'의 선진제도를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영국의 중국에 주재하던 외교관도 자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의 중국주재 외교관 및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정교합일'의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제국주의는 중국에서 공동의 이익이 있어, 영국도 그들과 완전히 관계를 결렬시키지 않았다. '정교합일'과 '정교분리'의 구분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자는 종교와 군사, 경제 등을 포함한 정치과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것이고, 후자는 종교와 세속정치 간의 관계가 긴밀하지 않은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정교합일'하의 종교는 거의 정부와 같고, '정교분리'하의 종교는 학교나 교육시스템과 같은 것이다.
의화단운동은 왜 하북, 산동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폭발하였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여기는 주로 천주교선교지역이었다. 명나라시기 천주교는 바로 이곳에 많은 성당을 지었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교인이 있었다. 강희, 옹정제의 선교를 금지하는 정책은 아편전쟁 후에 바뀌었고, 천주교선교사들은 이곳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여기에서 금교 시기에도 신앙을 유지해온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청나라말기의 각종 교안(敎案)의 발생지를 보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주로 모두 천주교선교지역이다. 신교선교지역에서 교안이 발생하는 비율은 비교적 낮다. 청말에, 미국의 신교도 산동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산동에서 발생한 교안은 여전히 주로 천주교에 대한 것이다. 신교교구에서 발생한 교안은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천주교의 선교사들이 비교적 흉악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이 견해는 현상만 본 것이고 본질은 보지 못했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더욱 '흉악'한 원인은 바로 천주교와 그에게 선교권을 부여한 서방열강의 세속정부가 함께 정교합일의 방식을 추진했기 때문에, 천주교의 선교행위는 중국민중의 이익과 직접적인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자신의 등급제도가 있다. 중국교구에서 그들은 이 등급제도와 중국의 지방 관리의 품계를 완전히 대응시키고, 선교사들이 중국교인들에게 받은 예의규범도 예를 들면 고두하궤(叩頭下跪)를 받았다. 중국민중의 지방 관리에 대한 예의규범과 거의 같았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현지의 사법에도 간여했고, 교민과 평민의 재산분쟁, 문화충돌에도 깊이 개입했다. 심지어 무력으로 성당과 교민을 보호하기도 했다. 청나라의 지방정부 외의 또 하나의 정부인 셈이었다. 그들은 중국교민의 고두하궤를 받는 동시에, 청나라황제에게 고두하궤는 하지 않으려 했다. 이 두 개의 '정권'이 철저하게 대립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천주교의 이처럼 강렬한 '정교합일'의 경향은 아메리카에서는 강력한 상대를 만나지 못했으나, 선진적인 정교분리원칙을 유지해온 중국에서는 저항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유럽종교개혁과 르네상스운동이후, 서방에서 가장 발달한 국가는 대부분 신교국가이다. 유럽 천주교국가는 비교적 낙후되어 있었고, 일찍이 발달한 천주교국가인 스페인, 포르투갈은 이때 이미 쇠락했다. 영국이 앞장서서 무력으로 중국의 대문을 연 후에, 비교적 실력이 낙후된 천주교국가들은 중국이라는 좋은 먹잇감을 앞에 놓고 조급한 탐욕을 보였다. 독일, 이탈리아는 그중에 전형적이다.
아편전쟁이전에 독일은 아직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비스마르크 수상이 독일을 통일한 후, 독일은 서둘러 중국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한다. 산동은 독일이 오랫동안 노리던 곳이다. 독일은 유럽 종교개혁의 발상지이고, 기독교 신교의 탄생지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온 독일 선교사들은 신교의 곽사립(郭士立, Karl Friedrich Gutzlaff)도 있고, 천주교의 탕약망(湯若望, 아담 샬, Johann Adam Schall von Bell)도 있다. 청나라말기 산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독일선교사인 안치태(安治泰, John Baptist Anzer)는 천주교가 새로 창립한 교파인 '성언회(聖言會, Societas Verbi Divini, 말씀의 선교 수도회)' 소속이다.
이 교파는 '정교합일'의 경향이 아주 강렬했다. 독일선교사는 당시에 심지어 곡부(曲阜)에 성당을 건립하여, 문화적으로 철저히 중국을 정복하려고까지 생각한다. 비록 이 계획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독일이 청도를 점령한 것 자체가 아주 무리했다. 그 후 자주 군대를 보내어 선교사들과 함께 중국민중을 진압했다. 그러므로 ,나중에 굴기한 유럽 천주교국가는 중국에서 조급하게 탐욕을 드러냈고, 정교합일의 방식으로 그들의 제국주의 전략과 정책을 추진한다. 그리하여, 민중의 반항, 교안빈발의 중요원인중 하나가 되었다.
천주교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일단 지방에서 중국하층문중과 갈등이나 충돌이 발생하면, 지방 관리들이 선교사들에게 철저히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교사들이 약간만 불만을 갖게 되거나 기타 목적을 지니면 고의로 사건을 일으켜서 사태를 확산시켰다. 그들은 항상 즉시 대사관에 보고하고, 서방세속정부의 외교관이 즉시 청나라의 총리아문에 외교조회를 보낸다. 자주 만일 따르지 않으면 무력을 쓰겠다는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왜 이렇게 했는가? 천주교의 소위 '보교권'때문이다. 청나라말기의 보교권은 프랑스정부에 속했다. 중국에서 이 '보교권'은 프랑스외교관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신교는 '보교권'이라는 말이 없었다. 그러므로 신교선교사들은 중국민중과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걸핏하면 대사관에 보고하지 않았다.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보불전쟁을 일으킨 적이 있으므로 프랑스가 '보교권'을 행사하는데 독일의 중국에서의 이익을 해칠까봐 우려했고, 이로 인하여 독일은 교안이 발생하면, 자주 프랑스를 제치고 단독으로 일처리를 했다. 그들의 흉악한 이미지는 영국조차도 자주 불쾌하게 여길 정도였다.
청나라정부는 당시에 서양인들 간의 이런 복잡한 관계를 알지 못했고, 일단 서양인의 외교조회를 받으면, 일반적으로 즉시 지방 관리에게 선교사의 뜻에 따르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렇게 하여 지방 관리들은 지방분쟁을 처리할 때, 공평하고 공정할 수 없었다. 만일 따르지 않으면 무력으로 위협할 뿐 아니라, 선교사들은 대사관, 총리아문을 통하여 강력하게 지방 관리의 교체를 요구했다. 심지어 선교사들이 마음에 둔 사람을 관리로 삼도록 추천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원세개가 산동순무로 간 것은 바로 서방열강이 추천한 결과이다. 그래서 원세개는 부임하자마자 의화단을 대거 진압한다. 중국하층민중은 서방열강, 선교사, 교인과 청나라관청의 여러 겹에 걸친 압박 하에, 공평한 대우는 받을 수도 없었고 ,처지는 어려워지고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2) 청나라 정부
의화단운동 후기는 청나라정부의 지지와 일정한 관계가 있으므로, 당시의 관청도 '구외배외'로 지목받았다. 아래에는 "협애구외(狹隘仇外)'하는 백성이 있고, 위에는 '맹목배외(盲目排外)'하는 고관이 있었으니, 한바탕의 재난은 피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 의화단운동에 대하여 이렇게 질책하는 것은 사실상 강대한 현실적인 의미가 있다. 그것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당금 중국에서 계속 나타나는 서방사회에 대한 비판과 질의의 목소리에 대한 것이다.
다만 오늘의 중국이 서방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구외배외'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확실히 정확하지 않다. 의화단운동시기의 청나라 정부를 간단하게 '구외배외'라고 정의내리는 것이 맞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청나라 정부는 한편으로 의화단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의화단에 반대했다. 육현(毓賢)은 관리로서 청렴했는데, 서양인들에게는 가장 배외적인 청나라고관중 하나로 여겨졌다. 의화단운동이 산서에서 활발했던 것은 육현이 산서순무로 재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의화단이 실패한 후, 육현은 조정에 의하여 처형당하는데, 민중은 그의 죽음을 억울하다고 여겼다. 육현은 형을 받기 전에 특별히 유언을 쓰는데, 민중들에게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것이고, 조정을 어렵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육현이 산동에서 재직할 때는 의화단의 전신인 "대도회(大刀會)"등 민중을 극력 진압한 바 있다.
청나라는 11개국에 동시에 선전포고를 한 후, 각지의 관리들에게 북경으로 와서 근왕(勤王)하도록 호소한다. 이홍장, 장지동, 성선회, 유곤일 등 지방관들은 아예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것을 '교조(矯詔)'로 취급했다. 그리고 서양인들과 함께 '동남호보(東南互保)'를 만들어, 북경의 '소란'을 구경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청나라의 통치상층부는 의화단에 대한 입장이 일치하지 않았다. 구외배외는 청나라상층부의 유일한 입장이 아니었다.
당시 순열장강수사대신인 이병형(李秉衡)은 '근왕'령을 받은 후, 수백 명을 데리고 강남에서 북경으로 출발한다. 이병형은 일찌기 광서에서 재직한 바 있고, 중프전쟁 때, 풍자재(馮子材)에 협력하여 '양산대첩'을 거둔다. 갑오청일전쟁 때 이병형은 산동순무로 있었는데,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이협형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처벌을 청한다.
그러나 조정은 여전히 그를 유임시킨다. 다만 그는 시종 패전에 대하여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나중에 서양인들이 반대하여 산동을 떠나 사천총독으로 간다. 그러나 부임하기도 전에 서양인들의 반대로 다시 파면된다. 순열장강수사대진을 맡았지만 실권을 별로 없었고, 자신의 손안에 병사들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병형은 북경에 도착하자 서태후에게 병력을 요구한다. 서태후는 그에게 영록을 찾아가라고 하는데, 영록은 군대를 내주지 않는다.
이병형이 말한다. 그러면 문서를 내려달라. 그러면 내가 1만 명을 모을 수 있다.
영록이 말한다. 사람을 모으는 것은 시간이 부족하다.
이명형이 다시 말한다. 그러면 나에게 총포와 탄약을 달라. 영록이 말한다. 산동에 가서 가져가라.
이병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어쩔 수가 없어서 자신이 일찍이 산동에서 재직할 때의 명망을 이용하여 500명의 산동에서 온 의화단을 뽑는다. 그리고 다시 서태후를 통하여 외지에서 북경으로 근왕하러 온 4개의 부대의 지휘권을 갖는다. 그는 천진을 수복하고자 했으나, 총리아문은 천진, 대고의 지도를 그에게 주지 않았다.
사실상 이병형이 이끄는 1만여 명은 천진에 가기도 전에, 사기가 심각하게 하락하여, 통주 동쪽이 양촌 부근에서 서양군에 궤멸당하고 만다. 청나라병사들은 사방으로 도망친다. 70세의 이병형은 비분강개하여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다. 죽기 전에 그를 떠나지 않으려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에게 각자도생하라고 한다.
이병형의 순국은 대세의 흐름을 뒤집을 수 없다는 객관적인 원인도 있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서양인과 의화단을 대하면서, 한마음이 되어 대응하지 않고, 서로 간에 싸웠다. 이것이 아마도 최종적으로 실패한 주요원인일 것이다.
이병형 이전에, 천진전투에서 이런 상황은 이미 나타났다. 송경(宋慶)은 청나라말기 저명한 장수중 한 명이다. 염군(捻軍)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승진했다. 민국시기의 군벌인 조곤, 장작림은 모두 한때 송경의 부하였고, 장작림은 송경의 위병(衛兵)을 지낸 적도 있었다.
의화단운동 때, 송경은 북양군부방판이었다. 천진전투 때, 송경은 고의로 의화단은 인체방패로 삼았고, 의화단은 용감하게 앞에서 돌진했다. 이는 서양인의 총포 앞에 의화단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송경의 군대는 멀리 뒤에 있으면서 서양인의 총포에 맞아죽지 않고 물러나게 되면 청나라병사들이 그들을 죽였다. 송경의 군대에 맞아죽은 의화단인들이 서양인에 죽은 의화단인들보다 많았다. 송경은 이에 대하여 의화단이 전투에 겁을 먹고 도망쳐서 그가 총을 쏘아 사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도 송경은 의화단을 대거 죽였다. 즉, 양군이 대치할 때, 청나라정규군은 자기 측의 동맹자들을 도살한 것이다. 만일 의화단이 구외배외한 것이 확실하다면, 그렇다면, 청나라군대가 전쟁터에서 의화단을 팔아먹고 도살한 행위는 뭐라고 해야 하는가?
단왕 재의의 아들은 서태후에 의하여, '대아가'로 세워져, 친서방의 광서제를 폐출시킬 계획이었다. 그의 북경에 있는 주택은 심지어의화단의 '총본산'이 되었다. 다만 바로 그도 경성에서 의화단을 대거 죽인다. 그의 명령과 지휘를 듣지 않는 의화단인들은 전선으로 보내고, 송경과 마찬가지로 전쟁터에서는 청군이 후방에 위치하고, 앞으로 돌진하는 의화단을 기회만 잡으면 죽여 버렸다.
동교민항의 대사관지역을 공격할 때, 서태후는 공격의 총포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영록의 수하의 한 '천진무비학당'의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위력이 큰 독일의 신식대포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 학생은 포의 위치를 정확하게 조전하여 포탄을 정확하게 대사관구역 곁의 아무도 없는 공지에 맞춘다. 서태후는 포성을 듣고는 자연히 기뻐했다. 서양인을 다치지 않게 했다고, 영록은 그를 크게 치하한다. 그는 경자사변 후 계속 승진하게 된다.
이때도 서태후는 여전히 서양인들과 담판하여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기대했다. 대사관구역을 오랫동안 포위하면서, 총리아문은 사람을 보내어 부족한 물건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서양인들은 놀라서 시험 삼아 말한다. 채소, 과일이 부족하다고.
그런데 청나라정부는 정말 전쟁상태의 서양인들에게 과일과 야채를 보내준다. 서태후는 확실히 "민심가용(民心可用)'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와 다른 청나라의 고관들의 행위는 민심을 심각하게 타격했고, 민심에 상처를 입혔다. 그들이 타격하고 상해를 가한 것은 바로 소위 '구외배외'하는 민심이었다. 서태후는 민심이 그저 '부청(扶淸)'이라는 것만 보고, 청나라조정이 이익을 위하여 단지 의화단을 대표로 하는 민심을 이용했을 뿐이다.
서태후 등은 의화단의 '부청'의 뒤에는 민중의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강대한 요구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거나 보지 않으려 했다. 청나라정부는 이런 요구를 심각하게 무시했다. 의화단은 확실히 '맹목배외'의 경향이 있었다.
다만, 청나라정부는 서양인들과 암중으로 통하며 몰래 결탁했다. 이것도 의화단이 실패한 중요한 원인중 하나가 아닐까? 당시 청나라조정은 북경부근에 있던 병력과 장비가 모두 8국 연합군보다 못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실패했을까? 다시 한번 큰 치욕을 당해야 했고, 민심을 모조리 잃게 되었을까? 서태후의 선전포고는 칭송할 가치가 없다. 서태후의 의화도 마찬가지로 찬미할 가치가 없다.
당시의 청나라관리들은 대체로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눌 수 있다. 주전파의 내부에도 의화단에 대한 태도는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하물며 주화파는 말할 것이 없다. 의화단운동이 폭발하기 전에, 1897년, 산동에서 거야교안(巨野敎案)이 발생하여, 2명의 선교사가 피살된다. 거야현령 이연서(許延瑞)는 오랫동안 현지에서 서양인의 편을 들어왔다. 그래서 현지민중들은 "서양인의 개 같은 관리"라고 불리었다. 독일의 산동에서의 침략의도가 명백하였으므로, 산동은 교안이 가장 빈발하는 지구 중 하나였다.
다만, '거야교안'이전에 청나라의 공식자료에서 서양인과의 기록 중에 거야에 관한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는 거야가 태평무사해서가 아니라, 허연서가 서양인과의 분쟁을 처리할 때, 항상 서양인의 편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서양인들은 아주 만족했고, 북경의 총리아문에까지 보고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조정도 만족했고, 허연서는 안심하고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거야교안'이 발발한 후, 허연서는 즉시 군대를 보내어 성당을 보호하고, 성당에 총포를 내준다. 그리고 친히 성당의 보초를 선다.
반달 안에 40여명의 혐의자를 체포하고, 일부 혐의자들은 고문으로 죽는다. 최종적으로 9명의 죄인을 확정하여 2명은 신속히 처결하고 나머지 7명은 감금한다. 여기서 얘기해야할 것이 있다. 이 사건의 처리에 참여한 관리중 하나는 당시 산동고사(山東皐司)를 지내고 나중에 산서순무로 옮겨가는 육현이다. 당시의 산동순무는 바로 앞에 언급한 이병형이다.
이병형, 육현, 허연서 등은 서양인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신속히 사건을 마무리 지어 끝내려고 한다. 그 결과 아직 다 처리를 끝내기도 전에 서양인들은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산동의 지방관청에서는 이미 범인을 모두 처결하였는데, 서양인들은 잘못 처결했다고 주장한다. 이 몇 명은 억울한 사람이고 진정한 흉수는 법의 처벌을 피했다고 말한다. 서양선교사들은 따로 14명의 혐의자의 명단을 제시한다. 선교사들이 중국경찰의 업무를 담당했으니 그것도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상 선교사들이 제공한 이 혐의자 명단은 진짜 혐의자들이 아니었다. 그저 현지에서 선교사에 반대하고 선교사들과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확실히 거야현령 허연서는 이번에는 서양인들의 진실한 요구사항이 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서양인에게 잘 보이려고 엉뚱한 사람을 죽인 것이다. "거야교안'의 진정한 흉수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러나 누가 신경 쓸 것인가? 관청은 서양인에게 잘 보이려고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 서양인들은 산동을 침략하기 위하여 사태를 확대시킨다. 그 결과, "서양인의 개 같은 관리"인 허연서는 양쪽에 모두 밉보여서 결국은 관직을 잃는다.
관청과 서양인의 이러한 일처리방식은 민중의 분노를 샀다. 민중의 '구외배외'정서는 확실히 진짜이다. 다만 만일 의화단운동의 원인이 바로 관청과 민중의 '구외배외'가 결합된 것 때문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너무 단순화한 것이다.
청나라관청의 '구외미외(懼外媚外)의 심리상태와 표현도 마찬가지로 분명했고, 심지어 더욱 강했다. 의화단운동이전의 수십년간, 청나라관부는 대도회, 매화권, 신권 등 의화단의 전신에 오랫동안 소탕정책을 썼다. 설사 의화단이 이미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이후에도, 청나라조정은 의화단에 대한 '소탕과 위무'정책은 계속하여 분명했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의화단을 소탕"한다는 것이 '의화단을 초무'하는 것보다 우세했다고 할 수 있다.
청나라관청은 최종적으로 의화단과 함께 했는데, 관건적인 원인의 하나는 바로 이전의 '구외미외'가 서양인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약간을 얻어내면 더 많이 얻어내려 했고, 욕심이 끝이 없었다. 중국에서 이익을 획득하려는 요구가 청나라조정의 '구외미외'로 충분히 만족될 수 없었다. 서양인들의 무리하고 무례한 행동은 일관되게 '구외미외'를 유지하던 청나라관리마저도 더 참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관청내부에서 서양인에게 항거하는 역량은 통일되지도 않았고, 충분하지도 않았다. 부득이 민간의 역량을 빌려와야 했다.
다만, 민중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전에 장기간 의화단을 소탕하는 정책을 써왔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의화단과 한편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서로 생각은 달랐다. 단지 이용해보자는 것이고, 이를 통하여 관청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자는 것이었다. 진정으로 민중의 이익을 생각해준 것은 아니다.
민중은 이로써 청나라관청의 서양인에게 아양떠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단지 이번에는 '애교'를 심하게 떨었고, '이혼'까지 하는 모양을 갖춘다. 서양인들이 서태후를 처벌하지 않는다는데 동의하자, 이 할망구는 즉시 '양중화지물력(量中華之物力), 결여국지환심(結與國之歡心)"이라는 말까지 하게 되고, 그리고 '자책지조(自責之詔)"까지 내려보낸다.
그러므로 의화단운동의 거대한 비극을 조성한 원인을 만일 단순히 '구외배외'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단순화 한 것이다. 관청의 '구외미외'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만일 '구외배외'가 정확한 선택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결여국지환심'의 '구외미외'도 마찬가지로 극히 잘못된 것이었다. 양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온고지신, 역사를 귀감으로 삼는다는 이 결론은 청나라에 대하여도 그러하지만,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3) 중국 민중
천진은 서방선교의 중점지구중 하나이다. 그리고 의화단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지역중 하나이다. 천진에서는 일찌기 이런 사건이 일어난 바 있다. 서양종교를 믿는 신도들이 서양종교를 믿지 않는 평민들과 분쟁이 일어나서 지방관청에서 소송을 벌이게 된다. 관청은 선교사들을 겁내어 교인의 편을 들어준다. 기본적으로 이런 소송은 발생하기만 하면, 교인이 이겼다.
억울하게 소송에서 진 한 백성이 분노해서 관리에게 묻는다, “너는 어떻게 이런 판결을 내리느냐?” 관리가 대답한다. “누가 너에게 입교하지 말라고 했느냐.”
즉, 중국백성이라도 서양종교를 믿으면 교인이 되는 것이다. 모든 소송에서 다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록 이는 서양열강에 대하여 어쩔 수 없었던 것을 말하지만, 이는 확실히 이미 무슨 공정, 공평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 사실은 서방선교사들이 그들의 정부와 함께, 이미 하층에서 중국정부의 권력을 차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방 관리는 기본적으로 서양열강의 괴뢰가 되었다. 결국 스스로의 무덤을 판 것이다.
서방에서는 청나라정부의 권력을 빼앗아 중국민중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것은 결국 교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보호를 잃은 중국 하층 민중들은 반항하는 것 외에 무슨 출로가 있었을까? 그래서 많은 중국민중들은 말했다: 좋은 사람은 서양종교를 믿지 않고, 서양종교를 믿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은 비록 과격하지만, 완전히 이치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일도양단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서양종교를 믿은 중국인이 모두 나쁜 사람이라고 혹은 좋은 사람도 서양종교를 믿으면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린다고. 이런 주장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명나라 때 서광계(徐光啓)는 천주교를 믿었다. 그는 당연히 나쁜 사람이 아니다. 강희제때 바티칸과의 '중국예의지쟁' 때 바티칸은 중국교인들에게 조상에 제사지내고, 공자에 제사지내는 것을 금지했다. 청나라조정은 천주교의 중국선교를 금지시킨다. 아편전쟁 후에야 이 금지령이 풀린다.
이 일백여년 동안, 많은 원래의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계속 유지한다. 나중에 천주교에서 발견한 '노교인'이다. 그때 청나라정부와 민중은 그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들도 무슨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보통의 중국농민과 같은 마을에 섞여 살면서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들은 이 일백여년 동안의 존재와 자체선교를 보면 '서양종교를 믿는 자들 중에는 좋은 사람이 없다'는 명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편전쟁 후, 서방전교사들이 무력남용을 중국에 가져오면서 상황은 확실히 바뀌게 된다.
서방교회의 권리를 나타내는 것 중 하나는 교인의 수이다. 왜 그런가? 현재 중국의 일부 지하교회를 예로 들면, 그들은 정교합일의 낙후한 원칙을 따르므로, 교회는 교인에게 '십일조'를 거둘 수 있다. 즉 교인은 모든 수입의 10분의 1을 교회에 내야 한다. 교회는 하나의 정부와 같다. 그러므로 교인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더욱 돈이 많아지게 된다.
유럽은 종교개혁, 종교전쟁, 르네상스 등을 거치면서, 신교의 세력이 크게 늘어났다. 바티칸이 관할하는 천주교인수는 날로 감소했다. 유럽이외의 지역에서 새로운 교인을 늘여가려는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다.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교회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이다.
현재 서방 각국은 '십일조'에 대한 태도가 각각 다르다. 어떤 국가는 철저히 '십일조'를 금지한다. 예를 들면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가 그러하다. 1936년 후의 영국도 그러하다. 어떤 국가는 일부분을 폐지한다. 예를 들면 독일이 그러하다. 미국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규정이 없다. 각 교파들은 거둘 사람은 거두고, 어떤 경우는 교인의 자유의사에 맡긴다. 어떤 경우는 헌금 혹은 교회가 제창한 자선으로 바뀌었는데, 결국, 모두 돈을 거두는 방법이다. 신도의 수가 경제적 이익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에, 청나라의 '금교령'은 아편전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된다.
서방의 각 교파는 즉시 벌떼처럼 중국으로 몰려온다. 어떤 경우는 교인을 받아들이는데 조심스럽게 진행하여 느렸고, 어떤 경우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고 나쁘고를 가리지 않고 거두어 신속히 확장했다. 황하 중하류지구는 청나라말기에 자주 재난을 겪는다. 황하는 1855년 물길을 바꾸어 발해로 흐른다. 청나라정부는 전란을 직면해서 황하의 치수사업에 뜻이 없었고, 돈도 없었다. 그후 황하 하류의 산동 쪽은 자주 둑이 무너지고, 다른 자연재해까지 겹친다.
청나라정부의 구제능력은 한계가 있어서, 대량의 기민(飢民), 재민들이 서방교회에서 재난구제를 이용하여 교인을 흡수하는 중요대상으로 된다. 재난구호물자를 줄지 주지 않을지, 예를 들어 죽 한그릇, 쌀 한줌을 주는 것의 조건은 바로 입교했느냐였다. 이렇게 남의 위기를 틈타는 수법은 실제로 아주 악랄하다. 중국 역사상의 "차래지식(嗟來之食)"보다 못하다.
그러나 재난을 구제하고,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당시의 청나라정부가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들 기민 혹은 재민은 입교했다고 하더라도 무슨 굳은 신앙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서양종교에 입교하는 것은 경제적 이익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확실히 적지 않은 '나쁜 사람'들이 흘러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유행하는 견해 중 하나는 의화단이 백련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의화단의 어떤 점은 확실히 백련교와 비슷하다. 그러나 의화단이 백련교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백련교 등 비밀종교는 '반청'을 종지로 한다.
그러나 의화단은 '반청'이 아니다. 양자는 근본이 다른 것이다. 반대로, 백련교 등 비밀종교는 반청으로 오랫동안 청정부의 타격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배경을 얻고자 금방 서방교회의 품에 안긴다. 선교사들이 한꺼번에 수백, 수천의 백련교 교도를 신도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간단하게 비밀종교로 반청인 백련교도는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우두머리가 재물을 긁어모은다는 점에서 양자는 확실히 일치한다.
그리고 일부 토비 강도들도 청나라정부의 타격을 받자, 서양종교에 입교하여 보호를 받고자 했다. 산동에서 당시 한 비적의 우두머리가 청나라정부와 의화단의 전신인 대도회와 전투를 벌였다 붙잡혀서 사형을 받는다. 청정부와 대도회가 그의 부하들을 수습하기도 전에, 선교사는 즉시 이 토비의 부하들을 모조리 입교시켜 보호하기 시작한다.
방삼걸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원래 대도회를 따라 서양종교에 반대했다. 그래서 서양종교에게는 눈엣가시가 되었다. 나중에 사건이 커지면서 청나라정부의 진압을 받는데, 그는 아예 서양종교에 입교해 버린다. 이런 사레는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 때문에 입교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종교가 더 믿을만한 배경이었기 때문에 서양종교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은 신앙 때문이 아니라, 그저 현실적인 이익을 비교형량한 것이다.
서양종교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받아들였고, 더 많은 중국민중들에게 서양종교의 좋은 점을 알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교인과 비교인간에 분쟁과 충돌이 발생하면 선교사는 자주 사실에 관계없이 시비를 가리지 않고 교인의 편을 들었고, 청나라정부의 사법에 간여하여, 무수한 사법판결이 교인들 편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정의감을 가진 하층 민중들은 선교사와 교인에 대하여 강렬한 반감을 품게 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서양종교에 입교한 사람이 만일 '좋은 사람'이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 그다지 많은 분쟁이나 충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있다고 하더라도 터무니없이 사건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서양종교에 입교한 사람이 '나쁜 사람'이면, 선교사의 비호 하에, 정말 물 만난 고기처럼, 기세등등하여 비교인을 압박하는 현상이 날로 더해갔다. 청나라말기에 교안이 빈발하던 시기에, 악랄한 짓을 한 교인들이 교적을 박탈당하는 사례도 있었으나, 아주 적었다. 왜냐하면 이런 무뢰배일수록, 돈 벌고 일 벌이는 건 잘했기 때문에, 제적시키는 것은 교회도 아쉬워했다. 교회는 이렇게 돌진하는 사람도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서방선교사들이 중국각지에서 선교하고 대량의 교인을 흡수한 결과 민중의 분열이 나타난다. 이런 분열은 단순히 보통의 의미에서의 관념차이 혹은 이익충돌만이 아니다. 한 국가의 주권 개념 하에, 관념차이, 이익충돌은 하나의 한도가 있는 기초위에서 토론을 전개하거나 자기주장을 할 수 있다.
설사 견해차이가 극단으로 가서 조화되기 어렵더라도 국가주권에 미치지 않으면 기껏해야 집단싸움, 대대로 원수가 되는 것뿐이다. 서방종교의 배후에는 강대한 서방 주권국가가 있다. 특히 천주교는 '정교합일'이기도 하여, 세속권력을 차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당시의 국면 하에서, 교인과 평민의 모든 의견 차이는 거의 국가하층의 분열이라고 할 수 있다. 거의 모두 청정부의 주권분열을 의미한다. 교인과 평민은 이미 공동의 바탕이 없어졌다. 아마도 교인과 평민자신은 그렇게 분명하게 몰랐을 수도 있다. 많은 교인은 자신의 행위가 반정부, 반국가라는 것을 아마도 인식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교인의 배후에는 중국분열을 기도하는 서방열강과 정교합일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종교 세력이 있었으므로, 이들 교인들이 조성하는 관념충돌과 이익분쟁은 객관적으로 국가의 분열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 현상은 당금 중국에서도 여전히 현실적인 의미가 있다.
바티칸이 정교합일의 방식으로 세속권력을 취득하는 방식은 전 세계 각국에서 중국고대와 마찬가지로 정교분리를 실행하는 강대한 추세 하에, 지금은 축소되고 약화되었다. 바티칸도 신교의 방식을 배워서, 교회는 학교나 자선 기구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당시 바티칸은 하나님을 '보편원칙'으로 하여 세속권력과 하나로 융합하는 방식을 취했다. 지금도 환탕불환약(換湯不換藥)의 방식이 여전히 존재한다. 단지 현재 '보편가치'를 반포하는 것은 이미 교회가 아니고, 서방세속정권 자체이다.
비록 우리는 오늘날 모든 외국세력이 모두 중국을 분열시키고 중국을 나눠가지려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이런 의도가 최소한 어느 정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보편가치'로 분열, 전복의도의 현실성을 포장하는 것은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세계의 많은 지방에서 선례를 본다. 구별되는 것은 '정교합일'원칙하에, 교인은 바로 '서로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자'이다. 종교는 아주 분명하게 정치와 동일시한다. 오늘날 어떤 원리주의자가 지도하는 종교 극단분자와 같다. 다만, 정교분리의 원칙하에,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자'와 교인은 왕왕 모호한 과도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어떤 때는 종교자유의 명의 하에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며, 종교가 정치의 보호우산이 된다.
현재 중국에는 많은 지하교회가 있는데, '삼자교회(三自敎會)'를 떠나 비밀리에 선교한다. 실제로는 바로 교육훈련,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자'의 대오를 확대하는 사명을 부담한다.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는 어느 정도 존재할 수 있다. 그 전제는 국가주권의 안정이라는 이 최소한의 기본을 유지 보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 '정교합일'의 종교는 국가주권을 전복시킬 의도가 있었다. 지금은 '보편가치'를 기치로 내걸고 서방세속정권이 여전히 이 의도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만일, '정교합일'의 원칙으로 교회가 세속정권을 도구로 삼더라도, 현재는 바뀌었다. '정교분리'의 원칙하에, 서방세속정권은 교회를 도구로 삼는다. 그러나 목적은 같다. 항장이 칼춤을 추는 것은 모두 다른 나라의 주권을 겨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다시 의화단 민중반항의 합리성과 부족함을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먼저, 의화단이 직면한 것은 실제로 국가주권문제였다. 많은 사람들은 국가주권을 보호하려는 목적 하에 의화단에 투신했다.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합리성이 있다. 많은 사람은 국가주권을 보호한다는 목적 하에 의화단에 투신하였다. 여기에도 의심의 여지없이 합리성이 있다.
그러나 문화지식, 기술수단의 결핍으로, 의화단은 패싸움을 하는 민간의 방식을 국가전쟁수단에서도 동일하게 사용했다. 확실히 성공하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다만 우리는 동시에 보아야 한다. 청정부의 양무운동시도는 서방규칙으로 국가전쟁수단의 능력을 제고하고자 시도한 것이나, 결국 참패한다. 하층민중은 길거리패싸움의 방식으로 벌떡 일어난다. 비록 방식은 웃기지만, 그 비장한 헌신정신은 감동할 만하다.
다음으로, 국가주권은 부의 장악에 관련된다. 의화단의 이 문제에서의 반항방식은 성당을 불태우고, 교인의 주택을 불태우는 것이다. 이런 것은 너 죽고 나 죽자는 방식이어서 여러 해동안의 억울함을 푸는 것은 될 수 있지만, 진정으로 승리를 얻는 심리상태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문화지식이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어, 그들은 국가 법률로 전체 경제이익을 보호하게 할 수 없었다. 설사 의화단이 패싸움의 방식으로 서양인을 모조리 죽이고, 중국에서 다 쫓아낸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이 문제에서 유리해지거나 유리한 위치를 점거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셋째, 교회는 '정교합일'의 방식으로 세속권력을 취득하는데, 그 핵심은 바로 종교가 만드는 전체발언체계이다. 양무운동은 '중체서용'을 주장했고, 유가를 핵심으로 한 발언체계이다. 양무운동은 '중체서용'을 주장하여 유가를 핵심으로 한 발언체계를 보호하고 발언권의 최고점을 확보하려는 시도이다.
다만, 양무운동의 실패는 유학의 서방종교에 대한 발언권전쟁도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화단은 어떤 발언체계를 취할 수 있을까? 혹은 그들은 어떤 사상체계를 가지고 서방종교에 대응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문화지식이 부족하여, 의화단은 이 문제에서 성공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종교의 우상숭배를 찾아낸다. 봉신연의의 관동, 오공에서부터 본토신이 외래의 서양 신을 이기도록 시도한다. 종교학의 각도에서 보면 이미 패배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신교'는 한마디 말로 모든 본토 신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연극무대에서 문학에서 신들 간의 싸움과 승패는 국가주권이 존망의 위기에 처할 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종적으로 믿을 것은 국가의 군사와 경제력이다. 의화단은 그저 열혈만 가지고 있었고, 필요한 수단은 너무나 부족했다. 그래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주권정부 혹은 엘리트집단은 이때 민중을 교육시키고, 민중을 단결시키고, 민중을 조직할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나 청정부 및 청왕조의 엘리트집단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심각하게 직무유기한 청정부는 의화단운동이 실패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철저히 역사무대에서 퇴출하게 된다.
역사는 아마도 비슷할 수는 있지만, 중복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의 중국에서 중국가 서방의 가치관이 다른 점은 이미 중국사회내부의 서로 다른 집단에 깊이 파고들었다. 어떤 경우는 기독교를 체현하고, 어떤 경우는 서양종교를 아예 믿지 않는다. 다만 양자 간에는 고도의 결합성과 일치성이 있다.
이런 관념상의 차이는 어떤 것은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것은 극단적인 대립의 정도가 된다. 역사상의 교인과 평민의 대립상태와 아주 유사하다. 예를 들어, 홍콩에서 발생하는 '점중사건'은 거의 옛날 선교사, 교인이 서방정부와 함께 청나라정부를 힘들게 하던 그 복사판이다. 아무 이유없이 시끄럽게 떠들고, 법률을 무시하고, 임의로 사태를 확대하는 수법은 옛날 '민교충돌'때 교인, 선교사, 열강정부의 수법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인의 진보는 '점중반대'의 대륙민중과 홍콩시민을 통하여 체현되었다. 그들은 '점중자'들의 아무 이유 없이 시끄럽게 떠드는 방식을 멸시한다. 그러나 그들은 의화단과 같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으로 하지 않았다. 법률과 여론수단으로 극소수 '점중자'들을 상대했다. 그들의 무리한 행동은 인심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천하에 보여주었다. 민중이 냉정하게 대응한 '점중'의 배후에는 냉정하고 자신 있는 중국정부가 있다. 가장 관건적인 것은, 당금 중국정부는 이미 절대로 당년의 청정부가 아니다.
당금 중국민중의 애국주의 열정에 대하여, 오늘날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의화단의 옛날 달력을 꺼내어 들고 애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금정부에 있어서, '구외배외'는 당연히 회피해야 한다. '구외미외'도 바뀌어야 한다. 청말 정부는 자주 서양인의 여론으로 자신의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을 취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훈과 거울이 된다. 비록, '세계대동'이 아름다운 이상이고,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는 주권국가가 여전히 최고원칙이다. 그리고 이 국면은 장기간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중, 서방 가치 관념의 차이에 기하여 조성된 의견불일치는 중국정부가 반드시 국가주권의 원칙을 견지하여야 한다. 국가주권의 완전성을 유비보호하는 것을 하한선으로 하여 각종 의견불일치와 충돌에 대하여 필요한 상응수단을 취해야 한다. 행운이라면,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은 서방으로 하여금 다시는 더 잇아 쉽게 무역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제 서방이 다시는 중국을 향하여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행운인 점이라면, 모택동이 영도하는 중국은 서방으로 하여금 다시는 더 이상 쉽게 중국에 무역을 동원할 수 있도록 상응한 수단을 써야 한다. 국가주권의 완정성은 하한선으로 하여 각종 의견불일치와 충돌에 대하여 필요한 상응하는 상응한 수단이 된다. 행운인 점이라면, 모택동이 영도하는 중국은 경제적으로 거대한 발전을 획득했고, 중국은 더 이상 경제명맥을 외국인이 장악하여 시키는 말이면 다 들어야 했던 시절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각종 내외의견불일치, 충돌이 냉정, 자신의 자신감이 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마찬가지로 의화단에서 심각한 교훈을 끄집어내야 한다.
"의화단이 강자아, 관노야, 손대성야 등을 이용하여 본토신선이 예수, 하나님, 마리아등 외래신선을 이기려 하였지만, 실패한다. 우리가 오늘날 다시 무슨 사상자원으로 '중국 스토리에 잘 보일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무슨 사상자원을 '의화단이 강자아, 관노야, 손대성등 본토신선이 예수, 하나님, 마리아등 외래신선을 이기게 하려고 했으나, 실패한다. 우리는 오늘날 무슨 사상자원'과 "중국스토리를 얘기하도록' 해야 할까?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어떤 발언체계를 써야 그들 완고한 '점중자(點中者)'를 설득하여, 그들이 포기하게 하고 기꺼이 집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
51. 청나라 멸망 후 기인(旗人)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글 : 완여청양(婉如淸揚)
청나라가 200여 년 동안 통치하면서, 기인들은 특권을 지녔다. 다만 동시에 그들은 생산에 종사하지 못하였고, 공상(工商), 무역에도 종사할 수 없었다. 생활 빈곤의 문제는 후기로 갈수록 두드러졌다. 청나라말기에 조정에서도 약간 정책을 바꾸어, 그들이 농업에 종사하거나, 상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여 개인생계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해혁명의 발발은 그들로 하여금 시간을 앞당겨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만들었다. 노사(老舍)의 화극(話劇) <차관(茶館)>은 생동감 있게 기인생활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미 집단적인 문제로 된 것이다.
1920년 5월 23일, 상해의 <민국일보>에는 <오늘날 기인의 생활상황>이라는 글을 싣는다. 당시의 기인의 생활상황을 개략 4부류로 나누었는데: 귀관파(貴官派)는 <우대조례>를 적용받던 친왕귀족종실을 말한다. 이들은 비록 재산은 많이 있었지만, 수입에 비하여 지출이 컸고, 재산을 관리한 경험도 없었으며, "여러 사람들이 재산을 나누어야 했다" 그리하여 장래에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가고 있었다. 모생파(謀生派)는 부지런하게 일하면서 사업을 하고 자립하는 사람들이다. '이 파는 기인들 중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이들은 점차 다른 민족들과 동화되었다; 노동파(勞動派)는 한군기인(漢軍旗人)들이 다수를 점하며 보통 인력거를 끌면서 생계를 해결했다 곤란하지만 그래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었다. 대사파(待死派)는 가난뱅이들이다.
고찰한 바에 따르면, 북경내성의 기인주민들은 이미 가난해져서 점차 거지의 처지로 전락했다. 수십만의 남녀노소들이 모두 거지가 된다. 치안이나 나라의 명성에 모두 주목할 가치가 있었다. 4부류 중 가장 많은 인원을 점하는 '노동파'는 비록 겨우겨우 입에 풀칠은 하지만, 경제상황은 악화되고, 생활비용은 올라가는 문제가 있었다. '보잘 것 없는 수입이 4,5년 전에 비하여 배나 줄었다." 생활은 갈수록 궁박해졌다.
기실, '귀관파'라 하더라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아니었다. 민국초기의 신문에는 자주 '세자왕손이 성문동에서 죽고, 군주명부가 기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만주의 왕공들은 신속히 빈곤의 나락에 빠진다. 장사돈(庄士敦, 부의의 영어선생 Johnston)에 따르면, 현지에서 1919년에 그들과 알게 되었을 때 그들중 일부는 이미 부자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비참한 지경'에 처했다. '체면'을 고려하여, 그들은 공개적으로 골동품을 팔지도 못하고, 그저 '가소로울 정도의 헐값'에 팔곤 했다.
장사돈은 한 친왕을 언급했는데, 건륭의 5대손인 육랑(毓郞)이다. 광서제때 진국장군 3등 장군에 봉해지고, 신해혁명 때는 군자대신의 신분을 지녔으므로 귀족 상층부라 할 수 있다. 청나라가 망한지 10년도 되지 않아. 그는 이미 '가난하기 그지없이' 된다. 또 다른 중량급 귀족인 재택(載澤)도 민국시대에 접어들며 신속히 가난에 빠진다. 민국의 사병들은 그가 값나가는 물건을 넣어둔 창고를 강탈해가기도 했다. 한때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중 하나였던 그는 1920년에 가난에 빠져 쓸쓸하게 죽어간다.
부의의 당형제인 부순(溥洵)은 가산을 다 날리고 그림을 팔아서 살았다. 장왕의 후손은 남횡가의 한 빈집에서 굶어죽었다. 예왕의 후손인 종씨형제는 살아갈 방법이 없자 조상묘를 파헤친다. 청나라말기의 중신 경친왕 혁광은 가산이 억만에 이르렀는데, 손자에 이르러는 쓰레기를 뒤지는 처지로 전락한다. 특권을 잃은 이들 귀족들은 봉록도 없고, 가산도 다 날렸다. 그저 길거리를 유랑하거나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계순(桂順)이라는 황족이 있었는데, 집안이 빈곤해지자 북경에서 천진으로 가서 살 길을 구하러 간다. 양촌을 지나가다가 불행히도 병으로 쓰러진다. 팔 것도 전혀 없고, 입을 것이나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부의에게 긴급요청서신을 보낸다. '우리 군주 대황제께서 은혜를 베풀어 돈을 하사해주셔서 노재가 병을 치료하며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당시 황족은 3만여 명인데, 이런 유사한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소조정이 구해줄래야 구해줄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빈곤과 병으로 죽어갔다.
왕공귀족들마저도 빈곤에 빠지니, 일반 기인들의 상황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선통제가 퇴위할 때 새로 성립되는 민국정부와 일련의 <우대조건>에 합의한다. 거기에는 명문으로 "기인의 재산을 보호하고, 기인의 일반생활을 유지한다"고 되어 있다. 거기에는 <만몽회장각족대우의 조건에 관하여>에는 이런 규정이 있다. "먼저 팔기의 생계를 위해 돈을 모으고, 돈을 모으기 전에는 팔기병의 봉급은 예전과 같이 지급한다" <기인의 공재산보호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무릇 팔기인민의 공사재산은 지방관 및 공정한 사신이 조사 정리하여 팔기의 생계에 쓰도록 한다." 다만 실제상황은 전혀 이렇지 않았다. 기인의 공사재산은 전혀 보호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왕왕 각종 원인을 붙여 몰수하였다.
민족대동회의 회원인 유규일, 오경렴 등은 원세개에게 상소를 올린다. 기인의 사유재산을 몰수하지 말도록. 호소는 호소이고, 기인의 재산은 계속하여 몰수되는 상황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 외에 재정상의 곤란으로 많은 지방에서는 기영을 철폐한 후, 잠시 몇 번 녹봉을 준 이외에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녹봉지급을 중단한다. 북경은 비교적 장기간 봉급을 지급한 곳이다. 1924년에 이르러 기인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것이 중단된다. 양식은 일찌감치 민국2,3년부터 더 이상 지급되지 않았다. 원세개가 죽은 후, 녹봉은 점차 지급이 지연된다. 민국7,8년에 이르러, 기향(旗餉)은 정월, 오월, 팔월의 3대 명절에만 지급되어, 변형된 구제금역할을 했다.
김계종은 민국에서 '녹봉을 지급하지 않은 것'을 기록한다. 소위 기병이 개편된 후, '녹봉은 예전과 같다'고 하였지만, 시종 이행되지 않았다. 먼저 생활이 안 되는 것은 영방의 과부였다. 청나라 때는 팔기과부에게는 일종의 '환과고독'의 구휼금이 있었다. 만일 남자가 나라를 위하여 전사하면, 우대구휼금이 있었다. 이런 규정은 이미 2백여 년간 집행되었다. 현재 돌연 지급하지 않게 되면, 즉시 먹을 것이 없어지고 굶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지경에 처한다. 경기(京旗)의 과부와 외지주방의 과부는 먼저 북경에 청원을 하고 열심히 뛰어다니지만 아무런 성과는 없었다.
나중에 나타난 경기와 삼영의 색향(索餉)도 여전히 아무런 성과를 못 거둔다. 그래서 대규모의 청원활동이 벌어지게 된다. "청원운동은 완전히 도저히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것이다. 민국에 대하여 어느 정도 환상을 품고 있어서 진행된 것이다." 프랑스의 노사연구학자인 파적(巴迪) 선생이 당시 북경의 외적인사가 방관자의 신분으로 기록한 기인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의 수량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처지는 상당히 비참했다. 그들 중 대다수는 부귀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하다가 돌연 가난한 지경에 처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볼 수 있다. 과거에 신분이 고귀했던 만주족이 양차를 끌고 있는 것이나, 그들의 부녀가 남에게 고용되어 일을 한다거나, 가장 비참한 것은 그들의 딸이 명예롭지 못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오로지 자신의 생존과 가정의 생존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북경성내에 최소한 칠천의 기녀가 있었는데 그중 대부분은 만주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