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인도 · 파키스탄 전쟁
방글라데시 독립(1971년)

좌측은 동서로 분리되기 전의 파키스탄. 우측은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패한 파키스탄의 니아지 중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터번을 쓴 사람은 인도의 오로라 싱 중장.
인도 · 파키스탄 전쟁이 시작된 것은 대영제국 식민지였던 양국이 독립을 얻게 된 그 순간부터였다. 두 나라는 1947년에 설정된 경계선에 서로 불만을 품고 국경지역에서 끝없이 분쟁을 벌여왔다. 이 전쟁은 1971년에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이때 인도는 파키스탄 내전에 개입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결과적으로 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을 포기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국가 방글라데시의 탄생을 그대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본래 1947년 분할은 장차 폭발할 위험성이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영국은 그 지역의 해묵은 종교 갈등을 최대로 이용하면서 '분할 지배(divide and rule)' 방식으로 식민통치를 했다. 그 결과 종교 갈등은 더욱 악화되고, 결국 인도 땅은 힌두교도 위주의 인도와 이슬람교도 위주의 파키스탄으로 분할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인위적인 분할은 민족 대이동을 수반하고 그 과정에서 두 종교 신도들 간에는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다.
분쟁은 파키스탄이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으로 나뉘어 있었던 데서 더 심화되었다. 종교는 같지만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은 우선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인종 · 문화 · 언어 · 경제 등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양쪽을 한데 결합시킬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부의 불균형적인 차별정책에 대한 동파키스탄 사람들의 불만은 계속 고조되었다. 서파키스탄인들은 정부와 군대요직을 두루 독점하고 경제를 지배했다. 그리하여 훨씬 잘 살게 된 그들은 동파키스탄을 하나의 식민지처럼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인구가 훨씬 많은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중앙정부 역할을 축소시키고 그 대신에 지방 자치정부의 권한을 대폭 증대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70년 총선거에서 동파키스탄 출신 무지부르 라만(Mujibur Rahman)의 연합 정당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파키스탄은 정치 개혁의 물결을 맞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집권자였던 야햐(Yahya) 장군은 의회 개회를 무기한 연기시키고 무지부르를 구속함으로써 민주화 요구를 짓밟아버렸다. 그는 동파키스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티카(Tikka) 장군에게 반정부운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토록 했다.
파키스탄 군대는 지식인들과 동파키스탄에서 거주하던 힌두 교도들을 색출, 피의 대숙청을 감행하는가 하면, 선량한 주민들에 대하여 강간과 학살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약 100만 명가량이 학살을 당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황에 처한 동파키스탄 인들은 조국 독립을 위하여 결사항전을 벌였다. 정부군의 학살과 만행을 피하여 인도의 서부 벵갈 국경 지역으로 몰려든 피난민의 숫자는 1971년 11월경 약 600만 명에 이르렀다.
피난민 문제로 인도와 파키스탄 관계가 악화되고 뿐만 아니라 게릴라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양국 군대가 국경 지역에서 자주 충돌하면서 자연히 파키스탄 내전은 양국 간의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사실상 파키스탄이 약해지기를 바라는 입장이었던 인도인들은 파키스탄 내전을 은근히 좋아했고, 나아가 과거 전쟁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인도는 외교적으로 잘 계산된 행동을 취하는 한편으로 군사적 개입을 은밀히 준비했다. 첫째, 인도는 국제사회를 향하여 피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지원을 열심히 호소했고, 그 과정에서 파키스탄 정부의 비인도주의를 세계만방에 알렸다. 둘째, 후방 안전을 도모하는 방책으로서 사전에 소련으로부터 중립을 보장받는 조약을 맺었다. 셋째, 그 후 인도는 게릴라들을 보호하는 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 및 장비 지원을 한 뒤 그들을 동파키스탄으로 되돌려보내 파키스탄 군대에 항전을 벌이도록 했다.
인도의 그러한 행동을 묵과할 수 없었던 파키스탄 정부는 전쟁을 결행하기로 했다. 인도와의 전면전에서 파키스탄은 획득할 수 있는 것보다는 잃을 것이 많았지만, 초기에 기습 공중공격으로 적 공군을 제압한다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파키스탄 군 수뇌부는 1967년도 이스라엘 공군이 6일전쟁에서 보여준 기습 시범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자기들도 그 방법을 적용하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1971년 12월 3일 파키스탄 공군은 석양 시간을 이용하여 기습을 감행했다. 일부러 적 공군 출동 준비 태세가 가장 느슨하리라고 여겨지는 시간대를 노렸다. 그러나 파키스탄 공군은 결코 이스라엘 공군이 아니었다. 또한 너무 늦은 시간 때문에 재차 출격을 못함으로써 그들은 기습을 달성할 수 없었다.
튼튼한 격납고 내의 인도 항공기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오히려 인도 공군은 기술적 우위로 공중전에서 크게 승리했다. 인도군이 45대의 항공기를 잃은 데 반하여 파키스탄은 93대를 상실했다. 인도의 소련제 항공기들은 전쟁사상 최초로 공중 경보 및 통제체제(AWACS)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약 450㎞ 거리에서부터 적기를 탐지하고 적 레이더와 교신에 대하여 전파 방해를 함으로써 자유로운 공중활동을 방해했다.
공중전 실패 이후 동과 서 양쪽에서 이루어진 지상전 상황은 파키스탄이 어느 한쪽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방향으로 흘렀다. 전체적으로 병력이 적었던 파키스탄은 최소한도 파멸을 면하기 위해서는 서파키스탄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서쪽에 약 12개 사단을 배치하여 인도군 전진을 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동파키스탄에서는 워낙 부족한 병력으로 말미암아 버티지 못하고 결국 2주일 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전쟁 결과 인구 약 7천만이나 되는 동파키스탄 인들은 신생국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이루었다. 또한 인도는 그들이 바라는 대로 약한 파키스탄을 상대하고 과거처럼 그 지역 맹주 자리를 확실히 확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