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쿠바 미사일 사태
핵전 문턱까지 가다(1962년)

케네디와 흐르쇼프
미국과 쿠바는 1959년 카스트로 정권 출발을 기점으로 하여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그전까지만 하여도 미국은 쿠바에 대해 '형님' 노릇을 톡톡히 하며 여러 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쿠바 경제는 미국 자본과 관광 수입에 크게 의존했다. 주 농산물이었던 설탕은 주로 미국 시장에서 팔렸다.
그러나 부패와 비리가 만연한 바티스타 정권이 무너졌을 때 쿠바인들의 반미감정은 심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비친 미국의 인상은 그동안 부패 정권을 지지했을 뿐, 카스트로의 좌익정권 출현에 대하여 지지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냉전 사고방식이 극도에 달했던 당시 미국으로서는 좌익정권의 어느 나라도 지원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카스트로의 사회주의적 정권을 환영할 리 없었다.
카스트로는 자연히 소련에 손을 내밀고 그들과 밀착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카스트로는 소수의 공산당을 앞세워 토지개혁 · 국유화 · 외국 자산 처분 등 과격한 개혁을 추진했다. 1960년도 말경에는 정치적 · 경제적으로 쿠바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약 70만 명의 쿠바인들은 섬을 탈출하여 플로리다로 건너갔으며, 미국은 그들 가운데 카스트로에 투쟁하는 반혁명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61년 4월 반혁명 세력은 카스트로를 제거하기 위해 쿠바 남부의 코치노스 만(피그스 만)에 상륙했다(쿠바 침공사건). 그러나 이 작전은 일반대중의 호응을 전혀 받지 못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이후 카스트로 정권의 입지는 한층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962년 미국은 쿠바에 대한 무역을 전면 금지시켰다.
카스트로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은 소련 지도자 흐루쇼프는 1960년 5월 쿠바 방어를 약속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는 쿠바를 핵무장하고 미국과의 핵 균형을 이루고자 했다. 1962년 여름 미국 정보부서는 소련이 쿠바로 미사일을 보낸 사실과 소련 기술자들이 쿠바에서 미사일 발사 장치를 설치하고 있다는 정보를 처음으로 입수했고 가을에는 그러한 사실들을 항공사진 등으로 확인했다.
미국에서 불과 90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소련제 공격용 미사일이 장치된 사실을 케네디 대통령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미국 역사상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그는 단호했다. 쿠바를 해상 격리시킬 방침을 선언한 데 이어 소련에게 미사일을 14일 이내에 철거하라고 경고했다. 쿠바를 향한 ‘공격용 군사 장비’를 실은 선박은 모두 되돌려보내겠다는 뜻을 확실히 전했다.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대 국민방송을 통하여 극적으로 소련을 향하여 그야말로 심각한 경고를 보냈다.
“미국은 쿠바에서부터 핵미사일이 발사되어 서반구에 속하는 어떠한 나라라도 공격을 당할 때는 그것을 소련의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며, 그런 경우 미국은 소련에 대한 최대의 보복 공격을 가할 것이다.”
그 후 28일까지 1주일간 미 전략군은 실제상황의 핵전쟁을 준비했다. 이때는 세계적 위기였지만 어떠한 나라도 개입하거나 중재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어 온 세계는 다만 긴장과 공포에 질려 있었다. 과연 두 초강대국 간에 핵전이 벌어지고 말 것인가, 그렇다면 지구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실로 온 세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1주일이었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10월 24일 핵무기를 적재한 소련선박이 해상격리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미국 선박 가까이까지 접근했을 때였다. 그러나 그 순간 소련선박은 진행방향을 돌려 돌아갔다. 그리고 나흘 후인 28일 흐루쇼프는 미사일 제거방침을 선언함으로써 쿠바 사태는 위기를 벗어났다. 세계 모든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 사태는 1964년 흐루쇼프의 실각에 주요 역할을 했다. 이 사태 이후 쿠바는 소련에 실망하고 중국 쪽에 보다 가까운 노선을 택했다.
쿠바 사태는 여러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그것은 케네디의 전략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데서 의미가 있기보다는 세계가 핵전 위기를 넘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처음으로 핵전 문턱까지 가본 경험을 한 지구인들은 반핵운동에 보다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또한 사람들은 케네디, 흐루쇼프 등과 같은 세계지도자들의 리더십과 책임이 핵시대에 얼마나 막대하고 중요한가에 대하여 절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