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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가장 길었던 하루: 노르망디 상륙

83. 가장 길었던 하루: 노르망디 상륙

 

사상 최대 규모의 육 · · 공군 합동작전(1944)

 

노르망디 상륙

· 미국 병사들은 노르망디에 상륙한 194466일을 흔히 '가장 길었던 하루(The Longest Day)'라고 표현했다. 2차대전 중 가장 중차대한 군사작전에서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엄청난 고생을 했고, 동시에 결과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태에서 지내야 했던 그날이 그렇게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연합군은 이 상륙작전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준비했다. 상륙부대 · 장비 · 보급품을 준비하고 한편으로는 적 저항력을 공중폭격으로 충분히 분쇄해야 했다. 연합군 공군은 장기간 동안 철도와 교량 등을 집중 폭격해 독일군 보급체계를 와해시켜 다른 지역에서부터 신속한 증원이 불가능하도록 했다. 실제로 연합군이 상륙했을 때 독일은 증원군 선발대를 자전거에 태워 보낼 정도로 폭격 피해가 컸었다.

1944년에 들어서자 연합군은 상륙정과 보급품을 충분히 갖추게 되었다. 1월에는 사령부를 편성하고 최고사령관에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을, 그리고 지상군 사령관에는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을 임명했다. 직책과 작전범위를 놓고 미국 장성과 영국 장성들 간에는 다소 신경전이 있기도 했으나, 위대한 조정자였던 아이젠하워는 미군과 영국군 간에 원만한 타협을 이루어냄으로써 연합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독일군이 해안 일대를 요새화하고 있었으므로 해안을 침공하는 데는 적의 허점을 이용하고 기만하기 위한 고도의 책략이 필요했다.

상륙해안은 영국에서부터 전투기 사정거리 내에 있는 곳으로 대체로 네 군데가 고려되었다. 그 가운데 네덜란드 해안은 영국 항구에서 너무 떨어져 있고 브리타니 해안은 독일로부터 너무 떨어져 있었다. 해협에서 가장 가까운 파드칼레 해안은 독일군의 최대 방어가 예상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연합군 사령부는 비록 정박시설이 없는 약점을 지닌 곳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방비가 허술한 노르망디 해안을 상륙지점으로 선정했다.

정박 문제에 대해서는 영국에서부터 임시 정박시설(인공부두)을 만들어 해협을 횡단해 끌어오는 기발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기습효과를 최대로 얻어내기 위해 파드칼레 해안에서 주 상륙작전을 실시할 태세를 보이는 각종 기만책을 사용하기로 했다.

최초 상륙을 개시할 부대로는 5개 보병사단과 3개 공수사단을 선정했다. 이 병력 규모는 1940년 한때 독일이 영국 침공계획을 수립하면서 고려했던 것과 비슷했다. 보병사단은 해안을 장악해 보급시설 상륙을 지원하고 공수부대의 임무는 침공지역의 양측방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독일 육군 원수 룬트슈테트는 60개 사단을 거느리고 프랑스 지역을 수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10개 사단은 기갑사단이었는데, 이들은 히틀러가 직접 통제했다. 룬트슈테트 휘하의 롬멜은 해안방어를 담당했는데, 두 사람은 방어개념에서 견해차가 컸다. 룬트슈테트는 적 계획을 모르기 때문에 내륙에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가 상륙장소가 알려질 때 신속히 투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롬멜은 제공권을 갖지 않는 이상 내륙에서부터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해안선에 전진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대체로 롬멜 의견에 동조했으나, 다만 기갑부대는 자신이 직접 관장하고 내륙 후방에 배치했다.

66일 새벽, 연합군은 사상 최대 규모의 육해공군 합동작전을 개시했다. 6,500척의 선박과 12,000대의 항공기를 가동시켜 첫날 17만 명의 병력을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켰다. 공수부대는 기상 악화로 말미암아 광범위하게 흩어졌지만 오히려 그것이 적을 혼란에 빠지게 함으로써 전화위복이 되었다.

일부해안에서 독일군이 완강히 저항해보았으나 전체적으로 역부족이었다. 연합군은 상륙하자마자 곧 교두보를 확보했다. 독일군은 제대로 공조체제를 이루지 못했으며 룬트슈테트는 적이 진짜 상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만작전을 펴는 것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일주일 후 연합군은 33만 명의 병력과 5만 대의 차량, 10만 톤의 물자를 상륙시켰다. 독일군은 공군지원이 없는데다가 지휘체계 혼란으로 말미암아 매우 힘겨운 전투를 치렀다. 그러던 중 7월에는 독일군 내부에서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까지 일어남으로써 위기가 가중되었다. 히틀러는 룬트슈테트와 롬멜을 모두 교체하고 그 자신이 직접 기갑부대에 대해 돌격명령을 내리고 전 보병부대에게는 사수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으며,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연합군은 825일 파리를 해방시키고 승리의 여세를 몰아 독일 내로 진격해 들어갔다. 독일군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판사판으로 나왔다. "전쟁이 끝나 지옥에 가느니 차라리 전쟁을 최대로 즐기자"는 유행어가 퍼지는 가운데 독일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194412월 흔히 '벌지 전투'라고 알려진 아르덴 고원에서 독일군은 최후의 반격을 실시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독일군은 도처에서 와해되었으며, 19452월 루스벨트 · 처칠 · 스탈린은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만나 독일 분할을 결정했다.

430일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자살했다. 무솔리니가 군중에 의해 처형된 이틀 뒤였다. 57일 되니츠 제독은 약 200만 명의 잔여 병력과 함께 무조건 항복했다. 이로써 유럽에서는 2차 대전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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