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회: 안평중은 복숭아 두 개로 세 장사를 죽이고, 초평왕은 며느리를 가로채고 세자를 쫓아내다.
한편, 제경공은 평구(平邱)의 회맹에서 돌아와서, 비록 진(晉)나라 군사의 위세에 눌려 할 수 없이 삽혈을 했으나, 진나라에는 원대한 계책이 없음을 알고, 마침내 제환공의 패업을 다시 일으키려는 뜻을 품었다. 제경공이 상국 안영에게 말하기를, “진나라는 서북을 제패하고, 나는 동남을 제패하면 되지 않겠소?” 하니, 안영이 대답하기를, “진나라가 사기궁을 짓느라 백성들을 고생시켜 제후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주군께서 방백이 되고 싶다면 백성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백성들을 잘 돌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안영이 대답하기를, “형벌을 줄이면 백성들의 원망이 줄어들고, 세금을 적게 거두면 백성들이 은혜를 알게 됩니다. 옛날 어진 왕들은 봄에 농사를 살펴서 부족한 것을 도와주고, 여름에는 세금을 줄여서 모자란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어찌하여 주군께서는 그것을 본받지 않으십니까?” 했다. 제경공이 이에 번거로운 형벌을 없애고, 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에게 빌려주니, 백성들은 감격하여 기뻐했다. 이에 동방의 제후들을 초빙했다. 서(徐)나라 군주가 따르지 않자 전개강(田開疆)을 장수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서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전개강이 포수(蒲隧)에서 크게 싸워 서나라 장수 영상(嬴爽)을 참하고 무장병 5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서나라 군주가 크게 두려워하여 제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화친하려 했다.
제경공이 담(郯)나라 군주와 거(莒)나라 군주에게 통고하여 서(徐)나라 군주와 같이 포수에서 회맹하기로 했다. 서나라에서 갑보(甲父)의 솥을 제경공에게 뇌물로 바쳤다. 진소공과 신하들이 그 사실을 알았으나 감히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 제나라는 이때부터 날로 강성해져서 진나라와 나란히 패자(霸者)가 되었다. 제경공은 전개강이 서나라를 평정한 공로를 기록하게 하고, 고야자는 자라의 목을 벤 공로를 치하하여 이에 오승지빈(五乘之賓)으로 삼아 표창했다. 전개강은 다시 공손첩의 용기를 천거했다. 공손첩은 얼굴이 검푸르고 두 눈이 튀어나왔으며, 신장은 한 길이고 힘은 천균(千鈞)을 들 수 있었다. 제경공이 공손첩을 보고 특이하다고 생각하여 그와 함께 동산(桐山)으로 사냥을 나갔다. 갑자기 산속에서 눈이 치켜 올라가고 이마가 하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큰 소리로 포효하더니 날 듯이 앞으로 다가와서 제경공의 수레를 끌던 말을 덮쳤다. 제경공이 크게 놀랐다. 그때 공손첩이 수레에서 뛰어내려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호랑이에게 달려들었다. 왼손으로는 호랑이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오른손으로는 주먹을 휘둘러 한 주먹에 그 큰 호랑이를 때려죽이고 제경공을 구했다. 제경공이 그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그도 역시 오승지빈으로 삼았다.
공손첩이 마침내 전개강, 고야자 등과 결의형제를 맺고, 자기들 스스로를 제나라의 삼걸(三傑)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공을 끼고 용기를 믿어 입으로는 호언장담을 일삼고 남을 업신여기며 여염집을 돌아다녔다. 조정의 공경들조차도 무시하고, 제경공의 면전에서도 일찍이 서로 너나들이를 하면서 전혀 예의가 없었다. 그러나 제경공은 그들의 재주와 용기를 아껴서 잠시 두고볼 뿐이었다. 그때 제나라 조정에는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신하가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을 양구거(梁邱据)라고 했다. 양구거는 오로지 제경공의 마음을 받들어 즐겁게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그래서 제경공이 양구거를 매우 총애하였다. 양구거가 안으로는 제경공에게 아첨하여 총애를 굳게 하고, 밖으로는 삼걸들과 교분을 맺어서 그 무리의 세력을 키우려고 하였다. 더욱이 그때는 진무우(陳无宇)가 인정을 많이 베풀어 민심을 얻어서 이미 제나라의 국권이 옮겨가려는 징조가 잠복해 있던 상태였다. 이 전개강과 진씨 일족이 훗날 서로 결탁하여 나라의 우환이 될 것이라고 안영은 깊이 걱정하였다. 그래서 제거하려고 했으나, 제경공이 듣지 않으면 오히려 삼걸로부터 원한을 사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느 날 노소공이 진(晉)나라와 맞지 않았던 까닭으로 제나라와 수호를 맺기 위해 친히 제나라에 왔다. 제경공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노소공을 환대하였다. 노나라는 숙손야(叔孫婼)가 상례(相禮)를 맡고, 제나라는 안영(晏嬰)이 상례를 맡았다. 삼걸은 칼을 차고 계단 아래에 서 있었는데 태연자약하고 방약무인했다. 두 나라 군주들이 반쯤 취했을 때 안자가 아뢰기를, “후원에 금도(金桃)가 이미 익었습니다. 명을 내리시면 새로 익은 복숭아를 따와서 두 군주님을 축수할까 합니다.” 하니, 제경공이 허락하고 후원 지기에게 명하여 금도를 따오라고 했다. 안자가 아뢰기를, “금도는 얻기 어려운 과일입니다. 신이 마땅히 직접 가서 살펴보고 따오겠습니다.” 하고, 안영이 열쇠를 가지고 갔다. 경공이 말하기를, “이 복숭아는 선공이신 제장공 때에 동해 사람이 큰 씨를 가져와 바치면서 이름이 만수금도(萬壽金桃)라 했습니다. 그것은 바다 건너 도색산(度索山)에서 나는데, 다른 이름으로 반도(蟠桃)라고 합니다. 심은 지 30년이 넘어 잎은 비록 무성하지만, 꽃이 피어도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금년에 열매가 몇 개 열렸는데 과인이 이를 아껴서 후원의 문을 자물쇠로 잠가 두었습니다. 오늘 군주께서 왕림하셨으니 과인이 감히 혼자 맛볼 수 없어서 특별히 노나라의 현군, 현신들과 같이 맛보고자 합니다.” 했다. 노소공이 두 손을 모아 감사했다.
조금 지나자 안자가 후원 지기를 데리고 조각 쟁반에 복숭아 6개를 담아 바쳤다. 큰 것은 사발만 하고 붉기가 타오르는 숯불 같으며 향기는 코를 찔렀다. 참으로 진기한 과일이었다. 제경공이 묻기를, “복숭아가 이것뿐이오?” 하니, 안자가 말하기를, “아직 서너 개 덜 익은 게 있습니다. 그래서 여섯 개만 따왔습니다.” 했다. 제경공이 안자에게 명하여 술을 따르게 했다. 안자가 옥잔을 받들어 공손히 노소공에게 올렸다. 좌우의 시종이 금도를 바치자 안자가 치사하여 말하기를, “복숭아가 말[斗]만하니 천하에 드문 과일입니다. 두 분 군주님들께서 잡수시고 함께 천세를 누리십시오!” 했다. 노소공이 술을 마신 후에 복숭아 한 개를 집어 먹었다. 아주 달콤하고 맛이 좋아 찬탄해 마지않았다. 제경공의 차례가 되자 역시 술을 한잔 마시고 복숭아를 집어 먹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이 복숭아는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오. 숙손야(叔孫婼) 대부께서는 천하에 어진 이름이 드러났고, 오늘 또한 상례를 맡은 공이 있으니 마땅히 복숭아 한 개를 드시지요.” 했다.
숙손야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신의 어짊은 상국(안영)에 만 번 미치지 못합니다. 상국께서는 안으로 국정을 바로 잡으시고 밖으로 제후들을 복종시켰으니 그 공이 작지 않습니다. 이 복숭아는 마땅히 상국이 드셔야 할 것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분에 넘치게 그것을 먹겠습니까?”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숙손 대부께서 상국에게 양보를 하시니 각각 술 한 잔씩에 복숭아 한 개를 내리겠소.” 했다. 두 신하가 무릎을 꿇고 술과 복숭아를 먹고 감사의 말을 올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안자가 아뢰기를, “쟁반에 아직 복숭아 두 개가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여러 신하 중에서 공로가 큰 사람을 말하게 하고 이 복숭아를 먹게 하여 그 어짊을 표창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그 말이 아주 좋습니다.” 하고, 즉시 좌우에 명하여 계단 아래의 여러 신하에게 전하기를, 스스로 공로가 크다고 생각하여 그 복숭아를 먹고 싶은 사람은 반열에서 나와 스스로 자기의 공을 말하면 상국이 공로를 판단해서 복숭아를 하사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공손첩이 몸을 세우며 나가서 연회석 앞에 서서 말하기를, “소신은 전날 주공이 동산(桐山)에서 사냥하실 때 따라가 힘으로 맹호를 죽였으니, 그 공이 어떠합니까?” 했다.
안자가 말하기를, “하늘을 붙들어 어가를 보호했으니 그 공은 참으로 큽니다. 술 한 잔과 복숭아 한 개를 먹고 반열에 돌아가시오.” 했다. 고야자(古冶子)가 분연히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호랑이를 잡은 것은 기이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일찍이 요사스러운 자라를 황하에서 참하여 주군을 안전하게 모셨습니다. 이 공이 어떻습니까?”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그때 파도가 높게 일어 장군이 요사스러운 자라를 죽이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배가 뒤집혀서 우리 일행은 물에 빠져 죽었을 것이오. 이것은 세상을 덮을 만한 큰 공로라! 술 한 잔을 마시고 복숭아를 먹는 것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했다. 안자가 바삐 고야자에게 술잔을 내리고 복숭아를 주었다. 그러자 전개강이 반열에서 나오며 위통을 벗어부치고 성큼성큼 걸어 나와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주군의 명을 받들어 서나라를 정벌하러 가서 그 장수의 목을 베고 무장병 5백여 명을 사로잡았습니다. 서나라 군주가 두려워하여 뇌물을 바치고 동맹하기를 청하게 했습니다. 담나라와 거나라의 군주도 우리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일시에 모두 모여 우리 주군을 맹주로 받들었습니다. 그 공이라면 복숭아를 먹을 만하지 않습니까?” 하니, 안자가 아뢰기를, “전개강 장군의 공은 앞의 두 장군과 비교하면 열 배나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줄 복숭아가 없으니 술을 한 잔 내리고 내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경의 공이 가장 큰데 애석하게도 말하는 것이 너무 늦어 하사할 복숭아가 없으니 그 공로를 표창할 수 없게 되었소.” 하니, 전개강이 칼을 만지면서 말하기를, “자라의 목을 베고 호랑이를 주먹으로 때려잡은 것은 작은 일입니다. 나는 산 넘고 물 건너 천 리 밖에서 피 흘리며 싸워 공을 이루었는데, 도리어 복숭아를 먹지 못하고 두 나라 군주와 신하들 사이에서 욕만 당했으니 이것은 만대의 웃음거리라 하겠습니다. 무슨 면목으로 조정의 높은 자리에 서 있겠습니까?” 하고 말을 끝내자 칼을 들어 스스로 목을 찔러죽었다. 공손첩이 크게 놀라 역시 칼을 빼 들고 말하기를, “나는 하찮은 공을 세워 복숭아를 먹었는데, 전장군은 큰 공을 세우고도 도리어 복숭아를 먹지 못했다. 무릇 내가 복숭아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그를 따를 수 없다면 그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하고, 말을 마치자 그 역시 칼로 목을 찔러죽었다. 그러자 고야자가 분연히 큰 소리로 소리치기를, “우리 세 사람은 의리가 골육에 나란하여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했는데 두 사람이 이미 죽고, 나만 홀로 구차하게 살면 내 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 하고, 역시 칼로 목을 찔러죽었다. 제경공이 급히 사람을 시켜 막으려 했으나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노소공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하기를, “과인은 세 신하가 모두 천하에 보기 드문 용사라고 들었는데 하루아침에 모두 죽어 버렸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하니, 제경공이 듣고 아무 말 없이 얼굴색을 붉히며 기뻐하지 않았다. 안영이 조용히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저 사람들은 모두 우리나라의 한 용기 있는 사내들입니다, 비록 작은 공로가 있지만, 어찌 말할 거리가 있겠습니까?” 했다. 노소공이 말하기를, “상국에는 이같이 용기 있는 장수가 또 몇 사람이나 더 있습니까?” 하니, 안영이 대답하기를, “조당에 앉아서 계책을 마련하여 나라의 위엄을 수천 리 밖까지 떨칠 수 있는 장상의 재주를 갖춘 인물들은 수십 명이고, 저런 혈기에 찬 용사는 우리 주군께서 매질해서 부리는 축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의 생사가 어찌 족히 제나라에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했다. 안영의 말에 제경공의 마음이 비로소 풀렸다. 안자가 다시 두 나라의 군주에게 술잔을 따라 올리니 즐겁게 마시고 헤어졌다. 세 호걸의 무덤은 탕음리(蕩陰里)에 있는데, 후한의 제갈공명이 ‘양보음(梁父吟)’을 지어서 그 일을 읊기를, “제나라 동문을 걸어 나가서, 멀리 탕음리를 바라보면, 마을 가운데 세 무덤이 있는데, 아주 비슷한 모습으로 나란히 있다. 묻노니 누구의 무덤인가? 전개강, 고야자, 공손첩의 무덤이라. 힘은 능히 남산을 밀어낼 만하고, 문장은 능히 지기(地紀 ; 땅을 매단 줄)를 끊을 만했는데, 하루아침에 음모에 떨어져, 복숭아 두 개로 세 용사를 죽였도다! 누가 능히 이렇게 했는가? 제나라의 상국 안자였다.” 했다.
노소공과 헤어진 후에 제경공이 안영을 불러 묻기를, “경은 연회석에서 큰소리를 쳐서, 우리나라의 체면을 세웠지만, 다만 세 호걸이 죽은 후에 그들을 이을 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를 어찌해야 되겠소?” 하니, 안자가 대답하기를, “신이 한 사람을 천거하겠습니다. 그는 족히 세 사람을 겸하여 쓸만할 것입니다.” 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입니까?” 하니, 안자가 말하기를, “전양저(田穰苴)라는 사람인데, 문장은 능히 사람들을 따르게 할 만하고, 무예는 능히 적을 위압할 수 있으니, 진실로 대장의 재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설마 전개강의 일족은 아니겠지요?” 하니, 안자가 대답하기를, “이 사람이 비록 전씨 문중의 사람이나 서얼의 미천한 출신이라 전씨들이 대단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해의 바닷가에 은거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대장을 고르신다면 이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경이 이미 그 어짊을 알았다면 어찌하여 일찍이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하니, 안자가 대답하기를, “벼슬살이를 잘하는 사람은 군주를 가릴 뿐만 아니라 친구도 가립니다. 전개강이나 고야자 같은 무리는 혈기만 믿는 사내들인데, 양저가 어찌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습니까?” 했다. 제경공이 입으로는 비록 ‘예, 예’했지만, 끝내 전(田)씨와 진(陳)씨는 동족임을 싫어하여 주저하며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갑자기 어느 날 변방의 관리가 보고하기를, “진(晉)나라가 세 호걸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탐지하여, 군사를 일으켜 동아(東阿) 지역으로 쳐들어오고, 연(燕)나라도 역시 이 틈을 타서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했다. 제경공이 크게 놀랐다. 이에 안자에게 명하여 비단 예물을 가지고 동해 가에 가서 양저를 초빙하여 조정에 데려오게 했다. 양저가 조정에 들어와 병법에 대해 진술하니 제경공의 마음속에 쏙 들었다. 그날로 양저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전차 5백 대를 거느리고 북쪽에서 연나라와 진(晉)나라의 군사를 막게 했다. 양저가 청하여 말하기를, “신은 본디 비천한데 주군께서 민간에서 발탁하여 갑자기 병권을 맡기셨으니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주군께서 나라 사람들이 평소에 존중하는 총신 한 명을 감군(監軍)으로 삼아서 신의 명령이 행해지게 해 주십시오.” 하니, 제경공이 그 말에 따라 총애하는 대부 장가(莊賈)를 명하여 군영으로 가서 군사를 감독하게 했다. 양저와 장가가 함께 감사를 드리고 물러 나왔다. 조문 밖으로 나오자 장가가 양저에게 출병하는 날짜를 물었다. 양저가 말하기를, “날짜는 내일 오시(午時;정오)입니다. 내가 군문에서 대부를 기다렸다가 같이 출병할 것이니 정오를 넘기지 마시오.” 했다. 양저가 말을 마치고 가 버렸다.
다음 날 오전에 양저가 먼저 군중에 이르러 군 사무관을 부르더니 나무를 세우고 표시하여 해의 그림자를 살피게 하였다. 한편으로 사람을 보내어 장가를 재촉했다. 장가는 나이가 어리고 평소에 신분이 높다고 교만했으며, 제경공의 총애를 믿고 양저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는데, 하물며 자기가 감군이 되어 권세가 양저에 미치지 못할 것이 없으니 완급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날 장가의 친척과 손님들이 전별연을 열어 장가를 붙들고 즐겁게 술을 마셨다. 사자가 와서 계속 재촉했지만 편안히 시간이 늦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양저가 해그림자가 서쪽으로 옮겨갈 때까지 기다렸지만 군 사무관은 이미 미시(未時 ; 오후 2시)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장가는 오지 않았다. 마침내 양저가 막대기를 치워 버리고 물시계의 누수(漏水)도 쏟아 버리라고 분부했다. 곧 양저가 단상에 올라 군사들에게 맹세를 하고 약속을 밝혔다. 명령하기를 끝내자 해는 이미 신시(申時 ; 오후 4시쯤)가 되었다. 멀리 보니 장가가 네 필의 말이 끄는 높은 수레를 타고 천천히 도착했는데 얼굴에 술기운을 띠었다. 군문에 이르자 장가는 좌우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수레에서 내려 장대(將臺)로 올라갔다. 양저가 단정히 앉아서 몸을 일으키지 않고 단지 묻기를, “감군은 무엇 때문에 약속한 시간에 늦었소?” 하니, 장가가 두 손을 모으며 대답하기를, “오늘 원정길에 나선다고 친척과 옛 친구들이 술을 가져와 전송하기에 이렇게 늦었습니다.” 했다.
양저가 말하기를, “무릇 장수된 자는 군명을 받은 날부터 곧바로 가족을 잊고, 군대에서 약속을 하면 친척과 친구를 잊어야 한다. 북채를 손에 잡고 시석을 무릅쓸 때는 자기 몸을 잊어야 한다. 지금 적국의 침략으로 변경이 소란스럽고 주군께서 잠을 편히 주무시지 못하며 음식도 맛을 느끼지 못하여, 삼군의 군사들을 우리 두 사람에게 맡기어 아침저녁으로 공을 세워 거꾸로 매달린 백성들의 위급함을 구하라고 부탁하셨다. 그런데 그대는 어느 겨를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겠는가?” 하니, 장가가 아직 웃음을 머금고 대답하기를, “어쩌다 약속 시간을 어기게 되었으니 원수께서는 너무 책하지 마시오.” 했다. 양저가 탁자를 치며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주군의 총애에 의지하여 군심을 태만하게 하니 만약에 적군을 앞에 두고 이렇게 한다면 어찌 대사를 그르치지 않겠느냐?” 하고, 즉시 군정사(軍政司)를 불러 묻기를, “군법에 약속 시간이 지나서 오면 어떤 죄에 해당되는가?” 했다. 군정사가 말하기를, “군법에 의하면 마땅히 참수해야 합니다.” 했다. 장가가 ‘참(斬)’이라는 말을 듣자 그때서야 두려운 생각이 들어 문득 달아나려고 장대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양저가 수하들에게 고함쳐서 장가를 붙들어 결박하고 원문 밖으로 끌고 나가서 참수하도록 했다. 장가가 크게 놀라 술기운이 달아나며 입속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용서를 빌어 마지 않았다.
장가를 따라온 자들이 황급하게 제경공에게 달려가 장가의 처지를 보고하고 구원을 청했다. 제경공도 크게 놀라 급히 양구거(梁邱據)를 불러 부절을 가지고 특별히 장가의 죄를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군주의 뜻을 전하게 했다. 제경공이 양구거가 시간에 늦어 장가의 목숨을 구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그에게 작고 빠른 수레를 타고 빨리 달려가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그때 이미 장가의 머리는 원문 앞에 걸려 있었다. 양구거가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손으로 제경공의 부절을 받들고 군중을 바라보고 달려갔다. 양저가 소리쳐 수레를 멈추게 하고 군정사에게 묻기를, “군중에는 수레를 달리지 못하는 법이다. 사자는 어떤 죄에 해당하는가?” 하니, 군정사가 대답하기를, “군법에 역시 참수형에 해당합니다.” 했다. 양구거의 얼굴이 흙색으로 변하더니 몸을 한번 떨더니 말하기를, “군주의 명을 받들어 온 것이지 저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하니, 양저가 말하기를, “이미 군명이 있으니, 죽일 수는 없겠지만, 군법을 폐할 수도 없다.” 하고, 양구거가 타고 온 수레를 부숴버리고, 수레를 끌던 말을 목 베어 사자의 죽음을 대신하게 했다. 양구거가 목숨을 구하여 머리를 싸안고 쥐새끼 같이 달아났다. 이에 대소 삼군의 군사들이 다리를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양저가 군사들을 이끌고 교외에 나가기도 전에 진(晉)나라 군사들은 소문을 듣고 달아나 버렸다. 연나라 군사들도 역시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양저가 그 뒤를 추격하여 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연나라 군사가 대패하여 뇌물을 바치면서 화의를 청했다.
양저가 회군하는 날에 제경공이 친히 교외에서 위로하고, 양저를 대사마(大司馬)로 삼아 병권을 맡겼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총신도, 부절을 지닌 사자도 형을 당하니, 국법은 개인 사정이 없어 반드시 행하였다. 어째서 전양저는 오늘 일어났을까, 적개심을 크게 일으켜 창생을 위로했기 때문이다.” 했다. 제후들이 양저의 명성을 듣고 모두가 두려워했다. 제경공이 안에는 안영이 있고, 밖에는 양저가 있어 나라는 잘 다스려지고 군사들은 강력해졌다. 사방 변경에 일이 없어 제경공은 날마다 오로지 사냥과 음주를 즐겨, 대략 제환공이 관중에게 나랏일을 맡겼던 때와 같았다. 하루는 제경공이 궁중에서 희첩들과 술을 마시다가 밤이 되어도 마음이 오히려 흡족하지 않았다. 갑자기 안자를 생각하고 좌우에 명하여 술 그릇을 챙겨서 술자리를 옮기라고 명했다. 사자가 앞서 달려가 안자에게 알리기를, “주군께서 오십니다.” 하니, 안자가 검은 관복에 허리띠를 매고 홀(笏)을 받쳐 들고 대문 밖에 섰다. 제경공이 미처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안자가 앞으로 나가 맞이하며 황망한 태도로 묻기를, “제후들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나라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아무 일도 없소.” 했다.
안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주군께서 무슨 일로 야심한 때에 신의 집에 오셨습니까?”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상국께서 번거로운 정무에 노고가 많으니 오늘 과인만 좋은 술과 즐거운 음악을 혼자 즐길 수 없어 상국과 같이 즐기러 왔소.” 했다. 안자가 대답하기를, “무릇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 제후들을 안정시키는 일이라면 신과 의논하기를 바랍니다. 만약 자리를 깔고 술상을 준비하는 일은 주군의 좌우에 그것을 맡은 사람이 있습니다. 신이 감히 그 일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제경공이 수레를 돌리라고 명하여 사마양저의 집으로 갔다. 시종이 먼저 달려가 앞에서와 같이 알렸다. 사마양저가 관을 쓰고 갑옷을 입고 손에는 극을 잡고 대문 밖에서 손을 모아 제경공의 수레를 맞이했다. 양저가 몸을 굽혀 묻기를, “제후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습니까? 아니면 대신 중에 반란을 일으킨 자가 있습니까?”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없소.” 했다. 양저가 말하기를, “그런데 밤에 신의 집에 오신 것은 무슨 일이십니까?” 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다름이 아니라 장군이 군무에 노고가 많음을 생각하여 과인에게 좋은 술과 즐거운 음악이 있어 장군과 함께 즐겨 볼까 하고 왔소.” 했다.
양저가 대답하기를, “무릇 적군을 막고 모반자를 죽이는 것은 신에게 의논하기를 바랍니다. 만약 자리를 깔고 술상을 준비하는 일은 주군의 좌우에 그 일을 할 사람이 적지 않은데 어찌하여 갑옷을 입은 무사에게 시키려 하십니까?” 했다. 제경공은 흥취가 사라져 버렸다. 좌우의 시종이 묻기를, “장차 궁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양구거(梁邱據)의 집으로 가자!” 했다. 시종이 앞서 달려가 양구거에게 제경공의 행차를 알렸다. 제경공의 수레가 미처 양구거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양구거가 왼손에는 비파를 들고 오른손에는 피리를 들고 노래를 크게 부르며 골목 입구에서 제경공을 맞이했다. 제경공이 크게 기뻐하여 이에 어의와 관을 벗어버리고 양구거와 함께 음악을 듣고 환호하며 닭이 울고 나서야 궁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안영과 양저가 같이 입조하여 제경공에게 지난밤의 일을 사죄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경공이 밤에 신하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신 일은 부당하다고 간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과인에게 두 경이 없다면 어찌 내가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소? 또한 양구거가 없다면 과인에게 무슨 즐거움이 있겠소? 과인은 두 경의 하는 일을 간섭하지 않을 터이니 두 경들도 과인의 일에 간섭하지 마시오.” 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두 기둥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장군과 상국의 공이니, 어찌 소신(小臣)이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과 서로 같겠는가? 제경공은 어진 신하에게 능히 나랏일을 맡길 수 있어, 그의 아름다운 이름을 해동에 떨치게 되었다.” 했다.
그때 중원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났으나 진(晉)나라가 능히 해결할 수 없었다. 진소공이 재위 6년 만에 죽고 세자 거질(去疾)이 즉위하였다. 이가 진경공(晉頃公)이다. 진경공 원년에 한기와 양설힐이 모두 죽어서 위서가 상경이 되었다. 순력(荀躒)과 범앙(范鞅)이 권력을 남용하고 재물을 탐하여 소문이 퍼졌다. 그때 기씨의 가신인 기승(祁勝)이 우장(鄔臧)의 처와 간통하다가 기영(祁盈)이 기승을 붙잡았다. 기승이 순력에게 뇌물을 바치자 순력이 경공에게 기영을 참소하여 도리어 기영을 잡아들였다. 양설식아(羊舌食我)가 기씨들과 힘을 합하여 기승을 잡아 죽였다. 경공이 노하여 기영과 양설식아를 죽이고, 기씨와 양설씨 종족들을 모조리 죽였다. 진나라 백성이 그것을 원통하게 생각했다. 그 후 노소공은 권신 계손의여(季孫意如)에 의해 쫓겨났다. 순력이 다시 계손의여에게 뇌물을 받고 노소공을 복위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경공이 언릉(鄢陵)에 제후들을 모이게 하여, 노나라의 내란을 평정하려고 했다. 천하의 제후들은 모두 제경공의 의기를 높이 샀다. 제경공의 이름이 제후들 사이에 드러났다. 이것은 후일의 이야기다.
한편, 주경왕 19년(기원전 526년)에 오왕 이매가 재위 4년에 병이 위독하여, 다시 부왕과 형들의 유언대로 계찰에게 왕위를 전하려고 했다. 계찰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내가 왕의 자리를 받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옛날에 부왕께서 내린 명령도 제가 감히 받들지 않았습니다. 부귀는 나에게 있어서는 마치 지나가는 가을바람과 같을 뿐인데 제가 어찌 그 자리를 아까워하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연릉(延陵)으로 도망가듯 돌아가 버렸다. 여러 신하가 이매의 아들 주우(州于)를 받들어 오나라 왕으로 세웠다. 주우가 이름을 요(僚)로 개명하였는데, 이가 오왕 왕료(王僚)다. 제번의 아들은 이름이 광(光)이고, 용병에 능했다. 왕료가 그를 장군으로 삼아 장안(長岸)에서 초나라와 싸워서 초나라의 사마 공자 방(公子魴)을 죽였다. 초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주래(州來)에 성을 쌓아 오나라를 방어했다. 그때 초나라에서는 비무극이 아첨하는 말로 초평왕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채평공 려(廬)는 이미 적자인 주(朱)를 세자로 삼았는데, 평공의 서자인 동국(東國)이 세자의 자리를 뺏으려고 모의하여 초나라 비무극에게 뇌물을 바쳤다. 비무극이 먼저 조오(朝吳)를 초평왕에게 참소하여 정나라로 쫓아냈다. 이어서 채평공이 죽자 세자 주(朱)가 뒤를 이었다. 비무극이 거짓으로 초평왕의 명이라고 전하여 채나라 사람들을 시켜 주(朱)를 쫓아내고 동국을 채나라 군주로 세웠다.
초평왕이 말하기를, “채나라 사람들이 어찌하여 주를 쫓아냈는가?” 하니, 비무극이 대답하기를, “주가 장차 초나라에 반기를 들려고 했기 때문에 채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원치 않아서 주를 쫓아냈습니다.” 했다. 초평왕은 마침내 묻지 않았다. 비무극이 또 태자 건(建)을 꺼리어 부자간을 이간시키려 했으나 아직 계책이 없었다. 하루는 비무극이 초평왕에게 아뢰기를, “태자의 나이가 장성하였는데 어찌하여 혼처를 구하지 않으십니까? 구혼을 하자면 진(秦)나라 만한 데가 없습니다. 진은 강국이며 우리나라와 화목합니다. 두 강국이 혼사를 맺으면 초나라의 세력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했다. 초평왕이 그 말을 쫓아 곧 비무극을 진(秦)나라에 보내 세자를 위해 구혼하게 했다. 진애공(秦哀公)이 여러 신하를 불러 가부를 의논하니, 여러 신하가 모두 말하기를, “예부터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는 대대로 혼인을 맺었습니다. 지금은 진(晉)나라와 우호 관계가 끊어진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초나라의 세력이 바야흐로 성하게 되었으니 청혼을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했다. 진애공은 즉시 대부 한 사람을 초나라에 답례 사절로 보내고 그의 큰 누이동생인 맹영(孟嬴)을 초나라에 시집보내기로 했다. (지금의 통속소설에 무상공주(無祥公主)라고 부르는 여인이다. 공주라는 칭호는 한나라 시대에 비로소 사용했으므로 춘추시대에 어찌 이런 호칭이 있었겠는가?)
초평왕이 다시 비무극에게 명하여 황금과 구슬과 오색 비단 등을 가지고 진(秦)나라에 가서 맹영을 모셔 오라고 했다. 비무극이 진나라 사자를 따라 진나라에 들어가 예물을 바치는 예를 드렸다. 진애공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공자 포(公子蒲)에게 명하여 맹영을 초나라에 보내주고 오라고 했다. 예물을 실은 수레가 백 대에 달했고, 딸려 보낸 잉첩(媵妾)이 수십 명이었다. 맹영은 그의 오라버니 진애공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초나라로 갔다. 비무극이 도중에서 맹영이 절세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잉첩 중에 자태가 제법 단아한 여인이 한 사람 있었다. 비무극이 몰래 그 출신을 알아보니 그 여인은 곧 제나라 출신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 진(秦)나라에서 벼슬을 살게 된 부친을 따라왔다가 마침내 궁중으로 들어가 맹영의 몸종이 되었다고 했다. 비무극이 제나라 여자에 대해 상세히 알아본 후 역관에 묶게 되었을 때 비밀리에 제나라 여자를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너의 관상을 보아하니 귀인의 풍모가 있다. 너를 천거하여 태자비를 만들어 주려 하니 너는 나의 계책을 숨겨야 한다. 그리하면 반드시 너는 장차 부귀를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하니, 제나라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무극이 앞서 길을 달려 하루 먼저 궁중에 달려 들어가서 평왕에게 아뢰기를, “진나라 여자가 이미 도착하여 도성 밖 약 3사(90리)의 거리에 묶고 있습니다.” 했다.
초평왕이 묻기를, “경은 진나라 여자를 이미 보았는가? 그녀의 용모가 어떠하던가?” 하니, 비무극은 초평왕이 주색을 밝히는 위인이라는 것을 알고, 진나라 여자의 아름다움을 과장하여 초평왕의 나쁜 마음을 충동질하려고 하던 참에, 때맞춰 초평왕이 이런 질문을 하여 자기의 계책에 맞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뢰기를, “신이 많은 여자를 봤지만 맹영과 같이 아름다운 여인은 보지 못했습니다. 초나라 후궁 중에 그녀의 미모에 비견할 수 있는 여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전해 오는 달기나 여희 같은 절색이라도 한갓 이름뿐이지 맹영의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했다. 초평왕이 진나라 여자의 아름다움을 듣자 얼굴에 홍조를 띠며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더니 천천히 한탄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헛되이 왕이라고 칭할 뿐이지 그와 같은 천하의 절색도 만나지 못하니 참으로 일생을 헛되이 보냈다고 하겠다.” 했다. 비무극이 좌우의 시종들을 물리게 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아뢰기를, “대왕께서 진나라 여자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시면 어찌하여 스스로 취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초평왕이 말하기를, “이미 며느리로 데려왔으니 인륜에 거리낄까 두렵다.” 했다. 비무극이 아뢰기를, “상관없습니다. 그녀는 비록 태자의 부인으로 데려왔지만, 아직 동궁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대왕께서 궁중으로 불러들인다 한들 누가 감히 이의를 말하겠습니까?” 했다.
초평왕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의 입은 비록 막을 수 있겠지만 태자의 입은 어떻게 막겠는가?” 하니, 비무극이 말하기를, “신이 진나라 여자를 따라온 잉첩을 살펴보니 그중에 제나라 여인이 재주와 용모가 범상치 않으니 그녀를 진나라 여자로 채워 넣으면 됩니다. 신이 먼저 진나라 여자를 왕궁으로 들이고 다시 제나라 여자를 동궁으로 보내면서 그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해 놓으면, 양쪽이 서로 숨겨서 모두에게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했다. 초평왕이 크게 기뻐하여 비무극에게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도록 당부하였다. 비무극이 진(秦)나라 공자 포에게 말하기를, “초나라의 혼례는 다른 나라와 다릅니다. 먼저 왕궁으로 들어가 시부모를 뵙고 그다음에 혼례를 치릅니다.” 하니, 공자 포가 말하기를, “명에 따르겠습니다.” 했다. 비무극이 곧 좌우에게 명하여 맹영과 그 잉첩들을 휘장을 친 수레에 태우고 모두 왕궁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어서 맹영은 왕궁에 남게 하고 제녀는 동궁으로 보냈다. 궁중의 시첩들을 진나라 잉첩으로 분장하고 제나라 여자는 거짓 맹영으로 분장하여, 태자 건으로 하여금 맞이하여 동궁으로 데려가 성례를 치르게 하였다. 조정의 문무 대신들과 태자 모두가 비무극이 꾸민 속임수를 알지 못했다. 맹영이 묻기를, “제나라 여자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 곧 말하기를, “이미 태자에게 주었습니다.” 했다. 잠연(潛淵) 선생의 영사시(詠史詩)에 이르기를, “위선공이 신대(新臺)에서 나쁜 선례를 만들었고, 채경공은 며느리와 간통하여 반역을 배태(胚胎)시켰고, 통탄스럽게도 초평왕이 패륜을 저질렀으니, 며느리로 데려온 진나라 여자를 궁중으로 끌어들였다.” 했다.
초평왕은 태자가 진나라 여자의 일을 알까 걱정하여 태자가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모자의 상면도 허락하지 않았다. 초평왕은 조석으로 진나라 여자와 후궁에서 잔치를 벌여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궁궐 밖에서는 여론이 비등하여 많은 사람이 진나라 여자의 일을 의심했다. 비무극은 태자가 그 일을 알게 되어 혹시라도 변란의 화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여 곧 초평왕에게 고하기를, “진(晉)나라가 오랫동안 능히 천하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땅이 중원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초영왕께서 진(陳)나라와 채나라에 큰 성을 쌓아 중원을 진압하려 했던 것은 바로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기초였습니다. 지금 두 나라를 다시 봉하여 초나라는 예전처럼 남방으로 물러나게 되었기 때문에, 어찌 능히 패업을 펼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태자에게 명하시어 나가서 성보(城父)에 진을 쳐서 북방으로 통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대왕께서는 남방의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되어 가히 앉아서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계책입니다.” 했다. 평왕이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비무극이 귓속말로 말하기를, “진(秦)나라 혼사 일은 시간이 지나게 되면 탄로나게 될 것입니다. 만약 태자를 멀리 보내신다면 나라를 위해서나 대왕 자신에게나 어찌 이롭지 않겠습니까?” 하니, 초평왕이 문득 크게 깨닫고 즉시 태자 건에게 명하여 군사를 데리고 가서 성보를 지키도록 했다. 분양(奮陽)을 성보의 사마로 삼아 당부하기를, “태자를 나를 모시듯 하라!” 했다.
오사(伍奢)가 비무극의 속임수를 알아채고 장차 나아가 간언하려고 했다. 그러나 비무극이 그것을 알고 다시 평왕에게 말하여 오사도 성보로 가서 태자를 보좌하게 했다. 태자가 성보로 간 후에 평왕은 마침내 진나라 여자 맹영을 부인으로 삼고, 태자의 생모인 채희(蔡姬)는 운(鄖) 땅으로 돌려보냈다. 태자는 성보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나라 여자가 부왕에 의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맹영이 비록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초평왕을 보니 늙었기 때문에 마음이 기쁘지 않았다. 초평왕도 스스로 짝이 아님을 알았으나 감히 맹영에게 이유를 묻지 못했다. 1년이 지나자 맹영이 아들을 낳았다. 초평왕이 귀중한 보물처럼 사랑했으므로 이름을 진(珍)이라고 했다. 진이 다시 돌이 지난 후에 초평왕이 비로소 맹영에게 묻기를, “그대는 궁에 들어온 후로 늘 수심이 많고 웃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이오?” 하니, 맹영이 말하기를, “첩이 오라버니의 명을 받들어 군왕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첩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진(秦)나라와 초나라는 서로 비슷하니, 저도 젊은 나이의 상대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궁정에 들어와 보니 대왕의 춘추가 혈기 왕성한 것을 보고, 제가 감히 대왕을 원망하지 못하고, 다만 대왕과 같은 때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할 뿐입니다.” 했다.
초평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렇게 된 것은 현세의 일이 아니라 전생의 인연으로 맺어진 것이오. 그대는 과인에게 너무 늦게 시집왔지만, 왕후가 된 것이 몇 년이나 앞당겨진 것을 모르는구려.” 했다. 맹영이 마음속으로 그 말에 의혹이 생겼다. 그래서 궁녀들에게 자세히 캐물어 보니, 궁녀들이 숨기지 못하고 마침내 그 까닭을 말했다. 맹영은 쓸쓸하게 눈물을 흘렸다. 초평왕이 그 마음을 알고서 백방으로 그 비위를 맞추려고 애쓴 나머지 공자 진을 세자로 세우기로 허락했다. 그제야 맹영의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비무극은 끝내 태자 건이 염려되어, 후일에 태자 건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화가 반드시 자기에게 미칠 것임을 두려워하여, 다시 틈을 타서 초평왕에게 참소하기를, “세자가 오사와 모의하여 반역을 꾀하고 몰래 사람을 제나라와 진(晉)나라에 보내어 도움을 허락받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왕께서는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초평왕이 말하기를, “내 아들은 원래 유순한 아이인데 어찌 그런 일을 하겠는가?” 했다. 비무극이 말하기를, “태자는 진나라 여자의 일로 원망을 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성보에서 무기를 정비하고 병사들을 훈련하며, 항상 입으로 초목왕이 대사를 행한 후에 초나라는 안정되고 자손이 번성하였다고 하면서 그것을 본받겠다고 합니다. 대왕께서 만약 믿지 못하신다면 신이 먼저 벼슬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면해야겠습니다.” 했다.
초평왕도 원래 태자 건을 폐하고 어린 아들 진을 세우려고 하던 참에 또 비무극의 설득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서 비무극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결국 믿고 말았다. 그래서 초평왕이 즉시 태자 건을 폐하려는 명령을 전하려 했다. 비무극이 아뢰기를, “세자가 나라 밖에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어, 만약에 세자를 폐한다는 명령을 내린다면 그 반역을 격동시킬 것입니다. 태사 오사는 태자의 모사입니다. 왕께서 먼저 오사를 부른 뒤에 군사들을 보내어 세자를 습격하여 잡으면 대왕의 근심거리는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니, 초평왕이 그 계책을 옳게 여겨 즉시 사람을 시켜 오사를 불렀다. 오사가 이르자 평왕이 묻기를, “건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데 그대는 그 일을 아는가?” 하니, 오사는 원래 강직한 사람이라 곧 대답하기를, “왕께서 며느리를 가로챈 것이 이미 잘못입니다. 또 간사한 자의 말을 듣고 골육의 지친까지 의심하시니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했다. 초평왕이 오사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좌우에게 소리쳐 오사를 잡아 옥에 가두도록 했다. 비무극이 아뢰기를, “오사가 왕께서 며느리를 차지했다고 책하니 왕을 원망하는 마음이 명백합니다. 오사가 잡혀 옥에 갇혔다는 것을 태자가 알게 되면 군사를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제나라와 진(晉)나라의 군사를 우리가 당할 수 없습니다.” 했다.
초평왕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시켜 세자를 죽이려 하는데 누구를 보내면 되겠는가?” 하니, 비무극이 대답하기를, “다른 사람이 가면 태자가 반드시 저항해 싸울 것입니다. 사마 분양을 몰래 시켜서 세자를 습격하여 죽이라고 하는 게 낫습니다.” 했다. 초평왕이 즉시 사람을 보내어 분양에게 몰래 시키기를, “태자를 죽이면 후한 상을 내릴 것이지만, 태자를 놓아 보내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했다. 분양이 명령을 받고 즉시 심복을 시켜 몰래 태자에게 알리고, 그에게 지시하기를, “빨리 도망치십시오. 경각이라도 지체하지 마십시오.” 했다. 태자건이 크게 놀랐다. 그때 제나라 여자는 이미 아들 승(勝)을 낳았다. 즉시 건이 그의 처자와 함께 밤을 틈타 송나라로 도망쳤다. 분양은 세자가 이미 달아난 것을 알고, 성보의 관리들을 시켜 자기를 잡아 함거에 가두어 영도(郢都)로 압송하도록 했다. 압송되어 평왕 앞에 선 분양이 말하기를, “세자는 도망쳤습니다.” 하니, 초평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말은 내 입에서 나와 너의 귀로만 들어갔다. 누가 건에게 알렸느냐?” 했다. 분양이 말하기를, “신이 사실대로 고했습니다. 왕께서 저에게 명하기를, ‘건을 나를 모시듯이 모셔라!’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그 말씀을 삼가 지켜서 감히 두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알려드렸습니다. 뒤늦게 제가 죄를 지은 것을 생각하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했다.
초평왕이 말하기를, “네가 이미 태자를 몰래 풀어 주고, 또 감히 과인을 찾아왔으니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 하니, 분양이 대답하기를, “제가 이미 왕께서 나중에 내린 명령을 받들지 못했는데, 다시 죽음이 두려워 오지 않는다면 이것은 두 가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또한 세자는 반역할 뜻이 없는데 죽인다면 명분이 서지 않습니다. 진실로 대왕의 아들이 살 수 있다면 저는 죽어도 괜찮습니다.” 했다. 초평왕이 측은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기색도 있는 듯하더니 한참 후에 말하기를, “분양이 비록 왕명을 거역했다 하나 그 충직함은 가상하다.” 하고, 즉시 그의 죄를 용서하고, 다시 성보 사마로 복직시켰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무고한 세자가 이미 목숨을 구해 달아나자, 감히 도망가지 않고 끓는 가마솥 앞으로 왔다. 분분한 참소와 아첨으로 끝내 죽을 뻔했지만, 천추에 분양의 이름은 남아있도다.” 했다. 초평왕은 이에 진나라 여자의 소생인 공자 진을 태자로 세우고 비무극을 태사로 삼았다. 비무극이 또 아뢰기를, “오사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상(尙)과 원(員)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인걸인데 만약 그들이 오나라로 도망친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 우환이 될 것입니다. 어찌 그 부친을 시켜 죄를 면하여 준다면서 부르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 부친을 사랑하여 틀림없이 부름에 응하여 올 것입니다. 그들이 오면 모두 죽여서 후일의 우환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했다.
초평왕이 크게 기뻐하여 옥중에서 오사를 꺼내오게 하여 좌우에게 명하여 종이와 붓을 내어 주며 말하기를, “너는 태자가 모반하게 시켰다. 그래서 본디 참수하여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너의 할아비와 아비가 앞서 조정에 세운 공로를 생각하여 차마 죄를 더할 수가 없다. 네가 글을 써서 두 아들을 조정으로 부르면 그들에게 관직을 바꾸어 주고 너는 죄를 용서하여 전원으로 돌아가게 하겠다.” 했다. 오사는 마음속으로 초평왕이 자기를 속여 두 아들들을 불러 같이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대답하기를, “신의 큰아들 상은 자애롭고 따뜻하며 어질고 신의가 있습니다. 신이 부른다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아들 원은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무예를 오래 익혀서, 학문은 능히 한 나라를 안정시키고, 무예는 능히 나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온갖 더러움과 치욕을 참고 능히 대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는 앞일을 내다보는 선비인데 어찌 기꺼이 오겠습니까?” 하니, 초평왕이 말하기를, “너는 다만 과인이 말한 대로 글을 써서 부르면 된다. 불러도 오지 않는다면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했다.
오사가 쓰기를 마치고 초평왕에게 드리니 평왕이 언장사(鄢將師)를 사자로 삼아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함에 넣은 인수를 가지고 당읍(棠邑)으로 가게 하였다. 그러나 그때 오상은 이미 성보에 돌아가 있었다. 언장사가 다시 성보에 이르러 오상을 만나 말하기를, “축하드립니다!” 했다. 오상이 말하기를, “부친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데 어찌하여 축하한다고 하십니까?” 하니, 언장사가 말하기를, “왕이 다른 사람의 말을 잘못 듣고 부친을 옥에 가두었는데 지금은 여러 신하가 보증하여 공의 집안은 삼대에 걸친 충신이라고 칭송하여, 왕이 참소를 잘못 듣고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오히려 부친을 높여 상국으로 삼고 그대들 두 아들을 후(侯)를 봉하여 그대 상(尙)에게는 홍도후(鴻都侯)를, 동생 원(員)에게는 개후(盖侯)에 봉하였소. 부친께서는 오랫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 두 아들을 보고 싶어 하여 다시 편지를 써서 나에게 주어 모셔 오라고 했소. 빨리 수레를 타고 부친의 보고 싶은 마음을 위로해야 될 것이오.” 했다. 오상이 말하기를, “부친께서 감옥에 갇혀서 나의 마음은 찢어지듯 했으나 풀려났다니 다행입니다. 어찌 감히 인수를 욕심내겠습니까?” 하니, 언장사가 말하기를, “이것은 왕명이니 그대는 사양하지 마시오.” 했다. 오상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부친의 편지를 가지고 내실로 들어가서 동생 오원에게 알렸다.
오원이 거꺼이 함께 부름에 응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제72회: 당공 상이 몸을 던져 부친의 수난에 달려가고, 오자서는 미복으로 소관을 통과하다.
한편, 오원(伍員)의 자는 자서(子胥)이고 감리(監利) 사람이다. 키가 한 길이 넘고 허리둘레가 열 아름이며 눈썹의 사이는 한 자이고 눈빛은 번개와 같았으며, 힘은 세 발 솥을 들고 산이라도 뽑을 만한 용력을 지녔고, 문무를 겸전한 인재였다. 또한 세자의 태부이며 연윤(連尹)인 오사(伍奢)의 아들이고 당공(棠公) 오상(伍尙)의 동생이었다. 이때 오상과 오원 형제는 함께 부친 오사를 따라와서 성보에 있었다. 언장사가 초평왕의 명을 받들어 오사의 두 아들을 유인하여 조정에 들어오게 하려고 먼저 오상을 만나서 오원도 같이 보기를 청했다. 오상이 부친의 편지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 오원과 같이 읽은 후에 말하기를, “부친께서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고, 우리 두 사람을 후(侯)로 봉하기 위해 사자가 문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동생은 나가서 만나 보아라.”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부친께서 죽음을 면하셨다는 것은 아주 다행한 일이지만 우리 두 아들이 무슨 공이 있다고 또 후에 봉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입니다. 가면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했다. 오상이 말하기를, “부친의 편지가 있는데 어찌 속인다고 하겠는가?”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우리 부친께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시는 분이니 내가 반드시 원수를 갚을 것을 아시고, 그래서 초나라에서 함께 죽어서 초나라의 후환을 없애려는 것입니다.” 했다.
오상이 말하기를, “동생의 말은 지나친 억측이다. 만일 부친의 서신이 진정이라면 우리가 저지르게 되는 불효의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변명하겠는가?”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형님께서는 잠시 앉아 계십시오. 제가 잠시 길흉을 점쳐 보겠습니다.” 하고, 산가지로 괘를 얻더니 말하기를, “오늘이 갑자(甲子) 일이고 시간은 사시(巳時)라 날과 시의 간지(干支)가 서로 해치고 기(氣)가 화합을 하지 않으니 주군이 신하를 속이고, 신하가 자식을 속입니다. 가면 죽는데, 어찌 후(侯)에 봉해지겠습니까?” 했다. 오상이 말하기를, “후의 벼슬을 탐해서가 아니라 부친을 만나고 싶을 뿐이다.”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초나라 사람이 우리 형제가 바깥에 있는 것을 두려워해서 틀림없이 감히 부친을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형이 만약 간다면 아버지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했다. 오상이 말하기를, “부자간의 사랑은 그 은정이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만약 한 번 뵙고 죽는다 한들 그것 역시 달게 받겠다.” 했다. 이에 오원이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기를, “부친과 함께 죽는다고 우리 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형님은 꼭 가시겠다고 하지만 이 동생은 여기에서 이별하겠습니다.” 하니, 오상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너는 장차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초나라에 복수할 수 있다면 나는 어디라도 가겠습니다.” 했다.
오상이 말하기를, “나의 지혜가 동생에게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초나라 도성에 당도하면 너는 다른 나라로 도망쳐라. 내가 효를 위해 부친과 함께 죽게 되면 너는 부친의 원수를 갚아 효를 행하도록 해라. 이제부터 각기 자기의 뜻대로 행하니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구나!” 했다. 오원이 오상에게 네 번 절하여 영결을 고했다. 오상이 눈물을 닦으며 밖으로 나와 언장사를 보고 말하기를, “동생이 벼슬에 봉해지기를 원하지 않아 제가 강권할 수 없었습니다.” 했다. 언장사가 할 수 없이 오상과 함께 수레에 올랐다. 초평왕을 뵈니, 오상을 오사와 함께 가두어 두도록 했다. 오사는 단신으로 영도에 돌아온 오상을 보자 한탄하며 말하기를, “나는 원래 오원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했다. 비무극이 다시 평왕에게 아뢰기를, “오원이 아직 밖에 있으니 마땅히 급히 잡아들이도록 하십시오. 지체하면 외국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했다. 초평왕이 그 말에 따라 대부 무성흑(武城黑)에게 정예 군사 200명을 거느리고 가서 오원을 덮치도록 했다. 오원이 초나라 군사가 자기를 잡으러 오는 것을 탐지하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부친과 형님이 과연 화를 면하지 못하셨구나!” 하고, 즉시 그의 처 가씨(賈氏)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군사를 빌려 부친과 형님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오. 그래서 그대를 돌볼 수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했다.
가씨가 눈을 부릅뜨고 오원을 보면서 말하기를, “대장부가 부형의 원한을 품어 마치 간과 폐가 찢어지는 듯한데, 어느 겨를에 부인에게 신경을 쓰겠습니까? 첩은 신경 쓰지 말고 속히 떠나십시오.” 하고, 마침내 방안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오원이 한바탕 통곡하고 나서 그 시체를 짚에 싸서 땅에 묻었다. 즉시 행낭을 수습하여 흰 도포를 입고 활을 메고 검을 차고 집을 떠났다. 반나절도 못되어서 초나라 군사들이 이르러 집을 포위하고 수색하였으나 오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오원이 틀림없이 동쪽으로 도망쳤다고 짐작한 무성흑은 즉시 마부에게 질주하여 오자서의 뒤를 쫓게 했다. 약 300리쯤 가서 사람이 없는 광야에 이르렀다. 오원이 활을 당겨 화살을 메겨 마부를 쏘고 다시 화살을 메겨 무성흑을 쏘려고 했다. 무성흑이 두려워서 수레에서 내려 달아나려고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원래 너를 죽이려고 했지만 잠시 너의 목숨을 살려주는 이유는 초평왕에게 돌아가 나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초나라의 종사를 계속 받들려고 한다면 반드시 우리 부친과 형님의 목숨을 살려 두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는다면 내가 반드시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친히 초평왕의 머리를 베어 나의 원한을 씻을 것이다!” 했다. 무성흑이 머리를 싸고 쥐새끼처럼 도망쳐서 돌아와 평왕에게 보고하기를, “오원은 이미 도망쳐 버렸습니다.” 했다.
평왕이 대로하여 즉시 비무극에게 명하여 오사의 부자를 저자에 압송하여 참수하도록 했다. 형을 집행하려는 순간에 오상이 무극에게 침을 뱉으며, 참언으로 주군을 현혹시켜 충신과 어진 사람을 살해한다고 욕을 했다. 오사가 말리며 말하기를, “나라가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다. 충신과 간신은 저절로 공론할 것인데 어찌 욕을 하겠는가? 다만 오원이 오지 않았으니 오늘 이후로 초나라의 군주와 신하가 편안하게 아침밥을 먹을 수 없을 것을 걱정한다.” 하고, 말을 마치자 목을 늘여 참수형을 받았다.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 하늘이 흐리고 해가 어두워지면서 처량한 바람이 불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처참하고 구슬픈 바람이 일고 해가 빛을 잃더니, 삼대에 걸친 충신의 자손들이 갑자기 화를 당해 죽었다! 이때부터 초나라의 조정에는 간신들로만 가득 차게 되어, 마침내 오나라 병사들을 영성에 불러들였다.” 했다. 초평왕이 비무극에게 묻기를, “오사가 형을 당할 때 무슨 원망의 소리를 하던가?” 하니, 비부극이 말하기를, “별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오원이 오지 않아서 초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은 마음 놓고 식사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니, 초평왕이 말하기를, “오원이 비록 달아났지만, 틀림없이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마땅히 다시 쫓아가 잡아라!” 했다.
초평왕은 즉시 좌사마 심윤수(沈尹戍)에게 군사 3천 명을 주어 오원을 끝까지 추격하게 했다. 오원은 큰 강가에 이르러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다. 그는 흰 도포를 벗어 강변의 버드나무 가지 위에 걸어 놓고, 신발을 벗어 강변에 버리고 짚신으로 바꾸어 신고 강물을 따라 계속 밑으로 내려갔다. 심윤수는 오원을 추격하여 강어귀에 이르러 오원이 버리고 간 도포와 신발을 주워서 초평왕에게 돌아와 아뢰기를, “오원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비무극이 나와 말하기를, “신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가히 오원이 도망치는 길을 끊을 수 있습니다.” 했다. 초평왕이 묻기를, “어떤 계책인가?” 하니, 비무극이 대답하기를, “초나라 전역에 현상금을 걸고 방을 붙여서 어떤 사람이건 오원을 잡아가지고 오는 자는 곡식 5만 석과 상대부의 벼슬을 내린다고 하시고, 누구든지 간에 오원을 수용하거나 놓아준 자는 그의 일가족을 참수한다고 하십시오. 모든 길의 관문과 강의 나루에 조칙을 내려 내왕하는 모든 행인을 엄중히 캐묻게 하시고, 또 제후국에 두루 통고하여 오원을 보면 감추지 말라고 하십시오. 그가 진퇴할 길이 없어 비록 일시에 잡을 수 없을지 몰라도 그 형세가 고단하여 어찌 능히 큰일을 이루어 내겠습니까?” 했다. 초평왕은 그 계책에 모두 따랐다. 그리고 오원의 모습을 그려서 체포하도록 초나라의 모든 관문과 요충지에 긴급히 명령했다.
한편, 오원이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서 오직 오나라로 가려 했으나 길이 너무 멀어서 일시에 가기가 어려웠다. 갑자기 생각하기를, “태자 건이 송나라로 달아났으니 어찌 그를 따르지 않으리오?” 하고, 마침내 송나라 수양성을 향하여 나아갔다. 길을 가는 도중에 갑자기 앞에서 한 떼의 거마가 오는 것이 보였다. 오원은 초나라 군사가 길을 막는 줄로 의심하고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숲속에 몸을 숨기고 살펴보니 그들은 옛날 친구인 신포서(申包舒) 일행이었다. 신포서는 오원과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초나라로 돌아오며 이곳을 지나는 중이었다. 오원이 뛰어나와 수레의 왼쪽에 섰다. 신포서가 놀라 황망히 수레에서 내려 서로 보며 묻기를, “자서는 어찌하여 이곳에서 홀로 길을 가고 있는가?” 하니, 오원은 초평왕이 자기의 부친과 형을 아무 죄도 없이 죽인 일을 말하면서 통곡했다. 신포서가 듣고 측은하게 여기며 묻기를, “자네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부모를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라고 하는데, 나는 장차 다른 나라로 달아나서 군사를 빌려 초나라를 정벌하여 초평왕의 고기를 씹고, 비무극의 시체를 찢어서 이 원한을 풀겠네!” 했다.
신포서가 권하여 말하기를, “초평왕이 비록 무도하나 군주라! 그대의 집안은 여러 대에 걸쳐 녹을 받아먹었으니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정해졌다. 어떻게 신하로서 군주에게 원수를 갚겠는가?”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옛날 걸주(桀紂)가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오직 그가 무도했기 때문이다. 초평왕은 며느리를 가로채고 적자를 버렸으며 참소와 아첨을 믿고 충성스럽고 착한 신하를 죽였네. 나는 군사를 빌려 영도(郢都)로 쳐들어가 초나라의 더러운 놈들을 모조리 쓸어 없애 버리겠네. 하물며 골육의 원수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만약에 초나라를 멸하지 못한다면, 맹세컨대 천지간에 내가 서 있지 않을 것이네!” 했다. 신포서가 말하기를, “내가 만약 자네에게 원수를 갚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라에 불충이 되고, 자네에게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자네를 불효자로 만드는 일이라! 자네는 힘써 자네 뜻대로 행하게! 친구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나는 자네를 만났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겠네! 그러나 자네가 초나라를 뒤엎는다면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보존시킬 것이고, 자네가 초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면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안정시킬 것이네.” 했다. 오원이 마침내 신포서와 작별하고 갔다. 하루가 지나지 않아 송나라에 도착했다. 태자 건을 찾아서 만나 머리를 쓸어안고 통곡하며 초평왕의 악행을 호소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태자께서는 송나라 군주를 만나 보셨습니까?” 하니, 태자 건이 말하기를, “송나라는 지금 내란이 일어나서 군주와 신하가 서로 공격하니 내가 아직 송나라 군주를 만나지 못했소.” 했다.
한편, 송나라 군주는 이름이 좌(佐)이고 곧 송평공(宋平公)의 사랑하는 첩이 낳은 아들이었다. 송평공이 시인(寺人) 이려(伊戾)의 참소를 듣고 태자 좌(痤)를 죽이고 좌(佐)를 세웠다. 주경왕 13년(기원전 532년)에 송평공이 죽고, 좌(佐)가 그 뒤를 이으니, 이가 송원공(宋元公)이다. 송원공은 얼굴이 추하고 성격이 유약하고 사사로움이 많으며 신의가 없었다. 대대로 경(卿)을 맡은 화씨의 세력을 싫어하여 공자 인(公子寅), 공자 어융(公子御戎), 상승(向勝), 상행(向行) 등과 공모하여 화씨들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상승이 그들의 모의를 상녕(向寧)에게 발설하자, 상녕은 평소에 화향(華向), 화정(華定), 화해(華亥) 등과 친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먼저 난을 일으키기로 모의했다. 화해가 거짓으로 병이 났다고 하자 여러 신하가 모두 병문안을 왔다. 화해가 공자 인과 공자 어융을 붙잡아 죽이고, 상승과 상행은 창고 안에 가두었다. 송원공이 재빨리 수레를 타고 친히 화씨의 부중에 가서 상승과 상행을 풀어 주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화해는 송원공을 협박하여 세자와 측근 신하들을 인질로 보내 주면 두 상씨를 풀어 주겠다고 했다. 송원공이 말하기를, “옛날 주나라와 정나라가 인질을 교환한 전례가 옛날부터 있으니 과인도 세자를 경의 집에 인질로 보내겠으니 경의 아들도 역시 과인에게 인질로 맡기시오!” 했다.
화씨들이 상의하여 화해의 아들 화무척(華无慼)과 화정(華定)의 아들 화계(華啓), 상녕의 아들 상라(向羅)를 송원공에게 인질로 보냈다. 송원공도 역시 세자 난(欒)과 그의 동모제인 공자 지(公子地)를 화해의 집에 인질로 보냈다. 화해가 비로소 상승과 상행을 석방하니 그들이 송원공을 따라 조당으로 돌아갔다. 송원공과 부인이 세자 난을 생각하여 매일 반드시 화씨의 집에 이르러, 세자가 식사를 마치는 것을 보고 나서 돌아갔다. 화해가 그 불편함을 싫어하여 세자를 궁으로 돌려보내려 하니 송원공이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상녕이 찬성하지 않고 말하기를, “태자를 인질로 삼은 까닭은 오로지 주군을 믿지 못해서인데, 만약 인질을 보내 버린다면 반드시 화가 우리에게 미칠 것이오.” 했다. 송원공이 화해가 중간에 뉘우쳐 마음을 바꾼 것을 알고, 대로하여 대사마(大司馬) 화비수(華費遂)를 불러 무장병을 거느리고 화해의 집을 공격하도록 했다. 화비수가 대답하기를, “세자가 그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데 주군께서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니, 송원공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문제는 하늘의 명에 달려 있다! 과인은 이 치욕을 참을 수가 없다!” 했다. 화비수가 말하기를, “주군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늙은 신하가 어찌 감히 사사로운 종족들을 비호하기 위해 군명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날로 무장병을 정돈했다.
송원공은 마침내 인질로 잡혀 있던 화무척, 화계, 상라를 모두 참수형에 처하고 화씨들의 집을 공격하게 했다. 화등(華登)은 평소에 화해와 친하게 지냈으므로 달려가 그 일을 알렸다. 화해가 바삐 집안의 가병을 모아 맞아 싸웠으나 패했다. 상녕이 세자를 죽이려고 하자 화해가 말하기를, “군주에게 죄를 지었는데 다시 군주의 아들까지 살해한다면 사람들이 장차 우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이에 인질을 모두 돌려보내고 그 일당과 함께 진(陳)나라로 도망쳤다. 화비수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이가 화추(華貙)이고, 차자는 화다료(華多僚)이며, 화등은 셋째 아들이었다. 화다료는 화추와 평소에 사이가 나빴다. 그래서 화씨의 난에 송원공에게 참소하기를, “화추가 실은 화해, 화정과 같이 모의했습니다. 지금 진(陳)나라에서 그를 불러 장차 내응이 되라고 합니다.” 하니 송원공이 그 말을 믿고 시인(寺人) 의료(宜僚)를 시켜 화비수에게 고하게 했다. 화비수가 말하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화다료의 참소다. 주군께서 이미 화추를 의심하니 즉시 주군에게 화추를 추방하도록 청해야겠다.” 했다. 화추의 가신인 장개(張匃)가 그 일을 은밀히 듣고 의료에게 물으니, 의료가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장개가 칼을 뽑아 손에 들고 말하기를, “만약 그대가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장 죽이겠소!” 하니, 의료가 겁에 질려 사실을 모두 토로했다. 장개가 화추에게 보고하고 화다료를 죽이자고 청했다.
화추가 말하기를, “화등(華登)이 나라 밖으로 달아나서 이미 부친의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형제가 또 싸운다면 어찌 살 수 있겠소? 내가 장차 피하겠소.” 하고, 부친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러 가는데 장개가 뒤를 따랐다. 그때 마침 화비수가 조정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화다료가 수레를 몰았다. 장개가 보더니 분함을 참지 못하고 허리에 찬 칼을 빼들고 달려들어 화다료를 찔러 죽였다. 그리고 화비수를 칼로 위협하여 함께 송나라 도성의 남문인 로문(盧門)을 나가 남리(南里)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 사람을 진(陳)나라로 보내 화해와 상녕 등을 불러와 함께 모반했다. 송원공이 악대심(樂大心)을 대장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남리를 포위하게 했다. 그러자 화등이 초나라로 가서 군사를 청하니, 초평왕이 원월(薳越)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화씨를 구하라고 했다. 오원이 장차 초나라 군사들이 송나라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송나라에는 머무를 수가 없겠습니다.” 하고, 즉시 태자 건과 그 부인 및 아들과 함께 서쪽 정나라로 달아났다. 시가 있어 증험하기를, “천 리 길을 나선 사람이 쉬지도 못했는데, 송나라 도성 남문에서 징소리와 북소리가 하늘을 진동시키네. 외로운 신하와 버림받은 아들은 낭패를 당하여, 또다시 정나라의 형양을 향하여 말을 채찍질했네.” 했다. 초나라 군사들이 화씨들을 구하러 오자 진경공(晉頃公)도 역시 제후들을 거느리고 송나라를 구하러 달려왔다. 제후들이 초나라와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진경공은 송나라를 권하여 남리(南里)의 포위를 풀고 화해와 상녕을 놓아주어 초나라에 가서 살게 하고 양쪽의 군대는 물러갔다. 이것은 후일의 이야기다.
그때 정나라의 상경 공손 교(僑)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정공(鄭定公)이 매우 애통해하고 있었다. 정정공은 평소에 오원이 초나라의 3대 충신의 후예이며 비할 바 없는 영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때 정나라는 진(晉)나라와 화목하고 초나라와는 원수가 되어 있었다. 정정공은 태자 건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행인(접대 담당)을 시켜 그들을 역관에 묵게 하고 양식과 기물을 후하게 주었다. 태자 건과 오원은 정정공을 볼 때마다 반드시 곡을 하며 그들의 원통한 사연을 호소했다. 정정공이 말하기를, “정나라는 작은 나라여서 군사의 수는 많지 않아 용병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대들이 원수를 갚고자 한다면 어찌하여 진(晉)나라에 가서 모의해 보지 않습니까?” 하니, 태자 건이 오원을 정나라에 남겨 두고 친히 진나라로 가서 진경공(晉頃公)을 접견했다. 진경공이 자세하게 그 정황을 물은 후에 태자 건을 역관으로 보내 기다리게 하고, 육경을 불러 초나라를 정벌하는 문제를 의논했다. 그 육경은 위서(魏舒), 조앙(趙鞅), 한불신(韓不信), 사앙(士鞅), 순인(荀寅), 순력(荀躒) 등이었다. 당시 육경은 일을 처리하는 데 각기 화목하지 못했고, 군주의 세력은 약하고 신하의 세력은 강해서 진경공이 독단으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그중에 오직 위서와 한불신이 어질다는 이름이 있었고, 나머지 네 사람은 모두 권세만을 탐하는 무리였다. 그중에서 순인은 뇌물을 특히 좋아했다.
정자산이 정나라의 국정을 맡아서 예의를 지켜 대접했기 때문에, 진(晉)나라의 경들도 두려워했다, 자산이 죽고 유길(游吉)이 대신하여 집정하자 순인이 사사로이 사람을 보내 뇌물을 요청했으나 유길은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순인은 정나라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었다. 이에 몰래 진경공에게 아뢰기를, “정나라는 음양으로 진(晉)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않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지금 초나라의 세자가 정나라에 있으니 정나라가 틀림없이 그를 믿을 것입니다. 세자가 능히 내응이 되고,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멸하여 정나라를 태자 건에게 봉해준 연후에 천천히 초나라를 도모한다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하니 진경공이 그 계책을 따라서 즉시 그 계책을 태자 건에게 몰래 알려주게 했다. 태자 건이 흔쾌히 허락했다. 태자 건이 진경공을 작별하고 정나라에 돌아와서, 오원과 그 일을 상의했다. 오원이 간하여 말하기를, “옛날 진(秦)나라 장수 기자(杞子)와 양손(楊孫)이 정나라를 기습하려다가 일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숨길 곳이 없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무릇 다른 사람이 진심으로 우리를 믿어주는데 어찌 그런 계책을 쓰겠습니까? 이것은 요행을 바라는 계책이니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하니, 태자 건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진나라 군주와 신하에게 허락했소,”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진(晉)나라에 내응하지 않았으니 아직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정나라를 도모한다면 신의와 정의를 모두 잃어버리니 어찌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태자께서 이 일을 결단코 행하신다면 재앙이 바로 닥칠 것입니다.” 했다. 태자 건은 나라를 얻으려는 욕심으로 마침내 오원의 충고를 듣지 않고, 가재를 털어 비밀리에 용사들을 모으고 다시 정나라 군주의 측근과도 교제하여 그들이 도와주기를 바랐다. 정나라 군주의 측근들이 뇌물을 받고 서로 간에 돌아가며 결의를 맺었다. 그리하여 진(晉)나라에서 몰래 사람을 태자 건이 묵고 있는 곳에 보내어 정나라를 기습할 날짜를 정했다. 그러나 그 음모가 점점 밖으로 새어 나가 어떤 사람이 비밀리에 자수했다. 정정공과 유길이 대책을 세우고, 후원에서 같이 술을 마시자고 태자 건을 불렀다.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술이 석 잔쯤 돌자 정나라 군주가 말하기를, “과인이 호의를 갖고 태자를 우리나라에 머무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껏 소홀히 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태자는 어찌하여 우리 정나라를 도모하려고 하십니까?” 하니, 태자 건이 말하기를, “여태껏 그런 뜻이 없습니다.” 했다. 정정공이 좌우를 시켜 그 일을 대질시키니, 태자 건은 감출 수가 없었다. 정나라 군주가 대로하여 역사에게 큰소리로 명령을 내려 연회석에서 태자 건을 포박한 후에 밖으로 끌고 나가 참수하도록 했다. 아울러 좌우에서 뇌물을 받아먹고 자수하지 않은 20여 명도 죽였다.
그때 오원은 역관에 있었는데, 갑자기 살이 떨려 그치지 않았다. 오원이 혼자 말하기를, “태자가 위태롭구나!” 했다. 조금 있다가 태자 건을 따르던 사람이 역관으로 도망쳐 돌아와서 태자가 피살된 일을 말했다. 오원이 즉시 태자 건의 아들 승(勝)을 데리고 정나라 도성을 탈출했다. 생각해 보니 갈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오나라로 달아났다. 염옹이 시를 지어 태자 건이 스스로 몸을 망치는 화를 자초했다고 했다. 시에 이르기를, “친부가 원수처럼 가마솥에 삶아 죽이려 하니, 정나라 군주는 역관을 빌려주었다가 도리어 해를 당할 뻔했다. 인정이 모두 이와 같다고 생각하기 어려운데, 의리를 좋아하는 영웅의 마음을 싸늘하게 했네.”라고 했다, 한편, 오원은 공자 승을 데리고 정나라의 추격군이 쫓아올까 두려워하여 낮에는 숨고 밤에만 길을 갔다. 천신만고는 자세히 서술할 수도 없었다. 진(陳)나라를 지나면서 그곳도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알고, 다시 동쪽으로 며칠을 가서 소관(昭關)과 가까운 곳에 이르렀다. 그 관문은 소현산(小峴山) 서쪽에 있는데. 두 개의 산이 나란히 솟아 있고, 그 사이의 한 통로가 여(廬)와 호(濠)를 왕래하는 요충지로 이 소관(昭關)을 넘어가면 바로 대강(大江)인데, 오나라로 통하는 수로였다.
소관의 형세가 매우 험하여 원래는 군사들이 지키지 않았으나 최근에 오원을 붙잡기 위해 특별히 우사마 원월(薳越)을 보내어 대군을 이곳에 주둔시키고 지키도록 했다. 오원이 소관에서 약 60여 리 떨어진 역양산(歷陽山)에 이르러 깊은 숲속에서 쉬면서 배회하고 나아가지 못했다. 갑자기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숲속으로 들어와 오원을 보고, 그 생김새가 기이한지 앞으로 다가와 읍을 했다. 오원이 답례하자 노인이 말하기를, “그대는 혹시 오씨(伍氏)의 자녀가 아니오?” 했다. 오원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것을 묻습니까?”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곧 편작(扁鵲)의 제자 동고공(東皐公)이라 하오. 어렸을 때부터 의술로 열국을 돌아다니다가 이제 늙어서 이곳에 은거하고 있소. 며칠 전에 원월 장군이 몸이 조금 아프다고 하여 내가 가서 진찰하였소. 그때 관문 위에 걸려있던 오자서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대와 비슷하게 생겨서 그래서 묻는 것이오. 그대는 숨길 필요가 없소. 내 누추한 집이 바로 이 산 뒤에 있는데 잠시 가서 같이 상의해 봅시다.” 했다.
그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오원은 곧 공자 승과 같이 동고공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몇 리를 가니 초가집 한 채가 있는데 동고공이 오원에게 읍을 하며 들어오라고 했다. 초당 안으로 들어가 오원이 두 번 절했다. 동고공이 황망히 답례하며 말하기를, “이곳은 그대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고, 다시 초당 뒤의 서쪽으로 인도하여 작은 바자문으로 들어가 대밭을 지나 그 뒤에 삼간 흙집이 있고 문은 마치 구멍 같아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다. 방안에서는 침상과 궤가 있고 좌우의 작은 창으로 빛이 들어왔다. 동고공은 오원을 밀어 상좌에 앉히려고 하니, 오원이 공자 승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어린 주인이 계시니 제가 마땅히 옆에서 시립해야 합니다.” 했다. 동고공이 묻기를, “누구십니까?”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이분은 초나라 태자 건의 아들 공자 승이고 제가 실은 오자서입니다. 공께서는 장자(長者)이시라 제가 감히 실정을 속이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부친과 형님의 뼈에 사무치는 원수가 있어, 복수하기를 맹세했습니다. 혹시라도 공께서는 이 일을 누설하지 마십시오.” 했다. 동고공이 이에 공자 승을 상좌에 앉히고, 자기와 오원은 동서 양쪽에 마주 대하고 앉았다.
동고공이 오원에게 말하기를, “노부(老夫)는 다만 사람을 살리는 기술만을 알 뿐인데, 어찌 사람을 죽이는 마음을 품겠습니까? 이곳에서 제가 비록 일 년 반을 살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소관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주 엄중히 지키니 공자를 데리고 어떻게 지나가겠습니까? 반드시 만전지책(萬全之策)을 마련해야만 일이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오원이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무슨 계책으로 우리를 위난에서 탈출시킬는지요? 훗날에 반드시 이에 대한 보답을 크게 하겠습니다.” 하니, 동고공이 말하기를, “이곳은 황폐하고 외진 곳이라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공자와 그대는 마음 놓고 머무르십시오. 그사이에 내가 계책을 하나 찾아서 그대 주군과 신하가 소관을 통과하게 하겠습니다.” 했다. 오원이 감사의 말을 했다. 동고공은 매일 술과 음식을 가져와 대접했다. 그곳에 묵은 7일째가 되어도 동고공은 소관을 통과하는 일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았다. 오원이 이에 동고공에게 말하기를, “제가 원수를 갚을 생각에 마치 일각이 한 해 같은데,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있으니, 마치 죽은 것 같습니다. 선생께서 높은 의기로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않으십니까?” 하니, 동고공이 말하기를, “노부가 생각한 계책이 이미 마련되었으나 한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했다. 오원은 의심하며 결정하지 못했다.
그날 밤, 침상에 누었으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당장 동고공에게 작별을 고하고 길을 떠나고 싶었으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도리어 화를 당할 것이 걱정되었고, 그렇다고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걱정되었다. 뒤척거리며 생각하느라, 돌아누워도 불안하여 몸과 마음이 가시 위에 있는 것 같았다.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리는 사이에 어느덧 동쪽이 밝아왔다. 이윽고 동고공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 오원을 보더니 크게 놀라 말하기를, “그대의 수염과 귀밑머리가 어찌하여 갑자기 하얗게 되었소! 밤사이에 너무 고심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이 아니오?” 했다, 오원이 믿지 못해 거울에 비춰 보니, 이미 희끗희끗 반백이었다! (세간에 전하기를, 오자서가 소관을 지날 때 하룻밤 사이에 고민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고 하는데 낭설이 아니었다.) 오원이 거울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한 가지 일도 이룬 것이 없는데, 양쪽 귀밑털이 이미 희끗희끗하구나. 하늘이여! 하늘이여!” 했다. 동고공이 말하기를, “그대는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이것은 그대를 위해 좋은 징조요.” 했다. 오원이 눈물을 닦으며 묻기를, “어찌하여 좋은 징조라고 하십니까?” 했다.
동고공이 말하기를, “그대는 생김새가 큼직하여 보는 사람이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염과 귀밑털이 갑자기 하얗게 되어 금방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사람들 속에 섞여서 남의 눈을 속이고 지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내 친구가 이미 당도하여 계획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선생의 계획은 어떤 것입니까?” 하니, 동고공이 말하기를, “내 친구에 성은 황보(皇甫)이고 이름은 눌(訥)이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서남쪽 70리 용동산(龍洞山)이라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신장이 9척에 이마가 8촌이라 흡사 그대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그를 그대처럼 분장시키고, 그대는 노복으로 변장하여 따르다가 만약 내 친구가 소관을 통과하던 중에 붙잡혀 의논이 분분하게 되면 그대는 그 틈을 타서 소관을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선생의 계책이 비록 훌륭하지만, 단지 선생의 친구분에게 누가 미치지 않을까 마음에 불안합니다.” 하니, 동고공이 말하기를, “그것은 괜찮습니다. 그를 구할 계책은 뒤에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노부가 이미 내 친구에게 상세하게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도 또한 강개한 선비라 두말없이 바로 맡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했다. 동고공이 말을 마치자 사람을 보내 황보눌을 방안으로 불러 오원과 만나게 했다.
오원이 그를 보니 과연 모습이 상당히 비슷하여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동고공이 다시 약탕으로 오원의 얼굴을 씻어 얼굴색을 변하게 하였다. 황혼 무렵이 되자 동고공은 오원의 흰옷을 벗겨 황보눌에게 입히고, 거친 베옷을 따로 가져와 오원에게 입혀서 황보눌의 노복으로 분장시켰다. 미승(羋勝 ; 공자 승)도 옷을 갈아입혀 마치 시골 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오원이 공자 승과 같이 동고공에게 네 번 절을 올리고 말하기를, “후일에 만약 다시 뵙게 된다면 반드시 이 은공을 크게 갚겠습니다.” 하니, 동고공이 말하기를, “나는 그대가 당한 억울함을 애통하게 생각하여 위험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뿐이지, 어찌 보답을 바라겠소!” 했다. 오원과 공자 승이 황보눌의 뒤를 바짝 붙어서 밤중에 소관으로 길을 떠났다. 날이 밝아 오자 바로 소관에 도착했다. 한편, 초나라 장수 원월(薳越)이 관문을 굳게 지키며 호령하기를, “무릇 북쪽 사람이 강동으로 건너려는 자는 심문을 철저히 하여 분명한 경우에만 관문을 통과시켜라.” 했다. 관문 앞에서 오자서의 얼굴을 그려 놓고 대조하니 참으로 물 한 방울 샐 수 없고 새도 날아 지날 수 없었다.
황보눌이 관문 앞에 당도하자 관문을 지키던 군사가 그 얼굴을 보고 그림과 모습이 비슷하고 흰옷을 입었으며 또한 겁을 먹은 모양이라 즉시 조사하여 붙잡아 두고 원월에게 보고했다. 원월이 관문 앞으로 달려가서 멀리서 보고 말하기를, “맞다!” 하고, 좌우에게 소리쳐서 일제히 달려가 황보눌을 붙잡아 소관 위로 데려오게 하였다. 황보눌이 짐짓 무슨 영문인지 모른 척하며 다만 놓아 달라고 애걸할 뿐이었다. 관문을 지키던 군사들과 관문 근처의 백성들은 오자서를 잡았다는 말을 듣고, 모두가 뛰어나와 오자서를 구경하려고 했다. 오원은 관문이 활짝 열린 틈을 타서 공자 승을 데리고 군중 속에 섞였다. (첫째는 한꺼번에 떠들어서 어수선했고, 둘째는 분장이 그림과 같지 않았으며, 셋째는 오자서의 얼굴색이 모두 바뀌고, 수염과 귀밑털이 모두 하얗게 세어 노인의 모습이라 노소가 달라서, 모두가 급한 마음에 알아보지 못했으며, 넷째는 모든 사람이 오자서가 이미 잡혔다고 알고 있어 문득 자세히 심문하지 않았다.) 마침내 서로 밀치며 뒤섞여서 관문을 나왔다. 그것은 마치 낚시에 걸린 잉어가 낚시에서 벗어나서 다시는 걸리지 않겠다며 머리와 꼬리를 흔들며 달아나는 것 같았다. 시가 있어 증험하기를, “수많은 호랑이와 표범 같은 군사들이 험한 관문을 지키는데, 도망치던 신하 한 사람이 이미 산을 내려갔도다. 이것으로 해서 오나라에 기운이 더해지고, 초나라 도읍의 병마는 한가로울 때가 없게 되었다.” 했다.
한편, 초나라 장수 원월은 황보눌을 결박하여 고문을 가해서라도 책임지고 자백을 받아 초나라 도읍으로 압송하려고 했다. 황보눌이 변명하기를, “저는 용동산 밑의 은사 황보눌입니다. 저의 친구 동고공을 따라 관문을 나가 동쪽에 놀려고 했을 뿐 범죄를 저지른 일도 없는데, 어찌하여 저를 결박하십니까?” 했다. 원월이 황보눌의 목소리를 듣고 생각하기를, “오자서의 눈은 마치 번쩍이는 번개와 같고 목소리는 큰 종소리처럼 우렁찬데, 이 사람은 그 생김새는 비록 비슷하다고는 하나 그 목소리가 낮고 작은데 어찌 길에서 풍상을 겪어 이렇게 됐는가?” 하고, 의혹에 빠진 참에 갑자기 고하기를, “동고공이 찾아와 뵙고자 합니다.” 했다. 원월이 황보눌을 압송하여 한 곳에 가두어 놓도록 하고, 동고공을 맞아들여, 주인과 손님의 인사를 나눈 후에 앉았다. 동고공이 말하기를, “노부가 관문 밖에 나가 동쪽에 놀러 가려고 했는데, 들으니 장군께서 도망치는 신하 오자서를 붙잡았다고 해서 특별히 와서 축하드립니다!” 하니, 원월이 말하기를, “군졸이 한 사람을 잡았는데, 그 얼굴이 자서와 비슷하다고 해서 끌고 왔는데 자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했다. 동고공이 말하기를, “장군과 오자서 부자는 초나라 조정에 함께 섰었는데, 어찌하여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할 수 없습니까?” 했다.
원월이 말하기를, “오자서의 눈빛은 번쩍이는 번개 같고 그 목소리는 큰 종소리 같은데, 지금 이 사람의 눈은 작고 목소리는 약하니, 오랫동안 초췌하여 그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하고 의심하던 중입니다.” 하니, 동고공이 말하기를, “저도 오자서와 한 번 만난 적이 있으니, 청컨대 이 사람을 한 번 보여주시면 내가 분별하여 허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원월이 명하여 죄수를 앞으로 끌어오라고 했다. 황보눌이 동고공을 보자 갑자기 소리치기를, “그대가 관문 밖으로 나가자고 약속해 놓고 어찌하여 일찍 나오지 않았는가? 나를 이렇게 욕보이는가?” 했다. 동고공이 웃으면서 원월에게 말하기를, “장군께서 사람을 잘못 잡았습니다. 이 사람은 나의 시골 친구 황보눌이라는 사람입니다. 제가 함께 놀자고 약속하고 관문 앞에서 서로 만나기로 했는데 뜻밖에 그가 먼저 길을 나섰습니다. 장군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여기 노부에게 관문을 나다닐 수 있는 허가증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도망치고 있는 범인으로 왜곡하십니까?” 하고, 말을 마치자 즉시 소매 안에서 문건을 꺼내어 원월에게 보여주었다. 원월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친히 황보눌의 포승줄을 풀어 주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곧 관문지기 군사가 잘못 보아 그리되었으니 만 번 괴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했다.
동고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장군께서 조정의 명을 받아 법을 시행한 것이니, 노부들이 어찌 괴이하게 생각하겠습니까?” 했다. 원월이 황금과 비단을 주며, 동쪽에 나가 노는 데 보태 쓰게 했다. 두 사람이 원월에게 감사하고 관문을 빠져나갔다. 원월이 군사들에게 호령하여 관문을 예전과 같이 굳게 지키게 했다. 한편, 오원이 소관을 지나서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뻐하며 마음 가는 대로 길을 갔다. 오원 일행이 몇 리를 가지 않아 한 사람을 만났는데, 오원은 그가 성은 좌(左)이고 이름은 성(誠)으로 소관에서 딱딱이를 치는 관리라고 알아보았다. 좌성(左誠)은 원래 성보 사람이었는데 오씨 부자가 사냥을 나갈 때 데리고 다녔던 자였다. 그래서 좌성은 오자서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좌성이 오원을 보더니 크게 놀라 말하기를, “초나라 조정에서 공자를 아주 급하게 찾는데 공자께서 어떻게 관문을 통과했습니까?”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주공께서 내가 야광주 한 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에게 물어 그것을 찾으셨는데 그 야광주는 이미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 버려서 가서 찾아오게 하셨다. 그래서 내가 원월 장군에게 주공의 명을 고하니 그가 나를 놓아주어 이렇게 소관을 나오게 되었다.” 하니, 좌성이 믿지 않고 말하기를, “초왕께서 명령하기를, ‘공자를 놓아주는 자는 전 가족을 참수한다.’ 했습니다. 제가 공자님과 같이 잠시 관으로 돌아가 원월 장군께 여쭈어 일을 명백하게 한 후에 비로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만약 원월 장군을 보고, 내가 이미 그 야광주를 그대에게 주었다고 말한다면, 그대가 해명하기 어렵게 될 것이 걱정되네. 나에게 인정을 베풀어서 후일에 좋은 얼굴로 서로 만나는 것이 나을걸세.” 하니, 좌성은 오원의 사람됨이 영특하고 용감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마침내 오원 일행이 동쪽으로 길을 가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소관으로 돌아온 후에 그 일을 숨기고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오원은 빠른 걸음으로 악저(鄂渚)에 이르러 장강을 바라보니, 아득히 넓어서 만경 파도만 일렁이며 건너갈 배가 없었다. 오원은 앞에는 큰 강물이 막고 뒤에는 추격병이 염려되어 마음이 매우 초조하였다. 갑자기 어부가 배를 타고 하류 에서 물살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원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내 목숨을 끊지 않는구나!” 하고, 이에 급히 부르기를, “어부는 나를 건너 주시오! 어부는 빨리 나를 건너 주시오!” 했다. 그 어부가 배를 물가에 대려고 하다가 강 언덕을 보니, 어떤 사람이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기를, “해와 달이 밝게 물속에 잠기어 달리는구나! 그대와 더불어 갈대밭 언덕에서 만날거나!” 했다. 오원이 그 노래의 뜻을 알아듣고 하류를 향하여 달려가 갈대가 무성한 곳에 이르러 갈대숲 속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어부가 배를 강가에 대었으나 오원을 보지 못했다. 다시 큰소리로 노래 부르기를, “해는 이미 저물었구나, 내 마음은 근심과 슬픔뿐이네. 달이 이미 솟았구나, 어찌 건너지 못하겠는가?” 했다. 오원이 미승과 함께 갈대 숲속에서 나오니 어부가 급히 불렀다. 두 사람이 돌을 딛고 배에 타자 어부는 삿대로 배를 밀어내어 목란(木蘭) 나무 노를 가볍게 저어 유유히 나아갔다. 한 시간도 못 되어 건너편 언덕에 닿았다. 어부가 말하기를,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장성이 내 배에 떨어져서, 이 늙은이가 이것은 반드시 이인(異人)이 와서 강을 건너게 해달라는 징조라고 생각하여 노를 저어 나왔는데 뜻밖에 그대를 만났소. 내가 그대의 용모를 살펴보니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나에게 사실대로 말해 주고 서로 숨기지 맙시다.” 했다. 오원이 마침내 자기의 성명을 알려주었다. 어부가 탄식해 마지않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얼굴에 허기진 기색이 있으니, 내가 가서 음식을 구해 오겠소! 그대는 잠시 기다리오.” 했다. 어부가 배를 강가의 버드나무 밑에 매어두고, 음식을 구하려고 촌락에 들어가 한참 동안 오지 않았다. 오원이 공자 승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으니 그가 우리를 붙잡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오지 않으리라고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즉시 갈대숲 깊은 곳에 다시 숨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어옹이 보리밥과 건어물 국, 간장 그릇을 가지고 나무 아래에 왔으나 오원이 보이지 않아 큰소리로 부르기를, “갈대밭에 숨은 사람아! 갈대밭에 숨은 사람아! 나는 그대를 미끼로 이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오!” 했다. 오원이 이에 갈대밭 속에서 나와 응답했다. 어옹이 말하기를, “그대가 배가 고픈 것을 알고 특별히 음식을 가지고 왔는데 어찌하여 나를 피하였소?”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나, 지금은 노인장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근심이 쌓여서 마음이 허둥지둥하니 어찌 감히 피하지 않겠습니까?” 했다. 어부가 음식을 앞으로 내밀자, 오원과 공자 승은 한 끼를 배불리 먹었다. 오원이 떠나기에 앞서 허리에 찬 칼을 풀어 어옹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 초나라 왕이 하사하여 우리 조부께서 차고 다닌 삼대에 걸친 것입니다. 칼에는 칠성이 새겨져 있고, 가치가 황금 백 근은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 노인장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하니, 어부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초왕이 명령하기를, ‘오원을 잡는 자에게는 곡식 5만 석을 하사하고 상대부 벼슬을 내린다.’고 하였소. 나는 상대부의 벼슬도 마다하는 사람인데 어찌 황금 백 근 밖에 나가지 않는 물건을 탐하겠소? 또한 ‘군자는 칼을 차지 않고는 돌아다니지 않는다.’라고 하니, 그대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지, 나에게는 쓸모없는 것이오.”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노인장께서 이 검을 받지 않으신다 하니, 원컨대 성명이라도 알려주시면 훗날에 보답을 하겠습니다.” 하니, 어부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나는 그대가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것을 생각하여 강을 건너게 해주었을 뿐이오. 그대가 훗날에 보답하겠다며 나를 꾀니 그것은 대장부가 할 말이 아니오!”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노인장께서 비록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제 마음이 어찌 편하겠습니까?” 하고, 굳이 말해 주기를 청했다. 어부가 말하기를, “오늘 우리가 서로 만났는데, 그대는 초나라의 난을 피해 도망치는 망명객이고, 나는 초나라의 역적인 그대를 놓아주었소. 어찌 성명을 말할 수 있겠소! 하물며 내가 풍랑 속에 배를 저어 생계를 유지하는데, 비록 이름을 알려 드린다 한들 어찌 만나기를 기약할 수 있겠소? 만일 하늘이 우리를 만나게 해준다면 나는 단지 그대를 갈대밭 속의 사람이라고 부르겠으니 그대도 나를 어부 노인장이라고 부르고 그 정도로 기억하면 족할 뿐이오.” 했다. 오원이 흔연히 절하고 감사했다. 그리고 몇 걸음을 가다가 다시 몸을 돌려 어부에게 말하기를, “만약 뒤에서 추격병이 오더라도 절대 나를 만났다는 비밀을 누설하지 마십시오.” 했다. 단지 몸을 돌려 한마디 한 것이 어옹이 목숨을 버린 원인이 되었다.
뒷일을 알고 싶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제73회:오원이 오나라 저자에서 피리를 불며 구걸하고, 전제가 구운 생선을 드려 왕료를 찔러 죽이다.
한편, 늙은 어부가 오원을 건네주고 또한 음식을 구해 주었지만, 사례로 주겠다는 칼은 받지 않았다. 오원은 어부와 헤어져 가다가 다시 돌아와 자기를 만난 사실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추격병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 어부의 두터운 정을 불신한 것이다. 어옹이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해 말하기를, “내가 덕으로써 그대를 대했건만 그대는 아직도 나를 의심하고 있소. 만약에 초나라의 추격병이 따로 강을 건넌다면, 내가 어떻게 해명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어서 그대의 의심을 끊겠소!” 하고, 말을 마치자 벌이줄을 풀고 배를 띄어 키를 뽑고 노를 던지며 배를 뒤집어엎어서 물에 빠져 죽었다. 후세의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여러 해 이름을 숨기고 낚시하던 어부가, 초나라의 망명하는 신하를 편주로 강을 건너 주었다. 그대의 염려를 끊겠다며 기꺼이 죽었으니, 천고에 이름이 전해오는 고기잡이 늙은이라네.” 했다. 지금도 무창(武昌) 동북쪽의 통회문(通淮門) 밖에 해검정(解劍亭)이 있는데, 그때 오자서가 찬 칼을 풀어서 어부에게 주려고 했던 곳이다. 오원은 늙은 어부가 스스로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고 한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대 덕택에 살았는데, 그대는 나 때문에 죽었구나! 어찌 슬프지 않으리요?” 했다. 오원이 미승과 함께 마침내 오나라 지경에 들어가서 율양(溧陽)에 이르렀다. 그들은 주렸기 때문에 걸식을 했다.
그들은 뇌수(瀨水) 가에서 빨래하는 여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대광주리에 밥이 있었다. 오원이 발길을 멈추고 묻기를, “부인께서 한 끼 밥을 줄 수 있습니까?” 하니, 여자가 머리를 숙이고 대답하기를, “첩은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서른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찌 감히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밥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내가 곤궁한 처지라 한 끼 밥을 빌어서 목숨을 구하려고 합니다. 부인께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덕을 행하는데 어찌 예의를 따집니까?” 하니,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오원의 생김새가 크고 위엄이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제가 보니 그대의 모습이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찌 작은 예의에 구애받아 곤궁한 처지를 앉아서 보기만 하겠습니까?” 했다. 이에 대광주리를 열고 간장 그릇과 함께 꿇어앉아 바쳤다. 오자서와 미승이 한 끼 밥을 먹고 그쳤다. 여자가 말하기를, “그대는 아마 멀리서 온 모양인데, 어찌하여 배불리 먹지 않습니까?” 하니, 두 사람은 곧 다시 먹어서 대광주리를 비웠다. 헤어지려는 순간에 여자에게 말하기를, “부인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구했으니 그 은혜를 가슴속에 간직하겠습니다. 나는 실은 목숨을 구해 도망쳐 온 사람이라 만약 다른 사람을 만나면 제 이야기를 하지 마십시오.” 했다.
그 여자가 처연히 탄식하기를, “슬프다. 첩은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느라고 서른이 되도록 시집도 못 가고 몸을 곧고 밝게 가지기를 스스로 맹세했는데, 뜻밖에 나그네에게 밥을 바치고 남자와 말을 주고받았으니 예의와 절개를 잃게 되었으니, 어찌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그대는 가십시오.” 했다. 오원이 작별하고 몇 걸음 가다가 머리를 돌려 뒤돌아보니 그 여자가 큰 돌을 안고 뇌수에 빠져서 죽었다. 후세 사람이 찬양하여 이르기를, “율수의 남쪽 강변에, 빨래하던 여인이 있었다. 오로지 모친을 봉양하느라, 남자와는 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어, 대광주리를 열어 음식을 바쳤다. 그대는 배불리 먹었지만, 나의 절개는 이미 이지러졌도다. 가냘픈 몸을 강물에 던져, 부녀자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밝혔도다. 뇌수가 흘러 마르지 않듯이, 이 여인의 절개는 천고에 빛나리.” 했다. 오원은 그 여자가 강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고,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돌 위에 스무 자의 글을 썼다. ‘빨래하던 그대에게 내가 음식을 구걸하였다. 나는 배불리 먹고 그대는 물에 빠져 죽었네, 십 년 후에 천금으로 보답하리라!’ 오원이 글을 다 쓰고 나서 다시 사람들의 눈에 띌까 걱정되어 흙을 움켜서 덮었다.
오원이 율양을 지나서 다시 300여 리를 가서 한 곳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오추(吳趨)였다. 거기에서 한 장사를 보았는데, 이마가 튀어나오고 눈이 움푹 들어가서 모양이 굶주린 호랑이 같고 목소리가 우레 같았다. 그가 바야흐로 덩치가 큰 사내와 싸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힘써 싸움을 말렸지만,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문안에서 한 부인이 부르기를, “전제(專諸)야, 싸우지 마라!” 하니, 그 사람은 마치 무섭고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즉시 손을 거두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오원이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여 곁에 있던 사람에게 묻기를, “저 같은 장사가 부인을 두려워합니까?” 하니, 곁에 있던 사람이 알려주기를, “저 사람은 우리 마을의 용감한 장사요. 힘은 만인을 상대할 만하여 어떤 힘센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평생 의로운 일을 좋아하여 남의 불공평한 일을 보면 곧 사력을 다해서 싸웁니다. 조금 전에 문 안에서 부른 사람은 그의 어머니입니다. 전제라고 불렀는데 곧 그의 이름입니다, 평소에 효행이 있어 그 모친의 말을 어긴 적이 없으며 비록 그가 매우 노했지만, 모친의 말을 듣고 즉시 싸움을 그쳤습니다.” 오원이 찬탄하기를, “이 사람은 진실로 열사로다!” 했다. 다음날 오원은 옷을 가다듬고 전제의 집을 방문했다. 전제가 나와 맞이하며 그가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오원이 자기의 성명을 말하고 아울러 억울한 일을 당한 전말을 이야기했다.
전제가 말하기를, “그대에게 그런 큰 원한이 있다면 어찌하여 오왕을 찾아뵙고 군사를 빌려 원수를 갚지 않으십니까?”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아직 나를 오왕에게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감히 스스로 찾아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했다. 전제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소. 그런데 오늘 이렇게 누추한 곳을 찾아온 뜻은 무슨 가르침을 주려는 것입니까?”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그대의 효행을 내가 존경하여 교제를 맺고자 하오.” 했다. 전제가 크게 기뻐하며, 들어가 어머니에게 고하고 즉시 오원과 여덟 번 절하여 결의형제를 맺었다. 오원이 전제보다 두 살이 많아서 전제가 오원을 형님이라 불렀다. 오원이 전제의 어머니에게 절하여 뵈었다. 전제는 다시 그 처자를 나오게 하여 오원에게 인사를 올리게 하고, 닭을 잡고 기장으로 밥을 지어 마치 골육을 만난 것처럼 기뻐하였다. 오원과 공자 승은 전제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오원이 전제에게 말하기를, “나는 장차 동생을 이별하고 오나라 도성에 들어가 기회를 찾아서 오왕을 섬길 작정이네.” 하니, 전제가 말하기를, “오왕은 용기를 좋아하고 교만합니다. 차라리 현자들과 친하고 선비들을 존대하는 공자 광(公子光)을 찾아가십시오. 장래에 반드시 이루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동생의 가르침을 마땅히 기억해 두겠네. 훗날에 내가 동생의 도움이 필요하여 부르면 절대 거절하지 말기를 바라네!” 하니, 전제가 응낙했다. 오원과 공자승은 전제와 작별했다.
오원과 공자 승이 함께 매리(梅里)에 도착했는데 성곽은 낮고 좁았으며 거리도 엉성했다. 배들과 수레 소리는 시끄러웠으나 눈을 들어 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어 미승(羋勝)을 교외에 숨겨 놓고, 자기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척하여, 맨발에 얼굴에는 칠을 하고 손에는 반죽(斑竹) 퉁소를 들고 시중에서 돌아다니며 그것을 불면서 걸식했다. 그 퉁소의 첫째 곡조에 이르기를, “오자서야! 오자서야! 산 넘고 물 건너 송나라와 정나라로 갔건만, 아무 데도 의탁할 곳이 없으니, 천신만고 끝에 처량하고 또 슬프구나.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없다면, 살아서 무엇하리?” 했다. 둘째 곡조에 이르기를, “오자서야! 오자서야! 소관을 한번 넘다가 수염과 눈썹이 세었고, 수없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처량하고 또 슬프구나! 형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살아서 무엇하리?” 했다. 셋째 곡조에 이르기를, “오자서야! 오자서야! 갈대밭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율양의 냇가를 지나, 천신만고 끝에 오나라에 도착했으나, 퉁소를 불며 구걸하니, 처량하고 또 슬프구나! 이 몸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살아서 무엇하리?” 했다. 그러나 저잣거리 사람들은 그 노랫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가 주경왕 25년으로 오왕 요(僚) 7년이었다.)
한편, 오나라 공자 희광(姬光)은 곧 오왕 제번(諸樊)의 아들이었다. 제번이 죽고 공자 광(光)이 당연히 자리를 이어야 했었다. 그러나 제번은 부왕의 유언을 지켜 왕위를 계찰(季札)에게 전하기 위해 형제들 순서대로 여제(餘祭)와 이매(夷昧)의 차례로 잇게 했다. 이매가 죽은 후에 계찰이 나라를 받지 않자 마땅히 제번의 아들을 세워야 했으나, 이매의 아들인 왕료가 욕심을 내어 왕위를 양보하지 않고 마침내 스스로 왕이 되었다. 공자 광이 마음속으로 승복을 하지 않고 몰래 왕료를 죽이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신하는 모두 왕료의 무리였기 때문에 같이 모의할 사람이 없어 은인자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관상을 잘 보는 피리(被離)라는 사람을 얻게 되어 그를 시장 관리로 천거하여 호걸들을 수소문하여 발견하면 데려와서 자기를 돕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루는 오원이 퉁소를 불며 오나라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데, 피리(被離)가 퉁소 소리를 듣고 심히 애처로워 다시 한번 들어보니, 그 노랫말을 차츰 알아들을 수 있었다. 피리가 나와서 오원을 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내가 관상을 본 사람은 많지만 이와 같은 얼굴을 아직 보지 못했다!” 하고, 읍을 하고 다가가서 상좌에 앉기를 청했다. 오원이 겸양하며 감히 상좌에 앉지 않았다.
피리가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초나라에서 충신 오사를 죽이자 그 아들 오자서가 외국으로 도망쳤다고 하는데 혹시 그대가 아닙니까?” 하니, 오원이 두렵고 조심스러워서 대답하지 못했다. 피리가 다시 말하기를, “나는 그대를 해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그대의 관상을 보니 평범한 사람이 아니어서, 부귀할 수 있는 지위에 그대를 이끌어 드리려고 할 뿐입니다.” 했다. 오원이 이에 사실대로 호소했다. 그런데 어느새 시중드는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오왕 요에게 알렸다. 오왕 요가 피리를 불러 오원을 데려오라고 했다. 피리는 한쪽으로는 사람을 시켜 희광(공자 광)에게 알리고 한쪽으로는 오원을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혀서 궁궐에 함께 들어가 오왕 요를 알현했다. 오왕 요가 오원의 얼굴이 기이하다고 생각하여 그와 말을 나누어 보고,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고 즉시 대부의 직에 임명했다. 다음날 오원이 입조하여 오왕에게 감사의 말을 올리고 그의 부친과 형이 억울하게 죽은 일을 말하면서, 이를 갈고 눈에서 불이 나오는 듯이 했다. 오왕 요는 오원의 기개를 장하게 여기고 또한 그를 동정하여 군사를 일으켜 복수할 것을 허락했다. 희광은 평소에 오원의 지혜와 용기를 알고, 마음속으로 오원을 거두어 자기 곁에 두고 싶어 했으나, 오원이 먼저 오왕 요를 알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왕 요가 친히 쓰지 않을까 걱정하여 마음에 약간 화가 났다.
공자 광이 오왕 요를 뵙고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초나라의 망명객 오원이 우리나라로 도망쳐 왔다는데 왕께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니, 오왕 요가 말하기를, “어질고 효성 있는 사람이오.” 했다. 공자 광이 말하기를, “무슨 연유로 그렇게 보십니까?” 하니, 오왕 요가 말하기를, “그는 용기 있고 씩씩하기가 매우 비상한 사람이오. 과인이 그와 함께 나라의 일에 대해 한번 의논해 보니 그의 말이 적중하지 않는 게 없었소! 그러니 그가 어질고, 그의 부친과 형의 원한을 한시도 잊지 않고 나에게 군사를 빌려 달라고 하니 그래서 그가 효자라고 생각하오.” 했다. 공자 광이 말하기를, “왕께서는 그가 원수를 갚을 수 있게 군사를 빌려주신다고 허락하셨습니까?” 하니, 오왕 요가 말하기를, “과인은 그의 처지가 불쌍하다고 생각되어 이미 허락했소.” 했다. 공자 광이 간하기를, “만승의 군주께서 필부를 위해 군사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 오나라와 초나라는 전쟁을 벌인 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 크게 이기지 못했습니다. 만약 오자서를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필부의 원한을 나라의 수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긴다면 오자서는 그의 원한을 통쾌하게 풀겠지만,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는 치욕을 더할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안 되는 일입니다.” 했다. 오왕 요가 옳다고 생각하여 즉시 초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취소했다. 오원은 공자 광이 들어가 간했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공자 광이 속에 딴 뜻을 품었으니, 나라 밖의 일을 말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이에 대부의 직책을 사양했다.
공자 광이 다시 오왕 요에게 말하기를, “자서는 왕께서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여 대부의 직을 받지 않으니, 왕을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듯 합니다. 그를 쓰지 마십시오.” 했다. 오왕 요는 마침내 오원을 멀리하고 그가 사양한 대부의 직을 거둬들였다. 다만 양산(陽山)의 전답 100무(1무는 백평)만을 하사했다. 오원과 공자 승이 양산의 들판에서 밭을 갈았다. 희광(공자 광)이 몰래 오원을 찾아와 쌀과 비단을 주면서 묻기를, “그대가 오나라와 초나라의 경계를 넘어올 때 대략 그대와 비슷한 재주와 용기를 갖춘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족히 말할 바이겠습니까마는 전제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참으로 용사였습니다.” 했다. 공자 광이 말하기를, “그대가 전제를 소개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전제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으니 지금 당장 부르면 내일이라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했다. 공자 광이 말하기를, “그가 재주 있고 용감한 선비라면 내가 당장 가서 만나야지, 어찌 감히 그를 부르겠소?” 하고, 이에 오원과 함께 수레를 타고 곧 전제의 집으로 갔다. 전제는 그때 저잣거리에서 남을 위해 돼지를 잡으려고 칼을 갈고 있었다. 그는 수레가 떠들썩하게 달려오는 것을 보고 곧바로 피하려고 했다.
오원이 수레 위에서 부르기를, “어리석은 형이 여기 있네.” 하니, 전제가 허둥지둥 칼을 멈추고 오원이 수레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오원이 수레에서 내려 공자 광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분은 오나라의 공자 중 맏이시네. 동생의 영명한 이름을 듣고 특별히 찾아오셨으니 동생은 사양하지 말게.” 하니, 전제가 말하기를, “저는 시장의 골목에 사는 백성일 뿐입니다. 무슨 능력이 있다고 감히 어른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했다. 전제가 공자 광에게 읍을 하고 집안으로 안내했다. 사립문에 누추한 집이라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다. 공자 광이 먼저 절하며 평생에 사모하던 뜻을 드러냈다. 전제가 답례했다. 공자 광이 가지고 온 황금과 비단을 폐백으로 주었으나 전제는 한사코 사양했다. 오원이 옆에서 힘써 권하자 그제서야 전제가 받았다. 이때부터 전제는 공자 광의 문하에 몸을 들이게 되었다. 공자 광이 사람을 시켜 날마다 양식과 고기를 보내고 달마다 면포와 비단은 보내 주었다. 또한 이따금 그 모친에게 문안을 드리곤 했다. 전제는 공자 광의 성의에 매우 감격했다. 어느 날 전제가 공자 광에게 묻기를, “저는 시골의 백성일 뿐인데, 공자님께서 보살펴 주는 은혜를 입었으나,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만약에 저에게 시킬 일이 있다면 오로지 공자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했다. 공자 광이 이에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고 그가 오왕 요를 죽이려는 뜻을 말했다.
전제가 말하기를, “선왕이신 이매가 죽고 그 아들이 당연히 이었는데 공자께서는 무슨 명분으로 그를 해치려고 하십니까?” 하니, 공자 광은 조부 수몽이 그 아들 형제에게 순서대로 왕위를 전하라고 한 유언을 상세하게 말하면서, “숙부 계찰이 이미 왕위를 사양했으니 당연히 적장자에게 돌아가야 마땅하고, 적장자의 후손은 바로 나입니다. 오왕 요가 어찌 왕이 될 수 있겠소? 내가 힘이 약하여 대사를 도모할 수 없어서, 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했다. 전제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공자께서는 근신을 시켜 왕의 측근에게 조용히 말하여 전왕의 명을 밝혀서 왕을 퇴위하도록 하지 않고, 하필 비밀리에 자객을 고용하여 선왕의 덕을 해치려고 하십니까?”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오왕 요는 욕심이 많고 세력을 믿어서 나아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은 모르는 사람이오. 만약 그 말을 했다가는 도리어 그가 나를 해치려 할 것이오. 이 광과 요는 양립할 수 없는 형세요.” 했다. 전제가 분연히 말하기를, “공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노모가 계시니, 목숨을 바쳐 일을 돕지는 못하겠습니다.”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나도 역시 그대의 모친이 늙고 아들이 어리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그대가 아니면 이 일을 도모할 사람이 없소. 만약 이 일이 성사되면 그대의 아들과 모친은 바로 나의 아들과 모친이 될 것이오. 내가 마음을 다하여 노모를 봉양하고 아들을 양육할 것이니, 어찌 감히 그대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소?” 했다.
전제가 한참 생각하고 나서 말하기를, “무릇 일이란 가볍게 움직이면 공을 세우지 못하는 법이니 반드시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천 길 깊은 연못의 고기도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은 향기로운 미끼 때문입니다. 왕료(오왕 요)를 찌르려면 반드시 왕료가 좋아하는 것을 먼저 주고 이어서 그 옆에 가까이 접근해야 합니다. 혹시 왕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지요.” 했다. 전제가 말하기를, “음식 중에서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합니까?”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구운 생선이오.” 했다. 전제가 말하기를, “제가 잠시 하직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했다. 공자 광이 말하기를, “장사는 어디로 가려고 하오?” 하니, 전제가 말하기를, “제가 가서 맛을 내는 것을 배워야만 오왕의 곁에 갈 수 있습니다.” 했다. 전제가 즉시 태호(太湖)에 가서 생선 굽는 것을 배웠다. 대체로 석 달이 지나서 그가 구운 생선을 맛본 사람들이 모두 맛이 훌륭하다고 했다. 그런 뒤에 다시 희광(공자 광)을 찾아왔다. 공자 광은 곧 전제를 부중에 숨겼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강직한 사람이라고 오자서를 추천하지만, 그도 전제를 바쳐 아첨했구나. 시해 음모가 어디에서 일어났는지를 알려면, 석 달 동안 호반에서 생선 굽기를 배울 때부터라고.” 했다.
희광(공자 광)이 오자서를 불러 말하기를, “전제는 이미 그 맛에 정통했는데 어떻게 오왕 가까이에 갈 수 있겠소?” 하니, 오원이 대답하기를, “무릇 사람들이 기러기를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것은 기러기에게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러기를 잡으려면 반드시 먼저 그 날개를 없애야 합니다. 제가 알기로 왕료의 아들 경기(慶忌)는 근골이 쇠처럼 강하여 만 사내가 당하지 못하고 손으로 능히 날아가는 새를 잡을 수 있고, 발로 맹수를 찬다고 합니다. 왕료가 경기를 늘 곁에 데리고 있으니 손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의 동모제 엄여(掩餘)와 촉용(燭庸)이 오나라의 병권을 장악하여, 비록 용을 붙들고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용기와 귀신도 모르는 꾀가 있다 한들 어떻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왕료를 죽이려고 하신다면, 반드시 먼저 이 세 사람을 없앤 연후에 왕위를 도모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비록 다행히 일이 이루어져도 공자께서 능히 편안히 왕위에 있겠습니까?” 했다. 공자 광이 머리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문득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소. 잠시 영지에 돌아가서 한가로운 틈을 기다린 다음에 상의하기로 합시다. ” 했다. 오원이 이에 작별 인사를 하고 양산(陽山)으로 갔다.
그해에 주(周)나라 경왕(景王)이 죽었다. 경왕에게는 정비 소생인 세자 맹(猛)과 차자 개(匄)가 있고, 서자이지만 맏이인 조(朝)가 있었다. 경왕이 조(朝)를 총애하여 대부 빈맹(賓孟)에게 부탁하여 세자의 자리를 바꾸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일을 못하고 죽었다. 유헌공(劉獻公) 지(摯) 또한 죽자, 그 아들 유권(劉券)은 자가 백분(伯蚡)인데 자리를 이어받았다. 평소에 빈맹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유권은 마침내 선목공(單穆公) 기(旗)와 공모하여 빈맹을 죽이고 세자 맹을 주왕으로 세웠다. 이가 주도왕(周悼王)이다. 평소에 왕자 조(朝)와 사이가 좋았던 윤문공(尹文公) 고(固), 감평공(甘平公) 추(鰌), 소장공(召莊公) 환(奐)은 세 집안의 가병을 모아 상장 남궁극(南宮極)에게 주어 유권 일당을 공격하도록 했다. 유권은 양(揚) 땅으로 도망치고, 선기(單旗)는 왕맹(王猛)을 모시고 황(皇) 땅으로 도망쳤다. 왕자 조가 그의 무리에 속하는 심힐(鄩肹)을 시켜 황(皇) 땅에 가 있는 왕맹과 선기를 토벌하도록 했으나 심힐은 싸움에 패하여 죽었다. 진(晉)나라 경공(頃公)은 왕실에 대란이 일어난 것을 듣고 대부 적담(籍談)과 순력(荀躒)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왕[王猛]을 왕성으로 모시게 했다. 윤고도 역시 왕자 조를 경(京) 땅에서 주왕으로 세웠다. 얼마 되지 않아 왕맹(王猛)이 병들어 죽자, 선기와 유권이 다시 그의 동생 왕자 개(匄)를 주왕으로 세워 적천(翟泉)의 땅에 머물렀다. 이가 주경왕(周敬王)이다. 주나라 사람들은 왕개(匄)를 동왕(東王)이라 하고, 왕자 조를 서왕(西王)이라고 했다. 두 왕이 서로 싸워 죽이기를 6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다.
소장공 환이 병으로 죽고, 남궁극이 벼락에 맞아 죽자, 인심이 벌벌 떨며 두려워했다. 진(晉)나라 대부 순력(荀躒)이 다시 제후들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경왕을 성주(낙양 근처)로 들이고 윤고(尹固)를 사로잡자, 왕자 조의 군사들은 무너지고 말았다. 소환의 아들 소은(召嚚)은 도리어 왕자 조를 공격하자, 왕자 조는 초나라로 달아났다. 제후들은 성주(成周)에 성을 다시 쌓고 돌아갔다. 주나라 경왕은 소은의 반복된 배신을 벌하여 윤고와 함께 저잣거리에서 참수하니, 주나라 사람들이 통쾌해했다. 이것은 나중의 일이다. 한편, 주경왕(周敬王) 즉위 원년이며 오나라 왕료 재위 8년에 초나라 태자 건의 생모는 운(鄖) 땅에 살고 있었는데, 비무극이 그녀가 오원과 내응할 것을 걱정하여 평왕을 권하여 잡아다가 죽이려고 했다. 태자 건의 모친이 알고 몰래 사람을 오나라에 보내어 구원을 청했다. 오왕 요가 공자 광에게 군사를 주어 운(鄖)에 가서 태자 건의 모를 모셔 오라고 했다. 공자광의 군사들이 종리(鍾離)에 이르자 초나라 장수 원월(薳越)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자 광의 앞길을 막고 영도에 사람을 보내 보고했다. 초평왕은 영윤 양개(陽匄)를 대장으로 삼아 진(陳), 채(蔡), 호(胡), 심(沈), 허(許) 등 다섯 나라의 군사를 동원했다. 호(胡) 나라의 군주 곤(髡)과 심(沈) 나라의 군주 영(逞)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다.
진(陳)나라는 대부 하설(夏齧)을 보냈으며, 돈(頓), 호(胡) 두 나라도 대부를 보내어 싸움을 돕도록 했다. 호(胡), 심(沈), 진(陳) 세 나라의 병사들은 오른쪽에 진영을 세우고, 돈, 허, 채 세 나라의 병사들은 왼쪽에 진영을 세웠으며, 원월의 초나라 대군은 중간에 진을 쳤다. 오나라 희광(공자 광)도 본국에 급보를 띄우니, 오왕 요가 공자 엄여와 함께 만 명의 대군과 죄인 3천 명을 거느리고 계보(鷄父)에 이르러 진영을 세웠다. 양쪽에서 아직 교전을 정하기도 전에 초나라 영윤 양개(陽匄)가 폭질로 죽으니, 원월이 대신하여 군사들을 거느렸다. 희광(공자 광)이 왕료에게 말하기를, “초나라의 대장이 죽어 군사들의 사기가 이미 꺾였습니다. 제후들이 이끌고 온 군사들이 비록 많다고는 하지만 모두 소국이라 초나라가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온 것입니다. 호나라와 심나라의 군주는 어리고 전쟁에 익숙지 않습니다, 진(陳)나라의 하설은 용감하나 무모합니다. 돈나라, 허나라, 채나라 삼국은 오랫동안 초나라로부터 시달림을 받아 마음속으로 불복하고 있어서 힘을 다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일곱 나라가 함께 참전하기는 했으나 마음이 한결같지 않고 초나라 장수의 직위는 낮고 위엄이 없습니다, 만약 군사를 나누어 먼저 호나라, 심나라, 진나라 군사를 치면 틀림없이 먼저 달아날 것입니다. 제후국 군사들이 무너지면 초나라 군사들도 반드시 두려워하여 전패할 것입니다. 청컨대 우리의 약함을 보여 적군을 유인하고 정예병을 후방에 두십시오.” 했다.
왕료(오왕 요)가 그 계책에 따라 즉시 오나라 군사들을 3대로 나누어 스스로 중군을 거느리고, 희광(공자 광)은 좌군을, 공자 엄여는 우군을 거느리게 하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진영을 굳게 지켜 대기하도록 했다. 먼저 죄인 3천 명을 출전시켜 초나라 우측 진영을 어지럽게 치고 들어갔다. 그때는 가을 7월 그믐이라 군대에서는 그믐을 꺼려서, 호나라 곤(髡)과 심나라 영(逞), 진(陳)나라 하설이 모두 준비가 없었다. 오나라 병사들이 돌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세 나라의 군사들은 진영의 문을 열고 적군을 맞이해 싸우려고 했다. 죄인들은 원래 기율이 없어서 어떤 자는 달리고 어떤 자는 멈추니, 세 나라 병사들은 오나라 군사가 산만하고 어지러워 피차간 공을 쫓았지만 전혀 대오도 갖추지 않았다. 희광(공자 광)이 좌군을 거느리고 혼란한 틈을 타서 진격하다가 하설을 만나, 극을 한번 휘둘러 하설을 말 아래 떨어뜨렸다. 호나라와 심나라 두 군주는 마음이 황망하여 활로를 찾아 달아나려고 했다. 공자 엄여가 거느린 우군이 도착하여, 두 군주는 마치 그물에 걸린 새처럼 도망칠 수가 없어 모두 오나라 군사들에게 잡혔다. 세 나라 군사들이 셀 수 없이 죽었고 사로잡힌 군사들이 8백여 명이었다. 희광(공자 광)이 소리쳐 호나라와 심나라 두 군주를 끌어내어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사로잡은 군사들은 풀어 주며 초나라 좌군으로 달아나게 하여 말을 전하게 하기를, “호나라, 심나라 두 군주와 진(陳)나라 대부가 모두 죽었다.”라고 하게 했다.
허, 채, 돈 세 나라의 장수와 병사들은 놀라 간담이 떨어져서 감히 나가 싸울 생각을 못하고 각기 살길을 찾아 달아났다. 왕료가 좌우의 두 부대를 합쳐 태산과 같은 기세로 압도해 왔다. 초나라 중군 원월이 미처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군사들 태반이 흩어져 버렸다. 오나라 병사들이 그 뒤를 쫓아 초나라 군사를 무찌르니,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고 흐르는 피는 내를 이루었다. 원월이 크게 패하여 50여 리를 달아나 겨우 추격에서 벗어났다. 희광(공자 광)이 바로 채나라 운양으로 들어가서 태자 건의 생모인 초부인을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왔다. 채나라 사람들은 오나라 군사들을 감히 막지 못했다. 원월이 패잔병을 수습하니 원래 병력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공자 광이 휘하 좌군을 이끌고 운양으로 초부인을 데리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밤낮으로 달려갔다. 초나라 군사가 채나라에 이르렀을 때 오나라 군사들은 이미 운양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난 뒤였다. 원월은 오나라 군사를 추격할 수 없음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기를, “내가 소관을 지키라는 명을 받고 도망치던 신하를 잡지 못했으니 이것은 공이 없음이요, 이미 일곱 나라의 군사를 잃고, 또 군부인까지도 놓쳤으니 이것은 죄가 있음이다. 공은 하나도 세우지 못하고 지은 죄가 두 가지나 되니, 무슨 면목으로 초나라 왕을 다시 볼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원월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초평왕은 오나라 군세가 크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워하여, 낭와(囊瓦)를 영윤으로 삼아 양개(陽匄)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낭와가 초평왕에게 계책을 올려 영성(郢城)은 낮고 좁아서 그 동쪽 땅에 큰 성을 쌓았다. 옛 성보다 높이가 일곱 자가 높고 넓이가 20여 리나 넓었는데, 옛 성은 기산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기남성(紀南城)이라 부르고, 새 성의 이름은 영성이라고 하여 도읍을 옮겼다. 다시 서쪽에 한 성을 쌓아 오른팔로 삼아 맥성(麥城)이라고 불렀다. 세 성이 마치 품(品)자 모양이 되어 서로 연락 호응하는 형세였다. 초나라 사람들은 모두 이를 낭와의 공이라고 말했다. 심윤수(沈尹戍)가 웃으며 말하기를, “자상(낭와)이 덕으로써 정사를 돌보지 않고, 헛되이 토목 공사를 일으키니, 만약 오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온다면 비록 영성이 10개가 있다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했다. 낭와가 계보(雞父)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전선을 대대적으로 건조하고 수군을 조련시켰다. 3개월이 지나자 수군들이 익숙해졌다. 낭와가 수군을 인솔하여 장강의 흐름을 타고 오나라 경계까지 갔다가 무력을 시위하고 돌아왔다. 오나라 공자 광은 초나라 군사가 변경을 침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도우러 왔으나, 오나라 경계에 이르렀을 때 낭와는 이미 군사를 돌이킨 뒤였다. 희광(공자 광)이 말하기를, “초나라가 방금 무력을 시위하고 돌아갔으니 초나라의 변경 군사들의 경계가 틀림없이 느슨해졌을 것이다.” 하고, 비밀리에 행군하여 소(巢) 땅을 기습하여 멸하고, 아울러 종리(鍾離)를 멸한 후에 개선하여 돌아갔다.
초평왕은 두 고을이 전멸됐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아 마침내 병을 얻어 오래되어도 낫지 않았다. 주경왕 4년(기원전 516년)에 이르러 초평왕의 병세가 위독하여 낭와와 공자 신(公子申)을 침상 앞으로 불러 태자 진(太子珍)을 부탁하고 죽었다. 낭와가 극완과 상의하기를, “태자 진은 나이가 어리고 또한 그의 모친이 태자 건의 부인으로 데려온 여자이므로 올바른 후사가 아닙니다. 자서(子西 ; 공자 신)가 나이도 많고 선(善)을 좋아합니다. 장자를 세우는 일은 명분도 순조롭고 착한 사람을 세워야 나라가 잘 다스려집니다. 진실로 자서를 세워야 초나라의 사직이 의지할 만할 것이오.” 했다. 극완이 낭와가 한 말을 공자 신에게 전했다. 공자 신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만약 태자를 폐한다면 군왕의 더러운 행위를 널리 알리는 것이 됩니다. 태자는 진(秦)에서 온 여인의 소생이고 그의 모친은 이미 군부인이 되었으니 어찌 적자가 아니라고 하겠소? 적자를 버려서 큰 지원국을 잃으면 나라 안팎에서 미워할 것이오. 영윤이 이익으로써 나를 재앙에 끌어들이려고 하니 그가 미쳤소? 다시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반드시 그를 죽이겠소!” 했다. 낭와가 두려워하여 이에 태자 진을 받들어 초평왕의 장례를 주관하게 하고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름을 진(軫)으로 바꾸니, 이가 곧 초소왕(楚昭王)이다. 낭와는 그대로 영윤이 되고, 백극완은 좌윤이 되었으며, 언장사는 우윤이 되고, 비무극은 사부로서 옛 은혜가 있어 함께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편, 정정공(鄭定公)은 오나라 사람들이 초부인을 데려갔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주옥으로 만든 비녀와 귀걸이를 보내어 태자 건을 정나라에서 죽인 한을 달래게 하였다. 초부인이 오나라에 당도하자 오왕 요가 도성의 서문 밖에 큰집을 주어 미승이 모시게 했다. 오원은 초평왕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가슴을 치며 대성통곡하면서 종일 그치지 않았다. 공자 광이 괴이히 여겨 묻기를, “초평왕은 곧 그대의 원수인데 그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마땅히 통쾌할 일인데 어찌 도리어 통곡을 하시오?”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나는 초평왕의 죽음을 통곡하는 것이 아니오. 내가 그의 머리를 베어 효수하여 나의 한을 풀지 못하고, 그가 방안에서 죽은 것이 원통해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했다. 공자 광도 역시 탄식했다. 호증 선생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부친과 형님의 원한을 미처 갚지도 못했는데, 이미 음탕한 도적은 자기의 안식처에서 죽었구나! 손에 들고 있던 칼로 사무친 원한을 갚을 수 없어, 흰 귀밑머리에 또 세월만 지나가니 슬프구나.” 했다. 오원이 직접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여 3일 밤을 자지 않고 마음속으로 한 가지 계책을 내어 희광(공자 광)에게 말하기를, “공자께서는 큰일을 행하려고 하면서 아직 그 기회를 잡지 못하셨습니까?”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밤낮으로 궁리를 하고 있으나 아직 기회를 얻지 못했소.”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지금 초나라는 왕이 막 죽었고, 조정에는 지모 있는 신하가 없습니다.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오왕에게 상주하여 초나라의 상을 틈타 군사를 동원하여 초나라를 쳐서 패권을 도모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만약 나를 대장으로 보내면 어찌하오?”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공자께서 실수한 척하여 수레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시면 오왕은 틀림없이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엄여와 촉용을 대장으로 추천하고, 다시 공자 경기(慶忌)를 정나라와 위(衛)나라에 보내 그들과 결맹하여 초나라를 함께 공격하게 하면, 이것은 한 개의 그물에 세 마리 새를 잡는 것이니 오왕의 죽음은 목전의 일이 될 것입니다.” 했다. 공자 광이 또 묻기를, “세 날개가 비록 제거되어도, 연릉(延陵)의 계자(季子)가 아직 조정에 있는데, 나의 찬탈 행위를 보고 능히 나를 용납하겠소?”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오나라와 진(晉)나라는 서로 화목하게 지냅니다. 다시 계자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중원의 정세를 엿보라고 하십시오. 오왕은 큰일을 좋아하고 계책에 소홀하니 틀림없이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 계자가 먼 나라로 사신으로 갔다고 귀국할 때쯤이면 왕위는 이미 정해졌을 것이니 어찌 그가 다시 폐립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공자 광이 자기도 모르게 오원에게 절을 하며 말하기를, “내가 자서를 얻은 것은 하늘이 준 것이오!” 했다.
다음날, 공자 광이 오왕 요에게 초나라에 국상이 난 틈을 이용하여 정벌하는 이로움을 상주하니, 오왕 요가 흔쾌히 받아들였다. 공자광이 말하기를, “이번 일에 제가 출전하여 공로를 세우고 싶으나 제가 수레에서 떨어져 발목이 부러져서 지금 치료를 받고 있으니 제가 출전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오왕 요가 말하기를, “그러면 누구를 대장으로 삼아야 하오?”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이번 출전은 나라의 큰일이라, 가까운 친척 중에 믿는 사람이 아니면 맡길 수가 없습니다. 왕께서 스스로 선택하십시오.” 했다. 오왕 요가 말하기를, “엄여와 촉용이면 되겠습니까?”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그 두 사람이면 될 것입니다.” 했다. 공자 광이 또 말하기를, “지난날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패권을 다투어 오나라는 그들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지금 진(晉)나라는 이미 쇠퇴했고 초나라도 우리에게 여러 번 패하여 제후들의 마음이 떠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남쪽 초나라와 북쪽 진나라가 지배했던 천하의 패권이 장차 동쪽의 오나라로 넘어올 것입니다. 만약 공자 경기를 정나라와 위나라에 보내어 그곳의 군사들과 힘을 합쳐 초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한편으로 연릉의 계자(季子)를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중원의 정세를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왕께서 수군을 뽑아 훈련하고 보군으로 그 뒤를 받친다면 패업이 거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했다. 오왕 요가 크게 기뻐하여, 엄여와 촉용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게 하고, 계찰을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오직 공자 경기는 보내지 않았다.
한편, 엄여와 촉용은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수륙으로 나란히 진격하여 초나라 잠읍(潛邑)을 포위했다. 잠읍 대부가 성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고, 사람을 초나라 도성에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그때 초나라 소왕이 새로 서서 군주는 어리고 신하들은 서로 중상모략하여, 오나라 군사가 잠읍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이 황급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공자 신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오나라가 우리의 국상을 틈타 공격해 왔는데 만약 우리가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막지 않는다면 우리의 약점을 보이는 것이 되고, 그들은 깊숙이 쳐들어오려는 생각을 품게 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한시라도 빨리 좌사마 심윤수로 하여금 육군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잠읍을 구하게 하고, 다시 좌윤 백극완에게 수군 1만 명을 인솔하여 회수(淮水)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서 오나라 군사들의 퇴로를 끊게 하십시오. 그들이 앞과 뒤에서 적을 맞게 되면 오나라 장수를 앉아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초소왕이 크게 기뻐하여, 곧 자서(공자 신)의 계책을 써서, 두 장수를 보내어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진격하게 했다. 한편, 엄여와 촉용이 잠읍을 포위하고 있을 때 첩자가 보고하기를, “초나라 구원병이 도착했습니다.” 했다. 두 장수가 크게 놀라 군사를 반으로 나누어 반은 성을 포위하고 반은 초나라 구원병을 맞이했다. 심윤수는 굳게 지키기만 할 뿐 싸우지 않았다. 사방으로 군사를 보내어 나무와 물을 가져오는 길목을 돌로 보루를 쌓아 모두 끊었다.
두 장수가 크게 놀랐다. 정찰 기병이 또 보고하기를, “초나라 장수 백극완이 수군을 이끌고 회수(淮水)의 물줄기를 타고 내려와 강어귀를 막았습니다.” 했다. 오나라 군사들은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엄여와 촉용은 영채를 나누어 서로 의지하는 형세를 이루어 초나라 군사들과 대치할 수 있도록 하고, 한편으로 사람을 오나라로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했다. 희광(공자 광)이 말하기를, “신이 전날에 정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여야 한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경기를 정나라와 위나라에 보낸다 해도 아직 늦지 않습니다.” 하니, 오왕 요가 즉시 경기를 시켜 정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들을 규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네 공자가 모두 오왕 요의 곁을 떠나게 되고, 단지 공자 광만 국내에 남게 되었다. 오원이 공자 광에게 말하기를, “공자께서는 예리한 비수를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까? 전제를 쓰려면 이때입니다.”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그렇소. 옛날에 월왕 윤상이 구야자(歐冶子)를 시켜 다섯 개의 칼을 만들게 했는데, 그중 세 개를 오나라에 바쳤소. 첫째는 담로(湛盧)라 했고, 둘째는 반영(磐郢)이라 했으며, 셋째는 어장(魚腸)이라 했소. 어장은 곧 비수요. 그 모양은 비록 짧고 좁지만, 쇠를 마치 진흙처럼 벨 수 있소. 선군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 지금까지 보물로 침상 머리맡에 감춰두고 비상시에 대비하였소. 이 칼은 밤이 되면 빛을 내는데, 생각건대 이 칼이 신물이라 스스로를 시험하고자 장차 오왕 요의 피를 먹고 싶어서인 것 같소.” 했다. 공자 광이 즉시 어장 검을 꺼내와서 오원에게 보여주었다. 오원이 보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공자 광은 즉시 전제를 불러 어장 검을 주었다. 전제가 공자 광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뜻을 짐작하고 비장하게 말하기를, “이젠 왕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의 두 동생은 멀리 떠났고 공자들은 사신으로 나갔으며 그는 이제 혼자 되었으니 나를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생사가 갈리는 마당이니 감히 혼자 결정할 수는 없고 늙은 어머니께 이 일을 아뢰어 허락하신다면 명을 받들겠습니다.” 했다. 전제가 집으로 돌아가서 그 모친을 보고, 말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 모친이 말하기를, “무엇이 그리 슬프냐? 공자께서 너를 어디에 쓰려고 했겠느냐? 우리 온 집안 식구가 공자님의 은혜를 입었는데 그 은덕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충신과 효자 노릇을 둘 다 온전하게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빨리 가거라. 내 걱정은 하지 말아라! 네가 일을 성사시킨다면 너의 이름은 후세에 남을 것이고 나는 죽더라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했다. 전제가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하자 노모가 말하기를, “내가 맑은 샘물을 마시고 싶으니 냇가에 가서 샘물을 떠 오너라.” 했다, 전제가 모친의 명을 받고 냇가의 우물에서 물을 떠 가지고 집에 돌아오니, 노모가 방안에 보이지 않아서 그 아내에게 물었다. 그 아내가 대답하기를, “어머니는 피곤하다고 하면서 문을 닫고 누워야겠다며 놀라게 하지 말라고 경계했습니다.” 했다. 전제가 의심하는 마음이 들어 들창을 열고 들어가니 노모는 침상 위에서 스스로 목을 매고 죽어 있었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아들의 이름을 이루려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아, 기꺼이 효자를 충신으로 만들었다! 세간에는 살기를 탐하여 잘못을 저지르니, 구구한 노부인에게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했다. 전제가 한바탕 통곡하고 시신을 염하고 입관한 후에 서문 밖에 장사지냈다. 전제가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가 공자의 큰 은혜를 입고도 감히 목숨을 걸지 못했던 까닭은 늙은 어머니 때문이었소. 지금 노모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니 나는 공자에게 달려가서 급한 일을 도와야겠소. 내가 죽더라도 그대 모자는 틀림없이 공자께서 가족처럼 보살펴 줄 것이니 나를 붙잡지 마시오.” 하고, 말을 마치자 공자 광을 찾아가 뵙고 모친이 죽었음을 말했다. 공자 광이 지나치게 마음을 쓰기 않도록 진심으로 위로했다. 한참 후에 다시 오왕 요를 암살할 일을 의논했다. 전제가 말하기를, “공자님께서 어찌하여 연회를 준비하고 오왕을 초대하지 않으십니까? 오왕이 만약 기꺼이 온다면 일은 십중팔구 성사될 것입니다.” 하니, 공자 광이 조정에 들어가 오왕 요를 뵙고 말하기를, “저희 집 요리사가 태호에서 왔는데 새로이 생선을 굽는 법을 배워서 그 맛이 아주 산뜻하고 맛있어서 다른 구이와 다릅니다. 청컨대 왕께서 저희 집에 한 번 행차하시어 맛보십시오.” 했다.
오왕 요는 생선구이를 좋아하여 즉시 흔쾌한 마음으로 허락하며 말하기를, “내일 당장 형님의 집으로 가겠소. 너무 지나친 비용은 쓰지 마시오,” 했다. 공자 광이 그날 밤 미리 무사들을 지하실 속에 매복시키고, 다시 오원에게 몰래 결사대 100명을 데리고 집 밖에서 호응하도록 했다. 이에 공자 광은 연회를 크게 준비했다. 다음 날 아침, 공자 광이 다시 오왕 요에게 청했다. 오왕 요가 입궁하여 그의 모친에게 고하기를, “공자 광이 술상을 차려 놓고 나를 청하는데, 혹시 다른 음모가 있지 않을까요?” 하니, 모후가 말하기를, “공자 광은 심기가 불편하여 항상 한을 품은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 있다. 이번에 너를 초청하는 것도 좋은 뜻은 아닌 듯한데 어째서 거절하지 않았는가?” 했다. 오왕 요가 말하기를, “제가 거절하면 그와 틈이 생길까 해서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만일에 대비하여 엄중히 준비를 하면, 또한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했다. 이에 오왕 요는 사자의 가죽으로 된 갑옷을 세 겹으로 껴입고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왕궁에서 떠나 곧바로 공자 광의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오왕 요를 호위하는 군사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행렬이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오왕 요의 어가가 문에 이르자 공자 광이 맞이하여 들이고 절하여 뵈었다. 오왕 요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공자 광이 그 옆에 모시고 앉았다. 오왕 요의 친척과 근신들이 집안에 가득 차고, 오왕 요의 주변에 장사 100명이 긴 극을 잡고 칼을 차고 왕의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다.
음식을 나르는 요리사들은 모두 뜰 아래에서 몸수색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무릎걸음으로 나아갔으며 십여 명의 장사가 손에 칼을 쥐고 요리사들을 옆에서 감시했다. 요리사들이 음식을 상에 놓을 때는 감히 얼굴을 들어 바라보지 못하고 다시 무릎걸음으로 나갔다. 공자 광이 술잔을 바치며 존경의 뜻을 나타내다가, 갑자기 발을 움켜쥐며 거짓으로 매우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곧 앞으로 나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다친 발이 다시 아파서 뼛속 깊이까지 고통이 심합니다. 큰 천으로 꽁꽁 싸야 통증이 그칩니다. 왕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잠시만 앉아 계시면 제가 발을 싸매고 나오겠습니다.” 하니, 오왕 요가 말하기를, “형님께서는 편한 대로 하시오.” 했다. 공자 광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절뚝거리며 내실로 들어가서 몰래 지하실로 내려갔다. 잠시 후에 전제가 생선구이를 드린다고 고하니 수색이 전과 같았다. 누가 생선 뱃속에 어장 단검이 이미 숨겨져 있는 줄을 알았겠는가. 장사들이 전제를 끼고 무릎걸음으로 왕 앞에 이르게 하니, 전제가 두 손으로 구운 생선을 바치면서 갑자기 생선 뱃속에 든 어장검을 뽑아 곧바로 오왕 요의 가슴을 찔렀다. 손에다 온 힘을 주었기 때문에 어장검의 칼날은 세 겹으로 껴입은 단단한 갑옷을 뚫고 들어가 관통하여 등 밖으로 나왔다. 오왕 요가 크게 한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다.
오왕 요를 호위하던 장사들이 한꺼번에 일제히 달려들어 칼과 극으로 전제를 찔러 저민 고기를 만들었다. 집안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공자 광이 지하실에서 일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즉시 무사들을 풀어 밖으로 출동시켰다. 양쪽의 무사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한쪽은 전제가 이미 손을 썼음을 알고 기세가 등등했지만, 다른 한편은 오왕 요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사기가 떨어져서 그들 중의 반은 피살되고 나머지 반은 달아나 버렸다. 집 밖의 경비 군사들도 모두 오원이 이끌고 온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흩어졌다. 오원과 무사들이 희광(공자 광)을 받들어 수레에 태우고 조당으로 들어가서 여러 신하를 모이게 했다. 공자 광은 오왕 요가 선대의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왕이 된 죄를 들어 나라 사람들에게 명백히 선포하기를, “오늘 내가 왕위를 탐해서가 아니라 실은 오왕 요가 불의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를 죽인 것이다. 내가 우선 대위(大位)를 섭정하다가 계자(季子)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선군들의 뜻을 받들어 그를 왕으로 모시겠다.”라고 했다. 공자 광은 즉시 오왕 요의 시신을 수습하여 왕으로서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 주었다. 또한 전제도 후하게 장사를 지내 주고, 그의 아들 전의(專毅)를 상경으로 봉했다. 오원을 행인(行人 ; 제후 접대 담당)의 직에 임명하여 손님의 예로 대하고 신하로 대하지 않았다. 시장 관리인 피리(被離)는 오원을 천거한 공로가 있다고 하여 역시 대부의 직에 올랐다.
공자 광은 오나라 부고에 쌓여 있던 재물과 양식을 꺼내어 불쌍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니 나라 사람들이 안심했다. 희광(공자 광)은 공자 경기가 나라 밖에 있는 것을 염려하여, 길을 잘 걷는 사람을 시켜 그가 돌아올 날짜를 알아내어, 친히 대군을 인솔하고 강가에 주둔하며 기다렸다. 공자 경기는 중도에서 변란 소식을 듣고 곧 달아났다. 희광(공자 광)이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에 타고 그를 추격했다. 공자 경기가 수레를 버리고 달아나는데 마치 날아가는 것 같이 빨라 말을 탄 공자 광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 공자 광이 궁수들을 모이게 하여 경기에게 활을 쏘도록 했다. 경기가 손으로 화살을 잡아내어 한 개의 화살도 경기를 맞추지 못했다. 희광(공자 광)은 경기를 잡을 수 없음을 알고 오나라의 서쪽 국경을 지키는 관리에게 철저히 대비하라고 이르고 마침내 오나라 도성으로 돌아왔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계찰이 진(晉)나라에서 돌아와 오왕 요가 이미 죽었음을 알고, 곧바로 그의 묘에 가서 애도하고 상복을 입었다. 희광(공자 광)이 친히 오왕 요의 묘소에 와서 왕위를 양보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조부와 여러 숙부의 뜻입니다.” 하니, 계찰이 말하기를, “네가 구하여 얻었는데, 또 어찌하여 양보하려고 하는가? 다만 나라에 제사가 폐해지지 않고 백성이 왕을 폐하지 않으면 능히 왕이 된 자가 곧 나의 군주이다.” 했다. 공자 광이 강권할 수 없어, 즉시 자신이 오왕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 호를 합려(闔閭)라 했다. 계찰은 물러나서 신하의 자리를 지켰다. (이것은 주경왕(周敬王) 5년(기원전 515년)의 일이었다.)
계찰은 왕위 다툼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연릉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오나라 도성에 들어오지 않고 국정에도 관여하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고결하다고 했다. 계찰이 죽자 그를 연릉에 장사 지냈다. 후에 공자(孔子)가 친히 그의 비에 쓰기를, “오나라 연릉 계자의 무덤(有吳延陵季子之墓)”이라고 했다. 사관이 찬양하기를, “탐욕스러운 사람은 이익 때문에 죽으니, 조그만 이익에도 얼굴색이 변하는구나! 춘추 때에는 앞을 다투어 임금을 죽였으니, 부모 형제도 돌아보지 않았다. 누가 저 계찰과 같으랴. 시종일관 나라를 양보했으니, 오왕 요와 공자 광은 부끄럽겠지. 조상 태백에게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울 것이다.” 했다. 훗날 송나라 유학자가 또 논하기를, 계찰이 왕위를 받지 않아 난이 일어났으니 그의 어진 이름에 옥의 티라고 했다. 시를 지어 이르기를, “한번 양보하여 여러 분쟁을 일으켰으니, 형제간에 왕위를 전하라는 선조의 명을 저버렸다. 만약에 연릉의 계자가 부친의 뜻을 받들었다면, 고소대에 사슴들이 어찌 멋대로 날뛰었겠는가?” 했다. 한편 엄여와 촉용은 잠성(潛城)에서 어려움에 처하여, 오랫동안 구원병이 오지 않자, 그곳을 빠져나갈 계책을 세우지 못해 주저하고 있었다. 갑자기 희광(공자 광)이 군주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이 목놓아 운 뒤에 상의하여 말하기를, “희광(공자 광)이 군주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아 갔으니 틀림없이 우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초나라로 도망치고 싶지만, 또한 그들이 우리를 믿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야말로 달아날 집도 없고 투항할 나라도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했다.
촉용이 말하기를, “지금 이곳에서 무한정 어려움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밤을 틈타 오솔길로 작은 나라로 도망쳤다가 후일을 도모합시다.” 하니, 엄여가 말하기를, “초나라 군사가 앞뒤에서 포위하여 새가 새장 속에 든 것과 같은데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겠느냐?” 하니, 촉용이 말하기를, “저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우리의 두 진영에 명령을 내려 거짓으로 내일 초나라 군사들과 교전을 한다고 하고, 밤중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형과 함께 평복으로 바꾸어 입고 몰래 도망친다면 초나라 군사들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엄여는 그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두 진영의 장수와 병사들에게 말에게 여물을 먹이게 하고 새벽밥을 먹게 한 후에 군령이 내려지면 포진을 하라고 했다. 엄여와 촉용은 심복 몇 사람과 함께 정탐 군사로 분장하여 본영을 벗어나 달아났다. 엄여는 서(徐)나라로 달아나고, 촉용은 종오(鍾吾)로 달아났다. 날이 밝아오자 오나라의 두 진영에서 주장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군사들이 혼란에 빠져 제각기 배를 빼앗아 타고 오나라로 돌아갔다. 그들이 버린 무수한 갑옷과 무기는 모두 백극완의 초나라 수군이 노획했다. 초나라의 여러 장수가 오나라 내란을 틈타 곧바로 오나라를 정벌하자고 했다. 백극완이 말하기를, “저들이 우리가 상중임을 틈타 쳐들어온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었소. 우리가 어찌 그것을 본받겠소?” 했다. 이에 백극완은 심윤수와 함께 회군하여, 초소왕에게 오나라 포로를 바쳤다. 초소왕은 백극완에게 공이 있다고 하여 노획한 전리품의 절반을 그에게 주었다. 초소왕은 매사를 극완과 상의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갖추어 대했다. 비무극이 이를 매우 시기하여 한 가지 음모를 꾸며 백극완을 해치려고 했다.
마침내 비무극이 무슨 계책을 쓸 것인가.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제74회: 낭와가 비방이 두려워 비무극을 죽이고, 요리가 명예를 탐하여 경기를 찌르다.
한편, 비무극은 백극완을 시기하여 언장사와 함께 상의한 후 한 가지 계책을 꾸며서, 낭와에게 속여 말하기를, “자오(子惡 : 백극완)가 연회를 준비하여 저에게 부탁하기를 상국의 뜻을 알아 달라고 하니, 모르겠습니다만 상국께서 기꺼이 가시겠습니까?” 하니, 낭와가 말하기를, “그가 만약 나를 초대한다면, 어찌 가지 않을 리가 있겠소?” 했다. 비무극이 또 백극완에게 말하기를, “영윤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백극완의 집에게 술을 마시고 싶은데, 그가 기꺼이 술상을 준비하여 자기를 맞이할지 몰라 나에게 알아보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니, 백극완이 그 계책을 모르고 응답하기를, “저의 지위가 하급자인데 영윤께서 저희집에 오신다면 진실로 영광이지요! 내일 간략한 주연을 마련하여 영윤을 모시겠으니, 번거롭겠지만 대부께서 저의 뜻을 전해주십시오.” 했다. 비무극이 말하기를, “그대는 영윤을 접대할 때 무엇으로 존중을 표할 것입니까?” 하니, 백극완이 말하기를, “영윤께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제가 알지 못합니다.” 하니, 비무극이 말하기를, “영윤께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입니다. 그래서 그대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까닭은 오나라에서 노획한 병장기 중에서 반이 그대에게 돌아갔으니, 그래서 잠깐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병장기들을 모두 내어 보여주면 제가 그대를 위해 선택하겠습니다.” 했다.
백극완은 초소왕에게서 받은 무기와 자기 집에 있던 무기들을 모두 꺼내어 비무극에게 보여주었다. 비무극이 그중에서 견고하고 날카로운 것 50개를 골라 주며 말하기를, “이것이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대는 이것들을 여러 문 앞에 장막으로 가려 놓고 있다가 영윤께서 오셔서 물으시거든 즉시 꺼내서 보여 주십시오. 영윤께서 틀림없이 좋아하고 아끼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바치십시오. 만약 다른 물건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백극완이 그렇게 믿고 생각하여 즉시 문 왼쪽에 장막을 치고 무기를 가져다가 그 속에 두었다. 드디어 술안주와 과일을 성대하게 준비하고 비무극에게 낭와를 모셔 오라고 부탁했다. 낭와가 장차 가려고 하니, 비무극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으니, 제가 영윤을 위해 먼저 가서 연회를 어떻게 준비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따라가시지요.” 했다. 비무극이 간 지 얼마 후에 비틀거리며 오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낭와에게 말하기를, “내가 하마터면 상국을 그르치게 할 뻔했습니다. 자오(백극완)가 오늘 청한 것은 좋은 뜻을 품고 한 일이 아닙니다. 상국께서 가신다면 이롭지 않겠습니다. 제가 마침 문 옆의 장막 속에서 무기와 갑옷을 보았습니다. 상국께서 잘못하다가는 틀림없이 그 독수를 만날 것입니다.” 했다.
낭와가 말하기를, “자오(백극완)는 평소에 나와 원수진 일이 없는데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하니, 비무극이 말하기를, “그는 왕의 총애를 믿고, 대감을 대신하여 영윤을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들으니, 잠읍(潛邑)의 싸움에서 여러 장수가 오나라를 치려고 했으나, 백극완이 몰래 오나라와 통하여 뇌물을 받고, 내란을 틈타 공격하는 것은 의롭지 않다면서 좌사마 심윤수를 강압하여 회군하여 돌아왔다고 합니다. 오나라가 우리의 국상을 틈타 쳐들어왔으니, 우리도 오나라의 내란을 틈타 쳐들어가면 좋은 보복이 될 것인데, 어찌하여 회군했을까요! 그가 오나라의 뇌물을 받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군사들의 뜻을 어기고 가벼이 퇴각했겠습니까? 백극완이 만약 뜻을 얻으면 초나라는 위태로워질 겁니다.” 했다. 낭와가 그래도 믿지 못하고, 좌우의 측근에게 가서 살펴보라고 했다. 측근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대문 옆의 장막 속에 과연 무장병이 숨어 있었습니다.” 했다. 낭와가 대로하여 즉시 사람을 시켜 언장사를 불러오게 하여, 백극완이 음모를 꾸며 자기를 해치려고 한다고 호소했다. 언장사가 말하기를, “백극완은 양영종(陽令終), 양완(陽完), 양타(陽佗) 등과 진진(晉陳)의 삼족(三族)과 합당하여 초나라의 정권을 잡기로 한 것이 어제오늘이 아닙니다.” 했다.
낭와가 말하기를, “다른 나라에서 도망쳐 온 필부가 감히 난을 일으키려 하니, 내가 당장 요절을 내겠다.” 하고, 즉시 초소왕에게 아뢰고 언장사에게 명하여 무장병들을 인솔하여 백극완을 공격하게 했다. 백극완은 비무극의 함정에 빠졌음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그의 아들 백비(伯嚭)는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교외로 달아났다. 낭와가 백씨의 집을 불사르라고 명했으나 백성들은 아무도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낭와가 더욱 화를 내어 명령하기를, “백씨의 집을 불사르지 않는다면, 같은 죄로 다스리겠다!”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백극완이 어진 신하임을 알고 있어서 아무도 그 집을 불태우려고 하지 않았으나, 낭와의 핍박에 어쩔 수 없이 각각 볏짚을 한 단씩 손에 들고 백씨의 집 문밖에 던지고 달아났다. 낭와가 친히 그의 가병들을 이끌고 백씨 집의 앞뒤 문을 포위하고는 큰 불을 질렀다. 가련하게도 좌윤부(左尹府) 제일 구역은 일시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백극완의 시체도 또한 불에 타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낭와는 백씨 종족들을 남김없이 멸족시켰다.
그리고 양영종, 양완, 양타 및 진진을 잡아들여 그들이 오나라와 내통하여 모반을 꾀했다고 무고한 후에 모두 죽였다. 백성 중에 낭와를 원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낭와가 달밤에 누각에 올라가서 시중에서 부르는 노래를 듣었는데, 노래소리가 또렷하여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낭와가 들어보니 그 노래에 이르기를, “극대부를 본받지 말아라. 충성을 바쳤으나 죽임을 당했다. 몸은 이미 죽었는데, 뼈도 남지 않았네. 초나라는 임금이 없고, 오직 비무극과 언장사만 있을 뿐이라, 영윤은 나무 인형이라, 위인이 스스로를 묶는 누에고치라. 하늘의 뜻을 만약 알고 있다면, 보답을 받아 그의 이름이 드러나겠지.” 했다. 낭와가 급히 좌우시종을 시켜 노래를 부른 사람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시장의 가게마다 신위를 모시고 향불을 피워 서로 맞닿은 것을 보았다. 시종이 묻기를, “신위는 누구의 것인가?” 하니, 백성이 대답하기를, “초나라 충신 백극완입니다.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었으니 하늘에 호소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했다. 좌우시종이 돌아와 낭와에게 보고했다. 낭와가 조당에 나가자 공자 신 등이 모두 말하기를, “백극완은 오나라와 내통하지 않았습니다.” 했다. 낭와가 마음속으로 매우 후회했다.
심윤수도 백성들이 교외에 신위를 모셔 놓고 영윤을 저주한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낭와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고 있는데, 상국만 홀로 듣지 못했습니까? 비무극은 초나라의 참소꾼입니다. 언장사와 공모하여 초나라를 속여 왔습니다. 조오(朝吳)를 돌려보냈고 채나라 군주 주(朱)를 나라 밖으로 내쫓았으며, 선왕 평왕을 교사하여 패륜의 일을 행하게 하고 태자 건을 나라밖에서 죽게 했습니다. 또한 오사 부자를 억울하게 죽였고, 오늘 또 좌윤 백극완을 죽여서 그 여파가 양(陽)과 진(晉) 두 집안에 미쳐 백성들은 두 사람에게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모두 말하기를 상국이 비무극의 악행을 방조하고 있다며 원한과 저주가 나라 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무릇 비방을 막으려고 사람을 죽이는 일은 어진 사람은 하지 않는데, 더구나 비방하는 말을 만들어서 사람을 죽였습니까? 대감께서 영윤의 자리에 있으면서 간특한 참소꾼을 내버려두어 민심을 잃었으니, 앞으로 초나라에 긴급한 일이 일어나 나라 밖의 적이 쳐들어오거나 나라 안의 백성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상국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참소꾼의 말을 믿어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는 것과 참소꾼을 제거하여 스스로 편안해지는 것은 어느 것이 낫습니까?” 하니, 낭와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내려와 말하기를, “그 일은 나의 잘못입니다. 원컨대 사마께서 저의 한 팔이 되어 도와주시면 그 두 도적을 죽이겠습니다.” 했다.
심윤수가 말하기를, “이는 나라의 복이니, 어찌 감히 명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고, 즉시 사람을 시켜 나라 안에 외치게 하기를, “좌윤 백극완을 죽인 것은 모두 비무극과 언장사의 짓이다. 영윤께서 이미 그 간계를 깨달아 오늘 가서 죽이려 하니 백성 중에서 원하는 자는 모두 나서기 바란다.” 하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성들이 다투어 병장기들을 쥐고 앞장섰다. 낭와가 곧 비무극과 언장사를 잡아 죄를 나열하고 참수하여 시가지에 효수하였다. 백성들이 영윤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비씨와 언씨의 집을 불사르고 그 일당들을 모두 죽였다. 그러자 비방과 저주가 비로소 그쳤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백씨들의 집은 태우지 않고 언씨와 비씨의 집은 태웠으니, 공평한 의견과 마음은 백성들에게 있었다. 영윤이 일찍이 사마와 계책을 의논하였더라면, 참소하는 말이 어찌 충신을 해쳤겠는가?” 했다. 또 다른 시가 있어, 언장사와 비무극 두 사람이 일생 동안 사람을 해치다가 결국 스스로를 죽였으니, 참소와 악행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라는 시를 지어 이르기를, “순풍에 불을 질러 사람을 태워 죽이더니, 갑자기 바람이 돌아 자신을 태웠다. 악독한 계책은 모두가 이와 같이 되나니, 악인이 조난을 피할 수는 없다.” 했다.
한편, 오왕 합려(闔閭) 원년은 주경왕 6년(기원전 514년)이다. 합려는 오원을 방문하여 국정을 상의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천하를 제패하고자 하는데 어찌하면 되겠소?” 하니, 오원이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기를, “저는 초나라에서 도망쳐 온 사람입니다. 부친과 형이 억울하게 죽은 원한을 품고 해골은 장사도 지내지 못했으며, 혼백은 제사도 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더러움과 치욕을 무릅쓰고 대왕께 몸을 의탁하러 왔습니다. 다행히 죽임을 당하지 않은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감히 오나라의 정사를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합려가 말하기를, “장군이 아니었다면 과인은 남의 밑에서 몸을 굽히는 처지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오. 지금 다행히 장군의 한마디 가르침에 따라 오늘과 같이 오나라의 왕위에 오를 수 있었소. 내가 오나라의 국정을 그대에게 맡기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중도에서 갑자기 뜻을 버리려고 하시오? 과인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오?” 하니, 오원이 대답하기를, “신은 대왕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이 듣기로 ‘소원한 사람은 친한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으며, 멀리 있는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갈라놓을 수 없다’라고 합니다. 신이 어찌 감히 나그네의 몸으로 오나라의 신하들 위에 있겠습니까? 하물며 신은 원수를 갚지 못하여 마음이 흔들려서 제 일도 꾀하지 못하는데, 어찌 능히 나라의 일을 꾀하겠습니까?” 했다.
합려가 말하기를, “오나라의 신하 중에는 그대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으니 사양하지 마시오! 나라의 사정이 안정되면 과인이 그대의 원수를 갚도록 도와주겠소. 그대는 오직 내 명령을 따라 주시오!”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꾀하려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니, 합려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동남쪽에 치우쳐 있으며, 땅이 험하고 낮아 습지가 많소. 또한 해마다 바다의 조수 때문에 피해가 많으며, 창고가 부족하고 전답이 개간되지 않았소. 그리고 나라를 지키려는 백성들의 확고한 의지가 없어서 이웃 나라에 위엄을 보이지 못하고 있소. 어떻게 하면 되겠소?” 했다. 오원이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에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은 백성이 편안하도록 다스려야 하며, 패왕이 되기 위해서는 가까운 데서부터 먼 곳을 제압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곽을 세워 수비 시설을 마련하고, 창고를 채운 후에 군사를 훈련하여 안으로 지킬 수 있고 밖으로 적군에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니, 합려가 말하기를, “훌륭한 생각이오. 과인이 그대에게 맡기니 그대는 과인을 위해 도모해 주시오.” 했다. 오원은 즉시 오나라 땅의 높고 낮은 곳을 살피고, 물맛이 짜고 담백한지를 맛본 후에 고소산(姑蘇山) 동북 30리 되는 곳에 좋은 땅을 얻어 큰 성을 축조했다. 둘레는 47리에 달하고 육지에 여덟 개의 문을 냈는데 그것은 하늘의 팔풍(八風 ; 팔방의 바람)을 본받았고, 수문도 여덟이었는데 이는 땅의 팔총(八聰)을 의미했다.
그 여덟 개의 문은 남쪽에 반문(盤門)과 사문(蛇門)이 있고, 북쪽에 제문(齊門)과 평문(平門)이 있으며, 동쪽에 누문(婁門)과 장문(匠門)이 있고, 서쪽에 창문(閶門)과 서문(胥門)이 있었다, 반문(盤門)은 물이 굽이친다는 뜻이고, 사문(蛇門)은 방위가 사방(巳方)에 있기 때문이며 십이간지로 말하면 뱀띠에 속했다. 제문(齊門)은 제나라가 북쪽에 있기 때문이고, 평문은 물과 육지가 대응하여 균형을 이루었다는 뜻이며, 누문(婁門)이란 누강(婁江)의 물이 모인다고 해서 딴 것이고, 장문(匠門)은 성을 축조할 때 장인들을 이곳에서 모아 일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창문(閶門)은 가을 기운이 들어오는 문이고, 서문(胥門)이란 고서산(姑胥山)을 향한 문이라는 뜻이다. 월(越)나라는 오나라의 동남쪽에 있는데 정확히 방위가 사방(巳方)에 있었기 때문에 사문(蛇門) 위에 나무로 뱀을 조각하여 그 머리를 성안으로 향하게 하여 월나라가 신하로서 복종한다는 뜻을 나타냈다. 남쪽에 다시 작은 성을 쌓아 그 둘레가 10리이고 서남북에 문을 만들고 동쪽에만 문을 내지 않았다. 그것은 월나라에 밝은 빛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오나라의 땅은 동쪽 진방(辰方)이 되고 십이간지의 용띠에 해당하여 작은 성의 남문 위에 두 마리의 도롱뇽을 조각하여 용의 뿔을 상징하게 했다.
성곽이 완성되자 합려를 맞이하여 매리(梅里)로부터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 성안의 앞에는 조당이 있고, 뒤에는 시장이 있었으며, 왼쪽에는 종묘가 들어서고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세웠으며, 창고와 부고 등 없는 것이 없었다. 백성 중에서 군졸을 많이 선발하여 전투 진형과 활쏘기를 가르쳤다. 따로 봉황산(鳳凰山) 남쪽에 성을 쌓았는데 그것은 월나라의 침략에 대비한 성이라고 해서 남무성(南武城)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합려는 어장(魚腸) 검을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여 상자에 넣어 봉하고 사용하지 않았다. 우수산(牛首山)에 쇠를 다루는 성을 쌓고, 수천 개의 칼을 주조하여 그것을 편제(扁諸)라고 불렀다. 또 오나라 사람 간장(干將)은 구야자(歐冶子)와 함께 배웠는데, 그를 장문(匠門) 근처에 살게 하고 별도로 명검을 주조하도록 했다. 간장은 이에 오산(五山)의 좋은 쇠를 캐고, 천지의 기운이 어린 황금을 캐내어 하늘과 땅의 형세를 살펴 길일을 신중하게 택하니 천지의 신령들이 내려오고 온갖 귀신이 와서 구경했다. 숯을 산같이 모아 동남동녀 300명을 시켜 숯에 불을 피워 풀무를 돌리도록 했다. 이렇게 석 달을 계속했으나 금과 쇠가 녹지 않았다. 간장(干將)은 금과 쇠가 녹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의 처 막야(莫邪)가 말하기를, “무릇 신령스러운 물건을 만들려면 반드시 사람의 기를 받아야만 이루어집니다. 지금 당신이 칼을 만들기 위해 석 달을 노력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은 사람의 기운을 기다려야 이루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니, 간장이 말하기를, “옛날에 나의 스승이 쇠에 불을 땠으나 녹지 않자 부부가 화로에 같이 들어간 연후에 쇠를 녹일 수 있었소. 지금까지 산에서 쇠를 녹일 때 반드시 삼베 띠를 머리와 허리에 두르고 풀옷을 입고 화로에 제사를 지낸 후에 불을 때었소. 오늘 칼을 주조하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소!” 했다. 막야가 말하기를, “당신의 스승은 능히 몸을 태워 신기(神器)를 만들었는데 나라고 그것을 따라 하지 못겠습니까?” 하고, 막야가 목욕하고 머리를 짧게 자른 후 손발톱을 정리하고 화로 곁에서 동남동녀로 하여금 다시 풀무를 돌리게 하였다. 이윽고 숯불이 이글거릴 때 막야가 스스로 화로 속에 몸을 던졌다. 삽시간에 막야는 금과 쇠와 함께 녹아서 쇳물이 되었다. 간장이 즉시 쇳물을 부어 두 자루의 칼을 만들었다. 먼저 만든 것을 양(陽)이라 하여 이름을 간장(干將)이라 하고, 나중에 만든 것은 음(陰)이라 하여 이름을 막야(莫邪)라고 했다. 양인 간장 검에는 거북이 문양을 새기고, 음인 막야 검에는 불규칙한 무늬를 넣었다. 이윽고 간장이 간장검을 숨기고 막야검만을 오왕 합려에게 바쳤다. 오왕 합려가 돌에 시험을 하여 내려치니 돌이 둘로 갈라졌다. 지금도 소주(蘇州)의 호구(虎邱)에는 시검석(試劍石)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
오왕이 간장에게 상으로 많은 돈을 주었다. 나중에 오왕은 간장이 검을 숨긴 것을 알고 사람을 시켜 가져오라고 했다. 만일 검을 주지 않으면 그를 죽이라고 했다. 간장이 검을 꺼내서 보여주려고 하자 그 검이 스스로 칼집에서 튀어나오더니 청룡으로 변했다. 간장이 그것을 타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은 간장이 검의 신선으로 되었다고 의심했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니, 합려가 탄식하며 그 후로는 막야를 더욱 보물로 여겼다. 막야검은 오나라에 남아있다가 나중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후 600여 년이 지난 서진(西晉) 왕조 때 승상 장화(張華)가 견우성과 북두칠성 사이에 자주색 기운이 있는 것을 보고 천문과 도참을 잘 아는 뇌환(雷煥)이란 사람을 불러 물었다. 뇌환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보검의 정령으로서 예장군(豫章郡) 풍성(豊城)에 있습니다.” 했다. 장화가 즉시 뇌환을 풍성의 현령으로 임명하니, 뇌환이 풍성의 현령으로 부임하여 옛날의 감옥 터를 파게 하여 한 개의 돌로 된 함을 얻었다. 그 함의 크기는 길이가 여섯 자가 넘고 넓이는 석 자였다. 그 함을 열어보니 그 안에 두 자루의 검이 들어 있었다. 이 칼들을 남창 서산의 흙으로 닦으니 칼날의 눈부신 광채가 살아났다. 한 자루는 장화에게 보내고 남은 한 자루는 자기가 허리에 차고 다녔다.
장화가 말하기를, “칼에 새겨진 문양을 상세히 살펴보니 이 칼은 곧 간장검이다. 아마 막야검도 있었을 터인데 어찌하여 보내지 않았는가? 비록 지금은 떨어져 있다 하나 신물은 결국 마땅히 같이 있게 될 것이다.” 했다. 그 후에 뇌환이 장화와 함께 칼을 차고 연평(延平) 나루를 지나는데 칼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급히 사람을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 찾게 했으나 그들은 다만 두 마리 용이 갈기를 세우고 오색찬란한 빛을 발하며 서로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여 물 밖으로 나왔다. 이후로 두 검은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신령스런 물건이 끝내 하늘로 올라갔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풍성현에 검지(劍池)라는 연못이 있고 연못 앞의 흙 속에 반쯤 묻혀 있는 석함이 있다. 사람들이 석문(石門)이라 부르는데 곧 뇌환이 칼을 얻은 곳이다. 이것이 간장과 막야의 결말이다. 뒤사람이 <보검명(寶劍銘)>을 지어 이르기를, “다섯 산의 정기와, 여섯 기운의 빼어난 것이, 단련되어 신령한 칼이 되었는데, 번개가 번쩍이고 서리가 맺힌 듯하다. 무지개 무늬와 물결 무늬, 용 무늬와 거북 무늬가 새겨져 있고, 쇠를 자르고 옥을 가르니, 위세가 삼군을 진동시켰다.”라고 했다.
한편, 오왕 합려가 이미 보검 막야를 얻고, 다시 쇠갈고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에게 상으로 많은 돈을 주겠다고 했다. 나라 사람들이 많이 갈고리를 만들어 바쳤다. 그때 어떤 갈고리 장인이 왕의 상금을 탐내어 두 아들을 죽여서 그 피를 쇠에 칠하여 갈고리 두 개를 만들어 오왕에게 바쳤다. 며칠이 지나서 그 사람이 궁문으로 찾아와 상금을 달라고 했다. 오왕이 말하기를, “갈고리를 만들어 바친 사람이 많은데 너만 홀로 상을 달라고 하니, 네가 만든 갈고리가 다른 사람의 것과 다른 점이 있는가?” 하니, 그 갈고리 장인이 말하기를, “신은 대왕의 상을 받기 위해서 저의 두 아들을 죽여 갈고리를 만들었습니다. 어찌 다른 사람의 갈고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오왕 합려가 갈고리를 가지고 좌우에 말하기를, “이미 여러 사람의 것과 섞여 버려 그 모양이 비슷하니 가려낼 수가 없구나!” 하니, 그 갈고리 장인이 말하기를, “신이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했다. 좌우에 있던 시종들이 많은 갈고리를 모두 가져다가 그 갈고리 장인 앞에 늘어놨으나, 그도 역시 가려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갈고리를 향하여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르기를, “오홍(吳鴻)아, 호계(扈稽)야! 내가 여기 있는데 어찌하여 대왕 앞에 혼령을 나타내지 않느냐?” 하니, 외치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두 개의 갈고리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 갈고리 장인의 가슴에 달라붙었다. 오왕 합려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네 말이 과연 틀리지 않았구나!” 하고, 많은 돈을 상으로 주었다. 마침내 오왕 합려는 막야검과 함께 그 갈고리를 몸에 차고 다녔다.
그때 초나라 백비가 나라 밖으로 달아나, 오원이 오나라에서 이미 중용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오나라에 들어와 먼저 오원을 찾았다. 오원은 그를 맞이하여 눈물을 흘리며 마침내 합려를 만나게 해주었다. 합려가 묻기를, “과인은 동해의 외진 곳에 있소. 그대가 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이곳을 찾은 것은 장차 과인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요?” 하니, 백비가 말하기를, “신의 조부 백주리(伯州犁)와 아버지 백극완(伯郤宛)은 두 대에 걸쳐 초나라에 온 힘을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의 부친 백극완은 아무 죄도 없이 불길에 횡사하였습니다. 신은 목숨을 구하여 사방으로 떠돌아다녔으나 몸을 맡길 만한 데가 없었습니다. 지금 들으니 대왕께서 높은 의기로 불운한 오자서를 거두셨다고 하여,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몸을 묶어 목숨을 의탁하려 하오니 오직 대왕께서 죽이거나 살릴 것입니다!” 했다. 합려가 불쌍하게 생각하여 백비를 대부로 삼아 오원과 함께 정사를 의논하게 했다. 오나라 대부 피리가 조용히 오원에게 묻기를, “그대는 뭘 보고 백비를 신뢰하십니까?”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나의 원한은 바로 백비의 원한과 같습니다. 속담에 ‘같은 병을 앓으면 서로 동정하며 같은 근심이 있으면 서로 도와준다.’고 했습니다. 놀란 새는 서로 뒤를 이어 모이며, 여울의 물도 함께 흐릅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괴이하다고 하십니까?” 했다.
피리가 말하기를, “그대는 사람을 겉만 보았지, 그 사람의 내면은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백비의 관상을 보니 눈은 매 같고 걸음걸이는 호랑이 같습니다. 그의 성격은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공로는 독차지하고 멋대로 사람을 죽일 것입니다.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를 중용했다가는 반드시 그대에게 해가 될 것입니다.” 했다. 오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침내 백비와 함께 오왕을 섬겼다. 뒷사람이 피리가 오원의 현명함을 알아보고, 또 백비의 간사함을 간파한 것은 그가 참으로 귀신같이 관상을 본 것이라고 논했다. 오원은 피리의 말을 믿지 않았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시가 있어 이르기를, “능히 충용한 자와 간특한 자를 알았으니, 피리는 귀신같이 관상을 보는 이인이었다! 만약 오자서로 하여금 미리 방비하도록 했다면, 어찌 사슴들이 소대에 뛰어놀게 했겠는가?” 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공자 경기(慶忌)는 애성(艾城)으로 도망쳐서 결사대를 모으고 이웃 나라들과도 연락을 취하면서 때를 기다려 틈을 타서 오나라로 쳐들어가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합려가 그 소식을 듣고 오원에게 말하기를, “전날에 전제를 얻어 대사를 이룬 일은 전적으로 그대의 힘이었소. 지금 경기가 오나라를 도모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내가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겠고 자리에 앉아 있어도 편하지 않소. 그대는 다시 나를 위해 힘을 써 주시오.” 했다.
오원이 대답하기를, “신이 불충하고 행실도 없지만, 대왕과 함께 왕료를 사가에 유인하여 죽였습니다. 지금 다시 그의 아들마저 죽인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이 아닐 것 같아 걱정됩니다.” 하니, 합려가 말하기를, “옛날에 주(周)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죽이고, 다시 주공이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을 살해했으나 주나라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소. 하늘이 폐한 것을 하늘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이오. 경기가 만약 살아 있다면 왕료는 아직 죽지 않은 것과 같소. 과인은 그대와 함께 성패를 같이 하고 있거늘, 어찌 조그만 인정 때문에 큰 화근을 자라나게 하겠소? 과인이 다시 한번 전제와 같은 사람을 얻으면 일은 해결될 것이오. 그대가 지혜와 용기를 갖춘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은 이미 하루 이틀이 아니니 또한 사람이 있지 않겠소?”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신이 잘 알고 지내는 한 천인이 있습니다. 거의 함께 꾀해 볼 만한 사람입니다.” 하니, 합려가 말하기를, “경기는 힘이 만 명을 대적할 수 있는데, 어찌 천인이 그를 도모할 수 있겠소?” 했다. 오원이 대답하기를, “그가 비록 천인이지만 실은 만인을 대적할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니, 합려가 말하기를, “그 사람이 누구요? 그대는 어떻게 그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오? 시험 삼아 과인을 위해 말해 보시오.” 했다, 오원은 마침내 그 용사의 성명과 알게 된 내력을 자세히 말했다. 이야말로, “말할 때는 화악산이 움직이고, 그 말에는 장강도 거꾸로 흐르는 듯하다. 단지 오자서가 천거했기 때문에, 요리의 이름이 춘추시대에 전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그 사람의 성명은 요리(要離)인데 오나라 사람입니다. 신이 전에 그가 초구흔(椒邱訢)이라는 장사를 욕보이는 것을 보고, 그의 용기를 알았습니다.” 하니, 합려가 말하기를, “그가 어떻게 욕을 보였소?” 했다. 오원이 대답하기를, “초구흔은 동해 가의 사람인데, 그의 벗이 오나라에서 벼슬하다가 죽었습니다. 초구흔이 문상을 위해 오나라로 가는데, 수레가 회수 나루에 이르러 말에게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나루를 지키던 관리가 말하기를, ‘물 속에 귀신이 있어 말을 보면 나와서 잡아갑니다. 그대는 말에게 물을 먹이지 마시오!’ 했다. 초구흔이 말하기를, ‘장사가 여기 있는데 어떤 귀신이 감히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겠는가!’ 하고, 즉시 종자를 시켜 말을 풀어 나루에서 물을 먹이게 했다. 말이 과연 울더니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루를 지키는 관리가 말하기를, ‘귀신이 말을 끌고 들어갔소.’ 했다. 초구흔이 대로하여 웃통을 벗고 칼을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 물귀신과 결전을 했다. 물귀신이 파도를 일으켰으나 끝내 초구흔을 해치지 못했다. 사흘 밤낮이 지나서 초구흔이 물속에서 나왔는데, 한쪽 눈을 귀신에게 다쳐 애꾸눈이 되었다.
초구흔이 오나라에 도착하여 조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 물귀신과 싸움을 벌인 용기를 과시하며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사대들에게 오만한 태도로 불손한 말을 했다. 그때 요리가 초구흔과 마주 앉아 있다가 갑자기 불평한 기색을 띠더니 초구흔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사대부들에게 오만하게 굴면서 어찌 용사라고 자처할 수 있는가? 나는 용사란 싸움을 할 때는 하루 종일 싸우고도 얼굴에 아무런 기색을 띠지 않아야 하고, 귀신과 싸울 때는 발길을 돌리지 말아야 하며, 사람과 싸울 때는 흰 소리를 하면 안 되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치욕을 당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지금 그대가 귀신과 물속에서 싸우다가 말을 잃고도 추격하지 못했고, 또한 한쪽 눈을 잃은 치욕을 입어 몸은 상하고 이름을 욕되게 하고도 목숨을 내던지지 못하여 오히려 남은 삶에 연연하였으니, 이것은 천지간에 가장 쓸데없는 물건이다. 그러면 사람을 마땅히 보지도 못할 것이거늘 하물며 선비들을 오만하게 대하겠는가?’ 했다. 초구흔이 요리에게 욕을 먹었으나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원한을 품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요리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그의 아내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오늘 상갓집에서 초구흔이라는 용사를 욕보였는데, 그가 원한을 품고 나갔으니 오늘 밤에 틀림없이 와서 나를 죽여 그 수치를 보복할 것이오. 나는 마땅히 방안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두려워서 문을 잠그지 마시오.’ 했다. 요리의 용기를 잘 알고 있는 그의 아내는 그의 말을 따랐다.
초구흔이 과연 밤중에 예리한 칼을 들고 요리의 집으로 달려와서 보니, 대문과 방문이 열려 있어서 거침없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한 사람이 침상에서 손을 늘어뜨리고 머리를 풀고서 창문 곁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초구흔이 살펴보니 바로 요리였다. 초구흔이 온 것을 보고도 꼿꼿하게 움직이지 않고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초구흔이 칼로 요리의 목을 겨누며 따지기를, ‘너는 죽어야 할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을 아느냐?’ 하니, 요리가 말하기를, ‘모른다.’ 했다. 초구흔이 말하기를, ‘너는 사대부의 초상집에서 나를 욕보였다. 그것이 네가 죽어야 할 첫 번째 이유다. 너는 집에 돌아와서 집의 대문을 닫지 않았으니 두 번째 이유다. 나를 보고도 일어나서 피하지 않았으니 세 번째 이유다. 너는 스스로 죽기를 원했으니 나를 원망하지 말아라!’ 하니, 요리가 말하기를, ‘나는 죽어야 할 세 가지 잘못이 없지만, 너는 부끄러워야 할 세 가지 못난 점이 있다. 너는 아느냐?’ 했다. 초구흔이 말하기를, ‘모른다.’ 하니, 요리가 말하기를, ‘내가 너를 수많은 사람 앞에서 욕을 보였건만 너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이것이 첫 번째 못난 점이다. 남의 집에 들어올 때 기침도 하지 않고 대청에 오르면서 소리도 내지 않고 엄습하려는 마음을 가졌으니 두 번째 못난 점이다. 칼로 나의 목을 겨누면서 오히려 큰소리를 치니 이것이 세 번째 못난 점이다. 네가 세 가지 못난 점을 가지고 도리어 나를 꾸짖으니 비열한 놈이 아니냐?’ 했다.
초구흔이 즉시 칼을 거두며 한탄하기를, ‘나는 세상에서 내 용기에 미칠 자가 없다고 자부했는데, 요리의 용기가 나보다 위에 있으니 진실로 천하의 용사다. 내가 만약 너를 죽인다면 어찌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겠는가? 그리고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또한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불리지 못할 것이다.’ 하고, 칼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 스스로 머리를 창문에 부딪쳐 죽었습니다. 초상집에서 요리가 초구흔을 욕보일 때 신도 또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자세히 압니다. 어찌 요리가 만인의 용기를 가졌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했다. 합려가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위해 그를 불러 주시오.” 하니, 오원이 즉시 요리를 찾아가 말하기를, “오왕께서 그대의 높은 의기를 전해 듣고, 한번 접견하기를 원하오.” 했다. 요리가 놀라서 말하기를, “나는 오나라의 미천한 백성인데, 무슨 덕과 능력이 있다고 감히 오왕의 부름을 받들겠습니까?” 하니, 오원이 다시 오왕이 보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하자, 요리가 오원을 따라서 들어와 알현했다. 합려는 처음에 요리의 용기를 칭찬한 오원의 말을 듣고, 요리는 필시 체구가 아주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요리를 보니 키가 겨우 다섯 자 남짓하고 허리의 둘레는 한 묶음인데 생김새는 매우 추하고 더러워서 크게 실망하여 마음속으로 기쁘지 않았다. 합려가 묻기를, “오자서가 요리를 용사라고 칭했는데, 바로 그대인가?” 했다.
요리가 말하기를, “신은 몸이 가냘프고 작으며 힘이 약하여 바람이 앞에서 불면 자빠지고 뒤에서 불면 엎어지는데 무슨 용기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왕께서 신을 보내신다면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합려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원이 이미 그 뜻을 알고, 아뢰기를, “무릇 좋은 말이란 그 체격이 우람한 데 있지 않고, 귀하게 여기는 바는 힘이 능히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까지 갈 수 있으면 됩니다. 요리의 생김새가 비록 보잘것없지만, 그 지혜와 수단은 비상해서 이 사람이 아니면 일을 이룰 수가 없으니 대왕께서는 그를 잃지 마십시오.” 하니, 합려가 이에 요리를 뒷 궁궐로 맞아들여 자리에 앉게 했다. 요리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대왕께서 근심하는 것은 죽은 전왕의 아들 때문이 아닙니까? 신이 능히 그를 죽일 수 있습니다.” 했다. 합려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기는 몸이 나는 듯이 민첩하고 달리는 말보다 빠르며 용감하고 날쌔기가 마치 귀신과 같아서 만 명의 사내도 당할 수 없는데 그대가 경기를 상대할 수 없을까 걱정이네!” 하니, 요리가 말하기를, “사람을 잘 죽이는 것은 지혜에 있지, 힘에 있지 않습니다. 신이 능히 경기의 곁에 접근하여 찔러 죽이는 것은, 닭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했다.
합려가 말하기를, “경기는 현명하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며 사방의 망명객들을 모아들였는데, 어찌 그가 오나라에서 온 사람을 쉽게 믿어서 그대를 곁에 두겠는가?” 하니, 요리가 말하기를, “경기가 망명객들을 모아들이는 것은 장차 오나라를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이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쳤다고 하며, 대왕께서 신의 처자를 죽이고 신의 오른팔을 자르시면 경기는 틀림없이 신을 믿고 가까이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 후에 가히 도모할 수 있습니다.” 했다. 합려가 근심스레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죄가 없는데 내가 어찌 차마 그런 처참한 짓을 그대에게 하겠는가?” 하니, 요리가 말하기를, “신은 듣기를, ‘처자의 즐거움을 편안히 여겨서 군주를 모시는 의리를 다하지 않는다면 이는 충성이 아닙니다. 집안의 일을 생각하여 군주의 근심을 없앨 수 없다면 이는 의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이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으니, 비록 온 집안사람이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엿처럼 단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했다. 오원이 곁에 있다가 나서며 말하기를, “요리가 나라를 위해 집안을 버리고, 주군을 위해 몸을 버리려고 하니, 참으로 천고의 호걸입니다. 다만 요리가 일을 이룬 후에 그의 처와 가속들을 위해 정문을 세우고 그의 공적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록하여 이름을 후세에 드높일 수 있게 해준다면 족할 것입니다.” 하니, 합려가 허락했다.
다음날, 오원이 요리와 같이 입조하여 요리를 장군으로 추천하고 군사를 청하여 초나라를 치자고 했다. 합려가 꾸짖기를, “과인이 요리의 힘을 보니 한낫 어린아이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초나라를 정벌할 임무를 맡길 수 있겠소? 하물며 과인이 가까스로 나라를 안정시켰는데 어찌 군사를 일으킬 수 있겠소?” 하니, 요리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대왕은 어질지 못하십니다! 자서(오원)는 왕을 위하여 오나라를 안정시켰건만 대왕은 자서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줄 생각이 없으십니까?” 했다. 합려가 대로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국가의 대사인데 어찌 시골 사람이 알겠는가? 어찌하여 조당에 나와서 과인을 질책하여 욕보이는가?” 하고 무사들에게 소리쳐 요리를 잡아 그의 오른 팔을 자르게 한 후에 감옥에 가두었다. 다시 사람을 보내 그의 처자를 잡아오게 하였다. 오원이 탄식하며 조당에서 물러 나왔다. 여러 신하는 아무도 그 연유를 몰랐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오원이 비밀리에 옥리에게 요리를 너무 엄격하게 감금하지 말라는 명했다. 요리는 그 틈을 타서 도망쳐 나왔다. 합려가 즉시 그 아내와 자식을 죽여서 그 시체를 거리에서 불태웠다.
송나라 때 유생이 이 일에 대해 논하기를, 무고한 왕료 한 사람을 죽여 왕위를 차지한 것도, 어진 사람이라면 차마 하지 못할 짓인데, 오늘 다시 죄 없는 요리의 처자까지 죽여서, 그의 간교한 계책을 실현코자 했으니, 합려의 잔인함은 그지없구나! 그리고 요리는 평생에 합려에게서 아무런 은혜를 입은 적이 없는데, 용감한 협객이라는 이름을 탐하여, 자기의 몸을 해치고 집안을 망하게 했으니, 그 역시 어찌 좋은 선비가 되겠는가? 라고 했다. 시를 지어 이르기를, “오로지 일을 성사시켜 임금에 충성하고자, 무고한 처자를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이런 일을 용맹하고 충성스럽다고 다른 나라에 자랑하지 말라! 잔인하고 도리에 어긋난 오나라 사람이다!” 했다. 요리가 오나라에서 달아나면서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경기가 위(衛)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물어 알게 되었다. 마침내 위나라에 가서 만나주기를 청했으나 경기가 속임수를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요리가 즉시 옷을 벗고 자기의 몸을 보여주었다. 경기는 요리의 오른팔이 잘린 것을 보고 비로소 사실로 믿었다. 경기가 묻기를, “오왕이 이미 너의 처자를 죽였고 네 몸에 절단형을 가했는데, 지금 나를 무엇 때문에 찾아왔는가?” 했다.
요리가 말하기를, “신은 오왕이 공자의 부친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아 간 일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공자께서는 제후들과 연결하여 장차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남은 목숨이나마 의탁하러 왔습니다. 신은 오나라의 사정에 밝으니 참으로 공자님의 용기로 신을 향도로 삼는다면 능히 오나라에 들어가 크게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왕이 되고, 적게는 신 역시 아내와 자식들의 원한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했다. 경기가 그래도 아직 깊이 믿지는 않았다. 오래지 않아, 오나라의 사정을 정탐하러 갔던 심복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요리의 처자가 과연 오왕에게 살해되어 그 시체가 거리에서 불태워졌다고 했다. 경기가 마침내 안심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요리에게 묻기를, “나는 오왕이 오자서와 백비를 책임자로 임명하여 군사들을 훈련하고 장수들을 선발하여 오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군사들은 미약하니 어찌 능히 가슴속의 원한을 풀 수 있겠는가?” 하니, 요리가 말하기를, “백비는 모무한 자인데 어찌 족히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오나라의 신하는 오직 자서(오원) 한 사람뿐입니다. 그는 지혜와 용기를 겸비했지만, 지금은 또한 오왕과 틈이 생겼습니다.” 했다.
경기가 말하기를, “자서(오원)는 곧 오왕의 은인이고, 그들은 임금과 신하로서 서로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틈이 있다고 말하는가?” 하니, 요리가 말하기를, “공자께서는 다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십니다. 오자서가 온 힘을 다해 합려를 도운 까닭은 군사를 빌려서 초나라를 정벌하여 그의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입니다. 지금 초나라 평왕은 이미 죽었고, 비무극도 역시 죽었는데, 합려는 왕위를 차지하여 부귀에 편안해하고 있습니다. 오자서를 위해 원수를 갚아 줄 생각이 없는 오왕은, 신이 오자서를 위해 진언을 하자 분노를 일으켜 신에게 참혹한 형벌을 가했습니다. 오자서가 마음속으로 오왕을 원망할 게 분명합니다. 신이 다행히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오자서가 빈틈없이 힘을 써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오자서가 나에게 부탁하기를, ‘이번에 가면 반드시 공자를 만나서 그가 어떤 뜻을 지녔는지 살펴보고, 만약 공자가 기꺼이 오씨 가문을 위해 원수를 갚아주겠다면 원컨대 공자를 위해 내응하여 지하실에서 동모하여 선왕을 죽인 죄를 속죄할까 하오!’ 했습니다. 공자께서 이번 기회를 틈타 군사를 동원하여 오나라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사이에 합려와 오자서가 다시 합치게 되어, 신과 공자님의 원수는 모두 다시 갚을 날이 없을 것입니다.” 했다.
요리가 말을 마치자 큰 소리로 울면서 머리를 기둥에다 부딪쳐 죽으려고 했다. 경기가 급히 그를 제지하며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말을 따르리라! 내가 그대의 말을 따르겠다!” 하고, 마침내 요리와 함께 애성(艾城)으로 돌아가서 요리를 심복으로 삼아, 그를 시켜 사졸들을 훈련하게 하고 전선을 만들게 했다. 그런지 석 달 후에 강물을 따라 내려와서 오나라를 습격하려고 했다. 경기와 요리가 같은 배에 타고 진군하여 중류에 이르렀을 때 뒤따라오던 배들이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요리가 말하기를, “공자께서 뱃머리에 친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뱃사람들을 경계하여 타이르십시오.” 하니, 경기가 뱃머리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고, 요리는 한 손으로 짧은 창을 잡고 경기를 모시고 섰다. 갑자기 강 가운데서 일진광풍이 불자 요리가 몸을 돌려 바람을 향하여 선 다음 바람의 힘을 이용하여 창으로 경기를 찌르자 창이 경기의 심장을 꿰뚫고 등 뒤로 튀어나왔다. 경기가 요리를 거꾸로 잡고 그 머리를 물속에 빠뜨리기를 세 번 하고, 이에 요리를 무릎 위에 앉히고 돌아보며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이 같은 용사가 있는가? 어찌 감히 나를 창으로 찌를 수 있는가?” 했다.
경기의 좌우에서 창과 극을 잡고 요리를 찌르려고 하자 경기가 흔들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천하의 용사다. 어찌 하루 동안에 천하의 용사를 둘이나 죽일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좌우에게 경계하기를, “요리를 죽이지 말고 그를 놓아주어 오나라에 돌아가게 해서 그의 충성을 기릴 수 있도록 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요리를 그의 무릎에서 밀어내고 스스로 가슴에 꽂혀 있던 창을 뽑아내니, 피가 콸콸 쏟아져 죽었다.
요리의 목숨이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제75회: 손무자가 진법을 훈련하여 미희를 참하고, 채소후가 인질을 바쳐 오나라에 군사를 청하다.
한편, 경기가 죽을 때 좌우 군사에게 경계하기를, 요리를 죽이지 말고 그 이름을 이루게 하라고 했다. 경기의 좌우 군사가 요리를 석방하려고 하였으나, 요리가 가려고 하지 않고 좌우 군사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상에 용납될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 비록 공자가 명령했지만 내가 감히 구차스럽게 살기를 바라겠는가?” 했다. 군사들이 묻기를, “세상에 용납될 수 없는 세 가지란 무엇인가?” 하니, 요리가 말하기를, “내가 아내와 자식을 죽여 군주의 뜻을 받들고자 했으니, 어질지 못한 짓이다. 새 임금을 위하여 옛 임금의 아들을 죽였으니 의롭지 못한 일이다. 남의 일을 성취하려고 자기 몸을 해치고 집안을 멸했으니, 이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이 세 가지 악행이 있으니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서 살겠는가?” 하고, 말을 마치자 마침내 몸을 강물에 던졌다. 뱃사람들이 물 밖으로 건져내자 요리가 말하기를, “나를 건져 올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뱃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대가 오나라에 돌아가면 반드시 관직과 녹봉을 받게 될 텐데 왜 기다리지 않는가?” 했다. 요리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집안 식구들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는데 하물며 관직과 녹봉이겠는가? 그대들이 나의 주검을 들고 오나라에 가서 중상을 받으시오.” 했다. 이에 요리가 옆에 있던 무사의 칼을 빼앗아 스스로 제 다리를 자르고 목을 찔러서 죽었다.
사관이 찬양하여 이르기를, “옛사람들은 한번 죽는 것을, 새털같이 가볍게 생각했다. 단지 자기의 목숨뿐만 아니라, 처자의 목숨까지도 가볍게 생각했다. 합려의 왕위를 위해서, 한 사람이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한 사람을 죽여서, 제 뜻을 펼쳤다. 전제가 비록 죽었으나, 그 후손은 전해지는데, 슬프게도 요리는, 죽어서 남긴 것이 없구나! 어찌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으리오? 다른 사람의 공을 세우게 하고, 공을 이루어 이름도 세웠으니, 비록 죽었으나 영화롭게 되었도다! 칼로 치고 의협심으로 죽는 것이, 풍속이 되었으니, 오늘도 오나라 사람들은, 정의를 추구하여 목을 늘여 바란다.”라고 했다. 또 시를 지어, “경기는 힘이 만인을 대적할만했지만, 외팔이 필부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니, 세상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믿는 것을 경계했다. 시에 이르기를, “경기는 천하의 보기 드문 용맹한 영웅이었는데, 외팔이 필부에게 눈 깜짝할 사이에 죽임을 당했다. 세상 사람들아, 힘세다고 자랑하지 말아라. 힘센 황소들도 다치면 들쥐의 밥이 된다.”라고 했다. 군사들이 요리의 지체를 거두어 경기의 시체와 함께 수레에 싣고 오왕 합려에게 투항했다. 합려가 크게 기뻐하여 항복한 군사들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오나라의 군사에 편입시켰다. 오왕 합려가 요리를 상경의 예로써 도성의 창문(閶門) 성 아래에 장사지내며 말하기를, “그대의 용기를 빌려 우리의 성문을 지켜 주시오.” 했다. 요리의 아내와 자식에게도 벼슬을 추증했다.
전제와 요리의 사당을 함께 짓고 때마다 제사를 지내게 했다. 경기를 공자의 예로 왕료의 무덤 옆에 장사지냈다. 여러 신하에게 크게 잔치를 베푸니, 오원이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대왕의 근심거리는 모두 없어졌지만, 다만 신의 원수는 어느 날에 갚을 수 있겠습니까?” 했다. 백비도 역시 눈물을 흘리며 군사를 동원하여 초나라를 칠 것을 청했다. 합려가 말하기를, “내일 아침에 의논하기로 합시다.” 했다. 다음 날 아침 오원이 백비와 함께 궁중에서 합려를 다시 뵈니, 합려가 말하기를, “과인이 두 경을 위해 출병하고자 하는데 누구를 장수로 삼아야 하겠습니까?” 했다. 오원과 백비가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오직 대왕께서 쓰시겠다고 하는데 누가 감히 목숨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했다. 합려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두 사람이 모두 초나라 사람이니 다만 자기들의 원수를 갚으면 틀림없이 오나라를 위해서 힘을 다하지 않을 것이다.” 했다. 그래서 합려는 아무 말도 없이 남풍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고 한참 후 다시 길게 탄식했다. 오원이 이미 그 뜻을 짐작하고 다시 나아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초나라 병사와 장수가 많아서 걱정이십니까?” 하니, 합려가 말하기를, “그렇소!”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신이 한 사람을 천거하겠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가히 필승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했다.
합려가 기뻐하며 묻기를, “경이 추천하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그의 능력은 어떠하오?” 하니, 오원이 대답하기를, “성은 손(孫)이며 이름은 무(武)이고 오나라 사람입니다.” 했다. 합려는 그가 오나라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문득 얼굴에 기쁜 빛을 띠었다. 오원이 다시 아뢰기를, “이 사람은 육도삼략(六韜三略)에 정통하고 귀신도 짐작하지 못할 기지를 갖고 있으며 하늘과 땅의 절묘한 이치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병법 13편을 지었으나 세상 사람들이 그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아서, 나부산(羅浮山) 동쪽에 은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사람을 얻어 군사(軍師)로 삼는다면 천하에 맞설 나라가 없을 것인데, 어찌 초나라를 논하겠습니까?” 했다. 합려가 말하기를, “경이 과인을 위해 시험 삼아 불러 보시오.” 하니, 오원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은 가볍게 벼슬에 나올 사람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에 비할 수 없으니 반드시 예를 갖추어 초빙해야 비로소 겨우 나올 것입니다.” 했다. 합려가 그 말에 따라 즉시 황금 십 일(鎰은 스무 냥)과 흰 벽옥(璧玉) 한 쌍을 내주며 오원으로 하여금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몰고 나부산에 가서, 손무를 초빙해 오도록 했다. 오원이 손무를 찾아가 오왕이 사모하는 뜻을 갖추어 말하자, 손무는 오원을 따라 나부산을 나와서 합려를 접견했다. 합려가 계단을 내려가서 맞이하고 자리를 권하고 병법을 물었다.
손무가 자신이 지은 <병법> 13편을 차례로 합려에게 바쳤다. 합려가 오원에게 명하여 처음부터 쭉 낭송하게 했다. 매번 한 편이 끝날 때마다 합려는 찬탄해 마지않았다. 그 <병법> 13편은, 제1편 시계편(始計篇), 제2편 작전편(作戰篇), 제3편 모공편(謀攻篇), 제4편 군형편(軍形篇), 제5편 병세편(兵勢篇), 제6편 허실편(虛實篇), 제7편 군쟁편(軍爭篇), 제8편 구변편(九變篇), 제9편 행군편(行軍篇), 제10편 지형편(地形篇), 제11편 취지편(就地篇), 제12편 화공편(火攻篇), 제13편 용간편(用間篇)이었다. 합려가 오원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병법>을 보니 손무 선생은 진실로 하늘과 땅의 이치를 통달한 재사요. 다만 과인의 나라가 작고 군사가 미약한 것이 한스러우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손무가 대답하기를, “신의 <병법>은 대오를 갖춘 군사에게 시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비록 부녀자일지라도 제가 군령으로 다스린다면 또한 대열을 지어 군사로 쓸 수 있습니다.” 했다.
합려가 손뼉을 치며 웃고 말하기를, “선생의 말씀은 너무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천하에 어찌 부녀자에게 무기를 주어 훈련을 시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니, 손무가 말하기를, “대왕께서 신의 말이 현실에 맞지 않다고 하시니, 청컨대 후궁과 시녀들을 내어 주신다면 제가 시험해 보이겠습니다. 만약에 군령을 내려도 시행이 안 되면 신이 대왕을 기만한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했다. 합려가 즉시 그의 궁녀 300명을 불러, 손무에게 훈련을 시키라고 했다. 손무가 말하기를, “대왕의 사랑하는 궁녀 두 사람을 대장으로 삼아 군령을 내리게 하여 통솔하고자 합니다.” 하니, 합려가 또 사랑하는 두 궁녀인 우희(右姬)와 좌희(左姬)를 앞으로 나오게 하고, 손무에게 말하기를, “이들은 과인이 사랑하는 여인들인데 대장으로 삼을 만합니까?” 하니, 손무가 말하기를, “가능합니다. 군사의 일이란 먼저 명령이 엄하게 서야 하며, 그다음에는 상벌에 달려 있습니다. 비록 작은 훈련이지만 이 두 가지를 폐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한 사람의 집법관(執法官)과 두 사람의 군리(軍吏)를 세워 장수의 명령을 군사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기겠습니다. 또 두 사람은 북을 치고, 장사 몇 사람을 아장(牙將)으로 삼아 도끼와 칼과 극(戟)을 들고 단상에 벌여 세워서 군진의 위용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했다.
합려는 중군에서 (집법관, 군리, 고수, 아장 등을) 골라 쓰도록 허락했다. 손무가 궁녀들에게 분부하여 좌우 두 대열로 나누고, 우희는 오른쪽 대열을 관할하고 좌희는 왼쪽 대열을 관할하게 했으며, 각기 군장을 갖추고 무기를 들게 한 다음 군법을 밝히기를, 첫째, 행과 오가 어지러우면 안 된다. 둘째, 시끄럽게 떠들면 안 된다. 셋째, 일부러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 라고 했다. 다음 날 새벽 오경(4시쯤)에 손무는 궁녀들을 모두 교련장에 모아 훈련하기로 하고, 합려는 망운대(望雲臺)에 올라가 손무가 여인들을 훈련시키는 것을 구경하기로 했다. 다음날 오경이 되자 궁녀들이 두 대열로 나뉘어 훈련장에 모두 모였다. 궁녀들은 모두 몸에는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썼으며, 오른손에는 칼을 잡고, 왼손에는 방패를 들었다. 두 궁녀도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대장이 되어, 양쪽에 나누어 서서 손무가 지휘대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손무가 친히 먹줄로 구획하여 진세를 펼쳤다. 전령관을 시켜 노란색 깃발 두 개를 두 대장 궁녀에게 나누어주고 그 깃발을 손에 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했다. 여러 궁녀가 뒤에 따라 섰다. 다섯 사람을 오(伍)라 하고 열 사람을 총(總)으로 하여, 각기 그 뒤를 따라 행군하다가 북소리에 따라 진퇴하고, 좌우로 선회하며 한 발자국도 흐트러지면 안 된다고 했다.
명령 전달이 끝나자 두 대열이 모두 땅에 엎드려 군령을 받들도록 했다. 잠시 후에 손무가 군령을 내리기를, “북소리가 한 번 울리면 두 대열은 일제히 일어난다. 다시 북소리가 두 번 울리면 왼쪽 대열은 오른쪽으로 돌고, 오른쪽 대열은 왼쪽으로 돈다. 북소리가 세 번 울리면 각각 칼을 들고 전투태세를 갖춘다. 징소리가 울린 뒤에는 본래 대열로 돌아가 물러난다.” 하니, 궁녀들은 모두가 입을 가리고 시시덕거렸다. 북을 치는 군사가 손무에게 보고하기를, “북을 한번 울렸습니다.” 했다. 궁녀들은 혹 일어나고 혹 앉으며 들쭉날쭉 고르지 않았다. 손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기를, “약속이 분명하지 않거나 명령이 믿을 만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잘못이다.” 하고 다시 전령관을 시켜 앞의 명령을 전달했다. 북을 치는 군사가 다시 북을 치니 궁녀들이 모두 일어나서 비스듬히 서로 기대어 웃음소리가 여전했다. 손무가 즉시 두 팔을 걷어붙이고 친히 북채를 잡고 북을 치면서 다시 앞의 명령을 알렸다. 그러나 두 대장과 궁녀들은 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손무가 대로하여 갑자기 두 눈을 치켜뜨며 머리칼이 관을 찔러 급히 소리치기를, “집법관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집법관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손무가 말하기를, “약속이 분명하지 않거나 명령이 믿을 만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잘못이다. 그러나 이미 약속을 세 번이나 했음에도 군사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음은 이것은 군사들의 잘못이다. 군법에는 마땅히 어떠한가?” 하니, 집법관이 말하기를, “마땅히 참수해야 합니다.” 했다. 손무가 말하기를, “군사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으니, 잘못은 대장에게 있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여대장을 끌고 와서 참수하여 군사졸에게 보여라!” 했다. 좌우의 무사들이 손무의 화낸 모습을 보고 감히 명령을 어길 수 없어 곧 좌우 두 여대장을 결박했다. 합려가 망운대에서 손무가 훈련하는 것을 보다가 갑자기 두 총애하는 궁녀를 결박하는 것을 보고, 급히 백비를 시켜 왕의 신표를 갖고 그들을 구하게 했다. 그 명령에 이르기를, “과인이 이미 장군의 용병하는 능력을 알았소. 다만 이 두 총애하는 궁녀는 과인의 침식과 의관을 수발하여 과인의 뜻을 잘 맞추고, 과인도 두 궁녀가 없으면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으니 청컨대 장군은 그들을 용서하시오!” 하니, 손무가 말하기를, “군대에는 농담이 없습니다. 신은 이미 명을 받들어 장군이 되었고, 장군은 군중에 있을 때 비록 군주의 명이라 할지라도 받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군주의 명을 따라 죄 있는 자를 풀어 준다면 어떻게 여러 군사를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했다.
손무가 좌우의 무사들에게 소리쳐서, “빨리 두 궁녀를 참수하라!” 하니, 무사들이 그들을 참수하여 수급을 군막 앞에 매달았다. 이에 두 대열의 궁녀들이 모두 다리를 떨며 얼굴색이 변하여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손무가 다시 대오 중에서 두 궁녀를 취하여 좌우 대열의 대장으로 삼고, 명령을 밝히고 북을 울리니, 북소리 한 번에 모두 일어서고, 두 번에 돌아서고, 세 번에 전투태세를 갖추고, 징소리를 울려 대열을 본래 자리로 수습했다. 앞으로 나가고 뒤로 물러나며 좌우로 돌며 행군을 하는데 모두가 손무가 그어 놓은 먹줄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어 추호도 어긋남이 없게 되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윽고 손무가 집법관을 오왕 합려에게 보내 보고하기를, “병사들이 이미 정돈되었으니 왕께서 보시고 쓰기 바랍니다. 비록 끓는 물이나 불을 밟게 하더라도 감히 후퇴하거나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손무가 궁녀들을 조련한 일을 읊기를, “강한 군대가 패업을 다투는데, 병법을 시험하여 군사의 위용을 빛냈다. 나온 군사들은 모두 아름다운 궁녀들이었으나, 싸우는 용사들과 다름이 없었다. 비단 소매를 걷어붙이고 과를 휘두르니, 분 바른 어여쁜 얼굴 갑옷에 비치는구나! 웃음을 참으며 군기 아래 나누어 서고, 부끄러움을 머금고 대열을 이루며, 북소리가 들리면 엄숙히 움직였으나, 명령을 위반하면 군법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미 요염한 두 궁녀의 목을 베니, 비로소 장수의 위세를 알게 되었다. 끓는 물이나 불 속에도 뛰어들 수 있으니, 백 번 싸우더라도 성공을 보장하리라.” 했다.
합려는 두 궁녀를 애통하게 여겨 곧 횡산(橫山)에 장사를 지내고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며, 사당의 이름을 애희사(愛姬祠)라고 불렀다. 합려는 사랑하던 궁녀들을 생각하여 마침내 손무를 쓰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오원이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군대는 흉기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헛말이 아닙니다. 죽이는 것이 과감하지 않으면 군령이 행해지지 않습니다. 대왕께서 초나라를 정벌하여 천하를 제패하려면 훌륭한 장수를 얻어야 하는데 무릇 장수란 과감하고 엄해야 합니다. 손무가 아니라면 누가 능히 회수(淮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천 리 먼 곳에 가서 싸우겠습니까? 미색은 얻기 쉬워도 훌륭한 장수는 구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만약 두 궁녀로 인하여 한 사람의 훌륭한 장수를 버리신다면, 이것은 가라지 풀을 아껴서 벼를 뽑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했다. 합려가 비로소 깨달아, 즉시 손무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군사(軍師)라 부르게 하고, 초나라를 정벌하는 임무를 맡겼다. 오원이 손무에게 묻기를, “군사들을 어느 방면으로 진군시킬 계획이십니까?” 하니, 손무가 말하기를, “대저 군사를 움직이는 법은 먼저 나라 안의 화근부터 없앤 후에 바야흐로 나라 밖으로 원정을 나갈 수 있습니다. 내가 들으니 왕료의 동생인 엄여는 서(徐)나라에 있고, 촉용은 종오(鍾吾)에 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원수를 갚으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오늘 군사를 진격시켜 먼저 두 공자를 제거하고 난 뒤에 남쪽 초나라를 정벌해야 합니다.” 했다.
오원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오왕 합려에게 아뢰었다. 오왕 합려가 말하기를, “서나라와 종오는 모두 작은 나라이니, 사자를 보내 두 사람을 잡아서 보내라고 한다면 그들이 감히 거절하지 못할 것이오.” 하고, 즉시 두 사신을 보내 한 사람은 서나라에서 엄여를 취하고, 한 사람은 종오에서 촉용을 붙잡아 오게 하였다. 서(徐)나라 군주 장우(章羽)가 차마 엄여를 죽이지 못하고 몰래 사람을 보내 알려주니, 엄여가 도망쳤다. 엄여가 길에서 촉용을 만나 함께 도망쳤다. 마침내 상의하여 초나라로 달아났다. 초나라 소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두 공자가 오나라에 깊은 원한을 갖고 있으니, 마땅히 그 궁함을 이용하여 후하게 맺어두어야겠다.” 하고, 이에 서성(舒城)에서 살게 하고, 군사들을 조련하여 오나라의 침입을 막게 했다. 합려가 서나라와 종오가 자기의 명령을 어긴 것에 노하여, 손무를 시켜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서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게 했다. 서나라 군주 장우가 초나라로 달아났다. 손무는 마침내 종오를 정벌하여 그 군주를 사로잡아서 오나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손무는 다시 서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엄여와 촉용을 죽였다. 합려가 문득 승세를 타고 초나라 영성으로 진격하려고 하자, 손무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피곤하여 갑자기 더 싸우게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마침내 회군했다.
이에 오원이 계책을 올려 말하기를, “무릇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이기거나 약한 군사로 강한 군사를 이기려면 반드시 먼저 적은 피로하고 아군은 편안한 방법을 써야 합니다. 진도공(晉悼公)이 4군을 세 부대로 나누어 교대로 출병하여 초나라의 군사들을 피로하게 하여 마침내 소어(蕭魚)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오직 스스로는 편하면서 상대방은 피로하게 한 때문이었습니다. 초나라에서 정권을 잡은 자들은 모두 탐욕스럽고 용렬한 자들이니 기꺼이 나라의 난국을 타개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청컨대 우리의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초나라를 괴롭혀야 합니다. 우리가 한 부대를 출병시키면 저들은 틀림없이 모든 군사를 출병시킬 것입니다. 그들이 출병하면 우리는 돌아오고, 저들이 돌아가면 우리가 다시 나갑니다. 저들의 힘이 쇠진하여 마침내 게으르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갑자기 그것을 틈타 공격하면 이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합려가 옳다고 여겨, 즉시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번갈아 출동시켜 초나라 변경을 어지럽혔다. 초나라가 장수를 보내 구원하자 오나라 군사는 즉시 돌아왔고, 초나라 군사들은 고통스러워졌다. 오왕 합려에게는 승옥(勝玉)이라는 사랑하는 딸이 있었다. 궁궐 안 잔치에서 요리사가 찐 생선을 바치자 오왕 합려가 그 절반을 먹고 나머지를 딸에게 주었다. 딸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왕이 먹다 남은 생선으로 나를 욕보이는데 내가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하고, 물러나 자살했다.
합려가 슬퍼하며 시신을 거두어 도성의 서쪽 창문(閶門) 밖에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못을 파고 흙을 쌓았다. 못을 판 자리가 마침내 큰 호수가 되었는데 오늘날 여분호(女墳湖)가 그것이다. 또 무늬 있는 돌을 쪼아 곽(겉 널)을 만들고, 금 솥, 옥배, 은 술 단지, 구슬 저고리 등, 오나라 부고에 있던 재화의 거의 절반과 또한 명검 반영(磐郢)을 모두 같이 묻어서 딸을 보냈다. 다시 오나라 거리에서 백학(白鶴)을 춤추게 하고, 백성 만 명이 그것을 따르면서 보게 했다. 그리고 구경한 백성들을 모두 굴속으로 들어가서 장례를 전송하게 했다. 지하도 안에 장치를 설치하여, 남녀 백성들이 그 속에 들어가자 즉시 그 장치가 발동하여 문이 닫히고 흙으로 그 굴을 막으니, 남녀 백성들 만 명이 죽었다. 합려가 말하기를, “내 딸을 위해 만 명의 백성들을 같이 묻어 주었으니 저승에 가서라도 쓸쓸하지는 않을 것이다.” 했다. 지금도 오나라에는 장사 지낼 때 초상집의 정자 위에 백학을 만들어 두는 것이 풍속이다. 사람을 죽여 딸의 죽음을 전송했으니 합려의 무도함이 극악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삼량을 순장했을 때 모두 진목공을 비난했는데, 거리에서 학춤으로 만 명을 유인하여 죽였으니 웬 말인가? 부차가 들판에 뼈를 버리기도 전에, 합려가 그날 이미 백성들을 잃어버렸다.” 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초소왕이 궁중에서 누워 자다가 잠이 깨어, 침상 곁에서 싸늘한 빛이 나는 것을 보고, 자세히 살펴보니 한 자루의 보검이었다. 아침이 되어 검에 조예가 깊은 풍호자(風胡子)를 불러 그 보검을 보여 주었다. 풍호자가 그 검을 살펴보더니 크게 놀라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이 칼을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하니, 초소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잠을 자다가 깨어 보니 침상 곁에 놓여 있었다. 이 검의 이름을 알 수 있겠는가?” 했다. 풍호자가 말하기를, “이 칼의 이름은 담로(湛盧)라 합니다. 오나라 장인 구야자(歐冶子)가 주조한 것입니다. 옛날 월나라 왕이 구야자를 불러 명검 다섯을 만들었습니다. 오왕 수몽이 소문을 듣고 구하자, 월왕 윤상이 세 자루를 바쳤는데, 이름이 각각 ‘어장(魚腸)’ ‘반영(磐郢)’ ‘담로(湛盧)’라 했습니다. 어장은 왕료를 찌를 때 사용하였고, 반영은 합려가 죽은 딸을 보낼 때 묻었습니다. 오직 담로만이 남아 있습니다. 신이 듣기에 이 검은 곧 다섯 가지 금속의 뛰어난 기운과 태양의 정령이 깃들어서 칼집에서 뽑으면 신령하고 허리에 차면 위엄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칼의 주인이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하면 검은 저절로 주인을 떠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검이 있는 나라는 그 사직이 복을 받아 오랫동안 번창했다고 했습니다. 요즈음에 오왕 합려가 왕료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또한 만 명의 백성을 생매장하여 그의 딸을 장사지내니 오나라 백성들은 슬퍼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보검 담로가 무도한 주인을 떠나 유덕한 주인을 찾아온 것입니다.” 했다.
초소왕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담로검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귀중한 보물로 생각하여 백성들에게 자랑하고 하늘의 상서로움이라고 여겼다. 한편, 합려는 담로검을 잃고 사람을 시켜 찾도록 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보고하기를, “그 칼은 초나라로 갔다고 합니다.” 했다. 합려가 노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초소왕이 나의 측근에게 뇌물을 주어, 내 칼을 도둑질해간 것이다.” 하고, 좌우의 시종 수십 명을 죽였다. 마침내 합려는 손무, 오원, 백비(伯嚭) 등을 시켜 군사를 인솔하여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또 사자를 월나라에 보내 군사를 모으게 했다. 월왕 윤상(允常)은 초나라와 수호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를 동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손무 등은 초나라 육(六)과 잠(潛) 두 고을을 점령하였으나, 증원군이 뒤따르지 않자 곧 군사를 물렸다. 합려는 초나라를 정벌하는 데 월나라가 함께하지 않자 노하여 다시 월나라를 정벌하려고 모의하였다. 손무가 간하기를, “금년에는 세성(歲星 ; 목성)이 월나라 쪽에 있어 공격하면 불리합니다.” 했다. 합려가 듣지 않고 마침내 월나라를 쳐서, 월나라 군사를 취리(檇李)에서 패배시키고 크게 노략질한 후에 돌아왔다. 손무가 가만히 오원에게 말하기를, “40년 뒤에는 월나라가 강대해져서 오나라를 멸망시킬 것이오!” 하니, 오원이 말없이 그 말을 기억해 두었다. 이것은 오왕 합려 5년의 일이었다.
그다음 해, 초나라 영윤 낭와가 수군을 거느리고, 지난해 육(六)과 잠(潛) 두 고을을 빼앗은 오나라를 보복하려고 공격했다. 합려가 손무와 오원을 시켜 초나라 군사를 쳐서 소(巢) 땅에서 파하고 초나라 장수 미번(羋繁)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합려가 말하기를, “영도를 점령하지 못하고서야 비록 초나라 군사를 물리쳤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공이 없는 것이오.” 하니, 오원이 대답하기를, “신이 어찌 잠시라도 영도를 잊었겠습니까! 그러나 초나라는 천하에 막강한 나라이니 가볍게 대적할 수 없습니다. 낭와가 비록 민심을 얻지 못했다고 하지만 제후들이 아직 미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들으니 그가 뇌물을 몹시 좋아하여, 머지않아 제후들과 틈이 벌어질 것이니 그 틈을 탈 수 있습니다.” 했다. 마침내 합려는 손무에게 강구(江口)에서 수군을 조련하게 하였다. 오원은 사람을 시켜 초나라를 정탐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보고하기를, “당(唐)과 채(蔡) 두 나라의 사신이 성문 밖에 도착하여 우리 오나라와 수호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했다. 오원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당나라와 채나라는 모두 초나라의 속국인데 아무런 까닭도 없이 먼 길에 사신을 보냈으니, 틀림없이 초나라에 원한이 있어서 일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시켜 초나라를 깨뜨리고 영도에 입성하라는 것이다.” 했다.
전날 초소왕이 담로검을 얻었을 때 제후들이 축하했다. 당성공(唐成公)과 채소후(蔡昭侯)도 역시 초나라에 왔다. 채소후는 양지백옥패(羊脂白玉佩) 한 쌍과 은초서구(銀貂鼠裘) 두 벌이 있었는데, 그중 양지백옥패 한 개와 은초서구 한 벌을 초소왕에게 바치고 하례를 했으며, 남은 한 개의 패옥과 초구 한 벌은 자기가 차고 입었다. 낭와가 보고 욕심이 나서 사람을 채후에게 보내어 남은 패옥과 초구를 자기에게 달라고 청했다. 채후도 역시 패옥과 초구를 매우 아꼈기 때문에 낭와에게 주지 않았다. 한편, 당성공도 역시 명마 두 필을 갖고 있었는데 이름을 숙상(肅霜)이라 했다. 숙상이란 원래 기러기를 칭하던 말인데 그 말의 털이 마치 비단처럼 희고, 키가 크고 목이 길어 말 모양이 기러기와 비슷하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었다. 후에 사람들이 다시 숙상이라는 글자 곁에다 말 마(馬) 변을 더하여 숙상(驌驦)이라 하였는데 참으로 천하에 희귀한 명마였다. 당성공이 초나라에 올 때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탔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음에도 안온했다. 낭와가 또 그 말을 탐내어 사람을 시켜 당성공에게 그 말을 요구했으나, 당성공은 주지 않았다. 두 나라 군주가 조례를 끝내자, 낭와가 즉시 초소왕에게 참소하기를, “당나라와 채나라 군주가 몰래 오나라와 내통하고 있는데, 만약 그들을 놓아주어 되돌아가게 하면 반드시 오나라를 인도하여 초나라를 칠 것이니, 잡아 두는 게 낫습니다.” 하니, 초소왕이 즉시 두 나라 군주를 역관에 가두고 각각 천명의 군사로 지켰다. 핑계는 호위한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감금한 것이었다.
그때는 초소왕이 나이가 어려서 영윤 낭와가 초나라 국정을 도맡아 처리했다. 두 나라 군주가 초나라에 감금된 지 3년이 되어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어쩌는 수가 없었다. 당나라 세자가 부친인 군주의 귀국하지 못함을 보고 대부 공손철(公孫哲)을 초나라에 보내 사정을 살펴보니 부친이 초나라에 구금된 까닭을 알게 되었다. 공손철이 당나라 군주에게 아뢰기를, “말 두 마리와 한 나라가 어느 것이 중합니까? 주군께서는 어찌하여 말을 바치고 귀국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당성공이 말하기를, “그 말은 세상의 보기 드문 보물이라 내가 아끼는 것이다. 초왕에게 기꺼이 바칠 수도 없는데 하물며 영윤에게 바치겠는가? 또한 그 사람이 욕심이 끝이 없어 과인을 위협하여 빼앗으려고 하는데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결단코 그 요구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했다. 공손철이 몰래 종자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주군이 말 한 마리를 아껴서 오랫동안 초나라에 억류된 것은 가축을 중히 여기고 나라를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몰래 숙상을 훔쳐서 영윤에게 바치는 것이 낫겠다. 만일 우리 주군이 당나라에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가 비록 말을 훔친 도적의 죄에 연좌된다 한들 또한 어찌 억울하겠는가?” 하니, 종자도 그렇게 여겨, 이에 마부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몰래 두 마리 말을 훔쳐 낭와에게 바치면서 말하기를, “우리 주군이 영윤의 높은 덕을 우러러보고, 저희들을 시켜 좋은 말을 바쳐서 영윤께서 타고 다니시도록 하셨습니다.” 했다. 낭와가 크게 기뻐하여 두 마리 명마를 받았다.
다음 날, 낭와가 조당에 나가 초소왕에게 고하기를, “당나라는 나라가 협소하고 군사가 적어 큰일을 이루기는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당나라 군주를 용서하여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초소왕이 즉시 당성공을 석방하여 성 밖으로 내보냈다. 당성공이 귀국하자 공손철과 많은 종자가 모두 스스로 결박하여 대전 앞에서 죄를 기다렸다. 당성공이 말하기를, “그대들이 탐욕스러운 낭와에게 말을 바치지 않았다면 과인은 귀국할 수 없었소. 이것은 과인의 잘못이니, 그대들은 과인을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하고, 각각 후하게 상을 주었다. 오늘날 덕안부(德安府) 수주성(隨州城) 북쪽에 숙상피(驌驦陂)가 있는데, 숙상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후대 당나라 호증(胡曾) 선생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서쪽으로 내달려서 황량한 숙상피에 이르러서, 당성공의 어리석음을 비웃노라! 숙상 말을 아까워하지 않고 영윤에게 바쳤다면, 한수 동쪽 당나라 궁궐에 빨리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 했다. 또 염선(髥仙)도 시를 지어 이르기를, “3년 동안 잡혀 있었으니 그 수모가 견디기 어려웠는데, 그것은 단지 명마를 욕심 많은 자에게 주지 않아서였다. 편의대로 몰래 말을 훔쳐서 바치지 않았다면, 당성공이 어찌 초나라 땅을 벗어났겠는가?” 했다. 채소후도 당성공이 명마를 바치고 풀려나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초구와 패옥을 낭와에게 바쳤다. 낭와가 다시 소왕에게 고하기를, “당나라와 채나라는 처지가 같습니다. 당성공을 이미 돌려보냈으니 채소후만 홀로 붙들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초소왕이 낭와의 말을 따랐다.
채소후가 영도에서 풀려나 귀국하던 중 한수를 건너다가 가슴에서 분노가 치밀어서 흰 벽옥을 강물에다 던지며 맹세하기를, “내가 만약 초나라를 정벌하지 못하고 다시 이 강물을 건넌다면 이 강물같이 되리라!” 하고, 귀국했다. 다음 날, 채소후가 즉시 세자 원(元)을 진(晉)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군사를 빌려 초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진정공(晉定公)이 주나라에 상소하니, 주경왕(周敬王)이 경사 유권(劉券)을 시켜 천자의 명으로 제후들의 군사들을 모이게 했다. 송(宋), 제(齊), 노(魯), 위(衛), 진(陳), 정(鄭), 허(許), 조(曹), 거(莒), 주(邾), 돈(頓), 호(胡), 등(滕), 설(薛), 기(杞), 소주(小邾)의 군주들과 채(蔡)나라까지 합쳐 모두 17국의 제후들이 각자 낭와의 탐욕을 원망하여 군사를 내어 따랐다. 진(晉)나라 사앙(士鞅 ;범앙)이 대장이 되고, 순인(荀寅)이 부장이 되어, 제후들의 군사가 소릉(召陵)의 땅에 모였다. 순인이 생각하기를, 채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니 (초나라를 이기면) 채나라에 공이 있을 것이니 중한 재물을 얻으려고 사람을 시켜 채소후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채소후께서는 초나라의 임금과 신하에게 초구와 패옥을 바치고는 어찌하여 우리나라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까? 우리가 천 리 먼 길에 군사를 일으켜 오로지 군주님을 위해서 왔는데 무엇으로 군사들의 수고를 위로할지 모르겠습니다.” 했다.
채소후가 대답하기를, “나는 초나라 영윤 낭와가 욕심이 많고 어질지 못해 초나라를 버리고 진(晉)나라에 의지했소. 오직 대부들이 생각하기를 맹주국의 의리로 강한 초나라를 멸하여 약소한 제후국들을 돕는다면 형양(荊襄) 5천 리가 모두 제후들의 군사를 위로할 재물이 될 것이오. 어느 것이 더 큰 이익이 되겠오?” 했다. 순인이 그 말을 듣고 심히 부끄러워하였다. 그때가 주경왕 14년 봄 삼월이었는데, 우연히 큰비가 열흘 넘게 내려서 유권(劉卷)이 학질에 걸렸다. 순인이 즉시 사앙(범앙)에게 말하기를, “옛날 다섯 패자(霸者) 중에 제환공이 제일 강했습니다. 그런데도 소릉에서 군사를 멈추고 초나라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선군이신 문공께서 겨우 한번 성복의 싸움에서 이긴 후 끊임없이 군사를 일으켰지만 이기지 못했습니다. 서로 만나 화친한 이후에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틈이 없어졌는데, 우리가 스스로 먼저 싸움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 큰비가 내려 군사들 사이에 학질이 창궐하고 있는데 만약 진격했다가 승리를 취하지 못하면, 퇴각하는 사이에 초나라가 우리를 추격하지 않을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사앙(범앙)도 역시 탐욕스러운 사내라 채소후로부터 사례를 생각하고 있다가 그 욕심을 이루지 못하자 큰비가 불리함을 핑계로 진격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마침내 채소후가 보낸 인질을 돌려주고 회군 명령을 내렸다. 각국의 제후들도 진(晉)나라가 맹주노릇을 하지 않자 각각 흩어져 본국으로 돌아갔다. 염선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위풍당당한 제후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곧바로 정벌할 힘이 넘쳐흘렀다. 중원에 의로운 선비가 없다고 누가 말했는가? 그들 역시 낭와와 같이 뇌물을 밝히는 자들이었다.” 했다.
채소후가 제후들의 군사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하여, 본국으로 회군하던 중 심(沈)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다. 채소후는 심나라 군주가 초나라 정벌군에 참가하지 않은 것을 괘씸하게 생각하여, 대부 공손성(公孫姓)을 시켜 심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키고 심나라 군주를 사로잡아 죽여서, 초나라에 대한 분노를 달랬다. 초나라의 낭와가 대로하여 군사를 일으켜 채나라를 정벌하여 그 도성을 포위했다. 공손성이 나와 말하기를, “진(晉)나라는 믿을 수 없습니다. 동쪽의 오나라에 구원을 청하는 것이 낫습니다. 오자서와 백비 등 오나라의 여러 신하는 초나라에 큰 원한을 품고 있어 틀림없이 우리에게 원군을 보내줄 것입니다.” 했다. 채소후가 그 말을 따라 즉시 공손성에게 명령하여 당성공과 약속하여 함께 오나라에 의지하여 군사를 빌리기로 하고, 그의 둘째 아들 공자 건(公子乾)을 인질로 보냈다. 오원이 인솔하여 합려를 뵙고 말하기를, “당나라와 채나라가 초나라에 한을 품고 초나라를 정벌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채나라를 구원한다는 명분과 초나라를 무찌를 수 있는 실익도 있습니다. 대왕께서 초나라의 영도에 들어가고 싶으시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니, 합려가 즉시 채소후의 인질을 받아들이고 출병을 허락하며, 공손성을 먼저 채나라에 돌려보내어 채소후에게 알리도록 했다. 합려가 군사를 이동하려 할 때 근신이 보고하기를, “지금 군사 손무가 강구(江口)에서 돌아와서 일이 있다고 접견을 청합니다.” 했다. 합려가 손무를 불러들여 온 까닭을 물었다.
손무가 말하기를, “초나라를 공략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그들이 데리고 있던 속국이 너무 많아서 바로 그 경내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晉)나라 군주가 한번 호령하니 18개 나라의 군주들이 모였고 그중에는 진(陳), 허(許), 돈(頓), 호(胡) 네 나라는 모두 오랫동안 초나라에 붙었으나 그들도 역시 초나라를 버리고 진(晉)나라를 따랐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초나라를 원망하는 것은 당나라와 채나라 두 나라만이 아닙니다. 이제 초나라의 형세가 고립되었습니다.” 하니, 합려가 크게 기뻐하였다. 피리와 전의(專毅)를 시켜 태자 파(波)를 보좌하여 오나라 도성을 지키게 하고, 손무를 대장으로 삼고, 오원과 백비를 부장으로 삼으며, 그의 친동생 부개(夫槪)를 선봉으로 삼고, 공자 산(公子山)에게 군량을 전담하도록 했다. 오나라 군사 6만을 모두 일으켜 십만 대군이라 하고, 수로를 통하여 회수를 건너 곧바로 채나라에 도착했다. 낭와가 오나라 군세가 큼을 보고 채나라 도성의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또 오나라의 군사들이 추격할까 두려워서 바로 한수를 건너 진영를 세우고, 계속해서 급보를 영도에 띄워 사태의 위급함을 알렸다. 한편 채소후가 오왕 합려를 영접하여 초나라 군신의 흉포한 짓을 울면서 호소했다. 오래지 않아 당성공도 역시 채나라에 도착했다. 두 나라의 군주가 좌우익을 맡아 초나라를 멸하는 데에 따르겠다고 했다. 출발에 임하여 갑자기 손무가 군사들에게 뭍에 오르고 전함은 모두 회수 유역에 남겨두라고 명했다.
오원이 손무에게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오르게 하는 이유를 조용히 물으니, 손무가 말하기를, “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행군 속도가 늦게 되고, 그러면 초나라가 천천히 대비하여 깨트릴 수가 없습니다.” 하니, 오원이 그 말에 승복했다. 대군이 장강 북쪽에서 육로로 장산(章山)을 넘어 곧바로 한양으로 쫓아왔다. 초나라 군사는 한수 남쪽에 주둔하고, 오나라 군사는 한수 북쪽에 진을 쳤다. 낭와는 밤낮으로 오나라 군사들이 한수를 건널까 걱정하다가 오나라 군사가 그들의 배를 회수에 두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조금 놓게 되었다. 초소왕이 오나라 군사가 대거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듣고, 여러 신하를 소집하여 그 대책을 물었다. 공자 신이 말하기를, “자상(子常) 낭와는 대장의 재목이 아닙니다. 속히 좌사마 심윤수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오나라 군사들이 한수를 건너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저들은 멀리 와서 후속 부대가 없으므로 틀림없이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하니, 초소왕이 그 말을 따라 심윤수를 시켜 군사 1만 5천을 거느리고 영윤 낭와와 협력하여 막게 했다. 심윤수가 한양(漢陽)에 도착하니 낭와가 그를 맞아 대채에 들어갔다. 심윤수가 묻기를, “오나라가 어떤 길로 왔기에 이렇게 신속하게 왔습니까?” 하니, 낭와가 말하기를, “회수 연안에 배를 버리고 뭍에 올라 예장(豫章)에서 이곳에 이르렀소.” 했다. 심윤수가 몇 번 웃으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손무는 군사를 귀신같이 부린다고 하던데, 이것을 보니 참으로 어린아이 장난일 뿐이오!” 했다.
낭와가 말하기를, “무슨 말이오?” 하니, 심윤수가 말하기를, “오나라 사람은 배를 타고 노를 젓는 일에 익숙하여 수상전이 유리합니다. 그런데 지금 배를 버리고 뭍으로 와서 민첩함을 취했지만, 만일 그들이 싸움에 지면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웃었습니다.” 했다. 낭와가 말하기를, “오나라의 군사들이 한수 북쪽에 진을 치고 있는데 그들을 파할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있소?” 하니, 심윤수가 말하기를, “제가 군사 5천을 떼어 영윤께 드리겠으니, 영윤께서는 한수 강변을 따라 군영을 세우십시오. 그런 다음 모든 배들을 끌어다 한수 남안에 모아 놓게 하시고 다시 빠른 배로 아침저녁으로 한수의 위아래 쪽을 순시하게 하여 오나라 군사가 배들을 빼앗아 건너는 것을 막으십시오. 내가 일군을 거느리고 신식(新息)에서 회수(淮水) 연안으로 진격하여 오나라 군사의 배들을 모두 불태운 후에 다시 한수 동쪽의 험로를 나무와 돌로 막아 그들의 퇴로를 끊겠습니다. 연후에 영윤께서는 군사를 이끌고 한수를 건너 오군의 대채(大寨)를 공격하십시오. 저는 그들의 배후에서 들이치겠습니다. 저들은 수륙 양로에서 길이 끊어지고 앞뒤에서 적을 맞으면 오나라 군신들의 목숨은 모두 우리 손에서 죽을 것입니다.” 했다. 낭와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사마의 높은 식견은 내가 미치지 못하겠소!” 했다. 이에 심윤수는 대장 무성흑(武城黑)에게 그곳에 남아 5천의 군사를 지휘하여 낭와를 돕게 하고 자기는 일만의 군사를 이끌고 신식을 향하여 출발했다.
다음의 승패가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제76회: 초소왕이 영도를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나고, 오자서가 평왕의 묘를 파서 시체를 매질하다.
한편, 심윤수가 떠난 후에, 오나라와 초나라 군사들은 한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무성흑(武城黑)이 영윤인 낭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말하기를, “오나라 군사들이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그들의 장기를 거스르고, 또 이곳의 지리를 모릅니다. 그래서 사마께서는 이미 그들이 틀림없이 패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지금 수일간 대치하면서 한수를 건너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해이해졌을 것입니다. 마땅히 빨리 공격해야 합니다.” 하니, 낭와가 총애하는 장수 사황(史皇)이 역시 말하기를, “초나라 사람들이 영윤보다는 심사마를 더 따르고 있습니다. 만약 사마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의 배들을 불사르고 그들의 퇴로를 막으면 오나라를 깨뜨린 공은 모두 심사마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영윤께서는 관직이 높고 이름이 무거운데 여러 차례 싸움에 패하고 지금 다시 가장 큰 공을 사마에게 양보한다면 어떻게 백관의 윗자리에 서겠습니까? 심사마가 영윤을 대신하여 정사를 맡을 것입니다. 무성흑 장군의 계책을 따라 한수를 건너 승부를 겨루는 것이 낫습니다.” 하니, 낭와가 그 말에 혹하여 마침내 삼군에게 명령을 내려 모두 한수를 건너 소별산(小別山)에 이르러 진영을 세우게 했다.
사황이 출전하여 싸움을 거니, 손무는 선봉 부개(夫槪)를 시켜 맞이하게 했다. 부개가 용사 3백 명을 선발하여 모두 단단한 나무로 만든 큰 몽둥이를 써서 초나라 군사를 만나면 무조건 두들겨 패고는 달아나게 했다. 초나라 군사들은 일찍이 이런 싸움 형태를 본 적이 없어서, 손을 쓰지 못하고 오나라 군사들에게 한바탕 두들겨 맞았다. 사황은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낭와가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강을 건너게 하고 지금 처음 싸워서 패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러 왔는가?” 하니, 사황이 말하기를, “싸워서 적장을 참하지 못하고, 공격해서 적의 임금을 사로잡지 못하면 이는 군대에서 말하는 아주 용감한 장수가 아닙니다. 지금 오왕의 본진이 대별산(大別山) 아래에 있으니 오늘 밤 예상치 못한 때에 가서 덮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했다. 낭와가 그 계책을 따라 즉시 정예병 만 명을 뽑아 군장을 갖추어 함매를 물리고 지름길을 이용하여 대별산 뒤로 달려갔다. 초나라의 모든 군사는 낭와의 군령에 따라 계획대로 대별산을 향해 진군했다. 한편, 손무는 부개가 초전에서 승리하여 모두 축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낭와는 변변치 못한 무리로 요행수나 바라보고 공을 탐하는 자이지만, 설령 사황이 첫 싸움에서 졌어도 아직 초나라 군사는 손상되지 않았소. 오늘 밤에 틀림없이 우리 본진을 습격하러 올 것이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오.” 했다.
이에 손무가 부개와 전의(專毅)에게 휘하 군사를 이끌고 대별산 좌우에 각각 매복하게 하고, 초병의 뿔피리 소리가 나면 그것을 신호로 돌격하도록 했다. 그리고 당성공과 채소후를 시켜 두 갈래로 지원하게 했다. 또 오원에게는 5천의 군사를 주어 소별산 쪽으로 나아가게 하여 낭와의 본진을 습격하게 하고, 백비를 시켜 지원하게 했다. 손무는 다시 공자 산(公子山)에게 오왕을 호위하게 하고 진영을 한음산(漢陰山)으로 옮겨 초나라군과 충돌하는 것을 피하도록 했다. 그리고 대채에는 겉으로만 깃발을 꽂고 노약자 수백 명을 남겨서 지키게 했다. 손무가 명령을 끝내니 삼경(자정)이 되었다. 과연 낭와가 정예병을 이끌고 비밀리에 대별산 뒤로 쏟아져 나왔다. 오나라 군사의 대채가 적막하여 방비가 없는 것을 보고, 함성을 지르며 오나라 군의 진영으로 돌격했다. 그러나 오왕을 보지 못하자 매복을 의심하여 황망히 달려 나가려고 했다. 갑자기 초병의 뿔피리 소리가 일제히 울리더니 전의와 부개의 군사들이 좌우에서 튀어나와 초군을 협공했다. 낭와는 싸우면서 달아났으나, 군사 중 삼 분의 일을 잃고 겨우 추격에서 벗어났다. 다시 대포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오른쪽에는 채소후가, 왼쪽에는 당성공이 양쪽으로 막았다.
당성공이 크게 소리치기를, “내 숙상마(驌驦馬)를 돌려주면 네 목숨은 살려주겠다.” 했다. 채소후도 역시 소리치기를, “내 갖옷과 패옥을 돌려주면 네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하니, 낭와는 수치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황망하고 두려웠다. 아주 위급한 순간에 마침 무성흑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한바탕 크게 공격하여 낭와를 구출했다. 낭와와 무성흑이 몇 리를 도망쳐 나아가는데, 대채를 지키던 군졸 한 명이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본영은 이미 오나라 장수 오원에게 점령당하고 사황 장군은 크게 패하여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했다. 낭와는 간담이 찢어져서 패잔병을 이끌고 밤새도록 달려 백거(柏擧)에 이르러 겨우 머물렀다. 한참 지나서 사황도 역시 패잔병을 이끌고 도착하고, 나머지 패잔병도 점차로 모여들자 다시 영채를 세웠다. 낭와가 말하기를, “손무의 용병이 과연 임기응변에 능하구나! 영채를 버리고 영도로 돌아가서 군사를 청하여 다시 싸워야겠다.” 하니, 사황이 말하기를, “영윤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오나라 군사를 막다가, 만약 영채를 버리고 돌아가면 오나라 군사가 한강을 건너 곧바로 영도에 들어올 것입니다. 영윤께서는 그 죄를 어떻게 면하려고 그러십니까? 차라리 남은 힘을 다하여 한번 싸워 진중에서 죽는다면 아름다운 이름이나마 후세에 남기지 않겠습니까?” 했다.
낭와가 주저하고 있을 때, 갑자기 군사가 보고하기를, “초소왕께서 한 무리 지원군을 보냈습니다.” 했다. 낭와가 영채를 나가 영접하니, 지원군의 대장은 곧 원사(薳射)였다. 원사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오나라 군사의 세력이 크다는 말을 듣고 영윤께서 이기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특별히 저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명령을 듣도록 했습니다.” 하고, 지난번 싸움에 대해 물었다. 낭와가 두루 상세히 설명하면서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원사가 말하기를, “만약 심사마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으리오. 지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계책은 오로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서 오나라 군사들과 싸우지 않고, 심사마의 군사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후에 힘을 합하여 공격하는 것입니다.” 하니, 낭와가 말하기를, “내가 병사들을 가볍게 움직여 오나라의 영채를 습격하였으나 도리어 우리의 영채를 빼앗겼소. 만약에 장군의 군사와 내가 거느린 군사를 합한다면 초나라 군사가 어찌 오나라 군사보다 약하다고 할 수 있겠소! 지금 장군이 처음 도착하였으니 이 예기를 이용하여 마땅히 죽음을 무릅쓰고 적군과 결전을 해야 할 것이오!” 했다. 원사가 낭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즉시 낭와와 떨어져 각각 진영을 세웠다. 명분은 비록 서로 의각지세라고 했지만 서로의 거리가 10여 리였다.
낭와는 자기의 직위가 높은 것을 믿고 원사를 존중하지 않았고, 원사도 또한 낭와가 무능하다고 업신여겨서 그의 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마음을 갖고 함께 상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나라 선봉 부개가 초나라 장수들이 불화함을 탐지하고는 즉시 오왕 합려를 찾아와 말하기를, “낭와는 탐욕스럽고 인자하지 않아서 평소에 인심을 잃고 있습니다. 원사가 비록 지원군을 이끌고 왔지만 약속한 바를 지키지 않아서, 삼군이 모두 싸우려는 뜻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쫓아가 공격한다면 틀림없이 이길 수 있습니다.” 했다. 그러나 합려는 허락하지 않았다. 부개가 물러 나오면서 말하기를, “군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고, 신하는 군주의 뜻을 행하는 것이니, 내가 장차 혼자 가서 만약 다행히 초나라 군사를 깨뜨린다면 영도(郢都)에 입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새벽에 일어나 휘하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마침내 낭와의 진채를 향하여 달려갔다. 손무가 듣고 급히 오원에게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부개를 돕도록 했다. 한편, 부개가 낭와의 대채를 덮치자, 낭와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낭와의 진영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무성흑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적을 막았다. 낭와는 수레에 오르지 못하고 걸어서 진영의 후문을 나가다가 왼쪽 어깨에 화살을 맞았다. 사황이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도착하여 낭와를 전차에 태웠다.
사황이 낭와에게 말하기를, “영윤께서는 스스로 편한 대로 하십시오. 소장은 이곳에서 싸우다가 죽겠습니다!” 하니, 낭와가 전포와 갑옷을 벗어 버리고 전차에 올라서 질주하여 감히 영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정나라로 달아났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갖옷과 패옥을 두르고 명마가 끄는 수레를 타면서, 오로지 오래도록 영도에서 살고자 했는데, 싸움에서 한번 지니 도망치는 신세가 되어, 만 사람들이 탐욕스런 사내를 비웃게 만들었다.” 했다. 오원의 군사가 도착하니, 사황은 그들이 낭와를 추격할까 걱정하여 즉시 휘하 군사를 이끌고 극을 휘두르며 오나라 진영으로 돌격했다. 그는 좌충우돌하며 오나라의 장수와 병사 2백여 명을 찔러 죽였으나 초나라 군사의 사상자 수도 그와 비슷했다. 사황은 몸에 중상을 입고 죽었다. 무성흑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부개와 싸우다가 역시 부개에 의해 목이 잘렸다. 원사의 아들 원연(薳延)은 앞 영채가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의 부친에게 알리고 군사를 내어 구원하려고 하였다. 원사가 허락하지 않고 스스로 진영 앞에 서서 억눌러 을러대며 군중에 명령하기를, “함부로 움직이는 자는 참한다.” 했다. 낭와의 패잔병들은 모두 원사의 진영으로 도망쳐 왔다. 점검해보니 아직 만여 명이나 남아 있어서 합하여 한 무리 부대를 이루니, 다시 군세를 떨쳤다.
원사가 말하기를, “오군이 승세를 타고 엄습해오고 있으니 당할 수 없다. 오군이 이르기 전에 대오를 정비하여 영도로 퇴각하여 다시 변통하여 처리해야겠다.” 하고, 즉시 대군이 영채를 거두어 모두 일어서게 명령하고 원연이 앞서고 원사는 친히 뒤에서 추격군을 막고자 했다. 부개는 원사가 영채를 옮긴다는 것을 탐지하고, 그 뒤를 추격하여 청발(淸發)에 이르렀다. 초나라 군사들이 바야흐로 배들을 모아 강을 건너려고 하자, 오나라 군사들이 문득 앞으로 나가 공격하려고 했다. 부개가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막다른 곳의 짐승도 오히려 싸우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만약 우리가 너무 급하게 초나라 군사를 몰아친다면 그들은 있는 죽을 힘을 다할 것이오. 잠시 병사들을 쉬게 했다가 그들이 강을 반쯤 건너기를 기다린 뒤에 공격하면 이미 강을 건넌 자들은 죽음을 면하겠지만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자들은 서로 먼저 건너기 위해 다투느라 누가 죽을 힘을 다해 싸우겠는가? 그리되면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오.” 하고, 즉시 군사들을 20여 리 뒤로 물러나게 하여 영채를 세우게 했다. 중군의 손무 등이 모두 도착하여 부개의 말을 듣고 사람마다 칭찬했다. 합려가 오원에게 말하기를, “과인에게 이 같은 동생이 있으니 어찌 영도에 입성하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 일찍이 피리가 부개의 상을 보고 말하기를, 부개의 몸에 난 털이 거꾸로 섰으니 반드시 나라를 배반하여 주군에 모반할 것이라 했습니다. 비록 부개가 비록 영특하고 용감하지만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기지 마십시오.” 했다. 합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원사는 오나라 군사가 추격한다는 말을 듣고 진영을 갖추어 적을 막으려고 했다. 그들이 다시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본래 알기를 오나라 사람들이 겁쟁이라 하더니 감히 끝까지 추격을 못하는구나.” 하고, 이에 명령을 내려 오경(새벽 4시경)에 배불리 먹고 일제히 강을 건너기로 했다. 초나라 군사가 막 십 분의 삼쯤 강을 건넜을 때, 부개의 군사가 도착했다. 초나라 군사는 먼저 강을 건너려고 크게 어지러워졌다. 원사가 통제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수레를 타고 달아났다. 강을 건너지 못한 군사들은 모두 원사를 따라 어지러이 도망쳤다. 오나라 군사들이 뒤에서 무찔러서 군기와 북 및 무기와 갑옷을 무수히 약탈했다. 손무가 당성공과 채소후에게 명하여 각기 본국 군사들을 이끌고 초나라가 강을 건너기 위해 준비한 배들을 빼앗아 강 연안을 따라 부개를 돕도록 했다. 원사가 달아나다가 옹서(雍澨)에 이르렀으나 장수와 군사들이 배가 고파서 달아날 수가 없었다. 오나라의 추격병을 멀리 따 돌렸다고 생각한 원사는 군사들을 잠시 멈추게 하여 솥을 걸고 밥을 짓게 했다. 밥이 겨우 되었는데 오나라 군사들이 다시 도착했다. 초나라 군사들은 밥을 먹지도 못하고 버리고 달아났다. 남겨진 밥은 오히려 오나라 군사들이 배불리 먹고, 힘을 다하여 추격했다. 초나라가 군사들이 서로 밟아서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원사의 전차가 넘어지니, 부개가 극을 휘둘러 원사를 찔러 죽였다. 원사의 아들 원연도 역시 오나라 군사들에 포위되어 죽을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갑자기 동북쪽에서 함성이 크게 일어나니, 원연이 말하기를, “오나라 군사들이 다시 몰려오니 나의 목숨도 끝났구나!” 했다. 알고 보니 그 군사들은 다름이 아니라 좌사마 심윤수가 신식(新息)에 도착하였으나, 낭와의 군사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오던 길을 따라 회군하다가 마침 옹서에서 오나라 병사들에게 포위된 원연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심윤수가 부하 만 명의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서 오나라 진영으로 돌진했다. 부개는 여러 번 승리한 것만 믿고, 반격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갑자기 초나라의 군사들이 세 방향에서 돌진해 오는 것을 보자 적군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되지 않아서 대항하여 싸우지도 못하고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달아났다. 심윤수가 한바탕 크게 무찌르니 오나라 군사 중 죽은 자가 천여 명이었다. 심윤수가 오나라 군사를 추격하려 했으나, 오왕 합려의 대군이 이미 도착하여, 양쪽의 군사가 진영을 세우고 대치했다. 심윤수가 가신 오구비(吳句卑)에게 말하기를, “영윤이 공을 탐하여 내 계책을 이루지 못하게 했으니, 하늘의 뜻이다. 지금 적들은 이미 초나라 땅 깊숙이 쳐들어왔으니 내일 내가 마땅히 목숨을 걸고 결전을 벌여야겠다. 다행히 이기면 오나라 군사가 영도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니 초나라의 복이고, 만일에 싸움에서 진다면 내 목을 너에게 맡길 것이니 오나라 사람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라.” 했다.
심윤수가 다시 원연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부친이 이미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으니, 그대마저 싸움에서 죽을 수는 없다. 그대는 마땅히 빨리 영도로 돌아가 나의 말을 자서(子西 ; 공자 신)에게 전하여 영도를 지킬 계책을 마련하게 해라!” 하니, 원연이 절하며 말하기를, “부디 사마께서 동쪽의 도적들을 물리치시어 일찍 큰 공을 세우십시오.” 하며, 눈물을 흘리고 이별했다. 다음 날 아침, 두 나라의 진영이 전투를 시작했다. 심윤수는 평소에 군사들을 사랑하고 지휘하는 방법에 능숙하여 군사들은 명을 받들어 힘을 다하여 싸웠다. 부개가 비록 용맹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점점 패하게 되었다. 그때 손무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고, 오른쪽에는 오원과 채소후가 있고, 왼쪽에는 백비와 당성공이 강궁과 쇠뇌를 앞세우고, 창칼을 든 군사가 뒤를 받쳐서 곧바로 초나라 군사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사들은 십 중 칠팔이 쓰러졌다. 심윤수가 죽을힘을 다하여 겹겹이 둘러친 포위망을 뚫고 나왔으나 몸에 몇 발의 화살을 맞아서 수레에 시체처럼 누워서 다시 싸울 수가 없었다. 이에 심윤수가 오구비를 불러 말하기를, “나는 더 싸울 수 없게 되었다. 너는 빨리 나의 목을 베어서 초소왕에게 전하라.” 하니, 오구비가 차마 베지 못하자, 심윤수가 있는 힘을 다하여 큰 소리를 지르고 마침내 눈을 감았다.
오구비가 부득이 칼을 들어 심윤수의 목을 베고, 옷으로 싸서 가슴에 품고, 다시 시체를 묻은 후, 영도로 달려 돌아갔다. 오나라 군사들은 마침내 멀리 진격해 나아갔다. 사관이 찬양하여 이르기를, “초나라가 행한 짓은 옳지 않았으니, 어진 사람을 죽이고 간신을 취하였다. 오원(伍員)의 가족들은 몰살당하고, 다시 백극완(郤完)의 종족들은 씨를 말렸다. 심윤수 한 사람만 두드러져, 기둥 하나로 큰 집을 지탱했다. 적을 다룰 계책이 손바닥 안에 있었으나, 탐욕스러운 낭와로 인해 싸움에 지게 되어, 공도 세우지 못하고 몸은 죽게 되었지만, 그 기상은 서리보다 차갑고 해보다 뜨거웠다! 하늘이 충신을 도와서, 그 목은 초나라에 돌아왔다.” 했다. 한편, 원연이 먼저 돌아와 초소왕을 뵙고, 울면서 낭와가 싸움에서 패하여 달아난 것과, 그의 아버지 원사가 피살된 것을 고했다. 초소왕이 크게 놀라 황급히 자서(공자 신)와 자기(子期)등을 불러 상의하여, 다시 군사를 내어 심윤수를 지원하려고 했다. 뒤따라 오구비도 돌아와 심윤수의 머리를 초소왕에게 바치고 싸움에서 패한 이유를 상세히 고하기를, “모두 영윤이 사마의 계책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했다. 초소왕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 사마를 쓰지 않은 것은 나의 잘못이다.” 하고, 크게 낭와를 욕하기를, “나라를 그르친 간신이 구차히 살아남았으니 개나 돼지도 그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다.” 했다.
오구비가 말하기를, “오나라 군사들이 날마다 다가오니 대왕께서는 빨리 영도를 지킬 계책을 정하셔야 합니다.” 하니, 초소왕이 한편으로는 심제량(沈諸梁)을 불러 부친의 수급을 전한 후에 장사를 지내는데 필요한 기구들을 후하게 내주고, 심제량을 섭공(葉公)으로 삼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날 것을 의논하니, 자서가 듣고 목을 놓아 울면서 간하기를, “사직과 능침(陵寢)이 모두 영도에 있는데 만약 왕께서 버리고 간다면 다시 이곳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했다. 초소왕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은 것은 장강과 한수의 천험(天險)인데, 지금 이미 그 천험을 잃었소! 오나라의 군사들이 머지않아 몰려올 것인데 어찌 꼼짝 못하고 사로잡히겠소?” 하니, 자기(子期)가 아뢰기를, “성중에는 아직 수만의 장정이 남아 있으니 대왕께서는 궁중의 창고에 남아 있는 곡식과 천을 모두 꺼내어 장사들을 격려하여 성을 굳게 지키게 하고, 다시 사자를 한수 동쪽 여러 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모아 원조하라고 명령하십시오. 오나라 군사가 우리의 땅에 깊숙이 들어왔으니 양식과 보급품이 뒤를 잇지 못할 터인데 어찌 능히 오래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했다. 초소왕이 말하기를, “오나라 군사는 우리 땅에서 양식을 구할 것인데 어찌 식량을 걱정하겠소? 진(晉)나라가 한번 호령하니 돈(頓)과 호(胡)가 모두 그들에게 붙어 버렸고, 오나라 군사들이 동쪽으로 내려오니 당나라와 채나라가 그들의 앞잡이가 되었소. 초나라의 지배 아래에 있던 나라가 모두 초나라를 떠났으니, 믿을 수가 없소.” 했다.
자서(공자 신)가 또 말하기를, “신 등이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싸우다가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그때 달아나도 오히려 늦지 않습니다.” 하니, 초소왕이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모두 두 형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두 분께서 마땅히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대로 행하십시오. 저는 상의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 눈물을 머금고 궁 안으로 들어갔다. 자서와 자기가 계책을 상의한 후에 대장 투소(鬪巢)를 시켜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맥성(麥城)을 지키면서 북쪽의 길을 방어하게 하고, 대장 송목(宋木)을 시켜 5천의 군사를 이끌고 기남성(紀南城)을 지키면서 서북쪽의 길을 막도록 했다. 자서는 스스로 정예병 1만을 이끌고 노복강(魯濮江) 가에 진영을 세우고 동쪽에서 건너는 길을 지켰다. 다만 서쪽의 천강(川江)과 남쪽의 상강(湘江)은 모두가 초나라 땅이었으나 그쪽 지방은 모두가 멀고 길이 험하여 오나라 군사가 초나라로 들어올 길이 아니어서 방비할 필요가 없었다. 자기(子期)는 왕손요우(王孫繇于)와 왕손어(王孫圉), 종건(鐘建), 신포서(申包舒) 등을 거느리고 성안을 순시하면서 십분 긴장한 자세로 엄하게 지켰다. 한편 오왕 합려는 여러 장수를 모아 놓고 영도에 언제 들어갈 것인지 물었다.
오원이 나와 말하기를, “초나라가 비록 여러 번 패했지만 영도는 튼튼하고 또한 맥성과 기남성이 연락하여 성을 함락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쪽으로 노복강을 향해 진격하면 초나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기는 하나 틀림없이 많은 군사가 지킬 것입니다. 그래서 북쪽으로부터 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입니다. 군사를 삼분하여 일군은 맥성을 공격하고, 다른 일군은 기남성을 공격하며, 대왕께서는 대군을 거느리고 영도를 곧바로 쳐서 빠른 번개에 귀를 막지 못하듯이 이곳을 돌아볼 때 저곳을 잃게 해야 합니다. 두 성이 만약 깨어지면 영도는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손무가 말하기를, “자서의 계책이 아주 좋습니다.” 했다. 이에 합려는 오원과 공자 산이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맥성을 공격하게 하고, 채소후가 본국 군사를 거느리고 돕도록 했다. 손무는 부개와 함께 1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기남성을 공격하도록 하고, 당성공에게 본국 군사를 이끌고 돕게 했다. 합려는 백비 등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영도성을 공격했다. 한편, 오원이 동쪽으로 며칠을 가는데, 첩자가 보고하기를, “이곳에서 맥성까지는 일사(하루에 갈 거리, 30리) 정도 떨어져 있는데 대장 투소가 군사를 끌고 와서 지키고 있습니다.” 했다.
오원은 군마를 주둔시키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소졸 두 사람을 데리고 걸어서 영채 밖으로 나가서 지형을 살폈다. 오원의 일행이 어느 촌락에 이르니, 촌사람이 당나귀로 연자방아를 돌려서 보리를 빻고 있었다. 그 사람이 회초리로 당나귀를 때리자 당나귀가 달려서 연자방아가 돌며 보리가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오원이 갑자기 깨달아 말하기를, “나는 맥성을 함락시킬 방법을 알았다.” 했다. 곧 막사로 돌아와서 조용히 명령을 내리기를, “모든 군사는 포대를 한 개씩을 준비하여 그 안에 흙을 가득 담고, 또 풀 한 다발과 함께 내일 새벽 오경(4시경)까지 바치도록 하라! 만약 이를 이행하지 않는 자는 참하겠다!” 하고, 다음날 오경이 되자 다시 명령을 내리기를, “모든 수레에는 돌을 가득 실어라. 어기는 자는 참하겠다!” 했다. 날이 밝아오자 군사들을 두 대로 나누어 채후에게 일대를 이끌게 하여 맥성의 동쪽으로 가게하고, 공자건(公子乾)에게 다른 일대를 주어 맥성의 서쪽으로 가게 했다. 그리고 각 장수에게 분부하여 군사들이 가져온 돌과 흙 포대 및 풀 다발로 작은 성을 쌓아 진영 보루로 삼게 했다. 오원 자신은 스스로 군사들이 힘을 쓰도록 지시 감독하고 독려하여 잠깐 사이에 성을 쌓았다.
동쪽 성은 좁고 길어서 당나귀 모양와 비슷하므로 여성(驢城 ; 당나귀 성)이라 이름 짓고, 서쪽의 성은 동그란 모양이라 연자방아와 비슷하므로 마성(磨城 ; 연자방아 성)이라 불렀다. 채소후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오원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동쪽의 당나귀와 서쪽의 연자방아가 어찌 보리가 떨어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했다. 투소가 맥성에 있다가 오나라 군사들이 동서 양쪽에다 성을 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싸움을 걸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으나, 누가 알았으리요, 그때는 이미 성이 완성되어 우뚝 솟은 견고한 보루와 같았다. 투소가 먼저 동쪽의 여성으로 달려가서 싸움을 걸었으나 성 위에는 깃발만 가득 펄럭이고 큰 방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투소가 크게 노하여 바로 성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때 진영의 원문이 열리면서 한 소년 장군이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했다. 투소가 소년 장군에게 성명을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채소후의 작은아들 희건(姬乾)이다.” 했다. 투소가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내 적수는 아니다! 오자서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 희건이 말하기를, “그는 이미 너의 맥성을 취하러 가셨다.” 했다. 투소가 더욱 화를 내며 자루가 긴 극을 들고 희건을 향하여 달려들었다. 희건도 과를 빼어들고 대항하여 두 사람이 어우러져 이십여 합을 싸웠다.
갑자기 정찰 기병이 급히 보고하기를, “지금 오나라 군사들이 맥성을 공격하고 있으니, 장군께서는 속히 돌아가기 바랍니다.” 했다. 투소가 근거지를 잃을까 걱정하여 급히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두니 대열이 어지러워졌다. 희건이 그 틈을 타서 한바탕 무찔렀으나 끝까지 쫓지는 못하고 돌아왔다. 투소가 맥성으로 돌아와서, 군마를 지휘하여 맥성을 공격하는 오원을 만났다. 투소가 극을 옆으로 쥐고 두 손을 맞잡아 예를 차리며 말하기를, “오자서는 그동안 별고 없었는가? 그대 선조들의 원한은 모두가 비무극의 참소로 인한 일이었소. 지금은 참소한 자가 이미 주살되었으니 그대는 이제 갚아야 할 원한이 없어졌소. 종주국의 3대에 걸친 은혜를 그대는 어찌하여 잊어버렸소?” 하니, 오원이 대답하기를, “우리 선조들은 초나라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초왕이 유념하지 않고 원통하게 부친과 형님을 죽이고, 또한 내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다행히 하늘의 도움을 입어 어려움에서 벗어났소. 원한을 품은 지 19년이 지나 이제 오늘이 있게 되었소. 그대는 내 처지를 이해하여 속히 멀리 피하여 나의 칼끝에 닿지 않으면 서로 보전할 수 있을 것이오.” 했다. 투소가 큰소리로 꾸짖기를, “주인을 배신한 도적놈아! 너를 피해 도망가면 내가 사나이가 아니다.” 하고, 극을 꼬나쥐고 오원에게 달려드니, 오원도 역시 극을 잡고 맞이했다.
몇 합을 싸우다가 오원이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피로하니, 그대를 성안으로 들어가게 놓아주겠다. 내일 다시 싸워보자.” 하니, 투소가 말하기를, “내일은 결단코 사생결단을 내겠다!” 했다. 양군이 각자 군사를 거두었다. 맥성 위의 군사들이 자기 편 인마를 보고 성문을 열어 성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한밤중에 갑자기 성 위에서 함성 소리가 일어나더니 성을 지키던 초나라 군사가 투소에게 보고하기를, “오나라 군사가 이미 성안에 들어왔습니다!” 했다. 원래 오원의 군사 중에 초나라에서 항복한 군졸이 많이 있었는데, 일부러 투소를 맥성으로 들어가게 해줄 때 항복한 군졸 몇 명을 변장시켜 초나라 군사들 속에 섞이게 하여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들이 으슥한 곳에 숨어 있다가 밤중에 성 위로 올라가서 긴 밧줄을 성 아래로 내려뜨려서 오나라 군사들을 끌어올렸다. 그것을 알았을 때 성 위로 기어오른 오나라 군사들은 이미 백여 명이 넘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성 밖의 오나라 대군에 내응했다. 성을 지키던 초나라 군사들은 어지럽게 달아나고, 투소가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투소도 작은 수레를 타고 성을 빠져나가 달아났다. 오원은 그를 쫓지 않고 맥성을 얻었으며, 사람을 오왕 합려에게 보내어 맥성을 점령했음을 알렸다. 잠연(潛淵) 선생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서쪽에 연자방아 성과 동쪽에 당나귀 성을 쌓아 맥성을 점령하여, 우연히 본 것으로 공을 이루었다. 오자서의 지혜와 용기를 당할 수가 없었으니, 선 채로 초나라는 오른쪽 팔을 잃었도다.” 했다.
한편, 손무도 군사를 이끌고 호아산(虎牙山)을 지나 당양판(當陽阪)에 들어와서 멀리 북쪽에 있는 장강(漳江)을 바라보니 물살이 매우 거세었다. 기남성은 지세가 낮았고, 서쪽에 적호(赤湖)가 있어 그 호수의 물이 기남성을 통하여 영도성 아래로 이르렀다. 손무가 지세를 살펴보고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내었다. 군사들에게 높은 언덕에 진을 치게 명하고, 각각 삼태기와 가래를 준비하게 하여 그날 밤 안에 참호를 깊게 파서 장강(漳江)의 물을 끌어들여 적호와 통하게 하고, 긴 제방을 쌓아 강물을 가로지르게 했다. 그 강물이 흘러나갈 데가 없어 평지에서는 두세 길이 되었다. 그리고 겨울철이라 서풍이 크게 일어나니 즉시 강물이 기남성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기남성을 지키던 장수 송목(宋木)은 단지 강물이 넘친 줄만 알고 성중의 백성들을 모두 영도로 보내 홍수를 피하게 했다. 그 수세가 넓고 커서 영도성 아래까지 이어져 마치 강과 호수처럼 되었다. 손무가 사람들을 시켜 산 위에서 대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들게 하고, 오나라 군사는 뗏목을 타고 영도성으로 나아가게 했다. 성중에 있던 사람들은 비로소 이 물이 오나라 군사가 장강(漳江)의 물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각자 목숨을 구해 달아났다.
초소왕은 영도성을 지키기 어렵다고 보고, 급히 잠윤 고(箴尹固)를 시켜 배를 서문에 준비하게 하여 사랑하는 여동생 계미(季羋)와 함께 배를 타고 달아났다. 자기(子期)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물을 막으려고 하다가 초소왕이 이미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백관들과 함께 성을 나와 초소왕을 호종했다. 단신으로 뛰어나왔으므로 집안사람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영도는 주인이 없게 되어 공격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무너졌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범처럼 네모난 성에 웅크리고 한수를 막더니, 오나라 군사가 연기처럼 빠르게 평정했도다. 충량한 신하들을 모두 버리고 아첨꾼과 탐관오리로 조정을 채웠으니, 높은 성벽이 하늘에 닿은들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했다. 손무가 합려를 모시고 영도에 입성한 후에 즉시 군사들에게 명하여 둑을 허물어 물을 장강(漳江)으로 돌리고 군사들을 모아서 영도성의 사방을 지키게 했다. 오원도 역시 맥성으로부터 와서 만났다. 합려가 초왕의 궁전에 올라 백관들의 하례를 받은 후에, 당성공과 채소후도 역시 들어와 합려에게 축하의 말을 올렸다. 합려가 크게 기뻐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날 밤에 합려는 초왕의 궁궐에서 묵으려고 하니, 좌우의 시종들이 초왕의 부인을 들였다. 합려가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려다가 뜻을 정하지 못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나라를 이미 차지하셨는데 하물며 그 부인을 주저하십니까?” 하니, 합려가 궁궐에 유숙하면서 그 후궁들을 두루 불러서 음란함을 즐겼다. 좌우의 시종이 혹 말하기를, “초왕의 모친 백영(伯嬴)은 곧 태자 건의 부인으로 진(秦)나라에서 데려왔으나 평왕이 그 미모에 반해서 가로챘습니다. 지금 나이가 아직 젊어서 그 미모가 시들지 않았습니다.” 하니, 합려가 마음이 움직여서 사람을 시켜 그를 부르니, 백영이 나오지 않았다. 합려가 노하여 좌우의 시종들에게 명하기를, “끌고 와서 과인에게 보여라.” 했다. 백영이 문을 닫고 칼로 문을 내리치며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제후는 한 나라를 가르치는 사람이고, 예절은 남녀가 같은 자리에 앉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도 같은 그릇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유별함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오늘 군왕이 그 모범을 버리고 음란한 소문이 백성들에게 들리니 미망인이 차라리 칼 위에 엎드려 죽을지언정 감히 왕의 명을 따르지 못하겠다.” 했다. 합려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곧 사과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부인을 존중하고 사모하여 얼굴을 보고자 했을 뿐이지, 어찌 감히 어지럽히려 했겠습니까? 부인은 안심하십시오.” 하고, 오래된 시종을 시켜 백영의 처소를 지키게 하여 아무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오원은 초소왕을 잡지 못하여 손무, 백비 등으로 하여금 초나라의 여러 대부들의 집에 분산하여 기거하면서 그 처첩들을 범하여 욕보이게 했다.
당성공과 채소후가 공자 산과 함께 낭와의 집을 수색하여 상자에 그대로 든 갖옷과 패옥, 마구간에 매어 있는 숙상마를 찾았다. 두 군주는 각기 자기의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모두 오왕에게 바치고, 그 밖에 방안에 가득한 금은보화와 비단은 마음대로 그들의 좌우에게 명하여 모두 꺼내어 실어가느라 도로가 시끄러웠다. 낭와가 한평생 뇌물을 탐했으나 무슨 소용이 있으랴? 공자 산이 낭와의 부인을 취하려고 했으나, 부개가 이르러 공자 산을 쫓아내고 자기가 차지했다. 이때 오나라의 군신들이 모두 공공연히 음행을 저질러 남녀가 구별이 없었고 영도 성 중에는 거의 짐승들이 난무하는 것 같았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음행을 행하는데 초나라 군신의 아내를 가리지 않으니, 다만 사심을 채웠지만 인륜을 어지럽혔다. 오직 백영이 늦게야 절개를 지켜, 한 미망인이 한 가닥 맑은 바람을 일으켰다.” 했다. 오원이 오왕 합려에게 말하여 초나라의 종묘를 헐어버리려고 했다. 손무가 나아가 말하기를, “군사는 의롭게 움직여야만 비로소 명분이 섭니다. 초평왕이 태자 건을 폐하고 진(秦)나라 여자의 아들을 세웠으며, 아첨배와 탐관을 임용하고, 안으로는 충량한 신하를 죽이고 밖으로는 제후들에게 포악한 짓을 저질러서 오나라가 이곳에 왔습니다. 지금 초나라 도성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마땅히 태자 건의 아들 미승(羋勝)을 불러들여 초나라의 왕위에 앉혀 그들의 종묘사직을 잇게 하고 지금의 초왕을 대신하게 한다면 초나라 백성들은 죄 없이 죽은 태자를 동정하여 틀림없이 초나라가 안정될 것입니다. 또한 미승이 오나라의 덕을 생각하여 대대로 끊이지 않고 조공을 올릴 것입니다. 대왕께서 비록 초나라를 용서하더라도 초나라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같이 하신다면 명분과 실리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했다.
그러나 합려는 초나라를 멸하고 싶은 마음에, 마침내 손무의 말을 듣지 않고 즉시 초나라의 종묘를 불살라 버렸다. 당성공과 채소후는 각기 작별 인사를 고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합려가 다시 장화대에서 주연을 열고 악공들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여러 신하가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으나, 오직 오원이 통곡해 마지않았다. 합려가 말하기를, “경은 초나라에 보복할 뜻을 이미 갚았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슬퍼하시오?” 하니, 오원이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기를, “초평왕은 이미 죽고 초소왕은 도망쳐 버렸으니, 신의 부친과 형의 원수는 아직 만분의 일도 갚지 못했습니다.” 했다. 합려가 말하기를, “경은 어떻게 하고 싶소?” 하니, 오원이 대답하기를, “대왕께 청하오니 신에게 초평왕의 무덤을 파서 관을 열어 참수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면, 비로소 소신의 원한이 풀리겠습니다.” 했다. 합려가 말하기를, “경이 과인을 위하여 많은 공을 세웠는데 과인이 어찌 썩은 해골을 아까워하여 경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하고, 즉시 허락했다.
오원이 평왕의 묘가 영성의 동문 밖 요대호(寥臺湖) 가의 실병장(室丙莊)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어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갔다. 그러나 평원에는 풀만 시들었고 호수는 아득하여 무덤의 소재를 알 수가 없었다. 병사들을 시켜 사방으로 찾았으나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오원이 가슴을 치면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기를,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하여 내가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지 못하게 하십니까?” 했다.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 읍을 하면서 묻기를, “장군께서 평왕의 무덤을 찾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초평왕은 아들을 버리고 며느리를 빼앗았으며 충신을 죽이고 간신을 임용하여 나의 종족을 멸하였소. 내가 군사를 얻지 못하여 그의 목을 취하지 못하였는데 그가 죽었어도 마땅히 그 시체의 목을 베어 지하의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오.” 했다. 노인이 말하기를, “초평왕은 스스로 많은 원한을 샀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자기의 무덤을 팔 것을 걱정하여 호수 안의 물속에 장사지내게 했습니다. 장군께서 꼭 그의 관을 얻으려고 하신다면 반드시 호수의 물을 퍼내어 그것을 구하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인하여 요대(寥臺)에 올라가 평왕의 무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오원은 잠수를 잘하는 사람을 시켜 물속에서 무덤을 찾게 하니, 과연 요대 동쪽에서 돌로 만든 큰 궤를 발견했다. 즉시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각기 모래 한 자루씩을 지고 오게 하여 그 묘 주위에 쌓게 하여 물을 막은 후에 석곽을 파내어 그 안에서 관을 얻었는데 대단히 무거웠다. 그 관을 여니 안에는 다만 의관과 정련된 쇠 수백 근이 있을 뿐이었다. 노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곧 가짜 관입니다. 진짜 관은 그 아래에 있습니다.” 했다. 다시 아래의 석판을 뜯어내니 과연 관이 하나 있었다. 오원이 관을 부수라고 명령하여 시체를 꺼내어 살펴보니 과연 초평왕의 시신이었다. 수은을 사용하여 염습하였기 때문에 그 시신의 피부와 살이 변하지 않았다. 오원이 그 시신을 보자 분한 기운이 충천하여, 아홉 마디 구리 채찍을 손에 쥐고 300번 채찍질을 하니, 살이 흩어지고 뼈가 으스러졌다. 이에 오원이 왼발로 그 배를 밟고 오른손으로 그 눈을 뽑아내어 따지며 말하기를, “너는 살았을 때 눈알을 잘못 굴려 충신과 간신을 구별하지 못하고, 참소를 믿고 나의 부형을 살해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느냐?” 하고 마침내 칼을 들어 평왕의 목을 자르고 시신의 의복과 관을 훼손하여 해골과 함께 들판에 버렸다.
염옹(髯翁)이 시를 지어 찬양하기를, “남에게 원한을 쌓지도 말며, 남을 원통하게 하지도 말라! 원통함이 극에 달하면 임금도 없게 되고, 원한을 쌓으면 생사도 상관하지 않는다. 필부는 목숨을 구하여 도망쳤으나, 욕보이는 것은 썩은 해골에까지 미쳐, 피눈물을 흘리며 채찍을 휘두르니, 원한으로 하늘이 어둡도다. 효성은 충성을 빼앗았고, 집안의 원수가 나라에까지 미쳤도다. 열렬하구나, 오자서여. 천고에도 오히려 눈물을 머금게 하도다!” 했다. 오원이 초평왕의 시체를 채찍질하고 나서 노인에게 묻기를, “노인께서는 어떻게 평왕이 묻힌 곳과 그 관이 거짓인 줄 아셨습니까?”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석공입니다. 옛날 초평왕이 우리 석공 50여 명에게 명령하여 가짜 무덤을 돌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비밀을 누설할까 걱정하여 그 무덤이 완성된 후에 여러 석공을 무덤 안에 가두어 죽였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만은 몰래 탈출하여 죽움을 면했습니다. 오늘 장군의 효심에 감동되어 특별히 와서 가리켜드려서 저도 또한 50여 원통한 귀신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달래려고 할 뿐입니다.” 했다. 오원이 황금와 비단을 가져와서 그 노인에게 후하게 사례하고 돌아갔다.
한편, 초소왕은 배를 타고 서쪽의 저수(沮水)를 건너고 다시 돌아서 큰 강을 건너 운중(雲中) 땅으로 들어갔다. 그때 도적 떼 수백 명이 밤에 초소왕이 탄 배를 습격하여 과로 소왕을 찌르려고 하였다. 그때 왕손 요우(繇于)가 초소왕의 곁에 있다가 소왕을 등으로 가리며 크게 소리치기를, “이 분은 초왕이시다. 너희들이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했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도적들이 과로 그의 어깨를 찔려 흐르는 피가 그의 발뒤꿈치까지 흐르더니 혼절하여 바닥에 쓰려졌다. 도적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단지 재물과 비단을 알뿐이며 왕이 있는지 모른다. 영윤이라는 대신도 뇌물을 탐하는데 하물며 상민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고, 도적들이 즉시 배 안을 수색하여 배 안에서 황금과 비단, 보물 등을 찾아냈다. 잠윤 고(箴尹固)가 급히 초소왕을 부축하여 강언덕에 올라 피신했다. 소왕이 소리치기를, “누가 나의 어린 누이를 보호하여 다치지 않게 하라!” 하니, 하대부 종건(鐘建)이 계미(季羋)를 등에 업고 초소왕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왔다. 뒤를 돌아보니 도적 떼들이 배에다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초소왕의 일행은 밤을 도와 몇 리를 달아나서, 아침이 되자 자기(子期)와 송목(宋木), 투신(鬪辛), 투소(鬪巢) 등이 계속해서 초소왕의 자취를 쫓아 도착했다. 투신이 말하기를, “신의 집이 운(鄖) 땅에 있는데 이곳에서 40리가 채 못 됩니다. 대왕께서는 힘을 내셔서 그곳에 가서 다시 변통하여 처리하셔야 합니다.” 했다.
조금 지나자 왕손 요우도 도착했다. 소왕이 놀라 묻기를, “그대는 중상을 입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올 수 있었소?” 하니, 왕손 요우가 말하기를, “신이 고통스러워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습니다. 불이 신을 덮치려는 순간 갑자기 어떤 사람이 신을 끌어 언덕에 오르게 했습니다. 정신이 혼미한 중에 그 사람의 말을 들으니, ‘나는 옛날 초나라 영윤을 지낸 손숙오(孫叔敖)라는 사람이오. 왕에게 가서 이 말을 전하시오. 오나라 군사들은 머지않아 스스로 물러가고 사직은 오랫동안 면면히 이어질 것이오.’ 했습니다. 그리고 소신의 어깨에 약을 발라 주었습니다. 깨어 보니 피가 멎고 통증이 진정되어서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했다. 초소왕이 말하기를, “손숙오는 운중에서 태어났으니 그의 혼령이 없어지지 않았구나.” 하며 서로 감탄해 마지않았다. 투소가 말린 양식을 꺼내어 서로 나누어 먹고, 잠윤 고가 표주박을 허리에서 풀어 물을 떠와서 초소왕에게 바쳤다. 초소왕이 투신을 시켜 성구(成臼)의 나루에 가서 배를 찾아보게 했다. 투신이 바라보니 동쪽에서 배 한 척이 오는데, 처자를 싣고 있었다. 투신이 살펴보니 그 배에 탄 사람은 바로 대부 남윤 미(藍尹亹)였다. 투신이 부르기를, “대왕께서 이곳에 있소. 배에 왕을 태우시오.” 하니, 남윤 미가 말하기를, “망한 나라의 임금을 내가 무엇 때문에 태우겠소.” 하고, 마침내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투신이 한참을 기다리다가 다시 고깃배를 발견하여 옷을 벗어 주고 겨우 배를 언덕에 붙이게 했다.
초소왕이 누이동생 계미와 함께 강을 건너 운읍(鄖邑)에 도착했다. 투신(鬥辛)의 동생 투회(鬪懷)가 초왕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아가 맞이했다. 투신이 음식을 준비시키니, 투회가 음식을 초소왕에게 바치면서 여러 번 눈으로 보았다. 투신이 이상히 여겨 즉시 그의 막내동생 투소와 함께 친히 왕을 침소에 모셨다. 밤중이 되어 칼 가는 소리가 나서, 투신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바로 투회였다. 손에 서릿발 같은 칼을 잡고 노기를 띠고 있었다. 투신이 말하기를, “아우는 칼을 갈아 무엇을 하려는가?” 하니, 투회가 말하기를, “왕을 죽이고자 하오.” 했다. 투신이 말하기를, “너는 무엇 때문에 이런 역심을 품었는가?” 하니, 투회가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아버지가 초평왕에게 충성했지만 초평왕은 간신 비무극의 참언을 듣고 아버지를 죽였소. 초평왕이 아버지를 죽였으니 나도 초평왕의 아들을 죽여서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안 된다는 것이오?” 했다. 투신이 노하여 꾸짖기를, “임금은 하늘과 같다. 하늘이 사람에게 재앙을 내렸는데 사람이 감히 원수를 갚겠느냐?” 하니, 투회가 말하기를, “임금이 나라가 있으면 군주가 되지만, 지금은 나라를 잃었으니 원수가 됩니다. 원수를 보고 죽이지 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했다. 투신이 말하기를, “옛말에 원한은 그 자손에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 왕이 또한 부왕의 잘못을 뉘우치고, 우리 형제들을 불러 임용했는데 오늘 그가 위험에 처한 것을 틈 타 죽인다면 하늘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만일 그런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너를 죽이겠다,”라고 했다.
투회가 칼을 품고 문을 나가면서 원통해하기를 마지않았다. 초소왕이 문밖에서 소리쳐 꾸짖는 소리를 듣고 옷을 걸쳐 입고 엿들어서 그 까닭을 상세히 알고, 마침내 운읍에 유숙할 마음이 없어졌다. 투신과 투소가 자기(子期)와 상의하여 마침내 왕을 모시고 북쪽으로 수(隨)나라로 달아났다. 한편 자서(子西 ; 공자 신)는 노보강(魯洑江) 가에서 지키다가 영도가 이미 함락되고 초소왕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 사람들이 흩어질까 걱정되어 이에 자신이 왕의 복장에 왕의 수레를 타고 스스로 초왕이라고 칭하며 비설(脾泄)에서 나라를 세워 사람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초나라 백성들이 오나라 난리를 피하여 그를 의지하며 살았다. 이윽고 초소왕이 수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에게 초소왕이 있는 곳을 분명하게 알린 후에 자신도 수나라로 가서 초왕을 따랐다. 오원은 끝내 초소왕을 붙잡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합려에게 말하기를, “초왕을 붙잡지 못했으니 초나라를 멸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원컨대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혼군 초왕의 자취를 찾아서 그를 잡아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합려가 허락했다. 오원이 곧장 쫓아가며 찾다가 초소왕이 수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수나라로 가서, 수나라 군주에게 편지를 보내 초왕을 붙잡아 보내라고 요구했다.
필경 초소왕이 어떻게 화를 면할까? 다음 회를 보면 플릴 것이오.
제77회: 신포서가 진나라 조정에서 울어 군사를 빌리고, 오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초소왕이 나라를 다시 찾다.
한편, 오원이 수나라의 남쪽 국경에 주둔하여 사람을 시켜 편지를 수나라 군주에게 보냈다. 편지의 내용에 대략 말하기를, “주나라 자손으로서 한수 부근에 있던 나라는 초나라에 의해 거의 병탄되었습니다. 오늘 하늘이 오나라를 도와서 초나라 임금에게 그 죄를 물었습니다. 만약에 초왕 진(珍)을 내놓는다면 우리 오나라와 우호를 맺고, 한수 북쪽의 땅은 모두 군주에게 돌려드리며. 우리 주군과 군주는 대대로 형제가 되어 함께 주나라 왕실을 받들 것입니다.” 했다. 수나라 군주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여러 신하를 모아 상의했다. 초나라 신하인 자기(子期)가 얼굴이 초소왕과 비슷하다면서 수나라 군주에게 말하기를, “사태가 매우 급합니다! 나를 초왕으로 가장시켜 밖으로 내보내 오나라 군사들에게 바치면 초소왕이 몸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수나라 군주가 태사를 시켜 길흉을 점치게 하니, 태사가 점괘를 바치면서 말하기를, “평지가 있으면 반드시 비탈이 있고, 가면 반드시 돌아온다. 옛것을 버리지 말고, 새것을 탐내지 말라. 서쪽 이웃은 호랑이가 되고, 동쪽 이웃은 고기가 되리라.” 했다. 수나라 군주가 말하기를, “초나라는 옛것이고 오나라는 새것이다. 귀신이 나에게 예시했다.” 하고, 즉시 사람을 오원에게 보내 거절하기를, “우리나라는 초나라에 의지해서 나라를 유지해 왔으며 대대로 초나라에 조공하기로 맹세했습니다. 초나라 임금이 만약 이곳에 온다면 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초나라 왕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오직 장군께서 살펴주십시오.” 했다.
오원이 낭와가 정나라에 있어서 초소왕도 역시 정나라로 갔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또한 정나라 사람이 태자 건을 죽였는데 아직 원수도 갚지 못했으므로 즉시 군사를 이동시켜 정나라를 쳐서 성 밖을 포위했다. 그때 정나라는 현신 유길(游吉)이 얼마 전에 죽어서 정정공이 두려워하여 죄를 낭와에게 돌리니 낭와가 자살했다. 정정공은 낭와의 시신을 오나라 진영으로 보내면서, 초나라 왕은 사실 아직 정나라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오나라 군사들은 오히려 물러가려 하지 않고 반드시 정나라를 멸망시켜서 태자 건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정나라의 여러 대부가 성을 의지하여 한번 싸워서 존망을 결정하자고 했다. 정정공이 말하기를, “우리 정나라 군마와 초나라의 군마 중에서 어느 편이 강하오? 초나라도 싸움에서 졌는데 하물며 정나라겠소?” 하고, 이에 나라 안에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능히 오나라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과인이 정나라를 나누어 그와 함께 다스리겠다.” 했다. 방을 붙인 지 사흘 만에, 그때 악저(鄂渚)에 사는 어부의 아들이 병란을 피해 정나라 도성 안에 도망해 있다가, 오나라에서 오원을 주장으로 삼았음을 듣고 이에 정정공을 찾아와 뵙고 스스로 말하기를, “제가 능히 오나라 군사들을 물러가게 할 수 있습니다.” 했다.
정정공이 말하기를, “경이 오나라 군사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전차와 군사가 얼마나 있어야 되겠소?” 하니, 어부의 아들이 대답하기를, “신에게는 한 치의 무기도, 한 말의 양식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배 젓는 노 한 개만 주시면, 제가 길에서 노래를 불러 오나라 군사가 문득 물러가게 하겠습니다.” 했다. 정정공이 믿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별다른 대책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좌우에게 명하여 노 한 개를 가져와서 주면서 말하기를, “과연 능히 오나라 군사들을 물러가게 한다면 상을 아끼겠는가?” 했다. 어부의 아들이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가서 곧바로 오나라 진영으로 가서 노를 두드리면서 노래하기를, “갈대밭 속의 사람이여! 갈대밭 속의 사람이여! 허리에는 칠성 무늬 보검을 차고, 강을 건널 때 보리밥과 생선국 먹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했다. 오나라 군사들이 그를 붙잡아서 오원에게 데리고 왔다. 그가 ‘갈대밭 속의 사람이여’ 하는 노래를 다시 부르니, 오원이 자리에서 내려와 놀라 묻기를, “그대는 누구인가?” 했다. 어부의 아들이 노를 들고 대답하기를, “장군께서는 내 손에 들려 있는 노를 보지 못하십니까? 나는 곧 악저 어부의 아들입니다.” 했다. 오원이 측은하게 생각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부친이 나로 인해 죽었소. 내가 은혜를 보답하고자 생각했으나 그 방법을 찾지 못해 한탄하고 있었소. 오늘 다행히 그대를 만났소. 그대가 노래를 불러 나를 보기를 청했으니 나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이오?” 했다.
어부의 아들이 대답하기를, “달리 바라는 바는 없습니다. 정나라 군주가 장군의 군사를 두려워하여 나라 안에 명령을 내리기를, ‘능히 오나라 군사들을 물러가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라를 나누어 함께 다스리겠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저의 부친께서 장군과 잠깐 만난 인연이 있어 오늘 장군께 정나라의 용서를 빌고자 온 것입니다.” 했다. 오원이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기를, “아! 오원에게 오늘이 있게 한 것은 모두가 어부가 강을 건너 준 덕분이라! 하늘이 저렇게 창창한데 어찌 감히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는가?” 하고, 그날로 명령을 내려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어부의 아들이 돌아와 정정공에게 보고하니, 정정공이 크게 기뻐하면서 이에 백 리의 땅을 그에게 봉했다. 정나라 백성들이 그를 칭송해 부르기를, ‘어대부(漁大夫)’라고 불렀다. 지금도 진수(溱水)와 유수(洧水) 사이에 장인촌(丈人村)이 있는데, 그 곳이 즉 어부의 아들에게 봉해진 땅이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강가 갈대밭에서 몰래 한 말로 생사가 갈라지고, 노 젓는 노래가 초나라 노래보다 강했다. 오나라 삼군은 이미 물러가고 봉토을 나누어 받았으니, 오원은 당시 강 위에서 받은 은혜를 배신하지 않았다.” 했다. 오원은 정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군사를 돌려 초나라 지경에 돌아가서 각기 군사를 나누어 지키며, 대군은 미(穈) 땅에 영채를 세우고, 사람을 보내 사방의 초나라 속국에게 항복을 권하고 긴급히 초소왕을 찾았다.
한편, 신포서(申包胥)는 영도가 함락되자 몸을 피하여 이릉(夷陵)의 석비산(石脾山) 산중으로 도망쳤다가, 오자서가 평왕의 묘를 파서 시신을 채찍질하고, 다시 초소왕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오자서에게 편지를 전했다. 그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자네는 옛날 초평왕의 신하로 북면하여 섬겼는데, 지금은 그의 시신을 욕보였으니 비록 원수를 갚는다지만 너무 심한 게 아닌가? 만물은 극에 이르면 반드시 되돌아오는 법이니, 자네는 마땅히 빨리 돌아가게. 그러지 않으면 내가 마땅히 ‘초나라를 회복시키겠다’라는 약속을 실천하겠네!” 했다. 오원이 그 편지를 받아 읽고 나서 한참 동안 말없이 신음하더니 곧 편지를 가져온 사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군무에 분주하여 답장을 쓸 수가 없다. 너의 입을 빌리니, 나를 위해 신포서에게 사례해다오. ‘충효를 둘 다 이룰 수가 없고, 나는 해가 지는데 갈 길은 멀다. 그래서 거꾸로 도리를 거슬러 시행했을 뿐이네!’”라고 했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자 신포서가 말하기를, “오자서가 기어코 초나라를 멸하려는구나. 내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다.” 했다. 신포서는 초평왕의 부인이 곧 진애공(秦哀公)의 딸이고, 초소왕은 곧 진(秦)나라 군주의 외손자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진(秦)나라에 초나라의 위급함을 풀어달라고 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포서는 밤낮으로 서쪽으로 달려서 발바닥은 부르터서 갈라지고 걸음마다 피가 흘러서 옷을 찢어 그것을 싸매었다.
신포서가 달려가 옹주(雍州)에 이르러 진애공(秦哀公)을 뵙고 말하기를, “오나라는 탐욕스럽기가 마치 큰 돼지와 같고 악독하기가 독사와 같습니다. 오랫동안 제후국들을 차츰차츰 먹으려고 초나라부터 쳐들어온 것입니다. 우리 주군께서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풀숲으로 몸을 피하시면서 특별히 신에게 명하여 위급함을 상국에 고하게 했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외손자의 정리를 생각하시어 대신 군사를 일으켜서 초나라의 위기를 구해주십시오.” 하니, 진애공이 말하기를, “진(秦)나라는 서쪽의 변두리 외딴곳에 있고, 군사는 적고 장수도 부족하여 스스로 지키기에도 겨를이 없소. 어찌 다른 사람을 위해 군사를 일으킬 수 있겠소?” 했다. 신포서가 말하기를, “초나라와 진(秦)나라는 국경이 접해 있어, 초나라가 침략을 당했는데, 진(秦)나라가 구하지 않으면, 오나라가 초나라를 멸한 다음 장차 그 화가 진(秦)나라에 미칠 것입니다. 군주께서 초나라를 존속케 한다면 또한 진(秦)나라도 공고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진(秦)나라가 초나라를 구해 진(秦)나라 편에 끌어들이면 오히려 오나라보다 세력이 낫지 않겠습니까? 만약 능히 초나라 백성들을 위무하여 나라를 존속케 하고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한다면, 초나라는 진심으로 그 덕에 감사하여 연년세세로 북면하여 진(秦)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하니, 진애공이 뜻을 정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대부는 잠시 여관에 머물러 쉬시오. 그동안 내가 군신들과 상의하여 보리다.” 했다.
신포서가 대답하기를, “우리 주군께서 풀숲에 떨어져 몸 쉴 곳도 찾지 못하고 계시는데 그 신하가 어찌 감히 여관에서 몸을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했다. 그때 진애공은 술에 빠져서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있었다. 신포서가 더욱 절박하게 구원군을 청했으나 애공은 끝내 군사를 동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신포서는 의관을 벗지 않고 진(秦)나라 조정 뜰에 서서 밤낮으로 부르짖어 통곡하여 그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와 같이하여 7일 밤낮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진애공이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초나라 신하가 그 임금의 위급함을 이렇게 지극하게 생각한단 말인가? 초나라에 이 같은 현신이 있는데도 오나라가 오히려 초나라를 멸하려고 하는구나! 과인에게는 저런 현명한 신하가 없으니 오나라가 어찌 우리나라를 그냥 둘 리 있겠는가?” 하고, 눈물을 흘리며 ‘무의(舞衣)’라는 시를 지었다. 시에 이르기를, “어찌 옷이 없다고 하는가? 그대와 같이 입으리라! 내가 군사를 일으킬 테니, 그대와 함께 원수를 무찌르리라!” 했다. 신포서가 머리를 조아려 감사한 뒤에 비로소 음식을 먹었다. 진애공이 자포(子蒱)와 자호(子虎)에게 전차 5백 대를 거느리고 신포서를 따라 초나라를 구하게 했다.
신포서가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수나라에서 구원군을 기다리기를 마치 큰 가뭄에 비를 기다리듯이 하고 있습니다. 이 신포서가 먼저 가서 우리 임금에게 알려야겠습니다. 원수들께서는 상(商)과 곡(穀)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면 5일이면 양양(襄陽)에 이를 것입니다. 거기서 남쪽으로 꺾으면 바로 형문(荊門)입니다. 나는 남아있는 초나라 군사들을 모아 석량산(石梁山) 남쪽으로 나오겠습니다. 계산해 보니 두 달 안에 서로 만날 수 있겠습니다. 오나라 군사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틀림없이 방비가 없을 것이고, 또한 군사들이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어 귀국하고 싶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의 한 부대를 깨뜨리면 자연히 무너질 것입니다.” 하니, 자포가 말하기를, “우리는 지름길을 모르니 반드시 초나라 군사가 인도해야 합니다. 대부께서는 기일을 어기지 마십시오.” 했다. 신포서가 진(秦)나라 장수들을 이별하고 밤을 새워 수나라로 가서 초소왕을 뵙고 말하기를, “소신이 진(秦)나라 구원병을 청하여, 이미 출병해 국경을 넘었습니다.” 하니, 초소왕이 크게 기뻐하며 수나라 군주에게 말하기를, “태사의 점괘에 ‘서쪽 이웃은 호랑이가 되고, 동쪽 이웃은 고기가 된다.’라고 했는데, 진(秦)나라는 서쪽에 있고, 오나라는 동쪽에 있으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고 하겠습니다.” 했다.
그때 원연(薳延), 송목(宋木) 등이 또한 초나라의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초소왕을 따라 수나라에 들어왔다. 자서(子西)와 자기(子期)도 수나라 군사들을 동원하여 일제히 출진했다. 진(秦)나라 군사는 양양에 주둔하여 초나라의 군사들을 기다렸다. 신포서는 자서(子西)와 자기(子期) 등을 이끌고 진(秦)나라 장수들과 만났다. 초나라 군사가 앞서고 진나라 군사가 뒤를 따라 진군하다가, 기수(沂水)에서 오나라 부개의 군사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자포가 신포서에게 말하기를, “대부께서 먼저 초나라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 군사와 싸우면, 우리는 마땅히 오나라 군사의 배후를 공격하겠소!” 하니, 신포서가 출전하여 부개와 겨루었다. 부개가 용기를 믿고 신포서를 없는 물건인 듯이 보았다. 약 십여 합을 겨루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자포와 자호가 진(秦)나라 군사를 몰아 대거 진격했다. 부개가 멀리 깃발에 진(秦)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서쪽의 진(秦)나라 군사가 어찌하여 여기에 왔는가?” 하고, 급히 군사를 거두었으나 태반이 꺾였다. 자서와 자기는 그 틈을 타서 50리를 추격하고 멈추었다. 부개가 도망쳐 영도에 돌아와서 오왕 합려를 뵙고, 진(秦)나라 군사의 정예함을 매우 칭찬하고 당해내기 어렵다고 했다. 합려가 두려운 기색을 띠었다.
손무가 나아가 말하기를, “군사는 흉기입니다, 잠시는 쓸 수 있으나 오래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초나라 땅은 넓고 초나라 인심을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신이 일전에 대왕께 초나라 공자 미승을 세워서 초나라 백성들을 위무하자고 청한 것은, 바로 오늘의 사태를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계책은 사자를 진(秦)나라에 보내 수호 친선을 한 후에 초소왕에게 왕위를 돌려주고, 초나라의 서쪽 변경을 떼어내서 오나라 땅으로 더하면 대왕께서 이익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초나라 궁궐을 오래 연연하여 그들과 대치하다가는 초나라 백성들이 분노하여 죽을힘을 다할 것입니다. 오나라 군사들이 교만하고 게을러지고, 거기에 호랑이나 늑대 같은 진(秦)나라 군사들까지 가세한다면 신도 만전을 보장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했다. 오원도 결코 초소왕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역시 손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합려가 장차 그것을 따르려 하자, 백비가 나와 말하기를, “우리 오나라 군사들은 동오에서 출발하여 단숨에 파죽지세로 달려와 다섯 번 싸워서 영도를 함락시켜 초나라 사직을 없애버렸습니다. 지금 진(秦)나라 군사를 한번 만나 싸워 졌다고 해서 즉시 군사를 물리려 하니 어찌하여 전에는 용맹하더니 뒤에는 겁이 많게 되었습니까? 원컨대 신에게 군사 일만 명을 주시면 반드시 진(秦)나라 군사의 갑옷 한 조각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만약 이기지 못한다면 달게 군령을 받겠습니다.” 하니, 합려가 그 말을 장하게 여겨 허락했다.
손무와 오원은 군사를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힘써 말렸지만, 백비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영성을 나갔다. 두 나라 군사들이 군상(軍祥)에서 마주쳐서 진을 쳤다. 백비가 멀리 바라보고 초나라 군사의 대오가 정비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즉시 북을 울리고 전차를 몰아 돌격했다. 바로 자서를 보자 크게 꾸짖기를, “너는 만 번 죽었다가 아직도 찬 재에서 불을 지피려고 하느냐?” 하니, 자서도 역시 꾸짖기를, “나라를 배반한 반역자야! 오늘 무슨 낯으로 나를 보느냐?” 했다. 백비가 대로하여 극을 비껴들고 자서에게 달려들었다. 자서 역시 들고 있던 과를 휘두르며 서로 맞섰다. 싸운 지 몇 합도 되지 않아 자서가 거짓 패하여 달아났다. 백비가 추격하여 2리도 가기 전에 왼쪽에서 심제량(沈諸梁)의 부대가 달려 나오고, 오른쪽에서 원연의 부대가 달려 나왔다. 이어서 진(秦)나라 장수 자포와 자호가 생기가 팔팔한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 진영의 가운데를 꿰뚫어 들어왔다. 세 갈래 군사들이 오나라 군사를 세 부분으로 잘랐다. 백비가 좌충우돌했으나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오원이 이끄는 군사가 도착하여 한바탕 무찌르고 백비를 구출했다. 백비가 이끌고 온 일만 명의 군사들은 남은 사람이 이천 명이 넘지 않았다. 백비가 스스로 죄수가 되어 오왕 앞으로 나가 죄를 기다렸다.
손무가 오원에게 말하기를, “백비는 사람됨이 공이 있음을 자임하니, 후일에 반드시 오나라의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번의 패전을 이유로 군령에 따라 그를 참하시오.”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그가 비록 군사를 잃은 죄를 지었다고 하나, 전날에 세운 공이 적지 않습니다. 하물며 적이 눈앞에 있는데 대장 한 사람을 참할 수는 없습니다.” 했다. 마침내 오왕에게 백비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뢰었다. 진(秦)나라 군사가 영도에 바싹 다가오니, 합려가 부개에게 명하여 공자 산과 함께 영성을 수비하라 하고, 자기는 대군을 이끌고 기남성(紀南城)에 주둔했다. 오원과 백비는 마성과 여성에 나누어 주둔하여 기각지세를 이루어 진(秦)나라 군사와 대치했다. 또 사자를 당나라와 채 나라에 보내어 지원군을 보내라고 했다. 초나라 장수 자서가 진나라 대장 자포에게 말하기를, “오나라가 우리 영도를 그들의 소굴로 삼고 견고한 성벽에 의지하여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데, 만약 당나라와 채나라가 다시 도우면 우리는 대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틈을 타서 당나라에 군사를 치는 게 낫습니다. 당나라가 함락되면 채나라 사람이 틀림없이 두려워하여 스스로 지킬 것이니, 우리는 오나라 군사들을 전력으로 칠 수 있습니다.” 했다. 자포가 그 계책이 옳다고 여겼다. 이에 자포는 자기(子期)와 함께 군사를 나누어 당나라 도성을 습격하여 당성공을 죽이고 당나라를 멸했다. 채애공이 두려워하여 감히 군사를 내어 오나라를 돕지 못했다.
한편, 부개는 초나라를 점령하는 데 일등의 공이 있다고 자부했으나, 기수에서 한번 패전했다고 영도를 협력해 지키라는 오왕의 명령을 받고 마음속이 답답하여 즐겁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왕의 군사와 진나라 군사가 승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대치한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생각하기를, “오나라의 왕위 제도는 형이 죽으면 아우에게 전하게 되어있으니, 내가 응당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왕이 그 아들 파(波)를 태자로 삼았으니, 내가 왕이 될 수는 없다. 왕이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여 나라 안이 텅 빈 이때를 타서 내가 몰래 귀국하여 왕이라 칭하고 왕위를 빼앗는다면 어찌 먼 후일에 왕위를 서로 다투어 이기지 못하겠는가?” 하고, 즉시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영도의 동문을 빠져나가 한수를 건너 귀국했다. 부개가 거짓으로 일컫기를, “합려의 군사가 진(秦)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어서 내가 마땅히 다음 왕위를 잇고자 한다.” 하고, 마침내 스스로 오왕이라고 자칭했다. 그의 아들 부장(夫臧)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회수에 웅거하여 오왕 합려의 귀로를 막게 했다. 오나라 세자 파(波)와 전의(專毅)가 변란을 듣고 성에 올라 방어하고 부개를 성에 들이지 않았다. 부개는 즉시 사자를 삼강(三江)을 경유하여 월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동원하여 오나라 도성을 협공하여 일이 성공하면 오나라의 다섯 개 성을 떼어 주겠다고 설득하게 했다.
한편, 합려는 진(秦)나라 군사가 당나라를 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바로 여러 장수들을 소집하여 전쟁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려고 했다. 갑자기 공자 산이 보낸 사자가 도착하여 보고하기를, “부개가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휘하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부개의 이번 행동은 틀림없이 반역하기 위해서입니다.” 했다. 합려가 말하기를,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부개는 한 용감한 사내이니 염려할 게 없습니다. 걱정되는 일은 월나라 사람이 혹 변란을 듣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빨리 돌아가시어 우선 내란을 평정하십시오.” 했다. 합려가 이에 손무와 오자서를 영도로 돌아가 지키게 하고, 자기는 백비와 함께 배로 물길을 따라 내려갔다. 한수를 건너자 태자 파가 급한 편지를 보내 고하기를, “부개가 반역을 일으켜 왕이라 칭하고 다시 월나라 군사와 연결하여 쳐들어와서, 오나라 도성이 위태롭기가 아침저녁에 달렸습니다.” 했다. 합려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오자서가 예측한 바에서 벗어나지 않는구나.” 하고, 즉시 사자를 영도에 보내어 손무와 오원에게 회군하도록 했다. 한편으로 밤새도록 달려 오나라로 돌아가면서 강 연안의 장수와 군사들에게 전하기를, “부개를 버리고 돌아오는 자는 본래 직위를 회복시켜 주겠지만, 부개가 잡힌 뒤에 항복한 자는 모두 죽이겠다.”라고 했다. 회수 가의 군사들은 모두 창을 거꾸로 들고 달려와 귀순했다.
부장(扶臧)은 곡양(谷陽)으로 달아나 돌아갔다. 부개(夫概)는 백성들을 몰아서 갑옷을 입혀 군사를 보충하려고 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왕 합려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달아나 숨어 버렸다. 부개는 이에 홀로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합려와의 싸움에 나섰다. 합려가 묻기를, “나는 너를 수족으로 생각하여 서로 의지했거늘 어찌하여 반역을 일으켰느냐?” 하니, 부개가 대답하기를, “너는 왕료를 시해하고 반역하지 않았느냐?” 했다. 합려가 성을 내어 백비에게 시키기를, “나를 위해 저 반적을 잡아오시오!” 했다. 백비와 부개가 싸운 지 몇 합이 되지 않아서 합려가 대군을 휘몰아 바로 진격했다. 부개가 비록 용감했지만 중과부적을 어찌하랴. 대패하여 달아났다. 부장이 강에서 배를 마련하여 부개를 건너게 하여 송나라로 달아났다. 합려는 백성들을 위무하면서 오나라 도성에 돌아왔다. 태자 파의 영접을 받아 입성하여 월나라를 막을 계책을 상의했다. 한편 손무는 오왕으로부터 회군하라는 조서를 받고 바로 오원과 상의하는데, 갑자기 보고하기를, “초나라 군중에서 어떤 사람이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했다. 오원이 편지를 가져오게 하여 보니 신포서가 보낸 편지였다. 그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자네의 군신들이 영도에 주둔한 지 철이 세 번이나 바뀌었으나, 초나라를 완전히 평정하지 못했다! 이것은 하늘이 초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으려는 뜻임을 또한 알 수 있다. 자네가 능히 초나라를 엎어버리겠다는 말을 실천하고 있다면, 나 역시 초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실천하고 있음이라! 친구의 의리상 서로 뜻한 바를 이루었으니 서로 해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네. 그대가 오나라의 위세를 다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진(秦)나라의 힘을 다하지 않겠네.” 했다.
오원이 신포서의 편지를 손무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오나라의 수만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로 쳐들어와서 종묘를 불사르고 사직을 무너뜨렸으며, 죽은 평왕의 시체를 매질하고 살아남은 초나라 군신들의 처첩들을 욕보였습니다. 옛날부터 신하였던 자가 원수를 갚은 일로 이렇게 통쾌한 일은 없었습니다. 또한 진(秦)나라 군사가 비록 우리 군사를 패배시켰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큰 손실이 아닙니다. 병법에 ‘할 수 있을 때 나아가고 어려움을 알면 물러서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초나라가 우리의 다급함을 모르고 있으니 물러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손무가 말하기를, “우리가 그냥 물러간다면 초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미승(羋勝)의 귀국을 청하지 않습니까?”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좋은 생각입니다.” 하고, 즉시 신포서에게 편지를 써서 이르기를, “평왕이 아무 죄도 없는 아들을 쫓아내고, 죄 없는 신하들을 죽여서, 내가 실로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여기에 이르렀네. 옛날에 제환공은 형(邢)나라를 세워 주고 위(衛)나라를 세워주었네. 그리고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세 번이나 진(晉)나라 군주를 세워주었네. 그러고도 그들은 땅을 탐하지 않았으므로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네. 내가 비록 재주가 없으나 잠깐 그들의 의리를 들어 알고 있네. 지금 태자 건의 아들 미승이 오나라에서 근근이 살고 있으면서 한 뼘의 땅도 없네. 초나라가 만약 미승을 귀국시켜 죽은 태자의 제사를 받들게 해 준다면 내가 감히 물러나서 그대의 뜻을 이루게 해 주지 않겠는가!” 했다.
신포서가 오원의 편지를 받아 보고 자서(子西, 공자 申)에게 말하니, 자서가 말하기를, “옛 태자의 아들을 봉하는 일은 바로 내 뜻과 같소.” 하고, 즉시 사자를 오나라에 보내 미승을 데려오려고 하자, 심제량(沈諸梁)이 간하기를, “태자는 이미 폐위되었고 미승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원수를 길러서 어찌 나라에 해를 끼치려 하십니까?” 하니, 자서가 말하기를, “미승은 필부일 뿐이오. 무슨 해를 끼칠 수 있겠소?” 했다. 결국 초소왕의 명으로 그를 불러서 큰 고을에 봉할 것을 허락했다. 초나라의 사자가 이미 출발하자 손무와 오원은 즉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무릇 초나라 부고의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돌아갔으며, 또한 초나라 변경의 1만 호의 백성들을 오나라의 빈 땅에 이주시켰다. 오원은 손무를 물길로 먼저 가게 하고, 자기는 육로를 택하여 역양산(歷陽山)을 지나면서 동고공(東皐公)을 찾아 은혜를 갚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초가집은 모두 없어졌다. 다시 사람을 용동산(龍洞山)에 보내어 황보눌(皇甫訥)을 찾았으나 역시 아무런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오원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진실로 고고한 처사들이로구나!” 하고, 그곳에 두 번 절하고 떠났다. 오원이 소관(昭關)에 이르렀으나 지키는 초나라 군사들은 없었다. 오원은 군사들에게 소관을 헐어버리라고 명했다.
오원이 다시 율양(溧陽)의 뇌수(瀨水) 가를 지나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이곳에서 배를 곯아 어려울 적에 한 여자에게 걸식을 했다. 그 여자가 국과 밥을 나에게 주고 마침내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내가 그때 바위 위에 글을 새겼는데 아직도 글씨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고, 오원이 좌우의 부하들에게 흙을 걷어 내라고 하니, 그 바위 위에 글씨가 없어지지 않고 뚜렷이 남아있었다. 오원이 천금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했으나 그 여자의 집을 알 수가 없었다. 즉시 군사들에게 천금을 뇌수 강물에 던지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여자가 만일 나를 알아본다면 내가 그대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음을 알 것이라.” 했다. 오원이 1리를 가기도 전에 길옆에서 한 노파가 군사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통곡했다. 군사들이 잡으려고 하며 묻기를, “할머니는 어찌하여 그리 슬피 곡을 하는가?” 하니, 노파가 말하기를, “나에게 서른이 넘도록 시집을 못 간 딸이 있었는데, 옛날에 뇌수에 빨래하러 갔다가 우연히 한 곤궁한 군자를 만나 문득 그에게 밥을 주고는 그 일이 남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뇌수에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내가 들으니 그 밥을 얻어먹은 사람이 곧 초나라의 망명객 오자서라고 했습니다. 오늘 오자서 장군이 싸움에 이겨서 돌아온다고 하는데, 내 딸은 그 보답도 받지 못하고, 헛되이 죽었으니, 그래서 슬피 울고 있습니다.” 했다.
군사들이 그 노파에게 말하기를, “우리 대장님이 바로 오자서 장군이요. 천금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려 했으나 할머니의 집을 찾지 못하여 그 금을 강물 속에 던졌습니다. 어찌 가서 그 금을 가지지 않습니까?” 했다. 노파가 마침내 금을 건져서 돌아갔다. 지금도 그 물가를 투금뢰(投金瀨)라고 한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투금뢰의 강물은 출렁출렁 흘러가고, 망명객이 은덕을 보답한 것을 잊지 않는 듯하구나! 나이 삼십이 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지만, 꽃다운 이름은 오자서와 함께 길이 전해지도다.” 했다. 월나라 군주 윤상은 손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나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손무가 용병술에 능한 것을 알아 오나라 군사와 싸워 봐야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그 역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월과 오는 적국이다.” 하고. 즉시 스스로 월왕이라고 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합려는 초나라를 깨뜨린 공을 논하여 손무를 으뜸으로 쳤다. 그러나 손무는 벼슬 살기를 원치 않고 굳이 나부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오왕 합려가 오원을 시켜 말렸지만, 손무가 오원에게 가만히 말하기를, “장군은 천도를 아십니까? 더위가 가면 추위가 오고 봄이 지나면 가을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왕은 그 강성함을 믿고 사방에 근심이 없어졌으니 교만하고 즐기는 마음이 반드시 생겨날 것입니다. 무릇 공을 이루고서도 물러나지 않으면 장차 후환이 있게 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온전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장군도 온전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하니, 오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손무는 즉시 표연히 떠나면서 오왕에게서 받은 황금과 비단을 마차에 싣고 가다가 길가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그 후에 그가 어떻게 생애를 마쳤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관이 찬양하여 이르기를, “손무의 재주는 오원보다 빛났고, 군법을 두 후궁에게 행하여 위엄이 삼군을 떨게 했다. 많은 군사를 한 사람처럼 제어하며, 적을 헤아리기를 귀신처럼 했다. 초나라를 원정하여 큰 뜻을 펼쳤으나, 진나라 군사에게 이기지 못한 것은, 지혜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계책을 모두 행하지 않아서였다. 벼슬도 받지 않고, 물러날 때와 있을 때를 알았으며, 세상에 나와서 공을 세워 몸을 빛내고, 이름을 남긴 뒤에 몸은 물러가니, 그가 쓴 병법 13편은 병가들의 경전이 되었다.”라고 했다. 합려는 즉시 오원을 상국에 임명하여, 제나라의 관중과 초나라의 자문의 예를 따라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서(子胥)라고 불렀다. 백비를 태재로 삼고 오자서와 함께 국정을 맡아보도록 했다. 다시 오나라 도성의 창문(閶門)을 파초문(破楚門)이라고 고쳤다. 또 오나라의 남쪽 변경에 돌로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여, 이름을 석문관(石門關)이라 칭하여 월나라의 침공에 대비했다. 월나라의 대부 범려(范蠡)도 역시 절강(浙江) 어귀에 성을 쌓아 오나라의 공격에 대비하게 하고는 그곳의 이름을 굳게 지킨다는 뜻으로 고릉(固陵)이라 했다. (이 일은 주나라 경왕 15년의 일이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초나라 자서(子西)와 자기(子期)는 다시 영도에 입성하여 초평왕의 해골을 수습하여 장사지내고, 종묘와 사직을 새로 지었다. 또한 신포서를 보내어 수군을 거느리고 수나라에서 초소왕을 모셔 오게 했다. 초소왕이 마침내 수나라 군주와 회맹을 하여 침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수나라 군주가 친히 초소왕이 배에 오르는 것을 전송한 뒤에 돌아갔다. 초소왕이 큰 강 가운데에 이르러 배의 난간에 기대어 사방을 둘러보면서 지난날의 고생과 오늘 다시 이 강을 건너느라 중류에 있게 된 것을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갑자기 강물 위에 떠 있는 물건을 하나 보았다. 크기는 말만 하고 색은 붉었다. 초소왕이 선원을 시켜 그 물건을 건져 올려서 여러 신하에게 물건의 이름을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허리에 찬 칼을 뽑아 그 물건을 자르자 안에는 오이와 비슷한 속이 들어 있어 맛을 보니 아주 달았다. 이에 좌우에 두루 나누어주며 말하기를, “이 이름 없는 과일을 알려면 박식한 선비를 기다려야 할 것 같소.” 했다. 하루가 지나지 않아 운중(雲中)에 이르렀다. 초소왕이 한탄하기를, “이곳은 과인이 도적을 만났던 곳이니 그냥 지나갈 수는 없다.” 했다.
초소왕은 곧 배를 강 언덕에 대도록 하고, 투신(鬥辛)을 시켜 인부를 독려하여 운(雲)과 몽(夢) 사이에 작은 성을 쌓게 하여 그곳을 지나가는 나그네가 묵을 수 있도록 했다. 지금도 운몽현에 땅 이름이 초왕성(楚王城)이라는 곳이 있는데, 바로 그 옛터이다. 자서와 자기 등이 영도에서 5십 리 떨어진 곳까지 나가 초소왕을 영접하고, 군신이 서로 위로하였다. 영도성에 당도하니 성밖에 백골이 널려있고 성안의 궁궐은 이미 그 태반이 무너져서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슬퍼져서 눈물을 흘렸다. 곧 궁궐로 들어가 그 모친 백영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모자가 서로 눈물을 흘렸다. 초소왕이 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이 같은 큰 변란을 겪었습니다. 종묘사직은 무너지고 능묘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이 원한을 어느 때나 갚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백영이 말하기를, “오늘 복위하여 마땅히 먼저 상벌을 밝히고 그런 다음 백성들을 쓰다듬고 보살펴서 서서히 기력을 키우면 회복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했다. 초소왕이 두 번 절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날은 감히 침소에 들지 못하고 재궁(齋宮)에서 잤다. 다음 날 초소왕은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고 귀국을 고했으며 분묘를 살펴본 뒤에 궁전에 올라 백관의 축하를 받았다.
초소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옳지 않은 사람들을 임용하여 거의 나라가 망할 뻔했소. 만약에 경들이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태양을 다시 볼 수 있었겠소? 나라를 잃을 뻔하게 한 것은 과인의 죄이고, 나라를 다시 찾은 것은 경들의 공이요.” 했다. 여러 대부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감히 그렇지 않다고 했다. 초소왕이 먼저 잔치를 열어 진(秦)나라 장수를 위로하고 그 군사들을 후하게 호궤하여 귀국하게 했다. 그런 후에 논공행상을 하여, 자서(子西)를 영윤으로 삼고, 자기(子期)를 좌윤으로 삼았으며, 신포서는 진(秦)나라에 가서 군사를 빌려 온 공이 크므로 우윤(右尹)을 삼으려 했다. 신포서가 말하기를, “신이 진나라에 가서 군사를 빌려 온 것은 왕을 위해서였지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왕께서 이미 환국을 하셨으니 신의 뜻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감히 그로 인해 이익을 취하겠습니까?” 하며, 고사하고 받지 않았다. 초소왕이 다시 강권하자 신포서는 즉시 그의 처자들을 데리고 도망쳐 버렸다. 신포서의 처가 말하기를, “당신은 온 힘을 다해 진나라 군사를 빌려와 초나라를 안정시켰으니 상을 받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도망칩니까?” 하니, 신포서가 말하기를, “나는 처음에 친구의 의리 때문에 오자서의 계획을 발설하지 않아서 결국은 오자서가 초나라를 깨뜨리게 한 것은 나의 죄요, 죄를 짓고도 공이 있는 체하는 것은 사실 나의 수치요!” 했다. 마침내 신포서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리고 죽을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초소왕이 사람을 보내어 불러오려고 했으나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살던 동네를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고 표창했다.
그래서 초소왕은 왕손요우(王孫繇于)를 우윤에 임명하면서 말하기를, “운중에서 나를 대신하여 과에 찔린 것을 감히 잊을 수 없소.” 했다. 그밖에 심제량(沈諸梁), 종건(鐘建), 송목(宋木), 투신(鬪辛), 투소(鬪巢), 원연(薳延)등은 모두 작위를 올리고 봉읍을 더하여 주었다. 또한 투회(鬪懷)를 불러 상을 주려고 하자, 자서가 말하기를, “투회는 왕을 시해하려고 했던 자이니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거늘 오히려 상을 주려고 하십니까?” 하니, 초소왕이 말하기를, “그가 자기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으니 그는 효자입니다. 능히 효자가 될 수 있다면 어찌 충신이 되기가 어렵겠습니까?” 하고, 투회도 역시 대부로 삼았다. 남윤미(藍尹亹)가 초소왕을 뵙겠다고 하자 초소왕은 옛날에 성구(成臼)에서 자기를 배에 태우지 않았던 원한을 생각하고 장차 잡아 죽이려고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너는 과인을 길에다 버려두고 갔으면서 지금 감히 다시 오겠다니 무엇 때문인가?” 했다. 남윤미가 대답하기를, “낭와는 오직 덕을 버리고 원한을 샀다가 그 때문에 백거의 싸움에서 패했습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본받으려 하십니까? 대저 성구에서 제가 탔던 배와 지금 영도 궁궐의 편암함이 어느 것이 더 안락합니까? 신이 성구에서 대왕을 버린 것은 왕께 경계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뵈려고 하는 것은 대왕께서 잘못을 깨닫고 계신지 어떤지를 보려는 것입니다. 대왕께서 나라를 잃은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신이 왕을 태우지 않은 죄를 기억하신다면 신은 죽어도 아깝지 않으나 아까운 것은 초나라의 종묘사직입니다.” 했다.
자서(子西)가 아뢰기를, “남윤미의 말이 직언이니 왕께서는 마땅히 용서하시고 지난날의 실패를 잊지 마십시오.” 하니, 초소왕은 이에 남윤미의 알현을 허락하고 옛날과 같이 다시 대부로 삼았다. 초나라의 신하들이 초소왕의 도량이 넓고 깊은 것을 보고 모두가 기뻐하였다. 초소왕의 부인이 스스로 합려에게 몸을 허락하여 그 남편 보기가 부끄러워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때 월나라가 바야흐로 오나라와 분쟁이 잦았는데, 초소왕이 돌아와 나라를 안정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축하하고 인하여 월왕의 종실 여자를 초왕에게 바쳤다. 초소왕이 그 여자를 후처로 삼았다. 월나라 여자가 아주 현명하고 덕이 있어 초소왕이 예를 갖추어 대했다. 초소왕이 여동생 계미(季羋)가 환난을 같이 한 것을 생각하여 좋은 짝을 골라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다. 계미가 말하기를, “여자의 도리는 외간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종건이 항상 나를 업고 다녔으니 그가 즉 나의 지아비입니다. 감히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겠습니까?” 했다. 초소왕이 이에 계미를 종건에게 출가시키고 종건을 사락대부(司樂大夫 ; 음악 담당)로 삼았다. 다시 옛 재상 손숙오의 영혼이 자기를 도왔다고 생각해서 사람을 보내 운중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자서(子西)는 영도가 전란에 대부분이 파괴되고 또한 오나라 군사들이 오랫동안 주둔하여 영도 안의 길에 익숙해 있다고 생각하여 약(鄀) 땅에 성을 쌓아 궁궐을 축조한 후에 종묘와 사직을 다시 세우고 천도하여 신영(新郢)이라고 불렀다.
초소왕이 신궁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여러 신하와 잔치를 벌였다. 술이 거나하게 되었을 때 악사 호자(扈子)는 초소왕이 지금의 안락에 젖어 옛날의 고생스러움을 잊어버리고 다시 초평왕의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초소왕의 앞에서 거문고를 가슴에 안고 아뢰기를, “신이 ‘궁육(窮衄 ; 코피가 터짐)’이라는 곡을 아는데 대왕을 위해 한번 연주해 보고자 합니다.” 하니, 초소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듣기를 원하노라.” 했다. 호자가 거문고를 당겨 타기 시작하니 그 소리가 매우 처량했다. 그 노랫말에 이르기를, “왕이시어, 왕이시어! 왜 어그러지고 못났던가? 종묘사직도 돌보지 않고 간신의 말을 들었구나. 간신을 등용하여 많은 신하를 죽이고, 충신과 효자를 주멸하여 기강이 무너졌습니다. 두 사람이 동쪽으로 달아나 오나라로 넘어가니, 오왕이 애통해하여 원통한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쳐들어오니, 오자서, 백비, 손무가 결행했습니다. 다섯 번 싸워 영도가 함락되고 왕은 달아나고, 오나라 군사들이 초나라 궁궐을 유린했습니다. 선왕의 해골은 파헤쳐지고, 썩은 시체가 매질 당한 치욕은 씻기 어렵습니다. 종묘와 사직은 거의 멸망될 뻔하였고, 왕께서는 죽음을 피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넜습니다. 대신들과 선비들은 슬픔에 젖어 백성은 피눈물을 흘렸고, 오군은 비록 물러갔으나 두려움은 끝나지 않았으니, 원컨대 왕께서는 나랏일에 힘쓰고 충신들을 위무하시어, 더러운 참언이 충신들을 해칠 수 없도록 해주십시오.” 했다.
초소왕은 거문고 곡조의 진정(眞情)을 깊이 이해하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호자가 거문고를 거두고 층계 밑으로 내려가자 초소왕이 연회를 끝마쳤다. 이때부터 소왕은 아침 일찍 조회를 열어 저녁 늦게 파했으며 국정에 전념하였다. 형벌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였으며, 군사를 양성하여 무술을 훈련하였고, 다시 변경의 관문을 수리하여 군사들을 보내 엄하게 지켰다. 미승이 오나라에서 돌아오자 초소왕은 그를 백공(白公)에 봉하고 성을 쌓아 백공성(白公城)이라 부르고 마침내 백씨를 성씨로 하여 그 종족들이 모여 살게 했다. 부개가 초소왕이 옛날의 원한에 괘념치 않는다는 말을 듣고 송나라에서 오니 초소왕이 그 용기를 알고 그를 당계(堂谿)에 봉하고 당계씨라 불렀다. 자서(子西)가 초나라의 재난은 모두 채나라와 당나라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여 당나라는 이미 멸망시켰으나, 채나라는 있었으므로 채나라를 정벌하여 원수 갚기를 청했다. 초소왕이 말하기를, “나랏일이 겨우 조금 안정되었는데, 과인이 감히 백성을 더 괴롭힐 수 없소.” 했다. <춘추(春秋)>에 전하기를, 초소왕 10년에 피난을 떠났다가, 11년에 초나라에 돌아왔다. 20년에 이르러 비로소 군사를 일으켜 돈(頓)나라를 멸하고 돈나라 군주 장(牂)을 사로잡았다. 21년에 호(胡)나라를 멸하고 호나라 군주 표(豹)를 사로잡아 옛날에 그가 진(晉)나라를 따라 초나라를 침입한 행위에 대한 원수를 갚았다. 22년에 채나라를 포위하고, 오나라를 따라 초나라의 영도를 공격한 죄를 묻자 채소후가 항복을 청했다. 초소왕이 그 나라를 강(江)과 여수(汝水) 사이로 이주시켰다. 초소왕은 중간에 10년 동안 백성들을 휴식시켜 힘을 길렀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킬 때마다 공을 이루고 초나라를 부흥시켰다. 마침내 담로검(湛盧劍)이 스스로 초소왕을 찾아오고, 강을 건널 때 이름을 알지 못했던 평실(萍實)이라는 과일을 얻은 상서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다음 일을 알고 싶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제78회: 협곡의 회맹에서 공자가 제나라의 무례를 물리치고, 세 도시의 성을 낮추어 명망이 있는 사람을 처형하다.
한편, 제경공은 진(晉)나라가 초나라를 정벌할 수 없어 천하의 인심이 별처럼 흩어지는 것을 보고, 자기가 진(晉)나라를 대신하여 패자가 되려는 마음이 더욱 급해져서, 즉시 위(衛)나라와 정(鄭)나라를 규합하여 스스로 맹주라고 칭했다. 제경공은 전날에 계손의여(季孫意如)에게 쫓겨난 노소공(魯昭公)을 다시 노나라 군주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계손의여가 완강하게 거부하며 따르지 않자, 노소공은 다시 진(晉)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진(晉)나라의 대신 순력(荀躒)이 계손의여로부터 뇌물을 받고 역시 노소공을 노나라 군주로 들이지 않았다. 노소공은 나라 밖에서 객사했다. 계손의여가 마침내 태자 연(衍)과 그 동모제 무인(務人)을 폐하여 쫓아내고 노소공의 서자인 공자 송(宋)을 군주로 세웠다. 이가 노정공(魯定公)이다. 계손씨가 진(晉)나라의 순력에게 뇌물을 바치고 마침내 진(晉)나라를 섬기고 제나라를 섬기지 않았다. 제경공이 대로하여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신하인 국하(國夏)를 장수로 삼아 여러 번 노나라 영토를 침략했다. 그러나 노나라는 반격할 힘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계손의여가 죽고 그 아들 계손사(季孫斯)가 그 뒤를 이었는데, 그가 계강자(季康子)다. 말하자면 노나라는 계손씨(季孫氏),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등 세 집안이 노소공 때부터 이미 노나라를 삼분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가신을 써서 나라를 다스렸으므로 노나라 군주는 공실의 신하가 없었다. 이에 가신들이 또한 세 대부의 권력을 빼앗아 자기들 마음대로 휘둘러 그 주인들을 압도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계손사(季孫斯), 맹손무기(孟孫無忌), 숙손주구(叔孫州仇)의 세 집안이 비록 솥발처럼 나란히 서 있었지만, 고을 원이 각각 성을 차지하여 자기들 사유물로 만들어서, 세 집안의 명령이 행해지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계손씨의 집안 고을은 비(費)였는데, 그 고을 원은 공산불뉴(公山不狃)였다. 맹손씨의 집안 고을은 성(成)이었고, 그 고을 원은 공렴양(公斂陽)이었다. 숙손씨의 집안 고을은 후(郈)였고, 그 고을 원은 공약막(公若藐)이었다. 세 집안의 고을은 성벽을 높이 쌓아 아주 견고하여 곡부의 도성과 같았다. 그 세 고을 원 중에서 공산불뉴가 가장 세력이 크고 멋대로 했다. 또 그에게 가신 한 명이 있었는데, 이름이 양호(陽虎)이고 자는 화(貨)였다. 그는 날 때부터 어깨가 수리처럼 벌어졌고 넓은 이마에 키가 아홉 자가 넘었으며, 힘이 장사였고 지모도 출중했다. 계손사(季孫斯)가 처음에 그를 심복으로 삼아 자기 집안의 집사로 삼았으나, 뒤에 점점 계씨의 집안일을 전담하여 자기 마음대로 권세를 부리고 은혜를 베풀었다. 계손씨들은 도리어 양호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계손씨는 안으로 가신의 지배를 받고, 밖으로 제나라의 침략을 받았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소정(小正) 벼슬의 묘(卯)라는 자가 있었는데 위인이 박학하고 기억력이 비상했으며, 교묘한 말로 말을 잘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문인(聞人 ; 명망이 있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세 집안 사람들은 그를 의지하여 존중했다. 소정묘(小正卯)는 면전에서 옳다고 하고 등을 돌리면 그르다고 하여 표리가 부동하게 행동했다. 세 집안의 사람들을 만나면 군주를 잘 보좌한 공로를 칭송하고, 양호(陽虎) 등을 만나면 군주의 세력을 강하게 하고 세 집안의 세력을 억제해야 한다고 했다. 세 집안의 가신들에게 노소공을 끼고 세 집안을 호령하라고 사주하여, 그들 상하를 마치 물과 불처럼 서로 용납하지 못하도록 부추겼으나,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을 듣고 즐거워만 했지, 아무도 그의 간교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속은 그렇다 치고, 맹손무기(孟孫無忌)는 곧 중손확(仲孫玃)의 아들이고 중손멸(仲孫蔑)의 손자였다. 중손확이 살아 있었을 때 노나라 공중니(孔仲尼)의 이름을 사모하여, 그 아들 무기를 공중니에게 보내 예(禮)를 배우게 했다. 그 공중니(孔仲尼)는 이름이 구(丘)였고, 그 부친 숙량흘(叔梁紇)은 일찍이 추읍(鄒邑)의 대부가 되어, 바로 핍양성(偪陽城) 싸움에서 현가식 성문을 두 손으로 받쳐 올렸던 용사였다. 숙량흘은 노나라 시씨(施氏)를 아내로 삼았으나 딸만 많이 낳고 아들은 낳지 못했다. 그 첩이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 아들을 맹피(孟皮)라고 했다. 맹피가 발에 병이 나서 폐인이 되었다. 이에 숙량흘이 안씨(顔氏) 집안에 구혼했다.
안씨에게 딸이 다섯 있었는데 모두 시집을 가기 전이었다. 안씨가 숙량흘이 늙은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면서 딸들에게 묻기를, “누가 추대부에게 출가하겠느냐?” 하니, 딸들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장 어린 딸을 징재(徵在)라고 불렀는데, 징재가 응하기를, “여자의 도리는 집에 있을 때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오직 아버지의 명을 따를 뿐인데 어찌하여 물으십니까?” 했다. 안씨가 징재의 말을 기특하게 여겨 즉시 그녀를 숙량흘에게 시집보냈다. 이미 징재가 숙량흘에게 시집갔으나 부부가 아들이 없어 걱정했다. 그래서 함께 니산(尼山)의 골짜기에 기도하러 갔다. 징재가 니산에 오를 때 초목의 잎들이 모두 일어서더니, 기도를 마치고 내려올 때는 초목의 잎들은 모두 밑으로 쳐졌다. 그날 밤 징재가 꿈을 꾸는데, 흑제(黑帝)가 나타나서 불러 당부하기를, “너는 성인(聖人) 아들을 둘 것이다. 산달이 다가오거든 반드시 공상(空桑)에서 낳아야 한다.” 했다. 징재가 꿈에서 깨어나서, 태기가 있었다. 하루는 징재가 황홀한 중에 꿈을 꾸니, 노인들 다섯이 뜰에 줄을 지어서 스스로 말하기를 ‘다섯 별의 정령’이라고 했다. 그들은 짐승 한 마리를 끌고 있었는데, 크기는 마치 작은 소 만하고 외뿔에 몸통의 무늬가 용의 비늘 같았다. 그 짐승이 징재를 향하여 엎드리더니 옥으로 만든 자 하나를 토했다. 옥자에 쓰인 글에 이르기를, “물의 정령의 아들이니, 쇠약해진 주왕실을 이어 지위 없는 왕이 될 것이다.” 했다. 징재가 마음속으로 기이하다고 생각하여 수놓은 비단 끈을 풀어 그 짐승의 뿔에 매어 주니 사라졌다.
징재가 잠에서 깨어 숙량흘에게 그 꿈 이야기를 하니, 숙량흘이 말하기를, “그것은 틀림없이 기린(麒麟)일 것이오.” 했다. 이에 산달이 되자 징재가 묻기를, “지명이 공상이라는 곳이 있습니까?” 하니, 숙량흘이 말하기를, “남산에 빈 동굴이 있는데 그 굴에 돌문이 있으나 물이 없어 사람들이 그 굴을 공상이라고 부르고 있소.” 했다. 징재가 말하기를, “제가 장차 그곳에 가서 해산을 하겠습니다.” 했다. 숙량흘이 그 까닭을 물으니, 징재가 전날의 꿈 이야기를 했다. 즉시 징재가 침구를 챙겨서 빈 동굴로 갔다. 그날 밤 푸른 용 두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남산의 좌우를 지키고, 다시 두 선녀가 공중의 향기로운 이슬을 받들어 징재를 씻긴 다음 한참 같이 있다가 갔다. 징재가 마침내 공자를 낳았다. 돌문 안에서 갑자기 맑은 샘물이 흘러나왔는데 자연 그대로 따뜻했다. 그 물로 아이의 목욕을 끝내자 샘물은 그쳤다. 지금 곡부현 남쪽 28리에 속칭 여릉산(女陵山)이라고 부르는 데가 있는데 그곳이 공상이다. 공자는 날 때부터 용모가 특이했는데, 입술은 소를, 손바닥은 호랑이를 닮았고, 어깨는 원앙새를, 등은 거북이와 비슷했으며, 입은 크고 인두는 넓었고 정수리는 우묵한 모양이었다.
그의 부친 숙량흘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니산(尼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구나!” 하고, 공자의 이름을 구(丘)라고 하고, 자는 중니라고 했다. 중니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숙량흘이 죽고, 그의 모친 징재가 중니를 키웠다. 공자가 장성하니 키가 아홉 자 여섯 치에 이르러 사람들이 중니를 키다리(長人)라고 불렀다. 중니는 성스런 덕이 있어 배우기를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열국을 돌아다녔고, 제자가 천하에 가득했다. 열국의 군주들이 그의 이름을 공경하여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국정을 담당한 권신들과 귀척들은 중니가 국사를 맡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마침내 그를 불러다 쓴 사람이 없었다. 중니가 노나라에 있을 때, 맹손무기가 계손사에게 말하기를, “안팎의 혼란을 진정시키려면 공자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하니, 계손사가 공자를 불러 종일토록 이야기하였는데, 공자의 마음과 도량은 마치 큰 강이나 바다와 같아서 그 끝을 엿볼 수가 없었다. 계손사가 일어나 옷을 바꿔 입는 사이에 갑자기 자기의 봉읍인 비읍에서 사람이 와서 보고하기를, “우물을 파다가 흙 항아리를 얻었는데 그 안에 양 같은 짐승 한 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짐승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했다. 계손사가 공자의 학문을 시험해 볼 생각으로 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서 공자에게 말하기를, “누가 우물을 파다가 땅속에서 개를 닮은 짐승을 얻었습니다. 그 짐승이 무엇일까요?” 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제가 알기로는 그것은 틀림없이 개가 아니라 양입니다.” 하니, 계손사가 놀라서 그 까닭을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제가 듣기로는 산에 사는 괴물은 기(夔)와 망량(魍魎)이고, 물에 사는 괴물은 용망상(龍罔象)이고, 땅에 사는 괴물은 분양(羵羊)이라 합니다. 지금 우물을 파다가 땅에서 얻었다 하니 그것은 틀림없이 양일 것입니다.” 했다. 계손사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것을 분양(羵羊)이라고 부릅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그것은 암컷도 아니고 수컷도 아니고 다만 그 모양만 있기 때문입니다.” 했다. 계손사가 즉시 비읍에서 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 과연 암수를 구별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에 크게 놀라 말하기를, “중니의 학문은 과연 아무도 미치지 못하겠구나!” 했다. 이에 공자를 중도(中都)의 재(宰)로 삼았다. 이 일이 초나라에까지 전해져 초소왕이 사람을 시켜 공자에게 예물을 보내고, 옛날에 자기가 강을 건널 때 얻은 물건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그 사자에게 대답하기를, “그것의 이름은 평실(萍實 ; 마름)입니다. 그것을 쪼개서 먹을 수 있습니다.” 하니, 사자가 말하기를, “선생은 어떻게 그것을 아십니까?” 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초나라에서 나루를 물었는데, 애들이 노래하기를, ‘초왕이 강물을 건너다 평실을 얻었네! 크기는 말만 하고 붉기는 해와 같았네! 갈라서 맛을 보니 달기가 꿀과 같구나!’ 했습니다. 그래서 압니다.” 했다.
초나라 사자가 묻기를, “마름을 언제든지 구할 수 있습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마름은 뿌리가 없이 물 위를 떠다니는 것인데 서로 얽혀 열매를 맺습니다. 비록 천백 년이라도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거나 쇠한 것이 다시 부흥하려는 조짐입니다. 초왕께 축하를 드릴만하지요.” 했다. 사자가 돌아와 초소왕에게 고했다. 초소왕이 듣고 탄복해 마지않았다. 공자가 중도(中都)를 맡아서 잘 다스리자, 사방에서 사람을 보내 그 정치와 교화를 보고 법칙으로 삼았다. 노정공(魯定公)이 공자가 어질다는 것을 알고, 불러서 사공(司空 ; 토목과 수리 담당)으로 삼았다. 주경왕(周敬王) 19년(기원전 500년)에 노나라에서 양호(陽虎)가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으려고 했다. 숙손첩(叔孫輒)이 숙손씨 집안에서 따돌림을 받고, 비읍(費邑)의 읍재 공산불뉴(公山不狃)와 교분이 두터운 것을 알았다. 양호는 숙손첩을 불러 서로 모의하여 먼저 계손씨를 죽인 다음에 아울러 중숙을 제거하고 공산불뉴를 계손사의 자리에, 숙손첩을 주구(州仇)의 자리에, 자신은 맹손무기의 자리에 올라 그들을 대신하려고 했다. 양호는 공자의 어짊을 사모하여 공자를 불러 자기의 문하에 두어 도움을 받으려고 하였다. 양호가 사람을 시켜 공자를 불렀으나 공자는 따르지 않았다.
이에 양호가 삶은 돼지를 공자의 집으로 보냈다. 공자가 말하기를, “양호가 나를 회유하기 위해 음식을 보냈는데 내가 가서 사례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를 보러 올 것이다.” 하고, 제자를 시켜 양호가 외출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자기의 명함을 양호의 집 문 안에 던져 넣고 오게 했다. 양호는 결국 공자의 뜻을 굽힐 수 없었다. 공자가 맹손무기에게 몰래 말하기를, “양호가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난은 틀림없이 계손씨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대부께서는 미리 대비를 해야 화를 면할 수 있습니다.” 했다. 공손무기가 거짓으로 남문 밖에 집을 짓는다고 하고 재목들을 날라다 목책을 세우고 목장에서 가축을 키우는 장사 300명을 뽑아 용병으로 삼았다. 겉으로는 공사를 한다고 했으나 실은 변란에 대비한 것이었다. 또한 성읍의 읍재 공렴양(公斂陽)에게 말하여 병장기를 수리하여 명령을 기다렸다가 만약 연락을 받으면 밤새 달려와서 구원하라고 했다. 그해 가을 8월에 노나라가 장차 체제(禘祭 ; 시조 제사)를 지내려고 했다. 양호는 체제를 지낸 다음 날 계손씨의 박하 밭에서 계손사를 대접하는 잔치를 열겠다고 초청했다. 맹손무기가 듣고 말하기를, “양호가 계손사를 위해 잔치를 연다고 하니 그 일이 의심스럽다.” 하고, 이에 사람을 시켜 급히 공렴양에게 알렸다. 그는 공렴양에게 한낮까지 무장병을 거느리고 동문을 거쳐 남문으로 오면서 도중에서 변란을 낌새를 살펴보라고 약속했다. 이윽고 잔치 날이 되자 양호가 친히 계손씨 집으로 가서 계손사에게 수레에 오르기를 청했다.
양호가 앞에서 인도하고 양호의 사촌 동생 양월(陽越)이 뒤에 있었으며, 좌우에도 모두 양씨의 일당이었다. 오직 마부 임초(林楚)만은 대를 이어 계씨 집안의 문객 노릇을 한 사람이었다. 계손사가 마음속으로 변이 있을까 의심하여 임초에게 몰래 말하기를, “너는 능히 이 수레를 맹손씨 별장으로 몰고 갈 수 있겠느냐?” 하니, 임초가 그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행렬이 큰 거리에 이르렀을 때 임초가 갑자기 말고삐를 낚아채더니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말에게 채찍을 계속 때리니 말이 성을 내어 달렸다. 양월이 멀리서 바라보고 크게 외치기를, “수레를 멈추어라!” 했지만, 임초가 응하지 않고 다시 채찍질을 하니 말은 더욱 빨리 달렸다. 양월이 노하여 활을 당겨 임초를 향해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양월도 역시 말을 채찍질하다가 마음이 급하여 채찍을 떨어뜨렸다. 양월이 채찍을 주어 드니, 계손사의 수레는 이미 멀리 가버렸다. 계손사가 남문 밖으로 나가 곧바로 맹손무기의 집으로 들어가서 채책(寨冊)을 닫게 한 후에 외치기를, “맹손은 나를 구하시오!” 했다. 맹손무기는 3백 명의 장사들에게 활과 화살을 가지고 책문 안에 엎드려서 기다리게 했다. 잠시 후 양월이 그 무리를 인솔하고 채책을 공격했다. 3백 명이 채책 안에서 화살을 쏘니 화살에 맞은 자는 쓰러졌다. 양월도 몸에 몇 발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한편, 양화(양호)가 동문에 이르러 돌아보니 계손사가 보이지 않아서 즉시 수레를 돌려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서 큰 거리에 이르러 길 가던 사람들에게 묻기를, “상국이 탄 수레를 보았는가?” 하니, 길 가던 사람이 말하기를, “말이 놀라서 이미 남문을 나갔습니다.”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월의 패잔병이 도착하여 자초지종을 듣고, 비로소 양월이 이미 활에 맞아 죽고, 계손사는 이미 맹손씨들의 새집으로 피해 들어갔다는 것을 알았다. 양호가 대로하여 군사들을 급히 몰아 궁궐로 쳐들어가서 노정공을 위협하여 조정에서 나오게 했다. 마침 숙손주구(叔孫州仇)를 길에서 만나 아울러 붙잡았다. 양호는 궁궐의 군사들과 숙손씨들의 가병들을 모두 동원하여 남문 밖의 맹손씨를 공격했다. 맹손무기가 3백 명의 장사를 거느리고 양호의 공격을 막아냈다. 양호가 명을 내려 목책을 불사르게 하자, 계손사가 크게 두려워했다. 맹손무기는 해가 중천에 뜬 것을 보고 말하기를, “성읍(成邑)의 군사들이 올 때가 되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쪽 귀퉁이에서 한 사람의 용맹한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앞장서 달려오면서 크게 외치기를, “내 주인을 해치지 말라! 공렴양이 여기에 있다.” 했다. 양호가 대로하여 문득 긴 과를 움켜잡고 공렴양을 맞아 덤벼들었다.
두 장수가 각기 자기들의 무예를 발휘하여 5십여 합을 싸웠다. 양호는 더욱 기세가 사나워지는데, 공렴양은 기력이 점점 떨어졌다. 숙손주구가 갑자기 뒤에서 소리치기를, “양호가 졌다!” 하고 즉시 자기의 가병들을 거느리고 정공을 호위하여 서쪽으로 달아나니, 정공의 궁궐 군사들도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맹손무기가 장사들을 이끌고 목책을 열고 쏟아져 나오니, 계손씨의 가신 점월(苫越)이 역시 무장병을 거느리고 도착했다. 양호는 고립되어 도움이 없어 환양관(讙陽關)에 농성했다. 세 집안이 군사를 합쳐 환양관을 공격하자 양호는 더 버티지 못하고, 부하들에게 내문(萊門)을 불태우라고 명했다. 노나라 군사가 불을 피해 물러난 틈을 이용하여 양호는 불길을 무릅쓰고 탈출하여 마침내 제나라로 도망쳤다. 양호가 제경공을 뵙고 자기가 머물렀던 환양의 땅을 바친다면서 제나라로부터 군사를 빌려 노나라를 정벌하고 싶다고 했다. 대부 포국(鮑國)이 나와 말하기를, “노나라는 바야흐로 공자를 등용하여 대적할 수 없습니다. 양호를 붙잡아서 그 땅을 돌려주어 공자에게 환심을 사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제경공이 그 말에 따랐다. 이에 서쪽 변경에서 양호를 붙잡았다. 양호가 지키던 군사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 짐수레를 타고 송나라로 도망쳤다. 송나라가 양호를 광(匡) 땅에 살게 했다.
양호가 광 땅의 백성들을 괴롭히자 광 땅의 백성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진(晉)나라로 도망쳐서 조앙(趙鞅)의 가신이 되어 그를 섬겼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송나라 유학자는 논하기를, 양호가 가신으로서 그 주인을 도모하려 했으니 진실로 대역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계손씨도 자신의 군주를 내쫓고 노나라의 정사를 제 맘대로 했다. 가신인 양호가 계손씨의 곁에서 훔쳐본 것이 이미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날 계손씨의 행위를 본받아 반역을 일으켰으니, 이것은 곧 하늘의 이치가 갚아주는 원칙을 지킨 것이라, 기이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 “당시 계씨들이 힘없는 주군을 능멸하고, 오늘 가신들이 주인에게 반역했다. 자신이 충신이건 간신이건 스스로 다시 받으니, 앞 수레의 굴러가는 소리가 뒷 수레에 들린다네.” 했다. 그가 또 말하기를, 노나라는 혜공(惠公) 치세 때부터 천자의 예절과 음악을 참람하게 사용하였고, 그 후 삼환(노환공의 세 아들)의 집안에서 팔일무(八佾舞 ; 천자의 예악 무용)를 즐기고 옹철(雍徹 ; 천자의 음악)을 노래하도록 했다. 대부들도 그 군주인 제후를 안중에 두지 않고 행동했으므로 가신들 역시 주인인 대부들을 무시한 것이니, 패역이 서로 이어져 온 것은 그 유래가 멀다고 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이르기를, “천자의 아홉 곡을 연주하고 방패와 도끼 춤을 추게 하니, 묻노니 누가 양호의 참람한 짓에 단서를 주었는가? 나라 안에서 반역의 무리가 생겨나지 않게 하려면, 다시 한 번 <주관(周官)>편에서 예악을 물어보아라.” 했다.
제경공은 양호를 놓쳐버리고, 또 노나라 사람들이 반역자 양호를 받아들인 자기를 비난할까 걱정했다. 그는 즉시 사람을 시켜 편지를 노정공에게 보내어, 양호가 송나라로 달아난 일을 설명하고, 노정공과 양국의 경계에 있는 협곡산(夾谷山) 앞에서 서로 전차를 타고 가서 회맹하여, 두 나라는 영원히 싸우지 않고 우호하는 맹약을 맺자고 했다. 노정공이 편지를 받고 즉시 세 집안의 대부들을 불러 상의했다. 맹손무기가 말하기를, “제나라 사람들은 속임수가 많으니 주공께서는 가볍게 가시면 안 됩니다.” 하니, 계손사가 말하기를, “제나라가 여러 번 우리나라를 침범하다가 지금 수호를 맺자고 하니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했다. 노정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만약 회맹을 하기 위해 간다면 누가 나를 호위하겠소?” 하니, 맹손무기가 말하기를, “신의 스승이었던 공자가 아니면 안 됩니다.” 했다. 노정공이 즉시 공자를 불러 회맹의식의 상례(相禮)를 맡아보게 했다. 타고 갈 어가가 준비되어 노정공이 길을 떠나려고 할 때 공자가 아뢰기를, “신이 듣기에 ‘문관의 일에는 반드시 무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문무의 일은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 제후가 국경을 벗어날 때는 반드시 문관과 무관을 모두 따르게 했습니다. 송양공이 우(盂) 땅에서 회맹할 때의 일을 거울삼을 수 있습니다. 청컨대 좌우 사마를 모두 데려가서 만약의 사태를 방비하십시오.” 했다.
정공이 그 말을 따라, 대부 신구수(申句須)를 우사마로, 낙기(樂頎)를 좌사마로 삼아 각기 전차 500대를 거느리고 멀리서 정공을 따르게 했다. 또한 대부 자무환(玆無還)에게 명하여 전차 300대를 거느리고 회맹장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주둔하게 했다. 노정공이 협곡산에 도착하자 제경공이 먼저 와서 회맹을 위한 삼층으로 된 간단한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제경공은 제단의 오른쪽에 막사를 지어 머무르고, 노정공은 제단의 왼쪽에 막사를 세웠다. 공자는 제나라 군사들의 위세가 아주 강한 것을 보고, 신구수와 낙기에게 명하여 노후의 곁을 바싹 붙어서 따르게 했다. 그때 제나라 대부 여미(黎弥)가 모략이 뛰어나다고 해서, 양구거(梁邱據)가 죽은 다음부터 제경공이 특별히 총애하고 믿었다. 그날 밤 여미가 제경공의 막사에 가서 뵙기를 청하자 경공이 불러들여서 묻기를, “경이 무슨 일로 밤에 이렇게 왔소?” 했다.
여미가 아뢰기를, “제나라와 노나라가 원수가 된 지는 어제오늘이 아닙니다. 공자가 어질고 덕이 높을 뿐만 아니라 노나라 정사를 맡아보니 장차 제나라에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어서 금일의 회맹을 연 것입니다. 신이 공자의 사람됨을 보니 예는 알지만 용기는 없고, 싸움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내일 주공께서 노정공을 만나는 예절을 마친 후에 사방 여러 나라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여 노정공의 마음을 즐겁게 하시고, 악공으로 변장한 래(萊) 땅의 오랑캐 300명을 시켜 북을 치며 시끄럽게 앞으로 가게 해서 기회를 보아 문득 노정공과 공자를 같이 붙잡으신다면, 신은 전차를 몰아 회맹 단 아래에서 노나라 군사들을 무찔러 쫓아버리면, 그때 노나라 군주와 신하의 목숨은 우리들의 손에 달려있어서 주공께서 어찌 처분하실지에 매어있으니, 어찌 군사를 일으켜 정벌해서 세운 공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이 일의 실행 여부는 마땅히 상국 안영(晏嬰)과 의논하시오.” 했다. 여미가 말하기를, “상국은 평소에 공자와 교류가 있으니, 만약 그에게 알게 하면 이 일은 틀림없이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신이 혼자서 이 일을 맡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경의 청을 허락하니 경은 조심하여 일을 처리하시오.” 했다. 여미가 물러 나와 래(萊) 땅의 오랑캐 군사들과 거사를 하기로 몰래 약속했다.
다음 날 아침, 두 나라 군주가 제단 아래에서 만나서 서로 읍하고 제단 위에 올랐다. 제나라 쪽에서는 안영이 상례(相禮)가 되고, 노나라 쪽에서는 공자가 상례가 되었다. 두 상례가 한 번 읍한 후에 각기 주군을 따라 제단 위로 올라가 서로 절을 했다. 강태공(제나라 시조)과 주공(노나라 시조)의 우호를 말하고, 각기 가지고 온 옥과 비단을 교환하였다. 그 의식이 끝나자 제경공이 말하기를, “과인에게는 사방 여러 나라의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있으니, 원컨대 군주와 같이 한번 보고자 합니다.” 하고, 즉시 명을 내려 래(萊) 땅 사람들을 단 위에 오르게 한 후에 그들의 토속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이에 제단 밑에서 북소리가 크게 진동하더니 래(萊) 땅의 오랑캐 300명이 깃털 장식 깃발을 들고, 깃털 옷을 입고, 창과 극, 칼과 방패를 들고, 벌떼처럼 몰려 나왔다. 입으로 휘파람 소리를 내는데 서로 화답하여 그치지 않았다. 계단을 반쯤 오르니 노정공이 놀라 얼굴색이 바뀌었다. 공자는 전혀 두려운 기색 없이 제경공 앞에 다가가서 소매를 들어 인사를 한 다음, 말하기를, “두 나라의 군주께서 서로 만나 우호를 맺기 위해 중국의 예를 행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오랑캐의 음악을 쓰십니까? 청컨대 집사에게 명하여 물러가도록 해 주십시오.” 하니, 안자가 여미의 계책을 알지 못하고, 또한 제경공에게 말하기를, “공자의 말이 예의에 맞습니다.” 했다.
제경공이 크게 부끄러워하여 급히 래(萊) 땅의 오랑캐들을 손을 저어 물러가게 했다. 여미가 제단 밑에 매복하여 오로지 래(萊) 땅의 오랑캐가 손을 쓰기를 기다려서 일제히 일어나려고 하다가, 그들이 제경공의 명령을 받고 제단 아래로 물러가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분기가 치밀어 즉시 본국에서 데려온 광대를 불러 분부하기를, “잔치 자리 중간에 너희를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하면 <폐구(敝笱)> 시를 노래하면서, 기분 내키는 대로 희롱하여 만약 노나라 군주나 신하들이 웃거나 성을 내면 내가 너희에게 중상을 내리겠다.” 했다. 원래 이 시는 문강(文姜)의 음란한 고사를 노래한 시로 노나라를 모욕하려는 것이었다. 여미가 계단을 올라가 제경공에게 아뢰기를, “청컨대 궁중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여 두 분 군주의 만수무강을 빌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궁중의 음악은 오랑캐의 음악이 아니니 속히 연주하게 하라.” 했다. 여미가 제경공의 명령을 전하자 배우와 곱사 20여 명이 이상한 옷을 입고 얼굴에 칠을 하여 남자와 여자로 분장하고 두 무리로 나누어 노정공의 면전에 몰려가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춤을 추면서 입으로 일제히 노래를 부르는데 모두가 음탕한 가사라 노래하면서 시시덕거렸다.
공자가 칼을 어루만지며 눈을 부릅뜨고 제경공을 노려보며 아뢰기를, “필부가 제후를 희롱하는 것은 그 죄가 죽어 마땅합니다. 청컨대 제나라의 사마가 법을 집행해야 합니다!” 하니, 경공이 응하지 않았다. 광대의 희롱과 시시덕거림이 여전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두 나라가 이미 수호를 맺었으니 형제와 같습니다. 노나라의 사마는 바로 제나라의 사마입니다.” 하고, 곧 소매를 들어 아래를 향해 휘두르면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신구수와 낙기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 두 사람의 장군이 나는 듯이 제단에 올라와 남녀 두 무리로 분장한 광대들 중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 각각 한 명을 붙잡아 그 자리에서 참수했다. 나머지 광대들은 놀라서 달아나지도 못했다. 제경공이 마음속으로 놀랐고, 노정공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여미가 처음에는 제단 아래에서 노정공을 가로막으려 하였으나 첫째는 공자의 이런 단호한 수단을 보았고, 둘째는 신구수와 낙기 두 장수가 영웅의 기개가 있었으며, 셋째는 십 리 밖에 노나라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탐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미는 목을 움츠리고 물러갔다. 회맹이 끝나고, 제경공이 자기의 막사로 돌아와서 여미를 불러 꾸짖기를, “공자가 그 군주를 도와 행하는 것이 모두 옛사람의 법도에 맞는데, 그대는 나를 오랑캐의 습속에 잘못 끌어들였다. 과인이 본래 노나라와 수호를 맺으려 했는데 지금 도리어 원수를 맺게 되었다.” 했다. 여미가 황공하여 사죄하고 감히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안자(안영)가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소인은 잘못을 깨달으면 글로써 사과하고, 군자는 잘못을 깨달으면 예물로써 사과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본디 노나라의 문양(汶陽) 땅이었던 세 곳이 있습니다. 첫째가 환(讙) 땅인데 양호가 바쳤으니 의롭지 못한 땅이고, 둘째가 운(鄆) 땅인데 옛날에 노소공이 살다가 복위를 조건으로 바쳐 우리 땅이 되었고, 셋째는 귀음(龜陰)인데 선군이신 제경공(頃公)께서 진(晉)나라의 위세를 빌려 빼앗은 땅입니다. 이 세 곳은 모두 원래 노나라의 땅으로 옛날 선군이신 환공의 치세 때 조말이 회맹장의 제단에 올라와 칼을 들고 위협하여 이 땅을 돌려주기로 약속했으나,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노나라 사람들이 아직도 그 일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이번 기회에 그 세 곳의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고 잘못을 사과하면 노정공이 틀림없이 기뻐하여 제나라와 노나라의 우호 관계는 더욱 단단해질 것입니다.” 하니, 제경공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안자를 보내 세 곳의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이것이 주경왕 24년의 일이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래(萊) 오랑캐를 시켜 북 치고 시끄럽게 소란만 떨었으나, 회맹의 제단 앞에서 한 마디를 어찌할 수 없었으니 어쩌랴? 예에 밝은 사람이 또한 용기도 갖추었으니, 세 곳의 땅을 얻고 두 군주는 화목하게 되었다.” 했다.
또 시를 지어, 제경공이 마음을 비워 사과했기 때문에 능히 어진 군주가 되었고 거의 다시 패업을 이룰 수 있었다고 했다. 시에 이르기를, “회맹의 제단에서 여미의 말을 듣고 일을 그르쳤으나, 신하가 간하자 군주가 따라 두 가지를 얻었다. 세 곳 땅을 아끼지 않고 돌려주어 사과했으니. 천추에 중화와 오랑캐에 이름을 남겼구나.” 했다. 그 문양의 땅은 원래 옛날 노희공(魯僖公) 때 계우(季友)에게 하사한 것이었는데 오늘 명목상 그 땅을 비록 노나라에 돌려줬다고는 했으나 실은 계씨들에게 돌아갔다. 이것 때문에 계손사는 공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계손사는 특별히 구음(龜陰)에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사성(謝城)이라고 불러서 공자의 공을 나타냈다. 또 노정공에게 아뢰어 공자를 대사구(大司寇 ; 형조판서)의 직에 임명하게 했다. 그때 제나라의 남쪽 변경에 갑자기 큰 새 한 마리가 날아왔는데, 그 길이가 약 석 자이고 몸은 시꺼멓고 목은 하얬으며 부리는 길고 다리는 하나였으며 두 날개를 흔들며 들판에서 춤을 추었다. 시골 사람들이 쫓아갔으나 잡지 못하고 그 새는 날아올라 북쪽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계손사가 그 괴이한 새 이야기를 듣고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그 새의 이름은 ‘상양(商羊)’입니다. 북해의 해변에서 산다고 하는데 하늘에서 큰비가 내릴 것 같으면, 상양이 나타나 춤을 춥니다. 상양이 나타난 곳은 반드시 큰비가 내려 재해가 발생합니다. 제나라와 노나라가 국경을 접했으니 미리 준비를 해야만 하겠습니다.” 했다.
계손사가 미리 문양의 백성들에게 경계하여 제방을 수리하고 지붕을 고치게 했다. 사흘이 못 되어 과연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더니 문수(汶水)가 범람했다. 노나라 백성은 준비를 했기에 큰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그 일이 제나라에 전해지자 제경공은 더욱 공자를 신인(神人)이라고 생각했다. 이로부터 공자의 박학함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어 사람들이 모두 공자를 성인(聖人)이라고 불렀다. 시가 있어 증명하기를, “부질없이 옛 서적을 모두 연구하더라도, 누가 평실과 상양을 알 수 있었겠는가? 위대한 장수와 성인은 하늘에서 내리나니, 공자의 아름다운 이름이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했다. 계손사가 공자의 문하에서 인재를 구하자, 공자는 중유(仲由)와 염구(冉求)를 정사를 돌볼 만한 사람이라고 추천했다. 계손사가 두 사람 모두 그의 가신으로 썼다. 어느 날 갑자기 계손사가 공자에게 묻기를, “양호가 이미 달아났으나 공산불뉴(公山不狃)가 다시 일어나려 하니 어떻게 제압해야 하겠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그를 제압하려면 먼저 예법과 제도를 밝혀야 합니다. 옛날에는 신하가 무장병을 두지 않았으며 대부는 백 개의 성가퀴를 가진 큰 성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을 원이 반란을 일으킬 근거가 없었습니다. 상국께서는 어찌하여 그들의 성벽을 낮추고 그들의 무장을 해제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상하가 서로 편안하고 나라도 영구히 안정될 것입니다.” 했다. 계손사가 그렇다고 생각하여 맹손씨와 숙손씨에게 공자의 말을 전하게 했다.
맹손무기가 말하기를, “진실로 집안과 나라에 이로운 일인데 내가 어찌 사사로운 일에 연연하겠는가?” 했다. 그때 소정묘(少正卯)는 공자와 제자들이 정사에 참여하는 것을 시기하여, 그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숙손첩(叔孫輒)을 시켜 공산불뉴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냈다. 공산불뉴는 성에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공자가 평소에 노나라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역시 공자의 협조를 구하려고 많은 예물과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 이르기를, “노나라는 삼환(三桓 ; 맹손, 계손, 숙손)이 정사를 마음대로 한 이래로 군주의 힘은 약하고 신하의 권력은 강하여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쌓였습니다. 이 공산불뉴가 비록 계손씨의 가신이 되었으나 실은 공실을 지키려는 도리를 사모하여 원컨대 비읍(費邑)을 공실에 바쳐 공실의 신하가 되고 주군을 도와 강포한 자들을 제거하고 노나라를 다시 주공의 옛날 상태로 돌려놓겠습니다. 만일 선생께서 허락한다면, 수레를 타고 비읍으로 와서 얼굴을 맞대고 그 일을 결정하고 싶습니다. 변변치 못한 예물이나마 노자로 쓰십시오. 삼가 생각건대 더럽다 마십시오.” 했다. 공자가 노정공에게 말하기를, “공산불뉴가 만약 반란을 일으킨다면 군사를 출동시켜야 할 것입니다. 신이 가벼운 몸으로 한번 가서 그의 마음을 돌려 잘못을 뉘우치게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노정공이 말하기를, “나라의 많은 일은 모두 그대의 주관에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과인의 곁을 떠날 수 있겠소?” 했다. 공자가 마침내 그 편지와 예물을 공산불뉴에게 돌려보냈다.
공산불뉴는 공자가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마침내 성읍(成邑)의 원 공렴양(公斂陽)과 후읍(郈邑)의 원 공약막(公若藐)과 약속하여 동시에 기병하여 반역하려고 했다. 그러나 공렴양과 공약막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한편, 후읍의 마정(馬正 ; 집안의 司馬)인 후범(侯犯)은 용기와 힘이 있고 활을 잘 쏘았다. 후읍의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해서 복종하니 평소에 남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생각이 있었다. 마침내 마부를 시켜 공약막을 찔러 죽이고 스스로 후읍의 원이 되어, 후읍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성에 올라 저항하려고 했다. 숙손주구는 후읍의 반란을 맹손무기에게 알렸다. 맹손무기가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도와 마땅히 반적을 함께 멸하겠다.” 했다. 이에 맹손씨와 숙손씨 두 집안이 연합하여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니, 곧 후읍성을 포위했다. 후범이 힘을 다해 대항하자 공격하던 군사들이 많이 죽어서 이길 수가 없었다. 맹손무기가 숙손주구를 시켜 제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게 했다. 그때 숙손씨의 가신인 사적(駟赤)이 후읍성에 있다가 거짓 후범에게 붙으니, 후범이 믿고 가까이했다. 사적이 후범에게 말하기를, “숙손씨가 사자를 제나라에 보내서 군사를 청했습니다. 제나라와 노나라가 군사를 합치면 당할 수가 없습니다.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후읍을 제나라에 바치고 항복하지 않습니까? 제나라가 겉으로는 비록 노나라와 친하지만, 속으로는 실은 시기하고 있습니다. 후읍을 얻어 노나라를 압박할 수 있다면 제나라는 반드시 크게 기뻐할 것이고, 두 배의 다른 땅을 장군에게 줄 것입니다. 아무튼 땅을 얻기만 하면 위태한 곳을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가게 되니 또한 어찌 불리함이 있겠습니까?” 했다.
후범이 말하기를, “그 계책이 참으로 좋소!” 하고, 즉시 사람을 제나라에 보내어 항복을 청하면서 후읍을 바치겠다고 했다. 제경공이 안영을 불러 묻기를, “숙손씨는 군사를 청해 후읍을 치려 하고, 후범은 또 후읍을 들어 항복하려 하니, 과인은 장차 어느 쪽을 따라야 하겠소?” 하니, 안자가 대답하기를, “이제 막 노나라와 수호를 맺었는데, 어찌 반역자가 바치는 땅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하고, 숙손씨를 도우는 것이 옳다고 했다. 제경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후읍은 곧 숙손씨의 사유지 고을이라 노정공과는 무관한 것이요. 하물며 숙손씨와 그 가신들이 서로 짓밟으면 노나라의 불행이지만 제나라에게는 다행이오. 나에게 지금 계책이 있으니, 마땅히 양쪽의 요청을 모두 받아들여 그들로 하여금 그르치게 하겠소.” 하고, 이에 사마양저를 시켜 국경에 주둔하게 하고 그 정세의 변화를 살피라고 했다. 만약 후범이 능히 숙손씨를 막아낸다면 군사를 반으로 나누어 후읍에 주둔하고 후범을 제나라로 데려오라 하고, 만약 숙손씨가 후범을 이긴다면 곧 숙손씨를 도와 후성을 공격하여 때에 따라 변화에 맞추어 일을 행하도록 했다. 이것은 제경공의 간웅적인 처사였다.
한편, 사적이 후범을 보고 제나라에 사자를 보내라고 하면서 후범에게 말하기를, “제나라가 노나라와 얼마 전에 회맹하여 노나라를 도울지 후읍을 도울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마땅히 성문에 무장병을 많이 배치하여 만일의 예기치 않은 사태에 대비하여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하니, 후범은 한 용맹한 사내일 뿐이라, 그 듣기 좋은 말을 믿고 즉시 정예병을 뽑아 성문 밑에 배치했다. 사적이 새의 깃털을 붙인 급한 편지를 성 밖으로 쏘니. 노나라 군사가 주워서 숙손주구에게 바쳤다. 숙손주구가 편지를 펴 보니 편지에서 말하기를, “소신 사적은 이미 역신 후범을 잡을 준비를 십에 칠팔은 해 두었습니다. 머지않아 성안에서 변이 일어날 것이니 주인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오.” 했다. 숙손주구가 크게 기뻐하여 맹손무기에게 알리고 군사들을 엄하게 통제하여 기다렸다. 며칠 후에 후범이 보낸 사자가 제나라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제경공이 이미 우리의 항복을 받아들여 우리가 원하는 다른 고을의 땅을 준다고 했습니다.” 했다. 사적이 들어와 후범에게 축하하고 나가서, 사람을 시켜 백성들에게 공공연히 말하기를, “후범이 장차 후읍의 백성을 제나라에 넘기려고 하여 보냈던 사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제나라 군사들이 도착할 것이라 한다.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했다.
갑자기 성안의 인심이 흉흉해지더니 많은 사람이 사적이 있는 곳으로 달려와서 정말이냐고 물었다. 사적이 말하기를, “나도 역시 그 말을 들었소. 제나라와 노나라는 얼마 전에 수호를 맺어 땅을 차지하기는 불편하니 장차 후읍 백성들의 호구를 옮겨 제나라의 비어 있는 땅을 채우려고 할 것이요.” 했다.옛날부터 이르기를, ‘고향을 떠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했으니, 고향을 떠나 먹던 샘물을 등지는 것이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서로 전하여 각기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사적은 후범이 술을 먹고 취한 것을 탐지하여 즉시 심복 수십 명에게 명하여 성 주위를 돌며 큰소리로 외치게 하기를, “제나라의 군사들이 이미 성 밖에 도착했다. 우리는 속히 봇짐을 싸서 3일 내에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단다.” 하고, 인하여 이어서 통곡했다. 후읍의 백성들이 크게 놀라 모두 후범의 집 문 앞에 모였다. 이때 노약자들은 단지 울기만 했지만, 청장년들은 모두가 이를 갈며 후범을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후범의 집 문안에 숨겨둔 갑옷과 무기가 많은 것을 보고, 바로 그것을 가져다가 여러 사람이 입고 각기 무기를 들고 함성을 지르며 후범의 집을 사면에서 포위했다. 이어서 성을 지키던 군사들도 모두 후범에게 등을 돌려서 백성들과 합류했다.
사적이 급히 들어와 후범에게 말하기를, “후읍 사람들이 제나라에 붙기를 바라지 않아서 성안 사람 모두가 변란을 일으켰습니다. 장군에게는 또한 무장병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거느리고 나가서 그들을 물리치겠습니다.” 하니, 후범이 말하기를, “무장병들도 모두 백성들에게 붙들렸소. 오늘 해야 할 일은 백성들로부터 화를 피하는 일이 먼저요.” 했다. 사적이 말하기를, “제가 목숨을 걸고 장군의 출로를 열겠습니다.” 하고, 즉시 집 앞으로 나가 군중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길을 양보해서 후범 장군이 달아날 수 있게 하시오. 후범 장군이 성 밖으로 나가면 제나라 군사들도 역시 오지 않을 것이오.” 했다. 군중이 그 말을 믿고 길을 내주자 사적이 앞서고 후범이 뒤에 섰으며, 가솔 100여 명과 수레 10여 대가 뒤따랐다. 사적은 후범의 일행을 동문으로 내보내고, 노나라 군사들을 후성으로 이끌어 들여서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위무했다. 맹손무기가 후범의 뒤를 추격하려 했으나 사적이 말하기를, “신이 이미 후범에게 화를 면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했다. 이에 후범을 내버려 두고 추격하지 않았다. 마침내 후성의 성벽 높이를 석 자 낮추고, 즉시 사적을 후읍의 원으로 임명했다. 후범이 제나라 군영에 도착하자 사마양저는 노나라 군사들이 이미 후읍을 평정한 것을 알고, 즉시 군사를 돌려 제나라로 돌아갔다. 숙손주구와 맹손무기도 역시 노나라로 돌아갔다.
공산불뉴는 처음에 후범이 후읍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숙손씨와 맹손씨가 토벌하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계씨는 고립되었다! 빈틈을 타서 노나라 도성을 습격하면 노나라를 얻을 수 있다.” 하고, 즉시 비읍의 무리를 모두 몰아서 노나라 도성 곡부성으로 쳐들어갔다. 숙손첩이 내응하여 성문을 열고 공산불뉴를 맞아들였다. 노정공이 급히 공자를 불러 계책을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공실의 군사는 허약해서 쓸 수가 없습니다. 신이 주군의 수레를 몰아 계손씨에게로 가겠습니다.” 했다. 공자가 즉시 수레를 몰아 계씨들의 부중으로 갔다. 부중에는 높은 누대가 있고 견고하여 지킬 만해서 정공이 거기에 머물렀다. 조금 있다가 사마 신구수와 낙기가 함께 도착했다. 공자가 계손사에게 모든 계씨들 가병들을 내어 두 사마에게 주라고 명하여, 두 사마가 계씨들의 가병들은 누대의 좌우에 매복하게 하고 공실의 군사들은 누대 앞에 열을 지어 지키도록 했다. 공산불뉴가 숙손첩과 상의하기를, “우리가 이번에 거사는 공실을 받들고 사가(私家)를 억누르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으니, 노정공을 군주로 받들지 못하고는 계씨들을 이길 수 없소.” 했다. 이에 일제히 공궁으로 쳐들어가 노정공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한참을 어정거리다가 노정공이 이미 계씨의 부중으로 간 것을 알고 즉시 군사를 이동하여 공격했다. 공실의 군사가 싸우다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갑자기 좌우가 크게 시끄럽더니 신구수와 낙기 두 장수가 정예병을 거느리고 쇄도해 왔다. 공자가 노정공을 부축하여 누대 위에 서서 비읍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주께서 여기에 계시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순역(順逆)의 도리도 모르느냐? 빨리 갑옷과 무기를 버리면 기왕의 죄는 묻지 않겠다!” 하니, 비읍 사람들이 공자가 성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거역하지 않고 병장기를 버리고 누대 아래에 엎드렸다. 공산불뉴와 숙손첩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즉시 오나라로 도망쳐 버렸다. 숙손주구가 곡부에 돌아와서 후성의 성벽 높이를 깎아내렸다고 정공에게 고했다. 계손사도 역시 비성의 성벽 높이를 낮추어 처음의 상태로 복원시키라고 명했다. 맹손무기 역시 성읍(成邑)의 성벽을 낮추라고 했으나, 성읍의 원 공렴양이 소정묘에게 계책을 물었다. 소정묘가 말하기를, “후읍과 비읍은 반란이 일어나 그 벌로 성벽의 높이를 낮추었소. 만약 성읍(成邑)도 성벽의 높이를 낮춘다면 그대와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가 무엇이 다르겠소? 그대는 다만 ‘성읍은 곧 노나라의 북쪽 변경을 지키는 요새지라 만약 성읍의 성벽을 낮춘 후에 제나라가 우리의 북쪽 변경을 쳐들어오면 어떻게 막으려고 하십니까?’라고만 굳게 말하십시오. 비록 명을 거역하게 되겠지만 반역으로 다스리지 않을 것이오.” 했다.
공렴양이 그 계책을 따라 성읍의 군사들에게 갑옷을 입고 성벽 위로 오르게 하여, 숙손주구에게 명령받기를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숙손씨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나라의 사직을 위해서 이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제나라 군사들이 언제라도 갑자기 쳐들어오면 막을 방법이 없으니, 원컨대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 성과 함께 부서지겠습니다. 감히 벽돌 한 개 흙 한 줌도 덜어낼 수 없습니다.” 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공자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공렴양은 이런 말을 지어내지 못했을 것이고, 틀림없이 ‘명망이 있는 사람’이 시켰을 것입니다.” 했다. 계손사는 공자가 비읍의 반란을 진압한 공을 칭찬하며 자기는 공자의 덕에 만분지일도 못 미친다고 생각하고, 노나라의 정사를 공자에게 맡겨 모든 일에 공자의 의견을 물어 행했다. 공자가 일을 행할 때마다 소정묘가 문득 말을 돌려 어지럽히니, 듣는 사람이 많이 현혹되었다. 공자가 조용히 정공에게 아뢰기를, “노나라가 흥하지 못하는 이유는 충신과 간신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며, 상과 벌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릇 좋은 곡식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라지를 뽑아 버려야 합니다. 원컨대 주군께서는 임시변통을 일삼지 마시고 청컨대 태묘에 보관되어 있는 부월(斧鉞)을 꺼내어 궁궐 양쪽 아래에 늘어놓고 치죄하려고 하니 허락해 주십시오.” 하니, 노정공이 말하기를, “좋소.”라고 했다.
다음 날, 여러 신하를 의논에 참여시켜 성읍의 성벽을 깎아내리지 않는 이해관계를 따지게 하고, 단지 공자는 가부간을 결정하기로 했다. 여러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마땅히 성벽의 높이를 깎아내려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깎아내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 소정묘가 공자의 뜻에 영합하기 위해 성읍의 성벽을 깎아내려야 하는 이유 여섯 가지 편한 점을 아뢰었다. 무엇을 여섯 가지 편한 점이라 하는가? 첫째, 나라 안에는 군주가 둘일 수 없다. 둘째, 나라의 도성에 그 무게를 두어야 하고, 셋째, 신하들의 권세를 억제하여야 하며, 넷째, 가신들이 발호하는데 의지하는 바를 없애야 하며, 다섯째, 세 집안의 마음을 평안하게 할 것이고, 여섯째, 이웃 나라가 노나라의 혁신하여 부흥하는 이치를 듣고 존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자가 아뢰기를, “소정묘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성읍(成邑)은 이미 고립된 형세인데 어찌 능히 반란을 꾀하겠습니까? 하물며 공렴양은 공실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다른 반역자처럼 발호하겠습니까? 소정묘의 변명은 국정을 어지럽히는 말이고, 군주와 신하 간을 이간질하는 짓입니다. 마땅히 법에 따라 죽여야 합니다.” 했다. 여러 신하가 모두 말하기를, “소정묘는 노나라의 명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말이 혹 부당하더라도 죽을 죄에 해당하지는 않습니다.” 하니, 공자가 다시 아뢰기를, “소정묘는 거짓을 꾸며 참말처럼 말하고, 행동이 편벽되면서도 고집을 부리며 한낱 헛된 이름으로 백성들을 현혹시킵니다. 죽이지 않으면 노나라의 정사를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신의 직책이 사구(형조판서)이니 부월의 형법을 행하려고 합니다.” 했다.
마침내 공자가 장사들에게 명하여 소정묘를 결박 지워 양관 아래에서 참수하게 했다. 여러 신하가 놀라 얼굴색이 변했고, 세 집안 사람들도 마음이 서늘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고화사(高華士)가 발호하자 태공이 죽였듯이, 공자도 기어코 소정묘를 죽였다. 두 분 성인들의 옳은 눈이 없었다면, 세간 사람들은 두 간사한 사람의 책만을 읽었을 것이다.” 했다. 소정묘가 죽고 나자 공자의 뜻이 비로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노정공과 세 집안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비우고 공자의 말에 따랐다. 공자가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예의를 백성들에게 가르치며 염치를 배양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시끄럽지 않고 잘 다스려지게 되었다. 석 달이 지나자 풍속이 크게 변하여, 시장에서 새끼 양과 돼지를 팔 때에 거짓으로 값을 부르지 않았으며, 남녀가 길을 갈 때 좌우로 나뉘어 다녀서 어지럽지 않았다. 또한 길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주어 자기 것이 아니면 수치로 여기고 그 물건을 줍는 자가 없었다. 사방에서 손님들이 한번 노나라에 들어오면 모두 변함없는 대접을 받아서 불편한 것이 없었다. 노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노래하기를, “곤룡포를 입고 예관을 쓴 성인께서, 우리가 있는 곳에 친히 왕림하셨네. 예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우리를 공평하게 위로하시네.” 했다. 이 노래가 제나라에 전해지자 제경공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틀림없이 노나라에 병합되겠구나!” 했다.
제경공이 무슨 꾀를 낼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제79회: 여악을 보내 여미가 공자를 방해하고, 회계에 사는 문종이 태재 백비와 통했다.
한편, 제경공이 협곡에서 회맹을 맺고 돌아온 후에, 안영이 병들어 죽었다. 제경공이 며칠을 슬피 울며 제나라 조정에 인물이 없음을 걱정했다. 제경공은 다시 공자가 노나라의 국정을 도와 잘 다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말하기를, “노나라가 공자를 재상으로 임용하면 틀림없이 천하의 패자가 될 것이다. 패권은 반드시 땅을 다투는 것인데 제나라가 그 가까운 이웃이 되니, 화가 먼저 미칠까 걱정되는구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하니, 대부 여미가 나아가 말하기를, “주군께서 노나라가 공자를 등용하는 일을 걱정하시면서 어찌하여 막지 않으십니까?” 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노나라가 바야흐로 공자에게 국정을 맡겼는데, 어떻게 내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니, 여미가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나라가 편안하게 다스려진 후에 교만한 마음이 반드시 생긴다고 했습니다. 청컨대 아름답게 치장한 여자 악사를 노정공에게 보내면 노정공이 받아들여 총애하여 틀림없이 정사를 태만히 하고 공자를 멀리할 것입니다. 노정공이 공자를 멀리하면 공자는 반드시 노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공께서 베개를 편안히 베고 잠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했다. 경공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여미에게 명하여 여려(女閭 ; 기생집)에서 용모가 아름다운 20세 미만의 여인들 80명을 뽑아 10대로 나누어 비단옷을 입히고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 그 춤곡 이름은 <강락(康樂)>이라 하는데, 곡조와 춤사위를 모두 새로 만들어 예전에는 본 적이 없는 극히 아름다운 자태를 갖추게 했다.
여자 악사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기를 다하고, 다시 좋은 말 120필에 금으로 만든 굴레와 조각한 안장을 얹은, 털색이 각기 다른 말을 준비하니, 바라보면 비단 같았다. 사람을 시켜 노정공에게 바치게 했다. 사자가 노나라 곡부성 남문 밖에 비단 천막을 두 곳에 나누어 치고, 동쪽 천막에는 말들을 묶어 두고, 서쪽 천막에는 여자 악사들을 머물게 했다. 먼저 노정공에게 국서를 보냈는데, 노정공이 국서를 뜯어 보니, 국서에 이르기를, “제나라 저구(杵臼)가 머리를 숙여 존경하는 노 현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제가 지난날 협곡에서 죄를 짓고 부끄러움을 잊지 못했으나, 다행히 현후께서 저의 사과하는 정성을 살피시어 마침내 두 나라가 수호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매일 나랏일에 근심이 많으실 텐데, 예를 갖추어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이에 노래하는 여종 10대를 보내오니 여흥을 즐기시고, 좋은 말 120필은 수레를 끌 수 있으니 좌우에 나누어 주어 사모하는 마음을 기쁘게 펴주십시오. 엎드려 바라옵건대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했다. 한편 노나라의 상국 계손사는 태평성대를 편안히 누리게 되자 자기가 할 일을 잊어버리고 사치와 오락만생각했다. 갑자기 제나라에서 여자 악사를 바친다는 소식을 듣고 그같이 성대한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즉시 미복으로 갈아입고 심복 몇 사람과 함께 수레를 타고 몰래 남문을 나가서 여자 악사들을 보았다.
그때 여자 악사들은 한참 연습 중이었다. 노랫소리가 구름을 멈추게 하고, 춤을 추는 자태가 바람을 일으키는 듯했다. 앞으로 나갔다 뒤로 물러갔다 하며 춤을 추는 여자 악사들의 화려한 모습은 사람들의 눈을 빼앗아 천상에서 노니는 선녀들을 보는 것 같아서 인간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계손사가 한참을 지켜보고, 또한 그 용모의 아름다움과 복장의 화려함을 두루 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 마비되고 다리가 나른해지며 눈을 부릅뜨고 입을 멍하게 벌리더니, 의식이 어지럽고 혼백이 나가 버렸다. 노정공이 하루 동안 세 번이나 불렀지만 계손사는 여자 악사들을 보느라 끝내 부름에 응하지 못했다. 다음 날이 되자 곧바로 입궐하여 노정공을 뵈었다. 노정공이 국서를 보여주었다. 계손사가 아뢰기를, “이것은 제경공의 아름다운 뜻이니 물리치지 마십시오.” 했다. 노정공도 역시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 문득 묻기를, “여자 악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한번 볼 수 있을까요?” 하니, 계손사가 말하기를, “남문 밖에 열을 지어 연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가가 만약 가신다면 신이 따라가겠지만 다만 백관들을 놀라게 할까 걱정되니 미복으로 가시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했다. 이에 군주와 신하가 모두 정복을 벗어버리고 미복으로 각기 작은 수레를 타고 남문을 향하여 달려 나가서 마침내 남문 밖 서쪽에 친 장막에 도착했다.
이미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노나라 군주가 옷을 바꾸어 입고 친히 와서 가무를 구경했습니다!” 하니, 제나라의 사자가 여자 악사들에게 마음을 써서 기예를 발휘하라고 분부했다. 그때 노랫소리는 더욱 요염해지고 춤은 한층 교태롭게 되었다. 열 무리의 여자들이 순서에 따라 나오고 들어가며 귀와 눈을 빼앗으니 제나라 사신의 접대에 응할 겨를도 없이 노나라 군주와 신하가 기뻐서 저도 모르게 손발을 움직이며 춤을 추었다. 시가 있어 증명하기를, “요염한 노래 한 곡이 한 덩어리 금이고, 절묘한 춤 한 번에 한 쟁반의 구슬이라. 단지 열 무리의 여자 악사들로 인하여, 노나라의 군주와 신하는 마음이 빼앗겼네.” 했다. 종들이 또 정공과 계손사에게 동쪽 장막 속의 양마를 자랑했다. 정공이 말하기를, “다만 이것으로 이미 다 보았으니 또 반드시 말에 대해서 물을 필요가 없다.” 했다. 그날 밤에 정공이 궁궐로 돌아와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귓속에서 아직도 노랫소리가 들리고 미인들이 베갯머리에 있는 것 같았다. 여러 신하가 의논이 일치되지 않을까 걱정하여 다음 날 아침 일찍 계손사 한 사람만을 입궁하도록 하여 답장을 초하게 하여, 감격했다는 뜻을 자세히 서술하게 했다. 그 편지의 내용을 구태여 모두 서술할 필요는 없겠다. 그리고 황금 백일을 제나라 사자에게 하사하고, 여자 악사들을 궁궐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30인은 계손사에게 주고, 좋은 말은 마부에게 맡겨 돌보게 했다.
노정공과 계손사가 여자 악사를 새로 얻어 각자 나누어 갖고는 낮에는 가무를 즐기고 밤에는 잠자리를 같이하여, 3일을 계속해서 조정에 나오지 않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공자가 그 일을 듣고 쓸쓸해져서 길게 탄식했다. 그때 제자 중에 이름이 중유(仲由)인 자로(子路)가 곁에 있다가 나아가 말하기를, “노나라 군주께서 정사에 태만하니 선생님께서는 다른 나라로 가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교제(郊祭 ; 교외에서 하늘과 땅에 지내는 제사)가 이미 가까웠으니 만일 대례를 폐하지 않는다면 아직 해볼 만하다 할 것이다.” 했다. 이윽고 제사를 지내는 날이 되어 노정공이 제사를 지내자마자 즉시 궁으로 돌아가 조회를 보지 않았고, 아울러 제사 지낸 고기를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제사 음식을 주관하는 관리가 궁문을 두드리며 명을 청했으나 노정공은 계손사에게 맡겨버렸다. 계손사는 다시 그 일을 가신에게 맡겼다. 공자는 제사에 따라갔다가 돌아와서 저녁이 되어도, 나눈 제사 음식이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보고 이에 자로에게 말하기를, “나의 도(道)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이로구나!” 하고, 거문고를 끌어와 노래하기를, “그 여자들의 노래 때문에, 내가 이곳을 떠나게 되었구나! 그 여자들의 참견 때문에, 내 일을 망쳤구나! 한가하게 즐기다가, 오로지 세월을 마쳐야지!” 했다. 노래를 마치자 마침내 행장을 꾸려 노나라를 떠났다.
자로와 염유가 또한 벼슬을 버리고 공자의 뒤를 따라갔다. 이때부터 노나라는 다시 쇠퇴해졌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아름다운 여자의 힘이 강철 칼을 이겼으니, 여미의 교묘한 계략 때문만이 아니었다. 천운이 쇠퇴하여 점점 무너졌으니, 어찌 노나라가 홀로 패업을 이루게 용납했겠는가?” 했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갔다. 위영공(衛靈公)은 기뻐하며 맞이하여 공자에게 싸움의 진법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이 구(丘)는 그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했다. 다음 날, 마침내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의 광(匡) 땅을 지나가게 되었다. 광 땅의 사람들이 평소에 양호에게 원한을 가져,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하게 생긴 것을 보고, 양호가 다시 왔다고 생각하여 무리를 모아 공자의 일행을 둘러쌌다. 자로가 나가서 싸우려고 하자 공자가 말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광 사람들에게 원수진 일이 없는데, 이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마땅히 저절로 풀어질 것이다.” 했다. 이에 공자는 편안히 앉아서 거문고를 연주했다. 그때 마침 위영공이 사람을 시켜 공자를 쫓아가서 돌아오게 하자, 광의 사람들이 그 잘못을 알고 사죄하고 물러갔다. 공자가 다시 위나라로 돌아가서 어진 대부 거원(蘧瑗)의 집에 주인을 정하고 묵었다.
한편, 위영공의 부인은 남자(南子)라고 불렀는데, 송나라 여자였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나 음란했다. 그녀가 송나라에서 있을 때 먼저 공자 조(公子朝)와 서로 통하고 있었다. 공자 조 역시 남자 중에 절색이었기 때문에 두 미남미녀가 서로 사랑하여 부부 이상이었다. 남자(南子)가 위영공에게 이미 시집을 와서 괴외(蒯聵)를 낳아 장성하여 위나라의 세자가 되었음에도 옛날 정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때 또 미자하(彌子瑕)라는 미남자가 있었는데, 평소에 위영공의 총애을 받고 있었다. 일찍이 복숭아를 반쯤 먹다가 그 나머지를 위영공의 입에 밀어 넣어 주었다, 위영공이 기쁘게 받아먹으며 사람들에게 자랑하여 말하기를, “자하가 나를 극진히 사랑하는구나! 복숭아 한 개의 맛을 차마 혼자 먹지 못하고 나에게 나누어 먹게 해주었다.” 하니, 여러 신하가 속으로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미자하가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려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위영공은 밖으로 미자하를 총애하고, 안으로 남자(南子)를 두려워하여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고 생각하여 때때로 송나라의 공자 조를 불러다가 부인과 만나게 해 주었다. 더러운 소리가 두루 퍼졌으나 위영공은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세자 괴외가 그 일을 아주 한스럽게 여겨서 가신 희양속(戱陽速)을 시켜 아침 인사를 드릴 때 남자(南子)를 찔러 죽여 그 추악함을 없애려고 했다.
남자(南子)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위영공에게 호소하였다. 위영공이 괴외를 쫓아내니 괴외는 송나라로 달아났다가 다시 진(晉)으로 달아났다. 위영공이 괴외의 아들 첩(輒)을 세자로 세웠다. 공자가 다시 위나라에 오자 남자(南子)가 만나고자 했다. 그녀는 공자가 성인(聖人)이라는 것을 알고 공경하여 더욱 예절로 대하였다. 갑자기 어느 날, 위영공과 남자가 수레를 같이 타고 외출했는데, 공자에게 함께 따르게 했다. 시가지를 지나가니 시장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함께 수레를 탄 사람은 미인인가? 뒤에 수레를 탄 사람은 덕 있는 사람인가?” 했다. 공자가 탄식하기를, “군주는 덕을 좋아하기를 예쁜 여자만큼 하지 않는구나!” 했다. 이에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가서 제자들과 큰 나무 밑에서 예를 익혔다. 송나라의 사마 환퇴(桓魋)도 역시 남색으로 송경공(宋景公)에게 총애을 얻어, 바야흐로 귀하게 되어 정사를 맡았기 때문에 공자가 오는 것을 꺼렸다. 마침내 사람을 시켜 그 나무를 베어 버리고 공자를 죽이려고 했다. 공자가 미복으로 송나라를 떠나 정나라로 갔다. 장차 진(晉)나라로 가려고 황하에 이르렀는데, 조앙(趙鞅)이 현신 두주(竇犨)와 순화(舜華)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새와 짐승도 그 무리를 상하게 하는 것을 미워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랴?” 하고, 다시 위나라로 돌아갔다. 오래지 않아 위영공이 죽고, 나라 사람들이 첩(輒)을 군주로 세웠다. 이가 위출공(衛出公)이다. 괴외도 또한 진(晉)나라의 도움을 얻어 양호(陽虎)와 함께 척(戚) 땅을 습격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했다.
이때 위나라는 아버지와 아들이 나라를 다투었는데, 진(晉)나라는 괴외(蒯瞶)를 돕고 제나라는 첩(輒)을 도왔다. 공자는 그 역리(逆理)를 미워하여 다시 위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로 갔다가 또 장차 채나라로 가려고 했다. 초소왕이 공자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초빙했다. 진나라와 채나라 대부들이 서로 의논하여, 초나라에서 공자를 쓰면 진나라와 채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생각하여, 이에 서로 군사를 동원하여 들판에서 공자를 포위했다. 공자는 양식이 떨어진 지 사흘이 지났지만, 거문고의 현을 뜯고 노래하기를 쉬지 않았다. 지금의 개봉부(開封府)와 진주(陳州)의 경계에 지명이 상락(桑落)이라는 곳이 있다. 그 땅에 누대가 남아 있고, 이름을 액대(厄臺)라 하는데, 곧 당시에 공자가 양식이 떨어졌던 곳이다. 송나라 유창(劉敞)이 시를 이르기를, “천하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한 나그네가, 사흘 동안 양식이 떨어져 죽음이 목전에 이르러도, 이것을 하늘이 목탁을 연마시키려는 뜻이라고 했지만, 어찌 어리석은 진나라 채나라의 신하들에게 시켰을까?” 했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신장이 9척이 넘는 괴이한 사람이 검은 옷에 높은 관을 썼으며, 갑옷을 입고 과를 들고서 공자를 향하여 꾸짖자 주위가 그 목소리로 울렸다. 자로도 튀어나가 뜰에서 싸웠으나, 그 사람의 힘이 세어서 자로가 이길 수가 없었다. 공자가 옆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한참 살펴보더니 자로에게 말하기를, “어찌 그 옆구리를 찌르지 않느냐?” 하니, 자로가 마침내 그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괴한은 힘이 빠지더니 손이 늘어지며 패하여 땅바닥에 쓰러졌다. 괴한은 변하여 큰 메기가 되니, 제자들이 괴이하게 생각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무릇 만물은 나이가 들어 쇠하면 여러 정령이 붙게 된다. 그것을 죽이면 그만이라. 어찌 괴이함이 있겠느냐?” 하고, 제자를 시켜 그것을 삶아 허기를 채우게 했다. 제자들은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보내 준 것이다!” 했다. 초나라 사자가 군사를 동원해 공자를 맞이했다. 공자가 초나라에 도착하니, 초소왕이 크게 기뻐하여 장차 공자를 천사(千社)의 땅에 봉하려고 했다. 초나라의 영윤 자서(子西)가 간하기를, “옛날 문왕은 풍(豊) 땅에 있었고 무왕은 호(鎬) 땅에 있어 땅이 겨우 백 리였습니다마는 능히 덕을 닦아 마침내 은나라를 대신하여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공자의 덕이 문왕과 무왕만 못하지 않으며, 또한 그 제자들은 모두 어진 사람들입니다. 만일 그들이 땅을 얻어 자리를 잡으면 그들이 초나라를 대신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초소왕이 공자를 등용할 생각을 그만두었다. 공자는 초나라가 그를 등용하지 못할 것을 알자, 곧 다시 위나라로 돌아갔다. 위출공(衛出公)이 공자에게 국정을 맡기려고 했으나 공자가 거절했다. 노나라 상국 계손비(季孫肥)가 또한 와서 공자의 문인 염유(冉由)를 불렀다. 공자는 그로 인해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나라는 공자를 나이 들어 은퇴한 노대부의 예로써 대우했다. 이에 여러 제자 중에서 자로(子路), 자고(子羔) 두 사람은 위나라에 벼슬을 하고, 자공(子貢), 염유(冉有), 유약(有若), 복자천(宓子賤)은 노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이것은 모두 나중의 일이다. 공자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한편, 오왕 합려는 초나라를 패퇴시킨 후에 위세가 중원에 진동하자, 자못 노는 즐거움을 일삼기 시작했다. 이에 궁궐을 크게 짓고 나라의 도성 안에 장락궁(長樂宮)을 축조하고 고소산(姑蘇山)에 높은 누대를 지었다. (산은 도성 서남쪽 30리에 있으며 일명 고서산(姑胥山)이라고 했다.) 서문(胥門) 밖 에 아홉 구비의 길을 만들어 산길과 통하게 했다. 봄과 여름에는 성 밖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가을과 겨울에는 성안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어느 날 갑자기 옛날 월나라 사람이 오나라를 쳤던 원한을 상기하고 그것을 보복할 생각을 했다. 그때 문득 제나라와 초나라가 통호하여 사신을 초빙한다는 소식을 듣고, 합려가 노하여 말하기를, “제나라와 초나라가 통호를 한다고 하니 이것은 우리 오나라 북쪽 변경의 우환 거리다.” 하고, 먼저 제나라를 정벌한 후에 월나라를 치려고 했다. 상국 오자서(伍子胥)가 나아가 말하기를, “사신이 서로 오가는 것은 이웃 나라끼리 늘 있는 일입니다. 제나라가 아직은 초나라를 도와 우리 오나라를 해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갑자기 군사를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태자 파(波)의 원비(元妃)께서 돌아가셨는데도 아직 계실이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사자를 제나라에 보내 구혼하지 않으십니까? 만약 제나라가 좇지 않으면 그때 정벌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하니, 그 말을 쫓아 대부 왕손락(王孫駱)을 사자로 삼아 제나라에 가서 태자 파의 구혼을 하게 했다.
그때 제경공은 이미 늙어서 뜻과 기운이 쇠퇴하여 스스로 일을 주재할 수가 없었다. 제나라 궁중에는 시집을 가지 않은 한 어린 딸이 있었지만 차마 오나라에 시집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제나라 조정에는 어진 신하도 없고 변방에는 좋은 장수도 없어서, 오나라의 청을 거절할 경우 그들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서, 전날 초나라가 입은 전화를 입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걱정했다. 대부 여미가 역시 제경공에게 오나라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를 권하고 그들의 분노를 격동시키지 말라고 했다. 제경공이 할 수 없이 그의 어린 딸 소강(少姜)을 오나라에 시집보내기로 했다. 왕손락이 오나라로 돌아가 합려에게 복명하니, 오왕 합려가 다시 왕손락을 제나라에 보내 폐백을 예물로 바치고 제나라 여자를 맞이해 귀국하도록 했다. 제경공은 딸을 사랑했지만, 오나라를 두려워하여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며 한탄하며 말하기를, “만약 안평중이나 사마양저 중 한 사람만 여기에 있었더라면 내가 어찌 오나라 사람을 걱정하겠는가?” 하고, 대부 포목(鮑牧)에게 말하기를, “번거롭겠지만 경이 과인을 위해 내 어린 딸을 오나라에 데려다주시오! 이 애는 나의 사랑하는 딸이니 오왕에게 잘 보살펴 주도록 부탁하시오!” 했다. 떠날 때가 되어 제경공이 친히 소강을 수레에 태우고 남문 밖까지 전송한 후에 돌아왔다. 포목이 소강을 모시고 오나라에 이르러 오왕 합려에게 제경공이 부탁하는 말을 전했다. 포목은 그로 인해 오자서가 어진 사람임을 알고 서로 깊이 사귀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편, 소강은 나이가 어려서 부부의 즐거움을 몰랐고, 태자 파와 혼인한 후에도 한마음으로 오직 부모 생각만 하여 밤낮으로 흐느껴 울었다. 태자파가 계속 달랬지만 그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다가 마침내 답답함이 병이 되었다. 합려가 불쌍하게 여겨 즉시 북문의 성루를 개조하여 극히 화려하게 꾸민 다음 그 이름을 망제문(望齊門), 곧 제나라를 바라보는 문이라 고치고, 소강에게 명하여 그 위에서 날마다 놀게 했다. 소강이 난간에 기대어 북쪽을 바라보았으나 제나라가 보이지 않자 슬퍼함이 더욱 심해져 그녀의 병이 더해졌다. 그녀가 죽음에 다다라 태자 파에게 부탁하기를, “첩이 들으니, 우산(虞山) 꼭대기에서는 동해를 볼 수 있다고 하니, 나를 거기에 묻어 주십시오. 만약에 혼백이 안다면 제나라를 한 번 볼 수 있겠지요.” 했다. 태자 파가 그 부왕인 합려에게 아뢰어 소강을 우산의 꼭대기에 장사지냈다. 지금도 상숙현(常熟縣)의 우산에는 제나라 여인의 무덤이 있고 또한 망해정(望海亭)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 명나라 초기의 장홍(張洪)이 ‘제녀분(齊女墳)’이란 시를 지어 증거로 남겼다. 시에 이르기를, “남풍은 처음 사납게 불고 북풍은 미약한데, 위세를 다투고자 제나라에서 여자를 데려왔다. 국경을 넘을 때 황금 천 냥을 주어 보냈지만, 도중에서 응당 만 번이나 눈물을 닦았으리라! 고향이 그리워 누대에서 멀리 보기를 마다하지 않고, 한을 품고 묻힌 무덤이 낮은 것을 싫어했다! 덩굴에 떨어지는 이슬은 그녀의 눈물 같아서, 누구를 시켜 고향을 향해 눈물을 적셔줄꼬?” 했다.
태자 파(波)가 제나라 여자를 그리워하다가 그 역시 병이 들어 얼마 있지 않아 죽었다. 합려는 여러 공자 중에 태자를 세울 만한 자를 택하려 했으나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오자서를 불러 결정하려고 했다. 태자 파는 전 부인에게서 얻은 부차(夫差)라는 아들이 있었다. 나이가 이미 26세였고, 타고난 풍채가 당당하고 영웅의 기상이 있는 한 사람의 준수한 인재였다. 부차는 조부 합려가 후사를 선택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먼저 오자서에게 달려가 만나서 말하기를, “나는 적손(嫡孫)입니다. 태자를 세우려 한다면 나를 버리고 누구겠소? 이것은 상국의 한 마디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오자서가 허락했다. 얼마 후에 합려가 사람을 시켜 오자서를 불러서 후계자를 세우는 일을 상의했다. 오자서가 말하기를, “후계자는 적자로 세워야만 혼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태자는 비록 죽었지만, 적손인 부차가 있습니다.” 하니, 합려가 말하기를, “내가 부차를 살펴보니 어리석고 인자하지 못하오. 능히 오나라의 계통을 받들지 못할까 걱정이오.” 했다. 오자서가 말하기를, “부차는 신의로써 백성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예의에 밝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죽으면 그 아들이 뒤를 잇게 되는 것은 경전에 명백한 조문입니다. 또 어찌 의심하십니까?” 하니, 합려가 말하기를, “과인이 경의 말을 따르겠으니 경은 잘 보좌하도록 하시오!” 했다. 즉시 부차를 태손으로 세웠다. 부차가 오자서의 집에 가서 머리를 숙여 감사의 말을 올렸다.
주경왕(周敬王) 24년(기원전 495년)에 합려는 늙어서 성격이 더욱 조급해졌다. 월나라의 윤상이 죽고 그 아들 구천이 새로 섰다는 소식을 듣고, 합려가 즉시 월나라의 초상을 틈타서 공격하려고 했다. 오자서가 간하기를, “월나라가 비록 우리 오나라를 기습한 죄는 있지만, 그러나 지금 대상을 당했는데 그를 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합니다. 마땅히 조금 기다려야 합니다.” 했다. 합려가 듣지 않고 자서와 태손 부차를 남겨서 오나라 도성을 지키라 하고, 스스로 백비(伯嚭), 왕손락(王孫駱), 전의(專毅) 등과 정예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남문을 나가 월나라를 바라보고 출병했다. 월왕 구천은 친히 군사를 독려하여 방어하되, 제계영(諸稽郢)을 대장으로 삼고, 영고부(靈姑浮)를 선봉으로 하며, 주무여(疇无餘)와 서안(胥犴)을 좌우익으로 삼아 취리(檇里)에서 오나라 군사와 서로 만났다. 서로 10리쯤 거리를 두고 각각 진영을 세웠다. 두 나라 군사가 전투를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합려가 대로하여 즉시 모든 오나라 군사들을 오대산(五臺山) 기슭에 진영을 벌여놓고 군사들에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경계하여 월나라 군사들이 해이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런 뒤에 그 틈을 타 습격하기로 했다. 구천이 오나라의 진영을 바라보니, 대오가 정연하고 창과 갑옷이 정예했다. 구천이 제계영에게 말하기를, “적군의 군세가 매우 성하니 가볍게 맞서서는 안 되겠다. 반드시 계략을 세워 오나라의 진영을 어지럽혀야 하겠다.” 했다.
구천은 즉시 대부 주무여와 서안을 시켜 결사대를 조직하게 했다. 왼쪽 결사대 5백 명은 각각 긴 창을 잡고 오른쪽 결사대 5백 명은 큰 극을 들게 하여, 고함을 크게 지르면서 오나라 진영을 향하여 돌진하게 했다. 오나라 진영에서는 전연 상관하지 않고 진영 최전방에서 궁노수들이 철벽과 같이 견고하게 화살을 퍼부었다. 월나라의 결사대가 세 번이나 돌격했으나 모두 돌파하지 못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구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제계영이 몰래 아뢰기를, “죄수들을 써 볼 수 있습니다.” 하니, 구천이 그 뜻을 알아들었다. 다음 날 비밀리에 군령을 내려 군중에서 죽을죄를 지은 자들을 내놓게 하니 모두 300명이었다. 3대로 나누어 모두 웃통을 벗게 한 다음 칼 한 자루씩을 목에 걸고 행군하여 오군 진영으로 나아갔다. 맨 앞에 선 자가 말하기를, “우리 군주이신 월왕께서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상국 오나라에 죄를 지어 토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신등은 감히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고, 원컨대 죽음으로써 월왕의 죄를 대신하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 차례대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오나라 병사들은 이러한 거동을 본 적이 없어 심히 괴이하게 생각하여 주목하여 보고서는 서로 말을 전했으나 아무도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를 알지 못했다.
월나라 군중에서 갑자기 북이 울리고 북소리가 크게 진동하더니, 주무여와 서안이 좌우 결사대를 거느리고 각각 큰 방패와 단검을 들고 휘파람을 불며 돌진해 왔다. 오나라 군사들은 마음이 황망해져 대오가 곧 흩트려졌다. 구천이 대군을 거느리고 계속 전진하고, 오른쪽에 제계영이, 왼쪽에 영고부가 오나라의 진영으로 돌격했다. 오나라의 왕손락이 결사적으로 제계영을 막았다. 영고부도 긴 칼을 들고 좌충우돌 분전하며 사람을 찾아 무찌르다가 오왕 합려를 만났다. 영고부는 칼을 들어 합려를 찍으려고 등 뒤로 다가가서 번개같이 휘둘렀다. 칼이 빗나가 오른쪽 발을 찍어서 합려의 발가락을 잘랐다.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수레 밑으로 떨어졌다. 그때 마침 전의가 군사를 이끌고 도착하여, 오왕 합려를 구했다. 그러나 전의는 몸에 중상을 입었다. 왕손락이 오왕 합려가 부상당했음을 알고, 감히 싸움을 계속할 생각을 버리고 군사를 황급히 거두었다. 한바탕 월나라 군사들의 엄습을 당하여 죽은 군사가 과반이었다. 합려의 상처가 중하여 즉각 군사를 돌려 오나라 진영으로 회군했다. 영고부는 합려의 신발을 주워 공을 아뢰니 구천이 크게 기뻐했다.
한편, 오왕 합려는 늙어서 고통을 참을 수 없었다. 회군하여 7리쯤 갔을 때, 크게 한번 외치더니 죽었다. 백비가 합려의 시신을 모시고 앞서고, 왕손락이 군사를 이끌고 추격병을 막으며 천천히 돌아갔다. 월나라 군사들도 또한 추격하지 않았다. 사관이 시를 지어 논하기를, 합려가 쉴 새 없이 군사를 동원하여 이런 화를 당했다고 했다. 시에 이르기를, “초나라를 무찌르고 제나라를 능멸하여 의기가 높더니, 다시 월나라를 삼키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전쟁을 즐기다가 결국에는 싸움 중에 죽으니, 일이란 순리를 따라야지, 날뛰면 안 된다.” 했다. 오나라 태손 부차가 합려의 시신을 맞이하여 돌아와서 상을 입고 오왕의 자리를 이었다. 파초문(破楚門) 밖의 해용산(海涌山)에 합려의 장지를 정하고, 공사 인부를 징발하여 산을 파고 구덩이를 만들었다. 이어서 전제가 썼던 어장검을 같이 묻고, 그 밖에 칼과 갑옷 6천 점을 부장했다. 또한 금과 옥으로 만든 노리개를 무덤 안에 가득 채워 합려의 시신과 함께 묻고 나서, 무덤 공사를 했던 인부들을 모두 죽여서 순장했다. 사흘 뒤에 어떤 사람이 합려의 능을 멀리서 바라보니 그 위에 하얀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어서 그 산을 호구산(虎邱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식자들은 금을 묻은 기운이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후에 진시황이 사람을 시켜 합려의 묘를 파헤쳐 어장검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얻지 못했다. 그때 판 곳이 깊은 시냇물이 되어, 지금은 호구검지(虎丘劍池)라 부른다.
중상을 입은 전의도 또한 죽으니 호구산 뒤에 묻었다고 했으나, 지금은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부차가 그 조부인 합려를 장사지내고 그의 장자 우(友)를 태자로 삼았다. 부차가 시종 열 사람을 시켜서 서로 번갈아 가며 뜰 안에 서서 자신이 출입할 때마다 반드시 큰 소리로 그 이름을 불러 고하기를,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너의 조부를 죽인 것을 잊었느냐?”라고 하게 했다. 그러면 부차는 울면서 대답하기를, “예. 그 일을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 하여, 스스로 경계하고 근신하고자 했다. 부차는 오자서와 백비에게 명하여 태호에서 수군을 조련하라고 하고, 또 영암산(靈巖山)에 활터를 만들어 활쏘기를 훈련시켰다. 삼년상이 끝나기를 기다려 원수를 갚기 위해 거병하려고 했다. (그때가 주경왕 24년의 일이었다.) 그때 진경공(晉頃公)이 실정하여 육경이 파당을 지어 권력을 다투느라 서로 짓밟았다. 순인(荀寅)과 사길사(士吉射)는 서로 화목하여 혼인을 맺었고, 한불신(韓不信)과 위만다(魏曼多)가 많이 시기했다. 순력에게는 양영보(梁嬰父)라는 총신이 있었는데, 순력이 그를 경(卿)으로 삼으려고 했다. 양영보는 순력의 총애를 믿고 순인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하려고 모의했다. 그래서 순력도 역시 범씨(范氏 ; 士氏)와 중행씨(中行氏 ; 荀氏)들과 서로 미워했다.
상경 조앙(趙鞅)에게는 조카뻘이 되는 조오(趙午)가 한단을 봉토로 가지고 있었다. 조오의 모친은 순인(荀寅)의 여동생이니 순인이 조오를 생질이라고 불렀다. 지난해에 위영공과 제경공이 함께 모의하여 진(晉)나를 배반하니, 진(晉)나라 조앙(趙鞅)이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를 정벌했다. 위나라가 두려워하여 호구 5백 호를 바쳐 죄를 빌었다. 조앙이 위나라 백성들을 한단에머물러 살게 하고 그들을 위나라 공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조앙이 그 5백 호를 진양(晉陽)으로 옮기려 하니, 조오는 위공들이 불복할까 걱정하여 조앙의 명령을 즉시 받들지 않았다. 조앙이 자기의 명을 거역했다고 성을 내어 즉시 조오를 진양으로 유인한 후에 잡아서 죽였다. 조앙이 자기의 생질을 유인하여 살해했다고 화를 낸 순인이 사길사과 상의하여 함께 조씨를 토벌하여 한단의 주인이었던 조오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조씨 문중에 동안우(董安于)라는 모신이 있었는데, 그때 조씨를 위해 진양성을 지키고 있었다. 순인과 사길석 두 집안의 모의를 들은 동안우가 특별히 강주로 달려와서 조앙에게 고하기를, “범씨(사씨)와 중행씨(순씨)가 아주 화목하고 한번 모의하여 난을 일으키면 진압하기 힘들까 걱정됩니다. 공께서는 마땅히 먼저 대비를 하십시오.” 하니, 조앙이 말하기를, “진(晉)나라에는 법령이 있어 화란을 먼저 일으킨 자는 반드시 죽이게 되어 있소. 그들이 먼저 난을 일으키기를 기다렸다가 뒤에 움직여야 하오.” 했다.
동안우가 말하기를, “백성들을 많이 다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제가 혼자 죽겠습니다.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이 동안우가 감당하겠습니다.” 하니, 조앙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안우는 사병들을 모아 무장을 시키고 순인과 사길사의 동정을 살폈다. 순인과 사길사는 여러 사람에게 말을 퍼트리기를, “동안우가 사병을 모아 무장시키는 것은 장차 우리를 해치려는 것이다.” 하고, 이에 두 집안의 군사를 합쳐 조씨를 공격하여 그 집을 포위했다. 그러나 동안우는 대비가 있었으므로 군사를 이끌고 싸워서 한 줄기 혈로를 열어 조앙을 보호하여 진양성으로 달아났다. 순씨와 사씨가 추격하여 공격해 오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보루를 세우고 지켰다. 순력이 한불신과 위만다에게 말하기를, “조앙은 육경의 수장인데, 순인과 사길사가 주군의 명도 없이 제멋대로 쫓아냈으니 정사는 그 두 집안에 돌아갈 것이오.” 하니, 한불신이 말하기를, “어찌 화란을 처음 일으킨 죄를 물어서 아울러 쫓아내지 않으십니까?” 했다. 세 사람이 즉시 함께 진정공(晉定公)에게 청하여 각각 가병을 거느리고 진정공을 받들고 순인과 사길사 두 집을 토벌하니, 순인과 사길사가 힘껏 항전했으나 이길 수가 없었다. 사길사가 진정공을 습격할 것을 모의하니, 한불신이 재빨리 사람을 시켜 시중에서 외치기를, “범씨(사길사)와 중행씨(순인)가 모반하여 주군을 납치하려고 한다!” 했다. 백성들이 그 말을 믿고 각기 병장기를 들고 진정공을 구하러 달려갔다.
세 집안(순력, 한불신, 위만다)이 백성들의 도움으로 범씨(사길사)와 중행씨(순인)의 병사들을 물리쳤다. 순인과 사길사가 조가(朝歌)로 달아나서 공실에 저항했다. 한불신이 진정공에게 고하기를, “범씨(사길사)와 중행씨(순인)가 먼저 변란을 일으켜 지금 이미 쫓겨났습니다. 조씨는 대대로 진(晉)나라에 큰 공이 있으니, 마땅히 조앙의 직위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하니, 진정공은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즉시 진양으로부터 조앙을 불러 그의 작록을 돌려주었다. 양영보가 순인을 대신하여 경이 되고자 하니, 순력이 조앙에게 말했다. 조앙이 동안우에게 물으니, 동안우가 말하기를, “진(晉)나라의 정사는 많은 집안에서 관여합니다. 그래서 화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만약에 양영보를 경으로 세운다면 그것은 또 다른 순인을 세우는 것입니다!” 했다. 조앙이 이에 (순력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양영보가 노하여 동안우가 방해한 것을 알고 순력에게 말하기를, “한씨와 위씨가 조씨와 당이 되어 지씨(智氏)의 형세가 고립되어 있습니다. 조씨가 믿는 것은 책략가 동안우입니다. 어찌 제거하지 않습니까?” 하니, 순력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제거할 수 있겠는가?” 했다. 양영보가 말하기를, “동안우가 먼저 사병을 무장시켜서 범씨(사길사)와 중행씨(순인)의 변란을 격발시켰습니다. 만약 먼저 변란을 일으킨 자를 논한다면 도리어 동안우가 그 첫 번째입니다.” 했다.
순력이 양영보의 말대로 조앙에게 따지니, 조앙이 두려워했다. 동안우가 그말을 듣고 말하기를, “신이 그때 본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신이 죽으면 조씨 집안은 편안할 것입니다. 이 죽음은 사는 것보다 현명합니다.” 하고 즉시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조앙이 동안우의 시신을 시정에 전시하고, 사람을 시켜 순력에게 고하기를, “동안우가 이미 자기의 죄를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하니, 순력이 즉시 조앙과 결맹하여 서로 해치지 않기로 했다. 조앙이 가묘에서 동안우의 제사를 몰래 지내주고 그의 노고에 보답했다. 순인과 사길사가 오랫동안 조가를 근거지로 하니, 진(晉)나라에 반대하는 제후들이 모두 그들의 힘을 빌려 진(晉)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조앙이 여러 번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제(齊), 노(魯), 정(鄭), 위(衛) 등의 나라에서 양식을 보내어 두 사람의 군사들을 도왔기 때문에 조앙은 싸움에서 이길 수 없었다. 주경왕(周敬王) 30년에 이르러 조앙이 한(韓), 위(魏), 지(智) 세 집안의 군사들과 힘을 합하여 조가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순인과 사길사는 한단으로 달아나서 다시 백인(柏人)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백인성이 다시 깨어지니 그 무리인 범고이(范皐夷)와 장유삭(張柳朔)은 모두 전사하고, 예양(禮讓)만은 순력의 아들 순갑(荀甲)에게 사로잡혔다. 그러나 순갑의 아들 순요(荀瑤)가 청하여 예양을 살려주었고, 마침내 지씨(智氏 ; 순력)의 가신이 되었다. 순인과 사길사는 제나라로 달아났다.
가련하게도 순림보의 5대손 순인과 사위의 7대손 사길사는 조상이 모두 진(晉)나라 공실의 팔다리만큼 중요한 신하였으나 그 자손이 재물을 탐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마침내 집안이 망하게 되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진(晉)나라의 육경은 이로부터 조(趙), 한(韓), 위(魏), 지(智) 사경만 남게 되었다. 이것은 나중의 이야기다. 염선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진나라 육경은 합치거나 혹 남거나 망했으니, 이는 모두 가문을 위한 세력 다툼이었다. 남은 네 가문도 나뉘어 도모함이 더욱 급하게 되었으니, 차라리 범씨(사씨)와 중행씨(순씨)만 남겨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했다. 한편 주경왕(周敬王) 26년(기원전 494년) 봄 2월에 오왕 부차가 탈상을 한 지 오래되어, 태묘에 고하고 나라의 힘을 기울여 군사를 일으켜서 오자서를 대장으로 삼고, 백비를 부장으로 삼아, 태호로부터 수로를 이용하여 월나라를 공격했다. 월왕 구천이 여러 신하를 모아 대책을 세운 뒤에 군사를 내어 적을 맞이했다. 대부 범려(范蠡)는 자가 소백(少伯)인데 반열에서 나와 아뢰기를, “오나라는 우리와 싸워 군주를 잃어 치욕을 당하고 그 원수를 갚고자 맹세를 한 것이, 지금 3년이 되었습니다. 그 마음은 분노로 차있고, 그 힘은 하나같이 강하여 당해낼 수 없습니다. 마땅히 군사를 모아 굳게 지키는 것을 계책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대부 문종(文種)은 자를 회(會)라고 했는데,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겸손한 말로 사죄하고 화의를 청하여 오나라 군사들이 물러가기를 기다려서 뒷일을 도모하는 것이 낫습니다.”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두 분 경의 말은 지키거나 아니면 화의를 하라는 것인데 모두 좋은 계책이 아니오. 무릇 오나라는 우리와 대대로 내려온 원수의 나라요, 그들이 쳐들어왔음에도 싸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군사를 지휘할 수 있겠소?” 했다. 즉시 나라 안의 장정들을 모두 동원한 3만 명을 이끌고 초산(椒山) 아래에서 오나라 군사를 맞이했다. 처음 싸움에서 오나라 군사가 조금 꺾여서 사상자가 백여 명이었다. 구천이 이기려고 곧바로 진격하여 약 몇 리를 나아가다가 부차의 대군과 맞닥뜨렸다. 양쪽이 진을 치고 크게 싸웠다.부차가 뱃머리에 서서 친히 북채를 잡고 북을 쳐서 장병을 격려하자 용기가 열 배로 솟았다. 갑자기 북풍이 크게 일어나 파도가 휘몰아치니, 오자서와 백비가 각기 여황(餘皇)이라는 큰 함선을 타고 바람을 따라 돛을 올리고 내려오면서 모두 강한 활과 굳센 쇠뇌로 화살을 나는 황충같이 쏘아댔다. 월나라 군사는 바람을 안고 적을 막아낼 수 없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오나라 군사는 세 길로 나누어 추격했다. 월나라 장수 영고부(靈姑浮)는 배가 뒤집혀 익사하고, 서안(胥犴)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오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죽인 군사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구천이 고성(固城)으로 달아나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지만 오나라 군사가 겹겹이 에워싸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물길을 끊었다. 부차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열흘도 못 가서 월나라 군사들은 모두 목이 말라 죽을 것이다.” 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고성 안 산꼭대기 위에 영천이라는 샘물이 있고 샘물에는 맛있는 물고기가 있었다. 구천이 군사들에게 명하여 고기 수백 마리를 잡아서 오왕 부차에게 보내 주라고 했다. 오왕 부차가 크게 놀랐다. 구천은 범려에게 고성에 남아 굳게 지키라 명하고 자기는 나머지 패잔병을 거느리고 틈을 타서 회계산(會稽山)으로 달아났다. 갑옷과 방패를 갖춘 군사의 수를 헤아려보니 겨우 5천여 명에 불과했다. 구천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군이 세상을 떠난 후 내가 왕위에 오른 지 30년 동안에 이렇게 패한 일을 일찍이 없었다! 내가 범려와 문종 두 대부의 말을 듣지 않아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을 후회한다.” 했다. 오나라 군사들이 더욱 급하게 고성을 공격했다. 오자서는 오른쪽에 진영을 세우고, 백비는 왼쪽에 진영을 새우니, 범려가 하루에 세 차례나 구천에게 위급함을 고했다. 월왕이 크게 두려워하자 문종이 계책을 바치며 말하기를, “일이 매우 급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도 화의를 청하면 혹시 성사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구천이 말하기를, “오나라가 화의 를 거절하면 어떻게 합니까?” 했다. 문종이 대답하기를, “오나라에 태재 백비라는 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재물을 탐하고 여자를 좋아하며 또한 남의 공을 시기하고 능력자를 질투합니다. 오자서와 같이 오나라를 섬기지만, 뜻이 맞지 않습니다. 오왕은 오자서를 두려워하며 섬기지만 백비와 친합니다. 만약에 몰래 백비의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그의 환심을 사서 화의를 맺자는 약속을 정하면 태재 백비가 오왕에게 말할 것이며, 오왕은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자서가 비록 알고 막아도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경이 태재를 만나면 무엇으로 뇌물을 바치겠소?” 하니, 문종이 대답하기를, “군중에 없는 것은 여자입니다. 진실로 아름다운 여자를 바치고, 하늘이 만약 월나라에 복을 준다면, 백비는 틀림없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것입니다.” 했다. 구천이 그날 밤으로 사람을 도성으로 보내 궁중의 미녀 여덟 명을 뽑아서 얼굴과 복장을 예쁘게 꾸미고, 흰 벽옥 스무 쌍과 황금 천일을 준비하여, 문종이 밤에 백비의 진영에 가서 태재를 뵙기를 청했다. 백비가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으나, 잠시 사람을 시켜 찾아온 형상을 살펴보고 바칠 물건을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즉시 불러들였다. 백비가 앉아서 문종을 맞았다. 문종이 무릎을 꿇고 월왕의 말을 전하기를, “저희 주군이신 구천께서 나이가 어려 무식하여 대국을 잘 섬기지 못해 죄를 지었습니다. 오늘 저희 주군께서는 이미 후회해 마지않습니다. 나라를 들어 오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지만, 오왕께서 우리의 허물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하여, 태재님이 높은 공덕으로 밖으로는 오나라의 간성이요, 안으로는 오왕의 심복임을 알고, 저희 주군께서 신 문종을 시켜 먼저 영문에 머리를 조아리고 한 말씀을 빌려 저희 주군을 오왕의 지붕 아래로 거두어 주십시오. 변변치 않은 것이지만 보잘것없은 예물을 받아 주시면, 이후로는 마땅히 끊이지 않고 예물을 바치러 오겠습니다.” 했다.
곧 문종이 뇌물의 목록을 백비에게 바쳤다. 백비가 짐짓 얼굴을 붉히며 말하기를, “월나라는 아침저녁에 파멸하여, 모든 월나라의 소유는 우리 오나라에 속하게 될 터인데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런 구구한 물건으로 나를 회유하려는 것이냐?” 하니, 문종이 다시 나아가 말하기를, “월나라가 비록 싸움에서 졌지만, 회계에는 아직 정예 군사 5천 명을 보유하고 있어서 일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싸워 이기지 못하더라도 장차 창고에 쌓인 재화들을 모두 불태우고 몸은 타국으로 달아나서 초왕의 전례를 도모한다면 어찌 쉽게 오나라의 소유가 되겠습니까? 설령 오나라가 모두 소유한다고 해도 대부분은 왕실의 소유가 되어 태재와 장수들은 불과 십분의 일도 못 가질 것입니다. 만약 월나라의 화의를 주관하신다면 우리 군주님이 오왕에게 몸을 맡기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태재께 몸을 맡기게 되어 봄과 가을에 왕궁을 거치지 않고 먼저 태재부에 공물을 바치겠습니다. 이것은 태재께서 혼자 월나라 전체의 이익을 독점하게 되니, 장수들은 간여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궁지에 몰린 짐승은 오히려 싸우려 하니 성을 의지하여 한번 싸운다면 아직 승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이 일장 연설이 백비의 가슴에 닿아 부지중에 머리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문종이 다시 미인의 명부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여덟 명의 미인은 모두 월나라 궁전에서 뽑아서 데려왔습니다. 만약 민간에 이 같은 미인이 있으면 저희 주군이 월나라에 생환하게 된 후에 힘을 다해서 구해 바쳐 태재님의 시중을 들도록 하겠습니다.” 했다.
백비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대부가 오른쪽 진영의 오자서에게 가지 않고 왼쪽 진영의 나에게 달려 온 것은 내가 위험을 이용하여 남을 해치려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오. 내가 내일 아침 그대를 오왕 앞으로 인도하여 그 의논을 결정하도록 하겠소!” 했다. 백비는 즉시 월나라에서 바친 미녀와 보화들을 모두 받고, 문종을 자기의 진영에 머물게 하면서 손님의 예로써 대했다. 다음 날 아침 백비가 문종과 함께 중군으로 가서 부차를 만났다. 백비가 먼저 들어가서 월왕 구천이 문종을 시켜 화의를 청한 뜻을 상세히 말했다. 부차가 벌컥 화를 내며 말하기를, “월나라는 과인에게 불구대천의 원한이 있는데 어찌 화의를 허락할 수 있겠소?” 하니, 백비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손무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군사는 흉기라 잠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오랫동안 쓸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월나라가 비록 오나라에 죄를 지었지만, 그들이 오나라에 몸을 낮춘 것이 이미 지극합니다. 그 군주는 오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청하고, 그의 처는 역시 오나라 왕의 첩이 되기를 청하며, 월나라에 있는 모든 보물을 모두 쓸어서 오나라 궁중에 바치겠다고 합니다. 왕에게 청하는 바는 겨우 한 가닥 종사를 보존하게 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무릇 우리가 월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실리가 크고, 월나라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명분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을 수 있으니 오나라는 패자(霸者)가 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 반드시 병력을 다하여 월왕을 죽이려 한다면 저 구천은 장차 종묘를 불사르고, 처자를 죽이며, 황금과 보옥을 강물에 버린 후에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오나라에 대항하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만 상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을 죽이는 것과 그 나라의 이익을 취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낫습니까?” 했다.
오왕 부차가 말하기를, “지금 문종은 어디에 있소?” 하니, 백비가 대답하기를, “막사 밖에서 대왕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했다. 부차가 즉시 문종을 불러들여 만났다. 문종이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와서 다시 앞에서 백비에게 한 말을 더욱 겸손하게 했다. 부차가 말하기를, “너의 군주 부부가 나의 신하와 첩이 되겠다고 청했다는데 능히 그들이 나를 따라 오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니, 문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이미 대왕의 신하와 첩이 되었으면 죽이거나 살리거나 대왕에게 달려 있는데, 감히 좌우에서 복종하여 섬기지 않겠습니까?” 했다. 백비가 말하기를, “구천 부부는 오나라에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오나라는 명분상 비록 월나라를 용서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미 그들을 얻었는데 대왕께서는 또 무엇을 얻으려 하십니까?” 했다. 부차가 이에 화의를 하락했다. 이미 어떤 사람이 오른쪽 진영에 가서 오자서에게 소식을 알렸다. 오자서가 급히 중군 막사로 달려가 오왕 부차의 곁에 서 있는 백비와 문종의 모습을 보았다. 오자서가 얼굴에 노기를 가득 띠고 부차에게 묻기를, “대왕께서는 이미 월나라와 화의를 허락하셨습니까?” 하니, 오왕 부차가 말하기를, “이미 허락했소!” 했다. 오자서가 연달아 외치기를, “안 됩니다. 안 됩니다!” 하니, 문종이 억하고 몇 걸음 물러서서 그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오자서가 간하기를, “월나라와 오나라는 이웃이라 양립할 수 없는 형세입니다. 만약 오나라가 월나라를 없애지 않으면 월나라가 반드시 오나라를 없앨 것입니다. 무릇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는 우리가 공격하여 이겨서 그 땅을 얻었다 해도 우리는 그곳을 다스릴 수 없고, 그들의 전차를 얻었다 해도 탈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월나라를 공격하여 이긴다면 그 땅에 우리가 살 수 있고 그들의 배를 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나라의 사직에 이로우므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선왕의 큰 원수인데 월나라를 멸하지 않고 뜰에 서서 한 맹세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니, 부차가 말문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오직 백비를 쳐다볼 뿐이었다. 백비가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상국의 말은 틀렸습니다! 옛날 선왕께서 나라를 건국하실 때 수륙을 아울러 봉하셨으니, 오나라와 월나라는 수로로 화목하고,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는 육로로 화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땅에 살 수 있고 그 배도 탈 수 있으면 오나라와 월나라가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곧 진(秦), 진(晉), 제(齊), 노(魯) 나라들은 모두 육로로 인접한 나라이니, 그 땅이 또한 살 수 있고, 그 수레가 또한 탈 수 있으면 그 네 나라도 역시 장차 아울러 하나가 되어야 합니까? 만약 선왕 합려의 큰 원수를 생각한다면 마땅히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상국의 원수인 초나라는 더욱 심했으나 어찌하여 초나라를 마침내 멸하지 않고 그렇게 빨리 초나라의 화의를 허락했습니까? 지금 월왕 부부가 모두 오나라에서 복역하겠다는 것은 초나라가 겨우 미승(羋勝)을 받아들인 것과는 다릅니다. 상국은 스스로 충성을 두터이 행한다면서 대왕에게 각박한 이름을 얻게 하니 충신이 이와 같지는 않습니다.” 했다.
부차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태재의 말이 이치에 맞소! 상국은 잠시 물러가시오. 월나라가 공물을 바치는 날을 기다려서 마땅히 그대에게도 나누어주겠소.” 했다. 기가 차서 오자서가 얼굴이 흙빛이 되면서 탄식하기를, “내가 피리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구나. 저 같은 간신과 일을 같이하다니!” 하고, 입속으로 한탄하는 말이 그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부차의 막사를 나가면서 대부 왕손웅(王孫熊)에게 말하기를, “월나라는 10년이면 생산하여 저축할 것이고 다시 십년의 교훈을 더하여 20년이 지나지 않아서 오나라의 궁정은 연못이 될 것이오!” 했다. 왕손웅은 이 의미심장한 말을 믿지 않았다. 오자서가 분함을 머금고 오른쪽 진영으로 돌아갔다. 부차가 문종에게 명하여 월왕에게 돌아가서 복명하게 하자 문종이 다시 오나라 중군에 들려 감사의 말을 올렸다. 부차가 문종에게 월왕 부부가 오나라에 들어올 시기를 물으니, 문종이 대답하기를, “저희 주군께서 대왕의 용서를 받아 주멸되지 않았으니, 잠시 도성으로 들어가서 모든 보화와 자녀들을 수습하여 오나라에 데려가 대왕께 바치려고 하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조금 관대한 말미를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배반하는 마음으로 신의를 저버린다 한들 어찌 능히 대왕의 주멸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부차가 허락하여 마침내 5월 중순까지 부부가 오나라에 들어오기로 약정했다. 곧 왕손웅을 시켜 문종을 호송하여 같이 월나라 도성으로 가서 기일에 맞추어 행차를 재촉하도록 했다. 태재 백비는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오산(吳山)에 주둔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만약 기일이 지나도 월왕이 오지 않으면 월나라를 멸하고 돌아가 부차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부차는 대군을 이끌고 먼저 돌아갔다.
필경 월왕은 어떻게 오나라에 들어갈 것인가.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제80회: 부차는 간언을 듣지 않고 월왕을 풀어주고, 구천은 힘을 다해 오나라를 섬기다.
한편, 월나라의 대부 문종(文種)은 오왕 부차가 화친을 받아들이겠다는 허락을 받고 돌아와 월왕 구천에게 보고하기를, “오왕은 이미 철군했습니다. 대부 왕손웅에게 명하여 신을 따라 여기에 이르러 대왕의 출발을 재촉하도록 하고, 태재 백비에게 강가에 주둔하고 있다가 대왕께서 강을 건너기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하니, 월왕 구천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 눈에 눈물을 흘렸다. 문종이 말하기를, “5월의 기한이 임박했습니다! 대왕께서는 속히 도성으로 돌아가 나랏일을 정리하셔야지 무익하게 슬퍼할 때가 아닙니다.” 했다. 월왕 구천이 즉시 눈물을 거두고, 월나라 도성으로 돌아갔다. 시가지는 예전과 변함이 없었으며 장정들은 그 표정이 숙연하고 얼굴에는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다. 월왕 구천은 왕손웅을 관사에 머물도록 하고, 창고의 보물들을 수습하여 수레에 싣고, 또 나라 안의 여자들 330명을 뽑아 300명은 오왕에게 보내고, 30명은 태재 백비에게 보냈다. 그때 아직 움직일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왕손웅이 계속해서 재촉했다. 구천이 눈물을 흘리며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내가 선왕께서 물려주신 위업을 이어받아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감히 게으르지 않았는데 오늘에 이르러 부초(夫椒)에서 한번 패해 마침내 나라는 망하고 가족은 깨어지게 되었소! 천 리 먼 곳에 포로가 되어 이번에 가면 돌아올 날이 없게 되었소!” 하니, 여러 신하가 눈물을 흘렸다.
문종이 나아가 말하기를, “옛날 탕왕은 하대(夏臺)에 갇혔고, 문왕은 유리(羑里)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한번 일어서자 천자가 되었습니다. 제환공은 거(莒)나라로 달아났고, 진문공은 적(翟)나라로 달아났으나, 한번 일어서자 방백이 되었습니다. 무릇 괴롭고 어려운 역경은 하늘이 천자와 방백으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왕께서 하늘의 뜻을 잘 받들어 스스로 일어날 기약을 하셔야지, 하필 지나치게 상심하여 스스로 그 뜻을 손상하려고 하십니까?” 했다. 구천이 이에 그날로 종묘에 제사를 지내고, 왕손웅이 하루 먼저 출발하니, 구천과 그 부인은 그 뒤를 따라 출발했다. 월나라의 여러 신하는 모두 절강(浙江) 가에서 전송했다. 범려도 고릉에서 배를 타고 와서 월왕을 영접하여 강가에서 전별연을 열었다. 문종이 술잔을 들어 월왕에게 바치면서 축수하여 이르기를, “하늘이 보호하고 도우시니, 처음에는 고생하더라도 뒤에는 일어나리라! 화는 덕의 근원이 되고, 근심은 후일에 복이 되리라! 남을 위압하는 자는 망하고, 복종하는 자는 창성하리라! 왕께서 비록 파묻혀 지체하더라도, 그 후로는 재앙이 없으리라! 군주와 신하가 생이별을 하니, 하늘의 상제도 감동하실 것이라. 여러 사람이 모두 슬퍼하니, 누구인들 마음이 아프지 않으리요! 신이 청컨대 안주와 함께, 두 잔의 술을 바칩니다.” 했다.
구천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잔을 들어 눈물을 흘리면서 묵묵히 말이 없었다. 범려가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그윽한 곳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그 뜻이 클 수 없고, 근심이 없는 사람은 그 생각이 멀리까지 미치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옛날 성현들은 모두 곤액의 어려움을 만나 용서할 수 없는 치욕을 겪었는데, 어찌 홀로 대왕뿐이겠습니까?” 하니, 구천이 말하기를, “옛날 요임금이 순임금과 우임금에게 정사를 맡겨 천하를 다스리게 할 때, 비록 홍수가 졌으나 사람들이 큰 해를 입지는 않았소. 과인이 지금 월나라를 떠나 오나라에 들어가면, 나라의 정사를 대부들에게 맡길 것이니, 대부들은 무엇으로 과인이 바라는 바를 위로할 수 있겠소?” 했다. 범려가 동료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주군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들의 치욕이고, 주군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들은 죽어야 한다.’라고 합니다. 오늘 주상께서 나라를 떠나는 근심이 있으니 이것은 신하들의 치욕이며, 우리 절강(浙江) 동쪽의 선비 중에 어찌 한둘의 호걸이 없어 주상의 근심과 치욕을 나눌 자가 없겠습니까?” 하니, 이에 여러 대부가 일제히 말하기를, “누군들 대왕의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오로지 대왕의 명령이 있을 뿐입니다.”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여러 대부가 과인을 버리지 않으니 각각 그대들의 뜻을 말하길 바라오. 누가 나와 고난을 같이 하고 누가 나라를 지키겠소?” 했다.
문종이 말하기를,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백성들의 일에 대해서는 범려가 신 보다는 못하고, 주군을 옆에서 모시고 임기응변으로 주선하는 일은 신이 범려보다 못합니다.” 하니, 범려가 말하기를, “문종이 스스로 이미 살펴보고 하는 말이니 주공께서는 나랏일을 그에게 맡기시고 농업에 힘쓰고 전력을 확충하게 하며 백성들을 친목하게 하소서! 위태로운 주군을 보필하며 치욕을 참으며 가서는 반드시 돌아와 주군과 함께 원수를 갚는 일은 신이 감히 마다하겠습니까?” 했다. 이에 여러 대부가 차례대로 각자의 각오를 말했다. 태재 고성(苦成)이 말하기를, “주근의 명령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주군의 어진 덕을 밝히며 번잡스러운 것은 하나로 묶고 복잡한 것은 정리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직분을 알게 하는 것이 신의 일입니다.” 했다. 행인(行人 ;외교 담당) 예용(曳庸)이 말하기를, “제후들에게 사신을 보내어 분쟁을 해결하고 의심을 풀며, 나가서는 군주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으며, 들어와서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신의 일입니다.” 했다. 사직(司直) 호진(晧進)이 말하기를,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면 신은 간하여 그 잘못을 들어 의심나는 점을 깨닫게 하여, 곧은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으며 왕의 친척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이 신의 일입니다.” 했다. 사마(司馬) 제계영(諸稽郢)이 말하기를, “적군에 맞서 진지를 세우고 화살을 날리며 병장기를 쳐들고 앞으로 나아갈 뿐 피를 철철 흘려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 신의 일입니다.” 했다.
사농(司農) 고여(皐如)가 말하기를, “몸소 백성들을 위로하고 죽은 자를 조상하고 병든 자를 살리며 음식은 두 가지 맛을 곁들이지 않으며 곡식을 저축하는 것이 신의 일입니다.” 했다. 태사(太史) 계예(計倪)가 말하기를, “하늘과 땅을 살피고 계절과 음양의 조화를 짚어 복을 발견하고 길한 일을 알아서 요망한 것은 쫓아내며, 흉조를 예측하는 것이 신의 일입니다.”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북쪽의 오나라에 가서 곤궁한 포로가 되겠지만, 여러 대부는 덕을 품고 재주를 써서 각기 능한 바를 발휘하여 사직을 보존하면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소?” 했다. 이에 여러 대부가 남아서 나라를 지키게 하고, 홀로 범려 한 사람과 함께 떠나기로 했다. 군주와 신하가 강어귀에서 이별하는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구천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기를, “죽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지만, 내가 만약 죽게 되더라도 마음속으로 절대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하고, 곧 배에 올라 길을 떠났다. 전송 나온 모든 신하가 강가에서 절하며 통곡을 했으나, 월왕 구천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시가 있어 증명하기를, “서산에 해가 지는데 외로운 범선이 출발하고, 바람은 봄 파도를 일으켜 땅을 흔든다. 오늘 술 한 동이로 백사장에서 이별하니, 어느 때 강을 건너 돌아와서 다시 볼까?” 했다.
월왕 구천의 부인이 뱃전에 기대어 곡을 하다가, 까막까치가 강가의 새우를 쪼아서 날아갔다가 다시 오는 것을 보고, 그 모습이 매우 한가해 보여, 울면서 노래 부르기를, “나는 새를 바라봄이여, 까마귀와 솔개로구나! 하늘을 넘나듦이여, 펄펄 나는구나. 모래톱에 모여서 노는 모습이여, 아주 자유롭구나. 힘차게 날갯짓함이여, 구름 사이에 있구나. 흰 새우를 부리로 쫌이여, 물도 마시는구나! 그 본성에 맡김이여, 갔다가 돌아오는구나. 나는 죄가 없는데, 이 땅을 등지도다. 무슨 잘못이 있는가? 하늘이 나를 견책하도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이여, 서쪽으로 가는구나! 다시 돌아올 것을 앎이여, 그 해가 언제인가? 괴로운 마음이여, 마치 찢어지는 듯하도다. 눈물을 줄줄 흘림이여, 두 줄기로 흐르는구나.” 했다. 월왕 구천이 부인의 원망하는 노래를 듣고, 마음속이 고통스러웠으나 억지로 웃음을 띠고 부인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높이 날 수 있는 여섯 개의 날개를 가졌으니 높이 나는 날이 있을 것이오. 부인은 또 무엇을 걱정하시오.” 했다. 월왕 구천이 오나라의 경계에 들어서자 먼저 범려를 오산(吳山)에 주둔한 태재 백비에게 보내어 황금과 비단 및 미녀 30명을 바치게 했다. 백비가 묻기를, “문종은 어찌하여 오지 않았소?” 하니, 범려가 말하기를, “우리 주군을 위해 나라를 지키느라고 같이 오지 못했습니다.” 했다. 백비가 범려를 따라가서 월왕 구천을 만나니, 월왕 구천이 백비에게 덮어주고 비호해 준 덕을 깊이 감사했다.
백비는 있는 힘을 다하여 책임지고 귀국시켜 주겠다고 하자 월왕 구천의 마음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백비가 군사를 이끌고 월왕을 압송하여 오나라 도성에 이르러 오왕 부차 앞에 인도하였다. 구천은 웃옷을 벗고 계단 밑에 꿇어앉자 구천의 부인도 역시 따랐다. 범려가 보물과 미녀들의 명부를 부차에게 바쳤다. 월왕 구천이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동해에 사는 신하 구천이 자신의 힘도 헤아리지 못하고 변경을 어지럽혀서 죄를 얻었습니다. 대왕께서 그 깊은 허물을 용서하여 키와 빗자루를 잡게 해 주시니 참으로 두터운 은혜를 입어 잠깐 목숨을 붙여 주셨으니 감격을 이길 수 없습니다. 구천은 삼가 머리를 조아릴 뿐입니다.” 하니, 부차가 말하기를, “과인이 만약 선군의 원수를 생각했다면 그대가 지금까지 살아 있지 못할 것이다.” 했다. 구천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은 죽어 마땅하나 오로지 대왕께서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했다. 그때 오자서가 옆에 있다가, 마치 불붙는 듯한 눈과 벼락과 같은 소리로 나와서 말하기를, “무릇 구름 위에 나는 새를 잡으려 한다면 활을 힘껏 당겨 화살을 쏘아야 하는데, 하물며 뜰 안에 가까이 모여있는 것이겠습니까? 구천은 위인이 약삭빠르고 음험한 자라 지금은 솥 안에 든 고기 신세가 되어 목숨이 요리사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아첨하는 말과 꾸민 얼굴로 죽임을 면하려 합니다. 그러나 일단 뜻을 얻게 되면 마치 산에 풀려난 호랑이같이, 바다에 놓여난 고래같이 다시 제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했다.
부차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항복한 장수를 죽이고 복속한 자를 살해하면 그 화가 3대에 미친다고 했소. 내가 월나라를 사랑해서 죽이지 않는 게 아니라 하늘에 허물을 얻을까 두려워서요!” 하니, 태재 백비가 말하기를, “오자서는 일시적 계략에는 밝지만, 나라를 편하게 하는 도리는 모릅니다. 대왕의 말씀은 참으로 어진 사람의 말입니다.” 했다. 오자서는 오왕 부차가 백비의 아첨하는 말을 믿어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부차가 월나라에서 바친 공물을 받아들이고, 왕손웅을 시켜 합려의 묘 옆에 석실을 짓게 하여 구천의 부부를 그 속에 들어가게 하여, 의관을 모두 벗기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더러운 옷을 입혀 말을 기르게 했다. 백비가 몰래 음식을 보내어 겨우 굶주림에 이르지는 않았다. 오왕이 매번 수레를 타고 나들이를 할 때마다 구천은 수레 앞에서 말채찍을 잡고 걸었다. 오나라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을 하며, “저자가 월왕 구천이다!” 했다. 구천은 머리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시가 있어 증언하기를, “어쩌나 영웅이 구덩이에 빠졌으니, 평생의 의기는 모두 녹아 없어지고, 혼은 고향을 떠나 돌아가기도 아득한데, 한은 긴 강물을 채우고 눈물이 되는구나.” 했다.
구천이 석실에 있은 지 두 달이 지났다. 범려가 아침저녁으로 구천의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모셨다. 어느 날 갑자기 부차가 구천을 궁궐로 들어오라고 불렀다. 구천이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범려는 그 뒤에 섰다. 부차가 범려에게 말하기를, “과인이 듣기에 ‘지혜로운 아녀자는 망한 집안에 시집을 가지 않으며, 이름난 어진 사람은 망한 나라에서 벼슬을 하지 않는다.’ 했다. 지금 구천이 무도하여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됐는데, 그대 군주와 신하가 모두 노복이 되어 한 방에 갇혀 있으니 어찌 비루하지 않은가? 과인이 그대의 죄를 용서하려고 하는데 그대가 능히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져서, 월나라를 버리고 오나라에 귀의한다면 과인이 마땅히 중용하겠다. 힘들고 걱정스러운 신세를 버리고 부귀를 누리게 되니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했다. 그때 월왕 구천은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오직 범려가 오나라에 귀의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범려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에, ‘망한 나라의 신하는 감히 정사를 논할 수 없으며, 싸움에서 진 장수는 감히 용기를 말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신이 월나라에서 충성을 믿게 하지 못하고 월왕을 보좌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 못하여 대왕께 죄를 짓기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 대왕께서 저희들을 죽이지 않아서 주군과 신하가 서로 보호하여, 들어서는 소제하고 나가서는 옆에서 종종걸음치게 하시니 신은 만족할 따름입니다. 어찌 감히 부귀를 바라겠습니까?” 했다.
부차가 말하기를, “그대가 뜻을 굽히지 않으니 다시 석실로 돌아가라!” 하니, 범려가 말하기를, “삼가 대왕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했다. 부차가 일어나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구천은 범려와 함께 석실로 돌아와서 잠방이를 입고 베 두건을 쓰고 여물을 썰어 말을 돌보았다. 구천의 부인은 장식 없는 치마에 소매 짧은 저고리를 입고 물을 긷고, 말똥을 치우며, 물을 뿌려 청소를 했다. 범려가 땔나무를 하고 불을 지피느라 얼굴이 여위었다. 부차가 때때로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했다. 그 군주와 신하가 힘껏 일하고 결코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밤에도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뜻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하루는 부차가 고소대(高蘇臺)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월왕 구천과 부인이 말똥 무더기 옆에 단정히 앉아 있고, 범려는 채찍을 들고 구천의 왼쪽에 서 있었다. 군주와 신하가 예를 지키고, 부부도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부차가 태재 백비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 월왕은 작은 나라의 군주에 불과하고, 범려는 일개 신하에 불과한데, 비록 궁핍하고 불행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군주와 신하의 예를 잃지 않았으니 과인은 마음속으로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소!” 하니, 백비가 대답하기를, “존경할 만도 하지만 또한 가련합니다.” 했다.
부차가 말하기를, “진실로 태재의 말대로 과인이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소. 만약 그들이 옛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된다면 또한 용서해도 되겠소?” 하니, 백비가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로, ‘덕은 돌아오지 않는 일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대왕께서 성왕의 마음으로 외롭고 불쌍한 사람을 가련하게 생각하시어 월나라에 은혜를 베풀고자 하니 월왕이 어찌 두터이 갚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뜻을 결정하십시오.” 했다. 부차가 말하기를, “태사에게 길일을 택하게 하여 월왕을 사면하여 귀국시키시오.” 했다. 백비가 몰래 가신을 시켜 오경(새벽 4시경)에 석실에 가서 그 기쁜 소식을 구천에게 알려 주었다. 구천이 크게 기뻐하여 범려에게 알리니, 범려가 말하기를, “대왕을 위하여 점을 쳐 보기를 청합니다. 오늘이 무인(戊寅) 일이고 묘시(卯時)에 그 소식을 들었으니, 무(戊)는 갇히는 날이나 묘(卯) 또한 무(戊)와 상극입니다. 그 점괘에 이르기를, ‘사방이 그물에 덮였으니 만물이 모두 상하고 상서로움이 도리어 재앙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비록 좋은 소식이긴 하나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다고 하겠습니다.” 했다. 구천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던 마음이 다시 근심으로 변했다.
한편, 오자서가 오왕이 장차 월왕을 사면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오왕을 뵙고 말하기를, “옛날 하나라의 걸왕은 탕(湯)을 잡아 가두었으나 죽이지 않았고, 상나라의 주왕(紂王)은 문왕을 잡아 가두었으나 죽이지 않아서, 천도(天道)가 돌아와 뒤집어지고, 화가 바뀌어 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걸이 탕을 방면하여 하나라가 상나라에 망했고, 다시 주왕(紂王)이 문왕을 풀어주어 상나라는 주나라에 의해 망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월나라의 임금을 이미 잡아 가두었으나 죽이지 않으시니 진실로 하(夏), 상(商=殷)의 환란이 다시 이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부차가 오자서의 말로 인하여 다시 월왕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게 되어 사람을 시켜 구천을 불러들이게 했다. 백비가 먼저 구천에게 알려주니, 구천이 크게 놀라, 또 범려에게 알렸다. 범려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왕 부차가 대왕을 가둔 지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 오왕이 3년 동안이나 차마 죽이지 못했는데, 능히 하루 만에 차마 죽이겠습니까? 가 보아도 무사하실 것입니다.”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과인이 참고 죽지 않은 것은 오로지 대부의 계책을 믿었기 때문이오.” 하고, 이에 궁성으로 들어가 오왕을 뵙고자 사흘을 기다렸으나. 오왕은 조회도 보지 않았다. 백비가 궁중에서 나오더니 오왕의 명을 받들어 구천으로 하여금 다시 석실로 돌아가게 했다.
구천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그 연고를 물으니, 백비가 말하기를, “대왕께서 오자서의 말에 현혹되어 왕을 죽이려고 불렀습니다. 마침 감기가 들어 일어나지 못해서 제가 입궁하여 문안을 드리면서, ‘재앙을 물리치려면 마땅히 복된 일을 해야 합니다. 지금 월왕이 기어들어 와서 궁궐 아래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니 원한과 괴로움의 기운이 하늘까지 뻗친 듯합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보중하시어, 잠시 그를 석실로 돌아가 있도록 하셨다가 병이 낫기를 기다려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왕께서 나의 말을 듣고 왕을 도성에서 나가게 했습니다.” 했다. 구천이 백비에게 감사해 마지않았다. 구천이 돌아와 석실에서 생활한 지 다시 석 달이 되었는데도 오왕의 병에 차도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범려에게 그 길흉을 점치게 했다. 범려가 점괘를 얻어서 대답하기를, “오왕은 죽지 않겠습니다. 기사(己巳)일이 되면 병이 차도가 있고 임신(壬申)일이면 반드시 완쾌될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오왕의 문병을 청하여 만약 뵙게 되면 그의 대변을 구하여 맛을 보고, 색을 살핀 후에 두 번 절하며 축하하고 병이 나을 시기를 말씀하십시오. 그때가 되어 만약 병이 나으면 틀림없이 오왕이 대왕에게 감동하여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구천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못났지만, 또한 일찍이 남쪽으로 향해 앉아서 임금 노릇을 했소. 어떻게 더러운 것을 머금고 치욕을 참으며 남의 대변을 맛보겠소?” 하니, 범려가 대답하기를, “옛날 은나라 주왕(紂王)은 서백(西伯 ; 文王)을 유리(羑里)에 가두고 그의 장자 백읍고(伯邑考)를 죽여 삶아서 맛보게 하니, 서백이 고통을 참고 그 자식의 고기를 먹었습니다. 무릇 큰일을 이루고자 하는 자는 조그만 일을 괴로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왕은 부녀자의 인정을 가졌지만, 대장부의 결단력이 없어 이미 우리를 사면하고 싶은데 갑자기 다시 변할지 모릅니다. 이같이 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의 동정심을 끌어내겠습니까?” 했다. 구천이 그날로 태재의 부중에 들어가 백비를 보고 말하기를, “신하의 도리는 임금이 아프면 신하는 근심하는 것입니다. 오늘 대왕께서 병이 나셔서 낫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천의 마음은 외롭고 실망하여 침식이 불안합니다. 원컨대 태재를 따라 대왕의 병문안을 드려서 신하의 정을 표하고 싶습니다.” 하니, 백비가 말하기를, “군주께서 이같이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계시니 감히 그 뜻을 전달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백비가 입궐하여 오왕을 뵙고 구천이 생각하는 정을 자세히 말하여 병문안을 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부차가 괴로운 중에 구천의 뜻을 기특하게 여겨 병문안을 허락했다.
백비가 구천을 인도하여 부차의 침실로 들어가니, 부차가 억지로 눈을 뜨고 말하기를, “구천이 또 나를 보러 왔는가?” 했다. 구천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죄인 구천이 대왕의 옥체가 편안하시지 못하다는 소식을 듣고 간과 폐가 찢어지는 것 같아 한번 대왕의 안색을 뵙고자 할 뿐 다른 연유는 없습니다.”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차가 배가 부풀어 변을 보고 싶어 손을 저어 사람들을 나가라고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신이 동해에 있을 때 의술을 배운 적이 있어서, 사람의 대변을 보고 능히 병세가 나아지거나 악화되는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침실 문 앞에 시립하였다. 시종이 변기를 부차의 침상 가까이 가져가서 부차를 부축하여 변을 보게 하여 문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구천이 변기의 뚜껑을 열고 손으로 대변을 찍어 무릎을 꿇고 맛을 봤다.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코를 가렸다. 구천이 다시 들어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죄인 구천이 감히 재배하고 대왕께 축하를 드립니다. 대왕의 병은 기사(己巳)일이 되면 낫기 시작하여 3일이 지나 임신(壬申)일이 되면 쾌유되겠습니다.” 했다. 부차가 말하기를,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니, 구천이 말하기를, “신이 의사에게 듣기를, ‘무릇 사람의 대변이란 곡식의 변한 맛이라, 시절과 기운에 순응하면 살아나고 시절과 기운에 역행하면 죽는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죄인 구천이 대왕의 변을 잠깐 맛보니 그 맛이 쓰고 시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봄과 여름의 발생하는 기운에 상응하는 것이라 그래서 대왕의 쾌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했다.
부차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어질구나. 구천이여!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데, 누가 대변을 기꺼이 맛보아가며 그 병세를 살펴본단 말인가?” 했다. 그때 곁에 있던 태재 백비에게 묻기를, “그대는 이렇게 할 수 있겠소?” 하니, 백비가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신이 비록 대왕을 매우 사랑하지만, 이런 일은 또한 할 수 없습니다.” 했다. 부차가 말하기를, “단지 태재뿐만 아니라 비록 태자라 할지라도 또한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하고, 즉시 구천에게 명하여 석실에서 나와 편할 대로 거처하라고 하고, “내 병이 낫는 대로 즉시 그대의 나라로 돌아가게 하겠다.” 했다. 구천이 재배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고 물러났다. 이로부터 구천 일행은 민가에서 거처하며 말을 기리는 일을 예전과 같이 했다. 부차의 병이 과연 점점 나아 하나하나가 구천이 기약한 것과 같이 되니, 부차가 마음속으로 그의 충성심에 감동했다. 이미 조정에 나오게 되자 문대(文臺)에다 술상을 차리게 하고 구천을 잔치에 불렀다. 구천이 짐짓 모르는 체하고 전에처럼 죄수복을 입고 왔다. 부차가 그것을 알고 즉시 명령하여 목욕을 시키고 의관을 갈아입게 했다. 구천이 재삼 사양하다가 비로소 명을 받들어 옷을 갈아입고 알현하여 재배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부차가 황망히 구천을 붙들어 일으키며 명령하기를, “월왕은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이라, 어찌 오랫동안 욕을 보일 수 있겠는가! 과인이 장차 그를 감옥에서 석방하여 죄를 사면하고 돌려보낼 것이오. 오늘 월왕을 위해 북쪽을 향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여러 신하는 그를 손님의 예로써 대하기 바라오.” 했다. 이에 구천을 정중하게 손님의 자리에 앉히고 여러 대부는 모두 그 옆에 늘어앉게 했다. 오자서가 오왕이 원수를 잊고 적을 대접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자리에 앉지 않고 소매를 떨치며 나가 버렸다. 백비가 나아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어진 사람의 마음으로 어진 사람의 잘못을 용서했습니다. 신은 듣기에 ‘같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같은 의기는 서로 구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자리는 어진 자는 마땅히 머무르고 어질지 못한 자는 마땅히 물러가야 합니다. 상국께서 강직하고 용기있는 사람이지만, 자리에 머물지 않으시니 아마도 스스로 부끄러운 모양이지요?” 했다. 부차가 웃으며 말하기를, “태재의 말이 맞소!” 했다. 술잔이 세 번 돌자 범려와 월왕 구천이 모두 일어나 술잔을 들어 오왕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축사를 읊기를, “대왕께서 위에 계시니, 은혜를 펴심이 화창한 봄날 같구나! 인자하기가 비할 바 없고, 그 덕은 날마다 새롭구나! 오호라, 아름답구나! 그 덕을 세상 끝까지 전하시고, 만세까지 사시옵고, 오나라를 길이 보전하시며, 사해를 다스리옵소서! 제후들이 다 복종할지니, 이 술잔을 받으시고. 길이 만복을 누리소서!” 했다.
오왕 부차가 크게 기뻐하여 그날 한껏 취한 연후에 술자리를 파했다. 왕손웅에게 명하여 구천을 객관으로 모시라고 하며 말하기를, “사흘 안에 내가 그대들을 고국으로 보내 주겠다.”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에 오자서가 입궐하여 오왕을 보고 말하기를, “어제 대왕께서 원수인 월왕을 마치 손님 접대하시듯이 하셨는데 그것은 과연 무슨 꼴입니까? 구천은 속으로 호랑이나 승냥이 같은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온화하고 공손한 모습으로 꾸미니, 대왕은 잠깐의 아첨을 사랑하여 훗날의 환란을 걱정하지 않고, 충직한 말을 버리고 아첨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작은 인정에 빠져 큰 원수를 기르니 비유하자면, 활활 타는 화로 위에 터럭을 올려놓고 타지 않기를 바라는 일과 같으며, 천근 아래에 계란을 던져 온전하기를 바라는 일과 같으니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니, 오왕 부차가 벌컥 화를 내며 말하기를, “과인이 병들어 석 달을 자리에 누워 있었건만 상국은 한 마디의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상국의 불충이오. 또한 한 가지 좋은 물건을 바친 것이 없으니 그것은 상국의 어질지 못함이오! 신하가 되어 어질지도 못하고 충성을 바치지도 않으니 어디에 쓰겠오! 월왕 구천은 나라를 버리고 천 리 길로 과인을 찾아와 그의 보화와 재물을 바치고 몸은 노비가 되었으니, 그것은 충성이오. 과인이 병들었을 때 친히 나의 대변을 맛보아 원망하는 마음을 대략 잊었으니, 그것은 인자함이라. 과인이 만약에 상국의 사사로운 뜻에 얽매어 이 훌륭한 사람을 죽인다면 하늘이 틀림없이 나를 돕지 않을 것이오.” 했다.
오자서가 말하기를, “왕께서는 어찌하여 상반되는 말을 하십니까? 무릇 호랑이가 자세를 낮추는 것은 장차 먹이를 공격하려는 것이며, 삵이 몸을 움추리는 것은 장차 먹이를 취하려는 것입니다. 월왕이 오나라에 신하로 들어와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있는데, 대왕께서는 무엇을 아십니까? 그가 아래로 대왕의 대변을 맛본 것은 실은 위로 대왕의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왕께서 만일 이를 살피지 못하신다면 그 간교한 계책에 떨어져서 오나라는 틀림없이 그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했다. 오왕 부차가 말하기를, “상국은 이 일에 대해 말하지 마시오. 과인의 뜻은 이미 정해졌소!” 했다. 오자서는 간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답답해하며 물러갔다. 사흘이 지나자 오왕이 다시 사문(蛇門) 밖에 술자리를 차리라 명하고, 친히 월왕의 귀국 길을 전송했다. 오나라의 여러 신하가 모두 술을 따라 구천을 전송했으나 오직 오자서는 오지 않았다. 부차가 구천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죄를 용서하고 돌려보내니, 그대도 마땅히 오나라의 은혜를 생각하고 오나라에 대한 원한을 기억하지 마시오.” 했다. 구천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대왕께서 저의 외롭고 곤궁한 처지를 애처롭게 보아 고국으로 살아서 돌아가게 하시니 마땅히 언제까지나 힘을 다하여 은혜를 갚겠습니다. 푸른 하늘이 위에서 신의 마음을 지켜보고 만약 오나라를 배반한다면 하느님이 돕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오왕 부차가 말하기를, “군자가 말 한마디로 정했으니 그대는 그것을 실행하시오. 노력하고 노력하시오!” 했다. 구천이 두 번 절하고 꿇어 엎드려 눈물을 얼굴 가득히 흘리며 이별하기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차가 친히 구천을 붙들어 수레에 태워 주자, 범려가 수레를 몰고, 구천의 부인도 두 번 절하여 감사했다. 모두 함께 큰 수레에 올라 남쪽을 향해 갔다. (그때가 주경왕(周敬王) 29년(기원전 491년)의 일이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월왕은 이미 가마솥 안의 물고기가 되었다가, 어찌 죽지 않고 살아서 회계로 돌아갈 줄 알았겠는가? 가소롭다. 부차는 멀리 내다보지 못하여, 그물을 열어서 고래를 풀어주었다.” 했다. 구천이 절강 가에 돌아와서 강 건너 산천이 첩첩한 것을 바라보고, 천지가 다시 맑아서 이에 탄식하기를, “내가 지난날 월나라 백성들과 영원히 이별하여 이역 땅에 내 뼈를 묻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다시 고국에 돌아와 사직에 제사를 받들 수 있게 될 줄 기약이나 했겠는가?” 하고, 말을 마치자 부인과 서로 쳐다보며 같이 눈물을 흘렸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문종은 월왕이 장차 돌아올 것을 미리 알고, 나라를 맡아 다스리고 있던 신하들과 성안의 백성들을 이끌고, 절강 가에서 절하고 맞이하니, 환성이 땅을 진동시켰다.
구천이 범려에게 명하여 점을 쳐 도성에 입성할 날을 잡게 하니, 범려가 손가락을 꼽아보며 말하기를, “이상합니다. 왕께서 입성하시는데 내일보다 좋은 날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마땅히 빨리 달려서 점괘에 응하십시오.” 했다. 이에 말을 채찍으로 재촉하여 나는 듯이 달려 밤사이에 도읍으로 돌아왔다. 태묘에 귀국을 고하고 조정에서 조회를 한 것은 모두 말할 필요도 없다. 구천은 회계산의 치욕을 생각하여 회계에 성을 세우고 도성을 옮겨 스스로 경각심을 주려고 했다. 곧 그 일을 범려에게 맡겼다. 범려가 즉시 천문과 지리를 살펴 새로운 성을 회계산에 세웠는데, 성안에 회계산을 품었고 서북쪽 와룡산(臥龍山)에 비익루(飛翼樓)를 세워 하늘로 통하는 문을 형상하고, 동남쪽에 하수구를 내어 땅으로 통한 문을 상징하게 하였다. 바깥 성곽으로 주위를 두르고 오직 서북쪽은 비워두었다. 소문을 내어 말하기를, “이미 오나라에 복종하기로 했는데 감히 공물을 바치러 가는 길을 성벽으로 막을 수는 없다.” 했다. 그러나 사실은 오나라로 진격하기에 편하도록 은밀히 도모한 것이었다. 성이 이미 완성되자 갑자기 성안에 둘레가 몇 리나 되는 산이 하나 땅에서 솟아올랐다. 그 모양이 마치 거북이를 닮고 처음부터 초목이 무성했다. 어떤 사람이 이 산을 알아보고, 곧 낭야(琅琊)의 동무산(東武山)인데 무슨 까닭으로 하룻밤 사이에 날아왔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범려가 아뢰기를, “신이 하늘의 형상에 맞추어서 성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곤륜(昆侖)을 보내어 월나라가 방백(方伯=霸者)이 될 것을 일깨어 준 것입니다.” 하니, 월왕 구천이 아주 기뻐하여 그 산의 이름을 괴산(怪山)이라고 불렀다가 다시 비래산(飛來山), 또 구산(龜山)이라고 불렀다. 그 산 정상에 영대(靈臺)라는 삼층 누각을 짓고 이 신령스러운 산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제도를 갖춘 구천은 도읍을 제기(諸曁)에서 회계로 옮겼다. 구천이 범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실은 덕이 없는 사람이라 나라를 잃고 집안을 망치며 몸은 남의 나라의 노예가 되기에 이르렀소. 진실로 상국과 여러 대부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소?” 하니, 범려가 말하기를, “이것은 대왕의 복이지 신하들의 공이 아닙니다. 단지 원하옵건대 때때로 석실의 고통을 잊지 않으시면 월나라를 일으켜서 오나라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겠소!” 했다. 이에 문종에게는 국정을 다스리게 하고 범려에게는 군사의 일을 맡겼으며, 어진 사람을 높이고 선비를 예절로써 대했으며, 노인을 공경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보살폈다. 월나라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월왕 구천이 부차의 대변을 맛본 이후로 항상 그의 입에서 냄새가 나는 병이 있었다.
범려가 성의 북쪽에 있는 산에서 즙(蕺)이라는 채소가 나는데, 그것을 먹을 수는 있으나 냄새가 조금 난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을 시켜 즙(蕺)을 캐와서 모든 신하에게 먹게 하여 구천의 입 냄새를 누그러뜨렸다. 후세 사람들이 그 산의 이름을 즙산(蕺山)이라고 불렀다. 구천이 오나라에 원수를 갚기를 서둘러서 몸과 마음을 밤낮으로 고달프게 했다. 두 눈이 피곤하여 감기려고 하면 눈을 찔러 졸음을 쫓았으며, 발이 시려 오므리면 찬물에 발을 담갔다. 겨울에 항상 얼음을 안고, 여름에는 오히려 뜨거운 것을 잡았다. 섶을 깔아 그 위에 누워 자고 침상과 요를 쓰지 않았다. 다시 앉고 눕는 곳에 쓸개를 달아 놓고 음식을 먹거나 기거할 때 반드시 쓸개를 맛보았다. 밤중에 몰래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회계(會稽)라는 두 글자를 입에서 떼지 않았다. 패한 이후에 월나라의 인구가 줄어서 구천이 즉시 명령을 내려 나이가 젊은 남자가 늙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금했고, 늙은 남자가 젊은 여인과 혼인하는 것을 금했다. 여자가 17세가 되어도 시집을 가지 않거나 남자가 20세가 되어도 장가를 가지 않으면 그들의 부모에게 모두 죄를 주었다. 임산부가 출산을 하게 되면 곧 관가에 고하게 하고 의사를 시켜 임산부와 아이를 보살피게 하였다. 남자아이를 낳으면 술 한 병과 개 한 마리를 주었으며 여자아이를 낳으면 술 한 병에 돼지 한 마리를 주었다. 사내아이 셋을 낳으면 관가에게 그 둘을 기르며, 사내아이 둘을 낳으면 관가에서 하나를 길렀다. 죽은 자가 있으면 구천이 친히 가서 곡하고 조문했다.
매번 나들이할 때마다 반드시 밥과 국을 뒷 수레에 싣고 가다가 어린이를 만나면 반드시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이름을 물었다. 농사철이 되면 몸소 쟁기를 잡았다. 구천의 부인도 스스로 베를 짜고 민간의 아낙네들과 함께 노고를 같이했다. 7년 동안을 세금을 걷지 않고, 고기를 상에 올리지 않았으며 여러 색깔의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다. 오직 오나라의 부차에게는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문안을 여쭙는 사자를 보냈다. 다시 남녀 백성들을 산으로 들여보내 칡넝쿨로 황사세포(黃絲細布)를 짜서 오왕 부차에게 바치려고 했다. 그것을 아직 바치지 않았는데, 오왕 부차가 구천의 순종을 가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그 봉지를 더해 주었다. 이에 동으로는 구용(句甬)에 이르고, 서로는 취리(檇李)에 이르며, 남으로는 고멸(姑蔑)에 이르고, 북으로는 평원(平原)에 이르는 종횡 800여 리가 모두 월나라 땅이 되었다. 구천이 곧 갈포(葛布) 10만 필과 꿀 백 항아리, 여우 가죽 5쌍, 진죽(晉竹 ; 화살대)을 가득 실은 배 10척을 봉지를 더해준 은혜에 대한 답례로 바쳤다. 부차가 크게 기뻐하여 월왕에게 깃털 장식을 주었다. 오자서가 그 소식을 듣고 몸에 병이 들었다면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부차는 월왕이 이미 신하로 복종하여 두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보고 마침내 백비의 말을 굳게 믿었다. 하루는 부차가 백비에게 묻기를, “지금 오나라의 변경에 일이 없으니 과인이 궁실을 넓혀 스스로 즐기고 싶은데 어디가 마땅하겠는가?” 했다.
백비가 아뢰기를, “오나라 도읍에 경치 좋은 숭대(崇臺)가 있기는 하지만 고소대(高蘇臺)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선왕께서 지은 고소대는 크게 구경하며 즐기기에 부족합니다. 대왕께서 고소대를 증축하고 누각을 높여 백 리를 볼 수 있도록 하고 그 안에 6천 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도록 크게 짓고, 거기에 노래하는 소년과 춤추는 소녀를 모으면 가히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부차가 그렇게 여겨, 이에 상을 걸고 큰 나무를 구한다고 했다. 월나라의 대부 문종이 듣고 월왕 구천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하늘 높이 나는 새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다 잡혀 죽고, 깊은 물 속의 고기도 향기로운 미끼를 먹으려다가 죽는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오나라에 보복하려고 하시면 반드시 먼저 오왕이 좋아하는 것을 던져준 다음에 그의 목숨을 제어하십시오.”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비록 그가 좋아하는 것을 얻은들 어찌 능히 그의 목숨을 제어할 수 있겠소?” 하니, 문종이 대답하기를, “신에게는 오나라를 깨뜨릴 일곱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재물을 주어서 오나라 임금과 신하를 기쁘게 해 줍니다. 둘째, 곡식과 여물을 비싸게 사서 그들의 창고를 비게 합니다. 셋째, 미녀를 보내서 그들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넷째, 솜씨 좋은 목공과 좋은 재목을 보내어 궁실을 짓게 하고 그 나라의 재물을 탕진하게 만듭니다. 다섯째, 아첨하는 신하를 보내어 그들의 계책을 어지럽힙니다. 여섯째, 직간하는 신하를 강압하여 자살하게 만들어 그 보좌를 약하게 합니다. 일곱째, 우리가 재물을 축적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그들의 폐단을 틈타는 것입니다.”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훌륭한 계책이요. 지금 어느 방법부터 먼저 시행해야 하겠소?” 하니, 문종이 대답하기를, “지금 오왕 부차가 고소대(姑蘇臺)를 개축한다고 하니 마땅히 명산의 신목(神木)을 골라서 바치십시오.” 했다. 월왕 구천이 즉시 목공 3천여 명을 시켜 산으로 들여보내어 신목을 찾으라고 했으나 일 년이 넘도록 소득이 없었다. 목공들이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모두 월왕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목객지음(木客之吟)>이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아침에도 나무를 찾고 저녁에도 나무를 찾아, 아침마다 저녁마다 산골짜기로 들어가서, 높이 솟은 바위와 깎아지른 골짜기를 헛되이 왕복하네. 하늘이 내지 않으니, 땅이 키우지 않은 것을, 목공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이렇듯 고생을 심하게 시키는가?” 했다. 목공들이 매일 밤 길게 불러대는 노래는 듣는 자들의 마음을 처절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하늘에서 신목 한 쌍이 내려왔는데 둘레가 스무 아름에 길이가 50길에 달했다. 산의 남쪽에 있는 것은 가래나무였고, 산의 부쪽에 있는 것은 녹나무였다. 목공이 놀라 여태껏 보지 못했던 그 나무를 월왕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여러 신하가 모두 축하하기를, “이것은 대왕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서 하늘이 신목을 내려주어 대왕의 충정을 위로한 것입니다.” 하니, 구천이 크게 기뻐하여 친히 가서 제사를 지낸 후에 그 나무를 베었다.
목공들이 쪼고 깎고 갈고 다듬어서 단청을 사용하여 오색의 용 그림을 그려 넣었다. 문종을 시켜 강물에 띄워 오나라에 가져가 오왕 부차에게 바치며 말하기를, “동해의 천한 신하 구천이 대왕의 힘을 입어 잠깐 조그만 궁궐을 지으려고 재목을 찾다가 우연히 큰 재목을 얻었습니다. 감히 제가 사용할 수가 없어서 저의 신하를 시켜 대왕의 좌우에 바칩니다.” 하니, 부차가 재목의 크기가 어마어마함을 보고 놀라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오자서가 간하기를, “옛날에 하나라의 걸왕은 영대(靈臺)를 세웠고, 상의 주왕은 녹대(鹿臺)를 세웠는데, 백성의 힘을 고갈시켜 마침내 멸망했습니다. 구천이 오나라를 해치고자 이렇게 큰 재목을 보냈으니 대왕께서는 받지 마십시오.” 하니, 부차가 말하기를, “구천이 이와 같은 좋은 재목을 얻고도 자기가 쓰지 않고 과인에게 가져다 바치니, 그것은 호의이지, 어찌하여 역심이라고 하시오?” 했다. 부차가 마침내 듣지 않고, 그 재목을 가지고 고소대(高蘇臺)를 지었다. 3년 동안 재목을 모으고 5년 만에 비로소 완성했다. 높이가 3백 장(丈)에 달하고 넓이는 84장이었다. 고소대에 오르면 사방 2백 리를 조망할 수 있었다. 옛날에 아홉 구비로 산에 오르던 길도 이에 다시 넓혔다. 오나라 백성들이 밤낮으로 일을 했으며 피로에 지쳐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후세에 양백룡(梁伯龍)의 시가 있어 증거가 된다, 시에 이르기를, “천길 높은 누각이 태호에 면했는데, 아침 종소리 저녁 북소리 고소대 잔치라네. 위세가 나라 밖 삼천리에 행해지니, 강남의 제일가는 도읍을 이루었구나.” 했다. 월왕 구천은 고소대가 완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문종에게 말하기를, “경이 말한 ‘솜씨 좋은 목공과 좋은 재목을 보내 궁실을 짓게 하여 그 재물을 탕진하게 한다.’라는 계책이 이미 시행되었소. 지금 숭대(崇臺) 안에 틀림없이 가무에 능한 여인들을 잘 골라 뽑아서 채울 것이오. 절세미인이 아니면 오왕의 사치심에 부족할 것이니, 경은 나를 위해 그 일을 도모해 주시오.” 하니, 문종이 대답하기를, “흥망의 운수는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하늘이 이미 신목을 내려 주었으니, 어찌 미인이 없음을 걱정하겠습니까? 다만 민간에서 미인을 찾자면 인심을 놀라게 할까 걱정됩니다. 신에게 한가지 계책이 있는데 가히 나라 안의 여인들을 보고 오직 대왕께서 선택하면 됩니다.” 했다.
문종은 무슨 계책을 말했는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