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전쟁의 무고한 희생자들
나는 며칠 동안 하릴없이 문간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며칠 동안 매일 아침 해가 뜨고 매일 밤 해가 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햇살은 예전처럼 무심했다. 대지는 폭탄으로 폐허가 되고 불길에 휩싸여도 저 위의 하늘은 변함없이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재앙이 소요가 멈추기를 염원하며 사나흘을 더 하릴없이 흘려보냈다. 그러면서 피난을 떠나 버리고 싶은 욕망과 이곳에 남아 있기로 한 약속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제까지의 삶의 토대를 뿌리째 뽑히고, 서른아홉의 나이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나는 이제 젊은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편과 용운이가 다시 돌아왔을 때 맞아 주기로 한 약속이었다. 집이 비어 있으면 두 사람 다 우리가 잡혀갔거나 아니면 더 나쁜 경우를 상상할 게 분명했다. 며칠 더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자, 초조함에서 비롯되는 힘으로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거리를 나돌아다니는 것도, 집 안에서 잠을 자는 것도 안전하지 않았다. 살아 보려고 애를 쓰다 죽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저 기다리다 죽는 게 더 나을까? 불현듯 피난을 가야겠다는 충동이 온몸을 압도해 왔다. 남은 우리 일곱 식구가 남편과 용운이를 따라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찾으면 되었다. 결심을 막 굳혔을 때 덕화가 들어왔다. 덕화는 내 마음을 읽은 듯했다.
"네 아버지와 오빠를 찾으러 가야겠다. 다른 아이들을 준비시켜라.‘
내가 덕화에게 말했다.
짐을 꾸리는 것은 감정을 소모시키는 일이었다.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는 힘겨운 선택이었다. 나는 인색해지기로 했다. 짐을 너무 많이 가져갔다가 우리의 생명을 희생시키게 될 수도 있었으므로 한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따져 본 후에, 나는 달랑거리는 금귀걸이 한 쌍과 아이들의 슨금 돌 반지, 쌀이 조금 든 자루 하나, 몰수당한 우리 토지의 땅문서 두 장, 서양식 운동복 차림을 한 남편의 사진 한 장과 그의 양모 외투 세 벌을 제외한 모든 것을 버리기로 했다. 보석과 땅문서는 옷단에 조심스럽게 꿰매 넣었다. 그리고 여자로서 치러야 할 생리라도 열구 살 난 딸아이가 성숙한 여인이 될 때를 대비해서 빨아 쓸 수 있는 면으로 된 천꾸러미 네 장도 함께 꾸렸다. 머리 위로 폭탄이 터지는 얼어붙은 길을 따라 내려가다 이 천을 빨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여자들은 결코 전쟁을 시작하지 않으리라. 전쟁은 남자들이 벌이지만, 가장 심한 고통을 겪는 것은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피난을 가야 한다는 결단 말고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떠나야만 해. 떠나야만 한다구."
내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려고 노력하며 이렇게 여러 번 중얼거렸다. 덕화가 얇은 끈으로 묶은 무거운 교과서 보따리를 감싸 안고 들어왔다.
"덕화야, 그 책은 여기 두고 가야 해. 무게만 나갈 뿐이야."
"하지만 엄마, 전 이 책들이 없으면 죽어 버릴 거예요. 이 책들을 가지고 공부하지 않으면 어떻게 내년에 좋은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네가 그 책을 가져가면 우리는 다 죽게 돼. 우리들 하나하나가 희생을 해야 하니까."
내가 엄하게 일렀다.
"남한에 도착하면 책을 더 많이 사 줄게. 자, 이제 할아버지와 동생들을 데리고 오너라."
"언니만 빼고는 다들 옷을 입었어요."
"민아야, 네 외투는 어디 있니?"
내가 민아를 불러들였다.
"할아버지가 너무 늙으셔서 먼 길을 가시는 건 무리예요. 가족들의 피난길만 지체시키실 거예요. 제가 할아버지와 여기 남아서 모두들 돌아올 때까지 집을 지키고 있을게요."
나는 깜짝 놀라서 민아를 쳐다봤다.
"두 사람 다 여기 남아 있으면 안 돼. 자살 행위야!"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전 엄마에게 빚을 졌어요."
민아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발 엄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 해주세요."
나는 자발적으로 시작은할아버지와 뒤에 남아 우리에게 작은 가능성이나마 열어 주려는, 그만큼 헌신적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이 현명한 어린 소녀를 경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민아를 한 가족처럼 사랑했으므로 결코 그 같은 일을 부탁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민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시작은할아버지는 점점 정도가 심할 만큼 허약해지는 데다, 눈은 반쯤 보이지 않았고 귀는 거의 먹은 상태였다. 시작은할아버지가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라곤 밥을 먹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이 끔찍했던 시절을 돌이켜보노라면, 이 곱사등이 소녀에게서 자주 생각이 멈추곤 한다. 이 소녀와 시작은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아이들과 나는 눈물을 흘리며 간단한 작별 인사를 하고 서둘러 대문 밖으로 나섰다.
"애들아, 그만 울거라. 눈물은 고드름이 되어 얼굴만 얼게 할 뿐이야. 용기를 내렴. 이제 막 피난길이 시작된 거니까."
내가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옷을 지나치게 껴입은 인형 가족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스웨터와 바지, 그리고 양말을 몇 겹으로 껴입었고, 나는 솜을 넣어 누빈 겨울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신속함과 민첩함을 따뜻함과 맞바꾼 셈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조심성 없이 매서운 겨울바람에 살을 드러냈다가는 동상에 걸리고 말 테니까. 여섯 살과 아홉 살 난 두 아이의 손을 잡으려면 양손이 다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쌀자루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위치에 길게 길러 땋은 머리를 쪽쪘다. 이제 맏이가 된 덕화는 내 치마를 붙잡고 뒤에서 나를 따라왔고, 아기는 남편의 양모 외투 세 벌로 따뜻하게 감싸인 채 내 등에 안전하게 업혀 있었다. 한겨울에 한 달간의 악몽 같은 피난길에 올랐을 때, 북쪽 산에 황금빛 광선을 길게 늘어뜨린 햇살로 밖은 아직 훤했다. 1950년의 마지막 달인 그때는 유엔군의 공습이 가장 심했던 시기라는 것밖에 기억나는 게 없다. 하루도 빠짐없이 전투기 수백 대가 날아와 마을과 부락을 폐허로 만들었다. 겨우 조금 발걸음을 옮겼을 때, 우리 집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서로 부둥켜안은 아이들과 나는 독수리 같은 인간들이 텅 빈 우리 집 창고를 미친 듯이 뒤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강도들이 남아 있는 가구를 내가는 동안 집 안에서는 횃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제까지는 우리의 친구였던 이들이었다. 우리 집을 털 기회를 엿보며 자신들의 집 문뒤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뒤에 남은 두 사람을 보호하기에 나는 너무 무기력했다. 길을 재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폐허 더미와 불에 타 버린 집들, 그리고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되어 있는 사물들이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치며 나아갔다. 얇은 얼음이 발밑에서 뽀드득거렸고, 우리 가족의 발자국 소리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 다섯 일행이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때 저 너머로 사람들이 보였다! 대동강에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피난민들이 설탕물에 모여든 개미 떼처럼 강둑을 뒤덮고 있었다. 이토록 많은 군중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남한으로 가려면 강을 건너야 했다. 강은 아직 얼지 않아서 예전의 겨울에 그랬듯이 미끄럼을 타며 쉽게 건널 수 없느 상태였다. 그래서 갖가지 고기잡이와 돛단배들이 사람들을 강 건너편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질서는 완전히 무너졌고, 생존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야만적인 힘뿐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찰 대로 찬 배 위에 자리를 잡으려고 아우성치며 서로의 몸에 매달리거나 몸을 밟고 올라섰다. 때리고, 밀고, 욕을 퍼붓고, 다투고, 여자들도 욕설을 퍼부으며 남자들처럼 행동했다. 목적은 단 하나, 강은 건너는 것이었다. 전쟁 중이었으므로 겸손함과 품위는 설 자리가 없었다.
"엄마, 저기 좀 보세요."
건일이가 내복만 입고 있는 이십 대 후반의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서서 자유르 찾아 강을 헤엄쳐 건너겠다고 허풍을 떨고 있었다. 모든 눈이 일제히 그 남자에게로 쏠렸다. 그가 성공하면 귀를 따르겠다고 벼르는 사람도 있었고, 호기심에 차서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의 얼굴에 푸른빛이 도는 것으로 보아 수운이 끔찍하리만큼 낮음을 알 수 있었다. 머리 위에 묶은 옷 보따리의 균형을 잡으며 남자가 한발 한발 걸어 들어갔다. 물이 어깨높이까지 차오르자, 남자가 개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강을 반쯤 건넜을 때, 뾰족한 나무 널판지가 그의 머리에 와서 세게 부딪쳤다. 남자는 몇 초 동안 물속을 들락날락하더니 끝내 가라앉고 말았다. 그가 죽은 곳은 붉은빛 소용돌이가 일 뿐이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강을 건널 수 있을까를 계속해서 궁리해보았다. 배가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재빨리 아이들을 태워 보려고 애를 썼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밀릴 뿐이었다. 사람들이 우리의 몸을 밟고 올라서는 바람에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배에 타려고 여러 차례 노력해 보았지만 이리저리 긁히고 얻어맞을 뿐 성공은 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용운이 엄마" 하고 부를 때까지는 모두가 다 무서워 보이기만 했다.
나를 부른 사람은 교회에서 알게 된, 소 같은 눈망울에 뺨이 움푹 꺼진, 자그마하고 다부진 여인이었다. 갈색으로 탄 얼굴이 땀에 번들거렸다. 남장을 하고 있어 처음에는 알알보지 못했지만, 웃을 때 이빨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자 곧 생각이 났다.
"용운이 엄마, 여태 여기서 뭘하고 있어요?"
여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안 되겠어요. 아이들과 난 동작이 너무 느려요."
"여기서 기다려요. 배를 보내 줄 테니까."
여인은 이렇게 말한 다음 즉시 어디론가 달려갔다.
몇 분 후에 조그만 고기잡이배가 우리 쪽으로 노를 저어 왔다.
"타시오."
구부러진 장대로 배를 세우며 사공이 말했다.
"애들아, 서둘러."
내가 다급하게 아이들에게 외쳤다. 배에 오르려고 애를 쓰다가 우리는 또 밀려나고 말았다. 든든한 버팀대를 붙잡은 것은 덕화뿐이었다. 어린 아들들과 나는 무참히 들려 강기슭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버려진 우리는 덕화가 혼자 강을 건너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어떡해요. 엄마?"
아이들이 흐느껴 울었다. 다리에서 떨어져 나온 기둥이 강 앞쪽으로 무너져내리며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멀리서도 다리 중간 부분이 잘려져 나가려 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다리를 건너려고 했다. 친정아버지는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을 노예처럼 부려서 만든 현대식 다리를 증오했다. 따라서 우리는 어렸을 때 다리를 건너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이들과 나는 느릿느릿 다리로 연결되는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절망에 빠진 더 많은 인파가 그곳에 모여 있었다.
"내 차례야!"
"아냐 내 차례야!"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 댔다.
"얼마나 기다리셨어요?"
앞에 서 있는 굳은 표정의 여자에게 물었다.
"하루종일이오!"
여자가 불평을 토했다.
"하루종일이라구요! 이제 곧 해가 질 텐데."
숨이 막혀 왔다. 우리는 사람들의 뒤로 가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막대기를 든 두 남자가 줄을 선 사람들의 아래위로 오가며 질서를 잡고 있었다. 이따금씩 막대를 휘둘러 새치기하는 사람들을 제지하면서
"저 키작은 남자는 악독한 인간이에요"
그 남자가 우리 쪽으로 바삐 오고 있을 때, 굳은 표정의 여자가 경고했다. 남자는 막대기로 다짜고짜 나를 가리켰다.
"아줌마! 아이들을 데리고 나를 따라와요!"
남자가 고함을 쳤고, 우리는 뒤를 따라갔다.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예요?"
남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덜 위압적인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날 몰라보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아야 하나요?"
"모르실 수도 있죠. 하지만 난 아주머니가 베풀어 주신 친절을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가난하다는 이유로 의사들마저 우리를 내쫓았을 때 아주머니가 우리 어머니를 돌봐 주신 적이 있어요."
남자는 진심으로 감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로 무수히 많은 도움을 베풀었던지라 그의 얼굴은 내 기억에서 빠져 있었다.
"그래도 기억이 안 나는걸요."
내가 솔직히 말했다.
"저예요. 신주성."
"어머나!"
나는 그의 두 손을 잡았다. 청년이 다 되어 있었다.
"다음에 건너가세요."
주성이가 군중들을 한쪽으로 밀고 우리를 맨 앞줄에 세웠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여자야?! 우리가 먼저 왔는데!"
사람들의 손이 사방에서 내 머리카락과 두 팔, 그리고 옷을 잡아당겼다. 나는 엄청난 힘에 떠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기가 업혀 있는 등 위로 사람들의 무거운 발걸음이 지나갔다.
"엄마! 엄마! 아기가 죽어요!"
건일이가 울부짖었다. 나는 몸을 돌려 아기를 보호하려고 온 힘을 다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발밑에 깔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주성아!"
내가 소리를 질렀다.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주성이가 무섭게 막대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한 사람, 한 사람, 내게서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다. 아기의 얼굴은 새까맸고, 머리는 꺾인 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아기야!"
나는 아기가 정신을 차리도록 내 어깨를 아래위로 흔들어 댔다. 아기는 죽어 있었다. 아기의 죽음을 애도해 주고 싶었지만,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할 시간은 없었다.
"강을 건넌 다음에 묻어 주어야겠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머리띠를 하고 막대기를 든 남자들이 더 많이 나타나 다리 입구를 지키며 한 번에 서너 사람씩만 통과시켰다. 그곳에 서 있자니 엉망이 된 다리와 앞으로 벌어질 일이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다리의 처음과 끝부분은 아직 무사했다. 하지만 가운데의 드넓은 부분은 뒤틀린 철근과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널빤지로 간신히 지탱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들이 다음에 갑니다."
주성이가 앞쪽을 지키는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가?"
내가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울먹였다.
"어떻게 내가 이 아이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겠어?"
나는 물러날 채비를 하며 뒷걸음질 쳤다.
"제가 작은아이를 등에 업고 큰아이와 함께 아주머니 뒤를 바짝 따라갈게요."
주성이가 용감하게 나섰다.
"그래,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해보는 수밖에 없어."
나는 나 자신을 설득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건너편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아이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중한 아들이 흔들거리는 좁다란 보를 따라 균형을 잡으며 걷는 것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쨌든 해냈다. 우리 네 사람 중에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건일이었다. 주성이의 깡마른 등에 매달린 건삼이는 신발이 벗겨져 공중에서 대롱거리고, 바지도 엉덩이가 다 나오도록 내려와 있었다. 건삼이가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다음은 끔찍하게도 내 차례였다. 나는 앞으로 나가 죽어 있는 아기가 등에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한 다음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한 남자가 내 몸 위로 뛰어넘는 바람에 하마터면 떨어져 죽을 뻔했다. 하지만 필사의 투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몽둥이가 그 남자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바람에 그는 옆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정신이 나간 듯한 사람들 속에서 질서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 같은 가차 없는 징벌이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차가운 금속 보를 손가락을 단단히 움켜쥔 채 이쪽저쪽으로 몸무게를 실어 가며 느릿느릿 앞으로 기어나갔다. 몸무게가 족히 천 근은 되는 것 같았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눈을 찔러댔지만, 나는 쉬지 않고 조금씩 나아갔다. 반쯤 건너왔을 때 아래는 내려다보고 싶은 불길한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큰 실수였다! 내가 수면에서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를 한번 보고 나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지는 꼼짝을 하지 않고, 등은 뻣뻣하게 굳었으며, 다리는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지려 했다. 폐가 부풀어 오르면 보가 무너질 것만 같아서 숨을 쉬기도 겁이 났다. 한 마리 나비로 변해 강을 건널 수 있기를 얼마나 갈구했던가!
"빨리 가든지, 아니면 비키란 말얏!"
뒤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아우성쳤다. 길을 비켜 주고 강물에 몸을 날려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게 더 쉬울 것만 같았다. 그때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빨리 오세요! 저희는 여기 있어요."
나는 두 눈을 꼭 감고 다시 용기를 냈다. 그리고는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제발, 하나님... 제발, 하나님, 제게 힘을 주십시오."
나는 기도에만 온 마음을 집중한 채 계속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강인한 손이 나를 단단한 육지로 이끌어 주었다. 열 바퀴쯤 돌고 난 것처럼 어지러웠고,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움직였다. 덕화를 찾아야 했다. 나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강둑 아래로 내려왔다. 다리에서 멀어질수록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몸을 흔들며 반쯤 잠이 든 상태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덕화를 발견했다.
"덕화야!"
내가 소리쳤다. 덕화는 벌떡 일어나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다시 나를 잃어버릴까 봐 겁이 나는 듯 온 힘을 다해 내게 매달렸다.
"엄마,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넌 총명한 아이다. 우린 힘든 일을 해냈어."
어린 두 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의 눈부신 웃음이 내게도 그대로 전해져 왔다. 우리는 잠시 훈훈한 마음을 나누었다.
"누나는 배를 탄 것밖에 없지만, 우리는 구름에 매달려 있었다구."
건일이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나자 막내 생각이 났다. 아기의 얼굴애ㅔ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기를 묻어 주어야겠다."
내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아기의 조그만 몸뚱이를 귀에 대 보니, 놀랍게도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살아 있는 아기를 묻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땅에 묻는 순간이 올 때까지 업고 다니기로 했다. 나는 안감에서 천을 조금 찢어 낸 다음 침을 묻혀 조심조심 얼룩을 문질러 가면 검게 변색한 아기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어떤 상처든 낫게 하는 엄마만의 비밀스러운 치료 약이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번에는 별 효과가 없었다. 순식간에 밤의 장막이 내려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곧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닥쳐올 터였다. 내일 걷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우리는 맨 하늘 아래 잠자리를 마련했다. 소의 눈망울을 한 그 건장한 여인이 강가에 모여 웅크리고 있는 우리를 또 찾아냈다.
"용운이 엄마, 여기서 자는 건 위험해요."
"다리가 말을 안 들어요."
내가 그 여자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지금 가야 해요. 그것도 빨리 가야 한다구요. B-29기가 오고 있어요."
여인의 눈이 다급함으로 둥그레졌다. 여인은 우리가 다시 길을 떠날 때까지 내 저고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다리는 뻣뻣하게 얼어붙고, 배는 고프고, 힘은 다 소진한 상태였다. 겨우 3, 4킬로미터를 걸었을 때 비행기가 강을 따라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마어마한 진동을 일으키며 폭탄이 쉴새 없이 터졌다. 거대한 화염이 하늘을 환히 밝혔고, 열기가 너무 뜨거워 눈썹이 그슬릴 것만 같았다.
"자, 가자. 애들아."
나는 사람들이 죽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말했다. 몇 년 후에 그때 뒤에 남았던 사람들이 모두 다리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동강에 ‘피의 강’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남긴 채.
우리는 높이 떠오른 달을 유일한 등대 삼아 캄캄한 어둠 속을 나아갔다. 긴 시간이 흘렀다. 끝도 없이 걸은 것만 같았고, 쉴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침내 수많은 굽잇길 중 하나를 돌아서자, 사람의 발자국이 나 있는 칠흑 같은 오솔길이 펼쳐졌다. 더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자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우리를 받아 줄 집이 있을지도 몰랐다. 거절하면 내 금귀걸이를 줄 생각이었다. 우리는 창문이 떨어져 나가고 문짝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커다란 오두막에 이르렀다. 안에는 사방의 벽 바로 아래까지 사람들이 겹쳐진 채 자고 있었다.
"딴 곳을 찾아봐. 이제 더 이상은 자리가 없는 게 안 보여!"
찬바람을 피하느라 머리를 감싸며 한 남자가 소리쳤다.
"가! 가란 말이야!"
아기의 축 늘어진 머리 바로 위로 신발 한 짝이 날아왔다.
이제 막 폭탄 때문에 죽을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는데 성안 이에게 또 얻어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매서운 밤 추위 속으로 다시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다섯 번째로 버려져 있는 집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때는 무척 좋은 집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오래전에 버려둔 집이었다. 마당으로 들어간 우리는 부엌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음식 찌꺼기에서 풍겨 나오는 탄 밥 냄새가 콧구멍을 맴돌며 텅 빈 위를 자극했다. 하지만 배고픔보다 더 절박한 것은 졸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몸을 눕혔다.
아이들은 차가운 온돌바닥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양모 외투 세 벌로 아이들을 덮어 주는 것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잠에서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한쪽 눈으로는 누가 양모 외투를 훔쳐 가지 않는지를 살피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아이들을 살피느라. 너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난 터라 마음속에서는 생각들이 바삐 오갔다. 집을 떠나왔고, 시작은할아버지와 민아를 잃고, 화염에 휩싸여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하루 밤새 이 모든 일이 벌어지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해는 일찍 솟아올랐고,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서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새로이 맞은 이 날 하루 동안 그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사지를 잃을 수도, 가족과 헤어질 수도, 죽음을 맞이할 수도, 불과 몇 초 만에 집은 텅 비어 버렸다. 나는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일어나서 몸을 이리저리 뻗어보았다.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아이들을 깨우려고 했지만,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 잠든 아이들의 얼굴이 너무 편안해 보였다. 단 1분이라도 지체하는 것이 위험함을 잘 알면서도 나는 아이들을 조금 더 재우기로 했다.
나는 밖으로 나와 우물가로 갔다. 양동이와 줄이 우물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 남자 고무신 하나가 누더기 같은 줄에 묶여 대롱거리고 있었다. 나는 조심조심 그 고무신을 내려 여러 번 애를 쓴 끝에 맑은 물을 고무신 하난 가득 퍼 올릴 수 있었다. 부엌에는 성한 그릇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짐이 가벼워지는 것을 기뻐하며 가지고 온 쌀을 밥솥에 얹혀 밥을 지었다. 이 보잘것없는 양을 먹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견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따스한 밥 냄새가 퍼져 나왔다. 이제 아이들을 깨울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자는 곳에 무릎을 꿇고 이들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아이들은 몸을 질질 끌며 마루로 나와 임시로 만든 상 위에 놓인 제 밥그릇을 집어 들었다. 쌀보다 물이 더 많은 죽이었지만, 아이들의 손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텅 빈 위장을 달래줄 터였다.
나는 푸른빛이 도는 입술에 부서진 공기를 갖다 대고 죽을 불어 식힌 다음 천천히 들이마시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말 한마디 없이 죽을 모두 삼켰다. 그러고 나서 아기에게로 가 보았더니. 아기는 아직 살아 있었다. 젖꼭지로 아기의 입술을 문지르자 어설픈 미소를 짓는 것 같기도 했다. 아기와 나도 아침을 먹었다. 뜨거운 죽이 추위에 떠는 내 몸을 한 바퀴 돌아 곧바로 아기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더 먹어야 했지만, 젖이 돌 수 있을 만큼만 먹었다.
"가자."
죽을 남김없이 핥은 후에 내가 말했다.
우리는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몸을 떨며 서로의 손이나 치마를 붙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해는 험준한 산세를 환히 비추며 산꼭대기 위로 솟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추위와 두려움 때문에 환한 길도 어슴푸레해 보였고, 매서운 소리를 내며 불어오는 바람이 뼛속에 사무쳤다. 우리는 이를 악물고 겨울바람을 맞받으며 걸었다.
어쩌다 보니 큰길에서 상당히 먼 거리를 벗어나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돌아가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대지를 메우고 있는 엄청난 인파가 눈앞 가득 펼쳐졌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눈앞의 모습이 현실로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북한 사람 전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포장도로인 신작로, 이 한 길로 대대적인 탈출을 감행하고 있는 듯했다. 압록강에서 의주로, 그리고 평양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이 포장도로를 닦은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신작로는 사람들과 썰매, 그리고 소달구지로 대혼란을 이루었다. 남자들은 지게를 지고, 나 같은 어머니들은 등에는 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보따리를 이고 있었다.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균형을 잘 잡으며, 아주 어린 아이들이나 노인들만이 빈손으로 길을 재촉했다.
눈이 녹아 발밑이 질척거렸고, 발을 잘못 디딘 가엾은 가축들이 크고 작은 웅덩이를 만들며 이 불안한 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졌다. 똑같은 불운을 피하려면 한발 한발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지나온 길에는 예외 없이 폭탄의 잔해와 재가 널려 있었다.
왜 우리 같은 피난민들에게 폭탄을 허비하는 것인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우리가 무슨 위협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유엔군이 우리에게 폭탄 세례를 퍼부은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피난민으로 가장한 공산주의자들이 말이 끄는 수레와 지게로 대포와 식량을 날랐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끼여 함께 걷고 있는지를 나도 알 수 없는 마당에 저 높은 곳의 비행기가 어떻게 이들을 식별할 수 있겠는가.
아침 아홉 시경이 되자, 근육에 피로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제 막 길을 떠났을 뿐인데, 벌써 기운을 쓸 수가 없었다. 쌀자루가 머리통을 내리눌렀고, 짐의 무게 때문에 얼굴은 땀 범벅이 되었다. 뒤쪽에서는 두 여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인들의 이름을 물어보기는커녕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을 기운조차 없었다. 이런 판국에 이야기를 나누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계속해서 걸어야 한다. 발아, 걸어라."
나는 나 자신을 타이르고....타이르고....또 타일렀다.
경고도 없이 바로 머리 위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긴 인파의 행렬이 공포에 찬 비명으로 술렁거렸다
"B-29기다! B-29기야!"
실성한 듯한 남자와 여자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죽음을 피하려고 날뛰었다. 무릎을 꿇고 웅크린 채 얼굴을 가리는 이들도 있었고, 그저 고개만 숙이는 이들도 있었다. 홱!홱! 총탄이 살을 찢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엄마! 엄마!!"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나를 찾았다. 지축을 뒤흔드는 폭탄보다 나를 더 동요시킨 것은 아이들의 울음소리였다.
"엄마, 어디 계세요?!"
"엎드려, 애들아!"
내가 고함을 쳤다.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엎드려!"
내가 또 소리쳤다. 그리고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기었다. 펑! 불과 1미터 앞에 있던 한 여인이 공중으로 치솟더니 즉사하고 말았다. 사냥철에 몸 가릴 곳 하나 없는 휑한 연못에 버려진 오리처럼, 나는 절망적이리만큼 나약하고 노출되어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업고 있던 아기를 내려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너무 독해서 목구멍이 막히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연기와 화염 속을 뚫고 달리느니 이대로 몸을 웅크리고 있기로 했다. 대열을 지어 하강한 비행기는 몇백 미터 간격으로 폭탄을 하나씩 떨어뜨리고는 다시 날아돌아 와 불타오르는 폐허 속으로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총알이 날아와 꽂히며 사람들의 육신을 대지에 박았다. 나는 사방으로 포위되어 있었다.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에서 폭탄이 어지럽게 춤을 추며 폭발했다. 매번 내가 맞는 것처럼 몸이 움찔거렸다. 그중 하나는 분명 내게 치명타를 입히리라. 비행기 엔진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고, 마지막 비행기가 머리 위를 저공 비행하며 파괴된 잔해를 확인할 때까지 나는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자 혼란이 가라앉고 고요함이 찾아 들었다. 신음소리와 알은 소리뿐 사방이 조용했고, 대참사의 현장을 드러내며 흙먼지와 연기가 서서히 걷혔다. 팔과 머리가 잘려 나간 그리스 동상 같은 처참한 형상의 시신들이 뒤엉켜 있었다. 잘려 나간 사지와 구멍 난 상처에서 새빨간 피가 솟구치며 새하얀 눈에 최후의 흔적을 새기고 있었다. 죽은 엄마의 시신에 깔려 꼼짝 못 하고 울어대는 아기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기를 구해 주려고 발길을 멈추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쟁으로 어쩔 수 없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이들은 이제 다른 아기의 우는 소리쯤에는 아랑곳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전쟁으로 자신의 문제만 걱정하게 되었다. 자기 앞가림만 하기에도 힘에 부쳤다.
"애들아, 어디 있니?"
없어진 아이들을 찾느라 피로 얼룩진 눈 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하는 어머니들도 있었다. 나는 희망이 하나하나 사라져 가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모습이었다.
"덕화야, 건일아, 건삼아!"
나는 아이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필사적으로 외쳤다. 놀랍게도 네 아이 모두 살아 있었다. 사내아이 둘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엄지손가락으로 두 귀를 막고, 둘째 셋째 손가락으로는 눈꺼풀을 누르고, 넷째 손가락으로는 콧구멍을 막은 채 누나 옆에 엎드려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품속으로 끌어모은 다음, 상처나 총알 자국은 없는지를 세심하게 살폈다. 피 한 방울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발을 딛고 일어나 다른 생존자들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시체와 뒤집힌 손수레, 그리고 집채만 한 구덩이를 조심조심 피해 가면서. 중국에서 여러 해 살았지만, 폭탄이 터지면서 사람들과 거대한 가축들이 공중으로 치솟는 장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서 가자, 애들아. 폭탄을 실은 비행기가 다시 오기 전에 빨리 가야 한단다."
내가 앞에서 아이들을 재촉했다.
"오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요?"
건삼이가 물었다.
"우리는 죽게 되는 건가요?"
건일이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아이들을 속이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대답했다. 다음번 공격 때 죽음이 찾아올 수도 있었으므로 나는 아이들을 죽음으로 대비시키고 싶었다.
"잘 들어라. 다시 비행기가 떼지어 날아오면 내 이름은 부르지 말도록 해라. 나는 너희들이 총알에 맞지 않도록 보호해 줄 힘이 없단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렴. 너희들을 구해 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란다. 알아듣겠니?"
"네, 엄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게요."
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들은 계속해서 다시 날아와 살아 있는 자들을 덮쳤고, 그때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자세를 낮게 취한 다음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을 부르짖었다. 하늘이 선명하게 드러날 때마다 더 많은 사람들과 가축들이 시뻘건 피를 뿌리며 죽어 있었다. 나는 연기 속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살아남은 아이를 찾았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아기. 모두가 기적적으로 죽음을 피해 나갔다. 두 아들을 잃게 될까 봐 너무도 겁이 난 나는 피가 돌지 않을 정도로 아이들의 손을 힘껏 움켜쥐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아이들이 우는 소리를 내며 불평을 해댔지만, 나는 아이들의 눈물을 무시해 버렸다.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발걸음을 멈출 시간도, 쉴 시간도 없었다. 버려진 짐과 따뜻한 시신을 넘어 서둘러 움직이라고 가축들에게 고함을 치며 휘두르는 매질 소리가 끊임없이 귓전을 때렸다. 청소부의 꿈이 실현되어 있었다. 대로는 말 그대로 거대한 시장이었다. 가방, 칼, 접시, 빛바랜 사진, 탁자, 자기 등 없는 게 없었다. 아무거나 다 가져갈 수 있었지만, 짐의 무게를 늘릴 바보는 아무도 없었다. 걷고, 걷고, 또 걷고.... 우리가 한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걷고, 걷고, 또 걷고.... 우리는 몇 날 며칠을 걸었다. 걷다... 넘어지다... 발을 질질 끌다... 그렇게 몇 주일을 걸었다. 나는 길에서 지나치는 모든 시체에서 남편과 아들의 얼굴을 찾았다. 이번이 아니면 다음번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하지만 매번 다른 사람의 남편이나 아이였다. 그 시신들은 모두 내 살과 피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내 시퍼렇게 얼어붙은 얼굴들을 살피는 일을 그만두었다. 지혜와 용기를 모아야 했다. 특히 기온이 떨어지는 밤이 찾아오면. 모두들 쉴 만한 곳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정신이 나간 듯한 피난민 수천 명이 대로를 따라 늘어선 몇 안 되는 집과 헛간, 그리고 옥외 변소를 놓고 싸움을 벌였다. 꽁꽁 얼어붙은 바깥에서 밤을 지내느니 욕 몇 마디를 얻어먹는 편이 훨씬 나았다. 공습을 피하느라 기진맥진한 긴 하루를 보낸 뒤에도 그러한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불행히도 아이들과 나는 우리 자리라는 고함 한 번 쳐 보지 못했다. 발걸음이 느린 우리는 제일 뒤쪽의 피난민들과도 몇 킬로미터의 거리를 둔 채 뒤처져 있었다. 우리는 많은 밤을 걸으며 지샜다. 추위 속에서 잠을 자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처음에는 칠흑 같은 어둠의 장막이 내려처진 다음에 움직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밤이면 전쟁도 잠잠해지리라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밤에도 비행기가 우리의 머리 위를 낮게 나는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다. 비행기는 움직이는 모든 것을 목표로 삼았다. 붉은 예광탄이 하늘을 가로지르면, 비행기들은 폭탄을 떨어뜨려 할 곳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든 비행기가 일제히 불을 내뿜는 광경은 마치 살인마가 개똥벌레들의 무리처럼 보였다. 나는 아이들을 호되게 몰아붙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진맥진한 상태도 넘어선 다음에야 나는 아이들을 조금 쉬게 해주었고. 그럴 때면 우리의 모습을 가려 줄 만한 방어물을 찾곤 했다. 불은 생각할 수도 없는 사치였다. 그래서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를 누그려뜨려 보기 위해 서로의 몸을 맞대었다. 엔진 소리가 들리면 언제라도 달아날 수 있도록 늘 신발을 신고 있어야 했다. 나는 아이들 옆에 몸을 눕히고 한순간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은 유혹을 자주 느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억지로 깨어 있었다. 어느 날 밤 아이들과 함께 수많은 별이 떠 있는 하늘을 천장 삼아 막 쉬려 하고 있을 때, 따뜻한 불길이 바지직거리며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코를 믿을 수는 없었지만 소고기 냄새 같은 것이 많이 났다. 멀지 않은 곳에 낮게 타오르는 장작불을 사이에 두고 남자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있었다. 길에 버려진 것들을 모아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나는 군침을 돌게 하는 그 향기로운 냄새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여러 주 동안 조금이라도 씹을 만한 음식은 물론 고기 한 점 먹지 못했기 때문인지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길에서 죽어 넘어져 얼음 속에 신선하게 저장되어 있던 가축 한 마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허옇게 튼 입술만 핥다가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이들을 먹이지 못하는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 밤 남자들이 물러나는 것을 본 나는, 불이 꺼져버린 장작불 쪽으로 조심스럽게 까치발을 하고 갔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발끝에서 온몸으로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나는 불가피한 경우 말고는 얼어붙은 눈을 밟지 않기 위해 발을 놓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도로 발을 들어 올리며 걸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근사한 냄새는 점점 강렬해지고 꼬르륵 소리는 커져만 갔다. 그 소리 때문에 꼭 죽을 것만 같았다. 바로 앞에는 송아지의 시체가 장작불에 구워지고 있었다. 죽은 소를 사이에 두고 사슬 모양으로 누워 잠들어 있는 남자들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 체. 바로 눈앞에 있는 고기를 어쩌지 못하고, 둥그렇게 누워 있는 남자들의 몸뚱이 밖에 서 있자니 심장이 두 방망이질을 쳐댔다. 나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누군가의 반쯤 벌어진 손에 아직 살덩어리가 붙어 있는 갈비뼈가 쥐어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배고픔으로 제정신이 아닌 나는 이미 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손이 너무 떨려 재빨리 그 손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위태로운 한순간을 기다렸다 다시 시도했다. 드디어 고기가 내 손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느닷없이 무언가가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더니 세게 잡아당겼다. 눈썹에 눈이 허옇게 쌓인 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움푹 들어간 검은 눈망울이 용운이만큼 젊어 보였다. 용운이의 또래임이 분명했다. 그러더니 남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손을 놓은 다음 다시 잠에 곯아떨어졌다. 이제 풀려난 것이었다. 여전히 그 갈빗대를 움켜쥔 채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도 아이들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그냥 자게 내버려 두었다. 내일 하루를 버티려면 아이들에게 반드시 고기를 먹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나도 잠시 쉬기로 했다.
왠지 그날 밤은 다른 날들보다 더 길게만 느껴졌다. 이 모든 무의미한 파괴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높은 하늘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이름 모르는 비행사를 바라보던 순간, 나는 해답을 깨닫게 되었다. 저 비행사들이 우리의 얼굴을 보고 비명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이 살육을 멈출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 쉬운 일처럼 여겨졌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안전한 꼬치 속에 몸을 실은 태 몇 킬로미터 위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지평선 너머로 달이 서서히 지고 태양이 솟아올랐다. 계속해서 굵은 눈발이 퍼부었지만, 햇살이 피를 조금 데워주어 몸을 움직이기가 한결 수월했다. 다시 살아난 느낌이었다. 나는 한 팔을 뻗어 아이들을 흔들었다.
"일어나라. 시간이 됐다."
아이들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하지만 갈빗대를 본 순간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이마다 상당한 분량의 살코기가 돌아갔고, 모두들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내 몫은 없었다. 나는 손가락에 묻은 찌꺼기를 빠는 것으로 만족했다. 달콤했다. 옆에는 어린 사내아이 둘이 있었다. 작은아이가 제 형을 흔들어 깨우려고 헛되이 애를 썼다. 밤새 죽음이 평화롭고도 조용히 큰아이를 덮친 것이었다. 업고 가기에는 형의 얼어붙은 몸뚱이가 너무 무거웠든지, 작은 아이가 제 형 옆으로 기어가더니 두 눈을 감았다. 무고한 희생자가 또 하나 늘어난 셈이었다. 나도 전쟁의 비정함에 또 한 번 울어야 했다.
"가자. 내 한 몸만 걱정해야 하는 거야."
내가 스스로를 타일렀다. 이런 이기적인 발언은 기독교인이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종종 어쩔 수 없이 내리게 되는 이와 같은 끔찍한 결단을 하나님이 이해해 주시리라 믿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튀어나오고 이리저리 굽은, 미로 같은 얼음판 한가운데를 비틀거리며 걸었다. 두 다리가 계속 후들거렸다. 얼음이 고무신 바닥을 찔러 대는 바람에 고무신 바닥을 찌러 대는 바람에 고무신 밑창이 찢어져 나갔고, 이내 신으나 마나 한 상태가 되었다. 나는 부러진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대 절름거리며 걸었다. 발 크기보다 작은 보기 좋은 고무신이 아니라, 걷기에 편한 신발 한 켤레가 간절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길을 따라 뻣뻣하게 굳어 있는 시체 하나하나를 살피며 질 좋고 적당한 크기의 신발을 찾았다. 얼굴이 날아가 버린 남한 병사의 시체가 누워있었다. 그 병사의 발에서 군화를 벗겨 내면서도 아무런 회한도 느끼지 않았다. 발에 맞지 않는 큰 신발이지만, 최소한 발가락을 펼 수는 있었다. 찢어진 고무신을 벗겨 내자니 발이 너무도 아팠다. 추위 때문에 고무신이 생살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칼로 잘라 내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살도 함께 잘려 나갔다. 그것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아픔도 느낄 수 없었다. 발은 어느새 성이 나 고름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나는 부기를 가라앉혀 보려고 살을 눌러 누런 고름을 짜냈다. 그런 다음에는 두 발을 얼음 속에 파묻어 신경을 마비시킨 후에 군화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두 발이 몸에서 분리되어 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고 나니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빨리 좀 움직이시오."
사람들이 뒤에서 우리를 밀어 댔고 낯선 이들이 하나하나 우리를 앞질러 갔다. 비쩍 마른 새로운 얼굴들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갔다.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피난민들은 목숨 줄 같은 짐꾸러미를 이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우리 쪽을 쳐다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 사람들의 기동력이 부러웠다. 아이들과 있는 힘을 다해 피난민 행렬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실망스럽게도 뒤로 더 처지기만 할 뿐이었다.
기분은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긴장감으로 얼굴에 힘을 주었다가도 지치고 불쾌해져 표정을 일그러뜨리기도 했다. 무척 추운 날씨였는데도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호흡은 무척 가빴다. 비행기와 추위, 그리고 이 빌어먹을 나라와 내 더러운 몸에서 풍기는 악취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 이제 최악의 적은 폭탄이 아니라 나 자신의 나약함이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몸을 웅크린 채 목놓아 울어버릴까 두려웠다. 예전의 집과 가족들이 그리웠다. 그리고 그러한 그리움은 발걸음을 옮기는 데 필요한 의지를 갉아먹었다. 농부 같은 차림을 한 공산주의자들의 스파이가 살금살금 다가와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라고 우르를 회유하러 했다.
"아줌마, 얼마나 피곤하세요? 전 집이 그리워요. 부끄럽게도, 연로하신 부모님을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두 분에게는 제가 필요한데 말이에요. 지금 돌아가도 늦지 않아요."
이들은 나의 나약함과 소용돌이치고 있는 내면의 감정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집으로 가야 할 것 같다"
내가 아이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안 돼요! 아버지가 계시는 곳으로 갈 거에요."
덕화가 소리쳤다.
"지금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지도 몰라."
"아니에요. 38선을 넘어야 아버지를 찾는다구요."
덕화가 소리쳤다.
이제 더 이상 지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으므로, 아버지를 찾겠다는 아이들의 열망만 아니었어도 나는 몇 킬로미터 전에 발걸음을 돌렸으리라. 이렇게 내 생각과는 달리 우리는 화염과 폭탄, 비명소리와 폭 발음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거의 다 왔어."
나는 아이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아무런 확신을 주지 못하는 이 말을 기운 없이 웅얼거리곤 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 말이 내 귀에 들리도록 소리 내어 말했다. 쌀자루는 이제 텅 비었고, 모든 식량은 바닥이 났다. 우리는 어제 먹은 쌀과 눈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고, 죽음의 문턱까지 간 아기는 아직 생명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기를 업고 다니느라 피난길은 더 힘이 들었다. 온몸의 근육이 축 늘어지고, 눈썹까지 안 아픈 데가 없었다.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결정을 내려야 했다. 즉, 아기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로 한 것이었다. 난 우리들의 생명을 택했다. 당연한 동시에 비정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꺼져가는 이 작은 생명 하나보다는 큰 아이들 셋을 살리는 편이 나았다. 나는 아기를 등에서 내린 다음, 사람들의 발에 밟히지 않도록 뒤로 자그마한 돌을 받혀주었다. 몸은 순식간에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슬픔으로 수천 배나 더 무거워져 있었다.
"엄마, 아기를 죽이려고 그냥 여기에 놓고 가시는 거예요?"
덕화가 울부짖었다.
"그냥 놔둬!"
내가 소리쳤다. 공포심이 서려 있는 세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는 일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아기를 데려가야 해요."
"아기는 어쨌든 죽을 거야."
"한 사람이 죽으면 우리 모두 다 죽고, 피난을 가려면 모두 함께 가야한다구요!."
"내가 하는 일에 이의를 달지 마. 다 너와 네 남동생들을 위한 거니까."
"그러면 제가 아기를 데리고 가겠어요."
덕화가 단숨에 아기를 품에 안아 올렸다.
"아기를 두고 갈 거라고 내가 말했지."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짐이 되면 우리도 길가에 버리실 건가요?"
나는 덕화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딸아이를 때리는 손은 멈출 줄 몰랐다. 덕화는 그대로 서서 내 매질을 고스란히 받았다. 내가 모든 슬픔과 절을 자신에게 털어 버릴 때까지 그렇게 잠자코 있었다.
"내가 이렇게 최악의 희생을 해도 너희들은 살아남을까 말까 해. 이 전쟁은 내 잘못이 아니야. 만일 아기가 몇 년 후에만 태어났거나 아니면 아기를 데리고 갈 아버지만 있었더라도.... 만일... 만일...."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두 아들의 손을 움켜잡고 정면을 응시한 채 걷기 시작했다. 덕화의 순진한 정의감 때문에 내 결심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옆 눈으로 보니, 덕화가 아기를 안고 우리를 따라오느라 허덕거리고 있었다. 한발 한발 덕화가 뒤처지기 시작했다. 두 팔과 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면서도 덕화는 아기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조금씩 걷다가 덕화는 주저앉아 쉬곤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쓰러질 때까지 한참을 더 걸으며 그 정신 나간 짓을 되풀이했다. 나는 두 아이에게 달려가 이들의 앳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기를 이리 내놔."
내가 두 팔을 벌렸다.
"싫어요. 제가 데리고 갈 거예요."
"아기를 이리 내놓으라니까."
내가 또 이렇게 말하며, 덕화의 품에서 간신히 아기를 빼앗아 등에 업었다. 7, 8백 미터 정도 가자, 두 다리가 다시 심하게 후들거렸다. 덕화가 나를 구해 주러 달려왔다. 하지만 먼저 스웨터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가슴께에 묶어 두었던 보따리를 풀었다. 교과서 한 권과 성경책이 툭 떨어졌다. 덕화는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내내 그것들을 숨겨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기꺼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것이다.
집을 떠나온 지 3주 만에 교차로에 이르렀다. 오른쪽 길은 38선 바로 위에 있는 황해도의 도청 소재지 해주로 가는 길이었고, 왼쪽 길은 해주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인 신막으로 연결되는 길었다. 해주가 더 가까웠지만, 자유를 찾아 인천으로 가려면 배를 타야 했다. 또 강을 건널 생각을 하자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하지만 신막은 꽤 먼 거리였다. 어디로 가야 할까? 통이 넓은 바지와 길게 내려오는 잿빛 저고리에 챙이 넓은 닳아빠진 밀짚 모자를 쓰고 지게를 짊어진, 농부로 보이는 한 노인이 경사진 바위 위에 올라서서 우왕좌왕하는 피난민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오늘 밤에 해주로 가서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타야 합니다. 그편이 훨씬 더 나아요. 신막으로 갔다가는 빨갱이들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해주로 가세요."
노인은 평야 사투리로 이렇게 말했다. 모두를 노인의 충고에 따라 해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우리도 그리로 가야겠다."
내가 결단을 내렸다.
"엄마 저기 좀 보세요. 오빠와 같은 반 친구예요."
덕화가 인파 속의 한 얼굴을 가리켰다. 정말 용운이의 친구 대건이었다. 나는 대건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 아이에게로 달려갔다. 먼지와 때를 뒤집어쓰고 있는 데도 대건이는 곧 나를 알아보았다.
"애, 용운이는 어디 있니?"
내가 신이 나서 목청을 높였다.
"몰라요. 지금 서 있는 바로 이곳에서 한 시간 전에 아이들과 헤어졌거든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귀를 아프게 쑤셔 댔다. 내 아들이 불과 한 시간 전에 바로 이곳에 있었다니. 그 애가 외톨이가 된 것은 아닐까? 무서움에 떨어도, 아니 상처를 입어도 자신을 감싸 줄 친구나 가족 한 사람 없이.
"용운이가 어느 길로 갔는데?"
불안해서 잠겨 드는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한 시간 더 앞서 이곳에 오지 못한 내가 몹시 원망스러웠다. 나는 즉시 바위 위에 서 있는 농부에게로 갔다.
"실례합니다, 할아버지. 여기 얼마나 서 계셨어요.?"
내가 물었다.
"하루 종일이오."
노인이 대답했다.
"한 시간 전에 여기 있던 사람들은 어느 길로 갔나요?"
"서둘러 가면 해주에서 만날 수 있을 거요. 거기는 자유의 땅이니까요."
나는 노인에게 고맙다고 말한 다른 아이들에게 해주로 갈 것임을 알렸다. 하지만 건일이가 해주라는 말을 듣자마자 발작을 일으켰다. 아무런 사전 징후도 없이 건일이는 갑자기 중병이 들어 있었다. 이마가 몹시 뜨거웠고, 충혈된 두 눈은 자꾸 뒤로 넘어갔다. 그 애는 너무 힘이 없어 잘 서 있지도 못하고 자꾸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나는 아이의 두 팔과 다리를 미친 듯이 문질러 주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아파하는 거지?"
내가 소리를 질렀다.
"신막, 신막, 신막."
건일이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는 해주로 가야 돼."
내가 아이를 꾸짖었다.
"난 해주로 가기 싫어요. 신막으로 갈 거예요."
"하지만 네 큰형이 해주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난 신막으로 갈 거예요."
아이는 단어 하나하나를 숨을 헐떡이며 내뱉었다.
"해주로 가야 돼. 안 그러면 잡힌다구."
"신막! 난 신막으로 갈 거예요. 엄마, 제발 날 신막으로 데려다주세요."
"넌 어린아이야.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아이를 나무랐다.
"……시시시신막."
아이는 이렇게 속삭인 다음 내 품 안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는 대건이와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야. 신막으로 가면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를 평양까지 데려다 주겠지."
"제가 건일이를 해주까지 업고 갈게요."
대건이가 나섰다.
"너는 먼저 가서 우리 아들을 찾도록 해라. 그리고 안전할 때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좀 전해 다오. 나는 너무 지쳐서 뛸 수가 없으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해주로 가는 대건이를 지켜보았다. 또다시 우리만 뒤에 남고 말았다. 건일이를 업고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남편의 외투단에 꿰매 넣은 금반지를 하나 꺼내 문짝으로 대충 만들 썰매를 샀다. 금덩이를 준다고 해도 잘못된 길로 가려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건일이가 탄 썰매를 직접 끌 수밖에 없었다. 신막이 가까워올수록 용운이의 영혼은 내게서 멀어지는 듯했다.
마을은 개 몇 마리를 제외하고는 인적 하나 찾아볼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버려진 집은 골라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많았다. 나는 욕심 사납게도 가장 좋고 깨끗한 집을 골랐다. 쌀통에는 쌀이 1/4이나 차 있었고, 꽁꽁 얼어붙은 땅에 묻지 않고 남겨 둔 김치도 꽤 많았다. 나는 즉시 불을 피울 생각으로 부엌 한구석에서 나뭇가지와 마른 잎사귀를 한 줌 집어다 하나도 남김없이 조심조심 화덕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쇳조각을 부싯돌에 부딪쳐 불꽃을 낸 다음 집단에 붙였다. 이내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찬장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양념과 재료를 모두 넣고 잔치를 별일 음식을 만들었다.
모두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을 한 공기씩 받았고, 아기에게 먹일 죽도 따로 조금 끓였다. 양에 넘치는 음식을 먹는 것은 여러 주 만에 처음이었다. 움푹 꺼져 들어간 위장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정작 입안에 든 음식은 삼킬 수가 없었다. 위가 놀란 것이었다. 손가락조차 젓가락 쓰는 법을 잃어버린 듯했다. 한 번도 젓가락을 사용한 적이 없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아이들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잘되지 않아서 먹지 않으면 혼을 내주겠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위에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먹어야 한다. 밥알 하나를 입 안에 넣고 굴리면서 천천히 시작해 보렴."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나도 아이들에게 한 충고에 딸 한 번에 적은 양을 씹었다. 그러다가 위가 음식의 온기와 그 만복감을 기억해낸 후에는 밥 한 그릇을 다 비울 수 있었다. 나는 배가 불러오도록 먹은 다음, 또 한 그릇을 먹었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단 한 번도 먹어 본 일이 없었다. 가래떡도, 달콤한 사탕도, 그리고 강냉이도. 배가 가득 차자 잠이 쏟아졌다. 공산주의자들이 언제든, 오늘 저녁이나 한밤중, 아니면 내일 아침에라도 우리를 잡으러 올 것을 알면서도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잠자리에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아이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나자 세상이 덜 비관적으로 보였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태양은 구름에 가려 있었다. 우리는 오전 내내 공산주의자들이 와서 우리를 데려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우리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거리는 트럭도 병사들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조금 더 기다리다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침밥을 먹었다. 건일이도 열이 완전히 내려 잘 먹었다. 건일이는 씻은 듯이 나아있었다. 그 애에게 발작을 일으키며 신막으로 가자고 고집을 부린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다리다 초조해진 나는 아이들을 억지로 일으켜 다시 길을 떠났다. 우리는 태백산맥을 등대 삼아 한적한 빙판길을 따라 내려갔다. 눈 덮인 산맥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것 같았다. 임진강 가까이 다가가자, 유엔군과 남한 병사들이 후퇴하며 남긴 잔해더미가 내키지 않는 듯 우리를 맞아 주었다. 임진강은 서울에서 북쪽으로 48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총 쏘는 소리는커녕 엔진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침묵때문에 오히려 신경이 곤두섰다. 창백한 낯빛의 피난민들이 머리를 어깨에 기댄 채 강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지 머리 위에는 흰 눈이 쌓여 있었다. 또 강을 건널 수는 없어,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강물을 살펴보았다. 또 강을 건널 수는 없어,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강물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얼음이 깨지면서 갑자기 사람의 발자국이 끊긴 그 수중 무덤 주위를 묘비처럼 수놓은 총알 자국을 제외하고는 강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여기서 다들 뭘 기다리고 계시는 거예요?"
내가 소리쳤다.
"저 사람들은 우리가 중공군인 줄 알고 있어요."
누군가 대답했다. 강 건너편에는 확성기를 통해 들려 오는 커다란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후퇴하라! 강을 건너지 마라. 안 그러면 쏘겠다. 퇴각하라!"
저 사람이 지금 제정신인가? 어디로 돌아가란 말인가! 이토록 먼 길을 떠나온 마당에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결말을 받아들이기가 싫어서 화가 끓어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물은 그 무엇도 강을 건너는 나를 막을 수 없을 터였다. 이미 너무 많은 고통과 위험을 겪지 않았는가.
나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앉아있고 싶으면 앉아 계세요 하지만 아이들과 난 강을 건너겠어요. 뒤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으니까요. 등 뒤에 총을 맞느니 차라리 앞에서 맞고 죽는 게 나아요."
나는 용기를 잃고 뒤돌아서는 일이 없도록 남편의 외투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언젠가 돌아가 우리 땅을 되찾으리라는 희망에서 여러 해 동안 고이 간직해왔던 땅문서 두 장을 꺼냈다. 그 문서는 북쪽과의 마지막 연결 고리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 문서를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거래를 입증하는 붉은 인(印)을 어루만진 다음,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얼음에 파인 총알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그 문서가 영원히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와 함께 돌아갈 희망도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나는 용기를 좀 얻어 볼 요량으로 수평선 너머를 살폈다. 그때 언덕 위에서 흐릿한 불빛이 번쩍였다. 실망스럽게도 우리를 직통으로 겨누고 있는 총에 햇살이 반사되어 나온 빛이었다.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강가에 굳은 자세로 섰다. 총이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 내가 천천히 오른발을 얼음판으로 내밀자, 총알이 반사되며 얼음이 깨졌다.
"멈춰라!"
똑같이 건조한 음성이 소리쳤다.
나는 발걸음을 반쯤 옮기다 멈춰 섰다. 두 다리가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나는 순교자가 아니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총을 든 남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기다렸다.
"건너와라!"
할렐루야! 실성한 듯한 피난민들이 벌떡 일어서더니 우리를 앞질러 종종걸음을 쳤다. 소를 달래 함께 강을 건너려는 사람도 있었다. 불행히도 그 소는 물에 빠져 죽고 말았지만. 소가 한순간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는 모습이 보이더니, 다음에 보이는 것이라곤 그 어마어마한 몸무게가 버티고 서 있던 곳에 난 커다란 구멍뿐이었다.
그 뒤를 따라 많은 이들이 마지막 남은 손수레와 짐을 버렸다. 그동안 굶어 죽을 정도로 먹지 못해 정상적인 몸무게보다 가벼워진 것이 처음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내 두 팔과 다리는 젖은 종이로 감싼 막대기처럼 바싹 말라붙어있었다. 발밑으로는 조금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강물이 얼음에 부딪히며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발, 한발, 미끄러지고. 나는 머리 털끝만큼이라도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밝은 생각만으로 머리를 가득 채웠다. 한발, 한발, 미끄러지고, 또 한발, 한발 미끄러지고‥‥‥ 드디어 해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대지를 끌어안았다. 가치 있는 일은 오직 그것뿐이었고,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므로. 나에게 그것은 자유 이상이었고, 헤어진 우리 가족이 다시 합침을 의미했다.
"여보, 우리는 해냈어요. 용운아, 엄마 여기 있다."
나는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물러나던 그 날처럼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임진강을 건넌 지 두 주일이 채 안 된 1951년 1월 4일. 유엔군과 남한군은 38선 이남으로 후퇴했고, 마침내 그곳에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 유명하고도 비극적인 날은 한국인들에게 1.4 후퇴로 기억되고 있다. 마지막 피난민들의 남한으로의 진입이 허용되었다. 1월 4일 이후로는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차단당한 이들이 안타까웠다. 영혼을 감금당하고 희망을 빼앗긴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들이.
우리는 사나흘을 더 걸어 서울에 도착했다. 피난을 떠난 지 거의 4주 만인 1950년 성탄절 이브였다. 거대한 도시 서울은 기대와는 달리 엉망진창으로 폐허가 되어 있는 데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나버린 후였고, 아직 남아 있는 이들에게는 남한 경찰의 총부리가 겨누어져 있었다.
나는 물어물어 서울의 남쪽 끝에 있는 영등포의 시누이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우리를 평양에 두고 떠난 시누이의 가족들이 이사한 곳이었다. 아들과 남편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맞아 주지 않았다. 집은 활짝 열린 채 버려져 있었고, 마루 한가운데에는 깁다 만 낡은 양말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부자리는 말끔히 개어져 있었다. 먼지가 잔뜩 낀 외투만 빼놓으면 곧 사람들이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중공군이 서울을 향해 곧장 내려오는 바람에 갑자기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 게 틀림없었다. 그것은 우리 또한 가능한 한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실망감을 억누르며 석유램프에 불을 붙였다. 부드러운 불꽃이 방안을 따뜻하게 밝혀 주었다. 나는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먹을 것을 찾아 헛간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모든 방문과 장롱문을 열어젖히고 비밀 창고를 찾았다. 하지만 나온 것이라곤 곰팡이 난 약간의 마늘과 말라붙은 붉은 고추, 그리고 멸치 서너 마리뿐이었다.
"배고파요"
건일이가 칭얼거렸다.
"나두요"
건삼이도 끼어들었다.
"알고 있어".
내가 아이들의 머리라도 물어뜯을 듯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아이들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만큼 지쳐 있었다.
스스로에게 화가 난 나는 들끓는 마음을 식혀 보려고 밖으로 나왔다. 모든 것이 처연할 만큼 아름다웠다. 비스듬하게 경사진 지붕을 뒤덮은 눈, 나뭇잎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들, 그리고 두길이나 되는 탑처럼 엎어져 있는 김치 항아리 위를 덮고 있는 눈. 저 커다란 항아리들‥‥‥. 바로 그곳이었다! 시누이가 무언가를 잘 숨겨 두는 곳. 나는 온몸의 무게를 실어 항아리를 들어 올렸다. 거대한 탑 같은 항아리가 옆으로 기울더니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한가운데 있는 항아리의 밑바닥에 시든 감자 주머니와 쌀자루가 숨겨져 있었다.
"감자다! 그리고 쌀이다!"
내가 소리를 질러댔다. 아이들은 내가 사탕과 장난감으로 가득한 창고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오늘 밤에는 잔치를 벌이자꾸나."
내가 신이 나서 말했다.
큰솥 위에 허리를 굽힌 채 김이 피어오르는 감자를 꺼내 질그릇으로 옮기자니 온몸의 피가 따스해져 왔다. 쌀은 다음날을 위해 아껴 두기로 했다. 감자는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축하하기에 안성맞춤인 음식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줄 선물이 없었다. 금반지가 생각난 나는 한 아이의 백일 기념 반지를 꺼냈다. 이러한 판국에 누구의 반지를 파는지 알아 둘 필요가 없었음으로 반지에 새겨져 있는 이름도 읽지 않았다.
나는 그 반지를 앞가슴 사이에 숨겨 가지고 살짝 큰길로 빠져나왔다. 얼어붙은 대지 이곳저곳에 웅크리고 앉은 거지들이 때 낀 손을 내밀며 먹다 남은 음식이나 동전을 구걸하고 있었다. 각양각색이었다. 두 다리가 없어 의족을 달고 있는 남자들, 어머니 없는 아이들, 그리고 굶어 죽어 가는 아기를 등에 업고 있는 어머니들.
"아줌마, 담배? 옷? 아니면 실은 어때요?"
한 여인이 제안했다. 여자는 똑같은 우리나라 말을 했지만, 억양은 어쩐지 이상하게 들렷다. 말투가 너무 느렸다.
"아줌마가 뭘 원하는지 알겠다. 떡이죠? 며칠밖에 안 된 거예요. 진짜라니까요."
검게 갈라진 손톱을 바삐 놀리며 여자가 말했다.
"얼만데요?"
내가 떡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아주 맛있는 떡이에요. 안에 단팥이 잔뜩 들어있다구요."
보따리 안에 손을 넣어 떡을 싼 누런 신문지를 만지작거리며 여자가 자랑을 늘어놓았다.
"얼마냐니까요?"
내가 다시 물었다.
"아줌마한테는 아주 싸게 드릴게요. 세 개에 조그만 금이나 은 한 조각이면 돼요."
여자가 눈을 찡끗해 보였다.
"너무하시네요. 지금 전쟁 중이라는 걸 모르시나 봐요?"
"그럼, 아무 데나 가서 한번 알아보세요. 모두들 비슷할 테니까요."
여자가 재빨리 보따리를 잡아당겼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진 탓에 가격 폭등이 일어나 일대 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딱딱한 떡 세 조각이 쌀자루 열 개와 맞먹는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언니, 남은 잔돈 조금 있으세요? 아이들한테 뭘 좀 먹여야 하거든요."
젊은 엄마가 울부짖었다. 옆에는 지쳐보이는 사내아이 세 명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있었다. 절을 하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린 것이었다. 반면 그 여자의 딸아이는 앞으로 걸어 나와 앙증맞게 오므린 두 손을 내밀었다.
"많이 달라는 게 아닙니다. 여유가 되는 만큼만 주세요."
젊은 엄마가 빈손을 내민 채 공허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쉬지 않고 걸었다. 거리 끝에 이르자, 한 여인과 아기가 눈에 띄었다. 얼굴의 반도 넘는 부위에 네이팜 폭탄으로 빨갛게 화상을 입은 여자였다. 입술과 코만 멀쩡했다. 그 여자가 가판을 벌여 놓은 손수레를 살펴보려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기는 시력을 잃은 두 눈을 빤히 뜨고 있었다.
‘아줌마네 아기가‥‥‥.’
나는 이렇게 말하려다 도로 삼켜 버렸다. 여자는 손수레에 앉아 아기를 어르며 귀에 익은 자장ㄱ라를 조용히 불러 주고 있었다. 나는 전쟁을 얼마나 혐오했던가! 나에게는 이 가엾은 젊은 여인을 도울 힘도, 아니 나 자신을 추스를 힘도 없었다.
나는 딱딱해진 조그만 떡 네 조각을 치마에 싼 다음, 그곳에 반지를 떨어뜨려 주었다. 그리고는 줄곧 집으로 달음박질을 쳤다. 이 바깥세상에서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도착해 보니 덕화가 아이들을 자리에 눕히고 있었다.
"내일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란다. 그리고 이것은 이 중요한 날을 기리기 위한 특별 선물이다."
내가 말했다.
아이들은 정신없이 떡을 먹었다. 건삼이는 턱에 단팥을 잔뜩 묻힌 채 온통 흘려 가며 먹었다.
나는 단팥의 단물이 묻은 손가락을 입에 넣고 그 달콤한 맛을 음미했다. 그리고는 아기 것으로 남겨 둔 제일 작은 떡을 잘게 씹어 내 입술을 아기 입술에 갖다 댄 다음, 아기의 입 속으로 그 떡을 밀어 넣어 주었다.
아기는 이빨 하나 없는 윗잇몸과 아랫잇몸을 오물거렸다. 모두가 떡을 먹어야 할 소중한 내 아이들이었다. 아기가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아직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가는 길고 긴 기차여행
나는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소문을 수소문하러 다녔다. 그 결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남한 유일의 항구도시인 부산에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까지 모인, 거대한 피난민촌이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곳의 수많은 사람들 틈에 남편과 용운이가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1백억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두 사람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었다. 하지만 그곳까지 어떻게 가야하나? 나는 속을 끓였다. 천 리도 넘는 길을 더 걸어가느니 차라리 양팔을 펄럭이며 날아가는 편이 더 현실적으로 생각될 지경이었다. 그때 아직 기차가 다닌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아이들과 손에 손을 잡고, 머리 위에는 새로 가득 채운 쌀자루를 인 채 영등포역으로 갔다. 건장한 남자들과 어린 소년들이 지나가는 기차에 뛰어오르기 위해 두 줄로 늘어선 철로를 따라 모여 있었다. 우리가 움직이는 기차를 타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을 터였다. 저 아래쪽의 지정된 승강장에서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딱딱하게 굳은 기운 없는 얼굴로 기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여기저기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두세 시간 후에 가까운 거리에서 기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엔진에서 연기와 김이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광경이 모인 사람들의 뜨거운 생명력에 불을 붙여 주는 듯했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정신없이 내달렸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기적소리가 커지고 기차가 더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작심한 피난민 행렬은 위험할 만큼 철길 가까이 다가갔다. 시커먼 철 괴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추어 서는 사이에 외딴 농촌에서 온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얼굴을 가렸다. 불꽃이 일고, 거대한 흰 연기가 우리를 덮쳤다. 전에도 수없이 이 괴물의 텅 빈 뱃속으로 올라탄 적이 있는 나는 정면을 응시한 채 문이 열린 곳을 찾았다.
기차에는 빈틈이라곤 없었다. 마치 기차가 인간의 모습이 그려진 외투를 입은 것처럼, 기차 전체를 사람들이 길게 에워싸고 있었다. 기차의 양옆과 앞뒤, 그리고 지붕에 사람들이 매달렸다. 무척 위험해 보였다. 급정거만 한 번 하면 모두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한 혼란의 와중에서도 우리도 사람들을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두 팔과 어깨, 그리고 엉덩이를 이용해 실성한 듯한 사람들 사이로 길을 냈다. 그리고 아이들 하나하나를 열려져 있는 문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는 사이에 피난민들이 내 머리를 발판 삼아 기차 옆을 타고 지붕 위로 기어올랐다. 나는 손가락 몇 개와 군화 속의 발가락 몇 개를 다친 다음에야 맨 마지막으로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내려!"
"아야!"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안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뒤틀린 나무로 고정시켜 놓은, 가축들이 이끄는 수레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널빤지가 떨어져 생긴 틈으로는 연기가 스며들어왔고, 벽과 바닥에서는 가축들과 비료 냄새가 났다.
"여기엔 당신들이 있을 데가 없다니까. 내리라구!"
안에 있던 사람들이 미친개의 무리를 보듯 우리를 노려보았다.
"무서워요, 엄마."
"조용히 해."
내가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나는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숨 쉴 공기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아이들과 전 내리겠어요. 하지만 먼저 여러분들 중 한 분이 자신이 살 가능성도 포기하고 이 기차에서 뛰어내려 보세요."
기다렸지만, 예상대로 자신의 자리를 선뜻 내놓을 만큼 정신이 나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기차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아이들을 앉힐 자리를 찾았다. 등받이가 반듯하게 달려 있는 딱딱한 의자도 지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사치일 터였다. 따라서 나는 양해를 구하는 말이나 인사말 한마디 없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옆 사람들이 신음소리를 내며 욕을 해댔다. 내 두 팔과 다리는 몸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최소한 기차에서 떨어질 염려는 없었다.
긴 기적 소리를 울리고 고무 없는 바퀴를 움직이며, 기차가 다시 연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기차는 노인처럼 숨을 헐떡이고 쌕쌕거렸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떠난 이후로 끔찍할 정도로 손상되어 있었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비밀을 혼자 간직하고 있기로 했다.
우리는 모두 숨을 죽이고 기차가 앞으로 나가기를 열심히 빌었다.
"가자, 가. 이 고철 덩어리 같으니."
누군가 소리쳤다.
"기차를 화나게 하지 말아요."
어느 여자가 그 사람을 나무랐다.
나도 "가자, 가자구" 소리쳤다. 그러자 마침내 움직였다! 기차가 앞으로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느릿느릿 내뱉는 칙칙폭폭 소리를 따라 바로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느릿느릿 내뱉는 칙칙폭폭 소리를 따라 바닥의 틈새로 먼지와 바람이 들어왔다. 경치를 구경하는 여행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속도였지만, 우리에게는 너무 느리게만 느껴졌다.
첫날 이동한 거리는 불과 8, 9킬로미터에 지나지 않았고 휴식 시간도 제멋대로여서 어떨 때는 두 다리를 펼 시간조차 없었다. 게다가 언제 다시 떠날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풀숲으로 달려 나갔다가 돌아와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여자들은 늘 안도감과 남의 이목을 꺼리는 듯한 복잡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방금 어떤 용변을 보았는지를 다른 이들이 알고 있는 데서 오는 난처함 때문이었다. 남자와 어린아이들은 훨씬 손쉽게 일을 보았다. 기차 뒤로 가서 두 다리 사이로 가늘고 노란 물줄기를 뿜어 내며 소변을 보는 것으로 끝이었다.
먹을 것을 만들려면 시간이 많이 걸렸다. 우선 눈 밑에 덮여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긁어모아 자그마한 불을 피워야 했다. 우리에게 먹을 것이라곤 쌀자루에 든 생쌀밖에 없었으므로, 기차가 정지하는 매 번의 휴식 시간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말린 생선, 절인 야채, 김밥 꾸러미를 비롯해서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한낮이 지나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파왔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기차는 멈춰 서지 않고 느릿느릿 앞으로만 나아가기만 했다. 그러더니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드디어 멈추어 섰다.
나는 기차가 완전히 정지하기도 전에 쌀자루를 들고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눈 속에 구덩이를 파고 치만 안감을 찢어 불을 붙인 다음, 젖은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다. 가지고 온 작은 냄비 속에서 눈이 녹아가고 있었다. 냄비에 쌀을 막 부으려고 할 때 기차의 출발을 알리는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무 놀라 움찔하는 바람에 쌀을 바닥에 쏟고 말았다. 실망스럽게도 거의 전부였다. 나는 빈 것이나 다름없는 쌀자루와 텅빈 냄비를 들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
"기다려! 서라니까!"
한 노인이 외쳤다. 풀숲에서 뛰어나온 그 노인은 한 손으로는 바지춤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지팡이를 허공에 휘두르며 기차를 따라 절룩거리며 오고 있었다.
"멈춰! 제발 멈추라니까!"
노인이 사정했지만, 기차에 귀가 달려 있을 리 없었다. 노인은 그처럼 늦은 나이에는 상당히 무리인 먼 거리를 감히 뛰어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표출된 놀라운 용기와 광기가 나이의 한계를 극복해 냈다. 노인은 몸의 반을 기차 안으로 밀어 넣고 나머지 반은 바닥에 끌며 기차에 매달리는 데 성공했다. 노인은 바지가 발목에 걸리며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달랑거리는 생식기가 드러났다.
"할아버지네 칸으로 돌아가란 말이에요!"
문가에 있던 학생이 고함을 쳤다.
나는 학생이 그 노인의 손가락을 풀어 죽음의 나락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동안 잠자코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들을 기차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 뛰어다니며 놀고 싶어 하는 여섯 살과 아홉 살 난 사내아이를 계속 한 곳에 묶어 두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아이들은 조그만 바늘 수백 개가 두 다리를 찔러 댄다며 쉴새 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힘이 들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엉덩이는 녹아 바닥에 들러붙은 것 같았고, 두 무릎을 가슴에 붙인 채 하도 오래 앉아있다 보니 이제 일어서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기차에 맞춰 약해진 두 다리로 균형을 잡는 것도 무척 힘겨운 일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처리했다. 밥을 하던 냄비는 요강이 되었고 조심해서 과녁을 맞추지 않으면 모두 가 악취를 맡아야 했다. 용변을 본 냄비는 창문가에 앉은 사람에게 전달되었고, 그 삶이 차창 너머로 냄비를 비웠다. 철길을 따라 늘어선 식물들에게 비료를 준 셈이었다.
사내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고 오줌을 쌌지만, 덕화나 나, 그리고 다른 부인들과 젊은 처녀들에게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차 안을 가득 메운 남자들 앞에 웅크리고 앉을 때는 허리 주위를 담요로 가리거나, 담요가 없을 때는 치마나 옷을 넓게 펼쳤다. 살찐 사람의 몸집으로 가릴 때도 있었다. 남편의 양모 외투가 있었지만, 그 옷에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었으므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덕화는 사흘 동안 오줌을 참았다. 몸 안에 오줌독이 퍼져 가고 있는데도 고집스럽게 냄비를 사용하지 않았다.
"덕화야, 남들 생각은 해서 뭐하니. 그 사람들도 다들 일을 보는걸."
내가 덕화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엄마는 모르세요."
"소변을 너무 참으면 중병에 걸린다는 건 안다."
"싫어요. 너무 창피하단 말이에요."
"내가 치마로 가려 줄게. 아무도 못 보게 말이야."
"오줌이 쇠로 된 냄비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우지 못해."
나는 엄하게 나무란 다음 덕화를 냄비 위에 주저앉혔다. 덕화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랫동안 오줌을 싸지 않고 버틸수록 이 사람들 앞에 더 오래 앉아있어야 한다는 걸 명심해."
딸아이가 자신을 죽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덕화는 고집스럽게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나는 덕화를 단단히 붙들어 앉혔다. 마침내 수축해 있던 근육이 지쳐 소변은 내보내고 말았다. 성장기의 소녀에게 필요한 영양분과 수분을 제공해 주지 못하는 것은 문제였지만, 그래도 순간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닷새째 되는 날에는 아이들의 몸에 더 이상 버릴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생쌀이 담긴 자루를 볼 때마다 아이들을 먹이지 못하는 회한이 끊임없이 되살아났다. 쌀자루의 쓰임새는 엉덩이를 받치는 방석 노릇뿐이었다. 쌀자루를 보기만 해도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힘만 있다면 갈기갈기 찢어 버렸을 만큼.
배고픔은 점점 심해졌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한 번에 서너 알씩 허연 생쌀을 씹으라고 시켰다. 생쌀은 마른 밀가루 반죽 같은 맛이 나는 데다, 위에서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하루 종일 생쌀을 씹으며 남들이 먹을 것에 대해 끝도 없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같은 희망에 찬 대화는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나았다.
내 몸은 나날이 약해졌고, 급기야 반의식 상태의 경계를 넘나들게 되었다. 기운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아기의 입이 거머리처럼 젖꼭지에 달라붙어 필사적으로 젖을 빨았다.
엿새째 되는 날에는 고개를 들기도 힘에 부쳤고, 밝은 불빛만 가물거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배도 고프지 않았다. 죽음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그러한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의식을 잃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엄마! 엄마. 어디 아프세요?"
덕화가 내 위로 몸을 구부린 채 제 손바닥으로 내 두 뺨을 문질러 댔다.
"나 죽는다."
내가 겨우 웅얼거리며 말했다.
"안 돼요. 엄마는 괜찮으세요. 조금 쉬고 나면 좋아지실 거예요."
덕화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내 말 잘 들어라, 덕화야. 네 남동생 둘과 여동생을 부산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해다오. 절대로 동생들과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덕화의 다짐을 받고 난 후에야 옆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당황한 덕화는 내 엄중한 명령에 따르지 않고 먹을 것을 찾으러 기차를 빠져나갔다. 부산에서 북쪽으로 한참 위쪽에 있는 김천역은 상인들과 행상들, 그리고 손쉬운 목표물을 노리는 도둑들로 들끓었다. 덕화에게는 이들이 훔쳐 갈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김밥이오! 김밥!"
덕화는 매처럼 그 냄새에 이끌렸다. 어느 여인의 바구니에 길고 가는 김밥 여섯 줄이 담겨 있는 것을 본 덕화는 눈이 반짝였다.
"아줌마 부탁이에요. 저한테 하나만 주시면 안 돼요?"
덕화가 여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저고리 벗겨진다. 이 작은 기생충 같으니!"
여인이 고함을 치며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덕화가 여인을 따라 달렸다.
"제발요. 우리 엄마가 죽어요."
덕화가 그 여인의 소매를 다시 붙잡고 늘어졌다.
"저리 가. 네가 손님들 다 쫓아내고 있잖아!"
여인이 덕화를 밀어내며 말했다.
"작은 김밥 하나만요. 제일 작은 걸루요."
"이 꼬맹이가."
화가 난 여인이 한 손을 치켜올려 덕화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래도 덕화는 여전히 여인의 소매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제발 하나만요. 부탁이에요. 엄마가 돌아가시면 두 남동생과 어린 여동생도 죽게 돼요."
측은함의 발로였는지, 아니면 너무 화가 나서 그랬는지 여인은 덕화에게 김밥 한 줄을 건넨 다음 사라져 버렸다. 나는 잠시 후에 깨어났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줄만 알았다. 두 눈이 비열한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손바닥에 김밥 한 줄이 쥐어져 있는 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감촉이 느껴졌다‥‥‥. 현실이었다!
"이제 괜찮아지실 거예요.
덕화가 나를 안심시켰다.
"우리도 배고프단 말이에요."
두 아들 녀석의 파르스름하고 작은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김밥을 아이들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덕화가 아이들이 내민 손을 때렸다.
"한입이라도 먹으면 또 맞을 줄 알아. 이 김밥은 엄마가 드셔야 돼. 그래야 돌아가시지 않지. 너희들이 엄마 걸 먹으면 우리 모두가 죽게 돼."
덕화가 동생들을 나무란 다음 등을 돌리고 앉게 했다.
몸이 축 늘어져서 일어나 앉을 수가 없었다. 나는 김밥을 탐욕스럽게 움켜쥐고 잠시 뿌듯한 마음으로 살펴보았다. 내 손가락 두 개 굵기도 채 안 되는 작은 김밥이었고, 말랑말랑한 검은 표면에는 아직 덕화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나는 그 김밥을 삼킬 때마다 이렇게 나 자신을 타일렀다.
‘내가 저희들을 위해서 먹는다는 걸 알아줄거야.’
그것은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 앞에서 내가 어쩔 수 없이 보인 가장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김밥을 바라보던 아이들의 움푹 꺼진 두 눈이 아직도 내 마음속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피난지 부산
거지 소녀가 된 덕화는 이역 저역에서 구걸을 했다. 나는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겨울 추위는 견딜 만해졌다.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곳을 찾은 것만 아니라면, 바다 옆의 항구도시 부산은 아주 좋은 곳이었으리라.
놀랍게도 부산은 한반도의 전 지역이 겪고 있는 파괴의 재난에서 벗어나 있었고, 이제 피난민들과 군부대의 고향이 되어 있었다 한반도 전역에서 온 북한 사람, 남한 사람, 그리고 피난민들, 거지들, 매춘부들, 고아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들은 모든 가옥과 오두막, 그리고 안식처가 될 만한 곳으로 밀려들었다. 폐허의 잔해를 대나무 바구니처럼 얼기설기 엮어 만든 구조물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플라스틱과 나뭇가지, 그리고 판지 조각을 비롯한 다른 쓰레기들을 한데 엮어 만든 집이었다.
우리는 이 참혹한 범죄에 희생당한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으로, 1951년 1월 초에 부산에 도착했다. 우리가 내린 곳은 남포동역이었다. 모두들 짐보따리를 움켜 쥐고 다른 사람들의 몸에 걸려 넘어지며 출입구 쪽으로 달렸다.
"어서 가자. 애들아. 드디어 부산에 도착했구나."
내가 기운 없이 말했다.
일어서려고 했지만, 두 다리가 아래로 꺼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덕화와 두 아들이 내 팔을 잡고 힘을 합쳐 나를 일으켜 세웠다. 덕화가 내 등에 아기를 업히고 포대기를 단단히 둘러 줄때까지 나는 힘없이 서 있기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맙다는 표정을 짓는 것뿐이었다.
"어서 가요, 엄마. 아버지가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덕화가 말했다.
"그래, 아버지가 계시지."
내가 속삭이듯 말했다. 목구멍이 말라붙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편. 남편을 본 지 얼마나 오래됐던가.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의 모습조차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래. 아버지를 찾아야지. 용운이도 찾고 말이야. 두 사람이 모든 걸 다 해결해 줄 거야."
기차에서 내려서는 순간, 우리는 정신없이 달리는 사람들의 무리에 휩쓸렸다. 뼈가 부서져 나가도록 심하게 몸을 압박당한 채로 이들을 따라 뛰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발바닥을 거의 땅에 대지도 않은 채 달리고 또 달렸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한데 뒤엉킨 우리는 여러 거리를 지나 거대한 천막촌 앞에 이르렀다. 집채만 한 천막, 아니 더 큰 천막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열기구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곳에서 우리는 갑자기 풀려났다.
저 멀리에서 교회의 첨탑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 첨탑은 가난한 이 도시의 하늘 높이 솟아올라 희망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마음이 끌렸다. 그곳은 하나님의 전당이었고, 나는 그분에게 가까이 다가가 치유의 힘으로 넘치는 그분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아이들과 나는 판자로 된 오두막이 길게 늘어선 곳을 지나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갔다. 대부분이 남자들인 사람들 여럿이 모여 서로의 몸에 올라탄 채, 무어라 써진 수도 없이 많은 전단을 힘겹게 읽고 있었다. 게시물과 전단이 교회의 외벽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마치 분단된 나라를 그린 벽화를 보는 듯했다. 이들은 살아 있을지 모를 헤어진 가족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이름과 이름들, 그리고 전단과 전단을 샅샅이 훑어 나갔다. 이곳 창진교회에서는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한데 모여 죽은 자와 산 자, 그리고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를 올렸다.
내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남자들이 일제히 갈구하는 듯한 눈빛으로 우리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 나갔다. 아이들이 내 더러운 치마 속 깊이 얼굴을 파묻었다. 나 역시 이 메마르고 천박한 얼굴들을 피해 달아나고 싶었다.
"용운이 엄마! 용운이 엄마!"
먼 곳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나를 불렀다. 다른 세계에서 들려 오는 소리 같았다.
키 작은 여인이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나를 교회로 인도했던 꿈속에 여인, 권사님이었다. 권사님은 이제 더 이상 말끔한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목 부근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권사님……권사님……정말 권사님이세요?"
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권사님이 우리의 몰골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나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용운이 엄마 이제는 안전해요."
"네, 그레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도 따라 했다. 하지만 내 신경은 권사님에게도, 아는 사람을 만난 반가움에도 쏠려 있지 않았다. 수염도 깍지 못한 채 절망에 빠져 있는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저 사람들한테 신경 쓸 것 없어요. 용운이 엄마와 아이들을 보니 잃어버린 자기들 처자식 생각이 나서 저러는 거예요."
"그런데 왜 계속해서 처다보는 거죠."
"열심히 바라보면서 간절히 빌면 용운이 엄마와 아이들이 기적처럼 자기들 처자식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 하나 봐요. 이 남자들과 젊은 청년들은 거의가 다 어머니와 아내와 아이들에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혼자 길을 떠나온 사람들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어 버렸잖아요. 이제 이념의 장벽이 으르렁대는 양쪽을 갈라놓고 있으니 말이에요."
"어떤 길로 왔나요?"
한 남자가 시커먼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
"어린 세 딸을 데리고 성진에서 온 여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아들 둘을 데리고 웅기에서 온 여자는요?"
"포항?"
"울산?"
"흥남?"
모두가 한꺼번에 외쳤다.
나도 똑같이 절박한 심정으로 남편과 아들의 이름을 외쳤다.
"제 남편 이득필 씨를 보신 분 있나요?"
내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평상시의 절도 있고 온화한 음성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음성, 아드레날린이 묻어 나는 남자 같은 낮은 목소리였다.
그때 홍해가 갈라지듯 인파가 갈라지며 그가 나타났다. 시선이 가 닿는 순간, 나는 그 사람을 알아보았다. 아니 잊어버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최면술에 걸린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감히 눈을 깜박일 수 없었다. 눈을 뜨면 내가 다시 그 지옥 같은 기차에 타고 있을까 두려웠다.
마침내 그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마치 물 위를 떠오는 것 같았다. 심장은 미친 듯 고동쳤고, 머리는 빙빙 돌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는 서로의 몸을 힘껏 껴안았다. 아이들이 가운데 끼었지만 아이들도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가 자신들의 온몸에 짜디짠 입맞춤을 퍼부어 주었으므로. 결혼한 이후 처음으로 나는 남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그저 안기고, 어루만지고, 위로받고 싶을 뿐이었다.
"여보, 여보, 여보!"
내가 걷잡을 수 없이 흐느껴 울었다.
"여보, 정말 당신이구려. 이렇게 당신을 만질 수 있다니."
남편도 흐느끼며 꿈이 아님을 확인하려는 듯 내 등과 머리를 두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럼요. 정말 저예요."
"당신과 저 어린것들을 영원히 잃어버리고 마는 줄 알았는데."
"쉬, 제가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게 놔두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
내가 두 손으로 남편의 얼굴을 감싸 쥐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순간 시간이 번개같이 흘렀다. 1년, 2년, 3년, 아니 10년은 지나가 버린 듯했다. 남편은 더 이상 곱고 앳된 얼굴이 아니었다. 이렇게 늙어 버리다니! 입술은 쭈글쭈글했고, 눈은 움푹 파여 있었으며, 살은 해골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남편의 온몸에 극단적인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집을 떠날 때 입었던 바로 그 농부 차림이었다. 언뜻 보아서는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나는 남편이 떠나던 날의 모든 것을 아주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무리 더렵혀져 있어도 나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러고 나니 내 얼굴에 생각이 미쳤다. 남편이 거울처럼 내 모습을 비춰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나는 내 두 손을 살펴보았다.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메마른 피부밑으로 뼈가 불거져 나와 있었다. 나는 추한 얼굴을 감추려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남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귀에 대고 나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속삭였다.
"한때 순진한 청년이었을 때는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했었지. 당신도 잘 알다시피 그걸 찾아다녔어. 하지만 공허함뿐 아무것도 남는 게 없더군. 이제 성숙한 한 남자가 되고 나서야 당신과 아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내 인생이 충만해진다는 걸 깨달았구려."
사실 그동안 동안의 남편은 원숙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절대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전쟁이 그를 성숙하게 해준 셈이었다. 나는 예전 그 어느 때보다 더 남편을 사랑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아들과 함께 살면서 살도 찌고 나이도 들고 했으면 좋겠구려."
남편의 얼굴이 환한 빛을 발했고 비로소 아이들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이들의 높다란 웃음소리는 총소리에 지친 내 귀에 음악처럼 들렸다.
"그런데 우리 용운이는 어디 있지, 여보!"
내가 무엇을 가리고 서 있기라도 한 듯 남편이 목을 길게 빼고 내 주변을 살폈다.
남편의 물음을 따라 하는 내 혀가 순식간에 말라붙었다.
"우리 아이는 어디 있죠?"
그 짧은 순간에 여러 해 동안의 긴장과 극도의 피로감이 증기처럼 사라졌고, 몸을 담그고 있는 동안 그토록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발가락 사이에서도 때가 불어나는 듯했다. 나는 때를 하나도 남김없이 벗겨 낸 다음에야 물에서 나왔다.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뒤엉킨 머리를 빗어 보려고 했지만, 빗살 두 개를 부러트려 동생의 마음만 상하게 하고 말았다.
불구인 동생이 남자 바지와 상의를 건네주었다. 새 것 같은 감촉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남편이 죽은 뒤에도 소중히 간직해오고 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옷을 입자 청결해진 피부에 와 닿는 감촉이 무척 상쾌했다.
나는 잠들어 있는 남편과 아이들을 조심스럽게 지나, 뜬눈으로 나를 기다리는 문 쪽의 동생들에게로 갔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속삭임을 주고받으며 밤을 지샜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 털어놓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우리는 밤새 그동안 잃은 것과 가슴 아팟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울고 이야기하고 또 울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날 밤 다른 친정 식구들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친정아버지와 오빠가 세상을 떠난 후에 조카가 친정어머니와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안전하게 예천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했다.
동틀 무렵이 다 되어서야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가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커다란 이불을 함께 덮은 채. 한 지붕 아래서. 우리의 지붕 아래서.
불구 동생의 찢어진 가슴
그날 밤 나는 불구 동생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동생의 동화 같은 결혼 생활은 겨우 4년이라는 짧은 세월에 갑자기 막을 내리고 말았다. 동생이 둘째를 임신하고 있을 때 그 온순한 남편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몸져누운 것이다.
친정아버지는 사위의 병이 태아에게 해를 입히는 악령을 불러들여 불구나 벙어리가 태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동생을 친정으로 불러들였다. 그 애는 남편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친정으로 거처를 옮겼고, 대신 친정아버지가 사위를 돌봐 주었다.
동생은 목이 쉬도록 친정아버지에게 사정했지만 남편을 만날 수 없었고, 친정을 몰래 빠져나가려고도 해보았지만 무거운 몸으로는 여의치 않았다.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가는 남편에 대해 친정아버지가 보내주는 전갈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의사도 한의사도 동생의 남편이 식물처럼 꼼작 못하고 자리에 누워 자기 이름도 기억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사내아이가 태어나기 2주일 전에, 동생의 남편은 자신의 분신이 태어난 사실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동생은 남편에게 작별을 고할 수도 없었다. 아기가 백일을 무사히 넘기고, 죽은 자가 땅속 깊이 묻혀 무덤이 높이 쌓아 올려지기 전까지는.
동생에게는 남편을 잃은 한없는 슬픔을 함께 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동생은 슬픔을 마음속에 꼭꼭 담아 두었고, 그러자 속으로 흐르는 눈물이 그 애의 영혼을 갉아 내렸다.
동생의 말투는 칼날보다 더 날카로워졌고, 아무도 그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똥’이라고 말하건 ‘장미’라고 말하건, 동생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모두 같은 냄새를 풍기는 듯했다. 그리고 내면의 슬픔이 점차 동생의 얼굴을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동생은 늘 찌푸린 얼굴을 하고 살았다.
동생네 집에 닥친 불길한 전조가 손자의 삶까지 앗아가 버릴까 겁이 난 친정어머니는 불구인 동생에게 계속 친정에서 함께 살자고 애원했다. 아버지는 또 다른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즉, 동생이 ‘보쌈을 당할까’ 봐 염려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따금씩 과부들이 농부의 등에 업혀 납치되는 끔찍한 이야기를 듣곤 했었다. 과부들은 아내를 맞아들일 여유가 없는 사내들의 손쉬운 표적이었다. 일단 몸을 망친 과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너무 치욕스러워서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불구인 동생은 부모님의 염려를 무시하고 빈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그 낡고 녹슨 자전거를 타고 세상을 구경할 수 없으라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새기면서 혼자 살아갔다. 그 애는 두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보내겠다던 남편의 꿈을 이룰 생각으로 혼자 남편의 그릇 가게를 다시 열기로 했다. 남편 자신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지만, 아이들만큼은 공부를 시키고 싶어 했다.
얼마간 동생은 혼자 힘으로 가게를 운영하며 두 아이를 키웠다. 친정어머니가 동생에게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른 가족들과 함께 예천으로 가자고 했지만, 동생은 그 가게를 포기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버텼다. 우리를 해방시켜 준 소련군들이 여염집을 습격해 약탈하고, 손목시계를 빼앗아 차고, 여자들을 겁탈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얼마 안 돼 전쟁이 터지면서 동생의 그릇 가게는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한 차례의 폭발로 모든 것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앗던 동생은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 높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자가 된 겄이다. 하지만 동생은 발 없는 고리대금업자였다. 고객들은 동생이 쫓아올 수 없을 것이라 자신하며 남쪽으로 달아났다. 동생은 금세 사업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실패에 무릎을 꿇지 않고 이번에는 꽈배기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의 꽈배기는 보통 길다랗게 꼬인 모양의 빵 같은 것을 돼지기름에 튀긴 후 설탕에 버무린 것이었다. 동생은 그 대신 구멍이 뚫린 한국 최초의 도넛 모양을 만들었다. 그 애는 불구로 태어나는 바람에 음식을 만드는 혹독한 수업을 거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애에게 있어 밀가루 한 줌은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B-29기만큼이나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하루하루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로 끌려갔으므로, 동생은 꽈배기 만드는 일을 포기했다. 그리고 십 대인 딸의 안전을 위해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 긴 여정에 오르기 전에 동생은 친정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했다. 즉, 열다섯 살 난 딸에게 남편을 사준 것이었다.
동생은 미래의 사위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하면 모아 두었던 돈을 모두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청년은 곧 동생의 딸아이에게 빠져 결혼에 동의했다 그 거래에 사랑스러운 신부는 물론 어린 처남과 장모도 함께 예천으로 데리고 가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 채.
청년은 돈을 상속받자마자 그 돈으로 장모를 등에 지고 다닐 지게를 샀다. 하지만 불구인 동생은 딸의 안전이 여전히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사위에게 아내를 데리고 부산으로 가라고 했고, 착한 남편인 그 청년은 그렇게 해주었다.
거대한 미국 배
막냇동생이 중국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동생과의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6.25 전쟁이 일어나 탁구공이 오가는 것처럼 밀고 밀리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38선 주변의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었고, 그 때문에 왕래는 전면 중단되고 말았다. 마침내 막냇동생과 세 아이들은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기 전에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중국에 남아 있던 한국인들의 광기 어린 투쟁에 합류했다.
이들은 기차를 타고 어렵사리 함경남도 흥남에 도착했지만, 그다음에는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이 거대한 미국 배가 피난민들을 무료로 부산으로 실어 나른다는 소식이 들렸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동생은 직접 그 배를 보러 갔다. 커다란 군함에 2백여 명의 피난민들이 짐을 들고 오르고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배에 올라타는 여인들을 본 막냇동생은 그 길로 그 여인들을 뒤따랐다.
휴게실과 통로, 그리고 현창 등 배 전체가 피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모두가 갑판 아래쪽에 잇는 길다란 객실에 수용되어 잇는 터라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미군들은 이들에게 가능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려고 노력했고, 많은 피난민들이 심하게 앓아서 미 군의관 한 사람이 파견돼 이들을 봐주기도 했다. 갑판 한쪽에 버려두고 그냥 낫게 하는 것이 그의 처방법이긴 했지만.
식사 시간이면 승무원들이 김치와 밥을 날라다 주었고, 고기를 소화시킬 수 있는 이들에게는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주기도 했다. 모두들 우리가 피난길에서 먹은 그 어떤 것보다 좋은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가끔씩은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 승무원들이 아이들을 위해 놀이를 할 수 있게 해주거나 음악회를 열어 주기도 했다.
동해안을 따라 내려온 이들의 여정은 부산항에 도착함으로써 사흘 만에 끝이 났다. 피난민들은 배에서 내리기 전에 예방 주사를 맞고, DDT 세례를 받고, 남한 화폐와 하루분의 식량을 배급받았다.
막냇동생은 아이들을 데리고 바로 예천에 갔다. 어렵사리 불구인 동생의 집에 도착한 막냇동생은 불구인 동생의 딸과 사위를 찾으러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야 했다. 두 사람과 헤어진 지 열 달이 넘도록 무사히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온데간데없이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막냇동생은 아이들을 남겨 둔 채 안동까지 먼 길을 걸었다. 그리고 안동에서 길가에 서 있는 지프차 한 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카키색 군복을 입은 남한 군인이 풀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차 색깔과 군복 색깔이 똑같았기 때문에 그 지프차가 군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생은 손등으로 이마를 누른 채 조심스럽게 그 군인에게 다가갔다.
"군인 아저씨, 저는 고아가 된 다섯 아이들을 찾으러 부산으로 가는 길이에요. 한 아이는 장님이고, 나머지 넷은 병신이죠."
동생은 거짓말을 했다.
"조용히 앉아있을게요. 제가 있는지도 모르실 거예요. 제발. 제발 이 불쌍한 엄마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세요"
동생이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
연기를 능숙하게 해낸 동생은 난생처음 자동차를 타게 되었다. 자신이 궁전 한 채만 한 배를 얻어 타고 바다를 건너거나, 미군들이 베풀어 주는 오락을 즐기거나, 남한의 군용 지프차를 얻어 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할 수만 있었다면 평화와 안정을 되찾기 위해 이 모든 경험을 자신의 삶에서 말끔히 지워 버렸으리라.
동생은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앉아 삼계탕과 막 익은 신선한 김치를 마음속으로 그려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 속의 잔치는 노상강도들의 출현으로 곧 막을 내리고 말았다.
"두 손을 높이 들고 천천히 걸어 나왓!"
두 사람의 얼굴에 총구를 겨눈 채 복면을 한 우두머리가 외쳤다.
막냇동생은 이들의 명령대로 두 손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군인도 똑같이 했다.
"저자들이 하라는 대로 하세요. 저자들의 신경을 거스를 필요가 없어요."
그가 이렇게 속삭였다. 지프차 밖으로 나오자마자 군인은 등에 총을 맞고 쓰러졌고, 너무 가까이에서 총이 발사된 데 놀란 동생은 총을 맞지도 않았는데 옆으로 쓰러졌다.
강도들은 승리의 찬가를 부르며 지프차를 몰고 사라졌다. 동생은 그들이 먼지 나는 길 아래로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쓰러져 있는 군인에게로 기어갔다. 그리고는 숨소리를 들어 보려고 그의 입술에 귀를 갖다 댔다. 헐떡거리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숨소리였다. 총알은 군인의 아랫배를 관통해 위장에 큰 구멍이 뚫리고 내장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위해 불러줄 어린 시절에 배운 창 한 곡조 생각나질 않았다. 그래서 얼굴을 땅에 박고 쓰러져 있는 그 군인을 그냥 남겨 둔 채 두 발로 걸어 부산으로 향했다.
동생은 꼬박 한 달 동안 두 사람을 찾았다. 운 좋게도 부산의 미군 기지 앞에 이른 막냇동생이 웅크리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젊은 여자가 길을 건너왔다. 두 사람은 말하지 않고도 즉시 서로를 알아보았다.
‘이게 바로 마마 자국 없는 얼굴에 두 다리로 온전히 설 수 있는 불구 언니의 모습이구나.’
막냇동생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합심한 두 사람은 우리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비가 새는 녹색 천막촌에서 뼛속까지 비에 젖어 있던 우리를 찾아낸 것이었다.
여보, 안녕히 가세요
그 무렵 남편과 나는 쉴새 없이 다투었다. 하나님에 대한 내 복수심이 늘 주요한 원인이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신비하신 섭리요. 그러니 하나님을 심판해서도 비난해서도 안 되는 거요. 때때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 만큼 지혜로운 방법을 사용하실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분의 크신 계획의 일부라는 믿음을 가져야 하오."
남편이 자신의 믿음을 설파했다.
"당신이 숭배해 마지않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도 다 끔찍한 신화에 지나지 않아요. 당신의 그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구요. 머리만 아플 뿐이에요!"
내가 울부짖었다.
남편은 잔인할 만큼 계속적으로 압박을 가해 왔다. 주제를 바꾸어 보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의견을 내게 주입시키려 하면 할수록 내 고집은 더 세질 뿐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잊으셨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오. 주님께 기도를 드리도록 해요. 하나님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당신의 고통에 찬 영혼을 환히 밝혀 주실 거요, 여보."
"흥!"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우리 이웃들을 무참히 죽이고 내 아이를 품에서 빼앗아 간 그 놈한테는 기도를 하지 않아요. 빨갱이들이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고 날 감옥에 가둘 때에도 침묵을 지키더니, B-29기가 머리 위로 그 무시무시한 폭탄을 퍼부을 때는 또 어디 가 있었답디까?!"
"그분은 그곳에……."
"당신 말이 맞다니까요! 물론 거기 계셨죠. 자기가 이 모든 일을 다 꾸몄으니까! 나는 그를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썼는데, 그런데도 내 아이를 데려가 버렸다구요."
"당신은 그분 역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버렸다는 사실을 잊었소?"
"나는 내 아이를 희생시키겠다고 말한 적 없어요. 나는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구요. 그냥 평범한 여자란 말이에요!"
나는 불현듯 고통스러운 상처를 다시 파헤쳐 남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었다. 내 말은 점점 더 심하고 포악해졌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당신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듣고 싶죠? 이럴 수가. 당신은 얼마나 착한지 몰라요. 그토록 자비롭고 그토록 정의로운 나의 신이시여, 내 당신의 성스러운 이름을 찬미하나니!"
나는 실성한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웃어 댔다.
"당신은 너무 순진해요."
나는 남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으르렁거렸다.
"바보 같다구요. 당신은 아직도 나와 결혼할 때의 어린아이 그대로예요. 가서 고추가 좀 여문 다음에 오시구려. 그러면 좀 남자다워질 테니까."
남편의 누런 얼굴로 피가 확 몰리더니 어찌해 볼 새도 없이 그가 내 뺨을 때렸다. 나는 무척 놀랐다.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내를 때리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남편은 한 번도 손찌검을 하지 않았었다.
남편은 나를 때린 손을 재빨리 등 뒤로 숨겼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얼굴이 온통 일그러진 것으로 보아 나보다 더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더 때려 보라며 대들었지만, 남편은 말없이 돌아서 버렸다. 그 시간 이후로 우리는 하루 종일 서로를 피했다. 하지만 가족들로 우글거리는 오두막 안에서 그러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한 발짝 걸음을 뗄 때마다 그와 부딪쳐야 했다. 결국 남편은 집을 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남편과 아내로서 멀어진 계기가 되었다.
남편은 혼자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고,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남편이 자비심을 베푸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나보고 치료해서 낫게 해주라며 중병에 걸린 임산부를 데려왔을 때에도 나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심 남편을 위해 그 일을 했다.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것이 너무도 오랜만의 일이었으므로.
그 임산부는 신체 마비를 수반한 열병을 앓고 있어서 태아는 물론 자기 자신도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열병은 부지불식간에 온 마을로 유행병처럼 번졌다. 이 무시무시한 질병이 디프테리아임을 알았을 때는 아이들도 나도 너무 늦은 상태였다. 우리는 병에 걸렸지만 웬일인지 남편과 다른 가족들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아이들과 그 임산부와 나는 즉시 마을의 교회 안에 있는 임시 격리소로 옮겨졌다. 뾰족탑 아래 있자니 옛 생각이 났지만, 나는 그 기억들을 재빨리 억눌러 버렸다. 우리는 교회에 헌납된 간이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모두가 서로의 기침을 마시는 상황이었다. 밧줄을 매 놓은 경계선을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은 용감한 자원봉사자들과 가족들뿐이었다.
남편은 매일 나를 찾아와 충실한 애완견처럼 내 옆을 지켰다. 그리고 두 여동생에게는 아이들을 위해 건강을 지켜야 한다며 교회 출입을 금지 시켰다. 나는 남편이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디프테리아는 그다지 매력적인 병이 못 되었으므로 남편이 오는 것보다는 동생들이 오는 편이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고열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지고 온몸은 탈수 현상으로 쭈글쭈글해졌다. 죽을 고비를 그토록 많이 넘겼는데, 이제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품 안에서 대머리가 되어 죽게 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 제발 당신도 조심해야 돼요. 그러니 돌아가세요."
다른 무엇보다 이기적인 마음에서 그런 부탁을 했건만, 남편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고 물을 떠 오는 등 계속해서 우리를 간호해 주었다. 남편이 옆에 있는 동안만은 정신을 차려 보려고 애를 썼지만, 나는 내내 헤어진 용운이 꿈만 꾸며 의식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깨어날 때마다 남편이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남편의 무한한 사랑이 우리에게 생명을 위해 싸울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약도 유능한 의사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우리에게는 남편이 절실히 필요했다.
함께 침대에 누워있던 사람들이 가족들의 마지막 인사조차 받지 못하고 하나하나 죽어 가는 위험한 상황에서 아이들과 그 임산부와 나는 끝내 목숨을 건졌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남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신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었다고 생각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를 구해 낸 건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간호예요. 보세요. 우리한테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구요."
내가 남편의 생각을 고쳐주었다.
하나님이 마침내 침묵을 깨뜨리기로 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남편은 번개에라도 맞은 듯 갑작스레 디프테리아로 쓰러지고 말았다. 고열이 순식간에 그의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더니 심장에 도달해 심장 박동을 약화시켜 놓았다. 나는 불과 하루 전에 내가 누워있던 바로 그 간이침대 위로 쓰러진 남편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물, 물 좀……."
남편이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아직 쇠약한 상태였으므로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남편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물잔을 남편의 부르튼 입술에 갖다 대자, 그는 물을 삼키려고 애를 쓰면서 빨갛게 충혈되고 움푹 꺼진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에게 다소나마 위안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나는 여러 날 동안 그곳에 앉아 헐떡거리는 남편의 숨소리에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그가 한 번만 더 숨을 쉬어 주기를 바라며 그와 함께 호흡하면서. 더 쉽게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려고 그의 머리를 내 가슴께로 들어 올려 주기도 했다. 축 늘어진 사지와 탈수된 몸을 안아 보니 남편이 얼마나 허약해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남편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내 손을 잡았다.
"눈을 좀 붙이세요. 당신이 깨어날 때까지 여기 있을 테니까요."
나는 밝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이렇게 말했다. 남편의 깊은 갈색 눈망울에 공허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조차 남편의 믿음은 너무도 순수했고, 그의 영혼은 조금도 꺾이지 않은 상태였다. 남편은 오래전에 내 마음을 빼앗아 갔던 바로 그 웃음인,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너무도 쇠약해진데다 감정에 복받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몇 시간이 흘렀고, 나는 남편의 머리를 받힌 채로 잠이 들었다. 그러다 얼마 후 그의 몸이 차갑게 굳어 오는 데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밤이 되어 있었고, 남편은 죽어 있었다. 그 순간 남편을 놓아 버리면 영원히 그를 잃게 될까 두려워 나는 남편을 꼭 끌어안았다.
빛. 빛. 남편의 얼굴을 보고 그의 모습을 내 마음에 담아 두려면 환한 빛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동안 남편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그 모든 감정을 얼마나 알리고 싶었던가? 왜 내가 아니라 남편인가? 왜 내가 아니라 아들이란 말인가? 나는 두 주먹으로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때리고 싶었다. 마침내 두 손을 펴 보니, 너무 힘을 주었던 탓에 손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충분해…… 충분하다구. 충분해, 충분하다니까!’
내면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거칠어진 피부 위로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 둔 채 나는 두 손으로 내 얼굴과 나이가 들어 허옇게 센 머리를 마구 때렸다.
이러한 시절 내내 나느 사랑과 신이 부재하는 세계에 살았다. 그리고 이전에도 수없이 눈물을 흘렸었지만, 너무도 많은 슬픔이 담겨 있는 그 눈물은 이제 밀랍처럼 무겁기만 했다.
나는 그날 밤 내 삶이 너무 서글퍼 실성한 사람처럼 울었다. 그때 뿌연 내 두 눈 앞에 어떤 형상이 빛을 발하며 나타났다. 남편이 연필로 그려 준 그림과 똑같은 예수의 얼굴이었다. 불현듯 모든 분노가 씻은 듯이 사라졌고, 나는 몸을 떨며 서 있었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저 깊고 어두운 영혼 밑바닥에 오랫동안 눌러 두었던 신을 향한 기도가 터져 나왔다.
"제발 천국으로 가게 해주십시오. 남편을 안전하고 따뜻하게 지켜 주십시오."
나는 겸허한 마음으로 간청했다.
나는 또 한 번 절박한 심정으로 믿고 싶었다. 남편이 천당이라는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그리고 그 순간부터 신에게 돌아갈 것을 맹세했다.
나는 환한 데서 남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해가 떠오를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친숙한 미소를 보는 순간, 나는 그 사람이 내게 있어 얼마나 많은 것을 의미했던가를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너무도 깊고 고요하고 잔잔한 행복이었다. 나는 평화를 되찾았다.
나는 남편의 시신을 따뜻하게 감싸 안고, 닷새 동안이나 면도를 하지 못한 그의 얼굴에 내 뺨을 대고 비볐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들에게 소식을 알릴 때가 되었다.
"여보, 안녕히 가세요."
나는 남편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인 다음 그곳을 빠져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는 술에 취한 듯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편의 죽음은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적어도 그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용운이의 경우처럼 의혹이 남아 있는 게 아니라. 나는 무어라 말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속으로 연습을 해보았다. 아이들이 또 다른 상실감을 느끼지 않도록 이야기를 꾸며 내고 싶었다.
아이들, 특히 아기는 짧고도 비극적인 삶을 살면서 이미 너무도 많은 고통을 겪었다. 아기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고, 나에게는 너무도 많은 기쁨을 안겨 주었던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었다.
아기는 아빠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보지도, 그 말이 누구를 뜻하는지도 모르리라.
"얘들아."
내가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너희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말소리를 흐느낌으로 변하기 전에 신속하고도 단호하게 소식을 전했다. 두 아들은 잠자코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의 죽음이 두 아이가 겪은 유일한 죽음인지라, 별로 슬프지도 마음에 닿아 오지도 않는 듯했다. 어쨌든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덕화는 내 무관심한 태도에 화를 내며 몸을 떨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좋으시죠."
덕화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원망했다.
"덕화야, 네 마음이 아퍼서 그런 말 하는 줄 안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를 바랐어요. 그렇지 않으면 왜 늘 아버지와 다투셨겠어요? 전 아버지를 뵈러 가겠어요."
덕화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덕화야, 너는 요즘 같은 때에는 이런 비극이 생활의 일부라는 것을 알 만큼 컸다. 하지만 산 사람은 계속 살아가야 해. 이제 남은 것은 겨우 우리 다섯 식구뿐이다. 그러니 우리끼리 싸우지는 말자꾸나.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아버지를 뵈러 가겠어요."
"위험해. 넌 아직 굉장히 쇠약한 상태야. 때가 되면 내가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 오마."
나는 이렇게 말한 다음 그걸로 이야기를 끝내 버렸다. 딸애와 다툼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걱정거리가 너무도 많았다. 네 아이의 불투명한 미래가 두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날 밤 나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진흙과 짚을 이겨 만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고픔보다 더 지독한 외로움이 덮쳐 왔다. 다른 가족들은 나지막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이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나는 소리 죽여 울었다. 코 고는 소리가 조금만 더 커서 내 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덕화는 틀려도 한참 틀렸다. 나는 속으로 앓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절망적인 괴로움이었다.
과부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잊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달갑지 않은 그 호칭도 사랑받고 보살핌받고 싶은 욕망까지 없애 주지는 못한다. 게다가 나는 겨우 서른아홉이었다. 그렇다. 나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가 내 피를 끓어오르게 하고 내 육체를 환히에 떨게 한 기억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에 대한 상실감으로 몸에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내 몸의 조화, 즉 음과 양의 균형이 깨어져 버린 듯했다.
나는 가만히 누워있을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까치발을 하고 조심스럽게 가족들의 몸을 넘어 문가로 다가가서 문을 열고, 속치마만 입은 채로 밖으로 기어나갔다. 나는 한때 널찍한 그늘을 이루었던 나무의 그루터기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바람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고, 별들은 나를 위해 반짝이며 춤을 추어 주었다.
아침에 나는 다시 교회로 갔다. 남편의 시신은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로 담요를 덮고 누워있었다. 떠나올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친절한 자원봉사자 두 사람이 남편이 한때 살았던 집으로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나가 버려 혼자 남편을 씻기고 장례 준비를 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나는 마치 남편이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가능한 한 부드러운 손길로 남편을 씻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누더기옷을 다시 입힐 수밖에 없었다. 그 옷 한 벌뿐이었으므로. 한때는 그 옷도 값비싼 양모 정장이었다. 이제 얼룩이 지고 여기저기 기운 누더기가 되어 있었지만.
"어떻게 묻어 주어야 하나?"
나는 관이나 상자 같은 것을 찾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켜 두었던 얼마 안 되는 돈조차 병치레로 다 써 버린 상태였다. 마지막 작별은 누군가를 이 세상에 맞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장례식을 제대로 치러 주기 위해서라면 마지막 남은 내 고무신 한 켤레라도 기꺼이 팔 생각이었다. 남편을 위해서라면 집집마다 다니며 구걸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으나, 불행히도 나라 전체에 거지들뿐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많은 이들이 친딸을 매춘부로 팔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이웃집을 뒤져 찾아낸 것이라곤 올이 풀리지 않은 멍석 한 장뿐이었다.
"여보, 절 용서해 주세요."
나는 이렇게 공손히 말한 다음 남편을 그 멍석으로 말았다. 그의 소중한 머리가 튀어나오며 단단한 땅바닥에 닿았다. 멍석이 30센티미터 정도 짧았다. 저쪽 끝으로는 남편의 발이 삐죽 튀어나와 양말에 난 구멍이 드러났다. 나는 맨살이 훤히 드러난 남편의 커다란 왼쪽 발가락을 보고 울었다. 구멍이 더 작아 보이도록 애를 쓰면 쓸수록 더 크게 벌어질 뿐이었다.
장례식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을 묻어 줄 곳을 찾아냈는데, 그곳은 내가 꿈꾸었던 장소와는 사뭇 다른 곳이었다. 나는 남편을 그림 같은 평원이 굽어 보이는 명당에 눕혀 그의 영혼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의 마지막 안식처는 시들어 가는 황폐한 옥수수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기슭이었다.
거대한 추모객의 행렬이 우리를 뒤따랐다. 나는 그날 오후 그토록 많은 이들이 나와 준 것에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 남편은 남한으로 온 이후에 좋은 일을 무척 많이 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조의를 표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었다. 모두가 빛과 생명의 상징인 동시에 망자에 대한 애도를 뜻하는 흰옷을 입고 있는 것은 장엄한 광경이었다. 아주 잘 들어맞는 색이 아닐 수 없었다.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삶에 대해 논할 수는 없으므로. 그 둘은 너무도 긴밀히 연결되어있으므로.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큰 소리로 울었고, 짚으로 만든 남편의 관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때는 "아이고, 아이고" 하며 울부짖었다. 내가 관 위에 제일 먼저 흙을 뿌리는 동안 추모객들이 공손히 한 옆으로 물러나 주었다. 부드러운 흙은 끝내 갈라진 내 손가락 사이를 모두 빠져나갔다. 흙을 다 뿌린 나는 뒤로 물러서서 삽으로 흙을 퍼 넣는 이들을 지켜보았다.
흙과 조그마한 벌레들이 암편의 두 귀와 코를 틀어막으리라. 나는 언젠가 남편의 무덤을 다시 파서, 그의 가치에 걸맞은 근사한 참나무 관으로 바꾸어 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날은 얼굴에 분을 바르고 흰 삼베 치마저고리를 입을 생각이었다.
모두가 가 버리고 난 뒤에도 나는 그곳에 남아,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안식처 앞에 서 있었다. 그동안 나는 여러 번 나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곤 했으나,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에게 속해 있었고, 젊었을 때는 남편에게 속해 있었는데. 게다가 이득필의 아내로 산 지난 세월 동안은 남편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접어 둔 상태였다. 나와 남편은 너무도 긴밀하게 엮어져 있어 더 이상 나라는 존재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잠시 동안은 재혼도 고려해 보았지만, 재혼의 형벌은 너무 무거워서 다음의 여러 세대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정절을 지키지 못한 과부 어머니는 자녀들이 좋은 위치에 오를 기회를 위협할 뿐 아니라, 미래의 세대에게도 같은 영향을 줄 터였다. 일단 어느 가족의 명예가 그 같은 허물로 더럽혀지고 나면 말끔히 닦아 내기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남편의 자리를 딴 남자가 대신한다고 생각하자 혐오스러웠다. 내 마음을 소유한 처음이자 마지막 남자는 남편이어야 했다.
그것은 다른 이의 동의 없이 나 혼자 내려야 했던 수많은 결단 중 최초의 것에 해당하는 결정이었다. 나는 두려운 나머지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왜 하필 나인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상중인 나는 남편을 잃은 것과 나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 그리고 내게 지워진 무거운 책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머리에 단 하얀 리본이 내 처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늘 그 리본을 달고 다녔다. 사람들이 "만세!"라고 환호를 지를 때에도.
3년하고도 한 달 이틀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고, 부상 당하거나 사망한 시민 1백만 명, 전쟁 고아 10만 명, 그리고 30만 명의 전쟁 미망인을 남기고 비극적인 6·25는 마침내 막을 내렸다. 1953년 7월 27일 비무장 지대인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한국의 통일을 희생하고 얻어진 협정이었다.
전쟁이 끝났어도 나는 일본이 패망했을 때처럼 환희의 함성을 지르지 않았다. 기뻐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쟁이 조금이라도 더 계속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의 인민군이 거의 소진한 상태였으므로 전쟁이 조금만 더 계속된다면 이들을 패배시킬 수 있을 터였다. 이제 용운이의 생사를 알 길이 완전히 막혀 버리고 말았다.
나는 상중에 이토록 많은 것을 잃고도 과연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에 시달렸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때 내면 깊은 곳에서 다시 한번 예의 그 조용하고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그래. 이제 알겠어.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었지. 주님은 치료라는 치유의 은사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보살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를 바라고 계셔. 그게 바로 내 삶의 목적이야.’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한 모험이 두렵거나 버겁게 느껴져서가 아니었다. 반대로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어서 그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나는 아침밥을 먹자마자 치료받을 사람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냉담한 비난과 반감에 부딪혔다. 친구들조차 치료의 효과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자신들의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나를 묶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내가 3년 상을 온전히 치르기를 바라며, 슬픔에 잠긴 미망인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고 나를 나무랐다. 3년이라니! 하룻밤도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판에. 나는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들의 비난을 접어 둔 채 내 사명에만 마음을 쏟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아침 희망에 부풀어서 나갔다가 밤이 되면 좌절감에 지쳐 되돌아왔다. 내가 만난 이들 모두가 웃옷의 단추를 풀려 하지도 바지를 내리려 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옷깃을 움켜쥔 채 나를 집 밖으로 밀어냈다.
"나를 때리게 놔두기는커녕 당신 앞에서 옷을 벗으리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미친 게 틀림없어."
어느 여인이 내뱉었다.
"무료로 봉사해 드리는 거예요."
내가 말했다.
"매일 밤 술에 취해 돌아온 남편한테 무료로 실컷 얻어맞고 있다구."
"치료를 받으면 혈액 순환이 잘 돼요. 아주머니 다리에 있는 이 구불구불하고 검푸른 자국은 피가 막혀 잘 돌지 못해서 생긴 거라구요."
나는 계속 밀어붙였다.
"끔찍한 고문을 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걸. 내 집에서 나가, 이 사기꾼 아!"
하루하루가 이런 식으로 지나갔다. 낙심한 나는 치료의 가치를 아는 유일한 사람인 나 자신의 몸을 치료했다. 두 손을 아래위로 움직여 가며 살이 검푸른 멍과 시뻘건 자국으로 빈틈없이 뒤덮일 때까지 내 몸을 때렸다.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건강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내 몸에 손댈 곳이 없어진 후에는 아이들을 치료했다. 내 두 다리 밑에 눌린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중국에서는 아이들을 치료하는 동안 유모가 잘 잡아 주곤 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아이들과 나는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 되었고, 치료로 생긴 자국은 교회 신자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끌어모았다. 서서히 서너 명의 환자가 모여들었다. 나는 한 번도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이들이었으므로, 쌀 한 줌이나 장작, 아니면 감사의 기도처럼 여유가 있는 만큼만 보답을 하면 되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지만 불구인 동생은 가차 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이들에게 먹일 것도 없으면서 일을 안 하겠다니. 게다가 하루 종일 자기 몸과 거리에서 끌어들인 낯모를 사람들의 벗은 몸뚱이를 때리는 데 시간을 허비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난 사업에 비상한 머리를 갖고 있으니 다른 일을 하면 돈을 좀 더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돈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치료야."
"잘 좀 생각해 보고, 그 미친 짓일랑 제발 좀 그만둬. 언니는 평범한 여자지, 전문 치료사가 아니야. 그런 일은 평생동안 약초를 연구한 노인네들이나 하게 내버려 두라구. 아이들 생각을 해야지."
굳이 아이들 이야기를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아직 남편이 입던 낡은 셔츠에 싸여 있는 아기를 보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물론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떠난 적도 없었다.
나는 매일 폐허가 된 거리로 나서면서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보상해 주어야 할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아이들을 다시 학교에 보내야 했지만, 학비를 마련하려면 1, 2년은 더 있어야 했다. 나는 덕화에게 말을 꺼내기가 두려웠다. 덕화는 난민촌에서도 내내 학교 이야기만 한 아이였으므로.
이전처럼 사내아이들은 그 씁쓸한 소식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사실은 지나치게 흔쾌히 받아들인 셈이었다. 아이들은 1년 더 놀 수 있다는 생각에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웃었다. 하지만 덕화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느라 매서운 두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조금만 더 참자꾸나."
"엄마!"
덕화가 눈을 부릅뜨고 나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나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1년을 더 기다리란 말씀이세요? 그러면 딴 아이들보다 한 학년 뒤지게 된단 말이에요!"
"1, 2년은 문제가 되지 않아. 게다가 넌 무척 총명한 아이다. 딴 아이들에게도 널 따라잡을 기회를 주자꾸나."
나는 딸아이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노력했다.
"전 학교에 갈 거예요."
짙은 속눈썹 아래로 나를 바라보는 덕화의 눈이 불타올랐다.
"자, 잘 좀 생각해 보렴. 네 남동생들과 아기도 함께 생각해야 하잖니.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나는 너희들을 모두 먹여 살리고 학비까지 낼 힘이 없단다."
"그러면 제가 직접 돈을 마련하겠어요."
"어떻게 돈을 마련한다는 거냐?"
"부산에 계시는 아버지 친구분들을 찾아갈래요. 그분들이라면 저한테 돈을 주실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분들도 우리처럼 이사를 하셨다면 네 노력은 헛고생이 되고 말 게다. 게다가 난 내 일을 멈추고 돈을 구걸하러 다니는 널 따라다닐 수가 없단다."
"엄마는 필요 없어요. 저 혼자 가겠어요."
덕화는 대담하게도 이렇게 선언한 다음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앳된 얼굴에 고통스러움이 서린, 그 도전적인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 덕화는 내 딸임이 분명했다. 한참 후에 돌아온 덕화는 나와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나를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덕화가 반항할 때마다 나는 좌절감을 느꼈다. 예전에는 도움을 청할 때마다 위안을 주곤 했었는데. 덕화는 희생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늘 제일 먼저 나서는 아이였다. 하지만 학교는 덕화가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밤 저녁을 먹은 다음, 해결책을 찾을 요량으로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기 전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도로를 샅샅이 뒤지며 부산으로 가는 자동차나 트럭을 찾았다.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덕화가 탈 만한 배추 운송용 트럭을 찾을 수 있었다. 길가에 서 있는 그 트럭에는 운전사와 일행 한 사람이 쌀밥과 족발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선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덕화와 나는 이튿날 새벽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불고 난 뒤에 약속했던 장소로 갔다.
"운전사 아저씨가 가능한 한 멀리까지 널 태워다 주실 거다. 그다음에 남은 길은 걸어서 가도록 해라. 밤에는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통금 시간이 되기 훨씬 전부터 쉴 곳을 찾아야 한다."
나는 덕화에게 어머니다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덕화는 겁을 먹었지만 마음을 다잡았고, 나 역시 두렵고 겁이 났다. 이미 한 아이를 멀리 떠나보냄으로써 그 아이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던 터였다. 나는 길가에서 덕화를 배웅하면서 똑같이 큰 실수를 범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뒤쪽에서 불타오르는 해가 솟아오르며 덕화의 모습을 환히 비추어, 그 애는 아름다운 한 떨기 들꽃처럼 보였다.
몇 분 후에 그 트럭이 북쪽에서 덜컹거리며 다가왔다. 차 문이 열리며 담배 연기가 덕화를 내리 덮쳤다. 연기가 걷히고 나서야 덕화는 자신을 부산까지 데려다줄 두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올라타거라."
운전사가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덕화는 잠시 머뭇거리며 돌아갈까, 아니면 이 차를 타고 갈까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기회를 잡기로 결심하고 차에 올랐다. 덕화는 차 안에서 내내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고, 부산에 도착했을 때에는 멀미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덕화는 여덟 달 동안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갇혀 살았던, 항구도시 부산을 보고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번에는 학교에 다니겠다는 소중한 꿈을 이루기 위해 온 것이었다.
덕화는 아버지의 친구들이 사는 작은 마을로 갔다. 그들은 기억 속의 덕화가 직접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덕화는 아버지의 죽음과 그 이후의 예천에서의 힘겨운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모두들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토록 먼 길을 온 용감하고 어린 소녀를 가엾이 여겼다. 그들 역시 보잘것없는 생활을 꾸려 가고 있었지만 모두가 항아리를 돌려 돈을 모아 주었다. 그들의 관대함으로 얼마간의 돈이 모아졌다.
그 돈으로 덕화는 3년 치 학비를 내고, 교복과 학용품들을 사고, 그리고 나서 남은 돈은 국수 장사를 시작하는 이모들에게 보탰다. 우리가 살던 오두막집에 차린 국수 가게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온 가족이 배고픔을 면 할 수 있었다.
나환자들과 함께 보낸 세월
나는 서른아홉의 나이에 내 운명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자유를 선택할 자유는 없었다. 부담감이 온몸을 내리눌렀다. 주위에는 나에게 명령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나는 온전히 나 자신에게만 속해 있었다. 예전 같으면 과부는 아들이나 사위의 뜻에 따라야 했다. 하지만 전쟁은 그러한 것마저 바꾸어 놓았다. 그처럼 구속이 없는 상황에서 나는 점차 대담한 여인으로 변해갔다.
내가 대구에 있는 나병 환자 수용소로 찾아간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곳에는 내가 찾던 바로 그것, 한곳에 모여 있는 수백 명의 환자들이 있었다.
"날 그곳으로 좀 데리고 가 주세요."
나는 나병 환자 동생을 둔 어느 남자에게 부탁했다.
"그런 곳에 가려고 하는 이유가 대체 뭐요?"
남자가 코를 실룩거렸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나병 환자니까요."
"아줌마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걸요. 열 손가락도 두 귀도 다 온전하잖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나병 환자나 되는 것처럼 내 치료를 피하는걸요."
"그 몹쓸 병에 걸릴까 겁이 나지도 않아요?"
"아뇨."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병에 전염될 가능성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었다. 하느님이 보호해 주실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용기를 내서 모두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아기를 업고 집을 빠져나왔다. 큰아이들은 예천에서 공부를 계속하는 편이 더 나을 터였다. 하지만 아기는 내가 없으면 안 되었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가 지났지만, 아기는 제대로 기지도 못했다.
나는 종이쪽지에 성급히 메모를 남겼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고 잠시 집을 비우겠다는 말만을 남겼다. 목적지를 밝히면 나를 다시 집으로 끌고 올 게 분명했으므로. 이렇게 해서 나는 아기와 함께 조용히 새로운 날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대구의 나병 환자 수용소는 바깥 세계와 담장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담을 따라 늘어선 화사하고 알록달록 한 화초와 나무들이 안쪽에 있는 버림받은 이들의 비참한 수용소를 가려 주었다. 이곳은 나병 환자와 의료진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었다. 찾아오는 방문객이 거의 없었으므로, 아기와 나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나는 시간을 끌지 않고 내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한데다 어떤 형태이든 기적을 바라는 심정으로, 이들은 나의 치료에 기꺼이 응해 주었다.
나는 수용소 안을 돌아보았다. 나병을 앓는 이들의 끔찍한 모습에 대해서는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보니 소름이 끼쳤다. 여자, 남자, 대학 교수, 농부, 학생, 음악가, 아이들 등 모두가 보통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가엾은 영혼은 염증을 일으켜 변색된 피부와 우툴두툴하고 두꺼워진 얼굴과 사지(사지)에 갇혀 있었다. 어떤 이에게는 머리카락이, 어떤 이에게는 눈동자와 귓불이 없었다. 증상이 심한 사람이 오히려 행운아였다. 신경이 심하게 손상되어 고통을 느낄 수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불행의 원인이기도 했다.
한번은 어느 나병 환자의 발에 불이 붙은 일이 있었다. 불타는 장작에 발을 너무 가까이 대고 있었던 것이다. 간호사가 옆에 없었다면, 미처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불꽃이 그의 두 다리를 한입에 삼켜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아기를 나병 환자들에게 넘긴 채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끔찍한 얼굴들이 자기를 어르는데도 아기는 울지 않았다. 이들이 아기를 잘 보살펴 주는 것을 확인한 나는 옆방으로 가서 첫 번째 환자를 불러들였다.
내 나이 또래의 한 여인이 젊은 청년의 등에 업혀 들어왔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몸집 때문에 어린아이인 줄 알았으나, 청년이 앞에 있는 요 위에 내려놓을 때 보니 얼굴에서 실제 나이가 드러났다. 여자는 애원하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에는 내면의 고통이 서려 있었다.
"어머니는 쳐다보기만 하실 뿐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세요. 뭉툭한 칼날을 당신의 허벅지에 갖다 대고 썩어 가는 살을 직접 도려내신 다음부터 이렇게 되셨어요."
청년은 절망감에 고개를 떨구었다.
"어머니께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 볼게요."
나는 이렇게 말한 다음, 여인의 치마를 들어 올리고 두 다리를 살폈다. 자신의 살을 도려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 깊은 상처는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
"자, 시작해 볼까요?"
나는 일어서서 나가려는 여인의 아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머니를 잡으려면 청년의 도움이 좀 필요해요."
청년은 내 부탁에 하얗게 질렸다.
"전 못해요. 우리 어머니이신걸요."
청년이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바로 이분이 청년의 어머니시니까 해야 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청년은 마지못해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기도합시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두 눈을 감았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당신의 사명을 행하는 제 두 손을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기도였다. 내가 수도 없이 드리곤 했던.
중국인 유모에게서 배운 대로, 나는 목부터 시작해 여인의 턱 아래쪽부터 젖꼭지 끝까지를 일직선으로 꼬집어 길고 붉은 자국을 냈다. 마치 어떤 부족의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여인의 배 주위를 세게 쳤다. 여인은 거의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육체적 고통보다는 내 손에서 나는 소리가 더 괴로운 모양이었다. 마침내 힘겹게 여인의 베어져 나간 허벅지에 이르렀을 때, 역겨운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입을 벌리고 있는 상처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을 때마다 손가락 끝이 욱신거렸다. 썩어 가는 살을 발라내고 그 속에 고여있는 뭉친 피를 꺼내느라 몇 번씩 치료를 중단해야 했다.
날이 저물어 갈 무렵, 나는 이 질병의 끔찍한 징후와 악화되어 가는 여러 단계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이들 나병 환자들을 외딴곳에 격리시켜 놓고 그 끔찍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쳤지만 음식을 못 먹을 정도로 피곤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밥을 먹기 위해 그 시체 같은 사람들을 따라 어느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흙으로 빚은 거대한 화덕 위에 욕조만큼 커다란 무쇠솥 여섯 개가 걸려 있었다. 물이 끓어오르면서 나무로 된 뚜껑이 춤을 추었고, 나무 뚜껑을 열자 하얀 증기가 올라왔다. 막 지은 밥 냄새보다 더 달콤한 향기는 없었다. 앞마당에서 기른 배추와 호박, 그리고 양파가 반찬이었다. 나병 환자 수용소에서 왕족처럼 먹게 될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누가?
아기와 함께라면 어디서 자도 상관없었지만, 나는 그날 밤 감사하게도 다른 여인 열 명과 함께 서양식 아파트처럼 지어진 방 하나를 배정받았다. 나는 그때 온몸이 다 들어갈 만큼 커다란 장롱과 옷을 넣어 두는 듯한, 벽에 붙어 있는 상자 모양의 공간을 난생처음 보았다. 남들은 집이 없어 거리에 나가자는 판에 옷이나 쌓아두는 그런 개인 공간을 만들어 둔 것이 터무니없게 여겨졌다.
나는 담요를 귀 위까지 끌어 덮고도 신음소리와 비명소리에 무감각해지지 못한 채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토록 비참할 수가. 여인들의 절규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번져 나갔다. 이곳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나병 환자들에게는 내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일주일에 엿새 동안 일했고, 새벽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일을 하는 날도 많았다. 긴 하루하루가 느릿느릿 흘러 일주일이 되었다. 조금 쉴 수 있는 날은 일요일뿐이었고, 그날은 예배에 참석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설교를 할 목사님이 수용소로 들어왔다.
그 목사는 아무도 자신의 몸에 손을 대려 하지 않는데도, 병균이 득실거리는 나병 환자들의 손이 닿지 못하도록 철조망으로 된 우리 속에 들어가서 설교를 했다. 환자들은 나처럼 자리에 앉아 신앙에 관한 그의 설교를 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썩어 가는 육신을 가진 양들의 무리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 한 번 짓게 할 능력도 없었다. 그의 부자연스러운 동작과 어색한 음성 때문에 나까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목사는 자신이 하고 있는 설교보다 나병 환자의 손이 몸에 와 닿지 않을까 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에서 불러들일 수 있는 유일한 성직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예 가까이 오려고 하지도 않았다.
환자들이 조금씩 좋아지는 징후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치료가 나병의 진행을 막고 아직 제 기능을 하는 사지의 혈액 순환을 향상시키는 듯했다. 내가 바랐던 것은 그게 전부였다. 현실주의자인 나는 치료가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시 자라게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고, 나를 찾아오는 이들을 속인 적도 없었다.
이 일로 인해서 나는 충만한 행복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들 몰래 집을 나온 죄책감이 커지면서 치료에 마음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엄마로부터 버림받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고 나온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몹시 괴로웠다. 이들 나병 환자들을 돕고 싶은 나머지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셈이었다. 나는 결국 내 진심을 담아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얘들아, 제발 이 엄마를 이해해 다오. 엄마는 너희를 버린 것도 내 일을 포기한 것도 아니란다. 나중에 이곳에서 본 끔찍한 모습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히 들려주마. 하지만 내 도움을 이곳에서 더 필요로 한다는 내 말을 믿어주길 바란다.
가족들은 즉시 연이어 답장을 보내왔다. 모두 똑같은 말로 시작되는 편지들이었다.
제발 돌아와요. 언니의 아이들이 엄마가 없어서 고생하고 있어요.
동생들도 애원했다. 하지만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소용이 없자, 불구인 동생이 자신의 비틀린 몸을 어느 건장한 청년의 등에 의지한 채 예고도 없이 직접 수용소로 찾아왔다. 동생은 호기심에서 가까이 다가오는 나병 환자들을 긴 나선형 지팡이로 때려 가며, 청년의 다리를 빌어 수용소 안을 누비고 다녔다. 동생의 소란으로 내 일은 중단되었다.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나를 데리러 온 늙고 성마른 수위에게 내가 고함을 쳤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어떤 미친 여자가 아주머니를 찾고 있습니다. 아주머니가 자기 친언니라나요."
수위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 여자가 불구이던가요?"
"네, 맞습니다. 이리로 데리고 올까요?"
나는 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때 동생이 와야 할 곳에 제대로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옆방으로 좀 데려다주세요."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생의 고성이 한참 들리고 난 후에 문이 열렸다. 길을 안내하는 늙은 수위에게도 예의 그 욕설을 퍼부어 댄 것이다.
"이렇게 날 보러 오다니."
내가 동생을 반갑게 맞이했다.
"언니, 분명히 말하겠는데 언니가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냐. 그 말도 안 되는 짓 좀 제발 그만두라고 얘기하려고 왔다구. 이곳에는 병든 짐승들이 득실거리고 있어. 이 사람들 속에는 모두 악령이 숨어 있다구. 악령에 사로잡혀서 살이 썩게 된 거야. 그 악령이 쫓아오기 전에 우리도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동생이 소리쳤다.
"악령 같은 건 없어. 미신일 뿐이야."
"쉬, 악령들이 언니 말을 듣고 노여움을 타겠다."
동생은 악령이 나타나기라도 한 듯 방을 둘러보았다
"이리 와. 여기 요 위에 누워서 좀 쉬어."
"그럼, 조금만 쉬어 볼까."
동생이 하품을 했다.
동생이 자리에 눕자마자, 간호사 세 명이 들어와 동생의 몸을 꼼짝 못 하게 내리눌렀다. 한 사람이 팔을, 또 한 사람이 두 다리를,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머리를 맡았다.
"아야, 이 나병 환자들을 내게서 좀 떼어 줘!"
불구인 동생이 비명을 질러 댔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더 세게 때릴거야."
동생을 세게 치는 동안, 동생은 머리를 비틀며 바닥에 내리찧었다. 동생이 머리를 세게 내리찧으면 찧을수록 나도 동생을 더 세게 때렸다. 동생은 몸부림치며 우리 모두를 할퀴고 물어뜯었다. 너무 힘이 세서 동생을 붙잡고 있을 사람이 두 명 더 있어야 했다.
내 손에도 똑같은 열기가 전해져 왔으므로, 나는 동생의 피부가 얼얼하게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전쟁터에라도 나온 듯한 절박한 심정으로 동생의 탄력 없는 피부를 세게 쳤다. 동생의 피부는 신속하게 반응해왔다. 살 속에서 생겨나 검푸르고 커다란 얼룩이 표피에서 출혈을 일으키며 큼직한 멍 자국을 남겼다.
불구인 동생은 자신의 침과 눈물 때문에 숨이 막히는지 거품을 토해 내며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물을 달라는 애원을 빼고는 동생의 모든 비명을 무시했다. 장장 다섯 시간 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동생은 계속해서 물을 달라고 애원했다. 동생이 천천히 물을 삼키는 동안, 그 물은 동생의 턱과 벗겨진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무 오랫동안 컵을 빨고 있으면 나는 그 컵을 빼앗아 버렸다.
"아직 다 안 마셨어!"
동생이 항의했다.
"네 몸이 더 좋아지길 바라지. 안 그래?"
나는 이렇게 물은 다음, 대답 대신 욕설을 퍼붓기 전에 두 손으로 동생을 침묵시켰다.
마침내 우리의 손에서 풀려난 동생은 옷가지를 챙겨가지고 병원을 빠져나가며 소리쳤다.
"내가 언니한테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까지 날 미워하는 거야!"
나는 동생이 더 오래 충만한 삶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다는 것을 그 애가 알아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치료의 효과를 알기에는 치료 시간이 너무 짧았던데다 자신이 당한 고통이 잊혀지지 않을 터이기 때문에.
아픔을 어루만지는 손
나는 다섯 달 후에 내게서 치료를 배운 이들이 이 일을 충실히 계속해 나가리란 확신을 갖고 흡족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 마침내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오두막은 약간 더 낡아 보일 뿐 전혀 달라진 데가 없었고, 국수 장사도 그만둔 상태였다.
나를 제일 먼저 맞아 준 것은 건일이와 건삼이었고, 그 뒤를 이어 두 아이의 누나가 들어왔다. 모두들 많이 자라 있었고, 특히 덕화는 처녀가 다 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평화로워졌지만, 옷차림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의 교복은 다 낡고 헤져 있었다.
"엄마, 어디 계시다 온 거예요?"
건일이가 어린아이 같은 팔을 내 허리에 둘렀다.
"엄마, 오늘 새 노래를 배웠어요. 불러 드릴까요?"
건삼이도 형처럼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쌌다.
덕화를 쳐다보니 그 애는 반항적인 눈빛으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자세히 좀 보자꾸나. 얼마나 네가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모들 말씀 잘 들었니?"
내가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있다 또 가시는 건가요?"
덕화의 눈망울에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 질문에는 나도 대답을 해줄 수가 없구나. 내 도움이 필요하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테니까."
"엄마, 같이 놀아 주세요."
건삼이가 제 손가락을 내 손가락에 끼웠다.
"우선 이모들과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어디 계시니? 왜 국수를 말지 않는 거지?"
"장사가 너무 안 돼서요. 이모들은 최선을 다하는데도 사람들이 사러 오지 않아요. 이제 우리 식구들이 먹을 것도 충분치 않아요."
덕화가 비난하는 투로 말했다.
"얘들아 이리 와. 밖에 나가서 놀자꾸나."
부족한 식량을 보충해 주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 방도를 찾고 있을 때 불구인 동생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절름거리며 들어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쪽 다리는 여전히 좀 짧았지만 동생은 다리를 쭉 뻗고 똑바로 서 있었다.
"언니, 언니가 하는 그 치료의 효과가 가히 기적적이던걸! 언니와 헤어진 다음부터는 내가 내 몸을 치료하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너무 아파서 이러다 죽나보다고 생각했지. 온몸에 검푸른 멍이 들어서 언니가 내 뼈를 부러뜨려 놓은 줄 알았어. 그러더니 그 멍이 누런빛을 띤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나병에 걸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지. 여러 주 동안 발가락이나 귀가 떨어져 나가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어. 대신 비틀린 두 다리가 펴지기 시작하더라구. 믿을 수가 없어서 그때부터 내 몸을 세게 치기 시작했어. 많이 치면 칠수록 다리 근육이 펴지면서 길어지는 거야. 이것 좀 봐. 두 다리가 거의 다 펴지고 살도 많이 쪘어, 이제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다닐 수 있게 됐다구. 내가 얼마나 잘 걷는지 좀 봐줘. 기적이라니까!"
동생의 얼굴에서는 비통함이 사라지고 다시 기쁨의 빛이 감돌았다.
나는 아이들의 교복을 빨며 처음 일주일을 집에서 보냈다. 덕화의 차림새에 제일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여러 번 빨아도 더러움은 말끔히 가시지 않았다.
나는 쓰레기 더미를 샅샅이 뒤져 면으로 된 큼직한 쌀자루 두 개를 찾아냈다. 하나는 검은색으로 물들여 덕화의 잠바 스커트를 만들고, 하얀 자루로는 깃이 달린 블라우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제화점 뒤에서 구두를 주워 오기도 했다. 운 좋게도 아들 녀석에게 신길 신발 한 켤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구두들은 한결같이 왼짝이라는 점만 빼고는 완벽했고,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나니 더 이상은 할 일이 없었다. 음식이 넉넉했더라면 특별 요리를 만들고, 빨 옷이 좀 더 있었더라면 그 옷들을 빨았을 텐데. 하지만 내가 아이들에게 가장 주고 싶었던 것은 우리들만의 집이었다.
그러고 있자니 내가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치료를 하고 있는 동안은 내가 유용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오지도 않는 환자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때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제 아들놈은 아주 착한 아이입니다. 그런데 가끔씩 춤을 추며 돌아다니거나 혼자서 갑작스레 웃고 합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환자의 아버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 농부의 아들은 한 다리를 구부리고 균형을 잡았다가 다른 다리를 구부려 균형을 잡아가며 어설프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는 피가 나도록 씹은 손가락으로 불구인 동생 집의 하나 남은 깨끗한 벽 위에 일그러진 자화상을 그려 놓았다.
"못써! 이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댁 벽에 그런 짓을 해놓다니."
아버지가 아들을 꾸짖었다. 사내아이는 한 팔을 높이 쳐들고 한 손은 입 안에 넣은 채 왼발로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름때 낀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소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밝은 표정에 여자아이처럼 곱상한 얼굴이었다. 내가 옷고름에 손을 대자 소년은 멀찌감치 달아났다. 이 실성한 농부의 아들도 부끄러움을 안단 말인가? 어쨌든 좋은 징후였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게 아니니까.
그때 내가 앞에 있는 이유를 알아챘는지 소년이 말없이 자리에 누웠다. 그래서 소년의 몸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내가 앞으로 할 치료에 대해 사실대로 설명해 주었다. 소년은 내가 자신의 웃옷을 벗기고 마로 된 바지의 끈을 풀어 내리도록 잠자코 있었다.
검게 탄 내 두 뺨이 부끄러움으로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병 환자 수용소에서도 수십 명의 남자를 치료했지만, 얼굴을 붉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몸이 너무 심하게 망가져 있어서 그런 사사로운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던 탓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로 나는 한 번도 그런 육체를 본 일이 없었다. 어깨가 딱 벌어진데다 배는 선박의 방파판처럼 근사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고, 바지를 내리자 성숙한 남자로 자랐음을 말해 주는 빽빽한 검은 털이 손질하지 않은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 비밀스러운 섭리에 당혹감보다는 궁금증이 일었다.
남편과의 결혼 생활 내내 나는 단 한 번도 두 손이나 눈으로 그의 몸을 자세히 탐구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따라서 남자의 인체는 나에게는 여전히 신비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아내가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금지된 비밀의 하나였다. 그와 나의 몸이 하나가 되어 아기를 낳은 한, 그 모든 기능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날의 첫 만남 이후로 소년은 계속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 중국인 유모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아침과 정오, 그리고 밤에 소년을 치료했다. 그러면서 가끔씩 그 흐릿한 두 눈 뒤에 감추어져 있는 소년의 빛나는 지성을 엿볼 수 있었다. 소년을 보면 배가 화끈거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또렷한 사고를 하는 다른 이들과 격리되어 있었던 나 자신의 외로운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소년은 결국 치료로 그 이상한 춤과 벽에 피로 초상화 그리는 일을 중단했다. 그리고 밤새 자고 아침에는 맑은 정신으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소년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생각과 계산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똑똑한 아이를 소 거름에 파묻히게 놔두는 것은 큰 손실이에요."
내가 혀를 차며 말했다.
농부가 내 말을 듣고 이렇게 물었다.
"아주머니는 공부를 시키면 제 아들 녀석이 큰 인물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자신에게 주어진 잠재력을 실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르는 일이에요."
"난 신자는 아니지만, 아주머니 말씀이 맞는 것 같군요. 이 녀석이 학교에 다녀서 제힘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만 있다면, 이 애비 같은 무식한 농사꾼은 되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
"이 아이를 서울로 데리고 가서 대학 시험을 치르게 하세요. 요즘 훌륭한 젊은이들은 다 대학을 나오거든요."
"아이구, 내가 그 녀석을 데리고 가면 땅은 누가 갈아준답디까?"
낙담한 농부가 자신의 두 손을 모아 잡았다.
"제가 데리고 가도록 하죠."
내가 불쑥 말했다. 너무 빠른 대답에 나 자신도 몹시 놀랐다.
"아니, 벌써 이렇게까지 잘해 주셨는데."
농부가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침에 아드님을 데리고 떠나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러한 약속을 한 사실을 안 불구 동생은 불같이 화를 냈다.
"친자식들은 팽개쳐 두고 그 정신지체아의 교육을 맡고 나서다니 도대체 언니는 어떤 엄마유?"
나는 내 딸로 하여금 학업을 위해 몸소 힘겨운 노력을 하게 함으로써 교육의 가치를 가르치는 엄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커다란 사각 면 보자기에 짐을 꾸리면서 아기와 함께 다음에 펼쳐질 모험에 대비했다. 이번에는 덕화를 따로 불렀다.
"난 서울로 간다. 네 이모들이 아무리 나를 욕하더라도 이모들 말씀 잘 듣고 기다리도록 해라. 집을 한 채 마련하는 대로 너와 남동생들을 불러들이마. 덕화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 있도록 내 자리를 잘 메워다오."
"우리도 데리고 가세요."
"넌 여기 있는 편이 낫다. 여기서는 공부도 할 수 있고, 비를 피할 집도 있잖니."
"엄마와 아기는 누가 돌봐 주나요? 엄마에겐 제가 필요한걸요."
"나도 안다. 그게 바로 내가 너에게 남동생들을 잘 보살피라고 부탁하는 이유야."
"우리를 잊지 않으실 거죠?"
"그럼. 곧 너희들을 데리러 오마. 용기를 내라."
농부의 아들은 신작로에서 아기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자그마한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북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둘 다 외로웠다. 신작로를 따라 걷는 우리의 어색한 발자국 소리가 끝없이 펼쳐진 것만 같은 광활한 신작로를 따라 길게 울려 퍼졌다. 그 낯익은 모습은 힘겨웠던 피난길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황량한 길을 따라 한동안 걷고 있을 때, 뒤쪽에서 흐릿한 불빛이 다가왔다. 나는 내 모습이 잘 보이도록 길 한가운데 서서 다가오는 트럭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트럭은 바로 앞에서 멈추어 섰고, 뒤에 실린 닭들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나는 재빨리 운전석 쪽으로 달려가 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도 운전하는 흔쾌히 그렇게 해주었다.
그는 홀아비가 된 자신의 비참하고 불행했던 과거사에 대해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우리는 이전에도 지나칠 만큼 많이 여러 입을 통해 들었던 비극적인 전쟁 이야기, 그 뻔한 사연을 다시 들어야 했다. 내릴 때가 됐을 때에는 모든 감정이 완전히 고갈되어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는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우리가 다시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농부의 아들과 아기와 나는 그 소년의 삼촌이 산다는 서울 교외의 판자촌으로 갔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고, 그 집으로 가는 골목길은 가로등으로 흐릿하게 밝혀져 있었다.
소년의 삼촌네 집은 자그마한 선물 가게 지하에 있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동전으로 그 가게에서 연필 한 자루를 샀다. 가게 주인 여자는 그 돈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펴보더니 매섭게 눈을 흘기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시하는 말투로 "진짜 같긴 하군"이라고 중얼거렸다.
불안해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아다니며 우리 모두를 깨워 대는 농부의 아들 때문에 나는 아주 잠깐 동안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마침내 통금 해제 사이렌이 울었고, 우리는 연세대학교로 갔다.
나는 우선 소년을 데리고 학교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 그곳 언덕에서 우리는 잔디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면 말이 너무도 쉽게 풀려 나왔다. 할 말을 다한 다음에는 소년에게 연필을 깎아 주었다.
"조심조심 아껴서 쓰도록 해라. 네가 가진 건 이게 전부니까. 살살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심이 부러진단다."
"네, 아줌마. 손에 힘을 다 빼고 쓸게요."
대학에 도착해 보니 값비싼 승용차의 물결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불안해 보이는 학생들과 부모들이 정문 주위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소년은 연필을 손바닥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이 부유한 도시 사람들을 보니 못 올 곳에 왔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이 길로 돌아서서 집으로 가요."
소년이 기운 없이 말했다.
"돌아가자구? 넌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아이로구나. 널 서울로 데리고 오느라고 네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데. 지금이 바로 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내가 엄한 말투로 나무랐다.
"여긴 제가 있을 데가 아니에요, 아줌마. 전 고작 농사꾼의 아들이지, 학자의 아들이 아니라구요."
소년이 시선을 떨구었다.
"맞아. 네 아버지는 널 소달구지에 태워 이곳으로 데려올 생각도 못 하는 무식한 농사꾼에 지나지 않아. 네가 가진 것은 이 연필과 하나님뿐이야.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단다."
소년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내가 말했다.
다른 학생들과 함께 줄을 지어 잿빛 시멘트 건물로 들어가는 겁에 질린 소년을 위해 나는 다시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걱정하고 있는 다른 부모들과 함께 밖에서 기다렸다. 불길한 기운의 접근을 막고 똑똑한 영혼을 부르는 온갖 종교의 상징물과 행운을 비는 부적이란 부적은 그날 그곳에 다 모여 있는 듯했다. 주위의 모든 학부모들이 몸을 흔들며 앞뒤로 서성거렸다.
마침내 시험이 끝나고, 학생들이 떼를 지어 몰려나왔다. 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고개를 길게 빼고 농부의 아들을 찾았다. 소년은 이제 몽당연필이 되어버린 그 연필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아줌마, 보세요. 부러뜨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조심했는지 몰라요."
소년이 자랑스레 웃어 보였다.
"잘했다. 이제 입학해서 쓸 필기도구가 있어야겠구나."
이 말에 소년은 더 밝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소년이 희망에 찬 음성으로 물었다.
"물론이지."
내가 아무리 자신 있게 이야기해도, 소년과 삼촌의 불안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초조하게 걱정을 하며 점수가 발표되기를 기다렸다. 예정된 날, 우리는 일찌감치 연세대학교로 갔다.
게시판의 주위에는 벌써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조그맣게 쓰여진 이름의 긴 목록이 길다란 게시판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이름들 제일 위쪽에 소년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제일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었다. 소년과 삼촌은 무척 기뻐했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은 채 어린아이들처럼 즐겁게 춤을 추었다. 그 자리에 그냥 있기에는 나에게 너무 걱정거리가 많았다. 이제 소년의 학비를 대고 살 집을 마련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나는 난감한 처지에서 벗어날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머리를 짜내며 하릴없이 거리로 나와 사흘 동안을 정처 없이 걸어 다녔다. 삼촌은 우리가 폐가 되지 않는다고 고집했지만, 너무 오래 그 집에 있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흘째 되던 날에는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문숭선교재단으로 찾아갔다. 이 친절한 사람들은 열린 가슴과 동정하는 마음으로 내 문제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소년을 받아들이고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들 또한 소년처럼 천재적인 젊은 영혼이 시들어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선교사들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서둘러 소년을 데리러 갔다. 소년과 함께 돌아와 보니, 서까래마다 그의 이름이 쓰여진 축하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고, 작은 촛불이 꽂힌 둥근 케이크가 쟁반에 담겨 나올 때에는 모두들 박수를 치며 즐겁게 환호했다. 그 바닐라 케이크는 무척 맛이 좋았다. 처음 먹어 보는 데다 너무 달콤해서 나는 부스러기 하나까지 음미하며 먹었다.
축하 파티가 끝나기 전에 나는 그 자리를 몰래 빠져나왔다. 지난 몇 년 동안 내세에서까지 해야 할 몫의 이별을 모두 치룬 터였다. 게다가 통금 사이렌이 울기 전에 아기와 내가 쉴 곳을 찾아야 했다.
나는 복구된 도시를 살펴보며 이리저리 헤메고 다녔다. 서울을 마지막으로 본 건 부산으로 피난 가던 도중이었다. 서울이 별로 쓸모없는 땅이라는 남편의 생각은 옳지 않았다. 나는 폭탄에 맞아 폐허가 된 건물과 땅들의 신속하게 부유한 도시로 재건된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벌써 인구도 제법 불어난 상태였다.
도시인들은 시골에 사는 우리들보다 더 많은 이점을 누리고 있었다. 이들은 거의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듯했다. 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위협에 가까운 이질감을 느꼈다. 이들은 한쪽은 갈색, 다른 한쪽은 회색으로 팔꿈치를 기운, 거친 삼베 치마저고리를 입은 내 모습에서 한눈에 북한에서 온 피난민임을 알아보았으리라. 나는 사람들 틈에서 엄마와 아기를 받아들여 줄 만한 선한 인상을 찾았다. 하지만 모두들 무뚝뚝한 시선을 돌려보낼 뿐이었다.
철저하게 거부당한 느낌이 든 나는 어두운 골목길로 몸을 숨겼다. 십 대 소년 한 명만이 먼 곳에서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소년은 보폭을 늘려 걸으며 어깨너머로 계속 나를 돌아보았다. 나를 아기를 업은 도둑쯤으로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예천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덕화에게 용기를 내라고 말한 마당에 이렇게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처절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토록 절망적인 순간이면 나는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곳에 나를 사랑하는 분이 계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그분은 기워 입은 옷이나 평양 사투리로 나를 판단하는 분이 아니기에.
나는 유일하게 알고 있는 부랑자들을 위한 안식처로 갔다. 그 교회는 믿음의 전당이라기보다는 마치 감옥처럼 보였다. 틈이 벌어진 출입구 위쪽에 삐딱하게 걸려 있는 조잡한 나무 십자가만 아니라면 그냥 지나칠 뻔했을 만큼. 안에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더러운 맨 벽에 제단조차 없었다. 누군가 불을 때는 데 쓴 것 같았다.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의자들뿐이었다.
그곳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몸을 쉬러 온 나 같은 이들이 많았다. 나는 가장 가까운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들었다. 나는 고무신을 벗고 앞줄에 있는 의자 뒤로 머리를 기댔다. 조금씩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기도도 하지 않고 그대로 쉬고 있었다.
잠깐 잠이 들었는지 나는 용운이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깨어났다.
"용운아, 용운아! 엄마 여기 있다."
"괜찮으세요?"
기운 없는 음성이 물었다.
뒤에 있는 부인의 목소리였다. 옷차림을 보니 부유한 집안의 여자였다. 하지만 부어오른 얼굴과 두 손이 건강이 무척 좋지 못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네, 고마워요."
아직도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대답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악몽을 꾸지 않는 사람이 없지요."
부인은 통증을 덜어보려는 듯 손가락을 비비며 말했다.
"손을 보니 상당히 아프시겠어요."
내가 말했다.
"네, 그래요."
부인이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혀를 보여 주세요."
내가 대담하게 제안했다. 부인의 혀는 하얗고 두꺼운 더께를 뒤집어쓴 채 부어 있었다.
"부인에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있어요. 분명히 건강을 되찾아 드릴게요. 괜찮으시다면 치료를 해드릴 수 있어요."
"어디서 오셨어요?"
"아무 데서도."
"어디로 가는 길이세요?"
"갈 데가 없어요."
"그렇다면 아줌마 말대로 하려면 우리 집으로 가야겠군요. 남편도 몹시 아프거든요."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 부인은 병자인 남편과 함께 비교적 괜찮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다른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그 남편의 건강은 전쟁 후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해 더 악화되어 있었다. 병이 나기 전에는 존경받는 음대 교수였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방구석에서 쇠약해진 몸을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기운이 없어 손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상태였다.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가끔씩 일하는 사람들이 몸을 움직여 주어야 했다.
그의 누런 눈동자를 보는 순간, 온몸에 독이 퍼져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피를 깨끗이 해서 모든 기관과 사지로 쉽게 흘러 들어갈 수 있게 해주어야 했다.
"이곳에서 할 일이 많군요. 당장 시작해야겠어요."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나는 그 교수와 교수의 착한 아내를 매일 치료해 주었다. 많을 때는 두 사람 모두 번갈아 가며 하루에 두 번씩. 점차 교수의 피부색과 체온이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교수는 고개를 들기 시작하더니 그다음에는 혼자 힘으로 앉았다. 그 후 얼마 안 돼 그는 두 발을 딛고 일어서서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강단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무엇이든 말해 봐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드릴 테니."
교수의 아내가 관대한 제안을 해왔다.
"아기와 저를 이 집에 있게 해주신 걸로 충분해요."
"그렇다면 계속 여기 있으면서 아주머니가 내킬 때까지 우리와 함께 살도록 해요. 아주머니의 치료는 아주 훌륭해요. 많은 이들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우리 집에서 그런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어도 좋아요. 돈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남편과 내가 아주머니와 아기를 먹이고 입혀 줄 테니까."
나는 한동안 그 집에서 일하며 그들과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우리 셋은 아주 쉽고도 자연스럽게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동생들이나 남편 이외의 사람을 말동무로 삼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실 혈연으로, 결혼의 끈으로도 맺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담도 더 없었다. 기대도 실망도 없었으므로 사소한 일로 법석을 떨 일도 없었다.
이들의 후원과 소개로 매일 끊이지 않고 환자들이 찾아왔다. 내가 사기꾼인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러 온 이들이었다.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님을 고백하고, 그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떤 이들은 나를 성실한 고문관 정도로 생각했지만 대다수는 치료의 효과를 널리 알리는, 믿음을 지닌 추종자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생활은 안식처에 대한 갈망만을 부채질했다. 평생 그토록 절실하게 내 집을 원했던 적이 없었다. 내 아이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 헝클어진 우리의 뿌리를 다시 내리고 단출해진 식구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곳.
하나님이 내 말 없는 기도를 들으셨는지, 어느 날 강씨 성을 가진 지체 높은 분이 나를 찾아왔다. 그분의 형은 적절한 조치를 받지 않으면 몸의 모든 구멍으로 피가 배어 나오는 내출혈을 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검은색 고급 승용차로 운전사가 나를 데리러 왔다. 그토록 고급스러운 승용차에 오르니 내가 아주 중요한 사람의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의자에는 갈색 가죽이 씌워져 있었고, 흰색 레이스로 장식된 쿠션과 방석이 놓여 있었다. 나에게 세 마디도 채 하지 않은 그 운전사는 새하얀 장갑을 끼고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차바퀴를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그를 바라보면서 그가 참 근사한 직업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변소를 청소하거나 밭을 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임에 틀림없었다.
높다란 대문이 우뚝 솟아 있는 어느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대저택의 내부는 값비싼 커튼과 크리스털 샹들리에,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값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물건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잘못해서 내가 사줄 능력도 안 되는 물건을 깨뜨릴까 봐 겁이 났다.
현관 입구에서부터 내가 서 있는 곳에 이르는 통로 바닥에는 값비싼 카펫이 깔려 있었다. 나는 내 고무신과 내가 방금 남긴 진흙 발자국을 슬쩍 보았다. 들어가기 전에 그 자국을 없애고 싶었지만, 옷을 잘 차려입은 하인이 들어오라고 말하며 이 집에서는 서양의 관습을 따른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우리 집에서는 이런 이상한 관습을 절대로 따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가정의 생활공간 안에서 신발을 신어서는 안 되었다. 내가 할 일만 늘어날 뿐이니까.
나는 여러 달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생활하고 몸을 씻어 주면서 그 사람을 치료했다. 점차 그의 대변에 피가 덜 섞여 나오기 시작하더니 몸에 살이 오르고 가끔은 농담을 하기까지 했다. 의사들은 그의 회복을 진단을 잘못 내린 탓으로 돌렸지만, 강씨의 형과 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감사의 표시로 홍릉 부근에 좋은 집을 한 채 지어 주었다. 나는 너무나 기뻤다. 커다란 철 대문에 시멘트벽이 둘러 처져있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베란다를 갖춘 널찍한 집이었다. 옥외 변소를 제외하고 방이 일곱 개나 되었다. 가장 넓은 방은 복도 끝에 있었다. 그 방의 미닫이문 위에는 손으로 깎은 바둑판만큼이나 큰 문패가 걸려 있었다. 문패의 글씨가 너무 커서 시력이 나쁜 사람도 집의 반대쪽 끝에서 그 사무실이 내 방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 삶이 달라졌다. 원하든 원치 않든 환자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고, 단골 고객들 중에는 회사 사장, 유명 오페라 가수, 잡지 편집장, 학교 설립자, 그리고 국회의원도 끼어있었다. 이들은 새벽 다섯 시 정도의 이른 시각에 운전사가 모는 자동차나 들 것이나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나를 찾아왔다.
나는 쉬지 않고 일했지만 생각만큼 일이 빨리 진행되지는 않았다. 두 손이 얼얼해서 환자들을 세게 치면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아팠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모든 신경과 혈관이 터져 버릴 듯 고동쳤다. 도와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치료의 효과를 부정하면서도 와서 나를 도와주곤 했던,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의존했다. 연필 한 자루 쥘 수 없는 지경이 된 나는, 동생들에게 조카와 내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와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받아쓰게 했다.
서울에 와서 수척해진 내 모습을 본 동생들은 나를 탓하지 않았다. 모두들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를 도와주었다. 동생들은 나만큼 열심히, 아니 나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환자들이 줄어들기는커녕 곱절로 늘어나서, 우리 집 뒤의 작은 언덕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때로는 기다림에 지쳐 자포자기 상태에 이른 사람들이 밀고 당기는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싸움이 하도 잦아지는 바람에 공정하게 번호표를 나누어 주는 방법을 고안해 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먼저 온 사람이 먼저 치료를 받는다는 원칙하에 1부터 수백까지의 숫자가 쓰여진 작은 종이를 나눠 준 것이었다.
나는 치료를 배우고 싶어하는 모든 여인을 받아들여 비법을 전수하는 실습을 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이 들어오면서 빌릴 수 있는 손도 늘어났다. 시멘트로 지어진 우리 집에서는 새벽부터 통금 시간까지 치료를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내 귀에는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리는 그 소리가.
덕화의 천생연분, 한국판 엘비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너무도 많은 인파가 대문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나는 아이들이 크는 것도 거의 모르고 지냈다. 너무 바빠서 아이들의 졸업식에 참석하지도, 생일을 기억하지도 못했음은 물론이고.
나는 덕화가 영원히 엄마의 작은 대리인 역할을 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덕화에게는 나름의 꿈이 있었고, 내게서 멀어져 자신만의 삶의 길을 걷는 여인으로 성숙해 갔다.
지금, 보다 맑은 정신으로 돌이켜보건대 나는 덕화에게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나는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잠잘 곳을 제공한 것만으로 내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덕화는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더 많이 먹고, 집안일도 좀 더 하라고 잔소리를 하는 엄마를 원했고 필요로 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혼자 알아서 잘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덕화는 무척 대담했고 자립심이 강했다.
다른 엄마들이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까 봐 조바심을 칠 때도 나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다. 나는 덕화가 그 같은 도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자신이 선택한 대학에 들어갈 것임을 믿고 있었다. 실제로 덕화는 그렇게 해주었다. 고려대학교는 한국에서 제일 좋고 유서가 깊은 대학에 속한다. 나는 무척 자랑스러웠다.
당시에 나는 덕화가 일찍 잠자리에 들 때 말고는 딸애를 거의 보지 못했고, 일요일에 예배를 보러 가는 길만이 덕화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나는 멀리서 덕화를 바라보는 카키색 군복을 입은 젊은 청년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청년은 덕화를 한 번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늘 교회 밖의 나무 뒤에 몸을 반쯤 숨기고 있었다.
덕화는 동년배와 교수님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자신감 있고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꽃피웠다. 모두들 덕화가 지닌 품위와 남자다운 강인함에 탄복했다. 하지만 외모에는 남자다운 면이 조금도 없었다. 1미터 60센티미터 정도의 큰 키에 가슴에서 장딴지에 이르는 부드러운 곡선을 지니고 있었고, 완벽한 34 36 23 36 34의 몸매였다.
그 젊은 군인을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어느 대학 파티에서 당시 3학년이던 덕화와 처음 만났다. 나는 젊은 총각과 처녀들이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만나는 소위 ‘미팅’이라는 것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나는 덕화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전쟁으로 빼앗기고 나중에는 책에 파묻혀 잃어버린 덕화의 청년기를 보상받아야 할 시기였으므로.
청년은 군에서 필요로 하는 1년간의 전파 탐지 교육을 받고 막 미국에서 돌아온 상태였다. 그는 새로 풀을 먹인 빳빳한 흰색 장교복을 입고, 미국의 인기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는, 어깨를 뒤로 제치고 턱을 높이 쳐든 채 잘난 척을 하며 서 있었다. 얼마나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던지, 젊은 처녀들은 모두 부끄러워 눈을 내리깔면서도 그 청년을 흠모했다.
그날 밤 청년에게 어울릴 만한 아름다운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그 청년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덕화와 친구 석희는 당시의 처녀들이 의레 그랬던 것처럼 파티장에 늦게 도착했다. 키 1미터 50센티미터가 될까 말까 한 아담한 처녀 석희는 짧은 파마머리에 새로 산 분홍색 재킷과 폭넓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그곳에서 가장 키가 큰 여학생보다 2, 3센티미터는 족히 더 큰 덕화는 머리를 하나로 묶은 리본과 잘 어울리는 녹색 투피스 차림이었다. 파스텔 색조로 차려 입은 두 명의 사랑스러운 여인이 들어서자, 인사를 나눌 생각으로 젊은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남자 경쟁자들이 둥글게 모여 있는 모습을 본 그 잘생긴 장교는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두 여인의 모습은 점점 더 마음으로 다가왔다.
"저는 이재학입니다."
청년은 이 여인들에게 자신의 남자다움을 깊이 각인시키려고 낮게 울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덕화와 석희는 청년의 잘생긴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다른 구애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무 잘생긴 남자의 주변에는 따르는 여자들이 많은 법이었으므로, 그러자 청년은 자부심에 위기를 느꼈다. 그래서 좀 더 과감해지기로 했다.
"저는 어-멜-리-카의 뉴저지에서 전파 탐지 기술 교육을 받고 방금 돌아왔습니다."
청년이 잘난 체하며 끼어들었다. 두 사람을 놀라게 할 영어까지 몇 마디 구사하면서. 결국 그는 덕화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곳은 어떤가요?"
"어-멜-리-카는 모든 게 큽니다. 할 일도 볼 것도 아주 많은 곳이죠. 커다란 극장에 가면 아무 때고 벽 위에 비춰지는 총천연색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에르-비스 플레-스리를 좋아합니다."
청년은 자랑스럽게 웃으며 기름을 발라 넘긴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자신의 우상이 영화에서 하는 모습을 수십 번 본 그대로.
"셋째 조카가 그곳에 다녀왔어요!"
눈이 큰 어느 청년이 덕화의 관심을 돌려 보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저도 먼 친척 아저씨 한 분이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계세요!"
자신을 부각시키려 애쓰며 또 다른 청년이 말했다.
재학은 이 여인들을 빼앗아 가려고 열을 올리는 많은 얼굴들을 밀어냈다.
"두 분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제가 모두 말씀드릴게요. 하지만 다른 곳으로 가야겠습니다. 제가 두 분께 코-피를 사 드리겠습니다."
석희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최초의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될 터였다.
‘어머, 재미있겠다."
석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킥킥거렸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럴 수 없겠는걸요."
덕화는 즉시 제안을 거절했다.
"코-피 한 잔인데 뭘 그러니. 어머니는 까맣게 모르실거야. 게다가 지금은 새로운 시대잖니. 우리는 현대 여성이고."
석희가 덕화를 달랬다.
"딱 한 잔이야. 너 약속하지?"
덕화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래. 딱 한 잔."
석희가 되풀이해서 말했고, 둘은 손가락을 걸었다.
밖으로 나갈 때, 두 여인은 재학이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문 옆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재학은 가볍게 문 쪽을 가리켜 보였다.
"어-멜-리-카에 있을 때 남자가 문을 열고 여자가 먼저 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두 여인은 기분이 좋았다. 여태까지 만났던 한국 남자들은 모두 자신이 앞장을 섰으므로. 이토록 특별한 대우를 받자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재학은 출입문을 열고, 두 사람의 외투를 받아 걸고, 의자를 내주었다. 그리고 미국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로 두 사람에게 커피 한 잔 이상의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세 사람은 여러 시간 동안 다양한 종류의 케이크를 맛보며 커피를 마셨다. 삼각 데이트가 끝날 무렵의 늦은 반 시간에 재학은 두 사람에게 굴찜과 떡볶음. 그리고 쇠고기찜을 대접했다.
"드시고 싶은 건 뭐든 주문하십시오."
재학은 지갑이 두둑한 것처럼 과시했다.
"벌써 돈을 너무 많이 쓰셨는걸요."
덕화가 사양하는 뜻을 나타냈다.
"그래서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담배도 못 피우고 지내게 됐습니다. 하지만 오늘 만남은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덕화는 담배를 무척 싫어했지만, 재학에게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 저명인사처럼 보였으므로.
세 사람은 배가 잔뜩 불러 헤어졌다. 덕화는 그 젊은 장교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미련도 남지 않았다. 2, 3주가 흘렀고, 덕화는 그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었다. 적어도 청년이 덕화와 단둘이 만날 일을 꾸미기 전까지는. 그는 구멍가게에 덕화에게 보내는 메모를 남겼다.
"내일 오후 세 시에 대학 정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세파에 지친 뚱뚱한 여인이 계산대 뒤에서 메모를 읽는 덕화를 흥미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재미난 뒷소문의 주인공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덕화는 그 종이쪽지를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그 여인에게 공손하게 감사의 표시를 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겉으로는 차분하고 침착해 보였지만, 내면은 자신과 만나려는 그 어리석은 군인에 대한 분노로 끓어올랐다.
다음날 학교에 간 덕화는 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일찍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 덕화가 나타나지 않자, 그는 이튿날 다시 대학 정문으로 와서 덕화를 기다렸다. 며칠 동안 그곳에 서 있다 보니 그는 수위들에게 친숙한 얼굴이 되었다.
재학의 자부심이 또 한 번 위기에 처했다. 그는 이 오만한 여인에게 매혹되었다. 재학은 덕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머리에서 몰아내기 위해 어여쁜 다른 여인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신만만한 이 여인의 모습은 더욱 강렬하고 절실하게 되살아날 뿐이었다. 그는 이 여인을 다시 만나 사랑을 얻어내기로 했다.
교회에는 주일마다 교회 밖에 숨어서 기다리는, 상사병에 걸린 잘생긴 군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았다. 나는 그러한 청년은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에 소문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낯선 청년이 자기를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내가 눈치챌까 봐 겁이 난 덕화는 더 이상 재학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 그와 만나기로 했다.
재학은 덕화를 용산에 있는 미군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점심을 사주었다. 스테이크와 으깬 감자 요리를 먹으며 그는 덕화에게 자신의 꿈을 털어놓았다.
"저는 언젠가 다시 어-멜-리-카로 갈 겁니다.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좋은 집과 차도 살 생각입니다. 첫째는 귀여운 딸이었으면 좋겠고, 그 밑으로는 아들이 한둘 있었으면 합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기를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재학의 말을 가로채며 덕화가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커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적이고 존경받는 어른이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동양인인 이 아이들을 보고 한국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지를 알 수 있도록요."
재학은 경외심 같은 것을 느꼈다. 이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어디서 이런 지혜를 얻은 것일까? 덕화도 자기와 같은 꿈을 가진 이 젊은 청년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두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서로의 마음을 빼앗겼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거의 닿을 듯 가까이 놓은 채 말없이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두 사람은 석 달 동안이나 나 몰래 은밀히 만났다. 예전의 관습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이 함께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현대적이고 반항적인 젊은 연인이라 해도 사람들 앞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고, 남자와 여자가 드러내놓고 손을 잡는 것이 놀랄 만한 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그래서 재학은 그날 대담하게 덕화의 손을 잡고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말했다. 덕화는 재학의 손바닥을 통해 그의 심장이 마구 뛰고 있음을 느꼈고, 그도 자신의 심장이 고동치고 있음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덕화는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최후의 허락은 어머니인 나에게 달려 있었고, 덕화는 내가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할 것임을 잘 알았다.
"하지만 착하고 교육도 잘 받은 사람인걸요."
덕화가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
내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청년의 어머니가 불교 신자라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자와는 결혼할 수 없다."
"일단 결혼하고 나서 제가 그 사람을 개종시킬게요, 엄마."
"결혼으로 남자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영혼이 달라져야 하니까."
"제발 한 번만 만나 보세요. 그 사람 이름은 이재학이에요. 엄마한테 드릴 말씀이 있대요."
"안 돼!"
나는 더 완강하게 말했다.
"은혜를 모르는 계집아이 같으니라구. 빨갱이들에 대해서 잊었단 말이냐? 나는 불교 신자에게 모든 것을 다 주어 버리려고 우리들과 네 아버지. 그리고 큰오빠의 생명을 걸지는 않았다. 의사 같은, 네게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을 찾아 주마. 그 군인은 잊어버려라.
제 신부를 직접 고르는 남자가 어디 있단 말이냐? 나는 중매로 결혼했다. 그래야만 상대방의 배경과 가문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법이다. 그 군인의 이씨 혈통이 네 아버지의 조상과 같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니? 그 군인은 우리의 먼 사촌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바보가 태어나게 된다구. 중매쟁이를 거치면 그런 비극적인 실수는 피할 수 있단다."
"우리 두 이씨 가문은 본이 다른걸요. 그러니 위험하지 않아요."
"하지만, 오점은 남는다. 사람들은 네가 친척하고 결혼하는 줄 알 거다."
"엄마. 이제 시대가 달라졌어요. 젊은 사람들 중에는 자기 짝을 직접 고르는 사람이 많다구요."
"그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야. 결혼은 가족 전체가 걸린 중대사야! 너무 중요한 일이라서 혼자서 결정할 문제가 못 된다. 몸으로 느껴지는 열기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 그 몸은 늙고 정열은 사그라드는 법이야. 엄마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나는 네 앞날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흥분으로 내 심장이 고동쳤다.
재학의 이름이 거론된 후로 우리 집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아이들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걷게 하는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의 내 의무였다. 하지만 당시는 실로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고, 젊은 사람들은 부모의 말을 무시하고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재학이 어른이나 친척, 아니면 중매인 한 사람 동행하지 않고 혼자 우리 집에 나타난 것은 관습을 완전히 무시한 행위였다. 집에 도착해 보니 재학이 내 동생들과 조카딸 부부, 그리고 덕화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덫에 걸렸음을 직감한 나는 한쪽 고무신은 벗고 한쪽 고무신은 신은 채로 현관에 서서 딸 옆에 앉아있는 군인을 노려보았다. 모두들 내가 화내기를 기다리며 죄지은 듯한 눈빛으로 시선을 피했다. 나는 말없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광경이었다. 특히 미래의 사위가 그러했다. 그는 남편처럼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 점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너무 잘생긴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끝없는 고통과 외로운 밤을 가져다줄 뿐이었다.
"이모, 앉으세요."
불구 동생의 딸이 애원하듯 말했다.
"왜 앉아야 해?"
내가 불쾌한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
이제 방에서 나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문제를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막냇동생이 내 뒤로 미닫이문을 닫았다. 나는 이 고집스러운 연인의 앞에 앉았다. 청년은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 똑바로 앉아있었고, 덕화는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타는 듯이 행동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오늘 모두를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고집스러움과 흔들림 없는 신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생들은 가장 많은 양의 차와 음식을 내 몫으로 내놓으며,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 모두들 방안의 굳은 침묵을 감추기 위한 거짓 웃음과 대화에 서서히 지쳐 갔다.
"덕화 친구가 우리에게 완전히 미국식인 이 신기한 케이크를 가져다주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막냇동생이 상냥하게 말했다.
"이렇게 달콤하고 ....이런 건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어요."
불구인 동생이 설탕 덩어리라도 삼킨 듯 호들갑을 떨었다.
"좀 먹어봐요, 언니."
동생이 검은 초콜릿이 여기저기 녹아 있는 둥그런 케이크를 건넸다.
내가 좀처럼 입을 열려 하지 않고 내 마음을 돌려 보려는 시도가 모두 허사로 돌아가자, 모두들 점점 당황해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이미 대답을 했는데도 넌 이 결혼을 고집하는구나."
모두들 내가 목소리를 높일 것이라 생각하며 겁이 나서 머뭇거렸다. 하지만 나는 냉정하고도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 청년 이야기 좀 들어 봐요. 우리는 언니 딸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어. 덕화도 이제 스물두 살이 되어 가는걸."
막냇동생이 두 사람을 옹호하고 나섰다.
"덕화에게 남편감을 찾아 줘야 하는 내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야. 나도 그러한 나 자신을 탓하고 있어. 하지만 이 청년은 내 딸과 맺어 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야."
"어머님께서는 덕화 씨가 기독교 신자와 결혼하기를 바라신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의 결혼을 허락해 주신다면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말을 시키지 않았는데도 재학이 또 한 번 불쑥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되도록 이 사람을 도울게요. 엄마."
덕화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어떻게 하겠는가? 꽃피어 나는 젊은 사랑이 두 사람에게 이토록 굳건한 믿음을 주는 것을. 두 사람은 서로의 최면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더해야 너희들 마음을 바꿀 수 있겠니. 알겠다.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나는 냉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머니로서의 깊은 상실
그렇게 해서 결혼 날짜가 잡혔고, 약속된 날은 순식간에 다가와 두 사람은 그해 겨울의 맑고 차가운 어느 날 결혼식을 올렸다. 서구의 현대적인 결혼식을 본딴 예식이었다. 나는 목사님을 모시고 기독교식으로 식을 올려야 한다는 점 한 가지만 고집했고, 약간의 설득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불교 신자인 재학의 어머니까지 모두가 찬성해 주었다.
결혼식 날에는 내가 특별 주문한 부케가 아침 일찍 도착했고, 부자만이 대접할 수 있는 고급스러운 음식이 실린 자동차를 끌어 줄 친구들도 일찍 와 주었다. 이들의 관대한 마음씨와 열의는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서글픈 감정은 어찌할 수 없었다. 결혼식이 경사스러운 일임은 잘 알고 있었지만, 내 딸이 결혼해서 다른 가족의 일원이 된다고 생각하니 몹시 가슴이 아팠다. 나는 그러한 감정을 피해 보려고 아침 내내 일부러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은 끊임없이 되살아났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나는 덕화가 내가 젊은 시절에 격었던 것과 똑같은 괴로움을 겪게 될까 염려스러웠다. 나는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상대를 사랑하지도 않고, 그의 전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 사람에게서 기대하는 것도 없다면, 실망할 것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역사하셨다. 내가 그러한 시련을 견뎌 낼 수 있고, 그러한 경험으로 성숙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남편을 내 삶으로 보내셨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불현듯 세상을 떠난 남편이 그리워졌다. 육체적인 외로움이 아니라, 동반자가 없는 데서 오는 외로움이었다.
웨딩드레스에 부케를 들고 서 있는 덕화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덕화는 이상적인 한국 여인의 아름다움을 말해 주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 주었다. 순수하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잊혀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완벽한 말을 찾았다. 덕화에게 앞으로의 힘겨운 삶에 도움이 될 만한 지혜를 전해 주고 싶었다. 그때 내가 출가하기 전에 들은 친정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비결에 관한.
‘여자는 한 가정의 초석이므로 모름지기 강인한 반석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네 힘과 의지로 남편을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남편으로 하여금 힘과 의지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해라. 가정의 평화와 행복은 네게. 너 하나에 달려 있다. 남편을 이끌어서 가능성을 모두 이루도록 도와주어라.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편과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을 하나님의 빛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덕화는 하얀 실크 드레스를 입고 다소곳하게 선 채로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의 깊게 듣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 말아라. 넌 굉장히 운이 좋은 아이다. 너희 둘은 사랑으로 서로를 선택했다. 모두가 그런 행운을 누리는 게 아니란다. 함께 인생을 즐기도록 해라. 단1초도 낭비하지 말고."
객석은 축하객으로 가득했다. 모두 내 친구와 내 환자들이었다. 재학이 중앙의 통로로 걸어 나왔다. 건장한 그의 친구들 중에서도 그는 유독 키가 크고 자신감에 넘쳐 보였다. 그가 앞에 서자, 낯설고 시끄러운 음악이 신부의 등장을 알렸다. 덕화는 남자 친척의 팔을 잡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음악에 맞춰 조심스럽게 걸었다. 덕화의 얼굴은 얇고 하얀 베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덕화는 어느 쪽으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눈은 일제히 덕화를 향해 있었다.
목사님이 재학에게 덕화를 아내로 맞이하겠냐고 물었을 때, 그는 벽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대답했다. 하객들의 숨죽인 웃음 소리가 터져 나오자, 그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은 몇 분 만에 부부가 되었다. 신랑과 신부는 하객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식이 끝났다. 그 순간 덕화가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덕화의 눈망울에 고마움이 서려 있었다. 덕화는 내 눈에서 무엇을 보았을지 궁금했다. 내가 가슴 아파하고 있음을 눈치 챘을까?
덕화는 내가 앉아있는 맨 앞줄의 의자 주변에서 남편의 팔에 손을 낀 채로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신랑이 곧 덕화를 데리고 가 버렸다. 덕화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재학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바라던 대로 딸을 얻게 될 것 같았다.
아홉 달 뒤의 두 사람은 새로운 식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덕화가 아기를 낳으러 친정으로 올 것이었으므로 나도 아기가 태어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사위가 근무지를 옮기면서 덕화를 부산으로 데려가 버리는 바람에 무척이나 외로운 시간을 보내던 터였다. 나는 내내 울며 지냈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보다 더 많이 울었다.
덕화는 착실히 편지를 보내왔다. 그 애는 내가 일을 얼마나 하고 휴식은 충분히 취하는지에 늘 관심을 기울이는 착한 딸이었다. 나는 덕화가 보내온 편지들을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젊은 아내로서의 덕화의 생활은 나의 그것과 판이하게 달랐다. 장남과 결혼하지 않은 덕화는 행운아였다. 사위는 시어머니의 감시의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고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아내를 데리고 다닐 수 있었으니까.
덕화가 도착했을 때, 나는 산모의 상태가 양호함을 알 수 있었다. 덕화는 어머니가 된다는 기쁨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아기의 탄생은 덕화를 나뿐만 아니라 전 세대의 모든 여인들과 더 가깝게 해줄 것이며, 덕화는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그들의 유산을 기릴 것이었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보다 큰 영광도 기쁨도 없음을 곳 알게 될 것이었다.
덕화는 모성애로 성숙해졌다. 이제는 오만함으로 내 인내심에 상처를 입히곤 했던 고집불통의 계집아이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내가 치료를 해주려고 옷을 벗으라고 하면 몸을 숨기곤 했지만, 이제는 배가 얼마나 나왔는지 보자고 하면 말없이 복대를 풀었다.
배는 불룩하고 살은 팽팽했지만 아들인지 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나는 끝에 지우개가 달린 연필 한 자루와 바늘, 그리고 실을 준비했다. 바늘에 실을 맨 다음, 그 바늘로 연필의 지우개 부분을 찔렀다. 그런 다음 연필심이 아래로 오도록 해서 덕화의 손목 위에 그 연필을 늘어뜨렸다. 나는 연필이 움직일 때까지 손으로 실 끝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앞뒤나 양옆으로 움직이면 사내아이임을 뜻했다. 하지만 연필은 서서히 둥글게 둥글게 돌기 시작했다. 계집아이였다.
놀랍게도 아기의 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낡은 사고방식이 바뀐 것이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못다 베푼 사랑을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보란 듯이 쏟아부을 작정이었다.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은 부모의 의무지만, 아이들을 망쳐 놓는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특권이었으므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진통이 시작되자마자 덕화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당시에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만이 집에서 아기를 낳았다. 나는 그러한 현대적인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딸의 출산을 돕지 못하게 되자 속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나를 대기실로 내쫓으며 이방인 취급을 했다. 딸애가 허연 환자복을 입고 낯선 사람들 틈에서 고통을 겪을 것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너무도 건강한 손녀딸을 품에 안는 순간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온통 짤막짤막한데다 분홍빛이 나는 너무도 조그마한 생명이었다. 아버지의 쌍꺼풀진 커다랗고 둥근 어머니의 조용한 품위를 이어받은 아기였다. 나와 닮은 곳이 있는지 얼굴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았다. 아무 데도 닮은 곳이 없음을 확인하자 마음이 놓였다. 나도 내 시커멓게 튀어나온 입술과 납작한 코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나는 품 안에 있는 작은 몸뚱이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속삭였다.
"네 엄마한테 잘해야 한다. 온 세상에서 너를 더 사랑하고 아껴 줄 사람은 다시 없기 때문이란다."
아기는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안다는 듯 나를 향해 얼굴을 조금 찡그려 보인 다음, 이 세상에서의 첫 호흡에 지쳤는지 잠이 들어 버렸다. 나는 아기를 엄마의 품 안에 눕힌 다음, 잠자는 두 사람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 덕화가 나를 보았고, 나도 덕화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기에게 근사한 이름을 지어 주어야겠다."
내가 말했다.
"애 아범이 벌써 지어 놨어요."
"어른들과 상의도 없이 말이냐?"
또 관습을 어기는 데 화가 난 내가 말했다.
"이 아이가 아들이었으면 성경에 나오는 다윗왕의 이름을 따서 데이비드라고 지을 생각이었고, 딸이면 줄리라고 지어 주려고 했어요."
"주-리라니? 무슨 이름이 그러냐?"
"미국식 이름이에요."
"하지만 넌 한국 사람이잖니?"
"엄마, 우리 아이들은 언젠가 미국에서 살게 될 거예요. 폭탄과 화염 속을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되도록요. 아이들이 한가하게 자라며 유년기의 하루하루를 즐기도록 할 생각이에요."
"그래, 알겠다."
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덕화와 손녀를 가까이 두고 싶었지만, 지혜롭고 용감한 덕화의 꿈을 존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들의 미래를 위해 내가 미국으로 가는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결심한 바를 이야기하려고 몸을 돌리자, 덕화의 반짝이는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왜 그러니?"
내가 덕화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이제 예전처럼 엄마를 도와 드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
덕화가 한숨을 쉬었다.
"내 앞가림은 내가 할 수 있다."
내가 덕화의 마음을 달래 주며 말했다.
"이제 이 아기가 최우선의 관심사가 될 테니까요."
덕화는 소중하게 안고 있는 예쁜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야지. 이 아기를 잘 보살피고 내가 너에게 해준 그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을 이 아기에게 베푼다면, 너는 그걸로 날 돕는 거나 다름없단다. 일단은 푹 쉬도록 해라. 이 아이의 인생을 이끌어 주려면 네게도 힘이 있어야 하니까. 그건 힘겹고도 오랜 길이란다."
나는 덕화와 벌였던 다툼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2년 후에 덕화는 또다시 혜리라는 외국 이름을 가진 둘째 딸을 낳았다. 나는 즉시 이 아기가 언니보다 더 고집스러움을 눈치챘다. 혜리는 잠시도 자기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는 듯 온종일 울어댔다. 하지만 나는 둘째 아이도 똑같이 사랑해 주었다.
나는 할머니가 되었다는 기쁨을 만끽했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두 손녀에게 모든 애정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전쟁의 가능성 때문에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냉전 상황임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하는 휴전선으로부터 두 아이를 멀리 떼어놓고 싶었다. 정치적인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는 않았다. 해빙기라고는 하지만 사랑하는 조국이 이전보다 더 끔찍한 전쟁에 또 휘말리게 될까 겁이 났다. 네 명의 아이들과 나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다음번에는 그렇게 운이 좋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는 치료로 알게 된 어느 충실한 환자에게서 정보를 입수했다. 그 환자의 남편은 국회의원이었는데, 캐나다 정부가 독립 백 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인 이민자를 받아들인다는 소식이었다. 미국은 아니었지만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나는 덕화와 사위에게 즉시 이 기쁘고도 ‘슬픈’소식을 전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고 지원서를 내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내가 두 사람을 재촉했다.
덕화는 그 즉시 밖으로 나가 캐나다 대사관을 찾았다. 하지만 캐나다 대사관은 어디에도 없었다. 홍콩에 있는 곳이 제일 가까웠다. 그래서 내가 여러 곳에 은밀히 알아본 결과, 영국 대사관에서 캐나다 대사관의 업무를 대신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접수대 뒤쪽의 영국 신사가 덕화에게 서류 뭉치를 건네주었고, 덕화는 즉시 그 서류를 남편에게 갖다주었다. 우리는 그가 한영사전을 뒤적여가며 이력서를 채워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철자는 빠뜨리지 않았는지 확인해 가며 영문법에 맞는 문장을 쓰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사위는 우선 연필로 살짝 쓴 다음, 그 자국을 따라 펜으로 다시 조심스럽게 썼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자신들의 미래가 걸려 있는 그 서류를 가지고 서울 중심가에 있는 큰 우체국으로 갔다. 우리 모두는 매일매일 참을성 있게 답장을 기다렸고, 그 일이 매일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기다리고 확인해 보고, 확인해 보고 또 기다리고.
고통스러울 만큼 여러 주를 기다린 사위는 두 딸아이에게 줄리와 혜리라는 외국 이름을 붙여 준 게 과연 잘한 것인지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러던 1968년 초봄에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캐나다 정부는 숙련된 기술을 가진 아시아 이민을 받아들입니다."
드디어 승인을 받은 것이다!
사위는 모든 재산을 팔아 비행기표 네 장을 샀다. 그리고 사위가 먼저 건너가서 집과 자신이 배운 군대의 전파 탐지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를 찾고, 덕화와 두 아이는 그가 데리러 올 때까지 나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 나는 너무 기뻤다.
사위가 떠나던 날은 지난겨울의 추위가 남아 조금 쌀쌀했다. 덕화는 아이들을 직접 짠 스퉤터와 모자로 감싸 주고, 벙어리 장갑과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진짜 여우털 목도리로 우아하게 장식해 주었다. 두 아이는 귀엽고 조그마한 인형 같았다.
공항 활주로는 친척들로 붐볐다. 모두들 나와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광활한 바다를 건너 신천지로 가는 가족을 전송했다.
"너희들이 캐나다로 오면 커다란 새 차를 타고 데리러 나갈게."
사위는 아버지에게 줄 꽃을 한 송이씩 들고 있는 눈이 커다란 딸들에게 큰소리를 쳤다.
"차라구요! 여태까지는 차가 없었잖아요."
줄리가 신이 나서 껑충껑충 뛰며 조그만 목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혜리는 덜어져 나온 꽃잎을 다시 붙이느라 정신이 없어 제 아버지가 아주 아주 먼 곳으로 간다는 것은 염두에도 없었다.
"착하게 잘 지내고 엄마 말씀 잘 들어라."
사위는 이렇게 말한 다음 비행기로 연결된 가파른 철 계단을 올랐다. 새 트렌치 코드를 입고 새 넥타이를 매고 계단 꼭대기에 서 있는 사위는 정말이지 근사해 보였다. 넷째 사촌이 마지막 사진을 찍어 주자 사위는 ‘김치’하며 미소 지었다.
모두들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지만, 나는 아이들이 따라갈까 겁이 나서 두 손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나는 덕화를 바라보았다. 우리 두 사람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덕화의 느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하리라.
남자와 여자가 가까워지면 두 사람의 몸은 영원히 하나로 융합된다. 그리고 그러한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되면, 남자가 여자의 일부를 가지고 가버려 여자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거리를 헤매게 되는 것이다.
나는 친정에서 마지막 몇 달을 보내는 덕화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전 가족이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처럼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면 거실로 모이곤 했다.
건일이는 낡은 기타를 가져와 줄리와 혜리가 독창적인 춤과 동작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동안 음악을 연주했다. 또 한 번 내 모든 아이들에 둘러싸여 보내는 시간은 정말이지 근사했다. 아니, 내 거의 모든 아이들에 용운이만 있었다면 완벽한 행복을 느꼈으리라. 그 애는 제 어린 동생들을 자랑스러워했을 텐데.
건일이와 건삼이도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제 모두가 덕혜라고 부르는 아기가 고등학교 2학년의 젊은 처녀가 되었다. 아이들 모두가 다 잘 자라준 것은 내 공이 아니다. 덕화는 동생들, 특히 덕혜에게는 어머니 이상의 존재였다. 덕혜가 조카들과 함께 놀아 주고 조카들을 업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여러 번 덕혜에게 그렇게 해주었던 덕화를 떠 올리곤 했다. 덕혜도 나만큼 덕화를 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위로부터 기다리고 기다리던 편지가 도착했다. 봉투에는 캐나다 몬트리올이라는 곳의 소인이 찍혀 있었고, 편지에는 안정된 직장을 구했으니 하루 빨리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우리가 함께 하는 마지막 날은 덕화와 나에게 특히 힘든 시간이었다. 우리는 거의 친구처럼 무척이나 가까워져 있었다. 덕화는 짐을 싸느라 정신없는 척했고, 나는 계속 손녀들과 법석을 떨며 돌아다녔다.
여름이어서 나는 아이들에게 앞쪽에 큼직하고 하얀 레이스 깃이 달려 있는 똑같은 노란색 원피를 입혔고, 바늘 한 땀까지 똑같은 모자를 씌웠다. 그러면 한 아이를 잃어버릴 경우에 다른 아이를 가리키며 엉터리 영어로 "쎄임, 쎄임"이라고 말하면 되니까. 덕화는 무척 총명했다.
모든 친척이 또다시 활주로에 모였다. 꼭 장례식에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넷째 사촌이 사진을 찍을 때마다 젖은 눈가와 흐르는 코를 연신 닦아 내야 했다. 먼저 떠나는 세 사람이 찍고 그다음에는 온 가족이 모여 찍은 다음, 마지막으로 덕화와 나, 단둘이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넷째 사촌이 렌즈를 조절하는 동안 나란히 뻣뻣하게 서 있었다. 사위가 웃으며 ‘김치’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던 기억이 났지만, 너무도 상실감이 컸던 나는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그러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찰칵칵. 그 순간은 지나갔지만 우리의 모습은 남았다.
나는 덕화 쪽으로 몸을 돌리고 절실한 심정으로 딸애의 손을 잡았다. 덕화도 내 손을 세게 잡아 왔다. 이러한 접촉을 통해 우리는 평생의 사죄와 용서를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의 눈을 통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흐르는 사랑을 확인했다.
"네가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을 거야. 넌 늘 무척이나 좋은 딸이었단다."
나는 이렇게 말한 다음, 용기를 내기 위해 잠시 마을 멈추었다.
"...내가 힘이 없을 때는 네가 힘이 되어 주었고, 누군가가 필요할 때는 네가 나를 지탱해 주었단다. 나는 매일 너 같은 딸로 축복을 내려주실 만큼, 그토록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단다."
"엄마, 우리와 함께 가시면 좋을 텐데요."
뺨으로 검은 눈물을 떨구는 덕화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이."
나는 엉망이 된 화장을 지우라고 덕화에게 축축해진 손수건을 건넸다.
"난 늘 너와 함께 있을 거야. 수천 킬로미터를 떨어져 있어도 네가 행복해 하면 네 기쁨을 함께해주마. 하지만 네가 울 때는 지금처럼 내 얼굴에도 네 눈물이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거야. 너와 나는 한 몸이기 때문이야."
"다시 엄마를 뵐 수 있을 거예요."
덕화가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나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덕화에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덕화의 바람만큼이나 그 말이 사실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비행기가 발명되었어도 세상은 여전히 무척 넓었다. 우리는 이렇게 작별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작별 인사를 하면 진짜 마지막이 될 것 같았으므로.
손녀들의 앙증맞은 검은 에나멜 구두가 높다란 계단을 올라 금속으로 되어 있는 새의 뱃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나자, 내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언니, 집에 가야지."
엔진의 소음 너머로 막냇동생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집에 갈 수는 없었다. 아직은 안 되었다. 그때 덕화와 조그마한 아이들이 비행기 입구로 머리를 내밀고 작은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허공으로 두 팔을 벌리고 "덕화야!"라고 외쳤다. 하지만 엔진 소리가 너무 컸다. 딸애의 이름을 또 한 번 부르기도 전에 철문이 닫혀 버렸고, 이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 속도를 내는 것을 꼼짝않고 서서 지켜보았다. 제시간에 비행기가 이륙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면서. 비행기는 이륙했다. 내 아이가 구름 속 저 높디높은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겁이 나면서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태평양을 건너온 41년 만의 편지
요즘 나는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하고, 늘 제일 먼저 눈을 뜬다. 나이 여든이 되니 몸도 시간의 소중함을 아는 모양이다. 하지만 늙었다고 해서 삶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올해 여든 해 생일에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지금이 바로 적기라는 생각으로, 나는 15년 전인 1976년 이곳으로 이민을 왔다. 한국의 의사들이 ‘치료’의 시술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느니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캘리포니아에서 사는 덕화네 가족과 합류하기로 했다.
나는 매일 아침 해 뜨는 시간에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컵에 넣어 둔 틀니를 꺼내 입에 끼우고 옷을 입은 다음, 교회로 가서 나에게 또 하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다. 나는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의 중심가에 있는 이 교회가 무척 마음에 든다. 덕화와 사위가 이 교회를 짓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래서 나와 두 동생은 교회 옆의 아담한 노란 집에서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나에게 자신들의 값비싼 저택으로 거처를 옮겨 함께 살자고 졸라대지만,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 여기서는 한국 시장까지 걸어가서 내가 좋아하는 먹을 것들을 마음껏 살 수 있고, 영어를 몰라도 된다. 멕시코 사람인 이웃조차 한국말을 몇 마디 하니까.
오늘은 막냇동생이 덕화가 어제 사다 준 새 전기밥솥으로 지은 뜨거운 밥 한 공기를 아침 식사로 내놓는다. 덕화는 나를 위해 늘 무언가를 해 준다. 음식 냄새를 맡은 불구 동생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절룩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온다. 지금 동생은 그 어느 때보다 잘 걷는다. 심지어 손자와 장난을 칠 때는 뛰기도 하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금이 가고, 칠이 벗겨지고, 바퀴벌레가 득실거리는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곳은 동생들과 내가 사는 집이다. 그리고 우리는 부유한 친정에서 살던 에전의 그 철없던 아이들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에서 너무도 많은 슬픔을 삼키며 살아왔다. 모두 남편이나 아이를 잃었고, 그 둘을 모두 잃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가장 심한 고통을 겪은 것은 막냇동생이다. 막냇동생의 유일한 혈육으로 살아남았던 한 아이가 얼마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으나, 그 후에 바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족들은 막냇동생이 이곳 로스앤젤레스로 올 때까지 이 같은 비극을 숨기기로 했다. 이곳에 도착한 동생에게 딸이 무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불구인 동생이다. 불구 동생은 열심히 관리해 온 제 이를 다 내보이며 늘 활짝 웃는다. 그리고 사소한 일에서도 유머를 찾아낸다. 그 때문에 얼굴의 주름이 더 깊어졌지만, 동생은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미국의 나이 든 여인들이 하듯 크림이나 화장품으로 그 주름을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나에 대해서는 아직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다. 나는 뭔가 할 말이 있거나 기운이 있을 때에만 말을 한다. 남들은 내 조용하고 침착한 태도를 지혜로 해석한다. 손녀인 혜리가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오늘 나를 찾아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지 모른다.
손자들 중에서는 혜리가 나를 가장 많이 닮았다. 그 애는 나처럼 고집스럽고 대담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 세상에 그 애가 가지 못할 곳은 없다. 나는 그 애가 결혼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혜리를 돌봐 줄 남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는 아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여자들이 남편을 지탱해 왔다는 사실을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리라. 나는 혜리가 가정의 사랑과 아이들을 얻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벌써 여덟 시가 다 되어 간다. 첫 번째 환자가 오기 전에 서둘러 아침밥을 먹어야겠다. 환자들은 매일 조금씩 더 일찍 오는 것 같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박씨다. 지난주부터 울긋불긋했던 얼굴이 조금씩 좋아지고, 목의 붉은 자국도 거의 다 사라졌다.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네"
박씨가 겸손하게 답한다.
"그러면 시작합니다."
내가 그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해보인다.
우리는 함께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드린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당신의 사명을 행하는 제 두 손을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
"아멘"
박씨도 따라 한 다음, 웃옷을 벗고 내가 펴놓은 담요 위에 눕는다.
나는 검지와 중지로 살을 꼬집으며 목부터 치료에 들어간다. 손가락은 아직 힘이 좋다. 보통은 한 번에 몇 시간씩 일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피곤해 할 때는 동생들이 대신해 준다.
우리 세 자매는 여전히 손발을 맞춰 일하며, 치료로 명성을 얻고 있다. 그래서 플로리다나 워싱턴 같은 먼 곳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오고, 때로는 한국에서 오는 이들까지 있다. 하지만 변함없이 보수는 받지 않는다. 환자들이 여유가 있는 한도 내에서라면 무엇이든 괜찮다. 돈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전에도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11시 10분 전에 차 한 대가 도로에 멈추어 서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손녀딸이 온 것이다. 정신없는 음악이 큰 소리로 울려 퍼진다. 손녀는 들어와서 한창 박씨를 치료하고 있는 나를 껴안고 입을 맞춘다. 그런 다음 다른 이모할머니들에게도 가서 똑같은 인사를 퍼붓는다. 무척이나 미국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애의 이런 애정 표현이 마음에 든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둘째 할머니, 그리고 막내 할머니. 오늘은 어떠세요?"
혜리가 우리에게 한국말로 인사한다. 우리말을 어찌나 잘하는지 대견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처음으로 그 애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헤리의 달라진 모습을 바라본다. 옷차림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애는 여전히 청바지를 입고 배꼽을 드러낸데다 가슴을 꽉 조이는 인형 옷 같은 조그마한 웃옷을 입고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 애의 표정에 대해서다. 제 어머니나 내가 옆에 있을 때면 혜리는 늘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가 빼앗아 가기라도 할 것처럼. 혜리는 자신의 독립적인 생활과 미국적인 자아를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혜리의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그리고 두 눈에는 온화함이 담겨 있다.
"할머니.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혜리가 묻는다.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불구인 동생이 내 일을 대신 맡고, 막냇동생은 부엌에서 바삐 빈대떡 한 접시를 들고 나온다. 혜리는 조금도 배가 고프지 않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쨌든 그 애에게 빈대떡을 먹인다. 그렇게까지 몸이 마른 것은 좋지 않으니까.
미국에서 자란 혜리는 배고픔을 모르지만, 나는 전쟁을 겪으면서 먹지 못하는 것이 없어졌다. 들풀까지도 맛있게 요리할 수 잇을 정도니까. 혜리가 빈대떡을 많이 먹어 우리 세 할머니의 마음이 흡족해진 다음에야, 우리는 인터뷰를 허락한다.
"좋아요. 마음을 편히 하시고, 이 마이크에 대고 말씀하세요." 혜리가 전깃줄 하나를 내 웃옷에 끼우며 말한다.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좀 빗어야겠다." 내가 말한다.
"걱정마세요. 할머니. 목소리만 녹음하는 거니까요."
"정말이냐?""
"그럼요. 녹음 시험 중. 하나, 둘, 셋."
기계가 똑같이 따라 한다.
인류가 이토록 작은 상자로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세계 평화를 그렇게 쉽게 이루지 못하는 것은 유감이지만.
"자, 할머니. 할머니와 둘째 할머니, 그리고 막내 할머니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건 쉽구나. 평양이란다."
불구인 동생이 이를 모두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몇 년도에 태어나셨는데요?"
나는 잠시 시간을 끌며 정확한 연도를 생각해 본다. 너무 오래전 일이다.
"1912년. 쥐의 해잖우."
막냇동생이 기억을 되살려 준다.
"그래, 맞아."
내가 동의한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나요?"
"그랬단다. 아버지는 아주 상냥한 분이셨어. 딸들을 곁에 두기를 좋아하셨지. 그래서 나를 그렇게 늦게 시집 보내신 것 같구나."
"몇 살에 결혼하셨는데요?"
"스물두 살이었지."
"그게 늦은 나이였다면, 저는 조금 썩는다 해도 개의치 말아야겠는걸요."
혜리가 혀를 찬다.
"미혼이 무슨 대단한 특권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썩은 과일은 한번 나무에서 떨어지면 그걸로 끝인 거야.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아. 생명을 창조해 내는 일은 여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값진 선물이다. 가볍게 생각하거나 거부할 일이 아니야."
불현듯 내 삶이 결정지어지던 순간이 기억이 물밀듯 밀려든다. 부모님 앞에 서서 장래의 남편과 그 사람이 종갓집 장손이라는 이야기를 듣던 때의 기억이. 그 남자와 함께 살기 위해 가마를 타고 친정아버지의 집을 떠나던 기억도. 성숙한 여인이 되고 어머니가 되면서 맛보았던 기쁨도.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랄 수 있도록 중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던 일과, 공산주의자들이 고국으로 다시 돌아온 우리를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너무도 잔인하게 괴롭히던 일, 전쟁과 그로 인해 겪은 갖가지 고통들, 아버지 없이 아이들을 기르느라 고생했던 일도 생각난다. 그리고 물론 내 곁을 떠난 용운이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혜리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러고 나서도 나 자신을 억제할 수 없어 더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내가 이야기를 끝낼 때쯤에는 모두가 감정에 겨워 지칠 대로 지쳐 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모두의 눈이 빨갛게 부어 올랐고, 내 목구멍은 칼칼해져 있다.
막냇동생이 손녀가 사는 아파트로 들려 보낼 방금 담근 김치와 한국산 배가 가득 담긴 가방을 들고 나온다. 우리는 혜리의 빨간색 차가 서 있는 곳까지 그 애를 배웅하고, 혜리는 우리르 껴안고 입을 맞추며 작별 인사를 한다. 그 애는 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창문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묻는다.
"할머니, 할머니의 인생에서 할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은 게 있나요?"
나는 즉시 그 물음에 답한다.
"있지."
목이 콱 메어 온다.
"한 가지를 바꿀 수 있다면, 내 큰아들의 운명을 바꾸고 싶어. 그게 한이란다."
집안의 불이 모두 꺼지고 동생들은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이 든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틀니를 빼어 다시 컵 속에 집어넣은 다음, 한동안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본다. 무척이나 늙은 노파가 한 사람 서 있다. 무성한 백발과 주름살투성이의 얼굴에 젊음의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모두가 제각기 슬픔과 행복에서 비롯된 머리카락이며 주름살들이다.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삶을 돌이켜보건대 가장 슬펐던 순간, 가장 기뻤던 순간이 가장 많이 기억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쳤다. 몹시 지쳤지만 아직 죽을 때는 되지 않았다. 내 아이의 불확실한 운명 때문에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용운이의 이름을 입 밖에 낸 일은 거의 없지만, 그 아이를 생각하지 않고 보낸 날은 단 하루도 없다. 나는 거의 40년 동안이나 용운이를 찾으려고 몸부림쳐 왔다.
1971년 남한과 북한이 비무장 지대인 판문점에서 남북 적십자 회담을 시작했을 때, 내 마음은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평화를 그토록 염원했건만, 권력과 이기주의 때문에 양측은 그 몇 년 동안 점점 더 멀어지기만 했다.
그러던 중 1983년에 나는 마지막 희망을 품게 되었다. 한국방송공사에서 이산 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방송한 것이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고 싶어 하는 이들은 모두 텔레비전에 출연할 수 있었다. 녹화가 있던 날, 덕화는 나를 커다란 독일제 차에 태워 방송국으로 데려다 주었다. 덕화는 나보다 더 흥분한 모습이었다.
도착해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카메라맨이 자기를 비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가 찾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쓰여진 커다란 종이판을 목에 건 채로, 덕화가 나를 도와 용운이의 이름과 태어난 날, 그리고 태어난 곳을 큼직한 글씨로 깨끗하게 써 주었다.
사람들이 너무 흥분해서인지 무대는 이야기 소리로 떠나갈 것만 같았다. 방송국 관계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마이크를 검사하고 전선을 점검하고 조명을 확인했다. 담배를 피워 문 한 남자가 출연하는 가족들은 통로에서 나오고 직원들은 더 빨리 움직이라고 고함을 치며 전체적인 일을 지휘했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모두들 준비!"
누군가가 소리쳤다. 환한 조명이 무대 위로 쏟아져 내렸다. 빛이 너무 강렬해서 땀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다섯, 넷, 셋, 둘...."
이렇게 방송이 시작되었다.
카메라맨이 돌아가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점점 내 차례가 가까워졌다. 불현듯 이 모든 것, 조명과 사람들, 그리고 카메라가 버겁게 느껴졌다. 그 짧고 급박한 순간 동안 내 몸은 뻣뻣하게 얼어붙고 두 다리는 뒤틀렸다. 덕화는 내가 쓰러질 것 같았는지, 내 쪽으로 몸을 숙이고는 한 팔로 나를 받쳐 주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엄마는 해내실 수 있어요. 오빠가 보고 있을지도 몰라요"라고 말했다.
이 몇 마디 말로 기운을 차린 나는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었다. 용운이에게 부들부들 떠는 겁쟁이의 모습을 어머니의 첫인상으로 심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용운이가 나를 자랑스러워 해주기를 바랐다. 용운이를 위해 나는 제일 근사한 한복으로 차려입고, 딸아이의 간청에 못이기는 척하며 백발에 파마와 염색을 했다.
부지불식간에 나를 알리는 순간이 지나갔다. 카메라는 내 얼굴과 종이판을 가까이에서 비춘 다음 옆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게시물을 똑바로 들고 있는데 정신이 팔려 미소 한번 제대로 짓지 못한 것 같았다.
"바보 같아 보였지?"
스튜디오를 나오며 내가 물었다.
"근사하셨어요."
덕화가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나는 며칠 동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마침내 그 프로그램이 방송 되었고, 그 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전 세계의 모든 한국인들이 그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본 것 같았다. 연락이 끊겼던 옛 친구와 이웃들에게서 전화와 편지가 폭주했다. 하지만 아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상심할 대로 상심한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또 한 번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결말을 견딜 수가 없어서.
1991년 6월 4일, 평양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살아 있다니! 나의 용운이가 살아 있다니! 그 편지는 용운이의 스물여덟 살 난 딸이 쓴 것이었다. 오, 하나님! 용운이에게 아이들이 있었다니요. 용운이가 휴전선 이북에서 살아온 세월 동안 나는 그 애의 삶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후에, 네 아이들이 모여 용운이를 찾는 일을 은밀하게 진행시키기로 결정했다. 아이들은 북한의 비공식적인 대사로서 많은 전쟁 이산가족들을 재회시켜 준 어느 캐나다인 목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건삼이가 자청해서 그 목사에게 편지를 썼고, 그는 편지를 북한으로 전해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약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달 후에 소식이 왔다. 그 목사는 용운이를 예전에 우리가 살던 고향에서가 아니라, 평양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낙후되어 있는 어느 작은 마을에서 찾아냈다. 우리가 북한에서 피난을 나올 때보다 생활 여건이 더 좋지 않은 마을이었다. 남북이 분단된 이후로 세계의 다른 나라들은 놀라운 발전을 하고 미래를 향한 힘찬 도약을 해 온 반면, 북한은 고립된 상태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작은아버지께
안녕하세요? 제가 이씨 집안을 대표해서 한 번도 만나 뵌 적이 없는 작은 아버지께 이 편지를 씁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어떤 모습이신지 궁금하군요. 건강하신지요.
저는 작은아버지의 큰형님이신 이용운씨의 장녀 애란입니다. 퍽 오랫동안, 심지어는 꿈속에서조차 그동안 저희 아버지를 찾으셨다구요. 형님을 분명히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시간은 살 같이 흐릅니다. 작은아버지와 저희 아버지가 헤어지시던 41년 전, 두 분은 다 무척 어린 나이셨다지요? 하지만 작은아버지는 이제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오십 대가 되셨습니다.
지금 스물여덟 살인 저는 이 비극적인 분단이 고착화된 후에 태어났고, 저희 부모님은 작은아버지가 살아 계신지조차 모르고 지내셨습니다. 두 분은 작은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모두들 잘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작은아버지가 태평양 저편의 먼 나라에 가 계시지만 않는다면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가 꼭 안아 드릴 텐데, 미국의 그 야만인들만 없다면, 피를 나눈 형제들이 만날 수 있을 터인데.
형제애를 느끼지 못하고 산 그 세월들을 돌이켜보건대, 지금 작은아버지의 존재는 저희들의 가슴을 감동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저는 전쟁의 속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한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졌지만, 더 좋지 않은 일은 가족들이 강제로 세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전쟁으로 우리의 국토는 두 동강이 났지만, 가족을 찾으려는 뜨거운 마음은 결코 갈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형제들과 저는 우리에게 할머니, 작은아버지, 고모, 그리고 사촌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 작은아버지께서는 캘리포니아에 대가족을 이루고 계시겠지요. 저희 가족은 모두 여섯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둘, 여동생 하나, 그리고 제가 있지요. 아버지는 혁명 건축 조합의 지도자이시고, 어머니는 요리사세요. 저는 식품 품질 관리부의 품질관리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스물여섯인 남동생 학정이는 보천보기술대학의 학생이고, 스물네 살인 그 아래 남동생 문정이는 인민군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막내인 여동생 미란이는 스물한 살로 견학을 오는 방문객들을 위해 자원 봉사자로 일합니다. 이렇게 저희 가족 모두는 최선을 다해 조국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희 가족에 대해서는 모두 아셨으니, 작은아버지의 미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차례입니다. 작은아버지의 답장이 도착할 때까지 1분 1초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가족들에 관한 재미있는 소식이 가득 담겨 있기를 바랍니다. 북한으로 저희를 만나러 와주세요. 금지된 조국 땅을 밟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 되실 겁니다.
우리는 작은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지, 더구나 미국 같은 큰 나라에서 살고 계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만남의 시간이 오면 작은아버지를 안아 드리고 싶습니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같은 피를 나누었기 때문인지 작은아버지가 무척 가깝게 느껴집니다. 핏줄은 숙명적인 끈이니까요.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들 합니다. 이제 그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가족은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한 국가도 마찬가지이지만요.
가족들에 대한 궁금증과 여쭤보고 싶은 것, 걱정과 관심은 끝도 없습니다. 미국에 계시는 가족들의 다정한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잠도 잘 오지 않고 일도 제대로 되질 않습니다. 낯선 나라에서 힘겹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실 가족들을 생각하니 너무 고통스러워 가슴이 다 타 버리는 듯합니다.
이제 이만 글을 줄여야겠군요.
부디 몸조심하세요. 그리고 모두에게 밝은 미래가 펼쳐지기를! 이제 우리 가족 모두의 사랑을 담아 이만 편지를 주입니다.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 북한에서 조카, 애란 올림
마음속에서 어머니로서의 걱정이 용솟음쳐 올랐다. 내가 틀렸다. 용운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 나는 전보다 더 심한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배를 곯지는 않을까? 어머니인 내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할까? 끔찍한 외로움을 겪지는 않았을까?
용운이의 얼굴에서 생각나는 것이라곤 막 미소를 지을 듯한 앳된 표정과 아버지를 닮은 또렷한 눈매가 전부이다. 오래전의 모습을 잊었는지, 그 나머지 부분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흘려보내고 그토록 긴 세월이 지났어도, 나는 아직 열일곱 살의 용운이를 그리고 있다.
아, 하나님, 지금은 늙고 어쩌면 저처럼 백발이 되었을 제 아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노인이 된 용운이를 생각하니 낯선 느낌이 든다. 망연자실할 뿐이다.
매일 아침, 그리고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딱 한 번만 이 지친 품 안에 내 아들을 안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러고 나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드린다. 그러면 내 인생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기도를 많이 드리고, 그러고 나서는 아픈 가슴을 붙안고 내 아들과 나를 갈라놓은 두 나라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날, 나는 내 아들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울고 웃으며 달려갈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나는 한국인이니까.
우리 한국인들은 의지가 강한 민족이므로 이렇듯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역사가 그것을 입증해 준다. 우리는 천년도 넘은 세월을 한 민족으로 살아왔고, 나는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될 것을 굳게 믿고 있다. 통일은 가능하다! 나는 80년도 넘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여인으로서, 그리고 생명을 탄생시켰던 여인으로서 이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남아 있을 것이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