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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걸프 전쟁과 헤일 메리 플레이

100. 걸프 전쟁과 헤일 메리 플레이

 

고전적 전법을 적용하여 승리하다(1991)

 

다국적군의 작전명인 사막의 폭풍(Desert Storm)”은 슈워츠코프의 별명인 폭풍의 노먼(Stormy Norman)”에서 따온 것이었다.

 

19908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은 미군을 주축으로 하여 편성된 다국적군과의 전쟁으로 확대되고 페르시아만(Persian Gulf)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하여 걸프전쟁이라고 불린다.

다국적군 편성을 주도한 미국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제2의 베트남전쟁과 같은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되고 신속한 군사작전으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는 개념으로 출발했다.

다국적군은 동맹군도 아니고 공식적인 연합사령부도 없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 중부군 사령관 슈워츠코프(Norman H. Schwartzkopf) 대장의 지휘를 받았다. 슈워츠코프는 이라크군에 대한 작전을 '사막의 폭풍작전'이라고 명명하고 10월부터 세부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기본 작전개념은 미국군의 이점을 최대로 살리고 인명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으로서, 공군력을 대량 투입하여 전략 폭격을 실시한 다음에 고립된 이라크 지상군을 격멸한다는 방식이었다.

한편 이라크의 후세인은 모든 유엔 결의안을 무시하고 그가 선언한 '19번째 주 쿠웨이트'4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라크군은 사우디 국경을 따라 벙커와 흙벽 등을 설치하는 한편, 최전방에 50만 개의 지뢰를 매설하고 그 후방에는 기름 호를 파놓아 다국적 군이 접근할 때는 원격조정으로 불바다를 만들 계획이었다.

유엔이 제시한 철수 시한을 그대로 넘기자, 다국적군은 드디어 1991117일 사막의 폭풍작전을 개시했다. 이때부터 228일까지 6주 동안 작전은 약 1,000여 시간의 제1단계 공중폭격과 100시간의 제2단계 지상전으로 펼쳐졌다.

다국적군은 압도적인 공군력을 투입하여 이라크의 미사일 기지, 지휘통제소, 통신시설, 발전소, 비행장, 활주로, 격납고 무기공장, 교량, 그 밖에 주요 군사 거점을 매일 수천 번씩 폭격을 가했다. 세계 전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성공적이었던 이 폭격으로 이라크 전투력은 지상전을 전개하기에 앞서 약 50% 이상 감소되었다.

지상전은 224일 새벽 시작되었다. 목표는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몰아내고 주력부대인 '공화국 수비대'를 격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슈워츠코프는 이라크군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에서 주공을 실시하는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골자는 방어가 집중된 사우디-쿠웨이트 국경지역을 견제하고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서쪽 사막 지역으로 우회하여 이라크 영토로 깊숙이 진격한 다음 공화국 수비대를 격멸한다는 것이었다. 슈워츠코프는 이 작전을 미식축구에서 쿼터백이 장거리 볼을 던져 큰 점수를 내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하여 헤일 메리 플레이(Hail Mary Play)’라고 불렀다. 이 기동은 고대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래 명장들이 사용한 전법으로서, 슈워츠코프는 바로 그러한 고전적 전법에 따른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후세인이 전방 방어에 몰두하고 있을 때 슈워츠코프는 지상군 주력부대를 은밀히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이 이동은 공중작전 엄호 하에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는 가운데 하루 24시간씩 2주 동안 계속되었다. 300마일의 거리를 제한된 도로를 이용하여 병력과 물자를 수송한 다음에 다국적군은 전투준비를 완료했다.

한편 슈워츠코프는 이라크군을 기만하기 위하여 쿠웨이트 해상 밖에 많은 해병병력을 주둔시켜 상륙작전을 연습시켰다. 후세인은 미 해병대 위치에 대하여 중시하고 다국적군이 쿠웨이트 남쪽에서부터 상륙작전을 시도하리라고 믿었다.

서쪽 사막 지역에서부터 기갑부대와 공수부대에 의한 기습공격은 순식간에 이라크군 보급선과 퇴로를 끊는 데 성공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이라크군은 이내 붕괴되기 시작했다.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그들은 별로 저항도 못하고 항복했다. 227일 다국적군은 쿠웨이트를 해방시켰다. 후세인은 유엔 결의안의 모든 사항을 수락함으로써 걸프전쟁은 종결되었다.

걸프전쟁에서 다국적군의 승리는 충분한 준비로 이루어낸 것이었다. 졸속하게 싸움에 빠져들지 않고 확실하게 전투력의 우세를 확보하기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한 것이 주효했다. 싸우기 전에 이겨놓고 싸워야 한다는 원리가 잘 적용된 대표적 전쟁이었다.

걸프전쟁은 다국적군 입장에서 살펴볼 때 전쟁 사상 인명피해가 가장 적으면서 대승을 거둔 전쟁이었다. 이라크군 전사자가 10만 명인 데 비하여 다국적군은 225명에 불과했다.

걸프전쟁이 시사하는 가장 의미 있는 교훈은 첨단병기가 위력을 떨치는 현대전에서도 고전적 전법이 승리를 가져왔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슈워츠코프는 우회기동을 결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것은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적 전열을 흔들어놓고 적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는 이길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 이길 수 있다. 우리가 걸프전에서 적용한 것은 고전적 개념에 충실한 우회기동이었다. 그것은 고대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래 대부분의 명장들이 적용한 고전적 전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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