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수에즈 전쟁
나세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한 나세르 대통령이 이집트 국민들로부터 대대적 환호를 받고 있다.
1948년 이스라엘 탄생 결과 그 주위 국경 지역에는 약 9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했다. 이스라엘인들과 아랍인들은 이해가 상충함으로써 끝없는 분쟁을 겪었다. 이스라엘은 생존을 걸고 모든 국경 지역 방비를 강화했고, 아랍인들은 고토(故土)와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군비를 증강시켰다.
1955년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최초로 비동맹 개념을 채택한 반둥(Bandung) 회담에서 아랍 세계를 이끄는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아스완 댐을 건설하여 농업경제를 발전시키려는 그의 계획은 미 · 소 냉전 대립으로 국제적 금융지원을 받지 못함으로써 처음부터 막대한 차질이 생겼다.
1956년 7월 나세르는 영국군 최종 부대가 이집트를 철수한 한 달 만에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거기서 생기는 수입으로 댐 공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운하 운영을 주도해온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영국 수상 이든(Anthony Eden) 경은 주저하지 않고 응징을 결심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하여도 그들 군대가 주둔한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로부터 그렇게 빨리 도전을 받았다는 사실은 대영제국으로서 실로 상상도 못하고 있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려는 영국정부의 단호한 태도는 제국이 기울고 있는 시점에서 영국인들의 미묘한 심리적 과잉반응을 나타낸 것이었다.
프랑스는 영국과 아주 똑같은 입장은 아니었지만 나세르를 응징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나세르가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 세력에 대하여 지원함으로써 프랑스의 비위를 크게 건드려왔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로부터 늘 위협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끌어들였다. 3국은 비밀 회담을 갖고 이집트를 침공하는 전반적 전쟁계획을 세웠다. 국제적 여론을 의식한 그들은 책략적으로 전쟁을 두 단계로 나누어 수행하기로 약속했다. 제1단계는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 대하여 침공하고 제2단계의 적절한 순간에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 끼어든다는 것이었다. 제2단계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국에게 즉각적인 전쟁 중단을 요구한 다음에 나세르가 그러한 요구를 거절할 때 그것을 구실삼아 뛰어드는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10월 29일 이스라엘은 계획대로 시나이 반도를 침공하여 5일 만에 가자 · 라파 · 알 아리쉬 등 주요 도시와 티란 섬을 점령했다. 그리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약속에 관계없이 자기들 목표를 달성했다. 시나이의 이집트군 기지들을 제거하고 에일라트에서 아카바 만에 이르는 해상통로를 개방시킨 것이다.
10월 30일 영국과 프랑스는 시나리오대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쪽에 선전포고를 하고 운하 양쪽 20마일 선으로 물러설 것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그 조건을 곧 받아들였지만, 이집트는 자국 땅 일부를 포기하라는 그 조건을 결코 수용할 리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 비행장들에 대한 공습을 가한 다음 11월 5일부터는 공수부대와 해상 수송부대가 상륙하고 운하를 향하여 진격했다. 그동안에 이스라엘군은 전 시나이 반도를 수중에 넣었다.
이렇게 하여 영국 · 프랑스 ·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성공하는 듯했으나, 곧 그들 계획에 없는 제3단계의 전쟁에서 유엔과 초강대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엔은 침략군의 즉각적인 철수와 정전 및 특별 유엔군 창설을 결의했다. 11월 6일 영국 수상 이든은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로부터 강력한 압력을 받고 그날 밤 전쟁 중단을 선언했다.
이스라엘은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이듬해 3월까지는 시나이 반도를 다시 이집트에 돌려주었다. 그러나 아카바 만에서 선박통행을 보장받아 냄으로써 이스라엘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또한 시나이와 가자를 통한 아랍인 침투를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외교적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와 협력 체제를 이루고 많은 우방국을 얻게 되었다.
이집트는 군사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원상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 여론과 미 · 소의 지원으로 얻어낸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결과는 나세르의 위신을 크게 세워주었다. 그는 아랍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독립운동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수에즈 운하는 완전히 이집트가 소유 관리하는 체제로 돌아가고, 다만 1888년 콘스탄티노플 약정에 따라 세계 모든 나라는 그곳 선박통행을 보장받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1956년 말까지 모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 전쟁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나라는 영국이었다.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하는 냉전체제 세계에서 영국은 그들의 19세기적 포함(砲艦) 외교 정책이 완전히 효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후 중동지역에서의 주요 변화 가운데 하나는 소련 영향력의 증대였다. 소련은 나세르에게 아스완 댐 건설과 이집트 재무장을 위한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이스라엘을 배척하고 아랍을 끌어안는 노선을 뚜렷이 보였다. 그러자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은 "미국은 국제 공산주의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중동국가를 반드시 방호하겠다"는 이른바 '아이젠하워 독트린'을 발표했고, 소련의 이집트 지원에 상응하는 지원을 이스라엘에 하기 시작함으로써 중동지역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미 · 소 냉전체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