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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김지하(1941~2022)

가벼움

가야고운(伽倻孤雲)

가야(伽倻)의 산들

가야(伽倻)의 흰 빛

가을

간혹

갈꽃

거기

검은 방

겨울

겨울 거울

겨울 시편

겨울에

결별

결핍

고무공

고사목

공경

광제국(廣濟局)에서 한낮에

구구

그 소, 애린

그때

근원으로 돌아가다

금산사(金山寺) 밤 뜨락에서

기다렸으나

기마상(騎馬像)

꼭둑각시

꽃그늘

꿈결의 시()

나 한때

나그네

나이

나팔 소리

나 한때

남쪽으로

남한강에서

낯선 희망

내 땅

내가 나에게

내년 봄엔

노여움

노을 무렵

녹두꽃

녹슨 기관차 가득히 꽃을

눈 내릴 때면

눈빛은 눈빛에게 말한다

눈길

눈물

늙음

다람쥐

단시(短詩)

달램

당신의 피

덕담 한마디

덧없이

()

돌아가지 않겠다

동동

동이

동짓날

되먹임

두타산

둥글기 때문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들녘

땅거미

또 남한강에서

마른번개의 날에

만남

말씀

망향

매장

먹칠

면벽

모래내

목련

()

무슨

무화과

문깐재

물구나무

물 흐르는 곳에

민족의 비극이지 뭘

바다

바다에서

바람

바람에게

바램

바로

밤나라

밤 산책

밥은 하늘입니다

백방

백학봉(白鶴峯)

베 짜는 누이에게

벼랑

변환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보리싹

봄살이

부끄러움

불귀(不歸)

불면

비녀산

비어(蜚語)

빈 가지

빈방

빈 산

빈집

빗소리

빗장 질린 문

빗점

뻔한 것

사람 사이의 틈

사랑

사랑 얘기

사월

사월의 피

산정리 일기(山亭里 日記)

산조(散調)

산책은 행동

살림

살림 소식

삼라만상

새 교회

새벽 두 시

새봄

샛길 없음

생명

서대문(西大門) 101번지

서울

서울 길

서편

성자동 언덕의 눈

세밑

소를 논함

소를 보다

소를 찾아 나서다

소리

소박하다면

속살

솔잎

송광사에서

수서(水西)

수유리 일기(日記)

숨은 사랑

숲속의 작은 공터

쉰네 살

쉰둘

()

시간

신새벽

신호

쓸쓸한 자유

아내에게

아랫쏘

아무도 없다

아주까리 신풍(神風)

아파트 꿈

악발골

안산

안팎

애린

앵적가(櫻賊歌)

어느 귀퉁이

어둠

어둠 속에서

어름

어젯밤

얽힘

업보

여름 감방에서

여울

여전

역려(逆旅)

엽서

영하 2

예전엔

옛 가야(伽倻)에 와서

오늘

오월 산책

오적(五賊)

외로워도

용담수운(龍譚水雲)

용당리에서

우리가 하자

우리 앞에 있는 분명한 희망

우물

이사(夷史)

이슬 털기

이제 나에게 오세요

일산시첩(一山詩帖)

재떨이 회담

저 먼 우주의

저기 여기

저녁 산책

저녁 이야기

저녁 장미

저자에 들어가 손을 내리다

정발산 아래

제사(祭祀)

죽음

척분(滌焚)

줄탁(啐啄)

중심의 괴로움

지는 봄꽃

지리산

지옥

지옥에

진리

책들

척분(滌焚)

천하태평

천형(天刑)

첫 문화

첫 미소

쳐라

초겨울

초생달

초파일 밤

촛불

최선생

칼아

축복

타는 목마름으로

텔레비전

팔현사은(八顯四隱)

편지

푸르름

푸른 옷

푸른 하늘 흰 구름을

풀에도 남북이 있는가

피리

피쏘

한 뼘

한숨

한울

해남에서

해는 사람의

허기

현풍(玄風)을 지나며

형님

호박

홍성담

화개(花開)

화살내

황불

황톳길

회귀(回歸)

훨덜린

흙집

흰 방

9

19741

 

 

 

 

 

 

 

가벼움

김지하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물을 이고

물의 진양조의 무게 아래 숨지는

나비 같은 가벼움

나비 같은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물살을 이고

퍼붓어 내리는 비의 쌔하얀

파성을 이고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이마 위에

총창이 그어댄 주름살의 나비 같은

익살을 이고

불꽃이 타는 그 이마 위에

물살이 흐르고 옆으로

옆으로 흐르는 물살만이 자유롭고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퍼붓어 내리는 쌔하얀

공포를 이고

숨져간 그 날의 너의

나비 같은 가벼움.

 

 

 

가야고운(伽倻孤雲)

김지하

 

홍류동(紅流洞)에서

 

멀리서 보는

가야산

 

슬프다

 

더 멀리서 보는

해인사

 

슬프다

 

여기

구름이,

구름 같은 한 생애가

 

외로이

머물다 간

역사가 슬프다

 

고운(孤雲)

떨림

 

흘러간 홍류(紅流) 너머 세산(勢山)의 밑

외짝 신발이여

눈물이여

 

마주한

나그네 마음속

흰 산세(山勢)

 

슬프다

 

겨울 햇살 아래

소주를 붓고

천부(天符)를 구독(九讀),

 

뭇 삶이여

어허

 

접화(接化)

접화로구나!

 

 

 

가야(伽倻)의 산들

김지하

 

가야의 산들

심상치 않다

 

겨울 흰 햇살

너른 들에 우뚝 선

검은 봉우리

 

신 내려

떨림

 

아아

가야여 가야여

 

망한 옛

동이(東夷)의 아득아득한

솟대여.

 

 

 

가야(伽倻)의 흰빛

김지하

 

오늘

돌아갈 길 없음

 

흰 바다

눈부신 빛뿐

 

갈 길 없음

 

숲 속에서 네가 기다린다는

갈매기의 애틋한

전갈도

 

흰 구름 모서리

한 소식 숨어 있다는 들뜬 기별도

 

모두 다

오늘

돌아갈 길 없음

 

흰 바다

눈부신 눈부신

 

쓸쓸한

빛뿐,

 

가야의 흰빛

그뿐.

 

 

 

가을

김지하

 

1

낙엽철

햇빛 속에서

 

머리를 긁어 올린다

흰 비듬이

우수수 쏟아진다

 

가슴에 꽂힌

모진 눈빛들 칼끝 같은 말들

다 쏟아진다

 

푸른 하늘

 

제주 어디쯤

검은 돌 틈 흰 갈꽃에 가 있는

내 마음 그물 새

 

가을.

 

 

2

어지름증을 앓는 어머니 앞에

그저 막막하더니

집을 나서는데

다 시든 낙엽을 밟으니

발바닥이 도리어 살갑구나.

 

 

 

간혹

김지하

 

간혹

가만히 앉았을 때

내가 누군지 모를 적이 있어

 

혹간은 내가 아예

없는 듯도 해서

 

아내는 날더러 도인 됐다고

도통했다 웃는데

 

아닐거라

필경은 날 잃어버린 건데

 

촛불 켜들고

거리거리 찾아 나설까

 

기억 따라

옛 술집들, 옛 병원들

, 옛 감옥들 밟아가

 

날 찾으러 가

갈거나

 

초겨울

포플러에 남은 마른 잎 하나

그 밑에 쪼그려 앉아

 

간간이 들리는

머언 곳 희미한 나팔 소리 들으며

생각한다

 

날 버린 이 누구 있어

날 잃어버렸나

 

온 곳도 갈 곳도 잊고

멍멍히 앉아 생각한다

 

흙 한 줌 물 한 방울 참새 한 마리

높이 뜬 흰 구름 시청 앞 전광판에

 

아황상가스 얼마 얼마

뒹구는 낙엽

 

저기 그리고 여기

거기 또 거기

 

가득가득 찬 잃어버린 분이여

 

어허

나로구나.

 

 

 

갈꽃

김지하

 

싸늘한 듯 살가운

가을풀 냄새

이리

돌아오는 옛 마을

 

코끝에

또 가슴속에

갈꽃 하나 흔들려

 

지금

거리에서 버티고

모멸에도 미소짓고

 

술 취한 밤

파김치 발길이

집 찾아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은

 

갈꽃 하나

내 아내

 

마음의

 

이 가을

숨쉬는 일 모두 다

 

아아 귀향!

 

 

 

거기

김지하

 

우엉 뒤

허물어진 돌덤부락

그 뒤 초가집

높은 토방 위

수놓은 원앙 한 쌍

唐彩에 행복 머문다

어릴 적 꿈은

지붕 위 별 속에

아아

거기!

 

 

 

검은 방

김지하

 

밤마다

앞뒤 좌우 다 끊고

 

검은 방

든다

 

들숨 날숨

기억도 희망도

 

한가닥 남겨진 자존과

오랜 죄의식마저도 아예

멀리 끊어 흩어버리고 밤마다

 

검은 방

든다

 

캄캄한 어둠 저편에

희미한

영신들 널뛰는 소리

 

뼈마디 우둑이고

온몸 뒤틀리고

뒤트는 옥돌 신음소리 신음소리

 

밤새워 앓던 나

내 속의 나

()인가 되살아나

새 몸뚱이로 되살아나

이윽고

방을 나선다

 

어둠속 아득한 곳

나를 이끄는

반딧불 같은

난초잎 서걱임 같은

아내의

작고 희미한

웃음소리 단 한번

 

그리고

누군가의 나직한 목소리

'당신을 아직은 살려두리니

가루가 되도록 일을 하시오

모심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걸으시도록!'

 

그리하여

다 끊고

이젠 밤마다

검은 방

든다.

 

 

 

겨울

김지하

 

내 마음 여위어

겨울나무 같아라

 

잿빛 구름 함께

까마귀도 와 앉거라

 

바람 소리 가깝고

번개 치리

 

번개 속에

숨었던 옛일 하나

비춰나리

 

땅속 스치는

희미한 노랫소리

그림자 하나 흔들림

 

거기

무서운 기별

 

봄 오리라.

 

 

 

겨울 거울

김지하

 

1

노을 사그라져

밤하늘

 

둥실 떴다 달님아

 

온몸에 돋아오는

새파란 별자리

 

옷 갈아입고

경루 뜨락에 눕는다

 

마주 우러른 북두

내 모든 허물 함께 눕는다.

 

 

2

설운 것이 역사다

두려운 것 역사다

두려워도 피할 수 없는 것 역사

아하

그 역사의

잔설 위에 서서 오늘밤

별밭을 우러르며

역사로부터 우주를 보고

우주로부터 역사를 보고

잔설 위에 깔린

아리따운 별밭을 또 보고.

 

 

3

대흥사 동백은

날 위해 피었는가

 

대흥사 동백 위해

내 가슴속 피멍 여기 피었는가

 

모든 것 다 잃었는데

사슬소리는 여전히 거느리고

 

피안교 건너가는 내게

동백이 오네

 

붉은 붉은 꽃사슬 두른

동백숲이 내게 오네

 

맵디매운

 

동백꽃 떨기들

피안교 너머 내게로 밀려오네

 

 

4

해는 중천인데

닭 울음소리

 

햇살 거느리고

잠 속으로 깊이 빠질수록

자본과 자본론에 묶여

헤어나지 못하는

이 잠 속에

낮닭 울음소리

 

해는 중천인데

요란한 닭 울음소리

 

 

5

내가

나 같질 않다

 

경루 보리 푸름에도 낮닭 울음에도

놀라지 않고

 

오늘 십오일

싸이렌 소리에도 끄떡없이

먹먹한 내가

도무지 나 같질 않다

 

울뚤목 소용돌이는

날 불러 일어서라 외치고

우수영 끝단네 가재미회는

술 마시자 술 마시자 손짓해도

 

바람만 드세게

내 속을 뚫고 갈 뿐

 

내가 영영

나 같질 않는 진도대교 오후

 

모두가 그저

검거나

흴 뿐.

 

 

6

아침에

저녁을 배운다

대낮에는

밤을 배우고

겨울이면 여름을 배운다

 

배운다

겨울 보리 여름에 먹고

여름 쌀 겨울에 먹는 것

천지 이치를 배운다

 

새벽 샘물 길러 가는 날마다

아침 학교에서 배운다

이차저차하는 모든 삶

줏대를 배운다

요즈막 내 공부다.

 

 

7

천리향도 시들고

동백도 자취없다

 

가슴은 마당 복판에서 두근거리고

발은 이미 문을 나선다

 

현수막 현수막

찢긴 포스터들 어지러운데

 

홀로 샘물 길러 간다

내일 마실 물.

 

 

8

쪽빛이

가슴 찌르는 비수인 걸

난 미처 몰랐지

 

은은한 옥색 그리

독살스런 빛인 걸

미처 몰랐지

 

애살스러워

애살스러워

그렇게만 좋아하다

가슴 이리 찢길 줄

난 미처 몰랐지.

 

 

9

내가 가도

애는 낳고 갈란다

 

가긴 가도

우황 한 웅큼은 두고 갈란다

 

허망하고

서러워도 갈란다

웃음 두고 가

 

아침 내내 쏟아질 소낙비 없으니

죽건 살건 웃을란다

 

웃어

원 씻김

웃어

한 씻김

웃어 척진 것 모두 다 씻고

 

죽고 낳는 것 매한가지

다시래기 다시래기

웃고 갈란다

다시래기.

 

 

 

겨울 시편

김지하

 

내 마음 깊이가

겨울 바다 같아라

 

아파트 사이

아스팔트 위에

길게 끌린 내 그림자

하늘 닿아라

 

눈 덮인 산속에 갇혀

잠이 든 나의 친구

설화 지는 소리에

내 꿈 꾸어라

 

내 몸 솔 같고

지금 여기 나

그래

무궁이어라.

 

 

 

겨울에

김지하

 

마음 산란하여

문을 여니

 

흰눈 가득한데

푸른 대가 겨울 견디네

 

사나운 짐승도 상처받으면

굴 속에 내내 웅크리는 법

 

아아

아직 한참 멀었다

 

마음만 열고

문은 닫아라.

 

 

 

결별

김지하

 

잘 있거라 잘 있거라

은빛 반짝이는 낮은 구릉을 따라

움직이는 숲그늘 춤추는 꽃들을 따라

멀어져가는 도시여

피투성이 내 청춘을 묻고 온 도시

잘 있거라

낮게 기운 판잣집

무너져 앉은 울타리마다

바람은 끝없이 펄럭거린다

황토에 찢긴 햇살들이 소리지른다

그 무엇으로도 부실 수 없는 침묵이

가득 찬 저 웨침들을 짓누르고

가슴엔 나직히 타는 통곡

닳아빠진 작업복 속에 구겨진 육신 속에 나직히 타는

이 오래고 오랜 통곡

끌 수 없는 통곡

잊음도 죽음도 끌 수 없는 이 설움의 새파란 불길

하루도 술 없이는 잠들 수 없었고

하루도 싸움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삶은 수치였다 모멸이었다 죽을 수도 없었다

남김없이 불사르고 떠나갈 대륙마저 없었다

웨치고 웨치고

짓밟히고 짓밟히고

마지막 남은 한줌의

청춘의 자랑마저 갈래갈래 찢기고

아편을 찔리운 채

무거운 낙인 아래 이윽고 잠들었다

눈빛마저 애잔한 양떼로 바뀌었다

고개를 숙여

내 초라한 그림자에 이별을 고하고

눈을 들어 이제는 차라리 낯선 곳

마을과 숲과 시뻘건 대지를 눈물로 입맞춘다

온몸을 내던져 싸워야 할 대지의 내일의

저 벌거벗은 고통들을 끌어안는다

미친 반역의 가슴 가득가득히 안겨오는 고향이여

짙은 짙은 흙 냄새여 가슴 가득히

사랑하는 사람들 아아 가장 척박한 땅에

가장 의연히 버티어 선 사람들

이제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금 피투성이 쓰라린 긴 세월을

굳게 굳게 껴안으리라 잘 있거라

키 큰 미루나무 달리는 외줄기

눈부신 황톳길 따라 움직이는 숲그늘 따라

멀어져가는 도시여

잘 있거라 잘 있거라.

 

 

 

결핍

김지하

 

 

 

쥐었다 폈다

두 손을 매일 움직이는 건

벽 위에 허공에 마룻장에 자꾸만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대구 그려쌓는 건

알겠니

애린

무엇이든 동그랗고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무엇이든 가볍고 밝고 작고 해맑은

, 풍선, 비눗방울, 능금, 은행, , 수국, 함박, 수박, 참외, 솜사탕, 뭉게구름, 고양이 허리, 애기 턱, 아가씨들 엉덩이, 하얀 옛 항아리, 그저 둥근 원

그리고

애린

네 작고 보드라운 젖가슴을 만지고 싶기 때문에.

찬 것

모난 것

딱딱한 것 녹슨 것

낡고 썩고 삭아지는 것뿐

이곳은 온통 그런 것들뿐

내 마음마저 녹슬고 모가 났어

애린

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조금씩 동그래져

애린

네 얼굴을 그릴 때마다

나는 조금씩 보드라워져

애린

네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조금씩 해맑아져

애린

그러나 이제

아무리 부르려 해도

아무리 아무리 그리려 해도

떠올리려 해도

안돼

그게 안돼

모두 다 잘 안돼

쥐었다 폈다

두 손을 온종일 움직이는 건

벽 위에 허공에 마룻장에 자꾸만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대구 그려쌓는 건

알겠니

애린.

 

 

 

고무공

김지하

 

옛사랑이었다

옛사랑의 거치른 숨결의 기억이 빗속으로

돌다리

떠내려가는 고무공

시뻘건 물에 배가 부풀어 죽어 시퍼런

어린애 시체 저 시체

떠내려가는 돌다리 빗속으로 오고

비 맞으며 저기서 기억이 오고

옛사랑이었다

빗줄기의 지루함

저 지루함

벗기고 벗길 수 없는 넋 속에 깊이 마지막

남은 한 오리 수치의 마지막까지 벗기고

와버렸다 비 맞으며 술집에서 잊고

와버려 잊고 있었다

돌다리 아무도 맞지 않는 새벽비 속의 이 수유리

미친 여울소리로 우는 어린애 시체 위에 저 시체

아아 저 위에 버틴 내 두 다리 위에

내 일자리 위에 버틴 내 얼굴 위에 개새끼 토해 버린다

창자까지 똥물까지 핏덩이까지 개 같은 새끼

, , 옛사랑이었다

거치른 여자의 숨결을 기억 빗속으로 돌다리

 

 

 

고사목

김지하

 

고목에 기대 서서

고목을 생각하자

고목에 기대 서서만

고목을 생각하자

고목에 기대 설 때만

고목을 생각하자

불타 죽은 나무

나무의 혼을.

 

 

 

공경

김지하

 

미류나무 위는

하늘

하늘 끝은

미류나무

 

높은 데 올라서야

산 높은 것을 아는 법

 

내 가슴이여

여인을 보고

어린이 앞에

뛰어라

가슴이여

 

우주의 삭이

사방에 산다

 

사랑은

공경

높여야

흐르는 법

 

 

 

광제국(광제국)에서 한낮에

김지하

 

날개 피 묻은

나비 한 마리

내내 눈가에 날더니

텅 빈 광제국

좁은 방안 들어서자

없다

 

없다

구릿골에서 온다는,

물 많은 금평못

우주의 자궁에서 온다는,

와서

입으로 뇌수의 피고름 빨아

인류를 모두 구할

 

큰 제비 온다는 봄소식

아예 자취 없다

 

아아

오고 오지 않는

율려의 세월이여

 

나비도 제비도 아닌

후천 여인의 신풍류여

 

잠시 못가에 서서

모악을 바라보니

 

기이한 기이한 시간을 날아 저기로

나비가 간다

날며

사라져 가

그마저 자취 없다

 

봄 한낮 구릿골

광제국 앞 텅 빈 뜨락에서

무 기미한 내 스스로의

그늘을 두고 생각한다

 

방금의 나비는

현실인가

환상인가

누군가 이제 맞이할

 

새봄의 예감인가

죽음의

기인 긴 죽음의

불길한 조짐인가

 

대답은

여기 지금

없다.

 

 

 

구구

김지하

 

주먹구구로 살아왔네

아직도 서투른 구구

 

구구라면 무슨

비둘기 울음인가

 

아직도

내 어깨엔

내려앉지 않는

비둘기

 

당연하지만

서운한

구구

 

구구는 여전히

팔십일구초당(八十一鷗草堂)

 

 

 

그 소, 애린

김지하

 

1

단 한 번 울고 가

자취 없는 새

그리도 가슴 설렐 줄이야

단 한 순간 빛났다

사라져가는 아침빛이며

눈부신 그 이슬

그리도 가슴 벅찰 줄이야

한때

내 너를 단 하루뿐

단 한 시간뿐

진실되이 사랑하지 않았건만

이리도 긴 세월

내 마음 길 양식으로 남을 줄이야

애린

두 눈도 두 손 다 잘리고

이젠 두 발 모두 잘려 없는 쓰레기

이 쓰레기에서 돋는 것

분홍빛 새살로 무심결 돋아오는

애린

애린

애린아.

 

 

4

외롭다

이 말 한 마디

하기도 퍽은 어렵더라만

이제는 하마

크게

허공에 하마

외롭다

 

가슴을 쓸고 가는 빗살

빗살 사이로 언듯언듯 났다 저무는

가느란 햇살들이 얕게 얕게

지난날들 스쳐 지날수록

얕을수록

쓰리다

 

입 있어도

말 건넬 이 이 세상엔 이미 없고

주먹 쥐어보나

아무것도 이젠 쥐어질 것 없는

그리움마저 끊어진 자리

밤비는 내리는데

 

소경 피리소리 한 자락

이리 외롭다

 

 

6

아내는 이미 오래전부터

날 우습게 알기 시작했고

아이들마저 이제는

말대답이 느리다

아무런 노여움도 슬픔도 없이

머얼건 애들 눈자위 건너다보는

내 눈자위에 걸린 머얼건

저 낮달

한낮 이 머얼건 쪼각달.

 

 

8

버들잎 타고

천리를 흘러와

무에 좋아서 이러는가

어쩌다 스스로 또 귀양살인가

차차 눈 침침해가는 이 나이에

해남 남동 남녘 끝까지 흘러 흘러와.

 

 

9

두 달을 간신히 넘기고

술 끊기 석 달째로 막 접어든

아침 산책길

찌그러진 구멍가게 유리문에 붙어

너덜대는 서투른 먹글씨 하나

'막걸리 팜이다'

 

파계!

초봄 옅푸른 저 하늘빛에 또 파계!

 

 

11

이마 위에

햇빛이 무겁구나

뺨에 스치는 바람은 칼

짓이겨진 갈갈이 찢긴 피투성이

내 얼굴이 대문을 열고

내게 천천히 다가오다

문득 멈춰 서는 오후

수도꼭지에서 한 방울씩 천천히

물 떨어지는 소리

 

 

12

눈보라 치다 볕들다

진눈깨비 몰아치다 소나기 퍼붓다

서풍은 끝간 데 없이 휘몰아치다

세상은 문득 적막

 

아니다 얘야

널더러 굽히란 말 아니다

너 하나 바라고 사는 이 어미

어찌하면 좋으냐고 묻는다 얘야

가르쳐다오 얘야 부디

내게 가르쳐다오

 

꽃샘철

잠시 한낮 세상은 적막

담 넘어오는 희미한 목소리 희미한 흐느낌

일찍 핀 매화 봉오리 가지째 찢어져

눈밭에 누워버린

누워 속절없이 시들어가는 꽃샘철

세상은 문득 적막

내 마음 눈보라 치다 볕들다

진눈깨비 몰아치다 소나기 퍼붓다

서풍은 끝 간 데 없이 휘몰아치다.

 

 

16

황매꽃 피는 사월 밤

가까이서 잎새 지는 소리

잔바람 나직이 스쳐 지나고

가까이서 누군가

숨죽여 내쉬는 한숨 소리

어두운 방에 누워

팔 뻗어 찾는 물주전자

손끝에 와 닿는 차가움

가까이서 가까이서

꽃몽올 하나 지는 소리

수첩 속에 적힌

깨알 같은 몇 줄 짧은 글귀들

불붙어 화안히 천정에서 스러지고

내일 다시는 해가 뜨지 않으리

무너져 내리는 마음

밑 모를 어둠으로 한없이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

가까이서 문득 멈춰 서는

발자욱 소리.

 

 

22

온종일 난초

허리는 굽고 다리는 펼 수 없고

눈은 차차 침침해지는데

온종일 난초 또 난초

 

가슴속 위아래 좌우 함부로 불던

바람도 그쳐 이젠 기척 없고

노을 무렵 이윽고

잎새도 마저 자취 없고

땅에 기울어 시드는 꽃대

오월 가까운 초저녁 꿈속을

문득 배회하는 아득한 향기

흰 종이 위에 멈춰 소리 없는 몇 방울의 먹.

 

 

24

새는 어떻게 만들지요?

나무는 언제 만들었지요?

흙은 무얼 먹고 살지요?

물은 어디서 왔지요?

고양이는 왜 노랗지요?

하늘은 왜 파랗지요?

바다는 왜 움직이지요?

나는 누가 만들었지요?

끝없는 막내놈 물음에

꽁무니 빼기 바쁜 나날

신이여

이것을 행복이라 합니까?

모든 당신의 일을?

 

 

25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나는 흙이요 나무요 벌레요 새요

성인 말씀 천만 아니요

무리 막내 세희놈 며칠 전 가라사대요

그리고 이 몸은 왈

팔불출이요.

 

 

32

대낮에

마당 복판에 갑자기

참새 한 마리 뚝 떨어져

머리 피투성이로 파닥이다 파닥이다

금세 죽어 숨진다

아내가 부삽으로 흙에 파묻고

장터 가려는 내 길 막고 서서

몸 부르르 떤다

 

 

34

마루 밑은 들여다볼수록 컴컴하다

열 길 물속보다 더 알 수 없는 사람 속

더우기 내 속 그 속속에 있는 네 속

안팎 본디 없는데 자꾸 이러니 병일지?

 

 

38

그 개울 어찌 건넜을까 만취했는데

그 한길 어찌 건넜을까 차 복잡한 그 길

이마고 코끝이고 광대뼈까지 다 쓸켰는데

한밤중 집까지는 어찌어찌 온 것일까

옛날 어렸을 적에 본 것모냥

사람 죽으면 그 식솔이 지붕에 올라

망자 헌 옷가지 흔들며 돌아오라고

세 번 크게 소리쳤던 것모냥

머리 위 숨구멍에서 하얀 혼백이 떠올라

허공중 둥둥 떠가던 그 쩍 꿈결모냥

무슨 넋 따로 있어 집 찾아냈을까

그것 있다면

지금 내게 오소

있다면

이 시국 속에 얼른 오소.

 

 

45

풀 끝

흰 이슬에서만 아니라

시드는 춘란 잎새에서도

파릇파릇한 상치싹만 아닌

흩어진 겹동백 저 지저분한 죽음에서도

외로운 겨울 햇빛처럼

작게 반짝이는

네 눈

애린의 눈

천둥 아직 들리지 않는 뭉글대는

태풍구름 속 번뜩이는

빈 눈.

 

 

47

영암 월출산을 지날 땐 반드시

고개를 돌린다만 어느 놈처럼

부채로 얼굴 가리는 건 아니다

악산이어서 사람 많이 죽어서 흉산이어서

끔찍해서가 아니다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운명 앞에 눈물 보이지 않으려는 것뿐.

 

 

50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 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 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

 

 

 

그때

김지하

 

내 귓속에

한 사람

얼굴 없는 사람이 앉아

귀 기울이고 있다

 

벌 소리일까

톱날 켜는 소리일까

 

어제와 오늘 그리고 똑같은 내일

지루한 지옥의 삶

내 귓속에

 

어릴 적 내가 앉아

울고 있다

 

엄마를 기다리는 걸까

아빠를 기다리는 걸까

 

산은 거꾸로

눈물 젖은 눈에 비치어

 

환상의 시작이었다

이 지루한 지옥의 삶의 아련한

 

시작,

내 어린 날

그때.

 

 

 

근원으로 돌아가다

김지하

 

다시 돌아올 걸 공연히 떠났구나

차라리 눈멀고 귀먹었던들

집 앞의 좋은 경치 왜 못 봤던고

물은 절로 흘러가고 꽃은 절로 피었네

 

 

 

금산사(金山寺) 밤 뜨락에서

김지하

 

어미산 아래는

금산사

제비산 앞에는 금평못,

우주의 음부 곁에 우뚝 섰구나

미륵이 섰다

한밤

뜨락에 나서

달빛 속의 산

저 꼭대기에 깊이 박힌

쇠를 뽑으라 뽑으라

기도할 때

내 기도할 때

댓잎은 우수수 바람에 지고

어디서 여자 울음소리

내내 들려라

여기가

진표와 진훤의 삼한 미륵땅

여기가

정여립의 대동계 미륵땅

여기가

갑오동학과

강증산의 큰 율려

큰 황극의 후천 미륵땅

또한

高首婦의 땅 母嶽이니

신발을 벗고

조심조심 마루 올라라

금평물이

원평으로 콸콸콸 쏟아져라

미륵은 한순간,

이윽고

여자의 때가 되었으니

내 이제

다 마쳤구나

달은 검은 숲속에 잦아들고

내 넋은 이내 깊은 잠에 든다

아아

눈부신 황금이여

빛나는 금산이여

댓잎은 우수수 바람에 지고.

 

 

 

기다렸으나

김지하

 

기다렸으나

먼지 낀 밤하늘에

별은 뜨지 않고

남쪽으로 가는

비행기 불빛만 지나간다

 

기다렸으나

꿈꾸는 나무 그림자

자동차 불빛 끝에 사라지고

 

기다렸으나

장마가 오는데도

맹꽁이 울음소리

들리지 않고

 

기다렸으나

기다렸으나

 

밤 산책길에 흰머리 노인

오늘은 웬일로 오질 않는다

 

여름날 밤 아홉 시

목동 아파트

홀로 서서

내내 기다리고 또 기다렸으나.

 

 

 

기마상(騎馬像)

김지하

 

살아 있는 힘의 동결

살아 있는 민중의 거센 힘의 동결,

전진하는 싸움의 동결

빛나는 근육의 파도와

쏟아져 흐르는 땀의 눈부심과

외침과 쇳소리들의 동결

뜨거운 대낮의 햇빛 아래서의 동결,

표정과 노여움과 용기의 동결

사랑의 동결,

부재(不在), 꽉 찬 부재(不在),

그러나 동결은 나이를 먹는다

기마상이 금이 가듯이

동결은 늙어 어린이처럼 부드러워진다

다시금 움직이려 한다

굳게 다문 입술에 미소가 번진다

육체의 이 살아 있는 육체의 기쁨이 샘솟는다

소리가 시작되려고 한다

말은 울려고 한다

발굽이 움직인다

말갈기가 움직인다

아아 그러나 햇빛 탓인가

더욱 강렬한 저 햇빛 탓인가?

바람 탓인가?

훈훈한 사()월의 바람 탓인가?

착각이었던가?

 

 

 

김지하

 

길에서

조금

벗어나고 싶다

 

가득 찬 길

뻔한 길

화살 같은 길

 

길가

가로수 그늘

찻집이나 골목 어디

 

서성이고 싶다

더듬어

낯선 집 찾아가고 싶다

 

아직도 들리는

가위 소리

 

지금도 흐르는

물소리

 

달리는 차창

서늘한 유리에 가져다

고개 기댄다

 

길은

아무래도

내 길이 아닌가 보다.

 

 

 

꼭둑각시

김지하

 

나팔소리 북소리

북소리 나팔소리

줄에 매달려

줄에 매달려

줄 잡아다리는 대로

줄 잡아다리는 대로

나는 각시요 꼭둑각시요

새벽부터 밤까지 밤부터 새벽까지

 

떨어지는 나락

밑으로 밑으로 떨어질수록 떨어질수록

나는 복수의, 피비린 복수의 꿈속으로

드높이 치솟는다

마치

핏방울처럼

나를 묶은 줄이 더 팽팽하고 팽팽하고

내가 더 기막히게 기막히게

춤출수록 줄은 더

팽팽하고 기막히게 팽팽하고

드디어 기막히게

끊어져버린다

대잡이는

허공을 본다

 

중간에 골고루 흐르는 물 따위는

아랑곳없다 높은 것, 낮은 것

둘밖에 없다

그렇다

네가 높으면 나는 낮아지고

내가 높으면 너는 저 밑바닥

 

밑바닥이다

대잡이여

장바닥에서 목쉬도록 영원히 노래 부른다

바람이 불고 별은 성글고 사람들은 흩어진다 노을이 탄다

나팔소리 북소리

북소리 나팔소리

줄에 메달려

오르락내리락

줄에 매달려

줄에 매달려

 

 

 

꽃그늘

김지하

 

이제야 그늘 속에

 

핀다

 

꽃과 그늘 사이

언젯적부터인가

그 긴장은

 

이제야

짧은 행간에

웬 무늬 무늬 드러나

흰 무늬들

속의 속

흐드러 진다

 

내 삶의

 

여기

청도 각북골에 와

엎드린 한 새벽에 흘러

흘러 넘치며 아롱거리는

샘물 속

 

그늘.

 

 

 

꿈결의 시()

김지하

 

1

거북이는 집 뒤에서 인사를 하고

한 마리 개를 잡아

나라 위한 전쟁에 참여하도다

칼은 무디고

개는 거름이 되어

한 밭 모란을 가꿔내도다

여름이 오기 전에

전쟁이 끝나기 전에

참전비를 뽑고

문득 모란밭에 자결하도다.

 

 

2

환란의 여름은 열도(列島)에서 그치고

갯비린내 흰 이마에 남았다

게 같은 여인을 사랑한다

늪에 빠진 이 가을

젊음이 빠져나간 게 껍질에

바람 소리와 눈물 자국을 찾아

북녘에 있는 그대에게

글발하고저.

 

 

 

김지하

 

기다림밖엔

그 무엇도 남김 없는 세월이여

끝없는 끝들이여

말없는 가없는 모습도 없는

수렁 깊이 두 발을 묻고 하늘이여

하늘이여

외쳐 부르는 이 기나긴 소리의 끝

연꽃으로도 피어 못 날 이 서투른 몸부림의 끝

못 믿을 돌덩이나마 하나

죽기 전엔 디뎌보마

죽기 전엔

 

꿈없는 네 하얀 살결에나마 기어이

불길한 꿈 하나는 남기고 가마

바람도 소리도 빛도 없는 세월이여 기다림밖엔

남김 없는 죽음이 죽음에서 일어서는

외침의 칼날을 기다림밖엔

끝없는 끝들이여

모든 끝들이여 잠자는 끝들이여

죽기 전엔 기어이

결별의 글 한 줄은 써두고 가마

 

 

 

나 한때

김지하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해 스치는 세포마다

말들 태어나

온 우주가 노래 노래부르고

 

잎새는 새들 속에

또 물방울 속에

가없는 시간의 무늬 그리며

나 태어난다고

끊임없이 노래부르고 노래부른다

 

지금도

신실하고 웅숭스런

무궁한 나의 삶

 

내 귓속에

내 핏줄 속에 울리는

우주의 시간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잊었는가

잎새가 나를 먹이고

물방울이 나를 키우고

새들이 나를 기르는 것

 

잊었는가

오늘도

잎새 속에서

뚫어져라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는 것.

 

 

 

나그네

김지하

 

길 너머

저편에

아무것도 없다

 

가야 한다

나그네는 가는 것

길에서 죽는 것

 

길 너머

저편에

고향 없다

 

내 고향은

끝없는 하얀 길

 

길가에 한 송이

씀바귀

피었다.

 

 

 

나이

김지하

 

바람은 퐁덩퐁덩 불고

햇볕은 사뭇 초봄인데

매지리 못가에 앉으니

괴로움도 기쁨도 자취 없고

파문 자취만 물 위에 남는다

이울어진 함석집 한 귀퉁이

늦은 탈곡이 한창인데

나는 항상 구경꾼

나는 항상 여행자

내 속에서도 늦은 탈곡이 한창인데.

 

 

 

나팔소리

김지하

 

가슴에

개 짖는 소리 붉게 녹슬고

노을은

차디차게

서편으로 스러져가고

단 한마디

가난한 벗에게

빈 약속조차 지키지 못한 채

손목에 패인 사슬자욱 자취 감추고

남은 것은 기인 긴

비린내나는 회한

 

밤과 다시 마주 서

창살을 잡고 이마를 때리고

아득한 아이들의 노랫소리, 외치는 아낙들의

목쉰 생활의 소리 칼이 되어

온몸을 찢어 가르고

아아

피투성이 된 피투성이 된

묶인 나와 마주 서라고

마주 서 밤새워 몸부림치라고

미쳐 죽도록 피 끓이라고

저렇게 한없이 취침나팔은 울리고

밤하늘은 탄식처럼 푸르러만 가고 깊어만 가고

 

 

 

나 한때

김지하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해 스치는 세포마다

말들 태어나

온 우주가 노래 노래 부르고

 

잎새는 새들 속에

또 물방울 속에

가없는 시간의 무늬 그리며

나 태어난다고

끊임없이 노래 부르고 노래 부른다

 

지금도

신실하고 웅숭스런

무궁한 나의 삶

 

내 귓속에

내 핏줄 속에 울리는

우주의 시간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잊었는가

잎새가 나를 먹이고

물방울이 나를 키우고

새들이 나를 기르는 것

 

잊었는가

오늘도

잎새 속에서

 

뚫어져라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는 것.

 

 

 

남쪽으로

김지하

 

외로움 속에

떠오르는 나무 한 그루

 

가지마다

북쪽 바람이 감겨

 

기우는 내 마음

남쪽으로 간다

 

검은 흙

파릇한 보리 싹

 

동백 한 송이

새빨간

 

새빨간

겨울 바다

 

기우는 내 마음

남쪽으로 간다.

 

 

 

남한강에서

김지하

 

덧없는

이 한때

남김없는 짤막한 시간

머언 산과 산

아득한 곳 불빛 켜질 때

 

둘러봐도 가까운 곳 어디에도

인기척 없고 어스름만 짙어갈 때

오느냐

이 시간에 애린아

 

내 흐르는 눈물

그 눈물 속으로

내 내쉬는 탄식

그 탄식 속으로

네 넋이 오느냐 저녁놀 타고

 

어둑한 하늘에 가득한 네 얼굴

이 시간에만 오느냐

남김없는 시간

 

머지않아 외투깃을 여미고

나는 추위에 떨며 낯선 여인숙을

찾아 나설 게다

 

먼 곳에 불빛 켜져 주위는

더욱 캄캄해지는 시간

이 시간에만 오느냐

짤막한 덧없는 남김없는

이 한때를

애린

 

노을진 겨울 강 얼음판 위를

천천히 한 소년이

이리로 오고 있다.

 

 

 

낯선 희망

김지하

 

내리는 비를 타고

한없이 내려라

 

증발의 날을

기다림도 없이

 

내려라

내림 속에 떠오르는

 

첫 무지개

 

태양도 없이 떠오르는

비 오는 날의

낯선

낯선 희망.

 

 

 

내 땅

김지하

 

진리는 서편 하늘에

노을처럼 빛나고

 

나는 여기

마른나무 되어 가지 못한다

 

내 땅이여

 

더는 물 흐르지 않고

물속의 푸른 별 비취지 않고

 

저벅저벅

소리내 다가오는

털 돋는 이빨의 그림자들

 

땅이여

 

내 가지 내가 꺾어

숟가락 싸들고

남으로 가리

 

묻으러

가리

 

못 가는 내 땅이여.

 

 

 

내가 나에게

김지하

 

내가

나에게 말합니다

 

혼자 가세요

 

바다가 빛납니다

 

거기

혼자 가세요

 

고요한 복판의 한

거기서 들끓는 화요일의 혁명들

 

이젠

혼자 가세요

 

바람도 불고

구름도 흐릅니다

그림자들은 나날이

짙어집니다

 

그 속을 이제는 혼자

오직 혼자서만 가세요

 

아무도

가까이 없습니다

돌아보지 마세요

 

바다가 빛납니다

 

거기

혼자 가세요.

 

내가

나에게 말합니다

 

부디

혼자 가세요.

 

 

 

내년 봄엔

김지하

 

이마 위에

흰 별을 이고

 

두 팔 허공에 벌리고

 

두 다리 대지에 깊이 묻었다

 

마시는 물 썩었고

마시는 공기 썩었고

 

새들도 멀어지고 가을이 와도

열매 맺지 않는다

 

내년 봄엔

꽃이 피랴

 

내년 봄엔

꽃인들 피랴.

 

 

 

노여움

김지하

 

행복 같은 것

저리 가고

야망 같은 것

저리 멀리 비켜서라

 

질병 좌절 같은 것

다 거느리고

찬바람 앞에 우뚝 선다.

 

 

 

노을 무렵

김지하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행길 저기서

아이들과 함께 공받기 하는 내 속에

담배 피우며 신문 읽고 있는

내 속에 노을 무렵에

되똥거리는 빛나는 재잘거리는

,참새,붉은 구름,사철나무 스쳐

지나는 바람,머언 거리의 노랫소리

노랫소리 속에

나와 함께 공받기 하는 아이들 속에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우리 집에 문득

불켜질 때 나는 다시 혼자다

오늘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자.

 

 

 

녹두꽃

김지하

 

빈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 소리 사라져버린 밤은 끝없고

끝없이 혀는 짤리어 굳고 굳고

굳은 벽 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

타네

불타네

녹두꽃 타네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횃불 아래

횃불이여 그슬러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뜩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녹슨 기관차 가득히 꽃을

김지하

 

당신이 내게 올 수 있다면

고원에 만발한 한아름 나리꽃 안고 산철쭉도 안고

그보다도 더 아리따운

환한 웃음 안고 내게 올 수 있다면

내가 나가 반겨

당신이 아닌 당신 몸이 아닌

당신의 꽃들과 웃음을 껴안고 눈물 흘릴 수 있다면

내가 이렇게

원주에서 해남으로 해남에서 원주로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오락가락할 이유가 없겠지

낡아빠진 석탄 차

녹슬은 기관차

지금은 국민학생들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차

그 차

휴전선에 잘린 경의선

경의선 화통

그것을 타고 내가 당신에게 갈 수 있다면

그 기관차를

새파란 동백잎, 빛나는 유자 무더기,

 

향기 짙은 치자꽃으로 무화과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

그리고 못난 내 얼굴에라도

함박꽃 같은 달덩이 같은 째진 웃음지어 만나고 싶다

나 오늘 눈 내리는 원주 거리에 다시 서서

다시금 남쪽으로 돌아갈 자리에 서서

거리를 질주하는 영업용 택시를 보며

경의선 끊어진 철로 위에

홀로 남겨진 기관차 속에 홀로 남을

민족의 외로움을 생각하며

소주 한 잔을 국토 위에 붓는다

아 아 꽃들이여

너희들의 영광은 언제 오려는가.

 

 

 

눈 내릴 때면

김지하

 

이리 눈 내릴 때면

여기면 여기고 저기면 저기지요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렇게 안 부를 도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당신 당신이지요

너 이제 동백 함께 삽니다

나 이제 사철 함께 삽니다

내일 내 소식 들으세요

 

 

 

눈빛은 눈빛에게 말한다

김지하

 

이제 아무도 거리에 없고

가득 찬 군중 속에 사람은 없고

눈 빛과 눈 빛만이

가끔 부딪칠 뿐

그들은 누굴까

그 눈빛은 무엇을 암호하는 것일까

의심할 필요도 없다

스쳐 지나라

너의 눈 속에

그 눈 빛은 남을 테니까

너의 의식 속에

그 암호는 남을 테니까

그것뿐

물결치는 군중 속에서

우리만이 선택받는 것이냐

아니다

모든 사람이 눈 빛을 빛내고 있다

다만

네가

눈빛이 약해서

알아차리지 못할 뿐.

 

 

 

눈길

김지하

 

애틋한

고양이 울음소리에

샛노란 불방울이 달렸다

 

네 미소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달렸다

 

맵디매운 이월 매화여

 

벌거벗고

홀로 눈길 가리라.

 

 

 

눈물

김지하

 

잊었던 눈물

돌아온다

 

손 바래기보다

먼저 와 고갯마루 나선다

 

눈물이

밟힌 벌거지 기게 하고

가난한 이들 마음 서로 비비게 하고

기는 모습 비비는 모습 보고 또 보고 울고

 

돌아온다

눈물

 

와서는

막힌 내 가슴을 운다

 

아 얼마나 오랜 이별이냐

 

나는 살았다

미움마저도 고맙구나

 

마음 밑바닥 오늘

별 하나 뜨고

 

이 가난

복되다.

 

 

 

늙음

김지하

 

늙고 병드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

 

쓰린 후회는 닻

출항이 멀지 않다

 

그러매

죽음은 그저 한계일 뿐.

 

 

 

김지하

 

가랑잎 한 잎

마루 끝에 굴러들어도

님 오신다 하소서

 

개미 한 마리

마루 밑에 기어와도

님 오신다 하소서

 

넓은 세상 드넓은 우주

사람 짐승 풀 벌레

흙 물 공기 바람 태양과 달과 별이

다 함께 지어놓은 밥

 

아침저녁

밥그릇 앞에

모든 님 내게 오신다 하소서

 

손님 오시거든

마루 끝에서 문간까지

마음에 능라 비단도

널찍이 펼치소서.

 

 

 

다람쥐

김지하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자

나는 마산 병원에서 연금에서 풀려났고

유신 헌법이 공포되자

내겐 구속 영장이 다시 떨어졌다

그 이튿날

또 그 다음날

눈부신 가을 햇살 아래

온갖 빛깔 단풍이 병풍쳐 감아두른 곳

내설악 백담사 골짜기

백담 산장 곁 잡화 가게 앞뜰

동그란 다람쥐 상자 앞에 나는 서 있었다

서서 한나절을 보고 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을

한도 끝도 없이 쳇바퀴 도는 것을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는 건 아닐 게다

다람쥐는 지금 숲속의 제 삶을 찾아

한도 끝도 없이 죽을 힘으로 달릴 게다

그것을 가두어 놓고

그것을 쳇바퀴까지 달아 놓고

숲속의 제 삶을 찾아

한도 끝도 없이 죽을 힘으로 뛰어 달리는

다람쥐의 모습을

다람쥐의 숨가쁨을

다람쥐의 절망을

다람쥐의 몸부림을

사람들은 웃으며 과자를 씹으며

구경하고 있을 게다

우뚝우뚯 솟은 바위들마다

바위 속에 갇힌 온갖 광석들이 저녁 햇살에

갖은 빛깔로 반짝이며 단풍 숲과 어우러져

온 천지가 찬란한 숨결을 내뿜어

잠시 물질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는 시간

새들도 둥지로 돌아가려 어지럽게 우짖는 그 시간

나는 슬그머니 상자를 훔쳐들고 숲속 그늘에 들어가

상자를 깨뜨려 버리고 다람쥐를 놓아 주었다

다람쥐는 절름거리며 절름거리면서도

뒤도 안 돌아보고 숲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내 가슴에 깊은 절망만을 남기고

내 귓전에 용대리 쪽으로부터

눈빛 험한 사람들 들어오고 있다는

이대 산악반 쪽의 속삭임만 남기고

흰 운동화에 작대기 하나 짚고

허우적거리며 헐떡거리며 마등력을 넘어

속초로 강릉으로 원주로 서울로

기어이 마산 병원으로 다시 돌아간 나의

기흉 터져 수술실에 아주 누워 버린 나의

또 다시 기인 연금 속에 갇혀 버린 나의

비틀거리는 비틀거리는 저 발자국들만

외롭게 외롭게 뒤에 남기고.

 

 

 

단시(短詩)

김지하

 

1

끊으려면 잇는 법

아주 잊히기 위해

이리 우뚝 선다

이루지 못하고 가는 것이 사람이라

오늘

진지하게

죽음을 한번 생각한다.

 

 

2

내 가슴에 달이 들어

내 가난한 가슴에

보름달이 들어

고층 아파트 사이사이를

산책 가는 내 가슴에

가을달이 들어.

 

 

3

감기 들린 작은놈 콜록 소리

내 가슴에 천둥 치는 소리

손에 끼었던 담배

저절로 떨어지고

춥다

그리고 덥다.

 

 

4

진종일 바람 불고

바람 속에 꽃 피고

꽃 속에 내 그리움 피어

세계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데

내 어쩌다 먼 산 바라

여기에 굳어 돌이 되었나.

 

 

5

창 너머

내가 늘 바라다보는

감나무 한 그루에

감꽃이 숱하게 피었다

 

보기만 해도 그런다

아직 어린데도 그런다

 

올겨울엔 감 실컷 먹고

똥구멍에 감타령 나겠다.

 

 

6

하 답답해

아내더러 이야기 좀 하자 했더니

아내는 대뜸

비겁하다고 지청구다.

 

 

 

달램

김지하

 

스산한 것

어디 마음뿐이랴

아프다

온몸이 여기저기

동백마저 얼어 시커먼 이 한때를

속절없이 달랠 뿐

밤이면

별바래기로 올려 달래고

나 또한 한 떨기 허공중에

별자리로 누워 내리 달래고.

 

 

 

당신의 피

김지하

 

만납시다

당신의 붉은 피

더운 입김 쟁쟁한 목소리 타던 눈빛 모두 다

흩어져 없어지고 뼈마져 삭아

이젠 남김없을 때 만나요

부용산 거기

붉은 흙구덩이 속 거기

칡뿌리 하늘로 울부짓던 거기

 

가슴 찍는 서러움

총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뒤따르던 발자욱소리 가슴 찍는 가슴 찍는

매질에도 만나요

솔내나는 새뿕은 당신의 피

 

아아 잠든 애기의 미소에도 있었으니까

숨죽여 부르던 노래에도 한숨에도 기인 밤과 밤에

당신은 있었으니까

피는 살아서

이토록 내 속에 미쳐 뜀뛰고 있었으니까

 

만나요 뼈 삭은 한 줌의 흙

마저 바람에 흩날렸어도 부용산 거기

붉은 황토 눈부신 삐비 패던 등성이 거기

만나 다시 흘러요

흘러

솔내나는 새뿕은 당신의 피

 

내 목숨 속에

흙 속에

누더기 채 잠이 든

애기들의 저 맑은 눈 속에

저 태양 속에

 

 

 

덕담 한마디

김지하

 

새해에는 빛 봐라

사방문 활짝 열어제쳐도

동지 섣달

어두운 가슴속에서 빛 봐라

샘물 넘쳐흘러라

아이들 싱싱하게 뛰놀고

동백잎 더욱 푸르러라

몰아치는 서북풍 속에서도

온통 벌거벗고 싱그레 웃어라

뚜벅뚜벅 새벽을 밟고 오는 빛 속에

내 가슴 사랑으로 가득차라

그 사랑 속에

죽었던 모든 이들 벌떡 알어서고

시들어가는 모든 목숨들

나름나름 빛 봐라

하나같이 똑 하나같이

생명 넘쳐흘러라

사방문 활짝 열어제쳐도

동지 섣달

어두운 가슴속에서

빛 봐라

빛 봐라

빛 봐라.

 

 

 

덧없이

김지하

 

덧없이 스러져간 벗들

잠들어 수치에 덮여 잠들어서 덧없이

한때는 미소짓던

한때는 울부짖던

좋았던 벗들

 

아아 못 돌아가리 못 돌아가리

저 방에 잠이 들면

시퍼렇게 시퍼렇게

미쳐 몸부림치지 않으면 다시는

바람 부는 거친 길

내 형제와

나그네로 두 번 다시는

 

 

 

()

김지하

 

몇 평 안 되는 아파트지만

홀로 앉아

세계를 굽어본다

'는 어디 있는고?'

'내 속에 도사렸다!'

'언제 풀리는고?'

'밖에 나서면!'

 

 

 

돌아가지 않겠다

김지하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

 

쓰라려도

여기 살겠다

 

거리의

소음 속에

희미하게 들리는

샘물 소리

 

뒷골목 응달에 부는

낮은 산바람

 

다만

네가 내게

손을

빈틈없이만 준다면

 

한 그루

가로수 아래

풀이 자랄 수만 있다면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

 

쓰라려도

지금 여기

애써 살겠다.

 

 

 

동동

김지하

 

등 한복판 거기

지랄해도 거기

내 손은 아무래도 거기서 거기

가려워도 비벼대도 동동 발 굴러도 아으

손톱 다 빠진 자네 손 따윈

어림없네 마누라

갈퀴를 주게

주게 차라리 피가 철철 흘러도 주게

옥수수, 깡탱이, 납작보리 포대론

유에쓰에이 마다리

새마을 곰방대

구멍숭숭 베잠방이론 어림없네

육실할 피가 철철 흘러도 동동

 

뭣이 좋다고 다롱디리만 하다 그저 곪아서 와장창

십년 등창이

만신창이냐 아으

가려운 데 아으

미치게 미치게 가려운 데 거기 거기 미치게

 

긁세나 북북 피가 터져 철철 흘러도 아으

빨대 달린 쉬파리 저 똥파리

삽짝 치고 와크르르 달려들기 전에 어서 주게

갈퀴를 줘 어서 아으

동동 다롱디리

 

 

 

동이

김지하

 

동이에 물을 붓는데

밑 빠진 동이에 물을 붓는데

밑에서 흐른 물이 발을 적시네.

 

 

 

동짓날

김지하

 

첫봄 잉태하던 동짓날 자시

거칠게 흩어지는 육신 속에서

샘물 소리 들려라

귀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샘물 소리 들려라

 

한 가지 희망에

팔만사천 가지 괴로움 걸고

 

지금도 밤이 되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날 뿐

 

아무것도 없고

샘물 흐르는 소리만

귀 기울여 귀 기울여 들어라.

 

 

 

되먹임

김지하

 

내 목숨은

아득타

별로부터 오셨으니

 

내 목숨은

가까이

흙으로부터 풀 나무 벌레와 새들 물고기들

내 이웃들로부터 오셨으니

 

죽고 싶어도

죽기 어려운 것

 

우주가 날 이끌고 있어

튕기고 이끌고 또 튕기고

 

살고 또 살아

갚아야 하리니

이 은혜를 갚아야

 

쪼그려 앉아 흙 위에 돌팍으로 쓴다

가슴팍에 깊이깊이 새기며 쓴다

 

'되먹임!'

 

 

 

두타산

김지하

 

쓸데없는 소리 말라

산이 산을 그리워하던가

된장이 된장을 그리워하던가

양파가 양파를 그리워하던가

쓸데없는 소리 말라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

 

이것은 절대 지상 철학이다

나는 이것을 두타산에서 배웠다

 

개새끼들!

 

 

 

둥글기 때문

김지하

 

거리에서

아이들 공놀이에 갑자기 뛰어들어

손으로 마구 공 주무르는 건

철부지여서가 아니야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골동상 유리창 느닷없이 깨뜨리고

옛 항아리 미친 듯 쓰다듬는 건

훔치려는 게 아니야

이것 봐, 자넨 몰라서 그래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노점상 좌판 위에 수북수북히 쌓아놓은

사과알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건

아니야

먹고 싶어서가 아니야

돈이 없어서가 아니야

모난 것, 모난 것에만 싸여 살아

둥근 데 허천이 난 내 눈에 그저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좁은 바지 차림 아가씨

뒷모습에 불현듯 걸음 바빠지는 건

맵시 좋아서가 아니야

반해서도 아니야

천만의 말씀

색골이어서는 더욱 절대 아니야

둥글기 때문

 

불룩한 젖가슴 도톰한 입술

새빨간 젖꼭지나 새빨간 연지

그 때문도 아니야

뚫어져라 끝내 마주 쳐다보는 건

모두 다 그건

딱딱한 데, 뾰족한 데 얻어맞고 찔려 산 내겐

환장하게 보드랍고 미치고 초치게

둥글기 때문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김지하

 

벌거벗은 내 생각의

새 뿌리가 자라는 곳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진종일 이마 위를

얇은 생각의 삽질만이 스쳐 가는 자리

가슴의 뜀질마저 나직나직한 자리

, 고름이 흘러

흘러 놀랄 때 놀라 깨어 외칠 때

나는 이미 옷이었다

횟대에 걸려 잠든 옷

 

눈초리는 눈초리대로

신문지는 신문지대로

소매 끝에 앞섶에 바지주름에 기어다니고

걷고 지껄이고

나빈 양

펄렁이는 옷

단 한 벌의 깨끗한 눈치 빠른 옷

 

땅거미가 지고

뒷짐을 지고

시뻘건 주둥이들 허옇게 웃는 뒷골목

가자 부산집으로

히히 웃으며 주물렁탕 하러 가자

나비들이 살풋 앉을 때

지분 냄새 콧가에 설핏 스칠 때

나는 이미 알몸이었다

주무르고 벗기고 악을 쓰고 빨고 핥고

나는 고름 담긴

술 한 잔의 고름

 

시궁창 속 얼굴이

달과 내 오줌에 맞아 깨어질 때

울다 칼부림하다 단 한 벌의 옷이 깨끗이

술값에 벗겨질 때

이마 깊이 찬바람이 와서 화살 되어 박힐 때

알몸에 알몸에 아아 고름이 흘러

벌거벗은 내 생각의

새 뿌리가 자라는 곳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들녘

김지하

 

무엇이 여기서

무너지고 있느냐

무엇이 저렇게 소리치고 있느냐

아름다운 바람의 저 흰 물결은 밀려와

뜨거운 흙을 적시는 한탄리 들녘

무엇이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느냐

 

참혹한 옛 싸움터의 꿈인 듯

햇살은 부르르 떨리고

하얗게 빛 바랜 돌무더기 위를

이윽고 몇 발의 총소리가 울려 간 뒤

바람은 나직히 속살거린다

그것은

늙은 산맥이 찢어지는 소리

그것은 허물어진 옛 성터에

미친 듯이 타오르는 붉은 산딸기와

꽃들의 웨침 소리

그것은 그리고

 

시드는 힘과 새로 피어오르는 모든 힘의

기인 싸움을 알리는 쇠나팔 소리

내 귓속에서

또 내 가슴속에서 울리는

피끓는 소리

 

잔잔하게

저녁 물살처럼 잔잔하게

붓꽃이 타오르는 빈 들녘에 서면

무엇인가 자꾸만 무너지는 소리

무엇인가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소리.

 

 

 

땅거미

김지하

 

하늘엔

해 없고

 

먼 곳 흰강물줄기 안 보인다

 

돌아가야 살 길

뛰어넘어야 숨쉴 틈

 

한 자리

 

타고 스며라 타고 스미듯

도리어

가야만이

 

산다

 

하늘엔

해 없고

 

먼 곳 흰강물줄기 안 보인다

 

 

 

또 남한강에서

김지하

 

춤추어라

애린

네 발끝 흰 눈부심 춤추어라

 

자작나무만 아니다

은사시나무 미류나무만 아니다

눈 내리는 겨울

모든 나무

모든 풀

돌마저도 하얗다 춤추어라

 

햇살

겨울 바람 없는 날 한낮

세상 온통 흰 햇살 속에 잠들 때

아아 흰빛

눈부시게 눈부시게 더욱 흰빛으로

애린

춤추어라

소복춤으로 흰빛을 딛고

얼음 사위로 얼음을 밟고

노을이 타도 새벽 푸르름이 와도

변함없는 흰빛

아아 흰빛

 

네 발끝 흰 눈부심으로 가볍게

흰빛을 딛고 춤추어라

애린

춤추어라

 

강가에 얼어붙은 겨울나무숲

배마저 얼어붙은

하얀 겨울강

그 얼음 위에

그 외로움 위에

춤추느냐 펄럭이는 옷자락

너 선혈아

사랑하는 애린

타오르는 타오르는

애잔한 노을

노을

내 애린의 얼굴.

 

 

 

김지하

 

똥 보면 베먹고 싶어

새벽 샘물

샘 뒤 어덩 위

산죽닢 스쳐 오는 바람을 마셔

동트는 분홍 산봉우리 흰 안개구름 마셔

똥만 보면 못 견디게 베먹고 싶어

내 몸이 곧 흙이어설 게야

흙이 똥을 마다 안함

오곡이 장차 가득가득히 익어 끝내는

열매 열리게 될 터이어설 게야

똥 속에서 배시시

애린이 웃어설 게야

꼭 그럴 게야.

 

 

 

마른번개의 날에

김지하

 

사람 없는 곳 골라 앉아

사람을 기다린다

 

예전엔 그렇지도 않더니

요즘엔 세월 흐르는 소리 들린다

 

흰 영산강으로 달을 베먹고

비녀산 위에서

별을 훔치던 때는 언제

 

사람 물결에 실려

자유를 외치던 때는 그 언제

 

천지가 내 집이나

머리 둘 곳마저 이제 없는 이 가슴

가슴속에 바람 한 오리 휘돌아

기인 하늘 저쪽에

마른번개가 한 번

또 한 번.

 

 

 

만남

김지하

 

밤이라도 이리 깊으면

밤이라 할 수 없겠지

 

앞길 뒷길 다 끊긴 곳에

 

문득 노여움처럼

난데없는 희망 한 오리

 

 

 

말씀

김지하

 

하는 일 없이 안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

출옥한 뒤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사람 자취 끊어진 헐벗은 산등성이

사철 그늘진 골짝에 엎드려 기며 살더라도

바위틈 사란 한 포기 품은 은은한 향기는

장바닥 뒷골목 시궁창 그려 하냥 설레노니

바람이 와 살랑거리거든 인색치 말고

먼 곳에라도 바람 따라 마저 그 향기 흩으라.

 

 

 

망향

김지하

 

내 마음에

복사꽃 피고

 

눈앞 가득히

무연한 봄 들판 펼쳐져

 

가랴

못 가랴

 

고삐 풀린 이 마음

방 안에서만 헤매는데.

 

 

 

매장

김지하

 

번개와 폭풍의 밤에

스물일곱 해의 굶주림의 곤혹에

가장 모질은 돌밭에 삽질을 한다

너는 그것을 원했다 빈손으로 일군 땅

네 피가 아직 더운 흙가슴의 모진 곳

좌절당한 반역의 이 불밭에 운명에

너를 묻기 위해

뜬눈의 주검

더없이 억센 뜬눈의 주검

염도 새끼줄도 관조차도 없다

네겐 한 권의 함석헌과 한 송이의 박꽃뿐

너는 그것을 원했다 황량한 옥금리 들녘

황토로 변하기를 너는 원했다

볕에 타고 거친 바람에 시달려

끝끝내 빛나기를, 끝끝내 흔들리기를

성장의 밑바닥에 타오르기를

죽음 속에서도 붉게 타는 뜬눈의

치열한 핏발 내 가슴속에 쟁쟁히 울리는

그 굵은 목소리 아직도 더운 흙가슴에

살아 있는 너

살아있는 반역의 이 불밭에 운명에

삽질을 한다 너를 묻기 위해

번개와 폭풍의 밤에 통곡하며 통곡하며

 

 

 

먹칠

김지하

 

산 것은

축생마저 떠나버려

신할아비 꽃각시 함께 멀리멀리 떠나버려

솔 끝에 타는 이 마지막

흰 길에 외줄기 마지막 날의 이 노을밭

이 깊은 땅거미의 나직한

숨소리마저 서쪽으로

다 타버린 나락의 하늘 서쪽으로 아득히 산 것들은 모두 서쪽으로

 

먹칠을 하자

시라손아 온몸에 남김없이

크게 열리어 내내 두려웁던 젖어 마를 날 없던

눈에마저 못난 시라손아 먹칠을 하자

가슴에 치미는 불길만을 남기고

, 불길만을 남기고

미쳐 뜀뛰는 식칼만을 남기고

, 식칼만을 남기고

 

캄캄한 숯덩이로 타는 것이여

불꽃의 마지막 관이 오는 때까지 타는 것

온몸을 밟고 오는 새파란 요령소리

발자욱이 오는, 상여가 오는, 대가 오는

대끝의 새하얀 눈부심들이 몰려오는

그때까지여

이 못난 시라손아 먹칠을 하자

벗기려도 벗기려도

벗겨지지 않는 시커먼

아아 시커먼 숯덩이로 타는 불덩이로

타는 육신을 아예 사뤄버리는 불꽃의

마지막 관이 오는 때까지 활활활 타오르는

, 기다림만을 남기고

기다리다 미쳐 뜀뛰는 식칼만을 남기고

하얗게

혼만 남기고

.

 

 

 

면벽

김지하

 

그리움 끊고

간도 꺼내 던지고

쓸개도 멀리 버리고

그래도 조금은 미련이 남고

그래도 조금은 노여움이 남고

금잔화 눈부신 아침 빛무리

빛무리에 눈 멀어 닷새째던가

일주일째던가 아니면

한 보름째던가, 그래도 끝끝내

날짜 세고 있는 지금이.

 

 

 

모래내

김지하

 

목숨

이리 긴 것을

가도 가도 끝없는 것을 내 몰라

흘러 흘러서

예까지 왔나 에헤라

철길에 누워

철길에 누워

 

한없이 머릿속으로 얼굴들이 흐르네

막막한 귓속으로 애 울음소리 가득 차 흘러 내 애기

핏 속으로 넋 속으로 눈물 속으로 퍼지다가

문득 가위소리에 놀라

몸을 떠는 모래내

철길에 누워

 

한번은 끊어 버리랴

이리 긴 목숨 끊어 에헤라 기어이 끊어

어허 내 못한다 모래내

차디찬 하늘

 

흘러와 다시는 내 못 가누나 어허

내 못 돌아가 에헤라

별빛 시린 교외선

철길에 누워

철길에 누워

 

 

 

목련

김지하

 

눈을 뜨면 시커먼 나무등걸

죽음 함께 눈감으면

눈부신 목련

내 몸 어딘가에서 아련히

새살 돋아오는 아픔

눈부신 눈부신 저 목련.

 

 

 

()

김지하

 

공허하므로 움직인다

 

시장해서

너를 사랑했노라

 

땅위의 풀과 벌레

거리의 이웃들

해와 달 별과 구름 모두 다

모두 다 죽어가는 이 한낮

 

내 속에

텅빈 속에

바람처럼 움트는

웬 첫사랑 우주사랑

 

그 새뿕음을

본다

 

공허하므로

공허하므로 움직인다.

 

 

 

무슨

김지하

 

무슨

소리라도 한번 들려라

살포시라도

 

외롭구나

무슨

벌레라도 한 마리

나를 물어라

너무 외롭구나

 

생각하고 생각하다

생각이 막힌 곳

문득 생각하니

 

내 삶이란 게 간단치 않아

온갖 소리 갖은 벌레 다 살아 뜀뛰는

무슨 허허한 우주

 

쓴웃음이

한번

 

뒤이어

미소가 한번

 

창 밖의 마른 나무에

공손히 절 한번

 

가랑잎 하나

무슨 종교처럼 진다.

 

 

 

무화과

김지하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섰다

 

이봐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 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문깐재

김지하

 

잔잔한 풀 위에 바람 흔들림이

이마 위에 그늘지는 것을

알겠는가

묻는 나는 모른다

잔잔한 풀 위에 바람 흔들림이

너의 머리 속에서 파고 있는

홈의 뜻을 아는가

피는 피를 부르고

바람은 낮게 속삭이며

물과 함께 먼 길을 가더라

 

내 눈에 타는, 밤새 타는

이상한 핏발

이제 나는 안다

돌의 역사를

돌의 신음의 역사를.

 

 

 

김지하

 

시월 난초에

꽃대 오를 때

 

푸른 하늘은 큰 물방울

 

눈물난다

 

물속에 우주 살아 있음

생각하니 눈물난다

 

가신 이

올 아이들

내 몸 물속에 살아

 

틈틈이 꽃

내 몸 우주 꽃

 

시월 난초에

꽃대 오를 때

 

푸른 하늘은

눈물방울

방울.

 

 

 

물구나무

김지하

 

남으로 귀양 갔다 북으로 가고

다시 또 남으로 옮기니

두 해에 세 번이나 한강 배를 불렀네

나루터 사공이 그 전 죄로 가는 줄 모르고

날더러 가는 곳마다 새 죄짓는다 이르리 - 김덕성

 

감옥이라도

하늘만은 막지 못해

밤마다 두견새 와서 울고

시간이 무너진 자리

귀틀상자에도 봄이 와

하얀 민들레씨 가득히 날아든단다

사람이 그만 못하랴

이 봄엔 물구나무를 서겠다

사람이 그만 못하랴

이 봄엔 물구나무를 서겠다

몇 차례고 어디서고

빼앗긴 봄날엔 웃어 물구나무를 서겠다

지구를 받쳐 들고

두견새 소리 맞춰 굿거리장단으로

창공에서 한바탕 발춤 추어볼란다

구경 오너라

애린

웃지는 말고 애린

오늘 밤 나는 화성에서 잔다.

 

 

 

물 흐르는 곳에

김지하

 

희한하다

더러운 개울물이 졸졸졸

소리만은 맑은 곳에 나는 있어라

 

물가에는 답싸리

똥덩어리 쓰레기 두엄더미 더불어

애기 머리만한

호박들이 열리고

꽃도 피었어라 참으로 희한하다

 

물이 늘면 비 내리고 내리 비가 내리면

또 물이 늘어 강물인 듯이

강물인 듯이 우렁차게도 외쳐대는 곳

밤낮으로 시달린 끝내는 하아얀 조약돌들이

저리도 눈부시게

반짝이는 곳 반짝이는 곳

그곳에 나는 있어라

 

큰 돌이 때론 흰 물살을 이루고

때론 푸른 하늘마저 내려와 몸을 씻는다

밤마다 지친 일꾼들의 먼지를 씻는다

지쳐 대처에서 돌아온 큰애기들

더럽힌 몸도 마음도 씻는다 희한하다

 

더러운 개울물이 졸졸졸

아아 머나먼 바다로 가리라

끝내 가리라 쉬임없이

꿈만은 맑은 곳에 지친 나는 서 있어라

 

 

 

민족의 비극이지 뭘

김지하

 

원주에서 자유당 때

동아일보 지사를

지방에서 하는 일은

고달픈 일이었다

몇 차례고 몇 차례고

구타당하고 억압당하고

온갖 핍박을 다 당하며

그래도 끝까지

4.19까지 버티어 낸

한 형이 있었다

겨우 한글이나 해독하고

불친절한 보수지의 한문 글자는

물어서 물어서

나에게까지 물어서

기뻐 벌쭉이며

고개 주억거리며

바삐 다방을 뛰쳐나가던 모습이 선하다.

 

그는 한때 국군이었고

그 뒤 그는 포로가 되어 인민군 병사가 되었고

그 뒤 탈출하여 유엔군에 편입되었고

그 뒤 또다시 붙잡혀 중공군 병사가 된 사람이다

`형이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요, 있었소?'

`있었지

중공군이 아직 들어오지 않고

유엔군도 아직 들어오지 않고

포탄만 하늘로 슝슝 날아다닐 때

칼빈 한 자루 메고

원주 대로를 활보하던 자는 나밖에 없었으니까'

`그게 몇 시간쯤이오?'

`한 세 시간쯤'

`그때 뭘 했소?'

`바로 그거야

그 때가 나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어

원주역에는 팔몰, 켄트, 카멜, 아까다마, 생전 맛도 보지 못하던 양담배가 산처럼 쌓였고

위스키, 브랜디, 포도주 산처럼 쌓였고

쇠고기 통조림, , 쏘세지 산처럼 쌓였고

코쟁이들이 불지르고 갈 틈이 없었단 말야

한꺼번에 담배를 다섯 개피씩이나 피우고

한꺼번에 포도주, 브랜디, 위스키를 세 병씩이나 한꺼번에 섞어 마시고

쇠고기, , 쏘세지를 한꺼번에 까서 막 처먹었단 말이지

나중에는

그 산더미 속에 들어가서 막 뒹굴었단 말이야

그게 행복 아니겠어

6.25는 좋았어

나 같은 놈에겐'

`그래서 결론이 뭐요?'

그 형은 잎담배가 반쯤 빠져나간

화랑 담배를 쪽쪽 피워 태우며

비장 처절한 얼굴로

대답했것다

`민족의 비극이지 뭘.'

 

 

 

바다

김지하

 

1

넘치지는 않는다

고이는 바다

움푹 패인 얼굴에 움푹 패인 맷자욱에

움푹 패인 농부의 눈자위 속 그늘에 바다

열리지 않는 마른 입술 열리지 않는

감옥에도 바다

고이는 바다

매우 작다 조용한 노여움의 바다

넘치지는 않는다 물결이 일어

찢어지는 온몸으로 촛불이 스며든다

몸부림이 몸부림이 일어 압제여

때로는 춤추는 바다 번쩍이는 그러나

달빛이 없는 바다 불타지 않는 바다

매우 작다 압제여

조용한 노여움의 바다

어느 날 갑자기 넘쳐버릴 바다

넘치면 휩쓸어버릴 자비가 없는 바다

쉬지 않고 소리 없이 밑으로 흘러

땅을 파는 팔뚝에 눈에 입술에

가슴에 조금씩 고이는 바다

아직은 일지 않은 폭풍의 바다.

 

 

2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참으로 이제 가겠다

손짓해 부르는

저 큰 물결이 손짓해 나를 부르는

망망한 바다

바다로

 

없는 것

아득한 바다로 가지 않고는

끝없는 무궁의 바다로 가는 꿈 없이는 없는 것

검은 산 하얀 방 저 울음소리 그칠 길

아예 여긴 없는 것

 

나 이제 바다로

창공만큼한

창공보다 더 큰 우주만큼한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만큼한

끝간 데 없는 것 꿈꿈 없이는

작은 벌레의

아주 작은 깨침도 있을 수 없듯

가겠다

 

나 이제 가겠다

숱한 저 옛 벗들이

빛 밝은 날 눈부신 물 속의 이어도

일곱 빛 영롱한 낙토의 꿈에 미쳐

가차없이 파멸해 갔듯

여지없이 파멸해 갔듯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백방포에서 가겠다

무릉계에서 가겠다

아오지 끝에서부터라도 가겠다

새빨간 동백꽃 한 잎

아직 봉오리일 때

입에 물고만 가겠다

조각배 한 척 없이도

반드시 반드시 이젠 한사코

당신과 함께 가겠다

혼자서는 가지 않겠다

 

바다가 소리 질러

나를 부르는 소리 소리, 소리의 이슬

이슬 가득 찬 한 아침에

그 아침에

문득 일어서

우리 그 날 함께 가겠다

살아서 가겠다

아아

삶이 들끓는 바다, 바다 너머

저 가없이 넓고 깊은, 떠나온 생명의 고향

저 까마득한 화엄의 바다

 

가지 않겠다

가지 않겠다

혼자서라면

함께가 아니라면 헤어져서라면

나는 결코 가지 않겠다

 

바다보다 더 큰 하늘이라도

하늘보다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라도

화엄의 바다라도

극락이라도.

 

 

 

바다에서

김지하

 

눈은 내린다

술을 마신다

마른 가물치 위에 떨어진

눈물을 씹는다

숨어 지나온 모든 길

두려워하던 내 몸짓 내 가슴의

모든 탄식들을 씹는다

혼자다

마지막 가장자리

삔으로도 못 메꿀 여미 사이의 거리

아아 벗들

나는 혼자다

 

손목에 패인 사슬의

옛 기억들 위에 소주를 붓고

기억들로부터 떠오르는 노여움에 몸을 기대어

하나하나 너희들의 얼굴을

더듬는다

흘러가지 않겠다

눈보라치는 저 바다로는

떠나지 않겠다

 

한치뿐인 땅

한치도 못될 이 가난한 여미에 묶여

돌아가겠다 벗들

굵은 손목 저 아픈 조동으로 패인 주름살

사슬이 아닌 사슬이 아닌

너희들의 얼굴로 아픔 속으로

돌아가겠다 벗들

 

눈 내린는 바다

혼자 숨어 태어난다

미친 가슴을 찢어 활짝이 열고

나는 아이처럼 울부짖는다

돌아가겠다

 

 

 

바람

김지하

 

1

다시금 칼을 뽑을 땐

칼날이여

연꽃이 되라

 

죽을 싸움 싸우다 죽어

피투성이 피투성일지라도

손에 쥔 것은 칼이 아닌

연꽃이 되라

연꽃이 되라

 

반쪽만 남은 돌미륵

모로 누운 채 잠든 내

주검 곁에서 웃어라

너는 크게 웃어라

 

아아아

이 커다란 품.

 

 

2

머물 곳 없는 것 다 알고

그저 머무는 마음뿐

그리움도 아득히 사라진 지금

무슨 애틋함 있어 저렇게

눈밭에서는 댓잎이 살랑입니까

 

날 찾을 이 없음도 다 알고

망연히 앉아 있는 나날

약속도 적혀 있지 않은 달력 위에

그 무슨 기다림 있어 저렇게

대문은 바람결마다 삐꺽입니까

 

희망은 알 수 없는 곳에서 슬며시 와

잠시 마음을 적시고 이내 자취 없는 것

 

길고 긴 산허리를 허덕이며

낯선 새날을 맞기 위해

허덕이며 오를 일만 남았습니다

 

 

 

바람에게

김지하

 

내게서 이제

다 떠나갔네

옛날 훗날도

먼 곳으로 홀가분하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남은 것은

겉머리 속머리

가끔 쑤시는 짜증뿐

빈 가슴 스쳐 지나는

윗녘 아랫녘 바람 소리뿐

 

내게서 더는

바랄 것 없네

버리려 떠나 보내려

그토록 애태웠으니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바랄 것은

몹시도 시장한 중에

눈 밝혀 찾아 먹는 밥 한 그릇

배부르면 배 두드려

대중없이 부르는 밥노래 한 가락뿐

 

춘란 뽑혀

멀리 팔려간 티끌 이는 길섶

못생긴 여뀌닢여뀌 잎으로 잔뜩

비틀어져 내 다시 났으니

바람아

내 잎새에 와 무심결에

새 햇살로 흔들려라.

 

 

 

바램

김지하

 

1

다시금 칼을 뽑을 땐

칼날이여

연꽃이 되라

 

죽을 싸움 싸우다 죽어

피투성이 피투성일지라도

손에 쥔 것은 칼이 아닌

연꽃이 되라

연꽃이 되라

 

반쪽만 남은 돌미륵

모로 누운 채 잠든 내

주겸 곁에서 웃어라

너는 크게 웃어라

 

아아아

이 커다란 품.

 

 

2

머물 곳 없는 것 다 알고

그저 머무는 마음뿐

그리움도 아득히 사라진 지금

무슨 애틋함 있어 저렇게

눈밭에서는 댓잎이 살랑입니까

 

날 찾을 이 없음도 다 알고

망연히 앉아 있는 나날

약속도 적혀 있지 않은 달력 위에

그 무슨 기다림 있어 저렇게

대문은 바람결마다 삐꺽입니까

 

희망은 알 수 없는 곳에서 슬며시 와

잠시 마음을 적시고 이내 자취 없는 것

 

길고 긴 산허리를 허덕이며

낯선 새날을 맞기 위해

허덕이며 오를 일만 남았습니다

 

 

3

천근 무게 돌덩이에

날개 달고 오르리

하늘 날아오르리

 

수렁 깊은 곳

하늘도 비추잖는 진흙창 늪

온갖 회한 그대로 안고

끝내 날아오르리

 

오늘

햇빛 따갑고

바람 몹시 부는 날

발 디딜 때마다 가라앉으며

온몸이 외치노니

터럭마저 외치노니

 

있는 그대로

항금빛 눈부심 되어

불타라 불타라

온 세계에 고요히 불타라

 

햇빛 따갑고

바람 몹시 부는 날

여기 오늘 지금.

 

 

 

바로

김지하

 

내게는

내 길이 따로 있다

그것을 잊었구나

 

마지막까지

 

이 길

 

혼자 가리라, 똑바로

 

바로 가면

아무리 굽은 길도

다아 펴지리

 

 

 

밤나라

김지하

 

밤은 소리들의 나라

보드라운 날카로운 엷고 때론 아득히

공고한 것이여 높고 낮은

울렁임 가득히 영글어가는 귀한 것이여

밤은 불멸의

아 저 숱한 소리들의 나라

 

온갖 것 다 살아 춤추어서 애틋하여라

그지없어라 가없어라

이슬에 깨어

깨어 어디에도 이를 곳 없이 떠나

쇠북에 떠나 다시는

흰 이마 위 저 고운 샘물 소리론 죽음 후에도

넋이라도 못 올 나라

아아 밤나라

 

분홍빛 작은 아기의 발

샘물 위에 춤추던 사뿐거리던 네 가벼운

소리에마저 입맞춤도 이제는 찌는 낮

고요 때문이어라

목마름 때문이어라

미친 듯 홀로 외치다 죽을 운명 때문이어라.

 

 

 

밤 산책

김지하

 

원보가 싫어하는 초생달 뜨고

그 밑 한 뼘쯤 아래

원보가 좋아하는 별도 떴다

 

봄은 익어 둥둥둥

내 가슴에 떨어지고

 

나는

내 아들들 속에서

둘로 넷으로

혹은 다섯으로

좋거니 싫거니 찢어진 채로

집으로 집으로 향해 걸어간다

 

이렇게 살아 있음이

희한쿠나

 

하늘에서는 이미 아우러진 걸

내 아들들 속에서만 내가 찢어져

 

나는 찢어져

찢어진 그대로 비틀비틀

이렇게 걷는다

 

희한쿠나

 

봄은 익어 둥둥둥

내 가슴에 떨어지는데.

 

 

 

밥은 하늘입니다

김지하

 

하늘을 혼자서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게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것.

 

 

 

백방

김지하

 

1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백방산 나가미 위에

무수히 서 있는 저 여인들의

얼굴 얼굴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저 무수히 바람에 갇혀

옹송거리는 어깨 움직임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여기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이리 떠나고 떠나오던

그 숱한 작별의 이야기들을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어느 나무에

어느 나무 그늘에

그 사연 새겨졌는가

내 이제 짧은 머리

짧은 바지 차림으로

이 자리에 서서

홀로

잿빛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여긴 왜 이제 항구가 아니냐.

 

 

2

하얀 방에 누웠네

내 누구를 원망하랴

하얀 방에 누웠네

내 이제 와서 누구를 기다리랴

저 형광등 소리

저 형광등 타는 소리

빛깔이 아닌

빛깔이 아닌

흰 빛깔이 아닌

가래 타는 소리

곁에 하나만 있다면

곁에 하나의 휴지통만 있다면

내 누구를 원망하랴

더 무엇을 그리워하랴

어차피 죽어가는 것을

그리고 가래를 뱉고 난 뒤

어차피 난 일어서 이 자리를 떠날 것을.

 

 

8

가지 말라

바다가 너를 삼키리라

가지 말라

바다가 너를 밟으리라

삼켜도 밟혀도

떠나가야 하는 바다

떠나가야 하는 바다

바다

네 이름

바다는 그대에게 내 그대에게

백방 뒤꼍 후미진 뻘밭 마지막 떠나던 목선

전 잡고 넘어지던 그대

그대에게 마지막 줄 것

이름뿐

마지막 줄

비단 주머니 속에 든 것은

바다뿐.

 

 

10

뒷숲에선 바람이 불어요

바람 속에선 뒷숲이 내게 와요

가까이 늘 밤마다

뒷숲속에

홈 패인 자국

자국 있는 샘물

샘 곁에 남겨진 끊어진 두레박

아 오세요

두레박 속에서 오세요

그날의 창도 버리고

그날의 핏발 선 눈도 버리고

오세요

뒤꼍 바람을 타고

웃음으로라도 오세요

머리 끝 흩날리는

바람으로라도.

 

 

 

백학봉(白鶴峯)

김지하

 

1

멀리서 보는

백학봉

 

슬프고

두렵구나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흰 학,

 

봉우리 아래 치솟은

저 팔층 사리탑

 

고통과

고통의 결정체인

저 검은 돌탑이

왜 이토록 아리따운가

왜 이토록

소롯소롯한가

 

투쟁으로 병들고

병으로 여윈 지선(知詵)스님 얼굴이

오늘

웬일로

이리 아담한가

이리 소담한가

 

산문 밖 개울가에서

합장하고 헤어질 때

검은 물위에 언뜻 비친

흰 장삼 한자락이 펄럭,

 

이제야 알겠구나

흰빛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2

저기

희미한 한등

불을 밝히고

 

암자에서 누군가

칼을 내린다

 

밤에도

하얗게 빛나는 백학봉

포란(抱卵)의 산세(山勢) 안에 깊이 안겨

 

한등

희미한 불을 밝히고

누군가 이 밤에 저기서

칼을 내린다

 

안쓰러운 생명들 위해

생사대립 위에 가차없는

칼을 내린다

칼을 내린다

 

서녘의 외로운 달은

밤새워 떨고

 

검은 숲속의 주린 나무들

내내 울부짖어

 

피비린 옛 역사를

소리소리 외쳐대는 곳

 

지금 여기

白羊寺에 와 있다

 

험했던 시간과 험했던 산천에

험했던 험했던

투쟁의 스님

지선선사(知詵禪師)

큰 아픔으로 주석하는 곳

 

불감(佛龕)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한 마리 백양(白羊)의 흰 그늘에

공명하는 칼끝 바람 소리

귀 기울이며 마주 앉아

차를 마신다

 

나 지금 여기

백양사(白羊寺)에 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밤새워

칼을 내린다

 

옛 싸움의 기억들 위에

칼을 내린다

칼을 내린다

미소 속에 끊어

멀리 바람에 흩날려 떠나보낸다

 

그 옛날

누군가

여기서

돌아갔기에,

피투성이 걸레처럼

갈가리 찢어발겨졌다는

어둡고

참혹한 전설이기에.

 

 

3

길은

아무리 곧아도

산을 뚫지는 못한다

 

돌아가거나 넘는다

 

새하얀

백학봉 아래

흰 백양사 있는 까닭인가

 

돌고 넘는데

몇 세상이 걸릴까

 

돌고 넘기 위해

몇번을 죽어야 하나

 

밤새워

형광등 타는 소리 소리

차 한잔 앞에

오똑 앉은 지선스님의

저 시뻘건 방에 갇혀

죽기로 좌선하던 이야기,

아하

 

앞산 등성이에

붉은 달 떠오르고

 

바람은

마루 밑

새끼 낳는 고양이처럼 시끄럽고

 

시냇물은

돌틈에서 외치듯 외치듯

용솟음치니

 

아하

산천이 모두 다

스님의 용맹을 걱정하는구나

 

'화상(和尙)은 현실을 보시오!

화상은 옛 시간을 배신하는

현실을 못 보시오?'

소리소리 떠드는구나

 

잠시

방을 나와

밤하늘 쳐다보니

 

달이

빙긋 웃어 왈

'뚫어 보았으니

이젠 돌아들 가시오'

 

나도 웃음으로

우러러 왈

'………!'

꿈결 같은 신새벽

백양사 야화(夜話)

한 토막.

 

 

 

베 짜는 누이에게

김지하

 

잘 있느냐

실꾸리 얼키기 쉽고

건강하냐

실꾸리 설키기 좋은 이때

웃고 사냐

실 끊어질라

울고 있냐

올 늘어질라

팽개치냐

바늘 부러진다

내던지냐

북통 깨진다

성을 내냐

날 처지고

화를 내냐

씨 흐트러진다

수선대냐

날씨도 매우 안 좋은데

서성대냐

내일은 더 궂다는데

토심나냐

궂은 날씨 조심 안허면

베는 확 잡치는 법이다

얘야

생각나냐

곰보할매 베틀 잉아

감잡히냐

날실을 못 처지게

뜻지피냐

굵은 줄로 올려메야

해볼 테냐

씨줄 모두 편다분해서

어쩔 테냐

날도 씨도 잘 짜인다

그리해라

베짜는 일이 다시없는

우주의 으뜸 철리이니

건강해라

바디를 부디 고르게 써서

잘 있거라

상목 좋은 놈 내거들랑

여불비례

두루막 한 벌씩 지어 입고

총총

성묘 가자

모년 모월 모일 모시

반쪽 오빠 짐땅밑이 쓴다.

 

 

 

벼랑

김지하

 

북풍은 가슴을 꿰뚫고

이마 위에 눈 쌓인 시루봉이 차다

 

삶은 명치 끝에

노을만큼 타다 사위어가는데

 

온몸 저려오는 소리 있어

살아라

살아라

울부짖는다

 

한 치 틈도 없는 벼랑에 서서

살자 살자고

누군가 부르짖는다

 

거리에 나서도

아는 사람 없는 빈 오후에.

 

 

 

김지하

 

그것뿐

있는 것은 그것 하나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

그것뿐

내 마음에

내 몸에 몸 둘레에

너와 나 사이 모든 우리들 사이

다시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붉은 벽

옛날 훗날

꿈길도 헛것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

내 마음이 네 가슴속에

네 몸속에 내 살덩이가

파고들어 파고들어 끝없이 파고들어

기어이 본디는

하나님이 화안이 드러나 열리는

자유, 열리는

눈부신 빛무리 속의 아침바다

그것을 손톱으로 쓰는

그것을 흐느낌으로 우리가 쓰는

온몸으로 매일 쓰는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그것은 이미 우리 앞에 없다.

 

 

 

변환

김지하

 

눈부시게 꽃 피는

라일락 밑에는

시체가 있다

 

시체 썩는 소리 들린다

 

내 고통

긴 기다림이 있다

 

기다림이

꽃으로 바뀌는 소리

들린다

 

벌이 오고

나비가 날아들고

하늘에 구름 빛나는

오월 잔치 밑에

변환이 있다

 

무서운 무서운

생명의 변환이 있다

 

 

 

김지하

 

내일 새벽

나의 죽음 뒤에

아마도

별이 뜰 것이다

 

불쌍한 우리 네 식구처럼

네 개의

푸른 별 뜰 것이다

 

우주의 비밀이다

살아서는

내 몸 속에 빛나던,

아름답던,

 

나를 이제껏

살게 했던

 

그 별이 처음으로

우주에 뜰 것이다

숨어 있던 별,

 

아마도

내일 새벽

나의 죽음 위에

비밀을 열 것이다

 

다시 산다면

나는

불쌍한 우리 네 식구처럼

네 개의 푸른 별로

 

항상 떠

내내 비췰 것이다.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김지하

 

아직은 따스한 토담에 기대

모두 토해버리고 울다 일어나

무너진 토담에 기대 우러른 하늘

 

아무것도 없는

댓잎 하나 쓰적일 바람도 없는

이렇게 비어 있고

이렇게 메말라 있고

미칠 것만 같은 미칠 것만 같은

서로서로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저 불켠 방의 초라한 술자리 초라한 벗들

날이 새면

너는 진부령 넘어

강릉으로 오징어잡이, 나는 또

몸을 피해 광산으로 가야 할 마지막

저 술자리

 

서로 싸우지 않고는 서로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낯선 마을의 캄캄한 이 시대의 한밤

아아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보리 싹

김지하

 

옛 거리는 침침하고

나는 굳어 돌이 되었네

 

겨울 나무에

새도 오지 않고

 

죽음은 늘 곁에 머물고

 

대낮에도 별을 보던 눈

이제는 멀어 옛 거리 침침하고

 

내 마음 캄캄하다

나는 굳어 돌이 되었네

 

기억 속에 떠오르는

검은 흙

파릇파릇한

보리의 새싹.

 

 

 

봄살이

김지하

 

눈부시게 흰

목련 앞에서

시커먼 욕정이 샘솟는 것은

들판으로 놓여난

봄살이 때문

 

부서지고 더럽혀지고

깨어져나가는 지구가

아프다 외칠수록 외칠수록

꽃들 저리도

시리게 아름다운 건

죽으며 살아나는

봄살이 때문

 

거리를 휩쓰는 시위물결 속에서

혼자 외롭고 혼자 어리석고

집안에 앉아 침묵하면

속에서 우주가 가없이 자라는 것

겨울과 여름 사이

봄살이 때문

 

사랑할수록

너와 나 사이 물이 흘러

멀리서 맞절하느니

서로 고맙다 맞절하느니

아아

이 모든 것

봄살이 때문.

 

 

 

부끄러움

김지하

 

꽃 터질 때마다

울리는 쇠북 소리

 

바람

잎가에 서성거리고

 

대낮에도

별들이 반짝인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

 

이 봄에

스며들듯

죽고 싶다.

 

 

 

불귀(不歸)

김지하

 

못 돌아가리

한번 디뎌 여기 잠들면

육신 깊이 내린 잠

저 잠의 저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

 

못 돌아가리

일어섰다도

벽 위의 붉은 피 옛 비명들처럼

소스라쳐 소스라쳐 일어섰다도 한번

잠들고 나면 끝끝내

아아 거친 길

나그네로 두 번 다시는

 

굽 높은 발자국 소리 밤새워

천정 위를 거니는 곳

보이지 않는 얼굴들 손들 몸짓들

소리쳐 웃어대는 저 방

저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

 

뽑혀 나가는 손톱의 아픔으로 눈을 흡뜨고

찢어지는 살덩이로나 외쳐 행여는

여윈 넋 홀로 살아

길 위에 설까

 

덧없이

덧없이 스러져간 벗들

잠들어 수치에 덮여 잠들어서 덧없이

한때는 미소짓던

한때는 울부짓던

좋았던 벗들

 

아아 못 돌아가리 못 돌아가리

저 방에 잠이 들면

시퍼렇게 시퍼렇게

미쳐 몸부림치지 않으면 다시는

바람 부는 거친 길

내 형제와

나그네로 두 번 다시는.

 

 

 

불면

김지하

 

재떨이 이만큼 있고

전화기 저만큼 있고

테레비 또 저어만큼 있고

밑 뚫린 사기그릇모냥

퍼내도 퍼내도 미진한 시궁

마음구멍 여기있고

 

구멍 저 밑구멍에서

세상 모두 안쓰러운 생각

몇 가닥 올라와 사방에 흩어지는

 

기인 긴 겨울 밤

고양이 울음소리만 천지에 가득 차고.

 

 

 

김지하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내리는 빗속에

춤추며 하소하나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내리는 빗속에

온갖 것 소리지른다

 

흙도 사금파리도

상추잎도 소리지른다

 

닫힌 몸 속에서

누군가 소리지른다

 

외침의 침묵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비녀산

김지하

 

무성하던 삼밭도 이제

기름진 벌판도 없네 비녀산 밤봉우리

웨쳐 부르든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시퍼런 하늘을 찢고

치솟아오르는 맨드라미

터질 듯 터질 듯

거역의 몸짓으로 떨리는 땅

어느 곳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옛이야기 속에서는 뜨겁고 힘차고

가득하던 꿈을 그리다

죽도록 황토에만 그리다

삶은

일하고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 것

 

삶은 탁한 강물 속에 빛나는

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

송진 타는 여름 머나먼 철길을 따라

그리고 삶은 떠나가는 것

아아 누군가 그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참혹한 옛 싸움에 몸바친 아버지

빛 바랜 사진 앞에 숨죽여 울다

박차고 일어섰다

입을 다물고

마즈막 우럴은 비녀산 밤봉우리

부르는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무거운 연자매 돌아 해 가고

기인 그림자들 밤으로 밤으로 무덤을 파는 곳

피비린내 목줄기마다 되살아오고

터질 듯한 노여움이 되살아오고

낡은 삽날에 찢긴 밤바람

웨쳐대는 곳

 

여기

삶은 그러나

낯선 사람들의 것.

 

 

 

비어(蜚語)

김지하

 

1 소리 내력(來歷)

서울 장안에 얼마 전부터

이상야릇한 소리 하나가 자꾸만 들려와

그 소리만 들으면 사시같이 떨어대며

식은땀을 주울줄 흘려샀는 사람들이 있으니

해괴한 일이다.

이는 대개 돈푼이나 있고 똥깨나 귀는 사람들이니 더욱 해괴한 일이다.

-

바로 저 소리다 쿵

저 소리가 무슨 소리냐 최루탄 터지는 소리냐 아니다 쿵

난리 터지는 소리냐 핵 터지는 소리냐 히로히도 방귓소리냐 아니다

닉슨 기침 소리냐 아니다 북경(北京)도 천안문(天安門)

코쟁이 맞아들이는 중공군(中共軍) 예포(禮砲) 소리냐 아니다 그럼 뭐냐

쿵 저 봐라 쿵 또 들린다 쿵

저 쿵 소리 내력을 누가 알꺼나 쿠궁쿵

어화 사람들아 저 소리 내력을 들어봐라

 

 

2 소리 내력(來歷)

아라사도 미국 중국 일본국도 아닌 대한민국 서울 동편에

먼지 펄펄 시끌덤벙 청량리 훨씬 지나가면 새까아만

연탄보다도 더 새까아만 쫄쫄 개굴창

물 썩는 내 진동하는 중량천 기인긴 방축 위에 줄을 지어 다닥다닥

금슬 좋게 들러붙어 비그닥

삐끄 삐끄 삐끄다다닥

바람결에 전후좌우로 몸을 흔들어대면서

노래 노래 불러쌌는 판잣집 한 모퉁이 그 한 귀퉁이 방에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서 올라와 세 들어 사는 안도(安道)라는 놈이 있었것다.

소같이 일 잘하고

쥐같이 겁이 많고

양같이 온순하여

가위 법이 없어도 능히 살 놈이어든

그 무슨 전생(前生)의 악연인지 그 무슨 몹쓸 살이 팔짜에 끼었는지

만사가 되는 일 없이 모두 잘 안 돼

될 법한 데도 안 돼

다 돼가다가도 안 돼

될 듯 될 듯 감질만 내다가 결국은 안 돼

장가는커녕 연애도 안 돼 집 장만은커녕 방세 장만도 제때 안 돼

밥벌이도 제대로 안 돼 취직도 된다 된다 차일피일하다가는 흐리부지 그만 안 돼

빽 없다고 안 돼 학벌 없다고 안 돼 보증금 없다고 안 돼 국물 없다고 안 돼

밑천 없어서 혼자는 봐주는 놈 없어서 장사도 안 돼 뜯기는 것 많아서도 안 돼

울어봐도 안 돼

몸부림쳐 봐도 안 돼

지랄발광을 해봐도 별수 없이 안 돼

눈 부릅뜨고 대들어도 눈 딱 감고 운명에 맡겨도 마찬가지로 안 돼

목매달아 죽자 하니 서까래 없어 하는 수 없이

연탄까스로 뻗자 하니 창구멍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청산가리 술 타 마시고 깨끗이 가자 하니 술값 없어 별 도리 없이 안 돼 안 돼 안 돼

반항도 안 돼 아우성은 더욱 안 돼 잠시라도 쉬는 것은 더군다나 절대 안 돼

두 발로 땅을 딛고 버텨서는 건 무조건 안 돼

한 번만 배짱좋게 버텨만 섰다가는

왼갖 듣도 보도 생각도 못 한 죄목들이 연달아 줄레줄레 쏟아져 나오니

이래 놓으니 사시장철

밤낮으로 그저 뛰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있것느냐

 

 

3

https://blog.naver.com/kcsoo_33/221482423135

 

 

 

 

빈 가지

김지하

 

빈 가지

꽃샘에 흔들릴 때

 

빈 가지

꽃눈 튼다

 

매연의 거리에 내리는

봄 눈

 

천지의 향기

 

술 한잔 마련없는

내 삶에 한 줄기

물 오르는 소리

 

사랑 움트는 소리

 

이 봄엔

우주 안에서

우주 만나라

 

떠나라.

 

 

 

빈방

김지하

 

아내는 나가고

없고

 

빈방에

가을 가득하다

 

하늘 푸르고 햇빛 희고

 

어디서

사람소리 들리다

사라진다

 

오후에 빈 가슴에

우주 들었으니

 

밤엔

죽어도 좋으리

 

죽어

먼 강물 위에

쪼각달 뜨리.

 

 

 

빈 산

김지하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빈집

김지하

 

달빛 고일 때

새푸르른 답싸리

무성한 저 빈집 가득히 달빛 고일 때

 

삭아내린 삽작문 너머

그림자 하나 하얗다 사라져버리네 기인

기인 비명이 꿈처럼 들려오던

빈집이여 가득히

달빛 고일 때

 

먼 마을로부터 삘리리

눈부신 구름으로부터 바람결에 삘리 삘리리

아련한 날라리 소리 들려오는 빈집이여

뜨락 가득히 달빛 고일 때

 

아아 낫 가는 사람

숨죽여 흐느끼며 낫 가는 사람

대처로 떠나갔다 숨어 돌아와 마지막

한 벌 흰옷으로 갈아입고 난 사람

 

땅에 떨어진

낫 끝에 가득히 달빛 고일 때

아득한 하늘에 천둥 은은하게 흐를 때

땅에 떨어진

빈집이여 빈집이여

땅에 떨어진.

 

 

 

빗소리

김지하

 

빗소리 속엔

침묵이 숨어 있다

 

빗소리 속엔

무수한 밤 우주의 침묵이

푸른 별들의 가슴 저리는 침묵이

 

나의 운명이 숨어 있다

 

빗소리 속엔

미래의 리듬이

死産된 채로 드러나

 

잿빛 하늘에 흔적을 남기던

옛사랑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침묵으로 나직이 共謀하듯

숨어 있다

 

빗소리는 그러나

침묵을 연다

 

숨어서

숨은 내게 침묵으로 연다

나의 침묵을 연다.

 

 

 

빗장 질린 문

김지하

 

해남은 바람이 거세서일까

우리 집 문은 밤에 꼭 한두 번은 저절로 열린다

빗장 질린 문이 왜 스스로 열리는 걸까?

 

사람의 손에 톱에 도끼에

나무가 잘릴 때

나무는 결심한다

넓은 벌판에서 우거진 숲속에서 자라던 자유로운 나무의 삶을 삶답게 지켜 준 살아 뜀뛰는 나무의 야생의 꿈을 이제는 온 힘으로 나뭇결에 집중할 것을

 

집중은 소리를 만드는 것

집중은 그늘과 함께 하는 것

집중은 햇빛 밑에서도 햇빛과 관계없이

 

제 빛깔을 지키는 최소한의 보장

집중은 이제 잘리고 찍힌 나무와

나뭇결 속에서 깊은 한을 품은 채

해방을 그리는 모든 나무들의 야생의 꿈

 

꿈은 그리움을 빗장으로 하고

그리움은 꿈을 지키는 빗장

바람결 따라

끝없이 끊임없이 삐꺽이다가

빗장 질린 채 문짝이 저절로 열리는 것은

내가 술취했거나 잠들었기 때문,

만약 잠 속에서도 내가 깨어 들을 수 있다면

 

아마도 틀림없이 저 아득하고

피 타는 그리움 때문에 터지기 시작하는

나무의 목쉬인 낮은 울음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마치 오늘 아침처럼

마치 오늘 아침에

빗장을 다시 지르던 내 손길의

그 기이한 손금의 감각들처럼

마치 대문에서 돌아오는 내 눈 속에

 

깊이 깊이 아로새겨져 영원히 잊히지 않을 듯싶은,

쌓아놓은 연탄재 위에서 할랑거리던

철 맞지 않은 마른 동백잎 하나처럼.

 

 

 

빗점

김지하

 

높은 곳

깊은 곳

빗점까지는

 

가지 못한다

간다

 

맑은 날에는

거기

비 오듯 쏟아지는

 

넋들의 붉은 울음소리

 

두려워 가지 못한다

간다

 

화개에서 실눈 뜨고

바라만 바라만 보다

 

마침내

간다

 

노고지리

뻐꾸기가

 

귀신 대신

노래 부른다

 

'높고

깊은 곳

빗점 빗점 빗점'

 

노래 부른다

 

'이제는 모두

돌아가거라 빗점'

 

달궁에서는 어제

기독교도들이

 

올 개천절에는

이 빗점에서

또 토박이들이

 

빌고

빌리라

 

그러나

내내 가지 못한다

간다

 

거기

옛 시간 속으로는

끝끝내

끝끝내

끝끝내.

 

 

 

뻔한 것

김지하

 

앞서가는 것만 길이던가

뒤돌아서는 것도 길

 

앞서거니뒤서거니

돌아가거니 또 앞으로 가는 것

모두 길이지

아무렴

 

이 길 알아야

길 간다 하겠지

아무렴

 

한길로 가며 오며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사람 사이의 틈

김지하

 

아파트 사이사이

빈틈으로

꽃샘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틈 때문

사람은 틈

새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사랑

김지하

 

1

내가 이렇게 기대 있는 것은

누굴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기대 있는 것은

한밤중 열두 시가 지난 시간

당신도 자고 아이들도 잠든 시간

담 건너 고양이 울음도 죽은 시간

이 시간에 깨어 있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괴로운 시간

깨어 있다는 것

죽기보다 더 버리고 싶은 일

알겠어요 이 시간

내가 기대고 있는 까닭

내가 기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

누구라도 좋지요

돌멩이라도 좋고

쓰레기라도 좋고

잿더미라도 좋지요

사랑하겠다는 것.

 

 

2

꽃 피어도

나비

오지 않는다

 

봄의 적막이

속에 든다

 

춥고

외로와

사랑하고저 하나

내밀어 볼

없다

 

온 마음

맨몸이 죽도록

거리를 걷는다

피투성이로 걷는다

사랑하고저.

 

 

 

사랑 얘기

김지하

 

시 귀신

정희가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라고

시집 제목을 달았다

금방

내 그물에 와 걸린다

즉각 수정한다

'모든 사랑은 짝사랑이다'라고

물론

안다

사랑이

얼마나 순정하고 고운 것인지

그것도 아주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랑이

얼마나 쓰라리고 병신스러운지

나는 그걸 안다기보다

그냥 몸으로 아파보았다

절충의 길은 없었다

첫사랑이 곧 짝사랑이었던 내겐

이런 경우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사월

김지하

 

오라

깊고 깊은 금빛 비단의

저주에 잠긴 저 아랫두리

뜨거운 근육이여

꿈속에 잠긴

 

우거진 칼날과

총창의 수풀에 뿌린 너의 글

지금도 타고 있는 피로 쓴 너의 글

그 위에 내리는 겨울비

내려서 고이는 고여 썩어가는

애매하게 웃고 있는

싯누렇게 번쩍이는

 

가장 완강한 벗들마저도

속물들의 저 비웃음을 이겨내지 못한다

투항하고 투항하고

또다시 투항한다

 

이제는 굳어 돌부처인 근육

꿈속에 잠긴

아직은 싸늘하고 아직은

진달래조차 피지 않았다

미신 같은 이월엔 풀도 흔들리지 않는다

살별 묻힌 자리에마저

총칼이 파수 섰다, 네 가슴에도

또 내 가슴에도 그 누구의 가슴속에도

자라는 것은 구역이다, 자라는 것은

진한 진한 노여움이다, 자라는 것은

폭풍의 예감이다 운명이 파멸하는

 

비안개의 침침한 거리로부터 오라

보드라운 젖무덤 멸망의 눈부심으로부터

탄식하는 골목 골목으로부터

넋의 참혹한 마비로부터

바람 없는 가슴의 썩음으로부터 바람 속으로

사월의 높고 푸르른 하늘

헐벗은 황야의 부름 속으로 오라

모순이 소리치는 거리의 한복판으로

반역의 미친 미친 저 짐승의 기쁨 속으로

오라

기어이 돌아오라

이제는 두 머슴애와

한 계집아이의 애비로 자란 근육

깊고 깊은 금빛 비단의

저주에 잠긴 저 아랫두리

뜨거운 근육이여

꿈속에 잠긴.

 

 

 

사월의 피

김지하

 

살라라

꽃내에 미쳐

거치른 황토의 가슴팍

숨막히는 저 꽃내에

어둠에도 화안히 흐드러지는 꽃내의

영롱한 영롱한 생명에 미쳐

갈피 모를 어둠 속에 살라라

갈피 모를 썩은 살 속의 썩은 넋 속의

썩은 눈동자 속의 캄캄한

어둠 속에 살라라

꽃내에 미쳐

숨막히는 꽃내에 꽃내에 미쳐

갈피 모를 막바지의 어둠 속에 흐르는

피여 살라라

어둠 속에 우뚝 선 침묵의 영원한

압제를 불살라라

사월의 피여

어둠에도 화안히 흐드러지는 꽃내의

영롱한 영롱한 생명에 미쳐.

 

 

 

산정리 일기(山亭里 日記)

김지하

 

나를

여기에 묶는 것은 무엇이냐

뜨거운 햇발 아래 하얗게 빛날 뿐

고여 흐르지 않는 둠벙 속에 깊이 숨어

끝끝내 나를 여기에 묶는 것은 무엇이냐

 

눈부신 붉은 산비탈

간간이 흔들리는 흰 들꽃들조차

가까이 터지는 남포 소리조차 아득히 멀고

흙에 갇힌 고된 노동도 죽음마저도

나를 일깨우지 않는다.

 

흐린 불빛이

가슴을 누르는 소주에 취한 밤

목쉬인 노래와 칼부림으로 지새우는 모든 밤

뜬눈으로 지새우는 알 수 없는 몸부림에

기어이 나를 묶는 것은

아아 무엇이냐 무엇이냐

깨어 있지도 잠들지도 않는

끝없는 소리 없는 이 어설픔은 무엇이냐

 

밤마다 취해서 울던

붉은 눈의 海州 영감은 죽어버렸다

열여섯 살짜리 깨곰보도

취한 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디에 와 있는 것이냐

나는 살아 있는 것이냐

무딘 느낌과 예리한 어둠이 맞서

섞이지 않는다 부딪히지도 않는다

또다시 시퍼런 새벽이 온다

 

남포가 터진다

흙차가 돌아간다

나는 흙 속에 천천히 깊숙히

대낮 속에 새하얀 잠의 늪 속에 빠져들어 간다

이것이 대체 무엇이냐

 

 

 

산조(散調)

김지하

 

초승달 등에 걸고

먼동으로 떠난다

 

뼛속 깊이

찬바람 으등대고

뼛속 깊이

붉은 먼동

흰 초생달

몸 한복판에

散調 한 자락

겨울이 자라고

 

뿌윰한 새벽길

 

 

 

산책은 행동

김지하

 

겨울나무를 사랑한다면

봄은 기적 같으리

 

고독한 사람이

물 밑을 보리

 

이리저리 흩날리는

가랑잎에 훨훨훨

노을 불이 붙는다

 

산책은

행동.

 

 

 

살림

김지하

 

화분 속에 수수 심어

가는 잎 보며 즐기는 사람

천정에 무우를 달아

돋아나는 푸른 싹 즐기는 사람

마음속에

마음속에 너를 키우는

 

짙은 냄새 억세찬 푸르름

다 잃어버리고

가늘어져 가늘어져

난초가 된 너를

마음속에만 그저 키우는 사람

 

햇빛 없는 날

오늘에 너를 묶는 나라는 사람

바람 없는 곳

추억에 너를 가두는 사람

그 마음의 감옥

 

부셔라

애린

끊어라 애린

탈출하라 바람 부는 저 벌판으로

내 사랑하는 애린

한 떨기 들꽃으로 시뻘건 흙으로

살아나라

다시 다시 살아나라

 

죽어가는 나

감옥은 죽음으로 맡기고

뒤에 남기고 뒤에 남기고

돌아보지 말고.

 

 

 

살림 소식

김지하

 

사뭇 불안하니

오늘은 무슨 소식 또 있을까?

동아일보는

콩나물에도 죽임이 서렸다 하니

벗들!

이젠 콩나물도 길러 먹자

오늘 소식이다

살림 소식

 

.

 

 

 

김지하

 

1

꿈꾸지 않겠다

꿈으로

고통을 이겨내는 일

그만두겠다

 

지긋지긋해도

하루하루 삶을

무심히 살겠다

 

풀 한 포기와 말하며

우주를 살겠다

 

꽃이 핀다면

더 바랄 것 없고

 

풀도 꽃도 없는 아파트에선

시멘트 입자와 이야기하리라

 

삶은 우주

삶은 진리

 

아직 내 몸 살아 있고

아내와 새끼들

곁에 살아 있으니

 

아아

내 삶

한없이 넓고 넓구나

 

아아

아직도 산다는 것

깊고 깊구나.

 

 

2

내 몸

어딘가

부서지고 있다

 

내 마음 하염없이

무너지고 있다

 

흙이 죽어가고

풀이 마르고 나무 병들고

 

새들 울부짖는다

하늘은 구멍 뚫리고

산성비 쏟아져 내리고

 

모두 다 내 몸

나는 병들었다

 

이제

일어서리라

 

일어서

치유하러 가리라

 

가리라

돌아오지 않으리라.

 

 

 

삼라만상

김지하

 

1

썩은 물도 물은 물

 

흐르는구나

하늘을 비추는구나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구나

 

아니

구름 한 점 어린 것 보니

돌아오겠다

 

깨끗이 되어

또 오고

또 돌아오겠다.

 

 

2

수련이 단풍 드니

더 좋네

 

썩은 물에 떠 불콰하니

더 보기 좋네

 

왤까?

 

 

 

김지하

 

저 청청한 하늘

저 흰구름 저 눈부신 산맥

왜 날 울리나

날으는 새여

묶인 이 가슴

 

밤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밑바닥 마지막 살의 그리움이여

피만이 흐르네

더운 여름날의 썩은 피

 

땅을 기는 육신이 너를 우러러

낮이면 낮 그여 한 번은

울 줄 아는 이 서러운 눈도 아예

시뻘건 몸둥아리 몸부림 함께

함께 답새라

아 끝없이 새하얀 사슬 소리여 새여

죽어 너 되는 날의 길고 아득함이여

 

낮이 밝을수록 침침해가는

넋 속의 저 짧은

여위어가는 저 짧은 볕발을 스쳐

떠나가는 새

 

청청한 하늘 끝

푸르른 저 산맥 너머 떠나가는 새

왜 날 울리나

덧없는 가없는 저 눈부신 구름

아아 묶인 이 가슴.

 

 

 

새 교회

김지하

 

풀잎들 신음하고 흙과 물 외치는 날

오랜 만에 교회에 간다.

 

산위에 선 교회

벽만 있는 교회

지붕 없는 교회

 

해와달과 별들이

나와 함께 기도하고

혜성이 와 머물고

 

은하수와 성운들 너머

온우주가 내려와 춤추고

여자들이 벌거 벗고 웃는다.

흰 수건 흔들며 노래한다.

유혹인가?

 

나의 새로운 교회

풀잎의

흙과 물의 교회

새 예수회 교회

 

꿈인가?

 

 

 

새벽 두 시

김지하

 

새벽 두 시는 어중간한 시간

잠들 수도 얼굴에 찬 물질을 할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공상을 하기는 너무 지치고

일어나 서성거리기엔 너무 겸연쩍다

 

무엇을 먹기엔 이웃이 미안하고

무엇을 중얼거리기엔 내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럽다, 가만있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벽 두 시다

어중간한 시간

이 시대다

 

 

 

새봄

김지하

 

1

바람 차다

온몸에 새순 돋는다

 

새들이 우짖는다

터파기 굉음이 시끄럽다

 

쓰레기 산 난지도

통일전망대 가는 길.

 

 

2

삼월

온몸에 새순 돋고

 

꽃샘바람 부는

긴 우주에 앉아

진종일 편안하다.

 

밥 한술 떠먹고

몸아픈 친구 찾아

불편한 거리를

어칠비칠 걸어간다.

 

세월아 멈추지 마라

지금 여기 내 마음에

사과나무 심으리라.

 

 

3

겨우내

외로웠지요.

새봄이 와

풀과 말하고

새순과 얘기하며

외로움이란 없다고

그래 흙도 물도 공기도 바람도

모두 다 형제라고

형제보다 더 높은

어른이라고

그리 생각하게 되었지요.

마음 편해졌어요.

 

축복처럼

새가 머리 위에서 노래합니다

 

 

4

아직 살아 있으니

고맙다.

 

하루 세 끼

밥 먹을 수 있으니

고맙다.

 

새봄이 와

꽃 볼 수 있으니

더욱 고맙다.

 

마음 차분해

우주를 껴안고

 

나무밑에 서면

어디선가

생명 부서지는 소리

새들 울부짖는 소리.

 

 

5

꽃 한번

바라보고 또 돌아보고

 

구름 한번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봄엔 사람들

우주에 가깝다.

 

 

6

꽃 사이를

벌이 드나들고

 

아기들

공원에서 뛰놀 때

 

가슴 두근거린다.

모든 것 공경스러워

눈 가늘어진다.

 

 

7

우주의 밑바닥에서

목련이 피어오른다.

 

푸른 새순 돋는가

온몸 쑤시고

 

우울의 밑바닥에서

우주가 떠오른다.

 

마음에 나직한

새 울음소리

 

외로움이 외로움과 손잡고

나무가 나무와 얽히는

바람부는 작은 봄 공원

 

나는 없고

우울의 얼굴만

하늘로 높이 떠오른다

거기 쓰여 있다.

사람은 영생

사람은 무궁이라고

우울은 어느덧

자취없이 사라지고

나비 한 마리

하늘 하늘 난다.

 

 

8

내 나이

몇인가 헤아려보니

 

지구에 생명 생긴 뒤 삼십오억살

우주가 폭발한 뒤 백오십억살

그전 그후 꿰뚫어 무궁살

 

아 무궁

 

나는 끝없이 죽으며

죽지 않은 삶

 

두려움 없어라.

 

오늘

풀 한 포기 사랑하리라

나를 사랑하리

 

 

9

벚꽃 지는 걸 보니

푸른 솔이 좋아.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 마저 더욱 좋아.

 

 

 

샛길 없음

김지하

 

이 길에서 떠나리란 생각도

고통뿐인 이 길

이 길에서 끝보리란 욕심도

조금은 갈채도 들리는 이 길

모두 다 시커먼 마음 밑바닥

서툰 걸음에 샛길로만 가다가

멈추어 생각한다

어디로든 길은 다 열렸으니

한길로만 가리라

욕심 없음

샛길 없음

 

 

 

생명

김지하

 

생명

한 줄기 희망이다

캄캄 벼랑에 걸린 이 목숨

한 줄기 희망이다

 

돌이킬 수도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이 자리

 

노랗게 쓰러져버릴 수도

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

이 마지막 자리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 줄기 희망이다.

 

 

 

서대문(西大門) 101번지

김지하

 

노을녘 수리 떼 떠도는

초겨울의 옛 전장(戰場)에 돌아왔다

한 자루의 보습을 메고

 

흙 속에 묻히고 이미 바람에

흩어지고 수리의 밥이 되고

뜻 모를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러나

아직도 날카롭게 희게 빛나는

뼈들처럼 거친 더운 숨결이

살아 있고 어디서 들개가 짖는다

거친 숨결이 흙을 생동

시킨다 이 사멸하면서

살아나는 대지에

보습을 박는다 발을 대고 누른다

아아 부드러운 이 살의 탄력이여

살아 있는 흙들이

꿈틀거린다 나는

전신의 힘을 보습에

모은다.

 

 

 

서울

김지하

 

칼이 서는 곳

칼자루 보이지 않는 안개 서린 곳

밤새워 흘린 핏자욱

마저 보이지 않는

대낮에도 시퍼렇게 칼이 서는 곳

휘저어도 휘저어도

잡히지 않는 곳

발붙일 수 없는 알 수 없는 떠날 수조차 없는

한번 묻혀 다시는 헤칠 길마저 없는

늪이여 저주의 도시

저 하늘에도 가득히 칼이 서는 곳

행여

너를 이기기 위해

행여 너를 이기기 위해 서울이여

넋은 네 칼날 아래 남김없이 바쳐졌다

주리고 병들은 빈 육신도 마저

부질없는 반역 속에 불타버렸다

 

남은 것은 지는 것

남은 마지막 단 한 번은 칼날 위에

아아 칼날 위에

꽃처럼 붉게 붉게 떨어지는 것

이기기 위해

죽어 너를 끝끝내 이기기 위해

죽어

피로써 네 칼날을 녹슬도록 하기 위해.

 

 

 

서울 길

김지하

 

간다

울지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피어 돌아오리란

댕기 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서편

김지하

 

내 마음에

불길 꺼지고

 

밤낮

흰 달 뜬다

 

차가운 자리

노을마저 스러져

 

무서운 꿈마다

꽃 피어난다

 

지난날 회한도

이제는 즐거움

 

아파트 사이

봉숭아 한 잎에도

 

하늘 든다

 

님아

이젠 오소서

 

검은 삶에

붉은 살 돋우시라

 

나 지금

 

 

 

성자동 언덕의 눈

김지하

 

지금도 너는 반짝이느냐

성자동 언덕의 눈

아득한 뱃길 푸른 물구비 구비 위에

하얗게 날카롭게

너는 타느냐

 

산 채로

산 채로 묻힌 붉은 흙을 헤치고

등에 칼을 꽂은 채 바다로 열린 푸른 눈

썩은 보리와 갈라진 논바닥이 거기서 웨치고

거기서 나의 비탄은 새파란

불꽃으로 변한다 너는 타느냐

 

마주한 저 월출산 아래 내리는

저 용당리 들녘에 내리는 은빛

비행기의 은빛 비늘의 눈부심, 독한 눈부심 위에 아아 푸른 눈

침묵한 아우성의 번뜩임이 거기서 타느냐

지금도 너는 반짝이느냐

성자동 언덕의 눈

하얗게 날카롭게 너는 타느냐.

 

 

 

세밑

김지하

 

일산종합시장

고양체육관

체이스컬트

농협

 

틈투성이다

 

틈 사이로 여러 갈래

가느다란 골목길

 

가시버시 세 쌍이

아이 하나 데리고

노래 부르며 올라간다

 

노래 아직

내게 들리지 않고

 

짐작은

아리랑,

 

하늘은 반지 같은

흰 초승달 끼어

 

세밑

아직

멀었다.

 

 

 

소를 논함

김지하

 

소가 아니면 소가 아닐세

이중섭이 소는 조선 소가 아닐세

조선 소 아니면 소 그림 안되는 법

조선엔 자고로 미친 소 없네

얼룩소 수입소 물론 코뿔소

사람 무는 소 사람 들이받는 소

노기등등 분기탱천하는 소

뼈만 남은 이중섭이 소

절간에서 소소소소소 하는 그런 소

거 다 소 아닐세

조선 소

조선놈 닮아 어질고 에미령하고

때려도 밟아도 치고 차고 패도 그저

끄덕끄덕 일하는 소

갈 데 없는 그 소

그것이 소

조선엔 자고로 미친 소 없네

우황 들어 앓긴 해도

미치는 일 따윈 아예 없어

천만의 말씀, 뼈만 남은 소라니!

소 죽어 뼈는 커녕

터럭 한 올 남기는 걸 본 일 있던가

없어

다 주고 가지

가죽은 가죽대로

꼬리는 꼬리대로 다 먹어라 주고 가지

없어

없다니까

그게 소여 조선 소

조선 소가 소여.

 

 

 

소를 보다

김지하

 

꾀꼬리 나무에 앉아 꾀꼴꾀꼴 우는데

봄날 산들바람에 버들가지 하늘거리네

이제는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곳에

한량없는 소 모습을 무엇으로 그려낼꼬

- 소노래 셋째

 

천구백칠십구년 겨울 난데없는 꾀꼬리 울음소리

`머리 고옵게 빗고 시집가고지고!'

 

 

 

소를 찾아 나서다

김지하

 

우거진 풀 헤치며 아득히 찾아가니

물은 넓고 산은 멀어 갈수록 험하구나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지쳐도 찾을 길 없는데

저문 날 단풍 숲에서 매미 울음 들려오네

- 열 가지 소노래 첫째

 

네 얼굴이

애린

네 목소리가 생각 안 난다

어디 있느냐 지금 어디

기인 그림자 끌며 노을진 낯선 도시

거리 거리 찾아 헤맨다

어디 있느냐 지금 어디

캄캄한 지하실 시멘트벽에 피로 그린

네 미소가

애린

네 속삭임 소리가 기억 안 난다

지쳐 엎드린 포장마차 좌판 위에

타오르는 카바이드 불꽃 홀로

가녀리게 애잔하게

가투 나선 젊은이들 노래 소리에 흔들린다.

 

 

 

소리

김지하

 

무엇인가 떠오른다

발끝에서

등에서

젖꼭지에서

머리칼마다에서

 

무엇인가

노래 같은 것

왠지 애잔한 것

쓰라린

희한 같은 것

 

낮게

속삭이듯 떠올라

가슴 저민다

 

'왜 죽으려느냐

나 이제 갈 곳이 없다.'

 

숱한 별들 해와 달

풀벌레 풀

꽃잎들에서 떠오른다

 

'왜 죽으려느냐

나 이제 갈 곳이 없다.'

 

슬픈 밤

꿈속에서도

무엇인가 자꾸만 떠올라온다

 

'왜 죽으려느냐

나 이제 갈 곳이 없다.'

 

나 이제 갈 곳이 없다.

 

 

 

소박하다면

김지하

 

소박하다면

이 죄 갚으리

 

일그러진 마음에도

들꽃 한 아름 안을 수 있다면

 

새를 님이라 그리워할 수 있다면

 

천 년 묵어 썩어 문드러진

이 죄 다 갚으리

 

길가에 가래침 뱉지 않고

물 공기 더럽히지 않는다면

 

일그러진 문둥이 마음

꽃 피어나듯 웃으리.

 

 

 

김지하

 

1

이리 괴로운 건 옛일 때문이다

옛일에의 집착 때문

 

한번 놓자

놓아버리니

먼 곳에서 희미한 고물 장수가 가윗소리.

 

 

2

옛 삶은 끝이 나고

새 삶은 시작되지 않았다

 

골목도 막힌 골목

어느 집 뒤울안

뼈만 남은 대추나무 밑에 서서

그저 먹먹하다.

 

 

3

솔질한 것이 좋다만

그저 좋은 것만도 아닌 것이

 

시란 어둠을

어움대로 쓰면서 이동을

수정하는 것

 

쓰면서

저도 몰래 햇살을 이끄는 일.

 

 

 

속살

김지하

 

1

내 안에서

치악산이 동터오고 있다

내 안에서

내가 걷고 있다

맑은 나도 더러운 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내 안에서 걷고 있다

첫눈 내린 새벽길

뿌리 깊은 기침도 함께.

 

 

2

앞서가던 내가 뒤돌아보니

뒷서오던 내가 또 치어다보니

별도 뜨고 비도 내리고

안개 낀 나무숲에 걸린 조각달

 

마당을 편 것이냐 좋다

털레털레 걷는 새벽길이

무슨 백둥날이냐

 

없는 것 없구나 좋다

사람만 없고.

 

 

3

달은 지려 하는데

해는 뜨려 하는데

 

별은 드물고

내 마음 자취 드물고

사람 자취마저 드물고

 

망망한 세계 중에 우뚝 서

삶을 생각한다.

 

 

4

찬바람은 뼈속 깊이 스며들고

언 머리에 서편 달이 시리다

벼랑에 서듯 내딛는 발자욱마다

비닐로 만든 학이 날아오르는데

마지막 남은 석냥깐에 가

온몸을 부숴 새로 벼리는 새벽.

 

 

5

무릎 꿇어 버릇하니

그게 편해진다

 

허리 굽혀 버릇하니

그쪽이 익숙해진다

 

무릎 꿇기도 허리 굽히기도

실은 어려운 일인데

어려운 일이 자꾸만

세월 갈수록 쉬워지니

 

왠일일까

왠일일까

 

억지로 반가부좌 틀어

허리 펼 일 아니라

늘 실겁고

마음 편히 가질 일이다.

 

 

7

염불 소리 안 들리고

목탁 소리만 들리네

 

귀기울여도

먼 듯 가까운 듯

바람 세찬 이 한밤

염불 소리 안 들리고

목탁 소리만 들리네.

 

 

8

그래

그래서

술 못 먹게 하나 부다

 

어지러운 세상

눈 크게 떠 바라보라고

 

죽임당할 때

맑은 정신으로 살아보라고

 

흐르지 말라고

흘러가지 말라고

 

한울은

그래

그래서

술 못 먹게 하나부다

 

오늘 매화바람에 벌거벗고 앉아

훌로 오똑 정신차렷!

 

 

9

꿈결 같은 빛깔로

올 봄을 꽃수 놓고 싶지

 

살갗 간지르는 한 오리 바람에마저

긴 겨울 다진 마음이

뿌리째 흔들리는데도

 

황홀한 당채로 눈부시게 놓고

하늘 오르고 싶지

 

꽃수 놓고 수놓고

나락 떨어지고 싶지

 

살갗 간지르는 한 오리 바람에도

오장육부 다 내주고 싶지

 

그러나

옳거니!

 

 

 

솔잎

김지하

 

엄동에도

솔잎은 얼지 않고

나무들은

뿌리만으로 겨울을 견딘다

모두 오염되고

파괴 되었어도

생명은 얼지 않고

뿌리에서 오는 힘으로

넉넉히

새봄을 준비한다.

 

 

 

송광사에서

김지하

 

극락에 있어라

내 등을 밟고

 

너 극락에 있어라

내 일일랑 잊고

 

송광사 산문 앞

합장조차 못한 채

엉거주춤 섰는 내 일일랑 아예 잊고

극락에 있어라

 

두 사람 중

하나라도 잠시만이라도

극락에 있어

 

소식 다오

극락 소식 나 기다린다는 소식

 

어차피 물에 잠길

섬진강 곁 마을터에

등 구부린 채 외로 섰는

내 일일랑 잊고

 

술 한잔 마련 없는

은어 고장

운오 씨도 마른 고장

송광사 산문 앞에

너는 있어라

 

내 등을 밟고

극락에 있어라.

 

 

 

수서(水西)

김지하

 

이름 좋다

물 서쪽

노란 새 오겠구나

 

봄도 한철

지는 해 한철

 

나 이제 가리라

水西에 가

 

투기해서 돈 벌러

남 안 볼 때 별 볼일

아예 없을 때 그때

나 가리라

水西에 가

 

혼자 돈 벌어

올 때는

수갑 차고

웃고 오리라

 

아예 발가락에 손가락

심장에도

털 달고

당당하게 오리라

내 생애 단 한 번

크게 웃고 오리라

 

 

 

수유리 일기(日記)

김지하

 

누구의 목을 조를 명주 띠일까

하얗고 긴 손길이 있어 밤이면 밤마다

내 이마를 스치고

 

나리꽃 만발하여 바람 따라 스적이는 높은

산맥이란 산맥으론 모두 다 핏빛

시냇물이 달리데 뛰어 달리데

 

달은 낡은 화투짝 위에서만

두둥실 떠올랐다

버얼겋게 취한 달이 비내려가고

 

목숨이야 한낱 그림자일 뿐이어서

흙벽에 어룽이는 호롱불 허리 굽은 그림자일 뿐이어서

독한 소주로도 못다 푼 폭폭증

가슴에 불은 이는데

불은 일어쌓는데

 

솟아라

산맥도 구름 위에 화안히 솟아라

붉은 호롱불도 하얀 애기달도 두둥실

하늘 높이 솟아라

배추포기 춤추고 노래불러라 바람 따라

신새벽이 뚜벅뚜벅 걸어서 돌아오는 때까지

어금니에 돌소금 소리내어 깨어지고

보이지 않는 외딴 숲속에 들개는 짖어대고

산맥이란 산맥으론 모두 다 핏빛

시냇물이 달리데 가슴에 불은 이는데

새파랗게 새파랗게 일어쌓는데.

 

 

 

숨은 사랑

김지하

 

살풋

숨은 사랑

 

가을 아침

흰 햇살에

댓잎 이슬

 

내가 널더러 가라 하고

떠난 뒤엔 하늘 우러러

눈물 한 방울

 

방울 속에

살풋

숨은 사랑

 

우주적인 것

작은 사랑

 

죽음 후에도

무궁무궁

 

앓는 아내 머리맡

댓잎 이슬

숨은 사랑.

 

 

 

숲속의 작은 공터

김지하

 

왠지

그럴 것 같애

 

숲 속의

작은 공터에 갔다

 

거기

잃어버린 할아버지

계실 것 같애

 

고즈넉하고 소슬한 자리

홀로 울고 계실 것 같애

 

바람 불고

비 오는 날

 

사랑도 꿈도 모두

나를 떠난 날

 

거기 홀로

울고 계실 것 같애

 

숲 속의

작은 공터

가고 또 갔다

 

내 이름처럼

작은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좁은 내 마음속으로

망명하고 망명했다

 

거기 홀로 앉아

느을

늙어서

울곤 했다.

 

 

 

김지하

 

나이 탓인가

눈 침침하다

눈은 넋 그물

넋 컴컴하다

새벽마저 저물녘

어둑한 방안 늘 시장하고

기다리는 가위 소리 더디고

바퀴가 곁에 와

잠잠하다

밖에

서리 내 리나

실 끊는 이 끝 시리다

단추 없는 작년 저고리

아직 남은 온기 밟고

밖에

눈 밝은 아내

돌아온다

가위 소린가.

 

 

 

쉰네 살

김지하

 

사랑 잃어버렸다

봄에

꽃잎 시들고

푸른 하늘 나직하다

 

아파트 모서리

날 선 내 마음 모서리

칼이 되어

아무나 찌르고 쑤시고

저도 가르고

 

아아

 

사랑 잃어버렸다

눈 침침하다

 

운다

 

길 양쪽 휘어져

가로수들 서로 맞절하는 오후

쓰린 가슴에

섬김을 배운다

 

저만큼 거리 두고

공경하는 법

공경으로 사는 법

 

이제

쉰네 살에.

 

 

 

쉰둘

김지하

 

돋보기를 써도

앞이 부옇다

 

아마

데리다는 영영

못 읽을 것이다

 

쉰부터 다시 산다는데

사는 것이 이리 어렵다

 

앉아

그대로 먹먹한 날들

쉰둘의 날들.

 

 

 

()

김지하

 

1 - 43321215일 낮 옛 가야 땅을 지나며 시()를 생각한다

짓지도

쓰지도 말라

 

이제

속에서 떨리고

밖에서 흐르라

 

산에 울고

물에서 웃으라

 

넋이

넋이 아니거든

 

쓰지 말라

 

때로는

쓰지 않아도

 

빛이 나

온통 흰빛이 나

 

구름이리라

 

삶이

()이리라

 

깊고 깊은

시장 한복판에서

 

때론

창녀와의

풋사랑이

 

흰 그늘

빛나는 한 편의

().

 

그것이리라.

 

 

2

()가 내게로 올 때

나는 침을 뱉었고

떠나갈 때

붙잡았다 너는 아름답다고

 

()가 저만치서 머뭇거릴 때

나는 오만한 낮은 소리로

가라지!

 

가라지!

아직도 그렇다 가까운 친구여!

어쩔 수도 없는 일

 

()가 한 번 떠나면

다시 오지 않는 걸

알기 때문에, 가라지!

 

난 그랬어

돌아올까봐 행여 올까봐

가라지!

몇 번이고 가라지!

가라지!

 

새벽까지 눈을 흡떠도

감옥 속에 몸부림쳐도 오지 않는

나는 서른셋

부패할 나이 이젠 진정으로

가까운 친구여!

어쩔 수도 없는 일

가라지!

 

 

 

시간

김지하

 

금방 있었던 일이

옛 사진첩모양 그리 빛바래기가

왜 이리 빠르냐

 

날마다 더욱 빨라져

금방이 바로 추억

 

온몸의 피가

머리에 모여

오늘 한 송이

시커멓게 얼어버린

동백이 되어.

 

 

 

신새벽

김지하

 

한 님 앞에

뜬눈으로 긴 밤을 새우고

신새벽에

남쪽으로 간다

 

해는

저기 있고

달은

여기 있다

 

아직 별들도 남아 있다

 

내 마음과

몸 안에

모두 있다

 

네 눈빛도

 

사랑아

 

옛날 그 불꽃이었던 사랑

그도 와 있다

 

이제껏

울며 지나온 땅들 그리고

헤어진 벗들

 

이제부터

가야 할 머나먼 길의

가로수 이파리들

그 위의

바람들

 

모두 있다

 

살아 있다

 

신새벽 푸른 공기

그 속에, 내 마음과

몸 안에

 

숨어 계신

한 님과 함께

 

빙긋이

저기서

미소 짓고 있다.

 

 

 

신호

김지하

 

너는 내게 외계인

나는 네게 외계인

우린 서로 외계인

서로 모두 외계인인걸

알고 나면 그날이 편지 쓰는 날

흰 종이연 날리는 바로

그날.

 

 

 

쓸쓸한 자유

김지하

 

내 사랑의 압제를 벗어나

벌판에 홀로 섰을 때

바람은 더운 이마를 식히고

풀꽃들은 내 몸을 간지럽힌다

철쇄는 부쉈으나

갈 곳 없이 망연한

쓸쓸한 자유 속에서 때론

너의 압제를 그리워한다

, 자유는 고달픈 방황,

그러나 자유는 내 삶의 조건이니

자유 없이는

난 한낱 미치광이,

낮달을 씹어먹는 한 괴물일 뿐.

 

 

 

아내에게

김지하

 

내가 뒤늦게

나무를 사랑하는 건

 

깨달아서가 아니다

외로워서다

 

외로움은 병

 

병은

병균을 보는 현미경

 

오해였다

 

내가 뒤늦게

당신을 사랑하는 건

 

외로워서가 아니다

깨달아서다.

 

 

 

아랫쏘

김지하

 

가거라 얘야

이 어미 간다

가거라 이 어미 제삿날을

잊지 말아라 얘야

가거라 가거라

새처럼 높이 뜨고

여우처럼 빠르게

가거라 얘야

이 피바다에서

 

 

 

아무도 없다

김지하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아무도 없다

 

검은 개천 위에 달빛이 몰락하는 돌다리 위에

이 이상스럽도록 아름다운

하이얀 입김 서린 집 속엔

아무도 없다

 

캄캄하고

달 속을 둔주하는 은전에 짓눌려

뒤틀리는 사지의 낡은 꿈속은 캄캄하고

 

푸르게 물드는

() 속에서 죽어가는 나의

나로부터 길에는 아무도 없다.

 

 

 

아주까리 신풍(神風) - 三島由紀夫에게

김지하

 

별것 아니여

조선 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

빼앗아 간 쇠그릇 녹여 벼린 일본도란 말이여

뭐가 대단해 너 몰랐더냐

비장 처절하고 아암 처절하고말고 처절 비장하고

처절한 신풍(神風)도 별것 아니여

조선 놈 아주까리 미친 듯이 퍼먹고 미쳐버린

바람이지, 미쳐버린

네 죽음은 식민지에

주리고 병들고 묶인 채 외치며 불타는 식민지의

죽음들 위에 내리는 비여

역사의 죽음 부르는

옛 군가여 별것 아니여

벌거벗은 여군(女軍)이 벌거벗은 갈보들 틈에 우뚝서

제멋대로 불러대는 미친 미친 군가여.

 

*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며 자결한 三島由紀夫의 죽음을 풍자한 것임

 

 

 

아파트 꿈

김지하

 

나는

아파트에다

토담집을 짓는다

 

아파트 사이사이로

돌아 나가는 강물이 있어

산책길에

내 발을 적신다

 

음악이 들리는 창문

장미가 피는 창문

라일락이 서 있는 창문은

모두 다 내 집이다

 

내 눈의 집

 

저녁달이 오르면

내 눈은 거대한 우주가 되어

아파트 위에 둥실 뜬다

 

내 눈은 이제

 

푸른 초원 비취는

구월 밤의

.

 

 

 

안산

김지하

 

저녁 무렵

여기 서서 보니

쇠창살 너머로 보니

피 흐르는 노을 인왕산을 넘어

노을에 찢긴 안산 피

인왕산을 넘어

내리 쏟아져 몰려가는 걸 보니

오른손도 왼손도

닿지 않는 내 등 한복판에 꽂힌 칼

칼이 밀어 노을에

노여움도 설움도

막지 못해 흐르는 내 가슴의 끝없는 새 피

피가 밀어 노을에

한 걸음 또 한 걸음

인왕산을 넘어

내리 엎으러져 몰려가는 내 마음속

부릅뜬 이괄의 두 눈 타는 핏발

외치는 이귀 저 쌔하얀 이빨을 보니

변함없는 것

되풀이되는 것

작은 풀씨 속에 초원이 자라는 것

좁은 빈틈에서 폭풍이 터져나오는 것

가마 한 채 말 한 필 겨우

다닐똥 말똥 좁아터진 길마재 외길에

서울 온 목숨이 달렸던 걸 보니

안산 노을을

여기 서서 보니

쇠창살 너머로 치어다보니.

 

 

 

안팎

김지하

 

1

새 속에서 묶인 내가

날으는 새 본다

노을로 타는 새 나 본다

핏발로 타는 내 눈 속에서 노을로 타는

날으는 묶인 새 본다

내가 끝끝내

나팔 소리 울리면 스러져갈

.

 

 

2

참새라면 쥐라면 파리 모기 빈대라면

풀 돌 물 연기 구름이라면

한줌 흙이라면

차라리 아예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태어나도 노을진 어느 보리밭 가녘

귀 떨어진 돌부처로 모로 누웠더라면

일그러진 오지그릇 속

텅 빈 기다림으로나 기다림으로나

거기서 항시 멈췄더라면

차라리

먼저 간 벗

가느다란 그 한 올

머리카락이었더라면.

 

 

3

입 안에 신침 괴는 날은 틀림없이

귤 넣어주셨고

발 시리다 싶은 날은 어김없이

털양말 넣어주셨다

면회는 한 달에 단 한 번

편지는 써본 일도 받은 일도 없는 긴 세월

내 몸과 당신 몸 바꾸어

어머니는 부처 이루셨나.

 

 

4

얘야

괜찮다

교도소 벽돌담 위에 풀꽃님도 피시니 괜찮다

건너편 병식님 계시던 방 창살 사이

가죽나무님도 자라신다 아주 괜찮다

아침엔 참새님 와서 악쓰시고

저녁엔 쥐님 와서 춤추시고

이 빈대 모기 파리 구더기님도 계신다

옆방에 그 옆방에 도둑님들 잔뜩 계시고

황공하옵게도 내 앞엔 간수님도 한 분 계신다

괜찮다

얘야

이만하면 견딜 만하니

염려하지 마라

네 하느님께도

그렇게 말씀 올려라.

 

 

5

벽 속에 누군가 누워 있는데

거기 내가 누워 있는데

창살 너머 민들레씨 가득히 날고

마룻장에 깊이 새긴 빈 장기판

밖에서 소리 없이

온종일을 누군가가 걷고 있는데

내 속에 걷고 있는데

내가 그 속에 걷고 있는데.

 

 

 

애린

김지하

 

외롭다.

이 말 한마디

하기도 퍽은 어렵더만

이제는 하마.

크게

허공에 하마

외롭다.

 

가슴을 쓸고 가는 빗살

빗살 사이로 언듯언듯 났다 저무는

가느다란 햇살들이 얕게 얕게

지난날들 스쳐 지날수록

얕을수록

쓰리다.

 

입 있어도 말 건넬 이

이 세상엔 이미 없고

주먹 쥐어보나

아무것도 이젠 쥐어줄 수 없는

그리움마저 끊어짐 자리

밤비는 내리는데

소경 피리 소리 한 자락

이리 외롭다.

 

 

 

앵적가(櫻賊歌)

김지하

 

1 - 1971

만물의 이치는 음양이 근본이라

화합하면 태평하고 상극하면 서로 싸워

싸우는 것 두 중간에 항용 기이한 기이한 꽃이 핀다 전하나니

이 꽃을 두고 일러 사꾸라라 부르것다.

아동방(我東方)이 반도(半島)로서

넓직한 대륙과 길쭉한 도국(島國)에 끼어 밤낮으로

동서남북 왼갖 잡것들이 서로 들어와 맞서 끝없이 불질하는 중에

김성(金姓), 목성(木姓)이 또한 다투고

폭군과 백성이 노상 부딪쳐

하루도 욕질에 매질, 칼질에 팔매질이 멈출 날 없으니

그사이 맞아 죽는 자 부지기수요

안죽간(安竹間)에 송장이 산더미 같이 쌓이고

수당간(隋唐間)에 흐르는 피가 내를 이워 끝없은 즉

밸 없고 뼈 없는 자 애오라지 바라는 것 그저 제 한 몸 안명보신(安命保身) 뿐이것다

 

 

 

어느 귀퉁이

김지하

 

어느 귀퉁이 하나

뚫린 곳 없이 막힌 마음

 

한 줄기

서녘 햇살 젖어들고

 

외로운 솔

이월 바람에 춤춘다

 

정다운 친구는

어느 거리에 숨었나

 

빈 도시 빈 하늘이

내 몸 안에 다시 태어난다

 

발그레한

한 줄기 서녘 햇살로 태어나

 

내 마음에 비스듬히

이리 비낀다.

 

 

 

어둠

김지하

 

어둠 끝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

한밤 봉천내 뚝길에서 나를 불러 미루나무 밑에 세운다

담배 붙여 물고 숨죽여 귀기울이니 어둠이 말한다

어둠은 없다고 없을까

이리 어두운데 이리 괴로운데

어둠 끝에서 누가 자꾸만 나를 부른다.

 

 

 

어둠 속에서

김지하

 

저 어둠 속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

건너편 獄舍 철창 너머에 녹슬은

시뻘건 어둠

어둠 속에 웅크린 부릅뜬 두 눈

아 저 침묵이 부른다

가래 끓는 숨소리가 나를 부른다

 

잿빛 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날

지붕 위 비둘기 울음에 몇 번이고 끊기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열쇠 소리 나팔 소리 발자국 소리에 끊기며

끝없이 부른다

창에 걸린 피 묻은 낡은 속옷이

숱한 밤 지하실의 몸부림치던 붉은 넋

찢어진 육신의 모든 외침이

고개를 저어

아아 고개를 저어

저 잔잔한 침묵이 나를 부른다

내 피를 부른다

거절하라고

그 어떤 거짓도 거절하라고

 

어둠 속에서

잿빛 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날

저 시뻘건 시뻘건 육신의 어둠 속에서

부릅뜬 저 두 눈이

 

 

 

어름

김지하

 

 

줄 위에

외줄 위에

서른살을 거네 산다면 그 뒤마저

죽음 후에도 산다면 영겁까지도

 

칼날에 더한 가파로움

잠보다 더한 이 홀로 가는 허공의 아픔

매호씨

또드락 딱딱

웃겨야 하네 아무렴

우린 광대이니까

 

애비로부터 또 할애비로부터

花開로부터 영원으로 南倉으로부터

어둑한 逆族 구석 피 토하는 마지막 소멸에까지

아무렴 우리는 광대이니까 아무렴

죽음은 좋은 것

단 한번뿐일 테니까

 

거네

외줄에 거네

왼쪽도 오른쪽도 허공도 땅도 모두

지옥이라서 거네 딴 길이 없어

제기랄 딴 길이 없어 어름에 거네

목숨을 발에 걸어 한중간에 걸어, 이미 태어날 적에

 

이봐

매호씨

정기정기 정저꿍

구경꾼은 되도록

많은 쪽이 좋네 아무렴

우린 광대이니까 구경꾼은 되도록

야멸찬 것이 좋네

죽임을 죽어

박살나 피 토해도 웃겨야 하네 아무렴

죽음은 좋은 것

단 한 번뿐일 테니까

 

* 어름 : 민속놀이의 하나인 줄타기를 뜻함. 줄광대를 '어름산이'라고 부름

 

 

 

어젯밤

김지하

 

어젯밤

나는 죽었다

 

마음 깊은 곳

어쩌다 떠오른

꿈속 여인마저

말잔치 장바닥에

내다 판 내 넋은 어젯밤

죽었다

 

우물 깊이

내리던 두레박 깨어지고

 

천지사방에 물 흩어져

목마르고

허전하고

 

말라, 어젯밤

나는 죽었다.

 

 

 

얽힘

김지하

 

신비는

신비대로 있고

 

과학은

과학대로 서는구나

 

둘이

못 만난 지 얼마?

 

오천 년?

만 년?

오만 년?

 

아마

옛 모습은, 글쎄

너는 너고

나는 나로되

 

그저

이리저리

 

서로 얽힘이엇을 것,

 

그래!

 

 

 

업보

김지하

 

업보처럼

쑥쑥 자라는 아이들만 남았다

 

지은 죄 많고

아직도 더 죄지을 듯

불안한 하루하루

눈앞에 커다렇게

업보처럼 남았다

 

다 놓아버릴 수 없을까

마음만 그저

노을 구름처럼 떴다간 스러지고

 

한 방울 두 방울씩

가슴 밑에 고이는

업보 사랑.

 

 

 

여름 감방에서

김지하

 

따통꾼 안씨는 만주서 왔다

전과 이십범 마적대 출신

별명이 갈꾸리인 안씨는 곧잘 마적들의

붉은 술이 달린 단도며 노을진 평원의

말달리기며

마을을 통째로 들어먹고 중국년을

한꺼번에 셋씩이나 상관했다는

옛 이야길 하다간 노상

인간은 모두 도둑놈이라고

험상굳게 악을 쓰며 침을 뱉는다

그렇지 않다고

착한 사람 얘길 하단 벽력이 떨어진다

너두 도둑 정권도둑

그러나 미수다 헤헤헤

나는 껄껄껄 웃고 만다

그런 날 밤엔 안씨와

뼉질을 하며 나는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고 칼을 던지고

나는 흉악하고 흉악한 마적이 된다

중국년을 셋씩이나 상관하고

마을에 불을 놓는다

싸그리 통째로 들어먹는다

뿌우연 호박꽃을 쳐다보며

인간은 모두 다 도둑놈이라고

밤 새워 중얼중얼거리며

 

* 따통꾼 : 아편장이

 

 

 

여울

김지하

 

밤하늘 가득 찬 비구름 바람

산맥 모두 잠든 저기서 소리 지르네

 

초똥을 모아 가난하게 일군 불

아슴히 여위어가는 곁에 있어 밤새워 소리 지르네

 

옛 만해(萬海)의 아픔

가슴 속 타는 촛불의 아픔

 

바위에 때려 부서져

갈 곳을 가러 스스로 끝없이 바위에 때려 부서져

 

저렇게 소리 지르네 애태우네

여울이 밤엔 촛불이 나를 못살게 하네

 

백담사 한 귀퉁이 흙벽 위에 피칠한

옛 옛 만해의 아픔

 

내일은 떠나 떠나 끝없이 나도 여울 따라 가리라

죽음으로밖에는

그여이 스스로 죽음으로밖에는

살길이 없어 가리라 매골모루로 가리라

 

아아 타다 타다가

사그라져 없어지는 새빨간

저 촛불의 아픔

 

* 매골모루 : 이조 때 대역죄인을 참시하여 토막토막을 나누어 각각 함경, 평안, 전라, 경상 등 각도의 남북단 "매골모루"란 곳에 매장했음

 

 

 

여전

김지하

 

한때는

밤도 많이 새웠지요

 

지금도 그럽니다

당신 때문에

 

'이 썩을 놈아!'

 

그럽니다 여전

 

당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안 계신 그 당신

 

그래

 

'이 죽일 놈아,

이놈아!'

 

날 채찍질하며

웃지요

 

지금도 님이여

보름달 밝아 좋아 구황 타러 갑니다 여전.

 

 

 

역려(逆旅)

김지하

 

내가 가끔

꿈에 보는 집이 하나 있는데

 

세 칸짜리 초가집

빈 초가집

 

댓돌에 피 고이고 부엌엔

식칼 떨어진

 

그 집에

내가 사는 꿈이 하나 있는데

 

뒷곁에 우엉은

키 넘게 자라고 거기

거적에 싸인 시체가 하나

 

아득한 곳에서 천둥소리 울려오는

잿빛 꿈속의 내 집

 

옛 고부군에 있었다는

고느넉한

그 집.

 

 

아침 길 기다란 그림자에서

바람 많던 날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길 옆 벽돌담엔

죽어간 이들의 얼굴이 어린다

 

내 이마는 기억의 집

회한과 원한 가득한 진흙창

연꽃 한 송이 일찍 피어

이마를 가르며 붉게 벌어진다

 

어젯밤 어느 문으로 들어왔을까

미친 버드나무가 천정에 목매었는데

산조 한 자락 들려오고

바람이 우수수 일어나고

 

대낮에도 식은땀 흘리며

감옥꿈 꾸며 미소 짓는 주름살 몇 가닥.

 

 

고름 질질 흐르는

썩어가는 도시의 살에 맑게 비치는

옛 마을의 희미한 실핏줄

핏줄을 찾아

벗이여 살 속으로

다리를 놓자

무쇠솥다리

집을 짓자

세 발 달린 집

고름 흐르는

썩어가는 도시의 살 속에

묻혔던 우뢰가 솟아 터져오르듯

 

물과 불이 서로 싸우는 자리

혁명이다

무쇠솥다리

세 발 달린 집 쇄신이다

부활이다

옛 마을의 희미한 실핏줄

핏줄을 찾아 벗이여

다리를 놓자 살 속으로

큰 산이 쿵쿵 울릴 때까지

다리를 놓아

무쇠솥 다리

집을 짓자

세 발 달린 집.

 

 

 

엽서

김지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볼펜이 말 안 듣는 걸 봐

아니야

펜이 나빠서가 아니야

잊었어

귀밑머리 하얘지고

한 달이 하루같이 바삐 스러져가는

그때만 기다리고 있어

잊어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아니야

엽서 위의 얼룩은 눈물자국이 아니야

창살 사이 흩뿌리는 빗방울자국이야

아니야

벽 위에 손톱으로 쓴 저 구절들은

네게 바친 것이 아니야

아니야

지금 쓰는 이 엽서는

네게 부칠 것이 아니야

습작이야 습작

손 무디어지지 않기 위해

그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단 하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벌써 잊었어

애린이란 네 이름마저

그 옛날에.

 

 

 

영하 2

김지하

 

영하 2도의 겨울에 얼어 죽은 한 시인 지망 청년 이야기를 하자.

그는 북위 38도선 이북 인제군이었는지 어딘지

발돋움 산등성이 화전민 부락 출신이다.

그 이름마저 잊었다. 성이 박씨라는 것밖엔.

그가 한때 여성지 편집실을 전전했던 것을 안다.

마치 최 서해처럼, 또 마치 그 누구처럼.

그러나 그가 최 서해도 그 누구도 아님을

아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면 그밖엔 없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청량리 밖 망우리 공동묘지에서다.

그것도 어둑해지는 노을 무렵에.

북위 38도선 이북 출신의 젊은이가

망우리 공동묘지와 무슨 상관인가,

그것이 그와 나와의 짧은 인연의 실마리이다.

논리적으로 보아 그와 공동묘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거기 묻힌 사돈네 팔촌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나는 그의 정신사를,

그의 위대성을,

그의 정신 안에 살아 뜀뛰는 민족의 의지를 읽었다.

그리고 지금도 읽는다.

그러한 그가 영하 2도의 겨울에 얼어죽었다.

길바닥에서, 쓰레기통 곁에서, 굶주린 개새끼처럼.

나는 배신당한 것이다.

남북 현 정권의 통일 정책에 대한

나의 기본적 견해는 언제나 영하 2도로부터 출발한다.

 

 

 

예전엔

김지하

 

예전엔

온갖 생각들 자취 없고

 

빈 자리엔

메마른 나무 그림자 하나

 

새야

와 앉으렴

 

앉아

새 노래를 불러주렴

 

겨울이 깊을수록

파릇파릇한

보리싹의 노래

 

매화의 노래

그리고 새빨간

동백의 노래

 

내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나 아닌 나의 노래

 

 

 

옛 가야(伽倻)에 와서

김지하

 

햇빛

외로운가

 

무덤 속의 사람아

 

옛 가야의 여인이었던

내 사람

 

이제

 

한낱 유행가 속의

남쪽 인연

 

새들이 허공에 떼지어

무늬 만들고

 

가야산

이제 간다

 

이제 산으로 간다

 

햇빛

외로운가

 

무덤 속의 사람아

 

칠서 휴게소에서

희고 고운

네 넋을 잠깐 보고

 

영산(靈山)

검은 빛 스쳐 지나며

 

운다

 

옛 무덤 속의

 

가야 여인아

 

가야 여인아

 

젊어

가라앉기 힘들고

 

늙어 뜨기 어려운

 

한세상

너를 부르며

유행가처럼 부르며

 

이제

가야산

간다.

 

 

 

오늘

김지하

 

오늘

간다는 사람은 가고

온다는 이는 오지 않았다

 

늙어가는 길

외로움과 회한이

가장 큰 병이라는데

 

사람이 그리우나

만나기는 싫다

 

오피스텔 꼭대기 한 방에 갇혀

풀잎으로부터는 아득히 멀고

꽃은 더욱 그러한데

 

입만 열면

생명을 말하니

이스라엘의 하느님 신앙 닮았다

 

내일도 산다면

이젠

떠나리라

 

 

 

오월 산책

김지하

 

내 머리칼 속을

새들이 날고

 

온몸엔

북소리 들려라

 

먼저 간 이들

함께 거니는 오월 산책

 

아스팔트에 꽃들 피어나고

행상들 비닐 속에 물고기 뛰놀고

먼 곳 푸른 산 긴 한숨 소리

 

천지에 가득한

새 울음소리.

 

 

 

오적(五賊) - 담시(譚詩)

김지하

 

1

()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것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기를 하나 쓰것다.

옛날도 먼 옛날 상달 초사흘 날 백두산 아래 나라선 뒷날

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 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아흐로 단군이래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포식한 농민은 배 터져 죽는 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 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 났고

부정부패 가렴주구 처처에 그득하나

요순시절에도 사흉은 있었으니

아마도 현군양상(賢君良相)인들 세살 버릇 도벽(盜癖)이야

여든까지 차마 어찌할 수 있겠느냐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

녘은 똥 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 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 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족

남북 간에 오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구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 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 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가 부어 남산만 하고 목 질기기는 동탁 배꼽 같은

천하 흉포 오적(五賊)의 소굴이렸다.

사람마다 뱃속이 오장 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 배 안에는 큰 황소 불알만 한 도둑보가 곁붙어 오장 칠보,

시 한 왕초에게 도둑질을 배웠으나 재조는 각각이라

밤낮없이 도둑질만 일삼으니 그 재조는 또한 신기(神技)에 이르렀겄다.

하루는 다섯 놈이 모여

십 년 전 이맘때 우리 서로 피로써 맹세코 도둑질을 개업한 뒤

날이 날로 느느니 기술이요 쌓으느니 황금이라,

황금 십만근을 걸어놓고

그간에 일취월장 묘기(妙技)를 어디 한번 서로 겨룸이 어떠한가

이렇게 뜻을 모아 도()짜 한자 크게 써 걸어놓고 도둑시합을 벌이는데

때는 양춘가절(陽春佳節)이라 날씨는 화창, 바람은 건 듯, 구름은 둥실

지마다 골프채 하나씩 비껴들고 꼰아잡고

행여 질세라 다투어 내달아 비전(泌傳)의 신기(神技)를 자랑해쌌는다.

 

 

2

첫째 도둑 나온다 재벌이란 놈 나온다

돈으로 옷 해 입고 돈으로 모자 해 쓰고 돈으로 구두해 신고 돈으로 장갑해 끼고

금시계, 금반지, 금팔지, 금단추, 금넥타이 핀, 금카후스보턴, 금박클, 금니빨, 금손톱, 금발톱, 금작크, 금시계줄.

디룩디룩 방댕니, 불룩불룩 아랫배, 방귀를 뽕뽕 뀌며 아그작 아그작 나온다

저놈 재조 봐라 저 재벌 놈 재조 봐라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초치고 간장치고 계자 치고 고추장치고 미원까지 톡톡 쳐서 실고추과 마늘 곁들여 나름

세금 받은 은행 돈, 외국서 빚낸 돈, 왼갖 특혜 좋은 이권은 모조리 꿀꺽

이쁜 년 꾀어서 첩 삼아 밤낮으로 작신 작신 새끼 까기 여념 없다

수두룩 까낸 딸년들 모조리 칼 쥔 놈께 시앗으로 밤참에 진상하여

귀뜀에 정보 얻고 수의계약 낙찰시켜 헐값에 땅 샀다가 길 뚫리면 한 몫 잡고

()원 공사(工事) 오 원에 쓱싹, 노동자임금은 언제나 외상 외상

둘러치는 재조는 손오공 할애비요 구워삶는 재조는 뙤놈 술수 빰치겄다.

 

또 한 놈 나온다. 국회의원 나온다.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가래 끓는 목소리로 응승거리며 나온다

털투성이 몽둥이에 혁명 공양 휘휘 감고

혁명 공약 모자 쓰고 혁명 공약 배지 차고

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깃발같이 높이들고 대갈일성, 쪽 째진 배암샛바닥에 구호가 와그르르

혁명이닷, 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 개조(改造), 부정 축재는 축재 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 중농(重農)이닷, 빈농(貧農)은 잡농(雜農)으로!

건설이닷, 모든 집은 와우식(臥牛式)으로!

사회정화(社會淨化), 정인숙(鄭仁淑), 정인숙(鄭仁淑)을 철두철미하게 본받아랏!

궐기하랏, 궐기하랏! 한국은행권아, 막걸리야, 주먹들아,

빈대 표야, 곰보 표야, 째보 표야

올빼미야, 쪽제비야, 사꾸라야, 유령(幽靈)들아, 표 도둑질 성전(聖戰)에로 총 궐기하랏!

손자(孫子)에도 병불(兵不) 후사, 치자즉 도자(治者卽盜者)요 공약즉 공약(公約卽空約)이니

우매(遇昧) 국민 그리 알고 저리 멀찍 비켜 서랏, 냄새난다 퉤 -

골프 좀 쳐야겄다.

 

 

3

셋째 놈이 나온다. 고급공무원 나온다.

풍신은 고무풍선, 독사같이 모난 눈, 푸르족족 엄한 살,

콱 다문 입 꼬라지 청백리(淸白吏) 분명쿠나

단 것을 갖다주니 쩔레쩔레 고개저어 우린 단것 좋아 않소,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말구

어허 저놈 뒤좀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었다

이쪽 보고 히뜩히뜩 저쪽 보고 혜끗혜끗, 피두피둥 유들유들

숫기도 좋거니와 이빨 꼴이 가관이다.

단것 너무 처먹어서 새까맣게 썩었구나, 썩다 못해 문들어져

오리(汚吏)가 분명쿠나

간같이 높은 책상 마다 같이 깊은 의자 우뚝나직 걸터앉아

()은 쥐뿔도 없는 놈이 하늘같이 높이 앉아 한 손으로 노땡큐요 다른 손은 땡큐땡큐

되는 것도 절대 안 돼, 안될 것도 문제없어, 책상 위엔 서류뭉치, 책상 밑엔 지폐뭉치

높은 놈껜 삽살개요 아랫놈껜 사냥개라, 공금은 잘라먹고 뇌물은 청()해 먹고

내가 언제 그랬더냐 흰 구름아 물어보자 요정(料亭) 마담 위아래로 모두 별 탈 없다더냐.

 

넷째 놈이 나온다. 장성(長猩) 놈이 나온다

키 크기 팔대 장성, 제 밑에 졸개 행렬 길기가 만리장성

온몸이 털이 숭숭, 고리눈, 범아가리, 벌룸코, 탑삭수염,

짐승이 분명쿠나

금은 백동 청동 황동, 비단 공단 울긋불긋, 천근만근 훈장으로 온몸을 덮고 감아

시커먼 개다리를 여기 차고 저기 차고

엉금엉금 기 나온다 장성(長猩) 놈 재조 봐라

쫄병들 줄 쌀가마니 모래 가득 채워놓고 쌀은 빼다 팔아먹고

쫄병 먹일 소 돼지는 털 한 개씩 나눠주고 살은 혼자 몽창 먹고

엄동설한 막사 없어 얼어 죽는 쫄병들을

일만 하면 땀이 난다 온종일 사역 시켜

막사 지을 재목 갖다 제 집 크게 지어놓고

부속 차량 피복 연탄 부식에 봉급까지, 위문품까지 떼어먹고

배고파 탈영한 놈 군기 잡자 주어 패서 영창에 집어놓고

열중 쉬엇 열중 열중 열중 쉬엇 열중

빵빵들 데려다가 제마누라 화냥끼 노리개로 묶어두고

저는 따로 첩을 두어 운우서수 공방전(雲雨魚水攻防戰)에 병법(兵法)이 신출귀몰(神出鬼沒)

 

마지막 놈 나온다. 장차관이 나온다

허옇게 백태끼어 삐적삐적 술지게미 가득 고여 삐져나와

추접 무화(無化) 눈꼽 낀 눈 형형하게 부라리며 왼손은 골프채로 국방을 지휘하고

오른손은 주물럭주물럭 계집 젖통 위에다가 증산 수출 건설이라 깔짝깔짝 쓰노라니

호호 아이 간지럽사와요

이런 무식한 년, 국사(國事)가 간지러워?

굶더라도 수출이닷, 안 팔려도 증상이닷, 아사(餓死)한 놈 뼉다귀로 현해탄에 다리 놓아 가미사마 배알하잣!

째진 북소리 깨진 나팔 소리 삐삐빼빼 불어대며 속셈은 먹을 궁리

검정 세단 있는데도 벤쯔를 사다 놓고 청렴결백 시위코자 코로나만 타는구나

예산에서 몽땅 먹고 입찰에서 왕창 먹고 행여나 냄새날라 질근질근 껌 씹으며

켄트를 피워물고 외래품 철저 단속 공문을 휙휙휙휙 내갈겨 쓰고나서 어허 거참 달필(達筆)이다.

추문 듣고 뒤쫓아온 말 잘하는 반벙어리 신문기자 앞에 놓고

일국(一國)의 재상더러 부정(不正)이 웬말인가 귀거래사(歸去來辭) 꿍얼꿍얼, 자네 핸디 몇이더라?

 

 

4

오적(五賊)의 이 절륜한 솜씨를 구경하던 귀신들이

깜짝 놀라서 어마 뜨거라 저놈들한테 붙잡히면 뼉다귀도 못추리것다

똥줄 빠지게 내빼 버렸으니 요즘엔 제사 지내는 사람마저 드물어졌겄다

이라 한참 시합이 구시월 똥호박 무르익듯이 몰씬몰씬 무르익어가는데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나라 망신시키는 오적(五賊)을 잡아들여라

추상같은 어명이 쾅,

청천 하늘에 날벼락 치듯 쾅쾅쾅 연거푸 떨어져 내려 쏟아져 퍼붓어싸니

네이- 당장에 잡아 대령하겠나이다, 대답하고 물러선다

포도대장 물러선다 포도대장 거동 봐라

울뚝불뚝 돼지코에 술 찌꺼기 허어옇게 묻은 메기 주둥이

침은 질질질

장비 사돈네 팔촌 같은 텁석부리 수염, 사람 여럿 잡아먹어 피가 벌건 왕방울 눈깔

마빡에 주먹 혹이 뛸 때마다 털렁털렁

열십자 팔 벌이고 멧돌 같이 좌충우돌, 사자같이 으르르르릉

이놈 내리훑고 저놈 굴비 엮어

종삼 명동 양동 무교동 청계천 쉬파리 답십리 왕파리 왕십리 똥파리 모두 쓸어 모아다 꿀리고 치고 패고

차고 밟고 꼬집어 뜯고 물어뜯고 업어 메치고 뒤집어 던지고 꼰아 추스리고 걷어 팽개치고

때리고 부수고 개키고 까집고 비틀고 조이고 꺾고 깎고 벳기고 쑤셔대고 몽구라뜨리고

직신 작신 조지고 지지고 노들강변 버들같이 휘휘 낭창 꾸부러뜨리고

육모방망이, 세모쇳장, 갈쿠리, 긴 칼, 짧은 칼, 큰칼, 작은칼

오라 수갑 곤장 난장 곤봉 호각

개다리 소다리 장총 기관총 수류탄 최루탄 발연탄 구토탄 똥탄 오줌탄 뜸물탄 석탄 백탄

모조리 갖다 늘어놓고 어흥 -

호랑이 방귓소리 같은 으름장에 깜짝, 도매금으로 끌려와 쪼그린 되민증들이 발발

전라도 갯땅쇠 꾀수놈이 발발 오뉴월 동장군(冬將軍) 만난 듯이 발발발 떨어댄다

네놈이 오적(五賊)이지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날치기요

날치기면 더욱 좋다. 날치기, 들치기, 밀치기, 소매치기, 네다바이 다 합쳐서

오적(五賊)이 그 아니냐

아이구 난 날치기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펨프요

펨프면 더욱 좋다. 펨프, 창녀, 포주, 깡패, 쪽쟁이 다 합쳐서

풍속사범 오적(五賊)이 바로 그것 아니더냐

아이구 난 펨프이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껌팔이요

껌팔이면 더욱 좋다. 껌팔이, 담배팔이, 양말팔이, 도롭프스팔이, 쪼코렛팔이 다 합쳐서

외래품 팔아먹는 오적(五賊)이 그 아니냐

아이구 난 껌팔이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거지요

거지면 더더욱 좋다. 거지, 문둥이, 시라이, 양아치, 비렁뱅이 다 합쳐서

우범오적(五賊)이란 너를 두고 이름이다. 가자 이놈 큰집으로 바삐 가자

애고 애고 난 아니요, 오적(五賊)만은 아니어라우. 나는 본시 갯땅쇠로 농사로는 배고파서 돈벌라고 서울 왔소.

내게 죄가 있다면은 어젯밤에 배고파서 국화빵 한 개 훔쳐먹은 그 죄밖엔 없습네다.

이리 바짝 저리 죄고 위로 틀고 아래로 따닥

찜질 매질 물질 불질 무두질에 당근질에 비행기 태워 공중잡이

고춧가루 비눗물에 식초까지 퍼부어도 싹아지 없이 쏙쏙 기어 나오는 건

아니랑께롱

한마디뿐이겄다

포도대장 할 수 없이 꾀수 놈을 사알살 꼬실른다 저것 봐라

오적(五賊)은 무엇이며 어디 있나 말 만하면 네 목숨은 살려주마

꾀수 놈 이 말 듣고 옳다꾸나 대답한다.

오적(五賊)이라 하는 것은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란 다섯 짐승, 시방 동빙고동에서 도둑 시합 열고 있오.

으흠, 거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 정녕 그게 짐승이냐?

그라문이라우, 짐승도 아조 흉악한 짐승이지라우.

옳다 됐다 내 새끼야 그 말을 진작 하지

포도대장 하도 좋아 제 무릎을 탁 치는데

어떻게 우악스럽게 처 버렸던지 무릎뼈가 파싹 깨져 버렸겄다, 그러허나

아무리 죽을 지경이라도 사()는 사(), ()은 공()이라

네놈 꾀수 앞장서라, 당장에 잡아다가 능지처참한 연후에 나도 출세해야겄다.

꾀수 놈 앞세우고 포도대장 출도한다

범 눈깔 부릅뜨고 백주대로 상에 헷드라이트 왕눈깔을 미친 듯이 부릅뜨고

부릉 부릉 부르릉 찍찍

소리소리 내지르며 질풍같이 내닫는다

비켜라 비켜라

안 비키면 오적(五賊)이다

간다 간다 내가 간다

부릉 부릉 부르릉 찍찍 우당우당 우당탕 쿵쾅

오적(五賊) 잡으러 내가 간다

남산을 훌렁 넘어 한강 물 바라보니 동빙고동 예로구나

우레같은 저 함성 범 같은 늠름 기상 이완대장(李浣大將) 재래(再來)로다

시합장에 뛰어들어 포도대장 대갈일성,

이놈들 오적(五賊)은 듣거라

너희 한같 비천한 축생의 몸으로

방자하게 백성의 고혈빨아 주지육림 가소롭다

대역무도 국위 손상, 백성 원성 분분하매 어명으로 체포하니

오라를 받으렸다.

 

 

5

이리 호령하고 가만히 들러보니 눈 하나 깜짝하는 놈 없이

제일에만 열중하는데

생김생김은 짐승이로되 호화찬란한 짐승이라

포도대장 깜짝 놀라 사면을 살펴보는데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이게 어느 천국이냐

서슬푸른 용트림이 기둥 처처 승천하고 맑고 푸른 수영장엔 벌거벗은 선녀(仙女) 가득

몇십 리 수풀들이 정원 속에 그득그득, 백만 원짜리 정원수(庭園樹)에 백만 원짜리 외국(外國)

천만 원짜리 수석비석(瘦石肥石), 천만 원짜리 석등석불(石燈石佛), 일억 원짜리 붕어 잉어, 일억원짜리 참새 메추리

()도 자동, 벽도 자동, 술도 자동, 밥도 자동, 계집질 화냥질 분탕질도 자동자동

여대생(女大生) 식모 두고 경제학박사 회계 두고 임학(林學)박사 원정(園丁) 두고 경제학박사 집사 두고

가정교사는 철학박사 비서는 정치학박사 미용사는 미학(美學)박사 박사 박사 박사 박사

잔디 행여 죽을세라 잔디에다 스팀 넣고, 붕어 행여 죽을세라 연못 속에 에어컨 넣고

새들 행여 죽을세라 새장 속에 히터 넣고, 개밥 행여 상할세라 개집 속에 냉장고 넣고

대리석 양옥(洋屋)위에 조선기와 살쩍 얹어 기둥은 코린트식()

대들보는 이오니아식()

선자추녀 쇠로 치고 굽도리 삿슈 박고 내외 분합 그라스룸 석조(石造) 벽에

갈포 발라 앞뒷퇴 널찍 터서 복판에 메인홀 두고 알 매달아 부연 얹고

기와 위에 이 층 올려 이 층 위에 옥상 트고

살미살창 가로닫이 도자창(盜字窓)으로 지어놓고

안팎 중문 솟을대문 페르샤풍(), 본 따놓고 목욕탕은 토이기풍(),

돼지우리 왜풍(倭風) 당당

집 밑에다 연못 파고 연못 속에 석가산(石假山), 대대 층층 모아놓고

열어 재킨 문틈으로 집안을 언뜻 보니

자개 케비넷, 무광택 강철 함롱, 봉 그린 용장, 용 그린 봉장, 삼천삼백삼십삼 층 장

카네숀 그린 화초장, 운동장만 한 옥쟁반, 삘딩 같이 높이 솟은 금은 청동 놋촉대,

전자시계, 전자 밥그릇, 전자 주전자, 전자 젓가락, 전자 꽃병, 전자거울, 전자책,

전자 가방, 쇠유리병, 흙 나무 그릇, 이조 청자, 고려 백자,

거꾸로 걸린 삐까소, 옆으로 붙인 샤갈,

석파란(石坡蘭)은 금칠액틀에 번들번들 끼워놓고,

산수화조호접인물(山水花鳥蝴蝶人物)

내리닫이 족자는 사백 점 걸어두고, 산수화조호접인물(山水花 鳥蝴蝶人物)

팔천팔백팔십팔 점이 한꺼번에 와글와글,

 

백동 토기, 당 화기, 왜 화기, 미국 화기, 불란서 화기, 애태리 화기,

호피 담뇨 씨운 테레비, 화류 문갑 속의 쏘니 녹음기, 대 모책상 위의 밋첼 카메라,

산호책장 곁의 알씨에이 영사기, 호박필통에 꽂힌 파카 만년필, 촛불 켠 샨들리에,

피마주 기름 스탠드라이트, 간접직접 직사곡사 천장 바닥 벽 조명이 휘황찬란 호화율율.

여편네들 치장 보니 청옥 머리핀, 백옥 구두 장식, 황금 부로취, 백금 이빨,

밀화 귓구멍 가게, 호박 밑구멍 마게, 산호 똥구멍 마게, 루비 배꼽 마게, 금파 단추,

진주 귀걸이, 야광주 코걸이, 자수정 목걸이, 싸파이어 팔지, 에어랄드 팔지,

다이야몬드 허리띠, 터키석 안경대, 유독 반지만은 금칠한 삼 원짜리 납 반지가

번쩍번쩍 칠흑 암야에 횃불처럼 도도무쌍(無雙)이라!

 

왼갖 음식 살펴보니 침 꼴깍 넘어가는 소리 천지가 진동한다

소털 구이, 돼지 콧구멍 볶음, 염소 수염 튀김, 노루 뿔 삶음, 닭 네발 산적, 꿩 지느라미 말림,

도미 날개 지짐, 조기 바톱젓, 민어 농어 방어 광어 은어 귀만 짤라 회 무침,

낙지 해삼 비늘 조림, 쇠고기 돈까스, 돼지고기 비후까스, 피 안 뺀 복지리,

생율, 숙율, 능금, 배 씨만 발라 말리원서 금딱지로 싸놓은 것, 바나나 식혜,

파인애플 화채, 무화과 꽃닢 설탕 버무림, 롱가리트 유과, 메사돈 약과, 사카린 잡과,

개구리알 구란탕, 청포 우무, 한천 묵, 괭장망장과화주, 산또리, 계당주, 샴펭, 송엽주,

드라이찐, 자하주, 압산, 오가피주, 죠니워카, 구기주, 화이트호스, 신선주, 짐빔,

선약주, 나폴레옹 꼬냑, 약주, 탁주, 소주, 정종, 화주, 째주, 보드카, 람주()!

 

아가리가 딱 벌어져 닫을 염도 않고 포도대장 침을 질질질질질질 흘려 싸면서

가로되

놀랠 노짜로다

저게 모두 도둑질로 모아들인 재산인가

이럴 줄을 알았더면 나도 일찍암치 도둑이나 되었을걸

원수로다 원수로다 양심(良心)이란 두글자가 철천지 원수로다

 

 

6

이리 속으로 자탄망조하는 터에 한 놈이 쓰윽 다가와 써억 술잔을 권한다

보도듣도 못한 술인지라

허겁지겁 한잔 두잔 헐레벌떡 석잔 넉잔 이윽고 대취하여

포도대장 일어서서 일장 연설 해보는데 안주를 어떻게나 많이 쳐먹었는지

이빨이 확 닳아 없어져 버린 아가리로 이빨을 딱딱 소리 내 부딪쳐가면서

씹어뱉는 그 목소리 엄숙하고 그 조리 정연하기 성인군자의 말씀이라

 

만장하옵시고 존경하옵는 도둑님들!

도둑은 도둑의 죄가 아니요, 도둑을 만든 이 사회의 죄입네다

여러 도둑님들께옵선 도둑이 아니라 이 사회에 충실한 일꾼이니

부디 소신껏 그 길에 매진, 용진, 전진, 약진하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또 바라옵니다.

이 말끝에 박장대소 천지가 요란할 때

포도대장 뛰어나가 꾀수 놈 낚궈채어 오라 묶어 세운 뒤에

요놈, 네놈을 무고죄로 입건한다.

때는 가을이라

서산낙일에 객수(客愁)가 추연하네

외기러기 짝을 찾고 쪼각달 희게 비껴 강물은 붉게 타서 피 흐르는데

어쩔 꺼나 두견이는 설리설리 울어쌌는데 어쩔 꺼나

콩알 같은 꾀수 묶어 비틀비틀 포도대장 개 트림에 돌아가네

어쩔 꺼나 어쩔 꺼나 우리 꾀수 어쩔 꺼나

전라도서 굶고 살다 서울 와 돈 번다더니

동대문 남대문 봉천동 모래내에 온갖 구박 다 당하고

기어이 가는구나 가막소로 가는구나

어쩔 꺼나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한 사정 누가 있어 바로 잡나

잘 가거라 꾀수야

부디부디 잘 가거라.

 

 

7

꾀수는 그 길로 가막소로 들어가고 오적(五賊)은 뒤에

포도대장 불러다가 그 용기를 어여삐 녀겨 저희 집 솟을대문,

바로 그 곁에 있는 개집 속에 살며 도둑을 지키라 하매,

포도대장 이 말 듣고 얼씨구 좋아라 지화자 좋네 온갖 병기(兵器)를 다 가져다

삼엄하게 늘어놓고 개집 속에서 내내 잘살다가 어느 맑게 개인 날 아침,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다 갑자기 벼락을 맞아 급살하니

이때 또한 오적(五賊)도 육공(六孔)으로 피를 토하며

꺼꾸러졌다는 이야기. 허허허

 

이런 행적이 백대에 민멸치 아니하고 인구(人口)에 회자하여

날 같은 거지 시인의 싯귀에까지 올라 길이길이 전해오겄다.

 

 

 

외로워도

김지하

 

외로워도

그립진 않다

 

아니다

그리운 사람 아예

없는 것

 

옛 옛 일곱 해

독방살이 나날 모두 다

새푸른 별밭이었으니

 

이제 더는

그립지 않다

 

외로울 뿐

 

우주 안에 산다는 것

다아 그런 것

 

외로울 뿐,

 

느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용담수운(龍潭水雲) -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김지하

 

내 운명은

물 한 잔

 

산을 지나고

물을 지난다

 

아아

 

물 한 잔이

걸어 지난다

 

사람들

솔들

욕망들

 

들에 가득 널려 있다

 

모두 다 빨래 같다

 

하나도

생동하지 않는다

 

말라,

목말라한다

 

지금 내가

한 나그네 마음 열어

말한다

 

지금에도

내 운명은

물 한 잔

 

언제

햇빛 있어

구름이 되랴

 

구름 되어

비구름 되어

 

거기

내리랴

 

멈추면

붉은 넋 아직도

龜尾山 속 남아

물 한 잔으로 남아

 

이리

운다

 

누구를 만나

이 물 한 잔

구름이 되랴

비구름

 

세상에

마른, 말라, 목마른

세상에 내리고

 

내려

눈물 되고 피눈물 되고

냇물 되고 강물 되어

저 크나큰 바닷물 되어

 

네 바다

한세상에 이르랴

 

이르러 꽃 피랴

 

아아

 

봄 되어

만년나무 생명나무 저 위에

천 떨기로

 

꽃 피랴

피어

팔방시방에 널리 널리

 

흩어지랴

흩어지랴.

 

 

 

용당리에서

김지하

 

용당리에서의 나의 죽음은

출렁이는 가래에 묻어올까, 묻어오는

소금기 바람 속을

돌 속에 흐느적거리고 부두에서

노동자가 한 사람 죽어 있다

그러나 나의 죽음

죽음은 어디에

 

무슨 일일까

신문지 속을 바람이 기어가고

포래포래마다 반짝이는 내 죽음의

흉흉한 남쪽의 손금들 수군거리고

해가 침몰하는 가래의 바다 저 끝에서

단 한 번

짤막한 기침 소리 단 한 번

 

그러나 용당리에서의 나의 죽음은

침묵의 손수건에 묻어올까

난파와 기나긴 노동의 부두에서 가마니 속에

노동자가 한 사람 죽어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작은 손이 들리고

물 위에서 작고 흰 손이 자꾸만

나를 부르고.

 

 

 

우리가 하자

김지하

 

몹시도 눈이 쌓인 날

치악산 밑에 사는

한 친구 집에 간 일이 있었지.

지금도 생각난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들을 하는지

참 우수한 아이들이었는데

넷이었던가

다섯이었던가

기억은 참되지 않다

기억은 오직 구성될 뿐이다

눈에 덮인 너와집

그 작은 방

그 희미한 촛불

해월 선생처럼 수염을 기르고 엄장 큰 한 분이 농주를 마시고 있었다

첫마디

`베토벤이 죽던 날 마르크스가 태어났지'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긴 논쟁은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나는 낫셀의 방향을 주장했던 것 같고

공과를 지망했던 내 친구는 그 무렵에 벌써 로스토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얘기는 사분 오열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똑같은 것이었다

`베토벤이 죽어간 날

마르크스가 태어났다

이 점을 기억하라

역사는 대를 이어서 자기의 본체 이성을 발전시키는 법이다

그래서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미끄러지며 넘어지며

고등학교 모자가 날아가고

다시 줏어 쓰며

우리가 얘기한 것은

한 가지였다

`우린 아직 어리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것도 저것도 다 틀렸다

우리가 하자!'

 

 

 

우리 앞에 있는 분명한 희망

김지하

 

술병 속에 갇혀 있던 때를 기억해라

술병 밖에서 술병 속을 추억하던 때를 기억해라

술병 속에 있을 때는 술병 밖을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술병 밖에서는 술병 속에 들어 있던 행복한 때를 추억한다

한마디로 말하자

마찬가지 얘기다

술병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술병 재벌의 매체 조작에 의해서만 술병은 이 지상에 있을 뿐이다

술병의 존재를 거절해라

우리는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마시고 있을 뿐이다

절망에도 술병이 있는가

만약 절망에 병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절망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아주 커다랗게

아주 환하게

아주 분명하게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

 

 

 

우물

김지하

 

1

울적하고

시장한 겨울 깊어

한 해가 간다

동전 세 닢 여섯 번 던져

에 묻자

그늘, ,

빛 그늘

 

나왔구나

물 바람 우물괘

 

도읍은 바꿔도 우물은 못 바꾸리.

 

 

2

흐리고 썪어

못 마시는 낡은 우물

 

옛 우물에 새조차 오지 않네

때가 날 버렸구나

 

새 물 졸졸 솟아

붕어 노니나

두레박 깨어져 물 새는구나

 

동무들 다 떠나 자취 없는 우물전.

 

 

3

우물에서 달을 길어

빠져 죽었네.

두레박에

 

길게 누운 구름에 묻고 죽었네

꿈꾸든 산머리는

바람에 짤려

고원

아아 고원에서 지나간

지나간 날의 눈 깊은 국경의 밤에

높이 울든 하얀 말

높이 울든 무성의 찰수숫대

목줄기가 찢어졌네

꽃샘 아래 철죽목

 

온갖 이쁜 소리의 방울과 우렁찬

모든 종들이 굳게 굳게 입을 다물 때

밤이 깊으면 마른번개의 밤이 깊으면

젊어서들 죽었네

홀로 깨어 일어나 촛불을 밝힌 죄로

도래질을 남기고 끄덕임도 남기고

 

물 마른 우물전엔 홈을 남기고

두레박에 죽었네

우물에서 달을 길어

빠져 죽었네.

 

 

 

이사(夷史)

김지하

 

산 아래

물가에

우두커니 앉아

하늘이 왜 푸른가를

생각한다

 

아무도

곁에 없다

 

올 것 같지도 않다

 

왔다 간

흔적조차 없는

빈자리

 

너는 환영처럼 거기

서 있다

 

희다

 

너의 이름은

夷史,

잃어버린 東夷族

아득한 넋

 

마지막 삶의

밑둥이여!

 

 

 

이슬 털기

김지하

 

~~술은 시가 되어 훨훨 나는데

여기 미인의 넋, 꽃이 있다

오늘은 마침 이 둘이 쌍쌍하니

귀인과 함께 하늘에 오름과 같도다~~ (이규보)

 

눈뜰 수 없이

눈부시게 흰 바람은 불어라

푸른 배추포기들 춤추고

붉은 능금들 딸랑거리고

하늘 올라라

떠올라라

두견꽃 죽어간 날

누가 태어났나

바람이 불어 눈뜰 수 없이

티끌은 일어 어둡던 그날

술집 술상 밑에서 꽃받침에서

누가 태어났나

눈뜰 수 없이

눈부시게 흰 치마는 흩날려라

검은 삼단머리 드날려

분홍 옷고름 휘날려

올라라

푸른 하늘 저 높이 높이

죽어도 죽지 않는

혼 중의 혼

뜨거운 한여름에 태어난 혼

버선코에 낮달을 걸고

눈뜰 수 없이 눈뜰 수 없이

눈부시게 빛나는 해 이마에 이고

떠올라라

하늘 올라

두견꽃 죽어간 날

누가 태어났나

바람이 불어 눈뜰 수 없이

티끌은 일어 어둡던 그날

술집 술상 밑에서 꽃받침에서

누가 태어났나

가라 가라

눈부시게 흰

극락 가라 요령 소리 따라

일수도 빚도 잊고

전세도 적금도 잊고

늙은 어머니 어린 동생 모두 다 잊고

설움 한 무더기 원한 한 삼태기

술도 노래도 주먹질 칼부림도 잊고

모두 뒤에 버리고

어화 넘자 어허야

달구 소리 따라가라

죽어도 죽지 않는

혼 중의 혼

뜨거운 한여름에 태어난 혼

눈뜰 수 없이

눈부시게 흰 바람은 불어와

푸른 배추포기들 춤추고

붉은 능금들 딸랑거리고

떠올라라

애린의 혼

푸른 하늘 높이 올라

두견꽃 죽어간 날

누가 태어났나

눈부시게 흰 눈부시게 흰

극락 가라

술 취해 우는 내

비나리 따라

어서 가라

어서 가라

 

 

 

이제 나에게 오세요

김지하

 

이제 나에게 오세요

문 열어놨습니다

한 스무 평쯤 될까요

한 서른 평쯤 될까요

라이타 여기 있고

술잔 저기 있습니다

저기 있고 여기 있는 그이

아 세상에 사는, 아직도 살아 있는

전화로 가끔은 서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그래요

전화하시면 돼요

아니 하지 마세요

하지 않는 동안 생각하세요

그 긴 시간

고통받았던 그 긴 시간

그리고 내 시간.

 

 

 

일산시첩(一山詩帖)

김지하

 

1

일산 새집 들어

빈방에

흰빛 난다

 

진종일 눈부시고

매미소리 뼈만 남고

 

어둠 속 붉었던

자취 없다

 

먼 강물

핏속에 흐르나

나 이제 벌판에서 죽으리

 

흩어져

한 줌

 

 

3

외로울 땐

풀잎 하나도 정답다

 

하늘 가득 스모그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대지

 

참새 지저귀고

아직도 꽃이 피고

 

하늘엔

흰구름도 흐른다

 

아파트에 쭈그려 앉아

허공 한쪽 볼 수 있으니

 

내 삶

아직은

괜찮다

 

고마워

눈물 난다.

 

 

 

재떨이 회담

김지하

 

남북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연상이 있어

재떨이야

남북 문제는 재떨이야

제 실컷 피우다가

담배를 끌 때는

불쾌하게 신경질적으로

불성실하게 함부로 끄는 것

그것이 남북 회담이야

재떨이 가지고 남북 회담이 되겠는가

남북 회담이 재떨이라면

남북 회담이라고 하지 말고

재떨이 회담이라고 불러라

성실하게 이야기하자

말은 그 시대의 진실을 반영하는 것

재떨이 회담!

 

 

 

저 먼 우주의

김지하

 

저 먼 우주의 어느 곳엔가

나의 병을 앓고 있는 별이 있다

 

하룻밤 거친 꿈을 두고 온

오대산 서대 어딘가 이름 모를

꽃잎이 나의 병을 앓고 있다

 

서정에 숨어 숨 고르고 있을

기이한 나의 친구

밤마다 병든 나를 꿈꾸고

 

옛날에 옷깃 스친 어느 떠돌이가

내 안에서 굿을 친다

 

여인 하나

내 이름 슨 등롱에 불 밝히고 있다

 

나는 혼자인 것이냐

홀로 앓는 것이냐

 

창틈으로 웬 바람이 기어들어

내 살갗을 간지른다.

 

 

 

저기 여기

김지하

 

봄은 철쭉

저만큼 있고

 

내 마음에 여기

흰 철쭉 핀다

 

사랑도 그런 것이냐

 

너는

저만큼서 웃고 있고

 

내 마음에

너는 울고 있다

 

우주는 밤낮 바뀌어

제 갈 길 가는데

 

내 속의 우주 홀로 멈춰

썩어가고 있다

 

꽃들 지고

잎새 무성한 여름이 오면

 

,

 

우리가

 

하나 되리.

 

 

 

저녁 산책

김지하

 

숙인 머리에

종소리 떨어지고

 

새들이 와 우짖는다

 

숙인 머리에

바람이 와 소스라치고

 

가슴 펴라

가슴 펴라 악쓰고

 

숙인 머리에

별 뜬다

 

오늘 밤은 무슨 꿈을 꾸랴

먼 하늘엔 새빨간

노을 쏟아지고.

 

 

 

저녁 이야기

김지하

 

접시에 흙을 담았다

가락지는 흙 속에

저녁 속에

있다.

 

나무는 말을 안한다

말은 기일게 길을 달리며

누군가 입술은

움직이다 말 것이다.

 

접시가 깨어진 것은

줄 간, 무너진 돌기둥의 밑이나

바위 밑 접시쪽 깨어진 한 모서리

내 지문은 있다.

 

우리는 너무나 기인 목의 춤을 추지만

흰 길이 고사리 까맣게 피울지도 모른다

아마도 달이 뜨면

네가 네 손을 내게 빈틈없이만 준다면

 

또한

그것은

아마 아주 광석인지도 모른다.

 

허나

차디찬 너의 얼굴, 허나

허나 네 입술은 퍼어런 금이 많음을

나무는 또한 말을 안한다.

 

겨울이 하나씩

분홍빛 거울 속을 지나가지만

그렇게도 가지만

나무는 또한 말을 안한다.

 

기인 말 울음 끝에 뜨는 달

달빛으로 그리인 접시에

차라리 붉은 접시에

흙을 담지만

 

흰 모시옷, 내가 쓰러지는 저녁에는

가락지와 이제

접시는 이제

없다.

 

 

 

 

저녁 장미

김지하

 

담배 연기에 싸여

부우옇게 떠오르는 저녁 장미

 

노을은

동편 하늘에 쓸쓸함을 주는데

 

누군가

아이 부르는 소리

 

누군가

신음 삼키는 소리

 

'장미꽃 피는 날에

돌아온다던 당신'

 

누군가 멀리서 노래 부르는 소리

 

날은 가고 또 오고

마음은 달뜨는데

 

한없이 내뿜는 담배 연기에 싸여

부우옇게 떠오르는

빛바랜 저녁 장미.

 

 

 

저자에 들어가 손을 내리다

김지하

 

맨가슴 벗은 발에 흙먼지 덮어쓰고

웃음 가득 띄우고 마을 찾아 들어온다

신선의 비결 따위 쓰지 않아도

마른 나무에 봄이 오면 꽃이 피듯 하리라

- 소노래 열째

 

시끄럽다!

 

 

 

정발산 아래

김지하

 

정발산 아래

아파트

아파트 속에 갇힌

내 속에는 정발산

정발산 속엔 또

해와 달과 별과 바람

 

나 이제 거리에서도 산에 살고

벽 너머 이웃에 살고

나 아닌

나를 살고

 

벗이여

다만 풀잎 하나

내 곁에 싱그럽게 푸르게

살아 있어만 준다면.

 

 

 

제사(祭祀)

김지하

 

흰 무명옷 갈아입고 앉아

대낮 해맑은 빛 속

내 안에 시방 살아 계신 옛 할매께

제사 드린다

 

드소서

 

요즘은 강연도 하고

글도 좀 쓰고

밥은 어찌 먹습니다

 

드소서

 

막거리 한 잔

명태 한 마리 드시니

물속 깊은 어딘가 빈 곳

새벽별 넷 차례로 떠오르고

소슬바람 떨리고 시린 물 흘러

잊었던 어메 아배

곰보할매 옛 물레 속에 함께 돈다

 

돌고 돌아라

 

아이들아

너희도 함께 돌아

 

창호지 문에 푸른 새벽 빛

발간 등잔불 꽃봉오리 보이느냐

원앙 수놓은 이불보에

기린이 봉황이 푸닥인다 보이느냐

 

굶어 돌아가신 고할매

너희 안에 살아 계시니

 

아이들아

밥 정히 모시거라

 

드소서

 

눈물 거두고

이제 많이 드소서.

 

 

 

죽음

김지하

 

빛 밝은 삼월 아침

상여 소리 지나는데

 

황매꽃 지고

꽃상여 지나는데

 

산란하던 마음

이리 차분해

 

황토 한줌

황산 어디쯤 산이면 어디쯤

눈부실 황토 한줌

 

종이꽃 하나

내 목숨.

 

 

 

줄탁(啐啄)

김지하

 

저녁 몸속에

새파란 별이 뜬다

회음부에 뜬다

가슴 복판에 배꼽에

뇌 속에서도 뜬다

 

내가 타죽은

나무가 내 속에 자란다

나는 죽어서

나무 위에

조각달로 뜬다

 

사랑이여

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

 

껍질 깨고 나가리

박차고 나가

우주가 되리

부활하리.

 

* 새가 알에서 부화할 때 새끼가 안에서 톡톡 쪼는 행위()와 어미가 밖에서 탁탁 쪼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날 때 비로소 두꺼운 알이 깨진다는 말

 

 

 

중심의 괴로움

김지하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 밑으로 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지는 봄꽃

김지하

 

누구십니까

밤마다 이맘때면

늘 창가에 와 멎는 발걸음

누구십니까

 

쉰도 넘은 내 나이

연인일 리 없으니

아파트 안에선 볼 수 없는

달빛이라니까

혹은 별떨기이리까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성실한 그이

무상한 그이

 

어느 해 봄

내 사랑을 읽고

 

울던 진달래 꽃밭

꽃들이 내 얼굴 간질여 위로하더니

 

오늘

지는 봄꽃이라니까

 

울적한 내 마음을 보아

그렇습니까.

 

 

 

지리산

김지하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짖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짓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갔고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지옥

김지하

 

1

꿈꾸네

새를 꿈꾸네

새 되어 어디로나

나는 꿈을 미쳐 꿈꾸네

가름투성이 공장바닥 거적대기에

녹슨 연장 되어 쓰레기 되어

잘린 손 감아쥐고 새를 꿈꾸네

찌그러져도 미쳐 눈 감고 꾸네

하얀 연이 되고 꽃 피고 푸른 보리밭도 되고

미쳐 새가 되고 콩새가 되고

붉은 독촉장들이 수없이

새 되어 사라지고 가서 돌아오지 않고

끝없이 알 수 없는 공장문 밖 어디로나 끝없이

체납액 정리실적 복명서

세입 인별 징수부 영수증 명세서 집계표 고지서

내 손을 떠나 파랑새도 되고

까마귀도 되어 사라지고 가고 없고

돌아오지 않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기름투성이 공장바닥 거적대기에

멍청히 남은 갓스물

소화 20년제의

아아 나는 낡아빠진

가와모도 반절기

찍어내고 찍어내고 잘리고 부러지고

헐떡거리며 지쳐 여위어 비틀거리며

녹슨 연장이 되어 찌그러져 미쳐 그래도

새를 꿈꾸며 잘린 손 감아쥐면

예쁜 색동이 되고

팔랑개비가 되고

고향집 벽에 붙은 빨간 딱지가 되고

꽃상여 되고

기어이 기어이

울음 우는 저 밤기차가 되고

 

꿈꾸네

새를 꿈꾸네

새 되어 어디로나

날으는 꿈을 미쳐 꿈꾸네

남진이 되어 남진이 되어

저 무대 위

저 사람들 위

저 빛나는 빛나는 조명등에 빛나는

저 트럼펫이 되어

외쳐보렴 목터져라 온 세상아 찢어져라 찢어져 없어져 사라져

호떡도 수제비도 잔업도 없는 무대 위에 남진이 되어 새 되어

사라져가렴 손가락아 제기랄!

아무것도 아무것도

뒤에는 아무것도 추억 하나도 남기지 않고 잘려나간

내 갓스물아

영화나 되어

낮도 밤도 없는 시커먼 영등포

멍청히 남은

소화 20년제의

아아 나는 낡아빠진 가와모도 반절기

 

 

2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여기 그 누구도

그 흔한 예수마저도 믿을 수 없는

내일은 반드시 수염을 깎겠다는 나의 작은 결심조차도

아서라

못 믿을 거리, 아 나직나직한

바람 속 죽은 흙들이 가슴에 고여내려

마주 잡는 손바닥에마저

아서라

돌이 자라는 거리,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핏발 선 네 뜬눈의 거리

 

잿빛 쌓인 구름의 저기서 이리 천천히 다가오는

마른번개의 이 기이한 날에마저

기계소리에 막혔나 기계소리에 막혀

잎새 없는 나무들의 침묵에 막혔나 침묵에 막혀

아서라

장갑을 끼지 않고는

손조차도 아예 못 잡을 거리

아아

붙잡으면 날카로운 저 수없는 칼날이 미쳐

아서라

그렇게도 조용히

흙들이 끄여내려

돌이 되는 거절하는 네 알 수 없는 뜬눈의

아아 메마른 십일월의 거리

구로동 길 언저리

침묵한 거리

 

 

3

노동 속에서 기어나오는

뱀을 보아라

뒤에 따라나오는 나리꽃도 보아라

우렁찬 나팔소리가 들리고

손에 손에 산이 번쩍 들려 드디어는

바다에 빠진다 보아라

이 빠진 기아에 손가락을 끼우고

기아만을 빠르게 온종일을 미쳐 미쳐 돌아간다

피 터지듯이

사지에 소리없이 통곡이 터져

흘러내린다

나리꽃

아아 눈부신 저 노을 속의 나리꽃

기계에 감겨

숨져가는 나의 육신이 육신의 저 밑바닥까지

기계에 감겨

회전하며 울부짖으며 기계가 되어가는 지옥의

저 밑바닥에서

보아라

나의 눈에 보이는 피투성이의

내 죽음과 죽음 위에 피어난 흰 나리꽃

사이의 아득한 저

혼수의 밑바닥까지

꿈이냐

아아 이게 생시냐

우렁찬 나팔소리가 들리고

손에 손에 산이 번쩍 들려 드디어는

바다에 빠진다 보아라 저것 보아라

기인 긴 지옥의 노동 속에서

노을 무렵에

미쳐 숨져가는 나의 저기 저 뒤틀린 눈매의

넋을 보아라

친구여

지친 살을 보는 내 눈 사이에 열리는 노을 같은

피투성이의 저 새하얀 꿈을 보아라

내 한 줌의 살과

 

 

 

지옥에

김지하

 

지옥에 청정한

나무 한 그루만

잎새 하나만 있다면

그것은 하늘

생명의 기억,

나무처럼 잎새처럼

팔을 벌리고

창세기를

창세기를

다시 시작하리라.

 

 

 

진리

김지하

 

바람 스산타

스산함 타고 앉으면

바람 속이 내 집

 

어렵구나

이리 쉬운 걸

아직 채 못 깨쳤으니

깨쳤건만

아직도 스산하니.

 

 

 

척분(滌焚)

김지하

 

스물이면

나 또한 잘못 갔으리

가 뉘우쳤으리

품안에 와 있으라

옛 휘파람 불어주리니

모란 위 四更

첫 이슬 받으라

수이

삼도천(三途川) 건너라.

 

 

 

책들

김지하

 

책들은 웅장하다

모든 책들은 질서를 갖기 때문에

나보다는 웅장하다

비극적인 명성을 꿈꾸고

마릴린 몬로와의 있을 법도 않은

간통을 꿈꾸고 벌거벗고 빨고

핥고 그러나 새카만

옷 속의 볕에 탄 아도니스의 몸을 꿈꾸고

동시에 혁명을 혁명의

비극적인 명성을 게바라를 꿈꾸는 그런

나보다는 웅장하다

 

나에겐 이제 질서가 없다

하루살이만한 질서도 없다

다만

책을 읽을수록 바보가 된다는

모택동을 소주 이홉에 타서

위로한다

책에 짓눌린 모든 이해 못한

책들에 억눌린 나의 불쾌감을

상상의 고갈을 위로한다

 

무엇이 될까?

하루살이 벼룩 빈대 모기

그보다도 못한 밥벌레겠지

나의 내세(來世)

 

내세가 책 속에 있다

그래서 웅장하다

나는 현세조차 모른다

 

그러나 책들이여

반성하라 책들이여

어째서 너희들의 소리가 없는가

반란이 없는가 거스르는 미친 피

내 손의 피, 내 피의 저 미친, 미친, 미친, 소용돌이치는

저 피가 없는가? 아무것도 아니다 너의 웅장은 어째서

침묵하는가

이 밤에 이 무료함 속에

내 이 불타는 부끄러움 속에마저 책들이여.

 

 

 

척분(滌焚)

김지하

 

스물이면

나 또한 잘못 갔으리

가 뉘우쳤으리

품안에 와 있으라

옛 휘파람 불어주리니

모란 위 사경(四更)

첫 이슬 받으라

수이

삼도천(三途川) 건너라

 

 

 

천하태평

김지하

 

산림에도 성곽에도 다 의지할 데가 없으니 아침에 나가면 언제나 저물어 취해 오네 - 정작

 

명륜동 고개 넘어 부니라

무실리 그 흰 바람 부니라

봄이면 복사꽃 향내 넘어와

여름이면 능금 익는 달큰한 내 밀려와

가을엔 구멍 뚫린 가랑잎 타고 오고

이마 시린 겨울엔 눈부신 햇살 따라와

소줏잔 언저리엔 네 소식 항상 부니라

산도 거리도 보기 싫어

혼자 여기 탱감쳐 앉았다

회식은 엿먹어라 천렵 따윈 똥이나 싸라

기도하듯 냉수 안주로 마시는 자리

좌선하듯 골똘히 술잔 마주한 자리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며 부니라 애린

네 소식 항상 내게 부니라

산도 거리도 아닌

엉뚱한 자리

그러매 내 일찍이

천하태평이라 이름 붙인 잔술집

의지가지없는 외톨술꾼에게도

덧없는 극락 소식 잠시 잠깐은 부니라.

 

 

 

천형(天刑)

김지하

 

아름답네라

온갖 무망(無望)의 것들

 

일그러진 내 마음의 자식들

모두모두 아름답네라

 

비 오는 노을

막내와 모형비행기를 날리며

오늘 들어 몇 번짼가

내 머리는 피를 뱉으며

 

오오 아름답네라

그리움마저 끊어진 지옥

 

천형이여

천형이여

모질도록 아름답네라

 

비에 젖은 가로수 하나

 

 

 

첫 문화

김지하

 

말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아파트 사이

공터에 나가

 

입에

손을 모은다

속삭인다

 

'꽃이 피었다아 ──'

 

'꽃이 피었다아 ──'

 

한겨울에

석 달 만에

 

'난초 피었다아 ──'

 

소리는

하얀 입김이 되어

 

푸른 하늘에

뜬다

 

사방으로 흩어진다

 

'피었다아 ──'

 

첫 문화다.

 

 

 

첫 미소

김지하

 

잠에서 깨어

이슬 속 가득 찬 외침으로 깨어

새벽길 빛나던 하아얀 풀들

쓰러져갔네

쓰러져갔네

내 발길 아래

등뒤로 아득히 잊혀져갔네

 

가슴에는 뉘우침

천근을 메고 달아났었네

허덕이며 숱한 산굽이 돌아 허덕이며

저 외침 저 머나먼 도시

끝끝내는 핏발 선 벗들의 저

눈동자 속

매질 속으로

녹슨 철창 속

저 허전한 자유 속으로

 

다시 새벽이 오고

더운 이마에 이슬 내릴 때

아아 그러나 일어서고 있었네

내 발길 아래

등뒤로 아득히 잊혀져간 풀들

일어서 여름 대지의

혼인 듯 새하얗게 타고 있었네

내 발길 아래

등뒤로 아득히 잊혀져간 풀들

일어서 여름 대지의

혼인 듯 새하얗게 타고 있었네

비탈도 골짜기도 산등성이도 모두 일어서

함성인 듯 불길인 듯 미쳐 일어서

나는 그때 처음으로 미소를 배웠고

나는 그때 처음으로 역사를 알았네

스물세 살 나던 해 뜨거운 여름

퍽도 어리숙한 시절이었네

 

 

 

쳐라

김지하

 

노을이여

나를 쳐라

내 마음을 쳐라

불타는 노을이여

 

새벽에나 겨우겨우 길 찾아나서는

둔한 내 마음을

잠든 내 삶을 쳐라

 

맑은 샘물에다 구원 청하는

산란한 내 마음

더욱 더 산란하게 쳐라

 

산란하여

아으

소리치며 벌떡 일어서게 쳐라

 

일어서 아무 때 아무 곳이든

뚜벅뚜벅 진흙길 나서게 쳐라

쳐라 쳐라

힘차게 쳐라

사그라드는 애잔한 끝만 남은

덧없는 노을이여

노을이여

 

 

 

초겨울

김지하

 

이 계절

참되다

 

잎새 떨어진 나뭇가지들

뼛속에서 한겨울 어귀찬

바람 소리 꿈꾸고

 

감추어진 온갓 아픔들

모두 드러나

죽음이 죽음에게

생명의 비밀을 속삭이는 때

아 초겨울

 

병든 남편이

병든 아내를 간호하는 잿빛 나날의

갇힌 방으로부터

포근한 남쪽

돌아갈 길은 끊기고

흰 눈은 아직 내리지 않고

 

조용한 기다림

 

이 계절 참되다.

 

 

 

초생달

김지하

 

태교였던가

원보는 초생달을 무서워한다

초생달이 걸리는 밤마다

이불 뒤집어쓰는 원보에게

까닭을 듣는다

'애기들을 죽여요 초생달이,

날카로운 피 묻은 칼이

내 눈 속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정녕 태교였던가

보름달 차기 전 그 한밤

사리때 오기 전 숨어 지내던

남녘 바다의 그 한밤

어둑한 뻘밭에 내던져진 웬 애기

마지막 비명을 미미하게 웃으며

찍어 가르는 찍어 가르는

붉은 초생달에 가위눌리던 그때

그 밤 제 아비의 흉한 꿈

아아 태교였던가

원보는 지금도 초생달을 무서워한다.

 

 

 

초파일 밤

김지하

 

꽃 같네요

꽃밭 갔네요

물기 어린 눈에는 이승 같질 않네요

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저기 저 꽃밭

살아 못 간다면 살아 못 간다면

황천길에만은 꽃구경 할 수 있을까요

삼도천을 건너면 저기에 이를까요

벽돌담 너머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오색영롱한 꽃밭을 두고

돌아섭니다.

쇠창살 등에 지고

침침한 감방 향해 돌아섭니다.

굳은 시멘트벽 속에

저벅거리는 교도관의 발자국 울림 속에

캄캄한 내 가슴의 옥죄임 속에도

부처님은 오실까요

연등은 켜질까요

고개 가로저어

더 깊숙이 감방 속으로 발을 옮기며

두 눈 질끈 감으면

더욱더 영롱히 떠오르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아아 참말 꽃 같네요

참말 꽃 같네요.

 

 

 

촛불

김지하

 

나뭇잎 휩쓰는

바람 소리냐 비냐

전기는 가 버리고

어둠 속으로 그대도 가 버리고

금세 세상이 온통 뒤집힐 듯

눈에 핏발 세우던 그 애도 가버리고

촛불

홀로 타는 촛불

내 마음 휩쓰는 것은

바람 소리냐 비냐.

 

 

 

최선생

김지하

 

내가 어렸을 때

내가 대학생 때

총상으로 다리를 절단당한 함경도 회령 출생,

 

김대 경제과 출신 술꾼을 만난 적이 있다

우리는 매일

유리 대신 비닐

문짝 대신 레이숀 박스로 된

한 평 반짜리 잔술집에서 만나

민족을 이야기하고

전쟁을 이야기하고

남북을 이야기하고

이 나라의 장래를 이야기했다

'북쪽은 그렇게 사람 살기가 어렵습니까?'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지요'

'남쪽은 어떻습니까?'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지요'

'그럼 문제는 사람입니까, 체제가 아닙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사람이라면, 사람도 여러 가진데'

'사랑이지요 다시 말합니다 사랑뿐이지요'

그 뒤

그는 쌀장사도 했고

술장사도 했고

경양식 집도 했고

그리고 망했고

그리고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어쩌면 나는 그 키가 크고 절룩거리며 걷는,

말 더듬는 최선생의 기억으로 지금껏 내 삶을

버티어 오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역사는 가도

사랑의 역사만이 남는다는 것으로.

 

 

 

칼아

김지하

 

미련의 배를

오늘은 끊으리라

애틋한 눈길 올올에 서린

色色이 아리따운 속삭임에 서린 아쉬움

끊어 떠나리 칼아

모진 옛 스승아

 

내 것이 아닌 이 묶이운 기쁨

흙내 바랜 육신에 깊이

뿌리 드리운 이 끝없는 부질없는 길쌈의 버릇

 

한잔의 독한 술

넋을 판 날의 괴로움과 그 술이 짜이고

한밤의 포근한 잠

이웃의 지친 설움과도 그 잠이 흔히 짜였네

짜여

대론 피할 길 없는 새벽녘 아픔이 된다 한들

 

죽음으로밖에는 죽음으로밖에는

씻을 수 없는 죄도 한 줄기 눈물로 씻겨내려

배신이 지혜로 패륜이

서러운 사랑으로 바뀌는 미련의

아아 온갖 더러운 실마리의 오색으로

영롱한 이 짙은 짙은 미련의 미련의

 

미련의 베를

끊어

알 수 없는 거리로, 먼 벌판으로

아픈 저 하공으로 오늘은 떠나리라

칼아

모진 그 옛 스승아

 

 

 

축복

김지하

 

우주는

신의 몸

 

네 죄는

삼라만상을

사랑하지 않은 죄

 

사랑을 넘어 차라리

이젠 미물조차 공경하므로

 

용서받으라

또한

축복을!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바싹 마르고 까무잡잡

속 빈 바가지에 탁곡지 발라 탈

탁곡지 위에다 홀바인 발라 탈

개발편자 박속 탈

숨김 탈

탈 위에 탈 발라 탈

식초추파

징글능청

응큼새촘 발라 탈

속음 탈

녹음 탈

마른 목에 꿀 발라 탈

헛맹세 발라 탈

개소리에 약 발라 탈 사탕 발라 탈

굳은 목 눅은 목 짧은 목에 노랑목

된 목에 방울목

발라 탈

발라 탈

송치탈에 소탈 발라 탈

호랑이탈 발라 탈 사자 발라 탈

생쥐새끼 취함 탈 미친 놈이 칼쥠 탈

남곤 심정 발림탈 생사육신 조짐탈

노략질로 배챔탈 주색잡기 날샘탈

빚내 쓰고 뻐김탈 만고풍기 거듭탈

골 빈 탈 속 빈 탈

부채 발라 관 발라 탈

헛기침 발라 탈

빈부 갈라 탈

있는 놈들 배터져 탈 없는 놈들 배붙어 탈

동서남북 남부여대 천하대본 이농실농

양동골목 순이순이 소매치긴 바우바우

고대광실 희희낙락 명동거리 씨근벌떡

골방 샌님 오입탈 요조숙녀 화냥탈

강탈 겁탈 취발이탈

로얄제리탈

이탈 저탈 속탈 밖탈

아랫물탈 윌물탈 탈 잘못 바른 탈

대지르면 발끈펄쩍 칼 빼들고 다짜고짜

성을 낸다 성을 내요

붉으락

푸르락

불호령

고리눈

칼시위

거드름

놀램탈 겁냄탈 참음탈 놔둠탈

성난 눈에 고춧가루 특제 발라 탈

최루탄 발라 탈

큰집 발라 탈

법 발라 탈 총 발라 탈

엮음 발라 탈

말많은놈 엮어엮어 뒷골큰놈 엮어엮어

눈깔큰놈 엮어엮어 귀밝은놈 엮어엮어

이리 엮고 저리 치고

요리 얼렁 조리 뚱땅

돈 발라 탈 쎅스 발라

분 발라 탈 디올 발라

이야홍 이야홍

이야홍에 닐니리

닐니리에 무관심

무관심에 무기력

무기력에 무책임

무책임에 무의식

무의식에 무사상

무사상에 호기심

호기심에 반창고

눈에 발라 귀에 발라 코에 발라 입에 발라

발라 발라 발라 발라

반창고 발라 탈

공포 발라 탈

몸씁 탈

옴탈

거무칙칙 노장탈

허여멀쑥 양반탈

긁어버려 벗겨버려

부셔버려 살라버려

비비새탈 영노탈

속탈

밖탈

머리탈

족탈

탈탈탈.

 

 

 

텔레비전

김지하

 

무공해라는 공해까지 생겨나

테레비는 온종일

죽여라 죽어라 악쓰고

내 가슴은 살려라

살아보자 높이 외치건만

어쩌자고 아이들은

테레비만 안고 도나.

 

 

 

김지하

 

1

세상에

아름다운 것

햇빛 밝은 날

잎 위에 잎 그늘

 

이파리 사 이사이

푸른 하늘

 

 

세상에

아름다운 것

미소의 그늘

아픔에도 웃는 얼굴

 

감옥에서 보고

진도 씻김에서 보고

울적한 오늘 아침

내 마음에

 

내 몸에

열리는 숱한 틈

틈마다 영그는

웃음소리

그 그늘에서 또 보고.

 

 

2

사랑은

 

내 안에 벌어지는

꽃이파리 하나

 

햇살 비쳐들고

바람 불어오고

 

벌이 오고 또 나비가 오고

 

흰 구름 흐르다 흐르다

밤이면

 

푸른 별자리들 기울어

이슬 내리고

 

사랑은

 

거리에서도

 

아아

너로 하여

 

우주에 살고.

 

 

 

팔현사은(八顯四隱)

김지하

 

여덟

드러나고

 

숨다

 

옛날엔

성산(星山)이며 고령(高靈)이며

가야(伽倻)

그리도 멀더니

 

쌍용레미콘

고령토 공장 건물까지 들어선

논공 근처에서마저

 

신령이 와

말을 건다

 

,

이제야

왔다

 

그러매 이젠

몸 안에 있는 눈물도

모두 열려라

 

여기

장이 서리라.

 

 

 

편지

김지하

 

막막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

 

지구 우주 모두 다 이상하게

뒤틀리는 것

 

바로잡을 길 없는

어찌할 바 모르는

 

나날이 그저

막막합니다

 

길은

내 속에 있는지요

 

내 속 들여다보면

화안하고 시커멓고

 

지극히 사랑하던 것

또 미워 몸부림치고

 

생명도 또한

그런 건지요

 

혹독한 파괴 곁에

새싹 움트는

 

봄철에 그 꽃눈에

당신 계신지요

 

모를 건 당신

모르는 건 나

 

이렇게 무지스럽게

죽임을 살림으로 아는

 

나 이 세상에

왜 내놓으셨는지요

 

오늘도 낮과 밤 뒤섞이는

노을녘에 망설입니다

 

아직도 해거름의 뜻 몰라

외길에 서성입니다

 

언제나 길이

끝에서 끝으로 이어짐을

 

확연히 깨닫나요

그날이 언젠가요

 

안녕히 계십시오

아직은 살아 있습니다.

 

 

 

편지

김지하

 

벗들

병든 나를 찾지 마라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머물려거든

매화 봉오리

아조아조 향그럽게 머물고

피우려거든

더욱 더 새빨갛게 꽃피워라

동백이여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따뜻한 춘삼월에 만나자 벗들

눈겨울 외로움 속에

맑은 향기로 머물렀다

매운 꽃으로 들에 홀로 피어났다

춘삼월 그 흔한 바람 속에 흐드러져

수월히 만나자 벗들

어렵게 수소문하여

나를 찾지 마라

병든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푸르름

김지하

 

울적한 이월

바람으로 산다

 

스모그 하늘 너머 빛나는

별이 있어 잠들고

 

소식 끊긴 친구들

추억으로 숨을 잇는다

 

외로운 솔이여

나를 지도하라

 

허허벌판에 우뚝 서

죽음과 더불어 사는

메마른 나에게

 

솔이여

 

푸르름의 비결을 굳세게 가르치라.

 

 

 

푸른 옷

김지하

 

새라면 좋겠네

물이라면 혹시는 바람이라면

 

여윈 알몸을 가둔 옷

푸른 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가슴에 꽂히어 아프게 피 흐르다

굳어버린 네모의 붉은 표지여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아아 죽어도 좋겠네

재 되어 흩날리는 운명이라도 나는 좋겠네

 

캄캄한 밤에 그토록

새벽이 오길 애가 타도록

기다리던 눈들에 흘러넘치는 맑은 눈물들에

영롱한 나팔꽃 한 번이나마 어릴 수 있다면

햇살이 빛날 수만 있다면

꿈마다 먹구름 뚫고 열리든 새푸른 하늘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잠시나마 서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네 푸른 옷에 갇힌 채 죽더라도 좋겠네

 

그것이 생시라면

그것이 지금이라면

그것이 끝끝내 끝끝내

가리워지지만 않는다면.

 

 

 

푸른 하늘 흰 구름을

김지하

 

푸른 하늘 흰 구름 어찌할거나

빼앗긴 아내 머리 쪽두리 씌워 바보

들러리 선 이 바보는 어찌할거나

눈도 입도 귀도 막혔네 장승이여 어허

가득 찬 이 설움을 어찌할거나

대 꺾어 대창 대신 피리나 불까 바보

피리 소리 가락 따라 통곡이나 할까 바보

 

밤은 가까운데

신방의 촛불 저리 밝혀지려 하는데

푸른 하늘 흰 구름을 어찌 볼거나 바보

들러리 선 이 바보는 어찌어찌 살거나

살길 물길 다 막혔네 장승이여 어허

들끓는 이 노여움을 어찌할거나

 

 

 

풀에도 남북이 있는가

김지하

 

풀에도 남북

바람에도 남북

구름에도 남북

다람쥐에게, 노루에게, 사슴에게, 늑대와 호랑이에게도 남북이 있는가

양파에게도 남북의 대립이 있는가

흙에게도 남북 사이의 전쟁이 있는가

총에게도 이데올로기가 있는가

이데올로기 대결이 있는가

철조망의 쇠는 이데올로기를 의식하고 있는가

물에게도

새와 벌레에게도 있는가

없다

없다면 큰일이다

우리 모두가 천치 바보라는 증명이기 때문에.

 

 

 

피리

김지하

 

뜨는 피리 소리

가라앉는 피리 소리

쉴새 없이 반짝이는 노을의 유리

땀방울이 열리는 타는 이마의 뿌리

손바닥에 도시의 손바닥에

깊이 박힌 열의 뿌리

쉴새 없이 손짓하는 죽음의 허리

죽어라 소스라치는 소모와 소모

소모의 하늬

악의 뿌리가 없는 파멸의 뿌리

잠재워도 잠재워도

깨어나는 불안의 작은 촛불을 끄기 위해

미쳐라 비벼대는 살과 살의 사이

뜨는 땀 속의 푸른 바다

가라앉는 피리 소리

쉴새 없이 반짝이는 노을의 유리.

 

 

 

피쏘

김지하

 

번득이는 것이

왜 빛뿐일까요

번득이는 것이

왜 눈뿐일까요

번득이는 것이

왜 절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햇빛뿐일까요

하늘에 가득 찬 총알 총알 총알

그 구리의 빛은

 

찢어진 왼쪽 다리 끌며 당신 찾는데

내 외침만 찾을까요

내 눈만 찾을까요

내 손만 찾을까요

찢어진 다리 흐르는 피가 흘러 가는 곳 거기 당신이 누워 숨지고 있겠지요

아 아 피쏘 속에서

당신 누워 숨지고 있겠지요

가물거리는

마지막 생각

가물거리는 마지막 눈

그 속에 타고 있는

삼화사 촛불

마지막 들리는

삼화사 독경 소리

마지막 보이는

삼화사 쇠 부처님

아 아

물방울.

 

 

 

한 뼘

김지하

 

한 뼘이나 남았을까

오후의 겨울 햇살

내 목숨

 

한 뼘이나 남았을까

너를 향한 그리움

그리고 풀꽃 사랑

 

무궁이라 믿었거늘

갈수록 야위어가는

내 마음

 

이제 한 뼘

혹은 두 뼘

아니면 아예 어둠

 

어둠 속에서 부스스 일어나

창을 열고

우주로 떠난다

풀꽃에게로 떠난다.

 

 

 

한숨

김지하

 

겨울이 깊다

땅은 한숨

 

눈부신 흰 한숨

은 사시나무도

한숨

 

동짓날 밤

깊은 잠 속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쌔하얀 사슬 끄을고

한숨

 

이 기이한 겨울 한복판

봄 오는 소리

또 한숨.

 

 

 

한울

김지하

 

병으로

오래 외롭다 보니

 

사람이 사람에게

한울님인 걸 알겠다

 

메마른 겨울 나무

한 오리 바람에도 마저

반가움이 앞서는데

 

전화벨 소리에 가슴 뛰는 소리

손님 맞는 마음에

비단 깔리는 소리

 

기이할 것 없다

 

본디 세상은 한울이었던 것

이제껏 내가 잊고 있었던 것

 

외롭다 보니

외롭다 보니

병이 스승인걸

이제야 알겠구나.

 

 

 

김지하

 

한 편의 시가

배부르지 않은 초여름

 

이것 말고

다른 것 있을 듯해

 

창 너머 본다

 

거기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

 

그리고

 

 

 

 

해남에서

김지하

 

섣달 보름달 기우는 새벽

용머리 샘물 속에

건너편 우슬고개 붉게 물들이며

갓 태어나는 애기먼동

내 얼굴 함께

시누대 함께 비칠 때

 

언제든 어디서든

눌러앉을 차비 끝낸 마음이

잠시 서성여 거기 흔들릴때

 

잔설 밟고 온 내 발자욱 나란히

아침 해 향해 거꾸로 찍혀 있네.

 

 

 

해는 사람의

김지하

 

해는

사람의 발만큼 한 넓이밖에 안 가졌네

아무도 오고 있는

오고 있는 저 회오리를 알지 못하지

벌판에선 그러나

풀잎마저 바람에 하늘하늘 춤춘걸

때로 바람은 산까지도 옮긴걸

한땐들 출렁이지 않는 물결이 없듯이

낡은 칼은 이윽고 이가 빠졌네, 아나

바람이 들며 나며 소리질러도 모르지

 

해는 사람의 발만큼한

넓이밖에 안 가졌네 해는 바볼세

불로 다진 강쇠가 불속에 녹고

물이 기른 도시가 물속에 잠이 든걸

아무도 이젠 모르지

 

가위 눌린 신음들이 기어다니고

때로 사람들은 미쳐버렸네, 아나

이가 빠져 모르고

그렇지

 

아나 모르나

한땐들 매질 없는 밤이 있었나

한땐들 돌팔매질 없는 날이 없었지

없어

물에 깎이듯이

바위가 물에 자꾸만 깍이듯이 그렇지

온단 말이세

낡은 칼이 이윽고 이가 빠져 울며

바람조차 못 베어 소리쳐 울며

녹스는 날이, 아나 해는 바볼세 아나

해는 사람의 발만큼 한

넓이밖에 안 가졌네, 아나 모르나

 

!

알 턱이 없지

 

 

 

허기

김지하

 

어허 시장타 풀 뜯어 먹고

샘물 마시고 누웠다 돌베개하고 누웠다

풀뿌리도 씹고 흙도 개꽃도

시뻘건 독버섯까지 모조리 모조리 씹고 나도 어허

이거 몹시 시장타

몇 백 마리 몇 천 마리

질긴 놈으로만 그저 어허 지근지근

되야지고길 씹고 싶다 살찐 놈으로 한꺼번에

소금에 질러

가자구

이봐 어서 가자구

오래 굶어 환장한 이 거대한 빈 창자를 끌고

서울로 가자구 가서 줏어먹어 보자구 닥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우라질 것 이봐 어서 가자구

생선 뼉다귀도 콩나물 대가리

개들이 먹다 버린 암소갈비도 복쟁이도

집도 거리도 자동차도 모조리 모조리 우라질 것

암수컷 가릴 것 없이 살찐 놈으로만 콰콱콱

사람고기도 씹어 보자구

어허 몹시 시장타

돈마저도

 

 

 

현풍(玄風)을 지나며

김지하

 

산 아래

구름 있어

 

현풍이다

 

바람도 바람

검은 바람

 

내 배 아래 바람

누이 바람

 

내 누이 아래도 바람

 

산 위에

물 있고

 

물 아래 산 있어

 

기이하다

 

오늘

여기 지나는

인연이 기이하다

 

훗날

다시 오는 날

 

흰 구름이

발끝을 적시리

 

산 위에

내 넋

높이 떠나리.

 

 

 

형님

김지하

 

희고 고운 실빗살

청포잎에 보실거릴 땐 오시구려

마누라 몰래 한바탕

비받이 양푼갓에 한바탕 벌여놓고

도도리장단 좋아 헛맹세랑 우라질 것

보릿대춤이나 춥시다요

시름 지친 잔 주름살 환히 펴고요 형님

있는 놈만 논답디까

사람은 매한가지

우라질 것 놉시다요

지지리도 못생긴 가난뱅이 끼리끼리.

 

 

 

호박

김지하

 

볕에선 솔잎이 타라

바람이 심한 날은 솔방울도 울어라

휘어낙낙 등걸도 타고

시뻘겧게 타고 쩍쩍 벌어지면서 타고

타고 앉은 저 퇴물 호피단 마고자의

앞섶에서 흘러라

바지춤에 녹아 흘러 고쟁이 아래

더운 날은 호박아

호박같이 굳어버린 민주주의야 흘러라

촉새 같은 고관 여편네

사타구니에 흘러라 질질 흘러라

숨 막히게 미치게 가득가득히

갈가마귀 벌판에도 시궁창에도.

 

 

 

홍성담

김지하

 

의왕구치소에 갇힌

화가 홍성담 씨를 면회하러 갔다가

화가의 모친

늙은 주름살을 면회했다

모친은 소리 없이 흐느끼고

화가는 싱그레 웃고 있었다

화안하고 따스한 그 해맑은 웃음이

유리벽을 얼푸시 뚫고 나와

모친 흐느낌의 손을 꼬옥 붙잡고

내 가슴속

시내 복판 어느 잘하는 대구탕집

대낮 해장술에 취해

셋이서 한참 떠드는 걸 면회하고

돌아왔다.

 

 

 

화개(花開)

김지하

 

부연이 알매 보고

어서 오십시오 하거라

천지가 건곤더러

너는 가라 말아라

아침에 해 돋고

저녁에 달 돋는다

 

내 몸 안에 캄캄한 허공

새파란 별 뜨듯

붉은 꽃봉오리 살풋 열리듯

 

아아

'화개(花開)'

 

 

 

화살내

김지하

 

화살은 왜 나에게 떠 오나

화살은 왜 나를 향해서 오나

화살은 왜

화살은 왜 내 가슴에 아프게 박히나

화살은 왜 이 개울을 따라서 흘러 오나

화살은 왜 물을 따라 흐르나

화살은 물을 따라 나에게 오고

나는 물을 따라 화살을 거슬러 가고

너는 누구냐

.

 

 

 

황불

김지하

 

갔네

황불이 일어

하늬도 소소리도

회오리도 없이 고인 불

잠 속에 고인

불 속에 깊이 고인 불 속에 내린

육신의 육신의 뿌리에 내린

쳐라 신명을 타내리네

황불이 일어

내리는 빗발이

솟구치는 육신의 휘모리에 타내리네

신명을 타내리네

황불이 황불이 황불이 일어 쳐라

나는 물덩어리 너는 물덩어리

나는 너의 불덩어리

차라리 서로 부딪쳐 파열해버려야만

속시원할 난장의 빗발 아래

황불이 일어

갔네

육신에 내리친 계엄의 미친

저 난장 위에 저 총창 위에 저 말발굽 위에

저 바리케이트 위에도 되게 쳐라

활활활 황불이 일어

갔네

개처럼 끌려갔네

하늬도 소소리도 회오리도 없이 고인 불

황불이 일어.

 

 

 

황톳길

김지하

 

1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2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니파리

뻗시디 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3

대샆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 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4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5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메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든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 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회귀((回歸)

김지하

 

목련은 피어

흰 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 뒤에 남기고

이리로 혹은 저리로

아메리카로 혹은 유럽으로

하나둘씩 혹은 감옥으로 혹은 저승으로

 

가데

검은 등걸 속

애틋했던 그리움 움트던

겨울날 그리움만 남기고

무성한 잎새 시절

 

기인 긴 기다림만 남기고

봄날은 가데

목련은 피어

흰 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아 저 모든 꽃들 가데.

 

 

 

휠덜린

김지하

 

휠덜린을 읽으며

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즐거워서 사는 것도 아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시인의 뇌 속에 내리는

 

내리는 비를 타고

거꾸로 오르며 두 손을 놓고

 

휠덜린을 읽으며

운다

 

어둠을 어둠에 맡기고

두 손을 놓고 거꾸로 오르며

 

내리는 빗줄기를

거꾸로 그리며 두 손을 놓고

 

휠덜린을 읽으며

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즐거워서 사는 것도 아니다.‘

 

 

 

흙집

김지하

 

일산의

오피스텔 빌딩

11층 고공 꼭대기에 앉아 한낮에

 

들녘

자그마한 흙집 하나를 생각한다.

 

돌아간다는 것

잊힌다는 것

숨는다는 것,

 

벼루와 먹과 붓과 종이

고승대덕들의 옛 비석 번역본이 열권

그리고

오래 묶은 시 몇 편

 

네 시간 자고 열 시간 일한다는

동경대 출신 우파 엘리뜨들 앞에서

자기는 열한 시간 자고 네 시간 일한다고 말한

쯔루미 선생의 교오또대 철학이

노을 비끼는 이 저녁에 웬일로

뚜렷 뚜렷이

허공에 새겨지는 구나

 

조용히

엎드리자

 

엎드려 귀를 크게 열고

바람소리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자

 

네 시간 일하고

열 시간 잠자고.

 

 

 

흰 방

김지하

 

서서히

죽어간다

 

여기

허공의

흰 방에 갇혀

 

서북쪽과

남쪽을 바라보며

 

흰 그늘이

마침내는

강화와 지리에서 지펴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나는

서서히

죽어간다

 

때론

새들이 떼를 지어 창밖을 날아가고

때론 화사한 꽃소식도 멀리서 들려온다

 

때때로

미쁜 님들의 아리따운 개벽의 복음이

잠시잠시 신문에 스쳐가기도 하지만

 

너는 무엇인가

너는 누구인가

 

허공이 내게 묻는다

 

대답은 늘

허공에서 흰빛이 날 때까지

새하얀 그늘의 그 아픈 거룩함이

강화 지리 굽이굽이

저 푸르른 물과 산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그날에까지 그날에까지

 

허공을 모심,

죽어가며 끝끝내 허공을 모심

 

슬프디슬픈 모심이여

 

허공인 당신의 빛을 내내 기다림

 

그것이 바로

,

 

꿈결 같은,

살아 있는 지금의 다름아닌

 

서서히

죽어가는

 

여기

허공의

흰 방에 갇혀

 

서북쪽과

남쪽을 바라보며

 

서서히

서서히

서서히.

 

 

 

9

김지하

 

두 달을 간신히 넘기고

술 끊기 석 달째로 막 접어든

아침 산책길

찌그러진 구멍가게 유리문에 붙어

너덜대는 서투른 먹글씨 하나

'막걸리 팜이다'

 

파계!

초봄 옅푸른 저 하늘빛에 또 파계!

 

 

 

19741

김지하

 

1974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던 날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두려움을 넘어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던 날 그날

그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바람 찬 저 거리에도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나올 그 함성을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저 모든 눈빛들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1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내 손에 남은 마지막

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

식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