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레오까디아 |
귀족의 딸 |
어느 무더운 여름날 밤에 나이가 지긋한 어느 시골 귀족이 부인과 어린 아들 그리고 16세 된 딸과 하녀와 함께 톨레도(마드리드 남쪽에 있는 오래된 도시 : 옮긴이) 강가에서 산보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공기는 상쾌했다. 시간은 밤 11시. 길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똘레도 강가를 감싸고 있는 한가로움과 평온함을 깨버리고 싶지 않은 듯 일가족의 발걸음은 느릿느릿 여유가 넘쳐 보였다.
선량한 똘레도 사람들과 빈틈없는 치안이 보장해 주는 믿음 속에서 인품이 뛰어난 귀족과 그의 정직한 가족들은 앞으로 그들에게 벌어질 불행한 사건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엄청난 불행일수록 불시에 닥치는 법이라 전혀 예기치 않게 일어난 그 사건은 그들의 평화를 파괴하고 여러 해 동안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것이다.
22세쯤 된 로돌포는 그 도시의 돈 많고 가문 좋은 귀족 청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서 깊은 가문 혈통의 자손이었으나 성격이 비뚤어지고 지나치게 방종하여 못된 짓만을 일삼는 바람에 무뢰한이라는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잘생긴 그 청년은, 나쁜 일을 도모하고 함께 저지르곤 하던 자기 또래의 네 명의 친구들과 함께 귀족의 가족 일행은 언덕에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양 떼가 늑대 무리와 마주치는 것이라 할까······. 파렴치한 청년 로돌포와 그의 친구들은 얼굴을 가린 채 귀족의 부인과 딸 그리고 하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늙은 귀족은 호통을 치며 젊은이들의 무례한 행동을 나무랐다. 그러자 그들은 입을 삐죽거리며 조소하는 얼굴로 대꾸했으나 더 이상 조롱하지 않은 채 지나쳐갔다.
그러나 로돌포는 순간적으로 스친 너무나 아름다운 미모에 다시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바로 귀족의 딸 레오까디아였다. 청년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를 가져야겠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그의 생각은 일순간에 친구들과 교감을 이루어 그들은 곧 걸음을 되돌려서 그녀를 납치하기로 했다. 멋대로 행동하는 부자들은 항상 그의 잘못된 욕망에 동조할 사람을 찾곤 한다. 해서는 안 될 일임을 알면서도 오로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불법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 로돌포가 레오까디아를 납치하기로 작정하자 모든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채 칼을 뽑아 손에 쥐고 길을 되돌아가서는 몇 걸음 만에 귀족 일행에게 도달했다.
하느님은 무지막지한 청년들의 손아귀에서 레오까디아의 가족들을 놓아주지 않으셨다.
로돌포는 레오까디아를 날쌔게 덮쳐서 두 팔로 그녀를 안고 도망쳤는데, 여인은 방어할 힘도 없었고 기절을 하는 바람에 고함조차 치지 못했다. 기절한 그녀는 정신을 잃어버려 누가 납치하는지,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가족들은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에 당황해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함을 쳤고 어머니도 비명을 질렀으며 어린 남동생은 울부짖고 하녀는 손으로 땅을 쳤다. 그러나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에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인적이 없었으며 밤의 적막과 사악한 자들의 잔인한 마음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로돌포의 일당은 성취감에 기쁨을 느꼈고, 레오까디아의 가족들은 슬픔에 휩싸였다. 로돌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집에 도착했으나, 레오까디아의 부모는 절망과 낭패감으로 비탄에 잠겨 집에 도착했다. 레오까디아의 부모는 자신들의 희망과 빛이었던 딸이 눈앞에 없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늘 밝은 웃음을 짓던 레오까디아의 모습이 몹시도 그리워졌다. 괴한들에게 딸을 빼앗겼다는 자신들의 무기력함과 부끄러움 때문에 신고하는 것조차 두려웠던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혼란 속에 빠졌다. 가난한 시골 귀족이었기에 그들은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건이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가 없었고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편, 간교하고 날렵한 로돌포는 이미 자신의 방에 레오까디아를 납치해왔다. 여인은 기절하여 의식이 없었고, 눈조차도 수건으로 가린 채로 왔기 때문에 어느 길로 왔는지 알 수 없었으며 지금 있는 곳이 어느 곳인지도 몰랐다. 또한 로돌포의 방은 같이 살고 있는 부모 집의 한쪽 구석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로돌포는 레오까디아가 의식을 되찾기 전에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말았다. 청년의 순수하지 못한 충동은 이를 자극하는 욕구를 거의 저지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성에 눈이 먼 로돌포는 어둠 속에서 레오까디아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훔쳤다. 대부분 음탕한 죄를 지은 사람들은 이를 달성한 후에는 상대방에게서 멀어지고 싶어 하므로 로돌포는 레오까디아가 거기서 사라져버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녀를 기절한 채로 길 밖에 내다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로돌포가 그녀를 내다 버리려 할 때, 의식을 되찾은 레오까디아가 탄식하며 말했다.
“불행한 내 신세여,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어둠은 무엇인가?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어두움은? 내가 무엇을 잘못하여 지옥에 있는가, 아니면 잘못도 없이 연옥(煉獄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으며 일부 영혼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장소)에 있는가? 하느님 맙소사! 누가 내 몸을 범했지? 내가 침대에서 몸을 더럽히다니! 어미니 내 말 들려요? 사랑하는 부모님은 내 말을 듣지 못하고 나의 적이 내 몸을 범하다니······, 이 어두움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내겐 얼마나 다행일까! 또한 이 세상의 빛을 내가 다시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남자가 누구였건 간에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나의 무덤이 되었으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명예보다는 아무도 모르는 불명예가 더 나을 테니까.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일이 기억나는데······, (결코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청년들이 나를 덮쳤던 것은 기억나는구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안 될 텐데. 아, 누구인지는 몰라도 지금 이곳에 나와 함께 있는 당신, 만일 당신의 영혼이 어떤 간청을 받아줄 수 있다면, 당신에게 간청하오니 이미 나의 명예를 빼앗았다면 내 목숨까지도 앗아가기를 바랍니다! 지금 내 목숨을 가져가 주세요. 명예를 잃은 목숨을 유지하는 것은 가치가 없어요! 내 목숨을 끊게 해줄 당신의 자비심은 내 몸을 더럽히는 데 사용했던 당신의 잔인함을 무마시켜 줄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당신은 잔인하면서 동시에 동정심 많은 사람이 될 거예요!”
레오까디아의 호소는 로돌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그다지 경험이 많지 않은 청년이었기에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의 침묵은 레오까디아를 더욱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있는 자가 유령인지 환영인지 두 손으로 확인하고자 버둥거렸다. 그러나 남자의 몸에 손이 닿자 그녀의 부모님과 함께 길을 걸어올 때 그녀에게 가해졌던 폭력적 힘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칠 불행을 상기하게 되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그녀는 계속 쏟아지는 눈물과 한숨을 섞여가며 넋두리를 다시 시작했다.
“무모한 젊은이시여, 젊은 나이는 당신을 심판받게 할 나쁜 행동을 하게 하지요. 그러나 당신이 어둠 속에서 이 치욕을 덮어버린 것처럼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않은 채 영원한 침묵 속에 두겠다고 나에게 약속하고 맹세한다면, 당신이 나에게 저지른 모욕을 나는 용서해주겠어요. 당신의 엄청난 모욕에 대하여 나는 극히 작은 보상을 청하는 거예요. 당신은 원하지 않을지라도 내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결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않았고, 보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당한 모욕감은 내 기억에 남을지라도 나를 범한 사람을 기억하고 싶지 않으며, 나에게 상처를 준 장본인의 모습을 기억 속에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의 원망들은 이 세상이 듣지 못한 채 나와 하늘 사이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이 세상은 곧이곧대로 사건을 심판하지 않고 흔히 통속적인 잣대에 의해 사건이 엉뚱하게 평가되지요.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많은 사건의 경험과 기나긴 세월 속에서나 깨닫게 될 이러한 진실들을 겨우 17세의 나이로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자신이 당한 고통을 지나치게 떠벌리기도 하고 때로는 침묵 속에 묻어두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곧 사람들이 믿어주도록 자신의 불행을 과장해 말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어차피 보상받을 수 없기 때문에 굳이 자신의 불행을 남에게 발설하지 않기도 합니다. 나는 이 불행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도 이 사실을 침묵으로 보상해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에게 그런 식으로 보상하지 않고서는 어떤 용서도 당신은 받지 못할 거예요. 당신이 나에게 그 정도의 보상을 해준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닐 겁니다. 나는 자포자기하지 않을 거예요.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내가 당신에게 품은 원한이 가라앉을 거라고 믿지 마세요. 또다시 당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마세요. 이미 나를 범했지만, 당신이 나를 더 이상 농락하려 하지 않는다면 나쁜 욕망도 사그라들 것입니다. 당신은 아무런 동기도 없이 우발적으로 내 몸을 더럽혔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니면 불행한 여자가 되기 위하여 태어난 것으로 하지요. 그러니 나를 길에 놓아주세요. 아니면 성당 가까이에라도 놓아주시면 그곳에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아니까요. 그러나 나를 뒤쫓지 않을 것을 약속해야 합니다. 집을 알려고 하지도 말고 내 이름이나 친척들의 이름이나 나의 부모님의 이름도 묻지 말아 주세요. 당신이 나로 인해 불행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에게 대답해주세요. 만일 내가 당신의 말투를 기억할까 봐 두려워한다면, 나는 아버지와 고해 신부 외에는 어떤 남자와도 얘기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목소리만 듣고서는 사람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두겠습니다.”
상심한 레오까디아의 진지한 이야기에 로돌포는 그녀를 다시 포옹하는 것으로 응답하려고 했다. 로돌포는 또 한 번의 쾌감을 느끼고 싶었지만, 그것은 레오까디아에게는 다시 한번 상처를 주는 일일 뿐이었다. 그의 몸짓을 눈치챈 레오까디아는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는 힘을 내어 다리와 팔로 이를 악물고 저항을 하며 말했다.
“이 배신자, 영혼도 없는 놈아, 네가 무엇이던 간에 나로부터 빼앗아간 것은 아무 감각도 없는 나무 둥치나 기둥으로부터 취한 것일 뿐이라는 걸 알아라. 그 같은 정복은 너의 불명예와 몰염치함만을 증대시킬 뿐이다. 그러나 지금 네가 다시 허튼짓을 한다면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엔 기절해 있는 나를 짓밟고 유린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똑똑히 정신을 차리고 있으니 나를 정복하기에 앞서 나를 죽여야 할 것이다. 만일 지금 정신이 든 채로 구역질 나는 주문에 저항 없이 내가 응한다면 네 놈이 나를 파멸시켰을 때 내가 기절한 것이 단순한 꾸밈이었다고 생각할 것 아니냐?”
레오까디아의 용감하고 끈덕진 저항 때문에 로돌포는 자신의 욕망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레오까디아를 범했던 것은 한순간의 충동 때문이었지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까지는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동정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쳐버린 로돌포는 냉담하게 아무 말 없이 레오까디아를 침대에 내버려 둔 채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의논하고자 친구들을 찾아 나가버렸다.
레오까디아는 혼자 감금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안을 걷기 시작했다.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나갈 수 있는 문이나 아니면 몸을 던질 수 있는 창문을 찾았다. 비로소 문을 찾아냈으나 굳게 잠겨 있었다. 그러나 창문을 하나 찾아서 열자 밝은 달빛이 방을 환하게 비추면서 방안을 장식한 타피스트리(실로 수를 놓아 여러 형상의 그림을 만들어 낸 천으로서 건물 실내의 벽을 덮어 보온과 장식의 역할을 한다 : 옮긴이)의 색깔을 알아볼 수 있었다. 침대가 금빛으로 아주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서 어느 특별한 귀족이라기보다는 왕자의 침대처럼 보였다. 의자와 책상들을 세어 봤다. 문이 있는 반대쪽 벽이 눈에 들어왔다. 벽에는 액자들이 걸려 있었는데 그 속에 있는 그림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창문은 컸고 굵은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창밖으로는 정원이 보였는데 높은 담이 쳐져 있었기 때문에 집 밖의 거리로 뛰어내리려는 생각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충 눈으로 살펴본 집안의 화려한 장식들과 시설로 봐서 그녀는 이 집의 주인이 부유한 가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창가의 놓인 책상에서 은으로 된 작은 십자가상을 발견하자 얼른 그것을 집어 옷 속에 감추었다. 그것은 십자가상에 대한 공경도 아니고 도둑질도 아닌 그녀의 분별력 있는 생각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창문을 닫고 침대로 돌아와 이 불운한 사건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생각했다.
그녀 생각에 반 시간이 채 안 지나서 방문을 여는 인기척을 느꼈다. 누군가 그녀 앞으로 와서는 아무 말도 없이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는 그녀의 팔을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방문을 닫는 것을 느꼈다. 이 자가 바로 로돌포였는데, 그는 친구들을 찾으러 나갔다가 만나지 않고서 집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자신과 레오까디아 사이에 벌어진 일에 그들이 증인이 되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친구들에게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었지만, 자신의 행동에 후회를 하고서, 또한 여인의 눈물에 마음이 움직여서 친구들을 만나러 가던 도중에 마음을 바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요구한 대로 성당 근처에 레오까디아를 데려다 놓기 위해 재빨리 돌아왔다.
왜냐하면 날이 밝기 전에 해야지 날이 밝아 사람들 눈에 띄게 되면 그다음 날 저녁까지 자신의 방에 그녀를 감금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자신의 완력을 다시 사용하고 싶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녀를 시청 앞 광장까지 데려간 후 그곳에서 청년은 목소리를 바꾸어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를 반반씩 쓰며 그녀에게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무도 그녀를 뒤쫓아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말했다. 그녀가 눈에 가린 수건을 풀기도 전에 그자는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
레오까디아는 혼자 남게 되었으며 눈가리개를 풀고서야 자기가 있는 장소를 알게 되었다. 사방을 둘러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멀리서 누군가 그녀를 미행할까 봐 의심하며 한 걸음마다 멈춰 서면서 그다지 멀지 않은 집을 향해 걸어갔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미행자를 따돌리기 위하여 그녀는 문이 열린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잠시 머문 후 자신의 집에 도착하며 얼이 빠진 채로 잠자리에도 들지 못하고 있던 부모님을 만났다. 그때까지 부모님은 편안히 쉬지도 못한 채 유괴된 딸에 관한 소식을 애태우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부모님이 달려와 두 팔을 벌려 껴안아 주었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레오까디아는 놀라움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던 부모심을 자신에게서 떼어놓고는 짤막한 말로 자신의 겪은 불행한 사건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명예를 더럽힌 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었다. 다만 그녀의 불운한 비극이 벌어진 곳에서 봤던 정황들만을 말했는데, 예를 들자면 창문, 정원, 창틀, 책상들, 침대, 타피스트리와 마지막으로 그녀가 가져온 십자가상을 보여주었다. 그 십자가상을 보자 노부부는 다시 눈물이 솟구쳐 하느님께 복수를 간청했고, 반드시 그자를 처벌해주기를 빌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더럽힌 자를 알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부모가 그자를 알고자 한다면 이 십자가상을 통해서 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곧 성당의 보물 실을 지키는 사람들이 똘레도의 모든 교구의 설교 대에서 십자가상을 잃어버린 사람은 성당에서 그것을 보관하고 있으니 찾으러 오라고 얘기하면 십자가상의 주인을 알게 될 것이고, 자연히 그의 집을 알게 되어 범인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사랑하는 딸아. 만일 그 자의 교활함이 너의 신중한 추리를 가로막지 않는다면, 네가 가져온 십자가상이 방에서 없어진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상의 주인인 그 청년은 교회에서 십자가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될 것이고, 그것을 누가 주웠는지 물어볼 것이다. 그러나 그자는 자신이 잃어버린 십자가상의 주인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자가 보낸 다른 사람이 십자가의 특징을 말하면서 자신이 주인이라고 주장하며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범인이 누군지 밝히지 못하고 혼란해질 뿐이다.
그러나 딸아, 일단은 그것을 잘 보관하고 그 십자가에 너 자신을 맡겨봐라. 네 불행의 목격자이신 그 십자가가 이번 일을 올바로 심판할 수 있게끔 도와주시리라 믿는다.
사랑하는 딸아, 1아로바(무게의 단위로 22파운드 : 옮긴이)의 감춰진 불명예보다 1온스의 공개된 불명예가 더 치욕스러운 것이란다. 그러니 너는 언제나 하느님 앞에서 떳떳하게 명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테니 은밀하게 일어난 불행한 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지 마라. 진정한 불명예는 죄악에 있고, 진정한 명예는 미덕에 있단다. 흔히들 말과 욕망에 있어서 하느님을 거역하기가 쉬운 법이지만 너는 말과 행동에서 결코 하느님을 배신한 적이 없으니 스스로 명예롭다고 여기거라. 나도 네 아비로서 진정으로 너를 명예롭게 생각하마.”
아버지는 사려 깊은 말로 레오까디아를 위로했고 어머니는 딸을 포옹하며 슬기롭게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그녀는 다시금 울먹였지만,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에 용기를 얻고 살아가리라 마음먹었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로돌포는 십자가상이 없어진 것을 알고서 누가 집어 갔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자들이 그렇듯이 금방 잊어버렸다. 그로부터 3일 후에 로돌포가 이탈리아로 떠날 때에도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십자가상에 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로돌포는 자기 방에 있던 모든 물건을 어머니의 하녀에게 간수 하도록 맡겼다.
오래전부터 로돌포는 이탈리아로 유학 가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다녀온 적이 있는 아버지가 설득하기를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의 조국에서만 지내서는 안 되고 해외에서 생활해볼 필요가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로돌포는 아버지의 충고를 따르기로 마음을 굳혔다. 아버지는 많은 노자를 주어 바르셀로나, 제노아, 로마 그리고 나폴리를 여행하도록 했고 두 명의 친구들도 동행하도록 했다. 로돌포는 자신이 아는 군인들로부터 듣기를 이탈리아와 프랑스에는 여인숙이 많고, 스페인 사람들은 여인숙에서 자유를 만끽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출발했다. 그는 맛있는 닭고기, 비둘기 고기, 햄, 소시지 등 음식들의 이름과 여러 가지 옷가지 얘기들이 떠올랐다. 또 군인들은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건너오면 여인숙과 주막이 비좁고 불편하다는 것을 얘기해 주었었다. 마침내 로돌포는 레오까디아와 일어났던 일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깨끗이 잊은 채 스페인을 떠났다.
한편 레오까디아는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가능한 조용히 집안에서만 지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이 마치 얼굴에 나타날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자 어쩔 수 없이 은둔 생활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다름이 아니라 그녀가 임신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안 레오까디아는 시름에 잠겼다. 지난날의 상처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녀의 어머니가 해주는 어떤 위로의 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서 아이를 출산할 시간이 되었다.
산파조차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녀의 어머니가 산파 역할을 대신했다. 레오까디아는 잘생긴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아이가 태어난 사실을 비밀에 붙여야 했기 때문에 일단 시골로 데려가 그곳에서 4년을 키웠다. 그때부터 레오까디아는 아이를 부모님의 집으로 데려와 그 애를 조카라고 부르면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예의 바르게 키웠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이에게 루이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예쁜 얼굴에 성격이 순하고 영리한 아이였다. 그의 외모와 성격으로 봐서 이 아이는 분명 어느 귀족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할아버지 내외는 손자의 영리함과 잘생긴 외모, 기품있는 모습 등 모든 것을 사랑했다. 비록 딸의 불행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별 탈 없이 자라는 손자를 보며 그것이 복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루이스가 집 밖으로 나가면 수많은 찬사가 아이에게 쏟아졌다. 어떤 이는 아이의 반듯한 생김새를 말하고 어떤 이는 아이의 어머니를 칭찬했다. 또 어떤 이는 아이의 아버지를 찬양했고 아이를 훌륭하게 잘 키운 것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 같은 찬사를 받으면서 루이스는 7세가 되었다. 이제 라틴어를 읽을 줄 알며, 아름다운 시도 짓고 글도 아주 잘 썼다. 루이스의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줄 형편이 되지 않았고 그 아이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덕성과 학식뿐이라는 것을 믿고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
어느 날 루이스는 할머니의 심부름으로 어느 친척 집에 가면서 경마 경기가 벌어지는 길을 지나게 되었다. 루이스는 경기를 구경하다가 좀 더 좋은 자리를 찾아 건너편 길로 가로질러 가는 도중 지나던 어떤 말에 밟히게 되었다. 기수는 거칠게 달리던 말을 멈춰 세울 수가 없었다. 말은 루이스의 몸을 밟았고, 아이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그때 가까이에서 경주를 구경하던 한 늙은 신사가 재빨리 말에서 내려 아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는 어떤 사람의 팔에 안겨 있던 소년을 빼앗아서 자신이 껴안고는 체면을 생각하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하인들에게 소년을 돌볼 의사를 부르러 보냈다. 많은 사람이 잘생긴 소년의 사고를 안타까워하면서 뒤따라왔는데, 사고를 당한 소년의 이름은 루이스이고 그를 구한 신사가 소년의 할아버지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 같은 얘기는 입에서 입을 통해 당사자인 할아버지 내외와 어머니인 레오까디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들은 사고가 생겼음을 확인한 후 실성한 사람처럼 자식을 찾아 나섰다. 소년을 데려간 신사는 잘 알려진 가문이었기 때문에 쉽게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의사가 진찰을 하고 있을 때 도착했다.
그 집의 내외는 아이의 부모라고 생각되는 그들에게 울거나 통곡하지 말도록 부탁했다. 왜냐하면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명성이 높은 의사는 신중하고 민첩하게 진단을 하고 나서 말하기를 처음에 걱정했던 것만큼 상처가 치명적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치료하는 도중에 루이스는 의식을 되찾았고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기뻐했다. 가족들은 울면서 어린아이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었다. 아이는 온몸과 머리가 매우 아프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아이와 얘기하지 말고 안정을 취하도록 당부했다. 그래서 아이를 쉬게 하고서 루이스의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베풀어준 큰 호의에 대해 집주인에게 감사했다. 이에 대하여 노신사는 아이가 쓰러져 말에 밟히는 순간 아이의 얼굴이 사랑하는 자기 자식의 얼굴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소년을 안고서 집으로 데려왔으며 가능하다면 상처가 나을 때까지 자기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보살피겠다고 말했다. 그 집의 안주인인 품위 있는 부인도 남편과 같은 말을 하며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루이스의 할아버지 내외는 노신사의 친절에 감탄했다. 그러나 루이스의 어머니는 더한층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이유는 의사의 설명으로 놀랐던 가슴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후 아들이 누워 있는 방을 차분히 살펴보다가 여러 물건들을 보는 순간 이 방이 바로 자신이 불행을 겪었던 곳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때 걸려 있던 타피스트리들은 없었지만, 그것이 있었던 자리를 알 수 있었다. 정원이 내다보이던 쇠창살이 쳐진 창문도 알아봤다. 지금은 루이스 때문에 창문이 닫혀 있어서 창문에서 정원을 내다볼 수 없었지만 모든 정황은 레오까디아가 기억하는 대로였다. 그녀가 제일 잘 알아본 물건은 바로 자신의 순결이 능욕당한 침대였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십자가상이 놓여 있던 책상도 아직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의심했던 일들이 진실로 밝혀졌다. 보다 결정적인 증거는 그녀가 눈을 가린 채로 방에서 나올 때 세어봤던 층계였다. 그 집에서 길가까지 놓여 있는 계단 층계를 조심스럽게 세어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레오까디아는 다시 한번 계단 수를 세어봤는데 그 숫자가 꼭 맞았다. 이런저런 증거들을 맞추어보고서 모든 것이 다 생각대로 확인되자 레오까디아는 이것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상세히 말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루이스가 머물고 있는 집의 노신사에게 아들이 있는지를 알아봤다. 노신사가 대답하기를 그의 아들의 이름은 로돌포이며 지금은 이탈리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스페인을 떠난 기간을 헤아려보니 루이스가 태어난 7년의 기간과 일치했다.
레오까디아와 부모는 사실을 알고 난 후 하느님이 루이스를 완전히 회복시켜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루이스는 15일 만에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났고 30일 만에 병상에서 일어났는데, 그동안 내내 어머니와 할머니가 방문을 했고 집주인은 마치 친자식처럼 극진하게 간호해주었다. 레오까디아는 노신사의 부인인 에스떼빠니아 부인과 몇 차례 얘기를 나누었는데, 귀부인은 루이스가 이탈리아에 있는 자기 아들과 닮았다고 말했다.
어느 날 레오까디아는 귀부인이 자신과 단둘이 있을 때 부모님과 합의하여 말하고자 했던 사실을 꺼낼 기회가 생겼다.
“부인, 저의 부모님으로부터 루이스가 상처를 입었다는 이야기를 듣던 날, 저는 하늘이 캄캄하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부모님들은 루이스가 없다면 자신들의 눈에 빛을 잃는 것이며, 노년에 의지하던 소중한 것을 잃은 거라고 생각하셨지요. 그만큼 루이스를 사랑했으며 다른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흔히 갖는 사랑보다 훨씬 큰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병도 주고 약도 준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 애를 이 집에서 본 순간 저는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부인, 저는 귀한 집의 딸이며 제 부모님과 선조들도 모두 귀한 가문입니다. 저희 가문은 보통 수준의 재산을 갖고서 명예를 소중하게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레오까디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에스떼빠니아 부인은 놀라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비하여 매우 성숙하고 고결한 성품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부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기다렸다. 마침내 레오까디아는 그의 아들의 못된 장난과 자신의 불행, 납치, 눈을 가리고 방으로 데려온 일과 그 장소를 알아보게 된 증거물들에 관해 모든 것을 말했다. 이를 확인시키기 위하여 레오까디아는 자기가 가져온 십자가상을 가슴속에서 꺼내며 말했다.
“제가 지켜온 순결함을 힘으로 빼앗긴 불행의 증인이신 하느님, 저의 명예의 보상에 재판관이 되소서, 저는 불행했던 지난날의 상처를 기억하기 위해 저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당신의 십자가상을 가져갔습니다. 이는 복수를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에게 기도함으로써 저의 불행을 인내로 간직하는데 위안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부인, 당신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돌봐주신 이 아이는 당신의 진짜 손자입니다. 하늘이 이 아이를 다치게 하여 당신의 집으로 데려오게 했고,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다.”
사실을 밝힌 후 레오까디아는 십자가를 껴안고서 에스떼빠니아 부인의 가슴에서 기절해버렸다. 에스떼빠니아 부인은 너그러운 동정심과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레오까디아가 기절하자마자 자신의 얼굴을 그녀에게 맞대고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레오까디아가 제정신을 차리도록 물을 길어다 뿌리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두 여인이 그렇게 있을 때에 마침 노신사가 루이스의 손을 잡고 집안에 들어왔다. 그는 에스떼빠니아의 눈물과 레오까디아의 혼절한 모습을 보고서 황급히 어찌 된 일인지를 물었다.
루이스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품에 안겼고 노신사는 부인에게 왜 울고 있는지 물었다.
“여보, 당신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어요.”
에스떼빠니아가 그의 남편에게 대답했다.
“여기 기절한 레오까디아가 당신의 며느리이고 이 아이가 당신의 손자라는 사실을 아셔야 해요. 내가 당신에게 방금 말한 사실은 레오까디아가 내게 말했는데 이 아이의 얼굴 모습이 그것을 확인해주고 있어요. 이 애 얼굴에서 우리는 로돌포의 모습을 보고 있잖아요.”
“부인, 당신이 더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부인의 얘기를 믿을 수 없었던 노신사가 말했다.
이때 레오까디아가 의식을 되찾았다. 그녀는 십자가를 가슴에 품은 채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다. 모든 일이 노신사를 큰 혼란에 빠뜨렸다. 그의 부인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자 비로소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치 수많은 진실한 증인이 그것을 증명이라도 한 듯이 노신사는 그것을 믿었다.
그는 레오까디아를 위로하고 부드럽게 포옹해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손자에게는 다정한 키스를 했다. 그날로 노부부는 그의 아들에게 집으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나폴리로 보냈다. 귀국해야 하는 이유는 굉장히 아름다운 여인과 혼인을 맺어놓았다고 했다. 그들은 레오까디아와 그녀의 아들 루이스가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레오까디아의 부모도 이 같은 소식과 결과에 대단히 흡족해하며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렸다.
나폴리에 전갈이 도달했다. 로돌포는 아버지가 말씀하신 아름다운 여인을 만날 기대를 안고서 편지를 받은 지 이틀 만에 마침 스페인으로 떠나는 네 척의 범선이 있어 친구 두 명과 함께 배를 탔다. 그리고 순풍을 만나 12일 만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다음, 그곳에서 곧장 내달려서 7일 만에 톨레도에 도착했다. 그는 늠름하고 용감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로돌포의 부모는 아들을 반갑게 맞으면서 기뻐했다. 에스떼빠니아 부인이 꾸민 계획과 부탁 때문에 레오까디아는 구석에 숨어서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로돌포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집으로 가기를 원했으나 부인은 자신의 계획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을 붙잡아두었다. 로돌포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저녁 무렵이었으므로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에스떼빠니아는 아들의 친구 두 명을 은밀히 불렀다. 부인은 의심의 여지 없이 레오까디아가 말한 대로 그들이 예전에 로돌포가 레오까디아를 납치하던 날 밤에 함께 있었던 친구들 중 두 명일 것이라고 믿었다. 부인은 그들에게 애원하듯 간청하기를, 여러 해 전에 자신의 아들이 어느 여인을 밤에 납치했던 일을 기억하는지 물었다. 이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이 자신의 가족 모두의 명예와 평화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얼마나 애타게 간청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부인은 그들에게 이 납치 사건을 말한다 해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켰다. 그러자 그들은 어느 여름날 밤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털어놓았다. 소녀를 납치한 일, 소녀의 가족들이 울부짖었던 일 그리고, 로돌포가 자신의 집으로 소녀를 데리고 갔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던 것까지 얘기했다.
두 친구의 진술은 모든 의혹을 깨끗이 씻어주었으므로 부인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직전에 부인은 아들과 단둘이서 방 안에 들어갔다. 부인은 초상화 하나 손에 들고 아들에게 내밀며 말했다.
“내 아들 로돌포야, 너의 신붓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근사한 저녁 식사를 차려놓았다. 이것이 그녀의 모습인데, 우선 말해주고 싶은 것은 그녀는 외모가 좀 빠지지만, 덕성은 넘쳐흐르는 처녀란다. 고상하고 분별력 있고, 재력도 꽤 있는 편이지. 너의 아버지와 내가 너의 반려자로 선택했는데 너에게 적합한 신부라고 확신한단다.”
로돌포는 조심스럽게 초상화를 바라본 후에 말했다.
“화가들은 일반적으로 얼굴을 실제 모습보다 더 아름답게 그리는 법인데, 이 경우에도 그러리라 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실체 얼굴은 아주 못생겼다는 것이 확실하군요. 어머니, 자고로 아들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자식에게 마음에 드는 여인을 골라 주시는 것이 더 좋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죽음으로서만 갈라놓을 수 있는 끈이며, 신랑 신부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해야 하고, 유사한 조건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곧 미덕, 고귀함, 분별력, 재산 등이 아내를 맞아들이는 남편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여인의 못생긴 얼굴은 남편의 눈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젊은이입니다. 성스러운 결혼에서 중요한 것은 부부간에 즐거움과 기쁨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일 즐거움이 없다면 부부관계는 절름발이가 되며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평생을 방에서나 식탁에서나 침실에서나 눈앞에서 봐야 할 못생긴 얼굴이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어머니, 청컨대 저를 즐겁게 하고 화나지 않게 할 반려자를 골라 주세요. 그래서 잘못됨이 없이 하늘이 맺어주신 끈으로 부부관계가 올바르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해주세요. 만일 어머니가 보여주신 그림의 여인이 어머니 말씀대로 고귀하고, 분별력 있고, 부유할지라도 나같이 취향이 다른 신랑에게는 필요하지 않을 거예요. 어떤 자는 신부에게서 고귀함을 찾고, 어떤 자는 사려분별을, 어떤 자는 재산을, 어떤 자는 아름다움을 찾지요, 저는 바로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고귀한 신분은 하늘의 덕분이며 조상과 부모의 덕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사려분별은 여인이 바보나 멍청이가 아니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재산 역시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으로서 저는 가난뱅이가 되지만 않는다면 충분합니다. 아름다움은 제가 추구하는 것으로 정직함과 훌륭한 습성과는 달리 타고나는 것입니다. 만일 제 처가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저는 기꺼이 하느님에게 봉사할 것이며 늙을 때까지 부모님을 공경하겠습니다.”
에스떼빠니아 부인은 로돌포의 설명에 아주 만족했는데,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잘 이루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부인은 아들의 희망대로 결혼시키도록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로돌포는 부모님이 못생긴 여인과 결혼하도록 한 약속을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없던 일로 하자 어머니에게 고마워하며 저녁 식사를 위해 함께 식당으로 갔다.
아버지와 어머니, 로돌포와 두 명의 친구들이 식탁에 앉자, 에스떼빠니아는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었다.
“내 정신 좀 봐라, 손님을 이렇게 대하다니!”
부인은 하인에게 손님을 모셔오라고 말했다.
“빨리 가서 레오까디아에게 얼른 이 식탁으로 와서 자리를 빛내 주기 바란다고 말해라.”
모든 것이 부인의 계획대로였다. 레오까디아에게는 이미 모든 것을 사전에 알려주었다. 얼마 후 레오까디아가 나타났는데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때가 겨울이었기에 그녀는 금과 진주로 장식된 비로도 치마를 입고, 다이아몬드 목걸이로 장식을 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연한 금발인데 머리 장식을 하고 스카프를 썼으며, 다이아몬드의 반짝거림과 함께 모든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만들었다. 레오까디아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한쪽 손으로 아들의 손을 붙잡고 있었으며 그녀의 앞에서 하녀 두 명이 은촛대에 두 개의 촛불을 들고 오며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그녀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넋을 잃고 황홀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멍한 채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레오까디아는 우아하고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모두에게 머리를 숙여서 인사하고 에스떼빠니아 부인의 손에 입 맞춘 후 부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맞은 편에 로돌포가 있었다. 어린 소년도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로돌포는 레오까디아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좀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선택했던 신부가 이 여인의 반만큼이라도 아름다웠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하느님 맙소사! 이것이 무엇이람! 내가 지금 천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이 순간 레오까디아의 아름다운 자태가 두 눈을 통해 로돌포의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레오까디아는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아주 가까이에서 로돌포를 몰래 훔쳐보면서 옛날 그와의 사이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떠오르자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레오까디아는 행운이 그녀에게 미소를 지을지 어떨지 두려움이 느껴졌고, 로돌포의 아내가 되리라는 희망이 그녀의 영혼 속에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행복이 가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영원히 사라질 것 같기도 했다. 그 같은 생각이 그녀를 짓누르자 그녀의 머리는 온통 어지럽게 되어서 가슴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창백해지면서 곧바로 기절해버렸다. 그녀는 에스떼빠니아 부인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갑자기 소동이 일었다.
모두들 깜짝 놀라 식탁을 박차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가장 먼저 급하게 덤벼든 사람은 바로 로돌포였다 그녀에게 달려가면서 그는 두 번이나 부딪치며 넘어졌다. 단추를 풀어주고 얼굴에 물을 끼얹었음에도 그녀는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심장의 박동과 맥박이 잡히지 않았으며 숨이 끊어지는 듯 보였다. 집안의 하인과 하녀들은 신중하지 못하게 큰 소리로 그녀가 죽었다고 떠들었다. 이 같은 슬픈 소식이 레오까디아의 부모에게 전해졌다. 에스떼빠니아 부인은 그들이 좀 더 적절한 기회에 나오도록 집안에 숨겨 두었었다. 대기하고 있던 신부님과 함께 레오까디아의 부모는 에스떼빠니아의 부탁을 지키지 않고 거실로 뛰쳐나왔다.
신부님은 재빨리 나와서 성호를 그으면서 죽어가는 자의 죄를 사하고 용서하는 손짓을 했다. 신부는 한 사람이 기절해 있는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이 기절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로돌포가 레오까디아의 가슴에 얼굴을 갖다 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돌포의 어머니는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하여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두 사람이 의식이 없는 것으로 알고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 로돌포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녀도 정신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에스떼빠니아 부인은 자기 아들이 생각하는 것을 예언이라도 하듯 그에게 말했다.
“아들아, 너무 호들갑 떨지 마라. 사람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에 순응해야 하는 것이다.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너에게 말하지 않으려고 했었다만 아들아, 바로 네가 안고 있는 기절한 여인이 너의 진정한 아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와 너의 아버지가 이 여인을 너의 아내로 골랐으며, 초상화로 본 여인은 가짜였어.”
로돌포는 이 말을 듣고서 불붙은 사랑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자리의 엄숙함과 예의 같은 것은 다 떨쳐버리고 레오까디아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마치 그녀의 영혼이 그를 맞으러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의 눈물이 탄식으로 바뀌었다. 고통의 소리가 커지고, 레오까디아의 어머니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고 아버지는 수염을 쥐어뜯었다. 아들 루이스의 고함 소리가 하늘을 찌를 때 레오까디아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로돌포의 품에 안겨 있던 레오까디아는 부끄러워하며 그의 팔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자 로돌포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 가만히 있으시오. 당신을 영혼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의 두 팔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 마오.”
이때에 레오까디아는 의식을 완전히 회복했고 에스떼빠니아 부인도 처음의 계획을 더 이상 시행하는 것을 중단했다. 그리고 신부님에게 자신의 자식과 레오까디아의 결혼식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으며, 신부는 이를 수락했다. 어떤 절차나 예고도 없이 두 사람의 의지에 따라서 결혼식이 거행되었으며 두 사람의 결혼을 방해할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다.
가족들과 모든 사람의 기쁨과 축하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나보다(작가 세르반테스를 말함 : 옮긴이) 더 훌륭한 재능이 있는 작가에게 맡겨주기 바랍니다.
레오까디아의 부모는 로돌포를 두 팔로 안아 포옹했고 하늘과 그의 부모님께 감사했다.
로돌포의 친구들도 스페인에 도착한 날 저녁에 뜻밖에도 아름다운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어 감탄했고, 더욱이 에스떼빠니아 부인이 모든 사람 앞에서 레오까디아가 바로 자신의 아들이 납치했던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 더욱 놀랐다. 이에 놀란 것은 로돌포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레오까디아에게 그것을 확인해줄 수 있는 어떤 증거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대답했다.
“제가 그때 기절에서 깨어났을 때, 저는 순결을 잃고서 당신의 품속에 있었지요. 그때처럼 방금 전 저는 당신의 팔에 안겨 기절했었지만 제 명예는 되찾았어요. 만일 이 설명으로 부족하다면 저 아니면 가져갈 수 없었던 십지가상을 보여드리지요. 제 어머니가 가지고 계신 저 십자가는 바로 당신이 찾았던 그것이지요. 이제부터 당신은 나의 영혼이시며 하느님의 허락하는 동안 그렇게 되실 것입니다.”
로돌포는 다시 한번 그녀를 포옹했고 모든 축복과 축하의 말이 두 사람에게 전해졌다.
저녁 식사가 다시 시작되었고 이를 위해 준비한 악사들이 나타났다. 로돌포는 자기 아들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신랑 신부 양측의 노부부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기쁨과 환희와 만족이 온 집안에 넘쳤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 저녁 시간이 빨리도 흘러갔으나 로돌포에게는 너무나 더디게 느껴졌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사랑하는 아내와 단둘이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내 원하던 시간이 되었다. 원래 끝이 없는 시작은 없는 법이니까.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고 온 집안의 침묵은 무덤 속에 덮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실만은 침묵 속에 남지 않을 것이다. 톨레도의 수많은 후대 사람이 그러한 정막 속에 그 진실을 마냥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두 행운의 부부는 많은 아들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늘과 ‘피의 힘’ 덕분이었다. 용감하고 고상하고 독실한 기독교도인 루이스의 친할아버지가 사고로 쓰러진 손자의 피를 본 덕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