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미국의 반격과 일본의 패망
히로시마 원폭 투하(1945년)

1945년 8월 6일 역사상 최초로 원폭이 투하되어 폐허로 변해버린 히로시마의 처참한 광경
태평양전쟁 초기에 일본은 그들이 원하던 섬들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연합군 해공군력을 완전히 분쇄한 것은 아니었다.
진주만에서 미 태평양함대가 불구가 된 것은 일시적이었다. 특히 항공모함 피해는 전혀 없었으므로 곧 작전 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때 미 항공모함들은 다행히도 그곳에 없었다.
일본보다 열 배의 공업력을 가진 나라로서 미국은 진주만 피해를 신속히 복구하고, 나아가 1943년부터는 본격적인 반격을 위해 전투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일본은 항모에서 발진한 미 폭격기로부터 도쿄가 공습받는 사건을 당하자, 태평양함대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격멸하기 위한 이중 계획을 세웠다. 첫째, 산호해로 미 항공모함 함대를 끌어들여 공격한다는 것이며 둘째, 미드웨이 섬을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1942년 5월 사상 최초의 항공모함 전투가 전개된 산호해 전투에서 미 항공모함은 일본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런가 하면 6월의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태평양전쟁의 일대 전환점을 이룬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미드웨이에서 미해군은 적 작전계획을 암호해독으로 미리 알고 유리한 상태에서 싸운 결과 그곳에서 일본군 항공모함 4척 모두를 격침시키는 대전과를 올린 반면, 그들은 항공모함을 1척 잃었을 뿐이었다. 역으로 미 항공모함 4척이 기습을 당해 모두 파괴되었다고 하면 미국은 상당기간 작전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다.
주 항공모함들을 상실해 대단히 불리한 처지에 빠지게 된 일본에 대해 미국은 드디어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1942년 8월 미국은 솔로몬군도 남쪽 요충인 과달카날을 공격해 이듬해 1월에는 그곳을 탈환했다. 이 무렵 태평양에서 미국과 일본의 육해공군 전력은 거의 균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1년 뒤 일본 전력은 미국의 1/3 규모로 급속도로 떨어졌다. 태평양 이곳저곳의 소모전에서 일본은 다수의 군함과 항공기를 상실했고 또한 생산능력에서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미국에 뒤졌다. 선박 운송능력 결여로 일본은 점령지역 외곽 수비대에 대한 지원을 하는 것이 어렵게 되고 일본 내의 비축물자도 점차 고갈되어감으로써 위기가 가중되었다.
미군은 삼군 합동작전을 최대로 활용해 탈환작전을 개시했다. 하나의 섬을 탈환하고 그 다음에 차례로 인접한 섬을 공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가 적 기지를 사전에 파괴하고 그 다음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해병과 보병에 의한 상륙작전을 펼쳤다. 또한 항공모함은 모든 장비와 보급품을 싣고 '움직이는 기지' 역할을 하면서 진격준비를 갖추었다.
육군을 대표한 맥아더 장군은 뉴기니아 북쪽 해안에서부터 필리핀에 이르는 진격로 상에서 지휘했다. 그에게 필리핀 탈환은 명예회복을 위한 절대적인 목표였다. 한편 해군 제독 니미츠는 하와이에서 태평양 중앙의 길버트 군도와 마셜 군도, 그리고 마리아나 군도로 진격했다.
미국 항공모함은 전쟁 초기의 일본 항공모함처럼 위력을 떨쳤으며, 항공모함을 상실한 일본은 거의 공격을 펴지 못했다. 일본은 미국 군함을 공격하는 데 잠수함을 이용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면에 미국은 잠수함으로 적 화물선과 유조선을 집중 공격했다.
1944년 6월 니미츠의 함대가 마리아나 군도의 사이판과 괌 섬을 공격, 점령했을 때 일본은 비로소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정부 내에서는 강화협상을 시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내각이 실각했다. 새로 구성된 고이소(小磯) 내각은 강화협상 추진과 필리핀 방어 강화의 화전 양면 정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이 필리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해군력을 집결시킴에 따라 1944년 10월 레이테만에서는 대규모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미 공격력을 상실해버린 일본군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가미카제(神風) 공격을 실시했다. 조종사가 폭탄을 탑재한 비행기를 몰고 와서 미항공모함이나 전함을 들이받는 자살 공격이었다. 그러나 그런 무모한 방법으로 일시적으로 적에게 공포를 안겨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승리를 위한 수단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1945년 1월 맥아더의 육군은 루손섬에 상륙해 5월경에는 거의 모든 필리핀 지역을 탈환했다. 한편 미국은 4월 오키나와에서 태평양전쟁 중 최후가 된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상륙부대는 해병 1개 군단과 미 육군 제24군단이었는데, 제24군단은 나중에 전쟁이 끝난 다음에 한반도와 가깝다는 이유로 38선 이남을 점령하게 된 부대였다.
오키나와에서 일본은 가미카제 특공작전을 펼치며 최후의 발악을 했다. 일본군부는 가미카제의 성공에 대해 과장보도를 하면서 맹목적인 죽음을 강요했다. 가미카제 공격으로 미군은 36척의 함선이 격침되고 368척이 파손되었다.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는 미군과 일본군 전사자 각각 13,000명과 110,000명을 발생시키고 약 80일 만에 미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오키나와에서부터 미 공군이 공중폭격에 가세함으로써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 공세는 절정에 이르렀고, 드디어 8월 6일 미국은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3일 후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되었다. 드디어 8월 10일 일본 천황은 연합군 측에 무조건 항복 의사를 전달하고 5일 후에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은 개전 5년 만에 막을 내렸다.
한편, 최초 원폭이 투하된 이틀 후인 8월 8일에 스탈린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는 진정으로 연합군의 전쟁 노력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기보다는 일본의 의중을 간파한 다음에 취한 행동이었다. 미국으로 하여금 다 싸우도록 하고 최후의 순간에 끼어듦으로써 전리품을 챙기겠다는 고도의 정치 전략이었다. 그는 독일이 패망하는 마지막 단계에서도 군사적이 아닌 주로 정치적 이익을 좇아, 독일로 진격하지 않고 동유럽 일대를 모두 수중에 넣은 다음에 베를린으로 진출했었다. 전쟁을 통해 궁극적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완전히 성공한 사람은 스탈린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