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한국전쟁 발발
남침 3일 만에 서울 함락(1950년)

한국전쟁 초기에 맹위를 떨친 북한군 보유 T-34 전차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 · 25전쟁을 영미국 사람들은 '한국전쟁'이라고 불러왔으며, 요즘 우리나라 많은 학자들도 그렇게 부르는 추세에 있다. 한국인들끼리 싸운 내전이면서 동시에 미국 · 소련 · 중국 · 영국 · 프랑스 등 강대국과 여러 유엔 회원국이 싸운 국제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전쟁(the Korean War)'이란 국제적인 호칭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각각 자기들 방식대로 '조국해방전쟁'과 ‘항미원조운동’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1945년 8월 한국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게 되었지만, 연합국 도움으로 이룬 해방이었기에 그들 결정에 의한 분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소련군대는 38선을 경계로 하여 각각 남한과 북한을 나누어 점령했다. 이 인위적 분단으로 말미암아 한국인들은 엄청난 고통과 함께 전쟁 위험성을 안게 되었다.
미 · 소 관계가 냉전 상황으로 바뀌면서 38선은 두 개의 한국을 구별하는 영구적인 경계선으로 변해갔다. 러시아인들은 북한을 공산화하고 미국인들은 남한에다 서양방식의 정치제도를 도입시켰다. 1948년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소련군은 북한군에 대하여 적극적인 무장 및 훈련지원을 한 반면에 미군은 국군에 대하여 극히 제한적인 지원을 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쟁 발발 당시 군사력에서 북한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남한 병력 95,000명에 비하여 북한은 최소한 135,000명이었다. 북한군 가운데는 2차 대전 때 소련군에 가담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중국군 출신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국군의 경우 전차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데 비하여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 15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군으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쌓아온 북한군의 전투력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철의 장막 내에서 이루어진 북한군의 그러한 군사적 능력에 대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 미국이나 서방측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1950년 초 “한국은 미국의 직접적인 방위권 밖에 있다”고 말한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성명으로 북한의 김일성,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 등 공산주의자들은 '남침을 하더라도 미국은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오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은 결코 한국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북한은 남한과 유엔을 향하여 평화적으로 통일문제를 해결하자는 제안들을 연달아 내놓았는데, 그것은 전쟁 준비를 철저히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기하여 북한군은 마침내 38선 전면에서 남침을 시작했다. 공식적인 선전포고 없이 감행한 기습침략이었다. 많은 병사들이 외출을 나간 그날 한국군의 방비태세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중장비 없이 소총과 맨손으로만 싸워야 했던 국군은 북한군 진격을 막지 못하고 곳곳에서 무너져버렸다. 특히 전차에 대하여 속수무책이었는데, 보유하고 있었던 대전차화기 2.36인치 로켓포가 적 전차 T-34를 전혀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남침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됨으로써 대한민국의 운명은 최대의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미국과 유엔은 남침을 그대로 묵과하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 자체가 그들에게 중요하여서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그대로 두면 동맹국들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또한 일본에 대한 방위도 어렵게 되리라는 우려에서 한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신속하게 결단을 내렸으며, 6월 27일 유엔 안보리는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결의했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김일성과 스탈린의 계산과는 달리 전혀 다른 국제전으로 변했다. 3년간의 전쟁에 직접 병력을 보내 참전한 국가는 공산 측의 경우 북한 · 중국 · 소련(조종사 제공)이었고, 대한민국을 지원한 나라는 미국을 비롯한 유엔 회원국 16개국이었다.
유엔군 가운데 대부분은 미군으로서 사실상 한국전쟁은 한국군과 미군이 연합작전을 벌여 공산군 침략을 격퇴시킨 전쟁이 되었다. 다른 유엔 회원국 참전병력이 전부 합해 44,000명이었던 데 비해 미군은 최대 규모였을 때는 30만 명 이상이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에 미군은 전투력에서 한국군이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많은 약점을 노출시켰다. 한국에서 초대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 원수도 처음에는 북한군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7월 중 미국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던 제8군 예하 4개 사단 가운데 3개 사단을 투입했는데, 전투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의 부대들이었다. 제8군은 미군들 가운데서 가장 질이 떨어진 군대로서, 약 75%가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다가, 전투경험은 고사하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적을 얕잡아 보았으며, 미군과 유엔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북한군을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과신했다. 그러나 오산 · 안성 · 공주 · 대평리에서 잇따라 적의 강력한 공격을 당하고, 대전에서는 최초로 투입된 1개 사단이 거의 와해되는 참패를 당했다. 미군도 처음에는 한국군과 마찬가지로 2.36인치 로켓포를 사용하다가 대전전투에서부터 3.5인치 로켓포로 교체해 적 전차를 파괴할 수 있었다.
7월 말경 낙동강 지역에서 미군과 한국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적 진격을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병력 및 물자를 증강하고 초전의 적 기습에 의한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전쟁은 유엔군이 언제 어떻게 반격을 실시할 것인가가 관심사가 되었으며, 북한군이 결국 패배하리라는 데 대한 의문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